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 조선청백리 /전주최씨 청백리 (최관)

전주최씨 조선청백리 연구 (휘 최유경, 휘 최사의, 휘 최관 )

아베베1 2011. 3. 30. 14:05

 

 

[문과] 효종(孝宗) 2년(1651) 신묘(辛卯) 알성시(謁聖試) 병과(丙科) 2위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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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보(栗甫)
생년 계축(癸丑) 1613년
합격연령 39세
본관 전주(全州)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이력사항]

전력 유학(幼學)
관직 참찬(參贊)
관직 청백리(淸白吏)

[가족사항]

 
[부]   성명 : 최계창(崔繼昌)
[조부]  성명 : 최행(崔行)
[증조부]  성명 : 최철견(崔鐵堅)
[외조부]    성명 : 이정경(李禎慶)
[처부]    성명 : 이오(李澳)   봉작 : 호안군(湖安君)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규장각[奎106])

 

 

조선시대 의정부(議政府)의 정이품(正二品) 관직으로 정원은 1원이다. 우참찬(右參贊)과 함께 서벽(西壁)이라 하였고, 좌참찬을 삼재(三宰)라 하며 우참찬을 사재(四宰)라 하였다. 또 우참찬과 함께 이공(貳公)이라고도 한다.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正一品)는 좌참찬에 제수(除授)되지 않았다.

좌·우찬성, 우참찬과 함께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의 삼의정(三議政)을 보좌하면서 국정에 참여하였다.

1392년(태조 1) 관제제정 때 문하부(門下府) 종일품 직으로 찬성사(贊成事) 2원을 두었다가, 1400년(정종 2)에 의정부를 설립한 뒤 1414년(태종 14) 4월에 이를 동판의정부사(同判議政府事) 2원으로 개정했다. 같은 해 6월 좌참찬·우참찬으로 고쳤으나 다시 1415년 1월 좌참찬을 찬성(贊成)으로, 우참찬을 참찬(參贊)으로 개편했다. 1437년(세종 19) 10월 의정부의 기능을 강화하면서 참찬 1원을 늘려 좌참찬·우참찬으로 나누어 설치했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의정, 참찬 등이 총리대신으로 개칭되고, 1895년(고종 32)에 의정부제가 내각제로 개편되면서 폐지되었다.

 

연려실기술 제26권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순절한 부인들 사로잡힌 부녀는 아래에 부기(附記)하였다.


윤선거(尹宣擧)의 아내 이씨 생원 장백(長白)의 딸 는 갑곶의 수비가 무너진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그때 선거는 위사(衛士)의 항오 속에 있어서 돌아오지 못하였다. 아들 증(拯)이 나이 겨우 9세인데, 손으로 옷과 이불을 정돈하여 조용한 곳에 빈소를 정하고 사방 구석에 돌을 놓고 가운데에는 숯과 재를 덮은 후에 통곡하며 하직하고 나서 계집종의 등에 업혀 나왔다. 뒤에 이민서(李敏叙)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이씨가 조용히 자결한 것은 위급한 때에 죽음을 당한 것에 비해 더욱 가상한 일입니다.” 하였는데, 대개 그 죽음이 가장 먼저이기 때문에 말한 것일 것이다. 정려하였다. 《강화지》
○ 이성구(李聖求)의 아내 권씨 □는 아들 상규의 아내 구씨 및 그 두 딸인 이일상(李一相)과 한오상(韓五相)의 아내와 더불어 함께 목매어 죽었는데, 모두 정려하였다. 《강화지》
○ 도정 권순창(權順昌)의 아내 장씨 경력(經歷) 우한(遇漢)의 딸 는 목매어 죽었고, 권순정(權順正)의 아내 장씨는 그 동생인데 같이 목매어 죽었다. 아울러 정려하였다. 《강화지》
○ 선비 심지담(沈之湛) 및 어머니와 아내와 첩과 자식이 모두 죽었는데, 몸으로 어머니의 시체를 가린 채 죽었다.
○ 이돈오의 아내 김씨 군수 태국(泰國)의 딸 는 마니산(摩尼山) 남쪽에서 병란을 피해 있다가 시어머니 이씨ㆍ동서 이씨와 같이 모두 스스로 목을 찔렀는데, 김씨는 즉사하고 이씨와 동서는 피가 흘러 옷에 가득하니 적병이 버리고 갔다, 돈오는 군기시 낭으로서 성안에 있다가 또한 피살되었다.
○ 헌납 홍명일(洪命一)의 아내 이씨 시림군(始林君)의 딸 는 배를 타고 피난을 가려고 하는데 적병이 이미 가까워오자, 시어머니 황씨가 스스로 목을 찔러 넘어지고, 이씨는 곁에 있다가 그 남편의 생질 박세상(朴世相)의 아내 나씨 □와 서로 껴안고 물에 빠져 죽었다. 그 두 아들 자의(子儀)와 자동(子同)은 나이 겨우 6, 7세였는데 서로 따라 바다에 빠져 죽었다. 아울러 정려하였다. 황씨는 구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죽지 않았다. 《강화지》 ○ 《강도록》에는 “이씨가 먼저 두 아들을 물에 던지고 드디어 스스로 떨어져 죽었다.” 하였다.
○ 이정귀(李廷龜)의 아내 권씨ㆍ□ㆍ여이징(呂爾徵)의 아내 한씨 서평군(西平君) 준겸의 딸 김반(金槃)의 아내 서씨 □ㆍ이소한(李昭漢)의 아내 □씨□ㆍ한흥일의 아내 □씨□ㆍ한준겸(韓浚謙)의 첩 □씨 모자ㆍ이호민(李好閔)의 첩 □씨가 모두 자결하였다.
그 밖에 부인들이 절개를 위하여 죽은 것은 모두 다 기록할 수 없었으며, 천인(賤人)의 아내와 첩도 자결한 사람이 많았다. 적에게 사로잡혀 적진에 이르러 욕을 보지 않고 죽은 자와 바위나 숲 속에 숨었다가 적에게 핍박을 당하여 물에 떨어져 죽은 자들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사람들이 전하기를, “머리 수건이 물에 떠 있는 것이 마치 연못물에 떠 있는 낙엽이 바람을 따라 떠다니는 것 같았다.” 하였다. 《강화지》에 “월사(月沙)ㆍ백주(白洲) 두 부인이라고 한 것은 몹시 와전된 것이다. 월사부인은 슬퍼서 상심하다가 교동(喬桐) 여사(旅舍)에서 죽었다.
○ 김류의(金瑬)의 아내 유씨(柳氏)ㆍ 근(根)의 딸 경징의 아내 박씨ㆍ 효성(孝誠)의 딸 진표(震標)의 아내 정씨 백창(百昌)의 딸 및 김류의 첩 신씨ㆍ경징의 첩 권씨가 같은 날에 목을 매어 죽었는데, 아울러 정려하였다. 《강화지》
○ 그때 경징과 장신의 어머니가 모두 성 안에 있었는데, 두 사람이 모두 자기 어머니를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 그 어머니가 마침내 적중에서 죽었다. 경징의 아들 진표는 그 아내를 다그쳐 자진하게 하고, 그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적병이 이미 성 가까이 왔으니 죽지 않으면 욕을 볼 것입니다.” 하니, 두 부인이 이어서 자결하고 일가 친척의 부인으로서 같이 있던 자들도 모두 죽었는데, 진표는 홀로 죽지 않았다.
○ 일찍이 경징의 아내 박씨가 경징이 자기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자주 간하니, 경징이 노하여 말하기를, “여자가 무엇을 아느냐.” 하자, 박씨는 울면서 말하기를, “나라가 깨치고 집이 망하면 또한 여자라 하여 스스로 모면할 수 있는가.” 하더니, 과연 이때에 이르러 한 집안의 부녀가 모두 목을 매어 죽었다. 혹자는, “진표가 다그쳐 죽게 하였다.”고 일컬었다. 대개 인심이 경징에 대한 분노가 쌓여서 그 어머니와 아내의 절개까지 아울러 깎아 없애려고 한 것일 뿐이다. 정씨는 백창의 딸이니, 그 친정의 혈통을 증험해 보더라도 남에게 닥달을 받아 죽을 사람은 더욱이 아니다. 《강화지》
○ 장신의 어머니 □씨 □ 역시 죽었다. 처음에 강을 건너는 날을 당하여 내관(內官)이 봉림대군에게 고하기를, “장 판서의 대부인이 이곳에 있으니 어찌해야 합니까?” 하니, 대군이 말하기를, “저(장신을 말한다)가 어머니를 모시지 않았는데 나 역시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마침내 얼고 굶주리다가 강변에서 죽었다.
○ 정선흥(鄭善興)의 아내 권씨 염(淰)의 딸 가 청병이 이미 닥쳐온 것을 보고 달려서 회은군(懷恩君) 앞에 나아가 말하기를, “영감은 내 아버지와 절친하니, 나를 살려주소서.” 하니, 회은군이 말하기를, “내가 장차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선흥이 눈을 부릅뜨고 꾸짖기를, “빨리 죽는 것이 옳다.” 하였다. 권씨가 칼을 가지고 문으로 들어가니, 회은군이 선흥에게 가서 보라고 하였는데, 가보니 죽어 있었다. 선흥(善興)은 백창(百昌)의 아들이다.
○ 어떤 선비의 아내가 청병이 강을 건넌다는 말을 듣고, 그 계집종에게 말하기를, “적이 죽은 사람을 보면 옷을 모두 벗겨 간다 하니, 내가 죽은 뒤에 급히 불을 가져다가 태워서 적의 손이 시체를 가까이하지 말도록 하라.” 하고, 드디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 역관(譯官) 정신남(鄭愼男)이 삼가고 조심하여 행검(行檢)이 있더니, 그때 가족을 이끌고 강화도에 들어갔다. 성이 함락됨에 미쳐 사람들이 다투어 바다에 떴다. 신남의 어린 딸이 울부짖으며 배를 부르니, 배가 이미 언덕을 떠났으므로 사공이 손을 잡아당겨 올리려고 하였다. 소녀가 말하기를, “손을 더럽히고 살기보다는 죽는 것이 낫다.” 하고 드디어 바다에 빠져 죽었다. 정치화(鄭致和)가 목격하고 조정에 아뢰니, 정려를 명하였다. 《통문관지(通文館志)》
○ 학생 이호선(李好善)의 아내 한씨는 토굴 안에 숨어 있었는데, 적병이 불을 질러도 나오지 않고 타 죽었다. 족친위(族親衛) 심정함(沈廷瑊)의 아내 □도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무인년(1638)에 정려하였다. 이하는 모두 강화 사람이며 《강화지》에서 나왔다.
○ 무거(武擧) 최필(崔弼)의 아내 정씨와 무거 이중언(李仲言)의 아내 양씨는 젊은 남자들이 모두 종군하자 그 시어머니를 지키고 떠나지 않다가 모두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참봉 황식(黃寔)의 아내 구씨ㆍ충의(忠義) 변경(卞慶)의 아내 이씨ㆍ이사성(李嗣聖)의 아내 이씨ㆍ학생 하함(河艦)의 아내 이씨ㆍ김계문(金繼門)의 아내 박씨ㆍ황탁(黃) 대곤(大坤)의 아들 의 아내 최씨ㆍ보인(保人) 한경문(韓景文)의 아내ㆍ무거 한충남(韓忠男)의 아내 □ㆍ구혈(具翓)의 아내 김씨ㆍ사과 남궁훈(南宮薰)의 아내 문씨ㆍ학생 안선도(安善道)의 아내 서씨ㆍ보인(保人) 조헌민(曺獻民)의 아내 예환(禮環)ㆍ사노(私奴) 김희천(金希天)의 아내 대숙(大淑)ㆍ내비(內婢) 고온개(古溫介)ㆍ무학(武學) 윤득립(尹得立)의 아내 염씨(廉氏)ㆍ사비(私婢) 애환(愛還)ㆍ사노 검동(儉同)의 아내 분개(分介)ㆍ무학 반일량(潘日良)의 아내 차씨(車氏)ㆍ수군 홍청운(洪淸云)의 아내ㆍ양녀(良女) 말덕(唜德)ㆍ진사 이성진(李成震)의 아내 □ㆍ주부 안응성(安應星)의 아내 이씨ㆍ첨지 최덕남(崔德男)의 아내 박씨는 모두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으며, 도사 김수(金嬃)의 아내 □는 언덕에서 떨어져 죽었는데, 아울러 경진년(1640)에 정려하였다.
○ 학생 송순(宋淳)의 아내 유씨는 언덕에서 떨어져 죽었는데, 신사년(1641)에 정려하였다.
○ 무학 이춘남(李春男)의 아내 정씨는 가위로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는데, 정려하였다.
○ 학생 유인립(劉仁立)의 아내 안씨는 적병이 갑자기 이르러 끌고 가려고 하였으나 끌고 갈 수 없자 서로 다투어 쏘아 죽였는데, 몸의 살이 온전한 곳이 없었으나 꼿꼿하게 선 채 끝내 넘어지지 않자 적병이 괴상하게 여겨 버리고 가버렸다. 이상은 모두 《강화지》에 있다.
○ 선비 집안의 부녀 중에 사로잡힌 사람이 하나가 아닌데, 이민구의 아내와 두 며느리의 일은 사람들이 모두 침을 뱉으며 욕을 하였다. 민구가 자기의 아내가 가산(嘉山)에서 죽은 것을 절개를 위해 죽었다 하여 묘지문(墓誌文)을 지어 훌륭함을 칭찬하고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에게 글씨를 청하니,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다.
○ 민구의 아내는 윤휘(尹暉)의 딸로, 오랑캐 병사에게 사로잡혀서 그 손자와 여종을 데리고 따라갔는데 서울을 지나가다가 길거리에서 민구의 형 성구(聖求)를 만났으나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없었다. 그해 여름에 성구가 심양(瀋陽)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왔는데, 민구가 칭하기를, “그 형이 심양에서 그 여종과 손자를 만났는데, 여종이 말하기를, ‘주모(主母)가 자산(慈山)에 이르러 적을 꾸짖고 죽었으므로 제가 관을 얻어다 염습하여 아무 곳에 임시로 매장하였다.’ 하므로, 그 여종의 말에 의하여 찾아가서 물으니 과연 관에 넣은 시체가 있는데 뒤늦게 온 적병이 관을 들춰내 옷을 가져가고 시체는 버리고 갔더라.” 하였다. 그 사위 신승(申昇)이 상여를 호송하여 원주(原州)에 반장(返葬)하고, 또 심양에 잡혀갔던 그 손자를 속바치고 돌아오게 하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의심하였다. 뒤에 들으니, 이기축(李起築)이 무고 별장(武庫別將)으로서 동궁을 호위하여 압록강을 건널 때에 민구의 아내가 적을 따라 심양으로 들어가는 것을 눈으로 보았다고 한다.
○ 일찍이 병자년 여름에 여러 경대부(卿大夫)의 부녀들이 서평군(西平君)의 집 잔치에 많이 모였는데, 그때 청 나라와 우리나라의 불화가 날로 심해져 민심이 흉흉하고 두려워하였다. 어떤 사람이 이에 대해 언급하면서 눈물을 흘리니, 민구의 아내가 몸을 빼어 자리에서 나와 말하기를, “죽기를 결심할 뿐이다. 이런 일을 어찌 헤아릴 여지가 있는가.” 하였다. 김류(金瑬)의 아내 유씨(柳氏)가 은근히 비웃기를, “말은 쉽게 할 것이 아니다.” 하니, 민구의 아내가 얼굴빛이 붉으락푸르락해지고 말 소리가 빨라지므로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시선을 모으고 쳐다보았었다. 이미 성취함에 미쳐 꼿꼿한 체하던 자가 과연 어떻게 되었는가. 《강화지》
○ 회은군(懷恩君) 덕인(德仁)의 딸이 적병에게 사로잡혔는데, 적병이 말하기를, “듣건대, 이 여자는 국왕의 근족(近族)의 딸이라 하니, 의당 황제에게 바쳐야 한다.” 하고, 즉시 시비(侍婢)를 정하여 호행(護行)하였다. 청 나라 임금에게 바치니 제 6황후로 삼았다. 그 후 경진년에 그 자에게 공신 피패(皮牌)를 주었으니, 황후를 많이 책립한 자를 우대하여 공신 호(號)를 주는 것은 대개 호인(胡人)의 풍속이었다.
○ 윤탄(尹坦)의 형제가 어머니를 모시고 강화도로 향하여 가다가 윤탄이 어머니를 아우에게 맡긴 채 아내를 데리고 달아났는데, 어머니와 아우는 사로잡혀서 굶어 죽었다. 《조야첨재(朝野僉載)》
○ 사대부의 아내와 첩으로서 적병에게 끌려갔다가 속환(贖還)된 자들은 예전처럼 함께 살지 않음이 없었다. 신풍 부원군(新豐府院君) 장유(張維)가 홀로 생각하기를 ‘절개를 잃은 여자와 부부가 되어서 선조의 제사를 받들 수 없다.’ 하여, 며느리가 속환된 후에 상소하여 아들을 다시 장가들이기를 청하였다. 영상 최명길(崔鳴吉)이 회계(回啓)하기를, “이와 같이 하면 반드시 원한을 품는 부녀들이 많을 것이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하니, 이에 방계(防啓)하였다. 장유가 죽은 후에 부인이 다시 임금에게 글을 올리니, 임금이 명하기를, “다만 이 사람에게만 허락하되 규례로 삼지는 말라.” 하였다.
○ 임진왜란에 사대부의 부녀들이 적진에 잡혀갔다가 살아서 돌아온 자를 시댁에서 이혼하고 개취(改娶)할 것을 청하니, 조정의 의논이 일치하지 않았다. 선조가 하교하기를, “이것은 음탕한 행동으로 절개를 잃은 데 견줄 것은 아니니, 버려서는 안 된다.” 하여, 허락하지 않는다고 명하였다. 이때에 와서 청 나라로부터 속환된 자에 대하여 조정의 의논이 또다시 장가드는 것을 허락하는 것은 괜찮지만 인연을 끊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는 의논이 있으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선조(先朝)에서 정한 규례에 따라 시행하라.” 하였다. 《조야첨재》
○ 최계창(崔繼昌)의 후처(後妻) 권씨(權氏) 석주(石洲) 필(韠)의 딸 가 강화도에서 개성부에까지 끌려갔다가 속황되었는데, 그후 권씨의 아들 최선(崔宣)이 숙종 정사년(1677)에 징을 쳐서 그 형 최관(崔寬) 전처의 아들 이 그 어머니를 사당에서 출향(黜享)했다고 호소하였다. 《술이(述而)》

