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 조선청백리 /전주최씨 청백리 (최유경)

조선의 청백리 전주 최공 평도공 휘 유경 관련 자료

아베베1 2011. 4. 3. 11:24

 

전주최공 문정공파 평도공 휘 유경 청백리 관련 자료

 

父子 청백리

태종 13년 계사(1413,영락 11)
 11월11일 (정해)
농장의 울타리 둘레를 법으로 정하다

각품(各品)의 농사(農舍)의 울타리 둘레[欄園] 보수(步數)를 정하였다. 졸(卒)한 참찬(參贊) 최유경(崔有慶)의 아내 이씨(李氏)가 정부에 고소하였다.
“죽은 남편의 장지(葬地)를 용구현(龍駒縣)의 전 장군(將軍) 김소남(金召南)의 농사(農舍) 곁에 복택(卜宅)하였는데, 영구(靈柩)가 이르니, 김소남이 이를 저지하였습니다.”
정부에서 의논하여 아뢰었다.
“1품 이하에서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분묘(墳墓) 영내 장승에는 모두 정한 제도가 있으나, 농사(農舍)의 울타리 둘레는 아직도 정한 제도가 없습니다. 부강(富强)한 자가 산과 들을 넓게 점령하여 시지(柴地)로 삼기에 이르매, 가난한 사람으로 하여금 거주할 수도 없게 하며, 심지어 달관(達官)의 장사에도 또한 땅을 얻을 수가 없어서 서로 다투어 소송하나 관리는 이를 금지하지 않습니다. 빌건대, 1품의 농사(農舍)의 울타리 둘레는 사방 1백 보로 하고 매 품(品)마다 10보를 내려서 서인(庶人)에 이르러 사방 10보로 하여, 정한 제도로 삼아서 함부로 점령하고 서로 소송하지 못하게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원전】 1 집 694 면  【분류】 *농업(農業) / *주생활(住生活) / *사법(司法) / *신분(身分)


[주D-001]시지(柴地) : 땔나무를 얻는 땅.

 

 

태종 12년 임진(1412,영락 10)
 10월23일 (을해)
박만·임순례를 외방에 자원 안치하고 자손을 영원히 서용치 말게 하다

명하여 박만(朴蔓)·임순례(任純禮)를 외방에 자원 안치(自願安置)하고, 자손은 영구히 서용(敍用)하지 말도록 하니, 대간이 여러 번 청하기를 그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명(命)이 있었다. 대간에서 또 상소(上疏)하였다.
“전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 최유경(崔有慶)이 순군 만호(巡軍萬戶)가 되고,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박신(朴信), 전 한성 윤(前漢城尹) 김겸(金謙), 판공주목사(判公州牧事) 권담(權湛) 등이 대간이 되었을 때, 형조에서 박만의 사죄(死罪)를 천조군마율(擅調軍馬律)로 논하였으니, 몽롱하게 신문(申聞)한 죄를 다스리소서.”
명하여 거론(擧論)하지 말게 하였다.
【원전】 1 집 652 면  【분류】 *사법-행형(行刑) / *정론-간쟁(諫諍) / *변란(變亂)


[주D-001]자원 안치(自願安置) : 죄인을 적소(謫所)에서 풀어 자기가 원하는 곳에 안치(安置)하던 제도.
[주D-002]천조군마율(擅調軍馬律) : 군마를 함부로 조발한 형률.

 

태종 10년 경인(1410,영락 8)
 7월26일 (신묘)
태조와 신의 왕후의 신주를 종묘에 부묘하고, 온 나라에 사유령을 내리다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獻大王)과 신의 왕후(神懿王后)의 신주(神主)를 종묘(宗廟)에 부제(祔祭)하고, 경내(境內)에 사유(赦宥)를 내렸다. 임금이 곤룡포(袞龍袍)와 면류관(冕旒冠) 차림으로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문소전(文昭殿)에 나아가 신주(神主)의 동가제(動駕祭)를 행하고, 상로(象輅)를 베풀어 의장(儀仗)을 갖추고 신주를 받들어 종묘(宗廟)에 나아갔는데, 배향 공신(配享功臣)의 신주(神主)는 태조(太祖)의 뒤에 있게 하였다. 드디어 제5실(第五室)에 부(祔)하고, 제의(祭儀)는 사시 대향(四時大享)의 예(例)에 의하였다. 그리고, 팔음(八音)의 악(樂)을 연주하였는데 그 악장(樂章)은 이러하였다.
“슬프다! 황고(皇考)시여, 명(命)을 하늘에서 도왔도다. 문모(文謨)와 무렬(武烈)이 뒤를 계승하고 앞을 빛내었도다. 빛나게 종묘(宗廟)에 있어 비로소 제사하기를 정성스럽게 하도다. 아름답게 흠향하기를 천만년이나 하소서.”
공신(功臣)은 의안 대군(義安大君) 양소공(襄昭公) 이화(李和), 평양 부원군(平壤府院君) 문충공(文忠公) 조준(趙浚), 청해백(靑海伯) 양렬공(襄烈公) 이지란(李之蘭), 한산군(漢山君) 충정공(忠靖公) 조인옥(趙仁沃)이었다. 처음에 내시 별감(內侍別監)을 이화 등의 사당(祠堂)에 나누어 보내어 사제(賜祭)하고, 그 자손(子孫)·종족(宗族)·문생(門生)으로 하여금 각각 신주를 받들고 문소전(文昭殿) 가까운 땅에 나아와 기다리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배향당(配享堂)에 들어왔다. 제의(祭儀)는 칠사의(七祀儀)에 의하고, 교서(敎書)가 있었다. 제사가 끝나매 강사포(絳紗袍) 차림으로 재전(齋殿)에 나아가 중외(中外)의 조하(朝賀)를 받고, 난가(鸞駕)를 타고 환궁하였는데, 백희(百戲)가 앞에서 베풀고, 성균 생원(成均生員) 2백여 인과 상기(上妓) 등이 모두 가요(歌謠)를 올렸다. 들어와 정전(正殿)에 좌기하여 하교(下敎)하였다.
“왕은 이렇듯이 말하노라! 생각건대, 우리 황고(皇考) 태조(太祖) 강헌 대왕(康獻大王)께서 신무(神武)하신 자품(資品)과 인후(仁厚)하신 덕(德)으로 하늘의 밝은 명령을 받아, 방가(邦家)를 창조하여 우리 조종(祖宗)의 적루(積累)한 공(功)을 잇고, 우리 자손이 지수(持守)할 업(業)을 열어 주시었으니, 아! 지극하다. 내가 큰 통서(統緖)를 이어받아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공경히 받들고 영양(榮養)하여 백세(百歲)에 이를 것을 바랐더니, 어찌하여 하늘이 불쌍히 여기지 않고 조금도 연장(延長)하지 않았는가? 내가 애통하고 사모함이 하루 하루 더하다. 돌아보건대, 상제(喪制)가 기한이 있어 상사(祥事) 담제(禫祭)가 이미 끝났으나, 마음은 오히려 측연(惻然)하여 감히 편안할 수 없다. 고전(古典)에 상고하니 마땅히 부의(祔儀)를 거행하여야 하므로, 영락(永樂) 8년 7월 26일 신묘(辛卯)에 친히 태조 강헌 대왕(康獻大王)의 신주와 신의 왕후(神懿王后)의 신주를 받들어 태실(太室)에 부(祔)하고, 공경히 곤면(袞冕)을 갖추어 예로써 강신(降神) 헌작(獻酌)하니, 중외(中外)의 신료가 서로 거느리고 하례하였다. 생각건대, 태조 강헌 대왕의 높은 공(功)과 성한 덕(德)이 천인(天人)에 이르렀고, 나 소자(小子) 또한 이루어진 공렬을 이었으니, 조선(朝鮮) 억만년의 무강(無彊)한 아름다움을 맞이할 것이 정히 오늘에 있다. 하물며, 성한 예를 거행함에 마땅히 비상한 은택을 내려야 하겠다. 금월 26일 새벽 이전의 모반(謀叛)·대역(大逆), 조부모·부모를 죽인 것, 처첩이 남편을 죽인 것, 노비(奴婢)가 주인을 죽인 것, 고독(蠱毒)·염매(魘魅), 모고살인(謀故殺人), 강도(强盜)를 범한 것을 제외하고, 이미 발각되었거나 아직 발각되지 않은 것, 이미 결정(結正)되었거나 아직 결정되지 않은 것을 모두 다 용서하여 면제한다. 아아! 이미 황고(皇考)를 높이어 극향(克享)의 의(儀)를 베풀었으니, 아름답게 신민(臣民)과 더불어 크게 유신(維新)의 교화(敎化)를 편다.”
예가 끝나매 〈임금이〉 안으로 들어가니, 의정부(議政府) 여러 대신이 대례(大禮)가 경성(慶成)한 것을 하례하였다. 임금이 대언(代言) 김여지(金汝知)에게 일렀다.
“우리 부왕(父王)은 조선(朝鮮)의 시조가 되었으니 부묘(祔廟)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모후(母后)를 아울러 부묘(祔廟)한 것은 하늘의 뜻이다. 옛날 재신(宰臣) 최유경(崔有慶)이 조정에서 말하기를, ‘제릉(齊陵)은 제사할 것이 없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간인(奸人)의 꾀임에 빠진 것이다. 오늘 천기(天氣)가 청명하고 예의(禮儀)가 잘못됨이 없은 것은 실로 여러 재상의 힘에 의한 것이다. 네가 마땅히 내 말을 〈대신에게〉 이르도록 하라.”
성석린(成石璘) 등이 대답하였다.
“모후(母后)의 일은 비록 나라 사람들이 함께 분하게 여기는 것이나, 오늘의 부묘(祔廟)는 실로 성자(聖子)의 공(功)이십니다.”
【원전】 1 집 559 면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사법-행형(行刑) / *예술-음악(音樂)


[주D-001]팔음(八音) : 동양 음악에 쓰이는 여덟 가지 종류의 악기(樂器). 또는 그 소리. 종(種) 등의 금(金), 경(磬) 등의 석(石), 금(琴)·슬(瑟) 등의 사(絲), 적(笛) 등의 죽(竹), 생(笙)·간(竿) 등의 포(匏), 부(缶) 등의 토(土), 고(鼓) 등의 혁(革), 어(敔) 등의 목(木)을 말함.
[주D-002]칠사의(七祀儀) : 봄에 사명(司命)과 호(戶), 여름에 조(竈), 가을에 문(門)과 여(厲), 겨울에 행(行), 그리고 계하(季夏)와 토왕일(土旺日)에 중류(中霤)에 지내는 일곱 가지 제사 의식.

 

태종 6년 병술(1406,영락 4)
 11월15일 (신미)
요언을 퍼뜨린 문가학과 그 당여를 잡아 순금사의 옥에 가두다

요인(妖人) 문가학(文可學)과 그 당여(黨與)를 체포하여 순금사(巡禁司) 옥(獄)에 가두었다.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 최유경(崔有慶)에게 명해 위관(委官)을 삼고, 겸 판의용순금사사(判義勇巡禁司事) 이숙번(李叔蕃)·윤저(尹柢), 형조 판서 김희선(金希善), 사헌 집의 최부(崔府) 등과 더불어 국문(鞫問)하게 하였다. 가학(可學)은 진주(晉州) 사람으로 대강 태일산법(太一算法)을 익혀 스스로 말하기를,
“비가 내리고 볕이 날 낌새를 미리 안다.”
고 하여, 나라 사람들이 점점 이를 믿는 자가 있게 되었다. 임금이 불러 시험하고자 하여 서운관(書雲觀)의 벼슬에 임명했는데, 오랜 날이 지났어도 효험이 없어 그를 내쫓았다. 그가 개성 유후사(開城留後司)에 있으면서 어리석은 백성들을 거짓으로 달래며, 은밀히 생원(生員) 김천(金蕆)에게 말하기를,
“이제 불법(佛法)은 쇠잔(衰殘)하고 천문(天文)이 여러 번 변하였소. 내 신중경(神衆經)을 읽어 신(神)이 들면, 귀신[鬼物]을 부릴 수 있고, 천병(天兵)과 신병(神兵)도 부르기 어렵지 아니하오. 만일 인병(人兵)을 얻는다면 큰일을 거사(擧事)할 수 있소.”
하니, 김천이 그럴듯하게 여기고 곧 전 봉상시 주부(奉常寺注簿) 임빙(任聘)·생원(生員) 조방휘(趙方輝)·전 부정(副正) 조한생(趙漢生)·전 소윤(少尹) 김양(金亮) 등과 더불어 모두 그에게 붙어, 마침내 작란(作亂)을 꾸미었다. 임빙의 외조부[母舅] 부사직(副司直) 조곤(趙昆)이 그 음모를 알고 고(告)하여, 문가학과 그 무리들을 체포해서 국문(鞫問)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내 문가학(文可學)을 미친놈이라 여긴다. 천병(天兵)과 신병(神兵)을 제가 부를 수가 있다 하니, 미친놈의 말이 아니겠는가?”
하니, 황희(黃喜)가 아뢰기를,
“한 놈의 문가학은 미친놈이라 하겠으나, 그를 따른 자들이야 어찌 다 그렇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국옥관(鞫獄官)에게 말하였다.
“지금 문가학 때문에 무죄(無罪)한 사람이 갇힌 자도 많을 것이니, 빨리 분변(分辨)함이 옳겠다.”
【원전】 1 집 379 면
【분류】 *사법-행형(行刑) / *사상-도교(道敎)

태종 6년 병술(1406,영락 4)
 9월3일 (기미)
임금이 안암동 김식의 집으로 이어하다

안암동(安巖洞) 김식(金軾)의 집으로 이어(移御)하였다. 처음에 경기 도관찰사(京畿都觀察使) 전백영(全伯英)이 안암동의 이어소(移御所)에다 초가(草家) 31간을 지었는데, 임금이 지신사(知申事) 황희(黃喜)에게 힐문(詰問)하기를,
“지금 이어소를 수즙(修葺)하라 한 것은 내가 경기의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으려고 함이었다. 오늘날 집을 영조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에게 고하지 않는가?”
하니, 황희가 대답하기를,
“신이 어제 명령을 받들고 수리 제조관(修理提調官) 최유경(崔有慶) 등에게 가 보았는데, 최유경이 말하기를, ‘집이 협소하여 조금 더 지어야 되겠다.’고 하기에, 신이 ‘그리하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때에 즉시 아뢰지 못한 것은 실로 신이 잘 잊어버리는 죄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새로 지은 집은 모두 다 헐어버리라. 내일 가서 보고, 만약에 한 간이라도 남아 있으면, 내 이어(移御)하지 않겠다.”
하니, 최유경이 왕명을 듣고 두려워하여 모두 헐어버렸다. 육조(六曹)와 대간(臺諫)에서 각 1명씩이 의막(依幕)에서 시위(侍衛)하고, 나머지 각사(各司)는 한 달에 여섯 번씩만 조참(朝參)하고, 삼군 갑사(三軍甲士)·별시위(別侍衛)·외패(外牌)의 시위(侍衛)는 평상시와 같이 근무하게 하였다.
【원전】 1 집 375 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주D-001]의막(依幕) : 임시로 비 바람을 피하기 위하여 지은 막사.
태종 6년 병술(1406,영락 4)
 윤 7월13일 (경오)
조온·남재·김희선·최유경·이내·설미수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조온(趙溫)으로 병조 판서를, 남재(南在)로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 겸 판의용 순금사사(判義勇巡禁司事)를, 김희선(金希善)으로 형조 판서를, 최유경(崔有慶)·유양(柳亮)으로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를, 이내(李來)로 공조 판서를, 유관(柳觀)으로 예문관 대제학을, 설미수(偰眉壽)로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를, 이숙번(李叔蕃)으로 겸 중군 총제(中軍摠制)를, 민무질(閔無疾)로 겸 우군 총제(右軍摠制)를, 함부림(咸傅霖)으로 경상도 도관찰사(慶尙道都觀察使)를, 김자수(金自粹)로 충청도 도관찰사를 삼았다. 이숙(李淑)을 파(罷)하여 완천군(完川君)으로 삼고, 신극례(辛克禮)를 취산군(鷲山君)으로 삼고, 좌사간 송우(宋愚)를 예조 참의(禮曹參議)로 임명하고, 우헌납 이안직(李安直)을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임명하였다. 신극례가 이를 듣고 노하여 말하였다.
“태상왕(太上王)께서는 이미 죽은 공신(功臣)의 시호(諡號)가 좋지 못하다고 하여 봉상시(奉常寺) 관원을 모두 죄주었지만, 지금 주상께서는 도리어 비훼(非毁)를 받으면서 현재 공신에 있는 자만 자급(資級)을 뛰어 올리는가?”
【원전】 1 집 367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태종 6년 병술(1406,영락 4)
 7월26일 (계축)
공신에게 검교직 부여 금지 등 시무에 관한 사간원의 상소문

사간원에서 상소(上疏)하여 정사를 의논하였다.
“1. 옛날은 관리로서 직책이 있는 사람이라야 상록(常祿)이 있었습니다. 지금 공신(功臣)과 제군(諸君)에게는 이미 전토와 노비[臧獲]를 하사하여 그들로 하여금 대대로 그 하사를 받게 하였으니, 포상(褒賞)의 은전이 이미 극진한데도 또 상록이 있음은 과합니다. 원컨대, 이제부터는 직책이 없는 여러 군(君)에게는 상록을 불허(不許)하소서. 또 대소의 검교지신(檢校之臣)도 직책이 없이 녹(祿)을 허비하니, 엎드려 바라건대, 모두 다 정파(停罷)하소서.
1. 재상(宰相)이란 임금과 천위(天位)를 같이 하여 천직(天職)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날의 임금은 반드시 쓸 만한 인재를 고른 뒤에야 임명하였는데, 오늘날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 이숙(李淑)은 어려서 일을 경험하지 못하였으니, 종친의 예에 두심이 마땅하고,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 신극례(辛克禮)도 재주와 덕행이 맞지 아니하므로 훈신의 예(例)에 두심이 마땅하니, 아울러 재보(宰輔)의 직책은 허락하시지 마소서.
1. 임금의 일신(一身)은 만화(萬化)의 근원이므로, 동정(動靜)과 위의(威儀)를 삼가지 않을 수 없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날마다 정사(政事)를 들으실 때나 예도를 갖추어 행행(行幸)하실 때, 중립(中笠)을 사용하지 마시고 반드시 사모(紗帽)를 사용하시어, 첨시(瞻視)를 높게 하소서.
1. 각도의 전지(田地)를 개량(改量)할 때, 차견(差遣)된 사람들의 소견이 같지 아니하여, 결부(結卜)의 수가 어떤 것은 평등하고 어떤 것은 과중하여 서민이 원망하니, 엎드려 바라건대, 신간(新墾)의 〈전지〉 이외의 다시 측량한 전지는 우선 전안(前案)에 의거하여 조세를 거두어서 백성의 마음을 편하게 하소서.
1. 근자에는 천도(遷都)를 한 처음이라 영선(營繕)의 일을 해이하게 할 수 없는 일이나, 전하께서는 외방 백성의 농사에 방해가 됨을 염려하여, 대체로 공작(工作)이 있게 되면, 오로지 부(府)·위(衛)의 군사만 역사시켰습니다. 각처의 영선 역시 거의 끝났으나, 부(府)·위(衛)의 사람들은 공역(公役)에 곤고(困苦)하여 사삿일을 볼 겨를이 없으니, 어찌 원망이 없겠습니까? 원컨대, 토목의 역사를 일절 정파(停罷)하고, 또 각도에서 세공 재목(歲貢材木)도 감하여 민력(民力)을 쉬게 하소서.”
또 대제학 권근(權近), 안성군(安城君) 이숙번(李叔蕃), 전 판한성부사 최유경(崔有慶), 전 도관찰사 유관(柳觀)은 정부(政府)에 둘 만하고, 흥녕군(興寧君) 안경공(安景恭), 전 판한성부사 이행(李行), 계림군(雞林君) 이내(李來)는 제조(諸曹)의 우두머리가 될 만하며, 전 판중추원사 정홍(鄭洪), 계림 부윤(雞林府尹) 함부림(咸傅霖), 중군 총제 정구(鄭矩), 계림군(雞林君) 이승상(李升商)은 감사(監司)가 될 만하다고 천거하니, 임금이 상소[疏]를 보고, 대내에 두고 내려 보내지 아니하였다.
【원전】 1 집 365 면
【분류】 *의생활(衣生活) / *재정-국용(國用) / *재정-전세(田稅) / *인사-임면(任免) / *왕실-행행(行幸) / *정론(政論)


[주D-001]상록(常祿) : 평소에 받는 녹(祿).
[주D-002]개량(改量) : 다시 측량함.
태종 4년 갑신(1404,영락 2)
 8월6일 (을해)
최유경·이지·김영렬·이귀령·민무질·권홍·함부림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최유경(崔有慶)으로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이지(李至)로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를, 김영렬(金英烈)로 참판승추부사(參判承樞府事)를, 이귀령(李貴齡)으로 판승녕부사(判承寧府事)를, 민무질(閔無疾)로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겸 좌군 총제(左軍摠制)를, 권홍(權弘)으로 영가군(永嘉君)을, 함부림(咸傅霖)으로 동북면 도순문찰리사(東北面都巡問察理使) 겸 병마 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 겸 영흥 부윤(永興府尹)을 삼았다.
【원전】 1 집 302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태종 4년 갑신(1404,영락 2)
 5월15일 (을묘)
피혐을 어긴 대사헌 최유경을 파직시키다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최유경(崔有慶) 등을 파면하였다. 사간원에서 상소하였다.
“대사헌 최유경의 아들 사위(士威)가 무진년(戊辰年)에 도관 좌랑(都官佐郞)이 되어 김귀진(金貴珍)의 어미를 잡아다가 조사하여 문안(文案)에 수결(手決)을 두었으니, 유경(有慶)에게 상피(相避)가 되고, 집의(執義) 이지직(李之直)은 사위와 함께 도관 좌랑이 되었고, 장령(掌令) 민설(閔渫)은 신사년(辛巳年)에 도관 겸 의랑(都官兼議郞)이 되어 종천(從賤)의 의논에 참여하였으니, 지금 귀진이 양인(良人)이라고 호소함에 있어 모두 마땅히 회피(回避)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버젓이 이를 청단(聽斷)하여 모두 상피(相避)의 법을 범하였으니, 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물며 전월(前月) 27일에 주상께서 지평(持平) 한옹(韓雍)에게 귀진의 종천(從賤)한 까닭을 묻고 집에 물러가 있으라고 명하고 말씀하기를, ‘마땅히 잘 생각하여 처리하라’하시었는데, 지직(之直) 등이 또한 이를 듣고서도 태연하게 제좌(齊坐)하여, 위로는 임금의 명령을 업신여기고, 아래로는 헌사(憲司)의 직책을 그르쳤으니, 더욱 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그러므로, 모두 파면시켰다.
【원전】 1 집 296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신분(身分)

태종 4년 갑신(1404,영락 2)
 3월7일 (무신)
사간원에서 대사헌 최유경을 다시 탄핵하다. 윤허않다

사간원에서 상소하여 사헌부를 죄주자고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사간원에서 다시 대궐에 나와 전일(前日)의 상소(上疏)를 윤허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근일에 정사(政事)가 있으면 마땅히 구처(區處)하겠다. 최유경(崔有慶)은 공사(公事)로 인하여 온 것이 아니고, 마침 일로 인하여 왔다가, 대원(臺員)이 수가(隨駕)하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 말하였는데, 내가 의(義)로 여기고 들어주었다. 유경은 가증(可憎)스런 사람이 아니다.”
하고, 얼마 아니 되어 유경을 복직(復職)시키었다.
【원전】 1 집 291 면
【분류】 *사법-탄핵(彈劾)

태종 4년 갑신(1404,영락 2)
 3월2일 (계묘)
사간원에서 상중에 수가를 청한 대사헌 최유경을 탄핵하다.

사간원에서 대사헌 최유경(崔有慶)을 탄핵하였으니, 유경(有慶)이 복중(服中)에 있으면서 대궐에 나와서 헌사(憲司)의 수가(隨駕)를 청하였기 때문이다.
【원전】 1 집 291 면
【분류】 *사법-탄핵(彈劾)

태종 4년 갑신(1404,영락 2)
 2월13일 (갑신)
최유경·조휴·이지직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최유경(崔有慶)으로 참판사평부사(參判司平府事) 겸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조휴(趙休)로 사간원 좌사간 대부(司諫院左司諫大夫)를, 이지직(李之直)으로 사헌 집의(司憲執義)를 삼았다.
【원전】 1 집 289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태종 4년 갑신(1404,영락 2)
 2월6일 (정축)
해주에서 강무하다. 삼성에서 수행하다

해주(海州)에서 강무(講武)하였다. 처음에 사헌부(司憲府) 장무(掌務)를 불러 말하기를,
“헌부(憲府)는 송사(訟事)를 듣기에 겨를이 없으니, 간원(諫院)과 형조(刑曹)만 거가(車駕)를 따르게 하겠다.”
하였다. 헌사(憲司)가 청하기를,
“삼성(三省)이 거가를 따르는 것은 예전 제도이니, 원컨대, 호종(扈從)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튿날 헌부가 또 거가를 따르기를 청하였어도 듣지 않았다. 대사헌(大司憲) 최유경(崔有慶)이 형(兄)의 복(服)을 입고 있어 사진(仕進)하지 않다가, 마침 사삿일로 인하여 대궐에 나왔다가 헌부가 거가를 따르지 못한다는 것을 듣고, 법을 폐할 수 없다고 들어가서 고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간원(諫院)에서 대궐에 나와 상언(上言)하기를,
“종묘(宗廟)의 여름 제사[夏享]를 친히 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만일 군사를 수고롭게 하여 멀리 사냥하고, 또 신도(新都)에 행차하면, 군마(軍馬)가 더욱 곤(困)해질 것입니다. 하물며, 풍해도(豐海道)는 중국 사신(使臣)이 왕래하는 땅이니, 춘추(春秋)로 강무(講武)하면 그 폐단이 작지 않습니다. 청컨대, 경기(京畿)에서 강무(講武)하고 신도(新都)에서 일을 행하소서. 풍해도에서 강무하는 것은 명년을 기다리소서.”
하였다. 임금이 노하여 대성(臺省)과 형조(刑曹)가 모두 거가를 따르지 말라고 명하였는데, 좌정승(左政丞) 하윤(河崙) 등이 굳이 청하여, 거가를 따를 것을 명하였다.
【원전】 1 집 288 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 *군사-병법(兵法) / *정론-정론(政論)

태종 4년 갑신(1404,영락 2)
 1월17일 (기미)
사헌부의 내부 갈등으로 집의 민약손·감찰 박하 등을 탄핵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집의(執義) 민약손(閔若孫)·감찰(監察) 박하(朴河) 등 다섯 사람을 탄핵하였다. 패가 없는 매는 금하라는 명령이 내리었으므로, 사헌부에서 서리(書吏)와 소유(所由)에게 첩(帖)을 주어서 영(令)을 범하는 자를 잡게 하였다. 하루는 서리와 소유가 〈영을 범한 자를〉 잡아서 고하였는데, 첩(帖)을 받은 자는 아니었다. 집의 민약손이 조사하여 보니 참지승추부사(參知承樞府事) 신극례(辛克禮)의 매[鷹]였다. 약손이 그 매받이[臂鷹]를 가두고, 매는 극례에게 돌려보냈다. 극례가 노하여 약손의 집에 가서 말하기를,
“이 매는 주상께서 주신 것이다. 네가 받겠느냐?”
하였다. 약손이 두려워하여 바로 극례의 집에 가서 사과하였으나, 극례가 나와 보지 않았다. 약손이 서리와 소유를 꾸짖기를,
“패 없는 매를 금하는 것은 네가 받은 책임이 아닌데, 무슨 까닭으로 잡아서 욕(辱)이 내 몸에 미치게 하는가?”
하고, 그 소유에게 볼기를 치고, 병(病)을 칭탁하고 사진(仕進)하지 않았다. 대사헌(大司憲) 최유경(崔有慶)·지평(持平) 정지(鄭持) 등이 극례(克禮)를 논핵하니, 극례가 대답하지 않았다. 이날에 사헌부의 관원이 본부(本府)에서 제좌(齊坐)하였는데, 정지와 민약손이 들어올 때에 감찰(監察) 박하(朴河) 등 다섯 사람이 기롱하기를,
“왕명(王命)을 욕되게 한 사람도 사진(仕進)하는가?”
하니, 한 사람이 이에 응하기를,
“그렇지.”
하였고, 한 사람은 말하기를,
“소유를 볼기치지 않는 것이 가하지.”
하였고, 한 사람은 말하기를,
“대강(臺綱)이 전혀 없어.”
하였고, 또 본부(本府)에서 약손을 탄핵하지 못한다 하여 말하기를,
“패 없는 매는 금하라는 판지(判旨)가 있었으니, 서리와 소유가 잡은 것이 옳다. 집의 민약손이 세력을 두려워하여 판지(判旨)를 따르지 않았으니, 규탄(糾彈)하는 책임을 감당할 수 없다.”
하였다. 장령(掌令) 한승안(韓承顔)과 지평(持平) 정지(鄭持)가 약손과 하(河) 등을 탄핵하였다.
【원전】 1 집 288 면
【분류】 *사법-법제(法制) / *사법-탄핵(彈劾)

태종 3년 계미(1403,영락 1)
 윤 11월27일 (경오)
최유경을 대사헌으로 삼고 맹사성·권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최유경(崔有慶)으로 대사헌(大司憲)을 삼고, 맹사성(孟思誠)·권진(權軫)으로 좌우 사간 대부(左右司諫大夫)를 삼고, 강서(姜筮)로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이숙번(李叔蕃)으로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를 삼았다.
【원전】 1 집 286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태종 3년 계미(1403,영락 1)
 8월20일 (을축)
최유경을 한성부 판사로, 조견을 좌군 도총제 평성군으로 임명하다

최유경(崔有慶)으로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삼고, 조견(趙狷)으로 좌군 도총제(左軍都摠制) 평성군(平城君)을, 이문화(李文和)로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신유정(辛有定)으로 판강릉대도호부사(判江陵大都護府事) 겸 병마 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를 삼았다.
【원전】 1 집 273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태종 3년 계미(1403,영락 1)
 5월4일 (경진)
인소전에 제사하고 태상전에 나아가 헌수하다. 안평 부원군 이서 등이 시연하다

임금이 친히 인소전(仁昭殿)에 제사하고, 드디어 태상전(太上殿)에 나아가 헌수(獻壽)하였다. 안평 부원군(安平府院君) 이서(李舒)·상당군(上黨君) 이저(李佇)·참판사평부사(參判司平府事) 최유경(崔有慶)·참판승추부사(參判承樞府事) 윤저(尹柢)가 시연(侍宴)하여, 연귀(聯句)를 지어 창화(唱和)하고 극히 즐기었다.
【원전】 1 집 264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태종 3년 계미(1403,영락 1)
 2월5일 (임자)
참찬 최유경을 시켜 사신 왕미실첩에게 음식을 대접하게 하다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 최유경(崔有慶)에게 명하여 사신 왕미실첩에게 음식을 대접하게 하였다. 왕미실첩이 불은사(佛恩寺) 과녁[侯]을 쏘기 때문이었다.
【원전】 1 집 256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외교-명(明)

태종 2년 임오(1402,건문 4)
 12월20일 (기사)
우사간 권담이 박만에게 가벼운 죄를 적용한 위관 조영무 등을 논핵하다

우사간(右司諫) 권담(權湛) 등이 위관(委官) 조영무(趙英茂)·순위부 만호(巡衛府萬戶) 최유경(崔有慶)·윤저(尹柢), 대사헌(大司憲) 박신(朴信)·형조 전서(刑曹典書) 김겸(金謙)·좌사간(左司諫) 조용(趙庸)을 논핵(論劾)하였으니, 경(輕)한 율(律)을 적용하여 박만(朴蔓)을 장류(杖流)에 처하였기 때문이었다.
【원전】 1 집 253 면
【분류】 *사법-탄핵(彈劾) / *변란(變亂)

태종 2년 임오(1402,건문 4)
 11월21일 (경자)
임금이 금교역 북교에 머무르며 민제·성석린 등에게 경성에 남아 지키게 하다

임금이 경성(京城)을 출발하여 금교역(金郊驛) 북교(北郊)에 머물렀는데, 민제(閔霽)·성석린(成石璘)·우인렬(禹仁烈)·최유경(崔有慶) 등에게 명하여 경성(京城)을 유수(留守)하게 하였다.
【원전】 1 집 252 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 *군사(軍事)

태종 2년 임오(1402,건문 4)
 3월6일 (기축)
하성절사 최유경이 연왕의 군사가 경사를 쳤다는 소식을 전하다

하성절사(賀聖節使)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 최유경(崔有慶)이 명나라 서울로부터 돌아왔다. 최유경이 아뢰기를,
“연병(燕兵)의 기세(氣勢)가 강하여, 이기는 기세를 타서 먼 곳까지 달려와 싸우는데, 황제의 군대[帝兵]는 비록 많다 하더라도 기세가 약하여 싸우면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하고,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달단(韃靼)의 군대가 이 틈을 이용하여 연(燕)과 요(遼)의 사이에서 침략(侵掠)하여, 중국이 소연(騷然)합니다.”
【원전】 1 집 227 면
【분류】 *외교-명(明) / *외교-야(野)

태종 2년 임오(1402,건문 4)
 3월6일 (기축)
하성절사 최유경이 연왕의 군사가 경사를 쳤다는 소식을 전하다

하성절사(賀聖節使)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 최유경(崔有慶)이 명나라 서울로부터 돌아왔다. 최유경이 아뢰기를,
“연병(燕兵)의 기세(氣勢)가 강하여, 이기는 기세를 타서 먼 곳까지 달려와 싸우는데, 황제의 군대[帝兵]는 비록 많다 하더라도 기세가 약하여 싸우면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하고,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달단(韃靼)의 군대가 이 틈을 이용하여 연(燕)과 요(遼)의 사이에서 침략(侵掠)하여, 중국이 소연(騷然)합니다.”
【원전】 1 집 227 면
【분류】 *외교-명(明) / *외교-야(野)

















 

 

 

 

고려사절요 제32권

 신우 3(辛禑三)
계해신우 9년(1383), 대명 홍무 16년

 


○ 봄 정월에 해도(海道) 부원수 정지가 왜적을 쳐서 크게 격파시키자, 금대(金帶) 한 벌과 백금 50냥을 내려 주었다.
○ 나하추가 문합라불화(文哈刺不花)를 보내어, 예전의 우호관계를 회복하자고 청하였다.
○ 정몽주 등이 요동에 이르니, 도사(都司)가 칙명이 있다 하며 들이지 않고 바치는 예물만 받았다. 칙서에 이르기를, “하늘이 덮고 땅이 싣고 일월이 임하는 곳에 만민의 임금이 되었으니, 봉한 지역은 비록 크고 작은 것이 다르나, 백성을 다스리는 도는 모두 마찬가지다. 온 천하의 백성들을 옛날부터 지금까지 어찌 한 임금이 두루 잘 길렀으랴. 전에 삼한의 추장이 백성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죽인 뒤에도 거듭 와서 짐에게 아뢰고 신하로서 조공하는 것을 평상시와 같이 하였다. 두 번 세 번 물리쳤으나 그치지 않아, 특별히 세공 문제로 그들을 곤란하게 하면 반드시 그치리라 생각하였다. 이제 그치지 않고 굳이 청하므로, 과거 수년 동안 바치지 아니한 자잘한 공물까지 모두 합하여 수효를 만들어서 그들을 암암리에 우롱하고 모욕하려 한다. 그러나 삼한의 지역이 중국의 동쪽, 창해의 밖에 있는데, 짐이 우리 중국의 서적을 보였다. 그 지방 사람들은 은혜를 생각지 않고 화를 얽기를 좋아한다 하였다. 비록 잠깐 신하 노릇을 할지라도 무슨 소용이 있으랴. 너희 요동을 지키는 여러 장수들은 굳게 내 강토를 지키되, 견주거나 청구하지 말라. 이제 수년 동안의 물건을 합하여 하나로 만들어서, '칙명과 같이 하라.' 하고, 그 뜻이 정성스럽지 못하거든 부서(符書)가 이르는 날에 전과 같이 저지하여 돌려보내어, 국경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말고, 다만 스스로 교화가 되도록 하라." 하였다.
○ 오랑캐 발도가 와서 이성(泥城)을 노략하다가 날아오는 화살을 맞고 달아났다.
○ 요동 도사가 통첩을 보내기를, “고려가 대명을 신하로서 섬기니, 나하추와 화친을 통하지 않아야 할 터인데, 이제 듣건대, '나하추가 문합라불화를 보내어 화친을 청하자, 고려가 후하게 대접하여 그를 위로하였다.' 하니, 신하로서 대명을 섬기는 의리로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만일 죄를 면하고자 하거든, 문합라불화를 잡아 보내어 그 정성을 드러내라. 그렇지 않으면 비록 후환이 있더라도 후회막급이리라." 하였다.
○ 2월에 양광도 안렴 유극서(柳克恕)와 교주도 안렴 최자(崔資)에게 나라 마구의 말을 각각 한 필씩 주었다. 두 사람은 모두 간사하고 영리하며 아첨하는 사람으로, 우가 남쪽으로 순행했을 때에 백성의 고혈을 짜서 맛있는 음식을 극진히 올렸고, 권세가에 뇌물을 주어 아첨하고 기쁘게 하였으므로, 이것을 하사한 것이다.
○ 우가 송경에 돌아왔다.
○ 좌사에서 의논하여 권근(權近) 등이 상소하기를, “관작이라는 것은, 덕이 있는 사람에게 명하고 공이 있는 사람을 상주는 것이기 때문에, 어진 자가 자리에 있고 능한 자가 직책에 있어야 하니, 공이 없는 사람은 함부로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근년 이래로 사방에 병란이 일어나 국가의 재정이 고갈되어, 싸움에서 승리한 공이 있는 사람이 있어도 돈과 재물이 모두 상주기에 부족하였고, 관작은 다 주기 어려웠습니다. 선왕께서는 임시로 첨직(添職)을 마련하여 일정한 수를 두어 공이 있는 사람에게 상으로 주었으며, 전공이 없으면 감히 헛되이 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공이 있는 자는 더욱 격려되었으며, 공이 없는 자는 감히 바라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지금은 첨직이 너무 많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게 되어, 공이 있고 없는 것이 서로 혼돈되고, 요행을 바라는 길이 날마다 열려, 공인ㆍ장사꾼ㆍ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함부로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공이 있는 자는 비록 얻더라도 기뻐하지 않으며, 공이 없는 자는 함부로 구하기를 그치지 않아, 관작의 천함이 진흙같이 되었으니,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하물며 지금 국가가 의지하는 것은, 공 있는 사람에게 상을 주는 것으로 사람의 마음을 잡아매는 것은 오직 관작뿐인데, 관작이 중하지 아니하여 사람마다 모두 그것을 가볍게 여기면, 뒤에 비록 공이 있더라도 무엇으로 상을 베풀 것입니까. 또 전장에서 싸우는 군사가 어찌 가볍고 천한 벼슬에 보태지기를 바라고 측량하기 어려운 위태 땅으로 달려가겠습니까. 원하건대, 지금부터는 공이 있는 사람을 상주기 위해서 첨설한 관직은 한결같이 선왕께서 정한 수에 의거하여, 싸움에 나가 공이 있는 군관(軍官)을 제외하고는 제수를 허여하지 마옵소서. 여자에게 택주(宅主)를 봉하는 것과, 중에게 제군(諸君)을 봉하고 법호(法號)를 주는 것과, 양부 외에 봉군하는 것은 모두 벼슬이 가볍고 천하게 되는 데에 관계되므로, 아울러 금지하옵소서.
국가의 안위가 주ㆍ현의 성쇠에 달려 있는데, 근년 이래로 지방 고을의 아전들이 본역을 면하기를 꾀하여 명서업(明書業)ㆍ지리업ㆍ의율업(醫律業)을 한다고 핑계대나, 모두 진정한 재능 없이 관직에 나아가 역사를 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골 아전이 날마다 줄어서 공무를 집행하기 어렵고, 수령들은 부리고 시킬 사람이 없게까지 되었으며, 여러 업으로 관직에 나아간 자들은 고향으로 물러나 앉아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행하여도 수령이 이를 어떻게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ㆍ현에 약간 남아 있는 아전들도 모두 분에 넘치는 생각을 가지게 되니, 각 고을이 이로 인하여 더욱 쇠할까 두렵습니다. 바라건대, 동당(東堂)의 제업(諸業)과 감시(監試)의 명경(明鏡)을 모두 폐지하옵소서. 옛 책에 이르기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요, 재물은 백성의 마음이므로, 그 마음을 잃으면 백성이 흩어지고, 그 근본을 잃으면 나라가 위태하다." 하였습니다. 근년 이래로 전쟁이 그치지 않고 수재와 한재가 겹쳐서 백성들에게 주린 기색이 있고 들에는 굶어 죽은 시체가 있으며, 게다가 밭 하나에 주인이 두셋씩 되어서 각각 그 도조를 징수하여 백성을 괴롭혀도 그 곳 관사(官司)들이 이를 꾸짖어 금하지 못하니, 지금부터는 한결같이 본국의 전법(田法)에 의거하여 서울 안에서는 판도사가, 지방에서는 안렴사가 판단 결정하여, 백성이 소생하여 쉬게 하고, 만일 어기는 자가 있거든 철저히 금지하옵소서.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옛 교훈을 배워야 이로써 일을 세울 수 있다.' 하였으니, 옛날부터 어진 임금이 배우지 않고서 온갖 정사를 잘 다스린 분은 없었습니다. 전하께서 처음 즉위하셨을 적에는 배움에 뜻을 두어 먼저 서연(書筵)을 개설하시니, 국인이 서로 치하하고 태평을 기대했었는데, 근년 이래로 하다가 말다가 하시어, 사람들이 모두 실망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처음 뜻을 잊지 마시고 다시 서연을 열어, 대신에게 건의하도록 명하기도 하고, 측근의 신하로 하여금 강논하게 하기도 하여, 경학에 실린 의리의 종지를 통달하시고, 고금에 걸친 치란의 변천을 관찰하시어, 삼한 신민의 소망에 부응하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 3월 사헌부에서 글을 올려 아뢰기를, “본조에서는 벼슬에 복무한 기간과 노력의 실적을 가지고 자격에 따라 계급을 올려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상주는데, 근년 이래로 분주하게 경쟁하는 것이 풍속이 되어 관작이 날로 천해져서, 공로가 있는 자는 승진하지 못하고 공이 없는 자는 함부로 받으니, 자세히 조사고 차례에 따라 서용하여, 인사 행정의 법을 밝히소서. 수령은 백성을 가까이하는 직책이니 더욱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되는데, 근래에 간사하고 아첨하며 탐하고 사나운 무리들이 권세가에 붙어 수령이 되어 멋대로 불법을 행하므로, 주ㆍ부와 군ㆍ현이 나날이 피폐해지니, 대성(臺省)과 6조에 청렴하고 정직하며 근검한 자를 천거하게 하여 군ㆍ현에 나누어 보내고, 도순문사와 안렴사에게 어진 사람은 올리고 나쁜 사람은 내치어 상과 벌을 밝히게 하며, 만일 잘못 천거한 것이 있거든, 죄가 천거한 사람에게까지 미치게 하옵소서." 하였다. 우가 그 말을 받아들였다.
○ 우가 정비의 대궐에 갔다. 이 뒤로부터 왕래가 매우 잦았는데, 어떤 때는 들어가지 못하였다. 갈 적마다 희롱하기를, “나의 궁녀들은 어쩐지 어머니의 인물만 못합니다." 하였다.
○ 좌사의 권근 등이 상소하기를, “전하가 오로지 노는 것만 일삼고 동작에 절도가 없어, 낮이나 밤이나 기사 두어 명을 데리고 길을 달리시니, 백성이 용안을 바라보고 아는 자는 깜짝 놀라 실망하여, '전하가 어찌 이렇게까지 하시는가.' 하며, 알지 못하는 자는 난봉꾼으로 생각하여 손가락질하며 모욕하고 비웃습니다. 지금 사방에 병란이 일어나고 흉년이 거듭 들어서, 백성의 생업이 탕진되고 나라 형세가 장차 위태롭게 될 것이니, 이때야말로 밤낮으로 근심하고 부지런히 정신을 가다듬고 정사를 할 때입니다. 전하께서는 조금도 유의하지 않고 밤늦도록 놀고 아침 늦게 일어나며, 안에서는 향락에 빠지고 밖에서는 말 달리며 돌아다니시어 작은 재미를 즐기고 장래의 걱정을 잊으시니, 갑자기 급한 일이 생기면 장차 어떻게 이를 처리하시렵니까. 더구나 향락에 빠져 뜻을 방탕하게 하고, 말을 달리어 몸을 수고롭게 하는 것은, 진실로 정신을 수양하여 수명을 보전하는 방법이 아니옵니다. 전하께서 한창 젊어서 혈기가 굳지 않았사오니, 이 또한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부터는 감히 경솔히 나가서 길에서 달리지 마시고, 밤이 되거든 자고 아침이 되거든 단정히 앉아 높이 손을 모아 쥐고, 대신을 가까이하시어 시국 정치의 잘잘못을 묻고 고금의 치란을 문의하시며, 조용히 담소하고 덕성을 함양하셔서, 법이 아닌 것은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닌 것은 행하지 말아, 하루하루 더욱 조심하고 아무리 쉬고 싶더라도 쉬지 마옵소서. 그러면 전하께서는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고 착한 것을 좋아하시는 미덕이 생기고, 뜻을 방탕하게 하고 몸을 괴롭히는 근심이 없어져 천위(天位)는 더욱 높아지고 왕업은 더욱 오래 갈 것입니다." 하였다.
○ 문하시중 홍영통(洪永通)이 은퇴하기를 청하니, 조민수를 시중으로, 임견미를 수시중으로 삼고, 견미ㆍ도길부ㆍ우현보ㆍ이존성을 시켜 정방(政房)을 제조하게 하였다. 전례에 시중이 인사 행정을 맡았었는데, 영통과 민수가 시중이 되어도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견미가 권세를 독차지했기 때문이었다.
○ 여름 4월에 가뭄으로 이죄(二罪) 이하를 사면하였다.
○ 김한로(金漢老) 등 3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5월에 전 판사 한중보(韓仲寶), 상호군 한중량(韓仲良)에게 장형을 행하고 변방에 귀양보냈다. 중보는 일찍이 제주 안무사로 있으면서 임금의 명령을 가장하고 마음대로 욕심을 부린 죄로 순군옥에 갇히었으며, 그 아우 중량은 본래 중보와 우애가 없었는데, 중보가 형을 당하는 것을 기뻐하고 형의 죄악을 열거하여 이존성의 집에 익명으로 투서하였으므로, 아울러 중량도 옥에 가두어 죄를 주었다.
○ 해도 원수 정지가 남해현(南海縣)에서 왜적을 쳐서 크게 파하였다. 이때에 정지가 거느린 전함은 겨우 47척이었는데, 나주와 목포에 머물러 있었다.
적선 1백 20척이 크게 이르자, 경상도 바닷가의 고을들이 매우 동요하였다. 합포 원수 유만수(柳曼殊)가 위급함을 고하므로, 정지가 밤낮으로 배 몰기를 독려하여 손수 노를 젓기도 하니, 노 젓는 군사들이 더욱 힘을 다하였다. 섬진(蟾津)에 도착하여 합포의 군사들을 징집하니, 적이 이미 남해의 관음포(觀音浦)에 이르렀는데, 형세가 대단히 성하여 사면으로 둘러싸고 전진하였다. 정지가 군사를 독려하여 나가 박두양(朴頭洋)에 이르니, 적이 큰 배 20척마다 강한 군사 1백 40명씩을 태워 선봉으로 삼았다. 정지가 진격하여 크게 깨뜨려 적선 17척을 불태우니, 뜬 시체가 바다를 덮었다. 병마사 윤송(尹松)이 화살에 맞아 죽었다.
○ 우가 몰래 호곶(壺串)에 가서 말 먹이는 것을 보았는데, 숙위하는 자들이 아무도 간 곳을 몰랐었다.
○ 6월에 교주ㆍ강릉도 수척(水尺)ㆍ재인(才人)이 가짜 왜적이 되어 평창ㆍ원주ㆍ영주ㆍ순흥 등지를 약탈하니, 원수 김입견(金立堅)과 체찰사 최공철(崔公哲)이 50여 명을 잡아 죽이고, 그 처자를 각 고을에 나누어 귀양보냈다.
○ 대간이 번갈아 글을 올려 아뢰기를, “우리 태조가 삼한을 통일하자 자손이 서로 계승함에 반드시 옛 일을 본받았습니다. 임금이 출입하는 것은 반드시 종묘의 제사나 국제간의 회합이나 외국 빈객의 접대 같은 일에 의하였고, 일없이 함부로 다닌 적이 없었습니다. 영릉(永陵 충혜왕)에 이르러 조종(祖宗)의 법을 따르지 않으며, 간신(諫臣)의 말을 듣지 않고 날마다 여러 소인과 더불어 마을에 돌아다니며 놀다가, 그 소문이 상국에까지 들려 마침내 악양(岳陽)의 행차가 있었습니다. 지금 전하가 놀러 다니심이 절도가 없어, 기사 두어 명을 데리고 말달리며 다니시지 않는 곳이 없으니, 신민이 기대를 잃고 있습니다. 위로는 하늘의 명을 두렵게 여기시고, 아래로는 조종을 본받아 출입하는 것이 절도가 있으며, 시위는 의장을 갖추어 혹시라도 가볍게 나다니지 마시어, 신민의 기대에 응하여 주옵소서." 하였다.
○ 왜적이 경상도 길안(吉安)ㆍ안강(安康)ㆍ기계(杞溪)ㆍ영주(永州)ㆍ신녕(新寧)ㆍ장수(長守)ㆍ의흥(義興)ㆍ의성(義城)ㆍ선주(善州) 등지를 침략하고, 또 단양(丹陽)ㆍ제주(堤州)를 침략하였다. 전의령(典儀令) 우하(禹夏)를 경상도에 보내어, 원수들이 왜적을 막는 태도를 감독하고 시찰하게 하였다.
○ 가을 7월에 우하가 여러 병마사를 독려하여 의성에서 왜적을 쳐서 3급을 베고, 또 예안(禮安)ㆍ순흥(順興)에서 싸워 14급을 베었다.
○ 지순주사 황안신(黃安信)이 군량 운반을 감독하다가 쌀 70여 석을 절취하였다. 유사가 법으로 처단하려 했는데, 우의 인척인 관계로 관직만 삭탈하였다.
○ 왜적이 대구(大丘)ㆍ경산부(京山府)ㆍ선주(善州)ㆍ인동(仁同)ㆍ지례(知禮)ㆍ김산(金山) 등지를 침략하였다.
○ 양광도 원수 왕안덕(王安德)이 괴주(槐州)에서 왜적을 쳐서 3급을 베었다.
○ 요동 심양의 비적 40여 기가 단주에 침입하니, 단주 만호 육여(陸麗)와 청주 만호 황희석(黃希碩)과 천호 이두란(李豆蘭) 등이 추격하여 서주위(西州衛)ㆍ해양(海陽) 등지에 이르러 괴수 여섯 명을 베니, 나머지는 모두 도망가 버렸다.
○ 교주ㆍ강릉도 도체찰사 최공철이 방림역(芳林驛)에서 왜적을 쳐서 8급을 베었다.
○ 8월에 문하찬성사 조인벽(趙仁璧)을 동북면 체찰사로, 판개성 부사 한방언(韓邦彦)을 상원수로, 문하찬성사 김용휘(金用輝)를 서북면 도순찰사로, 전 판도판서 안사조(安思祖)를 강계 만호로 삼아 변경을 방비하게 하였다.
○ 왜적이 비옥(比屋)ㆍ의성 등지를 침략하는데, 적은 많고 아군은 적어 여러 번 싸웠으나 불리하였다. 부원수 윤가관(尹可觀)이 안동ㆍ예안 등지에서 싸워 패하였다.
○ 왜적이 거령(居寧)ㆍ장수(長水) 등의 현을 함락시키고 군사를 나누어 전주를 침략하려 하는 것을, 부원수 황보림이 여현(礪峴)에서 싸워 물리쳤다.
○ 우가 밀직제학 조준(趙浚)을 불러 이르기를, “양광ㆍ경상도에 왜적이 매우 성한데, 원수와 도순문사가 약하고 겁내어 싸우지 못하니, 경이 가서 전쟁의 상황을 살펴야 되겠다." 하니, 준이 대답하기를, “전하께서 만일 신에게 두 도를 맡게 하시려면, 그 장수로서 머뭇거리거나 패전한 자는 신의 조처에 맡기셔야 합니다. 그러하지 않으면 원수와 도순문사의 직위가 신의 위에 있는데, 어찌 신을 두려워하여 죽을 땅에 나가려 하겠습니까." 하였다. 장수의 족속들이 이를 꺼리어 우에게 사뢰어 그만두게 하고, 마침내 문하평리 문달한(文達漢)을 양광ㆍ경상도 도체찰사로 삼고 명령하기를, “가서 장수의 부지런함과 태만함, 사기의 왕성함과 쇠약함 것을 살피어, 머뭇거리고 전진하지 않는 자가 있거든 원수는 잡아 가두고 보고하여, 그 나머지는 군율에 의하여 곧장 처단하라." 하였다.
○ 왜적 2백여 기가 괴주(槐州) 장연현(長延縣)을 침략하니, 원수 왕안덕ㆍ김사혁(金思革)ㆍ도흥(都興)이 적과 싸워 3급을 베었다.
○ 왜적 1천여 명이 춘양(春陽)ㆍ영월(寧越)ㆍ정선(旌善) 등의 군ㆍ현을 침략하였다.
○ 좌사의 권근 등이 글을 올려 아뢰기를, “우리 태조께서 근심하고 부지런하시여 만대에 전통을 내려 주셨고, 여러 성군이 서로 계승하여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에게 부지런히 하며 법과 제도를 준수하여 차차 태평을 이루었습니다. 선대에서 수백 년 동안 쌓아올려 어렵게 이룬 왕업이 전하여 전하에게 이르렀으니, 물려받으신 책임이 무겁다 할 수 있습니다. 임금의 지위는 어려울 뿐이며, 관계되는 것이 지극히 소중하여, 한 생각이라도 삼가지 않으면 사해에 근심을 끼치기도 하고, 하루라도 삼가지 않으면 백 년의 걱정을 이루기도 하니, 비록 정치가 잘 되고 일이 없는 때라도 오히려 마땅히 두려워하며 조심하여 뜻밖의 변에 대비하여야 할 것인데, 하물며 국가의 위급한 시기를 당하여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나라는 수재와 한재가 잇달아 일어나고 기근과 유행병이 겹쳐, 나라에는 몇 달을 지탱할 저축이 없고, 백성은 하루저녁거리도 없어, 늙고 약한 자는 죽어서 개천과 구렁에 뒹굴고, 굶어죽은 시체가 길거리에 널려 있습니다. 게다가 이웃나라가 국경 가까이에 군사를 주둔하여 우리의 영토를 침범하며, 우리의 인민을 꾀어 가고, 또 왜적이 깊이 들어와 약탈해서 각 고을이 쓸어낸 듯 버려져 적의 구혈이 되었어도, 수령이 막지 못하고 장수가 제어하지 못하니, 자고로 위란의 지극함이 이때보다 더 심한 적이 없었습니다. 섶을 쌓아 놓고 불을 지르는 것도 현재의 다급함에 비유하기에 부족하고, 침상을 깎아 살갗에까지 재앙이 미친다는 것도 현재의 절박함을 비유하기에 부족합니다. 시국을 구제하기가 급함이 마치 새는 물을 타는 불에 붓는 것같이 하더라도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두려우니, 이제는 참으로 전하가 두려워하여 닦고 살피며 밤낮으로 근심하고 부지런하며 분발하여 일을 하여야 할 때입니다.
지난번에 신등이 사헌부와 함께 글을 올려 미행(微行)을 간하였더니, 전하께서 영명하고 과단하신 덕으로 넉넉히 용납하여 어기지 아니하시고 곧 이를 받아들이시어, 궁중에 단정히 계시고 두어 달 동안을 나다니지 아니하셨습니다. 간하는 말을 좇으시는 덕과 허물을 고치는 아름다움이 오늘날에 빛나고 옛날보다 뛰어나서 일월이 빛을 더하니, 신하들은 조정에서 서로 경사로 여기며, 백성들은 들에서 서로 기뻐하여, 안팎이 한결같이 정치가 잘될 것을 기대한 지가 한 달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위태하고 어지러워 어려움 많은 시기를 당하여, 반성하고 조심하며 두려워하는 태도를 생각지 아니하시고 다시 나다니심만을 일삼아 밤낮으로 말을 달리며 돌아다니십니다. 높으신 왕의 몸으로 말 한 필을 타고 다니시어 자주 깊은 궁중을 떠나서 거리를 달리시니, 시위하는 신하들은 활과 칼을 끼고 빈 궁을 지키고 있으며, 공경과 백관들은 전하의 계신 곳을 알지 못합니다. 틈을 엿보고 내응하는 도적이나, 첩자와 자객이 이 나라 안에 있지 않을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만일 강하고 사나운 무리가 기회를 노리고 몰래 일어난다면 창졸간에 변이 일어날까 매우 두렵습니다. 이것이 신등이 밤낮으로 마음 아프게 생각하며, 깊이 전하를 위하여 위태롭게 여기는 바입니다.
옛날부터 인심은 헤아리기 어렵고, 화란은 일정한 것이 없습니다. 위태로움은 반드시 편안한 데서 생기고, 변은 반드시 소홀히 여기는 데서 생기는 것이니, 환란을 방비하는 도를 참으로 엄하게 하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잘 다스릴 때에도 오히려 변이 날까 두려운데, 하물며 지금은 도적이 많은 때이므로 더욱 한심합니다. 전하께서는 선조가 쌓아올린 어려운 왕업을 계승하고 계시니, 비록 자신은 중하게 여기지 않는다 하더라도, 장차 종묘 사직을 어찌 하시렵니까. 잘못인 줄 알면서 간하는 말을 좇지 않음은 허물을 늘리는 것이고, 위태한 줄을 알면서 정사를 닦지 않음은 망함을 재촉하는 것입니다. 이 소문이 만일 나돌아 사방에 번진다면, 틈을 타려는 도적이 어찌 다행스럽게 여기지 않겠으며, 적을 막으러 간 장수가 어찌 실망을 하지 않겠으며, 백성의 마음이 어찌 더욱 분산되지 않겠으며, 나라 형세가 어찌 더욱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신등이 밤이 되어도 자지 못하고 밥을 대해도 탄식하면서, 가슴을 치며 슬픔을 금하지 못하는 바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감히 안락하지만 마시 만기(萬機)의 정사를 도모하시고, 감히 놀러 나다니지 마시어 비상한 변고를 방비하시며, 간하는 말대로 반드시 행하시어, 혹시라도 신용을 잃지 마시며, 단정히 앉아 높이 손을 모아 잡으시어 재신들을 가까이해서 나라를 다스리는 계획과 도적을 막는 방책을 널리 물어 보시고, 밤낮으로 근심하고 부지런하시며 정신을 가다듬고 다스리기를 꾀하며, 덕을 닦고 정사를 행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상과 벌을 엄정하게 주시어 나라의 법전을 밝히시면, 장수와 병사는 저절로 분발하고 도적은 저절로 그칠 것이며, 이웃 나라가 감히 꾀하지 못하며 강포한 자가 감히 방자하지 못하여, 조종의 업이 영원히 전할 것입니다." 하였다. 우가 마을로 말을 달리며 돌아다니면서 그래도 대간을 두려워하고 꺼렸었는데, 환관들이 말하기를, “대간도 모두 상감께서 제수한 것이온데, 만일 뜻에 거슬리면 갈아 치우는 것이 어찌 어렵겠습니까." 하였다. 이로부터 우가 더욱 대간을 가볍게 여기어 다시 기탄 없이 노닐며 사냥하기에 쉴 날이 없었다.
○ 왜적이 임실현을 침략하였다.
○ 호발도(胡拔都)가 와서 단주를 침략하니, 부만호 김동불화(金同不花)가 이에 내응하여, 재물을 모두 차지하고 뒤에 거짓으로 붙잡혔다. 상만호 육여(陸麗)와 청주 상만호 황희석(黃希碩) 등이 여러 번 싸워 모두 패하였다. 그때에 이두란이 어머니의 상복을 입고 청주에 있었다. 이태조가 사람을 시켜 불러와서 그에게 이르기를, “국가의 일이 급하여 그대가 복을 입고 집에 있을 수 없다. 상복을 벗고 나를 따르라." 하였다. 두란이 상복을 벗고, 하늘에 울면서 절하여 고하고 나서 활과 화살을 차고 따라갔다. 발도와 길주평(吉州平)에서 만나, 두란이 선봉이 되어 먼저 싸우다가 크게 패하여 돌아왔다. 태조가 조금 뒤에 이르니, 호발도가 세 겹이나 되는 두꺼운 갑옷에 붉은 털옷을 껴입고, 검정 암말을 탄 채 진을 가로막고 기다리고 있다가, 태조를 가볍게 생각하고 군사는 머물러 두고 칼을 뽑아서 몸을 던져 달려 나왔다. 태조 또한 단기로 칼을 뽑아 들고 달려 나가서 검을 휘두르며 서로 쳤는데, 둘 다 날쌔게 비키어 맞히지 못하였다. 호발도가 미처 말을 가누지 못하고 있을 때에, 태조가 급히 말을 돌리며 활을 당겨 그 등을 쏘았으나, 갑옷이 두꺼워 화살이 깊이 들어가지 않았다. 곧 또 그 말을 쏘아 관통시키니, 말이 거꾸러지며 호발도가 떨어졌다. 태조가 또 쏘려 하자, 그 휘하들이 몰려들어 구원하니, 우리 군사들도 쫓아나왔다. 태조가 군사를 놓아 크게 쳐서 깨뜨리니, 호발도는 겨우 몸만 빠져 도망갔다.
○ 찬성사 김유를 보내어 성절을 하례하고 시호와 승습(承襲)을 청하는 진정표를 올리고, 밀직부사 이자용(李子庸)은 천추절을 하례하게 하였다. 앞서 요동을 경유하다가 번번히 도달하지 못하였으므로, 유 등으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가게 하였다.
○ 좌사의 권근 등이 간하기를, “지금 왜구가 사방을 침략하여 소란하고, 첩자와 자객이 경성에 왕래하는데, 전하께서는 기사 두어 명을 데리고 길거리를 달리시며 밤새도록 돌아오지 아니하시니, 신들은 전하를 위하여 매우 위태롭게 여깁니다." 하니, 우가 말하기를, “내가 정말 이런 잘못이 있다. 경들이 아니면 누가 말하겠는가." 하였다.
○ 우리 태조가 변방을 편안히 하는 계책을 올렸는데, 아뢰기를, “북계(北界)는 여진ㆍ달달ㆍ요동ㆍ심양의 지역과 서로 연하였으니, 실로 국가의 중요한 땅입니다. 비록 일이 없는 때라도 반드시 양식을 저축하고 군사를 길러 의외의 사태에 대비하여야 하겠는데, 이제 그 곳 주민들이 매양 저 사람들과 서로 물자를 교역하여 날마다 서로 친압하여 혼인을 맺기까지 하여 저쪽에 있는 족속이 유인하여 가고, 또 앞잡이가 되어 들어와 약탈하기를 그치지 않으니,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는 말과 같이, 이것은 동북 한 방면의 걱정일 뿐만이 아닙니다. 또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유리한 지리를 차지하느냐 못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저쪽 군사들이 점령한 곳이 우리의 서북쪽에 가까운데 내버려 두고 도모하지 않으므로, 마침내 중한 이익을 노려 멀리 우리 오읍초ㆍ갑주ㆍ해양의 백성들을 꾀어서 유인하여 가고, 지금 또 단주 독로올(禿魯兀)의 땅에 쳐들어와서 사람과 물건을 몰아가니, 이것으로 본다면 우리 요해의 지리 사정을 저쪽에서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신이한 방면의 임무를 맡고 있는 터에 앉아서 보기만 할 수 없어서, 삼가 국경 경비의 방책을 계획하여 보고하나이다.
도적을 막는 방법은 군사를 훈련시켜 일제히 공격하는 데 있사온데, 지금은 훈련시키지 않은 군사들을 먼 땅에 분산시켜 놓았다가 도적이 들어온 뒤에야 황급하게 불러들이는데, 군사가 올 때쯤 되면, 도적은 벌써 노략질하여 물러난 뒤입니다. 비록 시기에 이르러 싸운다 하더라도, 전술에 서투르며, 싸움에 익숙하지 못한데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제부터는 병졸을 훈련시켜 약속을 엄하게 세우고 호령을 거듭 밝혀, 변을 기다렸다가 곧 출동해서 사기(事機)를 잃지 말게 하옵소서.
군사의 생명은 양식에 달려 있으니, 비록 백만 군사가 있다 할지라도 하루 동안의 식량이 있어야 하루의 군사가 될 수 있고, 한 달 동안의 식량이 있어야 한 달의 군사가 될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은 하루도 먹는 것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도의 군사에게는 과거에는 경상ㆍ강릉ㆍ교주의 양곡을 운반하여 공급하였는데, 지금은 도내의 지세로 이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근래에 수재ㆍ한재로 인하여 관청과 민간이 모두 텅 비었고, 게다가 놀고 먹는 중과 무뢰배들이 불사를 칭탁하여 함부로 권세가의 편지를 받아서, 각 고을에 간청하여 백성에게 쌀 한 말과 베 한 자를 꾼다고 하고는 섬곡식과 10여 자의 베를 거두는데, 명목을 '반동(反同)'이라 하여 징수하기를 빚받아 내는 것처럼 하니, 백성들이 이때문에 기한에 시달리고, 또 여러 관청과 여러 원수(元帥)가 보낸 사람들이 떼를 지어 다니며, 이집저집에서 돌려 가며 먹어서 살을 깎아 내고 뼈를 망치질하듯 하니, 백성들이 고통을 참지 못하여 흩어지고 도망치는 자가 열에 여덟, 아홉입니다. 그리하여 군사의 식량이 나올 데가 없으니, 모두 금하여 없애어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옵소서.
또 도내의 고을들이 산과 바다에 끼어 있어서 땅이 좁고 또 척박한데, 지금 그 세를 거두는 것이 경작하는 토지가 많고 적은 것은 묻지 않고, 오직 호구가 크고 작은 것만을 보아서 책정합니다. 화령(和寧)은 도내에서 땅이 넓고 풍요한데, 모두 아전들의 녹전이어서 그곳의 지세는 관청에서 거두지 못하므로, 백성에게서 받아들이는 것이 고르지 못하고 군사를 먹이는 것은 족하지 못하오니, 금후로는 도내 여러 고을과 화령을 모두 경작하는 토지의 많고 적음에 준하여 과세함으로써 관청이나 민간이 다 편하게 하옵소서.
군사와 백성은 통속이 있지 않으면 급한 일이 있을 때에 서로 보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선왕의 병신년 하교에, 세 집으로 한 호(戶)를 만들고, 백 호로 통을 만들며, 통주(統主)는 원수의 영(營)에 소속시키고, 일이 없으면 세 집이 차례로 번을 서며, 일이 있으면 다 나오고, 일이 급하면 집안의 장정을 모두 징발하였으니, 진실로 훌륭한 법이었습니다. 근래에 법이 폐지되어 소속된 곳이 없어서, 징발할 때마다 흩어져 사는 백성들이 산골로 도피하여 불러 모으기가 어렵습니다. 지금은 또 한재와 기근으로 민심이 더욱 이탈되는데, 저들은 돈과 식량으로 미끼를 삼아 불러들이고, 군사를 숨기고 와서 노략질하여 돌아가기 때문에, 한 지역의 궁한 백성들이 이미 일정한 마음이 없고, 또 종족이 서로 섞여 있어서 이리저리 관망하다가 유리한 쪽으로만 따르니, 실로 보존하기가 어렵습니다. 병신년 하교에 의하여 다시 군호(軍戶)를 정해서 통속이 있게 하여 굳게 그 마음을 결속하게 하옵소서.
백성이 잘살고 못사는 것은 수령에게 달려 있고, 군하의 용감하고 비겁함은 장수에게 달렸습니다. 지금 고을을 다스리는 자가 권세가의 문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세력을 믿고 그 직책을 삼가지 않아서, 군사는 그 수요가 부족하고 백성은 그 생업을 잃게 되어 호구가 줄고 창고가 텅 비니, 이제부터는 청렴하고 부지런하며 정직한 자를 공정하게 선발하여 백성에 게 임해서는 홀아비와 과부를 돌보아 주게 하며, 또 장수가 될 만한 자를 선택하여 군사를 거느려 국가를 방위하게 하옵소서." 하였다.
○ 왜적 1천여 명이 옥주(沃州)ㆍ보령(報令) 등의 고을을 함락시키고, 마침내 개태사(開泰寺)로 들어가서 계룡산에 웅거하였다. 문달한(文達漢)ㆍ왕안덕(王安德)ㆍ도흥(都興)이 나가서 공격하니, 적이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공주 목사 최유경(崔有慶)과 판관 송자호(宋子浩)가 구점(仇岾)에서 싸워 자호는 패하여 죽고, 달한ㆍ김사혁(金斯革)ㆍ안덕ㆍ도흥ㆍ안경(安慶)ㆍ박수년(朴壽年) 등은 공주 반룡사(盤龍寺)에서 싸워 8급을 베고, 사혁은 목천(木川)ㆍ흑점(黑岾)까지 추격하여 20급을 베었다.
○ 문하평리 지용기를 전라도 도원수로 삼았다.
○ 9월에 지문하사 이을진을 강릉도 원수로 삼았다.
○ 일본이 포로로 잡힌 우리 백성 1백 12명을 돌려보냈다.
○ 대호군 정승가(鄭承可)를 오도 체복사로 삼아서, 군사 진용의 허실과 접전의 근태(勤怠)를 조사하였다.
○ 사헌부가, 환관 예의 판서 조순(曹恂)이 우를 인도하여 황음한 짓을 하게 한 것을 논핵하여 전라도 내상(內廂)에 귀양보냈다.
○ 왜적이 강릉부와 김화현(金化縣)을 침략하고 또 회양부(淮陽府)와 평강현(平康縣)을 함락하니, 경성에 계엄을 실시하고 평양과 서해도의 정병을 불러들여와 호위하게 하며, 전 정당상의 남좌시(南佐時), 지밀직 안소(安紹), 밀직상의 왕승귀(王承貴)ㆍ왕승보(王承寶)ㆍ정희계(鄭熙啓)ㆍ인해(印海), 개성군 왕복명(王福命), 판개부성사 곽선(郭璇) 등을 보내어 그들을 치도록 하였으나 김화에서 싸워 패전하였다.
○ 왜적이 홍천현(洪川縣)을 함락하니, 원수 김입견(金立堅)ㆍ이을진(李乙珍)이 적과 싸워 5급을 베었다.
○ 진병법석(鎭兵法席)을 중앙과 지방의 사찰 도합 1백 51개소에 크게 베풀었는데, 공급하는 비용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방어에 나가는 군사는 식량을 각자 준비하였다.
○ 밀직 김세덕(金世德)의 처 윤씨가 보국사의 중과 간통하니, 사언부가 적발하여 다스리려 하였으나, 세력이 강한 족속이기 때문에 면하였다.
○ 겨울 10월에 도체찰사 최공철(崔公哲)이 낭천(狼川)에 이르렀는데, 왜적이 갑자기 나와 습격하여 그 아들을 사로잡았다. 체복사 정승가가 왜적과 양구에서 싸우다가 패전하여 물러가 춘주에 주둔하니, 적이 춘주까지 추격하여 함락시키고, 드디어 가평현(加平縣)에 침입하였다. 원수 박충간(朴忠幹)이 싸워서 쫓아 버리고 머리 6급을 베었는데, 적은 청평산(淸平山)에 들어가 웅거하였다. 찬성사 상의 우인열(禹仁烈)을 도체찰사로 삼고, 전 밀직 임대광(林大匡)을 조전원수로 삼아, 가서 적을 치게 하였다.
○ 이성 만호(泥城萬戶)가 보고하기를, “요동 총병관이 아뢰기를, '달달(韃韃)이 문합라불화(文哈剌不花)를 고려에 보내어 함께 요동을 치려 하니, 군사를 보내어 이를 구원하소서.' 하니, 황제가 손도독(孫都督)에게 명하여 전함 8천여 척을 거느리고 우리나라를 치게 하여, 요동에 이르렀다가 배가 떠나려 하는데, 마침 달달의 군사가 혼하구자(渾河口子)를 공격하므로, 도독의 군사가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하니, 우가 변방을 방비하여 지킬 것을 명령하였다.
○ 대간이 상소하기를, “근래에 이웃 나라의 경계가 있고, 해적이 깊이 들어와 첩자가 왕래하므로 사변이 있을까 두려운데, 전하께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단기로 돌아다니시니, 신들은 근심하고 위태롭게 여기어 두세 번이나 간하였는데, 곧 받아들이시면서도 환관과 내수(內豎)ㆍ위사ㆍ어인(圉人 말을 기르는 사람)이 뜻을 맞추어 아첨하여 주상을 예가 아닌 길로 인도하고, 도리어 전하로 하여금 무시로 출입하게 하여 나라에서 믿음을 잃게 하였으니, 충성스럽지 못하며 도리에 어그러짐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습니다. 내승별감과 속고적(速古赤)ㆍ환관ㆍ내수 등의 일을 맡고 있는 자를 국문하여 뒷사람을 경계하게 하소서. 또 말[辭]을 맡은 자는 왕의 명령을 출납하는 것이어서 그 책임이 가볍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옛날에는 반드시 정직하고 근신하는 자 두 사람을 선택하여 그 임무에 충당하였는데, 지금은 두 사람을 더 두었으나 도리어 미치지 못하는 것이 있어 전하가 출입하는 것을 백관에게 고하지 않으니, 옛 제도에 의하여 두 사람만 선택하여 두고, 그 나머지는 도태시켜 버리소서." 하였다. 소(疏)가 올라가니, 우가 환관 김길봉(金吉逢)에게 장형을 행하여 이산(泥山)에 귀양보내고 내수(內豎) 서양수(徐良守)를 쫓아내었으며, 내승별감 김천용(金千用)은 도망갔으므로 그를 수색하게 하였다.
○ 왜적이 안변부 흡곡현을 침략하고 사방으로 나와 무인지경을 밟듯이 노략하였다. 우가 밀직제학상의 조준(趙浚)을 강릉ㆍ교주도 도검찰사로 삼았다.
○ 이을진과 부원수 권현룡(權玄龍), 병마사 곽충보(郭忠輔)가 동산현(洞山縣)에서 왜적을 쳐서 20여 급을 베고 말 72필을 노획하니, 적은 남은 무리를 거두어 고성포에 물러가 정박하였다. 우가 을진 등에게 차등에 따라 백금을 내렸다.
○ 11월에 통역 장백(張伯)이 명나라 서울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황제가, 진하사 김유(金庾)ㆍ이자용(李子庸)이 시기가 지나서 이르렀다 하여 법사(法司)에 회부하였다." 하고, 예부에서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자문(咨文)을 보냈는데, 이르기를, “고려가 멀리 동쪽 변방으로부터 지난번에 와서 아뢰어 약속 듣기를 원하였으나, 속으로는 여러 가지로 거짓을 품어서 틈이 생기는 것을 예사로 여겼다. 짐이 그 때문에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스스로 교화가 되도록 허락하였는데, 그 뒤에도 자주 와서 허락하여 주기를 청하므로, 짐은 성의가 지극하다고 생각하여 세공을 한정해서 저들의 성의를 표하게 하였던 것이다. 간 뒤에 약속대로 조공하지 않은 지가 다섯 해나 되었는데, 이제 또 경하하는 예로 왔으니 정성스럽기는하나, 시기가 지나서 이르렀으니 어찌 심한 모욕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사신을 보낸 일로 말하면 고려 국왕과 그 신하의 잘못이 아니며, 사자가 고의로 무시하고 만홀히 하여 시기가 지나서 온 것이다. 지금 고려가 완전히 신하가 되었으니, 영구히 사대(事大)의 정성을 지킬 것이다. 온 사신은 이미 조회하는 예에 어긋났으므로 마땅히 법사에 회부하고, 바친 예물은 이미 시기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받아들이지 말며, 다시 고려에 문서를 주고, 반드시 약속 듣기를 원한다면, 지난 5년 동안 바치지 않은 세공으로 말 5천 필, 금 5백 근, 은 5만 냥, 베 5만 필을 한꺼번에 가져와야만 곧 성의가 인정되며, 다른 날에 사자를 데려가기 위한 군사의 출동을 면할 것이다." 하였다. 이에 진헌반전색(進獻盤纏色)을 두어 세공을 준비하였다.
○ 왜적이 청풍군(淸風郡)을 침략하니, 도순찰사 한방언(韓邦彦)이 금곡촌(金谷村)에서 그들과 싸워 8급을 베었다.
○ 문하평리 홍상재(洪尙載)와 전공판서 주겸(周謙)을 경사로 보내어 신정을 하례하였다.
○ 지문하부사 정지가 여러 도에서 전함을 만들어 왜구를 방비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좇았다.
○ 12월에 정지를 해도 도원수, 양광ㆍ전라ㆍ경상ㆍ강릉도 도지휘 처치사로 삼았다.
○ 우가 노빈(盧贇)의 집에 갔다. 빈은 영수(英壽)의 아우인데, 우가 일찍이 빈의 처가 예쁜 것을 보고 이때부터 자주 갔다.


