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 조선청백리 /전주최씨 청백리 (최사의)

전주최씨 조선 청백리 휘 사강 관련기사

아베베1 2011. 4. 3. 14:11

 

최사강(崔士康)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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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경절(敬節)
생졸년 1388 (우왕 14) - 1443 (세종 25)
시대 조선 전기
본관 전주(全州)
활동분야 문신 > 문신

[관련정보]

[상세내용]

최사강(崔士康)에 대하여
1388년(우왕 14)∼1443년(세종 25).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아버지는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 유경(有慶)이며, 어머니는 시중(侍中) 이종지(李宗之)의 딸이다.
부음으로 사관(仕官), 1416년(태종 16) 2월 중군경력(中軍經歷) 재직중에 장녀가 태종 왕자인 성녕군(誠寧君)에게 출가하면서 현귀(顯貴), 곧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에 초천(超遷)되었다.
1418년(세종 즉위) 9월에는 다시 당상관에 오르면서 승정원동부대언(承政院同副代言)에 발탁, 우부대언을 거쳐 다음해 12월에 예조참의, 1420년 3월에 경기도도관찰사로 파견되었다.
1421년 12월 경상도도관찰사에 전임되고 이듬해 12월 중군동지총제(中軍同知摠制)로 입조, 1423년 3월 병조참판, 이후 1431년까지 좌군동지총제·호조참판·대사헌·병조참판·이조참판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병조판서에 승진, 세종의 총애가 계속되는 가운데 1434년 1월 장남인 고봉례랑(故奉禮郞) 승녕(承寧)의 딸이 세종 왕자인 임영대군(臨瀛大君)에게 출가, 1436년 12월 의정부참찬에 개수되었다.
이듬해 2월 차녀가 다시 세종 왕자인 금성대군(錦城大君)과 혼인, 같은달에 전년의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 議政府擬議制) 실시와 관련된 찬성·참찬의 각 1인 증치 및 좌·우로 세분됨에 따라 의정부우참찬에 개수되었다.
1441년 9월 의정부우찬성에 승진, 이듬해 6월 판이조사(判吏曹事)를 겸대하였고, 같은해 8∼12월에 걸쳐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를 내왕하다가 죽었다.
왕실과 연혼하면서 갑자기 현귀하였으나 분수를 지킨 까닭에 세종의 은총이 떠나지 않았고, 이를 배경으로 의정부·육조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세종성세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시호는 경절(敬節)이다.

[참고문헌]

太宗實錄 世宗實錄  國朝人物考  崔士康遺事  崔有慶墓表   璿源系譜 朝鮮初期 判吏·兵曹事硏究(韓忠熙, 韓國學論集 11, 1984)

 

 

인물 사전

세종(世宗)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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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元正)
시호 장헌(莊憲)
생졸년 1397 (태조 6) - 1450 (세종 32)
시대 조선 전기
본관 전주(全州)
활동분야 왕실 > 왕

[관련정보]

[상세내용]

세종(世宗)에 대하여
1397년(태조 6)∼1450년(세종 32). 조선 제4대왕. 재위 1418∼1450년.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도(祹), 자는 원정(元正).
1. 가계
태종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이고, 비는 심온(沈溫)의 딸 소헌왕후(昭憲王后)이다.
1408년(태종 8)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지고, 1412년 충녕대군에 진봉(進封)되었으며, 1418년 6월 왕세자에 책봉되었다가 같은해 8월에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2. 즉위과정
원래 태종의 뒤를 이을 왕세자는 양녕대군(讓寧大君)이었으나 개와 매〔鷹〕에 관계된 사건을 비롯한 세자의 일련의 행동과 일들이 태종의 선위에 대한 마음을 동요시켰으며, 또한 태종은 자신이 애써 이룩한 정치적 안정과 왕권을 이어받아 훌륭한 정치를 펴기에 양녕대군이 적합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였다.
태종의 마음이 이미 세자 양녕대군에게서 떠난 것을 알게 된 신료(臣僚)들은 그를 폐위할 것을 청하는 소(疏)를 올려 양녕대군을 폐하고 충녕대군왕세자로 삼기에 이르렀다.
즉, 태종에게는 왕후 민씨 소생으로 양녕·효령(孝寧)·충녕·성녕(誠寧) 등 네 대군이 있었는데, 이때 양녕대군은 벌써 두 아들이 있었으므로 그를 폐하고 새로이 세자를 세우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세자폐립에 대한 의론이 분분하였다.
그러나 태종의 마음은 이미 셋째아들인 충녕대군에게 쏠려 있었다.
1418년 6월에 태종은 “충녕대군은 천성이 총민하고 또 학문에 독실하며 정치하는 방법 등도 잘 안다.” 하여 그를 세자로 책봉하도록 결정을 내렸다. 이처럼 충녕대군에 대한 세자책봉은 태종의 뜻에 따라 극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대부분의 신하들도 이를 환영하였다.
두달 뒤인 1418년 8월 10일 태종의 내선(內禪)을 받아 세자 충녕대군이 왕위에 올랐으니 이 사람이 세종이다.
3. 유교정치의 기틀마련
세종대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유교정치, 찬란한 문화가 이룩된 시대였다. 이 시기에는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전반적인 기틀을 잡은 시기였다.
즉, 집현전을 통하여 많은 인재가 배양되었고, 유교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제도가 정비되었으며, 다양하고 방대한 편찬사업이 이루어졌다.
또, 훈민정음의 창제, 농업과 과학기술의 발전, 의약기술과 음악 및 법제의 정리, 공법(貢法)의 제정, 국토의 확장 등 수많은 사업을 통하여 민족국가의 기틀을 확고히 하였다. 세종 4년까지는 태종이 상왕으로 생존하여 있었으므로 태종의 영향이 계속된 시기였다.
1414년(태종 14)에 이룩된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는 의정부 대신의 정치적 권한을 크게 제약하고 왕권의 강화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인데, 세종은 이러한 정치체제를 이어받아 태종대에 이룩한 왕권을 계속 유지하면서 소신있는 정치를 추진할 수 있었다.
세종대는 개국공신세력은 이미 사라지고 과거를 통하여 정계에 진출한 유자적(儒者的)관료와 유자적 소양을 지닌 국왕이 서로 만나 유교정치를 펼 수 있었던 시기였다. 세종대의 권력구조나 정치적인 분위기는 1436년(세종 18)을 전후로 하여 두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즉, 1436년(세종 18)에는 육조직계제가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로 개혁된 정치체제상의 변혁이 있었고, 이듬해는 세자(世子: 뒤의 문종)로 하여금 서무(庶務)를 재결(裁決)하도록 하였으며 그 이전에 비하여 정치적 분위기는 더욱 안정되고 유연하게 되어갔다.
따라서, 언관(言官)과 언론에 대한 왕의 태도도 비교적 강경한 자세를 보였던 그 이전에 비하여 훨씬 자유롭고 부드러워져서 이들에 대한 탄압이나 징계는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이와같이 정치적 분위기가 변한 원인은 유교정치의 진전에서 찾을 수도 있다.
즉, 세종 전반기에 집현전을 통하여 많은 학자가 양성되었고, 그 학자들이 동원되어 유교적 의례·제도의 정리와 수많은 편찬사업이 이룩되어 유교정치기반이 진전되었고 1436년(세종 18)에 육조직계제에서 의정부서사제로의 이행도 유교정치의 진전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같은 정치체제로 변화하게 된 더 중요한 원인은 왕의 건강문제와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세종은 일찍이 신병때문에 고통을 받아왔으므로, 정무가 왕에게 폭주하는 육조직계제는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즉, 유교정치를 펼 수 있었던 기틀은 정치적·제도적·문화적 기반의 성립, 왕권의 안정, 그리고 왕의 건강의 악화 등에 있었다. 이러한 요소들이 세종 전반기와 그 후반기의 정치적 분위기를 변화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후반기에 왕의 건강이 극히 악화되기는 하였으나 의정부서사제 아래에서 군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룬 가운데 성세를 구가한 시대였다.
황희(黃喜)를 비롯, 최윤덕(崔潤德)·신개(申槩)·하연(河演)의정부 대신들은 중후하고 온건한 자세로 왕을 보좌하였고, 관료들의 정치기강도 그 전후에 비하여 건전하였으며, 언관의 언론도 이상적인 유교정치를 구현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 이러한 정치체제와 정치적 분위기도 세종시대를 이룩하는 데 작용한 요소였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집현전세종세종대를 운위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기관이다. 집현전중국고려시대에도 있었던 제도였고 조선정종대에도 설치된 일이 있으나, 조선시대의 집현전이라고 하면 세종 2년 3월에 설치한 것을 의미한다.
이때에 집현전을 설치하게 된 목적은 조선이 표방한 유교정치와 대명(對明)사대관계를 원만히 수행하는 데 필요한 인재의 양성과 학문의 진흥에 있었다.
이에 따라 유망한 소장학자들을 채용하여 집현전을 채웠고, 그들에게 여러가지 특전을 주었으며,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내려 학문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곳에 소속된 관원은 경연관·서연관·시관(試官)·사관(史官)·지제교의 직책을 겸하였고, 중국의 옛 제도를 연구하거나 각종 서적의 편찬사업에 동원되는 등 그들의 직무는 주로 학술적인 것이었다.
왕은 이들이 학술로써 종신할 것을 희망하였으므로 다른 관부에는 전직도 시키지 않고 집현전에만 10년에서 20년 가까이 있게 하였다. 그 결과 수많은 쟁쟁한 인재를 배출하였는데, 이러한 인적자원이 바로 세종대의 찬란한 문화와 유교정치의 발전을 이루게 한 원동력이 된 것이다.
유교적인 의례·제도의 정리는 유교정치의 기본이 되는 작업으로서, 이를 위하여 중국의 옛 제도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였다. 중국의 옛 제도에 대한 관심은 개국초부터 있어왔으나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된 것은 바로 세종이 즉위한 이후부터였으며, 그 중심이 된 기관도 예조·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집현전 등이었다.
이러한 기관에서 국가의 유교적 의례인 오례(五禮: 吉禮·嘉禮·賓禮·軍禮·凶禮)와 사서(士庶)의 유교적 의례인 사례(四禮: 冠禮·婚禮·喪禮·祭禮) 등 유교적인 제반 제도가 정리되었다. 실제로 조선시대의 유교적인 의례·제도의 틀은 세종대에 짜여져서 유교정치의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그런데 이때에 정리된 의례·제도의 틀은 중국의 옛 제도에 의한 것이었으나 왕은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를 비판, 연구하여 조선의 실정에 맞지 않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주체성을 견지하였던 것이다.
4. 편찬사업의 융성
세종대에 전개된 다양하고 방대한 편찬사업은 이 시대의 문화수준을 높이는 데 기본이 되었다. 이 사업을 통하여 문화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정리가 이루어졌고 정치·제도의 기틀이 잡혀갔다. 이 사업의 주도자는 물론 세종이었고, 이 일을 담당한 것은 집현전과 여기에 소속된 학자들이었다.
또, 이 사업은 집현전 학자들의 학문이 향상되고 일할 수 있는 준비가 이루어진 세종 1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이 편찬물을 내용별로 분류하면 역사서, 유교경서, 유교윤리와 의례, 중국의 법률 및 문학서, 정치귀감서, 훈민정음·음운·언역(諺譯)관계서, 지리서, 천문·역수서, 농서 등으로 다양하고 방대한 것이었다.
즉, 정치·법률·역사·유교·문학·어학·천문·지리·의약·농업기술 등 각 분야에 걸쳐 종합정리하는 사업이었고, 이 작업을 통하여 이 시대의 문화수준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5. 훈민정음의 창제
훈민정음의 창제는 세종이 남긴 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빛나는 것일 뿐 아니라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것임에 틀림없다.
세종집현전을 통하여 길러낸 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이선로(李善老)·이개(李塏) 등 소장 학자들의 협력을 받아 우리 민족의 문자를 창제하였던 것이니, 이 시대의 문화의식과 그 수준이 어떠하였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6. 과학기술의 발전과 기술서적의 편찬
이 시기는 과학과 기술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크게 발전을 보았다.
천문대와 천문관측기계 방면에서의 발전이 이러한 측면의 하나로 꼽힌다. 조선 초기 서운관에는 천문을 관측하기 위하여 두 곳에 간의대(簡儀臺)를 설치한 바 있으나, 이것은 아주 미흡한 것이었다.1432년(세종 14)부터 시작된 대규모의 천문의상(天文儀象)의 제작사업과 함께 경복궁의 경회루 북쪽에 높이 약 6.3m, 길이 약 9.1m, 넓이 약 6.6m의 석축간의대가 1434년(세종 16)에 준공되었고, 이 간의대에는 혼천의(渾天儀)·혼상(渾象)·규표(圭表)와 방위(方位) 지정표(指定表)인 정방안(正方案) 등이 설치되었다. 1438년(세종 20) 3월부터 이 간의대에서 서운관의 관원들이 매일밤 천문을 관측하였다. 이러한 간의대와 그 중요한 시설물들은 중국과 이슬람의 영향과 전통적인 요소들이 함께 들어 있는 것이었다.
혼천의는 천체관측기계로서 문헌상으로는 1433년(세종 15) 6월에 만들어진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이며, 같은해 8월에 또 하나가 만들어졌는데 정초(鄭招)·정인지(鄭麟趾) 등에게 고전(古典)을 조사하게 하는 한편 장영실(蔣英實) 등 기술자들에게 실제 제작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 혼천의는 천구의(天球儀)와 함께 물레바퀴를 동력으로 하여 움직이는 시계장치와 연결되어 천체의 운행과 맞게 돌아가도록 되어 있어서 일종의 천문시계의 성격도 가졌다.
또한, 시간을 측정하는 해시계와 물시계도 제작되었다.
해시계로는 앙부일구(仰釜日晷)·현주일구(懸珠日晷)·천평일구(天平日晷)·정남일구(定南日晷) 등이 있고, 물시계로는 자격루(自擊漏)와 옥루(玉漏)가 있다.
앙부일구는 우매한 백성들을 위하여 혜정교(惠政橋)와 종묘 남쪽의 거리에 설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공중시계(公衆時計)였고, 현주일구와 천평일구는 휴대용시계였으며, 정남일구는 매우 정밀한 해시계로 이것으로 관측하면 자연히 남쪽이 정해지면서 시각을 알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해시계는 갠 날과 낮에만 쓸 수 있는 것이므로, 공적인 표준시계로는 물시계가 더 유용하였는데 자격루가 그것이다.
자동시보장치가 붙은 물시계인 자격루는 세종이 크게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장영실을 특별히 등용하여 이의 제작에 전념하게 하여 1434년(세종 16)에 완성하였는데, 그것은 경복궁 남쪽의 보루각(報漏閣)에 설치되어 조선시대의 표준시계로 이용하였다. 1438년(세종 20)에는 장영실에 의하여 또 다른 자동물시계이며 천상시계인 옥루가 완성되었다.
세종은 천문·역서(曆書)의 정리와 편찬에도 큰 관심을 가져 《칠정산내편 七政算內篇》·《칠정산외편 七政算外篇》·《제가역상집 諸家曆象集》 등이 편찬되었다. 1433년(세종 15)에는 정인지·정초·정흠지(鄭欽之)·김담(金淡)·이순지(李純之) 등에게 《칠정산내편》을 편찬하게 하였으며, 1442년(세종 24)에 완성되어 2년 만에 간행되었다.
《칠정산외편》이순지·김담에 의하여 편찬되었는데, 이것은 당시 가장 완전한 이슬람 천문학서의 번역본이라 하겠다. 이 《칠정산내외편》의 편찬으로 조선의 역법(曆法)은 완전히 정비되었다.
또한, 세종 1445년(세종 27)에는 이순지에 의하여 《제가역상집》이 편찬되었다. 이 책은 세종대에 이룩한 천문·역법의 총정리작업과 천문의상제작의 이론적 근거를 찾기 위한 고문헌(古文獻)조사사업의 결산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높은 수준의 중국 천문학사라고 평가할 수 있다.
측우기의 발명도 이 시기 과학기술의 발달에 있어서 주목할만한 업적이다. 농업국가인 조선시대에 있어서 강우량의 과학적 측정은 매우 큰 뜻을 가진다고 하겠다.
측우기는 1441년(세종 23) 8월에 발명되어 새로운 강우량의 측정제도가 마련되었고, 그 미흡한 점은 이듬해 5월에 개량, 완성되었다. 이 측우기를 발명하여 강우량을 측정함으로써 농업기상학의 괄목할만한 진전을 이룩한 것이다.
또, 조선시대의 도량형제도도 세종대에 확정되었다.
즉, 1431년(세종 13)과 1446년(세종 28)에 확정된 도량형제도가 그뒤 《경국대전》에 그대로 법제화되었다. 이 제도는 12율(律)의 기본음인 황종률(黃鐘律)을 낼 수 있는 황종관(黃鐘管)을 표준기(標準器)로 삼은 것으로서, 황종관의 길이는 자〔尺〕로 길이의 단위를 삼았고, 그 속에 담기는 물은 무게의 단위로 삼은 것이었다.
인쇄술에 있어서도 세종대는 특기할만한 발전을 이룩하였다.
1403년(태종 3)에 주조된 청동활자인 계미자(癸未字)의 결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세종 2년에 새로운 청동활자인 경자자(庚子字)를 만들었고, 1434년(세종 16)에는 더욱 정교한 갑인자(甲寅字)를 주조하였다.
세종은 계미자 인쇄기의 결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세종 2년에 새로운 청동활자인 경자자와 인쇄기를 만들게 하여 활자의 주조와 인쇄기술상의 큰 발전을 가져왔다. 1434년(세종 16)에는 경자자보다 더 아름다운 자체인 갑인자의 주조사업이 이천(李蕆)의 감독하에 이루어져 20여만자의 크고 작은 활자가 주조되었고, 그뒤 1436년(세종 18)에는 납활자인 병진자(丙辰字)가 주조됨에 따라 조선시대의 금속활자와 인쇄술은 일단 완성을 보게 되었다.
한편, 화약과 화기(火器)의 제조에 있어서도 기술적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세종대는 종래 중국기술의 모방에서 탈피하려는 독자적 경향이 나타나서 화포(火砲)의 개량과 발명이 계속되었다.
완구(碗口)가 개량되고, 소화포(小火砲)·철제탄환·화포전(火砲箭)·화초(火鞘) 등이 발명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세종에게 있어서 아직 만족할만한 수준에 도달한 것은 못되었다. 1444년(세종 26)에 화포주조소(火砲鑄造所)를 짓게 하여 뛰어난 성능을 가진 새로운 규격의 화포를 만들어냈고, 이에 따라 이듬해는 화포의 전면 개주(改鑄)에 착수하였다. 1448년(세종 30)에 편찬, 간행된 《총통등록(銃筒謄錄)》은 그 화포들의 주조법과 화약사용법 그리고 규격을 그림으로 표시한 책이었다. 이 책의 간행은 조선시대의 화포제조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주목할만한 업적으로 평가된다.
세종대에는 농사법의 개량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중국의 농서인 《농상집요 農桑輯要》·《사시찬요 四時纂要》 등과 우리나라 농서인 《본국경험방 本國經驗方》 등의 농업서적을 통하여 농업기술의 계몽과 권장을 하였으며 정초가 지은 《농사직설(農事直說)》을 편찬, 반포하였다.
이 책의 반포는 조선시대 농업과 농업기술사에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의약발명에도 세종대는 특기할만한 시대로서 《향약채집월령 鄕藥採集月令》·《향약집성방 鄕藥集成方》·《의방유취 醫方類聚》 등의 의약서적이 편찬되었다. 《향약집성방》《의방유취》의 편찬은 15세기까지의 우리나라와 중국 의약학의 발전을 결산한 것으로 조선과학사에 있어서 빛나는 업적의 하나이다.
이 시대는 또 음악에 있어 우리 역사상 가장 빛나는 업적을 남긴 시기였고, 그것은 세종의 지휘와 참여로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유교정치에 있어서 중요시되는 것이 유교적 의례인데, 국가의 의례인 오례에는 그에 합당한 음악이 따르기 마련이다.
따라서, 유교적인 의례의 정리와 함께 음악의 정리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세종의 음악적 업적은 크게 아악(雅樂)의 부흥, 악기(樂器)의 제작, 향악(鄕樂)의 창작, 정간보(井間譜)의 창안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와같은 업적은 음악에 대한 깊은 관심과 조예를 가진 세종박연(朴堧)과 같은 음악의 전문가를 만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었다.
왕은 종래 미비하고 불완전한 아악을 바로잡기 위하여 박연 등을 시켜 중국의 각종 고전을 참고하여 아악기를 만들게 하고, 아악보를 새로 만들게 하여, 조회아악(朝會雅樂)·회례아악(會禮雅樂) 및 제례아악(祭禮雅樂) 등을 제정하였다.
그뒤 아악은 국가·궁중의례에 연주되었고, 본고장인 중국보다도 완벽한 상태로 부흥시킬 수 있었다.
이와같은 아악의 부흥은 그 악기의 국내생산과 직결된 문제로서 종래 중국에서 수입하였던 악기들을 국내에서 생산하였고, 특히 가장 중요한 악기인 편경(編磬)과 편종(編鐘)도 대량으로 생산되었다.
세종은 또한 박연으로 하여금 율관(律管)을 제정하게 하여 모든 악기의 음(音)을 조율(調律)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세종은 친히 〈정대업 定大業〉·〈보태평 保太平〉·〈발상 發祥〉·〈봉래의 鳳來儀〉 등 대곡(大曲)을 작곡하였다.
현재 국립국악원에서 연주되는 여민악(與民樂)도 〈봉래의〉 일곱 곡 중 한 곡이며, 〈정대업〉과 〈보태평〉은 현재 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왕은 또한 기보법(記譜法)을 창안하였으니, 곧 정간보(井間譜)가 그것이다. 정간보에 음의 시가(時價)와 박자를 표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세종은 이 정간보를 사용하여 향악인 〈정대업〉·〈보태평〉·〈봉래의〉·〈봉황음 鳳凰吟〉·〈만전춘 滿殿春〉등을 기보하였다. 정간보는 세조대에 약간 개량된 것을 현재에도 국악에 사용하고 있다. 법제적 측면에서도 세종대는 유교적 민본주의·법치주의가 강화, 정비된 시기였다.
7. 법전의 정비
세종은 즉위초부터 법전의 정비에 힘을 기울였다.
세종 4년에는 완벽한 《속육전》의 편찬을 목적으로 육전수찬색(六典修撰色)을 설치하고 법전의 수찬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다.
수찬색은 세종 8년 12월에 완성된 《속육전》 6책과 《등록 謄錄》 1책을 세종에게 바쳤고, 1433년(세종 15)에는 《신찬경제속육전 新撰經濟續六典》 6권과 《등록》 6권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그뒤에도 개수를 계속하여 1435년(세종 17)에 이르러 일단 《속육전》 편찬사업이 완결되었다.
한편으로는 형벌제도를 정비하고 흠휼정책(欽恤政策)도 시행하였다. 1439년(세종 21)에는 양옥(凉獄)·온옥(溫獄)·남옥(男獄)·여옥(女獄)에 관한 구체적인 조옥도(造獄圖)를 각 도에 반포하였고, 1448년(세종 30)에는 옥수(獄囚)들의 더위와 추위를 막아주고 위생을 유지하기 위한 법을 유시(諭示)하기도 하였다.
세종은 형정에 신형(愼刑)·흠휼정책을 썼으나 절도범에 대하여는 자자(刺字)·단근형(斷筋刑)을 정하였고, 절도3범은 교형(絞刑)에 처하는 등 사회기강을 확립하기 위한 형벌을 강화하기도 하였다.
또, 공법(貢法)을 제정함으로써 조선의 전세제도(田稅制度)확립에도 업적을 남겼다.
종래의 세법이었던 답험손실법은 관리의 부정으로 인하여 농민에게 주는 폐해가 막심하였기 때문에 1430년(세종 12)에 이 법을 전폐하고 1결당 10두를 징수한다는 시안을 내놓고 문무백관에서 촌민에 이르는 약 17만명의 여론을 조사하였으나 결론을 얻지 못하였다. 1436년(세종 18)에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를 설치하여 집현전 학자들도 이 연구에 참여하게 하는 등 연구와 시험을 거듭하여 1444년(세종 26)에 공법을 확정하였다.
이 공법의 내용은 전분육등법(田分六等法)·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결부법(結負法)의 종합에 의한 것이며 조선시대 세법의 기본이 되었다.
한편, 국토의 개척과 확장도 세종의 업적으로 빼놓을 수 없다.
두만강 방면에는 김종서(金宗瑞)를 보내서 육진을 개척하게 하였고, 압록강 방면에는 사군을 설치하여 두만강압록강 이남을 영토로 편입하는 대업을 이루었다.
이와같은 사업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세종이 문치(文治)만을 힘쓰지 않고 군사훈련, 화기의 제조·개발, 성진(城鎭)의 수축, 병선의 개량, 병서의 간행 등 국방책에도 힘을 기울인 결과인 것이다. 동쪽의 일본에 대하여는 강경책과 회유책을 함께 썼다.
세종 1년에는 이종무(李從茂) 등에게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하게 하는 강경책을 쓰기도 하였으나, 세종 8년에 삼포(三浦)를 개항하고, 1443년(세종 25)에는 계해약조를 맺어 이들을 회유하기도 하였다.
8. 불교에 대한 시책
유교정치를 표방한 조선은 개국초부터 억불책을 써왔고, 태종대에는 더욱 강화하였다. 세종도 불교에 대한 시책은 선대의 것을 따랐다. 왕실 중심의 기우(祈雨)·구병(救病)·명복(冥福) 등을 위한 불사(佛事)는 세종대에도 계속 이루어졌다.
세종은 유신(儒臣)들의 극단적인 불교전폐론에도 불구하고 조종상전(祖宗相傳)의 불교를 급히 없앨 수는 없다는 태도를 가졌다.
그러나 불교의 세속권을 재정리할 필요를 느껴 세종 1년에는 사사노비(寺社奴婢)를 정리하여 국가에 귀속시켰고, 세종 6년에는 불교의 종파를 선교(禪敎)양종으로 병합하였으며, 사사(寺社)·사사전·상주승(常住僧)의 액수를 재정리하였다.
즉, 선교 양종에 각 18사(寺)합 36사를 본사로 인정하고, 사원전은 7,760결(結), 상주승 3,600인으로 삭감, 정리되었다. 법석송경(法席誦經)과 도성(都城)안에서의 경행(經行)도 파하였고, 궐내의 연등행사도 없앴으며, 여항(閭巷)에서의 연등도 승사(僧舍)이외에서는 일체 금하였다.
이처럼 세종의 불교에 대한 시책은 불교의 세속권의 정리·약화와 불교행사의 제한으로 나타났으나 왕실과 세종 개인적인 면에서는 반드시 그렇지 못하였다. 1432년(세종 14)에 효령대군이 한강에서 7일간의 수륙재(水陸齋)를 행하는 것을 막지 않았고, 1435년(세종 17)부터 1442년(세종 24)까지는 흥천사(興天寺)의 사리각(舍利閣)·석탑(石塔)의 중수, 안거회(安居會)·경찬회(慶讚會)의 설행(設行)을 둘러싸고 유신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를 강행하였다.
또, 1446년(세종 28)에 왕비 소헌왕후가 죽자 왕은 유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불경(佛經)의 금서(金書)와 전경법회(轉經法會)를 강행하였으며, 1448년(세종 30)에는 모든 신하의 반대를 물리치고 내불당(內佛堂)을 세웠다.
세종의 불교에 대한 태도는 말년에 오면서 크게 변하는데 1444년(세종 26)에 광평대군(廣平大君), 그 이듬해(세종 27)에 평원대군(平原大君), 1446년(세종 28)에 왕후를 연이어 잃게 됨에 따라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고, 왕 자신의 건강도 악화된 것이 그가 불교로 기우는 데 크게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결과 세종 말년에 오면 세종과 유신간에 불교를 둘러싸고 격렬한 대립과 논란이 계속되는데 이와같은 현상이 발생한 것은 개국초부터 국가의 기본시책이 숭유억불이었으나, 유교는 정치이념·학문·철학·윤리적인 면의 욕구를 채워줄 뿐, 종교적인 욕구가 충족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풀이된다.
이러한 유불(儒佛)의 갈등 가운데에서도 세종대는 유교정치·유교사회의 기반이 다져진 시대였다.
이밖에도 금속화폐인 조선통보의 주조, 언문청(정음청)을 중심으로 한 불서언해(佛書諺解)사업 등을 폈고, 단군사당을 따로 세워 봉사하게 하고 신라·고구려·백제의 시조묘를 사전(祀典)에 올려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또한, 종래 춘추관·충주의 두 사고(史庫)였던 것을 성주·전주 두 사고를 추가 설치하게 함으로써 임란중 전주사고본이 전화를 면하고 오늘날 조선 전기의 실록이 전해질 수 있게 한 사실 등도 기억해야 될 일이다.
9. 평가
세종대가 우리 민족의 역사상 빛나는 시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정치적 안정기반 위에 그를 보필한 훌륭한 신하와 학자가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는 일이나, 이들의 보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세종의 사람됨이 그 바탕이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유교와 유교정치에 대한 소양, 넓고 깊은 학문적 성취, 역사와 문화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판단력, 중국문화에 경도(傾倒)되지 않은 주체성과 독창성, 의지를 관철하는 신념·고집, 노비에게까지 미칠 수 있었던 인정 등 세종 개인의 사람됨이 당시의 정치적·사회적·문화적·인적 모든 여건과 조화됨으로써 빛나는 민족문화를 건설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슬하에 18남 4녀를 두었는데, 제1자는 문종, 제2자는 세조이다. 시호는 장헌(莊憲), 능호는 영릉(英陵)이며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에 있다.

[참고문헌]

太宗實錄   世宗實錄    璿源系譜     國朝寶鑑    增補文獻備考
燃藜室記述
朝鮮科學史(洪以燮, 正音社, 1949)
朝鮮前期對日交涉史硏究(李鉉淙, 韓國硏究院, 1964)
韓國軍制使(陸軍本部, 1968)
세종대왕(홍이섭,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1)
朝鮮初期言官·言論硏究(崔承熙, 韓國文化硏究所, 서울大學校, 1976)
世宗大王의 學問과 思想(李崇寧, 亞細亞文化社, 1981)
李朝田稅制度의 成立過程(朴時亨, 震檀學報 14, 1941)
世宗朝의 集賢殿(李光麟, 최현배선생화갑기념논문집, 1954)
世宗의 言語政策에 관한 硏究(金斗鍾, 人文社會科學 5, 서울大論文集, 1957)
麗末鮮初의 佛敎政策(韓㳓劤, 人文社會科學 6, 서울大論文集, 1957)
正音廳始末(金東旭, 人文社會科學 5, 서울大論文集, 1957)
世宗의 言語政策에 관한 硏究―特히 韻書編纂과 訓民正音制定과의 關係를 中心으로 하여―(李崇寧, 亞細亞硏究 1―2, 1958)
世宗朝에 있어서의 對佛敎施策(韓㳓劤, 震檀學報 25·26·27합병호, 1964)
麗末鮮初火器의 傳來와 發達(許善道, 歷史學報 24·25·26, 1964·1965)
世宗大王(李崇寧, 人物韓國史, 博友社, 1965)
世宗(李光麟, 韓國의 人間像 Ⅰ, 新丘文化社, 1965)
世宗大王의 個性의 考察(李崇寧, 大東文化硏究 3, 成均館大學校大東文化硏究院, 1966)
集賢殿硏究 上·下(崔承熙, 歷史學報 32·33, 1966·1967)
韓國農業技術史(李春寧, 韓國文化史大系 Ⅲ, 高麗大學校民族文化硏究所, 1968)
韓國醫學史(盧正祐, 韓國文化史大系 Ⅲ, 高麗大學校民族文化硏究所, 1968)
韓國天文氣象學史(全相運, 韓國文化史大系 Ⅲ, 高麗大學校民族文化硏究所, 1968)
韓國靑銅活字印刷技術發展의 技術史的 背景(全相運, 誠信女師大論文集 3, 1970)
朝鮮初期祀典의 成立에 對하여(金泰永, 歷史學報 58, 1973)
朝鮮王朝의 政治經濟基盤(韓永愚, 한국사 9, 국사편찬위원회, 1974)
兩班儒敎政治의 進展(崔承熙, 한국사9, 국사편찬위원회, 1974)
經國大典의 編纂과 頒行(朴秉濠, 한국사 9, 국사편찬위원회, 1974)
倭人關係(李鉉淙, 한국사 9, 국사편찬위원회, 1974)
한글의 創製(李基文, 한국사 11, 국사편찬위원회, 1974)
科學技術의 發達(全相運, 한국사 11, 국사편찬위원회, 1974)
音樂(李惠求, 한국사 11, 국사편찬위원회, 1974)
朝鮮初期議政府硏究 上·下(韓忠熙, 韓國史硏究 31·32, 1980·1981

 

 

금성대군(錦城大君)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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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정민(貞愍)
생졸년 1426 (세종 8) - 1457 (세조 3)
시대 조선 전기
본관 전주(全州)
활동분야 왕실 > 왕자

[관련정보]

[상세내용]

금성대군(錦城大君)에 대하여
1426년(세종 8)∼1457년(세조 3). 조선 초기의 종실.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유(瑜). 아버지는 세종, 어머니는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이다.
1433년 금성대군에 봉해지고, 1437년 참찬 최사강(崔士康)의 딸을 부인으로 삼고, 그해 태조의 일곱째아들인 방번(芳蕃)의 후사로 출계(出系)하였다.
1452년에 단종이 즉위하자 형인 수양대군(首陽大君) 유(瑈)와 함께 어린 조카에게 사정전(思政殿)으로 불려가 물품을 하사받으면서 좌우에서 보필할 것을 약속하였다.
1453년 수양대군이 정권탈취의 야심을 가지고 왕의 보필대신인 김종서(金宗瑞) 등을 제거하자, 형의 행위를 반대하고 조카를 보호하기로 결심하였다.
1455년 그를 비롯한 몇몇 종친과 궁정 안에 있는 왕의 측근을 제거하려는 수양대군에 의해 무사들과 결탁하여 당여를 부식(扶植)한다는 죄명을 받고, 삭녕(朔寧)에 유배되었다가 이어 광주(廣州)에 이배되었다. 그해 수양대군단종을 핍박하여 왕위를 수선(受禪)하였다.
이듬해 이에 불만을 품은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이 중심이 되어 단종복위(端宗復位)를 계획하다가 실패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여기에 가담한 자들은 대부분 처형되고, 단종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될 때, 삭녕에서 다시 경상도 순흥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순흥에 안치된 뒤 부사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모의하여 고을 군사와 향리를 모으고 도내의 사족(士族)들에게 격문을 돌려서 의병을 일으켜 단종복위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거사하기 전에 관노의 고발로 실패로 돌아가 반역죄로 처형당하였다.
세종의 여러 아들 중에서 다른 대군들은 세조의 편에 가담하여 현실의 권세를 누렸으나, 홀로 성품이 강직하고 충성심이 많아 위로는 아버지 되는 세종과 맏형인 문종의 뜻을 받들어 두 분이 사랑하던 손자이고 아들이며 자신의 조카 되는 어린 단종을 끝까지 보호하려 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마치고 말았다.
1791년(정조 15)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편정할 적에 육종영(六宗英)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순흥의 성인단(成仁壇), 충청도 청안의 향사(鄕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민(貞愍)이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端宗實錄  世祖實錄  英祖實錄  正祖實錄  莊陵誌  國朝人物考

 

 

문종(文宗){2}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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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지(輝之)
시호 공순(恭順)
생졸년 1414 (태종 14) - 1452 (문종 2)
시대 조선 전기
본관 전주(全州)
활동분야 왕실 > 왕

[관련정보]

[상세내용]
문종(文宗){2}에 대하여
1414년(태종 14)∼1452년(문종 2). 조선 제5대왕. 재위 1450∼1452년.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향(珦), 자는 휘지(輝之).
세종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이고, 비는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권전(權專)의 딸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이다.
1421년(세종 3)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450년 37세로 왕위에 올랐다. 학문을 좋아하였고 학자(집현전 학사)들을 아끼고 사랑하였다. 부왕인 세종은 일찍부터 신체상의 각종 질환으로 1437년 벌써 세자(문종)에게 서무(庶務)를 결재하게 하려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1442년 군신(群臣)의 반대를 무릅쓰고 세자가 섭정(攝政)을 하는 데 필요한 기관인 첨사원(詹事院)을 설치하였고 첨사(詹事)·동첨사(同詹事) 등의 관원을 두었다.
또한, 세자로 하여금 왕처럼 남쪽을 향하여 앉아서 조회(朝會)를 받게 하였고(南面受朝), 모든 관원은 뜰 아래에서 신하로 칭하도록 하였으며, 국가의 중대사를 제외한 서무는 모두 세자의 결재를 받으라는 명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수조당(受朝堂)’을 짓고 세자가 섭정을 하는 데 필요한 체제를 마련하였으며, 1445년부터는 세자의 섭정이 시작되었다. 이 섭정은 세종이 죽기까지 계속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문종은 즉위하기 전에 실제 정치의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따라서, 문종시대의 정치의 방법과 분위기는 세종 후반기의 그것과 크게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문종이 즉위하면서 왕권은 세종대에 비하여 약간 위축되었다. 수양대군(首陽大君)·안평대군(安平大君) 등 종친(宗親)세력의 심상하지 않은 움직임도 이미 이때부터 나타나고 있었으며, 이를 견제하기 위한 언관(言官: 臺諫)의 종친에 대한 탄핵언론으로 상호 긴장된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하였다.
이 시대의 언관의 언론은 정치 전반에 걸쳐 활발히 전개되었으나, 특히 척불언론(斥佛言論)이 눈에 띈다. 그것은 세종 말기 세종의 호불적 경향(好佛的傾向)에 대한 유신(儒臣)의 반발로 해석된다.
즉, 세종 말기 세종과 왕실에 의하여 이루어진 각종 불교행사와 내불당(內佛堂)의 건설 등 불교적 경향을 방지하는 데 실패한 유자적(儒者的)인 언관(言官)들은 문종이 즉위하자 왕실에서의 불교적 경향을 불식하고 유교적 분위기를 조성하려 노력하였다.
당시 언관의 언론은 왕권이나 그밖의 세력에 구애되지 않고 활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문종은 자주 구언(求言)하였고, 언로(言路)가 넓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조신(朝臣) 6품 이상에 대하여는 모두 윤대(輪對)를 허락하였으며, 비록 벼슬이 낮은 신하에 대하여도 부드럽게 대하면서 그들의 말을 경청하였다.
문종조에 편찬된 서적으로는 《동국병감 東國兵鑑》·《고려사》·《고려사절요》·《대학연의주석 大學衍義註釋》 등이 있다. 《고려사》정도전(鄭道傳) 등의 《고려국사 高麗國史》 이래 여러 차례 개수(改修)·교정이 있었으나, 만족할만한 것이 못되어 1449년 김종서(金宗瑞)·정인지(鄭麟趾) 등에게 개찬(改撰)을 명하여 1451년(문종 1)에 완성을 본 것이며, 기전체의 《고려사》 편찬이 완성된 직후 새로이 편년체로 편찬에 착수하여 1452년에 완성된 것이 《고려사절요》이다.
《고려사》《고려사절요》의 편찬은 전 왕조의 역사의 정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조선왕조의 정치·제도·문화의 정리를 위하여도 필요한 작업으로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 사업이었다.
군사제도에 있어서도, 1445년에 10사(司)에서 12사로 개정되었던 것을 1451년에 5사로 개편하였다. 문종은 그가 세자로 있을 때부터 진법(陣法)을 편찬하는 등 군정(軍政)에 관심이 많았는데, 즉위 후 군제의 개혁안을 스스로 마련하여 제시하였고, 재위 2년여에 걸쳐 이루어진 군제상의 여러 개혁은 매우 중요한 내용을 가진 것이었다.
문종의 학문은 유학(儒學: 性理學)뿐 아니라 천문(天文)과 역수(曆數) 및 산술(算術)에도 정통하였고, 예·초·해서(隷·草·楷書) 등 서도에도 능하였다.
그러나 문종은 몸이 허약하여 재위 2년4개월 만에 39세로 병사하고, 나이 어린 세자 단종이 즉위함으로써, 계유정난, 세조의 찬위(纂位), 사육신사건 등 정치적으로 불안한 사건을 초래하는 계기가 되었다.
시호는 공순(恭順)이며, 능은 현릉(顯陵)으로 양주에 있다.

[참고문헌]

高麗史高麗史節要 世宗實錄 文宗實錄 璿源系譜 寶鑑燃藜室記     集賢殿硏究(崔承熙, 歷史學報 32·33, 1966·1967)
韓國軍制史―近世朝鮮前期篇―(陸軍士官學校 韓國軍事硏究室, 陸軍本部, 1968)
朝鮮初期言官·言論硏究(崔承熙, 서울大學校한국문화연구소, 1976)    兩班儒敎政治의 進展(崔承熙, 한국사 9, 1974)

 

임영대군(臨瀛大君)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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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지(獻之)
시호 정간(貞簡)
생졸년 1418 (태종 18) - 1469 (예종 1)
시대 조선 전기
본관 전주(全州)
활동분야 왕실 > 왕자

[관련정보]

[상세내용]

임영대군(臨瀛大君)에 대하여
1418년(태종 18)∼1469년(예종 1). 조선 초기의 종실.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구(璆), 자는 헌지(獻之). 세종의 넷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이다.  
1428년(세종 10) 대광보국임영대군(大匡輔國臨瀛大君)에 봉해졌으며, 1430년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일찍이 세종의 총애를 받아 1442년 원윤(元尹)이 되었으며, 1445년에는 세종의 명을 받아 총통(銃筒)제작을 감독하였고, 2년 후에는 종성 지방의 경재소(京在所)일을 관장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에 문종의 명을 받아 화차를 제작하였다. 세조가 정권을 잡자 그를 보좌하여 신임을 받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천성이 활달하였고 무예와 의론(議論)에 뛰어났으며, 왕손이면서도 근검하였고 사람들을 대하는 데 교만하지 않았다.
아들로 주(澍)·준(浚)·정(渟)·정(淨)·징(澄)·함(涵)·인(潾)·탁(濯)·옥(沃) 등을 두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文宗實錄    世祖實錄   睿宗實錄    燃藜室記述

 

세조(世祖)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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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지(粹之)
시호 혜장(惠莊)
생졸년 1417 (태종 17) - 1468 (세조 14)
시대 조선 전기
본관 전주(全州)
활동분야 왕실 > 왕

[관련정보]

[상세내용]

세조(世祖)에 대하여
1417년(태종 17)∼1468년(세조 14). 조선 제7대왕. 재위 1455∼1468년.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유(瑈). 자는 수지(粹之).
1. 가계 및 대군시절
세종의 둘째아들이고 문종의 아우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 왕비는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尹氏)이다.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명민(明敏)하여 학문도 잘하였으며, 무예도 남보다 뛰어났다. 처음에 진평대군(晋平大君)에 봉해졌다가 1445년(세종 27)에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고쳐 봉해졌다.
그가 대군으로 있을 때는 세종의 명령을 받들어 궁정 안에 불당을 설치하는 일에 적극 협력하고 승려 신미(信眉)의 아우인 김수온(金守溫)과 함께 불서(佛書)의 번역을 감장(監掌)하고, 또, 향악(鄕樂)의 악보(樂譜)도 감장, 정리하였다.
1452년(문종 2)에는 관습도감도제조(慣習都監都提調)에 임명되어 국가의 실무를 맡아보았다.
2. 계유정란과 즉위
이해 5월에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니 7월부터 그는 측근 심복인 권람(權擥)·한명회(韓明澮) 등과 함께 정국전복의 음모를 진행시켜 이듬해 1453년(단종 1) 10월에는 이른바 계유정난을 단행했던 것이다.
계유정난은 폭력으로써 정권을 탈취한 사건인데, 하룻밤 사이에 정국을 전복시키고 군국(軍國)대권을 한 손에 쥐고 자기 심복을 요직에 배치하여 국정을 마음대로 처리하였다. 조정 안에 있는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밖에 있던 함길도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 이징옥(李澄玉)마저 주살, 내외의 반대세력을 제거하였다. 1455년 윤 6월 단종에게 강박하여 왕위를 수선(受禪)하였다.
3. 개혁정치
세조가 즉위하여서는 이해 8월에 집현전직제학(集賢殿直提學) 양성지(梁誠之)에게 명하여 우리나라의 지리지(地理誌)와 지도를 찬수(撰修)하게 하였으며 11월에는 춘추관(春秋館)에서 《문종실록》을 찬진하였다.
1456년(세조 2) 6월에 좌부승지 성삼문(成三問) 등 이른바 사육신(死六臣)이 주동이 되어 단종복위를 계획하였으나 일이 발각되자 이 사건에 관련된 여러 신하들을 모두 사형에 처하였다. 뒤따라 집현전을 폐지시키고 경연(經筵)을 정지시켰으며, 집현전에 장치(藏置)된 서적은 모두 예문관(藝文館)에 옮겨 관장하게 하였다.
7월에 조선단군(朝鮮檀君)의 신주(神主)를 조선시조단군(朝鮮始祖檀君)의 신위(神位)로 고쳐 정하고, 후조선시조(後朝鮮始祖) 기자(箕子)를 후조선시조 기자의 신위로 고쳐 정하고, 고구려시조를 고구려시조 동명왕의 신위로 고쳐서 정하였다.
1457년(세조 3) 정월에 비로소 원구단(圓丘壇)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지내고 조선 태조를 여기에 배향하였다.
이해 6월에 상왕(上王: 端宗)을 사육신의 모복사건(謀復事件)에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써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하여 강원도 영월에 유배시켰는데, 뒤따라 경상도순흥에 유배된 노산군의 다섯째 숙부인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가 노산군복위를 계획하다가 일이 발각되자 신숙주(申叔舟)·정인지(鄭麟趾) 등 대신의 주청(奏請)에 따라 이해 10월에 사사(賜死)하고 노산군도 관원을 시켜 죽이게 하였다.
4. 법전과 제도개혁
1458년에 호패법(號牌法)을 다시 시행하여 국민의 직임(職任)과 호구(戶口)의 실태를 파악하고 도둑의 근절에 주력하였다.
이해에 《국조보감 國朝寶鑑》을 편수하였으니, 즉 태조·태종·세종·문종 4대의 치법(治法)·정모(政謨)를 편집하여 후왕의 법칙으로 삼으려는 의도이고, 후에 《동국통감》을 편찬하게 하였으니 이는 전대(前代)의 역사를 조선왕조의 의지에 의하여 재조명한 것이다.
세조는 정정이 안정됨에 따라 왕조정치의 기준이 될 법전의 편찬에 착수하였으니 최항(崔恒) 등에 명하여 앞서 있었던 《경제육전 經濟六典》을 정비, 왕조 일대(一代)의 전장(典章)인 《경국대전》의 찬술을 시작하였다.
1460년에 호전(戶典)을 반행(頒行)하고 이듬해 1461년에는 형전(刑典)을 반행하였다. 세조는 무비(武備)에 더욱 유의하여 1462년에는 각 고을에 명하여 병기(兵器)를 제조하게 하고, 1463년에는 제읍(諸邑)·제영(諸營)의 둔전(屯田)을 성적(成籍)시키고, 1464년에는 제도(諸道)에 군적사(軍籍使)를 파견하여 장정(壯丁)의 군적누락을 조사하게 하였다.
또, 1466년에는 관제를 고쳐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영의정으로, 사간대부(司諫大夫)대사간으로,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관찰사로, 오위진무소(五衛鎭撫所)오위도총관으로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병마절도사로 명칭을 간편하게 정하였으며, 종래의 시직(時職: 현직)·산직(散職)관원에게 일률적으로 나누어주던 과전(科田)을 그만두고 현직의 관원에게만 주는 직전제(職田制)를 시행하였다.
세조는 신하들을 통솔함에 있어 자기에게 불손하는 신하는 가차없이 처단하고 자기에게 순종하는 신하는 너그럽게 대하였으니, 양산군(楊山君) 양정(楊汀)은 정난(靖難)의 원훈(元勳)으로서 북변(北邊)의 진무(鎭撫)에 공로가 많았는데도 세조에게 퇴위를 희망하는 불손한 말을 한 이유로 참형에 처하고, 인산군(仁山君) 홍윤성(洪允成)은 세력을 믿고 방자하여 제 가신(家臣)을 놓아 사람을 살해까지 하였는데도, 자기에게 항상 순종한다는 이유로 주의만 시켰을 뿐 처벌하지 않았다.
세조는 왕권을 확립한 뒤 지방의 수신(帥臣: 병마절도사)은 그 지방출신의 등용을 억제하고 중앙의 문신으로 이를 대체시키자 이에 반감을 품은 함길도 회령 출신 이시애(李施愛)가 1467년에 지방민을 선동하여 길주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세조는 이 반란을 무난히 평정하고 중앙집권체제를 더욱 공고히 수립하였다.
5. 문화사업
세조는 민정에 힘을 기울여 공물대납(貢物代納)의 금령(禁令)을 거듭 밝히고, 잠서(蠶書)를 우리말로 해석하고, 국민의 윤리교과서인 《오륜록 五倫錄》을 찬수하게 하였으며, 또 문화사업에는 《역학계몽도해 易學啓蒙圖解》·《주역구결 周易口訣》·《대명률강해 大明律講解》·《금강경언해(金剛經諺解)》·대장경(大藏經)의 인쇄와 태조·태종·세종·문종의 어제시문(御製詩文)의 편집, 발간 등을 들 수가 있으며, 외국과의 관계는 왜인(倭人)에게는 물자를 주어 그들을 무마, 회유시키고, 야인(野人: 女眞族)에게는 장수를 보내어 토벌, 응징시키고, 또 명나라의 요청에 따라 건주위(建州衛)이만주(李滿住)를 목베어 국위를 선양하기도 하였다.
6. 왕권강화책
그러나 세조는 정치운영에 있어서는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이른바 ‘하의상통(下意上通)’보다는, 다만 자기의 소신만을 강행하는 ‘상명하달(上命下達)’식의 방법을 택하였다.
세조는 즉위 직후에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의정부의 서사제(署事制)를 폐지하고 육조의 직계제(直啓制)를 시행하였으니, 이것은 어린 단종 때의 정치의 권한이 의정부의 대신들에게 위임된 것을 육조직계제를 시행함으로써 왕 자신이 육조를 직접 지배하여 중신(重臣)의 권한을 줄이는 반면, 왕권의 강화를 기도하였던 것이다.
1456년 6월에 성삼문·박팽년 등 사육신의 단종복위사건의 발생을 계기로 학문연구의 전당인 집현전을 폐지하고, 정치문제의 대화 토론장인 경연을 정폐시켰으니, 이런 까닭으로 국정의 건의규제기관인 대간의 기능이 약화되는 반면에, 왕명의 출납기관(出納機關)인 승정원의 기능이 강화되었던 것이다.
즉, 이 시기의 승정원은 육조소관의 사무 외에 국가의 모든 중대사무의 출납도 관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승정원 직무의 중요성에 대비하여 그 직무를 맡은 관원은 반드시 국왕의 심복으로 임명하였으니, 신숙주·한명회·박원형(朴元亨)·구치관(具致寬) 등 정난공신(靖難功臣)이 이 승정원에 봉직하면서 모든 국정에 참획(參劃)하게 되었다.
또, 세조는 국가의 모든 정무를 이들 중신중심으로 운영하였으므로 정부의 중요관직은 자기의 심복인 대신급의 중신으로 겸무하게 하였으니, 즉 외교통인 신숙주겸예판(兼禮判)으로, 군사통(軍事通)인 한명회겸병판(兼兵判)으로, 재무통(財務通)인 조석문(曺錫文)겸호판(兼戶判)으로, 장기간 재직, 복무하게 하였다.
또, 중신들은 현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부원군(府院君)의 자격으로서 종전대로 조정의 정무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이와같이, 국가의 모든 정무는 세조 자신이 직접 중신과 서로 의논, 처결하게 되니 국왕의 좌우에서 왕명을 출납하는 승지의 임무는 한층 더 중요해졌고, 따라서 승정원의 기구는 점차 강화되어 이러한 추세하에서 1468년에는 원상제(院相制)의 설치를 보게 된 것이다.
이 원상은 왕명의 출납기관인 승정원세조 자신이 지명한 삼중신(三重臣: 신숙주·한명회·구치관)을 상시 출근시켜 왕세자와 함께 모든 국정을 상의, 결정하도록 한 것이니, 이는 세조가 말년에 와서 다단한 정무의 처결에 체력의 한계를 느끼게 되고, 또 후사의 장래문제도 부탁하려는 의도에서 설치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 까닭으로 세조는 1468년 9월에 병이 위급해지자, 여러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왕세자에게 전위(傳位)하고는 그 이튿날에 죽었으니, 세조가 왕권의 안정에 얼마나 주의를 집중시켰는가를 알 수 있다.
이와같이 세조대의 정치는 그 실행면에서 하의상통보다는 상명하달에 치중하였기 때문에 정국 전체의 경색을 초래하여 사회 도처에 특권 횡행의 비리적 현상이 많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결국, 이러한 세조의 무단강권정치는 왕권강화면에서는 일단 긍정할 수도 있지마는, 정치발전면에서는 세종·성종의 문치대화정치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라 여겨진다.
시호는 혜장(惠莊)이고, 존호는 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이며, 묘호는 세조, 능호는 광릉(光陵)이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文宗實錄        端宗實錄    世祖實錄

 

 

 

세종 25년 계해(1443,정통 8)

 4월3일 (무자)
의정부 우찬성 최사강의 졸기

의정부 우찬성(右贊成) 최사강(崔士康)이 졸(卒)하였다. 사강은 전주(全州) 사람이며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 최유경(崔有慶)의 아들이다. 처음에 음직(蔭職)으로 벼슬하여 여러 번 옮겨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에 이르렀고, 무술년에 금상(今上)이 즉위(卽位)하매, 특별히 승정원 동부대언(同副代言)으로 제수(除授)되었다가 우부대언(右副代言)으로 전임되었고, 기해년 겨울에 예조 참의로 옮겼다. 경자년에 〈외직(外職)으로〉 나가서 경기도 관찰사로 되었고, 그 해 겨울에 호조 참판으로 임명되었다. 신축년에 또 경상도 도관찰사로 되었고, 임인년에 중군 동지총제(中軍同知摠制)로 제수되었다가 병조 참판으로 옮겼으며, 을사년에 충청도 도관찰사로 되었다가 병오년에 다시 호조 참판으로 되었으며, 사헌부 대사헌과 병조·이조 참판을 여러 차례 역임하고서 신해년에 병조 판서로 승진되었다. 병진년에 의정부 참찬으로 제수되었고, 신유년에 우찬성으로 승진되었으며, 임술년에 이조 판서를 겸임(兼任)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하니, 나이 59세였다. 부음(訃音)을 아뢰니, 이틀 동안 조회를 철폐하여 조의를 표하고, 부의(賻儀)를 특히 후하게 내려 주어 〈관에서〉 예(禮)로써 장사지냈다. 시호(諡號)를 경절(敬節)이라 하였는데, 일찍 일어나서 일을 공경하게 하는 것이 경(敬)이고, 청렴함을 좋아하여 사욕(私慾)을 버리는 것이 절(節)이다. 아들은 최승녕(崔承寧), 최승정(崔承靖), 최승종(崔承宗)이고, 딸 하나는 함녕군(諴寧君)에게 출가하고, 딸 하나는 금성 대군(錦城大君)에게 출가하였으며, 또 승녕의 딸은 임영 대군(臨瀛大君)에게 출가하였다. 이러한 연고로 갑자기 높은 품계에 올랐다.
【원전】 4 집 468 면
【분류】 *인물(人物) / *왕실-의식(儀式)

順菴先生文集卷之八
 
與韓伯賢 秀運辛亥 a_229_517d


恭嬪事。前日薄有聞見。故錄在別紙。傳示鐋章。無妨否。當時事。以見出於野史者言之。昭陵掘而追廢爲庶人矣。昭陵之父爵追奪矣。昭陵之母崔氏及弟自愼伏誅矣。寧陽尉鄭悰罪死矣。敬惠公主爲長興官婢矣。至於端宗王妣宋氏沒爲婢。盖鄭麟趾等。以端宗罪關宗社。以治逆之律治之。故如是。而宋氏則申叔舟以功臣。請爲己婢。上不聽。令宋氏養鄭眉壽於宮中。此時之事如此。則恭嬪之有無。229_518a雖不可質言。若使有之。則亦安保其無事耶。自朝家雖索可考文籍。事在三四百年間。屢經兵燹。公家文籍。率多散佚。况士民之家乎。文籍有無不必言。而錫章先代屢世守護禁伐。則此爲實跡。其過於殘缺之文字大矣。


別紙
聞自上求文宗王妃事蹟云。文宗爲世子時。納徽嬪金氏。後廢。又冊純嬪奉氏。世宗丁巳。又廢。冊良媛權氏爲嬪。良媛東宮命婦也。辛酉。誕端宗。翌日薨。庚午。世宗昇遐。文宗卽位。229_518b辛酉至庚午爲十年。而無冊嬪之事。卽位三年而無冊妃之事。决無是理。甚可疑也。明史朝鮮傳。文宗卽位。天子賜冕服。又賜王妃崔氏誥命。崔氏野乘國史。皆不見。亦可怪也。考全州崔譜。贈左相崔道一有二女。一卽永順君溥。卽廣平大君之子。一恭嬪。以昭訓進。冊爲嬪無后。昭訓亦東宮命婦也。據此則昭陵薨後。似冊崔氏矣。革除之際。語多忌諱。史官記事亦漫漶。雖有實錄。是後代所撰。則亦必沒之耳。至尊之事。至重之地。雖不敢質言。而明史及崔譜。似無可疑矣。

229_518c
示諭恭嬪事。愚見十分無疑矣。考崔譜。連三代國婚。崔士康之女二。適諴寧君䄄,錦城大君瑜。士康之子承寧女適臨瀛大君璆。承寧之子道一二女。一適永順君溥。廣平大君璵之子也。一卽恭嬪無后。以昭訓進爲嬪。昭訓東宮命婦也。此時東宮冊嬪。非文宗而何。且道一官豊儲倉丞。歿後贈左相。國典。王妣考贈領相。世子嬪考贈左相。世孫嬪考贈右相。左相之贈。非世子嬪考而何。端宗之姊敬惠公主下嫁寧229_518d陽尉鄭悰。墓在高陽。恭嬪之祔葬於公主墓側。似非異事。况崔家流傳之語。以恭嬪無后。故自上定墓於公主墓側。奉祀則使崔氏本家擧行。定墓直香火禁伐云。則其說信矣。向來雖有三朝實錄考出之事。實錄之踈漏亦多。况革除之時。事多忌諱。史官之不能直書者必多。又况實錄之撰。出於後代。亦安知非史官之隨意刊削而然耶。其時法令甚嚴。私家野史。亦不敢記錄。理勢固然。但恭嬪二字。足爲的實之斷案矣。明史朝鮮傳。列朝王妣誥命。皆書姓氏。不獨崔氏然也。自上229_519a雖有批决之語。而猶在疑信之中。故使宗簿索本家可考之迹。聖意所存。詳密無餘蘊矣。若此之事。虛實是非間。必究竟而後已也。旣有其墓則誌石之有無。雖不可必。若得有信迹。則豈不大幸。此意當呈于宗簿。自官掘見誌石可矣。我朝文獻。全無可徵。恭靖大王廟號。睿宗朝定爲安宗。此出於尹梧陰根壽小說。考睿宗日記而知之。後猶稱恭靖。而安宗則無稱。又列聖誌狀。成宗朝乙未。茂林君善生等䟽言睿宗己丑。稱恭靖曰煕宗。與安宗之說牴牾。其有廟號則信229_519b矣。皆不見於實錄。帝王廟號。何等重事而皆不見。則實錄之踈漏。盖如是矣。○恭嬪於錦城大君夫人。爲從孫女。臨瀛大君夫人。爲姪女。○又聞忠州靑龍居士人許錩家有野史。備載恭嬪事。金相在魯聞之。誘其族武人許德川鉍借來。因執不給而沒崔氏事云。盖金初不知崔氏事。奉使赴燕。見明史有崔氏。驚怪。至於呈文改之。及見實迹。仍以掩諱而然也。
順菴先生文集卷之八

   
 
 
순암선생문집 제8권
 서(書)
한백현(韓伯賢) 수운(秀運) 에게 편지를 보내다. 신해년

공빈(恭嬪)의 일에 대해 전일에 조금 듣고 본 바가 있었기 때문에 별지(別紙)에다 기록해 놓았는데 석장(錫章)에게 보여주어도 괜찮겠습니까? 그 당시 사건 중 야사(野史)에 뚜렷이 드러난 것을 말해 보겠습니다.
소릉(昭陵 단종의 생모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을 파헤치고 소급해서 폐서인(廢庶人)시켰으며, 소릉의 아버지의 관작(官爵)을 소급해서 박탈하였으며, 소릉의 어머니 최씨(崔氏)와 소릉의 아우 권자신(權自愼)이 처형되었으며, 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이 처벌당했으며, 경혜공주(敬惠公主)가 장흥(長興)의 관비(官婢)가 되었으며, 심지어는 단종(端宗)의 왕비(王妃) 송씨(宋氏)까지 관비로 되었습니다. 대체로 정인지(鄭麟趾) 등이, 단종의 죄는 종사와 사직에 관계된다고 하여 역적을 다스리는 법으로 다스렸기 때문에 그런 것인데, 송씨는 신숙주(申叔舟)가 자신이 공신(功臣)이라고 하여 자기의 노비로 삼겠다고 요청하였으나 세조(世祖)가 허락하지 않고 송씨로 하여금 궁중(宮中)에서 정미수(鄭眉壽)를 양육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때의 일이 이러하였으니, 공빈이 있었느냐 없었느냐는 장담을 할 수 없지만 설사 공빈이 있었다면 그 또한 어떻게 무사하였으리라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조정에서 비록 상고할 만한 서적을 찾고 있으나 3, 4백 년 전에 있었던 일이라서 누차 병화(兵火)를 겪은 바람에 관청의 서적이 대부분 유실되었는데 더구나 일반 선비들의 집이야 말할 게 있겠습니까. 그에 관한 서적이 있느냐 없느냐는 말할 필요가 없고 석장의 선대(先代) 조상들이 여러 대 동안 수호(守護)하면서 벌목을 금하였으니 이게 실질적인 자취이므로 훼손된 서적보다는 몇 배 더 나은 것입니다.

○별지(別紙)

들은 바에 의하면 주상(主上)이 문종(文宗)의 왕비 사적(事蹟)을 찾는다고 하였습니다. 문종이 세자로 있을 때에 휘빈(徽嬪) 김씨(金氏)를 들였다가 나중에 폐서인시키고, 또 순빈(純嬪) 봉씨(奉氏)를 책봉하였다가 세종(世宗) 정사년(丁巳年)에 또 폐서인시키고, 또 양원(良媛) 권씨(權氏)를 빈(嬪)으로 책봉하였습니다. 양원은 동궁(東宮)의 명부(命婦)였는데 신유년(辛酉年)에 단종을 낳고 그 다음날 운명하였습니다. 경오년(庚午年)에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왕위에 올랐는데 신유년부터 경오년까지는 10년인데 빈을 책봉한 일이 없습니다. 왕위에 오른 지 3년이 되도록 왕비를 책봉한 일이 없을 리는 결코 만무하니,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명사(明史)》 조선전(朝鮮傳)에 “문종이 왕위에 오르자 천자(天子)가 면복(冕服)을 하사하고, 또 왕비 최씨에게 고명(誥命)을 하사하였다.”고 하였는데 최씨가 야사(野史)나 정사(正史)에 모두 나타나지 않으니 매우 이상한 일입니다.
전주 최씨(全州崔氏)의 족보(族譜)를 상고해 보니, 증 좌상(贈左相) 최도일(崔道一)이 2녀를 두었습니다. 하나는 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에게 시집갔는데 바로 광평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의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는 공빈인데 소훈(昭訓)으로 빈에 책봉되었으나 후사가 없었습니다. 소훈도 동궁의 명부였습니다. 이에 의하면 소릉이 운명한 뒤에 최씨를 왕비로 책봉한 것 같습니다.
혁명이 일어날 때 숨기는 말이 많고 사관(史官)이 기록한 사건도 모호하여 분별할 수 없으며, 비록 실록(實錄)이 있더라도 후대(後代)에 편찬한 것이고 보면 또한 빼버렸을 것입니다. 지존(至尊)의 일이고 매우 중요한 지위라서 감히 장담은 할 수 없으나 《명사》나 최씨의 족보에 기록된 것을 의심할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 또

말씀하신 공빈의 일은 저의 견해가 십분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최씨의 족보를 상고해 보니, 3대를 연이어 왕실(王室)과 혼인하였습니다. 최사강(崔士康)이 2녀를 두었는데 함녕군(諴寧君) 이인(李䄄)과 금성대군(錦城大君) 이유(李瑜)에게 시집갔으며, 최사강의 아들 최승녕(崔承寧)의 딸이 임영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에게 시집갔으며, 최승녕의 아들 최도일이 2녀를 두었는데 하나는 광평대군 이여의 아들 영순군 이부에게 시집가고 하나는 공빈이 되었으나 후사가 없었습니다. 소훈으로 빈에 승진되었는데 소훈은 동궁의 명부였습니다. 이 때에 동궁의 빈으로 책봉하였는데 그 동궁은 문종이 아니고 누구이겠습니까.
그리고 최도일이 풍저창 승(豊儲倉丞)의 벼슬을 하였는데 그가 죽은 뒤에 좌의정(左議政)의 벼슬을 하사하였습니다. 국전(國典)에, 왕비의 아버지에게는 영의정(領議政)을, 세자빈(世子嬪)의 아버지에게는 좌의정을, 세손빈(世孫嬪)의 아버지에게는 우의정(右議政)을 증직(贈職)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좌의정의 증직을 내렸으니 세자빈의 아버지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敬惠公主)가 영양위 정종에게 시집갔는데 그의 묘소가 고양군(高陽郡)에 있습니다. 공빈을 공주의 묘소 곁에다 안장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최씨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공빈이 후사가 없기 때문에 주상이 공주의 묘소 곁에다 묘소를 정하고 최씨의 본가(本家)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으므로 묘소를 지키는 사람을 정하여 향화(香火)를 올리고 벌목을 금하였다.”고 하였으니 그 말이 틀림없습니다.
지난날 세 조정에서 실록을 상고해 내는 일이 있었으나 실록에 빠진 것들이 또한 많은데다가 혁명할 때에는 숨기는 일이 많으므로 사관이 사실대로 쓰지 못한 것이 필시 많았을 것입니다. 더구나 실록은 후대에서 편찬하였으니 또 사관이 자기 마음대로 삭제해 버렸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 때 법령(法令)이 매우 엄하여 일반인들이 야사를 감히 쓰지 못하였는데 사세상 당연한 일입니다만, ‘공빈’두 글자가 족히 적실(的實)한 단안(斷案)이 될 수 있습니다. 《명사》 조선전에 역대 조정의 왕비에게 하사한 고명에다 모두 성씨(姓氏)를 써 놓았지 최씨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상께서 비록 결정을 내린 비답(批答)의 말씀이 있기는 하나 여전히 의심스럽기 때문에 종부시(宗簿寺)로 하여금 본가에서 상고할 만한 자취를 찾도록 하였으니 성상(聖上)께서 가지신 뜻이 자상하여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사실이든 아니든, 옳든 그르든 반드시 끝까지 규명한 다음에 그만두어야 합니다. 이미 그의 묘소가 있으니 지석(誌石)이 있느냐 없느냐는 단언할 수 없으나 만약 믿을 만한 자취를 얻는다면 어찌 큰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이 뜻을 종부시에 보고하여 관청에서 지석을 발굴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조선조의 문헌(文獻)은 전혀 징험할 수 없습니다.
공정 대왕(恭靖大王)의 묘호(廟號)를 예종조(睿宗朝) 때 안종(安宗)으로 정하였다는 사실이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의 소설(小說)에 나왔는데 예종 일기(睿宗日記)를 상고해 보고 알았습니다. 그 뒤에도 여전히 공정 대왕이라고 일컫고 안종은 일컫지 않았습니다. 또 역대 왕들의 지장(誌狀)에 성종조(成宗朝) 을미년(乙未年)에 무림군(茂林君) 이선생(李善生) 등이 올린 소(疏)에 “예종 기축년(己丑年)에 공정(恭靖)을 희종(熙宗)이라고 일컬었다.”고 하였는데 안종의 설과 맞지 않습니다만 묘호가 있다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실록에는 모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제왕(帝王)의 묘호는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모두 실록에 나타나지 않았으니 실록이 이처럼 엉성합니다. 공빈은 금성대군의 부인에게는 종손녀(從孫女)이고 임영대군의 부인에게는 질녀(姪女)입니다.
또 들은 바에 의하면, 충주(忠州) 청룡(靑龍)에 사는 허창(許錩)의 집에 야사가 있는데 공빈의 사건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그 말을 듣고 허창의 일가붙이인 무인(武人) 덕천(德川) 허필(許鉍)을 꾀여 빌려다 보고 돌려주지 않은 채 최씨의 일을 없애버렸다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김재로가 애당초 최씨의 사건을 몰랐는데 연경(燕京)에 사신으로 갔다가 《명사》에 최씨가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나머지 심지어 명 나라에 글을 올려 개정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최씨의 실적을 보고 그냥 숨겨버리고자 그랬던 것입니다.


예종 1년 기축(1469,성화 5)
 4월27일 (경진)
김호·전성동·이생과 최사강을 복호하도록 호조에 전지하다

호조에 전지(傳旨)하기를,
“최안(崔安)의 족친(族親)인 음성(陰城)의 김호(金浩)·전성동(全成同)·이생(李生)과 충주(忠州)의 최사강(崔思江)을 복호(復戶)하게 하라.”
하였다.
【원전】 8 집 364 면
【분류】 *외교-명(明) / *재정-역(役)
芝湖集卷之十三
 
英陵六大君傳 戊辰六月 a_143_573a


惟我世宗大王昭憲王后。凡有八嗣一女。一嗣文宗大王。二嗣世祖大王。而安平大君第三。臨瀛,廣平大君居其次。錦城,平原,永膺大君又居其次。女貞懿公主下嫁延昌尉安孟聃云。蓋顯陵姿極賢聖。爲東方守文之良主。光廟天縱英武。著化家爲國之盛烈。若安平曁廣平,錦城。皆有間世才德。而廣平弱冠早歿。安平終罹禍綱。錦城又自扞王法。皆不143_573b得令終。誠可惜哉。
安平諱瑢。字淸之。號琅玕居士。以永樂戊戌生。天資俊邁。儀表英偉。博洽經史。兼通內典。文章夙成。筆法與子昂並肩。加有飛動意。其餘篆籕八法。無不精妙。又善畫圖琴瑟之技。嘗承命與諸學士。裒集唐宋八家詩以進。又手抄白樂天三體詩,梅聖兪宛陵集。以行於世。世宗聞公所居無堂名。乃賜以匪懈公。遂倩一時文人。歌詠其事。作武夷精舍於北郊。又臨西湖。起淡淡亭。藏書萬卷。往來遊賞。其文華風流。輝映當世。文人名士。無不樂與之遊。景泰元年庚午。143_573c華使倪謙司馬恂之在館也。偶見公戲書泛翁策三字。大驚異。更請筆蹟。公一夜揮灑累百紙以與之。兩使極加歎賞曰。當今天下善書者。陳學士某爲最。而若比此則其不及遠矣。仍作詩以謝。上命公曰。此詩誠可傳。不宜泯沒也。公將求和章於搢紳間而未及。無何。上賓天。是年秋。太監尹奉詔而來。爲言兩使旣還朝。獻以公書。帝亦覽而奇之。卽命入石傳布。又自以縑素受書而去。於是。公之藝能。聞於海內矣。金節齋,朴平陽,申高靈作詩文以侈之。二年壬申。文宗昇遐。魯山嗣位。當是時。王室孤弱。大臣皇甫143_573d仁金宗瑞等。受遺敎輔政。方燕居深念。欲遏禍亂。明年十月。世祖首誅左相金宗瑞。詣闕上急變。卽命招大臣宰臣。椎殺領議政皇甫仁,兵曹判書趙克寬,贊成李穰。又遣人殺尹處恭。斬吏曹判書閔伸。遣禁府都事愼先庚。押大君。送于江華。敎曰。奸臣皇甫仁金宗瑞等。交結安平大君瑢。廣植親黨。分據中外。陰養死士。潛輸邊郡兵器。以圖不軌。今奸黨皆已伏辜。瑢至親不忍加法。其安置于外。又誅兵郞李賢老。竄右相鄭苯于樂安。平安監司趙遂良于固城。忠淸監司安完慶于梁山。參贊許詡于巨濟。池淨于靈巖。李143_574a石貞于延日。旣已皆坐死籍沒。兩司又啓曰。瑢首惡不可共戴一天。請按法誅之。魯山初不從。翌日。左相鄭麟趾等。率百官更請。乃遣禁府鎭撫李伯淳賜死。而以陰有異志。築武夷精舍。欲與宗瑞等相從。多處淡淡亭爲罪。又添以帷薄不忍言之罪。語在國乘。公得年僅三十六。夫人延日鄭氏。兵曹判書贈左議政淵之女。有二子。長友直。宜春君。娶右議政南智女。癸酉竄珍島以死。次友諒。德陽正。娶沈氏女。亦坐死。俱無后。公所書英陵碑極其致力。而被禍後朝家磨去。故不傳於世。獨安孝公沈溫墓額八法在焉。外143_574b方樓觀寺刹尙多所書扁額。而其親蹟至今流傳。寸楮尺幅。無不爲寶。墨本之傳世者亦不一。而惟月精寺水陸文最活動。詩文尤散落不存。宗室朗善君俁。收拾若干篇。藏于家。錦城諱瑜。字某。其生年不能知。而我廣平大君。以洪煕乙巳生。正統丙辰年十二歲。與公一時入學。仍就宗學。以此推之。公年亦不過差少一二歲。公德器淸高。辭氣灑然。無一點塵累。娶右贊成全州崔士康女。爲夫人。承命出爲昭悼公芳碩之后。嘗築室於瑞雲坊華山下。鑿池種蓮。亭于其上。以承恩扁其額。而文孝公河演爲之記。安平死143_574c後越二年乙亥春。大臣六卿政院。以和義君瓔與崔承孫金玉謙。讌射于錦城第。又通平原大君妾楚腰纖啓流于外。仍收大君告身。又安置。內官嚴自治於濟州道死。時世宗後宮惠嬪楊氏。以保護魯山出入禁中。重被譴責。和義乃惠嬪之出。而又與大君及自治陰護魯山。故皆被罪至此。是年六月。世祖受禪。尊魯山。爲恭懿溫文太上王。夫人宋氏。爲懿德王大妃。時上王往往開昌德宮北牆。往來大君舊第。人疑韓明澮等欲置上王於隘地。而令力士圖之。以故。魯山舊臣。尤悲憤。密爲之謀。丙子六143_574d月。終有成三問等六臣之獄。死者甚衆。丁丑正月。以宗親政府之請。上命修理大君第。出置上王。嚴其防禁。又安置大君於順興府。六月。貞熹王后之娚。前藝文提學尹士昫。以百姓金永水言。告判敦寧宋玹壽與敦寧判官權完等謀逆。於是下玹壽,完于獄。廷臣言上王得罪宗社。不宜居京師。乃降封爲魯山君。出置寧越。大妃降封爲夫人。又追廢。顯德王后改葬。以庶人之禮。秋。大君陰與本邑府使李甫欽約。率邑人以復上王位。及事覺。以十月二十日。賜死甫欽伏法。玹壽等處絞。順興一邑之人。擧被143_575a誅戮。而和義之同母弟漢南君,永豐君瑔曁寧陽尉鄭悰。皆安置於外。瑔又朴彭年之女壻。悰乃文宗朝駙馬。玹壽夫人宋氏之父完。顯德王后之幾寸親也。悰後加罪以死。而魯山終亦不保。大臣鄭麟趾宗室讓寧大君禔等。前後皆請之也。大君有一子。曰孟漢。咸從君。妾子曰銅。噫。諸大君中平原。又早歿。惟臨瀛,永膺。以純謹無他。被光廟眷遇。得以天年終。平原諱琳。字某。娶南陽洪氏。府使利用女。無后。以齊安大君琄爲后。臨瀛諱璆。字獻之。庚子生。壽五十。諡貞簡。娶宜寧南氏。右議政智女。無后。又娶全州143_575b崔氏。奉禮承寧女。生五子二女。子曰澍。烏山君。浚。龜城君。領議政。淳。定陽君。淨。八溪君。澄。歡城君。女適領議政愼承善,參判安友騫。側出。又有四子三女。永膺諱琰。字明之。甲寅生。壽三十四。諡敬孝。初娶宋玹壽女。再娶海州鄭氏。參判忠敬女。皆無后。三娶礪山宋氏。同樞復元女。生一女。適綾川君具壽永。側出又有二子二女。廣平諱璵。字煥之。號明誠堂。諡章懿。性度寬洪。容姿豐美。聰明孝悌。善屬文。書法亦妙。挽強射遠。又能擊毬,音律。算數亦極精妙。此非子孫之言。蓋史家之評如是。其詳在卞季良,李季甸等所撰行狀143_575c誌文云。娶平山申氏。同樞自守女。生一子。曰溥。永順君。再登文科。兩策勳籍。卒諡恭昭。與龜城君浚並名一時。光廟嘗稱之曰。文永武龜。永順。乃余七代祖也。
三灘先生集卷之十四
 墓誌
世宗莊憲大王遷陵誌石文 a_011_510b


恭惟我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太宗恭定大王第三子也。元敬王后閔氏。以大明洪武三十年丁丑四月初十日壬辰。誕于漢陽邸。自幼聰明絶倫。兩宮奇愛之。長封忠寧大君。性好學。雖在疾病。猶不釋卷。世子禔多失德。永樂十六年戊戌夏。群臣請廢立。太宗以王有潛德。具奏于太宗文皇帝。冊爲世子。秋八月。太宗倦勤。禪位于王。遣使請命。明年己亥春正月。帝遣使錫命爲王。繼遣使賜宴。又賜太宗宴。敕曰。王能簡賢命德。俾宗祀011_510c有托。不唯王一家之慶。且爲王一國之人慶也。歲庚子。元敬王后不豫。避忌于外第。王步行扶輦。至有露宿之時。及薨。哀毀踰禮。是年。設集賢殿。博選儒雅。置二十員以備顧問。壬寅夏五月。太宗薨。致喪三年。宣德元年丙午。宣宗皇帝賜綵幣書籍。自是寵賚頻繁。史不絶書。丁未秋。始置宗學。悉令宗室子弟受學。其諸子未就外傅者。亦敎以義方。嫡庶之間。禮嚴恩篤。人無間言。戊申冬。制朝會樂。始於大會。不用女樂。我國歲貢金銀。然非土宜。常患不給。乃遣親弟表請。朝議難之。帝曰。朝鮮王必不欺。豈可強人所無哉。許免貢。婆猪江野人數犯邊。癸丑四月。命將討之。斥地置慶興等鎭。自麗季。咸吉道沿邊之地。爲011_510d野人所據。至是盡復舊疆。甲子。對馬一歧島倭入寇上國。又侵軼我濟州之境。王使人諭島主。主承命。執送賊倭六十二人。於是械獻京師。帝賜綵幣嘉獎。夫以倭奴之頑悍。屈於折札。野人之桀驁。熸於偏師。非恩信素孚而威靈遠讋。則何以得此哉。初世子禔避謗在外二十年。召還京。群臣切諫皆不納。事二兄友諸弟。極其敬愛。以至九族之親。亦皆敦睦。王英睿冠古。輔以聖學。自卽位以來。宵旰求治。禮樂刑政。制度文爲凡先世所未遑者。皆擧而力行。酌古今文質之中。修五禮儀注。述祖宗功德之盛。作定大業等樂。創制訓民正音。以二十八字。盡通天下言語。文字紐切之妙。人所叵測。損益累朝憲章。以成經濟011_511a六典。規模宏遠。條貫詳密。可爲萬世法程。尤洞曉天文律曆。修七政算內外篇。作諸儀象。所以授人時也。取資治通鑑諸家註釋。讎校纂輯。名曰訓義。又撰三綱行實,治平要覽等諸書。所以隆文敎厚人倫也。哀矜庶獄。則有恤刑之敎。慮民淫僻。則作戒酒之書。虛懷受諫。尊賢禮士。終王之世。大臣無有遭刑戮者。尤重親民之職。朝臣未經守令者。不敢陞授顯秩。三十年間。吏稱其職。民安其業。朝庭淸明。四方晏如。號爲東方堯舜云。妃昭憲王后沈氏。靑松世家。皇曾祖諱龍。高麗贈門下侍中。靑華府院君。祖諱德符。相高麗恭愍王。再爲門下侍中。逮我恭靖王朝。爲議政府左政丞。封靑城伯。皇考諱溫。某官。皇妣安氏。領011_511b敦寧府事諡昭懿公天保之女。封三韓國大夫人。以洪武乙亥九月己未。生王后于楊州私第。少有聰慧貞淑之德。永樂戊子歲。后將笄。以選嬪于王。封敬淑翁主。敬事兩宮。篤承眷愛。后之進退。王必起立。其見敬禮如此。丁酉秋九月。改封三韓國大夫人。王之封世子也。進封敬嬪。及卽位。封恭妃。壬子正月。有司言中宮有美稱非古也。改封王妃。后正位中宮之後。益自謙謹。禮接嬪媵。甚得歡心。後宮有進御者。必加慰納。所生諸子。養之宮中。盡心撫育。同於己出。御膳進則必躬自省視。宮中之事。無敢專制。大小皆稟於上。亦未嘗爲親戚子弟求官與婚。儉以律身。慈以逮下。雞鳴進戒。述宣陰敎。011_511c配德並明。母儀一國。於戲。世宗有文王之聖。王后石有大姒之賢。故以能致關睢之化。螽斯之慶。本支百世。祚流無極。正統十一年丙寅春三月二十四日辛卯。以疾薨于外第。春秋五十二。王悼失良佐。以白衣素膳終三十日。夏六月。降冊諡昭憲王后。越五年庚午春二月十七日壬辰。王亦以疾薨于別宮。春秋五十四。在位三十三年。文宗率群臣上諡曰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廟號世宗。又表請易名。帝遣使致祭。賜諡莊憲。初。合葬于獻陵之西岡。以今上殿下卽位之元年己丑春三月初六日庚寅。移葬于呂興府治之北城山南向之原。實成化五年也。后誕八男二女。長文宗恭順大王。景泰三年011_511d壬申五月十四日薨。次世祖惠莊大王。成化四年九月初八日薨。次瑢。歲癸酉。謀不軌賜死。次璆。臨瀛大君。先遷陵二月卒。次璵。廣平大君。次瑜。亦謀不軌賜死。次琳。平原大君。與璵皆先卒。次琰。永膺大君。先遷陵二年卒。女長未䈂而卒。贈貞昭公主。次貞懿公主。下嫁延昌尉安孟耼。愼嬪金氏生六男。長璔。桂陽君。次玒。義昌君。次琛。密城君。次璭。翼峴君。次璋。寧海君。次璖。潭陽君。遷陵之年。唯密城在。餘皆先卒。惠嬪楊氏生三男。長。次玹。壽春君。早卒。次瑔。與以瑢黨貶死于外。淑婉李氏生一女。貞安翁主。適儀賓沈安義。尙寢宋氏生一女。貞顯翁主。適鈴川尉尹師路。宮人姜氏生一男瓔。亦以瑢黨貶死于外。文011_512a宗顯德王后權氏。贈議政府左議政專之女。誕一男一女。男卽魯山君。女敬惠公主。下嫁鄭悰。司則楊氏生一女。敬淑翁主。適儀賓姜子順。世祖慈聖王妣尹氏。贈議政府左議政璠之女。誕二男一女。男長懿敬世子。早卒。次卽今上殿下。女懿淑公主。下嫁儀賓鄭顯祖。某官朴氏生二男。長曙。德原君。次晟。昌原君。瑢娶贈左議政鄭淵之女。生二男。長友直。次友諒。皆連坐死。臨瀛娶右議政崔承寧之女。生五男二女。男長澍。烏山君。次浚。龜城君。次淳。定陽君。次淨。八溪君。次澄。懽城君。女長中牟縣主。適兵曺參判居昌君愼承善。次淸河縣主。適司䆃正安友騫。側室生四男六女。男長涵。英陽副正。次潾。丹溪副正。次濯。輪山副011_512b正。次沃。玉川副正。女皆幼。廣平娶某官申自守之女。生一男。漙。永順君。瑜娶贈左議政崔士康之女。生一男。平原娶贈左議政洪利用之女。無子。永膺娶某官宋福元之女。生一女。側室生一男一女。皆幼。瓔娶密山君朴仲孫之女。無子。側室生一男。桂陽娶左議政韓確之女。生七男三女。男長澧。寧原君。次瀜。江陽君。次湜。富林都正。餘幼。女長適某官安繼편001。餘幼。側室生一男一女。男幼。女適某官鄭從善。義昌娶某官金脩之女。生一男二女。男灝。蛇山君。女長適參奉辛禹鼎。次幼。娶戶曹正郞權格之女。無子。密城娶軍器副正閔承寧之女。生四男二女。男長誡。雲山君。次譡。春城君。次。遂安都正。次䛿。石陽都正。女長適某官011_512c某。次幼。壽春娶全州府尹鄭自濟之女。生一女。適某官沈順老。翼峴娶某官趙鐵山之女。生一男一女。男漬。槐山君。女幼。瑔娶朴彭年之女。寧海娶某官申允童之女。生一男一女。皆幼。貞懿公主生四男二女。男長安如獺。僉知事。次溫泉。副正。次桑雞。典籤。次貧世。參判。貞顯翁主生二男。長尹磻。僉知事。次磷。護軍。貞安翁主生一男一女。男幼。女適某官崔孟思。


[편-001]宋 :

寅齋先生文集卷之四
 附錄
政院日記 a_008_395b


 

世宗十四年壬子冬十月初十日乙未。大司憲申槩啓。近日本府糾摘成均館生徒多少。只九十餘人。學者甚少。此無佗。師儒之士。不過三員故也。上謂申商,許稠曰。以閒官加設兼官。使之勸學。何如。其議以啓。十一月二十二日丁丑。大司憲申槩等啓。聽訟之際。事干朝士。則以書劾問。巧飾答通。不卽輸008_395c情。甚爲未便。請依前例。三品以下。親進劾問。上曰。待朝士不可輕賤。故已立親問之禁。何可輕改。槩曰。自立相爲容隱之法。未盡推劾。決事爲難。上曰。然。遂傳旨刑曹官吏推劾罪人之際。相爲容隱之親。亦皆拿來憑問。傷恩敗倫。實爲未便。謀反以上外。毋得拿來推考。已曾立法。若其立證受罪之事則已矣。至於相考之事。亦拘容隱之禁。未得推問。以致淹延。亦爲未便。其立論受罪事外。相爲容隱族親。推考條件。令政府諸曹同議以啓。
008_395d十六年甲寅三月二十九日丁未。召議政府六曹議事。一。今者。通事金精秀回自北京曰。指揮金聲之弟言曰。去冬。裵指揮見辱於揚木答兀。皇帝欲發遼東軍九千皇城軍一千。致討以灑之。其皇城軍糧餉。令朝鮮供之。予聞之。以爲一千名一朔之糧。不過四百石。加一朔則八百石。其數不爲多矣。且此事不得已聽從。若待勅書而後轉輸。則無乃事緩乎。預先次次轉輸以待之何如。彼人等聞本國資糧。必結怨於我國。然聖旨不可不從。何計其怨我乎。然今當慶源,寧008_396a北。一時並設。糧餉不敷。將以此奏之。必不準矣。準不準之間。奏請何如。此非細事。其熟議以啓。僉曰。此是傳言。待見勑書後更議。申槩獨曰。今不多之數。次次輸轉預備何如。一。金精秀又言禮部程郞中。言於宋成立曰。中宮東宮進獻紅苧布。何以同裹於一袱與一油芚。成立答曰。若別裹則過乎負重。用是同封耳。程郞中又曰。啓汝殿下。自今別裹可也。予聞之。以爲兩宮布子。同封一袱。其來尙矣。前無言說。今始言之。必有以也。抑恐成立錯言而然。僉曰。上敎允008_396b當。宜山君來則必知其實。然臣等謂不是成立之所錯。恐怒甲移乙之辭也。一。被虜帖兒漢。厥初委係本國。奏聞留置。今更思之。此女之有無。不關國之利害。且其夫去秋來請肆欲還送。然其時奏聞留置。今無故發還。似乎不可。待其夫更請而發還乎。待見勑諭後發還乎。領議政黃喜等議。其夫更請而發還爲便。工曹判書趙啓生議。初旣奏聞留置。當具其辭更奏後發還。贊成盧閈議。使邊將知會來請後還送。戶曹判書安純等曰。國之利害。何關此女之有無。卽今008_396c發還可也。一。禮曹啓。倭客齎來銅鑞鐵。或三分之二。或爲半。於浦所留置。和賣何如。戶曹右參判朴信生議。除鑞鐵外。銅鐵爲半。並其餘物。令京中齎來和賣。兵曹左參判鄭淵曰。以典農寺綿布。每年秋冬。常換綿紬。以待倭客出來。送于浦所。令買銅鐵。以備國用。折半京中齎來。且許其浦所私相貿易。刑曹左參判崔士儀曰。因此生變可慮。又國用銅鐵藥材等物。恐不齎來。依前施行。參贊李孟畇曰。轉輸有弊。依前啓施行。但令禮曹量其物主尊卑與其舟楫相通之008_396d時。加減轉輸。安純等曰。前旣減輸。今又減數。恐違歸附之望。義當仍舊。吏曹判書申槩等曰。驛路疲弊。皆委浦所和賣。喜等議。除京中輸轉。若不獲已國用之物。則送綿紬于浦所。量宜貿易。載船齎來。一。議於黃喜,孟思誠,許稠,盧閈,安純等。太監尹鳳前者養母給糧之請。予欲從之。然傳聞之。請開其聽從之端。似乎不可。故未敢從之。今適其弟重富進馬。憑其馬價。欲給米豆共三十石。何如。僉曰。上敎允當。又議于喜曰。昔李叔蕃謂貞陵非正室。乃妾也。卞季良非008_397a之曰。非妾也。乃嫡也。今誠妃亦如是也。卿其時密近太宗。必知其時衆議。其悉陳之。喜曰。年久忘之矣。然臣心以爲貞陵。何與於配祭之例。誠妃亦如是也。倘或誠妃不諱三年後。則必與貞陵同矣。上曰。予已具悉。
夏四月初二日己酉。以申槩爲吏曹判書。初七日甲寅。吏曹啓。咸吉道吉州。地廣人稠。事務煩劇。牧使領軍而出。則曠官廢事。誠爲可慮。復置判官。從之。
冬十月二十六日己巳。謝恩使申槩,洪理等。往008_397b太平館,以明日發行辭。使臣等曰。明日起程。則是殿下促我等也。申槩將此意以啓。上怒。卽命都承旨安崇善。往告使臣曰。自我祖宗以來。四十餘年恭事朝廷。慶事到國。則不踰十日。遣使謝恩。明有前例。今使臣。本月十二日到國。二十一日遣使謝恩。例也。予強從使臣之請。不得已遷延。退定二十七日。使臣何發促行之言乎。若使促行。則以前定二十一日發程。何敢退定乎。發程後行之緩急。專在使臣之意。使臣等曰。二十七日發程徐行。以待我等一時越江。幸008_397c甚。二十七日庚午。謝恩使吏曹判書申槩,副使同知中樞院事洪理等。齎擎表箋及卞明奏本。如京師。上率世子以下文武百僚。拜表箋如儀。
十七年乙卯三月初五日丁丑。謝恩使申槩,副使洪理回自京師。二十七日己亥。以申槩,爲刑曹判書。
十八年丙辰五月初五日庚午。領議政黃喜,參贊申槩等詣晝停所。請進酒曰。謁陵之後。固當飮福。且今日是俗節。願進酒。上曰。旱災太甚。008_397d且今有地震。災變荐臻。豈可飮酒自歡。喜等又啓曰。聖體夙興。遠來拜陵。侵犯嵐霧。今不進酒。恐致違和。上曰。予不飮酒。欲民效之。且合懼災之意。槩涕泣固請。不允。 時上親謁獻陵
十九年丁巳六月十七日乙巳。上命辛引孫,金墩賚李蕆書。往申槩家議之。槩等又議數策以啓。上曰。可並書送之。十九日丁未。右承旨金墩啓。今猶未知李滿住所居。乞依申槩上言。使監護官1。與凡察率來諳事性直人閑話。先言佗事。反覆譬喻。以問滿住居處。隨宜鉤鉅其008_398a情。則庶或知之矣。上使金河因閒話問之。使彼不知我之有意也。
冬十月二十四日庚辰。以申槩爲議政府左贊成。
十二月二十五日壬午。召領議政黃喜,左贊成申槩,右贊成李孟畇,左參贊趙末生,右參贊崔士康,禮曹判書權踶,兵曹判書皇甫仁,僉知中樞院事金聽,吏曹參議崔致雲等。使辛引孫,金墩議事。一禮部云。冠服奏請則可以蒙賜。且云。遠遊冠。舊例也。今親王服皮弁冠。予欲奏008_398b請。何如。僉曰。依禮部所言奏聞而並請服爲可。一。今衝天角。曩者中朝使臣有云。體制失眞。今欲於冠服奏請時並請之。何如。僉曰。可。申槩曰。其來已久。宜勿奏請。一。勑諭云。童倉等欲移婆猪。恐朝鮮國不肯放。本人及所管五百戶,指揮高早化管下五十家。並護送出境上。今移居婆猪童倉。前日無移徙之請。我亦無禁遏之令。而今若此。且其所管未滿一二百戶。而以虛事奏聞。其計狡矣。何如而可。僉曰。本人等雖久居我境。其租稅徭役。一皆蠲免。特令完恤。移徙之008_398c請。前所未聞。今欲移徙者。意必忌我國輒解唐人之逃來。故欲與滿住結黨爲寇。而移居于婆猪。以此奏聞爲可。又於奏本。其管下多少眞僞。並錄亦可。一。滿住報復之心。未嘗少弛。而東八站舊路。近於婆猪。欲請刺楡塞新路。何如。僉曰。限賊變寢。經由刺楡新路赴京。以此奏請爲可。一。東八站之路。可畏如此。赴京使臣迎送軍。不宜單弱。加其軍額。移咨遼東。何如。喜等曰。舊額四十。又加四十爲便。槩等曰。宜加一百六十。喜等又曰。軍數倍於前。宜移咨遼東。俾知之。008_398d金聽,崔致雲等議曰。軍數不多。不須移咨。一。計稟使誰可。須擇遣知國家大體古今事變者。乃可辦事。並議以啓。喜等薦禮曹判書權踶,中樞院副使閔義生,吏曹參議崔致雲等。上曰。宜以此意草奏本。遂以權踶爲計稟使。迎送軍數。從槩等議。加一百六十。命勿移咨遼東。
二十年戊午六月初二日丙戌。上謂都承旨辛引孫曰。古昔帝王。親覽祖宗實錄者頗多。且孔子作春秋。至於定,哀。朱子於中庸。論神宗昭穆之制曰。考之史籍。則人臣亦觀當代之史矣。惟008_399a唐太宗欲觀國史。褚遂良,朱子奢等以爲不可。文宗欲觀史。魏謩,鄭朗。亦以爲不可。然此皆觀當時之史。故臣下以爲不可。若祖宗實錄。則觀之何害。昔我太宗欲觀太祖實錄。卞季良等以爲太祖實錄。修史甚善。皆直筆也。今殿下進而賜覽。後人皆疑。反爲不信之史矣。太宗不果見。今予卽位。欲修太宗實錄。大臣或以爲但具史草以傳。則後世自當修史。今不必汲汲。且不宜以宰相監修。予以重事。故竟命宰臣修之。予又念子孫不知祖宗事業。將何所監。008_399b欲以觀太宗實錄。議諸臣僚。柳廷顯等以爲監于成憲。善繼善述。實爲美意。乃得觀焉。今又思之。若非當世之史。則監觀成憲。祖與宗何別。旣觀太祖實錄。則太宗實錄。亦宜觀覽。議諸兼春秋大臣。黃喜,申槩等皆曰。歷代人君。雖有觀祖宗實錄者。恐非可法也。唐太宗欲觀史。褚遂良,朱子奢等以爲陛下獨覽起居。於事無失。若以此法傳示子孫。或有飾非護短之史官。不免刑誅。則莫不順旨全身。千載何所信乎。臣等之議。正與此同。此數臣皆號名臣。其言必有008_399c所見。且太宗事。皆殿下所親覩。若以爲法戒。則歷代之史備矣。何必今之實錄乎。況祖宗之史。雖非當代。而撰修之臣。今皆在焉。若聞殿下省覽。則心必未安。臣等亦以爲未便。上不果覽。
二十一年己未六月初十日戊子。以許稠爲左議政。申槩爲右議政。上謂金墩曰。爾若見黃喜。則曰領議政老且病。許稠雖無病。亦年過七旬。今以申槩年齡未老。氣亦疆健。乃以爲右議政。領議政當頤養於家。聽斷機務可也。不必強仕008_399d也。
八月十八日癸巳。御思政殿。親抽四書五經中一書。講館試。入格擧子三十人。東宮及宗親讀卷官,右議政申槩,刑曹判書鄭麟趾,藝文提學崔致雲,右承旨趙瑞康,左副承旨許詡,集賢殿副提學安止,直提學金鑌,應敎金汶,李思哲等入侍。二十一日丙申。御勤政殿。策試擧子。謂讀卷官右議政申槩曰。今觀學生。不究性理之書。徒務詞章。予將問其理學。乃出策題曰。嘗觀六籍之文。其義往往似有抵牾。予竊疑焉。008_400a易曰。作易者其有憂患乎。又曰。樂天知命。故不憂。其言之相戾。何歟。書稱文王曰。不遑暇食。用咸和萬民。稱武王曰。垂拱而天下治。其所以爲治之不同。何也。詩曰。昊天曰明。及爾出王。則天非冥冥而難知也。又曰。上天之載。無聲無臭。則天不可得而測也。亦將有說乎。子大夫講之熟矣。其各詳辨以對。予將親覽焉。遂使諸生疏行列坐。令人守之。毋得相通與語。又幸慕華館。試武擧騎射。
二十二年庚申夏四月初三日甲戌。賜領議政008_400b黃喜,右議政申槩,軺軒。仍傳旨禮曹。自今二品以上許令乘軺軒
二十四年壬戌五月二十一日庚辰召領議政黃喜,右議政申槩,淸平府院君李伯剛,右贊成崔士康,星原君李正寧,左參贊皇甫仁,右參贊李叔畤,前都節制使李蕆,知中樞院事鄭麟趾,僉知中樞院事庾順道,都承旨趙瑞康,右副承旨姜碩德議獻陵修補事。使晉陽大君瑈,安平大君瑢傳敎曰。獻陵,健元陵,齊陵皆可修治。須當置局。監掌其事。其司何以命名。喜等008_400c啓。當曰山陵修理都監。上曰。可。仍敎曰。禮文有曰,人君卽位而爲椑歲一漆之。則預置壽陵。未爲嫌也。且人君年旣老而爲之。則臣子之心。猶可嫌也。今予年未暮矣。何嫌之有。若置山陵修理都監。則兼治壽陵之事可也。喜等曰。上敎允當。但數陵一時修理。則未暇兼治壽陵之事。上曰。當從卿等之議。遂設山陵修理都監。以申槩,李伯剛爲都提調。河演,李蕆,李正寧,金宗瑞,同知中樞院事李思儉爲提調。又置使副使,判官各二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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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400d秋七月二十日戊寅。召領議政黃喜,右議政申槩,左贊成河演,右贊成崔士康,左參贊皇甫仁,右參贊李叔畤,兵曹判書鄭淵,參判辛引孫等。議備邊之策。僉議云。甲山地面賊人聲息屢報。宜加兵卒以備禦敵。慶尙道泗川,固城,寧海。最爲近海。防禦緊急。邑城未築。宜急築之。下三道及黃海道沿邊散居人民。被賊可畏。宜令移入陸地。以避賊變。又各官城及甕城,敵臺,池濠。一時並作爲難。宜當漸次築之。且下三道沿邊各官築城畢役後。內地各官邑城。以次築之爲008_401a便。從之。
八月初八日壬申。上令議政府,禮曹。議王世子嬪喪主除服之節。領議政黃喜,判書閔義生,右參贊李叔畤,參判尹炯等議。王世子嬪卒哭後。喪主除衰服。以白衣白靴烏角帶烏紗帽。常侍魂殿。朝夕上食。若朔望祭及俗節別祭。則著衰服行祭。期年而止。有不得已之故。具辭以聞。然後出入。右議政申槩議。喪主以衰服常侍魂殿。期年而除。左贊成河演議。喪主以衰服常侍魂殿。期年後。以白衣白靴烏角帶烏紗帽。008_401b朔望祭及俗節別祭。詣魂殿致齊行。祭三年而止。上從喜等議。又議嬪墓立石馬與否。黃喜,甲槩,李叔畤等議。先王陵室。有石人二石虎二石羊二石望柱二。而無石馬。今世子嬪墓。亦宜除石馬。河演議。石馬有古制。自今於陵室。皆置石馬二爲便。閔義生,尹炯等議。元敬王后之陵。石人四石羊四石虎四石望柱二。無石馬。貞昭公主墓。石人二石羊二石虎二。今除石馬。加羊虎各一。以別貞昭公主墓制。上從演議。九月初四日辛酉。春秋館監館事申槩,知館事008_401c權踶,同知館事安止等啓。太祖康獻大王,恭靖大王,太宗恭定大王實錄。事多闕逸。請修改。從之。
二十五年癸亥夏四月二十日乙巳。領議政黃喜,右議政申槩,左贊成河演,右贊成皇甫仁,左參贊權踶,右參贊李叔畤等詣闕啓曰。稱臣於世子而朝之。則嫌於至尊。況資善,承華堂。乃至尊臨御之所。尤不可也。上曰。予非固執而不聽。予病之差否。不可以歲月期也。日深不減。則朝參庶務。其可久廢乎。前日卿等啓曰。太008_401d宗文皇帝使太子監國。專以耳聾眼暗而爲之。然皇帝或親諭本國使臣。而暫無聾暗。但以病故。使太子監國耳。今我疾病而使世子攝政。何不可之有。喜等更啓曰。如不得已。則坐於東宮正門東壁。群臣行再拜禮。何如。上曰。大臣之言如此。則予心亦安矣。群臣雖不稱臣於世子。可也。世子於師傅宗親尊長朝參之際。凡所行禮。其商確古今以聞。喜等更啓曰。此事稽諸典籍。然後可以議定。上曰。使禮曹,集賢殿相考諸書。擬議以聞。仍命改前下敎旨曰。資善,承華008_402a堂。乃予臨幸之所。世子嫌於南面。可於東宮正門。南面而坐。一品以下。再拜庭下。世子不答。又命晉陽大君瑈,安平大君瑢。書晉,宋以後列國世子故事。仍問於喜等曰。世子嬪。不幸損世。今未終制。蓋古制。禮無二嫡。然次妃升爲后者亦多。今東宮承徽之中。無德儀出衆者。然於其中。擇其德優者。封嬪主內治如何。喜等啓曰。封嬪則名分至重。不可輕議。姑以其中有德行者。主內治。徐觀德行。然後命之爲主。亦未晚也。
二十六年甲子夏四月初五日乙酉。右議政申槩008_402b遘疾累日。命上京調理。仍賜內醞及廏馬一匹。五月二十七日丙子。賜几杖于右議政申槩。
二十七年乙丑春正月十八日壬辰。上使晉陽大君瑈。傳旨申槩,河演,權踶,金宗瑞曰。內禪之事。堯舜之後數千年間。不過十餘君。然或有勢不得已者。或樂於優游頤養者。皆非美事也。我國戊寅庚辰戊戌之事。皆有變故而然。近年水旱相仍。且予宿疾纏綿。連喪二子。天之不佑也明矣。因疾不受朝。又不見隣國之使。祭享香祝。亦008_402c不親傳。深居九重之內。凡事皆令宦者傳命。錯誤者多。人君之職。果如是乎。欲令世子卽位治事。予則退居。軍國重事。予將親斷。是則非歷代內禪之比。卿等其知之。槩等驚駭失色。涕泣曰。殿下何有是言。春秋鼎盛。雖有宿疾。聰明自若。起居如常。二事之故。非天之譴。壽夭脩短。本是氣數之難逃。雖宦者傳命。小事悉以文書出納。大事則東宮引承旨親問。熟議以啓。然後還付承旨施行。事無一毫之失。以此治國。何不可之有。殿下深知內禪之不可而欲效之。臣等008_402d未知其可也。且太祖以來。連三世內禪。今又行之。朝廷聞之。以爲朝鮮家法如此。眞外夷也。又將何辭奏達朝廷乎。朝廷若問四世內禪之故。則亦將何以對。戊寅庚辰戊戌之事。皆有辭焉。今無如彼之變而效之可乎。願亟收是命。勿播於外。臣等雖死不奉敎。上強之。槩等極言不可。以至夜分。明日復爭之。上曰。將來之事。雖聖人不能預料。後日內禪與否。未可必也。然今日則姑從卿等之請。
二十四日戊戌。以申槩爲議政府左議政。河演008_403a爲右議政。皇甫仁爲左贊成兼吏曹事。
夏四月二十八日辛未。左議政申槩,右議政河演,禮曹判書金宗瑞,左參贊李叔畤來問安。上曰。予之宿疾日增。旣不受朝。又不見隣國客人。常處深宮。凡大小公事。使宦者傳命。事多錯誤。且一應庶務。勉強親斷。恐生佗證。欲禪于世子。予則頤養。只斷軍國重事。槩等泣曰。殿下雖有宿疾。春秋鼎盛。雖使宦寺傳命。皆以文書啓達。或命東宮,大君出議。事無差誤。以此治國。何不可之有。亟收是命。上強之。槩等固008_403b請。上曰。姑從卿等之請。
二十八年丙寅春正月初五日癸酉。議政府左議政申槩卒。
二月初九日戊申。賜祭于左議政申槩。


春亭先生續集卷之四
 附錄
世宗實錄 a_008_217a



戊戌
八月戊子。以卞季良爲禮曹判書知經筵事。○壬辰。上王親詣健元陵。行秋夕祭。兼告傳位。領議政韓尙敬,戶曹判書崔迤,禮曹判書卞季良扈駕。○癸亥。吏曹判書鄭易,禮曹判書卞季良等。合司啓曰。上王慮年歉。停各殿遠道進上。臣等以爲殿下以國奉父王。乃以弊停進上物膳。恐有違奉養之意。縱不能復一朔再進之制。請依近一月一進之敎。008_217b上曰。順承是乃孝也。上王慮民臣艱苦。命除之。予不敢以請。○癸未。始開經筵。領經筵事朴訔,李原,知經筵事柳觀,卞季良,同知經筵事李之剛,參贊官河演,金益精,李隨。尹淮,侍講官鄭招,柳穎,侍讀官成槩,檢討官金楮,副檢討官權蹈等。進講大學衍義。上曰。設科取士。欲得實才。何以則令士去浮華之習。季良,之剛等對曰。初塲。以疑義觀經學。終塲。以對策觀適用。此初立法之意也。近學生不務實學。改立初塲講經之法。由此英銳可用之才。皆趍武科。上曰。講經最難。今雖使卞三宰講。安能盡通乎。仍命領經008_217c筵外。同知經筵以上。一日一員進講。侍讀以下。分三番進講。參贊金益精,李隨,尹淮。亦一日一員進講。○甲辰。上王置酒迎慰上。孝寧大君補,領敦寧柳廷顯,左議政朴訔,右議政李原,參贊卞季良,吏曹判書鄭易,戶曹判書崔迤,禮曹判書許稠,工曹判書孟思誠,兵曹參判李明德,大司憲許遲,司諫鄭守弘及六代言侍宴。上王謂羣臣曰。聞卿等請芳幹父子及朴蔓,任純禮,申孝昌,鄭龍壽,李叔蕃,黃喜,廉致庸,房文仲,權約之罪。以爲君父之讐。不可不復。所謂復讐者。以父不能有爲。我在位十九年。豈有不能而待008_217d後世也。乃歎曰。我百世後未可知也。我在無復言。○十一月 丁未朔 己酉。上命參贊卞季良製樂章。欲以封崇之日獻壽上王也。詞曰。云云。見上。以爲初筵獻壽之歌。又作天眷東陲之曲曰。云云。見上。以爲罷宴之曲。○癸丑。御經筵。問宋朝名臣事蹟。卞季良對曰。溫仁謹厚。司馬溫公爲最。王安石。先儒以爲小人。觀其文章政事與其用心。恐未可專以小人目之也。上曰。安石。小人之才者也。○甲寅。上以衮冕御仁政殿。奉玉冊金寶。上上王尊號曰聖德神功上王。大妃尊號曰厚德王大妃。親授上王冊寶于進冊008_218a官朴訔,進寶官李原。大妃冊寶于進冊官南在,進寶官柳廷顯。送之仁政門。訔等奉冊寶。至壽康宮上之。上王冊曰。云云。見原集。寶曰聖德神功上王之寶。樂章曰。云云。 見上 大妃冊曰。云云。見上。印曰厚德王大妃之印。樂章曰。云云。見上。是日。廷臣以雨雪。請更卜日。上遣近臣白之。上王曰。古人以雪爲祥。且有司已具。不可改日也。除百官。唯冊使來可也。命從上王旨。從宮中道往上壽。朴訔,李原,南在,柳廷顯,讀冊官卞季良,讀寶官趙末生,大妃讀冊官孟思誠,讀寶官閔汝翼,孝寧大君補等侍宴。伶人奏卞季良所進新008_218b詞。上王稱美主上之誠孝亟曰。辭位以後。吾益尊矣。唱和極歡。○丙辰。上謂卞季良曰。卿善製樂章。父王稱嘉。賜內廐馬一匹。○庚申。大司憲許遲,義禁府提調卞季良等請曰。孝昌以私心仰凟日月之明。其罪深重。鞫問其情。上王從之。○十二月 丙子朔 丙戌。上王與上御寢殿。餞平安道觀察使尹坤,都節制使尹子當。親餞功臣奉使者自此始。孝寧大君補,領議政柳廷顯,左議政朴訔,右議政李原,漢平君趙涓,參贊卞季良,禮曹判書許稠,兵曹判書趙末生,參判李明德,大司憲許遲,知申事元肅侍宴。○008_218c戊子。上問曰。科擧圓點之法。何以設乎。卞季良,許稠等對曰。生員食學稟兩時者爲圓點。生員不樂居齋。故立此法。滿三百點。然後許令赴試。季良因啓曰。臣再掌科擧。講經之法。實爲不可。今之儒者。拘於口讀。徒以誦習爲業。故其氣固滯。而短於詞賦。且試官面對擧子。豈無私心。高麗之時。立封之法。以此也。權近常患此弊。上書請罷。上王從之。歲丁酉。用一二文臣策。復立此法。臣以爲射者戲事。而人所樂爲也。今京中子弟以文科難以跂及。皆趍武科。不可不慮。孟思誠曰。古有進士科。其中者。唱名簾前以寵異008_218d之。人皆樂爲之。今罷進士。但有生員試。額止一百。宜加其額。以勸志學之士。季良曰。鄭道傳始廢進士。合於生員。李穡甚恨之。上又曰。初塲試五經如何。季良曰。初塲本有五經疑。或全擧五經。或擧三經。或一經而問之。今宜別立初塲之法。以代講經。許遲曰。害於義。更張可也。無害於義。載在六典。太祖成憲。不可改也。掌試者若無私心。取士安有不正者乎。上曰。大司憲之言甚當。季良曰。法有隨時而變。豈可固執乎。○庚子。御經筵。上曰。高麗史恭愍以下。鄭道傳以所聞筆削。與史臣本草不同處多。何以傳信於008_219a後世。不如無也。卞季良,鄭招曰。若絶而不傳於世。則後世孰知殿下惡道傳增損直筆之意乎。願命文臣改撰。上曰。然。

元年己亥
元年己亥春正月。 丙午朔 上壽于上王。宗親議政府參贊六曹判書以上及大司憲六代言侍宴。酒酣。上王起舞。羣臣以次上壽迭舞。爭進聯句歡極。夜深乃罷。當宴。上王語孟思誠,卞季良,許稠等曰。後殿眞勺。其音節雖好。其歌詞不欲聞也。思誠等曰。上旨允當。今樂府用其調。不用其詞。眞勺。有慢調。有平調。有數調。高麗忠惠王頗好淫聲。與嬖幸在後殿。作008_219b新聲淫詞以自娛。時人謂之後殿眞勺。非獨其詞。調亦不可用。○上王命卞季良撰賀皇恩曲。將以宴使臣也。序曰。云云。詞曰。云云。俱見上。○丁巳。義禁府提調卞季良等請朴信到遼東聞趙忠佐漏洩幾事。不卽首告之罪。上王曰。今有大功。勿論。○二月 丙子朔戊寅。命參贊卞季良,禮曹判書許稠等。開生員試于成均館。遣右副代言崔士康。奉御寶宣醞。往成均館。○壬午。卞季良,許稠請復進士試。不允。○戊戌。卞季良啓。東堂初塲講經之法。乃我太祖成憲也。然擧生以面講不中爲慚。憚於學問。就武擧者多。此實有008_219c乖於國家興學取士之義。置師傅於成均。分遣敎官於鄕學。春秋敎以禮樂。冬夏敎以詩書。而臣請以製述取士。上曰。然。當更議之。上問諸代言。皆曰。不可遽罷。獨柳穎曰。講經不如製述之興起斯文。上曰。使擧生不得聚頭通議。則製述爲佳。○五月 乙巳朔庚辰。卞季良以旱甚。請復圓壇祭天之禮。上曰。僭不可行也。季良對曰。諸侯不可祭天。禮固然矣。聖人垂訓。亦以爲不可。近者。周倬奉使而來。謂我國人曰。聞爾國祭天。以人事言之。爾國設饗禮以請朝廷。宰相容有許可。至如天子。雖請以誠。豈肯降臨爾國乎。008_219d於是始廢。然以臣所見。莫如祭之。前朝二千年相承祀天。况本國地方數千里。不比古者百里諸侯之國。何嫌之有。上曰。豈可以地方數千里。遂僭天子之禮乎。季良復啓曰。臣以謂行之爲可。何則。沂水之邊。有祭天禱雨之處。然則此禮古亦有之。常祭則不可。因事而行。猶爲可也。今當大旱。亦無所妨。祭之何嫌乎。上然之。命擇祭天之日。○六月 甲戌朔 庚寅。禁大小使臣姦官妓。時議政府六曹以平安監司尹坤所啓共議。皆以爲行之已久。不必禁也。惟朴訔以爲宜從坤請。卞季良固請仍舊以副衆心。上曰。其來雖008_220a久。豈是美俗。况其有夫之妓乎。可從坤請。○辛酉。京畿監司李迹報。今審早糓。幷審科受私田。卞季良啓。雖使幷審私田。誰肯用心檢踏乎。歲丁酉。已行此法。乃以不中。命他委官使之更審。而其失中者。皆杖一百。若凶年則幷審私田。豐年則許田主自審。而或失其中。罪之可也。趙末生啓。若凶年幷審。豐年許田主自審。是凶正其稅而豐使橫斂也。實非中正之道。不可行也。當遣敬差官時。命公私田一以中正踏驗。私田收稅之法。庶得平矣。元肅啓。今隔一畒。一爲公田。一爲私田。其收稅多少。大相不等。百姓怨咨。田主雖008_220b橫斂。其細戶俛首聽從之不暇。豈敢自訴。上曰。然。○戊辰。御經筵講春秋。至秋大水胡傳後世有人爲不善。感動天變。召水溢之灾者。必引堯爲解。誤矣。上曰。如此者必多矣。人臣有喜言祥瑞者。有喜言灾變者。專言祥瑞而不及灾變。是豈可乎。値祥瑞則言祥瑞。遇灾變則言憂懼可也。卞季良啓曰。人主不可喜祥瑞而忘灾變。憂灾變而略祥瑞也。○八月 癸酉朔戊子。義禁府提調卞季良等詣壽康宮啓。昨承命鞫朴實敗軍之罪。實供稱李從茂初令三軍三節制使。皆下陸而戰。後變令三軍節制使。各一下陸。實執籌008_220c乃下。賊強我弱。再報請救。從茂不聽。柳濕,朴礎等。亦不下救。故見敗。臣等謂非特朴實之罪。從茂,濕礎。皆亦有罪。請幷鞫之。上王曰。朴實敗軍之罪。固所知也。若以法論。則廷顯爲都統使。不卽收實請罪。是亦有罪。今罪張蘊以誣告而賞諸將。又下廷顯,從茂於獄。無乃有愧於國人乎。况東征勝多敗少乎。後日之事。亦不可不慮也。若爲大擧之計。亦宜用權。然吾豈以此終不治其罪乎。今實當以功臣之子免之。○九月 癸酉朔 丙午。先是。卞季良承宣旨。撰樂天亭記以進。命權弘書刻板懸于亭。記曰。云云。見原集。○壬戌。上008_220d命藝文館大提學柳觀,議政府參贊卞季良等改修鄭道傳所撰高麗史。○戊辰。上再朝壽康宮。三議政及卞季良,許稠等議喪禮。三議政及趙末生據鄭康成之言。以爲主上於大行上王。孫之行也。上王率百官。當服斬衰二十七日。主上當服齊衰十三日。卞季良,許稠啓曰。兩上率羣臣。皆當服斬衰。昔宋孝宗崩。光宗病。寧宗當服喪。文公勸寧宗代父行斬衰三年之禮。寧宗從之。及光宗病瘳。御史胡奏曰。光宗病愈。宜行喪如法。以寧宗行三年之喪爲非。遂使寧宗不終。雖寧宗從胡奏而中變卽吉。008_221a實光宗病愈故也。病若未愈。終三年必矣。今上服斬衰三年。用以日易月之制。當二十五日釋服。二十七日禫祭卽吉。可也。兩上從三議政之議。○甲戌。朴訔啓曰。進告訃請諡表箋。雖是戊子年例。使副俱行。豈爲無弊。當依請封世子及請傳位例。遣一人進奏啓本可也。李原及卞季良等曰。當依戊子年例。兩上從朴訔之言。○十一月 辛丑朔 丁未。兩上晝停于扇巖洞。留都宰樞。遣參贊卞季良問安。仍獻酒果。上王賜季良毛衣。○丁卯。上王因論檜巖寺僧徒犯姦盜事。笑曰。以吾心觀之。對大臣對小宦之時008_221b異。彼僧徒常近婦女。豈能不犯乎。吾曾立法。使僧徒不得役婢子。爲此也。其令奴子輪番入役。可也。又有上策。只給土田。革其奴婢。安有此弊。僧徒雖親執薪饌。亦可也。諸臣皆出。命留柳廷顯,朴訔,李原,卞季良,許稠,趙末生,元肅。辟左右曰。革寺社奴婢。予素欲也。但恐此屬逃入中國生變如尹彜,李初之事。以是未果頓革。反令勿役。以慰其心。今乃自取。又誰怨乎。宜令臺諫上疏。政府六曹亦宜請之。卞季良曰。宜只革婢子。李原非之。上亦不允。○庚午。上王與上御內殿。引見柳廷顯,朴訔,李原,卞季良,趙末生,許稠,008_221c申商,李明德,張允和等。上王曰。兵曹多事。欲令與諸曹同進主上殿啓事。而三軍鎭撫代兵曹。專掌軍事。啓聞于我。何如。皆曰。鎭撫代兵曹專掌軍事。則其多事。何以異於兵曹。不如仍舊宜定事目。以除煩冗。上王曰。然。卿等其擬議施行。○十二月 辛未朔 庚辰。兩上御壽康宮便殿。燃燭。召兵曹參議尹淮,知申事元肅。屛左右近侍。諭及僧徒之事。上王曰。今日主上告我以僧人三十名逃入中原之事。聽此忽憶昔者尹彜,李初逃入上國。誣訴本國。假作倭賊。窺覘上朝。以高皇帝之明。亦且惑之。本國辨析累歲。008_221d終不能自明。及寡人初年。貶上黨君李佇于外方。有一僧逃入上國。告之過實。今皇帝亦信之。語本國使臣曰。爾國王殺了親的後。久備知寡人心地。乃悟告者之誕。又皇帝聞本國招安野人。賜之紗帽品帶。及其還則以帶帽繫於馬脅之事哂之。如此之類。全是不逞之徒。逃入上國。虛辭交構之使然也。且東北兩界。境連上國。人之逃入也甚易。况僧徒之逃入。又易於平民乎。今者。皇帝深信浮屠。勝於蕭梁。名稱歌曲之誦。遍於天下。空花佛편001之瑞。播於圖畫。一時俗尙。靡然趍之。而我國則前旣革去。寺社田民。僅存十一。008_222a今又盡去寺社奴婢。雖其自取。豈無怨咨乎。此輩旣已缺望。又聞皇帝崇佛。必有逃入上國。飾辭讒訴之人。况皇帝之崇信如彼。而我國之革除如此。僧徒之欲逃此而入彼也無疑矣。古之人。臨時制變。有從權變通之理。今宜爲僧徒。開其自慰喜悅之心。皇帝所賜名稱歌曲爲善陰隲之類。速令西北面黃海道等使臣來往之地。聚會僧徒及耆老人等。常加讀誦。又製歌詩。稱讚佛氏及皇帝崇信獲報瑞應屢現之狀。令上妓肄習。如有上國使臣。則沿途經歷。有誦經者。燕饗歌舞。有誦德者。皇帝聞之。必喜我國能體聖心。008_222b雖有逃入讒訴之人。不得售其說矣。且欲令慈福寺田。移屬僧人會處。以安其心。寡人非怵於佛氏禍福之誘也。天子亦豈以我國排斥佛氏。遽興師問罪哉。然當時權宜。不得不爾。汝等豈不知乎。其與卞季良,許稠及三議政密議熟計。肅啓于主上。以轉達於寡人。肅等退與季良,稠議之。季良曰。上敎甚是。當行誦經崇佛之事。然要在安其心而禁防逃逸。臣意以爲宜還其奴子。以安其心。嚴令兩界。以防逃逸。且請還已逃之僧。稠曰。臣聞命乃知殿下千思萬慮。欲爲長遠之計。非臣等所及也。崇佛誦經之事。謹奉008_222c敎矣。還給奴子則不可。但京中之寺。依住僧徒。率皆兩班子弟。負薪汲水。必有怨咨。可量給奴子。以慰其心。肅與季良等。偕就三相第密議。○丙申。卞季良奉敎製賀聖明歌三章以進曰。云云。進口號曰。云云。詞曰。云云。退口號曰。云云。俱見上。命下禮曹被之管絃。