연려실기술 제31권
 현종조 고사본말(顯宗朝故事本末)
장자를 위한 《의례(儀禮)》의 <상복도(喪服圖)>


○ 아버지가 장자를 위하여 3년복을 입는다. 주(註). 적자(嫡子)라고 말하지 않고 장자라고 한 것은 상하를 통하기 때문이다. 석(釋). 적자의 칭호는 대부와 사(士)를 근거하여 말하는 것이요, 천자ㆍ제후에는 통용되지 않는다. 태자(太子)라고 말하면 역시 상하에 통하지 않는다. 또 적사(嫡嗣)를 세우되 맏이로 한다고 말하였다. 주(註). 적처의 소생은 모두 적자라고 이름한다. 첫째 아들이 죽으면 적처 소생의 둘째 아들을 대신 세우고 역시 장자라 이름한다.
○ 전(傳)에 말하기를, “어째서 부모는 장자를 위하여 3년복을 입는 것인가.” 하였다.
○ 조상을 바로 계승하기 때문이다[正體於上]. 소(疏). 그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적자와 적자로 서로 윗대에서 계승하고, 자신은 또 적자로 뒤에서 계승하는 것이다.
○ 또 장차 가계를 전할 바이기 때문이다. 소.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자신이 종묘의 주인이 된다. 따라서 부모는 그 장자가 정체(正體)ㆍ전중(傳重)의 두 가지가 있은 후에야 3년복을 입게 된다.
○ 서자(庶子). 소. 서자는 아버지 후사(後嗣)된 자의 아우이다. 서자라고 말한 것은 장자와 멀리 구별하기 위하여서이다. 석. 서자는 원래 첩자(妾子)의 칭호요, 적처 소생의 둘째 아들 이하는 이것이 중자(衆子)이다. 지금 여기서 같이 서자라고 이름하였는데, 이것은 장자와 멀리 구별하기 위하여 첩자와 칭호를 같이 한 것이다.
○ 장자를 위하여 부모가 3년복을 입을 수 없는 것은 그 장자가 조상을 계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계승하지 못함을 말하는 것이다.
○ 주(註). 비록 승중(承重)을 하여도 부모가 그 아들을 위하여 3년복을 입을 수 없는 경우가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정체(正體)이면서도 전중(傳重)을 하지 못한 것이다. 주. 적자가 폐질(癈疾)과 다른 사유가 있거나 또 죽었는데, 아들이 없어서 가계를 이어받지 못한 것이다. ○ 신은 생각하기를, 아버지와 아들이 체(體 직접 혈통)가 되고 적자와 적손은 정(正)이 되고, 서자와 서손은 부정(不正)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전중(傳重)을 하였지마는 정(正)ㆍ체(體)가 아닌 것이니, 서손을 세워서 후사(後嗣)를 삼은 것이 이것이다.
셋째는, 체이지마는 정이 아닌 것이니, 서자를 세워서 후사를 삼은 것이 이것이다. 신은 생각하기를, 소주(疏註)에 ‘적처의 소생은 모두 적자라고 하는데 제1자가 죽으면 적처 소생의 제2자를 대신 세우고 역시 장자라고 이름한다.’ 하였는데,그 장자에 대한 상복 제도는 이미 참최(斬衰) 3년 조에 있으니 다시, ‘체이지마는 정이 아니라’고 하여, ‘비록 승중을 하여도 부모가 그 아들을 위하여 3년복을 입을 수 없다’는 경우에 넣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서자를 세워서 후사를 삼는다.’는 그 서자는, 적처 소생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고 하겠습니다.
넷째는, 정이지마는 체가 아닌 것이니, 적손(嫡孫)을 세워서 후사를 삼은 것이 이것입니다. 신은 생각하기를, 위의 네 가지 경우에 있어서 적자ㆍ서손ㆍ서자ㆍ적손을 서로 대조하여 나누어서 말한 것으로서 적자ㆍ서자에 대한 분별이 이와 같으니, 적처 소생의 첫째 아들이 죽었을 때에 적처 소생의 둘째 아들을 대신 세워서 장자로 이름한 장자는 아버지가 장자를 위하여 3년복을 입을 수 없는 서자와는 같은 것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장자와 멀리 구별하기 위하여 첩자의 서자와 이름을 같이 한 것뿐이라 하겠습니다.
○ 어머니가 장자를 위하여 자최(齊衰) 3년복을 입는다. 소. 어머니가 장자를 위하여 자최복을 입는다. 어머니가 아들을 위하여 복을 입는 것이, 아들이 자기를 위하여 입는 복보다 지나게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어머니는 아들을 위하여 자최 3년복을 입는 것이다.부모가 장자를 위하여 복을 입는 것은 장자는 원래 선조(先祖)의 계승이 되기 때문이므로 강등(降等)하여 복을 입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있다고 하여 어머니가 눌려서 강등하여 기년복을 입을 수는 없다. 이것은 어머니는 장자를 위하여 복을 입는 데에 있어서, 그 남편이 있고 없는 데에 관계하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 전(傳)에 말하기를, “어머니는 아들을 위하여 어찌하여 3년복을 입는 것인가.” 하였다.
○ 아버지가 강복(降服 아들에 대하여 기년복을 입지 않는 것)하지 않는 것이니, 어머니도 감히 강복하여 기년복을 입을 수 없다. 주. 자기의 지위가 높다고 하여 감히,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바로 계승한 장자에 대하여서 강복하여 입을 수 없다는 것이다.
○ 기년복. 주(註). 임금과 대부는 그 지위가 높기 때문에 강등하여 기년복을 입는다. 소(疏). 천자와 제후가 정통(正統)의 친족인 후(后)ㆍ부인(夫人)과 장자ㆍ장자의 처 등을 위해서는 강복하지 않는다. 다른 친족에는 상복을 입지 않는다. 신은 생각하기를, 경(經)에서 이미 ‘장자를 위하여서는 3년복을 입는다.’ 하였고,기복소(朞服疏)에서는 또 ‘천자ㆍ제후가 정통의 친족인 후ㆍ부인과 장자ㆍ장자의 처 등을 위하여서는 복을 강등하여 입지 않는다.’ 하였으니 부모가 당연히 3년복을 입어야 할 장자에 대한 복제(服制)는 마땅히 기년복 조에 들어 있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장자를 위하여 부모가 마땅히 기년복을 입는다는 것은, 제 생각으로는 ‘승중을 하여도 부모가 3년복을 입을 수 없다.’는 자에 한해서만 가합니다. 때문에 말하기를 ‘장자는 한 가지이지마는 적사(嫡嗣)를 세우되 맏이로서 한 경우면 부모가 그 아들을 위하여 3년복을 입고 서자를 세워서 후사(後嗣)를 삼은 경우에는 부모가 그 서자를 위하여 기년복을 입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허목이 올린 상복도(喪服圖) 및 연복(練服)을 고치는 절차를 가지고 가서 우찬성 송시열에게 의논하게 하였는데, 송시열은 의논하여 아뢰기를, “상ㆍ하를 통한다는 것은 대부나 사(士)의 아들이 가계를 계승하여 제사를 주관하는 일과, 천자ㆍ제후가 왕통을 이어서 나라를 맡는 것이 다름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긴요한 대목입니다.이 주소의 내용이 이렇게 분명한 데에도, 지금 의논하는 이들은 오히려 나라와 사가(私家)의 경우가 같지 않다고 말을 하니, 신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서자를 세워서 후사를 삼는다.’는 조목이 곧 이것입니다. 지금 논쟁하는 요점이 바로 이 한 구절에 있습니다. 아래 위의 소설(疏說)로써 본다면, ‘아버지가 장자를 위하여서’라는 조에, 이미 ‘둘째 아들을 세우고 역시 장자라 일컫는다.’하였으며,그 아래서 또 ‘둘째 아들을 서자라 일컫는다.’ 하였고, 그 아래에서는 또 ‘체(體)이지마는 정(正)이 아니라는 것은 서자가 후사로 된 것이 이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 세 설은 한 사람이 기록한 것이요, 같은 때에 말한 것으로서 조리가 서로 통하는 것이니, 이것을 주장하여서 저것을 공격하며, 저것을 옳다 하고 이것을 그르다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정히 반복하고 참고하여 그 상ㆍ하의 글뜻을 서로 틀림이 없게 함이 옳겠습니다.
신이 청컨대, 다시 어리석은 의견으로 한 가지씩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른바 ‘둘째 아들을 역시 장자라 부르고 부모가 그 장자를 위하여 참최복을 입는다.’는 것은 아마도 첫째 아들이 어릴 때에 죽었거나, 혹은 폐질로 인하여서 그 아버지가 3년복을 입지 않은 연후에 둘째 아들을 세우면 역시 장자라 일컬으며, 그 아들이 죽으면 3년복을 입는다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만일 그 첫째 아들이 마땅히 가계를 전해받아야 하는데, 죽어서 그 아버지가 3년복을 하였다면, 비록 둘째 아들을 세워서 정통을 계승하였다 하더라도 역시 서자라고 하는 것으로서 3년복을 할 수 없다는 것일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아래 위에 보이는 소설(疏說)이 서로 틀리는 것 같지 않습니다.
○ 이른바 ‘둘째 아들을 같이 서자로 이름한다’는 것은, 둘째 아들은 첩자와 구별하기 위하여서는 적자라 하고, 장자와 구별하기 위하여서는 서자라고 하는 것이니, 그 경우를 따라서 칭호를 다르게 하는 것이 무방할 것입니다. 다만 서자의 칭호가 이미 첩자 및 차적자의 통칭이라고 한다면, 아래의 이른바 체(體)이지마는 정(正)이 아닌 서자는 첩자만이 되고 차적자는 들지 않는다는 뜻이 보이지 않습니다.이른바 ‘체이지마는 정이 아닌 경우는 서자가 후사된 것이다.’ 하였는데, 이 서자는 위에 이른 바와 일맥의 연결이 있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첩자만을 말하는 것이요, 차적자는 여기에 관계 없는 것이라면 가씨(賈氏)가 여기에서 반드시 한 번 말을 바꾸어서 변명이 있었을 것이요, 위의 것과 섞어서 한 대목을 만들어서 후인의 의혹을 일으키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깊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기복소(朞服疏)에 말하기를, ‘임금의 적실(嫡室) 부인의 둘째 아들 이하 및 첩자를 모두 서자라고 이름한다.’ 하였으며,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무릇 정체(正體)로서 위에 있는 자를 하정(下正)이라 하는데, 오히려 서(庶)가 된다.’ 하였습니다. 정체는 조부의 적(嫡)을 말함이요, 하정은 아버지의 적을 말함인데, 비록 정(正)으로서 아버지의 적자가 되었지만, 조부에게는 오히려 서(庶)가 된다는 것입니다.이른바, 정체로서 위에 있다는 것은, 적자로서 아버지의 뒤를 계승한다는 것이요, 이른바 하정이라는 것은, 차적(次嫡)의 적자인 것입니다. 어찌하여 정(正)이라 하고, 또 오히려 서(庶)라고 한 것인가. 적자이기 때문에 정이라 하고 차자이기 때문에 오히려 서가 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적자이지마는, 차자이기 때문에 그 아들에게 있어서도 오히려 서(庶)로써 칭호하는데, 하물며, 그 자신을 서로서 칭호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기복소 및 주자의 설로 미루어 본다면, 여기에 이른바, 서자로서 후사가 된다는 것은 반드시 첩자만을 가리키는 것이요, 차적자는 들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신으로서는 실로 깊이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대개 확실한 증거를 보지 못하고서 갑자기 이렇다고 의논을 내세우는 것은 혹시라도 소가(疏家)의 본의가 아닐 것인지 모르는 일이니, 이것은 일에 있어서 혹시라도 실수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의심은 의심대로 전하고 모르는 것은 빼놓는다는 뜻에도 어떨까 하옵니다. 때문에 신은 끝내 감히 단정하여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 임금이 마침내 기년복의 의논을 따랐다.
○ 전 참의 윤선도가 상소하였는데, 대략에 “지금 안위(安危)의 기미가 조석간에 닥쳤으므로 신이 노 나라 과부의 걱정과 기인(杞人)의 두려움을 참지 못하여 감히 망령되고 어리석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신의 혼자 소견으로는, 삼대(三代)의 길ㆍ흉에 관한 예법은 모두 성인이 천리에 근거를 두어 마련한 것인데, 후세 예문가(禮文家)들의 수다한 의논이 모여서 송사하는 것같이 되는 것은, 그것이 천리를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인가 합니다.
아아, 성인이 상례에 있어서 오복(五服 3년복ㆍ기년복ㆍ대공ㆍ소공ㆍ시마복)의 제도를 마련한 것이 어찌 우연히 한 일이겠습니까. 그 사람에게 대한 친ㆍ소ㆍ후ㆍ박을 이 오복의 제도로 분간하는 것이며, 예절의 경ㆍ중ㆍ대ㆍ소를 이 오복의 제도로 정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제도를 가정에 쓰면 부자간의 윤리가 여기에 의하여 밝아지고, 나라에 쓰면 군ㆍ신간의 분별이 여기에 의하여 엄하여지는 것입니다.하늘과 땅의 높고 낮음과, 종묘 사직이 유지하고 망하는 것이 여기에 달리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것은 막대하고 막중한 것으로서 털끝만치라도 틀리게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계통을 이은 아들은 할아버지에게 체(體)가 되는 것이니, 아버지가 적자의 상사에 있어서 그 복제를 반드시 참최 3년복으로 하는 것은 아들을 위하는 것이 아니고, 그가 조종(祖宗)의 정통을 계승함을 위하여서입니다.사가(私家)에서도 오히려 이러한데, 하물며 국가에 있어서이겠습니까. 먼 옛날, 태평한 세상에서도 오히려 이러하였는데, 하물며 말세의 위태로운 시기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신민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불평을 품은 무리들의 틈을 노리는 것을 막아 버리는 일이 참으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효종대왕의 상사에 있어서 대왕대비께서 입으실 복제를 《예경(禮經)》에서 상고하오면, 성인이 한 일은 언제나 계통을 이은 아들은 할아버지에게 체(體)가 된다는 대의에 있으며 성인이 예법을 제정하는 데 있어서도 그 실은 천리에 근원을 두고 종통을 바로한다는 대의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지금 효종대왕의 상사에 있어서 대왕대비께서 당연히 자최 3년복을 입어야 할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당초에 예관이 복제의주(服制儀註)에 기년복으로 정한다고 할 때에 조야에서 모두, 그렇게 하는 의사가 어디에 있는지를 깨닫지 못하였으며, 국가의 종통이 이 일로 하여 흐려지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대통(大統)을 밝히고 민심을 안정시키며 종묘 사직을 굳건히 하는 예법이겠습니까.
아아, 허목의 말은 예법의 대원칙을 의논한 것만이 아니라, 실로 나라를 위하는 지극한 생각입니다. 전하께서 다시 송시열에게 하문하신 것은, 유신(儒臣)을 우대하는 의미에서였습니다.시열이 마땅히 전날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이 기대승(奇大升)의 말을 듣고, 자기의 잘못을 놀라 깨달아서 그 전의 의견을 고친 것처럼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시열은 도리어 잘못된 것을 그대로 우기고 허물을 꾸미려 하여, 예경의 여러 문자를 주워 모아 자기의 의견에 덧붙여서 번거로운 말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예경에서, 아버지가 아들에 대하여 참최 3년복을 입게 한 의미는, 그것이 할아버지에게 체(體)가 되는 데에 있고, 성인이 이 예법을 엄히 하게 한 것은 그것이 종묘를 이어받는 데에 있다는 뜻에 있는 것인데 시열은 끝까지 그 뜻을 알아 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였으니, 신은 실로 그 의사를 알 수 없습니다.시열은 소설(疏說)의 ‘차장자를 세워서 장자를 삼고 역시 3년복을 입는다.’는 글을 인용하고서도, 그 아래에서는 또 말하기를, ‘지금 반드시 차장자는 서자가 되지 않는다는 명문(明文)을 얻은 연후에야, 허목의 말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으니, 그 말이야말로 참으로 어불성설입니다.
지금 우리 효종대왕은 인조의 차장자입니다. 그리고 소설(疏說)에서 이미, 차장자를 세워도 부모는 그 장자를 위하여 3년복을 입는다는 명문이 있으니, 대왕대비께서 효종대왕에 대하여 자최 3년의 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은 실로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딱 잘라 행할 것뿐이지, 어찌 굳이 다시 반드시 차장자는 서자가 되지 않는다는 명문을 찾아내라고 허목에게 힐문할 것이 있겠습니까.
시열이 말하기를 ‘문왕이 나라를 전하는 데에서는 백읍고(伯邑考)를 버리고 무왕을 세웠는데, 주공이 예법을 만들 때에 반드시 장자ㆍ서자의 분변에 힘썼다.’고 하였습니다.신은 생각하기를, 문왕의 백읍고를 버리고 무왕을 세운 일은 성인의 큰 권도(權道)요, 주공의 장자ㆍ서자를 분별하여 만든 예법은 성인이 원칙을 세우는 떳떳한 법으로서, 이것은 두 성인이 때와 경우를 따라 적당히 한 것이었습니다. 주공이 어찌 백읍고를 위하여 이 예문을 제작하였겠습니까. 그런데 어찌 이 예문만을 고집하여 효종이 적장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으며, 대왕대비께서 3년복상을 하지 않을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시열의 의논에, 장자가 성인이 되어서 죽은 자라는 말을 두 번 세 번 말하면서 그 긴요하게 단정하는 말에서는 ‘장자가 성인으로 죽었는데도 차장자를 다 장자로 이름하고서 참최복을 한다면 적통이 엄하지 못하다.’ 하였으니, 그 말은 반드시 중점을 장자가 성인으로서 죽은 데에 돌리려 하면서, 그 의사는 ‘장자가 성인으로서 죽은 경우에는 적통이 여기에 있으니, 차장자는 비록 원래 동모 형제이며, 비록 이미 할아버지를 이어 받들어 체가 되었으며, 비록 왕위에 나아가서 종묘를 계승하였다 하더라도 끝내 적통이 될 수 없다.’ 하는 것이니, 이 말이 역시 이치에 틀리지 않습니까.
적(嫡)이라 하는 것은, 형제 중에서 그 이상의 맏이나 또는 대등(對等)하는 사람이 없음을 말하는 칭호요, 통(統)이라는 것은, 왕위를 받아서 모든 백성의 위에서 위로 계승하고 아래로 전하는 것입니다. 차장자를 세워서 후사를 삼았다고 하여 어찌 별도로 다시 적통이 다른 곳에 있는 것을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차장자로서 아버지의 영을 받고 천명을 받아서 조상을 계승하고, 제사를 주관한 후에도 적통이 될 수 없으며, 적통은 오히려 다른 사람(먼저 죽은 장자)에게 있다면, 이것은 가짜 세자이겠습니까. 섭정 황제이겠습니까. 또 차장자로서 대신 선 사람은 감히, 이미 죽은 장자의 자손에게 임금 노릇을 하지 못하고, 이미 죽은 장자의 자손은 역시 차장자로서 대신 선 사람에게는 신하 노릇을 하지 않을 것이겠습니까.
시열이 만일 그 실언을 깨닫는다면, 반드시 또 발뺌하는 말로 해명하여 말하기를, ‘내가 쓴 적통이 엄하지 못하다[嫡統不嚴]는 문구는 효종이 적통이 아니란 말이 아니요 이것이 다만 만대의 장유(長幼)의 차례를 엄히 하기 위하여 말한 것이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적통이 엄하지 않게 된다.’는 문구는 상ㆍ하의 문세로 보아서 그렇지도 않은 것이니, 누가 그것을 믿겠습니까.
아아, 고공이 비록 계력(季歷)을 세웠더라도 태백(泰伯)이 후손이 있었다면, 고공의 적통이 오히려 태백의 후손에게 있을 것이겠습니까. 그렇다면 한 나라의 인심이 안정되지 못할 것이며, 계력의 후손이 어찌 보전할 것이겠습니까. 문왕이 비록 무왕을 세웠다 하더라도, 백읍고가 후손이 있었다면 문왕의 적통이 오히려 백읍고의 후손에게 있을 것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천하의 인심이 안정되지 않을 것이며, 무왕의 자손이 어찌 보전할 것이겠습니까.
시열은 종통은 종묘 사직을 계승한 임금에게 돌리고, 적통은 이미 죽은 장자에게 돌리려 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적통ㆍ종통이 갈라져서 둘이 되는 것이니, 또 어찌 이런 이치가 있을 것이겠습니까. 또 시열 자신도 두 정통이 없다는 말을 하였으니, 시열의 소견과 지식이 어찌 이렇게까지 어두운 데 이른 것입니까. 그렇다면, 세 번이나 적자가 성인으로 죽은 경우를 말하고, 또 적통이 엄하지 못하게 된다는 말을 하였으니, 신은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시열은 또 말하기를, ‘아버지 된 이가 한 몸의 위에 참최복이 너무 많지 않은가.’고 하면서, 세종의 8대군으로서 말을 만들어 증거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세종이 비록 오래 사시고 8대군이 비록 모두 단명하여 일찍 죽는다 하더라도 어찌 8대군이 각각 3년씩 섰다가 죽어서 아버지인 세종이 아들을 위하여 아홉 3년의 복을 입게 될 것이겠습니까. 비록 소진(蘇秦)의 궤변이라 하더라도 감히 이런 말을 하여 다른 사람의 말을 막지는 못할 것입니다.
송준길의 헌의와 차자에서 말한 것도 이러한 송시열의 비유와 한가지로서 반드시 있을 수 없는 일인데, 두 사람의 말이 서로 이렇게 들어맞으니 이상한 일입니다. 시열의 의논에서 또 말하기를, ‘대왕대비가 소현세자의 상사에서 이미 인조 대왕과 더불어 같이 장자에 대한 복을 입었으니, 그 의리를 어찌 오늘에 와서 변할 수 있으랴.’ 하였습니다.시열이 말하는 바 인조와 대왕대비께서 소현세자를 위하여 입었다는 그 장자의 복이라는 것은 어떤 복인지, 그때에 인조와 대왕대비는 소현세자를 위하여 과연 참최 3년의 복을 입었는지, 그것이 사실이라면 지금도 마땅히 일정하게 소설(疏說)의 ‘차장자를 세워 후사를 삼았으면 부모는 그 아들을 위하여 3년복을 입는다.’ 는 원칙에 의거하여 대왕대비의 복제는 3년복으로 정하여야 하겠습니다.그때에 혹시라도 기년복으로 시행하였다면, 이것은 예관이 실례한 소치이든가, 혹은 인조께서 무슨 의사가 그 사이에 있어서 한 일일 것입니다. 이것으로나 저것으로나 금일 효종대왕의 복제는, 대왕대비께서 자최 3년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부왕(父王)이 이미 서자를 위하여서 3년복을 입지 않은 것이니, 비록 이미 왕통을 계승하였다 하더라도 모후(母后)가 어찌 감히 혼자서 3년복을 입을 것이냐.’ 한다면 이것은 더욱 무리한 말이요,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대저 태자의 태(太) 자와 세자의 세(世) 자는 역시 적(嫡) 자ㆍ장(長) 자의 뜻이면서 더욱 그 이름을 별도로 하여 드러내고 특별히 한 것입니다. 그것은 종묘의 제사를 주관하고, 대(代)를 이으며, 할아버지에게 체(體)가 된다는 뜻이 적ㆍ장의 두 글자보다 더 현저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미 세자가 되었는데도 장자라고 하지 않는다면 이런 이치가 어디 있겠습니까.
소설에는 차장자를 세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 세울 때를 당하여서는 차장자라고 칭하지마는, 이미 세운 후에는 그 의리가 당연히 바로 장자라고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세자가 되면 장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가 죽음에 있어서는 참최복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왕통을 계승하여 임금으로 있은 후에도 장자라고 하지 않고, 참최복을 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시열은 말하기를 ‘소설에서 이미 차ㆍ장(次長)을 세우되 부모가 역시 3년복을 입는다 하고, 그 아래서 또, 서자로서 승중(承重)하면 3년복을 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 두 설이 스스로 서로 모순이 된다.’고 하였습니다.그런데 신은 생각하기를 여기에서 이른바, 서자라는 것이 과연 이 정실(正室)의 중자(衆子)의 칭호라면, 진실로 상문(上文)과 더불어 모순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만일 첩(妾)의 소생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이라면, 상문으로 더불어 모순이 되지 않는다고 하겠습니다.
시열은 또 말하기를, ‘효종이 대왕대비전에 군ㆍ신의 의리가 있는데, 대왕대비께서 도리어 신하가 임금에 대하여 입는 3년복으로 대왕의 복을 입을 수 있겠느냐.’ 고 하였는데, 이것은 더욱 근거가 없는 말입니다.성인이 예문을 제작할 때에, 아버지가 장자에 대하여 참최복을 입게 한 것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대하여 입는 복제와 같이 한 것이 아닙니까. 임금이 세자에 대하여 참최 3년복을 입는 것도, 신하가 임금에 대하여 입는 복제와 같은 것이 아닙니까.
아아, 선조(先朝)로부터 믿고 의지하고 위임한 것이 양송(兩宋 시열ㆍ준길) 같은 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선왕을 보필하여 인도하지 못하여 불행한 변이 있기까지 하고 재궁(梓宮)을 쓸 수 없게 한 일까지 있었으니, 이것은 만고에 없는 국가의 큰 변이었습니다. 인산(因山)은 마지막으로 보내드리는 큰 절차인데, 그 극히 길한 땅을 버리고 결점있는 자리에 모셨으니, 이것은 장지(葬地)를 택하여 편안히 모시는 도리가 아니었습니다.
지금 이 나라에는 재해가 함께 이르고, 흉년이 거듭 닥쳐서 조정과 민간이 모두 궁핍하여 나라는 가난하고 백성은 흩어집니다. 권력을 쓰는 것이 신하(송시열)에게 있고 위의 임금에게 있지 않습니다. 효종이 왕위에 계신 지 10년 후에도 오히려 적자ㆍ장자가 될 수 없게 되었으니, 어진 이를 등용한 효과가 이러하다면, 고금 천하에 누가 어진 이 등용하는 것을 좋은 일이라 하겠습니까.
혹은 ‘우리나라 선대에서는, 아랫사람에게 대한 복은 많이 간략한 것을 좇아서 강등하여 3년복을 하지 않았으니, 지금 어찌 다시 예문에 있는 이른바 옛날 예절을 회복하리오.’ 합니다. 그렇다면 맹자가 문공(文公)을 권하여 3년복제를 시행하게 한 것이 예가 아니겠습니까.또 옛날 국가가 견고할 때에는 비록 강복을 하더라도, 이것이 실례의 수치만 된 뿐이요, 종묘 사직에는 해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인심이 안정되지 못하고, 상ㆍ하가 위태롭고 의심하는 시기를 당하여, 어찌 이러한 대통(大統)을 밝히는 큰 예절을 조금인들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혹은, 이미 당초에 벌써 잘못 정하여졌으니, 지금 추후로 고쳐 복을 입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옛날 송(宋) 나라의 임금 상사에 다만 천담색(淺淡色)의 상복을 입었는데, 주희(朱熹)가 건의하여 추후로 고쳤으니, 이것이야말로 곧 허물을 고치는 것입니다.이렇게 하는 것이 뜨거운 것을 손에 쥐고도 찬물에 손을 넣지 않으며, 서리를 밟으면서도 얼음이 장차 얼 것을 경계하지 않아서 끝내 아랫사람들로 하여금, 국가 종통이 정하여지지 못함을 의심하게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지금 대왕대비께서 기년의 복을 벗는 일은 결코 할 수 없으며, 다시 정하여 3년복으로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신은 이 상소가 위에 들어가고 들어가지 않음과, 이 말이 시행되고 시행되지 않음으로써, 임금의 세력이 굳건하고 굳건하지 못함과 나라 운수가 길고 짧음을 점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 상소를 승정원에 올렸는데, 승정원에 머물러 두고 드리지 않았다. 승지 김수항(金壽恒)등이 윤선도의 마음 씀씀이가 음흉하고, 말을 지어 떠벌려서 현란시킨다고 아뢰니, 임금이 명하여 돌려주게 하고 전교하기를, “윤선도가 심술이 부정하여 음험한 글을 올려서 상ㆍ하의 사이를 비방하고 참소하니, 마땅히 중벌에 처해야 하지만 차마 그렇게 하지는 못하니 그 관직을 삭탈하고 고향으로 추방하여 보내라.” 하였다.수항이 입대하여 말하기를, “그 죄상을 따진다면 국문을 하더라도 가하지마는 고향으로 추방하기만 하니 이것만으로는 그 죄를 징계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 부제학 유계(兪棨)ㆍ교리 안준(安浚)ㆍ수찬 심세정(沈世鼎)이 면대하기를 청하여, 윤선도의 극히 흉악하고 간특한 죄상을 진술하면서, 그 상소를 가져다 조정에 보여서, 그 죄상을 밝히고 불사르며 먼 변경으로 귀양 보내기를 청하니, 임금이 좇아서 선도를 삼수부(三水府)로 멀리 귀양 보냈다.
○ 성균관과 사학의 유생 이혜(李嵇) 등이 상소하여, 윤선도에게 빨리 국법을 시행할 것(죽이는 것)을 청하였다.
○ 대사간 이경억(李慶億), 사간 박세모(朴世模), 정언 권격(權格), 장령 윤비경(尹飛卿), 지평 이계(李棨)ㆍ정수(鄭修) 등이 함께 아뢰기를, “선도의 상소는 예법을 논란하는 데에 관한 것이 아니라 곧 일종의 고변서(告變書)이니, 엄하게 국문하여 법으로 처리할 것을 청합니다.” 하였다. 여러 번 아뢰었지만 허락하지 않고, 안치(安置)만 시키도록 명하였다.
○ 임금이 대신과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고 효종에 대한 대왕대비의 복제를 의논하여 정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나와서 말하기를, “윤선도의 상소 내용에 대해서는 참으로 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중 재궁(梓宮)에 관한 일은 신이 실로 책임이 있습니다.또 당초 예를 의논할 때에 옛 경(經)에 있는 예문으로 단정하지 못하고, 다만 국가에서 이미 행한 규정만 의거하여서 의논하여 아뢰어 이 때문에 점차로 이렇게 문제가 있게까지 되었으니, 신은 황공함을 이기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만이 아니라 나도 불안하오. 예를 의논하는 일은 상례(常例)로 말하면 마땅히 그 절차를 대신에게 물어야 하는 것인데, 대신인 경 등이 역시 감히 확실하게 말하지 못하니 내가 장차 어떻게 결정할 것이오.” 하였다.
태화가, “신이 일찍이 예학(禮學)에 종사한 일이 없으니, 무슨 특별한 소견이 있어서 감히 큰 예문을 의논하여 정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나라의 제도는, 부모가 아들을 위하여 3년복을 입는 법이 없으므로 이것으로서 헌의하였던 것입니다. 옥당의 유신(儒臣)과 대간이 다 입시하였으니, 각각 의견을 진술하게 함이 좋을까 합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여 각각 의견을 진술하게 하였다.부제학 유계(兪棨), 대사간 이경억, 장령 윤비경은 모두 옛날 예문에 이미 명백하여 근거될 만한 글이 없으니, 마땅히 국가에서 전부터 시행하여 온 제도를 따르는 것이 옳다고 하였으며, 허목은 답하기를, “조종조(祖宗朝)에서 정한 바 《오례의》에, 부모가 아들에 대한 복제는 기년복으로 정하여 있으니, 대왕대비의 효종대왕에 대한 복제는 시ㆍ비를 확정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국가에서 전부터 시행하여 온 기년복의 제도를 따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 이전에 진선(進善) 윤휴가 장령 허목을 시켜서 다시 소를 올리게 하고, 또 적자의 계통을 흐리게 한다는 말로 여러 사람을 충동하였으며, 또한 위태로운 말투로 의견을 올려 임금의 마음을 흔들어 놓으니, 관원들이 모두 의심하고 두려워하였다. 유계가 차자를 올리기를, “오늘날 종통에 대한 말은, 실은 예법을 의논한다 빙자하여 사람을 잡으려고 깊숙이 파고드는 것입니다.복제에 있어서 반드시, 부모가 아들을 위하여 3년복을 입은 후에야 그 계통을 전하게 되기로 한다면, 국가의 계통이 끊어지지 않은 자가 거의 드물 것입니다. 《의례》의 소를 지은 사람이 부모가 아들의 복을 입는데 있어서 네 가지의 참최 3년복을 입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 말을 들어 말하였는데, 제사를 주관하고 가계를 전하는 큰 뜻이 그 사이에도 분명하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 상복의 경중에 따라 두 적자가 생기고 계통이 끊어질 염려가 있을 것이겠습니까.” 하였다. <유시남(兪市南)의 묘비>
○ 일찍이 송시열이 윤휴의 말을 따라서, 효종에 대한 자의대비의 복제를 참최 3년복으로 정하려 하였는데, 이유태(李惟泰)가 시열을 충동하여 여러 사람의 의논을 물리치고 자기의 의견을 세워서 기년복을 시행하게 하였다. 그 후에 윤선도의 상소에서는 자의대비가 효종에 대하여 자최 3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만을 주장하였으며, 윤휴는 처음부터 참최 3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을 고집하여 윤선도와 윤휴의 말이 원래 달랐다.그런데 송당(宋黨 송시열ㆍ송준길의 당파)에서는, 윤휴가 해윤(海尹 전라도 해남(海南)에 사는 윤선도)과 함께 합세하여, 두 송씨(宋氏)에 대하여 화근을 만들려 한다고 하였다. 《여강유사(驪江遺事)》 ○ 윤휴가 이유태ㆍ허목에게 보낸 글은 아래, 숙종 초년의 윤휴의 상소 중에 나온다.
○ 우윤(右尹) 권시(權諰)가, 윤선도를 변명하여 구원하는 소를 올렸는데, 대략에, “신은 일찍부터 생각하기를, 대왕대비는 오늘의 상사에 있어서 3년의 복을 입는 것은 당연한 일로서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지금 비록 예법을 고치더라도 백세 후에 판단이 될 것이라 여겼습니다. 더구나 들리는 말에는 ‘옛사람도 이미 태후는 마땅히 천자의 뒤를 이을 사람을 위하여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하였다.’ 합니다.신이 견문이 적고 일찍이 널리 상고하지 못하여 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알지 못하오니, 전하께서는 시험삼아, 담당 관원들로 하여금 여러 서적을 참고하여 보게 하시면 그 사실 여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석한 일입니다. 시열ㆍ준길ㆍ계와 같은 어진 이로서도, 이러한 대왕대비께서 당연히 3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큰 뜻을 살피지 못하였기 때문에, 세상에 떠도는 말이 불쾌함을 느끼게 한 지 이미 오래였습니다. 오늘에 와서는 여기에 대하여 고쳐야 한다는 의논이 이미 조정에서 일어났지만 여러 사람이 아직도 잘못된 생각을 고집하여 고치지 못하며, 그 중에서도 시열의 이른바, 선왕이 서자가 되어도 무방하다는 말은 잘못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여기에 대해서는 온 세상이 모두 그 말의 그른 것을 알면서도 말하지 않으니, 이것이 곧 선도의 참소를 가져오게 한 원인입니다. 선도의 훼방하고 투기하는 정상은 참으로 너무도 미운 일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몸이 반드시 화를 받을 것을 생각하지 않고 능히 다른 사람이 감히 하지 못할 말을 하였으니, 그도 역시 감히 말하는 선비라고 하겠습니다.
신은 생각하기를, 성인이 계신 조정에서는 사람을 쓰되 그 감히 말하는 장점을 취하고, 그 훼방하고 참소하는 단점을 묵언하여 천하의 좋은 말을 들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지금 조정의 의논이 크게 격렬하여 이토록 심한 지경에 이르러서 도리어 권세가 아래로 옮긴다는 참소가 사실이 되게 하니, 이대로 가다가는 큰일도 아닌데 선비를 죽이는 일이 불행하게도 가까워지겠습니다. 하물며 선도는 일찍이, 선왕이 잠저에 계실 때에 스승으로 있은 옛 은혜가 있습니다.비록 그 불순한 것을 분명히 아셨더라도 그 장점을 취하여야 하겠으며 더구나 그의 직위가 대부(大夫)에 이르렀으니, 가볍게 죽일 수 없는 것도 분명한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반드시 죽이고야 만다면, 신과 같은 조급 경망한 술 미치광이는 전하가 계신 이 조정에서 장차 어떠한 망발로 죄를 얻을지 모르겠으니, 이것이 오늘 신이 가지 않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부드럽게 답하였는데, 승지 김수항(金壽恒)이 상소를 봉하여 돌리고 그만 답을 고쳐서 내렸다. 이튿날 사간원의 이경억(李慶億)ㆍ박세모(朴世模)와 사헌부의 윤비경(尹飛卿) 등이, 선도를 논란한 일 때문에 권시에게 배척을 당하였다고 하면서 피혐하였으며, 홍문관의 유계ㆍ김만기(金萬基)ㆍ이시술(李時術)ㆍ심세정(沈世鼎) 등은 차자를 올려서, 권시를 흉악한 죄인을 두둔하였다고 배척하고, 정언 권격(權格)은 권시를 파직하기를 청하여 세 번 장계를 올렸는데, 일시 중지되었다가 다시 발의하여 여러 번 장계하니 파직을 허락하였다.
권시가 도성 밖으로 나가니 임금이 듣고 이르기를, “권 우윤(權右尹)이 또 나가는구나. 이런 선비들이 모두 조정을 버리고 가니, 내 마음이 헤아릴 수 없이 허전하구나.” 하면서, 곧 사관을 보내어 유시하기를, “지금 형편으로는 가지 않을 수 없지만 속히 마음을 돌려서 돌아오도록 하라.” 하였는데, 승정원에서 그 유시를 환수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명하여 승지를 가두게 한 후에야 비로소 사관을 보내어 권시에게 유시하였다.
공조 정랑 이상(李翔)이 글을 올려서 권시를 매우 공격하고, 부호군 이유태(李惟泰)는 입대하여 권시의 잘못을 극론하며, 제갈량이 울면서 마속(馬謖)을 벤 일을 말하기까지 하였다. 사간원ㆍ사헌부에서도 상소하여 권시를 공격 배척하였다.
○ 이때, 선도가 사람들의 의논이 둘로 나뉘는 것을 엿보고서, 예법을 의논한다 빙자하고 화의 단서를 일으킬 계획을 하였는데, 시열이 먼저 조정을 떠나서 시골로 가고 준길이 또 황급히 도성을 떠나가니, 조정과 민간에서 놀라고 분하게 여겼으며, 사헌부ㆍ사간원에서는 선도를 법에 의하여 처벌할 것을 청하였다.권시가 시열에게 말하기를, “요(堯)ㆍ순(舜)의 시절에도 비방하는 패목을 세웠다고 하였소. 비방이라고 말하였지만 그 중에는 도리에 어긋난 말도 반드시 많았을 것이요.그렇지만 직(禝)이나 설(契)이, 그러한 비방의 말을 듣고서 갑자기 물러갔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소.” 하였으나, 시열이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권시가 또 준길에게 글을 보내기를, “이러한 역경을 당하여 그것을 이용하여 도리어 보람을 더하는 밑거름으로 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그리고서 또 상소하였다가 파직을 당하였다. 무신년에 준길이 조정에 나가서 임금에게 아뢰기를, “권씨는 끝내 버려서는 안 됩니다.” 하니, 마침내 좌윤(左尹)으로 임명하였다. <권탄옹(權炭翁) 행장>
○ 윤증(尹拯)이 권시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당요(唐堯)ㆍ우순(虞舜)의 세대에는 정말 비방의 패목이 있었지만 네 사람을 죄준 것도 있지 않았는가. 이미 참소라 규정하고 투기라 규정하고서, 과감하게 말을 한다고 하여 칭찬하는 것은 역시 말이 서로 어그러지지 않는가. 곧은 말을 하는 데에 과감하다면 참으로 감히 말하는 선비라 할 수 있겠으나, 참소하고 투기하는 데에 과감하여도, 감히 말하는 선비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스승의 의리는 참으로 중한 것이지만, 옛사람은 참마검(斬馬劍)을 청하여 스승의 머리를 벤 자도 있으니, 그 죄가 죽일 만하다면 사제의 정이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선도를 용서하고 아니하는 데 따라, 자신의 거취를 결정하겠다고 말한 데에 이르러서는 더욱 그 자중하지 못함이 한스럽소. 선도의 좋지 못한 마음씨에 대해서 여러 번 차인(次仁) □ 형에게 말하였는데, 끝내 받아들이지 않고 또 착한 사람이라고까지 하였으며, 오늘에 와서는 선도의 참소하는 말이 퍼져서 어린아이들이라도 모두 그 가슴속을 들여다보게 되었는데, 선생님의 밝으신 안목으로도 아직 깨닫지 못하고, 과감히 말하는 선비에 비하기까지 하여, 스스로 간사하고 참소하는 무리들의 구렁으로 빠져 들어가는 줄을 모르니 어찌하면 좋으리오.
지금 이 복제에 대한 의논은 다만 밝으신 임금이 위에 계심을 믿기 때문에 감히 적ㆍ서의 분별을 다투어서 기탄없이 말하는 것이니, 이것은 실로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좋게 생각하고 기뻐하는 바인데, 무엇 때문에 말하기 어려운 지경까지 말을 하여서 여러 사람의 마음을 위태롭게 충동하여, 실지로 아는 사람으로는 그 자세하지 못함을 근심하고, 모르는 사람으로는 흉험하다고 지목하게 하는가. 그리하여 결국은 참소하는 도적의 상소가 틈을 타서 나오게 되었으니, 여기서 일은 이루 한탄할 수 없게 되었소.
윤선도의 상소는 그것이 겉으로 예론을 빙자하고, 속으로 살벌의 계교를 시험하려는 데서 나온 것으로, 우리 밝으신 임금이 아니었다면 사람들이 그의 손아귀에서 도살될 뻔하였소. 이런 때를 당하여서는 입을 봉하고 종적을 숨기며 악한 무리들을 사갈(蛇蝎)을 피하듯 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 어쩌자고 옷을 걷고 발을 적시면서 따라 들어가려 하는 것이오. 복제에 대한 그 일이 종묘 사직의 안위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이기에, 저 사람의 상소에서 세 번이나 종통ㆍ적통의 말을 듣고 나와서 곧장, 다른 사람을 멸족의 지경으로 몰아넣어서 한때의 사사로운 분을 시원하게 하려는 것인가. 참으로 가증스럽고 통탄할 일이오.
지금 영남 사람들이 속으로 왕실의 적통을 빼앗고 임금을 내려 깎으려 한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말조차 할 수 없는 지경에 빠뜨리려고까지 하는데, 말의 내용을 따져 본다면 다 종통을 둘로 하고, 임금을 낮추는[貳宗早主] 네 글자 중에서 꾸며진 것이오, 지금 여강(驪江 여주(驪州)에 사는 윤휴)이 마음을 돌이키는 일은 참으로 바라기 어려운 일인데, 선생님의 밝은 소견으로도 역시 점점 저들과 합하여 날마다 이곳에서 떠나가니, 이것이 어찌 시운에 관한 큰 일이 아니겠소. 3년복상의 예법은 비록 그 같고 다름을 들어 서로 다투어서 10년이 가고, 혹 저편이 그르다 하더라도 그것이 무슨 큰 해가 있는 일이겠소. 그러니 3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주견을 버리고 기년복을 입게 하기를 청하려는 것이 아니오.
이 일은 지금 와서는 벌써 크게 갈려졌으며, 서로 공격하여 무한한 화의 기틀을 빚어내고 있소. 그러나 그 시초를 돌아다보면, 이것은 한 작은 일, 그리고 중요한 것도 아닌, 복제에 관한 것뿐이니, 이것이 과연 얼마나 우습고 또 괴이한 일이오. 참으로 크게 탄식할 만한 일이오.” 하였다.
○ 송시열이 윤선도의 상소로 인하여 처벌을 기다리고 있으니, 임금이 사관을 보내어 위로하고 달래었는데, 회답하는 장계의 대략에, “신이 삼가 윤선도의 상소 내용을 보니, 그 중에 예법을 의논한 데 대한 잘잘못을 들어서 공격한 점에 대해서는, 신의 혼미한 식견으로 그의 말이 옳고 그름을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밖의 신의 죄를 들어서 공격한 것은, 하나도 옳지 않음이 없습니다. 다만 선도의 말이 너무 심한 것뿐입니다.
또 그동안 신이 망령되이 말한 잘못은 비록 자공(子貢)의 언변이 있더라도 스스로 변명할 수 없습니다. 선도는 사정을 잘 알기 때문에, 그 공격이 신의 일신에만 그쳤는데, 지금 송준길까지 함께 해당 관청의 처벌을 받게 되었으니, 신의 죄가 이토록 커진 점, 더욱 속죄할 수 없겠습니다. 신이 망령되다는 것은, 다만 밝으신 전하만을 믿고서 거리낌이 없었던 것입니다.
또 일찍이 한(漢) 나라 문제(文帝)가 남월국(南越國)에 보낸 글을 보았는데 거기에는, ‘짐(朕)은 고황제(高皇帝)의 측실(側室) 아들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있어서도 이 측실의 아들이라는 조건으로 한 문제를 낮게 보지 않았으며, 그 후 한 나라에서 비록 변고가 많았다 하지만, 나라의 계통과 사업을 이어받아서 주관한 사람은 모두 문제의 자손이었습니다.
그리고 4백 년을 지나서 소열황제(昭烈皇帝)가 한중(漢中)에서 천자 위에 오른 데 대해서도 사마광(司馬光)은 《자치통감》을 지으면서 소열황제의 존재를 당각(唐恪)의 밝히기 어려운 데에 비하였지마는, 주자(朱子)는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지으면서, 사마광의 잘못된 견해를 일소하고 소열황제를 대서특필하여, 중국 천자의 정통(正統)이 됨을 밝혔습니다. 비록 측실의 아들이라 하더라도 참으로 정통을 전하는 데에 무방한데, 하물며 효종대왕은 선대왕의 차적자(次嫡子)가 됨에 있어서이겠습니까.” 하였다.
○ 5월에 우의정 원두표가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적이 생각하건대, 장자(長子)가 중자(衆子)와 구별되어 부모가 그 장자를 위하여 반드시 3년복을 입게 한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그 아들이 장차 조상을 계승하고, 장차 가계를 전하여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장차 조상을 계승하고, 가계를 전하여 받을 그 아들에 대하여서도 역시 3년복을 입는데, 하물며 이미 조상을 계승하고 가계를 전한 사람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제왕가에서는 실제로 대를 이은 계통만을 중히 여기며, 제후는 종통을 인정하고, 사ㆍ서인은 적통을 인정한다는 것이 옛 교훈입니다.이미 차례를 계승하여 가계를 이어받아서, 종묘 사직의 주인이 되었다면 종통이 여기에 있으며 적통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문제와 당 나라의 태종(太宗)이 비록 곁 갈래의 자손으로 들어가서 계통을 이었다 하더라도 이미 황제 위에 있었으니, 이것이 곧 한 고조의 적통이요, 당 고조의 장자인 것입니다. 한 나라ㆍ당 나라의 서로 전하는 계통이, 문제나 태종을 버리고 어디로 돌아가겠습니까. 역대의 계통을 이은 일 중에서 이런 것이 매우 많아서 이루 다 들 수 없습니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의례》의 참최(斬衰) 조에 ‘아버지가 장자를 위하여 입는다.’의 주소(註疏)에서 말하기를, ‘첫째 아들이 죽으면 적처 소생의 둘째 아들로 대신 세우되 역시 장자라 이름한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대행대왕은 곧 인조의 둘째 아들이니, 소에 말한 바 적처 소생의 둘째 아들이 아니겠습니까.또 말하기를, ‘만일 적자라고 말한다면 첫째 아들에게만 해당되지만 장자라고 하면, 적자를 세우되 맏이로서 한 자를 통틀어 모두 말하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 소를 지은 사람의 의사가 적자라고만 말하면, 이것은 첫째 아들 이외에 둘째 아들로서 가계를 전하여 받은 사람은 들 수 없는 것인데, 반드시 장자라고 하여야만, 둘째 아들 이하의 아들로서 계통을 이은 아들에게는 부모가 다 3년의 복을 입을 수 있다는 것으로서, 여기서 그 글의 대의가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이 소의 말이 단연, 오늘의 예를 의논하는 데에 정확한 증거가 될 수 있는 것인데, 하필 왜 억지로 서자가 후사가 되면 부모가 그 아들을 위해서는 3년복을 입지 않는다는 예(例)를 끌어 말하여 의혹을 만들어 내는 것이겠습니까. 아래 위의 소설(疏說)이 갈려서 두 조목으로 되는 것인데, 이제 이것을 혼동하여 반드시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취하려 하니, 참으로 탄식할 만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두 번 참최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구나 여기에 끌어다 비유할 것이 아닙니다.
이른바, 두 근본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본가에서 나가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된 사람에게 해당하는 것으로서, 이미 그 후사가 된 부모를 위하여 참최복을 입었으니, 여기에서 다시 소생 부모를 위하여 참최복을 입는다면, 이것은 두 근본이 되는 것으로서, 인륜의 도가 어지러워진다는 것입니다. 여자가 출가한 경우도 역시 그러하니, 그 중히 여기는 바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부모가 장자를 위하여 3년복을 입는 것은, 그 근본 의미가 조상을 높이고 계통을 잇는 데에 있는데, 둘째 아들로서 승중(承重)한 자도 모두 조상을 높이고 계통을 잇는 의리가 있는 것이니, 비록 두세 번 참최 3년복을 입는다 하더라도 어찌 두 근본의 혐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실록(實錄)》에 있는, 전에 이미 기년복제를 시행한 사실로써 문제를 삼는다면 신이 또 할 말이 있습니다. 우리 조정에 와서 상례가 갖추어진 것은 일찍이 전에 없던 일이니, 그동안 여기에 대한 의장(儀章)과 도수(度數)가 역대 성왕(聖王)이 가감하고 개정한 바가 없지 않았습니다.전의 3년상 중에 있어, 검은 사모와 검은 각대(角帶)로 일을 보던 규정도 선조조(宣祖朝)에 와서야 고쳐졌으니, 어찌 전에 미처 못 한 일을 지금 와서 새로 할 수 없다고 하겠습니까. 현재 예법을 강론하는 일이 이미 끝났고 연제(練祭)도 박도하였으니,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 아는 것이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니 결단하여 행하는 것은 전하께 있을 뿐입니다.
만일 연제삿날에 있어서, 대왕대비께서 그대로 최복(衰服)을 입으시고 바로 길복(吉服)으로 옮기지 않으신다면, 3년복의 예법은 이미 시행되는 것입니다. 예법은 규정을 변하여 고치는 번거로움도 없이 지금에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곧 예법이니, 연구하여 고치는 데에는 최선을 도모하여야 할 것이며, 선왕조에서 우대하던 유신(儒臣) 중의 이유태(李惟泰)ㆍ심광수(沈光洙)ㆍ허후(許厚)ㆍ윤선거(尹宣擧)ㆍ윤휴 같은 이들도 역시 함께 의견을 말하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 예조에서 회답하여 아뢰기를, “차자의 내용대로 여러 유신들에게도 함께 물어서 아뢰오리까.” 하니, 전교하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 이유태가 의논하여 아뢰기를, “적이 듣건대, 대왕대비의 복제에 대한 예법은 벌써 이미 의논하여 정하였다 하는데, 지금 또다시 하문하심이 미천한 신에게까지 미치니, 전하께서 혹시라도 이 예법을 시행함에 있어서 미진한 것이 있지는 않은가 의심해서가 아니십니까. 신은 실지로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는데, 억지로 모르는 것을 가지고 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그리고 또 이 예법에 대해서는 신이 송시열ㆍ송준길과 함께 의논한 지 오래되었사온데, 여기에 대한 신의 의견은 처음부터 그들과 다른 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송시열ㆍ송준길 두 신하는 이 예법을 잘못 의논한 관계로 하여 지금 처벌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니, 신인들 어찌 감히 다른 무슨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하였다.
○ 허후는 헌의하기를, “예법을 의논하는 여러 신하들이 각각 의견을 들어 여러 가지로 논란하였기 때문에 다시 더 의논할 여지가 없습니다. 여러 의논을 참작하여 적당하게 처리하는 것은 다만 전하의 처리하시기에 달렸습니다.” 하였다.
○ 윤휴는 헌의하기를, “보잘것없는 소신이 갑자기 예법을 하문하시는 명을 받으니, 떨리고 두려워서 무어라 답해야 할지 모르겠으며, 감히 억지로 말을 하여 죄과를 더하지 못하겠습니다.이번 나라의 큰 예법에 온갖 신하들이 각기 자기의 의견을 내세워서 모두 의논이 있었으니 전하께서 밝으신 생각으로 선택하시되, 오직 그것이 인심에 만족하고 관계되는 대경대법(大經大法)에 합치하여 선왕의 예법에 어긋나지 않도록 시행하는 것뿐입니다. 변변치 못한 소신이 어찌 졸지에 이런 의논에 참여하여 조정을 욕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 심광수가 헌의하기를, “여러 신하들이 서로 강론하여 전하께 말씀드린 것을 보면 모두가 《예경(禮經)》에 있는 것이나, 종통을 중하다고 하는 것[기년복]이 옳은 것 같습니다.” 하였다.
○ 윤선거는 지방에 있었으므로 수의에 참석하지 아니하였다.
○ 예조에서 아뢰기를, “여러 신하들이 의논하여 아뢴 것이 명백하지 못한 것 같으니, 다시 대신들에게 물어 처리하소서.” 하였다.
○ 영돈녕 이경석이 헌의하기를, “일찍이 다시 물으실 때에 벌써 전에 가지고 있던 의견을 대략 말씀드렸으니, 이제 어찌 또 다른 의견이 있겠습니까. 한 가지 말씀을 더 드린다면, 국가의 예법은 일찍이 성조(聖祖)께서 정하신 바를 역대에서 좇아 시행하였으며, 또 인조(仁祖)가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상사 때에 행하였는데 지금 대왕대비께서 변경하신다면 이것이 예법에 합당한 것인지 아닌지를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 영의정 정태화와 좌의정 심지원이 헌의하기를, “당초 대왕대비의 복제를 의논하여 정할 때에는 다만 국가 예법에 근거를 두어 헌의하였던 것인데, 그 뒤에 예법에 대한 의논이 분분하게 되니 죄송함을 금치 못합니다.그런데 《실록》에 기재된 것을 살펴보니 아들의 상사에 대하여 3년의 복제를 행한 것을 볼 수 없었기에 전일 어전에서 ‘상례는 선조가 하신 대로 따른다.’는 뜻으로 이미 말씀드렸으며, 당시 이에 대하여 입시하였던 여러 신하들도 이의가 없었으므로 결정되었던 것인데, 지금 와서 다시 고친다는 것은 실로 생각하였던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 영중추 정유성(鄭惟城)이 헌의하기를, “조종조(祖宗朝)에, 예법을 아는 훌륭한 유학자가 많았음은 오늘의 비교가 아니었으니, 이러한 중대한 예법은 반드시 십분 연구하여 결정하고 시행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록》을 상고해 보면 일찍이 아들의 복을 3년의 복제로 실행한 일이 없었습니다.‘상례는 선조의 예를 따라서 행한다.’는 것은 《예경》에 있는 분명한 교훈입니다. 당초 효종의 상사에 있어서, 대왕대비의 복을 기년복으로 의논하여 정한 것은 예법 제도에 근거가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실로 상례는 선조를 따른다는 의미에서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하였다.
○ 전교하기를, “다수의 의논을 따라서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3일
○ 송시열이 이계주(李季周)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하기를, “내가 네 종류의 설을 들어 우리나라 예법에 부모가 작은 아들[衆子]을 위하여 기년복을 입는다는 말과 결부하여 말하였는데, 정 정승(태화(太和))ㆍ심 정승ㆍ이 영부사(李領府事)는 헌의할 때에 모두 나의 말을 따르지 않고, 우리나라 예법만을 들어서 말하였으니, 이것은 장자로서 입는 기년복과 중자로서 입는 기년복을 분별하지 않은 것이다.오직 정 정승 유성만이 나의 어리석은 의견을 깊이 믿기 때문에 네 종류의 설과 우리나라 예법을 합하여 헌의하였는데, 선왕의 비답에 다수의 의견을 따라 시행하게 하라고 하시었다.” 하였다.
○ 신축년 4월에, 가뭄이 심하므로 구언(求言)하였는데, 전 판중추부사 조경이 상소하기를, “신이 시골에 물러와 있으면서, 지금 땅이 타 들어가는 한재를 눈으로 보고, 또 전하께서 스스로 자신을 죄책하는 교서를 내린 것을 보니, 교서의 내용이 간절하고 측은하여, 옛날 은(殷) 나라 성탕(成湯)이 7년 대한(大旱)을 만나서 여섯 가지 일로 자신을 죄책하던 것보다도 더함이 있어,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감격하여 울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그런데도 어찌하여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하늘은 전연 노여움을 돌리는 기색이 없이, 음침한 안개가 자욱하여 하루하루 더 심하며, 큰 구름이 엉기어 있어도 땅이 붉게 메마르는 한발(旱魃)이 발호하여 그 기운이 전쟁의 기운보다도 사납고 요악스럽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장차 이 나라의 화가 민생이 굶어 죽는 데에만 그치지 않을 것을 두려워합니다.
지금 전하께서 재변에 대하여 자기 몸을 낮추고 반성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없으나, 그 중에도 원통한 옥사를 다시 심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원통한 옥사를 재심하는 데에 윤선도만이 들어 있지 않은 것은 어찌된 일입니까. 선도는 반대당의 공격으로 반드시 죽을 사람이었는데 목숨이 살아서 북쪽으로 귀양 갔으니, 전하의 은혜가 참으로 큽니다.그러나 선도의 죄는 무슨 죄입니까. 선도의 죄라는 것은 종통(宗統)ㆍ적통(嫡統)의 관계에 있어서 효종대왕을 위하여 두둔한 것뿐이었습니다. 선도로 말하면 일찍이 예법을 잘 안다는 이름도 없는 이로서 역량을 생각하지 않고 망령되이 큰 예법을 논란하였으니 무례하다고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위로 선왕께 충성을 다하고, 아래로 전하에게 효도하실 길을 권면한 점에 있어서는 그의 성심을 가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도가 소를 올리던 날, 전하께 그 소를 불태우라고 말한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고려조의 공민왕이 이존오(李存吾)의 소를 불태우고, 광해군은 정온(鄭蘊)의 소를 불태웠는데, 소를 불태운 공민이나 광해는 나라를 망친 임금이 아니었습니까. 오늘의 조정 신하들은 자신들이 어진 사람으로 자처하는 데에는 급급하면서도, 요ㆍ순의 도로 전하를 인도하지는 않고 도리어 나라를 망치던 전날의 임금들이 걸어간 길로 전하를 끌어들여서 따라가게 하니 이것이 웬일입니까.만일 후일에 이 사실을 역사에 쓰고 야사에 기록할 때에 아무 왕조 아무 때에 윤선도의 예법을 의논한 소를 불태웠다고 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성덕의 누가 되겠습니까. 신은 후세에서 지금의 일을 역사에서 보고 평하기를, 역시 오늘날 우리가 옛날 공민왕ㆍ광해군조의 일을 보고 평하는 것과 같을 것을 두려워하여 혼자서 가슴 아파하는 바입니다.선도의 죽고 사는 것이나, 있고 없음을 신은 반드시 애석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애석하게 생각하는 것은 한 사람 선도의 일 때문에 문란과 착오가 이렇게까지 된 사실입니다.
아아, 옛날의 임금 중에는 그 사람을 배척하면서도 그 말은 채용한 이가 있었으니, 이유는 그 말이 종묘 사직과 나라에 유익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선도라는 그 사람은 물리치시더라도 선도가 말씀드린 그 종통ㆍ적통에 대한 말은 결단코 버리실 수 없을 것입니다.전하께서 만일 한번 크게 깨달으시어 종통ㆍ적통이 어디에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선왕(효종(孝宗))의 《실록》에 분명히 실려서 후일에 예법을 의논하는 이들로 하여금 감히 다른 말을 하지 못하게 하신다면, 신(神)의 도(道)인들 어찌 인정과 다르겠습니까.
우리 조종(祖宗)들의 하늘에 계신 영혼이 은연중에 기뻐하셔서 재변을 내리는 꾸지람을 거두고 상서를 내리어 가뭄을 변하여 장마를 주실 것이며, 전하로 하여금 길이 자손과 백성을 보전하게 하여 그 덕이 일월과 함께 밝아지게 될 것입니다. 신은 이 말이 세상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고 기피하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이 한 몸의 이해만을 생각하고 전하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 승정원 승지 남취익(南就翼)ㆍ원만석(元萬石)ㆍ이은상(李殷相)ㆍ이익한(李翊漢)ㆍ박세모(朴世模)ㆍ정만화(鄭萬和) 에서 아뢰기를, “조경의 이 상소를 보니 그 말이나 의사가 완전히 윤선도를 위하여 나선 것입니다. 당초에 윤선도가 실은 음흉한 마음을 품었으나 겉으로는 예법을 의논한다 빙자하던 나머지의 말을 가지고 선동한 것이며 또 그 말이 이치에 어긋남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저 윤선도의 죄악으로 말하면, 온 백성이 함께 분개할 뿐만 아니라 실은 전하께서도 통촉하시는 바인데, 조경이 감히 방자하게 윤선도의 말을 옳다고 하면서 어지럽게 주장하고 음험하게 인증하여 꺼리는 바가 없습니다.정원의 임무가 문서의 출납을 합당하게 하여야 한다는 도리로서는 무턱대고 들어가 아뢸 수 없는 일이지마는 그 상소 내용의 시비와 사정(邪正)은 반드시 전하의 밝으신 눈에 숨길 수 없을 것이므로 상소를 받아들인 뜻을 감히 아뢰나이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런 음흉하고 간사하며 바르지 못한 상소를 보아서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곧 돌려주어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아아, 세 조정(인조ㆍ효종ㆍ당대)을 섬긴 사람으로서 어찌 이렇게도 지식이 없는가. 애석하도다. 그 상소의 말이 바르지 못하고 음험한 것이 어찌 이다지도 심한고. 지금 대왕대비전의 옥책문(玉冊文)을 제술(製述)하는 데에는 이런 사람을 충당할 수 없으니, 우선 먼저 다른 사람으로 고쳐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 삼사(三司)에서 조경을 삭탈관직하여 시골로 추방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 영의정 정태화가 경연에서 아뢰기를, “조경은 전부터 시골에 살고 있었으니, 배척하여 추방하더라도 그 사람에게는 손해가 없고 나라의 체면만 손상합니다.” 하였으며, 좌의정 심지원은 아뢰기를, “조경은 삼조(三朝)의 원로인데 구언(求言)에 응하여 진언하였다가 마침내 그것으로 인하여 죄를 얻게 된다면 이것은 나라를 망치는 일입니다.” 하였다.
○ 장령 윤비경(尹飛卿)이 피혐하면서, 대신들이 조경을 두둔하였다고 배척하니, 임금이 엄한 전교를 내렸다. 집의 곽지흠(郭之欽)과 정언 권격(權格)들이 조경을 멀리 귀양 보내라고 청하여 한 달이 넘도록 아뢰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 부제학 유계(兪棨)가 상소하기를, “신이 지난해에 욕되게 본직에 있으면서, 윤선도가 흉한 상소를 하여 화단을 얽어 일으키려는 것을 목견하고 제일 먼저 귀양 을 보내자는 의논을 내 놓고, 그 상소를 불태우자고까지 하였는데, 이것은 그 흉함을 깊이 미워하고 통렬히 배척하는 의사를 표시하였던 것입니다.지금 조경이 그 전부를 조정의 죄라고 하면서 심지어는 전일 공민왕이나 광해군의 나라를 망치던 그 길을 따라간다고까지 하였습니다. 조경은 선왕조의 옛 신하로서 약간 당대의 인망이 있는 사람인데, 시비가 이렇게도 어긋나니 세도(世道)와 인심이 참으로 해괴합니다.” 하였다.
○ 이때 송시열이, 효종대왕의 2주년 제사에 나와 곡배(哭拜)하기 위하여 서울에 와서 임금을 뵙고 예론(禮論)에 대한 죄를 책임지며 진술하기를, “신이 처음 네 가지의 설을 말하니, 정태화가 듣고 크게 놀라면서 그 설은 인용할 수 없다고 말하였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 사람의 반대당의 모함이 있을 줄 미리 알던 선견(先見)을 따를 수 없습니다.” 하였다. <양파시장(陽坡諡狀)>
○ 계묘년 여름에, 수찬 홍우원(洪宇遠)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전 참의 윤선도가 일찍이 전 찬성 송시열이 예법을 의논하는 데서의 실수에 대하여 상소하여 시열을 공격ㆍ배척하니, 조정에서 윤선도를 공격하는 의논이 크게 일어나서 선도는 이 일로 인하여 외딴 섬에 위리안치되었으며, 그 뒤에 참작하여 북청(北靑)으로 옮기기로 하였는데, 대관의 반대하는 글이 또 나와서 다시 전에 정하였던 배소로 돌려보냈습니다.
선도의 상소는 그 말이 지나치게 과격하고 너무 깊이 따져서 편벽된 점은 참으로 과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종통ㆍ적통에 관한 말은 이것이야말로 명백하고 정확하여 바꿀 수 없는 의논이라고 하겠습니다. 시열이 비록 사림의 원로로서 명망이 중하다고 하지만 지난번 예법을 의논하는 데서 일으킨 착오는 과연 숨길 수 없는 일입니다.사람이란 그 누가 허물이 없겠습니까. 성인도 역시 허물이 있는 것입니다. 시열이 비록 어질기는 하지만 어떻게 하는 일마다 모두 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시열을 두둔하는 사람들은 그의 과실을 덮어 두는 데에만 전력하여 아무도 감히 그 잘못을 의논하지 못하게까지 하려고 하며, 선도를 배척하는 사람들은 선도가 사림에 화를 얽어 만들려 한다고 하여 곧 흉적이라고 지목합니다. 선도의 말이 지나친 점은 사실 있지마는 역시 어떻게 사림에 화를 얽어 만들 의사야 있었겠습니까.
사람이란 제각기 의견이 있어서 구차히 남을 따를 수 없으므로 시비와 득실이 이러한 중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인데, 공론(公論)의 돌아가는 바를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지금 사람들은 자기와 같지 않은 자를 싫어하여 억지로 같이 만들려고 하여 사대부간에서 조금 다른 의논이 생기면 반드시 함께 일어나서 공격하는 것입니다.허목이 예법을 의논하는 소를 두 번 올리니, 먼 고을로 내쫓았다가 그만두고 돌아온 후에도 다시 찾아서 벼슬을 주지 않았으며, 권시(權諰)의 경우는 이론을 내자 곧 중한 탄핵을 받았습니다. 또 조경이 선도를 구하려고 하니, 간사하다고 지목하면서 그 아들까지도 영구히 벼슬을 주지 않는 벌을 받았습니다. 조경은 여러 조정의 오랜 신하로서 평생을 통하여 충직으로 일관한 점은 천지신명이 증명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지금 갑작스레 변하여 간사한 사람이 되고 말았으니, 이것은 신이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아아, 사대부들의 분위기가 안정되지 못한 것이 지금처럼 심한 때도 없으니, 자못 태평한 세상의 기상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생각하면 선도는 원래가 기개 있고, 할 말은 하는 사람으로서 전에도 바른말하는 상소로 광해조 때에 절개를 세웠으며 선왕조에는 또 사부(師傅)의 자리에 있었던 옛 은혜가 있었습니다.그런데 지금 말이 지나쳤다고 하여 오랫동안 바람 서리 차가운 지역에 귀양 보냈으니 백발 날리는 늘그막에 어느 날 죽을지 모르는 형편입니다. 하루아침에 죽어 버린다면 성스러운 조정에서 선비를 죽였다는 누명을 남길까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하였다.
○ 임금이 홍우원의 상소에 좋게 비답하였는데, 사간원의 김만균(金萬均)ㆍ송시철(宋時喆)ㆍ원만리(元萬里)와, 사헌부 정계주(鄭繼冑)ㆍ김익겸(金益兼) 등이 아뢰어 우원의 관직을 삭탈하고 외방으로 추방할 것을 청하였으며, 옥당의 이민적(李敏迪)ㆍ이익(李翊)ㆍ정철(鄭哲) 등이 차자를 올려서 논박하였지만 모두 따르지 않았다.
○ 병오년 봄에, 영남 유생 유세철(柳世哲) 등 1400여 명이 상소하여 송시열이 기해년에 복제를 잘못 의논하여 정한 것을 극론하면서, 《예경(禮經)》에 ‘천자와 제후가 그 아들을 위하여 모두 참최 3년복을 입고, 기년복을 입지 않는다.’는 말을 인용하고, 또 우리나라에서 역대로 전하여 온 종통ㆍ적통이 효종에 대하여 대왕대비께서 기년복을 입음으로써 애매하게 된다고 하면서 《상복고증(喪服考證)》이라고 이름한 책자도 함께 바쳤는데,그 책자의 내용은 윤선도가 하던 말을 따라서 서술한 것이었다. 상소가 승정원에 들어오니, 승지 김수항이, 그 상소의 내용이 임금의 마음을 경동시켜서 선한 사람들을 모두 없애고자 한다는 뜻으로 아뢰면서 상소를 받아들였다.
○ 임금이 답하기를, “그 상소와 책자를 보니, 음흉하고 간사하여 부정한 의사가 가슴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조정에서 이에 대하여 아예 그 근원을 막는 조치가 있어야 할 것이니, 어찌 다만 승지가 말한 선한 것을 좋아하고 악한 것을 미워한다는 것을 밝히어 보이는 데에 그칠 것이랴.” 하였다.
○ 임금이 유시철의 소에 답하기를, “상소 중의 문장과 의사가 들락날락하여 일정하지 아니하고, 동쪽을 말하는데 의사는 서쪽에 있으며, 서쪽을 말하는데 의사는 동쪽에 있으니, 선비들 풍습의 아름답지 못함이 어찌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그리고 소 중에 이른 바, 주자(朱子)가 이렇게 하였다는 말을 보면 그 허다한 말이 도리어 주자에 반대되니 참으로 극히 타당치 못하다.” 하였다. 사헌부ㆍ사간원에서 함께 아뢰어 유세철 등에 죄 주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 임금이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고 하교하여 이르기를, “근래에 인심이 좋지 못하여 영남 선비들의 상소가 있었는데, 그들의 죄를 논하여 처벌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한때의 벌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히 후일의 악한 일을 징계할 수 없고, 다시 다음날 분쟁의 폐단만 될 것 같으니 일정한 제도를 마련하여 천백 년이 가도록 그대로 준행하게 할 도리가 되게 하는 것만 같지 못하겠다.기해년 국상 때의 상복 제도는 모든 것을 《오례의(五禮儀)》에 따라서 시행하였는데, 지금 와서 다시 무슨 고치기를 청할 일이 있기에 예법을 의논한다 빙자하고 현저히 부정한 태도를 보이니, 참으로 매우 한심한 일이다. 차후에 다시 이런 일이 있다면 비록 많은 선비들의 상소라 하더라도 마땅히 엄하게 법을 시행하여 결단코 용서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널리 온 나라 안팎에 알리라.” 하였다.
○ 성균관과 사학(四學)의 유생 홍득우(洪得雨) 등이 상소하여 송시열의 복제설(服制說)이 영남 유생들에 의하여 무함(誣陷)당하였음을 변명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음흉, 간사한 태도는 그들의 가슴속을 들여다보는 것같이 환한데 어찌 너희들의 말을 듣고서야 알리오. 조정에서 처치하는 도리와 방법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 충청도 유생 윤택(尹澤) 등이 상소하여 송시열의 억울함을 변명하니, 임금이 우대하는 비답을 내렸다.
○ 대사간 이은상ㆍ사간 최관(崔寬)ㆍ헌납 이익(李翊)ㆍ정언 이혜(李嵇) 등이 아뢰기를, “공조 정랑 김수홍(金壽弘)은 곧 문충공(文忠公) 김상용(金尙容)의 손자인데, 사특한 말을 주창하여 망령되이 조정의 대례(大禮)를 의논하고, 논설을 지어서 복제를 의논하면서 장자와 서자에 대하여 논변하였는데 말이 어긋나고 망령됨이 많았습니다.또한 오랑캐[淸國]의 연호(年號)를 적은 축문을 문충공의 제사에 썼으니, 사판(仕版)에서 이름을 삭제하소서.” 하였다. 이때 수홍이 긴 글월을 만들어서 시열에게 보내었는데, 그 중에서 예를 논하는 몇 마디는 허목의 주장이 옳은 것으로 말하였다. 이 때문에 대관이 그의 관직을 삭탈할 것을 아뢰어 청하였다.
○ 임자년에 전 정언 조사기(趙嗣基)가 재변(災變) 때문에 상소하기를, “전하께서 왕위를 계승하였으니, 마땅히 어버이를 높이는 도를 다할 것이온데, 적통이 어떠니 효종이 서자니 하는 말은 선대왕을 내려 깎고, 대왕대비의 상복 기간을 단축하는 결과를 면치 못하였으니, 백세 후에도 반드시 그 잘못을 의논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뒤늦게나마 회개하시고 하늘에 계신 효종대왕의 혼령을 위로하소서.” 하였다.
○ 도승지 장선징(張善澂) 등이 아뢰기를, “조사기의 상소 사연이 괴이하고 망령되니, 복제에 관한 말을 다시 하지 말라는 금령(禁令)을 범한 것은 물론하고라도 법관에 회부하여 신문한 뒤에 아뢰게 하소서.” 하여, 사기가 옥에 갇혔다. 사간원의 이합(李柙)ㆍ윤심(尹深)ㆍ민종도(閔宗道) 등은 사기를 멀리 귀양 보내기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았으며 얼마 후에 놓아 주게 하였다.