고려사절요 제33권
 신우 4(辛禑四)
무진신우 14년(1388), 대명 홍무 21년


○ 봄 정월 초하루 병자일에 염흥방(廉興邦)이 우에게 현상금을 걸고 급히 조반(趙胖)을 잡으라는 영을 내리도록 권하였다. 정자교(鄭子喬)가 조반을 붙잡아서 순군옥에 가두었다. 이때에 흥방이 순군 상만호(上萬戶)로 있었는데, 흥방과 도만호 왕복해ㆍ부만호 도길부ㆍ이광보(李光甫)ㆍ위관(委官) 윤진(尹珍)ㆍ강회백(姜淮伯)이 대간(臺諫)ㆍ전법(典法)과 함께 신문하였다. 조반이 말하기를, “6, 7명의 탐욕스런 재상들이 사방에 종을 풀어 남의 토지와 노비를 빼앗고, 백성들을 모질게 해치니 이들은 큰 도적이다. 지금 이광(李光)을 벤 것은 오직 국가를 도와 인민의 적을 제거하려 하는 것뿐인데, 어째서 반란을 꾀했다고 하는가." 하였다. 종일토록 고문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흥방은 기어이 조반을 허위자백시키려고 매우 참혹하게 치죄(治罪)하였다. 조반은 꾸짖고 욕하며 조금도 굽히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국적인 너희들을 죽이고자 하는 사람이고, 너는 나와 서로 송사하는 사람인데 어째서 나를 국문하느냐." 하였다. 흥방은 더욱 노하여 사람을 시켜 마구 그 입을 치게 하였다. 복해는 졸면서 듣지 못하는 체하였고, 나머지 사람들도 감히 어찌하지 못하였으나, 오직 좌사의 김약채(金若采)만이 불가하다 하여 고문을 그치게 하였다.
경진일에 신우가 최영의 집에 가서 좌우를 물리치고 한참 동안 같이 이야기를 하였는데, 대개 조반의 옥사를 의논한 것이었다. 이날 흥방은 다시 반을 국문하려고 순군에 이르러 옥간과 대간을 청하였으나 모두 나오지 않았다.
임오일에 우(禑)가 반과 그 어미와 아내를 석방하라고 명하고, 또 의약(醫藥)과 갖옷[裘]을 주고, 영을 내리기를, “재상들이 이미 부자가 되었으니 녹을 주는 것을 정지하고 우선 먹을 것이 없는 군대에 나누어 주라." 하고, 드디어 흥방을 순군옥에 가두었다. 국인(國人)이 모두 기뻐하며 말하기를, “우리 임금님은 명철하시다." 하였다.
○ 계미일에 우가 최영과 우리 태조에게 명하여 군사를 풀어 숙위(宿衛)하게 하고, 영삼사사 임견미와 찬성사 도길부를 옥에 가두도록 하였다. 사자가 견미에 집에 이르니, 견미는 명을 거역하고 노한 목소리로 사자에게 말하기를, “7일마다 녹을 주는 것은 옛 제도이다. 지금 까닭없이 폐지하니 어찌 임금의 도리인가. 옛날부터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은 신하가 있다." 하고, 드디어 난을 일으키려고 사람을 시켜 달려가 그 무리에게 알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말을 탄 갑사(甲士)들이 이미 길을 막아 나가지 못하고 되돌아 와서 견미에게 고하였다. 견미의 집이 남산(男山) 북쪽에 있었는데 조금 뒤에 남산을 쳐다보니 기병(騎兵)이 이미 대열을 이루었다. 견미는 매우 놀라 저항을 포기하고 체포되었는데 탄식하기를, “광평군(廣平君)이 나를 그르치었다." 하였다. 이에 앞서 견미의 흥방이 최영이 맑고 정직하며, 또 중요한 병권을 쥐고 있음을 꺼리어 항상 해치려 하였으나, 이인임이 굳이 말렸기 때문에 한 말이었다. 순군이 흥방 등의 죄를 철저히 조사하지 않으니, 우가 크게 노하여 전 평리 왕안덕을 도만호로, 지문하(知門下) 이거인(李居仁)을 상만호로, 우리 공정왕(恭靖王)을 부만호로 삼아서 다시 국문하도록 명하였다. 밀직부사 임치(林㮹)는 강제로 자기 집에 돌려보내고, 찬성사 왕복해는 성(姓)을 주어 아들을 삼았으므로 의심하지 않고, 군사를 거느리고 최영과 함께 숙위(宿衛)하게 하였다. 이날 밤에 복해가 다른 뜻이 있어서 돌격 기마대 수십 명을 거느리고 궁성(宮城)을 순찰한다는 핑계로 최영의 군영으로 달려 들어갔다. 영이 갑옷을 입고 호상에 걸터앉아 부하 장수들을 지휘하여 눈을 부치지 않으니 복해가 해치지 못하였다.
을유일에 우시중(右侍中) 이성림(李成林), 대사헌 염정수(廉廷秀), 지밀직(知密直) 김영진(金永珍)ㆍ복해ㆍ치(치)를 순군옥에 가두었다.
병술일에 흥방ㆍ견미ㆍ길부ㆍ성림ㆍ정수ㆍ복해ㆍ영진ㆍ치를 처형하고, 또 그 족당(族黨) 찬성사 김용휘(金用輝), 삼사우사 이존성(李存性), 판개성(判開城) 임제미(林齊味), 밀직 홍징(洪徵)ㆍ임헌(任憲)ㆍ박인귀(朴仁貴)ㆍ반덕해(潘德海)ㆍ이희번(李希蕃), 개성 윤 정각(鄭慤), 전법판서 이송(李竦), 우시중 반익순(潘益淳), 우사의 신권(辛權), 대호군 신봉생(辛鳳生), 집의 이미생(李美生), 좌랑 홍상연(洪尙淵), 판내부시사(判內府寺事) 김만흥(金萬興) 등을 베고, 드디어 견미 등의 집을 적몰하였다. 이에 여러 도에 찰방(察訪)을 나누어 보내어 빼앗겼던 토지와 노비를 조사하여 그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존성은 인임의 종손으로 처음에는 인임의 하는 짓을 본받았으나 뒤에는 자못 뉘우쳤다. 서경 윤(西京尹)으로 있을 때에는 치적이 제일이어서 백성들이 추모(追慕)하였다. 임헌은 집에는 한 섬의 저축도 없으므로 옥관이 면죄시키려 하였으나, 영이 임헌이 흥방의 세력을 빙자하여 대사헌이 되어도 곧은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여, 드디어 베니, 당시 사람들이 불쌍하게 여겼다. 만흥은 견미의 가신(家臣)으로 탐욕스럽고 포학하며, 간사하고 교활하여 토지와 노비에 관한 사무를 전담하였다. 과거에 인임이 정권을 잡으려고 꾀하여 신우를 세우니, 한 나라의 권세가 그 손아귀 안에 있었고, 그 도당들이 이리저리 엉켰는데 견미는 그 심복이 되었다. 문신들을 미워하여 추방한 것이 매우 많았으니 흥방도 역시 그 속에 끼어 있었다. 뒤에 견미는 흥방이 세가대족(世家大族)이라 하여 혼인하기를 청하였다. 흥방도 역시 전날 귀양갔던 것을 징계하여 몸을 보존하려고 꾀하여 오직 인임과 견미의 말만을 좇았다. 이에 흥방의 동모형(同母兄) 이성림(李成林)을 시중(侍中)으로 삼으니 권간(權奸)의 도당이 양부(兩府)에 깔려 있고, 안팎의 요직은 그들의 사당(私黨) 아닌 것이 없어서 권세를 잡아 마음대로 방자하게 관작을 팔고, 남의 전토를 빼앗아 산과 들을 모두 점령하며, 남의 노비를 뺏은 것이 천 백으로 떼를 이루었으니, 주현(州縣)ㆍ진역(津驛)ㆍ능침(陵寢)ㆍ궁고(宮庫)의 밭이 모두 침탈을 당하였다. 주인을 배반한 노예와 부세(賦稅)를 도피한 백성들이 저자같이 모여 들어서 안렴사와 수령이 감히 징발하지 못하였다. 백성은 이산하고, 도적은 성하여 공(公)과 사(私)의 재물이 고갈되었다. 그러나 최영과 우리 태조가 그들의 행위에 분격하여 한마음으로 협력하여 우(禑)를 인도하여 그들을 제거하니, 국인(國人)이 크게 기뻐하여 길에서 노래하고 춤추었다.
○ 최영을 문하시중으로, 우리 태조를 수문하시중으로, 이색을 판삼사사로, 우현보ㆍ윤진ㆍ안종원을 문하찬성사로, 문달한(文達漢)ㆍ송광미(宋光美)ㆍ안소(安沼)를 문하평리로, 성석린(成石璘)을 정당문학으로, 왕흥을 지문하사로, 인원보(印原寶)를 판밀직사사로 삼았다.
○ 밀직사사 조임(趙琳)을 남경에 보내어 조회를 청하기로 하였는데, 조임이 요동에 이르러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 계사일에 서성군(瑞城君) 염국보(廉國寶), 동지밀직 염치중(廉致中), 전 지밀직 전빈(全彬), 밀직부사 안사조(安思祖), 밀직제학 박중용(朴仲容), 전 법판서 김을정(金乙鼎), 대호군 김함(金涵)ㆍ신정(辛靖), 성균좨주(成均祭酒) 윤전(尹琠), 사헌장령 김조(金肇), 호군 최지(崔遲)ㆍ임맹양(林孟陽), 사복정 감성단(甘成旦), 전 강릉 부사 도희경(都希慶), 환자 조원길(趙元吉) 등 50여 명을 베었는데, 이는 모두 처형당한 임견미 등의 족당(族黨)이었다.
○ 갑오일에 비로소 백관의 녹을 주었다.
○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하여 견미의 무리가 빼앗아 점유하였던 토지와 노비를 조사하고, 안무사를 여러 도에 나누어 보내어 견미 등의 가신과 사나운 종을 잡아서 무려 천여 명이나 베고, 재산도 모두 몰수하였다. 성림의 당인 서규(徐規)가 이천(利川)에 있었는데, 안집(安集)ㆍ이안생(李安生)이 잡으려 하니, 규가 도망갔다. 안생이 그의 아내가 아름다운 것을 보고 마침내 간통한 뒤에 그의 아내를 시켜 규를 유인하여 오게 하고, 안생이 잡아 죽였다. 뒤에 일이 발각되어 안생을 베고, 그 아내는 전객시(典客寺)에 붙여서 종으로 만들었다.
○ 종실(宗室)ㆍ기로(耆老)ㆍ대간(臺諫)ㆍ육조(六曹)를 시켜 문무(文武) 현량(賢良)을 천거하게 하였다.
○ 광평부원군(廣平府院君) 이인임을 경산부(京山府)에 안치하고, 전 문하평리 이인민(李仁敏)을 계림부(雞林府)에 귀양보내어 봉화대(烽火臺) 군사에 배치하고, 대호군 이환(李瓛)과 진사 도유(都兪)를 곤장을 쳐서 변방으로 귀양보냈다. 인임이 권세를 잡은 지가 오래되었고, 부드러운 태도로 아첨하여 남의 비위를 맞추니, 문객들이 뜰에 가득하여 각각 자신을 특별히 후대한다고 여겼다. 충성하고 어진 사람을 모함하고 죄 없는 사람을 살육하니, 당시 사람들이 '이고양이[李猫]'에 비유하였다. 최영은 인임이 자기를 두둔하여 준 것을 은덕으로 생각하여 우에게 아뢰기를 "인임이 계책을 결정하고 대국을 섬기어 국가를 안정시켰으니 공이 허물을 덮을 만합니다." 하여 마침내 그 자제까지 모두 용서하였다. 국인(國人)이 탄식하기를, “임(林)ㆍ염(廉)의 옥사에 큰 도적이 그물에서 빠졌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정직한 최공이 사사로운 정으로 늙은 도적을 살렸다." 하였다. 환(瓛)은 인임의 얼자(孽子)인데 임견미의 사위였으며, 유(兪)는 도길부의 아들로서 우인열(禹仁烈)의 사위였다. 최영은 본래 인열과 친하였으므로 유도 죽음을 면하였다. 또 전 찬성사 박형(朴形)을 각산수(角山戍)로, 지신사 권집경(權執經)을 안동(安東)으로, 우대언 이직(李稷)을 전주로 귀양보냈다. 형은 중용의 아비이고, 집경은 인임의 첩의 사위이며, 직은 인민(仁敏)의 아들이었다. 과거에 이인복(李仁復)이 인임과 인민의 사람됨이 미워서 말하기를, “나라를 결딴내고 집안을 망칠 자는 반드시 이 두 아우다." 하였는데, 그 손자 존성(存性)이 과연 연좌되었다.
○ 2월에 우가 견미ㆍ흥방 등의 악기를 화원에서 점검하니 악기 연주하는 소리가 밤낮으로 그치지 않았다.
○ 안숙노(安叔老)의 딸을 봉하여 현비(賢妃)로, 소매향(小梅香)을 화순옹주(和順翁主)로, 연쌍비(燕雙飛)를 명순옹주(明順翁主)로 삼았다. 이날 우리 태조와 최영이 정방에 들어갔다. 영이 임견미ㆍ염흥방이 쓴 사람들을 모두 내쫓으니 태조가 말하기를, “임견미ㆍ염흥방이 정권을 잡은 지 오래되어 사대부들이 모두 그들이 등용한 사람이니, 이제 사람의 어질고 어질지 않음을 따질 뿐이다. 어찌 그 과거를 허물할 수 있는가." 하였으나 영이 듣지 않았다.
○ 우가 동강에 가서 봉천선(奉天船)을 타고 음악을 연주하며, 유숙하고는 연쌍비에게 말 두 필을 주고, 또 기생 15명에게 각각 말 한 필씩을 주었다.
○ 최영이 여러 재상과 함께 정요위(定遼衛)를 칠까, 화친을 청할까의 가부를 의논하니, 모두 화친하자는 의논을 따랐다. 이때 요동 도사가 이사경(李思敬) 등을 보내어 압록강을 건너 방을 붙이기를, “호부가 황제의 명을 받드노라. 철령(鐵嶺) 이북ㆍ이동ㆍ이서는 원래 개원(開原)의 관할이니 여기에 속해 있던 군민(軍民)ㆍ한인(漢人)ㆍ여진ㆍ달달ㆍ고려는 종전과 같이 요동에 속한다." 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의논이 있었다.
○ 설장수(偰長壽)가 남경으로부터 돌아와서 구두로 황제의 명을 전하기를, “고려가 짐의 약속을 듣기를 원하므로 해마다 말을 조공하게 하였더니 바친 말이 아무데도 소용이 없고, 또 어렵다고 호소하므로 내가 명령하기를 세공(歲貢)은 하지 말고 3년에 종마(種馬) 50필씩만 바치라 하였는데, 가져온 말이 또 소용이 없어서 뒤에 5천 필을 사왔으며, 또 모두 약하고 작아서 우리 말 한 필 값이면 그 말 두세 마리는 살 수 있었고, 지금 또 의관(衣冠)을 고친 사례로 말을 가져왔는데, 발굽이 거칠고, 엉덩이 살만 풍만하였다. 기왕 바치는 것이라면 어찌 이렇게까지 하는가. 이것은 반드시 사신이 오다가 서경(西京)에 이르러 팔아 바꿔서 온 것이다. 이미 장자온을 금의위(錦衣衛)에 가두었으니, 해가 지난 뒤에 죄를 주겠다. 네가 돌아가서 집정 대신에게 고하라. 짐이 이미 통상을 허락하였는데, 그대들 편에서는 도리어 분명한 증명서를 가지고 와서 무역하게 하지 않고, 은밀히 사람을 시켜 대창(大倉)에 와서, 우리가 군사를 일으키는지 배를 만들고 있는지를 엿보고, 가서 소식을 알려주는 우리편 사람에게 중한 상을 주니, 이것은 거리에 노는 어린아이의 소견이다. 지금부터는 조심하여 이와 같은 짓을 하지 말고, 또 사신을 보내지 말라. 철령(鐵嶺) 이북은 원래 원 나라에 속하였으니 모두 요동에 귀속시키고, 개원ㆍ심양ㆍ신주(信州) 등처의 군사와 백성은 생업을 회복하도록 들어주라" 하였다. 황제가 또 약재를 주었다.
○ 여러 도의 양반ㆍ백성ㆍ향리(鄕吏)ㆍ역리(驛吏)의 적(籍)을 만들어 군대로 삼아 일이 없으면 농사에 힘쓰고 일이 있으면 징발하게 하였다.
○ 5도의 성을 수축하라 명하고, 여러 원수를 서북의 변방에 보내어 불의의 변에 방비하게 하였다.
○ 최영이 백관을 모아서 철령 이북을 명 나라에바칠 것인가의 가부를 의논하니, 모두 불가하다 하였다.
○ 우가 최영과 함께 비밀리에 요동을 치기를 의논하였다.
○ 경성 방리(坊里)의 군사를 징발하여 한양(漢陽)의 중흥성(重興城)을 수축하였다.
○ 원주 목사 서신(徐信)을 베었는데, 이성림의 동서였다. 우리 태조가 사람을 시켜 최영에게 말하기를, “죄의 괴수가 이미 멸족되고 흉한 무리가 이미 제거되었으니, 지금부터는 형벌과 살육을 그치고 포용하는 명을 반포함이 마땅하다." 하였으나, 영이 듣지 않았다.
○ 우가 복해(福海)의 준마(駿馬)를 가져다 타며 이르기를, “잘 놀라지는 않는가." 하였다. 판도판서 송빈(宋贇)이 앞으로 나와 아뢰기를, “복해도 부리기 어려워하였습니다." 하였다. 우가 노하여 이르기를, “네가 나에게 적의 말을 취했다고 그러느냐." 하고, 마침내 죽였다.
○ 순군(巡軍)이 견미ㆍ익순ㆍ흥방ㆍ길부의 아내를 고문하고 재산을 내놓으라고 독촉하여 모두 옥중에서 죽었다. 뒤에 성림ㆍ복해ㆍ존성ㆍ영진ㆍ임치ㆍ신권ㆍ손중흥 등의 처를 임진강에 던져 죽였다. 이에 처형당한 자의 자손을 빠짐없이 잡아 죽였는데, 포대기 속에 있는 어린 것까지 모두 강에 던지니, 숨어서 면한 자가 거의 없었고, 그 아내와 딸로 관비(官婢)에 몰입(沒入)된 자가 30여 명이나 되었다.
○ 정당문학 곽추(郭樞)를 남경에 보내어 약재를 하사한 것을 사례하고, 밀직제학 박의중(朴宜中)은 철령 이북을 돌려 주기를 청하였다.
○ 3월에 우가 호곶(壺串)에 있어 기린선(麒麟船)ㆍ봉천선 등의 배를 타고 갖은 잡된 놀이를 하였다. 칼을 잡고 좌우를 물리치고 홀로 배 가운데 앉아서 밤이 새도록 자지 않고 이르기를, “부왕(父王)께서 밤에 자다가 시해되었으니 내가 이를 매우 경계한다." 하였다.
○ 우가 최영의 딸을 맞아들였다. 처음에 우가 최영의 딸을 들이고자 사람을 시켜 말하니, 영이 불가하다고 여겨 이뢰기를, “신의 딸이 못생겼고, 또 정실 소생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측실(側室)에 두고 있으니 지존(至尊)의 배필이 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반드시 들이고자 하신다면 노신이 머리를 깎고 산으로 들어가겠습니다." 하고 울며 굳이 거절하였다. 부하 정승가(鄭承可)ㆍ안소(安沼) 등이 우의 뜻에 영합하여 마침내 영의 뜻을 꺾었다. 이날 우가 상의(尙衣)에서 옷을 늦게 바쳤다 하여 별감 강의(康義)와 원윤해(元允海)를 베었다.
○ 전 전리판서 허금(許錦)이 졸하였다. 허금은 젊어서부터 병이 있어 벼슬하기를 좋아하지 않고, 재물을 털어 약을 지어 병이 있는 자는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친히 가서 문병하고 약을 주어서 살린 것이 대단히 많았다. 불법을 좋아하지 않았다.
○ 연안(延安) 부사 유극서(柳克恕)와 환자 김실(金實)을 베었다. 극서는 견미의 문객인데, 또 이존성의 말을 듣고 몰래 김실을 옥에서 도망가게 하였었다.
○ 최씨를 봉하여 영비(寧妃)로, 또 신아(申雅)의 딸을 봉하여 정비(正妃)로, 왕흥(王興)의 딸을 선비(善妃)로 삼았다. 이근비(李謹妃)로부터 이하 최영비(崔寧妃)ㆍ노의비(盧毅妃)ㆍ최숙비(崔淑妃)ㆍ강안비(姜安妃)ㆍ신정비(申正妃)ㆍ조덕비(趙德妃)ㆍ왕선비(王善妃)ㆍ안현비(安賢妃)와 소매향ㆍ연쌍비ㆍ칠점선(七點仙) 등 세 옹주(翁主)의 여러 궁에 공급하려는 물품은 창고가 모두 비었으므로 미리 3년 동안의 공세(貢稅)를 징수하였으나 부족하여 또 가외로 더 거두니 그 폐단이 극도에 달하였다.
○ 첨서밀직 하륜(河崙)을 양주(襄州)로, 밀직부사 박가흥(朴可興)을 순천(順天)으로, 첨서밀직 이숭인(李崇仁)을 통주(通州)로 곤장을 쳐서 귀양보냈는데, 인임의 인척이었기 때문이다.
○ 공산(公山)부원군 이자송(李子松)을 죽였다. 처음에 최영이 우에게 권하여 요동을 치려 하니, 자송이 영의 집에 가서 불가하다고 온 힘을 다해 말하였다. 영이 그를 견미와 당(黨)을 지어 붙었다 하여 곤장 1백 7대를 쳐서 전라도 내상(內廂)으로 귀양보내기로 하였다가 조금 뒤에 죽였다. 자송이 청렴하므로 나라 사람들이 다시 정승이 되기를 바랐는데, 그가 죽자 듣는 사람들이 슬피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 서북면 도안무사 최원지(崔元沚)가 보고하기를, “요동 도사가 지휘(指揮) 두 사람을 보내어 군사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강계에 이르러 철령위(鐵嶺衛)를 세우려 하여 요동(遼東)에서 철령에 이르기까지 역참(驛站) 70군데를 두었다." 하였다. 우가 동강에서 돌아오다가 말 위에서 울며 이르기를, “군신들이 요동을 치려는 나의 계책을 듣지 않아서 이 지경이 되게 하였다." 하고, 드디어 팔도의 군사를 징집하였다.
○ 최영이 동교(東郊)에서 군사를 사열하였다.
○ 대명(大明) 후군도독부(後軍都督府)에서 요동 백호(百戶) 왕득명(王得明)을 보내와서 철령위 설치를 통고하였다. 우가 병을 칭탁하고 백관에게 명하여 교외에서 맞이하게 하였다. 판삼사사 이색(李穡)이 백관을 거느리고 득명에게 나아가서, 돌아가 황제께 잘 아뢰어 주기를 요청하였다. 득명이 말하기를, “천자의 처분에 달려 있는 것이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요." 하였다. 최영이 노하여 우에게 아뢰고, 요동 군사로서 방문(榜文)을 가지고 양계(兩界)에 이른 자를 죽이니, 죽은 자가 모두 21명이나 되었다. 이사경(李思敬) 등 5명만을 그 지방에 머물러 두고 단속하게 했다.
○ 경자일에 우가 경내의 죄인을 용서하고, 드디어 서해도로 가는데 영비(寧妃)와 최영이 따랐다. 세자와 여러 비를 한양산성에 옮기고, 찬성사 우현보에게 명하여 경성에 머물러 지키게 하고, 서쪽으로 해주 백사정(百沙亭)에서 사냥한다고 일컬었는데, 실상은 요동을 지키려는 것이었다. 이때 전라ㆍ경상도는 왜적의 소굴이 되고, 서북면은 땅이 분할되어 빼앗길 염려가 있으며, 경기ㆍ교주ㆍ양광도는 성을 수축하기에 피곤하고, 서해도와 평양은 사신을 영접하기에 지쳤는데, 게다가 군사를 징발하니, 8도가 소요하고 백성들이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되어 안팎에서 원망하였다.
○ 여름 4월 1일 을사일에 우가 봉주(鳳州)에 머물면서 최영과 우리 태조를 불러 이르기를, “요양(遼陽)을 치려 하니 경 등은 힘을 다하여야 한다." 하였다. 태조가 이뢰기를, “지금 군사를 내는 데에 4가지 불가한 것이 있으니,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거슬리는 것이 첫 번째 불가한 것이요, 여름에 군사를 출동시키는 것이 두 번째 불가한 것이요, 온 나라가 멀리 정벌을 하면 왜적이 빈틈을 타서 침입할 것이니 세 번째 불가한 것이요, 때가 무덥고 비가 오는 시기라서 활에 아교가 녹아 풀어지는 것과 대군이 전염병에 걸릴 것이 네 번째 불가한 것입니다." 하니, 우가 그럴듯하게 여겼다. 태조가 물러나와 최영에게 말하기를, “그리하겠소." 하였다. 밤에 최영이 다시 들어가 아뢰기를, “원컨대 다른 말을 받아들이지 마소서." 하였다. 다음날 우가 태조를 불러 이르기를, “이미 군사를 일으켰으니 중지할 수는 없다." 하자, 태조가 아뢰기를, “반드시 큰 계책을 성취하려거든 대가를 서경(西京)에 머물러두고 가을을 기다려 군사를 내면 곡식이 들에 널려 있어 대군의 양식을 충족할 수 있으니, 북을 울리며 전진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출병할 때가 아니니 비록 요동 한 성을 함락시킨다 하더라도 한창 비가 와서 군사가 전진할 수 없으니 군사가 태만해지고, 양식이 떨어지면 화만 초래할 뿐입니다." 하였다. 우가 이르기를, “경은 이자송을 보지 못하였는가." 하였다. 태조가 아뢰기를, “자송은 비록 죽었으나 아름다운 이름이 후세에 전하지마는, 신등은 비록 살아있으나 이미 실책을 하게 되었으니 무슨 소용입니까." 하였으나, 우는 듣지 않았다. 태조가 물러나와 눈물을 흘리면서 우니, 부하 장사들이 말하기를, “왜 그렇게 슬퍼하십니까." 하였다. 태조가 말하기를, “백성들의 화(禍)가 이제부터 시작이다." 하였다.
○ 정미일에 우가 평양에 머물면서 여러 도의 군사를 독촉하고 징집하여 압록강에 부교(浮橋)를 만드는 데에 대호군 배구(裵矩)에게 감독하게 하고, 임견미ㆍ염흥방 등의 가재를 배로 서경에 운반하여 군사의 상(賞)에 충당하기로 하며, 또 도성 안팎의 중들을 징발하여 군사로 만들었다. 병진일에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임명하고,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 조민수(曹敏修)를 좌군도통사로 삼아 서경 도원수 심덕부와 부원수 이무(李茂), 양광도 도원수 왕안덕, 부원수 이승원(李承源), 경상도 상원수 박위(朴葳), 전라도 부원수 최운해(崔雲海), 계림(雞林) 원수 경의(慶儀), 안동(安東) 원수 최단(崔鄲), 조전원수 최공철(崔公哲), 팔도도통사조전원수 조희고(趙希古)ㆍ안경(安慶)ㆍ왕빈(王賓)을 예속시켰다. 우리 태조를 우군도통사로 삼아서 안주도 도원수 정지(鄭地)와 상원수 지용기(池湧寄), 부원수 황보림(皇甫琳), 동북면 부원수 이빈(李彬), 강원도 부원수 구성노(具成老), 조전원수 윤호(尹虎)ㆍ배극렴(裵克廉)ㆍ박영충ㆍ이화(李和)ㆍ이두란(李豆蘭)ㆍ김상(金賞)ㆍ윤사덕(尹師德)ㆍ경보(慶補)와 팔도도통사 조전원수 이원계(李元桂)ㆍ이을진(李乙珍)ㆍ김천장(金天莊)을 예속시켰다. 좌우군이 모두 3만 8천 8백 30명이고, 심부름꾼이 1만 1천 6백 명이었다.
○ 정사일에 우가 봉천선(奉天船) 도원수 동지밀직 이광보(李光甫)에게 명하여 돌아가 개경(開京)과 서강(西江)에 주둔하여 왜적을 방비하게 했다.
○ 경신일에 우가 대동강에 가서 온갖 놀이를 베풀고, 온종일 호악(胡樂)을 연주하였다. 순군만호부 지인(知印)이 왕명을 위조하여 군사 10명을 놓아주었으므로 목을 베어 조리돌리었다.
○ 신유일에 좌우군도통사가 군사를 출발시키려 하는데, 우가 술에 취하여 날이 늦도록 일어나지 않으므로 하직하지 못하였다. 우는 술이 깨자 석포(石浦)에서 뱃놀이를 하고, 저녁에 돌아와서 여러 원수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옷과 갑주(甲冑)와 궁검(弓劍)과 말을 차등 있게 주고는 새벽까지 호악을 연주하였다.
○ 임술일에 조민수는 좌군을 거느리고, 우리 태조는 우군을 거느리고 평양을 출발하면서 군사를 10만이라 군호(軍號)하였다.
계해일에 영이 우에게 아뢰기를, “지금 대군이 길에서 만일 한 달간이나 지체한다면 큰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니 신이 가서 독려하겠습니다." 하였다. 우가 이르기를, “경이 가면 누구와 함께 정사를 하겠는가." 하였다. 영이 굳이 청하니, 우가 이르기를, “그렇다면 나도 가겠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이성(泥城)으로부터 와서 말하기를, “근자에 내가 요동에 갔었는데 요동 군사가 모두 오랑캐를 치러 가고 성중에는 다만 지휘하는 자 한 명이 있을 뿐이니, 만일 대군이 이르면 싸우지 않고 항복을 받을 것입니다." 하였다. 영이 크게 기뻐하여 물건을 후하게 주었다.
○ 갑자일에 우가 대동강 부벽루에서 호악(胡樂)을 울리고 직접 호적(胡笛)을 불었다. 말 먹이는 사람이 벌벗고 강에서 말을 씻기니, 우가 보고 임금을 업신여긴다 하여 베었다. 이때부터 항상 대동강에 가서 즐기며 돌아오는 것을 잊었다.
○ 을축일에 홍무 연호를 정지하고 백성들에게 다시 호복(胡服)을 입게 하였다.
○ 왜적이 초도(椒島)에 들어왔다. 이때 경성의 장정들이 모두 종군(從軍)하고, 오직 노약자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밤마다 봉화가 여러 번 오르는데 경성이 텅 비었으니, 인심이 위태롭고 두려워하여 조석으로 안심할 수가 없었다.
○ 우가 사냥하려고 나가면서 말 한 필을 끌어내어 베며 이르기를, “이 말이 자주 나를 놀라게 하였다." 하였다. 또 길에서 도망하는 군사 2명을 보고 즉시 명하여 베었다. 우의 음란과 살육이 날로 심해졌다.
○ 무진일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 문달한ㆍ김종연(金宗衍)ㆍ정승가와 환자(宦者) 조순(曹恂)ㆍ김완(金完)을 보내어 좌우도통사와 여러 장수에게 금은으로 만든 술그릇을 주고, 도진무(都鎭撫)에게는 모두 옷을 주도록 하였다.
○ 5월 1일 갑술일에 일식이 있었다.
○ 우가 대동강에서 마음껏 즐기고 밤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우는 나가 놀 때마다 호악을 연주하고, 광대를 시켜서 갖은 놀이를 벌였으며, 최영은 날마다 군사를 거느리고 출입하며 피리를 불었다. 왕과 신하가 음란하니 백성들이 원망하고 탄식하였다.
○ 왜선 80여 척이 와서 진포(鎭浦)에 정박하고 가까운 여러 고을을 침범하였다. 우가 상호군 진여의(陳汝宜)를 전라도ㆍ양광도로 보내어 병을 핑계대고 북쪽 정벌에 나가지 않거나, 자제와 노예로 대행시킨 자는 모두 왜적을 막게 하고, 피하는 자는 군법으로 처단하고 그 재산을 적몰하게 하였다.
○ 우가 영비와 함께 부벽루에 가서 활을 쏘기도 하고, 격구를 하기도 하다가, 말 기르는 사람을 죽이려 하니, 최영이 죽이지 말라고 청하였다. 우가 이르기를, “당신은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면서 왜 나에게는 금하는가." 하였다. 영이 아뢰기를, “신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부득이하여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우가 좌우에 눈짓하여 마침내 말 기르는 사람을 베었다.
○ 경진일에 좌우군이 압록강을 건너 위화도(威化島)에 둔을 쳤는데, 도망하는 군사가 길에 이어져서 끊어지지 않았다. 우가 곳곳에서 베도록 명령하였으나 그치게 하지는 못하였다.
○ 최영이 우에게 청하기를, “전하는 서울로 돌아가시고, 노신이 여기서 장수들을 지휘하겠습니다." 하였다. 우가 이르기를, “선왕께서 해를 당한 것은 경이 남정(南征)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어찌 감히 하루라도 경과 함께 있지 않을 수 있는가." 하였다.
○ 갑신일에 대동강 물이 붉어졌다.
○ 이성(泥城) 원수 홍인계(洪仁桂)와 강계(江界) 원수 이억(李薿)이 먼저 요동 지경에 들어가서 죽이고 노략하여 돌아오니, 우가 기뻐하여 금정아(金頂兒)와 무늬 있는 비단을 내려 주었다.
○ 병술일에 좌우군 도통사가 아뢰기를, “신등이 뗏목을 타고 압록강을 건너니, 앞에 큰 내가 있는데 비가 내려 물이 넘쳐 첫째 여울에서 휩쓸려서 빠진 자가 수백 명이요, 둘째 여울은 더욱 깊어 섬 가운데에 머물러 둔을 치는 것은 한갓 양식을 허비할 뿐입니다. 여기서 요동성에 이르는 사이에 큰 내가 많아서 무사히 건널 것 같지 않습니다. 근일에 불편한 상황을 조목조목 기록하여 도평의(都評議)의 지인(知印) 박순(朴淳)에게 부쳐 아뢰었는데, 아직 윤허를 받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황송합니다. 그러나 큰 일을 당하여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않으면 이것은 불충(不忠)입니다. 어찌 감히 부월(鈇鉞)을 피하여 묵묵히 있겠습니까.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나라를 보전하는 도리인데, 우리 나라가 삼한(三韓)을 통일한 이래로 부지런히 대국을 섬겼고, 현릉(玄陵)께서 대명(大明)에 복종하고 섬겨 그 표문에 이르기를, '자손 만대가 되도록 길이 신첩(臣妾)이 되겠다.' 하였으니, 그 정성이 지극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선왕의 뜻을 이어서 해마다 조공 바치는 물건을 한결같이 조서대로 하니, 이에 특별히 고명(誥命)을 내려 현릉의 시호를 주며 전하의 작위를 책봉하였으니 이것은 종사(宗社)의 복이요, 전하의 거룩한 덕입니다. 이제 유지휘(劉指揮)가 군사를 거느리고 위(衛)를 설치한다는 말을 듣고 밀직제학 박의중(朴宜中)을 시켜서 표문을 받들어 진달하였으니 대단히 좋은 계책인데, 지금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갑자기 큰 나라를 범하는 것은 종사와 생민의 복이 아닙니다. 하물며 지금 무덥고 장마가 져서 활이 풀리고 갑옷이 무거워 군사와 말이 함께 지쳤으니, 몰아서 견고한 성 밑에 다다르면 싸워도 반드시 이기지 못 하고 쳐도 반드시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 이때를 당하여 군량이 공급되지 못하고 진퇴가 곤란하게 되면 장차 어떻게 대처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특별히 회군을 명령하여 삼한 백성의 기대에 맞추소서." 하였으나, 우와 최영은 듣지 않고 환자 김완(金完)을 보내어 빨리 진군하라고 독촉하였는데, 군중에서 완을 머물러 두고 보내지 않았다. 최영이 오랑캐 군사와 함께 요동을 협공하려고 배후(裵厚)를 원 나라에 보냈다. 그때 망한 원 나라의 남은 종자는 사막으로 도망가 헛칭호만 일컫고 있었는데, 최영이 그들의 응원을 받으려 하였으니, 그 계책이 허술하기가 이와 같았다.
○ 양광도 안렴사 전리(田理)가 보고하기를, “왜적이 도내 40여 군을 침범하였는데 지키는 군사의 수가 적고 약하여 사람 없는 지역을 밟는 듯합니다." 하였다. 이에 원수 도흥(都興) ∙ 김주(金湊) ∙ 조준(趙浚) ∙ 곽선(郭璇) ∙ 김종연(金宗衍) 등을 보내어 막고, 한양에 있는 여러 비(妃)를 모두 개경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 을미일에 우가 성주(成州) 온천에 갔다. 좌우군 도통사가 최영에게 사람을 보내어 빨리 군사를 돌이키도록 허락하기를 청하였으나, 최영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군중에서 헛소문이 돌기를, “태조가 휘하 군사를 거느리고 동북면으로 향하려고 이미 말에 올랐다." 하였다. 군중이 흉흉하였는데, 민수는 어찌할 줄을 모르고 단기(單騎)로 태조에게 달려가서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공이 떠나면 우리들은 어디로 가란 말인가." 하였다. 태조가 말하기를, “내가 어디로 간단 말인가. 공은 이렇게 하지 말라." 하고, 태조가 여러 장수에게 말하기를, “만일 상국의 지경을 범하여 천자께 죄를 얻으면 종사와 생민에게 화가 곧 이를 것이다. 내가 순(順)과 역(逆)으로써 글을 올려 회군하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살피지 못하고, 영이 또 늙고 어두워 듣지 않으니, 어찌 그대들과 함께 들어가서 왕을 뵙고 친히 화와 복을 진달하고 왕 옆의 악한 사람(최영)을 제거하여 생령을 편안히 하지 않으랴." 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우리 동방 사직의 안위가 공의 한 몸에 달려있으니 감히 명령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군사를 돌이켜 압록강을 건너는데 태조가 백마를 타고 붉은 활과 백우전(白羽箭)을 메고 강 건너에 서서 군사가 다 건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군중에서 바라보고 서로 말하기를, “예부터 이와 같은 사람이 있지 않았고, 지금 이후로도 어찌 다시 이런 사람이 있을까." 하였다. 이때 장마가 며칠이 되어도 물이 넘치지 않았는데 군사가 건너고 나자, 큰물이 갑자기 닥쳐 온 섬이 잠기므로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이때 동요(童謠)에, '목자득국(木子得國).'이란 말이 있어 군사와 백성이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모두 노래하였다.
정유일에 조전사(漕轉使) 최유경(崔有慶)이 달려가 우에게 고하였다. 이날 밤에 우리 공정왕(恭靖王)이 그 형 방우(芳雨)와 이두란의 아들 화상(和尙), 상호군 유용생(柳龍生), 최고시첩목아(崔高時帖木兒)와 함께 우(禑)가 있는 성주(成州)에서 태조의 군중으로 달려왔다.
무술일에 우가 대군이 이미 안주에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달려 돌아와 밤에 자주(慈州) 이성(泥城)에 이르러 영을 내리기를, “정벌하러 갔던 여러 장수가 제 마음대로 회군하였으니, 너희 대ㆍ소 군민들은 마음을 다하여 막으면 반드시 크게 상을 주겠다." 하였다. 회군하는 여러 장수들이 급히 추격하기를 청하였다. 태조가 말하기를, “빨리 가면 반드시 싸울 터이니 사람을 많이 죽이게 된다." 하고, 매번 군사를 경계하기를, “너희들이 만일 승여(乘輿)를 범하면 내가 너희를 용서하지 않겠다. 백성의 오이 한 개라도 빼앗으면 역시 죄를 받을 것이다." 하고, 길가에서 사냥을 하며 일부러 행군을 늦추게 하였다.
기해일에 우가 평양에 이르러 재물과 보화를 거두어서 대동강을 건너 밤에 중화군(中和郡)에 닿았다.
신축일에 우가 길에서 모든 군사가 이미 가까이 왔다는 말을 듣고 사잇길을 따라 빨리 달려 기탄(岐灘)에 이르렀다. 이튿날 아침에 서울에 돌아와 화원으로 들어가니, 따르는 자가 겨우 50여 기(騎)였다. 서경에서 경성에 이르는 동안에 우를 따르던 신하와 백성들이 술과 음료를 가지고 대군을 맞이하는 자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최영이 막아 싸우고자 백관에 명하여 병기를 가지고 호위하게 하였다.
○ 6월 초하루 계묘일에 모든 군사가 근교(近郊)에 와서 둔을 치고 왕에게 올리는 글을 김완에게 주었는데, “우리 현릉께서 지성으로 대국을 섬겨, 천자가 일찍이 우리를 공격할 뜻이 없는데, 지금 영이 총재가 되어서 조종(祖宗) 이래로 대국을 섬기는 뜻을 생각하지 않고 먼저 대군을 몰아 상국을 범하려고 하여 무더운 여름에 군사를 움직이니, 삼한이 농기(農期)를 잃고, 왜놈들이 빈틈을 타서 깊이 들어와 침범하여 우리 인민을 죽이고 우리 창고를 불태웠습니다. 게다가 한양에 천도하여 중외가 소요하니, 지금 영을 제거하지 않으면 반드시 종사(宗社)를 전복시킬 것입니다." 하였다. 이튿날 우가 진평중(陳平仲)을 보내어 여러 장수에게 전교(傳敎)하기를, “명을 받아 국경을 나갔다가 이미 절제(節制)를 어기고 군사를 일으켜 대궐로 향하고, 또 강상(綱常)을 범하여 이런 분란의 조짐을 부른 것은 진실로 부덕한 나 때문이다. 그러나 군신의 대의는 실상 고금을 통한 의리이다. 경이 글 읽기를 좋아하니 어찌 이것을 알지 못하리오. 하물며 또 강토는 조종에게서 받았으니 어찌 쉽게 남(명 나라)에게 줄 수 있는가. 군사를 일으켜 막는 것이 낫겠다 하여 여러 사람에게 모의하니, 모두들 가하다 하였는데, 이제 어찌 감히 어기는가. 비록 최영을 지목하여 핑계하였지만 영이 내 몸을 호위하는 것은 경들이 아는 것이요, 우리 왕실을 위하여 수고하는 일 역시 경들이 알고 있는 것이다. 교서(敎書)가 이르는 날에 완미(頑迷)한 것을 고집하지 말 것이며, 잘못을 고치는 데에 인색하지 말고 함께 부귀를 보존하여 시종(始終)을 도모하기를 내가 진실로 바라노니,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였다. 또 설장수를 보내어 군사 앞에 나가서 장수들에게 술을 주고 그 뜻을 알아보려 하였다. 모든 장수들이 나와서 도성 문 밖에 둔을 쳤다. 동북면 백성들과 여진(女眞)사람으로 본래 종군하지 않았던 자들이 태조의 회군하는 것을 듣고 앞다투어 떨쳐 일어나 서로 모여 밤낮으로 달려오는 자가 천여 명이나 되었다. 우가 이에 창고의 금과 비단을 내어 군사를 모집하여 수십 명을 얻었는데, 모두 창고에 속한 노예와 시정잡배들이었다. 여러 도에서 군사를 징발하여 들어와 원조하게 하고, 수레를 모아 골목 입구를 막고, 민수 등의 관작을 삭탈하고, 최영을 문하좌시중으로, 우현보를 우시중으로 삼고, 송광미를 찬성사로, 안소를 평리로, 우홍수를 대사헌으로, 정승가를 응양군 상호군으 로, 조규(趙珪)를 밀직부사로, 김약채(金若采)를 지신사로 삼아서 거리에 방을 붙이기를, “민수 등 여러 장수를 잡는 자는 관가나 사가의 노예를 불문하고 크게 벼슬과 상을 주겠다." 했다.
을사일에 우리 태조가 숭인문(崇仁門) 밖 산대암(山臺巖)에 둔을 치고, 유만수(柳曼殊)를 보내어 숭인문으로 들어가게 하고, 좌군은 선의문(宣義門)으로 들어가게 하였는데, 최영이 막아 싸워 모두 물리쳤다.
과거에 태조가 만수를 보내면서 좌우에게 말하기를, “만수는 눈이 크고 광채가 없으니 담이 작은 사람이다. 가면 반드시 패하여 달아날 것이다." 하였는데, 과연 그러하였다. 이때 태조가 말을 들에 풀어놓았다. 만수가 쫓겨 돌아오자 좌우에서 이뢰니, 태조가 대답도 않고 그대로 장막 안에 누워 있었다. 좌우에서 두세 번 아뢴 연후에야 천천히 일어나서 식사를 하고, 말을 몰고 와서 안장을 얹고 군사를 정돈하였다. 출발하려 할 때에 작은 소나무가 백 보쯤 되는 곳에 있었는데, 태조가 소나무를 쏘아 이길 조짐을 점쳐서 군사의 마음을 모으려고 하여 드디어 쏘니, 한 화살에 꺾어졌다. 여러 군사가 모두 하례하고 진무(鎭撫) 이언출(李彦出)이 꿇어앉아 말하기를, “우리 영공(令公)을 모시고 가면 어딘들 못 가겠습니까." 하였다. 태조가 숭인문으로 성에 들어가 좌군과 나란히 양쪽에서 나아가니, 도성의 남녀들이 다투어 술과 음료를 가지고 군사를 맞아 위로하며, 왕이 막아놓은 수레를 끌어내어 길을 열었다. 노약한 자는 성에 올라가서 바라보고 환호성을 올리며 매우 좋아하였다. 민수가 검은 큰 기를 세우고 영의서(永義署) 다리에 이르렀는데, 최영의 군사에게 쫓기었다. 조금 뒤에 태조가 황룡을 그린 큰 기를 세우고 선죽교(善竹橋)를 거쳐 남산(男山)에 오르니, 먼지가 하늘을 덮고 북소리가 땅을 진동하였다. 영의 휘하 안소(安沼)가 정예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남산에 웅거하였다가 기를 바라보고 무너져 달아났다. 최영이 형세가 궁한 것을 알고 화원으로 달려 돌아와서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문지기를 창으로 콱 찌르고 들어갔다. 태조가 드디어 암방사(巖房寺) 북쪽 고개에 올라 큰 나팔을 한 차례 부니, 군사가 화원을 수백 겹으로 포위하고 최영을 내놓으라고 크게 외쳤다. 정벌할 때마다 장수들은 나팔을 쓰지 않았는데, 태조만이 말 앞에서 나팔을 불게 하였기 때문에 도성 사람들이 나팔 소리를 듣고 태조의 군사가 이미 이른 것을 모두 기뻐하였다. 우가 영비와 최영과 함께 팔각전(八角殿)에 있었는데, 최영이 나가려 하지 않았다. 나팔장이 송안(宋安)이 담에 올라 나팔을 한 번 불자, 군사들이 일시에 담을 무너뜨리고 뜰로 모여들어 곽충보(郭忠輔) 등 3, 4명이 곧장 대궐 안으로 들어가서 최영을 찾았다. 우가 영의 손을 잡고 울며 이별하니, 영이 두 번 절하고 충보를 따라 나왔다. 태조가 최영에게 말하기를, “이러한 사변이 나의 본심은 아니오. 그러나 국가가 편안하지 못하고 백성들이 피곤하여 원망이 하늘에 사무쳤기 때문에 부득이한 일이니 잘 가시오, 잘 가시오." 하고, 서로 대하여 울고, 드디어 영을 고봉 현(高峰縣)에 귀양보냈다.
처음에 최영이 영을 내리어 정벌에 나간 장수들의 처자를 가두려 하였으나, 뒤에 일이 급박하여 실행하지 못하였다. 이인임(李仁任)이 일찍이 말하기를, “이판삼사(李判三司)가 나라의 주인이 될 것이라." 하였는데, 영이 듣고 매우 노하였으나 감히 말은 못하였다. 이때가 되어 탄식하기를, “인임의 말이 참으로 옳다." 하였다. 광미ㆍ소ㆍ규ㆍ승가 등은 도망가 숨었다. 두 도통사와 36명의원수들이 대궐에 나아가 절하여 사례하고, 군사를 궐문 밖으로 돌리었다. 이에 앞서 잠저(潛邸) 동네에 동요가 있어 이르기를, “서경성 밖의 불빛이요, 안주성 밖의 연기 빛이라. 그 사이에 왕래하는 이원수, 원하건대 백성을 구제하소."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이런 변이 있었다.
○ 다시 홍무(洪武) 연호를 시행하고, 명 나라 의복을 입고, 호복(胡服)을 금하며, 우현보를 파면하고, 조민수를 좌시중으로, 우리 태조를 우시중으로, 조준을 첨서밀직삼사 겸 대사헌으로 삼고, 여러 장수를 모두 복직시켰다. 이때 명 나라 조정에서 본국에 출병하는 변고를 듣고 황제께 글을 올려 고려를 치기를 청하니, 황제가 종묘에 점을 치려고 재계(齋戒)를 하는 중이었는데, 마침 본국의 사자가 이르니 곧 재계를 그만두었다.
○ 장수들이 성에 들어가 흥국사(興國寺)에서 회의하고, 여러 도에서 성을 쌓는 것과 징병하는 것을 파하고, 안소와 정승가를 잡아서 순군옥에 가두었다. 전 교부령 윤소종(尹紹宗)이 군사 앞에 나와 정지(鄭地)를 통하여 우리 태조를 보기를 청하고 〈곽광전(霍光傳)〉을 드리었다. 태조가 조인옥(趙仁沃)에게 읽게 하고 들으니, 인옥이 극력 다시 왕씨를 세우자는 의논을 말했다.
○ 정미일에 장수들이 성에 들어가 지장사(地藏寺)에서 회의하여 최영을 합포(合浦)에 옮겨 귀양보내고, 송광미를 원주로, 안소를 안변(安邊)으로, 정승가를 영해(寧海)로, 판밀직 인원보(印原寶)를 함창(咸昌)으로, 동지밀직 안주(安柱)를 봉주(鳳州)로, 지밀직 정희계(鄭 熙啓)를 음죽(陰竹)으로 귀양보냈다.
○ 사헌부가 환자 조순ㆍ조복선(曹福善)ㆍ윤상(尹祥), 전 지신사 김약채의 죄를 탄핵하여 모두 먼 고을에 귀양보냈다.
○ 무신일에 우가 환자 80여명과 함께 갑옷을 입고 우리 태조와 조민수ㆍ변안열의 집에 달려 갔으나 모두 문 밖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집에 있지 않으므로 해치지 못하고 돌아왔다. 기유일에 제장들이 숭인문에서 회의하고, 이화(李和)ㆍ조인벽(趙仁璧)ㆍ심덕부ㆍ왕안덕을 시켜 대궐에 나아가 궁중의 병기와 안장 달린 말을 모조리 내어 놓기를 청하였다.
경술일에 우를 강화로 추방하였다. 처음에 모든 장수들이 영비를 내쫓기를 청하니 우가 이르기를, “만일 영비를 내쫓는다면 나도 함께 나가겠다." 하였다. 이에 여러 원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대궐을 지키면서 강화로 나가기를 청하였다. 우가 할 수 없이 나와서 채찍을 잡고 안장에 걸터앉으며 이르기를, “해가 이미 저물었구나." 하니, 측근들이 꿇어 엎드려 울면서 응답하는 자가 없었다. 드디어 영비ㆍ연쌍비와 함께 회빈문(會賓門)을 나와서 강화로 향하였다. 백관(百官)이 전국보(傳國寶)를 받들어 정비(定妃)에게 바쳤다. 사신(史臣)이 말하기를, “진(秦) 나라의 정(政)과 진(晋) 나라의 예(睿)에 대한 일은 애매모호하지만, 여씨(呂氏)가 다른 사람의 아들을 세워서 혜제(惠帝)의 후사(後嗣)로 삼은 데 이르러서는 주문공(朱文公)이 곧은 붓으로 특별히 써서 조금도 용서가 없었으니, 그 천하 후세의 경계를 삼은 것이 엄하였다. 공민왕이 일찍이 아들이 없는 것을 근심하였으니, 마땅히 종실의 어진 자를 구하여 후사(後嗣)를 삼아야 할 것인데, 신돈의 자식을 취하여 몰래 궁중에서 길러 죽은 뒤의 계책을 하였다가 마침내 자기 몸도 보전하지 못하였고, 우도 음란하고 포학하여 몸이 망하고 왕실이 무너졌으니, 우는 진실로 말할 것도 없지마는 공민왕은 또한 홀로 무슨 마음이었던가." 하였다.
신해일에 조민수가 정비의 전교로 우의 아들 창(昌)을 세웠다. 태조가 회군할 때에 민수와 의논하기를, “다시 왕씨의 후손을 세우자." 하였다. 민수 또한 그렇게 여겼었는데 이날에 이르러 태조가 왕씨를 가려 세우려 하니, 민수가 인임이 자기를 천거해 준 은혜를 생각하여 인임의 외형제(外兄弟)인 이임(李琳)의 딸 근비(謹妃)의 소생인 창을 세우기를 꾀하나, 장수들이 자기 뜻을 어기고 왕씨를 세울까 두려워하여 한산군 이색(李穡)이 당시의 명유(名儒)이므로 그 말을 빙자하고자 비밀리에 색에게 물었다. 색 또한 창을 세우고자 하여 "당연히 전왕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 하였다. 태조가 민수에게 말하기를, “회군할 때에 한 말은 어찌 된 것인가." 하니, 민수가 얼굴을 붉히며 말하기를, “원자를 세우는 것은 한산군(韓山君 이색)이 이미 계책을 정하였으니 어떻게 어길 수 있는가." 하고, 드디어 창을 세었는데 나이 9세였다.
○ 창이 어머니 이씨를 높여 왕대비로 삼았다.
○ 민수가 창에게 아뢰어 이인임과 이숭인을 불렀는데, 인임은 이미 죽은 뒤였다. 나라 사람들이 처음에 인임을 부른다는 소문을 듣고 다시 나라 정사를 어지럽히고, 또 백성의 재물을 빼앗는 문을 열어 놓을까 두려워하였는데, 조금 뒤에 인임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모두 기뻐하기를, “사람이 주벌하지 못하니 하늘이 죽였다." 하였다.
○ 조민수를 양광ㆍ전라ㆍ경상ㆍ서해ㆍ교주도 도통사로, 우리 태조를 동북면ㆍ삭방ㆍ강릉도 도통사로 삼았다.
○ 박의중이 남경에서 돌아왔다. 예부(禮部)가 황제의 명을 받들어 자문(咨文)을 보내기를, “표문에 이르기를, ‘철령(鐵嶺)의 인호(人戶)에 대한 일은 조종(祖宗) 이래로 문주(文州)ㆍ화주(和州)ㆍ고주(高州)ㆍ정주(定州) 등 고을이 본래 고려에 예속되어 있었다’ 하였으니, 왕의 말대로 하면 그 땅이 고려에 예속되어야 마땅하나, 이치와 사세로 말하면 그 몇 고을의 땅을 지난날에는 원 나라에서 통치하였으니, 지금 요동에 예속되어야 마땅하고, 고려의 말하는 것을 경솔히 믿을 수 없으니, 반드시 끝까지 살피고야 말겠다. 또 고려는 큰 바다로 막히고 압록강으로 한계하여, 일찍이 옛날에는 따로 나라를 이루었으나, 중국의 역대 조정의 정벌을 자주 입은 것은 분쟁의 단서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지난날에 역신(逆臣)이 왕을 죽였으므로 짐이 절교를 명하였는데, 저들이 사람을 보내 약속을 따르기를 청하였다. 여러 번을 윤허하지 않고, 자주 청하여 마지않은 뒤에야 세공을 요구하여 성의를 표하게 하고, 교통을 허락하였다. 저들이 조공한다고 하였으나 해마다 올리는 공물이 약속과 같지 않았고, 얼마 후에는 사람을 보내서 어렵다고 호소하였다. 그 어렵다고 호소하는 것을 받아들여, 전일에 정한 공물을 깎아버리고 다만 해마다 종마(種馬) 50필을 바치되 모두 순종으로 하라고 하였다. 이 조공물은 그전 공물에 비교하면 만분, 백분의 일뿐인데, 그 가져오는 것을 보면 모두 윗사람에게 바치는 물건이 못 되며, 모두가 노둔하고 저급한 짐승이었다. 이것이 상국을 첫 번째로 무시한 것이요, 표문에 사은(謝恩)한다 하면서 예물로 보낸 말이 왔는데 모두 얼룩진 잡색이어서 행상하는 사람들도 쓰지 않는 것이니, 두 번째로 무시한 것이요, 때로는 간혹 사람을 보내어 몰래 온(溫)ㆍ태(台)ㆍ항(杭)ㆍ소(蘇)ㆍ송(松) 등 제주의 백성들을 꾀어 비밀리에 사세를 엿보다가 발각되었으니, 세 번째로 무시한 것이요, 짐이 일찍이 여러 사신에게 이르기를, '이런 간계를 꾸미지 말고 백성의 생업을 금하지 말라.'고 하였다. 백성들이 수륙으로 공공연히 왕래하면서 무역을 하도록 허락했으니 무슨 일인들 되지 않으며, 무슨 기밀인들 얻지 못하겠는가. 몰래 간사한 꾀를 내어 백성을 유인하여, 그들이 금백(金帛)에 속아 망령되이 사세를 말하게 함으로써 공연히 소인에게 속임을 당했으니 이는 어리석은 짓이니 네 번째로 무시한 것이요, 홍무 20년 봄에 짐이 면포와 비단을 요동(遼東)에 가져다 두고 고려와 말을 무역하여 오랑캐를 치게 하였는데, 저 배신(陪臣)들이 모두 나쁜 말을 가지고 와서 바꾸었다. 값으로 치면 본국의 말 한 마리 값으로 두세 마리는 살 수 있는데, 이제 본국 말 두세 마리의 값으로 한 마리를 바꾸어도 너무 노둔하여 마침내 짐에게 소용이 되지 않았으니, 다섯 번째로 무시한 것이다. 아아, 고려의 땅이 삼면은 바다로 싸이고, 일면은 산을 지고 있어 주위가 수천리니, 그 가운데 어찌 어질고 지혜 있는 사람이 없으랴. 서로 왕래하는 데 있어서 이편에서 성의로 사귀면 저편에서 거짓으로 합하고, 장차 국교를 파하려고 하면 저들이 또 공손한 말로 청하니, 이러한 행위가 짐은 무슨 마음인지 알 수 없도다.
또 짐이 역대의 조정이 고려를 정벌한 것을 보면, 한(漢) 나라는 네 차례를 쳤는데, 자주 국경을 침범하기 때문에 쳐서 멸하였고, 위(魏) 나라는 두 차례를 쳤는데 은밀히 두 마음을 품고 오(吳) 나라와 우호를 통하기 때문에 그 도성을 도륙하였고, 진(晉) 나라는 한 차례를 쳤는데 모욕하고 교만하여 예가 없기 때문에 그 궁실을 불사르고, 남녀 5만을 사로잡아 노예를 만들었고, 수(隋) 나라는 두 차례를 쳤는데 요서(遼西)를 침범하고 속국으로서의 예를 빠뜨렸기 때문에 쳐서 항복을 받았고, 당 나라는 네 차례를 정벌하였는데 왕을 죽이고 형제가 서로 왕위를 다투기 때문에 그 땅을 평정하여 아홉군데의 도독부(都督府)를 두었고, 요(遼) 나라는 네 차례를 토벌하였는데 왕을 죽이고 아울러 반복이 많으며 침범하여 난을 꾸몄기 때문에 그 궁실을 불사르고, 난신 강조(康兆) 등 수만 명을 베었고, 금(金) 나라는 한 차례를 쳤는데 사신을 죽였기 때문에 그 백성을 도륙하였고, 원 나라는 다섯 차례를 토벌하였는데 도망한 사람을 받아들이고, 사자와 조정에서 보낸 관리를 죽였기 때문에 군사를 일으켜 쳤으며, 그 왕이 탐라(耽羅)로 도망갔으므로 잡아 죽였다. 그 분쟁의 단서를 따져 보면 모두 고려가 자초한 것이요, 중국의 제왕이 병탄을 좋아하고 토지를 욕심낸 것은 아니다. 지금 철령의 땅은 왕의 나라에서 할말이 있겠지마는, 탐라의 섬은 옛적에 원 세조가 말을 기르던 장소이다. 지금 원 나라 자손으로 짐에게 귀순한 자가 매우 많으니, 짐이 반드시 원 나라의 자손을 끊지 않으려 한다. 여러 왕을 섬 가운데 두고 군사 수만으로 지키면서, 양절(兩浙)에서 양식을 공급해 주어 원 나라의 후사를 보존하여 원 나라 자손으로 하여금 바다 가운데에서 편안히 살게 하면 어찌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공민왕 때부터 사신으로 가는 자가 금은과 토산물을 많이 싸가지고 가서 채색 비단과 가벼운 보화를 샀다. 비록 유식한 자라도 권세있는 자의 부탁을 못 이겨 개인의 짐이 조공으로 바치는 물건의 10분의 9를 차지하였다. 중국에서 말하기를, “고려 사람들은 사대(事大)를 빙자하여 무역을 하려고 온다." 하였다. 임견미와 염흥방이 집권하니, 그 폐단이 더욱 심하였다. 그러나 박의중(朴宜中)의 행장에는 한 물건도 없었다. 요동에서 호송하는 진무(鎭撫) 서현(徐顯)이 베를 요구하자 의중이 주머니를 털어 보이고 입고 있던 모시 옷을 벗어 주었다. 현이 그 청렴을 칭찬하고 예부에 보고하자 황제가 불러 보고 후하게 대접하였고, 또 예부에 명하여 회동관(會同館)에서 잔치하는데 전원(前元)의 평장원사(平章院使)의 위에 앉게 하고, 드디어 철령에 위(衛)를 설치하는 의논을 중지하였다.
○조민수와 우리 태조에게 충근(忠勤)ㆍ양절(亮節)ㆍ선위(宣威)ㆍ동덕(同德)ㆍ안사(安社)ㆍ공신의 호를 주고, 장사길(張思吉)을 밀직부사로 삼았다. 사길은 의주(義州) 사람인데, 의주는 땅이 요동과 접하여 왕래가 서로 잇달았다. 사길은 그 지방 사람으로 아비를 대신해서 만호가 되어 정상을 모두 알고 있으므로 특별히 포장(褒獎)하여 변방 사람을 위로하였다.
○ 왜적이 전주를 침범하여 관사를 불태우고, 또 김제(金堤)ㆍ만경(萬頃)ㆍ인의(仁義) 등의 현을 침범하였다.
○ 우리 태조가 병으로 사퇴하려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 창(昌)이 즉위하였으므로 국내에 사면령을 내리고, 편민사의(便民事宜)를 반포하였다.
○ 가을 7월에 왜적이 광주(光州)를 함락시키니 양광ㆍ전라ㆍ경상도 도체찰사 황보림(皇甫琳)과 양광도 부원수 도흥(都興), 전라도 부원수 김종연, 경상도 부원수 구성로(具成老) 등에게 명하여 구원하게 하였다.
○ 일본 국사(國師) 묘파(妙葩)와 관서성 탐제(關西省探題) 원요준(源了俊)이 사람을 보내어 방물을 바치고, 포로로 잡혀간 우리 백성 2백 50명을 돌려보내고, 이어서 장경(藏經)을 구하였다.
○ 압록강 서쪽의 초적(草賊)들이 의주 청수구자(靑水口子)를 침범하였다.
○ 최영을 잡아와서 순군옥에 가두고 요동 정벌의 죄를 국문하였다.
○ 대사헌 조준(趙浚)이 글을 올려 아뢰기를, “전제(田制)를 바로잡아 국용(國用)을 풍족하게 하고, 민생을 후하게 하며, 인재를 가려 기강을 진작시키고, 정령(政令)을 거행하는 것은 오늘날의 당연한 급선무입니다. 나라의 운수가 길고 짧은 것은 민생의 괴롭고 즐거움에 달려 있고, 민생의 괴롭고 즐거움은 전제(田制)의 고르고 고르지 못한 데 달려 있습니다. 문왕ㆍ무왕ㆍ주공이 정전(井田)을 제정하여 백성을 길렀기 때문에 주 나라가 천하를 차지한 것이 8백여 년이었고, 한 나라가 전세(田稅)를 헐하게 하였기 때문에 천하를 차지한 것이 4백여 년이었으며, 당 나라가 백성의 토지를 고르게 나누었기 때문에 천하를 차지한 것이 거의 3백 년이었고, 진(秦) 나라는 정전을 철폐하였기 때문에 천하를 얻은 지 2대만에 망하였습니다. 신라 말기에도 토지를 고르게 나누지 못하고 부세(賦稅)가 무거웠으므로 도적이 떼지어 일어났습니다. 태조께서 일어나 즉위한 지 34일 만에 여러 신하를 접견하고 개연(慨然)히 탄식하기를, '근세(近世)에 전세(田稅)를 너무 심하게 받아 1경(一頃)당 받는 조세가 6섬에 이르러 백성이 살 수가 없으니, 내가 매우 불쌍히 여긴다. 이제부터는 마땅히 십일(什一)의 제도를 사용하여 밭 1부(一負)에 벼 서되[三升]를 내게 하라.' 하고, 마침내 백성에게 3년간의 조세(租稅)를 감면하였습니다. 이때를 당하여 3국이 솥발처럼 대치하고, 영웅들이 승부를 다투어 재정의 용도가 급하였으나, 우리 태조께서는 전공(戰功)을 뒤로하고 백성 구제하는 일을 먼저 하였으니, 곧 천지가 만물을 생육(生育)하는 마음이요, 요(堯)ㆍ순(舜)ㆍ문왕(文王)ㆍ무왕(武王)의 인정(仁政)입니다.
삼한이 통일되자 곧 전제(田制)를 바로잡아 신하와 백성에게 나누어 주되, 백관은 그 품질(品秩)에 따라 주어서 본인이 죽은 뒤에는 회수하고, 부(府)의 군사는 20세에 서울로 들여서 60세가 되면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사대부로서 전지를 받은 자가 죄를 지으면 회수하니, 사람마다 자중하여 감히 법을 범하지 못하여 예의가 일어나고 풍속이 아름다워졌습니다. 부(府)ㆍ위(衛)의 군사와 주(州)ㆍ군(郡)ㆍ진(津)ㆍ역(驛)의 아전이 각각 그 전지의 소출을 먹고 그 땅에 정착하여 생업을 편안히 하니, 나라가 부강해졌습니다. 비록 천하를 호시탐탐 노리는 요 나라와 금 나라가 우리와 땅을 접하고 있어도 감히 침노하여 덤비지 못한 것은, 우리 태조께서 삼한의 땅을 나누어 신하와 백성들과 함께 그 녹을 누리고 그 생업을 후하게 하며, 그 마음을 결속시켜 국가 천만 대의 원기(元氣)가 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한인(閑人)이니, 공음(功蔭)이니, 투화(投化)니, 입진(入鎭)이니, 가급(加給)이니, 보급(補給)이니, 등과(登科)니, 별사(別賜)니 하는 명칭이 대(代)마다 증가하여 토지를 담당하는 관원이 번쇄(煩瑣)한 것을 견딜 수 없고, 토지를 주고 토지를 회수하는 법이 점점 무너져 해이하게 되었습니다. 간사하고 교활한 무리가 틈을 타서 속이고 숨기는 것이 한이 없어서 이미 벼슬한 자 시집간 자도 오히려 한인전에서 나오는 수입을 그대로 먹고, 군대에 나가지 않은 자도 속여서 군전(軍田)을 받으며, 아비가 토지를 몰래 가지고 있다가 사사로이 그 자식에게 물려주고, 자식은 몰래 토지를 가로채어 나라에 돌려주지 아니하여 이미 역분전(役分田)을 받고 또 한인전(閑人田)을 받았으며, 또 군전(軍田)을 받았습니다. 토지를 주고 받는 관원은 그것이 현재의 관리로서 역분전을 받아야 할 사람인가, 그 자신이 과연 부병(府兵)인가, 그 아비가 과연 변진(邊鎭)에서 수자리서는가, 그 할아비가 과연 다른 나라로부터 귀순한 사람인가를 묻지 않습니다.
조종(祖宗)의 토지를 주고 회수하는 법이 무너지고, 겸병(兼幷)하는 문이 한 번 열리니, 재상이 되면 당연히 밭 3백 결(結)을 받을 자가 일찍이 송곳 세울 만한 땅도 받을 곳이 없고, 재상이 되어서 녹 3백 60석을 받을 자가 오히려 20석도 차지하지 못합니다. 군사라는 것은 왕실을 호위하고 외적을 방비하는 것이며 그 옷과 양식과 기계가 모두 밭에서 나오는 것인데, 국가에서 기름진 땅을 떼어 42도부(都府)의 갑사(甲士) 10만여 명에게 녹으로 주었기 때문에 나라에서는 병사를 기를 비용이 없습니다. 조종조의 법은 곧 삼대(三代) 때에 농업에 군사를 붙여두었던 뜻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군사와 토지제도가 모두 엉망이 되어 매양 급한 때를 당하면 농민을 징집해서 군대에 보충하기 때문에 군사가 약하여져 적의 먹이가 되고, 농민들의 양식을 쪼개어 군사를 기르기 때문에 호구가 줄어들어 고을이 망합니다. 조종께서 지극히 공정하게 나누어준 토지를 한 집안 부자간의 사유물로 삼아서, 한 번도 문을 나와 조정에서 벼슬하지 않은 자와, 한 번도 군문(軍門)에 발을 들여 놓지 않은 자가 비단옷과 쌀밥으로 하는 일도 없이 복을 누리며 공후(公侯)를 멸시하는데, 개국 공신의 후손과 밤낮으로 왕을 모시는 신하와, 여러 번 싸워 힘을 바친 장사(將士)는 도리어 1 묘(畝)의 토지나 송곳 세울 정도의 경작지조차 얻지 못해 그 부모와 처자를 봉양하지 못하니, 어떻게 충의를 권하고 일을 책임지우며 전공(戰功)을 장려하고 외적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안으로 판도사(版圖司)ㆍ전법사(典法司)와, 밖으로 수령(守令)ㆍ염사(廉使)가 그 본직을 저버리고 날마다 추위와 더위를 무릅쓰고 땀을 흘리고 붓을 불어 가며 토지 송사만 판결하느라, 문권을 상고하고 증거를 조사하며, 전호(佃戶)를 신문하고 고로(故老)에게 묻고 있습니다. 그 죄에 관련된 자가 옥에 가득하고 뜰에 가득하여 농사를 폐지하고 판결을 기다리니, 두어 달 밀린 문안(文案)이 산같이 쌓이고 1묘의 다툼이 수십 년간 계속되어, 침식을 잊고 판결하기에 여념이 없는 것은 사전(私田)이 다툼의 실마리가 되어 송사가 번잡하기 때문입니다. 자식은 부모에 대하여 1묘(畝)의 요구라도 혹시 자신의 뜻에 맞지 않으면 오히려 원한을 품고 길가는 사람 보듯 하며, 심한 자는 상복을 벗자마자 그 시병(侍病)하던 노비를 때리며 그가 받은 토지의 공문서를 요구합니다. 부모에게 대하여도 이러한데 하물며 형제간이야 어떻겠습니까. 이것은 사전 때문에 인륜이 금수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조정 사대부들이 겉으로는 서로 좋아하는 체하나 속마음으로는 서로 시기하여 암암리에 중상하기까지 하니 이것은 사전으로 함정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근년에는 겸병(兼幷)하는 일이 더욱 심해져서, 간악하고 흉한 도당들이 주(州)에 걸치고 군(郡)을 포괄하여, 산과 내를 경계(境界)로 삼고서 모두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토지라 하며, 서로 훔치고 서로 빼앗아 1묘(畝)의 주인이 5, 6명이 되고, 1년에 도조 받는 회수가 8, 9차에 이릅니다. 위로는 어분전(御分田)으로부터 종실ㆍ공신ㆍ조정ㆍ문무관의 토지와, 외역(外役)ㆍ진(津)ㆍ역(驛)ㆍ원(院)ㆍ관(館)의 토지와, 남이 여러 대 동안 심은 뽕나무와 지은 집에 이르기까지 모두 빼앗아 차지하니, 호소할 곳 없는 불쌍한 백성들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개천과 구덩이에 빠져 죽을 뿐입니다. 조종께서 토지를 나누어 신하와 백성의 생업을 후하게 한 것이 끝내는 신하와 백성을 해치게 할 뿐이니, 이것은 사전이 난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토지를 겸병하는 집안의 도조를 거두는 무리가 병마사니, 부사(副使)니, 판관이니 일컫기도 하고 별좌(別坐)라 일컫기도 하는데, 따르는 자 수십 명이 말 수십 필을 타고 다니면서 수령을 능멸하고, 안렴사를 꺾고, 음식을 진탕 먹으며 주막집에서 돈을 흥청망청 씁니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떼를 지어 횡행하며 방종 포학하고 침탈 노략하는 짓이 도적보다 몇 배나 심하여 외방(外方)이 이때문에 피폐해집니다. 전호(佃戶)의 집에 들어가서는 사람은 술과 밥을 배불리 먹고, 말은 곡식을 실컷 먹고, 햅쌀을 먼저 바치게 하며 면화ㆍ삼ㆍ여비ㆍ개암ㆍ밤ㆍ대추ㆍ육포(肉脯) 등을 강제로 팔게 해서 거두는 것이 조(租)의 10배는 되어 조를 바치기 전에 재산이 다 없어지고 맙니다. 실지로 토지의 수확량을 조사할 때에는 부(負)와 결(結)의 고하(高下)를 마음대로 하여, 한 결의 토지를 3, 4결로 정하고, 큰 말로 벼를 거두어 한 섬 거두는 것을 두 섬 거두어들여 그 수량을 채웁니다.
조종께서 백성에게 취하는 것은 10분의 1에 그쳤는데, 지금 사가(私家)에서 백성에게 취하는 것은 열배 천배나 되니, 하늘에 계신 조종의 영령을 어찌 대하며 국가의 인정(仁政)이 어찌 되겠습니까. 토지는 백성을 기르는 것인데 도리어 백성을 해치니, 어찌 슬프지 않습니까. 백성이 사전(私田)의 조세를 낼 때에 다른 사람에게 빌려서 충당하는데 그 빚은 아내를 팔고 자식을 팔아도 갚을 수 없고, 부모가 굶주리고 떨어도 봉양할 수 없으니, 원통하게 부르짖는 소리가 위로 하늘까지 통하여 화기(和氣)를 상하게 하여 수재와 한재를 불러일으키게 하였으니, 호구(戶口)가 이때문에 비게 되었으며, 왜놈들이 이때문에 깊숙이 들어와 천리에 시체가 뒹굴어도 막을 자가 없습니다. 탐욕스럽고 욕심 많다는 소문이 중국에까지 퍼져 사직과 종묘가 알을 포개 놓은 것보다 위태합니다. 신등은 원하건대, 태조께서 지극히 공정하게 토지를 나누어 주신 법을 준수하고, 후인이 사사로이 주고받아 겸병하는 폐단을 고쳐, 선비도 아니고 군사도 아니고 나랏일을 맡은 자가 아니면 토지를 주지 말 것이며, 죽을 때까지 사사로이 주고받고 하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한계를 세워, 백성으로 하여금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여 국가의 재용을 족하게 하고 민생을 후하게 하며, 조정 신하를 우대하고 군사를 넉넉하게 길러 주십시오. 그러면 나라가 부유하고 군사가 강하여 예의가 일어나고 염치가 행해지며, 인륜이 밝아지고 송사가 없어져 사직의 기초가 반석같이 편안하고 태산같이 튼튼하며, 국가의 위엄이 뇌성처럼 진동하고 불꽃처럼 치성하여, 비록 외적의 침노가 있더라도 그 외적은 장차 저절로 시들고 무너질 것입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나라에 3년간 먹을 비축이 없으면 나라가 나라꼴이 아니다.' 하였는데, 근자에 서북으로 행차한 것이 겨우 두어 달뿐인데도 오히려 공사(公私)가 지탱하지 못하고 상하가 함께 곤궁하니, 만일 2, 3년간 수재와 한재가 생긴다면 어떻게 진휼할 것이며, 많은 군사의 양식과 비용은 어떻게 충당할 것입니까. 하물며 지금 도성 안팎의 창고가 일시에 모두 비어서 군국(軍國)의 수용이 나올 곳이 없는데, 변방의 근심은 예측할 수가 없으니 만일 창졸간에 변이 생기면 집집마다 거두기도 어렵습니다. 지금 양전(量田)할 때를 당해서 일정한 수(數)를 정하여 토지를 주기 전에 3년으로 한정하고 임시로 국가에서 거두어들인다면 군국의 수용을 충당할 수 있으며, 관원의 녹봉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안렴사(按廉使)의 직책은 건국 초기의 절도사(節度使)로서 군사와 백성을 총괄하고 한 지방을 도맡으므로, 수령은 직책을 받들어 백성들의 생업을 편안히 하고, 방진(方鎭)은 두려워하고 복종하여 힘껏 싸워서 지킨다면 권력은 한 곳으로 돌아갈 것이며, 사람들은 다른 바람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백성이 안렴사를 한 방면의 통찰(統察)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적이 주(州)ㆍ군(郡)을 공파(攻破)해도 방진(方鎭)은 거리낌이 없이 군사를 끼고 위엄만 기르며, 멀거니 바라보기만 하고 싸우지 않으니, 적의 기세가 날마다 더욱 치성해집니다. 수령은 제멋대로 방자하여 공공연하게 뇌물을 주고 받으며, 음악과 여색에 빠져서 백성이 도탄(塗炭)에 빠져도 구휼하지 않습니다. 안렴사가 된 자가 문서에 있는 수량과 실제 전곡(錢穀)의 차이만을 구구하게 따져 출척(黜陟)과 상벌의 법을 엄하게 하여 군민(軍民)의 행정을 진작시키지 못하는 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 안렴을 맡은 사람이 모두 정순(正順)ㆍ봉순(奉順)의 관원이고, 방진ㆍ부윤(府尹)ㆍ주목(州牧)ㆍ도호(都護)는 양부(兩部)의 대신과 봉익(奉翊)의 고관이기 때문에 대체로 왕명으로 받은 직책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품계가 낮다는 소소한 절차만 혐의를 삼아 기강을 떨치지 못하니 국사를 그르침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신들이 원하건대, 조종께서 양부(兩府)에서 안렴사를 보내도록 정한 법을 본받고, 당나라에서 대신을 절도사로 보내던 고사(故事)를 모방하여, 양부에서 청렴하고 위엄 있고 사무에 밝은 자를 가려 도안렴출척대사(都按廉黜陟大使)로 삼아서, 주ㆍ군을 순찰하여 전야(田野)가 개간되고, 호구가 증가되며, 송사가 적어지고, 부역이 고르며, 학교가 일어난 것 등을 가지고 수령을 출척(黜陟)하고, 방진(方鎭)을 순찰하여 호령이 엄하고 군기(軍器)가 정비되며, 병졸이 훈련되고, 둔전(屯田)이 정돈되며, 해구(海寇)가 종식된 것 등을 가지고 상벌을 행하되, 군관이 싸움에 패하여 한 주ㆍ군을 함몰하게 하였거나, 탐욕스럽고 더러워서 뇌물을 받은 수령은 목을 베며, 그 다음 죄를 지은 자는 관직을 파면하여 죄를 의논하고, 그 다음 죄를 지은 자는 벌을 논하되 공무는 행하도록 하여 기강을 진작하고, 3년을 체임(遞任)하는 동안에 도안렴의 견책을 받지 않은 수령은 곧 서울의 벼슬을 제수하고, 도안렴사는 대성(臺省)으로 하여금 천거하게 하여 내어 보내되, 원수(元帥) 이하가 모두 교외에 나와 영접하고, 참알(參謁)할 때에 앉는 것을 허락하지 말며, 5품ㆍ6품으로 염사(廉使)가 된 자도 1년 만에 서로 교대하는 기한과 출척하고 고과(考課)하는 법은 도안렴사와 같게 하여 고정된 예를 만들지 말 것이며, 도안렴으로 주ㆍ군과 방진 수령을 출척하지 못하는 자는 사헌부에서 아뢰어 그의 직책을 파면하여 통절히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수령이란 백성의 편안하고 괴로운 일을 살피며, 옥사와 송사를 결단하고 부역을 고르게 하여 이 백성의 부모노릇을 하는 것이 그 직책입니다. 순문사와 안렴사가 주ㆍ군에서 군사를 징발할 때에 그 수령에게 책임을 지우면 호수(戶數)의 많고 적은 것과, 정부(丁夫)의 튼튼하고 약한 것을 수령이 잘 알 것이니 반드시 정예 군사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순문사와 안렴사가 매양 군사를 징발할 때면 수령들은 자기 고을을 사사로이 할까 염려하여, 남군(南郡)의 군사를 징발하려 하면 반드시 북군의 수령에게 명하고, 북군(北郡)의 수령은 남군에 가게 합니다. 북군의 수령이 남군에 가면 듣고 보는 것이 생소하기 때문에 속을까 두려워하여 먼저 때리기부터 합니다. 북군의 군사를 징발하라는 통첩이 남군에 이르면 남군의 수령은 옷소매를 떨치고 일어서서 곧 북군으로 가서 수레에서 내리기도 전에 먼저 사람부터 형벌을 주며 그들의 부모를 가두고 처자를 때립니다. 군사의 징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호구를 점검하는 것과 군수품을 운송하는 데에도 가지가지로 징토(徵討)하고 독촉하는 것이 끝이 없습니다. 이런 까닭에 두 고을이 서로 원망하여 마침내는 원수가 되어 서로 보복하니, 백성들이 괴로움을 견딜 수 없어서 호구가 비게 됩니다. 왕의 뜻을 받아서 아래로 유포하고 교화를 선양하는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원하건대, 수령은 지경 밖에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마시어 자기 고을만을 다스리게 할 것이며, 그 임무를 감당하지 못하는 자는 안렴사가 곧 파직시켜 내치고 조정에 보고하여 그 결원을 보충하게 하소서.
선왕이 순문사ㆍ안렴사 이외에는 사신을 지방에 파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니 그 신중한 뜻을 볼 수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난 이후로 사신의 파견이 번다하여 수레가 연이어져서 역마를 타는 자가 한 필만 쓰라는 명령을 거짓으로 고쳐서 8, 9필에 이르고, 한 명의 사신을 모시는 자가 수십 명이나 되며, 게다가 순문사ㆍ안렴사의 차사(差使), 여러 원수가 파견하는 사람이 또한 모두 역마를 타고 주ㆍ군에 횡행하며, 관(館)과 역(驛)에 돌아다닙니다. 이런 문이 한 번 열리니, 무리를 이루고 말을 사랑하는 자들의 왕래와, 서울과 지방의 한가로운 자들의 사사로운 행차가 삼대와 좁쌀같이 많은데, 교대로 들락거리며 공공연하게 국고의 공급을 받으면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니, 쇠잔한 고을과 파괴된 역(驛)의 아전들은 풀이 죽어서 손을 맞잡고 호소할 곳이 없습니다. 한정이 있는 공급비용으로 끝도 없는 사객(使客)을 접대하니 주ㆍ군이 피폐해지고 역의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합니다. 원컨대, 이제부터는 주군의 여러 사무 일체를 순문사와 안렴사에게 맡겨 그 책임을 지우고, 번잡한 사신을 파견하지 마소서. 조정의 문자는 모두 현령(懸鈴)으로 전달하고, 군정(軍情)으로 긴급한 중대사가 아니면 역마를 주지 말 것이며, 역마를 탄 자가 아니면 여러 고을과 각 역(驛)에 들어가서 공급을 받지 못하게 하고, 어기는 자는 주인과 손을 모두 파직하여 서용(敍用)하지 말 것이며, 각도의 순문사와 안렴사로 하여금 한결같이 조정의 이 제도를 본받아서 감히 어기지 못하게 하고, 어기는 자는 엄격하게 다스리소서." 하였다. 간관 이행(李行), 판도판서 황순상(黃順常), 전법판서 조인옥(趙仁沃)도 잇달아 글을 올려 사전(私田)을 개혁 하기를 청하였다.
○ 정당문학 설장수에게 우(禑)가 손위(遜位)하는 표문을 가지고 남경으로 가게 했다.
○ 조민수가 이인임을 예장(禮葬)하고, 사신을 보내어 조상하며, 만장을 지어주고 치제(致祭)하며, 추증(追贈)하기를 청하니, 전의(典儀)들이 어렵게 여겨 병을 핑계대고 나오지 않았다. 부령(副令) 공부(孔俯)가 개연(慨然)히 말하기를, “내가 광평(廣平)의 시호를 의논하지 않으면 누가 감히 하겠는가." 하고, 홀로 전의(典儀)에 이르러 시호를 의논하기를, '황류(荒繆)'라 하였다. 이숭인ㆍ강회백ㆍ하륜 등이 반대하고 욕하니, 부가 농담이라고 대답하였다. 그 뒤에 대간(臺諫)에서 이인임의 죄를 의논하였는데, 그것은 공부가 발론한 것이었다.
○ 최영을 충주로 귀양보내고, 정승가를 베고, 조규(趙珪)를 각산(角山)으로, 조림(趙琳)을 풍주(豐州)로 귀양보내고, 또 안소ㆍ송광미ㆍ인원보를 귀양간 곳에서 베었다.
○ 조민수를 창녕현에 귀양보냈다. 민수는 임견미ㆍ염흥방이 처형을 받을 때에 화가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하여 백성에게서 빼앗은 밭을 모두 그 주인에게 돌려 주었었는데, 다시 득세하자 차츰차츰 도로 빼앗아 다시 탐하는 버릇을 부려 사전(私田)을 개혁하는 것을 저해하므로 대사헌 조준이 논핵하여 쫓아내었다.
○ 8월에 이색을 문하시중으로, 우리 태조를 수시중으로 삼았다.
○ 서연(書筵)을 열고 또 사헌부ㆍ중방(重房)ㆍ사관(史官)을 시켜서 한 사람씩 교대로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 이광보를 옥에 가두었다. 광보는 본래 시정의 무뢰배인데 우(禑)가 동강에서 유희를 즐기며 돌아갈 줄 몰랐으나, 광보는 우가 하고 싶어하는 대로 뜻을 맞추었다. 우가 크게 기뻐하여 조석으로 곁을 떠나지 않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옥에 가두고 곤장을 쳐서 죽였다.
○ 좌사의 이행 등이 상소하기를, “명기(名器)는 국가에서 어진 이를 기르고 선비를 대접하는 것으로, 벼슬을 설치하고 직책을 나누는 것에는 본래 정한 제도가 있으며, 전형하여 선출하고 가려서 쓰는 것은 이미 이루어진 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특별한 재주나 훌륭한 공적이 있고 나서야 등용하였는데, 권신이 정사를 제 마음대로 한 이래로 오로지 뇌물로만 벼슬을 얻게 되고, 비답 교지가 내리기도 전에 아무개가 아무 벼슬을 한다 하고 거리에 떠들썩하게 전해져 명분이 흐려지니, 조종이 어진 이를 높여서 녹을 중하게 주는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근자에 첨설(添設)한 벼슬은 수레로도 실을 수 없을 만큼 많아서, 농사하는 늙은이와 나무하는 아이들도 그것을 진흙같이 천하게 여깁니다. 이때문에 선비는 몸을 돌보지 않고 곧은 말을 하는 절개가 없으며, 무사는 의를 따라서 죽음으로 지키려는 마음이 없게 되었습니다. 바라옵건대, 전하는 맑고 깨끗하게 마음을 다스려 공(公)으로써 사(私)를 없애고, 주의(注擬)하며 선택할 때를 당하면 혹시 악덕(惡德)한 인물이나 사사로이 가까운 사람에게 미침이 있을까 유념하여, 두세 명의 대신과 함께 그 공적을 상고하고 그 덕행을 살핀 연후에 벼슬을 제수하면, 아첨하는 무리가 발을 붙일 곳이 없을 것입니다. 또 첨설한 벼슬은 본래 부득이하여 한 것이니 군공(軍功)을 제외하고는 일체 금지하소서." 하였다.
○ 정지를 양광ㆍ전라ㆍ경상도 도지휘사로 삼았다. 이때에 왜적이 3도를 침범하여 가을까지 백성을 도륙하고 민가를 불사르며 죽이고 노략질하였으나, 가는 곳마다 장수와 수령 중에 막는 자가 없었는데, 정지의 위엄과 명성이 왜적이 두려워하기에 충분하므로 김백흥(金伯興)ㆍ김용균(金用均) 등과 함께 가서 치도록 명하였다. 또 자혜 윤(慈惠尹) 조언(曹彦)과 밀직부사 최칠석(崔七夕)ㆍ장사길(張思吉), 화녕 윤(和寧尹) 정요(鄭曜)를 보내어 왜적을 막았다.
○ 사헌부가 분경(奔競)의 금지를 청하였다.
○ 왜적이 거제(巨濟)를 침략하니 진무 한원철(韓元哲)이 왜선 1척을 잡아서 18명의 수급을 베었다.
○ 여러 도의 안렴사의 명칭을 고쳐서 도관찰출척사로 삼아 교서(敎書)와 부월(鈇鉞)을 주어 보냈다. 모두 대간에서 천거한 사람을 썼는데, 양광도는 정당문학 성석린이요, 경상도는 전 평양 윤 장하(張夏)요, 전라도는 전 밀직부사 최유경이요, 교주ㆍ강릉도는 전 밀직상의 김사형(金士衡)이요, 서해도는 밀직제학 조운흘(趙云仡)이었다. 각각 부사(副使)ㆍ판관을 스스로 천거하게 하여 토지를 다시 측량하게 하였다.
○ 왜적이 연산현(連山縣) 개태사(開泰寺)를 침범하였다.
○ 비로소 전선법(銓選法)을 회복하였다. 예전 제도에 문ㆍ무관의 전선을 이부(吏部)와 병부(兵部)에서 나누어 맡아 부위(府衛)는 대정(隊正) 이상, 여러 관사(官司)는 9품 이상, 또는 부사(府使)ㆍ서도(胥徒)는 모두 연월을 적어 내고 공과를 기록하여 연말마다 벼슬을 올리고 내리게 하였는데, 이것을 도목정(都目政)이라 하였다. 우가 어려서 즉위한 뒤부터 권신과 간신이 정권을 차지하여 친족과 인척을 사사로이 벼슬시키고, 뇌물을 탐하여 관직이 전부 사문(私門)에서 나와 도목정이 폐지되었는데, 이때에 와서 그 공로를 추록(追錄)하니 벼슬하는 자가 크게 기뻐하였다.
○ 대사헌 조준이 시무(時務)를 진술하여 아뢰기를, “생각하건대, 우리 태조가 개국하던 처음에 벼슬을 설치하고 직책을 나누어 재상을 두어서 6부(部)를 통솔하고, 감(監)ㆍ시(寺)ㆍ창(倉)ㆍ고(庫)를 두어서 6부를 뒷받침하게 하였으니 대단히 좋은 제도였습니다. 법이 오래되니 폐단이 생겨, 인사를 담당한 자가 인물을 선발할 줄을 몰라, 관직이 문란해졌으며, 군부(軍簿)를 맡은 자가 군대의 정원을 알지 못하여 무비(武備)가 해이해졌습니다. 호구가 늘고 주는 것과, 전곡의 많고 적은 것과, 옥사와 송사에 질서가 없는 것과, 도적이 다스려지지 않는 것에 이르러서도 판도사(版圖司)와 전법사(典法司)의 관리가 된 자가 어떻게 할지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예의사(禮儀司)는 예(禮)에 대하여 전공사(典工司)는 주관 업무에 대하여 과연 각각 그 직책을 수행하였습니까. 대개 6부는 백관의 근본이요, 정사가 나오는 곳입니다. 근본이 어지러운데 어찌 정사가 잘 다스려지겠습니까. 이에 백료(百僚)와 여러 부서가 해체되어 흩어지고, 통솔이 없어져 여러 가지 일에 힘쓰지 않아 이름만 있고 실상은 없어졌습니다. 비록 임금과 재상이 근심하고 부지런하나 정사가 잘 거행됨은 역시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원하건대, 6전(典)의 일을 6부(部)에 돌리어, 각 관사(官司)를 6부에 나누어 소속시키고, 재신(宰臣)은 시중(侍中) 이하가 차례로 판사사, 밀직 또는 차례로 겸판서(兼判書)가 되어 위에서 벼리를 잡게 하고, 봉익(奉翊)을 6부 판서로 삼아서, 여러 낭관(郞官)과 소속된 관사(官司)를 거느려 각각 그 직책을 가지고 밑에서 명령을 듣게 하여 큰 일은 6부의 낭관이, 작은 일은 여섯 색장(色掌)이 맡아 때때로 위의 명령을 받들어 공문을 발송하여 행하게 하소서. 이렇게 하면, 간략함으로 번다함을 제어하고, 낮음으로 높은 사람을 받들며, 위와 아래가 서로 연결되고, 크고 작은 것이 서로 체계가 잡혀 벼리를 들면, 그물 눈이 벌어지고 옷깃을 추켜들면 옷이 바로 잡히는 것과 같아서, 왕과 정승은 위에서 편안하고, 모든 관리들은 아래에서 분주하여 교령이 쉽게 행하여지고, 정사가 쉽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왕의 직책은 재상과 의논하는 것뿐이요, 재상의 직책은 군자를 등용하고 소인을 물리쳐서 백관을 바르게 하는 것뿐이니, 적임자로 재상을 삼으면 천하도 다스려지거든, 하물며 한 나라의 정치이겠습니까. 본국의 제도에 중서(中書)의 영(令)이니, 시중이니, 평장이니, 참정이니, 정당(政堂)이니 하는 다섯 가지는 하늘의 오성(五星)을 본뜬 것이요, 추밀(樞密)의 일곱 관직은 하늘의 북두칠성을 본뜬 것입니다. 재상과 추밀이 합좌(合坐)하는 것은 원 나라를 섬기던 초기에 시작되었는데, 근대에 이르러서는 도당(都堂)에 앉아서 국정에 참여하는 자가 60~70명이나 되니 이렇듯 관직이 넘침은 옛날에는 없던 일입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도(道)를 논하고 나라를 경륜(經綸)하여 음양(陰陽)을 섭리(燮理)하고, 몸을 바르게 하여 백관을 바르게 할 만한 사람이 아니거나, 청백하고 충성되며, 곧고 악한 것을 미워하고 어진 것을 좋아하며, 나라만 알고 자신을 잊는 사람이 아니거나, 싸우면 이기고 공격하면 취하여 용맹이 삼군(三軍)의 으뜸이 되고 위엄이 다른 나라에 가해질 만한 사람이 아니거든, 양부(兩府)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마소서. 한나라의 광무제(光武帝)는 넓은 천하와 사해의 부유로도 관리의 수를 줄여 10명을 둘 곳에 1명을 두어서 중흥(中興)의 다스림을 이루었으니, 모든 급하지 않은 관원과 잡되고 쓸데없는 아전은 모두 제거하여, 조종께서 하늘을 대신하여 벼슬을 설치한 옛법을 회복하여 거룩한 조정의 유신(維新)하는 교화(敎化)를 보이소서. 6시(寺)와 7감(監)은 본래 판사(判事)가 없었습니다, 근래에는 또 통헌(通憲)ㆍ봉익(奉翊)의 품계들이 친히 일을 보지 않고, 직무를 폐하고서 녹만 허비하니, 원컨대 이제부터는 통헌ㆍ봉익의 품계에 오른 자 중에 만일 재간이 있는 자가 있거든 그 계급을 내려서 그 직책을 직접 수행하게 하고, 새로 제수하는 자에게는 봉익ㆍ통헌의 품계를 주지 마소서.
《춘추(春秋)》에, '천자가 잉숙(仍叔)의 아들을 노(魯) 나라에 사신으로 보내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대개 공자께서 주 나라에서 부형의 연고로 그 어리고 약한 자제를 벼슬시켜 녹을 허비하고 관직을 헛되이 한 것을 슬퍼한 것입니다. 우리 문종(文宗)의 38년의 정치가 태평성대(太平盛代)를 이룬 것은 모두 노성(老成)한 사람을 등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원컨대, 이제부터는 공경(公卿)ㆍ사대부의 어린 자제는 동반(東班) 9품 이상의 벼슬을 제수하지 말고, 혹시 속여서 받은 자가 있으면 그 부형에게 죄를 주소서. 규정(糾正)은 직책이 백관을 살펴서 왕의 귀와 눈이 되고, 모든 제사와 조회로부터 전곡과 출납에 이르기까지 모두 감찰 단속하는 것이니 품계는 낮아도 책임은 중합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대간에서 천거하게 하여 그 직책을 주되 그 품계를 정언(正言)의 다음으로 올려서 기강(紀綱)을 떨치게 하소서. 수령은 백성을 가까이하는 직책이니 임명을 신중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근일에 제수하는 수령은 사림(士林)이 알지 못하는 자가 간혹 있으니,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각사(各司)의 높은 품직을 역임하여 명망이 있는 자가 아니거나, 서울과 지방에서 역임하여 공적이 있는 자가 아니거든 제수하지 말며, 사냥하고 잔치하는 일은 일체 금지하소서.
감무(監務)와 현령(縣令)도 직책이 백성을 가까이 하는 것인데 근세에는 벼슬이 권문세가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으므로 사람들이 그 벼슬 하기를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부사(府史)와 서리(胥吏) 같은 불학무식(不學無識)한 무리들에게 제수하여 백성에게 해독을 끼치게 되니,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대간ㆍ6조가 천거한 재능있는 사람을 가려 보내되 품계를 참관(參官)으로 올려서 그 책임을 중하게 하소서. 안집사(安集使)는 일체 파하고, 부사ㆍ서리의 무리에게는 다만 임시대리[權務]의 직책만을 제수하소서. 공역서(供驛署)는 오직 8도의 역참을 맡은 곳인데, 근년에는 공청에 앉아 있지 않고 사가에 앉아서 공문을 보내어 권세가의 부탁과 친척과 친구의 청을 들어 주어 역마를 타고 역의 아전을 거느린 자가 그치지 않으니, 역졸이 피폐한 것은 바로 이때문입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공역서를 군부사(軍簿司)에 소속시켜, 모든 마필(馬匹)과 역졸은 도당(都堂)의 문서에 의거하여서만 징발을 허가하소서. 사복(司僕)은 승여(乘輿)를 맡아 임금 좌우에 가까이 있으므로 그 인선(人選)이 가장 중요한 것인데, 근래에 따로 내승(內乘)을 설치하여 내수(內豎 환관)의 무리가 그 직책을 독차지하니, 근일에는 횡포가 더욱 심합니다. 그 마초(馬草)를 거두어들일 때는 온갖 방법으로 빼앗고, 성에 수송하여 들일 때는 농우(農牛)가 창(瘡)이 나서 쓰러져 경기(京畿)의 고을들이 잔파(殘破)되고, 그 해독이 여러 고을에 번져 나가, 한 고을 안의 곡초(穀草) 값이 거의 베[布] 9백 필 값에 이릅니다. 주ㆍ군 모두가 이러한데 또 그 공호(貢戶)를 몰아서 구종(驅從)이라 이름하는 것이 천 명, 백 명에 이르며, 공적(公籍)에 붙이지도 않고 사사로 농장을 두어 노예같이 부려서 백성을 해치고 나라를 병들게 하니 매우 애통한 일입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상승(尙乘)을 사복시(司僕寺)에 예속시켜 내수(內豎)로 제수하지 말고 청렴하고 재간이 있는 자를 가려 맡겨서, 매일 교대로 마초(馬草)와 콩을 몸소 친히 헤아려 주고, 경기 안에 있는 마초와 볏짚은 말 수를 계산하여 분량을 정하고 달을 나누어 공급하되, 규정(糾正)을 시켜 감독하게 하고, 매양 당번 한 명에 수의(獸醫) 5명과 구종(驅從) 30명을 두고 나머지는 모두 파하여 부병(府兵)을 붙이게 하소서. 무릇 도감(都監)은 일이 있으면 두고, 일이 끝나면 파하는 것이 전례이며, 조성도감(造成都監)은 일찍이 궁궐을 짓기 위하여 두었는데, 뒤에 선공(繕工)의 직책을 곳으로 돌려서 일국의 목재(木材)와 철의 용도를 관리하게 하였더니, 관리를 보내어 역마를 번거롭게 하고 백성의 재물을 긁어모으기에 그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백성으로부터 취할 때에는 살을 벗기고 골수를 빼듯이 하면서 그것을 사사로이 쓸 때에는 진흙과 모래 쓰듯 하니, 원하건대 도감을 파하여 선공시(繕工寺)에 붙이고 아울러 방어화통도감(防禦火㷁都監)을 파하여 군기시(軍器寺)에 붙여서 청렴 공정한 사람을 가리어 관직을 맡기고, 또 규정(糾正)을 시켜 감독하게 하소서. 호곶(壺串) 궁궐의 목재ㆍ기와와, 그리고 죄를 입어 적몰된 집과 양강(兩江)의 재목 및 여러 기와굽는 가마의 기와는 영조(營造)하는 데 쓸 것이며, 모든 나무를 베고 기와를 굽는 역사를 3년 동안 정지하여 백성을 쉬게 하소서.
도성은 근본이 되는 땅이며, 풍화(風化)가 먼저 시작되는 곳으로 그 백성들은 왕실을 호위할 뿐입니다. 근래에 교화가 제대로 되지 못하여 간사하고 속이는 것이 습속이 되었으며, 부역이 번거롭고 거듭되어 날마다 피폐해가니, 신은 원하건대 도총도감(都摠都監)을 파하여 5부(部)를 개성부에 붙이고, 한 동네마다 학식 있는 노인을 택하여 사장(社長)으로 삼아서 당서(黨序 고대의 학교)의 법에 의하여 자제를 교육하게 하소서. 천인과 공장ㆍ상인의 자제는 각각 그 업을 일삼게 하며, 거리와 골목에서 떼를 지어 장난하는 경박한 풍습이 자라나지 못하게 하고, 어기는 자는 사장과 부형을 죄주소서. 도관(都官)ㆍ궁사(宮司)ㆍ창고의 노비와, 근일에 참형을 당하고 귀양간 사람의 조상 전래의 노비 및 새로 얻은 노비는 변정도감(辨正都監)으로 하여금 모두 인구를 계산하게 하여 빠짐없이 호적을 만들어서, 매양 토목ㆍ영선(營繕)의 역사와 빈객ㆍ부처ㆍ신(神)의 공양(供養)이 있을 때에는 모두 사역을 시키고, 방리(坊里)의 여러 가지 역사는 모두 면제하여 그 생활을 편안히 해서 왕실을 호위하게 하소서.
이인임은 국가의 권력을 제 마음대로 한 가지가 20년이 넘어 죄악이 가득 쌓였는데 다행히 하늘이 죽였으니, 원하건대 관작을 삭탈하고 시호를 내려 주지 말아 악한 짓을 하는 자를 징계하고, 정렬공(貞烈公) 경부흥(慶復興)은 청백으로 몸을 지켰으나 인임 등에게 쫓김을 당하여 적소(謫所)에서 죽었으니, 원컨대 교서를 내려 그 무덤에 조상하고 제사하게 하며, 시중 이자송(李子松)은 청렴하고 근신하고 절조를 지켰으나 죄 없이 죽어 국인(國人)들이 애석하게 여기니, 원하건대 시호를 내려주고 그 집을 후하게 구휼하소서.
조종의 의관과 예악(禮樂)은 모두 중국의 제도를 따랐었는데 원 나라 때에 이르러 당시 황제의 제도에 눌려서 중국 제도를 변경하여 몽고를 따랐으니, 위와 아래를 분별할 수 없고 백성의 뜻이 안정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현릉(玄陵)께서 상하의 분별이 없는 것을 통탄하여 몽고의 제도를 변경하여 중국을 따라서 조종의 거룩함을 회복하고, 호복(胡服)을 개혁하기를 청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승하하셨습니다. 상왕(上王)이 뜻을 이어 승인을 얻었는데 중간에 집정하는 신하가 고쳐버렸습니다. 전하가 즉위하여 친히 중화의 의복을 입고 온 나라 신민과 함께 다시 새롭게 하였으나 품제(品制)에 맞지 않아 유신(維新)의 정령(政令)에 장애가 되니, 원컨대 헌부를 시켜서 날을 한정하여 그 제도를 따르게 하소서.
근년에 간흉(姦兇)이 서로 잇달아 정권을 잡아 뇌물의 양에 따라 그 벼슬을 올리고 내리며, 제 뜻을 따르고 어기는 것을 보아 그 사람을 죽이고 살렸으므로 선비의 풍습이 일변하여 조석으로 권문(權門)을 따르기에만 분주하여 관직을 비우고 있으니, 유사(有司)로 하여금 각각 옥사를 결단하고 송사를 판결하는 일을 두 아전이 날마다 각 상사에게 올려 날마다 본사(本司)에 앉아서 일을 보게 하고, 혹시 권문만 드나들어 자기 직책을 수행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정직을 시키고 녹을 회수하소서.
형벌이 정해진 법이 없어서 안팎의 관사(官司)가 출(出)ㆍ입(入)을 자기 생각대로 하고 있는데, 지금 전교(典校)의 한 관사가 모두 문학을 아는 신하인데 다른 맡은 것이 없으니, 원하건대 형서(刑書)를 산정(刪定)하는 것을 위임하여 만세에 혜택을 주게 하고, 또 안팎의 관사가 서로 접대하는 예절과 문서의 격식을 또한 산정하게 하고 이를 반포하여 행하소서. 옛날에는 풍속이 순후하여 속이고 거짓된 일이 생기지 않아 백관의 사첩(謝牒)을 당후관(堂後官)이 서명하였는데, 세도가 나날이 떨어져 간사와 거짓이 날로 번성하여 근래에 상장군(上將軍) 이하는 군부사(軍簿司)로 하여금 도장을 찍게 하고, 봉익(奉翊) 이하는 전리사(典理司)에게 도장을 찍게 하니, 속이는 것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 도평의사가 도성 안팎의 관사(官司)에 공문을 보내는 것은 모두 전곡을 출납하는 것, 생살상벌(生殺賞罰)에 관한 것, 호령을 발하는 것 등의 일이어서 관계되는 것이 매우 중대한데, 녹사(錄事) 한 명에게 서명(署名)하게 하니 일을 융통성 있게 하고 간사함을 막는 도리가 아닙니다. 원하건대, 조정에서 직첩에 날인하는 예에 의하여 모든 도당(都堂)의 공문에는 반드시 도장을 찍게 하소서. 예전 제도에 왕패(王牌)를 여러 창고와 궁사(宮司)에 내릴 때에는 반드시 행신보(行信寶)를 찍었는데, 지금은 내수(內豎)가 혼자 서명하니 역시 간사함을 막는 것이 아닙니다. 원하건대, 모든 궁내에서 쓰는 것은 도평의사로 하여금 공급하게 하고 왕패를 내리지 말아 내수의 도적질하는 근원을 막게 하소서. 모든 송사를 결단하는 관원과 전곡을 출납하는 유사와 사사로운 편지를 주고받아서, 시비를 전도시키고 관청의 물건을 훔쳐 내는 데 대해서는 그 폐단이 점점 심하니, 원하건대 일체 금지하여 만일 어기는 자가 있으면 청하는 자와 들어 주는 자를 모두 불렴죄(不廉罪)로 논하고, 각 관과 각 성중애마(成衆愛馬)가 요구하는 것과, 외방 관원의 선물을 주고받는 것 역시 불렴죄로 논하소서.
옛날에 백성이 16세가 되면 비로소 정부(丁夫)가 되어 나라 역사에 복역하고, 60세가 되면 늙은이로서 역사를 면하게 되었는데, 주ㆍ군에서 매년 인구를 계산하여 백성의 호구를 조사하고 장부를 정리하여 안렴사에게 바치고 안렴사가 호부(戶部)로 바치면, 조정에서 군사를 징집하고 역군을 조발하기가 손바닥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쉬운데, 근래에 이 법이 한 번 무너지니, 수령은 그 고을의 호구를 알지 못하고 안렴사는 한 도의 호구를 알지 못하여, 군사를 징집하고 역군을 조발하는 데에 있어서, 향리(鄕吏)가 속이고 숨겨주면 뇌물을 받아들이므로 부강한 자는 면하고, 빈약한 자는 징발되어 가니, 빈약한 집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여 도망을 하면 부강한 집이 대신 괴로움을 당하여 그집 역시 빈약해져서 도망갑니다. 징발을 맡은 관원은 향리에게 속은 것을 분하게 여겨, 혹독한 형벌을 가하여 귀를 베고 코를 베는 등 못하는 짓이 없으니, 향리가 또한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여 도망갑니다. 향리와 백성이 사방으로 도망가 흩어져 고을이 비게 되는 것은 호적 문서를 만들지 않은 데서 오는 화입니다. 원하건대, 지금 토지를 조사할 때를 당하여 그 경작하는 토지를 살펴 토지의 많고 적은 것으로써 호(戶)를 상ㆍ중ㆍ하 세 등급으로 매기고, 양민과 천인의 상황을 문서로 만들어, 수령은 안렴에게 바치고 안렴은 판도(版圖)에 바치게 하면, 조정에서 일체 징병하고 조역(調役)할 때에 근거로 삼을 것이 있어 제때에 징발하여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수령과 안렴으로 만일 어기는 자가 있으면 법으로 다스리소서.
여러 도의 어염(魚鹽)과 목축(牧畜)의 번성은 국가에 없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우리 태조께서 신라와 후백제를 평정하지 못하였을 때에 먼저 수군을 조련하여 친히 누선(樓船)을 타고 금성(錦城)을 항복받아 점령하니, 여러 섬의 수입이 모두 국가에 속하였고, 그 재력에 의하여 드디어 삼한을 통일하였습니다. 압록강 이남은 대개 모두 산이고 비옥한 토지는 바다에 인접한 곳에 있는데, 비옥한 들판에 있는 수천 리의 논밭이 왜적에게 함락되어 황폐하여 갈대 숲이 하늘에 닿았으니, 국가가 이미 어염ㆍ목축의 이익을 잃고, 또 기름진 들판에 있는 좋은 전지의 수입을 잃어버렸습니다. 원컨대, 한(漢) 나라에서 백성을 모집하여 변방에 채워 흉노(匈奴)를 막은 고사(故事)를 따라서, 도망한 고을의 황무지를 개간하는 자에게는 20년을 기한하여 그 밭의 전세를 받지 말고, 그 백성을 부역시키지 말며, 수군 만호(水軍萬戶)에 전속시켜 성보(城堡)를 수축하고, 노약한 자를 불러 모으며, 먼 곳까지 척후(斥候)를 두고 봉화(烽火)를 신중히 하며, 평소에 일이 없을 때에는 농사 짓고, 고기 잡고, 소금 굽고, 철공(鐵工)질하여 먹고 살며, 때때로 배를 만들고, 적이 이르면 들을 비우고 성보(城堡) 안으로 들어가고, 수군을 시켜 치게 하소서. 합포에서 의주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렇게 하면 몇 해가 되지 않아서 뿔뿔이 흩어져 도망갔던 백성들이 모두 고향 고을로 돌아올 것입니다. 변방 고을이 차게 되고, 여러 섬이 점차로 차서 전함이 많아지고 수군이 훈련되면, 해적이 도망가 변방 고을이 편안해지며, 수운이 편리해지고 창고가 채워질 것입니다. 수군 만호와 여러 도의 원수가 능히 둔전(屯田)을 설치하고 전함을 수리하며, 인심을 결속하고 호령을 시행하여, 적을 멸하고 변방을 편안히 한 자에게 섬 안의 토지를 주어서 대대로 그 수입을 먹어 자손에게 전하게 하고, 한 성보를 잃고 한 주ㆍ군을 망친 자는 군법으로 처단하여 가볍게 용서하지 않음으로써 상벌을 보이소서.
전라ㆍ경상ㆍ양광 3도는 공부(貢賦)가 나오는 곳이며 국가의 요지인데, 지금은 왜놈들이 횡행하여 우리의 주ㆍ군을 쳐서 함락시켜 우리의 곡식을 짓밟고, 우리의 노약한 자를 살육하며 우리의 건장한 젊은이들을 노비로 삼고 있는데, 장수는 성 안에 엎드려 싸울 뜻이 없으므로 적의 형세가 날마다 성하니, 원하건대 크게 군사를 일으켜 시기를 잃지 말고 소탕하게 하소서. 서북 한 방면은 국가의 울타리와 같은데, 간흉이 정권을 차지하고 주변사람을 널리 등용하여 원수와 만호가 예전의 정원보다 증가되었으므로, 주ㆍ군에서 공급하는 것이 한량이 없어 백성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모두 도망갑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문무가 겸비하여 위엄과 명망이 일찍부터 드러난 사람을 뽑아서 각 도에 원수 한 사람, 상만호와 부만호 각각 한 사람을 두고, 나머지는 모두 파하소서. 장사치들이 다투어 권문에 청탁하여 천호의 소임을 구하고서는 침탈하고 거두어들이는 데 못하는 짓이 없으니,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그 도의 원수로 하여금 위엄과 혜택이 백성의 신복을 받는 자를 가려서 제수하게 하고 자주 바꾸지 마소서.
권세 있는 집에서 다투어 외국과 무역하려고 돈피ㆍ잣ㆍ인삼ㆍ꿀ㆍ밀[蠟]ㆍ쌀ㆍ콩의 종류를 거두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백성이 매우 괴롭게 여겨서 늙은이는 부축하고 어린이는 끌고 강을 건너 서쪽으로 도망가니, 통곡할 일입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강제로 사들이는 폐단을 일체 금지하고, 만일 어기는 자가 있으면 법으로 엄하게 다스리소서. 전일에 죄를 입은 간흉배들이 강제로 사들인 물건 중에, 아직 다 거두지 못하여 민간에 남아 있는 것은 마땅히 찾아 모아 관용에 충당하게 하고, 매와 돈피를 사사로이 바치는 것은 모두 엄하게 금지하소서.
수척(水尺)과 재인(才人)은 밭갈고 씨뿌리는 것을 일삼지 않고, 앉아서 백성의 곡식을 먹으며, 일정한 산업도 없고, 일정한 마음도 없으므로 서로 산골에 모여서 왜적이라 사칭하는데, 그 형세가 무시할 수 없으니 일찍 도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그들이 살고 있는 고을의 인구를 조사하여 호적을 만들어 이리저리 이동하지 못하게 하고, 빈 땅을 주어 부지런히 경작하여 평민과 같이 살게 하며, 어기는 자가 있으면 그 지방의 관사(官司)가 법으로 다스리게 하소서." 하였다. 창(昌)이 그 글을 도당에 내렸다.
○ 왜적이 청주(淸州)ㆍ유성(儒城)을 침범하고, 또 낙안군(樂安郡)ㆍ고흥(高興)ㆍ풍안(豐安) 등의 고을을 침범하여 민가를 공격하고 불태웠다.
○ 홍영통(洪永通)을 영문하부사로 삼았다. 국인(國人)이 모두 말하기를, “저렇게 탐하는 사람으로서 정월의 사변(事變)에 처형을 면하고, 이제 경화(更化 정치를 개혁하여 교화를 다시 한다는 뜻)를 시작하는 때를 만나서도 오히려 배척을 당하지 않고 또 상상(上相)의 자리에 오르니, 참 복있는 사람이다." 하였다.
○ 대간과 6조로 하여금 수령이 될 만한 사람을 천거하게 하였다.
○ 왜적이 진주(晉州)를 침범하여, 목사 이빈(李賓)이 전사하였다.
○ 경상도 도순문사 박위(朴葳)와 안동(安東) 원수 최단(崔鄲)이 왜적을 상주(尙州) 중모현(中牟縣)에서 쳐서 물리쳤으므로, 각각 활과 말을 주었다. 우리 태조를 도총중외제군사(都摠中外諸軍事)로 삼았다.
○ 왜적이 함양(咸陽)에서 운봉(雲峯)ㆍ팔라현(八羅峴)을 넘어 남원에 이르니, 도지휘사 정지가 도순문사 최운해(崔雲海), 부원수 김종연(金宗衍), 조전원수 김백흥(金伯興)ㆍ진원서(陳元瑞), 전주 목사 김용균(金用鈞), 양광도 상원수 도흥(都興), 부원수 이승원(李承源) 등을 독려하여 쳐서 크게 물리쳐 왜적 58급을 베고, 말 60여 필을 노획하였다. 적이 밤에 도망갔는데, 정지가 여러 군사의 양식이 없어 추격하지 못하니, 적이 배에 올랐다. 창(昌)이 정지 등에게 궁중의 술과 비단을 내려 주었다.
○ 찬성사 왕안덕을 6도 도통찰사로 삼았다.
○ 다시 사인(士人)을 현령과 감무에 임명하도록 하였다. 예전 제도에는 현령ㆍ감무를 모두 과거에 오른 사인들로 썼었는데, 근세에는 오로지 여러 관사의 서리(胥吏)에게 시켰으므로, 탐하고 더러워서 백성에게 포학하게 하였으며, 자급이 모두 7ㆍ8품이어서 질(秩)이 낮고 사람이 미천하므로, 호강(豪强)한 자들이 가볍게 여겨 불법을 자행하여 시골 고을이 쇠잔하고 망하였다. 공민왕이 전이도(全以道)의 말을 따라서 5ㆍ6품을 안집사(安集使)로 삼아 묵은 폐단을 고치려 했으나, 안집사는 왕의 임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모두 당시 재상이 천거한 자를 써서 백첩(白牒)으로 임소(任所)에 갔었다. 우(禑)의 때에 이르러 권간이 정치를 잡자, 오로지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을 써서 저희들의 좋아하고 싫어함에 따라 출척하였다. 여러 현의 안집사 중에 글자도 모르는 자가 많아서, 남의 토지와 백성의 재물을 빼앗아 권문에 바쳐 아첨하여 승진하는 매개로 삼으니, 탐하고 잔악한 화가 서리보다 심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사류(士流)를 쓰고 질(秩)을 5ㆍ6품으로 하였다.
○ 경상도 부원수 구성로(具成老)가 왜적 5급을 베어 바쳤다.
○ 왜적이 옥주(沃州)ㆍ황간(黃澗)ㆍ영동(永同) 등의 고을을 침범하였다.
○ 창(昌)이 전교하기를, “사전(私田)의 조세를 모두 나라에서 거둔다면 조신들이 반드시 먹기에 곤란할 것이니, 그 조세를 반만 거두어 나라의 용도에 충당하라." 하였다.
○ 9월에 박위가 고령현(高靈縣)에서 왜적을 쳐서 35급을 베었다.
○ 지문하부사 유만수(柳曼殊)가 파면되었다. 간관이 이뢰기를, “만수는 문음(門蔭)으로 벼슬을 얻어 재상의 자리에 올랐는데, 그 어머니에게 불효하므로 사람들이 모두 천시합니다. 또 죽은 소윤 최수첨(崔秀瞻)의 딸을 강간하였고, 또 남이 경작하는 토지를 빼앗아 점령하여 그 주인이 원한을 품게 하였으니, 국문하여 풍속을 바로잡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헌부가 또 탄핵하여 파면시켰다.
○ 우상시 허응(許應)이 상소하기를, “근자에 사헌부에서 판도사, 전법사와 함께 글을 번갈아 아뢰어 선왕의 균전(均田) 제도를 회복하기를 청하였는데, 전하께서 윤허하시니 듣는 자로서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대가세족으로 겸병하는 자만이 홀로 불편하게 여겨 여러 말을 시끄럽게 하여 여러 듣는 사람을 현란시키니, 토지를 가진 사대부들이 일시에 같은 목소리로 호응하였습니다. 조금 뒤에 종묘ㆍ사직ㆍ도전(道殿)ㆍ신사(神祠)ㆍ공신ㆍ등과자(登科者)의 토지는 회수하지 않는다는 의논이 있었습니다. 신등이 생각하기를, 이것은 반드시 먼저 주장하여 법을 폐지하려는 실마리를 일으킨 자가 있을 것이라 여겼는데, 하루도 못 되어 과연 반만 거두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대개 법을 만드는 것은 폐단을 고치자는 것인데, 법을 만들고 폐단이 생기기도 전에 갑자기 중지하는 것은 불가한 일이 아닙니까. 근래에는 나라의 재용과 군수(軍需)가 모두 부족하므로 일찍이 균전의 의논이 있었는데, 지금 만일 헛된 말을 믿고 끝까지 실행하지 못한다면, 녹봉과 군량은 어떻게 충족시키며, 비상하고 급한 일이 있으면 어떻게 감당하시렵니까. 중국이 요동에 위를 세워 우리 강토를 엿본 지 해가 넘었고, 왜적이 깊이 들어와 난을 일으키면서 못하는 짓이 없으니,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두가 두려운 때인데, 이런 것을 생각지 않고 국가의 공전(公田)을 공이 없이 하는 일 없이 먹기만 하는 사람에게 주니,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여러 사람이 떠드는 것을 내버려 두고, 균전의 예전 제도를 회복하여 군국의 수요를 모두 여유있게 하면, 국가에 다행한 일이겠습니다." 하니, 그 말대로 따랐다.
○ 서해도 관찰사 조운흘이 떠나려 할 때에 글을 올려 아뢰기를, “무릇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여 안팎에 일이 없을 때에도 오히려 위태한 것을 생각하는데, 하물며 우리나라는 바다로는 왜인의 섬에 가깝고, 육지로는 오랑캐의 땅에 연하였으니, 참으로 근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라 경계가 서해에서 양광ㆍ전라도를 거쳐 경상도에 이르기까지 바닷길이 거의 2천여 리나 되는데, 바다 가운데 살 만한 섬은 대청(大靑)ㆍ소청(小靑)ㆍ교동(喬桐)ㆍ강화(江華)ㆍ진도(珍島)ㆍ절영(絶影)ㆍ남해(南海)ㆍ거제(巨濟) 등 큰 섬 20개가 있고, 작은 섬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모두 비옥한 땅과 어염(魚鹽)의 이익이 있었으나, 이제 황폐하여 쓰지 못하니 탄식할 일입니다.
바라건대, 5군의 장수와 8도의 군관에게 각각 호부(虎符)와 금패(金牌)를 주고, 천호ㆍ백호에게까지도 패면(牌面)을 주어 크고 작은 해도를 그들의 식읍(食邑)으로 만들어 자손에게 전하게 하면, 오직 장수 자신의 부귀뿐만 아니라, 또한 자손 만대로 의식이 넉넉할 것이오니, 어찌 사람마다 스스로 힘껏 싸움을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마다 자발적으로 싸움을 하면 전함이 저절로 갖추어지고, 군량을 몸소 준비하여 유격병이 되어 적을 무시로 공격하면, 적이 감히 엿보지 못하여 백성이 부유하고 번성해져서, 인가가 서로 이어지고 닭소리, 개소리가 서로 들려서, 백성은 어염의 이익을 얻고 나라는 조운(漕運)의 걱정이 없어져, 조종의 토지가 다시 온전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창이 그 글을 도당에 내렸다.
○ 우(禑)를 여흥으로 옮겨 그 고을 군사에게 숙직 호위하게 하고, 조세(租稅)로 공양하여 받들게 하였다.
○ 군기소윤(軍器少尹) 고봉례(高鳳禮)를 제주 축마 겸 안무별감(濟州畜馬兼安撫別監)으로 삼아서 보냈다.
○ 정방(政房)을 고쳐 상서사(尙瑞司)라 하였다.
○ 침원서(寢園署)에서 아뢰기를, “종묘의 제사는 나라의 큰 일입니다. 보궤(簠簋 종묘에서 쓰는 제기)ㆍ변두(籩豆 제기(祭器))를 채우는 것과 희생(犧牲 고기로 만든 제물)ㆍ자성(粢盛 곡식으로 만든 제물)을 갖추는 것은 각각 맡은 관원이 있는데, 근래에 기강이 무너져 상고하고 검사하는 일이 없어서 희생과 전물(奠物)이 풍성하고 정결하지 못하니, 보본추원(報本追遠)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바라건대, 맡은 관원으로 하여금 풍성하고 정결하게 하도록 힘써서 정성과 공경을 극진히 하고, 전교(典校)의 축판(祝版)도 장관(長官)으로 하여금 목욕 재계하고 싸서 나오게 하고, 혹시 정성스럽지 못하면 대성(臺省)으로 하여금 규탄하여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그 말대로 좇았다.
○ 문하평리 균형(鈞衡)과 밀직부사 유광우(兪光祐)를 남경에 보내어 호인(胡人) 평정한 것을 하례하였다.
○ 겨울 10월에 대사헌 조준의 무리가 글을 올려 시무(時務)를 아뢰기를, “옛날에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기강을 세웠으니, 한 나라의 기강은 인체의 혈맥과 같은 것입니다. 몸에 혈맥이 없으면 기운이 통하지 않고, 나라에 기강이 없으면 명령이 행해지지 않으니, 법령이 행해지지 않으면 나라가 나라의 구실을 하지 못합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후로 크게 언로(言路)를 열어 상신(相臣)과 헌신(憲臣)이 각각 시무를 진달하였습니다. 그러나 묵은 폐단이 겨우 고쳐지고 새 법이 아직 행해지지 않아서, 원망이 일어나고 기강이 문란해져 병이 혈맥(血脈)에서 고황(膏肓)에 미쳤으니, 비록 편작(扁鵲 중국 전국 시대의 명의(名醫))이 있더라도 빨리 다스리기는 어렵습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판정(判定)해서 분부하는 법제를 판(板)에 새겨 시행하여 금석같이 굳게 해서, 백성으로 하여금 사시(四時)같이 믿게 하고, 감히 법을 범하거나 금령에 저촉되는 자가 있으면 일체 헌사에 맡겨서 다스리게 하소서.
침원서(寢園署)의 예문을 삼가 상고하건대, 모든 제사에 참여하는 자는 4일 동안 술을 마시지 않고 훈채(葷菜)를 먹지 아니하는데, 이것을 산재(散齋)라 하고, 혹은 본사(本司)에 거처하고 혹은 상서성(尙書省)에 있으면서 옷을 깨끗이 하고 단정히 앉아 4일 동안 정성과 공경을 지극히 하였는데, 이것을 치재(致齋)라 합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여러 집사자(執事者)가 산재로부터 치재하는 날에 이르기까지 각각 자기 집에서 혹 부녀자와 함께 가까이 있고, 또 예문을 익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강신(降神)하는 것, 헌작(獻爵)하는 것, 오르는 것, 내리는 것, 찬(贊)하는 것, 알(謁)하는 것, 진설하는 것, 철찬(撤饌)하는 것이 모두 법도에 부합하지 않으니, 매우 불경한 일입니다. 전하의 보본추원(報本追遠)하는 뜻에 어떻다 하겠습니까.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모든 제사에 참여하는 자는 산재하는 4일 동안은 그 집에 있으면 규정(糾正)에서 감찰하게 하고, 정순(正順 정3품의 상(上)) 이하는 녹사(錄事)를 시켜 살피게 하며, 치재하는 3일 동안은 공청에 모여서 예문을 익히고 정성과 공경을 지극히 하되, 어기는 자는 불경죄로 논하소서.
본조(本朝)의 음악 절차가, 빈객을 위하여 잔치를 할 때에는 반드시 당악(唐樂)을 연주하고 난 다음에 우리 향악(鄕樂)을 연주하였는데, 지금 창기들의 가무와 성음(聲音)의 절조(節調)가 중(中)ㆍ화(和)에 부합되지 않아 예악의 근본을 잃었습니다. 조정의(朝廷儀)를 삼가 상고하건대, 조회를 하고 잔치를 하는 데 있어서는 다만 악공(樂工)을 시켜 음악을 연주하고 창기는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원하건대, 이 법을 준수하시어 궁중의 향연(饗宴)에 당악(唐樂)만 연주하고, 창기는 앞에 가까이하게 하지 마소서.
남쪽 고을 백성들이 근래에 병란으로 인하여 혼란하고 생업을 잃었으며, 또 수재로 인하여 화곡(禾穀)이 손실되어 모두 생업을 유지할 수 없으니, 실로 마땅히 나라 근본을 배양하여 동요하지 않게 해야할 것이며, 각 도에 이미 절제사가 있고 또 관찰사가 있는데 군사를 징집하고 역군을 조발하는 사람들이 구름같이 부산스러워서 백성들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니, 절제사와 관찰사 이외의 여러 사명을 받든 자들을 모두 소환하소서. 사대부로서 조정에 벼슬하는 자는, 이미 몸을 바쳐 벼슬에 종사한 바에야 제 직책을 부지런히 하는 것이 원래 그 본분인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현관(顯官)의 직책을 맡고 있는 자가 근친(覲親)과 성묘(省墓)를 칭탁하여 왕의 구전(口傳) 허락을 받고서는 시골로 돌아가서 오래도록 머무르며 관직(官職)을 비우고 직무를 폐하니, 몸을 바쳐 왕을 섬기는 도리가 아닙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부모 상사에 분상(奔喪)하는 일 이외에는 관문 밖에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말고, 부득이한 일이 있는 자는 반드시 사직한 뒤에 가게 하며, 어기는 자는 엄하게 다스리소서.
서울에 있으면서 그 고을의 일을 맡아 보는 주와 현의 아전을 기인(其人)이라 하는데, 법이 오래되어 폐단이 생기므로 각 곳에 나누어 예속시켰더니, 노예같이 부리므로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서 도망가는 자가 있습니다. 해당 관청에서 경주인(京主人)에게 독촉하여 날마다 궐포(闕布) 한 필씩을 받는데, 경주인이 다른 사람에게서 빌려 내고 갚지 못하여, 곧 고을로 내려가서 서울에서 빈 수량의 곱절이나 독촉하여 징수하고 횡포를 부려 빼앗으니, 주ㆍ군이 피폐해지는 것이 또한 이 때문일 것입니다. 지난번 선공시(繕工寺)에서 날마다 기인의 궐포를 받아서 명분 없는 비용에 공급하니, 지극히 어질지 못한 일입니다. 이미 그 임무에 당하여 그 고을의 일에 이바지하지 못하고, 또 기인의 힘을 이용하여 나라의 역사에 이바지하지도 못하고, 한갓 백성의 고혈을 긁어서는 진흙과 모래같이 사용하여 나라의 근본을 깎으니, 전하께서 백성을 근심하는 뜻과 대단히 어긋난 것입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기인을 파하여 향리로 돌아가게 하고, 각 대궐의 역사는 근일에 혁파한 창고의 노비로 대신하고, 사설(司設)ㆍ막사(幕士)ㆍ주선(注選) 등속을 또한 모두 혁파하여 민생을 편안하게 하소서." 하였다.
○ 우리 태조와 이색ㆍ문달한ㆍ안종원에게 판상서시사(判尙瑞寺事)를 겸하게 하고, 조준을 지문하부사로 삼아 대사헌을 겸하게 했다.
○ 이치(李致) 등 3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시중 이색과 첨서밀직사사 이숭인을 남경에 보내어 신정을 하례하고, 명 나라 관원이 와서 우리나라를 감시하여 줄 것과, 또 자제를 입학하게 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현릉이 승하한 뒤로부터 천자가 매양 집정 대신을 불러 입조(入朝)하라 하였으나, 모두 두려워하여 가지 못하였다. 이색이 정승이 되자, 들어가 조회하기를 자청하였다. 우리 태조의 위엄과 덕이 날마다 성하여 안팎이 마음으로 복종하므로, 이색 자신이 돌아오기 전에 변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태조의 아들을 한 명 딸려 보내기를 청하니, 태조가 우리 태종(太宗 이방원)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 명 나라로 들어가는데, 길에서 한 관인(官人)이 색에게 말하기를, “귀국의 최영이 정예 군사 10만을 거느리고 있는데도 이(李 이태조의 옛 휘(諱))가 파리 잡듯 쉽게 잡았으니 백성이 이(李)의 망극한 덕에 대하여 어떻게 갚으려 하는가." 하였다.
○ 급전도감(給田都監)을 두었다.
○ 11월에 조영길(趙英吉)이 몰래 서울에 들어왔는데, 잡아서 곤장을 때려 다시 순천(順天)에 귀양보냈다.
○ 사헌부에서, 판개성부사 문달한이 외척의 세력을 빙자하여 함부로 탐욕을 부린다고 탄핵하여 합포(合浦)에 귀양보냈더니, 도당(都堂)이 가까운 땅에 두기를 청하므로 철원(鐵原)에 옮기게 하였다. 달한은 이림(李琳)의 매부이다.
○ 왜적이 구례(求禮) 등지를 침범하니, 김종연을 원수로 삼았다.
○ 밀직사 강회백(姜淮伯), 부사 이방우(李芳雨)가 남경으로 가서 조회를 청하였다.
○ 간관이 상소하여 지밀직 이무(李茂)ㆍ이빈(李彬)을 탄핵하기를, “지난번에 조영길이 제 마음대로 적소(謫所)를 떠나 몰래 경성에 들어왔으니, 그 형적이 괴이하고 비밀스러워 일이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영길이 왔을 때 무와 빈의 무리는 그 정상을 자세히 알고도 곧바로 위에 아뢰지 않았으므로, 죄가 진실로 작지 않은데 오히려 중직(重職)을 맡아 좌우에 있으니, 마땅히 헌부에 명해서 엄하게 국문하여 반측(反側 두 마음으로 이리 붙고 저리 붙는 것)하는 자들을 진정시키소서." 하였다. 소가 올라가자 그 직책만을 파하였다. 또 상소하기를, “무와 빈은 이인임의 무리가 되어 위세를 부렸으나, 다행히 전하의 자애를 입어서 그 지위를 보전하였으니, 참으로 마땅히 조심하고 공경하여 유신(維新)의 정사를 도와야 할 것인데, 영길의 반측하는 모의에 참여하려고 이무는 말을 빌려 타고 와서 집에 있고, 이빈은 가까운 이웃에서 상종하여 간사한 모의를 성사시키려 하였으니 죄가 이보다 더 클 수 없는데, 파직만 시키니 징계하여 다스리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무는 곡주(谷州)로, 빈은 안변(安邊)으로 귀양보냈다.
○ 다시 최영을 순군옥에 가두었다. 전법과 대간이 글을 올려 아뢰기를, “영이 비록 공이 있으나 요동을 치기를 주장하여 중국에 죄를 지었으니, 공이 죄를 가릴 수 없습니다. 베어서 중국의 노여움을 풀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 12월에 황제가 전원(前元)의 원사(院使) 희산(喜山)과 대경(大卿) 김려보화(金麗普化) 등을 보내어 말과 환자(宦者)를 구하였다.
○ 전법판서 조인옥(趙仁沃) 등이 상소하기를, “불교는 맑고 깨끗하여 욕심이 적고 세상을 떠나서 속세와 인연을 끊는 것을 종지로 삼으니, 본래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도가 아닙니다. 근세 이래로 여러 절의 중들이, 욕심을 적게 하라는 스승의 가르침을 돌아보지 아니하여, 토지의 조세와 노비의 노역(勞役)을 부처 공양에는 쓰지 않고 자신을 부유하게 하며, 과부의 집에 출입하여 풍속을 더럽히고, 권문세가에 뇌물을 바쳐서 큰 절을 차지하기를 구하니, 맑고 깨끗하고 속세를 끊는 교리에 있을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도행(道行)이 있고 이욕(利慾)이 없는 자를 가려서 여러 사원에 머물게 하고, 토지의 조세와 고용된 노비는 그 지방의 관원으로 하여금 거두어 공문서에 써서 중의 수를 계산하여 공급해서 주지(住持)가 훔쳐 쓰는 것을 금하며, 모든 남의 집에 유숙하는 중들은 간음을 범한 것으로 논죄하고, 귀천을 따질 것 없이 부녀자는 비록 부모상이라 하더라도 절에 가지 못하게 하여, 어기는 자는 실절(失節)한 것으로 논하며, 여승이 된 자는 실행(失行)한 것으로 논하고, 감히 부인(婦人)의 머리를 깎는 자는 중한 죄를 가하며, 향리(鄕吏)와 역리(驛吏)와 공노비, 사노비는 중이나 비구니가 되는 것을 허락하지 말고, 중으로서 항상 남의 집에 유숙하는 자는 군적에 채우게 하며, 그 주인 집도 죄를 주소서." 하였다.
○ 우사의(右司議) 윤소종(尹紹宗)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살피건대, 이인임은 유순하게 아첨하는 자질을 바탕으로 거짓과 간특한 마음을 품고 우리 현릉을 섬기어 외람되이 재상의 지위를 얻었습니다. 영전(影殿)의 역사에 안팎이 괴롭게 여기므로, 시중 유탁(柳濯)이 농한기를 기다리기를 청하다가 왕의 비위에 거슬려 파면되니, 인임이 드디어 그 자리를 대신하여 국정을 맡아, 정권을 잡고 뜻을 맞추어 영전의 역사를 계속해서 백성의 재력을 탕진하고 삼한을 병들게 하여, 마침내는 갑인년의 화를 초래하였습니다. 상왕이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으니, 인임이 나라의 권세를 제 마음대로 하여 일신의 백 년 부귀를 도모하고 삼한 만세의 사직을 돌보지 아니하며, 충성하는 어진이를 죽이고 대신을 귀양보내며, 서연(書筵)을 파하고 못된 아이들을 끌어들여 왕을 음악과 여색으로 인도하고, 왕을 놀고 사냥하는 데 빠지게 하여 상왕으로 하여금 친히 정사를 할 겨를이 없게 하였습니다. 환관ㆍ궁첩(宮妾)ㆍ옹부(饔夫)ㆍ내수(內豎)에게는 벼슬과 녹으로써 환심을 사고 뇌물로써 결탁하여 자신의 귀와 눈을 만들어 밤낮으로 왕께 자신의 칭찬하게 하였습니다. 달콤한 말과 작은 은혜로 국인(國人)을 우롱하여 환심을 사고, 임견미ㆍ염흥방을 심복으로 삼아 벼슬을 팔고 옥사를 돈으로 처리하여 문 앞이 물끓듯 하였습니다. 뇌물로써 부탁하는 자는 어진 인재가 되고, 행실과 염치가 있는 자는 불초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양부(兩府)ㆍ백사(百司)와 번진(藩鎭) 수령이 모두 그 문에서 나오고, 언관(言官)과 요직에 그와 사사로이 친한 사람을 배치하였습니다. 무한한 욕심이 끝이 없어서 남의 전토를 빼앗고 남의 노비를 빼앗으며, 부잣집 늙은이를 봉군(封君)해 준다고 꾀었으며, 인척의 젖내나는 아이들과 공인(工人)ㆍ장사치ㆍ천인ㆍ노예가 앉아서 국록을 소모하여, 숙위(宿衛)하는 신하와 백전(百戰)의 용사는 한 말의 곡식도 얻어먹지 못하였습니다.
사방에 근심이 많아서 전쟁이 한창인데 인임은 관심도 없이 패전한 장수라도 뇌물을 바치면 묻지 않으며, 적을 깨뜨린 장수라도 뇌물을 주지 않으면 상을 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온 나라 사람들이 명리를 다투는 것을 급무로 삼고 뇌물을 공(功)으로 삼아, 인임의 사문(私門)이 있는 것만 알고 왕실이 있는 것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임견미ㆍ염흥방의 죄악은 모두 인임이 빚어 낸 것입니다. 노씨(盧氏)는 궁첩(宮妾)이요, 최씨는 원비(院婢)인데, 왕의 뜻을 탐지하여 그들을 비(妃)로 봉해서 정궁(正宮)에 짝하게 하고, 그 내조에 의지하여 권세를 굳혔습니다. 그러고서도 오히려 그 계교가 주밀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제 집의 여종을 바쳐 소군(小君)으로 떠받들어 꿇어 엎드려 신이라 자칭했으니 왕실을 더럽히고, 조종께 치욕을 끼쳤습니다. 추한 소문이 중국에까지 전파되어, 천자께서, '삼한에 사람이 없다.' 하였으니, 그 죄악을 논하면 개국한 이래로 인임같이 심한 자가 없습니다.
여러 간흉들은 이미 멸족을 당하였는데, 인임은 머리를 보전하여 병으로 죽었고, 그 벼슬만 삭탈하여 그 집은 온전하니, 이것은 후세에 간적(姦賊)을 장려하는 셈이 됩니다. 원하건대, 전하는 굳건한 결단을 내리어서 인임의 죄를 따져서 관(棺)을 쪼개고, 집에 못을 파서 조종의 노여움을 풀게 할 것이며, 신민의 분통을 통쾌하게 풀어 주소서. 그 집과 노비와 재물은 일체 적몰하고, 그 자손은 멀리 귀양보내고 금고(禁錮)하여, 국인으로 하여금, 간적으로 나라를 그르친 죄에는 그 몸이 비록 죽었더라도 하늘에서 내리는 형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하면, 악한 일을 하는 자는 두려워하고 착한 일을 하는 자에게는 권하여져서, 인심이 바로잡히고 나라의 운수가 길어질 것입니다." 하였다. 소가 올라가니, 자손을 금고하라고 명하였다.
○ 최영을 베었다. 영은 본관이 철원인데, 유청(惟淸)의 5세손(五世孫)이다. 풍신과 용모가 괴걸ㆍ위대하고, 힘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강직하고 충성하고 청백하였다. 매양 군진에 나아가 적을 상대할 때면 신기(神氣)가 안정되고 차분하여 화살과 돌이 좌우에 날아와도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고, 한걸음이라도 퇴각하는 전사는 모두 베어서 반드시 이기도록 하였다. 그 때문에 크고 작은 여러 싸움에 향하는 곳마다 공을 세워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어서, 나라가 힘입어 편안하고, 사람들이 그 혜택을 받았다. 일찍이 영의 나이 16세 때에 아버지 원직(元直)이 죽으면서 훈계하기를, “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 하였다. 영이 유훈(遺訓)을 마음속에 간직하여 생업을 일삼지 않으니, 사는 집은 비습하고 좁으며 의복과 음식이 검소하여, 살찐 말을 타고 가벼운 옷차림한 자를 보면 개돼지같이 여겼다. 비록 오랫동안 장수와 정승으로 중한 병권을 맡고 있었으나 청탁이 그에게 이르지 못하였으니, 세상에서 그 청렴한 것을 탄복하였다.
대체(大體)를 지키기를 일삼고 세세한 사리를 따지지 않아서, 평생토록 병권을 맡았으나 휘하 군사 중에 얼굴을 알아보는 자가 수십 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좀 우직하고 학술이 없어서, 모든 일을 자기 뜻대로 결단하고, 죽이기를 좋아하여 위엄을 세웠으며, 늙어서는 지식과 사려가 전도(顚倒)하고 착란(錯亂)되어, 공연히 요동을 치는 군사를 일으켰다. 간대부(諫大夫) 윤소종이 논하기를, “공은 한 나라를 덮었고, 죄는 천하에 가득하다." 하였으니, 세간에서 명언이라 하였다. 형(刑)에 임하여 말과 얼굴빛이 태연자약하였다. 죽던 날에 도성 사람들이 저자를 파하고, 원근(遠近)에서 말을 전해들은 자와 거리의 아이와 골목의 부녀에 이르기까지 모두 눈물을 흘렸으며, 시신이 길 옆에 있으니 길가는 자가 말에서 내렸다. 도당에서 쌀ㆍ콩 1백 50석과 베 2백 50필을 부의하였다.


