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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조의 문형

아베베1 2011. 3. 28. 16:51

연려실기술 제6권
 연산조 고사본말(燕山朝故事本末)
연산조의 문형




홍귀달(洪貴達) 갑자화적(甲子禍籍)에 들었다.
홍귀달은 자는 겸선(兼善)이며, 호는 함허정(涵虛亭) 또는 허백당(虛白堂)이요, 본관은 부계(缶溪) 의흥(義興)이고, 함창(咸昌)에서 살았다. 세조 신사년에 문과에 올라 문형을 맡았으며 이조 판서와 참찬을 지냈다. 경원(慶源)으로 귀양가다가 단천(端川)에 이르러 사사(賜死)되었으니, 그의 나이 67세였다. 시호는 문광공(文匡公)이다.
○ 공은 문장이 전아(典雅)하고 강건하였으며 고풍이 있었다. 《해동악부》
○ 무오년 이후로 국가에 일이 많아 공이 걱정하여 몇천 자나 되는 소를 올렸다. 요약해 말하면, “임금이 어디에도 굽혀서는 안 되나 오직 대간에게는 굽혀야 할 것이니 굽혀서 그 말을 따라 정치의 업적이 높이 백 대 제왕에 뛰어 난다면 그야말로 잠깐 굽혀 영원히 펴는 셈이 된다.” 하였다.또 연산이 자주 사냥하는 것을 간하여, “요즘 안으로는 우레ㆍ우박 등의 천재가 있고 밖으로는 외적들이 트집을 잡고 있으니 마땅히 상하가 서로 덕을 닦아 재앙을 소멸시키고 환란을 막는 데 힘써야 할 것입니다. 사냥이 비록 종묘에 제사지내기 위함이라 하오나 지금 죽임을 당하고 사로 잡힌 자들이 모두 선왕과 선후(先后)의 적자들이옵니다. 사냥을 하여 효도를 다하려 하나 조상들이 그것을 흠향하시겠습니까.” 하였고,매양 입시하게 되면 시간이 지나도록 아뢰니 연산이 자못 싫어했다. 또 10여 조목을 아뢰었는데, 모두 궁중의 비밀스런 일들을 들어 개유(開諭)하고 풍자하여 말이 매우 간절하고 곧았다. 연산주가 더욱 불평하여 그의 관직을 다 빼앗고 경기 감사로 내보냈다. 《명신록》
내가 허백당(虛白堂) 홍공의 글을 보고 대절(大節)을 알았으니 연산이 신하의 간하는 말을 거부함과 사냥하는 것을 논한 두 장의 상소를 보고서였다. 한참 연산이 음란하고 포학하던 때에는 사람을 희롱감으로 삼고 죽이기를 장난처럼 하여 옥당의 신하들을 내쫓고 간관을 파면시키며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면 떼죽음을 시켜 그 흉폭한 위엄을 감히 아무도 건드릴 수 없었으니,그 위세가 마치 날뛰는 호랑이가 이를 갈며 입을 벌리고 사람에게 덤벼 드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바른 의논을 굽히지 않고 반복하여 개유하여 그 임금의 욕심을 막고자 함이 마치 태평스런 조정에서 홀(笏)을 단정히 잡고 밝은 임금과 의논하는 것같이 하였다. 지금 백 년이 지난 뒤에도 공이 붓을 잡고 상소문을 적을 때 신색이 태연자약하고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형틀을 마치 편안한 수레처럼 생각하는 기상이 우리 눈 앞에 보인다. 아, 장하다. 《우복집(愚伏集)》
○ 사랑받는 궁녀의 집에서 자주 무리한 일을 공에게 청탁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드디어 모함하여 북쪽 변방 경원(慶源)으로 귀양가게 하였다. 공이 집 사람들과 작별할 때, “내가 본래 함창(咸昌)의 한 농삿군으로 재상의 지위에까지 오르게 되었으니 본시 내 가졌던 것이 아니다. 출세한 것도 내가 한 것이요 실패한 것도 내가 한 것이니, 다만 옛날의 나로 돌아갈 뿐이다.무슨 원한이 있겠느냐.” 하고 태연히 길을 떠났다. 조금 뒤에 다시 경옥(京獄)으로 잡아 올렸는데 도중에 단천(端川)에 이르자 왕명을 받든 관원이 한 장의 공문을 내 놓았다. 공이 받아 보고 재배하며, “임금께서 나를 죽으라 명하셨다.” 하고 조용히 목조르는 형을 받았다. 《명신록》
○ 연산주가 왕자빈을 고를 때, 공의 둘째 아들 언방(彦邦) 홍문박사(弘文博士)의 딸이 용모가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위협하여 빈을 삼으려 했으나 공이 끝내 듣지 않았다. 그가 사사(賜死)되었을 때 아들 언충(彦忠)과 언방(彦邦)은 모두 섬으로 귀양갔다. 《축수편(逐睡篇)》 ○ 《명신록(名臣錄)》에는 네 아들이 모두 연좌되어 멀리 귀양갔다고 되어 있다. 언승(彦昇)은 진사, 언방(彦邦)은 홍문 박사(弘文博士), 언충(彦忠)은 직강, 언국(彦國)은 생원이다.
○ 공의 성품이 화평하고 포용성이 많아 어진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찾아오면 접대하여 친절히 이야기하고 모를 내지 아니 하였으나 의롭지 않은 일로 청하면 단연코 흔들리지 않았다.명 나라 사신 왕모(王某) 연산주가 처음 임금이 되자 명 나라에서 사신이 올 때 원접사(遠接使)가 되었었다. 가 매우 까다로와 남을 좀처럼 허여하지 않더니 공을 보고는 흔연히 오래 사귄 친구처럼 대하였다. 그 뒤에도 우리 사신들이 갈 때마다 꼭 공의 소식을 물었다.
○ 공은 물(物)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서책을 좋아하여 밤낮으로 탐독하였다. 문장이 넉넉하고 여유가 있으며, 깊고 넓은 물 같아서 생각대로 표현하기를 주로 하였다.
○ 남산 밑에 집이 있었는데 언덕에다가 초가로 정자를 만드니 세로와 가로가 겨우 두어 발(丈)이었다. 허백당이라 이름을 써 붙이고 매양 퇴근하면 복건을 쓰고 여장(藜杖)을 짚고 그 안에서 읊조리며 마치 세상을 잊은 것 같았다. 파직된 뒤로는 더욱 세상 일에 관계하지 않았다.그의 한 시귀에는, “산비 솔바람에도 역시 시끄러움을 싫어하노라.[山雨松風亦厭喧]” 하였다. 그러나 때로는 친구들이 그의 풍채를 흠모하여 모여드는 이가 많아 즐거이 상대하여 술상을 벌려 놓고 회포를 풀며 투호(投壺)를 하거나 시를 읊었다. 보는 사람이 그가 정승을 지낸 귀인인 줄 몰랐다.평생에 남과 눈 한 번 흘긴 일이 없으나 다만 국사에 대해 말할 것이 있으면 침묵하지 않았다. 자제들이 때로, “왜 좀 참으셔서 집안 식구들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하였다. 그는 “내가 역대 조정에 두터운 은혜를 입었고 또 이미 늙었으니 지금 죽은들 무엇이 아까우냐.”고 말하며 끝내 고치지 않았다.
○ 병인년 반정 때에 공에게 일품직(一品職)을 증직하고 특히 부의를 보내고 예관을 보내어 제사를 치렀다. 아들 언승(彦昇) 등이 귀양에서 풀려 나와 곧 단천(端川)으로 가서 관을 메고 남쪽으로 왔다.