 

[주D-001]기인(杞人)의 두려움 : 기(杞) 나라에 어느 사람이 늘, “만일 하늘이 무너지면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 걱정하였다는 것인데, 이것은 쓸데없는 지나친 걱정을 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주D-002]고공이 …… 있었다면 : 주(周) 나라의 고공(古公)이 세 아들이 있었는데, 장자(長子)는 태백(泰伯)이요, 말자(末子)는 계력(季歷)인데, 계력의 아들 창(昌 문왕)이 현명하므로 장자인 태백을 두고 계력에게 위를 전하였다.
[주D-003]재궁(梓宮)을 …… 한 일 : 효종이 시체에 부기(浮氣)가 심하고 관(棺)이 좁아서 부판(附板)을 쓰게 되었는데, 이것은 송시열이 염(斂)을 빨리 하지 못하게 한 까닭이다.
[주D-004]제갈량이 …… 벤 일 : 마속(馬謖)이 제갈량의 명령을 어기어 싸움에 실패하였으므로 제갈량이 그의 재주를 아깝게 여겼으나 국법을 위하여 부득이 죽이면서 울었다고 한다.
[주D-005]패목 : 거리에 패목(牌木)을 세워 놓고 누구든지 정치에 대하여 비방할 말이 있으면 이 패목에 써 두라고 한 일이 있다.
[주D-006]네 사람을 죄준 것 : 순 임금이 삼묘(三苗)인 곤(鯀)ㆍ환도(驩兜)ㆍ공공(共工)의 사흉(四兇)을 처단하였다.
[주D-007]사마광(司馬光)은 …… 어려운 데 : 유비(劉備)가 경제(景帝)의 자손이라고 하여 촉중(蜀中)에서 한제(漢帝)가 되어 한 나라 황실의 계통을 이었는데, 《자치통감》에서는 그의 세계(世系)를 밝히기 어렵다 하여 정통(正統)으로 인정하지 않고 당각(唐恪)의 예를 든 것이다.

연려실기술 제33권
 숙종조 고사본말(肅宗朝故事本末)
최관(崔寬)의 집 일 최계창(崔繼昌)의 아들 ○ 최선(崔宣)의 어머니 권씨(權氏)는 바로 석주(石洲) 권필(權韠)의 딸이다. ○ 최관의 5대 손 익남(益男)과 최선의 외손 진익한(陳益漢)은 문과(文科)하였다.


정사년 11월에 전 참봉 최선이 억울한 일이 있다고 징을 치고 잡혔다. 원정(元情)의 대략은, “신의 어머니는 바로 전 감사 최관의 계모입니다. 지난 무술년에 신의 어미가 죽자 형 최관이 제사를 주관하는 장자로서 삼년복을 입었고, 신주 방제(神主傍題)에도 ‘효자 관 봉사(孝子寬奉祀)’라 썼는데, 그 상을 마친 뒤에 신이 성묘 간 때를 기다려서, 계부(季父)인 계웅(繼雄)과 사사로 모의하여 신의 어미의 신주(神主)를 가묘(家廟)에 들이지 않으려고 갑자기 가묘에 고하였으니, 신이 놀라고 원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이유를 물으니, 형이 답하기를, ‘이는 조부의 유명(遺命)으로 조모가 이렇게 하신 것이다.’ 하기에, 신이 또 묻기를, ‘조부의 유명을 일찍이 들은 일이 없는데, 어찌하여 조모의 말을 극구 막지 않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부형의 명을 어찌 감히 거역하겠는가?……’ 하였습니다.가묘에서 추방하는 것이 얼마나 큰 변고인데, 모자간의 정에 만약 그런 기미를 알았으면 어찌하여 혼자만 알고 여러 동생에게는 말하지 않았겠습니까? 곧 이 말을 듣고는 의심스러워서 신이 울면서 계조모(繼祖母)에게 호소하니, 답하기를, ‘80살이나 된 늙은 할미가 어찌 이 일에 참여했겠느냐? 이는 네 형과 네 아자비가 한 일이다.’ 하시기에, 신이 또 울면서 계부(季父)에게 간하니, 답하기를, ‘이는 나 혼자서 한 일이 아닌데 어찌 나만 탓하느냐?’ 하였으니, 이는 아마도 신의 형을 지목한 것일 것입니다. 삼년상을 입고 방제(傍題)에 봉사(奉祀)라 쓰고는 상을 마친 뒤에 이처럼 가묘에서 추방하는 계책을 하는 것은 고금천하에 없는 변입니다. 조모는 그때 나이 벌써 80세였으니, 설혹 타당치 않는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손자된 도리로서 마땅히 울면서 극구 간해야 할 것인데, 하물며 조모가 애당초 참여하여 아는 일이 없다고 한데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한 장의 언문 글을 가지고 유명이라 말하는 것은 전혀 이치에 닿지 않습니다.
대개 신의 어미가 병자년에 시댁에서 친정에 노모를 뵈러 갔다가 병화(兵禍)가 갑자기 일어났기 때문에 사세가 급박해서 미처 시댁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이내 외조모와 같이 강화도로 피난갔다가 성이 함락되던 날에 남녀가 물결처럼 밀려 달아나는데, 신의 어미는 노모 때문에 자결하지 못하고 흰 머리 노쇠한 목숨이 마침내 난병(亂兵)들에게 몰리어 개성부(開城府)로 갔었습니다. 그때 마침 소현세자의 행차가 이르렀는데, 빈객(賓客) 박황(朴潢) 및 요속(僚屬) 등이 늙고 병들어서 굶주리고 추워하는 신의 어미의 모습을 눈으로 보고 거의 죽어가는 것을 불쌍히 여겨 세자에게 고해서 옷과 양식을 얻어주고, 이어서 석 냥 값으로 속(贖)하여 목숨을 보전하고, 개성(開城) 도사(都事) 홍정(洪霆)의 가족과 같이 한 배로 강화도로 돌아갔습니다.신의 조부가 난리가 지나자 서울로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신이 먼저 어미 있는 곳에서 조부를 와서 보니, 조부가 보고 기뻐서 울며 말하기를, ‘만약 박황과 홍정이 아니었으면 너의 어미는 길가에서 시체가 될 뻔했구나. 다만 네 외조모가 죽었으니 그 장사가 마치기를 기다려서 빨리 네 어미를 데리고 오너라.’ 하였습니다. 난리 뒤에 장사 지내자니 시일이 자연 늦어졌는데, 정축년 8월에 조부가 죽으니, 신의 어미가 맏며느리로 제사를 맡아 삼년상을 입었고, 조모 곁에 20여 년의 오랜 세월을 같이 있었으나 온 집안이 예전처럼 대접했고, 무술년 신의 어미의 상사(喪事) 때에도 조모가 맏며느리 복을 입었으며, 집안의 시공복(緦功服)의 친족도 모두 그 복을 입었는데, 상을 마치던 날에 이르러서 비로소 가묘에서 내치려는 의논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당초에 가묘에서 내친 뒤에 선비들의 공론이 중하게 일어나서 모두 ‘어미를 폐하였다.’는 것으로 지목하고, 모두 분하여 팔을 걷어붙이고 마음 아파하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갑자기 일설(一說)이 있어서 사대부들 사이에 돌기를, ‘송시열의 의논은 이같이 처치하는 것이 타당하니, 최관이 상복을 입은 것은 실로 후하게 한 것이다.’ 한다 하니, 듣는 이가 살피지 않고 부화뇌동하므로 신이 생각하기를, 시열은 글 읽은 사람이라 대강 의리를 알 것인데, 어찌하여 이런 경우 없는 말을 해서 남의 모자(母子)의 윤리를 어지럽히는고? 하고, 곧 시열의 집에 가서 자세하게 그 전후 사실을 진술하고, 이어서 묻기를,‘어디에서 얻어 듣고 이런 나의 형이 삼년상 입은 것은 후하게 한 것이라는 말을 하였는고?’ 하니, 시열이 답하기를, ‘그대의 형의 아들 세주(世柱)가 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증조부의 유명으로 계모가 내쫒긴 지가 오래되었는데, 상을 입은 까닭은 동기간을 위해서 남의 이목을 덮고자 해서이다.’라고 하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답한 것이다, 하기에, 신이 또 묻기를, ‘만약 내가 말한 사실과 같다면 이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니, 시열이 눈을 감고 답하지 않고 좌우를 돌아보며 딴말을 하였으니, 그가 신의 조카에게서 먼저 들은 말로 주장을 삼는 뜻을 대개 추측하였습니다.세주가 변고를 저지르기 전에 거짓말을 꾸며서 시열의 뜻을 시험삼아 탐지해 본 것인지, 혹은 변고를 저지른 뒤에 ‘어미를 폐했다.’는 말을 두려워하여 시열의 말을 빌려 도움이 되게 하려 함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변고 전에 물은 것인지 변고 후에 물은 것인 그것은 놓아두고 아직 논하지 않거니와, 손자로서 조모(권씨)의 허물을 증거댐은 그 사람됨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이미 상복을 입었으니 쫓아버리지 않은 것을 증명한 것인데, 후하게 하였다고 칭찬하고 마땅히 쫓아버려야 한다고 하니, 이것이 어찌 예를 아는 이(시열)의 사람을 가르치는 일입니까? 당초에 신이 형에게 말하기를, ‘이것을 개정하지 않으면 이는 어미가 없는 것이니, 사람이 어미가 없으면 어떻게 천지간에 설 수 있겠습니까?’ 하니, 형이 답하기를, ‘송시열은 당세의 사림의 종장(宗匠)이고, 국가의 원로(元老)이니, 내 마땅히 그의 말을 듣고 결정하겠다. ……’ 하였는데, 신은 세주가 꾸며서 무함한 말을 듣고는 비로소 형이 이미 그 아들을 시켜 먼저 시열의 뜻을 탐지하고서 이 말을 한 것인 줄 깨달았습니다. 다른 뜻을 두고 시열에게 탐문해서 어미의 죄를 구성하는 것은 진실로 사람의 자식으로서는 차마 못할 것인데, 시열은 어찌 의리의 합당 여부와 처사의 어그러지고 그릇됨을 살피지 않고 바로 이런 근거 없는 말을 내어서 드디어 신의 형으로 하여금 그 말을 빙자해서 불측한 데에 빠지게 한단 말입니까?
신의 형이 일찍이 고부(古阜) 군수로 있을 때에 신의 어미의 신주(神主)도 받들고 갔는데, 체차되어 올 때에 신에게는 알리지 않고 신주의 방제(傍題)를 계부 계웅(繼雄)과 같이 사사로 분칠하여 고쳐 신의 이름으로 써서 신의 집으로 보냈습니다. 이 뒤로부터 여러 고을 수령을 지냈으나 한번도 신의 어미 신주를 받들고 가지 않았으니, 고부로 가져간 것은 다만 개제(改題)할 계략으로 한 것입니다. 신의 형이 일찍이 감사가 되어 신의 어미에게 추증(追贈)이 되니, 신의 생각으로는 형이 후회하는 마음이 생겨 장차 모자의 의리를 회복할 것이라 생각하고, 그 개제할 때에 또 방제를 전과 같이 형의 이름으로 쓸 것을 청하니, 형이 거절하고 듣지 않았습니다. 이는 겉으로만 ‘어미에게 영광을 미치게 한다.’ 하여 전이 송시열의 ‘후하게 하였다.’는 말을 실증하려고 함에 불과합니다.조정 신하들 사이에 이 일로써 형을 논핵하고자 하니 없앨 수 없는 공론에 끝내 잠잠하고 있을 수 없게 되자 문중의 친척들이 서로 같이 모의하기를, ‘이미 잘못된 뒤에는 다시 어쩔 수 없으니, 종자(宗子 최관을 이름)로 하여금 중한 죄에 빠지게 하는 것이 이 변을 사실로 만드는 것만 못하다.’ 하고, 처음에 논의가 갑을로 나뉘었던 자들도 점점 합해져서 같이 호응하여 도리어 더욱 얽고 꾸미니 신의 어미의 억울함은 밝히고 씻을 길이 없습니다.” 하였다.
○ 전 감사 최관의 원정의 대략은, “집안의 망극한 변과 말하기 어려운 일은, 변명하고 죽는 것이 변명하지 않고 죽는 것만 못하나, 엄하게 물으시는 아래에서 끝내 침묵할 수 없습니다. 조모가 조부의 유언으로 어미를 처치한 후, 신의 3형제는 망극할 뿐이어서 변통하기 어려울 것 같았는데, 동생 최선이 번번이 말하기를, ‘조모와 계부가 이미 처치한 것이나, 조모와 계부는 모두 벌써 죽고 지금은 형이 아들로서 홀로 가묘를 받들고 있으니, 그 처치를 고쳐서 어머니의 신주를 가묘에 들이는 것이 마땅하다.’ 하기에, 신이 가묘에 들이고 싶은 정은 비록 그의 뜻과 같으나, 이미 조모와 계부가 조부의 유서로 선대를 위하여 계모를 처치하고 유서를 작성해 둔 뒤이므로 이미 그들이 죽었다고 해서 마음대로 고치지 못할 것 같기에 이 말을 들어주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 그(아우)의 원정을 보니, 여러 많은 말이 모두 차마 들을 수 없는 것이오니, 명백하게 아뢰고 나서 죽겠습니다. 무술년 3월 어미가 죽기 전에 미처 처치하지 못하고, 3년이 지난 경자년 1월에 조모가 어미의 대상(大祥)이 되기 전에 처치하고자 하여 여러 자녀들을 모아놓고 의논해서 정하였는데, 그때 동생 최선은 어미 산소에 가 있어서 조모가 불러도 오지 못하고, 신과 막내동생 최헌(崔憲)이 서울의 다른 집에서 어미 상을 받들었는데, 조모가 신의 형제와 여러 숙부를 불러 모두 모아놓고, 조모가 말하기를, ‘내가 너희 조부와 정축년 3월에 피난지에서 처음 서울에 들어왔는데, 너희 조부는 너희 어미가 강화도에서 불행한 일이 있었단 말을 듣고 너희 어미를 처치하려고 하였으나, 큰 난리가 겨우 평정되어 서울에 있던 자녀와 친족들이 먼 밖에 흩어져 있어서 진작 처치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뜻밖에 병이 중해져서 나와 곁에 있는 자녀들에게 유언하기를,‘내 생전에 미처 처치하지 못하고 죽으니, 내가 죽은 뒤에 내 말대로 며느리를 가묘에 들이지 못하게 하라.’ 하였는데, 정축년 8월에 너희 조부가 죽어서 생전에 너희 어미를 보지 못하였으니, 내가 마땅히 유언대로 곧장 처치할 것이나, 너희 조부 삼년상 안에 망극하게 세월을 보냈고, 또 그가 낳은 자손들은 위해서 차마 대의(大義)로써 결단하지 못하고 해가 오래되도록 시일을 미루었는데 너희 어미가 갑자기 내 생전에 죽으니, 그의 초상 때에는 그가 낳은 자손을 위하여 다른 사람의 이목을 덮고자 해서 너로 하여금 상복을 입게 한 것은 비록 일시의 변통이긴 하였으나 마음에는 끝내 미안한 바가 있었다.대상 전에는 처치하지 않을 수 없으니, 오늘 가묘에 고하고 처치하라. ……’ 하니, 신의 형제가 놀라고 황공함을 이기지 못해서 뜰에 내려가 엎드려서 머리를 숙이고 울면서 청하였으나, 조모가 엄하게 명하기를, “너희 마음의 가련함을 알기는 하지만 너희 조부 평생에 선조를 위하는 도리가 지극히 공경스럽고 정성스러웠으며 본성품이 엄격하고 단정해서 죽을 때의 유언도 엄중하였다. ……’ 하고, 끝내 들어주지 않아 계부 계웅이 축문을 지어 가묘에 고하고 처치한 것입니다. 쫓겨난 데에 대해서 설명한 것이 매우 많으나 다 기록하지 못한다. 조모가 또 신의 조부의 동생들 사이에 왕래하며 의논하여 정했는데, 그때 조부의 누이 동생인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 부인이 혼자 세상에 살아 있으니, 가묘는 역시 부부인(府夫人) 부모의 사당이었기 때문에 조모와 계부가 이같이 처치할 뜻을 같이 의논해서 결정한 것이니, 그 집 자손들도 모두 그 실상을 알고 있습니다. 당초 처치할 때에 참여한 자녀들의 자손 중에는 전 사간 이무, 직장 이재(李㦳)ㆍ이빈(李䎙)ㆍ최식(崔寔)ㆍ장두팔(張斗八)ㆍ최실(崔實) 등이 모두 이 일의 전말을 다 알고 있습니다. ……” 하였다. 이빈은 계창의 아우 계흥(繼興)의 사위이다.
○ 전 사간 이무의 원정에, “외백숙(外伯叔) 최계창(崔繼昌)의 계실(繼室) 권씨가 병자년 난리에 더러운 욕을 당한 일은 세상에 말이 자자하니 제기할 필요도 없거니와, 신 등의 외조부는 행실과 본성품이 엄정하여 집안의 일처리를 한결같이 법도에 따랐습니다. 권씨가 욕을 당한 뒤에 항상 자손과 친족에게 이르기를, ‘권씨가 자살하지 못하고 욕을 참고 돌아왔으니, 그가 어찌 감히 내 집에 발을 들이겠느냐? 그 오라버니 권항(權伉)의 집에 보내라.’ 하였으며, 정축년 8월에 외조부의 상사가 난 뒤에도 권씨가 끝내 분상(奔喪)하지 못하였으니, 외조부의 생시에 맏며느리로 대접하지 않은 것은 이것으로도 알 것이온데, 권씨가 시부상에 삼년을 주관했다는 말은 거짓이 막심하옵니다. 외조부가 임종할 때에 외조모와 자녀들에게 유언하기를, ‘내가 번번이 친족을 모아서 가묘에 고하고 처치하려고 하였으나, 큰 난리가 겨우 평정되어 친족이 흩어져 있어서 미처 처치하지 못하였으니, 내 죽은 뒤에 권씨가 비록 죽더라도 결단코 가묘에 들여서 선대의 사당을 더렵혀서는 안 될 것이다.” 한 것은 온 집안 자손들이 밝게 아는 일입니다.권씨가 죽은 뒤에 상복을 입은 일절(一節)은 외숙 계웅이 외조모에게 결정하기를 여쭈니, 외조모가 이르기를, ‘한갓 법으로만 따지면 장손 최관이 상복을 입을 의리가 없으나, 내가 차마 끊지 못하는 것은 권씨가 낳은 최선과 최헌이 있으니 지극한 인정에 차마 못할 것이지만, 삼년상을 입은 뒤에 가묘에 들이는 일은 결단코 변동할 수 없다.’ 한 것입니다. 경자년 1월에 축문을 써서 가묘에 고하고 이내 유서를 작성해 두었는데, 외사촌이 실지로 참여해서 정하고 모두 이름을 썼는데, 최선의 원정에는 조모와 삼촌이 언급하지 않은 말을 지어내서 가묘에서 내친 일을 모두 장형(長兄) 혼자 마음대로 한 일로 돌려서 죄목을 억지로 만들어 근거 없는 모함을 하니, 그 꾸미고 속이고 해괴한 실상은 형언할 수 없습니다.‘문중의 친족들이 처음에는 의논이 갑을로 나뉘었다가 점점 합치해서 서로 같이 호응했다.’는 말은 더욱 근거가 없습니다. 대체로 가묘에서 내치는 일은 실로 조부의 유언으로 된 것이니, 비록 효도하고 사랑하는 자손이라도 영원토록 고치지 못할 것이니, 최선의 도리로서는 마땅히 원통함을 참고서 그 허물을 덮어야 할 것인데, 지금에 와서 조모와 삼촌이 다 죽은 뒤에 부형을 불측한 말로 얽고 꾸며서 도리어 그 치욕을 스스로 외치는 것입니다.” 하였다. 그 외의 여섯 사람의 원정을 기록하지 않으나 대의는 이와 비슷하다.
○ 금부에서 아뢴 대략에, “최관이 상복을 입은 것은 그 두 동생을 위한 것뿐만이 아니며, 신주 방제를 처음 썼다가 뒤에 고친 것은 모두 사세의 당연한 것이니, 공자가 말한 ‘허물을 보면 인(仁)을 알 수 있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서를 작성해서 처치한 뒤에 그 낳아준 어미와 같이 일체 증직(贈職)을 받았으니 이미 그 조부모의 유의(遺意)에 어긋났으며, 또 임금의 은명(恩命)을 모독하는 죄가 있으니, 마땅히 이 일로써 논정할 것이며, 최선의 어미가 포로가 되고서도 죽지 않은 것은 사람들이 다 아는 바이고, 죽은 뒤에 가묘에 들이지 못하게 한 것은 그 조부의 유언을 조모가 시행한 것이었고,그 숙부와 여러 종형제가 붓으로 써서 서명하였으니, 이처럼 분명한데도 가묘에서 내친 일을 전적으로 최관이 한 것이라 칭탁하고, 낱낱이 얽어 무고하여 반드시 불측한 죄에 빠뜨리고자 하였으니, 그 어미의 악함을 씻으려 하다가 더욱 그 악함을 드러내었고 무죄한 형을 해치고자 하다가 속이고 무고하는 죄에 스스로 빠졌으므로, 국법에 그냥 둘 수 없으니 법에 비추어 최선은 곤장 1백 대와 삼천 리 유형에 처하고, 최관은 곤장 1백 대에 도삼년에 처하옵소서.” 하니, 임금이 특명으로, “용서할 만한 정상이 있으니 파직시키고 석방하라.” 하였다.


광주부윤(廣州府尹) 천
겸병조판서 홍중보(洪重普) : 민유중(閔維重)·정륜(鄭錀).
행공조판서 이완(李浣) : 민희(閔熙)·김우석(金禹錫)·최일(崔逸).
지중추부사 김좌명(金佐明)·민유중(閔維重)·심재(沈梓)·신후재(申厚載).
호조판서 김수흥(金壽興) : 이익(李翊)·정륜(鄭錀)·최관(崔寬).
이조판서 김수항(金壽恒) : 이익(李翊)·심재(沈梓)·정륜(鄭錀).
행대사헌 박장원(朴長遠)
한성부판윤 오정일(吳挺一) : 심재(沈梓)·신후재(申厚載)·정석(鄭晳).
예조판서 정지화(鄭知和) : 심재(沈梓)·정륜(鄭錀).
지충추부사 유혁연(柳赫然) : 민희(閔熙)·이익(李翊)·정륜(鄭錀).
형조판서 이경억(李慶億) : 민희(閔熙)·최관(崔寬)·권즙(權諿).
이조참판 조복양(趙復陽)
행부제학 민정중(閔鼎重) : 이익(李翊)·여성제(呂聖齋)·최관(崔寬).
천망(薦望) : ○ 김만기(金萬基)·심재(沈梓)·여성제(呂聖齋).

무낭청 망 : 교체됨 이담(李신출자)의 후임, 훈련초관(訓鍊哨官) 박이장(朴以樟).
광주부윤(廣州府尹) 천
겸병조판서 홍중보(洪重普) : 김만균(金萬均)·신명술(申命述)·허진(許璡).
행지사 이완
행예조판서 김좌명(金佐明) : 정재숭(鄭載嵩)·이세화(李世華).
행부호군 정지화(鄭知和) : 김징(金澄)·민시중(閔蓍重)·원만리(元萬里).
지사 유혁연(柳赫然) : 민시중(閔蓍重)·원만리(元萬里)·허진(許璡).
지사 이경억(李慶億)
호조판서 민정중(閔鼎重) : 원만리(元萬里)·최관(崔寬).
형조판서 서필원(徐必遠)
이조판서 이경휘(李慶徽)

비망 : ○ 정재숭(鄭載嵩) 민시중(閔蓍重), 이세화(李世華).

 

수원부사 천망
행호조판서 김수흥(金壽興) : 안진(安縝), 김만균(金萬均), 소두산(蘇斗山).
행이조판서 김수항(金壽恒) : 김만균(金萬均), 최관(崔寬), 성후설(成後卨).
예조판서 정지화(鄭知和) : 성후설(成後卨), 김만균(金萬均), 소두산(蘇斗山).
병조판서 민정중(閔鼎重) : 최관(崔寬), 소두산(蘇斗山), 신정(申晸).
공조판서 유혁연(柳赫然) : 성후설(成後卨), 김익훈(金益勳), 허정(許珽).
한성부판윤 이경억(李慶億) : 최관(崔寬), 안진(安縝), 성후설(成後卨).
병조참판 김만기(金萬基) : 안진(安縝), 최관(崔寬), 소두산(蘇斗山).

○ 김익훈(金益勳), 신정(申晸), 소두산(蘇斗山).

 

현종 12년(1671) 10월 21일

수원부사 천망
행호조판서 김수흥(金壽興) : 안진(安縝), 성후설(成後卨), 신정(申晸).
행이조판서 김수항(金壽恒) : 김만균(金萬均), 최관(崔寬), 신정(申晸).
예조판서 정지화(鄭知和) : 성후설(成後卨), 신정(申晸).
병조판서 민정중(閔鼎重) : 최관(崔寬), 신정(申晸).
공조판서 유혁연(柳赫然) : 김만균(金萬均), 성후설(成後卨), 신정(申晸).
우참찬 이경억(李慶億) : 안진(安縝), 최관(崔寬).
병조참판 김만기 : 성후설(成後卨), 신정(申晸).
망 : ○ 성후설(成後卨), 최관(崔寬), 안진(安縝).

정원에서 아뢰기를
"방금 영접도감의 계사에 '전부터 칙사가 연향을 중지하도록 하는 경우 으레 중사를 특파하여 문안하고, 치사하는 규정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 칙사도 여러 곳의 연향을 정지시킨 일이 있으니 전과 같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치사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별사(別使)의 경우 폐단이 있으니 황주에서 돌아오는 영위사로 하여금 별문안사의 소임을 그대로 행하게 하는 일을 이미 재가를 받았습니다. 어첩(御帖)·명첩(名帖)은 전날 가져 간 것으로서 올리고 오라는 뜻을 본원에서 금군을 별도로 정하여 영위사 최관(崔寬)에게 명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여 감히 이에 아룁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啓曰, 忠淸道巡撫使任奎罷職之代  

 숙종 1년(1675) 2월 27일

 

 

아뢰기를 
"충청도 순무사 임규(任奎)를 파직한 후임으로 행부호군 최관(崔寬)을 임명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답하였다.

東萊府使薦   숙종 2년(1676) 5월 26일

 

이조에서 아뢰기를
"동래부사(東萊府使) 어진익(魚震翼)을 잡아다 추고하는 일을 하명하셨습니다. 그 대신을 비변사로 하여금 의논하여 천거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동래부사(東萊府使) 천(薦)
행이조판서 민희 : 윤지선(尹趾善)·이복(李馥).
공조판서 유혁연 : 윤지선·유지발(柳之發)·박순(朴純).
의정부좌참찬 오정위 : 박순·안여석 (安如石)·윤지선.
호조판서 오시수 : 안여석·박순·홍석귀(洪錫龜).
의정부우참찬 민점 : 윤지완(尹趾完)·안여석.
병조판서 김석주 : 최관(崔寬)·이덕주(李德周)·홍석귀.
행사헌부대사헌 윤휴
예조판서 홍우원 : 이덕주·이복.
행부호군 목래선 : 안여석·최관.
행부호군 신여철 : 박순·윤지선·유지발.
병조참판 정석 : 박순·홍만종(洪萬鍾).
병조참의 이우정 : 윤지완·이복.
천망(薦望) : 윤지선(尹趾善)·○ 이복(李馥)·박순(朴純).

현종 3권, 1년(1660 경자 / 청 순치(順治) 17년) 12월 19일(경자) 1번째기사  송시열·윤문거·목겸선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송시열을 판중추부사로, 윤문거(尹文擧)를 대사헌으로, 목겸선(睦兼善)을 집의로, 박증휘(朴增輝)를 장령으로, 최관(崔寬)을 지평으로, 성초객(成楚客)을 길주 목사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36책 288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현종 14권, 8년(1667 정미 / 청 강희(康熙) 6년) 9월 20일(신유) 1번째기사 집의 최관이 최선의 일로 인피하다

     

집의 최관(崔寬)이 아뢰기를,
“신은 집안이 화를 당한 뒤끝에 살아남아 온 몸에 허물이 쌓인 천지간의 한 죄인입니다. 소패(召牌)가 내렸는데도 나아가지 못하였으니, 책임을 회피한 죄를 모면할 길이 없습니다. 파직하여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사신은 논한다. 최관의 계모인 권씨(權氏)는 병자 호란을 당하여 청나라 사람에게 잡혀갔다가 구차하게 살아 돌아왔으니, 참으로 허물이 있다. 당시에 권씨의 시부모가 모두 살아 있었으며, 최관 역시 성인이었다. 만약 최관의 할아버지가 대의(大義)로 책하여 절연(絶緣)하고서 최관으로 하여금 어머니로 대하지 못하게 하고, 또 권씨가 죽은 뒤에는 가묘(家廟)에 들이지 말라는 뜻으로 명백하게 유언을 만들어 자손들에게 남겨주었다면, 누가 감히 그것을 그르다고 하였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서 권씨가 살아 돌아오자 총부(冢婦)로 대우하여 제사를 주관하게 하고 최관으로 하여금 어머니로 섬기게 하였으며, 최관의 숙부인 최계웅(崔繼雄)이 형수로 섬긴 것이 20여 년이었다. 그리고 권씨가 죽었을 때에는 시아버지는 이미 죽었으나 시어머니가 살아있으면서 장부(長婦)의 복(服)을 입었고, 최관은 3년복을 입어 조금도 낮추는 예가 없었다. 그러다가 장례를 마치고 관을 묻는 날에야 계웅이 비로소 그의 어머니의 말이라고 하면서 “권씨의 신주를 우리 집안의 가묘(家廟)에 들일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최관이 드디어 그 말에 따라 자신의 이름을 방제(傍題)에서 삭제하였으며, 권씨의 신주를 권씨가 낳은 아들인 최선(崔宣)의 집으로 내쫓아 보냈다. 아, 모자간의 천륜과 삼년상의 제도가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 전후의 처사가 이와 같이 어그러졌단 말인가. 설령 최관이 그 사이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어지러운 집안의 자식임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대각에 출입하다니, 외람되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36책 565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가족-가족(家族) / *역사-편사(編史)

 

현종 20권, 13년(1672 임자 / 청 강희(康熙) 11년) 7월 15일(무오) 3번째기사  최관을 황해도 관찰사로 삼다

최관(崔寬)을 황해도 관찰사로 삼았다. 최관은 몸가짐이 맑고 검소하여 정치가 엄중하고 분명하였다. 부임한 뒤에 맨 먼저 안악 군수(安岳郡守) 김수증(金壽增)과 연안 부사(延安府使) 이민장(李敏章)을 쫓아내니 온 도가 숙연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작은 죄로 파직되어 돌아갔다. 김수증김수항의 형이며 이민장이민적의 형이었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37책 22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사법(司法) / *가족-친족(親族

 

 

○以崔寬黃海道觀察使。 律己淸約, 莅政嚴明。 赴任後, 首黜安岳郡守金壽增, 延安府使李敏章, 一道肅然, 未久以微罪罷歸。 壽增壽恒之兄,

 

敏章敏迪之兄也。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37책 22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사법(司法) / *가족-친족(親族)

 

현종 대왕 행장(行狀)

 

 

국왕의 성은 이씨(李氏)이고 휘(諱)는 연(淵)이며 자(字)는 경직(景直)이니, 효종 대왕의 아들이고 인조 대왕의 손자이다. 어머니 인선 왕후(仁宣王后) 장씨(張氏)는 의정부 우의정 장유(張維)의 딸이다. 효종이 대군(大君)으로 있을 때에 심양(瀋陽)에 볼모로 들어갔는데, 신사년1077) 2월 4일에 심양 관소(舘所)에서 대왕을 낳았다. 왕은 어려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어 두세 살 적부터 행동거지가 범상하지 않았는데, 4세에 본국으로 먼저 돌아왔다. 인조 대왕이 무엇을 물을 때마다 어른처럼 대답하였으므로 인조 대왕이 매우 기특하게 여겨 사랑하였다. 여러 왕자·왕손과 함께 궁중에서 자랐는데, 인조 대왕이 항상 말하기를,
“이 아이는 보통 아이보다 특별히 다르니 내 뒷날의 근심이 없겠다.”
하였으니, 대개 기대한 바가 있었던 것이다. 이때 효종이 미처 귀국하지 못하였는데 왕이 부모를 사모한 나머지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볼 적마다 축원하기를,
“부모가 어서 돌아오게 하여 내가 뵐 수 있도록 해 주소서.”
하였다. 새로 맛있는 음식을 대할 적마다, 그 지방1078) 에서 생산되지 않는 것이면 바로 보내게 하고 나서야 맛을 보았다. 왕이 5세에 궁중 안의 시아(侍兒)가 쑥대 화살[蓬矢]로 그의 동기를 쏘아 눈을 다치게 했다는 말을 듣고 골육을 해친 것을 미워하여 마침내 그를 멀리 내쫓아 버렸다.
인조가 한번은 증선지(曾先之)1079) 《사략(史略)》을 펴놓고 제왕들의 어질고 어질지 못함에 대해 죽 들어 물었는데, 요(堯) 순(舜)에 이르러서는 지극히 어질다고 대답하고, ·에 이르러서는 매우 나쁘다고 대답하였다. 인조가 묻기를,
은 어째서 어질고 ·는 어째서 나쁜가?”
하자, 왕이 대답하기를,
요임금은 흙으로 계단 세 층을 만들었고, 금옥(金玉)을 멀리하고 군자를 가까이 하였으며, 그의 인자함은 하늘과 같고 그의 지혜로움은 신과 같았으니, 어찌 어질지 않습니까. ·는 백성의 재물을 긁어모아 창고에 채워 놓는가 하면 궁전과 누대를 화려하게 지었으며 충성으로 간하는 자를 비방한다고 하고 의견을 올리는 자를 요망한 말이라고 하였으니, 어찌 나쁘지 않습니까.”
하니, 인조가 더욱 기특하게 여겼다.

 