 

[주D-001]이고양이[李猫] : 당 나라 이의부(李義府)가 겉으로는 부드럽고 속으로는 남을 해칠 마음을 가졌으므로, 당시에 그를 '이고양이'라 하였다.
[주D-002]군호(軍號) : 대개 출병할 때에 적에게 시위하기 위하여 군사의 실수(實數) 이외에 몇만 혹은 몇십만이라고 칭하는 것을 군호(軍號)라 한다.
[주D-003]곽광전(霍光傳) : 한 나라 곽광(霍光)이 대신으로서 무도한 창읍왕(昌邑王)을 폐하고 선제(宣帝)를 세운 사실을 기록한 책이다.
[주D-004]정(政) : 진 시황(秦始皇)의 이름이 정(政)인데, 실상은 진왕의 아들이 아니고, 여불위(呂不韋)의 아들이라 한다.
[주D-005]예(睿) : 진(晉) 나라 원제(元帝)의 이름이 예(睿)인데, 실상은 낭야왕(琅瑘王)의 아들이 아니고 우씨(牛氏)의 아들이라 한다.
[주D-006]혜제(惠帝)의 후사(後嗣) : 혜제(惠帝)가 일찍 죽고 아들이 없는데, 그의 어머니 여태후(呂太后)가 다른 사람의 아들을 몰래 데려다가 혜제의 아들이라 거짓 칭하고 황제를 삼았다.
[주D-007]주문공(朱文公)이……써서 : 주자(朱子)가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저술하여 춘추(春秋)의 필법(筆法)을 썼는데, 위에 인용한 세 가지 사실을 곧은 붓으로 썼다는 것이다.
[주D-008]분경(奔競) : 벼슬을 청탁하기 위하여 세력 있는 집에 분주히 왕래하는 것이다.
[주D-009]몸을……할 만한 : 한 나라 동중서(董仲舒)의 상소에, “임금은 마음을 바르게 하여 조정을 바르게 하고, 조정을 바르게 하여 백관을 바르게 하고, 백관을 바르게 하여 만민(萬民)을 바르게 하여야 한다." 하였는데, 여기서는 정승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주D-010]조종께서……대신하여 : 《서경》에, “정치와 관직은 하늘의 일을 사람이 대신하는 것이다." 하였다.
[주D-011]출(出)·입(入) : 법관이 죄인을 판결할 때에 중죄(重罪)를 가볍게 다스리는 것을 출(出)이라 하고, 경죄(輕罪)를 중죄로 다스리는 것을 입(入)이라 한다.
[주D-012]중(中)·화(和) : 음악은 중정(中正)과 화평(和平)을 위주로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고려사절요 제34권
 공양왕 1(恭讓王一)
기사 원년(1389), 대명(大明) 홍무 22년