二年庚子
春正月 庚子朔 戊申。上王問曰。慶尙,全羅道船軍。擇無才者換屬侍衛軍。如何。朴訔,卞季良曰。須先實侍衛軍。然後當慮船軍。不可換定也。柳廷顯曰。倭寇可慮。當換定以備不虞。○己酉。上御廣延樓下。上問誓戒之義。卞季良對曰。不犯染。不縱酒。008_222d不茹葷。收放心也。古者。誓戒于三司。今也誓戒于議政府。以政府百官之首故也。金漸啓曰。齋戒宰相。皆聚于議政府。則禮賓無奔走饋餉之勞。宰相亦安心定位。且今議政府不坐本府。使大廈空曠。莫若聚議政府也。卞季良啓曰。議政雖不坐本府。乃百官之首。不可雜處也。且入淸齊者。須居靜處。以收放心。不可羣居共坐。談笑喧譁也。上曰。然。金漸啓。禮賓寺虛竭。且提調猥多。不視職事。只率跟隨而已。季良曾爲本寺提調。故辨之不得。漸又啓。豐儲倉官秩卑。宜以三品官差下。季良以爲不可。上然季良之言。○閏008_223a正月 庚午朔 壬午。卞季良,許稠,行大司成柳伯淳等。承命試生員于成均館。左代言金益精奉宣醞及行信寶。往成均館。以慰試官。遂印試券。○戊子。上曰。宴享時常用鄕樂。甚爲鄙俚。其令卞季良,趙庸,鄭以吾等。以獻壽之意。警戒之辭。各製歌詞三首。○甲申。新置集賢殿。以柳寬,卞季良爲大提學。初因前朝之制。修文殿,集賢殿,寶文閣大提學提學。以二品以上爲之。直提學,直殿,直閣。以三四品爲之。然無官署職任。惟以文臣加官而已。至是悉罷之。只留集賢殿。置司于宮中。擇文臣有才行年少者充之。專事講論經史。008_223b以備顧問。○丙戌。御仁政殿。發策覆試金汶等三十三人。恩賜三人。吏科一人。亦預焉。讀券官李原,卞季良,許稠對讀官權蹈。藝文直提學成槩。○夏四月 己亥朔 己未。遣權跬,元肅及柳廷顯,卞季良奉宣醞。餞使臣于碧蹄驛。○己巳。上王及上置酒于別殿。柳廷顯,朴訔,李原,鄭易,許稠,趙末生,卞季良,申商,李明德,李之實,元肅等入侍。進獻使通事金時遇,全義回自北京。言皇帝怒進紙奏不塡日字。故不敢進請免金銀奏本。上王曰。請免金銀。此其時矣。若此時請不得。後來必以此爲據。宜備細布。因事進獻。須臾請008_223c之。廷顯等對曰。上敎甚當。易獨以爲宜進松鶻。上王曰。得之最難。其爲物也。才品特駿可愛。然日食一雉。養之亦難。又不調馴。或時逸去。則鷹師等每憑尋捕。侵擾邨落。其弊莫甚。故已悉放之。季良曰。殿下此言。可書之史。垂法萬世。○五月 戊辰朔 癸未。以上王誕日。上獻壽于樂天亭。讓寧大君,孝寧大君,恭寧君,敬寧君,柳廷顯,朴訔,李原,李伯剛,趙大臨,權跬,尹季童,柳觀,趙涓,朴子靑,鄭易,李和英,卞季良,崔潤德,權永均,許遲,許稠,趙末生,申商,李明德,安純,韓確,洪敷,李皎,元肅等入侍。羣臣以次獻壽迭舞。上008_223d起舞。上王亦舞。語卞季良曰。子爲王至誠奉養。爲其父享之如此者。古今所罕。乃賜上酒。又賜三議政酒極歡。夜分乃罷。○壬辰。柳觀,卞季良會集賢殿。試殿官等詩。○上王召柳廷顯,朴訔,李原,卞季良等至。命李明德,元肅語之曰。羣臣累請收從茂錄券。予皆不允者。不欲其削去功之籍也。今若不召還。旣爲安置。竟無還期矣。李迹非自啓達也。只請於從茂耳。且其父年老。誠爲可㦖。林尙陽亦無他犯。皆可赦之。洪汝方。功臣吉旼之子。起意召兵曹令史。致問予擧動。固當削去忠義衛矣。朴瑞生,宋仁山,鄭淵,許倜等008_224a初皆止之。不得已而與焉。是亦可赦。予若不赦。主上必不敢輕赦。爾等備傳予意于三議政及卞參贊。予不親問者。欲其商確以對耳。肅以傳于廷顯等。皆曰。上敎甚當。但朴瑞生等被罪。편002 踰月放還似輕。朴訔曰。赦之可也。廷顯曰。從茂及李迹等。罪干不忠。不宜赦。然上敎如此。敢不奉旨。兩上引見廷顯等。置酒極歡。上王曰。今日爲諸卿之來。予親獵獲獸。廷顯等起謝。各以次迭舞。競進聯句。兩上亦起舞。○乙未。視事經筵。卞季良錄高麗史灾異以進。上曰。前後漢書所載灾異。朱子於綱目不盡載。今讐008_224b校不必加錄也。○六月 戊戌朔 丙午。卞季良詣豐壤問安。○七月 丁卯朔 癸酉。大妃疾復作。上王自豐壤御壽康宮。視疾。召柳廷顯,朴訔,李原,卞季良,許稠,元肅等曰。脫有大故。殯所不可不慮。廣延樓下及壽康宮內。何處可乎。皆曰。廣延樓待使臣之處。壽康宮亦隘狹。請修明嬪殿。從之。○丙子。命卞季良,郭存中護喪。以驪川君閔汝翼,前府尹李種善及卞季良爲殯殿都監提調。○丁丑。上召許稠,卞季良曰。予聞令我行易月之制。十三日而釋服。然乎。是雖宋制。予嘗以爲薄行。今乃使予行之歟。稠曰。易月之制。行之已008_224c久。且承宣旨。已定喪制。上曰。然則予於山陵後免衰絰。百官於十三日免衰。易以白衣烏紗帽。如何。稠揮淚曰。上敎至矣。臣等何敢更言。百官亦當於山陵後免衰。○八月 丁酉朔 甲辰。上王召卞季良,許稠,元肅等傳旨曰。已從易月之制。十三日除喪。而於訃告文書。不用寶。未知終期年不用寶乎。於賀正文書。亦不用寶乎。季良等對曰。皆是十三日後事。然告訃凶事。故稱哀子。不用寶。賀正吉禮。故稱國王。且用寶。如有問之者。宜對以此。肅對曰。旣行易月之制。雖凶事。當稱王用寶。不然則當於解送唐人咨。略載遭喪008_224d不敢署事之意。俾達朝廷。不可專使告訃。上王曰。前後不同之意。辨析似難。且諸侯告天子。不可用權。天子聞顯妃之薨。降勑賜祭賜賻。而不問其不訃。德妃之薨。帝亦不問其不告。則今大妃之薨。必不問其不告。如或問之。對以不敢仰凟宸聰。事歸恭敬。不如不告之爲愈也。雖訃告無請諡誥命之禮。是要其賜祭耳。雖爲異議。予當不聽。卿等且啓主上告政府。卞季良啓。槨用黃膓積材有隙。請依世俗用全板。從之。○丁未。上將詣樂天亭。上王以雨止之。柳廷顯,李原,卞季良,許稠,元肅等。詣樂天亭。○上王曰。008_225a聞主上欲五月而葬。故還止之。早知百日內通吉。則雖無禮文亦可。况有三月葬之文乎。且予命卽爲法。何必古制。人死過十日二十日。則無有生理。古人有一月而葬者。有十日而葬者。予今定爲三月之葬。無有異議。季良等還啓。上曰。家禮王公三月而葬之文。非朱子之本意。實責世俗不葬之辭也。上意已定。不可違越。但嫌右議政粗見禮文。輒啓達。季良曰。今日之事。上王權時處之。非欲立法也。○庚申。參贊卞季良撰獻陵誌文以進曰。云云。見上。命判敦寧府事權弘書諸石。○冬十月 丙申朔 己亥。議國喪期008_225b年內宗廟及望闕禮用樂可否。許稠對曰。太祖之喪。卒哭後用樂。宗廟宜遵成憲。望闕禮亦宜用樂。卞季良曰。宗廟用樂則可。望闕不可。若上不出。而百官以時服行禮。則似爲得體。上曰。宗廟可依成憲。望闕用樂。更議施行。羣臣出。謂近臣曰。望闕。予先行禮。百官以時服用樂蹈舞。如何。○癸酉。上詣豐壤上壽。柳廷顯,朴訔,李原,柳寬,卞季良,孟思誠,李之剛,李之實,李伯剛,趙大臨,南暉,趙涓,延嗣宗,洪敷,李皎,李明德,元肅,尹淮,鄭招,金益精侍宴。各以次進爵。上王曰。今日是佳節。主上與大臣來獻壽。吾豈不008_225c醉。以國君無事去官。未知有幾。賜元肅卓上杮橘。令與其母。賜入番宰樞及代言酒于兵曹廳。

三年辛丑
春正月 甲子朔 癸巳。前此以鄭道傳所撰高麗史。間有與史臣本草不同處。且稱制勑稱太子之類。語涉僭踰。命柳觀,卞季良讐校。至是書成乃進。○辛亥。左議政朴訔,參贊卞季良來問起居。○甲子。發丁夫二千。驅禽于訥豆山。夕駕次大和驛之野。留都羣臣。遣參贊卞季良。問起居獻酒果。上曰。前命五日一次問安。何至七日乃來。季良對曰。左議政朴訔以謂未晚。乃於前月二十九日。封酒授臣。緣此遲來。008_225d上王命內臣餽酒賜鹿二頭曰。後來問安者。雖逢路上。汝率還京。○五月 壬戌朔 己卯。上奉上王幸樂天亭。大閱五衛陣。前此上王命參贊卞季良。考據古制。以成陣法。上於內中。又出畫本陣法一軸。季良參究爲五陣法以進。令訓鍊觀依法敎隷。至是三軍變爲五陣。無失次者。旣閱。乃觀手拍之戲。置酒奏樂。慰三軍將帥。○庚辰。上命金益精問於卞季良曰。今卿所撰陣說內。應敵之際。後衛先出應敵及觸處爲先之說。似皆拘於一偏。予意以爲中衛主將臨時布置。或前或後。或左或右。從其主將之指揮。可008_226a也。季良曰。後衛先出之說。出於五陣本法。觸處爲先之說。亦出於諸家陣法。皆不可廢。請兩存其說。上曰。予之所言。卿之所言。俱書以進。予將啓于父王。季良書二條以進。遣尹淮等以啓于上王。○六月壬辰朔 庚申。兩上御水亭。仍設小酌。柳廷顯,朴訔,李原,卞季良,趙末生,尹淮,金益精,權蹈,郭存中,曹崇德等。侍議請還逃僧適休事。○秋七月 辛酉朔 戊寅。朝廷議建廟之地。左議政朴訔以爲四祖殿。若在大室之西。則宗廟太祖以下。皆子孫也。夫卑者在側。而四時大享不與。於人情未安。長生殿在國之西。與宗廟008_226b隔。請以爲四祖殿。參贊卞季良。亦請於宗廟隔遠地建廟。時上王在豐壤宮。禮官俱啓。上王曰。祖宗在天之靈。豈容地之遠近有聞不聞耶。且爲祖宗。難於土木役而用古殿。非禮也。宜遵古制。建廟大室之西。號則宜曰永寧殿。葢祖宗子孫。有俱安之意云。○八月 辛卯朔 辛丑。上在樂天亭。召柳廷顯,李原,卞季良,許稠,李之剛議事。仍置酒。○庚戌。上王與上同御水閣。置酒奏樂。爲迎鄭擢,尹子當,李中至,趙啓生之還。餞新除邊將郭承祐,趙菑,趙慕,沈寶,金乙辛,陳原貴,金益生,李澄石,吳益生,朴寅吉等也。幷賜坐008_226c閣上。茂長鎭兵馬使朴東秀等七人。坐於閣下。命孝寧大君補及柳廷顯,李原,趙涓,卞季良,許稠,趙末生,李明德,河演,金益精等侍宴。入直宰樞。賜宴于兵曹廳。侍衛軍士皆賜酒。○甲寅。參贊卞季良,禮曹判書李之剛等啓曰。成均學生。屢因浮腫而死。臣等聞其故。皆曰。生員皆欲滿圓點三百。且因考講之法。長坐一處。勉強讀書。故勞神喪氣。不知病之深至於死也。臣等以謂圓點考講二事。國家欲令勤學。務要成材。不可革也。使醫二人竟相遞番。朝夕與居救療。則可無浮腫者。上從之。又謂季良等曰。卿等會于成均008_226d館。訪問其弊以聞。朝退。獨召季良。與語移時。○九月辛酉朔 丁卯。議政府啓曰。臣等欲進箋請上上王徽號。願殿下爲臣等善啓焉。上諾之。尋詣樂天亭。領議政府事柳廷顯等。遣參贊卞季良,禮曹參判河演。奉箋詣樂天亭以進。箋曰。云云。見原集。箋上。上王遣宦官嚴永秀傳旨曰。箋內辭意到。然若爲太上。則豐壤出入。亦不可輕。卞季良,趙末生,河演等啓曰。雖尊爲太上。何害於出入。乞以前日殿下事太上之心。體今日主上事殿下之心。以賜兪允。上王曰。前朝忠宣王父子。亦賢君也。克盡慈愛。未聞008_227a有太上之號。何必尊崇然後盡父子之道乎。卞季良對曰。臣等以王季,文王期之。豈敢以忠宣父子望於今日乎。上王曰。去年主上再請。今羣臣合辭固請。予不得已許之。前此予爲聖德神功上王。每於祝文見之悚然。封崇日期。使臣還後。更涓日行之。季良等復啓曰。十五日。乃世子封崇日也。乞於其日行之。世子封崇。姑待後日。上王許之。復啓曰。十五日猶遠。十二日亦吉日也。請於此日行之。上王又許之。尋使永秀傳旨。使臣支待事煩。姑停之。○己巳。命元子名曰珦。上與柳廷顯,許稠,卞季良議曰。008_227b欲使元子見於使臣。於何所見之乎。廷顯等請於溫斟宴見之。又問服色。廷顯等曰。今當請命之時。宜以紗帽品帶見之。上從之。○冬十月 庚寅朔 辛卯。戶曹請修大淸觀。上謂卞季良曰。卿知大淸觀設置之意乎。季良曰。捴制金瞻嘗商確其事。臣則不知也。吏曹判書孟思誠曰。大淸觀。創自高麗。其東有射廳。將帥受命分閫者醮之。古例也。且遼東學館之東。有星宿影殿。其東又有射廳。疑大淸觀倣此而設也。上謂季良曰。大淸觀。信不可無。當置京中。何必置於留後司耶。卿更考古事以聞。○己亥。朝新宮置酒。柳008_227c廷顯,李原,趙涓,卞季良,孟思誠,趙末生,李之剛,曹致,李明德,金益精等侍。○甲辰。駕次臨津。留都羣臣。遣參贊卞季良問起居。○十一月 庚申朔 丙寅。視事。謂近臣曰。予欲觀資治通鑑綱目。卞季良請觀性理之學。今曰始講四書。卿等其知之。知申事金益精請令代言一人入侍。上從之。是日。始講大學。○太上王問卞季良,趙末生,李之剛,金益精曰。高麗始祖配享功臣凡六。今我太祖配享惟四人耳。議其有功者加配如何。開國之時。功之大小。予盡知之。南誾唱於外。李濟助於內。其功不細。予昔與南誾,李濟,趙仁沃008_227d共坐。誾出。仁沃曰。開國。此人之力也。誾,濟功大如此。太祖在天之靈。豈不欲令配享乎。後雖有罪。功不可廢也。季良等對曰。二人前雖有功。後不忠於社稷。豈可以功揜罪乎。太上王曰。卿等更議以聞。明日。當與卿等定議。○丁卯。太上王召柳廷顯,李原,卞季良,許稠,趙末生,李之剛,李明德,金益精置酒。議太祖配享功臣。廷顯等議如太上旨。明德啓曰。南誾雖有功。知有太祖而不知有今日。假如得遂其謀。則安有今日乎。臣以爲不宜配享。太上王曰。不可以私怨棄大功也。乃命贈誾及濟諡。○辛未。上008_228a奉太上王。自豐壤還御新宮置酒。補,裀,李原,金承霔,卞季良,李明德,金益精侍。○丙戌。太上王召卞季良,許稠。賜毛衣毛冠。○十一月 庚寅朔 辛卯。知司諫許盤石,執義朴安臣等。復請金漸之罪。上曰。已知卿意。安臣出。上從容謂近侍曰。臺諫之請然矣。然以犯在赦前不聽耳。漸之所犯。非挾椒房之勢也。狂妄不畏人之致然也。左代言鄭招對曰。漸之在獄也。卞季良訊之不服。季良誘之曰。子今行年五十。前去百年幾何。子雖服罪。以知敦寧。挑燈坐奧房度餘年。亦足矣。漸答曰。心雖不肖。以予貫日之忠。獨坐度年。008_228b心實痛焉。仍放聲而哭。此誕妄之證也。○壬寅。命議永寧殿祭享疎數。饌品豐殺及樂懸儀仗之數。朴訔議我太祖追崇四祖。乃建宗廟。今當遷之祖。依宋制建別廟。其祭期之疎數。祭品之豐殺與夫樂懸之差等。臣不敢妄議。竊謂文宣王異代追崇之聖。尙且廟食萬世。我四祖。盛朝始廟之主。當享百世。其祭期祭器樂懸之數。幷依已定文宣王祭禮施行。請朔望仍舊。大享止於春秋行之。祭品樂懸。皆如釋奠例。移安時儀仗。依唐代宗附廟時遷毀廟之制。用本室舊仗移安。卞季良議高麗諸陵署。尙備朔望。况別008_228c立廟於宗廟之西。以安四祖。崇奉之至也。然祭之疎數。則不可與宗廟無別。朔望仍舊。大享止於春秋行之。如社稷例。其祭品樂懸。皆與宗廟差减。朱子論四祖殿曰。棟宇儀物。亦必不能如宗廟之盛。葢別廟。不可與宗廟等。故朱子酌事理之輕重而言之也。非謂別廟儀物當如宗廟之盛。而宋朝不能爲之也。然則別廟祭器樂懸之不可與宗廟等。朱子之意也。臣不敢加損焉。許稠,李之剛議宋制別建僖,順,翼,宣四祖殿于太祖之西隅。歲令禮官薦獻。三年一祫。先詣四祖殿行禮。次詣太祖廟。逐幄行禮。乞依宋制。每歲008_228d一次行祭。三年一次祫享于別廟。朱文公論僖祖不當遷曰。別立一廟。以奉四祖。則別廟棟宇儀物。亦必不能如太廟之盛。是乃名爲尊祖而實卑之。然則別廟奠物。不可减於宗廟。且宋制。別廟在大殿西隅。相踞甚邇。無別立神廚。而每當祫享。先詣四祖殿行禮。次詣大廟。逐幄行禮。則大廟別廟牲牢。必無別備。今別廟奠物內。犧牛共用於兩廟。祭時樂懸。只設堂上樂。朴訔,卞季良,李之剛等。又獻議。唐玄宗天寶二年。追尊咎繇爲德明皇帝。凉武昭王爲興聖皇帝。各立廟。四孟月祭享。肅宗寶應時。禮儀使杜鴻漸請停四008_229a時享獻。獻,懿二祖。祔于德明,興聖廟後。祭禮未有所考。太祖之後。祧遷之主。依歷代之制。藏諸西夾室。只於祫祭與享。不可與別立四祖殿同。許稠又議。宋別立四祖殿。以奉追崇之祖。歲令禮官薦獻。三年一祫。先詣四祖殿行禮。太祖以下祧遷之主。藏諸西夾室。每遇祫享。合食於太祖之前。今旣依宋制。別立永寧殿。以奉追崇之祖。其永寧殿及太祖之後祧遷之主。祭享疎數。奠物豐殺。一依宋制。上命遷廟。只於春秋大享。其牲牢祭品。視宗廟。○庚戌。太上王謁健元陵。上如中良浦。設幄殿以迎。張樂置酒。孝寧008_229b大君補,敬寧君裶,恭寧君裀,順平君羣生,淸平府院君李伯剛,領議政柳廷顯,左議政李原,右議政鄭擢,贊成孟思誠,參贊卞季良,禮曹判書李之剛,兵曹判書趙末生,刑曹判書李潑,兵曹參判李明德,都摠制權希達,洪敷,知申事金益精等侍宴。

四年壬寅
四月 丁亥朔 戊子。兩上觀獵于加乙麽峴。留都羣臣。遣參贊卞季良來問安。仍獻酒果。賜季良鹿二。○丙申。還給及第李馨期紅牌。左議政李原,參贊卞季良啓收紅牌。故事所無。故有是命。○癸卯。太上王召卞季良,李之剛曰。恭妃旣生世子。然君008_229c王繼嗣。不可不廣。與三議政及大司憲成揜,司諫沈道源等。選可爲嬪媵者二人以聞。○五月。 丁巳朔上在新宮。太上王疾劇。上憂懼。命參贊卞季良,前大司憲金自知,奉常少尹鄭宗本,供正庫副使李通。以星曜法。卜其吉凶。○丙寅。以議政府參贊卞季良,吏曹參判元肅爲편003殿都監提調。○丁卯。延嗣宗,卞季良啓曰。殿下自侍疾以來。至今不進膳。恐傷聖體。上曰。昨日。政府六曹請之。卿等今又請之。予當夕而聽。夕奠後。政府六曹咸進。涕泣啓曰。聖人垂訓。有曰無以死傷生。願殿下節哀進膳。以全大孝。008_229d上乃進淡粥小許。日止一次。○壬午。上以皇帝北征。當遣人問起居。而以方在衰絰。令政府六曹擬議以聞。皆云。不可以私喪。廢君臣之禮。宜稱王用印。一如常例。卞季良,許遲以爲依中朝易月之制。於二十七日後遣使。上曰。於奏本稱國王用印於禮部。議政府呈狀。○命更議欽問起居事。柳廷顯,李原,鄭擢,許稠,李之剛,李孟畇,承文院提調韓尙德等議。殿下雖居衰絰。欽問事重。恐不可稱哀子。稱王用印。一如常例。後日如有解送逃來人口事。令議政府申達。則朝廷知以欽問時稱王用印者。重其事也。卞季良008_230a議曰。殿下不用易月之制。於卒哭前。不釋衰服。其後尙且權免視事。而朔望祭及凡干喪事。皆著衰服。以終三年。是則山陵之前。不可稱王用印。顧皇帝起居。不可不問。葢不可以私喪廢君臣之大禮。但於奏本。不可稱王。唯稱孤子。似亦不背於理。遣使若在二十七日之後。則稱王用印。以據天下古今定制。亦何害於義哉。殿下於所當擅便之事。不用易月之制。羣臣亦皆則效。以至卒哭。獨於欽問一事。權從易月之制。稱王用印。如此則忠孝兩得。元肅議曰。奏本稱王用印於禮部遼東。令議政府申呈。似有未便。山陵008_230b前凡有奏啓。皆稱孤子。於禮部遼東。政府申呈則可矣。於奏本旣稱王用印。則禮部遼東。亦當稱王用印。而以二十七日後塡日。乃從廷顯等議。○辛丑。議政府禮曹因許稠上書。議國葬儀仗以聞。領議政柳廷顯,禮曹判書李之剛,參判李孟畇等。請用大駕儀仗。左議政李原曰。宋至道三年太宗之喪。有司請大駕儀仗鹵簿萬八千九百三十六。若全用其數。則慮山道近隘。車騎塡委。望加裁定。詔用其半。然則前此用大駕鹵簿之數明。今山陵之路。非近且隘。請用大駕儀仗。右議政鄭擢請用太祖國葬時吉仗。參贊008_230c卞季良曰。前者。禮曹啓云。大行太上王喪葬之制。一依元敬王后喪制。事已施行。呈報政府。臣始知之。君王之喪。豈可援引后妃之例。書之史冊。傳之後世。禮曹及政府大臣咸以謂宜。更啓請用太祖及恭靖大王喪葬之制。臣謂恭靖大王之喪。儀仗之數。减於太祖二分之一或三分之一。龍扇鳳扇等物是已。今宜從太祖喪葬之例。若太祖時未備。而詳具於恭靖之時者。當從恭靖之例。以至元敬太后之喪。不關后妃而可采者采之。臣之志也。葢太祖之時。大作佛事。及至葬也。佛儀甚多。008_230d殿下已汰之矣。恭靖王儀仗。减於太祖。不可施於今日。且太后之喪。后妃之制。不可援以爲例。宜可參酌。更考古典。勒成一典。於事爲宜。上命用大駕儀仗。○八月 乙酉朔 辛亥。李原,卞季良等獻議曰。梓宮赴山陵時。耆老及生徒僧徒。不可不奉請於發引日。令耆老生徒僧徒序立於百官路祭幄次之側奉辭。從之。○冬十月 乙酉朔 壬寅。禮曹判書金汝知啓。李原,鄭擢,柳寬,卞季良等。以爲今當國喪。不宜取士。臣與許稠以爲科擧雖是吉事。無害於義。不可廢也。上曰。吾意亦如此。卽下傳旨于禮曹曰。文武科008_231a試取。依前例。講經則今當年歉姑除。取以製述。○壬寅。以卞季良爲藝文館大提學。

五年癸卯
六月 庚戌朔 壬申。傳旨。昔晉山府院君河崙,吉昌君權近掌文詞時。大提學卞季良往來其門習之。今集賢殿副提學申檣。亦於卞季良門來往習之。初上問季良曰。繼卿主文者誰歟。季良以申檣對。○秋七月 己卯朔 壬辰。遣內臣賜卞季良燒酒。○丙戌。大提學卞季良以疾辭職。不允。○冬十月 戊申朔 庚申。吏曹判書許稠,大提學卞季良等議。請於北郊望祈。中央及四方。依唐制稱某方。岳海瀆之神。山川之神。008_231b其奠物。亦設十位。岳海瀆一祝。山川一祝通行。從之。○辛酉。傳旨。在前晉山府院君河崙,大提學卞季良修改諸處祭享祭文祝文外。通行祭文祝文。更令主文者修改。錄之儀軌。○十二月 戊申朔 辛未。春秋館知館事卞季良,同知館事尹淮等上書曰。臣等竊見永樂七年九月我太宗恭靖大王命禮曹稽古前代修撰實錄之例以聞。禮曹上言西漢武帝時司馬遷撰惠文景本紀。唐太宗詔房玄齡等撰高祖實錄。宋太宗命沈倫等撰太祖實錄。元成宗詔翰林國史修世宗實錄。本朝國史依倣此例修撰。太宗乃令本008_231c館修撰太祖康獻大王實錄。乞依成憲。修撰恭靖大王及我太宗,恭定大王兩朝實錄。以垂永世。從之。○癸酉。大提學卞季良改修廣孝殿大享祭祝曰。云云。朔望祭祝曰。云云。 俱見上

六年甲辰
五月 乙亥朔 辛巳。命獻陵大祥後長明燈燃火及朝夕焚香。領議政柳廷顯,左議政李原等議長明燈焚香。非古制。宜制。星山府院君李稷,大提學卞季良,吏曹判書許稠,禮曹參判李明德等議云。除燃燈而焚香。依健元陵例。命從李稷等議。○癸未。傳旨曰。予於近左腋下發微瘇。然大祥大事。欲詣幄008_231d次。易服而還。許稠等啓不必親幸。不允。領議政柳廷顯,左議政李原,大提學卞季良,判漢城吳陞等亦啓曰。大抵病加於小愈。今殿下恃其小愈。力疾而行。誠爲未便。請停親行。上亦不允曰。若病未差。予豈不知大軆而強之。○六月 甲辰朔 丁未。召領議政柳廷顯,星山府院君李稷,左議政李原,大提學卞季良,吏曹判書許稠,禮曹參判李明德。使知申事郭存中傳敎曰。今觀所上祔廟儀註。當祔廟日。於廣孝殿。出太宗王后兩位神主時。卽行奠禮安位板。予惟祔廟之日。其重專在祔廟。而欲以考妣之神。先安於原008_232a廟。然後次行祔廟之禮。則誠敬未專。甚爲不可。且奉神主祔廟後。卽還廣孝殿。遂行奠禮。奉安位板。則似乎適中。然予當擧之日。夜分而起。先詣原廟。行動駕祭。奉神主祔廟後。又還原廟。奉安位板。則非獨予之倦怠。百官有侍從。煩屑勞。予以爲當祔廟之日。親奉神主。祔于宗廟。命臣於原廟。攝行奠禮。仍安位板訖。更待祔廟後。擇日親祭。何如。卿等其議以聞。廷顯等皆曰。攝行可矣。卽命禮曹以此節次。修儀註以進。上又傳敎曰。嚮許稠言歷代帝王諡號。三代以上。皆以一字。如文,武,成,康是也。至後世唐,宋及本國,高麗008_232b王氏。皆加上尊號。或十餘字或二十餘字。美號有限。而互相追崇。故名實不孚。予亦以爲不足貴也。今於母后。亦加上徽號乎。恐元敬之外。更無以加。廷顯等曰。上敎善矣。然本朝宗廟四室以上。皆上徽稱。今太宗王后。則當百世不遷。宜倣太祖神懿王后例。加上尊號。若在後世。當從稠議。上曰。然。○甲寅。星山府院君李稷,吏曹判書許稠等議。一。元敬王后加上尊號。后於神主。無進書之例。且神主改造。古制所無。只於祭文祝文。具書加上尊號。一。加上尊號。前期一日。於廣孝殿。當行預告祭。祭式依朔望008_232c例。一。加上尊號玉冊奉獻時祭儀。若依別祭例。則嫌於援尊。宜從朔望例。於太宗大王前用朔祝。太后前用別祝。讀玉冊。藝文館大提學卞季良議。加上尊號玉冊奉獻時祭例。依文昭殿神懿王后忌辰兼祭太祖例。宜於朔祭。用有名日別祭儀。餘同稷等議。命用季良議。○甲申。前此大提學卞季良上議曰。爲之後者爲之子。古也。恭惟太宗爲恭靖王之后。則太宗乃恭靖王之子也。今殿下於恭靖當孫。而遷翼祖於永寧也。無疑云云。○丙申。賜藝文館大提學卞季良,禮曹參議成槩鞍馬。領敦008_232d寧致仕權弘馬。季良撰獻陵碑文。槩書弘篆額。○癸丑。進讐校高麗史。其序文曰。恭惟我太祖開國之初。卽命奉化伯鄭道傳捴修高麗國史。於是。採摭各朝實錄及檢校侍中文仁公閔漬綱目,侍中文忠公李齊賢史略,侍中文靖公李穡金鏡錄。彙而輯之。倣左氏編年之體。三年而成。爲卷三十有七。顧其書頗有舛誤。至於凡例。以元宗以上。事多譖擬。往往有所追改者。我主上殿下聰明好學。留心典籍。乃命右議政臣柳觀,藝文館大提學臣卞季良及臣淮等。重加讐校。正其訛謬。知春秋館事尹淮所撰也。○冬008_233a十月 壬寅朔 己酉。注書李承孫回自黃海道安城站。賫郭存中與天使問答書以啓。其書曰。使臣劉景謂存中曰。殿下旣遣元宰相。今又遣君問安。其用心至矣。欲速上馬委來事可速說。存中言。九月初一日。護送王天使。知三登縣事朴得年。敬錄令諭。回自遼東。殿下欽聞大行皇帝賓天。率羣臣哭臨行喪。不勝哀痛迫切之情。卽遣進香,陳慰兩使。本月十五日。咨文賫進官趙忠佐回自遼東。復欽聞皇帝卽位。又遣賀登極使。中路聞大人命。幷留不行。臣子聞君父喪。情意迫切。宜以所先後。不忍延緩。三使旣已發程。請008_233b先入送。詔勑開讀後。更以感激之意。別遣一使。意謂兩全。景云。皇帝聖旨。朝鮮雖外國。讀書且結親之國。詔勑兩使。雖一時發行。入朝鮮境。各行欽此出來。進香,陳慰節次。前日已言之矣。三使去留。任意爲之。卽出上馬。副使陳善云。我等於朝鮮之禮。何事不知。已遣進香,陳慰使。又遣人奏聞。豈不重疊。又云。我等回還。若奏此事。王賢及遼東。豈得無事。遼東大小臣民。皆素衣素饌。得年之所親見。又謄頒降令諭而來。本國由此得聞。前此賀平定北方及祥瑞等事。皆聞於遼東。遣使進賀。已有故事。善云。吉凶有緩急。得爲而008_233c不爲。不得爲而爲之。皆非禮也。汝朝鮮。讀書知禮。禮貴得中。過猶不及也。存中曰。大人之言。似是而非。聞皇帝賓天。以臣子迫切至情。卽行進香陳慰。愚意此乃得中。使臣云。汝言亦似是而非。三使行止。任自爲之。卽出上馬。上召領敦寧柳廷顯,左議政李原,右議政柳觀,贊成黃喜,大提學卞季良,吏曹判書許稠,參贊卓愼,禮曹判書申商,刑曹參判河演,戶曹參判睦進恭議之。卽遣奉常尹鄭旅。問喪制及迎勑儀於使臣。○十一月 壬申朔 丙戌。召大提學卞季良曰。故老漸稀。不可無文籍。本國地志及州府郡縣古今沿革。008_233d俾撰以觀。然今春秋舘事劇。地志則不可爲也。姑撰州府郡縣沿革而觀之。且周公豳風之詩。無逸之書。可以鑑。然本土之俗。異於中國。欲問民稼穡艱難。徭役疾苦。逐月作圖。仍述警戒之語。以便觀覽。庶傳不朽。季良啓曰。地志及州郡沿革。一軆事也。使兼春秋舘一人掌之。臣與卓愼,尹淮共議撰之。月令之文。臣當任之。上曰。月令之文。姑徐之。地志及州郡沿革。卿令撰進。○十二月。 壬寅朔 受朝。同知春秋舘卞季良啓曰。敬奉王旨。自己亥至壬寅年。史草一皆收納。臣等以爲宜將永樂十七年己亥正月至二十年壬008_234a寅十二月。充修撰官以下各人史草。京中限乙巳年二月。京畿,忠淸,黃海,江原等道。三月晦日。慶尙,全羅,平安,咸吉等道。四月收納。其有未納者。依前例。子孫禁錮。徵白金二十兩。先是。上與李原,柳觀,卞季良等議曰。自己亥至壬寅。予雖在位。其間國政。予皆稟太宗而後施行。無寡人自擅之事。其四年史草。欲皆收納。載之太宗實錄。何如。皆對曰。可。上又曰。自今史官身死之後。史草卽皆收納。慮史官子孫年久。或失之也。季良聞命。議於諸史官。皆曰。不可。今太宗實錄修撰。猶恐其太早。况又收納當代史草乎。008_234b如此則國人將以李行爲鑑。必無直筆矣。○季良曰。壬寅以上四年史草收納。上問我。對曰。可。業以爲可。難於更啓。諸君上書請之可也。其意以爲記注官魚變甲,兪尙智等。亦阿上旨而不敢請也。奉敎以下史臣欲上書。依違中止。是後上聞之。命史官身死。勿令子孫卽納史草。○丙辰。大提學卞季良進新製歌詞。其詞曰。云云。見上。上命下慣習都監。載諸樂部。用之宴享。○辛酉。皇帝令禮部尙書呂震宣旨曰。爾國王至誠享上。爾使臣等天寒路遠。驅疾而來。朕甚嘉之。臣等對曰。聖德罔極。感荷何量。但言路不通。008_234c至情未盡上達耳。震曰。汝旣知聖心。則斯可矣。入京初。令閔光美進禮部。告於尙書曰。去九月初一日護送王內官陪臣朴得年。回自遼東。殿下欽聞皇帝升遐。慟悼。卽率羣臣。哭臨行喪。遣臣等陳慰,進香。初十日發程。過鴨綠江。至湯站。逢詔勑使臣等。令開讀詔勑後進去。卽時啓聞留止。詔勑使到王京開讀後。殿下改修表箋。追送領受而來。呂震曰。殿下本至誠忠孝。聞喪卽遣進香,陳慰。亦是。承文院提調大提學卞季良,提學尹淮詣闕賀。上甚喜。

七年乙巳
春正月 壬申朔 甲戌。召領敦寧柳廷顯,右議008_234d政柳觀,贊成黃喜,大提學卞季良就職。○夏四月 庚子朔 辛丑。大提學卞季良製華山別曲以進。其詞曰。云云。見上。命載諸樂部。用之宴饗。○庚申。議政府六曹採擇各品陳言以啓。藝文大提學卞季良等十人陳言。今我殿下令政府六曹臺諫。日陳庶事。以資治道。可謂廣聰明而達下情矣。然皆未能從容詳密。以盡羣下之情。且旋進旋退。吹竽混眞者。或有之矣。唐,宋盛時。皆有輪對之法。是不獨廣聰明而無壅蔽之患。羣臣之賢否。亦難逃於聖鑑矣。乞依古制。令四品以上。逐日輪對。益廣言路。以盡下情。以察羣臣邪正。幸008_235a甚。○秋七月 戊辰朔 甲戌。上㦖雨。召領敦寧柳廷顯,左議政李原,贊成黃喜,刑曹判書權軫,兵曹判書趙末生,吏曹判書許稠,戶曹判書安純,禮曹判書李孟畇,大提學卞季良曰。二十年來。如此旱灾。未之見焉。惟予寡德。不能安居廈屋。欲避居於本宮。但慮酷熱。無軍士可居之所。肆居於此宮。宮中所居有三。予不居正寢。而就外側室居之。以思弭灾之道。然猶欲出西離宮。以答天譴。何如。僉曰。殿下憂旱自責。欲避厥居。誠萬世之嘉言。然出於離宮。則軍士侍衛。臣僚進退。膳羞轉輸。亦皆有弊。莫若仍御此宮之爲可。008_235b上曰。予欲除弊。而慮不及此。卿等之言甚當。又曰。觀各道雨澤之報。外方則雨澤足矣。而獨不雨於京城。恐或上天有爲而然也。且政事之間。猶恐有可疑之事。以孟溫之事觀之。諸宰相初則皆以刑曹所啓爲是。及臺諫論請。又以刑曹爲非。臺諫爲是。其所爲是爲非。別無他意。一人曰是。而衆以爲是。一人曰非。而衆以爲非。予以爲此不致精思雷同之弊也。擧此一事。可知其他。政事之失。豈可謂必無。其各勉思弭灾之等。悉陳無隱。僉曰。聖上恐懼修省。爲日已久。政敎號令。意謂無失。臣等向於求言之日。尙未講救旱008_235c之策。以答宵旰之憂。更有何策可陳。但前日所上各品陳言。更裁擇施行。○十二月 丙寅朔 庚午。御經筵。謂知申事郭存中曰。太祖實錄。只書一本。若後日遺失則不可。又寫一本。納春秋館。一本。吾常見之。其傳敎於春秋館。知館事卞季良啓曰。太祖實錄多密事。臣與河崙知之。他人不知。不可又寫一本而使衆人知之。請擇吉日納于史庫。從之。

八年丙午
三月 乙未朔 己未。知申事郭存中,右副代言鄭欽之,大提學卞季良等啓曰。慶愼公主之卒。已過三日。殿下迨今進素膳。臣等切恐以萬機之勞。不008_235d可如此。而况太宗常以爲主上一日不可素膳。請復肉膳。上曰。予常時雖異姓無服之喪。必三日素食。况同姓之姑乎。親疎之分。不可不異。季良等更啓曰。殿下之言是矣。然太宗之心。以爲雖有大故。不可日久素膳。况其他乎。太宗之靈。於昭于天。太宗之言。昭昭在耳。其可違乎。聖軆不可使一疎。伏望上遵太宗之訓。俯答臣民之望。上曰。雖數日素食。於太宗之訓。不爲悖逆。卿等勿請。○夏四月 甲子朔 丙子。大提學卞季良以上憂旱不進酒。詣闕請進曰。酒所以闢邪氣通血脉。實是良藥。若夙008_236a夜憂懼。蹔不進酒。不無損氣。伏望須進酒。以養氣脉。從之。○五月 甲午朔 己亥。上憂旱。召大提學卞季良。製求言敎書。且曰。予因旱灾。常時不居正殿。乃命設幄次於月臺上。去儀仗金鼓。以時服御幄次。頒敎書云云。見原集。命敎書別監。京畿,江原,咸吉道遣一人。忠淸,全羅,慶尙道一人。開城,黃海,平安道一人。盖以農時除弊也。○六月 癸亥朔 癸酉。大提學卞季良啓曰。導官署所納粳米一百二十七石。以西籍田所出稻。令其所屬奴婢舂正上納。其弊爲大。請如舊。上然之。○癸未。以卞季良爲判右軍府事。○十月 辛酉朔 戊辰。008_236b賜獐各一于留都宗親及左議政李稷,領敦寧金九德,判府事卞季良,判漢城吳陞,吏曹判書李孟畇,戶曹判書安純,禮曹判書申商,刑曹判書鄭津,大司憲崔士康,大提學李隨,參贊許稠,右議政致仕柳寬。

九年丁未
六月 戊午朔 丙寅。被擄逃來漢人徐仕英。言曾住開元。本無遠近族親。誠願留住。命下議之。左議政黃喜,右議政孟思誠等議。仕英到吉州。見先來漢人張顯子息。已知顯受職。留仕司譯院。獨解送仕英。未便。又稍解文字。將爲可用。依自願留之爲便。判府事卞季良議幷顯解送爲可。上從喜等議。

十年戊申
008_236c二月 癸丑朔 壬戌。禮曹據前銜宰樞所上言啓。本所古無衙門。二品以上閒良耆老。無所依處。散亂無統。雖國有慶事及行幸出入。皆不得知。殊失人臣之禮。惟我太宗,恭定大王卽位之初。設立衙門。賜公廨田一百結奴婢五十口書題二十名。每當誕日正至及國有慶事行幸出入之時。臣等咸集明庭。以行其禮。誠萬世不刊之令典也。但號爲前銜宰樞所。實爲未便。伏覩詔書及敎旨。皆曰。文武大小臣僚閒良耆老等。前朝亦謂致政宰樞所。乞以耆老宰樞所,耆老所二號。詳定稱下。命下詳定所議之。李稷議008_236d宜稱前銜兩府。黃喜,許稠議耆老所。卞季良議致仕耆老所。鄭招議朝請所。從季良議。○夏四月 癸丑朔 戊午。韓承舜被賊刦奪物件徵還勑書內。幷錄遼東委差東寧衛鎭撫王遜之物。命召左議政黃喜,右議政孟思誠,判府事卞季良,吏曹判書鄭招,藝文館提學尹淮。議回答可否。喜,季良以爲還送王遜物件之意。不可不奏。宜於奏本。微著其意。禮部咨詳陳爲便。思誠,招,淮以爲奏本。但錄欽受承舜物件之意。禮部咨。幷載還送王遜物件之意。命從喜等議。○乙亥。判府事卞季良上書曰。云云。見上。命下禮曹命文臣六品以008_237a上會議。左議政黃喜,右議政孟思誠,禮曹判書申商等十六人。以爲講經製述。不可偏廢。宜臨時迭用。贊成權軫,戶曹判書安純等五十一人。以爲宜用製述。漢城府尹李明德等五人。以爲宜依元典。設四書五經齋。常時考講升黜。試塲則試疑義。藝文提學尹淮,集賢殿校理權採,修撰李先齊等十五人。以爲用講經。柳思訥獨以爲錄姓名時。講所讀經書。通大義者許赴試。試塲則用製述。命依製述之議。初。季良修史春秋館。每語人曰。試官於講經之際。頗多徇私。爲試生者。或其爲親族。則講雖不切。必揜庇之。且試生常008_237b苦讀書。氣習局束。未能著述。將安用之。故權近嘗上書太宗。革林樸講經之策。復用製述。近來復行講經之法。弊復如前。於是言之。季良忿衆議多不一。謂先齊曰。館中諸人。皆從吾議。爾與採不從何耶。採獨不思乃叔權近之議歟。先齊曰。用製述則徒習彫篆。以要科名。誰肯專心性理之學乎。莫若講經之爲愈也。季良不悅。○辛巳。判右軍府事卞季良製箕子廟碑以進。碑文曰。云云。見原集。○閏四月 壬午朔 戊申。視事。判府事卞季良啓。設侍衛軍士。欲其捍外衛內。備不虞也。比來。因內外無事。外方侍衛軍士。或因農時。或008_237c因凶年。或因寒暑。勿令番上。騎船軍或分四番。或分三番。使專務農。此誠殿下恤民之心。然禍患每生於不虞。豈可姑恃安靜。以弛備禦乎。但當以他術存恤耳。上曰。近來緩弛。非故爲之也。但年歉耳。卿言是也。○六月 壬午朔 癸卯。召承文院提調黃喜,孟思誠,卞季良,許稠,申商,尹淮等。議賀冊皇后時。進方物于皇太后與否。請賜王世子梁冠。免金銀等事。僉曰。賀冊皇后時。進方物于皇太后。古無是例。王世子梁冠。不可不亟請。若免金銀。則竢請梁冠而後請之。從之。○秋七月 辛亥朔。上曰。世子待孝寧大君諸008_237d叔父諸弟之禮。詳定以聞。判府事卞季良,禮曹判書申商等對曰。此禮甚大。不可輕議。上曰。宜速參酌以定。○九月 庚戌朔 癸亥。詳定所提調李稷,黃喜,卞季良,許稠,申商,趙啓生,鄭招等議啓。禮曾子問曰。宗子爲士。庶子爲大夫。以上牲祭於宗子之家。祝曰孝子某爲介子某。薦其常事。若宗子有罪。居於他國。庶子爲大夫。其祭也。祝曰孝子某使介子某。執其常事。臣等竊詳。庶子雖爲大夫。已不得祭。宗子越在他國。庶子祭之。以宗子之命。其尊祖敬宗之嚴如此。無次子立廟之文。然事有難處。禮從而變。若長子長孫殘劣。008_238a雇居人家。雖有宗人相助。終不得立祠堂者。許令次子立之。其長子長孫。今雖單弱無依。終可立祠堂者。次子依經濟六典。不能立廟者例。擇凈室一間。以奉神主。待長子長孫立祠堂。奉還神主。自餘長子長孫。雖廢疾者。苟有宅舍。皆立祠堂。至祭時。令次子代行。依文公家禮。祭初就位參神。休於他所。祭終復位辭神。且國俗無大小宗之制。乞依朱文公家禮大宗小宗圖。惟曾祖之長子孫爲宗。營祠堂立神主。行祭。同曾祖衆子孫詣其家。與執事以物相助。其有相去遠。而不能與祭。則依文公家禮。只於祭時旋設位。以紙008_238b牓標記。祭畢焚之。又議二室幷祔之禮。稷,稠,商,啓生等以爲謹按禮喪服小記。婦祔於祖姑。祖姑有三人。則祔於親者。此言祔廟之禮。三人或有二繼也。親者謂舅所生母也。唐韋公肅曰。前娶後繼。幷是正嫡。則偕祔之義。於禮無嫌。朱文公家禮。卒哭明日而祔。註云。母喪。祖妣二人以上。則以親者祔。臣等竊詳。天子諸侯嫡配嬪媵。名分甚嚴。嫡配遭喪之後。嬪媵雖以寵幸進位中壼。乃前日名分已定之人也。傳所謂幷后二嫡。亂之本也。或有繼世之君。出自庶孼。欲尊其母。加以尊號。先儒所謂反卑其父者也。至於大夫。於008_238c禮得再娶。韋公肅所謂前娶後繼幷是正嫡者。不可一尊一卑也。古禮。祖姑有三人者。豈不以此歟。乞依古禮二人以上幷祔。季良以爲三代之時。一帝一后而已。自漢以後。乃有前娶後繼皆嫡。始微終顯皆嫡也之論。肆爲邪說而莫之禁。大宋元豐年間。有引古人祖姑三人。則祔於親者之文。繼爲邪議而用之者。至有以二后三后幷祔之說焉。臣竊謂三代之制。最爲得正。後世儒者。乃有推尊時君之母之心。援引古今。傅會經傳。以飾其說者。不可勝言。臣伏覩聖上出自宸衷。特下明旨。以一室祔廟。二室三室祭享處。008_238d命臣等擬議。是皆足以破千古儒臣之諂媚鄙陋。若其二室三室祭享處。則其所生子設位致祭何如。命召喜,思誠,季良,稠,商,招等更議。喜,季良,商等又議。士大夫祭四代之禮。以爲宜從元典之制。思誠,稠,招等。以爲宜從朝廷之制。命季良,招各述其意。招曰。有問於程子曰。今人不祭高祖如何。曰。高祖自有服。不祭甚非。某家郤祭高祖。又曰。自天子至於庶人。五服未嘗異。皆至高祖。服旣如是。祭祀亦須如是。朱文公家禮云。爲四龕。高祖居西。曾祖次之。祖次之。父次之。大明公侯品官之家祀先圖。列高曾祖禰四位。本朝立008_239a六品以上祭三代。七品以下祭二代。庶人只祭考妣之法。若父爲六品以上。得祭三代。身沒之後。其子無職。只祭父母。當撤去曾祖與祖神主。及後日除授六品。復作神主。勢有難處。一從朝廷之制。季良曰。大抵儀禮制法。自天子至於庶人。須有差等。此出於天理之本然。非私智邪說所得而撓也。朱子傳中庸修其祖廟之章。以爲天子七。諸侯五。大夫三。適士二。官師一。或問朱子官師一廟。只祭父母。不及祖母。乃不近人情。曰。位卑澤淺。其理自當如此。實天下古今之大典。今朝廷之制。品官祭四代。庶民祭三代。亦未嘗以008_239b品官混於庶人也。然其制與古不合。本朝時享之禮。敢得事理之正。人情之宜。不可得而變也。若以父死子繼。被黜復爵之際等論。疎濶尤甚。葢立法于其常。而不于其變。天下萬事皆然。何獨至於神主之作撤而疑之哉。正所謂一笑而揮之者。不必深辨也。惟朱子論程子之說爲得祭祀本意者。不可不究其旨。然程子冬至始祖立春先祖之祭。朱子已議其僭。且謂未見祭及高祖之文。則所謂得本意者。特論其理耳。其與位卑澤淺理當如此云者。自相矛盾。故先儒謂朱子之言。一說其分。一說其理。正所謂理一而分殊008_239c者也。古人廟制。自有降殺。祭祀之禮。亦必如之。豈可謂廟雖有等。祭則無差也哉。古人之意。其不出此也決矣。又况皆不及高曾。更不及祖之說。章章明甚矣乎。恭惟太祖太宗四十年之成憲。實爲有據。且以事理論之。彼庶人雖使之祭四代。豈能然乎。設有不能。又從而刑之可乎。若曰庶人雖不能行。姑立此法。以示來世。則亦非以信待人之道也。况欲從家禮。則又與朝廷之制不同。一依祖宗成憲。無有變更。命文臣四品以上會議。從季良之議者多。從招之議者四五人而已。○丙寅。王世子讀尙書畢。師黃喜,傅008_239d孟思誠,左賓客李孟畇,右賓客鄭招,右副賓客申檣等。啓請每日熟讀集註十張三遍。輔德以下侍講。貳師卞季良,左副賓客尹淮。啓請每日讀集註五張一遍。晝講則輔德以下侍講。讀至六遍。上從喜等議。○癸酉。上謂卞季良曰。大夫士兩妻祔廟之議。卿以爲不可。何也。季良對曰。大夫士。於禮無二妻。若其死亡失德。則不得已而改之。所以重宗祀也。生旣不得畜二妻於一室。死豈可幷祔二妻於祖宗之廟乎。臣故以爲未可也。上曰。卿之此言。以義理言之耳。若有古制。則豈可不幷祔乎。天子諸侯。則禮無二嫡。008_240a先后旣薨。後妃之子立。雖欲尊母而祔廟。不可得也。若大夫士之禮。與天子諸侯異。雖有故改娶。旣有二嫡之禮。何不幷祔乎。古文有曰幷祔妾族。妾族猶祔。况先後妻乎。季良曰。臣未嘗考士大夫之禮。然窃料仁宗皇帝。後妃出也。仁宗以嫡母無後先薨。欲尊所生母以祔母。其時臣子雜採古禮。遂祔之。始瀆亂古制。時有諍之以爲不可者。此眞忠臣也。若以爲大夫士有二妻幷祔之禮。則臣恐後世以爲臣子尙有二妻幷祔之禮。况人主乎。援以爲證。將有如仁宗之尊母者矣。立法一變。末流不可遏也。上曰。卿言末流008_240b難制。此語甚善。然儀禮制度。聖人之事。士大夫二妻幷祔之禮。若是周公所制。則豈可變易乎。命詳定所及集賢殿稽古制以聞。○冬十月 己卯朔 辛巳。御經筵。上嘗聞晉州人金禾弑父之事。矍然失色。乃至自責。遂召羣臣。議所以敦孝悌厚風俗之方。判府事卞季良曰。請廣布孝行錄等書。使閭巷小民。尋常讀誦。使之駸駸然入於孝悌禮義之塲。至是上謂偰循曰。今俗薄惡。至有子不子者。思欲刊行孝行錄。以曉愚民。此雖非救弊之急務。然實是敎化所先宜。因舊撰二十四孝。又增二十餘孝。前朝及三國時孝行特008_240c異者。亦皆裒集。撰成一書。集賢殿其主之。循對曰。孝乃百行之源。今撰此書。使人人皆知之。甚善。若高麗史。藏之春秋館。外人不得考閱。令春秋館抄錄以送。卽命春秋館抄之。○乙未。上曰。御膳至重。承文院提調以爲今進獻。可無奏本。此何謂也。小邦進享上之物。可無書乎。予以爲甚不可也。此無乃卞季良之說歟。右代言許誠對曰。諸大臣皆云宜載奏本。惟季良曰。今此進獻。非事之正者。可除奏本。○十一月。 己酉朔儀禮詳定所啓。大小人員行時祭。許著紗帽。上曰。前銜亦可著公服乎。判府事卞季良曰。二品以上。008_240d雖前銜。詣闕則著金帶紗帽。故祭時亦可著。三品以下前銜。則不得著。至祭時而著未可。若令著之。則與二品以上一例。恐無尊卑之分。上曰。自今前銜行祭時。二品以上。則著金帶紗帽。三品以下。著烏角帶紗帽。○上謂卞季良曰。議者以爲文科三外。皆以權知。口傳三館。待次敍用。至七八年。乃得去官。故老於一館。不習世務。其他貴家子弟。則自少分列各司南行。明習吏事。終爲可用之才。此言然乎。季良對曰。誠然。上曰。予亦然之。季良曰。文科三十三人。卽皆敍用。已載元典。若用此輩。爲各司南行。勝於貴家子008_241a弟矣。然臣竊料文科。皆用於各司南行。則貴家子弟。有不見用之歎。議者亦或以爲取文士。專爲文學。不宜用於南行。上曰。取士。欲爲世用。豈獨爲文學耶。季良曰。上敎甚善。貴家子弟。其父母寵愛之。使英明可學之輩。未免弱冠。已列於各司南行。不學文字。不達事理。深可惜也。宜使貴家子弟盡赴學。待其通義理就德行。然後漸以入官。以三館權知。用之於各司南行。如是則子弟無躁進之弊。儒者售適用之才。上曰。子弟之事。予亦聞之久矣。尙未施行。吏曹判書李孟畇曰。臣祖入朝登第。見其榜目。卽皆叙用。刑008_241b曹判書金自知曰。前朝中文科者。皆差外方司錄。臣父亦入朝登第。卽授丘縣丞。上曰。卿之父。不知中華之語。故除丘縣丞。自今三館權知。吏曹隨窠闕叙用。○辛亥。上謂右議政孟思誠曰。今皇帝出征北方。遣人欽問起居何如。將待回駕欽問乎。昨日卞季良言須及時欽問。孟思誠及判府事許稠等對曰。不可恝然。須亟欽問。○十一月 己酉朔 丁卯。判府事卞季良啓曰。上至誠事大。獲海靑輒獻。然昔者未易捕獲。今則獲稍多。請擇善以獻。勿多進。其捕獲甚苦。又安知後日未能多獲也。倘有多獻之命。何以待之。008_241c上曰。帝若聞多捕而不盡獻。無乃不可乎。○甲戌。上曰。今賜世子六梁冠。特加等級。實萬世之寵也。將何以謝恩乎。帝賜太宗冠服,母后段子。於其謝恩。進金鞍二部及馬匹。又太宗嘗曰。金非我國所產。雖無金鞍可也。何以處之。判府事卞季良對曰。等級之加。與爵命同。此特恩也。須進金鞍。以表喜謝之意。上曰。然。

十一年己酉
春正月 戊申朔 辛亥。上謂大臣等曰。使臣以帝命求石燈盞甚勤。若果帝命。不可不應。使臣之還。附副本而獻之乎。別遣人偕使臣獻之乎。予意008_241d太祖時或有附使臣進獻之例。處之何如。左議政黃喜,判府事卞季良曰。雖有附獻之例。以今觀之。似未可。崔得霏致祭。其子弟必有謝恩之行。附獻何如。上曰。三年之喪。天下之通喪也。昔帝致祭李茂昌之父。茂昌喪畢。然後入見。受職而還。然古文有云。子卽釋服行謝禮。若無親子。族親與同里人行之。則謝恩不可緩也。喜,季良曰。喪畢入見。雖有古例。今不當如是。得霏之子。則方在喪次。其婿可行。兼賫石燈盞。偕使臣而獻。似可。命禮曹判書申商擬議以聞。上謂喜,季良曰。前日疏上興學條件。已聞回話否。季良008_242a曰。臣未聞也。上曰。古者。卿大夫之適子與凡民之俊秀。得入太學。今有蔭子弟。皆入泮宮。則無乃過多乎。季良曰。京官三品以上子弟。皆入學宮可也。上曰。武科。亦賜牌賜葢賜宴遊街。無異於文科。判府事累言其不可。然此太宗已立之法。不可輕改。但試取時講四書二經。何如。喜與季良曰。射御之才。三千甲士。亦皆能之。武科之異於甲士者。但以講兵書也。然不過粗通三四書而已。如此而與文科無異。故士皆捨文就武。今使講四書一經則可矣。上曰。授職之事。何如。季良曰。二十五歲。則授職可矣。今十八歲。008_242b授職之法。始於朴錫命。欲除其子之術。喜曰。此法乃太宗時河崙等所定也。上曰。予亦嘗聞朴錫命爲其子立此法也。其餘條件。予皆依允。若武科與諸學。一例試取則不可也。季良曰。臣未知一例與否。尹淮語臣曰。武科乃諸學例也。今考元典。無放榜賜葢三日成行之法。依舊制何如。上曰。予更商量。季良曰。科塲。必考經書本文。然後得製之。今使不見本文。則必誦經書。然後乃得製述。恐無盡治四書五經者也。上曰。如不得見本文。則學者必致慮矣。但以三經命題。何如。季良曰。然。且古者有賜酺之禮。宋鑑與008_242c前朝史。亦載三日大酺之語。宜行古制。上曰。通鑑亦載之矣。然近年以來。禾穀不登。且無慶事。未敢擧行。今於春秋。已賜八十歲以上米。季良曰。大酺之制。古之良法。宜速行之。○乙丑。御資善堂。判府事許稠曰。科試之法。東堂禁令稍嚴。監試稍寬。昨日搜挾甚嚴。擧子皆苦之。生員非試取卽用之人。將使居館讀書也。不可若是其嚴也。上曰。予意亦然。命右代言許誠曰。判府事之言。然矣。其語于卞判府事。季良亦曰。上敎甚當。宜令禮曹依舊搜挾。勿使太嚴。○三月 丁未朔 庚申。府院君李稷,判府事許稠,參判鄭招等008_242d以爲父沒子繼職秩。不及撤其神主。以待後日之得官者。不過二道。曰瘞埋也。襲藏也。旣埋復作。於禮無文。事理亦礙。襲而藏之。與天子諸侯遷廟之主。藏于夾室似矣。然士大夫家廟。則無夾室。若建別廟。則卿大夫合三代爲一祠堂。士於曾祖。尙不得祭。安得建廟以奉之。若藏於廟。一祭一否。誠未便。若藏於廳事。接待賓客之所。若藏於寢房。夫婦所居之處。或廊或庫。卑下不敬。皆非所宜。且天子諸侯夾室所藏之主。雖無四時之祭。至三年則有祫祭。今此襲藏之主。致祭無期。如或未得官。終當如何。孝孫之心。事死如生。008_243a埋之則已。藏而不祭。於心何如。程子朱子。皆以通祭四代爲禮。朝廷亦許品官之家。祭及高祖。雖不明言其故。豈不以此也哉。臣等初議欲從朝廷之制與夫程朱之說。則元典六品以上。亦祭止三代。故乞令品官通祭三代者。葢用元典世代限數而取法通祭之義也。議上。令臣等更議。又乞依朝廷之制。乃下禮曹。令文臣四品以上。議其可否。議者以世數加於元典。爲更改成憲。然臣等竊謂前日之議。乃補元典之未備耳。非改也。乞取臣等前日所進兩議裁擇。左議政黃喜,判府事卞季良,判書申商,參判金孝孫等。以爲008_243b父歿子繼。則父之曾祖。於子爲高祖。其神主當埋於墓側。若子職不相等者。將其不應祭之神主。重襲以藏。以待加職。出而祭之何如。從喜等議。○丙寅。詳定所提調府院君李稷,左議政黃喜,判府事許稠,判書申商,參判金孝孫,鄭招等以爲。謹按唐開元禮。皇帝時享太廟儀。奠爵出戶北向立。大祝進戶外之右。跪讀祝再拜。皇帝謁陵儀。至寢殿三奠爵。當神座前北向立。大祝二人持玉冊于戶外。跪讀再拜。宋郊祀前一日朝享太廟儀。設冊案於室戶外之右。皇帝奠爵出戶外北向立。讀祝官東向跪讀冊文再拜。太廟時008_243c享儀。祝板各設於神位之右。初獻奠爵出戶外北向立。大祝跪讀祝文訖再拜。郊祀前二日朝獻景靈宮儀。設祝冊於殿上之西。皇帝進酒俛伏興立。讀冊官東向跪讀冊。四孟朝獻景靈宮儀。皇帝奠酒俛伏興再拜。無讀祝一節。每歲春秋仲月。太常宗正卿朝拜祖宗及后陵。詣神座前。奠酒俛伏興。俟大祝讀文訖。再拜降階。前朝詳定古今禮時享太廟儀。設祝坫於每室戶外之右。奠爵出戶北向立。大祝進戶外之右。讀祝再拜。朔望享太廟儀。各設祝板於坫上。置於神座之右。上香酒俛伏興。少退北向立。祝史持板進神008_243d座之右。東向跪讀祝文。獻官再拜。拜陵儀。奠酒三爵。少退北向立。大祝持板詣神座右。跪讀再拜。竊詳唐,宋及前朝之制。奠爵後行禮。或出戶外。或當神位前。祝文或設於神位之右。或設於戶外之右。或設於殿上之西。未可定從。况本朝宗廟。戶外窄狹。展禮尤難。乞奠爵後行禮。皆當神座之前。讀祝皆於獻官之左。祝板皆設於神位之右。若原廟戶內伏地。則古典所無。然本朝常時出入殿內有伏地。原廟多用平日之禮。仍舊何如。判府事卞季良議。宗廟用古禮。原廟用俗禮。古人有是言也。我太宗嘗曰。宗廟以神道事008_244a之。原廟象生時。則其原廟戶內伏地。一從成憲。何如。其戶外讀祝事。唐,宋宗廟。雖非古制。然其體面甚大。其內修粧。必多曲折。所謂戶外讀祝。亦必不在於外階也明矣。今徒泥戶外之文。而輕改成憲。臣固痛心。今承下問。不勝欣忭。願遵祖宗成憲。今後議新法時。禮曹啓目。汎稱曹與詳定所同議。最爲不可。宜列詳定提調某某之名以聞。永爲恒式。從之。○夏四月丙子朔 戊戌。上曰。每日相參老大臣等。凌晨詣闕。則病必生矣。遂傳旨禮曹曰。星山府院君李稷,左議政黃喜,右議政孟思誠,驪川府院君閔汝翼,谷山府院008_244b君延嗣宗,贊成權軫,判府事卞季良,許稠等許令五日一參朝啓。則各以其次入參。○己亥。召府院君李稷,左議政黃喜,右議政孟思誠,判府事卞季良議曰。似聞使臣欲親往年魚產處造醢。從之則將開萬世之弊。不從則有虧享上之儀。何以處之。唱歌兒女三十名。何以採之。十二三之女能唱歌者鮮矣。果盡從三十名之數乎。近來四年間。名爲執饌入朝之婢。已五十餘人矣。使臣到京面說。則將何以答之。稷等曰。使臣面說時。不宜防遮。姑權辭以答曰。唯命是從。後日必欲往年魚產處。則答云年魚產於江原道大山008_244c長谷。歸路甚阻。難以親往。若說歌女。則答云十歲以上二十歲以下少女能唱歌者鮮。故惟採得幾人。或十名或十五名入遣。何如。上曰。將以卿等之議待之。○乙卯。左議政黃喜,判府事卞季良,許稠,判書申商,捴判鄭招言。曩奉敎旨。凡爲治之道。不可以卑陵尊。以下陵上。必須嚴立法禁。以杜其漸。謹具一二條以啓。一。禁品官吏民。上訴于守令之後。陰嗾他人告狀者有之。由此風俗日弊。宜加痛懲。今後陰嗾者。則被訴守令。勿論品官吏民。幷杖一百徒三年。如有陰嗾告訴。身自告訴者。連續不絶。則知官以上降號。縣008_244d官降爲屬縣。又有姦猾之徒。私記守令過失。揚說恐動。亦宜痛禁。乞依律文部民罵本屬官條施行。一。宣德二年三月日。刑曹判書受敎。訟者凌辱官員者。不受理。元隻所訟外。他事告擧者亦勿受。官吏於所告本狀外。別求他事爲罪者。依律論罪。其後元告欲增隻人罪惡。幷錄別罪犯。被告者亦然。官司或修理。乞加申明。如有違敎者。官吏及訟者元隻。悉皆論罪。又姦愎之徒。有不愜於己者。捃摭過失。無因告訴。因此獄訟繁滋。風俗日渝。乞自今律及本朝敎旨許人陳告事條及死罪外。無因告訴他人過犯痕咎者。不受。008_245a以違令論。一。卑下與事上相訟者。罵詈敺打其事上。則先覈詈敺之罪。依律決罰。然後辨其所訟曲直。從之。○秋七月 乙巳朔 壬戌。命左議政黃喜,右議政孟思誠,判府事卞季良,許稠,禮曹判書申商,捴制鄭招,藝文提學尹淮會于興德寺。令知申事鄭欽之往議請免金銀貢。喜,稠,招等以爲文表。令文臣製述。揀擇潤色。其賫進宰相。則以六曹判書爲使。都捴制元閔生爲副。商以爲以戶曹判書爲使。僉捴知金時雨爲副。其代貢二物。則惟思誠,喜欲用馬匹布子油厚紙三物。招,商,稠欲用馬匹及布子。季良欲用布子。時季良008_245b病在興德寺。故命喜等就而議之。○八月 乙亥朔 戊寅。承文院黃喜,孟思誠,卞季良,許稠,申商,尹淮等議請免金銀時獻禮物可否。淮,商,稠,思誠,喜等議。以謂非謝非賀。又非朝覲之比。獻禮物恐無名。季良以爲執贄陳請。不違於禮。從喜等議。上又謂知申事鄭欽之曰。今爲東宮擇配。宜抄選處女。世系婦德。固皆爲重。然姿或不美。則亦不可也。以予父母之心。欲親擇取。然無古禮。未得行之。欲令聚昌德宮。使內官與侍女,孝寧大君選之若何。喜,思誠,季良,商,淮等皆曰。可。稠獨以爲未可也。若令聚一處選擇。 則取之專以貌。008_245c不以德也。上曰。暫見之餘。何以便知其德。旣未能便知其德。又不以容可乎。宜巡往處女之家。擇其可者。更聚昌德宮選之。僉曰。可。○十一月 癸卯朔 癸丑。禮曹啓。言者以爲前此京外祭享靈驗處。革祭不祀。未便。願自今訪問山川奇巖龍穴社寺等靈驗處。設祭室及位板。每四仲吉日。遣使行禮。命議之。卞季良曰。此葢祖述周公咸秩無文之意。誠有理矣。然擇其不可廢者而行之。命從所議。

十二年庚戌
春三月 壬寅朔 癸丑。右議政孟思誠,禮曹判書申商,知申事許誠等回啓。使臣求毛衣席子甚008_245d勤。答以有聖旨難聽。使臣怒不接見。上曰。卞季良云從權與之可也。卿等以爲如何。思誠曰。天氣甚寒。贈以毛裘似可。商,誠皆以爲不可。乃止。○夏四月 辛未朔 丁亥。判右軍府事卞季良以病辭。從之。仍傳旨曰。卿受重任。病未治事。故欲免職事。予豈以卿爲備員而允之乎。卿其安心調理。○癸巳。判右軍府事卞季良卒。季良字巨卿。號春亭。密陽府人。玉蘭之子。自幼聰明。四歲誦古詩對句。六歲始綴句。十四中進士試。十五中生員。十七登第。補典校注簿。累遷司憲侍史。歷成均樂正,直藝文館司宰少監。兼藝文應敎,直提008_246a學。丁亥重試。擢乙科第一人。特拜禮曹右參議。己丑。進藝文館提學。乙未大旱。上甚憂之。季良上言。本國祭天。雖云非禮。事旣迫切。請禱圓壇。卽命季良製文以祭之。丁酉。拜藝文大提學。明年。轉禮曹判書。卽遷議政府參贊。又明年。倭奴侵我南鄙。多殺掠。太宗取季良之言。議征討。丙午。判右軍都捴制府事。至是卒。年六十二。訃聞。輟朝三日。命攸司致祭賻及棺。東宮亦賻米豆幷三十石。諡文肅。勤學好問文。執心決斷肅。季良典文衡幾二十年。事大交鄰。詞命多出其手。掌試取士。一以至公。盡革前朝冒濫之習。論事008_246b決疑。往往出人意表。初娶鐵原府使權総之女。又娶吳氏死。又娶都捴制使朴彥忠之女。妾子曰英壽。○丙申。命左議政黃喜,右議政孟思誠監修太宗實錄。前此。卞季良專捴修史。素多疾病。未能早暮。其居第在興德寺傍。故移史庫於興德寺。至是季良卒。故命喜等監修。移史庫于議政府。○五月 庚子朔 丁巳。上謂檢討官權採曰。卞季良嘗獻議太宗曰。請於集賢殿員。擇敏者一二人。令究庸,學。輯繹或問。其一則權採爲可。太宗慮其久讀兩書。則恐失他書。竟不從。及予卽位。又請令若等讀書。予亦慮其兩失。然008_246c季良精於學問。豈無所見。乃允其議。若等讀書已久。庸,學熟乎否。季良又言。權採等自賜暇讀書之後。聽其談論。殊異昔日。採對曰。庸,學則從季良之言。讀至三載。自前年春。始論,孟與五經。然臣性本不敏。未能精熟。○六月 庚午朔 甲申。賜祭于判府事卞季良敎曰。云云。見上。○乙酉。王世子遣官致祭于貳師卞季良云云。見上。○冬十月 戊辰朔 庚申。上曰。李崇仁之才。權近,卞季良皆溢美之。初修高麗史之時。削近救崇仁之文。近,季良之改撰也。還書之。然其事過情。此事亦未成之書。若改修之則當削之。近作陶隱集序。稱譽008_246d之。又書追贈之意。乃虛事也。季良問於近曰。何以不追贈之事。答云。今以追贈書之。則後必追贈。此甚失言。季良亦稱崇仁曰賢。太宗覽之曰。溢美矣。

十六年甲寅
春正月 己卯朔 癸丑。上曰。昨日諫院上疏曰。今年各道凶歉。外方侍衛牌。勿令番上。其意善矣。然予以爲不可。軍士。國家所重也。昔卞季良言於予曰。軍士以練習爲貴。不可不常常侍衛也。如有請除番上者。願勿聽。反加罪責。予當其時。反以其言爲非。今更思之。其言果有見也。


[편-001]象 :
[편-002]讒 :
[편-003]嬪 :

春亭先生文集卷之十二
 碑誌
有明贈諡恭定朝鮮國太宗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獻陵神道碑銘 幷序 a_008_149b


天之將降大任於有德也。必生聖子神孫。以開景運。以永洪祚。我朝鮮太祖康獻大王之興也。以我太宗爲子。以我殿下爲孫。噫戲盛矣。豈人爲之所能及哉。天也。其與商家賢聖君之繼作。周家太王王季文武之相承。何以異哉。臣謹按璿源。李氏。全之008_149c望姓。司空諱翰。仕新羅。娶宗姓之女。六世而至諱兢休。始仕高麗。十三世而至皇玄祖穆王。入仕元朝而長千夫。四世襲爵。咸能濟美。元政旣衰。皇祖桓王。還事高麗恭愍王。積功累仁。其來久矣。我神懿王太后。以至正丁未五月辛卯。誕太宗于咸興府厚州私第。我太祖之第五子。生而神異。稍長。英睿絶倫。好讀書。學日進。年未冠。中高麗科第。時政散民離。國勢扤捏。慨然有濟世之志。太祖愛之異諸子。嘗以書狀官。偕侍中李穡朝京師。累官至密直司代言。洪武辛未九月。神懿王太后薨。廬于齊陵之側。008_149d欲終三年。壬申春。太祖西行。遘疾而還。來侍湯藥。恭讓之臣。乘隙謀傾。勢甚急。太宗應機制變。討除渠魁。群謀瓦解。秋七月。與諸將相倡以大義。推戴太祖。化家爲國。封靖安君。甲戌夏。高皇帝命遣親男入朝。太祖以我太宗通經達禮。㝡賢諸子。卽遣應命。旣至。敷奏稱旨。優禮賜還。戊寅秋八月。太祖不豫。權臣朋家聚黨。有欲挾幼擅政。以肆己志者。禍發斯迫。太宗炳幾殲除。時宗親將相。皆欲請冊我太宗爲世子。太宗牢辭。推尊恭靖。上請太祖冊封世子。以定宗社。九月丁丑。太祖疾008_150a未瘳。禪于恭靖。建文庚辰正月。逆臣朴苞謀戕同氣。陰誘芳幹父子。稱兵爲亂。太宗勒軍平之。誅苞餘悉釋。安置芳幹。不廢懿親。恭靖以無嗣。且謂開國定社。皆我太宗之績。冊爲世子。冬十有一月。亦以疾傳位于我太宗。遣使請命。明年辛巳六月。建文帝遣通政寺丞章謹等。奉誥命印章來。封我太宗爲王。冬。遣鴻臚寺行人潘文奎來。錫冕服。秩視親王。歲壬午。今皇帝卽位。遣左政丞臣河崙。賀登極。帝嘉忠誠。明年癸未四月。賜以誥印。遣都指揮使高得等來。仍封爲王。秋。遣翰林待詔王延齡來。008_150b錫衮冕九章錦段紗羅書籍。太祖錦段紗羅。元敬王太后冠袍錦段紗羅。各有差。自是厥後。帝賚荐至。無虗歲矣。歲乙酉。以漢陽太祖所都。排群議而還。歲丁亥。帝語朝正使臣曰。朝鮮國王至誠事大。自後每當使臣之至。輒稱至誠。戊子五月。太祖晏駕。哀慕罔極。居于諒闇。喪葬以禮。遣使告訃。帝震悼罷朝。遣禮部郞中林觀等。賜祭大牢。贈諡康獻。又勅太宗賜厚賻。壬辰冬。有以王氏之裔。隱於民間者上言。攸司請誅之。太宗曰。帝王之興。自有天命。誅王氏之後。非我太祖本意。迺下敎曰。王氏之008_150c後存者。俾之各安生業。甲午六月日。甘露降于咸興府月光仇未里及定平白雲山。明年乙未四月。甘露又降咸興府德山洞。吾東方前古所未有也。政府俱進箋賀。不受。戊戌六月。以世子禔敗德廢之。封讓寧大君。以我殿下聰明孝悌。好學不倦。國人屬望。冊封世子以聞。帝兪允。是年八月。禪于我殿下。遣使請命。十有一月。我殿下奉冊寶獻號。曰聖德神功上王。明年己亥正月。帝遣鴻臚寺丞劉泉等奉誥命。封我殿下爲王。五月。對馬島倭犯邊。殺掠軍士。命領議政臣柳廷顯及贊成臣李從茂等。以008_150d舟師往討之。島倭納款如舊。八月。帝遣使賜宴。勅書略曰。王至誠篤厚。祗事朝廷。一德一心。終始不怠。能簡賢命德。俾宗祀有托。以副國人之望。又賜宴我殿下。勅書略曰。爾父篤厚老成。祗敬天道。忠順之誠。愈久不替。九月。恭靖王卽世。服斬衰終易月之制。遣使告訃。明年四月。帝遣使致祭。賜諡恭靖。是年春。我殿下卛群臣。請上太上王之號。不允。秋七月。元敬王太后薨。以我殿下哀毀過禮。命從易月之制。殿下涕泣固辭。乃命葬後釋服。白衣終制。九月壬午。葬太后于廣州治之大母山。陵008_151a曰獻。辛丑秋九月。我殿下奉冊寶獻太上王之號。十月。稟太宗命冊封元子 文宗諱 爲世子。太宗以不世之資。緝煕聖學。孝悌通於神明。誠敬格于宗社。事大則天子稱其至誠。交隣則倭邦服其有道。欽天恤民。崇儉節用。先德禮而愼刑罰。進忠直而黜奸邪。闢異端而禁淫祀。酌古今以定制度。昭文敎而嚴武備。積弊悉革而庶績咸煕。四境安堵而民安物阜。帝王之道。嗚乎盛哉。宜其紆帝眷之隆。而再獲甘露之上瑞矣。壬寅四月。始不豫。粤五月丙寅。薨于離宮。我殿下不勝哀慟。三日撤膳。群臣涕泣。請進008_151b膳。竟不許。定爲三年之喪。不用易月之制。太宗春秋五十六歲。在王位十有九年。居閒頤養五年。而弓劍忽遺。大小臣僚。下至僕隸。莫不失聲號哭。愈久愈哀。如喪考妣。嗚乎慟哉。以是年九月初二日丙辰。上尊號。曰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廟號太宗。初六日庚申。合葬于元敬王太后之陵。遺命也。及訃聞。帝哀慟輟朝。特遣禮部郞中楊善等賜祭。其文略曰。惟王篤厚至誠。聰明賢達。敬事朝廷。忠順之誠。終始不替。訃音遠聞。良深感悼。又賜誥命。諡曰恭定。又賜殿下賻優厚。盖我太宗功德之盛及我008_151c殿下孝誠之至。前後相承。克享天心。故於終始之際。寵異之典。如此其備至矣。中宮元敬王太后姓閔氏。驪興世家。自高麗門下侍郞平章事文景公諱令謨。六世而至皇高祖諱宗儒。相毅陵。位都僉議侍郞贊成事。諡忠順。忠順生皇曾祖判密直司事諡文順諱頔。文順生皇祖大匡驪興君諱抃。大匡生皇考純忠同德贊化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驪興府院君,修文殿大提學,領藝文春秋舘事諡文度諱霽。皇妣宋氏。封三韓國大夫人。高麗重大匡礪良君諱璿之女。積善流慶。是生淑德。聰慧異常。將笄擇配。來嬪008_151d于我太宗。太宗少有濟世之志。留心經史。不事家產。太后能儉於治家。謹於主饋。以勉其功。敎誨多男。俾循義方。禮遇妾侍。克盡婦道。洪武壬申。封靖寧翁主。戊寅。太宗定社之際。勢甚孤危。太后盡心輔贊。以濟大事。庚辰春。封貞嬪。其年冬。太宗卽位。封靜妃。永樂癸未。帝賜冠袍。自是年至丁酉。累受帝賜凡五。戊戌冬。我殿下獻號。曰厚德王大妃。庚子九月。追諡元敬王太后。春秋五十六歲。太后稟幽閒貞靜之德。克配太宗。以專內治。二十年間。壼儀肅穆。又誕聖子。俾主宗社。以享榮008_152a養。及薨。嬪媵妾侍。莫不난001心悲慟。婦則母儀。其至矣乎。誕四男四女。我殿下居三。長卽禔。次曰補。封孝寧大君。次曰。封誠寧大君。先卒。女長貞順公主。下嫁淸平府院君李伯剛。非一李也。次慶貞公主。下嫁平壤府院君趙大臨。次慶安公主。下嫁吉昌君權跬。亦先卒。次貞善公主。下嫁宜山君南暉。懿嬪權氏。生一女貞惠翁主。適雲城君朴從愚。昭惠宮主盧氏。生一女幼。信寧宮主辛氏。生三男七女。男長禋。封恭寧君。餘幼。女長貞信翁主。適鈴平君尹季童。次貞靜翁主。適漢原君趙璿。次貞淑翁主。適月城君鄭孝全。餘008_152b皆幼。宮人安氏。生一男三女。皆幼。金氏生一男。封敬寧君。高氏生一男。崔氏生一男一女。李氏生一男。金氏生一女。皆幼。我中宮恭妃沈氏。門下侍中德符第四子溫之女。誕四男二女。男長卽世子。餘皆幼。讓寧娶金漢老之女。生三男一女。皆幼。孝寧娶前判中軍都摠制府事鄭易之女。生四男一女。皆幼。誠寧娶前全羅道都觀察使成抑之女。無子。貞順公主生一女。適龍驤侍衛司護軍李季疄。亦非一李。慶貞公主生四女。長適敦寧府丞安進。次適幼學金仲淹。餘幼。慶安公主生二男。長聃娶漢城少尹鄭淵之女。008_152c次幼。貞善公主生二男一女。皆幼。敬寧娶戶曺參議金灌之女。生二男。皆幼。恭寧娶兵曺參判崔士康之女。生二女。皆幼。臣竊觀我太宗之盛德隆功。固已高出於百王之上矣。而配匹之賢。內助之功。又有可與蜀塗莘摯。同符而儷美者矣。群臣咸願刻銘于陵之神道碑。昭示永世。殿下以命臣季良。臣季良承命祗慄。不敢辭。謹拜手稽首而獻銘。銘曰。
天眷海東。降我太宗。亹亹太宗。盛德在躬。推戴聖父。克集大功。乃覲帝庭。敷奏從容。優荷睿恩。保我黎元。炳幾靖亂。嫡長是尊。雖値䦧墻。友愛猶惇。008_152d孝悌之至。從古罕聞。惟德之厚。惟功之懋。天鑑孔昭。式申保佑。煌煌金寶。輝映前後。帝誥荐臻。我乃龍受。祖訓惟服。還于漢北。制作禮樂。煥乎郁郁。遭喪居廬。哀慕罔極。以葬以祭。古典是式。祗事朝廷。帝稱至誠。肅肅承事。感于神明。交隣有道。倭邦來庭。存䘏王裔。俾遂其生。中外乂安。垂億千齡。浥浥甘露。歲降咸府。廢昏命德。以作民主。期享永年。父臨下土。何促賓天。一疾莫愈。哀哀聖子。慟悼無比。撤膳三日。不勝摧毀。凡百喪事。惟禮之履。帝聞慟悼。遣使以祀。贈諡褒崇。賜賻優隆。恤典之備。喜溢臣工。思齊008_153a太后。允也肅雝。密贊定社。克配亶聰。篤生聖哲。俾主宗祏。乾健离明。恭定之德。坤厚柔貞。元敬之則。琴瑟以友。藏同其域。子孫振振。吁嗟其麟。綿綿宗社。垂萬億春。臣拜獻詞。刻之貞珉。萬代不磨。昭我東垠。 碑陰尹淮記


[난-001]盡 : 盡疑衋

동문선 제121권
 비명(碑銘)
유명증시 공정 조선국 태종 성덕 신공문무 광효대왕 헌릉 신도비명 병서 (有明贈諡恭定朝鮮國太宗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獻陵神道碑銘) 幷序


변계량(卞季良)

하늘이 덕이 있는 이에게 큰 임무를 내려주려 할 때에는 반드시 착한 아들과 뛰어난 손자를 낳게 하여 큰 운수를 열고, 큰 복록을 길게 하는 것이다 우리 조선 태조 강헌대왕(康獻大王)이 일어나매, 우리 태종(太宗)으로써 아들이 되게 하고, 우리 전하로써 손자 되게 하셨다. 아, 장하다. 어찌 사람의 작위(作爲)로 될 수 있겠는가. 하늘이 하는 일이로구나. 그것은 상(商) 나라의 왕실(王室)에 어진 임금과 착한 임금이 이어 일어난 것과, 주(周) 나라의 왕가(王家)에서 대왕(大王)ㆍ왕계(王季)ㆍ문왕(文王)ㆍ무왕(武王) 같은 임금이 서로 계승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신은 삼가 선원(璿源)을 상고하여 보오니, 이씨(李氏)는 전주(全州)의 이름난 가문이다. 사공(司空) 벼슬한 휘 한(翰)이 신라에 벼슬하였으며, 신라 종성(宗姓)의 딸에게 장가 들었다. 6대 손인 휘 긍휴(兢休)에 이르러 비로소 고려에 벼슬하였고, 13대 만에 태종 임금의 5대조 목왕(穆王)에 이르러서는 원(元) 나라 조정에 들어가 벼슬하여 천부장(千夫長)이 되었다. 4대가 내리 습작(襲爵)하여 모두 잘 하였다. 원 나라의 정치가 이미 쇠잔하게 되니, 황조(皇祖) 환왕(桓王)은 돌아와 고려의 공민왕(恭愍王)을 섬기었다. 공을 쌓고 어진 덕행을 누적(累積)하였음이 그 유래가 장구하다.
우리 신의 왕태후(神懿王太后)께서 지정(至正) 정미년 5월 신묘일에, 태종(太宗)을 함흥부(咸興府) 후주(厚州)의 사저(私邸)에 낳으니, 우리 태조의 다섯째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기특하였는데 차츰 자라면서 슬기로움이 무리에 뛰어났다. 글 읽기를 좋아하여 학문이 날로 진보하여 나이 20도 못 되어서 고려의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때, 정치는 산란하고 백성들은 유리(流離)하여 국가의 형세는 위태로웠다. 강개(慷慨)하여 세상을 구제할 뜻이 있으니, 태조가 여러 아들들 중에서 유달리 사랑하였다.
일찍이 서장관(書狀官)의 자격으로 시중(侍中) 이색(李穡)과 같이 명 나라의 서울에 조회하였으며, 여러 번 승진하여 벼슬이 밀직사 대언(密直司代言)에 이르렀다. 홍무(洪武) 신미년 9월에 신의왕태후(神懿王太后)가 훙(薨)하니, 태종이 제릉(齊陵)의 곁에 여막을 짓고 3년 상을 마치고자 하였는데, 임신년 봄에 태조가 서쪽의 행차에서 병을 얻고 돌아왔으므로 와서 탕약(湯藥)을 돌보며 모시었다. 공양왕의 신하가 그 틈을 타서 태조의 세력을 뒤집어 엎을 것을 꾀하여 사세가 매우 급하게 되었다. 태종이 조짐에 대응하여 변고를 제압하고 그 괴수(魁首)를 쳐서 제거하니, 온갖 음모가 와해되었다. 가을 7월에, 여러 장상(將相) 들과 더불어 앞장서서 대의(大義)를 외치고 태조를 추대하여 집을 바꾸어 나라로 만드니 정안군(靖安君)에 봉군(封君)되었다.
갑술년 여름에, 명(明) 나라의 고황제(高皇帝)가 태조에게 친아들을 보내어 들어와 조회하게 하라고 명령하니, 태조가 우리의 태종이 경서에 능통하고 예에 밝아서 여러 아들 중에 가장 현명하다고 하여 즉시 보내어 명령에 응하였다. 명 나라에 이르러서는 진술하는 것이 황제의 뜻에 만족하였으므로, 예를 갖춘 우대를 받고 돌아오게 되었다. 무인년 가을 8월에 태조가 몸이 편찮았는데 권신(權臣)이 붕당(朋黨)을 모아 어린 왕자를 끼고 정권을 잡아 제 마음대로 휘둘러 보고자 하는 자가 있어서 화가 곧 일어날 것 같으므로 태종이 낌새를 밝게 살펴 제거해 버렸다. 그때에 종친들과 장군과 재상들이 다 우리 태종을 세자로 책봉하기를 청하고자 하였으나, 태종이 굳이 사양하고 공정(恭靖 정종(定宗))을 추천하여 높이고, 위로 태조에게 청하여 세자로 책봉하게 하여 종묘 사직을 안정시켰다. 9월 정축일에 태조가 병이 낫지 않으므로 공정에게 선위(禪位)하였다.
건문(建文) 경진년 정월에는 역신(逆臣) 박포(朴苞)가 동기(同氣)를 해칠 음모를 꾸미고 몰래 방간(芳幹)의 부자를 유인하여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저지르니, 태종이 군사를 통솔하여 평정하였다. 박포만을 베고 나머지는 모두 놓아 주었으며, 방간은 안치(安置)의 벌에 처하였을 뿐 지친(至親)의 정을 버리지 아니하였다. 공정(恭靖)이 후사(後嗣)가 없고, 또 개국(開國) 정사(定社)의 일이 다 우리의 태종의 공적이라고 하여 세자로 책봉하였다. 11월에 또한 병으로 우리 태종에게 전위(傳位)하였다. 사신을 명 나라에 보내어 황제의 명을 청하니, 다음해 신사년 6월에 건문제(建文帝)가 통정시 승(通政寺丞) 장근(章謹) 등을 보내어 고명(誥命)과 인장(印章)을 받들고 와서 우리 태종을 봉하여 왕으로 하였다. 겨울에는 홍려시 행인(鴻臚寺行人) 반문규(潘文奎)를 보내와서 면복(冕服)을 내리니, 품질(品秩)이 친왕(親王)과 비등(比等)하였다.
임오년에 지금의 황제가 즉위하자 좌정승 신 하륜(河崙)을 보내어 등극을 축하하니, 황제가 충성을 칭찬하였다. 다음해 계미년 4월에 고명과 인장을 내리고 도지휘사(都指揮使) 고득(高得) 등을 보내와서 전대로 봉하여 왕으로 하였다. 가을에는 한림 대조(翰林待詔) 왕연령(王延齡)을 보내와서 곤면(袞冕) 9장(章)과 금단사라(錦段紗羅)ㆍ서적을 주었는데, 태조에게는 금단사라를, 원경왕태후(元敬王太后)에게는 관포(冠袍)와 금단사라를 내리어서 각각 차등이 있게 하였다. 그때부터 뒤에는 황제의 하사하는 선물이 계속하여 쉬는 해가 없었다.
을유년에, 한양(漢陽)은 태조가 수도로 정한 곳이라고 하여 여러 사람들의 반대 의논을 물리치고 한양으로 돌아왔다. 정해년에 황제가 정조(正朝)의 조하(朝賀)에 간 조선의 사신에게 말하기를, “조선의 국왕은 지성으로 사대(事大)한다.” 하였다. 그 뒤로는 사신이 도착할 때마다 번번히 ‘지성이라.’ 칭찬하였다.
무자년 5월에 태조가 안가(晏駕)하니 태종이 애모함을 그지없이 하였다. 양암(諒闇 임금이 거상(居喪)할 때에 있는 방)에 거처하면서 초상과 장사를 예로써 하였다. 사자를 보내어 부고(訃告)를 알리니, 황제가 매우 슬퍼하고 정사 보는 것을 정지하였다. 예부 낭중 임관(林觀) 등을 보내어 대뢰(大牢)를 서서 사제(賜祭)하고 시호를 강헌(康獻)이라고 추증하였다. 또 태종에게 칙서(勅書)를 내려 후한 부의(賻儀)를 주었다.
임진년 겨울에 왕씨(王氏)의 후예로서 민간에 숨은 자가 상언(上言)한 것이 있었다고 하여 담당 관사(官司)에게 사형에 처할 것을 청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제왕(帝王)이 일어남은 본래 천명(天命)이 있는 것이다. 왕씨의 후예를 죽이는 것은 우리 태조의 본의가 아니다.” 하고, 곧 하교하기를, “왕씨의 후예로서 생존한 자는 각기 생업에 안정하게 하라.” 하였다. 갑오년 6월에 감로(甘露 달콤한 이슬)가 함흥부 월광구미리(咸興府月光仇未里)와 정평(定平)의 백운산(白雲山)에 내렸다. 다음해 을미년 4월에 감로가 또 함흥부의 덕산동(德山洞)에 내렸다. 우리 나라에서는 전고(前古)에 없었던 일이다. 의정부에서 모두 전문(箋文)을 올리어 진하(進賀)하였으나 임금이 받지 아니하였다. 무술년 6월에 세자 제(禔)가 패덕(敗德)하다고 해서 세자의 직위를 해제하여 양녕대군(讓寧大君)에 봉하고, 우리 전하가 총명하고 효도하며 우애가 있고 학문을 좋아하여 게을리 함이 없어서 국민들이 촉망(囑望)한다고 하여, 세자로 책봉하고 중국 조정에 알리니, 황제가 좋다고 윤허하였다.
이해 8월에 임금이 우리 전하에게 선위(禪位)하고 사신을 보내어 황제의 명령을 주청(奏請)하였다. 11월에 우리 전하가 책보(冊寶)를 받들어 부왕(父王)에게 성덕신공상왕(聖德神功上王)이라는 호(號)를 올렸다. 다음해인 기해년 정월에 황제가 홍려시 승(鴻臚寺丞) 유천(劉泉) 등을 보내어 고명(誥命)을 받들고 우리 전하를 왕으로 하였다. 5월에 대마도(對馬島)의 왜구가 변경을 침범하여 우리의 군사를 살해하고 약탈하므로 영의정 신(臣) 유정현(柳廷顯)과 찬성(贊成) 신 이종무(李從茂) 등을 명하여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게 하니, 대마도의 왜인들이 예전과 같이 성심으로 섬겼다.
8월에 황제가 사신을 보내 와서 상왕에게 잔치를 하사하였다. 칙서(勅書)의 사연은 대략 이러하였다. “왕의 지성이 돈독하고 두터워서 성심으로 황제의 조정을 섬기어 한결같은 덕과 한결같은 마음이 처음이나 끝이나 변함이 없었으며, 능히 어진 이를 고르고 덕있는 이에게 명하여 종사(宗祀)로 하여금 의탁함이 있게 하고 백성들의 바람에 부응하였다.” 하였다. 또 우리 전하에게 잔치를 하사하였는데, 칙서는 대략 이러하다. “부왕이 돈후하고 노성하여 천도(天道)를 삼가 공경하였으며 충순(忠順)한 정성은 오래 갈수록 변함이 없었다.” 하였다.
9월에 공정(恭靖)이 죽자, 전하가 참최복(斬衰服)을 입고 역월의 복제[易月之制]를 마쳤다. 사자를 보내어 부고를 알리었더니, 다음해 4월에 황제가 사자를 보내 와서 치제(致祭)하고 공정(恭靖)이라는 시호를 내리었다. 이해 봄에 우리 전하가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태상왕(太上王)의 호를 올리도록 청하였으나 윤허되지 아니하였다. 가을 7월에 원경왕태후(元敬王太后)가 훙(薨)하였다. 우리 전하가 애통하여 몸을 훼상(毁傷)함이 예(禮)에 지나친다고 하여 거상 기간을 날을 달로 계산하는 역월의 복제를 좇기를 명하였으나 전하가 울며 굳이 사양하였다. 이에, 장사 뒤에 상복을 벗고 흰옷으로 복제(服制)를 마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9월 임오일에 태후(太后)를 광주(廣州) 수읍(首邑)의 대모산(大母山)에 장사 지내고 능(陵)을 현릉(顯陵)이라고 하였다. 신축년 9월에 우리 전하가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받들고 태상왕(太上王)의 호를 올렸다. 10월에 태종(太宗)에게 품의(禀議)하고 원자(元子) 향(珦)을 책봉하여 세자로 삼았다.
태종은 좀처럼 세상에 나지 않는 훌륭한 자질로서 성인의 학문에 밝으며, 효도와 우애는 신명에 통하고, 정성과 공경함은 종묘와 사직을 바로잡았다. 사대하는 일은 천자가 그의 지성을 칭찬하였으며, 교린(交隣)하는 일은 왜국(倭國)이 그의 도(道) 있음에 심복하였다.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불쌍히 여기며, 검소한 것을 숭상하고 비용을 절제하였다. 덕과 예(禮)를 우선하고, 형벌을 신중히 하였으며, 충직한 이를 등용하고 간사한 자를 내쫓았다. 이단을 물리치고, 음사(淫事)를 금지하였다. 고금(古今)을 참작하여 제도를 정하였으며, 문교(文敎)를 밝히고 무비(武備)를 엄중하게 하였다. 누적된 폐단을 모두 없애버리니, 모든 사적(事績)은 다 빛이 났다. 온 나라 안이 안도하여 백성들은 편안하고 산물은 풍성하였다. 제왕의 도가 아, 성대하도다. 그가 상제(上帝)의 사랑을 얻음이 융숭한 것은 당연하다. 그리하여 두 번이나 감로(甘露)를 내리는 상제의 상서를 얻었던 것이다.
임인년 4월에 처음으로 병환이 있더니, 다음달 5월 병인일에 이궁(離宮)에서 훙하였다. 우리 전하가 애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3일 동안 수라를 들지 아니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울며 수라 들기를 청하였으나 마침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3년을 거상(居喪)할 것을 정하고 역월(易月)의 제도를 쓰지 아니하였다.
태종은 춘추가 56세이며 왕위에 있은 것이 19년이었다. 한가롭게 살며 정양한 지 5년 만에 갑자기 승하하시니, 크고 작은 신료들과 아래로 하인과 노예에 이르기까지 목이 쉬도록 호곡(號哭)하지 않는 이가 없어서 오랠수록 더욱더 슬퍼하기를 부모의 상을 당한 것 같이 하였다. 아, 슬프다. 이해 9월 6일 경자(庚子)에 원경왕태후(元敬王太后)의 능에 합장하였다. 유언의 명령에 좇은 것이다. 부고(訃告)가 가니, 황제가 슬퍼하여 정사보는 것을 정지하였다. 특별히 예부낭중(禮部郞中) 양선(楊善) 등을 보내 와서 사제(賜祭)하였는데 그 제문(祭文)은 대략 이러하였다. “왕은 돈후하고 지성스러우며, 총명하고 현달하여 공경히 황제의 조정을 섬기어서 충순(忠順)의 정성이 처음이나 끝이나 변함이 없었습니다. 부음이 멀리 들려오니 진실로 깊이 슬픔을 느낍니다.” 하였다. 또 고명(誥命)을 내려 시호를 공정(恭定)이라고 하였다. 또 전하께서 부의(賻儀)를 넉넉하고 후하게 내리었다. 대체로 우리 태종(太宗)의 공덕이 성대함과 전하의 효성이 지극함이 앞뒤에서 서로 받들어서 천심을 잘 누렸기 때문에 마지막과 시초의 즈음에 있어서 남달리 총애하는 은전이 이와 같이 갖추어지고 지극하게 된 것이다.
중궁(中宮) 원경왕태후의 성(姓)은 민씨(閔氏)니, 여흥(驪興)의 세가(世家)이다. 고려의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障事) 문경공(文景公) 휘 영모(令謨)로부터 6대 만에 황고조(皇高祖) 휘 종유(宗儒)에 이르러 의종(毅宗)을 도왔으니, 벼슬은 도첨의시랑 찬성사(都僉議侍郞贊成事)로서 시호는 충순(忠順)이다. 충순이 황증조(皇曾祖)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시호 문순(文順) 휘 적(頔)을 낳고, 문순은 황조(皇祖) 대광(大匡)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휘 복(扑)을 낳았으며, 대광은 황고(皇考) 순충동덕찬화공신(純忠同德贊化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수문전대제학 영예문춘추관사(修文殿大提學領藝文春秋館事) 시호 문도(文度) 휘 제(霽)를 낳았다. 황비(皇妣) 송씨(宋氏)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을 봉하였는데, 고려 중대광(重大匡) 여량군(礪良君) 휘 선(璿)의 딸이다. 선을 쌓음으로써 흘러나오는 경사가 맑고 덕 있는 이를 낳게 되었으니, 총명하고 지혜스러움이 남에게 뛰어났다.
시집갈 나이가 되매 배필을 가려서 우리 태종에게 시집왔다. 태종이 젊었을 때, 세상을 건지려는 뜻이 있어 경서와 사기에 마음을 두고 집안 살림살이를 돌보지 아니하였으나, 태후는 능히 집을 다스리는 데 검소하게 하고, 가정의 공궤(供饋)에는 삼가하여 그의 공부를 힘쓰게 하였으며, 많은 아들들을 가르쳐서 의로운 방법을 따르게 하였다. 첩(妾)과 시녀들을 예(禮)로 대우하여 부인의 도리를 극진하게 하였다. 홍무(洪武) 임신년에 정녕옹주(靖寧翁主)로 봉하여졌다. 무인년에 태종이 사직을 정할 즈음에는 형세가 매우 외롭고 위태하였는데, 태후가 마음을 다해 도와서 큰 일을 성취하게 하였다. 경진년 봄에 정빈(貞嬪)으로 봉하였고, 그해 겨울에 태종이 즉위하여 정비(靜妃)로 봉하였다. 영락(永樂) 계미년에는 명 나라의 황제가 관포(冠袍)를 내려주었으며, 이 해로부터 정유년에 이르는 동안 여러 번 황제의 하사를 받은 것이 모두 다섯 번이나 되었다. 무술년 겨울에 우리 전하가 후덕 왕대비(厚德王大妃)의 호(號)를 올리었고, 경자년 9월에 원경왕태후(元敬王太后)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춘추는 56세였다.
태후는 차분하고 한아하며 정숙하고 경건한 덕을 타고났으며 태종을 잘 도와서 내치(內治)에 전심하였다. 20년 동안 궁궐 안에서의 용의(容儀)는 엄숙하고도 화목하였으며, 또 착한 아들을 낳아서 종사(宗社)를 맡게 하여 영광스러운 봉양을 누리었다. 흥하자 빈(嬪)과 시녀와 첩들이 마음껏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부(婦)가 모(母)의 거동을 본받음이 지극하였도다. 4남 4녀를 낳았으니, 우리 전하는 셋째이다. 장자는 제(褆)이며, 다음은 이름을 보(補)이니 효녕대군(孝寧大君)으로 봉하였다. 그 다음은 종(種)이니 성녕대군(誠寧大君)으로 봉하였다. 맏딸은 정순공주(貞順公主)이니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 이백강(李伯剛)에게 시집갔다. 같은 이씨(李氏)는 아니다. 다음은 경정공주(慶貞公主)이니 평양부원군 조대림(趙大臨)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경안공주(慶安公主)이니 길창군(吉昌君) 권규(權跬)에게 시집갔으나 또한 먼저 졸하였다. 다음은 정선공주(貞善公主)이니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에게 시집갔다.
의빈(懿嬪) 권씨(權氏)가 딸 하나를 낳았으니, 정혜옹주(貞惠翁主)로서 운성군(雲城君) 박종우(朴從愚)에게 시집갔다. 소혜궁주(昭惠宮主) 노씨(盧氏)가 딸 하나를 낳았으나 아직 어리다. 신녕궁주(信寧宮主) 신씨(辛氏)가 3남 7녀를 낳았으니, 맏이는 이름을 인(禋)이라고 하며 공녕군(恭寧君)으로 봉하였다. 나머지는 어리다. 큰딸은 정신옹주(貞信翁主)이니 영평군(鈴平君) 윤계동(尹季童)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정정옹주(貞靜翁主)이니 한원군(漢原君) 조선(趙璿)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숙정옹주(淑貞翁主)이니 일성군(日城君) 정효전(鄭孝全)에게 시집갔다. 나머지는 다 어리다.
궁인(宮人) 안씨(安氏)가 1남 3녀를 낳았으나, 다 어리다. 김씨(金氏)가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이름은 비(緋)인데 경녕군(敬寧君)으로 봉하였다. 고씨(高氏)가 아들 하나를 낳았으며, 최씨(崔氏)가 1남 1녀를 낳았고, 이씨(李氏)가 1남을, 김씨(金氏)가 1녀를 낳았으나 다 어리다. 우리 중궁(中宮) 공비(恭妃) 심씨(沈氏)는 문하시중 휘 덕부(德符)의 넷째 아들인 온(溫)의 딸이다. 4남 2녀를 낳았으니, 첫째는 바로 세자이고, 나머지는 다 어리다.
양녕(讓寧)이 김한로(金漢老)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낳았으나 다 어리다. 효녕(孝寧)이 전 판중군도총제부사(前判中軍都摠制府事) 정이(鄭易)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1녀를 낳았으나 다 어리다. 성녕(誠寧)이 전 전라도 도관찰사 성억(成抑)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아들이 없다. 정순공주(貞順公主)가 딸 하나를 낳았으니 용양시위사 호군(龍驤侍衛司護軍) 이계린(李季疄)에게 시집갔다. 물론 같은 이씨가 아니다. 정경공주(貞慶公主)가 딸 넷을 낳았으니, 첫째는 돈녕 부승(敦寧府丞) 안진(安進)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유학(幼學) 김중엄(金中淹)에게 시집갔다. 나머지는 어리다. 경안공주(慶安公主)가 아들 둘을 낳았으니, 첫째는 이름을 담(聃)이라고 하며 한성 소윤(漢城小尹) 정연(鄭淵)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다음은 어리다. 정선공주(貞善公主)가 2남 1녀를 낳았으나, 다 어리다. 경녕(敬寧)이 호조 참의 김관(金灌)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낳았으나 다 어리다. 공녕(恭寧)이 병조 참의 최사강(崔士康)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둘을 낳았으나 다 어리다.
신은 적이 살펴보니, 우리 태종(太宗)의 큰 덕과 높은 공이 본래 이미 모든 임금들의 위에 높이 뛰어났으나, 배필의 어지심과 내조의 공도 또 촉도 신지(蜀塗莘摯)와 더불어 부서(符瑞)를 같이하고 아름다움을 짝할 만한 것이 있다. 모든 신하들이 모두 능(陵)의 신도비(神道碑)에 명(銘)을 새겨 길이 뒷 세상에 밝혀 보이고자 하여, 전하가 신(臣) 계량에게 명하였다. 신 계량은 명령을 받고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삼가 손으로 읍하고 머리를 조아려 명(銘)을 올린다. 명에 이르기를,

하늘이 우리 나라를 돌보시어 / 天眷海東
우리 태종을 내려주셨네 / 降我太宗
부지런히 힘쓰는 태종이여 / 亹亹太宗
성대한 덕 몸에 지니셨네 / 盛德在躬
성스러운 아버지를 추대하여 / 推戴聖父
위대한 공 이루게 하고 / 克集大功
황제의 조정에 조근하여 / 乃覲帝庭
조용히 진주하였네 / 敷奏從容
천자의 은총 넉넉히 입게 되어 / 優荷睿恩
우리 나라 백성들 보전하셨네 / 保我黎元
기미를 밝게 살펴 변란을 평정하고 / 炳幾靖亂
적계 형을 높여 세자되게 하였네 / 嫡長是尊
형제간의 싸움을 만났으나 / 雖値鬩墻
우애가 오히려 두터웁네 / 友愛猶惇
효제의 지극함은 / 孝悌之至
전고에도 드물었네 / 從古罕聞
그 덕은 후하고 / 維德之厚
그 공은 성대하니 / 惟功之懋
하늘이 매우 밝게 살펴 / 天鑑孔昭
거듭하여 보우하시네 / 式申保佑
휘황한 금보가 / 煌煌金寶
전후에 빛나고 / 輝映前後
황제의 고명이 잇달아 도착하매 / 帝誥荐臻
내 드디어 왕위를 받았네 / 我乃龍受
할아버지 훈계를 지켜 / 祖訓惟服
한성에 환도하고 / 還于漢北
예악을 제작하니 / 制作禮樂
아름답게 문채나네 / 煥乎郁郁
상중에 여막살며 / 遭喪居盧
애모함이 망극하여 / 哀慕罔極
장사와 제사에 / 以葬以祭
옛 법을 따르셨네 / 古典是式
공손히 사대하니 / 抵事朝廷
황제가 지성이라 칭찬하였네 / 帝稱至誠
경건하게 승사하니 / 肅肅承祀
신명이 감응하고 / 感于神明
교린에 도 있으니 / 交隣有道
왜국이 복종하며 / 倭邦來庭
왕씨 후예 돌보아 / 存䘏王裔
편안히 살게 하였네 / 俾遂其生
안팎이 태평하기 / 中外又安
20년이 되어가니 / 垂二十齡
윤택한 감로가 / 浥浥甘露
해마다 함부에 내리었네 / 歲降咸府
어두운 아들(湜) 폐하시고 덕 있는 이에 명하여 / 廢昏命德
백성의 주인이 되게 하였네 / 以作民主
길이 천수를 누리며 / 期享永年
이 땅에 군림하시기를 기약하였는데 / 父臨下土
그 어찌 빈천을 재촉하여 / 何促賓天
병이 낫지 않는가 / 一疾莫愈
슬프다, 착하신 아들 / 哀哀聖子
슬퍼함이 가이없어 / 痛悼無比
3일 동안 철선하고 / 徹膳三日
상심을 못이기며 / 不勝摧毁
거상 중의 모든 절차를 / 凡百喪事
예대로 지키었네 / 維禮之履
황제 듣고 슬퍼하며 / 帝聞慟悼
사자 보내 사제하고 / 遣使以祀
높이는 시호 주며 / 贈謚褒崇
후한 부의 내리시니 / 賜賻優隆
조문의 예를 완비함에 / 恤典之備
신하들 기뻐하네 / 喜溢臣工
신의 태후 생각 같아 / 思齊太后
진실로 화순하네 / 允也肅雝
가만히 도와 사직을 안정시켜 / 密贊定社
큰 총명에 배필하고 / 克配亶聰
성철한 아들 낳아 / 篤生聖哲
종묘제주 되게 했네 / 俾主宗祐
하늘처럼 건전하고 밝으심은 / 乾健离明
공정의 덕이요 / 恭定之德
땅처럼 후하고 바르심은 / 坤厚柔貞
원경의 법칙이네 / 元敬之則
살아서는 금슬 같은 벗이요 / 琴瑟以友
죽어서도 같이 장사하였네 / 藏同其域
자손이 번성하니 / 子孫振振
아, 기린 같도다 / 于嗟其麟
종묘 제사 / 緜緜宗祀
억만년 이어가리 / 垂萬億春
신은 절하고 글을 올리오니 / 臣拜獻詞
옥 같은 굳은 돌에 이 사연 새기어서 / 刻之貞珉
만대에 마멸 없이 / 萬代不磨
우리 나라 빛나게 하리라 / 昭我東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6권
 경기(京畿)
광주목(廣州牧)