한번은 인조가 방물(方物)을 받다가 표피(豹皮)의 품질이 나빠서 되돌려 보내려고 하였다. 왕의 나이 이때 7세였는데 곁에 있다가 말하기를,
“표범 한 마리를 잡으려면 아마도 사람이 많이 다칠 듯합니다.”
하니, 인조가 그 뜻을 가상히 여겨 돌려 보내지 말라고 명하였다.
부모가 쓰는 의복이나 거마(車馬), 그리고 기용(器用)에 있어서는 비록 하찮은 물건이라도 반드시 공경을 다해 다루고, 감히 다른 데로 옮기지 않았다. 부모의 경계를 들으면 기뻐하였다. 때로 여염집에 나가 임시 거처하면서 부모가 원하지 않는 바는 감히 행하지 않았는데 곁에 있는 것처럼 하였다. 가까운 이웃 중에 목소리가 큰 사람이 있어 시자(侍者)가 꾸짖어 금하자, 왕이 말리기를,
“사람이 자기 집에 있으면서 어찌 소리를 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땅히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어야지 괴롭게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한번은 궁중에서 나오다가 떨어진 옷을 입고 얼굴색이 검은, 합문(閤門) 밖을 지키는 군졸을 보고 묻기를,
“어찌하여 이와 같은가?”
하니, 시자(侍者)가 대답하기를,
“얼고 굶주려서 그렇습니다.”
하였다. 왕이 탄식하다가 옷을 주도록 명하고 또 내관(內官)으로 하여금 남은 밥을 계속 주되 그가 천경(踐更)1080) 을 마칠 때까지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곤궁하여 굶주린 사람을 볼 적마다 불쌍히 여기고 반드시 구휼해 주었다. 어렸을 적에 나타난 그의 효성과 우애 그리고 자애와 밝은 덕이 이와 같았다.
기축년1081) 2월에 인조인정전(仁政殿)에 친히 납시어 왕세손(王世孫)으로 책봉(冊封)하였는데, 자태가 우뚝하고 의도(儀度)가 한아(閑雅)하였으므로 백관이 서로 하례하였다. 강서원(講書院)을 설치하고 강관(講官)을 두었는데 학문에 더욱 부지런하였다. 먼저 《소학(小學)》을 읽었는데, 주(註)까지 정밀하게 잘 외웠으므로 강관이 탄복하였다. 이해 5월에 인조 대왕이 승하하고 효종 대왕이 왕위를 잇자, 왕이 세자의 자리에 올랐다. 이에 보도(輔導)가 더욱 갖추어지니 슬기로운 덕이 날로 진취하였다. 효종이 또 왕에게 농사의 어려움을 알게 하려고 일찍이 농부로 하여금 후원(後苑)에 들어와 밭을 갈게 하고는 왕으로 하여금 보도록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소가 사람에게 공이 있습니다. 사람이 노력해야 먹을 것을 얻는다는 게 이와 같은가 봅니다.”
하고, 자주 일컬었다. 왕은 기억력이 매우 뛰어나, 무릇 한번 보고 들은 것마다 잊지 않았다. 일찍이 《맹자(孟子)》를 다 읽고 나자, 효종이 시험해 보려고 일시에 모두 외우게 하였는데, 7편을 다 외우는 동안 조금도 틀리지 않았으므로 효종이 매우 놀라고 기뻐하였다. 어려서부터 장성할 때까지 독서하는 일이 아니면 부모의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부모의 몸이 편치 못하면 밤낮으로 부축하고 시중을 들며, 비록 물러가 쉬라고 명하여도 물러가지 않았다.
신묘년1082) 가례(嘉禮)1083) 를 행하였는데, 왕비 김씨(金氏)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의 딸이다.
임진년1084) 에 입학(入學)하는 예를 행하고 선성(先聖)1085) 에게 전을 드리며 배알하였다. 이어서 박사(博士)에게 나아가 학업을 청하였다. 예의에 맞는 거동이 장엄하고 중후하며 강하는 음성이 크고 맑으니, 뜰 주위에서 듣는 선비들이 너나없이 감탄하며 기뻐하였다.
기해년1086) 5월 4일에 효종이 승하하자, 왕이 상막(喪幕)에서 상(喪)을 주관하면서 상례를 옛날 예법대로 하며 슬퍼하고 야위움이 《예경(禮經)》보다 과도하게 하였다. 5일이 지난 9일에 왕이 인정전(仁政殿)에서 왕위에 올랐다. 왕이 안색에 슬픔을 띠고 곡하는 소리가 애처로우니 뭇 관료가 차마 쳐다보지 못하였다. 이때 이조 판서 송시열(宋時烈), 좌참찬 송준길(宋浚吉) 등이 실로 상례를 주관하였는데, 대왕 대비(大王大妃)1087) 에게 대행 대왕(大行大王)1088) 을 위하여 기년복(朞年服)을 입게 하였다. 이는 대개 《의례(儀禮)》 주소(注疏)에 ‘비록 승중(承重)하였더라도 삼년복(三年服)을 입어주지 못하는 경우가 네 가지가 있다.[雖承重不得爲三年者有四種]’는 설을 채용한 것이다. 성복(成服)1089) 하기 전에 송시열이 이에 대해 포의(布衣)인 윤휴에게 물으니, 윤휴가 말하기를,
예(禮)에 ‘임금을 위해 참최(斬衰)를 입고 내종(內宗)·외종(外宗)이 모두 참최(斬衰)를 입는다.[爲君斬內外宗皆斬]1090) ’는 문구가 있으며, 또 제왕가(帝王家)는 종통을 중시하고 있으니, 네 가지 설[四種說]1091) 은 아마도 쓸 수가 없을 듯하다.”
라고 하였으나, 송시열이 따르지 않았다. 연양 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이 삼년의 설을 옳게 여겨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에게 보고하고 그 설을 따르려 하였으나, 송시열이 이미 네 가지 설을 옳게 여기고 마침내 말하기를,
“국제(國制)에는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장자나 서자(庶子)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기년복을 입게 되어 있다.”
라고 하였다. 조정에서 그 의논을 대신에게 내려 의논하게 하였는데, 대신의 의논도 모두 송시열의 뜻과 같으므로 마침내 기년의 복제가 행해졌다.
왕이 평소에 유술(儒術)을 중히 여겼다. 송시열·송준길 등이 선왕조(先王朝)1092) 때부터 선비라는 이름이 있어 크게 일시의 추앙을 받았고 선왕도 그들을 매우 신임하였다. 왕에 이르러서도 그들을 중시하고 예로 받들었으므로 대체로 조정의 큰 의논은 대부분 송시열 등으로부터 나왔다. 그러나 송시열은 실로 성질이 집요하고 편당짓기를 좋아하였으며 학식이 없었다. 그가 의논드린 국제(國制)란 것도 실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대상(大喪)의 제도가 아니었으므로, 그 논의를 들은 사람은 근심하고 탄식하였다.
영부사 이경석(李景奭)효종 대왕의 행장을 지어 올리자, 왕이 서찰을 내려 이르기를,
요(堯) 순(舜)의 도는 효도와 공순일 따름이다. 요순의 치세(治世)를 이루려면 요순의 도를 다해야 한다. 선왕은 이것으로써 몸을 닦고 교화(敎化)를 이루는 근본으로 삼으셨다. 또 세상의 일을 몹시 개탄하신 나머지 어진 사람과 출중한 사람들을 예로 초빙하여 심복으로 삼고 도의(道義)를 서로 닦아, 이 세상을 삼대(三代)의 시대로 만회하고 대의를 천하에 펴려고 하였으니1093) , 이는 실로 선왕의 뜻으로서 평일 수립한 커다란 규범이다. 그런데 지금 이 행장 중에는 그다지 거론하지 않았다. 이 한 조항을 명백하게 써서 후세에 전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서찰이 나오자, 이를 본 신하들은 선왕을 천양(闡揚)하려는 생각과 계술(繼述)하려는 뜻에 너나없이 감복하였다.
이때가 한창 무더운 여름철인데다가 상막도 좁고 누추하였으므로 측근의 신하가 서늘한 가을이 될 때까지 다른 곳으로 옮기자고 청하자, 왕이 이르기를,
“지금이 어느 때인데 거처를 가린단 말인가. 좋은 곳을 가려 지내면 몸은 편안하겠지만 마음은 편치 않을 것이다.”
하였다. 10월 27일에 효종 대왕영릉(寧陵)에 장사지냈다. 초하루와 보름날의 제전(祭奠)마다 심한 병을 앓지 않을 경우에는 대행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가서 능침(陵寢)을 참배할 적에 슬피 곡해 마지않으니 근시(近侍)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으며 심지어는 자신도 모르게 울움을 터뜨린 자도 있었다.
이 해에 노인을 우대하고 의지할 데 없는 외로운 사람을 구휼하는 은전(恩典)을 거행하였으며, 충효(忠孝)와 절의가 있는 사람, 청백한 관리, 전쟁터에 나가 죽은 사람의 자손에게도 세시(歲時)마다 음식물을 지급하였다. 형벌을 남용한 관리는 종신토록 금고(禁錮)시키고 서명(叙命)1094) 의 문부에 써넣지 말라고 명하였다. 이때 내수사(內需司)의 무명 1천 필을 내려 어린아이에게 징수하는 면포에 보태 쓰게 하여, 어린아이 9천 명에게 징수하는 군포(軍布)를 견감하였으며, 징수한 군포 중 외방에서 쓰는 것은 감영(監營)과 병영(兵營)에 저축된 것을 쓰도록 명하였으며, 서울에 납입하는 수량은 상평창(常平倉)의 백금(白金) 5천 냥으로 대체해 주었다. 또 명하여 제도(諸道)에서 이웃이나 일가붙이에게 대신 징수하는 폐단을 제거하고 비어 있는 군인의 액수를 충정(充定)하는 조처를 느슨히 하였으며, 각도의 대동미(大同米)를 감하고 산릉(山陵)에 진상하는 물선(物膳)을 줄였다.
해서(海西)에 수재가 들었다 하여, 특별히 재해입은 전세(田稅)를 면제하고 신역(身役)을 견감하였다. 호남·경기·호서에서 수납하는 세미(稅米)를 차등있게 감해주고, 흉년이 특히 심한 곳은 더 감해 주었으며, 다른 도에도 그렇게 하였다. 북도에 흉년이 들었다하여, 공물과 부역을 임시로 감해 주고 정배(定配)된 사람을 남방으로 옮기었다. 그리고 관서 지방의 걸식하는 유민(流民)들에게는 관향(管餉)의 미곡으로 사람의 수효를 계산하여 무상으로 주게 하였다. 왕이 즉위하여 정사를 환히 습득하고 백성의 고통을 보살폈으므로 거행한 바가 모두 용도를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여 그 고통을 제거해 는 일이었다.
즉위 1년인 경자년1095) 정월에 단천(端川)에 기근이 들었다 하여, 공은(貢銀) 4천 냥을 감해 주었다. 사관(史官)을 좌참찬 송시열(宋時烈)에게 보내어 도타이 타일러서 올라오게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병을 이유로 면직을 청하자, 왕이 도타이 타일러서 출사(出仕)하게 하였다. 영동·영서의 대동미를 견감하여 그 도의 진휼에 보태 쓰게 하였다. 어사를 보내어 영동·영서·관서에 떠돌아다니는 북도의 백성들을 위문하고 구휼하여 안주케 하였다. 강원도삼세(三稅)1096) 중에서 수미(收米)1097) 와 노비의 공포(貢布)를 감해 라고 명하였다.
재령(載寧)에 사는 김두영(金斗榮)이란 자가 고변하였는데 70여 인을 불러 심문하였으나 그런 사실이 없었다. 김두영에게는 무고율(誣告律)을 받게 하고 무고당한 모든 사람에게는 모두 양식을 주어 방면하였으며, 금부의 이졸(吏卒)에게 재물을 빼앗긴 자에게는 모두 찾아서 되돌려 주게 하여 너그럽게 보살펴 는 뜻을 보였다.
2월에 호구(戶口)의 법을 더욱더 엄밀하게 하였는데 우윤(右尹) 권시(權諰)의 말을 따른 것이다. 대신과 비국의 당상을 인견할 때에 왕이 이르기를,
“지난번 흉년이 들었을 적에 백관의 녹봉을 ‘모두 감해야 한다.’고 여러 신하들이 말하였으나, 선부왕(先父王)께서 특별히 어공(御供)을 재량해서 감하고 백관의 녹봉은 그대로 두게 하셨다. 지금도 비록 궁핍하지만 녹봉을 먼저 감할 수는 없으니 어공 중에 감할 수 있는 것을 또 뽑아 아뢰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3월에 비변사에서 남은 정포(丁布)를 강원 감사(江原監司)에게 내려 재해를 당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고 또 서울과 지방의 노인에게 음식물과 쌀·포목을 나누어 주었다. 전라도의 여러 고을에서 지급한 물건이 너무나 보잘것없다고 하자 왕이 이르기를,
“조정에서 베풀려고 하는 은덕의 뜻을 어찌 이같이 소홀히 할 수 있단 말인가. 그 고을의 수령들에 대해 벌을 논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90세나 1백 세 된 노인에게는 특별히 명주와 솜을 더 주도록 명하고 또 문·무과의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빈궁하여 양식을 싸 가지고 올라오지 못하는 자는 연도의 각 고을로 하여금 양식을 공급하게 하여 과거에 응시하도록 하였다.
전 장령 허목(許穆)이 상소하여, 대왕 대비(大王大妃)가 효종 대왕에게 기년복(朞年服)을 입어 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논하고, 《의례(儀禮)》 가공언(賈公彦)의 소(疏)에 ‘적처(嫡妻)에게서 난 둘째 아들을 세웠을 경우에도 역시 장자(長子)라고 부른다.[取嫡妻所生第二長者立之亦名長子]’는 말을 인용하여 말하고 또 아뢰기를,
소현(昭顯)이 이미 세상을 일찍 떠났고, 효종께서 인조 대왕의 둘째 아들로 종묘를 이었으니 대비(大妃)께서 효종을 위해 자최 삼년(齊衰三年)을 입어야 함은 예(禮)로 볼 때에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혈통이기는 하나 정통이 아니므로 삼년복을 입을 수 없다.[體而不正不得爲三年]’는 것으로 비교하였으니, 신은 그것이 어디에 근거를 두고 한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왕이 그 소를 예조에 내리니, 예조가 대신과 유신(儒臣)에게 의논하여 결정하기를 청하였다. 좌참찬 송준길(宋浚吉)이 난점을 제기하면서 어물어물 결정하지 못하고, 정희 왕후(貞熹王后)1098) 예종(睿宗)을 위해 입은 복제(服制)를 《실록(實錄)》에서 고증하기를 청하고, 또 아뢰기를,
“가령 어떤 집안에 10여 명의 아들이 있는데 전중(傳重)한 다음 잇따라 죽을 경우 모두 참최복을 입어 주어야 합니까? 주소(註疏)에 이미 둘째 아들부터는 서자(庶子)가 된다는 의의를 분명히 말하였는데, 허목은 꼭 첩의 아들이라고 하니, 예의 뜻이 과연 이와 같은지 모르겠습니다. 또 어떤 사람의 의논은 이르기를 ‘제왕가(帝王家)는 왕통(王統)을 잇는 것을 소중히 여기므로 태상황(太上皇)1099) 사군(嗣君)1100) 을 위해서는 비록 지자(支子)로서 입승(入承)하였다 하더라도 마땅히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라고 하는데, 이는 정체(正體)이든 정체(正體)가 아니든 모두 삼년복을 입어 주어야 한단 말입니까?”
하였다. 우찬성 송시열(宋時烈)은 기년 복제가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극력 말하고 또 《예경(禮經)》의 장자(長子)·서자(庶子)의 설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서자(庶子)라는 칭호는 물론 첩의 아들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임금의 아우[母弟]도 또한 서자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효종 대왕이 인조 대왕의 서자라고 해도 지장이 없습니다. 옛날에도 물론 적자(嫡子)를 버리고 서자를 세운 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인이 예를 제정할 때에는 반드시 장자와 서자(庶子)의 구별에 마음을 다하였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차자가 장자가 된다.’는 설은 물론 가공언(賈公彦)의 소(疏)에 있고, 황면재(黃勉齋)1101) 《통해속(通解續)》에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정자(程子)주자(朱子)의 감정(勘定)을 거치지 않았으니 그 설이 과연 허목이 말한 바와 같은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연양 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 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은 병 때문에 의논을 개진하지 못하였다. 사관이 강화(江華)《실록(實錄)》을 고증하여 아뢰기를,
예종 대왕이 승하하였을 때에 정희 왕후가 어떤 복을 입었는지 고증할 수 없고, 기년(期年)도 못 되어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복을 벗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4월에 부호군(副護軍) 윤선도(尹善道)가 상소하여 복제를 논하였는데, 그 대략에 아뢰기를, “성인이 상례(喪禮)를 오복(五服)으로 제정한 것이 어찌 우연히 한 것이겠습니까. 친소(親疎)와 후박(厚薄)을 이것이 아니면 구별할 수 없으며, 경중(輕重)과 대소(大小)를 이것이 아니면 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이를 사용하면 부자의 윤기가 밝아지고, 국가에서 이를 사용하면 군신이 분의(分義)가 엄해지며, 하늘과 땅의 높고 낮음과 종묘와 사직의 보존과 망함이 모두 여기에 매여 있으니, 이게 바로 막중 막대해서 터럭만큼도 참람하거나 어긋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적통(嫡統)을 계승한 아들은 할아버지와 체(體)가 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적자(嫡子)에게 반드시 참최 삼년(斬衰三年)을 입도록 복제를 만든 것은 아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곧 조종(祖宗)의 적통을 계승하였기 때문입니다. 사가(私家)에서도 이렇게 하고 있는데 하물며 국가이겠으며, 삼대(三代)의 태평한 세상에서도 이렇게 하였는데 하물며 위태롭고 어지러운 말세의 때이겠습니까. 신민의 마음을 정하고 불만을 품은 자들이 넘보는 것을 끊는 것이 이 상례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국가를 소유한 자가 이 예에 삼가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신은 듣건대, 효종 대왕(孝宗大王)의 상에 대왕 대비전의 복제는 《예경(禮經)》을 고증해 보면 자최 삼년(齊衰三年)으로 정해야 함은 의심할 것이 없는데, 당초 예관(禮官)의 의주(儀註)에 기년복으로 정하였으므로 조야(朝野)의 신민 중에 유식한 이는 모두 놀라고 탄식하며 그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게 어찌 대통(大統)을 밝히어 백성의 뜻을 정하고 종사를 튼튼히 하는 예라고 하겠습니까. 이야말로 곧바로 의논하여 바로잡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연기(練期)1102) 가 임박하였으나 적적하게도 국가를 위해 이 말을 올리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신이 평소 깊이 생각해 볼 때 종사에 대한 근심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저번에 전 장령 허목《예경(禮經)》을 상고하여 소 한 장을 올렸다는 말을 듣고 신은 자신도 모르게 나라에 사람이 있구나 하고 기뻐하였습니다.
아, 허목의 말은 예를 의논하는 대경(大經)일 뿐만 아니라 실로 국가를 경영하는 지극한 계책이니, 말을 듣지 않으실 경우 후회해 보았자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하께서 결단을 내리시어 곧바로 예관으로 하여금 성경(聖經)에 의거하여 바로잡게 하셔야 할 터인데 송시열에게 다시 물으신 것은 유신(儒臣)을 우대하는 뜻에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송시열은,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기대승(奇大升)의 논평을 듣고 깜짝 놀라 옛날의 견해를 바꾸면서1103) ‘만일 기명언(奇明彦)이 아니었다면 천고의 죄인이 됨을 면하지 못할 뻔하였다…….’라고 한 것 처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도리어 나쁜 줄을 알면서도 그대로 행하고 허물을 어름어름 숨기려는 심산으로, 《예경》의 글귀를 주워모아 자기의 의견에다 뜯어 맞추었으므로 그 사설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번다하였습니다. 그러나 《예경(禮經)》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참최복을 입어 는 것은 오직 할아버지와 체(體)가 되는 데 있고 성인이 이 예를 엄하게 하는 것은 다만 종묘의 계통을 잇는 데에 있다는 큰 뜻에 대해, 종시 견해가 미치지 않았고 언급되지도 않았습니다. 신은 실로 그 말에 복종하지 못하겠고 그 의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 선조(先朝) 때부터 신임하여 위임한 이로는 송시열·송준길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일생 동안 강구(講究)한 바는 예학이었고 자기들도 이를 맡을 만하다고 자부하였을 것입니다만, 국가의 대례(大禮)에 대해 이처럼 소견이 빗나갔는데, 더구나 자기 몸을 닦고 남을 다스리는 도리와 나라를 튼튼히 하고 천하에 위엄을 펼치는 계책을 같이 의논할 수 있겠습니까.
이번 대왕 대비의 복제는 마땅히 삼년으로 의주(儀註)를 고친 다음 팔방에 알려, 대소의 신민으로 하여금 조정의 의논이 이의(異意)가 없음을 환하게 알도록 함으로써 명분을 바르게 하고 국시를 정하여 나라의 형세를 태산처럼 안전한 터전 위에 올려 놓아야 하며, 기년(朞年)만에 복을 벗는 일은 결코 해서는 아니되고, 삼년상으로 정하는 것은 결코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소가 정원에 이르자, 승지 김수항(金壽恒) 등이, 그의 마음씀이 음흉하고 속임수로 허풍을 쳐서 현란하게 한다고 지레 헤아려 아뢰니, 왕이 명하여 그의 소를 돌려주고 그의 관작을 삭탈하여 향리로 돌아가게 하였다. 김수항이 입대(入對)하여 아뢰기를,
“그의 죄상을 따져보면 비록 국문을 하더라도 괜찮을 것입니다. 그를 향리로 내쫓는 조치만으로는 그의 죄악을 징계할 수 없습니다.”
하고, 부제학 유계(兪棨), 부교리 안후열(安後說), 수찬 심세정(沈世鼎) 등은 윤선도의 말이 흉악하고 참혹하므로 그의 소를 불태우고 먼 변방으로 내쫓자고 청하였다. 이에 윤선도삼수(三水)로 귀양가고 말았다. 관학 유생(館學儒生) 이혜(李嵇) 등은 소를 올려 국가의 형벌을 바르게 시행할 것을 청하고, 대사간 이경억(李慶億), 사간 박세모(朴世模), 정언 권격(權格), 장령 윤비경(尹飛卿), 지평 이무(李堥)·정수(鄭脩) 등은 엄히 국문하여 율(律)에 비추어 죄를 정하자고 누차 아뢰었으나, 왕이 따르지 않고 다만 안치(安置)하라고 명하였다.
우윤 권시가 상소하여, 윤선도를 율에 비추어 죄를 정한 것은 잘못되었다고 극구 말하고, 또 아뢰기를,
“대왕 대비께서 오늘날의 상에 삼년복을 입어야 함은 필연코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지금 비록 의리로 헤아려 제정한다 하더라도 백세토록 질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송시열이 이른바 ‘선왕1104) 은 서자가 되어도 지장이 없다.’고 한 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온 세상이 모두 그 잘못된 점을 알면서도 감히 말하지 못하고 있는데, 윤선도는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는 바를 말하였으니 그 또한 과감히 말하는 선비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조정의 논의가 크게 격렬해져서‘죄없는 선비를 죽인다.’1105) 라고 한 말과 불행히도 비슷하게 되었습니다.”
하니, 왕이 비답을 내려 가상히 받아들였다. 그런데 김수항이 그 비답을 봉해 왕에게 도로 올리고 누차 반대의 의견을 아뢰자 마침내 비답을 고쳐 ‘그를 죽이는 것은 불가하나, 귀양보내자는 여러 사람의 심정은 결국 어길 수 없다.’는 것으로 분부하였다.
사간원의 이경억·박세모와 사헌부의 윤비경·이무 등이, 윤선도를 논하다가 권시에게 배척을 받았다 하여 그를 논계하고, 부제학 유계는 관료(館僚)인 교리 김만기(金萬基) 이시술(李時術), 부수찬 심세정 등을 거느리고 차자를 올려 권시의 죄를 논하고 또 윤선도의 소를 불태워버리기를 거듭 청하자, 윤비경·이경억·박세모 등이 또 소를 올려 그를 공격하였다. 정언 권격은, 권시흉인(凶人)1106) 을 비호한다 하여 파직을 청하였다가 곧바로 중지하였다. 공조 좌랑 이상(李翔)이 소를 올려 권시를 매우 강력히 공격하고, 부호군 이유태(李惟泰)도 입대(入對)하여 그를 극렬히 논하였는데, 심지어는 제갈양마속을 죽인 일’1107) 을 들어 말하였다. 그 뒤에 대사간 이정기가, 동료가 갑자기 계사를 중지하였다 하여 다시 그를 논하여 파직시켰다.
처음에 권시가 도성문 밖에 나가 대죄(待罪)할 적에 왕이 특별히 사관을 보내어 위로하고 타이르라고 명하였다. 그런데 승지 박세성(朴世城)이, 대론(臺論)이 바야흐로 격렬하다는 이유로 즉시 거행하지 않자, 왕이 진노하여 ‘대간이 있는 것만 알고 임금이 있는 것은 모른다.’고 하면서 엄한 분부를 내려 잡아다 국문하고 장차 왕명을 거역한 것으로 죄주려 하였다. 승정원과 양사에서 그 명을 도로 거두도록 계청하였으나 왕이 모두 윤허하지 않다가 얼마 뒤에 대신의 말로 인하여 풀어주었다.
4월에 모든 궁가(宮家)의 원당(願堂)을 혁파하였다. 또 묘당(廟堂)에 명하여, 강원도에 있는 모든 궁가(宮家)와 각 아문이 떼어받은 시장(柴場)에 대해 의논하여 혁파하고 지금부터 더 설치하지 못하게 하였다. 상평청(常平廳)에 명하여 북도·영동·영서의 굶주린 백성 가운데 도성 안으로 흘러 들어온 자에 대해 각부(各部)로 하여금 보고하게 하여 쌀과 소금을 지급하게 하고, 도성 백성 중에 특히 끼니를 잇지 못한 사람에게도 일체로 시행하게 하였다. 그리고 가흥창(可興倉)에 바쳐야 할 영(嶺) 밑 11개 읍의 전세(田稅)를 가을을 기다렸다가 거두어 들이라고 명하였다.
7월에 크게 가물자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라고 명하였다. 나라의 제도에 가을 이후에는 기우제를 지내지 않게 되어 있는데, 이때 와서 특별히 거행하였다.
8월에 각 아문에서 매매한 이식(利息)을 이웃과 일가붙이에게 나누어 징수하는 폐단을 금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흉년에 이미 어공(御供)을 감하였으니 관원들의 녹봉도 감하소서.”
하니, 왕이 이르기를,
“어공을 줄였다고는 하나 감하지 않은 물품이 아직도 많은데 하필이면 관원들의 녹봉을 먼저 감한단 말인가.”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8월 26일에 영릉(寧陵)을 참배하였는데, 시위하는 장사들에게 당부하여 도로가의 벼와 곡식을 손상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9월에 흉년이 들자 승지에게 교서(敎書)를 초하게 한 다음 팔방에 두루 유시하여 안주하게 하고, 어공(御供) 중의 정미(精米)·중미(中米)와 주방(酒房)의 향온미(香溫米)를 감하게 하였다.
10월에 우레가 치는 재변이 있자 정원과 옥당이 더욱 수성(修省)하시기를 청하니, 왕이 가상히 받아들였다. 이때에 관서에 암탉이 수탉으로 변하는 이변이 있었는데, 왕이 교서를 내려 자신을 책하고 직언(直言)을 두루 구하였다.
11월에 팔도에 명하여 각각 인재를 천거하도록 하였다. 빈청(賓廳)에서 아뢰기를,
“사위스러운 질병이 있으니 계복(啓覆)1108) 을 정지하소서.”
하니, 왕이 이르기를,
“아, 천성은 사람마다 지니고 있건만, 어리석은 백성이 법령을 준수하지 않고 타고난 천성을 회복하지 않아 악한 일을 하기에 이르렀다. 복심(覆審)해야 하는 죄인을 즉시 처리하지 않고 또 그를 엄하게 가두어 두면, 아무리 죄는 비록 사형에 해당되지만 그 정상은 슬픈 일인데, 심지어 죄없이 감옥 속에서 죽는 것이겠는가. 여기까지 생각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참담해진다. 금년에 이것 때문에 복심을 거행하지 않고 명년에 또 이것 때문에 복심을 행하지 않는다면 저 죄인들은 모두 감옥 속의 귀신이 되고 말 터이니, 이는 국가를 다스리는 도리가 아니다.”
하였다.
신축 2년 정월에 도성 안에 있는 두 이원(尼院)을 철거하였다. 전에 왕이 승니(僧尼)들이 교화를 어지럽히는 것을 미워하여 ‘승니들을 모두 환속(還俗)하게 하라.’고 하교하였다. 그런데 대신과 옥당이 갑자기 거행하기 어렵다고 아뢰자 왕이 명을 내려 도성 안의 자수원(慈壽院)인수원(仁壽院) 두 곳을 철거하게 하여, 나이 젊은 자는 속인으로 돌아가게 하고 늙은 자는 성 밖으로 내쫓았다. 그리고 헐어버린 불사(佛寺)의 재목으로 학궁(學宮) 및 무관(武館)을 수리하게 하였다. 대체로 불교는 신라 때에 비롯되어 고려 때에 성하였고, 우리 조선조에 와서도 다 제거하지 못하였는데, 이때 와서 시원하게 물리쳤으니, 수천 년 동안 없었던 쾌거였다. 명을 내려 중외(中外)의 음사(淫祀)1109) 를 금하고 내탕고의 면포를 내려 서울의 수용(需用)을 보충하였다.
4월에 가뭄이 들자 승지를 보내어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게 하였는데, 상규(常規)에 구애되지 말고 속히 너그럽게 방면하여 정체된 죄수가 없게 하라고 하였다. 명을 내려 윤선도의 유배지를 북청(北靑)으로 옮기도록 하였는데, 집의 곽지흠(郭之欽), 헌납 오두인(吳斗寅), 교리 김만균(金萬均) 등이 그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다. 고 상신 이시백(李時白)이 청백하고 충성스런 지조가 있다 하여 3년 동안 녹봉을 그대로 주도록 하였다. 어사 6인을 삼남(三南) 지방에 나누어 보내 백성들의 고통을 살피게 하였다. 가뭄이 들자 교서를 내려 자신을 꾸짖고 어선(御膳)을 감하고 술을 금하였다. 그리고 뭇 관원들을 신칙(申勅)하여 공경하고 부지런히 하며 단결하고 화합하도록 하였다. 친히 기우제를 지내려 하자, 경연의 신하들이 성상의 건강이 편치 못한 것을 들어 말하니, 왕이 이르기를,
“내 어찌 내 한 몸을 아껴 백성들의 목숨을 돌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부사직(副司直) 조경(趙絅)이 소를 올려 윤선도를 구원하였는데, 대략 아뢰기를,
“가뭄을 고민하는 일로는 억울한 죄수를 심리하는 것을 첫째가는 의의로 삼습니다. 일국의 갖가지 죄수들에 대해 어느 누가 거론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윤선도만 홀로 심리 대상에 들어가지 않았으니 무엇 때문입니까? 신은 윤선도의 죄가 무슨 죄인지 모르겠습니다. 윤선도의 죄는 오직 종통(宗統)·적통(嫡統)으로 효종을 위하여 편든 데에 있을 뿐입니다. 위로는 선왕(先王)께 충성을 다하고 아래로는 전하에게 효도하는 도리를 권면한 것이니, 그 성의가 뚜렷하여 가릴 수가 없습니다. 윤선도가 소를 올릴 때에 누가 전하를 위하여 소를 태워버리라는 계책을 올렸습니까? 신이 삼가 전대의 사서(史書)를 보니, 공민왕이존오(李存吾)의 소를 불태웠고,1110) 광해주(光海主)는 정온(鄭蘊)의 소를 불태웠습니다.1111) 공민왕광해주는 난망(亂亡)을 초래한 임금이 아닙니까. 오늘날의 조정 신하가 요(堯) 순(舜)의 도리로써 전하를 인도하지 않고 도리어 전하에게 난망의 전철(前轍)로 인도하며 직접 멍에를 메고 따르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신은, 후세에 오늘날의 일을 보는 것이 오늘날에 옛일을 보는 것과 같을까 염려됩니다.
윤선도가 죽고 사는 것은 신이 논할 필요가 없고 신이 애석히 여길 것이 없습니다만, 그가 말씀드린 종통(宗統)·적통(嫡統)의 설은 단연코 버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전하께서 만일 크게 깨달아 종통의 귀결을 명확이 분변하여 선왕의 실록(實錄)에 밝게 실어서 후세에 예를 논하는 자로 하여금 감히 다른 말이 없게 한다면 신도(神道)에서 찾아보더라도 어찌 인정과 멀겠습니까. 좌우에 오르내리시는 우리 조종(祖宗)의 영혼이 이치상 저승에서 기뻐하여, 견책을 거두어 상서가 되고 한재를 바꾸어 장맛비가 되게 하여 전하로 하여금 우리 자손과 백성을 장구히 보전하게 할 것이니, 그 덕이 뭇 산천(山川)에 가서 제사를 지내어 보답을 비는 것보다 더 크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소가 주달되자, 승지 남용익(南龍翼) 등이 ‘악인과 편당을 지어 터무니없는 말로 허풍을 친다.’고 아뢰니, 그 소를 되돌려 라고 명하였다. 집의 곽지흠(郭之欽), 장령 박증휘(朴增輝) 등은 벼슬을 삭제하여 쫓아내자고 청하고, 대사간 이은상(李殷相), 정언 권격(權格) 등은 먼 곳으로 귀양보내자고 청하는 등 달이 넘도록 논쟁하였다. 그리고 부제학 유계(兪棨), 교리 이민적(李敏迪) 등은 양사(兩司)의 청을 따르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따르지 않았다.
6월에 장차 태묘(太廟)에 부제(附祭)하는 예를 행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진하(陳賀)·반교(頒敎)·음복연(飮福宴)을 정지하고, 환궁(還宮)할 때에도 나례(儺禮)와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 결채(結綵)하는 등의 일을 모두 정지하게 하였다. 명을 내려 윤선도를 위리 안치(圍籬安置)하게 하였는데, 대사간 이은상이 탑전(榻前)에서 아뢰었기 때문이다.
7월에 강도(江都)남한 산성(南漢山城)의 쌀을 옮겨 삼남(三南)을 진휼하게 하였다. 호조 판서 허적(許積)이 술 담그는 쌀을 감하기를 청하니, 왕이 이르기를,
“백성의 목숨이 죽어가고 있으니, 진실로 우리 백성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
하고, 삼남(三南)의 감사에게 별도로 유시를 내려 각각 굶주린 백성을 구제해 살릴 수 있는 계책을 생각하도록 하였다. 7월 7일에 왕이 태묘(太廟)에 나아가 효종 대왕의 부묘례(附廟禮)를 행하고 인종(仁宗)·명종(明宗)의 신주를 영녕전(永寧殿)에 조천(祧遷)하였다. 대개 국조의 묘사(廟祀)는 태조세실(世室)1112) 이외에 사친(四親)1113) 을 제사지내는데, 형제는 같은 소목(昭穆)의 제도를 쓰게 되었으므로 인종과 명종 두 위는 이때에 5대가 되어 조천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왕이, 양묘(兩廟)1114) 를 같이 조천하는 것은 중대한 일이라고 하여 대신과 유신(儒臣)에게 물었다. 판중추부사 송시열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묘제(廟制)의 세대 수를 태조로부터 사친(四親)까지 5세로 잡는다면, 인종과 명종 두 위는 모두 대수 이외에 해당됩니다. 오늘날 아울러 옮기는 것이 의심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다만 일설이 있습니다. 제왕가(帝王家)에서는 대통의 계승을 중히 여기므로 형이 아우의 뒤를 계승하고 숙부가 조카의 뒤를 계승하더라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여기어 각각 소목(昭穆)이 됩니다. 그러므로 《춘추(春秋)》에서는 역사(逆祀)1115) 하는 것을 비평하였고, 주자(朱子)는 ‘송(宋)나라 태조·태종과, 철종(哲宗)·휘종(徽宗)이 모두 형제이긴 하지만 한 세대로 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논하였습니다.
지금 우리 인종명종은 비록 형제간이지만 의리는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두 위를 합하여 한 세대로 치는 것이 비록 과거에 사례가 있기는 하나, 공자(孔子)주자(朱子)의 말씀으로 헤아려 보면, 인조 대왕을 태묘(太廟)에 합부(合附)할 때에 먼저 인묘(仁廟)를 조천하고 오늘 또 명묘(明廟)를 조천하는 것이 올바른 예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일이므로 말할 것이 없습니다만, 앞으로 영녕전(永寧殿)에 옮겨 모실 적에 소목(昭穆)을 둘로 만들어서 과거의 온당치 못한 일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또 생각건대, 우리 나라의 종묘 제도는 태조 및 사친(四親)의 신주가 모두 태묘(太廟)에 있으나, 목조(穆祖)·익조(翼祖)·도조(度祖)·환조(桓祖)의 조천한 신주는 모두 영녕전(永寧殿)에 모셔져 있습니다. 태묘는 정묘(正廟)이고 영녕전은 별묘(別廟)인데 높으신 목조께서 별묘(別廟)에 모셔져 있으니, 의리나 예로 헤아려보면 편안한 바가 아닙니다. 송나라 조정에서 의논하는 이가 희조(僖祖)를 별묘에 옮기려 하자, 주자(朱子)가 그 잘못된 점을 극력 말하였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의 태묘송나라 종묘 제도에 비교하고 주자의 설로 증거해 보면, 우리 목조는 곧 송나라목조와 같고 주(周)나라후직(后稷)에 비교되며, 태조태종송나라태조와 태종 같고 주나라문왕(文王)무왕(武王)에 비교됩니다. 그런데 목조께서 태묘의 윗자리에 계시지 못하고 태조태묘의 제1실에 계시니, 이른바 ‘희조(僖祖)는 공업(功業)이 없고 천하를 얻은 것을 자기가 이룩한 것으로 여겨 강약(强弱)을 다투어 비교해 겸손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아마도 그 당시 태조께서 효도로 봉양하던 마음이 아닐 듯한데, 어질고 효성스런 군자가 아니라도 그 불가함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의견으로는, 우리 선왕을 옮겨 합부하는 때를 인하여 서둘러서 예관(禮官)과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서로 더불어 강구하게 한 다음 목조태묘의 제1실로 옮겨 모시어 시조로 삼고 태종·태조 이하의 세실(世室)의 예를 일체 주나라의 옛 제도처럼 하며, 또 태묘에 동서의 협실(夾室)을 만들어 익조 이하 조천한 신주를 모시면 명분이 바르고 이치가 맞게 되며 의리가 밝아지고 일이 온당하여 백 세 이후에 성인이 나오더라도 의혹되지 아니할 것으로 여깁니다…….”
하였다.
왕이 그 소를 해조(該曺)에 내리니, 예관이 아뢰기를,
“조묘하는 일은, 인종과 명종 두 위를 아울러 옮기는 데 대해 대신과 유신이 이의가 없었습니다만 그 밖에 진달한 바는 국가의 막중하고도 막대한 예에 관계되므로 해조가 감히 의논할 수 없으니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니, 왕이 윤허하였다. 원임 대신 이경석(李景奭),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좌의정 심지원(沈之源) 등은 여론의 비난을 받고 있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의견을 개진하지 않았고, 원임 대신 정유성(鄭維城)은 ‘대신과 유신이 한곳에 모여 의논하여 그 가부를 정밀히 강구하자.’고 청하였다. 그 뒤에 정태화. 심지원 등이 탑전에서 그 불가함을 아뢰니, 왕이 마침내 회의를 중지시키고 그의 소에도 답하지 않았다. 대체로 종묘의 제도는, 천자는 시조를 체례(禘禮)로 받들어 하늘과 배향(配享)해서 칠묘(七廟)를 세우고, 제후는 맨 처음에 나라를 봉해 받은 임금을 조(祖)로 받들어 태조로 삼아 사친(四親)까지 아울러 5묘(廟)를 세우니, 이것이 예이다. 우리 나라의 종묘 제도는 실로 옛날 제도를 따른 것이고, 영녕전의 제도도 제법(祭法)의 ‘단선(壇蟬)의 제도’1116) 를 가감하여 조절한 것이니, 곧 선유(先儒)가 이른바 ‘2백 세(世)에 귀(鬼)가 된다.’는 것이다. 송시열의 의견은 선현(先賢)을 모방하되 비의하여 의논한 것이 두서가 없었다. 갑자기 큰 일에 간여하여 옛 헌장(憲章)을 어지럽히려 하였다. 소가 올라가자, 듣는 이가 놀라고 두려워하여 말하기를,
송시열이 이미 복제(服制)의 일로 조정을 그르쳤는가 하면 대통(大統)을 깎아내려 서인(庶人)의 위치와 똑같이 만들었고 또 이로써 오묘(五廟)를 뜯어고치려고 하였으니 천험(天險)1117) 을 범하고 조종에 죄를 얻게 되었다.”
하였다. 왕이 그 의논을 중지시키고 시행하지 않으므로써 종묘의 조주(祧主)가 움직이지 않고 신과 사람이 제자리에서 편안히 있게 되자, 유식한 장로(長老)들이 왕의 깊고 아름다운 식견에 감복하였다.
형과 아우를 한 세대로 치는 설에 있어서는, 우리 나라의 종묘 제도가 비록 동당(同堂)에 모시는 전대의 제도를 따르고는 있으나, 대(代)마다 한 실(室)을 만들어 각기 그 존엄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송나라 시대에 형제의 신위(神位)를 나란히 모시는 제도와는 같지 않다. 이는 형제를 1세(世)로 잡아 같이 조천하는 것으로서 소목(昭穆)을 달리하여 차례로 옮기는 것과는 본디 다르기는 하지만 이 두 예는 《예경(禮經)》에 증거가 없고 선유(先儒)들의 논의가 달라 역대마다 각각 한 왕조의 제도가 되었으니, 갑자기 이것이 옳으니 저것이 그르니 할 수 없는 바가 있으며, 영녕전에 조천하는 것도 소목을 달리할 수 없다. 그런데 송시열은 대개 그것을 구명하지 못하고 말하였던 것이고 왕은 또 그 설을 버리고 묻지 않은 채 구례대로 조묘(祧廟)에 모셨다.
하교하여, 양전(兩殿)에 바치는 경상도 삭선(朔膳)1118) 을 명년 가을까지 감하도록 하고, 전라도·공충도(公忠道)의 삭선도 헤아려 감하게 하였다.
8월 23일에 왕이 영릉(寧陵)을 참배하였다.
9월 24일에 태학(太學)에 거둥하여 선성(先聖)에게 석채례(釋菜禮)를 행하고 이어서 선비를 시취(試取)하였다. 좌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어공(御供)을 이미 감하였으니, 관원들의 녹봉 또한 전대로 두는 것은 부당합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조정의 관원들이 의뢰하는 것은 녹봉인데, 점차로 박해지고 있으니 어떻게 염치를 지키라고 책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11월에 시녀(侍女)를 선발하는 일을 파하도록 명하였는데 사헌부의 청을 따른 것이다.
12월에 명하여 삼남·경기·해서에서 재해를 입은 고을의 조적을 일체 면제해 주고 또 봄에 징수하는 미곡을 감해 주게 하였다. 태복시(太僕寺)의 말 먹이는 곡식 1천여 석을 방출하여 굶주린 백성을 먹이게 하였다. 임인 3년 정월에, 기근이 들었다 하여 금주령을 내리고 모든 관부 및 어공(御供)의 술에 소요되는 것을 모두 파하였으며 조참(朝參)의 거동에 추수 때까지 음악을 쓰지 말라고 명하였다.
2월에 양남(兩南)에 진휼 어사(賑恤御史)를 보내어 편의에 따라 일하라고 하였다.
3월에 한재로 중외에 명하여 억울한 죄수를 심리하게 하였다. 그리고 분부를 내려 자신을 책하고 정전(正殿)을 피해 거처하고 수라의 가짓수를 줄이고 음악을 철거하고 직언을 널리 구하였다. 또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당상을 불러 재이를 중지시키고 구제하는 계책을 강구하였으며, 윤선도의 위리(圍籬)를 철거하라고 명하였다.
4월에 우참찬 민응형(閔應亨)이 뵙기를 청하고 인하여 윤선도를 용서해 줄 것을 청하자 왕이 대신에게 물었는데, 정태화민응형의 말을 옳다고 하였다. 옥당의 김만기(金萬基)는 대간(臺諫)이 윤선도의 위리 철거에 대해 쟁집(爭執)하지 않은 것을 말하고, 지평 이동명(李東溟)·여성제(呂聖齊), 장령 이정(李程) 등이 드디어 위리를 철거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 관원을 보내어, 의주·강화·금화(金化)·광주(廣州)·안주(安州)·토산(兎山)·안변(安邊) 등의 병자 호란(丙子胡亂) 전쟁터와 호남(湖南)의 수상 조련 때에 큰 바람으로 인하여 사람이 빠져 죽은 곳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돌림병이 매우 성하자 중외(中外)에 약물과 양곡을 라고 하였다.
6월에 관원을 보내어 노산군(魯山君)의 묘소에 제사를 드리게 하였다. 노산군영월(寧越)로 물러가 있다가 죽으니 온 나라 사람들이 가련하게 여겼다. 중종·선조·효종조에 모두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드렸는데, 이때 와서 다시 행한 것이다. 절행(節行)이 바른 영남의 사람 하홍도(河弘度)·조임도(趙任道)에게 미곡을 차등있게 하사하였다. 영남 진휼 어사의 서계(書啓)로 인하여 굶주린 백성이 대여받은 곡식을 일체 탕감해 주었다. 제도(諸道)에 홍수가 져서 백성이 많이 떠내려가 죽었다. 제도에 명하여 해당 고을에서 매장하라고 명하였다. 명하여 각 아문(衙門)에서 소유하고 있는 배[船]의 숫자를 정하게 하고, 내수사(內需司)·명례궁(明禮宮)·용동궁(龍洞宮)·수진궁(壽進宮)·어의궁(於義宮) 등의 배는 현존하는 숫자 이외에 더 늘리지 못하게 하였다.
7월에 서북 감사(監司)에게 인재를 찾아내 아뢰라고 명하였다.
8월에 경기경기 균전사(京畿均田使) 민정중(民鼎重)·김시진(金始振) 등을 보내어 전지를 측량하게 하고, 호남의 대동 전결(大同田結)의 미곡과 포목의 수량을 정하였다.
9월 9일에 왕이 건원릉(健元陵)을 참배하였다. 이 해에 고려조의 여러 왕릉(王陵)에 화재와 벌채를 금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남해(南海) 노량(露梁)에 있는 고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의 사당 편액을 하사하였다. 이순신은 선조조에 왜구를 누차 격파하여 충의와 용맹이 가장 드러났고 전쟁터에서 죽은 사람이다.
계묘 4년 3월에 영녕전을 다시 지었는데, 옛 규모를 넓히고 익실(翼室)을 고쳤다.
4월에 여러 궁가(宮家)의 전결(田結)을 정하였는데, 대군·공주·왕자·옹주가 차등이 있었다. 수찬 홍우원(洪宇遠)이 상소하기를,
“신이 삼가 보건대 전 참의 윤선도는 일찍이 우찬성 송시열이 예를 잘못 의논하였다고 소를 올려 송시열을 공박 배척하였는데, 조정의 논의가 크게 일어났기 때문에 윤선도가 먼 변방에 위리 안치되고 말았습니다. 그 뒤에 심리로 인하여 북청(北靑)으로 옮기었다가 대간(臺諫)의 소장이 또 제기되어 다시 옛날의 유배지(流配地)로 돌아갔습니다. 신이 일찍이 윤선도의 소를 얻어 보았는데, 그 의미와 말투가 대부분 분노에 격동된 데서 나왔고 지나치게 문구를 따졌으니 윤선도의 일은 참으로 잘못입니다. 그러나 그의 종통과 적통에 관한 말은 실로 명백하고 정확하여 바꿀 수 없는 논의였습니다. 송시열이 비록 산림(山林)의 유아(儒雅)로 큰 명망을 짊어지고 있으나 그가 예를 잘못 의논한 잘못은 참으로 가릴 수 없습니다. 지금 송시열을 옹호하는 사람은 완전히 그 과실을 덮어 주고 심지어 사람들로 하여금 감히 의논하지 못하게 하려 하며, 윤선도를 배척하는 사람은 윤선도가 사림(士林)의 화를 빚으려 한다고 지척하여 곧바로 흉적(凶賊)으로 지목하고 있습니다. 윤선도가 말한 것이 사리에 지나친 점은 물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어찌 사림의 화를 빚으려는 의사야 있었겠습니까. 사람마다 각각 소견이 있으므로 구차히 같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공론이 있는데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그 견해가 나와 같지 않은 것이 싫어서 억지로 같게 만들고자 하고 사대부의 사이에 조금만 의논을 달리하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떼를 지어 일어나 공격합니다. 허목이 재차 예를 논하는 소를 올리게 되어서는 먼 지방의 군(郡)으로 내쫓고, 파면되어 돌아온 뒤에는 수용(收用)하지 않았으며, 권시가 이의를 제기하자마자 곧 중한 탄핵을 입었으며, 조경윤선도를 구원하는 말을 한마디 하자 간사한 사람으로 지적됨과 아울러 그의 아들까지 연좌의 율(律)을 입었습니다. 조경은 여러 조정을 거친 노성한 신하입니다. 그의 평생 충직하였던 오롯한 지조는 신명(神明)에게 질정할 수 있는데 지금 갑자기 변하여 간사한 사람이 되었으니 어찌 옛 사람이 말하는 ‘사람은 진실로 쉽게 알 수 없지만 사람을 알아보기란 또한 쉽지 않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는 실로 신이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신은 윤선도와 본디 알고 있는 사이가 아니므로 감히 그를 위해 변호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생각건대, 윤선도는 본디 기절(氣節)이 있고 과감히 말하는 사람입니다. 일찍이 소를 올려 혼조(昏朝)에서 절개를 세웠고,1119) 선조(先朝) 때에는 사부(師傅)의 옛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말을 잘못한 과실로 풍상(風霜)이 험난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유배되어 백수의 쇠잔한 나이에 죽을 날이 얼마 남아있지 않으니 참으로 하루아침에 갑자기 죽어 성조(聖朝)에서 선비를 죽였다는 이름을 끼칠까 염려됩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불쌍히 여기시고 어서 방면하여, 전리에 돌아와 죽게 하소서. 이것 또한 인자한 성주(聖主)께서 사람에게 막하지 못하는 하나의 어진 정사입니다.”
하니, 왕이 너그럽게 비답하였다.
사간원의 김만균(金萬均)·송시철(宋時喆)·원만리(元萬里)와 사헌부의 정계주(鄭繼胄)·김익렴(金益廉) 등이, 홍우원을 삭탈 관작하여 쫓아내기를 청하고, 옥당의 이민적(李敏迪)·이익(李翊)·정석(鄭晳) 등도 차자를 올려 논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7월에 한재로 인해 분부를 내려 자신을 책하면서 도움되는 말을 구하고, 중외의 대소 신료에게, 서로 공경하고 협조하여 직무에 힘써 하늘의 견책에 답하도록 명하였다.
8월에 대신과 비국의 당상을 불러 흉년 구제의 계책에 대해 강구하였다.
9월에 사도시의 어공에 소요되는 정미(精米)를 감하게 하므로 대신이 그대로 두기를 청하니, 왕이 이르기를,
“백관의 봉록을 이미 줄였는데, 어찌 어공(御供)만 감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12월에 명하여 여러 궁가(宮家)의 시장(柴場)을 각자 한 곳에 망정(望定)하여 그 크고 작은 것을 헤아려 남겨 두게 하였고, 어장(漁場)과 망장(網場)은 선조조(宣祖朝)에서 하사한 것 이외에는 일체 허락하지 못하게 하고 비록 하사한 곳이라 하더라도 하사받은 자에게만 한정하도록 하였다.
갑진 5년 5월에, 무술년1120) 이후 내수사(內需司) 노비의 신공(身貢)을 이미 죽은 자의 일가붙이에게 추징(追徵)하는 것을 탕감하고 남한 산성(南漢山城)의 쌀 5천여 석을 경기 지역 고을에 나누어 주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게 하되, 추수를 기다려 이자 없이 도로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7월에 우참찬 김수항(金壽恒)함경 북도에 보내어 변방의 폐단을 조사하게 하였다. 문·무과의 시험을 시행하여 선비를 뽑았다. 해조(該曺)로 하여금 양남(兩南)의 방백에게 분부하여 《소학(小學)》을 인출해 중외에 반포하고 강독을 권하도록 거듭 명하였다.
9월 15일에 왕이 광릉(光陵)을 참배하였다. 호조 판서 허적(許積)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11월 2일에 혜성(彗星)이 진성(軫星)에서 나오자, 하교하여 자신을 책하고 정전을 피해 거처하였다. 대소의 신료에게 명하여 자기의 직분을 삼가고 부지런히 하며, 정사의 득실(得失)에 대해 자세히 진달하게 하였다. 그리고 해조로 하여금 수라의 가짓수를 줄이고 술을 금하는 등의 일을 거행하게 하였다. 바람과 천둥의 변고로 인해 내사옥(內司獄)1121) 의 죄수를 방면하고 상의원(尙衣院)의 비단 짜는 일을 정지하게 하였다.
을사 6년 1월 1일에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
2월에 혜성(彗星)이 다시 나타나자, 교서를 내려 자신을 책하면서 정전을 피해 거처하고 원옥(冤獄)을 심리하게 하였다. 유생 성대경(成大經)이 상소하여 ‘윤선도를 석방해 과감히 간언하는 길을 열어놓으라.’고 청하였다.
3월에 윤선도의 유배지를 광양(光陽)으로 옮겼다. 장령 이동명(李東溟)이 그 명을 거둬 들이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 징수할 곳이 없는 제도(諸道)의 갑진년1122) 을 포함한, 이전의 모든 신역(身役) 및 각종 조적곡을 깨끗이 면제해 주었다.
4월에 왕이 온천 행궁(溫泉行宮)에 거둥하였다. 때마침 농사철이었기 때문에 호위하는 본도의 군병을 파해 보냈다. 왕이 질병이 있어 오래도록 낫지 않자 중외(中外)가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는데, 의원이 온천의 물로 목욕을 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온천 행차는 국조의 고사이다. 왕이 가서 수개월 동안 목욕하니 몸이 쾌히 나았다. 드디어 그 도에 명하여 노인들을 예우하고 효제(孝悌)의 행실이 있는 사람을 등용하고 충신과 열녀에게 제사지내고 전조(田租)를 감하고 과거를 보였다. 대궐로 돌아온 후 다시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恩典)을 거쳐온 도에 베풀었다. 그 뒤에 여러 차례 거둥하였는데 그 예(禮)는 모두 같았다. 왕이 온양 행궁(溫陽行宮)에 있을 적에 도내의 노인 중 나이 80 이상인 자는 관직이 있건 없건 양인이나 천민을 막론하고 모두 노직(老職)의 통정첩(通政帖)을 주었다. 고 참판 김장생(金長生), 동래 부사(東萊府使) 송상현(宋象賢), 제독관(提督官) 조헌(趙憲),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사관(史官)을 보내어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에게 도타이 타이르고, 또 온양 경내에 행적이 드러난 사람을 찾아 아뢰게 하여 정표(旌表)하였다. 80세 이상인 노인에게는 가자(加資)하고 90세 이상인 노인에게는 가자하고 또 음식물을 주었다. 경기도로 하여금 대가(大駕)가 경유하는 일로에 일체로 시행하게 하였다.
좌찬성 송시열, 대사헌 송준길, 부호군 이유태 등이 행궁에 와서 뵈었다. 왕이 그들과 함께 서울에 오려 하였는데, 이유태는 어머니가 늙었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송시열은 유언 비어가 있다는 이유로 사양하고는 직산(稷山)에 이르러 돌아갔다. 송준길은 뒤따라 도성에 들어오니 해조(該曺)에 명하여 식량을 계속 공급하게 하였다.
10월 1일 밤에 비바람이 크게 휘몰아치면서 천둥과 번개가 치니, 왕이 놀라고 두려워하였다. 그리고 초야에 있는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실봉(實封)1123) 을 갖추어서 아뢰게 하였다. 풍정연(豊呈宴)1124) 을 내년 봄으로 물려 행하게 하고, 중외의 관리에게 거듭 당부하여 혹형을 금지하게 하고, 민결(民結)이 궁가(宮家)의 면세 전결(免稅田結)에 몰래 등록된 것은 일체 파하였다. 여러 궁가와 각 아문에서 점유하고 있는 묵혀진 전토를 개간한 백성에게 돌려주게 하였다. 중외에 절의와 효행이 있는 사람을 정표(旌表)하게 하였다. 각도의 감사와 병사에게 명하여 관하의 아병(牙兵)1125) 에게 거두는 포목을 면제하고 오로지 훈련에만 힘쓰게 하였으며, 관서경기의 세두(稅豆)를 감하고 그 나머지 도들도 차등있게 감해 주었으며, 포보(砲保)가 바치는 포목을 감하고 병조에 저축해 둔 것으로 충당하여 지급하게 하였다.
병오 7년 1월 17일에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자, 왕이 교서를 내려, 자신을 책하고 도움되는 말을 구하였다. 하늘의 노여움이 매우 심하고 재이가 겹쳐 발생한다는 이유로 진연(進宴)을 뒤로 물려 가을을 기다려 거행하게 하였다. 2월에 사간원의 이은상(李殷相)·최관(崔寬)·이익(李翊)·이혜(李嵇) 등이 계사를 올려, 공조 정랑 김수홍(金壽弘)을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였다. 기해년1126) 에 기년복의 제도를 이미 시행하였는데, 김수홍송시열에게 편지를 보내어 상복의 제도를 논하면서, 송시열이 기년의 복제를 주장한 잘못을 책하였다. 이때에 와서 김수홍이 사설(邪說)을 제창하여 조정의 대례(大禮)를 망령되이 의논하였다고 논죄하여 삭직(削職)하였다.
3월에 영남 유생 유세철(柳世哲) 등 천여 인이 상소하여, 송시열이 주장한 기해년1127) 의 기년복이 잘못된 복제임을 극렬히 논하고, 《예기(禮記)》 증자문(曾子問)에 ‘천자와 제후의 상에는 모두 참최복을 입고 기년복은 없다.’는 설을 인용하였으며, 또 《상복고증(喪服考證)》 1책을 올렸다. 소가 정원에 당도하자, 승지 김수흥(金壽興) 등이 ‘주상의 마음을 놀라게 하고 동요시키어 선한 사류를 일망타진하려 한다.’고 아뢰니, 왕이 ‘소의 뜻이 온당하지 못하니 물러가 업을 닦으라.’고 비답하고, 이어서 뭇 신하들을 모아 이를 의논하게 하였다.
좌의정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당초 복제에 대해 의논할 때, 윤휴는 ‘참최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하였고, 송시열(宋時烈)은 ‘참최는 신하가 임금의 복(服)을 입는 것이므로 참최를 입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윤휴는 이기고자 기필하여 긴 편지를 왕복하며 쟁변(爭辯)하였습니다. 허목의 논의는 윤휴의 논의를 본받아 기술한 것에 불과합니다. 이번 영남 유생의 소는 오로지 그들의 끄트머리를 주워모아 엮은 것으로 정해진 주된 뜻이 없으나, 그 뜻은 실로 유신(儒臣)을 얽어 모함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하고, 김수항(金壽恒)·김만기(金萬基)는 ‘밝게 분변하여 통렬히 배척하시라.’고 청하고, 우의정 허적은,
“삼년(三年)의 설은 유세철(柳世哲)만 주장한 것이 아니니, 유세철을 죄줄 수 없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내 의견으로는 반드시 통렬히 분변하는 것을 급한 일로 삼을 필요가 없고 후일 상의해 법을 만들어서 후일의 근심을 막는 것이 옳다고 여긴다.”
하였다. 사헌부의 조복양(趙復陽)·정계주(鄭繼胄)·맹주서(孟胄瑞)·어진익(魚震翼)·소두산(蘇斗山), 사간원의 이정(李程)·최일(崔逸)·이동직(李東稷)·정재희(鄭載僖) 등은 율을 상고하여 죄를 결정하기를 청하고, 옥당의 이민서(李敏敍)·오두인(吳斗寅)·이단하(李端夏)·박세당(朴世堂) 등은 또 차자를 올려 그를 논하고, 관학 유생(館學儒生) 홍득우(洪得禹) 등도 상소하여, 기년의 복제를 주장하면서 그를 논척(論斥)하고 그 죄를 다스리자고 청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교리 최유지(崔攸之)가 소를 올려 ‘장자(長子)는 기년복을 입는다는 것을 중외에 포고하고 또 국기(國忌)를 판자에 새기어 달아 놓은 예에 따라 각 아문의 청사 벽에 그것을 새기게 하자.’고 청하였는데, 왕이 그 소를 궁중에 놔두고 내려보내지 않았다. 얼마 뒤에,
“국가의 위아래 복제(服制)를 일체 《오례의(五禮儀)》에 따라 행해야 하고 장자(長子)나 중자(衆子)를 논할 것 없이 모두 기년복(朞年服)을 입어야 한다. 만일 예를 논한다고 빙자하여 시끄러운 단서를 야기하는 자는 마땅히 형벌을 시행하겠다.”
는 뜻으로 중외에 포고하였는데, 홍명하가 청한 것이었다.
왕이 다시 온양(溫陽)에 거둥하면서 왕대비(王大妃)를 모시고 떠났다.
4월에 왕이 온천 행궁(溫泉行宮)에서 호서(湖西)의 도내에 효행이 드러난 사람을 노인의 예에 의해 음식물을 지급하여 특별히 대우한다는 뜻을 보이게 하라고 명하였다. 온양 및 본도의 각 고을과 경유하는 경기의 일로에 역(役)을 감면해 주되, 지난해의 예에 의해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7월에 청나라 사신이 와서 금령을 범하고 물건을 사고 판 사람 및 도망해 돌아온 사람을 받아들였다는 등의 일을 조사하고 변신(邊臣)을 참형의 죄로 논단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이것은 나의 잘못인데, 어떻게 신하들에게 떠넘길 수 있겠는가.”
하였다. 청나라 사신이 또 대신을 사형의 율로 논단하니, 왕이 또 이르기를,
“나의 잘못이므로 내 마땅히 스스로 죄주기를 청해야 하겠다.”
하자, 청나라 사신이 그 다음 율로 처결하였다. 좌의정 허적북경에 사신으로 보내어 대신은 죄를 면하고 벌금을 물게 되었다.
8월에 일식을 하고 흉년이 들었다 하여, 교서를 내려 자신을 책하고 정전을 피해 거처하였다.
9월에 영남의 곡식을 영동영서로 옮기고, 해서의 곡식을 북도로 옮겨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였다. 명을 내려, 포보(砲保)의 가포(價布)를 감하였는데, 영동·영서·경기·양남(兩南)이 각각 차등이 있었고, 그 부족한 수량은 훈련 도감과 호조에 저축된 것을 가져다 쓰게 하였다. 목화가 귀하였으므로 각사 노비의 신공(身貢)을 차등있게 감하고 혹은 미곡으로 대신 납부하도록 허락하였다. 그리고 영동·영서의 노비 신공과 병조에서 거두는 군포(軍布)도 그와 같이 하였다.
11월에 징수할 곳이 없는 각사 노비의 신공(身貢)을 전부 면제해 주고 을사년1128) 이후 신공의 반을 미곡으로 바꾸어 납부하게 한 것도 면제해 주었다. 명을 내려 세초(歲抄)를 정지하게 하였다. 그리고 어린아이와 죽은 자에게 군포(軍布)를 징수하는 것을 다 조사해 내서 견감하게 하였다. 어린아이는 실지의 나이 10세를 한계로 하고 10세가 되지 아니한 자는 그 신역(身役)을 일체 감면해 주었다. 그리고 각도에 명을 내려 어린아이에게 신역을 함부로 정하지 못하도록 하는 금령을 되풀이하여 일렀다.
제도(諸道)에 명을 내려, 감영·병영·수영의 영장(營將) 집에 있는 군관을 조사해 내서 조정의 조처를 기다리게 하였다. 만일 사실대로 아뢰지 않을 경우 군사의 실정을 속여 보고한 죄로 벌을 시행하게 하였다.
함경도에서 상납하는 공물 중에 우황(牛黃)·표피(豹皮) 등의 물품을 감하였다. 어사(御史)가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별도의 보고서에 의하여 북도의 안변(安邊)·덕원(德源)·홍원(洪原)·문천(文川)·고원(高原)·경성(鏡城)·경흥(慶興)·이성(利城)·부령(富寧) 등 9 개 고을의 전세(田稅)를 감하였다.
정미 8년 1월 22일에 왕세자의 책봉례를 거행하였다. 양사(兩司)가 임금이 벌금을 물게 되었다고, 청나라로 사신 갔던 사람과 청나라 사신이 관(館)에 있으면서 조사할 때의 상신에게 죄주기를 청하며 합계(合啓)하여 논하니, 왕이 ‘사정을 알지 못하고 대신을 망령되이 논한다.’고 하면서 엄한 분부를 내려 배척하였다. 집의 이숙(李䎘), 장령 박증휘(朴增輝)·신명규(申命圭), 지평 유헌(兪櫶)·이하(李夏), 헌납 김징(金澄), 정언 조성보(趙聖輔) 등을 모두 먼 곳으로 귀양보냈다. 4월에 다시 왕대비를 모시고 온양으로 거둥하였다. 농사철이라고 하여 경기·충청도영호 군병(迎護軍兵)1129) 을 동원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연로의 노인들에게 지난해의 예에 따라 음식물을 지급하고 도로에 떠돌아다니는 빌어먹는 사람에게는 상평창(常平倉)의 미곡을 내어 주어 구제하고 또한 음식물을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관에 명하여 본군의 향교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또 행궁(行宮) 부근에 있는 고을의 인재를 수용(收用)하도록 하고, 행궁의 역사에 나온 사람에게는 별도로 우대하여 구휼하게 하였다.
윤사월(閏四月)에 백세 된 노인에게 음식물을 더 내려주게 하였다. 한재로 인해 교서를 내려 자신을 책하면서 정전을 피해 거처하고 수라의 가짓수를 줄이고 여러 신하들에게 마음을 합하여 조심하고 부지런히 일하도록 권면하였다.
6월에 각사(各司) 노비의 신공(身貢)을 반으로 감하고, 저화가(楮貨價)도 특별히 감하였다. 국전(國典)에 노비의 신공 이외에 또 저화가 있었다. 그 뒤에 저화를 폐지하고 대신 면포를 거두었다. 이때에 와서 저화가를 특별히 감하고 영구히 정식(定式)으로 삼았다.
7월에 한재로 인해 사직단(社稷壇)에 친히 제사를 지냈다. 또 옥의 죄수를 다시 심리하게 하였다. 한재가 혹심하다 하여 교서를 내려 자신을 책하고 신하들에게 편당짓는 것을 경계하고 서로 닦는 도를 다하게 하였다. 또 도움되는 말을 널리 구하고 수라의 가짓수를 감하고 술을 금하였다.
8월에 윤선도를 방면하여 전리로 돌아가게 하라고 명하였다. 특별히 경기의 전세(田稅)와 대동미(大同米)를 면제하게 하였다. 호조 판서 김수흥(金壽興)이 관원들의 녹봉을 감하자고 청하니 왕이 이르기를,
“관원들의 녹봉은 원래 박하니 지금 줄인다 하더라도 얼마나 줄일 수 있겠으며, 구제하는 데 도움되는 바 또한 얼마나 되겠는가. 나는 줄이고 싶지 않다.”
하였다. 정치화(鄭致和)가 아뢰기를,
“상공(上供)하는 물품과 아랫사람의 요포(料布)도 모두 줄였는데, 어찌하여 관원들의 녹봉만 줄이지 않는단 말입니까.”
하니, 4품까지만 각각 1석씩 감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왕이 명을 내려, 비국에 써야 할 각종 경비의 수량을 별도의 단자에 일일이 기록하게 하였다. 사포서(司圃署)·사복시(司僕寺)·군기시(軍器寺)·조지서(造紙署)·의정부·종친부·상의원의 경비에 소요되는 물품들을 모두 반으로 줄이도록 하고, 강계(江界) 등 6개 고을의 공물로 바치는 표피(豹皮)를 파하여 반으로 줄였다. 단천(端川) 등 4개 고을의 노비가 신공(身貢)으로 바치는 세포(細布)와 내궁방(內弓房)의 별조(別造)1130) 를 내년 가을까지 중지하도록 하였다. 호조의 소관인 서산(瑞山)태인(泰仁)의 염세(塩稅)를 감하였다. 양서(兩西)에 흉년이 들었다하여 징수하는 미곡을 감하라고 명하였다.
10월에 북도의 포흠된 조적곡을 완전히 면제해 주었다. 심양(瀋陽)에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 정뇌경(鄭雷卿)의 어머니가 죽었는데, 특별히 상을 치르는 데 필요한 물품과 조묘군(造墓軍)을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혼조(昏朝) 때에 절의를 세운 사람 부제학 정홍익(鄭弘翼)의 아내가 죽었는데, 또한 장사에 드는 물품을 지급하라고 하였다. 명을 내려 경기 경내에서 번을 드는 기병(騎兵) 및 각 진영(鎭營)의 수군에게 매월 입번(立番) 조로 납입하는 군포(軍布)를 반으로 줄였다. 12월에 각도 노비의 공포(貢布)로 을미년1131) 추쇄(推刷) 이전에 징수하지 못한 것을 완전히 면제해 주었다.
무신 9년 1월 9일에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
2월 4일에 치우기(蚩尤旗)가 서방에 나타나자 교서를 내려 자신을 책하면서 정전을 피해 거처하고 도움되는 말을 구하고, 신하들에게 서로 공경하고 화합하며 직무에 신중히 하고 힘쓰도록 경계하였다. 그리고 인재를 선발하고 옥사를 관대히 처결하였다. 강도의 미곡 1만 석과 남한 산성의 미곡 5천 석을 경기로 옮겨다가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였다. 영의정 허적을 면직하고 우찬성 송시열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3월에 예조에서, 혜성(彗星)의 재변이 이미 사라졌다 하여 정전을 피해 거처하며 수라 가짓수를 줄이고 음악을 철거한 일을 정지하기를 청하니, 왕이 이르기를,
“반찬 가짓수를 감한 것이 비록 사소한 일이지만, 굶어죽은 자가 길에 널려 있다는 말을 들을 적마다 마음이 항상 측은하여 음식물이 목에 넘어가지 않는다. 무슨 마음으로 반찬 가짓수를 회복한단 말인가. 아직은 거행하지 말고 가을을 기다려 봐야 할 것이다.”
하였다. 군자감(軍資監)에 저축된 곡식 7천여 석을 풀어서 도성과 경기에 대여받기를 원하는 자에게 나누어 주고, 호서의 전세(田稅)와 대동미(大同米)를 산간 고을의 용도와 바꾸어 진휼하였다. 관원을 보내어 험천(險川)·쌍령(雙嶺)·금화(金化)·토산(兎山) 등 병자 호란에 임금을 위해 힘쓴 군사들이 전사한 곳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4월에 호남 사람 사서(司書) 김인후(金麟厚)는 경학(經學)과 행의(行誼)가 있었고,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은 의병을 일으켰다가 원통하게 죽었다 하여 시호를 내리고 관작을 추증하라고 명하였다.
7월에 한재로 인해 교서를 내려 자신을 책망하면서 정전을 피해 거처하고 음악 연주를 중지하였다.
8월에 온양에 거둥하였다. 우의정 송시열이 와서 뵙자 불러 보았다. 그가 체직된 뒤에 어가를 수행하겠다고 청하므로 왕이 허락하였다.
9월에 왕이 온천 행궁을 떠났다. 이조 판서 송준길은 어가를 전송하고 뒤처졌고, 우의정 송시열은 중도에 이르러 소를 올리고 오지 않으면서 비방하는 말이 있어서라고 핑계댔다. 그가 이른바 ‘비방하는 말’이란 대개 허목정미년1132) 에 일찍 세자를 책봉하기를 청한 소를 가리킨 것인데, 그것은 상복 제도의 일로 말미암아 자기를 의심하여 발론한 것이라고 의심하였던 것이다. 왕이 그들 모두에게 승지를 보내어 간절히 타이른 뒤에야 도성에 들어왔는데 얼마 뒤에 모두 물러갔다.
이 해에 유생 황연(黃壖)·이석복(李碩馥)·이태양(李泰陽) 등이 서로 잇따라 소를 올려 시사를 극렬히 말하고 권력을 장악한 자를 지척하여 구언(求言)하는 왕의 뜻에 응하였다. 삼사(三司)가 그들을 귀양보내 국문하기를 청한 지 한 달이 넘었으나, 왕이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기유 10년 1월에 영남에 흉년이 들었다 하여 각사 노비 중에 을사년 이후 신공(身貢)을 징수할 곳이 없는 것들을 수령에게 엄히 신칙하여, 분명히 조사해서 보고하게 한 다음 감면하였다. 충청 감사의 장계로 인해 공주방(公主房)에서 떼어받은 것 가운데 주인이 있는 백성의 전지와, 궁가(宮家)에서 떼어받기 전에 백성들이 일구어 경작한 곳을 그들에게 다 내주었다. 그리고 지나치게 점유한 자는 그 죄를 다스렸다. 원양 감사(原襄監司)의 장계에 의해 흉년이 든 영동(嶺東) 7개 고을에 ‘서북 지방 백성을 쇄환(刷還)하라.’는 명령을 정지하였다. 조참(朝參) 때에 백관에게 명하여 소회를 진달하게 하였다.
2월에 송시열이, 설날에 솔잎을 진배(進排)하는 일을 파하기를 청하니, 왕이 이르기를,
“이와 같은 일들은 혁파하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솔잎·도장(桃杖)·도지(桃枝)·인승(人勝)·세화(歲畵)를 모두 혁파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4월에 왕이 온천 행궁에 있으면서 본읍의 무신년1133) 전세(田稅)와 기유년1134) 세폐(歲幣)를 감면해 주고, 본도의 죄인 및 본도 사람으로 다른 도에 정배(定配)된 자를 관대하게 처결하였다.
10월 1일에 처음으로 신덕 왕후(神德王后)1135) 의 신주를 태조실(太祖室)에 합부(合附)하고 휘호(徽號)를 올렸는데 순원 현경(順元顯敬)이었다. 정릉(貞陵)을 회복한 다음 수호관(守護官)을 두고 의절대로 석물 등을 설치하였다. 신덕 왕후는 태조 대왕의 두 번째 아내이다. 태조가 즉위한 뒤로부터 이미 중전(中殿)의 자리에 앉아 고명(誥命)과 면복(冕服)의 하사를 받았다. 그런데 태조가 승하하여 부묘(附廟)할 때에 신하들이 예를 잘못 의논하여 아울러 부묘하지 않았으므로 사람과 신이 오래도록 억울하게 여겼다. 이점에 대해 조정 의논이 간간이 나오기는 하였으나, 역대의 왕들도 미처 이 일을 거행하지 못하였었다. 이때 와서 태학생이 상소하여 말하고 삼사(三司)가 차자로 아뢰니, 왕이 처음에는 윤허하지 않다가 뭇 신하들이 대궐 뜰에 나와 청하자 윤허하였는데, 이는 대개 신중히 여겨서 그런 것이다. 능을 봉하고 제사를 지내던 날에 소낙비가 내려 정릉(貞陵) 한 골짜기가 가득히 찼는데 백성들이 ‘원한을 씻어주는 비이다.’고 하였다.
11월에 천둥과 번개가 치면서 우박이 내렸는데 명을 내려, 중외의 감옥에 있는 죄수들을 관대히 처결하게 하였다. 그리고 재해를 입은 삼남(三南)의 목화밭을 돌보아주어 선혜청(宣惠廳)의 대동미(大同米)를 감해주었다.
12월에 우의정 송시열이 면직되었다.
경술 11년 여름에 큰 가뭄이 들었다. 5월에 서리가 연달아 내리고 7월에 바람이 불고 서리가 내렸다.
8월에 흉년으로 인해 각전(各殿)의 향온미를 헤아려 감하게 하였다. 강도(江都)의 쌀 3만 석을 운반하여 이를 서울에 팔게 하였다. 전라도 감사의 장계에 따라 호조에 안부(案付)된 염분포(鹽盆布)1136) 24동(同)과 나주(羅州)·영광(靈光)의 염철포(鹽鐵布) 7십여 동을 전라도에 나누어 주어 진구하는 밑천으로 삼게 하였다. 팔도의 어영군(御營軍)에 입번(立番)하는 것을 정지하고 금년 10월부터 이듬해까지 그 보미(保米)를 본도에 남겨두었다가 어영군을 진구하게 하였다.
9월에 제주(濟州)에 흉년이 들어 굶어죽은 백성이 많았으므로 호남의 곡식 2천 석을 운반하여 지급하고 또 통영(統營)의 조곡(租穀)을 더 주어 구제하였으며, 본주(本州) 노비의 신공(身貢)을 모두 탕감해 주었다.
9월에 미친 사람 이세직(李世直)이란 자가 거리의 종을 치고 고변하여 외방에 있는 재신 등을 무고하였는데, 조사해 본 결과 그런 사실이 없었으므로 그를 참형(斬刑)에 처하였다. 10월에 호조·진휼청·한성부(漢城府)에 명하여 추위에 떨고 굶주리는 사람에게 미곡과 동옷 등을 차등있게 지급하였다. 재해를 특히 심하게 입은 고을의 공포(貢布)를 감하여 주고 경기·함경·원양(原襄) 등의 도에서 진상하는 호피를 감면해 주었다.
12월에 혹독한 한파로 인해 각도에 하유하여, 굶주린 백성을 진휼하는 이외에 특별히 죄수를 관대히 처결하여 정체된 옥사가 없게 하였다.
신해 12년 1월에 명을 내려 서울 및 지방에 나이 80세가 된 사람은 사대부나 상민을 물론하고 특별히 자급을 올려주어 노인을 우대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였다. 뭇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지금과 같이 예전에 없었던 큰 흉년을 당하여, 각도의 전세(田稅)를 수송할 적에 백성에게 끼치는 폐해가 적지 않다. 삼남·원양(原襄)·황해·경기 등 6도의 전세는 모두 본도에 놓아두었다가 오는 봄에 굶주린 백성을 진휼하게 하라. 징수할 곳이 없는 각사(各司) 노비의 신공(身貢)으로 경술년1137) 조에 들어 있는 것은 모두 탕감하게 하라.”
하였다. 이 해에 보리 농사가 크게 흉작이 되어 굶어죽은 자가 길에 즐비하였고, 돌림병이 또 치성하여 걸리지 않은 백성이 없었으므로 제도(諸道)에 진휼청을 설치하였다. 서울에는 진휼청을 세 곳에 설치하여 죽을 쑤어 굶주린 백성을 진휼하고 사대부는 마른 양식을 주었다.
3월에 명하여 진휼청의 적곡(糴穀)을 발매하게 하고 굶주린 백성이 버린 자녀를 거두어 기르는 자는 본주가 추쇄(推刷)하지 못하게 하였다.
6월에 주방(酒房)의 일차(日次)에 공상(供上)하는 것을 정지하고 각도의 진상(進上)에 있어서는 양대비전(兩大妃殿) 이외에는 상납을 허락하지 않았다.
9월에 명하여 경기의 대동 전세(大同田稅)를 기한을 뒤로 물려 받아들이게 하고 납입한 조적곡도 이자를 면제하게 하였다. 제주(濟州)에 선유 어사(宣諭御史)를 보내어 세 고을의 노인과 군민(軍民)을 위로하고 또 면포 4천 필을 가지고 가서 곤궁한 백성에게 나누어 주고 보리씨 2천 석을 더 보내어 파종을 도와주게 하였다. 무릇 상공(上供)하는 토산물과 각사의 상공(常貢)에 관계되는 것은 다 재량하여 감하게 하고, 내사(內司) 및 각사 노비의 신공(身貢)은 아울러 전부 감해 주게 하였다. 이어서 명하여, 백성의 질병과 고통을 묻고 사상자(死喪者)를 도와주게 하였다. 또 효우(孝友)와 절행(節行)이 특별히 드러난 사람을 찾아 발탁하는 소지로 삼게 하였다. 또 호남의 감영(監營)·병영(兵營) 및 호조에 저축된 포목 수천 필을 더 주어 진휼하게 명하였다. 이때 제주에 크게 비바람이 휘몰아쳤는데 빗물의 맛이 모두 짜서 들판에 곡식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 까닭이었다. 한라산(漢拏山)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는데 한라산은 제주 섬 전체의 진산(鎭山)이다. 또 문·무의 시험을 실시하여 그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경기의 승군(僧軍)을 동원하여 안팎의 굶주린 백성과 병사한 자를 묻어 주었다. 10월에, 서울과 지방에 마른 양식을 받아먹은 사람 중에 본인이 죽은 데다가 전지도 없는 경우에는 일체 탕감해 주고 이웃이나 일가붙이에게 징수하는 일이 없게 하도록 명하였다. 광주(廣州)의 조적을 절반만 거두어 들이고, 중외의 기유년1138) 을 포함한 이전 신역포(身役布)를 모두 기일을 뒤로 물려 받아들이게 하였다. 징수할 곳이 없는 각사 노비의 신역포도 전부 감해주었다.
천둥의 재변으로 인하여 대신·비국(備局)·삼사(三司)를 인견하고 재변을 그치게 할 수 있는 계책을 들었다. 죄수를 관대히 처결하고 동교(東郊)와 서교(西郊)에 여단(厲壇)을 설치한 다음 관원을 보내어 여역으로 죽은 사람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정월 초하루에 진상하는 방물을 명년1139) 부터 계축년1140) 까지 감하게 하였다. 평안도 강변 6개 고을의 전세(田稅) 중 3분의 2를 감하였다. 제주에 선혜청(宣惠廳)의 쌀 2천 석을 더 보냈다. 이 해에 팔도가 큰 풍년이 들어 김매지 않고도 수확한 자도 있었다.
12월에 명하여 윤선도(尹善道)의 직첩을 도로 주게 하였다. 헌납 윤경교(尹敬敎)가 소를 올려, 영의정 허적(許積)을 공격하되 ‘영합하여 총애를 굳히려 한다.’고 말하니, 왕이 엄한 분부를 내려 책하고 특별히 의령 현감(宜寧縣監)에 보임하였다. 대간(臺諫)이 그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
임자 13년 1월에, 봄철에 징수하는 삼남(三南)의 대동미를 감하도록 명하였다. 우의정 송시열의 소에 따라 각읍에 도적을 다스리는 대책에 대해 신칙하였다. 또 대동미를 징수할 적에 기유년1141) 의 전결(田結)을 적용하지 말고, 지난해1142) 의 전결(田結)을 적용하여 백성의 재력이 펴이게 하도록 명하였다. 각도의 감사·수령에게 명하여, 굶주린 백성을 진휼하는 계책에 대해 조목조목 아뢰어 채택에 대비하게 하였다.
인견할 때에 대신이 청하기를 ‘진휼할 때에 반드시 죽을 쑤어 먹일 것 없이 건량(乾糧)을 나누어 주자.’고 하자, 왕이 이르기를,
“만일 장기간 백성을 편안히 하는 도리를 논한다면 물론 건량을 나누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떠돌아 다니며 빌어먹는 저 백성을 어떻게 보고만 있으면서 구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2월에 전 정(正) 조사기(趙嗣基)가 폐단을 진달하는 소를 올리면서 기년복의 제도를 사용하여 지체를 깎아내린 데 대한 잘못을 논하였는데, 그 내용 중에,
“전하께서 대통(大統)을 이으셨으니 오직 어버이를 높이는 도리를 극진히 해야 합니다. 그런데 적통과 서자(庶子)의 일설은 지체를 내리깎아 상복의 기한을 단축하게 하였으니, 후세에서 마침내 반드시 논의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추후에라도 뉘우쳐 하늘에 계신 효고(孝考)1143) 의 영혼을 위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라는 말이 있었다. 도승지 장선징 등이 아뢰기를,
“소의 사연이 괴상하기 이를 데 없어 금령을 범하였으니, 유사에게 회부하여 성상의 뜻을 여쭈어서 죄를 결정하게 하소서.”
하였다. 조사기가 의금부에 나아가 심리를 받고 편배(編配)1144) 되었다. 사간원 이합(李柙)·윤심(尹深), 민종도(閔宗道) 등이 먼 곳에다 유배하자고 청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 얼마 안 되어 특별히 서용하라 명하였다.
3월에 이조 참의 이단하(李端夏)의 상소로 인해 중종의 폐비(廢妃) 신씨(愼氏)의 신주(神主)를 신씨의 집안 직손 집에 옮겨 모시게 한 다음 관에서 제수(祭需)를 지급하고 묘소를 수호하기 위해 3호(戶)를 두었다. 신씨중종이 대군으로 있을 때의 정비(正妃)이다. 호남의 곡식 1천 석과 해서의 곡식 2천 석을 제주에 들여 보내 종자로 주었다. 또 베 50동(同)을 주어 옷감으로 쓰게 하였다. 각도에 명하여 신해년1145) 을 포함한 이전의 모든 신역(身役) 중에 거두어 들이지 못한 것은, 받을 곳이 없는 자이건 기한을 뒤로 물려 아직 거두어 들이지 못한 자이건 간에 모두 탕감하게 하였다.
명을 내려 2품 이상으로 동반(東班)의 실직을 지낸 자와 육조의 참의, 삼사(三司), 수령으로 하여금 인재를 천거하게 하였다. 그리고 죄수를 관대히 석방하게 하였는데 서울과 지방에 사죄(死罪) 이하로서 일시에 사면을 받은 자가 모두 8백여 인이었다. 명을 내려 병오년 이전까지 포흠된 조적곡의 실제 수량을 조사해 내어 일체 탕감하게 하였다.
조군(漕軍)도 수군(水軍)의 예에 의하여 과거에 응시하도록 허락하였다. 국가의 제도에, 조군(漕軍)·수군(水軍)의 군역(軍役)이 가장 고통스러우며 과거 응시를 자손 대대로 금지하였기 때문이다. 교서를 내려 자신에게 죄를 돌리고 포흠된 무세(巫稅)·장세(匠稅)·관향세(管餉稅)와 각 아문의 파괴된 염분(鹽盆), 어선세(漁船稅)의 미수된 것을 모두 탕감하도록 명하였다.
4월에 행 호군(行護軍) 송준길(宋浚吉)이 소를 올려 허적(許積)을 논하면서 노기(盧杞)1146) 에다 비하고, 또 윤경교(尹敬敎)를 구원하였는데, 소가 들어가자 회보하지 않았다. 이에 허적이 정승의 자리를 떠나니, 왕이 누차 승지를 보내어 도타이 타일렀다. 판부사(判府事) 송시열도 소를 올려 허적을 매우 심하게 공격하였는데, 이는 대개 허적의 소 안에 ‘권세가 위에 있지 않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평 오정창(吳挺昌)이 소를 올려 ‘송시열·송준길 등이 허적을 견지하면서 비교해 의논한 것은 걸맞지 않다.’고 논하자, 양사(兩司)가 논핵하여 그의 관직을 삭탈하고 도성 밖으로 내쫓자고 청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
