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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조(燕山朝)의 절신(節臣)

아베베1 2011. 3. 28. 16:55

연려실기술 제6권
 연산조 고사본말(燕山朝故事本末)
연산조(燕山朝)의 절신(節臣)




홍언충(洪彦忠)
홍언충은 자는 직경(直卿)이며, 호는 우암(寓菴)이요, 본관은 부계(缶溪)이다. 대제학 귀달(貴達)의 둘째 아들로서 을묘년에 문과에 올라 호당(湖堂)에 뽑혀 들어갔다. 벼슬은 교리에 이르렀다.
○ 17세 때에 ‘병상구부(病顙駒賦)’ 를 지어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 일찍 과거에 올라 청관(淸官) 현직(顯職)을 지냈다.
○ 갑자년에 옛날 직언한 신하를 소급해 죄줄 때 시종신(侍從臣) 중에 죄를 면한 이가 드물었다. 공은 옥에 갇혀 고문을 당하고 나서 담여(擔輿) 아래에서 조금 쉬었다. 이때 김안로(金安老)는 그의 옷이 피로 물든 것을 보고 가엾게 여겨 그것을 가리키면서, “참혹하도다.” 하니 공은 “이것은 홍문관 물이 든 것이라.” 하였다. 대개 홍문관 탄핵으로 죄를 받았다는 말인데 홍(弘)과 홍(洪)은 음이 같다. 국문을 마치고 귀양갔던 곳으로 다시 돌려보냈다. 김안로는 교외(郊外)에 나가 전송하였는데, 공이 “학문을 한 화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하며 자못 고통스러운 기색이 있었다. 이에 김안로는 희롱하기를, “만약 자네에게서 지혜를 깎아 버리고 학식을 어둡게 하여 좋고 나쁜 것을 가리지 못하고 콩과 조를 서로 혼합하여 아무 것도 분변 못하는 그런 물건이 되라 하면 자네가 또한 그리 하겠는가?” 하니, 공은 탄식하기를, “무슨 말이냐. 떠돌아 다니며 고생하는 중에도 사람들이 혹 나를 기억해 주는 것은 학문 때문이고, 나그네 길에 온갖 고생을 하고 양식이 떨어졌을 때 사람들이 혹 나에게 양식을 대주는 것이 다 학문 때문이다. 바다 섬 속에 귀양가 있으면서 정신이 괴로운 중에 문묵(文墨) 아니면 즐거워할 일이 없으니, 학문의 공은 큰 것이다. 진실로 나로 하여금 마음으로는 착하고 악한 것을 가려내고 입으로는 옳고 그른 것을 말하게 하여, 남의 시기와 미워함이 내 한 몸에 모여서 이 세상에서 화를 당하게 한 것도 학문이지만 또 스스로 학문의 힘으로 저만큼 얻은 것이다. 그로하여 죄를 얻고 고통을 당할 적에 나의 학문을 미워하여 나를 어리석은 자로 돌리고 나의 지각을 빼앗아 미련하게 밥만 먹고 있을 뿐이라면 하늘 위에서 떨어져 구덩이 속으로 내려오는 것처럼 망연자실할 것이니, 비록 엎드러지고 자빠지는 일이 있더라도 내가 어찌 감히 이 짓을 하리오.” 하였다. 《용천담적기》
○ 진보(眞寶)에 귀양가서는 반드시 죽게 될 것을 스스로 단정하고 옛 사람을 모방하여 자신의 만장(挽章)을 짓고 묘갈명(墓碣銘)도 지었다. 그 묘갈문에, “대명(大明 명 나라) 천하 햇빛이 비치는 나라에 남자의 성은 홍(洪)이며 이름은 충(忠)이요 자는 직(直)이라. 반평생에 오활하고 옹졸함은 문자의 공이다. 32세에 세상을 마치니 명은 어찌 그리도 짧으며 뜻은 어찌 그리도 긴고. 옛 고을 무림(茂林)에 묘지를 정하니, 푸른 산이 위에 있고 물굽이 언덕이 아래에 있도다. 천추만세 뒤에 누가 이 들판에 지날는지. 반드시 이곳을 가리키고 배회하면서 슬퍼할 사람이 있을 것이라.” 하였다. 《동각잡기》
○ 연산주의 음란하고 포악한 행실이 극도에 달하자 반정할 기미가 있었다. 집안 사람이 권고하기를, “당세에 이름이 알려진 이장곤(李長坤) 같은 이도 망명하였는데, 공은 어찌 지금까지 가지 않습니까?” 하였다. 공은 “인륜이 다섯 가지가 있으니 부자 관계가 그 첫째이고, 군신 관계가 그 둘째이다.나는 지금 아버지는 벌써 세상을 떠났으니 가장 중한 것은 다만 군신의 의리가 있을 뿐이다. 지금 만약 망명한다면 이는 아버지도 없는데 또 임금도 없게 되는 셈이 된다. 임금의 명을 어찌 도피하리오.” 하였다. 조금 후에 잡으러 왔으므로 공은 조용히 길을 떠났다. 가다가 유곡역(幽谷驛)에 이르러 자신의 만장을 지었다.조령(鳥嶺)에 이르러 중종(中宗)이 이미 왕위에 올랐다는 말을 듣고 공은 울기를 마지 아니하였다. 중종은 연산주 때 내쫓긴 사람을 먼저 뽑아 썼으니 장순손(張順孫)ㆍ이장곤(李長坤) 같은 이는 모두 좋아라고 나갔으나, 공은 끝내 나가지 않고 시 짓고 술마시는 것으로 스스로 즐겁게 지내다가 불행히 일찍 죽었다. 연산주를 위하여 절개를 지킨 사람은 오직 우암(寓菴)뿐이었다. <축수편>


