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 의령공 휘 충성 ,지성 등/崔繼成 傳

전주최공 문성공 崔繼成 (전)

아베베1 2011. 3. 29. 11:02

保晩齋集卷第九 達城徐命膺君受著
 雜著
崔繼成傳 a_233_251c


崔繼成字紹先。全州人也。國家當中廟初載。慕齋金安國。倡學于前。靜菴趙光祖。行道於後。故士多作興。敦實行黜虛騖。而嶺湖尤號彬彬。若其一門之內233_251d父子兄弟步武牽聯。則全州崔氏是已。崔氏。高麗侍中文成公阿之後。至霮始仕我朝。爲修文殿直提學。霮生匡之。集賢殿提學。匡之生生明。京市殿直。以學行載名輿地勝覽。生明生秀孫。擧進士不仕。號固窮堂。又以學行配食文貞公金坵廟。秀孫生弼成及繼成。又以孝友卓異。朝廷旌其閭。載名三綱行實。人比之大連少連。二人者之才與行同矣。而趙光祖薦弼成曰。奉母至孝。才兼文武。於繼成則不及者。繼成時尙少也。未幾。己卯禍作。繼成幼有異質。家庭之間。旣得師友。又以戊午賢良。成仲淹爲外從兄。相追逐講233_252a劘。故雖負經濟之志。甘晦迹終老。一擧進士不復仕。所居甕泉。扁其室曰處庵。以見志。探討經籍。尤長於易。遠方士有欲來學者。亦不拒也。由是戶屨常滿。其學一以孝弟爲本。其尤著稱塗人耳目者。母病乳癰。醫言蝮虵爪可已也。時方隆冬。繼成求而得之。卒乃效。妹壻宋自啓死於疫。繼成躬自殯殮。家育其女如己出。他皆類此。故子孫親法。亦各興於孝弟。繼成以弘治戊申生。壽六十九。嘉靖丙辰終。葬扶安席洞山。四男。曰河,曰溫,曰活曰沫。活奉事。沫正郞。河與溫嘗同行過恩津之沙橋。溫墜水。河救之不能得。遂幷溺233_252b水中。初。思庵朴淳與繼成相友善。至是爲解衣殮二人屍。哭之以詩曰。昔聞父子淵。今見兄弟川。孝友元無異。芳名萬古傳。繼成所著述。經亂無徵。獨其流風餘韻。尙留在一鄕。一鄕章甫相議腏享于淸溪祠。先是。弼成已配食于固窮云。
外史氏曰。大夫而動國人易。匹夫而動鄕人難。何則。大夫有位以表望之。有業以宣昭之。動固其勢也。匹夫則不然。人相忘於其鄕。如魚之相忘於江湖。非有實德實行弸于中彪于外。則夫孰有樂趨而仰之哉。當時之人。樂趨而仰之且難矣。况能於數百年之後。233_252c咨嗟嚮慕而尸祝之哉。珠璧沉海。漁人不能知。而百世之下。得其光輝。如在几案之上。繼成之謂也。


중종 13년 무인(1518,정덕 13)
 9월15일 (임자)
사정전에 나아가 유생 최계성 등 3인을 강하고 정광필 등에게 《대학》을 강론하게 하다

상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유생 최계성(崔繼成) 등 3인을 강(講)하고, 이어서 입시 재상(入侍宰相) 정광필 등에게 《대학(大學)》을 강론하게 하였다. 정광필이,
“여기서 말한 ‘남의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머물고, 남의 신하가 되어서는 경(敬)에 머물고, 남의 아버지가 되어서는 자(慈)에 머물고, 남의 자식이 되어서는 효(孝)에 머물고, 나라 사람과 사귐에는 신(信)에 머문다.’ 등의 말은 사람들이 보통으로 하는 말인데, 임금에게만 반드시 ‘인(仁)’이라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고는 부제학 조광조를 지목하며,
“부제학 등이 자세히 말하시오.”
하니, 조광조가 아뢰기를,
“남의 임금이 되어서 인에 머문다는 것은 임금 혼자만이 하는 것이요 다른 사람은 인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인이란 천지(天地)가 만물을 낳는 이치로서 끊임없이 낳고 낳아서 가장 긴절한 것입니다. 임금은 천하에 임금 노릇하고 일국을 다스리므로 인덕(仁德)을 체득하여 만물이 각각 그 본성을 얻게 한 뒤에라야 천지에 동참(同參)할 수가 있습니다. 인(仁)은 사덕(四德)을 모두 다 포함하고 있으므로 인도(仁道)를 다 실행하게 되면 예(禮)·의(義)·지(智) 세 가지는 자연 그 속에 다 있게 됩니다.”
하고, 김정은,
“천지의 대덕(大德)을 ‘낳는 것[生]’ 이라 하는데, 인은 낳는 이치이므로 천지의 큼과 만물의 번성함도 다 인에 포함되었습니다. 임금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려서 하늘과 다름이 없으므로 인이 큰 것입니다.”
하고, 이계맹은,
“인도(仁道)가 지극히 크니, 인(仁)을 행하면 절로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였다. 신용개가,
“임금은 형벌하고 죽이는 일이 있는데도 인(仁)하다고 할 수 있는가?”
하니, 조광조가,
“인도(仁道)를 다하게 되면 부당한 일이 없는 것입니다. 임금은 인에만 힘쓰고 다른 것은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지공 지정(至公至正)하고 광명 정대(光明正大)하여 사의(私意)가 털끝만큼도 없으면 힘을 쓰지 않고도 일마다 다 이치에 합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저 하늘은 봄에는 만물을 내고 여름에는 만물을 자라게 하고 가을에는 만물을 거두어들이고 겨울에는 만물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천리(天理)와 절문(節文)은 인(仁)과 예(禮)이고, 재제(裁制)하고 계교(計較)하는 것은 의(義)와 지(智)이나, 지극한 곳에 이르러서는 말로 형용할 수 없습니다.”
하고, 고형산은,
“임금의 도는 만물을 내는 것을 주재하므로 ‘인에 머물렀다.’ 한 것이며, 또 각각 한 가지 일을 들어서 문왕(文王)의 덕을 아름답게 여긴 것이요, 임금이 홀로 인(仁)을 행할 뿐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고, 이계맹은,
성인(聖人)이 말하기를 ‘내가 인을 좋아하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 하였고, 또 ‘성(聖)과 인은 내가 어찌 감히 당하랴!’ 하였으며, 안자(顔子)는 아성(亞聖)이었으되 석 달 뒤에도 인에 어그러짐이 없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인도(仁道)는 지극히 커서 하기 어렵습니다.”
하고, 조광조는
“순일한 도리가 심원(深遠)하여 조금도 끊임이 없어야 합니다. 만약 털끝만한 사욕(私慾)이 있어 천도(天道)처럼 쉬지 않게 된다면 안자(顔子)라도 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하고 이계맹은,
“사람마다 다 ‘안자는 아성(亞聖)이었는데도 끊임없이 행하지 못하였으니 우리가 어찌 할 수 있겠는가.’ 하고 끝내 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하고, 조광조는,
“나에게 관계되는 일을 참으로 하고자 한다면 본연(本然)의 이치가 처음부터 부족한 것이 아닌데, 어찌 하지 못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안당이,
“《대학》에서는 인(仁)만 말하였는데, 사마광(司馬光)이 또 명(明)·무(武) 2자를 덧붙인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니, 조광조가,
“이 말은 지(智)·인(仁)·용(勇) 삼달덕(三達德)의 말과 같습니다. 대개 이미 인(仁)하였더라도 사리의 당부(當否)를 변석(辨析)하지 못하면 임금의 도리를 다했다고 할 수 없으므로 반드시 밝게 살피는 것이요, 이미 밝았더라도 쓰고 버릴 때에 과단하게 하지 못하면 또한 임금의 도리를 다했다고 할 수 없으므로 반드시 용감하게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사마공(司馬公)의 말이 이와 같았던 것입니다.”
하고, 신용개는,
“인도(仁道)가 순일(純一)한 천리(天理)에 이르게 되면 더할 나위가 없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유약한 데에 빠지기 쉬우므로 반드시 인(仁)과 무(武)가 서로 도와 나가야 폐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온공(溫公)이 인을 말하면서 명(明)과 무(武)를 아울러 말한 것입니다.”
하고, 이유청은,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송 진종(宋眞宗)은 인유(仁柔)는 넉넉하였으나 강단(剛斷)은 부족하였다.’ 하였으니, 반드시 인(仁)·명(明)·무(武) 세 가지가 구비한 뒤에야 가합니다. 한 장제(漢章帝)의 우유부단하고 자혜(慈惠)한 것을 인(仁)이라 할 수 없고, 한 선제(漢宣帝)의 명실(名實)을 따져서 밝힌 것을 명(明)이라 할 수 없고, 한 무제(漢武帝)의 전쟁을 남용하여 무덕(武德)을 손상한 것을 무(武)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고, 김정은,
“합하여 말하면 다 인(仁)의 일로서, 인을 행하는 데 명(明)과 무(武)를 갖추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천도(天道)로써 말하면, 봄에는 생장(生長)하고 가을에는 숙살(肅殺)하니, 숙살하는 것은 곧 굳게 응결(凝結)하는 것으로 이것 역시 기르는 마지막 일입니다.”
하고, 조광조는,
“실과로 비유하면 알이 찬 뒤에 씨앗이 생겨서 후일에 다시 나니, 이것이 이른바 ‘끊임없이 낳고 낳는다.’는 뜻입니다.”
하였다. 신용개가,
“《대학》에서 인(仁)을 말하되, 평천하장(平天下章)에 이르러 혈구(絜矩)를 논하면서 그 뜻을 다하였으니, 혈구는 곧 인(仁)의 공용(功用)입니까, 공효(功効)입니까?”
하니, 김정은,
“혈구는 곧 서(恕)이니, 서가 익숙해지면 곧 인이 됩니다. 《대학》은 학자(學者)의 일을 주로 말하므로 인을 말하고서 또 혈구를 말하였습니다. 성인의 전체(全體)는 다만 인뿐이요, 자기의 마음을 미루어 남에게 미치는 것은 학자의 일로서 한 발자국, 반 걸음으로 이를 수 없습니다. 반드시 서를 행함이 있어야 안에 이르게 됩니다.”
하고, 조광조는,
“위에 있는 이가 늙은이를 늙은이로 대접하면 백성이 효도하는 기풍이 일어나며, 위에 있는 이가 어른을 어른으로 대접하면 백성이 공손하는 기풍이 일어나니, 혈구(絜矩)의 도리를 다하면 일마다 물건마다 각각 그 적의함을 얻어서 인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한 ‘아! 계속 밝혀 공경하여 머무신다.[於緝熙敬止]의 경(敬) 한 자는 한 편(篇)의 주의(主意)입니다.”
하고, 김정은,
“이 경(敬)자는 인(仁)·경(敬)·효(孝)·자(慈)·신(信) 다섯 가지의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조광조가,
“그 자세한 것을 들을 수 있습니까?”
하니, 김정이,
“경(敬)은 위로 천리와 아래로 인사에 관통하는 공부이니, 초학(初學)으로부터 ‘중(中)과 화(和)를 이루어 천지가 안정되고 만물이 생장하는 것[中和位育]’과 ‘독실히 공손하매 천하가 태평해지는 일[篤恭而天下平之事]’에 이르기까지 다 경(敬) 한 자에서 나왔습니다.”
하였다. 조광조가,
“무슨 말입니까?”
하니, 김정이,
“경(敬)자의 뜻은 모두 자기 혼자만을 삼가는[謹獨] 데 있습니다. 비록 은미(隱微)하고 혼자 있을 때라도 방심(放心)을 거두어들여서 항상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조금도 사심이 없게 해야 합니다.”
하였다. 조광조가,
“나의 기(氣)가 정숙(整肅)하면 자연 전일을 주력하여 마음이 다른 데로 가지 않아서, 사물(事物)이 닥치면 응접함이 정세(精細)하고 마땅히 한 가지 말과 한 가지 행동도 모두 예에 알맞게 됩니다. 보통 사람을 기가 흐려서 착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못합니다.”
하고, 김정이,
“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은 다 경(敬)에서 나오므로, 마음이 흩어지지 않고 전일하면 온갖 이치가 밝게 갖추어지며, 움직이는 곳에만 보일 뿐 아니라 조용한 속에서도 스스로 공경하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바야흐로 적연(寂然)히 움직이지 않는 중에도 마른 나무나 죽은 재와는 같지 않고 마음에 주장하는 바가 있어서, 보고 듣지 않더라도 보고 듣는 이치는 다 갖추어졌습니다.”
하였다. 이유청(李惟淸)이,
“‘아, 계속 밝혀 고경하여 머문다[於緝熙敬止]’는 경(敬)이 ‘남의 신하가 되어서는 경에 머문다[爲人臣止於敬]’는 경과 같습니까, 다릅니까?”
하니, 김정이,
“‘공경하여 머문다[敬止]’는 경은 대강(大綱)이고 ‘경에 머문다[止於敬]’는 경은 소목(小目)입니다. 대개 음식이나 은미(隱微)한 속에서도 부끄러운 일이 하나도 없으면 바깥에 나타나는 것이 광명 정대해지며, 조정에서의 일도 모두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경을 독실히 하면 천하가 태평해진다.’ 한 것이고, 하룻동안 마음에 공경을 다하면 천하가 곧 태평해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는 까닭의 이치는 진실로 말로 형용할 수 없습니다.”
하고, 신용개는,
“잠깐 사이에라도 마음이 혹 흐트러지면 사욕(私慾)이 끼어듭니다. 처음에 조금 잘못되면 마침내는 매우 심하게 잘못되므로 선유(先儒)가 경(敬)으로써 성학(聖學)의 시종을 이루는 것으로 삼았습니다. 비록 성인이라도 이 경(敬)이 없으면 그 마음을 전일하게 하지 못합니다.”
하고, 조광조는,
“경(敬) 한 자는 말로 형용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항상 분명하여 게으르고 해이한 때가 없고, 전일을 주력하여 다른 데로 가지 않으며, 의관(衣冠)을 바르게 하고 시선을 엄정하게 하는 것은 곧 마음이 흐리거나 게을러지지 않는 공부입니다.”
하고, 김정은,
“마음이 감촉해도 움직이고 감촉하지 않아도 움직이는 것은 마음의 출입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움직여도 경(敬)을 지키는 것은 오히려 할 수 있지만, 적연히 조용하게 있을 때에는 마음이 정착하는 바가 없어서 경을 지키는 공부가 어려우므로 선유(先儒)들도 흔히 흐트러지고 그른 마음이 끼어든 것입니다.”
하였다. 조원기(趙元紀)가,
‘왕은 경(敬)으로 처소를 삼으소서[王敬作所]’의 경(敬)과 위에서 말한 경(敬)의 뜻이 같습니까?”
하니, 조광조가,
“같습니다. 이 편은 임금의 일을 주로 말한 것입니다. 임금은 천하와 일국을 주재하므로 능히 공경으로 임하면 천하가 공경하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권벌(權橃)이,
“인도(仁道)는 지극히 크니, 하늘에 있어서는 원(元)이 되어 만물을 생장하게 하고, 사람에 있어서는 인(仁)이 되어 만물로 하여금 그 본성대로 성취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임금의 도는 인(仁)보다 더 큰 것이 없으므로 《대학》에서 ‘남의 임금이 되어서는 인에 머문다.’ 하였으며, 선유(先儒)가 인(仁)의 뜻을 해석하기를 ‘사욕이 없고 천리(天理)에 합치한다.’ 하였습니다. 지금 좌우의 신하에게 인도를 강론하게 하니 매우 아름다운 뜻입니다. 그러나 말할 적에만 강론하고 시행하는 데에는 나타나지 않으면 이는 인정(仁政)을 행한다는 소문뿐입니다. 전하께서 아랫사람을 인애(仁愛)하는 마음이 지극하다고 하겠으나, 신은 사정에 치우친 마음이 죄다 버려지지 못하였다고 여깁니다.
노산군(魯山君)은 후사가 없어서 제사가 끊어지게 되었으니, 동종(同宗) 사람으로 후사를 삼아 그 제사를 주관하게 하는 것이 무슨 불가함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여태까지 그렇게 하지 않으시니 마음이 지공 지정(至公至正)하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전에 노산군 부인 송씨(宋氏)가 상언(上言)하여 ‘노비(奴婢)를 해평군(海平君)【정미수(鄭眉壽)이다.】에게 주도록 해달라.’ 하였습니다. 해평군은 노산군에게 외친(外親)이 되는데, 자식이 없어 죽고 부인만 있습니다. 부인이 죽으면 노산군의 제사가 끊어질 것은 틀림없습니다. 옛날 성왕(聖王)이 망한 나라를 일으켜 주고 끊어진 세대(世代)를 이어준 것은 천하를 공평하게 하는 마음입니다. 옛날 주 무왕(周武王)이 은(殷)나라를 쳐서 이기고 주왕(紂王)의 아들 무경(武庚)을 봉해 주었으니, 보통 사람의 심정으로 본다면 아비를 죽이고 아들을 봉해 주는 것이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동종 사람을 노산군의 후사(後嗣)로 삼아서 그 제사를 주관하게 하는 것이 무슨 혐의가 있겠습니까? 지하에 계시는 조종(祖宗)의 영혼도 어두운 저승에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노산군의 일은 선왕(先王)의 후사(後嗣)를 사가(私家)에서 제사지내게 할 수 없으므로 이 일을 의논한 지 오래되었으나 아직 결정하지 못하였다. 대신의 의견에는 어떠한가?”
하매, 정광필이 아뢰기를,
“전에 신이 이미 후사를 세울 수 없다는 뜻으로 말씀드렸습니다.”
하고, 신용개는,
“이는 매우 큰일입니다. 전일 의논할 때에 신이 이미 다 말씀드렸습니다.”
하고, 안당은,
“전일 의논할 때에 신도 남곤(南袞)과 의논에 참여하였습니다. 이 일이 대체로는 좋으니, 지금 노산군의 후사를 세우더라도 어찌 딴마음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논의를 결정할 경우에는 사세가 또한 난처합니다.”
하였다.
김정국이 아뢰기를,
“인(仁)이란 마음의 덕이고 사랑의 이치인데, 마음의 덕은 인의 전체(全體)이고 사랑의 이치는 인의 한 단서입니다. 천도(天道)로써 말씀드리면 인은 곧 원(元)이고, 형(亨)과 이(利)·정(貞)이 그 속에 포함됩니다. 천도는 원에서 형, 형에서 이, 이에서 정에 이르고, 정에 이르면 다시 원이 됩니다.
임금의 덕도 인에 극진하게 되면 의(義)와 예(禮)·지(智)가 다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비근한 예로 말씀드리면 은애(恩愛)로 구휼하는 것은 인이고 형벌(刑罰)로 제재하는 것은 의입니다. 그러나 죄가 있는데도 형벌로 다스리지 않아서 다시 죄에 빠지게 하면 인도(仁道)가 따라서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허물이 있는 사람을 다스려서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워하게 하여 유사(有司)에게 간범(干犯)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도 인입니다. 저 사마광(司馬光)이 반드시 인(仁)·명(明)·무(武) 세 가지를 말한 것은 일을 거행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인의 대체는 천리(天理)가 순수하여 사욕이 털끝만큼도 없는 것이니, 조금이라도 사욕이 있으면 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국가에서 노산군과 연산군(燕山君)의 후사(後嗣)를 세우지 않은 것은 매우 공평정대한 일이 아닙니다. 당우(唐虞)와 삼대(三代)의 일은 오래되었거니와, 삼가 국초(國初)의 일을 상고해보건대 정순군 이방번(定順君李芳蕃)·소도군 이방석(昭悼君李芳碩)이 태종조(太宗朝)에 현륙(顯戮)을 당하였으나, 세종(世宗)께서 즉위하여 마음에 측은(惻隱)하게 여겨 성심(聖心)으로 결단하시어 특별히 명하여 광평대군 이여(廣平大君李璵)·춘성군 이당(春城君李璫)을 정순군과 소도군의 후사로 삼으셨는데, 어찌 노산군의 후사 세우는 것에 의심하십니까? 이로써 본다면 인을 행하는 도리에 거리가 먼 것입니다.”
하고, 문근(文瑾)은 아뢰기를,
“노산군의 후사를 세우는 일은 대신과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태종께서 방석을 죽이신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세종께서 아랫사람의 논의를 기다리지 않고 특별히 예조(禮曹)에 명하여 그 후사를 세우게 하셨습니다. 이제 노산군의 일로써 본다면 조종(祖宗)의 뜻을 더욱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고, 권벌이 아뢰기를,
“심온(沈溫)·이방석 등은 모두 태종께 죄를 졌는데 심온의 자손은 세종조가 끝나도록 녹용(錄用)되지 못하였고, 이방석과 이방번은 즉위하신 초기에 다른 일을 할 여가가 없는데도 맨 먼저 후사를 세우게 한 것은 종성(宗姓)을 중히 여겨서입니다. 대저 천하와 국가를 위하는 이는 천하를 공도(公道)로 삼으므로 비록 삼대(三代)의 일일지라도 다 힘써 행해야 하는데, 하물며 우리 조종께서 일찍이 행하시던 것임에리까? 말할 적에만 강론하고 시행하는 데에는 나타나지 않으면 무슨 도움이 있겠습니까? 인은 사랑하는 이치이며, 선왕(先王)의 후사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되니, 측은하게 생각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하고, 조광조가 아뢰기를,
“지금 아뢴 이 말이 매우 아름답고 행하기도 어렵지 않습니다. 또 권벌·문근·김정국은 망령된 사람이 아니니, 어찌 깊이 생각하지 않고서 이와 같이 아뢰겠습니까? 이 일은 지난해에 의논하였으나, 논의하는 이가 서로 옳다느니 그르다느니 하기 때문에 그 의논이 중지되었으니, 성상의 마음으로 결단하여 행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대신인들 어찌 그 일의 시비를 모겠습니까만, 조종의 일이기 때문에 감히 가벼이 의논하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바야흐로 신하들이 성덕(聖德)을 믿으므로 자기의 뜻을 앞을 다투어 진달(陳達)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맑고 밝지 못하면 간사한 무리가 오히려 이 말로써 화를 꾸밀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아랫사람이 감히 반드시 행하기를 청하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전하께서 만기(萬機)의 여가에 생각이 미치지 못할까 염려해서입니다. 그리고 노산군의 일은 신 등이 태어나기 전에 있었고, 연산군은 생령(生靈)에게 해독을 끼친 임금입니다. 신 등이 그 사이에 무슨 사의(私意)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노산군의 후사를 세우는 일은 어찌 사의가 있어서 어렵게 여기는 것이겠느냐? 다만 선왕께서 행하지 않으신 것을 과인(寡人)의 대에 와서 결단하여 후사를 세움은 옳지 못한 듯하다.”
하매, 안당이 아뢰기를,
“이는 바로 소릉(昭陵)을 회복한 일과 같습니다. 예로부터 임금이 대명(大命)을 받을 적에 하늘이 주고 사람이 귀복(歸服)하니 어찌 다른 마음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세가 난처함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노산군의 후사를 세우은 것은 소릉을 회복하는 것과는 경중(輕重)이 다르다. 무왕(武王)의 덕으로써 비교하면 좋겠다.”
하매, 김정이 아뢰기를,
“능호(陵號)를 회복하는 것은 가벼운 듯하나 실지로는 어렵고, 후사를 세우는 것은 중한 듯하나 실지로는 쉽습니다. 그러나 망한 나라를 일으켜 주고 끊어진 세대를 이어주는 것은 제왕(帝王)의 지정 지공한 도입니다. 이제 노산군의 후사를 세운다 하더라도 현재나 후세에 누가 감히 이의(異議)가 있겠습니까? 옛사람이 이른바 ‘전대의 공렬(功烈)보다 더 빛난다.’ 한 것이 이 한 일의 거행에 있습니다.”
하고, 김정국이 아뢰기를,
“온공(溫公)이 인(仁)·명(明)·무(武)를 임금의 대도(大道)로 삼은 것은 끊어진 세대를 측은히 여기는 것은 인(仁)이 되고, 끊어진 세대를 이어야 함을 아는 것은 명(明)이 되기 때문인데, 상께서 다 갖추셨습니다만 결단하는 데는 무(武)로 하시지 못할 뿐입니다. 임금의 도는 이 세 가지에 벗어나지 않으니, 과연 이 세 가지에 능하면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하고 신용개가 아뢰기를,
“일마다 다 스스로 독단(獨斷)해서는 불가하고 여러 사람의 의논을 채택하여야 합니다.”
하고, 이계맹은 아뢰기를,
“이와 같은 일은 여러 사람과 의논하여 해서는 불가하고 위에서 결단해야 합니다.”
하고, 신용개가 아뢰기를,
“어찌 노산군의 후사를 세우는 데에 감히 다른 마음이 있겠습니까? 다만 형세가 난처함이 있을 뿐입니다.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하고, 정광필이 아뢰기를,
“어찌 여러 차례 의논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고 김정이 아뢰기를,
“하(夏)·은(殷)·주(周)는 시대가 다른데도 성인(聖人)이 망한 나라를 일으켜 주고 끊어진 세대를 이어준 것은 대공 지정(大公至正)한 마음이 있어서입니다. 노산군 등의 일과 같은 것은 더욱 측은하게 여겨야 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전대(前代)에 죄를 당한 종실의 자손이 먼 변방에 나누어 유배(流配)되어, 천적(賤籍)에 이름이 오르고 노예(奴隷)들의 사이에서 심부름하면서 매를 맞는 고초를 면하지 못하는 사람이 흔히 있으니, 지극히 공정한 마음으로 본다면 또한 생각함직한 일입니다. 잔미(孱微)한 후손이 어찌 선조(先祖)의 일에 간여하겠습니까? 본부(本府)는 또 들으니 이 같은 사람이 억울함을 호소하려고 하면 자못 금지하고 매질한다 하는데, 그것은 그 정상을 다 캐내어 계품(啓稟)해서 그 죄를 다스리고자 해서입니다. 조종(祖宗)의 골육(骨肉)으로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성치(聖治)에 흠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 선조의 죄는 경중(輕重)이 어떠한지 모르겠으니 모름지기 사리를 헤아리고 경중을 따져서 비록 선원적(璿源籍)에는 올리지 못하더라도 천역(賤役)을 면하게 해주고, 적몰(籍沒)한 물건을 돌려주어서 그 생활을 도와주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원전】 15 집 480 면
【분류】 *인사-선발(選拔) / *사상-유학(儒學) / *왕실-종친(宗親) / *왕실-종사(宗社) / *역사-고사(故事)