5월에 전 집의 이상(李翔)이 소를 올려 논핵하기를
허적이 사리 사욕을 추구하고 당류를 심는가 하면 위아래에 아첨하여 헛된 명예가 융성해져서 허충신(許忠臣)이란 말이 안팎에 가득합니다. 왕이 아첨하는 신하에게 빠진 바가 되었습니다.”
하니, 왕이 하교하기를,
이상이 산림(山林)에 머물면서도 세상에 나가 벼슬하는 일에 바쁜데, 그의 마음가짐과 일처리하는 것은 길가는 사람도 아는 바이다.”
하고, 그를 배척하고 그의 관작을 삭탈하였다. 대간이 그 명을 거두어 들이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
12월에 헌부의 계사(啓辭)에 따라 대내의 전각(殿閣)을 수선하는 역사를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명을 내려, 대전(大殿)에 진상하는 세 명일의 방물(方物) 물선(物膳)을 감하게 하고, 제주에서 월령(月令)에 진상하는 물품을 감하였다. 그리고 어린아이에게 군역(軍役)을 정하지 말라는 영을 거듭 밝혔다.
계축 14년 정월에 경기 지방이 재해를 입었다 하여, 징수해야 하는 대동미(大同米)를 차등있게 감하라고 명하였다.
2월에 명을 내려 경술년과 신해년 두 해에 거두어 들이지 못한 조적의 수를 뽑아내어 탕감해 주도록 하였다. 팔도의 감사와 강화부(江華府)와 개성부 등의 유수(留守)에게 유시하기를,
“내 생각건대 나라는 백성에게 의지하고 백성은 먹는 것에 의지한다. 먹는 것을 풍족하게 하는 도리는 진실로 농사에 힘쓰고 곡식을 중히 여기는 데에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옛날 제왕들은 백성들이 무엇을 의지하는가를 알고 농사짓는 것을 우선으로 여기지 않은 이가 없었다. 《시경(詩經)》빈풍(豳風)《서경(書經)》무일(無逸)이 어찌 후세의 귀감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 조종(祖宗)에서는 백성을 잘살게 하는 방법을 깊이 생각하여 먼저 전제(田制)를 바르게 하였다. 또 백성들이 농사짓는 방법에 어둡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농서(農書)를 번역하고 풀이하여 가르치고, 토지를 이미 시험해 본 방법으로 《농사직설(農事直說)》을 지어서 어리석은 백성으로 하여금 환히 알게 하였으며, 또 농사를 권장하는 글을 반포하는 등 무릇 농사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여러모로 심력을 기울였었다. 그러므로 한(漢)나라 때에 쌀이 붉게 썩고 돈꿰미가 썩어 셀 수 없는 것1147) 당(唐)나라 때에 쌀 한 말 값이 3전이었던 것1148) 도 그다지 훌륭하게 여길 것이 못 되었다.
그런데 과인에 이르러 하늘이 도와주지 않아 수재와 한재가 없는 해가 없었고, 기근의 참혹함이 지난해에 와서 극도에 달하였다. 그리하여 노약자들은 구렁텅이에 죽어 뒹굴고 백골이 서로 잇따르고 있으나 이주시킬 만한 곳이 없고 구제할 만한 곡식도 없다. 내 이 때문에 잠자리가 편치 아니하고 음식이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으므로 먹는 것을 넉넉하게 하는 계책을 얻어 위급한 지경에 이른 백성을 구제하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결국 그들이 죽는 것을 서서 보고만 있게 되어 조종(祖宗)께서 3백 년 동안 길러온 백성으로 하여금 하루아침에 씻은 듯이 없어지고, 뽕나무와 삼이 있던 곳이 쑥대밭으로 변해 버렸으니, 아, 이를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그 연유를 구명해 보면 비록 연운(年運)이 좋지 못한 데에서 말미암았으나 실로 사람이 한 일이 미진하여 그런 것이다. 만일 옛날처럼 3년을 농사지어 1년 먹을 것이 축적되고 9년을 농사지어 3년 먹을 것이 축적되었다면 떠돌거나 죽는 일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대체로 농사에서 힘써야 할 일은 때에 맞추어 하는 것과 힘을 써서 하는 것 이 두 가지에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날은 이미 제때에 씨를 뿌리지 못하였고 김매는 일에도 힘을 쓰지 않는가 하면, 제방을 쌓아 관개(灌漑)하는 이로움을 폐지한 채 수거(修擧)하지 않고, 거름을 주고 김매는 일도 대부분 소홀히 하여 힘쓰지 않고 있다.
아, 사농공상 가운데 오직 농민이 가장 괴로움을 겪고 있다. 추울 때에 밭갈이 하고 더울 때에 김매는 등 해가 다 가도록 부지런히 일하여도 굶주림과 추위를 면하지 못하는데, 고을의 관리가 조세(租稅)의 상납을 독촉하는 정치가 소요를 일으키고, 장사꾼과 놀고 먹는 무리가 또 뒤따라 좀먹고 있으니, 어떻게 백성이 곤궁하지 않겠는가.
지금 봄날이 따뜻해져 토맥(土脈)이 처음으로 열리었으니, 보습을 손질하는 정월은 이미 멀어지고, 밭갈이하는 2월이 문득 박두하였으므로 농사를 권장하는 정사를 조금도 느슨히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한번 우역(牛疫)이 치성해지면서부터 백성들은 어깨가 붉게 문들어진다고 탄식하고 있다. 날카로운 보습을 제대로 쓸 수가 없으므로 흙을 일구는 밭갈이를 장차 폐지하게 되었다. 옛날 왕공(王公)이 경작하는 예를 몸소 행하여 천하의 백성을 거느렸다. 내가 경사 대부(卿士大夫)와 함께 옛날의 제도를 본받아서 사방의 주창이 되려 하였으나, 이 일을 할 겨를이 없었으므로 실로 불만스럽게 여긴다. 아, 큰 흉년을 치른 전지가 황폐하여, 간신히 살아남은 백성이 살아갈 대책이 막연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무마하는 도리는 급히 해야지 느슨히 해서는 안 되며 권장하는 방법은 서서히 해야지 급박하게 해서는 안 된다. 나와 함께 다스리는 자는 오직 방악(方岳)1149) 뿐이며, 백성과 가까운 직책은 수령만한 사람이 없다. 경들은 나의 명농(明農)1150) 의 뜻을 체득하여 수령들에게 포고하여, 밭두둑을 출입하되 여리(閭里)를 소요스럽게 하지 말도록 하고, 전야(田野)를 살펴 보되 백성의 농사일에 방해되지 않도록 하라. 저수지 중에 관개(灌漑)할 만한 것은 수리하고, 도랑 중에 소통할 만한 것은 소통시키도록 하라. 백성의 힘이 넉넉하지 못한 바가 있으면 도와줄 것을 생각하고 종자와 식량이 부족한 바가 있으면 도와줄 것을 생각하여, 갈고 씨앗 뿌리는 시기를 놓치지 않게 하고 김매고 북돋우는 시기를 어기지 않도록 하라. 그리하여 곡식을 생산할 수 있는 토지가 모두 일구어지도록 힘쓰고 놀고 먹는 백성이 다 농사에 돌아가도록 하라.
그렇게 하면 백성이 본업을 즐거워하여 태만하지 않고 힘을 다해서 위로는 경상(經常)의 부세(賦稅)를 바치고 아래로는 부모를 섬기고 자식을 기르는 소원을 이룩하게 될 것이다. 백성의 생업은 농사에서 안정되고 나라의 근본은 반석처럼 튼튼해질 것이다. 경들은 형식적인 것으로 여기지 말고 깊이 유념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작고한 참찬 송준길(宋浚吉)에게 의정(議政)의 직을 추증하라 명하고 문·무관 당상(堂上) 이상의 부모 중에 나이 70세 이상인 자에게 음식물을 지급하도록 하고, 경평군(慶平君)·정명 공주(貞明公主) 및 종실 중에서 부모의 나이가 70세 이상인 자에게도 그와 같이 하라고 명하였다. 고려 공양왕의 능을 수호하도록 명하고 대신의 아내 및 친공신(親功臣)의 아내 중에 생존하고 있으나 살림이 궁핍한 자에게 음식을 지급하게 하였다.
3월에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정시(庭試)를 실시하여 문·무 인사를 뽑았다.
4월에 가뭄이 갈수록 혹심하다 하여 교서를 내려 원통한 옥사를 심리하게 하였다.
5월에 또 교서를 내려 자신을 책하고 정전을 피해 거처하며 수라 가짓수를 줄이고 술을 금지하였다. 정원에서 단오첩(端午帖)을 제진(製進)할 것에 대해 계사를 올리자, 왕이 이르기를,
“한재가 이처럼 혹심하니, 이런 형식적인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신해년1151) 이전의 군병과 노비(奴婢) 중에 도망했거나 죽은 사람 및 임자년1152) 에 상납하지 아니한 신역(身役)과 계축년에 납입해야 할 군포(軍布)를 탕감해 주도록 명하고 신해년 기병(騎兵)과 보병 중에 도망한 사람은 연한에 구애하지 말고 그 대역(代役)할 사람을 정하도록 명하였다.
8월에 효종의 능을 옮기는 일로, 경유하는 양주(楊州)·광주(廣州)·여주(驪州)·이천(利川)·양근(楊根) 등 5개 고을의 대동미 징수와, 경기 고을의 봄에 징수해야 하는 대동미를 차등있게 감해 주도록 명하였다. 경기·황해·전라·원양(原襄) 등 4도의 경술년1153) 조 전세(田稅) 중 미수된 것을 탕감하도록 명하였다.
9월 29일에 계구릉 망곡례(啓舊陵望哭禮)를 거행하였다. 면례(緬禮)에는, 삼년복을 입지 않는 사람일 경우 시복(緦服)을 입는 예문(禮文)이 없는데, 왕이 예관(禮官)에게 특별히 명하기를,
기해년1154) 대상(大喪) 때에 대왕 대비(大王大妃)께서 기년(朞年)을 지난 뒤에 천담복(淺潭服) 차림으로 삼 년을 마쳤으니, 지금도 이 예에 의해 천담복 차림으로 3개월을 마치게 하라.”
하였다. 이는 대개 기해년 대상(大喪) 때에 궁중에서 실지로 삼년상을 행하였기 때문이다. 구영릉(舊寧陵)을 처음 모실 적에 능의 자리를 어디에다 잡을 것인지에 대한 의논이 빨리 정해지지 않아 기일이 촉박하였고 일을 감독하는 자가 다급하여 신중히 하지 못했기 때문에 봉축(封築)이 무너져서 빗물이 스며들었는데 누차 보수하였으나 완벽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봉심(奉審)한 신하들이 감히 사실대로 아뢰지 못하고 다만 그때마다 석회로 틈을 막았을 뿐이었다. 3월에 종실 영림령(靈林令) 이익수(李翼秀)란 이가 상소하여 그 사실을 말하니, 왕이 놀라고 슬퍼하면서 곧바로 익수를 불러 그 상황을 물어보았다. 익수가 능 위의 흙과 돌이 무너진 까닭을 낱낱이 말하고 또 아뢰기를,
“옛날 주 성왕(周成王)주공(周公)의 충성과 성스러움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하늘이 바람과 천둥의 재이(災異)로 보여 주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선릉(先陵)에 변고가 있음을 모르고 계셨으니, 근년에 일어난 재이가 반드시 이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못할 것입니다.”
하니, 왕이 익수에게 이르기를,
“네가 남들이 감히 말하지 못한 바를 말하였으므로 내 아름답게 여긴다. 또 그릇된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으니, 매우 감격하였다.”
하고, 드디어 옮겨 모시기로 뜻을 결정하였다. 대신·육경(六卿)·양사(兩司)에 명하여 능의 자리를 살펴보게 하고 또 익수로 하여금 대신을 따라가 같이 살펴보게 하였다. 좌의정 김수항(金壽恒), 선공감 제조(繕工監提調) 민유중(閔維重) 등이 익수와 말다툼을 하여 함께 복명하지 않았다. 익수가 소를 올려 주달하고 또 아뢰기를,
“구릉(舊陵)의 연월과 길흉(吉凶)에 구애받지 말고 속히 옮겨 모셔야 합니다.”
하니, 왕이 아름답게 받아들였다. 부수찬 조위봉(趙威鳳)이 상소하기를,
“신이 듣건대, 영릉(寧陵)을 봉심한 공경·대시(臺侍)가 돌아와서, 익수의 소가 헛말이 아니라고 아뢰고 주상은 ‘능 위 사면 팔방이 하나도 완전한 곳이 없다.’는 분부가 계셨다 합니다. 영릉을 봉안한 지 지금 15년이 되었는데도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다면 만세토록 전하는 교산(喬山)의 염려1155) 가 그지없습니다. 옛날 송 인종(宋仁宗)영소릉(永昭陵)에 장사지낼 때에 황당(皇堂)의 기둥이 손상되었습니다. 여러 사자(使者)들이 그냥 덮어버리려 하자, 한기(韓琦)가 정색을 하며, ‘손상되었으면 바꾸어야 한다. 만일 장사의 날짜를 어겨 비용이 많이 날 경우 그래도 이 책임은 담당할 수 있지만 만일 구차히 이를 덮어버렸다가 뒤에 무너져서 임금의 의심을 초래할 경우 신하가 어떻게 그 책임을 담당하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그때 감독한 신하들이 무너지는 후환은 돌아보지 않고 오직 일을 마치기에만 힘썼으니, 한기의 말과 비교해 볼 때 어떠합니까? 역사(役事)를 감독한 관원도 물론 죄가 있습니다만, 흙을 덮은 데와 배치한 석물에 이상이 생겼다고 보고한 뒤로부터 전후로 봉심한 신하가 다만 회로 틈을 바르기만 하고 사방·팔면이 우려된 형세에 대해선 왕에게 아뢰지 않았습니다. 살펴보고도 몰랐다면 그래도 괜찮지만 만일 알고도 아뢰지 않았다면 그 죄가 실로 감독한 관원보다 더 큽니다.
능침(陵寢)을 봉심하는 것은 이 얼마나 중대한 일입니까. 그런데 눈치만 살피고 사실대로 아뢰지 않는단 말입니까. 이러한 습관이 그치지 않고 커진다면 비록 장릉(長陵)의 흙을 한 줌 가져가는 자가 있더라도1156) 전하께서 듣지 못하게 될까 신은 염려됩니다. 전하의 효성을 몸받지 아니하고 감히 기망을 자행함이 또 이보다 더 큰 것이 있겠습니까. 능의 일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이 나타난 지가 이미 오래 되었건만, 양사(兩司)에서는 침묵만 지킨 채 전후로 봉심을 성실하게 하지 않은 잘못을 거론조차 하지 않았으니 이게 무슨 의도란 말입니까. 어리석은 신은 근심과 개탄을 금치 못한 나머지 감히 어리석은 소견을 말씀드립니다.”
하였다. 조위봉조경(趙絅)의 아들이다. 왕이 비답하기를,
“네 소를 보니 개연(慨然)한 뜻과 충애(忠愛)의 정성이 말에 넘쳐흐르고 있으므로 매우 아름답게 여기고 감탄하였다. 지금 만세토록 계실 선왕 능침의 의물(儀物)에 완전한 곳이 없으므로 장차 부득이 옮겨 모셔야 하니, 내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전후 봉심한 신하가 만일 있는 것을 없다고 하였거나 큰 것을 작다고 하였다면 그 죄는 참으로 면하기 어렵다. 내가 실상을 조사해 내어 처리해야겠다. 근일 대각(臺閣)의 신하 중에 눈치를 슬슬 보는 자가 많은데, 누가 국가를 위해 분연히 이러한 말을 하는 자가 있겠는가. 참으로 개탄할 일이다.”
하였다. 대간이 모두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옥당이 출사하게 하자고 청하였으나 특별히 체차하라고 명하였다. 왕이 하교하기를,
“전후 봉심하고 올린 문서를 상고해 보면 영릉의 석물에 틈이 생긴 뒤로 대신 이하가 봉심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정미년1157) 봄과 가을 두 번 봉심할 때에는 해조(該曺)가 별도의 의견을 내어, 다른 능의 예를 인용하여 본조의 당상이 나가 봉심하였을 뿐이었다. 이는 대신이 나가는 것은 중대한 일로 여기고 능의 사체는 도리어 가볍게 여긴 것이다. 또 영릉을 봉심하는 일이 어찌 다른 능과 비등할 수 있겠는가. 다른 능은 이와 같은 변고가 아직 없었다. 참으로 매우 놀랍다. 그때의 당상과 낭청(郞廳)을 아울러 잡아다가 엄히 국문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이에 전 예조 판서 정지화(鄭知和), 참의 이준구(李俊耉), 정랑 이유원(李惟源), 좌랑 오시복(吳始復) 등이 모두 옥에 갇히었다. 또 하교하기를,
신해년1158) 에 봉심하고 올린 서계는 더욱 형편이 없다. 그때 봉심한 신하들을 아울러 잡아다 심문하여 죄를 정하게 하라.”
하였다. 그때의 대신 판부사 정치화(鄭致和), 선공감 제조 좌의정 김수항은 먼저 직을 파면한 다음 죄명을 기다리게 하고, 전 관상감 제조 남용익(南龍翼), 예조 좌랑 안한규(安漢珪) 등은 모두 옥에 가두고 관직을 삭탈하였다. 얼마 뒤에 한재로 인하여 심리를 청해 모두 석방되었다. 이에 전 참의 장응일(張應一)이 상소하기를,
영릉 석물(石物)에 틈이 생긴 일은 국가의 큰 변고 중 이보다 더 큰 변고는 없습니다. 보충해 덮은 흙이 단단하지 않았거나 사람의 계획이 잘못되어 그러한 것입니까? 택조(宅兆)가 이롭지 못하고 신도(神道)가 편치 못해서 그러한 것입니까?
우러러 생각하건대 성상께서는 놀라고 두려워하셨을텐데 어떻게 마음을 안정하셨습니까? 처분이 어떻게 내릴지 귀를 기울이느라 밤낮으로 우울해 하던 중 전후 비망기(備忘記)를 보고서야 비로소 능의 일을 감독하였던 신하들과 봉심한 대신이 모두 죄를 받았으며 성상께서 능을 옮겨야겠다고 결심하시어 분부를 내리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는 불행 중 다행한 일로서 국가의 복입니다. 그런데 하늘이 오랫동안 비를 내리지 않자, 심리하라는 명이 계시고 봉심한 대신의 불경하고 불충한 죄까지 모두 사면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전하께서 대신을 극진히 대우한다고 할 만합니다만, 선왕을 섬기는 도리로 볼 때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이른바 심리한다는 것은, 죄가 크더라도 정상에 용서할 만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만, 이번 봉심한 대신의 불경하고 불충한 죄에 대해 전하께서는 혹 용서할 만한 정상이 있다고 여기십니까? 불경·불충은 신하의 큰 죄로서 왕법(王法)에 있어서 용서하지 못할 바인데도 전하께서 이처럼 법을 굽혀 죄를 사면해 주시니, 신은 아마도 하늘의 마음을 감동시켜 비를 내리게 할 수 없다고 여깁니다.
능침(陵寢)을 봉심하는 일은 이 얼마나 중대한 일입니까. 그런데 한두 대신이 성상의 뜻을 체득하지 아니하고 다만 인정에 얽매이어, 명을 받들어 봉심하고는 사실대로 아뢰지 않아 전하로 하여금 지금에 와서야 변고를 아시게 하였습니다. 이는 성상의 마음에 있어서 참으로 원수로 여기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터인데 완전히 석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차라리 신하에게 제재를 받는다는 말을 듣고 말지 감히 대신을 상하지 않으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비록 이러한 생각이 계신다 하더라도 신릉(新陵)의 역사를 끝마칠 때까지 꾹 참고 기다렸다가 곡진히 그들의 입장을 돌봐주셔도 늦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심리를 거행해서 마치 조위봉(趙威鳳)의 말에 색책(塞責)한 것처럼 하신단 말입니까.
아, 도로에서 전해 들은 바로는 탑전에서 다시 봉축(封築)하자는 말씀을 드린 자가 있다 하는데, 마음을 흉참(兇慘)하게 쓴 죄는 봉심한 신하보다 더 심합니다. 전하의 좌우에 모시는 대소의 신료가 이처럼 믿을 수 없으니 어찌 뒷날 능을 옮길 적에 영릉의 전일 근심이 없다고 보장하겠습니까. 재궁(梓宮)을 옮겨 모시는 일은 더욱 대신에게 맡겨서는 안 됩니다. 전하께서는 신구(新舊)의 두 능에 직접 가시어 반드시 정성스럽게 하고 반드시 신실하게 하는 효도를 다하소서.”
하였다. 소가 들어가자, 왕이 비답하기를,
“네 소의 사연을 보니 나의 성효(誠孝)가 형편없는 것이 한스럽기만 하다. 오장이 찢어지는 듯하여 나도 모르게 마음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 능의 일을 감독한 사람의 죄는 더없이 중대하다. 상소의 뜻도 또한 옳으나 그 밖의 일은 곡절이 각각 다르니, 뜬 소문은 사실과 틀리다.”
라고 하였다. 장령 성호징(成虎徵)이 아뢰기를,
“의도가 음험하고 말에 조리가 없으며 위아래를 이간하고 있으니 관작을 삭탈하고 내쫓으소서.”
하고, 대사간 신정은 소를 올려 ‘장응일이 선왕의 능침에 일이 생긴 것을 빙자하여 간사한 계책을 부리려 한다.’고 배척하였다. 응교 이선(李選)이 또 소를 올려 논핵하였는데 그 내용에,
“종통(宗統)·적통(嫡統)의 설은 당초에 화를 전가시키는 수단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윤선도(尹善道)가 앞장서서 주동하고 조경이 뒤에서 응하였는데 능침의 일에는 또 얼굴을 바꾸어 나왔습니다. 그들이 밤낮으로 바라는 바는 오로지 능의 구덩이에 물이 고이고 재궁(梓宮)에 틈이 생기는 것입니다. 만일 털끝만큼이라도 의심쩍은 점이 있으면 반드시 서로 이끌고 일어나서 조정을 어지럽히고야 말려고 할 것입니다. 조위봉의 소가 익수의 뒤에 잇따라 나왔는데, 기회를 타서 교묘하게 중상하는 말이 도리어 칭찬의 비답을 받았습니다. 이번 장응일의 소가 또 천리에서 이르렀는데 10일 안에 이른 연왕(燕王)의 글과1159) 같은 바가 있습니다. 장응일의 죄를 어서 다스리어 간흉한 무리를 단속하소서.”
하고, 장령 김수오(金粹五), 헌납 김석주(金錫胄)장응일을 먼 곳으로 귀양 보내자고 청하였다. 왕이 경연의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이선(李選)의 소는 말 뜻이 조리가 없다. 그가 장응일이 한 일에 노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능침에 저촉된 말을 하였다. 당초에는 처벌하려 하였으나, 사람들이 반드시 ‘장응일은 죄주지 않고 이선을 죄준다.’고 말할 것이므로 잠시 참고 있었다. 장응일이 올린 소의 사연도 올바르지 않으니 멀리 귀양보내고 이선은 관작을 삭탈하라.”
하였다.
9월에 구릉(舊陵)을 열어보니, 아무 탈이 없었다.
10월 7일에 여주(驪州) 홍제동(弘濟洞)에 옮겨 모셨는데, 관과 구덩이에 부수되는 물품에서부터 의위(儀衛)와 상설(象設)에 이르기까지 신중히 하지 않은 것이 없다. 거기에 드는 비용은 모두 내탕(內帑)1160) 에서 가져다 마련하였고 백성에게 징수하지 않았다.
능을 파려 할 적에 왕이 친히 구덩이를 보려고 하자, 김수흥·장선징 등이 힘껏 말렸다. 처음 능을 팔 적에 봉축(封築)이 견고하지 않은 것을 보았기 때문에 이미 옮겨 모신 뒤에 왕이 또 중신·근신·내신(內臣) 등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는데, 구릉(舊陵)의 구덩이에 물이 스며들고 벌레와 뱀의 자취가 있었으며, 또 더러 나무와 돌을 뒤섞어 쌓은 것도 있었다. 왕이 뭇 신하들이 큰 일을 신중히 하지 않은 데에 노하여 하교하기를,
“구릉(舊陵)의 능 위의 석물을 이미 철거하여 헐어버렸으나 그때 간심(看審)한 도감의 당상과 낭청 등의 죄에 대해 형률을 상고하여 처리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모두 잡아다가 가두게 하였다. 도감 당상 정치화(鄭致和)신해년1161) 에 봉심한 대신으로 사실대로 아뢰지 않았다 하여 관작을 삭탈당했다. 왕이 또 명하여 잡아다가 신문한 다음 사형을 감면하고 유배하게 하였다. 그리고 낭관 신명규(申命圭)·이정기(李鼎基) 등은 일죄(一罪)1162) 로 논하게 하자, 대간이 이를 여러 달 동안 논쟁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뒤에 대신의 말에 의해 사형을 감면하고 멀리 귀양보냈다.
당초 구영릉의 자리를 잡을 적에 우의정 송시열이 실로 주장하였다. 이때에 와서 상소하여 ‘개축(改築)해야지 옮겨 모시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하였는데 그 내용에 이르기를,
“구릉의 신혈(神穴)은 매우 편안합니다. 당초 땅을 한 자쯤 파본 뒤에 이미 구덩이에 탈이 없다는 것을 알았으나, 일을 맡은 신하들이 망극(罔極)한 사람들의 말을 두려워하여, 그대로 개봉(改封)하자는 의논을 감히 꺼내지 못하였습니다. 신릉(新陵)이 길지임은 비록 옛날부터 일컬어오던 바입니다만, 어찌 지극히 편안한 땅에 그대로 봉안하는 것보다 낫겠습니까. 또 표석(表石)에 관한 일은 전하께서 이미 사간원의 비답에서 ‘이와 같은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은 국가의 복이 아니다.’ 하였고, 국구(國舅)의 말은 곧 신을 지척(指斥)한 말이었는데 정지하라는 명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전하의 마음에 실로 이것을 그르게 여기고도 강행을 하신 것이니 아마도 성신(誠信)으로 하여 뉘우침이 없게 하는 도리가 아닌 듯합니다. 성명(聖明)께서는 다시 조정의 신하에게 물으시어 옳고 그름을 자세히 살핀 다음에 시행할 것인지 그만둘 것인지 결정한 뒤에야 사리를 얻게 되고 명분이 바르게 될 것입니다. 바라건대, 다시 어물어물 구차히 하여 사람들의 말을 듣지 마소서.
신이 또 듣건대, 성명께서 김만중(金萬重)이 상신을 공박 배척한 것은 무슨 기대가 있어 한 것이라 하셨다는데 외간에 떠들썩하게 전파되어 ‘김만중이 기대한 바는 곧 송시열이다’고 합니다.
아, 김만중이 비록 지극히 어리석다 하더라도 어찌 신의 오늘날 처지가 스스로를 구제하기에도 겨를이 없다는 것을 모르고 신에게 기대하였겠습니까. 성명께서는 신의 실정을 양찰하지 못한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김만중의 위인도 살피지 못하였습니다. 일전에 전하께서 매양 ‘임금과 신하의 사이에는 서로 마음을 아는 것이 소중하다.’라고 하교하셨는데, 어찌 오늘날 이처럼 성명의 알아줌을 받지 못할 줄을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하니, 왕이 비답하기를,
“경의 소를 보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놀라고 의아해 하였다. 경이 선조(先朝)에 은혜를 받은 것이 특별하였으므로 내 생각으로는, 선릉(先陵)의 일을 위해 경이 반드시 물불을 피하지 않을 것으로 여겼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일은 경에게 바라던 바에 크게 어긋났을 뿐만 아니다. 능 안에 빗물이 스며들어 고여있는 상황과 석물이 탈난 일은 경이 익히 보고 들었으며, 현궁(玄宮)에 흠이 없음은 외면으로 알 수 있는 바가 아닌데 어찌 개봉(改封)하자는 의논을 한단 말인가. 이게 내가 의혹하는 바로서 경의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금일 능을 옮기는 일은 풍수(風水)의 설에 미혹된 것이 아닌데, 경의 소에는 마치 이로 말미암아 그렇게 한 것처럼 말하고 있으니, 더욱 놀랍고 의혹되어 경의 뜻을 알지 못하겠다. 간원에 내린 비답에 있어서는, 최후상(崔後尙)을 체례(體例) 사이의 일로 책망한 데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경을 논하지 않은 것을 그르게 여기는 뜻이 조금이라도 있었겠는가. 하물며 김만중의 말은 매우 터무니없어서 내가 놀라고 분하게 여겼다. 그런데 지금까지 생각해봐도 ‘경을 기대하였다.’는 말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면 경에게 전파한 것이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닌가. 경의 사양하는 소는 불평스런 말이 아닌 것이 없는데, 도리어 내 말을 이처럼 극심하게 의심하니 실로 나의 성의가 서로 믿게 하지 못한 소치이므로 부끄럽고 한스러울 뿐이다. 다시 무슨 말을 많이 하겠는가.”
하였다.
송시열이 재차 소를 올려 그전의 설을 거듭 아뢰었으나, 회보하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송시열이 선왕의 능에 표석(表石)을 세우자고 청하였는데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이 불가하다고 말하자, 사간 최후상(崔後尙)김우명을 탄핵하였다. 왕이 비답하기를,
“비록 대신이 건의하였다 하더라도 이미 성명(成命)이 있었다. 만일 이를 핑계로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게 한다면 국가의 복이 아니다.”
하였다. 또 교리 김만중이, 뵙기를 청하여 영의정 허적(許積)은 백관의 윗자리【정승.】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 지척하니, 왕이 ‘대신을 망령되이 논하여 국가의 체통을 떨어뜨렸다.’ 하여 잡아다가 국문하였기 때문에 송시열이 이처럼 말한 것이다.
이 해 9월에 청풍 부원군 김우명이 인대(引對)를 통하여 아뢰기를,
“전 교관(敎官) 민업(閔嶪)의 손자인 민신(閔愼)의 할아버지가 죽었는데 그 아버지가 몹쓸 병이 들었기 때문에 그가 대신 복을 입었습니다. 이것은 민업민세익(閔世翼)이 모두 자식이 없는 셈이고 민세익민세익의 아들도 모두 아버지가 없는 셈입니다. 성명의 세상에 이런 사람을 도성 안에 살게 할 수 없습니다.”
하니, 왕이 하교하기를,
“부자 사이의 큰 윤기가 한 번 어긋나면 사람이 어찌 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 비록 위문하러 온 손님의 지시에 부딛껴서 그렇게 했다 하더라도 민신이 어떻게 그 죄를 면할 수 있겠는가.”
하고, 조사 신문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대개 민신의 일은 전 진선(進善) 박세채(朴世采)가 시킨 것이었는데, 박세채송시열의 논의를 따른 것이다. 논평하는 사람들은 ‘송시열의 이 논의는 윤리에 어긋나고 교화를 손상하는 것으로서 아버지를 무시한 데에 가깝다.’ 하였고, 왕도 그를 그르게 여겼다. 송시열이 상소하여 ‘민씨(閔氏)의 집에서 아들이 아버지를 대신해 복을 입은 것은 본디 선유(先儒)인 주자(朱子)의 설이다.’라고 하면서 논변해 마지않았다. 또 소를 올려 아뢰기를,
“신이 매양 고려의 일을 생각할 적마다 한심함을 금하지 못하였습니다. 고려 때에 임금은 약하고 신하는 강하여 심지어는 연산(燕山)1163) 에 참소하고 권세를 부린 자도 있었습니다. 비록 당시 임금이 앞에서 참소하여도 알지 못하고 뒤에 적이 있어도 보지 못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만, 그때 신하의 죄야말로 머리털을 뽑아가며 책망한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다 셀 수 있겠습니까. 근래에 ‘신하가 강하다.’는 설이 갑자기 만 리의 밖에서 나오고, ‘권세가 위에 있지 않다.’는 말이 상신의 소에서 잇따라 나오니, 대소 신료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 신이 탄핵받은 말은 실로 저 정승과 같습니다. 비록 그 이름을 조금 바꾸었으나, 신이 전일에 남을 위해 위태롭게 여겼던 것이 신이 당할 줄을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경연의 신하가 탑전(榻前)에서 ‘민씨의 집 일은 조정에서 조사해 처리할 필요가 없다.’고 하자, 성명께서 ‘인륜에 관계된 일이므로 그냥 둘 수 없다.’ 하셨다 합니다. 이는 경연의 신하가 마치 신을 위해 그 일을 저지시켜 신의 죄를 덮어주려는 것처럼 하였고 전하 역시 신을 죄에서 벗어나게 하였는데 신은 의리로 보나 법으로 보나 두려워서 감히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대개 이때에 연경(燕京)에서 ‘신하가 강하다’는 설로 질문한 적이 있었는데 사신이 돌아와서 주달하였고, 또 김우명이 뵙기를 청할 때에 송시열을 가리켜 논하면서 ‘사람들이 감히 그의 그름을 바로잡지 못한다.’고 하였기 때문에 송시열이 이것을 스스로 혐의스럽게 여겨 이 말을 한 것이다. 그가 말하는 경연의 신하란 김만중이다. 왕은 그 말에 답하지 않고 ‘내 뜻은 전에 올린 소에 대한 비답에서 이미 다 말하였다.’라고 비답하였는데, 대개 불쾌하게 여긴 것이다. 당시 논평하는 자가 말하기를,
송시열이 주장한 기해년1164) 상복 제도는 사인(士人)과 서인(庶人)의 예로써 제왕가(帝王家)에 썼고, 민신(閔愼)이 아비를 대신해 복을 입은 것은 제왕가의 예로써 사인·서인에게 행한 것이다. 그 논설을 미루어 나가면 장차 임금도 없고 아버지도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인데 송시열이 뉘우칠 줄을 모른다. 또 ‘서(庶)’란 글자는 이미 종묘 사직을 주관한 이에게 쓸 수가 없다는 것을 몰랐다.”
하였다.
갑인 15년 2월에 왕대비가 승하하였다.
6월 4일에 인선 왕후(仁宣王后)1165) 영릉(寧陵)에 장사지냈다.
이해 여름에 가뭄이 들자, 옥당(玉堂)이 차자를 올렸는데 비답하기를,
“아, 부덕한 내가 왕위에 있었기에 신명(神明)에게 죄를 얻어 수재·한재·풍재(風災)·상재(霜災)가 거르는 해가 없었다. 그리하여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이처럼 망극한 재앙을 당하게 하였으니, 항상 이를 생각하면 먹는 것과 쉬는 것이 편치 않다. 금년 여름에 이르러 한발의 혹심함은 근고(近古)에도 드문 일이다. 여기까지 생각하다 보면 한밤중에도 놀라 일어나 하늘이 과인에게 재앙을 내리지 않고 창생으로 하여금 그 재앙을 대신 받게 함을 몹시 슬퍼하고 있다. 차라리 속히 죽어 민생의 곤궁함에 조금이라도 답하는 것이 더 낫겠다.”
하였다.
7월에 영남 유생 도신징(都愼徵)이 상소하여, 인선 왕후(仁宣王后)의 복제(服制)에 대해 논하기를,
대왕 대비(大王大妃)1166) 께서 마땅히 맏며느리를 위하여 기년복(朞年服)을 입어야 하는데, 오늘날의 국가의 복제는 도리어 중서부(衆庶婦)1167) 의 복을 대공복(大功服)으로 정하였으니, 나라의 법을 어지럽히고 사람의 윤기를 전도시킴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소가 정원에 이르자, 정원이 여러 차례 기각하였는데 오래 있다가 들어가게 되었다. 그 뒤에 수일만에 왕이 대신을 불러 보고 하교하기를,
기해년1168) 의 복제는 대개 시왕(時王)의 제도를 사용하였다. 지금 9개월의 복제[大功服]가 기해년의 복제와 같은지의 여부를 아울러 상고해 내되 ‘원임 대신, 육경(六卿), 정부의 동·서벽(東西壁),1169) 판윤(判尹), 삼사의 장관이 모여 의논하여 아뢰어라.”
하였다. 드디어 빈청(賓廳)에서 회의하여, 기해년에 수렴한 의논을 상고해 내어 들였다. 왕이 이르기를,
“만일 등록(謄錄)만 상고해 내고 말려고 하였다면 하필 대신·육조·삼사의 장관에게 회의하도록 하였겠는가. 다시 의논하여 아뢰어라.”
하였다.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김수항(金壽恒), 영의정 김수흥(金壽興), 호조 판서 민유중(閔維重), 병조 판서 김만기(金萬基), 이조 판서 홍처량(洪處亮), 대사헌 강백년(姜栢年), 형조 판서 이은상(李殷相), 한성 판윤 김우형(金宇亨), 예조 참판 이준구(李俊耉), 예조 참의 이규령(李奎齡), 부응교 최후상(崔後尙), 헌납 홍만종(洪萬宗)이 같은 사연으로 대답하기를,
“옛날 기해년에 신하들이 이미 시왕(時王)의 제도를 사용해 기년복으로 정하였습니다. 그런데 《대전(大典)》의 복제를 다시 상고해 보니, 다만 ‘아들을 위하여 기년복을 입는다.’라고 말하였을 뿐이고 장자(長子)와 중자(衆子)의 구별이 없었습니다. 지금 복제를 의논해 정하는 날에 해조에서 바로 부표(付標)하기를 청한 것은 또한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다시 하교하기를,
“계사(啓辭)가 분명하지 못하다. 대왕 대비께서 오늘날 기년복과 9월복에 어느 복을 입어야 하는지 왜 귀결처가 없단 말인가?”
하자, 영의정 김수흥이 대답하기를,
“오늘은 다만 기해년의 복제를 의논하였을 뿐이고, 대왕 대비께서 대비에게 어떤 복을 입어야 될지에 대해서는 감히 가벼이 먼저 의논해 정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왕이 또 탑전에 불러들여, 물음에 대답하지 않은 의도를 힐문하니, 김수흥이 황공하여 사죄하고 글로 써서 아뢰겠다고 청하였다. 드디어 나가 빈청(賓廳)의 신하들과 재차 계사를 올리기를,
《대전(大典)》에서 복제를 상고해 보니. 장자(長子)의 아내에게 기년복을 입어주고 중자(衆子)의 아내에게는 대공복을 입어준다고 하였을 뿐 승중(承重)의 여부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이로써 살펴보면, 대왕 대비의 복제는 대공으로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러나 사체가 중대하므로 정희 왕후(貞熹王后)장순 왕후(章順王后)의 상에서와1170) , 소혜 왕후(昭惠王后)공혜 왕후(恭惠王后)의 상에서1171) 반드시 이미 행한 제도가 있을 것이니, 춘추관(春秋館)으로 하여금 《실록(實錄)》에서 상고해 내게 하소서.”
하였다. 왕이 《실록》강도(江都)에 있어 상고해 내기 쉽지 않다 하여 다시 모여 의논을 드린 뒤에 《실록》을 상고해 내게 하였다. 김수항·김수흥 등이 또 ‘《대전(大典)》에 장자(長子)와 중자(衆子)의 복은 모두 기년으로 되어 있다.’라고 대답하면서 아뢰기를,
“만일 차례로 논한다면 저절로 장자·중자의 구별이 있습니다만, 중자가 왕통을 계승할 경우 장자가 될 수 있다는 조문은 국가의 법전에 뚜렷이 나타난 곳이 없습니다. 오늘날의 복제는 국가의 법전 이외에는 억견(臆見)으로 가벼이 의논하기 어렵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기해년 복제를 의논해 정할 때에 장자·중자에 대한 말이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는데, 이제 와서는 감히 대공의 설을 말한단 말인가? 《대전》의 오복조(五服條)에 왕통 계승에 관한 조항이 없는 것은, 비록 시왕(時王)이 제정한 예라 할지라도 이게 곧 미비한 점이다. 시왕이 제정한 예라고 핑계대고 《예경(禮經)》을 참고하지 않으니 오늘 회의하는 뜻이 어디에 있는가?”
하였다. 빈청(賓廳)에서 재차 계사를 올려, 《의례(儀禮)》 주소(註疏)의 4종 중에 ‘체(體)이기는 하나 정(正)이 아니면 삼년복을 입지 않는다.[體而不正不爲三年]’는 말을 인용하여, ‘국가의 법전이 《예경(禮經)》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대답하였다. 왕이 승지 김석주(金錫胄)에게 명하여 《의례(儀禮)》 경전(經傳)의 ‘아버지가 장자를 위하여 입는다.[父爲長子]’는 조목의 주소(注疏)를 문단마다 해석하여 들이게 하였다. 이튿날 재차 올린 계사에 답하기를,
“계사가 터무니없어 나도 모르게 놀랐다. 경들은 모두 선왕의 은혜를 입었는데, 이제 와서 감히 ‘체이기는 하나 정통이 아니다.[體而不正]’라는 설로 오늘날의 예율을 삼고 있다. 《예경(禮經)》 주석 중의 ‘서자(庶子)라고 한 것은 장자와 엄격히 구별한 것이다.’는 설은, ‘4 종(種)은 삼년복이 될 수가 없다.’는 문귀와 관통되지 않는다. 가공언(賈公彦)의 소에 이미 ‘첫째 아들이 죽으면 적처(嫡妻)에게서 난 둘째 아들을 세우는데 이 역시 장자(長子)라고 부른다.’ 하였으니, ‘체이기는 하나 정통이 아니다.[體而不正]’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경들이 이처럼 이치에 가깝지 않은 어긋난 말을 예율로 정하여 선왕을 ‘체이기는 하나 정이 아니다.’라는 것으로 지목하였으니 임금을 박하게 대우하였다고 하겠는데, 누구에게 후하게 하려고 한 것인가? 막중한 예를 의탁한 논의를 가지고 정제(定制)라고 결단할 수 없으니 당초에 마련한 국가의 제도에 따라 정하여 거행하라.”
하였다. 또 정원에 전교하여, 기년으로 고쳐 표지를 붙이게 하고, 예관을 잡아다가 신문하여 죄를 정하게 하였다. 예조 판서 조형(趙珩), 예조 참판 김익경(金益炅), 예조 참의 홍주국(洪柱國) 등을 모두 하옥하고 대공(大功)의 복제를 고쳐 기년으로 정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대신의 직책은 문서를 봉행하는 데에만 있는 게 아니라, 큰 일에 임하여 지조를 변하지 않아야만 곧 임금을 보좌하여 나랏일을 해 나갈 수 있다. 영의정 김수흥이 오늘날 복제에 관해 회의할 때 감히 수많은 어지러운 논설로 아뢰었으나 끝내 귀결처가 없었다. 혹은 인용해서는 안 될 고례(古例)를 인용하기도 하고, 혹은 국가의 법전 몇 마디 말로 책임이나 때웠는가 하면 마침내 두서도 없고 이치에 가깝지도 않은 말로 ‘체이기는 하나 정이 아니다.[體而不正]’라는 말을 주창하였으니, 선왕을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의 논의에 빌붙은 그의 죄를 결코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 중도 부처(中途付處)하라.”
하였다. 승지 이단석(李端錫), 사헌부의 이광적(李光迪)·유지발(柳之發)·송창(宋昌)·정창도(丁昌道)·김빈(金), 사간원의 이혜(李嵇)·송창(宋昌), 옥당의 조근(趙根)·권유(權愈) 등이, 예관을 나국하라는 것과 김수흥(金壽興)을 부처(付處)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어 들이기를 청하였다. 왕이 승정원에게는 ‘번독(煩瀆)하게 한다.’고 꾸짖고, 대관(臺官)에게는 ‘규핵(糾劾)하지 못하고 직무를 거행하지 못한 데다 사정을 따르고 공론을 멸시한다.’는 것으로 지척하고, 옥당에게는 ‘터무니없다.’는 것으로 지척하고, 이광적·유지발 등은 관작을 삭탈하여 내쫓았다.
정원과 삼사가 또 그를 구원하였으나 왕은 모두 듣지 않았다. 좌참찬 이상진(李尙眞)이 또 소를 올려 구원하니, 왕이 ‘임금을 섬기는 데 의리가 없다.’고 지척하였다. 좌의정 정지화(鄭知和)가 또 차자를 올려 논하니, 왕은 ‘임금을 성실하게 섬기는 도리가 아니다.’라고 비답하였다. 대사간 남이성(南二星)이 또 소를 올려 논변하니, 전교하기를,
남이성이 감히 이의를 제기하여 앞장서서 분노를 부리고 대신에게 아부하면서 감히 ‘반드시 오늘 빈청에서 의논해 올린 계사와 같이 해야만 국가의 전례(典禮)가 털끝만큼도 미진하다는 비평이 없을 것이다.’고 말하고 또 ‘각각 소견을 지키고 각각 그 논설을 펼 뿐이니, 여러 사람의 말이 어지러우므로 성인에게서 절충돼야 한다.’ 하였다. 어지러운 말이 성인에게서 절충되지 않았을 때에는, 그의 임금을 위해 후한 논의를 따르는 것이 옳은가, 반드시 4종의 조목 중 한 조항에 의거해 박한 논의를 따르는 것이 신하로서 바꿀 수 없는 의리인가? 또 감히 박한 쪽을 따라 도리에 어긋나는 논의를 따라야만 ‘털끝만큼도 미진한 비평이 없을 것이다.’고 하는 것은 또한 무슨 의도인가? 이것은 임금을 무시하는 자의 말이다. 전후로 아부한 말과 임금을 잊어버리고 나라를 저버린 그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멀리 외딴 섬에다 귀양보내라.”
하였다. 승지 이합, 장령 안후태, 부교리 조근 등이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고, 조근을 강서 현령(江西縣令)으로 특별히 보임하였다.
8월에 왕이 병이 들자, 승지를 급히 보내어 충주에 있는 영의정 허적(許積)을 불렀다. 왕의 병이 매우 위독하자, 허적을 침소로 불러들여 떠나갈 만한 의리가 없다고 하고, 또 이르기를, “경의 마음을 내가 아는 바이고, 나의 뜻을 경도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기(氣)가 부족하여 국가의 일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한다.”
하였다. 또 좌의정 김수항을 불러 앞으로 가까이 오게 하고는 애써 유시하였다. 이날 저녁에 승하하니 18일 기유(己酉)였다. 대개 인조 대왕이 즉위하여 소현(昭顯)을 세자로 책봉하였으므로 효종 대왕은 차적(次嫡)이 되었다. 소현 세자가 죽자 세자빈(世子嬪) 강씨(姜氏)가 죄를 지어 폐위되고 그의 아들도 불초하였다. 인조가 이르기를,
소현의 자식은 결코 왕업(王業)을 짊어질 사람이 못 된다. 나라에 장성한 대군이 있으니 사직의 복이다.”
하고, 효종을 대신 세자로 책봉하였다. 효종이 승하하자, 송시열·송준길·유계 등이 복제를 의논해 정하면서 ‘대왕 대비가 효종을 위해 입는 복은 서자(庶子)를 위해 입는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 하니, 외부의 의논이 자못 시끄러웠는데 그 의논에,
“대왕 대비가 대행 대왕(大行大王)1172) 에게는 왕통을 계승한 지존(至尊)의 복을 입어 주어야지 최복(衰服)으로만 제정할 일이 아니다.”
하였다. 의논을 수렴하게 되자, 송시열이 또 ‘장자에게 기년복을 입는다.’는 국제(國制)의 설을 빌어다가 논설을 세웠으므로 기년의 복제가 드디어 행해졌다. 그러나 ‘장자에게 기년복을 입는다.’는 제도는 《대명률(大明律)》과 국조의 《대전(大典)》에 실려 있는 실로 사서인에 대한 제도의 법이고 왕조에 대한 전례(典禮)가 아니었다. 이 때문에 뭇 의논이 더욱 불평하였다.
효종 상이 기년이 되자, 전 장령 허목(許穆)이 소를 올려 ‘기년복은 옳은 복제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가공언(賈公彦)의 주소(注疏) 중 ‘둘째 아들을 장자로 세운 경우 삼년복을 입는다.’는 조문을 인용하여 송시열의 설을 깨뜨렸다. 이때 조정에서 허목의 말을 옳게 여긴 이가 많이 있었다.
좌의정 원두표(元斗杓)가 차자를 올려, 당초 기년의 복제를 따른 것이 잘못되었음을 스스로 나열하고, 대신·유신(儒臣)에게 다시 의논하게 하자고 청하였다. 마침 전 참의 윤선도(尹善道)가 기년복제의 잘못에 대해 소를 올려 논하면서 심지어 ‘종사를 편히 하고 백성의 뜻을 안정하라.’고 말하고 또 송시열이 어질지 않다고 지척하였다. 이에 조정 의논이 발칵 뒤집혀 서로 편당을 지어 배척하였다.
이때 승지 이유태(李惟泰)가 마침 부름을 받고 도성에 들어와서 ‘윤선도가 예를 논한다고 빙자하여 사림(士林)에게 화를 전가하려 한다.’고 말하고, 송시열도 의논 수렴에서 허목의 설이 옳지 아니함을 크게 지척하고, 또 단궁(檀弓)이 문복(免服)을 입고1173) 자유(子游)가 최복(衰服)을 입었다1174) 는 말을 인용하여 그 뜻을 거듭 밝혔다. 이에 허목의 설이 드디어 행해지지 못하고 윤선도는 귀양갔다. 우윤(右尹) 권시 또한 소를 올려 윤선도를 구원하다가 죄를 얻었다.
얼마 뒤에 원두표가 또 차자를 올려 ‘제후(諸侯)가 종통을 빼앗는 의리’에 대해 진달하고 또 다시 복제에 대해 이유태·윤선거(尹宣擧)·심광수(沈光洙)·허후(許厚)·윤휴(尹鑴) 등에게 물어보자고 청하였다. 윤선거는 외방에 있었고, 허후의 의논은 가부가 없었고, 이유태는 기년복제의 의논을 따랐고, 심광수는 종통의 의논을 따랐으며, 윤휴는 ‘오직 그 인심에 의거하면 대강(大綱)에 관계되고 선왕(先王)에게 어그러짐이 없다.’는 뜻으로 말하였으며, 영의정 심지원(沈之源), 영돈녕부사 이경석(李景奭)은 국가의 전례로 말하였다. 왕이 다수의 의논에 따라 시행하게 하니 기년의 복제가 마침내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판부사 조경, 수찬 홍우원(洪宇遠), 전 참판 조수익(趙壽益)이 모두 소를 올려 윤선도권시를 구원하고 또 복제가 잘못되었음을 논하니, 대간의 논의가 크게 일어나, 혹은 귀양보내기를 청하고 혹은 파직하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뒤에 무릇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설에 참여한 사람에 대해서는 모두 ‘간사한 사람과 편당을 짓고 바른 사람을 미워하였다.’고 지목하였으므로 벼슬에 제수되지 않은 지가 거의 10여 년이나 되었다.
인선 왕후(仁宣王后)의 상을 당하게 되자, 예관이 처음에는 기년으로 대왕 대비(大王大妃)의 복제를 정하였는데, 이는 대개 당(唐)·송(宋) 때 적부(嫡婦)에게 입어주는 상복의 제도를 사용한 것이다. 외부의 의논은 ‘효종 대왕이 이미 서자(庶子)가 되었으니 인선 왕후가 적부(嫡婦)가 될 수가 없다.” 하면서 비평하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 송시열에게 편당하는 자가 또 앞뒤1175) 의 복제가 다르다 하여, 예관 조형(趙珩) 등에게 부탁하여 대공(大功)으로 고쳐 표지를 붙여 들였는데, 대개 서부(庶婦)에게 입어주는 상복 제도를 사용한 것이다. 왕이 앞뒤가 전도되었다 하여 예관을 가두고 치죄하였다. 그러나 대공의 복제가 또한 시행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빈청(賓廳)에서 모여 의논하는 일이 있었는데, 7월 13일이었다. 왕이 깨닫고 뜻이 불끈 솟구쳐 친히 《예경(禮經)》을 고증하여, 《예경(禮經)》 주소(注疏)의 ‘적처(嫡妻)에게서 난 둘째 아들을 세워도 또한 장자(長子)라고 부른다.’는 문구로 주장을 삼아, 대왕 대비의 복제를 대공에서 기년으로 고쳐 입게 하였다. 이에 적통(嫡統)이 밝아지고 나라의 예가 엄해지는 동시에 인심도 흡족히 여기었다. 왕의 뜻을 여쭈어 보지 않고 마음대로 복제를 고쳤다 하여 예관을 죄주고, 《예경(禮經)》을 따르지 않고 다른 논의에 의탁하였다 하여 수상을 죄주었는데, 빌붙은 여러 사람은 모두 차례로 벌을 받았다. 또 장차 내치고 들어쓰는 일을 크게 밝혀 국시(國是)를 바르게 하고 종묘를 존중되게 하려 하였는데, 왕의 건강이 좋지 않았다.
8월 7일에 다시 재신(宰臣)을 불러 빈청에 모이게 하고 불러들여 일을 의논하려 하였는데, 갑자기 병이 들어 실행하지 못하였다. 12일이 지나 창덕궁(昌德宮)재려(齎廬)1176) 에서 승하하니 춘추 겨우 34세였고 왕위에 있은 지 15년이었다. 아, 슬프도다!
왕이 어려서부터 숙성함을 타고나 어려서도 장난을 좋아하지 않았다. 춘궁(春宮)에 있을 적에 효도를 다하여 증자(曾子)·민자(閔子)의 덕행이 있었고 왕위에 오르게 되자 정신을 가다듬어 정치에 힘쓰고 조상의 사업과 뜻을 잇는 일에 마음을 두었다. 대비 및 대왕 대비에게 효성을 다해 섬겨 비평하는 말이 없었고, 기쁘고 화락한 얼굴빛과 아침 저녁으로 문안하는 예를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으니 양전(兩殿)이 기뻐하고 궁중에 화기가 넘쳐 흘렀다.
대왕 대비가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과도하게 슬퍼하다가 병이 위급하자, 왕이 뜨락의 한데에 앉아서 의원을 불러 약을 묻고, 손수 약물을 가지고 들어가서 올리니, 이 말을 듣는 이들이 감동하였다.
왕대비가 처음 통명전(通明殿)에서 거처하였는데, 왕의 거처와 조금 사이가 떨어졌었다. 왕이 왕대비를 위해 집상전(集祥殿)을 지어 옮겨 모시려 하였다. 집상전이 완성되기 전에 대조전(大造殿)으로 옮겨 거처하기를 청하고 자신은 부근의 별실(別室)에 거처하여 봉양하는 데 편리하게 하였다. 대비가 묵은 병이 있었는데 왕이 밤낮으로 정성을 다해 그 마음을 위로하였다. 대비가 일찍이 말하기를,
“왕이 매양 곁에 있으니 병이 몸에서 떠나가는 것 같다.”
하였다.
일찍이 대왕 대비를 모시고 남군(南郡)1177) 에 거둥하여 온천에 목욕하여 효과를 보았는데, 왕이 도내에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을 크게 베풀었다. 환궁하여 또 조정과 종친에게 은전을 베풀고 제도(諸道)에까지 일체로 행하였다. 이는 대개 내 노인을 노인으로 존경하는 마음을 미루어 남의 노인을 존경하는 은혜[老老之恩]를 미루어 시행한 것이다.
세시(歲時)에 항상 부로(父老)들을 위문하고 혹은 달마다 늠료(廩料)를 주기도 하였으며 재신에게는 달마다 쌀과 고기를 계속 보내 주었다. 판서 박장원(朴長遠)이 어머니에게 효도하였는데 그가 먼저 죽자, 왕이 특별히 명하여 그의 어머니에게 종신토록 늠료를 주게 하였다. 가까이 모시는 신하들 중에 어머니가 늙었다 하여 돌아가 봉양하기를 청하면 왕은 윤허하지 않고 쌀·고기·옷감들을 넉넉하게 라고 명하였다. 부모의 봉양을 위해 주군(州郡)의 수령을 원하는 자가 있으면 곧 허락해 주고, 혹 그 사람이 지방관으로 나가는 것이 아까우면 특별히 쌀과 베를 주었는데, 그 효도로 다스림이 이와 같았다.
왕에게 다섯 자매가 있었는데, 매우 사랑하였고 똑같이 대우해 주었다. 좋은 음식을 얻게 되면 반드시 나누어 먹고, 병이 났다는 말을 들으면 놀라고 근심하여 문병으로 보내는 사람과 약을 가지고 가게 한 사람이 끊이지 않았으며 죽었을 경우에는 비통해 마지않았다. 신하들의 상소에 죄없이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의 형제를 모함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몹시 미워하고 통렬히 배척하였다.
소현 세자의 딸이 황창 부위(黃昌副尉) 변광보(邊光輔)에게 출가하였는데,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슬퍼하면서 말하기를,
“선조(先朝)의 사랑이 여러 부마(駙馬)보다 못하지 않았다. 이런 일들을 생각해 볼 때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특별히 해조(該曹)로 하여금 보살펴 주게 하여 선왕께서 시종 한결같이 하신 뜻을 보존하도록 하라.”
하였다. 친족과 매우 화목하여 곡진한 은혜의 뜻이 있었고, 친분을 헤아려 돌보아 주어 끊임이 없었다. 왕이 귀척(貴戚)에게 대우를 융숭히 하였으나 사정에 흔들려 공사를 해친 적이 없었다. 여러 궁가(宮家)의 하인들이 한 번이라도 법을 범하여 방종한 자가 있으면 반드시 유사(有司)에게 회부하여 법으로 통렬히 다스렸다.
학문에 마음을 두어 의리를 강구하고, 질병이 있지 않으면 반드시 경연에 나갔다. 또 전대의 역사를 강구하기를 좋아하여, 그 임금의 수덕(修德) 여부와 정치의 득실, 민생의 고락에 대해 부지런히 토론하여 거울로 삼았다. 견해가 고명하여 항상 강관(講官)의 견해보다 뛰어났다.
동궁(東宮)에 있을 적에 이미 심리학에 뜻을 두어 선유(先儒)의 인심 도심설(人心道心說)을 써서 들이게 하여 살피고 음미하는 자료에 대비하였다. 일찍이 《대학(大學)》을 강할 적에 왕이 이르기를,
“몸을 닦는 데서부터 천하를 다스리는 데에 이르기까지 경(敬) 자의 공부가 아닌 것이 없다.”
하고, 《중용(中庸)》을 강할 적에 왕이 이르기를,
“사람이 도(道)를 멀리 있다고 여기는 것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이어서 묻기를,
“어떤 것이 비근(卑近)한 것이고 어떤 것이 고원(高遠)한 것인가?”
하니, 강관이 아뢰기를,
“사람의 일이 비근한 것이고 불씨(佛氏)와 노자(老子)의 교리(校理)가 곧 고원한 것입니다.”
하자, 왕이 이르기를,
“반드시 불씨와 노자(老子)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절실하지 않은 것이 곧 고원한 것이다.”
하였다.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할 적에 왕이 이르기를,
“격물·치지(格物致知)하는 방법이 이 책에 모두 구비되어 있다. 비록 격물·치지를 한다고 하더라도 성의(誠意)를 하지 않는다면 어디에다 공력을 쓸 수 있겠는가. 또 반드시 성의의 공부가 있어야만 격물·치지한 바가 배치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서경(書經)》을 강할 적에 익직편(益稷篇)의 ‘제(帝)여, 제위(帝位)에 계심을 삼가소서.’라는 대목에 이르자, 왕이 이르기를,
“임금이 임금의 자리에 있는 도리는 삼간다는 신(愼)의 한 글자보다 더 큰 것이 없다. ‘기미를 생각하여 편안함을 생각한다.[惟幾惟康]’는 것은 대개 공부하는 데 매우 요긴한 곳을 말한 것이다. 기미[幾]란 생각하는 시초이고 편안함[康]이란 안락한 즈음이니, 더욱 삼가해야 한다.”
하였다. 역대의 일을 강할 적에 강관이 아뢰기를,
한 문제(漢文帝)는 자질이 높지 아니한 것은 아니나, 배운 바가 다만 황제(黃帝)·노자(老子)의 도(道)였으므로 몸소 현묵(玄默)을 행하느라 옛날 성왕(聖王)의 정치를 회복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무제제 양공(齊襄公)이 복수한 말을 인용한 것1179) 을 살펴보면 규모가 매우 컸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고, 무력을 함부로 남용하였으나 마침내 패망하지 않은 것은 윤대(輪對)의 뉘우침1180) 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무력을 함부로 남용한 것은 다른 게 아니라 한 고제(漢高帝)평성(平城)의 근심을 남겼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자질이 이와 같았으므로 말년에 그것이 잘못된 일이었다는 것을 알고 곧바로 윤대를 버리는 조칙(詔勅)을 내리고 또한 신선 구하는 일을 파할 수 있었던 것1181) 이다.”
하였다. 당 태종(唐太宗)이 군사를 일으킬 때의 일에 이르러서 장관으로 하여금 범엽(范曄)이 논단한 사평(史評)을 읽게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하였다. 건성(建成)의 일1183) 을 논하기를,
명나라 태종조(太宗朝)한왕(漢王) 고후(高煦)는 사람됨이 선량하지 못하였으나, 인종(仁宗)이 태자가 되어 은혜와 사랑으로 대우하니, 인종의 세대가 끝날 때까지 감히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하였다. 가령, 건성태종을 이와 같이 대우하였더라면 어찌 피를 흘리는 변고가 있었겠는가.”
하였다. 송 태조(宋太祖)가 한잔 술로 병권을 해제한 일1184) 을 강할 적에 강관이 아뢰기를,
“이것은 권모 술수에 가깝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무슨 지장이 있겠는가. 이것은 인심을 열복(悅服)시킨 것이다.”
“스스로를 속이는 것도 안 될 일인데, 하늘에 계신 조종(祖宗)의 영혼을 속일 수 있겠는가. 진종의 초기 정사는 또한 볼 만하였는데, 간사한 소인에게 그르친 바가 되어 그 마지막을 잘 끝내지 못하였으니 심히 경계할 만하다.”
하였다. 왕이 경연에 임하여 강논한 말씀 중에 아름다운 말이 매우 많았으나 다 기록하지 못하였다.
강을 정지하던 날에는 또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사기를 고열(考閱)하여 정치하는 데에 절실한 고사(故事)를 써서 올리게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써서 올린 바의 고사가 볼 만할 뿐만 아니라, 또 풍자하고 깨우치는 뜻이 많으니 내 유념하겠다.”
하였다. 밤에 측근의 신하를 불러 보고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강마하고 백성의 일에까지 물으니, 정의가 서로 부합되어 마치 가정의 부자 사이와도 같았다. 왕이 눈병이 있었으나 촛불에 책을 보았다. 신료들이 더 덧칠까 두려워하자, 왕이 이르기를,
“겨울밤이 매우 길고 또 내가 잠이 없어 삼경 전에는 잠자리에 들지 못하니 책을 보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뒤에 눈병이 심해지자, 옥당으로 하여금 사서(四書)오경(五經)을 써서 올리게 하되 그 글자를 크게 써서 열람하는 데 편리하도록 하였다. 비록 병환 중에 있었으나 학문에 항상 이와 같이 힘썼다.
대신을 예우하여, 말을 하면 의견을 굽혀 따르지 않은 적이 없었다. 병이 들면 의원과 약을 보내 문병하고 죽었을 경우에는 상(喪)이 끝날 때까지 녹봉을 그대로 주고 혹은 제수(祭需)까지 주었으며, 혹은 안석[几]과 지팡이를 특별히 하사한 적도 있었다. 유학(儒學)을 중시하는 선왕의 뜻을 왕이 이어받아 송시열·송준길 등을 대접함에 있어 은우(恩遇)가 매우 융숭하였으며, 이유태·이상(李翔) 등 여러 사람도 초빙하여 아울러 특별한 예로 대우하였다. 그리하여 송시열은 마침내 의정(議政)에 제수되고, 송준길은 지위가 삼재(三宰)1186) 에 이르렀다. 송시열·송준길 등이 예를 그르친 일이 발각되게 되자, 사당(私黨)을 지어 자기와 다른 사람을 배척하는 마음을 갖고서 효종의 능을 옮긴 뒤에 소를 올려 뒤늦게 지난 일을 탓하니, 왕이 그의 편벽됨을 미워하여 대우가 약해졌다.
처음 왕이 송시열 등을 대우할 적에 정성과 예의가 아주 지극하여 전고보다 특출하자 조정과 재야에서 그들의 풍채를 사모하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송시열 등이 잘 받들지 못하고 도와주는 바가 없어 실패를 가져오게 되었으며, 좌우의 두세 명 신하에 이르러서도 그들이 이끄는 대로 행동만 한 채 국사를 담당하고 보필하여 공적을 이룬 게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모두 ‘임금은 있으나 신하는 없다.’고 탄식하였다.
왕은 여러 신하를 매우 너그럽고 후하게 대우하였는데, 항상 말하기를,
“임금 노릇하는 도리는 아랫사람에게 시기와 의심으로 대하면 아랫사람이 반드시 불안한 마음을 갖게 되므로 오직 성의를 미루어 대해야 하는 것이다.”
하였다. 언로(言路)를 열기에 힘써 비록 남을 공격하고 남의 비밀을 들추어내는 정직한 체하는 자일지라도 반드시 받아들여 너그러이 용납하고 혹은 포상하여 장려하기도 하였다. 비록 초야의 미천한 사람의 말이라도 반드시 채택하여 기록하게 하고 혹은 벼슬을 제수하기도 하고 혹은 상을 내리기도 하였다. 화재로 집을 잃은 측근의 신하가 있었는데 특별히 호조에 명하여 구제하게 하였다. 그들이 죽었을 때 노고한 행의(行誼)가 있거나 혹은 청렴 근신(謹愼)으로 드러났을 경우에는 관례로 보내는 부의(賻儀) 이외에 별도로 관재(棺材)를 하사하고 혹은 상수(喪需)·제수(祭需) 및 일꾼을 보내 도와주고 아울러 그들의 아내와 자식의 굶주림과 추위를 구제해 주었으며, 작고한 훈신(勳臣)의 아내와 자식에게도 그와 같이 하였다.
임인년1187) 청나라에서 사사(査使)1188) 를 보내어, 의주 부윤(義州府尹) 이시술(李時術)이 본부의 사람이 강을 건너가 나무를 베게 허락하였다 하여 사형으로 단안을 내렸다. 왕이 반복하여 굳이 변론했으나 해결되지 않자, 특별히 이시술에게 금 5백 근을 주어 그들에게 뇌물을 써서 화를 해결하는 자본으로 삼게 하였다. 그리고 사관(査官)을 특별하게 접대하고 이어서 사신을 보내어 구하였는데, 이시술이 이에 힘입어 완전히 모면하였다. 신하를 자신의 몸처럼 보살핌이 이와 같았다.
조정이 화목하지 못한 것을 고민하여 매양 서로 삼가고 협력하는 도리로 책려(策勵)하고, 방백과 수령이 조정을 하직하고 임지로 떠날 적에는 병이 있지 아니하면 곧 불러보고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를 물어본 다음 백성을 어루만지고 사랑하는 방도를 거듭 일러주었다. 또 전임(前任) 때의 폐막을 묻고는 아뢴 바에 따라 곧 변통하게 하였다.
인재를 수용(收用)하되 먼 지방의 사람도 빼놓지 않았다. 서북(西北) 양도(兩道) 지방은 길이 멀고 제주(濟州)는 바다 속에 있다 하여 특별히 중신과 근신(近臣)을 보내어 과거를 보여 인재를 뽑게 하고 백성을 구제하게 하니, 먼 지방 사람이 모두 고무되었다. 향천(鄕薦)1189) 의 법을 거듭 밝히고 또 재신(宰臣)과 삼사(三司)로 하여금 인재를 별도로 천거하게 한 다음 재능이 특이한 자가 있으면 평상의 격례에 구애하지 않고 발탁해 썼다.
또 항상 이조에 신칙하여 전사한 사람 및 청백리의 자손을 녹용(錄用)하게 하고, 혼조(昏朝) 때 원통하게 죽은 사람에 있어서도 증직하라고 하였다. 그 뒤에 충신·현사(賢士) 중에 특출한 자는 모두 기록하여 혹은 사당을 세우거나 관작을 추증하기도 하고 혹은 비를 세우거나 무덤을 표지(表識)하기도 하고 그 후예에게 벼슬을 주기도 하고 혹은 그 호역(戶役)을 면제해 주기도 하는 등 표창하는 은전이 거의 빠뜨림이 없었다. 효자나 열녀 중에 행실이 드러난 자에게는 곧바로 정문을 세워서 표창하였는데, 서민과 노비에게도 두루 미치었다. 한번은 경연의 신하와 세조성삼문(成三問)의 일에 대해 의논하게 되었는데, 왕이 이르기를,
성삼문 등은명나라 방효유(方孝孺)1190) 등과 같은 사람이다.”
하였으니, 충의(忠義)를 포상하고 높이는 뜻이 이와 같았다.
백성의 일은 지성으로 근심하고 노고하였다. 만일 상위(象緯)1191) 의 변고나 수재·한재를 만나면 곧바로 정전(正殿)을 피해 거처하고, 수라의 가짓수를 줄이고, 자기 자신에게 죄를 돌리고, 도움되는 말을 구하였는데, 전후로 내린 애통한 교서가 신민으로서 차마 듣지 못할 정도였다. 비가 내리기를 빌 적마다 친히 제사지내지 않더라도 반드시 궁중에서 재계한 다음 밤새도록 한데 서서 묵묵히 기도하고 기우제를 파할 때가 되어서야 편히 쉬었다.
만일 재난과 흉년을 만나면 신료들을 불러들여 재변을 사라지게 하는 계책을 강구하고 진구하는 정사를 크게 거행하였다. 그리하여 조세와 공물을 면제하고 포흠진 것을 감면하며 혹은 곡식을 옮겨다가 구제하기도 하고 혹은 죽을 쑤어 그들을 먹였다. 돌림병이 나돌면 양의(良醫)를 나누어 파견하여 약을 가지고 가서 구제하게 하였다. 또 측근의 신하를 보내어 여제(厲祭)를 지내고 국상(國殤)에게 제사지냈다. 그리고 조석으로 공급하는 어주(御廚)의 물품을 절약하고 초하루와 명절에 올리는 외방의 공물 헌납을 정지하고, 주방(酒房)을 파하고, 어구(御廐)의 말을 방출하였으며, 공상(供上)하는 일용의 물품에 이르기까지 또한 모두 재량하여 줄였다. 또 내장(內藏)1192) 과 각 아문에 저축된 것을 풀어서 진휼에 돕게 하였는데, 곤궁한 백성에게 은혜를 베푼 정사가 하나뿐만이 아니었으나, 오래 갈수록 더욱 독실하였다. 항상 말하기를,
“백성이 굶주리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먹는 것이 목에 넘어가지 않고 잠자리가 편치 않았다. 만일 한 가지라도 백성을 살릴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아까운 물건이 뭐가 있겠는가.”
하였다. 진휼을 파한 뒤에 또 어사를 보내어 제도(諸道)의 수령이 진휼의 정사를 잘 거행했는지의 여부를 염탐하게 한 다음 승진시키거나 벌을 주었다. 경술·신해 두 해에 이르러서는 팔도가 크게 기근이 들고 이어서 큰 돌림병이 떠돌았다. 왕이 밤낮으로 애태우며 성의를 다해 구제하되 더욱 여러모로 힘을 기울였다.
임자년1193) 봄에 국내에 선유(宣諭)하여 여러 해 동안 포탈된 부세(賦稅)를 모두 탕감하게 하고 이어서 죄수 및 폐고(廢錮)된 사람을 모두 처결하여 방면하고 서용(叙用)하게 하니, 백성들이 매우 기뻐하였다. 이 때문에 크게 흉년이 들어 길에 굶어 죽은 사람이 즐비하였으나 포악한 백성이 일어나지 않고 나라의 근본이 흔들리지 않았다. 중외(中外)에서 물에 빠져 죽거나 불에 타서 죽거나 맹수에 해독을 입은 자가 있다고 아뢰면 또한 반드시 돌보아주게 하였다. 겨울철에 호위하는 병사가 추위에 고생하는 것을 염려하여 특별히 동옷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한번은 능침(陵寢)을 참배하는데 벼를 수확하기 전의 절기였다. 왕이 영을 내려 이르기를,
“나를 수행하는 신하들과 상장(廂將)1194) 이 경유하는 곳에 만일 풀 한 포기라도 손상하였을 경우 금령을 범한 견책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고, 행차가 지날 적에 또 점검해 보게 하였다.
온천에 거둥할 때에 왕이 이르기를,
“도로를 정비하되 가마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정비하고 혹시라도 도로를 넓게 확장하여 백성의 전지에 손해를 끼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온천 근처의 백성이 집을 비워 수행한 관원을 거처하게 하고 스스로는 한데에 거처한 것을 보고는 매우 불쌍히 여겨, 쌀과 콩을 주어 호구(糊口)의 밑천으로 삼게 하였다. 서울로 돌아왔을 때 온천에서 돌아오는 측근의 신하가 있었다. 왕이 그에게 벼가 손상된 곳이 있던가라고 묻자, 그가 대답하기를,
“의장(儀仗)을 설치하였던 근처에 약간의 손상이 있었습니다.”
하자, 왕이 댓가를 넉넉하게 보상하라고 명하였다. 그 불쌍하게 여기고 근심하고 사랑함이 이와 같았다.
일찍이 팔도의 군안(軍案)을 조사하여 어린아이 및 죽은 사람 2만 명이 납부해야 할 군포(軍布)를 면제해 주었다. 그리고 특별히 내수사(內需司)의 베를 내리고, 또 상평창(常平倉)의 은·베와 감영·병영에 저축된 것을 풀어서 내외(內外)의 비용에 보충하게 하였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는 본디 호구의 부세(賦稅)가 없고 다만 군졸이 납부한 베로 경상의 비용으로 써 왔는데 백성들이 오랫동안 이를 근심거리로 여겼다. 왕은 폐단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 줄을 알고 갑인년1195) 에 대간의 말을 채용하여 바야흐로 크게 변통해 영원한 제도로 만들려고 하였으나 미처 이 일을 시행하지 못하였다.
각사(各司) 노비들의 공포(貢布)가 다른데 비해 너무나 많아 오랫동안 고질적인 병폐가 되어 왔다. 왕이 특별히 내수사의 공부(貢賦)를 감하되 아울러 고루 감해주게 하였다. 내수사의 재물 용도가 이로 인하여 더욱 궁핍하게 되었으나 왕은 상관하지 않았다.
선조(先朝)에서 호남·호서에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여 부세를 고르게 함으로써 백성들을 편리하게 하였으나, 호남의 산간 고을에서는 미처 시행하지 못하였다. 왕은 그 공적의 뒤를 이어서 더욱 구별 획정(劃定)하여 두루 시행하게 하니, 백성이 매우 편리하게 여겼다.
왕가(王家)의 법도가 매우 엄하여 궁중이 엄숙하였고 안팎의 구분이 엄격하였다. 재신(宰臣)과 간신(諫臣)이 일찍이 왕가의 일가붙이와 궁중의 일을 말하였는데, 사실과 틀린 것이 있었다. 왕이 이르기를,
“내가 진실로 털끝만큼이라도 사사로운 뜻이 없다면 사람들의 말이 반드시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그런 일이 있으면 고치고 그런 일이 없으면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비록 한 말이 사실과 틀렸다 하더라도 들은 바를 다 아뢰었을 뿐이니, 혐의할 게 뭐가 있겠는가.”
하였다. 한번은 장번 내관(長番內官)1196) 이 말미를 받아 고향에 내려갈 때에 외방에 폐해를 끼쳤는데, 내관을 꾸짖어 파면하고, 이를 알고서 아뢰지 않았다 하여 특별히 그 도의 감사를 추고하였다.
왕의 성품이 독실함을 좋아하고 명예에 가까운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궁중에서 좋은 일을 행하였을 때 혹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하면 마음에 매우 싫어하므로 시종의 신하가 그 뜻을 알고 감히 외부에 퍼뜨리지 않았다. 검소하기를 더욱 좋아하여 겉옷을 제외하고는 비단옷을 입지 않았다. 한번은 병이 들어 신료를 대내(大內)에서 접견하였는데 방안에 깔아놓은 자리가 매우 낡았으나 바꾸지 않았다. 신료들이 물러나와서 감탄하였다.
왕이 정대한 학문에 마음을 두고 이단(異端)을 매우 미워하였다. 이미 두 이원(尼院)1197) 을 철거하고 사찰에 있는 모든 선왕의 어판(御板)도 달지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일찍이 이르기를,
음사(淫祀)1198) 가 도움은 없고 해만 있다는 것은 알기 어렵지 않다. 어리석은 여염의 지아비와 아낙네는 본디 책망할 것조차 없지만 사대부의 집안도 이러한 일이 있으니 내 실로 이해가 안 간다.”
하였다. 어판(御板)이란 승가(僧家)에서 부처에게 물건·음식 등을 공양할 때에 어좌(御坐)를 죽 써 놓은 것인데 이것은 부처를 모시고 같이 먹는다는 것으로서 전대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었다.
왕은 학교를 독실히 숭상하였다. 일찍이 태학(太學)에 나아가 친히 석전제(釋奠祭)를 지내고, 경서(經書)를 찍어 중외에 반포하였으며, 또 성균관(成均館)에 교정청(校正廳)을 설치하고 경서의 잘못된 자획(字劃)과 음의(音義)를 일체 모두 바로잡아 사방의 학자에게 혜택을 주었다.
뜻하지 않은 일에 경계심을 가져 군정(軍政)을 닦게 하고 장신(將臣)을 접견하여 이야기할 적에 피곤함을 잊었다. 혹은 원유(苑囿)에 나아가 군대를 사열하기도 하고, 혹은 거둥을 인하여 군사를 사열하기도 하였는데, 행진(行陣)하는 법과 병갑(兵甲)의 제도를 강구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병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중국《기효신서(紀效新書)》《연병실기(練兵實紀)》 등의 서적을 올리자. 왕은 즉시 반포하여 연습하게 하였다. 훈련 별대(訓鍊別隊)를 새로 설치하고 또 정초군(精抄軍)을 설치하여 병조 판서가 대장의 일을 겸임하게 하였다. 이것은 대개 정예롭고 용맹한 군사를 양성하고 양식과 기계를 비축하여 위급할 때에 대비토록 하려는 것이었다. 또 어사를 파견하여 호남·호서·영남 3도 및 제주를 순무(巡撫)하고, 해안의 방비를 자세히 살피고 수군(水軍)을 정돈하려 하였으나 미처 시행하지 못하였다. 평상시에 군사(軍事)를 수치(修治)하는 데에 뜻을 두고 무비(武備)를 잊지 않았는데 이는 숙위(宿衛)를 엄히 하고 변경을 튼튼히 하려 한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장차 신기(神機)1199) 를 묵묵히 운용하여 천하의 변천을 조용히 살펴보면서 선왕의 뜻을 소술(紹述)하려는 것1200) 이었다.
대신(臺臣)이 일찍이 필요치 않은 군사를 혁파하지 않는다고 간하자, 왕이 이르기를,
“내가 군사를 좋아하여 그런 것이 아니다. 만일 깊이 생각해 본다면, 내 뜻이 국가를 위망(危亡)의 형세에 두고 다만 군사를 일삼는 데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또 일찍이 측근의 신하들과 같이 큰 나라를 섬기고 이웃 나라를 사귀는 일에 대해 논한 적이 있었는데, 주상의 뜻을 알지 못하고 말하는 자가 있었다. 왕이 탄식하며 이르기를,
“이웃 나라와 사귀고 큰 나라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는 사세가 같지 않은 것이 있는 것이다. 내가 나이 어리고 덕은 없지만 조종(祖宗)과 부형의 백대 원수를 어찌 감히 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북쪽 변방의 수령들은 무관이었으므로 탐욕하고 방종하였다. 다시 병마 평사(兵馬評事)의 제도를 설치하고 반드시 이조의 낭관(郞官)과 옥당의 관원을 임명해 보내어 그들을 견제하게 하였다.
작고한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가 임진란을 당하여 북방에서 공로가 있었는데, 도신(道臣)의 청으로 인하여 특별히 품계를 올려 좌찬성을 추증하게 하고 같은 시대 남·북도(南北道)의 의사(義士) 20명에게 모두 포상하라고 명하니, 함경도 한 지방이 격려되었다.
왜국 사신이 올 적에도 반드시 측근의 신하를 엄선하여 국경에서 맞아 위로하게 하되 그들의 환심을 잃지 않게 하였다. 왜국 사신이 웅천(熊川)에다 왜관(倭館)을 옮기겠다고 굳이 청하였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는 대개 내지(內地)에 옮김으로써 후일의 근심을 끼칠까 염려한 것이었다.
왕은 옥사를 더욱 자세히 살피고 신중히 처결하였다. 매양 큰 추위와 심한 더위에는 곧 승지로 하여금 전옥서(典獄署)에 달려가서 죄질이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게 하였다. 일찍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마땅히 해조(該曹)로 하여금 긴급한 죄수를 곧바로 처결하게 하되, 비록 하루에 재차 복심(覆審)하게 되더라도 상규(常規)에 구애하지 말도록 하라.”
하고, 또 일찍이 이르기를,
“사형수를 세 차례 복심하게 하는 뜻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는가. 마땅히 죽어야 할 죄를 지은 자는 반드시 죽이려 하고 마땅히 죽지 않아야 할 자는 반드시 죽이지 않으려 하는 것이 곧 그 본의이다.”
하였다. 또 추운 철에 오래 갇혀 있는 것을 염려하여 양식과 동옷을 라고 명하였다.
왕이 평소 병환이 있었으나 정사의 처리를 부지런히 하였으며, 병이 조금 나으면 항상 승지로 하여금 문서를 가지고 입시(入侍)하도록 하였다. 내직과 외직에 결원이 생기면 전관(銓官)으로 하여금 곧바로 차임하여 충원하게 하고 며칠을 지체한 적이 없었는데, 대개 직무가 폐지되어 백성에게 폐단이 미칠까 염려한 것이다.
갑인년1201) 대비(大妃)1202) 가 승하하였다. 왕이 항상 부왕(父王)을 일찍 여읜 것을 슬퍼하다가 또 모비(母妃)를 오래 봉양하지 못한 것을 지극한 으로 여겨 거친 밥을 들고 맹물을 마시며 슬퍼함이 예절에 지나쳤다. 신하들의 굳이 간하며 권도를 따르시라는 청을 억지로 부응하기는 하였으나, 음식을 대할 적마다 울먹이며 스스로 감내하지 못하였다. 무릇 장사나 제사에 드는 물품과 예로 섬기는 절차를 반드시 정성스럽고 경건하게 하였다. 대비가 일찍이 경덕궁(慶德宮)으로 거처를 옮겼었는데, 이때 와서 창경궁(昌慶宮)반우(返虞)1203) 하고 왕도 옛 거처로 돌아갔다. 사물이 눈에 부딪힐 적마다 감회가 복받쳐 슬픔이 더욱 간절해 종일토록 묵묵히 앉아 있으면서 잠시도 슬픔을 잊지 못하였다. 옆에 모시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감동되어 슬퍼하였다.
혼전(魂殿)을 받들어 모시기를 일체 평소처럼 하였고 철따라 나는 음식물을 올리는 것이 산릉(山陵)에 잇따랐는데, 전(奠)을 드릴 적에는 반드시 친히 점검하고 감독하여 올렸다. 기일 하루 전에 친히 살펴보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그 정결 여부에 대해 물어보고 이틀날 아침에 또 연달아 물어 보았다. 왕의 병이 위독할 적에 창 밖의 바람 소리를 듣고 말하기를,
“이것은 곡식을 해치는 바람이 아닌가. 내가 어찌 또 이 소리를 듣는단 말인가.”
하였다.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백성을 근심하는 마음이 임종 전까지 이처럼 열렬하였다. 염습(斂襲)에 필요한 유갑(襦匣)·의복 등을 모두 궁내에서 준비하고 호조로 하여금 시장 백성에게 한 자, 한 치도 거두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는 대개 우리 중궁(中宮)1204) 사왕(嗣王)1205) 이, 평일 백성을 걱정하고 검소를 숭상하는 왕의 지극한 뜻을 몸받아 행한 것이었다.
중궁(中宮)은 김씨(金氏)로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영의정 김육(金堉)의 손녀이고 중종조의 현신(賢臣) 대사성(大司成) 김식(金湜)의 6대손이다. 1남 3녀를 낳으셨는데, 아들은 우리 사왕(嗣王)1206) 전하이다. 큰 따님은 명선 공주(明善公主)이고, 다음 따님은 명혜 공주(明惠公主)인데, 모두 출가하기 전에 일찍 죽었고, 막내 따님은 명안 공주(明安公主)인데 출가하지 않았다.
사왕(嗣王)의 비(妃)는 김씨(金氏)로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의 딸이다. 신해년1207) 봄에 책봉을 받아 빈(嬪)이 되었고, 지금 중궁의 자리에 올랐다.
변변치 못한 신이 지식이 없는데, 이미 사왕(嗣王)의 명을 받아 왕의 말씀과 행적에 대한 기년(紀年)을 위와 같이 대략 차례대로 서술한 다음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 왕은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굳세고 침착한 자질을 가진데다가 너그럽고 따스한 덕이 있고 넓고 큰 도량이 있었다. 효도와 우애는 천성으로 타고났고 자애로운 심성은 아래 백성들에게 믿음을 받았다. 재위한 지 16년 동안에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의 일에 애쓴 마음은 신명(神明)에게 질정(質正)할 수 있다. 몸을 검속(檢束)하되 부족한 것처럼 하고 선(善)을 구하되 미치지 못할 듯이 하였으며, 하루 이틀 사이 번거로운 정무에 경계를 다하고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언제나 가졌다.
비록 좋지 못한 운과 어려운 때를 만나, 수재·한재·풍재(風災)·상재(霜災)가 없는 해가 없었으며 백성들이 병들고 외세가 핍박하였으나, 왕은 근심하고 노고하며 가다듬음으로써 하늘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걱정하고 충애(忠愛)함으로써 백성의 생명을 보전하였다. 안으로는 음악이나 여색(女色)의 즐거움을 누리지 않았고 밖으로는 놀이나 사냥의 즐거움을 추구함이 없었다. 그리하여 무릇 전대 제왕이 욕심껏 방종하고 사정(私情)을 행하며, 법도를 패하고 덕을 어지럽게 했던 일들이 마음이나 행동에 파고들지 못하였다.
진하(陳夏)를 아울러 썼으나 경력(慶曆)의 치세(治世)에 해가 되지 않았고1208) , 왕려(王呂)가 권세를 부렸으나 실로 중조(中朝)의 탄식이 나오게 하여 원우(元祐)의 태평을 이루었다.1209) 전례(典禮)가 밝혀지자 인륜이 펴고 사설(邪說)이 사라짐에 인심이 바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입으로 외우고 마음 속으로 말할 적마다 ‘우리 왕의 덕은 한 문제(漢文帝)송 인종(宋仁宗)도 앞서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임금도 무시하고 아버지도 무시하는[無君無父] 논설을 물리쳐서1210) 온 세상에 군신의 의리와 부자의 윤기가 나타나도록 함에 이르러서는 또 사도(斯道)1211) 에 큰 공로가 있었다. 비록 신민들이 복이 없어 하늘이 장수를 주지는 않았으나, 그 자애로운 마음과 자애롭다는 소문이 사람에게 깊이 감명되어 실로 영구히 잊지 못하고 생각하게 되었으니, 우뚝이 동방에 성덕(盛德)의 임금이 되었다. 아, 아름답도다.
우리 현종 대왕(顯宗大王)으로 말하면, 잔포(殘暴)한 자를 교화시키고 사형을 없앨 수 있는 덕1214) 백성을 화하게 하고 빨리 덕을 공경하는[諴小民疾敬德] 도1215) 는 진실로 옛날 명철하고 올바른 임금과 비해 볼 때 손색이 없다. 내가 적은 기년(紀年)의 글을 한번 보았으면 한다. 첫째도 ‘우리 백성이다.’ 하고, 둘째도 우리 백성이다.’ 하여 하나의 생각도 백성에게 있지 않은 적이 없었다. 정이 깊어서 교화가 믿음을 받게 되고, 백성이 감화됨에 하늘이 감응하였으니 진실로 하늘이 장차 우리 문자 문손(文子文孫)이신 유자왕(孺子王)1216) 을 크게 인도해 주어 옛 나라를 새롭게 하고 국운을 길이 누리게 하며, 주(周)나라를 높이고 오랑캐를 배척하는 《춘추(春秋)》의 의리를 이어 우리 국가의 억만년토록 끝없는 아름다움을 누리게 할 것이다. 아, 아름답고 성대하도다.
자헌 대부(資憲大夫) 이조 판서(吏曹判書) 겸 지의금부사(兼知義禁府事) 성균관 좨주(成均館祭酒) 오위 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신(臣) 윤휴(尹鑴)는 지어 올림.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37책 81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 *역사-편사(編史)




