○ 봄 정월에 예문춘추관 전교시에서 글을 올리기를, “예문관은 사명(詞命)을 맡고, 춘추관은 기사(記事)를 맡고, 전교시는 사전(祀典)을 맡고 축문을 수찬하니, 이 세 가지는 모두 중요한 일입니다. 이러므로 선왕이 그 관청을 금중(禁中)에 두고 '금내(禁內)'라고 하였는데, 지금은 관(館)과 시(寺)가 밖에 있으니, 선왕이 관직을 설치한 뜻이 아닙니다. 지금부터는 사한(史翰) 2명과 전교 1명에게 궐내로 들어와 숙직하게 하여, 옛 제도를 회복하소서." 하니, 창(昌)이 그 말을 따랐다.
○ 2월에 창이 이인임을 장사 지내도록 허락하니, 윤소종(尹紹宗)이 또 동사(同舍) 허응(許應)ㆍ민개(閔開) 등과 다시 상소를 올려 인임의 죄를 논핵하려 했으나 날이 저물어 상소를 올리지 못하였다. 마침 윤소종이 등에 등창이 나서 휴가를 청하였으므로 허응 등이 그 글을 중지시켜 올리지 않았다. 이인임의 족당은 윤소종을 미워하여 그를 죽이려고까지 하였다. 소종이 성균관 대사성으로 옮겨지자 그제야 이인임을 장사지냈다.
○ 동지밀직사사 윤사덕(尹師德)을 남경에 보내어 최영(崔瑩)을 베어 죽인 것을 아뢰었다.
○ 경상도 원수 박위(朴葳)가 병선 1백 척을 거느리고 대마도를 쳐서 왜적의 배 3백 척과 막사를 불살라 거의 없애 버렸다. 원수 김종연(金宗衍)ㆍ최칠석(崔七夕)ㆍ박자안(朴子安) 등이 잇달아 이르러 사로잡혀 갔던 백성 1백여 명을 찾아 돌아왔다. 창이 박위에게 의복과 안장 갖춘 말과 은정(銀錠)을 하사하여 권장(勸獎) 위유(慰諭)하였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박위는 막사와 배만 불살랐을 뿐이고, 포로를 빼앗은 사실은 없다." 하였다.
○ 간관이 상소를 올려 부병(府兵)을 논하기를, “적이 생각하옵건대, 우리 태조께서 부병을 설치하시고 군부사(軍簿司)을 시켜서 마섭(馬攝)의 정무를 맡게 하셨는데 풍채와 무예를 구비한 자가 그 선발에 참여하게 되어, 이 때문에 장수는 그 적임자를 얻었고, 군사는 날래고 강하게 되었습니다. 근년 이후로는 벼슬로 들어오는 길이 많아져 군정(軍政)이 온통 무너져서 도목(都目)에 구애를 받거나, 청탁으로 인하여 나이나 재능을 묻지 않고 벼슬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포대기에 쌓인 어린아이나 공(工)ㆍ상(商)과 노예가 조그만 공도 없으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국록을 소모하니, 한 번 급한 일이 있으면 장차 어떻게 이들을 쓰겠습니까. 이는 선왕(先王)께서 군사를 설치한 뜻이 전혀 아닙니다. 용맹과 지략을 모두 갖춘 자를 정선하시어 이에 충당하시고, 항상 무예를 익히게 하여 그 능력을 조사하여 승진시키기도 하고 내쫓기도 하소서. 대호군과 상호군은 임금의 호위이며 군(軍)의 사표(師表)이오니 늙은 사람과 어린아이들에게는 이것을 시키지 말 것이며, 제색(諸色)의 공인과 장인 중에 공로가 있는 자는 돈과 곡식으로 상을 주고 일을 맡기지는 마옵소서. 선왕이 설치한 관직의 정원 외에 더 설치한 인원수는 일체 모두 삭감하소서." 하였다.
○ 3월에 사헌부에서 민중리(閔中理)가 진주에서 아버지의 상(喪)에 달려가면서 생선과 고기를 싣고 간 것과, 판도 판서가 되어서는 기복시키기를 기다리지 않고 사무를 보고 녹을 받은 죄를 탄핵하여 귀양보냈다.
○ 예조에서, 조회를 받을 때에 음악을 사용하기를 청하니, 창이 그 말을 따랐다.
○ 강회백(姜淮伯)이 남경에서 돌아왔다. 예부에서 황제의 명을 받들어 자문을 보내어 이르기를, “고려는 산이 막히고 바다를 등져서 풍속이 다르니, 비록 중국과 서로 통하고 있으나 떨어지고 합함이 일정하지 않았다. 이제 신하가 그 아버지를 내쫓고 아들을 왕으로 세워 중국에 조회하러 오기를 청하니, 이는 인륜이 크게 무너지고 왕의 도가 전혀 없기 때문에, 신하 노릇하지 않는 반역이 크게 드러난 것이다. 사자에게 돌아가서 동자(童子 창(昌))가 와서 조회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라. 왕으로 세우는 것도 저희들에게 달렸고 폐하는 것도 저희들에게 달렸으니, 중국은 상관이 없다." 하였다.
○ 사관 최견(崔蠲) 등이 글을 올리기를, “사관의 임무는 왕의 언행ㆍ정사와 백관의 시비ㆍ득실을 모두 사실대로 써서 후세에 보여 권계(勸戒)를 남기는 까닭으로, 예로부터 국가를 가진 자는 사관의 직책을 중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이러므로 본조에서도 예문관ㆍ춘추관을 설치하여 문학과 행실을 갖춘 자 8명을 뽑아서 모두 사관과 문한(文翰)의 직책을 맡겼으며, 또 겸관을 두어 이를 통솔하게 하였으니, 그 책임을 중하게 하는 까닭입니다. 근년 이후로 사관과 문한이 나누어져 둘이 되고, 겸관도 직무를 보지 않으며, 공봉(供奉) 이하 4명만으로 이를 담당하게 하여, 사실을 기록하는 데 갖추지 못하게 되었으니, 국가에서 사관을 설치한 본뜻이 아니옵니다. 지금부터는 사한(史翰) 8명은 그 직임을 같이하게 하여 각기 사초 2본을 만들게 하고, 임기가 차서 옮기게 되면 1본은 사관(史館)에 바치고 1본은 집에 간수하여 뒷날의 상고에 대비하게 하고, 겸관과 충수찬(充修撰) 이하의 관원은 각기 보고 들은 바에 의하여 이를 기록하여 사초를 만들어 모두 사관에 보내게 하고, 또 본관(本館 사관(史館))에서는 직접 서울과 지방의 크고 작은 아문에 통첩하여 시행한 모든 일을 일일이 사관에 보고하게 하여 기록하는 데에 전거로 삼게 하고, 이를 영원한 제도로 삼게 하십시오." 하니, 창이 그 말을 따랐다.
○ 여름 4월에 예의사(禮儀司)에서 매월 육아일(六衙日)에 조참(朝叅)하기를 청하였다.
○ 이색(李穡)이 남경에서 돌아왔다. 황제가 평소부터 이색의 명망을 들었으므로 예로써 매우 후하게 대접하였다. 이에 이르기를, “너는 원조(元朝)에 벼슬하여 한림이 되었으니 응당 중국말을 알 것이다." 하였다. 이색이 중국말로 빨리 대답하기를, “왕이 친히 조회하기를 원합니다." 하니, 황제가 알아듣지 못하여 예부의 관원이 이를 전해 아뢰었다. 황제가 웃으며 이르기를, “너의 중국말이 꼭 나하추[納哈出]와 같다." 하였다. 이색이 발해에 이르러 두 객선과 같이 왔는데, 반양산(半洋山)에 이르러 회오리바람이 일어나서 두 객선이 모두 침몰되고, 태종(太宗)이 탄 배도 거의 구원하지 못할 뻔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여 자빠지고 넘어졌으나 태종은 신색이 태연하더니, 마침내 보전하여 돌아왔다. 이색이 돌아와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지금 이 황제는 마음에 주장이 없는 임금이었다. 내가, '황제가 반드시 이 일을 물을 것이다.' 하고 생각하면 황제가 그것은 묻지 않았고 황제가 물은 것은 내가 생각하지 않은 것이었다." 하니, 그때의 의논이 이를 비난하기를, “대성인의 도량을 속된 선비가 비평할 수 있는 것이랴." 하였다.
○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아뢰기를, “입춘으로부터 입추에 이르기까지 사형을 정지하고, 서울에서는 다섯 번 복심해서 아뢰고, 지방에서는 세 번 복심해서 아뢴 뒤에야 죄를 결단하도록 허락하고, 군기(軍機)와 반역에 관계된 일은 이 한정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하였다.
○ 도평의사사에서 전제(田制)를 의논하였다. 이때 전제가 크게 문란하여 겸병하는 집들이 토지를 빼앗아 산과 들을 차지하였으니, 독해(毒害)가 날로 깊어 백성들이 서로 원망하였다. 우리 태조가 대사헌 조준(趙浚)과 더불어 사전을 개혁하고자 하였는데, 이색이 옛 법을 경솔하게 고쳐서는 안 된다 하며 그 의논을 고집하여 따르지 않았고, 이임(李琳)ㆍ우현보(禹玄寶)ㆍ변안열(邊安烈)도 모두 개혁하려 하지 않았다. 이색을 유종(儒宗)으로 여기고 그 말을 빌려 여러 사람의 귀를 현혹시켰으므로, 개혁하여 사전을 공전으로 회복하려는 의논이 결정되지 못하였다. 예문관 제학 정도전(鄭道傳)과 대사성 윤소종(尹紹宗)은 조준의 의논에 찬동하고, 후덕 부윤(厚德府尹) 권근(權近)과 판내부시사(判內府寺事) 유백유(柳伯濡)는 이색의 의논에 찬동하고, 찬성사 정몽주(鄭夢周)는 두 사이에서 어름어름하고 있었다. 이에 각 관사(官司)로 하여금 사전을 개혁하여 공전으로 회복하는 이해(利害)를 의논하게 하니, 의논한 자 53명 중에 개혁하고자 하는 자가 10에 8,9명이었는데, 개혁하지 않으려는 자는 모두 대가(大家)의 자제였다.
○ 예의 판서(禮儀判書) 민제(閔霽)가 군신(群臣)의 의종(儀從)과 일산(日傘), 부채[扇]에 차등을 두도록 다시 정하기를 청하니, 그 말에 따랐으나 끝내 시행되지 않았다.
○ 가뭄 때문에 죄수를 사면하였다.
○ 10학(學)에 교수(敎授)를 두었다.
○ 6월에 문하평리 윤승순(尹承順)과 첨서밀직사사 권근을 남경에 보내어 왕이 친히 조회하기를 청하였다.
○ 심덕부(沈德符)를 판삼사사로, 안종원(安宗源)을 문하찬성사로, 정몽주를 예문관 대제학으로, 정영손(丁令孫)ㆍ이서원(李舒源)을 밀직부사로 삼았다.
○ 경상도 도절제사 박위(朴葳)가 왜적의 배 1척을 잡고 32급을 베었다.
○ 안종원(安宗源)을 남경에 보내어 성절(聖節)을 하례하고, 밀직사 황보림(皇甫琳)은 천추절(千秋節)을 하례하였다
○ 경기 절제사 박자안(朴子安)이 왜적과 싸워 30급을 베었다.
○ 가을 7월에 왜적의 배 20척이 와서 해주(海州)에 정박하므로, 절제사 유만수(柳曼殊)와 우리 공정왕(恭靖王 정종(定宗))을 보내어 이를 막았는데, 활과 화살을 하사하였다.
○ 대사성 윤소정(尹紹宗)이 글을 올리기를, “《역경》에, '어릴 때에 바름을 기름이 성인(聖人)이 되는 공부다.' 하였습니다. 하늘이 준 성품은 본래 선하여 악이 없으니, 범인(凡人)과 요순(堯舜)은 애당초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옛날의 성왕(聖王)은 진실로 태교(胎敎)를 받고 태어나서, 강보(襁褓)에 있을 때에는 보(保)가 있어서 그 신체를 보호하여, 마땅한 기거(起居)에 나아가고 조심하는 마음을 갖게 하였으며, 부(傅)가 있어 덕의(德義)를 가르쳐서 지나친 기호(嗜好)를 조절하고 그릇된 견문을 막게 하였는데, 특별히 행실이 바른 선비를 뽑아서 함께 출입하고 기거하게 하였으므로, 반드시 바른 일만 보고 바른 말만 들어서, 외물(外物)의 유혹이 들어올 수 없고 천성(天性)의 진실(眞實)함이 잘 길러져서, 마음속에 가르침을 받을 터전이 맑고 고요하여 물욕의 가림이 없는 까닭으로 모두 요순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臣)이 적이 보건대, 주상께서 《논어》를 읽은 지 13개월이나 되었는데 매일 새로 안 것이 많아야 서너 글자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혹시 읽기가 어렵다 하더라도 주상은 총명하신 재주를 타고났으니, 배움에 있어 하지 않는 것이지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주상께서 서연(書筵)에 잠시 납셨다가 금새 내전(內殿)에 들어가서 환관ㆍ궁녀와 가까이 지내시어, 마음이 외물에 얽매어 있고 글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근일에 이르러서는 학문을 게을리 하는 흔적이 겉으로 나타나서, 사부(師傅)가 물러가기 전에 음훈(音訓)을 통하기도 전에 문득 읽다가 문득 일어나고, 조금 후에는 어선(御膳)의 때를 놓친다고 말하면서 내전에 들어가시니, 학문이 어떻게 향상되겠으며 덕이 어떻게 밝아지겠습니까. 상왕(上王)이 처음 왕위에 오르실 때에 총명하여 학문에 뜻을 두셨는데, 간신이 나라를 도둑질할 계책으로 즉시 강연을 파하여 우리 상왕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여 하마터면 종사(宗社)를 전복시킬 뻔하였습니다. 주상께서 왕위를 전해 받은 초기에 대신이 전조(前朝 전왕(前王))의 일을 경계로 삼아 맨 먼저 경연(經筵)을 열어 성인의 학문을 권면하여 요순 같은 성인을 주상에게 기대하였사옵니다. 만약 학문을 게을리 하신다면 종묘는 어떻게 할 것이며 생령(生靈)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지금 7월의 길한 절후인데 곡식을 손상시키는 바람이 불어, 국가 생민(生民)의 생활을 해치니, 하늘의 견책이 이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홍범(洪範)〉에 이르기를, '성스러움에 제때에 바람이 부는 것이며, 몽매함에 항상 바람이 부는 것이다.' 하였는데, 주상께서 학문을 게을리 하시는 흔적이 나타나 징계하는 바람이 응한 것이니, 하늘이 몽(蒙)으로써 주상에게 경계하는 뜻이 어찌 매우 명백하지 않습니까. 옛날에는 8세에 소학(小學)에 들어가고, 10세가 되면 사부에게 나아가 생활하였습니다. 옛날에 노(魯)나라 양공(襄公)은 나이 겨우 8세인데도 나가서 천하 제후의 회합(會合)에 참여하였으니, 어찌 어선(御膳)을 반드시 깊은 궁궐 안에서 먹었겠습니까. 옛날에 정자(程子)가 강관(講官)이 되어서 글을 올리기를, '임금이 하루 안에 환관과 궁첩(宮妾)을 가까이하는 때가 적고 어진 사대부와 접하는 때가 많게 되면, 자연히 기질이 변화하여 덕기(德器)가 이루어진다' 하였습니다.
주상께서는 매일 아침 태후(太后)에게 문안드린 후에는 편전(便殿)에 나가서 어선을 올리도록 명하고, 여러 간관(諫官)과 관각(館閣)의 학사(學士)에게 명하여 항상 곁에서 모시도록 하여, 조용한 말로 도리를 설명하기를 해가 기울거나 밤이 깊을 때까지도 하여, 천명이 떠나고 머무는 것과, 인심이 따르고 배반하는 것, 농사의 어렵고 고생스러움, 수자리의 괴로움, 치란의 근본, 흥망의 자취, 고금의 예악, 인물의 어질고 어질지 못한 일들을 날마다 앞에 와서 진술하게 하면, 오랫동안 들어서 저절로 통달하게 되며, 습관이 천성(天性)이 되어 덕이 요순과 같게 될 것이옵니다. 이를 항상 깊은 궁궐 안에 있어서 부인과 환관의 사특함에 물이 들어, 성(聖)이 변하여 몽(蒙)이 되는 것에 비한다면 그 유익함이 어찌 매우 크지 않겠습니까. 환관과 부인들의 버릇없는 행동은 실로 왕의 덕을 해치는데 있어 곡식을 해치는 가라지[稂莠]와 같으며, 어진 사대부의 훈도하는 이익은 곧 성덕(聖德)을 함양하는데 있어, 만물을 기르는 우로와 같습니다. 무릇 궁녀와 환관도 정자가 경연에서 아뢴 말에 따라, 모두 나이 40,50세 이상의 중후한 사람을 뽑아서 측근에 대비하고, 나이 젊은 자는 측근에 나아오지 못하도록 하여 왕을 사특하고 사사로운 데로 인도하는 근원을 끊게 하소서. 대궐에서 쓰는 기용(器用)은 주(紂)의 옥배(玉杯)와 상저(象箸)를 경계(警戒)로 삼고, 우(禹) 임금이 의복을 검소하게 하던 것을 모범으로 삼으소서.
지금의 영서연(領書筵)ㆍ지서연(知書筵)은 옛날의 태사(太師)ㆍ태부(太傅)이며, 시독은 옛날의 소사(少師)ㆍ소부(少傅)입니다. 지금부터는 정전(正殿)에서 글을 읽을 때에 지서연이 나아오면 반드시 일어나서 자리를 피하여 경서를 배우고, 지서연이 물러가면 역시 일어날 것이오며, 시독이 나아오고 물러갈 때에도 역시 자리를 피하고 얼굴빛을 고쳐 사부(師傅)를 존중하는 뜻을 극진히 하소서. 이것이 이른바, '탕왕(湯王)은 이윤(伊尹)에게 반드시 배우고 난 뒤에 그를 신하로 삼았기 때문에 수고롭지 않고 왕 노릇을 하셨고, 환공(桓公)은 관중(管仲)에게 반드시 배우고 난 뒤에 신하로 삼았기 때문에 수고롭지 않고 패자(覇者)가 되었다.'(《맹자》에 있는 말)는 것이니, 성덕을 양성하는 데에는 이보다 더 급한 것이 없습니다. 주상께서는 위로는 태조(太祖)께서 5백 년을 전해 주신 왕통(王統)을 생각하시고, 아래로는 삼한(三韓)의 억조 창생의 기대를 생각하시어, 미천한 신의 간절한 말을 죄주지 마시고 살펴 받아들여 닦고 반성하여 천만세의 태평을 이루소서." 하였다.
○ 왜적이 함양ㆍ진주를 침범하니, 절제사 김상(金賞)이 가서 구원하였으나 패하여 죽었다.
○ 문하 시중 이색(李穡)이 해직을 원하고 이임(李琳)을 천거하여 자신를 대신하게 하니, 이색을 판문하부사로, 이임을 시중(侍中)으로, 홍영통(洪永通)을 영삼사사로 삼았다. 이색이 일찍이 홍영통ㆍ이무방(李茂方) 등과 함께 남신사(南神寺)에서 백련회(白蓮會)를 설치하니, 식자들이 그 부처에게 아첨하는 것을 기롱하였다.
○ 8월에 대사헌 조준(趙浚) 등이 소를 올리기를, “적이 생각하옵건대, 사전(私田)은 사문(私門)에만 이익이 되고 나라에는 이익이 없으며, 공전은 국가에 이익이 되고 백성에게도 매우 편합니다. 사문에 이익이 되면 겸병이 이로써 일어나게 되고, 용도가 이로 말미암아 부족하게 되며, 국가에 이익이 되면 창고가 차고 국가의 재용이 넉넉하게 되며, 송사가 그치고 백성이 편안하게 될 것입니다. 국가를 가진 이는 마땅히 경계(經界)를 인정(仁政)의 시초로 삼아야 될 것이온데, 어찌 겸병의 문을 열어서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전지는 본래 사람을 기르기 위한 것인데 사람을 해치는 데 알맞게 되었으니, 사전의 폐해가 이 지경으로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다행히 하늘이 국가를 도와서 여러 대에 쌓인 폐단을 제거하게 되었으니, 사전을 개혁하여 공전으로 회복하는 이해(利害)는 분명히 알 수 있는데도 세신(世臣)과 대가(大家)들은 오히려 폐단이 있는 풍속을 이어받아 말하기를, '본조(本朝)의 이루어진 법을 하루아침에 갑자기 개혁해서는 안 되며, 만일 이를 개혁한다면 사군자(士君子)의 생계가 날로 곤란해져서 반드시 공업과 상업에 마음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하면서, 서로 부언(浮言)을 선동하여 여러 사람의 귀를 현혹시키고 사전을 일으켜 부귀를 보전하고자 하니, 그것이 한 집의 계책으로서는 잘된 일이지마는 사직과 생민에는 어찌되겠습니까. 만약 사전을 일으키면 이는 삼한(三韓)의 백만 민중을 기름불 속에 밀어 넣는 것입니다. 지금 나라가 잘 다스려지기를 도모하면서 도리어 백성들에게 걱정을 끼치게 되니, 불가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적이 생각하건대, 경기의 땅으로 왕실을 보위하는 사대부의 전지로 삼아 그것으로 생계를 이바지하고 업을 두텁게 하며, 나머지는 모두 개혁하고 제거하여 위에 바치거나 제사 지내는 용도에 충당하고, 녹봉과 군수의 비용을 넉넉하게 하여, 겸병의 문을 막고 쟁송(爭訟)의 길을 근절시키는 영원한 아름다운 법을 정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 유구국(琉球國)의 중산왕(中山王) 찰도(察度)가 사신을 보내와서 빙문하고, 우리나라에서 왜적에게 사로잡혀 간 인구(人口)를 돌려보냈다.
○ 간관 이준(李竱) 등이 사전을 다시 일으킬 수 없다고 글을 올려 간쟁하니, 좌사의(左司議) 문익점(文益漸)이 이색(李穡)ㆍ이임(李琳)ㆍ우현보(禹玄寶)에게 붙어 병을 핑계하여 서명하지 않고, 다음날 곧장 서연(書筵)으로 달려갔다. 조준이 탄핵하기를, “익점은 본래 유일(遺逸)로서 진주(晉州)의 두메에서 몸소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어질다 하여 간대부(諫大夫)로 임명하여 왕의 측근에 두고 왕의 자문(諮問)에 이바지하게 하였으니, 진실로 마땅히 충언을 남김없이 올리고 치도(治道)를 진술하여 다스림을 도와야 될 것인데도, 우물쭈물하며 비굴하게 남의 비위를 맞추어 간쟁하는 절개가 없으며, 몸을 굽히고 하는 일 없이 남에게 순종만 하고 있습니다. 지난번 동료 오사충(吳思忠)과 이서(李舒)가 각기 소를 올려 시사를 극력 말하였으나, 익점은 녹(祿)만 지키고 관직을 잃을까 걱정하여 한마디도 언급함이 없었으며, 또 동료가 연명하여 소를 올려 전제를 극력 논하였으나, 익점은 권세에 아부하여 병을 핑계하고 참여하지 않은 것을 스스로 잘한 계책으로 생각하여, 위로는 전하의 사람을 알아보는 밝은 지혜에 누를 끼치고, 아래로는 사림의 기대를 저버렸으니, 이것은 마땅히 그 관작을 삭탈하고 산야(山野)에 돌려보내어, 말할 책임이 있는데도 말하지 않는 자의 경계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하니, 곧 익점을 파면시켰다.
○ 창(昌)의 생일에 이죄(二罪) 이하의 죄수를 사면하였다.
○ 양광도 도관찰사(楊廣道都觀察史) 성석린(成石璘)이 주ㆍ군에 의창(義倉)을 설치하기를 청하니, 그 말을 따랐다.
○ 정지(鄭地)를 양광 전라 경상도 도절제체찰사로 삼아서 적을 토벌하고 백성에게 전지를 경작시키며, 성곽을 수축하는 일을 겸하여 맡게 하였다.
○ 전객령(典客令) 김윤후(金允厚)와 부령(副令) 김인용(金仁用)을 답례로 유구국(琉球國)에 보냈다.
○ 사재 부령(司宰副令) 문윤경(文允慶)이 그 아버지의 첩을 간음하고, 또 관아의 물품을 도적질하니, 법사(法司)에서 탄핵하여 윤경과 그 아버지의 첩을 목매어 죽였다.
○ 4월부터 이 달에 이르기까지 늘 비가 와서 물이 솟아오르고 산이 무너졌다.
○ 9월에 창(昌)이 중국에 친히 조회하려 하니 이색이 아뢰기를, “요동의 들판은 매우 추우니, 일찍이 떠나야 합니다." 하였다. 조금 후에 창(昌)의 어머니 이씨(李氏)가 그의 나이 어린 것을 민망하게 여겨 도당(都堂)에 말하여 가는 일을 중지하게 하였다.
○ 영흥군(永興君) 환(環)이 일찍이 어떤 일로 무릉도(武陵島 울릉도)로 귀양갔는데, 생사를 알지 못 한 지가 19년이나 되었다. 그의 아내 신씨(辛氏)가 환이 풍파에 표류하여 일본국(日本國)에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조정에 청하여 가노(家奴)를 시켜 사신을 따라가서 물색하여 찾은 것이 서너 번이었다. 이때에 와서 그 가노가 환이라고 칭하는 자와 함께 왔는데, 위인이 매우 어리석고 얼굴도 닮지 않았으며, 말도 많이 잊어버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름과 성이며 마을도 알지 못하였다. 신씨의 아우 전 판사 극공(克恭)과 인친(姻親) 전 판개성부사 박천상(朴天祥), 전 밀직부사 박가흥(朴可興), 지밀직 이숭인(李崇仁)ㆍ하륜(河崙)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진짜 환이 아니다." 하였으나, 신씨가 경산부(京山府)로부터 와서 보고는 매우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다른 사람의 아는 것이 어찌 아내의 아는 것만 같으랴." 하고, 드디어 사헌부에 송사하였다. 사헌부에서 종실(宗室)과 천상 등을 모아 대질하니, 환의 두 아들과 형인 중 참수(旵髓)와 종실의 여러 사람이 모두 말하기를, “진짜 영흥이다." 하니, 천상 등을 탄핵하여 무고죄(誣告罪)를 주었다. 숭인이 도망하니, 옥졸(獄卒)이 숭인의 아들 차약(次若)을 두 손을 뒤로 묶고는 숭인을 찾아내라고 등을 매질하여 피가 흘렀다. 길에서 우리 태조(이성계(李成桂))를 만났는데 옥졸이 차약을 길가의 집에 숨기니, 차약이 큰소리로 부르짖기를, “영공(令公 태조)은 나를 살려 주십시오." 하였다. 태조가 놀라서 불러 물어보고는 옥졸에게 이르기를, “어찌 아들에게 아버지를 찾도록 강요할 수 있느냐." 하고, 곧 석방하도록 명령하고, 또 종자 한 사람을 시켜 차약을 집에 데려다 주게 하였다. 이에 시중 이임(李琳)과 창에게 아뢰기를, “즉위한 초기에 너그러운 정사를 베풀어야 될 것이오니, 천상 등을 사면하기를 바라오며, 더구나 숭인은 서연(書筵)에서 시강하여 학문을 보좌한 지가 오래되었으니, 직무에 힘쓰게 하기를 바랍니다." 하니, 천상 등 4명을 먼 지방으로 귀양 보냈다. 숭인이 서연에 나아가니 사헌부에서 또 탄핵하였다. 이때 윤소종(尹紹宗)이 숭인의 높은 재능을 질투하였고, 또 이색이 숭인을 칭찬하면서 자기는 칭찬하지 않는 것을 시기하여 갖은 방법으로 참소하고 헐뜯었다.
○ 창(昌)이 이색ㆍ이임과 우리 태조는 칼을 차고 신을 신은 채로 전상에 오르게 하고, 찬배(贊拜)하고 이름을 칭하지 말게 하였다. 각기 은 50냥과 채단 10필과 말 1필을 하사하고, 교지를 내려 권장하고 위유하였으니, 정몽주의 청을 따른 것이다.
○ 밀직 부사 유원정(柳爰廷)을 시중 경복흥(慶復興)의 무덤으로 보내어 제사 지내게 했는데, 그 제문에, “우리 선조 공민왕(恭愍王)이 경을 헌사(憲司)에 탁용하여 경에게 기강을 바로잡기를 맡겼으며, 침실에 불러들여 밤을 새워 정사를 자문하였다. 모든 백성들의 고락과 사대부의 충간(忠姦)을 밝게 알아내어, 이익되는 일을 일으키고 해되는 일은 제거하며, 현재(賢材)를 등용하고 불초한 자는 물리쳤으니, 드디어 안으로는 기철(奇轍)을 목 베고 밖으로는 홍건적을 섬멸하였다. 덕흥(德興)의 난리에 경과 최영(崔瑩)이 충성을 발하여 이를 쳐서 쫓아 우리 사직을 보존하였으며, 역적 신돈이 사도로 우리 선조(先朝)를 미혹시켜 영첨의사(領僉議事)가 되니, 삼한의 경대부가 어두운 밤에 달려가서 청탁하고 오직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여 그 문정(門庭)이 물 끓듯 하였는데, 신돈도 경의 청렴과 충성을 공경하였으며, 경을 굽히게 하려고 제 집에 오게 하여 권위(權威)를 보이자고 여러 번 은근한 뜻을 통하였으나 경이 한 번도 그 문에 나아가지 않으니, 신돈이 마침내 경을 참소하였던 것이다. 이에 명이(明夷)의 행이 있자 삼한 사람이 경을 아는 자와 알지 못하는 자가 모두 울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신돈이 주벌을 받은 뒤에, 선조가 경을 쫓은 것을 매우 뉘우쳐서, 바로 그날에 경을 불러 좌상에 복직시켰다. 우리 상왕이 왕위를 계승하니 적신 이인임(李仁任)이 기회를 타서 제멋대로 관직을 팔고 옥을 팔았으나 경이 조정에 있었기에 5,6년 동안은 사직이 조금 안정되었다. 인임이 경을 꺼려서 한정이 없는 욕심을 마음대로 부리지 못하므로 조석으로 눈을 흘겼으나, 우리 왕모(王母) 명덕비(明德妃)가 경을 깊이 신임하였기 때문에 감히 일을 일으키지 못하였다. 명덕비가 승하함에 미쳐서 인임이 여러 흉악한 사람을 사주하여 경을 내쫓았으니, 이에 인임의 흉악함이 극도에 달하여 원통한 소리가 천지 사이에 가득 차게 되었던 것이다. 아, 경의 관직은 신하로서 제일 높지마는 경성 근처에 한 이랑의 토지도 없고, 집 안에는 한 말의 곡식도 없었으며, 대그릇 밥에 물을 마시고, 해진 갖옷과 야윈 말[馬]로써 지냈으니, 천만년(千萬年) 지나간 옛날에서 찾더라도 경과 같은 이는 몇 사람이나 되겠으랴. 경의 충성과 청렴과 의열(義烈)은 삼한에 모범이 되고 만세에 권장할 만하므로, 내가 그 충성을 가상히 여겨, 특별히 사자(使者)를 보내어 제사를 드리게 하니, 이 특별한 대우를 흠향하여 길이 우리 왕가를 보우할지어다." 하였다.
○ 장하(張夏)ㆍ성석린(成石璘)을 문하 평리로, 조운흘(趙云仡)ㆍ김사형(金士衡)ㆍ최유경(崔有慶)을 동지밀직사(同知密直事)로, 권주(權鑄)를 밀직 제학(密直提學)으로, 민제(閔霽)를 개성윤(開城尹)으로 삼았다.
○ 김여지(金汝知) 등 3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윤승순(尹承順)과 권근이 남경에서 돌아왔다. 예부(禮部)에서 황제의 명을 받들어 도평의사사에 자문을 보냈는데, 그 자문에, “고려의 국내에 변고가 많아서 배신(陪臣)은 충신과 역적이 뒤섞여 하는 일이 모두 좋은 계책이 아니다. 왕위(王位)는 왕씨(王氏)가 시해를 당하여 후사(後嗣)가 끊어진 이후 비록 왕씨라고 꾸며서 이성(異姓)으로 왕을 삼았으나, 이것은 삼한이 대대로 지켜 왔던 좋은 일은 아니다. 옛날에도 임금을 시해한 적(賊)이 있었으나 임금의 죄악이 지극한 데서 생겼던 것이며, 무릇 임금을 시해한 자는 비록 난신적자이기는 하나, 또한 인정을 베풀어 천의를 돌이키고 많은 백성을 편안하게 한 자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고려의 배신들은 음모에 간사함까지 겹쳐서 지금까지 편안하지 못하였고, 설혹 역으로써 나라를 얻었을지라도 역으로 나라를 지키는 것이 될 일인가. 만약 역을 떳떳한 일이라고 한다면 역신이 잇달아 이를 일삼을 것인데, 모두 맨 먼저 역(逆)을 한 자가 이를 가르친 것이니, 또 무엇을 원망할 것이랴. 전에 예부에서 '동자(童子)는 서울에 올 필요가 없다'고 이문(移文)하였으니, 과연 어질고 지혜로운 배신이 보필하는 지위에 있어 위에서 군신의 분의(分義)를 정하고 나라에서 백성을 편안히 할 계책을 만든다면, 비록 수십 년을 조회하지 않더라고 무엇을 걱정할 것이며, 해마다 와서 조회하더라도 무엇을 싫어하겠는가." 하였다. 권근이 도중에서 사사로이 열어 보고 돌아와서는 이림(李琳)의 집에 먼저 보이고 난 후에 도당으로 보냈다.
○ 겨울 10월에 왜적이 양광도의 도둔곶(都屯串)을 침범하였는데, 도체찰사 왕안덕(王安德)이 왜적과 싸워 크게 패하였다.
○ 찬성사 배극렴(裴克廉)과 밀직 부사 박경(朴涇)을 남경으로 보내어 신정을 하례하였다.
○ 간관 오사충(吳思忠) 등이 예문관 제학 이숭인을 탄핵하기를, “숭인은 성품이 간사하고 탐욕스러우며 언행이 사특하고 아첨하며, 나라를 다스릴 만한 재주도 없고, 원대(遠大)한 생각을 할 만한 계책도 없는데, 문묵(文墨)의 말기만으로 출세하여 분수에 넘치는 명예를 얻어 중요한 관직에 오래 있었습니다. 이인임이 권세를 부릴 때에는 이 사람이 아첨하여 붙었으며, 임견미(林堅味)가 정권을 희롱할 때에는 또 그의 심복이 되어 자못 세력을 부리고 불법을 자행하였습니다. 부모의 상에 3년의 상기를 마치기 전에는 과거의 시관이 될 수 없는 것이 국가의 제도입니다. 그런데 숭인이 산기 상시로 있을 때,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는데도 감시(監試)의 시관을 요구하여 시관이 되었으나, 조복을 입고 시관노릇을 맡을 수 없기 때문에, 상시(常侍)의 높은 관직을 강등하고 상호군의 낮은 관직을 요구하여 과거 시험을 맡았으며, 더구나 어머니가 죽은 지 겨우 백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태연히 고기를 먹어 사람의 도리를 허물었으니 이는 불효입니다.
근래에 상국에서, 간흉들이 탐욕을 부린다 하여 우리나라를 절교하였는데, 간흉들이 처형되고 주상께서 중흥하여 시중 이색(李穡)이 중국에 들어가 조회할 때에 숭인이 따라갔는데, 전일의 탐욕의 마음을 고치지 못하고 몸소 물건을 팔고 사고 하기를 상인과 같이하여 중국 사람으로 하여금 우리 삼한 사대부의 면목에 침을 뱉게 하였으니, 비록 시를 칠보(七步)에 짓고, 입으로 요순의 말을 외울지라도 실로 개와 돼지보다도 못하니, 참으로 이른바 '소인유(小人儒)'인 것 입니다. 어찌 시독(侍讀)으로 삼아 왕의 측근에 두겠습니까.
근일에 와서는 그 간사한 꾀를 마음대로 부려 종친(宗親 영흥군(永興君) 환(環))을 무함하여 부자ㆍ형제ㆍ부부의 대륜을 무너뜨리고자 하였으나, 진상이 드러나자 말이 궁하여 명을 어기고 숨었는데, 주상께서 그를 시독이라 하여 특별히 죄를 사면하고 묻지 않았사오며, 또 선마(宣麻)를 내려 후한 예로써 대우하였는데도, 숭인은 천지의 포용하는 은혜를 알지 못하고 순월(旬月) 동안이나 지체하고 즉시 나와 사은하지 않았으니, 주상을 업신여기고 예를 무너뜨림이 심하였습니다. 그 불경함이 무엇이 이보다 크겠습니까. 헌사를 시켜서 죄를 추궁하여 엄하게 다스려 멀리 변방으로 귀양보내어 불효하고 불경함과 나라를 욕되게 한 죄를 징계하여 인륜을 바로잡고 선비의 절개를 권려(勸勵)하소서." 하였다. 창(昌)이 그 소를 헌부에 내려 그 죄를 추궁하니, 숭인이 또 도망하였으나 찾아 잡아서 경산부(京山府)로 귀양보냈다.
또 헌부에서 박돈지(朴惇之)가 일찍이 그 장모를 간음하였고, 이제 또 이색을 따라 중국에 들어가서 조회할 때에 몸소 물건을 팔고 샀다 하여 탄핵하니,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었다. 돈지는 숭인과 평소부터 친한 까닭으로 죄를 받게 된 것이다.
○첨서밀직사사 권근이 숭인을 구원하는 글을 올리기를 "숭인을 불효하다고 하는 것은 어머니가 죽고 난 후 3년 안에 시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그의 아버지 원구(元具)는 이미 늙고 병들어 금방 죽을 목숨으로 매우 급박하였는데, 그가 살아 있을 때에 아들이 감시(監試)를 맡는 영화(榮華)를 보고자 하였습니다. 국가에서 숭인의 재주를 중히 여기고 원구의 뜻을 가련하게 여겨 그로 하여금 감시를 맡게 하였습니다. 만약 숭인이 구차스럽게 사양하였다면 이는 죽은 어머니만 알고 살아 있는 아버지는 알지 못하는 것이 되며, 그가 후일의 비방을 면하고자 한다면 그 아버지의 뜻을 돌보지 않게 되기 때문에, 비록 마음속으로는 편안하지 못하였으나 힘써 직무에 나아간 것입니다. 이것은 비록 허물이 있지만 공자의 이른바, '허물을 보고서 그 사람을 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실로 효자의 불행이니, 불효라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관직에 있는 자 중에도 혹은 부모가 모두 죽고 난 후 3년 안에 왕의 구전(口傳)을 받았다 사칭하여 시험을 보고 과거에 오른 자가, 중요한 관직에 올라 헌부(憲府)에 앉아서 사람을 형벌하고 사람을 죽이면서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자가 있으니, 그 사람들은 부모가 모두 죽었으니 누구를 위한 영화이겠습니까. 오직 자기 몸을 위한 것일 뿐입니다. 아버지를 위하여 어머니에게는 미안한 일을 한 것이 불효가 된다면, 제 몸을 위하여 부모를 잊은 것이 참 효도가 되겠습니까. 하물며, 우리나라 사람이 3년상을 행하는 사람은 만 명에 혹시 한 명이 있을 정도이며, 국가에서 기복의 법을 만들어 거상하려는 뜻을 빼앗는데, 만약 숭인에게 죄를 주고 반드시 3년상을 행한 사람을 구하여 이를 쓰려고 한다면, 이는 만 명을 버리고 한 명을 얻는 것이므로 신은 주상께서 사람을 얻어 쓸 수 없을까 염려합니다. 숭인이 아버지를 사랑한 심정은 살피지 않고 불효하다는 명목으로써 허물을 씌우니 어찌 너무 가석하지 않습니까.
숭인을 불충이라고 한 것은 영흥(永興 환(環))의 진위를 대질할 때에 이미 왕의 명을 받았으면 마땅히 즉시 스스로 나아갈 것이온데, 미루면서 나아가지 않고 숨어 피하기까지 한 그것입니다. 그러나 숭인은 대신이요, 영흥의 진위에 대한 분별은 말을 잘못한 사소한 실수인 것입니다. 국가의 옛날 법으로써 이를 처리한다면 한 장의 공함(公緘)을 보내어 이를 묻는 정도에 불과할 뿐이옵니다. 하물며, 전일에 헌사(憲司)에서 글을 올리기를, '대신은 법을 범하였더라도 형리에게 보내어 욕보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으니, 주상께서 옳게 여겨 판격(判格)으로 정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숭인이 국가의 구법을 믿고 주상의 판지(判旨)를 믿어서 즉시 나아가서 변명하지 않았던 것인데, 헌사에서 노발하여 잡아 오게 한 후에야 구법을 의지할 것이 못 되며, 판지를 믿을 것이 못 됨을 알았습니다. 형세가 궁하고 일이 박하여 숨어 피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비록 겁이 많고 유약한 일이지만, 또한 조정의 처리가 도리를 잃어 그로 하여금 놀라고 두려워하게 한 것이며, 숭인이 마음에 불충한 생각을 품고 감히 왕의 명을 거역한 것은 아닙니다.
그가 영흥의 진위에 간섭한 일은, 그의 천성이 인자하고, 붕우를 매우 사랑하였기 때문인데, 마침 가흥(可興)의 무리와 서로 이웃이라 친하게 되어, 그의 말을 듣게 된 것이오며, 숭인이 거짓으로 이 말을 꺼낸 것은 아닙니다. 작위를 회복하고 난 후에 즉시 나아가서 사은하지 않은 것은 진실로 헌사를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지, 왕의 명을 공경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에 몸소 물건을 팔고 사고 하였다는 일로 그가 비난을 받게 된 것은 까닭이 있습니다. 지휘(指揮 관명(官名))이며 성이 진씨(陳氏)인 자는 그 아내가 곧 숭인의 아내의 종족이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그 집에 가게 되어 시항(市巷)을 지나갔으며, 또 구경을 하려고 길을 지나갔는데, 숭인과 사이가 좋지 못한 자가 이것으로 말을 만들어 무함하고 헐뜯으니, 이 말을 들은 자는 내용을 살피지도 않고 사실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만약 과연 물건을 팔고 사고 하여 국가를 욕되게 하였다면, 신이 사신으로 간 것이 마침 숭인이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후이니, 마땅히 이를 들었을 것이온데, 신이 중국에 있을 때에 일찍이 숭인이 물건을 팔고 사고 하여 왕의 명을 욕되게 하였다는 일을 한번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 일을 의논하는 자는 그의 발이 일찍이 중국의 국경을 밟아보지도 못했는데, 그의 귀가 어떻게 이 일을 들을 수 있었겠습니까. 헐뜯는 자가 과연 숭인보다 어질겠습니까. 한갓 헐뜯는 자의 말만 믿고 숭인의 행실은 믿지 않으시니, 어찌 그렇게 한 쪽으로만 치우치십니까.
우리 국가가 대명(大明)을 섬긴 후로 표전의 사명(詞命)은 대부분 숭인의 손으로 지어졌으니, 공민왕(恭愍王)이 시호를 얻고, 상왕이 부조(父祖)의 봉작을 이어받게 된 것은 모두 숭인의 문장(文章)의 힘이며, 세공에 금ㆍ은ㆍ말ㆍ베를 면제 받은 것도 역시 숭인의 힘이며, 황제께서 여러 번 문장의 아름다움을 칭찬하면서 우리나라에 인물이 있다고 말한 것도 역시 이것이 숭인의 공이었습니다. 숭인의 문장은 간결하고 고고(高古)하여 세상에 드물게 뛰어났고 중국에서도 드물게 있사오니, 국가의 사명(詞命)은 이 사람에게 맡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의논하는 자는 이를 살피지 않고 도리어 소인의 헐뜯는 말만 믿고서 감히 대악의 죄를 씌우니, 어찌 너무 가석하지 않습니까.
종실(宗室)을 친히 하고 어진이를 높이는 것의 두 가지는 천하 국가의 대경(大經)입니다. 주상께서 종실을 친히 하고 중하게 여겨 그 치욕을 씻으려고 맡은 관원에게 특별히 명하여 영흥의 진위를 밝히게 하였으니, 친족을 친히 하는 도리에는 잘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숭인은 오랫동안 시독의 관직에 있었으니 주상께서 가르침을 받은 신하입니다. 그에 대한 의심과 비난이 생기자마자 그것을 잘 분별하여 처리하지 않고서 곧 내쫓으라고 명하시니, 어진이를 높이는 도리에는 지극하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적이 주상을 위하여 이를 애석하게 여깁니다. 또한 마땅히 그를 위하여 맡은 관원에게 특별히 명하여 그를 헐뜯는 말이 나온 이유를 추궁하여 밝혀야 할 것이옵니다. 헐뜯은 자는 과연 중국에서 한 터럭의 물건도 사지 않은 사람이겠습니까. 숭인이 화물을 운반할 때에 반드시 귀신이 운반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수레 몇 채와 짐 싣는 말 몇 필을 사용하였을 것이오니, 그 수레에 실린 것이 과연 모두 숭인의 화물이며 그 말이 과연 다른 사람들의 예(例)에 배였겠습니까. 일일이 추궁해 밝힌다면 헐뜯은 자는 참으로 한 터럭의 물건도 산 것이 없었겠습니까. 수레에 실은 것이 모두 숭인의 화물이고, 말이 다른 사람의 예에 배나 되었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 숭인의 죄를 밝힌다면 숭인도 자백ㆍ복종할 것이오며, 만세토록 주상이 공평하였다고 일컬을 것입니다. 만약 헐뜯는 자도 역시 판매한 물건이 있고, 그 수레가 모두 숭인의 화물이 아니고, 그 말이 다른 사람의 예에 배가 되지 않았다면 헐뜯은 자는 참으로 군자를 무함한 소인이오니, 마땅히 헐뜯은 자의 무함한 죄를 밝히시어 현신(賢臣)이 억울함을 당한 치욕을 씻어 준다면, 어진이를 높이는 도리도 얻게 되고 만세토록 모두 주상의 밝으심을 일컫게 될 것입니다.
의논하는 자가 또 말하기를, '숭인은 글을 읽어 이치를 통달하여 평소에 중한 명망이 있으므로 다른 무지한 사람과 같이하기는 어렵다. 범한 죄가 비록 작더라도 극형에 처해야 할 것이다.' 하니, 또 어찌 생각하지 못함이 이와 같이 심합니까. 의리를 알지 못하여 국가에 도움이 없는 자가 죄를 범함이 있으면 들추어 낼 만한 것이 못 된다 하면서 항상 용납하여 이를 보전하게 하고, 문장에 통달하여 나라에 이익이 있는 자에게 조금이라도 의심이 있으면 용서할 수 없다고 하면서 반드시 조사하여 죄에 빠지게 한다면, 이는 후진(後進)의 선비가 모두 구차하게 형벌만 면하고 수치를 갖지 않는 사람이 되려 할 것이니, 누가 애써 마음과 힘을 쏟아 경서를 궁구하고 이치를 통달하여 헛된 명예만 얻고 실지로는 화를 받는 짓을 하겠습니까. 의논하는 자의 말대로 하면 인심과 사풍(士風)을 무너뜨리고 후학을 그르침이 심할 것입니다.
예로부터 어진 자를 의논하고, 재능 있는 자를 의논하고, 공이 있는 자를 의논하는 법이 있었습니다. 어진 자와 재능 있는 자는 혹시 실수를 하더라도 그 어진 것과 재능 있는 것을 의논하여 형벌을 감하여 사람마다 모두 어진 사람과 재능 있는 사람이 되도록 힘쓰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의논하는 자는 도리어 어진 사람과 재능 있는 사람의 죄를 중하게 하니, 이는 후세의 사람에게 착한 일을 하려고 하는 뜻을 막는 것입니다. 가령 숭인에게 진실로 죄가 있다. 하더라도 문장의 공을 의논하여 특별히 용서하여 주신다면 후진의 선비가 모두 학문하는 데 힘쓸 것이온데, 하물며 지금 숭인의 죄는 신이 진술한 바와 같이 모두 의논할 여지가 있는 데이겠습니까.
삼가 바라옵건대, 주상께서는 신의 이 글을 도평의사(都評議使)ㆍ문하부ㆍ사헌부에 내리시어 숭인을 헐뜯은 자를 추궁ㆍ힐문하시어 그 곡직을 밝혀서 그 치욕을 씻어 주고, 그의 어짊을 기리고, 사유(師儒)를 높여 주며, 후학을 권장하소서." 했으나 대답이 없었다. 대사헌 조준이 이때 기복(起復)했었는데 권근의 상소 가운데 부모가 모두 죽은 3년 이내에 현달한 자리에 올라 부사(府司)에 앉았다는 등의 말이 자기 때문에 나온 말이라 하여 깊이 감정을 품었다. 숭인은 진실로 재주는 있지마는 행실은 실수가 역시 많았으니, 그를 구하는 권근의 말도 지극히 공평한 말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 판 문하부사 이색이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원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색이 또 전(箋)을 올리기를, “신이 지난해에 경사에 가서 신정을 하례하였는데 부사로 갔던 이숭인이 지금 탄핵을 당하여 귀양갔사오니, 신이 감히 편안히 있을 수 없으므로 맡은 일을 사면하기를 원합니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교지와 술을 내려 위유(慰諭)하였다.
○ 간관 오사충(吳思忠) 등이 소를 올려 권근이 숭인에게 편당한 죄를 논핵하니, 권근을 우봉현(牛峯縣)으로 귀양보냈다가, 또 영해부(寧海府)로 옮겼다.
○ 이색이 장단(長湍)의 별업(別業)으로 돌아가니, 창(昌)이 지신사(知申事) 이행(李行)을 보내어 술을 하사하여 위유하고 그에게 정무를 보게 하였으나 이색은 나오지 않았다.
○ 11월 갑술일에 지진이 있었다.
○ 전 대호군 김저(金佇)와 전 부령(副令) 정득후(鄭得厚)가 몰래 황려(黃驪 여주)에 가서 우(禑)를 알현하였다. 김저는 최영(崔瑩)의 생질인데 최영을 따른 지 오래되어 자못 권세를 부렸으며, 정득후도 역시 최영의 먼 인척이었다. 우가 울면서 말하기를, “답답하게 이곳에 있으면서 손을 묶고 앉아 죽음을 받을 수는 없다. 역사(力士) 한 사람만 얻어 이시중(李侍中 이성계)만 해친다면 내 뜻은 성취할 수 있다. 내가 평소에 예의 판서(禮儀判書) 곽충보(郭忠輔)를 좋아하였으니 네가 가서 보고 이 일을 도모하라." 하고는 칼 한 자루를 충보에게 전해 주게 하면서, “일이 이루어지면 비(妃)의 동생을 처로 삼고 부귀를 함께 누릴 것이다. 이번 팔관일(八關日)에 일을 일으키라." 하였다. 김저가 충보에게 알리니 충보가 겉으로 승낙하고는 달려와서 우리 태조에게 알렸다. 김저와 정득후는 밤에 태조의 사저로 갔다가 문객에게 잡혔는데, 정득후는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정축일에 김저를 순군옥에 가두고 대간과 더불어 번갈아 문초하니, 진술한 말이 전 판서 조방흥(趙方興)에게 관련되므로 모두 옥에 가두었다. 김저가 말하기를, “변안열(邊安烈)ㆍ이임(李琳)ㆍ우현보(禹玄寶)ㆍ우인열(禹仁烈)ㆍ왕안덕(王安德)ㆍ우홍수(禹洪壽)가 공모하여 여흥왕(驪興王)을 맞이하는데 내응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무인일에 우를 강릉부(江陵府)로 옮겼다.
우리 태조가 판삼사사 심덕부(沈德符), 찬성사 지용기(池湧奇)ㆍ정몽주(鄭夢周), 정당문학 설장수(偰長壽), 평리 성석린(成石璘), 지문하부사 조준(趙浚), 판자혜부사(判慈惠府事) 박위(朴葳), 밀직 부사 정도전(鄭道傳) 등과 흥국사(興國寺)에 모여서 삼엄한 군사의 호위 속에서 의논하기를, “우(禑)와 창(昌)은 본래 왕씨(王氏)가 아니니 종사(宗祀)를 받들게 할 수 없으며, 또 천자의 명도 있으니 마땅히 가왕을 폐위시키고 진왕을 세워야 될 것이다. 정창군(定昌君) 요(瑤)는 신왕(神王 신종(神宗))의 7대손으로 그 족속이 가장 가까우니 왕으로 세워야 할 것이다." 하니, 조준이 말하기를, “정창군은 부귀한 집에서 나고 자라서 자기의 재산을 다스릴 줄만 알고 나라를 다스릴 줄은 알지 못하므로 왕으로 세울 수 없다." 하였으며, 성석린은 말하기를, “임금을 세우는 데는 마땅히 어진이를 가려야 될 것이고, 그 족속이 가까운지 먼지는 논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이에 종실(宗室)의 몇 사람의 이름을 써서 심덕부ㆍ성석린ㆍ조준을 보내어 계명전(啓明殿)에 가서 태조(고려 태조)에게 고하고 제비를 뽑았더니 정창군의 이름이 뽑혔다.
○ 기묘일에 우리 태조가 심덕부 등 8명과 공민왕(恭愍王)의 정비(定妃) 궁에 나아가서 군사로 호위하게 하였는데, 종친과 백관이 모두 이에 따랐다. 비의 교지를 받들어 창(昌)을 강화(江華)로 추방하고, 정창부원군(定昌府院君)을 맞이하여 왕으로 세웠다. 교지에, “우리 태조로부터 공민왕에 이르기까지 자손이 서로 계승하여 종묘와 사직을 받들었는데, 불행히도 공민왕이 세상을 떠나니 후사가 없었다. 당시에 종척(宗戚)과 신하들이 의논하여 종실의 어진이를 왕으로 세우려고 하였으나, 권신 이인임(李仁任)이 오랫동안 나라의 권력을 잡고 있으면서 불의한 일을 많이 행하여 남(새 임금)에게 은혜를 베풀어 자기의 죄를 면하기 위하여 역적 신돈의 아들 우(禑)를 공민왕의 아들이라고 거짓으로 꾸며서 그를 낳은 어미를 죽여 입을 봉하고, 질녀를 시집보내어 그 총애을 굳게 하였으니, 신(神)과 사람의 분노가 쌓인 지 15년이나 되었다. 우(禑)가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여 국인에게 원망을 사고, 군사를 일으켜 중국을 침범하여 천자에게 죄를 얻었다. 지금은 마땅히 왕씨(王氏)가 종사(宗祀)를 회복할 시기인데도 대장 조민수(曹敏修)가 이인임의 친척으로써 상상(上相)이 되어 이인임의 간사한 꾀를 이어받아 우의 아들 창을 왕으로 세워 악으로써 악을 계승하였는데, 권병이 그 손에 돌아가니 형세가 갑자기 제거하기 어려워졌다. 지난번에 윤승순(尹承順) 등이 경사에서 돌아왔는데 황제가 이성으로 왕을 삼은 것을 꾸짖었다. 이에 나라 안의 여론과 종척(宗戚), 대소 신료들에게 물으니, 모두 말하기를, '정창부원군(定昌府院君) 요(瑤)는 곧 태조의 직계 신왕(神王 신종(神宗))의 7대(代)손으로서 족속이 가장 가까우니, 마땅히 공민왕의 후사가 될 것이다.' 하여, 요에게 명하여 왕위에 오르게 해서 종묘와 사직을 받들게 하고, 우와 창을 폐하여 서인으로 삼는다. 아아, 자홍(子弘)을 폐하고 대왕(代王)이 한가(漢家)의 종사(宗祀)를 회복하여 4백 년 동안 태평스러운 업(業)의 터전을 잡았으니, 지금의 일을 옛날과 비교하면 그 이치는 한가지이다." 하였다. 이날 요(瑤)가 수창궁(壽昌宮)에서 왕위에 올라 우와 창을 낮추어 서인으로 삼고, 이임(李琳)과 그 아들 귀생(貴生), 유염(柳琰)ㆍ최염(崔濂)ㆍ노귀산(盧龜山)ㆍ이근(李懃)을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고, 정양군(定陽君) 우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장단(長湍)에 가서 비상사태에 대비하였다.
○ 병진일에 왕이 정전(正殿)에 나가서 조회를 받고 정사를 청단하였다. 어머니 왕씨(王氏)를 높여 복녕궁주(福寧宮主)라 하고, 비(妃) 노씨(盧氏)를 순비(順妃)로 삼으며, 아들 정성군(定城君) 석(奭)을 책봉하여 세자(世子)로 삼고 경내(境內)의 죄수를 사면하였다.
○ 이색이 장단으로부터 대궐에 나아와서 하례하니, 왕이 내전으로 불러들이고 용상에서 내려와 기다렸다. 이어서 이르기를, “나는 평생을 한가로이 놀고 있었는데 오늘날에 이 자리를 얻을 줄은 생각하지 못하였다. 경은 나를 도와 달라." 하였다. 다시 이색을 판문하부사로, 변안열(邊安烈)을 영삼사사로, 심덕부(沈德符)를 문하시중으로, 우리 태조(이성계)를 수문하시중으로, 정도전(鄭道傳)을 삼사우사로 삼고, 집의 송문중(宋文仲)을 파면시켰다. 송문중은 일찍이 나주 목사로 있을 적에 청렴하지 못했다는 평판이 있으므로, 대간이 고신(告身)에 서명하지 않아 드디어 파면되었다.
○ 갑신일에 왕이 친히 태묘(大廟)에 제사지내고 왕위에 오른 것을 고하였다. 유사가 우(禑)의 어머니 신주(神主)를 철거할 것을 청하니, 이색이 말하기를, “이 일은 그 종말을 보장할 수 없으니 아직 천천히 하라."고 하였다.
○ 김저(金佇)가 옥 안에서 갑자기 죽으니, 저자에서 송장을 베었다. 김저가 진술한 말이 순군부의 관원과 많이 관련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의 죽음을 의심하였다. 이에 문하평리 정지(鄭地)ㆍ이거인(李居仁), 전 판후덕부사(前判厚德府事) 유혜손(柳惠孫)ㆍ이을진(李乙珍), 전 밀직 이유인(李惟仁)ㆍ유번(柳蕃)ㆍ조호(趙瑚)ㆍ안주(安柱) 등 27명을 귀양 보냈으니, 김저의 모의에 참여한 까닭이었다. 또 조방흥(趙方興)을 목베었다.
○ 왕이 즉위한 날 저녁에 왕의 사위 강회계(姜淮季)의 부(父) 시(蓍)가 내전에 들어와서 왕에게 아뢰기를, “여러 장상들이 전하를 왕으로 세운 것은 다만 자기의 화를 면하기 위한 것이지 왕씨(王氏)를 위한 것은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삼가시고 친신(親信)하지 마시어 스스로 보전할 것을 생각하소서." 하였다. 왕의 사위 우성범(禹成範)이 곁에 시립하고 있다가 이 말을 듣고 그 어머니 윤씨(尹氏)에게 알리니, 윤씨의 종형(從兄) 소종(紹宗)이 전해 듣고 9공신에게 알렸다. 공신들이 왕에게 의견을 아뢰기를, “전하께서 겨우 왕위에 오르자마자 참소하는 말이 갑자기 들어오니, 신들은 두려워서 어찌할 줄을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참소하는 말을 믿으신다면 곧 신들에게 죄를 주시고, 만약 신들이 위성(僞姓)을 내쫓고 다시 왕씨를 세운 공이 있다고 여기신다면, 참소하는 사람에게 죄주어 윗사람과 아랫사람으로 하여금 틈이 없도록 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왕이 측근 신하를 돌아보고 잠잠히 말이 없었다.
○ 순안군(順安君) 방(昉)과 동지밀직사사 조반(趙胖)을 남경으로 보내어 왕의 즉위를 알렸다.
○ 12월에 좌사의(左司議) 오사충(吳思忠), 문하사인 조박(趙璞) 등이 소를 올리기를, “판문하부사 이색이 우리 현릉(玄陵 공민왕(恭愍王))을 섬겨 벼슬이 보상(輔相)에 이르렀는데, 현릉이 훙하고 후사가 없으므로, 많은 신하들이 의논하여 종실의 어진이를 왕으로 세우려고 하니, 권신 이인임이 스스로 권세를 마음대로 부리고자 하여 위주(僞主)를 기어이 세우려고 하니, 이색이 의논을 도와 우(禑)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무진년에 여러 장수들이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왕씨를 세우려고 의논할 무렵에, 인임의 친척인 대장 조민수(曹敏修)가 우의 아들 창(昌)을 세워 그 간사한 꾀를 계승하고자 하여 계책을 이색에게 물었는데, 이색도 역시 일찍이 창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으므로 드디어 의논을 정하여 창을 세웠습니다. 그 아들 조종학(曹種學)이 외척(外戚)에게 선언하기를, '많은 신하들이 의논하여 종실을 세우려고 하였는데, 마침내 세자(世子 창(昌))를 세우게 된 것은 우리 아버지의 힘이다.'고 하였습니다. 후에 천자께서 명하시기를, '이성(異姓)을 왕씨라 꾸며서 왕으로 삼았으니, 이는 삼한을 대대로 지킬 계책이 아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충신과 의사들이 왕씨를 회복시켜 천자의 명에 따르려고 하였는데, 적신 변안열(邊安烈)이 기이한 공을 세워 부귀를 얻으려고 이색과 우(禑)의 외숙 이임(李琳)과 김저(金佇)ㆍ정득후(鄭得厚) 등과 더불어 신우를 맞이하여 왕씨를 다시 세우려는 의논을 저지하려고 하였습니다. 더구나 이색은 대대로 왕씨에게 봉직하여 공민왕의 더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았는데, 이인임에게 붙어서 신우를 세우고 왕씨의 종사를 끊으며, 장수들이 왕씨를 세우려고 하자 조민수에게 붙어서 우를 내쫓고 창(昌)을 세웠으며, 충신과 의사가 왕씨를 회복하려고 하자 변안열에게 붙어서 창을 내쫓고 우를 맞이하여, 다시 왕씨의 종사를 끊으려 하였으니, 우와 창에 있어서도 모반하는 신하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족히 논할 것도 못 됩니다. 대대로 왕씨의 신하이면서도 적신에게 아첨하여 왕씨의 종사를 영원히 끊어지게 하였으니, 그의 죄악은 천지ㆍ종사(宗社)가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이색은 이인임에게 중하게 여겨져서 그 부귀를 보전하였습니다. 이인임은 그 무리 임견미(林堅味)ㆍ염흥방(廉興邦)과 더불어 탐욕을 마음대로 부려 관직을 팔고 옥(獄)을 팔아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토지와 노비를 빼앗아 차지했으니, 원망이 쌓이고 죄가 많아져서 마침내 패망을 초래하였는데도, 이색은 그 그른 점을 말하지 않았으며, 우의 사부가 되어 여러 번 상사(賞賜)를 받고 젖내 나는 어린 자제들을 모두 높은 과거에 뽑아서 요직에 늘어놓았고, 우가 포학을 부려 죄 없는 사람을 죽였는데도 이색은 그 허물을 바로잡지 않았으며, 또 우(禑)가 망녕되게 군사를 일으켜 상국의 경계를 침범하여 동방의 무궁한 화를 만드는데도 이색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국가에서 사전(私田)으로 공가(公家)를 궁핍하게 하고, 민생을 해치며 송사를 일으키고 풍속을 무너뜨리므로, 이를 개혁하여 전법을 바로잡고자 하였는데도 이색은 상상(上相)으로서 불가하다고 고집하였으며, 이임(李琳)이 탐하고 못났음은 국인들이 아는 바인데도 이색이 또 외척(外戚)에 붙어서 지위를 보전하고자 하여, 이임을 천거하여 자기를 대신하게 하였으며, 또 유종(儒宗)으로서 부처에 아첨하여 사람들의 심술을 무너뜨리고 풍속을 어지럽혔습니다. 왔다갔다 간사함이 심하여 이숭인이 탄핵당한 것을 핑계하여 장단(長湍)으로 돌아가서 일의 추이를 관망하고 있다가, 전하께서 왕위에 오르자 공공연히 와서 판문하의 관직을 받고, 백관의 위에 서 있으면서도 조금도 부끄러운 기색이 없으며, 학문을 굽혀 세상에 아첨하고, 거짓을 꾸며서 명예를 구하는 짓을 하더니, 마침내 또 다시 반복하여 큰 죄를 짓기에 이르렀습니다. 맡은 관사(官司)에 내리어 이색의 부자와 조민수의 죄를 다스려서 후세의 신하가 되어 불충한 자를 경계하소서. 이인임의 죄도 전하께서 친히 본 바이오니 헌사에 맡겨서 관(棺)을 베고, 집을 헐어 못을 파서 그 죄를 드러내소서." 하였다.
또 말하기를, “삼사우사 김속명(金續命)이 우(禑)의 어머니를 분별할 수 없다는 말을 처음 꺼낸 이유로 내쫓겨서 죽었으며, 공산부원군(公山府院君) 이자송(李子松)은 우(禑)가 군사를 일으킨 것을 간하다가 드디어 죽음을 당하였으니, 전하께서는 맡은 관원에게 명하여 그 무덤에 치제(致祭)하고 그 자손을 녹용하여 충혼을 위로하소서." 하였다. 명하여 이색의 부자를 파면하고, 조민수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았다.
○ 사헌부에서 소를 올려 권근이 사사로이 명나라 예부의 자문(咨文)을 열어 본 죄를 논핵하기를, “이 자문은 본국 종사(宗社)의 존망에 관계된 것이니, 마땅히 바로 도당에 보내어 재상들을 모아서 열어 보아야 될 것인데, 권근이 여러 날 동안 사사로이 간수해 두었다가 사사로이 열어 보고 은밀히 모의하여 천기를 누설시켰으니, 음모가 헤아리기 어렵고, 이보다 더 심한 불충이 없으니, 잡아다 신문하여 형률에 의거해서 죄를 결정하여 후세의 사람을 경계하소서." 하였다. 왕이 명하여 죄를 신문하지는 않고 먼 지방으로 귀양 보냈다.
○ 대간이 번갈아 소를 올리기를, “지금은 전하께서는 위로는 천자의 명을 받들고, 아래로는 신민의 기대에 응하여 난리를 평정하고, 질서 있는 세상으로 회복시켜 우리 조성(祖聖)의 끊어졌던 대통을 계승하셨고, 신우(辛禑) 부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았으니, 이것은 명분을 바로잡고 백성의 뜻을 정한 것으로, 만세의 태평을 열 시기입니다. 옛날에 위(衛) 나라 임금이 공자를 보시고 정사를 하려 하니, 공자는 먼저 명분을 바로잡고자 하여 말하기를, '명분이 바르지 않으면 백성들이 손발을 둘 곳이 없어진다.' 하였습니다. 한(漢) 나라 여후(呂后)가 궁첩의 아들 홍(弘)을 데려와서 혜제(惠帝)의 후사로 삼으니, 태위(太尉) 주발(周勃)이, 홍이 혜제의 아들이 아니라고 하여 이를 목 베고, 대왕(代王)을 맞이하여 세워서 백성의 뜻을 정하고 4백 년의 태평을 열었습니다. 당(唐)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가 그 아들 중종(中宗)을 폐위하고 이성(異姓)인 무삼사(武三思)를 세워 태자로 삼으려하니, 승상 장간지(張柬之)가 측천후의 무리 장역지(張易之)ㆍ장창종(張昌宗) 등을 목 베고 다시 중종(中宗)을 세웠는데, 무삼사만은 남겨두어 중종이 스스로 베어 죽이기를 기다렸더니, 설계창(薛季昶) 등이 장간지에게 말하기를, '풀을 제거하면서 뿌리를 뽑지 않으면 뒤에 반드시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삼흉(三凶)은 비록 목베었으나 무삼자가 아직 살아 있으니, 공들은 마침내 장사지낼 곳이 없게 될 것입니다. 만약 일찍이 도모하지 않으면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입니다.' 하니, 장간지 등이 그 말을 따르지 않고 말하기를, '큰 일이 정하여졌으니 저 무삼사 한 사람은 도마 위의 고기와 같을 뿐이다.' 하더니, 후에 무삼자가 과연 장간지 등을 죽이고 중종도 시해를 당하였습니다. 군자가 이를 논하기를, '측천후는 이미 당나라의 종묘에 죄를 지었으니, 중종이 그 어머니에게 사정(私情)을 둘 수 없으며, 장간지 등이 이미 중종을 세웠으니 측천후를 사사하여도 중종이 대의로써 그 의논에 간여하지 않는다면 조종의 노여움을 풀게 될 것이며 천지의 떳떳한 법도가 서게 될 것이다.' 하였으니, 역시 공자의 명분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지금 한둘의 대신이 전하를 추대하여 공민왕의 뒤를 계승하게 하고, 신우(辛禑)가 공민왕의 아들이 아닌 것을 바로잡아 조정과 백성에게 포고하니, 삼한 억조의 백성이 서로 말하기를, '우리 평생에 다시 태조의 손자를 보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지난번 홍륜(洪倫)의 난의 근원과 우(禑)의 어미 반야(般若)의 말과 죽음도 주상께서 명백히 알고 계시오며 성천자(聖天子)께서도 이미 들으신 바이옵니다. 지금 이색은 마음속으로 그른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인임(李仁任)이 신씨(辛氏)를 왕으로 세울 때에도 말 한마디 한 적이 없었고, 조민수(曹敏修)가 창을 세울 때에도 제일 먼저 주창하여 국가의 계책을 정하였으며, 금년에 또 다시 신우(辛禑)를 세우고자 하였으니, 그 죄는 전에 올린 소(疏)에서 말을 다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이미 정통을 이었는데, 이종학(李種學)이 홀로 사람들에게 선창하여 말하기를, '현릉(玄陵)께서 이미 우를 강녕군(江寧君)으로 책봉하고 부(府)를 세웠으며, 또 천자(天子)께서도 우(禑)에게 작위를 주었는데, 이(李 태조의 옛 이름)는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현릉의 명을 어기고 우리 여흥왕(驪興王)을 폐하느냐.' 하였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우의 부자의 죄를 다스려 태묘에 고하여 백성의 뜻을 정하지 않으시고, 또 이색 부자가 우의 부자에 붙었던 죄를 다스려 수많은 소인들의 음모를 근절시키지 않으신다면, 전하께서도 하루도 왕위에 편안히 계실 수 없을 것입니다.
혹자가 말하기를, '우(禑)의 부자는 천자께서 아는 바이니 천자의 명이 내림을 기다려 그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 하는 것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천자께서 이미 삼한의 배신(陪臣)에게 이성을 왕으로 삼은 것을 꾸짖었으니, 또 어찌 두 가지의 명이 있겠습니까. 또 혹시 상국에서 신우를 보존하고자 하신다면 모르겠습니다마는, 전하께서는 왜 이를 보존해 두고 백성의 뜻을 정하지 않으십니까. 춘추(春秋)의 법에 난신ㆍ적자는 누구나 이를 벨 수 있으니, 먼저 일을 행하고 뒤에 알려도 될 것인데, 또 어찌 천자의 명이 내리기를 기다리겠습니까.
이인임이 신씨(辛氏)를 추대한 죄는 곧 하늘에 계신 태조와 열성의 영이 다 베고자 하는 것이온데, 어찌하여 신등의 청을 따르지 않으십니까. 이를 베지 않으신다면 이는 만세에 난적(亂賊)의 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유사를 시켜서 관(棺)을 베고, 집을 헐어 못을 파고 가산을 적몰하도록 해야 하옵니다. 이종학(李種學)의 부자는 관직을 파면시키는 데만 그친다면 만세에 간적(姦賊)을 어떻게 징계하겠습니까. 맡은 관사(官司)에게 명을 내려 그 죄를 밝게 다스려야 될 것입니다. 이숭인(李崇仁)과 하륜(河崙)은 전에는 이인임의 심복이 되었다가 후에는 이색의 간사한 꾀에 따라 신창(辛昌)을 독촉하여 중국에 조회하도록 하고, 신우(辛禑)를 세워서 열성의 제사를 영원히 끊고자 하였으니, 죄가 죽음으로도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역시 맡은 관사로 하여금 논죄하여야 될 것입니다. 또 이종학이 창을 세운 것은 그 아버지의 공이라고 환관 이분(李芬)에게 말하니, 이분이 이임(李琳)의 딸에게 말하여 종학이 이임에게 편당하고 아부하여 간사한 꾀를 이루고자 하였으니, 이분을 맡은 관사에 내려 정상을 추국하여 그 죄를 다스리소서.
권근은 황제의 명을 사사로이 열어 보고는 먼저 이임에게 보이고 또 이색에게 보였으니, 그 마음이 왕씨에게 있지 않음이 명백합니다. 조금 후에 이숭인의 일로써 글을 올렸다가 탄핵을 당하였는데, 그들 사이의 일은 역시 알 수 없는 바이니, 먼 지방에 귀양보내는 데만 그치고 그 죄를 다스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뒷세상의 불충한 신하를 징계하겠습니까. 전 한양윤(漢陽尹) 문달한이 이임의 인척이라 하여 궁중에 있으면서 권세를 부리고 불의를 자행하였는데, 이임의 족속은 이미 모두 귀양갔는데도 문달한만은 홀로 서울에 있사오니, 직첩을 거두고 외방으로 추방하소서. 또 거짓 조정의 환관을 추방하여 뜻밖의 환란을 방비할 것이오며, 또 문종의 제도에 따라서 10여 명만 남겨 놓고 궁내의 소제하는 데만 충당하고, 또 충렬왕(忠烈王)의 고사에 의거하여 육품 벼슬에 임명하는 것을 허락하지 마옵소서." 하였다. 이에 이인임의 집을 헐고 못을 팠으며, 이색의 부자와 이숭인ㆍ하륜ㆍ이분ㆍ문달한을 귀양보내고, 조민수를 삼척(三陟)으로 옮기고, 환관은 그전대로 직무를 보게 하였다.
○ 임인일에 우의 어머니 의릉(懿陵)을 철거하였다.
○ 사헌 규정(司憲糾正) 전시(田時)를 창녕(昌寧)에 보내어 조민수를 국문하였다. 전시는 조민수가 창(昌)을 세운 계책이 이색(李穡)에게서 나온 것으로 진술 받고자 하였는데, 조민수가 자복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창을 세운 죄는 진실로 나 혼자 한 것이요, 이색은 실로 관여함이 없다." 하였으나, 여러 날 동안 핍박하니 드디어 자복하였다.
○ 사재 부령(司宰副令) 윤회종(尹會宗)이 소를 올려 우와 창을 베기를 청하였다. 왕이 여러 재상에게 차례로 물으니 모두 잠잠히 말이 없었는데, 홀로 우리 태조가 아뢰기를, “이 일은 용이하지 않습니다. 이미 강릉(江陵)에 안치시켰다고 중국 조정에 알렸으니 중도에 변경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신 등이 있사오니, 우가 비록 난을 일으키고자 한들 무슨 걱정이겠습니까."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우가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였으니, 스스로 죽음을 당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지신사(知申事) 이행(李行)에게 명하여 교서를 내리고, 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을 강릉(江陵)으로 보내어 우를 베며, 예문관 대제학 유구(柳玽)를 강화(江華)로 보내어 창을 베도록 하였다. 우의 아내 최씨(崔氏)가 크게 울면서 말하기를, “첩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우리 아버지 최영의 허물이다." 하였다. 10여 일 동안 먹지 않고 밤낮으로 울며 밤에는 반드시 시체를 안고 자며, 쌀을 얻으면 번번이 정하게 찧어서 전(奠)을 드리니, 그때 사람들이 이를 불쌍하게 여겼다.
○ 좌사의 오사충(吳思忠)과 문하사인 조박(趙璞) 등이 소를 올리기를, “환시(宦寺)는 본래 궁궐 안을 소제하는 것을 직무로 삼고 그 밖의 일은 간여하지 않았는데, 진(秦) 나라에 이르러 옛 제도를 무너뜨리고 조고(趙高)를 중거부령(中車府令)으로 삼아서 2세(世)가 그 손에 죽었으며, 서한(西漢)에서는 홍공(弘恭)을 중서령으로 삼아 충량(忠良)을 죽여서, 왕망(王莽)에게 찬탈 당했고, 조절(曹節) 등이 권세를 부리더니 동한(東漢)이 멸망하였으며, 당(唐) 나라에서는 구사량(仇士良)을 중위(中尉)로 삼았다가 임금을 폐하기도 하고 세우기도 하였으며, 송(宋) 나라에서는 동관(童貫)을 장수로 삼았다가 두 황제(휘종(徽宗) 흠종(欽宗))를 여진(女眞)에게 붙들려 가게 하였으며, 전의 원(元) 나라에서는 원사(院使)가 권세를 부리자 드디어 천하를 잃게 되었으니, 이는 고금(古今)의 밝은 본보기입니다. 우리나라의 조정의 제도에 있어서도 심부름하는 환관이 수십 명에 지나지 않았으며, 또한 녹(祿)을 먹은 적이 없었는데, 현릉(玄陵)에 이르러 환자들을 조반(朝班)에 포열(布列)시켰다가, 마침내 최만생(崔萬生)의 변고를 초래하였으니, 이 또한 주상께서 친히 본 바입니다. 주상께서 왕위에 오르시자 다시 내시부(內侍府)를 세우셨는데 관계(官階)가 3품이나 되오니, 이는 주상께서 중흥한 임금으로서 다시 나라를 망쳤던 전철을 밟는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궁중의 일 보는 환관에게는 다만 의식만 주고 내시부를 폐지하소서."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 교지를 내리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태조께서 나라를 세운 이후로 자손이 서로 계승하여 능히 종사(宗祀)를 받들었는데, 공민왕에 이르러 불행히도 아들이 없이 세상을 떠나셨다. 적신 이인임이 정권을 마음대로 하고자 하여 나이 어린 얼자(孼子)를 기어이 세워 신우를 왕씨라고 거짓으로 일컬어 왕으로 삼았었다. 우가 완악하고 패악스러워서 장차 요양(遼陽)을 침범하려고 하므로, 시중 이(李 태조의 옛 이름) 등이 사직의 큰 계책으로 많은 사람을 타일러 회군하여 왕씨를 세우려고 하였으나, 주장 조민수(曹敏修)가 이인임의 당으로서 다시 권병을 마음대로 하여, 그 간사한 꾀를 계승해서 마침내 여러 사람의 의논을 저지하고, 우의 아들 창을 세우니, 왕씨의 종사가 끊어져 신(神)과 사람이 다 같이 분노한 지 16년이 되었다. 시중 이(李 태조의 옛 이름)가 충성을 분발하고 대의를 주장하여 마침내 심덕부(沈德符)ㆍ정몽주(鄭夢周)ㆍ지용기(池湧奇)ㆍ설장수(偰長壽)ㆍ성석린(成石璘)ㆍ박위(朴葳)ㆍ조준(趙浚)ㆍ정도전(鄭道傳) 등과 더불어 계책을 정하여 위로는 천자의 밝은 명을 받들고, 아래로는 종친ㆍ기로ㆍ문무 신료와 의논하여, 공민왕의 정비(定妃)의 명을 받들어 우와 창 부자를 폐하고, 내가 왕씨로서 가장 촌수가 가깝다 하여 나로 하여금 조종의 대통을 계승하게 하였다. 비록 내가 덕이 적어서 책임을 감내하지 못하지마는 이(李 태조의 그전 이름) 등이 명분을 바로잡고 회복시켜 왕실을 다시 세웠으니, 그 공이 실로 태조의 개국공신들보다 적지 않다. 대려(帶礪)의 맹세로 잊을 수 없고, 벽상(壁上)에 얼굴을 그려 공신으로 남기며, 그 부모와 아내에게는 봉작(封爵)하고, 그 자손에게는 음직을 주며, 10세까지 죄를 사면하노라." 하였다.
○ 대사헌 조준(趙浚) 등이 소를 올리기를, “「경(敬)」이란 한 글자는 제왕이 성인(聖人)이 되는 기초이고, 「공(公)」이란 한 글자는 제왕이 다스림을 이루는 근본입니다. 청하건대 전하께서는 위로는 황천(皇天)의 굽어보심을 두려워하고, 아래로는 억조 백성의 우러러봄을 두려워하여, 한 사람을 상 주더라도 상제(上帝)의 착한 자를 복 주는 마음에 합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한 사람을 벌주더라도 상제의 음란한 자를 죄주는 뜻에 합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여러 사람이 기뻐한 후에야 상을 주고, 여러 사람이 버린 후에야 형벌을 더하시옵소서. 자문(咨問)을 부지런히 하여 총명을 넓히고, 학문을 좋아하여 덕업을 높이며, 많은 신하를 예로써 대하고, 모후를 효도로써 받들며, 간사한 사람을 제거할 때에는 의심하지 말고, 영을 내리면 반드시 행하시옵소서. 궁궐에 거처할 때에는 백성의 집이 비바람을 막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고, 진수성찬을 드실 때에는 백성이 거친 음식도 넉넉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며, 가볍고 따스한 의복을 입을 때에는 잠부(蠶婦)의 헐벗은 것을 생각하여, 대우(大禹)의 의복을 검소하게 한 것을 본받고, 연향(宴享)에 임해서는 농부의 굶주려 죽는 것을 생각하여, 수문제(隋文帝)의 한 가지 고기만 먹던 것을 본받으며, 검소함을 숭상하고 사특함을 경계하며, 재용을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시옵소서.
군자와 소인의 구분은 왕이 당연히 알아야 될 것입니다. 안색을 엄숙하게 하여 조정에 서서 남김없이 말하고 숨기지 않으며, 우뚝하게 뛰어나서 조금도 회피함이 없는 것이 군자이니, 주상께서 이를 가까이하고 이를 믿으시면 요순의 다스림도 앉아서 이루게 되고, 태조의 업을 계승하여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인아(姻婭)는 반드시 천거하고자 하고, 은원(恩怨)는 반드시 갚고자 하며, 백성의 고통스러움을 듣거나 왕의 과실을 보고도 잠잠하게 있으며, 거리낌 없이 말하지 않으면서 '입은 화(禍)의 문이다.' 하며 아첨만을 행하여 부귀를 도둑질하는 자는 소인이오니, 주상께서 기뻐하여 이를 용납하신다면 걸주(桀紂)의 멸망을 서서 기다리게 될 것이오며, 태조의 공렬이 금방 무너질 것입니다. 원하건대 주상께서는 경사를 통달하고 심술이 바른 큰 선비를 가려서 날을 번갈아 입직하게 하며, 경사를 토론하고 치도를 토론하여 넓고 밝은 학문을 이룰 것이오며, 또 사관으로 하여금 번갈아 곁에서 모시게 하여 좌사(左史)는 말을 우사는 사실을 모두 기록하게 하여 만세에 전하시옵소서. 또 세자(世子)를 위하여 특별히 서연(書筵)을 열어서 당세의 대유를 사부로 삼고, 경의에 밝고 행실이 닦인 선비를 요좌(僚佐)로 삼아, 아침저녁으로 함께 있으면서 경적(經籍)을 강론하고 밝혀서 근본을 바로잡고 근원을 맑게 하는 학문을 밝히게 하소서.
부병(府兵)은 8위(衛)에 영속되고, 위는 군부사(軍簿司)에 통속되어, 42도부(都府)의 군사가 12만 명이나 되는데, 대(隊)에는 정(正)이 있고, 오(伍)에는 위(尉)가 있어 상장에 이르기까지 서로 통속되어 있으니, 금위(禁衛)를 엄하게 하고 외적을 막는 것입니다. 원(元) 나라를 섬긴 이후로 태평이 오래 계속되니 문관이나 무관이 모두 안일하고 태만하여 금위(禁衛)에 사람이 없습니다. 이에 근시와 충용에 모두 호군 이하의 관직을 설치하여, 금위의 임무를 대신하게 하고 이들에게 녹을 주니, 이에 조종의 8위의 제도가 모두 소용이 없는 제도가 되어 한갓 국록만 허비하게 되었습니다. 우달치(亏達赤)ㆍ속고치(速古赤)ㆍ별보(別保) 등의 모든 애마(愛馬 고려 말의 병제(兵制))가 추울 때나 더울 때나 이른 아침이나 깊은 밤에 수고로움이 심하였으나, 한 되, 한 말의 녹도 먹지 못하였고, 42도부(都府)의 5원(圓)ㆍ10장(將)ㆍ위(尉)ㆍ정(正)의 녹을 먹는 자는 어리고 약한 자제가 아니면 곧 공상과 천예(賤隸)들이어서, 녹을 먹고도 그 직책을 비워두거나, 국사에 부지런하고도 녹을 먹지 못하기도 하였으니, 어찌 조종께서 성의(誠意)로 대우하고 후하게 녹을 주는 뜻이겠습니까. 전하께서는 근시(近侍)를 좌우위에 합하고, 사문(司門)을 감문위(監門衛)에 합하고, 사순(司楯)을 비순위(備巡衛)에 합하고, 충용(忠勇)을 신호위(神虎衛)에 합하며, 그 나머지 각 애마는 종류별로 여러 위에 합하여, 이들로 하여금 날을 번갈아 입직하게 하여, 그 부지런하고 게으름을 상고하여 각기 그 위(衛) 안의 호군 이하에서 위ㆍ정의 관직에 이르기까지 품계에 따라 녹용하여, 그들로 하여금 녹을 먹고 그 직무에 부지런하게 한다면, 사람들이 즐거이 일을 보고 국록이 덜어질 것이며, 금위가 엄해지고 무비가 신장될 것입니다.
사막(司幕)은 옛날의 상사(尙舍)이고 지금의 사설(司設)이며, 사옹(司饔)은 옛날의 상식(尙食)이고 지금의 사선(司膳)인데, 지금은 사설은 그 녹을 먹고도 그 직무를 폐하며, 사막은 그 일에 근실하고도 그 녹은 먹지 않으며, 사옹 이하의 관직도 역시 그러하오니, 사막과 사옹 등 애마를 6국(局)에 합하여 선왕의 옛날 제도를 회복하고 근대의 폐해를 개혁한다면 명칭과 실상이 서로 맞고 맡은 일이 확립될 것입니다.
공(功)이 있는 이가 아니면 후(侯)를 봉하지 않는 것은 우리 조정의 법입니다. 김부식(金富軾)은 참란(僭亂)을 제거하고 서도(西都)를 평정하고서 낙랑후(樂浪侯)로 봉해졌고, 김방경(金方慶)은 탐라의 반란을 토벌하고 동쪽의 왜국을 문죄하고서 상락공(上洛公)으로 봉해졌으니, 지금부터는 재상(宰相)으로 사직을 편안하게 하였거나 변방을 평정한 공신이 아니면 군(君)으로 봉하지 마소서.
환관은 국초부터 경릉(慶陵) 때에 이르기까지 관직에 참여하지 못하였는데, 근래에는 궁중에서 명을 전달하는 직임으로서 도(道)를 논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재상(宰相)의 반열에 참여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조정을 높이는 방법이 아닙니다. 지금부터는 환관의 제수는 경릉의 제도를 따라서 조관에 임명하는 것을 허락하지 마소서.
군기시와 선공(繕工)은 사무는 번거롭고 인원은 적으니, 상장군ㆍ대장군ㆍ낭장ㆍ별장을 겸판사ㆍ주부 등 관직에 임명하면 녹이 허비되지 않고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사무가 번잡한 시(寺)ㆍ감(監)도 이를 본받아 겸섭하게 하면 공무에 편리할 것입니다.
학교는 풍속과 교화의 근원이니, 국가의 치란과 정치의 득실이 이에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요사이 전쟁이 일어남으로써 학교가 폐지되었거나 해이하여 무성한 풀밭이 되었는데, 향원(鄕愿)으로 유명(儒名)을 핑계하여 군역을 피하는 자들이 여름 5, 6월 사이에 동자들을 모아 당(唐)ㆍ송(宋)의 절구를 읽고, 50일이 되면 파하고서 이를 '여름 공부[夏課]'라고 하는데, 수령이 된 자들도 이를 보고 범연히 여겨 일찍이 마음에 두지도 않으니, 이와 같이 하고서 경의에 밝고 행실이 닦인 선비를 얻어서 국가의 다스림에 도움을 주고자 한들 되겠습니까. 지금부터는 근실하고 민첩하여 학식이 넓은 사람을 교수관으로 삼아 5도에 각기 1명씩 나누어 보내어 군ㆍ현을 두루 다니게 하고, 그 마필과 접대는 모두 향교에 맡겨서 이를 주관하도록 하소서. 또 주ㆍ군에 한가로이 있으면서 유학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을 본 고을의 교도로 삼고, 자제로 하여금 항상 사서 오경만 읽고 사장은 읽지 못하게 하며, 교수관은 쉬지 않고 항상 돌아다니면서 과정을 엄격히 세우고, 몸소 어려운 문제를 논의하여 그 통하고 통하지 못한 것을 상고하여 이름을 올려 명부에 쓰고, 인도하고 권장하여 진실한 이재를 이루게 하되 인재를 많이 배출시켜 효과를 거둔 자는 계급을 거치지 않고 뽑아 쓸 것이며, 만약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여 효과를 거두지 못한 자는 벌을 논하도록 하시옵소서.
맹자가 이르기를, '불효에 세 가지가 있는데 후사가 없는 것이 그 중에 큰 것이다' 하였으니, 그것은 제사를 끊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옛날에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들에 장사하고 나서 우제(虞祭)를 지내어 신을 편안하게 하고 사당에 모시어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것은 죽은 부모 섬기기를 살아 있는 부모 섬기는 것과 같이 하는 도리입니다. 우리 동방에 가묘의 법이 오랫동안 폐해졌는데, 지금은 서울로부터 군ㆍ현에 이르기까지 모든 집이 있는 자는 반드시 신사(神祠)를 세워 이를 '위호(衛護)'라고 이르니, 이것이 가묘의 유법(遺法)입니다. 아아, 부모의 시체를 땅밑에 묻어 두고 가묘를 만들어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면 부모의 영이 어디에 의지하겠습니까. 이것은 자식의 마음이 아닌데, 습관이 떳떳한 일로 여겨 일찍이 생각하지 않았던 것일 뿐입니다. 지금부터는 일체《주자가례(朱子家禮)》를 좇아서, 대부 이상은 3세(世)까지 제사를 지내고, 육품 이상은 2세까지 제사를 지내며, 칠품 이하에서 서인에 이르기까지는 그 부모만 제사를 지내도록 하며, 깨끗한 방 한 칸을 가려서 각기 한 감실(龕室)을 만들어, 그 신주를 간수하되 서쪽을 윗자리로 삼을 것이며, 초하루와 보름에 반드시 전(奠)을 드리고, 밖에 나가고 집에 들어올 때에 반드시 고하며, 철을 따라 새로 나는 음식물은 반드시 올리며, 기일에는 반드시 제사를 지내고, 기일을 당하면 말을 타고 출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빈객을 대접할 때에 상중(喪中)의 예절과 같이하며, 그 무덤에 성묘하는 예절은 풍속에 따르되 매년 삼명절(三名節)과 한식(寒食)으로 정하여 조상을 추모하는 풍속을 이루게 할 것이며, 이를 어기는 자는 불효로 논죄하시옵소서.
《중용》에 말하기를, '성의로 대우하고 녹을 후하게 주는 것은 사(士)를 권장함이다.' 하였습니다. 이러므로 옛날에는 위로는 공경으로부터 아래로 서리에 이르기까지 녹을 후하게 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모든 조정에서 벼슬하는 사람들이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는 데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공무에만 마음을 쏟았던 것입니다. 세력 있는 자들이 겸병한 이후로는 조세가 날로 줄고 녹질(祿秩)이 해마다 부족하여, 선왕이 정하신 녹의 숫자는 한갓 형식이 되었을 뿐이니, 유사로 하여금 옛 제도를 참작하여 그 녹질을 풍족하게 한다면 사(士)가 항심(恒心)이 있어 염치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경기(京畿)의 8현은 요역이 매우 번거로운데 그것은 정관(正官)이 통할하고 관찰사가 다스릴 것이 아닙니다. 또 수령이 교화를 펴는 일도 없기 때문에, 과세가 고르지 못하고 부역이 제한이 없어서 백성이 의지해 살 수 없어도 하소연할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부터는 각 도의 예에 따라서 현에 5,6품의 관원을 두고 개성부(開城府)를 시켜서 공적을 상고하여 무능한 사람은 깎아내리고 유능한 사람은 승진시키는 법을 밝히소서.
근년 이후로 군사를 거느리는 직임은 그 재주는 묻지도 않고 재상(宰相)의 자리에만 있으면 경솔하게 명하여 이를 보냈으니, 지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적의 기세가 더욱 강해져서 침략을 초래하여 군ㆍ현이 황폐해졌습니다. 옛날 사람이 말하기를, '임금이 장수를 가리지 않으면 그 나라를 적에게 내주는 것이 되고, 장수가 병법을 알지 못하면 그 임금을 적에게 내주는 것이 된다.' 하였으니, 장수를 가려 왜적(倭賊)을 제어하는 것은 진실로 오늘날의 급선무입니다. 도평의사와 대간을 시켜 각기 위엄과 덕이 일찍부터 드러난 사람을 천거토록 하여, 이들에게 명하여 장수로 삼아 군정을 다스리게 하시옵소서.
또 군정이 여러 곳에서 나오면 지휘가 엄숙하지 않게 되니, 지금 한 도에 세 사람의 절제사(節制使)를 두는 것은 옛 제도가 아닙니다. 지금부터는 동북면과 서북면 외에는 한 도에 한 사람의 절제사만 보내고 나머지는 모두 폐지하시옵소서.
병이란 것은 백성의 생명을 맡은 것이요 나라의 큰 정사이니, 왕실을 호위하고 화란을 없애기 위한 것입니다. 본조 5군 42도부(都府)는 대개 한(漢) 나라의 남북군과 당(唐) 나라의 부위병(府衛兵)에 해당됩니다. 요(遼) 나라와 금(金) 나라가 양계(兩界)에 접경하였는데, 요 나라가 진제(晉帝)를 세워 이를 자식으로 대우하고 천하를 노려보면서, 우리나라에 화친을 구하였으나 태조께서 국교를 끊었으며, 금 나라가 요 나라와 송 나라의 세 황제를 사로잡아 위엄이 사해에 떨쳤는데도 감히 옆의 우리를 엿보지 못하고 지금까지 이르게 된 것은, 조종의 군정이 그 규율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근세에는 병제가 크게 무너져서 전쟁을 한 지 30여 년이 되도록 군정의 통솔이 없었습니다. 전술이 없는 장수로서 가르침을 받지 않은 백성을 거느리고 싸우게 되어, 멀리 바라보고 놀라서 싸우지도 않고 달아나서 천리에 해골이 널렸습니다. 조그만 왜놈들이 나라의 걱정이 되었으니, 통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부터는 전임 사품 이상의 관원은 3군에 소속시켜 군에 장수의 보좌로 두고, 오품 이하의 관원은 부위(府衛)에 소속시켜 군부사(軍簿司)에 통속되게 하여서, 위와 아래가 서로 매이고 체통이 서로 연결되어 군정이 한곳에서 처리되고, 여러 사람의 마음이 한곳에 통일된 후에 군령을 거듭 밝히고 사졸을 훈련한다면, 백만의 군사도 몸이 팔을 쓰는 것과 같고 팔이 손가락을 쓰는 것과 같이 쉬울 것이니, 어디를 지킨들 견고하지 않으며, 어디를 공격한들 빼앗지 못하겠습니까.
근세에는 간신이 정치를 문란하게 하여, 장수가 될 만한 인재가 아닌데도 중방(重房)에 늘어섰고, 온갖 전쟁에 수고로운 자는 겨우 첨설직(添設職)에 임명되니, 상벌의 규정이 없어 군사들이 해이해져서 이르는 곳마다 공적이 없습니다. 지금부터는 견고한 적진을 깨뜨리고 적을 함락시킨 공과, 장수의 목을 베고 기를 빼앗은 용맹과, 수많은 전쟁에서 수고한 공적이 있는 자로 공이 큰 자는 상호군(上護軍), 다음은 호군, 중랑장에서 별장, 산원(散員)에 이르기까지 모두 적절히 임명하여, 적을 깨뜨린 공을 장려한다면, 사람마다 모두 윗사람을 친애하여 그를 위해서 죽을 것입니다. 또 근일에 의병을 일으켜 어지러운 세상을 평정할 때에 군에 종사한 자에게도 관직과 상을 주어서 후세 사람을 권장하시옵소서.
국가에서 관찰사를 뽑고 수령을 가려 임명하여 5도를 어루만져 편안하게 하였는데, 동북면ㆍ서북면만이 아직도 옛날의 습속을 따르고 왕의 교화를 입지 못하였으니, 지금부터는 여러 도의 예에 의거하여 관찰사를 두어서 군ㆍ현을 순행(巡行)하여, 군과 민의 관원 중에 무능한 자는 깎아 내치고 유능한 자는 승진시키게 하시옵소서.
근래에 역호(驛戶)가 피폐해져서 모든 포마(鋪馬 역말)ㆍ전체(傳遞)ㆍ지로(知路)ㆍ지로(指路)의 역(役)을 주ㆍ군에서 대신 맡아, 그 고통이 심해서 백성들이 흩어져서 도망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런 주ㆍ현을 회복시키고자 한다면 마땅히 역호를 우선으로 돌보아야 될 것입니다. 국가에서 비록 정역별감(程驛別監)을 두어 여러 역(驛)을 편안하도록 하였지마는, 한 사람이 다스릴 수 없어서 역마다 사속(私屬)을 두어 이목(耳目)을 삼았으나 도당(都堂)에서 보낸 사람이 아니므로, 사람마다 이를 업신여기기 때문에 편안하지 못합니다. 지금부터는 역마다 5품, 6품의 역승(驛丞) 한 사람을 두어 그 보거(保擧)는 수령의 예와 같이 하고, 또 반인(半印)을 주어 보낼 것이며, 역호를 풍족하게 하고 역마를 번성하게 하는 자가 있으면, 관찰사가 도당에 보고하여 수령이 결원된 곳에 보충하고, 또 경관(京官)에 임명하여 포상할 것이며, 변방과 먼 곳의 역승은 관찰사로 하여금 천거하여 보충하게 하시옵소서.
상평창(常平倉)과 의창(義倉)의 법은 흉년을 구제하는 좋은 계책입니다. 한(漢) 나라 경수창(耿壽昌)의 의창에 대한 상소(上疏)와 당(唐) 나라 장손평(長孫平)의 사창(社倉)에 대한 건의는, 그 법이 주관(周官)ㆍ위인(委人)의 직책에서 나온 것이오니, 국가를 가진 자는 마땅히 먼저 해야 될 일입니다. 지난해 한여름에 군사를 일으키고 게다가 왜구(倭寇)까지 침범하여 농사짓는 시기를 어기고 수확이 때를 놓치게 되었으며, 금년에는 또 수재를 입어 동남방의 주ㆍ군이 쓸쓸히 헐벗게 되었으니, 흉년을 구제하는 계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가에서 이미 사전(私田)을 개혁하여 이르는 곳마다 모두 축적이 있으니, 지금부터는 군ㆍ현에 모두 상평창을 두고, 풍년에 거두었다가 흉년에 흩어 주는 법은 일체 근일에 도평의사에서 아뢴 바에 의해서 행하소서. 적이 듣건대, 양광도(楊廣道)에서는 상평창을 설치하였다고 하니, 각 도로 하여금 이에 의거하여 시행하게 하되, 법대로 하지 않는 수령이 있으면 이를 벌주소서.
먹는 것은 백성에게 제일 소중한 것이 되고 곡식은 소[牛]로 인하여 생산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나라에는 소 잡는 것을 금지하는 도감[禁殺都監]이 있으니, 이는 농사를 소중하게 여기고 백성의 생계를 후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달단(韃靼)의 수척(水尺)은 소를 잡는 것으로써 농사를 짓는 것에 대신하니, 서북면이 더욱 심하여 주ㆍ군의 각 참(站)마다 모두 소를 잡아서 손님을 먹여도 이를 금하지 않습니다. 마땅히 금살도감과 주ㆍ군의 수령으로 하여금 금령을 신칙ㆍ시행하게 하되, 법을 위반하는 자를 잡아서 관(官)에 알리는 자가 있으면 범인의 가산을 상으로 주고, 금령을 범한 자는 살인죄로 논죄하시옵소서.
주ㆍ군에서 위에 바치는 삭선(朔膳)과 사객(使客)을 대접하는 등의 일로 인하여, 비록 한창 바쁜 농사철이라도 농민을 모아서 가시숲 속을 쫓아다니면서 한 달 동안이나 사냥하니, 농사가 시기를 놓쳐서 백성의 먹을 것이 넉넉하지 못한 것은 이 일 때문입니다. 닭과 돼지 같은 가축이라면 우리 안에서 이를 취할 수 있으니 백성에게 소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경기에 계돈장(鷄豚場) 두 곳을 만들어 한 곳은 전구서(典廐署)로 하여금 이를 주관하게 하여, 종묘와 제사의 쓰임에 이바지하게 하고, 한 곳은 사재시(司宰寺)로 하여금 이를 주관하게 하여 어주(御廚)에 바치는 것과 빈객의 쓰임에 공급하게 할 것이며, 주ㆍ군과 각 역(驛)에도 모두 이를 기르게 하여 수용을 절약하고 잘 기르며 새끼 가진 짐승을 죽이지 않는다면, 수년이 못 되어서 공상(供上)ㆍ제사ㆍ빈객의 쓰임에 충당되고 우리 백성들의 먹을 것도 풍족하게 될 것이며, 사냥함으로 인하여 농사를 망칠 걱정도 없게 될 것입니다.
사옹시(司饔寺)에서는 해마다 각 도에 사람을 보내어 대궐에서 쓰일 자기(瓷器)의 제조를 감독하는데, 1년에 한 번씩 하게 되오나 공사(公事)를 빙자하고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해서 온갖 방법으로 침탈하여 한 도에서 짐을 싣고 오는 것이 소 8ㆍ90바리나 됩니다. 지나오는 곳은 떠들썩하지만, 서울에 이르러서 바치는 것은 백 분의 일 정도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사사로이 차지하니, 폐해가 이보다 더 심할 수 없습니다.
또 새의 깃[羽]과 수의 힘줄[筋]과 화살대[箭竹] 등의 차견(差遣)이 있어서 백성을 소란하게 함이 한 가지가 아닙니다. 지금부터는 각 관사의 애마(愛馬)를 외방에 보내는 것은 일체 이를 금하되, 모든 이와 같은 일은 모두 도당에 아뢰게 하고, 도당에서는 관찰사에게 내려보내며, 관찰사는 물품이 있는 주ㆍ현에 배정하여 문서에 따라서 직접 바치게 한다면 백성에게 편리할 것입니다.
군사가 왜놈들과 싸워서 빼앗은 말과 무기와, 모든 백성들이 적을 죽이고 빼앗은 물건은, 그 곳의 관원이 경내에 통첩하여 도적같이 국문해서, 모두 서울로 실어 보내어 후한 상(賞)을 바라니, 윗사람을 속이고 백성을 해침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군사들은 해이해지고 적의 세력은 더욱 강하게 되니, 매우 나쁜 계책입니다. 지금부터는 여러 도의 장수 중에 적을 깨뜨린 자는 벤 적의 머리만 바치게 하고, 군사와 백성들이 빼앗은 왜적의 물건은 추국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기록하여 영전(令典)으로 한다면, 사람들이 그 이익을 즐거워하여 싸움에 용감할 것이오며, 이를 범한 자는 불렴죄(不廉罪)로 논죄하소서.
재상은 임금의 보좌이니, 더 불어 천위(天位)를 함께 누리고 천공(天工)을 대행하는 사람입니다. 그 높음이 비할 데가 없으니, 불행히 죄가 있으면 이를 폐하여도 될 것이며 이를 물리쳐도 될 것이며, 이를 사사하여도 될 것이온데, 마침내 법리(法吏)에게 내려서 포승으로 몸을 결박하고 칼을 씌우며 머리를 베어 달고 몸뚱이를 드러내어 버려두고 장사하지 못하게 하니 심한 일입니다. 한(漢) 나라 문제(文帝) 때에 가의(賈誼)가 소(疏)를 올려 대부 이상에게는 형벌이 미치지 않아야 한다고 하니, 문제가 이 말을 깊이 받아들여 이로부터 대신에게 죄가 있으면 모두 죽음을 내리되, 모욕은 주지 않았고, 예로써 아랫사람을 대우한 까닭으로 그 당시에 사대부들이 남의 과실을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한 나라 4백 년의 예속(禮俗)을 이루었습니다. 지금부터는 양부(兩府 문하부ㆍ밀직사)의 대신에게 비록 죽을죄가 있더라도 그 대역부도(大逆不道) 외에는 한 문제의 옛일을 본받아 죄인을 죽여 그 시체를 여러 사람에게 보이는 형벌은 쓰지 말아, 국가에서 대신을 후하게 대우하는 은전(恩典)을 이루소서.
《서경(書經)》에, '벌(罰)은 후사(後嗣)에게 미치지 않는다.' 하였으며, 《맹자》에, '죄인은 형벌이 처자(妻子)에게는 미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순(舜)은 곤(鯀)을 형벌에 처하고도 그 아들 우(禹)를 재상으로 삼았으며, 무왕(武王)은 주(紂)를 목베고도 그 아들 무경(武庚)을 봉작하였으니, 곧 천지가 만물을 생육하는 마음입니다. 근세에 와서는 사람 죽이기를 밥 먹듯이 하고 남을 멸족하는 데는 오히려 그 후사가 남아 있을까 두려워하니 매우 불인한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모든 죄가 있는 자는 3대의 거룩한 임금들의 제도를 본받아 처자가 연좌(連坐)되는 일이 없게 하여, 거룩한 우리 조정의 인자한 정사를 보이소서.
모든 옥사와 모든 금계(禁戒)를 문왕(文王)이 감히 이를 간여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것이 주 나라가 다스림을 이루었던 것이며, 진평(陳平)이 전곡(錢穀)의 숫자를 알지 못하여, 군자가, '진평은 재상의 체통을 아는 사람이다.' 하였으니, 그가 다른 관청의 직무를 침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조의 제도는 도당(都堂)이 백규(百揆 백관)를 통솔하고 호령을 반포하며, 헌사(憲司)가 백관을 살피고 풍속을 바로잡으며, 전법도관(典法都官)이 곡직을 분별하고 옥송을 결단하는 것이 그 직책입니다. 근래에는 요행을 바라고 이익을 탐하는 무리들이 대궐 안을 속이고 도당을 업신여겨 송사의 문서가 많이 쌓이고, 문서를 발송하는 사이에 고식적이고 구차스러워 그 번잡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니, 관직을 설치하고 직책을 나누게 한 본뜻이 아닙니다. 지금부터는 송사하는 자로 하여금 각기 맡은 관사(官司)에 송사를 하게 하고, 바로 대궐 안과 도당에 올리는 것은 일절 이를 금지시켜 대궐 안을 높이고 도당을 엄하게 하소서. 모든 공사(公私)의 재물을 불려서 늘리는 것은 본전이 1냥이면 이자도 1냥일 뿐이온데, 요사이 재물을 늘리는 무리들은 이익만 보게 되어 본전 1냥의 이자가 10배까지 이르기도 하니, 빌려 쓴 무리들이 아내를 팔고 자식을 팔아도 마침내 갚지 못하므로, 국가에서 이미 금령(禁令)이 있었습니다. 지금 공판도감(供辦都監)의 보미(寶米 보(寶)의 미곡(米穀))는 불리고 늘리는 데 한이 없어서 빌린 사람으로 하여금 집을 잃고 생업을 잃게까지 만들었으니, 국가에서 백성을 구휼하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부터는 본전 1냥에 이자도 1냥을 받고 더 취하지 못하게 하소서.
삼사(三司)와 육부(六部)의 관원은 때로 친히 소속 각 관사(官司)에 이르러 그 보고된 것을 가지고 문서를 살펴 조사하고, 회계를 점고하여 사무가 점점 해이함이 없도록 할 것이니, 만약 법을 받들지 않는 자가 있으면 헌사로 하여금 이를 살펴 다스리게 하여, 큰 죄는 강등시켜 별도로 쓰기도 하고 제명시켜 서용하지 않기도 하여, 죄에 따라서 이를 논죄하고, 작은 죄는 순군부(巡軍府)에 문서를 내려보내어 태형(笞刑)과 장형(杖刑)을 쓰고 관직을 회수하소서.
서울과 지방의 모든 관리가 제목(除目)이 내려간 지 여러 날이 지나도 즉시 취임하지 않으므로, 공사(公事)를 지체시켜 그 문서와 전곡(錢穀)이 모두 간사한 아전에게 숨김을 당하니, 이것은 폐해의 큰 것이며, 또 신하가 성심으로 임금을 섬기는 도리가 아닙니다. 지금부터는 대성과 정조(政曹)를 제외한 그 경관(京官)의 모든 원리(員吏)는 임명이 내린 후, 경관은 3일, 외관(外官)은 10일로 한정하여, 대궐에 나아가서 사은하고 즉시 상관(上官)으로 가서 취임하게 하소서. 권지행사(權知行事)라고 일컫는 것은 신관(新官)과 구관(舊官)이 서로 마주 대하여, 문서와 전곡 관계를 명백하게 계약서로 만들어, 손수 서로 교부하여 고과에 증빙하게 하고 사은 후에 정식으로 관직에 취임하게 하되, 법대로 하지 않은 자가 있으면 법으로써 엄하게 다스리소서.
근년 이후로 기강이 점점 해이하여 향리가 군공이라 일컬어 관직을 부당하게 받기도 하고, 잡과(雜科)를 빙자하여 본역(本役)을 피하려고 꾀하기도 하며, 권세 있는 사람과 결탁하여 외람되이 관질(官秩)이 올라가기도 한 자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으므로, 주ㆍ군이 텅 비고 8도(道)가 피폐해졌습니다. 지금부터는 비록 3정(丁)에 1자(子)로써 3ㆍ4대(代) 향리의 역(役)을 면하였으나, 확실한 증명서가 없는 자와 군공(軍功)으로 향리의 역을 면하였으나, 특별히 기특한 공을 세워 공패(功牌)를 받은 일이 없는 자와, 잡과라도 성균관의 전교(典校)ㆍ전법(典法)ㆍ전의(典醫) 출신이 아닌 자와, 첨설직(添設職)의 봉익(奉翊)과 참관직의 3품 이하는 강제로 본역에 따르게 하여 주ㆍ군을 채우고, 지금부터는 향리에게 명경과와 잡과 출신의 향리라도 역을 면하지 못하게 하고 이를 일정한 법식으로 삼으소서." 하였다.
○ 사헌부에서 소(疏)를 올려 전제를 논하였는데, 그 대략에 말하기를, “하늘이 화란(禍亂)을 뉘우쳐서 흉악한 사람들이 이미 멸망되고 신씨(辛氏 우 창)도 이미 제거되었으니, 마땅히 사전을 일체 개혁하여 백성을 부유하고 오래 살도록 하셔야 하는데, 이때가 그 기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신과 대가들은 사직의 큰 계책은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폐단이 있는 풍속을 이어받아 서로 터무니없는 소문을 퍼뜨려 인심을 선동하여 사전을 회복하고자 합니다. 주상께서 중흥하여 왕위에 오른 지 열흘 만에 생민이 도탄에 빠진 것을 생각하시고, 여러 해나 된 큰 폐해를 깊이 징계하여 멀리는 성주(成周)의 규전(圭田 경대부(卿大夫)의 제전(祭典))ㆍ채지(采地)의 법을 계승하고, 가까이는 문종(文宗)이 경기(京畿)를 넓히고 개척하였던 제도에 따르소서. 경기는 서울에 있는 시위하는 자의 전지로 주어서 사족(士族)을 우대하셨으니, 곧 문왕(文王)이 벼슬한 자에게 대대로 녹을 주던 아름다운 뜻이요, 여러 도(道)에는 군전(軍田)만 주어서 군사를 구휼하셨으니, 곧 조종이 선발한 자에게 전지를 주던 좋은 법입니다. 이에 서울과 지방의 전지의 경계가 확실하여져 서로 엉클어지지 않게 하였고, 겸병의 문을 막고 쟁송하는 길을 막았으니, 진실로 성인의 제도입니다. 그러나 경기에서 전지를 받았는데도 수량이 차지 않는 자에게는 외방(外方)에서 이를 주고자 하는데, 이것은 전하께서 다시 겸병의 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신등은 전하의 성하게 중흥하는 정치를 위하여 이를 심히 애석하게 여깁니다. 전제을 먼저 바로잡지 않고서 중흥의 정치를 이루고자 하는 것은 신등은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6도의 관찰사가 보고한 개간된 전지의 수량은 50만 결(結)도 되지 않는데, 상부에 바치는 것은 풍족하게 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10만 결을 우창(右倉)에 속하게 하고, 3만 결을 사고(四庫)에 속하게 하였습니다. 녹봉은 후하게 주지 않을 수 없으므로 1만 결을 좌창(左倉)에 속하게 하였으며, 조관(朝官)를 우대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경기(京畿)의 10만 결을 나누어 주니, 그 나머지는 17만 결뿐입니다. 6도의 군사와, 진(津)ㆍ원(院)ㆍ역(驛)ㆍ시(寺)의 전지와, 향리(鄕吏)ㆍ사객(使客)ㆍ아록(衙祿)ㆍ늠급(廩給)의 쓰임도 오히려 넉넉하지 못하고, 군수(軍需)가 나올 곳도 없는데, 지금 또 사전을 외방에서 주려고 하니, 자세히 모르겠습니다마는, 공상(供上)ㆍ녹봉의 비용과 진ㆍ원ㆍ역ㆍ시의 각종 전지는 어디서 오겠으며, 방진(方鎭)의 병졸과 해도의 군졸은 무엇으로써 먹이겠습니까. 만일 3, 4년 동안 수재와 한재가 있게 되면 무엇으로써 이를 진휼하겠으며, 수천 수만 명의 군사를 먹이는 비용은 무엇으로써 공급하겠습니까. 전하께서 위로는 태조의 큰 업을 계승하고 아래로는 중흥의 무궁한 터전을 여는 이때에 나라의 재용을 저축하여 제사와 빈객의 비용을 넉넉하게 하고, 녹봉을 풍족하게 하여 백관을 후하게 대우하고, 군량을 넉넉하게 하여 삼군을 기르지 않고서, 이에 도리어 대가들이 근거 없이 퍼뜨린 소문을 두려워하여, 생민의 큰 계책은 생각하지 않고 외방에다 사전을 일으켜 간사하고 교활한 자가 겸병하는 문을 열고자 하시니, 삼군을 굶게 하여 6도의 변방 도적을 기르게 하고, 녹봉을 박하게 하여 백관의 염치를 무너뜨리고, 나라의 재용을 부족하게 하여 제사와 빈객의 비용을 모자라게 함이, 어찌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하는 정사이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모든 서울에 있는 자에게는 경기 안의 전지만 주고, 외방에서 전지를 주는 것은 허락하지 않으심을 일정한 법으로 삼아, 백성과 더불어 혁신하여 나라의 재용을 넉넉하게 하고, 백성의 생계를 후하게 하고 조정의 선비를 우대하고, 군량을 풍족하게 하소서." 하였다.
○ 왕이 아우 우(瑀)를 영삼사 영삼사종부시사(領三司宗簿寺事)로 삼고, 조준(趙浚)을 문하평리 판상서시사(門下評理判尙瑞寺事)로, 성석린(成石璘)을 사헌부 대사헌을 겸하게 하였다.
○ 관제를 고쳤다.
○ 계해일에 왕이 효사관(孝思觀)에 나아가서 우와 창을 벤 일을 태조에게 고하기를, “조선(朝鮮)의 말기에는 나라가 아주 작게 나누어져서 78개나 되었는데 약한 나라를 강한 나라가 합하여 모두 세 큰 나라[三雄]가 되어 전쟁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성조(聖祖 태조)께서 일어나니 왕사(王師)가 가는 곳에 많은 도적들이 평정되었습니다. 김부(金傅 경순왕(敬順王))가 와서 의탁하고, 견훤(甄萱)이 와서 항복하고, 신검(神劍)이 항복하여 통일이 이루어졌습니다. 자손이 4백 57년을 서로 이었는데, 공민왕이 아들을 두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니, 적신 이인임이 나라의 정치를 마음대로 하고자 하여, 이에 신돈(辛旽)의 비첩(婢妾) 반야(般若)가 낳은 우(禑)를 세워 왕으로 삼고, 족제(族制) 이임(李琳)의 딸을 시집 보내어 사내아이를 낳으니 창(昌)이었는데, 그를 부자가 서로 왕위를 계승하여 국운이 중간에 끊어졌습니다.
근년에 창이 중국에 친히 조회하기를 청하니, 예부에서 자문을 보내어 이성(異姓)이 왕이 되었음을 꾸짖었습니다. 자문이 도착되니 이임(李琳)이 상상(上相)으로서 이를 숨기고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시중 이(李 태조의 그전 이름)가 충성을 분발하고 대의를 주창하여 왕씨(王氏)를 흥복시키려고 하니, 덕부(德符)ㆍ몽주(夢周)ㆍ용기(湧奇)ㆍ장수(長壽)ㆍ석린(石璘)ㆍ박위(朴葳)ㆍ조준(趙浚)ㆍ도전(道傳) 등 여덟 명의 장상(將相)이 그 계책을 돕고 정하여, 종친ㆍ백료와 함께 공민왕의 정비(定妃)의 궁에 나아가서, 모두 비의 교지를 받들고 천자의 명을 선포하였습니다. 우(禑)의 부자를 폐하고 신이 태조의 후손이고 신왕(神王)의 7대 손자라 하여 정통을 계승하게 하였습니다. 이에 백관을 거느리고 조상의 묘(廟)에 반정한 것을 고합니다.
우와 창을 남겨 두어 천자의 명을 기다리려 하였는데, 간신(諫臣) 사충(思忠) 등이 우와 창을 베기를 청하여 말하기를, '춘추의 법에 난신ㆍ적자는 누구나 이를 목 벨 수 있으니, 먼저 일을 행하고 후에 알려도 될 것이므로, 반드시 사사(士師 법관)가 아니라도 처형할 수 있습니다.' 하였으며, 잇달아 사재부령(司宰副令) 윤회종(尹會宗)이 말을 올리기를, '두 흉인은 조종의 죄인이니, 왕씨 신하들과는 이 세상에서 함께 살 수 없는 원수이므로 하루라도 왕씨의 땅 위에는 둘 수 없습니다.' 하므로, 신이 그 말에 감동하여 그 글을 도당에 내려보냈더니, 모두 청하는 것이 간신들의 의논과 같으므로, 드디어 우와 창을 베었습니다. 이미 그 죄를 다스렸으니 재계하고 길일을 가려서 감히 성조의 어진(御眞) 앞에 고합니다.
일찍이 우가 왕위에 오르자, 재상 속명(續命)이, '그는 참다운 왕자가 아니다.' 하여, 인임(仁任)이 이를 내쫓았으며, 신돈의 첩 반야(般若)가 스스로 말하기를, '우는 바로 내가 낳은 것이다.' 하니, 인임이 이를 죽였습니다. 김유(金庾)와 최원(崔源)이 황제에게, '우는 왕씨가 아닙니다.'라고 하다가, 인임에게 모두 도륙을 당하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화를 두려워하여 아버지가 감히 그 아들에게 말하지 못하고, 남편이 감히 그 아내에게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세월이 이미 오래되어 이를 아는 사람은 점점 적어지고, 또 그 인친들이 조정과 외방에 뿌리박고 있어서 뽑아 없앨 수가 없었는데, 이제 흥복된 것은 실로 우리 성조께서 가만히 도와주신 공 때문입니다. 아아, 이성이 제거되고 종사가 계승되었으니, 어기지도 않고 잊지도 않아 성조께서 이룬 법을 따르는 일이 곧 신이 마음을 다할 바입니다. 우러러 생각하옵건대, 성조께서는 공신에게 성의를 다하여 시종토록 보전해 주시고 이를 국사에 써서 만세에 귀감이 되게 하였사오니, 한 가지라도 따르지 않는 것이 있으면 신은 효성스러운 손자가 아닐 것입니다. 다만 원하옵건대, 하늘에 계신 영은 신의 성심을 살피시고 신의 뜻을 도와서 실추함이 없이, 큰 왕업을 계승하여 만세의 태평을 마련할 수 있도록 하옵소서." 하였다.
또 공신에게 상을 주는 것을 고하는 글에, “탕왕(湯王)은 이윤(伊尹)을 기용하여 우왕(禹王)의 옛 업적을 계승하였고 태갑(太甲)이 끝까지 정치를 잘한 것은 이윤의 훈계에 힘입었으며, 이척(伊陟)은 태무(太戊)를 도왔는데 그 정성이 상제에게 감동되었고, 태공(太公)는 용맹스럽게 은(殷) 나라를 쳐서 천하가 주(周) 나라를 높였는데, 주공(周公)과 더불어 왕실을 보좌하여 제(齊) 나라에 봉함을 받아 그 책명이 맹부(盟府)에 간수되어 있으며, 그 후손 환공(桓公)은 천하를 바로잡아 주 나라를 높였습니다. 탕왕(湯王)은 6백 년이나 전해 내려갔고 주 나라는 그 보다 더 오래갔으니 국운의 장구함은 뒷세상에서 이에 미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실로 이윤ㆍ태공이 보필했던 공로를 잊지 아니하여서 그 자손이 선인의 훌륭함을 본받는 충성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한(漢) 나라는 삼걸(三傑)에 힘입었으며, 장량은 황제의 스승이 되었으나 그를 정승에 임명하지 않았고 벽곡(辟穀)하는 것을 들어 주었으며 소하(蕭何)는 도필리(刀筆吏)로서 정승이 되었으나 또한 옥에 갇히었으며, 한신(韓信)은 멸족되었고, 경포(黥布)는 배반하여 화살이 고제(高帝)의 몸에 맞았습니다. 나라에 사람이 없어 그 대를 전하자 중간에 끊어져서 유씨(劉氏 한(韓) 나라)가 2대 만에 망한 진(秦) 나라와 같이 될 뻔하였으니, 그 상(商) 나라와 주(周) 나라가 나라를 세운 공신인 이윤과 태공으로 하여금 후사를 보좌하게 하여 잘 다스렸던 것에 비교한다면 하나같이 어찌 그렇게 떨어집니까. 성조께서 공에 보답하여 배현경(裵玄慶)ㆍ홍유(洪儒)ㆍ신숭겸(申崇謙)ㆍ복지겸(卜智謙)ㆍ유검필(庾黔弼)ㆍ최응(崔凝) 6공(公)의 얼굴을 그려 어진과 마주 대하게 하고, 태묘(大廟)에 배향하여 춘추로 같이 제사 하였습니다.
31대까지 전하다가 공민왕에 이르러 아들이 없이 갑자기 훙하여 국운이 중간에 끊어졌습니다. 공민왕을 장사지낼 때에 무지개가 해를 거듭 둘러쌌으며, 우(禑)가 처음 제사[蒸]를 지낼 때에 올빼미가 태실(太室 종묘에 태조의 신주를 모신 방)에서 우니 천지가 진동하였습니다. 다음 해 3월의 의능(毅陵)의 기일에 큰바람이 불고 비가 왔으며 천둥이 치고 또 우박이 왔습니다. 우가 작(爵)을 물려받을 때에 큰바람이 조묘(祧廟)에서 일어나 북쪽으로 향해 부니, 태실의 망새[鷲頭]가 부러지고 묘의 문이 넘어졌으며, 조묘 침원(寢園)의 소나무가 거의 반이나 뽑히고, 쥐가 태실의 신주 밑자리를 뜯어먹었으며, 이듬해에는 어름(御廩)에 화재가 일어났습니다. 지난해 6월에는 창(昌)이 세워 둔 말이 전국보(傳國寶)의 갑(匣)을 발길로 차서 자물쇠를 부수고 어보를 부러뜨리고 뛰어나가 달아났습니다. 조종께서 이성을 노하여 그가 받드는 제사를 흠향하지 않으며, 위엄을 보여 이를 끊으시니, 비록 면전에서 가르치고 귀를 당겨 일러 주더라도 어찌 이보다 더 하겠습니까. 인임이 우를 세우고 나서 우(禑)의 생모 반야를 죽여 입을 봉하니, 사평문(司平門)이 무너졌습니다. 뼈를 장사하면서 말하기를, '이는 공민왕의 궁인인데 실상 우의 어머니다' 하였는데, 관(棺)의 휘장에 불이 나서 이를 바꾸었더니 또 불이 났습니다. 재상 속명(續命)을 내쫓고 김유(金庾)ㆍ최원(崔源)을 죽이니, 사람들이 모두 기운이 꺾이어 말이 신씨(辛氏)에게 관계되면 깜짝 놀라 얼굴빛이 변하며 멸족 당할까 서로 경계하였습니다. 우와 창의 인친(姻親)이 심복과 조아(爪牙)가 되어 조정과 민간에 뿌리박고 있어, 이를 제거하기 어렵기가 산을 뽑기와 같았습니다. 시중 이(李 태조의 옛 이름)가 충성을 다하고 대의를 분발하여 제일 먼저 흥복(興復)을 주창하여, 덕부(德符) 등 8장상이 따라 이를 도와 드디어 두 흉인(兇人 우ㆍ창(禑昌))을 제거하였으니, 우리 조종(祖宗) 31대의 하늘에 배향(配享)된 제사를 다시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옛날에 문왕(文王)은 4명의 신하가 아니었다면 주(周) 나라를 세울 수 없었을 것이며, 무왕(武王)은 9명의 신하가 있었으므로 큰 공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지금의 이 흥복은 진실로 성조께서 가만히 도와주신 데 말미암은 것이지만, 또한 이(李 태조의 옛 이름) 등의 충성은 일월을 꿰뚫었고 공정은 삼한에 드러났으니, 크게 천도를 따랐기에 하늘이 위에서 도왔으며, 크게 미덥게 하였기에 사람이 아래에서 복종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인임과 우ㆍ창이 길렀던 자들로 하여금 갑자기 순종하도록 하여 저자는 가게를 바꾸지 않고, 사람들은 얼굴빛도 변함이 없이, 새벽에 시작하여 아침이 되기 전에 나라가 왕씨에게 돌아오게 하였으니, 이에 성조(聖祖)의 어진에 나아와서 공을 아뢰고 상을 시행합니다. 이(李 태조의 그 전 이름)에게는 식읍을 주고 군(君)에 봉하여 대대로 물려받게 하고, 덕부(德符) 이하는 충의군(忠義君)에 봉하고 모두 세습하게 하여 그 녹을 대대로 주게 할 것입니다. 얼굴을 그리고 공적을 새겨서 영구히 전할 것을 맹서하고 이를 종묘에 간수합니다.
성조(聖祖)께서는 후사왕과 9명의 후손을 도와 마음과 덕을 같이하여,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두려워하여 위로는 종묘를 받들고 아래로는 생령을 보전하여 천록(天祿)을 같이 누리고 영원한 세대까지 전하도록 하여 주소서. 9명의 자손은 비록 대역을 범하더라도 재량하여 가장 가벼운 죄에 처하고, 다시 그 후사를 구하여 작(爵)을 물려받고 제사를 받들게 하며, 대대로 끊어짐이 없게 하여 9명의 공에 보답할 것입니다. 후사왕이 중흥의 어려움을 생각하지 않고 9명의 후손으로 하여금 혹시 그 작과 식읍을 잃게 한다면 성조(聖祖)께서 죄를 주어서 나라를 누리지 못하게 할 것이며, 9명의 후손이 그 조부의 충성을 잊고 간사한 꾀를 품거나 교만하고 사치하여 집에 재앙를 끼치고 나라에 해를 끼친다면, 성조께서 이를 죄주어 그 작과 식읍을 다른 후손에게 주어, 9명으로 하여금 영원한 세대까지 제사를 받게 하소서. 이는 신이 9명에게 사사로운 정을 두는 것이 아니고 실로 9명이 죽음을 무릅쓰고 계책을 내어 사직에 몸을 바쳐 왕씨(王氏)를 흥복시켜, 우리 조종의 종사로 하여금 하늘과 더불어 무한히 전하게 함을 가상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 종친ㆍ문무 기로ㆍ신료(臣僚)들은 중흥ㆍ반정할 때에 위주(僞主)를 버리고 진주에게 돌아와, 어려운 지경에 있는 나를 호위하였으니, 신이 매우 이를 가상하게 여깁니다. 성조께서는 그 후손을 길이 도와서 우리 왕실을 호위하게 하소서." 하였다.
9공신의 녹권을 내려 주었는데, 우리 태조로 분충 정난 광복 섭리 좌명공신 화령군 개국충의백(奮忠定難匡復燮理佐命功臣和寧郡開國忠義伯)으로 삼고, 식읍 일천호 식실봉 삼백호, 전 2백 결, 노비 20구(口)를 주었으며, 심덕부를 청성군 충의백(靑城郡忠義伯)으로 삼고, 전 1백 50결, 노비 15구를 주었으며, 정몽주ㆍ설장수 등 7명은 모두 충의군으로 삼고 각기 전 1백 결, 노비 10구를 주었다.


[주D-001]사명(詞命) : 문신(文臣)이 왕을 대신하여 교서(敎書) 및 외교 문장을 제술(製述)하는 것이다.
[주D-002]옥배(玉杯)와 상저(象箸) : 상(商) 나라 주(紂)가 사치하여 처음으로 옥배(玉杯)와 상저(象箸)를 만드니, 기자(箕子)가 탄식하기를, “장차 경궁(瓊宮)과 요대(瑤臺)를 지어 사치가 한이 없을 징조로다." 하였다.
[주D-003]백련회(白蓮會) : 서방(西方) 극락 세계(極樂世界)에 왕생(往生)하기를 원하여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부르고 예경(禮敬)하는 것으로, 진(晉) 나라 혜원법사(慧遠法師)가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에서 백련사(白蓮寺)를 만들어 염불하였는데, 그 절의 연못에 흰 연꽃을 심은 데서 유래했다.
[주D-004]찬배(贊拜) : 절할 때에 옆에서 홀기(笏記)를 불러 주는 것이다.
[주D-005]명이(明夷) : 《주역》의 명이괘(明夷卦)는 어진 사람이 참소를 당하는 괘이니, 여기서는 참소를 당하여 귀양간 것을 말한 것이다.
[주D-006]칠보(七步) : 위(魏) 나라 조식(曹植)이 글재주가 민첩하여, 걸음을 걸으면서 7보(步) 안에 오언절구(五言絶句)를 지었다.
[주D-007]소인유(小人儒) : 《논어》에, 공자가 자하(子夏)에게 이르기를, “너는 군자유(君子儒)가 되고, 소인유(小人儒)가 디지 말라." 하였으니, 유(儒)에도 군자와 소인의 구별이 있는 것이다.
[주D-008]허물을……안다 : 예를 들면, 후한(後漢) 때 오우(吳祐)의 속관(屬官) 손성(孫性)이 사사로이 백성들에게 돈을 거두어 아비의 옷을 해드리다가 죄를 받자, 오우가 "아전 손성이 오명을 받았으니 이른바 허물을 보고 사람을 안다는 것이로구나." 하고 돌려보낸 일이 있다. 이 말은 허물의 종류에 따라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는 뜻으로 《논어》에도 보인다.
[주D-009]어진……법 : 주관(周官)의 제도에, 형벌을 쓰는 데 팔의(八議)가 있으니, 그 중에 의현(議賢)·의능(議能)·의공(議功)의 조목이 있다. 이것은 같은 죄를 지어도, 현인이나 재능이 있는 이나 공(功)이 있는 이에게는 참작하여 감면할 수 있다는 말이다.
[주D-010]자홍(子弘)을 폐하고 : 한 나라 혜제(惠帝)가 죽은 뒤에, 여태후(呂太后)가 자홍(子弘)을 혜제의 후사(後嗣)로 삼았는데, 여태후가 죽은 뒤에 자홍은 혜제의 참아들이 아니라 하여 대신들이 폐하고, 고제(高帝)의 아들인 대왕(代王) 항(恒)을 맞아 세웠다.
[주D-011]위(衛)……명분 : 당시에, 위(衛) 나라 임금이 출공(出公) 첩(輒)인데, 그보다 먼저 그의 아버지 괴외(蒯聵)가 태자 때에 그의 아버지 영공(靈公)에게 죄를 얻어 망명하고, 영공이 죽은 뒤에 출공이 유명(遺命)으로 즉위하였는데, 그의 아버지 괴외가 국내로 들어오므로 출공이 이를 막았다. 공자가 말한 명분은 위 나라 부자간의 명분을 말한 것이다.
[주D-012]측천후는……대의 : 무후(武后)는 중종(中宗)의 어머니인데, 신하들이 무후를 당 나라 황실에 대한 역적으로 처단하게 될 때에 중종이 말려야 할 것이나, 사정(私情)보다 대의(大義)로 모르는 척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주D-013]향원(鄕愿) : 한 고을 사람이 모두 그를 점잖다[愿] 칭하는 것인데, 이것은 지적할 허물도 없고 겉으로 점잖은 것 같으나 실상은 어름어름하게 처세하는 사람으로, 공자와 맹자가 모두 이런 종류의 사람을 덕(德)의 적(賊)이라 하였다.
[주D-014]항심(恒心) : 맹자가 말하기를, “보통 사람은 일정한 산업[恒産]이 있어야 일정한 마음[恒心]이 있다." 하였다.
[주D-015]요……대우하고 : 중국 오대(五代) 시대에, 후진(後晉)의 황제 석경당 (石敬瑭)이 글안의 덕으로 임금이 되어, 글안을 아버지로 섬기었다.
[주D-016]보거(保擧) : 천거하는 사람이 그의 신분을 보증하여, 후일에 천거받은 자가 죄를 지으면 천거한 사람이 책임을 지는 것이다.
[주D-017]모든……않는다 : 《서경》입정편(立政篇)에 있는 말인데, 문왕(文王)은 대체(大體)만을 살피고, 모든 옥사(獄事) 같은 것은 해당 관청에 맡겨 직접 관여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주D-018]채지(采地) : 경대부(卿大夫)의 봉읍(封邑)인데, 그 조세의 수입으로 녹봉을 삼는 것이다.
[주D-019]삼걸(三傑) : 한 고조(漢高祖)의 개국을 보좌한 인걸이 3명인데, 소하·장량·한신이다.
[주D-020]벽곡(辟穀) : 장량이 벼슬을 사양하고 인간 일을 버리고 벽곡하여 신선을 배우겠다고 한 고조에게 하직하고 갔다.
[주D-021]신하 : 태공망(太公望)·태전(太顚)·굉요(閎夭)·산의생(散宜生)을 말한다.