[주D-001]강(講) : 강독 시험.
[주D-002]사덕(四德) : 인(仁)·의(義)·예(禮)·지(智)의 덕을 말한다. 《중용(中庸)》 30장.
[주D-003]절문(節文) : 일을 알맞게 갖추는 것.
[주D-004]성인(聖人)이 말하기를 ‘내가 인을 좋아하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 하였고, 또 ‘성(聖)과 인은 내가 어찌 감히 당하랴!’ : 여기서 말한 성인은 공자(孔子)를 가리킨다. 위의 말은 《논어(論語)》 이인(里仁)에 나오는데 덕(德)을 이루는 일이므로 보기 어려움을 말한 것이다. 아래 글은 《논어》 술이(述而)에 나오는데, 공자가 겸양하여 하는 말이다.
[주D-005]안자(顔子)는 아성(亞聖)이었으되 석 달 뒤에도 인에 어그러짐이 없지는 못하였습니다. : 안자는 공자의 제자로 이름은 회(回). 맹자(孟子)와 함께 아성(亞聖)으로 불린다. 《논어(論語)》 옹야(雍也)에 “공자가 ‘회(回)는 그 마음이 석 달을 인(仁)에 어그러지지 않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날로 한 번, 달로 한 번 이를 따름이다.’ 했다.” 하였다. 인(仁)이란 마음의 덕으로, 마음이 인에 어그러지지 않는다는 것은 사욕이 없고 그 덕을 지닌다는 뜻이다. 주자(朱子)는 여기에 대해 “안자도 석 달 뒤에는 어그러짐이 없지는 않으나 석 달 뒤에 한결같이 어그러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도리(道理)에 있어서 오랜 뒤에 잠깐 끊어지고, 한 번 끊어졌다가는 곧 접속된다. 만약 조금도 간단이 없으면 곧 성인이니 안자가 성인에게 한 계단 미달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하였다.
[주D-006]삼달덕(三達德) : 이 말은 《중용》 20장(章)에 나온다. 달덕이란 천하 고금의 사람이 행해야 할 덕이다.
[주D-007]온공(溫公) : 사마광의 시호.
[주D-008]인(仁)을 말하되, 평천하장(平天下章)에 이르러 혈구(絜矩)를 논하면서 그 뜻을 다하였으니, : 《대학(大學)》 9장(九章)에 “한 집이 인(仁)하면 일국이 인에 흥기된다.” 하였고, 《대학(大學)》 10장(十章)에 “소위 천하를 평치함이 그 나라를 다스림에 있다 함은……이 때문에 군자는 혈구의 하는 도가 있다.” 하였는데, 이를 평천하장(平天下章)이라 한다. 혈구는 척도(尺度)에 맞추어 헤아려 아는 것으로서 여기서는 혈구를 빌어서 비유한 것인데, 자기의 마음을 미루어서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도덕상의 법칙, 곧 서(恕)의 도이다.
[주D-009]전체(全體) : 완전한 본체.
[주D-010]‘중(中)과 화(和)를 이루어 천지가 안정되고 만물이 생장하는 것[中和位育]’과 ‘독실히 공손하매 천하가 태평해지는 일[篤恭而天下平之事]’ : ‘중(中)과 …생장하는 것[中和位育]’은 《중용(中庸)》 1장(章)에 나오는 말이고 ‘독실히 태평해지는 것[篤恭而天下平之事]’은 《중용(中庸)》 33장(章)에 나오는 말인데, 위의 것은 학문의 최고의 공효로서 성인이 해야 할 일을 말한 것이고, 아래의 것은 성인의 지극한 덕이 오묘하고 정미한 자연의 결과로서 중용의 최고의 공효를 말한 것이다. 중(中)은 내 마음의 바름이고, 화(和)는 내 기(氣)가 순함을 말한다.
[주D-011]‘왕은 경(敬)으로 처소를 삼으소서[王敬作所]’ : 《서경(書經)》 주서(周書) 소고(召誥)에 나오는데 소공(召公)이 성왕(成王)에게 고한 말이다.
[주D-012]원(元) : 사덕(四德)의 하나. 《주역(周易)》 건괘(乾卦) 문언(文言)에 “원(元)은 선(善)의 으뜸이다.” 하였는데, 그 주석에 “원(元)은 만물을 생장하는 시초이다. 천지의 덕이 이보다 앞서는 것이 없으므로 사시에 배분하면 봄이 되고, 사람에는 인(仁)이 되어 뭇 선의 으뜸이다.” 하였다. 형(亨)·이(利)·정(貞)과 함께 사덕(四德)이라 한다.
[주D-013]노산군(魯山君) : 복위되기 전 단종의 군호.
[주D-014]해평군은 노산군에게 외친(外親)이 되는데, : 해평군(海平君)은 정미수(鄭眉壽)의 봉호로 문종(文宗)의 부마(駙馬) 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의 아들이다. 노산군(魯山君) 즉 단종(端宗)에게는 생질(甥姪)이 된다.
[주D-015]무경(武庚) : 이름은 녹보(祿父).
[주D-016]형(亨)과 이(利)·정(貞) : 원(元)과 함께 사덕(四德)이라 하는데, 이는 천지가 만물을 화육(化育)하는 덕이다. 《주역(周易)》 건괘(乾卦) 문언(文言)에 “형(亨)은 아름다움의 모임이고, 이(利)는 의리의 조화이고, 정은 일의 근간이다.” 하였는데, 주석에 “형은 만물을 생장하여 통달시키는 것이다……시절로는 여름이 되고 사람에게는 예(禮)가 된다. 이는 만물을 생장하여 각기 완수하는 바가 있게 하는 것이다……시절로는 가을이 되고 사람에게는 의(義)가 된다. 정(貞)은 만물을 생장하여 성취시키는 것이다……시절로는 겨울이 되고 사람에게는 지(智)가 된다.” 하였다.
[주D-017]당우(唐虞) : 요순(堯舜) 시대.

 

 

중종 35년 경자(1540,가정 19)
 7월16일 (을사)
동반은 정3품 이상, 서반은 2품 이상에서 각각 일사를 천거하다

상이, 동반(東班)은 정3품 이상, 서반(西班)은 2품 이상에게 각각 일사(逸士)를 천거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윤은보는 진사 김사근(金思謹)을 천거하고, 좌의정 홍언필은 생원 권습(權習)을 천거하고, 좌찬성 소세양은 생원 최계성(崔繼成)과 최언충(崔彦沖)을 천거하고, 우찬성 윤인경(尹仁鏡)은 진산 남세빈(南世贇)을 천거하고, 한성부 판윤 김안국(金安國)은 생원 서경덕(徐敬德)과 유학(幼學) 유인선(柳仁善)을 천거하고, 형조 판서 유인숙은 유학 성수침(成守琛)과 진사 조성(趙晟)을 천거하고, 형조 참판 김정국(金正國)은 전 별좌(別坐) 우성훈(禹成勳)과 유학 김취성(金就成)을 천거하고, 형조 참의 채세걸(蔡世傑)은 유학 신덕응(申德應)과 진사 윤내신(尹來莘)을 천거하고, 예조 참의 이찬(李澯)은 생원 권습과 유학 성수침을 천거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유보는 생원 정세구(鄭世球)와 유학 신덕응을 천거하고, 부제학 김만균(金萬鈞)은 생원 이세명(李世嗚)과 유정(柳貞)을 천거하고, 병조 참판 신광한(申光漢)은 유학 성수침과 생원 윤우형(尹友衡)을 천거하고, 공조 참판 홍경림(洪景霖)은 진사 권습과 이충남(李沖南)을 천거하고, 병조 판서 유관(柳灌)은 생원 신백령(辛百齡)과 전 찰방 이이건(李以乾)을 천거하고, 병조 참의 박우(朴祐)는 유학 성수침과 정심(鄭深)을 천거하고, 병조 참지(參知) 이임(李霖)은 유학 성수침과 조식(曺植)을 천거하고, 대사성 이언적(李彦迪)은 유학 김취성과 조식을 천거하고, 판결사(判決事) 김수성(金遂性)은 진사 정취(鄭聚)와 경수문(慶秀文)을 천거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권벌(權橃)은 생원 금축(琴軸)과 유학 이희안(李希顔)을 천거하고, 공조 판서 윤임(尹任)은 진사 신주(申鑄)와 권지(權軹)를 천거하고, 한성부 우윤 한윤창(韓胤昌)은 충순위(忠順衛) 이공구(李公矩)를 천거하고, 좌참찬 이귀령(李龜齡)은 생원 안백증(安伯增)과 유학 성수침을 천거하고, 대사헌 남효의(南孝義)는 생원 정홍익(鄭弘翼)을 천거하고, 상호군(上護軍) 원팽조(元彭祖)는 여절 교위(勵節校尉) 이문간(李文幹)과 유학 양윤보(梁允補)를 천거하고, 예조 판서 정옥형(丁玉亨)은 유학 유인선(柳仁善)과 생원 김지손(金智孫)을 천거하고, 대사간 최보한(崔輔漢)은 생원 최여주(崔汝舟)와 진사 남세빈(南世贇)을 천거하고, 동지중추부사 남세웅(南世雄)은 진사 정기(鄭耆)를 천거하고, 상호군(上護軍) 이기(李芑)는 진사 이고(李皐)를 천거하고, 호조 판서 조계상(曺繼商)은 생원 안순(安珣)과 정기를 천거하고, 호조 참판 김섬(金銛)은 유학 남순손(南舜孫)과 윤세신(尹世愼)을 천거하고, 호조 참의 장적(張籍)은 전 직장(直長) 김대유(金大有)와 진사 양담(梁澹)을 천거하고, 상호군 방호의(方好義)는 유학 유인선과 홍덕윤(洪德潤)을 천거하고, 상호군 이현보(李賢輔)는 생원 박형(朴珩)을 천거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일사를 빠뜨리지 않고 향리에서 천거해 등용하는 것은 왕정의 중대한 일이다. 기묘년에 현량과(賢良科)를 두어서 많은 인재가 흥기하여 볼만했었는데 사림의 화가 이로 말미암아 격렬하게 일어났으니, 이는 소인들에게 분노를 많이 샀기 때문인 것이다. 이번에 일사를 천거하라고 명하여 40여 명에 이르렀으니 이 역시 매우 많다. 다만 천거를 받은 자들 모두가 참으로 자수(自守)하는 선비로서 국가에서 어진이를 구하는 아름다운 뜻에 부응할 수 있을지? 천거에 든 자가 혹은 적임자가 아니어서 물고기 눈알이 구슬에 섞였다는 의논이 있었는데, 이는 곧 마땅한 사람이 아니고 맡길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원전】 18 집 401 면
【분류】 *인사-선발(選拔) / *역사-사학(史學)


[주D-001]서경덕(徐敬德) : 성리학에 밝았고 또 부모의 상에 여막(廬幕)을 지어 3년을 지내면서 능히 성효(誠孝)를 다하여 사람들이 모두 감복하였다.
[주D-002]유인선(柳仁善) : 효도로 소문이 나서 정문(旌門)을 세웠다.
[주D-003]성수침(成守琛) : 과거에 응하지 않고 지조를 지켰다.
[주D-004]유정(柳貞) : 기묘년에 천거과(薦擧科)로 승문원 정자가 되었다가 사화가 일어난 후 다시 과거볼 뜻이 없었고 벼슬을 구하지도 아니했다.
[주D-005]기묘년 : 1519 중종 14년.

국조보감 제20권
 중종조 3
35년(경자, 1540)

○ 7월. 문무 2품 이상에게 명하여 유일(遺逸)의 선비를 천거하게 하였다. 좌의정 홍언필(洪彦弼)은 권습(權習)을, 좌찬성 소세양(蘇世讓)은 최계성(崔繼成)을, 판윤 김안국(金安國)은 서경덕(徐敬德)을, 형조 판서 유인숙(柳仁淑)은 성수침(成守琛)과 조성(趙晟)을, 형조 참판 김정국(金正國)은 우성훈(禹成勳)을, 병조 판서 유관(柳灌)은 신백령(辛百齡)을, 대사성 이언적(李彦迪)은 김취성(金就成)과 조식(曺植)을, 지중추부사 권벌은 금축(琴軸)을, 대사헌 남효의(南孝義)는 정홍익(鄭弘翼)을, 호조 참판 장적(張籍)은 김대유(金大有)를 천거했는데, 모두 한 시대의 인사 중에서 최대한 가려 선발한 것이었으며, 그 밖의 수십 명도 모두 이름난 선비였다. 상이 전조(銓曹)에 명하여 재능을 헤아려 관직을 제수하도록 하였다.

임하필기 제10권
 전모편(典謨編)
어진 이 구하기[求賢]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어진 사람을 보려고 하면서 그 도리로 하지 않으면 마치 그 사람이 들어오기를 원하면서 문을 닫아 버리는 것과 같다. 대저 의리는 길이요, 예절은 문이니, 군자(君子)만이 이 길을 밟고 이 문을 출입하는 것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대동(大東)에, ‘주도(周道)의 평탄하기가 숫돌 같으니, 그 곧기가 화살과 같도다. 군자가 밟는 바요 서민이 우러러보는 바이다.’ 하였다.” 하였다.