[註 1103]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기대승(奇大升)의 논평을 듣고 깜짝 놀라 옛날의 견해를 바꾸면서 : 선조 즉위년, 즉 1567 명종(明宗)의 상에, 공의전(恭懿殿:인종 비(仁宗妃) 박씨(朴氏)를 말함)이 명종에게 수숙(嫂叔)이 되어 복(服)이 없어야 한다고 의논이 정해졌는데, 이황도 그 설을 인정하였다. 기대승은, “형제가 전국(傳國)하여 차례를 이었으니 나름대로 군신·부자의 의리가 있는데 어찌 복이 없을 리가 있겠는가. 기복(朞服)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니, 퇴계가 크게 깨닫고, 조정에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군자가 있지 않았으면 어떻게 국가가 제 구실을 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기대승의 변례(變禮)에 통달한 것을 훌륭하게 여기고 퇴계가 선한 말을 선뜻 따르는 것을 칭찬하였다.《고봉집(高峰集)》 속집(續集). 기명언(奇明彦)의 명언은 기대승의 자(字).






















































[註 1156]장릉(長陵)의 흙을 한 줌 가져가는 자가 있더라도 : 장릉(長陵)은 한 고조(漢高祖)의 능. 곧 한 고조의 능을 파헤침을 말한다. 한 문제(漢文帝) 때에 도적이 한 고조의 사당에 있는 옥 가락지를 훔쳐 갔는데, 정위(廷尉) 장석지(張釋之)가 기시형(棄市刑)에 처하자, 한 문제는 멸족(滅族) 명을 적용하지 않았다 하여 대노하였다. 장석지는 “지금 종묘의 기구를 훔쳤는데 멸족한다면, 가령 어리석은 백성이 장릉(長陵)을 파헤친다면 폐하께서 무슨 법으로 치죄하겠습니까.” 하였다. 《한서(漢書)》 장석지전(張釋之傳), 《통감절요(通鑑節要)》 권7, 《한서(漢書)》 태종(太宗) 효문 황제(孝文皇帝) 상(上).