 

국조보감 제2권
 정종조
1년(기묘, 1399)


○ 1월. 1일에 상이 태상왕께 조회하고 정전으로 돌아와서 조하(朝賀)를 받고 신하들에게 잔치를 열었다.
평양부윤 성석린(成石璘)은 의기도(欹器圖)를 올리고, 경기좌도 관찰사 이정보(李廷俌)는 역년도(歷年圖)를 올리니, 경기우도 관찰사 최유경(崔有慶)은 무일도(無逸圖)을 올리니, 상이 모두 가상하게 여기고 받았다.
○ 상이 경연에 거둥하여 의기도를 벽에다 걸어 놓고 신하들에게 보이니, 지경연사 이서(李舒)가 그릇이 비면 기울어지고 가득 차면 엎어지는 이치에 대해 의미를 확장하여 설명하고 가득 차면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으로 갖추 진달하니, 상이 기뻐하였다.
○ 처음으로 사관(史官)을 경연에 입시하게 하였다. 문하부(門下府)가 상소하기를,
“사관의 직책은 대체로 임금의 언동과 시정(時政)의 잘잘못을 숨기지 않고 사실 그대로 기록하는 것인데, 그렇게 하는 것은 반성의 자료로 삼도록 하고 경계도 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전조(前朝)의 말기에는 주색에 빠져 법도가 없다 보니 사관이 사실대로 기록하는 것을 꺼려하여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전조의 실정(失政)을 거울로 삼아 사관으로 하여금 날마다 좌우에서 모시고 앉아 임금의 언동과 시정을 기록하게 해서 만세의 대원칙으로 삼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 우정승 김사형(金士衡)을 파견하여 경사(京師)로 보냈는데, 건문황제(建文皇帝)의 등극을 축하하기 위해서이다. 상이 홍제원(弘濟院)에서 전송하였다.
○ 호서 지방의 백성들이 궁성(宮城)에 사용할 기와와 이엉을 운송하는 역사와 조군(漕軍)의 어염(漁鹽)에 대한 역사를 견감하였는데, 충청 감사 이지(李至)의 청을 따른 것이다.
○ 호서에 기근이 들자, 본도의 군자(軍資)를 가지고 구조해 주게 하였다.
○ 올적합(兀狄哈) 등이 와서 조회하였다.
○ 각도 감사에게 내려주는 쌀을 제외하고 실직에 따라 녹(祿)을 반사하였다.
○ 2월. 상이 제릉(齊陵)에 행행하여 한식제(寒食祭)를 친행하고 개성(開城) 유후사(留後司)를 둘러보았다. 수창궁(壽昌宮) 북원(北苑)에 올라가서 좌우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전조 태조(太祖)의 지혜로 여기에다 서울을 정한 것이 어찌 우연이었겠는가.”
하였다.
○ 상이 개성에서 돌아왔다.
○ 3월. 개성으로 서울을 옮길 때에 한양(漢陽)의 궁궐은 초창기였고 민가도 갖추어지지 않았다. 백관(百官)과 군민(軍民)은 모두 옛 서울을 그리워하고 태상왕도 생각을 떨구지 않고 있었다. 상이 서울 옮기는 문제를 종실과 대신들에게 물으니, 모두 좋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달 무인(7일)에 상이 태상왕을 모시고 길을 떠나 경진(9일)에 개성 도읍지에 도착하였다. 상이 매번 태상전(太上殿)에 뵈러 갈 때면 의장대는 동구 밖에 머물게 하고 기마병 두어 사람만 데리고 들어가서 조용히 모시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물러 나오곤 하였다.
○ 동북면 및 강원도 선군(船軍)을 혁파하고, 서북면 및 경기, 경상, 충청, 전라, 풍해 등 여러 도의 선군을 견감시켜 주도록 명하였다. 당시에 선군이 방수(防戍)하는 문제는 여러 도의 고질적인 폐단이 되어 있었다. 상이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백성이 겪는 고초 중에 선군만큼 심한 것이 없다. 요즘 왜구가 설치지 않아서 변경이 조금 잠잠하니, 윤번으로 서는 수군(戍軍)을 요해처에다 나누어 배치해서 봉화(烽火)로 서로 연락하고 격문(檄文)을 띄워 서로 모이게 한다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드디어 도평의사에 묻고서, 관동(關東) 및 동북면의 방수하는 선군을 모두 혁파하도록 하고, 그 나머지 제도(諸道)는 열에 한둘을 감해 주었다.
○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문신으로 하여금 하루씩 걸러 회강(會講)하게 하였다. 처음에 고려 인종(仁宗)이 연영전(延英殿)의 이름을 집현전으로 고치고 문학(文學)하는 선비를 선발하여 두었었는데, 국초(國初)에 이르러서는 그 이름만 있고 실상은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대사헌 조박(趙璞)이 서적을 많이 비치해 두고 관각(館閣)의 직함을 띠고 있는 문신으로 하여금 하루씩 걸러 모여서 경의(經義)를 토론하여 고문(顧問)에 대비하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그 말을 따랐다. 조준(趙浚), 권중화(權仲和), 조박(趙璞), 권근(權近)을 제조관(提調官)으로 삼고, 문신 중에서 5품 이하는 교리(校理)에 충원하고, 7품 이하는 설서(說書)와 정자(正字)에 충원하였다. 얼마 후에 집현전의 이름을 보문각(寶文閣)으로 고쳤다.
○ 충청, 전라, 풍해 등 제도(諸道)에 기근이 들자, 경차관을 나누어 보내 구휼하게 하고 또 수령의 성실 여부를 규찰하게 하였다.
○ 4월. 태상왕이 금강산(金剛山)에 행행하려 하자, 상이 간청하기를,
“지난해에 있었던 수재와 한재 때문에 백성은 기근이 들어 있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초여름이어서 농사일로 바쁩니다. 대가(大駕)가 가시는 길에 아무리 호종(扈從)을 간소화한다고 하더라도 백성들의 생업에 방해가 될까 싶습니다.”
하니, 태상왕이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아비는 자식을 위하여 말하고 자식은 아비를 위하여 말하는 법이니, 어찌 생각하지 않고 말하였겠는가.”
하고, 가지 않았다.
○ 예조에 하교하기를,
“제릉(齊陵)에 행할 제의(祭儀)를 종묘(宗廟)의 제의에 따르도록 하라.”
하니, 예조가 아뢰기를,
“능에 지내는 제사는 고례(古禮)가 아닙니다. 신의왕후(神懿王后)가 비록 종묘에 들지는 못했지만 이미 원묘(原廟)에 모시고 사계절에 따라 제사를 지내고 있으니, 또 능에다 제사를 지내는 것은 부당한 일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고 단지 희생만 쓰지 말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 처음 태상왕 원년에 예조에 명하여, 마전현(麻田縣) 앙암사(仰巖寺)에 고려 태조의 영정을 모실 곳과 별도로 전우(殿宇)를 지어 고려 태조 및 혜종(惠宗), 성종(成宗), 현종(顯宗), 문종(文宗), 충경(忠敬), 충렬(忠烈), 공민(恭愍) 등 7왕을 제사지내게 할 것을 의논하여 결정하게 하였으나, 미처 착수하지 못하였다. 6년이 지난 뒤에야 경기 관찰사에게 명하여 정부(丁夫)를 징발해서 사당을 짓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완성되니, 제의(祭儀)대로 타향(妥享)하였다.
○ 5월. 상이 백관을 거느리고 태상왕께 진연(進宴)하니, 태상왕이 매우 기뻐하면서 띠고 있던 황금대(黃金帶)를 직접 풀어 상에게 하사하면서 이르기를,
“아비가 죽고 나서 자식에게 전해지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다. 어찌 아비와 자식이 직접 주고받아서 친애하는 정을 다하는 것만한 일이 있겠는가.”
하니, 상이 머리를 조아리고 사례하였다. 종실과 공경이 번갈아가며 일어나서 상수(上壽)하고 저녁이 다하고 나서야 파하였다.
○ 일본국 대장군이 사신을 보내 방물(方物)을 진상하고 포로로 잡혀간 남녀 100여 인을 모두 돌려보냈다. 상이 어전에서 인견하고 내사(來使)를 4품 반열에 서서 예를 행하게 하였다.
○ 올량합(兀良哈)이 이리를 진헌하였다. 상이 연신에게 이르기를,
“이 짐승이 비록 먼 곳에 사는 사람이 진헌한 것이기는 하지만 궁원(宮苑)에서 사육하자면 매월 닭 60마리가 든다. 어찌 쓸모 있는 가축으로 쓸모 없는 짐승을 기를 수 있겠는가.”
하고, 들에 풀어주도록 명하였다.
○ 상이 종묘(宗廟)가 새 도읍지에 있으므로 친히 제사를 지낼 수 없다 하여 종묘를 개성으로 옮기고자 하니, 참찬문하부사 이거이(李居易)가 그것이 불가하다는 것을 극력 진달하고 또 대신을 보내어 대행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 7월. 경외(京外)에 남형(濫刑)으로 인한 폐단을 금지하도록 명하였다.
○ 8월. 하교하기를,
“옛날 순(舜)은 용(龍)에게 ‘참소하는 말이 선인(善人)의 일을 저해하는 것을 미워한다.’는 말로 명하였고, 기자(箕子)는 무왕(武王)에게 ‘백성은 사당(邪黨)을 두지 않는다.’는 말로 고하였다. 전조의 말기에 붕당을 서로 만들고 참소를 서로 숭상하여 망하게 되었다. 그 남은 잔재가 없어지지 않고 서로들 모여서 남을 참소하고 선동하는 자들이 많았다. 오직 너희 묘당은 나의 지극한 뜻을 받아들여서 엄격하게 금령을 실시하여 전조의 풍습을 일시에 바꾸고 우(虞)와 주(周)의 정치를 만회하여 조선의 억만년 사업이 영원히 지속되게 하라.”
하였다. 당시에 여러 공신들이 각각 군사를 거느리고 사적으로 알현하는 것이 성행하여 서로 참소하고 헐뜯었기 때문에 이 하교가 있었다.
○ 어용(御容) 및 정사공신(定社功臣),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 등 17인의 초상을 그리도록 하였는데, 이는 방석(芳碩)의 난을 평정하였기 때문이다.
○ 문하부(門下府)가 상서하기를,
“구언을 하고 간언을 받아들이는 것은 임금의 요도(要道)입니다. 전일에 대간이 상소한 것을 혹 윤허를 내리지 않기도 하고 혹 궁중에 두고 내리지 않기도 하시니 언로가 막혀 아랫사람들의 실정이 진달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원하건대, 앞으로는 대간이 아뢴 것을 곧바로 윤허를 내리도록 하소서.
여름부터 가을까지 조회를 보거나 정사를 듣는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하늘과 땅 위에서 발생하는 변괴가 누누이 경고를 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정사를 게을리 한 소치가 아니겠습니까. 원하건대, 매월 육아일(六衙日)에 각사로 하여금 모두 아뢰게 해서 친히 결단을 내리소서.
삼년상은 만세에 변치 않을 법이며, 기복(起復)의 제도는 일시적인 변례입니다. 국가가 위급한 시기에는 장수와 재상의 재주를 겸비한 자일 경우 본정을 빼앗고 기복시키는데, 이것이 어찌 평화로운 세상에서 행할 일이겠습니까. 원하건대, 최질(衰絰)을 착용한 상인(喪人)을 기복시켜 직임을 부여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상이 가상하게 여기고 받아들였다.
○ 행대(行臺)의 감찰(監察)을 각도에 나누어 보내서 민간의 이해 관계와 수령의 득실 문제와 호족(豪族) 중에서 백성을 괴롭히는 자를 염찰하게 하였다.
○ 9월. 상이 해주(海州)에서 사냥을 하고 이어서 온천에 가서 질환을 씻고자 하였다. 헌부가 왜구를 아직 평정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만두기를 간청하였으나, 상이 듣지 않았다. 다음날 참찬문하부사 이무(李茂)에게 이르기를,
“어제 헌사(憲司)의 간언을 따르지 않았더니 밤새도록 마음이 편치 않았다. 더구나 백성의 폐가 되는 일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가는 것을 중지하도록 명하였다.
○ 10월. 천둥과 번개가 크게 치고 우박이 내렸다. 하교하기를,
“하늘의 경고가 이러하니 나는 매우 두렵다. 양부(兩府)와 각사(各司)로 하여금 형정(刑政)의 득실과 민간의 애환을 밀봉해서 보고하게 하라.”
하였다.
○ 처음으로 조례상정도감(條例詳定都監)을 설치하고 백관의 장주(章奏)를 내려서 의의(擬議)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다.
○ 태상왕이 누누이 상에게 이르기를,
“나를 시위하고 있는 장사(將士)들이 종일 수직(守直)하고 있으니, 내가 민망하오. 어찌 철수시키지 아니하는 거요?"
하니, 상이 부득이 철수하도록 명하였다. 태상왕이 매우 기뻐하면서 좌우에게 이르기를,
“왕의 성품이 순후하여 일찍이 내 마음을 거스른 적이 없으니 참으로 효자이다.”
하였다.
○ 상이 백관을 거느리고 태상왕을 위하여 향연을 열었다. 심덕부(沈德符)와 성석린(成石璘)이 시연(侍宴)하였고 밤이 깊어서야 파하였다.
○ 태상왕이 신도(新都)에 행행하였다.
○ 11월. 가병(家兵)을 혁파하도록 하였다. 처음에 고려 말기부터 가병을 두는 그릇된 제도가 있었는데, 조선 초기까지도 오히려 미루고 개정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대간이 서로 상소하기를,
“지금 조정은 제각기 사병(私兵)을 거느리고 문에는 무기를 진열하며 간혹 갑옷을 입고 무기를 소지한 채로 궁문을 출입하는 등 마치 전쟁 중에 적과 대치하는 때와 같으니, 선왕의 법도를 좇아 나라를 잘 다스려 가는 데에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원하건대, 옛 제도를 준수하여 종친(宗親) 중에 충의(忠義)가 있는 자를 선발해 맡기고 그 나머지는 사병을 거느리지 말게 해서 공신을 보전하는 도리를 다할 수 있게 하소서.”
하니, 상이 드디어 종친과 훈신을 간택하여 제도의 군사를 나누어 맡게 하고 그 나머지 사병을 거느리고 있는 자는 모두 혁파하게 하였다.
○ 태상왕이 신도에서 돌아왔다. 상이 백관과 의장대를 거느리고 장단(長湍) 나루에서 태상왕을 영접하였다. 행악(行幄)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헌수(獻壽)하니, 태상왕이 먼저 가도록 명하였다.
○ 6품 이상은 각각 현량(賢良)을 천거하게 하였다.
○ 왜구가 풍해도(豐海道) 및 서북면(西北面)을 침략하자, 상이 항왜 구륙(仇陸) 등을 보내 이들을 초유(招諭)하게 하였다. 구륙 등이 선주(宣州)에 가서 만호 등시라로(藤時羅老) 등을 만나 상의 위엄과 덕망을 가지고 유시하니, 왜인들이 모두 기뻐하며 항복하였다. 항복한 왜인에게 사직(司直) 이하의 관직을 제수하고 은대(銀帶)도 주었다. 그리고 매번 조회할 때에는 서반(西班) 8품직 아래에 입참(入參)하도록 하였다.
○ 12월. 헌사(憲司)가 상소하기를,
“시어소(時御所)의 담이 낮고 좁아서 무기를 소지한 자가 아무 때나 마음대로 출입합니다. 원컨대, 지금부터 중문(中門)의 안팎을 환관(宦官)과 갑사(甲士)를 시켜 지키게 하고, 수행하는 사람도 한결같이 《경제육전(經濟六典》에 의거하여 무기를 소지하는 것을 허락하지 마소서.
서무를 분담 처결하는 것은 유사가 제각기 있기 마련인데, 간사한 소인들이 곧바로 대내에 직접 호소하니, 정사하는 체모가 아닙니다. 원컨대, 이제부터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소장(訴狀)은 금지하여 받아들이지 말게 하소서.
조정에 벼슬한 자가 간혹 부모가 병이 있다고 말하는 자도 있고 집에 일이 있다고 말하여 함부로 구전(口傳)을 요구하며 심지어 포마(鋪馬)까지 받아 주현(州縣)을 활보하는 자가 있습니다. 원컨대, 이제부터는 규찰하여 추고하고 논핵해서 그 죄를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상이 가상하게 여기고 받아들였다.
○ 문하부(門下府)가 상소하기를,
“세말(歲末)에 자급을 따르는 정사는 오래되었습니다. 도력장(都歷狀)을 가지고 그 사람의 근만(勤慢) 상태를 따져서 근면한 자는 승급하고 태만한 자는 파면하여, 새로 제수된 자로 하여금 이듬해의 관록을 받고 그 해의 일을 성실히 행하게 하는 것을 ‘세말도목정(歲末都目政)’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반록(頒祿)을 기다려 제수하기로 한다면 관직을 병들게 하는 자가 요행으로 녹을 받게 되고 도목(都目)에서 관직을 받은 자는 녹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을 어찌 관직을 맡기고 녹을 반사하는 의의라 하겠습니까. 한결같이 성헌(成憲)에 따라 제수하는 법을 실시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 상이 태상왕을 모시고 잔치를 열었다. 조용히 말씀드리기를,
“두 정승이 다 해직을 요청하니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태상왕이 이르기를
“조준(趙浚)과 김사형(金士衡)은 인걸(人傑)이오. 그러나 굳이 사양한다면 심덕부(沈德符)와 성석린(成石璘)이 대신할 만하오.”
하였다. 그래서 상이 두 사람을 제배하여 좌우 정승으로 삼았다.
○ 우정승 성석린이 종제(從弟)의 상(喪)을 당한 관계로 정무를 보지 않자,
도평의사사가 아뢰기를,
“대신이 비록 상중에 있다고 하더라도 만일 국가에 큰 일이 있을 경우에 특지를 내려서 직무를 보러 나오게 하는 것을 정식으로 삼으소서.”
하니, 따랐다.
○ 각도의 도관찰사와 경력과 도사에게 모두 경직(京職)을 겸차(兼差)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판중추원사 정홍(鄭洪)의 말을 따른 것이다.

동문선 제120권
 비명(碑銘)
유명 조선국 추증추충직절 수문병의 보조공신 특진보국숭록대부 문하우정승 판도평의사사사 병조사 수문전대학사 영예문춘추관사 서원백 시 문간공 행광록대부 형부상서 집현전학사 이공 신도비명 병서 (有明朝鮮國追贈推忠直節守文秉義輔祚功臣特進輔國崇祿大夫門下右政丞判都評議使司事兵曹事修文殿大學士領藝文春秋館事西原伯諡文簡公行光祿大夫刑部尙書集賢殿學士李公神道碑銘 幷序)


권근(權近)

영락(永樂) 원년 가을 8월에 영사평부사 서원부원군(領司平府事西原府院君) 이공(李公)이 선군(先君)의 묘비명을 나에게 부탁하여 말하기를, “우리 선군자(先君子)께서 덕을 심고 그 열매는 먹지 아니하여 우리 후인에게 끼치셨습니다. 인하여 부자(父子)가 임금의 총애와 영광을 입어 지위는 높고 봉록은 두터워서 선세(先世)에까지 작(爵)을 추봉하게 되었습니다. 분황(焚黃)하고 제사를 올려 은총을 밝힌 일은 있었으나, 그 묘도(墓道)에 아직 비석이 없어서 뒷세상에 보일 길이 없습니다. 또 나는 불행하게도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으며 세 형도 또한 다 먼저 세상을 떠났으므로, 선인(先人)의 덕행을 자세하게 알 수 없습니다. 인멸하여 전하지 못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그대는 세계(世系)와 선인이 경력한 관작(官爵)을 상고하여 명(銘)을 지어 주십시오.” 하기에, 나는 사양할 수 없었다.
삼가 상고하건대, 이씨(李氏)는 청주(靑州)가 관향(貫鄕)이니, 나라의 명망있는 가문으로 가장 드러났으며 또 오래 되었다.
고려 태조가 창업할 때, 휘가 능희(能希)라고 하는 이가 있었는데, 태조를 잘 도와서 공(功)이 있었으므로 국공(國公)을 봉하고, 공신으로서 벽상(壁上)에 화상(畵像)을 그리게 되었다. 그의 6대 손에 이르러 휘를 공승(公升)이라고 하는 이가 있었는데, 행실이 단정하였으며, 인종(仁宗)과 의종(毅宗)을 도왔다. 일찍이 봉명사신으로 금(金) 나라에 갔으나 한 닢의 돈도 받지 아니하니 맑은 덕이 더욱 드러났다. 의종이 추석에 달 구경을 하는데, 하늘이 밝고 구름도 없었다. 오랫동안 감탄하며 아름다워하다가 이르기를, “오늘 밤의 밝은 달은 공승(公升)의 가슴속 같아서 한 점의 티끌도 없구나.” 하였다. 졸하매 시호를 문정(文貞)이라고 하였다. 상하(上下) 수백 년 동안에 자손들은 조상의 업을 이어 받들어 아름다움을 이룩하여 대대로 덕 있는 이가 서로 이어 오더니, 문간공(文簡公)에 이르러서는 더욱 스스로 경계하고 신칙하여 후손에게 경사(慶事)를 끼치게 하였다. 사평공(司平公)은 그의 아들 상당군(上黨君)과 마음을 합하고 힘을 다하여 우리 이씨 조선에 거듭 정사좌명(定社佐命)의 공훈이 있어서 공신으로서 훈맹(勳盟)에 함께 피를 마셨으며, 모두 정승의 높은 벼슬에 올랐다. 상당군(上黨君)과 그의 아우 청평군(淸平君)은 모두 공주에게 장가들었는데, 적선(積善)이 남긴 경사가 더욱 크고 창성하다. 아, 성대하도다. 문간공(文簡公)의 휘는 정(梃)이니 그전 이름은 춘길(春吉)이다. 태정(泰定) 을축년에 공이 29세로 처음에 문음(門蔭)으로 팔관보 판관(八關寶判官)이 되었고, 다음해에 과거의 병과(丙科) 제2등으로 급제하였다. 봉거 직장(奉車直長)에서부터 전법 좌랑(典法佐郞)을 역임하였으며, 치화(致和) 원년에는 판도정랑(版圖正郞)으로 나가서 지초계군사(知草溪郡事)가 되었는데 어진 정치를 한 바 있다. 그 뒤에 감찰ㆍ장령ㆍ전법 총랑ㆍ경상도 찰방에 차례로 임명되었다. 그리고는 10년 동안을 한가롭게 살면서 조용히 노닐며 편안하게 지내다가 지정(至正) 계사년에 다시 중정(中正)ㆍ성균 좨주(成均祭酒)에 임명되고, 봉순대부 판전교시사 진현관제학(奉順大夫判典校寺事進賢館提學)으로 추자(追資)되었다. 갑오년에는 정순대부 판통례문사(貞順大夫判通禮門事)가 되었으며, 을미년에는 판위위시사 보문각제학(判尉衛寺事寶文閣提學)이 되고, 위계(位階)는 봉익대부(奉翊大夫)로 높아졌다. 조금 뒤에 우상시(右常侍)로 전임하였고, 정유년에는 영록대부 우산기상시 집현전학사(榮祿大夫右散騎常侍集賢殿學士)로 고쳐 임명되었다. 무술년에는 광록대부 형부상서(光祿大夫刑部尙書)가 되었으며 관직은 전과 같았다. 이것이 그가 역임한 벼슬이다. 공은 일찍이 청렴하고 검소한 것으로써 스스로 다스리며 예법을 따라 실천하고, 세속에 따라 굽히고 펴고 하는 일을 하지 아니하니, 세속 사람들이 그의 바르고 곧음에 탄복하였다. 진주(鎭州)의 상산(常山)에 물러가 살면서 벼슬과 영달을 구하지 아니하였다. 공민왕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오래 그의 어짐을 들었으므로 왕위에 오르자 공을 불러 서울에 오게 하고, 그의 맑고 삼가는 것을 가상히 여겨 내불당(內佛堂)의 일을 주관하게 하고, 문정공(文貞公)의 절조와 행적의 대강과, 의종(毅宗) 임금이 달을 보고, ‘오늘밤의 밝은 달은 공승(公升)의 가슴속 같아서 한 점의 티끌도 없다.’고 탄상한 말을 친필로 쓰고, 이어 공의 뜻이 선조를 사모하여, 또한 세상 살이의 욕망을 담박하게 하는 일 등, 수백 가지의 말을 써서 내려 주고, 이제 곧 크게 등용하려 하였는데, 공이 갑자기 전에 은거하던 곳으로 돌아가 신축년 6월 19일에 병으로 졸하니, 춘추가 63세였다. 상산(常山)의 남쪽 기슭에 장사하였다.
아버지의 휘는 계감(季瑊)이다. 중대광 낭성군(重大匡琅城君)인데, 시호는 정헌(正憲)이다. 조(祖)의 휘는 창우(昌祐)이니, 판도총랑 증밀직사사(版圖惣郞贈密直司使)이다. 증조의 휘는 장(粧)이니, 전중감 증지문하성사(殿中監贈知門下省事)이다. 바로 문정공(文貞公)의 아들인 참지정사(叅知政事) 휘 춘로(椿老)의 아들이다. 김변(金胼)이니, 외조(外祖)는 시호를 문신공(文愼公)이라 하는데 모주(某州)의 사람이다. 부인(夫人)은 명주 김씨(溟州金氏)니, 모관(某官) 계초(繼貂)의 딸이다. 향년이 70세로서 공보다 15년 뒤인 홍무(洪武) 을묘년 4월 21일에 졸하여 공의 무덤 곁에 장사하였다. 또 그 뒤 20여 년 뒤에 사평 부사(司平府事)의 공(功)으로 공에게 문하우정승서원백(門下右政丞西原伯)을 추증하고, 부인에게 변한국부인(卞韓國夫人)을 봉하였으니, 공신의 조상에게 미루어 주는 은전(恩典)이다. 아들 넷과 딸 둘이 있다. 맏아들의 이름은 유신(由伸)이니, 임오년 과거에 급제하고 형부 낭중(刑部郞中)으로 경상도 안찰사로 나갔는데 공보다 먼저 몰(歿)하였다. 차남의 이름은 거인(居仁)이니, 검교 좌정승(檢校左政丞)으로 죽어서 시호를 공절(恭節)이라 하였다. 다음 삼남의 이름은 거의(居義)니, 공조 전서(工曹典書)로 일찍이 몰하였다. 다음 사남은 이름을 거이(居易)라고 한다. 문하 좌정승(門下左政丞)으로 지금 영사 평부사서원부원군(領司平府事西原府院君)이 되었다. 맏딸은 검교 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 이숭(李崇)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공안 부윤(恭安府尹) 민경생(閔慶生)에게 시집갔다. 손자와 손녀 약간 명이 있다. 장남인 낭중(郞中)이 상서(尙書) 홍승조(洪承祚)의 딸에게 장가 들어 아들을 낳았으니, 큰아들 이름을 덕윤(德閏)이라고 하며 호군(護軍)의 벼슬에 있고, 다음은 이름을 부윤(富閏)이라고 하며 전중경(殿中卿)의 벼슬에 있다. 맏딸은 정당문학 겸 사헌부대사헌 이지(李至)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대호군(大護軍) 김소(金紹)에게 시집갔다. 차남인 공절(恭節)은 도첨의 정승(都僉議政丞) 조익청(曹益淸)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낳았으나 다 어리다. 한산군(漢山君) 이광우(李光雨)의 딸에게 후취(後娶)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굉도(宏道)라고 하며 사수 감승(司水監丞)의 벼슬에 있다. 맏딸은 판사(判事) 박전의(朴專誼)에게 시집가고, 차녀는 군자 주부(軍資注夫) 양중관(梁仲寬)에게 시집갔으며, 다음 삼녀는 공조 의랑(工曹議郞) 노경(盧敬)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도염 서승(都染署丞) 심총(沈聰)에게 시집갔다. 삼남인 공조전서는 호군 김인회(金仁晦)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곤륜(崐崙)이라고 하며 사헌부 감찰의 벼슬에 있다. 4남인 영사평부사는 형부 상서(刑部尙書) 최연(崔堧)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저(佇)라고 하며, 의정부 찬성사 상당군(議政府贊成事上黨君)이다. 태상왕(太上王)의 딸 경신궁주(慶愼宮主)에게 장가들었다. 차남은 이름을 백관(伯寬)이라고 하며, 상호군(上護軍)의 벼슬에 있다. 다음은 이름을 백언(伯言)이라고 하며, 대호군의 벼슬에 있다. 다음은 이름을 백강(伯剛)이라고 하니 청평군(淸平君)이다. 지금 임금의 딸 정신궁주(貞愼宮主)에게 장가들었다. 다음은 이름을 현(儇)이라고 하는데 어리다. 맏딸은 전농정(典農正) 신중선(辛中善)에게 시집 갔다. 차녀는 종부 부령(宗簿剖令) 경지(慶智)에게 시집갔다.
외손자와 외손녀 약간 명이 있다. 이 시중(李侍中 이숭)이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민(岷)이라고 하며, 광주 목사(光州牧使)의 벼슬에 있다. 다음은 이름을 인(嶙)이라고 하며, 사재 소감(司宰少監)의 벼슬에 있다. 다음은 이름을 치(峙)라고 하며, 연안 부사(延安府使)의 벼슬에 있다. 맏딸은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최안준(崔安濬)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최유경(崔有慶)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조준(趙浚)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봉례랑(奉禮郞) 김지(金祉)에게 시집갔다. 민공안(閔恭安) 부윤이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설(渫)이라고 하며, 직예문관(直藝文館)의 벼슬에 있다. 맏딸은 지곡 주사(知谷州事) 홍제(洪濟)에게 시집 갔다. 다음은 평원군(平原君) 조박(趙璞)에게 시집갔다. 증손자와 증손녀 약간 명이 있다. 평녕군(平寧君) 대림(大臨)은 지금 임금의 딸 경정궁주(慶貞宮主)에게 장가들었으니, 정승 조준(趙浚)의 아들이다. 나머지는 다 어리다. 예전부터 공훈이 있는 가문이 두어 대를 못 가서 한미한 가문이 되는 것은, 대체로 선조의 공덕을 거듭 쌓음이 비록 부지런하였더라도 자손된 자가 대개 교만하고 사치함이 많아서 지키는 데 삼가하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지금 공께서는 선대에서 쌓은 덕이 두터워 그 흘러오는 광채가 발달함이 이미 성대한데, 사평(司平)의 부자도 능히 모두 공경하고 근신하여 뜻과 절조를 더욱 가다듬어 귀한체 하지 아니하고 자랑하지 아니하며, 선을 즐겨 게을리 함이 없다. 이는 그 지킴을 더욱 삼가서 선대의 빛을 드날리는 것이니, 후손에게 경사가 흘러감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마땅히 명(銘)에 써야 하겠다. 그 명은 이러하다.

기름진 서원 땅 / 膴膴西原
그 근원을 누가 열었는가 / 孰濬其源
국공이 터를 잡아 / 國公肇緖
그 근본을 잘 굳혔네 / 克固其根
그 뿌리 굳건하여 / 其根旣固
가지와 잎 번성하구나 / 枝葉是繁
높고 큰 문정공 / 烈烈文貞
몸가짐이 맑아서 / 操履之淸
가슴속 티끌 없음이 / 胸中無累
가을달의 밝음일세 / 秋月之明
밝고도 정성스런 형부상서 문간공 / 顯允刑部
덕행이 있어 / 維德之行
예로써 처신하며 / 身以禮持
세속에 영합하지 않았네 / 不與俗隨
청렴하고 검소함 더욱 돈독하여 / 淸儉彌篤
그 터전에 후하게 덕을 쌓았으니 / 厚積厥基
공경도 될 수 있고, 정승에도 알맞건만 / 宜卿宜相
마침내 시용하지 아니하고 / 訖莫以施
경사를 뒤로 물려 / 遺慶于後
넉넉함을 끼치었네 / 以垂其裕
사평을 계도하니 / 迺啓司平
준엄하고 씩씩하여 / 旣峻且武
충성은 사직에 있고 / 忠在社稷
공로는 맹부에 간직하였네 / 功藏盟府
부자가 두 번이나 맹세하여 / 父子再啑
임금의 큰 사업을 함께 도우셨네 / 同獎王業
형제 모두 훌륭하여 / 兄弟竝美
임금의 딸 맞이하니 / 王姬是室
광채나는 은총의 빛 / 赫赫寵光
옛날에도 짝 없구나 / 雖古罕匹
모두 법을 잘 지키고 / 咸能守法
더욱 지조를 삼가니 / 愈謹秉節
복록은 끊임 없고 / 福未有艾
전렬 더욱 빛이나 / 增光前烈
면면한 그 후손 / 繩繩來裔
길이길이 이어가리 / 引之無替
이 사연을 비석에 새겨 / 刻辭于碑
영원한 후세에 밝게 보이노라 / 昭示永世

동문선 제126권
 묘지(墓誌)
언양군부인 김씨 묘지명 병서 (彦陽郡夫人金氏墓誌銘) 幷序


이색(李穡)

부인의 성은 김씨이며, 언양군(彦陽郡)이 본향이다. 고조(高祖)의 휘는 취려(就礪)이니 태사 문하시랑(太師門下侍郞)으로 시호는 위열(威烈)이요, 증조(曾祖)의 이름은 전(佺)이니 태부 문하시랑(太傅門下侍郞)으로 시호는 익대(翊戴)요, 조부의 휘는 변(賆)이니 도첨의참리(都僉議參理)로서 시호는 문신(文愼)이요, 아버지의 휘는 윤(倫)이니 수성수의 협찬보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언양부원군(輸誠守義協贊輔理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彦陽府院君)으로 시호는 정렬(貞烈)이요, 어머니는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 최(崔)씨이니, 대유(大儒)인 중서령(中書令) 문헌공(文憲公) 충(沖)의 13세손이요, 부지밀직사사 서(瑞)의 딸이다. 13세에 민(閔)씨의 집으로 시집와서 며느리의 직분을 다하였으며, 천성이 엄하여 자제를 교도하는 데도 반드시 예로써 하여 친척들이 지금까지도 이를 칭도한다. 딸 하나를 낳아서 판군기시사 김묘(金昴)에게 출가시키니, 김묘는 신라 경순왕(敬順王) 부(傅)의 18세손이다. 김씨의 자녀로 아들은 제민(齊閔)ㆍ제안(齊顔)ㆍ구덕(九德)이 있고, 딸은 밀직부사 김사안(金士安)과, 전 개성 윤 이창로(李彰路)와, 전 종부령 최유경(崔有慶), 전 낭장 허호(許顥)와, 전 전객부령 허의(許誼)와, 낭장 겸 박사 이존사(李存斯)와 문하 주서 김섬(金贍)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제민이 이름을 구용(九容)이라 고치고 그 아들 흥위위 녹사(興威衛錄事) 명선(明善)을 보내어 행장에 의하여 명(銘)을 청하고, 또 말하기를, “우리 외조부 급암공(及菴公)은 천성이 순진하고 솔직하여 장벽을 세우지 않고 날로 시와 술로서 스스로 즐겼으며, 집안의 살림살이는 묻지 않고 오직 부인에게만 맡겼는데, 부인께서는 술과 음식을 준비하여 외조부의 마음을 즐겁게 해드리고서도 오직 날짜를 부족하게 여겼다. 또 외손녀들을 가르칠 때는 반드시 말씀하시기를, ‘남편을 섬기는 예는 처음부터 늙을 때까지 오직 공경하는 마음 한 가지만 지킬 것이며, 의복과 음식에 이르러서도 반드시 정결하게 하되, 오직 그때에 맞도록 하면 될 것이다.’ 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당시 주위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민공이 성정에 맡겨 술 마시고 마음껏 자적하는 것은 그 부인이 안에서 집안일을 잘 다스렸기 때문이다.’ 하였던 것이다. 언양백(彦陽伯) 경직(敬直)이 비록 부인보다 연치가 많았으나 또한 부인을 꺼려하여 감히 조금도 소홀하게 대하지 않았으며, 첨서밀직(簽書密直) 희조(希祖)와 여러 아우들이 모두 어머니와 같이 섬겼다. 기해년에 급암공이 돌아가고 겨우 3년 상을 마치자 신축년에 홍건적을 피하여 영남으로 갔다가 다시 여흥(驪興)으로 돌아와서 살았는데, 일찍이 스스로 한탄하여 말하기를, ‘내 손자 제안(齊顔)이 옳은 죽음을 얻지 못하였으니 내가 무슨 낯으로 다시 서울로 돌아가겠느냐.’ 하였으니, 그 강렬(剛烈)함이 그 아버지의 풍도에 있었다 한다. 갑인년 9월 19일에 병으로 돌아가니 향년이 73세였다. 그 해 12월 15일에 고을 남방에 있는 발산(鉢山) 서쪽 기슭에 장사하였다.” 하였다. 내가 일찍이 급암(及菴)의 장사 때에 시로써 만사(挽詞)를 도운 바 있었으니 부인의 묘명(墓銘)을 어찌 사양하겠는가. 나는 대답하기를, “그렇게 하겠다.” 하였다. 명에 이르기를,

여강의 서쪽 / 驪江之西
발산 양지에 / 鉢山之陽
급암의 부인 / 及菴之室
김씨를 장사하였다 / 金氏攸藏
위열공의 가풍이 / 威烈之風
정렬공에 이르러 더욱 떨쳤으니 / 振于貞烈
규문이 엄숙하여 / 閨門肅然
문채도 있고 절조도 있었다 / 有文有節
오직 너희 자손들은 / 惟爾子孫
그이 마음을 잘 간직하고 / 惟心之存
또 부도를 실추하지 말아서 / 無墜婦則
구천의 여령을 위로하도록 하라 / 以慰九原

하였다.

동문선 제128권
 묘지(墓誌)
여흥군부인민씨 묘지명(驪興郡夫人閔氏墓誌銘)


이색(李穡)

나의 벗 김구용(金九容)씨가 금년 윤 5월 갑진(甲辰)에 그의 어머니 여흥군부인 민씨(閔氏)를 조모 김씨(金氏)의 무덤 곁에 장사하였는데, 거리가 십 몇 보나 되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참군사(叅軍事) 명선(明善)을 보내어 명(銘)을 구하였는데, 나는 의리상 사양하지 못하였다. 그 행장(行狀)을 상고하니, 수성병의협찬공신 중대광도첨의찬성사 진현관대제학 지춘추관사(輸誠秉義協贊功臣重大匡都僉議贊成事進賢館大提學知春秋館事) 시호 문온(文溫) 급암선생(及菴先生) 휘 사평(思平)은 그 아버지요, 광정대부(匡靖大夫) 밀직사사(密直司使) 시호 문순(文順) 휘 적(迪)은 그 대부이고,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시호 충순(忠順) 휘 종유(宗儒)는 그 증조이고,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 시호 정렬(貞烈) 죽헌(竹軒) 김공(金公) 휘 윤(倫)은 그 외조이다. 내외의 문벌이 혁혁하여 온 나라에서 부러워하였는데 부인이 그 사이에서 태어나 견문이 익숙하여 대개 마땅히 할 일에는 모두 어머니를 모범으로 근본을 삼고, 부모를 섬기되 매우 효도하여 혼정신성(昏定晨省)을 병이 들어도 폐하지 않으니 종족들이 칭찬하였다. 신축년 겨울에 도적을 피하여 남쪽으로 피난 갈 때 어머니를 모시고 떠났는데, 어머니는 마치 집안에 있는 것과 같이 편안하였다. 그 뒤에 여흥(驪興)에 살면서 십여 년 동안을 더욱 부지런히 섬겼다. 어머니가 이미 돌아가니 부인의 아들과 사위가 매양 서울로 돌아올 것을 청하였다. 부인이 울면서 말하기를, “우리 어머니 무덤을 여기다 모셔두고 내가 가버리면 성묘를 안 할 것이니, 내 어찌 차마 떠나겠는가. 내 어찌 차마 떠나겠는가.” 하였다. 5월 계사일에 병으로 죽으니 나이가 56세였다. 구용씨(九容氏)가 또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가 맑은 덕을 알까 걱정하시며 남모르게 양성하였더니, 이제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으니 어찌할꼬.” 하였다. 이색이 말하기를, “어질도다. 김모(金母)여, 문온공(文溫公)이 비록 아들이 없으나, 이러한 딸이 있어서 구용씨를 낳았고, 또 그 생질이 사마천의 사전(史傳)을 지었으니, 어질다 이르지 않으리오.” 하였다. 아들이 셋인데 맏은 구용이니, 전(前) 중정대부 삼사좌윤 진현관직제학 지제교 충춘추관편수관(中正大夫三司左尹進賢館直提學知製敎充春秋館編修官)이었고, 다음은 제안(齊顔)으로 중의대부 중서 병부랑중 겸첨서하남강북등처 행추밀원사봉선대부 전교부령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中議大夫中書兵部郞中兼簽書河南江北等處行樞密院事奉善大夫典敎副令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이요, 다음은 구덕(九德)인데, 전(前) 좌우위(左右衛) 보승산원(保勝散員)이었다.딸이 아홉인데 밀직부사 김사안(金士安)ㆍ전(前) 개성윤(開城尹) 이창로(李彰路)ㆍ전 종부령(宗簿令) 최유경崔有慶〉ㆍ전(前) 낭장(郞將) 허호(許顥)ㆍ전 부령(副令) 허의(許誼)ㆍ겸박사(兼博士) 이존사(李存斯)ㆍ문하주서(門下注書) 김첨(金瞻)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아직 시집가지 못하였다. 그 명(銘)이 다음과 같다.

사물이 그 근본으로 돌아갔으니 / 物歸其根
그 삶은 무궁하도다 / 其生不窮
여흥 민씨를 / 驪興閔氏
그 가운데 장사하니 / 葬于其中
강물은 흘러 흘러 / 江之沄沄
어찌 쉴 때가 있으리오 / 曷其有終
강물과 함께 길지어다 / 與之俱長
영가의 풍모여 / 永嘉之風

목은시고 제32권
 시(詩)
공주 목사(公州牧使) 최유경(崔有慶)에게 답하면서 급히 붓을 달리다.


부친의 풍도 이어 청백하고 공근하니 / 淸白公勤繼父風
공사에 인정을 흠뻑 베풀 줄 알고말고 / 已知仁政洽於公
무더위에 시달리는 병객이 안타까워 / 應憐病客愁炎熱
은하수 대신 찻종을 보내 준 것이렷다 / 欲代銀河寄茗鍾


목은문고 제16권
 비명(碑銘)
언양군부인(彦陽郡夫人) 김씨(金氏)의 묘지명 병서(幷序)


부인의 성은 김씨(金氏)이니, 언양군(彦陽郡) 사람이다. 고조(高祖) 휘(諱) 취려(就礪)는 태사 문하시랑(太師門下侍郞)으로 시호가 위열(威烈)이요, 증조 휘 전(佺)은 태부 문하시랑(太傅門下侍郞)으로 시호가 익대(翊戴)요, 조부 휘 변(賆)은 도첨의참리(都僉議參理)로 시호가 문신(文愼)이다. 부친 휘 윤(倫)은 수성수의협찬보리공신(輸誠守義協贊輔理功臣)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언양부원군(彦陽府院君)으로 시호가 정렬(貞烈)이요, 모친인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 최씨(崔氏)는 대유(大儒)인 중서령(中書令) 문헌공(文憲公) 휘 충(沖)의 13세손이 되는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 휘 서(瑞)의 딸이다.
부인은 나이 13세에 민씨(閔氏 민사평(閔思平))에게 시집을 와서 부인의 직분을 다하였으며, 엄한 성품으로 자제를 반드시 예법에 맞게 가르쳤으므로, 종족(宗族)들이 지금까지도 일컫고 있는 터이다. 딸 하나를 낳아서 판군기시사(判軍器寺事) 김묘(金昴)에게 시집을 보냈는데, 김묘는 신라 왕 휘(諱) 부(傅)의 18세손이다.
김묘는 아들 제민(齊閔), 제안(齊顔), 구덕(九德)을 두었다. 딸은 밀직부사(密直副使) 김사안(金士安), 전(前) 개성 윤(開城尹) 이창로(李彰路), 전 종부 영(宗簿令) 최유경(崔有慶), 전 낭장(郞將) 허호(許顥), 전 전객 부령(典客副令) 허의(許誼), 낭장 겸 박사(郞將兼博士) 이존사(李存斯), 문하주서(門下注書) 김섬(金贍)에게 각각 출가하였으며, 다음은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제민은 이름을 구용(九容)으로 고쳤다. 그가 흥위위 녹사(興威衛錄事)인 아들 명선(明善)에게 행장(行狀)을 들려 보내 명(銘)을 지어 달라고 나에게 청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외조부인 급암공(及菴公 민사평)은 성품이 진솔(眞率)하여 사람 사이에 간격을 두지 않았다. 날마다 시와 술로 유유자적(悠悠自適)하였을 뿐, 집안의 살림살이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으며 모두 부인(夫人)이 하는 대로 맡겨 두었다. 부인은 술과 음식을 준비하여 외조부의 마음을 즐겁게 해 드리면서도 혹시 부족한 점이 있지 않을까 날마다 걱정하였다. 부인이 외손녀들을 가르칠 때면 으레 ‘남편을 받드는 예법은 처음부터 늙을 때까지 오직 한결같이 공경하는 마음을 지니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옷과 음식을 마련할 때에도 반드시 정결하게 하면서 때에 맞게 하였다. 그래서 당시에 사람들이 ‘민공(閔公)이 자유분방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부인이 가정을 잘 다스렸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언양백(彦陽伯) 경직(敬直)이 부인보다 손위의 오빠이긴 하였지만, 그 역시 부인을 어렵게 여긴 나머지 감히 조금이라도 거만하게 대하지 못하였으며, 첨서 밀직(簽書密直) 희조(希祖)와 여러 아우들도 모두 모친을 대하듯 부인을 섬겼다.
기해년(1359, 공민왕8)에 급암공이 돌아가시고 나서 신축년에 삼년상을 금방 마쳤을 때,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하였으므로 영남(嶺南)으로 피난하였다가 여흥(驪興)으로 돌아와서 살게 되었다. 부인이 자탄(自嘆)하기를 ‘우리 손자 제안(齊顔)이 제 목숨대로 살지 못하고 죽었으니, 내가 무슨 낯으로 경읍(京邑)에 다시 들어가겠는가.’ 하였으니, 그 강렬(剛烈)한 기질이 부친의 풍도를 닮은 데가 있었다고 한다. 갑인년(1374, 우왕 즉위년) 9월 19일에 병으로 별세하였으니, 향년 73세였다. 그해 12월 15일에 군(郡)의 남쪽에 있는 발산(鉢山) 서쪽에 장사 지냈다. 급암을 장사 지낼 적에 선생이 시를 지어서 만사(挽詞)를 거든 인연도 있으니, 부인의 묘지명을 어찌 또 사양할 수가 있겠는가.”
하기에, 내가 그 말도 맞다고 대답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여강의 서쪽 / 驪江之西
발산의 양지 / 鉢山之陽
급암공의 부인인 / 及菴之室
김씨가 잠들었네 / 金氏攸藏
위열공의 그 기상을 / 威烈之風
정렬공이 떨쳤나니 / 振于貞烈
규문 역시 숙연하여 / 閨門肅然
문채와 절도가 있었어라 / 有文有節
아 그대 자손들이여 / 惟爾子孫
이 마음 잘 간직하고 / 惟心之存
부도(婦道)에 어긋남 없게 하여 / 無墜婦則
구원에 계신 분의 영혼을 위로하라 / 以慰九原

 양촌선생문집 제38권
 비명류(碑銘類)
유명 조선국 추증(追贈) 추충직절 수문병의 보조공신(推忠直節守文秉義輔祚功臣) 특진보국숭록대부 문하우정승 판도평의사사사 병조사 수문전태학사 영예문춘추관사(特進輔國崇祿大夫 門下右政丞判都評議使司事兵曹事修文殿太學士領藝文春秋館事) 서원백(西原伯) 시(諡) 문간공(文簡公) 행광록대부 형부상서 집현전학사(行光祿大夫刑部尙書集賢殿學士) 이공(李公)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並序)


영락(永樂 명 성조(明成祖)의 연호) 원년(1403, 태종3) 가을 8월에,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이공(李公)이 선군(先君)의 묘비명(墓碑銘)을 나에게 부탁하며 말하기를,
“우리 선군께서 덕(德)을 쌓아 그 영화는 누리지 않고 우리 후인에게 끼쳤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부자(父子)는 임금의 총애와 영광을 입어 지위가 높고 봉록이 두터우며, 선세(先世)에까지 작위를 추봉하게 되어 분황(焚黃)하고 제사를 올려 나라의 은전을 밝힌 일은 자주 있었으나, 그 묘도(墓道)에 아직 비(碑)를 세우지 못하여 뒷 세상에 보일 길이 없습니다. 또 나는 불행히도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세 형 역시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선인의 덕행을 자세히 알 수 없으니, 영원히 인멸하여 전하지 못하게 될까 이것이 두렵습니다. 그대는 세계(世系)와 관작의 경력을 상고하여 명(銘)을 지어 주시오.”
하기에, 나는 사양할 수 없었다.
삼가 상고하건대, 이씨(李氏)는 청주(淸州)가 관향이니, 나라의 망족(望族)으로 가장 드러났고 또 오래 되었다. 고려 태조(高麗太祖)가 창업할 때, 능희(能希)라는 분이 있어 태조를 도운 공로가 있으므로 국공(國公)을 봉하였고 벽상(壁上)에 화상을 그리게 되었다. 그의 6대손에 이르러 공승(公升)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조행(操行)이 단정하며 인종(仁宗)과 의종(毅宗)을 도왔다. 일찍이 봉명사신으로 금(金) 나라에 갔으나 한 닢의 돈도 받지 아니하므로 그 청백한 인격이 더욱 드러났다. 의종이 추석(秋夕)에 달 구경을 하는데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갰다. 오랫동안 탄상하다가 말하기를,
“오늘밤의 밝은 달은 공승의 가슴속 같아서 한 점의 티끌도 없구나.”
하였다. 졸(卒)한 뒤에 시호를 문정(文貞)이라 하였는데, 상하(上下) 수백 년 동안 자손들이 모두 훌륭하여 그 세덕(世德)을 서로 계승하여 오더니 문간공(文簡公)에 이르러 더욱 스스로 경계하고 가다듬어 후손에게 경사를 끼치게 하였다. 사평공(司平公)은 그 아들 상당군(上黨君)과 협력하여 우리 조선(朝鮮)을 도와 두 번이나 정사(定社)ㆍ좌명(佐命)의 공을 세웠으므로, 함께 훈맹(勳盟)에 참여하고 정승의 높은 벼슬에 올랐으며, 상당군과 그의 아우 청평군(淸平君)은 모두 공주(公主)에게 장가들었으니, 적선(積善)이 남긴 경사가 더욱 크고 창성하다. 아, 성대하도다.
문간공의 휘는 정(挺)인데 초명은 춘길(春吉)이다. 태정(泰定 원 진종(元晉宗)의 연호) 을축년(1325, 충숙왕12)에 공이 29세였다. 처음 문음(門蔭)으로 팔관보판관(八關寶判官)이 되었고, 이듬해 겨울 과거에 병과(丙科) 제2등으로 급제하였다. 봉거직장(奉車直長)을 거쳐 전법 좌랑(典法佐郞)을 역임하였으며, 치화(致和 원 천순제(元天順帝)의 연호) 원년(1328, 충숙왕15)에는 판도정랑(版圖正郞)으로 있다가 초계 군수(草溪郡守)로 나가 어진 정사를 베풀었다. 그 뒤에 감찰(監察)ㆍ장령(掌令)ㆍ전법 총랑(典法摠郞)ㆍ경상도 찰방(慶尙道察訪)에 차례로 임명되었다. 그 후 10년 동안 한가롭게 살면서 조용히 지내다가, 지정(至正 원 순제(元順帝)의 연호) 계사년(1353, 공민왕2)에 다시 중정(中正)ㆍ성균 좨주(成均祭酒)에 임명되고, 봉순대부(奉順大夫) 판전교시사 진현관제학(判典校寺事進賢館提學)을 더하였다. 갑오년에는 정순대부 판통례문사(正順大夫判通禮門事)가 되었으며, 을미년에는 판위위시사 보문각제학(判尉衛寺事寶文閣提學)으로서 봉익대부(奉翊大夫)의 품계를 더하였다가, 얼마 뒤에 우상시(右常侍)로 전임되었다. 정유년(1357, 공민왕6)에는 영록대부 우산기상시 집현전학사(榮祿大夫右散騎常侍集賢殿學士)로 고쳐 임명되었고, 무술년에는 광록대부 형부상서(光祿大夫刑部尙書)가 되었으며 관직(館職)은 전과 같았다. 이것이 모두 공이 역임한 벼슬이다.
공은 일찍이 청검(淸儉)함으로 자신을 다스리며, 예법을 따라 실천하고 세속을 따라 행동하지 아니하므로 세속 사람들은 곧 그의 정직함에 탄복하였다. 진주(鎭州)의 상산(常山)에 물러가 살면서 벼슬과 영달을 구하지 않았는데, 공민왕(恭愍王)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오래 그의 어짊을 들은 터이라, 즉위하자 공을 서울로 불러올렸다. 공민왕은 그의 청신(淸愼)함을 가상히 여기어 내불당(內佛堂)의 일을 주관하게 하고, 문정공(文貞公)의 빛나는 조행 및 의종(毅宗)이 달을 보면서 감탄한 말에 이어, 공의 뜻이 선조를 사모하여 세상의 일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담박하게 하는 일 등, 수백 가지의 말을 친필로 써서 하사하여 장차 크게 등용하려 하였는데, 갑자기 전에 은거하던 곳으로 돌아가 신축년(1361, 공민왕10) 6월 19일 병으로 졸하니 춘추가 63세였다. 상산 남쪽 산기슭에 장사하였다.
아버지의 휘는 계감(季瑊)이니 중대광 낭성군(重大匡琅城君)으로 시호는 정헌(正憲)이며, 조부의 휘는 창우(昌祐)이니 판도 총랑(版圖摠郞) 증밀직사사(贈密直司使)이며, 증조의 휘는 장(粧)이니 전중감(殿中監) 증지문하성사(贈知門下省事)로서 곧 문정공의 아들 참지정사(參知政事) 휘 춘로(椿老)의 아들이다. 외조는 김변(金賆)이니 시호는 문신공(文愼公)이며 모주(某州)의 사람이다. 부인(夫人)은 명주 김씨(溟州金氏)로서 모관(某官) 계초(繼貂)의 딸인데, 향년이 70세로서 공보다 15년 뒤인 홍무(洪武) 을묘년(1375, 우왕1) 4월 21일에 졸하여 공의 무덤 곁에 장사하였다. 또 20여 년 뒤에 사평(司平)의 공로로 공에게는 문하우정승(門下右政丞) 서원백(西原伯)을 추증하고, 부인에게는 변한국부인(卞韓國夫人)을 추봉하였으니, 공신의 조상에게 미루어 주는 은전(恩典)이다.
아들 넷과 딸 둘을 두었다. 장남 유신(由信)은 임오년 과거에 급제하여 형부 낭중(刑部郞中)을 거쳐 경상도 안찰사(慶尙道按察使)로 나갔는데 공보다 먼저 죽었고, 차남 거인(居仁)은 검교좌정승(檢校左政丞)으로 죽었으니 시호는 공절(恭節)이며, 3남 거의(居義)는 공조 전서(工曹典書)로서 조사하였고, 4남 거이(居易)는 문하좌정승(門下左政丞)으로 지금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이 되었다. 맏딸은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 이숭(李崇)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공안 부윤(恭安府尹) 민경생(閔慶生)에게 시집갔다.
손자와 손녀 몇 명이 있다. 낭중(郞中)은 상서(尙書) 홍승조(洪承祚)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으니, 장남 덕윤(德閏)은 호군(護軍)이고, 차남 부윤(富閏)은 전중경(殿中卿)이다. 맏딸은 정당문학 겸 사헌부대사헌(政堂文學兼司憲府大司憲) 이지(李至)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대호군(大護軍) 김소(金紹)에게 시집갔다. 공절(恭節)은 도첨의 정승(都僉議政丞) 조익청(曺益淸)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낳았으나 다 어리고, 한산군(漢山君) 이광우(李光雨)의 딸을 후취(後娶)하여 낳은 아들 굉도(宏道)가 사수감 승(司水監丞)이며, 맏딸은 판사(判事) 박준의(朴遵誼)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군자 주부(軍資注夫) 양중관(梁仲寬)에게 시집갔고, 셋째는 공조 의랑(工曹議郞) 노경(盧敬)에게 시집갔고, 넷째는 도염서 승(都染署丞) 심총(沈聰)에게 시집갔다. 공조 전서(工曹典書)는 호군 김인회(金仁晦)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은 곤륜(崑崙)으로 사헌 감찰(司憲監察)이다.
영사평(領司平)은 형부 상서(刑部尙書) 최연(崔堧)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으니, 장남 저(佇)는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 상당군(上黨君)으로 태상왕(太上王)의 딸 경신궁주(慶愼宮主)에게 장가들었다. 차남 백관(伯寬)은 상호군(上護軍)이며, 3남 백신(伯信)은 대호군(大護軍)이며, 4남 백강(伯剛)은 청평군(淸平君)으로 금상(今上)의 딸 정신궁주(貞愼宮主)에게 장가들었으며, 5남 현(儇)은 어리다. 맏딸은 전농 정(典農正) 신중선(辛中善)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종부 부령(宗簿副令) 경지(慶智)에게 시집갔다.
외손자와 외손녀 몇 명이 있다. 이 시중(李侍中 시중은 관명. 이름은 숭(崇))의 장남 민(岷)은 광주 목사(光州牧使)이며, 차남 인(嶙)은 사재 소감(司宰少監)이며, 3남 치(峙)는 연안 부사(延安府使)이다. 맏딸은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최안준(崔安濬)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최유경(崔有慶)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조준(趙浚)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봉례랑(奉禮郞) 김지(金祉)에게 시집갔다. 민 공안(閔恭安 공안은 봉호(封號). 이름은 경생(慶生))의 아들 설(渫)은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이며, 맏딸은 지곡주사(知谷州事) 홍제(洪濟)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평원군(平原君) 조박(趙璞)에게 시집갔다. 증손자와 증손녀 몇 명이 있다. 평녕군(平寧君) 대림(大臨)은 금상의 딸 경정궁주(慶貞宮主)에게 장가들었으니, 정승 조준의 아들이다. 나머지는 다 어리다. 예부터 훈벌(勳閥)의 가문이 몇 대를 못 가서 한문(寒門)이 되는 것은, 대개 그 조상들은 덕을 쌓음이 비록 부지런하였으나 자손된 자가 대개는 교만하고 사치하여 삼가 지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 공은 선대에서 쌓은 덕이 두텁고 그 광채의 흐름이 발달(發達)하여 이미 성대한데, 사평(司平)의 부자도 능히 공경하고 근신하여 지조를 더욱 가다듬고, 귀한 체하거나 뽐내지 않으며 선(善)을 즐겨 게을리함이 없으니, 이는 그 지킴을 더욱 삼가서 능히 선대의 빛을 드날리는 것이다. 후손에게 경사가 흘러감이 그치지 않으리라. 이는 명(銘)할 만하기에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기름진 서원(西原) 땅 누가 그 근원을 열었는가. 국공(國公)이 터를 잡아 뿌리를 내렸는데, 그 뿌리 굳건하니 지엽(枝葉)도 무성하다. 열렬한 문정공(文貞公) 그 지조 맑아서, 티끌 없는 가슴속이 가을 달처럼 밝았네. 진실한 형부 상서(刑部尙書) 덕행이 있어, 예절로 처신하며 세속에 영합하지 않았네. 청검(淸儉)에 독실하여 그 터전을 두텁게 하였으니, 경상(卿相)에도 알맞으나 마침내 쓰이지 않고, 경사를 뒤로 물려 넉넉함을 끼쳤도다. 사평(司平)을 계도하니 준엄하고 씩씩하여, 충성은 사직(社稷)에, 공로는 맹부(盟府)에 간직했네. 부자(父子)가 두 번이나 맹세하며 왕업을 도왔고, 형제(兄弟) 모두 훌륭하여 공주를 맞았으니, 혁혁한 은총의 영광 옛날에도 짝할 이 없었네. 법도를 잘들 지키고 더욱 삼가 지조를 지켰으니, 복록은 한이 없고 선열(先烈)에게 광채를 더함이라, 면면한 그 후손 길이길이 이어가리. 사연을 비석에 새겨 영원한 후세에 밝게 보이노라.

연려실기술 제1권
 태조조 고사본말고사본말(故事本末)옛날에 일어났던 일의 시초와 결말이라는 뜻인데, 이 책에서는 편자가 의례에서 밝힌 바와 같이 기사본말체를 취하기는 하였으나, 순수한 기사본말체가 아니고 각 왕조 때 일어난 중요한 사실의 시초와 결말을 시대에 따라 체계적으로 엮어, 각 왕조마다 ‘고사본말’이라고 붙였다.(太祖朝故事本末)
고려말 정사의 문란과 왕업의 일어남


중 변조(遍照)는 본래 옥천사(玉川寺) 여종의 아들인데, 어머니가 천하므로 그 무리에 끼지 못하였다. 이에 앞서 공민왕이 일찍이 꿈을 꾸었는데, 어떤 사람이 칼을 빼어서 찌르려 하자, 어떤 중이 구하여 주어서 곤경을 벗어났다. 왕이 기억하고 있었는데, 마침 김원명(金元命)이 변조를 데리고 와서 왕께 뵈이니, 그 얼굴이 꿈에 본 중과 같았다. 왕이 매우 이상하게 여겨 같이 말하여 보니, 자못 말솜씨가 뛰어나고 스스로 도를 얻었다고 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자주 궁중으로 불러들이니, 이승경(李承慶)이 보고서 말하기를, “국가를 어지럽게 할 자는 반드시 이 중이다.” 하고, 정지운(鄭之雲) 또한 “요사한 인물이다.” 하여 죽이려 하니, 왕이 몰래 피하게 하였다.두 사람이 죽은 다음 변조는 머리를 기르고, 거사(居士)가 되어 이름을 본성명인 신돈(辛旽)으로 하며 돌아와서 다시 왕을 뵙고, 비로소 궁중에 들어가 용사(用事)하였다. 사부(師傅)라고 부르며 국정을 자문하였는데, 왕은 그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없었고, 많은 사람이 따랐다. 사대부의 처첩들이 신승(神僧)이라고 하여 설법을 들으며 복을 구하러 그를 찾아오면 신돈은 오는 대로 간통하였다. 《여사제강(麗史提綱)》
○ 왕이 신돈을 점점 깊이 믿어 매양 그에게 도닦을 뜻을 굽혀 세상을 구제할 것을 청하니, 신돈은 겉으로는 좋아하지 않는 체하면서 왕의 뜻을 굳건히 하였다. 왕이 굳이 말하니, 신돈이 아뢰기를, “듣건대, 대왕께서는 참소하고 이간하는 것을 많이 믿으신다고 하니, 이런 일이 없어야 세상을 복되고 이롭게 할 수 있습니다.” 하니, 왕이 이에 손수 맹세하는 글을 써서 천지 신명에게 증명하였다. 신돈이 용사한 지 몇 달만에, 나이 많은 옛 신하들을 거의 다 내쫓았다. 수정 논도 섭리 보세 공신(守正論道燮理保世功臣)의 호를 주고 영도첨의(領都僉議)에 취성부원군(鷲城府院君)을 봉하였다. 《여사제강》
○ 신돈이 처음 궁중에서 나와 기현(奇顯)의 집에 우거하면서 기현의 처와 간통하고 음식을 만들게 하였다. 처음 기현의 처가 과부로 있을 때에 신돈이 중이 되어서 간통하더니, 뒤에 기현에게 시집갔는데, 신돈이 기현의 집에 주인을 정하고 또 간통하였다. 기현이 처와 함께 조석으로 곁에서 신돈을 모시기를 늙은 노비와도 같이 하였다. 이로 인하여 기현이 갑자기 등용되었다. 《여사제강》
○ 신돈은 날로 탐음(貪淫)이 심해졌다. 집에 있을 때에는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으며 음악과 여색을 마음대로 하지만, 왕을 뵐 때에는 청아한 이야기를 하고, 채소와 과일만을 먹었다. 이달충(李達衷)이 일찍이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돈을 보고 말하기를, “공이 주색을 지나치게 한다고 사람들이 말한다.” 하니, 신돈이 좋지 않아 하며 헤어졌다. 《여사제강》
○ 경복흥(慶復興) 등이 은밀히 의논하여 말하기를, “도선기(道詵記)의 이른바 ‘비승 비속(非僧非俗)이 정사를 어지럽히고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것이 바로 이 사람이다. 마땅히 왕께 아뢰어 빨리 제거하여야 하겠다.” 하였는데, 신돈이 그들을 모두 남쪽 먼 지방으로 정배보냈다. 《여사제강》
○ 신돈은 천성이 사냥개를 무서워하고, 활쏘고 사냥하는 것을 싫어하였다. 날마다 음란 방종하며, 항상 검은 닭과 흰 말을 잡아서 양기를 돋우니, 당시 사람들이 늙은 여우의 정기라 하였다. 《여사제강》
○ 우정언 이존오(李存吾)가 말하기를, “요물이 나라를 그르치니 제거하지 않을 수 없다” 하면서, 드디어 상소하여 아뢰기를, “신돈은 항상 말을 타고 홍문(紅門)안에 출입하였고 전하와 함께 의자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신돈이 집에 있을 때 재상이 뜰 아래에서 절하는데도 돈은 누구에게나 모두 앉아서 상대하였으니, 비록 최항(崔沆)과 김인준(金仁俊) 같은 권신들도 이런 일은 없었습니다. ……” 하니, 왕이 크게 노해서, 명하여 그 글을 불사르고 존오를 불러서 책망하였다. 이때 신돈이 왕과 함께 의자에 마주 앉았는데, 존오가 신돈을 노려 보며 꾸짖어 말하기를, “늙은 중이 어찌 이리 무례할 수 있느냐.” 하니, 신돈이 황망히 놀라서 저도 모르게 의자에서 내려앉았다. 왕이 더욱 노하여 순군옥에 가두어 국문하고 벼슬을 강등하여 장사현 감무(長沙縣監務)를 시켰다. 《여사제강》
○ 공민왕 20년 신해에 신돈이 사형을 당했다. 처음에 신돈이 중의 행실로 왕에게 신임을 받았는데, 이미 김란(金蘭)의 두 딸을 들이고 또 첩을 무수히 두고서 권력을 마음대로 부렸다. 기현과 최사원(崔思遠)이 심복이 되고, 이춘부(李春富)와 김난이 우익(右翼)이 되며, 그의 도당이 조정에 가득하니, 왕도 스스로 안심하지 못하였다. 신돈 자신도 너무 심하게 방자스런 것을 알고, 왕이 자기를 도모할까 두려워하여 드디어 반역을 계획하였다.신돈의 문객(門客)인 시랑(侍郞) 이인(李韌)이 흉한 음모를 상세히 알고서 이름을 숨겨 ‘한림거사(寒林居士)’라 칭하고 글을 만들어서 밤에 재상 김속명(金續命)의 집에 던지고, 곧 평민의 복색으로 도망갔다. 속명이 그 글을 바치니, 왕이 이에 명하여 신돈의 무리 기현과 사원 등을 잡아서 국문하니 모두 자백하였다. 드디어 그들을 죽이고 신돈을 수원으로 귀양보냈다. 대간이 번갈아 글을 올려서 죽이기를 청하니, 왕이 이에 임박(林樸) 등을 보내어서 신돈을 수원에서 죽였다.이보다 앞서 왕이 신돈과 더불어 서로 맹세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왕이 맹세한 글을 임박에게 주어서 신돈에게 보이며 죄목을 세어 이르기를, “네가 전에 말하기를 부녀자를 가까이하는 것은 기운을 기르는 것이니, 간음은 안한다 하였는데, 지금 들으니 자식을 낳기까지 하였다고 하니, 이것이 맹세 중에 있느냐. 성중에 좋은 집 일곱 채를 지었으니, 이것이 맹세 중에 있느냐.” 하였다. 신돈의 머리를 경성에 가지고 와 거리에 매달고, 사지를 찢어서 각도로 돌리며, 그의 두 살 난 아이도 함께 죽였다. 《여사제강》
○ 공민왕 23년 갑인에 홍륜(洪倫)과 최만생(崔萬生)이 공민왕을 침실에서 시해하였다. 《여사제강》
과거에 왕이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하여 젊은 미모의 남자를 뽑아서 채우고, 대언(代言) 김경흥(金慶興)으로 하여금 거느리게 하였다. 이에 홍륜ㆍ한안(韓安)ㆍ권진(權溍)ㆍ홍관(洪寬)ㆍ노선(盧瑄) 등이 모두 사랑을 받아 항상 좌우에서 모셨다. 왕의 천성이 여색을 좋아하지 않아서, 노국공주(魯國公主)가 별세한 이후로 비록 여러 왕비를 들였으나, 별궁에 두고 자주 가까이 하지 않았다. 밤낮으로 슬퍼하며 공주를 생각하여 드디어 정신병을 얻게 되었는데, 항상 스스로 화장을 하여 부인의 모양을 하고 경흥과 홍륜들을 끌어들여서 마음대로 음란한 짓을 하였다.왕이 아들이 없음을 걱정하여 홍륜과 한안의 무리로 하여금 여러 왕비를 강제로 간통하여 아들 낳기를 바랐는데, 정비 안씨(定妃 安氏)ㆍ혜비 이씨(惠妃 李氏)ㆍ신비 염씨(愼妃 廉氏)는 죽기로써 거절하여 좇지 않았다. 왕이 익비 왕씨(益妃 王氏)의 궁에 가서 홍륜 등을 시켜 비에게 간통하게 하니, 왕비가 죽기로 거절하였는데, 왕이 칼을 빼어서 왕비를 치려하니 왕비가 두려워서 좇았다. 이로부터 홍륜 등이 자주 왕의 분부라 꾸며대며 왕래하였다. 또 아름다운 소년들을 많이 선발하여 항상 왕을 모시게 하며 ‘속구치[束古赤]’라 불렀는데, 자제위와 더불어 사랑을 받았다. 《여사제강》
○ 처음에 왕이 홍륜들로 하여금 여러 왕비를 간통하여 아기 낳기를 바랐는데, 이때 익비 왕씨가 임신을 하였다. 환자 최만생이 왕을 따라 뒷간에 가서 은밀히 고하여 아뢰기를, “신이 익비전에 갔더니 익비가 말하기를, ‘임신한 지 이미 5개월이 되었다’ 합니다.” 하니, 왕이 기뻐서 이르기를, “내가 일찍이 영전(影殿) 노국공주의 영전을 의탁할 곳이 없음을 염려했었는데, 지금 비로소 임신하였다 하니, 내가 무엇을 근심하리오.” 하였다. 조금 있다가 다시 묻기를, “누구와 관계하였다 하더냐.” 하니, 만생이 아뢰기를 “비의 말이 홍륜이라 합니다.” 하였다.왕이 이르기를, “내일 창릉(昌陵)을 배알할 적에 취한 척하고 홍륜 등을 죽여서 뒷말이 없도록 하여야겠다. 너도 이 일을 알았으니, 역시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만생이 두려워서 홍륜 등과 의논하고 이날밤에 침전에 들어가 왕이 크게 취한 틈을 타 만생이 칼로 쳐서 시해하니, 머리의 골이 튀어서 벽에 묻었다. 홍륜 등이 드디어 김경흥 등을 치면서 소리치기를, “도적이 밖에서 들어왔다.” 하니, 시위하는 군사들이 다리가 떨려서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환자 이강달(李剛達)이 먼저 침전에 들어가서, 방에 가득 피가 흐른 것을 보고 거짓으로 말하기를, “왕이 불편하다.” 하면서, 문을 잠그고 출입을 금하였다. 날이 밝을 무렵, 태후(太后)가 와서 숨기고 상사를 발표하지 않고, 왕의 명이라 하며 경복흥과 이인임(李仁任) 등을 불러서 은밀히 역적을 잡을 것을 의논하였다. 인임이 만생의 옷에 피흔적이 있음을 보고 순위부에 가두고 국문하여 그 죄상을 캐내고, 홍륜 등을 잡아서 문초하니, 모두 자복하였다. 백관이 저자에 모여서 만생과 홍륜 등을 수레로 찢어 죽였다. 《여사제강》
○ 왕이 별세한 지 3일 만에 신우가 재신과 추신들과 더불어 상사를 발표하였다. 이튿날 태후와 경복흥은 종친을 세우려 하고, 이인임은 신우를 세우려 하여 논의를 결정하지 못하였다. 도당에서 서로 보며 감히 말하지 못하였는데, 판삼사 이수산(李壽山)이 말하기를, “오늘의 계책은 종실에서 알아서 해야 합니다.” 하였다. 영녕군(永寧君) 유(瑜)와 밀직(密直) 왕안덕(王安德) 등이 크게 말하기를, “왕이 대군으로 후사를 삼았으니, 이를 두고 어디가서 구하리오.” 하니, 인임이 드디어 백관을 거느리고 신우(辛禑)를 세웠다. 《여사제강》
과거에 공민왕이 항상 후사가 없는 것을 걱정하였었다. 하루는 천하게 변장하고 신돈의 집에 갔는데, 신돈이 자기의 아이[禑]를 가리키면서 아뢰기를, “전하는 양자를 삼아서 후사를 세우소서.” 하니, 왕이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이미 허락하였으며, 신돈은 은밀히 자기 무리들을 시켜서 모니노(牟尼奴 신우)를 위하여 복을 빌었다. 신돈이 수원으로 귀양가게 되자, 왕이 근신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일찍이 신돈의 집에 가서 그의 여종 반야(般若)을 보아서 아들을 낳았다. 놀라지 않게 하고 잘 보호하라.” 하였다.신돈이 죽은 다음에 왕이 모니노를 불러서 태후전에 들이고, 이인임에게 이르기를, “아들이 있으니, 내가 근심이 없다.” 하였다. 그리고 이내 이르기를, “아름다운 부인이 신돈의 집에 있었는데, 아들을 낳을 만하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관계하여서 이 아이가 있게 되었다” 하였다. 《여사제강》
○ 임박이 이미충(李美冲)과 함께 왕을 모시고 있을 때, 왕이 미충을 보고 이르기를, “네가 아기의 일을 아느냐.”고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임박이 괴이하게 여겨 나와서 미충에게 물으니, 미충이 말하기를, “임금께서 일찍이 금으로 만든 것을 신에게 주며, 신돈의 집에 가서 아기에게 주게 하였는데, 아기가 크게 기뻐하였소. 신돈이 나보고 말하기를, ‘주상이 자주 내 집에 행차하시는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 하였소. 내가 이 일을 갖추어 아뢰었기 때문에 임금께서 이 말씀을 한 것이오. ……” 하였다.돈이 처형되자, 임박이 사관 이지(李至) 등에게 말하기를, “신돈을 처형한 것은 국가의 큰 경사요. 또 큰 경사가 있는 것을 그대들은 아시오. 임금께서 궁인(宮人)을 관계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지금 벌써 일곱 살이요. 신돈이 은밀히 길러서 사람들이 모르게 하였으니, 이 죄만으로도 죽여야 마땅하오. 사관은 마땅히 알아요 할 것이오.” 하였다. 《여사제강》
반야(般若)가 밤에 몰래 태후궁에 들어가서 울부짖으며 말하기를, “내가 사실 주상을 낳았는데, 어찌 한씨(韓氏)를 어머니로 하시오.” 하니, 태후가 내치고 반야를 옥에 가두고 대간과 순위부(巡衛府)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다.반야가 새로 만든 중문(中門)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하늘이 만일 나의 원통함을 안다면, 이 문이 반드시 저절로 무너질 것이다.” 하였는데, 좀 있다가 문이 저절로 무너지니, 사람들이 자못 이상하게 여겼다. 삼사우사(三司右使) 김속명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천하에 자기 아비를 분간하지 못하는 자는 혹 있을 수 있지만, 어미를 분간하지 못한다는 것은 내가 듣지 못하였다.” 하였다. 이인임 등이 마침내 반야를 임진강에 던졌다. 《여사제강》
○ 폐주(廢主) 우왕 9년에 문사찬성사 김유(金庾)가 성절(聖節)을 하례하고 왕위를 이어받는 승인을 얻으려고, 명 나라에 들어갔다. 명 태조가 책하여 이르기를, “그대 나라에서 그대 임금을 시해하였는데, 그 권신(權臣)이 누구인가?” 하니, 김유가 이인임이라고 대답하였다.명 태조가 이르기를, “그대의 먼저 국왕이 아들이 없는 것은 내가 아는 바인데 지금 왕은 누구의 아들인가?” 하니, 김유가 변명하지 못하였다. 인임의 집 종이 역시 일행 중에 있다가 듣고 돌아와서 고하니, 인임이 왕께 아뢰고 김유를 국문하여 청주(淸州)로 귀양보냈다. 뒤에 다시 옥에 가두고 그의 가산을 몰수하고, 곤장 백 대를 쳐서 순천(順天)으로 귀양보냈는데, 도중에 죽었다.
○ 신우(辛禑) 때에 태조가 최영과 동심으로 협력하여 임견미(林堅味)와 염흥방(廉興邦) 등을 죽였다. 태조가 최영과 더불어 정당(政堂)에 앉았는데, 최영이 임견미와 염흥방이 등용한 인물을 모두 내쫓았다. 태조가 말하기를, “임견미와 염흥방이 정권을 잡은 지 오래되었으니, 사대부는 모두 그들이 등용한 사람들이오. 지금은 다만 그 인재의 어질고 그러하지 못한 것만을 따져야 할 것이니, 어찌 지나간 일을 허물하리오.” 하였지만, 최영이 듣지 않았다. 《동각잡기》
대대로 녹을 받는 대가로서 국가의 운명과 시종을 같이 한 자가 어느 시대에도 있었지만, 그 사이에는 선하고 선하지 못한 것의 차별이 없을 수 없다. 다만 세상 사람들은 행한 일의 옳고 그름은 자세히 살피지 않고,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여 부귀가 융성한 것만을 보고서, 불선한 자도 함께 국가의 주석이나 심복이 된다고 일컬어 은연중, 그 뽑을 수 없고 움직이기 어려운 세력이 있음을 믿는 것이다. 고려말에 염흥방ㆍ임견미ㆍ지윤(池奫)ㆍ이인임 등이 조정 정사를 잡아 권세를 마음대로 부려서 해독이 백성에게 미치고 화가 종묘 사직에 미쳤으니, 사람마다 모두 그들을 죽일 수 있고, 반드시 천벌이 내려져야 했다.최영이 혁폐도감(革弊都監)을 설치하여 모조리 죽여서 한 집에 죽은 자가 각각 천여 명씩이나 되니, 이에 상하가 통쾌하다 하였으며, 조정과 민간에서 서로 경축하였다. 그러나 이로부터 왕실이 점점 외롭고 우익(羽翼)이 꺾여지고 쇠잔해져서, 드디어 떨쳐 일어날 수 없게 되었다. 목은(牧隱)과 포은(圃隱)이 데리고 일을 같이 한 자들은 이숭인(李崇仁)과 김진양(金震陽) 등 약간이니, 모두 초야(草野)에서 나온 백면서생(白面書生)에 지나지 못할 뿐이었다. 때문에 일을 이루지 못한 것이니, 이런 것을 살피지 않아서는 안 된다. 《기재잡기(寄齋雜記)》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의 의논
○ 태조는 최영과 정의가 매우 두터웠다. 태조의 위엄과 덕망이 점점 성하여지니, 신우에게 태조를 모함하려는 자가 있었는데, 최영이 노하여 말하기를, “이공은 국가의 주석이다. 일조에 큰일이 있으면, 누구를 시켜야 할 것이냐.” 하였다. 매양 연회를 하게 되면, 최영이 반드시 태조에게 말하기를, “나는 소찬을 준비할 것이니, 공은 육찬을 준비하시오.” 하였는데, 태조는 그렇게 하자고 하였다.하루는 태조가 이것 때문에 부하 군사를 거느리고 사냥을 나갔다. 노루 한 마리가 높은 고개에서 달려 내려가는데 지세가 높고 급하여 여러 군사가 모두 바로 내려가지 못하고 산밑으로 돌아 달려와서 모였다. 문득 위로부터 내려오는 대초명적(大哨鳴鏑) 소리를 듣고 우러러보니, 태조가 고개 위에서 곧바로 달려 내려오는데, 형세가 번개같이 빨랐다. 노루와의 거리가 매우 멀었지만 쏘아 바로 맞혀서 죽이고는, 태조는 말고삐를 잡고 웃었다. 최영이 듣고서 한참동안 감탄하며 칭찬하였다. 《용비어천가》
○ 우왕(禑王) 14년 무진 홍무(洪武) 21년 에 태조와 조민수(曹敏修)를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요동(遼東)을 치게 하였다. 처음 명 나라 홍무 기유 공민왕 18년 에 명 태조가 부보랑(符寶郞) 설사(偰斯)를 보내 와서 새서(璽書)를 내려 명 나라가 천하를 평정하였다는 것을 통보하였다. 이어 공민왕을 고려의 왕으로 봉하고, 금으로 된 왕의 인을 만들어 보내왔다.고려에서는 드디어 원 나라의 지원(至元)이라는 연호의 사용을 정지하고, 사은사(謝恩使) 강사찬(姜師贊)으로 하여금 전에 원 나라에서 내려 준 금인(金印)을 싸 가지고 가서 바치게 하였으며, 의례와 복식을 처음으로 명 나라 제도를 모방하였다. 갑인년(1374)에 공민왕이 시해되자, 김의(金義)가 진헌하는 말을 이끌고 명 나라에서 온 사신을 따라 강을 건너가게 되었는데, 도중에 부사(副使) 채빈(蔡斌)을 죽이고 북원(北元)으로 달아났다.우왕 3년 정사 홍무 10년 에 북원에 사신을 보내고, 2월부터 다시 북원의 선광(宣光)이라는 연호를 고쳐 사용하였다. 다음해 무오년(1378)에는 선광 연호를 버리고, 9월에 다시 홍무 연호를 사용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명 태조는 철령(鐵嶺) 이북이 본래 원 나라에 속했던 땅이라고 하여 모두 요동에 귀속시키게 하고 철령위(鐵嶺衛)를 두도록 명령하고, 요동 백호(遼東百戶)를 보내서 알려주었는데, 우왕이 병을 칭탁하고 나가 맞지 않았다. 4월에 다시 홍무 연호의 사용을 정지하였다. 조민수를 좌군 도통사(左軍都統使)로 삼고 태조를 우군 도통사(右軍都統使)로 삼아 요동을 치게 하였다. 《고사촬요(故事撮要)》
고려는 원종(元宗) 때부터 원 나라를 섬겼으며, 충렬왕은 드디어 원 나라의 공주와 결혼하여 원 나라의 황제와는 장인과 사위 사이인 우호관계를 맺었었다. 그리하여 몇 백년 동안 충선왕을 비롯하여 모두 원 나라의 외손이 대대로 왕위를 이었다. 명 나라가 일어나자, 공민왕은 의주(義主)라 하여 섬기기로 하였다. 당시에는 북원(北元)을 가볍게 끊는 것은 옳지 않다고 의논하는 이가 많았다.정도전(鄭道傳)과 박상충(朴尙衷) 등은 명 나라 섬길 것을 주장하고, 이인임(李仁任)과 지윤(池奫) 등은 원 나라 섬길 것을 주장하여, 서로 헐뜯고 배척하고 하여 죄를 받는 자가 있기까지 하였다. 최영(崔瑩)이 나라 일을 맡게 되었을 때 마침 명 나라에서 철령위를 두게 되자, 모두 원 나라를 섬기자는 논의를 주장하게 되었으며, 요동을 칠 계획을 결정하게 되었다. 이때 태조는 공명(功名)이 날로 높아가고 또 이씨(李氏)가 왕이 된다는 풍설도 있어서, 최영이 실로 꺼려하였으나 죄를 줄 만한 구실이 없었다. 그래서 요동을 치게 하여 명 나라에 죄를 짓도록 만든 뒤에 그것을 핑계로 제거하려고 해서 드디어 이 계획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 《해동악부(海東樂府)》
○ 이때 최영이 우왕에게 요동을 칠 것을 권하니, 공산부원군(公山府院君) 이자송(李子松)이 최영의 집으로 가서 그 계획이 옳지 못하다고 역설하였다. 최영이 자송을 임견미와 염흥방의 도당이라고 핑계대어 곤장을 쳐서 먼 곳으로 귀양보냈더니 곧 죽었다. 자송은 청렴한 사람이어서, 나라 사람들이 다시 재상이 되기를 기대하였는데,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에 우왕이 홀로 최영과 요동을 칠 계획을 결정하였으나, 감히 드러내 놓고 말하지는 못하였다.우왕이 봉주(鳳州)에 이르러서 최영과 태조를 불러서 이르기를, “내가 요양(遼陽)을 치고자 하니, 경 등은 마땅히 힘을 다하라.” 하였다. 태조가 아뢰기를, “지금 군사를 출동시키는 것은 네 가지의 불가(不可)함이 있습니다.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에 거역하는 것이 첫 번째 불가함이고, 여름철에 군사를 출동시키는 것이 두 번째 불가함이며, 온 나라의 힘을 기울여 멀리 가서 정벌하면 왜적이 빈틈을 노릴 것이니, 이것이 세 번째 불가함이고, 지금은 한창 더위와 비가 심한 계절이어서 활의 아교가 풀어지고 많은 군사에게 전염병이 생길 것이니, 이것이 네 번째 불가함입니다.” 하였다.우왕이 이르기를, “이미 군사를 출동시켰으니, 중지할 수 없다.” 하였다. 태조가 다시 옳지 못하다고 있는 힘을 다해 아뢰니, 우왕이 이르기를, “경은 이자송을 보지 못하였는가.” 하였다. 태조가 아뢰기를, “자송이 비록 죽었으나, 아름다운 이름이 후세에 전해질 것입니다.” 하였다. 우왕이 듣지 아니하니 태조가 물러나와 울면서 말하기를, “생민의 화가 이로부터 시작되는구나.” 하였다.우왕이 평양에 행차하여 최영을 팔도 도통사(八道都統使)로 삼고, 조민수를 좌군 도통사로 삼아 심덕부(沈德符) 등으로 하여금 그의 지휘를 받게 하고, 태조를 우군 도통사로 삼아 이두란(李豆蘭) 등으로 하여금 그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좌군과 우군이 모두 3만 8천 6백여 명인데, 십만 군사라고 호칭하였다. 최영은 우왕과 더불어 평양에 머무르면서 멀리서 지휘하였다. 《여사제강(麗史提綱)》
○ 5월에 좌군과 우군이 압록강을 건너가 위화도(威化島)에 이르렀는데, 태조가 의거(義擧)로 군사를 돌려 돌아왔다. 《고사촬요(攷事撮要)》
좌우도통사(左右都統使)가 글을 올려 아뢰기를, “신들이 압록강을 건너니, 앞에 있던 큰 내가, 비로 인해 물이 불어서 첫째 여울에서 수백 명이 빠졌는데, 둘째 여울은 더욱 깊었습니다. 강 속의 섬 안에 머물러 둔치고 있어서 한갖 군량만 허비하고 있을 뿐입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나라를 보전하는 도리입니다. 지금 명 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한다는 말을 듣고 박의중(朴宜中)으로 하여금 표문을 받들고 가서 교섭하게 하는 것이 매우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 갑자기 큰 나라를 침범하는 것은 종묘 사직과 백성을 위하여 복된 일이 아닙니다. 청컨대, 군사를 돌리도록 명령하여 주소서.” 하였으나, 우왕이 듣지 않았다. 태조가 모든 장수들에게 타일러 말하기를, “만약 명 나라의 국경을 침범하여 천자에게 죄를 얻게 되면, 종묘 사직과 백성에게 화가 당장에 미칠 것이다. 이제 순역(順逆)의 도리를 글로 올려 회군하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살피지 못하고 최영 또한 매우 늙었으니, 공들과 더불어 왕을 뵙고 친히 화복의 사유를 아뢰어 임금의 측근에 있는 악인들을 제거하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지 않겠는가.” 하니, 모든 장수들이 말하기를, “우리나라 사직의 안전과 위태로움이 공의 한 몸에 달려 있으니, 어찌 명령을 좇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군사를 되돌려 압록강을 건너왔다. 태조가 백마를 타고 붉은 활에 흰 깃 달린 화살을 잡고 언덕 가에 서 있으니 온 군중이 바라보고 서로 말하기를, “옛날이나 지금이나 또는 후세에도 어찌 저같은 인물이 있겠는가.” 하였다. 그때 장마비가 여러날 동안 내렸어도 물이 불지 않았는데, 군사가 다 건너고 나니 큰물이 갑자기 닥쳐와서 온 섬이 물 속에 잠겼다.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그때 아이들의 노래에, ‘목자(木子)가 나라를 얻는다’는 구절이 있었는데, 군인과 백성들이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이 노래를 불렀다. 조전사(漕轉使) 최유경(崔有慶)이 달려가 군사가 돌아온다는 것을 우왕에게 보고하였다. 《여사(麗史)》
○ 위화도에서 회군하기 전에 잠저(潛邸)가 있는 동리에 아이들의 노래가 있었는데 그 노래에,