○ 선조조(宣祖朝)에 부제학 이이(李珥)가 경연에서 아뢰기를, “옛날에는 ‘학문(學問)’이란 명칭이 없어, 일상의 사람이 행하는 도리가 모두 사람이 당연히 해야 할 바로서 별도로 정해진 명목이 없었으니, 군자는 오직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행할 뿐이었습니다. 후세에는 이 도리가 밝지 않아 이에 당연히 해야 할 것을 행하는 사람을 ‘학문하는 선비’로 이름하였습니다. 이 이름이 서게 되자 도리어 세상 사람들의 지목하는 바가 되어, 터럭을 불어 흠을 찾아 혹은 위선(僞善)이라 지목하여, 선을 행하는 사람들이 숨겨서 점차 학문이라는 이름을 피하도록 만들었으니, 이것이 후세의 큰 근심입니다. 임금은 모름지기 학문을 주장하여 세속에서 이러니저러니 비방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학문이란 어찌 다른 것이 있겠습니까. 단지 일상생활 속에서 옳은 것을 찾아 그것을 행할 뿐입니다.” 하였다.
○ 효종조(孝宗朝)에 《시경(詩經)》 백구장(白駒章)을 강론하였는데, 그 주(註)를 외우며 이르기를, “이 주는 참으로 적절하고 타당하다. 예부터 임금과 신하 사이는 뜻이 부합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한신(韓信)이 초(楚)나라 사신을 대하여 역시 ‘말하면 들어 주고 계획하면 따라 준다.’는 등의 말로 물리쳤으니, 과연 말하면 들어 주고 계획하면 따라 준다면 어진 이가 어찌 임금을 떠나려고 할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 상이 보위에 오른 초기에 전 참의 김집(金集), 전 지평 송준길(宋浚吉)ㆍ송시열(宋時烈), 전 자의(諮議) 권시(權諰)ㆍ이유태(李惟泰), 전 현감 최온(崔蘊)이 제일 먼저 소명(召命)을 받고 왔는데, 객지에서 겪을 음식에 대한 어려움을 염려하여 쌀과 고기를 내렸으며, 송시열과 이유태의 어머니가 늙고 또 병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쌀과 반찬 및 약물(藥物)을 보내 주도록 하였다. 그들을 부르는 데 지성스러웠던 면으로 말하자면, 올라올 때 가교(駕轎)를 탈 것을 명하였고, 그들을 추운 날씨에 따뜻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해 주려고 초구(貂裘)를 벗어 주기까지 하였다. 장령 조극선(趙克善)이 병들었을 적에는 털옷을 내려 덮어 주고 내의(內醫)를 보내 구완하게 하였으며, 그가 죽자 호조 낭관에게 명하여 상사(喪事)를 돌보게 하고 또 날마다 중사(中使)를 보내어 감호하게 하였다. 무릇 ‘선비’라는 이름이 있는 이들을 모두 수소문하였고 그들을 등용하고서는 보살핌이 매우 넉넉하였으니, 유학을 숭상하는 성대함이 시종 한결같았다.
○ 비국(備局)이 아뢰기를, “초야에서 부름을 받은 사람으로서 경연(經筵)을 겸임하는 일은 이미 재결을 받았습니다. 파격적인 겸대가 불가함이 없을 듯합니다만, 듣기에 선조조(宣祖朝) 때 유신(儒臣) 성혼(成渾)이 경연을 겸하지 않고 단지 한관(閒官)의 직함으로 경연에 입시하였다고 하니, 선조조의 예에 따라 다만 각각 본직의 직함으로 참여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 상이 언젠가 사대부들이 술을 좋아하고 노닐며 담소하는 풍조를 근심한 적이 있었는데, 이후원(李厚源)이 대답하기를, “조광조(趙光祖)가 국정을 담당하였을 적에 조심하여 행동을 고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때에도 역시 그러하였으니, 임금이 유학을 숭상하는 효험이 이와 같습니다. 지금 만약 덕이 무르익은 어진 선비가 조정에 있다면, 어찌 감히 술에 취하여 길거리를 누비고 농담과 장난으로 일을 그르치겠습니까.” 하였다.
○ 숙종조(肅宗朝)에 고상(故相) 최석정(崔錫鼎)이 차자를 올리기를, “후세의 유학자들이 또한 어찌 다 기용하기에 꼭 알맞겠습니까. 그들로 하여금 재화와 식량을 관장하게 함이 꼭 나라를 여유롭게 하려는 계책은 아니며, 무기와 병사를 다루게 함이 꼭 군사 전력을 증강하려 함은 아닙니다. 비록 그러나 경서를 담론하고 옛것을 좋아하여 명예와 조행을 갈고 닦는 선비가 조정에 많이 있으면, 관료는 공경하여 꺼리는 바가 있고 서민은 보고 본받는 바가 있어 세상 풍속이 필시 크게 무너지는 데에는 이르지 않을 것이니, 국가에 있어 어찌 도움이 적다 말하겠습니까. 지난해 수차례 글을 올려 천거하였는데, 임용된 몇 사람은 고작 고을 원으로 나가거나 하급 관료를 담당하는 데 불과하고 사간원, 사헌부, 변방 막부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명령에 응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는 인심이 예스럽지 못하고 습속이 투박하여 조금이라도 남다른 기치를 세우면 먼저 지적하는 비판을 가하고 거듭 조정의 여러 사람이 어지럽게 제재하여 발을 붙이기가 더욱 어려우니, 그들이 거취에 대해 스스로 가볍게 하려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를테면 지난번에 서원리(徐元履), 윤순거(尹舜擧), 정양(鄭瀁) 등 여러 사람이 모두 천거로 나왔는데, 이미 나온 뒤에는 처지에 따라 직무에 이바지하고, 평범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반드시 명예로운 벼슬자리를 사양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나라를 걱정하는 자들이 반드시 ‘붕당(朋黨)’을 말하는데, 신의 생각에는 도학(道學)의 쇠퇴가 더 큰 걱정입니다. 만약 교육시키고 감화시켜 인재를 육성하여 조금이나마 이목(耳目)을 새롭게 함이 없다면, 또한 어떻게 이를 구제하겠습니까.” 하였다.
○ 선유(先儒) 김창협(金昌協)이 말하기를, “대저 우리나라가 과거(科擧)를 통하여 인재를 등용하였지만 유학을 더욱 중시하였으니, 위의 예우를 더한 바와 아래의 추천한 바가 항상 초야에 숨은 사람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본시 고고하게 자처하여 가벼이 세상에 나오지 않고 세상의 명망 또한 이미 막중하니, 만약 맹자(孟子)가 말한 천민(天民)의 일과 순경(荀卿)이 말한 대유(大儒)의 효험을 기대한다면 그 형세가 실로 더욱 스스로 닫아 감추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혹 강권에 못 이긴 뒤에야 나오면 또 부득불 두텁게 자임해야 할 것이니, 결과적으로 어긋나고 실망하여 어떤 일을 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에서는 마침내 유학자가 사람과 국가에 무익하다고 하지만, 그 근심은 바로 책임과 여망이 너무 지나친 데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 태조조(太祖朝)에 문무 양부(兩府)와 육조(六曹), 대간(臺諫)에 명하여 각각 현량(賢良)과 유일(遺逸)을 천거하게 하였다.
○ 정종조(定宗朝)에 6품 이상에게 명하여 각각 현량을 추천하게 하였다.
○ 세종조(世宗朝)에 하교하기를, “우리나라가 과거(科擧)로 선비를 선발하고 덕행(德行)으로 가려 천거하는 법이 없어서, 조급하게 다투는 풍조가 점점 이루어지고 청렴하게 사양하는 도리는 거의 사라졌으니, 이 점은 탄식할 만하다. 만약 몸가짐이 방정하여 절의가 있는 자, 마음가짐이 비분강개하여 곧은 말을 할 수 있는 자, 그리고 선비로서의 행실이 우뚝하여 본시 고을에 알려진 자, 재능이 특이하여 사람들에게 믿음을 받는 자가 있으면 제도(諸道)의 관찰사가 수소문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 또 하교하기를, “정치의 요체는 사람을 얻는 데에 있으니, 벼슬이 그 직분에 맞으면 모든 일이 다 다스려진다. 자리에 있는 문무 관원들로 하여금 각각 용맹과 지혜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 변방을 지킬 수 있는 자, 공정하고 총명하여 수령을 맡길 수 있는 자, 일의 조리를 분명하고 자세히 알아 번거롭고 까다로운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자를 천거하게 하라. 만약 사정(私情)을 따라 그릇되게 천거하여 탐관오리가 정치를 어지럽혀 그 피해가 민생에 미치게 되는 경우가 있으면, 법에 따라 죄를 적용하여 결코 용서함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 문종조(文宗朝)에, 동반(東班)의 시산(時散) 6품 이상, 서반(西班)의 시산 4품 이상에게, 각각 몇 사람을 천거하되 감히 사정을 따라 그릇되게 천거하는 자가 있으면 처벌하고 용서하지 않겠다고 명하였다.
○ 세조조(世祖朝)에 제도(諸道)의 관찰사에게 유시하기를, “산간 초야에 깊숙이 숨어 있으면서 평소에 명망이 있지만 자천(自薦)할 수 없는 자를 계수관(界首官 지방 각도의 감영이 있는 우두머리 고을)으로 하여금 천거하게 하라.” 하였다.
○ 중종조(中宗朝)에 제도(諸道)에 명하여, 유일(遺逸)을 수소문하되 만약 탁월한 자가 있으면 재능에 따라 녹용(錄用)하게 하였다. 또 태학(太學)에 명하여, 유생 중에 경서(經書)와 사서(史書)에 통하고 정치 체제를 잘 아는 자를 천거하도록 하였다.
○ 상이, 전조(銓曹)가 온갖 일 처리에 있어 쓸 만한 사람이 없는 것을 근심한다는 말을 듣고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대신(大臣)이 평소에 재능 있는 사람을 많이 천거하였다면 어찌 사람이 부족하다는 한탄이 있겠는가.” 하자, 조광조(趙光祖)가 아뢰기를, “국가가 사람을 등용함에 있어 비록 과거 시험을 중요시하지만, 대단히 어진 사람이 있다면 어찌 과거에 구애될 필요가 있겠습니까. 지금 조사(朝士)들이 대신(大臣)을 보려 하지 않는 이유는, 청탁하는 것으로 비칠까 봐 부끄러워하기 때문입니다. 대신이 만약 성심으로 찾는다면 어찌 인재가 없음을 근심하겠습니까. ‘좋은 사람이 없다.[無好人]’는 말은 도 있는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주공(周公)은 성인인데도 먹던 음식을 뱉어 내고 감던 머리를 움켜쥔 채 뛰어나갈 만큼 선비를 찾는 데에 다급하였는데, 더구나 지금의 대신이겠는가.” 하였다.
○ 경상도 관찰사 김안국(金安國)이 본도(本道) 가운데 행동이 올바르고 학식과 재능이 있는 선비 노진(盧珒), 김옹(金顒) 등 30여 인을 천거하였는데, 대부분 김종직(金宗直)과 김굉필(金宏弼)의 문인들이었으므로 사림(士林)이 흥기하였다.
○ 문무 2품 이상에게 명하여 유일(遺逸)의 선비를 천거하게 하니, 좌의정 홍언필(洪彦弼)은 권습(權習)을, 좌찬성 소세양(蘇世讓)은 최계성(崔繼成)을, 판윤 김안국(金安國)은 서경덕(徐敬德)을, 형조 판서 유인숙(柳仁淑)은 성수침(成守琛)과 조성(趙晟)을, 형조 참판 김정국(金正國)은 우성훈(禹成勳)을, 병조 판서 유관(柳灌)은 신백령(辛百齡)을, 대사성 이언적(李彦迪)은 김취성(金就成)과 조식(曺植)을, 지중추부사 권벌(權橃)은 금축(琴)을, 대사헌 남효의(南孝義)는 정홍익(鄭弘翼)을, 호조 참판 장적(張籍)은 김대유(金大有)를 천거하였는데, 모두 한 시대의 뛰어난 인물들을 선발한 것이고, 그 나머지 수십 명의 사람들 역시 이름이 알려진 선비들이었는데, 상이 전조(銓曹)에 명하여 재능에 따라 관직을 제수하게 하였다.
○ 명종조(明宗朝)에 제도(諸道)에 명하여 유일의 선비를 천거하도록 하니, 경기에서는 성수침(成守琛)과 조욱(趙昱)을 천거하고, 청홍도(淸洪道)는 성제원(成悌元)을 천거하고, 경상도에서는 조식(曺植)과 이희안(李希顔)을 천거하였는데, 마침내 6품의 직책에 바로 서용할 것을 명하였다.
○ 생원과 진사 가운데 경학에 밝고 행실이 닦여진 사람을 이조와 예조로 하여금 대신과 의논하여 아뢸 것을 명하였는데, 학생 이항(李恒), 전 참봉 성운(成運), 전 별좌(別座) 한수(韓修), 전 참봉 남언경(南彦經), 전 참봉 임훈(林薰), 진사 김범(金範), 이상 여섯 사람이 명에 응하자 아울러 6품의 직책에 특별히 서용하였으며, 역마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도록 하였다.
○ 선조조에 유일의 선비를 천거하도록 명하니, 경기 관찰사 윤현(尹鉉)이 성혼(成渾)을 천거함으로써 명령에 응하였다.
○ 인조조(仁祖朝)에 팔도에 명하여 향거 이선(鄕擧里選 지방의 인재를 중앙의 관리로 뽑아 올리는 제도)의 법을 거듭 밝히도록 하였으니, 이조가 아뢴 말을 따른 것이다.
○ 상이 하교하기를, “몸가짐이 방정하고 덕행이 있는 자, 의리를 탐구하고 학술이 있 는 자, 압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히 공무를 집행할 수 있는 자, 용맹과 지혜가 남보다 뛰어나서 적을 제압할 수 있는 자, 지기(志氣)와 절개가 확고하여 직간(直諫)할 수 있는 자, 세상의 사무에 통달하여 일 처리가 밝고 민첩한 자를 벼슬자리에 있는 문무 관리들로 하여금 각각 아는 바를 천거하도록 하라. 또 제도(諸道)의 감사로 하여금 수소문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문무 3품 이상이 각각 두 사람씩을 천거하였다.
○ 또 하교하기를, “하늘은 한 시대의 인재를 내어 한 시대의 쓰임에 이바지하게 한다. 예나 지금이나 쇠란(衰亂)의 원인은 세상에 인재가 부족한 데에 있지 않고 다만 어진 이를 구하는 마음이 지극하지 못한 데에 있다. 어진 이는 자신을 천거할 리가 없고 군자는 쉬이 물러가는 의리가 있으니, 만약 공경대부가 추천하여 뽑고 끌어올리지 않는다면 그 어찌 공훈과 업적을 떨쳐 일으켜 훌륭한 정치를 이룩하겠는가. 정부(政府) 및 팔도 감사로 하여금 나의 지극한 마음을 인식하여 인재를 수소문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 숙종조(肅宗朝)에 영상 김수항(金壽恒)이, 일전에 박세채(朴世采)와 이상(李翔)이 진달한 ‘인재를 널리 찾아야 한다’는 사안에 대하여 널리 물어서 처리할 것을 요청하니, 좌상 민정중(閔鼎重)과 이조 판서 이숙(李䎘)이 아뢰기를, “종전에 별도의 천거는 단지 조사(朝士)를 시켜서 하였기 때문에 견문이 넓지 못하여 천거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정조(政曹) 역시 착실하게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만 형식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반드시 절목(節目)을 강정(講定)하여 특별히 방백(方伯)과 주군(州郡)에 인재를 선발하여 추천하도록 신칙해서 임용한다면 인재를 얻는 길이 넓을 것입니다.” 하므로, 상이 정조(政曹)에 명하여 절목을 의정(議定)해서 시행하도록 하였다.
○ 상이 하교하기를, “인재의 묘연함이 요즘보다 심한 적이 있지 않았다. 별도로 선발하는 방법이 없을 수 없으니, 삼공(三公)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및 육경(六卿)과 삼사(三司)의 장관들로 하여금 재능과 인망이 있는 사람을 각각 세 사람씩 천거하여 녹용(錄用)의 바탕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 선조조에 고상(故相) 이준경(李浚慶)이 연중(筵中)에서 아뢰기를, “오직 대신(大臣)만이 사람을 천거할 수 있고 사람을 임용하는 방법에는 또 순서가 있습니다. 그런데 백인걸(白仁傑)이 감히 관례를 뛰어넘어 사람을 천거하여 6품에 특별 제수하였고, 천거된 사람은 또 인망에 맞지 않으므로 일이 매우 부당합니다.” 하니, 유성룡(柳成龍)이 나아가서 아뢰기를, “천거된 사람이 만약 수상(首相)의 말대로라면 진실로 취하기에 부족하지만, 수상의 말도 병폐가 있음을 면하지 못합니다. 가령 백인걸이 과연 어진 이로서 이미 재상의 반열에 있다면 어찌 감히 천거하지 못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만약 반드시 대신이 추천하여 이끌기를 기다린 뒤에 임용한다면, 초야의 어진 이가 누락되었다는 한탄이 필시 이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하였다. 물러 나온 뒤에 이준경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유 아무개가 나의 실수를 지적하여 의논한 것은 그 말이 매우 옳다.” 하였다.
○ 인조조에 연신(筵臣)에게 말하기를, “선조조에 재신(宰臣) 노수신(盧守愼)이 권율(權慄)과 이순신(李舜臣)을 천거하였으니, 역시 사람을 알아보았다고 이를 만하다. 큰 재목은 평범한 곳에서 나오지 않은 적이 없으니, 만약 단지 재주와 모양이 똑똑하고 민첩한 사람만을 취한다면 어떻게 사업을 이룩하겠는가.” 하였다.
○ 대제학 정경세(鄭經世)가 경연에서 아뢰기를, “이항복(李恒福)이 선조조에 이순신을 애써 천거하였고 정충신(鄭忠信)을 발탁하였으며, 기타 재능에 따라 임용한 사람도 대부분 이항복이 좌우에서 찬성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의논하는 자들이 임진왜란을 극복한 공로를 평가함에 있어 이항복을 으뜸으로 추대하였습니다.” 하였다.
○ 숙종조에 고상(故相) 민정중(閔鼎重)이 상소하기를, “재능이 있는 사람은 난세를 만나면 장수로서의 역할을 잘하고 치세를 만나면 정승으로서의 역할을 잘하여 상황에 따라 하지 못하는 것이 없지만, 만약 때를 만나지 못하면 단지 보통 사람일 뿐입니다. 선조조의 인재들을 예로 들면, 이항복, 이덕형(李德馨), 이원익(李元翼), 윤두수(尹斗壽), 유성룡 같은 여러 신하들의 경우 평시에는 단지 글이나 잘 짓고 이름만 화려할 뿐이었으니, 어떤 사람이 ‘이들이 난리를 평정하고 중흥의 위업을 세울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나라 사람들이 모두 옳게 여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큰 공로를 세우고 난 뒤에야 비로소 그 재주와 위업이 한(漢)나라의 등우(鄧禹)와 마원(馬援)보다 못하지 않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순신의 경우는 본래 보잘것없는 말단이었고 권율은 본시 명망이 없었으니, 만약 때를 만나지 못하여 미관말직으로 늙어 죽었다면 사람들은 그들이 불세출의 재주를 품고 있었는지 알지 못한 채 지금은 사라진 지 오래일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렇게 늙어 죽는 사람들 가운데 또 어찌 몇 명의 권율이나 이순신과 같은 인재가 있는 줄 알겠습니까. 신은 또 생각건대, 비록 그 재능이 있다 하더라도 직책으로 시험해 보지 않으면 또한 알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 고상 이원익(李元翼)이 차자를 올리기를, “편안히 물러나 스스로를 지키는 사람은 향곡(鄕曲)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더욱 조정의 사이에서 찾아야 합니다. 대체로 조정에 벼슬하는 선비는 그 마음에 간직한 세리 염치(勢利廉恥)가 서로 경중(輕重)이 됩니다. 세리가 경하면 염치가 중하니, 행하여 부합하지 않는 점이 있으면 구차스럽게 용납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주D-001]말하면 …… 따라 준다 : 한신(韓信)이 한왕(漢王) 유방(劉邦)을 도와 초군(楚軍)을 대파한 공로로 제왕(齊王)에 봉해지자, 그의 존재에 두려움을 느낀 초왕(楚王) 항우(項羽)가 무섭(武涉)을 사자로 보내어, 옛날에 자신을 섬겼던 친분도 있고 하니 한(漢)을 버리고 자신을 따라 천하를 삼분(三分)하자고 제의하였다. 이에 대하여 한신이, 옛날에 자기가 항우의 밑에 있을 적에는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했지만 지금 유방의 밑에서는 자신의 능력에 맞는 충분한 대우를 받고 있음을 강하게 피력하여, 그 제의를 거절하면서 한 말이다.
[주D-002]맹자(孟子)가 …… 효험 : 맹자가 신하의 부류를 논하면서, 출세하여 자기의 도(道)를 온 천하에 행할 수 있으면 나가고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이름 없이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사람을 천민(天民)이라고 지칭하였고, 순자(荀子)가 말하기를, “대유(大儒)는 아무리 궁하게 살더라도 왕공(王公)이 그와 명성을 다투지 못하고, 대부(大夫)의 지위에 있으면 한 나라가 그를 독차지하지 못하며, 백 리의 땅을 다스리면 천 리를 가진 나라가 그와 승부를 다투지 못한다. 현달하면 천하를 통일시키고 곤궁하면 홀로 그 이름을 귀하게 하니, 중니(仲尼)와 자궁(子弓)이 이런 사람이다.” 하였다.《孟子 盡心上》 《荀子 儒效》

 

冲齋先生文集卷之六
 戊寅日記 五月十五日。至十一月六日。承宣時。
正德十三年 中宗大王十三年 戊寅 a_019_423a



〔五月〕
十五日。晴。夕地震。是日親政。新授右副。兩殿先肅拜。以在成均館時射烏之變。辭免者再。皆不允。○酉時。地大震。至夜不止。上軫災變。御簷下。引見政府堂上及禮判南衮。迎訪闕失。都承旨及臣入參。旣出歸家。○三更臺諫請面對。從之。
十六日。雨。大妃殿先肅拜。後坐與同副直。○午初。上御簷下。引見六曹堂上及曾經六卿都入參。酉019_423b時罷。翰林柳成春等求面對。傳曰。翰林以近侍故。求面對盡言。政院豈無所欲言。其進對。○持平金湜,正言李希閔。以合司意上箚。論兵曹判書張順孫凶險媢嫉狀。許面對。而出後院。及藝文館入對。夜幾三鼔矣。
十七日。陰。上御思政殿。卯時。引見領議政鄭光弼,右議政安瑭,參贊柳聃年,崔淑生。以臺諫駁張順孫事問之。光弼等對曰。心術不正則不知。但不堪任。請遞兵曹判書。崔淑生曰。臣久同竄謫。然不能詳知其心不正事。物議則有之云云而退。命遞本職。未時。019_423c臺諫合司。來請竄逐。又云。曺繼商昨於迎訪。欲陷害士族。請皆竄逐。蓋繼商於迎訪啓云。小人希旨人主。人主慕古則以慕古悅之。虛僞成風。此人雖無人禍。必有天刑。其志欲害善類也。上皆不允。許進對。唯許兩司長官高荊山,孔瑞麟入。○五月初七日。黃海道雨雹書狀來。○酉時。忠淸監司李世膺,都事朴世熹。遣海美縣監曺世健。馳啓地震之故。初昏。上御簷下。引見世健。問道路所經震處。
十八日。雷震而雨。午後霽。太白晝見。○臣以成均館直宿。焚香時殿宇奉審不參事。歸家待命。命行公019_423d推考。午時出仕。○臺諫,弘文館合司。來啓張順孫,曺繼商事。曺則命罷職。○命臣進奏弘文館所啓辭。
十九日。晴。經筵臣入。上御經筵。○持平金湜,正言李希閔。論張,曺事。不允。○兩司弘文館合啓張順孫,曺繼商請竄逐。不允。○平安道地震書狀又來。
二十日。密雲。有朝啓經筵。○未時。命罷張順孫職。兩人皆盡奪告身。聽弘文館之言也。○副提學趙光祖入侍經筵。○臺諫合司來。不啓而退。大019_424a憲始出。○有政。高荊山戶曹判書。柳聃年兵曹判書。金淨兼同知經筵。孫澍嘉善禮曹參判。李耔嘉善大司憲。鄭忠樑直提學。柳仁淑執義。鄭瓊崔澐主簿。
二十一日。晴。卯巳午。地震。夜又震。御朝晝講。右入。○巳時。引見主簿安遇,盧㻶等。領鄭光弼,右安瑭,橃入侍。治所學及治道。 上治字疑咨 㻶薦河艇才堪將帥。○兩司持平任權,正言李希閔來啓。金克愊。平常人也。資憲加不合。卜禧達。舒川郡守不合。皆不允。○夜雨。
二十二日。雨。經筵都公入。○命選有將才者陞019_424b用。從經筵高荊山,柳聃年之議。因災變慮有邊警也。○左議政申用漑差病肅拜。上引見問地震之災。○兩司所啓金克愊加,卜禧達郡守,都摠府都事李守義不合。皆不允。○昏傳旨下五原副守寶丁于義禁府獄。以沈末孫奪嫡僞造文記。看證著名罪也。
二十三日。晴。國忌無事。
二十四日。晴。午後雨。國忌。
二十五日。陰雨。 母忌謁告在家
二十六日。陰雨。 在家
019_424c二十七日。陰雨。御經筵。右副入。左議政申用漑,特進孫澍,金鐺,同知金淨,侍讀奇遵,說經李弘楗。○夕講大學畢。○巳時。引見薦擧人佐郞朴薰,司紙鄭琓,主簿朴遂良。遂良請均田政。議啓曰。均田誠爲美事。然重難。未可遽行。○全羅右道水使李菤牌招。命速赴任。
二十八日。始大雨。朝啓昌寧鄕吏河仁義。怨其縣監金世琬。射中罪絞待時。依允。又樂安人朴哲孫毆殺其妻罪。依允。皆賜覆。停朝講。雨且日晏故也。○議政府六曹,漢城府判尹以上。會議賓廳。○019_424d停晝講。亦雨故。
二十九日。陰雨。午後乍晴。停經筵。雨故。○宣醞于院與弘文館。○有政。崔淑生同知經筵。方有寧兵曹參判。尹煕平工曹參判。韓忠應敎兼藝文應敎。尹倬司成。李孝彥奉常僉正。朴世熹吏曹正郞。盧㻶長興庫令。鄭瓊戶曹佐郞。朴潤卿兵曹佐郞。黃士祐忠淸都事。
三十日。晴。有朝夕講。御經筵。左公文入。○政府遣舍人李元幹啓曰。昨政。主簿盧㻶爲長興庫令。草茅之士初職。參職已爲過矣。㻶今爲五品職。官爵至019_425a爲猥濫。吏曹爲政非矣。請改正。傳曰。其改之。○院啓曰。盧㻶五品職改正。殊無待賢之意。一人進退。所關非輕。敢稟命更問于三公以不可遞之意。○文招殿參奉鄭汝寬暴死。遣醫藥救之不甦。命給棺。