동은 양근군(楊根郡) 경계(境界)까지 25리, 여주 경계까지 75리, 남은 이천부(利川府) 경계까지 74리, 양지현 경계까지 85리, 용인현 경계까지 43리, 서는 과천현(果川縣) 경계 양재역(良才驛)까지 27리, 안산군 경계까지 76리, 북은 양주 경계에 이르기까지 10리, 서울에서의 거리는 41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남한산성이다. 시조(始祖) 온조왕(溫祚王) 13년에 위례성(慰禮城)으로부터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고, 근초고왕(近肖古王) 26년에 또 도읍을 남평양성으로 옮겼다 지금의 경도(京都). 당 나라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쳐서 없애고, 당 나라 군사가 돌아간 뒤에 신라가 그 땅을 점차 거두어 남한산성을 고쳐 한산주라 하고, 또 남한산주라고도 불렀다. 경덕왕(景德王) 15년에는 한주(漢州)라 고쳤고, 고려 태조 23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성종(成宗) 2년에 처음으로 12목(牧)을 두었는데 광주는 그 하나이다. 14년에 절도사를 두어 봉국군(奉國軍)이라 이름하고 관내도(關內道)에 예속시켰다. 현종(顯宗) 3년에 폐하여 안무사가 되었다가 9년에 8목(牧)을 정할 때에 다시 목이 되었다. 본조에서는 이를 따랐다. 세조 때 진(鎭)을 두었다.
【진관】 목 1. 여주 도호부 1. 이천 군 1. 양근 현 5. 지평(砥平)ㆍ음죽(陰竹)ㆍ양지(陽智)ㆍ죽산(竹山)ㆍ과주(果州)
【관원】 목사 1인, 종 3품이다. 여러 목도 같다.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를 겸하였는데, 여러 도와 여러 진(鎭)이 같다. 판관(判官) 1인, 종 5품으로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겸하였는데, 여러 도와 여러 진이 같다. 교수(敎授) 1인, 종 6품이다. 여러 도의 도호부 이상은 같다. 『신증』 연산군(燕山君) 11년에 이 주의 사람으로 난언(亂言)한 자가 있어 본주(本州)를 혁파하였다가, 지금 임금 초년에 복구하였고, 6년에는 주가 잔악하고 피폐함으로써 판관을 폐지하였다.
【군명】 남한산ㆍ한산주ㆍ한주ㆍ회안(淮安)ㆍ봉국군(奉國軍).
【성씨】 본주(本州) 이(李)ㆍ윤(尹)ㆍ석(石)ㆍ한(韓)ㆍ안(安)ㆍ김(金)ㆍ지(池)ㆍ소(素), 노(盧)ㆍ장(張)ㆍ박(朴)이다 모두 속성(屬姓)이다.
【풍속】 상기사 독서사(尙騎射讀書史) 《수서(隋書)》에, “백제 풍속이 말타고 활 쏘기를 숭상하며, 서사(書史)를 읽어 행정의 일에 능하고, 또 의약과 점치고 상보는 법을 안다.”하였다. 혼인의 예절은 대략 중화(中華)와 같다 위와 같다. 두 손을 땅에 디딤을 공경으로 삼는다 위와 같다. 의복은 깨끗하다 《남사(南史)》 삼년거복(三年居服) 《북사(北史)》에, “부모 및 남편 죽은 자는 3년 동안 복을 입고, 나머지 친척은 장사를 끝내면 복을 벗는다.”하였다.
【형승】 한수(漢水)의 남쪽으로 토양이 기름지다. 백제 시조 온조의 말이다. 고적(古跡)편에 나타나 있다. 면이 모두 높은 산이다. 이곡(李穀)의 청풍정기(靑風亭記).
【산천】 검단산(黔丹山) 주 동쪽 7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청계산(淸溪山) 주 서쪽 50리에 있는데 또 과천현 편에 보라. 대모산(大母山) 주 남쪽 30리에 있다. 일장산(日長山) 주 남쪽 5리에 있는데 일명 남한산이라고도 한다. 조곡산(早谷山) 주 동쪽 30리에 있는데 일명 초동산(草洞山)이라고도 한다. 문현산(門懸山) 주 남쪽 45리에 있다. 천천현(穿川峴) 주 서쪽 30리에 있다.
○ 중 선탄(禪坦)의 시에, “관산(關山)은 아득히 멀고, 길은 굽이굽이 돌았는데, 걸음이 양주에 가까우니 안계(眼界)가 점점 열리는구나. 삼산(三山)이 본래부터 친함이 있는 듯, 은근히 백리에 강을 건너옴을 깊이 사례하노라.”하였다.
영장산(靈長山) 주 남쪽 20리에 있다. 운길산(雲吉山) 주 동쪽 30리에 있다. 수리산(修理山) 주 서쪽 60리에 있다. 또 과천현 편에 보라. 대해산(大海山) 주 남쪽 50리에 있다. 군월라산(軍月羅山) 주 동쪽 15리에 있다. 원적산(元寂山) 일명 무적산(無寂山)으로, 주 동쪽 60리에 있다. 대쌍령(大雙嶺) 주 동쪽 40리에 있다. 소쌍령(小雙嶺) 주 동쪽 45리에 있다. 가마령(佳亇嶺) 주 동쪽 45리에 있는데 성종 어태(御胎)를 봉안했다. 이령(梨嶺) 주 남쪽 30리에 있는데 지금 임금의 어태를 봉안했다. 추령(楸嶺) 주 남쪽 47리에 있다. 망월봉(望月峯) 주 서쪽 10리 몽촌(夢村)에 있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긴 바람에 배부른 돛으로 한수(漢水)에 급히 달려, 산중으로 돌아오니 술이 처음 익었네. 마른 창자에 술이 들어가니 또한 쉽게 취하는구나. 두 귀가 취중에 찡 울리며 흥이 스스로 족하니, 술 두루미를 옮겨 몽산 머리에 날아 올라가, 슬쩍 눈을 동쪽 봉우리로 돌려 새 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려 본다. 새 달이 넘실넘실 구름 끝에 나오니, 빙륜(氷輪)이 둥그런데 금 물결 무늬 일렁거리네. 잠깐 사이에 하늘 중앙에 달려 있으니, 구주(九州)와 사해(四海)가 모두 맑은 빛이네. 잔을 들어 달에게 물어도 달은 응하지 아니하는데, 돌아보니 토끼가 나의 청광(淸狂) 많음을 웃누나. 옛 사람이 달을 사랑하는 이는 모두 유선(儒仙)이라, 고래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지 천년이나 되었네. 적벽(赤壁) 어느 때에 검은 학이 춤 추었더냐. 백중(伯仲)되는 호걸 기운이 천하에 제일이었네. 한 두루미 술이 넘실넘실 강과 같이 다함이 없으니, 지금 사람과 옛 사람이 같지 않을까. 오경 밤이 깊어도 달은 지지 아니하니, 사가(四佳 서거정의 호(號)) 취한 늙은이 머리가 반백일세.”하였다.
구질포(仇叱浦) 주 서쪽 90리에 있다. 이관포(梨串浦) 주 서쪽 88리에 있다. 조포평(助布坪) 주 서쪽 30리에 있는데 옛 목장이다. 탄천(炭川) 주 남쪽 30리에 있는데 삼전도(三田渡)로 들어간다. 소천(小川) 주 동쪽 30리에 있는데 도미진(渡迷津)으로 들어간다. 독포(禿浦) 주 북쪽 11리 도미진(渡米津) 하류에 있다. 또 양주 편에 보라.
○ 이색(李穡)의 시에, “독포 모래 가에 어둠빛이 닥치니, 먼 산과 편평한 들의 형세가 굽이쳐 뻗었네. 뱃사람이 닻줄을 걷어 흐름을 따라 내려가면서, 달이 양주에 밝은데 마침 시를 지었네.”하였다.
세고탄(洗姑灘) 주 서쪽 15리 광진(廣津) 하류에 있다.
○ 서거정의 시에, “강가에서 빨래하는 색시 얼굴이 꽃과 같은데, 어릴적부터 빨래하여 생활하였네. 아침엔 흰 발을 씻으니 눈빛 같고, 저녁에 흰 팔을 씻으니 서릿발 같네. 아침마다 저녁마다 씻고 도 씻으니, 한 물이 스스로 깨끗해져 마음에 스스로 만족하리. 흰 실[綿]을 내리니 빙사(氷絲) 더 희매, 밤마다 흰 달 아래 찬 북[梭]을 울리네. 가는 비단을 짜 재단하여 옷을 만드니, 교초(蛟綃)보다 가늘고 월사(越紗)보다 가볍네. 강물이 맑고 또 잔잔함이여, 날마다 눈을 내리어 쉴 때 없어라. 씻기 끝나매 소담[談]한 화장[粧]이 물 밑에 비치니, 소아(素娥 월궁의 선녀)도 깨끗함을 사양하겠고, 강비(江妃 강의 신녀)도 부끄러워하겠네. 문득 미친 바람이 있어 천지가 어두우니, 티끌이 아득하여 갈 곳을 잃었네. 허둥지둥 진흙물 가운데서 당황하니, 옥질(玉質)은 이미 잘못되어 옷도 검어졌네. 시누이 문에 나와 색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데, 색시는 빨래하기 왜 더딘고. 색시가 돌아오매 시누이는 손뼉치며 웃되, 추악하여 우리 집 시(施 서시(西施)의 성)가 아니라 하네. 시누이 나이는 겨우 열 세 살, 이때에 철이 아직 안 들었네. 시누이야, 시누이야 색시를 웃지 말아라. 이 한(恨)을 뒷날 너도 혹 알게 되리라.”하였다.
도미진(渡迷津) 주 동쪽 10리, 양근군 대탄 용진(龍津) 하류에 있는데, 그 북쪽 언덕을 도미천(渡迷遷)이라 이름한다. 동쪽으로 봉안역을 향하여 돌 길이 7~8리나 빙빙 둘렀는데, 신라 방언(方言)에 흔히 물 언덕 돌 길을 천(遷 벼루)이라 불렀다. 뒤에 나오는 것도 이와 같다.
○ 고려 한수(韓脩)의 시에, “햇볕이 잠깐 움직이자 오는 바람이 부드럽고, 하늘 그림자는 멀리 비췄는데 돛은 한가히 가네. 머리를 돌려 은근히 삼각산을 이별하되, 달이 아직 반쯤 둥글기 전에 내 돌아오리라.”하였다.
○ 권우(權遇)의 시에, “산 허리 구불구불 사닥다리 길 비꼈는데, 가다가 길 다한 곳에 사람 집이 있구나. 하늘은 차고 날은 저물고 바람은 급하게 부는데, 머리 돌려 긴 강을 바라보니 물결이 꽃을 피우네.”하였다.
광진(廣津) 주 서쪽 18리 독포 하류에 있다. 또 양주 편에 보라. 삼전도(三田渡) 주 서쪽 18리에 있는데, 한성부(漢城府) 편에 자세히 있다.
【토산】 실[絲]ㆍ삼[麻]ㆍ자기(磁器) 해마다 사옹원(司饔院) 관리가 그림 그리는 사람을 인솔하고 가서, 궁중에서 쓸 그릇을 감독하여 만든다. 도기(陶器)ㆍ은어[銀口魚]ㆍ눌어(訥魚)ㆍ쏘가리[錦鱗魚]ㆍ게[蟹].
【봉수】 천천현 봉수(穿川縣烽燧) 남쪽으로는 용인현(龍仁縣) 보개산(寶蓋山)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서울 남산 제2봉수에 응한다.
【누정】 청풍루(淸風樓) 객관 동북쪽에 있는데 옛 청풍정이다. 목사 홍석(洪錫)이 다시 지어 누로 만들었다.
○ 이곡(李穀)의 기문에, “지정(至正 원 나라 순제(順帝)의 연호) 기축년 여름 4월에 어버이를 뵈러 고향으로 가는 길에 낙생역(樂生驛)에 이르니, 광주 목사 백화보(白和父)가 글을 보내 초청하고 또 말하기를, ‘관사의 북쪽에 옛날의 청풍정 터를 찾아 네 기둥을 세워 집을 지었는데, 실로 한 고을의 제일가는 명승이라. 기문(記文)을 지어 주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나는 갈 길이 바빠 우선 답하기를, ‘뒷날 서울에 돌아갈 때에 한 번 가서, 눈으로 보고 기를 지어도 아직 늦지 않을 것이오.’ 하였다. 이듬해 광주에 이르니 백군은 이미 조정에 불려 들어갔고, 이군 모(某)가 대임(代任)된 지 반 년이나 되었다. 때는 바야흐로 혹심한 더위라 허덕이는 숨길이 실끝 같았다. 이에 이른바 청풍정에 올라 기둥에 기대어 옷깃을 헤치니, 정신이 맑고 상쾌해지며 모발(毛髮)이 선들선들하여져, 더러운 데서 매미가 허물을 벗고 티끌 밖으로 나온 것 같았다. 이군은 술을 장만하고, 조용히 말하기를, ‘네 기둥의 제도는 간소하기는 간소합니다만 아침저녁에 해가 쬐고, 동쪽 서쪽으로 빗발이 치므로 앉아 노는 손님들이 이것을 불편하게 여겼습니다. 내가 양쪽 옆으로 달아내어 남쪽 추녀를 지어 각각 다섯 자씩이요, 북쪽도 또한 이와 같이 하니 약간 넓어지고 또 깊어졌습니다. 벌써 흙 손질을 끝내고 장차 단청을 하려는 참이온데 선생께서 마침 이르러 오시니 어찌 술잔을 들어 낙성(落成)하고, 연월을 써서 기록하여 주지 아니하겠습니까.’ 하였다. 내 이미 전에 백군에게 허락하였기에, 이에 정자가 폐허된 지가 몇 해인가 물었으나 부로(父老)들이 아는 자 없으니 오늘날 폐한 정자를 일으킴이 사실에 있어서는 새로 세움과 같다. 《춘추(春秋)》에 공사(工事)한 것을 쓴 것은 안할 공사를 하였다고 한 것도 있고, 또 《논어(論語)》에, ‘노(魯) 나라 장부(長府)를 하필 다시 지으리요.’ 한 말도 있으니, 성인이 가르침을 남기신 뜻이 깊다. 내, 광주 형세를 보니 3면은 높은 산이요, 북쪽은 비록 틔여서 넓으나 지세가 낮아서, 공청이나 백성의 집이 우물 밑에 있는 것 같아, 손들이 오면 낮고 누추하다고 불편하게 여길 것이나, 지척(咫尺) 사이에 이 같은 시원한 곳이 있음을 알지 못하였던 것이매, 이 정자를 지음이 《춘추》의 폄(貶)한 예(例)에 들지 않을 것이다. 내 이에 기문을 쓴다. 청풍이란 뜻은 백군의 말에 다하였으므로 내 다시 보태지 아니한다. 백군은 동년(同年 같은 해에 과거에 급제한 사람) 이군의 벗인데, 정사가에 모두 청렴하고 부지런하다는 칭찬 평이 있다.”하였다.
○ 권담(權湛)의 시에, “바람이 장미를 흔드니 벌써 꽃이 떨어졌고, 녹음이 땅에 가득하니 한이 왜 이다지도 많은가. 젊었을 때 이 누의 달 아래서 노래하며 춤추었더니, 10년 만에 돌아오매 두 귀밑털이 희었네.”하였다.
무진정(無盡亭) 주 서쪽 15리, 화산군(花山君) 권반(權攀)의 별장에 있다.
○ 최항(崔恒)의 시에, “하늘이 기이한 지경을 아꼈다가 호걸과 영웅에게 부쳐 주니, 한없는 기관(奇觀)이 한강 동쪽을 다 차지하였네. 봄 비에 바다 갈매기 난간 밖을 의지하고, 저녁놀과 따오기[霞鶩]가 술잔 속에 들어오네. 우연히 오는 죽백(竹帛)의 이름이 무슨 소용되겠소. 늙어감에 강산의 흥이 무궁하네. 저는 나귀를 거꾸로 타니 가는 곳마다 좋고, 어찌하면 돌아올 줄 아는 지친 새와 같을꼬. 푸른 도롱이[簑]에 취한 몸을 붙들어 어부를 따르고, 흰 삿갓에 노래를 높이 부르며 소 치는 늙은이와 짝하네. 돌아가지 않는 것이지 돌아가면 갈 수 있을 것인데, 부끄럽다 내 공연히 오호(五湖) 바람을 생각하네.”하였다.
압구정(狎鷗亭)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가 두모포(豆毛浦) 남쪽 언덕에 정자를 지었다. 사신으로 명(明) 나라에 들어가 정자의 이름을 한림학사(翰林學士) 예겸(倪謙)에게 청하였더니, 예겸이 이름짓기를 ‘압구'라 하고 기문을 지었다. 그 뒤 을미년에 또 사신으로 명 나라에 들어가 조정 선비들에게 시를 청하였더니, 무정후(武靖侯) 조보(趙輔) 등이 말하기를, “이 분이 압구정 주인이다.”하고, 한 가지로 시를 지어 보여 정자 이름이 마침내 중국에 들리게 되었다.
○ 예겸의 기문에, “조선 왕성의 남쪽 십수 리에 물이 있는데 한강이라 한다. 그 근원은 금강ㆍ오대 두 산으로부터 나와서, 모여서 긴 강이 되고 서로 흘러서 바다에 들어간다. 내 옛날에 조서(詔書)를 받들어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가 강 위에 이르러 정자에 올라 잔치하며 시를 읊었었고, 또 배를 강 가운데 띄우고 오르내리며 즐겼었다. 그 강은 넓고 파도가 아득하여 바람 돛이 오가고, 갈매기 오르내리는 것을 보니 마음이 시원하고 경치가 다함이 없어, 황홀히 몸을 창해와 한수(漢水)ㆍ면수(沔水 중국의 강 이름)의 사이에 둠과 같아서, 몸이 동방 조선에 머물러 있음을 잊어버렸다. 이별한 지 10년에 매양 강 언덕의 풍치를 멀리 그리며, 정신이 달려가지 아니한 적이 없었었다. 천순(天順) 원년 겨울에 조선의 이조 판서 한명회 공이, 그 국왕의 명을 받들고 들어와 봉사(封事)를 천자에게 바치었다. 공은 전에 별장을 한강 가에 두고 정자를 그 가운데 지었으나, 아직 이름을 붙이지 못했다 한다. 내 전날 사신 가서 한 차례 놀았으므로, 그 좋은 경치를 안다 하여 사람을 시켜 나에게 이름을 청하고 인하여 기문 쓰기를 부탁하였다. 내 이름 짓기를 압구(狎鷗)라 하고 다음과 같이 쓴다. 갈매기는 물새의 한가한 자이다. 강이나 바다 가운데 빠졌다 떴다 하고, 물가나 섬 위에 날아다니는 것으로, 사람이 길들일 수 있는 물건이 아닌데 어찌 친압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위태로운 기미를 보면 바로 날아 떠오르고, 공중을 휘 날은 뒤에라야 내려앉는 것이니, 새이면서 기미를 보는 것이 이같은 까닭으로, 옛적에 해옹(海翁)이 아침에 해상으로 나갈 적에, 갈매기가 이르러 오는 수를 백으로 헤아린 것은 기심(機心)이 없는 까닭이요, 붙들어 구경하고자 하기에 미쳐서는 공중에서 춤추며 내려오지 아니하니, 그것은 기심이 동했기 때문이다. 오직 기심이 없으면 갈매기도 자연히 서로 친하고 가까이할 수 있을 것이다. 공은 큰 키가 옥처럼 섰고 거동과 풍도가 빼어났으며, 위대하여 번국(藩國)에서 벼슬할 때, 인재를 뽑아 쓰는 데 공명(公明)한 재주를 나타내었고, 천조(天朝 중국)에 사신 오매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예절로 삼갔으니, 나라에 돌아가면 등용됨이 융숭할 것이어서, 어찌 갈매기와 친압할 수 있겠는가. 만물의 정은 반드시 기심이 없은 뒤에라야 서로 느끼고, 만사의 이치는 반드시 기심이 없은 뒤에라야 서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조금이라도 사심이 붙어 있게 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기심이 진실로 없게 되면 조정에서는 사람들이 더불어 친하기를 즐기지 아니할 자 없고, 이 정자에 오를 적에는 갈매기도 더불어 한가히 친압하지 아니함이 없으리라. 부귀와 이록(利祿)에 대하여서는 자신에게 관계가 없는 것같이 한다면, 이는 도(道)에 나아감이 높은 이가 아니겠는가. 정자를 이로써 이름함이 아마도 마땅할 것이다. 옛날 송 나라 한위 충헌공(韓魏忠獻公 한기(韓琦))도 일찍이 정자 이름을 압구로 하니, 구양 문충공(歐陽文忠公 수(脩))이 시를 지어 보내기를, ‘험난하거나 평탄하거나 한 절개는 금석과 같아, 공훈과 덕이 함께 높아 예와 이제에 비치었다. 어찌 기심을 잊어[忘機] 갈매기가 믿는데 그치겠으랴. 만물을 다스리는 것도 본래 무심(無心)함이다.’ 하였다. 충헌공이 시를 얻고 기뻐 말하기를, ‘영숙(永叔 구양수의 자)이 나를 아누나.’ 하였다. 외국[朝鮮]과 중국이 비록 같지 아니하나 사람의 마음은 같고, 고금이 비록 다름이 있으나 우리 도(道)는 다르지 아니하다. 내가 공에게 바라는 것도 자못 이와 같다. 공의 마음에도 역시 나더러 잘 안다고 할는지 모르겠다. 혹시 잘 안다고 여기거든 이 말로써 정자 가운데에 걸어 기문으로 삼으면 다행이겠다.”하였다.
○ 태복시 승(大僕寺丞) 김식(金湜)의 시에, “초정(草亭)이 길이 한강을 대하여 열렸으니, 엄자릉(嚴子陵)의 옛 조대(釣臺)와 방불하구나. 다만 백구가 있어 짝이 될 만하니, 한가로이 날아갔다 또 날아오는구나.”하였다.
○ 급사중(給事中) 진가유(陳嘉猷)의 시에, “한 정자 물과 구름 사이에 산뜻하고 깨끗하게 서 있는데, 정자 밖 강 갈매기는 임의로 오가네. 종일 서로 친하여 푸른 물가에 의지하였고, 가끔 가다 가까이 날아와 붉은 난간에 서기도 하네. 피차에 맹세 깊었으니 기심을 잊은 지 오래고, 공무에서 아침저녁 퇴근하면 취미가 스스로 한가하네. 아직 높은 관직에 있다고 말하지 말라, 연래에는 명리(名利)와 이미 관계가 없어졌다네.”하였다.
○ 급사중 장녕(張寧)의 시에, “물과 구름 깊은 곳에 초정(草亭)이 그윽한데, 손이 있어 기심을 잊어 흰 갈매기를 대하네. 공명(功名) 다름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한가로운 심사(心事)를 가지고 더불어 부침(浮沈)하는 것을 배우지 말지어다. 윤건(綸巾)과 우선(羽扇 도인(道人)의 복색(服色))으로 한가하게 이야기할 만하고, 부슬비와 비낀 바람에 늦도록 다시 머무네. 좋을씨고 곡강(曲江) 누은(樓隱)한 곳에 갈매기와 서로 부르고 서로 가까이함이 몇 가을이나 되었는고.”하였다.
○ 무정후(武靖侯) 조보(趙輔)의 시에, “그윽한 정자 높이 큰 강 동쪽을 굽어보는데, 갈매기와 서로 기심을 잊어 즐거움이 다함이 없네. 떴다 잠겼다 함이 때가 있음에 둥둥 제대로 맡기고, 오고감에 스스로 걱정하는 생각이 없네. 한가한 가운데 넉넉히 연파(煙波)의 흥취를 얻었고, 고요한 가운데 바야흐로 조화(造化)의 공을 알겠네. 위국공(魏國公)의 청풍을 이제 잇는 이 있으나, 나의 시(詩)는 구양공(歐陽公)에 끌리네.”하였다.
○ 정서후(定西侯) 장완(蔣琬)의 시에, “현달한 사람이 그윽하고 고요함을 좋아하여, 정자를 꽃다운 물가에 지었네. 수레바퀴 말발굽 소리는 멀어졌는데, 맑은 바람만이 때로 오고 가네. 깨끗한 옥과 같은 새가 있어 서로 대하여 얼굴을 화하게 함에 족하다. 한 점 눈은 청산을 깨뜨리고, 모래에 새기니 푸른 이끼 얼룩지네. 물결이 편평하니 마음대로 떴다 잠겼다 하고, 화하게 울음 우니 소리 또한 꽥꽥하네. 세한 세월과 한가지로 오래니, 기심 잊어 흰 구름과 더불어 한가롭다. 보통 새와 서로 어울리기가 부끄러워, 소요(逍遙)하며 티끌 세상 밖에서 거니네. 위국공이 가신 지 이제 천 년이 되나, 높은 바람은 진실로 사모할 만하네.”하였다.
○ 태자소보 겸 좌도어사(太子少保兼左都御史) 왕월(王鉞)의 시에, “물 구름 고장 속에 초정이 그윽한데, 정자 위에 앉은 사람이 마치 물 위의 갈매기와 같네. 티끌 세상 백 년에 이런 낙이 없을 것이며, 연파(煙波) 만경(萬頃)에 무슨 근심이 있겠는가. 구양자(歐陽子)의 제품(題品 품평(品評))을 이미 거쳤고, 충헌공은 일찍이 은퇴하기 원하였네. 물(物)과 내가 서로 잊고 마음과 경계[境]가 고요하매, 한가한 가운데 소식은 봉후(封侯)보다 낫네.”하였다.
○ 병부 상서(兵部尙書) 항충(項忠)의 시에, “외로운 정자 푸른 물가에 몸이 흰 갈매기와 벗이 되네. 벼슬살이는 이미 꿈과 같으매 한가한 마음은 마치 구름 같네. 물결 빛은 대 자리[簟] 빛을 밝게 하고, 연꽃 기운은 향로의 향기와 섞였네. 해옹(海翁)에게 말을 전하고자 하노니, 기심 잊은 것은 이 분에게 돌려 보내소.”하였다.
○ 병부 좌시랑(兵部左侍郞) 등소(滕昭)의 시에, “작은 정자를 새로 낚시터 곁에 짓고, 매양 떼지어 나는 갈매기를 사랑하여 앉아서 돌아가지 아니하네. 잔 물결, 가벼운 바람에 둥둥 뜨고, 외로운 부평초와 나무 토막처럼 스스로 떠 다니네. 갈고리 낚시에 미끼를 달아 놓으니, 앞을 다투어 서로 쪼아 먹고, 돛대를 두들겨 소리나도 날아가지 아니하네. 시험 삼아 묻노니 해옹은 어찌 이것을 얻었는가. 원래 물(物)과 내가 한 가지로 기심을 잊었음이네.”하였다.
○ 이부 좌랑(吏部左郞) 유비(劉斐)의 시에, “그윽한 정자에서 강가를 굽어보니, 강물은 맑고도 깊네. 단정히 있으니 분위기 잡된 티끌을 물리쳤고, 경치는 그윽함을 찾을 대로 찾았네. 저 물결 위의 갈매기로 정자 이름 지으니, 한가함이 내 마음과 같다네. 서로 친하여 둥둥 뜨니 외로운 읊조림을 발하고, 아득하게 송설옹(松雪翁 원(元)의 조맹부(趙孟頫))을 생각하니, 천 년에 여운(餘韻)이 있네.”하였다.
○ 호부 낭중(戶部郞中) 이형연(李炯然)의 시에, “새로 모정(茅亭)을 푸른 강 가까이 지으니, 들 갈매기 오가매 뜻이 더욱 깊네. 항상 작은 배에 의지하여 낚시 드리움을 보고, 때로는 그윽한 창에 가까이 와서 거문고 타는 소리듣네. 한 가지로 연파에 늙기로 응당 약속했으리라. 강호(江湖)에서 서로 잊으니 모두 무심(無心)함일세. 아, 나는 밝은 시대에 애착되었으니, 맹세를 어기어 오래 찾지 아니함을 괴이하게 여기지 말게.”하였다.
○ 병부 낭중(兵部郞中) 우면(于冕)의 시에, “공무를 파하고 돌아오니 모든 생각이 멎었는데, 한가한 정자에 날마다 모래 갈매기가 가까이 오네. 인간에는 부질없이 기사(機事)가 많음을 말하는데, 나 홀로 무심하여 마음대로 가고 머물고 하네.”하였다.
○ 병부 원외랑(兵部員外郞) 장여필(張汝弼)의 시에, “봄바람 두약주(杜若州 향초)에 앉아서 늙으니, 흰 갈매기 나를 잊고 나는 갈매기를 잊었네.”다시 한 점의 기심도 없으니, 구름은 스스로 떠 다니고 물은 스스로 흘러 가네.”하였다.
○ 한림 수찬(翰林修撰) 나경(羅璟)의 시에, “세상에서 말하기를, ‘기심 잊은 사람은 일찍이 기심 잊은 새를 사랑한다.’ 하였네. 사람과 새가 서로 잊어 아침 저녁으로 좋은 맹약을 맺었네. 여기에다 이 정자를 지으니 높다랗게 강가에 임했네. 맑고 깨끗함이 침향(沈香) 아니라 경치는 하늘의 조화를 앗았네. 맑고 기이함이 산기슭에 비쳤는데, 모래 아득하고 구름과 안개가 둘렸네. 한 길이 대숲으로 들어가니, 오가는 차와 말도 적으며 연기 아득하니 호수가 맑고, 저자 머니 사람이 오지 아니하네. 달빛은 찬 물결에 잠겼는데, 풍광은 푸름 마름[藻]에 엉기네. 눈을 멀리 들어 긴 하늘 향하여 사면을 돌아보니, 푸른 산이 작아 보이네. 누가 망기(忘機)의 짝을 알랴. 스스로 이름하기를 망기로(忘機老)라네. 한가로이 망기 시를 읊조리다가 취하여 망기초(忘機草)에 누웠네. 망기한 사람이 아니면 어찌 망기함을 일찍 하겠는가.”하였다.
○ 교유(敎諭) 오가립(鄔可立)의 시에, “한 정자가 바다 동쪽 가에 그윽하게 있으니, 뭇 갈매기 날마다 나와 친해짐을 매우 기쁘게 여기네. 날아서 술자리에 떨쳐 도무지 피하지 아니하고, 물 난간에 다가드니 잘 길들인 것 같으이. 창파에 떠다니니 흰 털이 무거워짐을 아끼고, 푸른 풀밭에서 조니 눈[雪] 점이 새로움을 보겠네. 물건과 더불어 맹약을 맺으니 특히 탈속했구나. 이국(異國)엔들 어찌 사람이 없겠는가.”하였다.
○ 진사(進士) 진승(秦昇)의 시에, “은은한 외로운 정자 푸른 물 흐름을 대하니, 바다 갈매기는 나를 잊고 나는 그를 잊었네. 모래 개니 비낀 난간에 가까워서 편안히 졸고, 구름이 따뜻하니 항상 굽은 난간을 돌면서 노누나. 달이 잠길 때를 당함에 금 거울이 고요하고, 물결 일어나는 곳을 밟으매 옥 꽃이 뜨네. 호기 있게 노저어 타고 봄 연기 밖에 나가니, 몇 번이나 쌍쌍이 나는 갈매기 낚시 배와 친했던가.”하였다.
○ 회계(會稽) 진지(陳贄)의 시에, “본뜻은 한가함을 좋아하는데, 빛나는 정자를 강가에 임하여 지었네. 한가한 날 여기서 배회하니, 한가히 가슴이 트이네. 고운 놀은 물결 넘실거리고 넓은데, 맑은 물 흐름은 창을 둘렀네. 갈매기는 어디로부터 왔는지, 떼 지어 물가에 모이네. 훨훨 날개를 날리니, 눈같이 희고 희어 서리 같은 깃이 빛나네. 문득 산란하게 나니, 천 조각 배꽃이 춤추는 듯하네. 처마에 가까이 가끔 오가고, 물결에 목욕하며 임의로 노니네. 오리들과 유가 되지 아니하고 원추새와 해오라기[鵷鷺]와는 거의 짝이 될 만하겠네. 고상한 사람은 진실로 즐거워 이것을 보고 깊이 깨달음을 얻으리라. 피차가 둘다 기심을 잊으니, 서로 보매 섬세한 티끌도 없네. 기심이 조금이라도 싹트게 될 것 같으면 문득 날아가리라. 그러므로 군자의 마음은 물(物)과 더불어 항상 거스르지 않는다네.”하였다.
○ 호부 낭중(戶部郞中) 기순(祁順)의 시에, “산뜻한 초가집을 한강 동쪽에 지으니, 주인의 뜻 백구와 같네. 맹약(盟約)을 맺었으니 즐겨 모랫가의 짝 백구를 저버리랴. 생각을 바꾸다가 해옹(海翁)이 매우 부끄럽네. 들 나루에서 천 이랑 물결에 떴다 잠겼다 하고, 낚싯배에는 한 줄기 실바람이 살랑이네. 재상의 덕업이 앞시대 뒷시대에 빛나니, 정자의 이름만이 위공(魏公)에게 비할 뿐이 아니네.”하였다.
○ 신숙주(申叔舟)의 시에, “상당(上黨) 한후(韓侯)의 자는 자준(子濬)인데, 머리 땋은 소년 때부터 같이 놀며 서사(書史)를 읽었네. 장한 뜻 우뚝하여 구속받지 아니하며, 그윽함을 찾고 외롭게 놀다가 취미를 산수에 붙였네. 동중서(董仲舒)의 장막 10년에 경서(經書)를 안았는데, 푸른 적삼 미관(微官)이 될 말인가. 대장부 뜻을 두었으니 끝내 하고 말 것이니, 하루아침 초려(草廬)에 풍운이 일어나네. 융중(隆中)에 높이 누워 있을래야 할 수 없으니, 곤어ㆍ붕새[鯤鵬]의 변화함이 참으로 잠깐 사이일세. 손으로 해바퀴[日轂]를 떠받들어 하늘 운수 돌리니, 하늘을 돌리고 북두(北斗)를 굴림이 한 번 돌아보는 동안일세. 공훈과 이름 빛나고 빛나 한 몸에 있으니, 소하(蕭何)ㆍ장량(張良)ㆍ구순(寇恂)ㆍ등우(鄧禹)를 족히 헤아릴 것 없네. 고귀한 벼슬이 우연히 굴러 왔지 기약한 바 아닌데, 세월은 쉬 흘러 머물지 아니함이 괴롭네. 평생에 맑은 마음을 임천(林泉)에 붙여, 높은 정자를 지어 강가에 임했네. 마음 앎은 오직 흰 갈매기가 있을 뿐, 날고 울며 서로 따르니 한가지로 한가롭네. 옥 패물을 버리고, 난지(蘭芝)를 바늘로 꿰어 차니, 한 강의 연파(煙派)가 스스로 찰랑거리네. 공이 이루어지고 이름이 이루어지매 번화함이 싫어서, 아침 저녁 그윽한 생각 강에 있네. 훈업(勳業)은 비단 동쪽 나라에 있을 뿐 아니라, 성하고 아름다움이 스스로 천하에 퍼졌네. 중국의 유로(儒老)들이 다투어 붓을 휘둘러, 그대를 위하여 서술하고 칭도하였네. 세상 벼슬아치들은 공연히 떠들썩한데, 남아가 이 지경에 이르면 바야흐로 운운 하랴. 동방의 창생(蒼生)이 큰 비를 기다리는데, 어찌 능히 그대를 갈매기 떼에 두겠는가. 아, 갈매기야 서로 귀찮게 말아라. 성주(聖主)님의 융숭한 총애가 오직 그대에게 쏠렸네.”하였다.
○ 안지(安止)의 시에, “한공의 아담한 취미 청한(淸閑)한 것을 사랑하여, 매양 강 정자를 향하여 갔다왔다하기 좋아하네. 다만 고기 낚는 늙은이의 눈 같은 귀밑털을 드리운 것과 짝하는데, 즐겨 노래하는 기생들 구름 머리채를 어여삐 여기랴. 갈매기는 섬돌 밑 맑은 물에 길들었고, 소라[螺]같이 물가에는 점점(點點)한 산이 벌려 섰네. 사직의 특별한 공을 어찌 말하랴. 뜻대로 푸른 물굽이 굽어봄이 무방하리라.”하였다.
○ 성임(成任)의 시에, “해를 하늘에 받들어 팔도(八道)에 비치니, 공명은 드높이 기린각에 올랐네. 묘당(廟堂)에선 이미 경륜의 손을 펴고는, 도리어 갈매기를 짝하여 물가에서 희롱하네.”하였다.
○ “벼슬하는 틈에 조용히 대궐에서 물러나와 신세를 물가에 붙였네. 옆사람들이 부질없이 고기잡이와 나무꾼으로 보고, 당시 조정에 제일류(第一流)를 몰라 보네.”하였다.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압구정은 산 그윽한 곳에 있는데, 아래 맑은 강이 있어 만고에 흐르더라. 상공(相公)이 여가 날에 와 거닐어, 산에 오르고 물에 임하니 마음이 한가롭구나. 공명을 세상에 덮었으나 유후(留侯)를 봉함에 족하고, 부귀는 우연히 굴러 들어온 것이매 뜬구름과 같네. 몸이 한가하여 이에 빈 배를 띄웠는가 의심하고, 기심을 잊었으니 강변의 갈매기를 친압할 만하구나. 흰 갈매기 날아와 긴 물가에 희롱하니, 날개를 비비고 그림자를 희롱하며 울어 서로 화답하네. 가끔 놀라 일어나 강가를 지나니, 맞은 언덕 바람이 창랑(滄浪) 노래 보내네. 상공이 난간에 의지하여 흥을 걷잡지 못하니, 건곤 만리가 두 눈에 드는구나. 물에서 헤엄치고 구름 속에 나는 것이 각각 자유로우니, 강 위에 모든 물건이 시름없구나. 바람과 비는 때 맞추어 순조로우니, 남촌과 북촌에는 뽕과 삼이 풍년일세. 공(公)이 능히 이같은 태평한 아름다움을 이룩하였으니, 만년에 조용히 노는 기회 얻으셨네. 그대는 서린 용이 한 번 일어나면, 구주(九州)에 은택 줌을 보지 못하였는가. 삼농(三農)에 고무(鼓舞)되어 해가 풍년이 들었네. 돌아와서는 도리어 물고기와 짝하여, 여의주(如意珠)를 안고 깊은 한 못 속에 푹 잠드네.”하였다.
○ 이문형(李文炯)의 시에, “빛나는 정자 높이 한강 물가에 임하니, 성남(城南) 지척 사이에 홍진(紅塵)이 막혔구나. 목란주(木蘭舟)를 달밤에 띄우니 연기는 개울에 비끼고, 버드나무 술집에서 물고기를 잡는데 비는 나루터에 어둡네. 들 밖의 산 빛은 창[戟]을 벌여 놓은 듯, 난간 앞 물결 그림자는 사람을 흔드네. 나라를 편안하게 하는 대업을 역사에 전해 두고, 창주(滄洲)에 돌아와 흰 갈매기와 친하네.”하였다.
○ 최경지(崔敬止)의 시에, “임금이 하루에 세 번이나 은근히 불러 보아 총애가 흐뭇하니, 정자는 있으나 와서 놀 틈이 없구나. 가슴 가운데 기심만 끊어졌다면, 벼슬 바다 앞에서도 갈매기를 친압할 수 있으련만.”

【학교】 향교(鄕校) 서쪽 2리에 있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사문(斯文)이 떨어지지 아니하고 천년에 드리우니, 착하고 좋은 풍속이 응당 한 고을에서 많이 나오리라.”하였다.

【역원】 경안역(慶安驛) 남쪽 50리에 있다. 본도의 속역(屬驛)은 일곱인데, 덕풍(德豐)ㆍ양화(楊花)ㆍ신진(新津)ㆍ안평(安平)ㆍ아천(阿川)ㆍ오천(吾川)ㆍ유춘(留春)이다. ○ 역승(驛丞) 1인 . ○ 고려 공민왕(恭愍王)이 홍건적을 피하여 남으로 피난할 때 이 역에 이르렀다. 중랑장(中郞將) 임견미(林堅味)가 재추(宰樞)에게 말하기를, “적이 이미 서울에 들어왔다. 임진(臨津) 이북은 우리 소유가 아니니 제도의 군사를 징집하여 적을 치자.”하였다. 재추들이 응하지 아니하므로 곧 눈물을 흘리면서 임금에게 아뢰었더니, 임금이 말하기를, “갑작스러운 사이에 어떻게 하겠는가.”하고, 마침내 복주(福州)로 피하였다.
봉안역(奉安驛) 주 동쪽 30리에 있다. ○ 권근(權近)의 시에, “옛 역정(驛亭)이 무성한 나무 사이에 열렸는데, 느지막이 서늘할 때에 와 쉬니 몸이 편안함을 깨닫겠네. 산림(山林) 궁벽한 곳에 백성의 집이 적고, 주전(廚傳)이 드물 때에 아전의 일이 한가하네. 벼랑 길이 강을 굽어보니 누가 험한 길을 뚫었는가. 시내 흘러 돌에 부딪치니 스스로 찬 기운이 생기네. 내가 오매 대접한 것이 없었다 말하지 마오. 말이 푸른 꼴[靑蒭]에 배 불렀으니 오히려 염치 없소.”하였다.
낙생역(樂生驛) 주 남쪽 45리에 있다. 덕풍역(德豐驛) 주 북쪽 5리에 있다. 하진참(下津站) 주 서쪽 20리에 있다. 사평원(沙平院) 한강의 남쪽 기슭에 있다. ○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피로한 말이 걸음도 느린데 길은 험하고 길다. 안장을 부리고 애오라지 여기에 머무르리라. 왕래하는 말[騶]들 길에 가득차, 처음엔 시끄러움을 싫어했더니, 한 마리 학이 숲에서 울매 비로소 그윽함을 사랑하겠네. 만 길이나 높은 다리[飛橋]는 무지개가 꼬리를 둘렀고, 천 척 늘어선 배는 얼새[鷁] 머리를 나란히 하였네. 고인(故人)이 보이지 아니하니 슬픔이 더하다. 떨어지는 해 아득한데 누(樓)에 기대지 마오.”하였고, ○ “강 어귀에 돛을 내리고 머뭇거리기 한참, 맑은 물에 비춰보며 가만히 수염을 세어 보네. 풀이 언덕 가에 어우러져 겨우 학(鶴)이 숨을 만하고, 밀물이 강가에 오매 오리를 영접하듯 하네. 뱃사공은 앉아서 물이 깊고 얕음을 알고, 나루터 사람은 능히 바람이 있고 없음을 점치네. 급히 흰 비단을 찾아 그림을 그려야겠으니, 한 쌍 한가한 오리 쇠잔한 갈대 속에서 졸고 있네.”하였다.
판교원(板橋院) 주 남쪽 45리에 있다. 동양원(東陽院) 주 서쪽 50리에 있다. 말을천원(末乙川院) 주 남쪽 50리에 있다. 황교원(黃橋院) 주 동쪽 20리에 있다. 쌍령원(雙嶺院) 주 동쪽 50리에 있다. 금척원(金尺院) 주 동쪽 60리에 있다. 이부원(利夫院) 주 남쪽 30리에 있다. 봉헌원(鳳獻院) 주 서쪽 30리에 있다. 둔입원(芚入院) 주 서쪽 30리에 있다. 대야원(大也院) 주 남쪽 30리에 있다. 도미원(渡迷院) 도미천에 있다. 인덕원(仁德院) 주 서쪽 45리에 있다. 사근내원(沙斤乃院) 주 서쪽 55리에 있다. 정금원(鄭金院) 주 서쪽 25리에 있다. 광진원(廣津院) 광나루 북쪽 언덕에 있다.
【불우】 신복선사(神福禪寺) 이곡(李穀)이 지은 중영기(重營記)가 있다. 봉수사(奉水寺) 모두 한산에 있다. 수리사(修理寺) 수리산에 있다. 약정사(藥井寺) 한산에 있다. 백종사(百種寺) 주 북쪽 20리에 있다.
수종사(水鍾寺) 조곡산(早谷山)에 있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가을이 오매 경치가 구슬퍼지기 쉬운데, 묵은 밤비가 아침까지 계속하니 물이 언덕을 치네. 하계(下界)에서는 연기와 티끌을 피할 곳이 없건만, 절의 누각은 하늘과 가지런하네. 흰 구름은 자욱한데 뉘게 줄거나. 누런 잎이 휘날리니 길이 아득하네. 내 동원(東院)에 가서 참선(參禪) 이야기하려 하니, 밝은 달밤에 괴이한 새 울게 하지 말라.”하였다. ○ “용진강(龍津江) 위 옛 절을 찾으니, 구불구불 돌길이 푸른 삼(杉)나무 숲으로 들어갔네. 옛날 자주 사영운(謝靈運)의 지난 일이 생각되고 지금 원공(遠公 혜원(惠遠)) 말을 못 들은 지 오래로세. 시냇가에서 바릿대[鉢]에 주문(呪文) 외우니 용이 응당 엎드릴 것이요, 돌 위에서 불경을 설(說)하니 호랑이 또한 참여하여 듣네. 흰 버선과 푸른 짚신 신고 내 또한 있으니 서로 만나 한 번 호계(虎溪) 남쪽에서 웃어보세.”하였다. 백중사(伯仲寺) 일명 암사(巖寺)이며, 하진참(下津站) 동쪽에 있다. ○ 서거정의 시에, “절간이 푸른 벼랑에 걸쳐 있으니, 어느 날 금을 펴고 지었는고. 낙엽은 쓰는 사람이 없는데, 빈 집에 오는 손이 있네. 산 형세는 물에 다달아 끊겼는데, 물 구비는 산에 부딪쳐 돌아 흐르네. 앉아서 고승(高僧)과 같이 말을 주고 받으니, 마음이 스스로 티끌이 없어지네.”하였다. 봉은사(奉恩寺) 저도(楮島) 남쪽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주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능묘】 헌릉(獻陵) 주 서쪽 30리 대모산(大母山) 남쪽에 있다. 태종 공정대왕(太宗恭定大王)의 능인데, 원경왕후(元敬王后)를 부장(附葬)하였다.
○ 변계량(卞季良)의 비명(碑銘)에, “하늘이 장차 큰 책임을 덕 있는 사람에게 내리려 함에 반드시 성자(聖子)와 신손(神孫)을 낳아서 큰 운수를 열고 넓은 복을 길게 누리게 한 것이다. 우리 조선 태조 강헌대왕(太祖康獻大王)이 일어나시매 우리 태종으로서 아들을 삼고, 우리 전하(殿下 세종(世宗))로서 손자를 삼으시니, 아, 성하도다. 어찌 인위(人爲)로 능히 된 것이겠는가. 하늘이 하심이다. 그 상(商) 나라에 현성(顯聖)의 임금이 계속하여 일어남과 주(周) 나라에 태왕(大王) 왕계(王季), 문왕ㆍ무왕이 서로 이어 받음과 무엇이 다름이 있겠는가. 신(臣)이 삼가 상고하건대 선원(璿源) 이씨는 전주의 드러난 성이니 사공(司空) 휘 한(翰)은 신라에 벼슬하여 종성(宗姓)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6세(世)만에 휘 긍휴(兢休)에 이르러 비로소 고려에 벼슬하였습니다. 13세에 태조의 고조부 목왕(穆王)에 이르러 원 나라에 들어가 벼슬하여 천부장(千夫長)이 되어, 4대를 내리 습작(襲爵)하여 모두 아름다운 업적을 계승하였다. 원 나라가 이미 쇠하자 할아버지 환왕(桓王)께서 돌아와 고려의 공민왕(恭愍王)을 섬기었으니, 공을 쌓고 인(仁)을 쌓았음이 그 유래가 오래였다. 우리 신의 왕태후(神懿王太后)께서 지정(至正) 정미(丁未) 5월 신묘(辛卯)에 태종을 함흥부 후주(厚州) 사제(私第)에서 낳으시니, 우리 태조의 다섯째 아드님이시다. 나면서부터 신이(神異)하셨고, 점점 자라매 영특하고 지혜로움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셨다. 글 읽기를 좋아하셔서 공부가 날로 진보되어 나이 아직 20이 못 되어 고려의 과거에 합격하셨다. 이때에 정사는 문란하여 민심이 이반(離叛)됨에 나라 형세가 위태로웠으므로 개연히 세상 건질 뜻을 두니 태조께서 사랑하시기를 여러 아들과 달리 하셨다. 일찍이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시중(侍中) 이색(李穡)과 함께 명 나라 서울에 입조(入朝)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밀직사 대언(密直司代言)에 이르렀다. 명 나라 태조 홍무 신미(辛未) 9월에 신의왕후께서 돌아가시매 제릉(齊陵) 옆에 여막을 지어 3년상을 마치고자 하셨는데, 임신년 봄에 태조께서 서쪽으로 가셨다가 병을 얻어 돌아오시니, 와서 시병(侍病)하셨다. 공양왕의 신하 정몽주(鄭夢周) 등이 틈을 타 태조를 모함하여 사세가 매우 급하였는데, 태종께서 사기(事機)에 응하여 변고를 처리하여 그들의 괴수를 제거하니 그들의 모략이 깨어졌다. 가을 7월에 여러 장수와 재상과 더불어 대의(大義)를 주창하여 태조를 추대해서 집을 나라로 만드시고, 정안군(靖安君)에 봉해 지셨다. 갑술년 여름에 명 나라 고황제(高皇帝)께서 친 아들을 보내 입조(入朝)하라고 명하니, 태조께서 우리 태종이 경서(經書)에 통하고 예에 숙달하여 여러 아들 가운데서 가장 어질다 하시어 곧 파견하여 황제의 명에 응하였다. 이미 명 나라에 이르자 아뢰는 것이 황제의 뜻에 맞아 특별한 대접을 받고 돌아오시었다. 무인년 가을 8월에 태조께서 병이 나으시매, 권신(權臣)이 붕당을 모아 어린이[芳碩]를 끼고 정권을 잡아 제 뜻대로 함부로 하려는 자가 있어 화(禍)가 곧 절박하였다. 태종께서 기미를 밝게 보시어 섬멸 제거하셨다. 이때에 종친과 장상들이 모두 우리 태종을 책봉하여 세자로 삼기를 청하였으나 태종께서 굳이 사양하고, 공정 대왕(恭靖大王 정종(定宗))을 추천하여 태조께 청하고 세자로 책봉하여 종사(宗社)를 안정시켰다. 9월 정축일에 태조께서 병이 낫지 아니하시므로 공정대왕에게 전위(傳位)하시었다. 건문(建文) 경진년 정월에 역신(逆臣) 박포(朴苞)가 가만히 방간(芳幹)의 부자를 꾀어 동기를 해치려고 꾀하고,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일으키매 태종께서 군사를 거느리고 난을 평정하여, 박포는 베고 나머지는 모두 놓아 주었으며 방간은 안치(安置)하여 형제의 정의를 폐하지 아니하셨다. 공정대왕께서 후사(後嗣)가 없으시고 또 나라를 창업하고 사직을 안정함이 모두 우리 태종의 공적이라 하시어 책봉하여 세자로 삼으셨다. 겨울 11월에 또한 병으로 말미암아 우리 태종에게 전위하고 명 나라에 사신을 보내 책명(策命)을 청하니, 다음 해 신사년 6월에 건문제(建文帝)가 통정시승(通政侍丞) 장근(章謹) 등을 번갈아 보내어 고명(誥命)과 인장(印章)을 받들고 와서 우리 태종을 봉하여 왕을 삼았다. 겨울에 홍로시 행인(鴻臚寺行人) 반문규(潘文奎)를 보내와 면복(冕服)을 주고 품질(品秩)을 친왕(親王)에 준하였다. 임오년에 지금 황제께서 즉위하시매 태종께서 좌정승 신(臣) 하륜(河崙)을 보내 등극을 하례하니, 황제는 충성을 아름답게 여겨서 다음 해 계미년 4월에 고명(誥命)과 인장을 주셨다. 도지휘사(都指揮使) 고득(高得) 등을 보내와 그대로 왕에 봉하였다. 가을에 한림대조(翰林待詔) 왕연령(王延齡)을 보내어 곤룡포ㆍ면류관ㆍ구장(九章)과 금단(錦段)ㆍ사라(沙羅)ㆍ서적(書籍)을 주고, 태조께는 금단ㆍ사라를, 원경 왕태후께는 관(冠)ㆍ포(袍)와 금단ㆍ사라를 각각 차등 있게 주었다. 이때부터 그 뒤로는 황제께서 물건을 내림이 거듭되어 비는 해가 없었다. 을유년에 한양(漢陽)은 태조께서 도읍하셨던 곳이라 하여 여러 신하의 의논을 물리치고 한양으로 돌아왔다. 정해년에 황제께서 하정사(賀正使)로 입조(入朝)한 사신에게 이르기를, ‘조선국왕은 지성으로 대국을 섬긴다.’ 하였다. 이뒤부터 사신이 갈 때마다 매양 지성이라고 칭찬하였다. 무자년 5월에 태조께서 돌아가시니 슬퍼하시고 사모함이 망극(罔極)하셨고, 거상(居喪)을 하고 상사와 장사를 예로써 하셨다.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부고를 고하니 황제가 슬퍼하여 조회(朝會)를 철폐하시고 예부 낭중(禮部郞中) 임관(林觀) 등을 보내어 태뢰(大牢)의 제사를 내리고, 시호를 강헌(康獻)이라 하고 또 태종에게 칙서(勅書)를 내려 후한 부의(賻儀)를 주셨다. 임진년 겨울에 고려 왕씨의 후예로서 민간에 숨어 있는 자가 있어 어떤 사람이 조정에 아뢰어 죽이기를 청하니 태종께서 말씀하시기를, ‘제왕의 일어남은 스스로 천명이 있는 것이다. 당초에 왕씨의 후손을 죽인 것은 우리 태조의 본 뜻이 아니다.'하시고, 이에 하교(下敎)하여, ‘왕씨의 후예로 생존한 사람은 그들로 하여금 각각 생업에 편안하게 하라.’ 하셨다. 갑오년 6월 일(日)에 감로(甘露)가 함흥부 월광(月光) 구미리(仇未里) 및 정평(定平)의 백운산에 내렸다. 다음 해 을미년 4월에 감로가 또 함흥부 덕산동에 내리니, 우리 동방에 전에는 있지 않았던 일이라 정부에서 모두 전(箋)을 올려 하례하였으나 받지 아니하셨다. 무술년 6월에 세자 지(禔)가 덕이 없으므로 폐하고 양녕대군으로 봉하고, 우리 전하가 총명하고 효제(孝悌)하며 학문을 좋아하여 게으름이 없으며, 나라 사람들이 촉망하므로 책봉하여 황제께 아뢰니 황제가 허락하셨다. 이해 8월에 우리 전하에게 선위하시고 명 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명(誥命)을 청하였다. 11월에 우리 전하께서 책보(冊寶)를 받들어 존호(尊號)를 올리어 성덕신공상왕(聖德神功上王)이라 하였다. 다음 해 정월에 황제가 홍로시 승(鴻臚寺丞) 유천(兪泉) 등을 보내어 고명을 받들고 와서 우리 전하를 봉하여 왕으로 삼았다. 5월에 대마도(對馬島)의 왜(倭)가 국경을 침범하여 군사를 죽이고 약탈하매 영의정 신(臣) 유정현(柳廷顯) 및 장천군(長川君) 신 이종무(李從茂) 등에게 명하여 해군으로서 가서 치게 하니, 섬 왜인들이 복종하여 전과 같았다. 8월에 황제께서 사신을 보내어 잔치를 내리니, 칙서에 대략 이르기를, ‘왕의 지성이 두터워 공경히 조정을 섬기고, 한 덕과 한 마음이 끝까지 게으르지 아니하매, 능히 어진 이를 가리어 덕 있는 이를 명하여 종사(宗社)로 하여금 의탁 할 곳이 있게 함으로써 나라 사람의 바람에 맞게 하였도다.’ 하고, 또 우리 전하에게 잔치를 내리셨다. 칙서에 대략 이르기를, ‘네 아버지가 도탑고 후하고 노성(老成)하여 천도(天道)를 공경하더니, 충성스럽고 순한 정성이 오래 갈수록 변하지 않는다.’ 하였다. 9월에 공정왕이 세상을 떠나매 참최(斬衰)의 복을 입어 역월(易月)의 복제를 마치었다. 사신을 보내어 보고하니, 다음 해 4월에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시호를 공정(恭靖)이라 내렸다. 이해 봄에 우리 전하께서 뭇 신하를 거느리고, 태상왕의 호를 올리려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셨다. 가을 7월에 원경왕태후께서 돌아가시매 우리 전하가 슬퍼하심이 예(禮)에 지나치므로 명하여 역월의 복제를 따르도록 하였으나, 전하께서 울며 굳이 사양하시매, 이에 장사 뒤에 복을 벗고 백의(白衣)로 상기(喪期)를 마치도록 하셨다. 9월 임오에 태후를 광주(廣州) 고을의 대모산(大母山)에 장사지내고, 헌릉(獻陵)이라 하였다. 신축년 가을 9월에 우리 전하께서 책보(冊寶)를 받들어 태상왕의 호를 올리고, 10월에 태종에게 품하여 원자(元子 문종)를 책봉하여 세자로 삼았다. 태종께서는 세상에 흔히 나지 않는 자질로서 학문을 쌓으시어 효제(孝弟)는 신명(神明)에 통하고, 정성과 공경은 종묘 사직에 감동되었다. 대국을 섬기매 천자는 그 지성을 일컬었고, 이웃나라를 사귀매 왜국은 그 도덕에 복종하였다.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생각하여 검소를 숭상하고 씀씀이를 절약하였으며 덕과 예(禮)를 먼저하고, 형벌을 삼가고 충성스럽고 정직한 사람을 등용하셨다. 간사한 사람을 내치고 이단(異端)을 물리치고 음사(淫祀)를 금지시키며, 고금을 참작하여 제도를 정하고, 문교(文敎)를 밝히며 무비(武備)를 엄하게 하여 쌓였던 폐단이 모두 개혁되어 모든 업적이 빛나, 온 나라가 안정되어 백성은 편안하고 물질이 풍부하니 제왕의 도(道)가 성하였다. 상제(上帝)의 돌보심이 융숭함을 받아 두 번이나 감로가 내리는 최상의 상서(祥瑞)를 얻음이 마땅하도다. 임인년 4월에 처음으로 병이 드시어 다음 달 5월 병인(丙寅)에 이궁(離宮)에서 돌아가시었다. 우리 전하께서 애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사흘 동안 음식을 폐하시니, 군신이 울면서 음식 드시기를 청하였으나 끝내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3년의 상복으로 정하여 역월(易月)의 복제를 쓰지 아니하셨다. 태종의 나이 56세였는데 왕위에 19년 동안 계시었고, 한가히 계신 지 5년 만에 문득 돌아가셨다. 대소의 신하들과 아래로 노예(奴隸)에 이르기까지 소리 내어 울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고, 날이 갈수록 더욱 슬퍼하여 부모를 여윈 것같이 하였으니 아, 슬프다. 이해 9월 초2일 병진(丙辰)에 존호를 올려 성덕신공문무광효 대왕(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이라 하고, 묘호(廟號)를 태종이라 하였다. 초6일 경신(庚申)에 원경 왕태후의 능에 합장하니 유명(遺命)이었다. 명 나라에 부고를 보내매 황제는 애통하여 조회를 철폐하고, 예부 낭중 양선(楊善) 등을 보내어 제사를 내리니, 그 글에 대략 이르기를, ‘왕은 뜻이 돈후하고 지성스럽고 총명하고 현달(賢達)하여, 조정을 공경히 섬기어, 충성스럽고 순종하는 마음이 종시 바뀌지 아니하더니, 부고가 멀리서 들림에 진실로 깊이 슬픔을 느끼노라.’ 하였고, 또 고명(誥命)을 주어 시호를 공정(恭定)이라 하였으며, 또 전하에게 부의를 후히 내리셨다. 대저 우리 태종의 성한 공덕과 우리 전하의 지극한 효성이 앞뒤에 서로 이어 능히 황제의 마음을 맞춘 까닭으로 종시(終始)하는 즈음에 있어 특별한 은전(恩典)이 이와 같이 갖추어 지극한 것이다. 중궁(中宮) 원경왕태후의 성은 민씨니 여흥(驪興)의 대대로 이름난 집이시다. 고려 문하시랑 평장사 문경공 휘 영모(令謨)로부터 6세 만에 고조 휘 종유(宗儒)에 이르러 의릉(毅陵)을 도와 도첨의시랑 찬성사(都僉議侍郞贊成事)에 이르고, 시호를 충순(忠順)이라 하였다. 충순이 증조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시호 문순(文順) 휘(諱) 적(頔)을 낳고, 문순이 조부 대광 여흥군(大匡驪興君) 휘 변(抃)을 낳고, 대광이 아버지 순충동덕찬화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여흥부원군 수문전대제학 영예문춘추관사(純忠同德贊化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驪興府院君修文殿大提學領藝文春秋館事) 시호 문도(文度) 휘 제(霽)를 낳았다. 어머니 송씨는 삼한국 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봉했으니, 고려 중대광 여량군(重大匡礪良君) 휘 선(璿)의 따님이시다. 착함을 쌓아 경사가 나매 이에 숙덕(淑德)을 낳으니 총명이 보통과 다르셨다. 배우자를 가리어 우리 태종에게 시집오셨다. 태종께서 젊었을 때부터 세상을 건질 뜻을 두시어 경사(經史)에 유의하시고, 가산(家産)을 일삼지 아니하셨다. 태후께서는 치가(治家)하심이 검소하고, 부엌 일을 삼가시고 여공에 힘쓰셨으며, 많은 아들을 가르쳐 의방(義方)에 순종하게 하셨고, 첩과 시녀들을 예로 대접하여 부도(婦道)를 극진히 하셨다. 홍무(洪武) 임신년 정녕옹주(靖寧翁主)에 봉하고, 무인년에 태종께서 정사(定社)할 때에 사세가 매우 외롭고 위태로웠는데 태후께서 마음을 다하여 도와 큰 일을 치렀다. 경진년 봄에 정빈(貞嬪)에 봉하고, 그해 겨울에 태종께서 즉위하시자 정비(靜妃)에 봉해지셨다. 영락(永樂) 계미년에 황제가 관포(冠袍)를 하사하였다. 이해로부터 정유년에 이르기까지 황제의 하사를 다섯 번이나 받았다. 무술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존호를 올리어 후덕대왕비(厚德大王妃)라 하였고, 경자년 9월에 시호를 올려 원경왕태후라 하였으니, 춘추가 56세이셨다. 태후께서 정숙한 덕을 타고 나서 능히 태종에 짝하시어 내치(內治)를 오로지하기 20년 동안에 부도(婦道)가 엄숙하고 공경하여 또 성자(聖子)를 낳으시매 종묘와 사직에 주인이 되게 하심으로써 영화로운 봉양을 누리셨다. 돌아가시기에 미쳐 빈첩(嬪妾)과 시녀들이 마음을 다하여 슬퍼하고 아파하지 아니한 이가 없었다. 부인으로서의 법도와 어머니로서의 거동이 지극하심이로다. 네 아들과 네 딸을 낳으셨으니 우리 전하께서는 셋째이시다. 장남은 지(禔)요, 차남은 보(補)이니 효령대군에 봉하고, 그 다음은 종(種)으로 성녕대군(誠寧大君)에 봉하였다가 먼저 죽었다. 맏딸은 정순공주(貞順公主)로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 이백강(李伯剛)에게 하가(下嫁)하니 본관이 같은 이씨가 아니다. 다음은 경정공주(慶貞公主)이니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조대림(趙大臨)에게 하가하였고, 다음은 경안공주(慶安公主)이니 길창군(吉昌君) 권규(權跬)에게 하가하였다가 먼저 죽고, 다음은 정선공주(貞善公主)이니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에게 하가하였다. 의빈 권씨(懿嬪權氏)가 딸 하나를 낳으니 정혜옹주인데, 운성군(雲城君) 박종우(朴從愚)에게 시집갔고, 소혜궁주(昭惠宮主) 노씨가 딸 하나를 낳았으니 아직 어리다. 신녕궁주(信寧宮主) 신씨가 3남 7녀를 낳았으니 장남 인(裀)은 공녕군(恭寧君)에 봉하고,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장녀 정신옹주(貞信翁主)는 영평군(鈴平君) 윤계동(尹季童)에게 시집가고, 다음 정정옹주(貞靜翁主)는 한원군(漢原君) 조선(趙璿)에게 시집가고, 다음 숙정옹주(淑貞翁主)는 일성군(日城君) 정효전(鄭孝全)에게 시집가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궁인 안씨(宮人安氏)가 1남 3녀를 낳았으니 모두 어리고, 김씨가 1남을 낳았으니 비(裶)요, 경녕군(敬寧君)에 봉하였다. 고씨(高氏)가 1남을 낳고, 최씨(崔氏)가 1남 1녀를 낳고, 이씨(李氏)가 1남을 낳고, 김씨(金氏)가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우리 중궁 공비(恭妃) 심씨(沈氏)께서는 문하시중 휘 덕부(德符)의 넷째 아들 온(溫)의 따님으로 4남 2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곧 세자(世子)이시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양녕대군은 김한로(金漢老)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효령대군은 전(前) 판중군 도총제 부사(判中軍都總制府事) 정이(鄭易)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성녕대군은 전 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 성억(成抑)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자식이 없다. 정순공주는 1녀를 낳았으니 용양시위사 호군(龍驤侍衛司護軍) 이계린(李季疄)에게 시집갔는데 본관이 같은 이씨가 아니다. 경정공주는 4녀를 낳았으니 장녀는 돈녕부 승(敦寧府丞) 안진(安進)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유학(幼學) 김중엄(金仲淹)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어리다. 경안공주는 2남을 낳았으니 맏은 담(聃)으로 한성 소윤(漢城少尹) 정연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다음은 어리다. 정선공주는 2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경녕군은 호조 참의(戶曹參議) 김관(金讙)의 딸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고, 공녕군은 병조 참판(兵曹參判) 최사강(崔士康)의 딸에게 장가들어 두 딸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신(臣)이 그윽히 보옵건대, 우리 태종의 성한 덕과 높은 공이 진실로 이미 백왕(百王)의 위에 높이 뛰어나시고, 배필의 어지심으로 내조(內助)의 공이 또 촉도(蜀塗 고양씨의 어머니)ㆍ신지(莘摯 무왕의 어머니 태사씨(太姒氏)를 말함)로 더불어 사실이 서로 맞고 아름다움이 같았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능의 신도비(神道碑)에 명(銘)을 새기어 영세(永世)에 밝게 보일 것을 원하므로, 전하께서 신 계량(季良)에게 명하시니, 신 계량이 명을 받자와 조심스럽고 떨리어 감히 사양하지 못하옵고, 삼가 머리 조아려 절하며 다음과 같이 명(銘)을 올립니다. ‘하늘이 해동(海東)을 돌보시와 우리 태종을 내리시니, 덕을 부지런히 하신 태종은 성덕(聖德)이 몸에 있으시고 성부(聖父)를 추대하여 능히 큰 공을 이루시네. 이에 황제의 뜰에 조회(朝會) 가서 아뢰기를 조용히 하셨고, 황제의 은혜를 두터이 입으시어 우리 백성을 보호하시네. 시기[炳幾]를 밝게 보아 난을 평정하시어 적장(嫡長 정종(定宗))을 높이시니, 비록 혁장(鬩墻)을 만났으나 우애가 두터우셨네. 효제(孝悌)의 지극함은 예로부터 드물게 들은 바이로다. 오직 덕이 두텁고 오직 공(功)에 힘쓰시어 하늘의 내려 보심이 매우 밝으시고 거듭 황제를 보우(保佑)하셨네. 빛나는 금보(金寶)가 전후에 비쳤으니 황제의 고명(誥命)이 거듭 이르매 내가 이에 은혜로 받았네. 할아버지(태조)의 유명(遺命)을 따라서 한수 북쪽 서울로 돌아오셨네. 예와 악(樂)을 제작함에 찬란히 빛나도다. 상사를 당하여 여막에 계심에 애모(哀慕)함이 망극하셨네. 장사지내고 제사지냄에 옛 예법대로 따르셨고, 공경히 명나라 조정을 섬김에 황제가 지성이라 일컬었네. 엄숙하게 제사를 받들매 신명(神明)에 감동하셨고, 이웃을 사귐에 도가 있으니 왜국이 조회하려 왔었네. 왕씨의 후예를 가엾게 생각하여 그들을 살도록 하셨도다. 중외가 다스려져 편안함에 억천년을 드리우리. 흐뭇한 감로(甘露)는 해마다 함흥부에 내렸네. 어두운 양녕대군을 폐하고 덕 있는 세종(世宗)을 명하사 백성의 주인을 삼았네. 오랜 수(壽)를 누리시어 이 땅에 아버지로 임하시기를 바랐더니, 어찌 하늘로 올라가심을 재촉하여 한 번 든 병환이 낫지 아니하셨는가. 슬프다, 성자(聖子)는 아프고 슬픔이 비할 데 없으시어 삼일 동안 음식을 철폐하시니, 지쳐서 상함을 이기지 못하시어 범백(凡百) 상사에 오직 예를 따르셨네. 황제께서 듣고 슬퍼하시어 사신을 보내 제사하고, 시호를 주어 포장하여 높이고 부의를 융숭하게 내리셨네. 은전(恩典)이 갖추어졌으매 기쁨이 신하들에게 넘치었네. 어지신 태후께서는 진실로 엄숙하고 화하셨도다. 가만히 정사(定社)함을 도우시어 능히 큰 성군(聖君)에게 짝이 되셨네. 성철(聖哲)을 나으시므로 하여금 종묘(宗廟)의 제사를 주장하게 하셨네. 건(乾)의 건장하고 이(離)의 밝음은 공정대왕의 덕이 좋고, 곤(坤)의 후하고 유(柔)하고 정(貞)함은 원경왕태후의 법도로다. 금슬로서 벗하시다가 장사도 한곳에 하셨네. 자손이 많으시니, 아, 기린(麒麟)이로라. 길이 이어 가는 종사(宗祀)는 억만 년을 드리우리다. 신이 절하고 글을 올려 좋은 돌에 새기오니 만대에 닳지 아니하여 우리 동방에 비치리다.’ 하였다.”했다.
○ 윤회(尹淮)의 비음기(碑陰記)에, “공손히 생각건대 우리 태종대왕께서 성스러운 덕과 신공(神功)이 뚜렷하여 전고(前古)보다 높았도다. 춘추 아직 많지 아니하실 적에 자리를 성자에게 전해주시고, 바야흐로 한가함을 얻으시어 영화로운 봉양을 누리시다가 갑자기 돌아가시니, 우리 전하께서 슬퍼하시고 상하심이 예법대로 다하셨나이다. 다음 5월에 원경왕태후의 헌능에 합장하시니 유명(遺命)을 따름이다. 능은 광주(廣州) 치소(治所)의 서쪽 대모봉(大母峯) 밑 건해좌(乾亥坐)의 산에 있는데 건좌손향(乾坐巽向)이다. 북으로 서울과의 거리는 30리쯤 된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 산은 장백산(長白山)으로부터 내려오다가 남쪽으로 수천 리를 넘어 상주(尙州)의 속리산(俗離山)에 이르고, 여기서 꺾여 서북으로 또 수백 리를 달려 과천(果川)의 청계산(淸溪山)에 이르고, 또 꺾여 동북으로 달려 한강을 등지고 멈추었는데 이것이 대모산이다. 땅의 영기(靈氣)가 멈추어 솟아 맑은 기운이 꿈틀거리니 아, 하늘이 만들고 땅이 간직하여 능(陵)의 길조(吉兆)로 기다림인가. 전하께서 능의 손방(巽方) 63보에 나아가 큰 비를 세워서 덕의 아름다움을 기록하여 빛을 이제와 오는 세대에 드리우라 명하시고, 또 개국 좌명 정사공신(開國佐命定社功臣)들의 이름을 차례로 비 뒤에 새기도록 명하시었다. 신이 그윽히 생각건대, 자고로 제왕(帝王)이 일어남에 반드시 세상에 이름난 신하가 있어 때에 응하여 나서 대업(大業)을 도와서 이루었습니다. 이에 종명이정(鐘銘彝鼎)에 공을 기록하는 법이 있는 것이니 썩지 않을 공을 보여 영구히 전하는 바입니다. 우리 조정이 임신년에 창업됨과 무인년과 경진년의 내란을 평정함을 얻은 것은 실로 하늘이 태종을 열어준 바가 된 것이요, 그러므로서 조선 억만년 무궁한 복조의 기초를 잡은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또한 장상(將相)들이 몸을 잊고 명을 바쳐 보좌한 것이 많았습니다. 이것을 마땅히 비석에 새겨 영세에 보여서 뒤에 보는 사람이 오히려 능히 우리 전하께서 선대의 빛나는 공을 현양(顯揚)하고 원훈(元勳)을 포장(褒獎)하신 지극한 뜻을 알게 할 것입니다.
개국공신(開國功臣) 익안대군(益安大君) 방의(芳毅)ㆍ문하시중(門下侍中) 배극렴(裵克廉)ㆍ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조준(趙浚)ㆍ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사형(金士衡)ㆍ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ㆍ의안대군(義安大君) 화(和)ㆍ계림군(鷄林君) 정희계(鄭熙啓)ㆍ청해군(靑海君) 이지란(李之蘭)ㆍ의성군(宜城君) 남은(南誾)ㆍ화산군(花山君) 장사길(張思吉)ㆍ서원군(西原君) 정총(鄭摠)ㆍ한산군(漢山君) 조인옥(趙仁沃)ㆍ의녕군(宜寧君) 남재(南在)ㆍ청성군(淸城君) 정탁(鄭擢)ㆍ익화군(益和君) 김인찬(金仁贊)ㆍ파평군(坡平君) 윤호(尹虎)ㆍ상산군(商山君) 이민도(李敏道)ㆍ호조전서(戶曹典書) 조영규(趙英圭)ㆍ부흥군(復興君) 조반(趙胖)ㆍ한천부원군(漢川府院君) 조온(趙溫)ㆍ남양군(南陽君) 홍길민(洪吉旼)ㆍ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 유창(劉敞)ㆍ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 조견(趙狷)ㆍ평해군(平海君) 황희석(黃希碩)ㆍ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 안경공(安景恭)ㆍ계림군(鷄林君) 김균(金稛)ㆍ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유원정(柳爰廷)ㆍ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 이직(李稷)ㆍ영성부원군(寧城府院君) 오사충(吳思忠)ㆍ안평부원군(安平府院君) 이서(李舒)ㆍ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 조영무(趙英茂)ㆍ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 이백유(李伯由)ㆍ흥원군(興原君) 이부(李敷)ㆍ연성군(延城君) 김노(金輅)ㆍ고성군(高城君) 고려(高呂)ㆍ동원군(東原君) 함부림(咸傅霖)ㆍ서원군(西原君) 한상경(韓尙敬)ㆍ상호군(上護軍) 한충(韓忠)ㆍ여천부원군(驪川府院君) 민여익(閔汝翼)
정사공신(定社功臣) 의안대군(義安大君) 화(和)ㆍ익안대군(益安大君) 방의(芳毅)ㆍ상당군(上黨君) 이저(李佇)ㆍ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조준(趙浚)ㆍ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사형(金士衡)ㆍ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 하륜(河崙)ㆍ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 조영무(趙英茂)ㆍ완원부원군(完原府院君) 이양우(李良祐)ㆍ봉녕부원군(奉寧府院君) 복근(福根)ㆍ청해군(靑海君) 이지란(李之蘭)ㆍ화산군(花山君) 장사길(張思吉)ㆍ한천부원군(漢川府院君) 조온(趙溫)ㆍ연성군(延城君) 김노(金輅)ㆍ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정탁(鄭擢)ㆍ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 이천우(李天祐)ㆍ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장철(張哲)ㆍ취산부원군(鷲山府院君) 신극례(辛克禮)
좌명공신(佐命功臣) 상당군(上黨君) 이저(李佇)ㆍ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 하윤(河崙)ㆍ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 조영무(趙英茂)ㆍ취산부원군(鷲山府院君) 신극례(辛克禮)ㆍ계성군(鷄城君) 이내(李來)ㆍ의안대군(義安大君) 화(和)ㆍ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 이천우(李天祐)ㆍ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성석린(成石璘)ㆍ완천군(完川君) 이숙(李淑)ㆍ청해군(靑海君) 이지란(李之蘭)ㆍ칠성군(漆城君) 윤저(尹抵)ㆍ의성군(義城君) 김영렬(金英烈)ㆍ파평군(坡平君) 윤곤(尹坤)ㆍ금천군(錦川君) 박은(朴訔)ㆍ평양군(平陽君) 박석명(朴錫命)ㆍ장흥부원군(長興府院君) 마천목(馬天牧)ㆍ한천부원군(漢川府院君) 조온(趙溫)ㆍ길창군(吉昌君) 권근(權近)ㆍ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이원(李原)ㆍ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 이직(李稷)ㆍ문성부원군(文城府院君) 유양(柳亮)ㆍ한평부원군(漢平府院君) 조연(趙涓)ㆍ평양부원군(平陽府院君) 김승주(金承霔)ㆍ마성군(麻城君) 서익(徐益)ㆍ남양군(南陽君) 홍서(洪恕)ㆍ칠원군(漆原君) 윤자당(尹子當)ㆍ계림군(鷄林君) 이승상(李升商)ㆍ연성군(蓮城君) 김정경(金定卿)ㆍ이성군(利城君) 서유(徐愈)ㆍ장천부원군(長川府院君) 이종무(李從茂)ㆍ영양군(永陽君) 이응(李膺)ㆍ풍산군(豐山君) 심구령(沈龜齡)ㆍ곡산군(谷山君) 연사종(延嗣宗)ㆍ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 한규(韓珪)ㆍ희천군(熙川君) 김우(金宇)ㆍ월천군(越川君) 문빈(文彬)ㆍ여산부원군(礪山府院君) 송거신(宋居信)ㆍ증 동지중추원사(贈同知中樞院事) 김덕생(金德生)” 하였다.

선릉(宣陵) 주 서쪽 30리 학당동(學堂洞)에 있다. 성종 대왕(成宗大王)의 능이다. 평원대군 (平原大君) 묘(墓) 주 남쪽 18리에 있다. 한확(韓確) 묘(墓) 주 동쪽 30리에 있다. 임영대군(臨瀛大君) 묘(墓) 주 남쪽 60리에 있다. 광평대군(廣平大君) 묘(墓)ㆍ영순군(永順君) 묘(墓) 모두 주 서쪽 25리에 있다. 이원(李原) 묘(墓) 주 서쪽 30리에 있다. 구치관(具致寬) 묘(墓) 주 동쪽 60리에 있는데, 서거정이 비명을 지었다. 최항(崔恒) 묘(墓) 주 동쪽 20리에 있는데 서거정이 비명을 지었다. 박은(朴訔) 묘(墓) 주 북쪽 23리에 있다. 이극배(李克培) 묘(墓) 주 북쪽15리에 있다. 밀성군(密城君) 묘(墓) 주 서쪽 7리에 있다. 서거정(徐居正) 묘(墓) 주 서쪽 13리에 있다. 정창손(鄭昌孫) 묘(墓) 주 서쪽 14리에 있다. 오사충(吳思忠) 묘(墓) 주 북쪽 11리에 있다. 권진(權軫) 묘(墓) 주 동쪽 20리에 있다. 맹사성(孟思誠) 묘(墓) 주 남쪽 30리에 있다. 유창(劉敞) 묘(墓) 주 북쪽 10리에 있다. 이극증(李克增) 묘(墓) 주 남쪽 40리에 있다. 정난종(鄭蘭宗) 묘(墓) 주 남쪽 70리에 있다. 함부림(咸傅霖) 묘(墓) 주 서쪽 12리에 있다. 김승주(金承霔) 묘(墓) 주 동쪽 30리에 있다. 한계희 묘(韓繼禧) 묘(墓) 주 남쪽 40리에 있다. 어효첨(魚孝瞻) 묘(墓) 주 북쪽 17리에 있다. 정척(鄭陟) 묘(墓) 주 서쪽 7리에 있다. 이지강(李之剛) 묘(墓) 주 북쪽 7리에 있다. 이계손(李繼孫) 묘(墓) 주 서쪽 80리에 있다. 이문화(李文和) 묘(墓)ㆍ이승손(李承孫) 묘(墓) 모두 주 서쪽 30리에 있다.
『신증』 희릉(禧陵) 대모산(大母山)에 있는데 장경왕후(章敬王后)의 능이다. 제안대군(齊安大君) 묘(墓) 주 남쪽 16리에 있다.
【고적】 온조왕고성(溫祚王古城) 온조왕 13년에 왕도(王都)에 늙은 할미가 변화하여 남자가 되고, 다섯 호랑이가 성안에 들어왔으며, 왕의 어머니가 돌아갔다. 왕이 신하더러 이르기를, “국가가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강토를 침범하여 편안한 날이 적은 데다가, 더욱 지금 요사스러운 조짐이 자주 나타나고, 국모께서 세상을 버리시니 사세가 스스로 편안히 있을 수 없어 반드시 장차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 어제 나가서 한수의 남쪽을 순시하여 보니, 토지가 비옥하다. 마땅히 그곳에 도읍하여 오래 편안하기를 도모하리라.”하고, 7월에 한산에 나아가 목책(木柵)을 세우고 위례성의 백성들을 옮기고, 9월에 성과 궁궐을 세웠다. 일장산성(日長山城) 바로 신라 때 주장성(晝長城)이다. 문무왕(文武王)이 쌓은 것인데, 안에 여섯 우물과 시내가 있다. 주위가 8만 6천 8백 척, 높이는 24척인데 석축이다. 요탄역(饒呑驛) 고려 현종 9년에 거란이 와서 침범하므로 왕이 광주로 행차하였다가 두 왕후의 간 곳을 잃어 지채문(智蔡文)으로 하여금 가서 찾게 하였더니, 이 역에 이르러 바로 만나 모시고 돌아왔다. 왕이 기뻐하여 사흘 동안을 여기에 머물렀다.
【명환】 신라 김대문(金大問) 성덕왕(聖德王) 3년에 김대문을 도독(都督)으로 삼았다. 고려 이혼(李混) 참군이 되었다. 홍자번(洪子藩) 통판이 되었는데 간 뒤에 백성들이 그의 은덕을 생각함이 있었다. 안보(安輔) 사록(司錄)이 되었다. 김부의(金富儀) 사록이 되었다. 장선(張瑄) 목(牧)이 되었다. 이세화(李世華) 고려 때에 오랑캐의 침략으로 인하여 장차 도읍을 옮기려고 하였는데 광주가 중도의 큰 진(鎭)인 까닭에 세화를 보내 나가 자사(刺史)가 되게 하였다. 몽고의 대병이 와서 포위하고, 백 가지 계교로 공격하였으나, 세화가 주야로 성을 수리하고 방비하여 사기(事機)에 따라 응변하니 오랑캐가 드디어 포위를 풀고 갔다. 이진(李瑱) 사록이 되었다.
본조 권진(權軫) 판관이 되었다. 최부(崔府) 목사가 되었다. 안노생(安魯生) 목사가 되었다. 남금(南琴) 태종조에 양녕군을 이 주에 안치(安置)하였는데, 주관(州官)이 잘 제재하지 못하므로 임금이 특히 경창부윤(慶昌府尹) 남금으로서 판목사(判牧事)를 삼았다.
【인물】 백제 고흥(高興) 근초고왕(近肖古王) 때의 사람이다. 백제 개국 이래로 아직 문자로서 일을 기록함이 있지 못하더니, 고흥이 박사가 되매 비로소 서기(書記)가 있었다.
본조 안성(安省) 과거에 올라 벼슬이 개성부 유후(開城府留後)에 이르렀다. 시호는 사간(思簡)이다. 이집(李集) 본주의 아전이다. 고려 공민왕조에 과거에 올랐다. 천성이 강직하여 신돈(辛旽)에게 붙지 아니하니 돈이 죽이고자 하매 그 아버지를 업고 영주(永州)로 도망하였다가 돈이 죽음을 받자 서울로 돌아와 본조에 벼슬하여 전교판사(典校判事)에 이르렀다. 학문이 높아서 한 때에 사귀던 이색(李穡)ㆍ정몽주(鄭夢周)ㆍ이숭인(李崇仁)의 무리들이 모두 존경하고 중히 여겼다. 호는 둔촌(遁村)이요 시집이 있다. 이지직(李之直) 이집의 아들로 급제하여 벼슬이 형조 참의에 이르렀다. 이지강(李之剛) 이지직의 아우로 급제하여 벼슬이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叅贊)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이지유(李之柔) 이지강의 아우로 급제하여 벼슬이 성주목사(星州牧使)에 이르렀다. 이장손(李長孫) 이지직의 아들로 급제하여 벼슬이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에 이르렀다. 이인손(李仁孫) 이장손의 아우로 일찍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대사헌에 이르렀다. 간절하고 정직하게 국사를 말하다가 대신에게 거슬려 한성부윤으로 옮겼다가 뒤에 다시 호조 판서가 되었다. 세조가 위로하고 일깨워 말씀하시기를, “경의 나이 많음이 민망하나 탁지(度支)의 무거운 임무는 경이 아니면 불가하다.”하였다. 얼마 안 되어 의정부 우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승진 되었다가 치사(致仕)한 지 5년 만에 죽었다. 사람됨이 침착하고 굳세고 큰 포부가 있었다. 음악과 여색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가산(家産)을 일삼지 아니하였다. 벼슬에 있으면서 삼가고 주밀하여 전의 법도를 준수하기에 힘썼다. 시호는 충희(忠僖)다. 다섯 아들이 모두 급제하였다. 이예손(李禮孫) 이인손의 아우로 급제하여 벼슬이 황해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이극배(李克培) 이인손의 아들로 급제하여 좌익공신(佐翼功臣)에 참여하였다. 벼슬은 의정부 영의정에 이르고, 광릉부원군(廣陵府院君)에 봉하고, 시호를 익평(翼平)이라 하였다. 성품이 엄중하고도 풍채가 있었으며 정치의 대체를 알았다. 아들 세필(世弼)ㆍ세광(世匡) 또한 과거 급제하였다. 이극감(李克堪) 이극배의 아우로 두 번 과거에 합격하였다. 세조조에 좌익공신이 되어 광성군(廣城君)을 봉하였고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다. 문장으로 이름이 있었고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아들 세우(世佑)도 급제하여 벼슬이 경기 관찰사에 이르렀다. 이극증(李克增) 이극감의 아우로 과거에 급제하여 좌리익대공신(佐理翊戴功臣)에 참여하여 광천군(廣川君)을 봉하였다. 부지런하고 조심하여 관(官)을 다스림에 집과 같이 하였다. 시호는 공장(恭長)이다. 이극기(李克基)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공조 참판에 이르렀다.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하였다. 천성이 강직하고, 관(官)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었다. 『신증』 이극균(李克均) 극증의 아우로 급제하여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다. 연산군 갑자년에 피살되었다. 이세좌(李世佐) 이극감의 아들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다. 연산군 갑자년에 피살되었다. 이점(李坫)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윤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안(文安)이다. 이손(李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찬성에 이르렀다. 시호는 호간(胡簡)이다. 아들 수언(粹彦)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인(舍人)에 이르렀다가 일찍 죽었다.
【우거】 고려 조운흘(趙云仡) 늘그막에 주의 몽촌(夢村)에 우거하였다. 하루는 임견미(林堅味)ㆍ염흥방(廉興邦)의 당(黨) 가족들이 멀리 귀양가는 것을 보고 시를 짓기를, “사립문에 해가 낮이 되어서야 사람 불러 열고, 임정(林亭)에 걸어 나와 돌 이끼[苔]에 앉았도다. 어제 밤 산중에 비바람 사나워, 시내에 가득 흐르는 물이 꽃을 띄워 오누나.”하였다.
본조 박계성(朴繼姓)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황해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청렴하고 근엄하게 직무를 보았다. 조추(趙秋) 벼슬이 예문관 직제학에 이르렀다.
【효자】 본조 한구(韓逑) 나이 다섯 살에 아버지가 죽고, 장년이 되어 어머니가 죽으매 아버지 묘에 부장하고 6년 상을 입었다. 이런 사실이 나라에 들리매 정문을 세우고 부역을 면제하였다. 정수명(鄭守明) 그 아버지 호겸(好謙)이 악질(惡疾)을 얻어 거의 죽게 되었는데 수명이 나이 겨우 14세에 손가락을 끊어 약에 타 드렸다. 이런 사실이 나라에 들리매 정문을 세우고 부역을 면제하였다. 내은이(內隱伊) 사비(私婢)이다. 도둑이 그 집에 들어 와서 약탈하고 사람을 죽였다. 내은이가 몸으로써 그 아버지를 가리워 대신 죽음을 당하려 하여 마침내 아버지와 함께 화를 면했다. 사실이 나라에 들리매 정문을 세워 표창하고 부역을 면제하였다. 『신증』 정주신(鄭舟臣) 그 아버지 성근(誠謹)이 연산군 갑자년의 화를 만나 죽으니 가슴을 두들기며 통곡하며 먹지 않고 죽었다. 금상(今上) 초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신증』 【열녀】 본조 이씨(李氏) 정랑 성경온(成景溫)의 처이다. 연산군 때에 경온이 멀리 귀양갔다가 피살되었다. 이씨가 염습(殮襲)하고 장사 지내는데 예를 다하여 여막을 산소 곁에 짓고 손수 제사 음식을 갖추었다. 복을 벗은 뒤에도 술과 고기를 먹지 아니하니 금상 2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제영】 사면운산옹관사(四面雲山擁官舍) 이색의 시에, “사면의 구름산이 관사를 옹위하였는데, 한 줄기 강물은 어대(漁坮)를 둘렀더라.”하였다. 창산녹수장의구(蒼山綠水長依舊)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푸른 산과 푸른 물은 길어 예와 같은데, 푸른 기와와 붉은 기둥은 몇 번이나 새 것으로 바꾸었는고.”하였다. 수기저정생준예(秀氣儲精生俊乂) 유백유(柳伯濡)의 시에, “빼어난 기운이 정기를 저장하여 준걸을 낳았으니 조선의 인물이 빛이 있구나.”하였다.
변오 고려 이집(李集) 이당(李唐)은 본주의 아전이다. 조심하여 어진 행실이 있었다.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이집은 그 셋째 아들로, 처음 이름은 원령(元齡)이다. 고려 충목왕(忠穆王) 때 과거에 급제하여 문장과 지조로 세상에 이름이 있었다. 이색ㆍ정몽주ㆍ이숭인 등과 서로 더불어 공경하는 벗으로 삼았다. 일찍이 바른 것으로서 항거하다가 적승(賊僧) 신돈에게 거슬리매, 신돈이 장차 잡아 죽이려 하므로 가만히 그 아버지 당(唐)을 업고,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걸어 영천(永川)의 최윤도(崔允道) 집에 몸을 의탁하였다. 신돈이 죽음을 받으매 비로소 돌아와 이름을 고쳐 집(集)이라 하고 자를 호연(浩然)이라 하고 호를 둔촌(遁村)이라 하였다. 이로부터 출세할 뜻이 없었다. 봉순대부 판전교시사(奉順大夫判典校寺事)가 되었으나 얼마 아니하여 물러가 여주의 천녕현(川寧縣)에 살며 몸소 밭 갈고 글을 읽었다. 때로는 시편(詩篇)과 새 곡식을 정몽주 등에게 선사하니 몽주가 글을 부쳐 감탄하였다. 공양왕 정묘년에 죽으니 몽주ㆍ숭인 등이 글을 지어 애도(哀悼)하였다. 그뒤 여러 어진 이들이 서로 이어 죽자, 고려가 망하고 아조(我朝)에서 개국하였다. 그의 사적의 전말이 여러 문집에 갖추어 실려 있었으나, 역사를 편찬함에 미치어 임사홍(任士洪) 부자가 매우 이극감(李克堪) 형제를 질투하여, 이에 거짓으로 이집이 이조에 들어와 벼슬한 것으로 하여 마침내 본조 인물 밑에 그릇 기록하기에 이르렀다. 이어서 시림(詩林)을 주석한 자 또한 그 그릇된 기록을 따랐다. 선종(宣宗 선조(宣祖))조에 경연관(經延官) 홍적(洪迪)이 고치기를 청하니 선종이 인출(印出)할 때를 기다리라 명하였다. 금상 3년에 비로소 이 책을 간행하여 세상에 공포하였다. 8대손 영의정 이덕형(李德馨)이 상서하여 유교(遺敎)를 따라 바로할 것을 청하니 금상이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다시 편찬하도록 하였다. 거짓을 고쳐 실지로 삼으니 출처(出處)의 큰 대절(大節)이 명백하여져 유감 없이 되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高宗) 32년에 군(郡)으로 고쳤다가 32년 부(府)로 승격시켰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인조(仁祖) 원년에 유수(留守)로 승격 수어사(守禦使)를 겸하게 하였다. 4년에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쌓고 관청을 성안으로 옮기었다 수어사를 설치하여 광주(廣州) 등의 진(鎭)을 절제하게 하고 군무(軍務)는 목사(牧使) 겸 방어사(防禦使)가 보게 하였다. 11년에 토포사(討捕使)를 겸하게 하였고 15년에 부윤(府尹)으로 고쳤다. 효종(孝宗) 3년에 수어사를 겸하게 하였다가, 6년에 폐지하였다. 숙종(肅宗) 6년에 다시 겸하게 하였으나, 다시 폐지하였다. 9년에 유수로 승격(陞格)시키고 수어사를 겸하게 하고 또 경력(經歷)을 두었다. 전영(前營)을 여주(驪州)로 옮기고 16년에 다시 부윤을 두어 방어사와 토포사(討捕使)를 겸하게 하였다. 전영장(前營將)을 두고 경력을 없앴다. 17년에 다시 수어부사(守禦府使)를 겸하게 하고 21년에 이를 폐지하였다. 영조(英祖) 26년에 수어사를 폐지하고 유수를 두어 수어사를 겸하게 하였으며, 경력을 두고 전영을 이천(梨川)으로 옮기었다. 35년에 유수와 경력을 폐지하고 수어사를 두어 경청(京廳)을 설치했는데, 부윤 겸방어사ㆍ전영장ㆍ수성장(守城將)은 옛과 같다. 정조(正祖) 19년에 유수로 승격하고 수어사를 겸하고 나가서 본성(本城)을 진무하게 하였다. 따라서 경청은 폐지하고 진을 여주로 옮겼다.
【관원】 유수(留守) 수어사를 겸한다. 판관(判官) 전영장ㆍ수어종사관(守禦從事官)을 겸한다. 검률(檢律)ㆍ의학(醫學) 각 1인.
【토산】 밤[栗]ㆍ앵도(櫻桃)ㆍ사과[林檎]ㆍ칠(漆)ㆍ자초(紫草 지초 뿌리는 염료(染料)로 쓰인다)ㆍ수철(水鐵)ㆍ석회(石灰)ㆍ실[絲]ㆍ목화[綿]ㆍ삼베[麻]ㆍ자기(磁器)ㆍ도기(陶器)ㆍ은어[銀口魚]ㆍ잉어[鯉魚]ㆍ낭어(魚 숫게)ㆍ쏘가리[鱖魚]ㆍ누치[訥魚 잉어과에 속하는 민물 고기]ㆍ쏘가리[錦鱗魚 아름다운 물고기]ㆍ밀어(密魚 망둥과에 속하는 물고기) 압구정(押鷗亭) 앞 강에서 산출된다.
【궁실】 행궁(行宮) 상궐(上闕)ㆍ하궐(下闕)ㆍ좌전(左殿) 우실(右室) 등이 있다. 재덕당(在德堂)ㆍ한남루(漢南樓)ㆍ인화관(人和館)ㆍ사근평(肆覲坪)ㆍ행궁(行宮) 관해 좌승당(坐勝堂)ㆍ일장각(日長閣)ㆍ수어영(守禦營)ㆍ제승헌(制勝軒) 등이다.
【방면】 성안에 두 개의 동(洞)이 있다 남동(南洞)과 북동(北洞)이다. 경안(慶安) 남쪽에 있는데 첫머리는 10리이고 그 끝이 40리이다. 오포(五浦) 남쪽에 있는데 첫머리는 30리이고, 끝은 50리이다. 세촌(細村) 남쪽에 있는데 첫머리가 50리, 끝이 20리이다. 악생(樂生) 남쪽으로 첫머리가 20리요, 마지막이 40리이다. 돌마(突馬) 남쪽으로 첫머리가 20리요, 끝이 30리이다. 동부(東部) 동북쪽으로 첫머리가 10리요, 끝이 30리이다. 서부(西部) 서북쪽으로 첫머리가 10리요, 마지막이 20리이다. 퇴촌(退村) 동쪽으로 첫머리가 20리, 끝이 40리이다. 초부(草阜) 동쪽으로 첫머리가 30리, 끝이 60리이다. 도척(都尺) 동남쪽으로 첫머리가 40리이고, 끝이 70리이다. 실촌(實村) 동남쪽으로 첫머리가 50리, 끝이 70리이다. 초월(草月) 동남쪽으로 첫머리가 30리이고, 끝이 40리다. 중대(中垈) 서쪽으로 첫머리가 10리, 끝이 20리이다. 언주(彦州) 서쪽으로 첫머리가 20리, 끝이 40리이다. 구천(龜川) 서북쪽으로 첫머리가 20리요, 끝이 30리이다. 육왕(六旺) 서남쪽으로 첫머리가 15리요, 마지막이 30리이다. 의곡(義谷) 서남쪽으로 첫머리가 40리요, 끝이 60리이다. 왕륜(旺倫) 서남쪽으로 처음이 60리요, 끝이 70리이다. 북방(北方) 서남쪽으로 첫머리가 70리요, 끝이 90리이다. 월곡(月谷) 서북쪽으로 첫머리가 70리요, 마지막이 80리이다. 성곶(聲串) 서남쪽으로 첫머리가 80리고, 마지막이 1백 리로 해변(海邊)이다.
【진도】 송파진(松坡津) 서북쪽으로 20리며, 삼전도(三田渡)와 무동도(舞童島)를 주관하는데 별장(別將)은 한 사람이다. 삼전도(三田渡) 서북쪽으로 25리이며, 옛날에는 도승(渡丞)이 있었는데, 송파(松坡)로 옮겼다. 광진(廣津) 북쪽으로 20리다. 마점진(麻岾津) 봉안(奉安) 동쪽으로 통하는데 25리이다. 신천진(新川津) 삼전도 북쪽으로 5리이다. 두미진(斗迷津) 동쪽으로 20리인데 그 북쪽 언덕은 두미천(斗迷遷)으로 돌길이며, 빈강 강 가로 따라 둘리기를 7, 8리이며, 동쪽으로 봉안을 향한다. 미음진(渼音津) 북쪽으로 30리인데, 양주(楊州) 편에 보면 자세하다.
【사원】 귀암서원(龜岩書院) 북쪽으로 30리인데, 현종(顯宗) 정미년에 건립하였고, 숙종(肅宗) 정축년에 액(額)을 내리었다. 이집(李集) 자는 호연(浩然)이며 호는 둔촌(遁村)이고 본관은 광주(廣州) 사람이며, 벼슬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다. 이양중(李養中) 자는 자정(子精) 호는 석탄(石灘)이고 광주(廣州) 사람인데 고려말에 벼슬은 형조 우참의(刑曹右參議)였다. 우리 태종이 즉위하여 부르니, 평민으로 와서 보거늘 특별히 한성 좌윤(漢城左尹)으로 승직하니 받지 않았다. 정성근(鄭誠謹) 자는 신(信)이고 진주(晉州) 사람으로 연산주 본관 갑자년에 화를 입었다. 벼슬은 승지요, 증직 이조 판서이다. 정엽(鄭曄) 자는 시회(時晦) 호는 수몽(守夢)이고 본관 초계(草溪) 벼슬은 좌참찬이며, 증직 우의정이고 시호는 문제(文齊)이다. 오윤겸(吳允謙) 자는 여익(汝益)이며 호는 추탄(楸灘)이고, 본관 해주(海州) 사람이다. 벼슬은 영의정이고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임숙영(任叔英) 자 는 무숙(茂叔) 호는 소암(疎庵), 본관은 풍천(豐川)이다. 벼슬은 수찬(修攢)이고 부제학(副提學)이다.
○ 수곡서원(秀谷書院) 서쪽으로 20리이며 숙종(肅宗) 을축년에 세웠고 을해년에 액(額)을 내렸다. 이의건(李義健) 자는 의중(宜中) 호는 동은(峒隱)이고 본관은 전주이다. 벼슬은 공조 정랑이고 증직 집의(執義)이다. 조속(趙涑) 자는 계온(季溫) 호는 창강(滄江)이며 본관은 풍양(豐壤)이다. 벼슬은 진선(進善)이며 증직 이조참판이다. 이후원(李厚源) 자는 사심(士深) 호는 우재(迂齋)이고 완산(完山)이다. 벼슬은 우의정이며 완남부원군(完南府院君)이고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 현절사(顯節祠) 부성 안에 있다. 숙종 무진년에 세웠고 계유년에 액을 내렸다. 김상헌(金尙憲) 경도(京都) 태묘(太廟) 편에 보라. 정온(鄭蘊) 자는 휘원(輝遠) 호는 동계(桐溪)이며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벼슬은 이조 참판 증직 영의정(領議政)이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홍익한(洪翼漢)ㆍ윤집(尹集) 두 현인(賢人)은 강화부(江華府)에 보라. 오달제(吳達濟) 자는 계휘(季輝)이며 호는 추담(楸潭)이고 본관은 해주(海州)다. 벼슬은 교리요 증직 영의정이며, 시호는 충열(忠烈)이다.
【능침】 정릉(靖陵) 선능(宣陵) 동쪽 산에 있는데 중종 대왕(中宗大王)의 능이며 기일은 11월 15일이다. □직장(直長)ㆍ참봉(參奉) 각 1인. 인능(仁陵) 헌능(獻陵)의 오른편 언덕에 있는데, 순조 대왕(純祖大王)의 능이다. 기일은 11월 13일이고, 처음에 장례(葬禮) 모신 곳은 교하(交河) 장릉(長陵) 국내(局內)인데, 철종(哲宗) 6년에 이곳으로 천장(遷葬)하였다.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金氏)도 이곳에 합장(合葬)하였는데, 기일은 8월 4일이다. □령(令)ㆍ참봉(參奉) 각 1인.


 

[주D-001]청광(淸狂) : 미친 것이 아니면서 미친 것 같은 것이다.
[주D-002]유선(儒仙) : 유학(儒學)하는 사람으로 신선의 풍치가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주D-003]교초(蛟綃) : 동해(東海)에 교인(蛟人 인어(人魚) 비슷한 것)이 비단을 짜는데 그 비단은 세상의 비단보다 곱다 한다.
[주D-004]노(魯) 나라……지으리요 : 노(魯) 나라에서 장부(長府 국가의 창고)를 새로 지으려 하니, 공자의 제자 민자(閔子)가 말하기를, “옛것을 그대로 수리하면 될 터인데 하필 고쳐 지으랴.”하였다.
[주D-005]《춘추》의…… 예(例) : 《춘추》의 필법(筆法)에 포(褒)하고 폄(貶)한 것이 있다.
[주D-006]바람이……많은가 : 당 나라 두목지(杜牧之)가 젊을 때 양주(揚州)에 놀러가서 어린 미인을 사랑하여, “내가 10년 만에 양주 자사(揚州刺史)가 되어 올 터이니, 그때까지 시집가지 말고 기다려라.”하였다. 그 뒤에 과연 양주 자사로 갔는데, 10년이 조금 넘었으므로, 그 여인은 벌써 시집가서 자녀(子女)까지 두었다. 두목지는 시를 짓기를, “꽃을 찾기 너무 더딘 것이 한이로다. 지금에는 바람이 흔들어 꽃이 떨어지고 푸른 잎이 그늘이 되고 열매가 가지에 찼구나”. 하였다. 아마 그때에 작자가 어느 여인과 관계가 있었던 모양이다.
[주D-007]저녁놀과 따오기[霞鶩] : 왕발(王勃)의 글 〈등왕각서(滕王閣序)〉에 , ‘낙하고목(落霞孤鶩)'이란 명구가 있는데 이 말을 인용한 것이다.
[주D-008]나귀를 거꾸로 타니 : 송 나라 시인 반랑(潘閬)이 나귀를 거꾸로 타고 화산(華山)의 경치를 구경한 일이 있다.
[주D-009]봉사(封事) : 임금에게 소(疏)를 올려 중요한 국사(國事)를 아뢸 때에, 밀봉(密封)하여 올리는 것을 봉사(封事)라 한다.
[주D-010]곡강(曲江) 누은(樓隱) : 당 나라 서울 부근에 곡강(曲江)이라는 명승지가 있다. 누은(樓隱)은 산중에 숨을 것 없이 강가의 누각에 숨었다는 뜻이다.
[주D-011]조화(造化) : 한명회가 정승이었으므로 만물을 기르는 조화(造化)에 비유한 것이다.
[주D-012]한 점……깨뜨리고 : 옛 시에, “백구(白鷗)는 날아서 푸른 산의 허리를 벤다.”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도 그 뜻을 모방한 것인데 빛이 희기 때문에 날아서 푸른 산을 깨뜨린다는 뜻이다.
[주D-013]강호(江湖)에서 서로 잊으니 : 《장자(莊子)》에, “사람은 도덕 가운데서 서로 잊고, 물고기는 강호(江湖)에서 서로 잊는다.”하였다. 그것은 제 몸과 저 사람의 몸이 있는 것을 모른다는 뜻이다.
[주D-014]동중서(董仲舒)의 장막 10년 : 한(漢) 나라 동중서가 장막을 내리고 그 속에서 글읽기에 부지런하여 10년 동안 전원(田園)을 돌보지 아니하였다.
[주D-015]하늘을……굴림 : 이것은 한명회가 세조(世祖)를 도와서 임금이 되게 하였다는 말이다.
[주D-016]난지(蘭芝)를……차니 : 굴원(屈原)의 《이소경(離騷經)》에서 나온 말로, 지초와 난초를 얽어서 패물로 한다는 뜻이다.
[주D-017]공명은……올랐네 : 한(漢) 나라 선제(宣帝)가 기린각(麒麟閣)에다 공신(功臣)들의 화상을 그렸다.
[주D-018]공명을……족하고 : 한 고제(漢高帝)가 공신들을 봉해 줄 때에 장량은 자원하기를, “내가 폐하(陛下)를 유(留)에서 처음 만났으니, 유후(留侯)로 봉하면 족합니다.”하였다.
[주D-019]몸이……띄웠는가 : 《장자(莊子)》에, 사람을 태운 배가 가다가 남의 배에 부딪치면 부딪침을 당한 배에서 노하고 꾸짖지마는, 빈 배가 부딪칠 때에는 꾸짖지 않는 것은, 빈 배는 무심(無心)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남과 시기하는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주D-020]창랑(滄浪) 노래 : 굴원의 〈어부사(漁父詞)〉에 “창랑수(滄浪水)가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고 창랑수가 탁하면 나의 발을 씻으리라.”한 노래가 있다.
[주D-021]벼슬 바다 : 관계(官界)를 벼슬 바다[宦海]라 한다. 그것은 풍파가 많음을 뜻한다.
[주D-022]갈매기를……있으련만 : 이 시는 한명회가 벼슬을 좋아하고 욕심이 많음을 풍자한 것이므로, 현판(懸板)에 새기지 아니하였다.
[주D-023]얼새[鷁] : 배의 돛대 위에다 얼새 모양을 만들어 다는데, 그것은 이 새는 바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D-024]흰 구름은……줄거나 : 육조 시대(六朝時代)의 은사(隱士) 도홍경(陶弘景)의 시에, “산중에 무엇이 있는가. 언덕 위에 흰 구름이 많네. 다만 나 혼자 좋아할 수 있고 임에게 가져다 줄 수 없다네.”하였다.
[주D-025]바릿대[鉢]에……것이요 : 육조(六朝) 시대에 주문을 외워서 용을 바릿대[鉢] 속에 들게 한 도승(道僧)이 있었다.
[주D-026]금을 펴고 지었는고 : 인도(印度)의 수달장자(須達長者)가 부처를 위하여 절을 지으려고 땅을 사려 하니 땅 주인이 팔기가 싫어서, “그 땅에 금을 가득 펴면 그만큼 땅을 팔겠다.”하니, 수달장자는 곧 금을 폈다.
[주D-027]태조를……만드시고 : 처음 나라를 창업(創業)한 것을 말한 것이다. 당 태종(唐太宗)이 그의 아버지에게 군사를 일으키기를 권하니, 그 아버지는, “집을 망치고 몸을 죽이는 것도 너 때문이요, 집을 변하여 나라를 만드는 것도 너 때문이다.”하였다.
[주D-028]구장(九章) : 장(章)은 무늬인데, 천자는 열두 가지 무늬[十二章]의 곤룡포를 입고 제후(諸侯)는 구장(九章)의 옷을 입는다. 무늬에 산(山)ㆍ쌀[米]ㆍ꿩[華蟲] 등이 있다.
[주D-029]역월(易月)의 복제 : 상복의 기간을 짧게 하는데 날로써 달과 바꾸어서 27일을 입는 것이다.
[주D-030]의방(義方) : 아비는 자식에게 옳은 도리[義方]를 가르쳐야 한다는 옛 글이 있다.
[주D-031]태종께서 정사(定社) : 태종(太宗)이 그의 아우인 세자(世子) 방석(芳碩)을 죽이고 나라를 빼앗은 것을 정사(定社)라 한다.
[주D-032]혁장(鬩墻) : 《시경》에, “형제가 담장 안에서는 서로 싸우다가도 바깥 사람의 침노함이 있을 때에는 함께 막는다.”하였다.
[주D-033]건(乾)의……법도로다 : 《주역》에 “건괘(乾卦)의 덕은 건(健)하고 이괘(離卦)의 덕은 밝은 것인데, 임금의 덕에 비하고, 곤괘(坤卦)의 덕은 유(柔)하고 후(厚)한데 후비(后妃)의 덕에 비한다.”라고 하였다.
[주D-034]자손이……기린(麒麟)이로라 : 《시경》에, “번성한 공자(公子)들이여, 아, 기린이로다.”한 구절이 있다.
[주D-035]비음기(碑陰記) : 비석의 후면에 따로 새기는 것을 음기(陰記)라 한다.
[주D-036]종명이정(鐘銘彝鼎) : 국가에 큰 공적이 있으면 종(鐘)과 솥[鼎]에 그 기록을 새겨서 영원히 전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7권
 경기(京畿)
여주목(驪州牧)