서경성 밖에는 불빛이요 / 西京城外火色
안주성 밖에는 연기로세 / 安州城外煙光
그 사이를 왕래하는 이원수여 / 往來其間李元帥
원컨대 백성들을 구제하소서 / 願言救濟黔蒼

하였다. 이로부터 얼마 안되어 회군하는 일이 있었다. 《동각잡기》
○ 정종(定宗)이 형 방우(芳雨)와 이두란(李豆蘭)의 아들 화상(和尙)과 더불어 우왕 곁에서 태조에게로 달려왔다. 우왕이 말을 빨리 달려 서울로 돌아왔다. 위화도에서 돌아온 모든 장수가 근교에 이르러 둔을 치고, 우왕에게 글을 올려 최영의 죄를 들어 제거하기를 청하였다. 우왕이 듣지 아니하고 설장수(偰長壽) 등을 보내어 모든 장수에게 군사를 해산할 것을 타일렀다. 모든 군사가 도성의 문밖에 나아가 둔치니, 우왕이 최영과 더불어 군사를 모집하여 나누어 네 문을 지키고, 조민수 등의 관직을 삭탈하고 맞서 싸우고자 하였다. 좌군(左軍)은 선의문(宣義門)으로부터 들어가고, 태조는 숭인문(崇仁門)으로부터 들어갔다.출발하려 할 때 백 보쯤 떨어진 거리에 작은 소나무가 있었는데, 태조가 승리의 징조를 점쳐서 여러 사람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자 하여 소나무를 쏘니, 한 화살에 당장 부러지고 말았다. 이에 말하기를, “두 번 쏘아 뭘 하겠느냐.” 하니, 여러 장수가 모두 축하하였다. 좌우군이 앞뒤에서 협공하여 진격하니, 성을 지키는 군사 중에 맞서 싸우는 자가 없었다. 도성 안의 남녀들이 다투어 술을 가지고 와서 맞이하고, 늙은이와 어린이는 높은 곳에 올라가서 바라보면서 환호하며 날뛰었다.조민수가 검은 큰 기를 세우고 영의교(永義橋)에 이르러 최영의 군사에게 격퇴되었으나, 조금 뒤에 태조가 황룡을 그린 큰 기를 세우고 선죽교(善竹橋)로부터 남산(男山)에 오르니, 흙먼지는 하늘을 덮고 북소리는 땅을 진동시켰다. 최영의 군사들은 깃발만 바라보고 달아나 무너지니, 최영은 형세가 다했음을 알고 달아나서 화원(花園) 우왕이 있는 곳 으로 돌아가며 분노를 참지 못해 문지기를 찔러 죽이고 들어갔다. 태조가 암방사(巖房寺)의 북쪽 재 위에 올라가 큰 나각(螺角)을 한번 불게 하여 모든 군사가 화원을 수백 겹으로 포위하고 큰 소리로 최영을 내달라고 부르짖게 하였다.우왕은 영비(寧妃) 최영의 딸 및 최영과 더불어 팔각전(八角殿)에 있었다. 최영이 나오지 않으려 하니, 모든 군사가 화원을 부수고 달려 들어갔다. 곽충보(郭忠補) 등이 바로 전정(殿庭)에 들어가 최영을 찾아 내니, 우왕이 최영의 손을 잡고 울며 불며 작별하였다. 최영이 두 번 절하고 충보를 따라 나왔다. 태조가 최영에게 일러 말하기를, “이같은 사변은 나의 본 뜻이 아니요. 그러나 요동을 치려는 계획은 대의를 거스르는 일일 뿐만 아니라, 나라가 편안하지 못할 것이므로 부득이 이리된 것이니, 잘 가시오, 잘 가시오.” 하고, 서로 마주보고 울었다.드디어 최영을 고봉현(高峯縣) 지금의 고양(高陽) 에 귀양보내고, 두 도통사(都統使)와 서른 여섯 원수(元帥)가 궁궐에 나아가 절하고 사례한 다음 성문 밖으로 군사를 돌렸다. 《여사제강(麗史提綱)》
○ 조인옥(趙仁沃) 등이 최영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여 드디어 최영을 죽이니, 나이가 73세였다. 형벌을 받을 임시에 태연자약하여 말소리와 얼굴빛이 변하지 않았다. 죽던 날 도성 안의 사람들은 철시(撤市)하고, 온나라 사람들은 소문을 듣고 길에 노는 철없는 아이나 거리의 여자들까지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최영이 형을 받는 자리에서 말하기를, “내가 평생에 만약 탐욕의 마음이 있었으면 무덤 위에 풀이 날 것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나지 않을 것이다.” 하더니, 무덤이 고양(高陽)에 있는데 지금까지도 벌겋게 벗어져 있다. 사람들이 ‘붉은 무덤[赤墳]’이라고 부른다. 《여사제강》 ○ 《기언(記言)》에 말하기를, “최영이 충주(忠州)로 귀양갔다가 마침내 죽임을 당하였는데, 시체를 길에 버리니, 길가는 사람들이 모두 말에서 내려 지나갔다.” 한다.
이인임(李仁任)이 일찍이 말하기를, “이 판삼사사(李判三司事 이성계(李成桂)) 가 모름지기 나라의 주인이 될 것이다.” 하였다. 최영이 듣고 매우 성내었으나 감히 말하지 못하더니, 이때에 이르러 탄식하기를, “인임의 말이 진실로 옳구나.” 하였다. 《여사제강》
○ 처음에 신의왕후(神懿王后)는 포천(抱川) 재벽동(滓甓洞)의 농장에 있고 신덕왕후(神德王后)는 포천 철현(鐵峴)의 농장에 있었다. 그때 태종(太宗)이 전리정랑(典理正郞)으로 서울에 있다가 사변이 일어난 것을 듣고 집에 들리지 않고 바로 포천으로 달려가서 두 후(后)를 모시고 동북면을 향하여 갔다.철원(鐵原)을 지나면서 관리가 체포하고자 한다는 말을 듣고, 밤을 새워 길을 가되 인가에 들어가지 못하고 풀밭에서 자곤 하였다. 이천(伊川) 한충(韓忠)의 집에 이르러서는 장정 백여 명을 모아 놓고 부서를 나누어 변고에 대비하면서 말하기를, “최영은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이니, 반드시 나를 좇지 아니할 것이다. 비록 오더라도 나는 두렵지 않다.” 하며, 7일 동안 머무르고 있다가 사변이 평정된 것을 듣고 돌아왔다. 《용비어천가》
○ 6월에 태조가 군사를 돌려서 우왕을 폐하여 강화(江華)로 보내고, 우왕의 아들 창(昌)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고, 초 3일에 다시 명 나라의 홍무 연호를 사용하였다. 《고사촬요(攷事撮要)》
우왕이 밤에 환관 80여 명과 더불어 갑옷을 입고 태조와 조민수 등의 집으로 달려왔으나, 모두 성문 밖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집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해치지 못하고 돌아갔다. 《여사(麗史)》
○ 처음에 태조가 회군하였을 때 윤소종(尹紹宗)이 군문 앞에 나아가 정지를 통하여 뵙기를 청하고 곽광전(霍光傳)을 품에서 꺼내어 바쳤다. 태조가 조인옥(趙仁沃)으로 하여금 읽게 하여 들었는데, 인옥이 다시 왕씨 중에서 세워야 한다고 극력 설명하니, 태조가 옳게 여겼다. 여러 장수들이 궁중의 병장기를 내놓을 것을 청하고, 또 영비(寧妃)를 내보낼 것을 청하였다.신우가 이르기를, “만약 영비를 내보낸다면, 나도 마땅히 함께 나갈 것이다.” 하였다. 이에 모든 원수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궁궐을 지키면서 신우에게 강화로 가기를 청하니, 신우가 부득이해서 드디어 나왔다. 채찍을 잡고 안장에 의거하여 이르기를, “오늘은 이미 저물었다.” 하였는데, 옆에 있던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으나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드디어 영비와 함께 강화로 향하였다.백관들이 나라의 옥새를 받들어 정비전(定妃殿)에 갖다 두고 왕씨의 후예를 골라서 세우고자 하였는데, 조민수는 신우의 장인인 이림(李琳)의 친척으로서, 신우의 아들 신창을 세우고자 하였다. 민수는 장수들이 자기의 뜻에 반대할까 두려워하여 이색(李穡)이 당시의 이름난 선비라고 하여, 그의 말을 빙자하고자 몰래 물어보니, 이색이 말하기를, “마땅한 전왕(前王)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고 하였다. 민수 등이 드디어 논의를 결정하고 정비(定妃)의 교명으로 신창을 세우니, 그때 나이가 아홉 살이었다. 《여사》 《동각잡기》
○ 태조가 회군할 때 조민수와 더불어 다시 왕씨의 후손을 세울 것을 의논하였는데, 민수도 역시 그렇게 하자고 하였다. 그런데 신우가 강화로 귀양가게 되자, 민수는 인임이 자기를 천거하여 뽑아 준 은혜를 생각하여 인임의 질녀인 근비(謹妃)의 아들 신창을 세우기를 꾀하였다. 태조가 말하기를, “회군할 때 한 말은 무엇인가?” 하니, 민수가 불쾌한 얼굴빛으로 말하기를, “원자(元子)를 세우는 일은 한산군(韓山君 이색)이 이미 정한 계책이다. 어찌 어길 수 있겠는가.” 하였다. 드디어 신창을 세웠다. 《용비어천가》
○ 그때 명 나라에서는 우리나라의 변을 듣고, 신하들이 상소하여 고려를 정벌하기를 청하였다. 명 태조가 몸소 정벌하고자 하여 종묘에 점쳐 보려고 바야흐로 재계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고려의 사신이 도착하게 되어 회군한 사실을 보고하므로 즉시 재계를 그쳤다. 《고사촬요(攷事撮要)》
공민왕이 돌아가신 뒤로부터 명 태조는 매양 고려의 집정대신(執政大臣)을 불렀으나, 모두 두려워하여 감히 가지 못하였다. 신창이 왕이 되니, 이색은 창왕으로 하여금 몸소 명 나라에 가게 하고, 또한 명 나라에서 관리를 보내어 우리나라를 감시할 것을 청하고자, 자청하여 명 나라에 사신으로 가기로 하였다. 태조가 칭찬하여 말하기를, “강개(慷慨)하다, 이 옹(翁)이여,” 하였다. 이색이 태조의 위엄과 덕망이 날로 높아가므로, 그가 돌아오기 전에 정변이 있을 것을 두려워하여 태조의 아들 한 사람을 데리고 가기를 청하니, 태조가 태종(太宗)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아 보냈다.명 태조가 평소에 이색의 명망을 들었으므로, 조용히 말하기를, “그대가 원 나라에 벼슬하여 한림(翰林)이 되었으니 지정(至正) 14년에 이색이 원 나라의 과거에 합격하여 한림 지제고에 임명되었다. 응당 한어(漢語)를 알겠구나.” 하니, 색이 한어로 대답해 아뢰기를, “왕이 몸소 와서 천자께 조회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천자가 알아듣지 못하고 말하기를, “뭐라고 말하느냐.” 하니, 예부의 관리가 전하여 아뢰었다.이색이 오랫동안 중국에 들어가지 않아서 말이 자못 난삽하여 알아들을 수가 없었는데, 천자가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한어(漢語)는 꼭 나하추와 같다.” 하였다. 이색이 돌아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지금의 황제는 주견이 없어서 내가 맘 속으로 황제가 이 일을 반드시 물을 것이라고 한 것은 묻지 않고, 황제가 물은 것은 모두 내가 생각했던 바와 다른 것이었다.” 하였다. 《용비어천가》 《동각잡기》
○ 이색이 명 나라에 사신으로 갈 것을 자청한 것은 장차 어떤 계획이 있었던 까닭에 태조가 의심할까 두려워서 태종을 데리고 갔던 것이다. 명 태조를 보고 우리나라를 붙들어 보호하여 달라는 뜻을 말하였으나, 황제가 일부러 알아듣지 못하는 체 하였다고 한다. 《월정만필》
○ 강회백(姜淮伯)이 명 나라로부터 돌아올 때, 예부에서 황제의 뜻을 받들어 회답 자문을 보내기를, “고려의 경계는 산으로 막혀 있고 바다를 등지고 있어서 풍속이 매우 다르니, 중국과 비록 통하기는 하나 붙었다 갈라졌다 하였다. 이제 신하가 그 아비를 쫓아내고 그 아들을 세운 다음 중국에 와서 조회하기를 청하나, 대저 윤리가 크게 무너져 임금의 도가 전혀 없고 신하의 도리를 지키지 않은 반역이 분명하다. 사신에게 타일러 돌려 보내노니, 어린 아이[昌王]가 반드시 중국에 올 필요는 없다. 세우는 것도 저희에게 있고 폐위하는 것도 저희에게 있으니, 중국은 이에 간여하지 않겠다.” 하였다. 《여사제강(麗史提綱)》
○ 기사년(1389)에 폐주 신창을 강화로 추방하고 정창군(定昌君) 요(瑤)를 맞아들여 왕으로 삼으니, 이 이가 공양왕(恭讓王)이다. 《고사촬요》 김저(金佇)는 최영의 생질이다. 정득후(鄭得厚)와 더불어 몰래 여흥(驪興)에 가서 신우를 보니, 이때 신우를 여흥에 옮겨 놓았던 것이다. 신우가 울며 말하기를, “답답하게 여기 있다가 꼼짝않고 죽음만 기다리는 것을 차마 할 수 없다. 한 사람의 역사(力士)를 얻어 이 시중(李侍中 태조)을 살해한다면, 나의 뜻을 이룰 수 있겠다.” 하고, 칼을 주며 친하게 지내던 판서 곽충보(郭忠輔)에게 보내어 일을 꾀하도록 하였다.충보가 거짓 승낙하는 체하고 달려가 태조에게 알리니, 김저를 순군옥에 가두고 국문하였다. 태조가 심덕부(沈德符)ㆍ지용기(池湧奇)ㆍ정몽주(鄭夢周)ㆍ설장수(偰長壽)ㆍ성석린(成石璘)ㆍ조준(趙浚)ㆍ박위(朴葳)ㆍ정도전(鄭道傳) 등과 더불어 의논하기를, “신우와 신창은 본래 왕씨가 아니니, 종묘의 제사를 받들게 할 수 없다. 마땅히 거짓 왕씨를 폐위하고 진정한 왕씨를 세워야 된다” 하고, 정비(定妃)의 명을 받들어 신우를 강릉(江陵)으로 옮기고 신창을 강화로 추방하였다. 이튿날 태조가 여러 공신들과 더불어 계책을 정하여 정창군(定昌君) 요(瑤)를 맞아 왕으로 세웠다. 《여사제강(麗史提綱)》
○ 윤회종(尹繪宗)이 글을 올려 신우와 신창을 죽이기를 청하였다. 이에 신우를 강릉에서 죽이고 신창을 강화에서 죽였다. 영비(寧妃) 최씨가 크게 통곡하며 말하기를, “내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내 아버지의 잘못 때문이다.” 하였다. 10여 일을 먹지 않고 밤낮으로 슬피 울며, 밤에는 반드시 우의 시체를 안고 자고, 곡식을 얻으면 반드시 깨끗이 찧어서 밥을 지어 상식을 올리니, 당시 사람들이 불쌍하게 여겼다. 《여사제강》
세상에서 전하기를, 왕씨의 혈통을 받은 자는 왼쪽 겨드랑 밑에 금비늘 세 조각이 있다고 하였다. 신우가 강릉에서 죽고 신창이 강화에서 죽을 때에 모두 이 표적이 있었다고 한다. 차식(車軾)이 고성 군수(高城郡守)가 되었을 때, 양사언(楊士彦)의 장인 이시춘(李時春)이라는 자는 나이가 70이었다.매양 말하기를, 그의 증조모가 강릉에 살았는데 나이가 거의 90여 세였고, 자기 나이 열두 살 때 선왕(先王) 우(禑)) 이 그곳에서 참형을 당하게 된다는 말을 듣고 가 보았더니, 왕이 형벌을 받을 임시에 여러 사람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우리 왕씨는 본래 용의 후손이다. 왼쪽 겨드랑 아래에 반드시 세 개의 비늘이 있어서 대대로 표적을 삼는다.” 하고, 드디어 옷을 벗고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다. 왼쪽 겨드랑 아래에 과연 세 개의 비늘이 있었는데, 금빛이며 크기가 동전만 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며 슬퍼하였다 한다. 《한골동(閑骨董)》
○ 공양왕(恭讓王)이 태조에게 전교를 내리기를, “지난날 이인임(李仁任)이 몰래 공민왕의 영전(影殿)의 공사를 유도하여 정승의 지위를 취득하고 원망을 임금에게 돌려서, 마침내 갑인년(1374)에 공민왕을 시해하는 변란이 있게 하였고, 공민왕이 후사(後嗣)가 없자, 인임이 옛날 여불위(呂不韋)가 진(秦) 나라를 도둑질하던 계획 을 써서 공민왕 때의 요망한 중 신돈의 소생인 신우를 공민왕의 궁녀 소생이라 속여 왕으로 세웠다. 공민왕의 모후(母后)가 불가하다 하였고, 재상 이수산(李壽山)은 종친을 세울 것을 청하였으나, 인임이 좇지 아니하여, 온 나라 사람들이 실망하였었다. 누런 안개가 사면을 막아 햇빛이 드러나지 못하였으며 신우가 상주가 되어 현릉(玄陵)을 장사 지낼 적에 무지개가 태양을 둘렀으며, 신우가 종묘에서 제사를 주장하여 지낼 적에 올빼미가 태실(太室 종묘 안에 신주 모신 집)에서 울고 천둥치고 지진이 있었으며, 신우가 공민왕의 아버지 의릉(懿陵)의 기제(忌祭)에 치재하고 있을 적에 큰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우레와 번개에 우박까지 퍼부었으며, 신우가 작(爵)을 이어받을 때는 바람이 조묘(祧廟)침원(寢園)의 소나무와 잣나무를 뽑고 태실의 독수리 기와로 독수리 대가리의 모습을 만들어 지붕모서리에 얹어 둔 것 가 부러졌으며, 묘문(廟門)이 넘어지고 어름(御廩)에 화재가 났으니, 이것은 조종(祖宗)의 신령이 위엄을 진동하여 화를 끊고자 한 것이다. 신우의 어머니 반야(般若)를 뒷말이 없게 하기 위하여 죽일 적에 사평(司平)의 새로 만든 문이 저절로 무너졌으며, 다른 해골을 장사지내며 신우의 어머니라고 하니 영구(靈柩)와 영악(靈幄)에 하루에 두 번이나 불이 났다. 이것은 하늘이 신우가 반야의 아들이라는 것을 만세에 보인 것이다. 신우가 왕이 된 지 2년이 되어도 그의 어머니의 이름과 성이 정해지지 아니하니, 재상 김속명(金續命)이 말하기를 ‘천하에 자기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 이는 간혹 있지만, 어머니를 알지 못하는 자를 나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고 하였다가 거의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을 공민왕의 모후가 극력 구하여 죽음을 면하였다. 김유(金庾)는 명 나라 황제에게 신우가 왕씨가 아님을 말하였는데 돌아와 죽임을 당하니, 나라 사람들이 한심하게 여겨 입을 다물고 말았다. 신우의 아내는 인임의 질녀로서 신창을 낳으니, 왕씨를 다시 일으켜 회복할 희망이 끊어졌다. 위화도에서 회군할 때 왕씨를 일으켜 회복할 것을 의논하였는데, 조민수도 또한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돌아와서는 그의 친척인 인임과 이림(李琳)의 당(黨)이 되어 경의 의논을 저지하고 신창을 세웠으니, 왕씨를 부흥시키는 데 가장 좋은 기회를 잃게 하였다. 기사년(1389) 겨울에 신창이 친조(親朝)하기를 청하여 파견한 윤승순(尹承順)이 명 나라 예부가 황제의 뜻을 받들어 보낸 자문(咨文)을 가지고 왔다. 거기에, ‘고려 임금의 후사가 끊어져서 다른 성을 왕씨로 대신하였다 하니, 삼한(三韓)에서 대대로 지키는 좋은 계책이 아니다’ 하였고 과연 황제의 성지(聖旨)에, ‘배신(陪臣)이 직책을 이행하여 군신의 분수를 바로잡는다면, 비록 십수 년을 조회하지 않은들 무엇이 걱정이며, 해마다 와서 조회한들 또 어찌 싫어할 것인가. 나이 어린 아이가 굳이 경사(京師)에 올 필요는 없다’ 하였다. 이것은 천자(天子)가, 공민왕이 사해가 아직 평정되지 않은 때에 솔선하여 명 나라에 신하로 칭하여, 온 천하로 하여금 천명이 명 나라로 돌아갔다는 것을 알게 해서, 크게 명태조의 왕운(王運)을 돕는 데 공이 있었던 것을 생각하고, 그의 후사가 끊어진 것을 민망히 여겨 왕씨를 일으켜 회복할 것을 신하들에게 간절히 바랐던 것이다. 신창의 외조부 이림이 재상으로 있으면서 명 나라 황제의 말씀을 숨기고 발표하지 않았으니, 흉악한 꾀를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런데 경은 만 번의 죽음도 돌아보지 않고 몸소 대의를 잡아 왕씨를 위하여 만세의 계책을 정하였으며, 덕부(德符)ㆍ몽주(夢周)ㆍ용기(湧奇)ㆍ장수(長壽)ㆍ석린(石璘)ㆍ조준(趙浚)ㆍ박위(朴威)ㆍ도전(道傳) 여덟 명의 장수와 재상들이 따라서 찬성하여 천자의 말씀을 현릉(玄陵) 정비(定妃)의 궁정(宮庭)에서 선포하고, 나를 종실에서 맞아 들여 공민왕의 후계로 되게 하였다. 16년이나 왕노릇을 한 신씨(辛氏)를 하루 아침에 제거하여 31대의 차례를 잇게 하였으니, 경이 왕씨를 일으켜 회복하게 한 공은 강후(絳侯)오왕(五王)도 비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하였다. 《용비어천가》
○ 간관(諫官)들이 이색이 신창을 세우고 신우를 맞이하여 오자한 것을 논죄하여 극형에 처할 것을 청하므로 이색을 장단(長湍)에서 국문하니, 이색이 공술하기를, “작년에 명 나라에 갔더니, 예부상서 이원명(李原明)이 말하기를, ‘너희 나라에서 아비를 쫓아내고 아들을 세웠으니, 천하에 어찌 이러한 도리가 있는가. 왕과 최영이 모두 구금을 당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무슨 뜻인가.’ 하므로, 돌아와서 이시중(李侍中)에게 일러 말하기를, ‘이원명(李原明)의 말은 귀로는 들을 수 있으나, 입으로 말할 수는 없다. 여흥(驪興)은 땅이 머니 맞이하여 가까운 곳에 두면 임금을 쫓아냈다는 이름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하였다. 드디어 이색을 함창(咸昌)으로 옮기고 이색의 아들 종학(種學) 등도 모두 먼 곳으로 옮겨 귀양보냈다. 뒤에 종학은 결국 태조가 혁명할 때에 죽었다. 《여사(麗史)》
전조(前朝)를 혁명할 때의 역사 기록은 극히 의심나는 것이 있으니, 신우와 신창의 일이 그것이다. 만약 신우가 진실로 신돈의 소생이라면 신우를 폐위하였을 때 당연히 종실의 어진 사람을 선택하여 세웠어야 하는데, 어찌해서 이색에게 물었으며, 이색도 또한 마땅히 전왕(前王 우(禑)) 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고 하였겠는가. 그러니 신우와 신창이 결코 신씨(辛氏)가 아님을 알겠다. 《축수편(逐睡篇)》
○ 고려사의 여탈(與奪)은 모두 믿을 수가 없는데, 말년의 사적은 더욱 어긋나고 틀렸다. 이것이 비록 기휘(忌諱)에 관한 것이라 하더라도, 진실을 전하는 역사에 어찌 그 사실을 모조리 몰각(沒却)하고 덮어 버릴 수 있는가.신창을 세운 일, 신우를 본 일, 윤이(尹彛)와 이초(李初)를 보낸 일, 이 세 건의 일을 큰 죄안(罪案)으로 삼아 원신(元臣)과 고로(故老)들을 전락시키고 유리(流離)하게 하여 마침내 그 나라를 빼앗았으니, 도전(道傳)이다, 소종(紹宗)이다, 조준(趙浚)이다 하는 자들은 하늘이 없었는가. 《고려사》를 만든 자는 정인지(鄭麟趾)이다. 인지는 세종(世宗)과 문종(文宗) 두 대에 걸쳐 신임과 사랑을 늘 받고 지위가 재상에 이르게 되었으나, 마침내는 임금을 시해한 역적이 되고 말았다. 《상촌집(象村集)》
○ 역사책에 이르기를, “이색이 어떤 사람에게 일러 말하기를, ‘호치당(胡致堂)원제(元帝)의 성은 우씨(牛氏)였으나 동진(東晉)의 여러 신하들이 그대로 둔 것은 필시 호(胡)와 갈(羯)이 번갈아 중국을 침범하는데 만약 옛날부터 쌓아 온 왕업을 의지하지 않으면, 인심을 계속(係屬)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일 것이라고 논하였으니, 내가 신씨(辛氏)에게 감히 이의를 하지 못한 것도 또한 그러한 뜻에서 한 것이다’ 하였다.” 하였다. 이 기록은 거짓으로 꾸며서 쓴 것 같다. 아마도 당시에 이씨의 왕업을 도운 여러 사람들이 이색의 말을 빙자하여 창왕 폐위가 정당하다는 것을 성립시키려 한 것인 듯 하다. 《우암집(尤庵集)》목은 비음기(碑陰記)
눌재(訥齋)가 말하기를, “갑술년 9월 추성(秋城)의 관사에 있을 때 꿈에 목은(牧隱)을 보았는데, 그보다 수일 전에 원충(元冲 김정(金淨))과 목은의 심사(心事)를 논의하여 그 실상을 알아냈다” 하였다. 시를 지어 말하기를,
선정(先正) 한산군(韓山君)은 먼 세대 사람이건만 / 先正韓山世已遼
세상에서 썩지 않고 우뚝 서있네 / 人間不朽挺嶢嶢
사가(史家)는 붓을 잡는데 공정함이 어디 있는고 / 史家秉筆公何在
새 조정의 공신들 그림자도 아득하여라 / 昭代凌煙影獨遙

하였다. 임보신(任輔臣)의 《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에 말하기를, “눌재의 시에 사가라고 한 것은 목은이 전왕의 아들을 세우자고 한 일이 죄라고 한 정인지를 가리킨 것이다. 눌재가 《동국사략(東國史略)》을 지으면서, 목은이 일찍이 사람에게 말하기를, ‘치당(致堂)이 진(晉) 나라 원제(元帝)의 성이 우씨(牛氏)였으나, 동진(東晉)의 신하들이 내쫓지 않은 이유는 호(胡)와 갈(羯)이 번갈아 중국을 침범하는데, 동진은 힘이 미약하였으니 만약 진(晉)이 옛날부터 쌓아 온 왕업을 의지하지 아니하면, 어찌 능히 인심을 계속(係屬)시킬 수 있겠는가. 옛것을 버리고 처음을 일으키는 것(원제(元帝)를 내 쫓는 것)은 원제가 우씨인 것을 덮어 두고 임금으로 그대로 받드는 일에 비하면 쉽고 어려움이 엄청나게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니, 그대로 덮어둔 것은 또한 형세에 따라 일을 성취시키는 데 있어서 부득이한 것이었다.’ 한 것을 인용하고, 단정하기를, ‘이색이 신씨를 세울 때에 감히 반대하지 않았던 것 또한 이러한 의미였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본다면, 눌재의 말 또한 어찌 목은의 심정을 다 알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것은 말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였다. 《몽예록(夢囈錄)》
○ 공민왕이 시해된 것과 반야(般若)가 밤중에 궁중에 뛰어든 일들은 앞뒤로 이어지고 일이 매우 복잡하니, 한 개인의 사소한 일과 같이 이리저리 말을 꾸며 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 이씨 왕조가 일어날 때에도 또한 전적으로 우를 신씨라고 한 이 일만을 빙자한 것도 아니다. 강직하고 따지기를 좋아하는 추강(秋江)은 알고는 감히 말하지 못할 사람이 아니며, 그가 고려 말에서 멀지 않은 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선배들을 보았으니, 반드시 자세히 알 수 있었을 것인데, 그가 지은 시에 ‘두 성 임금’이라는 글귀가 있으니,눌재(訥齋)나 충암(冲庵)의 의견과 같다. 비록 역사를 다 믿을 수 없다고는 하지만, 세 군자(君子)의 말이 정론이 될 수 없단 말인가. 임씨(任氏) 이후에 비로소 이설을 하는 자가 많아졌으나, 다 억측하여 정확하지 못한 말들이고,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신우에게 용의 비늘이 있었다고 하는 말에 이르러서는 무식한 사람들의 허황한 이야기이니, 더욱 깊이 따질 가치가 없는 것이다. 《몽예록》
○ 원천석(元天錫)은 일찍이 시를 지으면서, 시사(時事)를 많이 읊고 제목에 따라 주해를 붙이되, 신우 이전은 ‘국가(國家)’라 하고, 공양왕 이후는 ‘국(國)’이라고 하고, 이씨 조선에 들어와서는 다만 ‘신국(新國)’이라고만 하였다고 한다. 자세한 것은 아래에 나오는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 조를 보라.
○ 신우와 신창의 일은 마땅히 원천석의 기록을 진실한 역사로 하여야 한다. 최영이 죽으니 고려에 사람이 없어졌고, 정도전이 들어오니 고려에 역적이 있게 되었다. 이른바 한 사람으로 인하여 나라가 일어서고 망한다는 것이다. 고려가 망한 것은 무진년(1388)에 임금 신우를 폐위시킨 데서 나온 것이다. 임금을 폐한 뒤에도 목은과 같은 분들이 아직 남아 있어서 한 가닥 공정한 의논이 없어지지 않았다.그러므로 그때 도전과 소종 등이 신우를 왕씨가 아니라고 하는 자는 충성한다고 하고, 왕씨라고 말하는 자는 반역자라 하는 논의를 부르짖어 조정을 혼란하게 하고 인심을 현혹케 하여, 드디어 문학과 덕행이 있는 선비들을 살육하고 입을 봉하게 한 지 겨우 5년 만에 나라가 망하였다. 그러니 그 시대에 나서 바르고 곧은 것으로 굽히지 않는 이들은 삶의 고생이 어떠하였겠는가.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모조리 현혹시킬 수 없으며, 사람의 입을 모조리 봉하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시골 구석에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사실대로 써서 역사에 남기려는 원천석의 붓이 있었으니, 어찌 돌로 죽순을 누르면 옆으로 터져 나오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상촌집(象村集)》
○ 어떤 이가 말하기를, “목은이 혁명 때에 즉시 목숨을 바치지 아니하여, 비록 정포은의 명쾌한 태도와는 같지 못하나, 그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일을 상고하여 보면, 바로 왕씨에 마음을 두고 마침내 절개를 완전히 지킨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 그가 장단(長湍)으로 귀양가서 도당(都堂)에 올린 절구(絶句) 열 수 속에, ‘신조(辛朝)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비로소 출신하니[放榜辛朝始出身]’라는 구절이 있다. 목은이 만약 신우가 공민왕의 아들인 것을 분명히 알았다면, 어찌 차마 ‘신조(辛朝)’ 라는 말을 시에 드러냈을 것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나라의 운명이 거의 끊어지려는 때에는 그릇 전파되는 말이 많이 생긴다. 궁중의 은밀한 침실의 일은 외부의 신하들이 자세히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신우가 이미 신돈의 아들이라는 명목으로 폐위되었고, 목은도 이미 새 임금을 세우는 일에 참여하였으니, 싯귀에 그렇게 말하였더라도 매우 괴이쩍은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땅히 전왕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고 한 말로 본다면, 그가 반드시 신우가 왕씨가 아니라고 단정하지 못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목은이 신우가 신돈의 아들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면, 비록 신우를 폐위시킬 때에 절개를 세우지 못했다 하더라도 신우를 폐한 다음에 왕씨의 다른 종실에서 뽑아 세우자는 의논이 없었겠는가. 이 또한 그의 숨은 뜻을 볼 수 있다.” 하였다. 어떤 이가 또 말하기를, “신우와 신창이 다른 성이라는 것은 중국의 조정에서도 알게 되어 힐문하게 되었으니, 그때 나라의 여론이 비등하여 전파되었던 것을 여기에서 또한 볼 수 있다.” 하니, 대답하기를, “이것은 더욱 공증(公證)이 될 수 없다. 이때에 천명은 이미 왕씨에게서 떠나고 인심은 이씨에게로 돌아갔다. 조정의 대소관리들 중에 왕씨의 사람은 지극히 적었으니, 이른바 ‘중국에서 힐문한다’ 는 것도 사신이 자기가 묻고 자기가 대답한 거짓말이 아닌 줄을 어찌 알겠는가.운곡은 괴이한 말을 전해 들은 자와는 달라서 진위에 대하여 마땅히 모르는 것이 없었을 것인데, 그가 실제대로 기록한 말이 도리어 단안(斷案)이 되기에 부족하단 말인가. 퇴계의 편지에도 ‘국가가 만세를 지난 뒤에는 마땅히 운곡의 논의에 따를 것이다’ 말한 것이 있고, 상촌(象村)도 말하기를, ‘신우와 신창의 일은 마땅히 원천석의 것을 참 역사로 삼아야 된다’ 하였다. 나의 구구한 견해도 또한 전수 받은 바가 있다.” 하였다. 《곤륜집(崑崙集)》
○ 이씨 왕조가 일어날 때에, 하늘의 명과 사람의 마음이 다 그리로 돌아갔으니, 어찌 신우와 신창이 신씨라는 것이 필요했겠는가. 그런데 오직 저 정인지(鄭麟趾)의 무리가 그들의 좁은 마음으로 사실을 왜곡한 기록을 만들어 마침내 그것이 사실처럼 되버렸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청야만집(靑野謾輯)》
공양왕이 즉위하던 날 저녁에, 왕의 사위 강회(姜淮)의 삼촌인 진산군(晉山君) 시(蓍)가 안으로 들어와 왕에게 아뢰기를, “여러 장수와 재상들이 전하를 세운 것은 다만 자기들의 화를 면하고자 함이고, 왕씨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삼가 그들을 친애하거나 믿지 마시고, 스스로 보전할 계책을 생각하소서.” 하였다. 왕의 사위 우성범(禹成範)이 옆에서 모시고 있다가 듣고, 그의 어머니 윤씨(尹氏)에게 말하였다.윤씨의 종형 소종(紹宗)이 전해듣고 아홉 공신에게 말하니, 공신들이 들어가서 왕에게 아뢰었는데, 왕이 좌우를 돌아보며 아무 말이 없었으므로 아홉 공신들이 한참 동안 엎드려 있다가 나왔다. 왕이 태조의 공이 높고 인심을 얻은 것을 꺼려하자, 구가세족(舊家世族)들이 왕이 태조를 꺼리는 것을 알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무고하고 헐뜯으며, 신우와 신창의 당파가 왕실과 인척관계가 있어 아침 저녁으로 참소하니, 왕이 도리어 참소하는 말을 믿고는, 밤낮으로 측근들과 더불어 태조를 제거할 것을 몰래 도모하였다.태조가 참소하는 말에 곤란하게 되어 정도전 등에게 이르기를, “내가 자네들과 더불어 왕실에 대하여 있는 힘을 다 바치고 있건만, 참소하는 말이 비등하니 우리들이 용납되지 못할까 두렵다. 나는 마땅히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서 화를 피하겠다.” 하고, 먼저 집안 사람들로 하여금 행장을 차리기를 재촉하여 떠나려 하였다. 도전이 말하기를, “공은 어찌 일신의 거취를 경솔히 할 수 있겠습니까.지금 만약 한쪽 구석에 물러가 살고 있으면, 참소하는 말을 더욱 부채질하여 화가 장차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옛날 한 나라의 장자방(張子房)이 적송자(赤松子)를 좇았는데도 한 고조(漢高祖)가 죄주지 않았다. 내 마음에 다른 생각이 없는데, 왕이 어찌 나를 죄주겠는가.” 하였다. 도전 등이 극력 이해 관계를 설명하여 중지하게 하였다. 《용비어천가》 《대동운옥(大東韻玉)》
○ 홍무 경오년에 왕방(王昉)과 조반(趙胖) 등이 명 나라에서 돌아와 아뢰기를, “예부에서 신들을 불러 이르기를, ‘너희 나라 사람 윤이(尹彛) 파평군(坡平君) 와 이초(李初) 중랑장(中郞將) 라는 자가 와서 황제에게 호소하여 아뢰기를, 「고려의 이 시중(李侍中)이 요(瑤)를 세워 임금을 삼았으나, 요는 왕실의 종친이 아니고 인척입니다.요가 이성계와 더불어 군사를 출동시켜 장차 중국을 침범하려 하는 것을 재상 이색들이 옳지 않다고 하였더니, 즉시 이색ㆍ조민수ㆍ이림(李琳)ㆍ변안열(邊安烈)ㆍ권중화(權仲和)ㆍ장하(張夏)ㆍ이숭인(李崇仁)ㆍ권근(權近)ㆍ이종학(李種學)ㆍ이귀생(李貴生) 등 10인을 살해하고, 우현보(禹玄寶)ㆍ우인열(禹仁烈)ㆍ정지(鄭地)ㆍ김종연(金宗衍)ㆍ윤유린(尹有麟)ㆍ홍인계(洪仁桂)ㆍ진을서(陳乙瑞)ㆍ경보(慶補)ㆍ이인민(李仁敏) 등 9인을 먼 곳으로 귀양보냈습니다.귀양가 있는 재상들이 몰래 우리들을 보내어 와서 천자께 아뢰는 것입니다.」 하고, 이어서, 「중국 군사를 출동시켜 토벌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하며, 곧 윤이와 이초가 기록한 이색 등의 명단을 내 보이며 말하기를, ‘너희들이 나라에 돌아가서 왕과 재상이 윤이의 서면에 적혀 있는 사람들을 힐문한 다음 보고하라’ 하였습니다.” 하였다. 《여사제강(麗史提綱)》
조반이 명 나라에서 윤이와 더불어 대질하여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정성으로 사대하고 있는데,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하고, 이어 윤이에게 묻기를, “너의 지위가 봉군(封君)에 이르렀으니, 자못 나를 알겠구나.” 하나, 윤이가 깜짝 놀라 얼굴빛이 변하였다. 예부의 관리가 말하기를, “천자가 밝으시어 역시 그것이 무고임을 알고 있다.” 하였다. 《고사촬요(攷事撮要)》
○ 김종연이 도망하였으므로, 대대적으로 나라 안을 수색하였다. 드디어 우현보ㆍ권중화ㆍ경보ㆍ장하ㆍ홍인계ㆍ윤유린을 순군옥에 가두고, 아울러 최공철(崔公哲) 등 11인도 옥에 가두며, 또 이색ㆍ이림ㆍ우인열ㆍ이인민ㆍ정지ㆍ이숭인ㆍ권근ㆍ이종학ㆍ이귀생 등을 청주옥(淸州獄)에 가두었다. 마침 청주에 홍수가 났으므로, 왕이 심덕부(沈德符)와 태조를 불러 죄수들을 석방할 것을 의논하고 이조 판서 조온(趙溫)을 청주에 보내어 이미 죄를 자백한 자를 제외하고는 석방하여 각처에 안치시키니, 나라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여사제강》
○ 유원정(柳爰廷)이 명 나라에서 돌아와 아뢰기를, “황제가 윤이와 이초가 무고한 것을 알고 멀리 표수현(漂水縣)에 귀양보냈습니다.” 하였다. 정도전 등이 또 명 나라에서 돌아와 명 태조의 말을 전하기를, “윤이와 이초가 너의 나라 일을 어지럽게 하려고 한 모략은 짐이 이미 믿지 않았고, 이미 단죄하였으니, 그대 나라가 다시 무엇을 근심하고 의심할 것인가.” 하였다고 하였다. 《여사제강》
윤이와 이초의 변에 이색과 권근이 모두 체포되어 청주옥에 구금되었는데, 국문이 매우 혹독하여 일이 어찌될 지 예측할 수 없었다. 하루는 새벽부터 비가 쏟아져 한낮이 못되어 산이 무너지고 물이 솟아 넘쳐서 성문이 허물어져 물이 넘쳐 성안으로 들어오니, 가옥이 모두 물에 잠겼다.문사관(問事官)이 물에 빠져 떠내려 가다가 압각수(鴨脚樹) 은행나무 를 붙잡고 겨우 죽음을 면하였는데, 이 일이 조정에 보고되어 석방하고 묻지 않았기 때문에 이색과 권근이 보전할 수 있었다. 처음에 옥천군(玉川君) 유창(劉敞)이 두 분이 무고되어 옥에 갇혔다는 소문을 듣고 말하기를, “두 선생은 바로 하늘이 특별히 낸 사람이라 반드시 하늘의 도움이 있을 것이다.” 하더니, 그 말이 마침내 맞았다. 어떤 사람은 시 쓰기를,

근거 없는 중상이 불행하게 주공에 미쳤더니 / 流言不幸及周公
홀연히 가화(嘉禾)가 큰 바람에 일어났네 / 忽有嘉禾起大風
듣건대 서원(西原) 청주에 홍수 다 하니 / 聞道西原洪水漲
천도는 고금이 같은 것을 알겠구나 / 是知天道古今同

하였다. 《필원잡기》
○ 신미년(1391)에 명 태조가 정사(正使) 승휘원사(承徽院使) 강완자독(康完者篤)과 부사(副使) 승휘원사 보로테물[孛羅帖木兒]과 태경(太卿) 차한테물[蔡罕帖木兒] 등을 보내어 예부의 자문과 선물로 주는 옷의 겉감과 속감을 가지고 왔다. 그 자문에 말하기를, “예부의 우시랑(右侍郞) 장지(張智) 등은 황제의 명을 받든 즉, 삼한 땅에 군신이 패란(悖亂)을 저지른 지 어느덧 20년이 되었으되, 다행히 전란이 없고, 왕씨의 자손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다기에 이제 특별히 사신을 보내어, 선물로 옷감을 가지고 가서 위로하고 정치가 어떠한가를 살피게 한다.” 하였다. 《고사촬요》
○ 정도전이 일찍이 태조를 따라가 군사의 대오가 정비된 것을 보고 나아가 은밀히 말하기를, “장합니다. 이 군사라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하였다. 태조가 말하기를, “무슨 말인가.” 하니, 도전이 말을 돌려 말하기를, “왜놈을 쳐서 동남을 평정한다는 말입니다.” 하였다. 병영 앞에 늙은 소나무가 있었다. 도전이 부탁하여 껍질을 깎고 시를 쓰기를,

아득히 오랜 세월에 한 그루의 소나무 / 蒼茫歲月一株松
몇만 겹의 푸른 산에서 생장하였는고 / 生長靑山幾萬重
잘 있거라, 뒷날 다시 볼 수 있을까 / 好在他年相見否
인간 일은 잠깐 사이에 옛 자취 되느니 / 人間府仰已陣縱

하였다. 이는 하늘의 명이 태조에게 있는 것을 알고 재촉한 것이다. 《용비어천가》 《대동운옥(大東韻玉》
○ 공양왕의 세자 석(奭)이 명 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니, 태조가 황주(黃州)에 나가 맞이하였다. 해주(海州)에서 사냥을 하다가 한 마리 노루를 쫓아 쏘아 맞혔는데, 미처 고삐를 잡지 못하여 말이 진창에 빠져 거꾸러졌다. 태조는 몸이 매우 편찮아 남여[肩與]를 타고 돌아왔다. 과거에 시중 정몽주가 태조의 위엄과 덕망이 날로 높아가는 것을 꺼려, 그의 무리들과 더불어 같이 태조를 해치고자 꾀하더니, 이때에 이르러 태조가 말에서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는 빛이 있었다. 대간을 추겨 말하기를, “이성계가 지금 말에서 떨어져 병이 위독하다.마땅히 먼저 그의 우익(羽翼)인 조준(趙浚) 등을 제거한 뒤에 도모할 수 있겠다.” 하고, 드디어 삼사 좌사(三司左使) 조준, 정당 문학(政堂文學) 정도전, 밀직사 남은(南誾), 예조 판서 윤소종, 판전교시사(判典敎寺事) 남재(南在), 청주 목사 조박(趙璞)을 탄핵하였다. 왕이 그 탄핵하는 글을 도당(都堂)에 내려 주자, 몽주가 안에서 선동하여, 조준을 비롯한 여섯 명을 모두 먼 곳으로 귀양보내고 자기들의 당파인 순군천호(巡軍千戶) 김귀련(金龜聯), 형조 정랑(刑曹正郞) 이번(李幡) 등을 조준 등이 귀양간 곳에 나누어 보내서 장차 국문하여 죽이기로 하였다.그때 태종이 제릉(齊陵) 곁에서 여막을 지키고 있다가 태조가 말에서 떨어져 돌아온다는 말을 들은데다, 또 태조가 서울에 들어오는 날 몽주가 난을 일으키고자 한다는 것을 듣고, 곧 달려가 길에서 맞이하여 벽란도(碧瀾渡)에 이르러 몽주의 음모를 아뢰기를, “몽주가 필시 우리 집을 몰락시킬 것이니, 속히 서울에 들어가야 됩니다. 중도에 머물러 자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태조가 허락하지 아니하니, 태종이 두 번 세 번 간청하였다. 태조가 병을 억지로 참고 밤을 새워 가서 밝기 전에 서울에 들어갔다. 몽주가 성헌(省憲)을 추겨 번갈아 소장을 올려 조준과 정도전 등을 베기를 청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이러한 무고는 변명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하고, 장차 조정에 가려 하는데, 편찮아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정종과 이화(李和) 의안대군(義安大君)ㆍ이제(李濟)ㆍ황희석(黃希碩)ㆍ조영규(趙英珪) 등을 보내어 대궐에 나아가 아뢰기를, “지금 성헌(省憲)이, 전하를 세울 때 조준이 다른 사람을 세우자는 의논이 있는 것을 신이 저지시켰다고 말하고 있으나, 조준이 어느 사람과 그런 논의를 하였으며, 신이 저지시키는 말을 들은 사람이 그 누구인지, 조준 등을 불러서 대간과 더불어 대질하게 하소서.” 하고, 두세 번 왕복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고 뭇 소인들의 참소와 모함은 더욱 급하여졌다. 태종이 은밀히 몽주를 죽이기를 청하니, 태조가 듣지 않고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명이 있으니, 다만 마땅히 순하게 받을 뿐이다.” 하였다.태종이 굳이 청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속히 돌아가서 너의 큰 일이나 마쳐라. 제릉에 돌아가 상주 노릇을 마치라는 것” 하였다. 태종이 숭교리(崇敎里)의 옛 집에 앉아서 걱정하여 결정을 못내리고 있는데, 문을 급히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나가 보니, 광흥창 사(廣興倉使) 정탁(鄭擢)이었다. 그가 극력 말하기를, “백성들의 이해가 이 시각에 결정이 납니다. 왕후와 장상이 어찌 따로 종자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태종이 드디어 정종(定宗)과 이제와 더불어 의논하기를, “몽주는 안 죽일 수 없다. 내가 마땅히 그 허물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 하고, 이두란(李豆蘭)으로 하여금 몽주를 저격하게 하니, 두란이 말하기를, “우리 상공(相公)이 모르는 일을, 내가 어찌 감히 하겠는가.” 하였다. 태종이 조영규 등을 불러 말하기를, “우리 이씨가 왕실에 충성한 것은 나라 사람들이 알고 있는 터인데, 지금 몽주의 모함에 빠져 악명을 덮어 쓰고 있다. 우리 휘하에 사람이 많으면서 이씨를 위하여 힘을 다할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가.” 하니, 영규가 말하기를, “힘을 다하기를 원합니다.” 하였다.이에 태종은 영규와 조영무(趙英茂)ㆍ고려(高呂)ㆍ이부(李敷) 등으로 하여금, 도평의사사에 들어가 몽주를 저격하게 하려 하는데, 홀연히 행인을 벽제(辟除)하는 소리가 났다. 나가 보니, 몽주가 문에 도착하였다. 태조의 서형 원계(元桂)의 사위 변중량(卞仲良)이 그 모의를 몽주에게 누설하였기 때문에, 몽주가 동태를 살피고자 하여 문병을 칭탁하고 온 것인데, 태조가 몽주 대접하기를 전과 같이 하였다.이화가 태종에게 말하기를, “몽주를 죽이는 것은 지금이 기회입니다. 상공께서 성내실 것이 두려우니, 어찌할까요.” 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기회는 놓칠 수 없다.” 하고, 영규에게 명령하여 칼을 가지고 길가에서 기다리게 하였다. 그때 전 판개성부사(前判開城府事) 유원(柳源)이 죽었으므로 몽주가 지나다가 그 집에서 조상하느라고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영규들이 병기를 준비하여 가지고 기다릴 수 있었다. 몽주가 이르렀을 때, 영규가 달려가 쳤으나 맞지 아니하였다. 몽주가 돌아보고 꾸짖으며 말을 채찍질하여 달아났다. 영규가 달려가 말 머리를 치니, 몽주가 떨어져서 달아나는 것을 고려(高呂) 등이 베어 죽였다.태종이 들어가 아뢰니, 태조가 크게 놀라면서 일어나 성내어 말하기를, “우리 집이 평소에 충효로 알려졌는데, 너희들이 함부로 대신을 죽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내가 몰랐다고 하겠느냐.” 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몽주 등이 우리집을 몰락시키려 하는데, 어찌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겠습니까.” 하였는데, 태조의 성냄이 바야흐로 대단하였다. 신덕왕후(神德王后)가 얼굴빛을 가다듬고 말하기를, “공이 항상 대장군으로 자처하였는데, 어찌 이렇게까지 놀라고 두려워하십니까.” 하였다. 이튿날 태조가 황희석을 보내어 아뢰기를, “몽주가 죄인들과 붕당을 만들어 은밀히 대간을 유인하여 충량(忠良)한 사람들을 모함하다가 이제 이미 죽임을 당하였습니다.조준 등과 대간을 불러서 밝게 판정하소서.” 하였다. 왕이 어쩔 수 없어서, 이에 대간을 순군옥에 가두고, 배극렴(裵克廉)과 김사형(金士衡)에게 명하여 국문하게 하였다. 좌상시(左常侍) 김진양(金震陽)이 말하기를, “몽주와 이색ㆍ우현보(禹玄寶)가 이숭인(李崇仁)ㆍ이종학(李種學)ㆍ조호(趙瑚)를 보내서 신들을 추겨 탄핵하게 하였습니다.” 하였다.이에 숭인 등 3인을 순군옥에 가두고, 조금 뒤에 김진양과 이확(李擴)ㆍ이래(李來)ㆍ이돈(李敦)ㆍ권홍(權弘)ㆍ정희(鄭熙)ㆍ김묘(金畝)ㆍ서견(徐甄)ㆍ이작(李作)ㆍ이신(李申)ㆍ이숭인ㆍ이종학을 먼 곳으로 귀양보냈다. 유사(有司)가 말하기를, “진양(震陽) 등의 죄는 참형(斬刑)에 해당됩니다.” 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진양 등은 몽주 등의 추김을 받았을 뿐이다. 어찌 함부로 형벌을 내리겠는가.”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진양 등은 죽음을 면하게 되고, 이색은 한주(韓州)로 내쳤다. 《용비어천가》 《동각잡기》
○ 대사헌 민개(閔開) 등이 상소하기를, “몽주의 무리인 설장수(偰長壽)ㆍ이무(李茂)ㆍ이빈(李彬)ㆍ김리(金履) 등은 마땅히 국문하여 논죄해야 되며, 안노생(安魯生)ㆍ최관(崔關)ㆍ김첨(金瞻) 등은 마땅히 멀리 귀양보내야 되겠습니다.” 하였다. 소가 올라가니, 장수와 김리는 고향으로 돌려 보내고 그 나머지는 모두 파면시키고 멀리 귀양보냈다. 《여사(麗史)》
○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할 때, 남은이 조인옥(趙仁沃) 등과 더불어 태조를 추대할 것을 은밀히 의논하고 태종에게 알리니, 태종이 말하기를, “이 큰 일을 가볍게 말해서는 안된다.” 하였다. 그때 여러 사람의 마음이 모두 태조에게 돌아가, 어떤 이는 많은 사람이 모여 앉은 자리에서 공공연하게 말하기를, “천명과 인심이 이미 귀속한 데가 있는데, 어찌 속히 왕위에 오르기를 권하지 않는가.” 하였다. 임신년(1392) 6월에 이르러 태종이 남은과 더불어 계획을 정하고 몰래 조인옥ㆍ조준ㆍ정도전ㆍ조박 등 52인과 더불어 추대할 것을 협의하였다.그러나 태조가 크게 성낼 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아뢰지 못하고, 태종이 들어가 신덕왕후(神德王后)에게 아뢰어 전달하였다. 7월 12일에 시중(侍中) 배극렴(裵克廉) 등이 정비(定妃)에게 아뢰기를, “지금의 왕은 혼암(昏暗)하여 임금의 도리를 이미 잃었으며 백성의 마음이 이미 이탈하였으니, 사직과 백성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청컨대 폐위하소서.” 하였다. 남은과 정희계(鄭熙啓)가 정비의 교서를 가지고 북천동(北泉洞) 궁(宮)에 이르러, 왕의 죄를 헤아리고 폐위하여 원주(原州)로 내쳤다. 13일에 정비가 전교로, 태조를 감록국사(監錄國事)로 삼았다.16일에 극렴 등이 사람들을 거느리고 옥새를 받들어 전하려고 잠저로 나아가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거리가 꽉 찼다. 대사헌 민개(閔開)가 홀로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머리를 떨어뜨리고 말을 하지 아니하므로 남은이 쳐 죽이고자 하니, 태종이 말하기를, “의리상 그렇게 못한다.” 하고, 힘써 만류하였다. 태조가 문을 닫고 들이지 아니하니, 극렴이 문을 밀치고 곧바로 들어가 옥새를 마루 위에 놓아 두고, 벌려 서서 절하고 북을 치며 천세(千歲)를 부르고, 합사(合辭)하여 왕위에 오르기를 권하였다.태조가 굳이 거절하여 말하기를, “예로부터 왕자가 일어나는 것은 천명이 있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나는 실로 부덕한 사람이니, 어찌 감히 감당하겠는가.” 하였는데, 대소 신하들과 늙은 중신들이 옹위하고 서서 물러가지 않았다. 17일 병신에 백관들이 수창문(壽昌門)의 서쪽에 품계의 차례대로 늘어서서 맞으니, 태조가 말에서 내려 걸어서 정전(正殿)에 들어가 왕위에 나아갔다. 어좌(御座)를 피하고 영내(楹內)에 서서 여러 신하의 축하를 받았다.이어 육조의 판서 이상에게 명하여 전상(殿上)에 오르게 하고 이르기를, “나는 수상이 되어서도 오히려 두렵고 위태로운 마음을 품었는데, 어찌 오늘 이 일을 볼 것을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내가 만약 몸이 건강하다면 말이라도 타고 피해 갈 수 있을 것이나, 지금 마침 병이 들어 손과 발을 스스로 쓸 수가 없어서 드디어 여기에 이르게 되었다. 경들은 각각 나라 일에 충성하는 마음을 한결같이 하여 힘써 박덕(薄德)한 나를 돕도록 하라.” 하였다. 곧 전교를 내려, 전조(前朝)의 중앙과 지방의 대소 신료들에게 전과 같이 계속하여 일을 보게 하였다. 《국조보감》 《용비어천가》
○ 이에 앞서 크게 가물더니, 왕이 즉위한 이튿날 정유에 큰 비가 좍좍 내려 사람들이 크게 즐거워하였다. 《동각잡기(東閣雜記)》
○ 고려의 폐주(廢主)를 공양군(恭讓君)으로 하였다.
태종 16년 병신에 예조(禮曹)의 아룀으로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군을 봉하여 공양왕으로 하였다. 《동각잡기》. 묘가 고양(高陽)에 있다.


[주D-001]홍문(紅門) : 붉은 살로 만든 문인데, 여기서는 대궐의 홍살문을 말한다.
[주D-002]반야(般若) : 우왕의 생모이며, 신돈의 계집종.
[주D-003]성절(聖節) : 중국 황제의 생일.
[주D-004]새서(璽書) : 황제가 제후나 속국의 왕들에게 내리는 황제의 도장이 찍힌 문서.
[주D-005]북원(北元) : 원 나라가 명 나라에게 중원을 잃고 몽고 본토에 가서 세운 나라.
[주D-006]곽광전(霍光傳) : 한 나라 대신 곽광이 음란한 황제인 창읍왕(昌邑王) 을 폐하고 선제(宣帝)를 세운 사실을 적은 전기.
[주D-007]정비(定妃) : 공민왕의 비.
[주D-008]여불위(呂不韋)가 …… 계획 : 여불위가 잉태한 첩을 진왕(秦王)에게 들여 시황(始皇)을 낳게 하였는데, 진왕은 그것을 모르고 시황에게 왕위를 계승시켰으므로 여씨(呂氏)가 영씨(嬴氏 진왕의 성) 의 나라를 빼앗았다는 고사.
[주D-009]치재(致齋) : 제사를 모시려고 재계하는 것인데 주육(酒肉)을 금하고 들어앉아 근신하는 것.
[주D-010]조묘(祧廟) : 조상의 신주를 사당(祠堂)에 모셨다가, 4대가 지나면 신주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는데, 그 신주를 옮겨 모신 데가 조묘이다.
[주D-011]어름(御廩) : 임금이 사사로이 쓰는 창고.
[주D-012]친조(親朝) : 변두리의 작은 나라들이 사신을 보내 중국 황제에게 예물을 바치는 것을 조공(朝貢)이라고 하며, 친조라는 것은 속국(屬國) 의 왕이 직접 중국에 가서 조공하는 것을 말함.
[주D-013]배신(陪臣) : 속국의 신하를 종주국인 황제에 대하여 배신이라 한다.
[주D-014]강후(絳侯) : 한 나라 장군 주발(周勃)을 말하는데, 나라를 어지럽히던 여후(呂后)의 무리들을 무찌르고 한 문제(漢文帝)를 세운 공신.
[주D-015]오왕(五王) : 당 나라 무후(武后)의 무리를 무찌르고 중종(中宗)을 복위시킨 적인걸(狄仁傑)ㆍ장간지(張柬之) 등 다섯 사람의 공신을 왕으로 봉하였으므로 오왕이라 함.
[주D-016]여탈(與奪) : 주는 것과 빼앗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역사의 논평에 있어서 허여하는 것은 “여”라 하고, 깎아 내리는 것은 “탈”이라고 한다.
[주D-017]기휘(忌諱) : 여기서 말하는 기휘는 조선 왕실에 대한 기휘임.
[주D-018]호치당(胡致堂) : 송(宋) 나라 사론가(史論家) 호인(胡寅)을 말한다.
[주D-019]원제의 성은 우씨(牛氏) : 진(晉) 나라 민제의 황후가 소리(小吏) 우금(牛金) 과 간통하여 원제(元帝)를 낳았으므로 당시에 우(牛)를 마(馬)로 바꾸었다는 고사가 있었다.
[주D-020]눌재(訥齋) : 중종조 박상(朴祥) 의 호.
[주D-021]두 성 임금 : 신씨(辛氏) 와 왕씨(王氏) 두 성을 말한다.
[주D-022]임씨(任氏) : 《병신정사록(丙辰丁巳錄)》의 저자인 임보신(任輔臣)을 말한다.
[주D-023]상촌(象村) : 인조(仁祖) 때 사람인 신흠(申欽) 의 호.
[주D-024]공신 : 우왕을 폐위시킨 이성계ㆍ정몽주 등 아홉 사람을 말함.
[주D-025]가화(嘉禾) : 《서경》에 가화편이 있는데, 그 내용은 주공이 참소를 당해 물러가 있을 때, 큰 바람이 불어서 벼[禾]가 모두 쓰러졌으므로 성왕(成王) 이 놀라고 두려워 뉘우치고 주공을 도로 맞았더니, 바람이 다시 불어 쓰러졌던 벼를 도로 일으켜 놓았던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주D-026]제릉(齊陵) : 태종의 어머니인 신의왕후 한씨의 능.
[주D-027]성헌(省憲) : 고려 말기의 문하부(門下府)와 사헌부.
[주D-028]벽제(辟除) : 귀인이 통행할 때, 잡민의 통행을 금지하던 일.

 

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사전전고(祀典典故)
서원(書院)


우리나라는 옛날에는 서원이 없었으나 가정(嘉靖 가정은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1522~1566) 연간(1542)에 주세붕(周世鵬)이 풍기 군수(豐基郡守)가 되었을 때에 풍기군의 속현인 순흥(順興)은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의 본관(本貫)이며, 살았던 옛터이므로 거기에다 그의 사우(祠宇)를 창건하여 선비들이 장수(藏修)하는 곳으로 삼았는데, 곧 백운동(白雲洞)이다. 《후청쇄어》
이황(李滉)이 세붕을 이어 군수가 되어, 조정에 건의하여 송(宋) 나라의 고사에 따라 사액(賜額)한 것과 책을 내려줄 것, 토지와 노비를 내려줄 것을 청하였더니, 명종 5년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 사액하고, 또 신광한(申光漢)에게 명하여 기문(記文)을 짓게 하였다.서원에 사액하는 것과 책을 내린 것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명신록》
○ 주세붕이 황해 감사가 되었을 때에 해주에 문헌당(文憲堂)을 세웠는데 향선생(鄕先生) 문헌공(文獻公) 최충(崔冲)을 모신 것이었다. 사우와 강당(講堂)ㆍ재사(齋舍)가 모두 향교의 제도를 모방하였다. 그리고 유생을 뽑아서 거처하게 하고 경비를 공급하였다. 이로부터 다른 도의 각 고을에서도 서원을 세우는 자가 있었다. 만력 4년 선조 9년 에 이르러서는 백운동서원을 세운 지가 겨우 30여 년밖에 되지 않는데, 모든 지방에서 다투어 본받게 되니 조정에서는 혹 사액과 사서(賜書)한 곳도 있으나, 명현을 모시는 사우이거나 특수한 지방이 아니면 얻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향사도 없으면서 서원을 세운 것이 더욱 많으니 대개 60~70개 소나 되었다. 《후청쇄어》
○ 서원은 송 나라 때에 비롯하여 원(元) 나라의 말기에 성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소수서원을 창건한 후에 각지에서 계속 건립하게 되었는데, 영천(永川)에는 임고서원(臨皐書院), 함양(咸陽)에는 남계(灆溪)서원, 송도(松都)에는 숭양(崧陽)서원, 성주(星州)에는 천곡(川谷)서원, 해주에는 문헌(文憲)서원, 능성(綾城)에는 쌍봉(雙峯)서원, 양주에는 도봉(道峯)서원, 예안(禮安)에는 도산(陶山)서원, 안동에는 수곡(樹谷)서원, 영천(榮川)에는 이산(伊山)서원, 강릉에는 구산(丘山)서원, 대구에는 획암(畫巖)서원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선대의 학자가 살던 곳이거나, 혹은 왕래한 곳으로 사우(祠宇)를 아울러 세워서 향사하였다. 이외에도 또 많이 있다. 《동각잡기》
○ 각 지방의 향교는 곧 공자묘가 있는 곳이다. 조정에서 관원을 보내 교육하므로 모든 서원에 비교하면 존비(尊卑)가 있다. 그러나 서원의 선비는 주세붕이 처음 세워 선비 중에서 해액자(解額者 향시(鄕試)에 합격한 사람)가 거하게 하고, 비록 해액자가 아니라도 반드시 글을 많이 아는 자로서 보충하도록 규율을 세웠으므로, 거기에서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면 들어가지 못하였다. 향교는 생원ㆍ진사에 합격한 자는 가지 아니하고 대개 용렬한 잡것들이 병역을 피하기 위한 자가 많았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향교를 천하게 보고 서원을 높이고 받들었다. 그러나 무지한 자가 스스로 원유(院儒)를 가탁하여 수령을 깎고 추었으므로 수령 또한 삼가고 두려워하였다. 《후청쇄어》
○ 한산(韓山)의 문헌서원(文獻書院)이 이미 창건되었는데, 모든 유생이 가(稼) 가정(稼亭) 이곡(李穀)ㆍ목(牧) 목은(牧隱) 이색(李穡) 부자의 좌차(坐次)가 나란히 되는 것을 의심하여 서울에 있는 자손 이덕형(李德泂)에게 묻고 학식이 높은 여러 선비에게 물었더니 모두 결정하지 못하였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에게 가서 물었더니, 항복이 말하기를, “옛날에 오기량(吳紀亮)의 아들 즐(騭) 부자가 함께 중서령(中書令)이 되어서 조회 때에는 늘 임금이 운모 병풍(雲母屛風)을 주어 사이에 치고 따로 앉았으니, 이제는 장자(樟子)를 사이에 치고 격좌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 드디어 그 말을 따라 장자를 치고 앉게 하였다. 《죽창한화(竹窓閒話)》
목은의 화상이 문헌서원에 있었는데, 권근(權近)이 찬(贊)을 지어서 그 뒤에 쓰기를, “영락 갑오 9월 하한(下澣) 문인 권근 기(記)”라 하였다. 덕산(德山)에 있는 이씨의 옛집에 또 목은의 영당이 있었는데, 그 기문에 정덕(正德) 갑술이라 하였다. 화상이 처음에 두 벌 있었는데, 그 중 한 벌은 치관(豸冠)을 쓰고 서대(犀帶)를 띠며, 붉은 비단 옷을 입고 수염이 반백인 것은 지금서원의 소장본이 그것이다. 영당본은 그것으로부터 전해온 것이며, 한 벌은 야인(野人)의 복색이었는데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서원본은 임진병란에 잃어 버렸는데, 뒤에 일본으로 사신 갔던 자가 얻어 왔다. 일본의 노인이 주면서, “이것은 옛날의 귀인 도화(貴人圖畫)”라고 하였다. 사신이 돌아와서 그 자손에게 주었는데, 타국으로 돌아다닌 지가 오랜 세월이 되었으므로 깁[生綃]이 찢어져서 그 아래 절반이 없어졌다. 자손이 두 벌을 모사(模寫)하여 한 벌은 태창동(太倉洞) 이 중추(李中樞)의 집에 봉안하고, 한 벌은 구본과 아울러 문헌 사당에 봉안하였다. 《미수기언(眉叟記言)》
○ 배천(白川) 문회서원(文會書院)은 선조가 어필로 써서 사액하였더니, 임진년 병란에 편액은 불에 탔는데 숙종이 다시 어필로 액을 써주었다.
○ 홍가신(洪可臣)이 부여 현감(扶餘縣監)이 되었을 때, 비로소 의열서원(義烈書院)을 세우고 백제의 충신 성충(成忠)ㆍ계백(階伯)ㆍ흥수(興首)와 고려 정언 이존오(李存吾)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려고 하는 날 밤에, 가신의 꿈에 네 사람이 와서 인사를 하고 착한 일에 감동하는 빛이 있었으며, 김씨 성을 가진 서생(書生)이 집사(執事)로 재사(齋舍)에 갔는데, 이날 밤 또 꿈에 네 사람이 같이 문에 들어오면서 읍을 하고 당에 올라왔다고 한다. 《죽창한화(竹窓閒話)》. 이 일은 유성룡(柳成龍)이 지은 <서원기(書院記)>에 상세하게 말했다.
광해 때, 평양에 인현서원(仁賢書院)을 세우고 조정에서 향사의 예를 어떻게 할지 결정하지 못하였다. 감사 김신국(金藎國)이 아뢰기를, “향사의 잘못은 김계휘(金繼輝)에게서 시작한 것입니다. 대개 기자(箕子)는 동방의 성군(聖君)으로 이미 국가의 사전(祀典)에 실려 있는데, 다시 사자(士子)들이 사사로이 향사하는 것은 외람한 것입니다. 팔조(八條)의 교(敎)가 처음 동방에 펴졌으니, 이제 서원을 구도(舊都 평양)에 세우고 많은 선비가 모여서 장수(藏修)하고, 그가 끼친 가르침을 강명(講明)하면 족한 것이요, 제사를 지내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였다. 《염헌집(恬軒集)》
○ 서울의 북쪽에 조계동(曹溪洞)이 있다. 이이첨(李爾瞻)이 조계동의 조자(曹字)가 조식(曹植)의 성자(姓字)와 같은 것을 이유로 사당을 세워서 조식을 향사하려 하여 서원을 짓고, 그 무리를 모아서 제 주구(走狗)들을 길렀다. 임숙영(任叔英)이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조계에 조남명을 향사한다면 공덕리(孔德里)에는 공자를 향사해야 한단 말인가.” 하였다. 계해년 인조반정 후에 예조에서 아뢰기를, “선정신(先正臣) 조식의 서원을 근년에 중흥동(中興洞) 어구에 세웠는데, 요새 들으니 어떤 사람이 모두 헐고 그 위패를 던지기까지 하였다고 하는데 지극히 해괴한 일입니다. 이 서원은 적괴(賊魁) 이첨이 주장한 것이므로 유식한 사자(士子)는 한 사람도 참여하지 않고, 처음에 창설할 때부터 지금까지 지키는 자는 모두 무뢰한 흉도로서, 서울과 지방에 폐를 끼쳐 원망하는 사람이 많았었으므로 이제 이런 변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서원에 대한 원망은 비록 이첨으로 말미암은 것이나, 조식은 유현(儒賢)인데 어찌 이첨의 개인적인 사람이겠습니까. 인심이 이와 같으니 실로 사림의 욕됨이 되니, 청하옵건대, 소속 고을에 영을 내려, 군인을 많이 정해서 엄숙하게 금단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소암집(踈庵集)》 《월사남궁록(月沙南宮錄)》
○ 효종 때 서필원(徐必遠)의 상소로 인하여 조정에서 비로소 서원에 대해서 제한하는 규정을 만들기로 의논하였고, 숙종 갑자년에 이르러서는 명을 내려 각 도에 서원을 사사로 세우는 것을 금하였다. 영종 신유년에는 무릇 갑오년 이후에 창설한 것은 모두 훼철하였는데, 이것은 모두 금령을 범하고 사사로 세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서필원의 소 결(缺)
○ 영종 신유년 영조 7년 4월에 전교하기를, “갑오년에 법을 정한 후에 조정에 아뢰지 아니하고 사사로이 사원(祠院)을 세우거나 또는 기설(旣設)된 서원에도 사사로이 추향(追享)한 자는 유현(儒賢)이거나 대신이거나를 막론하고 모두 철거하고, 당시에 그것을 알고 묵인했던 감사는 이미 죽은 자 외에는 모두 파직하고, 수령은 잡아다가 처벌하며, 앞장서서 주창한 유생은 5년 동안 과거에 응하지 못하게 하고, 이후에 아뢰지 않고 세운 사원 및 추향자를 알고도 묵인하는 감사는 잡아다 처벌하며, 수령은 고신(告身)을 빼앗고 삼등을 내리는 율로 다스리게 하고, 유생은 멀리 귀양을 보내라.” 하였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근년에 이 일로써 공문을 발표한 일이 있었는데, 소위 조사한다고 하고 책임 얼버무리기만 일삼으니 실로 잘못된 것입니다. 또 서원 외에 향현사(鄕賢祠)라 일컫고, 혹은 영당(影堂)이라 일컫고서 그 중에 세력이 있는 자면 감사와 수령이 덮어주는 폐단이 없지 않으니, 이후로는 감히 그 같은 짓을 못하게 하라는 뜻으로 비변사로부터 특별히 공문을 보내 엄하게 단속하고, 또 조사한 보고가 온 후에, 조정에서 다만 훼철하라고 말하면 반드시 그 영대로 즉시 거행할는지 꼭 알 수 없으니, 여기에 대해서는 각 도의 감사로 하여금 따로 관원을 파견하여 직접 가서 훼철시킨 뒤에 사실대로 보고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하게 하였다.
○ 10월에 정언 어석윤(魚錫胤)의 상소에 비답하기를, “아아, 저 태학에 이미 성묘(聖廟)를 받들었고, 각 도에는 향교(鄕校)가 있는데 막중한 대성(大聖)을 어찌 감히 사사로 서원을 세워 받들 수 있겠느냐. 지명이 비록 같으나 조정에서 명령한 것이 아니니, 변변치 못한 선비들이 또 어찌 감히 마음대로 서원을 세우겠느냐.이 폐단을 버리지 아니하면 태학을 도리어 경하게 보고 사사 원우(院宇)를 중하게 볼 것이며, 나라에서 태학과 향교를 설치한 도리와 선비들의 풍습을 바로하고 성인을 높이는 뜻이 차차 희미해 질 것이니, 태산(泰山)에 제사한 것을 배척한 공자의 말씀을 어찌 과하다 하겠는가. 위패는 거두어 향교에 묻고 화상은 거두어다 각 성전(聖殿)에 받들면, 높이고 중히 여기는 예가 갖추어 지리라.” 하였다.
○ 영종 때 명을 내려 예안(禮安)의 도산서원과 해주의 소현서원의 그림을 그려 올리게 해서 보았다.


 

 

홍충도(洪忠道 충청도의 별칭)
공주
(公州) 충현서원(忠賢書院) 만력 신미년에 세웠고 천계(天啓) 을축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子)ㆍ이존오(李存吾)ㆍ이목(李穆) 무오당적(戊午黨籍)조에 들었다.ㆍ성제원(成悌元) 명종 유일(遺逸)ㆍ조헌(趙憲)ㆍ김장생(金長生)ㆍ송준길(宋浚吉)ㆍ송시열(宋時烈)ㆍ서기(徐起) 선조 때의 학자
청강서원(滄江書院) 숭정 무진년에 세웠고 숙종 임술년에 사액하였다. : 황신(黃愼)
도산서원(道山書院) 계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권득기(權得己) 호는 만회(晩悔)이며, 예조 좌랑을 지냈는데 이조 참판을 증직하였다.ㆍ권시(權諰)
부용강영당(芙蓉江影堂) 숙종 경인년에 세웠다. : 이만원(李萬元) 호는 이우당(二憂堂)이며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평안도 관찰사[箕伯]를 지냈다.
청주(淸州) 쌍천서원(雙泉書院) 계유년에 세웠다. : 신식(申湜) 호는 용졸재(用拙齋)이며, 대사헌을 지냈고 이조 판서를 증직하였다. 퇴계(退溪)의 문인이며 광해조 때 폐모 의논에 불참하였고, 《가례언해(家禮諺解)》를 저술하였다. 효도로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신항서원(莘巷書院) 융경(隆慶) 경오년에 세웠고, 현종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 이색(李穡)ㆍ이이(李珥)ㆍ경연(慶延) 자는 징군(徵君)이며, 본관은 청주(淸州)인데 현감을 지냈으며, 성종 때는 유일(遺逸)로 주부(主簿)를 지냈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 박훈(朴薰) 기묘 명현ㆍ김정(金淨) 기묘 명현ㆍ한충(韓忠) 기묘 명현ㆍ송인수(宋麟壽) 을사당적(乙巳黨籍)에 들었다.ㆍ송상현(宋象賢)ㆍ이득윤(李得胤) 호는 서계(西溪)이며, 괴산(槐山) 군수를 지냈다.
화양서원(華陽書院) 을해년에 세웠고 병자년에 어필(御筆)로 사액하였다. : 송시열(宋時烈) 화양동(華陽洞)에 또 만동묘(萬東廟)가 있는데 계미년에 세웠고, 명 나라의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을 향사한다.
국계서원(菊溪書院) 신사년에 세웠다. : 박증영(朴增榮) 호는 눌재(訥齋)이며, 교리를 지냈다.ㆍ변경복(卞景福) 호는 백음(栢陰)이다.ㆍ이덕수(李德洙) 호는 이유당(怡愉堂)이며, 대사간을 지냈다.ㆍ이수언(李秀彦) 호는 농계(聾溪)이며, 대사헌을 지냈다.
기암서원(機巖書院) 숙종 기묘년에 세웠다. : 강백년(姜栢年)
송천서원(宋泉書院) 숙종 정해년에 세웠다. : 김사렴(金士廉) 벼슬은 안렴사(按廉使)이다.최유경(崔有慶) 호는 죽정(竹亭)이며, 참판을 지냈고 시호는 평도공(平度公)이다.ㆍ이정간(李貞幹) 벼슬은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지냈고 시호는 효정공(孝靖公)이다.ㆍ박광우(朴光祐) 을사당적조에 들었다.ㆍ이지춘(李之春) 호는 삼우당(三友堂)이며, 장령을 증직하였다.ㆍ조강(趙綱) 호는 모계(慕溪)이며 현감을 지냈고, 승지를 증직하였다.ㆍ이대건(李大建) 이시발(李時發)의 부(父)이다. 호는 오촌(梧村)이며 진사에 급제하고 27세에 죽었다. 사람들이 관중안자(館中顔子)라 하였다. 우상(右相)을 증직하였다.ㆍ이제신(李濟臣)ㆍ최석정(崔錫鼎) 숙종조의 정승ㆍ이인혁(李寅爀) 호는 매산(梅山)이며 사복정(司僕正)을 지냈다. 이상 3인을 추배하였다.
백록서원(白麓書院) 숙종 경인년에 세웠다. : 권상(權常) 호는 남강(南岡)이며, 동흥군(東興君)으로 봉하였다. 동지(同知)를 지냈고 영상을 증직하였다.
송곡서원(松谷書院) 숙종 임진년에 세웠다. : 변시환(卞時煥) 호는 일공(一筇)이며 흥덕(興德) 현감을 지냈다.
봉계서원(鳳溪書院) 숙종 임진년에 세웠다. : 김우옹(金宇顒) 선조조의 명신ㆍ신송(申誦) 호는 하은(霞隱)이며, 감사를 지냈고 이조 판서를 증직하였다.ㆍ신집(申潗) 호는 종산(鍾山)이며 지평(持平)을 증직하였다.
□□영당(□□影堂) 경인년에 세웠다. : 이색(李穡)
체화당(棣華堂) : 노계원(盧繼元) 호는 송헌(松軒)이다.ㆍ노후원(盧後元) 호는 국헌(菊軒)이다.ㆍ노종원(盧從元) 호는 매헌(梅軒)이며, 지평을 지냈다.ㆍ노일원(盧一元) 호는 죽헌(竹軒)이다.
표충사(表忠祠) 영종 신해년에 세웠고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 이봉상(李鳳祥) 병사로서 영종 무신년에 순절하였다. 시호는 충민공(忠愍公)이며, 좌찬성을 증직했다.ㆍ남연년(南延年) 영장(營將)이다. 시호는 충장공(忠壯公)이며 병조 판서를 증직하였다.ㆍ홍림(洪霖) 비장(稗將)을 지냈고, 병조 참판을 증직하였다.
충주(忠州) 운곡서원(雲谷書院) 만력 경자년에 세웠고 숙종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子)ㆍ정구(鄭逑)
팔봉서원(八峯書院) 만력 임오년에 세웠고, 현종 임자년에 사액하였다. : 이자(李耔) 기묘 명현ㆍ이연경(李延慶) 기묘 명현ㆍ김세필(金世弼) 기묘명현ㆍ노수신(盧守愼) 선조조의 정승
누암서원(樓巖書院) 숙종 갑술년에 세웠고, 임오년에 사액하였는데 갑진년에 철훼(撤毁)하였다가 을사년에 복구하였다. : 송시열(宋時烈)ㆍ민정중(閔鼎重)ㆍ권상하(權尙夏)
충렬사(忠烈祠) 숙종 정축년에 세웠고 영종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 임경업(林慶業)
문의(文義) 노봉서원(魯峯書院) 만력 갑인년에 세웠고, 효종 무술년에 사액하였다. : 송인수(宋麟壽)ㆍ정렴(鄭)
검담서원(黔潭書院) 숙종 갑술년에 세웠고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송준길(宋浚吉)
덕천사우(德川祠宇) 숙종 갑술년에 세웠다. : 유희령(柳希齡) 호는 몽암(夢庵)이며 호조참의를 지냈다.ㆍ유흥룡(柳興龍) 호는 숙옹(塾翁)이며 감찰을 증직하였다.ㆍ우신언(禹愼言) 호는 묵재(默齋)이며, 찰방을 지냈다.ㆍ정응창(鄭應昌) 호는 유항(柳巷)이며 공조 좌랑을 증직하였다.
괴산(槐山) 화암서원(花巖書院) 천계 임술년에 세웠다. : 이황(李滉)ㆍ이문건(李文楗) 호는 검재(黔齋)이며 승지를 지냈다.ㆍ노수신(盧守愼)ㆍ김제갑(金悌甲) 목사를 지냈고, 영상을 증직하였다. 호는 의재(毅齋)이다.ㆍ유근(柳根) 광해조의 문형(文衡)ㆍ이신의(李愼儀)ㆍ허후(許詡) 이상(貳相)을 지냈고 시호는 정간공(貞簡公)이다.ㆍ박세무(朴世茂) 헌납을 지냈고, 호는 소요당(逍遙堂)이다.ㆍ전유형(全有亨) 호는 학송(鶴松)이며 형조 참판을 지냈다.
아산(牙山) 인산서원(仁山書院) 경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 무오당적조에 들었다.ㆍ조광조(趙光祖)ㆍ정여창(鄭汝昌) 무오당적조에 들었다.ㆍ이언적(李彦迪) 명종 명현ㆍ이황ㆍ기준(奇遵)ㆍ이지함(李之菡) 선조 때 사람ㆍ홍가신(洪可臣) 호는 만전(晩全)이며 판서를 지냈다.ㆍ이덕민(李德敏) 처사이며 참봉을 지냈고, 호는 송파(松坡)이다.ㆍ박지계(朴知誡) 4인은 무신년에 추향하였다.
현충사(顯忠祠) 숙종 병술년에 세웠다. : 이순신(李舜臣) 선조조의 명신ㆍ이완(李莞) 순인의 종자(從子)이다. 의주 부윤(義州府尹)을 지냈고 병조 판서를 증직하였다.ㆍ이봉상(李鳳祥)
연기(燕岐) 봉암서원(鳳巖書院) 신묘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한충(韓忠) 기묘 명현ㆍ김장생(金長生)ㆍ송준기ㆍ송시열
제천(堤川) 남당서원(南塘書院) 만력 경진년에 세웠다. : 이황(李滉)
영춘(永春) 송파서원(松坡書院) 계축년에 세웠다. : 윤선거(尹宣擧)
보은(報恩) 상현서원(象賢書院) 가정(嘉靖) 기유년에 세웠고 만력 경술년에 사액하였다. : 김정(金淨)ㆍ성운(成運) 명종조의 유일(遺逸)ㆍ성제원(成悌元) 명종조의 유일로 보은(報恩) 현감을 지냈다.ㆍ조헌(趙憲) 신유년에 추향하였다.ㆍ송시열 을해년에 추향하였다.
산앙사영당(山仰祠影堂) 숙종 정해년에 세웠다.ㆍ송시열ㆍ권상하(權尙夏)
단양(丹陽) 단암서원(丹巖書院) 현종 경자년에 세웠고, 숙종 임신년에 사액하였다. : 우탁(禹倬) 고려 때에 좨주(祭酒)를 지냈다. 호는 역동재(易東齋)이며 자는 보안(甫安)이며, 안향(安珦)의 문인이다.ㆍ이황(李滉)
목천(木川) 도동서원(道東書院) 기축년에 세웠고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子)ㆍ정구(鄭逑)ㆍ김일손(金馹孫) 무오당적에 들었다ㆍ황종해(黃宗海) 호는 오천(杇淺)이다.
홍산(鴻山) 청일서원(淸逸書院) 천계 신유년에 세웠고 숙종 갑신년에 사액하였다. : 김시습(金時習)
창렬사(彰烈祠) 삼학사(三學士)를 향사하였다.
옥천(沃川) 창주서원(滄洲書院) 만력 무신년에 세웠고,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조헌(趙憲)ㆍ김집(金集)ㆍ송시열ㆍ송준길ㆍ곽은(郭垠) 호는 용촌(龍村)이며 승지를 지냈다. 효종 경인년에 따로 창주사우(滄洲祠宇)를 세워서 향사하였다.
용문영당(龍門影堂) 무인년에 세웠다. : 송시열
호계사우(虎溪祠宇) 숭정(崇禎) 신묘년에 세웠다. : 남수문(南秀文) 호는 경재(敬齋)이며 직제학을 지냈다.
대곡영당(代谷影堂) 계사년에 훼철하였다. : 전팽령(全彭齡) 호는 송정(松亭)이며 감사를 지냈다.
표충사(表忠祠) 갑인년에 사액하였다. : 조헌(趙憲)ㆍ조완기(趙完基)
신창(新昌) 도봉서원(道峯書院) 경술년에 세웠다. : 조익(趙翼)ㆍ조극선(趙克善) 자는 유선(有善)이며 호는 야곡(冶谷)이다. 효행이 있어 정문을 세웠으며 유일(遺逸)로 장령(掌令)을 지냈고 이조 참의를 증직하였다.
청풍(淸風) 봉강서원(鳳崗書院) 신해년에 세웠으며 임자년에 사액하였다. : 김식(金湜)ㆍ김권(金權)
황강서원(黃江書院) 영종 병오년에 세웠고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 권상하
연산(連山) 돈암서원(遯巖書院) 숭정 계유년에 세웠고, 현종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 김장생ㆍ김집ㆍ송준길ㆍ송시열
귀산서원(龜山書院) 임오년에 세웠다. : 윤전(尹烇)ㆍ윤순거(尹舜擧)ㆍ윤원거(尹元擧) 자는 백분(伯奮)이며 벼슬은 진선(進善)을 지냈다.
팔현서원(八賢書院) 임오년에 세웠는데, 지금은 액(額)을 충곡(忠谷)이라 한다. : 백제 장군 계백(階伯)ㆍ박팽년(朴彭年)ㆍ성삼문(成三問)ㆍ이개(李塏)ㆍ하위지(河緯地)ㆍ유성원(柳誠源)ㆍ유응부(兪應孚)ㆍ김익겸(金益兼)
휴정서원(休亭書院) 기묘년에 세웠다. : 유무(柳懋) 호는 휴계(休溪)이며 찰방을 지냈다.ㆍ이항길(李恒吉) 호는 과암(果庵)이며 참봉을 지냈다.ㆍ김망(金望) 호는 삼육재(三六齋)이며 현감을 지내고 승지에 증직되었다.ㆍ권□(權□) 호는 반곡(盤谷)이며, 감사를 지내고 영상에 증직되었다.
보령(保寧) 화암서원(花巖書院) 만력 경술년에 세웠고 숙종 병인년에 사액하였다. : 이지함(李之函)ㆍ이산보(李山甫)ㆍ이몽규(李夢奎) 호는 천휴당(天休堂)이며, 추향되었다.
홍주(洪州) 녹운서원(綠雲書院) 임자년에 세웠고, 숙종 임신년에 사액하였다. : 박팽년(朴彭年)ㆍ이개(李塏)ㆍ하위지(河緯地)ㆍ성삼문(成三問)ㆍ유성원(柳誠源)ㆍ유응부(兪應孚)
혜학서원(惠學書院) 숙종 을유년에 세웠고 경종 임인년에 사액하였다. : 이세귀(李世龜) 호는 양와(養窩)이며, 목사를 지냈다.
용계서원(龍溪書院) 숙종 갑오년에 세웠다. : 윤증(尹拯)
황간(黃澗) 모현서원(慕賢書院) 임오년에 세웠다. : 조위(曺偉) 무오당적조에 들었다.ㆍ박영(朴英) 중종조의 명신ㆍ김시창(金始昌) 호는 풍정(嵐亭)이며, 효절(孝節)로써 삼강록(三綱錄)에 실렸다.ㆍ박응훈(朴應勳) 호는 오촌(梧村)이다.ㆍ송시열(宋時烈)
송계서원(松溪書院) 현종 정미년에 세웠다. : 남지언(南知言) 호는 삼괴당(三槐堂), 참봉을 지냈다.ㆍ박유동(朴惟東) 호는 일석(一石)이며, 참봉을 지냈다.
한천서원(寒天書院) 정유년에 세웠고 병오년에 사액하였다. : 송시열(宋時烈)
서천(舒川) 명곡서원(鳴谷書院) 임인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이산보(李山甫)ㆍ조헌(趙憲)ㆍ조수륜(趙守倫) 자는 경지(景至)이며, 호는 풍옥헌(風玉軒)이고, 호조 좌랑을 지냈으며, 병조 참판에 증직되었다.ㆍ조속(趙涑) 수륜(守倫)의 아들이며, 추향되었다.
부여(扶餘) 의렬사(義烈祠) 만력 을해년에 세웠고, 선조 정축년에 사액하였다. : 성충(成忠) 백제(百濟)의 좌평(佐平)을 지냈다.ㆍ흥수(興首) 백제의 좌평을 지냈다.ㆍ계백(階伯) 백제의 장군ㆍ이존오(李存吾) 고려의 우정언(右正言)을 지냈다.ㆍ정택뢰(鄭澤雷) 호는 화강(花岡)이며, 광해조 때 남해(南海)에 귀향갔다. 지평에 증직되었으며 추향되었다.ㆍ황일호(黃一皓) 호는 지천(芝川)이며 시호는 충렬공(忠烈公)이고 찬성에 증직되었다.
부산서원(浮山書院) 을해년에 세웠고 숙종 기해년에 사액하였다. : 김집(金集)ㆍ이경여(李敬輿) 인조조의 정승
청안(淸安) 귀계서원(龜溪書院) 만력 계축년에 세웠다. : 이준경(李浚慶) 명종조의 정승ㆍ서사원(徐思遠) 호는 낙재(落齋)이다. 현감을 지냈다.ㆍ박지화(朴枝華) 자는 군실(君實)이며, 호는 수암(守庵)이고 본관은 정선(旌善)이다. 교관(敎官)을 지냈고, 예서(禮書)에 정통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물에 빠져 자결하였다.ㆍ이득철(李得澈) 위에 보라. 호는 신곡(莘谷)이다.ㆍ이당(李瑭) 호는 방촌(芳村)이며 참봉을 지냈고 추배되었다.
□□사우(□□祠宇) 영종 기미년에 세웠다. : 금성대군 유(錦城大君瑜) 시호는 정민공(貞愍公)이며, 단종조의 사람이다.ㆍ이보흠(李甫欽) 본관이 영천(永川)이며, 순흥(順興) 부사를 지냈고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영동(永同) 초강서원(草江書院) 만력 계축년에 세웠다. : 박연(朴堧) 호는 난계(蘭溪)이며, 세종조의 명신이다.ㆍ박사종(朴嗣宗) 호는 읍청(挹淸)이며 참봉을 지냈다.ㆍ송방조(宋邦祚) 병조 좌랑을 지냈다.ㆍ송시영 위에 보라ㆍ송시열ㆍ윤황(尹煌)
화암사우(花巖祠宇) 현종 병오년에 세웠다. : 장항(張沆) 호는 눌재(訥齋)이며,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고, 시호는 문현공(文顯公)이다.ㆍ박흥생(朴興生) 호는 국당(菊堂)이며 현령(縣令)을 지냈고 공조 참의에 증직되었다.ㆍ장필무(張弼武) 호는 백야(栢冶)이며, 자는 무부(武夫)요, 시호는 양정공(襄貞公)이다. 청렴결백한 장군으로서 절도사를 지냈고, 병조 판서에 증직되었다.ㆍ박인(朴忍) 만호(萬戶)를 지냈다.ㆍ장지현(張知賢) 호는 삼괴당(三槐堂)이며 감찰을 지냈다. 임진왜란에 순절하였는데 병조 참의에 증직되었다. 필무(弼武)의 아들이다.
회덕(懷德) 숭현사(崇賢祠) 만력 기유년에 옮겨 세웠다. : 정광필(鄭光弼) 중종조의 정승ㆍ김정(金淨)ㆍ김장생(金長生)ㆍ송시열(宋時烈)ㆍ이시직(李時稷)ㆍ송인수(宋麟壽)ㆍ송준길(宋浚吉)ㆍ송시영(宋時榮) 이시직과 송시영의 사당은 따로 있다.
정절사(靖節祠) 갑자년에 세웠다. : 송유(宋愉) 호는 쌍청당(雙淸堂)이다.ㆍ백팽년(朴彭年)ㆍ송갑조(宋甲祚) 호는 수옹(睡翁)이며, 참봉을 지냈고 영상에 증직되었다.ㆍ송상민(宋尙敏) 호는 석곡(石谷)이며 좌랑을 증직하였다.ㆍ김경여(金慶餘) 부제학을 지냈으며 영상에 증직되었다. 호는 송애(松崖)이며 추배되었다.
종회사영당(宗晦祠影堂) 숙종 정축년에 세웠다. : 주자(朱子)ㆍ송시열(宋時烈)
용호사우(龍湖祠宇) 정축년에 세웠다. : 강학년(姜鶴年) 호는 복천(復泉)이며, 장령을 지냈고 대사헌에 증직되었다.ㆍ강세귀(姜世龜) 호는 삼휴당(三休堂)이며, 대사간을 지냈다.
미호서원(渼湖書院) 정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송규렴(宋奎濂) 호는 제월당(霽月堂)이며 참찬을 지냈고, 시호는 문희공(文僖公)이다.
이성(尼城) 노강서원(魯崗書院) 갑인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윤황(尹煌)ㆍ윤문거(尹文擧)ㆍ윤선거(尹宣擧)ㆍ윤증(尹拯)
온양(溫陽) 정퇴서원(靜退書院) 기사년에 세웠다. : 조광조(趙光祖)ㆍ이황(李滉)ㆍ맹희도(孟希道) 호는 동포(東浦)이며 수문제학(修文提學)을 지냈다. 사성(思誠)의 부(父)이며, 추향되었다.ㆍ홍가신(洪可臣)
충효사우(忠孝祠宇) 숭정 갑술년에 세웠다. : 이순신(李舜臣)ㆍ강봉수(姜鳳壽) 호는 창암(窓巖)이며 참찬에 증직되었다.ㆍ조상우(趙相禹) 호는 시암(時庵)이며 참판에 증직되었다.ㆍ강백년(姜栢年)ㆍ윤현(尹俔) 호는 양심당(養心堂)이며 도사(都事)를 증직하였고, 추향하였다.
면천(沔川) 향현사(鄕賢祠) 병술년에 세웠다. : 이안눌(李安訥)
대흥(大興) 우천향현사(牛泉鄕賢祠) 정해년에 세웠다. : 이약수(李若水) 호는 우천(牛泉)이며 진사에 합격하였고, 기묘 명현이다. ○ 소정방사(蘇定方祠) 제사(諸祠)조에 들어 있다.
청산(靑山) 덕봉서원(德峯書院) 신사년에 세웠다. : 조헌(趙憲)ㆍ송시열(宋時烈)
임천(林川) 칠산서원(七山書院) 정묘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ㆍ유계(兪棨)
예산(禮山) 덕잠서원(德岑書院) 을유년에 세웠고 갑오년에 사액하였다. : 김구(金絿) 기묘 명현
집성사영당(集成祠影堂) 기축년에 세웠다. : 주자ㆍ송시열
평택(平澤) 포충사우(褒忠祠宇) 신축년에 세웠고 갑신년에 사액하였다. : 홍익한(洪翼漢)ㆍ윤집(尹集)ㆍ오달제(吳達濟)
향현사(鄕賢祠):우남양(禹南陽) 호는 운곡(雲谷)이며, 처사를 지냈고, 집의에 증직되었다.
한산(韓山) 문헌서원(文獻書院) 만력 갑오년에 세웠고, 경술년에 사액하였다. : 이곡(李穀) 고려조에서 한산군(韓山君)으로 봉하였으며, 호는 가정(稼亭)이다.ㆍ이색(李穡)ㆍ이종학(李種學) 호는 인재(麟齋)이며 제학(提學)을 지냈다.ㆍ이개(李塏)ㆍ이자(李耔)
진천(鎭川) 백원서원(百源書院) 가정(嘉靖) 임오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이종학(李種學)ㆍ김덕숭(金德崇) 호는 모재(慕齋)이며, 본읍 군수를 지냈고 참의에 증직되었다.ㆍ이여(李畬) 호는 송광(松匡)이며 문학(文學)을 지냈다.ㆍ이부(李阜) 호는 행원(杏園)이며, 교리를 지냈고 현량과에 합격하였다. 김유신(金庾信) 사당은 제사(諸祠)조에 들어 있다.
지산서원(芝山書院) 임인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최석정(崔錫鼎) 숙종조의 정승
서산(瑞山) 성암서원(聖岩書院) 을해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유숙(柳淑) 고려조에서 찬성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희공(文僖公)이고, 자는 순부(純夫)이며, 호는 사암(思庵)이다.ㆍ김홍욱(金弘郁) 호는 학주(鶴洲)이며 판서에 증직되었다.
인정서원(仁政書院) 중간에 폐지하였다가 다시 세웠다. 송곡향현사(松谷鄕賢祠)라고도 한다. : 유방택(柳方澤) 호는 금헌(琴軒)인데 고려조에서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를 지냈다.ㆍ정신보(鄭臣保) 본관은 서산(瑞山)이며 고려조에 인주(麟州) 수령을 지냈다.ㆍ정인경(鄭仁卿) 신보(臣保)의 아들인데, 고려조의 중찬(中贊)을 지냈으며, 시호는 양렬공(襄烈公)이다.ㆍ유백유(柳伯濡) 방택(方澤)의 아들인데 호는 저정(樗亭)이며, 이조 판서를 지냈고, 시호는 문정공(文靖公)이다.
연풍(延豐) 원천사(源泉祠) 기축년에 세웠다. : 이기홍(李箕洪) 호는 직재(直齋)이며 집의(執義)를 지냈다.
해미(海美) □□영당(□□影堂) 임진년에 세웠다. : 남구만(南九萬) 숙종조의 정승
진잠(鎭岑) 집성사(集成祠) 숙종 갑술년에 세웠는데, 각각 화상이 있다. : 주자(朱子)ㆍ송시열(宋時烈)
은진(恩津) 갈산사(葛山祠) 숙종 계사년에 창건하였다. : 강응정(姜應貞) 생원에 합격하였고, 호는 화재(和齋)이다.ㆍ서익(徐益) 호는 만죽헌(萬竹軒)이며, 의주 목사를 지냈다.ㆍ양응춘(楊應春) 호는 도곡(道谷)이며, 현감을 지냈고,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금곡사(金谷祠) 무진년에 중건하였다. : 김수남(金秀南) 호는 만치당(萬癡堂)이며, 병조 정랑을 지냈고, 승지에 증직되었다.
비인(庇仁) 청절사(淸節祠) 경인년에 세웠다. : 유기창(兪起昌)ㆍ유여림(兪汝霖) 기창(起昌)의 아들인데 예조 판서를 지냈으며, 시호는 경안공(景安公)이다.
전의(全義) 뇌암서원(雷岩書院) 기묘년에 세웠다. : 이상(李翔) 본관은 우봉(牛峯)이며, 이조 참판을 지냈으며, 호는 타우(打愚)이다.
덕산(德山) 회암서원(晦庵書院) 기축년에 세웠다. : 주자(朱子)ㆍ이담(李湛) 호는 정존재(鄭存齋)이며, 부학(副學)을 지냈다.ㆍ조극선(趙克善)
석성(石城) 봉호서원(蓬湖書院) 숙종 계유년에 세웠다. : 윤문거(尹文擧)