성현(成俔)
성현은 자는 경숙(磬叔)이며, 호는 용재(慵齋) 또는 허백당(虛白堂)이라고도 한다 요,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공혜공(恭惠公) 염조(念祖)의 아들이다. 세조(世祖) 임오년에 문과에 오르고 병술년에 발영시에 합격하고 갑신년에 중시에 합격하였으며 예조 판서를 지냈다. 시호는 문대공(文戴公)이며, 갑자년에 죽었다. 나이 66세 뒤에 화가 무덤에까지 미쳤고 두 아들은 귀양갔다. 중종 때 좌찬성으로 증직되었다. 저술에는 《용재총화(慵齋叢話)》 《허백당집(虛白堂集)》 《금낭행적(錦囊行跡)》 《악학궤범(樂學軌範)》 등이 있다.
○ 호를 부휴자(浮休子)라 하고 또 ‘부휴자전(浮休子傳)’을 지어, “세상에 나서 사는 것이 마치 떠 있는 것 같고, 죽어서 세상을 떠나는 것이 쉬는 것 같으니 떠 있는 것이 무에 영화로우며 쉬는 것이 또 무에 슬프리오.” 하였다.
○ 죽을 때 유서에, “상례와 장례를 모두 간략히 하도록 하고 문 앞에서 상여를 소가 끌게 하고 만장(輓章)은 열 장으로 하여 나의 검소한 뜻을 나타내라.내가 임금의 은혜를 입어 벼슬이 육경에 이르렀으되 칭도할 만한 덕이 없으니 다만 표석(表石)이나 세우고 비를 세우지 말라.” 하였다. 연산주 말년에 공이 전일에 먼저 나서서 연산의 사랑하는 여인에 관한 일을 간하였다고 하여 묘를 파헤치는 화를 입었다.
○ 공은 성품이 소활하여 구애됨이 없고 순탄하여 남과 경쟁함이 없는 군자였다. 문장은 물처럼 솟아나고 산처럼 나왔다.
○ 홍(洪)가 자는 사부(士俯) 가 공의 아들 세창(世昌)과 친하였다. 한번은 정월 눈 내린 밤에 찾아가 동원(東園)별실에 앉아 밤중까지 이야기를 하고 있다가 뜰가에서 나는 거문고 소리를 듣고 창틈으로 내다 보았더니, 한 노인이 매화나무 아래에 눈을 쓸고 앉아서 허연 백발을 날리며 거문고를 뜯고 있었다.세창이 “나의 아버지라.” 하였다. 조금 있다가 손님이 와 있는 줄을 알고 곧 거두었다. 그 뒤에 홍(洪)이 매양 말하기를, “그때 달빛이 밝아 대낮 같고 매화 꽃이 만개했었는데, 백발은 바람에 날려 나부끼고 맑은 음향이 흐르니 마치 신선이 내려온 듯, 문득 맑고 시원한 기운이 몸에 가득참을 느꼈다. 용재(慵齋)는 참으로 선풍도골(仙風道骨)이라 할만 하다.” 하였다. 《기재잡기》


김감(金勘) 병술년에 나서 40세에 죽다.
김감은 자는 자헌(子獻)이며, 호는 선동(仙洞)이요,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성종(成宗) 기유년에 문과에 올라 처음에는 운각(芸閣) 승문원 에 봉직했고, 임자년에 휴가를 받아 호당(湖堂)으로 들어갔다. 정국(靖國)공신으로 연창부원군(延昌府院君)에 책봉되었으며 벼슬은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다.
○ 추천시(鞦韆詩)로 연산주에게 아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