동은 충청도 충주 경계에 이르기까지 44리요, 강원도 원주 경계에 이르기까지 10리요, 남은 음죽현(陰竹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33리요, 서는 이천부(利川府) 경계에 이르기까지 28리, 광주 경계에 이르기까지 52리요, 북은 지평현(砥平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37리, 양근군(楊根郡) 경계에 이르기까지 57리요, 서울과의 거리는 1백 90리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골내근현(骨乃斤縣)이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황효(黃驍)로 고쳐 기천군(沂川郡)의 속현(屬縣)으로 삼았다. 고려 초에 황려현(黃驪縣) 황리(黃利)라고도 한다. 으로 고쳤다. 현종(顯宗) 때 원주에 붙이고,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고종 때 영의(永義)로 고치고, 충렬왕(忠烈王) 31년에 순경왕후(順敬王后) 김씨의 고향이므로 여흥군(驪興郡)으로 승격시켰다.
대명(大明) 홍무(洪武) 21년에 신우(辛禑)를 이 군에 옮기고, 황려부로 승격시켰다가 공양왕 원년에 다시 내려 군으로 하였다. 본조 태종조에 원경왕후의 고향이므로 다시 승격시켜 부(府)로 하고, 음죽현 북쪽 어서이촌(於西伊村)을 합하여 충청도로부터 본도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고쳐 도호부(都護府)로 했다.
예종(睿宗) 원년에 영릉(英陵)을 부의 북성산(北城山)에 옮기고, 천녕현(川寧縣)을 혁파하여 이 부에 소속시키고, 지금 이름으로 고쳐 승격시켜 목(牧)으로 하였다.
【관원】 목사(牧使)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각 1인.
『신증』 연산(燕山) 7년에 본주(本州)가 쇠잔하였으므로 판관을 혁파하였다.
【군명】 골내근(骨乃斤) ㆍ황효(黃驍)ㆍ영의(永義)ㆍ황려(黃驪)ㆍ여강(驪江)ㆍ여흥(驪興)ㆍ여성(驪城)ㆍ황리(黃利).
【성씨】 본주(本州) 이(李)ㆍ민(閔)ㆍ안(安)ㆍ필(畢)ㆍ윤(尹)ㆍ김(金)ㆍ한(韓)ㆍ음(陰). 천녕(川寧) 견(堅)ㆍ현(玄)ㆍ최(崔)ㆍ유(兪)ㆍ방(房)ㆍ장(張). 등신(登神) 유(兪).
【형승】 국도 상유(上游)에 있다 김수온(金守溫)의 보은사(報恩寺) 기문에 있다. 한수마암(捍水馬巖) 이색(李穡)의 시에, “물을 막는 공은 마암석(馬巖石)이 높고, 하늘에 뜬 형세는 용문산(龍門山)이 크구나.” 하였다. 들이 평평하고 산이 멀다[野平山遠] 전인(前人)의 여강시(驪江詩)이다. 산수가 맑고 기이하다 권근의 여강시이다. 긴 강이 서쪽으로 흐르고, 첩첩한 영(嶺)이 북에서 왔다 설문우(薛文遇)의 시에, “긴 강이 서쪽으로 흘러 창해(滄海)에 들어가고, 첩첩한 영(嶺)이 북으로 와서 얕은 산을 둘렀네.” 하였다.
【산천】 북성산(北城山) 주 서쪽 7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옛 성터가 있다. 오압산(烏鴨山) 주 남쪽 10리에 있다. 강금산(岡金山) 주 남쪽 25리에 있다. 장연산(長淵山) 주 북쪽 7리에 있다. 유우산(流牛山) 주 동쪽 5리에 있다. 환희산(歡喜山) 주 서쪽 25리에 있다. 봉미산(鳳尾山) 주 동쪽 7리에 있다. 혜목산(慧目山) 주 북쪽 25리에 있다. 상두산(象頭山) 천령현 서쪽에 있다. 승산(勝山) 주 남쪽 5리에 있다.
○ 고려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깨끗한 청산에 들불이 침범하여, 소나무와 삼(杉)나무가 다 타버리고 다시 마음이 상하누나. 지난해 철죽꽃이 피던 곳, 울창하게 도리어 잡목 숲을 이뤘네.” 하였다.
입암(笠巖) 주 서쪽 5리 강구(江口)에 있다. 팔대수(八大藪) 주 북쪽 3리에있다. 옛날에는 패다수(貝多藪)라 일컬었는데, 주위가 5ㆍ6리 된다. 여강(驪江) 곧 한강 상류이며 주 북쪽에 있다. 객관(客館)을 강을 베개하여 지었다.
○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계수나무 노와 모란(木蘭) 배로 푸른 물결을 가로지르니, 붉은 단장이 물 가운데의 하늘에 아름답게 비치네. 소반에 담은 것은 배꼽 둥근 게[蟹]만 보겠고, 그물을 거니 도리어 목 움츠린 편[縮項鯿]을 보겠네. 10리의 연화(煙花)는 참으로 그림 같은데, 한강에 풍월은 돈을 논하지 아니하네. 모래에 앉은 갈매기야, 고기잡이 노래소리를 익숙하게 들었을 터이니, 날아와 여울 앞에 이르러 배를 피하지 말라.” 하였다.
○ 권근(權近)의 연집서(宴集序)에, “금상(今上)께서 즉위하신 지 3년 신미 11월에, 우리 좌주(座主) 한산(韓山) 목은(牧隱) 선생께서 나라의 은명(恩命)을 받아 서울로 조공(朝貢)하러 들어가는 길에 여강(驪江) 별장에 이르렀는데, 도관찰사(都觀察使) 안공(安公)이 술자리를 베풀어 위로하였다. 날이 이미 저물어 하늘이 밝고 달은 맑은지라, 배를 타고 중류(中流)에서 흥대로 놀다가 파했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는 강에 얼음이 얼어 배가 통하기 어려웠다. 다음 날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공문이 이르렀는데, 좌대언(左代言) 신(臣)이 임금의 명령을 전하기를, ‘한산군(韓山君) 색(穡)이 충주ㆍ여주 사이에 있을 때 도관찰사는 음식을 차려서 예(禮)로써 후대하여 보내라 하셨다.’ 하였다. 안공이 공경히 명령을 받들고, 또 가서 술 자리를 베풀었다. 이 날 구름이 음산하고 눈이 조금씩 내리면서 강의 얼음이 스스로 풀렸다. 선생이 또 안공과 배를 같이 타고 물 흐름을 따라서 내려갔다. 이때에 모시고 앉았던 사람은 첨서(簽書) 종학(種學)이니 선생의 아들이고, 여흥(驪興) 군수 권총(權總)은 생질이요, 근(近)과 도사(都事) 이우(李愚)는 모두 문인(門人)이다. 잔을 올리고 수작하여 예(禮)를 차리고 서로 더불어 흡족하게 즐기는데, 구름 속 달은 희미하게 밝아 하늘과 물은 아득하여 끝이 없었다. 물살은 잔잔하여 풍랑(風浪)이 없고 눈이 때때로 날리며 떨어지니 또한 배 가운데의 좋은 경치였다. 또 다음 날 도재(陶齋) 이학사(李學士)가 수문(修文)의 명을 받고, 역마를 달려 이르러 또 같이 배에 올라 놀기를 이와 같이 하였다. 도재는 당세의 문장대가로 선생이 시험보인 신해년 향시에 장원한 사람이다. 안공(安公)은 쌍청상공(雙淸相公)의 아들인데, 쌍청선생은 선생의 동년(同年)이므로 세교(世交)가 매우 두터웠다. 공이 일찍이 문학과 청렴과 근신함으로써 높은 벼슬을 지냈고, 이제 또 중한 선택으로 한 지방을 맡았으매, 민생을 안정시켜 임금의 덕택을 펼 것을 생각했는데, 더욱 선생께서 부르심을 받아 조정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어찌 성의를 극진히 하여 성상께서 후한 예(禮)로서 불러들이시는 뜻에 맞추고자 아니하겠는가. 이것은 정성된 마음이 감동되어 얼음이 스스로 풀리어 오늘 배 가운데 즐거움을 이루어 준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아니한가. 여강(驪江)의 산수가 좋음은 자고로 일러 오지만, 사람의 일은 많이 뜻과 어긋나고, 좋은 벗도 한 자리에 모이기 어려운데, 우리들이 서로 떠돌아 다니던 끝에 이 회합을 만났으니 진실로 얻기 어려운 것이다. 안공은 도관찰사의 위엄과 공무에 번다한 몸으로서 쉽사리 이런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다. 또 하물며 중동(仲冬) 추운 때에 배를 띄우고 오늘과 같이 즐겁게 노는 것이 그 몇 번이나 있겠는가. 한 자리의 손의 명망이 높음이 한산(韓山) 같고, 위엄의 무거움이 안공(安公) 같고, 문아(文雅)함이 도재(陶齋) 같고, 현달한 명사들이 제공(諸公)과 같은 이들이 서로 같이 한 배를 타고 노는 것도 또한 몇 번이나 있었는지. 이 강이 있은 이래로 이제 겨우 있는 일이다. 근(近)이 재주 없는 몸으로 이 모임에 참여함을 얻게 되니 진실로 다행한 일이라, 이것을 기록하지 아니할 수 없노라.” 하였다.
○ 이색(李穡)의 시에, “여강의 형승(形勝)은 천하에 드문데, 사시(四時)의 풍경이 천지의 비밀을 헤쳐 보이누나. 내가 처음 와 놀 때는 마침 여름철이어서,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이 배에 불어 옷에 가득 서늘하였네. 백 척 높은 군루(郡樓)에 두 눈으로 멀리 바라보니, 들은 평평하고 산은 멀어 부슬부슬한데 연기가 걷히네. 흐르는 강에 임해 높은 흥을 알 이가 적으니, 유선(兪仙)이 자부(自負)하던 것 진실로 기롱하기 어렵네. 봄 꽃이 산에 만발하니 물결 밑이 붉고, 가을 달은 구슬을 잠그네. 하늘엔 바람조차 없는데, 내 그 좋은 시절에 모두 미쳐 오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이같은 얼음 얼고 눈 오는 엄동(嚴冬)이랴. 바야흐로 임금의 부름을 받아 스스로 기뻐 날뛰니, 바로 야학(野鶴)이 갇혀 있던 장을 떠나는 듯하구나. 쌍청(雙淸)의 맏자제 관찰사로 있고, 성산(星山 도은(陶隱))과 양촌(陽村 권근)도 뜻밖에 한 자리에 모였네. 태수(太守 목사(牧使)) 성심으로 아름다운 손을 즐겁게 하니, 권하고 수작하며 예(禮)를 다하여 화기(和氣)가 무르익었네. 얼음이 스스로 녹고 눈이 또 오고, 밝은 달이 나오려 하자 구름 또한 열리네. 하늘도 우리가 오래 떨어져 다님을 가엾게 여기어 이것을 위로하고자 황금 술잔을 함께 들게 하네. 뭇 양[衆陽]이 함께 나아감[彙征]이 이제로부터 시작하나니, 노래와 춤 한 곡조로 춘대(春臺)에 오르네.” 하였다.
○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사상(使相 도관찰사)은 위명(威名)이 크고, 선생(목은(牧隱))은 덕업(德業)이 높으시네. 하늘가에 수년 이별했다가, 강 위에서 한 잔 술을 같이하네. 들이 넓으니 산이 그림 같고, 물결은 고요한데 해는 정히 내리쪼이누나. 휘정(彙征)이 이로부터 시작되나니, 부르고 화답하매 흥이 다함 없구나.” 하였다.
○ 권근(權近)의 시에, “황려(黃驪)의 산수가 스스로 맑고 기이하여, 높은 관개(冠蓋)가 서로 만나매 기약이 있는 듯하네. 별당의 거문고와 노래 소리는 자리가 질서 있고, 긴 강의 운월(雲月)은 밤이 더디네. 배를 띄우니 아득하게 은하수와 통하는 듯, 날리는 눈은 부슬부슬 술잔에 떨어지네. 다행히 여러분 모시고 성한 모임 여니, 풍류와 문채가 당시에 제일일세.” 하였다.
○ 정도전(鄭道傳)의 시에, “강산 설월(雪月)에 손이 누에 올라, 잔을 잡고 시를 읊는 좋은 놀음 열었네. 물이 줄어져 공선(貢船)은 밀어도 내려가지 않으매, 여러 인부들 파서 통하니 사군(使君 관찰목사)의 근심일세.” 하였다.
대교천(大橋川) 주 서쪽 27리에 있다. 근원은 음죽현(陰竹縣) 흑석동(黑石洞)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이포진(梨浦津)으로 들어간다. 천민천(天民川) 주 남쪽 45리에 있다. 죽산현 조에 자세하다. 우만포(禹萬浦) 주 동쪽 25리 여강 상류에 있다. 이포진(梨浦津) 주 서쪽 43리 여강 하류에 있다.
○ 최숙정(崔淑精)의 시에, “저문 산은 천층(千層)으로 붉은데, 가을 강은 한 띠[帶]인 듯 푸르구나. 출세하고 숨는 것은 짧은 나무토막을 따르고, 신세는 부평초[浮萍]에 붙였네. 허술한 촌 백성의 가게[店]요, 쓸슬한 역리(驛吏)의 정(亭)이로세. 멀리 바람에 날려 오는 소리는 어느 곳 피리인가. 슬프고 원망스러워 차마 들을 수가 없구나.” 하였다.
진강도(鎭江渡) 천녕현에 있다. 금당천(金堂川) 주 동쪽 10리 원주(原州) 경계에 있다. 두두리천(豆豆里川) 천녕현 동쪽 5리에 있는데, 곧 대교천(大橋川) 하류이다. 순지(蓴池) 주 남쪽 1리에 있다.
『신증』 점암(簟巖) 동쪽 5리에 있다.
【토산】 실[絲] ㆍ 쏘가리[錦鱗魚] ㆍ 누치[訥魚].『신증』 녹반(綠礬) 서쪽 왕암(王巖)에서 난다.
【누관】 청심루(淸心樓) 객관(客館) 북쪽에 있다.
○ 임원준(任元濬)의 승목기(陞牧記)에, “여주는 삼국 때에는 본래 고구려의 골내근현(骨內斤縣)이었는데, 뒤에 신라에게 병합되었다. 경덕왕이 이름을 황효(黃驍)라 내려 기천(沂川)에 소속시켰다. 전조 충렬왕(忠烈王) 31년에 경순왕후(敬順王后) 김씨의 고향이므로 여흥군으로 승격하였다. 대명(大明) 홍무(洪武) 21년 위주(僞主) 신우(辛禑)가 이 고을에 물러나 있었으므로 이로 하여 승격하여 황려부가 되었다가 공양왕(恭讓王) 원년에 다시 강등하여 군이 되었다. 우리 세종대왕이 어머니 원경황후(元敬王后)의 고향이므로 특히 승격하여 도호부(都護府)가 되었다. 성화(成化) 5년 무자(戊子) 겨울에 일관(日官)이 풍수설을 가지고 영릉(英陵)을 옮기기를 청하는 자가 있었으므로, 예종대왕이 대신에게 명하여 경기 지방에 나누어 다니면서 자리를 보도록 하였다. 바로 주 북쪽의 5리 지점에서 자리를 얻어서 점을 쳐보니, 만억년을 누릴 수 있다 하므로 드디어 다음해 기축 3월 경인에 능을 여기에 옮겼다. 이에 이 부(府)에 선왕의 능(陵)이 있으므로 승격시켜 주로 하고, 목사와 통판(通判)을 두고, 또 지역이 좁으므로 천녕현을 합하여 넓히니, 인물의 번화함이 비로소 다른 고을의 번성함과 견줄 만하게 되었다. 주의 형승으로는 강물이 중원(中原 충주(忠州))의 월악(月岳)으로부터 시작하여 강원도의 오대산(五臺山)의 물과 합하여 몇 백 리를 흘러서 주 북쪽에 이르러 깊고 맑게 고여서 못이 되었고, 우뚝하게 뾰족뾰족 푸르러 동북쪽을 누른 것으로는 용문산(龍門山)이 있다. 높고 푸르러 날으는 듯 춤추는 듯하여 추녀와 기둥에 엿보는 듯 솟은 것은 치악산(雉岳山)이 벽사(甓寺) 그림자를 강속에 거꾸로 비춤이요, 마암(馬巖)은 강을 금후(襟喉 서울 가까운 요지)에서 막는다. 북으로 서울과의 거리는 밤낮 이틀의 노정(路程)이요, 남으로는 세 도(道)를 통하는 길이 읍(邑) 밑에서 나누어진다. 진실로 국가의 상유(上游)를 눌렀고, 경기(京畿)의 깊숙한 구역이다. 주가 승격하여 목이 되매, 조정 의논이 반드시 어질고 유능한 사람을 가리어 목사와 판관을 삼는데, 안공(安公) 극사(克思)와, 김공(金公) 승경(承慶)이 맨 먼저 그 선임(選任)에 응하였다. 안후(安侯)가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이제 부가 주로 되었으니 이것은 주의 큰 시초이다. 어찌 기(記)를 지어 두지 아니하겠는가.’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넓은 땅에서 여주와 대등한 것으로 주로 된 것이 그 몇인지 모르겠지마는, 상서와 복을 저장하여 국가 근본의 땅이 된 것인즉 아직 여주의 성함만 같은 것이 없다. 주의 이름난 성(姓)으로는 어은(漁隱) 민시중(閔侍中)이 성후(聖后)를 낳아 우리 태종에게 짝함으로부터 성조신종(聖祖神宗)이 계계 승승하여 자손에게 규모를 전해주어 만세에 편안을 내려 주셨다. 지금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공의 부인도 이 주의 민씨로서 우리 중궁(中宮)을 낳아 우리 전하의 짝이 되어 큰 운수에 응하시고, 힘써 대업(大業)을 밝히시어, 태평시대를 거듭하여 여러 만물이 기(氣)를 토하니, 사직(社稷)의 장구한 억만년 한이 없는 복조가 진실로 오늘에서 기초가 될 것이다. 하물며 이제 영릉(英陵)을 옮겨 놓아 만세에 국맥(國脉)을 배양하는 땅이 되었다. 옛날에는 군에서 부로 승격하고, 오늘은 부에서 주가 되니, 어찌 황려 산천의 쌓이고 모인 기운의 발함으로써 아름다운 상서와 복과 경사의 성대광명(盛大光明)함이 천만세에 내려가 다함이 없을 것이 아닌가.’ 하였다.” 했다.
○ 고려 주열(朱悅)의 시에, “한 조각 밝은 달이 구름 끝에 솟으니, 거울 속에 전에 알던 안면을 만난 것 같네. 쌍쌍으로 선 나무는 보개(寶蓋)의 그림자가 기울어진 듯, 사면에 둘린 산은 긴 눈썹이 푸르구나. 잉어는 푸른 물 저쪽에서 척소(尺素)를 전하고, 용은 여의주(如意珠)를 암흑한 속에서 품고 있네. 시 읊으며 오경(五更)이 이르매 시가 더욱 기절(奇絶)하니, 풍경으로 하여금 잠시라도 한가하게 마소.” 하였다.
○ 이곡(李穀)의 시에, “만일 이 경치를 붓 끝에 넣으려 한다면, 글은 소동파(蘇東坡)ㆍ황산곡(黃山谷)이어야 하고, 글씨는 안진경(顔眞卿)이어야 하겠네. 방금 백성을 위하매 부역을 걱정하는데, 어찌 지나는 손의 강산 구경을 용납하랴. 흰 물결 푸른 뫼는 여염(閭閻) 속이요, 적안(赤岸)과 은하수는 백중(伯仲)의 사일세. 하룻밤 누 가운데 잤어도 오히려 부족하니, 다른 날 긴 여가를 만들어 조각배를 타리라.” 하였다.
○ 이색(李穡)의 시에, “병 앓은 후에 여강을 몇 번 왕복하였는가. 높은 시를 화답하려 하매 내 얼굴이 부끄럽네. 배 띄워 놀기엔 반삿대쯤 물이 가장 좋나니, 천 겹 산은 다 보기 여렵고, 밝은 달 맑은 바람은 좌우에서 오는데, 흰 수염과 붉은 뺨으로 중간에 앉았네. 초연하게 스스로 신선의 지경이라, 목옹(牧翁)이 한가한가 않은가를 물어보게.” 하였다.
○ 한수(韓脩)의 시에, “이름 자가 절의 한 조각 돌 끝에 걸려 있으니, 10리에 배 타고 산기슭을 살펴보네. 강가에서 웃으며 나잔자(懶殘子)를 이별하고, 군(郡)안에 들어와 원차산(元次山)을 보네. 어찌 감히 오랫동안 손의 자리 상편에 오래 머물러 있으리요. 오히려 작은 폐단이나마 민간에 미칠까 근심하노라. 글 재주 없으매 하늘이 아끼던 좋은 경치를 묘사하기 어려우니, 누 앞 풍경 한가하게 버려두네.” 하였다.
○ 고려 정몽주(鄭夢周)의 시에, “가랑비가 아득하여 온 강에 찼는데, 누 가운데 자는 손이 밤에 창을 여누나. 내일 아침 말에 올라 진흙 밟고 갈 적에, 돌아 보면 창파(蒼波)에 흰 갈매기 쌍쌍이리.” 하였다.
○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누각이 강 가에 다달았으니, 휘어잡아 오르매 세속 정이 멀어지네. 물결이 빛나는 것은 아침 해가 오름이요, 나무가 빽빽하니 더운 바람이 맑구나. 일찍부터 강산(江山)을 즐겨 하여 벼슬의 영화로움을 뜬구름처럼 보았네. 어찌하여 낚싯대 잡던 손으로 말에 채찍질하며 서울로 향할꼬.” 하였다.
○ 고려 이구(李玖)의 시에, “일찍이 여강 강 위 누에 올라, 바로 쇠한 귀밑털 가지고 맑은 흐름에 비쳤네. 오늘 와서 진토(塵土)는 지나간 꿈 되었으니, 이슬은 고기잡이 도롱이에 가득하고 달은 배에 가득하네.” 하였다.
○ 정추(鄭樞)의 시에, “밤에 황려현에 드니, 뱃사공이 자려할 때로세. 물가로 가니 바람은 사나운데, 누에서 자니 달은 기약이나 있는 듯. 하늘이 넓은데 긴 강은 움직이고, 모래는 밝은데 잡나무[雜樹]도 기이하구나. 삼경(三更)에 맑은 휘파람을 부니, 문득 물귀신도 춤을 추는 듯.” 하였다.
○ 정자후(鄭子厚)의 시에, “북원(北原 원주) 서쪽이요, 한강 남쪽 끝이로세. 내 일찍이 다락에 올라 한 번 얼굴을 폈었네. 발 밑에는 넓고 아득한 강이 성곽을 둘렀는데, 눈 앞은 평평하고 먼 들산에 이었네. 흰 구름 신선 생각은 삼청(三淸) 밖이요, 밝은 달 시정(詩情)은 팔영(八泳) 사이네, 20년이래 진토 밑에 다녔으니, 지금도 생각하는 꿈이 일찍이 한가롭지 못하네.” 하였다.
○ 설문우(薛文遇)의 시에, “온갖 경치가 가리키는 손 가락 끝에 벌여있는데, 누에 오르니 저도 모르게 자주 얼굴을 돌리네. 긴 강은 서로 흘러 창해로 들어가는데, 겹겹이 두른 영(嶺)은 북쪽에서 와 얕은 산을 둘렀네. 그물을 뚫은 고기는 찬 비 속에서 뛰고, 기심 잊은[忘機] 해오리는 어두운 연기 사이에 서 있네. 일생에 공명(功名)의 누(累)를 벗어 버리며, 푸른 부들 삿갓 쓴 어옹(漁翁) 역시 스스로 한가하리.” 하였다.
○ 도원흥(都元興)의 시에, “10년만에 돌아와 이 난간 끝에 기대니, 미인이 응당 젊은 얼굴 변한 것을 웃으리라. 서너 발 남은 낙일(落日)은 외로운 탑에 밝은데, 한 줄기 긴 강은 뭇 산을 안았네. 들 매[野鶻]는 멀리 단풍든 나무 밖을 도는데, 가는 기러기는 푸른 하늘 공중으로 사라지네. 선배들 뱃놀이 하던 일을 실컷 들었더니 이제는 여울 머리에 놀이배 한가함을 보겠네.” 하였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다락은 백 길이나 높아 구름 끝에 솟았는데, 호기 있는 원룡(元龍)은 옛 얼굴과 같네. 배를 옮겨 갈매기를 놀라게 하지 말라. 홀(笏)로 턱을 괴고 청산이나 보리다. 학은 밝은 달을 따라 하늘 위로 돌아 갔고, 용은 빛나는 구슬을 안고 물속에서 조네. 임금이 이 감호(鑑湖)를 주는 것은 헤아리기 어려우나, 산을 사서 마침내 여기에 한가히 살고자 하네.” 하였다.
○ 최숙정(崔淑精)의 시에, “그림 누각 치레가 곱고도 단정한데, 다시 풍월을 가지고 수심 띈 얼굴을 씻네. 동쪽 언덕의 절은 높이 물에 임하였는데, 서쪽 기슭 민가(民家)는 고요히 산을 지고 있네. 굽어보고 쳐다보니 건곤(乾坤)이 모두 세속 밖이요, 누에 올라 강을 내려다 보니 신세(身世)가 별인간이네. 다른 해 내 벼슬 버리고, 티끌 옷깃 털어 죽기까지 한가하리라.” 하였다.
○ 중 선탄(禪坦)의 시에, “그대는 옛날 취옹(醉翁)이 서호에서 잔치함을 보지 못하였는가. 은촛불[銀燭] 켜고 놀다가 이 밤 늦어서야 파하니, 금잔 옥잔이 흩어져도 거두지 않았다네. 또 하감(賀監) 방랑하여 회계에서 논 것을 보지 못하였는가. 가벼운 노 짧은 배로 연기 낀 물가를 따라, 비낀 바람 가는 비에 꽃다운 섬을 찾아 갔다네. 중원(中原) 목백(牧伯)이 자취를 이어, 놀이배에 북을 치며 금강(錦江) 가을에 즐겁게 노는구나. 칠택(七澤)은 흰 갈매기 밖에 아득하고 먼데, 삼산(三山)은 금오(金鼇)의 머리에 숨으락 비치락하네. 잠(簪)을 빼 밤에 동선(洞仙) 문을 두드리니, 푸른 눈썹 붉은 뺨이 중루를 둘렀네. 중루의 노래와 저[吹]는 반공중에서 떨어지는데, 달이 뜨니 황혼이 하늘 빛이 그윽하구나. 별빛이 희미해지고 해가 떠오르매, 오마(五馬)가 총총히 떠나가니, 창려(昌黎)의 월녀(越女) 한 번 웃음에 삼 년을 머물렀다는 시(詩)가 우습구나.” 하였다.
『신증』 이색(李穡)의 시에, “관개(冠蓋)로 별처럼 달려 콧등에 땀이 맺히는데, 한 번 이 정자에 오르매 얼굴을 펴네. 서늘함이 궤안(几案)에서 나는 것은 바람이 나무에 스몄기 때문이요, 푸른 빛이 이 술상에 뚝뚝 떨어지는 것은 비가 산을 걷어서이네. 긴 소매 가벼운 치마는 자리 위에 나부끼는데, 잦은 거문고와 급한 피리는 기둥 사이에 벌어졌네. 누가 임금 은혜 중함을 느끼지 않으랴마는, 사명(使命) 받고 나온 몸이 도리어 한가한 놀이를 겸했네.” 하였다.
○ 또, “누기(樓記)가 추녀 머리에 써 있지 아니함을 한하노니, 이름을 누가 청심이라 하였는가. 현판(懸板) 걸 것을 빠뜨렸네. 물 막는 공이 높은 것은 마암석(馬巖石)이요, 하늘에 떠서 형세 큰 것은 용문산(龍門山)일세. 방에 있을 때 눈은 처마와 창 밖에 떨어지고, 여름에 서늘하게 누웠을 땐 바람이 베개와 삿자리 사이에 오네. 더욱 봄 바람과 가을 달을 보게 되면, 완상(玩賞)하는 마음과 아름다운 경치가 더욱 너그럽고 한가하리.” 하였다.
○ “또 지쳐서 나는 외로운 새도 이미 돌아올 줄을 아는데, 만년(晩年)의 맑은 놀음에 얼굴을 활짝 펴네. 천명(天命)을 어찌 의심하랴. 곧 팽택(彭澤)이요, 세상 인연은 마침내 적으니 향산(香山)과 같구나. 강호의 흥미는 삼생(三生)의 밖인데, 종정(鐘鼎) 공명(功名)은 한바탕 꿈 사일세. 태평을 읊조리는 것이 나의 사업이니, 이제부터 스스로 호(號)하기를 이한한(李閑閑)이라 하리라.” 하였다.
○ 이육(李陸)의 시에, “잠이 깨니 동정(銅鉦)은 나무 끝에 걸렸는데, 물 빛과 서로 더불어 쇠한 낯을 비치네. 강에는 벽 절[甓寺] 구층 탑 그림자가 잠겼는데, 누는 용문 천길 산을 대했네. 넓으니 극히 우내(宇內 세상) 없는 줄 알겠고, 서늘하니 오히려 인간 아님을 의심하겠네. 괴롭게도 또 홍진(紅塵)으로 향하니 물결 위에 흰 새 한가함을 속절없이 부러워 하네.” 하였다.
○ 신석조(辛碩祖)의 시에, “세상사 분분(紛紛)하여 하루에 몇 가지인가. 누에 오른 오늘 저녁에야 우연히 얼굴을 펴겠네. 강가에 늙은 나무는 나이를 알지 못하겠는데, 하늘 끝 먼 봉우리는 어느 곳 산인지. 신선 지경을 어찌 삼도(三島 삼신산) 밖에 찾으랴. 풍류는 도리어 오호(五湖) 사이보다 나으리. 총총히 왕명 받은 사신(使臣)이라 분주하게 달려 잠깐도 한가하지 못함을 어이하리.” 하였다.
○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배를 초가집 가시 울타리 끝에 매니, 물고기와 새가 어찌 일찍이 내 얼굴을 알겠는가. 병(病)에도 오히려 능히 행보할 수 있는데, 조정에서 쫓겨 나서야 겨우 강산 구경을 할 수 있네. 10년 동안 세상 일을 외로이 읊조리니, 8월 가을 경치는 어지러운 나무 사이로세. 잠깐동안 난간에 의지하여 북쪽을 바라보는데, 뱃사공 타기를 재촉하여 한가롭지 못하네.” 하였다.
○ 신용개(申用漑)의 시에, “강 연기 뉘엿뉘엿 붓 끝에 끌리는데, 강물은 맑고 맑아 파리한 얼굴 비치네. 작은 배 삐걱거리는 가엔 오직 흰 갈매기. 푸른 숲이 비낀 밖엔 또 푸른 산이 팔면이네. 창에 좋은 경치는 두 눈 안이요, 찬 비 소리는 일만 낙수물받이 사이로세. 벼슬 자리에서 오랫동안 앉은뱅이 노릇한 것을 스스로 웃나니, 저 고기잡이 늙은이에게 청한(淸閑)함을 도맡게 하였네.” 하였다.
○ 일본승(日本僧) 범령(梵齡)의 시에, “긴 강은 흰 비단을 펼쳐 처마 끝에 접했는데, 게으른 나그네 티끌 묻은 얼굴을 씻을 만하네. 맑은 경쇠 소리에 달이 높으니 먼 절임을 알겠고, 평평한 숲에 구름이 다하니 먼 산을 분별하겠네. 붉은 추녀와 푸른 기와는 물 속에 비치는데, 모래ㆍ새[鳥]ㆍ바람ㆍ돛은 좌석 사이에 가깝네. 세 번 삼한(三韓)에 와서 국명(國命)을 전하니, 도리어 한마음 한가함을 저버린 것이 부끄럽네.” 하였다.
○ 김조(金稠)의 시에, “맑은 강이 하늘 끝에서 내리쏟는데, 누에 올라 내려다 보매 얼굴을 비칠 만하네. 통쾌하게 마시니 이태백(李太白)을 맞이할 만하고, 시에 능한 이로는 일찍이 한산(韓山 이색)을 얻었네. 어석버석한 소나무의 푸르름은 외로운 돛 밖이요, 흐느끼는 여울 소리는 두 언덕 사이로세. 걸음을 옮겨 붉은 난간에 의지하여 한 번 웃노니, 어떤 것이 바쁘고 어떤 것이 한가한가.” 하였다.
별관(別館) 청심루 동쪽에 있다. 부사 노회신(盧懷愼)이 창건한 것으로 오래되어 퇴락하였더니, 목사 권중개(權仲愷)가 중수하였다. 『신증』 영빈관(迎賓館) 객관 동쪽에 있는데, 옛날에는 빈선(賓仙)이라 이름하였다. 금상(今上) 23년에 영릉(英陵)에 참배할 때, 이 관에 들러 오늘의 이름으로 고쳤다.
【학교】 향교(鄕校) 주 동쪽 2리에 있다.
【역원】 신진역(新津驛) 주 동쪽 5리에 있다. 안평역(安平驛) 주 남쪽 30리에 있다. 양화역(楊花驛) 주 서쪽 15리에 있다. 초계원(草溪院) 주 남쪽 5리에 있다. 가로개원(加老介院) 주 남쪽 30리에 있다. 파장원(破場院) 주 남쪽 25리에 있다. 신원(新院) 주 북쪽 45리에 있다. 복천원(福川院) 주 서쪽 30리에 있다. 보통원(寶通院) 주 북쪽 25리에 있다. 자천원(子川院) 주 북쪽 30리에 있다. 보제원(普濟院) 주 동쪽 5리에 있다.
【불우】 보은사(報恩寺) 여강 동쪽 기슭 봉미산에 있다. 옛 신륵사인데, 벽돌 탑이 있으므로 속칭 벽절이라 한다. 우리 예종(睿宗) 때에 영릉을 절 서쪽 10리에 옮기고, 드디어 고쳐서 큰 절을 짓고, 인하여 지금의 액(額)을 내렸다.
○ 절에 강월헌(江月軒)이 있는데 고려의 명승 나옹이 죽은 뒤에 그 제자들이 석종(石鍾)에 사리를 간직하고 진당(眞堂)을 세웠는데, 이색이 기(記)를 지었으며, 또 대장각(大藏閣)이 있는데, 이숭인(李崇仁)이 기를 지었다.
○ 김수온(金守溫)의 기에, “여주(驪州)는 국도의 상류 지역에 있으며, 산이 밝고 물이 아름다워 낙토(樂土)라고 칭하여 오는데, 신륵사가 바로 이 형승(形勝)의 복판에 있다. 옛날 현릉(玄陵)의 왕사(王師) 나옹과 한산 목은 선생과 이공 두 사람이 서로 이어 와서 놀았다. 이로부터 이 절이 드디어 기좌(畿左)의 유명한 절이 되었다. 다음 해 성화(成化) 9년에 대왕대비전하께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다시 고쳐 짓고, 액(額)을 내려 보은(報恩)이라 하고, 선왕 능의 원찰(願刹)로 삼았다. 처음 세조 대왕이 꿈에 세종대왕을 뵙고 친근히 말씀을 받들어 즐거움이 생시와 같았다. 세조께서 추모하는 정이 더욱 간절하여 세종대왕과 소헌왕후(昭憲王后)를 위하여 영릉 옆에 절을 세워 명복(冥福)을 비는 장소로 하고자 하였다. 이에 유사에 명하여 나무를 찍어 떼를 만들어 띄워서 강 언덕에 쌓았는데, 하루 저녁에 큰 비로 홍수가 나서 미친 물결이 휩쓸어 갔다. 명년에 세조께서 돌아가시고 국가에 사고가 많아 영릉 옆의 절을 경영할 겨를이 없었다. 때마침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영릉 좌국(坐局)의 풍수(風水)가 옛법에 맞지 아니함이 있사오니, 마땅히 능을 다시 세워서 큰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예종이 여러 신하들에게 그 의논을 내렸더니 모두 아뢰기를, ‘이장(移葬)하는 법이 예로부터 있습니다. 장사할 때에 빠진 것이 있어도 오히려 개장(改葬)하옵는데, 하물며 이제 풍수(風水)를 맡은 관원의 말이 있음은 반드시 상고한 것이 있을 것이니 따르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예종께서 재신(宰臣)을 나누어 파견하여 그 땅을 선택하게 하였더니 군신이 아뢰기를, ‘여흥의 북쪽에 한 큰 골짜기가 있는데, 산이 형세를 벌려서 주(主)와 대(對)가 분명한데 풍수법에 말한, 산이 멈추고 물이 구부러져서 자손이 천억이 된다고 한 그대로입니다. 신등이 본 바로서는 능을 모실 곳이 이보다 나은 곳은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예종이 전지(傳旨)를 조정에 내려 좋다하여, 성화(成化) 5년 기축에 세종의 재궁(梓宮)을 여주에 옮겨 농사 지내는 일이 끝나자 대왕대비 전하께서 분부하시기를, ‘선왕께서 부왕을 꿈에 보시고 장차 영릉 밑에 절을 세우려 하시었으나, 급히 승하(昇遐)하시어 문득 신민(臣民)을 버리셨으므로 절을 경영할 겨를이 없었더니, 이제 선왕이 하늘에 계시는데, 우리들이 빨리 유지(遺旨)를 거행하지 아니하면, 어찌 장차 선왕을 지하에서 뵈올 것인가.’ 하였다. 곧 상당부원군 신 한명회, 서평군(西平君) 신 한계희(韓繼禧) 등에게 명하여 능에서 멀지 않게 절을 세울 곳을 택하게 하니, 신 명회 등이 아뢰기를, ‘능의 국내(局內)에는 절을 세울 만한 곳이 없습니다. 신륵사는 일명 벽절로 옛 현인들이 놀던 자취가 완연하옵고, 또 선왕의 능과 거리가 매우 가까워 종고(鐘鼓)의 소리가 들릴 만하옵니다. 만일 이것을 수리하면 옛것을 인하여 새롭게 만드는 것인데, 일은 반이라도 공은 갑절이나 될 것이오니, 이보다 편리함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진 2월에 대왕대비께서 분부를 내리기를, ‘이제 능(陵)을 겨우 끝마쳤는데 또 일반 백성을 부리는 것은 불가하다. 이제 간경도감(刊經都監)은 이미 파하였고, 쓰던 전곡(錢谷)이 아직도 남아 있으니, 그것을 내수사(內需司)에서 전장(專掌)하여 출납하여 노는 사람에게 보수를 주어 역사하게 하고, 혹시라도 폐가 없도록 하라.’ 하고, 신 한명회ㆍ한계희를 명하여 제조(提調)를 삼고, 여주목사 신 이신효(李愼孝), 원주목사 신 김춘경(金春卿), 내시부상선(內侍府尙膳) 신 이효지(李孝智)를 감역관(監役官)으로 삼아 그 해 2월에 역사를 시작하여 겨우 10월에 끝마쳤다. 그전 것을 수리한 것이 몇 칸이고, 새로 지은 것이 몇 간이니, 합쳐서 2백여 칸이 되었다. 종과 북 같은 도구(道具)와 일용집기(日用什器)도 모두 새로 만들었다. 신이 생각건대 사찰의 흥폐(興廢)는 진실로 그 때를 기다림이 있는 것이요, 또 운수가 그 사이에 관계됨이 있는 것이다. 신륵사 풍경의 아름다움은 우리 나라에 소문난 것으로서 사대부(士大夫)들이 바람에 돛을 달고 왕래하여 배들이 서로 연달았으나, 아직 한 사람도 그 절을 일으키고 창설하지 않았었다. 다행히 이제 황려대부(黃驪大府)는 천백 년 산천의 모인 기운이 가만히 간직되어 있다가, 오늘날 성명(聖明)의 시대에 발하여 선왕의 능을 이 고을에 경영하여 큰 일이 이미 정하여 큰 경사가 시작되었으니, 우리 국가는 억만 년의 끝없는 기업(基業)을 열었다. 이에 부가 승격되어 주가 되고, 절 또한 일신되니, 이것은 바로 때를 기다린 것이요, 운수에 관계된 것이다. 우리 대왕대비 전하께서 때에 고금이 있고 땅에 피차가 있음을 탓하지 아니하시고, 선왕의 끼치신 뜻을 생각하시어, 능을 이미 옮기고 빨리 절을 세우셨으니, 그 잘 계승하여 크게 나타낸 아름다움이 여러 선왕에 빛이 되고 전고에 뛰어났다. 신이 비록 늙고 어두우나 감히 머리 조아려 절하며 삼가 글로 써서 후세에 밝게 보이지 아니하겠는가.” 하였다.
○ 이색(李穡)의 시에, “먼산은 긴 강 밖이요, 성긴 소나무는 푸른 돌 곁이로세. 절은 복된 땅에 열렸고 보제(普濟)는 진당(眞堂)이 열렸네. 현령은 자주 허리에 홀(笏)을 꽂고 예배하는데, 산 중[僧]은 홀로 벽을 향하고 있네. 어쩌면 들 배를 불러서 맑은 휘파람으로 넓고 아득한 물에 띄울꼬.” 하였다.
○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참나무 돛대는 갈대 여울을 돌고, 소나무 배를 돌다리에 매었구나. 맑은 바람은 늙은 나무에 불고, 밝은 달은 긴 강에 찼네. 설법하니 용도 응당 들을 것이요, 참선하니 호랑이도 스스로 엎드리네. 오가며 그윽한 흥이 있으니, 이끼 길이 배창에 접했네.” 하였다.
○ 권근(權近)의 시에, “내 와서 이 좋은 강산을 사랑하여 종일토록 배를 타고 또 난간에 의지하네. 물 밑에는 찬란하게 절이 열렸는데, 숲속에는 은은히 선단(仙壇)이 보이네. 마음을 가리키는 돈교(頓敎)는 멀리 혜가(慧可)에게서 전했고, 일을 기록하는 웅문(雄文)은 한퇴지(韓退之)와 흡사하네. 진중한 늙은 중은 부지런히 종이를 주는데, 글을 지어 남겨 두면 뒷 사람이 볼까 부끄럽네.” 하였다.
○ 최수(崔脩)의 시에, “벽절 종소리 한밤에 울리니, 광릉(廣陵)에서 돌아오는 손의 꿈이 처음 깨네. 만일 장계(張繼)로 하여금 일찍이 여기를 지나게 하였다면, 꼭 한산(寒山)만이 홀로 이름을 얻지 못했으리.” 하였다.

정천사(井泉寺) 환희산에 있다.
○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우리 스님 물건 취하는 것은 청렴하나, 유독 강산에 대하여는 탐(貪)함을 꺼리지 않네. 한 누를 만들어 내어 높이 우뚝하매, 일만 경치를 몰아 모두 포함하였구나. 밭가는 모습에 가랑비 내리니 촌 멋이 즐겁고, 나무꾼 피리에 햇빛이 쇠잔하니 들 흥취가 거나하네. 아침 저녁 새 소리는 문밖 나무에서요, 예와 이제 사람의 그림자는 길가 연못이로다. 구름에 붙어 돌아가는 기러기는 차례 있게 앞뒤요, 물에 나온 뜬 갈매기는 갑자기 둘셋이로세. 토질은 모름지기 기름진 것을 볼 것이요, 절 이름은 도무지 우물물의 맑고 깊음에 있네. 달은 깊은 방에 한가한 중이 자는 것을 엿보고 골짜기는 빈 마루에 앉은 손의 말소리에 메아리치네. 더위를 쫓는 서늘한 난간을 어찌 꼭 북쪽을 택하랴. 바람을 부르는 높은 집은 남향이 가장 마땅하리. 개인 하늘에 놀[霞]빛은 불보다 붉은데, 새벽 주점 연기 빛은 푸르기 남빛 같네. 일찍이 맑고 그윽함을 차지하여 그대 스스로 유쾌한데, 늦게야 아름다운 명승을 만나니 내 바야흐로 부끄럽네. 마음을 씻고 수도하는 결사(結社)에 들어 같이 숨을 수 있다면 늙은 근력이라도 물을 길어 차를 끓임은 오히려 감당할 만하네. 혹시 재미나는 화두(話頭) 있거든 때로 늙은 방거사(龐居士) 불러 참구(參究)함도 무방하리.” 하였다.
하북사(下北寺) 환희산에 있다.
○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아득하고 먼 연기낀 멧부리는 만점이나 푸른데, 바라보이는 곳 어디쯤이 바로 신경(神京)인가. 한가한 구름은 잠깐 사이에 천 가지 형상을 이루는데, 흐르는 물은 늘 한결같은 소리로세. 장사(長沙)에 가의(賈誼)가 귀양 옴은, 이미 정한 것이나, 장포(漳浦)에 유정(劉楨)이 누은 것을 어찌 견디랴. 아무도 망우물(忘憂物 술)을 반겨 주는 이 없으며, 조정에서 쫓겨나온 손이 봄을 만나매 더욱 불평하네.” 하였다.
신통사(神通寺)ㆍ철갑사(鐵甲寺) 모두 환희산에 있다. 장흥사(長興寺) 상두산(象頭山)에 있다. 취암사(鷲巖寺)ㆍ상원사(上院寺)ㆍ고달사(高達寺) 모두 혜목산(慧目山)에 있다. 고려 한림(翰林)학사 김정언(金廷彦)이 지은 중 혜진(慧眞)의 탑비(塔碑)가 있다.
○ 한수(韓修)의 시에, “20년 전이 꿈같구나, 젊었을 때의 친구들은 반이나 황천객(黃泉客)이 되었네. 이제 고달(高達) 옛절에 옴은, 원통(圓通) 큰 복전[大福田]이 있기 때문이네. 사면의 산 병풍은 절을 둘렀는데, 한 개 비석은 푸른 하늘에 기대었네. 웃음과 이야기 하루 저녁에 돌아갈 길을 잊었으니, 당시 묘련(妙蓮)에 있던 것 같으이.” 하였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주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주 남쪽 5리에 있다. 여단(厲壇) 주 북쪽에 있다.
【능묘】 영릉(英陵) 우리 세종 장헌대왕(世宗莊憲大王)의 능이다. 소헌왕후(昭憲王后)를 합장했다. 능은 본래 광주 서쪽 대모산(大母山)에 있었는데, 예종(睿宗) 원년 기축에 주 북성산의 양지편에 이장하였다.
○ 정인지(鄭麟趾)가 지은 비명(碑銘)에, “요(堯)가 단주(丹朱)를 버리고 순(舜)에게 선위하였는데, 순은 중화(重華)의 덕이 있으매 요의 인(仁)이 더욱 오래갔고, 문왕(文王)은 백읍고(伯邑考)를 버리고 무왕(武王)을 세우매 무왕이 비승(丕承)한 공이 있어, 주(周) 나라의 업이 더욱 창성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당우(唐虞 요ㆍ순)는 어진 신하에게 선위(禪位)하고, 하(夏) ㆍ 은(殷)ㆍ 주(周)는 자손이 이었는데 그 뜻은 한 가지이다.’ 함은 사심이 없음을 말함이다.
우리 태종이 선위하심은 그 요와 문왕의 마음이시며, 우리 세종의 선위를 받으심은 순(舜) 임금과 무왕의 덕이 있으심이다. 태종이 재위(在位)하였을 때 일찍 원자 지(禔)를 세워 세자로 삼고, 어진 사우(師友)를 가려서 교양의 방법을 극진히 하였으나 세자는 자라서도 어린 마음이 있어 학문이 이루어지지 아니하고, 덕이 진보되지 아니하매 태종이 매우 근심스럽게 여겼다. 영락(永樂) 무술년 6월에 세자가 덕을 잃음이 매우 심하게 되자 태종께서 맏 손자를 세워서 후사[嗣]로 삼고자 하였더니, 대신들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세자를 교양하옴에 모든 방법을 다 하였건마는 오히려 이와 같이 되었사오니, 이제 어린 손자를 세운다 하더라도 어찌 다른 날에 그가 현명하리라고 보장할 수 있겠나이까. 하물며 아비를 폐하고 아들을 세우심은 의리에 있어서 어떠하올는지요. 어진이를 가려 사(嗣)로 삼음만 같지 못할까 합니다.’ 하였다. 이때에 세종은 세자의 동모제(同母弟)로서 서열이 제3에 있어, 일찍이 충녕대군(忠寧大君)에 봉했었다. 태종이 이르기를, ‘충녕이 여러 아들 가운데서 가장 어지니 충녕을 세자로 세움이 옳겠다.’ 하고, 세자로 삼으니, 종친과 문무 백관이 절하여 하례하고, 중외(中外)가 만족히 여겨 칭송하였다. 드디어 천자에게 상주(上奏)하니 천자가 칙서(勅書)를 보내 이르기를, ‘적(嫡)을 세우는데 맏아들로써 세우는 것은 고금에 바꿀 수 없는 상도(常道)이다. 그러나 사자(嗣子)의 어질고 어질지 못함은 나라의 성쇠존망이 매인 것이다. 왕은 국가의 장구한 생각을 하고, 성쇠존망의 기미를 밝게 보아 어진이를 세워 사(嗣)를 삼고자 하니 왕의 선택함을 허락하노라.’ 하였다. 이해 8월에 태종이 세종에게 선위하고 명 나라에 신신을 보내어 책명(冊命)을 청했다. 11월에 세종이 책보(冊寶)를 받들어 태종에게, 성덕 신공 상왕(聖德神功上王)이라는 존호를 올렸다. 다음 해 기해년 봄 정월에 천자가 홍로시 승(鴻臚寺丞) 유천(劉泉)을 보내 세종을 봉하여 왕을 삼았다.
6월에 천자가 태종에게 조칙을 내리기를, ‘이번에 왕이 제삼자(第三子)가 효제(孝悌)하고 학문에 힘써 종사를 이을 만하다 하고, 또 스스로 연로(年老)하므로 전위할 것을 청하니, 짐이 왕의 식견이 명달(明達)함을 생각하여 특히 소청을 허락한다. 대체로 세계를 잇는 데는 후사(後嗣)가 있어야 하고, 위(位)를 전하는 사람을 얻음에 있는 것이다. 이제 왕은 어진 이를 가리고 덕 있는 이를 명하여 종사(宗社)로 하여금 의탁할 데가 있게 하여 나라 사람의 소망에 맞게 하니, 진실로 아름답게 여기고 기뻐하여 왕에게 연향(宴享)을 내리는 것이니, 왕 한 집의 경사뿐만이 아니라 왕의 나라 경사인 것이다.’ 하고 또 세종에게 칙서를 내려 충효의 도로써 권면(勸勉)하고 연향(宴享)을 내려 주었다. 8월에 사신이 나라에 이르러, 두 임금이 경복궁의 근정전에서 잔치를 받으니 예악의 성대함이 온 나라를 용동(聳動)시켰다. 일찍이 원경왕후(元敬王后)께서 홍무(洪武) 정축년 4월 10일 임진에 세종을 한양의 잠저(潛邸)에서 낳으셨는데, 네 살되던 때 왕후(王后)의 꿈에 태종께서 세종을 안고 해 가운데 앉아 계셨다. 얼마 안 되어 태종께서 왕위에 오르게 되고, 세종께서 또 대통을 이었다. 하늘이 덕 있는 이에게 운명을 주심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는가. 세종께서 궁중에 계실 적부터, 천성이 학문을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아니하였다. 침묵하고 말이 적어 깊고 먼 모습이 있었으며 대위(大位)에 오름에 미쳐서는 총명하고 지혜로운 것은 서물(庶物)에 우두머리로 성인이시고, 관유(寬裕)하고 온유(溫柔)함은 백성을 용납하고 대종을 기르는 덕이요, 물건을 제작함에는 홀로 지혜를 내시며 발강강의(發强剛毅)한 잡음[執]이 있으시고, 위의(威儀)는 두려워할 만하고 법받을 만하여 제장중정(齊莊中正)의 공경함이 있으시고, 정미한 뜻은 신(神)에 들어 문리밀찰(文理密察)하는 분별이 있으셨다. 날마다 새벽에 북이 네 번째 울리면 옷을 찾으시고, 아침 일찍 조회를 받으신, 다음에 일을 보시고, 다음에 윤대(輪對)하시고, 경연(經筵)에 납시었다가 안으로 드셔서도 오히려 글을 보시며 조금이라도 게으름이 없으시니, 정사가 행해지지 아니함이 없고, 일이 다스려지지 아니함이 없었다. 태종께서 이미 왕위를 전하시매 스스로 나라를 부탁할 사람을 얻었다 생각하시고, 산수의 취미를 즐겨 자주 교외(郊外)에 나가 놀이함으로써 스스로 유쾌히 하셨다. 가끔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밝은 임금을 얻어 국정을 맡겼으니 근심 없는 이는 천하에 나와 같은 이 없을 것이다. 어찌 천하에 나와 같은 이가 없을 뿐이겠는가. 고금에 또한 나와 같은 이 없을 것이다.” 하였으니, 대체로 그 근심함이 깊었던 까닭으로 그 기뻐함이 이와 같았다. 겨울 10월에 중외 사찰(寺刹)의 노비를 혁파하여 다 관(官)에 돌리고, 얼마 안 되어 오교(五敎)를 파하고 다만 선(禪)ㆍ교(敎) 두 종만을 남겨 두었다. 이에 이단(異端)의 교를 물리쳐 시원스럽게 하였다. 경자년 봄에 비로소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문학의 선비를 뽑아 모아 고문(顧問)에 대비하였다. 이해 여름에 원경왕후(元敬王后)께서 병이 들어 밖으로 피기(避忌)하였는데 왕후의 연(輦)을 부축하여 걷고 노숙(露宿)도 하며 약을 받들어 항상 곁을 떠나지 아니 하였다. 7월에 왕후께서 돌아가시니, 미음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다가 태종께서 억지로 권하니 조금 들었다.
신축년 8월에 천자(天子)가 북정(北征)을 하는 데 말 만필을 바치니 천자가 가상히 여겨 포장하고, 은폐(銀幣)를 내렸다. 9월에 태종에게 태상왕의 호를 올리고 임인년 5월에 태종이 돌아가시니, 3년 동안 최복(衰服)을 입고 정무를 보았으며, 정하여 영세(永世)의 법으로 삼았다. 갑진년 가을에 명나라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가 돌아가고, 인종 소황제(仁宗昭皇帝)가 등극하매 사신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받들어 위로하고, 등극을 하례함에 예절을 다하였다. 천자가 기뻐하여 충성이 지극하다고 포장하고 채색 폐백을 내려 주었다. 을사년에 인종이 돌아가시고, 선종 장황제(宣宗章皇帝)가 등극하시자 또 사신을 보내 위로하고 하례하였다. 선덕(宣德) 병오년 봄에 천자가 지성을 칭찬하여 폐백을 내리었는데 왕비에까지 미쳤다. 이해 겨울에 또 오경(五經)ㆍ사서(四書)ㆍ《성리대전(性理大全)》ㆍ《통감강목(通鑑綱目)》등 서적을 내려 주었다. 이로부터 상(賞)으로 보내는 것이 어느 해나 이르지 않는 해가 없었다. 나중에는 황제가 차고 있던 보옥으로 만든 띠ㆍ고리와 도검(刀劍)까지도 풀어서 보내 주었다. 기유년 여름 성균관(成均館)에 거둥하시어 선성(先聖)을 뵙고 선비를 뽑았다. 나라 사람들이 항상 금ㆍ은은 우리 나라 산물이 아닌데 명 나라 조정에 해마다 공물로 바치는 것을 계속하기 어렵다고 근심하므로 이에 친아우 함녕군(諴寧君) 인(裀)을 보내 연유를 갖추어 진술했더니, 천자가 특히 허락하여 바치는 것을 면해 주고, 대신 토산물로써 정성을 바치도록 하고, 인(裀)에게 상사품(賞賜品)을 매우 후하게 주었다. 이해 겨울에 천자가 칙서를 내려 이르기를, ‘조정에서 보낸 사람들이 왕의 나라에 이르거든 왕은 다만 예로써 대접할 뿐 물건을 선사하지 말라. 왕의 부자는 조정을 공경히 섬김이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두터움을 짐이 깊이 아는 바이니, 좌우 근신들의 이간질할 것이 못 된다.’ 하고, 또 칙서를 보내 이르기를, ‘왕은 가위 탁월한 어진 왕이로다.’ 하였다. 이보다 먼저 파저강(婆猪江) 등처의 야인(野人)이 다른 부락과 서로 연결하매 그들의 노략질을 당한 요동(遼東) 개원(開原) 등 변방의 군민(軍民)으로 우리나라에 도망하여온 사람이 5백여 명에 이르렀는데, 모두 북경으로 보냈더니 야인들이 분을 품어 우리 북변을 범했다. 계축년 봄에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최윤덕(崔潤德), 중추원사(中樞院事) 이순몽(李順蒙) 등에게 명하여 가서 치게 하니, 그 괴수 이만주(李滿住) 등이 새같이 도망하고 짐승같이 달아났으므로 그들의 근거지를 헐어버리고 돌아왔다. 갑인년 봄에 또 선성(先聖)을 뵙고 선비를 뽑았다.
3월 병오년에 헌릉(獻陵)을 배알하니 감로(甘露)가 송백(松柏)에 내리고 또 경복궁 후원 소나무에도 내렸다. 백관이 하레 올리기를 청했으나 받지 아니하였다. 함길도 북문(北門)의 연강주군(沿江州郡)은 본래 고구려의 옛 강토요, 우리 조종(祖宗)이 왕업을 일으킨 땅이다. 그런데 야인의 점령한 바 되었더니, 비로소 회령(會寧)ㆍ종성(鍾城)ㆍ온성(穩城)ㆍ경원(慶源)ㆍ경흥(慶興)등 제진(諸鎭)을 설치하여 옛 강토를 회복하였다. 을묘년 봄에 명나라 선종(宣宗)이 돌아가고 지금 상황제가 즉위하매 표문을 받들어 위로하니, 천자가 사신을 보내 비단을 주었다. 정통 무오년 8월에 또 원유 관복(遠遊冠服)을 주었다. 임술년 5월에 달달(達達)이 사람을 시켜 글을 가지고 북문에 이르렀으므로 초유(招諭)하였다. 변장이 말하기를, ‘하늘엔 두 해가 없고, 백성에겐 두 왕이 없다. 이제 대명(大明)이 천하를 통일하였는데 너희들이 어찌 무도한 말을 하는가.’ 하고 끝내 거절하고 받아 들이지 아니하였다. 세종께서 북경에 사신을 달려 상주하니 천자가 기뻐하여 상사(賞賜)하였다. 갑자년 봄에 칙서를 보내 이르기를, ‘지시한 바 변방 일을 모두 잘 따르고 받들어 어기거나 게으름이 없으니 왕은 어질도다.” 하고 특히 곤룡포(袞龍袍)를 주어 은총(恩寵)을 표시하였다. 대마(對馬) 일기(壹岐) 등 섬의 왜적(倭賊)들이 명 나라 연해(沿海)의 땅을 침범하고, 또 우리 제주의 지경도 범하였는데 변장(邊將)이 다 잡지 못하고 본도(本島)로 도망친 자가 있으므로 세종이 사람을 보내 도주(島主)를 타일러 잡아 보내게 하니, 도주가 명을 받들고 모두 수색하여 잡아 보냈으므로 드디어 북경으로 압송하여 처단을 받게 하였으니, 전후의 인원이 대략 60여 명이었다. 천자가 매우 가상히 여기고 칙서를 보내 이르기를, ‘왕은 능히 너의 선왕이 하늘을 공경하고 대국을 섬기던 마음을 본받아 공순하고 정성스러움이 오랠수록 더욱 두터우므로 조정의 돌봄과 대우가 더욱 융숭하니, 가위 군신(君臣)이 한 마음이요, 종시(終始) 변함이 없다 할 수 있다. 이제 다시 변방을 침범한 왜적을 묶어보내니, 족히 왕이 나라를 경영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뜻을 보겠고, 또 변방을 지키는 데 사람을 잘 써서 횡포를 막은 공이 있음을 보겠도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조정에서 착함을 아름답게 여기고 어짊을 중히 여겨 예로 대우하기를 융숭하게 하노니, 덕이 후한 이는 사랑과 영화를 받는다는 옛말은 왕에게 해당된다.’ 하였다. 동량북(東良北)에 사는 오랑캐 낭포야온두(浪浦也穩豆)는 일찍이 아비를 죽인 자인데, 이해에 우리나라에 와서 조공하였다. 세종께서 생각하시되, ‘대역(大逆)한 사람은 천지가 용납하지 않을 것이요, 왕법(王法)에 용서하지 못할 것인데, 동량북은 우리 국경에 바짝 가깝고, 오래 왕화(王化)에 젖었으니 베지 아니할 수 없다.’ 하고 국경 위에서 찢어 죽이고 하교(下敎)하여 야인에게 타일렀더니 야인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을축년에 근심과 과로로 병을 얻으시자 금상 전하에게 명하시어 정무를 참결(參決)하게 하였다. 병인년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여 음운(音韻)의 변화를 기록할 수 있게 하니 오랑캐와 중국의 여러 소리를 번역하여 통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그 제작이 정미함이 가히 고금에 뛰어났다 할 만하다. 무진년에 원손(元孫) 홍위(弘暐)를 봉하여 왕세손(王世孫)으로 삼았다. 기사년 가을에 지금 상황제가 즉위하매 표문을 받들어 하례하고 또 말[馬]을 보내어 변방의 경비를 도왔다. 황제가 한림 시강(翰林侍講) 예겸(倪謙), 형과 급사중(刑科給事中) 사마순(司馬恂)을 보내어 폐백을 내려주었다. 우리 나라는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로부터 구장면복(九章冕服)을 내려 주었고, 품질(品秩)은 친왕(親王)에 비하였다. 오직 왕세자께서 아직 면복(冕服)이 없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다 부족하게 생각하였더니 세종께서 칠장(七章) 면복을 청하여 마침내 허락함을 받았다. 세종께서는 지극한 효도를 하시어 날마다 수강궁(壽康宮)에 문안드릴 제 화한 낯빛과 부드러운 얼굴이며, 옥을 잡은 듯 가득 찬 것을 드는 듯 조심함은 전세의 제왕이 미치지 못하는 바이요, 상사와 제사를 당하여 예를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모두 법도에 맞았다. 비빈(妃嬪) 이하를 은혜로 대접함이 각각 그 분수를 다하니 이간하는 말이 없었다. 여러 아들을 의방(義方)으로써 하여, 적서(嫡庶)ㆍ존비(尊卑)의 등급이 분명하였다. 모두 학문을 좋아하여 이치에 통달하여 마침내 교만하고 게으르고 사치하고 경박한 습관이 없었다. 아침 저녁마다 정성(定省)할 제 주옥(珠玉)이 서로 연하듯 하고 기러기 줄처럼 차례로 들어가니, 나라 사람들이 다 그 종사(螽斯)인지(麟趾)의 경사 있음을 감탄하였다. 처음 태종께서 지(禔)를 밖으로 내쳤으나 세종께서는 때없이 불러 보셨고, 마침내 서울로 돌아오게 하시고 친애하여 혐의 없으시니, 여러 신하들이 굳이 간하여 불가하다 하였으나 듣지 아니하셨다. 두 형을 섬기고 여러 아우를 대접함에 우애의 정을 다 하시고 종실의 여러 친족에게도 자주 회견하고 술을 내려 즐기시고, 유복(有服)의 친척은 모두 재능에 따라 직을 주시고, 촌수 멀고 먼 곳에 사는 사람이라도 역시 부역을 면제하여 생각해 주셨다. 외척에 이르기까지도 대우함이 또한 마땅함을 얻었었다. 또 종학(宗學)을 설치하여 태조의 자손으로 종적(宗籍)에 속해 있는 자는 다 글을 배우게 하니, 교양의 방법이 지극하였다. 여러 신하를 예로써 대우하시고 착한 이를 가상히 여기시고, 능하지 못한 이를 불쌍히 여기시어, 중한 형벌을 받은 자가 없었다. 환관의 무리에게는 엄숙하게 임하여 일의 권한을 맡기지 아니하였다. 사대(事大)의 예는 지성에서 나와 무릇 바치는 문서와 토산물은 몸소 스스로 살피지 아니함이 없었으므로 여러 황제가 사랑하고 돌보아 물품을 하사한 것이 융숭하고, 가상히 여겨 포장하는 말이 전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왜국이 보배를 바치고 야인들이 예물을 가지고 와 남으로부터 오고 북으로부터 와 꼬리를 물어 끊어지지 아니하여, 높이고 친하고 감격하여 추대함이 마음속으로 감복한 데서 나왔다. 전주(銓注 인물을 전형하여 적재 적소에 배치하는 것)ㆍ출척(黜陟)의 법을 세웠으되 지극히 자세하고 지극히 구비되니, 요행으로 자리를 얻는 것은 자취를 감추고, 현량(賢良)이 나아와 쓰이게 되었다. 수령(守令)이 하직할 적에는 인견하시고 백성을 구제하는 정사를 하도록 타이르시니 사람마다 스스로 힘썼다. 농상(農桑)에 유의하여 책을 만들어 권유하고, 밭 가는 것을 살피고 거두는 것을 보니 사람들이 농사짓기를 즐겨 하였다. 손실(損實 감하고 채움)의 폐단을 개혁하여 공법(貢法 세 바치는 법)을 정하고, 농토를 여섯 등급으로 나누고, 농사를 아홉 등급으로 나누어서 그 세(稅)를 올리고 내리게 하여 삼대(三代) 즉 하(夏)ㆍ은(殷)ㆍ주(周)의 공(貢)철(徹)의 법을 복구하였다. 유사에게 명하여 종(鐘)과 경쇠를 만들게 하여 율관(律管)을 불어 음성을 조화하게 하니 아악이 일신되었다. 회례(會禮)에 쓰던 여악(女樂)을 처음으로 철폐하였다. 또 조종(祖宗)의 공덕을 서술하여 정대업(定大業)ㆍ여민락(與民樂) 등의 악장(樂章)을 지으시니 소리와 의식(儀式)의 아름다움이 지극하였다. 《당속악보(唐俗樂譜)》를 만들어 느리고 빠른 음조를 고르게 하여서, 사람마다 악보만 있으면 악사에게 번거롭게 배우지 않아도, 모든 음악이 각각 바름을 얻게 되었으니 또한 옛날에 없던 일이다. 고금의 예설(禮說)을 참작하여 오례의(五禮儀)를 정하니 정(情)과 문(文 의식(儀式))의 갖춤을 극진히 하였다. 처음으로 양로연(養老宴)의 예를 설정하여 남자면 친히 임석하시고, 여자면 왕비가 친히 대접하고, 주군(州郡)에 있는 노인은 수령이 친히 대접하도록 하였다. 백 세 이상의 노인은 달마다 술과 고기를 보내고, 80이상의 늙은이에게는 1작(爵)을 주되 차등이 있게 하니, 이에 은혜가 미치지 아니함이 없었다. 재변을 만나매 하늘을 두려워하고 흉년을 구제하고 백성을 가엾이 여기는 데 진심진력하였으니, 모두가 실지를 일삼고 겉치레를 하지 않은 것이다.《칠정내외편(七政內外篇)》을 편찬하고 여러 의상(儀象 천문 관측기)과 규표(圭表 해시계) 및 흠경(欽敬)ㆍ보루(報漏) 등의 각(閣)을 지었다. 혼상(渾象)ㆍ성구정시의(星咎定時儀)ㆍ앙부의(仰釜儀)ㆍ한양일출입분(漢陽日出入分)은 다 스스로 창제한 것이니, 이에 천문 역수(曆數)가 비로소 틀림이 없게 되었다.《삼강행실(三綱行實)》을 편찬하여 풍속을 격려함이며,《명황계감(明皇戒鑑)》을 지은 것은 안일하고 향락(享樂)에 빠짐을 막음이요,《통감훈의(通鑑訓義)》와《치평요람(治平要覽)》을 편찬한 것은 역대의 흥망을 보게 한 것이요, 《역대병요(歷代兵要)》를 편찬한 것은 평화한 때에도 싸움을 잊지 않게 한 것이요 의약(醫藥) 제서(諸書)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교정하여 새 것처럼 하였다. 주자(鑄字)와 기리고(記里鼓)의 유에도 매우 유의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진설(陣說)을 지어 진법 일으키는 것을 사열하고, 전함(戰艦)을 더욱 수리하고 화통(火筩)을 더 제조하고, 성곽을 수리하고, 갑병(甲兵)을 훈련하니 무비(武備)가 엄하여졌다. 법률이 밝고 옥사를 다스림이 공평하매 형벌이 맑아졌고, 술을 경계하고 형벌을 가엾이 여기어 모두 교서를 내려 관리를 단속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비록 백공 기예(百工技藝)라 하여도 다 그 능력을 정밀하게 하였다. 상림원관(上林園官) 갖추기를 청하였더니 하교(下敎)하기를, ‘내 천성이 화초를 좋아하지 아니하니 유사(有司)는 마땅히 실지에 힘쓸지어다. 뽕나무ㆍ닥나무ㆍ과일나무는 모두 일상 생활에 요긴한 것이니, 너희들은 지금 이후로는 이것으로써 직책을 삼음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일찍이 대신에게 이르기를, ‘옛날의 역사를 보니 태평한 세상에도 오히려 임금의 옷 자락을 잡아당기며 간절히 간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제 비록 조금 편안하다 하나 아직 옛날에 미치지 못하는데 곧은 말하는 사람 있음을 보지 못하겠음은 어쩐 일인가.’ 하고 항상 마음을 열고 간함을 구하며 신하들로 하여금 할 말을 다하게 하였는데, 힘써서 말이 비록 이치에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죄주지 아니하고, 큰일, 작은 일 할 것 없이 반드시 대신과 의논한 뒤에 행하신 까닭으로 잘못된 처사는 없었다. 경태(景泰) 원년 경오 봄 2월에 병이 드시매, 의원은 그 기술을 다하였고, 신에게 두루 빌었으나 끝내 효험 없어 17일 임진에 별궁(別宮)에서 돌아가시니 춘추(春秋)가 54세요, 왕위에 계시기 33년이었다. 신하들과 백성들이 은택을 흐뭇하게 입어 모두, ‘대덕(大德)은 반드시 장수하심을 얻어 길이 만년을 누릴 것이다.’ 하였더니 문득 만백성을 버리시니, 아, 슬프다. 대소신료(大小臣僚)와 하인 종에 이르기까지도 실성 통곡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었다. 금상 전하께서 유명을 받들어 재궁(梓宮) 앞에서 즉위하시고 거상(居喪)에 예를 다 하시었다.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책보(冊寶)를 받들어 영문 예무 인성 명효 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의 시호를 올리고, 묘호(廟號)를 세종(世宗)이라 하였다. 여름 6월 12일 갑신(甲申)에 영릉의 서실(西室)에 합장하니 유명(遺命)이었다. 명나라에 부고를 전하매 천자가 매우 슬퍼하고 사신을 보내어 제사를 내렸다. 또 고명(誥命)을 내려 장헌(莊憲)이라 시호를 주고, 우리 전하에게 부의를 특히 후히 주고 왕위를 이에 책봉하고 곤면구장(袞冕九章)을 주고 왕비에게는 관복(冠服)을 주었다. 우리 전하에게 주신 고명에 대략 이르기를, ‘고(故) 조선국왕 이모(李某)는 자애하고 은혜스럽고 겸손하며, 공순하고 총명하고 특달(特達)하여, 선을 즐기고 이치를 따라 터럭같이 작은 일이라도 조심하고, 하늘을 공경하고 상국(上國)을 섬기기를 한결같이 정성스럽게 했으므로, 인후(仁厚)한 덕이 나라 사람에게 믿어지고 공이 변경에 나타났다. 조선이 나라가 생긴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왕과 같은 이는 드물었다. 너 이모(李某)는 바로 그 세자(世子)로 충효에 정성스럽고 공경하고 조심하여 게으르지 아니하니 순서로나 덕으로나 마땅히 왕위를 계승해 받아야 한다. 충성하고 효도하여 길이 아버지의 행실을 따를지어다.’ 하였다. 대체로 우리 세종의 거룩한 덕이 사해(四海)에 빛나고, 천조(天朝)에 들린 까닭으로 종시 애영(哀榮)의 은전이 이와 같이 지극하였으니, 아, 성대하도다. 왕후의 성은 심씨로 청송(靑松)의 이름난 집이다. 증조 휘 용(龍)은 고려 문하시중 청화부원군(門下侍中淸華府院君)에 증작되고, 할아버지 휘 덕부(德符)는 고려 공민왕을 섬기어 두 번 문하시중이 되고, 우리 공정왕(恭靖王) 조에 이르러 문하좌정승이 되어 청성백(靑城伯)에 봉하였고, 아버지 휘 온(溫)은 영의정부사 청천부원군(領議政府事靑川府院君)에 봉하였다. 어머니 안씨(安氏)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봉하였는데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천보(天保)의 따님이다. 후께서는 나면서부터 착하고 아름다웠다. 태종께서 잘 골라 뽑아와 빈(嬪)이 되어 경숙옹주(敬淑翁主)에 봉하였는데. 양궁(兩宮)을 공경히 섬기어 은총을 두텁게 받았다. 세종께서 왕세자로 봉해지자 후는 경빈(敬嬪)으로 봉하였고, 세종이 즉위하자 후는 봉하여 공비(恭妃)가 되었다. 선덕(宣德) 임자년에 예관(禮官)의 말을 좇아 공(恭)이란 미칭(美稱)을 버리고 왕비라고 고쳐 봉하였다. 후는 정숙한 덕이 있어 세종께서 잠저에 계실 때에 왕후가 나고 드는 때에 반드시 일어서서 깊이 경례를 하였다. 중궁(中宮)이 되매 여러 번 천조의 상사(賞賜)를 받았다. 왕후는 빈과 첩들을 예로써 대접하고 아래로 시녀에 이르기까지도 다 은혜를 베풀었으며, 서출자(庶出子)도 다 자기가 낳은 아들과 같이 여기어 어루만지고 사랑하였다. 임금에게 수라를 올릴 적에는 반드시 몸소 임하여 살펴보며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다. 경계를 드리는[進戒]도움이 있고 사사로 청하는 일은 없었다. 궁중이 바르니 덕화가 나라에 흘러 멀리 태사씨(太似氏 주 나라 문왕의 비)의 풍을 따르셨다. 정통(正統) 병인년 봄에 병을 얻으니 세종께서 밤낮 친히 돌보고 우리 전하께서는 곁에 모시어 탕약을 받들었으나 3월 24일 신묘에 돌아가시니 향년이 52세였다. 시호를 소헌(昭憲)이라 하고 7월 19일 을유에 영릉 동실에 장사지냈다. 왕후는 8남 2녀를 낳으시니 큰아들은 바로 금상 전하이고, 다음은 세조 유(瑈)이니 수양대군(首陽大君)에 봉하고, 다음은 용(瑢)이니 안평대군(安平大君)이요, 다음은 규(璆)이니 임영대군(臨瀛大君)이요, 다음은 여(璵)이니 광평대군(廣平大君)으로 먼저 죽고, 다음은 유(瑜)이니 금성대군(錦城大君)이요, 다음은 임(琳)이니 평원대군(平原大君)인데 또한 먼저 죽었다. 다음은 염(琰)이니 영응대군(永膺大君)이다. 장녀는 비녀를 꽂지 못하고 죽었는데, 정소공주(貞昭公主)라 증(贈)하고, 다음은 정의공주(貞懿公主)로 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聃)에게 하가(下嫁)하였다. 신빈(愼嬪) 김씨가 여섯 아들을 낳았으니, 장남은 증(贈) 계양군(桂陽君)이요, 다음은 침(琛)으로 밀성군(密城君)이요, 다음은 운(璭)으로 익현군(翼峴君)이요, 다음은 장(璋)으로 영해군(寧海君)이요, 다음은 거()로 담양군(潭陽君)인데, 복중(服中)에 죽었다. 혜빈양씨(惠嬪楊氏)는 세 아들을 낳았는데 장남은 오()로 한남군(漢南君)에 봉하고 다음은 현(玹)이니 수춘군(壽春君)이요, 다음은 천(瑔)이니 영풍군(永豐君)에 봉하였다. 숙원(淑媛) 이씨는 1녀를 낳았는데, 정안옹주(貞安翁主)로 아직 비녀를 꽂지 못하였다. 상침(尙寢) 송씨가 1녀를 낳았는데, 정현옹주(貞顯翁主)로 영천위(鈴川尉) 윤사로(尹師路)에게 하가했고, 궁인 강씨가 1남을 낳았으니, 영(瓔)으로 화의군(和義君)이다. 우리 전하의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는 증 의정부 좌의정(贈議政府左議政) 전(專)의 따님으로 1남 1녀를 낳고 돌아갔다. 아들 홍위(弘暐)는 지금 왕세자에 봉하였고 딸은 경혜공주(敬惠公主)로 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에게 하가하였다. 사칙(司則) 양씨(楊氏)가 1녀를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수양(首陽)은 증 좌의정 윤번(尹璠)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덕종인데 도원군(桃源君)이요, 나머지는 어리다. 측실(側室) 박씨가 1남을 낳았는데 어리다. 안평(安平)은 증 좌의정 정연(鄭淵)의 딸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았는데, 장남 우직(友直)은 의춘군(宜春君)이요, 차남 우량(友諒)은 덕양군(德陽君)이다. 임영(臨瀛)은 증 우의정 최승녕(崔承寧)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낳았으니 장남 주(澍)는 오산군(烏山君)이요, 나머지는 다 어리다. 광평(廣平)은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신자수(申自守)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으니, 보(溥)로 영순군(永順君)이고, 금성(錦城)은 증 좌의정 최사강(崔士康)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는데 어리다. 평원은 증 좌의정 홍이용(洪利用)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자식이 없다. 영응(永膺)은 증 좌의정 정충경(鄭忠敬)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화의(和義)는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 박중손(朴仲孫)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측실 김씨가 1남을 낳았는데 어리다. 계양(桂陽)은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한확(韓確)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는데 어리고, 의창(義昌)은 부지통례문사(副知通禮門事) 김수(金修)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는데 어리다. 한남(漢南)은 호조 정랑(戶曹正郞) 권격(權格)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는데 어리고, 밀성(密城)은 인순부 소윤(仁順府少尹) 민승서(閔承序)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고, 수춘(壽春)은 부지통례문사(副知通禮門事) 정자제(鄭自濟)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고, 익현(翼峴)은 예빈소윤(禮賓少尹) 조철산(趙鐵山)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영풍(永豐)은 사헌집의(司憲執義) 박팽년(朴彭年)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영해(寧海)는 증 좌찬성(贈左贊成) 신윤동(申允童)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정의공주(貞懿公主)가 4남 2녀를 낳았는데, 장녀는 돈녕부 승(敦寧府丞) 정광조(鄭光祖)에게 시집가고 나머지는 다 어리다. 정현옹주(貞顯翁主)가 2남을 낳았는데 다 어리다. 의춘(宜春)은 우의정 남지(南智)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신이 그윽히 생각건대 조화(造化)의 묘함은 물(物)에 나타나고, 성인(聖人)의 마음은 정신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 세종께서는 생지(生知 나면서부터 아는 것)의 성인으로 중을 세우고[建中] 극을 세워[建極] 인륜의 지극함[人倫之至]이 되시어 선왕을 잘 계승하여 제왕의 효도를 드러내었습니다. 구족(九族)이 이미 화목하매 만백성이 다 화하고, 모든 일이 다 화함에 명성이 넘쳐 흐르셨습니다. 천자가 그 충성되고 어짐을 포장하여 내려 주심이 실로 많았고, 이웃나라는 그 정성스럽고 미더움에 감복하여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서로 연달아 왔습니다. 신은 시종(侍從)하기 10년이옵고, 정부(政府)와 육조(六曹)에 출입하기 20여 년 맑은 빛[淸光]을 가깝게 모시었사온데, 참으로 지극히 광대(廣大)하시어 정미(精微)함을 다하였고, 고명(高明)을 극도로 하며 중용(中庸)으로 말미암았으니 실로 동방의 요순이옵니다. 소헌왕후(昭憲王后)는 곤후(坤厚)의 덕으로서 건강(乾剛)의 성인에 짝하시어 어머니로서의 모범을 한 나라에 보이시고 덕화가 사방에 미치었으며, 또 다남(多男)의 경사가 있어 우리 전하를 낳으시매 성덕(聖德)이 있으시어 대통(大統)을 이었습니다. 또 어관(魚貫)의 사랑을 이루시고 종우(螽羽)와 같이 자손이 많으셨습니다. 참으로 하늘이 내신 배합이요, 주나라의 태사(太姒)와 짝할 만합니다. 신은 필력이 거칠고 옹졸하여 성하고 아름다움을 칭송할 수 없사오니, 천지의 큼을, 그리고 일월의 밝음을 칭찬하는 데 충분하지 아니하옵니다. 그러나 명을 받자옵고 감히 사양하지 못하여 삼가 머리 조아려 절하옵고 명(銘)을 드리나이다.
‘순임금은 요임금을 이어, 거듭 빛내고 진실로 요의 덕에 맞았네. 무왕은 문왕을 이어, 왕업을 창성하게 하였네. 덕이 성한 이는 제(帝)가 되고, 공이 높은 이는 왕(王)이 되네. 빛나는 문채가 있어, 곧 밝은 빛을 주셨도다. 어진이에게 주고 아들에게 줌은 하늘이 진실로 명함이요, 혹 선위(禪位)하고 혹 계승함은 오직 공(公)이요 사(私)가 아니네. 생각건대 우리 세종은 하늘이 내신 생지(生知)이시고, 효제(孝悌)의 성품이요 충신(忠信)의 자질이시네. 학문을 좋아하시어 게으르지 아니하시니, 주공(周公)의 뜻이며, 공자(孔子)의 생각이로다. 밝고 밝은 태종은 오직 미묘하고 깊으셨네. 어두운 이를 폐하고 덕 있는 이를 명하시니, 요 임금과 문왕의 마음이로다. 천자의 조정에 아뢰니 황제의 허락이 내리셨네. 부지런하다가 지치시어 이에 왕위를 물려 주셨네. 천자가 책명(冊命)을 내리어 사신이 드디어 이르렀고, 천자가 연회를 내려 주시어 주행(周行 대도(大道))을 보이셨도다. 도가 그 몸에 쌓이어 총명하고 슬기롭네. 밤에 일어나고 늦게 잡수시며, 정성을 쏟아 다스림을 도모하시어 받은 책임을 능히 하시니 부왕께서 기뻐하셨도다. 양궁(兩宮)을 즐겁게 받드시며 기쁜 안색이요, 화한 얼굴이었네. 용루(龍樓)에서 문안드리매 더욱 정성되고 더욱 공손하셨도다. 상사에는 슬픔을 다 하시고 제사에는 정성을 다하셨네. 하늘이 감로(甘露) 내려 그 신령함을 밝히셨네. 궁중에선 화합하여 은혜가 치우침이 없으시고, 가법이 바르매 사람이 이간할 수 없었도다. 백형이 밖에 있으매 와 보기를 자주 하게 하고 얼마 후에 서울로 불러와서 우애함이 더욱 도타우셨도다. 효도를 미루어 우애하매 이에 형제가 화락하고, 화악(華萼)이 서로 즐기는 것은 서로 빛났고, 구족(九族)에 미치기까지 은택을 베풀었도다. 진진(振振 떼지어 나는 모양)한 자손은 선선(詵詵 많은 모양)한 메뚜기로다. 의방(義方)으로 가르치니 서(書)를 읽고 시를 외우네. 등급이 분명하였고, 적서(嫡庶)가 분수 따라 뭇 신하를 예우하여 형벌을 가하지 아니하였도다. 지성껏 대국을 섬기니 천자가 가상히 여겨 포장하셨도다. 무엇을 주셨는가. 조환(絛環)과 보도(寶刀)로다. 또 무엇을 주셨는가. 곤룡포(袞龍袍)로다. 예로써 이웃을 사귀매 이웃나라가 친하고 화하도다. 산을 넘고 바다 건너 예물을 가지고 오니 만 리가 한 집이로다. 백성이 이미 잘 살고 번성하매 인의(仁義)로 점점 교화시켰네. 인에 그치고 효에 그치고 공경에 그치고 믿음에 그치셨도다. 중을 세우고 화(和)를 극도로 하니 인륜(人倫)이 요순(堯舜)이로다. 임관(任官)하는 법이 정하고 자세하매 요행을 바라는 자가 자취를 감추었도다. 어진이에게 직책을 맡기고 능한 사람을 부리니 각각 그 직책에 알맞았네. 전제(田制)를 이미 정하니 교활한 아전이 손을 움츠리고, 걸(桀)도 아니며 맥(貊)도 아니매 세 받음이 어김없었네. 처음으로 의상(儀象 관측기)을 만드시고 다음으로 율력(律曆)을 정하시어 오례(五禮)를 손익(損益)하시니 정(情)과 문(文)이 극진하였도다. 음악의 소리와 의식을 새로이 하시어 조종의 공덕을 칭송하였네. 모임에 아악(雅樂)을 쓰고 비로소 여악(女樂)을 물리치고, 양로연(養老宴)에 친히 임하시어 매년 가을로서 정식을 삼으셨네. 서사(書史)를 편찬하여 정치의 득실을 거울삼고, 훈민정음을 제정하여 누속(陋俗)을 씻으셨도다. 공물(貢物)에 토산만을 하기로 천자의 칙서를 받았고 천자가 세자에게 칠장면복(七章冕服)을 내리니 온 나라에 빛이 났도다. 모든 시설하신 것이 자손에게 전할 만한 것 아님이 없었네. 진(鎭)을 북방에 설치하니 옛 강토 회복되었도다. 위엄과 덕이 멀리 덮으니 복종하지 않는 곳이 없었네. 군사가 북을 가리키매 적의 괴수 주둥이로 숨 쉬었네[喙息]. 바로 소굴(巢窟)을 치니 저 스스로 전복되었고, 글월 한 장을 남으로 보내니 왜놈들이 항복하였네. 명 나라 서울로 보내어 처단받게 하였도다. 편안할 때에도 위태로움을 잊지 아니하시고, 다스려질 때에 어지러운 것을 잊지 아니하셨네. 성과 보루(堡壘)는 험한 데 의거하였고, 창과 칼을 준비하였네. 전함(戰艦)을 새로 만드니 견고함이 철석같아 화통(火筒)이 틀에서 발하매, 빠르기 벽력같아서 군자(軍資)와 기계가 전보다 훨신 충실하였네. 호생(好生)의 마음으로 더욱 죄인을 불쌍하게 여기시니, 형벌이 공평하여 사람들이 억울함이 없었네. 백공기예(百工技藝)도 모두 법칙에 맞았네. 완호(玩好)를 좋아하지 아니하시고, 질실(質實)함을 위주하셨네. 더욱 겸손하여 바른말 구하기를 목마른 것같이 하셨으니, 높으신 덕이요 빛나는 문채로다. 이름할 수 없는 거룩함이요, 막대(莫大)한 공(功)이로다. 우(虞) 나라 주(周) 나라와 더불어 짝하겠고, 한 나라와 당 나라에서도 듣지 못하던 것이었네. 33년간 부모 되고 임금 되시었네. 하늘이 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여 문득 신민(臣民)을 버리시니, 멀고 가까운 데에서 슬픔에 얽혀, 애모(哀慕)하기 어버이같이 하네. 우리 임금이 위(位)를 이으시매 지극한 효도가 천성에서 나오시니, 밝음으로 밝음을 이으시고 성인으로 성인을 이으셨도다. 장사의 상제(喪制)는 모두 유명(遺命)에 따르셨네. 천자가 조상을 하며 제(祭)를 내리고 뇌사(誄詞) 지으셨네. 절혜(節惠 시호)로 이름을 정하여 아름다운 시호를 내리셨네. 후한 부의(賻儀)가 또한 이르러 은전을 베푸셨네. 왕작(王爵)을 잇게 하고 면복(冕服)을 주시었네. 내리심이 왕비에까지 미치어 구슬관과 유적(褕翟 꿩의 깃으로 꾸민 왕비의 옷)이로다. 천자의 은혜가 실로 두텁네. 공손히 생각건대, 왕후는 하늘의 아가씨에 비하겠네. 왕가에 시집오시어 궁중의 정위(正位)에 앉으시니 태사(太姒)의 덕으로, 문왕의 짝이로세. 성주(聖主)를 낳으시니 나라 운수 더욱 성하도다. 곧 많은 아들 두어서 인지(麟趾)를 읊었도다. 실로 우리 동방에 억년의 경사였네. 아, 선왕의 거울 잃음을 탄식하시더니 다섯 돌이 못 되어 세종이 문득 돌아 가셨도다. 능을 만들어 같은 궁(宮)에 실(室)은 다르네. 우러러 일각(日角)을 생각하오니 오장이 아프고 찢어지네. 오직 이 거룩한 덕이 만대에 한결같으리. 삼가 대략을 기록하여 절하옵고 명사(銘詞)를 드리나이다. 하늘처럼 길이 가고 땅처럼 오래 가도록 한없이 빛나오리.’” 하였다.
이인손(李仁孫) 묘(墓) 주 서쪽 15리에 있다. 이계전(李季甸) 묘(墓) 주 서쪽 25리에 있다.
【고적】 천녕폐현(川寧廢縣) 본래 고구려 술천군(述川郡)인데 일명 성지매(省知買)이다. 신라 때 기천(沂川)으로 고쳤다가, 고려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顯宗) 9년에 광주(廣州)에 소속시키고,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 태종조에 예에 따라 현감(縣監)으로 했다. 예종조에 이것을 폐하고, 주에 병합하여 직촌(直村)이 되니 주 서쪽 25리에 있다. 고산성(古山城) 주 북쪽 53리에 있다. 석축으로 주위는 3만 8천 8백 25척이다. 마암(馬巖) 주 동쪽 1리에 있다. 속담에 전하기를, “황마(黃馬)와 여마(驪馬)가 물에서 나왔기 때문에 군을 이름하여 황려라 하였다.” 한다. 바위가 마암으로 이름을 얻음도 이때문이라 한다.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웅건하고 기특한 쌍마(雙馬)가 물가에서 나오매, 현 이름을 이로부터 황려라 하였네. 시인은 옛것을 좋아하여 번거로이 증거를 캐물으나, 오 가는 고기잡이 늙은이야 어찌 알리.” 하였다.
사우당(四友堂) 마암(馬巖)에 있다. 임원준(任元濬)이 당(堂)을 짓고, 이름을 사우(四友)라 하였다. ○ 서거정(徐居正)의 기문에, “여강(驪江) 물은 월악(月岳)에서 근원하여 달천(獺川)과 합하여 금탄(金灘)이 되고, 앙암(仰巖)을 거쳐 섬수(蟾水)와 만나 달려 흐르며 점점 넓어져 여강(驪江)이 되었다. 물결이 맴돌아 세차며 맑고 환하여 사랑할 만하다. 강 서쪽에 마암이 있는데 크고 넓고 높고 험하며 기이하고 뛰어났다. 물은 맑아서 황려 일주(一州)가 크게 힘입었다. 이 바위의 이름은 이로 해서 났다. 좌우로 두른 장림(長林)ㆍ대야(大野)와 양전(良田)ㆍ옥양(沃壤)이 멀리 수백 리에 가득하며, 벼가 잘 되고 기장과 수수가 잘 되고, 나무하고 풀 베는 데 적당하고, 사냥과 물고기 잡기에 적당하여, 모든 것이 자족(自足)하다. 멀리 바라보면 치악산ㆍ용문산 여러 산이 푸르게 뾰족히 솟아 연운(煙雲)의 아득한 사이에 출몰(出沒)하여 기상이 여러 가지로 변하니, 참으로 이른바 명구승지(名區勝地)인데, 서하(西河) 임 선생(任先生)의 별장이 있다. 선생이 일찍이 한 당(堂)을 짓고 사우(四友)라 편액(扁額)을 달았는데, 경(耕)ㆍ목(牧)ㆍ어(漁)ㆍ초(樵) 네 벗이란 뜻에서 취한 것이다. 요즈음 나에게 기문을 부탁하였다. 내 생각건대, 들에서 밭 갈고, 들에서 소 먹이고, 숲에서 나무하고 물에서 고기 잡는 것은, 모두 산림(山林)에 고상하게 숨어 사는 사람이 즐거워하는 것인데, 선생은 공명부귀의 성(盛)함으로서 헌면(軒冕 귀인이 타는 수레와 쓰는 갓)ㆍ규조(圭組 홀과 인끈)의 영화를 누려 성심(聖心)의 돌보심이 쏠리는 바 되고, 세상 의논이 중히 여겨 의지한 바로서, 이 네 가지 벗이 될 수 없는데, 이제 다시 이것을 취함은 무슨 까닭인가. 산림이거나 들이거나 처해 있는 곳은 비록 같지 아니하나, 취미를 붙인 것은 같지 아니함이 없는 것이다. 조정에 있어서는 강호(江湖)를 생각하고, 번화를 싫어하며, 한적(閒適)을 즐겨함은, 달인(達人) 군자의 취미가 본래 이와 같은 것이다. 선생이 비록 공훈이 높고 명망이 중하나 겸손하고 지족(止足)의 경계를 거울삼아 용퇴(勇退)하고자 마음을 가진 지가 하루가 아니었다. 더욱 여주의 별장은 바로 선생의 청전(靑氈 세업(世業))으로 선산이 있는 곳인데, 서울과의 거리는 겨우 이틀의 길 밖에 되지 않는다. 선생께서 공무의 틈을 얻어 아름다운 때와 절일이면, 오가며 성묘(省墓)하여 소와 양을 잡아 제사를 드려 조상에게 정성을 다하고, 물러와서는 고향의 부로(父老)들과 조용하게 웃고 이야기하며 밭가는 이에게는 심고 거두는 방법을 묻고, 목자에게는 사육(飼育)하는 방법을 이야기하고, 나무하는 사람에게는 벌목편(伐木篇)을 노래하고, 고기잡이하는 이에게는 호량(濠梁)의 취미를 논하고 기뻐하여, 담박(淡泊)한 것으로 더불어 사귀고 적막한 것으로 더불어 벗한 것같다. 벗할 것이 부족하여 그 당(堂)을 이름하고, 그 당을 이름하고는 기문을 저술하였다. 그 벗함은 안면으로 함이 아니라 마음으로 함이다. 대체로 벗이란 것은 그 덕을 벗하는 것으로서 그 벗을 취하는 것이 하나가 아니다. 옛 사람을 벗하는 사람도 있고, 한 세대의 어진 사람을 벗하는 사람도 있고, 한 고을의 선비를 벗하는 사람도 있다. 옛을 벗하고 한 세대의 어진이를 벗하는 것은 일찍기 그런 사람이 있음을 들었거니와, 능히 높은 선비, 경목초어(耕牧樵漁) 같은 이를 벗하여 유익한 도움이 되어 오랠수록 공경함은 선생에게서 보았다. 아, 선현이 말씀하기를, ‘친족을 친한 뒤에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을 사랑한 뒤에 물건을 사랑하라.’ 하고, 또 말씀하기를, ‘백성은 우리 동포요, 물건은 나와 한편이다.’ (장자(張子)의 말) 하였은즉, 군자의 벗을 취함이 의당 먼저 사람에게 하고, 뒤에 물건에 하는 것이다. 두루 고금의 고상한 사람과 운치있는 선비들을 보건대, 도연명(陶淵明)은 국화를 벗하고, 왕자유(王子猷)는 대를 벗하고, 윤화정(尹和靖)은 매화를 벗하고, 주염계(周濂溪)는 연꽃을 벗하여, 혹은 그 향기로운 덕을 취하고, 혹은 그 맑은 절개를 취하였으니, 마음으로 벗하여 물건과 나를 간격(間隔)이 없게 한 것이다. 근자에 김선생 경지(敬之)가 여강(驪江)에 계셔 그 당(堂)을 이름하여 사우(四友)라 하였으니, 이것은 설(雪)ㆍ월(月)ㆍ풍(風)ㆍ화(花)를 위한 것이었는데, 뒤에 강(江)ㆍ산(山)을 더하여 육우(六友)로 하였다. 그 벗함이 어찌 뜻이 없겠는가. 그러나 그 숭상하는 것이 다 선생이 벗한 바가 인륜 일용(人倫日用)의 떳떳한 데 있고, 형색(形色)이 완호(玩好)한 데 있지 아니한 것만 같지 못하니, 벗을 취하는 도리가 이에 극진하였다. 거정(居正) 또한 사가(四佳)로써 정자에 이름하였는데, 사가는 춘하추동을 이름이니, 원(元)ㆍ형(亨)ㆍ이(利)ㆍ정(貞)에 군자의 사덕(四德)이 갖추어 있다. 거정이 사덕 군자의 뒤를 따라 위로 옛 사람을 벗[尙友]하고자 한 것이 그 넷을 벗한 까닭이니, 마땅히 선생에게 사양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선생도 또한 취함이 있으실런지. 만일 취함이 있을 것같으면 선생과 다시 이것을 의논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침류정(沈流亭) 천녕(川寧) 금사리(金沙里)에 있다. ○ 이색(李穡)의 기(記)에, “염동정(廉東亭 이름은 흥방(興邦))이 귀양살이 할 때, 안으로 천녕현(川寧縣)에 옮기어 물에 걸쳐 정자를 짓고, 그 위에서 노닐며 쉬었다. 인하여 수석침류(漱石枕流)의 말을 취하여 이름을 지었더니, 이미 풀려서 돌아오매 나에게 기(記)를 청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동정(東亭)은 선왕에게 알아줌을 만나 검은 머리로 젊었을 때 재상이 되었으니, 금상(今上)에게 갚음을 도모할 바를 다시 더 말하여 무엇하랴. 말함은 혐의됨을 피하지 못하고, 일은 어려운 것을 사양하지 아니하여, 더럽고 탁한 것을 용납하고 흔들리고 격동하는 것을 진정하여, 굳센 기운은 금석보다 더하고, 충성은 귀신을 움직였으니, 확고하여 흔들 수 없다고 이를 만하다. 비록 밖에 쫓겨 나왔으나 몸을 보존하고 생명을 온전히 하여 산수의 즐거움이 평일의 소원을 갚았고, 임금께서 보전하게 하여주니, 은혜가 하늘과 같다. 밥먹고 숨쉬는 동안에도 감히 강호의 먼 데 처해 있는 까닭으로 해서 임금을 근심함을 잊지 못할 터인데, 어찌하여 정자에 이름한 것은 이와 반대되는가. 앞으로 시냇물에 귀를 씻어 세상 일을 듣기를 원하지 아니하려 함인가. 앞으로 그 몸만을 깨끗이 하여 세상의 누(累)가 미치지 않게 하려 함인가.’ 하니, 동정이 말하기를, ‘그렇지 아니하다. 대체로 물의 성질은 맑은 것이라, 그 기운이 사람에게 닿으면 뼈에 사무치게 찬 것입니다. 마음의 혼탁함이 이에 맑고 밝아지고, 마음의 흔들림이 이에 고요하여 안정하고, 상제(上帝)를 섬길 수 있고, 사령(四靈)을 이르게 할 수 있다. 이러므로 천일생수(天一生水)하며 오행(五行)의 장이 되었다. 만물이 번식하는 소이는 다 물의 공인 것이다. 이제 사람들이 아침 저녁으로 남의 집에 문을 두들겨 물과 불을 구함은 무슨 까닭인가.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하루라도 없으면 사람이 그 생명을 보전할 수 없으니 공이 큰 것이다. 흐름을 베개한다[枕之]는 것은 물과 친할 뿐이요,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내가 물에 취하는 소이이다. 다행히 자네는 나의 말을 다 풀이하여 주게.’ 하였다. 내 일찍이 들으니, 천지 사이에 물이 큰 것이 된 까닭으로 땅은 물 위에 있어 물에 실려 있는 것이 되는데, 대체로 형색(形色)을 가지고 천지 사이에 나서 모인 것은 다 물을 베개하니, 홀로 사람에게 뿐이랴. 이제 저 산이 높이 솟고 커, 위로 하늘에 닿았고, 금수초목이 산을 의지하여 산다. 비록 비와 이슬의 적셔줌이 있다 하나 진실로 물기가 그 사이에 통하지 아니한다면, 장차 무엇으로 그 생(生)을 이룰 것인가. 더욱 평원(平原)ㆍ거야(鉅野 대야(大野))ㆍ단록(斷麓)ㆍ평림(平林)에 물이 나옴은 필연이다. 그래서 사람이 거처하는 데 물이 없는 땅이 없고, 사람이 먹 는데 물이 없으면 물건이 없을 것이니, 물과 사람이 잠깐 동안이라도 떠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동정(東亭)이 거이 양이(居移養移)하여 식견이 일세에 높아 부귀(富貴)했으며 환란에 처했으니, 대체로 환란에 행하여 자득(自得)한 것이 깊다. 나는 구름이 흩어지면 달이 나오고, 물이 흐르면 바람이 일어 나는 줄 안다. 동정(東亭)은 초연(超然)이 독립하였으니 더욱 어찌 부귀와 환란이 그 마음을 움직이랴. 그래서 이 정자야말로 하늘이 동정에게 더욱 후하게 한 것이다. 동정이 다시 조정에 올라 사방에 고루 베풀어,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번열(煩熱)을 씻고 정신을 통하여 임금의 덕에 기뻐 뛰게 함인즉, 하늘에 매여 있는 것이다. 이것으로 기를 삼는다.” 하였다.
○ 고려 염흥방(廉興邦)의 시에, “시와 술로 즐거이 놀음이 백년 가까운데, 옛 사람 남기신 자취 임천(林泉)에 있구나. 홍진(紅塵) 10년에 은대(銀臺)의 영광이여, 이암(伊菴)에 한 번 취하여 자는 것과 어찌 같으리.” 하였다.
○ 금사거사(金沙居士)의 침류정에는, “버들 그늘이 짙으매 더운 기운이 가시네. 귀를 씻으니 속세의 일이 들리지 아니하는데, 졸졸 흐르는 것은 단지 작은 시내 소리뿐이네.” 하였다.
○ 또, “보리 언덕은 높고 낮고 물은 못에 가득한데, 쓸쓸한 마을이 적적하게 강가에 있네. 속세에서 남으로 북으로 다니던 시끄러운 일을, 모래 가 흰 새에게 말하여 알리노라.” 하였다.
○ “여강은 넓고 아득하여 용문산을 둘렀는데, 언덕 맞은편에 고기잡이 등불에 먼 마을 있음을 알겠네. 농사꾼이 밤에 돌아오매 잔소리 없고, 다만 곡식이 들에 가득하길 빌 뿐이네.” 하였다.
○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멀리 남국에 놀음이 이미 3년인데, 깃발을 예천(醴泉)에서 금사로 옮겼네. 이암(伊菴)의 유적이 있으니, 침류정 위에서 책을 베고 조노라.” 하였다.
○ 또, “못을 파고 버들을 심고 초가 정자를 지었으니, 푸르름이 축축하여 개이려 하지 않네. 문득 은대(銀臺)에 놀던 화월(花月)의 꿈을 깨니 녹음에서 가끔가다 꾀꼬리 소리 들려오네.” 하였다.
○ 또, “꿈은 아직도 봉황지(鳳凰池)를 싸고 도는데, 집을 구하고 밭을 구하여 푸른 물가를 찾았네. 구차스럽게 성자(姓字) 감출 것 없으니, 금어초목(金魚草木)이 이미 알고 있네.” 하였다.
○ 또, “조각배 짧은 노로 가시사립 두들기니, 비오는 밤에 도리어 물 위 마을이 아득하구나. 묻노니 금사가 어느 곳이뇨. 등불이 숲을 격한 언덕에 깜박거리네.” 하였다.
육우당(六友堂) 천녕현에 있다.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이 여강에 귀양와서 당(堂)을 짓고 육우(六友)라 이름하였다. 이색(李穡)의 기에, “영가(永嘉) 김경지(金敬之)가 그 당을 이름하여 사우(四友)라 하였으니, 대체로 강절선생(康節先生 송대의 철학자 소옹(邵雍))의 설월풍화(雪月風花)를 취한 것이다. 나에게 그 뜻을 설명하기 청하나, 그것을 배우기 원하지 아니하고, 또 겨를이 없어 응하지 못함이 오래 되었다. 그가 여흥(驪興)에 있으면서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지금 우리 외가에 있는데, 강산의 아름다움이 나를 조석으로 위로하는 것이, 홀로 눈ㆍ달ㆍ바람ㆍ꽃만이 아닌 까닭으로, 여기에 강산을 더하여 육우(六友)라 하였으니, 선생은 가르침을 주십시오.’ 하였다. 내 말하기를, ‘내가 쇠하여 병든 지 오래였다. 위로 천시(天時)가 이변하여도 내 모르고, 아래로 지리(地理)가 허물어져도 내 모를 뿐이다. 강절(康節)의 학문은 수리(數理)에 깊은 것인데, 이제 비록 강산 두 자로써 그 위에 더 써서 강절과 같지 아니함을 보인다. 그러나《역(易)》의 육룡(六龍)ㆍ육허(六虛)는 강절의 학문이 나온 것이니, 이 육(六)을 또한 강절에게 돌릴 뿐이다. 비록 그러나 이미 강절의 학문을 배우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것을 버리고 어찌 말이 없겠는가. 말하자면 산은 우리 인자(仁者)가 즐기는 것이니 산을 보면 내 인(仁)을 가지고, 물은 우리 지자(智者)가 즐기는 것으로 강을 보면 지(智)가 있는 것이다. 눈이 겨울의 따뜻함을 누르는 것은, 나의 기운을 가운데 보전시키고, 달이 밤에 밝은 빛을 내는 것은, 나의 몸의 편안함을 보존함이다. 바람은 팔방이 있어 각각 철따라 나의 망녕되게 움직임이 없는 것이요, 꽃은 사시가 있어 각각 유(類)로써 모이니, 내가 차례를 잃음이 없는 것이다. 또 더욱 경지씨는 마음이 깨끗하여 한 점의 티끌도 없고, 또 사는 곳이 산이 밝고 물이 푸르르니, 밝은 거울과 비단병풍이라 일러도 욕됨이 없을 것이다. 눈은 고주사립(孤舟簑笠)에서 더욱 아름답고, 달은 높은 다락 술자리에서 더욱 아름답고, 바람은 낚싯줄에 있어서 그 맑은 것이 더욱 맑고, 꽃은 서탑(書榻)에서 그 그윽함이 더욱 그윽하여지는 것으로, 네 철의 좋은 경개가 각각 그 극치를 다하여, 강산의 사이에 경위(經緯 가로 세로)하였다. 경지는 어머니를 모시는 여가에 강에서 배를 타고 짚신 신고 산에 올라 낙화(落花)를 세고, 청풍에 서서 눈을 밟고 중을 찾고, 달을 대하여 손을 부르니 사시의 즐거움이 또한 그 극치를 다함이니, 경지씨는 일세에 독보(獨步)하는 분이다. 동지(同志)를 벗함에 있어서도 위로 옛 사람을 벗으로하니, 옛 사람을 하나 둘로 헤일 수 없는 것이요, 벗을 현금에 구하면 우리같은 이로 어찌 적다 하겠는가. 그러나 경지씨의 취한 것이 이와 같으니, 경지씨는 일세에 독보하는 분이다. 비록 그러나 천지는 부모요, 물(物)은 나와 한편이니, 어디에 가서 벗하지 못하겠소. 더욱 대축(大畜)의 산과 습감(習坎)의 물은 강습하여 많이 아는 것이랴. 참으로 나의 유익한 벗이다.’ 하고 이에 육우당기를 짓는다.” 하였다.
○ 정추(鄭樞)의 부(賦)에, “저 여강 지역을 바라보니, 새로운 당(堂)이 있어 장려하구나. 아, 탁월한 높은 사람이여, 여기에 아름다운 손을 모았구나. 그 벗함은 오직 여섯인데 보통 사람이 친할 만한 것이 아니네. 고인(高人)이 더불어 평소에 그들과 서로 알게 됨이여, 흉금이 속세의 티끌을 끊었네. 아, 아름답구나. 저 양양하게 먼 흐름이여, 흐름이 근원이 있어 쉬지 않는도다. 저 높고 아래가 두터움이여, 높으나 위태롭지 아니하여 편안한 집일세. 저 꽃다운 꽃봉우리의 찬란함이여, 속에 아름다움을 품었다가 때가 되면 피는구나. 저 달이 고움이여, 골고루 멀리 비치는구나. 손이(巽二)가 맑은 바람을 명하고, 등륙(騰六)은 곧 나쁜 것을 가리어 숨겨 주누나. 서ㆍ동과 남ㆍ북이 모두 그 어진 덕을 자랑하고 빛내누나. 손과 주인의 서로 대함이여, 어찌 웃음 소리도 하하 하는고. 주고 받는 이야기 우레 같음이여, 혹 낮을 다하고 저녁에 늦도록 하는구나. 만일 그 거처를 말하자면 태극(太極)을 집으로 하였고, 그 족속을 상고하면 육막(六幕 천지 사방을 말한다)에 두루했네. 천지가 이미 개벽됨으로부터 형상이 나타나 법도대로로다. 세속은 어두워서 늘 함께 하면서도 알지 못하는구나. 아, 나의 혼미함이여, 저 장님과 무엇이 다르랴. 아름답다, 상락(上洛)의 원손(元孫)이여, 일찍이 주역에 연구가가 있었도다. 훌륭한 벗을 알아서 굳게 맺음이여, 진심으로 얻었음이로다. 이에 육일노인(六一老人)이 있어서 그 행함이 빨라 자취 없구나. 이미 팔구(八區)를 두루 보고는 고향에 들려서 수일 동안 묵었구나. 드디어 당에 올라 손에게 읍하고, 주인을 불러 말하기를, ‘어질구나, 그대가 육을 벗함이여. 진실로 초월하여 세속에서 벗어났구나. 그러나 그 득실(得失)에 어찌 말이 없겠는가. 바야흐로 그 기둥에 의지하니 물결이 밝고, 발을 걷으니 산이 푸르구나. 봄동산에 흩어진 것은 홍록(紅綠)이요, 가을 하늘에 걸린 것은 희고 깨끗한 달일세. 바야흐로 무더울 때는 맑게 물결이 부딪치네. 겨울의 따뜻함을 누름이여, 흰 것을 뿌리누나. 이때에 혹 술을 대하며 쟁(箏)을 타고, 혹 난간에 기대어 피리소리를 듣누나. 정신이 화열하고 뜻이 맞으니 이 즐거움이 어찌 다하랴. 물에 가까이 함을 즐기면 옷이 젖고, 자주 위험한 산을 타면 나막신이 꺾어진다. 색을 너무 사랑하면 천성을 해치는 것이요, 밝음을 구경하는 것이 심하면 눈을 상하고, 시원한 것을 먹기를 좋아하면 병이 나고, 찬 것을 항상 범하면 동상(凍傷)을 입는다. 내 일찍이 공자의 말씀을 들으니, ‘친구도 충고를 자주하면 소원해진다.’ 하셨네. 그 함괘(咸卦) 동동(憧憧)함이여, 성인이 아름답게 여기는 바 아니네. 일반 사람의 정이 서로 좋아함이여, 마음이 험하여 헤아릴 수 없구나. 처음 사귀매 아교[膠漆]같이 붙었다가, 문득 노하여 눈을 흘기네. 이제 그 원인을 찾아보니, 물(物)과 내가 적이 된 까닭이네. 비록 여섯 벗이 맑다 하나 적이 되니 일반이라. 덕을 한결같이 한 대인이 있음이여, 천지를 초월하여 독립했구나. 그 등을 등지니 그 몸을 보지 못하거든, 하물며 와서 흔드는 것을 볼 수 있으랴. 어찌 그대의 여섯 벗을 버리고, 대인을 따라서 배우지 않는가. 주인이 이에 들판을 돌아보고, 빙그레 웃고 말하기를, ‘그대의 하는 말은, 내 들은 것과 다르네. 저 방(方)과 물(物)이 유(類)로 모이고, 무리로 나뉘어져서 법칙 없음이 없는 것일세. 대체로 대인의 학문은 반드시 비고 고요한데, 저 벗의 좋고 좋지 아니함은 내 자신으로부터 손익(損益)할 것이네. 그 물(物)이 없는 미묘한 진리에 돌아가 숨는 것보다, 차라리 손과 더불어 즐김이 나을 것일세.’ 하고, 이어 노래하기를, ‘달이 비침이여, 산 언덕이로다. 바람이 슬슬 불어 옴이여, 강이 스스로 물결치누나. 꽃은 말을 아는 것이 더욱 아름답고, 눈 물[雪水]은 차를 끓일 수 있네. 이에 서로 크게 웃으니, 누가 주인이고 누가 손인지 알수 없네.’ 하였다.” 했다.
방근곡처(防斤谷處) 주 남쪽 30리에 있다. 신제처(新堤處) 주 서쪽 15리에 있다. 신잉이소(新仍伊所) 주 서쪽 15리에 있다. 등신장(登神莊) 천녕현 동쪽 20리에 있다.
○ 이제 살펴 보건대, 신라에서 주군(州郡)을 건치(建置)할 때, 그 전정(田丁) 호구(戶口)가 현이 되지 못할 것은, 혹 향(鄕)을 두거나 혹 부곡(部曲)을 두어 소재(所在)의 읍에 속하게 하였다. 고려 때에 또 소(所)라고 칭하는 것이 있었는데, 금소(金所)ㆍ은소(銀所)ㆍ동소(銅所)ㆍ철소(鐵所)ㆍ사소(絲所)ㆍ주소(紬所)ㆍ지소(紙所)ㆍ와소(瓦所)ㆍ탄소(炭所)ㆍ염소(鹽所)ㆍ묵소(墨所)ㆍ곽소(藿所)ㆍ자기소(瓷器所)ㆍ어량소(魚梁所)ㆍ강소(薑所)의 구별이 있어 각각 그 물건을 공급하였다. 또 처(處)로 칭하는 것이 있었고, 또 장(莊)으로 칭하는 것도 있어, 각 궁전(宮殿)ㆍ사원(寺院) 및 내장댁(內莊宅)에 분속되어 그 세를 바쳤다. 위 여러 소(所)에는 다 토성(土姓)의 아전과 백성이 있었다. 김부식(金富軾)이 편찬한 《삼국사기》 지리지는 다시 여기에 쓸 것 없고, 정인지(鄭麟趾)가 편찬한 《고려사》에도 또한 《삼국사》를 그대로 기록하였다. 이제 저명한 성씨(姓氏)는 그 성씨의 근본되는 땅을 싣지 않을 수 없으므로 주관육익(周官六翼)에 의거하여 증거대었는데, 지금 상고할 만한 것은 겨우 열에 하나 둘이며, 모두 읍마다 고적(古跡)의 밑에 달아두었다.

『신증』 【명환】 본조 정성근(鄭誠謹)ㆍ최숙정(崔淑精) 모두 목사가 되었다.
【인물】 고려 민영모(閔令謨) 어려서 글을 좋아했고 인종(仁宗) 조에 과거에 합격했다. 명종이 잠저에 있을 때, 꿈에 한 재상이 광화문으로 나오는데 추종(騶從)이 매우 성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는 당신의 재상입니다.” 하였다. 즉위하자 영모(令謨)가 형부 시랑(刑部侍郞)으로서 과거를 관장하였는데, 방(榜)을 발표할 때에 임금이 보니 꿈에 보던 사람과 같았다. 비로소 크게 쓰려는 뜻을 두어 순서를 밟지 않고 뽑아올려 여러 벼슬을 거쳐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민식(閔湜) 영모(令謨)의 아들로 천성이 활달하였다. 비록 귀하고 현달하나, 친구를 대접함에 귀천이 없이 한결같이 전일과 같으니, 사람들이 이로써 어질게 여겼다. 명종의 서자 중 소군(小君)이 권세를 부리고 뇌물을 받아 들이니, 조정의 선비들이 다투어 붙었으나 홀로 식(湜)만은 가지 아니하였다. 그 아우가 말하기를, “형님은 어찌하여 안 가시오.” 하니, 식이 말하기를, “무지개[虹沙彌]의 무리가 나라를 망칠 것이다.” 하니, 아우가 놀래어 땀을 흘렸다. 무지개는 한 끝은 땅에 닿고 한 끝은 하늘에 붙은 것인데, 소군(小君)이 왕자로서 어미가 천함을 비유함이다. 식의 언행이 구속을 받지 아니함이 이와 같았다. 벼슬은 우산기 상시(右散騎常侍)에 이르렀다. 이윤유(李允綏) 벼슬이 호부 시랑(戶部侍郞)에 이르렀다. 이규보(李奎報) 윤유의 아들로 9세에 글을 잘 지어 당시 기동(奇童)이라고 불렀다. 경사(經史)와 백가(百家), 불교ㆍ노자의 서적을 한 번 보면 곧 기억했다. 명종조에 과거에 급제하여 고종 때에 여러 벼슬을 거쳐, 판비서성사(判祕書省事)가 되었다. 이때에 몽고 군인이 우리 지경을 누르고 자주 힐난하였다. 이규보는 오래 양제(兩制)를 맡아서 진정서표(陳情書表)를 지어 바쳤더니, 황제가 감동되어 깨닫고 철병하였으므로, 임금은 크게 기뻐하여 특히 추밀부사(樞密府事)를 주었다. 문하시랑으로서 치사(致仕)하였으며 시호는 문순(文順)이다. 성격이 활달하여 집안 살림을 경영하지 아니하였고, 마음대로 술을 마시고 행동에 구애를 받지 아니하였다. 시문(詩文)이 양양(洋洋) 하여 한때의 중대한 문자가 모두 그 손에서 나왔다. 문집이 있어 세상에 유행된다. 이함(李涵) 규보의 아들로 과거에 합격하여 지홍주사(知洪州事)가 되었다. 민지(閔漬) 과거에 장원으로 뽑혔다. 일찍이 충선왕(忠宣王)을 따라 원 나라에 갔었는데, 세조가 공경(公卿)에게 명하여 교지(交趾)를 칠 것을 의논하게 하면서 조서를 내려, 민지와 정가신(鄭可臣)에게 같이 의논하게 하였는데 세조의 뜻에 맞아 한림직학사(翰林直學士)를 받았다. 여러 벼슬을 거쳐 수정승(守政丞)에 이르고, 시호를 문인(文仁)이라 하였다. 민상정(閔祥正) 민지의 아들로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이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다. 민선(閔璿) 상정의 아들로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이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이르렀다. 민인균(閔仁鈞) 민영모(閔令謨)의 손자로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이 판삼사사 한림학사(判三司事翰林學士)에 이르렀다. 재주와 학식이 넉넉하여, 비록 높은 벼슬에 이르러서도 외고 익히는 것을 철폐하지 아니하고 학생들의 공부하는 것과 같게 하였다. 평시에 태만한 거동이 없었고, 속된 말을 하지 않았으며 움직일 때마다 예법을 따랐다. 문생(門生)이나 옛 관속이나 신학(新學) 후진(後進)이 나아가 뵈오면, 반드시 의관을 갖추고 띠를 띠고 대하기를 손님같이 하여, 경서를 이야기하고 도를 논할 뿐이었다. 민종유(閔宗儒) 인균의 손자로 벼슬이 찬성사에 이르렀다. 천품이 장중(莊重)한 데다 풍도가 아름답고 전고(典故)를 밝게 알아, 관리로서의 능력과 재간이 뛰어났었다. 시호는 충순(忠順)이다. 민적(閔頔) 종유의 아들로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이 밀직사사(密直司事)에 이르렀다. 어진이를 좋아하고 선비를 사랑하고, 세력없는 후진을 대함에 더욱 정(情)과 예의를 다하였다. 시호는 문순(文順)이다. 민사평(閔思平) 민적의 아들이다. 젊어서 기국(氣局)이 있었다. 정승 김윤(金倫)이 사람을 잘 알아 보기로 유명하였는데 딸을 주었다.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이 찬성사에 이르렀다. 관에서 처사함에 있어 특별히 모난 일을 하지 아니하고, 항상 시서(詩書)로써 스스로 즐겼다. 저술한 《급암집(及菴集)》이 세상에 전하며, 시호는 문온(文溫)이다. 민변(閔抃) 사평의 아우로 과거에 급제하여, 충혜왕 때에 여러 번 옮겨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가 되고, 뒤에 여흥군(驪興君)에 봉하고, 시호를 문도(文度)라 하였다.
본조 민제(閔霽) 변의 아들이요 적의 손자이다. 온화 인자하고 청백하고 간소하며 글 읽기를 좋아하였다. 과거에 합격하여 높은 자리를 갖추 지냈다. 예(禮)를 아는 것으로 소문이 났다. 여러 벼슬을 거쳐 좌정승 여흥부원군(左政丞驪興府院君)에 이르렀다. 원경왕후(元敬王后)를 낳았다.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이행(李行)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다. 문장으로서 저명하여 세상에서 일컬어졌으며, 시호는 문절(文節), 호는 기우자(騎牛子)이다. 문집이 있어 세상에 전한다.
『신증』 민휘(閔暉)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이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으며, 천성이 청간(淸簡)하였다. 민수천(閔壽千) 휘(暉)의 아들로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이 관찰사(觀察使)에 이르렀다. 글을 잘하여 이름이 있었다. 【우거】 고려 김구용(金九容) 민사평(閔思平)의 외손이다.
【제영】 촌시어아미(村市魚兒美) 이숭인의 시에, “시골 저자에 물고기 아름답고, 강 들판에 벼가 기름지네.” 하였다. 연침강자파(煙沈江自波) 임규(任奎)의 시에, “달이 침침한데 까마귀 물가에 날고, 연기가 잠겼는데 강이 스스로 물결치네. 고기잡이 배 어디에서 자느냐. 멀고 아득한 한 마디 노래로세.” 하였다. 반사단청반사시(半似丹靑半似詩) 이색의 시에, “천지는 가이 없으나 인생은 가이 있다. 호연(浩然)히 돌아갈 뜻은 어디로 가려는가. 여강 한 구비에 산이 그림같으니, 반은 단청 같고 반은 시같으이.” 하였다. 격안소종임하사(隔岸疏鐘林下寺) 김수온(金守溫)의 시에, “언덕을 격하여 성긴 종소리 들리니, 숲 아래 절이요, 난간에 둘린 기이한 그림은 비 가운데 산일세.” 하였다. 해객사통운한상(海客査通雲漢上) 고려 허옹(許邕)의 시에, “바다 손의 떼는 은하수에 통하고, 선인(仙人)의 피리는 자소(紫霄) 사이에서 내려오네.” 하였다. 금사(金沙) 팔영(八詠) 이색의 시. 서산채미(西山採薇) “봄비는 바람을 따라가는데, 봄 산은 가는 곳마다 깊었구나. 어떤 사람이 능히 고사리를 캐는고. 백이(伯夷)의 마음을 끌어 일으키네.” 하였다. 동강조어(東江釣魚) “일찌기 생선 맛이 좋다고 들었더니, 모두가 가는 비늘[細鱗]살찐 것을 말하네. 가을 바람이 일어남을 기다리지 아니하여도, 장한(張翰)을 따라 돌아가기를 원하네.” 하였다. 용문착약(龍門斲藥) “땅이 신령하니 약물(藥物)이 많고, 산이 그윽하니 티끌이 적네. 다시 묻노니 외와 같은 대추를 안기생(安期生)이 어디에 있는가.” 호곡경전(虎谷耕田) “평야는 다 호부한 집에 점령되고, 거친 밭 한 조각이 남았네. 스스로 밭갈아 조석을 지내니, 도리어 공명(孔明)의 초가집 같으이.” 하였다. 한포농월(漢浦弄月) “해 떨어지니 모래 더욱 희고, 구름이 옮기니 물이 더욱 맑구나. 높은 사람이 밝은 달을 희롱하는데, 다만 자란생(紫鸞笙)이 없구나.” 하였다. 파성망우(婆城望雨) 하늘 뜻은 응당 만물을 살리고 농사 일은 때 미처 함에 있네. 푸른 못에 용이 누운 지 오래인데, 한 번 일어남이 어찌하여 더딘가.” 하였다. 장흥습율(長興拾栗) “가을 바람이 처음 우수수하니, 밤톨이 주렁주렁. 홀로 찾아감을 내 일찍 기억하니, 금탄환(밤알)이 땅에 떨어질 때로세.” 하였다. 주읍심매(注邑尋梅) “이것들을 읊은 것은 그대로 묘삼함이 적은데, 재배(栽培)함은 세속을 떠난 것이 많네. 가장 어여쁜 것은 황벽한 곳에, 적막하게 항아(姮娥)를 짝하네.” 하였다. 팔영 여강(驪江) 최숙정의 시에, “강 비 잠깐 개니 강물이 갑자기 가득하네. 바람이 돌매 물결 단무늬 길고, 해 나니 고기 비늘이 흩어지네. 누를 비록 씻지 못하나, 티끌 묻은 갓끈을 애오라지 씻을 만하네. 흰 갈매기는 본래 일이 없어 떼지어 날며, 맑고 따뜻함을 희롱하네. 어찌 구속을 벗어나 호탕(浩蕩)하게 너와 짝하리.”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인생 백년 동안에 백년도 또한 차지 못하네. 더욱 티끌 속에 얽혔으니, 어찌 청한(淸閑)하게 살 수 있으랴. 저 여강 물을 바라보니, 물이 맑아 갓끈을 씻을 만하네. 내 세속에 적합한 취미 없어, 시세의 차고 더움을 따르지 못하네. 늙었도다, 벼슬을 버리고 가서 적송자(赤松子)와 짝하리라.” 하였다.
도주(渡舟) 최숙정의 시에, “둥둥 떠 있는 작은 조각배, 여러 해를 나루터에 비껴 있구나. 남쪽으로 맞이하고 또 북으로 보내니, 사람을 건너 주느라고 조금도 쉼이 없네. 파도는 산악처럼 일어나는데, 가랑비 물가에 아득하네. 매지도 않고 닻도 내리지 않았는데, 한가히 봄 가을에 떠 있네. 부열(傅說)이 돛대를 잡으면 은하수의 흐름에 거슬러 올라가겠네.”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어리고 젊어서 여주에 놀았더니, 40여 년 만에 이제 머리 돌렸네. 누에 올라 긴 강을 굽어보니, 아, 한시라도 쉼이 없구나. 황학(黃鶴)은 가고 돌아오지 않는데, 앵무주(鸚鵡洲)에 풀만 무성하구나. 시를 쓸 제 최후(崔侯)를 생각하니, 걸구(傑句)가 천추에 전하누나. 그대 이제 가풍(家風)을 이었으니, 아름다운 이름이 물과 같이 길이 흐르네.” 하였다.
팔대수(八大藪) 최숙정의 시에, “평림(平林)은 바라보아도 다함이 없어, 강가에 잇달았네. 울밀(鬱密)한 건 백 년된 등(藤)이요, 우거진 것은 천년 된 나무일레. 족제비와 다람쥐는 집을 짓고, 여우와 토끼는 성(城)을 쌓았네. 기색은 멀리 아득한데 천택(川澤)은 참으로 아름답구나. 이곳에 깊이 숨을 만하니, 혹시 옛날의 소부(巢父) 있을지.”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패다(貝多)는 예부터 이름난 숲이라, 강가에 울창하게 얽혔네. 옛날 돛을 날리며 지날 제, 닻줄을 묵은 회나무에 매었도다. 위에는 신선의 집이 있고, 아래에는 교룡(蛟龍)의 굴이 있네. 멀리 운몽수(雲夢藪)를 생각하니, 그와 백중(伯仲)하여 자랑할 만하이. 내 초(楚) 나라의 깬[醒] 사람 아니며 홀로 어부를 보지 못했네.” 하였다.
벽사(甓寺) 최숙정의 시에, “강 언덕 저 건너 절이 있는데, 단청이 숲 끝에 비치는구나. 제천(諸天)은 하계(下界)에 벌려 있는데, 세존(世尊)은 중간에 안치되었네. 속객의 내왕이 적으니, 고승(高僧)이 길이 스스로 한가하네. 아침저녁 향 피우고 비는 것은, 성수(聖壽) 남산과 같음일세. 문앞에 흙으로 구운 부도(浮屠 부처)는, 세월이 오래매 이끼 껴 얼룩졌네.”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긴 강은 하얗게 바랜 비단을 쏟는데, 한 길은 강가를 연해서 있네. 내 옛날 벽절을 찾았는데, 지경이 깨끗하여 인간 같지 않더라. 보제(普濟)의 영정(影幀)에 향을 피우니, 오랜 세월에 구름은 항상 한가하네. 백련사(白蓮社)를 맺지도 않고, 먼저 영취산(靈鷲山)에 이르렀네. 이목은(李牧隱) 생각함이여, 옛 비석에 이끼가 얼룩졌구나.” 하였다.
마암(馬巖) 최숙정의 시에, “마암석(馬巖石)이 서려 또한 기괴하구나. 강 흐름은 그 뿌리를 씹는 데도, 만고에 견고하여 무너지지 않네. 노한 물결은 바야흐로 울렁거리다가, 여기서 나뉘어 수세(水勢) 점점 쇠하네. 외로운 성이 이 바위에 힘 입어서 완전하니, 공을 논할진대 빚을 갚기 어렵네. 남은 하나의 무지한 돌에, 나는 홀로 그 견고하여 굽히지 않음을 취하네.”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바위를 말[馬]로 써 이름지었는데, 기기하고 괴괴하구나. 날뛰는 듯 스스로 힘차고, 견고하여 또 무너지지 아니하네. 바다 귀신은 이미 혼이 두근거리는데, 놀란 파도는 여기서 무너지누나. 내 채찍질하여 다리를 만들고자 하노니, 지주(砥柱)의 공을 잊으랴. 종당 다듬어 하늘을 기울이니, 높은 이름이 강 가를 독차지했네.
영릉(英陵) 최숙정(崔淑精)의 시에, “능(陵)이 정히 서로 접했는데, 오색 구름은 빈 전각(殿閣) 둘렀네. 금어(禁籞)는 산을 싸서 긴데, 송백(松柏)은 강을 연하여 둘렀네. 일백 신령이 암곡(巖谷)을 옹호하고, 상서로운 바람이 일산과 부채에서 나오네. 사관(祠官)은 벼슬을 조심하여 청소하고, 고을원은 깨끗이 재계하고 제사드리네. 두 성인(세종 부부(世宗夫婦)) 가만히 도움을 내리시어, 풍년의 즐거움이 고을에 차게 하소서.”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교산(橋山 황제의 무덤이 있는 곳)에 상설(象設)이 엄한데, 의관(衣冠)은 침전(寢殿)에 간직하였고 높고 높은 금속(金粟)은 뫼에 자욱하고, 아름다운 기운이 두루 뻗쳤네. 팔준마는 울면서 앞으로 향하는 듯, 의장(儀仗)은 산선(傘扇)이 삼엄하네. 성주(聖主) 능을 중히 여기시는데, 사관은 엄숙하게 제사드리네. 정호(鼎湖)에 구름이 멀고 아득한데, 황려현(黃驪縣)에 머리 들어 바라보네.” 하였다.
청심루(淸心樓) 최숙정의 시에, “작은 누 또한 깨끗한데, 아래로 긴 강물을 당기었네. 강물은 넘실넘실 흘러가는데, 먼 산은 겹겹이 높았더라. 삼면이 모두 비고 넓어, 한 번 바라보매 아득하게 천리로세. 악양루(岳陽樓)도 부끄러워 할 만하고, 황학루(黃鶴樓)도 부끄러워 할 만하네. 좋은 문장들이 벽 사이에 찬란한데, 올라보니 이 세상 더러움이 깨끗해지네.”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누각은 높고 내 마음은 맑은데, 그 아래엔 흐르는 물이 있네. 푸르고 맑아서 침도 뱉을 수 없으니, 마음의 누(累)를 씻을 만하네. 산천은 울창하게 서로 엉키어 천리 또 만리일세. 망치로 황학루를 두드려 부수었다는 말을, 내 일찍이 부끄러워하여 호기(豪氣) 있는 늙은 원룡(元龍)은 드높아서 티끌 세속을 벗어났네.” 하였다.
연촌(煙村) 최숙정의 시에, “인가(人家)가 어지러이 땅에 가득하니, 울타리가 서로 바짝 붙어있네. 뽕과 삼을 심는 것은 한 봄날이요, 웃어가며 말하는 동네의 저녁이네. 언덕을 격하여 나무꾼의 노래를 듣고, 물가에 임하니 고기잡이 피리 소리를 보내오누나. 풍년이 드니 굶주림이 없고, 시절이 태평하니 부역이 드무네. 희희(熙熙)하고 호호(皥皥)하여, 한가지로 태평한 즐거움을 누리누나.”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사군(使君 사또)이 아직 오지 않았을 적엔, 농민들이 토착(土着)하지 못했더니, 사군이 이미 수레에 내리매 풍년들어 밥짓는 연기 나오네. 왼쪽엔 밥이요, 오른편에는 죽, 시골 노래는 농악과 섞여서 들려오네. 지난 달에는 관의 세금을 감했는데, 이 달엔 병역(兵役)을 면했네. 격양가(擊壤歌)를 부르며 구준(衢樽)을 마시니, 인자한 백성의 즐기는 바일세.”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정종조(正宗朝)에 광주진(廣州鎭)을 부(府)로 옮겼다. 여섯 읍을 관할하였다. 인조조(仁祖朝)에 후영(後營)을 두었다가 뒤에 죽산(竹山)으로 옮겼다. 숙종(肅宗) 7년에 광주전영(廣州前營)을 이곳으로 옮겼다가 뒤에 다시 광주로 옮겼다.
【영아】 수어좌부(守禦左部) 별장(別將)은 본목사가 겸한다.
○ 군병(軍兵) 속읍(屬邑)은 여주(驪州)ㆍ광주(廣州)ㆍ양주(楊州)ㆍ포천(抱川)ㆍ양지(陽智)ㆍ영평(永平)ㆍ양근(楊根)ㆍ이천(利川)이다.

【토산】 누치[訥魚]ㆍ쏘가리[錦鱗魚]ㆍ즉어(鯽魚)ㆍ잉어[鯉魚]
【성지】 고성(古城) 서북쪽으로 7리 칭성산(稱城山)으로 들어가 영릉(英陵) 국내(局內)에 있다. 파사성(婆娑城) 서북쪽 40리에 있는데 작은 산이 있고 강에 접해 있다. 선조(宣祖) 25년에 승장(僧將) 의엄(義嚴)이 고성(古城)을 수축(修築)했는데, 그 둘레가 1천 1백 보(步)이다.
【누정】 청심정(淸心亭) 읍내에 있는데 임장강(臨長江)을 굽어보며, 남쪽 건너편에는 치악(雉岳)의 광야(廣野)가 동룡문(東龍門)에 아득히 넓고, 북쪽으로는 석벽(石壁)이 높이 솟아 있으며, 벽사(甓寺)의 그림자가 거꾸로 강 가운데 비친다.
【방면】 주내(州內) 끝이 10리이다. 근동(近東) 동남쪽으로 처음 이리이고 끝이 20리이다. 근남(近南)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20리이다. 점량(占梁) 남쪽으로 처음이 20리이고, 끝이 40리이다. 소개곡(召開谷) 서남쪽으로 처음이 15리이고, 마지막이 40리이다. 가서곡(加西谷) 서쪽으로 끝이 30리이다. 개군산(介軍山) 북쪽으로 끝이 50리이다. 수계(首界) 서쪽으로 끝이 25리이다. 대송(大松) 북쪽으로 끝이 40 리이다. 길천(吉川) 서북쪽으로 끝이 15리이다. 등신(登神) 북쪽으로 끝이 25리이다.
【진도】 주내진(州內津) 읍의 동쪽에 있다. 양화진(楊花津) 서쪽으로 20리에 있다. 구미포진(龜尾浦津) 주(州)의 남쪽에 있다. 단암진(丹巖津) 동남쪽으로 20리에 있다. 앙암진(仰巖津) 동남쪽으로 10리에 있다. 이포진(梨浦津)
【사원】 기천서원(沂川書院) 선조(宣祖) 경진년에 건축하여 인조(仁祖) 을축년에 사액하였다. 김안국(金安國)ㆍ이언적(李彦迪) 자세한 것은 모두 경도(京都) 묘정(廟庭) 편에 보라. 홍인우(洪仁祐) 자는 응길(應吉), 호는 치재(恥齋)인데 당성인(唐城人)이다. 벼슬은 증 영의정 당양부원군(贈領議政唐陽府院君)이다. 정엽(鄭曄) 광주(廣州) 편에 보라. 이원익(李元翼) 경도(京都)의 묘정 편을 보라. 이식(李植) 자는 여원(汝園), 호는 택당(澤堂)이며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벼슬은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문형(文衡)을 맡았는데, 영의정을 추증하였고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 고산서원(孤山書院) 숙종 병인년에 세우고 무자년에 사액하였다. 이존오(李存吾) 자는 순경(順卿), 호는 석탄(石灘)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벼슬은 고려의 우정언(右正言)이었는데, 대사성(大司成)을 추증하였다. 조한영(曺漢英) 자는 수이(守而), 호는 회곡(晦谷)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벼슬은 이조 참판이었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 대로사(大老祠) 정자(正字) 을축년에 세우고 그 해에 사액하였다. 송시열(宋時烈) 경도(京都)의 묘정편을 보라.
○ 현암서원(玄巖書院) 순조(純祖) 갑오년에 세우고 사액하였다. 김조순(金祖純) 경도의 묘정편을 보라.
【능침】 영릉(寧陵) 영릉(英陵) 국내(局內)에 있으며, 홍제동주(弘濟洞州)로 서쪽으로 10리에 있다. 효종대왕(孝宗大王) 능으로 기신(忌辰)은 5월 4일이다. 능이 처음에는 건원릉(健元陵) 서쪽 언덕에 있었는데, 현종(顯宗) 14년에 이곳으로 옮겼다.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도 합장하였는데, 기신은 2월 24일이다.
○ 영(令)과 참봉이 각 1인.