[註 1159]10일 안에 이른 연왕(燕王)의 글과 : 한 소제(漢昭帝) 때에 상관걸(上官桀)이 대장군 곽광(霍光)을 제거하고자 하여 사람을 시켜 연왕 단(燕王旦)의 상서(上書)를 가짜로 만들어 곽광의 죄를 고발하게 하였다. 이 말을 듣고 곽광이 갓을 벗고 소제에게 사죄하니 소제는 “짐은 이 상서가 거짓임을 알았다. 장군은 죄가 없다. 장군이 교위(校尉)를 조용(調用)한 것이 10일이 못 되었는데 연왕이 그 일을 어떻게 알겠는가?” 하였다. 이때 소제의 나이는 14세였는데 상서한 자는 과연 도망하였다. 연왕은 소제의 형으로 제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원망하다가 이를 이용하여 곽광을 모반자로 몰아 내치려 한 것이다. 《통감절요(通鑑節要)》 권11 한기(漢紀) 효소 황제(孝昭皇帝).















[註 1173]단궁(檀弓)이 문복(免服)을 입고 : 공의 중자(公儀仲子)의 상(喪:중자〈仲子〉의 아들 상임)에 단궁(檀弓)이 문복(免服)을 하였다. 문복은 5세친(世親) 즉 10촌에게 입거나, 붕우로서 다른 나라에서 죽어 주인이 없는 자에게 입는 복인데, 중자(仲子)가 단궁에게 5세친이 아니고 또 상이 다른 나라에서 죽은 자가 아닌데, 단궁이 문복을 입었다. 이것은 중자(仲子)가 적손(嫡孫)을 버리고 그의 서자(庶子)를 세웠으므로 단궁이 입어서는 안 될 복(服)을 입음으로써 중자(仲子)가 세워서는 안 될 서자(庶子)를 세운 그것을 기롱한 것이다. 단궁은 예를 아는 사람으로 이것이 예에 합당하지 않음을 중자의 형인 자복 백자(子服伯子)에게 물었고, 자유(子游)도 공자(孔子)에게 물었는데, 공자는 “손자를 세워야 한다.”고 하였다. 《예기(禮記)》 단궁(檀弓) 상.


[註 1174]자유(子游)가 최복(衰服)을 입었다 : 사구(司寇) 혜자(惠子)의 상(喪)에 자유(子游)가 마최(麻衰)를 입고 숫삼의 요질(腰絰)을 띠고 조문했다. 혜자의 형인 문자(文子)가 이를 사양하였다. 원래 친구의 상에는 조복(朝服)을 입고 고운삼의 요질을 두르는 것이 예이다. 그러나 자유는 혜자가 적자(嫡子) 호(虎)를 폐하고 서자를 세웠으므로 짐짓 예가 아닌 옷차림으로 조문했던 것이다. 혜자의 형 문자가 깨닫지 못하자, 자유가 자기가 서야 할 손의 자리에 서지 않고 신하의 위치에 서니, 문자는 자유의 행동이 기롱의 뜻임을 깨치고 혜자의 적자(嫡子)인 호(虎)를 붙들고 들어와 남향하여 서게 하였다 한다. 《예기(禮記)》 단궁(檀弓) 상.











[註 1184]송 태조(宋太祖)가 한잔 술로 병권을 해제한 일 : 송 태조가 무장으로 즉위한 건륭(建隆:960∼962) 이래로 번진(藩鎭)의 병권을 해제하고 장리(贓吏)는 중법으로 다스렸다. 오월(吳越) 전숙(錢俶)이 내조(來朝)하자 재상들은 전숙을 억류하고 그 영지를 취하자고 청하였으나, 송 태조는 듣지 않고 귀국시켰다. 또 남한(南漢)의 유장(劉鋹)이 그 나라에 있을 적에 짐독(酖毒)을 술에 타서 신하를 즐겨 죽였다. 유장이 내조(來朝)하자 송 태조가 술을 따라 유장에게 주니, 유장은 독약이 들어있는 것으로 의심하고 술잔을 받들어 올리고 울며 아뢰기를 “신의 죄가 용서받지 못하겠으나 폐하께서 이미 죽이지 않으셨으니 대량(大梁)의 포의(布衣)가 되어 태평 성세를 보기를 원하오며 감히 이 술은 마시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송 태조는 웃으며 “짐은 성심을 미루어 남에게 대하는데 어찌 그처럼 하겠는가.” 하고 유장의 술잔을 가져다 자신이 마시고 별도로 술을 따라 유장에게 주었다. 《송사(宋史)》 권1 권3 송태조 본기(宋太祖本紀).







[註 1190]방효유(方孝孺) : 명(明)나라 태조(太祖), 혜제(惠帝) 때의 명신. 자(字)는 희직(希直). 혜제(惠帝) 건문(建文) 때에 시강 학사(侍講學士)가 되었다. 연왕(燕王:뒤에 성조〈成祖〉임)의 군사가 들어와서 그를 불러 조서(詔書)를 초하게 하자, 방효유는 최질(衰絰)로 이르러 호곡(號哭) 소리가 전폐(殿陛)에 사무쳤다. 성조(成祖)가 의자에서 내려와서 위로하고 좌우 신하들을 돌아보고 붓과 종이를 주게 하며 말하기를, “조서를 선생이 아니면 초를 할 수 없다.” 하였다. 방효유는 붓을 땅에 던지며, “죽이면 곧 죽을 뿐이지 조서는 초할 수 없다.” 하였다. 마침내 시장에서 사지가 찢어지는 형을 당하고 종족과 친우로서 연좌되어 죽은 사람이 수백 인이었다. 성조(成祖)는 태조의 네째 아들로 처음에 연왕(燕王)에 봉해졌는데, 태조가 승하하자, 군사를 일으켜 건문제(建文帝)를 축출하고 정난병(靖難兵)이라 일컫고 서울을 함락하여 제위(帝位)에 올라 방효유(方孝孺) 등 건문제(建文帝)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죽이고 연경(燕京)에 천도(遷都)하였다. 《명사(明史)》 방효유전(方孝孺傳).




















[註 1209]왕려(王呂)가 권세를 부렸으나 실로 중조(中朝)의 탄식이 나오게 하여 원우(元祐)의 태평을 이루었다. : 왕려(王呂)는 왕안석(王安石)과 여혜경(呂惠卿)이고, 원우(元祐)는 송 철종(宋哲宗)의 연호, 왕안석과 혜경이 신종(神宗) 때에 집권하여 청묘(靑苗)·수리(水利)·균수(均輸) 등 여러 신법(新法)을 만들었다가 물의가 일어나자 당시 명신을 배척하였다. 송 철종이 즉위 초에 여공저(呂公著)·사마광(司馬光) 등 명신을 불러 써서 왕안석이 건의하여 만든 신법을 파하고, 어진 사람을 등용하여 언로(言路)를 트니 천하의 인심이 흡족하여 치세로 행하였다. 《송사(宋史)》 신종·철종 본기(神宗哲宗本紀).





[註 1213]한(漢)나라문제(文帝)경제(景帝)는 몸소 공손과 검소를 행하여 건원(建元)의 성대한 정벌의 공을 이루도록 터전을 만들어 주었으며 : 문제(文帝)는 한 고제(漢高帝)의 중자(中子)로 혜제(惠帝)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효제(孝弟)를 숭상하고 농사를 권장하여 검소와 질박을 천하에 보임으로써 예의가 일어났다. 경제(景帝)는 문제(文帝)의 맏아들로 즉위하여 문제의 업을 계승하여, 절약 검소하고 백성을 사랑하였다. 건원(建元)은 한 무제(漢武帝)의 연호로 B.C 140∼134. 경제의 중자(中子)로 즉위, 문제 경제의 업을 이어 태학(太學)을 일으키고 유학을 높이며, 남월(南越)·동월(東越)을 평정하고 조선을 치고 서남이(西南夷)와 흉노를 물리치고 서역(西域) 제국과 교통하였다. 《사기(史記)》 권10, 11.




[註 1216]문자 문손(文子文孫)이신 유자왕(孺子王) : 《서경(書經)》 입정(立政)에 나오는 말로, 성왕(成王)에게 현재(賢才)을 임용하는 도리로 진계(進戒)한 것이다. 곧 성왕은, ‘무왕(武王)의 문자(文子)이신 어린 왕’이라는 뜻이다.

 

숙종 6권, 3년(1677 정사 / 청 강희(康熙) 16년) 2월 15일(임술) 3번째기사
전 참봉 최선이 중용의 도를 저술한 《중용연의》를 올리다

전 참봉(參奉) 최선(崔宣)이 상소하여 중용(中庸)의 도(道)를 말하고, 이어 저술한 《중용연의(中庸衍義)》를 올리니, 답하기를,
“네가 진달한 말은 임금을 아끼는 정성이 아닌 것이 없으니, 내가 마땅히 유의하겠고, 올린 책자(冊子)는 곁에 두고 보겠다.”
하였다. 최선(崔宣)은 곧 전(前) 감사(監司) 최관(崔寬)의 이복(異腹) 아우이다. 그의 어미가 병자년1625) 정축년1626) 의 난리 때 사로잡혀 갔다가 어떤 사람이 사서 내왔기 때문에, 최선(崔宣)이 글로 분식(粉飾)하여 자연히 세상에 나타내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심술(心術)이 아름답지 못하다고들 했었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38책 348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출판-서책(書冊) / *인물(人物

 

숙종 3권, 1년(1675 을묘 / 청 강희(康熙) 14년) 3월 9일(정묘) 5번째기사 부임하는 전라도 순무사 이세화에게 내린 응행 절목의 내용 

 

전라도 순무사(全羅道巡撫使) 이세화(李世華)가 나갔다. 그 응행 절목(應行節目)에 이르기를,
“전선(戰船)의 체제는 크기·높이·두께를 사람마다 의견을 달리하여 말하는 것이 여러가지이니, 반드시 바람이 어지러운 날에 바다 가운데에 멀리 들어가 배를 저어 회선(回旋)하며 편리한지를 시험할 것.
전선(戰船)·병선(兵船)·사후선(伺候船) 등의 격군(格軍)431) 과 방수(防戍)하러 번든 사부(射夫)·포수(砲手) 등의 액수를 낱낱이 점고하여 그 실수(實數)를 알 것.
주사(舟師)432) 를 검열(檢閱)한 뒤에 사수·포수와 그 진(鎭) 관하의 군관(軍官)에게 사시(射矢)·방포(放砲)를 시험하여 본도(本道)의 방군 유포(防軍留布)433) 로 차등을 두어 상줄 것.
무변(武弁)인 수령(守令)과 각진(各鎭)의 변장(邊將)도 재예(才藝)를 시험하여 분수(分數)를 개좌(開坐)할 것.
수사(水使)와 연변(沿邊) 수령의 현부(賢否)와 민폐를 상세히 염문(廉問)할 것.
변장 가운데에서 근간(勤幹)한 자와 용람(庸濫)한 자와 직임(職任)을 감당하지 못하는 자를 구별하여 서계(書啓)하고, 가장 심하게 군졸을 침학(侵虐)하는 자는 계문(啓聞)하여 파출(罷黜)하되, 결곤(決棍) 30도(度) 이하는 스스로 결단할 것.
연변 각읍(各邑)의 무사(武士) 가운데에서 용력(勇力)이 뛰어나고 기예(技藝)가 뛰어난 자와 도내(道內)의 사자(士子) 가운데에서 행의(行誼)와 재국(才局)이 있는 자도 다 물어서 계문할 것.
또 각 진포(鎭浦) 전선(戰船)은 격군·사수·포수를 다 토병(土兵)으로 급대(給代)하고 충보(充補)하여 사변에 대비하나, 각 고을에서는 빈 배를 포(浦) 가에 걸어 두기만 하므로, 사변이 있더라도 결코 제때에 장비하여 떠날 수 없는 형세이니, 늘 주사를 정제(整齊)하여 사변에 대비할 방책에 대하여 편의한 것을 물어서 계문할 것.
능로군(能櫓軍)은 전혀 충정(充定)하지 않으므로 습조(習操) 때마다 촌백성을 물아서 구차하게 채우거니와, 충정한 고을이 있더라도 선소(船所)가 멀기 때문에 여느 때에 지키고 급할 때에 징발하여 쓰기가 다 불편한데, 부근에 있는 육군의 속오(束伍)434) 로 바꾸어 충정하면 수군·육군이 다 편리할 것이니, 참작하여 계문할 것.

 

각 진포의 사졸(士卒)은 이미 살길이 없거니와, 능로군의 양료(粮料)도 나올 곳이 없는데, 변통할 도리로는 둔전(屯田)만한 것이 없으니, 둑을 쌓고 개간하기에 합당한 곳을 살펴서 적어 아뢸 것.
연해(沿海)의 금송(禁松)하는 곳에 각 아문(衙門)에서 설치한 둔전이건 여러 궁가(宮家)·사대부(士大夫)의 농장(農庄)이건 물론하고 모두 적간(摘奸)하여 계문할 것.
해도(海島)에 들어가 사는 백성은 엄히 금단(禁斷)하여 낱낱이 몰아 내고, 금산(禁山)의 참나무도 소나무와 마찬가지로 배양(培養)할 것.
선재(船材)를 기르는 곳에는 목장(牧場)이 많으므로 피차가 서로 다투어 방해되는 일이 많으니, 각도(各島)를 두루 살펴보고 선재가 무성한지, 말떼가 살이 쪘는지, 토질이 소나무를 기르기에 합당한지, 수초(水草)가 목장을 두기에 합당한지 낱낱이 서계(書啓)하여 변통할 바탕으로 삼을 것.
통영(統營)435) 을 처음 설립하였을 때에는 삼남(三南)의 해리(海利)를 모두 구관(句管)하였으므로, 군향(軍餉)·기계(器械) 등 장사(將士)에게 지공(支供)할 것이 다 여기에서 나왔는데, 요즈음 듣기로는 여러 곳의 어기(漁磯)가 많이 본도의 감사(監司)에게 빌려주어 수세(收稅)의 반이 감영(監營)에 들어가므로, 통영은 곡식을 얻는 길이 날로 점점 줄어 간다 하는데, 이제 모두 도로 붙여서 해방(海防)의 중진(重鎭)에 군향(軍餉)이 넉넉하게 하는 바탕으로 삼지 않을 수 없으니, 두 영(營)을 사문(査問)하여 아뢸 것.
능로군의 모자란 액수는 각영(各營)의 물선(物膳) 등 군사에서 정장(丁壯)을 가려서 낱낱이 채워 줄 것.
또 변장(變將)·변수(邊帥)가 군례(軍禮)를 행할 때와 군병의 시재(試才) 때에는 《오례의(五禮儀)》의 변방에서는 변복(變服)하지 않는다는 예(禮)에 따라 융복(戎服)으로 거행하되, 수사(水使) 이하는 갑주(甲胄)를 갖추고 지영(袛迎)하여 예를 행하고, 통제사(統制使)는 감사가 상견(相見)하는 예에 따라 함께 북벽(北壁)하여 객(客)은 동쪽에 주(主)는 서쪽에 나란히 앉을 것.”