[六月]
一日。晴。夕大雨。御經筵。橃與同副入。○侍從,臺諫極論盧㻶不可遞之意。○檢詳柳墩來啓政府意曰。盧㻶初授參職。上來未數月。未見功能。卽爲五品職。至爲猥濫。不可不遞。已前以循資陞遷者。豈無如盧㻶者乎。且今薦擧中。必有優於㻶者矣。成019_425b宗朝。安良生以學行薦。初拜參奉。後登第爲六品職。金宏弼以師表可當人。初拜參奉。循資陞爲佐郞。見死於廢朝。祖宗朝。雖賢者。必歷試有實跡。然後陞敍。今亦歷試。有卓異之行。則遷擢爲當。
二日。大雨。自昨夕連夜。停經筵。雨故。有晝講。都公入侍。○日暈。午時。太白見於未地。○陽城地。去五月二十七日申時。風急下土雨。大木斯拔。京畿監司李自華書狀來。又江華及南陽地。去月二十七日。地震。○兵曹參判方有寧以本曹事務。請遞成均同知。依允。○夕。弘文館上疏。副提學趙光祖等。
019_425c三日。大雨。視事後。御經筵。右副入。旣出。引見富寧府使方好義,淮陽府使李萬孫。深戒愛民恤刑之意。○停晝講。雨故。○薦擧科目條件來啓。院啓曰。只以四館,成均館,六曹,漢城府各擧所知。似不廣。傳曰。雖令廣薦。猶慮應擧之人不多。以院所啓之意。更問于政府,禮曹。○司諫院啓。奉常正朴認,右通禮金綴文,訓鍊正郭順宗。皆階梯職也。右人等雖陞堂上。不合於參議。而他司正則可爲矣。請遞之。不允。○右議政安瑭。以禧陵奉審事。肅拜而出。
四日。雨。御經筵。右入侍。○權勝酷刑殺人推考。019_425d從大司憲李耔經筵啓也。○左議政申辭免。以弘文館上疏論也。○領議政鄭光弼,左議政申用漑。以屢被謗毀辭免。上命引對。陳細務而退。
五日。晴。停朝講。右議政安瑭。回自禧陵復命。因請罷免。不允。○有夕講。左承旨文入侍。○政府再請罷撰集廳。待豐年復設。皆不允曰。此廳書冊開刊。干於學問之事。不可停罷也。
六日。晴。視事。停經筵。○恤囚事馳書八道。告諭以多死囚。推刑曹官吏不愼刑恤囚之罪。
七日。晴。御經筵。同副入侍。○有晝講○憲府合司019_426a來啓。刑曹以不愼刑恤囚被推。府囚亦有死者。待罪。○傳京中外方死囚。每六月及年終。罪名及某年月囚禁。幾次受刑。物故緣由。啓聞事下刑曹。○本月初三日。京圻喬桐縣地震。
八日。晴。御經筵領事申用漑臣入侍。○有晝講○吏曹正郞金絿以堂上意來啓曰。朝廷近日多闕。而無可塡差者。且國小而貧。事簡而員宂。年又荒凶。稅入少而俸祿多。乞勿充差。且紓國用。兩便與政府議爲何如。傳曰。祖宗設官分職。已有定額。似不可輕改。然其以此意。明日賓廳議得時幷議。可也。
019_426b九日。雨。終夜雷電而雨。無事。議得故。○賓廳,議政府,堂上,刑曹,漢城府堂上,司憲府議獄囚及徵債等事。依議。命減死二人。免徵者亦多。
十日。雨。晨大雨。右李卯而仕。都韓辰而仕。○無事。雨故○決死囚。再覆啓下。先銜待罪。○咸鏡北道兵使申公濟爲下直而來。雨不發。設小酌而歸。○午時。傳曰。有暑證。停經筵。待更敎。○雨司依前來啓。憲府又啓曰。各營繕處甚多。今當避殿修省之時。請計歇處停之。依允。
十一日。陰雨夕晴。藥房提調申用漑金詮,韓效元等019_426c問安。傳曰。服藥後。氣候復常。○都公,右公因議褒貶而出。不還院。○憲府請吏曹考功司掌文官功過,勤慢,休暇。而近日擧行懈弛。請申明。從之。○憲府公事。啓許確淹延公事罪。永不敍用。命安徐判付。
十二日。晴。太白經天。左公歸司甕褒貶。○諫院始啓新本宮賜與福城君。而增制加作。以啓奢侈之端。又撤去窮人等屋。圓覺,貞陵兩寺基代折給。兩司又啓許確永不敍用。李希雍功臣削籍事。諫院啓朴認,金綴文,郭順宗階梯堂上職不合。憲府啓金克愊019_426d資憲不合。尹汝弼,尹之任,邊修,鳳山君提調不合事。傳曰。新本宮。非賜與福城君。君祿藏其家。故人言如是爾。其家舊無行廊。故內需司請造爾。餘皆不允。
十三日。陰。 余袒忌。乍見次野而還。無事。
十四日。大雨。 以忌在家 無事。
十五日。陰。無事。○文昭殿提調蓮城君,戶曹參判李自堅來啓殿事。命報該曹。
十六日。晴。命議政府及六曹,漢城府曾經六卿以上。臺諫,弘文館。議勘改奏本。○下金守墩疏示。三公019_427a啓曰。觀疏意甚美。但多有改作之事。妨於成憲。似難施行。然豈無可行之事。請下該司。傳曰可。○兩司新啓楊州牧使李翰元,仁川府使柳軾不合守令。不允。
十七日。晴。無事。
十八日。陰。右公仍病。○以漕船摘奸事。左副,同副如龍山。○兵曹啓住張哈作耗於城底野人農作者之事。請招三公及知邊事黃衡,李長坤,高荊山,尹希平,崔漢弘于賓廳議得。傳曰。其亟招議之。○大妃殿誕日賀禮。命以權停禮行之。避殿故也。
019_427b十九日。晴。御經筵。副提學趙光祖,正字李認,承旨金正國入侍。講近思錄。○應敎韓忠覲親于忠淸道淸州。來路有一儒生。陳時弊三事。一言學校廢弛。二言非禮之祀當去。如昭格署,太一殿,文昭殿,延恩殿。皆非禮之祀。三。宦寺夫婦。有戾陰陽之道。宜禁絶之。言甚激切。終不言其名。命忠親啓。又牌招議政府。迎問其事可否云。所啓皆當。但文昭殿等事。先王所爲。雖非前古帝王之制。臣子勢難改變。右相安瑭曰。祭祀煩瀆。三時行之。似不甄潔。然先王所爲。不可輕議云云。竟不能施行。
019_427c二十日。晴。無事。○兩司所啓仁川府使柳軾,楊州牧使李翰元命罷職。李宗仁,申玉衡,皇甫謙。姑勿敍用。餘皆不允。
二十一日。 立秋 晴。有不時經筵。同副入侍。○持平金湜,獻納柳庸謹。始啓革昭格署。不允。○ 是夕。宿于元沖家。老泉大椿從宿。
二十二。 舍人李元幹以三公意來啓曰。避殿已久。節亦改矣。請復正殿。傳曰。近來。災變已甚。不可復殿。○領議政鄭光弼來啓正案過半畢。
二十三日。雨陰。軍威訓導朴世亨上疏陳弊。○傳019_427d忠淸道監司李世應本職遞差。以臺諫啓也。
二十四日。雨。校書正字鄭承周上小學。進上四十件。○撰集廳堂上金詮,南衮,崔淑生。磨勘小學諺文反譯畢來上。呂氏鄕約幷入。
二十五日。雨。大妃殿誕日。承旨等問安于殿門。饋酒三巡而退。○午。宣醞餠果于院。
二十六日。陰。都目政事始。是日。右李成童嘉善爲監司。 忠淸 成童病不求退。物議譏之。至是遷官。
二十七日。晴。夕陰。夜大雨。判中樞金詮來啓曰。聞臣昨日禮曹判書受點。禮曹掌典禮。非臣所能堪。臣019_428a又嬰病。氣力不足。尤不能堪任。請遞之。三啓。依允。○鄭忠樑爲同副。
二十八日。陰。政。下批南衮崇政左贊成,知經筵,弘文館大提學。李繼孟崇政禮曹判書,知經筵。丁壽岡兵曹參判。李沆特加嘉善大司憲。李成童特加嘉善忠淸監司。朴好謙吏曹參議。朴壕右承旨。權橃左副承旨。金正國右副承旨。鄭忠樑同副承旨。新授成雲判決事。 終制申光漢典翰。鄭士龍司諫。蘇世讓司成。金世準奉常副正。曺致雲內贍副正。南世準掌令。金守墩司藝。許安國內資僉正。柳庸謹吏曹正郞。019_428b崔山斗持平。丁玉亨獻納。金安老慶州府尹。李思鈞全州府尹。河艇金海府使。
二十九日。陰。午驟雨。巳時。不時召對。講近思錄。副應敎閔守元,承旨文瑾入言將來將帥柳栽等以外官徑遞爲京職未便事。○政府專數。禮曹判書李繼孟議奏請使事。仍啓光州判官柳栽,永興判官金秀淵有將才。徑遞爲都摠府經歷未便。傳曰。仍任。○忠淸監司李成童。以無才德且病。辭免三啓。不允。○ 孝道與李認來話

[七月]
一日。晴。韓忠來言。前日所啓儒生。乃稷山居權019_428c鐸也。卽啓之夕。京畿監司李自華得權鐸所居。馳啓來入。○憲府所啓南世準掌令不合。李成童監司不合。金璠其行邪穢。勿齒仕版。江西縣令李暢一字不知。不合守令。德山縣監李孟華不辨是非。請皆遞之。○祈晴祭命停。晴故也。○傳曰。掌令遞差。餘皆不允。○申時。咸鏡監司書狀。住張哈爲其兄莽哈。報復設計。數來侵掠城底野人。野人等號泣來告請救援。不救援則請入城避難。不然。從便散去云云事。命明早會賓廳議得。
二日。晴。御不時經筵。仍引見政府,兵曹及知邊事019_428d黃衡,高荊山,李長坤,尹希平,崔漢弘,金克成等議邊事。領相鄭光弼以衆議啓曰。住張哈不可輕擊生釁。請待兵使招致敎後。答辭更議云云。高嶺僉使林千孫。防禦則可矣。無應變才。請遞。從之。○傳于戶兵曹判書曰。將帥可爲人及北道軍糧。無爲布置。可也。○曹潤孫所納火燻兵符。改造。
三日。晴。正言李忠楗來啓曰。司諫鄭士龍有才藝。然於朋友失信。夫婦恩薄。嫡妾紊亂。不合諫官。傳曰。此人豈不可爲諫官。但勢不相容。其遞差。○第十四密符改造。○諫院又啓襄陽府使秦澹老病。○019_429a傳曰。典艦提調尹之任,司甕提調鳳山君墩,邊修,忠淸監司李成童,吏曹參議朴好謙,德山縣監李孟華遞差。
四日。 有政○襄陽府使秦澹,宣川郡守申永徹命遞之。從諫也。○崔淑生特加崇政議政府右贊成。趙元紀右參贊。李自健工曹判書。柳雲特加嘉善忠淸監司。孔瑞麟吏曹參議。徐克哲大司諫。申光漢特超六級大司成。柳仁淑超二資弘文直提學。○ 夜往弘文館。見孝直李認打話。
五日。晴。太白晝見已久。諫院啓大司諫徐克哲長019_429b官不合。執義金鏐臺諫不合。命皆遞之。○ 夕見次野
六日。晴。太白晝見。有政。○午後。持平崔山斗來自其鄕光陽。啓曰。臣到本道。聞六月儒生都會。試官潭陽府使朴以寬,淳昌郡守兪仲翼。以文廟從祀鄭文忠公爲賦題。儒生篇中有孟軻戰國之寒士。兩程伊洛之黨流等語。仲翼稱善。以寬以爲不可。仲翼堅執以爲善。只抹此句而置第一。使士流不知趣向。請罷仲翼。推以寬。從之。○柳仁淑超四級大司諫。朴守儒執義。
七日。晴。宗廟,永寧殿秋享大祭香祝親傳。○獻019_429c官領議政鄭光弼,南陽君洪景舟。○實錄閣開閉。考見太祖請諡行狀事入啓。依允。奏請使意也。○兩司來啓前所啓。諫院獨啓工判李自健不合六卿。仁川府使柔懶不合守令。尙衣直長權世憲迷劣。重林察訪曺景文年老躁妄。請罷黜。且六品以上。則曾已沙편001。參外官則未沙편002。庸流溷雜。請令該曹沙편003。傳曰。不允。李自健。果是老病人也。然今無當次宰相。且自健豈不能爲工曹判書乎。權世憲,曺景文等事。問于該曹處置。○副修撰權雲來啓曰。本館官員多闕。請充差。命塡差。
019_429d八日。雨。兩司以前辭來啓。憲府又啓。崔淑生今爲貳相人也。有文武之材。用心亦善。然贊成貳公。弘化之職。而次輔三公。未 拔擢用之。奉常副正李允湜。猥瑣不合本職。忠翊府都事金義錫。侵刻其弟元錫。元錫雖狂悖。然乃其父寵子也。不念父意。薄待如此。彝倫斁矣。請罷職。○吏曹郞李希閔啓曰。重林察訪曺景文。年老生員。謂其可用故用之。權世憲庸劣事未及聞。而以別坐例遷。臺諫豈無所聞而啓之。宜皆편004去。傳曰。金義錫,權世憲,曺景文。皆改差。餘皆不允。○兵曹啓薦擧文科別試啓下。武科何以019_430a爲之。傳曰。其問于政府。
九日。晴。永川居生員曺龍謙上箋。請奏請使請字。以正改之。傳曰。問于三公。舍人啓曰。此事未可施行。○ 夕與都左公。訪次野于伯王第飮。夜分而歸。
十日。陰。 夜李孝叔來話 ○無事。
十一日。雨。有朝講。同副入。○右議政安瑭啓。吏曹正郞柳庸謹。文武兼全。有將才。宜升堂上預養。察訪金麟孫。亦有武才而文。年過四十。宜爲邊方府使。府使朴英。有識武臣。年將五十。亦宜升堂上云云。○同副啓柳雲以大司成爲監司。爲人宜於師表。乞停019_430b監司。爲本館同知。上曰。師表雖重。監司亦不可輕。右議政啓曰。聞儒生之議。副提學趙光祖宜爲同知。光祖進以後進年少。力辭曰。今吏曹參判金淨有物望。宜爲同知。相讓極力。○有政。
十二日。晴。視事。○晉州人殺人偸鷹。同副進啓。鷹進上有弊。至有如此殺人者。宜革。傳曰。祖宗朝內鷹房。今皆廢革。只爲上殿與祭祀。鷹牌猶存。而累次減數封進。今其更加磨鍊減數事。問于兵曹。○執義尹自任來啓。辭職甚力不得。午時退去。○撰集廳左議政申用漑,判中樞金詮,左贊成南衮。進續019_430c東文選幷箋。且啓曰。序使某製進。傳曰。在下可製者製之。可也。
十四日。晴。視事。○辰時。上御思政殿。引見赴京使。奏請南衮。正朝方有寧。奏請副李耔。兼掌令韓忠。質正官崔世珍。書狀官盧克昌。酒五行。賜各弓袋筒箇。○三公,六承旨,史官等入。○成均館兼同知趙光祖來辭甚懇。不允。退去不肅拜。○典翰柳庸謹上辭職箚子。傳曰。合於其任。故不聽。
十五日。晴。卯時。上率百官拜表。○生員金山居崔光濟疏入。黃鍾疏亦入。言朴君孝曖昧事。
019_430d十六日。晴。御經筵。特進官李坫云。金國光有經濟之才。掌令尹自任曰。安有人貪而能經濟者乎。世祖朝大臣。無一可人矣。○右尹黃孟獻以親在尙州。呈歸養狀。不允。再啓不得。○兼成均館同知趙光祖來又力辭。不允退去。○崔光濟疏。命下攸司。黃鍾疏無可施行。留院事傳敎。○向化生員金渭上疏。論三公不職及雉岳山上元寺作佛事事。
十七日。雨。大丘私奴。其主田致寬殺害事及晉州京子銀孫殺麻田事三覆。皆允。○辰時。御經筵。右副入。○上元寺作佛事事。命下書推考以啓。○019_431a命遞大同察訪金世鈞。○冠禮,祭禮報府事。宋洗精聽去。
十八日。晴。御經筵。左副入。○左尹黃孟獻,修撰孝獻,都事世獻。病母相見事呈辭。受由而去。○命遞金瑛慶尙左道敬差官,李坤承文院提調。從臺論也。○傳曰。薦擧別試時。宜講經事。問于政府。啓曰。薦擧必少。若講經則入格者數少。於事體埋沒。請勿講。他別試亦宜臨時取稟定規。○持平崔山斗。以昭格署無縣幡祈禱事誤啓。待罪。
十九日。雨。病不仕。○密陽僵柳自立書狀來。
019_431b二十日。晴。視事。御經筵入侍。○量田巡察使安潤德以病辭。允之。
二十一日。晴。御朝夕講。同副入。○憲府始論有災怪。留浦船亦無。倭變可慮。而慶尙左道兵使成世貞。年老儒生。雖優於撫御。有變則短於防禦。請遞差。
二十二日。朝雨。是日。都韓加拜兵曹參判。○御經筵○有政。韓效元嘉善兵曹參判。文瑾都承旨。 朴壕左承旨。 權橃右承旨。 金正國左副。 鄭忠樑右副。 柳仁淑同副。 宋欽大司諫。柳沃鍾城府使。朴薰持平。朴遂良龍宮縣監。太斗南開寧。沈希佺丹019_431c城。
二十三日。灑雨或晴。 八月節國忌無事。
二十四日。晴。正言金光復以院意啓曰。大司諫宋欽陪八十病母。今在靈光。前任全州尹。以母病辭。今未可必其來也。而院無長官。獻納魚泳濬亦在外。官員多闕。請遞大諫。傳曰。可遞。急速政事。○義城民來獻麥穗三岐。院以今年麥不盛。却之不啓。
二十五日。陰。是日受由。
二十六日。早朝發行。過廣州。見牧使柳思敬。夕到利川。見府使同年慶。俶。仍宿。
019_431d二十七日。曉。照火而發。到陰竹。縣監權恰出見。朝飯後。到可興驛。洗足穩憩。晝飯。向忠州。牧使金欽祖出對。飮酒至夜。
二十八日。平明發行。到安阜朝飯。踰嶺到聞慶。縣監朴堧出見。晝食後。到幽谷而宿。尙州判官權愚將如京。先到驛矣。對話良久。
二十九日。欲明而起。察訪具思兼來見。自監司行次。夜半馳到矣。朝發。由徑路到龍宮。龍宮前縣監金煕壽率妻子將發。相見于衙內。乍酌而出。校理張玉陪其慈堂將發。見我小酌先出。金希說亦來在矣。姜世019_432a亨,全懷瑾姪審言來見。朝飯。向醴泉。見郡守成世俊,榮川郡守權五紀,前判官李守英,家兄伯懼于西軒房。生員韓從傑,辛耆,洪彥國亦來見。俄向東軒見監司。韓都事,辛孟卿設酌。李守英,洪彥國,成世俊亦參。未罷先出。到家兄家。與兄及應祥兄,濟甫弟同宿。朝。成世俊以監司意來問起居。設酌。韓洪辛三生員及鄭雅,鄭繼繼到。呈壺果。行酒後向安東。到金地。謁伯叔于亭。智用,士鈞,仲吉,張以文等十餘人先來。招妓設酌矣。乍飮而出。到伯叔家又飮。夜已昏矣。夜發路險。危苦而行。到岐村。省覲家君。 已上皆晴

[八月]
一日。兩城主來見設酌。暮。兩公向豐山。欲見張玉也。
二日
三日。向乃城酉谷。省叔父母于避病所。俄謁母墳。泣拜而歸。朴瑨亦到。欚亦在矣。
四日。奉化縣監甄繼宗持酒來見。不拔叔亦到。通仲,虞卿,訓導金龜息皆來。飮罷而散。
五日。早向安東。道入南參奉家朝飯。而行到刀只村。點心少憩。入府見監司韓公瑞。都事辛孟卿,張校理玉。亦先到矣。暮。監司設酌。酒闌。府使,判官。皆入行酒。019_432c醉後。歸別室下處。監司與都事,校理,府使共到。再飮而罷。
六日。朝食後。與張子剛見監司。辭出。遂與都事國老,府使棐仲。歸見一亭。點心後。上舟到映湖樓下小酌。晡時先出。往所等村齋庵。夜已深矣。仲吉與朴瑨兄弟三人先待矣。共宿。
七日。行祭于祖父母墳前。鄭長水,朴上將與叔父來參。伯父則來而不參。還寺飮福後。向刀只村留宿。
八日。向榮川見姊氏。俄而李謙,朴珩,金連同等來訪小酌。點心後。向乃城。道見金安鼎震卿。遂拜器之柩019_432d前。又發。道見李進士。暮到酉谷。
九日。步至川石中。待震卿不來。金劉持酒來。與叔父,叔泛。以素飮酒而還。宿于齋庵。
十日。朝行祭于外祖父母墳及母墳。食後。鳳城守設酌于川邊。伯玉以江原災傷敬差亦來。至夜而罷。 伯玉。文瓘字也。
十一日。告行。來安東家。
十二日。行祭于先妣祖父母與外祖父母。亦以紙牋祭。夕。安東判官德璋來見。
十三日。午後。張子剛與權叶之來。飮酒點心後。叶之019_433a歸甕泉宿。子剛宿于奴幕。
十四日。行茶禮。家君與伯父,叔父參焉。仲父以病不來。客則兵使柳湄,張玉,權五紀,李賢輔,醴泉成世俊,禮安申撙,察訪李連枝,南宣,義興縣監浩原,敎授仲舒,義城林萬根,安東敎授金演。劇飮而罷。
十五日。鄭長水,朴上將,鄭僑,朴琛來設酌。午時。告辭。道謁伯父家。到所夜祭曾祖父母兩墳。伯父與五寸叔叔均,進士彥倫,趙孟文,裵碩宗曁諸宗人。來到飮福。乘昏到豐山。十四日。客皆先到矣。見張玉與兵使。困甚不得玩月。
019_433b十六日。子剛行榮宴于仇多本。余及兵使柳湄,敬差官文瓘,府使李賢輔,判官朴璨,尙牧鄭宗輔,榮川叶之,醴泉成世俊,義城縣令林萬根,軍威縣監趙忠孫,義興縣監李洺,其子前博士李胖,察訪南宣,判官秦澹令玉。作新來戲。金希說以直赴殿試。亦參新來戲。飮後。兵使先出。余次出。宿于多仁縣。
十七日。兵使餞余設小酌。成世俊,趙忠孫亦參。食後。兵使先發。余次出。到洛東遞馬點心。到善山。善守兪啓沃出對。敍舊懽飮。見月出而發。到開寧。知禮縣監安瓘。先以事到縣見余。
019_433c十八日。朝食後。到賀老省婦翁。洞中知舊多來見。
十九日。星牧金祐吉甫,安瓘來訪。曺伸及察訪李仁孫亦來。婦翁以庶母服制行素。夕。婦翁先入下庭。開樂而飮。 已上皆晴
二十日。雨。告辭而出。到金泉驛。吉甫李仁孫先在樓待之。與登樓飮餞而出。値雨著蓑帽而行。困甚到供城。日已暮矣。點心後到尙州。夜已二鼓矣。
二十一日。朝對牧使小酌。點心後發行。牧使先到北川。鋪筵見待。不得已飮餞。金匡律。進士同年也。來謁參飮。後到咸昌猪谷。縣監與洪彥昇,柳希任等。待于019_433d江頭。洪彥邦又到。飮飯後。入柳希任家設酌。俄而文瑞,濟甫。自醴泉來參。夜深各散。余與文瑞,濟甫留宿。
二十二日。朝食而發。濟甫,柳希任從行。見頤叔于里安蔡承權第。暫話而別。踰嶺到嘉恩小憩。點心後。聞縣西北數里許有石窟。馳往照火以入。有石柱玲瓏。如張蓋數丈。仰觀有石乳錯落。如玉雕鎪。天巧可愕。深入則有流川淸淺。凜乎其不可入。遂還出。夕。到曦陽山洞口。盤石淸溪。數里不止。山形如畫。眞仙境也。有石山中立。屹然半空。高大可仰。所謂曦陽山也。有石在洞口溪邊。其大如屋。問之則前八九年時。雷雨019_434a後所墜也。觀一大碑龜趺龍首。乾德三年立者。荒基遺礎。蕎麥離離。所謂陽山寺也。小西有巨刹。所謂鳳巖寺也。寺中又有靑石大碑。羅時學士崔致遠所撰。高大且剝落。讀不可連文。借僧榻以憩。夜未久。聞寺僧喧鬨索火聲。乃太守朴堧尋我來也。夕食散宿。 頤叔。金安老字。
二十三日。朝食。更與朴堧等流覽寺中。登彌勒殿。觀南山拱揖而前。霜葉初丹如錦繡。間以松柏。可敬可愛。未午各跨馬。入寺上洞口數里。觀所謂白雲洞者。層巒疊石。澗水如練。松杉落落。赤葉如渥。煮松蕈膾019_434b雉膏。酒數行。朴堧先醉嘔吐。日已暮。興未闌而出。西行數里。泉石淸幽。亦可愛也。檣也從我而行踰嶺。昏到延豐。
二十四日。朝見縣監金壽昌。飯後發向槐山。見主守申濂。飯後到陰城。日已暮矣。見縣監羅俔孫對飯。有韓孝騫者。自京來。招見于亭。
二十五日。蓐食而發。丁彭者來見濟甫。到無極點心。過竹山佐贊。暮至陽智。
二十六日。曉發到龍仁。見主守洪義孫。點心而發。見公碩于廬所。又到洛生點心。到良才遞馬入京。日已019_434c入矣。 已上皆晴○公碩。金世弼字。
二十七日。晴。肅拜。○臺諫呈辭。以請革昭格署不得也。弘文館亦啓。
二十八日。晴。臺諫如前呈辭。弘文館如前。
二十九日。晴。三公來啓請從臺諫之言。臺諫呈辭。弘文館亦啓。院與藝文館亦啓。皆不允。
三十日。晴。三公,六卿來啓請從臺諫之言。以東堂臨近故也。藝文館弘文館亦啓。院亦啓。○午時。命遞臺諫。以其不署經監察。無試官。將罷東堂故也。是日政事。三更而罷。