 

[주D-001]목 움츠린 편[縮項鯿] : 축항편(縮項鯿)은 물고기의 이름인데 당 나라 맹호연(孟浩然)의 시에 나오기 때문에 두보(杜甫)가 맹호연을 생각하는 시에도 인용하였다.
[주D-002]좌주(座主) : 자기를 과거에 뽑아준 시관(試官)이다.
[주D-003]수문(修文) : 송 나라에 수문전학사(修文殿學士)라는 벼슬이 있는데 한림학사(翰林學士)의 등속이다.
[주D-004]풍경으로……마소 : “이백(李白)이 죽고 나니 강남의 풍월이 오랫동안 한가하다.”는 송 나라 사람의 시가 있는데, 여기서는 시를 자꾸 지으라는 뜻이다.
[주D-005]나잔자(懶殘子) : 당 나라 이필(李泌)이 산중 절에서 글을 읽을 때에 나잔(懶殘)이란 이승(異僧)을 만난 일이 있다.
[주D-006]삼청(三淸) : 태청(太淸)ㆍ상청(上淸)ㆍ옥청(玉淸)을 삼청(三淸)이라 하는데, 도교(道敎)의 천상(天上) 이상경(理想境)을 말한 것이다.
[주D-007]임금이……주는 것 : 당 나라 하지장(賀知章)이 고향인 회계(會稽)로 은퇴하는데, 임금이 감호(鑑湖)한 구비를 주었다.
[주D-008]산을 사서 : 동진(東晉)의 명승(名僧) 지공(支公)이 중 심공(深公)에게 은거할 만한 산을 사겠다고 부탁한 일이 있다.
[주D-009]취옹(醉翁) : 취옹은 송 나라 구양수(歐陽修)의 호이며, 동선(洞仙)은 동부(洞府)에 사는 신선이다. 명산(名山)에는 신선이 거처하는 동부가 따로 있다고 한다.
[주D-010]창려(昌黎)의……시(詩) : 한유(韓愈)가 유사명(劉師命)에게 지어준 시에, “월 나라 계집이 한 번 웃으매 3년 동안 머물렀다.[越女一笑三年留]”는 구절이 있는데, 그것은 그 사람이 월(越)의 지방에서 여자에게 빠져서 3년간 지체하였던 때문이라 한다.
[주D-011]팽택(彭澤) : 도연명(陶淵明)이 팽택령(彭澤令)을 지냈으므로 그를 팽택이라 불렀는데, 그의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 끝에, “천명을 즐기는데 다시 어찌 의심하랴.[樂夫天命復奚疑]”란 구절이 있다.
[주D-012]삼생(三生) : 전생(前生)ㆍ금생(今生)ㆍ후생(後生)이다.
[주D-013]동정(銅鉦)은……걸렸는데 : 소동파(蘇東坡)의 시에, “나무 끝에 처음 해는 구리쇠 징이 걸렸다.[樹頭初日掛銅鉦]” 한 구절이 있다.
[주D-014]풍류는……오호(五湖) : 중국 남방에 오호(五湖)가 있는데 경치 좋은 곳으로 높은 선비들이 많이 놀았다.
[주D-015]원찰(願刹) : 불교 신자들이 죽은 조상을 위하여 그 무덤 옆에 절을 짓고 그 공덕으로 극락세계에 가기를 원하는 일이 있는데 그 절을 원찰(願刹)이라 한다.
[주D-016]종과……도구(道具) : 불도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기구.
[주D-017]보제(普濟) : 고려 말기의 명승(名僧) 나옹(懶翁)의 시호가 보제존자(普濟尊者)이다.
[주D-018]중[僧]은……있네 : 고승(高僧) 달마(達摩)가 소림사(少林寺)에 9년 동안 벽을 향하여[面壁] 앉아 있었다.
[주D-019]돈교(頓敎) : 불교에 점교(漸敎)와 돈교(頓敎)가 있는데 점교는 점차로 도를 닦는 것이요, 돈교는 한꺼번에 마음을 깨닫는 것이다.
[주D-020]혜가(慧可) : 달마의 제자이다.
[주D-021]한산(寒山)만이……못했으리 : 당 나라 한산(寒山)과 습득(拾得)은 시를 잘하는 중이다.
[주D-022]화두(話頭) : 참선(參禪)하는 중들에게 화두(話頭)라는 것이 있는데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니 마삼근(麻三斤)이니 하는 문구(文句)들을 명상(冥想)으로 참구(參究)하여 깨달아 내는 것이다.
[주D-023]방거사(龐居士) : 당 나라 때 방거사(龐居士)의 이름은 온(薀)인데 마조대사(馬祖大師)에게 화두(話頭)를 듣고 깨달았다.
[주D-024]가의(賈誼) : 한(漢) 나라 가의(賈誼)는 소년재사(少年才士)로서 여러 대신들의 시기함을 받아서 장사(長沙)로 귀양갔다.
[주D-025]유정(劉楨) : 후한(後漢) 말기의 문인(文人) 유정(劉楨)이 장수(漳水)가에서 병들어 누워서 지은 시가 있다.
[주D-026]큰 복전[大福田] : 복전(福田)은 불교의 말인데 불교를 믿으면 그것이 복이 나오는 밭이라는 뜻이다.
[주D-027]묘련(妙蓮) : 부처가 영취산(靈鷲山)에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설(說)하였다.
[주D-028]순은 중화(重華) : 요(堯)의 덕을 순(舜)이 거듭 빛내었다는 말이다.
[주D-029]참결(參決) : 직접 임금이 된 것이 아니라 임금의 결재하는 것을 돕는 것이다.
[주D-030]구장면복(九章冕服) : 천자 옷의 아홉 가지 무늬.
[주D-031]수강궁(壽康宮) : 아버지 상왕(上王)이 계신 궁이다.
[주D-032]종사(螽斯) : 메뚜기가 한 번에 새끼 구십 마리를 낳으므로 자손이 많은 것을 비유함. 《시경》의 편 이름.
[주D-033]인지(麟趾) : 기린은 산들을 밟지 않음으로 덕 있는 짐승이라 함. 《시경》에서 문왕의 여러 아들이 덕 있음을 여기에 비유함.
[주D-034]공(貢) : 하(夏) 나라의 전제(田制)ㆍ50묘(畝) 중에서 5묘의 생산을 세(稅)로 한다.
[주D-035]철(徹) : 9백 묘 중 백 묘를 공전(公田)으로 하여 세로 바친다.
[주D-036]오례의(五禮儀) : 길례(吉禮 祭祀)ㆍ흉례(凶禮)ㆍ빈례(賓禮)ㆍ군례(軍禮)ㆍ가례(嘉禮 冠昏) 등 다섯 가지 의식을 정한 책이다.
[주D-037]상림원관(上林園官) : 비원(祕園)을 관리하는 관직이다.
[주D-038]애영(哀榮) : 덕이 있고 복이 있는 이는 살아서는 영광스럽고 죽으면 애통하다는 것이다.
[주D-039]인륜의 지극함[人倫之至] : 《맹자》에, “성인(聖人)은 인륜(人倫)의 지극한 이이다.” 하였다.
[주D-040]곤후(坤厚)의……성인 : 《주역》에 “건괘(乾卦)는 강(剛)하고 곤괘(坤卦)는 후(厚)하고 유(柔)하다.” 하였는데, 건강(乾剛)은 임금의 덕을 말한 것이요, 곤괘(坤卦)는 왕비의 덕을 말한 것이다.
[주D-041]어관(魚貫) : 임금이 처첩(妻妾)을 많이 거느리는데, 서로 질투 없이 물고기가 꿰미에 차례로 꿰여져 있듯, 순서대로 임금의 잠자리를 모신다는 것이다.
[주D-042]주행(周行)……보이셨도다 : 《시경(詩經)》에, 제후가 천자의 연회를 받고 읊은 시에, “나에게 큰 길을 보여 주셨다.[示我周行]” 한 귀절이 있다.
[주D-043]용루(龍樓) : 세자(世子)의 거처하는 곳이다.
[주D-044]화악(華萼)이……빛났고 : 꽃받침[花萼]이 서로 다닥다닥 붙은 것을 형제에게 비유하므로, 당 명황(唐明皇)이 형제에 우애하여 화악루(花萼樓)를 지었다.
[주D-045]중을……하니 : 《중용(中庸)》에, “중화(中和)를 극도로 하면 만물이 발육(發育)된다.” 하였다.
[주D-046]걸(桀)도……맥(貊) : 《맹자》에 나온 말인데, “나라에서 농민에게 10분의 1 이상을 받으면 걸(桀 暴君)이요, 이하로 받으면 맥(貊 문화(文化) 없는 미개인)이다.” 하였다.
[주D-047]거울……탄식하시더니 : 당 태종(唐太宗)이 위징(魏徵)이 죽은 뒤에 구리쇠 거울로 의관을 바로하고 위징을 대하면 잘하고 잘못함을 아는데 위징이 죽고 나니, “나는 사람의 거울 하나를 잃었다.” 하였다.
[주D-048]능을 만들어 : 한 문제(漢文帝)가 유언(遺言)하기를, “나의 장사는 검소하여 산(山) 그대로 능을 만들어 따로 인력을 낭비하지 말라.” 하였다. 그러므로 인산(因山)이라 한다.
[주D-049]일각(日角) : 상법(相法)에, “얼굴에 일각(日角)이 있으면 임금 될 상이다.” 하였다.
[주D-050]지족(止足) : 《노자(老子)》에, “그칠 줄 알고 족한 줄 알라.[知止知足]” 한 말이 있다.
[주D-051]오랠수록 공경함은 : 공자는, “안자(晏子)는 사람 사귀기를 잘하여 오랠수록 존경한다.” 하였다.
[주D-052]상제(上帝)를……있고 : 《맹자》에, “비록 추악하게 생긴 사람이라도 목욕재계하면 상제를 섬길 수 있다.” 하였다.
[주D-053]남의 집에……구함 : 남의 집에 물이나 불을 빌려 달라 하여 거절하지 않음은 그것이 흔하기 때문이란 뜻이다.
[주D-054]앵무주(鸚鵡洲) : 지금 호북성 무한시(武漢市) 무창(武昌) 서남쪽 가운데 있는 섬. 최호(崔灝)의 〈황학루〉시에 나온다.
[주D-055]초(楚)나라의 깬[醒] 사람 : 초(楚) 나라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詞)〉에,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취하였는데 나만 홀로 깨어 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춘정집 제12권
 신도비명(神道碑銘)
유명 증시 공정 조선국(有明贈諡恭定朝鮮國) 태종 성덕신공문무광효 대왕(太宗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 헌릉(獻陵)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


하늘이 덕이 있는 이에게 큰 임무를 내려주려 할 때에는 반드시 신성한 자손을 낳게 하여 큰 운을 열고 길이 큰 복을 받게 한다. 우리 조선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獻大王)이 일어남에 우리 태종으로 아들이 되게 하고, 우리 전하로 손자가 되게 했으니, 아, 성대하도다. 어찌 사람의 힘으로 될 수 있겠는가. 하늘이 한 일이다. 그것은 상(商) 나라 왕실에 성군이 이어서 일어난 것과 주(周) 나라 왕가에 태왕(大王)ㆍ왕계(王季)ㆍ문왕(文王)ㆍ무왕(武王)이 서로 계승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신이 삼가 왕실의 근원을 상고하건대, 이씨(李氏)는 전주(全州)의 이름난 가문이다. 사공(司空) 휘(諱) 한(翰)이 신라에 벼슬하여 신라 종성(宗姓)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6대를 내려와 휘 긍휴(兢休)에 이르러 비로소 고려에 벼슬했고, 13대에 이르러 태종의 5대조 목왕(穆王)에 이르러 원(元) 나라 조정에 들어가 벼슬하여 천부장(千夫長)이 되었는데, 4대가 내리 작위를 세습하여 모두 선대(先代)의 아름다운 공렬을 계승하였다. 원 나라 정치가 이미 쇠하게 되자, 조부 환왕(桓王)은 돌아와 고려 공민왕(恭愍王)을 섬겼으니, 공(功)과 인(仁)을 쌓음이 그 유래가 오래이다.
우리 신의왕태후(神懿王太后)께서 지정(至正) 정미년(1367, 공민왕 16) 5월 신묘에 태종을 함흥부(咸興府) 후주(厚州)의 사저(私邸)에서 낳으시니, 우리 태조의 다섯째 아드님이다. 태종은 나면서부터 신이(神異)하더니, 차츰 자라면서 영명하고 지혜로움이 비할 데 없이 뛰어나, 글읽기를 좋아하여 학문이 날로 진보했다. 나이 20세가 못 되어 고려의 과거에 급제했는데, 그때 고려의 정치는 어지럽고 백성들은 유리(流離)하여 국가의 형세가 위태로웠다. 개탄스러운 심정으로 세상을 구제할 뜻이 있으니, 태조가 여러 아들 중에서 유달리 사랑했다. 일찍이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시중(侍中) 이색(李穡)과 같이 명 나라 서울에 갔으며 여러 번 승진하여 벼슬이 밀직사 대언(密直司代言)에 이르렀다.
홍무(洪武) 신미년(1391, 공양왕 3) 9월에 신의왕태후께서 돌아가시니, 제릉(齊陵) 곁에 여막(廬幕)을 짓고 삼년상을 마치고자 했는데, 임신년(1392, 공양왕 4) 봄에 태조가 서쪽 지방으로 행차했다가 병을 얻고 돌아왔으므로 와서 탕약(湯藥)을 살피며 시중들었다. 이때에 공양왕(恭讓王)의 신하가 틈을 타서 태조의 세력을 제거하고자 하여 사세가 매우 급하게 되었다. 태종이 조짐에 대응하여 변고를 제압하고 그 괴수를 쳐서 제거하니 온갖 음모가 와해되었다. 가을 7월에 여러 장상(將相)들과 함께 대의(大義)를 부르짖으며 태조를 추대하여 나라를 세우니, 정안군(靖安君)에 봉해졌다.
갑술년(1394, 태조 3) 여름에 명 나라 고황제(高皇帝)가 태조에게 친아들을 보내어 입조하도록 명하니, 태조께서는 우리 태종이 경서에 통하고 예법에 밝아서 여러 아들 중에 가장 현명하다고 하여 즉시 보내어 명에 응했다. 태종이 명 나라에 이르러서 황제의 뜻에 맞도록 잘 아뢰었으므로 예우를 받고 돌아왔다.
무인년(1398, 태조 7) 가을 8월에 태조가 편치 않으시자, 붕당(朋黨)을 만들어 어린 왕자를 끼고 정권을 잡아 제 마음대로 휘두르고자 하는 권신(權臣)이 있었다. 때문에 화가 곧 닥칠 다급한 상황이었으므로 태종이 기미를 밝게 살펴서 제거했다. 당시 종친(宗親)과 장상(將相)들이 다 우리 태종을 세자로 책봉하기를 청하고자 했으나, 태종이 굳이 사양하고 공정(恭靖 정종(定宗))을 추대하여 태조에게 청하여 세자로 책봉하게 하여 종묘사직을 안정시켰다. 9월 정축에 태조가 병이 낫지 않으므로 공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건문(建文) 경진년(1400, 정종 2) 1월에는 역신(逆臣) 박포(朴苞)가 태종의 형제를 해칠 음모를 꾸미고 몰래 방간(芳幹) 부자를 유인하여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저지르니, 태종이 군사를 통솔하여 평정했다. 박포만을 주벌하고 나머지는 모두 놓아 주었으며, 방간은 안치(安置)시키는 벌에 처했을 뿐 지친(至親)의 정을 버리지 않았다. 공정이 후사(後嗣)가 없고, 또 나라를 열고 사직을 안정시킨 일이 다 우리 태종의 공적이라고 하여 세자로 책봉하고, 겨울 11월에 또한 병으로 우리 태종에게 왕위를 전하고는 사신을 명 나라에 보내어 황제의 명을 청했다.
다음해 신사년(1401, 태종 1) 6월에 건문제(建文帝)가 통정시 승(通政寺丞) 장근(章謹) 등을 보내어 고명(誥命)과 인장(印章)을 받들고 와서 우리 태종을 왕으로 봉하였다. 겨울에는 홍려시 행인(鴻臚寺行人) 반문규(潘文奎)를 보내와서 면복(冕服)을 내리니, 품질(品秩)이 친왕(親王)과 비등했다.
임오년(1402, 태종 2)에 지금의 황제 성조(成祖)가 즉위하였는데, 좌정승 신 하륜(河崙)을 보내어 등극을 하례하자 황제가 충성을 가상히 여겼다. 다음해 계미년(1403, 태종 3) 4월에 고명과 인장을 내리고, 도지휘사(都指揮使) 고득(高得) 등을 보내어 그대로 왕으로 봉하였다. 가을에는 한림 대조(翰林待詔) 왕연령(王延齡)을 보내와서 곤면 구장(袞冕九章)과 금단사라(錦段紗羅), 서적(書籍)을 내렸는데, 태조에게는 금단사라를, 원경왕태후(元敬王太后)에게는 관포(冠袍)와 금단사라를 각각 차등 있게 내렸다. 이로부터 황제가 하사하는 선물이 계속 이르러 거르는 해가 없었다.
을유년(1405, 태종 5)에 한양은 태조께서 수도로 정한 곳이라고 하여 여러 사람들의 반대 의논을 물리치고 이곳으로 돌아왔다.
정해년(1407, 태종 7)에 황제가 정조(正朝)에 하례하러 간 조선의 사신에게 말하기를, “조선 국왕은 지성으로 대국을 섬긴다.” 했는데, 그 뒤로는 사신이 도착할 때마다 그 지성을 칭찬하였다.
무자년(1408, 태종 8) 5월에 태조가 승하하니 태종이 슬퍼하고 사모하기를 그지없이 하고, 상차(喪次)에 거처하면서 상례와 장례를 예에 따라 거행하였다. 명 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부음을 알리자 황제가 매우 슬퍼하여 조회를 정지하고, 예부 낭중(禮部郎中) 임관(林觀) 등을 보내어 대뢰(大牢)로써 제사 지내게 하고 시호를 강헌(康獻)이라고 내렸다. 또 태종에게 칙서(勅書)를 내리고 후하게 부의(賻儀)를 주었다.
임진년(1412, 태종 12) 겨울에 민간에 숨은 왕씨(王氏)의 후예가 있다는 상언(上言)이 있자, 담당 관사(官司)에서 죽이기를 청했다. 태종이 말하기를, “제왕이 일어남은 본디 천명에 달려 있는 것이다. 왕씨의 후예를 죽이는 것은 우리 태조의 본의가 아니다.” 하고, 곧 하교하기를, “살아남은 왕씨의 후예들을 각기 생업에 안정하게 하라.” 했다.
갑오년(1414, 태종 14) 6월에 감로(甘露)가 함흥부의 월광구미리(月光仇未里)와 정평(定平)의 백운산(白雲山)에 내리고, 다음해 을미년(1415, 태종 15) 4월에 감로가 또 함흥부 덕산동(德山洞)에 내리니, 우리나라에서는 예전에 없었던 일이다. 의정부에서 이 상서로운 일에 대하여 모두 전문(箋文)을 올려 하례했으나 태종은 받지 않았다.
무술년(1418, 태종 18) 6월에 세자 제(褆)가 패덕(敗德)하다는 이유로 폐하여 양녕대군(讓寧大君)에 봉하고, 우리 전하가 총명하며 효도하고 우애 있으며 학문을 좋아하여 게으름이 없어서 나라 사람들의 기대를 모은다고 하여, 세자로 책봉하고 명 나라에 알리니, 황제가 좋다고 윤허했다. 이해 8월에 태종이 우리 전하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사신을 보내어 황제의 명을 청했다. 11월에 우리 전하가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받들어 부왕에게 성덕신공 상왕(聖德神功上王)이라는 호를 올렸다.
이듬해 기해년(1419, 세종 1) 1월에 황제가 홍려시 승(鴻臚寺丞) 유천(劉泉) 등을 파견하여 고명을 보내와서 우리 전하를 봉하여 왕으로 삼았다. 5월에 대마도(對馬島)의 왜구가 변경을 침범하여 우리 군사를 살해하고 약탈하므로 영의정 신 유정현(柳廷顯)과 찬성 신 이종무(李從茂) 등에게 명하여 수군을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게 하니, 대마도의 왜인들이 예전과 같이 성심으로 우리나라를 섬겼다. 8월에 황제가 사신을 보내와서 태종에게 잔치를 하사했는데, 칙서의 대략에, “왕의 지성이 돈독하고 두터워서 성심으로 황제의 조정을 섬기어 한결같은 덕과 한결같은 마음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게을리 하지 않았고, 능히 어진 이를 고르고 덕 있는 이에게 명하여 종사(宗祀)로 하여금 의탁함이 있게 하고 백성들의 바람에 부응했도다.” 하였다. 또 우리 전하에게도 잔치를 하사했는데, 칙서의 대략에, “경의 부왕이 독후(篤厚)하고 노성(老成)하여 천도를 삼가 공경했으니 충순(忠順)한 정성은 오래 갈수록 변함이 없다.” 하였다. 9월에 공정왕(恭靖王)이 승하하니 태종이 참최복(斬衰服)을 입어 거상(居喪) 기간을 달 대신 날로 계산하는 역월(易月)의 상제(喪制)를 마쳤다. 명 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부음을 알렸더니, 이듬해 4월에 황제가 사신을 보내와서 치제(致祭)하고 공정(恭靖)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해 봄에 우리 전하가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태상왕(太上王)이란 호를 올릴 것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가을 7월에 원경왕태후(元敬王太后)가 돌아가셨는데, 우리 전하께서 너무도 애통해하여 몸이 손상되었기 때문에 역월의 제도를 따를 것을 명했으나, 전하께서 울며 굳이 사양하니 장사 지낸 뒤 상복을 벗고 흰옷으로 복제를 마치도록 하라고 명했다. 9월 임오에 태후를 광주(廣州)의 대모산(大母山)에 장사 지내고 능호(陵號)를 헌릉(獻陵)이라고 했다.
신축년(1421, 세종 3) 가을 9월에 우리 전하가 옥책과 금보를 받들고 태상왕이란 호를 올렸다. 10월에 태종에게 여쭈어서 원자- 문종(文宗) 휘(諱) - 를 세자로 책봉하였다.
태종은 세상에 드물게 나는 훌륭한 자질로서 성학(聖學)에 밝았고, 효도와 우애는 신명에 통하고 정성과 공경은 종묘사직의 신을 감격시켰다. 사대(事大)에 있어서는 천자가 그 지성을 칭찬하고, 교린(交鄰)에 있어서는 왜국이 그 도가 있음에 복종했다.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불쌍히 여기며, 검소함을 숭상하고 재용을 절약했다. 덕(德)과 예(禮)를 앞세우고 형벌을 신중히 했으며, 충직한 이를 등용하고 간사한 자를 내쫓았다. 이단(異端)을 물리치고 음사(淫祀)를 금지했으며, 고금을 참작하여 제도를 정했으며, 문교(文敎)를 밝히고 무비(武備)를 엄중하게 했다. 누적된 폐단을 모두 혁파하니 모든 일이 다 일신되었고, 온 나라 안이 안도하여 백성들은 편안하고 물산은 풍성했다. 제왕의 도가 실로 성대하니, 하늘로부터 크나큰 사랑을 받아 두 번이나 감로(甘露)가 내리는 상서를 얻음이 당연하다.
임인년(1422, 세종 4) 4월에 처음으로 병환이 있더니, 5월 병인에 이궁(離宮)에서 승하하시니, 우리 전하가 애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3일 동안 수라를 들지 않았다. 여러 신하들이 울며 수라를 들기를 청했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고, 삼년상을 행할 것을 정하고 역월의 제도를 쓰지 않았다.
태종은 춘추가 56세이며 19년 동안 왕위에 계셨다. 왕위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지내며 휴양한 지 5년 만에 갑자기 승하하시니, 대소 신료들로부터 아래로 노복에 이르기까지 목놓아 울부짖지 않는 이가 없어서 시간이 갈수록 더욱 슬퍼하기를 부모의 상을 당한 것과 같이 했다. 아, 슬프다. 이해 9월 2일 병진에 존호(尊號)를 올려 ‘성덕신공문무광효 대왕(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이라 하고, 묘호(廟號)는 ‘태종’이라고 했다. 6일 경신에 원경왕태후의 능에 합장하니, 유명(遺命)에 따른 것이다.
명 나라에 부고가 알려지자, 황제가 슬퍼하여 조회를 멈추고, 특별히 예부 낭중 양선(楊善) 등을 보내와 사제(賜祭)했는데, 그 제문의 대략에, “왕은 독후(篤厚)하고 지성(至誠)스러우며 총명하고 현달(賢達)하여, 공경으로 조정을 섬김에 있어 충순(忠順)의 정성이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었도다. 부음이 멀리서 들리니 실로 슬픈 감회가 깊도다.” 하고, 또 고명을 내려 시호를 ‘공정(恭定)’이라고 했다. 또 전하에게 부의를 넉넉하고 후하게 내렸다. 대체로 우리 태종의 성대한 공덕과 전하의 지극한 효성이 앞뒤로 서로 이어져서 천자의 마음을 잘 받들었기 때문에 시종(始終) 남달리 총애하는 은전이 이와 같이 갖추어지고 지극했던 것이다.
중궁 원경왕태후의 성은 민씨(閔氏)이니 여흥(驪興)의 세가(世家)이다. 고려의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문경공(文景公) 휘 영모(令謨)로부터 6대를 거쳐 고조 휘 종유(宗儒)에 이르러 의종(毅宗)을 도왔으니, 벼슬은 도첨의 시랑찬성사(都僉議侍郞贊成事)로서 시호는 충순(忠順)이다. 충순공이 증조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시호 문순(文順) 휘 적(頔)을 낳고, 문순공은 조부 대광(大匡) 여흥군(驪興君) 휘 변(抃)을 낳고, 대광공은 부친 순충동덕찬화공신(純忠同德贊化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수문전대제학 영예문춘추관사(修文殿大提學領藝文春秋館事) 시호 문도(文度) 휘 제(霽)를 낳았다. 모친 송씨(宋氏)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봉해졌는데, 고려 중대광(重大匡) 여량군(礪良君) 휘 선(璿)의 따님이니, 선을 쌓음으로써 경사가 전해져서 맑은 덕이 있는 태후를 낳게 되었다.
태후는 총명하고 지혜로움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고, 시집갈 나이가 되자 우리 태종의 배필이 되었다. 태종이 젊었을 때 세상을 구제하려는 뜻이 있어 경서(經書)와 사기(史記)에 마음을 두고 집안 살림살이를 돌보지 않았으나, 태후는 검소하게 집안을 꾸려나가고 음식을 장만하는 일도 삼감으로써 태종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했으며, 많은 아들을 가르쳐서 의(義)를 따르게 하고, 첩과 시녀들을 예로 대우하여 능히 부인의 도리를 극진히 했다.
홍무(洪武) 임신년(1392, 태조 1)에 정녕옹주(靖寧翁主)로 봉해졌다.
무인년(1398, 태조 7)에 태종이 사직을 안정하게 할 즈음 형세가 매우 외롭고 위태했는데, 태후가 마음을 다해 도와서 대사를 이루게 했다.
경진년(1400, 정종 2) 봄에 정빈(貞嬪)에 봉해지고, 그해 겨울에 태종이 즉위하면서 정비(靜妃)에 봉해졌다.
영락(永樂) 계미년(1403, 태종 3)에는 명 나라 황제가 관포(冠袍)를 내려주었는데, 이해부터 정유년(1417, 태종 17)까지 모두 다섯 번이나 황제의 하사를 받았다.
무술년(1418, 태종 18) 겨울에 우리 전하가 존호를 올려 ‘후덕왕대비(厚德王大妃)’라 하였다.
경자년(1420, 세종 2) 9월에 ‘원경왕태후(元敬王太后)’라는 시호를 올렸으니, 춘추 56세였다.
태후는 한아(閒雅)하고 정정(貞靜)한 덕을 타고나 능히 태종의 배필이 되어 내치(內治)에 전심했다. 20년 동안 왕비로서의 위의는 엄숙하고, 또 성자(聖子)를 낳아서 종사를 맡게 하여 영광스러운 봉양을 누리었다. 승하하기에 이르러 빈(嬪)과 시첩(侍妾)들이 마음을 다해서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부인의 법칙과 모후의 위의가 지극했도다.
4남 4녀를 낳았는데, 우리 전하는 셋째이다. 장자는 바로 제(褆)이고, 다음은 보(補)인데 효령대군(孝寧大君)에 봉해졌고, 다음은 종(褈)이니 성녕대군(誠寧大君)에 봉해졌는데 먼저 죽었다. 맏딸은 정순공주(貞順公主)이니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 이백강(李伯剛)에게 시집갔는데 같은 이씨(李氏)는 아니다. 다음은 경정공주(慶貞公主)이니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조대림(趙大臨)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경안공주(慶安公主)이니 길창군(吉昌君) 권규(權跬)에게 시집갔는데 또한 먼저 죽었다. 다음은 정선공주(貞善公主)이니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에게 시집갔다.
의빈(懿嬪) 권씨(權氏)가 1녀를 낳았는데, 정혜옹주(貞惠翁主)이니 운성군(雲城君) 박종우(朴從愚)에게 시집갔다. 소혜궁주(昭惠宮主) 노씨(盧氏)가 1녀를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신녕궁주(信寧宮主) 신씨(辛氏)가 3남 7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인()이니 공녕군(恭寧君)에 봉해졌고, 나머지는 어리며, 맏딸은 정신옹주(貞信翁主)이니 영평군(鈴平君) 윤계동(尹季童)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정정옹주(貞靜翁主)이니 한원군(漢原君) 조선(趙璿)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정숙옹주(貞淑翁主)이니 월성군(月城君) 정효전(鄭孝全)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다 어리다. 궁인(宮人) 안씨(安氏)가 1남 3녀를 낳았는데, 다 어리다. 김씨(金氏)가 1남을 낳았는데, 이름은 비(裶)이니 경녕군(敬寧君)에 봉해졌다. 고씨(高氏)가 1남, 최씨(崔氏)가 1남 1녀, 이씨(李氏)가 1남, 김씨(金氏)가 1녀를 낳았는데, 다 어리다.
우리 중궁 공비(恭妃) 심씨(沈氏)는 문하시중 덕부(德符)의 넷째 아들 온(溫)의 따님이다. 4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바로 세자이고, 나머지는 다 어리다. 양녕(讓寧)은 김한로(金漢老)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낳았는데, 다 어리다. 효령(孝寧)은 전 판중군도총제부사(判中軍都摠制府事) 정역(鄭易)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4남 1녀를 낳았는데, 다 어리다. 성녕(誠寧)은 전 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 성억(成抑)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아들이 없다. 정순공주(貞順公主)는 1녀를 낳았는데, 용양시위사 호군(龍驤侍衛司護軍) 이계린(李季疄)에게 시집갔고 물론 같은 이씨는 아니다. 경정공주(慶貞公主)는 4녀를 낳았는데, 장녀는 돈녕부 승(敦寧府丞) 안진(安進)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유학(幼學) 김중엄(金仲淹)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어리다. 경안공주(慶安公主)는 2남을 낳았는데, 장남은 담(聃)이니 한성 소윤(漢城少尹) 정연(鄭淵)의 따님에게 장가들었고, 다음은 어리다. 정선공주(貞善公主)는 2남 1녀를 낳았는데, 다 어리다. 경녕(敬寧)은 호조 참의 김관(金灌)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2남을 낳았는데, 다 어리다. 공녕(恭寧)은 병조 참판 최사강(崔士康)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2녀를 낳았는데, 다 어리다.
신이 삼가 살펴보니, 우리 태종의 성대한 덕과 높은 공이 실로 이미 역대의 제왕을 크게 능가하였으나 배필의 현숙함과 내조의 공이 또한 촉도(蜀塗),신지(莘摯)와 일치하는 점이 있다. 많은 신하들이 모두 능의 신도비에 명(銘)을 새겨서 길이 후세에 밝게 보이기를 원하니, 전하께서 이 일을 신 계량에게 명하셨다. 신 계량은 명을 받고 나서 조심스럽고 두려워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머리를 조아려 명을 바친다.
명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해동을 사랑하여 / 天眷海東
우리의 태종을 내려주시니 / 降我太宗
부지런히 힘써서 쉬지 않는 태종이여 / 亹亹太宗
성대한 덕 몸에 지니셨네 / 盛德在躬
성부를 추대하여 / 推戴聖父
능히 위대한 공 이루게 하고 / 克集大功
황제의 조정에 사신 가서 / 乃覲帝庭
조용히 진주(陳奏)하니 / 敷奏從容
천자의 은총 넉넉히 입게 되어 / 優荷睿恩
우리나라 백성들 보전하셨네 / 保我黎元
기미를 밝게 살펴 변란을 평정하고 / 炳幾靖亂
형을 높여 보위에 오르게 하니 / 嫡長是尊
비록 형제간에 싸움을 만났으나 / 雖値䦧墻
우애 오히려 도타웠으니 / 友愛猶惇
효성과 우애의 지극함은 / 孝悌之至
전고에 드물었네 / 從古罕聞
오직 덕을 후하게 하고 / 惟德之厚
오직 공에 힘썼으니 / 惟功之懋
하늘의 살핌이 매우 밝아 / 天鑑孔昭
이에 거듭 보우해 주셨네 / 式申保佑
빛나는 금보가 / 煌煌金寶
찬란하게 비춤에 / 輝映前後
황제의 고명(誥命) 거듭 내리니 / 帝誥荐臻
내 곧 은총을 받았네 / 我乃龍受
선왕의 훈계를 따라 / 祖訓惟服
한성에 환도하고 / 還于漢北
예악을 제작하니 / 制作禮樂
문채가 빛나네 / 煥乎郁郁
상을 당해 여막에 거처하며 / 遭喪居廬
애모가 망극하고 / 哀慕罔極
장사와 제사에 / 以葬以祭
옛 법식을 따르셨네 / 古典是式
공손히 명 나라를 섬기시니 / 祗事朝廷
황제는 그 지성을 칭찬했고 / 帝稱至誠
엄숙하게 제사를 받듦에 / 肅肅承事
신명이 감응하였네 / 感于神明
교린에 도가 있으니 / 交鄰有道
왜국이 와서 복종하였고 / 倭邦來庭
왕씨의 후예를 보살펴 / 存䘏王裔
편안히 살도록 했으니 / 俾遂其生
중외가 다스려져 태평하여 / 中外乂安
억만 년 길이 드리우리 / 垂億千齡
윤택한 감로가 / 浥浥甘露
해마다 함흥부에 내렸고 / 歲降咸府
어두운 아들 폐하고 덕 있는 아들 명하여 / 廢昏命德
백성의 주인이 되게 하였네 / 以作民主
영년토록 향수(享壽)하여 / 期享永年
상왕으로 계시길 기약했더니 / 父臨下土
어찌 하늘에 오르기를 재촉하여 / 何促賓天
한 질병이 낫지 않았던가 / 一疾莫愈
애달프도다 성자여 / 哀哀聖子
슬픔을 비길 데 없어 / 慟悼無比
사흘 동안 수라를 그치고 / 撤膳三日
상심으로 몸이 손상함을 견디지 못했네 / 不勝摧毁
거상(居喪) 중의 모든 절차 / 凡百喪事
오직 예대로 이행하니 / 惟禮之履
황제가 듣고 슬퍼하며 / 帝聞慟悼
사신을 보내 사제(賜祭)했네 / 遣使以祀
시호를 주어 포숭하고 / 贈諡褒崇
부의(傅儀)를 후하게 내리니 / 賜賻優隆
황제의 조문하는 예가 구비되매 / 恤典之備
기쁨이 신하들에게 넘쳤네 / 喜溢臣工
엄정하신 태후여 / 思齊太后
진실로 엄숙하고 화순하니 / 允也肅雝
사직의 안정을 가만히 도와 / 密贊定社
능히 총명한 성군의 짝이 되었네 / 克配亶聰
돈독히 성철한 아들 낳아 / 篤生聖哲
종묘의 주인 되게 하셨네 / 俾主宗祐
하늘처럼 굳세고 명철함은 / 乾健离明
공정왕의 덕이요 / 恭定之德
땅처럼 후덕하고 유정함은 / 坤厚柔貞
원경왕후의 법칙이니 / 元敬之則
살아서는 금실이 좋으시고 / 琴瑟以友
죽어서는 같이 장사 지냈네 / 藏同其域
자손이 번성하니 / 子孫振振
아, 기린같이 인후하여 / 吁嗟其麟
끊임없는 종묘사직 / 綿綿宗社
억만년 이어가리 / 垂萬億春
신은 절하고 명(銘)을 바쳐서 / 臣拜獻詞
옥돌에 새기노니 / 刻之貞珉
만대에 마멸되지 않고 / 萬代不磨
우리 동방에 밝게 빛나리라 / 昭我東垠
비음(碑陰)은 윤회(尹淮)가 기록했다.


 

[주D-001]촉도(蜀塗) : 촉산씨(蜀山氏)와 도산씨(塗山氏)의 딸을 말한다. 황제(黃帝)가 그 아들 창의(昌意)를 촉산씨의 딸에게 장가들여 고양(高陽)을 낳았는데 이가 제곡(帝嚳)이다. 또 하(夏) 나라 우왕(禹王)이 도산씨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계(啓)를 낳았다.
[주D-002]신지(莘摯) : 주(周) 나라 문왕(文王)이 신(莘)에서 맞이하여 무왕(武王)을 낳은 후비 태사(太姒)와 태왕(大王)이 지(摯)에서 맞이하여 문왕을 낳은 후비 태임(太任)을 말한다.