태조
 총서
태조가 조민수와 함께 위화도에서 회군하다

5월, 대군(大軍)이 압록강을 건너서 위화도(威化島)에 머무르니 도망하는 군사가 길에 끊이지 아니하므로, 우왕이 소재(所在)에서 목 베도록 명하였으나 능히 금지시키지 못하였다. 좌우군 도통사(左右軍都統使)가 상언(上言)하기를,
“신(臣) 등이 뗏목을 타고 압록강을 건넜으나, 앞에는 큰 냇물이 있는데 비로 인해 물이 넘쳐, 제1여울에 빠진 사람이 수백 명이나 되고, 제2여울은 더욱 깊어서 주중(洲中)에 머물어 둔치고 있으니 한갓 군량만 허비할 뿐입니다. 이곳으로부터 요동성(遼東城)에 이르기까지의 중간에는 큰 내가 많이 있으니 잘 건너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근일에 불편한 일의 실상[事狀]을 조목별로 기록하여 아뢰었으나 윤허(允許)를 받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황공하고 두렵습니다. 그러나, 큰일을 당하여 말할 만한 것이 있는데도 말하지 않는 것은 불충(不忠)이니, 어찌 감히 죽음[鈇鉞]을 피하여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나라를 보전하는 도리입니다. 우리 국가가 삼국(三國)을 통일한 이후로 큰 나라 섬기기를 근실히 하여, 현릉(玄陵)께서 홍무(洪武) 2년에 명(明)나라에 복종하여 섬겨 그 올린 표문(表文)에, ‘자손만세(子孫萬世)에 이르기까지 영구히 신하가 되겠습니다.’ 하였으니, 그 정성이 지극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이 뜻을 계승하여 세공(歲貢)의 물품을 한결같이 조지(詔旨)에 의거했으므로, 이에 황제가 특별히 고명(誥命)을 내려 현릉(玄陵)의 시호(諡號)를 내려 주고 전하의 작(爵)을 책봉하였으니, 이것은 종사(宗社)의 복(福)이요 전하의 성덕(盛德)입니다. 지금 유지휘(劉指揮)가 군사를 거느리고 철령위(鐵嶺衛)를 세운다는 말을 듣고, 밀직 제학(密直提學) 박의중(朴宜中)으로 하여금 표문(表文)을 받들고 명령을 받으려고 했으니, 계책이 매우 좋았습니다. 지금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서 갑자기 큰 나라를 범하게 되니, 종사(宗社)와 생민(生民)의 복이 아닙니다. 하물며 지금은 장마철이므로 활은 아교가 풀어지고 갑옷은 무거우며, 군사와 말이 모두 피곤한데, 이를 몰아 견고한 성(城) 아래로 간다면 싸워도 승리함을 기필할 수 없으며 공격하여도 빼앗음을 기필할 수 없습니다. 이 때를 당하여 군량이 공급되지 않으므로 나아갈 수도 없고 물러갈 수도 없으니, 장차 어떻게 이를 처리하겠습니까? 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 특별히 군사를 돌이키도록 명하시어 나라 사람의 기대에 보답하소서.”
하였으나, 우왕과 최영은 듣지 아니하고, 환자(宦者) 김완(金完)을 보내어 군사를 전진하도록 독촉하였다. 좌우군 도통사는 김완을 붙잡아 두고 보내지 아니하며, 또 사람을 보내어 최영에게 가서 빨리 군사를 돌이킬 것을 허가하도록 청하였으나, 최영은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다. 군중(軍中)에서 거짓말이 나기를,
“태조가 휘하의 친병(親兵)을 거느리고 동북면을 향하는데 벌써 말에 올랐다.”
하니, 군중이 떠들썩 하였다. 민수(敏修)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단기(單騎)로 달려 태조에게 와서 울면서 말하기를,
“공은 가시는데 우리들은 어디로 가겠습니까?”
하니, 태조는 말하기를,
“내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공은 이같이 서둘지 마시오.”
하였다. 태조는 이에 여러 장수들에게 타이르기를,
“만약 상국(上國)의 국경을 범하여 천자(天子)에게 죄를 얻는다면 종사(宗社)·생민(生民)의 재화(災禍)가 즉시 이르게 될 것이다. 내가 순리(順理)와 역리(逆理)로써 글을 올려 군사를 돌이킬 것을 청했으나, 왕도 또한 살피지 아니하고, 최영도 또한 늙어 정신이 혼몽하여 듣지 아니하니, 어찌 경(卿) 등과 함께 왕을 보고서 친히 화(禍)되고 복(福)되는 일을 진술하여 임금 측근의 악인(惡人)을 제거하여 생령(生靈)을 편안하게 하지 않겠는가?”
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우리 동방 사직(社稷)의 안위(安危)가 공의 한 몸에 매여 있으니, 감히 명령대로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군사를 돌이켜 압록강에 이르러 흰 말을 타고 동궁(彤弓)과 백우전(白羽箭)을 가지고 언덕 위에 서서 군사가 다 건너기를 기다리니, 군중(軍中)에서 바라보고 서로 이르기를,
“옛부터 지금까지 이 같은 사람은 있지 않았는데 지금부터 이후로도 어찌 다시 이 같은 사람이 있겠는가?”
하였다. 이때 장마가 수일 동안 계속했는데도 물이 넘치지 않다가, 군사가 다 건너가고 난 후에 큰물이 갑자기 이르러 온 섬이 물에 잠기니, 사람들이 모두 이를 신기하게 여겼다. 이때 동요(童謠)에,
목자(木子)가 나라를 얻는다.”
는 말이 있었는데, 군인과 민간인, 늙은이와 젊은이를 논할 것 없이 모두 이를 노래하였다. 조전사(漕轉使) 최유경(崔有慶)이 대군(大軍)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우왕에게 알렸다. 이날 밤에 상왕(上王)이 그 형 방우(芳雨)와 이두란(李豆蘭)의 아들 화상(和尙) 등과 함께 성주(成州)의 우왕의 처소로부터 태조의 군대 앞으로 도망해 갔으나, 우왕은 해가 정오(正午)가 되어도 오히려 알지 못하였다. 길에서 지응수령(支應守令)들을 만나 그들의 말[馬]을 다 빼앗아 타고 갔다. 우왕은 대군(大軍)이 돌아와 안주(安州)에 이르렀음을 알고 말을 달려 서울로 돌아왔다. 군사를 돌이킨 여러 장수들이 급히 추격하기를 청하니, 태조는 말하기를,
“속히 행진하면 반드시 싸우게 되므로 사람을 많이 죽이게 될 것이다.”
하였다. 매양 군사들을 경계하기를,
“너희들이 만약 승여(乘輿)를 범한다면 나는 너희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백성의 오이[瓜] 한 개만 빼앗아도 또한 마땅히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하겠다.”
하였다. 연로(沿路)에서 사냥하면서 짐짓 느리게 행군하니, 서경(西京)에서 서울에 이르는 수백 리 사이에 우왕을 좇던 신료(臣僚)와 서울 사람과 이웃 고을 백성들이 술과 음료(飮料)로써 영접하여 뵙는 사람이 끊이지 아니하였다. 동북면의 인민과 여진(女眞)으로서 본디 종군(從軍)하지 않던 사람까지도, 태조가 군사를 돌이켰다는 소식을 듣고는 다투어 서로 모여 밤낮으로 달려서 이르게 된 사람이 천여 명이나 되었다. 우왕은 도망해 돌아와 화원(花園)으로 돌아갔다. 최영이 막아 싸우고자 하여 백관(百官)에게 명하여 무기를 가지고 시위(侍衛)하게 하고 수레를 모아 골목 입구를 막았다.
【원전】 1 집 11 면
【분류】 *인물(人物) / *왕실(王室) / *외교(外交) / *군사-군정(軍政) / *역사(歷史) / *변란(變亂) / *인사(人事)


[주D-001]현릉(玄陵) : 공민왕(恭愍王).
[주D-002]고명(誥命) : 임금이 신하에게 고시(告示)하는 말이나 글.
[주D-003]목자(木子) : 이(李).
[주D-004]상왕(上王) : 정종(定宗).
[주D-005]승여(乘輿) : 임금.
태조 3년 갑술(1394,홍무 27)
 6월25일 (계사)
대간에서 천거한 사람들을 각도의 도관찰출척사로 임명하다

대간에서 천거한 사람으로 각도의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를 임명하였는데, 최유경(崔有慶)을 경상도에, 홍길민(洪吉旼)을 풍해도에, 오사충(吳思忠)을 강원도에, 김희선(金希善)을 경기우도에 임명하였다.
【원전】 1 집 65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태조 4년 을해(1395,홍무 28)
 3월12일 (을사)
차준과 도만호 안처선 등에게 술과 채단 등을 내려 주다

임금이 사신을 보내어 차준(車俊)에게 술과 채단(綵段)·홍초(紅綃)를 하사하고, 또 도만호(都萬戶) 안처선(安處善)에게도 차준에게 준 수대로 주었으며, 겸해서 도절제사 조견(趙狷)과 도관찰사 최유경(崔有慶)에게도 술을 하사하였다. 차준의 처부(妻父)의 상고(喪故)가 있다는 말을 듣고 쌀과 콩 1백 석을 주었다.
【원전】 1 집 76 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태조 4년 을해(1395,홍무 28)
 4월9일 (임신)
최유경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임금이 우정승 김사형(金士衡)에게 일러 말하였다.
“경상도 도관찰사 최유경(崔有慶)이 무진년에 비록 우리들을 배반하였으나 그 임금을 위한 것이요, 또 포치(布置)하는 재주가 있다.”
이에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중군 동지절제사(中軍同知節制使)를 제수하고, 그대로 관찰사를 겸임시켰으며, 진을서(陳乙瑞)로 서북면 병마 도절제사·평양 윤을 삼았다.
【원전】 1 집 77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주D-001]무진년 : 1388년 위화도(威化島) 회군시

 

  태조 4년 을해(1395,홍무 28)
 6월6일 (무진)
지중추원사 최유경에게 태안군 북쪽에 운하 팔 곳이 있는지를 보게 하다

임금이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최유경(崔有慶)을 보내어 태안군(泰安郡) 북쪽에 〈조선(漕船)이 다닐 수 있는〉 조거(漕渠)를 팔 곳을 보게 하였는데, 유경이 돌아와서 말하였다.
“땅이 높고 굳은 돌이 있어서 갑자기 팔 수 없습니다.”
【원전】 1 집 79 면
【분류】 *교통-수운(水運)


 

본관 연혁

전주(全州)는 전라북도 중앙에 위치한 지명으로 고대 마한(馬韓)의 원산성(圓山成)에서 유래하며, 백제시대에 완산(完山) 또는 비사벌(比斯伐)·비자화(比自火) 등으로 불렸다가, 555년(위덕왕 2)에 완산주(完山州)로 하였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완(完)을 의역(意譯)하여 전주(全州)로 고쳤고, 900년(효공왕 4)에 견훤(甄萱)이 무주(武州: 光州)로부터 이곳으로 후백제의 도읍을 옮겨 백제 부흥의 노력을 하였다. 936년(고려 태조 19)에 후백제가 망하자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가 설치되었다가 940년에 다시 전주로 회복되었다. 983년(성종 2)에 12목 가운데의 하나인 전주목이 설치되었으며, 993년에 승화(承化)로 개칭하고 절도안무사(節度安撫使)를 두었다. 995년에는 강남도(江南道) 관하의 전주순의군절도사(全州順義軍節度使)가 되었다가 1018년(현종 9)에 다시 안남대도호부로 승격되고, 1022년에 전주목으로 개칭되어 1곳의 속군과 11곳의 속현을 포함하는 큰 고을이 되었다. 1310년(충선왕 2)에 전주로 강등되고, 1355년(공민왕 4)에는 부곡으로 강등되었다가 이듬해에 완산부(完山府)로 복구되었다. 1392년(태조 1)에 전주이씨의 본향지라 하여 완산부유수(完山府留守)로 승격되었으며, 1403년(태종 3)에 전주부(全州府)로 개칭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전주부 전주군이 되었고, 1896년 전라북도 전주군으로 개편된 이래 1935년 전주면이 부로 승격하여 독립하고 1949년 전주시로 개칭되었다.

성씨의 역사

전주최씨는 4파로 갈려져 있다. 문열공파(文烈公派)는 최순작(崔純爵)을 시조로 한다. 그는 고려 정종 때 벼슬에 나가고 문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지냈으며, 숙종 때 병부상서겸신호위상장군(兵部尙書兼神虎衛上將軍)을 역임하였고, 완산부개국백(完山府開國伯)에 봉해졌다.

사도공파(司徒公派)는 최균(崔均)을 시조로 한다. 그는 인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명종 때 소주주부에 이르렀다. 1172년(명종 2) 금나라에서 사신이 와서 고려 의종을 폐하고 명종을 세운 경위를 조사할 때 접반사로 나가 일을 원만히 해결하여 명종의 신임을 받았고, 이듬해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금나라에 다녀왔다. 1174년 서경유수 조위총(趙位寵)이 반란을 일으키자 동북로도지휘사(東北路道指揮使)가 되어 토벌군을 지휘하다가 살해되었고 완산군(完山君)으로 추봉되었다.

문성공파(文成公派)는 고려 충숙왕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고 후에 완산군(完山君)으로 봉해진 최아(崔阿)를 시조로 한다.

문충공파(文忠公派)는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역임하고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에 봉해진 최군옥(崔群玉)을 시조로 한다.

전주최씨는 세계를 이어 오면서, 조선 인조반정 공신인 최명길(崔鳴吉), 소론의 영수인 최석정(崔錫鼎), 경종때 좌의정을 지낸 최석항(崔錫恒) 등 수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분적종 및 분파

문열공파는 예의판서공파(禮儀判書公波), 판윤공파(判尹公波), 양도공파(襄度公波), 지평공파(持平公波) 등 6개 지파로 나뉘고,
문성공파는 안렴사공파(按廉使公波). 대호군공파(大護軍公波), 판서공파(判書公波), 중랑장공파(中郞將公波)로,
문충공파는 군수공파(郡守公波), 현령공파(縣令公波), 절도사공파(節度使公波)등 8개 지파로,
사도공파는 완성군파(完城君波), 판서공파(判書公波), 총랑공파(摠郞公波)로 나뉜다.

주요 세거지

경기도 화성군 동탄면 방교리   경기도 화성군 동탄면 산청리   경기도 화성군 정남면      
경상북도 달성군 구지면 대암동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면 신후리   전라북도 익산군 삼기면
전라북도 익산군 왕궁면    충청남도 당진군 당진읍 수청리  충청남도 서천군 마서면 봉남리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구일리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조촌리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전주최씨는 122,147가구 총 392,548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참고문헌]

《韓國人의 姓譜》(삼안문화사, 1986)   《姓氏의 고향》(중앙일보사, 2002)
뿌리를 찾아서(http://www.rootsinfo.co.kr)  傳統族譜文化社(http://www.genealogy.co.kr)
성씨정보(http://www.surname.info)



고려사절요 제32권
 신우 3(辛禑三)
계해신우 9년(1383), 대명 홍무 16년


○ 봄 정월에 해도(海道) 부원수 정지가 왜적을 쳐서 크게 격파시키자, 금대(金帶) 한 벌과 백금 50냥을 내려 주었다.
○ 나하추가 문합라불화(文哈刺不花)를 보내어, 예전의 우호관계를 회복하자고 청하였다.
○ 정몽주 등이 요동에 이르니, 도사(都司)가 칙명이 있다 하며 들이지 않고 바치는 예물만 받았다. 칙서에 이르기를, “하늘이 덮고 땅이 싣고 일월이 임하는 곳에 만민의 임금이 되었으니, 봉한 지역은 비록 크고 작은 것이 다르나, 백성을 다스리는 도는 모두 마찬가지다. 온 천하의 백성들을 옛날부터 지금까지 어찌 한 임금이 두루 잘 길렀으랴. 전에 삼한의 추장이 백성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죽인 뒤에도 거듭 와서 짐에게 아뢰고 신하로서 조공하는 것을 평상시와 같이 하였다. 두 번 세 번 물리쳤으나 그치지 않아, 특별히 세공 문제로 그들을 곤란하게 하면 반드시 그치리라 생각하였다. 이제 그치지 않고 굳이 청하므로, 과거 수년 동안 바치지 아니한 자잘한 공물까지 모두 합하여 수효를 만들어서 그들을 암암리에 우롱하고 모욕하려 한다. 그러나 삼한의 지역이 중국의 동쪽, 창해의 밖에 있는데, 짐이 우리 중국의 서적을 보였다. 그 지방 사람들은 은혜를 생각지 않고 화를 얽기를 좋아한다 하였다. 비록 잠깐 신하 노릇을 할지라도 무슨 소용이 있으랴. 너희 요동을 지키는 여러 장수들은 굳게 내 강토를 지키되, 견주거나 청구하지 말라. 이제 수년 동안의 물건을 합하여 하나로 만들어서, '칙명과 같이 하라.' 하고, 그 뜻이 정성스럽지 못하거든 부서(符書)가 이르는 날에 전과 같이 저지하여 돌려보내어, 국경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말고, 다만 스스로 교화가 되도록 하라." 하였다.
○ 오랑캐 발도가 와서 이성(泥城)을 노략하다가 날아오는 화살을 맞고 달아났다.
○ 요동 도사가 통첩을 보내기를, “고려가 대명을 신하로서 섬기니, 나하추와 화친을 통하지 않아야 할 터인데, 이제 듣건대, '나하추가 문합라불화를 보내어 화친을 청하자, 고려가 후하게 대접하여 그를 위로하였다.' 하니, 신하로서 대명을 섬기는 의리로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만일 죄를 면하고자 하거든, 문합라불화를 잡아 보내어 그 정성을 드러내라. 그렇지 않으면 비록 후환이 있더라도 후회막급이리라." 하였다.
○ 2월에 양광도 안렴 유극서(柳克恕)와 교주도 안렴 최자(崔資)에게 나라 마구의 말을 각각 한 필씩 주었다. 두 사람은 모두 간사하고 영리하며 아첨하는 사람으로, 우가 남쪽으로 순행했을 때에 백성의 고혈을 짜서 맛있는 음식을 극진히 올렸고, 권세가에 뇌물을 주어 아첨하고 기쁘게 하였으므로, 이것을 하사한 것이다.
○ 우가 송경에 돌아왔다.
○ 좌사에서 의논하여 권근(權近) 등이 상소하기를, “관작이라는 것은, 덕이 있는 사람에게 명하고 공이 있는 사람을 상주는 것이기 때문에, 어진 자가 자리에 있고 능한 자가 직책에 있어야 하니, 공이 없는 사람은 함부로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근년 이래로 사방에 병란이 일어나 국가의 재정이 고갈되어, 싸움에서 승리한 공이 있는 사람이 있어도 돈과 재물이 모두 상주기에 부족하였고, 관작은 다 주기 어려웠습니다. 선왕께서는 임시로 첨직(添職)을 마련하여 일정한 수를 두어 공이 있는 사람에게 상으로 주었으며, 전공이 없으면 감히 헛되이 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공이 있는 자는 더욱 격려되었으며, 공이 없는 자는 감히 바라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지금은 첨직이 너무 많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게 되어, 공이 있고 없는 것이 서로 혼돈되고, 요행을 바라는 길이 날마다 열려, 공인ㆍ장사꾼ㆍ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함부로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공이 있는 자는 비록 얻더라도 기뻐하지 않으며, 공이 없는 자는 함부로 구하기를 그치지 않아, 관작의 천함이 진흙같이 되었으니,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하물며 지금 국가가 의지하는 것은, 공 있는 사람에게 상을 주는 것으로 사람의 마음을 잡아매는 것은 오직 관작뿐인데, 관작이 중하지 아니하여 사람마다 모두 그것을 가볍게 여기면, 뒤에 비록 공이 있더라도 무엇으로 상을 베풀 것입니까. 또 전장에서 싸우는 군사가 어찌 가볍고 천한 벼슬에 보태지기를 바라고 측량하기 어려운 위태 땅으로 달려가겠습니까. 원하건대, 지금부터는 공이 있는 사람을 상주기 위해서 첨설한 관직은 한결같이 선왕께서 정한 수에 의거하여, 싸움에 나가 공이 있는 군관(軍官)을 제외하고는 제수를 허여하지 마옵소서. 여자에게 택주(宅主)를 봉하는 것과, 중에게 제군(諸君)을 봉하고 법호(法號)를 주는 것과, 양부 외에 봉군하는 것은 모두 벼슬이 가볍고 천하게 되는 데에 관계되므로, 아울러 금지하옵소서.
국가의 안위가 주ㆍ현의 성쇠에 달려 있는데, 근년 이래로 지방 고을의 아전들이 본역을 면하기를 꾀하여 명서업(明書業)ㆍ지리업ㆍ의율업(醫律業)을 한다고 핑계대나, 모두 진정한 재능 없이 관직에 나아가 역사를 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골 아전이 날마다 줄어서 공무를 집행하기 어렵고, 수령들은 부리고 시킬 사람이 없게까지 되었으며, 여러 업으로 관직에 나아간 자들은 고향으로 물러나 앉아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행하여도 수령이 이를 어떻게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ㆍ현에 약간 남아 있는 아전들도 모두 분에 넘치는 생각을 가지게 되니, 각 고을이 이로 인하여 더욱 쇠할까 두렵습니다. 바라건대, 동당(東堂)의 제업(諸業)과 감시(監試)의 명경(明鏡)을 모두 폐지하옵소서. 옛 책에 이르기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요, 재물은 백성의 마음이므로, 그 마음을 잃으면 백성이 흩어지고, 그 근본을 잃으면 나라가 위태하다." 하였습니다. 근년 이래로 전쟁이 그치지 않고 수재와 한재가 겹쳐서 백성들에게 주린 기색이 있고 들에는 굶어 죽은 시체가 있으며, 게다가 밭 하나에 주인이 두셋씩 되어서 각각 그 도조를 징수하여 백성을 괴롭혀도 그 곳 관사(官司)들이 이를 꾸짖어 금하지 못하니, 지금부터는 한결같이 본국의 전법(田法)에 의거하여 서울 안에서는 판도사가, 지방에서는 안렴사가 판단 결정하여, 백성이 소생하여 쉬게 하고, 만일 어기는 자가 있거든 철저히 금지하옵소서.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옛 교훈을 배워야 이로써 일을 세울 수 있다.' 하였으니, 옛날부터 어진 임금이 배우지 않고서 온갖 정사를 잘 다스린 분은 없었습니다. 전하께서 처음 즉위하셨을 적에는 배움에 뜻을 두어 먼저 서연(書筵)을 개설하시니, 국인이 서로 치하하고 태평을 기대했었는데, 근년 이래로 하다가 말다가 하시어, 사람들이 모두 실망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처음 뜻을 잊지 마시고 다시 서연을 열어, 대신에게 건의하도록 명하기도 하고, 측근의 신하로 하여금 강논하게 하기도 하여, 경학에 실린 의리의 종지를 통달하시고, 고금에 걸친 치란의 변천을 관찰하시어, 삼한 신민의 소망에 부응하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 3월 사헌부에서 글을 올려 아뢰기를, “본조에서는 벼슬에 복무한 기간과 노력의 실적을 가지고 자격에 따라 계급을 올려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상주는데, 근년 이래로 분주하게 경쟁하는 것이 풍속이 되어 관작이 날로 천해져서, 공로가 있는 자는 승진하지 못하고 공이 없는 자는 함부로 받으니, 자세히 조사고 차례에 따라 서용하여, 인사 행정의 법을 밝히소서. 수령은 백성을 가까이하는 직책이니 더욱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되는데, 근래에 간사하고 아첨하며 탐하고 사나운 무리들이 권세가에 붙어 수령이 되어 멋대로 불법을 행하므로, 주ㆍ부와 군ㆍ현이 나날이 피폐해지니, 대성(臺省)과 6조에 청렴하고 정직하며 근검한 자를 천거하게 하여 군ㆍ현에 나누어 보내고, 도순문사와 안렴사에게 어진 사람은 올리고 나쁜 사람은 내치어 상과 벌을 밝히게 하며, 만일 잘못 천거한 것이 있거든, 죄가 천거한 사람에게까지 미치게 하옵소서." 하였다. 우가 그 말을 받아들였다.
○ 우가 정비의 대궐에 갔다. 이 뒤로부터 왕래가 매우 잦았는데, 어떤 때는 들어가지 못하였다. 갈 적마다 희롱하기를, “나의 궁녀들은 어쩐지 어머니의 인물만 못합니다." 하였다.
○ 좌사의 권근 등이 상소하기를, “전하가 오로지 노는 것만 일삼고 동작에 절도가 없어, 낮이나 밤이나 기사 두어 명을 데리고 길을 달리시니, 백성이 용안을 바라보고 아는 자는 깜짝 놀라 실망하여, '전하가 어찌 이렇게까지 하시는가.' 하며, 알지 못하는 자는 난봉꾼으로 생각하여 손가락질하며 모욕하고 비웃습니다. 지금 사방에 병란이 일어나고 흉년이 거듭 들어서, 백성의 생업이 탕진되고 나라 형세가 장차 위태롭게 될 것이니, 이때야말로 밤낮으로 근심하고 부지런히 정신을 가다듬고 정사를 할 때입니다. 전하께서는 조금도 유의하지 않고 밤늦도록 놀고 아침 늦게 일어나며, 안에서는 향락에 빠지고 밖에서는 말 달리며 돌아다니시어 작은 재미를 즐기고 장래의 걱정을 잊으시니, 갑자기 급한 일이 생기면 장차 어떻게 이를 처리하시렵니까. 더구나 향락에 빠져 뜻을 방탕하게 하고, 말을 달리어 몸을 수고롭게 하는 것은, 진실로 정신을 수양하여 수명을 보전하는 방법이 아니옵니다. 전하께서 한창 젊어서 혈기가 굳지 않았사오니, 이 또한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부터는 감히 경솔히 나가서 길에서 달리지 마시고, 밤이 되거든 자고 아침이 되거든 단정히 앉아 높이 손을 모아 쥐고, 대신을 가까이하시어 시국 정치의 잘잘못을 묻고 고금의 치란을 문의하시며, 조용히 담소하고 덕성을 함양하셔서, 법이 아닌 것은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닌 것은 행하지 말아, 하루하루 더욱 조심하고 아무리 쉬고 싶더라도 쉬지 마옵소서. 그러면 전하께서는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고 착한 것을 좋아하시는 미덕이 생기고, 뜻을 방탕하게 하고 몸을 괴롭히는 근심이 없어져 천위(天位)는 더욱 높아지고 왕업은 더욱 오래 갈 것입니다." 하였다.
○ 문하시중 홍영통(洪永通)이 은퇴하기를 청하니, 조민수를 시중으로, 임견미를 수시중으로 삼고, 견미ㆍ도길부ㆍ우현보ㆍ이존성을 시켜 정방(政房)을 제조하게 하였다. 전례에 시중이 인사 행정을 맡았었는데, 영통과 민수가 시중이 되어도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견미가 권세를 독차지했기 때문이었다.
○ 여름 4월에 가뭄으로 이죄(二罪) 이하를 사면하였다.
○ 김한로(金漢老) 등 3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5월에 전 판사 한중보(韓仲寶), 상호군 한중량(韓仲良)에게 장형을 행하고 변방에 귀양보냈다. 중보는 일찍이 제주 안무사로 있으면서 임금의 명령을 가장하고 마음대로 욕심을 부린 죄로 순군옥에 갇히었으며, 그 아우 중량은 본래 중보와 우애가 없었는데, 중보가 형을 당하는 것을 기뻐하고 형의 죄악을 열거하여 이존성의 집에 익명으로 투서하였으므로, 아울러 중량도 옥에 가두어 죄를 주었다.
○ 해도 원수 정지가 남해현(南海縣)에서 왜적을 쳐서 크게 파하였다. 이때에 정지가 거느린 전함은 겨우 47척이었는데, 나주와 목포에 머물러 있었다.
적선 1백 20척이 크게 이르자, 경상도 바닷가의 고을들이 매우 동요하였다. 합포 원수 유만수(柳曼殊)가 위급함을 고하므로, 정지가 밤낮으로 배 몰기를 독려하여 손수 노를 젓기도 하니, 노 젓는 군사들이 더욱 힘을 다하였다. 섬진(蟾津)에 도착하여 합포의 군사들을 징집하니, 적이 이미 남해의 관음포(觀音浦)에 이르렀는데, 형세가 대단히 성하여 사면으로 둘러싸고 전진하였다. 정지가 군사를 독려하여 나가 박두양(朴頭洋)에 이르니, 적이 큰 배 20척마다 강한 군사 1백 40명씩을 태워 선봉으로 삼았다. 정지가 진격하여 크게 깨뜨려 적선 17척을 불태우니, 뜬 시체가 바다를 덮었다. 병마사 윤송(尹松)이 화살에 맞아 죽었다.
○ 우가 몰래 호곶(壺串)에 가서 말 먹이는 것을 보았는데, 숙위하는 자들이 아무도 간 곳을 몰랐었다.
○ 6월에 교주ㆍ강릉도 수척(水尺)ㆍ재인(才人)이 가짜 왜적이 되어 평창ㆍ원주ㆍ영주ㆍ순흥 등지를 약탈하니, 원수 김입견(金立堅)과 체찰사 최공철(崔公哲)이 50여 명을 잡아 죽이고, 그 처자를 각 고을에 나누어 귀양보냈다.
○ 대간이 번갈아 글을 올려 아뢰기를, “우리 태조가 삼한을 통일하자 자손이 서로 계승함에 반드시 옛 일을 본받았습니다. 임금이 출입하는 것은 반드시 종묘의 제사나 국제간의 회합이나 외국 빈객의 접대 같은 일에 의하였고, 일없이 함부로 다닌 적이 없었습니다. 영릉(永陵 충혜왕)에 이르러 조종(祖宗)의 법을 따르지 않으며, 간신(諫臣)의 말을 듣지 않고 날마다 여러 소인과 더불어 마을에 돌아다니며 놀다가, 그 소문이 상국에까지 들려 마침내 악양(岳陽)의 행차가 있었습니다. 지금 전하가 놀러 다니심이 절도가 없어, 기사 두어 명을 데리고 말달리며 다니시지 않는 곳이 없으니, 신민이 기대를 잃고 있습니다. 위로는 하늘의 명을 두렵게 여기시고, 아래로는 조종을 본받아 출입하는 것이 절도가 있으며, 시위는 의장을 갖추어 혹시라도 가볍게 나다니지 마시어, 신민의 기대에 응하여 주옵소서." 하였다.
○ 왜적이 경상도 길안(吉安)ㆍ안강(安康)ㆍ기계(杞溪)ㆍ영주(永州)ㆍ신녕(新寧)ㆍ장수(長守)ㆍ의흥(義興)ㆍ의성(義城)ㆍ선주(善州) 등지를 침략하고, 또 단양(丹陽)ㆍ제주(堤州)를 침략하였다. 전의령(典儀令) 우하(禹夏)를 경상도에 보내어, 원수들이 왜적을 막는 태도를 감독하고 시찰하게 하였다.
○ 가을 7월에 우하가 여러 병마사를 독려하여 의성에서 왜적을 쳐서 3급을 베고, 또 예안(禮安)ㆍ순흥(順興)에서 싸워 14급을 베었다.
○ 지순주사 황안신(黃安信)이 군량 운반을 감독하다가 쌀 70여 석을 절취하였다. 유사가 법으로 처단하려 했는데, 우의 인척인 관계로 관직만 삭탈하였다.
○ 왜적이 대구(大丘)ㆍ경산부(京山府)ㆍ선주(善州)ㆍ인동(仁同)ㆍ지례(知禮)ㆍ김산(金山) 등지를 침략하였다.
○ 양광도 원수 왕안덕(王安德)이 괴주(槐州)에서 왜적을 쳐서 3급을 베었다.
○ 요동 심양의 비적 40여 기가 단주에 침입하니, 단주 만호 육여(陸麗)와 청주 만호 황희석(黃希碩)과 천호 이두란(李豆蘭) 등이 추격하여 서주위(西州衛)ㆍ해양(海陽) 등지에 이르러 괴수 여섯 명을 베니, 나머지는 모두 도망가 버렸다.
○ 교주ㆍ강릉도 도체찰사 최공철이 방림역(芳林驛)에서 왜적을 쳐서 8급을 베었다.
○ 8월에 문하찬성사 조인벽(趙仁璧)을 동북면 체찰사로, 판개성 부사 한방언(韓邦彦)을 상원수로, 문하찬성사 김용휘(金用輝)를 서북면 도순찰사로, 전 판도판서 안사조(安思祖)를 강계 만호로 삼아 변경을 방비하게 하였다.
○ 왜적이 비옥(比屋)ㆍ의성 등지를 침략하는데, 적은 많고 아군은 적어 여러 번 싸웠으나 불리하였다. 부원수 윤가관(尹可觀)이 안동ㆍ예안 등지에서 싸워 패하였다.
○ 왜적이 거령(居寧)ㆍ장수(長水) 등의 현을 함락시키고 군사를 나누어 전주를 침략하려 하는 것을, 부원수 황보림이 여현(礪峴)에서 싸워 물리쳤다.
○ 우가 밀직제학 조준(趙浚)을 불러 이르기를, “양광ㆍ경상도에 왜적이 매우 성한데, 원수와 도순문사가 약하고 겁내어 싸우지 못하니, 경이 가서 전쟁의 상황을 살펴야 되겠다." 하니, 준이 대답하기를, “전하께서 만일 신에게 두 도를 맡게 하시려면, 그 장수로서 머뭇거리거나 패전한 자는 신의 조처에 맡기셔야 합니다. 그러하지 않으면 원수와 도순문사의 직위가 신의 위에 있는데, 어찌 신을 두려워하여 죽을 땅에 나가려 하겠습니까." 하였다. 장수의 족속들이 이를 꺼리어 우에게 사뢰어 그만두게 하고, 마침내 문하평리 문달한(文達漢)을 양광ㆍ경상도 도체찰사로 삼고 명령하기를, “가서 장수의 부지런함과 태만함, 사기의 왕성함과 쇠약함 것을 살피어, 머뭇거리고 전진하지 않는 자가 있거든 원수는 잡아 가두고 보고하여, 그 나머지는 군율에 의하여 곧장 처단하라." 하였다.
○ 왜적 2백여 기가 괴주(槐州) 장연현(長延縣)을 침략하니, 원수 왕안덕ㆍ김사혁(金思革)ㆍ도흥(都興)이 적과 싸워 3급을 베었다.
○ 왜적 1천여 명이 춘양(春陽)ㆍ영월(寧越)ㆍ정선(旌善) 등의 군ㆍ현을 침략하였다.
○ 좌사의 권근 등이 글을 올려 아뢰기를, “우리 태조께서 근심하고 부지런하시여 만대에 전통을 내려 주셨고, 여러 성군이 서로 계승하여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에게 부지런히 하며 법과 제도를 준수하여 차차 태평을 이루었습니다. 선대에서 수백 년 동안 쌓아올려 어렵게 이룬 왕업이 전하여 전하에게 이르렀으니, 물려받으신 책임이 무겁다 할 수 있습니다. 임금의 지위는 어려울 뿐이며, 관계되는 것이 지극히 소중하여, 한 생각이라도 삼가지 않으면 사해에 근심을 끼치기도 하고, 하루라도 삼가지 않으면 백 년의 걱정을 이루기도 하니, 비록 정치가 잘 되고 일이 없는 때라도 오히려 마땅히 두려워하며 조심하여 뜻밖의 변에 대비하여야 할 것인데, 하물며 국가의 위급한 시기를 당하여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나라는 수재와 한재가 잇달아 일어나고 기근과 유행병이 겹쳐, 나라에는 몇 달을 지탱할 저축이 없고, 백성은 하루저녁거리도 없어, 늙고 약한 자는 죽어서 개천과 구렁에 뒹굴고, 굶어죽은 시체가 길거리에 널려 있습니다. 게다가 이웃나라가 국경 가까이에 군사를 주둔하여 우리의 영토를 침범하며, 우리의 인민을 꾀어 가고, 또 왜적이 깊이 들어와 약탈해서 각 고을이 쓸어낸 듯 버려져 적의 구혈이 되었어도, 수령이 막지 못하고 장수가 제어하지 못하니, 자고로 위란의 지극함이 이때보다 더 심한 적이 없었습니다. 섶을 쌓아 놓고 불을 지르는 것도 현재의 다급함에 비유하기에 부족하고, 침상을 깎아 살갗에까지 재앙이 미친다는 것도 현재의 절박함을 비유하기에 부족합니다. 시국을 구제하기가 급함이 마치 새는 물을 타는 불에 붓는 것같이 하더라도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두려우니, 이제는 참으로 전하가 두려워하여 닦고 살피며 밤낮으로 근심하고 부지런하며 분발하여 일을 하여야 할 때입니다.
지난번에 신등이 사헌부와 함께 글을 올려 미행(微行)을 간하였더니, 전하께서 영명하고 과단하신 덕으로 넉넉히 용납하여 어기지 아니하시고 곧 이를 받아들이시어, 궁중에 단정히 계시고 두어 달 동안을 나다니지 아니하셨습니다. 간하는 말을 좇으시는 덕과 허물을 고치는 아름다움이 오늘날에 빛나고 옛날보다 뛰어나서 일월이 빛을 더하니, 신하들은 조정에서 서로 경사로 여기며, 백성들은 들에서 서로 기뻐하여, 안팎이 한결같이 정치가 잘될 것을 기대한 지가 한 달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위태하고 어지러워 어려움 많은 시기를 당하여, 반성하고 조심하며 두려워하는 태도를 생각지 아니하시고 다시 나다니심만을 일삼아 밤낮으로 말을 달리며 돌아다니십니다. 높으신 왕의 몸으로 말 한 필을 타고 다니시어 자주 깊은 궁중을 떠나서 거리를 달리시니, 시위하는 신하들은 활과 칼을 끼고 빈 궁을 지키고 있으며, 공경과 백관들은 전하의 계신 곳을 알지 못합니다. 틈을 엿보고 내응하는 도적이나, 첩자와 자객이 이 나라 안에 있지 않을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만일 강하고 사나운 무리가 기회를 노리고 몰래 일어난다면 창졸간에 변이 일어날까 매우 두렵습니다. 이것이 신등이 밤낮으로 마음 아프게 생각하며, 깊이 전하를 위하여 위태롭게 여기는 바입니다.
옛날부터 인심은 헤아리기 어렵고, 화란은 일정한 것이 없습니다. 위태로움은 반드시 편안한 데서 생기고, 변은 반드시 소홀히 여기는 데서 생기는 것이니, 환란을 방비하는 도를 참으로 엄하게 하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잘 다스릴 때에도 오히려 변이 날까 두려운데, 하물며 지금은 도적이 많은 때이므로 더욱 한심합니다. 전하께서는 선조가 쌓아올린 어려운 왕업을 계승하고 계시니, 비록 자신은 중하게 여기지 않는다 하더라도, 장차 종묘 사직을 어찌 하시렵니까. 잘못인 줄 알면서 간하는 말을 좇지 않음은 허물을 늘리는 것이고, 위태한 줄을 알면서 정사를 닦지 않음은 망함을 재촉하는 것입니다. 이 소문이 만일 나돌아 사방에 번진다면, 틈을 타려는 도적이 어찌 다행스럽게 여기지 않겠으며, 적을 막으러 간 장수가 어찌 실망을 하지 않겠으며, 백성의 마음이 어찌 더욱 분산되지 않겠으며, 나라 형세가 어찌 더욱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신등이 밤이 되어도 자지 못하고 밥을 대해도 탄식하면서, 가슴을 치며 슬픔을 금하지 못하는 바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감히 안락하지만 마시 만기(萬機)의 정사를 도모하시고, 감히 놀러 나다니지 마시어 비상한 변고를 방비하시며, 간하는 말대로 반드시 행하시어, 혹시라도 신용을 잃지 마시며, 단정히 앉아 높이 손을 모아 잡으시어 재신들을 가까이해서 나라를 다스리는 계획과 도적을 막는 방책을 널리 물어 보시고, 밤낮으로 근심하고 부지런하시며 정신을 가다듬고 다스리기를 꾀하며, 덕을 닦고 정사를 행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상과 벌을 엄정하게 주시어 나라의 법전을 밝히시면, 장수와 병사는 저절로 분발하고 도적은 저절로 그칠 것이며, 이웃 나라가 감히 꾀하지 못하며 강포한 자가 감히 방자하지 못하여, 조종의 업이 영원히 전할 것입니다." 하였다. 우가 마을로 말을 달리며 돌아다니면서 그래도 대간을 두려워하고 꺼렸었는데, 환관들이 말하기를, “대간도 모두 상감께서 제수한 것이온데, 만일 뜻에 거슬리면 갈아 치우는 것이 어찌 어렵겠습니까." 하였다. 이로부터 우가 더욱 대간을 가볍게 여기어 다시 기탄 없이 노닐며 사냥하기에 쉴 날이 없었다.
○ 왜적이 임실현을 침략하였다.
○ 호발도(胡拔都)가 와서 단주를 침략하니, 부만호 김동불화(金同不花)가 이에 내응하여, 재물을 모두 차지하고 뒤에 거짓으로 붙잡혔다. 상만호 육여(陸麗)와 청주 상만호 황희석(黃希碩) 등이 여러 번 싸워 모두 패하였다. 그때에 이두란이 어머니의 상복을 입고 청주에 있었다. 이태조가 사람을 시켜 불러와서 그에게 이르기를, “국가의 일이 급하여 그대가 복을 입고 집에 있을 수 없다. 상복을 벗고 나를 따르라." 하였다. 두란이 상복을 벗고, 하늘에 울면서 절하여 고하고 나서 활과 화살을 차고 따라갔다. 발도와 길주평(吉州平)에서 만나, 두란이 선봉이 되어 먼저 싸우다가 크게 패하여 돌아왔다. 태조가 조금 뒤에 이르니, 호발도가 세 겹이나 되는 두꺼운 갑옷에 붉은 털옷을 껴입고, 검정 암말을 탄 채 진을 가로막고 기다리고 있다가, 태조를 가볍게 생각하고 군사는 머물러 두고 칼을 뽑아서 몸을 던져 달려 나왔다. 태조 또한 단기로 칼을 뽑아 들고 달려 나가서 검을 휘두르며 서로 쳤는데, 둘 다 날쌔게 비키어 맞히지 못하였다. 호발도가 미처 말을 가누지 못하고 있을 때에, 태조가 급히 말을 돌리며 활을 당겨 그 등을 쏘았으나, 갑옷이 두꺼워 화살이 깊이 들어가지 않았다. 곧 또 그 말을 쏘아 관통시키니, 말이 거꾸러지며 호발도가 떨어졌다. 태조가 또 쏘려 하자, 그 휘하들이 몰려들어 구원하니, 우리 군사들도 쫓아나왔다. 태조가 군사를 놓아 크게 쳐서 깨뜨리니, 호발도는 겨우 몸만 빠져 도망갔다.
○ 찬성사 김유를 보내어 성절을 하례하고 시호와 승습(承襲)을 청하는 진정표를 올리고, 밀직부사 이자용(李子庸)은 천추절을 하례하게 하였다. 앞서 요동을 경유하다가 번번히 도달하지 못하였으므로, 유 등으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가게 하였다.
○ 좌사의 권근 등이 간하기를, “지금 왜구가 사방을 침략하여 소란하고, 첩자와 자객이 경성에 왕래하는데, 전하께서는 기사 두어 명을 데리고 길거리를 달리시며 밤새도록 돌아오지 아니하시니, 신들은 전하를 위하여 매우 위태롭게 여깁니다." 하니, 우가 말하기를, “내가 정말 이런 잘못이 있다. 경들이 아니면 누가 말하겠는가." 하였다.
○ 우리 태조가 변방을 편안히 하는 계책을 올렸는데, 아뢰기를, “북계(北界)는 여진ㆍ달달ㆍ요동ㆍ심양의 지역과 서로 연하였으니, 실로 국가의 중요한 땅입니다. 비록 일이 없는 때라도 반드시 양식을 저축하고 군사를 길러 의외의 사태에 대비하여야 하겠는데, 이제 그 곳 주민들이 매양 저 사람들과 서로 물자를 교역하여 날마다 서로 친압하여 혼인을 맺기까지 하여 저쪽에 있는 족속이 유인하여 가고, 또 앞잡이가 되어 들어와 약탈하기를 그치지 않으니,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는 말과 같이, 이것은 동북 한 방면의 걱정일 뿐만이 아닙니다. 또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유리한 지리를 차지하느냐 못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저쪽 군사들이 점령한 곳이 우리의 서북쪽에 가까운데 내버려 두고 도모하지 않으므로, 마침내 중한 이익을 노려 멀리 우리 오읍초ㆍ갑주ㆍ해양의 백성들을 꾀어서 유인하여 가고, 지금 또 단주 독로올(禿魯兀)의 땅에 쳐들어와서 사람과 물건을 몰아가니, 이것으로 본다면 우리 요해의 지리 사정을 저쪽에서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신이한 방면의 임무를 맡고 있는 터에 앉아서 보기만 할 수 없어서, 삼가 국경 경비의 방책을 계획하여 보고하나이다.
도적을 막는 방법은 군사를 훈련시켜 일제히 공격하는 데 있사온데, 지금은 훈련시키지 않은 군사들을 먼 땅에 분산시켜 놓았다가 도적이 들어온 뒤에야 황급하게 불러들이는데, 군사가 올 때쯤 되면, 도적은 벌써 노략질하여 물러난 뒤입니다. 비록 시기에 이르러 싸운다 하더라도, 전술에 서투르며, 싸움에 익숙하지 못한데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제부터는 병졸을 훈련시켜 약속을 엄하게 세우고 호령을 거듭 밝혀, 변을 기다렸다가 곧 출동해서 사기(事機)를 잃지 말게 하옵소서.
군사의 생명은 양식에 달려 있으니, 비록 백만 군사가 있다 할지라도 하루 동안의 식량이 있어야 하루의 군사가 될 수 있고, 한 달 동안의 식량이 있어야 한 달의 군사가 될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은 하루도 먹는 것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도의 군사에게는 과거에는 경상ㆍ강릉ㆍ교주의 양곡을 운반하여 공급하였는데, 지금은 도내의 지세로 이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근래에 수재ㆍ한재로 인하여 관청과 민간이 모두 텅 비었고, 게다가 놀고 먹는 중과 무뢰배들이 불사를 칭탁하여 함부로 권세가의 편지를 받아서, 각 고을에 간청하여 백성에게 쌀 한 말과 베 한 자를 꾼다고 하고는 섬곡식과 10여 자의 베를 거두는데, 명목을 '반동(反同)'이라 하여 징수하기를 빚받아 내는 것처럼 하니, 백성들이 이때문에 기한에 시달리고, 또 여러 관청과 여러 원수(元帥)가 보낸 사람들이 떼를 지어 다니며, 이집저집에서 돌려 가며 먹어서 살을 깎아 내고 뼈를 망치질하듯 하니, 백성들이 고통을 참지 못하여 흩어지고 도망치는 자가 열에 여덟, 아홉입니다. 그리하여 군사의 식량이 나올 데가 없으니, 모두 금하여 없애어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옵소서.
또 도내의 고을들이 산과 바다에 끼어 있어서 땅이 좁고 또 척박한데, 지금 그 세를 거두는 것이 경작하는 토지가 많고 적은 것은 묻지 않고, 오직 호구가 크고 작은 것만을 보아서 책정합니다. 화령(和寧)은 도내에서 땅이 넓고 풍요한데, 모두 아전들의 녹전이어서 그곳의 지세는 관청에서 거두지 못하므로, 백성에게서 받아들이는 것이 고르지 못하고 군사를 먹이는 것은 족하지 못하오니, 금후로는 도내 여러 고을과 화령을 모두 경작하는 토지의 많고 적음에 준하여 과세함으로써 관청이나 민간이 다 편하게 하옵소서.
군사와 백성은 통속이 있지 않으면 급한 일이 있을 때에 서로 보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선왕의 병신년 하교에, 세 집으로 한 호(戶)를 만들고, 백 호로 통을 만들며, 통주(統主)는 원수의 영(營)에 소속시키고, 일이 없으면 세 집이 차례로 번을 서며, 일이 있으면 다 나오고, 일이 급하면 집안의 장정을 모두 징발하였으니, 진실로 훌륭한 법이었습니다. 근래에 법이 폐지되어 소속된 곳이 없어서, 징발할 때마다 흩어져 사는 백성들이 산골로 도피하여 불러 모으기가 어렵습니다. 지금은 또 한재와 기근으로 민심이 더욱 이탈되는데, 저들은 돈과 식량으로 미끼를 삼아 불러들이고, 군사를 숨기고 와서 노략질하여 돌아가기 때문에, 한 지역의 궁한 백성들이 이미 일정한 마음이 없고, 또 종족이 서로 섞여 있어서 이리저리 관망하다가 유리한 쪽으로만 따르니, 실로 보존하기가 어렵습니다. 병신년 하교에 의하여 다시 군호(軍戶)를 정해서 통속이 있게 하여 굳게 그 마음을 결속하게 하옵소서.
백성이 잘살고 못사는 것은 수령에게 달려 있고, 군하의 용감하고 비겁함은 장수에게 달렸습니다. 지금 고을을 다스리는 자가 권세가의 문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세력을 믿고 그 직책을 삼가지 않아서, 군사는 그 수요가 부족하고 백성은 그 생업을 잃게 되어 호구가 줄고 창고가 텅 비니, 이제부터는 청렴하고 부지런하며 정직한 자를 공정하게 선발하여 백성에 게 임해서는 홀아비와 과부를 돌보아 주게 하며, 또 장수가 될 만한 자를 선택하여 군사를 거느려 국가를 방위하게 하옵소서." 하였다.
○ 왜적 1천여 명이 옥주(沃州)ㆍ보령(報令) 등의 고을을 함락시키고, 마침내 개태사(開泰寺)로 들어가서 계룡산에 웅거하였다. 문달한(文達漢)ㆍ왕안덕(王安德)ㆍ도흥(都興)이 나가서 공격하니, 적이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공주 목사 최유경(崔有慶)과 판관 송자호(宋子浩)가 구점(仇岾)에서 싸워 자호는 패하여 죽고, 달한ㆍ김사혁(金斯革)ㆍ안덕ㆍ도흥ㆍ안경(安慶)ㆍ박수년(朴壽年) 등은 공주 반룡사(盤龍寺)에서 싸워 8급을 베고, 사혁은 목천(木川)ㆍ흑점(黑岾)까지 추격하여 20급을 베었다.
○ 문하평리 지용기를 전라도 도원수로 삼았다.
○ 9월에 지문하사 이을진을 강릉도 원수로 삼았다.
○ 일본이 포로로 잡힌 우리 백성 1백 12명을 돌려보냈다.
○ 대호군 정승가(鄭承可)를 오도 체복사로 삼아서, 군사 진용의 허실과 접전의 근태(勤怠)를 조사하였다.
○ 사헌부가, 환관 예의 판서 조순(曹恂)이 우를 인도하여 황음한 짓을 하게 한 것을 논핵하여 전라도 내상(內廂)에 귀양보냈다.
○ 왜적이 강릉부와 김화현(金化縣)을 침략하고 또 회양부(淮陽府)와 평강현(平康縣)을 함락하니, 경성에 계엄을 실시하고 평양과 서해도의 정병을 불러들여와 호위하게 하며, 전 정당상의 남좌시(南佐時), 지밀직 안소(安紹), 밀직상의 왕승귀(王承貴)ㆍ왕승보(王承寶)ㆍ정희계(鄭熙啓)ㆍ인해(印海), 개성군 왕복명(王福命), 판개부성사 곽선(郭璇) 등을 보내어 그들을 치도록 하였으나 김화에서 싸워 패전하였다.
○ 왜적이 홍천현(洪川縣)을 함락하니, 원수 김입견(金立堅)ㆍ이을진(李乙珍)이 적과 싸워 5급을 베었다.
○ 진병법석(鎭兵法席)을 중앙과 지방의 사찰 도합 1백 51개소에 크게 베풀었는데, 공급하는 비용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방어에 나가는 군사는 식량을 각자 준비하였다.
○ 밀직 김세덕(金世德)의 처 윤씨가 보국사의 중과 간통하니, 사언부가 적발하여 다스리려 하였으나, 세력이 강한 족속이기 때문에 면하였다.
○ 겨울 10월에 도체찰사 최공철(崔公哲)이 낭천(狼川)에 이르렀는데, 왜적이 갑자기 나와 습격하여 그 아들을 사로잡았다. 체복사 정승가가 왜적과 양구에서 싸우다가 패전하여 물러가 춘주에 주둔하니, 적이 춘주까지 추격하여 함락시키고, 드디어 가평현(加平縣)에 침입하였다. 원수 박충간(朴忠幹)이 싸워서 쫓아 버리고 머리 6급을 베었는데, 적은 청평산(淸平山)에 들어가 웅거하였다. 찬성사 상의 우인열(禹仁烈)을 도체찰사로 삼고, 전 밀직 임대광(林大匡)을 조전원수로 삼아, 가서 적을 치게 하였다.
○ 이성 만호(泥城萬戶)가 보고하기를, “요동 총병관이 아뢰기를, '달달(韃韃)이 문합라불화(文哈剌不花)를 고려에 보내어 함께 요동을 치려 하니, 군사를 보내어 이를 구원하소서.' 하니, 황제가 손도독(孫都督)에게 명하여 전함 8천여 척을 거느리고 우리나라를 치게 하여, 요동에 이르렀다가 배가 떠나려 하는데, 마침 달달의 군사가 혼하구자(渾河口子)를 공격하므로, 도독의 군사가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하니, 우가 변방을 방비하여 지킬 것을 명령하였다.
○ 대간이 상소하기를, “근래에 이웃 나라의 경계가 있고, 해적이 깊이 들어와 첩자가 왕래하므로 사변이 있을까 두려운데, 전하께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단기로 돌아다니시니, 신들은 근심하고 위태롭게 여기어 두세 번이나 간하였는데, 곧 받아들이시면서도 환관과 내수(內豎)ㆍ위사ㆍ어인(圉人 말을 기르는 사람)이 뜻을 맞추어 아첨하여 주상을 예가 아닌 길로 인도하고, 도리어 전하로 하여금 무시로 출입하게 하여 나라에서 믿음을 잃게 하였으니, 충성스럽지 못하며 도리에 어그러짐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습니다. 내승별감과 속고적(速古赤)ㆍ환관ㆍ내수 등의 일을 맡고 있는 자를 국문하여 뒷사람을 경계하게 하소서. 또 말[辭]을 맡은 자는 왕의 명령을 출납하는 것이어서 그 책임이 가볍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옛날에는 반드시 정직하고 근신하는 자 두 사람을 선택하여 그 임무에 충당하였는데, 지금은 두 사람을 더 두었으나 도리어 미치지 못하는 것이 있어 전하가 출입하는 것을 백관에게 고하지 않으니, 옛 제도에 의하여 두 사람만 선택하여 두고, 그 나머지는 도태시켜 버리소서." 하였다. 소(疏)가 올라가니, 우가 환관 김길봉(金吉逢)에게 장형을 행하여 이산(泥山)에 귀양보내고 내수(內豎) 서양수(徐良守)를 쫓아내었으며, 내승별감 김천용(金千用)은 도망갔으므로 그를 수색하게 하였다.
○ 왜적이 안변부 흡곡현을 침략하고 사방으로 나와 무인지경을 밟듯이 노략하였다. 우가 밀직제학상의 조준(趙浚)을 강릉ㆍ교주도 도검찰사로 삼았다.
○ 이을진과 부원수 권현룡(權玄龍), 병마사 곽충보(郭忠輔)가 동산현(洞山縣)에서 왜적을 쳐서 20여 급을 베고 말 72필을 노획하니, 적은 남은 무리를 거두어 고성포에 물러가 정박하였다. 우가 을진 등에게 차등에 따라 백금을 내렸다.
○ 11월에 통역 장백(張伯)이 명나라 서울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황제가, 진하사 김유(金庾)ㆍ이자용(李子庸)이 시기가 지나서 이르렀다 하여 법사(法司)에 회부하였다." 하고, 예부에서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자문(咨文)을 보냈는데, 이르기를, “고려가 멀리 동쪽 변방으로부터 지난번에 와서 아뢰어 약속 듣기를 원하였으나, 속으로는 여러 가지로 거짓을 품어서 틈이 생기는 것을 예사로 여겼다. 짐이 그 때문에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스스로 교화가 되도록 허락하였는데, 그 뒤에도 자주 와서 허락하여 주기를 청하므로, 짐은 성의가 지극하다고 생각하여 세공을 한정해서 저들의 성의를 표하게 하였던 것이다. 간 뒤에 약속대로 조공하지 않은 지가 다섯 해나 되었는데, 이제 또 경하하는 예로 왔으니 정성스럽기는하나, 시기가 지나서 이르렀으니 어찌 심한 모욕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사신을 보낸 일로 말하면 고려 국왕과 그 신하의 잘못이 아니며, 사자가 고의로 무시하고 만홀히 하여 시기가 지나서 온 것이다. 지금 고려가 완전히 신하가 되었으니, 영구히 사대(事大)의 정성을 지킬 것이다. 온 사신은 이미 조회하는 예에 어긋났으므로 마땅히 법사에 회부하고, 바친 예물은 이미 시기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받아들이지 말며, 다시 고려에 문서를 주고, 반드시 약속 듣기를 원한다면, 지난 5년 동안 바치지 않은 세공으로 말 5천 필, 금 5백 근, 은 5만 냥, 베 5만 필을 한꺼번에 가져와야만 곧 성의가 인정되며, 다른 날에 사자를 데려가기 위한 군사의 출동을 면할 것이다." 하였다. 이에 진헌반전색(進獻盤纏色)을 두어 세공을 준비하였다.
○ 왜적이 청풍군(淸風郡)을 침략하니, 도순찰사 한방언(韓邦彦)이 금곡촌(金谷村)에서 그들과 싸워 8급을 베었다.
○ 문하평리 홍상재(洪尙載)와 전공판서 주겸(周謙)을 경사로 보내어 신정을 하례하였다.
○ 지문하부사 정지가 여러 도에서 전함을 만들어 왜구를 방비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좇았다.
○ 12월에 정지를 해도 도원수, 양광ㆍ전라ㆍ경상ㆍ강릉도 도지휘 처치사로 삼았다.
○ 우가 노빈(盧贇)의 집에 갔다. 빈은 영수(英壽)의 아우인데, 우가 일찍이 빈의 처가 예쁜 것을 보고 이때부터 자주 갔다.



明谷集卷之十二
 題跋
先代墓表帖跋 a_154_078b


惟我十二代祖選部典書。十一代祖藝文提學完山君諡文貞公兩世墓。在淸州之北大栗里。墓前無碑表石床。相傳舊有之而今亡云。孝宗戊戌間。先君子與諸宗人謀修歲祭之禮。行之四十年于玆。嘗欲營豎碑表而未就。往年秋。錫鼎與宗人議。發書于先祖後孫之爲邑宰者五六人。宗叔後徵宰淸安。是邇154_078c先墓。遂委重於宗叔。命工伐石。治表石各一。床石各一。題曰高麗選部典書崔得枰墓。一曰高麗完山君崔宰墓。九代祖平度公以孝旌閭。世遠門毀。顯宗甲寅。改營棹楔。今又毀破久。亦以石碑改之。題曰朝鮮孝子參贊平度公崔有慶之門。攻石刻訖。以是年端午。建于墓前。孝子門。舊在墟門街竹亭舊基。今移立碑于完山君墓近處。具祭奠祝告。後孫參拜者三十餘人。噫。先代碑表。曠三百年未立。今始營建。豈非私門之大幸歟。後孫錫弼宰臨陂。寯宰永同。後章爲安奇郵官。各捐俸以助。柱天宰信川。寔爲咸興判官。154_078d追有助。墓下主事者命稷。有司則世顯,後俊云。錫鼎印出碑表數件。裝爲帖。家藏之。庚辰秋七月日。平度公十世孫大匡輔國崇祿大夫行判敦寧府事錫鼎謹書。


頭陀草冊十七
 [雜著]
代淸州儒生等。請額松泉書院。追配三賢䟽。 a_191_524c


伏以崇儒重道。王者之先務。褒行尙節。有國之令典。是故聖王之御世也。苟有名德之士。可以羽翼斯道。矜式一世者。則必表章崇報。如恐不及者。盖所以風當時勵後學也。惟我國家。以文爲治。其宗儒術㫌191_524d 孝義者。逈出百王。故雖窮鄕下邑之士。一節一行。卓有可觀。則無不沾被褒嘉之典。是以列邑之間。先賢俎豆之所。比比相望。而其得賜恩額。列于祀典者。又不知其幾何。祖宗朝右文尙賢之意。於是尤可見矣。豈不猗歟盛哉。臣等所居之地。素稱湖左名州。而節孝之士。篤學之儒。無代無之。若麗之按廉使臣金士廉,本朝之參贊贈諡平度公臣崔有慶,觀察使贈諡孝靖公臣李貞幹,司諫臣朴光祐,處士臣李之冲,贈左承旨臣趙綱,處士贈左贊成臣李大建。尤其表著者也。今臣等略擧其平日言行。以備殿下之澄191_525a 省焉。士廉其文學行誼。爲一時衣冠之眉宇。而尤以氣節自許。與鄭文忠夢周相友善。見麗政衰亂。常憂憤忼慨。有殉國之志。及王氏亡。遂歸隱于州北嶺山下。本朝徵拜司諫而終不起。遂作詩曰烈女猶不更。忠臣豈事二。以自明其志。臨沒謂諸子曰吾家世麗臣也。旣不能扶顚持危。又不能捐軀死國。將何顔面下見吾祖先乎。仍令薄葬。勿爲封樹。與平地等。後之人高其節義。至以遺令平塚。出題試士。其淸風高節。實無愧於吉再,徐甄諸人云矣。有慶天性至孝。事父母盡誠。及其歿。六年廬墓。太宗特拜大司憲。191_525b 後諸臣俱薦其才行可大用。歷典大州䧺藩。一淸如水。人皆嗟嘆。被抄於淸白吏。死後以孝旌閭。摭其事實。載於三綱行實。故至今邑人指其所居曰孝子里。貞幹自幼有至性。其父早死。事母極孝。老而不衰。甞慕老萊子斑衣娛親之意。爲嬰兒戱以悅母志。世宗聞而嘉之。擢拜中樞院使。遂以御筆書家傳忠孝世守仁敬八大字以褒。又令賜宴壽親。州人至今艷稱之。光佑天資粹美。潛心性理之學。與趙光祖諸賢。磨礲講討。深爲光祖所嘆賞。兄弟四人。同居一室。事親極孝。其行義著于鄕里。及己卯禍作。以新榜進191_525c 士。與同志之士申命仁,李若水等。齊聲陳䟽救光祖。爲門者所敺。血流被面。裂裳裹首。作詩曰此身已許王庭士。努力當年莫作羞。逮乙巳元衡將戕殺善類。火色滔天。光佑方居諫職。力爭前席。天怒大震。遂設庭鞫。光佑顔色不變。徐徐納供曰杖大如股。命盡今日。求仁得仁。又何怨尤。命竄鳳山。出城門卽死。追奪官爵。籍其産。宣廟初服。先正臣李珥上箚暴其冤死狀。命復其官。忠直之節。爲儒賢所奬許者如此。之冲自少講學于金安國之門。隱居求志。不就徵辟。德器渾厚。學問淹博。居親喪執禮甚苦。幾至滅性。士191_525d 論以此高之。甞著三經輯覽等書。又抄程朱書及春秋傳要語。朝夕觀覽。以自警省。其見解之精。踐履之篤。實有人所不及者焉。如黃廷彧,李海壽諸名臣。皆其門人。其誘掖薰陶之功。亦可見矣。綱少有美質。性極孝友。早棄科業。博學力行。事親專以養志爲先。母病中思想野鴨羹。綱出野次涕泣徬徨。忽有一鶻搏鴨墜于前。執而供母。人稱爲孝感云。父母歿。廬墓前後六年。後以才行薦。筮仕出守恩津。値壬辰倭寇。倡義募勇士。守險設奇。斬獲甚衆。又鳩合千餘斛朱豆鐵千斤。陳䟽以献。請補械。上嘉之。至顯宗朝191_526a 因朝臣奏達。追贈承旨。而告身左方書以忠孝二字。人皆榮之。大建卽甲子名臣黿之曾孫也。生質淸明秀異。未十歲詞學驟進。及長受業於故徵士李潛,朴枝華之門。潛心性理。探究經旨。與枝華論卞大學格致之說。枝華亦歎其學識超詣。後遊於太學。太學諸生莫不敬服。至稱之曰館中顔子。甞渡漢江作詩曰氷下滄波幾仞深。行人莫不戰兢臨。若敎平地皆如此。步步無時放爾心。以此可驗其操履之篤實矣。惜其早歿。未能究其志業。而當時名流多與友善。無不咨嗟興悼。盛稱其學術之淵微。才行之高卓。噫。之前191_526b 數臣者。或守西山之媺節。或踵孟王之至行。或秉史魚之直道。或紹濂洛之遺緖。其出而顯於王朝者。用樹風聲。可以爲邦國之光華。退而隱於山林者。有功斯道。可以爲後學之楷範。而其杖屨逍遙之所。衣冠所藏之地。俱不出數十里之間。通德之里。下馬之陵。往往爲人所指点。則其流風餘韵。尙有不泯者。足以激勵頹俗。維持世敎者矣。是故一州之衿紳。擧懷高山景行之誠。同倡建祠妥靈之議。乃於丙戌間。臣等各鳩財力。創立祠宇。而年歲荐凶。加以國家多事。臣等無以上籲。尙未蒙恩額之頒。門楣無色。享儀多觖。191_526c 多士之抑欝。爲如何哉。夫臣鄕以湖左之䧺州。而七臣之高行峻節又如此。而獨不沾朝家褒崇之典。宣額之恩。則此不獨爲臣等之至恨。豈不爲聖朝之闕典耶。臣等玆敢不避煩猥。裹足上來。齊聲仰瀆於九閽之下。伏乞聖明特念諸臣卓異之行。俯察臣等懇迫之誠。亟命該曹。宣賜華額。以彰國家崇儒尙節之意。千萬幸甚。臣等窃又伏念故贈領議政臣李濟臣。曾在宣廟朝。來蒞是土。多施仁惠。至今州民莫不追思。稱賢長吏者。必以濟臣爲首。然此特濟臣之緖餘耳。慶源之役。宣廟特起濟臣爲北兵使。奮191_526d 不顧身。聞命卽行。指麾諸將。防守要隘。出奇兵以鏖虜衆盡殪之。連破其部落五百餘帳。盪掃窟穴。剪其黨羽。終使醜虜欵塞內附。邊塵不驚。其豊功偉烈。至今爀爀照人眼目。宣廟甞下敎以褒曰北變之作。如癰疽積年內蓄。一朝潰决。大命隨之。朝廷失慶源。而濟臣復之。又討滅反賊。此不世之勳也。濟臣若在。必使君父紓憂。此一節足可以建祠崇奉。而若其孝友之行。廉白之操。俱可爲後學之軌式。則宜其與七賢配食於一宇也。至於故相臣崔錫鼎。天質淸粹穎異。聦悟絶人。博極羣書。識解淹該。上自六經。下至濂191_527a 洛關閩之書。靡不硏究旨要。積有成說。至有象數之學。尤爲玄邃。洞貫精微。多發先賢所未發者。樂育人才。誘掖後學。出於至誠。雖窮鄕遠裔之士。摳衣來學者則受而舘之。供其衣食。盡心敎導。俾有成就。是以及門之士。多有彬彬可觀者。爲人樂易豈弟。名位雖極隆崇。而待人接物之際。恭謙和順。絶無一毫傲慢之意。故麻衣草履之士。常滿其座。無不得其歡心。賙恤窮交貧族。賴以擧火者甚衆。由是士論翕然歸之。稱爲儒相焉。臣等亦甞出入於錫鼎之門下。覿德薰化。所以敬慕者。尤倍他人。而顧此淸州。卽錫鼎松檟191_527b 之鄕也。間甞來往。而七臣祠宇之創建。又自錫鼎倡之。及其歿也。又卜葬於此。故一鄕士論。皆曰追配七賢者。宜莫先於錫鼎云云。於此尤可見公議之所在也。故司僕寺正臣李寅爀。卽大建之曾孫也。爲人沖和淵深。高潔正直。動靜語默。鮮有不合於理。盖其天資自然近道也。居家孝友篤至。豁達喜施與。賑窮賙急。惟恐不及。寒族窮交。歸之如家。歷典郡邑。而御下以寬。處事以簡。氷蘖自持。吏民愛戴如父母焉。平居靜處一室。終日危坐。人不見其喜慍。凡於勢利浮華窮達毁譽。視之泊如也。待人一以誠信。容貌言語之191_527c 間。和氣藹然。眞意洋溢。令人自無鄙詐之心儇薄之態。故見之者莫不感悅敬服。一時儕友。亦以黃叔度,元紫芝一流人稱之。及當己巳之變。與朴泰輔諸人。同聲陳䟽。及泰輔死。遂退歸鄕廬。絶意仕宦。朝廷累除郡邑終不赴。家素貧寠。或至烟火累絶。妻子凍餒。而處之晏然。誘掖後進。必以先行誼後文藝爲務。故頗有成就之人。甲戌改紀之初。卽拜南陽府使。謂人曰今日朝著之局面雖換。而中宮尙處閭舍。難進之義。與己巳少無差殊。了無起色。及中宮復位。始乃趁賀班來謝。其志操之卓然。有如是者。故一世191_527d 之士。無不高其爲人。嘉其節行。而臣等從遊於寅爀者亦久矣。臣等窃以爲寅爀資稟之美。操守之確。亦可以振一世頹靡之習。而其生也游息於斯。其歿也又葬於斯。則實合躋祀於七賢之祠。玆敢因請額之䟽。略陳三臣平日本末。仰徹於黈纊之下。倘蒙聖明亦加睿照。幷賜允許。以爲表章風勵之圖。則其有補於聖代崇賢興學之化。固不少矣。臣等不勝激切편001懇之至。


[편-001]祁 :