[九月]
一日。晴。國忌。○弘文館副提學趙光祖,應敎閔守元,著作沈達源來啓請革昭格署。○新大司諫申光漢,執義金希壽,司諫閔壽千等肅拜後。來啓前臺諫遞差未便。請革昭格署。否則不可就職。累啓。不允。○持平丁玉亨,正言具壽福,黃士裕,獻納崔山斗等。肅拜後一啓。以未署經退去。院亦啓。○趙光祖請面對。上出丕顯閣引見。都承旨參入。夜而罷。
二日。小雨。申光漢,金希壽,閔壽千等呈辭而去。命招就職。累辭。弘文館終日啓。入夜亦啓。傳曰。吾019_435a計已定。欲罷之矣。今日。大臣不來。故不得議之耳。明日。當與大臣議爲之矣。院請罷漏時。開門召大臣爲之。允可。○儒生五上書。宗親嵩善正等亦上書。
三日。首相鄭光弼,左相申用漑未明而至。右相日出後至。○傳衆議欲革昭格署。俯從輿情革之。○是日。東堂三所試官差出。
四日。正言具壽福來啓曰。李希雍功臣削事。曾已盡啓。禮賓正金克恢貪汚。且非理好訟。請罷黜。 以上前啓忠淸都事鄭嗣宗。暗劣不合掌令。李世茂。放浪不端謹。不合。請遞差。不允。
019_435b五日。經筵朝夕講始。○濫入儒生等二十三人及入門官推考事。昨日來啓。命推。○忠淸都事鄭嗣宗。於經筵命遞。○東西蠶室絲看品。○兩司來駁人物。○憲府獨啓古阜郡守文敬仝浮放。不合臨民。請遞之。皆不允。
六日。視事。○兩司啓文敬仝,金克恢事。宋蕆不勤職。司評不合事。金敬思無賢能。升爲判官事。李世弘被駁未久。不宜升爲訓練僉正事。許䃢不宜爲正郞。金克恢事。依允改正。
七日。國忌。
019_435c八日。國忌。
九日。臺啓宋蕆司評遞差。○ 夜招見校理子敬,修撰朴潤卿。校書正字李迪亦來。直長金雍來。
十日。有朝啓。
十一日。李自堅以典醫提調來啓。提調李耔赴京。醫科試取時。獨試與否。問于該曹與三公。
十二日。無事。
十三日。御經筵。右副鄭入侍。○政府,兵曹,知邊事大臣。會議于賓廳。以住張哈招來與否及巡邊使下送與否也。○醫科提調李耔赴京。今在提調李自堅019_435d與禮曹堂上。一同試取事。傳說。
十四日。御經筵。左公朴入侍。得病先出去。○夕講入侍。○文敬仝古阜郡守遞差。
十五日。受朝賀。午時。御思政殿。儒生崔繼成,朴恒,安士彥講書。侍客三公。禮判李繼孟,戶判高荊山,刑判李惟淸,參贊趙元紀,大司憲金淨,副提學趙光祖入侍論難後。臣橃啓魯山燕山立後事。三公與繼孟沮抑不行。
十六日。陰乍雨。御經筵。左副金正國。以公事不親啓。推考而出。○遣將習陣。○有政。憲府啓今日019_436a政。忠淸都事崔灝庸碎不合。工曹正郞權義庸劣不合。六曹須及今日改正二政事罷去。不允。
十七日。晴。視事。
十八日。御經筵。○聖節望闕禮習禮。都公與臣參。○典籍鄭嗣宗,李迪被諫駁而遞。○吏曹被推。
十九日。御經筵。右副鄭入。○書房色簡擇。劉五敬落點。
二十日。視事。○強奸一。造印一。殺人二皆死。依允。○夕講。副提學請上命論難。○傳曰。昭格署器皿。成均館,四學,讀書堂分給。有餘則開城府給。
019_436b二十一日。御經筵。有輪對。都令公入。○李陌進來推考。憲府來啓。傳曰。壓良爲賤。罪加朝官。非輕。事干推閱。
二十二日。國忌。無事。 兒始疾
二十三日。書頒賜件踏印。○吏曹參議孔瑞麟。以覲病母。歸龍安縣。
二十四日。聖節望闕禮親行。○憲府啓都正李陌壓良爲賤事進來推考。依允。
二十五日。是日。同副朴英出。○有經筵政事。○工曹正郞許䃢及權義不合與否。問于吏曹。
019_436c二十六日。陰。夜雨。水深三分。 分疑尺御經筵。○謝恩使權鈞,副金安國。還自燕京。○ 國弼仕進後。出迎國卿于門外。
二十七日。御經筵。○諫院啓常服色厖駁未便。請改爲純色。不允。又啓江陵府使柳世雄性暴戾。不愛儒士。屢爲守令。皆見罷。請遞差。不允。
二十八日。視事。停朝講。
二十九日。晦。御經筵。○京畿監司韓效元來啓曰。齊陵親往奉審。東西北隅低微。冬節則無妨。霾雨則未安。請▒春後修築。傳曰。以此語禮曹。

[十月]
一日。御經筵。○停咸鏡道私賤推刷考準。○019_436d夕見大憲元▒。投宿弟讀書處。
二日。寒甚。遣史官火禁摘奸。
三日。御經筵。
四日。御經筵。入侍。○下李陌義禁府。○ 與國弼。往宿國卿第。
五日。停朝講。三政丞有故也。○晝不時召對。講近思錄。講官副提學趙光祖,承旨金正國。講論經理。上亦論難亹亹。或至談笑。
六日。未明時。親傳宗廟冬享大祭香祝。初獻官左議政申用漑。禮當從東西向跪受。而直傳北向受之。失禮也。
019_437a七日。雨。停經筵。大祭故也。○ 夕宿于淸平家
八日。寒風灑雪。御經筵。右副入侍。○應敎奇遵,大諫申光漢,貳相崔淑生等。論啓呂氏鄕約註解未便事。○李陌勿囚。長命等代受刑訊時。事干推閱事。傳敎。○憲府啓別坐黃純,安點,李壽康,趙叔珪,權憶等請편005。皆庸劣云云。問于吏曹。
九日。停經筵。○拜表以權停禮行。正朝使李世應也。
十日。雨。御思政殿。吏文殿講。○禁府堂上任由謙,沈貞。啓李陌事干。似與陌符同。其餘則皆其奴。不019_437b可推也。傳曰。刑推。
十一日。御經筵。
十二日。御經筵。朝夕講。
十三日。御朝講。○有政○命召三公詣賓廳。議京畿災傷差錯守令。分輕重。罷陽川縣監李光文。抱川縣監吳世雲。
十四日。午後。不時召對。○舍人尹自任啓曰。三公意駙馬不得再娶。於前古帝王之法無之。此無理事也。是故。祖宗法章不著。帝王偏私之政。莫是過也。鄭顯祖妻李氏。士族婦女。成禮成婚。故依牒呈施019_437c行事啓目。今後。公翁主卒而改娶。欲爲萬世通例耳。傳曰。我非問駙馬再娶之事。河城尉取李氏之時。欺貞熹王后曰。取良女爲妾。事覺被罪。論以爲妾。特問李氏不可爲嫡耳。更遣注書問之。
十五日。陰。月食。同副承旨朴英。肅拜入直。○無事。
十六日。陰。視事。決罪囚三人。○御經筵。○淸州牧使李元幹。謝恩肅拜。
十七日。御經筵。
十八日。御經筵。都公入侍。○掌令任樞。以其父由謙禁府知事。被駁於本府。在府未安。再啓。不允。019_437d退去。待朝廷處置事入啓。
十九日。視事。停朝講。○ 與張子剛。會宿于濟甫。
二十日。掌令任樞來啓。父被推於本府。不可安心在職。非徒一己未安。朝廷事體有妨。請遞臣職。○京畿監司韓效元肅拜。○任樞遞差與否。問于本院。回啓曰。臺員遞差。果爲重難。然其父被駁。在職實難。命遞差。吏曹啓明日爲政。
二十一日。受朝參。御朝講。○工曹判書金安國啓。方爭訟日興。傷害骨肉。敗壞風俗。又有以其祖上孼子孫爲補充隊遺漏云云陳告者亦多。請皆立大限。019_438a以杜爭訟之風。又啓軍額量減事。領議政鄭光弼。又從而照之收議。○候氣重室試驗事。女妓革罷。各官男樂仍設事。令禮曹施行。○有政。持平金湜爲掌令。魚得江爲獻納。
二十二日。中宮誕日。政院問安色承旨監進表裏。○司諫閔壽干啓。獻納魚得江。廉退可用人也。但聞有病。其上來與否不知。正言黃士祐在外時。在官數少。請遞魚得江獻納。傳曰。遞差。○宣醞于院。
二十三日。無事。
二十四日。無事。
019_438b二十五日。無事。
二十六日。無事。
二十七日。無事。
二十八日。御思政殿視事。御夕講。上曰。師長可當人。雖非正科出身。兼帶學官職檢察。可也。○ 夜趙光輔與金雍來話
二十九日。無事。
三十日雨。憲府杖殺私奴金仇知,金三父兄及其奴一口。院閔其冤欲啓。議不一而止。

[十一月]
一日。晴。御經筵。夕講。上曰。近來。學校019_438c不興。雖非科目出身。而其人器可當。則差學官兼官何如。禮曹判書李繼孟不對。臣等曰。差兼官。有形跡。不若差 官。以盡其職。○命輪次堂上。前期一日。書名以入。蓋欲遣內臣視學也。○臺諫所啓。命承旨親啓。不允。
二日。晴。冬至習禮。○是日。都承旨文瑾爲刑曹參判。崔命昌爲同副。
三日。小雪。承旨等謝恩肅拜。余以外祖母忌出去。
四日。忌。
五日。坐。
019_438d六日。 冬至 有夜對。右副朴入侍。○停經筵○是日。成均館輪次堂上坐起。臣承命陪宣醞往饋堂上及儒生。儒生等令升坐月臺。四五人升堂講論。前此儒生等饋於庭。升飮月臺自此始。○左議政申用漑,同知崔淑生,工曹判書金安國,同知趙光祖,大司成尹倬。
冲齋先生文集卷之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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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002]汏 :
[편-003]汏 :
[편-004]汏 :
[편-005]汏 :

기묘록 보유 상권(己卯錄補遺 卷上)
김안국 전(金安國傳)


김안국은 무술생(戊戌生)이며 자(字)는 국경(國卿)이다. 신유년 진사시(進士試)에 장원하였고 계해년에 급제하였으며, 정묘년에 중시(重試)하였다. 벼슬이 우참찬에 이르렀고, 정유년에 다시 서용(敍用)되었다. 호(號)는 모재(慕齋)이다.
보유 : 겨우 성동(成童 15세)일 적에 경서(經書)와 사기(史記)에 넓게 통했다. 김굉필(金宏弼)에게 배웠으며, 개연(慨然)히 도를 구하려는 뜻이 있었고, 그 조예(造詣 목표)하는 바는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를 사모하는 것이었다. 신유년에 사마 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였는데 모두 둘째였다. 석갈(釋褐 대과에 급제함)하여 주서로 임명되었는데, 그때 나이가 26세였다. 그 뒤에 일본에서 시를 잘하는 중인 붕중(弸中)이 사신으로 왔으므로, 공이 선위사(宣慰使)로 충수되었다. 예대(禮待)하는 데에 사체(事體)를 알았고, 시가(詩歌)를 주고받는 것이 넉넉하고 민첩하였다. 붕중이 시상(詩想)이 고갈되어서 적수가 못되므로 억지 운(韻)을 시험함으로써 곤란을 주고자 하여, 《주역(周易)》을 읽는다는 것으로 시제(詩題)를 하고 운자를 염(鹽 소금)ㆍ첨(尖 뾰족)ㆍ겸(鎌 낫)을 부르는 것이었다. 공은 운자 부르는 소리에 응대하기를,
대갱(자연적으로 된 음식)에는 원래부터 시고 짠것은 타지 않으며 / 大羹元不和梅鹽
지극한 도는 붓이나 혀의 뾰족한 것으로 형용하기 어렵네 / 至道難形筆舌尖
고요한 속에서 사그러지고 늘어나는 이치를 잠자코 보는바 / 靜裏黙觀消長理
달이 둥글 때는 거울 같더니 또 낫과 같이 되네 / 月圓如鏡又如鎌
하니, 글자가 혹 빠진 데도 있다. 붕중이 무릎을 치면서 탄복하였다. 정축년에 영남을 안찰(按察)하면서 효자 및 학행(學行) 있는 사람을 방문하여 그 집에 가기도 하고 음식을 보내 주기도 하며, 뛰어난 자는 조정에 천거하기도 하였다. 《이륜행실록언해(二倫行實錄諺解)》와 《여씨 향약(呂氏鄕約)》을 편찬 간행하고, 여염(閭閻)에 반포하면서 풍속을 변화시키고, 사람을 가르치기에 힘썼다. 기묘년에 조정에 들어와서 우참찬 겸 홍문관제학이 되었는데, 특지로써 전라도 관찰사로 제수하면서, “앞서 경상도에 있을 때에 공적이 현저하였으므로 백성을 위해 경을 뽑아서 제수한다.” 하였다. 공이 감격하여 교화를 성취시킬 조목을 생각하였는데, 전보다 주밀하고 상세하였다. 사화(士禍)가 일어나자 연루되어 파직되니 이천(利川)의 주동(注洞) 집에 물러가 살다가 따로 작은 집을 지어서 은일재(恩逸齋)라는 현판을 붙이고 날마다 여러 학생과 강학(講學)하니, 학도가 점점 많아졌다. 당시 논의가 중한 견벌(譴罰)을 가하고자 하였으나, 공은 마음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여주(驪州)의 천녕(川寧)에 옮겨 살면서 물가에 작은 정자를 지었는데, 내려다보면 아득하고 넓다란 것이 뗏목을 타고 바다에 뜬 것 같으므로 정자 이름을 범사(泛槎)라 하였다. 또 선현(先賢)이 우의(寓意)하였던 물(物)을 취해 여덟 가지를 읊조리고, 당(堂) 이름을 팔이(八怡)라 하였다. 날마다 지팡이를 끌고 거닐며 읊조리면서 장차 이런 생활로써 명을 마치려 뜻한 것이 19년이었다. 정유년에 권력을 잡았던 흉한(凶漢) 김안로(金安老) 등이 죄를 받은 후에 비로소 조정에 돌아왔다. 기해년에 화사(華使 중국 사신) 설정총(薛廷寵)이 와서 조서(詔書)를 반포할 때에 공이 관반(館伴)이 되었는데, 사신이 공과 전중 단아(典重端雅)함을 탄복하였다. 드디어 찬성에 임명되고 문형(文衡)을 맡았다. 무릇 사대(事大)하는 표문(表文)ㆍ전문(戔文)은 모두 그의 솜씨에서 나왔고, 비록 병이 위독하여도 딴사람에게 맡기지 않았다. 계묘년 정월에 병세가 이미 어찌할 수 없으므로 임금이 특별히 승지를 보내어 국사(國事)를 문의하니 일어나 대하지는 못하고 다만, “성은(聖恩)이 지중(至重)하다.” 하였다. 말을 마치자 죽었는데, 온 조정 관원이 곡림(哭臨)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가르침을 받았던 선비는 비록 직위가 근시(近侍)인 자도 모두 변복(變服)하여 자제(子弟)의 예(禮)를 행하였고, 태학(太學) 여러 학생도 모두 조문치전(弔問致奠)하였으며, 성문 밖까지 나가서 관구(棺樞)를 전송하였다. 뒤에 인종(仁宗)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고, 저술한 《모재집(慕齋集)》이 세상에 행한다. 태상(太常)에서 시법(諡法)을 상고하기를, “넓게 듣고 많이 본 것을 문(文)이라 하고, 일찍 일어나서 하는 일에 공손한 것을 경(敬)이라 한다.” 하여서, 문경공(文敬公)이라는 시호가 내렸다.
모재가 여흥(驪興)에 있을 때 범사정 춘첩(春帖 입춘에 써 붙이는 것)에,
정자 밑 긴 강은 한강 나루에 닿았고 / 亭下長江接漢津
동녘 바람에 얼음 풀리니 푸르고 맑다 / 東風新泮綠粼粼
성심스런 마음 조종할 것 이루지 못하고 / 丹心未逐朝宗去
멀리서 풍신(궁전)을 향해 만년의 봄을 축수한다 / 遙向楓宸祝萬春
하였다. 재상으로서 산림에서 편하고 한가로이 맑은 복을 누린 것이 무릇 18년이었다. 정유년 봄에 사환(賜環)하라는 명이 있었다. 또 새로운 첩자(帖子)를 지어서 아이에게 주어 벽에 붙이도록 하기를,
은일정에서 보낸 세월 19년이었는데 / 恩逸亭中十九
여생에 다시 중신을 뵈올 줄 어찌 뜻했으리 / 餘生何意覲中宸
나아갈 때나 물러갈 때나 홍은이 뼈에 사무치니 / 鴻私進退皆淪骨
요(堯)의 시대에 정성스러이 축수하는 성대(聖代)의 백성이어라 / 堯日誠深祝聖民
하였으니, 공과 같은 분은 나아가거나 물러가거나 임금을 잊지 않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기언 별집 제26권
 행장(行狀)
모재(慕齋) 김 선생(金先生) 행장