춘정속집 제4권
 부록(附錄)
세종실록


○ 즉위년 8월 11일(무자)
변계량을 예조 판서 지경연사로 삼았다.
○ 즉위년 8월 15일(임진)
상왕이 친히 건원릉(健元陵)에 나아가 추석제(秋夕祭)를 행하고, 겸하여 전위(傳位)를 고유(告諭)하였는데, 영의정 한상경(韓尙敬), 호조 판서 최이(崔迤), 예조 판서 변계량이 호종(扈從)하였다.
○ 즉위년 9월 16일(계해)
이조 판서 정역(鄭易), 예조 판서 변계량 등이 합사(合司)하여 아뢰기를,
“상왕께서 흉년이 든 것을 염려하시어 각전(各殿)에 올리는 원도(遠道)의 진상을 정지하라 하셨습니다. 신들이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한 나라로써 부왕을 받드시는 데에 이제 조그만 폐단 때문에 진상하는 물선(物膳)을 폐지하신다면 봉양(奉養)하시는 뜻에 어긋남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가령 다시 한 달에 두 번씩 진상하던 제도를 복원할 수는 없을지라도 근래 한 달에 한 번씩 진상하라고 하신 하교대로 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뜻을 받들고 순종함이 곧 효도이다. 상왕께서 민생의 어렵고 괴로움을 염려하시어 폐지하라고 분부하신 것을 내가 감히 청할 수는 없다.”
하였다.
○ 즉위년 10월 7일(계미)
처음으로 경연(經筵)을 열고 영경연사 박은(朴訔)ㆍ이원(李原), 지경연사 유관(柳觀)ㆍ변계량, 동지경연사 이지강(李之剛), 참찬관 하연(河演)ㆍ김익정(金益精)ㆍ이수(李隨)ㆍ윤회(尹淮), 시강관 정초(鄭招)ㆍ유영(柳穎), 시독관 성개(成槩), 검토관 김자(金楮), 부검토관 권도(權蹈) 등이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진강(進講)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과거를 설치하여 선비를 뽑는 것은 참다운 인재를 얻고자 해서이다. 어떻게 하면 선비로 하여금 부화(浮華)한 버릇을 버리게 할 수 있겠는가?”
하니, 변계량과 이지강 등이 대답하기를,
“초장(初場)에서는 의의(疑義)로 경학(經學)의 깊이를 보고, 종장(終場)에서는 대책(對策)으로 실질적으로 쓰기에 적합한지를 보는 것이 당초에 법을 만든 뜻입니다. 근자에 학생이 실질적인 학문에 힘쓰지 않으므로 초장에서 강경(講經)을 하도록 법을 개정하였더니, 이로 말미암아 영민하고 예기(銳氣)있는 쓸 만한 인재가 모두 무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강경은 가장 어려운 일이니, 지금 비록 변삼재(卞三宰)로 하여금 강론하게 하더라도 어찌 다 정통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영경연사 외에 동지경연사 이상은 하루에 한 사람씩 진강(進講)하고, 시독관 이하는 세 번으로 나누어 진강하며, 참찬관 김익정ㆍ이수ㆍ윤회도 역시 하루에 한 사람씩 진강하라고 명하였다.
○ 즉위년 10월 28일(갑진)
상왕이 주연을 차리고 임금을 맞아 위로하였다.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와 영돈녕부사 유정현(柳廷顯), 좌의정 박은, 우의정 이원, 참찬 변계량, 이조 판서 정역, 호조 판서 최이, 예조 판서 허조(許稠), 공조 판서 맹사성(孟思誠), 병조 참판 이명덕, 대사헌 허지(許遲), 사간 정수홍(鄭守弘) 및 여섯 대언(代言)이 연회에 배석(陪席)하였는데, 상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듣건대 경들이 청하기를, ‘방간(芳幹) 부자 및 박만(朴蔓), 임순례(任純禮), 신효창(申孝昌), 정용수(鄭龍壽), 이숙번(李叔蕃), 황희(黃喜), 염치용(廉致庸), 방문중(房文仲), 권약(權約) 등의 죄는 군부(君父)의 원수이니, 복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하니, 소위 복수란 것이 아비로서는 하지 못할 것이던가. 내가 재위한 지 19년인데 어찌 처리할 수가 없어서 후대를 기다려 하라고 남겨 두었겠는가.”
하고, 이에 탄식하며 이르기를,
“나의 백세 후에는 알 수 없지만,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다시 말하지 말라.”
하였다.
○ 즉위년 11월 3일(기유)
상이 참찬 변계량에게 명하여 악장(樂章)을 짓게 하니, 봉숭(封崇)하는 날에 상왕에게 헌수(獻壽)하고자 한 것이다. 그 사(詞)에 운운하였다. - 앞에 보인다. - 이것은 처음에 헌수하는 노래이다. 또 천권동수지곡(天眷東陲之曲)을 지었으니, 그 곡에 운운하였다. - 앞에 보인다. - 이것은 연회(宴會)를 파(罷)하는 곡이다.
○ 즉위년 11월 7일(계축)
경연에 나아갔다. 송(宋) 나라 명신(名臣)의 사적(事蹟)을 물으니, 변계량이 대답하기를, “온인(溫仁)하고 근후(謹厚)하기로는 사마온공(司馬溫公)이 제일입니다. 왕안석(王安石)은 선유(先儒)가 소인(小人)이라고 하였으나, 그 문장(文章)과 정사(政事)와 마음 씀씀이를 보건대, 아무래도 전적으로 소인이라고 지목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왕안석은 소인의 재주를 가진 사람이다.” 하였다.
○ 즉위년 11월 8일(갑인)
상이 곤룡포를 입고 면류관을 쓰고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서,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받들고, 성덕신공상왕(聖德神功上王)으로 상왕의 존호를 올리고 후덕왕대비(厚德王大妃)로 대비의 존호를 올렸다.
상이 친히 상왕의 책보(冊寶)를 진책관(進冊官) 박은(朴訔)과 진보관(進寶官) 이원(李原)에게 주고, 대비의 책보를 진책관 남재(南在)와 진보관 유정현(柳廷顯)에게 주어 인정문(仁政門)에까지 보내왔다. 박은 등이 책보를 받들고 수강궁(壽康宮)에 이르러 이를 올렸다. 상왕의 책(冊)에 운운하였다. - 원집에 보인다. - 보(寶)는 성덕신공상왕지보(聖德神功上王之寶)라고 하였다. 악장(樂章)에 운운하였다. - 앞에 보인다. - 대비의 책에 운운하였다. - 앞에 보인다. - 인(印)은 후덕왕대비지인(厚德王大妃之印)이라 하였다. 악장에 운운하였다. - 앞에 보인다.
이날 조정의 신하들이 눈이 내리는 것을 걱정하여 다시 좋은 날을 가려 정하기를 청하였으므로 상이 근신(近臣)을 보내어 이대로 아뢰었더니, 상왕이 이르기를, “옛날 사람은 눈을 상서(祥瑞)라 하였고, 유사(有司)가 이미 준비하였으니, 날을 변경할 수 없다. 백관(百官)은 제외하고 단지 책사(冊使)만 오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에 상이 상왕의 뜻을 따라 궁중(宮中)의 길로 가서 수(壽)를 올리라고 명하였다. 박은ㆍ이원ㆍ남재ㆍ유정현과 독책관(讀冊官) 변계량, 독보관(讀寶官) 조말생(趙末生)과 대비 독책관(大妃讀冊官) 맹사성, 독보관 민여익(閔汝翼), 효령대군 이보 등이 연회에 배석하였다. 영인(伶人)이 변계량이 올린 새로 지은 사곡(詞曲)을 연주하였다. 상왕이 주상의 효성을 칭찬하며 자주 이르기를, “왕위를 물려준 이후로 내가 더욱 높아졌다.” 하고, 서로 창화(唱和)하며 매우 즐거워하였다.
○ 즉위년 11월 10일(병진)
상이 변계량에게 이르기를, “경(卿)이 악장을 잘 지은 덕에 부왕께서 칭찬하셨다.” 하고, 내구마(內廏馬) 1필을 하사하였다.
○ 즉위년 11월 14일(경신)
대사헌 허지(許遲)와 의금부 제조 변계량 등이 청하기를, “신효창(申孝昌)이 사심(私心)을 갖고 일월(日月)같이 밝으신 총명을 모독하였으니, 그 죄가 매우 중합니다. 그 사실을 국문하소서.” 하니, 상왕이 그대로 따랐다.
○ 즉위년 12월 11일(병술)
상왕이 상과 더불어 침전(寢殿)에 나아가서 평안도 관찰사 윤곤(尹坤)과 도절제사 윤자당(尹子當)을 전송(餞送)하였다. 공신으로서 사신(使臣)으로 가는 사람을 친히 전송한 것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효령대군 이보, 영의정 유정현, 좌의정 박은, 우의정 이원, 한평군(漢平君) 조연(趙涓), 참찬 변계량, 예조 판서 허조, 병조 판서 조말생, 참판 이명덕, 대사헌 허지, 지신사(知申事) 원숙(元肅) 등이 연회에 배석하였다.
○ 즉위년 12월 13일(무자)
상이 묻기를, “과거(科擧)에 원점(圓點)의 법은 무엇 때문에 설치하였는가?”
하니, 변계량과 허조 등이 대답하기를,
“생원이 학교의 늠료(稟料) 두 끼[兩時]를 먹은 자는 원점이 되는데, 생원이 거재(居齋)하기를 즐겨하지 않는 까닭으로, 이 법을 만들어 만 300점(點)이 되어야만 과거를 보도록 허락하는 것입니다.”
하고, 변계량이 인하여 아뢰기를,
“신이 과거를 두 번이나 관장(管掌)하였는데, 강경(講經)의 법은 실상 옳지 못합니다. 지금의 유자(儒者)들은 입으로 읽는데 얽매여, 한갓 읽어 외우는 것으로만 업을 삼는 까닭으로 그 기질이 고체(固滯)되고 사부(詞賦)에 능하지 못하며, 더구나 시관(試官)이 과거 보는 선비를 면대(面對)하게 되니, 어찌 사심(私心)이 없겠습니까. 고려 때에 봉미(封彌)의 법을 만든 것은 이 때문입니다. 권근(權近)이 항상 이 폐단을 걱정하여 글을 올려 폐지하기를 청하자 상왕이 이 청을 따르셨는데, 정유년에 한두 문신의 계책을 써서 다시 이 법을 설치하였습니다. 신은 생각하기를, 활쏘는 것은 장난삼아 하는 일로서 사람들이 즐거이 하는 것입니다. 지금 서울 안의 자제(子弟)들은 문과(文科)는 따라갈 수 없다고 하여 모두 무과(武科)에 몰리게 되니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맹사성이 아뢰기를,
“옛날에 진사과(進士科)가 있었는데, 그 합격한 자는 어전(御前)에서 이름을 불러 특별히 총애하였으므로, 사람마다 모두 이를 즐거워하였습니다. 지금은 진사과를 폐지하고 생원시(生員試)만 있으며 정원도 100명뿐이니, 마땅히 정원을 늘려서 학문에 뜻을 둔 선비를 권장하여야 합니다.”
하고, 변계량이 아뢰기를,
“정도전(鄭道傳)이 처음으로 진사과를 폐지하고 생원시와 합쳤는데, 이색(李穡)이 이를 심히 한스럽게 여겼습니다.”
하자, 상이 또 이르기를,
“초장(初場)에 오경(五經)을 시험하는 것이 어떠한가?”
하니, 변계량이 아뢰기를,
“초장에 본디 오경의 의의(疑義)를 묻는 것이 있었는데, 혹은 오경을 다 들어서 묻기도 하고 혹은 삼경(三經)만 들어서 묻기도 하며, 혹은 경서 하나만 들어서 묻기도 하였습니다. 지금은 마땅히 초장의 법을 따로 만들어 강경에 대신하게 해야 됩니다.”
하고, 허지가 아뢰기를,
“의리(義理)에 해가 되면 고쳐 만드는 것도 옳겠지마는, 의리에 해가 없고 《육전(六典)》에 기록되어 있는 태조(太祖)의 성헌(成憲)을 고칠 수 없습니다. 시험을 주관하는 사람이 사심만 없으면 선비를 뽑는 데 어찌 부정한 일이 있겠습니까.”
하여, 상이 이르기를,
“대사헌의 말이 매우 마땅하다.”
하니, 변계량이 아뢰기를,
“법은 때에 따라서 변경할 수도 있으니, 어찌 고집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 즉위년 12월 25일(경자)
경연에 나아갔다. 상이 이르기를,
“《고려사(高麗史)》에서 공민왕(恭愍王) 이하의 사적은 정도전이 들은 대로 보태거나 지워버려 사신(史臣)의 본 초고(草稿)와 같지 않은 곳이 매우 많으니, 어찌 후세에 믿음을 줄 수 있겠는가.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니, 변계량과 정초(鄭招)가 아뢰기를,
“만약 끊어지고 세상에 전하지 않는다면, 후세에 누가 전하께서 정도전이 직필(直筆)에 손을 댄 것을 미워하신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문신(文臣)에게 명하여 고쳐 짓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그리하라고 하였다.
○ 원년 1월 1일(병오)
상왕에게 수주(壽酒)를 올리는데, 종친(宗親), 의정부 참찬, 육조 판서 이상 및 대사헌, 6명의 대언(代言)이 연회에 배석하였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상왕이 일어나 춤을 추니, 여러 신하들은 차례로 수주를 올리고 어울려 춤을 추며 다투어 연구(聯句)를 지어 올렸다. 실컷 즐기고 밤이 깊어서야 파하였다. 이 자리에서 상왕이 맹사성(孟思誠), 변계량, 허조(許稠) 등에게 이르기를,
“후전진작(後殿眞勺)은 그 곡조는 좋지만, 가사만은 듣고 싶지 않다.”
하니, 맹사성 등이 아뢰기를,
“전하의 분부가 마땅합니다. 지금 악부(樂府)에서 그 곡조만을 쓰고 그 가사는 쓰지 않습니다. 진작(眞勺)은 만조(慢調), 평조(平調), 삭조(數調)가 있는데, 고려 충혜왕(忠惠王)이 자못 음탕한 노래를 좋아하여, 총애하는 측근들과 더불어 후전에 앉아서 새로운 가락으로 노래를 지어 스스로 즐기니, 그 당시 사람들이 후전진작이라 일컬었던 것입니다. 그 가사뿐만 아니라 곡조도 쓸 것이 못됩니다.”
하였다.
○ 원년 1월 8일(계축)
상왕이 변계량에게 명하여 하황은곡(賀皇恩曲)을 짓게 하였는데, 장차 사신을 대접하는 자리에 쓰기 위해서였다. 서문에 운운하고, 가사에 운운하였다. - 모두 앞에 보인다.
○ 원년 1월 12일(정사)
의금부 제조 변계량 등이, 박신(朴信)이 요동(遼東)에 이르러 조충좌(趙忠佐)가 기밀에 관한 일을 누설하는 것을 듣고도 즉시 고발하지 않은 죄상을 주청하니, 상왕이 이르기를, “지금 큰 공을 세웠으니, 논하지 말라.” 하였다.
○ 원년 2월 3일(무인)
참찬 변계량과 예조 판서 허조 등에게 명하여, 생원시(生員試)를 성균관에서 열게 하고, 우부대언 최사강(崔士康)을 보내 어보(御寶)와 선온(宣醞)을 받들고 성균관에 가게 하였다.
○ 원년 2월 7일(임오)
변계량과 허조가 진사시(進士試)의 복구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원년 2월 23일(무술)
변계량이 아뢰기를,
“동당시(東堂試)의 초장(初場)에서 경서를 강(講)하는 일은 우리 태조께서 마련하신 헌장(憲章)입니다. 그러나 응시자들이 면전에서 강하다가 마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학문을 꺼리고 무과에 응시하는 자가 많으니, 이는 실로 국가가 학풍을 일으켜 선비를 육성하는 취지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사부(師傅)를 성균관에 두고, 교관(敎官)을 향학(鄕學)에 파견하여, 봄과 가을에는 《예기(禮記)》와 《악기(樂記)》를 가르치고, 여름과 겨울에는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을 가르쳐서 제술(製述)로써 선비를 선발할 것을 신은 주청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옳다. 다시 상의하겠다.”
하였다. 상이 여러 대언에게 물으니, 모두 아뢰기를,
“갑자기 파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는데, 유독 유영(柳穎)만은 아뢰기를,
“강경이 제술처럼 사문(斯文)을 흥기시키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응시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주고받지 못하게 하려면 제술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 원년 5월 7일(경진)
변계량이 가뭄이 심하므로 원구단(圓丘壇)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는 예(禮)를 복원하자고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참람한 예는 행하는 것이 불가하다.”
하였다. 변계량이 대답하기를,
“제후(諸侯)가 하늘에 제사하는 것이 불가한 것은 예가 본디 그러하고, 성인(聖人)의 가르치심으로도 또한 불가하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근래 중국 사신 주탁(周倬)이 와서 우리나라 사람에게 묻기를, ‘듣건대, 그대들의 나라가 하늘에 제사한다 하니, 인사(人事)를 가지고 말하면, 그대의 나라가 향례(饗禮)를 베풀고서 조정에 청한다면 재상은 혹시 몰라도 천자인 경우는 비록 정성을 다한다 하더라도 어찌 그대의 나라에 기꺼이 강림하려 하겠는가.’ 하므로, 이때에 비로소 하늘에 제사하는 의식을 폐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의 소견으로는 제사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전조(前朝) 2천 년 동안 계속해서 하늘에 제사 지내 왔으며, 더구나 본국은 국토가 수천 리나 되기 때문에 옛날 백 리 제후의 나라에 비할 바가 아닌데 하늘에 제사한들 무슨 혐의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국토가 수천 리가 된다 해서 천자의 예를 분수 없이 행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변계량이 다시 아뢰기를,
“신은 행하는 것이 옳다고 여깁니다. 왜 그런가 하면, 기수(沂水) 가에 하늘에 제사하여 비를 비는 곳이 있으니, 이 같은 예는 옛적에도 있었습니다. 평상시에 늘 제사하는 것은 불가하다 하겠으나, 어떤 일로 인하여 행하는 것은 오히려 가한 일입니다. 지금 극심한 가뭄을 당하여 방해될 것이 없으니, 하늘에 제사하는 것이 무슨 혐의가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옳게 여기고, 하늘에 제사할 날짜를 택일하라고 명하였다.
○ 원년 6월 17일(경인)
대소 사신(使臣)이 관기(官妓)를 간음하지 못하도록 금하였다. 이때에 의정부와 육조가 평안 감사 윤곤(尹坤)의 장계를 가지고 의논하여 모두 아뢰기를,
“행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반드시 금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였는데, 오직 박은(朴訔)만은 아뢰기를,
“윤곤이 요청한 대로 따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변계량은 옛 관례를 그대로 따라서 뭇사람의 마음에 부응하기를 청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해 온 것이 비록 오래라고는 하나, 그것이 어찌 아름다운 풍속이겠으며, 더구나 남편이 있는 기생인 데이겠는가. 윤곤의 요청대로 따르도록 하라.”
하였다.
○ 원년 7월 18일(신유)
경기 감사 이적(李迹)이 보고하기를,
“이번에 조곡(早穀)을 살펴 조사하고 아울러 과전(科田)으로 받은 사전(私田)을 조사하겠습니다.”
하니, 변계량이 아뢰기를,
“비록 모두 사전을 조사하라고 한다 해도, 누가 기꺼이 답험(踏驗)하고 검사하는 데 마음을 쓰려고 하겠습니까. 정유년(1417, 태종 17)에 이미 이 법을 행하였으나 제대로 되지 않았다 하여 다른 위관(委官)에게 명하여 다시 조사하도록 하였고, 제대로 하지 않은 자에게는 다 장형(杖刑) 100대를 내렸습니다. 만일 흉년이 들면 사전도 아울러 심사하고, 풍년이 들면 전주(田主)에게 맡겨서 스스로 심사하게 하여, 혹 제대로 하지 않았으면 죄를 주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고, 조말생(趙末生)은 아뢰기를,
“만약 흉년에 아울러 심사하고 풍년에는 전주(田主)가 스스로 심사하도록 한다면, 이것은 흉년에는 납세를 정확하게 하고, 풍년에는 마음대로 걷게 하는 것입니다. 실로 중정(中正)한 방법이 아니니, 행할 수 없습니다. 마땅히 경차관(敬差官)을 보낼 때에 공전(公田)과 사전(私田)을 한결같이 중정하게 답험하도록 명하면, 사전에서 조세 받는 법이 거의 공평하게 될 것입니다.”
하고, 원숙(元肅)이 아뢰기를,
“한 이랑[畝]을 건너서 하나는 공전이요, 다른 하나는 사전일 경우, 그 조세를 받는 데 있어서 많고 적은 것이 크게 서로 같지 않을 것이니, 백성들이 원망할 것입니다. 전주가 비록 마음대로 무리하게 거두어들이더라도, 소작하는 사람은 머리를 굽혀 가며 듣고 따르기에도 겨를이 없을 터인데 어찌 감히 스스로 호소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 원년 7월 25일(무진)
경연에 나아가 《춘추(春秋)》를 강하였다. 환공(桓公) 원년 조에 “가을에 큰물이 있었다.”라는 대목의 호전(胡傳)에, “후세에는 착하지 못한 일을 하다가 천변(天變)을 초래하여 물이 범람하는 재앙을 부르게 된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요(堯) 임금을 끌어다가 변명하려 하니 잘못이다.”라고 한 데에 이르러 상이 이르기를,
“이와 같은 자가 반드시 많을 것이다. 신하 중에는 상서(祥瑞)를 말하기 좋아하는 자도 있고 재변을 말하기 좋아하는 자도 있으나, 전적으로 상서만 말하고 재변을 말하지 않는다면 어찌 옳다고 하겠는가. 상서를 만나면 상서를 말하고, 재변을 만나면 근심과 두려움을 말하는 것이 옳다.”
하니, 변계량이 아뢰기를,
“임금은 상서를 좋아하느라 재변을 잊거나 재변을 우려하느라 상서를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 원년 8월 16일(무자)
의금부 제조 변계량 등이 수강궁(壽康宮)에 가서 아뢰기를,
“어제 명을 받들고 박실(朴實)이 패군한 죄를 국문하니, 박실이 공초하기를, ‘이종무(李從茂)가 처음에는 삼군 삼절제사에게 모두 육지에 내려서 싸우라고 명하더니, 뒤에 명령을 변경하여 삼군 절제사 각 한 사람씩만 육지에 내리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제비를 뽑게 되어서 내렸는데, 적은 강하고 우리는 약하여서 두 번이나 보고하여 구원하기를 청하였으나, 이종무가 들어주지 않았고, 유습(柳濕)과 박초(朴礎) 등도 역시 내려와 구원하지 않아 패전하게 되었습니다.’ 하였습니다. 신들의 생각에는 특별히 박실의 죄뿐만이 아니고, 이종무, 유습, 박초도 다 죄가 있습니다. 모두 국문하소서.”
하니, 상왕이 이르기를,
“박실이 패군한 죄는 진실로 다 아는 바이다. 만약 법대로 논한다면, 유정현(柳廷顯)이 도통사(都統使)이면서 즉시 박실을 구속하고 죄줄 것을 청하지 아니하였으니, 역시 죄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장온(張蘊)을 무고죄로 벌주고 여러 장수들을 상 주었다가, 또다시 유정현과 이종무를 옥에 가둔다면 나라 안의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이 있지 않겠는가. 하물며 동정(東征)할 때에는 승리가 많았고 패전은 적지 않았는가. 뒷날의 일도 역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크게 거병(擧兵)할 계획을 한다면 또한 권도(權道)를 써야 할 것이나, 내 어찌 그런 일로 끝까지 그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야 있겠는가. 지금 박실은 공신의 자식이니 면죄토록 하라.”
하였다.
○ 원년 9월 4일(병오)
이보다 앞서 변계량이 선지(宣旨)를 받들고 낙천정기(樂天亭記)를 지어 바치니, 권홍(權弘)에게 명하여 쓰게 하고 판에 새기라 하여 낙천정에 걸었다. 기문에 운운하였다. - 원집에 보인다.
○ 원년 9월 20일(임술)
상이 예문관 대제학 유관(柳觀), 의정부 참찬 변계량 등에게 명하여, 정도전(鄭道傳)이 찬수(撰修)한 《고려사》를 개수(改修)하게 하였다.
○ 원년 9월 26일(무진)
상이 두 차례 수강궁에 문안하였다. 세 의정(議政) 및 변계량, 허조(許稠) 등이 상례(喪禮)를 의논하였다. 세 의정과 조말생(趙末生)이 정강성(鄭康成)의 말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주상은 대행 상왕(大行上王)에게는 손자 항렬이므로, 상왕은 백관을 거느리고 참최(斬衰) 27일의 복을 입어야 하고, 주상께서는 자최(齊衰) 13일의 복을 입어야 합니다.”
하고, 변계량과 허조가 아뢰기를,
“상왕과 상께서는 군신을 거느리시고 다 참최의 복을 입으셔야 합니다. 옛날 송 나라 효종(孝宗)이 붕(崩)하자, 그 아들 광종(光宗)이 병이 들어서 영종(寧宗)이 효종의 상(喪)을 입어야 하였습니다. 문공(文公)은 영종에게 부친을 대신하여 참최 3년의 예를 행하라고 권하였고, 영종은 그 말에 따랐습니다. 광종의 병이 완쾌되자, 어사(御史) 호홍(胡)이 상주(上奏)하여 아뢰기를, ‘광종의 병이 완쾌되었으니, 마땅히 법대로 상을 치뤄야 합니다.’라고 하고, 영종이 삼년상을 입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여, 마침내 영종이 삼년상을 끝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비록 영종이 호홍의 상주에 따라 도중에 고쳐서 길복(吉服)으로 돌아갔으나, 그것은 광종의 병이 완쾌되었기 때문입니다. 병이 만약에 완쾌되지 않았다면, 삼년상을 끝까지 입었을 것은 틀림없습니다. 이제 상께서 참최의 복을 입으시는데, 하루로 한 달을 바꾸는 제도를 적용한다면, 마땅히 25일에 상복을 벗고, 27일에 담제(禫祭)를 지내고서 길복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니, 상왕과 상이 세 의정의 건의에 따랐다.
○ 원년 10월 3일(갑술)
박은이 아뢰기를,
“고부 청시 표전(告訃請諡表箋)을 드리는 것이 비록 무자년의 예이기는 하나 정사(正使)와 부사(副使)가 다 가는 것이 어찌 폐단이 없겠습니까. 세자를 봉하는 것을 청하고, 왕위를 전하는 것을 청하는 예에 따라 한 사람을 보내서 주계본(奏啓本)을 드리도록 하소서.”
하고, 이원 및 변계량 등이 아뢰기를,
“마땅히 무자년의 예에 따르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상왕과 상이 박은의 말을 따랐다.
○ 원년 11월 7일(정미)
상왕과 상이 선암동(扇巖洞)에서 주정(晝停)하였다. 도성에 머물러 있던 재추(宰樞)들이 참찬 변계량을 보내서 문안하고, 이어 술과 과일을 올리니, 상왕이 변계량에게 모의(毛衣)를 하사하였다.
○ 원년 11월 27일(정묘)
상왕이 회암사(檜巖寺) 중들의 간음과 절도 사건을 논의하다가 웃으면서 이르기를,
“내 경우를 예로 들어 보면 대신(大臣)을 대할 때와 소환(小宦)을 대할 때가 다르다. 저 중들이 항상 부녀와 가까이 있었으니, 어찌 능히 범하지 않겠는가. 내가 일찍이 법을 만들어 중들로 하여금 비자(婢子)를 부리지 못하도록 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노자(奴子)만 윤번으로 부리게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또 상책이 있으니, 다만 전토만 주고 노비를 없애면 어찌 이런 폐단이 있겠는가. 중들이 비록 직접 나무하고 밥을 짓더라도 또한 가한 일이다.”
하였다. 여러 신하가 모두 나갔는데, 유정현(柳廷顯), 박은, 이원(李原), 변계량, 허조, 조말생, 원숙은 남아 있게 하여, 좌우를 물리치고 이르기를,
“절의 노비를 혁파하는 것은 내가 평소에 하고자 한 것이다. 다만 이 무리들이 도망하여 중국에 들어가, 윤이(尹彛)나 이초(李初)의 사건과 같은 변고를 일으킬까 염려하여 갑자기 개혁하지 못하고, 도리어 중들을 사역하지 말게 함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였던 것이다. 이제 그 폐단을 내가 자초하였으니 또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대간을 시켜 상소하게 하고, 의정부와 육조에서도 노비 폐지를 청하도록 하라.”
하니, 변계량이 아뢰기를,
“비자(婢子)만 혁파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이원이 그르게 여겼고, 상도 윤허하지 않았다.
○ 원년 11월 30일(경오)
상왕이 상과 함께 내전에 나아가 유정현, 박은, 이원, 변계량, 조말생, 허조, 신상(申商), 이명덕(李明德), 장윤화(張允和) 등을 인견하였다. 상왕이 이르기를,
“병조에 일이 많으니, 여러 조(曹)와 함께 주상전에 나아가 일을 아뢰게 하고, 삼군진무소(三軍鎭撫所)가 병조를 대신하여 군무를 전담하여 나에게 계문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모두 아뢰기를,
“진무가 병조를 대리하여 군무를 전담하게 되면 그 일이 많은 것이 병조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예전대로 사목(事目)을 정해서 번잡함을 없애도록 하소서.”
하자, 상왕이 이르기를,
“그렇다. 경들이 의논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 원년 12월 10일(경진)
상왕과 상이 수강궁 편전에 나아갔다. 촛불을 켜고 병조 참의 윤회(尹淮)와 지신사 원숙을 불러서, 좌우의 근시를 물리치고 중들의 사건에 대하여 유시하였다. 상왕이 이르기를,
“오늘 주상이 나에게 중 30명이 도망하여 중국에 들어간 사건을 보고하였다. 이 말을 듣고, 문득 예전에 윤이와 이초가 도망하여 명(明) 나라에 들어가 거짓말로 본국에 대한 일을 고자질하고, 가짜 왜구를 꾸며 명 나라를 엿본 일이 생각났다. 그때 고황제(高皇帝)의 총명으로도 현혹되었으니, 우리나라에서 여러 해를 두고 변명하였지만 아직도 제대로 해명하지 못하였다.
과인의 초년에 상당군(上黨君) 이저(李佇)를 외방에 귀양 보냈는데, 중 하나가 도망하여 중국에 들어가 사실을 지나치게 고하였으므로, 지금 황제가 또한 이것을 믿고 본국 사신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 왕이 친족을 죽였다.’ 하였다. 오래 지난 뒤에 과인의 마음을 자세히 알고 고해 바친 자가 거짓임을 깨달았다.
또 황제가, 우리나라에서 야인을 안무하여 사모(紗帽)와 품대(品帶)를 주니, 그들이 돌아가서는 품대와 사모를 말 옆구리에 매달았다는 말을 듣고 비웃었다 하는데, 이와 같은 것은 전부 불령(不逞)한 무리가 도망하여 명 나라에 들어가 거짓말로 사건을 일으키려고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또 동북 양계(兩界)는 경계가 명 나라와 연해서 사람이 도망쳐 들어가기 매우 쉬운데, 하물며 중들이 도망쳐 들어가기는 평민보다도 더 쉬운 데이겠는가.
지금 황제가 부도(浮屠)를 신봉하는 것이 소량(蕭梁)보다 더 심하여, 《명칭가곡(名稱歌曲)》을 외우는 소리가 천하에 퍼져 있고, 공화(空花)와 불상(佛像)의 상서를 그린 그림이 파다하여, 일시에 풍습이 쏠려서 따라가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앞서 이미 절의 전토와 백성을 혁파하여 겨우 열에 하나를 남기고, 이번에 또 절의 노비를 다 없앴으니, 비록 그들이 자초한 것이라 할지라도 어찌 원망이 없겠는가. 이들이 이미 희망을 잃었고, 또 황제가 불도를 숭상한다는 것을 들었으니, 반드시 도망하여 중국에 들어가 말을 꾸며서 참소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더구나 황제가 불도를 숭상하고 신봉함이 저와 같은데, 우리나라에서는 불도를 혁파함이 이와 같은 데이겠는가. 중들이 여기서 도망하여 저곳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것은 의심할 것이 없는 것이다.
옛사람도 때에 따라 변고(變故)를 제압하기 위하여 권도(權道)로 임시변통하는 일이 있었으니, 지금 중들에게 스스로 위안하고 기쁘게 하는 마음을 열어 주기 위하여, 황제가 하사한 《명칭가곡》과 《위선음즐(爲善陰隲)》 따위를 속히 서북면(西北面)과 황해도 등 사신이 내왕하는 곳에 중과 늙은이들을 모아서 항상 읽고 외우게 하며, 또 불씨(佛氏) 및 황제가 불도를 숭상하여 복을 얻고 상서로운 일이 여러 번 나타난 것을 찬하하는 시와 노래를 지어서 기생들에게 가르치게 하라. 그리하여 명 나라 사신이 와서 연도(沿道)를 지날 때 경을 외우는 자가 있고, 연회에서 가무할 때 황제의 덕을 칭송하는 자가 있다면, 황제가 듣고 반드시 우리나라가 황제의 마음을 본받는다 하여 기뻐할 것이니, 비록 도망하여 들어가 참소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 말이 행해질 수 없을 것이다.
또 자복사(慈福寺)의 전지(田地)를 중들이 모이는 곳에 이속시켜 그들의 마음을 편하게 하고자 하니, 이것은 과인이 불씨의 화복설(禍福說)을 겁내서가 아니다. 또한 천자가 어찌 불교를 배척한다 하여 갑자기 군사를 일으켜 우리나라에 죄를 묻겠는가. 그러나 지금의 권도로는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대들도 어찌 모르겠는가. 변계량과 허조 및 세 의정과 더불어 비밀히 논의하고 충분히 계획하여, 원숙이 주상에게 아뢰어 과인에게 전달하게 하라.”
하였다. 원숙 등이 물러나와 변계량과 허조와 논의하였는데, 변계량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매우 옳습니다. 경을 외우고 부처를 숭봉하는 일은 당연히 거행할 것이나, 요는 그들의 마음을 편하게 하여서 도망치는 것을 방지하는 데 있습니다. 신의 의견으로는 절의 노자(奴子)를 돌려주어서 그들의 마음을 편하게 하고, 양계(兩界)에 엄령(嚴令)을 내려 도망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봅니다. 또 이미 도망쳐 들어간 중을 돌려보내도록 청하소서.”
하고, 허조는 아뢰기를,
“신이 명을 듣고 보니, 전하의 모든 생각은 국가의 장구하고 원대한 계획에서 나온 것으로서 신들이 미칠 바가 아닙니다. 불도를 숭상하고 경을 외우는 일은 삼가 하교를 받들어 거행하겠습니다마는, 노자를 돌려준다는 것은 불가합니다. 다만 서울 절에 거주하는 중들은 거의 모두가 양반의 자제로서 나무를 지고 물을 긷는 데 반드시 원망이 있을 것이니, 얼마쯤 노자를 주어서 그 마음을 위로하소서.”
하였다. 원숙이 변계량 등과 함께 세 정승 댁에 가서 비밀히 의논하였다.
○ 원년 12월 26일(병신)
변계량이 하교를 받고 하성명가(賀聖明歌) 3장을 지어 올렸는데, 운운하였다. 진구호(進口號)에 운운하고, 가사에 운운하고, 퇴구호(退口號)에 운운하였다. - 모두 앞에 보인다. - 명하여 예조에 내려 관현(管絃)으로 소리를 맞추게 하였다.
○ 2년 1월 9일(무신)
상왕이 묻기를,
“경상도와 전라도의 선군(船軍) 중에 재능이 없는 자를 가려 시위군(侍衛軍)으로 환속(換屬)시키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박은(朴訔)과 변계량이 아뢰기를,
“모름지기 먼저 시위군을 충실하게 한 뒤에 선군을 고려해야 하니, 바꾸어 정할 것이 못됩니다.”
하고, 유정현(柳廷顯)이 아뢰기를,
“왜구가 염려되니, 바꾸어 정하여 뜻밖의 일에 대비해야 합니다.”
하였다.
○ 2년 1월 10일(기유)
상이 광연루(廣延樓) 아래에 나아갔다. 상이 서계(誓戒)의 뜻을 물으니, 변계량이 대답하기를,
“더러움을 범하지 않으며, 술을 광음하지 말며, 냄새 나는 것을 먹지 말며, 방심(放心)하지 않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삼사(三司)에서 서계하였는데 지금은 의정부에서 서계하니, 의정부는 백관의 으뜸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고, 김점(金漸)은 아뢰기를,
“재계(齋戒)하는 재상이 다 의정부에 모이면 예빈시(禮賓寺)가 분주하게 궤향(饋餉)하는 노고가 없고, 재상이 또한 마음을 편히 하여 거처를 정할 것입니다. 또 지금은 의정부가 본부에 개좌(開坐)하지 않아 큰 집이 텅 비어 있게 하니, 의정부에 모이는 것이 좋습니다.”
하였다. 변계량이 아뢰기를,
“의정부가 비록 본부에 개좌하지 않으나 이는 백관의 으뜸이므로 섞어 앉을 수 없고, 또 청재(淸齋)에 들어오는 자는 반드시 고요한 곳에 거처하여 방심(放心)을 거두어야 하며, 여러 사람과 함께 앉아 떠들썩하게 웃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김점이 아뢰기를,
“예빈시가 텅 빈데다 또 제조 중에 함부로 하는 자가 많아서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고 그저 따라서 할 뿐이다.”
하였다. 변계량이 일찍이 본시의 제조로 있었기 때문에 변명하고자 하였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김점이 또 아뢰기를,
“풍저창(豐儲倉) 관원은 작질이 낮으니, 마땅히 3품관으로 차하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변계량이 불가하다고 하자, 상이 변계량의 말을 옳다고 하였다.
○ 2년 윤1월 13일(임오)
변계량과 허조(許稠), 행 대사성 유백순(柳伯淳) 등이 명을 받들어 성균관에서 생원시(生員試)를 보였는데, 좌대언 김익정(金益精)이 선온(宣醞)과 행신보(行信寶)를 받들고 성균관에 가서 시관(試官)을 위로하고 시권(試券)에 인보(印寶)를 찍었다.
○ 2년 윤1월 19일(무자)
상이 이르기를, “연향을 베풀 때에 항상 향악(鄕樂)을 쓰는데, 그 가사가 매우 비열하니, 변계량과 조용(趙庸), 정이오(鄭以吾) 등으로 하여금 헌수(獻壽)의 뜻과 경계될 만한 내용으로 각기 가사(歌詞) 3수(首)를 짓게 하라.” 하였다.
○ 2년 3월 16일(갑신)
집현전(集賢殿)을 새로 두고 유관(柳寬)과 변계량을 대제학으로 임명하였다. 처음에 고려의 제도에 의하여 수문전(修文殿)ㆍ집현전ㆍ보문각(寶文閣)의 대제학과 제학은 2품 이상으로 임명하고, 직제학ㆍ직전(直殿)ㆍ직각(直閣)은 3, 4품으로 임명하였으나, 관청도 없고 직무도 없이 오직 문신으로 관직을 주었을 뿐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모두 폐지하고, 다만 집현전만 남겨 두어 관사(官司)를 궁중에 두고, 문관 가운데서 재주와 행실이 있고, 나이 젊은 사람을 택하여 이에 채워서, 오로지 경전과 역사의 강론을 일삼고 임금의 자문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 2년 3월 18일(병술)
인정전에 나아가 책제(策題)를 내어 김문(金汶) 등 33명에게 복시(覆試)를 실시하였는데, 은사(恩賜) 3명과 이과(吏科) 1명도 참가하였다. 독권관(讀券官)은 이원(李原)ㆍ변계량ㆍ허조이며, 대독관(對讀官)은 권도(權蹈)와 예문관 직제학 성개(成槩)였다.
○ 2년 4월 21일(기미)
권규(權跬)와 원숙(元肅) 및 유정현과 변계량을 보내어, 선온을 받들고 벽제역(碧蹄驛)에 가서 사신을 전송하게 하였다.
○ 2년 5월 2일(기사)
상왕과 상이 별전(別殿)에서 주연을 베풀고, 유정현ㆍ박은ㆍ이원ㆍ정역(鄭易)ㆍ허조ㆍ조말생(趙末生)ㆍ변계량ㆍ신상(申商)ㆍ이명덕(李明德)ㆍ이지실(李之實)ㆍ원숙 등이 입시하였다. 진헌사(進獻使) 통사(通事) 김시우(金時遇)와 전의(全義)가 북경으로부터 돌아와서 아뢰기를,
“황제가 종이를 진상하는 상주문(上奏文)에 날짜를 적지 않은 것 때문에 노하였으므로 금(金)과 은(銀)을 진상하는 것을 면제하여 달라는 주본(奏本)을 감히 올리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상왕이 이르기를,
“금과 은의 진상을 면제하여 달라고 청하는 것은 이번이 적기이다. 만약 이번에 청하지 못하면 뒷날에는 반드시 이것으로 근거를 삼을 것이다. 마땅히 세포(細布)를 준비하였다가 일에 따라서 진헌하고 곧바로 청하도록 하라.”
하자, 유정현 등이 대답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지당하십니다.”
하였다. 정역이 홀로 아뢰기를,
“송골매를 진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왕이 이르기를,
“그것은 얻기가 가장 어렵고, 성질이 특히 날래어서 좋지마는, 하루에 꿩을 한 마리씩이나 먹는데다가 기르기도 어렵고 잘 길들여지지도 않는다. 혹시 날아가버리면 응사(鷹師)들이 매번 찾는다는 핑계로 촌락을 침노하고 소동을 부려 그 폐해가 막심한 까닭에 이미 다 놓아 버렸다.”
하자, 변계량이 아뢰기를,
“전하의 말씀은 사책(史冊)에 기록하여 만세(萬世)의 법으로 삼을 만합니다.”
하였다.
○ 2년 5월 16일(계미)
상왕의 탄신일이므로 상이 낙천정(樂天亭)에서 헌수(獻壽)하는데, 양녕대군(讓寧大君), 효령대군(孝寧大君), 공녕군(恭寧君), 경녕군(敬寧君), 유정현, 박은, 이원, 이백강(李伯剛), 조대림(趙大臨), 권규, 윤계동(尹季童), 유관(柳觀), 조연(趙涓), 박자청(朴子靑), 정역, 이화영(李和英), 변계량, 최윤덕(崔潤德), 권영균(權永均), 허지(許遲), 허조, 조말생, 신상, 이명덕, 안순(安純), 한확(韓確), 홍부(洪敷), 이교(李皎), 원숙 등이 입시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차례로 헌수하고 춤추니, 상이 일어나 춤을 추었다. 상왕도 역시 춤을 추며 변계량에게 이르기를,
“자식이 왕이 되어 지극한 정성으로 봉양하니, 그 아비가 되어 이와 같이 누리는 것은 고금에 드문 일이다.”
하였다. 이어 상에게 술을 주고, 또 세 정승에게도 술을 주어 한껏 즐기다가 밤이 깊어서야 끝이 났다.
○ 2년 5월 25일(임진)
유관과 변계량이 집현전에 회동하여 집현전 관원들에게 시(詩)를 시험보였다.
○ 2년 5월 26일(계사)
상왕이 유정현, 박은, 이원, 변계량 등을 불러서 왔다. 상왕이 이명덕과 원숙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신하들이 이종무(李從茂)의 훈공으로 준 녹권(錄券)을 거두어들이자고 여러 번 청하였으나, 내가 다 윤허하지 않은 것은 그를 공신 명부에서 삭제하지 않고자 해서였다. 이제 만약 도로 불러들이지 않는다면, 이미 안치(安置)한 것이니, 끝끝내 돌아올 기약이 없을 것이다.
이적(李迹)은 자신에 대하여 계달한 것이 아니다. 단지 이종무에 대하여 청하였을 뿐이다. 또 그 아비의 나이가 늙었으니, 진실로 민망한 일이다. 임상양(林尙陽)도 역시 다른 범행이 없으니, 다 용서하도록 하라. 홍여방(洪汝方)은 바로 공신 홍길민(洪吉旼)의 아들인데, 자의로 병조 영사(兵曹令史)를 불러 나의 거동을 물었으니, 진실로 충의위(忠義衛)에서 삭거(削去)했어야 한다. 박서생(朴瑞生), 송인산(宋仁山), 정연(鄭淵), 허척(許倜) 등은 처음에 모두 말리다가 부득이하여서 참여하였으니, 이들도 용서해 주어야 할 것이다.
내가 만약 풀어 주지 않으면, 주상이 반드시 가볍게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그대들이 세 정승과 변 참찬에게 나의 뜻을 갖추어 전하라. 내가 친히 묻지 않는 것은, 그들이 서로 원만히 의논하여 대답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하였다. 원숙이 그 말을 유정현 등에게 전하니, 모두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지당하십니다. 다만 박서생 등은 죄를 받은 지 겨우 달을 넘겼을 뿐인데, 방환(放還)하는 것은 가벼운 듯합니다.”
하고, 박은은 아뢰기를,
“사면하도록 하소서.”
하고, 유정현은 아뢰기를,
“이종무와 이적 등은 불충의 죄를 지었으니, 사면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상의 하교가 그와 같으시니 어찌 감히 교지(敎旨)를 봉행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상왕과 상이 유정현 등을 인견하고 주연을 베풀어 즐거움을 만끽하였다. 상왕이 이르기를,
“오늘 경들이 오는 것을 위하여, 내가 손수 사냥하여 짐승을 잡았노라.”
하니, 유정현 등이 일어나 치사하고 각각 차례로 나아가 춤추고 연구(聯句)를 지어 바치니, 상왕과 상도 일어나 춤을 추었다.
○ 2년 5월 28일(을미)
경연에서 일을 보았다. 변계량이 《고려사(高麗史)》에 실려 있는 재이(災異)에 관한 일을 뽑아 기록하여 올리니, 상이 이르기를,
“《한서(漢書)》와 《후한서(後漢書)》에 기재되어 있는 재이에 관한 일을 주자(朱子)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 다 적지 아니하였으니, 이번에 교정할 적에 더 기록할 필요는 없다.”
하였다.
○ 2년 6월 9일(병오)
변계량이 풍양(豐壤)에 나아가 문안하였다.
○ 2년 7월 7일(계유)
대비의 병환이 재발하니, 상왕이 풍양으로부터 수강궁(壽康宮)에 나아가 병환을 살펴보고, 유정현, 박은, 이원, 변계량, 허조, 원숙 등을 불러 이르기를,
“만일 대고(大故)가 있으면 빈소(殯所)를 염려치 않을 수 없으니, 광연루(廣延樓) 아래와 수강궁 안쪽 가운데 어느 곳이 좋겠는가?”
하니, 모두 아뢰기를,
“광연루는 사신을 접대하는 곳이고, 수강궁도 좁으니, 명빈전(明嬪殿)을 수리하게 하소서.”
하여, 그대로 따랐다.
○ 2년 7월 10일(병자)
변계량과 곽존중(郭存中)으로 하여금 호상(護喪)하게 하고, 여천군(驪川君) 민여익(閔汝翼)과 전 부윤 이종선(李種善)과 변계량을 빈전도감 제조(殯殿都監提調)로 삼았다.
○ 2년 7월 11일(정축)
상이 허조와 변계량을 불러 이르기를,
“내가 들으니, 나로 하여금 역월(易月)의 제도를 행하여 13일 만에 상복을 벗으라 했다고 하는데, 그러한가? 이것이 비록 송 나라 제도이기는 하지만 나는 일찍이 이를 야박한 행실이라 여겼다. 그런데 지금 나로 하여금 이를 행하도록 할 것인가?”
하니, 허조가 아뢰기를,
“역월의 제도는 행한 지 이미 오래되었고 또 선지(宣旨)를 받들어 이미 상제(喪制)를 정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러면 나는 산릉(山陵) 후에 최질(衰絰)을 벗을 것이니, 백관은 13일 만에 최복을 벗고 백의(白衣)와 오사모(烏紗帽)로 바꾸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허조가 눈물을 흘리며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지당하신데 신들이 어찌 감히 다시 말씀드리겠습니까마는, 백관들도 마땅히 산릉 후에 최복을 벗도록 하겠습니다.”
하였다.
○ 2년 8월 8일(갑진)
상왕이 변계량, 허조, 원숙 등을 불러 전지(傳旨)하기를,
“이미 역월의 제도를 좇아 13일 만에 제상(除喪)하게 되었다. 부고(訃告)하는 문서에 어보(御寶)를 사용하지 않는데, 기년(期年)을 마치도록 어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인가? 또 하정(賀正)하는 문서에도 어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인가?”
하니, 변계량 등이 대답하기를,
“모두 13일이 지난 뒤의 일입니다. 그러나 고부(告訃)는 흉사(凶事)이므로 애자(哀子)라 칭하고 어보를 사용하지 않으며, 하정은 길례(吉禮)이므로 국왕(國王)이라 칭하고 또 어보도 사용합니다. 만일 묻는 자가 있으면 이것으로써 대답하소서.”
하고, 원숙은 대답하기를,
“이미 역월의 제도를 행하였으니, 비록 흉사라 할지라도 왕(王)이라 칭하고 어보를 사용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아니하려면 이번 중국 사람을 돌려보낼 자문(咨文) 속에 대강 상고(喪故)를 당하여 감히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뜻을 밝혀 명 나라 조정에 알리고, 전적으로 고부만의 일을 가지고 사신을 보낼 것은 없습니다.”
하자, 상왕이 이르기를,
“전후가 같지 않은 뜻을 잘 분변하여 해명하기가 어렵다. 또 제후(諸侯)로서 천자(天子)에게 고하면서 권도를 쓸 수 없는 것이다. 천자가 현비(顯妃)가 훙(薨)하였다는 것을 듣고 칙서와 제문과 부의를 내리면서도 부고(訃告)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고, 덕비(德妃)가 훙하였을 때에도 황제가 고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묻지 않았으니, 이제 틀림없이 대비(大妃)가 훙하였을 때 부고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묻지 않을 것이다. 만일 물을 경우에는 ‘감히 천자의 신총(宸聰)을 번거로이 할 수 없어서 그랬다.’고 대답한다면 일이 천자를 공경하는 데로 돌아갈 것이니, 고하지 않는 것이 나을 것이다. 비록 부고한다 하여도 시호(諡號)와 고명(誥命)을 청하는 예(禮)는 없으니, 이것은 사제(賜祭)나 바라는 것같이 볼 수 있다. 뒤에 이의(異議)하는 자가 있을지라도 나는 듣지 않을 것이니, 경(卿) 등은 이 뜻을 갖추어 주상(主上)에게 아뢰고, 또 정승들에게도 고하라.”
하였다. 변계량이 아뢰기를,
“곽(槨)은 쌓아둔 황장목(黃膓木)의 재목을 써야 하는데 틈이 생겼습니다. 세속의 예에 따라 전판(全板)을 쓰게 하소서.”
하여, 그대로 따랐다.
○ 2년 8월 11일(정미)
상이 장차 낙천정에 나아가려 하는데, 상왕이 비가 내린다 하여 정지하게 하였다. 유정현, 이원, 변계량, 허조, 원숙 등이 낙천정에 나아갔다.
상왕이 이르기를,
“주상이 5개월 만에 장례를 치르려 한다는 말을 듣고 내가 못하게 하였다. 일찍이 100일 이내라도 좋은 날이 있는 줄을 알았다면 비록 예문에 없더라도 가한 일인데, 더구나 3개월 만에 장례를 치른다는 예문이 있는 데이겠는가. 또 나의 명이 바로 법이 되는데 하필 옛날 제도만을 따를 것인가. 사람이 죽고 10일이나 20일이 지나고 나면 살아날 이치가 없다. 예전 사람은 1개월 만에 장사한 자가 있고 10일 만에 장사한 자도 있었다. 나는 지금 3개월 만에 장사하는 것으로 정하려 하니, 다른 논의를 제기하지 말라.”
하였는데, 변계량 등이 돌아와서 아뢰었다. 상이 이르기를,
“《가례(家禮)》에 왕공(王公)은 3개월 만에 장례를 치른다고 한 글은 주자(朱子)의 본래 뜻이 아니고, 세속이 장례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을 책망한 말이었다. 상왕의 뜻이 이미 정해지셨으니 어길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우의정이 예문에 대해 대강 알고 있으니, 그때 바로 아뢰었더라면 하는 것이다.”
하니, 변계량이 아뢰기를,
“오늘의 일은 상왕께서도 임시방편으로 조처한 것이지, 법으로 정하고자 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 2년 8월 24일(경신)
참찬 변계량이 헌릉지(獻陵誌)를 지어 올렸는데, 운운하였다. - 앞에 보인다. -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권홍(權弘)을 시켜 비석에 쓰게 하였다.
○ 2년 10월 4일(기해)
국상(國喪)으로 기년(期年) 안에 종묘와 망궐례(望闕禮)에 악(樂)을 쓰는 것의 가부를 의논하게 하니, 허조가 대답하기를,
“태조(太祖)의 상 때에는 졸곡(卒哭) 뒤에 악을 썼으니, 종묘에는 마땅히 성헌(成憲)을 따라야 할 것이며, 망궐례에도 악을 쓰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변계량은 아뢰기를,
“종묘에 악을 쓰는 것은 가하지만, 망궐례에는 쓸 수 없습니다. 상께서 나오시지 않고 백관들만이 시복(時服) 차림으로 예를 행한다면 사리에 맞을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종묘에는 성헌에 의거해 거행하도록 하고, 망궐례에 악을 쓰는 것은 다시 의논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신하들이 나간 뒤에 근신(近臣)에게 이르기를,
“망궐례에 내가 먼저 예를 행하고, 백관은 시복으로 악을 쓰고 춤도 추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였다.
○ 2년 11월 9일(계유)
상이 풍양(豐壤)에 나아가 상수(上壽)하는데, 유정현, 박은, 이원, 유관(柳寬), 변계량, 맹사성(孟思誠), 이지강(李之剛), 이지실, 이백강, 조대림, 남휘(南暉), 조연, 연사종(延嗣宗), 홍부, 이교, 이명덕, 원숙, 윤회(尹淮), 정초(鄭招), 김익정(金益精)이 시연(侍宴)하였다. 신하들이 각기 차례로 잔을 올리니, 상왕이 이르기를,
“오늘이 가절(佳節)인데, 주상이 대신과 와서 헌수하니, 내가 어찌 취하지 않겠는가. 국군(國君)으로서 일없이 거관(去官)한 자가 몇이나 되는지 모르겠다.”
하고, 상에 놓인 감과 귤을 원숙에게 내려주어 그의 어미에게 주라 하고, 번(番)에 들었던 재추(宰樞)와 대언(代言)에게는 병조청(兵曹廳)에 술을 내려 주게 하였다.
○ 3년 1월 30일(계사)
이전에 정도전(鄭道傳)이 편찬한 《고려사》가 간혹 사신(史臣)이 본래 초(草)한 것과 같지 않은 곳이 있고, 또 제(制)니, 칙(勅)이니 하는 말과 태자(太子)라고 한 것 등이 참람되고 분수에 넘치는 말이 된다 하여, 유관(柳觀)과 변계량에게 명하여 교정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책이 완성되어 진상하였다.
○ 3년 2월 18일(신해)
좌의정 박은과 참찬 변계량이 와서 문안하였다.
○ 3년 3월 1일(갑자)
장정(壯丁) 2000명을 동원하여 눌두산(訥豆山)에서 사냥하고, 저녁에 어가(御駕)가 대화역(大和驛)의 들에 머물렀다. 서울에 있는 신하들이 참찬 변계량을 보내어 문안하고, 술과 과일을 올렸다. 상이 이르기를,
“전에 닷새에 한 번씩 문안하라 하였는데, 어찌하여 이레나 되어서야 오는가?”
하니, 변계량이 대답하기를,
“좌의정 박은이 늦지 않을 줄로 생각하고 지난달 29일에 술을 봉하여 신에게 주었기 때문에, 늦게 오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상왕이 내신(內臣)에게 명하여 술을 내리고, 사슴 2마리를 주면서 이르기를,
“뒤에 문안하러 오는 자를 길에서 만나더라도 그대가 데리고 서울로 돌아가라.”
하였다.
○ 3년 5월 18일(기묘)
상이 상왕을 모시고 낙천정(樂天亭)에 거둥하여, 오위(五衛)의 진(陣)을 크게 열병(閱兵)하였다. 이보다 앞서, 상왕이 참찬 변계량에게 명하여, 옛 제도를 상고하여 진법(陣法)을 이룩하게 하고, 상이 내전(內殿)에서 또 그림으로 된 진법 1축(軸)을 내주었다. 변계량이 참작하여 연구하여 오진법(五陣法)을 만들어 올리자, 훈련관(訓鍊觀)으로 하여금 이 진법에 의거하여 익히게 하였다. 이때에 와서 삼군(三軍)이 오진(五陣)으로 변하였으나, 차례를 잃은 병졸이 없었다. 열병을 하고 나서, 손으로 서로 치는 놀이[手拍]를 보고, 술자리를 베풀고 풍악을 연주하여 삼군의 장수를 위로하였다.
○ 3년 5월 20일(경진)
상이 김익정을 명하여 변계량에게 묻기를,
“지금 경이 지은 《진설(陣說)》 안에, 적군(敵軍)과 응전(應戰)할 즈음에 후위(後衛)가 먼저 나가서 적군과 응전한다는 설(說)과 부딪치는 곳에서 먼저 나간다는 설은 모두 한쪽에 치우친 듯하다. 내 생각에는 중위(中衛)의 주장(主將)이 임시로 포치(布置)하여 앞으로 가기도 하고, 뒤로 가기도 하며, 혹은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가기도 하여, 그 주장의 지휘를 따르게 하는 것이 옳겠다.”
하니, 변계량이 아뢰기를,
“후위가 먼저 나간다는 설은 오진 본법(五陣本法)에서 나왔으며, 부딪치는 곳에서 먼저 나간다는 설도 또한 제가(諸家)의 진법에서 나왔으니, 모두 폐지할 수 없으므로, 그 두 가지 설을 다 두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말한 바와 경이 말한 바를 빠짐없이 써서 올리라. 내가 장차 부왕께 아뢰겠다.”
하니, 변계량이 두 가지 항목을 써서 올렸는데, 윤회(尹淮) 등을 보내어 상왕께 아뢰었다.
○ 3년 6월 29일(경신)
상왕과 상이 수정(水亭)에 나아가서 정사를 보고, 인하여 조그마한 술잔치를 베풀었다. 유정현, 박은, 이원, 변계량, 조말생, 윤회, 김익정, 권도(權蹈), 곽존중(郭存中), 조숭덕(曺崇德) 등이 모시고서 도망한 중 적휴(適休)를 돌려보내주기를 청하는 일에 대해 의논하였다.
○ 3년 7월 18일(무인)
조정에서 또 별묘(別廟)를 세울 땅을 의논하였는데, 좌의정 박은이 아뢰기를,
“사조(四祖)의 전(殿)이 대실(大室)의 서쪽에 있게 된다면, 종묘의 태조(太祖) 이하는 모두 그 자손인데 세대(世代)가 낮은 왕이 곁에 있으면서 사시(四時)의 대향(大享)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인정(人情)에 미안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장생전(長生殿)은 국도(國都) 서쪽에 있어 종묘와 떨어져 있으니, 그곳을 사조의 전으로 정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참찬 변계량도 종묘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별묘를 세우기를 청하였다. 이때 상왕이 풍양궁(豐壤宮)에 있었는데, 예관(禮官)이 상세히 아뢰니, 상왕이 이르기를,
“조종(祖宗)의 하늘에 계신 혼령이 어찌 장소의 멀고 가까운 데에 따라 흠향하고 흠향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더구나 조종을 위하면서 토목(土木)의 역사(役事)를 어렵게 여겨, 고전(古殿)을 사용하는 것은 예(禮)가 아니니, 마땅히 옛 제도에 따라서 대실(大室)의 서쪽에 별묘를 세우고, 칭호는 영녕전(永寧殿)이라 할 것이다.”
하였는데, 대개 조종과 자손이 함께 편안하다는 뜻이다.
○ 3년 8월 11일(신축)
상이 낙천정에 있으면서 유정현, 이원, 변계량, 허조, 이지강을 불러 일을 의논하고, 인하여 술자리를 베풀었다.
○ 3년 8월 20일(경술)
상왕이 상과 함께 수각(水閣)에 거둥하여 술자리를 마련하고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는데, 정탁(鄭擢), 윤자당(尹子當), 이중지(李中至), 조계생(趙啓生)이 돌아온 것을 맞이하고, 새로 제수된 변장(邊將) 곽승우(郭承祐), 조치(趙菑), 조모(趙慕), 심보(沈寶), 김을신(金乙辛), 진원귀(陳原貴), 김익생(金益生), 이징석(李澄石), 오익생(吳益生), 박인길(朴寅吉) 등을 전송하는 잔치였다. 모두 각(閣) 위에 앉게 하고, 무장진 병마사(茂長鎭兵馬使) 박동수(朴東秀) 등 7명은 각(閣) 밑에 앉게 하고, 효령대군 이보(李補)와 유정현, 이원, 조연, 변계량, 허조, 조말생, 이명덕, 하연, 김익정 등은 시연(侍宴)하고, 입직한 재추(宰樞)에게는 병조청(兵曹廳)에다 잔치를 벌이게 하였으며, 시위 군사에게도 모두 술을 내려주었다.
○ 3년 8월 24일(갑인)
참찬 변계량과 예조 판서 이지강 등이 아뢰기를,
“성균관 학생들이 여러 차례 부종(浮腫)으로 죽게 되어, 신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모두 말하기를, ‘생원(生員)들이 전부 원점(圓點) 300개를 채우고자 하고, 또 고강(考講)하는 법으로 인하여 한자리에 오래 앉아서 글 읽기만 힘쓰다 보니, 정신이 피로하고 기운이 떨어졌는데도 병이 깊어진 줄을 모르다가 죽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신들이 생각건대, 원점이나 고강의 두 가지 일은 나라에서 학문을 부지런히 하게 하여 인재를 키워내려는 것이니, 혁파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의원(醫員) 2명을 보내어 서로 번갈아 가면서 조석으로 같이 있게 지내며 치료하게 한다면 부종을 앓는 사람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또 변계량 등에게 이르기를,
“경들이 성균관에 모여 그 폐단을 잘 물어서 보고하라.”
하였다. 조회를 마치고 나서, 변계량만을 불러서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 3년 9월 7일(정묘)
의정부가 아뢰기를, “신들이 전(箋)을 올려서 상왕의 휘호(徽號)를 올릴 것을 청하려 하오니, 전하께서는 신들을 위하여 말씀을 잘 드리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고, 얼마 있다가 낙천정에 나아갔다. 영의정부사 유정현 등이 참찬 변계량과 예조 참판 하연(河演)을 보내어 전을 받들고 낙천정에 나아가 전을 올렸는데, 전에 운운하였다. - 원집에 보인다. - 전이 상달되니, 상왕이 환관(宦官) 엄영수(嚴永秀)를 보내어 전지(傳旨)하기를,
“전의 내용이 간곡하나, 만일 태상(太上)이 된다면 풍양(豐壤)에 출입하는 것도 가볍게 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하니, 변계량, 조말생, 하연 등이 아뢰기를,
“비록 태상으로 존숭하여 모시더라도 출입하는 데에 무슨 구애될 것이 있겠습니까. 그저 전일에 전하께서 태상을 섬기던 마음으로, 오늘날 주상이 전하를 섬기도록 몸받으셔서 윤허하소서.”
하였다. 상왕이 이르기를,
“고려조의 충선왕(忠宣王) 부자도 어진 임금으로서 극진히 자애하였지만 태상이라는 호가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어찌 반드시 존숭한 뒤에라야 부자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겠는가.”
하니, 변계량이 대답하기를,
“신들은 주(周) 나라 왕계(王季)와 문왕(文王) 부자와 같기를 기대하는 것이니, 어찌 감히 충선왕 부자와 같기를 오늘날에 바라겠습니까.”
하였다. 상왕이 이르기를,
“지난해 주상이 두 번이나 청하였고, 이제 신하들이 합사(合辭)하여 굳이 청하니, 내가 부득이 윤허한다. 그러나 앞서서 나에게 성덕신공 상왕(盛德神功上王)이라 하여, 매양 축문(祝文)에서 보게 되면 마음으로 송구스러웠다. 봉숭(封崇)할 날짜는 명 나라 사신이 돌아간 뒤에 택일하여 거행하라.”
하니, 변계량 등이 다시 아뢰기를,
“15일은 세자(世子)를 봉숭하는 날인데 그날 거행하도록 하고, 세자를 봉숭하는 것은 우선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상왕이 허락하였다. 다시 아뢰기를,
“15일도 오히려 멉니다. 12일도 길한 날이니, 이날 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왕이 또 허락하였다. 조금 뒤에 엄영수를 시켜 전지하기를,
“사신을 접대하는 일이 번잡하니, 우선 정지하라.”
하였다.
○ 3년 9월 9일(기사)
원자(元子)의 이름을 이향(李珦)이라고 명하였다. 상이 유정현, 허조, 변계량과 함께 의논하기를,
“원자를 사신에게 보이려 하면 어느 장소에서 보여야 하겠는가?”
하니, 유정현 등이 아뢰기를,
“따뜻하게 술 마시는 연회 때에 보이게 하소서.”
하였다. 또 복색은 어떤 것으로 할 것인지에 대해 물으니, 유정현 등이 아뢰기를,
“이제 명을 청할 때를 당하였으니, 마땅히 사모(紗帽)와 품대(品帶)를 갖추고 뵈어야 합니다.”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 3년 10월 2일(신묘)
호조가 대청관(大淸觀)을 수리하기를 청하자, 상이 변계량에게 이르기를,
“경은 대청관을 설치한 뜻을 아는가?”
하니, 변계량이 아뢰기를,
“총제(摠制) 김첨(金瞻)이 일찍이 그 일을 맡아 보았으므로 신은 알지 못합니다.”
하자, 이조 판서 맹사성(孟思誠)이 아뢰기를,
“대청관은 고려 때에 창설되었는데, 그 동쪽에 사청(射廳)이 있어 장수들이 사명을 받아 나갈 때에 거기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옛날부터 내려온 전례입니다. 또 요동(遼東)에 가 보면, 학관(學館)의 동쪽에 성수영전(星宿影殿)이 있고, 그 동쪽에 또 사청이 있었습니다. 아마 대청관은 여기서 모방하여 설치한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변계량에게 이르기를,
“대청관은 진실로 없을 수가 없으니, 마땅히 도성 안에 두어야 한다. 어찌하여 반드시 유후사(留後司)에 둔다는 말인가? 경은 다시 옛일을 상고하여 아뢰라.”
하였다.
○ 3년 10월 10일(기해)
신궁(新宮)에 문안하고 술자리를 베풀었는데, 유정현, 이원, 조연, 변계량, 맹사성, 조말생, 이지강, 조치(曺致), 이명덕, 김익정 등이 입시하였다.
○ 3년 10월 15일(갑진)
어가(御駕)가 임진(臨津)에 머물렀다. 서울에 남아 있는 여러 신하들이 참찬 변계량을 보내어 문안하였다.
○ 3년 11월 7일(병인)
정사를 보았다. 근신(近臣)에게 이르기를, “나는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보고 싶은데, 변계량이 성리학(性理學)에 관한 글을 보기를 청하므로, 오늘 비로소 사서(四書)를 강(講)하도록 하였으니, 경들은 그리 알라.” 하였다. 지신사 김익정이 대언(代言) 한 사람으로 하여금 입시하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이날 비로소 《대학(大學)》을 강하였다.
○ 3년 11월 7일(병인)
태상왕이 변계량, 조말생, 이지강, 김익정에게 묻기를,
“고려의 시조(始祖)에게 배향(配享)된 공신(功臣)은 모두 6명인데, 지금 우리 태조에게 배향된 공신은 4명뿐이다. 공이 있는 사람을 의논하여 더 배향시키는 것이 어떻겠는가? 나라를 세울 때에 공이 크고 작은 것은 내가 다 알고 있다. 남은(南誾)은 밖에서 주창(主倡)하였고, 이제(李濟)는 안에서 도왔으니, 그 공이 작지 않다. 내가 예전에 남은, 이제, 조인옥(趙仁沃)과 함께 앉아 있었는데, 남은이 밖으로 나간 후에, 인옥이 아뢰기를, ‘나라를 세운 것은 이 사람의 힘입니다.’라고 하였다. 남은과 이제의 공이 이와 같이 큰데 하늘에 계신 태조의 혼령이 어찌 그들을 배향시키고 싶지 않겠는가? 말년에는 비록 죄가 있었지만 공을 폐할 수 없다.”
하니, 변계량 등이 대답하기를,
“두 사람이 전에는 비록 공이 있었으나, 후에는 사직(社稷)에 충성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공으로 죄를 덮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태상왕이 이르기를,
“경들은 다시 의논하여 아뢰라. 내일 마땅히 경들과 의논을 정하겠다.”
하였다.
○ 3년 11월 8일(정묘)
태상왕이 유정현, 이원, 변계량, 허조, 조말생, 이지강, 이명덕, 김익정을 불러 술자리를 베풀고 태조에게 배향된 공신을 의논하니, 유정현 등의 의논은 태상왕의 뜻과 같았다. 이명덕이 아뢰기를,
“남은은 비록 공이 있지마는, 태조만 섬길 줄 알고 오늘날이 있을 줄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가령 그 계획이 이루어졌더라면 어찌 오늘날이 있었겠습니까. 신은 마땅히 배향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태상왕이 이르기를,
“사사로운 원망 때문에 큰 공을 버려서는 안 된다.”
하고, 이에 남은과 이제에게 시호(諡號)를 주도록 명하였다.
○ 3년 11월 12일(신미)
상이 태상왕을 모시고 풍양으로부터 신궁으로 돌아와서 술자리를 베풀었는데, 효령대군 이보, 공녕군(恭寧君) 이인(李裀), 이원, 김승주(金承霔), 변계량, 이명덕, 김익정이 입시하였다.
○ 3년 11월 27일(병술)
태상왕이 변계량과 허조를 불러 모의(毛衣)와 모관(毛冠)을 하사하였다.
○ 3년 12월 2일(신묘)
지사간(知司諫) 허반석(許盤石)과 집의(執義) 박안신(朴安臣) 등이 김점(金漸)에게 죄주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경의 뜻을 알았다.” 하였다. 박안신이 나가니, 상이 조용히 근시(近侍)에게 이르기를,
“대간(臺諫)의 청이 옳다. 그러나 범한 죄가 사죄(赦罪) 전에 있었으므로, 그 청을 듣지 않았다. 김점이 범한 죄는 초방(椒房)의 세력을 믿고 한 것은 아니며, 광망(狂妄)하여 남을 두려워하지 않는 데서 이루어진 것이다.”
하니, 좌대언 정초(鄭招)가 대답하기를,
“김점이 옥에 있을 적에 변계량이 신문하였으나 복죄(服罪)하지 않으므로, 변계량이 달래며 말하기를, ‘그대는 지금 나이 50세인데, 앞으로 100년을 살더라도 얼마나 되겠는가. 그대는 비록 복죄하더라도 지돈녕(知敦寧)으로서 등불을 돋우고 깊은 방에 앉아서 여생을 보낸다면 또한 충분할 것이다.’라고 하니, 김점이 대답하기를, ‘마음은 비록 불초하지마는, 나의 지극한 충성으로 깊은 방에 홀로 앉아 세월을 보내게 되는 것은 참으로 원통한 일이다.’고 하면서, 이내목놓아 울었다고 하는데, 이는 거짓 증언입니다.”
하였다.
○ 3년 12월 13일(임인)
영녕전의 제향 횟수와 찬품(饌品)의 수량과 풍악을 설비하는 의장(儀仗)의 수(數)를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박은은 의논드리기를,
“우리 태조께서 4대(代)의 조상(祖上)을 추숭(追崇)하여 종묘를 세웠으니, 지금 마땅히 옮겨야 할 조상은 송 나라 제도에 의거하여 별묘(別廟)를 세울 것이나, 그 제기(祭期)의 횟수와 제품(祭品)의 수량과 풍악 설비의 차등(差等)에 관해서는, 신은 감히 함부로 의논드릴 수 없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문선왕(文宣王)은 다른 시대의 추숭한 성인(聖人)이지마는, 오히려 문묘(文廟)에서 만세(萬世)토록 제사를 받들고 있습니다. 우리 사대의 조상도 성조(盛朝)의 종묘에 처음 모신 신주이니, 마땅히 백세(百世)토록 제사를 받들어야 될 것입니다.
그 제기(祭期)와 제기(祭器), 풍악 설비의 수효는 모두 이미 정해진 문선왕의 제례(祭禮)에 의거하여 시행토록 하고, 삭망제(朔望祭)는 그 전대로 하며, 대향(大享)은 봄가을에만 행하도록 하소서. 제품(祭品)과 풍악의 설비는 모두 석전(釋奠)의 예와 같이 하고, 옮겨 모실 때의 의장(儀仗)은 당(唐) 나라 대종(代宗)이 부묘(附廟)할 때에 훼철(毁撤)한 묘(廟)를 옮기던 제도에 의거하여, 본실(本室)의 그전 의장을 써서 옮겨 모시도록 하소서.”
하고, 변계량은 의논드리기를,
“고려의 여러 능서(陵署)에도 오히려 삭망제를 갖추어 지냈는데, 하물며 종묘의 서쪽에 따로 묘(廟)를 세워서 4대의 조상을 모시는 일은 지극히 높여 받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를 지내는 횟수에 관해서는 종묘와 차별이 없게 할 수 없습니다. 삭망제는 그전대로 하고 대향은 봄가을에만 이를 행하는 데 그쳐 사직(社稷)에 지내는 제사의 예(例)와 같이 하고, 그 제품(祭品)과 풍악 설비는 모두 종묘보다 조금 줄이도록 하소서. 주자(朱子)가 사조전(四祖殿)을 논하여 말하기를, ‘동우(棟宇)와 의물(儀物)도 또한 반드시 종묘와 같이 성대하게는 할 수가 없다.’ 하였으니, 대개 별묘는 종묘와 같아서는 안 되므로 주자가 사리(事理)의 경중(輕重)을 참작하여 말한 것이지, 별묘의 의물도 마땅히 종묘와 같이 성대하게 해야 하는데 송조(宋朝)에서 그렇게 하지 못했음을 이른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별묘의 제기(祭器)와 풍악의 설비가 종묘와 같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주자의 뜻이니, 신은 감히 가감(加減)할 수 없습니다.”
하고, 허조와 이지강은 의논드리기를,
“송 나라 제도는 따로 희조(僖祖), 순조(順祖), 익조(翼祖), 선조(宣祖)의 사조(四祖)의 전(殿)을 송 나라 태조 묘(廟)의 서쪽 모퉁이에 세우고, 해마다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제사 지내게 하고, 3년 만에 한 번 협제(祫祭)를 지낼 적에 먼저 사조전에 나아가서 예(禮)를 행하고 다음에 태조묘(太祖廟)에 나아가서 악좌(幄座)마다 예를 행하였습니다. 원컨대, 송 나라 제도에 의하여 해마다 한 번씩 제사를 지내고, 3년 만에 한 번 별묘에 협제를 지내게 하소서. 주문공(朱文公)이 희조를 옮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논하면서, ‘따로 한 묘를 세워 사조를 모시며, 별묘의 동우와 의물도 또한 반드시 대묘(大廟)와 같이 성대하게 할 수는 없다.’고 하였으니, 이는 명목은 사조를 높인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낮추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별묘의 전물(奠物)도 종묘보다 줄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더구나 송 나라 제도의 별묘는 대전(大殿)의 서쪽 모퉁이에 있었으니, 거리가 매우 가까우므로 따로 세운 신주(神廚)가 없었으며, 매양 협제를 지낼 적에는 먼저 사조전에 나아가서 예를 행하고, 다음에 대묘에 나아가서 악좌마다 예를 행하였으니, 대묘와 별묘의 생뢰(牲牢)를 반드시 별도로 준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별묘의 전물 중에서 희우(犧牛)는 두 묘에 같이 쓰고, 제사 지낼 때에 풍악의 설비는 다만 당상악(堂上樂)만 설치하게 하소서.”
하였다. 박은, 변계량, 이지강 등이 또 의논드리기를,
“당 나라 현종(玄宗) 천보(天寶) 2년에 고요(皐繇)를 추존(追尊)하여 덕명 황제(德明皇帝)로 삼고, 양무소왕(凉武昭王)을 추존하여 흥성 황제(興聖皇帝)로 삼아, 각기 묘를 세워 사맹월(四孟月)에 제사를 지냈으며, 숙종(肅宗) 보응(寶應) 때에 예의사(禮儀使) 두홍점(杜鴻漸)이 사시(四時)의 제향을 정지하기를 청하고, 헌조(獻祖)ㆍ의조(懿祖)를 덕명 황제ㆍ흥성 황제의 묘 뒤에 부묘(祔廟)한 것은 제례(祭禮)에 상고할 데가 없습니다. 태조 이후에 조천(祧遷)된 신주는 역대(歷代)의 제도에 의거하여 서쪽 협실(夾室)에 간직하되, 다만 협제와 제향에는 따로 세운 사조전과 같이 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허조가 또 의논드리기를,
“송 나라에서는 따로 사조전을 세워 추숭한 조상을 모시고 예관으로 하여금 제사 지내게 하고, 3년 만에 한 번 협제를 지낼 적에는 먼저 사조전에 나아가서 예를 행하였으며, 태조 이하의 조천된 신주는 서쪽 협실에 간직하고, 매양 협제를 지낼 적에는 태조의 앞에 합하여 제사를 받게 하였습니다. 지금 이미 송 나라 제도의 따로 영녕전을 세워 추숭하는 조상을 받드는 것에 의거하였으니, 그 영녕전과 태조 이후에 조천된 신주에게 올리는 제향 횟수와 전물(奠物)의 수량을 일체 송 나라 제도에 의거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조천한 묘에는 다만 봄가을의 대향에만 그 생뢰와 제품(祭品)을 종묘에 견주어 하도록 명하였다.
○ 3년 12월 21일(경술)
태상왕이 건원릉(健元陵)에 참배하니, 상이 중량포(中良浦)에 가서 악전(幄殿)을 설치하여 맞이하고, 풍악을 베풀고 술자리를 마련하였다. 효령대군 이보, 경녕군(敬寧君) 이비(李裶), 공녕군 이인, 순평군(順平君) 이군생(李羣生),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 이백강(李伯剛), 영의정 유정현, 좌의정 이원, 우의정 정탁, 찬성 맹사성, 참찬 변계량, 예조 판서 이지강, 병조 판서 조말생, 형조 판서 이발(李潑), 병조 참판 이명덕, 도총제 권희달ㆍ홍부, 지신사 김익정 등이 연회에 배석하였다.
○ 4년 4월 2일(무자)
상왕과 상이 갈마현(乫磨峴)에서 사냥을 하였는데, 서울에 머물러 있는 여러 신하들이 참찬 변계량을 보내어 문안드리고 술과 과일을 바치니, 변계량에게 사슴 2마리를 하사하였다.
○ 4년 4월 10일(병신)
급제 이형기(李馨期)에게 홍패(紅牌)를 도로 내주었다. 좌의정 이원과 참찬 변계량이, 홍패를 빼앗는 것은 옛날에 없던 일이라고 아뢴 까닭에 이러한 명령이 있었다.
○ 4년 4월 17일(계묘)
태상왕이 변계량과 이지강을 불러 이르기를, “공비(恭妃)가 이미 세자를 낳았으나, 임금의 자손은 많지 않아서는 안 되니, 세 의정(議政) 및 대사헌 성엄(成揜), 사간 심도원(沈道源) 등과 의논하여, 후궁이 될 만한 여자 두 사람을 선발하여 보고하라.” 하였다.
○ 4년 5월 1일(정사)
상이 신궁(新宮)에 있었다. 태상왕의 병환이 더욱 심해지므로, 상이 걱정하고 두려워하여 참찬 변계량, 전 대사헌 김자지(金自知), 봉상시 소윤(奉常寺少尹) 정종본(鄭宗本), 공정고 부사(供正庫副使) 이통(李通)에게 명하여 성요법(星曜法)으로 길흉을 점쳐 보게 하였다.
○ 4년 5월 10일(병인)
의정부 참찬 변계량과 이조 참판 원숙(元肅)을 빈전도감 제조(殯殿都監提調)로 삼았다.
○ 4년 5월 11일(정묘)
연사종(延嗣宗)과 변계량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태상왕의 환후를 돌보신 이래로 지금까지 음식을 들지 않으시니, 성체(聖體)가 손상될까 걱정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제 정부(政府)와 육조(六曹)가 청하고, 경들이 이제 또 청하니, 내가 오늘 저녁에 들겠노라.” 하였다. 석전(夕奠) 뒤에 정부와 육조가 모두 나와 울면서 아뢰기를, “성인의 훈계에 이르기를, ‘죽은 이 때문에 살아 있는 자를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 하였으니, 원컨대 전하께서는 애통한 마음을 절제하고 음식을 드시어, 큰 효도를 온전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에 상이 묽은 죽을 조금 들었으나, 하루 한끼에 그쳤다.
○ 4년 5월 26일(임오)
상이, 명 나라 황제가 북정(北征)하였으므로 사람을 보내서 문안하여야 하나 현재 상중에 있으므로 어떻게 해야 좋을지 정부와 육조에 명하여 의논하여 올리게 하였다. 모두 아뢰기를,
“사사로운 상례로 인하여 군신의 예를 폐할 수 없으니, 평상시와 같이 왕(王)이라 일컫고 조선 국왕의 인(印)을 사용하소서.”
하고, 변계량과 허지(許遲)는 아뢰기를,
“중국의 역월(易月)의 제도에 의하여, 27일이 지난 뒤에 사신을 보내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주본(奏本)에 왕이라 일컫고 인(印)을 사용하고, 예부(禮部)에 의정부가 정장(呈狀)하여 해명하라.”
하였다.
○ 4년 5월 27일(계미)
명 나라 황제에게 문안하는 일을 다시 의논하게 하였다. 유정현, 이원, 정탁, 허조(許稠), 이지강, 이맹균(李孟畇), 승문원 제조 한상덕(韓尙德) 등이 의논드리기를,
“전하께서 비록 상중에 계시기는 하지만 황제의 기거를 묻는 것은 중대한 일입니다. 아마도 애자(哀子)라 할 수는 없을 듯하니, 평상시와 같이 왕이라 하고 인(印)을 사용하도록 하소서. 뒷날 도망온 사람을 해송(解送)할 일이 있을 때 의정부를 시켜 그 사실을 해명하면, 명 나라에서도 문안할 때에 왕이라 하고 인을 사용한 것은 문안 자체를 존중하게 여긴 까닭으로 알 것입니다.”
하고, 변계량은 의논드리기를,
“전하께서 역월의 제도를 쓰지 아니하여 졸곡 전에는 최복을 벗지 않으시고 그 뒤에도 오히려 임시 조처로 복을 벗고 정사를 보거나 삭망제와 상사에 관계되는 일에는 모두 최복을 입고서 3년을 마치려 하십니다. 이렇게 하신다면, 산릉(山陵)을 쓰기 전에는 왕이라 일컫거나 인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황제의 기거를 묻지 않을 수 없으니, 대개 사사로운 상례로 인해 군신의 큰 예를 폐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다만 주본(奏本)에는 왕이라고 일컬어서는 안 되니, 오직 고자(孤子)라고 하는 것이 사리에 어긋나지 않을 듯합니다. 만일 사신을 보내는 것이 27일 이후라면, 왕이라 일컫고 인을 사용하여도 천하 고금의 정한 제도에 의거한 것이니, 또한 의리에 무슨 해가 되겠습니까. 전하께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에 있어서는 역월의 제도를 쓰지 않고, 여러 신하들도 모두 이것을 본받아 졸곡에 이르도록 하고, 유독 황제의 기거를 묻는 일에만 임시 조처로 역월의 제도에 따라 왕(王)이라 일컫고 인(印)을 사용하소서. 이와 같이 하면 충(忠)과 효(孝) 둘 다 제대로 될 것입니다.”
하고, 원숙(元肅)은 의논드리기를,
“주본(奏本)에 왕이라 일컫고 인을 사용하고, 예부(禮部)와 요동(遼東)에 의정부를 시켜 그 사실을 해명하는 것은 온편치 않은 듯합니다. 산릉을 쓰기 전에 아뢸 것이 있으면 모두 고자(孤子)라 하고 예부와 요동에 정부가 그 사실을 해명하는 것은 가하나 주본에 이미 왕이라 일컫고 인을 사용하였으면, 예부와 요동에도 또한 왕이라 일컫고 인을 사용하여야 하고, 27일 뒤로 날짜를 써넣어야 합니다.”
하였는데, 유정현 등의 의논을 따랐다.
○ 4년 6월 15일(신축)
의정부와 예조가 허조의 상서(上書)에 의하여 국장(國葬)의 의장(儀仗)을 의논하여 올렸는데, 영의정 유정현, 예조 판서 이지강, 참판 이맹균 등은 대가(大駕)의 의장을 사용할 것을 청하였다. 좌의정 이원은 아뢰기를,
“송 나라 지도(至道) 3년 태종의 초상 때에, 유사(有司)가 ‘대가의 의장은 노부(鹵簿)가 1만 8936인이니, 만일 그 수를 다 사용하면, 산길이 좁아서 수레와 말이 꽉 차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재량하여 정하기를 바랍니다.’라고 청하니, 조서(詔書)를 내려 그 반만 쓰게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전에는 대가의 노부 수를 사용한 것이 명백합니다. 이번의 산릉은 좁은 길도 아니니 대가의 의장을 사용하소서.”
하고, 우의정 정탁(鄭擢)은 태조 국장 때의 길장(吉仗)을 사용할 것을 청하였다. 참찬 변계량이 아뢰기를,
“앞서 예조가 대행 태상왕(大行太上王)의 상장(喪葬) 제도는 한결같이 원경왕후(元敬王后)의 상제와 같이 해야 한다고 아뢰고, 일을 이미 시행하고서 정부에 보고함으로써 신이 비로소 알았습니다. 군왕의 상에 어찌 후비(后妃)의 예를 끌어다 적용하고서 이것을 사책(史冊)에 쓰고 후세에 전할 수 있겠습니까. 예조와 정부의 대신들 모두 옳다고 하여 다시 태조와 공정 대왕의 상장 제도를 사용하기를 계청하였습니다. 신은 생각건대, 공정 대왕의 상에 사용한 의장의 수는 태조의 2분의 1, 또는 3분의 1로 감하였는데, 용선(龍扇)과 봉선(鳳扇) 등이 여기에 해당하는 물건들입니다. 지금은 마땅히 태조의 상장 제도에 따라야 되나 만일 태조 때에 미비하였다가 공정 대왕 때에 자세히 갖추어진 것은 당연히 공정 대왕 때의 예를 따라야 되고, 원경 왕후의 상에 있어서도 후비에 관계없이 쓸 만한 것은 뽑아서 써야 한다는 것이 신의 생각입니다. 대개 태조 때에는 불사(佛事)를 크게 일으켰기 때문에 장사 때에 불교 의식이 대단히 많았는데 전하께서 이미 태거하셨습니다. 공정대왕의 의장은 태조 때보다 감하였으니 오늘날 시행할 수 없으며, 또 태후의 상과 후비의 제도는 끌어다가 예로 삼을 수도 없습니다. 다시 옛 전례(典例)를 상고하고 연구하여, 따로 법전을 만드는 것이 일에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대가의 의장을 사용하라고 명하였다.
○ 4년 8월 27일(신해)
이원(李原)과 변계량 등이 헌의(獻議)하기를, “재궁(梓宮)이 산릉에 나갈 때에, 기로(耆老)와 생도(生徒), 승도(僧徒)들도 봉사(奉辭)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청컨대, 발인하는 날에 기로와 생도, 승도들은 백관(百官)의 노제 악차(路祭幄次)의 곁에 서차(序次)대로 서서 봉사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4년 10월 18일(임인)
예조 판서 김여지(金汝知)가 아뢰기를,
“이원, 정탁, 유관(柳寬), 변계량 등이 ‘지금 국상(國喪)을 당하였으므로 과거를 보이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하는데, 신과 허조(許稠)는 ‘과거는 비록 길사(吉事)이기는 하나 의리에 해로울 것이 없으니, 폐지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뜻도 이와 같다.”
하고, 곧 예조에 전지(傳旨)를 내리기를,
“문무과(文武科)를 전례(前例)에 의거하여 시취(試取)하되, 강경(講經)은 지금 흉년을 당하였으므로 우선 그만두고 제술(製述)로써 시험하여 뽑게 하라.”
하였다.
○ 4년 10월 28일(임자)
변계량을 예문관 대제학으로 삼았다.
○ 5년 6월 23일(임신)
전지하기를, “옛날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 하륜(河崙)과 길창군(吉昌君) 권근(權近)이 문사(文詞)를 맡았을 때에, 대제학 변계량이 그 문하에 내왕하면서 익혔는데, 지금은 집현전 부제학 신장(申檣)이 또한 변계량의 문하에 내왕하면서 익히고 있다.” 하였다. 처음에 상이 변계량에게 묻기를, “경의 뒤를 이어서 문한(文翰)을 맡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하니, 변계량이 신장이라고 대답하였다.
○ 5년 7월 14일(임진)
내신(內臣)을 보내어 대제학 변계량에게 소주(燒酒)를 하사하였다.
○ 5년 9월 9일(병술)
대제학 변계량이 병으로 사직(辭職)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 5년 10월 13일(경신)
이조 판서 허조(許稠), 대제학 변계량 등이 의논드리기를, “북교(北郊)에서 망제(望祭)를 행하여 빌고, 중앙과 사방에는 당 나라 제도에 의하여, 아무 방위(方位)의 악(嶽)ㆍ해(海)ㆍ독(瀆)의 신, 산천의 신이라 일컫고, 그 전물(奠物)도 또한 십위(十位)를 진설(陳設)하며, 악ㆍ해ㆍ독에 축문 하나, 산천에 축문 하나로 하여 통행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5년 10월 14일(신유)
전지하기를, “앞서 진산부원군 하륜과 대제학 변계량이 수정(修正)한 각처 제향의 제문과 축문 이외에, 통행하는 제문과 축문도 다시 대제학으로 하여금 수정하게 하여 의궤(儀軌)에 기록하라.” 하였다.
○ 5년 12월 24일(신미)
춘추관 지관사(春秋館知館事) 변계량과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윤회(尹淮) 등이 상서(上書)하기를, “신들이 가만히 보니, 영락(永樂) 7년(1409, 태종 9) 9월에 우리 태종 공정 대왕(太宗恭定大王)께서 예조에 명하시기를, ‘전대(前代)의 실록을 편찬한 예를 상고하여 아뢰라.’ 하시므로, 예조가 아뢰기를, ‘서한(西漢)의 무제(武帝) 때에 사마천(司馬遷)이 혜제(惠帝)ㆍ문제(文帝)ㆍ경제(景帝)의 본기(本紀)를 편찬하였고, 당 나라 태종이 방현령(房玄齡) 등에게 명하여 《고조실록》을 편찬하게 하였으며, 송 나라 태종이 심윤(沈倫) 등에게 명하여 《태조실록》을 편찬하게 하였으며, 원 나라 성종(成宗)이 한림국사원(翰林國史院)에 명하여 《세종실록》을 편수하게 하였으니, 본조의 국사(國史)도 이 예를 모방하여 편찬하도록 하소서.’ 하여, 태종이 드디어 본관(本館)으로 하여금 《태조강헌대왕실록(太祖康獻大王實錄)》을 편찬하도록 명하셨습니다. 바라건대 조종(祖宗)이 이루어 놓은 법에 의하여 공정 대왕(恭靖大王)과 우리 태종 공정 대왕 양조(兩朝)의 실록을 편수하여 영원히 후세에 전포(傳布)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5년 12월 26일(계유)
대제학 변계량이 광효전(廣孝殿)의 대향제(大享祭) 축문(祝文)을 고쳐 지어 운운하였고, 삭망제(朔望祭)의 축문에 운운하였다. - 모두 앞에 보인다.
○ 6년 5월 7일(신사)
헌릉(獻陵)의 대상(大祥) 뒤에, 장명등(長明燈)에 불을 켜는 일과 조석으로 분향하는 일에 대해서 논의하기를 명하였다. 영의정 유정현(柳廷顯)과 좌의정 이원(李原) 등이 의논드리기를,
“장명등에 불을 켜는 일과 분향하는 일은 옛 제도가 아니니 없애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 이직(李稷), 대제학 변계량, 이조 판서 허조(許稠), 예조 참판 이명덕(李明德) 등은 의논드리기를,
“연등(燃燈)하는 일은 없애고, 분향하는 것은 건원릉(健元陵)의 예대로 하소서.”
하니, 이직 등의 의논을 따르도록 명하였다.
○ 6년 5월 9일(계미)
전지하기를,
“근일에 내 왼쪽 겨드랑이 밑에 작은 종기(腫氣)가 났다. 그러나 대상은 큰일이므로 악차(幄次)에 나아가서 옷을 바꾸어 입고 돌아오고자 한다.”
하니, 허조 등이 친행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영의정 유정현, 좌의정 이원, 대제학 변계량, 한성부 판윤 오승(吳陞) 등이 또 아뢰기를,
“대체로 병은 조금 나았을 때 조심하지 않으면 더해지는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조금 나은 것을 믿어 병을 참고 행차하시는 것은 진실로 온편치 못한 일입니다. 친행을 중지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또한 윤허하지 않고 이르기를,
“만약 병이 낫지 않았다면 내가 어찌 대체(大體)를 모르고 억지로 하겠는가.”
하였다.
○ 6년 6월 4일(정미)
영의정 유정현, 성산부원군 이직, 좌의정 이원, 대제학 변계량, 이조 판서 허조, 예조 참판 이명덕을 불렀다. 지신사(知申事) 곽존중(郭存中)을 시켜 전교하기를,
“예조에서 올린 부묘 의주(祔廟儀註)를 지금 보니, ‘부묘하는 날 광효전(廣孝殿)에서 태종과 왕후의 신주(神主)를 모셔 낼 때에 곧 전례(奠禮)를 행하고 위판(位板)을 봉안(奉安)한다.’ 하였다. 내 생각에는, 부묘하는 날에 막중한 것은 오직 부묘하는 것인데, 고비(考妣)의 신주를 먼저 원묘(原廟)에 봉안한 뒤에 부묘하는 예를 행하려고 한다면, 정성을 다해 공경하는 마음이 전일하지 못하게 될 것이므로 매우 옳지 않을 듯하다. 또 신주를 받들어 부묘한 뒤에 곧 광효전에 돌아와서 전례(奠禮)를 행하고 위판을 봉안하면 적당할 듯하다. 그러나 내가 예를 거행하는 날에는 밤중에 일어나서 먼저 원묘에 나아가 동가제(動駕祭)를 행하고, 신주를 받들어 부묘한 뒤에 또 원묘에 돌아와서 위판을 봉안하게 되면 나만 피곤할 뿐 아니라, 백관들도 시종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을 것이다. 내 생각에는 부묘하는 날 친히 신주를 받들어 종묘에 부묘하고, 신하에게 명하여 원묘의 전례를 섭행(攝行)하도록 하며, 이어 위판 봉안을 마친 다음 다시 시위하고 부묘한 뒤에 날을 가려서 친제(親祭)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경들이 의논하여 보고하라.”
하니, 유정현 등은 모두 섭행하는 것이 가하다고 하였다. 곧 예조에 이 절차(節次)로서 의주를 손질하여 바치도록 명하였다. 상이 또 전교하기를,
“저번에 허조가 ‘역대 제왕의 시호(諡號)로서 3대(代) 이상은 모두 한 자(字)로서 문(文), 무(武), 성(成), 강(康) 같은 것을 씁니다. 후세에 와서 당(唐)과 송(宋) 및 본국(本國)과 고려 왕씨(高麗王氏)는 모두 존호(尊號)를 더 올려, 혹 10여 자, 혹 20여 자가 되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호는 한(限)이 있는데, 서로서로 추숭(追崇)한 까닭으로 명호(名號)와 실행(實行)이 합치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나도 그것을 귀하게 볼 문제가 아니라고 여겼는데 지금 모후(母后)에게 또 휘호(徽號)를 가상(加上)한다는 말인가. 아마도 원경(元敬) 이외에는 다시 가상할 것이 없을 듯하다.”
하니, 유정현 등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옳습니다. 그러나 본조 종묘에 4실(室) 이상은 모두 휘호를 올렸습니다. 지금 태종 대왕과 왕후는 마땅히 백세(百世)를 지나도 천조(遷祧)하지 않을 것이니, 태조와 신의왕후(神懿王后)의 전례를 본받아서 존호를 가상하고, 후세에는 마땅히 허조의 말을 따르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 6년 6월 11일(갑인)
성산부원군 이직, 이조 판서 허조 등이 의논드리기를,
“첫째, 원경왕후에게 존호를 가상한 후에, 신주에 추급해서 쓴 예(例)는 없고 또 신주를 고쳐 만드는 것도 옛 제도에 없는 바이니, 제문(祭文)과 축문(祝文)에만 가상한 존호를 갖추어 쓰도록 하소서. 둘째, 가상한 존호는 하루 앞서 광효전에 예고(預告)하는 제(祭)를 마땅히 거행할 것이며, 제식(祭式)은 삭망제(朔望祭)의 예를 따르도록 하소서. 셋째, 존호를 가상하는 옥책(玉冊)을 봉헌할 때, 제사 의식을 만약 별제(別祭)의 예대로 하면 억지로 높이는 혐의가 있으니, 마땅히 삭망제의 예를 따라서 태종 대왕 앞에서는 삭제의 축문을 사용하고, 태후 앞에서는 별제의 축문을 사용하면서 옥책을 읽도록 하소서.”
하고, 예문관 대제학 변계량은 의논드리기를,
“존호를 가상하는 데 따른 옥책을 봉헌할 때의 제사 의식은 문소전(文昭殿) 신의왕후(神懿王后)의 기신(忌辰)에 태조를 겸제(兼祭)하는 예를 따라, 삭제에 유명일(有名日)의 별제 의식을 사용하는 것이 마땅하고 나머지는 허직 등의 의논과 같습니다.”
하니, 변계량의 의논대로 행하도록 명하였다.
○ 6년 7월 12일(을유)
이보다 앞서 대제학 변계량이 의논드리기를, “후사(後嗣)가 된 자는 그의 자식이 된다는 것이니, 옛법입니다. 공경히 생각하건대, 태종이 공정왕(恭靖王)의 후사가 되었으니 태종은 곧 공정왕의 아들입니다. 이제 전하께서는 공정왕에게 마땅히 손자라고 칭호하시고 익조(翼祖)를 영녕전으로 조천(祧遷)하시는 것은 의심할 것도 없습니다. …… ” 하였다.
○ 6년 7월 25일(무술)
예문관 대제학 변계량, 예조 참의 성개(成槩)에게 안장 갖춘 말을 하사하고, 영돈녕(領敦寧)으로 치사(致仕)한 권홍(權弘)에게 말을 하사하였다. 변계량이 헌릉(獻陵)의 비문을 짓고, 성개가 쓰고, 권홍이 전액(篆額)을 썼기 때문이다.
○ 6년 8월 11일(계축)
교정하여 편찬한 《고려사(高麗史)》를 올렸는데, 그 서문(序文)에 이르기를,
“삼가 생각건대, 우리 태조께서 개국하신 초기에 즉시 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과 정총(鄭摠)에게 명하시어 《고려국사(高麗國史)》를 편찬하게 하시니, 이에 각 왕조의 실록 및 검교 시중(檢校侍中) 문인공(文仁公) 민지(閔漬)의 《강목(綱目)》과 시중(侍中) 문충공(文忠公) 이제현(李齊賢)의 《사략(史略)》과 시중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의 《금경록(金鏡錄)》을 채집하고 모아서 편집하여, 좌씨(左氏)의 편년체(編年體)에 따라 3년 만에 37권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그 글을 살펴보건대, 잘못된 것이 꽤 많았다. 범례(凡例) 같은 데에 있어 원종(元宗) 이상은 일이 많이 참람되었다 하여 간간이 추후로 개정한 것이 있었다. 우리 주상 전하께서 총명하시고 학문을 좋아하시어 고전과 서적에 뜻을 두셨으므로, 이에 우의정 유관(柳觀)과 예문관 대제학 변계량과 윤회(尹淮) 등에게 명하시어 거듭 교정하고 개정하여 그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라고 하셨다.”
하였는데,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윤회가 지은 것이다.
○ 6년 10월 8일(기유)
주서(注書) 이승손(李承孫)이 황해도 안성참(安城站)에서 돌아와, 곽존중(郭存中)이 사신과 문답한 서장을 바쳤다. 그 서장에 이르기를,
“사신 유경(劉景)이 곽존중에게 말하기를, ‘전하가 이미 원재상(元宰相)을 보냈고, 이제 또 그대를 보내어 문안하니, 그 마음가짐이 지극하다. 속히 길을 떠나려고 하니, 맡아가지고 온 일을 속히 말하라.’ 하므로, 곽존중이 말하기를, ‘9월 1일 사신 왕현(王賢)을 호송한 지삼등현사(知三登縣事) 박득년(朴得年)이 요동에서 황태자의 영유(令諭)를 기록하여 돌아왔는데, 전하께서는 대행 황제(大行皇帝)가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곡하여 상례를 거행하고, 애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바로 진향사(進香使)와 진위사(陳慰使)를 보냈다. 이달 15일에 자문 뇌진관(咨文賚進官) 조충좌(趙忠佐)가 요동에서 돌아옴으로 인하여, 다시 황제가 즉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또 하등극사(賀登極使)를 보냈는데, 중도에서 대인(大人)의 말을 듣고 모두 떠나지 못하고 머물러 있다. 신자(臣子)로서 군부(君父)의 상을 들었으므로 정의(情意)가 박절하여 듣는 대로 사신을 보낼 것이요, 차마 늦추지 못할 것이다. 세 사신이 이미 출발하였으니, 청컨대 먼저 들여보내고, 조칙(詔勅)을 열어 본 뒤에 다시 감격하였다는 뜻으로 특별히 한 사신을 보내는 것이 두 가지가 다 온전하다고 생각한다.’ 하니, 유경이 이르기를, ‘황제의 성지(聖旨)에 조선은 비록 외국이나, 글을 읽고 친교(親交)를 맺은 나라이니, 조칙과 두 사신이 일시에 출발한다 할지라도, 조선 경내에 들어가서는 각기 따로 갔다오라고 하였다. 진향과 진위의 절차는 전일에 이미 말하였으며, 세 사신이 가고 머무르는 것은 마음대로 하라.’ 하고, 바로 나가 말에 올랐습니다.
부사(副使) 진선(陳善)이 이르기를, ‘우리들이 조선의 예에 대해서 무엇이고 모르는 것이 있는가. 이미 진향사와 진위사를 보내고, 또 사람을 보내어 주문(奏聞)하면, 어찌 중첩된 일이 아닌가.’ 하고, 또 이르기를, ‘우리들이 돌아가서 이 일을 아뢰면, 왕현이 요동에서 어찌 무사할 수 있겠는가.’ 하여, 곽존중이 말하기를, ‘요동 지방의 대소 신민들이 모두 상복을 입고 소찬(素饌)하고 있는 것을 박득년이 직접 본 일이요, 또 반포한 영유(令諭)를 베껴 왔으므로, 본국에서도 알게 된 것이다. 이보다 앞서 북방을 평정한 일과 상서로운 일들도 모두 요동에서 듣고 사신을 보내어 진하한 전례가 있다.’ 하였습니다. 진선이 이르기를, ‘길흉(吉凶)에는 완급(緩急)이 있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하지 않아야 할 일을 하는 것은 모두 예가 아니다. 조선은 글을 읽어서 예를 아는 나라이니, 예는 적중하여야 하고 지나치는 것은 옳지 못한 것이다.’ 하여, 곽존중이 말하기를, ‘대인(大人)의 말은 옳은 것 같으나 그르다. 황제가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신자의 지극한 정으로 바로 진향사와 진위사를 보내는 것이 나의 의견으로는 적중하다고 생각한다.’ 하니, 사신이 이르기를, ‘그대의 말도 또한 옳은 것 같으나 그르다. 세 사신이 가고 머무르는 것은 마음대로 하게 하라.’ 하고, 바로 나가 말에 올랐습니다.”
하였다. 상이 영돈녕부사 유정현, 좌의정 이원(李原), 우의정 유관, 찬성 황희(黃喜), 대제학 변계량, 이조 판서 허조, 참찬 탁신(卓愼), 예조 판서 신상(申商), 형조 참판 하연(河演), 호조 참판 목진공(睦進恭)을 불러 의논하게 하고, 바로 봉상시 윤(奉常寺尹) 정여(鄭旅)를 보내어 상제(喪制)와 영칙의(迎勅儀)를 사신에게 묻게 하였다.
○ 6년 11월 15일(병술)
대제학 변계량을 불러 이르기를,
“나이 많은 노인을 점점 보기가 드무니 문적(文籍)을 남기지 아니할 수 없다. 본국의 지지(地志)와 주(州)ㆍ부(府)ㆍ군(郡)ㆍ현(縣)의 고금 연혁을 찬술해서 볼 수 있게 하려 한다. 그러나 지금 춘추관(春秋館)에 일이 많아 지지는 편찬할 수 없으니, 우선 주ㆍ부ㆍ군ㆍ현의 연혁을 편찬하여 볼 수 있게 하라. 또 주공(周公)의 빈풍(豳風) 시(詩)와 무일(無逸) 편(篇)은 귀감으로 삼을 만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풍속이 중국과 다르니, 민간에서 농사짓는 괴로움과 부역하는 고생을 묻어 달마다 그림으로 그리고 거기에 경계되는 말을 써넣도록 해서 보기에 편리하게 하여 영구히 전해지게 하고자 한다.”
하니, 변계량이 아뢰기를,
“지지와 주ㆍ군의 연혁은 동일한 것입니다. 춘추관 한 사람으로 하여금 겸하여 맡게 하소서. 신은 탁신ㆍ윤회와 함께 의논하여 편찬할 것이며, 월령(月令)에 대한 글은 신이 담당하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월령에 대한 글은 아직 서두르지 말고, 지지와 주ㆍ군의 연혁을 경이 편찬하여 바치도록 하라.”
하였다.
○ 6년 12월 1일(임인)
조회를 받았다. 동지춘추관사 변계량이 아뢰기를,
“공손히 왕지(王旨)를 받들어 보니, 기해년부터 임인년까지의 사초(史草)를 일제히 모두 수납하라 하셨습니다. 신들은 영락(永樂) 17년 기해 1월부터 20년 임인 12월까지의 충수찬관(充修撰官) 이하 각인(各人)의 사초를, 서울 안은 을사년 2월까지, 경기ㆍ충청ㆍ황해ㆍ강원도는 3월 그믐까지, 경상ㆍ전라ㆍ평안ㆍ함길도는 4월 그믐까지 한하여 수납하되 미납자는 전례에 의하여 자손을 금고(禁錮)하고 백금(白金) 20냥을 징수하게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상이 이원, 유관, 변계량 등과 의논하기를,
“기해년부터 임인년까지 내가 비록 임금 자리에 있기는 하였으나, 그동안 국정(國政)은 모두 태종(太宗)께 여쭌 뒤에 시행하였고, 내 마음대로 한 일은 없으니, 그 4년 동안의 사초를 모두 수납하여 태종의 실록에 기재하려고 하는데, 어떻겠는가?”
하니, 모두 옳다고 대답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이제부터 사관이 사망한 뒤에는 곧 사초를 수납하도록 하라. 그것은 사관의 자손이 여러 해가 지나고 나면 혹 잃어버릴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하였는데, 변계량이 명을 듣고 여러 사관에게 의논하니, 모두 아뢰기를,
“안 됩니다. 지금 《태종실록》을 수찬하는 것도 오히려 너무 이르다고 생각되는데, 더구나 당대의 사초를 수납한다는 말입니까. 이렇게 되면 사람들이 이행(李行)을 귀감으로 삼아 반드시 직필(直筆)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변계량이 말하기를, “임인년 이상 4년 간의 사초를 수납하는 것에 대하여 상이 묻기에 나도 가능하다고 대답하였다. 이미 가능하다 하였으니, 다시 아뢰기는 어렵다. 제군들이 상서하여 청하라.” 하니, 그 뜻은 기주관(記注官) 어변갑(魚變甲), 유상지(兪尙智) 등도 또한 상의 뜻에 아부하여 감히 청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봉교(奉敎) 이하 사신(史臣)들이 상서하여 반대하려고 하였으나, 머뭇거리다가 중지하고 말았다. 뒤에 상이 듣고, 사관이 사망하더라도 그 자손으로부터 즉시 사초를 수납하지 말게 하였다.
○ 6년 12월 15일(병진)
대제학 변계량이 새로 지은 가사(歌詞)를 올렸는데, 그 사(詞)에 운운하였다. - 앞에 보인다. - 상이 명하여 관습도감(慣習都監)에 내려서 악부(樂部)에 실어 연향(宴享)에 사용하게 하였다.
○ 6년 12월 20일(신유)
황제가 예부 상서 여진(呂震)을 시켜 선지(宣旨)하기를, “귀국의 국왕이 지성으로 우리나라를 섬기고, 사신(使臣)들이 일기가 차고 길이 먼데도 불구하고 달려오니, 짐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하여, 사신들이 대답하기를, “황제의 덕이 한량없어 무어라 감사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언로(言路)가 통하지 못하여 지극한 마음을 다 아뢰지 못합니다.” 하니, 여진이 이르기를, “사신이 황제의 마음을 이해하였으면 그만이다.” 하였다.
북경에 도착하자, 곧 민광미(閔光美)를 시켜 예부에 나아가 상서(尙書)에게 고하기를,
“지난 9월 1일 내관(內官) 왕현(王賢)을 호송한 배신(陪臣) 박득년(朴得年)이 요동에서 돌아왔기 때문에 우리 전하가 황제께서 승하하셨다는 것을 듣고 매우 슬퍼하여, 곧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곡하고 상례를 거행하고, 신들을 보내어 진위와 진향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10일에 출발하여 압록강을 건너서 탕참(湯站)에 도착하였을 때 조칙사(詔勅使)를 만났는데, 조칙(詔勅)을 열어 본 뒤에 떠나라고 하므로, 곧바로 장계하고 머물러 있다가 조칙사가 서울에 이르러 조칙을 열어 본 뒤에 전하가 다시 표전(表箋)을 고쳐 만들어서 보내므로 받아가지고 온 것입니다.”
하니, 여진이 이르기를,
“전하의 충효가 본시 지극하여 상(喪)을 듣고 곧 진향사와 진위사를 보냈으니, 또한 옳은 일이다.”
하였다. 승문원 제조 대제학 변계량과 제학 윤회(尹淮)가 궐내에 와서 하례하니, 상이 매우 기뻐하였다.
○ 7년 1월 3일(갑술)
영돈녕 유정현(柳廷顯), 우의정 유관(柳觀), 찬성 황희(黃喜), 대제학 변계량을 불러 관직에 나아가도록 하였다.
○ 7년 4월 2일(신축)
대제학 변계량이 화산별곡(華山別曲)을 지어 바쳤으니, 그 가사에 운운하였다. - 앞에 보인다. - 이를 악부(樂府)에 올려 연향(宴饗)할 때에 쓰게 하였다.
○ 7년 4월 21일(경신)
의정부와 육조가 각 품(品)의 관원이 진언한 것을 채택하여 아뢰었다. 예문관 대제학 변계량 등 10인이 진언하기를, “지금 우리 전하께서 정부와 육조와 대간에 ‘날마다 모든 일을 진언하여 치도(治道)에 도움이 되도록 하라.’고 명하셨으니, 총명을 넓히고 아랫사람의 사정을 통달하신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모두 종용(從容)하고 자세하고 정밀하게 아랫사람의 사정을 다 진달하지 못하고 또 남들을 따라 나아갔다 물러났다 하기만 하고 별다른 능력도 없이 훌륭한 사람들 속에 섞여 있는 이도 혹 있을 것입니다. 당 나라와 송 나라의 전성시대에는 모두 윤대(輪對)하는 법이 있었으니, 이는 단지 총명을 넓혀서 막히고 가려지는 폐단이 없게 할 뿐만 아니라, 여러 신하의 현부(賢否)도 환히 꿰뚫어 보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바라건대, 옛 제도에 따라 4품 이상으로 하여금 날마다 윤대하게 하여 더욱 언로를 넓혀서 아랫사람의 사정을 다 아뢰게 하고 여러 신하의 사특함과 정직함을 살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 7년 7월 7일(갑술)
상이 가뭄을 근심하여 영돈녕 유정현, 좌의정 이원(李原), 찬성 황희, 형조 판서 권진(權軫), 병조 판서 조말생(趙末生), 이조 판서 허조(許稠), 호조 판서 안순(安純), 예조 판서 이맹균(李孟畇), 대제학 변계량을 불러서 이르기를,
“20년 이래로 이와 같은 가뭄은 보지 못하였다. 덕이 없는 내가 감히 대궐에 편안히 있을 수 없어서 본궁으로 피하여 있고 싶지만, 더위가 혹심한데 군사들이 있을 만한 곳이 없기 때문에 그냥 이 궁에 거처하는 것이다. 궁중에 거처할 만한 곳이 세 곳이니, 나는 정전(正殿)에 거처하지 않고 바깥 측실(側室)에 가서 거처하면서 재앙을 그치게 할 도리를 생각할까 한다. 오히려 서쪽의 이궁(離宮)으로 나가서 하늘의 견책에 보답하였으면 하는데, 어떠한가?”
하니, 모두 아뢰기를,
“전하께서 가뭄을 걱정하신 나머지 자신을 책망하여 정전에 거처하는 것마저 피하고자 하시니, 진실로 만세(萬世)에 아름다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궁으로 나가시면 군사의 시위와 신료들의 진퇴와 음식을 운반하는 데에도 모두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그대로 본궁에 계시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폐단을 없애고자 하면서 생각이 그런 점에까지는 미치지 못하였다. 경들의 말이 매우 타당하다.”
하고, 또 말하기를,
“각도의 비 내린 데 대한 보고를 보니, 외방에는 비가 충분한 듯하다. 유독 서울에만 비가 오지 않으니, 혹시 하늘이 무슨 까닭이 있어 그러는지 모르겠다. 또 정사에도 의심스러운 일이 있었는지 두렵기도 하였다. 맹온(孟溫)의 사건으로 보건대, 여러 재상이 처음에는 모두 형조(刑曹)에서 아뢴 것이 옳다 하였는데, 대간(臺諫)이 상소(上疏)하여 논죄한 뒤에는 또 형조가 잘못이고 대간이 옳다 하였다. 옳다 그르다 하는 것이 별로 딴 뜻은 없겠지마는, 한 사람이 옳다 하면 여럿이 따라서 옳다 하고, 한 사람이 그르다 하면 여럿이 따라서 그르다 하니, 이것은 자세히 생각하지 않고 뇌동(雷同)하는 폐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한 가지 일만 보더라도 다른 것을 알 수가 있으니, 어찌 정사에 잘못이 반드시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각자 재앙을 그치게 할 도리를 힘써 생각하여 숨김없이 죄다 말하라.”
하니, 모두 아뢰기를,
“성상께서 재앙을 두려워하시어 수양하고 반성하신 지가 벌써 여러 날이시니, 정사의 지시와 명령하심에 잘못이 없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예전에 구언(求言)하시던 날에도 오히려 신들이 가뭄을 구제할 방책을 강구하여 밤낮으로 걱정하시는 데에 보답하지 못하였는데, 다시 무슨 아뢸 만한 계책이 있겠습니까. 또한 전일에 올린 각품의 관원이 진언(陳言)한 것을 취사선택하여 시행하소서.”
하였다.
○ 7년 12월 5일(경오)
경연에 나아갔다. 지신사 곽존중(郭存中)에게 이르기를,
“《태조실록》을 한 본(本)만 써서 놓았다. 만약 후일에 유실(遺失)된다면 안 될 것이니, 한 본을 더 베껴서 춘추관(春秋館)에 납본(納本)하고, 한 본은 내가 항상 볼 것이니, 이 사실을 춘추관에 전교하라.”
하였는데, 지관사 변계량이 아뢰기를,
“《태조실록》에 은밀한 일이 많음은 신과 하륜(河崙)만이 알고,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니, 또 한 본을 베껴서 여러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청컨대, 좋은 날을 받아서 사고(史庫)에 넣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8년 3월 25일(기미)
지신사 곽존중, 우부대언 정흠지(鄭欽之), 대제학 변계량 등이 아뢰기를,
“경신공주(慶愼公主)가 죽은 지 벌써 3일이 지났는데, 전하께서는 지금까지 소선(素膳)을 드시니, 신들은 아무래도 모든 일을 살피시며 수고하시는 몸으로서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여깁니다. 하물며 태종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주상께서는 하루라도 소선을 들어서는 안 된다.’ 하셨으니, 육선(肉膳)을 다시 드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보통 때에 성(姓)이 다르고 복(服)이 없는 사람의 초상에도 반드시 3일 간은 소식(素食)을 했는데, 더구나 같은 성의 고모가 아닌가. 가깝고 먼 관계는 차이가 없을 수 없는 법이다.”
하였다. 변계량 등이 다시 아뢰기를,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나 태종의 마음에는 비록 부모상을 당했을 때라도 여러 날 동안 소찬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셨는데, 더구나 그 밖의 상사야 말해서 무엇하겠습니까. 태종의 혼령이 밝게 하늘에 계시며, 태종의 말씀이 귀에 쟁쟁하게 남아 있으니, 이를 어길 수 있겠습니까. 성상의 귀중하신 몸은 하루라도 손상되거나 허술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바라건대 위로 태종의 가르침을 받드시며, 아래로 신하와 백성의 기대에 보답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며칠 동안 소식(素食)을 한다고 해서 태종의 가르침을 거스리는 것은 아니니, 경들은 더 요청하지 말라.”
하였다.
○ 8년 4월 13일(병자)
대제학 변계량이 상이 한재(旱災)를 근심하여 술을 드시지 않으므로, 대궐에 나아가 술 드시기를 청하기를,
“술은 사특한 기운을 물리치고 혈맥(血脈)을 통하게 하는 것이니, 실로 좋은 약입니다. 만약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근심하고 두려워하시면서 조금도 술을 들지 않으신다면, 기운이 손상되는 일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술을 드시어 기맥(氣脈)을 기르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8년 5월 6일(기해)
상이 가뭄을 근심하여 대제학 변계량을 불러 직언(直言)을 구하는 교서(敎書)를 짓게 하고, 또 이르기를, “나는 한재로 인하여 평상시에는 정전(正殿)에 거처하지 않는다.” 하고, 이에 월대(月臺) 위에 악차(幄次)를 설치하라고 명하였다. 의장(儀仗)과 금고(金鼓)는 제거하게 하고 시복(時服) 차림으로 악차에 나아가서 교서를 반포하였다. 그 교서에 운운하였다. - 원집에 보인다.
교서별감(敎書別監)을 경기도ㆍ강원도ㆍ함길도(咸吉道)에 1인을 보내고, 충청도ㆍ전라도ㆍ경상도에 1인을 보내고, 개성(開城)ㆍ황해도ㆍ평안도에 1인을 보내라고 명하니, 대개 농사철이므로 폐단을 덜기 위해서였다.
○ 8년 6월 11일(계유)
대제학 변계량이 아뢰기를, “도관서(䆃官署)에서 바치는 세갱미(細粳未) 127석은, 서적전(西籍田)에서 생산된 벼를 가지고 그 소속 노비로 하여금 찧게 하여 상납(上納)하니, 그 폐단이 큽니다. 청컨대 그전대로 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옳게 여겼다.
○ 8년 6월 21일(계미)
변계량을 판우군부사(判右軍府事)로 삼았다.
○ 8년 10월 8일(무진)
서울에 머물러 있는 종친과 좌의정 이직(李稷), 영돈녕부사 김구덕(金九德), 판돈녕부사 변계량,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오승(吳陞), 이조 판서 이맹균(李孟畇), 호조 판서 안순(安純), 예조 판서 신상(申商), 형조 판서 정진(鄭津), 대사헌 최사강(崔士康), 대제학 이수(李隨), 참찬 허조(許稠), 우의정으로 치사(致仕)한 유관(柳寬)에게 노루 한 마리씩을 하사하였다.
○ 9년 6월 9일(병인)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해 온 중국 사람 서사영(徐仕英)이 아뢰기를, “일찍이 개원(開元)에 살았으나 본래 멀고 가까운 족친도 없으니, 성심으로 이 나라에 머물러 살기를 원합니다.” 하니, 정부에 내려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황희(黃喜)와 우의정 맹사성(孟思誠) 등이 의논드리기를, “서사영이 길주(吉州)에 이르러 먼저 들어와 사는 중국 사람 장현(張顯)의 아들을 만나 보고 이미 장현이 벼슬을 받아 사역원에 근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서사영만을 돌려보내는 것은 온편치 못한 일이고, 또 그가 문자를 조금 아니 앞으로 소용될 만한 사람입니다. 원하는 대로 머물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판부사 변계량은 의논드리기를, “장현과 함께 돌려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황희 등의 의논을 따랐다.
○ 10년 2월 10일(임술)
예조가 전함재추소(前銜宰樞所)에서 올린 말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옛날에는 본소(本所)에 아문(衙門)이 없었으므로, 2품 이상의 한량(閑良)과 기로(耆老)들이 의지할 곳이 없어서 산란(散亂)하여 통솔이 없었으니, 비록 나라에 경사(慶事)와 임금의 행차와 출입이 있더라도 모두 알 수 없게 되어 신하의 예절을 잃었던 것입니다. 우리 태종 공정 대왕이 즉위 초에 아문을 설립하여 공해전(公廨田) 100결(結), 노비(奴婢) 50명, 서제(書題) 20명을 내리시고, 매양 탄일(誕日)ㆍ정조(正朝)ㆍ동지(冬至)와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나 행차와 출입이 있을 때면 신들이 모두 궁궐에 모여 그 예(禮)를 행하게 하셨으니, 진실로 만세토록 마멸(磨滅)될 수 없는 좋은 법입니다. 다만 칭호를 전함재추소라 한 것이 실로 온편치 않습니다. 삼가 조서(詔書)와 교지를 보건대, 모두 이르기를 ‘문무 대소 신료와 한량(閑良)과 기로(耆老) 등을 전조(前朝)에서도 또한 치정재추소(致政宰樞所)라 하였다.’고 하였으니, 원컨대, 기로재추소(耆老宰樞所)와 기로소(耆老所)의 두 칭호로써 상정(詳定)하여 칭호를 내리소서.”
하였다.
상정소(祥定所)에 내려 이를 의논하도록 명하니, 이직(李稷)은 의논드리기를, “마땅히 전함양부소(前銜兩府所)라 일컬어야 될 것입니다.” 하고, 황희(黃喜)와 허조(許稠)는 의논드리기를, “기로소라 일컬어야 될 것입니다.” 하고, 변계량(卞季良)은 의논드리기를, “치사기로소(致仕耆老所)라 일컬어야 될 것입니다.” 하고, 정초(鄭招)는 의논드리기를, “조청소(朝請所)라 일컬어야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변계량의 의논을 따랐다.
○ 10년 4월 6일(무오)
한승순(韓承舜)이 도적에게 잡혀서 빼앗긴 물건을 찾아서 되돌려 보낸다는 칙서 안에, 요동위차 동녕위진무(遼東委差東寧衛鎭撫) 왕손(王遜)의 물건도 아울러 기록되어 있으므로, 좌의정 황희, 우의정 맹사성(孟思誠), 판부사 변계량, 이조 판서 정초, 예문관 제학 윤회(尹淮)를 불러 회답의 가부에 대하여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황희와 변계량은 아뢰기를, “왕손의 물건을 되돌려 보낸다는 뜻을 아뢰지 않을 수 없으니, 마땅히 주본(奏本)에는 그 뜻을 은미하게 드러내고, 예부에 보내는 자문(咨文)에 자세히 진술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고, 맹사성과 정초와 윤회는 아뢰기를, “주본에는 다만 한승순의 물건을 공손히 받았다는 뜻만 기록하고, 예부에 보내는 자문에 왕손의 물건을 되돌려 보낸다는 뜻을 아울러 기재하도록 하소서.” 하니, 황희 등의 의논을 따르라고 명하였다.
○ 10년 4월 23일(을해)
판부사 변계량이 상서(上書)하여 운운하였다. - 앞에 보인다.
예조로 내려보내 문신(文臣) 6품 이상의 사람들로 하여금 회의(會議)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황희, 우의정 맹사성, 예조 판서 신상(申商) 등 16인은 의논드리기를,
“강경(講經)과 제술(製述)을 어느 한 가지만 하는 것은 옳지 않으니, 마땅히 때에 따라서 번갈아가며 시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찬성 권진(權軫)과 호조 판서 안순(安純) 등 51인은 의논드리기를,
“제술만을 사용하여야 합니다.”
하고, 한성 부윤 이명덕(李明德) 등 5인은 의논드리기를,
“《원전(元典)》에 의거하여 사서오경재(四書五經齋)를 설치하고 평소에 고강(考講)하여 합격시키거나 떨어뜨리게 하고, 과거의 시험장에서는 의(疑)와 의(義)를 시험하여야 합니다.”
하고, 예문관 제학 윤회, 집현전 교리 권채(權採), 수찬 이선제(李先齊) 등 15인은 의논드리기를,
“강경을 사용해야 합니다.”
하고, 유사눌(柳思訥)은 홀로 아뢰기를,
“응시자의 성명을 기록할 때에, 읽은 경서(經書)를 강(講)하게 하여 대의(大義)를 통한 자에게만 응시(應試)를 허락하게 하고, 시험장에서는 제술을 사용하게 하소서.”
하니, 제술을 시행하고자 한 의논을 따르라고 명하였다.
처음에 변계량이 춘추관에서 역사를 편찬할 때에, 매양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시관(試官)이 강경(講經)할 때에 사정을 봐주는 일이 꽤 많으니, 시험 보는 자가 자기의 친족일 경우에는 강(講)을 비록 적절하게 하지 못하더라도 반드시 덮어 비호하여 주는 일이 있다. 또 응시자가 항상 글 읽기에 고생하여, 기운과 습성이 위축되어 저술을 할 줄 모르게 된다면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그런 까닭에 권근(權近)이 일찍이 태종께 상서하여 임박(林樸)의 주장으로 세워진 강경책(講經策)을 혁파하고 다시 제술을 시험 과목으로 쓰도록 하였는데, 요사이 또다시 강경의 방법을 사용하니, 그 폐해가 다시 전과 같게 되었다.” 하였는데, 이때에 상서하여 말한 것이다. 변계량이 여러 사람의 의논이 일치하지 않은 것을 분하게 여겨, 이선제에게 말하기를,
“관중(館中)의 사람들이 다 나의 의논에 따르는데, 그대와 권채는 무엇 때문에 따르지 않는 것인가? 권채는 유별나게도 삼촌 권근의 의논을 존중하지 않는구나.”
하니, 이선제가 말하기를,
“제술을 시험 과목으로 사용하면 한갓 조충전각(彫蟲篆刻)의 기술만 익혀 과거에 합격하려 들 것이니, 누가 성리학(性理學)에 전심하려 하겠습니까. 강경으로 하는 것보다 못합니다.”
하자, 변계량이 좋아하지 않았다.
○ 10년 4월 29일(신사)
판우군부사 변계량이 기자묘(箕子廟)의 비문을 지어 올렸는데, 그 비문에 운운하였다. - 원집에 보인다.
○ 10년 윤4월 27일(무신)
정사를 보았다. 판부사 변계량이 아뢰기를,
“시위 군사(侍衛軍士)를 설치한 것은 밖을 방어하고 안을 호위하여 불의(不意)의 사변에 대비하고자 한 것인데, 요사이 국내외가 무사하다고 해서 외방의 시위 군사들을 혹은 농사철로 인하여, 혹은 흉년으로 인하여, 혹은 추위와 더위로 인하여 번(番) 들지 않게 하고, 기병(騎兵)과 선군(船軍)도 4번으로 나누거나 3번으로 나누어 오로지 농사에만 힘쓰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진실로 전하께서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재화(災禍)와 환란(患難)은 언제나 뜻하지 않을 때에 생기는 것입니다. 어찌 우선 안정(安靜)한 것을 믿고 수비와 방어를 소흘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다른 방법으로 마땅히 구휼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근래에 해이해진 것은 고의로 한 것이 아니다. 다만 흉년이 들었기 때문일 뿐이다. 경의 말이 옳다.”
하였다.
○ 10년 6월 22일(계묘)
승문원 제조(承文院提調) 황희, 맹사성, 변계량, 허조(許稠), 신상, 윤회 등을 불러, 황후에게 옥책(玉冊)을 하례할 때 황태후에게 방물을 올릴 것인지의 여부와, 왕세자에게 양관(梁冠)을 하사해 주기를 청하는 일과 금은(金銀) 등의 진헌을 면제해 달라고 청하는 등의 일을 의논하게 하니, 모두가 아뢰기를,
“황후에게 옥책을 하례할 때 황태후에게 방물을 바치는 것은 이러한 전례가 없었습니다. 왕세자의 양관은 시급히 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금은의 진헌을 면제해 달라고 청하는 일은 양관을 청하고 나서 청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 10년 7월 1일(신해)
상이 이르기를,
“세자가 효령대군(孝寧大君)과 여러 숙부와 여러 아우를 대접하는 예법을 자세히 정해서 아뢰도록 하라.”
하니, 판부사 변계량과 예조 판서 신상 등이 대답하기를,
“이 예법은 매우 중대한 것이어서 경솔히 의논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속히 참작해서 정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 10년 9월 14일(계해)
상정소(詳定所)의 제조(提調) 이직(李稷), 황희, 변계량, 허조, 신상, 조계생(趙啓生), 정초 등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예기(禮記)》 증자문(曾子問)에 이르기를, ‘종자(宗子)는 사(士)이고, 서자(庶子)가 대부(大夫)일 때에는 종자 집에 가서 상생(上牲)으로 제사를 올리되, 축문에, 「효자(孝子) 아무개는 개자(介子) 아무개를 위하여 그 상사(常事)를 드리나이다.」 하고, 만약에 종자가 죄를 지어 다른 나라에 가서 살고, 서자가 대부일 때에는 그 제사의 축문에, 「효자 아무개가 개자 아무개로 하여금 그 상사를 집행하게 하나이다.」 한다.’ 하였습니다. 신들이 삼가 상고하건대, 서자는 비록 대부가 되었더라도 제사를 지낼 수 없고, 종자가 다른 나라에 가 있어서 서자가 제사를 지낸다 하더라도 그것이 종자의 명령으로 대신하는 것이니, 그 조상을 높이고 종통(宗統)을 공경하는 엄한 뜻이 이와 같아서, 차자(次子)가 사당을 세운다는 예문(禮文)은 없습니다.
그러나 일에 난처한 것이 있게 되면 예법도 이에 따라 바꾸어야 합니다. 만약에 장자(長子)나 장손(長孫)이 잔약하고 용렬해서 남의 집에 가서 품팔이나 하고 있어, 비록 종인(宗人)들이 서로 돕더라도 끝내 사당을 세우지 못하는 경우에는 차자로 하여금 사당을 세우도록 허락하고, 그 장자나 장손이 지금은 비록 외롭고 잔약하여 의지할 곳이 없다 하더라도 나중에 가서 사당을 세울 만한 자이면, 차자는 사당을 세울 수 없다는 《경제육전(經濟六典)》의 예(例)에 의거하여, 깨끗한 방 1칸을 가려서 신주(神主)를 받들다가 장자와 장손이 사당을 세우게 되거든 신주를 다시 모셔 가도록 해야 합니다.
기타의 경우에는 장자나 장손이 비록 폐질자(廢疾者)라 하더라도 집이 있을 때에는 모두 사당을 세우는데, 제사 때를 당하여서는 차자가 대행(代行)하게 하되, 주 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에 의거하여 제사 지낼 처음에 자리에 나아가 참신(參神)만 하고 딴 곳에서 쉬다가, 제사를 마치면 자리에 돌아와서 사신(辭神)을 하도록 합니다. 또 우리나라의 풍속은 대종(大宗), 소종(小宗)의 제도가 없습니다. 바라건대, 주 문공의 《가례》의 대종소종도(大宗小宗圖)에 의거하여 오직 증조(曾祖)의 장자나 장손만이 종(宗)이 되어 사당을 짓고 신주를 세우고 제사를 행하도록 하며, 같은 증조의 중자(衆子)나 중손(衆孫)은 그의 집에 나아가서 집사(執事)에 참여하여 물품으로써 서로 돕게 하고, 만일 거리가 멀어 능히 제사에 참예하지 못할 경우에는 주 문공의 《가례》에 의거하여 다만 제사 지낼 시각에 곧 신위(神位)를 만들어 지방(紙榜)으로 표기하고, 제사를 마치면 불사르도록 하소서.”
하였다. 또 두 처(妻)를 함께 부(祔)하는 예(禮)를 의논하게 하니, 이직, 허조, 신상, 조계생 등이 아뢰기를,
“삼가 《예기》 상복소기(喪服小記)를 살펴보건대, ‘부(婦)는 조고(祖姑)에게 부(祔)하되, 조고가 세 분이면, 친(親)한 사람에게 부(祔)한다.’ 하였는데, 이것은 부묘(祔廟)의 예에 있어 세 분이면, 혹 두 분 계모(繼母)가 있음을 말한 것이고, 친한 사람이란 시아버지의 생모(生母)를 말하는 것입니다. 당 나라 위공숙(韋公肅)은 말하기를, ‘전취(前娶)와 후계(後繼)가 모두 정실(正室)이고 적통(嫡統)이면 함께 부(祔)하여도 예법에 혐의될 것이 없다.’ 하였으며, 주 문공의 《가례》에는 ‘졸곡(卒哭)한 다음날에 부(祔)한다.’ 하고, 그 주석에 이르기를, ‘모상(母喪)에 조비(祖妣)가 두 분 이상이면 친한 사람에게 부(祔)한다.’ 하였습니다.
신들이 삼가 상고하건대, 천자(天子)와 제후(諸侯)의 적배(嫡配)와 빈잉(嬪媵)은 명분이 매우 엄격하므로, 적배의 상(喪)을 당한 뒤에 빈잉이 비록 사랑을 받아 중곤(中壼)의 자리에 나아갔다 하더라도, 바로 전날에 명분이 이미 정해진 사람이니, 전(傳)에 이른바와 같이 두 적비(嫡妃)를 함께 세우는 것은 어지러움[亂]의 근본이 됩니다. 혹 대를 이을 임금이 서얼(庶孼)의 몸에서 나서 그 어머니를 높이고자 하여 존호(尊號)를 더한다면, 이는 선유(先儒)가 이른 바와 같이 도리어 그 아비를 낮게 하는 것이 됩니다. 대부(大夫)의 경우에는 예법에 재취(再娶)를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위공숙의 이른바 전취와 후계가 모두 정적(正嫡)일 때에는 하나는 높이고 하나는 낮출 수가 없으니, 고례(古禮)의 조고(祖姑)가 세 분 있다는 것은 어찌 이 이유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바라건대, 고례에 의거하여 두 사람 이상을 함께 부(祔)하게 하소서.”
하고, 변계량은 아뢰기를,
“삼대(三代) 때에는 한 황제(皇帝)에 한 황후(皇后)뿐이었는데, 한(漢) 나라 이후로 전취와 후계가 모두 적실이고 처음에는 한미하다가 나중에 현달한 것을 모두 적실이라고 하는 주장이 방자하게 사설(邪說)을 내세우는데도 이를 금하지 못하였습니다. 송(宋) 나라 원풍(元豐) 연간에는 ‘옛사람은 조고(祖姑)가 세 분이면 가장 근친인 사람에게 부(祔)한다.’는 글을 인용하여, 이것을 계승해서 간사한 의논을 만들어 쓴 자가 있어, 심지어는 둘째 왕후나 셋째 왕후라도 모두 부(祔)한다는 말이 있게 되었습니다.
신은 삼가 생각건대, 삼대의 제도가 가장 바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후세의 선비들이 당시 임금의 어머니를 추존(推尊)할 마음으로, 고금의 예를 원용하고 경전(經傳)의 말을 끌어붙여 자신의 말을 수식하는 자가 이루 다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성상께서는 마음속에서 나온 특별히 밝은 교지(敎旨)를 내리시어 첫째 처(妻)를 부묘(祔廟)하고 둘째 처, 셋째 처를 제향하는 것에 대하여 신들에게 명하여 의논하라 하셨으니, 이는 모두 천고(千古) 유신(儒臣)들의 아첨하는 비루함을 깨뜨리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니 둘째 처, 셋째 처를 제향하는 것은, 각자의 소생(所生)들이 신위(神位)를 만들어 치제(致祭)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명하여 황희, 맹사성, 변계량, 허조, 신상, 정초 등을 불러들여 다시 의논하게 하였다. 황희, 변계량, 신상 등이 또 의논드리기를,
“사대부(士大夫)가 4대(代)를 제사 지내는 예법은 마땅히 《원전(元典)》의 제도를 따르도록 하소서.”
하고, 맹사성, 허조, 정초 등은 아뢰기를,
“마땅히 명 나라의 제도를 따르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변계량과 정초에게 각기 그들의 뜻을 말하라고 명하였다. 정초는 아뢰기를,
“어떤 이가 정자(程子)에게 묻기를, ‘지금 세상 사람은 고조(高祖)에게 제사지내지 않는데, 어떻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고조까지는 복(服)이 있으니 제사하지 않는 것은 매우 잘못이다. 나의 집안은 고조에게도 제사를 지낸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천자(天子)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오복(五服)이 다름이 없어 모두 고조에게까지 이르니, 복(服)이 이미 이와 같다면 제사도 지내야만 한다.’ 하였습니다.
주 문공의 《가례》에 이르기를, ‘사감(四龕)을 두되, 고조는 서쪽에 모시고, 증조(曾祖)가 그 다음이며, 조(祖)가 그 다음이고, 부(父)는 그 다음에 모신다.’ 하였으나, 명 나라의 공후(公侯)와 품관(品官)의 집 사선도(祀先圖)에는 고조ㆍ증조ㆍ조ㆍ부의 네 위(位)를 벌여 세웠습니다.
본조(本朝)에서는 6품 이상은 3대(代)를 제사 지내고, 7품 이하는 2대를 제사 지내며, 서인은 고비(考妣)만 제사하는 법을 세웠습니다. 만일 아비가 6품 이상이라면 3대를 제사 지내며, 자신이 죽은 뒤에 그 아들이 무직(無職)이면 부모에게만 제사를 지내고, 증조와 조의 신주(神主)를 철거(撤去)해야 할 것이나, 뒷날에 가서 6품에 제수되면 다시 신주를 세우게 하되, 사세(事勢)가 난처하면 한결같이 명 나라의 제도를 따르도록 하소서.”
하고, 변계량은 아뢰기를,
“대저 《의례(儀禮)》를 제정한 법(法)은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차등이 있는데, 이는 천리(天理)의 본연(本然)에서 나온 것이어서 사사로운 지혜나 사설(邪說)로서 굽힐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자는 《중용(中庸)》의 수기조묘지장(修其祖廟之章)에 대한 주(註)에서 ‘조묘(祖廟)는 천자는 7묘(廟), 제후(諸侯)는 5묘, 대부(大夫)는 3묘, 적사(適士)는 2묘, 관사(官師)는 1묘이다.’ 하였습니다. 어떤 이가 주자에게 묻기를, ‘관사를 1묘로 한 것은 부모만을 제사 지내고 조부모(祖父母)에게는 미치지 않는데, 이것은 인정(人情)에 가깝지 않다.’ 하니, 주자가 대답하기를, ‘지위가 낮으면 은택(恩澤)도 얕은 법이니, 그 이치가 이와 같아야 한다.’ 하였으니, 이것은 실로 천하 고금의 대전(大典)입니다.
지금 명 나라의 제도에 품관은 4대를 제사 지내고, 서민은 3대를 제사 지내는데, 또한 일찍이 품관을 서인과 뒤섞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제도가 고례(古禮)와 합치되지 않는 점이 있습니다. 본조(本朝)의 시향(時享)하는 예법은 가장 사리(事理)의 바름과 인정의 마땅함을 얻었으니 변경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에 아비가 죽어 자식이 대를 잇게 되었는데 폐출(廢黜)되었거나 복작(復爵)되는 등에 대한 의논으로 말하자면 소활(疎闊)하기가 매우 심한 일입니다.
대개 법을 세움은 그 상(常)을 기준으로 하지 그 변(變)을 기준으로 하지 않으니, 천하의 만사(萬事)가 모두 그러한데, 어찌 신주를 만들어 놓고 철거하는 일에 대해서만 의심하겠습니까. 이것은 정말로 이른바 한 번 웃고 손을 내저어 물리칠 만한 일이므로 깊이 변별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주자(朱子)가 정자(程子)의 학설을 논하여 제사의 본의(本意)를 얻었다는 것에 대해 그 뜻을 궁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자가 동지(冬至)에는 시조(始祖)를 제사하고 입춘(立春)에는 선조(先祖)를 제사한다는 것을, 주자도 그것이 참람(僭濫)하다고 의논하였고, 또 제사가 고조(高祖)에게 미친다는 글을 보지 못했다고 하였으니, 이른바 본의를 얻었다고 한 것은 다만 그 이치를 논한 것뿐입니다. 그러니 지위가 낮으면 은택이 얕은 법이어서 이치가 이와 같아야 한다고 말한 것과는 절로 서로 모순(矛盾)이 됩니다.
그러므로 선유(先儒)들이 이르기를, ‘주자의 말은 하나는 그 갈래를 말하고 하나는 그 이치를 말한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이른바 이치는 하나인데 나누어져 작용함에 각기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옛사람의 묘제(廟制)는 절로 등급에 따라 줄임이 있었으니, 제사를 지내는 예법에도 반드시 이와 같았을 것입니다. 어찌 묘제는 차등이 있었다 해도 제사에는 차등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옛사람의 뜻이 결코 여기에서 벗어나지는 않았음이 명백한 것입니다. 또 더구나 모두 고조ㆍ증조에게 미치지 않고 다시 조(祖)에게 미치지 않는다는 설이 뚜렷하고 매우 분명하니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공손히 생각건대 태조(太祖)에서 태종(太宗)까지 40년 동안의 성헌(成憲)이 실로 근거할 만하고, 또 사리(事理)로써 논한다면 저들 서인에게 비록 4대를 제사 지내게 한들 할 수 있겠으며, 설령 그들이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대로 형벌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만일 서인들이 비록 행할 수 없더라도 우선 이 법을 세워 후세에 보여야 한다고 한다면, 또한 신의로 사람을 대접하는 도리가 아닐 것입니다. 하물며 《가례》를 좇고자 한다면 또 명 나라의 제도와 같지 않게 되니, 한결같이 조종(祖宗)의 성헌에 의하여 변경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문신(文臣) 4품 이상에게 명하여 회의를 하도록 하니, 변계량의 의논을 따르는 자가 많고, 정초의 의논을 따르는 자는 4, 5인뿐이었다.
○ 10년 9월 17일(병인)
왕세자가 《상서(尙書)》를 읽기를 마치니, 사(師) 황희, 부(傅) 맹사성, 좌빈객 이맹균(李孟畇), 우빈객 정초, 우부빈객 신장(申檣) 등이 계청하기를, “매일 《집주(集注)》 10장을 세 번씩 숙독하게 하고, 보덕(輔德) 이하가 시강(侍講)하도록 하소서.” 하였고, 이사(貳師) 변계량, 좌부빈객 윤회는 계청하기를, “매일 《집주》 5장을 한 번 읽되, 주강(晝講)은 보덕 이하가 시강하여 여섯 번 읽게 하소서.” 하니, 상이 황희 등의 의논을 따랐다.
○ 10년 9월 24일(계유)
상이 변계량에게 이르기를,
“대부(大夫)와 사(士)가 두 처(妻)를 부묘(祔廟)한다는 의논을 경이 옳지 않다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변계량이 대답하기를,
“대부와 사는 예법에 두 처를 둘 수 없는데, 만일에 죽었거나 덕(德)을 잃어서 부득이하게 개취(改娶)하는 것은 종사(宗社)를 중히 여기는 까닭입니다. 살아서도 두 아내를 한 방에 둘 수 없었는데 어찌 죽어서 두 아내를 조종(祖宗)의 사당에 함께 부(祔)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이 때문에 옳지 않다고 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의 이 말은 의리(義理)를 가지고 말한 것이다. 만일 옛 제도에 있다면 어찌 함께 부(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천자와 제후는 예법에 두 적실(嫡室)이 없다 하였으니, 선후(先后)의 적실이 이미 훙(薨)하였을 경우 후비(後妃)의 아들이 서서 비록 자기 어머니를 높여서 부묘하고자 하더라도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다.
대부와 사의 예법은 천자와 제후의 예법과 다르니, 비록 연고가 있어 개취(改娶)하였더라도 이미 적처(嫡妻)를 둘로 할 수 있다는 예법도 있으니, 어찌 함께 부(祔)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옛글에 이르기를, ‘첩족(妾族)을 함께 부(祔)한다.’ 하였으니, 첩족도 오히려 부묘하는데 선처(先妻)와 후처(後妻)를 함께 부묘하지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하니, 변계량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사와 대부의 예법을 상고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삼가 헤아려 보건대, 인종 황제(仁宗皇帝)는 후비(後妃)의 소생입니다. 인종(仁宗)이 적모(嫡母)가 후사 없이 먼저 훙했다 하여 생모(生母)를 높여서 부묘하고자 하니, 그 당시의 신하들이 고례(古禮)를 갖가지로 채택하여 드디어 부묘함으로써 비로소 옛 제도를 더럽히고 어지럽혔습니다. 당시에 이것을 간쟁하여 옳지 않다고 한 자가 있었으니, 그는 참으로 충신(忠臣)입니다. 만일 대부와 사에게 두 처를 함께 부(祔)한다는 예법이 있다고 말하게 되면, 신은 후세(後世)에 ‘신하로서도 오히려 두 처를 함께 부(祔)하는 예법이 있는데 더구나 임금이겠는가.’ 하고, 이것을 인용하여 증거로 삼아 장차 인종이 생모를 높인 경우와 같음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세워진 법이 한 번 바뀌게 되면 말류(末流)의 폐단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말한 말류의 폐단을 막기 어렵다는 것은 매우 좋은 말이로다. 그러나 《의례》의 제도는 성인(聖人)의 일이니, 사와 대부의 두 처를 함께 부(祔)한다는 예법이 주공(周公)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면 어찌 바꿀 수 있겠는가.”
하고, 상정소(詳定所)와 집현전(集賢殿)에 옛 제도를 상고하여 아뢰라고 명하였다.
○ 10년 10월 3일(신사)
경연에 나아갔다. 상이 일찍이 진주(晉州) 사람 김화(金禾)가 그 아비를 살해하였다는 사실을 듣고, 깜짝 놀라 낯빛을 변하고는 곧 자책(自責)하고 드디어 여러 신하를 소집하여 효제(孝悌)를 돈독히 하고, 풍속을 후하게 이끌도록 할 방책을 논의하게 하니, 판부사 변계량이 아뢰기를,
“《효행록(孝行錄)》 등의 서적을 널리 반포하여 항간의 백성들로 하여금 이를 항상 읽고 외우게 하여 점차로 효제와 예의의 장(場)으로 들어오도록 하소서.”
하였다. 이에 이르러 상이 설순(偰循)에게 이르기를,
“지금 세상 풍속이 좋지 않아 심지어 자식이 자식 노릇을 하지 않는 자도 있으니, 《효행록》을 간행하여 이로써 어리석은 백성들을 깨우쳐 주려고 생각한다. 이것이 비록 폐단을 구제하는 급무가 아니기는 하다. 그러나 실로 교화하는 데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니, 전에 편찬한 24인의 효행에다가 또 20여 인의 효행을 더 넣고, 전조(前朝) 및 삼국 시대(三國時代)의 사람으로 효행이 특이한 자도 모두 수집하여 한 책을 편찬해 만들도록 하되, 집현전에서 이를 주관하라.”
하니, 설순이 대답하기를,
“효도는 곧 백행(百行)의 근원이니, 이제 이 책을 편찬하여 사람마다 이를 알게 한다면 매우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고려사(高麗史)》를 춘추관(春秋館)에 보관하고 있어 외부 사람은 참고하여 살펴볼 수가 없습니다. 춘추관으로 하여금 이를 초록(抄錄)해 보내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즉시 춘추관에 명하여 이를 초록하도록 하였다.
○ 10년 10월 17일(을미)
상이 이르기를,
“어선(御膳)은 지극히 중한 것인데, 승문원 제조가 말하기를, ‘이번에 진헌하는 것은 주본(奏本)이 없어도 된다.’ 하니, 이게 무슨 말인가? 우리나라에서 바치는 물품을 기록하지 않아도 되는가? 나는 매우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변계량의 말이 아닌가?”
하니, 우대언(右代言) 허성(許誠)이 대답하기를,
“여러 대신이 모두 말하기를, ‘주본을 올려야 한다.’고 하였으나, 오직 변계량은 말하기를, ‘이번에 진헌하는 것은 일의 정당한 것이 아니므로 주본을 없애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 10년 11월 1일(기유)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에서 아뢰기를,
“대소(大小)의 인원이 시제(時祭)를 행할 때에는 사모(紗帽)의 착용을 허락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함(前銜)도 역시 공복(公服)을 착용할 수 있는가?”
하자, 판부사 변계량이 아뢰기를,
“2품 이상은 비록 전함이더라도 대궐에 나아갈 때에는 금대(金帶)와 사모를 착용하기 때문에, 제사를 행할 때에도 사모와 금대를 착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3품 이하의 전함은 착용할 수 없으니, 제사 때에 착용한다는 것은 불가합니다. 만약 착용하게 하려면 2품 이상과 더불어 일례(一例)가 될 것이니, 이렇게 되면 아마도 존비(尊卑)의 분별이 없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제부터는 전함이 제사를 행할 때에 2품 이상은 금대와 사모를 착용하고, 3품 이하는 오각대(烏角帶)와 사모를 착용하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변계량에게 이르기를,
“건의하는 자의 말에 의하면 ‘문과에서 3등 이하는 모두 권지(權知)로 삼관(三館)에 구전(口傳)으로 차하하여 차례를 기다려 서용(敍用)하게 되므로 7, 8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그 관직을 떠날 수 있다. 그래서 한 관(館)에서 늙어버려 세상일을 익히지 못하는 실정이니, 그 밖의 귀한 집 자제들을 젊어서부터 각사(各司)의 남행직(南行職)에 나누어 배치하여 관리의 일을 밝게 익히게 하면 마침내 쓸 만한 인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는데, 이 말이 과연 그러한가?”
하니, 변계량이 대답하기를,
“참으로 그렇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도 그렇게 여긴다.”
하였다. 변계량이 아뢰기를,
“문과에 오른 33인은 즉시 모두 서용한다는 말이 이미 《원전(原典)》에 실려 있으니, 만약 이 사람들을 각사의 남행직에 쓴다면 귀한 집 자제들보다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은 삼가 헤아려 보건대, 문과에 급제한 사람을 모두 각사의 남행직에 쓴다면 귀한 집 자제들은 쓰이지 못한다는 탄식이 있을 것이요, 의논하는 자도 혹 문사(文士)를 취하는 것은 오로지 문학(文學)을 위해서이니 남행직에 쓰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하기도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선비를 취하는 것은 세상을 위해 쓰고자 함인데, 어찌 문학만을 위해서라고 하겠는가.”
하니, 변계량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매우 좋습니다. 귀한 집 자제는 그들의 부모가 총애하여, 영명(英明)하여 배울 만한 무리들을 약관(弱冠)에 이미 각사의 남행직에 나누어 배치하여 문자(文字)를 배우지 못하고 사리를 통달하지 못하게 하니 매우 애석한 일입니다. 귀한 집 자제들은 다 학교로 나가게 하여 의리에 통하고 덕행을 이룬 뒤에 점차로 관직에 들어오게 하고, 삼관(三館)의 권지(權知)로 있는 사람들을 각사의 남행직에 쓰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자제들은 조급하게 나아가는 데 따른 폐단이 없을 것이요, 선비들은 쓸 만한 인재로 커나갈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귀한 집 자제에 대한 일은 나도 들은 지 오래이나, 아직도 이를 시행하지 못하고 있다.”
하니, 이조 판서 이맹균은 아뢰기를,
“신의 조부는 중국에 들어가서 과거에 올랐습니다. 그 방목(榜目)을 보니, 즉시 모두가 서용되었습니다.”
하고, 형조 판서 김자지(金自知)는 아뢰기를,
“전조(前朝)에서는 문과에 합격한 자를 모두 외방의 사록(司錄)으로 보냈습니다. 신의 부친도 중국에 들어가 과거에 올랐는데 즉시 구현승(丘縣丞)에 제수되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의 부친은 중국어를 몰랐기 때문에 구현승에 제수된 것이다. 이제부터는 삼관의 권지는 이조에서 빈자리가 나는 대로 서용하도록 하라.”
하였다.
○ 10년 11월 3일(신해)
상이 우의정 맹사성에게 이르기를,
“지금 황제께서 북방에 출정(出征)하셨으니, 사람을 보내어 공경히 문안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아니면 장차 회가(回駕)하기를 기다려서 문안해야 하는가? 어제 변계량은, ‘모름지기 때를 잃지 말고 문안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하니, 맹사성과 판부사 허조 등이 대답하기를,
“무심히 보고 있어서는 안 되니 모름지기 빨리 문안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 10년 11월 19일(정묘)
판부사 변계량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지성으로 중국을 섬겨 해청(海靑)을 잡으면 즉시 바쳤습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포획하기가 쉽지 않던 것이 지금은 조금 많이 잡히는 것이니, 청컨대, 좋은 것을 택하여 바치고 많이 바치지는 마소서. 또 그 포획하기가 매우 고생스러우니 뒷날에 많이 잡히지 않을지를 어찌 알겠으며, 혹시 많이 바치라는 명이 있으면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황제가 만약 많이 포획하였는데도 다 바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듣게 되면 안 되지 않겠는가.”
하였다.
○ 10년 11월 26일(갑술)
상이 이르기를,
“이번에 세자에게 육량관(六梁冠)을 하사하고 특별히 등급을 더하셨으니, 실로 만세토록 전해질 은총이다. 장차 무엇으로 사은할 것인가? 전에 황제께서 태종(太宗)의 관복(冠服)과 모후(母后)의 단자(段子)를 하사하셨을 때 그것에 대한 사은으로 금안장 2부(部)와 말을 바친 일이 있었다. 또 태종께서 일찍이 말씀하기를, ‘금(金)은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니 금안장이 없다 하더라도 좋을 것이다.’ 하셨는데,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니, 판부사 변계량이 대답하기를,
“등급을 더한 것은 작명(爵命)과 같은 것으로 이는 특별한 은수(恩數)입니다. 모름지기 금안장을 올려 희사(喜謝)의 뜻을 표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 11년 1월 4일(신해)
상이 대신들에게 이르기를,
“사신이 황제의 명령이라 하여 석등잔(石燈盞)을 구하는데, 과연 황제의 명이라면 응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신이 돌아갈 때에 부본(副本)을 첨부하여 바칠 것인가, 따로 사람을 보내어 사신과 같이 가서 바칠 것인가? 내 생각에 태조 때에도 간혹 사신에게 부쳐 진헌한 전례가 있었으니, 그와 같이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좌의정 황희(黃喜)와 판부사 변계량이 아뢰기를,
“비록 사신에게 부쳐 진헌한 전례가 있었으나, 지금은 사세로 보아 옳지 않을 것 같습니다. 황제가 최득비(崔得霏)에게 치제(致祭)한 일로 인하여 그의 자제가 반드시 사은하러 갈 것이니, 그에게 부쳐 진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3년의 상기(喪期)가 천하의 공통적인 상례이다. 옛날에 황제가 이무창(李茂昌)의 아비에게 치제하였는데, 이무창이 상기를 마친 뒤에 들어가 황제를 뵙고 벼슬을 받아 돌아왔다. 그러나 옛글에 이르기를, ‘자식이 복을 벗으면 곧 사례를 행하되 만약 친아들이 없으면 족친이나 한동네 사람이 이를 행한다.’ 하였으니, 사은을 늦출 수는 없다.”
하니, 황희와 변계량이 아뢰기를,
“상기를 마친 다음에 들어가 뵙는 것이 비록 고례(古例)에 있으나, 지금 이와 같이 한다는 것은 부당합니다. 최득비의 아들은 바야흐로 상중에 있으니, 그 사위가 대행하는 것이 옳으며, 겸하여 석등잔을 가지고 사신과 함께 가서 진헌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였다. 예조 판서 신상(申商)에게 명하여 의논해서 아뢰게 하였다. 상이 황희와 변계량에게 이르기를,
“일전의 상소 가운데 ‘학문을 진흥시키라’는 조항에 대하여 답한 말을 들었는가?”
하니, 변계량이 아뢰기를,
“신은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날에는 경대부(卿大夫)의 적자(嫡子)와 준수한 평민만이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는데, 이제 음관(蔭官)의 자제(子弟)를 모두 반궁(泮宮)에 들어가게 한다면 너무 많지 않겠는가?”
하니, 변계량이 아뢰기를,
“경관직(京官職) 3품 이상의 자제들만 모두 입학시키도록 하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과(武科)도 또한 문과와 다름없이 사패(賜牌)ㆍ사개(賜蓋)ㆍ사연(賜宴)하며 유가(遊街)시키는 것이 부당하다고 판부사가 여러 번 말하였다. 그러나 이는 태종께서 이미 법으로 세워 놓으신 것이므로 경솔히 고칠 수 없다. 다만 시취(試取)할 때에 사서 이경(四書二經)을 고강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황희와 변계량이 아뢰기를,
“활쏘고 말타는 재예는 3000명의 갑사(甲士)도 다 능한 것이지만 무과가 갑사와 다른 것은 다만 병서(兵書)를 고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삼사서(三四書)를 대략 통하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데도 문과와 다름이 없는 까닭에, 선비들이 모두 문과를 버리고 무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사서 일경(四書一經)을 고강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관직을 제수하는 일은 어찌 할 것인가?”
하니, 변계량이 아뢰기를,
“25세가 되면 관직을 주는 것이 옳습니다. 지금 18세에 관직을 주는 법은 박석명(朴錫命)이 그의 자식에게 벼슬을 제수하려는 술책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고, 황희가 아뢰기를,
“이 법은 곧 태종 때의 하륜(河崙) 등이 정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 역시 일찍이 박석명이 그의 아들을 위하여 이 법을 세웠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그 나머지의 조건은 내가 모두 아뢴 대로 윤허할 것이나, 무과와 제학(諸學)을 일례(一例)로 시취한다는 것은 불가하다.”
하니, 변계량이 아뢰기를,
“신은 아직 일례의 여부(與否)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오나, 윤회(尹淮)가 신에게 말하기를, ‘무과는 곧 다른 제학의 예와 같다.’ 하기에, 방금 《원전(元典)》을 상고해 보았더니 방방(放榜)ㆍ사개ㆍ3일 유가의 법이 없습니다. 구제(舊制)에 의거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내 다시 생각해 보겠다.”
하였다. 변계량이 아뢰기를,
“과장(科場)에서는 반드시 경서의 본문을 상고한 뒤에라야 글을 지을 수 있습니다. 지금 본문을 보지 못하도록 한다면, 반드시 경서를 왼 연후에야 비로소 글을 지을 수 있을 것인데, 아마도 사서 오경(四書五經)을 완전히 다 욀 수 있는 자가 없을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만일 본문을 보지 못하게 하면 학자들이 반드시 너무 우려할 것이니, 다만 삼경(三經)만으로 글제를 내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변계량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옛날에도 포(酺)를 내리는 예(禮)가 있었고, 《송감(宋鑑)》과 전조(前朝)의 역사에도 3일간 대포(大酺)한다는 말이 기재되어 있으니, 옛 제도에 따라 행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통감(通鑑)》에도 역시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근년 이래로 곡식이 잘 되지 못하고, 또 나라에 경사스런 일이 없어서 감히 거행하지 못했었다. 이번 봄가을에 80세 이상 된 자에게 쌀을 내려주었다.”
하니, 변계량이 아뢰기를,
“대포를 내리는 제도는 옛날의 좋은 법입니다. 속히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 11년 1월 18일(을축)
자선당(資善堂)에 나아갔다. 판부사 허조(許稠)가 아뢰기를,
“과시(科試)의 법이, 동당(東堂)의 금령(禁令)은 다소 엄하고, 감시(監試)는 다소 너그러운 것인데, 어제는 협서(挾書) 수색을 너무 엄하게 하여 응시자들이 모두 고생을 하였습니다. 생원(生員)은 시취하여 곧 임용할 사람이 아니며, 장차 성균관에 기거하면서 글을 읽도록 할 자이니, 이같이 엄하게 할 일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뜻도 역시 그러하다.”
하고, 우대언 허성(許誠)에게 명하기를,
“판부사의 말이 그러하니, 변 판부사(卞判府事)에게 말하라.”
하였다. 변계량도 역시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지당하십니다. 예조로 하여금 전대로 협서를 수색하게 하되, 너무 엄하게 하지 말도록 하소서.”
하였다.
○ 11년 3월 14일(경신)
부원군 이직(李稷), 판부사 허조, 참판 정초(鄭招) 등이 건의하기를,
“아버지가 죽고 그 아들이 대를 이을 때, 아직 그 직질(職秩)이 미치지 못하여 그 신주를 거두고 뒷날 관직을 얻게 될 때를 기다리는 자는 두 가지의 길이 있을 뿐이니, 그 하나는 묻는 것이요, 하나는 잘 싸서 두는 것입니다. 이미 묻었던 것을 다시 파내는 것은 예에 명문(明文)이 없고 사리를 거스르는 일이며, 싸서 간직하는 것은 천자와 제후가 종묘에서 대가 지나서 체천(遞遷)하는 신주를 협실(夾室)에 모셔 두는 것과 유사합니다. 그러나 사대부의 가묘(家廟)에는 협실이 없습니다. 만약 별묘(別廟)를 세운다면 경대부(卿大夫)는 3대를 합하여 한 사당에다 모셔야 하며 선비는 증조(曾祖)마저도 오히려 그 제사를 받들지 못하는데 어찌 따로 사당을 세워 받들 수 있겠습니까. 만약 사당 안에 간직해 둔다면 한쪽은 제사를 받들고 한쪽은 제사를 받들지 않는 것이 진실로 미안한 일입니다. 만약 대청에 간직해 둔다면 빈객을 접대하는 곳이어서 불편하고, 침실에 간직해 두자면 부부가 거처하는 곳이어서 부당하고, 행랑이나 창고는 낮은 곳이라서 불경스러워 모두 적당하지 못합니다. 또 천자나 제후의 협실에 모셔 둔 신주는 비록 사시(四時)에 행하는 제사는 없더라도 3년마다 협제(祫祭)가 있습니다. 지금 싸서 넣어 둔 이 신주는 제사드릴 기회도 없거니와, 혹시 관직을 얻게 되지 못한다면 마침내 어찌 되겠습니까. 효손의 마음은 죽은 이를 살아 있는 것처럼 섬기는 바이니, 이미 신주를 묻었다면 모르거니와 싸서 넣어 두고서 제사를 지내지 못한다면 그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는 모두 4대를 함께 제사하는 것으로 예를 삼았고, 명 나라에서도 품관의 집에서 고조까지 제사하는 것을 허용하였는데, 비록 그 까닭을 밝혀 말하지는 않았으나 역시 이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신들이 당초 건의할 때에 명 나라의 제도와 정자와 주자의 예설(禮說)을 좇으려 하였으나, 《원전(元典)》에, ‘6품 이상도 역시 3대만을 제사한다.’고 하였으므로 품관까지도 3대를 함께 제사하게 하자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대개 《원전》에서 세대의 한수(限數)로써 함께 제사한다는 뜻을 법으로 삼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의논을 올렸더니, 신들로 하여금 다시 논의하라 하셔서 또 명 나라의 제도에 의거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이에 예조에 내리시고 문신 4품 이상으로 하여금 그 가부(可否)를 의논하게 하셨는데,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그 세대의 한수를 《원전》에서 더 얹는 것은 조종의 법을 고치는 것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들은, 삼가 전일의 건의는 곧 《원전》의 미비한 바를 보완하기 위한 것이지 개정하자는 것이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신들이 전일에 올린 두 가지 의논을 재량하셔서 취사선택하소서.”
하고, 좌의정 황희, 판부사 변계량, 판서 신상, 참판 김효손(金孝孫) 등이 건의하기를,
“아버지가 죽고 아들이 대를 이으면, 아버지의 증조는 곧 아들에게 고조가 되니 그 신주는 분묘 곁에 묻어야 합니다. 만약 아들의 직품이 아직 서로 동등하지 않을 경우 응당 제사를 지내지 못할 신주는 잘 싸서 넣어 두었다가, 그 직품이 더해지기를 기다려서 내다가 제사를 지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황희 등의 건의를 따랐다.
○ 11년 3월 20일(병인)
상정소(詳定所)의 제조(提調) 부원군 이직, 좌의정 황희, 판부사 허조, 판서 신상, 참판 김효손ㆍ정초 등이 건의하기를,
“삼가 당 나라 《개원례(開元禮)》를 살펴보니, 황제시향태묘의(皇帝時享太廟儀)에는, ‘황제가 잔을 올리고 문 밖으로 나와 북향하여 서면, 대축(大祝)이 문 밖의 오른쪽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고 축문을 읽고 나서 재배(再拜)한다.’ 하였고, 황제알릉의(皇帝謁陵儀)에는, ‘침전(寢殿)에 이르러 세 번 잔을 올리고 신좌(神坐) 앞에 똑바로 북향하여 서면, 대축 2인이 옥책(玉冊)을 가지고 문 밖에 나아가서 무릎을 꿇고 읽은 다음 재배한다.’ 하였고, 또 송 나라 교사(郊祀)의 전일일조향태묘의(前一日朝享太廟儀)에는, ‘책안(冊案)을 신실(神室) 문 밖 오른편에 설치하고, 황제가 잔을 올리고 문 밖으로 나와 북향하고 서면, 독축관(讀祝官)이 동향하여 무릎을 꿇고 책문(冊文)을 읽은 다음 재배한다.’ 하였고, 태묘시향의(太廟時享儀)에는, ‘축판(祝版)을 신위의 오른편에 각각 설치하고, 초헌관(初獻官)이 잔을 올리고 문 밖으로 나와서 북향하여 서면, 대축이 무릎을 꿇고 축문을 읽은 다음 재배한다.’ 하였으며, 교사의 전이일조헌경령궁의(前二日朝獻景靈宮儀)에는, ‘축책(祝冊)을 전 위의 서쪽에 설치하고 황제가 술을 올리고는 부복하였다가 일어나 서면, 독책관(讀冊官)이 동향하여 무릎을 꿇고 책문을 읽는다.’ 하였고, 사맹조헌경령궁의(四孟朝獻景靈宮儀)에는, ‘황제가 술을 올리고 부복하였다가 일어나서 재배한다.’ 하였으되, 축문을 읽는다는 절목 하나가 없고, ‘매년 봄가을 중월(仲月)에 태상 종정경(太常宗正卿)이 조종(祖宗) 및 후릉(后陵)에 배례할 때에는 신좌 앞에 나아가서 술을 올리고 부복하였다가 일어나서 대축이 축문을 다 읽기를 기다려 재배하고 섬돌로 내려온다.’ 하였습니다.
전조(前朝) 《상정고금례(詳定古今禮)》의 시향태묘의(時享太廟儀)에는, ‘축점(祝坫)을 각 실(室) 문 밖 오른편에 설치하고, 잔을 올리고 문 밖으로 나와서 북향하여 서면, 대축이 문 밖 오른편으로 나아가서 축문을 읽은 다음 재배한다.’ 하였고, 삭망향태묘의(朔望享太廟儀)에는, ‘각기 축판(祝版)을 마련하여 점(坫) 위에 얹어 신좌의 오른편에 놓고, 향과 술을 올리고 부복하였다가 일어나 조금 물러나서 북향하여 서면, 축사(祝史)가 축판을 가지고 신좌의 오른편으로 나아가서 동향하여 무릎을 꿇고 축문을 읽은 다음 헌관(獻官)이 재배한다.’ 하였고, 배릉의(拜陵儀)에는, ‘술 세 잔을 올리고 조금 물러나서 북향하여 서면, 대축이 축판을 가지고 신좌의 오른편으로 나아가서 무릎을 꿇고 읽은 다음 재배한다.’ 하였습니다.
당 나라와 송 나라 및 전조의 제도를 삼가 살펴보건대, 잔을 올린 뒤에 행례(行禮)는 혹은 문 밖으로 나가서 하고, 혹은 신위 앞에 바로 서서 하였으며, 축문은 혹은 신위의 오른편에 설치하기도 하고, 혹은 문 밖의 오른편에 설치하기도 하고, 혹은 전 위의 서쪽에 설치하기도 하여, 어느 것을 정하여 좇을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본조의 종묘는 문 밖이 비좁아서 행례하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청컨대 잔을 올린 뒤에 행례는 모두 신위 앞에서 하고, 축문을 읽는 것은 모두 헌관(獻官)의 왼편에서 하며, 축판은 모두 신위의 오른편에 설치하게 하소서. 그리고 원묘(原廟)의 문 안에서 땅에 엎드리는 것은 옛 법전에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본조에서는 평상시 전 안을 출입할 때에는 땅에 엎드리는 법이 있어, 원묘에서는 평일의 그 예를 많이 썼으니, 예전 그대로 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판부사 변계량이 헌의하기를,
“종묘에는 고례(古禮)를 쓰고, 원묘에는 속례(俗禮)를 쓴다고 함은 옛사람도 이런 말을 하였으며, 우리 태종께서도 일찍이 이르기를, ‘종묘에는 신도(神道)로써 섬기고, 원묘는 생시(生時)를 상징하는 것이다.’라고 하셨으니, 원묘의 문 안에서 땅에 부복하는 것은 일체 조종이 이루어 놓은 법을 따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리고 문 밖에서 축문을 읽는 일에 있어서는 당 나라와 송 나라의 종묘가 비록 옛 제도는 아니나, 그 규모가 매우 크고 그 안에 수장(修粧)한 것은 반드시 곡절이 많을 것입니다. 이른바 문 밖에서 축문을 읽는다는 것도 반드시 그 바깥 섬돌[外陛]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한갓 문 밖이란 문구에 얽매여 경솔히 조종이 이루어 놓은 법을 고치는 데 있어서는 신은 진실로 가슴아프게 여기고 있었는데 이제 하문(下問)하심을 받게 되니 그 기쁜 마음을 억제할 길이 없습니다. 조종이 이루어 놓은 법을 준수하소서. 앞으로 새 법을 건의할 때에는 예조 계목(禮曹啓目)에, ‘조(曹)에서 상정소(詳定所)와 더불어 같이 의논하였다.’고 범칭하는 것은 가장 옳지 못한 일이니, 마땅히 상정소의 제조 아무 아무개라고 이름을 나열하여 적어서 보고하게 하는 것으로 이를 영구한 항식(恒式)으로 삼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11년 4월 23일(무술)
상이 이르기를,
“매일 상참(常參)으로 인하여 나이 많은 대신(大臣)들이 새벽같이 대궐에 나오다 보면 반드시 병이 날 것이다.”
하고, 드디어 예조에 전지하기를,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 이직, 좌의정 황희, 우의정 맹사성(孟思誠), 여천부원군(驪川府院君) 민여익(閔汝翼), 곡산부원군(谷山府院君) 연사종(延嗣宗), 찬성 권진(權軫), 판부사 변계량ㆍ허조 등에게 5일에 한번 참예하게 하고, 조계(朝啓) 때에는 각기 차례대로 입참(入參)하게 하라.”
하였다.
○ 11년 4월 24일(기해)
부원군 이직, 좌의정 황희, 우의정 맹사성, 판부사 변계량 등을 불러 의논하기를,
“사신이 친히 연어(年魚)가 나는 곳에 가서 젓을 담고자 한다고 들은 듯한데, 이를 따르게 되면 장차 만세(萬世)의 폐단을 열게 될 것이며, 따르지 않으면 윗사람에게 드리는 의식에 흠점이 있게 될 것이니,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는가? 노래를 잘 부르는 소녀 30명을 어떻게 뽑는다는 말인가. 12, 3세의 소녀 중에 노래를 잘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적을 것이니, 과연 30명의 수효를 다 따를 수 있겠는가? 근래 4년 동안에 찬(饌)을 만든다는 명목으로 중국에 들어간 비(婢)가 벌써 50여 명이나 되는데, 사신이 서울에 와서 면대하여 말한다면 장차 무슨 말로 이를 대답하겠는가?”
하니, 이직 등이 아뢰기를,
“사신이 면대하여 말할 때에는 마땅히 막아서는 안 될 것이므로, 우선 변통하여 대답하기를, ‘명령대로 따르겠습니다.’라고 했다가, 후일에 반드시 연어가 나는 곳에 가고 싶다고 하면, 대답하기를, ‘연어는 강원도의 깊은 산속 긴 골짜기에서 나기 때문에 돌아가는 길이 매우 험하니 직접 가기가 어렵다.’고 하고, 만약 노래를 부르는 여자에 대하여 말하면, 대답하기를, ‘10세 이상 20세 이하의 소녀 중에 노래를 잘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적은 까닭에 몇 사람만 뽑았다.’고 하여, 10명이나 15명을 들여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장차 경들이 의논한 대로 대답하겠다.”
하였다.
○ 11년 5월 10일(을묘)
좌의정 황희, 판부사 변계량ㆍ허조, 판서 신상, 총제(摠制) 정초 등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교지를 받았습니다. 무릇 정치하는 도리는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을 업신여겨서는 안 되며,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업신여겨서는 안 되니, 모름지기 법금(法禁)을 엄히 세워 그것이 커지기 전에 막아야 합니다. 삼가 한두 가지 조목을 갖추어 아룁니다.
첫째, 품관(品官)과 이민(吏民)이 수령(守令)을 위에 고소한 뒤에 몰래 다른 사람을 사주(使嗾)하여 소장(訴狀)을 내게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로 말미암아 풍속이 날로 나빠지게 되니, 마땅히 엄하게 징계해야 합니다. 이후로 몰래 사주하는 자가 있을 경우 고소를 당한 수령은 죄를 논하지 말고, 몰래 사주한 품관과 이민은 모두 장일백(杖一百)과 도삼년(徒三年)에 처하도록 하며, 만약 몰래 사주하여 고소하거나 자신이 스스로 고소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다면 지관(知官) 이상은 호를 강등하고 현관(縣官)은 낮추어 속현(屬縣)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또 간사하고 교활한 무리들이 사사로 수령들의 과실을 기록하여 공공연히 말하고 겁주는 일이 있는데, 이것도 통렬히 금해야 할 것이니, 부민(部民)이 본관(本官)과 속관(屬官)을 욕하는 것을 처벌하는 율문(律文) 조항에 따라 시행하소서.
둘째, 선덕(宣德) 2년(1427, 세종 9) 3월 일에 형조 판서가 하교를 받으니, ‘소송하는 사람이 관원을 능욕(陵辱)하는 내용인 경우에는 수리(受理)하지 말고, 원고와 피고가 소송한 건 이외에 다른 일을 고하여 거론하는 것도 접수하지 말고, 관리가 고소된 본장(本狀) 외에 따로 다른 일을 찾아 죄를 삼는 사람은 법에 따라 논죄한다.’ 하였습니다. 그 뒤에 원고가 피고의 죄악을 보태고자 하여 다른 범죄까지 아울러 기록하고 피고도 그렇게 하였는데도 관사(官司)에서 수리하는 경우가 있으니, 거듭 밝혀서 만약 하교를 위반한 사람이 있으면, 관리 및 소송 원고와 피고를 모두 논죄하소서. 또 간사하고 사나운 무리들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과실을 주워 모아 까닭 없이 고소하니, 이로 인하여 옥송(獄訟)이 매우 번잡하고 풍속이 날로 박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율문(律文)과 본조(本朝)의 교지에서 사람들에게 진고(陳告)할 수 있도록 허용한 일의 조항과 사죄(死罪) 외에 까닭 없이 다른 사람의 작은 실수와 허물을 고소한 것은 접수하지 말고 조령(條令)을 어긴 것으로 논하소서.
셋째, 신분이 낮은 사람으로서 윗사람과 소송한 사람이 그 윗사람을 욕하고 구타하였으면 먼저 구타하고 욕한 죄를 조사하여 법에 따라 벌을 결정한 뒤에 그 소송한 바의 곡직(曲直)을 분별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11년 7월 18일(임술)
좌의정 황희, 우의정 맹사성, 판부사 변계량ㆍ허조, 예조 판서 신상, 총제 정초, 예문관 제학 윤회를 명하여 흥덕사(興德寺)에 모이게 하고, 지신사 정흠지(鄭欽之)로 하여금 그곳에 가서 명 나라 조정에 대하여 금ㆍ은 공물의 면제를 청하는 일을 의논하게 하였다. 황희, 허조, 정초 등은 아뢰기를,
“주청할 표문(表文)은 문신(文臣)으로 하여금 짓게 하여 골라 뽑은 다음 윤색(潤色)하도록 하소서. 그것을 가지고 갈 재상은 육조의 판서 중에서 뽑아 정사(正使)로 삼고, 도총제(都摠制) 원민생(元閔生)을 부사(副使)로 삼도록 하소서.”
하고, 신상은 아뢰기를,
“호조 판서를 정사로, 첨총제(僉摠制) 김시우(金時雨)를 부사로 삼으소서.”
하였다. 그 금ㆍ은 공물 대신으로 바쳐야 할 토산물(土産物)에 대하여, 맹사성과 황희 등은 마필(馬匹), 포자(布子), 유후지(油厚紙)의 세 가지를 사용하고 싶다고 하였고, 정초, 신상, 허조는 마필과 포자를 사용하고 싶다고 하였고, 변계량은 포자를 사용하고 싶다고 하였다. 이때 변계량이 병으로 흥덕사에 있었기 때문에 황희 등을 명하여 이곳에 가서 의논하게 한 것이다.
○ 11년 8월 4일(무인)
승문원 제조 황희, 맹사성, 변계량, 허조, 신상, 윤회 등을 명소(命召)하여 금ㆍ은 공물의 면제를 주청할 때에 예물(禮物)을 바치는 일의 가부(可否)를 의논하니, 윤회, 신상, 허조, 맹사성, 황희 등이 의논드리기를,
“사은(謝恩)도 아니고 축하(祝賀)도 아니며, 또 조근(朝覲)에 비길 것도 아닌데, 예물을 올리는 것은 아마도 명분이 없을 듯합니다.”
하고, 변계량은 아뢰기를,
“폐백을 가지고 가서 사정을 진술(陳述)하여 주청하는 것은 예(禮)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하였는데, 황희 등의 의논을 따랐다. 상이 또 지신사 정흠지에게 이르기를,
“이제 동궁(東宮)을 위하여 배필을 간택해야 하니 마땅히 처녀를 잘 뽑아야 하겠다. 세계(世系)와 부덕(婦德)은 본래부터 모두 중요하나, 혹시 인물이 아름답지 않다면 또한 안 된다. 나는 부모된 마음에서 친히 간택하고 싶다마는 고례(古禮)에 없어서 실행할 수가 없으니, 창덕궁(昌德宮)에 모이게 하고 내관(內官)으로 하여금 시녀(侍女)와 효령대군(孝寧大君)과 함께 뽑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황희, 맹사성, 변계량, 신상, 윤회 등은 모두 좋다고 하였으나, 허조만 유독 아뢰기를,
“불가합니다. 만약에 한곳에 모이게 하여 가려 뽑는다면 오로지 용모만을 취하고 덕(德)은 보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잠깐 보고 나서 어찌 곧바로 그 덕을 알 수 있겠는가. 이미 그 덕을 곧바로 알 수 없다면 또한 용모로써 뽑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땅히 처녀의 집을 돌면서 좋다고 생각되는 자를 미리 뽑아서, 다시 창덕궁에 모아 놓고 뽑는 것이 좋겠다.”
하니, 모두가 좋다고 하였다.
○ 11년 11월 11일(계축)
예조가 아뢰기를,
“건의하는 자가 말하기를, ‘이보다 앞서 경외(京外)의 제향(祭享)에 영험한 곳을 혁파하여 제사하지 않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원컨대, 이제부터 산천의 기암(奇巖)과 용혈(龍穴)과 사사(社寺) 등 영험한 곳에 제실(祭室)과 위판(位版)을 설치하고, 4중월(仲月)의 길일(吉日)마다 사자(使者)를 보내어 행례(行禮)하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하니, 이를 논의하라고 명하였다. 변계량이 아뢰기를,
“이는 대개 《서경(書經)》 낙고(洛誥)의 ‘사전(祀典)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곳에도 모두 질서 있게 제사를 드린다.’는 주공(周公)의 뜻을 본받은 것이니, 진실로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폐할 수 없는 곳만을 가려서 제사를 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헌의한 대로 따르라고 명하였다.
○ 12년 1월 12일(계축)
우의정 맹사성, 예조 판서 신상, 지신사 허성(許誠) 등이 회계(回啓)하기를,
“사신이 모의(毛衣)와 석자(席子)를 간절히 요구하기에, 성지(聖旨)가 계시므로 들어주기가 어렵다고 대답하였더니, 사신이 노하여 접견도 해 주지 않았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변계량의 말은 ‘권도(權道)를 따라서 일단 주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는데,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맹사성이 아뢰기를,
“날씨가 몹시 차니, 모구(毛具)를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으나, 신상과 허성이 모두 옳지 않다고 하였으므로 그만두었다.
○ 12년 4월 17일(정해)
판우군부사 변계량이 병으로 사직을 청하니 그대로 들어주고, 인하여 전지(傳旨)하기를, “경이 중한 책임을 받았는데 병으로 일을 보지 못하는 까닭에 직무를 사면하고자 한다. 내가 어찌 경을 인원수만 갖추는 것으로 여겨 사직을 윤허하겠는가. 경은 안심하고 병을 조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 12년 4월 23일(계사)
판우군부사 변계량이 졸하였다. 계량의 자는 거경(巨卿)이요, 호는 춘정(春亭)이니, 밀양부(密陽府) 사람 변옥란(卞玉蘭)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4세에 고시(古詩)의 대구(對句)를 외웠고 6세에 비로소 글을 지었다. 14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5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17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전교서 주부(典校署主簿)에 보직(補職)되었고, 사헌부 시사(司憲府侍史)에 여러 번 옮겨졌다. 성균관 악정(成均館樂正)을 거쳐 직예문관(直藝文館), 사재감 소감(司宰監少監), 겸 예문관 응교(兼藝文館應敎),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지냈다.
정해년(1407, 태종 7) 중시(重試)에서 을과(乙科)의 제1등으로 뽑혀서 특별히 예조 우참의에 임명되고, 기축년에 예문관 제학에 승진하였다. 을미년에 크게 가물어서 상이 매우 근심하니, 변계량이 아뢰기를, “본국에서 하늘에 제사하는 것은 비록 예(禮)가 아니라고 말할 것이나, 일이 이미 절박하오니 원단(圓壇)에 기도하소서.” 하니, 곧 변계량에게 글을 지어 제사 지내라고 명하였다.
정유년(1417, 태종 17)에 예문관 대제학에 임명되고 이듬해에 예조 판서로 옮겨졌다가 이내의정부 참찬으로 옮져졌다. 그 다음 해에 왜놈들이 우리나라 남쪽 변경을 침략하여 죽이고 약탈한 일이 많았는데, 태종 대왕이 변계량의 말을 취하여 정벌(征伐)하는 데 대해 의논하게 하였다.
병오년에 판우군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가 되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죽으니, 나이 62세였다. 부고를 듣자 사흘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유사(攸司)에게 명하여 치제(致祭)하고 부의와 관(棺)을 보내게 하였으며, 동궁도 쌀과 콩 30석을 부의로 보냈다. 시호를 문숙(文肅)이라 하니, 배우기에 부지런하고 묻기를 좋아함이 문(文)이요, 마음을 굳게 잡고 일을 결단함이 숙(肅)이다.
변계량이 거의 20년 동안이나 문형(文衡)을 맡아서 명 나라를 섬기고 이웃 나라를 교제하는 사명(詞命)이 대부분 그의 손에서 나왔고, 시험을 주관하여 선비를 뽑는 데 한결같이 지극히 공정하게 하여, 전조(前朝)의 함부로 부정(不正)하게 하던 습관을 다 고쳤으며, 일을 의논하고 의문을 해결하는 데에 이따금 다른 사람의 상상 밖에서 나오는 일이 있었다.
처음에 철원 부사 권총(權總)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또 오씨(吳氏)에게 장가들었는데 죽었다. 또 도총제사 박언충(朴彦忠)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첩의 아들은 이름이 영수(英壽)이다.
○ 12년 4월 27일(병신)
좌의정 황희, 우의정 맹사성에게 명하여 《태종실록(太宗實錄)》을 감수하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변계량이 실록 수찬하는 일을 전임으로 총괄하였는데, 평소에 병이 많아 일찍 마치지 못하니, 그가 사는 집이 흥덕사(興德寺) 곁에 있었으므로 사고(史庫)를 흥덕사로 옮겼다. 이때에 이르러 변계량이 죽자, 황희 등에게 감수하기를 명하고 드디어 사고를 의정부로 옮겼다.
○ 12월 5월 18일(정사)
상이 검토관(檢討官) 권채(權採)에게 이르기를,
“변계량이 일찍이 태종께 헌의하기를, ‘청컨대, 집현전 관원들 중에서 슬기롭고 민첩한 1, 2인을 골라서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의 《집석(輯釋)》과 《혹문(或問)》을 연구하게 하소서. 그 중의 한 사람으로는 권채가 적당합니다.’ 하였는데, 태종께서는 두 책만을 오래 읽으면 필경 다른 글은 공부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따르지 않으셨다. 내가 즉위하였을 때에도 또한 그대들로 하여금 독서하게 하기를 청하였는데, 나 역시 양쪽 다 잃게 될까 염려하였다. 그러나 변계량은 학문에 정통하였으니 어찌 소견이 없겠는가. 이에 그 의논을 윤허하였던 것이다. 그대들은 글을 읽은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중용》과 《대학》을 익히 읽었는가? 변계량이 또 아뢰기를, ‘권채 등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에 말하는 것을 들으니 자못 예전과는 달랐습니다.’ 하였다.”
하니, 권채가 대답하기를,
“《중용》과 《대학》은 변계량의 말에 따라 읽은 지 3년이 되었고, 지난해 봄부터 비로소 《논어》, 《맹자》, 오경(五經)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신은 본시 성품이 민첩하지 못하여 정밀하게 익히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 12년 6월 15일(갑신)
판부사 변계량에게 사제(賜祭)하였는데, 그 교서에 운운하였다. - 앞에 보인다.
○ 12년 6월 16일(을유)
왕세자가 관원(官員)을 보내어 이사(貳師) 변계량에게 치제(致祭)하였는데, 운운하였다. - 앞에 보인다.
○ 12년 11월 23일(경신)
상이 이르기를,
“이숭인(李崇仁)의 재주에 대해 권근(權近)과 변계량이 모두 지나치게 칭찬하였다. 맨 처음 《고려사》를 편찬할 때 권근이 이숭인을 변호한 글을 삭제하였는데, 권근과 변계량이 이를 편찬할 때 다시 써넣었으나, 그 사실은 실정보다 지나쳤다. 이 역사는 역시 완성되지 못한 책이니, 만일 이것을 고쳐서 바로잡을 때에는 그것을 없애야 될 것이다. 권근이 《도은집(陶隱集)》의 서문을 지었는데 그를 칭찬하였고 또 벼슬을 추증(追贈)한 뜻을 썼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변계량이 권근에게 묻기를, ‘어째서 추증하지도 않은 일을 썼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지금 추증했다고 쓰면 뒤에 반드시 추증될 것이다.’ 하였다 하니, 이것은 큰 실언이다. 변계량도 이숭인을 가리켜 ‘어질다’고 하였으되, 태종께서 보시고 ‘이것은 지나치게 칭찬한 말이다.’ 하셨다.”
하였다.
○ 16년 1월 15일(계사)
상이 이르기를,
“어제 사간원이 상소하기를, ‘금년은 각도가 모두 흉년이 들었으니, 외방의 시위패(侍衛牌)는 번(番)에 오르지 말게 하소서.’ 하니, 그 뜻이 훌륭하다. 그러나 나는 이를 옳지 않게 여긴다. 그것은 군사(軍士)란 국가가 소중히 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에 변계량이 나에게 아뢰기를, ‘군사란 연습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항상 시위하도록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만일 번에 오르는 것을 해제하자고 청하는 자가 있더라도 이를 들어주지 말고 도리어 죄책을 가하소서.’ 하였다. 나는 그 당시 그 말이 잘못되었다고 여겼는데 지금 다시 생각하니, 과연 견해가 있는 말이었다.”
하였다.