유기창(兪起昌)
유기창은 자는 자성(子盛)이며, 본관은 기계(杞溪)이다. 무과에 올라 연산주 때에 정평 부사(定平府使)로 있다가 거제(巨濟)에 귀양갔다. 같은 때에 거제로 귀양간 사람이 세 사람 있었는데, 매양 서로 이끌고 산에 올라 북쪽을 바라 보았다. 어느 날 금부 도사가 달려와서 한 사람을 잡아가서 죽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한 사람을 잡아가 죽이니 공은 홀로 있으면서 아침 저녁으로 명령오기만 기다렸다. 어느 날 급한 심부름군이 바다를 건너오는 것을 바라다보고 집안 사람을 불러 영결하였다. 심부름군이 도착하여 중종(中宗)이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알리고 공을 병조 참지로 임명하고 그 아들 여림(汝霖)은 한림(翰林)으로 승진하게 되었다는 아들의 편지를 전하였다. 공은 편지를 보고 집안 사람에게 말하기를, “나는 마땅히 예전 임금을 위하여 울어야 되겠다.” 하고 자리를 깔고 북쪽을 향하여 큰 소리로 울었다. 아들에게는 편지로 답을 써서 충성을 다하여 임금을 섬기라고 말하고, 자신은 비인(庇仁)으로 돌아가서 한평생을 마칠 때까지 벼슬하지 아니하였다. 죽을 때 신주에 첨지중추(僉知中樞)만 쓰라고 단단히 타일렀다. 《후촌만록(後村謾錄)》


김숭조(金崇祖)ㆍ남세주(南世周)
연산주의 옛 신하 김숭조와 남세주는 중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 벼슬하지 않고 밖에 나오지 아니하였다. 한 사람은 청맹(靑盲)이라고 핑계하고 한 사람은 고질이 있다고 핑계하였다. 연산주가 쫓겨나고 중종조가 일어나는 천명을 어길 수 없음을 알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자기의 주견을 지켜 세속을 따르지 않고 혼자 행하여 변하지 아니하였다. 《장빈호찬》
김숭조는 자는 희지(禧之)이며,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을묘년에 문과에 오르고 정사년에 중시(重試)에 합격하였으며, 벼슬은 전한(典翰)에 이르렀다.
남세주는 자는 인문(仁文)이며, 본관은 고성(固城)이요, 이조 참판 금(琴)의 손자이다. 성종 정미년에 문과에 올라 벼슬은 전한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