증조부는 증(贈) 가선대부(嘉善大夫) 예조참판 겸 동지경연춘추관사 홍문관제학예문관제학 동지성균관사(禮曹參判兼同知經筵春秋館事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同知成均館事) 행(行) 봉직랑(奉直郞) 예조 정랑(禮曹正郞) 통(統)이요, 할아버지는 증(贈)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 겸 지경연춘추관사 홍문관제학예문관제학 지성균관사(吏曹判書兼知經筵春秋館事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知成均館事) 행(行) 통정대부(通政大夫) 성천도호부사(成川都護府使) 익령(益齡)이요, 아버지는 증(贈)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우찬성 겸 판의금부사(議政府右贊成兼判義禁府事) 연(璉)이요, 어머니는 증(贈) 정경부인(貞敬夫人) 양천 허씨(陽川許氏)이니 증(贈)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조 참의(吏曹參議) 행(行) 통훈대부(通訓大夫) 영월 군수(寧越郡守) 지(芝)의 딸이다.
공의 휘(諱)는 안국(安國)이요, 자(字)는 국경(國卿)이요, 성은 김씨요, 본관은 의성(義城)으로서, 고려 때의 사공(司空) 용필(龍弼)의 후예이다. 명 나라 효순황제(孝純皇帝) 성화(成化 명 헌종(明憲宗)의 연호) 14년(1478, 성종9) 무술 8월 6일에 선생이 태어났다. 7세 되던 해에 비로소 《소학(小學)》을 배우게 되었는데, 기뻐하여 말하기를,
“사람은 반드시 이것으로 법을 삼아야 한다.”
하였다. 학문이 날로 성취하여 겨우 15세가 되자 정주학(程朱學)을 독실하게 믿었으며, 경서와 역사를 넓게 읽어서 대의를 통하였다. 17세에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였고, 19세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廬墓)살이를 하였는데, 그가 행하는 상주로서의 예절과 비통하게 하는 곡읍(哭泣)은 사람들이 보고 크게 감동하였다.
효경황제(孝敬皇帝) 홍치(弘治 명 효종(明孝宗)의 연호) 14년 즉 우리나라 연산군(燕山君) 7년(1501) 신유년 감시(監試)에서 진사시(進士試)에 제1등으로 합격되고 생원시(生員試)에는 제2등으로 합격되었다. 원래 진사ㆍ생원 두 시험에 모두 1등이었는데, 시험관이 말하기를,
“두 시험의 장원을 한 사람에게 시킬 수 없다.”
하고, 생원시에는 제2등으로 정하였다. 2년 후 계해년(1503, 연산군9) 별시에 갑과(甲科) 제2등으로 뽑혔으니, 그때에 선생의 나이 26세였다. 승문원(承文院)에 뽑혀 통사랑(通仕郞)으로서 정자(正字)에 제수되었으며, 갑자년에는 저작(著作)으로 승진되었다가 승정원주서 겸 춘추관기사관(承政院注書兼春秋館記事官)으로 옮겼다. 얼마 후에 옥당(玉堂)에 뽑혀서 박사 겸 경연사경(博士兼經筵司經)이 되었고, 무공랑(務功郞)으로 올라 부수찬 겸 경연검토관(副修撰兼經筵檢討官)이 되었다가 그만두었다.
의황제(毅皇帝) 정덕(正德 명 무종(明武宗)의 연호) 원년(1506, 중종1) 병인에 황제가 서목(徐穆)ㆍ길시(吉時)를 보내어 등극 경사(登極慶赦)의 칙서(勅書)를 반포할 적에 공이 원접사(遠接使) 종사관(從事官)으로서 호분위사과 겸 지제교(虎賁衛司果兼知製敎)가 되었다. 얼마 후에 승문원 교검(承文院校檢)이 되어 또 시강원 사서(侍講院司書)를 겸하였다가, 중종(中宗) 초년에 다시 옥당(玉堂)으로 들어가서 선교랑(宣敎郞)으로서 부교리(副校理)가 되었다. 다음해 정묘년(1507, 중종2)에는 여러 번 승진하여 봉훈랑(奉訓郞)으로 승문원 교리(承文院校理)를 겸하였고, 그해 가을에는 중시(重試)에 발탁되어 봉직랑(奉直郞)에 올라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이 되었는데, 상에게 아뢰기를,
“폐조(廢朝 연산군을 말함)가 단상(短喪)한 이후로 사람들이 부모를 잊고 예절을 버리다시피 하여 인륜이 땅에 떨어졌으니, 밝으신 유시(諭示)를 내리시어 풍교(風敎)를 세우소서.”
하였다. 무진년에 예조 정랑(禮曹正郞)으로 옮기고 여러 번 승진하여 조봉대부(朝奉大夫)에 올랐으며, 기사년에는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이 되었는데 국사를 말하다가 호분위 호군(虎賁衛護軍)으로 체직되었다. 얼마 후에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이 되었고, 다시 사도시 첨정(司䆃寺僉正)이 되었다가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로 옮겨서 조산대부(朝散大夫)로 승진하였다. 경오년에는 내자시 부정(內資寺副正)이 되었는데, 공의 아우(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을 말함)가 이조 좌랑으로 있었다. 국법에 형제는 피혐(避嫌)해야 하므로 공이 관직을 옮기지 못하니, 대신들이 상에게 아뢰기를,
“성균관(成均館)은 교회(敎誨)하는 직책이라 김안국이 아니고는 안 되겠으니, 관례에 얽매이지 말고 특별히 제수하여 전담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다시 관직(館職)으로 사성(司成)이 되었고, 그 이듬해에 봉렬대부(奉列大夫)로 올랐다. 일본의 사신인 붕중(弸中)이라는 중이 왔을 때에 공이 선위사(宣慰使)가 되었는데, 접대하는데 예법이 있었고 정성과 신의를 보여 주었으므로 붕중이 마음으로 감복하여 말하기를,
“내가 큰 나라에 사신으로 많이 다녔지만, 대부(大夫 김안국을 말함)처럼 훌륭한 분은 보지 못하였다.”
하였다. 그 뒤로는 일본 사신이 오면 반드시 공의 안부를 물었다. 임신년에는 봉정대부(奉正大夫)에 올랐다. 그해에 일본에서 붕중이 또 사신으로 왔으므로 공에게 다시 선위사(宣慰使)의 명이 내렸는데, 홍문관(弘文館)에서 말하기를,
“상께서 지금 《주역(周易)》을 강론하시므로 김안국은 내보낼 수 없으니, 다른 사람을 대신 보내고 불러들이소서.”
하였으나, 붕중이 함께 있기를 빌어 마지않으므로 상이 허락하였다.
계유년에는 내자시 정(內資寺正)으로 승직되어서 적전(籍田)의 경계(經界)를 바르게 하였다. 을해년에는 대신들의 추천으로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가 되어서 한리학(漢吏學)의 훈독(訓讀)을 익히는 법을 엄하게 과(課)하였으며, 그해 가을에는 예조 참의(禮曹參議)로 발탁되고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옮겼는데, 일을 말하다가 첨지중추(僉知中樞)로 체직되었다. 병자년에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가 되었고, 그해 여름에 또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승진되었다. 임금에게 아뢰기를,
“음관(蔭官)을 시취(試取)하는 일이 너무 지나쳐 모든 직사(職事)가 잘 다스려지지 않으니, 《경제육전(經濟六典)》에 의거하여 매년 연초에 예조(禮曹)로 하여금 사헌부(司憲府)ㆍ사간원(司諫院)과 함께 시취하여 합격한 사람은 방(牓)을 내걸고 패(牌)를 주소서.”
하였다.
그때에 노산군(魯山君)과 연산군(燕山君)의 후사를 세우자는 의논이 있어서 상이 공에게 의견을 물으니, 공이 대답하기를,
“노산군과 연산군은 비록 폐위(廢位)는 당하였지만, 종친(宗親)의 서열로 본다면 다 선왕의 계통이요, 더구나 모두 한 나라에 임금으로 있었던 분인데, 죽은 뒤에 돌아갈 곳도 없으면 그 외로운 혼의 원한이 반드시 재앙을 부를 것입니다. 전하께서 끊어진 후사를 이어 주시려는 뜻은 훌륭한 덕(德)이신데, 대신들이 고집하니 신은 의혹됩니다. 다시 모든 신하의 의논을 모으고 옛날 방석(芳碩)의 후사(後嗣)를 세운 사실을 상고하여 결단하여 시행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은 효도와 우애로 급선무를 삼도록 하되, 그 가르치는 방법은 《소학(小學)》보다 절실한 것이 없습니다. 또 선왕이 이미 《삼강행실(三綱行實)》을 편찬하여 천하를 가르쳤으니, 장유(長幼)와 붕우(朋友) 두 가지를 더하여 《오륜행실(五倫行實)》을 엮어서 국내에 널리 펴소서.”
하였다.
상께서 인심이 날로 야박해지고 송사가 그치지 않는 것을 근심하여 법으로 기한을 정하여 막고자 하시니, 공이 말하기를,
“기한을 정하여 막는 것은 말단의 방법이라, 그보다 착실히 교화를 베풀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행실이 흥기하도록 하여 풍속이 후하여지면 송사도 자연히 없어질 것입니다.”
하였더니, 상도 매우 옳게 여겼다.
정축년에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승진되었고 조금 있다가 가선대부(嘉善大夫)를 가자(加資)하여 경상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慶尙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로 삼았다. 상이 서찰을 내리기를,
“경상도는 다른 도보다 크기 때문에 반드시 마땅한 사람을 가려서 두어야 하므로, 비록 벼슬의 서열로는 차례가 되지 않았으나 특별히 보내는 것이다.”
하였다. 공이 정사를 할 때 반드시 교화를 주로 하였으니, 효자와 절부를 찾아서 다 정려(旌閭)하여 표창하고 예물과 음식을 후하게 보냈으며, 훌륭한 행실이 있는 사람은 다 방문하여 예로써 대접하였고, 현풍(玄風)에 있는 한훤당(寒暄堂) 김 선생(金先生)의 묘소에 제사를 지냈다. 고을 사람 중 형제간에 송사하는 자가 있었는데, 공이 효제의 의리로써 타일렀더니 두 사람이 부끄러워서 그 자리에서 소장(訴狀)을 찢고 두 번 절하고 돌아갔다. 공이 임금에게 하직하고 떠날 때 《정유집설소학(程愈集說小學)》을 먼저 간행하도록 청하고 또 《이륜행실언해(二倫行實諺解)》를 편찬하고 《여씨향약(呂氏鄕約)》과 농사짓고 누에치는 데 대한 서적들을 다 간행하여 민간에 펴게 하였다. 각 고을 학교에는 다 권학시(勸學詩)를 지어서 학생들에게 공부하기를 권하고, 못을 막고 도랑을 파서 수리(水利)를 크게 열었으니, 비안(比安)에 있는 상공제(相公堤)라는 제방이 그것이다. 영남 지방과 호서 지방에서 가흥(可興)으로 조세를 운반하여 뱃길이 열린 지가 오래되었다. 공이 그때 호서 안찰사(湖西按察使)로 있으면서 편의한 점을 조목별로 열거해서 조정에 보고하여 가흥창(可興倉)을 두었다.
무인년에 동지중추(同知中樞)로서 사은 부사(謝恩副使)가 되어 명 나라에 가게 되자, 상이 특별히 자헌대부(資憲大夫)를 가자하고,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제수하였다. 돌아올 때에 《주자대전(朱子大全)》, 《주자어류(朱子語類)》, 《논어혹문(論語或問)》, 《맹자혹문(孟子或問)》, 《연평답문(延平答問)》, 《이정전도수언(二程傳道粹言)》, 《장자어록(張子語錄)》, 《경학이굴(經學理窟)》, 《호자지언(胡子知言)》, 구준(丘濬)의 《가례의절(家禮儀節)》 및 《고금표선(古今表選)》 등의 서적들을 구입해 와서 이것을 간행하여 세상에 널리 펴기를 청하였다. 그해 겨울에 겸 지경연 동지성균관사(兼知經筵同知成均館事)가 되었고, 기묘년에 의정부우참찬 겸 홍문관제학(議政府右參贊兼弘文館提學)이 되었다. 그해 여름에 다시 지중추 겸 전라도관찰사(知中樞兼全羅道觀察使)로 제수되었는데, 하직하고 떠날 때에 상이 위로하여 이르기를,
“전라도가 다스리기 어려운 지방이라 이름났기에 특히 경(卿)을 보내는 것이다.”
하였다. 그해 겨울에 사화(士禍)가 일어나서 대사헌(大司憲) 조광조(趙光祖) 등이 다 귀양 가서 사사(賜死)되고 공도 파면되었다. 공은 이천(利川)으로 물러가서 조그마한 정자를 지어서 은일정(恩逸亭)이라 이름하고, 날마다 제자들과 함께 경학(經學)을 강론하니, 배우러 오는 자가 날마다 모여들었다. 이에 용사자(用事者)들이 미워하여 죄를 주고자 하였으나, 공은 흔들리지 않고 그대로 강학을 계속하였다. 무자년에 여주(驪州)의 이호(梨湖)로 옮겨 가서 별업(別業 별장)을 짓고, 정자를 범사정(泛槎亭)이라 하여 ‘이호십륙영(梨湖十六詠)’을 지었으며, 당(堂) 이름은 팔이당(八怡堂)이라 하여 ‘초당팔영(草堂八詠)’을 지었다. 매양 그 고을 노인들이 술을 가지고 와서 대접하면 반드시 유쾌하게 놀며 지냈으니, 이와 같이 하여 19년의 세월을 보냈다.
효숙황제(孝肅皇帝)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 연호) 16년(1537, 중종32) 정유에 용사자(用事者)들이 패하고 공이 다시 등용되어 상호군 겸 동성균(上護軍兼同成均)이 되고, 무술년에 동돈녕(同敦寧)으로 바뀌어 그대로 성균관사(成均館事)를 겸하였고, 조금 있다가 지중추(知中樞)로서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제수되고, 그해 가을에 다시 우참찬(右參贊)이 되었다. 그 다음해에 명 나라 사신 화찰(華察) 설정총(薛廷寵)이 왔을 때에 공이 접반사(接伴使)가 되었는데, 서로 화답(和答)한 한 권의 시(詩)가 있다. 그해 여름에 지중추(知中樞)로서 다시 우참찬이 되었다. 일찍이 경연(經筵)에 입시하여 상에게 아뢰기를,
“선비를 취하는데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다 강독하기 때문에 힘이 나누어지고 공부가 전일하지 못하니, 주자(朱子)의 의논대로 식년시(式年試) 때마다 경 한 가지씩을 바꾸어 가며 시험 보이면, 중국의 전경 제도(專經制度)보다 더욱 자상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해 겨울에 숭정대부(崇政大夫)를 가자(加資)하여 판중추 겸 지의금 세자빈객(判中樞兼知義禁世子賓客)이 되었고, 얼마 후에 다시 예조 판서가 되었으며, 특별히 대사헌(大司憲)으로 바꾸었으나 사양하여 지중추가 되었다. 다시 예조 판서를 제수했다가 또 대사헌을 특별히 제수하매 힘껏 사양하였다. 다시 지중추가 되었으며, 조금 있다가 판중추(判中樞)로 옮기고, 얼마 후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서 다시 우참찬(右參贊)을 제수받았고, 우찬성 겸 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 세자이사(右贊成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世子貳師)로 승진하였다.
신축년 여름에 날씨가 크게 가무니, 상이 공경 대신들을 불러서 각각 일을 말하게 하매, 공이 아뢰기를,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죄를 받은 신하들이 아직 은택을 입지 못하였고, 그 밖에도 죄수 명부에 있는 자들로서 사면해야 할 자들은 옛날 선왕들의 고사와 같이 하소서.”
하니, 대신들에게 회의하여 상소해서 석방하게 하였다. 조금 뒤에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체임되었다가 그해 가을에 판돈녕(判敦寧)으로 옮겼고, 겨울에 다시 예조 판서가 되었다. 임인년에는 다시 세자이사(世子貳師)를 겸직하게 했는데 공이 굳이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더니, 그해 여름에 세자의 청에 의해서 상이 그를 서연(書筵)에 들어가서 《주역(周易)》을 강하게 하였다. 이에 공이 사양하여 말하기를,
“신이 세자이사(世子貳師)로 있었는데, 이사(貳師)에게는 세자가 뜰에 내려와서 맞이하는 것이 예이므로 신이 이사의 직에 있을 때는 비록 참람하나 굳이 피하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이사의 직에서 갈렸고, 세자는 저군(儲君 다음 대를 이을 임금)이니, 이러한 예를 받을 수 없습니다.”
하자, 상이 빈객의 예로 하게 하였으나, 공이 또 사양하여 말하기를,
“세자가 이미 이사의 예로 신을 대하였는데, 지금 와서 새로 빈객의 예로 대한다면 이는 전후의 예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예는 변경할 수 없는 것이니 신은 역시 이 예를 받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는 변경할 수 없는 것이니 이사의 예로 해야 한다.”
하여,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또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겸하게 했다. 그해 여름에 일본 사신 안심동당(安心東堂)이 왔는데, 일본의 국서(國書)에 불손한 구절이 많으므로 공이 예로써 꾸짖고, 엄하게 신칙하기 전에 조약을 세워서 답하게 하였다. 또 한리과(漢吏科)를 두기로 하고, 사방에서 와 국학(國學)에 모여서 공부하는 선비가 혹 죽게 되면 한성부(漢城府)에서 그 관구(棺柩)를 고향으로 보내 주도록 하는 것으로 법령으로 정하였다. 그해 겨울에 병이 나서 지중추(知中樞)로 체임되었는데, 상이 의원을 보내어 병후를 묻고 약을 보냈으며, 세자도 궁중의 관속을 보내서 문병하였다. 얼마 뒤에 판중추(判中樞)로 옮겼는데 또 사양하니, 도총관(都摠管)을 체직하였다. 고가(告暇) 수개월 동안에 병이 더욱 심하였다. 이 즈음에 명 나라 황제는 궁중에 폭도가 들어온 일로 환후가 있었는데, 죄인을 잡고 나자 각국에서 축하를 드렸다. 이에 우리나라에서도 하례하고 글을 보내야 될 일이라 대신들이, 공이 병중에 누웠으니 제학(提學)을 시켜서 표문을 짓도록 하자 하니, 공이 말하기를,
“이것은 나의 직무이다.”
하고 스스로 지었다.
계묘년 1월 4일에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다. 공이 문형(文衡 대제학(大提學))을 맡은 4년 동안 명 나라에 보내는 표문(表文)과 상주(上奏)하는 글을, 비록 많은 학사들이 있었지만 한 번도 피곤하다는 이유로 남에게 부탁한 채 쉰 적이 없었고 병이 위독한 중에도 역시 이와 같았다. 문인(門人)인 판서(判書) 허자(許磁)와 참판(參判) 윤개(尹漑)가 청하여 묻기를,
“선생님이 항상 국사를 걱정하였으니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하니, 공이 억지로 힘을 차려서,
“국사(國事) 국사……”
하고는 말을 잇지 못하였다. 상이 승지(承旨)를 보내서 문병하려 하니, 승정원(承政院)에서 정승이 아니고는 승지를 보내서 문병한 규례가 없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임금께서 특별히 승지를 보냈더니 일어나지 못하고 다만,
“신이 감히 성은을 저버리고 죽지는 못하겠나이다.”
하고 드디어 운명하였다. 부음이 들리자 상이 이틀 동안 조회를 받지 않고 부의(賻儀)를 후하게 보냈으며, 백관(百官)들이 다 모여서 조곡(弔哭)하고, 문하생부터 태학관(太學館)의 제생(諸生)까지 다 복색을 변경하여 조상하고, 여염의 서민층에서도 다 눈물을 흘렸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남달리 훌륭하였고 또 수양이 깊었기 때문에 덕스런 풍모가 수연하게 면모에 나타나고 거동에 드러났다. 강하면서도 거세지 않고 곧으면서도 너그러웠다. 온화하고 공순하며 매사에 착실하여서 남들의 착한 것을 즐거워하고 남들의 악한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정성스럽게 잘 타일러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히 양심이 우러나게 하니, 남을 가르치면 사람들이 잘 따르고 남을 나무라도 사람들이 성내지 않았다. 관직에 있어서 일을 처리하는 데에는 그 지성을 다하였으니, 오랑캐의 풍속이라도 변화시킬 만하였다. 십오륙 세 때부터 벌써 도(道)를 구하려는 뜻이 있었는데, 한훤당 김 선생을 뵌 이후로 성현의 심법(心法)을 듣게 되어 침식(寢食)을 잊을 정도로 즐겨 공부하면서, 군자의 도리는 일용 행사(日用行事)의 법에 벗어나지 않는 것이라 여겨 모든 일에 알맞게 하고 작은 일도 빠뜨림이 없었다. 사람들이 혹 지나치게 세밀하다 하면 공은 말하기를,
“중인(衆人)들은 마음이 거칠고 성인은 마음이 세밀한 것이니, 어찌 정밀한 것을 버리고 거친 것을 따르면서 통달했다 하리오. 옛날 사마 온공(司馬溫公 사마광(司馬光))은 ‘평생에 한 일 가운데 남을 대하여 말 못할 것이 없다.’ 하였고, 또 ‘매일 하는 일을 반드시 하늘에 고한다’고 한 자도 있으니, 한 가지의 일이라도 소홀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규모가 광대하고도 절목이 갖추어진 뒤 만일 폐추(廢墜)된 일이 있으면, 큰일이나 작은 일이나 따지지 않고 반드시 그 근본 원인을 연구하여 조리와 계통을 통하게 함으로써 옛 법에 얽매이지 않고 시대에 맞게 하였으며, 국가의 규례나 중국의 제도를 미루어서 시행할 만한 것은 일에 임할 때마다 반드시 정성껏 시행하였다. 항상 《경제육전(經濟六典)》을 보고서 선왕들의 좋은 법도와 아름다운 뜻이 다 여기에 있다고 하였다. 《대전(大典)》에 있는 수신전(守信田)은 관리(官吏)의 미망인에게 식량을 넉넉히 주도록 준비하는 것인데, 《대전통편(大典通編)》을 수정 편찬하여 직전(職田)을 만든 것은 선왕(先王)들의 충후(忠厚)한 뜻을 상실하는 일이라 하였다. 항상 한리(漢吏)에 대한 훈학(訓學)이 한결같지 않음을 병통으로 여겨 젊은 사람들을 중국에 보내서 배워 오게 하려 하였으나, 일이 끝내 시행되지 못하였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의관을 정제하고 단정하게 앉아서 책을 대했으며, 하루 종일 조금도 쉬지 않았다. 항상 탄식하기를,
“우리나라 사람들은 풍기(風氣)가 박해서 인품(人稟)이 후하지 못하므로 성덕(成德)하는 사람이 적다.”
하였다. 사람을 가르치는 데는 각각 그 재주에 따라 지도하고 기질을 변화시키는 것으로 법을 삼았다. 뜰 앞에 조그마한 못을 파고 물을 끌어다 고기를 길러 구경하였는데, 밤중에 고기들이 뛰는 소리가 들리면 기뻐하기를,
“크고 작음은 다를지라도 즐기는 것은 한가지이니, 고요한 가운데 움직임이 있는 것이 내가 즐기는 바다.”
하였다. 그 당시의 사람들이 공을 평하여, 주도(周到)하고 극진함은 육경여(陸敬輿)와 같고, 정밀하고 요약(要約)함은 여회숙(呂晦叔)과 같고, 초월하게 깨달음은 채계통(蔡季通)과 같다고 하였다.
공은 일찍 부모를 여의었기 때문에 거처와 음식에 있어 한평생 부모를 사모하여, 부모의 사당(祠堂) 곁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거기에 거처하면서 집 이름을 모재(慕齋)라 하였다. 자매(姊妹)들 중에 가난한 이는 한집에서 같이 살고 녹(祿) 받는 것을 나누어 주어서 함께 생활하였다. 자신의 생활은 검소하게 하였고 남의 급한 일을 돕는 데는 반드시 후하게 하였다. 자제(子弟)에게 항상 경계하기를,
“나는 평생에 남에게 거만스럽게 대하지 않았고 또 남의 과실을 말한 일이 없었다. 너희들은 마땅히 경계해야 한다.”
하였다. 8가지의 가훈(家訓)을 두었으니, 첫째 임금에게 충성할 것, 둘째 부모에게 효도할 것, 셋째 형제에게 우애할 것, 넷째 일가에게 화목할 것, 다섯째 향당(鄕黨)과 친구에게 원만하게 대할 것, 여섯째 말을 삼갈 것, 일곱째 행실을 조심할 것, 여덟째 거관(居官) 육사(六事)를 잘 지킬 것 등이다.
공의 향년은 66세였다. 그해 3월 29일에 장단군(長湍郡) 해촌(海村) 선영(先塋) 아래 예장(禮葬)하였다. 시호를 문경(文敬)이라 내렸으니, 도덕이 높고 아는 것이 많음을 문(文)이라 하고 일찍 일어나 일을 공경히 하는 것을 경(敬)이라 한다. 인종(仁宗)의 사당에 배향(配享)하였고 학생들이 여강(驪江) 가에 사당을 세워서 향사(享祀)를 드렸다. 정경부인(貞敬夫人) 이씨(李氏)는 종실(宗室) 송림군(松林君) 효창(孝昌)의 딸이다. 공이 별세한 지 13년 뒤에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79세였다. 3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유부(有孚)니 전설사 별좌(典設司別座)이고, 둘째는 여부(汝孚)니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이고, 셋째는 재부(在孚)니 활인서 별좌(活人署別坐)이며, 딸은 부사용(副司勇) 강복(姜復)에게 출가하였다. 유부(有孚)는 2남을 두었는데, 장남 요명(堯命)은 장례원 사의(掌隷院司議)요, 둘째 요선(堯選)은 찰방(察訪)이다. 여부(汝孚)는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요서(堯叙)는 현감(縣監)이요 사위 조성(趙誠)도 현감(縣監)이다. 재부(在孚)는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요석(堯錫)은 진사요, 사위는 부흥수(復興守)이다. 강복(姜復)은 1녀 1남을 두었으니 딸은 전함사 별제(典艦司別提) 허강(許橿)에게 출가하였고 아들은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 극성(克誠)이다.
외후손(外後孫) 양천(陽川) 허목(許穆)은 삼가 기록한다.


 

 홍재전서 제171권
 일득록(日得錄) 11
인물(人物) 1


삼대(三代) 이후로 임금과 신하가 뜻이 맞은 것은 효묘(孝廟)가 우암(尤庵)을 우대한 것만 한 경우가 없었다.

제학(提學) 신 김종수(金鍾秀)가 계묘년(1783, 정조7)에 기록한 것이다.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는 불세출의 현인으로 일찍이 임금의 인정을 받아서 그 도를 행하였다.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을 때에는 남녀가 길을 달리할 정도로 한 시대가 영향을 받았다. 다만 권력을 잡은 지 얼마 안 되어 불행히 화를 입었기 때문에 그의 사업을 논할 때면 오히려 미진했다는 탄식이 있게 된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에 이르러서는 여러 왕을 두루 섬기며 몸소 세도(世道)를 자임하여 천리(天理)가 밝아지고 인심(人心)이 바르게 되도록 하여 길이 천하 후세에 할 말이 있게 하였고, 그 남은 여운이 아직까지도 없어지지 않고 있으니 붙들고 유지할 수 있었던 모든 것들은 다 이 선정(先正)의 공이다. 이 때문에 내가 이 선정에 대해 오랜 세월을 사이에 두고 느낌이 닿아 가장 깊이 존경하고 사모한다.