해동야언 1
세종(世宗)


○ 세종은 천성이 학문을 좋아하여 그가 세자로 있을 때에 매번 글을 읽을 때면 반드시 1백 번을 채우고, 좌전(左傳)과 초사(楚辭) 같은 것도 또 1백 번을 더 읽었다. 일찍이 병이 들었을 때에도 글 읽기를 멈춘 적이 없었다. 병이 점점 심해지자 태종은 내시를 시켜 그 처소에 가서 책을 모조리 거두어 가지고 오게 하였다. 구소수간(歐蘇手簡) 한 권만이 병풍 사이에 남아 있었는데, 세종은 그것을 천백번이나 읽었다. 왕위에 오르자 날마다 경연(經筵)을 열어 안 읽은 책이 없었고, 학문에 빛나는 공덕을 이룸이 백왕(百王) 중에서 가장 뛰어났었다. 일찍이 근신(近臣)에게 이르기를, “글 읽는 것이 유익하지만, 글씨를 쓴다든지 글을 짓는 것 같은 것은 임금으로서 유의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만년에는 정사를 돌보는 일에 지쳐 조회(朝會)는 보지 않았으나, 문학에 관한 일에 더욱 생각을 두어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국(局)을 나누어 설치하게 하고, 차례로 여러 가지 책을 편찬하게 하였다. 《고려사(高麗史)》ㆍ《치평요람(治平要覽)》ㆍ《병요(兵要)》ㆍ《언문(諺文)》ㆍ《운서(韻書)》ㆍ《오례의(五禮儀)》ㆍ《사서오경음해(四書五經音解)》등이 동시에 편찬되었는데, 모두 임금의 재결(裁決)을 거쳐 이루어진 책으로서, 하룻 동안에 열람한 것이 수십 권이나 되었으니, 참으로 하늘이 운행함과 같이 쉬지 않았다고 할 만하다. 《필원잡기》
○ 세종이 언문청(諺文廳)을 설치하고 신 고령(申高靈 신숙주)ㆍ성삼문(成三問) 등에 명하여 언문을 지었는데, 초종성(初終聲)이 여덟 자, 초성(初聲)이 여덟 자, 중성(中聲)이 열한 자로서 그 자체(字體)는 범자(梵字 인도글자)를 본떠서 만들었다. 우리나라와 다른 여러 나라의 말소리에 대해서 한자(漢字)로는 적을 수 없는 것까지 다 통하여 막힘이 없었으며, 《홍무정운(洪武正韻) 의 모든 글자도 언문으로 다 썼다. 드디어 5음(音)으로 나누어 구별하였는데, 아음(牙音)ㆍ설음(舌音)ㆍ순음(脣音)ㆍ치음(齒音)ㆍ후음(喉音)이다. 순음에는 가법고 무거운 차이가 있고, 설음에는 정(正)과 반(反)의 구별이 있으며, 글자에는 또한 전청(全淸)ㆍ차청(次淸)ㆍ전탁(全濁)ㆍ불청불탁(不淸不濁)의 차이가 있어, 아무리 무식한 여인이라도 똑똑히 깨치지 못하는 이가 없었으니, 성인께서 사물을 만드신 지혜는 범인의 힘으로서는 따를 수 없는 데가 있다. 《용재총화》
○ 세종이 처음으로 아악(雅樂)을 제정하였는데, 중추부사 박연(朴堧)이 도와 이루어진 것이다. 박연은 앉아서나 누워서나 항상 손을 가슴에 얹어 악기를 다루는 시늉을 하고, 입으로는 휘파람을 불어 율려(律呂)의 성조를 만들었다. 이렇게 하여 10여 년 만에 비로소 이룩하였는데, 세종이 매우 중히 여겼다.
세종은 또 자격루(自擊漏 시계의 한 가지)ㆍ간의대(簡儀臺 천문대)ㆍ흠경각(欽敬閣 물시계를 두었던 집)ㆍ앙부일구(仰釜日咎 해시계) 등을 만들었는데 제작이 매우 정교하고 치밀하였으며, 그것은 모두 임금의 재량에서 나온 것이다. 비록 기술자들이 많이 있었지만 임금의 뜻을 제대로 헤아리는 자는 없었으며, 오직 호군(護軍) 장영실(蔣英實)이 임금의 지혜를 받들어 남다른 재주와 솜씨를 운용하여 임금의 뜻과 들어맞지 않음이 없으니 상이 그를 매우 중히 여겼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박연과 장영실은 모두 우리 세종의 제작을 왕성하게 하기 위하여 때에 맞추어 태어난 인재들이다.” 하였다. 《필원잡기》. 아래의 대목도 마찬가지이다.
○ 세종이 일찍이 사마온공(司馬溫公)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뜻을 두었는데, 그 주석이 미진하고 구두가 분명하지 않음을 염려하여,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널리 여러 서적에서 채집하여, 사건마다 주를 달아 보기에 편리하게 하였다. 이에 호삼성(胡三省)의 《음주(音註)》와 《원위석문집람(源委釋文集覽)》등의 서적에 의거하여 간추려 문장을 다듬었고, 부족한 곳이 있으면 또 다른 책에서 추려다가 보충하였다. 또 문자의 뜻이 난해한 곳이 있으면 본사(本史)의 전구(全句)를 주석하되, 글귀 밑에 쓰기도 하여 구두(句讀)에 편리하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글자의 풀이와 음의 옮김에 있어 자세히 갖추지 않음이 없었으니, 이는 모두 임금의 재결을 얻은 것이다. 이름을 《사정전훈의(思政殿訓義)》라 하였고, 《강목통감(綱目通鑑)》도 마찬가지인데, 그 훈의(訓義)의 정밀함은 비할 데가 없다.
○ 세종 기해년 5월에 충청도 관찰사가 보고하기를, “왜적이 비인현(庇仁縣) 도두곶(都豆串)에 침입하였는데, 만호(萬戶) 김성길(金城吉)이 술에 취하여 막지 못하게 되자 스스로 물에 뛰어들었고, 그의 아들이 힘껏 싸우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 하였다. 정사년에 황해도 관찰사는 보고하기를, “절도사(節度使) 이사검(李思儉) 등이 해주(海州) 연평곶(延平串)에서 적정(敵情)을 살피다가 적에게 포위되었는데, 적이 말하기를, ‘우리는 조선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 중국으로 가려다가 식량이 떨어져 여기에 왔으므로 식량을 주면 물러가겠다.’ 하기에, 이사검이 쌀 5섬과 술 10병을 주었다. 〈그래도 물러가지 않았으므로〉 또 쌀 40섬을 보내 주었더니, 비로소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하였다.
두 임금(상왕과 주상)이 유정현(柳廷顯)ㆍ박산언(朴山言)ㆍ조말생(趙末生)ㆍ이명덕(李明德)ㆍ허조(許稠) 등을 불러, 그들이 비어 있는 틈을 타서 대마도(對馬島)를 섬멸할 계책을 의논하였다. 모두들, 빈틈을 타서 치는 것은 불가하고 적이 돌아가는 것을 기다려서 쳐야 한다고 하였으나, 조말생만은 홀로 빈틈을 타서 치는 것이 좋다고 말하였다. 상왕이 이르기를, “만일 그들을 소탕하지 않으면 항상 침략을 당할 것이니, 옛날 한 나라 고조가 흉노(匈奴)에게 욕을 본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빈틈을 타서치고 그 처자들을 잡아 가지고 제주(濟州)로 군사를 돌려, 적이 돌아가기를 기다렸다가 요격하여 그 배를 빼앗아 불사르고, 장사하러 온 자들과 배에 남아 있는 자들을 아울러 구속하되, 명령을 거역하는 자가 있을 때에는 모두 무찔러, 나라 안의 왜인으로 하여금 경솔히 움직이지 못하게 하라.” 하고, 또 이르기를, “약함을 보여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뒷날의 걱정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하고, 곧 장천군(長川君) 이종무(李從茂)를 삼도도체찰사(三道都體察使)로 삼아 중군(中軍)을 거느리게 하고, 우박(禹搏)ㆍ이숙묘(李叔畝)ㆍ황상(黃象)을 중군절제사(中軍節制使)로 삼고, 유온(柳溫)을 좌군도절제사(左軍都節制使)로, 박초(朴礎)ㆍ박실(朴實)을 좌군절제사(左軍節制使)로, 이지실(李之實)을 우군도절제사(右軍都節制使)로, 김을화(金乙和)ㆍ이순몽(李順夢)을 우군절제사(右軍節制使)로 삼아, 경상ㆍ전라ㆍ충청 3도의 병선 2백 척과, 하번 갑사패(下番甲士牌)와 별시위패(別侍偉牌) 및 수성군(守城軍)ㆍ영속(營屬)ㆍ재인(才人)ㆍ무자리[水尺]ㆍ한량(閒良)ㆍ민간인[民]ㆍ향리(鄕吏)ㆍ일수(日守)ㆍ양반(兩班) 중에서, 배를 탈 줄 아는 군정(軍丁)들을 거느리고 왜구(倭寇)가 돌아가는 길을 맞아서 치되, 6월 초8일에 각도의 병선(兵船)이 함께 견내량(見乃梁)에 모여 대기하기로 약속하고, 또 호조 참의(戶曹參議) 조치(曺致)를 황해 체복사(黃海體復使)로 삼아, 여러 장수들 중에서 일에 늑장을 부리거나 시기를 놓친 자를 사찰하게 하였다. 상왕은 영의정 유정현(柳廷顯)을 삼도도통사(三道都統使)로 삼고, 참찬(參贊) 최윤덕(崔潤德)을 삼군절제사(三軍節制使)로, 사인(舍人) 오선경(吳先敬)과 군자정(軍資正) 곽재안(郭在鞍)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았다.
이 달 기사 일에 떠날 때 두 임금이 한강정(漢江亭) 북쪽에 납시어 전송하고, 안장ㆍ말ㆍ활ㆍ살ㆍ옷ㆍ갓ㆍ신 등을 내려 주었다. 경인 일에 이종무가 아홉 명의 절제사를 거느리고, 거제(巨濟) 마산포(馬山浦)에서 떠났다가, 바다 가운데서 바람을 만나 돌아와 거제에 정박하였는데, 배가 모두 2백 27척이요, 군졸은 모두 1만 7천 2백 85명으로, 65일 동안 먹은 식량을 가지고 갔다. 계사일 오시(午時)에 10여 척이 먼저 대마도에 이르니, 적이 바라보고 본도(本島 대마도) 사람이 이익을 얻어 가지고 돌아온다 하여 술과 고기를 준비하고 기다렸다. 대군이 잇따라 와서 두지포(豆知浦)에 이르니, 적은 넋을 잃고 도망쳐 버리고, 다만 50여 명만이 맞아 싸우다가 패하여, 식량과 물자를 버리고 달아나 요새로 들어가 내려오지 않았다. 적에게 먼저 귀화(歸化)한 왜인 지문(池文)을 보내어, 글로써 도도웅와(都都熊瓦)를 회유하였으나 회답이 없었다. 우리 군사가 길을 나누어 수색하여, 크고 작은 적의 배 1백 29척을 빼앗아, 그 중에서 쓸 만한 것 20척을 고르고 나머지는 불살랐다. 또 적의 집 1천 9백 39채를 불사르고, 목을 자른 것이 1백 40명, 사로잡은 것이 21명이었으며, 밭에 있는 곡식을 베고, 그들에게 잡힌 중국인 남녀 1백 31명을 포획했다. 여러 장수들이 포획한 중국인에게 물어서, 섬 안에 기근이 심하고 경황이 없는 때라 아무리 부자라 해도 한두 말의 쌀만 가지고 달아난 형편을 알았으므로, 오랫동안 포위하면 반드시 굶어 죽을 것이라 생각하여, 목책(木柵)을 훈내곶(訓乃串)에 설치하여 오가는 길목을 막고, 오랫동안 머무를 뜻을 보였다. 유정현이 종사관 조의구(趙義昫)를 서울로 보내어 대마도에서 싸움에 이겼음을 알리니, 삼품(三品) 이상의 관원이 수강궁(壽康宮)에 나아가 축하하였다. 이 종무 등이 두지포에 정박해 있으면서 날마다 편장(偏將)을 풀어서 뭍에 내려가 적을 수색하고, 다시 적의 집 68채와 배 15척을 불사르고, 목을 벤 것이 9명이고, 중국인 남녀 15명과 우리나라 사람 8명을 포획했다. 적은 밤낮으로 우리에게 항거할 생각을 하고 있으므로, 기해 일에 이종무는 이로군(尼老郡)에 이르러 삼군으로 하여금 길을 나누어 뭍에 내리게 하여 그들과 일전을 벌이려고 좌우 군을 감독하였다. 먼저 내려간 좌군절제사(左軍節制使) 박실(朴實)이 적과 서로 만났는데, 적은 험한 곳에 의거하여 복병(伏兵)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박실이 군사를 거느리고 높은 데 올라가서 싸우려 했으나, 복병에게 공격을 받고 우리 군사가 패하여 편장 박홍신(朴弘信)ㆍ박무양(朴茂陽)ㆍ김언(金諺)ㆍ김희(金喜) 등이 전사하였다. 이에 박실이 군사를 거두어 돌아와 배에 오르자, 적이 추격하여 우리 군사가 전사하고 벼랑에서 떨어져 죽은 자가 백 수십 명이나 되었다. 우군절제사 이순몽(李順蒙)과 병마사 김효성(金孝誠) 등도 적을 만나 힘껏 싸워 막아내자 적이 마침내 물러갔다. 중군(中軍)은 끝내 뭍에 내리지 않았다. 도도웅와는 우리 군사가 오래 머무를까 두려워 글월을 보내어 군사를 물리고 수호할 것을 요구하고, 또 말하기를, “7월 사이에는 항상 큰 바람이 일어나니, 대군이 오래 머물러 있음은 좋지 않소.” 하였다.
가을 7월 병오 일에 이종무 등이 수군을 이끌고 거제로 돌아와 머물렀다. 경술일에 이종무를 찬성(贊成)으로 삼고, 이순몽을 좌군총제(左軍摠制)에, 박양(朴陽)을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에 올리고, 여러 절제사도 모두 승진시켰다. 7월에 동정원수(東征元帥) 장천군(長川君 이종무)이 군사를 이끌고 돌아오는 길에, 밀양부(密陽府)지동(池洞) 앞길을 지나는데, 박실(朴實)의 부인이 방에 있다가 울타리 너머로 울면서 계집종들을 시켜 길가에 나가서 발을 돋우고 서서, “내 남편은 어디에 있는가.” 하고 묻게 하였다. 장천군이 말고삐를 어루만지며 길게 탄식하고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지나가며 말하기를, “그것은 나의 죄가 아니요, 여러 장수들이 가벼이 나아간 탓이오. 원하건대 낭자는 나를 허물하지 마시오.” 하였다. 길가는 사람과 이웃 사람들이 모두 이 때문에 눈물을 뿌렸다. 김종직(金宗直)의 《이존록(彝尊錄)》
○ 14년 겨울 10월에, 평안도 관찰사 박규(朴葵)가 말을 달려 장계(狀啓)를 올리기를, “야인(野人) 4백여 기(騎)가 여연(閭延)에 갑자기 침입하여 인민을 노략질하므로, 강계절도사(江界節度使) 박초(朴礎)가 군사를 거느리고 추격하여 잡혀 갔던 26명, 말 30마리와 소 50마리를 다시 빼앗았는데 전사자는 13명입니다. 마침 날이 저물어 끝까지 추격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노하여 곧 상호군(上護軍) 홍사석(洪師錫)을 보내어 정세를 살피게 하고, 전사한 장수와 병사에게 쌀과 콩을 내려 주었다. 이난(李爛)의 《유편서정록(類編西征錄)》. 아래 대목도 같다.
○ 박규(朴葵)가 또 장계를 올리기를, “여연(閭延)과 강계(江界)의 백성으로 포로 된 자가 75명이요, 전사자가 48명입니다.” 하였다. 상이 영의정 황희(黃喜), 좌의정 맹사성(孟思誠), 우의정 권진(權軫), 이조 판서 허조(許稠), 호조 판서 안순(安純)을 불러 이르기를, “포로로 잡혀 간 민가가 비록 죽음은 면하였으나, 유리(流離)되어 생업을 잃었으니 내 매우 걱정이 된다.” 하고, 그들을 구호할 계책을 의논하니, 황희 등이 조세와 부역을 30년 동안 탕감하고, 부모가 없는 아이들에게는 관에서 옷과 식량을 주며, 친척으로 하여금 보호하여 기르게 하되, 만일 친척이 없을 경우에는 살림살이가 넉넉한 이웃 사람으로 하여금 구휼하게 함이 마땅하다고 하여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건주위 지휘(建州衛指揮) 이만주(李滿住)의 관하 올량합(兀良哈)과 천호(千戶) 열아합(列兒哈) 두 사람이 문첩(文牒)을 가지고 포로 된 남녀 7명을 거느리고 여연에 와서 말하기를, “이만주가 성상의 뜻을 받들어 토표(土豹 스라소니)를 잡았는데, 홀라온 올적합(忽剌溫兀狄哈) 등 1백여 기가 비어 있는 틈을 타서 여연과 강계에 들어와 남녀 64명을 사로잡아 가지고 돌아가는 것을 이만주가 군사 5백여 명을 거느리고 산골짜기의 요로를 막아, 모두 빼앗아 보호하고 있으니, 사람을 보내어 데려가기 바랍니다.” 하였다. 상이 정부(政府) 육조(六曹) 및 삼군(三軍)의 도진무(都鎭撫)를 불러 그 처치 방법을 의논하니, 황희(黃喜)ㆍ허조(許稠)ㆍ안순(安純)과 판중추부사 하경복(河敬復), 찬성(贊成) 이맹균(李孟畇)ㆍ성억(成抑), 공조 판서 조계생(趙啓生), 호조 좌참판(戶曹左參判) 김익정(金益精), 공조 좌참판(工曹左參判) 정연(鄭淵), 예조 우참판(禮曹右參判) 유맹문(柳孟聞) 등이 강계 등지에 통사(通事)를 보내어 데리고 와야 한다고 하였다.
○ 15년 봄 정월에 이만주가, 포로가 되어 갔던 남녀ㆍ어른ㆍ아이 등 64명을 송환하면서 강계에 이르러 아뢰기를, “선덕(宣德) 7년(1427년) 12월 29일에 난독 지휘(㬉禿指揮) 타납노(咤納奴)가 사람을 보내어 와서 보고하기를, ‘홀라온이 1백 50여 인마(人馬)를 거느리고 난독 땅을 약탈하며 지나간다.’고 하기에, 내가 이 말을 듣고 본위(本衛)의 인마 3백여 명을 거느리고 별빛이 밝은 밤에 전진하다가, 천사(天使) 장도독(張都督)과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를 만나 함께 수정산(守定山) 입구까지 뒤쫓아 포위하여 머물러 길을 막아서 포로를 다시 빼앗았습니다. 관리를 시켜 송환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 홍사석(洪師錫)이 여연(閭延)으로부터 돌아와 아뢰기를, “여연 절제사 김경(金敬)과 강계 절제사 박초(朴礎)는, 적의 침범을 막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목책(木柵)이 헐었어도 수리하지 않아서 적으로 하여금 틈을 타서 죽이고 노략질하게 만들었으며, 도절제사 문귀(文貴)도 규찰을 행하지 아니하였으니, 청컨대 해당 관청에 회부하여 죄를 다스리소서.” 하고, 의금부(義禁府)에서도 아뢰기를, “도관찰사(都觀察使) 박규(朴葵)와 경력(經歷) 최효손(崔孝孫)이 국경 순찰을 게을리 하여, 성(城)과 보루(堡疊)를 완전히 수리하지 못하여 적의 침입을 불러들였으니 모두 잡아서 문초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이를 따랐다. 의금부 제조 등에게 교지를 내리기를, “박초ㆍ김경 및 백호(百戶)ㆍ천호(千戶)ㆍ진무(鎭撫)의 우두머리 등은, 우리 백성이 죽고 잡혀 가는 것을 보고도 나아가 싸우지 않았으니 그 죄는 크다. 마땅히 법에 따라 처리해야겠지만, 그간에 혹 길이 험준한 탓으로 때맞추어 가서 구원하지 못했거나, 혹은 힘으로 겨룰 수가 없어 할 수 없이 후퇴할 경우는 사정상 용서하지 않을 수 없으니 거론하지 말라. 경들은 죄과를 살피되 정리(情理)에 맞추어 경중(輕重)의 알맞음을 잃지 않도록 하라.” 하니, 대답하기를, “박초와 김경의 죄는 마땅히 중형에 처해야 하고, 천호(千戶) 정유(丁宥)와 진무(鎭撫) 김영화(金永禾)ㆍ김봉천(金鳳天)의 죄도 박초와 김경과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는 경들의 의논에 따르겠다.” 하여, 드디어 문귀(文貴)는 울산으로 귀양 보내어 군(軍)에 충당하고, 박규(朴葵)는 함열(咸悅)로 귀양 보냈다.
○ 최윤덕(崔潤德)을 평안도 도절제사로 삼고, 김효성(金孝誠)을 도진무(都鎭撫)로, 최치운(崔致雲)을 경력(經歷)으로, 이숙치(李叔畤)를 평안도 관찰사로 삼았다. 윤덕ㆍ효성ㆍ치운 등이 하직할 때, 상이 불러들여 보고 이르기를, “오랑캐를 제어하는 방법은 예로부터 별 묘책이 없으므로, 삼대(三代)의 제왕들도 그들이 오면 어루만져 주고, 가면 추격하지 않아 그저 회유책을 쓸 뿐이었다. 문헌(文獻)이 없어 자세한 것을 알 수는 없으나, 한(漢) 나라 이래로 역사에 상고할 만한 것이 있다. 한 고조(漢高祖)가 천하를 평정하였으니, 흉노(匈奴) 따위는 마치 마른 가지를 꺾듯 할 것 같지만, 백등(白登)에서 포위를 당하여 겨우 몸만을 구하여 화친을 논의하였고, 여태후(呂太后) 역시 여주(女主)로서 영특하였는데도, 묵특(冒頓) 의 글이 비록 매우 무례하였으나, 도외시하고 화친하였을 뿐이요, 무제(武帝)에 이르러서는 사방의 오랑캐에게 일을 많이 벌여, 드디어 천하를 헛되이 소모하였다. 이러므로 옛 사람은 오랑캐를 모기에 비유하여 그저 몰아냈을 따름이었다. 옛 사람이 이렇게 한 까닭은, 나라는 크거나 작거나 간에 벌도 쏘면 독이 있듯이, 피차간에 죄 없는 백성들에게 차마 전쟁의 폐해를 입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저강(婆豬江)의 도적은 이와 달라서, 임인 년에 우리 여연(閭延)에 침입하였다가, 그 뒤에 홀라온(忽剌溫)에게 쫓기어 저들의 소굴을 잃고, 가솔들을 이끌고 강가에서 살기를 빌기에, 나라에서 그들을 가엾게 여겨 허가하여 주었으니, 그 은혜가 크다 하겠는데, 이제 배은망덕하게도 변방의 백성을 죽이고 노략질하니, 극악무도한 그 죄는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만일 토벌하지 않는다면 그들을 징계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더구나, 지금은 나라가 태평한 지 오래되어 사방 변방에 걱정거리가 없으니, 맹자가 말하기를, ‘적국(敵國)이 침노하는 외환(外患)이 없으면 나라가 망하기 일쑤다.’ 하였으니, 오늘의 일은 비록 야인이 한 짓이기는 하나, 실은 하늘이 우리를 경계하는 것이다. 이제 이만주(李滿住)ㆍ동맹가(董猛哥)ㆍ윤내관(尹內官)의 글에 모두 홀라온이 한 짓이라고 하였으나, 지난번에 임합라(林哈剌)가 여연(閭延)에 와서 말하기를, ‘도망친 우리의 종들을 돌려보내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이다.’ 하였으니 이제 과연 그의 말대로 되었다. 비록 홀라온이 한 짓이라고 하지마는, 실상은 이들의 무리가 꾀어서 한 것이리라. 옛날 경원(慶源)에서 한흥부(韓興富)가 야인에게 죽을 때에, 하륜(河崙)은 쳐서는 안 된다고 하였고, 조영무(趙英茂)는 쳐야 한다고 하였는데, 태종이 영무의 계책에 따라 토벌하였고, 기해년에 대마도(對馬島)를 칠 때에, 어떤 이는 치는 것이 옳다 하고, 또 어떤 이는 옳지 않다 하였으나, 태종이 대의(大義)로써 결단하고 장수에게 명하여 토벌하게 하였으니, 비록 그 소굴을 소탕하지는 못했으나, 그 적들이 결국 우리의 위엄에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최치운이 오랫동안 나를 가까이 모시고 있었으니, 경은 막중(幕中)에서 그와 더불어 고사를 논하라.” 하고, 최윤덕에게 안장과 말 및 활과 화살을 하사하고, 김효성에게는 말을 하사하였다.
○ 여연의 사변이 있은 뒤로부터 상이 변방 일에 유의하여, 자주 무사(武士)를 모아서 후원(後園)에서 활쏘기를 구경하였다. 상이 장차 야인(野人)을 칠 생각으로, 대신들의 뜻을 떠보려고 은밀히 정부에 명을 내려, 육조 참판 이상의 관원과 삼군 도진무(三軍都鎭撫) 등으로 하여금, 각각 야인 토벌에 대한 방략을 진술하게 하였으나 의논이 일치하지 않았다. 지신사(知申事) 안숭검(安崇儉)에게 결정된 토벌 계획을 밀봉하여 새나가지 않게 하고,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삼군을 거느릴 만한 장수를 의논하게 하니, 모두들 아뢰기를, “최윤덕이 중군을 거느리고 이순몽(李順蒙)이 좌군, 최해산(崔海山)이 우군을 거느리게 하소서.” 하니, 이순몽이 아뢰기를, “군사의 진퇴는 오로지 중군에 달려 있는데, 신이 좌군을 거느리면 어찌 공을 세울 수 있겠습니까. 바라옵건대 최윤덕을 주장(主將)으로 삼고, 신을 부장(副將)으로, 해산을 좌장으로, 이각(李恪)을 우장으로 삼아, 선봉의 정예(精銳) 5,6백 기를 거느리고, 먼저 적의 땅으로 들어가 형세가 칠 만하면 치고, 불가하면 물러나서 후군을 기다리도록 하소서.” 하였더니, 맹사성(孟思誠)도 그대로 말하자 임금도 그 말에 따랐다. 드디어 최해산에게 명하여 먼저 가서 압록강에 부교(浮橋)를 놓게 하였다. 사목(事目 공사에 대한 규칙)을 들어 윤덕에게 유시를 내렸는데, “그 하나는, 도절제사가 장계한 야인에 대한 공초(供招)를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고 되풀이하여 생각하니, 파저강(婆豬江)의 침입은 홀라온을 사칭한 것이라는 것은 정상이 드러나고 명백한 일이니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가 서로 바라다 보이는 곳에 살면서, 지난날의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간사한 마음을 품고 악독한 짓을 마음대로 행하여, 변방 백성을 죽이고는 도리어 홀라온이 한 짓이라고 핑계하여 후환을 모면하려 하는 것은, 위로는 중국을 속이고, 아래로는 우리나라를 속이는 것이다. 그 죄악이 이르지 않은 곳이 없으니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 의논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 침입이 홀라온이 한 짓이라는 말이 황제에게 들리면, 파저강 야인을 지목하지 않고서 그들을 칠 수 있다고 하나, 내가 생각하기에 황제는 한결같이 인(仁)한 자와 함께 하는데, 어찌 야인이 속이는 말을 믿고, 허물을 우리나라에 돌리겠는가. 혹시 따지게 되면 마땅히 사실대로 아뢰고, 또 태종 황제가 내린 성지(聖旨)를 인용하여 아뢰면 마침내 허락을 받을 것이다. 군사는 3천 명을 거느리고 가게 하되, 2천 5백 명은 평안도에서 내고, 5백 명은 황해도에서 내며, 기병과 보병의 수효는 상황에 따라 의논하여 결정하도록 하라.
또 하나는, 강물이 깊어서 군사가 건너기 어려울 때에, 만약 여울 위로 건널 만한 곳이 있으면 그렇게 하고,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두세 곳에 부교를 만들 것을 논의하라.
또 하나는, 강계(江界)와 여연(閭延) 등지의 강가에 무지한 백성들이 일찍이 농사를 짓기 위하여 그 땅에 몰래 들어간 것을 관리들도 몰라서 금지하지 못하였는데, 지금 대사를 당하여 중요한 정보가 새나가고 있으니 작은 일이 아니다. 관리에게 밀령을 내려 더욱 엄하게 검찰 하도록 하라.
또 하나는, 사람을 시켜 그 부락의 다소와 산천의 험하고 평탄함을 알아본 뒤에, 가서 칠 시기를 결정하라.
또 하나는, 부교를 만들되 민가의 장정을 징발하지 말고, 근처 각 관가의 배를 부리는 사람을 시켜 운반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순몽은 말하기를, “최해산이 먼저 강가에 이르러 백성을 시켜 벌목을 하게 하면, 서로 유언비어를 퍼뜨려 저들의 의심을 살 것이다.” 하였다. 황희(黃喜)ㆍ권진(權軫)ㆍ하경복(河敬復), 병조 판서 최사강(崔士康) 등은 말하기를, “얼음이 녹으면 반드시 저들이 모두 밭갈이에 힘쓸 것이니, 마땅히 이 해산으로 하여금 먼저 그곳에 가서 성책(城柵)을 순찰하는 중이라 둘러대고, 몰래 모든 일을 준비하여 뜻하지 아니한 때를 대비하면서 수군과 육군을 모아서 만들게 할 것이지, 굳이 다른 사람을 다시 보낼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 말을 따라 곧 최해산에게 유시하기를, “처음에는 경이 가서 부교(浮橋)를 만들도록 명을 내렸으나 이제 다시 생각해 보니, 무단히 벌목을 하면 인심이 동요되어 저들이 반드시 알게 될 것이다. 이제 경을 성책 순심사(城柵順審使)로 삼으니, 목책(木柵)을 신설할 터를 골라서 정한다고 둘러대고, 강가를 돌아보면서 심사숙고하여 군사가 오기를 기다려 급히 부교를 만들되, 만약 다리가 튼튼하고 치밀하지 않으면, 사람과 말이 함께 바지게 될 것이니 보통 일이 아니다.” 하였다. 상이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옛날의 임금 된 이는 큰일을 당하면 반드시 여러 사람에게 계책을 묻고 널리 여러 사람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러니 경들은 각기 방략을 말하여 보라.”하니, 조뇌(趙賚)ㆍ김익정(金益精)ㆍ권도(權蹈) 등이 아뢰기를, “사변을 예측할 수 없어 임시의 계략도 미리 세울 수 없으니, 임기응변으로 적을 제압하는 것은 장수에게 맡기고, 그 부장(副將) 이하는 그의 호령을 들어 어김이 없어야 합니다.” 하였다. 맹사성(孟思誠)ㆍ권진(權軫)ㆍ조계생(趙啓生)ㆍ정흠지(鄭欽之)가 아뢰기를, “정예를 골라 재갈을 물리고 급히 달려 길을 나누어서 나란히 쳐 나아가며, 그 부락을 습격하고 그들의 소굴을 소탕하는 것이 상책이요, 대군이 진을 치고 북을 치면서 전진하면, 저들이 장차 두려워하여 온 부락을 거두어 도망하기에 겨를이 없을 터이니, 어찌 감히 항거하겠습니까. 병정들의 무용(武勇)을 빛내어, 그들로 하여금 무서움을 알게 하면 감히 다시는 변방을 엿보지 못하게 될 것이니, 이것이 중책입니다.” 하였다. 황희ㆍ안순(安純)ㆍ허조(許稠)가 아뢰기를, “얼음이 얼기를 기다려 군사가 몰래 강을 건너가 뜻하지 아니한 때에 엄습을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농사철에 군사를 일으켜 다리를 만들어서 군사를 건너게 하면, 적이 먼저 알게 되어 복병이 갑자기 일어난다면 승패를 헤아리기 어렵고, 비가 와서 물이 차면 진퇴양난에 빠질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의 뜻은 이미 잘 알았다.” 하였다.
이전에 상이 박호문(朴好問)ㆍ박원무(朴原茂)를 이만주(李滿住)ㆍ심타납노(沈咤納奴)ㆍ임합라(林哈剌) 등이 있는 곳으로 보내어 적이 쳐들어올 때의 허실(虛實) 및 종류(種類)의 다소와, 산천의 험하고 평탄함과, 길의 멀고 가까운 것들을 정찰하게 하였는데, 이제 돌아와 복명하였다. 임금이 맞아들여 비밀히 야인의 소식을 물어보니, 박호문이 길의 구부러지고 곧음과, 산천의 험하고 평탄함과, 부락의 많고 적음 등을 두루 진술하고, 또 아뢰기를, “전에 야인 부락에 가서 정세를 보았을 때는 모두 집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었으나, 지금은 달래어 생업에 안정하게 하여 저들이 생각지 못한 때에 습격하려 합니다. 또한 대군이 강을 건너려면 그때는 강물이 몹시 빨라서 부교(浮橋)를 놓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호문의 아룀을 듣고 더욱 칠 결의를 하고, 정부 육조(六曹) 및 삼군 도진무(三軍都鎭撫)를 불러 박호문의 말을 가지고 의논하였더니, 이순몽(李順蒙)ㆍ정연(鄭淵)ㆍ박안신(朴安信)ㆍ황보인(皇甫仁)이 아뢰기를, “홀라온에게 포로로 잡혀 간 사람을 빼앗아 사람을 시켜 들려 보내 온 것은 그 뜻이 가상할 만하니, 술과 음식을 보내어 위로하기로 하고, 우선 우리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전과 같이 강을 건너 가 농사를 짓게 하되, 그 연장을 감추어 그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여, 형적을 나타내지 말게 하고 사태를 관망하게 하소서.” 하니, 정흠지(鄭欽之)가 아뢰기를, “이 계획이 그럴 듯합니다. 그러나 술과 음식을 보내면 도리어 의심을 사게 하여 무익할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맹사성과 조계생이 아뢰기를, “저 적들은 완악하고 교활하여 스스로 그 죄를 알고, 일찍이 집을 비우고 산으로 올라갔던 것입니다. 비록 여러모로 달랠 수는 있으나 속여서는 안 됩니다. 또 산골짜기에 흩어져 살면서 지금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고 있지만, 군사를 일으키어 한 모퉁이를 치게 되는 날이면, 나머지 무리들이 모두 다 알게 될 것이니, 어찌 그 부족을 다 멸할 수가 있겠습니까. 마땅히 몰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하루 사이에 길을 나누어 함께 나아가 초전에 공격하여 그 죄를 성토해야 합니다.” 하였다. 황희가 아뢰기를, “소득이 잃은 것을 보상하지 못하여 수고로움만 있고 아무 공로가 없다면 도리어 적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오니, 전날 말씀드린 계책대로 도절제사로 하여금 잡혀간 사람과 마소와 가재들을 가지고 돌아오게 하되, 만일 듣지 않으면 죄를 선언하고 토벌하여, 그들로 하여금 무서움을 알게 하는 동시에, 편안히 농사지을 수도 없이 멀리 도망치게 한다면, 명분도 서고 듣기에도 좋아 곧음이 우리에게 있을 것입니다. 만일 할 수 없다면 반드시 얼음이 얼기를 기다리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마땅히 4월에 풀이 자랄 때를 이용할 것이며 시기를 놓쳐서는 안 되리라.” 하였다. 황희 등이 아뢰기를, “물살이 빠른지 느린지와 배와 부교 중 어느 것이 편리한지의 여부를 알지 못하고서 함부로 추측하는 것은 실로 곤란한 일이니, 장수로 하여금 배나 부교 중에서 편의에 따라 만들게 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또 이르기를, “옛 사람이 싸움을 할 때에는 모두 간첩을 두어 그 정세를 살피게 하였다. 나도 몰래 사람을 보내어 저 사람들의 정상을 파악한 연후에 치려고 하노라.” 하니, 황희 등이 아뢰기를, “옛날에 간첩을 쓴 것은 같은 중국 사람으로서 옷이나 음식에 차이가 없고, 말소리도 서로 같아서 그 속에 섞여 있어도 알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야인은 말이나 옷, 음식 등이 전혀 다르고, 또 인구의 수가 많지 않아 그들과 섞이기가 어려울 것 같으니, 만약 잡힌다면 더욱 해가 될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 3월에 최윤덕(崔潤德)이 최치운(崔致雲)을 보내어 아뢰기를, “지금 내전(內傳)을 받자오니, 파저강(婆豬江)의 야인을 토벌하는 일에 군사 3천 명을 낸다고 하는데, 신(臣)이 가만히 생각건대, 적지는 험하여 지나가는 요새마다 반드시 병사를 머물게 하여 지켜야 할 것입니다. 신의 마음속에 품고 있는 계교로서는, 한 길은 만포(滿浦)로부터, 또 한 길은 벽동(碧潼)으로부터 함께 올라(兀剌) 등지로 향하고, 한 길은 감동(甘同)으로부터 마천목책(馬遷木柵) 등지로 향하여 동서(東西)에서 한꺼번에 일어나게 하고, 신은 소보리(小甫里)로부터 타납노(咤納奴)ㆍ임합라(林哈剌)가 있는 곳으로 향하려고 하는데, 군사가 만 명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맞아들여 만나보고 이르기를, “처음에 여러 신하들과 군사의 수효를 의논할 때, 어떤 이는 7,8백을 말하고 어떤 이는 1천이라고 하여 말이 많아 정하지를 못하다가, 결국 3천 명으로 정하였는데 나는 적다고 하였다. 박호문(朴好問)도 만 명 이하여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이제 올린 글을 보니 과연 그렇구나.” 하였다.
정부 육조(六曹) 및 삼군 도진무(三軍都鎭撫)를 불러 의논하니, 혹은 5백을 더하라 하고 혹은 1천을 더하라 하며, 혹은 더할 필요가 없다고 하여 의논이 일치하지 않았다. 최치운이 아뢰기를, “최윤덕이 말하기를, ‘처음 올 때에는 다만 타랍노와 합라 등만을 치려 했으므로, 정예군 1천 명만 얻으면 넉넉히 일을 처리할 것이라 생각했으나, 이제 다시 생각하니, 마천(馬遷)에서 올라(兀剌) 지방까지 야인이 산골짜기에 흩어져 살면서, 닭소리와 개 소리가 서로 들리는 터이므로, 만약 한두 부락을 치면 반드시 서로 구원할 것이니, 성패를 헤아릴 수가 없다. 옛 사람이 대군을 동원하였다가 몇 안 되는 적에게 패한 일이 있는데, 하물며 대군은 다시 일으키기가 힘 드는 것이니 한두 부락에 한 군(軍)씩 보내면, 저들이 장차 자신도 구할 겨를이 없어서 남을 구원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 명의 군사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옳다고 하였다.
최치운이 아뢰기를, “윤덕이 말하기를, ‘황해도의 병사가 먼 길을 달려오면 피로하여 쓸 수 없고, 평안도의 병사는 거의 3만이나 되니, 황해도의 병사를 출동시킬 필요는 없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옳다고 하고 묻기를, “최윤덕이 언제 군사를 일으키려 하더냐.” 하니, 최치운이 아뢰기를, “윤덕이 단오(端午) 때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도적들의 풍속에 그때에는 서로들 모여서 놀이를 하며, 풀도 자라 있을 것입니다. 다만 비가 와서 물이 질까 염려되어 24, 25일 동안을 기다려 군사를 일으키려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윤덕이 말하기를, ‘토벌하는 날 저들의 죄명을 써서 방을 붙이고 돌아와야 한다.’고 합니다.” 하였더니, 상이 안숭선(安崇善)과 판승문원사(判承文院事) 김청(金聽)에게 명하여 방문을 써 보내었다.
○ 병조(兵曹)가 아뢰기를, “스스로 모병(募兵)에 응하여 종군한 자로서 만약 공을 세운 자는 한량(閒良)이면 상으로 벼슬을 주고, 향리(鄕吏)ㆍ역자(驛子)면 부역을 면제해 주며, 관노(官奴)면 천인을 면하게 하여 그 공을 표창하소서.” 하였다.
○ 여름 4월 초 10일에, 최윤덕이 평안도와 황해도의 군마를 강계부(江界府)에 모아 군사를 나누되, 중군절제사 이순몽(李順蒙)으로 하여금 군사 2천 5백 명을 거느리고, 적의 괴수 이만주(李滿住)의 성채(城寨)로 향하게 하고, 좌군절제사 최해산(崔海山)은 2천 70명을 거느리고 거여(車餘) 등지로, 우군절제사 이각(李恪)은 1천 7백 70명을 거느리고 마천(馬遷) 등지로, 조전절제사(助戰節制使) 이징석(李澄石)은 3천 10명을 거느리고 올라(兀剌) 등지로, 김효성(金孝誠)은 1천 8백 88명을 거느리고 임합라(林哈剌)의 부모의 성채로, 홍사석(洪師錫)은 1천 1백 18명을 거느리고 팔리수(八里水) 등지로 향하게 하고, 최윤덕 자신은 군사 2천 5백 99명을 거느리고 곧 바로 임합라 등이 있는 성채로 달려갔다.
임금이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 이선(李宣)을 보내어 최윤덕에게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용병(用兵)은 제왕이 중대하게 여기는 일이다. 그러 므로, 고려 고종(高宗) 때에는 3년의 역이 있었고, 주 나라 선왕(宣王)은 6월의 군사를 일으켰으니, 이것이 모두 백성과 나라에 해가 됨을 염려한 것이어서 부득이한 일이었다. 이제 야인이 준동(蠢動)하여 우리 강토를 침범하고 쥐나 개처럼 도둑질을 하는 일이 빈번하였으나, 그들의 짐승 같은 풍속을 탓할 바 못 된다 하여 참고 용서해온 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이제 변경에 숨어 들어와 늙은이와 아이들을 죽이고 부녀자를 노략질하며 민가를 소탕하여 제멋대로 포악한 짓을 하니, 그들의 죄를 성토하는 거사(擧事)를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오직 경은 충의(忠義)의 자질과 장상(將相)의 책략을 겸비하여, 명성이 평소에 드러나 중외(中外)가 다 아는 터이므로, 경에게 중군(中軍)을 거느리고 야인의 죄를 문책하게 하노니, 부장(副將) 이하 대소 군관ㆍ사졸들의 항오(行伍)에 있는 자를 거느리되, 명령을 받들고 안 받듦에 따라 상벌(賞罰)하라.” 하였다.
이순몽ㆍ최해산ㆍ이징석ㆍ이각ㆍ김효성 등에게도 교시하기를, “임금의 도는 오직 백성을 보호하는 데 있고, 장수된 신하의 충성은 적개심을 갖는 것을 귀히 여긴다. 야인이 준동하여 일어나 늑대의 심술을 멋대로 부리고, 벌과 전갈의 독을 거리낌 없이 피워 우리의 변경을 침략하고 백성을 학살하니, 고아와 홀어미에게 원한을 품게 하고 부부간의 금슬을 해치게 한다. 이것이 내가 애통하고 불쌍히 여겨 마지않는 것이며, 경들도 함께 가슴을 치며 이를 가는 터이니, 군사를 일으켜 그들의 죄를 성토함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경에게 모군(某軍)을 거느리고 가서 치게 하노니, 합심 협력하여 주장(主將)의 방략을 잘 따르고, 적을 무찌르는 공을 이룩하여 변방 백성들의 소망에 보답하라.” 하였다.
또 3품 이하의 군관과 민군(民軍)에 교시하기를, “야인들이 준동하여 짐승[梟獍 나쁜 새와 짐승] 같은 본성을 드러내고 이리 같은 마음을 행하여, 우리의 경계에 이웃하여 항상 화를 일으킬 마음을 품고, 틈을 엿보아 침략하므로, 방비를 엄하게 하고 화친을 수고로이 행하느라고 너희 백성의 근심이 된 지 오래였는데, 지금 또 변방을 침범하여 인명을 살해하고 집들을 부수니, 나는 참으로 고아와 홀어미들을 위하여 마음 아프게 생각한다. 이에 장수로 하여금 그 죄를 성토하게 하노니, 너의 모든 군사들은 내가 밤낮으로 근심하는 것을 잘 알아서, 장수의 절제(節制)하는 규율을 삼가 지키며 늙은이와 아이들 및 부녀자를 제외하고는 벨 수 있는 대로 베어라. 그 죽인 그 수효의 다소에 의하여 혹은 3등급, 혹은 2등급, 혹은 1등급을 승진시켜서 벼슬로 상을 줄 것이다. 만일, 군령을 지키지 않는 자는 공을 세워도 상이 없을 터이니, 너희들은 각기 용맹을 다하여 과감하고 굳셈을 다하도록 힘쓸지어다.” 하였다.
교서의 반포가 끝나자, 최윤덕이 여러 장수들을 모으고 명을 내리기를, “주장(主將)의 조령(條令)에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군법으로 처리할 것이니 소홀하게 여기지 말라.” 하였다. 그 조령에 이르기를, “싸움에 임하여 지휘에 응하지 않는 자, 북소리를 듣고도 전진하지 않는 자, 나아가서 장수를 구해 내지 않는 자, 군사의 정보를 누설한 자, 요망스러운 말을 퍼뜨리어 군중을 의혹하게 하는 자는 대장에게 고하여 베고, 제 패를 잃고 다른 패를 따라 장표(章表)를 잃은 자, 시끄럽게 떠드는 자들에게는 벌을 내리고 항오(行伍) 중에서 세 사람을 잃은 자, 패두(牌頭)를 구해 내지 않은 자는 벨 것이요, 도적의 마을에 들어가서 명령이 내리기 전에 재물과 보화를 거둔 자는 벨 것이다. 또 도적의 마을에 들어가서 늙은이와 아이들과 남녀를 막론하고 치지 말 것이며, 장정일지라도 항복하면 죽이지 말라. 험한 곳에 행군하다가 갑자기 적을 만났을 때에는 멈추고 공격하면서 나팔을 불어 주장에게 알려야 하며, 물러나 도망하는 자는 벨일 것이다. 닭ㆍ개ㆍ소ㆍ말을 죽이지 말고 집들을 불사르지 말 것이다. 토벌하는 법은 정의로써 불의를 치되 그 마음을 치는 것이 만전(萬全)의 의(義)가 되는 것이다. 만일, 늙고 어린 자와 중국 사람을 죽여서 군공(軍功)을 낚으려 하여 조령(條令)을 범한 자가 있으면, 모두 군법에 의하여 시행할 것이며, 또 강을 건널 때에는 모름지기 다섯 사람씩, 열 사람씩 차례로 배에 오르되 먼저 오르려고 다투지 말 것이니, 위반하는 자는 죄를 줄 것이다.” 하였다.
명령이 끝나자 여러 장수들과 약속하기를, 19일에 함께 적의 소굴을 두들기되 만일 비바람으로 캄캄하면 20일로 기일을 정하기로 하고는, 최윤덕이 소탄(所灘)으로부터 시번동(時番洞) 어구로 내려가 강을 지나서 강가에 군사를 멈추니, 강가에서 네 마리의 노루가 군영(軍營) 안으로 뛰어들었으므로 군인이 그것을 잡았다. 최윤덕이 말하기를, “노루는 야수(野獸)인데 이제 저절로 와서 잡히니 실로 야인(野人)이 섬멸될 징조로다.” 하였다.
어허강(魚虛江)가에 이르러 군사 6백 명을 머물게 하여 목책(木柵)을 설치하고, 19일 어두운 새벽에 임합라의 성채를 쳐서 그대로 머물러 군영(軍營)을 차리니, 타납노의 성채가 모두 도망쳐 버렸다. 강가에 되놈 10여 명이 나와서 활쏘기 하는 것을 발견하고 최윤덕이 통사(通事) 마변(馬邊)으로 하여금 그들을 불러서 이르기를, “우리들의 행군은 오직 홀라온을 잡으려는 것이요 너희들을 잡으려는 것이 아니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였더니, 되놈들이 모두 말에서 내려 머리를 조아렸다. 20일에 홍사석(洪師錫)의 군대가 와서 최윤덕과 서로 모여서 적 31명을 사로잡았다. 되놈들이 뒤쪽으로부터 싸움을 걸므로 이에 남아 있는 적 26명을 베어 버렸다. 타납노의 동쪽산 으로부터 임합라의 성채에 이르는 사이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수색하다가 해가 저물자 석문(石門)에 물러나 군영을 설치하고 지자성군사(知慈城郡事) 조복명(趙復明)과 지재녕군사(知載寧郡事) 김잉(金仍) 등에게 명하여 군사 1천 5백 명과 포로들을 거느리고 먼저 가서 길을 닦게 하고, 홍사석(洪師錫)과 최숙손(崔叔孫)으로 하여금 (원문 빠짐)
○ 마변(馬邊)이 군사 천 5백 명을 거느리고 함께 각 부락을 수색하면서 타납노의 성채에 이르니 사람이라고는 없었다. 최윤덕은 이순몽이 적의 수급을 바치지 않고, 또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떠난 것과, 최해산이 군사 기일에 미치지 못한 것과, 이징석이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떠난 일들을 모두 탄핵하였다. 오명의(吳明義)를 보내어 전문(箋文)을 받들어 축하하고, 또 박호문(朴好問)을 보내어 아뢰기를, “선덕(宣德) 8년에 삼가 병부(兵符)와 교서(敎書)를 받들고 장차 파저강(婆豬江)의 도적을 치려 할 때 좌부(左符)를 보내어 왔으므로 병부를 맞추어 보고 군사를 동원하였는데, 곧 마병(馬兵)과 보병(步兵) 1만과 황해도 군병 5천을 출동시켜 4월 초10일에 강계부(江界府)에 모아 여러 장수에게 나누어 소속시키고, 일곱 개의 길로 갈라 나란히 진군하여, 이 달 19일에 여러 장수가 몰래 군사를 이끌고 가서 오랑캐를 소탕하여, 남녀 모두 2백 36명을 사로잡고 1백 7명을 베었으며 소와 말 70여 마리를 얻었는데, 우리 군사의 전사자는 4명, 화살을 맞은 자가 5명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오명의와 박호문에게 각각 옷 두 벌을 주고, 선위사(宣慰使) 박신생(朴信生)을 보내어 군영에 이르러 술을 내리어 여러 장수들을 위로하고, 교지를 선포하기를, “오늘의 일은 실로 천지와 조종(祖宗)의 덕을 힘입어 여기에 이른 것이니,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군사가 돌아오는 날, 반드시 보복이 있을 것이니, 사로잡은 사람은 늙은이와 아이들은 제외하고 장정은 모조리 베어 죽이고, 배가 지나다니는 강 등은 더욱 조심하여 지키라.” 하였다. 이순몽ㆍ이징석ㆍ최해산은 탄핵을 당하였으므로 참여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황희(黃喜)ㆍ맹사성(孟思誠)ㆍ권진(權軫)ㆍ허조(許稠)ㆍ하경복(河敬復)ㆍ안순(安純)ㆍ예조 판서 신상(申商)을 불러 이르기를, “내가 어림(御臨)한 이후로 매양 문물(文物)을 지키는 데 뜻을 두고 병혁(兵革)의 일에 대하여서는 일찍이 뜻이 미치지를 못했었는데, 이제 어찌 공을 이루었음을 자랑하고 기뻐할 수 있겠는가. 적이 말썽을 부려 할 수 없이 거사(擧事)한 것인데, 다행히 크게 이기게 되었으니 어떻게 하면 이 공을 길이 보전하고 후환이 없게 할 수 있겠는가.” 하니, 모두 아뢰기를, “자랑하고 뽐내는 마음은 옛사람도 경계한 것이오니 전하께서는 크게 이긴 것을 기뻐하기만 해서는 아니 됩니다. 신들은 깊이 축하 하옵는 동시에 성책(城柵)을 튼튼히 하고 군량(軍糧)을 비축하여 불의에 대비하고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면 후환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이르기를, “이제 정벌한 뒤에 만약 또 적이 침입하여 오면 변방의 장수를 시켜 성벽을 튼튼히 하고, 적의 이용물을 없애어 들을 말끔히 하고 기다리다가, 그 형세를 살펴 적당한 시기에 쫓아가 잡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모두 좋다고 하였다. 임금이 또 이르기를, “토벌에 나가서 죽은 군사와 말의 수효가 천을 헤아리니, 곳간의 쌀로 말을 사서 갚아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였더니, 모두 그것은 안 된다고 하였다. 임금이 또 이르기를, “변방의 장졸들로 하여금 사사로운 말로 알목하(斡木河)와 여러 야인(野人)들을 타이르기를, ‘파저강의 야인이 오랫동안 나라의 은혜를 입고 있으면서도 아무 명분도 없이 군중을 선동하여 은덕을 배반하고 살생(殺生)과 약탈을 하였으므로 부득이 장수에게 명하여 그 죄를 치게 한 것이다. 어찌 공(功)을 좋아해서 그렇게 했겠는가. 만약, 너희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스스로 마음을 새롭게 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귀순하면 나라에서는 반드시 처음과 같이 대접할 것이다.’ 하고 말하게 하면 어떻겠는가.” 하니, 모두 옳다고 하였다. 임금이 또 이르기를, “최해산이 원수(元帥)의 명령을 복종하지 않고 지체하였으며, 천 명이 넘는 군사를 가지고도 적을 잡은 것이 가장 적으니, 마땅히 군기(軍機)를 어긴 죄에 해당되지만, 특사한 뒤이니 이제 다시 논하지 말 것이며, 또한 논공(論功)도 하지 말라.” 하니, 모두 아뢰기를, “만약 특사를 받지 않았다면 죄를 멸하지 못하였을 것인데, 어찌 상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관하에 공이 있는 군사에게만 상을 내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병조에서 아뢰기를, “최해산은 군기(軍機)를 놓친 것이 특사를 받기 전에 범한 일이어서 죄줄 수가 없으니, 청컨대 그의 고신(告身 관직의 임명 사령장)을 거두소서.” 하였더니, 임금이 그 벼슬만 파면시켰다. 임금이 황희ㆍ권진 등과 의논하기를, “전날 기해년에 동쪽으로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하고 도통사(都統使) 유정현(柳廷顯)이 돌아올 때에는 대언(代言 승지)을 시켜 가서 맞이하게 하였는데,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종무(李從茂)가 돌아올 적에는 내가 상왕을 따라 낙천정(樂天亭)으로 나가 맞이하여 위로했으니, 이종무가 친히 대마도를 치고 돌아올 때는 유정현에게 했던 예와는 다르다. 지금의 파저강의 역을 대마도 정벌과 비교하면 그 공이 배나 되니, 최윤덕과 이순몽 등이 개선하는 날은 어떻게 처우하는 것이 좋겠는가. 내 생각에는 최윤덕이 돌아올 때에는 모화관(慕華舘)으로 나가 맞이하고, 이순몽이하의 경우에는 대군(大君)이나 대신(大臣)을 시켜 맞이하게 하고자 한다. 만약 그것이 너무 정중하다고 한다면 최윤덕은 대군이나 지신사(知申事 도승지)로 하여금 가서 맞이하게 하고, 이순몽 이하는 대군이나 대언(代言)이 나가서 맞이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옛날 이성(李晟)이 주비(朱沘)를 치고 서울을 수복하였을 때, 덕종(德宗)이 이성에게 사도(司徒)의 벼슬을 배수하고 영락리(永樂里) 저택을 주어 특별히 잔치를 베풀었는데, 태상(太常 예악을 맡아 보는 관청)으로 하여금 예악(禮樂)을 갖추어 서울에서 음식을 대접하고 풍악을 울리어 영화를 베풀었고, 후주(後周)의 세종(世宗) 때에는 장수를 보내어 진주(鎭州)를 평정하고 돌아오자 친히 성 밖까지 나가 맞이하여 위로하고, 그의 집에 나아가 잔치를 베풀고 풍악을 울렸다. 옛날의 제왕이 장수를 대접하기를 이렇게 영화롭게 하였는데 지금은 어떤가.” 하니, 황희 등이 아뢰기를, “상왕이 이종무를 낙천정(樂天亭)에서 맞이하여 위로한 것은 그때 우연히 낙천정에 납시었는데 때마침 종무가 왔을 뿐이요, 일부러 윤정현과 달리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저 당 나라와 주 나라의 임금들이 장수를 사랑하고 우대한 것은 그 당시에 있어서는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그들의 마음을 잡기에 부족했기 때문이었으나, 오늘의 일은 수복(收復)한 것과 같은 공은 아니며, 다만 조그마한 추악한 무리를 쳤을 뿐입니다. 때가 다르고 사건도 다르니 어찌 나가서 마중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최윤덕은 지신사(知申事)로 하여금 맞이하여 위로하게 하고, 이순몽이하는 집현전(集賢殿)의 관원을 시켜 맞아 위로하게 하여도 넉넉히 한때의 영광이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말에 따랐다. 예조에서 싸움에 이겼음을 종묘에 고하고 중외(中外)에 널리 선포하고 곧 치하하기를 청하매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임금이 여러 장수의 공을 표창하려고 대신들에게 의논하니, 허조(許稠)는 최윤덕에겐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를 주어 표창하자고 하고, 맹사성(孟思誠)은 자기의 벼슬을 주자고 하여 두 의견이 일치되지 못하였다. 벼슬을 내리는 날, 좌대언(左代言) 김종서(金宗瑞)에게 특명을 내려 안숭선(安崇善)을 대신하여 문선(文選 문관과 종친의 인사를 담당하는 사무)을 관장하게 했더니, 모두들 임금의 생각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임금이 김종서를 불러들여 이르기를, “경은 지난해의 말을 기억하고 있는가. 그때에 경과 더불어 말하기를, ‘최윤덕은 수상(首相)이 될 만하나 그 직임이 지극히 무거우므로 전공(戰功)으로 인해 상을 줄 수는 없다.’고 하였다. 지금 최윤덕이 비록 전공이 있으나 만약 재덕(才德)이 없으면 단연코 줄 수가 없다. 나는 일의 선후와 취사의 가림이 이러하니, 경은 이 뜻을 대신들에게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여 잘 의논해 가지고 아뢰라.” 하였더니, 맹사성 등이 아뢰기를, “윤덕은 청렴 정직하고 부지런하여 삼가 임금의 뜻을 받드니, 수상이 되어도 부끄러움이 없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 생각이 이러하고 대신들의 뜻이 또한 그러하니, 권진(權軫)의 벼슬을 대신하여 최윤덕을 우의정으로 삼고, 이순몽을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로, 이각(李恪)과 이징석(李澄石)을 중추원사(中樞院事)로, 김효성(金孝誠)과 홍사석(洪師錫)을 중추부사(中樞副使)로 삼으라.”고 하였다. 최윤덕에게는 노비 10명, 이순몽에게는 8명, 이각과 이징석에게는 6명씩, 홍사석에게는 5명, 김효성에게는 4명을 주었다. 이숙치(李叔畤)는 군사를 조달하고 군량을 운반하는 일을 잘하였다 하여 벼슬을 올려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삼고 그대로 평안도 도관찰사(平安道都觀察使)로 있으라고 하였다.
임금이 근정전(勤政殿)에 납시어 최윤덕 등과 장수 및 관리들을 위로할 때, 상의원(尙衣院)으로 하여금 옷과 신을 나누어 주어 그것을 입고 잔치에 나오게 하였다. 임금이 친히 잔을 잡아 최윤덕 등에게 내리고, 또 세자에게 명하여 술을 돌리고는 이어 최윤덕에게 명하여 술잔을 받을 때에 일어나서 받지 말게 하고, 군관으로 하여금 서로 마주 서서 춤을 추게 하였다. 최윤덕도 술이 취하자 역시 일어나 춤을 추었다. 토벌에 나가 전사한 군사에게는 초혼제(招魂祭)를 지내게 하고 교서를 내리기를,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쳐 장하게도 충성을 나타내었으니, 그 은공에 보답하기 위하여 구휼의 은전(恩典)을 내리노라. 전번 야인이 침입해 왔으므로 여러 장수에게 명령하여 가서 치게 하였더니, 너희는 모두가 용맹한 자질을 가지고 있어 항오(行伍)의 대열에서 뛰쳐나와, 창칼을 휘두르며 다투어 용감히 나아가서, 적진을 함락시키고 예봉을 꺾어 죽음을 돌보지 않았다. 이에 특별히 죽음을 무릅쓴 의리를 가상히 여기고 은전을 베푸노라. 혹 영묘한 넋이 앎이 있으면 나의 지극한 뜻을 헤아릴 것이다.” 하였다. 쌀과 콩을 내리고 5년 동안 부역을 면제하고, 앓다가 죽은 자에게는 쌀과 콩을 주고 2년 동안 부역을 면제하고, 말을 잃은 자에게는 2년 동안 부역을 면제하여 주었다.
병조가 아뢰기를, “사로잡은 야인의 남녀 1백 74명을 제주현(濟州縣)에 편안히 살게 하소서.” 하였더니, 임금이 이르기를, “어린것과 여자들은 모두 도적질한 자가 아니니 마땅히 구해 주되, 야인은 습성이 본래 더위를 두려워하므로 모름지기 기온(氣溫)을 알맞게 해주어 병이 나지 않게 하여주고, 또 남녀가 서로 섞이지 않도록 하고, 굶주리고 추위에 떨지 않도록 그곳 수령(守令)은 심중히 살피도록 하라.” 하고, 경기와 충청도 관찰사에게 유시(諭示)하기를, “갈라놓아 둔 야인은 말이 통하지 않으니 힘써 보호하도록 하고, 포악한 무리가 여자들을 겁탈하지 못하게 하여 마음 놓고 살게 하고, 혹시 떠도는 자가 있거든 반드시 처벌하라.” 하였다. 또 처음 갈라놓을 때에 예조에 명령하여 모자(母子) 형제가 서로 떨어지지 않게 하라고 했으나, 예조의 조치가 충분치 못하여 완전히 모여 살지 못하는 자가 간혹 있었으므로 다시 그들의 소원을 들어 한 곳에 완전히 모여 살게 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공격하여 싸운 뒤에는 수비를 엄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여연(閭延)의 방비가 얼음이 녹은 뒤 튼튼하다고는 하나, 야인이 보복할 생각을 품고 있어 어떻게 나올지 헤아릴 수가 없으니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우의정을 도안무찰리사(都按撫察理使)를 삼아 성을 쌓고 목책(木柵)을 세워 변경을 튼튼히 함이 어떠할까.” 하니, 노한(盧閈)ㆍ안순(安純)ㆍ허조(許稠)가 아뢰기를, “그렇게 하면 평안도 인심에 폐를 끼침이 많을 것입니다. 지금 농사철을 당하여 별다른 조치가 없을 것이니, 가을에 가서 보내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이르기를, “갑산(甲山)은 야인의 땅과 경계가 이어 있는데, 다만 색군(色軍)에 소속되어 있고 주둔군을 두지 않았으니, 이제 주둔군을 두어 방비를 엄히 하는 것이 어떠할까.” 하니, 모두들 병사(兵使)로 하여금 규약을 만들어 정하게 하자고 하였다. 임금이 또 이르기를, “해산(惠山)의 민가는 두 강어귀 외에는 불과 7, 8호 밖에는 살고 있지 않는데, 이곳이 맨 먼저 적의 해를 받을 곳이니, 그곳 백성을 깊은 곳으로 옮기는 것이 어떨까.” 하니, 황희가 말하기를, “도순무사(都巡撫使) 심도원(沈道源)으로 하여금 방문하게 하여 옮기는 여부를 알아보고, 또 전입시켜 보호할 곳을 살피게 한 다음에 다시 의논하여 결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 임금이 또 이르기를, “우리나라가 요즘 세월이 태평하여 군사훈련을 소홀히 하고 있으므로 각 도(道)에 소속시켜 훈련하게 하고자 하나, 다만 염려되는 것은 정벌한 뒤에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가 한창 의구심(疑懼心)을 품고 있는데, 만약 양쪽 경계에서 군사를 모아 훈련을 하면 반드시 더욱 더 의심을 할 것이요, 남쪽에는 왜가 아주 가까이 있는데, 왜인이 그것을 들으면 또한 의심할 것이니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하니 황희(黃喜)ㆍ권진(權軫)ㆍ최윤덕(崔潤德)ㆍ허조(許稠)ㆍ하경복(河敬復)ㆍ노한(盧閈)ㆍ이징석(李澄石)ㆍ홍사석(洪師錫)이 아뢰기를, “병졸을 훈련하는 것은 참 좋은 일이오나 요사이 양계(兩界)에 시끄러운 일이 많을뿐더러 축성(築城)의 역사도 있고 하오니 잠깐 후년을 기다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고, 맹사성(孟思誠)ㆍ안순(安純)ㆍ이순몽(李順蒙)은 아뢰기를, “양계에서는 당번 군사를 제외하고 훈련하되 다만 진법(陣法)에 관한 책을 읽게 하고, 다른 도에서는 집합 장소를 정해 놓고 군사를 모아 훈련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더니, 임금이 병조에 명하여 법을 마련하여 아뢰라고 하였다.
가을 7월에, 임금이 경회루(慶會樓)에 납시어 도안무찰리사(都按撫察理使) 최윤덕 및 여러 군관 등을 전송하고, 또 지신사(知申事 도승지) 안숭선(安崇善)을 시켜 홍제원(弘濟院)에서 전송케 하였다.
○ 임금이 황희ㆍ맹사성ㆍ권진과 의논하기를, “중국 도독(都督) 한 사람이 우리나라가 파저강의 야인을 친 소식을 듣고, ‘조선이 멋대로 군사를 일으켜 침입하였다.’ 하나 나는 생각하기를 태종 황제의 성지(聖旨)가 뚜렷이 믿을 만하고, 더구나 또 황제의 칙유(勅諭)에, ‘기미를 관찰하고 잘 다루어 야인의 업신여김을 사지 말라.’ 한 것으로 보아, 황제는 반드시 우리가 가서 정벌한 것을 죄로 삼지 않음을 알겠다. 또 맹날가래(孟捏哥來)와 최진(崔眞) 등이 오는 윤8월에 건주(建州)와 본국을 향해 떠나서, 두 곳의 포로 된 사람과 물건을 찾아서 각각 제 고장으로 돌려보낸다고 하였다. 내가 처음에 정벌한 것은 위령(威靈)을 보이고자 함이었으니, 저들이 만약 와서 항복하면 포로를 돌려보내려고 했는데, 그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여러 번 여연(閭延) 등지를 침범하였으므로 두 도(道)에 갈라 두었던 것이다. 만약 황제의 칙서가 온 뒤에 돌려보내면, 야인은 다만 황제의 덕으로만 생각하고 우리나라의 은덕으로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강계(江界)에 머물러 두었던 야인 2명을 본고장으로 돌려보내면서 유시하기를, ‘너희들이 진심으로 와서 항복하면 포로를 보낼 것이나, 전의 잘못을 그치지 않고 변경을 엿보므로 지금까지 돌려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옷과 음식이 때를 잃는 일이 없고, 강포한 무리들이 침해하지 못하게 하여 마음 놓고 살고 있다.’고 하여 만일 저들이 이 말을 듣고 진심으로 와서 항복하면 마땅히 다 돌려보낼 것이니, 전날의 위세와 오늘의 은혜를 알게 하면, 은혜와 위엄이 함께 행해져 서로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 8월에 최윤덕이 아뢰기를, “올적합(兀狄哈)과 열가(列家) 등 세 사람이 강계(江界)에 이르러 말하기를, ‘전에 보낸 포로 조사라(趙沙剌)가 죽지 않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만약 진심으로 나와서 항복하면 잡아온 사람과 물건을 모두 돌려보내게 할 것 이다고 하기에 이만주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만나보고 이르기를, “만약 다시 나오면 다시 말하겠다.” 하면서, “너희가 만약 성심으로 귀순하면 처음과 같이 대우하고 잡혀온 사람을 다 보내어 주겠다.” 하였다.
○ 야인이 이만주(李滿住)의 편지를 가지고 강계(江界)에 와서 고하기를, “최진과 맹날가래 두 중국 사신이 홀라온에 가서 조선 사람과 물건들을 조사하고 만포로부터 나온다.” 하였다. 그 편지에 이르기를, “선덕(宣德) 7년에, 올적합 1백 40명이 조선 국경에 이르러 백성을 약탈하였으므로 내가 힘껏 싸워 64명을 빼앗아 조선으로 돌려보냈고, 조선에서 이미 사람을 보내어 식량을 주고, 또 군사를 일으켜 와서 토벌하니, 잡힌 사람들이 말을 갖추어 주달(奏達)하여 이미 중국 황제의 성지(聖旨)가 내렸으니, 잡아간 처자와 마소와 재물을 모두 돌려주기 바랍니다.” 하였다. 임금의 정부 육조(六曹)를 불러 그 답사를 의논하는데, 모두 아뢰기를, “너희 무리가 홀라온을 끌어들여 변방 백성을 노략질하였으므로 나라에서 가서 그 까닭을 물었더니, 너희 무리가 항거하고 복종하지 않아 스스로 패망을 가져오게 했으니, 이것은 오로지 너희들이 순종하지 않은 잘못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아직도 홀라온을 핑계대고 스스로 벗어나려 하느냐. 너희들의 처자 4명이 이미 돌아갔으니, 만약 성심으로 귀순하면 어찌 칙서(勅書)를 기다려 돌려보내겠느냐.” 하였더니, 임금이 거기에 따랐다.
○ 최윤덕이 박호문을 보내어 아뢰기를, “야인이 강계에 와서 하는 말이 전날 포로를 돌려보내 준 데 대하여 이만주가 몹시 기뻐하면서 우리의 가속이 만약 살아 있으면 강가에서 서로 만나보면 좋겠다고 하는데, 지금 강 연안의 방비에 있어 군마(軍馬)가 극도로 지쳐 있고, 또 흠차사(欽差使)가 중국 황제의 칙서를 받들고 오니, 포로 중의 한두 사람은 혹은 들여보내고 혹은 강가에 보내어 서로 만나보게 하여, 저들이 귀순하려는 마음을 가지게 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박호문으로 하여금 돌아가 윤덕에게 이르라고 하면서, “지금 야인이 처자를 돌려보내 달라 하고, 또 사신이 나온다 하니, 연변 방비에 있어 남도(南道) 병사에 한하여 얼음이 얼면 풀어 보내고, 얼음이 언 뒤에 자산(慈山) 이남의 병사로 교대하되, 그런 일은 먼 데서 헤아리기는 곤란하니 기회를 보아가며 조치하라.” 하였다.
○ 윤8월에, 파저강의 야인 왕반거(王半車) 등 4명이 이만주의 편지를 가지고 와서 빼앗긴 가산(家產)을 돌려보내 주기를 빌고, 서울로 올라와 임금을 뵙고자 하니, 맹사성과 권진은 그 소원을 들어주기를 청하였고 황희는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나, 임금은 맹사성의 의논을 따랐다. 9월에 왕반거(王半車) 등이 화친을 허락하는 교지를 받아 가지고 돌아가기를 청하자 임금이 정부 육조에 의논했더니, 승문원 제조(承文院提調)가 아뢰기를, “이런 교지를 내린 것은 전례가 없습니다. 예조(禮曹)나 병조, 의정부(議政府)에서 교지를 받아 이첩(移牒)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황희 등은 아뢰기를, “지금 온 한두 사람의 말이 추장(酋長)에게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비록 관원이 교지를 받아서 써 보내는 글이라 할지라고 너무 간단한 것 같고, 또 사사로이 문서를 통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성심으로 귀순한다면 예전과 같이 대접한다는 뜻을 말로 하여 주면 그만입니다.” 하고, 김익정(金益精) 등은 아뢰기를, “지금 온 사람의 말이 비록 믿을 수 없다 하여도 이미 이만주의 공문을 받았으며, 와서 화친할 뜻을 말했으니, 예조에서 임금의 뜻을 받들어 이첩하되, 화목하지 못한 이유와 아울러 화해(和解)의 뜻을 소상히 말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더니, 임금이 다시 의논하여 일치한 의견을 가지고 아뢰라고 하였다. 황희 등이 아뢰기를, “문서를 보내는 것은 단연코 불가합니다. 그러나 자제(子弟)를 볼모로 보내어 와서 빌고 또 임금께 뵙고자 하는 것은 도의(道義)로 막을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맹사성등이 아뢰기를, “지금 온 사람이 진정으로 통서(通書)를 요구하니, 기록을 갖추어 문서를 청하는 뜻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하고, 이어서 아뢰기를, “‘너희들이 스스로 틈이 벌어지게 할 만한 일을 꾸몄으므로 부득이 가서 친 것이니, 만일 마음을 고쳐 성심으로 복종하면 반드시 전날과 같이 대접할 것이다.’ 하고 예조에서 교지를 받들어 이첩하면 대의(大義)를 상함이 없을 것이요, 이제부터 우리나라에 오는 자와 자제(子弟)로서 입시(入侍)하는 자를 함께 모두 허락하면 시의(時宜)에도 적합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맹사성 등의 의논에 따랐다.
○ 최윤덕에게 유시하기를, “지금 사자 최치운(崔致雲)이 와서 아뢰기를, 친히 군졸을 거느리고 변방의 고을을 순행(巡行)하여 무용(武勇)을 빛내고 위엄을 보이려 한다고 하나 나는 불가하다고 생각한다. 매년 순행하는데 올해는 이렇게 하고 이듬해는 그렇지 않게 하면, 저들이 장차 이르기를, “대장의 순행이 없으니, 예측하지 않은 사변이 장차 여기서 생길 것이다.” 라고 할 것이다. 더구나, 이미 저들에게 말하기를, ‘성심으로 와서 항복하면 처음과 같이 대접한다.’ 하고서, 이제 다시 군사를 동원하여 순찰하면 저들에게는 반드시 의심이 생길 터이니, 이것이 어찌 이전의 약속을 어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군사에 있어서는 비밀을 중히 여기는 것이니, 적으로 하여금 속셈을 모르게 해야 한다.” 하였다.
○ 겨울 10월에, 올적합(兀狄哈)이 알목하(斡木河)를 공격하여, 관독(管禿)의 부자(父子)와 관하의 사람을 죽였는데, 오직 범찰(凡察)과 대이(大伊) 등만이 난을 면하여 우리나라 사람을 보고 애걸하기를, “형세가 여기에서는 살기 어려우니, 경원(慶源) 부근 시반(時反) 등지로 이사하도록 하여 주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듣고 여러 신하를 불러 의논하기를, “역대 제왕 중에도 오랑캐를 변경 안에 두어 번병(藩屛)으로 삼은 적이 간혹 있었고, 태종도 일찍이 알목하(斡木河)는 우리나라의 울타리라 하였으니, 범찰의 청에 어떻게 응할까.” 하니, 모두 아뢰기를, “그들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지 못하고 가벼이 허락할 수도 없거니와, 또 오랑캐를 친근히 하여 스스로 화를 끼치는 것은 옛사람이 깊이 경계한 바이오니, 단연코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 11월에,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 성달생(成達生)이 급히 아뢰기를, “알목하의 야인은 그 괴수가 이미 죽었으므로 그 도당이 의지할 곳이 없어 혹시 소란을 피우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이미 영북(寧北)과 경원(慶源)으로 하여금 군마를 정비하고 대비하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병조 좌랑(兵曹佐郞) 우효강(禹孝剛)을 보내어 유시하기를, “요즘 맹가첩목아의 부하가 통사(通事) 박천기(朴天奇)를 따르는 사람을 쏘아 죽여 그 사정이 비록 중요하지만, 잘못을 뉘우치고 사죄하여 나라에서 이미 용서하였으니, 다시 그 죄를 논할 것이 없다. 이제 남의 위급한 때를 타서 군사를 일으켜 이긴다 하더라도, 무용(武勇)이 될 수 없겠으며, 남의 재앙을 이용하여 군사로 쳐서 빼앗는 것은 사람으로서 잔인한 일 같으니, 저들이 만일 침범하면 부득이 응변하여 추격해서 잡을 것이지만, 저들이 혹 옮겨 오기도 하고, 혹 그대로 살기도 하여 침노할 마음이 없다면, 먼저 칠 생각은 하지 말고, 그들로 하여금 편안히 생업에 종사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를 불러 의논하기를, “수성(守成)하는 임금 은 대체로 사냥이나 풍악, 여색을 좋아하지 아니하면, 반드시 자랑을 좋아하고 공(功)을 즐기는 법인데, 예로부터 선대의 왕업을 계승하는 임금은 마땅히 이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 내가 이제 조종(祖宗)의 업을 이어가면서 항상 이것을 두려워하노라. 지난번 파저강(婆豬江) 토벌 때에는 대신과 장상(將相)들이 모두 안 된다 하였고, 또 그것은 바른 의논이었으나 나는 그 여러 의논을 듣지 않고 쳐서 다행히 공을 이루었다. 이제 맹가첩목아의 부자가 모두 죽자 범찰이 그 도당을 거느리고 경내에 살기를 청하였으나, 대신들이 모두 가벼이 허락해서는 안 된다 하였으니, 그 말은 당연하다. 그러나 알목하는 본래 우리나라 경내인데, 범찰이 만일 다른 곳으로 옮겨가 산다면 또 다른 강적이 와서 살 것이니, 그렇게 되면 땅을 잃어버릴 뿐 아니라 또 하나의 강적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내 그 빈틈을 타서 영북진(寧北鎭)을 알목하로, 경원(慶源)을 소다로(蘇多老)로 옮겨, 옛 강토를 회복하고자 하니 어떠할까. 또 조종(祖宗)이 경원을 공주(孔州)에 두었고, 태종은 경원을 소다로에 두었었는데, 그 뒤 한흥부(韓興富)가 전사하고 곽승우(郭承佑)가 패하였으나, 태종은 그래도 차마버릴 수가 없어 목책(木柵)을 부거참(富居站)에 설치하고 군사를 머물러 지키게 하였다. 이는 조종이 알목하를 경계로 삼으려는 생각이었으므로, 일찍이 잊지 않고 마음속에 품고 있던 것이다. 내가 자랑하기를 좋아하고 공(功)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맹가첩목아의 부자가 한꺼번에 죽은 것은 하늘이 이들을 버리신 것이니 때를 잃어서는 아니 된다. 더구나, 두만강(豆滿江)은 우리 강토를 둘러싸고 있는 하늘이 만든 험한 곳으로서, 옛사람이 이른바 큰 강을 해자로 삼는다는 뜻에 꼭 들어맞으므로, 내 이미 계획을 정하였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고.” 하니 심도원(沈道源)과 하경복(河敬復)이 아뢰기를, “때를 잃어서는 안 되오니 청하건대, 조관(朝官)을 보내어 성달생(成澾生)과 더불어 형세를 살펴본 뒤에 다시 의논하소서.” 하였고, 황희와 권진이 아뢰기를, “강한 도적이 와서 살게 되면 다시 새로운 한 적이 생긴다는 말씀은, 전하의 생각하심이 지극히 원대 하시오며, 신들도 빈틈을 타서 진(鎭)을 설치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옵니다. 그런데 두 곳의 진을 설치한다면 한 진 안에 이민(移民)이 1천 호는 되어야 할 것이오니, 일이 어렵고 큽니다. 가벼이 의논하지 말고 우효강(禹孝剛)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형세를 자세히 물어 본 다음에 다시 의논하게 하소서.” 하였다. 맹사성이 아뢰기를, “《시경(詩經)》소민편(召旻篇)에 이르기를, ‘옛날 소공(召公) 이 국토를 하루에 백 리는 넓힌다.’ 하였으니, 이는 당시의 현실을 슬퍼하고 옛날을 생각하는 격분한 말이었습니다. 우리 선원(璿源 이씨 왕실의 조상)이 대대로 공주(孔州)에 살고 있었는데, 이제 거친 풀밭이 되어 야인이 차지하고 있으니, 어찌 차마 볼 수 있겠습니까. 이야말로 나라를 넓힐 좋은 기회입니다.” 하였다.
○ 김종서(金宗瑞)를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 )로 삼고 교시하기를, “예로부터 제왕이 왕업을 처음 일으킨 땅을 소중히 여겨 근본으로 삼지 않은 이가 없었으니, 역사상의 기록을 상고하면 역력히 알 수가 있다. 또한 우리나라의 북쪽 경계에 있는 두만강은 하늘이 만들고 땅이 마련한 요해(要害)로서, 나라의 울타리를 웅장하게 하고 국경을 한정한 곳이다. 그러므로 태조께서 처음에 경원부를 공주에 두었던 것을, 태종께서 소다로로 옮긴 것은 모두 처음 왕업을 일으킨 땅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경인년에 좀도둑이 침입한 것을 지키던 신하가 막지 못하고, 부거참(富居站)으로 물러나와 있었는데, 태종께서는 일찍이 명하시기를, ‘만일 오랑캐들이 와서 살면 곧 쫓아내어 적의 소굴이 되게 하지 말라.’ 하였다. 이제 소다로와 공주가 모두 풀밭이 되어 오랑캐의 말이 멋대로 짓밟고 사냥하는 터가 되었으니, 내 이를 생각할 때마다 몹시 마음 아파하였노라. 또 알목하는 바로 두만강 남쪽이어서 우리 경계 안에 있으며, 땅이 기름져 농사와 목축에 알맞고 요충 지대에 있으니, 큰 진(鎭)을 두어 북쪽을 막는 문의 역할에 합당하다. 태종께서는 사방의 오랑캐를 지키려는 생각에서 우선 맹가첩목아의 귀화를 허락하였던 것인데, 이제 그들이 자멸하여 울타리가 텅 비게 되었다. 일의 기회가 왔으니 기회를 놓칠 수 없다. 내가 선왕의 뜻을 이어받아 다시 경원부를 소다로로 옮기고, 영북진(寧北鎭)을 알목하에 옮겨 백성을 모아 지키게 하려고 한다. 이는 삼가 조종(祖宗) 때부터 내려오는 천험(天險)의 국경을 지키며, 조금이라도 변방 백성의 번갈아 수자리 사는 수고를 덜게 함이요, 과대(誇大)함을 좋아하고 공(功)을 즐겨 국경을 개척하는 따위에 비할 일이 아니니, 너희 병조(兵曹)에서는 이 뜻을 본받아 조건에 맞도록 계속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더니, 병조에서 아뢰기를, “이제 두 진(鎭)을 설치하여 그 고장의 관원을 두고 본도(本道) 백성 1천 1백 호를 영북(寧北)에, 또 1천 1백 호를 경원(慶源)에 옮기어, 요역(徭役)을 가볍게 하고 납세(納稅)를 덜 내게 하여, 그들의 생계를 후하게 하고 그들이 번성하기를 기다려서, 해당 도에서 멀리 수자리 사는 괴로움을 덜어 줄 것이요, 만일 본도에서 옮겨갈 만한 백성이 2천 2백 호에 차지 못하면, 충청ㆍ강원ㆍ경상ㆍ전라도 등지에서 모집에 스스로 응하는 자로서, 양민에게는 그 고장의 관직을 주어 포상하고, 향리(鄕吏)와 역리(驛吏)에게는 길이 그 천역(賤役)을 면제해 주며, 천인(賤人)은 아주 놓아 주어 양민이 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2월에 이살만(李撒滿)ㆍ답실리(答失里) 등이 사람을 보내어 굶주림을 호소하고 식량을 청하자, 임금이 이살만과 답실리 및 이만주에게 각각 쌀 20섬을 내려 주었다.
○ 16년에 예조 판서 신상(申商)이 아뢰기를, “알타리(斡朶里)가 예조에 고하기를, ‘이제 알목하에 진(鎭)을 만드니, 그대로 우리들로 하여금 살게 하렵니까.’ 하였사오니, 이는 대체로 저들을 쫒아낼까 두려워함에서일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우리 백성이 되기를 원한다면 무엇 때문에 쫓아내랴. 또 만일 옮겨가고자 한다면 왜 그들을 잡아 두겠는가.” 하였다. 석막(石幕)의 영북진을 백안수소(伯顔愁所) 지금의 행영(行營)이다. 로 옮기고 종성군(鍾城郡)이라 불렀다. 얼마 아니 되어 알목하가 서북으로 적을 막는 요층 지대가 되고, 또 알타리가 남긴 종족이 살고 있는 곳이라 하여 특별히 성과 보루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그 고장이 다른 진에서 거리가 멀어 성원(聲援)할 길이 너무 떨어져 있으므로, 따로 알목하에 진을 두고 회령부(會寧府)라고 불렀다.
처음에 고려 윤관(尹瓘)이 여진(女眞)을 쫓아내고 보루를 설치하고 험처를 만들어 진 안의 방어소로 삼았는데, 공주(孔州)라고도 하고 광주(匡州)라고도 불렀었다. 이조 태종 7년 무인년에 옛터라 하여 돌 성을 쌓고, 그곳에 덕릉(德陵)과 안릉(安陵)이 있으며, 또 왕업을 시작한 땅이므로 이름을 경원(慶源)으로 고쳤다. 태종 9년 기축 년에 소다로(蘇多老)의 옛 행영(行營)에 옮기어 다스리다가, 10년 경인년에 여진이 침입하여 드디어 두 능을 함주(咸州)로 옮기고, 백성들의 집은 경성군(鏡城郡)에 옮겨 합쳤으므로 그 땅은 드디어 비게 되었다. 17년에 부거참(富居站)에 다시 읍(邑)을 두게 되자, 이때에 이르러 진을 알목하에 설치하고, 모두 본부를 회질가(會叱家)로 옮기고 경원부(慶源府)라 일컬었다. 12월에 최윤덕(崔潤德)에게 편지를 내리어 이르기를, “비바람을 무릅쓰고 다니는 괴로움을 겪으면서, 경이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함에 대하여, 그 노고를 중외(中外)에 알려 위로하노라. 조정의 중신(重臣)으로서 변방에 출정하여, 적을 누르고 변방을 평정하여 나의 근심을 풀어주니, 깊이 가상히 여기노라. 몹시 추운 때를 당하여 기거(起居)를 삼가도록 하라. 이제 내관 엄자치(嚴自治)를 보내어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게 하고, 옷 한 벌을 내리노니, 이르거든 잘 받아라.” 하였다.
○ 17년 봄 정월에 올량합(兀良哈)의 5천 7백 기(騎)가 와서 여연(閭延)을 포위하였다. 군수(郡守) 김윤수(金允壽)ㆍ도진무(都鎭撫) 이진(李震)ㆍ수군 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 김성렬(金成烈)ㆍ도안무사 군관 김수연(金壽延)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용감히 막았으므로, 적의 인마(人馬)가 화살을 많이 맞고 물러갔다. 이튿날 수연이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강으로 쫓아갔으나, 적은 숨어 나타나지 않고 다만 1백여 기가 싸우다가 못 이기는 척하고 달아나므로, 수연은 복병이 있음을 알고 끝까지 추격하지 않았다.
여름 5월에 파저강에서 온 사람의 말이, “이만주와 홀라온이 여연에 침입하여, 2명을 죽이고 7명을 사로잡고 마소를 약탈해 가지고 돌아갔다.” 하였다. 병조 판서 최사강(崔士康)이 아뢰기를, “지경 안의 사람과 가축이 도적에게 약탈당하였는데, 군수 김윤수(金允壽)가 어찌 몰랐으리오 마는 아뢰지 아니하였사오니, 그 죄가 진실로 가볍지 않습니다. 도질제사 이각(李恪)이 또한 주장(主將)으로서 곧 방문하여 조사해서 아뢰지 않았사오니, 변방 일에 대하여 유의하지 않음이 심합니다. 해당 관아로 하여금 죄를 주게 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황희(黃喜)와 노한(盧閈) 등을 불러 의론하니, 모두 아뢰기를, “일이 특사가 내리기 전에 해당됩니다만, 김윤수는 삼품(三品)의 고신(告身)을 빼앗아야 합니다.” 하니, 최사강이 말하기를, “김윤수가 변경을 침범당한 것은 큰일이오니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직첩(職牒)을 거두어들이고 죄를 다스리소서.”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지금 김윤수만한 무사가 어찌 없으랴마는, 변방을 지키는 장수를 자주 갈면 일에 빈틈이 많을 것이요, 또 한때의 죄를 가지고 법을 폐하면서까지 믿음을 잃는 것은 옳지 않다.” 하였다. 최사강이 아뢰기를 “특사가 내리기 전의 일이어서 형벌을 가할 수 없다면, 관직을 빼앗고 내쫒은 전례는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여 사품(四品) 고신(告身)을 빼앗고 그대로 직임을 맡아 보도록 하였다.
7월에 야인 20여 기가 강을 건너와 여연 소동두(小董頭) 지방을 침략하자, 진무(鎭撫) 장사우(張思祐)가 군사를 거느리고 추격하고, 군수 김윤수도 군사를 거느리고 길을 막아 적 7명을 죽이고, 그들이 뺏어간 사람과 가축, 재산 등을 모두 도로 뺏어 왔다. 전에 평안도에 칙명을 내리어, 여름철 방어가 소홀하고 농민이 들에 있을 때 적이 몰래 올까 염려된다 하여, 요로와 각 마을에 장정을 뽑아서 대(隊)를 지어, 낮에는 나누어 진을 치고 깃발과 북으로 서로 알리고, 밤에는 산림 속으로 들어가게 하여 뜻밖에 일어나는 일에 대비하게 하고, 산양회 구자(山羊會口子) 등지에는 군사를 두어 살피게 하였는데, 여연이 포위되자 또 조령(條令)을 내려 전후(前後)의 할 바를 자세히 갖추었다. 이때에 이르러 관찰사 박안신(朴安臣), 도절제사 이각(李恪)에게 교지를 내리기를 “변에 응하는 방략에 대해서는 이전에 이미 자세히 계획해 놓았는데, 경들은 명을 어기고 거행하지 아니하여, 적이 빈틈을 타서 침입하여 멋대로 노략질을 하려 하였으니, 이제부터는 변방 장수는 전의 조령(條令)을 빠짐없이 알고 농민 장정을 골라, 밤에는 산에 오르고 낮에는 해가 뜬 후부터 망을 보면서 농사에 종사하게 하라.” 하였다. 야인 20여 명이 여연(閭延) 조명우 구자(趙明于口子)에 침입하여 아군 전사자 3명을 내고, 적은 화살을 맞은 자가 많았는데, 김윤수(金允壽)가 군사를 거느리고 추격했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에게 유시하기를, “경이 전날 서울에 와서 친히 아뢰기를, ‘이징옥(李澄玉)이 본부(本府) 부근에 살면서, 알타리와 범찰등의 동족(同族)을 거느리고 번(番)을 갈라 지키게 하여, 조금이라도 모인다는 소식이 있으면 그들을 거느리고 변에 응한다.’ 하였는데, 이제 내가 생각하니, 그들이 얼굴은 사람이나 짐승의 마음을 지닌 무리라, 두 마음을 품고 있어 믿기 어렵다. 얽매어 두고 잘 다독거려서 오면 후히 대접하고 가면 좇지 않을 뿐이니, 심복으로 하여 친하고 믿고 일을 같이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은 니마거마(尼亇車馬)와 원수이므로 만약 도당을 지어 원수를 갚는다 핑계하고 쳐들어왔을 때, 혹시 잡아서 주거나 혹은 방관하고 구하지 않는다면, 전날의 믿고 친하던 뜻을 저버릴 것이요, 만약 군사를 일으켜 구원한다면 또 다른 적을 만들게 될 것이니, 이제부터는 그저 얽매어 두고 어루만져 도와주며 성심으로 대접하되, 그들과 더불어 군사를 가까이하며 일을 같이하지는 말아서, 뒷걱정을 없이 하는 것이 실로 좋은 계책이 될 것이다. 다만 이미 군사의 일을 같이하던 것을 하루아침에 이유 없이 갑자기 끊어 버리고, 저들과 우리와의 분별을 엄하게 하면, 반드시 의심을 가질까 염려스러우니, 이런 뜻을 드러내지 말고 은근히 타이르기를, ‘나라에서 너희 무리를 동정하고 있는데, 저절로 나고 자라서 본래 딸린 데가 없어, 복역(服役)으로 뛰어다니는 괴로움을 모르던 너희에게, 이제 나라가 차마 복역의 일을 시킬 수가 없어 편안히 생업에만 종사하게 하니, 너희들은 마땅히 나라가 너희들을 대접하는 지극한 뜻을 알아, 안심하고 생업을 즐기고 길이 살아가는 즐거움을 누리라.’ 하라. 그러나 변방의 일이라 멀리서 헤아리기는 어려우니, 반드시 변장(邊將)이 이해(利害)를 목격하기를 기다린 뒤에 빠짐이 없는 계책을 세운다면 반드시 일을 이룰 것이니, 이징옥과 잘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또 유시하기를, “장수가 되는 도리는 싸움을 좋아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무게를 지님을 귀하게 여기니, 역사의 기록을 상고하면 뚜렷이 알 수 있다. 우선 조(趙) 나라의 장수 이목일(李牧一)에 관한 일을 말해 보면, 이목일이 안문(雁門)에 있을 때에 사졸(士卒)들에게 음식을 주어 말 타기와 활쏘기를 연습시키고, 봉화(烽火)를 삼가고 간첩을 많이 썼다. 사졸과 약속하기를, ‘흉노(匈奴)가 쳐들어오면 곧 들어와 모여서 지키고 나가서 싸우는 자가 있으면 목 베겠다.’ 하였더니, 오랑캐가 이목일을 겁쟁이라 하였다. 조왕(趙王)이 노하여 다른 사람을 장수로 임명하였는데, 오랑캐가 오면 매양 나가 싸웠으나 번번이 불리하여 손해가 많았다. 조왕이 이에 이목일을 다시 기용하여 장수로 삼았더니, 옛날 따르던 변방 병사들이 모두 한 번 싸우기를 원하였으므로, 이에 이목일이 적을 크게 무찔러 흉노 10여 만 명을 죽였으며, 이로부터 오랑캐가 다시는 변경을 침범하지 아니하였다. 그 밖에도 굳게 지키는 것이 이롭고 적을 가볍게 여김이 해가 된다는 것은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 이번 급보에 의하면, ‘홀라온(忽剌溫)이 변경 침범을 꾀하므로 백성들을 함께 다 모아서 지키고, 적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들을 말끔히 하여 대비하고 있겠다. 그러나 여러 날 행군에 지친 적이 우리 경내에 침입한 것을 지키기만 하고, 공격하지 않는 것은 겁 많고 약한 자의 짓에 가까우므로, 정예(精銳)를 뽑아 적당한 기회에 쳐서 침범당하는 걱정을 길이 없애고자 한다.’ 하니, 그 계책이 참으로 좋도다. 그러나 변방을 지키는 계책은 봉화(烽火)를 삼가고 척후(斥候)를 행하는 것만 같지 못하니, 적이 쳐들어올 때에는 우선 모여서 지키고 진지를 튼튼히 하며, 말끔하게 하여 놓으면 적이 들어와도 소득이 없을 것이다. 그들이 험한 산천을 여러 날 뛰어다니는 것은 헛된 수고가 될 것이니, 후일에 침략하는 일이 거의 없어질 것이다. 혹시 적의 강하고 약함을 헤아리지 않고 그저 한번의 결전을 꾀하다가 만일 실패하게 된다면 그 해(害)는 적지 않을 것이다. 약한 군사를 가지고 강적에 대하고 소수로써 다수의 적을 무찌르는 것은 비록 전단(田單) 의 기묘한 계책이 있다 손치더라도, 한때의 요행에 지나지 않는 것이요, 결코 승리하는 만전의 계책이 아니니 본뜰 것이 못 된다. 적의 강약을 알고 우리의 많고 적음을 헤아리어, 우리에게 만번이길 승산이 있고 적에게 반드시 패할 형세가 보인다면, 뜰 안의 도적을 잡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기묘한 계략으로 임기응변을 내어 한척의 수레도 돌아가는 일이 없게 하여, 시랑과 같은 마음을 징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만약 국경 밖에까지 추격하여, 무력을 다하면서까지 토벌하기를 한(漢) 나라 왕실의 위곽(衛霍) 이 한 것처럼 하는 것도 나의 소망이 아니니, 옛사람의 성패(成敗)를 거울삼아 만전의 계책을 도모하라.” 하였다.
○ 18년 여름 5월에 올량합의 5백여 기(騎)가 조명우 구자(趙明于口子)에 침입하여, 남녀 14명을 사로잡고 마소 85마리를 약탈해 갔다. 병조에서 아뢰기를, “연변(沿邊)의 고을에 모두 목책(木柵)을 세우고 밤에는 관리가 순찰하여 굳게 지키며, 낮에는 망을 보고 나와서 농사를 짓게 하여, 방어의 방략과 국경을 정하는 일을 이미 극진히 하였는데, 이번에 적 5백여 기가 사람과 가축을 노략질해 갔으니, 청컨대, 이각과 김윤수가 막지 못한 죄를 다스리소서.” 하였더니, 임금이 따랐다. 그때 야인이 원한을 품고 을묘년 이후 매년 침략하였으므로 변방 고을이 떠들썩하였다. 병조에서 아뢰기를, “군사의 일은 멀리서 지휘하기 어렵사오니, 모름지기 변방 장수에게 맡겨서 처리하도록 해야 공을 이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평안도의 변방 방비의 일을 해마다 대신을 보내어 처리하게 하여, 도절제사(都節制使)로서는 무엇을 해볼 수 없으니, 어찌 계획이 서로 모순되는 일이 없겠습니까. 또 군사의 명령이 나오는 곳이 많아서 사졸이 어느 것을 따라야 할지 몰라, 변방 일이 늦어지고 해이해져서 침략을 당할 때마다 추격하여도 잡지 못하오니, 이 뒤로는 찰리사(察里使)와 부사(副使)를 보내지 마시고, 오로지 도절제사에게만 책임을 지워서 효과를 거두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 말을 따랐다.
○ 6월에 병조 판서 최사강에게 명하여 이만주가 보낸 임납노(林納奴)에게 예조를 통하여 유시하기를, “너희들이 우리 변방에 침입한 것을 홀라온이 한 것이라 하니, 그 말이 과연 사실이라면, 홀라온이 살고 있는 곳은 우리나라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또 다른 곳으로 왕래할 길이 없어, 반드시 너희들의 고장을 거쳐야 하는데 너희가 어찌 모르겠으며, 더구나 침입할 때에 걸어온 자가 수십 명이나 되니, 홀라온이 어찌 험한 길을 무릅쓰고 먼 데까지 왔겠느냐. 이에 너희들이 거짓임을 알 수 있으므로, 변방 장수가 정예로운 기병 10만으로 너희 소굴을 철저히 수색하여, 너희들의 난폭한 짓과 속인 죄를 묻기를 청하였으되, 전하께서 너그러이 용서하고 끝까지 추격하지 말게 하였다. 만약 죄악이 차고 쌓이면 스스로 멸망을 취하게 될 것이니 뉘우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교시하기를, “우리나라는 동쪽은 섬 오랑캐와 이웃하고, 북쪽은 야인과 접하고 있어, 그들을 어루만지는 도리와 방어하는 방법이 지극하지 않음이 없었다. 지난번의 함길도(咸吉道)의 일로 말하면, 경인년에 알타리 등이 감히 멋대로 날뛰어 경원(慶源)을 침략하여 양민을 죽이고 해(害)가 진장(鎭將)에까지 미쳤으므로, 태종께서 장수에게 명하여 토벌하였더니, 그들이 마침내 낯빛을 고치고 순종하여, 그들의 땅을 가지고 조정에 오는 자가 그치지 않은 지가 이제 거의 30년이 되어간다. 평안도 일대는 지방이 평안하고 조용하여, 평소에 좀도둑의 걱정이 없었는데, 임자년 겨울에 이만주 등이 여연(閭延) 등지에서 잔학한 짓과 침략을 멋대로 하였으므로, 종묘에 고하고 장수를 보내어 죄를 다스리고, 그 완악한 자들을 섬멸하고 남녀를 잡아서 돌아왔었다. 그들을 마땅히 멸종(滅種)의 죄로써 다스려야 하였지마는, 내가 생각해보니, ‘오랑캐는 짐승이다. 그러니 그 땅을 얻어도 쓸데가 없고, 그 사람을 얻어도 백성으로 만들 수 없으며, 또한 한때의 조그마한 사건을 가지고 수십 년 동안을 어루만져 온 신의를 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 하여, 그 사로잡은 남녀들을 본토로 데리고 돌아와 편안히 살게 하였다.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쌀을 팔기를 원한다면 팔게 하여 후하게 대접하여, 어루만져 주는 은혜를 전날의 배나 더하였다. 또 무장(武將)을 뽑아 변방 소임을 맡기고, 남도(南道) 사졸로 하여금 번갈아 가면서 지키게 하고, 해마다 대신을 보내어 방법과 계책을 세우면서 그 방어하는 계책에 빠진 것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만주가 짐승의 마음을 버리지 않고 항상 개나 쥐새끼 같은 생각을 품고, 을묘년 정월에 여연(閭延)의 구자(口子)의 읍성을 침략하고, 7월에는 다시 훈두(薰頭)와 조명우(趙明于) 두 구자(口子)에 침입하여, 농민과 마소를 죽이고 잡아가고 하여 악독한 짓을 멋대로 함이 이와 같으니, 어찌 통분하지 않겠는가. 어찌 막는 방법과 어루만지는 마음이 미진함이 있어서가 아니겠는가. 동서반의 사품(四品) 이상의 관원으로 하여금 능히 막을 계책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봉장(封章)을 올리도록 하라. 내가 친히 보리라.” 하였다.
○ 이천(李蕆)을 평안도 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를 삼고 사정전(思政殿)에 불러들여 보고 어구마(御廐馬) 한 필을 내렸다. 윤6월에 병조에서 아뢰기를, “평안도 수령들이 각각 군졸을 거느리고 차례로 연변 방어에 나아가는데, 공급에 따른 물자를 가득 실은 말이 7,80필이나 되오며, 따라가는 마부도 백 명이 넘사오니, 이제부터는 수령이 군졸을 친히 점검하고 각군에 1천 호씩을 주어 거느리고 가서 방비하게 하되 도절제사는 사찰을 엄격히 하고, 경중(京中)에서 보내는 군사는 상호군(上護軍) 중에서 무략(武略)이 있는 자를 뽑아서 거느리고 가서 방비하게 하되, 도절제사의 의견을 듣게 하고, 때로 조관(朝官)을 보내 순찰하여 상과 벌을 정하게 하소서.” 하였더니, 임금이 좋다 하고, 이천에게 유시하기를, “한 줌도 못 되는 흉측하고 추악한 무리가 우리의 큰 은덕을 잊어버리고 해마다 침노하니 그 죄가 차고도 남는다. 여러 신하와 막료(幕僚)들이 그들의 죄를 묻는 군사를 일으키려 함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흉년이 들어 백성이 굶주리는 것을 생각하여 오직 변경을 굳게 지키기만 하고, 위엄으로 누르면서 덕으로써 회유(懷柔)할 뿐이었다. 그래서 변방 장수들이 적이 지난날의 잘못을 생각지 않고 신의(信義)로써 대접하여 왔는데, 방비가 약간 늦추어진 틈을 타서, 저들이 혹은 강가나 험한 산이나 우거진 수풀 속에 숨어서 밤낮으로 엿보다가, 때를 보아 침입하여 백성을 죽이고 잡아가고 하니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다. 의견을 아뢰는 이가 있어, 말하기를 ‘여연(閭延) 등지는 몹시 춥고 길이 험하여, 겨울철에는 한 마리의 말을 먹이는 여물과 콩의 비용이 몇 사람을 먹이는 비용의 배나 든다. 비록 좋은 말이라 해도 땅이 좁고 길이 험하여 적을 만나도 달리고 뛸 곳이 없으니, 차라리 건장하고 용감한 보졸(步卒)을 뽑아 방비에 충당하면 먹이에 대한 수고도 없애고 방어의 효과를 거두게 되어 좋다.’ 하는데, 이 말이 어떠한가. 적을 제압하고 방어하는 일을 전적으로 경에게 맡기노니, 경도 나의 마음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군사에 관한 일은 멀리서 지휘하기는 어려운 것이므로, 이제 적을 제압 방어하는 계책을 중외(中外)에서 구하여 그 중에서 이용할 만한 것을 적어서 밀봉하여 보내노라. 비록 때에 알맞게 조처하는 방법에는 맞지 않는 것이 많으나, 이용할 만한 계책과 실행할 만한 일도 있을 것이니, 경만 혼자서 보고 그 뜻을 세밀히 연구하여 밤낮으로 깊이 생각하고, 만일 좋은 계책이 있거든 계획하여 아뢰라.” 하고, 또 박안신(朴安臣)에게 유하기를, “한 지방을 방비하는 방법은 오로지 도절제사에게 맡겼으나, 성과(成果)를 보고자 하여 방략을 모은 글을 널리 구하여 보내면서 이제 다시 생각해보니, 적을 제어하는 방법은 비록 도절제사가 위주로 할 것이나, 경도 함께 살펴야 하니 역시 몰라서는 안 되겠으므로 또 한 벌을 베껴 보내노라. 이번에 중론이 분분하여 비록 때에 알맞게 조처하는 방책이 아닌 것도 있을 것이나, 역시 쓸 만한 것과 못쓸 만한 계책이 있을 것이니, 경은 밤낮으로 잘 생각하여 도절제사와 더불어 성심성의로 토의하여 의논을 모아 아뢰라. 비록 의견이 같지 않은 점이 있어도 각기 자기의 소견을 적어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 가을 7월에, 함길도 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 정흠지(鄭欽之)에게 유시하기를 “근래, 야인이 해마다 변방을 침범하는데, 혹자는 말하기를 ‘이만주가 홀라온에게 병력을 청하여 함께 와서 침략한 것이다,’ 하고, 이만주는 말하기를, ‘홀라온이 한 짓으로, 나는 거기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우리 파저강(婆豬江) 가에 사는 사람도 노략질을 당하였다’ 하니, 나는 변경에 침입한 자가 누구인지를 모른다. 그 도(道)에 사는 올량합(兀良哈)ㆍ알타리(斡朶里)ㆍ올적합(兀狄哈) 등이 홀라온과 서로 통하는 자가 응당 많을 것이다. 그러므로 도절제사 김종서(金宗瑞)로 하여금 사람 편에 물어서 그 사실을 파악하려 하였더니, 이제 종서가 아뢰기를, ‘알타리ㆍ 원문빠짐 수(水)ㆍ올량합ㆍ복아한(卜兒罕) 등의 말에 의하면, 홀라온ㆍ올적합ㆍ사매합(沙眛哈)ㆍ내이거(乃伊巨)ㆍ모독호(毛禿戶) 등이 5월 5일에 파저강을 나와서 사매합은 여연에 침입하고, 내이거와 모독호는 이만주가 있는 곳을 침략하였다고 하옵는데, 두 사람의 말이 입은 달라도 말은 같으나, 서로 혼인관계를 맺고 있어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함께 할 것이 뻔하니, 그 말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옛날 적국과 상대하는 자는 반드시 적국의 정상과 허실, 도로의 굽음과 곧음, 험하고 평탄함 등을 알았습니다. 우리 편을 위하는 계책으로서는 간첩을 잘 이용하는 것뿐입니다. 사매합ㆍ내이거ㆍ모독호 등이 같이 군사를 일으켜 2군으로 나누어서 하나는 우리를 침범하고, 다른 하나는 이만주를 침범했는데, 거기에는 반드시 사정이 있었을 터이니 그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만주가 우리에게 원한을 품고 홀라온에게 군대를 청한 것은, 속으로는 마음을 같이하지만 겉으로는 서로 원수처럼 대하는 것으로서, 그 실정을 숨어 나타내지 않으니, 그것도 몰라서 안 되겠습니다. 홀라온이 사는 곳의 산천이 험하고 평탄함과, 부락의 많고 적음과, 병정의 강약과 허실, 우리와의 거리의 멀고 가까움, 도로의 굽음과 곧음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랑캐들의 성품은 욕심이 많으므로 잇속으로 꾀면, 아비와 아들 사이에서도 그 사정을 알아낼 수가 있습니다. 만약 올량합과 알타리 중에서 홀라온과 인연이 있는 사람을 구하여서 뇌물을 후하게 주어 그 마음을 사고, 또 우리나라 통사(通事) 중에서 조심성 있고 치밀한 자를 뽑아 그들의 옷을 입히고 왕복의 여비를 두둑히 주어서 함께 홀라온에게 보내어 시일(時日)을 제한하지 않고 마음대로 갔다 오게 하여 저들의 정상을 염탐하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를 수년 동안 하면 저들의 형편을 남김없이 알게 될 것입니다.’ 하니, 종서의 이 계교가 참으로 좋다. 이제 정부 대신들과 의논하니, 어떤 이는 말하기를, ‘오랑캐와 알타리중에서 홀라온과 인연이 있는 자는 진실로 만나기 어렵고, 비록 만난다 하더라도 그 마음을 헤아리기는 어려우며, 또 통사를 보냈다가 실패하여 탄로난다면, 실로 위험한 계교입니다.’ 하고, 어떤 이는 말하기를, ‘옛날부터 적의 정상을 알려면 모름지기 간첩을 이용해야 한다고 했사온데, 비록 홀라온에게 직접 통하지는 못한다손 치더라도, 어떤 일을 핑계 삼아 이만주ㆍ심납노ㆍ임합라 등에게 잇따라 가서 몰래 물건이나 돈을 그 관하(管下) 사람에게 주면, 그는 반드시 세 곳의 말을 낱낱이 듣고 올 것이오니, 그것을 검토하면 그들의 실정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변방 방어가 비록 준비되었더라도, 저들의 허실을 모르면 장님과 귀머거리 같으므로 예부터 반간(反間) 을 이용하여 그 계획을 마음껏 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통사로서 함께 일을 꾀할 만한 사람이 적으니, 만일 실패하여 탄로가 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홀라온과 파저강의 야인 중에서 서로 친하고 우호적이어서 함께 일을 꾀할 만한 자를 뽑아 그 처자를 넉넉히 도와주고 재물을 후하게 주어서 보내고, 공이 있으면 또 후히 상을 주어, 서로 다투어 반간이 되게 하면 적의 모의(謀議)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여 의논이 분분하여 그 요점(要點)을 잡을 수가 없다. 내 생각에는 이만주가 해마다 자주 침입하여 무고한 백성을 죽이고 잡아갔으니 마땅히 토벌해야 하겠으나, 흉년을 만나 많은 사람을 동원할 수가 없어 잠깐 생각 밖에 두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예부터 군사가 적을 대하여 싸우려 할 때에는 반드시 간첩을 이용하였다. 그렇지 않고서는 적정을 알 수 없어 임기응변으로 일을 처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만주가 여러 번 변경을 침범하고는 홀라온이 한 짓이라고 핑계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 실정을 몰라 그의 술책에 빠진 것 같으니, 반드시 김종서가 말한 바와 같이한 뒤에라야 지키든지 치든지 간에 계책을 세울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통사 중에 조심성 있고 치밀한 자가 많지 않으니, 혹시 잡힌다면 왕숭(王嵩)이 원호(元昊)에게 매를 맞고 괴로움이 극도에 달하여 거의 죽게 되어서도, 끝내 말을 바꾸지 않는 것과 같이 할 자가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저 홀라온이 잡아 머물러 두고 온갖 방법으로 위협을 하면 반드시 간첩이라는 실정을 실토하여 변경에 대한 계획을 누설할 것이요, 홀라온의 수천 군중이 소요(騷擾)를 일으킬 것이다. 옛날의 장군들은 적을 이용하여 적정을 알아내는 일이 많았다. 저 야인은 의리를 모르고 본성이 재물을 탐하므로, 접경(接境) 지대에 있는 야인으로서 홀라온과 파저강에 인연이 있는 사람을 골라서 그 처자를 후하게 도와주고, 그로 하여금 사사로이 왕래하게 하면 몇 해가 안 되어서 홀라온과 이만주의 실정을 모조리 알게 될 것이다. 만일 잡히더라도 우리가 공격하여 토벌할 기세가 없고, 저들 역시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바에야 우리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겠는가. 경은 김종서와 이징옥과 편리할지 않을지의 여부를 잘 의논하여 자세히 아뢰되, 만일에 다른 계책이 있거든 숨기지 말고 아울러 아뢰라.” 하였다. 흠지(欽之)가 계책을 아뢰기를, “좋은 장수는 간첩을 잘 이용하여 적정을 알고, 군령을 엄격히 해서 우리의 계획을 비밀히 하여야 하오니, 정보를 먼저 아는 자는 이기고, 모르는 자는 패하는 것은 예나 이제나 늘 있는 일이오며, 병법(兵法)에도 이르기를, ‘몇 해 동안을 지키다가 하루의 승리를 다투어 작록(爵祿)과 백금(百金)을 받는다. 적정을 모르는 자는 장수가 아니며 임금을 보좌하는 신하가 아니며, 승리의 주인이 될 수 없다.’ 하였사오니, 바로 이것을 이른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사면이 모두 적과 경계하고 있고 동쪽과 남쪽은 큰 바다여서 저절로 전함(戰艦)으로 쳐들어옴을 대비하였으므로 왜가 걱정을 끼치지 못함이 거의 50년이 되어 갑니다. 그런데 서쪽과 북쪽은 적의 소굴과 경계가 접해 있고, 왕래를 막는 데가 없어 도로의 굽음과 곧음, 산천의 험하고 평탄함 등을 모르는 데가 없이, 가만히 엿보다가 틈을 타서 침입하여 약탈해 가지 않는 해가 없습니다. 여러 진(鎭)을 지키는 장수가 침입해 오는 것을 알지 못하면 어떻게 기일에 미처 변에 대응할 수가 있겠습니까. 서쪽은 압록강 이북, 동쪽은 두만강 이북의 산천의 험하고 평탄함과, 도로의 구불고 곧음 등과 아울러 적의 허실(虛實)을 비록 변방에 오래 산 경험이 있는 장수와 노련한 병졸일지라도 잘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 하물며 그 나머지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이야말로 지리를 모르는 군사가 먼저 지리를 잘 아는 적을 대하는 것이므로, 늘 저들에게 꺾이었던 것입니다. 이번의 급변은 이만주에 대해 아는 것이 없고, 또 범찰(凡察)과 홀라온이 서로 화살로 편지를 보내어 몰래 결탁한다는 말이 있으니 그 실정을 몰라서는 안 됩니다. 마땅히 임금님의 계획에 따라 접경에 있는 야인으로서 홀라온과 파저강에 인연이 있는 자와 비밀리에 모의하여 후한 잇속으로 구슬러서 그 처자에게 뇌물을 주고, 그로 하여금 친척이나 사돈과 만나본다는 핑계로 사사로이 왕래하면서 몰래 그 실정을 알아보게 하되, 이렇게 하기를 2ㆍ3번 하면 거의 두 곳의 정상을 모조리 파악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시세에 적합할 뿐만 아니라 또한 옛사람의 간첩을 이용하는 취지에도 맞는 것입니다. 신들의 소견에도 본래 다른 계책이 없사오며, 또 야인 중에는 홀라온과 파저강에서 인연이 있는 자도 있습니다마는, 서두르면 일이 이루지지 못하오며,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혹 형적(形迹)을 남길까 염려되오니, 형적을 없애야만 간첩을 이용하는 방법이 성공하는 것입니다. 이징옥에게 그 일을 맡아보게 하고, 김종서가 그 모사를 주관하여 기한을 두지 않고 기회를 보아 잘 꾀하면 계획은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간첩 일은 비밀히 해야 하며, 간첩은 상을 후하게 주어야 하고, 계획은 알리지 말고 돈은 마음대로 넉넉히 쓰게 하는 것입니다. 신들의 얕은 소견은 이것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정부에 의논하니 황희(黃喜)가 아뢰기를, “만일 국경 근처의 야인으로서 그 동족을 배반하고 충성을 우리나라에 보내는 자를 얻는다면 좋습니다. 그러하오나 야인의 본성이 배신을 잘하여 믿기 어렵사오니, 만약 먼저 우리 나랑 사정을 저들에게 알리고 도리어 허황된 말을 우리나라에 알리게 된다면 이로움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손해가 됩니다.” 하였고, 참찬 하연(河演)이 아뢰기를, “지난날 왜적이 창궐할 때에 나라에서 윤명(尹明)의 무리를 얻어 쌀과 돈을 많이 주어 적의 소굴에 왕래하면서 혹은 장사도 시키고 혹은 괴수에게 물건을 보내고 하였더니, 적이 잇속을 탐내어 침입하지 않았으므로 백성들이 평안할 수가 있었으니, 이것은 이미 지난날 실지로 있었던 사실입니다. 이제 임금님 말씀대로 접경에 사는 야인으로서 평소에 서로 왕래하는 자를 얻어 그 지방에서 귀하게 여기는 물건을 주어 반간 행세는 하지 말게 하고, 오로지 장사를 하면서 서로 화목해야 한다는 말만 힘써하게 하면, 잇속을 구하여 왕래할 자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는 반간이면서 저들의 실정을 잘 알게 될 것이오며, 비록 잡히더라도 저들이 두 마음임을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더니, 곧 정흠지와 김종서에게 유시하기를, “이번에 경이 올린 계획은 매우 좋다. 여러 대신들과 의논하였더니 혹은 좋다 하고 혹은 안 된다고 하여 의논이 분분하였으나, 나는 생각하기를, 저들과 인연이 있는 자를 간첩을 시키되, 우리나라의 실정을 잘 아는 자는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없으니 도리어 우리나라의 비밀을 누설할 염려가 있으므로 해로워서 불가할 것이 환하니, 반드시 자신이 간첩임을 모르게 한 뒤에라야 할 것이다. 이제 저들과 인연이 있는 야인을 뽑아, 사사로운 일로 인하여 반간을 행하되, 그로 하여금 후한 상을 탐내게 하고, 제가 반간이 된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하게 한다면, 저들은 실정을 숨기지 않을 것이니, 우리는 그 계획을 시행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 상줄 돈을 경들이 의논하여 재량껏 마련해서 처리하라.” 하였다.
○ 9월에 홀라온과 가은독(家隱禿) 등이 회령에 침입하여 남녀 9명과 말 한 필을 노략질하여 갔다. 이징옥이 부하 장교 손효은(孫孝恩)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추격하게 하고, 범찰(凡察)의 관하가 역시 뒤를 쫓았다. 무아계(無兒溪)에 이르러 가은독의 아우 탕기(湯其)와 수고(愁古) 등 2명을 잡고, 노략당하였던 사람과 말을 탈환하고, 정흠지ㆍ김종서가 가은독ㆍ탕기 등을 베었다. 정흠지ㆍ김종서ㆍ도순무사(都巡撫使) 심도원(沈道源)에게 유시하기를, “옛날부터 오랑캐와 더불어 일을 같이한 사람은 늘 화를 입었고 복을 입은 적이 없다. 그러나 오랑캐로써 오랑캐를 공격하게 하면 중간 나라의 이익이다. 범찰이 국경 안에 살면서 적이 침입하였다는 말을 듣고 원군을 청하지도 않았는데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갔으니, 비록 그 마음을 모른다 치더라도 그것을 힘써 충성을 다한 것이다. 적들이 원한을 품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군사를 거느리고 왔으며, 또 관하 사람으로 하여금 관군에게 길을 알려주게 하여 곧 적을 잡고 노략당한 사람과 물건을 탈환하였으니 상주지 않을 수 없다. 범찰에게 옷 한 벌을 주고, 관하 10명에게도 각각 옷 한 벌씩, 그 길가에 살면서 알타리를 따라간 자에게도 무명 각각 1필씩을 내리노라. 그러나 변방의 일이라 멀리에서 헤아리기 어려우니, 위에 적은바 내린 상이 더하고 덜할 필요가 있거든 경들이 잘 생각하여 시행하라.
또 무아계에서 회령까지는 1백 20리이며, 보아하(甫兒下)와 길가 좌우 알타리에 흩어져 사는 자가 많은데, 가은독 등이 만약 내응(內應)하는 사람이 없었다면 어찌 곧장 들어가 노략질을 할 수가 있었겠느냐. 그러나 만약 검색을 하면 소동을 일으킬까 염려되고, 또 사로잡은 적도 근래에는 없으니 이제 경이 잘 계획하여 잡아들이는 데만 힘쓰지 않도록 하라. 다만 요즈음 홀라온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있는데, 여러 날 가두어 두고 그 무리를 국문하지 아니하면 홀라온 사변에 비칠 것이다. 경들은 일찍이 조정에 있어 국가 대사에 참여하지 않은 일이 없으므로, 사리의 완급(緩急)에 대하여 정통하지 않음이 없을 터이니, 사유를 묻지 않고 긴급히 처형하는 데는 반드시 부득이한 사태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고, 이에 정흠지ㆍ심도원ㆍ이징옥ㆍ 김종서에게 옷과 술을 내리었다.
○ 김종서가 급히 아뢰기를, “올적합 3천여 명이 와서 경원(慶源)을 포위하였으므로, 판관(判官) 이백경(李白慶)과 호군(護軍) 우안덕(牛安德)이 나누어 나아가 협공하여 적의 머리 셋을 베었읍니다. 도진무(都鎭撫) 조석강(趙石剛)의 원병이 오자 적이 조금 퇴각했으므로, 추격하여 두만강에 이르렀는데 날이 저물어 돌아왔습니다.” 하였다.
○ 겨울 10월에 박안신(朴安臣)과 이천(李蕆)에게 유시하기를, “요즈음에 야인이 자주 변경을 침략하는데, 조정의 의논은 파저강 야인이 홀라온을 꾀인 것이라고 하나, 이제 와서 보건대, 비단 파저강 야인 때문만은 아니다. 지난날 저들이 우리 노루목[獐項] 목책을 포위하였을 때에 우리가 비록 모조리 섬멸하지는 못했으나 저들이 잃은 인마 역시 많았었다. 여연(閭延)에 침입하여서도 실패하고 돌아갔으니, 그들의 보복하려는 생각이 시끄럽게 그치지 않은 것도 알 만한 일이다. 어찌 다만 파저강 야인이 군사를 청해서만 그렇게 된 것이겠는가 홀라온이 회령에 이르기까지는 도로가 평탄하고 또 가까웠었다. 9월에 3천여 명이 뜻하지 않은 때에 나와서 멀리 험한 길을 경유하여 와서 경원(慶源)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지키던 장수가 군사를 내어 적의 머리 셋을 베고 추격하여 두만강에 이르니, 적이 엎어지고 자빠지면서 강을 건넜으니, 그들의 보복하려 날뛰는 정상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함길도(咸吉道) 연변의 네 고을은 이미 수비가 되어 있고, 도내(道內)의 여연(閭延)ㆍ자성(慈城)ㆍ강계(江界) 등지의 수비도 튼튼하니, 그들은 반드시 이 틈을 타서 의주(義州) 등지로 달려들어 방비가 없는 곳을 엄습할 것이다. 창성(昌城) 이하 의주 등지에 영을 내려 수비를 더욱 엄하게 하여 후회가 없도록 하라.” 하였다.
○ 정흠지와 김종서에게 유시하기를, “이제 정부 대신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용성(龍城)은 새로 설치한 네 고을의 요충 지대이니 경성(鏡城)을 여기에 옮겨서 도절제사의 본영을 삼아 사방으로 통하는 요충을 지키게 하는 것이 매우 사리에 합당합니다. 또 이 고장은 옛날에는 인구가 조밀하고 곡식이 잘되던 곳인데, 네 고을을 새로 설치한 뒤로부터 백성들이 모두 옮아가 비옥한 땅이 도리어 풀밭이 되어 버렸습니다. 도절제사를 보러 오는 야인들이 길이 이 고을을 경유하게 되니, 허술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물며 지금의 경성은 성이 낮고 작으며, 영청(營廳)의 관사가 작고 좁으니, 지금 행영(行營)을 고쳐야 하겠지마는, 그 역사가 번거로우며 또 수재(水災)가 있으니, 도절제사의 본영을 용성(龍城)으로 옮기어 경성부(鏡城府)로 삼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그렇게 되면 군사ㆍ관리ㆍ노비들을 옮겨와 살게 하고, 각 도의 군민(軍民)을 아울러 용성들에 흩어져 살게 하면, 머지않아 번창할 것을 곧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고 한다. 그러나 변방의 일을 멀리서 짐작하기 어려우니 잘 생각하여 아뢰라.” 하였다. 정흠지가 아뢰기를, “신이 가만히 보건대, 경원부가 부거(富居)에 있을 때에는 용성은 실로 북쪽 변방으로서 적이 내왕하는 요충 지대였으나, 이제 이미 네 고을을 두었으니, 경성과 용성으로부터 황절벌(黃節伐)과 석막(石幕)에 이르기까지가 모두 내지(內地)가 되었고, 경성에서 서쪽 4,5리에 보동(甫洞)이 있는데, 이곳은 곧 동북쪽에 있는 적이 나다니는 지름길이니, 적이 만일 빨리 달려온다면 이틀이 못 되어서 성 밑까지 이를 것입니다. 경성이 비록 성이 낮고 영청 관사가 좁아서 지금 행영을 바꾸어야 한다 하지마는, 옛날부터 있던 굳은 성에 의거하고 이미 지은 관사를 수리한다면, 용성에 새로 옮겨서 가시밭을 헤치고 새로 관사를 짓고 성보(城堡)를 쌓는 것에 비하여 그 공역(功役)이 어렵고 쉬움과 크고 작음을 같이 논할 바가 아니옵니다. 금년 8월에 신이 경성에 가서 자를 가지고 그 성을 재어 보았더니, 둘레가 2천 9백 4자이고, 높이가 12자나 되오며, 그 성이 비록 작다고 하오나 쌓은 뒤에 아직 한번도 무너진 적이 없사오며, 또 산성(山城)이 있어 읍성(邑城)과의 거리가 2ㆍ3리 밖에 안 되옵고 창고도 모두 있었습니다. 우뚝이 마주 솟아 깃발이 서로 바라보이고 북과 나팔소리를 서로 들을 수 있어, 적의 침입을 막는 요충으로서 이른바 기각(掎角 서로 협력한다는 뜻)의 형세입니다. 비록 수재(水災)가 있다고 하지만, 그 물은 질펀하게 흐르고 제방이 매우 평탄하니 성에 해가 되지는 못합니다. 하물며 경성에서 길주(吉州)까지가 2백 49리나 되어 이미 먼데, 만약 용성으로 옮기면 서로의 거리가 3백여 리나 되오니, 관리와 백성이 입는 폐해가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각 도에서 새로 이사 온 사람들을 용성으로 흩어져 가게 하면 꼭 행영을 옮기지 않아도 몇 해 뒤에는 용성의 들이 저절로 번성해질 것입니다. 네 고을을 설치하기 전에 주장(主將)의 본영을 용성에 옮기지 않고도 수십 년의 오랜 세월을 지내면서 오늘에까지 이르렀는데, 이제 용성을 지나 나흘이나 걸리는 곳에 강을 따라 진을 설치해서, 용성의 남쪽과 북쪽이 모두 내지(內地)가 되었으니, 작은 이익을 위해서 하루아침에 오촌(烏村)의 당당한 두 성을 버리고, 백성들의 이미 안정된 생업을 옮기고, 적들이 침입하는 요충을 소홀히 하면서까지 그만두어도 좋은 큰 역사(役事)를 일으키려 하시니, 이것이 신에게는 이해가 안 되는 일이옵니다. 또 이 도에다가 성을 쌓는 것은 다른 도에 비하여 그 어려움이 10배나 되오니, 회령의 한 성을 보더라도 백성들의 노고와 마소가 지쳐서 죽는 실태는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네 고을이 비록 설치되었다 하오나 종성과 용성에는 아직 성을 쌓지 않았으며, 역사에 피로한 백성들이 아직 소생하지 못했으니, 지금의 계책으로 마땅히 백성의 힘을 아껴 기르고, 농사에 힘써 곡식을 저축하여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서, 종성과 용성에 시기에 맞추어 성을 쌓을 것이요, 다시금 다른 일을 의논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하였다.
○ 임금이 정부에 의논하기를, “내가 젊었을 때는 혈기가 왕성하고 생각이 주밀하였으나, 근래에는 기운이 쇠약해지고 생각이 자꾸 섞갈리어 걸핏하면 불길한 생각이 든다. 이번에 함길도 경원(慶源) 백성이 죽임을 당하고 잡혀가고 했으니 내가 매우 부끄럽게 여기는 바이다. 전에 함길도 백성이 혹은 말하기를, ‘용성(龍城)과 경성을 한계로 해야 한다.’ 하고, 혹은, ‘철령(鐵嶺)을 한계로 해야 한다.’ 하여, 의논이 분분하였으나, 내 생각에는 조종(祖宗)께서 이미 정하신 기업을 가볍게 버릴 수는 없다. 또 그 강토를 줄이더라도 적이 따라와 침범하면 무익할 뿐이니, 옛 지역을 굳게 지키는 것만 같지 못하다. 또 고려 말년에 혹은 용성을 경계로 하고 혹은 종성을 국경으로 했지만, 적들이 더욱 그 잔학한 짓을 멋대로 하였으니, 이것은 지난날에 있었던 사실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끝이 없는 만사 중에 오직 이것이 큰일이로다.’ 하였는데, 이것은 변경을 두고 말한 것이다. 경들은 의당 이에 대하여 생각을 다해야 할 것이다. 또 새로 네 고을을 설치하여 이미 용성의 민가를 옮겨다 채우고, 이제 경상도의 1백 40호, 충청ㆍ전라도에서 각각 1백 20호, 강원도의 52호의 용성을 채우려 하는데, 강원도 관찰사가 아뢰기를, ‘도내에 흉년이 들었으므로 풍년을 기다려 옮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지마는, 내 생각에는 큰일을 하는 데는 조그마한 폐단을 헤아리지 않는 법이다. 하물며 남북 변방의 경계할 일이 아직 그치지 않은 때에, 만약 풍년을 기다린다면 반드시 늦어질 것이고, 또 강원도와 함길도는 땅이 서로 이어 있어 이사하기가 가장 쉬우므로, 강원도는 수효대로 옮기고, 충청ㆍ전라ㆍ경상의 세 도는 농사를 전연 못 지을 것이니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겠느냐.” 하니, 모두 말하기를, “이주한 백성은 모두 그곳 창고에 있는 곡식을 먹을 것 이온데, 함길도에 저축된 곡식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오니, 잠시 그 이민을 반으로 줄임이 좋을까 합니다.” 하여, 그 말을 따랐다.
○ 경상ㆍ전라ㆍ충청ㆍ강원네 도의 관찰사에게 유시하기를, “고향을 떠나기를 달가워하지 않음은 사람의 상정(常情)이나, 한(漢) 나라 이래로 가끔 내지(內地)의 백성을 옮겨다가 변방을 채운 일이 있다. 이번에 함길도에 네 고을을 신설하고 용성과 길주의 백성을 옮겨다 채웠는데, 용성과 길주는 풀이 들에 가득하니 이 길을 지나가는 저 야인들이 보고 어떻다 하겠는가. 안으로는 굳세고 밖으로 정복하는 의리에 어긋남이 있으므로 부득이 네 도의 백성을 옮겨 용성과 길주의 땅을 채우는 것이다. 옮길 때에 굶주리고 추위에 얼어서 쓰러지지 않을까 염려되니, 그곳 수령들은 구호에 힘써 굶주리고 얼게 하지 말 것이며, 병든 자는 더욱 더 잘 구호하여 죽지 않게 하여 나의 뜻에 부응(副應)하라.” 하였더니, 김종서가 아뢰기를, “회령에 돌성을 새로 쌓아 이징옥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고, 그 군사 2백을 김윤수(金允壽)에게 주어 옛 벽성(壁城)을 지키면서 서로 돕게 하오면, 감히 어느 한 성도 적이 가벼이 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두성을 포위하면 군사가 갈라져 세력이 약해질 것입니다. 또한 경원(慶源)과 종성(鍾城)의 읍성(邑城)이 서로 바라보이는 중요한 곳에도 벽성(壁城)을 쌓고 적당히 군사를 갈라 무략(武略)이 있는 장교를 뽑아서 지키게 하되, 역시 서로들 돕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하였더니, 임금이 회답하기를, “이번에 경이 아뢴 일을 대신들에게 의논하였더니 모두 말하기를, ‘회령부가 비록 새로 돌성을 쌓은다고는 하나, 창고가 아직 옛 성(城)에 있고, 옛 성이 아직도 튼튼하고 완전한데, 김윤수에게 주어 지키게 하는 것은 항구적인 계책이 아닙니다. 경원과 경성의 군사 정원이 본래 적은데, 만약 작은 보루(堡壘)를 더 만들어 군사를 나누어서 지키게 되면 병력이 분사되어 방어하기가 실로 어려울 것입니다.’ 하였으니, 경은 그것을 알지어다.” 하였다.
○ 11월에 김종서가 글을 올리기를, “가만히 생각하옵건대, 선비들은 모두 말하기를, ‘오랑캐를 대우하는 도리는, 그들이 오면 어루만지고 가면 쫓지 않아 원한을 맺지 않고 틈이 생기지 않게 한다.’ 고 하며, 또 말하기를, ‘화친을 맺는 것이 소중하니, 이 계교가 성공하면 평안하고 이 계교가 실패하면 위태하다.’고 말하는데, 신도 평소에 항상 그렇게 말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나와서 북호(北湖)를 지키며, 오랑캐와 뒤섞여 살면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 그들의 실정을 살피어 알게 되었는데, 오랑캐는 천태만상(千態萬狀)이어서 한 가지로 딱 잡아서 논할 수가 없습니다. 은혜로써 하지 않으면 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없고, 위엄으로써 하지 않으면 그들에게 두려운 마음을 가지게 할 수 없는데, 은혜가 지나치면 교만해지고 위엄이 과하면 원한을 품게 됩니다. 그러므로 원한을 품고 난을 일으키는 자는 위엄으로 눌러서 감히 난동을 부리지 못하게 하고, 교만하여 환란(患亂)을 일삼는 자를 경멸하면 그 악독한 행동을 더욱 멋대로 하므로, 은혜와 위엄은 그 어느 하나에 치우쳐도 안 되고 어느 하나를 버려도 안 됩니다. 우(虞) 나라가 묘족(苗族)을 치고, 은(殷) 나라가 귀방(鬼方)을 치고, 주(周) 나라가 오랑캐를 응징하고, 한(漢) 나라가 흉노(匈奴)를 토벌하고, 당(唐) 나라가 돌궐(突厥)을 정벌하였는데, 저 성제(聖帝)와 명왕(明王)들이 어찌 모두 싸움을 좋아하여 그리하였겠습니까. 부득이하여 쳤을 뿐입니다. 이제 경원(慶源)의 적은 대부분 수빈강(愁濱江)의 올량합인데, 그들이 우리 국경 가까이 있어 우리나라의 고기와 소금을 먹으며, 우리의 무명과 비단을 입으면서, 하루아침에 우리의 큰 은덕을 잊어버리고 몰래 동건올적(童巾兀狄) 한두 사람과 결탁하여, 까닭 없이 침입하여 우리 백성을 죽이고 가축을 노략질하였으니, 맨 먼저 공격한 것은 저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을 놓아주고 치지 아니하면, 저들이 우리가 겁을 내는 줄 알고 장차 말하기를, ‘조선은 쳐도 좋다. 백성을 잡아가도 좋다.’ 하여, 뒷날 그 악독한 행동을 마음대로 하기를 오늘보다 더 심히 할 것이오며, 비단 이 도적만이 아니라, 여러 오랑캐들도 틈을 엿보았다가 이것을 본떠 잇따라 일어나면, 변방 백성의 화가 장차 이루 말할 수 없이 될 것입니다. 신은 원하옵건대, 오는 8, 9월이 바뀌어 지는 때에 본도(本道)의 정병 4천을 뽑고, 올량합과 알타리 가운데 올적합과 원수된 자를 모집하여 향도로 삼아, 길을 나누어 가서 정벌한다면, 군사가 곧고 씩씩할 것이니, 이기지 못함을 걱정하겠습니까. 신이 재주 없는 몸으로 이미 도절제사의 직권을 받았으니, 실로 분에 넘치어 항상 직책에 걸맞지 못할까 두려워하였사온데, 어찌 또 공을 바라고 벼슬이 그리워 감히 이 거사를 칭하겠습니까. 천지신명이 굽어보실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 글을 보고 사정전(思政殿)에 납시어 승지 신인손(辛引孫)을 불러 이르기를, “이 글월의 사연이 지극히 간절하다. 그러나 요즘에 재변(災變)이 자주 나타나고 흉년이 들어 백성이 굶주리고 또 북쪽의 민심이 아직 수습되지 못하였으므로 가벼이 거사를 하여서는 아니 될 것이다. 지난 계축년에 파저강(婆豬江) 정벌 때만 하더라도 그들의 소굴에서 우리 변경까지 살고 있는 백성이라고는 없었으므로, 불의에 나아가 몰래 쳤기에 족히 부끄러움을 씻을 수 있었으나, 북방으로 말하면 우리 땅으로부터 그들의 소굴까지 7ㆍ8일이나 걸리는데, 그 사이에 여러 종족의 야인이 서로 연이어 살고 있으니, 만약 많은 군사를 동원하면 저들이 반드시 먼저 대비하여 산림(山林) 속에 숨어 대기하고 있을 터이니, 어찌 반드시 성공한다고 할 수 있겠느냐.” 하였다.
김종서가 글을 올려 아뢰기를, “알타리의 동자음피(童者音彼)가 말하기를, ‘범찰(凡察)과 올량합의 복아간(卜兒看)ㆍ도아(都兒) 등이 홀라온과 우호를 맺고 다음해 봄에 백성을 노략하여 먼 곳으로 옮겨가 거주하려고 한다.’ 하고, 또 알타리의 마자화(馬自和)는 말하기를, ‘우리 알타리 등이 이절제사(李節制使)의 위엄을 꺼려하여 모두 먼 곳으로 이사하려 한다.’ 하여, 이번 회령 절제사 이징옥(李澄玉)이 자음피(者音彼)의 말을 가지고 와서 신에게 알리기를, ‘범찰의 간교한 계획이 하루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니, 이 도적이 끝내 화가 될 것을 나는 본래부터 알고 있었지만 일찍 제거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소이다. 전날 꼬투리를 잡았으므로 죽이려 하였으나 심도원(沈道源)ㆍ정흠지(鄭欽之) 등이 말려서 죽이지 않았었는데, 이제 와서 깊이 뉘우쳐지오. 이제 될 수 있는 대로 속히 아뢰어 그 추장(酋長) 3ㆍ4명을 죽이고, 이내 그 딸린 무리들을 구제하여 주고, 도와서 관독(管禿)의 세 살 난 아들을 세워 추장을 삼아 거느리게 하면, 큰 간흉(姦凶)이 제거되어 알타리와 올량합이 각각 마음을 놓을 것이니, 이 계책이 좋소. 혹은 모조리 죽여 씨도 없이 하여 뒷날의 걱정을 끊어 버리는 것은 더욱 좋은 계책이오. 이 기회를 잃으면 뉘우친들 장차 어찌하리오.’ 하였사온데, 그 말이 절박하여 다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신의 생각에, 이번에 네 고을을 신설하였사오나, 오직 회령에만 돌 성을 쌓고 그 나머지는 모두 쌓지 않았고, 식량도 많이 모자라며 방비도 그리 튼튼하지 못하고, 군졸도 그리 많지 못 하온데, 서쪽에는 홀라온이 있고, 북쪽에는 혐진(嫌眞) 있어 모두 이미 원한을 맺고 있으니, 모두 호시탐탐(虎視耽耽) 노리고 있습니다. 또한 이징옥의 계교와 같이 범찰을 잡아 죽이면 그 잔당들이 날뛰지 않겠습니까. 남의 아비를 찔러 죽이고 그 자식을 어루만져 편안하고자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그 무리들뿐만이 아니라 올량합도 말하기를, ‘오늘 범찰이 죽었으니 내일은 나의 차례다.’ 하면서, 서로 결탁하여 화를 일으키게 된다면, 다만 다시 적이 더 생길 뿐 아니라, 앞으로 원근(遠近)의 오랑캐들이 결탁하여 올량합과 함께 모의하고 화를 우리에게 전가시킬 것이니, 신은 경인년의 화 를 되풀이할까 두렵습니다. 대체로 먼 곳의 적은 올 때에는 더디고 갈 때는 빠르옵니다. 또 우리의 허실(虛實)을 모르므로 그 방어가 어쩌면 쉽기도 합니다. 그러하오나 가까운 적은 우리 산천의 험하고 평탄함, 도로의 굽고 곧음, 백성들이 살고 있는 곳 등을 샅샅이 알고 있어서, 갑자기 왔다가 갑자기 물러나서 그 변동을 헤아릴 수가 없으므로, 막기도 또한 어렵습니다.
신이 또 생각하옵건대, 자음피(者音彼)의 말이 혹시 거짓인지 모르오니 그대로 믿을 수가 없고, 자화(自和)의 말이 혹시 진실인지 모르오니, 한 편만 의심해서도 안 됩니다. 하물며, 범찰이 신아첩합(臣兒帖哈)과 다시 소통한 까닭으로 제 스스로 와서 자세히 알리고, 또 그 가고 돌아옴을 모두 사람을 시켜 와서 알려, 그 정상을 숨기지 않는 것 같으니.이제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죽인다면 또한 의심이 됩니다. 또 이징옥의 계획과 같이 섬멸하여 씨도 남기지 않으면 뒷걱정이 없어지겠지마는, 알타리의 8백 명과 올량합의 수천이나 되는 무리를 하나하나 모조리 죽일 수가 있겠습니까. 성패(成敗)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리 군사를 동원하는 날에는 저들의 군사도 동원될 것이오니 변방 백성의 화가 곧 일어날까 염려됩니다. 신이 또 생각하기를, 고려의 신하 윤관(尹瓘)이 여진을 꾀여서 죽여 여러 번 기묘한 공을 세우고 9성을 세웠으나 이내 다시 잃어버렸고, 본조(本朝 이조)의 신하 정승우(鄭承祐)가 8명이 지휘(指揮)를 꾀여서 죽이고 드디어 그 처자를 섬멸함으로써 경인년의 병화를 초래하였으니, 이 또한 거울삼을 만하옵니다. 자음피(者音彼)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들이 이사할 때에 우리는 성을 굳게 지키고, 우리 군사를 정비하여 네 진(鎭)으로 하여금 빈틈이 없게 하고 신(臣)도 군사 수천을 거느리고 종성(鍾城)에 머물러 다른 여러 진과 서로 기각(掎角)이 되어, 천천히 그 형세를 보고 미리 우리의 계획을 세워, 그들이 옮겨갈 때에 노략질하는 형적(形迹)이 나타나기만 하면 그것을 꼬투리로 하여 추격 토벌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들이 우리 군사인 줄을 알고 또 우리의 튼튼한 수비를 보면 비록 딴 생각이 있더라도 감히 움직이지 못할 것이오니, 이것이 토벌하는 계책의 한 가지입니다. 그러나 이징옥은 북쪽 오랑캐 땅에서의 노련한 장수로서 지용(智勇)이 뛰어나고 생각이 주밀 하온데, 신은 본래 한낱 서생(書生)으로서 군사 일에 익숙하지 못하고, 일처리에 서투르오니, 삼가 바라건대, 잘 헤아려 선택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종서가 아뢴 것은 야인이 신의가 없어 믿지 못할 이유를 소상히 알고 있고, 범찰이 역모를 꾀한 자취가 이미 드러났다면, 우선 죽이고 나서 여러 추장(酋長)의 계획을 막는 것은 병가(兵家)의 한 기책(奇策)이라 하겠다. 그러나 알타리의 수백이나 되는 무리를 어떻게 모조리 섬멸할 수 있겠는가. 만약 씨가 남아 있으면 화가 끝이 없을 것이요, 또 알타리 등이 우리나라에 순종한 지가 오래되는데, 이제 까닭 없이 갑자기 죽이면 여러 종족의 야인들이 모두 우리가 귀순한 자를 죽였다 할 터이니, 어찌 귀순하려는 마음을 가지겠는가. 그렇게 되면, 북쪽 변방의 화가 이로부터 일어날 것이다. 또 범찰이 홀라온과 결탁하여 도적질할 계책을 이미 정하였다면, 비록 범찰을 토벌하고 알타리의 무리를 섬멸한들, 어찌 홀라온의 내침(來侵)을 막을 수 있겠느냐. 만약, 범찰이 본래 홀라온과 더불어 사귐을 맺지 않았다면, 범찰이 비록 목숨을 보전한다 하더라도 저 홀라온이 어찌 반드시 험한 곳을 넘어 우리 국경에 뛰어들겠느냐. 이제 범찰의 속은 비록 짐승의 마음이라 할지라도 겉으로는 이미 귀순하였으니, 갑자기 그를 죽이는 것은 명분이 없는 듯하니, 나도 종서의 계획을 옳게 여기는 바이다. 그렇기는 하나 이징옥은 북쪽 오랑캐 땅에서의 노련한 장수이니, 범찰의 역모가 과연 자음피(者音彼)가 고한 바와 같이 홀라온과 결탁한 정형(情形)이 뚜렷이 드러나서 사세가 숨길 수 없다면 일이 일어나기 전에 주벌하여, 이징옥의 계책대로 하는 것도 아마 옳다고 생각된다.” 하여, 곧 김종서에게 회답의 유시를 내리기를, “경이 논한 바가 시의(時宜)에 합당하도다. 대체로 오가는 말이란 그대로 다 믿을 수도 없고 믿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니, 성벽을 튼튼하게 하고 굳게 지키면서 가만히 저들의 동정을 엿보다가 조그만 틈이라도 생기면, 그 변고에 응하는 방법은 일찍이 을묘 년에 내린 교서에 의하여 시기에 맞게 처리하되, 삼가고 가벼이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하였다.
회령 절제사 이징옥에게 유시하기를, “예부터 장수는 다만 위엄과 무용(武勇)만을 숭상하지 않고 반드시 문덕(文德)을 닦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으니, 문덕이 아니면 민중이 따르지 않고, 무력이 아니면 적을 위압하지 못한다. 옛날 오기(吳起)는 지혜가 온갖 일에 정통하고 용맹이 삼군(三軍)에 으뜸가는 장수였는데, 위(魏) 나라를 위하여 서하(西河)를 지키니 진(秦) 나라 군사가 감히 동쪽을 향하지 못하였고, 제후(諸侯)와 더불어 싸워서 이기기를 64번, 국토의 사면을 개척하고 땅을 천 리나 넓혔으니 재사(才士)라 할 만하였다. 그러나 그는 오로지 위무(威武)만을 숭상하였고, 은혜와 인덕이 적었으므로 이르는 곳마다 원망과 비방이 그를 따랐다. 그러므로 노(魯) 나라도 섬기고 위(衛) 나라도 섬겼으나 모두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였다. 등훈(鄧訓)은 호강교위(護羌校尉)가 되어 힘써 은혜와 신의로써 먼 데 사람을 회유(懷柔)하였으므로, 황중(隍中)의 여러 오랑캐들이 감격하여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어서, 종족과 부락들이 진심으로 귀순하여 변경이 평안하였고, 그가 죽자 관리들이나 오랑캐가 목 놓아 울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집집마다 사당을 세우는 데까지 이르렀다. 또 반초(班超) 는 서역(西域)에 있은 지 31년 만에 5천여 호(戶)가 귀순하여 와서, 동한(東漢)의 변방 장수로서 그보다 앞서는 사람이 없었으며, 교대하여 돌아올 때에 임상(任尙)에게 고하기를, ‘변방의 관리들이란 본래 효자나 충손(忠孫)이 아니라 모두 죄를 지고 변방으로 전본(轉補)되어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고, 오랑캐들은 새나 짐승의 마음을 품고 있으므로 그들을 기르기는 어렵고 실패하기는 쉽다. 지금 그대의 성품이 엄중하여 아랫사람들의 사정을 생각지 아니하니, 의당 작은 허물은 용서하고 일의 큰 줄거리만을 쥐어야 한다.’ 하였더니, 임상이 생각하기를, ‘반초는 별다른 묘책을 가지고 있지 않아 말하는 것이 그저 평범하다.’ 하였는데, 그 뒤에 과연 반초가 경계한 바와 같이 실패했다. 대체로 사람의 성품이란 느린 사람도 있고 급한 사람도 있으며, 도량도 크고 작음이 있어 꼭 같기란 어려운 것이니, 너그러이 받아들이는 사람은 늘 민중의 마음을 얻고, 무위(武威)로써 엄하게만 다스리는 자는 항상 군중의 노여움을 사게 된다. 군중의 마음을 얻는 사람은 항상 안전을 보전하고, 군중의 노여움을 사는 자는 늘 화를 불러 패하게 되는 법이니, 이것은 떳떳한 이치이다. 경의 무위는 비록 옛사람도 경보다 나을 것이 없도다. 위엄이 북쪽 오랑캐 땅에 떨치어 오랑캐들이 모두 두려워 복종하니, 내가 매우 기뻐하는 바이다. 그러나, 민중을 제어하는 길은 은위(恩威)가 치우치지 않는 데 있으며, 은위가 치우치지 않으면 사람이 사랑할 줄을 알고, 사랑할 줄을 알면 또한 두려워할 줄을 알게 되는 것이니, 이렇게 하면 공을 세울 수가 있는 것이다. 진(晉) 나라의 양호(羊祜)가 그러하였다. 경은 옛 장수의 득실을 거울삼고 나의 지극한 마음을 알아차려서 위무(威武)만을 숭상하지 말고 반드시 인애(仁愛)를 더하여 사람을 복종하게 하여 길이 북쪽 오랑캐 땅에서의 어진 장수가 되어 나의 뜻에 따르라.” 하였다.
○ 19년 봄 3월에, 전 경원절제사(慶源節制使) 송희미(宋希美)와 호군(護軍) 이백경(李伯慶)을 의금부(義禁府)에 가두고 전지(傳旨)하기를, “일찍이 연변(沿邊)에 영을 내려 매년 가을이 되면 백성을 독려하여 성보에 들어가서 들을 말끔히 하여 놓고 대기하라고 법령에 뚜렷이 있는데도, 9월 그믐께까지도 아직 성보에 들어가지 않아서, 적으로 하여금 마음대로 죽이고 잡아가게 하였을 뿐 아니라 적이 온다는 보고가 잇따라 있었으며, 그들이 국경 가까이에서 며칠을 묵었는데도, 아직 백성들을 독려하여 입보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적의 창칼에 쓰러지게 하였으며, 죽고 잡힌 자가 많았는데도 적게 아뢰고, 적의 무리가 1천명도 못 되는 것을 3천이라고 하여 거짓되게 위에 보고 하였으니, 이 모두가 큰 죄다.” 하였다. 또 김종서에게 유시하기를, “송희미(宋希美)와 이백경(李伯慶)의 죄가 얼른 나가서 적에게 대응하지 않은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적의 기병 2백이 우리 땅에 들어와 머물러 있는데도 탐색하지 못하였고, 또 급히 사람과 물건을 거두는 바람에 죽고 잡힌 자를 많이 내었으며, 적이 물러갈 때에는 그 세력이 조금 쇠약해졌는데도, 조석강(趙石岡)의 군사와 합하여 꾸물거리고 나아가지 않았으므로, 잡혀간 사람과 가축이 3백이 넘는데도, 다만 사람 20여 명, 마소 8ㆍ9마리라고 보고하여 거짓 상달하였다. 이에 큰 죄를 저질렀으므로 법에 의하여 대죄에 처할 따름이다. 만약 연변의 장수들이 송희미 등이 곧 나아가 싸우지 않았으므로 형벌을 받았다고 잘못 생각하여, 뒷날 적이 쳐들어올 때에 적이 많고 적음을 헤아리지도 않고 경솔히 성 밖에서 결전하려 하면 작은 해가 아닐 것이다.” 하였다.
송희미가 경원(慶源)을 지키는데, 아침에 수청 기생이 말하기를, “어젯밤 꿈에 적이 갑자기 달려들어 영감의 머리를 베어 갑디다.” 하였다. 얼마 아니 되어 적이 쳐들어온다는 보고가 있었으나, 송희미는 기생의 꿈을 매우 꺼리어 끝내 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부하들이 간하기를, “적의 형세가 외로우므로 치면 반드시 이길 것인데, 어찌 차마 그들의 노략질을 앉아서 보기만 하고 나가서 구하지 않겠습니까.” 하였으나, 마침내 듣지 않아 적은 드디어 말과 사람 1백여 명이나 몰아 가지고 갔다. 어떤 군졸이 몸을 날려 크게 외치면서 잡혀가는 사람 수십 명을 빼앗아 가지고 돌아왔다. 이 일이 임금께 알려지자 세종이 크게 노하여 송희미를 잡아오게 하고, 군졸은 발탁하여 사품관(四品官)으로 삼고, 드디어 송희미를 의금부에 내리어 군법으로 논죄하여 죽음을 내렸다. 그가 죽을 때 길이 청파(靑坡)를 지나는데, 정승 최윤덕(崔潤德)이 송과 더불어 옛 친구인지라 주과(酒果)를 갖추어 권하면서 영결하기를, “슬퍼하지 말라. 공은 법에 의하여 의당 죽어야 하며, 하물며 인생은 마침내는 한 번 죽음이 있는 것이니, 나 역시 얼마 아니하여 공을 따를 것이오.” 하였다. 《청파극담(靑坡劇談)》
○ 여름 6월에, 이천(李蕆)이 글을 올리기를, “전에 파저강(婆豬江)의 도적이 도둑질을 시작할 때에 조명우(趙明于)가 우리 군사를 속임으로써 이 도적이 몰래 우리 변경 땅에 가까이 하였고, 〈그 후〉 매년 침범하였습니다. 그 죄악이 차고 남음이 있사오니 군사를 일으켜 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신이 이 도적에 대하여 헤아려 보건대 계축년 이래로 우리가 쳐들어갈 것을 의심하고 반드시 망을 보았을 것이며, 또 숨어 버리는 계략을 갖추고 있어서, 우리의 병력을 크게 동원하여 가서 치면 반드시 수풀 사이에 숨어 버립니다. 지난번에는 전 군대가 불시에 엄습했었으나, 이번에는 병력을 크게 동원하여가서 한 명의 도적도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오게 되면, 위엄을 보일 수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비웃음을 남기게 될 것입니다. 신의 소견으로는 연변 백성으로서 자발적으로 분발하여 적을 칠자와 모집에 응한 군졸 및 수비하는 정병으로 길을 나누어 몰래 들어가, 적이 머물러 있는 곳에서 20리 떨어져 있는 곳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민가의 많고 적음을 헤아려서 밤중에 바로 그 소굴을 두들기되, 집집마다 복병을 두고 화포(火砲)와 화전(火箭)을 퍼부어 집들을 불사르면, 적이 반드시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를 것이옵니다. 이때에 모든 복병이 함께 일어나서 하나하나 쏘아 맞히면, 작은 도적을 굴복시키기란 마른 가지를 꺾는 것같이 쉬울 것이옵니다. 지난달 9일에 직접 정탐꾼을 보내기를 청하므로 곧 변방 고을에 영을 내려 그 소굴을 탐색하였는데, 신이 의주(義州)로부터 여연(閭延)으로 향하여 만포구자(滿浦口子)에 이르니, 비가 연일 그치지 아니하여 여연과 자성(慈城) 산골의 물이 넘쳐 건널 수가 없었습니다. 신은 시절이 바야흐로 한여름이 되어 장마가 한창이므로, 일을 처리할 수가 없어 희천(熙川)에 돌아왔는데, 조명우의 변을 듣게 되어 그곳으로 달려 가보니, 그때는 비도 멎었습니다. 각 고을의 염탐꾼들이 돌아왔는데, 모두 바로 그 소굴을 찾지 못하고 중도에서 돌아와, 내보냈던 뜻이 매우 잘못되었기에 신이 책벌을 가하려 하였사오나, 그리하지 못한 것은 뜬 말로 선동할까 두렵고, 또 일이 오히려 기밀에 속하여 신이 감히 알리지 못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변방 고을의 수령(守令)들이 모두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소굴을 알아내지 못하였사오니, 실로 신에게 죄가 있습니다. 이제 다시 글을 변방 고을들에 띄워, 사람을 보내어 적의 소굴을 탐색하여 적이 있는 곳을 대략 알아 가지고 곧 군사를 일으켜 들어가 치려합니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산천이 험하여 만약 장마 비를 만나면 물에 막히는 걱정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그러므로 늦가을 나뭇잎이 다 떨어져 활쏘기에 좋고 사람이나 말이 함께 활동하기 편리한 때를 기다려 길일(吉日)을 택하여 가면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만주가 이사할 뜻을 가지고 있음을 평소에 들었는데, 오늘의 체탐(體探)을 그가 알면 의심이 생겨서 급작스럽게 이사해 갈까 염려됩니다. 아간(阿間)과 고음한(古音閑) 마을이 오미대둔(吾彌大屯)에서 30여 리 떨어져 있고, 이산(理山)의 중앙 목책(木柵)에서 이틀 길인데, 농사로 인하여 살고 있는 사람이 한 4ㆍ5십이나 됩니다. 추수 후에는 반드시 이사해 들어갈 것이니, 신의 생각에는 수확하기 전에 먼저 모집한 정병 1백 50으로 몰래 쳐들어가 우익(羽翼)을 치면 저들은 우리가 싸우기를 좋아하지 아니하여 군사를 일으켰다가 돌아갔으니, 반드시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라 하고 마음 놓고 수확할 것입니다. 이때에 위와 같이 조치하고, 다시 늦가을에 가서 3천의 정예를 내어 두 대(隊)로 갈라 한 대는 강계(江界) 고사리(古沙里) 목책으로부터 이향다회평(里香多會坪)을 거쳐 오미(吾彌) 위쪽 끝에 이르고, 또 한 대는 이산(理山) 중앙 목책에서 고음한평(古音閑坪)을 거쳐 오미 아래쪽 끝에 이르러, 우선 사로잡은 적을 길잡이로 하여, 도로의 어렵고 쉬움과 소굴의 있는 곳 등의 모든 이길 수 있는 계교를 협박하여 스스로 말하게 하고, 밤을 타서 엄습하면 이것이 곧 이기는 계책입니다. 만약 내년 2월이 되면 계절이 심한 추위가 아니어서 강 얼음이 아직 풀리지는 않았으되 쌓인 눈이 반쯤 녹아 저들이 숨어 엎드릴 곳이 없을 터이니, 이 역시 이용할 만한 때입니다. 그러하오니 이 도적이 전날의 원한을 깊이 품고 있으므로 가까운 장래에도 반드시 침범하러 올 것이고, 먼 장래에도 반드시 올 것인데, 만일 의심이 생겨서 다른 먼 곳에 숨어 버리면 여러 해 동안 쌓인 치욕(恥辱)을 씻을 길이 없게 될 것이니, 번갈아 들락날락하면서 자주 군대를 일으켜 치면 그들이 생업을 계속할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밤낮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상의 세 가지 계책을 혹 허락하여 주신다면 마땅히 군대와 무기를 정비하고 미리 대비하여 다른 사람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서, 맹세코 이 도적과는 삶을 함께 하지 아니하여, 서쪽을 돌아보는 염려에 우러러 보답하겠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이 뜻을 드러내지 마시고 신에게 전승(全勝)의 책임을 지워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임금이 글을 내려 유시하기를, “계축년의 토벌 때에 여러 대신들의 뜻에 의하면, ‘평안도의 연변은 침입할 곳이 많아 방어하기가 다른 지방보다 10배나 더 어려우니, 적들이 만약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다면 위엄으로 눌러 굴복시켜야 할 것이다. 경인년과 기해년의 일이 이미 드러난 자취이다.’고 하였는데, 지금 논의하는 자는 걸핏하면 흉노(匈奴)의 예를 인용하여 이번의 큰 계획을 막지마는, 저 흉노는 모든 오랑캐의 대국(大國)으로서 중국(中國)과는 길이 아주 멀고 인적이 끊어져 있으므로, 제압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 도적은 많아야 5,6백 명에 불과하고 골짜기 사이에 숨어 있으니, 우리나라에 비하면 불과 한 현(縣)의 인구밖엔 안 된다. 또한 변경과의 거리가 수백 리 에 지나지 않으니, 흉노와 비교하면 크게 다르다. 그런데 저 도적이 우리를 무서워하지 않고 강 위에서 날뛰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들을 너무 무서워하여 끝내 한 명의 군사도 내지 못하고 물러나 성 안에 움츠리고 있으니, 이른바 ‘먼저 발하면 남을 제압한다.’는 말이 바로 이것이다. 그 하는 일로 보아 득의(得意)하기는 기약할 수가 없으니, 계축년의 계획은 본래 이렇지 아니하였었다. 전에 경이 아뢴 일은 아주 내 뜻에 맞는다. 그러나 요즘 천도(天道)가 불순하고 사람의 꾀하는 일에 차질이 생김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내가 감히 가벼이 허락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천도나 사람이 꾀하는 일은 이미 지나간 일이니, 잠깐 토벌의 일에 대하여 말하면, 계축년의 거사(擧事)는 저 도적들이 마음 놓고 있을 때에 불시에 강을 건너 그 방비가 없음을 틈타 그 소굴을 엄습하였으므로 노획한 것이 있었으나 이번 일은 그렇지가 않다. 〈그들은〉 반드시 그 처자들을 숨기고 그 재산을 감추고 구원한 약속과 요새를 지키는 일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놓고 있으니. 이것이 곧 그들이 감히 나쁜 짓을 마음대로 하는 까닭이다. 적이 인의(仁義)는 비록 부족하지마는 간사한 꾀는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번에 장군이 행하는 일에 있어 적의 소굴을 알아내었다고 하니 다행한 일이다. 김 장군이 그들의 소굴을 알았다는 사실을 적이 알면 필시 새가 날듯이 이사를 해버려 그 거처를 찾아내기가 어려울 것이니, 군사 행동을 하려 해도 장차 어찌 실시할 것인가. 또 정탐으로 나간 사람 중에 적을 죽이고 온 사람도 있고, 붙잡혀 돌아오지 못한 자도 있는데, 적이 이미 우리의 계획을 알아차렸으니 미리 도망쳐 숨는 꾀가 전날보다 훨씬 나아졌을 것이 아닌가. 만약, 크게 쳐들어가려면 반드시 그 소굴을 알고 나서 행해야 되는데, 정탐하는 일은 이제는 이미 맞지 않으니 장차 무엇으로서 알아내겠느냐. 나는 경의 아룀을 매우 좋다고 생각하므로 뭇 의논을 물리치고 단행하고자 하나, 다만 이런 불편한 상황이 있으니 경은 비밀리에 변방의 노숙(老熟)한 사람과 휘하의 같이 모의할 만한 사람과 잘 의논하여 아뢰면 내가 다시 생각해 보겠다. 이번에 군사를 일으킨다면 언제가 좋겠느냐. 군사는 몇 명이면 족하겠으며, 길은 몇으로 나누어졌으며, 기병은 몇 명, 보병은 몇 명이면 되겠느냐. 적의 소굴은 어떤 방법으로 알아내겠느냐. 우선 참기로 하여 군사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몇 해 동안이나 기다리려느냐. 공격 토벌할 생각은 말고 오로지 방비에만 힘쓴다면, 침입했을 때에 모름지기 따끔하게 응징하여 경솔히 침입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더욱 염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소굴을 탐색하는 사람은 골짜기 길을 경유하지 말고 산림(山林)을 뚫고 가다가 가끔 나가서 적의 소굴을 살핀다면, 적이 어찌 알아챌 수 있겠는가. 혹 알아냈다 하더라도 도망쳐 숨기에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만위림(李滿衛林)이 적을 죽일 적에 두 곳에서 간 사람이 한 곳에 모였다고 들었는데, 이번에 여덟 사람이 돌아오지 않는 것도 역시 두 곳에서 간 사람이 한 곳에 모여 마치 명령에 따라 행해진 것 같으니, 비록 우리나라 사람인들 어찌 서로 모일 리가 있겠느냐. 김 장군이 갔을 적에 말 탄 적과 평야에서 서로 만나 쫓아가면서 쏘았다고 하는데, 이 세 가지 일로 보아 내놓고 큰길에서 행한 것이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렇게 어리석은 백성을 이용하여 이렇게 큰일을 하려면, 자세하고도 친절히 알려 경계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 이번에 이렇게 된 것은 생각하건대 경의 포치(布置)에 미진한 데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진장(鎭將)으로서 일을 행함에 있어 게으름이 있었던가. 강을 건너가서 정탐하는 일이 중요한 듯하지마는, 소굴을 탐색하느라고 너무 깊이 들어가는 것은 오늘에 있어서 그리 급한 일이 아니니, 일을 시작한 때에 해도 늦지 아니할 것이다. 내가 말리려 했으나 미치지 못한 것이 몹시 후회가 된다. 또 헌의하는 자가 있어 말하기를, ‘오랑캐를 대하는 길은 인의(仁義)로써 복종시킬 수 없고, 또한 하루나 한 달 동안 서둘러 해치우는 계략도 안 되며, 마땅히 지구책(持久策)을 써야 한다. 정병을 수백 혹은 수천 명을 뽑아 가지고 해마다 계속하여 쳐서 혹은 그 소굴을 불사르고 혹은 지어 놓은 곡식을 짓밟고, 들락날락 갈마들면 2ㆍ3년이 못 되어 저들은 반드시 지치고 피폐해질 것이다. 수(隋) 나라가 진(陳) 나라를 뺏을 때 고영(高穎)의 계책을 썼듯이 추수(秋收) 때를 헤아려 은밀히 군마를 징발하여, 고함을 지르면서 엄습하면, 저들은 군사를 모아 수비하느라고 농사철을 놓쳐 버리게 된다. 또 강남에는 띠나 대로 지은 집과 쌓아둔 낟가리가 많은데, 몰래 행인을 보내어 바람결에 불을 놓고, 저들이 수리하기를 기다려 다시 불사르곤 하면 몇 해가 못 되어 재물과 기력이 다 소진되어, 자리를 마는 것처럼 쉽게 점령하는 형세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지금 파저강(婆豬江)의 도적이 비록 사냥을 좋아하여 군졸들도 모두 육식을 하고 있지만, 또한 농사를 지어 그 살림살이를 보태고 있으니, 도내(道內)의 정병 2,3천 명을 얻어 살찐 말을 타고 두꺼운 옷을 입고 비옷을 갖추어 매양 추수할 즈음에 불시에 엄습하여 그 집을 불사르고 곡식을 짓밟아 버리곤 하기를 몇 해 동안만 하면 저 적의 소굴은 거의 소탕될 것이라.’ 하는데, 나 역시 생각하기를, 북방이 비록 일찍 추워져서 가을비가 무섭다고는 하나, 살찐 말에 두꺼운 옷을 입은 사람을 뽑아 위에 말한 사람의 계책과 같이 실행하면 무슨 큰 폐단이 있겠는가. 저들은 장차 소굴을 잃어버리고, 북방은 평안하고 조용해질 것이다. 경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울러 참작하여 가부를 아뢰라.” 하였다. 《유편서정록(類編西征錄)》이하 동.
○ 이에 앞서 찬사(贊事) 신개(申槩)가, “이 오랑캐를 토벌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하고 아뢰었는데, 임금이 신개의 의논을 따르려 하였다. 그러던 참에 이천(李蕆)의 글을 보자, 도승지 신인손(辛引孫)과 좌승지 김돈(金墩)에게 명하여 신개의 집에 나아가 비밀리에 의논하게 하였더니, 신개가 12조목을 상신(上申)하였다. 임금이 드디어 사목(事目 공사에 관한 규칙)을 쓰게 하여 이천에게 유시하기를, “첫째, 계축년 때처럼 크게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한 번은 할 수 있으나 두 번은 곤란하므로, 북호(北胡 북쪽 오랑캐 땅)의 일은 경에게 일임(一任)하니 도내의 정병 1백여 명이나 1천여 명을 뽑아 적의 소굴을 수색하되, 혹은 드물게 혹은 자주하여 무시로 군사를 보내어 강을 건너 들어가, 산과 들을 사냥하면서 칠 것처럼 하면 저들은 반드시 농사를 폐지하고 방비에 겨를이 없을 것이다. 저들이 군사를 모으면 우리는 문득 군사를 헤치고, 이렇게 하기를 오랫동안 되풀이하면 저들이 반드시 마음이 헤이해질 것이니, 이때에 우리가 몰래 습격하면 거의 뜻을 이룰 것이다.
둘째, 무시로 군사를 보내되 여름철에는 부방군(赴防軍)의 수가 적을 것이니, 남도(南道)의 군졸을 징용하고, 얼음이 얼 때에는 남도의 군사에다 부방하는 자도 더 많을 것이니, 반드시 남도에서 아직 징발하지 않은 군졸을 모조리 징발한 뒤에 군사를 움직이겠느냐. 남도의 아직 징발하지 않은 군사는 쓰지 않아도 되지 않겠느냐. 셋째, 나는 초목이 아직 시들지 아니하여 말을 먹이기에 편리한 때에 비로소 군사를 내어 일을 행하려 하는데, 경의 생각은 어떠한고. 깊숙이 들어가 토벌하되 밭에 있는 곡식을 짓밟고, 마당에 거두어들인 곡식을 불사르고, 그들의 집을 헐어 비리고, 마소를 잡아온다면 우리는 한 명의 오랑캐를 보지 못하고 돌아와도 무방하다. 우리 기병이 잇따라 그들의 소굴 근처를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것을 저들이 알면 반드시 무서워서 편안히 있을 수 없을 것이니, 어찌 우리를 침략할 수 있겠느냐. 이렇게 하면 어찌 유익하지 않겠느냐. 대거 출동하려면 적의 소굴을 알지 않으면 안 되니. 만약 소굴을 모르고 함부로 대부대를 동원하였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와 중국이 그 소식을 듣는다면 비웃음을 사지 않겠느냐. 그러니 모름지기 그들의 소굴을 알아낸 뒤에 군사를 내어야 할 것인데, 장차 무슨 방법으로 그것을 알아내겠느냐.
넷째, 경은 이러한 조건하에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옳으냐그르냐, 더디 할 것이냐 빨리 할 것이냐, 혹은 또 다른 계책이 있느냐 하는 것을 자세히 생각하고 비밀히 아뢰라.” 하였더니, 이천이 그 대략을 올려 아뢰기를, “내리신 교지(敎旨)를 받자옵고 각 고을에 공문을 띄워 병마(兵馬)를 조사 검열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농삿 달이 되어 열병(閱兵)에 알맞지 않사오나 야인의 기세가 몹시 왕성하여 화가 눈앞에 있사오니, 이야말로 뜰 앞에 있는 도적이니, 방어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비록 군사를 움직이어 토벌하지는 못한다 치더라도 우리 군사를 훈련시켜 우리의 강토를 튼튼하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고, 또 말하기를, “적이 국경 근처에 이르러 여러 날 머물러 있사온데 그들의 속셈을 헤아리기가 어려우니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지금 나라가 한가하여 안으로는 염려할 만한 일이 업사온데, 적이 국경 근처에 있어 밖으로 걱정할 일이 있사오니, 청하건대, 내금위(內禁衛)와 별시위(別侍衛) 갑사(甲士)로서 용감한 계략이 있는 자를 뽑아 7월 보름 지나 창성(昌城) 이북 6고을에 각각 6명을 보내어 지키게 하고, 또 화포 교습관(火砲敎習官) 6명을 보내되, 사람과 말을 골라 탈 만한 말 1백여 필을 각 관원에게 나누어 주어 기르게 하소서.” 하였더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 가을 7월에 이천에게 유시하기를, “지금 경의 회답을 보고 경의 포치(布置)의 적절함을 알았다. 그런데 군사를 움직이어 적을 물리칠 적에는 먼저 누가 어디에 머물러 있으며 관하(管下)가 몇 호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런 뒤에라야 군사를 일으킬 수가 있는 것이다. 만약 소굴을 알지도 못하고 함부로 행하여서는 우리 군사에게 헛수고만 시키고 공은 이루지 못할 것이다. 경이 먼저 척후병(斥候兵)을 보내고 뒤에 대군을 출발시키려한다고 하였는데, 만약 먼저 나간 척후병이 저들을 만나는 족족 모조리 잡아서 길잡이로 삼는다면 괜찮으나, 만일 10명을 발견하였는데 9명만을 잡고 1명이 달아났다면 어찌 그 추장에게 알리지 않겠는가. 그렇게 되면 일의 성패는 반드시 생각한 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동도이불화(童都伊不花)의 말을 믿어도 좋을 것 같으나, 그가 귀순한 지 2년밖에 안된다. 또 우리나라 체탐자(體探者)가 다시 잡히게되면 저들이 우리의 상황을 알게 되므로 반드시 방비의 계책을 할 것이다. 이만주 등이 아직도 옛 소굴에 있는지 없는지도 전적으로 믿을 수가 없으며, 나 역시 그 중요한 내용을 잘 모르므로 다시 한두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였더니, 어떤 이는, 말하기를 ‘지략이 있고 용맹한 사람 2명을 뽑아 체탐하게 하되 낮에는 산림 속에 깊숙이 숨어 있다가 밤을 타고 산을 따라서 가면 적의 소굴이 있는 곳을 알아낼 것이라.’고 하나, 이에 앞서 체탐자가 다시 잡히면 이야말로 적이 귀를 기울이고 엿볼 때이니, 나는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경의 생각은 어떠한고.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대군이 출발할 때에 먼저 척후 기병 수백 명을 보내어 곡식을 짓밟고, 살림집은 불사르지 않고 급히 돌아오면 저들은 반드시 다시 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그 집으로 돌아가 편안히 마음 놓고 있을 것이니, 그때에 대군이 뒤따라 와서 몰래 그 소굴을 포위하면 반드시 적을 모조리 잡을 수 있으리라.’ 한다. 그러나 척후 기병이 날치고 다니는데, 달아났던 도적이 며칠 사이에 제집에 돌아와 있으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지 않은가. 또 어떤 이는, ‘건강하고 용맹한 보병을 한 대오마다 5ㆍ60명씩으로 하여 3대오 나누어 강을 건너가, 8백여 리의 땅을 낮에는 숨고 밤에는 행군하여, 깊은 수풀 속에 잠입하여 높은 데에 올라가서 멀리 바라보면, 반드시 적의 기병이 보일 것이니, 그를 사로잡아 가지고 돌아와 길잡이로 하면 될 것이라.’ 하고, 또 어떤 이는, ‘장사(壯士) 수십 명을 몰래 보내어 가까운 수풀 속에 숨어서 그들의 밭을 엿보게 하면, 반드시 추수하는 사람을 발견할 것이니, 그를 잡아 가지고 돌아와 길잡이로 삼으라.’는 등 의론이 분분하여 꼭 들어맞는 생각을 얻을 수가 없었다. 나도 반복하며 지혜를 짜 보았으나 지당한 의론을 얻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옛사람이,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 하였으니, 경은 오랫동안 서쪽 땅에 있었으므로 그럴 만한 형편을 잘 알 것이다. 내가 경에게 일방적으로 위임한 것은 좋은 성과를 보고자 함이다. 나는 비록 그 형편을 터득하지 못하였지만, 경은 반드시 그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니, 만약 할 만한 기틀을 얻으면 낱낱이 곧 아뢰라.” 하였다. 이천(李蕆)이 말씀 올리기를, “적의 소굴의 탐색 및 군사를 일으킬 날짜와 시간, 도로 등에 관하여는 체탐 나갔던 사람과 동도이불화(童都伊不花) 등에게 따져 물었으나, 이만주가 지금 오미부(吾彌府)에 있는지 혹은 올라산성(兀剌山城)으로 옮겨 들어갔는지 모두 확실히 알지를 못하옵고, 그 오미부(吾彌府)로 향하는 길은 하나는 강계(江界)로부터 파저강(婆豬江)을 건너 바로 오미곶(吾彌串) 동구(洞口)로 들어가고, 다른 하나는 이산(理山)으로부터 파저강을 건너 올라산 동쪽을 경유하여 오미부의 서쪽으로 들어가고, 또 하나는 이산으로부터 파저강을 건너 올라산 남쪽을 경유하여 서쪽으로 꺾어 들어가는데, 적어 오미부에 있다면 세 길을 경유하여 갈라서 들어갈 것이요, 만이 올라산에 있다면 대군이 오미 등지로 들어가게 되면 적이 반드시 미리 알아차리고 도망쳐 흩어질 것이 염려됩니다. 다시 사람을 보내어 비밀히 탐색하게 하고자 하오나, 그렇게 하면 적이 우리의 탐색을 알아차리고 반드시 파수(把守)를 세울 것이 분명하니, 전번과 같이 잡힐까 두렵습니다. 체탐자(體探者)의 말이 만약 변두리의 한두 집이라면 몰래 들어가 사로잡아 오겠다고 하오나, 신 역시 반복해서 생각하옵건대, 야인이 이 추수 때를 당하여 멀리 도망쳐 숨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옛집을 옮겼다 하더라도 가까운 곳에 있을 것이오니, 곧 적의 우두머리의 거처를 찾아내는 것이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습니다. 반드시 야인을 사로잡아 길잡이로 삼아야 큰 계획을 성공할 수 있겠습니다. 강계에서 이틀 길 거리에 오자치(吾自峙)가 있어 세 집이 살고 있는데, 오미부(吾彌府)에서는 90 리 떨어져 있습니다. 이산에서 이틀 길 되는 곳에 고음한리(古音閑里)가 있어 두 집이 살고 있으며, 오미부에서는 하루 길의 거리인데, 두 동네가 다 외따르고 사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8월 10일경에 정병 5ㆍ60명을 보내되 체탐자를 거느리고 밤에 습격하여 야인을 잡아다가 우두머리와 그의 무리들이 있는 곳을 두들겨 물어 가지고 8월 20일께 다시 군사를 일으켜 치는 것, 이것이 계책의 하나입니다. 5월에 체탐자가 잡힌 이후에는 다시 사람을 보내지 않고 이렇게 편안히 앉아 움직이지 않고 있어 그들에게 의심을 주었는데, 8월에 이르러 조심성 있고 용감한 장사 3ㆍ4명을 뽑아 보내어 낮에 산에 올라가서 오미부 동구(洞口)의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을 살펴보고 만약 사람이 안심하고 살고 있으면, 깊은 곳의 큰 둔영도 반드시 그럴 것이니, 8월 중순에 군사를 내어 급습하고 우선 우두머리가 있는 곳을 물어 그 머물러 있는 곳을 쳐서 곡식을 짓밟아버리고, 집들을 불사르고 노획한 것을 가지고 곧 돌아와 사졸을 휴양시키다가, 때를 보아 다시 쳐들어가면 저들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없게 될 것이오니, 이것이 또 하나의 계책입니다. 지금의 계책으로서는 이 두 가지밖에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사용할 군사는 기병 2천 5백, 보병 5백, 도합 3천을 써야 하옵고, 나누어 진격하는 길은 응당 세 길을 경유하게 되는데, 만약 적이 올라산성(兀剌山城)에 있으면 임시로 형세를 바꾸어, 8월 20일 이후 초목이 다 말라서 말먹이기 편리한 때에 새벽달이 밝은 밤을 이용하여 가는 것도 편할 것입니다. 계절이 몹시 추운 때도 아니어서 천시(天時)와 인사(人事)가 알맞고 어울리는 때입니다. 다만 큰물이 채 마르지 않았는데 빗물이 더하면, 파저강(婆豬江)을 건너기가 어려울까 염려됩니다. 8월 20일 후와 9월 초순ㆍ중순 등 세 번 중에 길한 때를 골라, 그때의 형편에 따를까 하옵니다.” 하였다.
임금이 회답하여 유시하기를, “이제 경이 올린 글을 보고 경의 포치(布置)가 좋음을 알았다. 그러나 의논하는 이의 말이, ‘오자참(吾自站)과 고음한(古音閑) 두 곳은 인구가 많지 않고, 인가가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하지마는, 우리 군사가 진격하여 포위했을 때에 저들 중에 도망하는 자가 있거나, 혹은 멀리서 바라보는 자가 있으면 우리 군사가 며칠 동안 머뭇거릴 때에, 적이 미리 알고 도망쳐 버리면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니, 대군이 전진하면서 먼저 척후 기병을 보내어 두 곳을 갈라서 포위하고, 적을 사로잡아 그를 길잡이로 하여, 밤에 불시에 적의 우두머리의 거처를 급습하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만약 적을 잡지 못하더라도 대군이 산과 들을 달리면서 사냥하여 시위(示威)하고 돌아와도 무방할 것이다. 저들도 대군이 사냥을 하면서 산과 들을 달리면, 응당 의심스럽고 두려워 안절부절 못할 것이라.’ 하고, 또 어떤 이는, ‘먼저 척후를 보내어 적을 잡아 그 우두머리의 소굴을 알아낼 수 있다면 그것은 상책이나, 적을 잡지 못하더라도 대군이 일제히 진격하여 그들의 곡식을 짓밟고 집을 불사르는 등, 거듭 이렇게 하면 저들은 반드시 곤궁에 빠질 것이니, 비록 한 명의 오랑캐를 보지도 못하고 돌아와도 이 역시 무방하다.’ 하며, 또 어떤 이는, ‘한꺼번에 두 곳을 함께 포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 씩씩하고 용감한 기병 5ㆍ60명을 뽑아 밤을 이용하여 진군하여 사람이 적고 외딴 곳을 포위하고, 저들 중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은 자가 있거든, 10여 기를 머물러 두고 산림 속에 잠복하여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모조리 잡아 가지고 온다. 이렇게 하면 적의 우두머리는 전혀 모를 것이다.’ 하며, 또 어떤 이는, ‘갈라서 두 곳을 포위하든지 혹은 한 곳을 포위하고, 가산(家産)과 곡식은 하나도 해를 주지 말고 다만 사람만 모조리 잡아 가지고 급히 돌아오면, 적이 와서 보고도 다른 곳에 간 줄 알고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하여, 의논이 분분하여 한결같지 않다. 내 생각에는 대군을 진군시키기 반 날쯤 앞서 척후 기병을 보내어 오자참ㆍ고음한혹은 오미(吾彌) 동구를 엄습하여, 만약 포로가 있으면 한두 명이라도 잡아서 길잡이로 삼아 길을 재촉하여 바로 적의 우두머리가 있는 곳으로 향하여, 불의에 그 우두머리를 습격하는 것이 상책이다. 옛사람이 말하였듯이 군사 행동은 귀신같이 빨라야 하는 법이니, 10일에 먼저 수십 기를 보내어 적의 무리를 사로잡고, 20일 후에 대군을 내어 저들로 하여금 미리 알고 몰래 도망치게 하는 것은 하책이라고 생각하는데 경의 생각은 어떠한가. 권도(權道)는 미리 마련할 수 없으며, 변고(變故)는 미리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경은 되풀이하여 깊이 생각해서 임기응변으로 잘 시행하라. 8월 20일 후 초목이 모두 마르고, 새벽달이 밝은 밤에 가는 것도 편하겠으나, 큰물이 채 마르지 않은 데에 게다가 비가 와서 물이 넘치게 되면, 20일 후 및 9월 초순ㆍ중순의 길한 날을 가려 동원하겠다는 것도, 멀리서 헤아리기는 어려운 일이다. 다만, 의논하는 사람의 말이, ‘만일 9월까지 기다리면 북쪽 땅은 일찍 서리가 내리므로, 저들이 이미 곡식을 거두어 움 속에 간직했을 것이다.’고 하는데, 내 생각에 여름비가 많이 오면 가을에는 가무는데, 이번 장마로 보건대 8ㆍ9월경에는 비가 내리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하늘이 하는 일이란 예측하기 어려우니, 경이 임기응변으로 군사를 동원하되, 만일 적당한 기회를 만나지 못하거든 꼭 금년 가을이 아니라도 좋으니, 천천히 만전의 계책을 생각하여 내년 봄에 하여도 늦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박안신(朴安臣)에게 유시하기를, “계축년 이래로 연변 방어의 계책이 지극하지 않아, 파저강의 적이 해마다 잇달아 우리 국경을 침범하는데도 우리는 수년 동안을 꾹 참고 있으니, 적의 횡포는 더욱 심하여지고 방비의 곤란함이 정벌하기보다도 더 심하다. 이제 도절제사(都節制使) 이천(李蕆)에게 명하여 도내의 정병 수천 명을 뽑아, 8ㆍ9월 사이에 몰래 그리고 자주 군사를 적지에 들여보내어, 기어코 적의 우두머리를 잡도록 하려 한다. 경은 이 뜻을 알고 이천과 한마음이 되어 일을 처리하라.” 하였다. 또, “대체로 군사에 있어서는 비밀을 소중히 여기는 것인데, 서울 안의 의논할 신하가 역시 한두 사람밖에 되지 않으니, 그대가 혼자서 생각하고 힘을 다하여 사목(事目)을 잘 계획하라.” 하였다.
이천에게 유시하기를, “첫째, 대군을 일제히 진군시켜 오자참ㆍ고음한ㆍ오미 동구의 적을 잡아 그에게 캐어물어서, 이만주가 만약 올라산성에 있다면 공격에 필요한 상황을 낱낱이 물어서 3천 명 군졸로써 할 만하면 하라. 만약 매우 험하여 3천 명 군졸로서는 공략(攻略)하기가 어려우면, 다만 파저강 근처에 흩어져 살고 있는 적을 치고 돌아와, 뒷날 다시 대거 출동할 것을 도모하는 것도 좋다. 이제 3천 명의 군졸로서 지극히 험한 성을 포위하였다가, 끝내 성공을 못하면 적은 멀리 피할 것이니, 우리가 훗날 거사를 일으킨다 하더라도 공이 없게 될 것이니, 경은 임기응변으로 형세를 헤아리어 행하라. 둘째, 전에 도망해 온 사람의 말에 의하면 이만주가 이미 홀라온 땅에서 2ㆍ3일 길이나 되는 봉주(鳳州)에 옮겨가 살고 있다고 하는데, 이만주가 과연 봉주에 옮아가 살고 있다면 끝까지 쫓아가 토벌하지 말고, 다만 파저강 등지 의 적의 무리들만을 토벌하라. 셋째, 이만주가 비록 요동(遼東) 근처에 이주하고 있다 하더라도, 만약 성 근처가 아니라면 쳐도 무방하다. 이에 앞서 이미 중국 황제의 칙서가 내려 있으니, 그 소굴을 칠 때에 만약 나와서 물어보는 요동 사람이 있거든, 일찍이 칙지(勅旨)가 있었다고 대답하라. 넷째, 대군이 한 곳에 많이 모이면 진퇴가 곤란할 뿐 아니라 앞뒤가 서로 구원하기가 어려우니, 반드시 길을 나누어서 진격하되, 각 길마다의 군사는 부대(部隊)를 많이 만들어 지략(智略) 있는 자를 뽑아 패두(牌頭)로 삼고, 모든 부대와 부대와의 간격은 적절히 할 것이며, 성을 공격할 때에는 일제히 나아가지 말고, 여러 부대를 대기시키고 정예(精銳)를 뽑아 몰래 서로 다른 길을 따라 교대로 나아가 적을 공격하면, 적은 우리 군사의 많고 적음을 몰라 겁을 먹을 것이다. 다섯째, 경이 아뢰기를, 기병 2천 5백 명, 보병 5백 명이라 하였는데, 내 생각에도 기병은 그것으로 넉넉하다. 그러나 험한 길에는 보병이 으뜸이니, 경은 이 뜻을 알아 요령껏 보병을 증가하라. 여섯째, 만약, 오자참의 세 집과 고음한의 두 집을 잡거나, 혹은 오미 동구의 주민을 잡거든 거짓말로, ‘대군이 북쪽으로부터 이만주 등의 큰 부락을 습격ㆍ섬멸하고, 북쪽 요로에는 모두 척후를 두어 대군이 가다가 응당 여기에 이를 것이니 너희 무리는 움직이지 말라. 우리들은 남쪽으로부터 와서 북쪽으로부터 오는 대군을 맞게 된 것이다.’ 이렇게 적에게 말하면 적이 도망치려 하여도, 반드시 북쪽으로 달아나 달리 계책이 없을 것이다. 일곱째, 계축년 정벌 때에는 잡은 장정을 곧 죽이지 않고 우리 경내에 돌아와 죽였는데, 이번에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적을 잡으면 부녀자와 어린 것들을 제외하고는 살려둘 필요가 없다. 옛사람이 많이 죽이는 것을 경계한 것은, 무고한 백성으로서 도탄에 빠진 자를 말한 것이다. 이 놈들은 한놈 한놈이 강한 도적이 되어 우리 변경을 침략하려는 것이니, 그 죄가 차고도 남는데 어찌 천지간에 용서할 수 있겠느냐. 여덟째, 올라산성을 공략할 만하거든 성 밖에 보병이나 기병을 적당히 배치하고, 공격하기 쉬운 곳을 골라 화로를 갖추어 적들로 하여금 성 위에 나설 수 없게 하고, 보병 1천여 명에게 각기 포대(布袋)에 흙 7,8말을 담아 성 밖 한쪽에 쌓아 올리고, 그리로 올라가 돌격하게 하면 성을 함락시킬 수 있을 것이다. 아홉째, 이미 관찰사에게 밀지(密旨)를 전하였는데, 만약 의논을 같이한 일이 있으면 그 의논대로 시행하라. 열째, 적이 만일 작은 보루(堡壘)나 요새에 모여 있다면 공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인데, 그때에는 모름지기 완석(碗石)을 쓰라. 그러나 그것이 무거워 짐바리에 싣기가 힘들어 사실상 소용에 안 닿는다면, 경이 다시 생각하여 멀리까지 옮길 수 있는 방법을 아뢰라. 열한째, 군사에 관한 일은 멀리 앉아서 헤아리기 어려운 일이요, 이런 여건들에 대하여서는 나도 그 가부를 잘 모르니 경도 억지로 따를 필요는 없다. 옳은 것 그른 것을 생각하여 임기응변으로 처리하라.” 하였다.
이천에게 교시하기를, “장군이 지방에 있으면 앉고 서고 치고 찌르는 법을 삼령오신(三令五申) 할 뿐 아니라, 심지어 살리고 죽이고 주고 빼앗는 권리까지도 도맡고 있다. 그러나, 임금의 신임이 미덥고 명령이 소중한 것이 아니라면 어찌 전제할 수 있겠느냐. 준동(蠢動)하는 파저강의 도적이 홀라온을 핑계 삼아 여러 번 변경을 침범하여 우리 백성들을 죽였으므로, 계축년에 장수에게 명하여 죄를 토벌해서, 그 간악하고 교활한 행동을 응징했으나, 저들은 아직도 그 죄악을 고치기는커녕, 잔학하고 악독한 짓을 더욱 마음대로 하여, 해마다 변방을 침범하여 우리의 무고한 백성을 해치고 있으니, 내 마음이 몹시 아프다. 신자(臣子)된 자는 마땅히 힘을 다하여 임금의 원한을 풀어서, 여러 해 동안 쌓인 치욕을 씻게 하라. 만약, 제 한 몸의 안위(安危)만을 생각하고 나라의 큰일을 돌보지 않고서 늦장을 부려 시기를 놓친다든지, 혹은 적을 보고도 싸우지 아니하여 적에게 겁 많고 약함을 보여 변경의 걱정을 더하게 하는 것은 나의 바라는 바가 아니다. 경이 이미 한 도의 권한을 맡고 평일에 지키고 있을 때에도 오히려 엄하게 임하였거늘, 하물며 강을 건너가서 적을 제어하는 마당에 죽이고 살리고 주고 빼앗는 위엄이 없겠느냐. 편장(褊將)과 비장(裨將)이하 항오(行伍)의 군졸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군령을 받드는 자는 상을 주고, 군령을 받들지 않는 자에게는 벌을 주어, 사사로운 일로써 법을 굽히지 말 것이며, 일시적인 형세에 따라 대국(大局)을 그르치지 말라. 삼갈지어다.” 하였다.
신개(申槩)가 아뢰기를, “죄를 토벌하는 데 있어서는 그 우두머리를 잡으면 거의 뒷걱정이 없어집니다. 전하는 말에, ‘풀을 뽑을 때 그 뿌리를 뽑지 않으면 마침내 되살아난다.’ 하는데, 왕년에 북쪽을 정벌할 때 장수들이 오직 수급(首級)을 많이 올리는 데에만 힘써, 죽이고 뺏은 것이 늙은이와 어린 것들이 태반이었고, 비단 그 우두머리를 놓쳤을 뿐 아니라 장정도 얼마 못 잡았으므로, 그 조그마한 적이 지금가지도 병통이 되어 있습니다. 이제 다시 그 우두머리를 잡지 않으면 그들의 원한이 더욱 깊어지고 그 계획이 더욱 다급해져서, 도망쳐 흩어진 무리를 모아들이고 와신상담(臥薪嘗膽) 하여 그 세력을 다시 떨쳐, 혹은 깊은 곳으로 들어가 야인들에게 호소하여 서로 결탁하고, 그들을 꾀어 길잡이로 삼는다면 변방의 걱정이 전보다 더 심해질 것입니다. 북쪽 오랑캐의 정세는 이만주 한 사람만 없앤다면 일대가 아주 평온할 것입니다. 벌써 그 우두머리를 잡았던들 형세가 대를 쪼개 듯하여 항복을 했든지 쇠잔했든지, 하루아침에 결말이 났을 것입니다. 그 밖의 심질납노(沈叱納奴)의 무리도 땅강아지와 개미일 뿐 달래면 귀순할 것이요, 치면 쉽사리 섬멸될 것이므로 걱정할 것이 못 됩니다. 바라옵건대, 분명히 장수들에게 칙명을 내리시어 적의 우두머리를 잡는 사람을 으뜸가는 공으로 삼고, 그 밖의 평민이나 늙은이, 어린 것들을 잡은 것은 공으로 치지 않으면, 기필코 적의 우두머리와 그의 자손ㆍ아우ㆍ조카들을 잡아올 것입니다. 만일 한번에 하지 못하면 침범한 그때그때에 군사를 일으켜 끝까지 진격하여 그 부락을 전멸시키어 국위를 펴고, 북호(北胡)를 평안하게 하소서. 또 장수들이 분발하여 공을 세우는 것은 오로지 상벌에 달렸사오니, 적의 우두머리를 사로잡거나 죽인 사람은 벼슬을 5등 올리고, 그 자제(子弟)를 얻은 사람은 4등, 장정을 얻은 사람은 3등, 평민을 얻은 사람은 그 인원수에 따라 차등을 두어 벼슬을 올려주고, 역자(驛子)ㆍ염간(鹽干 염전에서 소금 만드는 일을 하던 사람)ㆍ공사천구(公私賤口)로서 특별한 공이 있는 자는 부역을 면제하는 동시에 벼슬과 재산을 주고, 만일 싸움에 임하여 적을 대함에 있어 진퇴나 동작이 조금이라도 군령에 어긋나거든 군사들 앞에서 죽이고 용서하지 않게 하소서. 이것을 주장에게 다시 유시하여 상벌을 똑똑히 밝히고, 군사들에게 선포하여 군사들로 하여금 다투어 용기를 분발하고, 있는 힘을 다하여 싸움에 나가게 하는 것도 우두머리를 잡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틀림없이 이길 것이오나, 만약 올라산성이면 험준하여 날짜를 정해 놓고 빼앗기는 어려우므로, 반드시 여러 날을 포위하고 지키면서, 그들의 식량과 힘이 다하기를 기다려서야 함락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원컨대, 주장에게 명을 내리시어 모름지기 군사로 하여금 그 수비가 소홀한 때를 기하여 엄습하게 하면, 거의 군사를 지치게 하지 않고 빨리 공을 이룩할 것입니다. 토벌군을 떠나보내고 나서부터 몹시 의심스러운 것이 있으니, 혹시 들리는 말에 북호가 벌써 군사를 띄웠다고 하니, 신에게는 몹시 걱정이 됩니다.” 하였다.
임금이 김종서(金宗瑞)에게 글을 내려 비밀리에 유시하기를, “처음에, 부거(富居)와 경원(慶源) 백성이 모두 조정에 고하기를, ‘옛 경원 땅은 농사에 알맞고 또 강이 있어 지키기도 좋으니 옮아가 살게 해 주소서.’ 하였으며, 또 전대(轉對)하는 자의 말에, ‘옛날에 나라를 다스린 자는 국토를 넓히기를 힘썼으니, 공험(公險) 이남은 버릴 수 없습니다.’ 하였다. 계축년 겨울에 때마침 올적합(兀狄哈)이 관독(管禿) 부자에게 피살되어, 아목하(阿木河)에는 추장이 없었다. 그때 의논하는 신하들이 말하기를, ‘국토를 버려서는 안 되고 기회를 잃어서도 안 됩니다. 마땅히 강을 따라 진(鎭)을 설치하고 성을 높이 쌓으며, 군민(軍民)을 많이 살게 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지키게 하면, 방어하기 위하여 왕래하는 폐단도 없어질 것입니다. 만약, 명나라에서 추장이 없다는 말을 듣고, 혹시 다른 조치라도 취하게 되면 뉘우쳐도 때가 이미 늦을 것입니다. 전에 공주(孔州)는 성의 높이가 불과 한 사람의 키밖에 안 되었고, 주민도 4백 호에 지나지 않았으나 수십 년 동안을 지킬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의 계획은 조금도 염려할 바가 없습니다. 다만, 후세에 기강(紀綱)이 해이해져서 변장(邊將)이 적임자가 아니면 어떻게 할까 그것이 염려될 뿐입니다. 그러나 나라가 태평하고 어지러움이란 서로 뒤바뀌는 것이요, 백대(百代)를 이어가는 천운이란 없는 것이 상리(常理)입니다. 마지막 세대(世代)에 이르러 파멸되는 것이 어찌 다만 변경의 일뿐이겠습니까. 그리하오니, 역시 논할 바가 못 됩니다. 자잘구레한 좀도둑의 침입은 영원히 끊어질 수 없다 하더라도 커다란 일을 못한대서야 되겠습니까. 참된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란 많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의 거처가 우리나라와 불과 6ㆍ7일 여정이요, 또 반드시 파저강의 소식을 들었을 것이니 어찌 마음이 떨리지 않겠습니까. 그러하오니, 그것도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했는데, 내 생각에도 경인년의 난리에 대하여 여러 신하들이 혹은 아뢰기를, ‘공주(孔州)는 사방으로 흩어지는 곳이어서 수비가 극히 곤란하오니, 폐지해 버리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하고, 혹은, ‘경내 수백 리 의 땅은 버려 오랑캐에게 내어주는 것이 옳다면, 저들은 반드시 서로 거느리고 들어와 살 것입니다.’ 하니, 태종이 말씀하시기를 ‘우리 강토 안에 오랑캐가 사는 것은 안 된다. 곧 내어 쫓으면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 하여, 이에 폐지하는 의논에 따랐던 것이다. 그 후 명나라가 공주 땅에 위(衛)를 건설한다는 풍문이 있어, 조정에서 크게 놀라 곧 경원부(慶源府)를 부거(富居)에 복구하였다. 이로써 말하건대, 태종께서 그 땅을 버리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근년에 와서 올량합 수백 호가 야금야금 공주 등지에 침입하므로, 내가 그들을 내어 쫓고자 대신에게 의논하였더니, 모두 말하기를, ‘야인을 강제로 몰아내어서는 안 됩니다. 그대로 두어 어루만져 주는 것이 무방합니다.’ 했다. 신하들의 말이 이러한데, 태종께서 곧 쫓아내라는 생각에 비하여 어떠하고. 수십 년이 못 되어 야인의 거처는 반드시 두루 미치게 될 것이다. 요즘 장내관(張內官 명 나라의 내시)이 공주(孔州) 등지에 병영을 두고 머물러 겨울을 지내면서, 해동청(海東靑 송골매)과 토표(土豹 스라소니)를 잡아 가지고 돌아갔으며, 계속하여 아목하(阿木河)에는 추장이 없다. 전번에 풍문에 들은 말이 그러하였고, 오늘의 아목하의 일이 또한 이러하니, 야인을 제압하고 해동청을 잡는 것은 조정에서 하고자 하는 바이다. 만약, 추장이 없는 틈을 타서 〈중국이〉 여기에 위(衛)를 설치하여 야인을 위압하고 해동청을 잡으면,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버렸으니 또 무슨 말로 청하겠느냐. 기회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 매우 내 마음에 든다. 만약, ‘태종께서 안 쓴 계책을 지금 행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태종께서 곧 쫓아내라고 하신 교시는 받들어 행하지 못하면서, 다만, 이런 말만 하는 것이 옳겠느냐. 하물며 태종께서 이미 이룩한 일을 지금에 받들어 행할 뿐임에랴. 만약, ‘용성(龍城)은 가장 좋은 요해(要害)의 땅이므로 이곳을 국경으로 삼는다면 우리가 베개를 높이하고 누울 수 있을 것이다.’고 말한다면 이 또한 옳지 않다. 용성을 국경으로 한다면 야인의 거주지도 용성을 경계로 삼아야 할 것이며, 길주를 국경으로 한다면 야인이 사는 곳도 길주를 경계로 삼을 것이니, 이렇게 하다가는 끝이 없을 것이다. 하물며, 용성 남쪽에 적이 침입할 길이 한둘이 아님에랴. 나의 본말(本末)을 취사(取捨)함이 이와 같으니 경도 잘 알 터이다. 지난해 9월의 일은 지세가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진장(鎭將)에 사람을 잘못 썼던 소지이니, 가령 용성을 경계로 삼는다 하더라도 한 사람으로서 관문을 감당할 수 없고 사면으로 싸워야 할 땅이다. 거주민이 반드시 그들에게 퍼져 있을 것이니, 이런 일이 반드시 없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경인년의 일이 바로 이러한 것이었다. 이에 의거하여 말하면, 오늘날에 있어서는 변방을 개척하는 것이 상책이 됨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뜻밖에 첫해에는 큰 눈이 내리고, 다음 해에는 큰 병이 돌아서 사람과 가축이 죽은 것이 많았고, 지난해의 적의 난리에는 사로잡히고 죽은 자도 적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커다란 일을 이루는 사람은 애초에는 반드시 순조롭지 못한 일이 있어도 훗날의 공효는 반드시 바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또 염려되는 일이 있어 글로써 경에게 이르노니, 오늘날 적을 방비하는 일은 전날에 비할 바가 아니다. 적이 오지 않으면 모르되, 오게 된다면 반드시 천명, 만 명 떼를 지어 제멋대로 날뛰어 거리낌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만약 성을 지키기만 하고 대응책을 쓰지 아니하면, 적의 마음을 더욱 조장(助長)하여 뒷날의 화가 끝이 없을 것이니, 반드시 응징하여 뒷날의 화를 일으킬 마음을 막는 것이 상책이다. 그러나, 요즘 적의 난리를 알려온 자가 정월이라고도 하고 5월이라고도 하며, 또 8,9월이라고도 하고 얼음이 얼 때라고도 한다. 혹은 홀라온이라고도 하고, 혹은 수빈강(愁濱江), 혹은 흑룡강(黑龍江)이라 하며, 혹은 수천 혹은 수만이라고도 한다. 이와 같이 분분한 이야기가 없었던 해가 없으므로 듣는 사람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여서도 안 되지만, 참말로 생각하여 사시(四時)를 막론하고 남도(南道)에서 징발하는 군사를 수천 명에나 이르게 하고 또 성을 쌓는 군졸을 2ㆍ3만 명이나 두니, 이렇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면 10년이 못 되어 재력과 민력이 다하여, 백성들이 원망하고 노하여 도망쳐 흩어질 것은 필연의 이치이다.
함길도(咸吉道)는 땅이 좁고 백성이 적어 부역이 본래 가벼우니, 선왕께서 백성을 사랑한 정치가 지극하였음에 깊이 감격할 것이다. 그러나 나의 대(代)에 와서 이익 되는 정치는 듣지도 못하고 시끄러운 일만 날로 많으니, 내가 매우 부끄럽고 또 두려워하는 바이다. 원(元) 나라의 위효문(魏孝文)은 비록 오랑캐라 하지마는, 성품이 인자하고 효도가 지극하고 자애로우며 착하여, 문무를 갖추고 덕화(德化)가 널리 미치어 진실로 얻기 어려운 어진 임금이었다. 그의 말에, ‘선조께서 오로지 무(武)에만 힘쓰고 교화할 겨를이 없었으므로 교화의 책임이 나에게 있다. 그러므로 오랑캐 말과 오랑캐 의복을 금지하고 낙양(洛陽)으로 서울을 옮겨, 점차로 옛 풍속을 고쳐 옛 주나라의 성왕(成王)과 강숙(康叔) 시대를 본받고자 한다.’ 하였다. 옛날 역사에서 이를 아름답게 여겼으나, 태자와 공훈 있는 신하들이 모두 끝내 그러하지 못하였으므로, 신하와 백성들이 편안히 살지 못하였다. 그 후로 국운이 날로 쇠퇴해 갔으므로 임금이 매양 이르기를, ‘내가 낙양에서 이룩하지 못하였노라.’ 하였는데, 임금이 죽은 뒤 끝내 국운을 떨치지 못한 채 마치었다. 그의 뜻이 자기가 할 일에 최선을 다했다고 여겼겠지만, 그 공효가 이와 같았으니 내가 이를 생각할 때마다 진실로 삼가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더해진다. 전날 경원(慶源) 사람 김귀남(金貴男)이 아뢰기를, ‘적의 무리가 이 뒤에 더욱 많이 이를 터이니, 큰 성, 작은 보로 할 것 없이 지키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이 사람의 말로 미루어 보면 네 고을의 인심이 그 땅에 정착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네 진(鎭)을 처음 세울 때에 하경복(河敬復)과 심도원(沈道源)이 회답하여 아뢰기를, ‘이징옥(李澄玉)과 송희미(宋希美)의 말이, 이런 군대를 가지고 항복받기 무엇이 어려우며 어찌 도적을 두려워 하리오 하였고, 그 후에 또 들으니 경원 등지의 군사와 말들이 정예롭고 강하여 동방의 으뜸이 되는데, 장사(將士)가 어찌 쓸데없는 일을 한탄 하리오 하였고, 또 듣건대 경원부가 부거(富巨)에 있을 때에 적이 강을 건너 여러 날 동안 들어와 있는 것을 우리들이 추격하였는데, 한두 식(息)에 불과하였으므로, 적이 태연히 행하고 강을 건너 돌아갔다고 하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돌아가는 길이 몹시 험난하여 우리 군사가 강으로 추격하면, 적이 반드시 패하여 달아날 것이다.’ 하여 내가 매우 기뻐하고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서는 스스로 지키기에도 부족하거늘, 하물며 뜻을 펴기를 바랄쏘냐. 네 진(鎭)을 세우기 전에 남도(南道) 군사가 부거(富居)로 가는데 길이 오늘보다 가깝고 군사의 수효는 오늘보다 적었으나, 곡산(谷山)의 연사종(延嗣宗) 등이 아뢰기를, ‘국경을 방비하러 가는 군사 중에 말을 팔고 걸어서 오는 자가 10에 8ㆍ9나 되니, 심히 좋은 계책이 아니다.’고 하였는데, 이제 와서 보면 어떠한가. 하물며 해마다 성을 쌓는 부역이 있음에랴. 이것이 내가 밤낮으로 삼가고 두려워하는 것이다. 처음에 새 고을을 건설할 때에 여러 신하들의 의논이 자못 같지 않았던 것은 경도 아는 바이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대신들이 아뢰기를, ‘서북쪽의 압록강과 동북쪽의 두만강에 어찌 가볍고 무거움의 차이가 있겠습니까. 번진(藩鎭)을 건립하여 국경을 튼튼히 하는 것은 의(義)를 다하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이 의논을 가벼이 여기는 자는 무식한 사람입니다.’ 하여 대신의 말들이 모두 이와 같았다. 그러나 내가 유독 깊이 염려하는 것은 대개 성을 쌓는 일을 늦출 수 없고 민폐도 돌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적의 변고를 와서 고하는 것을 헛말이라 할 수 없고, 모두 사실이라 할 수 있으니, 남도의 군사를 많이 징발하지 않을 수 없는데, 재물이 다하였으니 무엇을 입히며, 식량도 다하였으니 무엇을 먹일 것이며, 힘이 다하였으니 어떻게 할 것이며, 모두 도망해 버렸으니 누구를 부리겠는가. 하물며 귀화하여 언어가 다른 사람이 대부분 요역에 종사하고 있으니, 더욱 불쌍히 여겨 그들을 먹여 살려야 할 것이다. 내가 매양 생각하여도 계책이 없으니 어찌하랴. 내가 구중궁궐(九重宮闕) 안에 깊이 들어앉아서, 도내(道內)의 일은 멀리서 헤아려볼 뿐이므로 그 사정을 자세히 모르지만, 경은 이런 일에 대하여 깊이 생각한 지 오래이니 네 진을 건설하는 것이 장차 공효가 있겠는가. 백성들의 재력이 반드시 다하겠는가. 백성들의 원망이 날로 성하겠는가. 네 진의 민심이 장차 편안해지겠는가. 야인의 변이 결국 잠잠해지겠는가. 옛날 도내의 어리석은 백성들이 헛소문을 지어내어 인심을 놀라게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요즘에 일이 전보다 커지고 백성이 전보다 피로하니 더욱 걱정이 되는데, 이번에는 반드시 그런 일이 없겠는가. 경은 잘 생각하여 은밀히 아뢰라.” 하였다.
김종서가 아뢰기를, “신이 삼가 어찰(御札)을 뵈옵고, 밤낮으로 외고 생각하기를 여러 날을 하여, 전하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는 지극히 인자한 마음과 나라를 걱정하시는 원대한 헤아림을 몸으로써 느끼옵고 감격을 금할 길이 없사오나, 신이 재주가 용렬 하와 임금님 생각에 따르지 못할까 두려워 몸둘 바 를 모르겠습니다. 신이 가만히들은 바에 의하면, 위엄과 덕을 널리 입히어 나라를 백 리 넓힌 이가 많지 않은 것은 아니나 주 문왕(周文王)보다 더한 이가 없고, 무력으로써 땅을 천리를 개척한 이가 많지 않은 것은 아니나 한 무제(漢武帝)보다 더한 이가 없습니다. 또 사리에 어둡고 나약하고 서툴러서, 날로 그 땅을 축내어 끝내 떨치지 못한 유선(劉禪) 따위는 본래 말할 것도 없습니다. 덕으로써 나라를 개척한 이는 얻기는 쉬우나 잃기는 어려운 법이요, 힘으로서 땅을 개척한 자는 얻기는 어려우나 잃기는 쉬운 것이오니, 일은 같으나 방법이 같지 않습니다. 그 얻음과 잃어버림, 쉽고 어려움의 차이는 도(道)와 부도(不道)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진실로 도가 있으면 비록 저들의 경계에서 다툰다 하더라도 가하거늘, 하물며 우리 강토를 되찾는 일이겠습니까. 신이 또 듣기에 고려 태조가 힘으로는 능히 삼한(三韓)을 통합하였으나, 위엄이 북방에 미치지 못하고 다만 철령(鐵嶺)을 경계로 삼았고, 예종(睿宗) 때에 이르러서는 모신(謀臣)들의 슬기를 모아 오랑캐를 꾀어서 죽이고 9성을 설치하였었는데, 비록 잠깐 얻었다 도로 빼앗겼으므로 이익을 보지는 못하였으나, 경계와 판도가 분명하여져서 후세에 남긴 혜택이 그지없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우리 태조께서는 하늘이 주신 성무(聖武)로서 북방에서 일어나시어, 대동(大東 우리나라)을 다 차지하여 남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북으로는 두만강에 닿아서 공주(孔州)ㆍ경성(鏡城)ㆍ길주(吉州)ㆍ단천(端川)ㆍ북청(北靑)ㆍ홍원(洪原)ㆍ함흥(咸興)의 7고을을 설치하였으니, 참으로 동방에서 나라를 연 이래로 일찍이 보지 못한 성업(盛業)이었습니다. 또 태종께서 나라를 이어 도(道)가 정치에 젖어, 잘 다스려진 지 이미 오래되어 오랑캐를 백성으로 교화하고, 풍속을 개선하여 나라를 굳게 지켜 왔으니, 감히 누구도 어쩌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태평한 지 오래되어 지키는 신하가 방어를 잘못하여, 경성(鏡城) 이북이 적의 소굴에 빠졌는데, 태종께서는 이를 진념(軫念)하시어 우선 경원(慶源)을 부거(富居)에 두어 넌지시 복구의 뜻을 표시하였사오니, 오랑캐를 물리치고 옛 강토를 회복하는 것은 전하께서 뒤를 이어 하실 일입니다. 앞서 여러 신하들이 의논하여 아뢸 적에 경원을 줄여서 용성에다 붙이면, 북방의 포치(布置)가 알맞게 되고 민폐가 가시리라고 하였으나, 전하께서 생각하시기를 조종이 지켜온 한 자 땅, 한 치의 흙도 버릴 수 없다고 고집하시고, 여러 사람의 의논에 부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시어, 그 후 그 의논이 다시 일어나 시끄럽기 그지없었습니다. 이에 소신에게 명하여 대신에게 가서 의논하여, 영북진(寧北鎭)을 석막(石幕)에 두어서 국경을 정하게 하였습니다. 신이 이제 북방에 있어서 어느 곳이나 보지 못한 것이 없고, 어떤 말이고 듣지 못한 것이 없습니다. 부거와 석막은 모두 국경을 삼을 곳이 못 되오며, 용성도 관새(關塞)의 땅이 아닙니다. 의논하는 자가, ‘용성이 진(秦) 나라의 함곡(函谷)과 같아서 좁고 험하기 비길 데 없어, 여기서 지키면 오랑캐가 감히 우리를 향하여 간교를 피울 수 없으며, 우리 백성이 베개를 높이하고 마음 놓고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였으나, 이것은 절대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막을 만한 물이 없으니 무엇으로써 험한 진을 설치할 것이며, 의거할 만한 산이 없으니 무엇으로써 튼튼한 요새로 삼겠습니까. 참으로 이른바 사방으로 흩어지고 사면으로 싸워야 할 곳입니다. 만약, 네 고을의 요충지로써 큰 진(鎭)을 만들어 네 고을의 응원으로 삼는다면 괜찮지만, 만일 의논하는 자의 말대로 용성으로써 경계로 삼았다가 오히려 적에게 침입당하는 걱정을 면하지 못하면, 뒤에 의논하는 자는 반드시 마천령(摩天嶺)을 경계로 삼으려 할 것이요, 그래서도 오히려 면하지 못하면 철령을 경계로 삼고야 말 것이오니, 전조 (前朝 고려)의 일을 거울삼을 만하옵니다. 신이 또 들은 바에 의하면 역대의 제왕이 왕업을 처음 일으킨 땅을 소중히 여기지 아니함이 없습니다. 유(劉)씨의 한(漢) 나라가 풍패(豐沛)에 대하여, 이씨의 당 나라가 진양(晉陽)에 대한 것으로써 볼 수 있습니다. 선조의 땅을 버리고 지키지 않으며 창업의 땅을 잊어버리고 회복하지 않는다면, 선조가 이룩하여놓은 일을 잘 이어받을 후손이 있다고 하겠으며, 선조의 뜻을 잘 계승하여 그 공렬을 잇는다고 하겠습니까. 또 용성을 경계로 삼는 것은 불의(不義)한 것이 한 가지요, 불리(不利)한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선조의 강토를 줄이는 것이 한 가지의 불의요, 산천의 험함이 없는 것이 한 가지 불리함이요, 수비의 편리가 없는 것이 두 가지의 불리입니다. 두만강을 경계로 삼으면 한 가지의 대의(大義)와 두 가지의 큰 이익이 있습니다. 왕업을 일으켰던 땅을 다시 일으키는 것은 대의이오며, 긴 강의 험함에 의거하는 것은 한 가지의 큰 이익이요, 수비에 편리함이 있으니 두 가지의 큰 이익입니다. 그러니 용성을 경계로 삼고자 하는 것은 모자라는 생각입니다. 하늘은 도(道)가 있는 자를 도와서 원흉(元兇)은 자멸하고, 천한 오랑캐는 스스로 쫓기게 마련입니다. 우리 전하께서 기회를 타고 포치(布置)를 알맞게 하여 한명의 군사도 힘들이지 않고 한 사람의 백성도 다치지 않고서 옛 강토를 회복하고, 거기에 네 고을을 두면, 선조의 뜻과 업을 잘 계승하여 그 공렬을 더욱 빛냈다고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또 듣기에, ‘큰일을 이룩하는 사람은 조그마한 폐단을 돌보지 않으며, 큰 업을 세우는 사람은 작은 손해를 계산하지 않는다.’ 합니다. 일이 크면 폐단이 반드시 생기고, 업이 크면 해가 따르는 것은 다만 오늘의 일만이 아니오니 옛날부터 그러하옵니다. 이번에 네 고을을 설치하는 것은 과대(誇大)함을 좋아함이 아니요 선조의 땅을 회복하는 것이오니, 이보다 더 큰 일이 없사오며, 선왕의 업을 잇는 것이오니 이보다 더 중한 의(義)는 없을 것입니다. 어찌 조그마한 폐단을 염려하며 작은 해를 걱정하오리까. 하물며 첫해의 눈이 비록 많이 왔다 하오나 마소가 심하게 손실된 바 없고, 다음해의 병이 비록 많았다 하오나 백성이 그다지 많이 죽은 것이 아니옵니다. 만약 의논하는 자의 말과 같다면 농우(農牛)와 전마(戰馬)가 어디에서 나왔으며, 군졸이 많고 장정이 남아돌아가 오히려 지난날의 수효에서 감소된 것이 없으니 무슨 까닭입니까. 그 말이 실정보다 지나쳤음은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또 지난해의 일로 말하면 그 화가 비록 중했다 하나, 흥부(興富)의 죽음과 승우(承祐)의 패군(敗軍)과 용성의 대패에 비하면 참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9년 동안의 홍수와 7년 동안의 가뭄이요(堯)임금과 탕(湯)임금의 성덕에 손실을 줄 수 없었고, 40만의 흉노(匈奴)나 50만의 돌궐(突厥)이 한(漢) 나라와 당(唐) 나라의 큰 공에 무슨 해를 끼쳤습니까. 하물며 1년도 못 되는 재앙과 수천도 못 되는 도적이 무엇이 걱정이며 두렵겠습니까.
신이 또 듣건대, 옛날의 호걸은 만리장성을 쌓아 오랑캐를 막았고, 천리의 긴 둑을 수리하여 하수(河水)를 막았으며, 또 그 일을 하는 데 백성들이 10년이란 오랜 세월을 보내었으니, 이것은 좀 지나친 일이라 하겠사오나 후세 사람은 오히려 그 혜택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북쪽이 말갈(靺鞨)과 접하고 있어, 여러 번 침략을 받음이 전조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치지 않으니, 성곽의 수리와 갑병(甲兵)의 훈련이 마땅히 다른 도에 비하여 백배나 되어야 할 것입니다. 비록 금년에 한 성을 쌓고 내년에 또 한 성을 쌓아, 성을 쌓지 않는 해가 없다 한들 의(義)에 해로울 것이 무엇입니까. 지난번 부거(富居)를 경계로 했을 적에는 아직 몇 자의성도 없었습니다. 국경의 고을이 이러하였으니 하물며 용성 이남의 고을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생각하면 변방에 대비하는 계책이 매우 허술하여, 중국 사람이 비웃는 것도 당연합니다. 우리 전하께서 진념하시고 모신(謀臣)이 의견을 바쳐 백성들이 자식처럼 모여와서 이미 회령(會寧)에는 성을 쌓았고, 또 경원(慶源)에도 쌓았는데 역사(役事)가 시기를 잃지 않고 일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하물며 갑산(甲山)과 경흥(慶興)은 스스로 수축(修築)하여 모두 보배로운 성을 가지고 있으니, 북방의 걱정이 10중에 7ㆍ8이 이미 사라졌습니다.
신이 또 듣건대, 은(殷) 나라가 귀방(鬼方)을 치는 데 3년이 걸렸고, 주(周) 나라의 수자리를 살던 자들이 말하기를 ‘내가 보지 못한지가 지금껏 3년이나 되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어느 달에나 내가 이기고 돌아갈꼬.’ 하였으니, 이것을 보면 은나라와 주 나라의 백성들은 오래도록 수자리를 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뒤 오랑캐들이 더욱 세력을 펴서 정벌과 방비가 더욱 확대되었으니, ‘돌아오니 백발이 되었는데 도로 수자리 신세로다.’ 하는 시로써 알 수 있습니다. 비단 중국뿐이 아니오라 고려 때에도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철령을 국경으로 삼았다가, 뒤에는 쌍성(雙城)을 경계로 삼아, 하도(下道)에서 낸 군사를 보내어 이곳에서 수자리 살게 하였으므로, 수자리는 늙도록 집에 돌아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부자가 서로 알지 못하였으니, 그 길이 얼마나 멀며 수자리를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를 알 것입니다. 오늘의 일로 말하면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갑인 년 봄부터 병진년 사이에 네 진을 설치한 이후로는, 홍원(洪原) 이남이 편안하고 조용해졌습니다. 다만 지난해 겨울에 원근의 야인이 동요하려 하므로 위엄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고, 또 북청(北靑) 이북의 관하 소속 군졸이 아직 교대 휴가를 얻지 못하였으므로, 처음에는 홍원(洪原)ㆍ함흥(咸興)ㆍ정주(定州)ㆍ예원(豫原) 네 고을의 정규군 5백 명을 내어 겨울 방어에 임하게 하고, 다음엔 영흥(永興)ㆍ고원(高原)ㆍ덕원(德源)ㆍ용진(龍津)ㆍ안변(安邊)ㆍ문천(文川) 고을의 5백 명을 내어 봄에서 여름까지 지키게 하였으니, 다만 두 번만 나가면 그만입니다. 신이 계축년 겨울에 명을 받은 이래로 부거와 갑산에는 모두 유방군(留防軍)이 있고, 남도의 번상(番上)하는 자와 번휴(番休)하는 자가 길에 끊이지 않으므로, 말이 죽고 군졸이 쓰러지는 것을 신이 목격하였으니, 오늘의 일로 말씀드리면 그 노고에 본래 차이가 있습니다.
신이 또 듣건대, 고을을 옮기는 것은 큰일입니다. 원망을 불러일으키고 화기(和氣)를 상하게 하는 것은 옛사람이 깊이 염려한 바이온데, 하물며 조용히 살고 있는 우리 백성을 저 늑대와 이리의 땅으로 옮기는 것이겠습니까. 원망하고 싫어하지 않는 자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다만 성상의 계획이 신묘하시어 한 사람의 백성도 벌주지 않고서 수만이나 되는 무리가 겨우 한 달 남짓한 사이에 새 땅에 다 모여들어, 대사가 쉽게 이룩되고 새 고을이 길이 세워졌으니, 저 잠깐 동안 성공하였다 곧 실패한 것과는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뜻밖에 부박한 무리가 첫해에 큰 눈이 왔느니, 다음 해에는 큰 병이 돌았느니 하여 서로 근거 없는 말을 퍼뜨리어 인심을 선동 현혹케 하여, 편안히 살고 있는 자가 움직이려 하고 머물러 있는 자가 가고자 하여, 거의 큰일을 저해하여 전공(前功)을 망칠 뻔하였사오나, 다행히도 전하의 명쾌하신 단안에 힘입어 근거 없는 말은 저절로 사라지고 민심은 자연히 안정되었습니다. 게다가 지극히 인자하신 은혜가 백성에게 깊이 스며들어, 추워하는 자에게 옷을 주고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어 백성이 일에 시달려도 그 피로를 잊고, 군졸이 수자리 살기에 지쳐도 그 괴로움을 잊었으니, 옛사람이 말한바, ‘기쁘게 하여 백성을 부리면 백성이 그 괴로움을 잊는다.’ 함이 이것입니다. 오늘 네 고을을 건설함은 오로지 북방에 울타리를 만드는 것이요, 오늘 성을 쌓는 것은 울타리를 튼튼히 하는 것이며, 오늘 변경을 지키는 것은 역시 저 도적을 막아 우리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자 함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일은 하지 않아도 될 일에 가벼이 인력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요, 과시하거나 공로를 좋아해서 병력을 다하며 무력을 남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 백성이란 지극히 어리석으면서도 신령스러운 것이니, 이 뜻을 모르고 망령되어 원망을 일으키겠습니까. 어떤 백성이 신에게 말하기를, ‘회령과 경원에는 이미 성을 쌓았으니, 앞으로 마땅히 쌓아야 할 곳은 종성과 용성인데, 오직 이 두 성이 건축되면 우리들은 걱정이 없을 것이다.’ 하오니, 이 말을 미루어 보면 다른 백성의 마음도 따라서 알 것입니다. 지난해의 경원의 화는 참혹하다 하겠사오나, 백성들이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고, 흩어진 자는 모이고 간 자는 되돌아오며, 농사에 힘쓰고 생업을 즐기어 평일과 다름이 없었으니, 오늘의 일로써 이를 보면 뒷날에 목숨을 바치고 떠나가지 않을 것을 기약할 수 있습니다. 혹 날카로운 기세를 이기지 못하여 스스로 적진에 나아가 능히 적의 머리를 베는 자도 있으니, 지난날의 사세로써 이를 돌이켜 보면, 훗날 윗사람과 친하고 어른을 위하여 죽는 것도 기약할 수가 있습니다. 경원 한 고을의 일로써 미루어 보면 세 고을 군민의 마음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신이 오랫동안 북방에 있어서 야인의 실정을 잘 보았사온데, 그들은 비록 아비와 아들 사이일지라도 욕심이 나면 서로 죽이고 해치기를 원수와 다름없이 하니, 비록 매일 천금을 허비하더라도 그 마음을 맺기가 어려우며, 혹시 이익으로써 맺어 놓는다 하더라도 그 이익이 다하면 또 독살을 부립니다. 그러하오니 밖으로는 회유하는 은혜를 보이고 안으로는 방어의 태세를 갖추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리하면 우리의 형세는 저절로 강해지고 적의 형세는 저절로 꺾일 것입니다. 저절로 강해진 세력으로써 저절로 꺾인 틈을 타면 우리는 뜻을 펴게 될 것입니다. 신이 성을 쌓고 병기를 수선하며 군졸을 훈련하고 군량을 저축하기에 급급한 것은 실로 이 때문입니다. 만일 성곽이 튼튼하고 병기가 날카롭고 사졸이 훈련되면, 네 진의 백성이 스스로 지키고 제 힘으로 싸울 수 있을 것이오니, 어찌 다른 군사의 도움을 기다리겠습니까. 적의 침략이 길이 그치고, 적의 마음이 영원히 복종할 것을 미리 헤아리기는 어렵습니다.
신이 또 생각하옵건대, 처음 새로 옮겼을 때에는 겨우 몇 자 밖에 안 되는 목책으로도 오히려 굳게 지킬 수가 있었사온데, 더구나 이제 석성이 이루어졌으니 스스로 지키는 데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전에는〉 민간이나 관청에나 저축해 둔 것이 없어 이로 인해 기근이 들면서도 굶어 죽음을 면하였사온데, 더구나 지금은 매년 풍년이 들어 백성에게는 남은 곡식이 있고, 관에는 남은 저축이 있으니 어찌 식량이 다함을 걱정하오리까. 관청에서는 조금의 요구도 없고 백성은 실오라기 하나의 지출도 없사오니, 무엇 때문에 재물이 다하겠습니까. 백성의 마음은 이미 안정되고 죄를 짓고 도망하는 자는 날로 줄어드니, 무슨 까닭으로 모두 도망쳐버리겠습니까. 종성만 다 쌓게 되면 민력(民力)은 자연히 쉬게 될 것이니, 어찌 힘이 다함을 걱정하오리까. 용성 같은 곳은 형세가 그리 나쁘지 않사오니 빨리 서두를 필요가 없습니다. 재력이 넉넉해지기를 기다린 뒤에 하여도 늦지 않습니다. 신이 또 듣건대, ‘선인(先人)이 나라를 다스리되 백년이 되어야 잔악함을 이기고 몹쓸 것을 제거한다.’ 하였사오니, 비록 선인이라도 백년이 못 되고서는 다스려진다고 말할 수 없을 것 이온데, 하물며 이 세 고을을 세운 지가 10년도 못 된 것이겠습니까. 어찌 한 가지 일의 득실(得失)로써 대번에 걱정하거나 기뻐하겠습니까.
삼가 바라옵건대, 성상께서는 속히 이루기를 구하지 마시고 작은 이익을 귀히 여기지 마시며, 작은 폐단을 헤아리지 마시고 조그마한 걱정을 염려하지 마시어, 세월이 흐르기를 천천히 기다리면 허황된 말이 저절로 가라앉고 민심이 자연히 안정될 것이며, 민폐는 사라지고 백성의 원망은 없어져서, 자연히 백성들의 식량은 넉넉해지고 병력은 강해지며 도적들은 굽히어 세 고을은 길이길이 튼튼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드릴 말은 다함이 없을 것 같습니다. 첫해의 큰 눈 내린 것을 말하는 자는 마소가 다 죽어버린 것같이 생각하오나 나는 그렇게 여기지 않습니다. 또 다음해의 돌림병을 말하는 자는 백성이 거의 다 죽은 것처럼 여기오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조정의 의논은 대부분 저희들은 옳게 여기고 신은 그르다 하오며, 저희들을 가리켜 충직하다 하고 신을 가리켜 간사하다고 하니, 신은 이때에 있어 그지없이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제 와서 보건대, 일이란 제각기 자취가 있어 끝내 덮어둘 수 없는 것이니, 누가 충직하고 누가 간사하며, 누가 공(公)이고 누가 사(私)인지, 공사(公私)와 충사(忠邪)의 가림은 오직 전하의 밝으신 판단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예로부터 지방에 있으면서 일을 건의하는 신하는 반드시 참소와 비방을 받아 화를 벗어나지 못한 자가 많습니다. 전조(고려)의 신하 윤관(尹瓘)도 그 하나의 예이겠습니다. 윤관은 그 지체가 귀족이요 또 큰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화를 면하지 못하였거늘, 더구나 신은 조그마한 공로도 없고 또 큰일을 할 재주도 없어 하는 일에 잘못이 많으니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신이 절실함을 이기지 못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옵니다.” 하였다.
임금이 보고 나서 곧 중관(中官) 엄자치(嚴自治)를 보내어 위로하고 유시하기를, “내가 북방 일에 대하여 밤낮으로 걱정하여 마지않았는데. 이제 경의 글을 보니 근심할 것이 없도다.” 하시고, 곧 어의(御衣) 한 벌을 내려 주시었다. 세종이 김종서(金宗瑞)에게 명하여 네 진(鎭)을 설치할 때에, 조정의 의논이 분분하였으나 종서가 힘껏 그 일을 주장하였다. 의논하는 자의 말이, “김종서가 사람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는 일을 가지고 이룰 수 없는 역사(役事)를 시작하였으니 그 죄는 죽여야 옳다.”는 것이었다. 세종이 이르기를, “비록 내가 있으나 만일 김종서가 없었다면 이 일을 마련할 수 없었고, 비록 김종서가 있으나 내가 없었더라면 이 일을 주장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하고는, 고집하고 마음을 돌리지 아니하였다. 김종서가 이미 네 진을 설치하여 남도 백성을 옮겨다 채우고, 날마다 술을 마련하고 풍악을 울려 장사(將士)들에게 크게 잔치를 베풀었으므로, 벼슬아치와 백성들이 괴롭게 여겼다. 어떤 이가 그 불가함을 말하니 김종서가 말하기를 “바람이 모래를 날리는 변방에서 장사가 굶주리고 수고하는데, 내 처음부터 초라하게 시작하면 뒤에 반드시 유종의 미가 없을 것이다.” 하였다. 어느 날 밤잔치 때에 불평하는 무리가 활을 쏘아 술통을 맞히니, 좌우가 모두 놀라 떠들썩하였으나 김종서는 태연자약하였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으니 김종서가 말하기를, “간인(奸人)이 나를 시험해 보았을 뿐이니 제가 무엇을 할 것인가.” 하였다.
9월 7일에 이천(李蕆)이 여연 절도사(閭延節度使) 홍사석(洪師錫)과 강계 절제사 이진(李震)과 더불어 4천 8백여 명을 거느리고, 강계로부터 만포구자(滿浦口子)의 앞 여울을 지나 옹촌(瓮村)ㆍ오자참(吾自站)ㆍ오미부(吾彌府) 등지로 향하고, 호군(護軍) 이재(李梓)로 하여금 1천 8백여 명을 거느리고 이산(理山)의 산양회(山羊會)로부터 압록강을 지나 올라산 남쪽 홍타리(紅拖里)로 향하게 하고, 대호군(大護軍) 정덕성(鄭德成)은 1천 2백여 명을 거느리고 이산의 산양회로부터 압록강을 지나 올뢰산(兀頼山) 남쪽 아간(阿間)으로 향하였다. 11일에 좌우군은 고음한(古音閑) 땅으로 들어가 적의 전장(田莊)을 협공하니 적이 모두 도망하였다. 좌군은 홍타리 가운데의 마을로 향하고, 중군은 오자참으로부터 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적의 소굴 10여 호를 수색하여, 적의 머리 35급을 베고 5명을 사로잡고 마소와 가축을 뺏고 쌓아둔 곡식은 불살라 버렸다. 12일에 좌군은 파저강을 지나 올라산성과 아간 땅을 수색하니, 적은 모두 도망하였으므로, 다만 적의 머리 한 급만을 베고 그 집과 곡식을 태워버리고 곧 파저강을 도로 건넜다. 13일 새벽에 우군과 중군이 함께 오미부에 이르러 적의 소굴을 포위하니, 적이 미리 알고 모두 도망쳐 버렸으므로, 그 빈 집 24채와 쌓아둔 곡식을 불사른 뒤에 중군은 곧 돌아오고, 우군은 소토리(所土里)에 머물러 좌군을 기다리면서 적의 머리 10급을 베고 남녀 9명을 사로잡고 홍타리로부터 와서 모이었다. 이날 신시(申時)에 적이 우군이 미처 진지를 마련하지 못한 틈을 타고 달려들었다가 이기지 못하고 물러갔다. 14일 아침에 적이 또 좌군을 향하여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다가 우리 군사가 화포(火砲)를 쏘자 물러갔다. 좌 우군이 모두 군사를 돌릴 때, 좌군이 앞잡이가 되고 우군이 후군이 되어 오다가 길에서 적 50여 기가 별안간 숲 속에서 뛰어나는 것을 만났으나 우리 군사가 쳐서 말 두 필을 빼앗았다. 16일에 삼군(三軍)이 모두 개선하니 죽이고 잡은 적이 60여 명이었다. 이천 등이 사자를 보내어 첩보(捷報)를 올렸는데, 그때마다 사신들에게 모두 차등을 두어 옷을 내려 주었고, 판승문원사(判承文院事) 이세형(李世衡)을 보내어 장병들을 위문하였다.