 

하였는데, 대개 묘당(廟堂)에서 의논하여 정한 것이다. 경상도 순무사 권대재(權大載)·충청도 순무사 최관(崔寬)·제주 순무사 이선(李選)이 잇달아 나갔는데, 절목은 같았다. 제주에서는 문과(文科)·무과(武科)를 설행(設行)하여 사람을 뽑고, 또 신해년436) 조곡(糶穀)437) 을 모두 면제한다는 뜻드로 별유(別諭)하여 보냈는데, 묘당의 의논에 따른 것이었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38책 250면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軍事) / *농업-전제(田制) / *농업-수리(水利) / *사법-법제(法制) / *인사-선발(選拔)








[註 437]조곡(糶穀) : 나라에서 봄철의 춘궁기(春窮期)에 창고의 곡식을 내어 백성들에게 꾸어 주던 일, 또는 그 곡식.

 

 

숙종 6권, 3년(1677 정사 / 청 강희(康熙) 16년) 12월 14일(병진) 3번째기사 전 참봉 최선을 귀양보내고 전 감사 최관을 파직시키다 

 

 

전(前) 참봉(參奉) 최선(崔宣)은 바로 전(前) 감사(監司) 최관(崔寬)의 이모제(異母弟)였다. 병자년1837) 의 난(亂)에 최선의 어미가 잡혀갔다가 속전(贖錢)을 내고 돌아오게 되자, 최관의 조부(祖父) 최행(崔行)이 의(義)로 그와의 관계를 끊었다. 또 일찍이 그 처(妻) 이씨(李氏)와 여러 자녀(子女)에게 유언(遺言)하여, 최선의 어미를 사당에 들이지 말도록 하였다. 그러나 최관은 그의 두 아우인 최선(崔宣)·최헌(崔憲) 때문에 차마 버리고 끊지 못하여 항상 어머니로 섬겼다. 그 어머니가 죽자 3년 동안 복상(服喪)하고, 또 그를 낳아준 어머니와 더불어 함께 봉작(封爵)하도록 청하였다. 이씨(李氏)가 이미 늙자 훗날 쟁송(爭訟)하는 변고(變故)가 있을까 염려하여, 그 부당(夫黨)1838) 을 모아 놓고 남편의 유의(遺意)를 가지고서 글을 지어 사당(祠堂)에 고하였다. 또한 아들 최계웅(崔繼雄)으로 하여금 유서(遺書)를 써서 최관(崔寬)에게 주어 이르기를, ‘더럽혀지고 욕된 사람을 우리 선조(先祖)의 사당에 들여서 우리 집안의 법을 어지럽게 하지 말도록 하라.’고 하였다. 최선은 이것이 최관의 종용(從容)에서 나왔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최관에 대한 원한이 날이 갈수록 깊어져, 항상 최관을 죽이려는 마음이 있었고, 칼을 품고 그 방에 들어간 적이 여러 번이 있었다. 이 때에 이르러 북을 쳐서 최관이 이유없이 어미를 폐(廢)하였다고 호소하였다. 최관최선을 모두 의금부(義禁府)에 내렸는데, 최선이 호소한 바의 실상을 조사하였더니 무고(誣告)한 것으로 귀결되었다. 마침내 최선은 속여서 형(兄)을 모해하려 한 것으로 논하여 장(杖)을 때려 유배하였고, 최관 역시 봉작(封爵)을 합해서 청하여 은명(恩命)을 태만히 한 죄로 의금부에서 도배(徒配)시키도록 청하였다. 임금은 최관에게 용서할 만한 도리가 있다 하여 특별히 파직(罷職)시키고 방송(放送)하라고 명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38책 375면
【분류】 *인물(人物) / *사법-행형(行刑) / *인사-임면(任免)



 

숙종 11권, 7년(1681 신유 / 청 강희(康熙) 20년) 1월 19일(계유) 2번째기사
신익상·최관·이유·오두인·이사명·박태상·신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신익상(申翼相)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최관(崔寬)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이유(李濡)를 사간(司諫)으로, 오두인(吳斗寅)을 도승지(都承旨)로, 이사명(李師命)을 승지(承旨)로, 박태상(朴泰尙)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신완(申琓)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심유(沈濡)·이현석(李玄錫)을 부교리(副校理)로, 박태보(朴泰輔)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이수언(李秀彦)을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어진익(魚震翼)을 공청도 관찰사(公淸道觀察使)로, 이홍적(李弘迪)을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38책 513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숙종 19권, 14년(1688 무진 / 청 강희(康熙) 27년) 6월 6일(정미) 1번째기사
최관을 대사헌, 서문유를 응교로 삼다

 

최관(崔寬)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서문유(徐文裕)를 응교(應敎)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39책 127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숙종 11권, 7년(1681 신유 / 청 강희(康熙) 20년) 2월 2일(병술) 1번째기사
우의정 이상진이 경기 관찰사로 최관을 추천하다

 

 

우의정(右議政) 이상진(李尙眞)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청컨대 대사간(大司諫) 최관(崔寬)을 격식에 구애치 말고 기백(畿伯)에 제수(除授)하소서. 또 기백(畿伯)이 사제(私第)에서 개좌(開坐)하는 것이 미안(未安)하다면, 청컨대 본영(本營) 부근의 집을 사들여 정사(政事)를 살피는 곳으로 삼도록 하소서.”
하였다. 이날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이 입진(入診)하는 데에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나가서 차본(箚本)을 보자, 김수항이 말하기를,
“기백(畿伯)이 매번 사제(私第)에서 개좌(開坐)하여 청리(聽理)하니, 이에 의거하여 변통(變通)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최관(崔寬)은 강직하니, 진실로 이 직임(職任)에 합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기백(畿伯)은 직임(職任)이 중대하니, 나가서 여러 대신(大臣)과 의논하여 오늘 정사(政事)에서 차임(差任)하여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38책 515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숙종 11권, 7년(1681 신유 / 청 강희(康熙) 20년) 2월 2일(병술) 2번째기사
홍만용·최관·이후정·안진·윤반·권기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홍만용(洪萬容)을 도승지(都承旨)로, 최관(崔寬)을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로, 이후정(李后定)을 부교리(副校理)로, 안진(安縝)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윤반(尹攀)·권기(權愭)를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38책 515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숙종 28권, 21년(1695 을해 / 청 강희(康熙) 34년) 3월 26일(정해) 1번째기사 지경연 박태상이 함경도 육진의 교생 고강 등에 대해 청하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지경연(知經筵) 박태상(朴泰尙)함경도 육진(六鎭)의 교생(校生) 고강(考講)을 평안도 강변(江邊) 고을의 준례에 의해, 세 차례에 걸쳐서 통하지 못하면 군액(軍額)으로 정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참찬관(參贊官) 이야(李壄)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의 묘소(墓所)에 가토(加土)할 때에 특별히 본도(本道)로 하여금 역군(役軍)을 제급(題給)하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야가 또 말하기를,
“고(故) 참찬(參贊) 최관(崔寬)은 청렴 결백한 것이 확실히 드러났으니, 마땅히 강백년(姜栢年)의 예에 의하여 특별히 장례(葬禮)에 쓰이는 물품을 하사해야 합니다.”
하고, 시독관(侍讀官) 민진후(閔鎭厚)도 또한 극력 찬성하니, 그대로 따랐다. 민진후가 또 김호(金灝)를 반장(返葬)할 때 제도(諸道)에 호송(護送)하도록 명하여, 정직한 이를 포양하고 죽은 이를 불쌍히 여기는 뜻을 보일 것을 청하니, 또 그대로 따랐다. 무신(武臣) 이상전(李尙)강화(江華) 진강(鎭江)의 목장마(牧場馬)와 제주(濟州) 입산(入山)의 잡색마(雜色馬)를 금군(禁軍)에게 나누어 주어, 전진(戰陣)의 용도에 대비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해당 관서에 품지(稟旨)하여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병조(兵曹)에서 진강의 말은 수가 적어서 허락하지 말고, 다만 제주의 말을 나누어 공급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39책 372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인사-관리(管理) / *군사-군역(軍役) / *군사-군기(軍器) / *재정-역(役) / *교통-마정(馬政) / *풍속-예속(禮俗)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숙종 55권, 40년(1714 갑오 / 청 강희(康熙) 53년) 8월 5일(갑술) 1번째기사
여러 신하들과 황당선 출몰의 일·송조 육현을 승배하는 일·진상의 일·고 상신 윤방 일 등에 대해 의논하다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황당선(荒唐船)이 출몰(出沒)하는 일 때문에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저들에게 주문(奏聞)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좌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아뢰기를,
“이 밖에 관서의 강변에서 범월(犯越)하는 폐단과 함경도 경원(慶源) 등지의 건너편에서 저쪽 사람들이 집을 짓고 전답을 개간하는 등의 일에 대하여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모두 주문(奏聞)함이 마땅하다고 하는데, 다만 북관(北關)의 일에 대하여 혹자는 말하기를, ‘저들이 만약, 「너희 나라에도 진보(鎭堡)와 촌락(村落)이 모두 강변에 늘어서 있는데, 유달리 우리만 금지함은 무엇 때문인가?」고 답변한다면 대답할 말이 없다.’고 하니, 이로써 품지(稟旨)하고자 합니다.”
하니, 임금이 다만 어채(漁採)와 채삼(採蔘) 등의 일을 먼저 주문(奏聞)하라고 명하였다. 호조 판서 조태구(趙泰耉)가 말하기를,
“저들이 강변에서 채삼함에 있어 비록 범월(犯越)할 염려가 있기는 하나, 만약 넘어와서 폐단을 일으키는 일이 없다면 또한 우리가 금지할 만한 일이 아니니, 반드시 넘어와서 폐단을 일으키기를 기다려 그 표적(標迹)을 만들어서 주문한 후에야 안전한 계책이 됩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말을 옳게 여기고, 다만 황당선(荒唐船)과 어채(漁採)하는 폐단만 주문하게 하였다. 김창집이 진달하기를,
“양호(兩湖)와 영남이 모두 흉년을 면하지 못하였는데, 수륙(水陸)의 조련(操鍊)을 거행함은 폐단이 있으니, 청컹대 아울러 정지하고, 영장(營將)으로 하여금 편의(便宜)에 따라 점검(點檢)하게 하소서. 영남의 노비 추쇄(奴婢推刷)와 군병 도안(都案)의 개정(改正) 또한 풍년을 기다려 거행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전(前) 좌윤(左尹) 임홍망(任弘望)이 나이 80이라 하여 최관(崔寬)·권열(權說) 등의 예(例)에 의하여 품계를 바꾸어 자헌(資憲)으로 승급(陞級)시킬 것을 명하였으니, 우의정 김우항(金宇杭)의 말로 인한 것이었다. 또 좌참찬(左參贊) 최석항(崔錫恒)의 진언으로 인하여 고(故) 의정(議政) 윤증(尹拯)의 집에 경인년17028) 이후 보내던 월름(月廩)을 특별히 도로 거두도록, 하고 다만 3년을 한정하여 녹봉을 수송(輸送)하도록 명하였으니, 대개 윤증의 아들 윤행교(尹行敎)가 여러 차례 그 아비의 유언(遺言)을 이유로 늠록(廩祿)을 극력 사양했기 때문이었다. 사간(司諫) 유숭(兪崇)이 앞서 논계(論啓)한 일을 진달하고, 또 논하기를,
“송조 육현(宋朝六賢)의 승배(陞配)는 진실로 사문(斯文)의 큰 경사이니, 어찌 다른 의논을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부사과(府司果) 이이만(李頤晩)이 감히 이론(異論)을 세우고 한 소장(訴章)을 올려 이르기를, ‘새로운 규례(規例)를 세우는 것은 홀로 《주례(周禮)》를 준수(遵守)하는 의리에 어긋남이 있다.’고 하면서 드러나게 비난하는 논평을 가하며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으니, 지극히 해괴합니다. 청컨대 삭탈 관작(削奪官爵)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당에 소론(疏論)한 바가 지극히 근거가 없었다. 파직하라.”
하였다. 또 논하기를,
“영종 첨사(永宗僉使) 김의만(金義萬)은 오로지 탐학(貪虐)을 일삼고 횡렴(橫斂)이 한정이 없으며, 상납(上納)하는 어물(魚物)도 억지로 남징(濫徵)을 더하니,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더욱 상세히 살펴 처치하라고 답하였다. 지평(持平) 조상경(趙尙絅)이 앞서의 계사(啓辭)를 진달하고, 또 논하기를,

 

기다리는 것은 바꿀 수 없는 규례입니다. 그런데 근래에 이르러 이 법이 점차 폐지되어 어공(御供)의 물품을 혹 공물인(貢物人)의 집에서 곧장 마련해 궐문(闕門) 아래로 오고, 관원은 의막(依幕)에 와서 휴식을 취하다가 개문(開門)하면 비로소 들어옵니다. 청컨대 각사(各司)에 신칙하여 지금부터 그릇된 규례를 따르는 자는 각별히 과죄(科罪)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또 논하기를,
“작년에 영남 사람 김이달(金履達)이라는 자가 한 소장(疏章)을 올렸는데, 비록 박녀(朴女)를 정포(旌褒)하는 일을 말하였지만 정신을 쏟은 바는 오로지 도신(道臣)을 무함하는데 있었습니다. 다만 조광한(趙廣漢)을 참요(斬腰)한 옛 일17031) 을 끌어댔으니 생각하는 뜻이 위험했습니다. 박수하(朴壽河)가 형벌을 받은 것은 다만 언어의 패만(悖慢)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으니, 송사(訟事)의 입락(立落)17032) 에 무슨 관련이 있겠습니까? 이로 인하여 여러 가지를 주워모아 반드시 도신(道臣)에게 앙갚음을 하려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전에 없던 일입니다. 청컨대 소두(疏頭) 김이달을 해조(該曹)로 하여금 율(律)을 헤아려 정죄(定罪)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대신(大臣)에게 문의하니, 김창집 등이 말하기를,
“도신의 우연한 살인이 산송(山訟)과 무슨 관련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감히 조광한을 참요했다는 등의 말을 이끌어댔으니, 이는 범연히 치죄하여서는 아니됩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여러 신하에게 물었는데, 모두 말하기를,
“그 소가 비록 근거는 없으나 이미 초야(草野) 사람의 상소라고 일컬으니, 한두 구절의 말을 가지고 죄주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기고 대간(臺諫)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민진후(閔鎭厚)가 각사(各司)의 관원들이 편복(便服)으로 드나드는 폐단을 진달하고, 또 말하기를,
경녕전(敬寧殿) 제향 때 여러 제관(祭官)들이 궁중으로부터 편복을 입고 나왔으니, 논죄(論罪)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전교(傳敎)하기를,

 내가 석척제(蜥蜴祭)17033) 를 지낼 때 조신(朝臣)들이 궁중에서 이미 편복을 입고 나오는 것을 또한 보았으니, 지금부터 드러나는 대로 논죄토록 하라.”

하였다. 이에 앞서 판부사(判府事) 최석정(崔錫鼎)이 고(故) 기평군(杞平君) 유백중(兪伯曾)의 시장(諡狀)을 지었는데, 유백증이 고(故) 상신(相臣) 윤방(尹昉)을 논핵한 일을 논하여 이르기를,
“공(公)은 윤방이 묘사(廟社)의 위판(位版)을 더럽힌 데 대하여 논핵하였는데, 임금이 그 허실을 물었을 때 대답한 것이 명확하게 말하지 못하였으므로, 임금께서 실상에 어긋났다 하여 특별히 파직을 명하였다. 그 후에 이회(李檜)심양(瀋陽)에서 돌아와 묘사의 위판을 더럽힌 정상을 극력 진달하였는데, 이회가 그때 궁관(宮官)으로서 일찍이 목도(目睹)하였으므로, 임금이 비로소 공(公)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았다.”
하였다. 윤방의 후손 봉사(奉事) 윤중명(尹重明) 등이 소를 올려 그 무망(誣罔)함을 변명하고, 최석정의 조부(祖父) 최명길(崔鳴吉)의 말과 고 판서(判書) 이식(李植)의 비문(碑文) 가운데 원래 죄줄 뜻이 없었다는 말을 이끌어 이르기를,
유백증이회는 모두 윤방과 더불어 오래 된 혐의가 있으므로 때를 틈타 날조하였는데, 최석정은 오로지 유백증에게 아부하여 그 자손을 기쁘게 하려고 하였으니, 청컨대 태상시(太常寺)17034) 에 명하여 시장(諡狀) 가운데 무함한 말을 개삭(改削)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리고, 태상시로 하여금 개삭하는 일을 거행하게 하니, 봉상시(奉常寺)에서 그 시장을 유백증의 자손에게 내주어 산개(刪改)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유백증의 손자 전 군수(郡守) 유명담(兪命聃) 등이 또 소를 올려 윤방이 묘사의 위판을 더럽힌 정상을 논하여 이르기를,
“묘사의 위판을 봉환(奉還)할 때 빈 섬[空石]으로 싸서 말에 싣고 해진 버선과 잠방이 및 식기(食器)·작도(斫刀) 등의 물품을 그 가운데 뒤섞어 넣었으며, 여종으로 하여금 그 위에 타게 하니, 인심이 모두 분노하였습니다. 온 나라에 말이 왁자하게 퍼지자, 성상께서 그 죄상을 통촉하시고, 인하여 중도 부처(中道付處)17035) 의 명을 내리셨습니다. 성조(聖祖)의 처분이 이와 같이 엄절하였는데, 그 자손된 자가 어찌 감히 비호하며 도리어 신변(伸辨)할 계획을 세울 수 있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피차의 소변(疏辨)이 이와 같으니 공의(公議)에 따라 처리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그 소를 해조(該曹)에 내렸다. 이에 이르러 임금이 연신(筵臣)에게 순문(詢問)하니,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이 일은 이미 백 년이 가까와서 상세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유백중의 시장(諡狀) 가운데 유백증윤방을 논핵한 일로부터 이회의 상소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조보(朝報)에 나온 것이며, 윤중명이 칭원(稱寃)하는 바는, ‘비로소 공(公)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았다.’는 한 마디 말에 있는 듯합니다. 그때 이회가 상소한 뒤 윤방은 중도 부처되었다가 얼마 안되어 석방(釋放)되었으니, 성명(聖明)의 도량(度量)이 깊어 많은 신하들이 감히 그 한계를 엿볼 수 없었습니다. 윤방을 두둔하는 자들은 말하기를, ‘임금이 비록 여러 신하의 소청에 몰려 잠시 중도 부처를 허락하였으나 바로 은사(恩赦)를 내린 것은 반드시 윤방을 억울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니, 이식의 문자 가운데 원래 죄줄 뜻이 없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하고, 유백증을 두둔하는 자들은 말하기를, ‘이회가 상소한 뒤 이회는 죄을 입지 않고 윤방은 중도 부처되었으니, 이는 임금께서 반드시 이회의 말을 옳게 여긴 것이다. 이제 시장(諡狀) 가운데 이른바 비로소 공(公)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았다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합니다. 옛사람도 간혹 한 가지 일을 가지고 각기 그 소견에 따라 말하는 자가 있었으니, 양편의 말을 모두 깊이 배척할 수 없으며, 이 밖에 다시 사핵(査覈)할 단서가 없습니다.”
하고, 조태채(趙泰采) 등은 말하기를,
“시장 또한 공가(公家)의 문장인데, 함부로 산개(刪改)하게 한다면 그 폐단이 한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시장을 산개하지 말라고 명하고, 또 그때의 시비(是非)를 지금 작정(酌定)하기 어려우니, 예조(禮曹)의 복주(覆奏)를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40책 534면
【분류】 *외교-야(野) / *사법-치안(治安) / *사법-탄핵(彈劾) / *구휼(救恤) / *군사-병법(兵法) / *군사-군역(軍役) / *인사-관리(管理) / *재정-국용(國用) / *재정-진상(進上) / *사상-유학(儒學)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윤리(倫理)


 


 


 


 


 


 

 숙종 29권, 21년(1695 을해 / 청 강희(康熙) 34년) 7월 11일(신미) 2번째기사 묘당에서 청백리·염근리 및 음관 중에 통용질·탁용질을 소선하여 계하

 

 

묘당(廟堂)에서 청백리(淸白吏)·염근리(廉謹吏) 및 음관(蔭官) 중에 통용질(通用秩)·탁용질(擢用秩)을 초선(抄選)하여 계하(啓下)하였는데, 청백리에 피선(被選)된 사람은 고(故) 영의정(領議政) 이시백(李時白)·홍명하(洪命夏), 우의정(右議政) 이상진(李尙眞),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조경(趙絅)·강백년(姜栢年), 이조 참판(吏曹參判) 조석윤(趙錫胤), 예조 참판(禮曹參判) 유경창(柳慶昌), 좌참찬(左參贊) 박신규(朴信圭)·최관(崔寬), 우윤(右尹) 이지온(李之馧), 강계 부사(江界府使) 성이성(成以性), 참지(參知) 이후정(李后定), 진선(進善) 조속(趙涑), 예빈 시정(禮賓寺正) 홍무(洪茂), 경상 좌수사(慶尙左水使) 홍우량(洪宇亮), 덕원 부사(德源府使) 강열(姜說), 순천 군수(順天郡守) 이태영(李泰英)이다. 염근리에 피선된 사람은 호조 판서(戶曹判書) 이세화(李世華), 부호군(副護軍) 강세귀(姜世龜), 전(前) 군수(郡守) 윤추(尹推)이니, 이세화강세귀는 가자(加資)를 명하고, 윤추준직(準職)8645) 의 제수(除授)를 명하였다. 통용질에 뽑힌 사람은 김제 군수(金堤郡守) 이세필(李世弼), 전(前) 현감(縣監) 정제두(鄭齊斗), 인천 현감(仁川縣監) 이희조(李喜朝), 전(前) 좌랑(佐郞) 민이승(閔以升), 전(前) 참봉(參奉) 문동도(文東道)이고, 탁용질에 뽑힌 사람은 전(前) 현감(縣監) 나양좌(羅良佐), 전(前) 주부(主簿) 김창흡(金昌翕)·이세귀(李世龜), 나주 목사(羅州牧使) 이인혁(李寅爀), 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 송병하(宋炳夏), 전(前) 익찬(翊贊) 한후상(韓後相)이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39책 388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숙보 17권, 12년(1686 병인 / 청 강희(康熙) 25년) 2월 4일(무자) 1번째기사
송창은 평범하고 지식이 짧았으나 노론에 아부했기 때문에 대사간이 되다

 

 

 

송창(宋昌)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삼았다. 송창은 평범한 사람으로서 지식이 짧았으나, 노론(老論)에 아부했기 때문에 갑자기 간장(諫長)239) 에 임명되었는데도 사신(史臣)이 사정(私情)에 따라 지나치게 칭찬하였으니, 지난번 최관(崔寬)에 대한 표창도 이와 같은 것이다. 그것을 공적인 곤월(袞鉞)240) 의 도리에 있어서는 분변하지 않을 수 없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39책 89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정론-간쟁(諫諍) / *인물(人物)

 

정조 13권, 6년(1782 임인 / 청 건륭(乾隆) 47년) 2월 11일(무인) 1번째기사
문신들에게 제술을 행하다

 

문신(文臣)에게 제술(製述)을 행하였는데, 당(唐)나라의 뭇 신하들이 양관(楊綰)이 동평장사(同平章事)가 된 것을 축하한 것, 곽자의(郭子儀)가 성악(聲樂)을 감축시킨 것, 여간(黎幹)이 추종(騶從)을 줄인 것, 〈후위(後魏)의〉 최관(崔寬)이 제사(第舍)를 헌 것으로 표제(表題)하여 시취(試取)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에게 이르기를,
“근래 새로 정승을 매복(枚卜)했기 때문에 나에게는 깊은 뜻이 있어서 이런 출제(出題)를 명한 것이다. 시군(時君)·세주(世主)로서 요(堯)·순(舜)처럼 되기를 스스로 기약하지 않는 것을 옛사람이 그르다고 하였는데, 경 등이 보좌(輔佐)하고 승필(承弼)하는 것이 또한 어찌 옛사람에게 뒤지겠는가?”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45책 297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숙종 19권, 14년(1688 무진 / 청 강희(康熙) 27년) 10월 20일(기미) 2번째기사
최석정·이여·최관·남치훈·황흠·민진장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최석정(崔錫鼎)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이여(李畬)를 부제학(副提學)으로, 최관(崔寬)을 대사헌(大司憲)으로, 남치훈(南致熏)을 사간(司諫)으로, 황흠(黃欽)을 부수찬(副修撰)으로, 민진장(閔鎭長)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39책 135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숙종 20권, 15년(1689 기사 / 청 강희(康熙) 28년) 1월 27일(을미) 2번째기사
최관·원성유·남지훈·남치훈·최석항·김성적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숙종 24권, 18년(1692 임신 / 청 강희(康熙) 31년) 9월 5일(신해) 2번째기사 대신들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여, 남한 산성에서의 조련을 정지하게 하다

 

최관(崔寬)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원성유(元聖兪)·남지훈(南至熏)을 지평(持平)으로, 남치훈(南致熏)을 교리(校理)로, 최석항(崔錫恒)을 부교리(副校理)로, 김성적(金盛迪)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39책 154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숙종 27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6월 5일(신축) 1번째기사
김만길·최관·김연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만길(金萬吉)을 승지로, 최관(崔寬)을 좌참찬(左參贊)으로, 김연(金演)을 필선(弼善)으로, 서종태(徐宗泰)를 이조 참의로, 김성적(金盛迪)을 이조 정랑으로, 이징명(李徵明)을 겸사서(兼司書)로, 이건명(李健命)을 설서(說書)로 삼고, 오도일(吳道一)을 발탁하여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39책 329면【분류】 *인사-임면(任免)

 

 

숙종 24권, 18년(1692 임신 / 청 강희(康熙) 31년) 9월 5일(신해) 2번째기사 대신들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여, 남한 산성에서의 조련을 정지하게 하다

 

대신들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했다. 흉년이어서 민폐가 있다 하여 남한 산성(南漢山城)에서의 조련(操鍊)을 정지하도록 명하고, 수원(水原)에서의 무재(武才) 시험의 상격(賞格)7587) 을 호조(戶曹)와 병조(兵曹)로 하여금 마련하여 나누어 주게 하되, 진휼청(賑恤廳)의 전화(錢貨)는 쓰지 말도록 하였는데, 대신들이 아뢴 말에 따른 것이다. 전(前) 참판(參判) 최관(崔寬)의 나이가 80이였는데, 우의정 민암(閔黯)이 아뢴 말에 따라 정경(正卿)의 품계(品階)로 올려 우대하도록 명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39책 269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군사-군정(軍政) / *재정-국용(國用)


 

 

숙종 28권, 21년(1695 을해 / 청 강희(康熙) 34년) 2월 2일(갑오) 4번째기사
지중추부사 최관의 졸기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최관(崔寬)이 졸(卒)하니, 나이 83세였다, 최관은 관직에 있으면서 법을 지키고 나라를 위해 진력했으며, 또 청렴 결백한 지조와 조용하고 겸손한 절개가 있었다. 세상의 논의가 분파됨에 있어서 옛 견해를 확고하게 지키고, 부박(浮薄)한 논의에 동요되지 않으니, 사람들이 이 때문에 훌륭하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39책 366면  【분류】 *인물(人物)

 

 숙종 27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6월 11일(정미) 6번째기사
좌참찬 최관이 왕도·현자의 등용을 촉구하는 상소를 하다

 

좌참찬 최관(崔寬)이 상소하기를,
“신이, 오늘날의 사정이 《주역》의 괘효(卦爻)와 서로 비슷한 것을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무릇 천지가 장차 태평해지려면 반드시 양기(陽氣)가 회복되는 이치가 있고, 국가가 장차 중흥(中興)하려면 또한 선(善)으로 되돌아가는 도리가 있는 것입니다. 가인괘(家人卦)로 보건대, 남녀가 각각 제자리에 있는데, 오늘날 전하께서 이미 곤위(坤位)를 복구하셨으니, 이로 인해 선으로 되돌아가시며 가인괘의 의의를 체득하여 하늘에 국운을 길게 해 주기를 기구(祈求)하는 터전을 삼으시기 바랍니다. 혁괘(革卦)로서 보건대, 국가가 변혁(變革)해야 할 때를 당하면 변혁하되 좋게 변혁해야 할 것인데, 변혁할 때를 다스리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고괘(蠱卦)의 괘사(卦辭)에 ‘선갑삼일 후갑삼일(先甲三日後甲三日)8189) 한다.’고 하였습니다. 선갑삼일의 경우 전하께서 개혁하기 전에 마땅히 개혁해야 할 것을 구명(究明)하여 미리 처리하시고, 후갑삼일의 경우 전하께서 개혁을 한 다음에 장차 그렇게 되어질 것을 생각하시어 도리에 맞게 처리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온 나라 사람들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선유(先儒)의 말에 ‘의리에 맞게 바로잡되 이득을 도모하지 않고, 도를 밝히되 공은 헤아리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먼저 의리에 맞게 바로잡고 먼저 도만 밝히신다면, 이득만 도모하고 공만 헤아리는 폐단이 전하의 명감(明鑑) 앞에서 도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 옛날부터 의논은 더러 이동(異同)이 있어 같다가 다르기도 하고, 다르다가 같기도 하였지만 나라에 해롭지 않았습니다. 같은 것이 공정한 마음으로서 같은 것이라면 이 같은 것은 나라를 위해 같은 것이고, 다른 것이 공정한 마음으로 다른 것이라면 이 다른 것도 또한 나라를 위해 다른 것입니다. 공정한 마음으로 같은 것을 가지고 공정한 마음으로 다른 것을 배척하지 않고, 공정한 마음으로 다른 것을 가지고 공정한 마음으로 같은 것을 물리치지 않는다면, 그 같은 것이나 그 다른 것이 모두가 각각 나라를 위해서인데, 같거나 다르거나 한 논의가 어찌 나라에 해로울 것이 있겠습니까? 또 유사(儒士)가 천하 사람의 절반이 되자 한 광무(漢光武)의 왕업(王業)이 떨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랏일을 하는 도리에 있어서 유사와 현자(賢者)의 등용을 시급하게 여기는 것이니, 또한 성상께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태백산사고본】【영인본】 39책 330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인사-관리(管理) / *왕실-비빈(妃嬪) / *사상-유학(儒學)


[註 8189]선갑삼일 후갑삼일(先甲三日後甲三日) : 갑(甲)이란 법령.(法令)을 새로 만들면 백성들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법령을 선포하기 앞서 3일 동안 은근하게 말하고 법령을 선포한 뒤에도 3일 동안 다시 정녕(丁寧)하게 말한다는 뜻임. 즉 주의깊게 신중히 대처한다는 것임 

 

숙종 14권, 9년(1683 계해 / 청 강희(康熙) 22년) 7월 30일(기해) 2번째기사
행 사직 최관이 박태유가 대로를 침공한 잘못을 상소하다

 

행 사직(行司直) 최관(崔寬)이 상소(上疏)하여 박태유(朴泰維)가 대로(大老)를 침공(侵攻)한 잘못을 논하여 이르기를,
“들이니 사람들이 묘호(廟號)의 의논으로 대로(大老)를 침척(侵斥)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로의 의논은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에 합치되니, 조금도 흠잡을 단서가 없습니다. 옛날 동파(東坡)이천(伊川)을 공격하여 마침내 나뉘어 이당(異黨)이 되었는데, 동파(東坡)의 재학(才學)으로도 도리어 이천의 온오(蘊奧)함을 엿보지 못했거늘, 지금 의논하는 자들은 과연 대로(大老)의 의리(義理)의 온오함을 엿보고 배척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어떤이는 유종(儒宗)의 막중(莫重)함 때문에 그 설(說)의 근거없음을 감히 다툴 수 없고, 형세(形勢)에 눌려서 그 설의 험벽(險僻)함에 감히 이론(異論)을 제기할 수 없다고 합니다. 묘례(廟禮)는 지극히 중요하며 유종(儒宗)은 범상(凡常)한 것과 다르므로, 이 의논을 변석(辨析)하지 아니하고 국시(國是)가 정해지지 않는다면, 뒷날 대로(大老)는 또 예(禮)를 그르쳤다는 구실거리가 될 것이니, 멀리 생각하고 물러나 돌아보건대 작은 근심이 아닙니다. 그리고 다른 의논을 가졌다고 내쫓는다면 끝내 어진이를 공격하고 배척하는 결과를 면하지 못할 것이니, 세도(世道)를 위해 한심스럽게 여깁니다.”
하고, 그 아래에서 《주역(周易)》 대과괘(大過卦)의 초륙(初六)과 풍괘(豊卦)의 초구(初九)를 인용하여 이르기를,
“오늘날 사류(士類)들이 대로(大老)를 부축해 세우고 경신(敬愼)한 데 지나쳐 비록 흰 띠풀을 깔고 있는 것처럼 허물이 없이 할지라도 도리어 곁에서 엿보고 질시(嫉視)할까 염려합니다. 진실로 식려(識慮)함이 있고 또한 어진이를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면 더욱 먼저 그 엿봄을 열어주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이는 곧 대과괘(大過卦)를 인용하여 해설한 것이다.】 그리고 박태유가 비록 대로에 대해서 과연 서로 적대(敵對)하는 데는 ‘비록 형세가 균등(均等)하나 허물이 없었으니, 또한 혹은 균등에 지나치면 재앙이 될 것입니다.【이는 풍괘(豊卦)를 인용하여 해설한 것이다.】 감히 조잡하고 천박한 억견(臆見)으로 대로를 배척하였기 때문에 심지어 서로 위복(違覆)4515) 하기 어렵다고 물리쳤습니다. 이는 풍괘(豊卦)의 아래에 처하였으나 사람의 위에 서려는 마음을 가졌던 것이니, 서리를 밟게 되면 얼음 얼 때가 곧 닥친다는 것으로 앞으로의 징후(徵候)가 멀지 않다는 것이요, 송아지 뿔에 횡목(橫木)을 설치하는 것은 뒷수레에 경계가 될 만한 것입니다. 양기

 

陽氣)를 북돋우고 음기(陰氣)를 억누르는 데 그 조짐을 엄하게 다스리지 않는다면 해괴(駭怪)한 기틀이 장차 뒷날엔 틈타 일어날까 깊이 두렵습니다. 신이 망설(妄說)을 발(發)하매 진실로 여러 사람의 화살이 모여들 줄 알지만, 이 일은 치란(治亂)에 크게 관계되니, 신이 어찌 다른 데 미칠 겨를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온화(溫和)한 비답(批答)으로 답하고, 원소(原疏)는 금중(禁中)에 머물러두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38책 660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 *사상-유학(儒學)


 

 

 

迂齋集卷之五
 敎書
敎京畿觀察使崔寬書 a_147_483a


王若曰。念畿輔一方之任。此時尤難。採廟堂僉擧之言。惟卿是屬。非無獨賢之歎。政須共理之良。顧自四五年以來。連有數千里之旱。嗟根本宜優之地。最急庚癸之呼。由眇躬獲戾于天。曷堪乙丙之慮。哀鳴鴻雁。幾多風人之詩。幸待蠶牟。亦有御史之疏。豈不欲恤彼無告。猶未免煩諸有司。矧玆陵役之浩多。益致民力之蕩盡。須得櫛垢爬痒之手。畀以巡宣。庶敎如傷若保之心。及於凋瘵。惟卿天姿介潔。志操剛方。147_483b砥節首公。早蒙我寧考之簡拔。秉心無黨。諒有古直臣之風稜。惟其左右俱宜。是膺內外歷試。當分符於塞北。咸推畢諴之才。及攬轡於海西。可見范滂之志。久司出納於近密。亦多佐貳於諸曹。曾罷按節於東藩。遠牧耽羅之舊國。德惠普沾於疲氓則拯諸水火。苦節愈勵於絶域則爽若氷霜。爰奏汚吏贓賄之姦。悉露權貴貪饕之罪。一島皆舞。奚啻合浦還珠之徵。群奸稍沮。莫售射工含沙之計。神明共護。幸危疾之獲甦。朝著復淸。藹雅望之冞重。諸臣多言廉白。合居第一之流。肆予深加褒揚。新擢從二之列。旋從漢147_483c省之諫長。暫畀周甸之保釐。非唯宰揆之薦章。實多予意之眷注。丹衷素知如皎日。黎首必稱爲福星。雖薇垣補衮之是司。而棠化蘇枯之尤切。玆授卿云云。卿其宣布德意。申明敎條。褰帷察謠。無或遺乎幽隱。正衙治事。須自戒乎因循。興學而振文風。賞廉而懲猾吏。將二路已試之利器。更加淬礪之功。惟四野多瘠之窮民。益勤懷保之念。弭災保邦之道。予方勉乎一心。深根固柢之圖。斯有望於三輔。何必予多誥。皆是卿所能。於戲。人物渺然。誰是識務之俊。時勢至此。尙賴盡瘁之臣。往哉欽哉。公耳國耳。故玆敎示。想宜147_483d知悉。


送濟州牧[崔寬]入拜亰畿水使 ( 送濟州牧[崔寬]入拜亰畿水使

里同辛苦今朝異去留孤帆歸北洛隻影卧南陬寂歷荒城雨蕭條瘴海秋舊遊應有問憔悴雪渾頭

服濟州牧使[已未在旌義時牧使崔寬] ( 服濟州牧使[已未在旌義時牧使崔寬]

 

云云縣監本以無似百無一取而蒙蒙恩命來▣

▣ 008
玆邑感戴鴻私圖報無階惟當竭心志之所知殫筋力之所至以效一分涓埃之訃而顧此邦僻處海外有同別域王化之所不霑聲敎之所不曁雖欲極意撫摩以不負朝廷命送之意而到任十餘日細觀本縣形勢則官事之隳廢極矣人民之凋甚甚矣百孔千瘡已至於莫可收拾之域試言其一二則官中諸屋毁破巳允而一不修補今日曰巳倉壞矣明日曰官廳頹矣又明日曰軍器覆矣東有水山館舍一遇雨則不得保存西有西歸倉庫一遇風則勢必傾圮至於文廟是何等重地而殿廡四壁爲風▣

▣ 009
所傷幾盡頹剝而明倫堂則腐敗巳甚顯有傾覆之形若欲一時修改則凋殘物力有難遍及若欲袖手坐待則亦非盡一日之責可悶者一也本縣進上之數極其浩多而鮑漢則只七人以如許之人而應如許之役其勢所所所不給而兼本縣異於他邑風氣和平之日絶無而僅有非風則雨不雨則霧採鰒役役得任意故母當月令進上之時則或囚其其知或不發遣別差桁楊鞭楚靡不用極而亦不準數南槎錄所謂浦作輩其身則長在海中其妻則長在獄中舍冤耐苦之狀不可勝言願勿爲浦作人妻者▣

▣ 010
說盡其苦狀也且聞故老之言在前則浦作之數頗多足以應役故享上之際少無欠闕庚辛以後幾盡死亡餘存無多而上分分定之數則雖云割給加加於前萬無措辦勢或不免累次退限之患此出出於本縣事力之不之逮而有身身爲守令不役享享享者諸分義惶隕岡措可悶者二也本縣農事五六月揆則旱災太甚不得趁時厥厥節晩之後待待寸而所付者比前未滿三之一焉旣付之後出土者種又未滿十六六七而頃日風災之酷言之慘矣折木揚石屋瓦皆飛幼之之穀皆損損傷有若萬蹂蹂▣

▣ 011
然然而至於海邊則海波揚溢水水飛灑去海十里之地盡爲枯損殆無靑草此後雖雨暘適中失稔則丁寧明春賑救之資不可不及時科理而以本縣之凋獘少無容手處內地郡縣則官廳雖無所儲有大同焉有常平焉或不無推移之地而本縣則尺布斗粟了無辦出之路有同無麪之不托立而視死誠有所不忍可悶者三也本縣素稱橘柚之鄕觀於前輩諷詠亦可知也今則不然公私果木其數尠少而盡八於營案則縣無餘木矣旣已結實之後自營送人照數置薄則木無餘實矣旣無餘木又無餘實而▣

▣ 012
縣有封進之物則未知從何而備厥包之歲貢乎以例此每當封進之時東西奔走窘急百端不亦苟簡之甚者乎莫重享上之物如有可爲之勢則何敢曰何有何亡而旣不可貿得於陸邑又不可轉於於隣縣將不免爲闕封之歸可悶者四也本縣蕩敗難支之狀略數之如此而此外悶迫之形不可毛擧大局勢已敗雖使奕秋當之亦無善後之策況如縣抵本無幹才手手虛着事事謬謬則寧有收拾監敗局之望事乎之伏惟閤下以醫國之大手任一面之重寄凡係島中利害宜在揣摩商量之中何可以局外

▣ 013
高明之見不虞當局者之迷乎伏乞俯察本縣之形勢兼諒主局之匪人速爲啓聞處置使勤幹善辦事者來莅則私分之幸猶爲第二件事而國家保障之地庶有牢固之望積年凋之之民庶有回蘇之意不亦兩便於公私乎否者亦宜隨事指揮特爲變通滌除獘扇扇揚仁風使海外之民得蒙朝廷惠澤則非獨下官之幸也


送濟州牧崔寛入拜京畿水使 ( 送濟州牧崔寛入拜京畿水使

萬里同辛苦、今朝異去留。孤帆歸北洛、隻影臥南陬。寂歷荒城雨、蕭條瘴海秋。舊遊如有問、憔悴雪渾頭

 

報濟州牧使崔寛論邑弊狀[己未在旌義時] ( 報濟州牧使崔寛論邑弊狀[己未在旌義時] )

縣監本以無似、百無一取。而猥蒙恩命、䴝莅玆邑、感戴鴻私、圖報無階。惟當竭心志之所知、殫筋力之所至、以效一分涓埃之計。而顧此邦、僻處海外、有同別域。王化之所不霑、聲敎之所不曁、雖欲極意

▣ 117
撫摩、以不負朝廷命送之意。而到任十餘日、細觀本縣形勢、則官事之隳廢、極矣。人民之凋瘵、其矣。百孔千瘡、已至於莫可收拾之域。試言其一二則官中諸屋、毁破已久。罹一不翛補、今日曰司倉壞矣、明日曰官廳頹矣、又明日曰軍器覆矣。東有水山舘舍、一遇雨、則不得保存。西有西歸倉庫、一遇風、則勢必傾圮。至於文廟、是何等重地、而殿庑四壁、爲風雨所傷、幾盡頹剝。而明倫堂、則腐敗已甚、顯有傾履之形。若欲一時修改、則凋殘物力、有難遍及。若欲䄂手坐待、則亦非盡一日之責、可悶者、一也。本縣進上之數、

▣ 118
極其活多。而鮑漢、則只七人、墅如許之人、而應如許之役、其勢誠有所不給。而兼本縣異於他邑。風氣和平之日、絶無而僅有。非風則雨、不雨則霧。採鰒之役、不得任意。故每當月令進上之時、則或囚其次知、或發遣別差ㅍ桁楊鞭楚、靡不用極、而亦不準數。南傞錄所謂浦作軰、其身則長在海中、其妻則長在獄中、含寃耐苦之狀、不可勝言。願勿爲浦作人妻者、誠說盡其苦狀也。且聞故老之言在前、則浦作之數頗多、足以應役。故享上之際、少無欠闕。庚辛以後、幾盡死亡、餘存無多。而上使分定之數、則雖云割給、實加

▣ 119
於前萬無措辦之勢。或不免累次褪限之患、此實出於本縣事力之不逮、而有若身爲守令、不役志于享者、揆諸分義惶隕罔措。可悶者、二也。本縣農事五六月、則旱災太甚。不得趁時播厥。節晩之後、始得付種。而所付者、比前未滿三之一焉。旣付之後、出土者、又未滿十之六七。而頃日風災之酷、言之慘矣。折木揚石、屋瓦皆飛。幼穉之穀、皆爲損傷。有若萬馬蹂躙者、然而至於海邊、則海波揚溢、醎水飛灑。去海十里之地、盡爲枯損、殆無靑草。此後雖雨暘適中、失稔則丁寧。明春賑救之資、不可不及時料理。而以本縣之凋

▣ 120
弊、少無容手處。內地郡縣則官廳雖橆所儲、有大同焉、有常平焉、或不橆推移之地。而本縣、則尺布斗粟、了無辦出之路。有動無麪之不托、立而視死、誠有所不忍。可悶者、三也。本縣素稱橘柚之鄕、觀於前軰、諷詠亦加知也。今則不然、公私果木、其數尠少、而盡入於營案、則縣無餘木矣。旣已結實之後、自營送人照數置簿、則木無餘實矣。旣無餘木、又無餘實、而本縣例有封進之物、則未知從何而備。厥包之歲、貢乎。以此、每當封進之時、東西奔走、窘急百端。不亦苟簡之甚者乎。莫重享上之物、如有可爲之勢、則何

▣ 121
敢曰何有何亡、而旣不可貿得於陸邑、又不可轉丏於隣縣。將不免爲厥封之歸。可悶者、四也。本縣蕩敗難支之狀、略數之如此而。此外悶廹之形、不可毛擧。大抵局勢已敗、雖使奕秋當之、亦無善後之策。況如縣監、本無幹事之才、手手虛着、事事昏謬、則寧有收拾敗局之朢乎。伏惟閤下、以醫國之大手、任一面之重寄。凡係島中利害、宜在揣摩商量之中。何可以局外高明之見、不虞當局者之迷乎。伏乞俯察本縣之形勢、兼諒主局之匪人、速爲啓聞處置、使勤幹善辦事者來莅、則私分之幸、猶爲第二件事。而國家

▣ 122
保障之地、庶有牢固之望。積年凋瘵之民、庶有回蘇之意、不亦兩便於公私乎。否者、亦宜隨事指揮、特爲變通、滌除弊瘼、扇揚仁風、使海外之民、得蒙朝廷惠澤。則非獨下官之幸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