천신(賤臣)이 화양(華陽)에서 돌아오자 바로 입시하라고 명하고 치제(致祭)할 때의 의식 절차와 선유(宣諭)한 뒤의 여론에 대해 물으시고 이어 탄식하기를, “호서(湖西) 지역은 바로 사대부(士大夫)로 가득 찬 창고이다. 훈구 세족(勳舊世族)들은 나라와 고락을 함께하고, 혹 긴급한 일이 있으면 믿는 것은 오직 이들뿐인데 근년 들어 사람들이 의심을 많이 하여 사기(士氣)가 꺾이고 상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답답하지 않겠는가. 저 반역을 한 무리는 스스로 반역을 한 것이니 다른 사람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이번 통유(洞諭)는 오로지 진무하고 안정시키려는 고심에서 나온 것인데 사기가 끝내 꺾이고 상하였으니, 이것이 내가 근심스레 깊이 우려하는 바이다.” 하였다.

한(漢) 나라와 당(唐) 나라의 소인은 알아보기 쉽고 송(宋) 나라의 소인은 알아보기 어려우며, 희령(煕寧) 이전의 소인은 알아보기 쉽고 희령 이후의 소인은 알아보기 어렵다. 희령 이전의 소인으로 말하면 조보(趙普)나 여이간(呂夷簡) 같은 자가 모두 소인을 면치 못한다.

원임 직각(原任直閣) 신 김희(金熹)가 계묘년에 기록한 것이다.

일찍이 야연(夜筵)에서 근신들과 정묘호란(丁卯胡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에 대해 논하면서 하교하기를, “삼한(三韓) 강상(綱常)의 근본을 부지하고 만고 의리의 바름을 세워서 우리 동방을 천하 후세에 이름나게 한 것은 삼학사(三學士)의 공이다. 더 이상 무엇을 논하겠는가. 그리고 가벼운 수레를 타고 술병을 차고서 백만 군대의 앞에 달려 나가 자리를 펴 놓고 담소하면서 능히 눈앞의 위급을 해결하여 종사를 보전하여 오늘이 있게 한 것은 고(故) 재상의 공이니 또한 어찌 작은 일이겠는가. 뒷날에 전날의 일을 논하는 자들 중에 혹 고 재상을 소인으로 지목하는 자가 있다고 하는데 나는 매우 그르게 여긴다.”라고 하였다.

원임 직각 신 김재찬(金載瓚)이 계묘년에 기록한 것이다.

유신(儒臣)을 불러 주자(朱子)의 봉사(奉事)를 읽게 하고서 경연의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나라를 건국한 과정은 전적으로 송(宋) 나라를 본받았다. 시운(時運)의 소장(消長)과 인재의 나아가고 물러남이 왕왕 대략 서로 합치되는 것이 있고, 주자가 효종(孝宗)을 만난 것과 선정이 영릉(寧陵)을 섬긴 것에 이르러서는 그 뜻과 일이 완전히 들어맞으니 참으로 고금이 한 법도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끝내 원통함을 품은 채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은 하늘의 뜻인 것이다.” 하였다.

원임 직각 신 김재찬이 갑진년(1784, 정조8)에 기록한 것이다.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은 타고난 성품이 뛰어났고 평소에 수양을 쌓아 기묘 제현(己卯諸賢)의 영수(領袖)가 되었다. 나라를 위하여 성의를 다하고 관직을 맡아서는 직분을 다하였으니, 비록 옛날의 현자 중에서 구하더라도 이런 사람은 많이 얻기가 쉽지 않다. 그가 태학사(太學士)로 있을 때 사대(事大)와 교린(交隣)의 응제 문자(應製文字)는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는데, 매번 초고를 지을 때마다 문을 닫고 손님을 거절하고서 며칠을 읊조려서 한 자도 구차하게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글은 전아하고 명쾌하여 중국에서까지 칭송하였다. 그러나 박학한 문장에 비해 수약(守約) 공부가 조금 미진하였기 때문에 후세의 의논이 정암(靜菴)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하였으나, 후학을 육성하여 사도(師道)를 담당함으로써 한때의 사류들이 모두 그의 훈도를 입었으니, 이 점에 있어서는 정암이 도리어 양보함이 있는 것이다. 그의 아우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 역시 사우(師友)의 연원(淵源)이 있어 학문이 높은 경지에 올랐고, 문장이 여유 있고 민첩하여 시도 붓을 들면 그 자리에서 바로 완성하였다. 문집은 비록 한 권이지만 볼만한 것이 많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는 학문과 문장이 당세에 우뚝하였고 시대의 급류에서 기미를 알아차렸기 때문에 원우(元祐)의 난에서 온전할 수 있었으니, 그 절의의 큼과 출처의 바름은 비길 만한 사람이 드물었다. 젊었을 때 인묘(仁廟)에게 인정을 받아 출중한 은혜를 받았고, 인묘께서 늘 그가 숙직하는 곳에 직접 가서 차분히 토론하였으며, 그가 올린 묵죽 시(墨竹詩)는 지금 보아도 사람을 격앙시킨다. 심지어 천문(天文)과 지리(地理), 의약(醫藥)과 복서(卜筮), 음양(陰陽)과 율력(律曆), 명물(名物)과 도수(度數)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대개 그의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 스스로 터득하여 그렇게 된 것이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은 호걸스런 선비이다. 그의 언론과 풍채는 사람을 용동(聳動)시키는 점이 많았다. 그의 문집 중 한 편의 상소에 대해서는 대성인이 수용해 주시는 국량으로 죄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누차 간절히 불러 다스리는 도를 묻고 예우를 융숭히 하였으니, 아, 성대하도다. 대저 그의 학문은 기상을 숭상하고 기이한 것을 좋아하여 병폐가 적지 않았다. 말단의 폐해로는 심지어 정인홍(鄭仁弘)이 있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순경(荀卿)의 문하에 이사(李斯)가 나온 경우인 것이다. 그러나 영남(嶺南)에서 절의(節義) 있는 선비가 배출된 것은 실로 이 사람의 힘 때문이니, 후세에 어찌 중도의 선비를 얻을 수 있겠는가. 이런 사람도 얻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에 대해 혹자는 그의 사업이 문장보다 낫다고 하지만 문장도 사업에 못지않다. 그의 문장은 호방하고 통창하여 문장 꾸미기만을 일삼는 자가 미칠 바가 아니다. 또한 자품이 청수하고 고상하며 마음씀이 관대하고 공평하여 한 몸에 일국의 안위를 지고 있으면서 외적인 것에 흔들리지 않아 나라를 태산과 반석 같은 안전한 지경에 올려놓았다. 사림(士林)들이 입방아 찧는 것을 일삼아 이 때문에 혹 비방이 있기는 하지만 그의 문장과 사업은 가히 한 시대에 빛을 발할 만하였다.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은 호남의 인사 중에서 가장 걸출한 사람이다. 학문의 높은 조예와 문장의 초절(超絶)함과 절의의 정대함은 삼절(三絶)이라고 말할 만하다. 그의 문집 중에서 퇴계와 주고받은 사칠논쟁(四七論爭)의 편지는 동이(同異)를 변별하고 분석한 수많은 말들이 의논이 뛰어나서 바로 창을 들고 방 안에 뛰어들 듯 하였다. 그러므로 많은 부분에서 퇴계가 자기의 의견을 굽히고 그의 견해를 따르면서 ‘홀로 환하고 광대한 근원을 안 사람’이라고 칭찬하였다. 그의 호걸스런 기개와 탁월한 자품은 퇴계의 문인 중에서 제일의 인물로 꼽을 만하다.

사암(思菴) 박순(朴淳)은 맑고 지조가 있어 선류(善類)의 종주가 되었다. 정성을 쏟아 명사들을 끌어들여 세도(世道)를 만회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여겼다. 그의 문장 역시 그의 인물됨과 같아서 근체시(近體詩)의 실속 없고 경박하며 기구하고 괴이한 것을 몹시 싫어하고 나쁜 습관을 애써 변화시켜 깨끗이 씻어 내려 하였다. 문집에 볼만한 곳이 많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은 호방하고 준걸스러워 군계일학처럼 우뚝 뛰어난 사람이다. 우계(牛溪)와 율곡(栗谷) 등 제현이 추대하였고, 심지어 ‘얼음처럼 맑고 옥처럼 깨끗하며 적자(赤子)의 마음을 가지고 나라를 위해 일한[氷淸玉潔赤心奉公]’ 사람이라고 칭송하였다. 그의 문집은 한 권뿐이지만 준걸스럽고 통창스러운 맛이 흘러넘치고 자연스럽게 격을 이루었다. 이것으로 보면 그가 명재상이었음을 가히 알 수 있다.

북창(北窓) 정렴(鄭)은 원래 이인(異人)으로 학문을 통해 인격을 이루었다. 삼교(三敎)와 구류(九流)에 통하지 않은 것이 없고 자품이 대단히 뛰어났다. 문장 또한 맑고 새로웠으며 전혀 세속적인 기미가 없어 계곡(谿谷)의 이른바 ‘일민(逸民)으로서 권도에 맞는 사람’이라는 말이 참으로 적절하다. 그의 아우 고옥(古玉 정작(鄭碏)) 역시 세속에 휩쓸리지 않고 고고하였다. 초서와 예서를 잘 썼으며 시 읊기를 좋아하였으니 북창과 난형난제(難兄難弟)라고 할 만하다.

직제학(直提學) 신 박우원(朴祐源)이 을사년(1785, 정조9)에 기록한 것이다.

송당(松堂) 박영(朴英)은 무인(武人)으로서 발심하여 기미를 보고 일어난 사람이다. 낙동강 가에서 독서하였고 마침내 기질을 변화시켜 당대의 거유(巨儒)가 되었다. 이 문순공(李文純公 이황(李滉))이 비록 선가(禪家)의 기미를 띠고 있다고 기롱했지만 예로부터 무신 중에 송당만 한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어찌 기특하지 않은가. 또 야천(冶川 박소(朴紹))이나 석계(石溪) 등 많은 사람들이 모두 이 송당의 문하에서 배출되었으니 후학을 성취시킨 공로 또한 어찌 적다고 하겠는가.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은 바른 도학과 높은 절의를 우리나라에서 존경할 뿐만 아니라 청 나라 사람들도 공경하고 복종하였으니 문장은 나머지의 일일 뿐이다. 내가 그를 말할 때에 고상(故相)이라고 하지 않고 선정(先正)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난날 치제문(致祭文)에서 “그의 문장은 한유(韓愈)와 증공(曾鞏)이요, 그의 학문은 염락(濂洛)이다.”라고 한 것은 도학과 문장을 가리켜 말한 것이고, “동해의 물과 서산(西山)의 고사리, 잔 들어 제향하니 맑은 모습 이와 같도다.”라고 한 것은 절의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선원문집(仙源文集)》이 비록 몇 편에 지나지 않지만 형제의 쌍절(雙節)은 옛날에도 그와 견줄 만한 사람이 없다. 문곡(文谷)의 조부에게 부끄럽지 않음과 퇴우(退憂)의 자기 동생에게 부끄럽지 않음과 몽와(夢窩)의 충절과 농연(農淵)의 경술 문장(經術文章)에 노포택(老圃澤)이 나란히 훌륭한 명성을 날렸으니 참으로 전후에 드문 명문가이고, 절의 있는 인물이 많기로는 덕수 이씨(德水李氏)와 연안 이씨(延安李氏)도 미치지 못한다.

졸수재(拙修齋) 조성기(趙聖期)는 기걸찬 선비로 웅대하고 해박한 논변으로 당세를 압도하였고, 우옹(尤翁)의 산이 우뚝 선 듯한 기상[山峙]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수해(叟海), 등파(騰波)와는 병칭되었다. 또 그의 묘지문(墓誌文)에 이런 말이 있다. “삼황(三皇)과 삼왕(三王), 오제(五帝)와 오패(五伯)여 일월과 성신이로다. 울울한 뜻 뱃속에 가득하고 마음속에는 굉대한 포부 있도다. 땅에는 베풀 곳 없어 높은 하늘 더위잡고 올랐네. 애석하도다, 끝내 필부로 마쳤음이여.” 그리고 이기설(理氣說)과 사칠변(四七辨)에 제가의 학설과 조금 다른 곳이 있기는 하지만 타고난 재능의 지극히 높음은 구유(拘儒)가 미칠 수 없는 것이 있다.

월천(月川) 조목(趙穆)은 퇴계 선정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선정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았는데 문인들이 의문 나는 곳을 물어보면 늘 “조사경(趙士敬)에게 보여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다. 일찍이 설 문청공(薛文淸公 설선(薛瑄))의 《독서록(讀書錄)》을 좋아하여 직접 중요한 말에 권점(圈點)을 찍어 표시하여 책상에 두었으며, 또한 유 원성(劉元城)의 ‘스스로 말을 망녕되게 하지 않음으로부터 시작한다’는 말을 따다가 항상 자신을 바로잡았다. 또 옆에 작은 책자를 두고서 자기에게 절실한 선현들의 훈계를 써서 곤지록(困知錄)이라고 이름 지었다. 더욱이 심학(心學)에 대해서는 잠시도 진작시키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원집(原集) 중의 ‘구방심(求放心)’으로 주고받은 편지를 참고해 보면 알 수 있다. 선정께서도 심경후론(心經後論)을 지었으니 사제 간에 서로 강마한 것이 이와 같다.

저헌(樗軒) 이석형(李石亨)은 젊은 나이에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명성이 자자하였는데, 그의 유집(遺集)을 읽어 보면 전혀 화려하게 꾸민 기색이 없으니 그가 순후한 군자임을 알 수 있다. 지금 그의 자손이 여러 대 동안 융성하고 현달하니 우리 동방의 제일 가문이라고 꼽을 만하다. 선대의 남은 음덕을 받은 것이니 어찌 까닭이 없겠는가. 늘 책상에 두고서 가끔씩 펼쳐 본다.

정도전(鄭道傳)의 《삼봉집(三峯集)》은 간행본이 아주 드물어 지난번에 경상도 관찰사에게 명하여 베껴 오게 하였는데 그 후손의 집에 오랫동안 소장되어 있던 것이었다. 문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경의(經義)에 논란을 제기한 곳에도 볼만한 곳이 많다.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은 우계(牛溪) 성혼(成渾),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교유하였다.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여 정미한 이치를 분석하는 것은 남들이 미치지 못하였고, 시사(詩詞)가 절묘하여 많은 작품이 세상에 회자된다. 그러나 집안에 세루(世累)가 있는데도 덮을 생각을 않고, 몸은 천류(賤流)에 있으면서 지나치게 자신을 대단하게 여겼다. 귀양에서 돌아온 뒤로는 더욱 큰소리를 치고 당시의 일을 기롱하여 식자들이 병통으로 여겼지만 또한 쉽게 얻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할 만하다.

박세채(朴世采)의 《남계집(南溪集)》 60권 중에는 예설(禮說)이 가장 볼만하다. 대체로 예설가(禮說家)들은 늘 자기의 사사로운 지혜로 견강부회한 것들이 많으니 이 때문에 송사하듯 설이 분분한 것이다. 남계의 설은 하나도 자기 마음대로 논단한 것이 없고 다만 많은 문서를 수집하여 이것을 가지고 저것을 증명하였으니, 예를 좋아하는 자가 그 속에서 거취를 결정할 뿐이다.

동래 정씨(東萊鄭氏)의 문중에 정광필(鄭光弼)의 《문익공실기(文翼公實記)》와 정유길(鄭惟吉)의 《임당집(林塘集)》이 있다. 기묘사화가 일어났을 때 문익공이 충심으로 임금을 만류하지 않았더라면 누가 능히 임금의 마음을 돌려 진노를 조금이나마 누그러지게 했겠는가. 야사(野史)에 보면, “촛불을 문지르고 앉았는데 눈물이 흰 수염을 따라 흘렀다.”는 말이 있다. 나라를 근심하고 인재를 사랑하는 충정과 나라를 부지하고 인재를 보호하는 정성은 아직도 사람을 감격시키니 그의 자손들이 번성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나라의 망족(望族)으로는 먼저 덕수 이씨(德水李氏)를 꼽는다. 도학으로는 율곡(栗谷)이 있고, 장수의 지략과 충의로는 충무공이 있고, 문장으로는 용재(容齋) 이행(李荇)과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있다. 한 문중에 많은 훌륭한 인물이 모였고, 또 각파에서 과거에 장원한 인물이 많지 않은 것이 아닌데도 악역(惡逆)의 죄를 범하여 주륙을 당한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이 또한 다른 집안에 없는 일이다. 고(故) 상신(相臣) 수곡(睡谷) 이여(李畬) 같은 이는 숙묘(肅廟) 말년에 융숭한 대우를 받고 유상(儒相)으로 예우를 받았지만 도리어 초야로 한가히 물러나 그 명절(名節)을 보존하였다. 이러한 출처(出處)는 시대의 급류에서 용퇴(勇退)한 것만으로는 논할 수 없는 것이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은 젊어서 퇴계에게서 수학하였다. 임진왜란을 만나 전장의 급보가 빈번히 날아들고 공문서가 산처럼 쌓였는데 한편으로 답을 하고 한편으로 사람을 접하는 것이 모두 시의적절하였다. 신흠(申欽)은 상촌수기(象村手記)에서 “공은 내가 글씨를 빨리 쓴다고 하여 반드시 나에게 붓을 잡으라고 명하고 입으로 불러 문장을 만드는데, 줄줄이 이어지는 문서나 편지를 비바람 몰아치듯 신속히 만들어 내서 붓이 멈출 겨를이 없었지만 문장은 점 하나 더할 것 없이 완전하게 격을 이루었고, 주자문(奏咨文)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하였다.”라고 술회하였다. 이처럼 재능을 갖추고 이처럼 문장력을 지닌 사람은 가히 시대마다 있는 인물이 아니라고 하겠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의 하자를 찾아내려는 다소의 의논이 있더라도 그것은 치우친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저 헐뜯는 사람들을 고(故) 상신(相臣)이 처한 시대에 처하게 하고 고 상신이 맡았던 일을 행하게 한다면 그런 무리는 백 명이 있다 하더라도 어찌 감히 고 상신의 만분의 일이라도 감당하겠는가. 옛날 당 태종(唐太宗)이 이필(李泌)에 대해 말하기를, “이 사람의 정신은 몸보다 크다.”라고 하였는데 나도 서애에 대해서 또한 그렇게 말한다. 대개 그는 젊었을 때부터 이미 우뚝이 거인(巨人)의 뜻이 있었다. 처음 훈련도감(訓鍊都監)을 창설했을 때 사수(射手)와 살수(殺手)와 포수(砲手)를 설치하였고, 또 기내(畿內)에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군사 2만을 기르되 반은 서울에 두고 반은 둔전에 두게 하여 군사를 농민 속에 두는 뜻을 담으려고 했다. 계책은 비록 시행되지 않았지만 이처럼 좋은 경륜과 좋은 계책을 어디에서 얻을 수 있겠는가. 오위(五衛)의 제도가 혁파되고 나서 국가에서 믿고서 급할 때 쓸 수 있는 것은 오직 훈련도감의 군사뿐인데, 또 미리 양병(養兵)의 폐단을 생각하여 반농반병(半農半兵)의 설을 주장하였으니, 신기(神機)와 원려(遠慮)는 참으로 우리나라의 유후(留侯)인 것이다. 당시에 토지 제도를 정리할 수 없었는데 처음으로 절수법(折受法)을 만들어 세법이 정해지게 하여 지금에 이르러서 개척되지 않은 들이 없고 개간되지 않은 토지가 없게 되었으니 이것은 또 얼마나 큰 사업인가. 혹자는 절수법의 폐단을 가지고 서애에게 허물을 돌리기도 하지만 삼대(三代)의 정치도 더하거나 뺄 것이 있는데 하물며 말류의 폐단이 어찌 법의 죄이겠는가. 이런 경우는 지금 사람이 애당초 이해하지 못하고 다만 남의 선(善)을 가려서 자기의 기분만 후련하게 하려고 한 것이니, 참으로 제 분수를 헤아리지 못한 어리석음만 보인 것이다.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은 조식(曺植)의 문인으로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와 동시대에 경연(經筵)에 출입하였다. 선묘(宣廟)께서 일찍이 경연에 임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대의 말을 들으니 그대의 자질이 좋음을 알겠다.”고 하시고 잠(箴)을 지어 올리라고 명하였으니, 그가 학문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불행히 조정의 논의가 갈리어 남의 비난을 받았다. 지난번 내가 도(道)의 유생들이 서원의 사액(賜額)을 청하는 상소로 인하여 특명으로 치제(致祭)를 하였다. 당시에 비록 대신(臺臣)의 배척하는 논의가 있었으나 나의 뜻은 나름대로 마음먹은 것이 있었다. 원집(原集)의 문자(文字)에는 볼만한 것이 매우 많고, 《송원강목(宋元綱目)》은 그 공이 적지 않으니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이 말한 ‘진사업(眞事業)’이라는 말이 지나친 말이 아니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으로 말하면, 덕망과 공로와 문장과 절개 중에서 하나만 얻어도 어진 재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물며 한 몸에 겸하였음에랴. 세상에 전하는 우스개들이 꼭 모두 백사의 일은 아니겠지만 나라 안의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아끼고 사모하고 있는 것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임진왜란으로 선조가 파천(播遷)하던 날 밤 궁궐을 지키는 위사(衛士)들은 모두 흩어졌는데 혼자서 손수 횃불을 들고 상을 내전으로 인도하였고, 내부(內附)의 의논이 결정되자 개연히 호종(扈從)하겠다고 자청한 사람은 공 한 사람뿐이었다. 당시의 일을 생각하면 기가 막히는데 ‘나라가 전복되는 위기에서 참된 신하를 안다’는 말은 백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겠는가. 철령가(鐵嶺歌) 중에서, “누가 고신(孤臣)의 원통한 눈물을 가져다가 구중궁궐에 뿌려 줄까.[誰將孤臣怨淚 灑入九重宮闕]”라고 한 구절은 들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을 쏟게 한다. 참으로 충의가 탁월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백 년이 지난 뒤에도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겠는가.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이 ‘연산(燕山)에 뼈를 묻겠다’고 한 말은 백사와 같은 충의이고, 문장과 사업도 서로 백중을 겨룬다고 할 수 있다. 《명사(明史)》 속에서 무함을 받았으니 어찌 분통이 터지지 않겠는가. 대체로 한음과 서애 같은 사람은 중국에서 찾아봐도 그보다 나은 사람은 쉽게 볼 수 없다. 그런데 와전되고 또 와전되어 심지어 파낼 수 없는 역사에까지 실려 있으니, 국가에서 충성을 장려하고 공로에 보답하는 의리로 볼 때 반드시 변별하여 밝히는 도리를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이미 간행한 책은 끝내 바로잡을 수 없기 때문에 《명사》 중에서 이 한 판(板)을 떼어 내서 내가 독실히 잊지 않는 뜻을 붙이고 싶다.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에 대해 비난하는 의논이 아직 많지만, 만약 왜구가 우리 강산을 짓밟은 책임을 수상(首相)이 나라를 그르친 것으로 돌린다면 옳은 것인지 모르겠다. 대체로 풍신수길(豐臣秀吉)은 하늘이 내놓은 모진 도적으로 중국을 넘봤으니 그의 뜻은 우리나라에 있을 뿐만이 아니었다. 비록 장량(張良)이나 진평(陳平)의 지혜가 있더라도 국경에 들어온 뒤에 쳐부수는 것은 가하겠지만 어떻게 바다를 건너오기도 전에 그들의 꾀를 칠 수 있겠는가. 유집(遺集)에 볼만한 것이 꽤 많으니 사람을 논하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다.