四留齋集卷之十
 [倭變錄]
倭變錄 a_051_368a


新罷始祖赫居世八年。倭來寇。王有神德。乃還。
脫解王十七年。倭寇木出島。王遣角干羽烏禦之。不克死之。
南解王十一年。倭侵新羅邊郡。發六部勁兵千人以禦之。
阿達羅王四年。新羅置迎日縣。初。東海濱有人。夫曰迎烏。妻曰細烏。一日。迎烏,採藻海濱。忽漂至日本國小島爲王。細烏尋其夫。又漂至其國爲妃。時以迎烏051_368b細烏有日月之精。至是置縣焉。
助賁王四年。倭寇新羅東邊。伊湌于老戰于沙道。乘風縱火。焚戰艦。賊赴水死盡。
沾解王三年。倭寇新羅殺于老。初。倭葛耶古聘新羅。王使于老儐之。于老戲。早晩以汝王爲鹽奴。王妃爲㸑婢。倭主聞。遣將軍于道朱君來侵。王出居于柚村。于老曰。今日之寇。由臣言致之。臣請當之。遂抵倭軍曰。前日之言。戲之耳。豈意興師至此耶。倭人執之。積薪燒殺之。乃去。後倭使來聘。于老之妻。請於王私享之。及其醉。使人執而焚之。倭怒來攻金城。不克。
051_368c儒禮王十一年。倭攻新羅長峯城。不克。○十二年。王謂群臣曰。倭人屢犯我城邑。百姓不得安居。吾欲與百濟共擊之。如何。弘權對曰。我軍不習水戰。冒險遠征。恐有不測之危。況百濟多詐。常有呑噬之心。恐難與同事。王曰。善。
基臨王三年。新羅與倭國交聘。
訖解王三年。倭遣使請婚於新羅。以阿湌急利女送之。王卽于老之子。
三十五年。倭遣使新羅請婚。不報。
三十六年。倭移書新羅絶交。
051_368d三十七年。倭寇新羅風島。進圍金城急。王欲出兵擊之。伊伐湌康世曰。賊遠至。其鋒不可當。不若緩之。待其師老。王然之。閉門不出。賊食盡將退。命康世率輕騎追擊走之。
奈勿王九年。倭大擧侵新羅。王懼造草偶人數千。持兵列吐含山下。伏勇士一千於斧峴東原。倭恃衆直進。伏兵擊其不意。倭兵大敗走。追擊殺之幾盡。
三十八年。倭人來圍新羅金城。五日不解。將士皆請出戰。王曰。今賊棄舟深入。在於死地。鋒不可當。閉門固守。賊乃退。王先遣勇騎二百。要其歸路。又遣步卒051_369a一千。追於獨山。夾擊大敗之。殺獲甚衆。
百濟阿莘王六年。與倭結好。遣太子晪友爲質。
新羅實聖王七年。聞倭人置營於對馬島。練兵儲糧。謀將襲之。欲先其未發擊破之。舒弗邯未斯品曰。臣聞兵囟器。戰危事。況涉巨浸以伐人。脫或失利。悔不可追。不若依險說關。來則禦之。使不得侵掠。伺其便。出擊之。此所謂致人而不致於人。策之上也。王從之。
訥祗王二十八年。倭寇新羅。圍金城十日。糧盡乃歸。王欲出兵追之。左右曰。兵法。窮寇勿追。王其舍之。不聽。率數千人追之獨山東。合戰。爲賊所敗。將士死者051_369b過半。王蒼黃乘馬登山。賊圍王數重。忽昏霧不辨咫尺。賊謂有陰助。收兵乃退。
慈悲王二年。倭以兵船百餘艘。襲新羅東邊。進圍月城四面。矢石如雨。王固守。賊將退。出兵擊敗之。追至海口。賊溺死者過半。
六年。倭侵新羅歃良城。不克而去。王命伐智,德智。伏兵於歸路。要擊大破之。王以倭屢侵疆埸。築沿邊二城。
文武王三年。倭國遣兵。救百濟周留城。新羅軍遇倭於白江口。力戰四合皆克。焚其船四百艘。煙熖灼天。051_369c海水爲赤。倭人皆降。羅王謂倭人曰。我與爾國。隔海講和。聘問交通。未嘗交搆。何今日與百濟謀我。今爾之命。在我掌握。不忍殺之。歸語爾王。遂縱之。
十年。倭國更號日本。自言近日所出。以爲名。
孝昭王七年。日本國遣使來聘。
聖德王三十年。日本以兵船三百艘。寇東邊。王命將擊破之。
孝成王六年。日本國使至。不納。
惠恭王十五年。遣金巖聘日本。巖性聰敏。嘗入唐宿衛。學陰陽家術。自述遁甲立成法。至是聘日本。王知051_369d其賢。欲留之。會唐使高鶴林來。相見甚懽。以巖爲大國所知。不敢留乃還。
高麗元宗四年。遣太官署丞洪泞詹事府錄事郭王府如日本。請國禁賊。牒曰。自兩國交通以來。歲常進奉一度。船不過二艘。設有他船。枉憑他事。濫擾我沿海村里。嚴加懲禁。以爲定約。今春。貴國船一隻。入熊神縣勿島。掠其貢船。又入椽島。奪我民産。甚乖交通之意。請徵還所掠之物。以固兩國和親之義。秋八月。洪泞等還自日本曰。窮推海賊。乃對馬島倭也。徵米二十石,馬麥三十石,牛皮七十領而來。
051_370a高麗縣宗三年。日本國潘多等三十五人來投。
六年。倭寇南道沿海州郡。命將軍安洪敏。率三別抄禦之。
七年。蒙古遣黑的殷弘等來詔曰。今爾國人趙彝來告。日本與爾國爲近隣。典章政治。有足嘉者。漢唐以下。亦或通使中國。故今遣黑的等往日本。欲與通和。卿其導達去使。以徹彼疆。開悟東方。向風慕義。玆事之責。卿宜任之。勿以風濤險阻爲辭。勿以未嘗通好爲辭。恐彼不順命。有阻去使爲托。卿之忠誠。於斯可見。卿其勉之。彝本咸安人。初爲僧。後歸俗。叛入蒙古。051_370b能解諸國語。出入帝所。以讒毁本國爲事。○命宋君斐,金贊。與黑的等往日本。
八年春正月。宋君斐,金贊。與黑的等。至巨濟松邊浦。畏風濤之險。遂還。王又令君斐隨黑的如蒙古。奏曰。詔旨中所諭導達使臣。通好日本事。謹遣宋君斐等。伴使臣以往。至巨濟縣。遙望對馬島。見大洋萬里。風濤蹴天。意謂危險若此。安可奉上國使臣。冒險輕進。雖至對馬島。彼俗頑獷無禮義。設有不軌。將如之何。是以與俱而還。且日本南邦。未嘗通好。但對馬島人。時因貿易往來金州耳。小邦自陛下卽阼以來。深蒙051_370c仁恤。三十年兵革之餘。稍得蘇息。綿綿存息。聖恩天大。誓欲報效。如有可爲之勢。而不盡心力。有如天日。秋八月。宋君斐等。與黑的,殷弘等復來。帝諭曰。向者遣使招諭日本。委卿嚮導。不意卿以辭爲解。遂令徒還。意者。日本旣通好。則必盡知爾國虛實。故托以他辭。然爾國人在京師者不少。卿之計亦疏矣。且天命難諶。人道貴誠。卿先後食言多矣。宜自省焉。今日本之事。一委於卿。卿其體朕此意。通諭日本。以必得要領爲期。卿嘗有言。聖恩天大。誓欲報效。此非報效而何。李藏用以書贈黑的等曰。日本阻海萬里。雖或與051_370d中國相通。未嘗歲修職貢。故中國亦不以爲意。來則撫之。去則絶之。以爲得之無益於王化。棄之無損於皇威也。今聖明在上。日月所照。盡爲臣妾。蠢玆小夷。敢有不服乎。然蜂蠆之毒。豈可無慮。國書之降。亦甚未宜。隋文帝時上書云。日生處天子。致書于日沒處天子。其驕傲不識名分如此。安知遺風不存乎。國書旣入。脫有驕傲之答。不恭之辭。欲捨之則爲大朝之累。欲取之則風濤艱險。非王師萬全之地。陪臣固知大朝寬厚之政。亦非必欲致之。偶因人之上言。姑知之耳。然取舍如此。尺一之封。莫如不降之爲得也。且051_371a豈不聞大朝功德之盛哉。旣聞之。計當入朝。然而不到。蓋恃其海遠耳。然則期以歲月。徐觀其至否。至則獎其內附。否則置之度外。任其蚩蚩。自活於相忘之域。實聖人天覆無私之至德也。陪臣再覲天陛。親承睿渥。雖在遐陬。犬馬之誠。思效萬一耳。蓋藏用度日本竟不至。將累我國。故密以書貽黑的。欲令轉聞。以寢招懷之事。然不先聞於王。故王疑有貳心。卽配靈興島。接伴起居舍人潘阜。亦坐不告。流綵雲島。阜方對黑的。武士突入曳出。黑的怒詰問知之。乃還藏用書。且曰。我若歸奏此書。幸而聽之。天下之福也。如不051_371b之聽。於汝國。亦有何罪。固止之。由是獲免。遣舍人潘阜。齎蒙古書及國書如日本。蒙古書曰。大蒙古皇帝。奉書日本國王。朕惟自古小國之君。境土相接。尙務講信修睦。況我祖宗。受天明命。奄有區夏。遐方遠域。畏威懷德者。不可悉數。朕卽位之初。以高麗無辜之民。久罹鋒鏑。卽令罷兵。還其疆域。返其旄倪。高麗君臣。感載來朝。義雖君臣。歡若父子。計王之君臣。亦已知之。高麗。朕之東藩也。日本密邇。開國以來。亦時通中國。至於朕躬。而無一介之使。以通和好。尙恐王國知之未審。故遣使持書。布告朕志。冀自今051_371c以往。通問結好。以相親睦。且聖人以四海爲家。不相通好。豈一家之理哉。以至用兵。夫孰所好。王其圖之。國書曰。我國臣事蒙古大國。稟正朔有年矣。皇帝仁明。以天下爲一家。視遠如邇。日月所照。咸仰其德。今欲通好於貴國。而詔寡人云。日本與高麗爲隣。典章政治。有足嘉者。漢唐以下。屢通中國。故特遣書以往。勿以風濤險阻爲辭。其旨嚴切。玆不獲已遣某官某。奉皇帝書前去。貴國之通好中國。無代無之。況今皇帝之欲通好貴國者。非利其貢獻。蓋欲以無外之名。高於天下耳。若得貴國之通好。必厚待之。其遣一介051_371d之使。以往觀之何如也。貴國商酌焉。
九年。蒙古遣明威將軍都統領脫朶兒,武德將軍統領王國昌,武略將軍副統領劉傑等。來閱軍額戰艦。仍視日本水道黑山島。又令耽羅別造船百隻。王使卽將朴巨甫,都兵馬使禹天錫。從國昌,劉傑等。往視黑山島。
蒙古遣兵部侍郞黑的,禮部侍郞殷弘等。來詔曰。向委卿導達使者。送至日本。卿乃餙辭。以爲風濤險阻。不可輕涉。中道乃還。其言若是。今潘阜等。何由得達。今來奏。有潘阜至日本。逼而送還之語。亦安足取信。051_372a今復遣使以往。期於必達。卿當令重臣導達。毋致如前稽阻。遣知門下省事申思佺,侍郞陳子厚,舍人潘阜。偕黑的,殷弘如日本。
十年。黑的及申思佺等。至對馬島。執倭二人以還。○蒙古使于婁大等。遣還倭人。初。申思佺以倭人謁帝。帝喜曰。爾王祗稟朕命。爾等不以險難爲辭。入不測之地。生還復命。忠節可嘉。厚賜匹帛。又謂倭人曰。爾國朝覲中國。其來尙矣。今朕欲爾國之來朝。非以逼汝也。但欲垂名於後耳。賚予甚稠。
十二年。蒙古遣祕書監趙良弼。來詔曰。朕惟日本。自051_372b昔通好中國。又與卿國。地相密邇。故嘗詔卿導達去使。講信修睦。爲渠疆吏所梗。不獲明諭朕意。復以林衍之故。不暇及。今旣輯爾家。復遣趙良弼。充國信使。期于必達。仍遣忽林赤,王國昌,洪茶丘。將兵送抵海上。比使者還。姑令金州等處屯住。所需糧餉。卿可委官赴彼。逐近供給。鳩集船艦。待於金州。無致稽緩匱乏。趙良弼請與倖臣康允紹偕行。王不得已從之。
蒙古遣忻都史樞。來詔曰。朕嘗遣信使。通諭日本。不謂執迷固閉。難以善言開諭。此卿所知。今將經略於彼。勅有司發卒屯田。用爲進取之計。庶免爾國他日051_372c轉輸之勞。仍復遣使持書。先示招懷。卿其悉心盡慮。裨贊方略。期於有成。以稱朕意。又中書省移文曰。欽奉帝旨。以忻都史樞。行經略司於鳳州等處。營軍屯田。所有屯田牛六千頭。除東京等處起遣一半。餘三千頭。令經略司受直王國和市外。軍器種子芻秣之類及接秋軍糧。一就供給。無致闕乏。
十三年。趙良弼還自日本。遣書狀官張鐸。率日本使十二人如元。王遣郞白琚表賀。
日本使還自元。張鐸宣帝命曰。譯語別將徐偁,校尉金貯。使日本有功。宜加大職。遣御史康之邵。護日本051_372d使還其國。
倭船到金州。慶尙道安撫使曺子一。恐交通事覺。獲譴于元。密令還國。洪茶丘聞之。鞫子一。鍛鍊其辭。聞于帝。遂殺之。
十四年。元復遣趙良弼如日本招諭。良弼至大宰府。不得入國都而還。十五年。元遣摠管察忽。監造戰艦三百艘。又令洪茶丘監督。約以正月十五日興役。王乃以侍中金方慶爲東南道都督使。許珙爲全州都指揮使。洪祿遒爲羅州指揮使。又遣大將軍羅裕等。爲諸道部夫使。徵051_373a集工匠役徒三萬三百餘人。是時驛騎絡繹。庶務煩劇。期限急迫。疾如風電。民甚苦之。
二月。遣別將李仁如元。上書中書省曰。小邦奉承省旨。造戰艦三百艘。其所需工匠人巭及材木等物。分委陪臣金方慶等幹辦。而但事巨力微。恐不能辦。又竊念自正月十五日始役。其工匠人巭三萬五百名。計一人一日三時糧。比及三朔。合支三萬四千三百十三石五斗。又忻都軍四千五百人。至金州行糧。一千五百七十石。洪茶丘軍五百人行糧八十五石。濟州留守官軍幷小邦卒一千四百人七月糧。二千九051_373b百四石。及羅州落後軍糧八千石馬料一千三百二十五石。悉令小邦供給。又奉省旨。令小邦應副鳳州屯田軍各月不敷糧二千四十七石。牛糧一千一石七斗。然此屯田軍糧及農牛農器種子。初年已曾支足。而姦人妄稱屯田被虫水損傷。冒受省旨。又令供給。如此支給。罔有期限。乞皆蠲免以惠遠人。
元遣使來。命發軍五千。助征日本。元遣阿海漕運米二萬石助軍糧。元遣于思齎絹三萬三千一百五十四疋。來貿軍糧。卽置官絹都監。分給京外人民以市之。每絹一疋直米十二斗。遣郭如弼如元上表曰。向051_373c者洪茶丘移書金方慶曰。船三百艘。梢工水手一萬五千人。宜先備之。小邦地偏人稀。加以喪亂。往者征耽羅。兵卒篙師悉赴造船之役。今征日本之師。將於何出。小邦北界諸城及西海道逋租之民。往投東寧府者。皆習操舟。請悉刷還。以補軍額。元征東兵萬五千人來。○命加簽征東軍。各領府爭捕東班散職人及白丁以告。或誤捕私奴者。
遣羅裕如元。奏已造戰艦九百艘。回泊金州。日本征討都元帥忽敦。來自元。○東征副元帥洪茶丘。以忠淸道梢工水手不及期。杖大將軍崔沔。
051_373d冬十月。都督使金方慶等九人。統三翼軍。與元都元帥忽敦,右副元帥洪茶丘,左副元帥劉復亨。以蒙漢軍二萬五千。我軍八千。梢工水手六千七百。戰艦九百餘艘。發合浦。越十一日。至一岐島。倭兵陣於岸上。中軍朴之亮等逐之。倭請降而復戰。茶丘與之亮等。擊殺千餘級。舍舟三郞浦。分道以進。所殺過當。倭兵突至衝中軍。金方慶拔一嗃矢。厲聲大喝。倭辟易而走。之亮等諸軍殊死戰。倭兵大敗。伏屍如麻。忽敦曰。雖蒙人習戰。何以加此。諸軍終日戰。及暮乃解。方慶謂忽敦曰。我兵雖小。已入敵境。人自爲戰。卽孟明焚051_374a舟。淮陰背水也。請復決戰。忽敦曰。小敵之堅。大敵之擒。策疲兵戰大敵。非完計也。不若回軍。復亨中流矢。先登舟。故遂引兵還。會夜大風雨。戰艦觸巖崖多敗。東征軍師還合浦。遣同知張鎰勞之。軍不還者。無慮萬三千五百人。
侍中金方慶等還師。忽敦以所俘童男女二百人。獻王及公主。
忠定王二年春二月。倭寇固城,竹林,巨濟等處。合浦千戶崔禪等戰破之。賊死者三百餘人。倭寇之與。始此。
051_374b夏四月。倭賊百餘艘寇順天府。掠南原,求禮,靈光,長興府漕船。
五月。倭賊六十六艘。寇順天府。我兵追獲一艘。斬十三級。
六月。倭賊二十艘。寇合浦。焚其營。又寇固城,檜原,長興府。
秋八月。倭船一百三十艘。來寇紫燕,三木二島。焚其民舍殆盡。又焚南陽府雙阜縣。遣萬戶元顥于西北面。印璫,李權于西江。屯兵以備之。又命璫等入海捕倭。權還白王曰。臣非將。又不食祿。不敢奉命。固辭不051_374c行。
三年十一月。倭寇南海縣。
恭愍王元年。全羅道萬戶柳濯。持軍嚴整。不擾州縣與士卒同甘苦。賜敎書衣酒勞之。倭寇萬德。大掠而去。濯以輕騎追捕。悉還其俘。終濯在鎭。寇不復犯。○命內府少尹金暉南。率戰艦二十五艘。禦倭至楓島。遇賊船二十艘。不戰而還。至喬桐。又望見賊船甚盛。遂還西江。請濟師。與倭賊戰于窄梁,安興,長巖等處。獲賊船一艘。王除暉南左常侍。○倭船大至。暉南兵少不能敵。退次西江告急。鷹揚上將軍金鏞。調發諸051_374d領兵。婦女攔街痛哭。都城大駭。又斂百官坊里民戶軍糧及箭有差。
倭焚喬桐甲山倉。前代言崔源與戰。獲賊船二艘。倭寇全羅道。知益州事金暉等領舟師擊之。不克。沃溝監務鄭子龍。坐逗遛不進。杖配突山烽卒。四年。倭掠全羅道漕船二百餘艘。
六年。倭入昇天府興天寺。取忠宣王及韓國公主眞而去。
倭寇喬桐。遣上將軍李云牧,將軍李蒙古。追捕倭寇云。牧詭曰。若不殲賊。請受顯戮。議者料其無成。果未051_375a獲一倭。
七年。倭寇角山戍。燒船三百餘艘。
倭寇韓州及鎭城倉。全羅道鎭邊使高用賢。請徙沿海倉廩於内地。從之。
倭焚喬桐。京城戒嚴。發丁坊里爲軍。都評議使司啓。近因倭寇。漕運不通。自今諸封伯已行侍中者。從宰樞料。其餘依異姓諸君料。從之。
倭侵黔毛浦。焚全羅道漕船。○倭焚花之梁。寇仁州。
八年。倭寇禮成江。焚瓮津縣。
九年。倭寇泗州角山。
051_375b倭寇全羅道會尾,沃溝等處。又寇楊廣道平澤,牙州,新平等縣。焚龍城等十餘縣。京城戒嚴。以柳濯爲京畿兵馬都統使。李春富爲東江都兵馬使。我太祖爲西江都兵馬使。發丁坊里爲軍。又令百官助戰。諫宮詣宮門拜辭。參政鄭世雲曰。諫官從軍。古所未聞。如國體何。王特免之。國子博士等上言。臣等侍於夫子廟庭。學官從軍。古無其例。侍中廉悌臣,李喦皆曰。爾雖不侍孔子。孔子焉逃。簽書金希祖爭之不得。彦陽伯金敬直詣闕。聞宰樞博奕戲謔聲。還家太息曰。國家其將亡乎。宰相雖在太平之世。而不可耽戲。況051_375c今干戈搶攘。飢饉荐臻。不此之恤。而耽樂若是。欲不亡。得乎。
倭寇江華。入禪源,龍藏二寺。殺三百餘人。掠米四萬餘石。有沈夢龍者。斬倭十三級。竟死於賊。○教曰。四方兵興。用人爲急。其除三年喪。時雖許行三年。然皆百日脫衰。但解官而已。
十年。全羅道按廉使田祿生啓曰。州縣之弊。防倭爲大。自庚寅以來。道内之戍。歲益增置至十八所。其軍將虐州郡以立威。致其凋弊。役戍卒以濟私。使之逋逃。及寇至。徵兵州郡。謂之煙戶軍。雖置戍所。不聞禦051_375d寇。只見害民。不若罷諸戍所。令州郡謹烽燧。嚴斥候。以應其變。
倭焚掠東萊,蔚州。奪其漕船。又寇梁州,金海府,泗州,密城郡。
十一年。倭焚晉州岳陽縣。
十二年。倭國歸我被擄人三十餘口。○倭船二百十三艘泊喬桐。京城戒嚴。以安遇慶爲防禦使。○倭寇守安。
十三年。倭船二百餘艘。寇河東,固城,泗州,金海,密城,梁州。
051_376a全羅右道兵馬使裵光秀,左道兵馬使李善。領漕船遇倭兵。與戰敗績。先是。漕船阻倭不得運。王選東北面武士及喬桐,江華,東西江戰船八十餘艘。命光秀等分將往護之。光秀船至代島。有內浦民被虜者逃來告曰。賊伏兵伊作島。不可輕進。善不聽。鼓譟先進。賊以艘逆之。佯退。俄而五十餘艘圍之。兵馬判官李芬孫,中郞將李和尙等。先與戰。盡爲賊所殺。諸船兵望見喪魄。投海死者十八九。光秀等觀望。不戰而退。戰卒大呼曰。兵馬使何其棄士卒耳退耶。願小駐爲國家破賊。光秀等終不救。士卒氣益沮喪。由是大敗。051_376b惟副使朴成龍力戰。全船而來。身中數矢。兵馬判官全承遠。與判官金鉉,散員李天生殊死戰。賊追之不敢近。有賊船二艘。忽從西橫擊。士卒不能支。皆投水。獨承遠力戰。中數槍。亦投水。然善泅故得不死。夜還登船。有一卒中矢。亦投水。援船無力。不能出。承遠引致船中。晝夜手棹。三日得到南陽府。還者惟光秀,善等。船才二十艘而已。喬桐,江華,東西江。哭聲相聞。光秀等竟不坐。
全羅道都巡禦使金鈜。領漕船遇倭兵。與戰敗績。初。鈜居羅州。以豪右奪占民田。資財饒富。嘗擊倭于木051_376c浦。受賞職。輸貨權要。屢爲捕倭使。時。全羅道飢。重以兵革。民不聊生。鈜剝民掊克。無所不至。一方嗷嗷。大護軍宋芬死。其妻服未闋。托官事鉤致。白晝强淫。因以爲妾。至是亦以漕船至内浦。與倭戰敗。死者太半。嬖幸受鈜賂。反譽之。王賜内醖迎勞。人多憤恨。
慶尙道都巡問使金續命。擊倭三千於鎭海縣。大破之。獻兵仗。王賜衣酒金帶。爵戰士有差。
選諸道良家子男。補充八衛番上宿衛。分隷五軍。屯于京城四門外。惟江陵道子弟。屯其道。以備東北。○倭寇祖江。殺關吏。
051_376d十四年。倭寇喬桐,江華。命東西江都指揮使崔瑩。帥兵出鎭東江。○倭入昌陵。取太祖眞以歸。以金續命爲東西江都指揮使。
十五年。倭寇深岳縣。倭奪漕船三艘。死傷甚衆。又屠喬桐縣。京城大震。命安遇慶,池龍壽,李珣等領三十三兵馬使。出屯東西江昇天府。時影殿正陵役大興。百司所事。不出土木。庶事廢弛。倉廩虛竭。宿衛單弱。軍政不修。至無兵可操。無甲可授。諸軍索然。望賊不敢進。○倭入陽川縣。掠漕船。
十六年。倭掠江華府。
051_377a十七年春正月。日本國遣使來。先是。王患倭寇侵擾。遣金逸請禁。故至是報聘。辛旽不爲禮。館待甚薄。其使梵盪等怒而去。
十八年。倭掠寧州,温水,禮山,沔州漕船。初,倭人願居巨濟。永結和親。國家信而許之。至是入寇。
十九年。倭寇內浦。掠諸州租稅。又寇宣州。西北面元帥楊伯淵。擊斬五十餘級。
二十年。倭入海州。火官廨。虜牧使妻及女。
二十一年。倭寇白州。○倭寇順天,長興,耽津,道康等郡。○倭掠鎭溟倉。○倭寇江陵府及盈德,德源二縣。051_377b時李春富子沃。沒爲東界官奴。及倭寇至。我軍望風奔潰。府使及按廉聞沃勇銳。授兵使擊之。沃力戰却之。王賜鞍馬。免其役。
倭寇安邊,咸州。○倭寇東界安邊等處。擄婦女。掠倉米萬餘石。罷存撫使李子松。放歸田里。倭又寇咸州。北靑萬戶趙仁璧。伏兵大破之。斬首七十餘級。
倭寇洪州。我軍與倭兵戰于陽川敗續。王親帥五軍。出次昇天府。
倭船二十餘艘。入陽川留三日。諸將領兵出戰。我軍皆成衆愛馬。未習水戰。大敗。王以各司成衆愛馬及051_377c五部坊里人。分隷五軍。親率出昇天府。遂次龍泉寺峯。以宿衛不嚴。梃諸提調官。謂贊成事安師琦曰。予之此行。非好慢遊。欲觀行師如何耳。庚子辛丑之紅賊。庚寅以來之倭賊。非不可敵。而民被虜掠。國至播越者。以用兵無律。號令不嚴耳。今予親臨。尙有不用命者。況諸將代行者乎。卿其體予意。曉諭衆人。自今軍令。毋或不謹。
二十二年。倭寇龜山縣。都巡問使洪師禹。斬數百級。獻所獲器仗。
倭寇河東郡。晉州人鄭任德。嘗戍是郡。適被疾。子愈051_377d及愻。擁父走避。賊追及之。愈射殺數人。賊不敢前。忽一賊奮劍突進。刺任德頰。愻以身蔽之。且斬四人。竟歿於賊。事聞。拜愈爲宗簿寺丞。
倭舶集東西江。寇陽川。遂至漢陽府。燒廬舍。殺掠人民。數百里騷然。京城大震。遣體覆使李傑生。以江華萬戶河乙沚,漢陽府尹辛廉。不能禦倭。杖配烽卒。○倭陷喬桐。
倭陷海州。殺牧使嚴益謙。誅吏之不救者。降爲郡。以西海道萬戶許子麟不能禦倭。遣體覆鄭丹鳯杖之。丹鳯縊殺之。子麟弟訟其挾私枉殺。丹鳯逃。○殺體051_378a覆使李傑生。輕杖河乙沚等罪也。人謂傑生剛直敢言。嘗忤金興慶故及。
二十三年。中郞將李禧上書言。今倭寇方熾。乃驅不習舟楫之民。使之水戰。每致敗績。臣生長海邊。稍習水戰。願率濱海居民慣於操舟者。與之力戰。庶可立功。王慨然曰。草野之人如禧者。尙獻計如此。百官衛士之中。曾無一人如禧者也。衛士柳爰廷進曰。中郞將鄭准提。嘗草平寇策。第未獻耳。準提適侍殿陛。王顧問之。准提卽取諸囊中以獻。王覽之大悅。以禧爲楊廣道安撫使。准提爲全羅道安撫使。幷兼倭人追051_378b捕萬戶。王謂宰相曰。今爵禧等。卿等勿以爲異。冀其成功。激人心耳。他日無功。亦當不赦。時准提與禧。再三上疏凡數十條。其略以爲深陸之民。不閑舟楫。難以禦倭。但簽生長海島及自請水戰者。令臣等將之。期以五年。可淸海道。若都巡問使則徒費軍糧。擾民生。乞罷之。准提後改名地。
誅都巡問使金鈜。初。鈜以盹黨流。復起附金興慶金師幸。得是職。貪殘無比。至是倭船三百五十艘來寇合浦。燒軍營兵船。士卒死者五十餘人。王遣趙琳誅之。支解以徇。
051_378c西海道萬戶李成,副使韓方道,崔思正。與倭戰于木尾島。敗死。
倭寇紫燕島。○倭寇江陵三陟。○又寇慶,蔚二州。以倭賊近境。都城戒嚴。
倭寇安州。倭寇密城。火官廨。掠人物。
辛禑元年二月。倭寇慶陽縣。楊廣道都巡問使韓邦彦。與戰敗績。
判典客寺事羅興儒上書。請行成日本。乃以興儒爲通信使。遣之。
五月。倭人藤經光來投。處之順天,燕岐等處。給資糧。
051_378d八月。倭寇樂安,寶城。○慶尙道副元帥尹承順。斬倭二十級。
九月。倭舶大集德積,紫燕二島。時將卒悉赴北征。乃簽軍坊里及諸陵戶。又徵兵楊廣,全羅,慶尙諸道。以我太祖及崔瑩領之。耀兵東西江以備之。
徵諸寺住持僧戰馬各一匹。又取諸寺田租。以充軍費。
倭寇寧,木二州。崔瑩請往擊之。不許。
倭寇瑞州,結城。
十一月。楊廣道安撫使朴仁桂。獲倭船二艘。殲之。
051_379a倭寇金海府。殺掠民物。焚官廨。都巡問使曹敏修。與戰敗績。又戰於大丘。敗績。士卒死者甚衆。
倭賊數十艘。又自金海。泝黃山江。將寇密城。敏修邀擊。斬數十級。禑遣中使。賜衣酒及馬。敏修上箋謝。命左正言金子粹製回教。子粹辭曰。敏修摠兵一道。金海,大丘之戰。怯懦敗沒。多殺士卒。密城小捿。功不掩罪。衣酒廏馬。賞已過矣。又何回教。且回教。記功德。敏修無功可紀。不敢奉命。禑怒。下子粹巡衛府。杖流于突山戍。
二年春正月。全羅道都安撫使河乙沚。捕倭船一艘。051_379b賜衣酒。乙沚無才行。又有簠簋之誚。賂權貴。得任閫寄。士林鄙之。
倭寇晉州。曹敏修與戰于淸水驛。斬首十三級以獻。
六月。倭寇林州。全羅道兵馬使柳實。知益州事金密等。力戰却之。
秋七月。倭寇全羅道元帥營。又寇榮山。焚戰艦。又寇羅州。縱火剽掠。時元帥河乙沚。聞柳濚來代己。輒歸晉州農庄。倭乘時而至。無敢拒者。是以大敗。杖流乙沚河東縣。
倭寇扶餘至公州。牧使金斯革。戰于鼎峴敗績。遂陷051_379c公州。元帥朴仁桂。以屬縣懷德監務徐天富不赴救。斬之。
倭又寇石城。趨連山縣開泰寺。仁桂迎戰。墜馬被殺。遂屠開泰寺。
判三司事崔瑩。聞仁桂敗死。自請擊倭。禑及諸將以老止之。瑩曰。蕞爾倭賊。肆暴如此。失今不制。後難啚也。今若將他人。未必制勝。且兵不素鍊。亦不可用。臣身雖老。志則不衰。但欲安社稷衛京城耳。請率麾下。亟往擊之。請至再三。許之。瑩不宿而行。
倭寇朗山,豐堤等縣。全羅道元帥柳濚,全州牧使柳051_379d實。力戰却之。獲所掠牛馬二百餘。還其主。訛言倭將寇都城。夜半發坊里軍守城。又聞賊將先登松嶽山。發僧爲軍。分守要害。
崔瑩與楊廣道都巡問使崔公哲,助戰元帥康永,兵馬使朴壽年等至鴻山。賊先據險隘。三面皆絶壁。惟一路可通。諸將畏怯不進。瑩身先士卒。盡銳突進。賊披靡。有一賊隱林中。射瑩中唇。血淋漓。神色自若。射賊應弦而倒。乃拔矢。戰益力。遂大破之。俘斬殆盡。遣人獻捷。賜瑩衣服鞍馬。崔瑩凱還。禑命宰樞。供帳于天水門。巡衛府具襍戲。迎于臨津。如迎詔使禮。○論051_380a鴻山功。以崔瑩爲鐵原府院君。柳濚爲密直副使。其餘軍士。除授有差。時李仁任池奫等。提調政房。視人賄賂多少。以爲升黜。鴻山論賞。不從軍而得官者甚衆。
倭寇古阜,泰山,興德。焚官廨。又寇保安,仁義,金堤,長城等縣。
倭陷臨陂縣。撤橋自固。柳實潛令士卒作橋。邊安烈率兵得渡。按廉使李士穎設伏橋畔。倭賊望見逆戰。我軍敗績。
倭陷全州。牧使柳實。與戰敗績。退屯歸信寺。實復擊051_380b却之。
憲府上疏曰。全羅元帥柳濚。不以閫寄爲意。日玩聲色。以致倭寇乘勝肆暴。及陷全州。詐稱墜馬。擁兵逗遛。請置於刑。兵馬使柳實所管泰山郡。亦被寇怯。討捕失機。反爲所敗。又不能收復全州。罪亦大矣。然實於往者倭犯全州。悉力擊却。其與濚罪。似有輕重。請削奉翊以上官。於是。廢濚爲民。幷實戍遠地。
憲府以兵革旱蝗。連歲相仍。軍食罄竭。請於功臣田租。三分取一。寺社田收其半。兩殿所屬官司田。科斂外羨餘。幷充軍需。從之。
051_380c冬十月。羅興儒還自日本。日本遣僧良業來報聘。仍獻綵段畫屛長劍等物。自辛巳東征之後。絶交且百年。至是日本以興儒爲䜓者囚之。良業本我國晉州人。少從倭僧而去。聞興儒至。來謁。遂請釋使而通好。興儒之還。其國僧周佐寄書曰。惟我西海道一路九州。亂臣割據。不納貢賊且二十餘年矣。西邊海島頑民。觀釁出沒。非我所爲。是故朝廷遣將征討。深入其地。留陣交鋒。日以相戰。庶幾克復九州。則誓天指日。禁約海寇。時興儒年僅六十。紿曰。吾今百有五十矣。倭人駢闐聚觀。至有畫像作讚而贈之。○倭寇扶寧。051_380d邊安烈等進擊大破之。
倭寇晉州溟珍縣。又焚掠咸安,東萊,梁州,彦陽,機張,固城永善等處。
倭寇晉州班城縣。又寇蔚州,會原,義昌等縣。殺掠殆盡。又寇密城郡及東萊縣。
倭焚合浦營。屠燒梁,蔚二州及義昌,會原,咸安,鎭海,固城,班城,東平,東萊,機張等縣。先是。元帥金縝。大集一道倡妓有姿色者。日與麾下。晝夜酣飮。軍中號曰燒酒徒。以縝嗜燒酒也。卒伍偏裨。有犯必鞭辱。一軍憤怨。及寇至。軍士却立不戰曰。元帥使燒酒徒擊賊。051_381a我軍何爲。以故敗。
三年春正月。倭盗會原倉品米。時軍餉不足。令州郡隨品出米有差。謂之品米。○以金縝敗軍。廢爲民。流加德島。斬其千戶二人。杖軍官有差。
二月。倭寇新平縣。倭寇慶陽。遂入平澤縣。楊廣道副元帥印海。與戰不克。○召募良家子弟善射御者及郡縣吏有膂力者。防倭。覈諸司員吏吿歸田里。久不還者。削職收其田。給有戰功者。
三月。賊夜入窄梁。焚戰艦五十餘艘。海明如晝。死者千餘人。萬戶孫光裕中流矢。乘釣船僅免。先是。崔瑩051_381b戒光裕曰耀兵窄梁江口。愼勿出海。是日光裕纔岀窄梁。大醉熟眠。賊突至。遂見敗。京城大震。
倭又寇江華府。萬戶金之瑞,府使鄭彦龍。遁于摩尼山。賊遂大掠。虜之瑞妻而去。府使妻女三人遇賊。義不汚。相携赴江而死。下光裕,之瑞,彦龍于獄。
判開城府事羅世淸。提兵入江華。擊走倭賊。禑壯其志。賜廏馬二匹。遂遣世淸及李元桂,姜永,朴壽年,趙思敏。擊倭于江華。都統使崔瑩。次昇天府以備之。賊乃棄江華。退寇守安,通津,童城等縣。所過蕭然。至童城語曰。無人呵禁。誠樂土也。時有童子自賊中逃還。051_381c諸將召問賊所爲。對曰。賊常言所可畏者。惟白髮崔萬戶而已。曩日鴻山之戰。崔萬戶至則麾下士卒。爭先躍馬。蹴踏我衆。甚可畏也。
以李希泌爲東江都元帥。睦仁吉等十一人副之。受守城都統使慶復興節度。黃裳爲西江都元帥。我太祖及邊安烈等十人副之。受京畿都統使李仁任節度。慶尙道元帥禹仁烈。報倭賊自對馬島。蔽海而來。帆檣相望。已遣兵分守要衝。然賊勢方張。防戍處多。以一道兵分軍而守。勢甚孤弱。請遣助戰元帥。以備要害。時江華之賊。逼近京都。國家備禦不暇。又得051_381d此報。罔知所爲。○令諸道募僧。作戰艦。
崔瑩啓曰。喬桐江華。禦寇要害之地。豪强爭占土田。軍資不繼。請罷二邑私田。以充軍食。從之。徙喬桐人老幼於内地。留壯者以治農桑。
崔瑩令諸元帥。各出從事十人。又發愛馬,宮司,倉庫人爲兵。遣戍江華。
夏四月。倭寇蔚州,鷄林。○點五部丁壯爲兵。計屋十間出一丁。九間以下。出資糧器仗。以給軍卒。
倭又寇蔚州。元帥禹仁烈往擊之。斬九級。
金海府使朴葳。擊倭于黃山江口。斬二十九級。賊投051_382a江死者甚衆。遣李光甫。造戰艦于龍津。
倭寇蔚州,梁州,密城。焚掠殆盡。又寇彦陽縣。
倭寇密城郡。禹仁烈與戰敗績。寇至靈山縣。仁烈及副元帥裴克廉等。戰于栗浦。斬十餘級。
倭舶入西江。崔瑩,邊安烈。出師却之。
倭寇餘美縣。
我太祖與金得齊,李琳,柳㬅殊。往擊倭于慶尙道。
倭寇密城。王賓擊却之。
禑謂巡衛府曰。孫光裕,金之瑞,鄭彦龍之罪。宜以軍法論。然方旱甚。其減死。竝流遠地。崔瑩嘆曰。向曲法051_382b原金縝。今又釋光裕等。政刑如此。何以爲國。禑又賜縝衣馬召還。瑩不可曰。縝不撫士卒。見賊逗遛。以致敗軍。得保首領幸矣。今反厚賜而召還。他日如有樹功者。何以待之。賞罰。人主大柄。不可顚倒。乃止。
以京城濱海倭寇密邇。欲遷都内地。會耆老尹桓等。書動止二字。議可否。衆雖不肯。後若有變。恐禍及己。皆占動字。惟崔瑩否。乃陳徵師固守之䇿。李仁任曰。今赤地千里。農夫輟耕。以望雲霓。而又徵師俾失農業。非爲國之謀也。慶復興,崔瑩等。詣太祖眞殿。卜動止。得止字。禑曰。盗賊密邇。可從卜乎。遣政堂文學權051_382c仲和。相宅于鐵原。
禹仁烈遣精騎五百。夜擊倭于沙佛卽松旨。賊潰。爭舟墜水。中矢者亦多。邏卒又言。賊船隱現海島。不知多少。時我太祖行未至。人心恟懼。仁烈飛報繼至。太祖竝日而行。與賊戰于智異山。相去二百許步。有一賊背立俯身。手扣其臀。示無畏以辱之。太祖用片箭射之。一矢而倒。於是。賊驚懼氣奪。卽大破之。賊衆狼狽登山。臨絶崖。露刃垂槊如蝟毛。官軍不得上。太祖遣裨將。率衆往攻之。裨將還白。巖高峻。馬不得上。太祖叱之。又使恭靖王分麾下勇士。與之偕051_382d行。恭靖王還白。亦如褊裨之言。太祖曰。我當親往見之。乃謂麾下曰。我馬先登。則汝等要當隨之。遂鞭馬互馳。觀其地勢。卽拔劍用刃背打馬。時日方中。劍光如電。馬一躍而登。軍士或推或攀而隨之。於是。奮擊之。賊墜崖死者太半。遂擊餘賊殲焉。太祖素得人心。又士卒精銳。戰無不克。州郡望若雲霓。金海府使朴葳。擊倭于黃山江。敗之。初。倭船五十艘。先至金海南浦。榜示後來賊曰。吾輩適乘風利。泝黃山江。直擣密城。葳偵知之。設伏兩岸。將舟師三十艘以待。賊果見榜。有一大船先入江口。伏發。葳亦突至遮擊。051_383a賊狼狽自刃。投水死殆盡。江州元帥裴克廉。又與倭戰。賊魁覇家臺萬戶。令步卒翼左右。躍馬而前。馬旋濘而止。我軍迎擊斬之。
倭自江華。攻陷楊廣道濱海州郡。初。賊船僅二十二艘。奪我戰艦。多至五十艘。邏卒望見我戰艦。以爲我軍。民皆信之不避。殺傷不可勝計。賊又寇慶陽,安城。楊廣道元帥王安德。怯懦不戰。乃召副元帥印海及陽川元帥洪仁桂。退次加川驛。欲邀擊歸路。賊望見。由他路引去。安德率銳追擊。不克。號天慟哭。擒賊諜訊之。諜曰。吾等議若侵楊廣道。崔瑩必帥師而下。於051_383b是。乘虛直擣。京城可圖也。初。賊入安城。伏兵麻田。使被虜三四人。田于壠上。若農夫然以誘之。水原府使朴承直。聞三元帥至。亦領兵來。問田者曰。賊退否。三元帥何在。紿曰。賊旣退。三元帥追之矣。承直信之。直趍官廨。賊伏發圍之。承直單騎突圍脫走。軍士多被殺虜。自水原至陽城安城。蕭然無復人煙。體覆使崔仁哲。還朝妄言。臣督王安德等。擊倭于稷山。斬五十餘級。禑賜仁哲廏馬白金。賜安德等衣酒廏馬。遣楊伯淵,邊安烈,林堅味等助戰。禑命築宮城于鐵原。崔瑩曰。夏月遷都。恐妨農業。且以京城委賊。國將日蹙。051_383c可乎。事遂寢。
倭賊百餘騎。寇南陽,安城,宗德等縣。又二十艘。復寇江華。殺府使金仁貴。戍卒被虜者以千計。又寇水原府。元帥楊伯淵羅世等。以戰艦五十艘擊走之。世過江華境。有一婦匿水滸指示曰。賊諜入彼人家。世疾趍圍而火之。殺賊二十九人。
烽火自江華。晝擧不絶。京城戒嚴。遣諸元帥分戍東西江。召募勇士。皆賞以官。先給布。人五十疋。倭又寇江華。大肆殺掠。
憲府劾崔仁哲承命出使。擅自還朝。妄獻倭捷。欺瞞051_383d國家。濫受賞賜。請置于法。以懲後來。杖流道死。
倭寇信州,文化等縣。元帥趙仁璧,羅世,沈德符。與戰不克。請濟師。
倭寇順天,樂安等處。兵馬使鄭地。斬十八級。擒三人。○倭寇西海道安州。又寇長澤縣。
禑謂都堂曰。今聞邊民被虜於賊。幸而逃還。皆指謂賊諜。輒殺之。甚不可也。夫懷土。人情之常。況有父母妻子者。孰不思還。特畏死從賊耳。自今凡逃還者。必加褒賞。雖實諜者。毋得殺戮。官給資糧。以遂其生。如有斬倭還國者。賞之加等。其令邊郡張榜以示。違者051_384a罪之。
遣判典客寺事安吉常于日本。請禁賊。吉常至日本病死。
倭賊二百餘艘。寇濟州。○又寇永康,長淵,豐州,安岳,咸從,三和,江西等縣。
禑謂宰相曰。倭雖盗賊。然其死屍。亦當瘞之。況我江華西海之民。死賊暴露甚衆。豈可忍視。出内帑錢布。以資掩埋。
全羅水軍萬戶鄭龍等。聞倭寇濟州。遣兵船二艘。詗獲一艘。盡殺之。
051_384b遣使。修築諸道山城。
倭寇西海道豐州,信州,安岳,鳯州。元帥楊伯益,羅世等。擊之敗績。請遣將助戰。以我太祖及林堅味,邊安烈,柳㬅殊等。爲助戰元帥。
日本遣僧信弘。來報聘書云。草竊之賊。是逋逃輩。不遵我令。未易禁焉。
倭寇海州。九月。太祖與諸元帥。擊倭于海州。安烈,堅味等奔潰。我太祖將戰。置兜䥐於百數十步外。試射之以卜勝否。遂三發皆洞貫曰。今日之事可知。戰於州之東亭子。戰方酣。遇泥濘之地丈餘。太祖051_384c之馬。一踴而過。太祖以大羽箭射賊十七。皆斃之乃縱兵乘之。遂大破之。是戰也。太祖初御大羽箭二十。戰罷餘三矢。謂左右曰。吾皆占射左目眥。汝往觀之。果盡驗。餘賊阻險積柴自固。太祖下馬。據胡床張樂。僧神照割肉進酒。命士卒焚柴。煙焰漲天。賊勢窮。出死力衝突。矢中坐前缾。太祖安坐不起。命金思訓等。擊之幾殲。
倭寇靈光,長沙,牟平,咸豐等地。倭又寇海平,二州地。禑賜崔瑩鉞。使與元帥李希泌,金得齊等擊走之。倭寇岳陽縣。元帥李琳擊之。獲其船二艘。
051_384d遣前大司成鄭夢周。報聘于日本。且請禁賊
倭屠燒洪州。殺牧使池得淸妻。虜判官妻子。楊廣道元帥王安德等。與戰于蘆峴敗績。翌日賊又寇温水縣。焚伊山營。元帥印海等。戰于新橋。夜賊四圍。士卒驚潰。多被殺傷。○賊又自鎭浦入韓州。安德請遣將助戰。禑命商山君金得齊,密直副使睦忠,王赴之。始置火㷁都監。從判事崔茂宣之言也。時元焰焇匠李元。與茂宣同里閈。茂宣竊問其術。使家僮數人私習試之。建白于朝。○命修京城。
倭船四十艘。寇東萊縣。遂徵諸道兵以備之。
051_385a倭寇寧州,牙州。王安德等。與戰于牙州。走之。擒三人。○倭寇咸悅縣。○十一月。倭寇定山,扶餘,鴻山。○倭賊百三十艘。寇金海府。又寇義昌縣。都巡問使裴克廉。與戰敗績。
倭寇守安,童城,通津等縣。
十二月。順天兵馬使鄭地。斬倭四十餘級。擒二人以獻。
四年。倭寇延安府。○倭寇安山,仁州,富平,衿州。○倭寇泰安郡。○倭寇南陽。焚掠水原府。府使愼仁道。僅以身免。元帥王。與戰敗績。請濟師。命密直副使朴051_385b守敬赴之。○倭又寇韓,林二州。
夏四月。判三司事崔瑩等。與倭戰于海豐。大破之。先是倭寇海豐,合德等縣。火都巡問使營。又大集窄梁。入昇天府。聲言將寇京城。中外戒嚴。分命諸軍。出屯東西江。兵衛列於闕門。以待賊至。城中洶洶。令坊里軍登城望候。瑩督諸軍。軍于海豐郡。贊成事楊伯淵副之。賊覘知之。以爲得破瑩軍。則京城可窺。乃經諸屯。捨不與角。趍海豐直向中軍。瑩曰。社稷存亡。在此一戰。遂與伯淵進擊之。賊逐瑩。瑩奔。太祖率精騎直進。與伯淵合擊大敗之。瑩望見賊披靡。率麾下乃051_385c進。從旁擊之。賊殆盡。餘黨夜遁。城中聞瑩被逐。益洶洶莫知所之。禑欲出避。百官裝束累重。會于闕以待。及諸元帥使人獻捷。京城解嚴。百官畢賀。朝廷以爲瑩功。賜號安社功臣。○倭寇西州庇仁縣。又寇水原府。
六月。倭寇淸州。賊鋒甚銳。我軍望風而遁。賊四出攻掠。我軍復乘間襲之。斬十餘級。
日本九州節度使源了俊。使僧信弘。率其軍六十九人。來捕倭賊。
倭又寇木州,寧州,溫水縣。
051_385d以禹仁烈爲慶尙,楊廣,全羅三道都體察使。仁烈獻倭捷。賜酒及鞍馬。
倭寇宗德,松莊,永新等縣。元帥崔公哲,朴守敬等。擊却之。
秋七月。鄭夢周還自日本。九州節度使源了俊。遣周益仁偕來。是行也。人皆危之。夢周略無難色。及至。極陳古今交隣利害。主將敬服。館待甚厚。倭僧有求詩者。援筆立就。緇徒坌集。日擔肩輿。請觀奇勝。及歸。刷還尹明,安遇世等數百人。且禁三島侵掠。夢周又憫倭賊奴我良家子弟。乃謀贖歸。勸諸將各出私貲若051_386a干。且爲書授尹明以遣。賊魁見書辭懇惻。還俘百餘人。自是每明之往。必得俘歸。倭人稱慕夢周不已。後聞其死。莫不嗟惋。至有齋僧薦福者。
倭寇牙州。崔公哲等擊走之。
日本僧信弘。與倭寇戰于兆陽。捕獲一艘。盡斬之。還被擄婦女二十餘人。
八月。慶尙道元帥裴克廉。撃倭于欲知島。斬五十級。○倭寇長興府。都巡問使池湧奇。與戰于會寧縣。擒斬九人。
倭寇延安府及海州。又寇衿州,陽川。
051_386b遣羅世,沈德符等。以戰艦。大索倭賊于諸島。
九月。倭寇瑞州。○倭寇鐵州。又寇益州,公州,尼山,連山,懷德,永同,沃川,靑山等縣。
十月。倭寇林川。又屠燒公州。○遣版圖判書李子庸,前司宰令韓國柱于日本。請禁賊。
倭寇靈光,光州,同福縣。巡問使池湧奇,兵馬使鄭地等。追及於玉果縣。賊入彌羅寺。我軍圍之。縱火奮擊。賊自焚死。獲馬百餘匹。是戰。地之功居多。捷至賜湧奇,地各銀五十兩。
倭寇潭陽縣。池湧奇鄭地與戰。斬十七級。倭又寇益051_386c州。
十二月。倭寇河東縣。又寇晉州。裴克廉追擊于晉州。斬二十餘級。
五年。諫官上言。倭賊日熾。侵掠諸道。而國家待其告急。然後遣將出師。道里悠遠。將帥垂至。而賊已浮海。不及與戰。假令與戰。倂日倍馳。士馬疲困。屢致敗績。請於諸道。預遣將帥。寇至卽擊之。禑納之。
倭寇順天,兆陽等處。鄭地與戰敗績。崔瑩謂慶復興等曰。倭寇侵擾至此。諸相何不憂慮。一鄭地雖勇。其如衆賊何。諸相有慙色。瑩又嘗謂李仁任曰。國家多051_386d難。公爲首相。何不此之憂。但以家産爲念。仁任默然。○倭寇道康,谷城。又寇南原,順天府。
夏四月。以韓邦彦,金用輝等。爲助戰元帥。楊伯淵,洪仁桂等副之。追捕倭賊。民間聞伯淵等來。相語曰。寧逢倭賊。勿逢元帥。○倭寇安山郡。○倭侵延安府。遣延安君羅世以戰艦五十二艘往擊之
倭寇合浦。元帥禹仁烈擊却之。斬四級。仁烈中流矢。我軍死者八十餘人。
五月。倭賊騎七百步二千餘。寇晉州。楊伯淵與禹仁烈等。戰于班城縣。斬十三級。賜物有差。
051_387a倭焚掠豐州。○羅世等。與倭戰于龍岡縣木串浦。獲賊船二艘殲之。
閏月。安州萬戶崔元祉。擊倭于永淸縣。敗之。
倭寇蔚州。又寇鷄林府。日本海盜捕捉軍官朴居士。與倭戰。元帥河乙沚不救。居士軍大敗。先是。韓柱國還自日本。居士率其軍一百八十六人偕來。
倭寇淸道郡。元帥禹仁烈擊之。
憲府劾南原府使盧成達。賊退後火其倉庫。盜米百三十餘石。常與宴樂。不恤民事。請治其罪。成達逃。李仁任曲法庇之。
051_387b倭寇龍州,義州。萬戶張侶擊却之。倭又寇蔚州,淸道,密城,慈仁,彦陽等地。禹仁烈等。與戰于蔚州。獲船七艘。○倭寇樂安郡。
李子庸還自日本。九州節度使源了俊。歸我被虜民二百三十餘人。○倭入武陵島。留半月而去。
倭留蔚州。刈稻黍爲糧。侵入機張,彦陽。掃地無遺。禹仁烈募兵戰于東萊縣。斬七級。
八月。倭寇餘美縣。又寇隨郭二州。○慶尙道元帥禹仁烈等。擊倭于泗州大破。斬四十三級。
倭寇班城縣。登確山頂。樹柵自保。禹仁烈等。合圍攻051_387c克之。斬馘三十四級。○倭又寇丹溪,居昌,冶爐等縣。至于嘉樹縣。都巡問使金光富。與戰敗死。
倭又寇山陰,晉州,泗州,咸陽。時晉州戶長鄭滿如京。賊攔入所居里。滿妻崔氏。携諸子避匿山中。崔年少且美。賊得而欲汚之。露刃以䝱。崔抱樹拒。奮罵曰。死等耳。與其見汚而生。寧死於義。罵不絶口。賊遂害之。○遣使西海,楊廣等道。簽水軍。以備慶尙,全羅等道倭寇。
遣睦仁吉。擊倭于全羅道。先是。仁吉在廟堂颺言曰。倭賊侵掠州郡。吾等在此飽食。略不愧恥。可謂有人051_387d乎。仁任怒其言逼己出之。
以崔瑩兼海道都統使。瑩白禑曰。臣任事旣多。又都統海道。臣恐不堪。且今戰艦纔百艘。戍卒僅三千。臣若行師。當用兵萬餘。倉廩匱竭。何以供給。禑曰。備禦事劇。不獲已以卿兼之。其無固辭。且以吾國軍需。餉萬餘兵。誠難矣。請卿用三千。使一當百。瑩曰。臣已老。不得以時上謁。今幸進見。請陳一言。願殿下操心惕念。百姓安危。皆係上心。禑尋錄瑩功。賜鐵券。○以不能禦倭。杖流元帥崔公哲,安翊。斬都鎭撫二人。
倭寇西州。又倭寇扶餘,定山,雲梯,高山,儒城等縣。遂051_388a入鷄龍山。時婦女嬰孩。避賊登山者。多爲所害。楊廣道元帥金斯革。擊走之。賊遂掠靑陽新豐鴻山而去。○又寇沃州,錦州,咸悅,金堤等縣。全羅道元帥池湧奇。與賊戰于鳴良鄕。奪所俘百餘人。
倭賊五百艘。入鎭浦口。以巨絙相維。分兵守之。遂登岸散入州郡。恣行焚掠。屍蔽山野。轉穀于其舶。米棄地厚尺。羅世,沈德符,崔茂宣等至鎭浦。始用茂宣所製火砲。焚其船。煙焰漲天。賊燒死殆盡。赴海死者亦衆。賊盡殺所俘子女山積。所過波血。惟三百三十餘人。自拔而來。賊脫死者。趨沃州。與登岸賊。合焚利山051_388b永同縣。金斯革追捕倭賊于林州。斬四十六給。○倭寇黃澗,禦侮二縣。又寇中牟化寧,功成,靑利等縣。遂焚尙州。羅世等還。禑賜金各五十兩。裨將鄭龍等。銀各五十兩。
倭焚善州。初。賊在尙州。裵儉自募。請往覘賊。諸元帥許之。及儉至。賊欲殺之。儉笑曰。天下無殺使之國。我國諸將。領精兵無算。戰則必克。然而盡殲汝等何益。汝等占居一邑若何。賊曰。是紿我也。汝國誠欲活我。豈奪舟楫耶。吾亦計之熟矣。飮儉以酒。遂以鐵騎護送。時賊掠得二三歲女兒。剃髮剖腹淨洗。兼奠米酒051_388c祭天。左右張樂羅拜。祭畢。掬分其米而喫。飮酒三鍾。焚其兒。槍柄忽折。卜者曰。吾等留此必敗。卽引軍趨善州。
以我太祖爲楊廣,全羅,慶尙道都巡察使。邊安烈爲體察使以副之。王福命,禹仁烈,都吉敷,朴林宗,洪仁桂,林成味,李元桂爲元帥。皆受太祖節度。師出至長湍。白虹貫日。占者以爲戰勝之兆。賊自鎭海之敗。攻陷郡縣。奮肆殺掠。賊勢益熾。三道沿海之地。蕭然一空。自有倭患。未有如此之比。
倭屯沙斤乃驛。元帥裵克廉等擊之。敗績。士卒死者051_388d五百餘人。賊遂屠咸陽。
倭攻南原山城不克。退焚雲峯縣。屯引月驛。聲言將穀馬于光之金城。北上。中外大震。○我太祖擊倭于雲峯。大破之。時太祖與邊安烈等至南原。裵克廉等來謁于道。莫不懽悅。諸將咸曰。賊負險。不若俟其出與戰。太祖慨然曰。興師敵愾。猶恐不見賊。今遇賊不擊。可乎。遂部署諸將。詰朝誓而東踰雲峯。距賊數十里。至荒山西北。登鼎山峯。太祖見道右險徑曰。賊必出此。襲我後矣。我當趨之。諸將皆由坦途進。望見賊鋒甚銳。不戰而却。時日已昃矣。太祖旣051_389a入險。賊奇銳果突出。太祖以大羽箭二十射之。繼以柳葉箭射之。五十餘發皆中其面。莫不應弦而斃。凡三遇鏖戰殲之。地又泥濘。彼我俱陷其中。相顚仆。及出。死者皆賊。我軍不傷一人。賊據山自固。太祖指揮士卒。分據要害。使麾下李大中等十餘人挑之。太祖仰攻之。賊出死力衝突。我軍奔北而下。太祖顧謂將士曰。堅控轡。勿使馬蹶。旣而太祖復使吹螺整兵。蟻附而上。衝賊陣。有賊將引槊。直趨太祖後甚急。偏將軍李豆蘭躍馬大呼曰。令公視後視後。太祖未及見。豆蘭遂射殪之。太祖馬中矢而仆。易051_389b乘又中仆。又易乘。飛矢中太祖左脚。太祖抽矢。氣壯戰益急。軍士莫有知之者。賊圍太祖數重。太祖與數騎突圍而出。賊又衝突。太祖立殪八人。賊不敢前。太祖誓指天日。麾左右曰。怯者退。我且死戰。將士咸勵。勇氣百倍。人人殊死戰。有一賊將年才十五六。骨貌端麗。驍勇無比。乘白馬。舞槊馳突。所向披靡。莫敢當。我軍稱阿只拔都。爭避之。太祖惜其勇銳。命豆蘭生擒之。豆蘭曰。若欲生擒。必傷人。其人至於面上皆被甲。無隙可射。太祖曰。我射兜鍪頂子。兜鍪落。汝便射之。遂躍馬射之。正中頂子。兜鍪051_389c纓絶而側。其人急正之。太祖卽射之。又中頂子。兜鍪遂落。豆蘭便射殺之。於是賊挫氣。太祖挺身奮擊。銳鋒盡斃。賊痛哭聲如萬牛。棄馬登山。諸軍乘勝馳上。鼓譟震地。四面崩之。遂大破之。川流盡赤。六七日色不變。人不得飮。皆盛器候澄乃飮。獲馬一千六百餘匹。兵仗無筭。初。賊十倍於我。惟七十餘人奔智異山。太祖曰。天下未有殲賊之國。遂不窮追。退而大作軍樂。陳儺戲。軍士皆呼萬歲。獻首級山積。諸將懼治不戰之罪。叩頭流血乞生。太祖曰。在朝廷處分。時被虜者自賊中還言。阿只拔都。望見太祖置051_389d陣整齊。謂其衆曰。觀此兵勢。殊非往日之比。爾輩宜各愼之。初。阿只拔都在其島。年少未習戎。不欲來。衆賊服其勇銳。固請而來。諸賊酋每進見。必趨跪。軍中號令。皆稟而行之。東寧之役。太祖獲其將處明不殺。處明感恩。每見矢㾗。必嗚咽流涕。常隨侍左右。是戰也。處明居馬前。力戰立功。時人稱之。我太祖振旅而還。崔瑩率百官。設綵棚雜戲。班迎天壽寺門前。太祖望見下馬。趨進再拜。瑩亦再拜。前執太祖揮涕曰。非公。孰能爾耶。太祖謝曰。謹奉明公指揮。幸而得捷。予何功焉。瑩曰。公乎公乎。三韓再造。在此一051_390a擧。微公。國將何恃。太祖讓不敢當。禑賜太祖及邊安烈金各五十兩。王福命以下諸將。銀各五十兩。皆辭曰。將帥殺賊職爾。臣何敢受。太祖威名益著。倭國人。必問李萬戶今在何處。伺間乃入寇。
七年。時因倭寇漕運不通。宰相之俸。不過數斛。李仁任曰。以予之祿。頒諸尉正。仁任縱肆貪饕。瘠公肥私。而顧行小惠。以釣虛名。時人譏之。
沿江要衝。皆置元帥。以備海寇。凡十五所。
倭寇江陵道。時是道大飢。備禦甚疏。遣李崇。率交州道兵以禦之。051_390b崔瑩請蠲濱海州郡三年租稅。從之。○倭寇松生,蔚珍,三陟,平海,盈德,寧海等地。遂焚三陟縣。
倭自智異山。逃入無等山。樹柵圭峯寺巖石間。三面峭絶。惟一逕緣崖。僅通一人。都巡問使李乙珍。募敢死百人。乘高下石。以火箭焚其柵。賊窘墜崖。死者甚衆。餘賊走海。竊小舶而遁。前少尹羅公彦。以快船追及。盡殺之。擒十三人。
倭船五十艘。寇金海府圍山城。元帥南秩擊却之。又戰於寧海,蔚州,梁州,彦陽等處。凡五合斬八級。
倭寇蔚珍縣。權玄龍與戰敗之。斬二十級。獲馬七十051_390c匹。○倭寇固城縣。南秩與戰。斬八級。
倭寇潘南縣。元帥池湧奇等。與戰却之。獲一艘焚之。斬九級。賊投水死者亦多。○倭寇林州。都巡問使吳彦。擊之不克。
楊水尺群聚。詐爲倭賊。侵寧越郡。焚公廨民戶。遣林成味等追捕之。獲男女五十餘人,馬二百餘匹。
西海道按廉使李茂。斬所獲楊水尺三十餘人。得馬百匹。諸道按廉守令。各獻所獲水尺及馬匹。下巡軍鞫之。斬其首謀者。沒入妻孥馬匹。餘皆釋之。分置水尺于諸州。比平民差役。有不從令者斬之。
051_390d倭踰竹嶺。寇丹陽郡。元帥邊安烈,韓邦彦等擊破之。斬八十餘級。獲馬二百餘匹。○邊安烈等。擊倭于安東。斬三十餘級。獲馬六十匹。
遣典法判書趙浚。爲慶尙道體覆使。時倭寇甚熾。州郡騷然。民皆奔竄山谷。而國無紀綱。將帥環視不戰。賊勢日盛。浚至。號令嚴明。諸將股栗。連戰告捷。一道之民。賴以稍安。先是。守城人曹希參。扶其母欲避倭於京山府。行至洛東江。無船不得渡。賊追及之。其母曰。吾老且病。死無悔矣。汝其走馬以免。希參曰。母在。子何往。遂與母伏於田間。賊欲刃其母。希參以身蔽051_391a之。爲賊所害。母得以免。京山府人裴仲善之女。爲倭所逐。負其兒至所耶江。江水方漲。裴度不能脫。投入水中。賊至岸。持滿注矢曰。爾來可免死。女曰。烈女。不更二夫。之死不爲汝所辱。賊射之。中其兒。賊引滿又語如前。竟不出遇害。靈山人郞將辛期蕆之女年十六。爲賊所逐。隨父至江。乘船將渡。賊猝至。殺舟中人殆盡。其父亦被害。有一賊執其女下船。女曰。汝殺吾父。不共戴天之讐。寧死不汝從。遂扼賊吭。蹴而倒之。賊怒遂殺之。至是。浚上三人事曰。節行如是。可旌表門閭。以勸後來。遂立石記其事。
051_391b九年春正月。海道副元帥鄭地。擊倭破之。賜金帶一腰,白金五十兩。○鄭地擊倭于南海縣。大破之。時鄭地所將戰艦僅四十七艘。次羅州木浦。賊船百二十艘大至。慶尙沿海州郡大震。合浦元帥柳曼殊告急。地日夜督行。或手自掉。櫓卒益盡力。到蟾津。徵集合浦士卒。賊已至南海之觀音浦。賊勢甚熾。四圍而進。地督兵至朴頭津。賊以大船二十艘。艘置勁卒百四十人爲先鋒。地進攻大破之。賊船十七艘浮屍蔽海。兵馬使尹松中箭死。地謂將佐曰。吾嘗汗馬。破賊多矣。未有如今日之快也。捷音至。禑大喜。遣使連賜宮051_391c醞以勞之。軍器尹房之用。奉使日本。還道遇倭賊被獲。鎖頸置般底。及是戰。賊曰。若不勝。必先斬之。戰罷。賊徒盡殲。之用乃免。
秋七月。禹夏督諸兵馬使。擊倭于義城。斬三級。又戰于禮安,順興。斬十四級。○知順州事黃安信。監運軍糧。竊米七十餘石。有司欲置安信於法。以禑姻戚。止削職。
倭寇比安,義城等處。賊衆我寡。屢戰不利。副元帥尹可觀。與戰于安東,禮安等處。敗績。
倭陷居寧,長水等縣。分兵欲寇全州。副元帥皇甫琳。051_391d戰于礪峴。却之。
禑召密直提學趙浚曰。倭寇大熾。元帥等愞怯不戰。卿可往察軍機。浚曰。殿下若命臣專制。則道內將帥逗遛敗積者。聽臣區處。不然。元帥都巡問使。皆位在臣上。豈畏臣就死地乎。將帥之族忌之。白禑不遣。乃以文達漢爲楊廣,慶尙道體察使。命之曰。往察將帥勤怠軍兵盛衰。其有逗遛不進者。元帥則囚禁以聞。其餘照律直斷。倭賊二百餘騎。寇槐州,長延縣。元帥王安德等。與戰斬三級。
倭賊千餘。寇春陽,寧越,旌善等郡縣。○倭賊千餘。寇051_392a沃州,保令等縣。遂入開泰寺。據鷄龍山。公州牧使有慶,判官宋子浩。與戰于仇岾。子浩敗死。文達漢等。與戰于公州盤龍寺。斬八級。金斯革追擊于木川黑岾。斬二十級。○倭寇江陵府及金化縣。又陷淮陽府及平康縣。京城戒嚴。徵平壤西海道精兵入衛。遣南佐時,安紹等往擊之。戰于金化縣敗績。○倭陷洪川縣。元帥金立堅等與戰。斬五級。
冬十月。都體察使崔公哲。至狼川。倭突出掩擊。體覆使鄭承可。與倭戰于楊口。敗績退屯春州。賊追至春州陷之。遂侵加平縣。元帥朴忠幹。與戰逐之。斬首六051_392b級。賊入據淸平山。以贊成事禹仁烈爲都體察使。與林大匡等。往擊之。
倭寇安邊府歙谷縣。四出擄掠。如蹈無人之境。禑以趙浚爲江陵,交州道都檢察使。○李乙珍等。擊倭于洞山縣。斬二十級。獲馬七十餘匹。賊收餘衆。退泊高城浦。禑賜乙珍等白金有差。知門下府事鄭地。請造戰艦于諸道。以備倭寇。從之。
倭寇長淵縣。西海道上元帥王承寶。與戰敗績。○倭寇同福縣。都巡問使尹有麟等。與戰斬九級。
倭寇水原。府使許操。擒賊諜三人。○海道萬戶尹之051_392c哲。遇倭于德積山。擊走之。獲倭船二艘。得所虜八十人。○海道副元帥曹彦。擊倭于汝走島。獲船一艘。擒三人。禑賜白金五十兩。
倭寇甕津麒麟島。海道萬戶鄭龍。追擊之。○倭寇平海府。體察使睦子安。擊却之。斬五級。
全羅海道元帥陳文瑞。捕倭二十餘級。○倭賊百五十艘。寇咸州,北靑,哈蘭北等處。殺虜人民殆盡。元帥沈德符等。與戰于洪原之大關嶺北。諸將皆敗先遁。惟德符突陣獨入。中槊而墮。賊欲復刺。麾下劉訶郞哈。馳入射之。遂連斃三人。奪賊馬以授德符。轉戰出051_392d陣。於是。德符軍亦大敗。賊勢益熾。太祖請往擊之。至咸州。部署諸將。營中有松在七十步許。太祖召軍士謂曰。我射第幾枝第幾箇松子。汝等觀之。卽以柳葉箭射之。七發七中。皆如所命。軍中皆蹈舞歡呼。明日直指賊所。屯兔兒洞。伏兵於洞之左右。賊衆先據洞內東西山。遙聞螺聲。大驚曰。此李某螺也。太祖率李豆蘭等百餘騎。按轡徐行。過其間。賊見兵少行緩。不測所爲。不敢擊。東賊就西賊爲一屯。太祖登東賊所屯處。據胡床。令軍士解鞍息馬。久之。將上馬。百步許有枯槎。太祖連射三矢皆中之。賊相顧051_393a驚服。太祖令解倭語者。呼謂曰。今主將卽李萬戶也。汝其速降。否則悔無及矣。賊酋對曰。惟命是從。方與其下。議未定。太祖曰。當因其怠而擊之。遂上馬。使豆蘭,趙英珪誘賊。賊先鋒數百追之。太祖陽北。自爲殿。退入伏中。遂回兵親射。賊二十餘人皆應弦而斃。與豆蘭等馳擊之。伏兵又起。於是。太祖身先士卒。單騎出入賊陣數四。所向披靡。麾身斃賊無筭。所射洞徹重甲。或有一矢而人馬俱斃者。賊奔崩。我軍乘之。呼聲動天地。僵尸蔽野。無一人得脫。是戰也。女眞軍乘勝縱殺。太祖令曰。賊窮可哀。勿殺。生擒051_393b之。餘賊入千佛山。亦盡擒之。禑賜太祖白金五十兩,五表裏鞍馬。又加賜定遠十字功臣號。
忠州兵馬使崔雲海。斬倭六級。
初。倭賊皆由丑山島入寇。尹可觀出鎭合浦。建白置船卒。自後倭患稍息。可觀性淸儉。秋毫不取。銷兵器弊棄者爲農器。開屯田以贍軍食。及還。鞍勒破缺。以麻繩補之。
鄭地上疏。自請東征曰。倭非擧國爲盜。其國叛民。分據對馬,一岐。兩島隣於合浦。入寇無時。若聲罪大擧。覆其巢穴。則邊患永除矣。且今水軍。非辛巳東征蒙051_393c漢兵不習舟楫之比也。順風而往。則二島一擧可滅云。
倭寇光州。執前書雲正金彦卿妻金氏以去。欲汚之。金仆地罵賊大叫曰。汝卽殺我。義不辱。遂遇害。倭寇井邑縣。典醫監正景德宜妻安氏。携二子及三婢。匿後園土宇。賊尋得。欲亂之。安罵且拒。賊捽首拔劍䝱之。安極口罵曰。寧死不從汝。賊怒殺之。虜一子一婢而去。又執中郞將李得仁妻李氏。欲汚之。李以死拒。賊遂殺之。
十四年夏四月。倭入椒島。時京城丁壯。皆從軍北征。051_393d惟餘老弱而已。每夜烽火屢擧。京城單虛。人情危懼。莫保朝夕。
倭船十八艘來泊鎭浦。寇傍近州郡。禑遣上護軍陳汝宜于全羅,楊廣道。凡托疾不赴北征。使子弟奴隷代行者。悉令禦倭。避者斷以軍法。籍其産。
楊廣道按廉使田理。報倭寇道內四十餘郡。留兵單弱。如蹈無人之境。乃遣元帥金湊等禦之。令諸妃之在漢陽者。悉還開京。
秋七月。倭陷光州。命皇甫琳等將兵救之。時判典校寺事康好文妻文氏有二兒。負幼携長。將走匿。忽被051_394a虜。欲自絶不肯行。賊擊其頸。逼令前行。又逼棄所負兒。文氏知不免。裹幼兒置樹陰。謂長兒曰。汝且在此。將有收護者。兒勉從之。行至夢佛山極樂庵畔。有石崖高可千尺餘。上有路如線。文氏謂同被虜隣女曰。汚賊求生。不如潔身就死。奮身以墜。賊不及止之。罵極口。殺其兒而去。崖下有蘿蔓。蒲草又密。得不死。折右臂。久而復甦。適里中人先在崖竇。見而哀之。養以饘粥。居三日。聞賊退乃還。鄕里莫不驚嘆。以鄭地爲楊廣等三道都指揮使。時倭寇擾亂三道。所至。將帥守令莫有禦者。以地威名。足以懾伏倭寇。051_394b命與金伯興往擊之。
大司憲趙浚陳時務曰。諸道漁鹽畜牧之蕃。國家之不可無者也。我神聖王之未平百濟,新羅也。先治水軍。親駕樓船。下錦城而有之。諸島之利。皆屬國家。資其財力。遂一三韓。自鴨綠江以南。大抵皆山。肥膏之田。在於濱海。沃野數千里稻田。陷于倭奴。蒹葭際天。國家旣失漁鹽畜牧之利。又失沃野良田之入。願用漢氏募民實塞下。防凶奴故事。許於亡邑荒地開墾者限二十年不稅其田。不役其民。專屬水軍萬戶府。修立城堡。屯聚老弱。遠斥候。謹烽火。居無事時。耕耘051_394c漁鹽冶鑄而食。以時造船。寇至淸野入堡。而水軍擊之。自合浦以至義州皆如此。則不出數年。流亡盡還其鄕邑。而邊境州郡旣實。諸島漸次而充。戰艦多而水軍習。海寇遁而邊鄙寧。漕運易而倉廩實矣。水軍萬戶諸道元帥。能置屯田。修戰艦。結人心。施號令。滅賊安邊。賜之島田。世食其入。傳之子孫。其失一城堡亡一州郡者。處以軍法。毋得輕宥。以示勸懲。全羅,慶尙楊廣三道。貢賦之所出。國家之腹心。今也倭奴橫行。攻陷我州郡。踐踏我禾稼。殺戮我老弱。奴婢我壯丁。而擁旌節者嬰城竄伏。莫有鬪志。賊勢日熾。願令051_394d大擧。及時掃淸。
慶尙道都巡問使朴葳等。擊倭于尙州中牟縣破之。各賜弓馬。
楊廣等道巡問使鄭地等。擊倭于南原大破之。時倭寇三道。自夏及秋。屠燒州郡。晉州牧使李贇戰死。倭又自咸陽。踰雲峯入羅峴。至南原。地。督諸元帥崔雲海等。奮擊大破之。斬五十八級。獲馬六十餘匹。賊夜遁。地以諸軍無食。不能追。賊乃登船而走。人謂非此戰則三道民幾盡矣。昌賜地等宮醞段絹。
西海道觀察使趙云仡將行。上書曰。凡爲國者。當家051_395a給人足內外無患之時。猶且居安思危。綢繆預備。況我本朝。水近倭島。陸連胡地。固不可以不虞也。自西海歷楊廣,全羅。至于慶尙。海道幾二千餘里。有水中可居之州曰。大靑,小靑,喬桐,江華,珍島,絶影,南海,巨濟等大島二十。小島不可勝數。皆有沃壤魚鹽之利。今廢而不資。爲可嘆已。乞於五軍將帥。八道軍官。各給虎符金牌。至于千戶百戶。皆授以牌面。仍以大小海島。爲其食邑。傳諸子孫。則不惟將帥一身之富貴。亦且子孫萬世。衣食有餘矣。誰不人人各自爲戰乎。人人各自爲戰。則戰艦自備。兵糧自齎。各爲游兵而051_395b擊之。則賊不敢窺覦。民得以復業。人獲魚鹽之利。國無漕運之虞。祖宗土地。復全於今日矣。
恭讓王二年。慶尙道元帥朴葳。以兵船一百艘。擊對馬島。燒倭船三百艘。廬舍殆盡。元帥金宗衍,崔七夕繼至。搜被虜民百餘以還。賜諸將衣服鞍馬銀錠獎諭之。人以爲葳但燒廬舍舟楫。實無所俘獲云。○慶尙道都節制使朴葳。捕倭一船。斬三十二級。○京畿節制使朴子安。與倭戰。斬三十級。
秋七月。倭船二十艘來泊海州。遣我恭靖王及柳㬅殊禦之。賜弓矢。
051_395c琉球國中山王察度。遣使來聘。歸我被倭虜掠人口。遣典客令金允厚,副令金仁用。報聘于琉球國。
冬十月。倭寇楊廣道都屯串。都體察使王安德。與戰大敗。
大司憲趙浚等上疏。略曰。軍士與倭奴戰。而所得馬匹器仗與凡民殺賊所得之物。所在官。悉輸京師。以希重賞。罔上毒民。軍士解體。願自今諸道將帥破賊者。獻馘而已。軍民所得倭物。勿令輸送。又曰。比年以來。紀綱陵夷。爲鄕吏者。或稱軍功。冒受官職。或憑雜科。謀避本役。或托權勢。濫陞官秩者。不可勝紀。州郡051_395d一空。八道凋弊。願自今雖三丁一子及三四代免鄕者。無的實文契者。雖軍功免鄕。而無特立奇功。受功牌者。非成均典校典法典醫出身者。自添設奉翊眞差三品以下者。皆勒令還本役。以實州郡。今後鄕吏。不許赴明經雜科。出身免役。以爲恒式。
二年。倭寇楊廣道。至陰竹,陰城,竹州,槐州。遣我恭靖王及尹師德等往討。遇賊于寧州高山下。斬賊百餘級。取所虜男女以歸。
三年。倭寇慶尙道仇羅島。萬戶李興仁擊破之。獲戰艦以獻。賜米二十石。慶尙道水軍萬戶車俊。獲倭船051_396a一艘。王賜帛。
辛禑元年。諭全羅道元帥金先致。誘殺藤經光。先致大具酒食。欲因餉殺之。謀洩。經光率其衆。浮海而去。僅捕三人殺之。先致懼罪。詐報斬七十餘級。事覺編配戍卒。先是。倭寇州郡。不殺人物。自是激怒。每入寇。婦女嬰孩。屠殺無遺。全羅,楊廣濱海州郡。蕭然一空。以添設職賞軍士。自奉翊至七八品無筭。時有車載斗量之譏。
令中外官及吏民奴婢。出穀有差。以補軍食。憲府言。諸道連年旱荒。軍食不給。民轉溝壑。誠可痛心。宜令051_396b守令審歲豐凶之狀。量戶大小。出穀有差。藏之州廩。以救來歲之荒。且備不虞之用。又添設官職。只爲賞軍功也。而無功閑居者。亦或夤緣冒得。使名器至賤。自今除從軍立功外。勿授添職。
諫官上言。國無三年之儲。國非其國也。今中外之廩皆竭。不足以支一年。請令州郡課屯田。以充軍食。易曰。長子帥師。弟子輿尸。凶。今元帥甚衆。令出多門。故體統紊亂。紀綱不立。請依舊制。置一元帥。餘則罷之。加以他號。竝聽元帥節制。工匠之徒。雖或有勞。勿許職。其已受者追奪職牒。以重名器。
051_396c都評議使司上言。比來按廉守令。紀綱不立。諸道鄕吏。縱逞其欲。點兵則不及富戶。收租則私作大斗。匿京丁爲其田。聚良人爲其隷。誅求於民。靡有紀極。宜令御史臺及諸道按廉使。究其元惡。重者極刑。輕者杖流。從之。
左司議權近等上疏曰。國之安危。係乎州縣盛衰。比年以來。外方州縣吏輩。規免本役。皆無實材。出身免役。故鄕吏日減。難支公務。至於守令。無所役使。諸役出身者。退坐其鄕。恣行所欲。守令莫之誰何。是故州縣僅存之吏。皆生覬覦之心。竊恐州縣因此益衰。乞051_396d東堂雜業。監試明經。一皆罷之。
我太祖安邊策若曰。軍民非有統屬。緩急難以相保。是以。先王丙申之敎。以三家爲一戶。統以百戶。統主隷於師營。無事則三家相遞番上。有事則俱出。事急悉發家丁。誠爲良法。近來法弊。無所維擊。每至徵發。散居之民。逃竄山谷。難以招集。乞依丙申之敎。更令軍戶。使有統屬。民之休戚。係於守令。軍之勇怯。在於將帥。今之爲郡縣者。出於權倖之門。恃其勢力。不謹其職。軍缺其須。民失其業。戶口消耗。府庫虛竭。乞自今公選廉謹正直者。使之臨民。又擇堪爲將帥者。051_397a俾之摠戎。捍禦國家。
大司憲趙浚等上疏曰。士大夫之仕宦于朝者。旣已委質從仕。克勤乃職。固其分也。今則不然。顯官任職者。托以覲親省墓。冒干口傳。便歸鄕曲。淹延歲月。曠官廢職。非事君致身之義也。願自今父母奔喪前。不許出關。其事有不獲已者。必辭職然後乃行。違者痛理。
皇明萬曆二十年壬辰四月。日本國王平秀吉。遣將率兵二十餘萬。渡海入寇。陷釜山,東萊等鎭。僉使鄭撥,府使宋象賢死之。自是之後。列郡望風而潰。莫有051_397b禦之者。朝廷遣巡邊使李鎰,申砬等往擊之。鎰敗於尙州。僅以身免。砬敗於忠州。赴水死。其月晦夜。
主上開敦義門。西幸以避之。命領議政李陽元守京城。都元帥金命元守漢江以禦之。車駕出城之後。都中士女一空。奸民乘時焚燒宮殿及庫倉。五月初三日。倭賊入據漢陽。開城,平壤。相繼陷沒。車駕次于龍灣。遣鄭崑壽,申點等。告急于天朝。請兵來援。先是秀吉。放逐前王。盡殺諸島倭酋。遣使于我。請與通好。朝廷欲探其情僞。以黃允吉,金誠一爲使价。許筬爲書狀官報聘。其還也。通書云。中國不許修貢。將051_397c起兵作賊。請假道以往。辭極悖慢。又遣使以來。朝廷不許。卽將此意。馳奏于天朝矣。及是。兵部題準。先遣游擊將軍沈惟敬。多齎金帛。入平壤倭營。誘以講和。使撤其鋒。繼遣提督李如松,都督李如柏,楊元,張世爵等四大將。領兵八萬。擊破平壤。餘賊遁還漢陽。諸道分鈔之賊。莫不陷沒。惟平安安州以西。全羅右道,忠淸右道數十郡僅存耳。癸巳四月。諸道之賊。皆萃于漢陽。退屯于嶺南。天朝又遣摠兵官劉綎,駱尙志,宋大贇,吳惟忠等。相繼領兵出來。賊酋淸正,平行長等。還我被虜王子二人及宰相。要與講和而051_397d退兵。朝廷不許。倡義使金千鎰,兵使崔慶會,黃進等守晉州。相拒廾餘日。諸賊合力攻圍。七月初見陷。千鎰等皆死之。城中無少長盡屠之。天將劉綎等。駐兵數息地。而不敢往救。退住于南原。明年甲午撤兵而還。惟留吳惟忠,駱尙志等數將。將兵數千以防戍。天朝遣臨淮侯李宗城,摠兵官楊方亨等于日本。冊秀吉爲其國王。賜以金印綵幣銀兩等物。勅令講和收兵。李宗城在釜山倭營。脫身逃還。方亨與沈惟敬渡海至日本。秀吉大陳兵威以䝱之。拒不奉命。天朝大怒更發兵。以楊元爲先鋒將。麻貴,劉綎爲左右051_398a提督。陳璘爲水軍提督。遼東布政使楊鎬爲經理。兵部侍郞邢玠爲軍門總督使。前後調發十二萬兵。運糧數十萬石。○丁酉七月。倭賊掩擊我軍。統制使元均,水使李億祺,崔湖等皆敗死。賊踰咸陽至南原。天將楊元。率兵七千禦之。大敗。僅以身免。遂分兵北上。肆搶掠。全羅,忠淸右道餘郡。盡被焚燒。所獲我國人民生還者。皆割其鼻。兩南士族浮海避亂者。太半被虜。數千里內。無復人煙。兵火之慘。甚於壬辰。賊至稷山將逼京城。城中士女。逃散一空。適値楊經理至漢陽未久。遣麻貴等領兵逆擊之。賊退屯慶尙之蔚051_398b山山城,全羅之順天水營等地。楊經理率大軍攻蔚山之賊。合圍累日不克。大敗而還。劉綎與陳璘合攻順天之賊。累日不克。請與講解。倭賊又聞其國王秀吉身死。交質而退。我軍追擊之。統制使李舜臣中丸而死。戊戌秋。賊兵盡數撤兵而還。天朝士馬。前後死亡。無慮數萬人匹云。謹按日本世系。始祖狹野。建國于周平王東遷之後。或云泰伯,仲雍之後。自百越之地。流入海島。仍王其地。秦始皇時。徐市托以採樂。率童男女數千。浮海以往。死焉。至今立祠以祀之。醜種之䌓。蓋始於此云。天051_398c限溟海。不與中國相通。自周歷秦,漢三國,東西晉,南北朝。以迄于唐,宋,五代。未聞有倭國之稱。至隋文帝時。日本致書。有日生處天子之語而已。以東史攷之。新羅赫居世八年。倭始來寇。其後代有侵寇。而數不過數千。攻不過一二城而止耳。三國開基。而惟新羅見侵。餘二國有不及焉。至如前朝之末。倭寇之慘。雖曰前古未有。而亦不過攻陷一道而止耳。亦止於西海一道而已。非有大志而然也。賊之酋長。只稱九州節度而已。未知國王之稱。始於何時耶。我朝庚午三浦之變酷矣。而不過對馬島之賊也。乙卯達梁之051_398d禍慘矣。而不過攻陷數三鎭堡也。越至于今。傾國入寇。數旬之內。連陷八道。器械之精。士馬之强。雖以中國當之。莫能必勝。其禍蔓延。十年猶未已。不知天將厚其凶惡。而使之覆亡無遺育耶。抑將如金如元値百年。而天亦任其所爲而然耶。陰陽消長之幾。世道治亂之運。非識微之君子。孰能知哉。噫。己亥仲冬。四留子。書于貞洲精舍。
四留齋集卷之十

歸鹿集卷之十八
 
明見樓記 甲寅 a_213_097a


府城之設。在我太祖大王擧義回軍之年。觀察使崔有慶實主之云。旣歷年久。壞敗無餘地。盖以威鳳城。爲早晩緩急之歸。視此爲棄地。而未有肯修葺者213_097b故也。某窃以爲道臣受一面安危之托。雖平居無事。重門禦暴。宜有其術。况當危急。人心去就。惟道臣動靜是視。而所居無崇墉峻壁之衛。倉卒捧頭鼠竄。則一擧足而千里封壃。遂非其有矣。且本州以湖嶺都會。爲湖西出入之咽喉。爲道臣者。當以一身。毅然任蔽遮江淮之責。勢窮力盡。則死之而已。若或棄而之他。賊且遵大路皷行。其孰能禦之。然則威鳳固險矣。然懦㥘無膽氣。全軀保妻子者。去而避亂則可矣。將以控扼要衝。藩衛王室。則不亦左乎。於是。不謀於衆。斷然爲改築之計。乃以按道之翌年甲寅正月甲申。告祭城隍。掇舊城。伐石于黃坊之山黑石之洞。二月213_097c三月運石。四月五月六月。參新舊石築之。七月八月。設虹霓建門樓。於是乎城之事訖。而通判具侯聖弼,中軍前縣監崔德中幹之也。方始事。不悅者造謗流布。㙜臣啓請停罷。廟堂之臣。亦多言其不便。獨上以爲若已始役。則不可中掇。遂有下詢之命。臣某上䟽。具言自初經紀之張本。所需財力之出處。與夫雇用役丁。不役農民狀。仍請堅定聖志。勿撓浮議。上賜批曰。卿之經始。實有意見。不撓在予。卒事惟卿。臣某拜稽祗承。布告將吏。將吏皆感激懽欣。趍事益勤。遂不日而成。夫路傍之舍。理宜無成。實賴天日之明。洞達於堂陛之外。而不見奪於浮嘵之論。213_097d雖以某之無似。奉而周旋。得有成功。是不可無識也。遂以名南門之樓曰明見樓。所謂相西,判東,中車門之名。亦各有其義也。城周幾步。雉與堞幾。用丁夫幾。錢糓布炭鐵灰幾。都監牌將色吏姓名等。築城謄錄可考也。坤止山在城南。去城不三百步。賊若臨之。城必殆矣。後之臨亂欲守此城者。不可不知此而先有以啚之也。巽書于此。


西山先生文集卷之十六
 
文貞公杏村李先生遺墟碑銘 幷序 a_321_314a


鐵嶺西門外。有村曰松谷。北戴天王。南挹漲海。中藏一區。局勢環抱。儼然如臨朝老相。總百官而贊萬機。又如大將行師。指揮有法。壁壘部伍。321_314b井井不亂。我文貞李先生遺墟云。按玄陵己亥冬。漢賊數十萬。冰渡鴨綠。進薄西京。朝廷謀元帥。僉曰敦詩說禮。惟李侍中可。時先生以三朝老相。退臥丘樊。王遣內臣起之。星夜馳赴。諸軍未集。賊勢猖獗。西京守臣。謀守不可。欲焚倉廩。先生曰非計也。賊遠鬭。精銳不可當。若不中止。其勢必震我國都。不如姑㗖以此城。鐍倉廩東走。賊必怯我。且少駐。怯我心驕。少駐氣衰。待吾軍集。可一鼓襲取。未幾賊果敗。明年冬。扈駕南州。謂鄭摠兵世雲曰。天下安。駐意相。天下危。駐321_314c意將。余儒臣。懦不能軍。子其勉之。及賊平行賞。先生居第一。乃面奏。不幸罹玆多故。將相須材。臣以無狀。久叨左揆。請避賢。王愈益嘉之。加賜功。封鐵城君。今松谷左右土田山澤。皆其采食也。猗歟盛哉。先生鍾海嶽以降。而海嶽遇先生以重。則所謂地由人而勝者歟。日裔孫象義。與族人珒,珷。奉實記一。示興洛曰。先生畏壘之祝在葛川。輒毁於邦禁。則謀所以豎石遺墟。垂示永久。乞以是銘諸。興洛受而讀之。有曰先生自髫齔異凡。入小學。已淹貫旨義。弱冠登第。益321_314d勵志篤學。筆法與趙子昂相埒。文章高古簡潔。大爲元朝諸學士所歎賞。居家不問有無。淡如也。居官勤謹守繩墨。常以盛滿爲戒。屢召而進。一辭而退。爲泮長也。有旨曰。成均師道所在。任亦重矣。左右予理。實兩府其職。奉王如元也。命聽斷國務。還卽有旨曰。先王舊臣。惟李嵒有德。可輔予政。其知貢擧。甄拔稱材。故門生多聞人。其掌銓選。予奪無私。故朝廷無怨言。在樞密時。用事者詆訕我儒。先生隻手匡救。斯文賴焉。西征時。有以秘術破賊者。先生以爲惑亂軍情。執321_315a送于京。年六十乞骸。乃曰吾老矣。無官守無言責。當以格君心爲務。手寫太甲篇諫王。又嘗類聚食貨種息之法。爲農桑輯要。葢亦無逸陳戒之意也。興洛讀畢。喟然曰否否。先生名在鼎彝。事在史策。一片貞珉。何足重輕。無已則題曰文貞公杏村先生遺墟足矣。焉用文爲。惟世系履歷及宗派之分。不可不載。遂忘其僭而敍之世系曰。鐵城之李。以戶部尙書諱璜爲鼻祖。其後有諱瑨承文學士。恥胡元威制。隱不仕。自號文山道人。元宗勅加節士二字。生諱尊庇。儒術事321_315b忠烈王。判密直謚文僖。生諱瑀門下侍中鐵城君謚文憲。娶咸陽君朴之亮女。以慶陵丁酉。生先生。諱嵒字古雲。杏村號也。履歷曰年十七中癸丑科。懿陵愛其才。命典符印。除秘書校勘。俄陞正郞。辛未以典儀令。擢密直代言監察執義。庚辰拜知申事。改成均大司成。尋遷政堂文學僉議評理。前後知貢擧者三。提調政房者二。乙酉加贊成事。己丑如元還。拜左政丞錄勳。壬辰襲父封鐵原。癸巳乞骸。戊戌復爲侍中。己亥拜都元帥。辛丑從幸福州。壬寅致仕奉朝賀。癸卯321_315c策扈從一等功。圖形壁上。賜推誠守義同德贊化翊祚功臣號。甲辰五月卒。有司供禮葬。太常謚文貞。明年。王親寫眞賜祭。配享忠定廟。宗派曰子男四人。曰寅門下評理固城君。曰崇侍中謚安靖。曰蔭平毛賊功。拜上將軍。辛丑戰歿。曰岡大提學謚文敬。女二人。金光丙判事,趙愼府使。寅子曰吉祥府使。曰文資典書。崇子曰岷判尹。曰嶙司宰監。曰峙府使。曰延壽小尹。女崔安璿知州事。崔有慶參贊謚平度。趙浚領議政謚文忠。金祉奉禮郞。蔭子曰彬密直班主。岡子曰321_315d原左議政鐵城君謚襄憲。女權近左贊成謚文忠。閔開都評議漢陽君。李良幹郡事。曾玄以下。世有名碩。如承旨臺,左尹垤,縣監增,司諫墀,參判謚貞肅則,留守浤,佐郞洺,參判陸,參議陌,副提學胤,正言胄,修撰膂。節行事業。煇耀國乘。疊璧聯珠。多不勝錄。象羲卽佐郞十七世孫也。銘曰。
天眷大東。篤生文貞。蘊畜皇王。爲國榦楨。時尙夷陋。異言喧轟。獨立詆排。斯道以明。遂開政府。總務專聽。持謙戒盈。浩歸淸平。江湖亦憂。太甲321_316a書呈。格君一言。無媿老成。王曰無遐。予嘉乃誠同朝胥慶。復作阿衡。猘彼狂冦。蹂我西城。詩禮元戎。籌策紆宏。一鼓掃除。扈駕還京。功首麟閣。禮配廟庭。大旣葢世。其細奚評。爰有儒祠。在葛之汀。運極陽九。廢撤豆鉶。乃謀伐石。表厥衖閎。海闊山長。彌久令名。我銘其陰。實有光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