이귀(李貴)의 《묵재집(默齋集)》은 변폭(邊幅)을 다듬지 않고 중복을 꺼리지 않았다. 그는 마음에 품은 생각이 있으면 바로 말하고 말을 하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였다. 예를 의논하는 데 있어서 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과 상당히 합치되어 결국 나라의 예를 정할 때에는 상하가 모두 서운해함이 없었다.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고 꺾어도 꺾이지 않으니 국가를 지탱하는 주석(柱石)이라고 하겠다.

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의 전례(典禮)를 논한 차자(箚子)는 견해가 두루 통하고 근거가 정밀하며 그 밖의 여러 차자도 모두 볼만하다. 예를 들어 공무를 처리하는 법과 전랑(銓郞)의 폐단과 관료 제도 등을 논하면서 실제 사정을 지적하여 진술한 것이 시의(時宜)에 적절하였다. 대체로 이것들은 자기가 혼자서 터득한 견해이고 옛사람들이 한 말을 주워 모아 이리저리 꿰맞추거나 주저하고 망설인 행태가 없다. 시무(時務)를 아는 호걸이라고 할 수 있으니 당세의 재상 중에 그와 맞설 사람을 찾기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강화(講和)를 주장한 일에 대해 사람들이 비록 완벽하지 못하다고 책하지만 만약 지천이 없었더라면 종사(宗社)가 어찌 되었을 것인가. 김창협(金昌協)의 ‘송최석정연행시(送崔錫鼎燕行詩)’에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의리 참으로 높으니, 문종(文種)과 범려(范蠡)의 마음 또한 괴로우리.[夷齊義誠高 種蠡心亦苦]”라는 글귀는 청음(淸陰)과 지천의 마음을 잘 말한 것이다. 지천이 독자적인 판단을 내리고 그 허물을 자기가 받은 것은 어떠한 고심과 대의인가. 청음이 심양 객관에서 한 말에서는 더욱 결연한 본심을 볼 수 있다. 황경원(黃景源)의 《배신고(陪臣考)》 중에서 그를 배신의 반열에 둔 것에 대해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왕 형공(王荊公)조차도 《명신록(名臣錄)》 안에 들어 있는데 하물며 지천은 왕 형공 같은 잘못이 없고 더구나 왕 형공에게는 없는 공로까지 있는 사람임에랴.

원임 직각 신 이병모(李秉模)가 을사년에 기록한 것이다.

일찍이 관원을 보내 기우제를 지내던 날 밤 승지와 사관을 불러 하교하기를, “백성을 위해 비가 오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기 그지없다. 비가 오기를 바라는 마음에 한가히 잠을 잘 수 없어, 앉아서 예가 끝나기를 기다려 몸소 기도하는 정성을 담고 싶어 특별히 제신을 불러 이 밤을 길이 기억하려 한다. 그러나 구름은 점점 흩어지고 별들만 밝게 비추고 있으니 비는 끝내 오지 않으려는 것인가. 시인이 이른바, ‘근심하는 마음 타는 듯하다.[憂心如惔]’라는 말이 바로 오늘의 내 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우리나라가 나라를 세워 운영하는 규모가 송(宋) 나라와 비슷하다. 그렇기 때문에 선인들이 풍속과 인물에 대해 많이 견주어 논하였다. 송 나라 재상의 업적으로 논한다면 누가 으뜸이 되는가?” 하니, 제신이 대답하기를, “한기(韓琦)와 범중엄(范仲淹)이 그중 나은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왕조(王朝)와 여이간(呂夷簡)은 어떠한가?” 하니, 이곤수(李崑秀)가 대답하기를, “여몽정(呂蒙正)이 치사(致仕)한 뒤에 낙(洛) 땅에 살았는데, 진종(眞宗)이 그곳에 들러 제자(諸子) 중에 누가 등용할 만한지 물으니 여몽정이 여이간을 추천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진종의 인정을 가장 많이 받았고 오랫동안 국정을 잡았으며, 사신(史臣)은 옛날 대신의 풍도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고 원망을 피하여 권세를 공고히 하는 데 힘썼으니 그의 인물됨은 볼만한 것이 없습니다. 오직 왕조(王朝)가 재상이 되었을 때는 천서(天書) 한 가지 일은 비록 비난을 면할 수 없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지조를 지켰으며 인정할 만한 일은 많고 폄하할 만한 일은 적습니다. 왕조를 여이간과 비교한다면 왕조가 낫다고 봐야 할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구준(寇準) 같은 사람도 당시의 명재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전연(澶淵)의 전쟁에 뭇사람들의 의견을 기를 쓰고 막고서 임금에게 직접 정벌할 것을 권하여 결국 전공을 세우기는 했지만 이것은 다만 요행일 뿐이다. 만약 당시에 만일 명(明) 나라의 토목지변(土木之變) 같은 난을 당했다면 그 죄는 장차 누구에게 돌아갈 것인가. 옛날 대신이 나라를 다스리던 큰 계책으로 볼 때 따져 볼만한 것이 없지 않다.” 하니, 사관 윤행임(尹行恁)이 대답하기를, “당시에 제신은 팔짱만 끼고 아무 계책이 없었는데 오직 구준 한 사람의 능력에 힘입어 강한 적을 소탕했으니 그 공은 참으로 위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천자가 직접 정벌하는 것은 결코 가볍게 할 일은 아니니 가령 옛날의 대신이 그런 경우에 처했다면 과연 어떻게 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송 나라의 정치는 오직 문교(文敎)만을 숭상하여 병력이 역대에 가장 약했다. 그러므로 근본이 비고 고갈되어 오랑캐가 침범하여 소란을 일으키는데도 끝내 태연자약하게 고담준론이나 하며 위태로운 나라를 부지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으니 우리나라가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것이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대체로 문무(文武)를 아울러 사용하는 것은 예로부터 어려운 일이었다. 하나가 성하면 하나가 쇠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 어떻게 하면 관대돈박(寬大敦朴)의 문(文)을 위주로 하면서도 발강강의(發强剛毅)의 무(武)로 구제하며, 문(文)을 하면서도 나약한 데에 이르지 않고 무(武)를 하면서도 무력을 남용하는 데에 이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예악(禮樂)으로 정치를 하면서도 활쏘기와 말 타기를 폐하지 않으며, 농사짓는 여가에 사냥으로 전술을 익히며, 관면(冠冕)과 보불(黼黻)의 거동을 하면서도 활을 당기고 시위를 매기는 것을 보며, 차분히 겸양하는 속에서도 앉고 일어서고 나아가고 물러나는 전술을 익숙히 하는 것, 이것은 선대의 성왕(聖王)이 둘 다 공존시킨 보통 사람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신묘한 조화인 것이다. 내가 비록 덕은 없으나 바라는 것은 여기에 있다. 장차 무슨 수로 이것을 이룩할 수 있겠는가?” 하니, 모두 일어나 대답하기를, “우리 전하께서 이런 뜻을 가지고 계시니 뜻이 해이해지지 않는다면 일이 어찌 따라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얼마 뒤에 5경의 북소리가 울리고 어두운 밤빛이 점점 희미해지며 멀리 아득한 속에 횃불이 반짝거렸다. 이윽고 향례(享禮)가 끝나자 바로 여러 신하들에게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대교(待敎) 신 이곤수가 을사년에 기록한 것이다.

상이 “오랫동안 앉아 있으니 달은 지고 능 주위의 잣나무 어두우니, 어느 곳에서 무릎 꿇고 말씀을 진달해야 할지 모르겠네.[坐久月沈陵柏暗 不知何處跪陳詞]”라는 시구를 외고 이르기를, “이것은 선정 송 문정공(宋文正公)이 청심루(淸心樓)에서 지은 것이다. 기억하건대, 기해년(1779, 정조3)에 내가 영릉(寧陵)을 알현하고 이어 이 누각에 올라 벽에 이 시가 있는 것을 보고 세 번을 읽고서 감탄하며 존경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갑절이나 들었다. 천추(千秋) 뒤에 지사(志士)로 하여금 옷깃을 적시게 하기에 충분하다. 대개 효묘(孝廟)께서 선정에 대해 인정함과 예우함이 과연 어떠하였던가. 은(殷) 나라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을 대우한 것과 촉한(蜀漢)의 소열제(昭烈帝)가 제갈공명(諸葛孔明)을 대우한 것에 비할 수 있을 것이니, 그들만이 아름다움을 독차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당이 이웃에 가까이 있다’는 말은 옛사람이 한 말인데, 여강(驪江) 한쪽에 어찌 선정의 제사를 모실 사당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당시에 이미 지시가 있었는데 아직까지 건물을 짓지 못하였고 서원의 편액도 내리지 못하였으니 어찌 참으로 사문(斯文)의 흠전(欠典)이 되지 않겠는가. 사림(士林)에 명하여 빨리 이루도록 하라.” 하였다.

양사옹(楊嗣翁)의 이름은 찬(纘)이고 호는 자하(紫霞)이니 바로 송(宋) 나라 영종의 비(妃)인 공성황후(恭聖皇后)의 조카 양석(楊石)의 손자이다. 청렴함으로 조신(操身)하여 귀척들이 모두 그를 꺼렸고, 또 음률에 밝아서 일찍이 “금(琴)은 현 하나면 모든 곡조를 다 맞추어 연주할 수 있다.”고 하고, 스스로 200여 곡조를 지었다. 또 광악(廣樂)을 합주할 때 한 글자라도 잘못이 있으면 반드시 알아챘으므로 노숙한 악공들이 모두 감복하고 현척리(賢戚里)라고 일컬었다. 대체로 척리는 굳이 조정에 간여하지 않고 단지 풍류를 좋아하고 은택을 노래할 뿐이므로 척리 중에 두광국(竇廣國)처럼 어진 자라도 오히려 벼슬 맡기를 어려워하였는데 하물며 두광국보다 한 등급 낮은 자임에랴.

일찍이 우리나라 재상의 일을 논하는데, 유성룡(柳成龍)에 이르러서 연신(筵臣) 중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다만 《징비록(懲毖錄)》의 번방(藩邦)을 다시 살렸다는 뜻은 자긍하는 의도가 있으니 이것이 흠이다.”라고 하자, 상이 이르기를, “마땅히 대체를 보아야 하니 어찌 조그만 잘못을 가지고 대뜸 평생을 단정할 수 있겠는가. 옛날 이천(伊川)이, 전배(前輩)의 단점을 말하는 사람을 보면 반드시 ‘너희들은 다만 그의 장점만을 취하라.’고 하였는데, 이 훈계를 명심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검교대교(檢校待敎) 신 윤행임(尹行恁)이 을사년에 기록한 것이다.


 

[주D-001]원우(元祐)의 난 : 송(宋) 나라 원우(元祐) 연간에 일어난 당파 싸움을 가리킨다. 당시에 사마광(司馬光)을 위시하여 문언박(文彦博), 소식(蘇軾), 정이(程頤), 황정견(黃庭堅) 등이 결속하여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반대하였다. 그후 사마광의 구당(舊黨)과 왕안석의 신당(新黨)이 계속해서 대립하였는데, 역사에서는 이 사건을 원우당인(元祐黨人)이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원우의 난이라고 한 것은 우리나라의 당파 싸움을 가리키는 말로, 하서가 당시 홍문관 부수찬으로 있었는데 윤원형(尹元衡)과 윤임(尹任)의 당파 싸움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다가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장성으로 하향해 버린 일을 가리킨다.
[주D-002]묵죽 시(墨竹詩) : 인조(仁祖)가 동궁으로 있을 때 늘 하서 김인후가 숙직하는 곳에 가서 토론을 벌였고, 직접 묵죽을 그려 하사하였는데, 하서가 그것을 시로 읊었다. 《河西全集 行狀》
[주D-003]한 편의 상소 : 《명종실록(明宗實錄)》 제10권에 나온다. 조식이 1555년(명종10) 11월 19일 단성 현감(丹城縣監)에 제수되어 상소를 올렸는데, 그 내용이 예리하면서도 직설적이어서 명종이 심히 화를 냈으나 그의 명성 때문에 차마 처벌하지 못하고 승정원만 나무랐다. 그후에 여러 차례 천거한 뒤에야 겨우 6품직을 내렸고 도성에 불러올려 면대(面對)한 것은 명종 말년인 21년 10월 7일 한 차례뿐이다. 물론 이때 예우를 하기는 했지만 그것도 신하들의 간곡한 권유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정조가 대성인의 국량으로 죄주지 않고 융숭히 예우했다고 한 것은 사실과 어긋나는 점이 있다.
[주D-004]순경(荀卿)의 …… 경우 : 이사(李斯)는 초(楚) 나라 상채(上蔡) 사람으로 순경(荀卿)에게 제왕의 학문을 배웠다. 뒤에 진시황을 섬기면서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실시하여 학통을 끊어 버렸고 끝내는 처형을 당하였다. 정인홍(鄭仁弘)도 남명에게서 유학(儒學)을 배웠으면서 결국은 광해군을 섬겨 권세를 누리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이이첨(李爾瞻)과 함께 잡혀 참형되었다.
[주D-005]창을 …… 뛰어들 듯 : 《후한서(後漢書)》 정현전(鄭玄傳)에 보인다. 당시에 임성(任城)의 하휴(何休)가 공양학(公羊學)을 좋아하여 《공양묵수(公羊墨守)》, 《좌씨고황(左氏膏肓)》, 《곡량폐질(穀梁廢疾)》을 지었는데 정현이 발묵수(發墨守), 침고황(鍼膏肓), 기폐질(起廢疾)을 지었다. 하휴가 보고 탄식하기를, “정강성(鄭康成)은 내 방에 들어와서 내 창을 들고 나를 찌르려는가.”라고 하였다. 어원이 여기에서 시작되어 뒤에는 상대의 이론을 가지고 상대를 논박하는 말로 쓰였다.
[주D-006]동해의 …… 고사리 : 동해의 물은 전국 시대 제(齊) 나라 사람 노중련(魯仲連)을 가리키고, 서산의 고사리는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가리킨다. 노중련은, 진(秦) 나라가 자신의 나라를 제(帝)로 섬길 것을 요구하자, 말하기를, “저 진 나라는 예의를 버리고 공 세우는 것만 으뜸으로 치는 오랑캐이다. 저들이 천하를 차지하고 제(帝)가 된다면 차라리 동해에 빠져 죽을지언정 내 차마 그 백성이 되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史記 卷83》 백이와 숙제는 무왕이 주(紂)를 쳐서 천하를 차지하자 신하로서 임금을 시해하는 것은 인이 아니라고 하며 주 나라 곡식 먹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수양산(首陽山)에 숨어서 고사리를 캐 먹다가 죽었다. 《史記 卷61》 청음이 병자호란 때 청 나라에 굴복하지 않은 일을 노중련과 백이ㆍ숙제의 기상에 비유한 것이다.
[주D-007]《선원문집(仙源文集)》이 …… 쌍절(雙節) : 청음 김상헌의 형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도 학문이 높고 절개가 곧은 학자로 병자호란 때 강화성이 함락되자 화약에 불을 질러 자결하였다. 여기에서는 김상헌이 심양에 잡혀가서도 굽히지 않은 것과 김상용이 강화성에서 자결한 것, 두 가지 일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주D-008]문곡(文谷)의 …… 날렸으니 : 문곡은 김수항(金壽恒)인데 청음 김상헌의 손자이고, 퇴우(退憂)는 김수항의 형인 퇴우당(退憂堂) 김수흥(金壽興)이다. 몽와(夢窩)는 김수항의 장남 김창집(金昌集)이고, 농연(農淵)은 김수항의 차남 농암(農巖) 김창협과 삼남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이며, 노포택(老圃澤)은 사남 노가재(老稼齋) 김창업(金昌業)과 오남 포음(圃陰) 김창즙(金昌緝)과 육남 택재(澤齋) 김창립(金昌立)을 가리킨다. 이들은 4대에 걸쳐 문장과 절의로 명성을 날렸다.
[주D-009]집안에 …… 있으면서 : 그의 아버지 송사련(宋祀連)이 1521년(중종16)에 신사무옥(辛巳誣獄)을 일으켜 권력을 잡았다가 뒤에 무고가 밝혀져 성명을 갈고 시골로 도망갔다. 여기에서 세루(世累)라는 말은 자기 아버지가 죄인이기 때문에 한 말이고, 몸이 천류(賤流)에 있다는 것은 송사련이 원래 안당(安瑭) 집안의 종 신분이었다가 면천되어 벼슬을 하였는데 무고 사건으로 온 집안이 다시 환천(還賤)되어 송익필 역시 사노(私奴)가 되었기 때문에 한 말이다.
[주D-010]병자호란(丙子胡亂) …… 일 : 원문에는 강화(講和)라고만 되어 있어 정묘호란(丁卯胡亂)을 말하는지 병자호란을 말하는지 확실치 않다. 그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모두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뒤에 나오는 ‘종사가 어찌 되었을 것인가’라는 말로 볼 때 병자호란을 가리키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주D-011]문종(文種)과 범려(范蠡) : 두 사람은 전국 시대에 함께 월왕(越王) 구천(句踐)을 섬겨 오(吳) 나라를 멸망시키고 월 나라를 패자(霸者)로 만들었다. 그후 범려는 기미를 알고 신분을 감추어 일신을 보전했지만 문종은 범려의 물러나라는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아 결국 구천에게 살해되었다. 여기에서는 그들의 말로를 인용한 것이 아니라 어려운 상황에서 나라를 구한 공로만을 취한 것이다. 《吳越春秋 句踐伐吳 外傳》
[주D-012]청음(淸陰)과 지천의 마음 : 병자호란 때 청음 김상헌(金尙憲)은 화의(和議)를 극력 반대하여 기초 중인 국서를 찢고 통곡하다가 화의가 성립되자 심양(瀋陽)에 붙들려 가서 3년 동안이나 심문을 받았으나 끝내 굽히지 않아 결국 청 나라 사람들까지도 감동하여 돌려보냈다. 반면 지천 최명길은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仁祖)를 옹립하였고, 병자호란 때에는 국운이 경각에 달렸으므로 명분을 내세우기보다는 일단 화의를 하여 나라부터 구하고 보자고 주장하였다. 여기에서는 백이와 숙제를 청음에 비유하고 문종과 범려를 최명길에 비유하였다.
[주D-013]천서(天書) 한 가지 일 : 《송사(宋史)》 권7 진종기(眞宗紀) 2에 보인다. 대중상부(大中祥符) 춘정월(春正月) 을축일(乙丑日)에 누런 비단이 좌승천문(左承天門) 남쪽 치미(鴟尾) 위로 끌려갔는데, 문을 지키는 졸병이 발견하고 보고하여 유사가 상에게 아뢰자, 상이 군신들을 불러 조원전(朝元殿)에서 절하고 받아서 개봉하고 천서(天書)라고 불렀다. 정묘일(丁卯日)에는 자운(紫雲)이 나타났는데 용봉(龍鳳)처럼 궁전을 덮었다. 이로 인해 무진일(戊辰日)에 대사면을 단행하고 개원(改元)하였다. 여기에서 굳이 이 일을 거론한 것은 허무한 도참 따위를 막는 것이 재상의 임무에해당되는데도 막기는커녕 도리어 동조한 것은 옳지 못함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주D-014]전연(澶淵)의 전쟁 : 송(宋) 나라 진종(眞宗) 원년(1004)에 거란이 대거 쳐들어왔을 때 구준(寇準)이 강력히 주장하여 진종에게 직접 정벌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전연(澶淵)에 행차하여 접전하던 중 요행히 실수로 날아간 화살이 거란의 통군(統軍) 달람(撻覽)의 이마에 맞아 달람이 죽자 성 아래에서 맹약을 하고 전쟁을 마쳤다. 비록 이기기는 했지만 중국의 군주로서 성 아래에서 오랑캐와 맹약을 하는 것 자체가 중국으로서는 수치인 것이고, 만의 하나 이기지 못했다면 토목지변(土木之變)과 같은 꼴을 면치 못했을 것이니 구준의 처사가 꼭 옳다고 볼 수 없다. 《宋史 卷281 寇準列傳》
[주D-015]명(明) 나라의 토목지변(土木之變) : 명 나라 정통(正統) 14년(1449)에 영종(英宗)이 와자군(瓦刺軍)에게 포로가 된 사건을 가리킨다. 당시에 와자의 귀족 야선(也先)이 군대를 거느리고 명 나라를 공격했는데 환관 왕진(王振)이 영종을 협박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직접 정벌하게 했다가 토목보(土木堡)에서 영종은 적의 포로가 되고 왕진은 부하에게 살해된 사건이 있었다.
[주D-016]관대돈박(寬大敦朴)의 …… 무(武) : 관대돈박은 소동파(蘇東坡)의 상매직강서(上梅直講書)에서 동파가 매요신(梅堯臣)을 추켜세우는 말로 매요신의 문장이 관후하고 질박함을 일컫는 말인데, 원래는 관후돈박(寬厚敦朴)으로 되어 있다. 발강강의(發强剛毅)는 《중용장구(中庸章句)》 제31장에 나오는 말로 ‘성인(聖人)의 무(武)’를 가리키는 말이다.
[주D-017]사당이 …… 있다 : 두보(杜甫)의 촉주규오행삼협(蜀主窺吳幸三峽) 시에 “옛 사당의 소나무와 삼나무에는 물학이 둥지를 틀고, 무후(武侯)의 사당은 오랫동안 이웃에 가까이 있네.[古廟松杉巢水鶴 武侯祠屋長鄰近]”라는 구절이 있는데, 오랫동안 사당에 제사가 끊겨 폐허가 되었음을 슬퍼하는 시이다. 여기에서는 문정공 송시열의 사당이 효종(孝宗)의 능이 있는 여주(驪州)에 없고 걸맞은 제사 또한 행해지지 않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주D-018]두광국(竇廣國) : 전한(前漢) 효문제(孝文帝)의 황후인 두태후(竇太后)의 동생으로 평생 부귀하면서도 교만하지 않고 겸양으로 자처하였다. 경제(景帝)가 즉위한 뒤에 장무후(章武侯)에 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