 

[주D-001]《홍무정운(洪武正韻)》 : 명나라 태조 홍무(洪武) 연간(1368~1398)에 어명으로 편찬된 16권의 운서(韻書)로서, 사성(四聲)의 체계를 북경(北京) 음운을 중심으로 고치어 정한 것인데, 우리나라의 〈훈민정음〉과〈동국정운〉제작에 기초 자료가 되었다.
[주D-002]묵특(冒頓) : 흉노(匈奴) 추장(酋長)의 이름인데 ‘용맹한 자’라는 뜻이라고 한다. 북방의 여러 족속을 굴복시키고 내외 몽고를 중심으로 한 일대 제국을 건설하여 흉노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남쪽으로 내려와 한 고조(漢高祖)와 백등(白登)에서 싸워 재물과 많은 여자들을 받음.
[주D-003]수성(守成)하는 임금 : 창업한 군주가 아니고, 선대(先代)에서 이루어 놓은 것을 이어받아 지키는 임금을 말한다.
[주D-004]소공(召公) : 주(周) 나라 무왕의 아우이며, 성왕(成王)을 도와 주 나라의 기초를 만들었다. 무왕이 멸망시킨 은(殷)이 재흥을 꾀하였으나, 소공이 성왕을 도와 반란을 평정하고, 또 산동 반도의 오랑캐들을 정벌하여 국토를 넓혔다.
[주D-005]전단(田單) : 춘추전국 시대 제(齊) 나라의 장수인데, 연(燕) 나라 장수 악의(樂毅)가 제 나라를 쳤을 때, 단(單)만이 농성하고 있다가 연 나라 군사를 화우(火牛)의 계교로 물리치고, 70여 성을 도로 빼앗았다.
[주D-006]위곽(衛霍) : 위청(衛靑)과 곽거병(霍去病)을 말함인데, 모두 한 무제(漢武帝)의 장수로서 흉노(匈奴) 정벌에 공이 컸다.
[주D-007]반간(反間) : 《손자병법(孫子兵法)》에, 간첩을 향간(鄕間)ㆍ내간(內間)ㆍ반간(反間)ㆍ사간(死間)ㆍ생간(生間)의 다섯으로 들었다. 향간과 내간은 내통자이고, 반간은 이중간첩, 사간은 적을 속이기 위하여 위장 정보를 제공하는 자이고, 생간은 생생한 정보를 가지고 오는 간첩을 말한다. 반간은 간첩, 이간(離間)의 뜻으로도 쓰이는 말이나, 여기에서는 적을 역이용하여 적정을 탐색함을 뜻한다.
[주D-008]경인년의 화 : 태종 10년(1410) 경인년에 올적합(兀狄哈)이 오도리(吾都里)ㆍ올량합(兀良哈)과 함께 경원(慶源)에 침입하였던 일을 가리킨다.
[주D-009]반초(班超) : 후한(後漢) 때의 서역 경략자(西域經略者)로서, 흉노(匈奴)와 서역의 여러 나라가 한에 배반했을 때, 이를 정복하고 서역도호(西域都護)가 되어 50여 국을 통할하였고, 거기서 31년이나 살다가 귀국 병사하였다.
[주D-010]삼령오신(三令五申) : 세 번 호령하고 다섯 번을 거듭 말한다는 뜻이니, 곧 군대에서 되풀이하여 자세히 명령함을 말한다.
[주D-011]와신상담(臥薪嘗膽) : 오(吳) 나라의 왕 부차(夫差)가 섶나무 위에서 자면서 월(越) 나라에 복수할 것을 잊지 않았고, 월나라 왕 구천(句踐)은 오 나라에 복수할 것을 잊지 않기 위하여, 쓸개를 핥으면서 피차 고생을 참고 견디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주D-012]유선(劉禪) : 촉한(蜀漢)의 초대 왕인 유비(劉備)의 아들로서, 부왕(父王)의 뒤를 이어 제갈량(諸葛亮)의 뛰어난 지략과 지극한 충성을 받았으나, 그가 병사하자 갑자기 국세가 꺾이어 위(魏) 나라에 멸망당하였다.


 

태종 15년 을미(1415,영락 13)
 12월3일 (병인)
원윤 이인을 신이충의 집에 결혼시키고자 하는 일로 대언과 논의하다

임금이 대언(代言) 등에게 이르기를,
“내가 원윤(元尹) 이인(李裀)을 신이충(愼以衷)의 집에 결혼시키고자 하였는데, 들으니, 신이충이 허물이 있다 하니 그러한가?”
하니, 조말생(趙末生)이 대답하기를,
“지난날에 부모상을 당하여 사람을 죽였습니다.”
하고, 유사눌(柳思訥)은 대답하기를,
“이것뿐만 아니라, 신이충은 설회(薛懷)의 사위이고 설회는 채홍철(蔡洪哲)의 손서(孫壻)인데, 채씨는 본래 기생의 손자입니다. 어찌 금지(金枝)와 연결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이인의 어미도 천하니, 무슨 혐의가 있겠는가? 그러나 내가 이미 최사강(崔士康)의 딸에게 정혼하였다. 정적(正嫡)의 아들로서 일생 동안에 어찌 간난(艱難)하기가 이 자식들 같은 것이 있겠느냐? 내가 죽은 뒤에는 반드시 처부모의 은애(恩愛)를 받아야 그 삶을 편안히 살 수가 있겠으므로, 장획(臧獲)과 산업이 구비한 곳에 결혼하려고 하는 것이다. 원윤의 어미는 내가 이미 작(爵)을 봉하였으니 무슨 비천한 것이 있겠느냐?”
하니, 유사눌이 말하였다.
“참으로 상지(上旨)와 같습니다.”
【원전】 2 집 93 면
【분류】 *풍속-예속(禮俗) / *왕실-종친(宗親)

태종 16년 병신(1416,영락 14)
 2월2일 (을축)
정선 궁주를 우의정 남재의 손자 남휘에게 시집보내고, 원윤 이비를 장가들게 하다

제4녀 정선 궁주(貞善宮主)를 우의정(右議政) 남재(南在)의 손자 남휘(南暉)에게 시집보내고, 또 원윤(元尹) 이비(李裶)를 첨총제(僉摠制) 김관(金灌)의 딸에게 장가 들게 하고, 원윤 이인(李裀)을 중군 경력(中軍經歷) 최사강(崔士康)의 딸에게 장가들게 하였다.
【원전】 2 집 102 면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의식(儀式)

태종 17년 정유(1417,영락 15)
 12월6일 (정해)
세자와 왕자·부마가 광연루에서 헌수하다

세자와 왕자·부마(駙馬)가 광연루 아래에서 헌수(獻壽)하였다. 세자와 효령 대군(孝寧大君)·충녕 대군(忠寧大君)·성녕 대군(誠寧大君)·경녕군(敬寧君) 이비(李裶)·공녕군(恭寧君) 인(裀)·청평군(淸平君) 이백강(李伯剛)·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가 헌수하고, 여러 종친과 권영균(權永均)이 시연(侍宴)하였다. 병조 판서 김한로(金漢老)·이조 판서 심온(沈溫)·호조 판서 정역(鄭易)·동지총제(同知摠制) 성억(成抑)·대호군(大護君) 최사강(崔士康)·강주(姜籌)는 밖에 사연(賜宴)하였다. 임금이,
“지금 이 김한로 등 6인은 왕실과 연혼(連婚)한 사람들이니, 이후부터는 종친의 내연(內宴)에 모두 와서 잔치에 참여하라.”
하고, 이에 김한로 등을 명하여 차례에 따라 잔을 바치게 하였다. 정비(靜妃)가 편전(便殿)에 나아가니, 세자 이하가 헌수하고, 숙빈(淑嬪)·여러 대부인(大夫人)·궁주(宮主)·옹주(翁主)가 시연하였다.
【원전】 2 집 195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태종 18년 무술(1418,영락 16)
 11월8일 (갑인)
예문관 대제학 변계량이 찬한 태종의 신도비문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신(臣) 변계량(卞季良)에게 명하여 신도비문(神道碑文)을 찬(撰)하게 하였다. 그 글은 이러하였다.
“하늘이 장차 유덕(有德)한 이에게 큰 임무를 내려주려 할 때에는 반드시 성자(聖子)·신손(神孫)을 낳게 하여 큰 운수를 열고 큰 복조(福祚)를 길게 하는 것이다. 우리 조선(朝鮮) 태조 강헌 대왕(康獻大王)이 일어나시고, 우리 태종으로써 아들을 삼고 우리 전하로써 손자를 삼았었다. 아아,성하도다! 어찌 인위(人爲)로써 능히 미칠수가 있는 바이겠는가? 하늘이 상(商)나라 왕가(王家)에 어질고 착한 임금을 잇달아 내신 것과 주(周)나라 왕가(王家)에 태왕(太王)·왕계(王季)·문왕(文王)·무왕(武王)과 같은 임금을 서로 잇달아 내신 것이 무엇이 다르겠는가? 신(臣)이 삼가 선원(濬源)을 살펴 보니, 이씨(李氏)는 전주(全州)의 이름난 대성(大姓)이었다. 사공(司空) 휘(諱) 이한(李翰)은 신라(新羅)에 벼슬하여 종실(宗室)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6세(六世) 휘(諱) 이긍휴(李兢休)에 이르러 비로소 고려(高麗)에 벼슬하였고, 13세(十三世) 황현조(皇玄祖) 목왕(穆王)에 이르러 원조(元朝)에 들어가 벼슬하여 천부(千夫)의 장(長)이 되었고, 그 후 4세(四世)가 작위(爵位)를 이어받아서 모두 능히 선대의 업(業)을 잘 받들어 이루었다. 원(元)나라 정치가 이미 쇠약하자, 황조(皇祖) 환왕(桓王)은 돌아와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조에 벼슬하여 공(功)을 쌓고 인(仁)을 쌓은 지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우리 신의 왕태후(神懿王太后)께서 지정(至正) 정미년(丁未年) 5월 신묘(辛卯)에 태종(太宗)을 함흥부(咸興府) 후주(厚州)의 사제(私第)에서 낳으니, 우리 태조의 제5자(第五子)이었다. 나면서부터 신이(神異)하고, 점점 자리면서 영예(英睿)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고 글 읽기를 좋아하여 배움이 날로 진전하였다. 나이 20이 못되어 고려의 과거(科擧)에 급제하였다. 당사의 정사(政事)가 문란하고 백성들이 유리(流離)하여 나라 형세가 위태로우니, 개연(慨然)히 세상을 구제(救濟)할 뜻을 가지게 되었다. 태조께서 사랑하기를 여러 아들과 달리 하였고, 일찍이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시중(侍中) 이색(李穡)과 함께 명나라 서울[京師]에 조현(朝見)하였고, 관(官)을 여러 번 옮겨 밀직사(密直司) 대언(代言)에 이르렀다. 홍무(洪武) 신미년(辛未年) 9월에 신의 왕후(神懿王后)가 훙(薨)하니, 제릉(齊陵) 곁에 여막(廬幕)을 짓고 3년상(三年喪)을 마치고자 하였는데, 임신년 봄에 태조(太祖)께서 서쪽으로 행차하였다가 병에 걸려 돌아오니, 달려와서 탕약(湯藥)을 받들어 모시었다. 공양왕(恭讓王)의 신하들이 그 틈을 타서 경복(傾覆)하기를 꾀하여 형세가 매우 위급하므로, 태종이 시기에 응하여 변(變)을 제압하고 그 괴수(魁首)를 쳐서 없애니, 모든 음모가 와해되었다. 가을 7월에 여러 장상(將相)들과 더불어 대의(大義)를 제창하여 태조를 추대(推戴)하여 집을 바꾸어 나라를 만드니, 정안군(靖安君)에 봉(封)해졌다. 갑술년 여름에 명나라 고황제(高皇帝)가 태조의 친아들을 보내도록 명하니, 태조(太祖)가 우리 태종(太宗)이 경서(經書)에 능통하고 예(禮)에 밝아서 여러 아들중에서 가장 어질다고 하여, 즉시 보내어 명에 응(應)하게 하였다. 명나라에 이르러 황제에게 아뢴 것이 황제의 뜻에 맞았으므로, 황제가 예를 우대하여 돌려보내 주었다.
무인년(戊寅年) 가을 8월에 태조가 편찮으시니, 권신(權臣)들 가운데 집안끼리 무리를 짓고 붕당(朋黨)을 모아서 유얼(幼孼)을 끼고 정권을 마음대로 잡고 자기들의 뜻을 마음대로 펴고자 하는 자가 있어서 화(禍)의 발생이 임박하여지니, 태종이 기미(幾微)를 밝게 알아 모두 없애버리니, 그때에 종친(宗親)과 장상(將相)들이 모두 우리 태종을 세자로 삼기를 청하였으나, 태종이 굳이 사양하고, 공정왕(恭靖王)을 추대하여 높이고, 위로 태조에게 청하여 세자(世子)에 책봉(冊封)하게 하여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안정시켰다. 9월 정축(丁丑)에 태조(太祖)가 병이 낫지 않으므로 공정왕(恭靖王)에게 선위(禪位)하였다.
건문(建文) 경진년 정월(正月)에 역신(逆臣) 박포(朴苞)가 동기(同氣)를 살해할 음모를 하여 몰래 방간(芳幹) 부자(父子)를 꼬이어 군사를 일으켜 난(亂)을 일으키니, 태종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평정하여, 박포를 베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고 방간을 안치(安置)하여 의친(懿親)의 정을 폐하지 아니하였다. 공정왕(恭靖王)이 후사(後嗣)가 없고, 또 개국(開國)과 정사(定社)가 모두 우리 태종의 공적이라 하여 세자(世子)로 책봉하고, 겨울 11월에 또한 병으로 우리 태종에게 전위(傳位)하였다. 사신을 명나라에 보내어 고명(誥命)을 청하니, 다음해 신사년 6월에 건문제(建文帝)가 통정시 승(通政寺丞) 장근(章勤) 등을 보내어 고명(誥命)과 인장(印章)을 받들고 와서 우리 태종을 왕(王)으로 봉(封)하고, 겨울에 홍려시 행인(鴻臚寺行人) 반문규(潘文奎)를 보내어 와서 면복(冕服)을 하사하였는데, 그 직질(職秩)을 친왕(親王)과 같게 하였다. 임오년 겨울에 지금의 황제(皇帝)가 즉위하자, 좌정승 하윤(河崙)을 보내어 등극(登極)을 하례하니, 황제가 충성을 아름답게 여겨 이듬해 계미년 4월에 고명(誥命)과 인장(印章)을 하사하고, 도지휘사(都指揮使) 고득(高得) 등을 보내 와서 그대로 왕(王)으로 봉(封)하였다. 가을에 한림 대조(翰林待詔) 왕연령(王延齡)을 보내 와서, 곤면(袞冕) 9장(九章)금단 사라(錦段紗羅)와 서적(書籍)을 하사하고, 태조에게는 금단 사라를, 원경 왕태후(元敬王太后)에게는 관포(冠袍)와 금단 사라를 각각 차등있게 내려 주었다. 이때부터 그 뒤로 황제의 하사함이 거듭 이르러 해마다 거르는 때가 없었다. 을유년에 한양(漢陽)은 태조께서 도읍한 곳이라 하여 여러 의논을 물리치고 환도(還都)하였다. 정해년에 황제가 정조 사신(正朝使臣)에게 말하기를, ‘조선 국왕이 지성(至誠)으로 사대(事大)한다.’ 하였고, 그 뒤부터 매양 사신이 이를 때를 당하면, 문득 임금의 지성을 칭찬하였다.
무자년 5월에 태조가 안가(晏駕)하니, 슬퍼하고 그리워하기가 끝이 없었고, 양암(諒闇)에 거처하면서 상장(喪葬)을 예(禮)로 하였다. 사신를 보내어 부고(訃告)를 알리니, 황제가 몹시 슬퍼하고 조회를 파(罷)하였으며, 예부 낭중(禮部郞中) 임관(林觀) 등을 보내어 제사에 대뢰(大牢)로써 사제(賜祭)하고 시호(諡號)를 강헌(康獻)이라 주었고, 또 태종에게 칙서(勅書)를 내려 후하게 부의(賻儀)를 하사하였다. 임진년 겨울에 왕씨(王氏)의 후예(後裔)로서 민간(民間)에 숨었던 자가 있어 상언(上言)하니, 유사(攸司)에서 베기를 청하였으나, 태종이 말하기를, ‘제왕(帝王)이 일어남은 천명(天命)이 있는 것이니, 왕씨의 후예를 죽인 것은 우리 태조의 본의가 아니었다.’하고, 이에 하교(下敎)하기를, ‘왕씨의 후예로서 생존한 자들은 그들로 하여금 각각 생업(生業)에 안정하게 하라.’하였다. 갑오년 6월에 감로(甘露)가 함흥부(咸興府) 월광(月光) 구미리(仇未里)와 정평(定平) 백운산(白雲山)에 내렸다. 이듬해 을미년 4월에 감로(甘露)가 또 함흥부(咸興府) 덕산동(德山洞)에 내렸다. 우리 동방(東方)에서는 전고(前古)에 있지 않았던 일이었으므로 정부에서 함께 전(箋)을 올려 하례했으나, 임금이 받지 않았다. 무술년 6월에 세자 이제(李禔)가 패덕(敗德)하였으므로, 폐하여 양녕 대군(讓寧大君)으로 봉하고, 우리 전하가 총명하고 효도하고 우애가 있고 학문을 좋아하여 게을리하지 않아서 나라 사람들이 촉망(屬望)하기 때문에 세자로 책봉(冊封)하고 중국에 아뢰니 황제가 윤허하였다.
이 해 8월에 우리 전하에게 선위(禪位)하고 사신을 보내어 고명(誥命)을 청하였다. 11월에 우리 전하께서 책보(冊寶)를 받들어 호(號)를 ‘성덕 신공 상왕(聖德神功上王)’이라 바치었다. 이듬해 기해년 1월에 황제가 홍려시 승(鴻臚寺丞) 유천(劉泉) 등을 보내어 고명(誥命)을 받들고 우리 전하를 왕(王)으로 봉(封)하였다. 5월에 대마도(對馬島)의 왜구(倭寇)가 변경을 침범하여 군사를 죽이거나 노략질하니, 영의정 신(臣) 유정현(柳廷顯)과 장천군(長川君) 신(臣) 이종무(李從茂) 등에게 명하여 주사(舟師)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게 하니, 대마도의 왜적이 성심으로 복종하기를 전과 같이 하였다. 8월에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사연(賜宴)하였는데, 칙서(勅書)의 대략은 이러하였다. ‘왕의 지성(至誠)이 돈독하고 후(厚)하여 삼가 중국 조정을 섬겨 한결같은 덕(德)과 한결같은 마음이 처음이나 끝이나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능히 어진 사람을 고르고 덕(德)과 한결같은 마음이 처음이나 끝이나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능히 어진 사람을 고르고 덕(德)있는 사람에게 명하여 종묘(宗廟)·사직(社稷)이 의탁(依託)할 데가 있게 하니, 나라 사람들의 소망에 부응(副應)하였다.’하였고, 또 우리 전하에게 사연(賜宴)하였는데, 칙서(勅書)는 대략 이러하였다. ‘그대의 아비가 독후(篤厚)하고 노성(老成)하여 천도(天道)를 삼가 공경하고, 충순(忠順)의 정성은 더욱 오래 갈수록 변하지 않았다.’하였다.
9월에 공정왕(恭靖王)이 즉세(卽世)하니, 참최복(斬衰服)을 입었고, 역월(易月)의 복제(服制)를 마치었다. 사신을 보내어 부고를 알리니, 이듬해 4월에 황제 사신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시호를 ’공정왕(恭靖王)’이라 내렸다. 이 해 봄에 우리 전하께서 군신(群臣)을 거느리고 태상왕(太上王)의 호를 올리도록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가을 7월에 원경 왕태후(元敬王太后)가 훙(薨)하니, 우리 전하께서 심히 슬퍼함이 예(禮)에 지나치므로 〈태종께서〉 역월(易月)의 복제를 따르도록 명하였으나, 전하께서 눈물을 흘리고 울며 굳이 사양하였다. 이에 명하여 장례 뒤에는 최복(衰服)을 벗고 백의(白衣)로 복제(服制)를 마치게 하였다. 9월 임오(壬午)에 태후를 광주(廣州)의 관내 대모산(大母山)에 장사지내고 능을 ‘헌릉(獻陵)’이라 하였다. 신축년 가을 9월에 우리 전하께서 책보(冊寶)를 받들어 태상왕의 호(號)를 바치었다. 10월 태종에게 품신(稟申)하니, 원자(元子) 향(珦)을 책봉하여 세자로 삼도록 명하였다. 태종은 좀처럼 세상에 없는 뛰어난 자질로서 성학(聖學)에 밝았으며, 효도와 우애가 신명(神明)에 통하고, 정성과 공경은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에 이르렀으며, 사대(事大)하는 일은 천자가 그 지성(至誠)을 칭송하였고, 교린(交隣)하는 일은 왜국(倭國)이 그 도(道)가 있는 데 복종하였다. 하늘을 흠모하고 백성을 불쌍히 여기며 검소함을 숭상하고 비용을 절약하였다. 덕(德)과 예(禮)를 먼저 하고 형벌을 삼갔으며, 충직(忠直)한 이를 등용하고 간사한 이를 내쳤으며,이단(異端)을 물리치고 음사(淫祀)를 금지하였다. 고금(古今)을 참작하여 제도를 정하고, 문교(文敎)를 밝게 하고 무비(武備)를 엄하게 하였다. 쌓였던 폐단을 모두 개혁하니, 모든 공적(功績)이 다 빛나고, 사방(四方)이 안도(按堵)하여 백성이 편안하고 산물이 풍족하니 제왕(帝王)의 도(道)가, 아! 성하였도다. 그 황제의 사랑을 얻음이 융성하였던 것과, 두 번씩이나 감로(甘露)의 상서(上瑞)를 얻었던 것도 마땅하다 하겠다. 임인년 4월에 비로소 몸이 편찮아서 5월 병인(丙寅)에 이궁(離宮)에서 훙(薨)하였다.
우리 전하께서 애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3일 동안 철선(輟膳)하니, 군신(君臣)들이 체읍(涕涖)하면서 진선(進膳)하기를 청하였으나, 마침내 허락하지 않았다. 3년상(三年喪)으로 정하고 역월(易月)의 제도를 쓰지 않았다. 태종은 춘추가 56세이고, 왕위(王位)에 있은 지 19년이었다. 왕위를 물려주고 한가하게 거(居)하면서 정양한 지 5년 만에 갑자기 승하(昇遐)하시니, 대소 신료(大小臣僚)에서 아래로 복례(僕隷)에 이르기까지 목이 메어 울지 않은이가 없고, 세월이 오랠수록 더욱 슬퍼하기를 고비(考妣)의 상사(喪事)와 같이 하였다. 아, 슬프도다! 이 해 9월 초2일 병진(丙辰)에 존호(尊號)를 ‘성덕 신공 문무 광효 대왕(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이라하고, 묘호를 ‘태종(太宗)’이라 하였다. 초6일 경신(庚申)에 원경 왕태후(元敬王太后)의 능에 합장(合葬)하였으니, 이것은 유명(遺命)이었다. 중국에 부음(訃音)을 알리자, 황제가 애통하여 철조(輟朝)하였고, 특별히 예부 낭중(禮部郞中) 양선(楊善) 등을 보내어 사제(賜祭)하였는데, 그 글은 대략 이러하였다. ‘오직 왕이 독후(篤厚)하고 지성(至誠)하며 총명하고 현달(賢達)하여, 삼가 중국 조정을 섬겨서 충순(忠順)한 마음이 처음이나 끝이나 변함이 없었다. 부음(訃音)이 멀리 들리니, 진실로 깊이 애도(哀悼)한다.’하였고, 또 고명(誥命)을 하사하여 시호를 ‘공정(恭定)’이라 하였다. 또 전하에게 내린 부의(賻儀)가 넉넉하고 후(厚)하였다. 대개 우리 태종의 공덕의 성함과 우리 전하의 요서의 지극함이 전후에서 서로 이어서 황제의 마음을 잘 누린 까닭으로 시작과 마지막 때에 있어서 남달리 총애(寵愛)하는 은전(恩典)이 이와 같았으니, 그 갖춤이 지극하다 하겠다.
중궁(中宮) 원경 왕태후(元敬王太后)는 성(姓)이 민씨(閔氏)이요, 여흥(驪興) 세가(世家)였다. 고려의 문하 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문경공(文景公) 휘(諱) 민영모(閔令謨)로 부터 6세(世)에 황고조(皇高祖) 휘(諱) 민종유(閔宗儒)에 이르러 의릉(毅陵)을 도와서 도첨의 시랑 찬성사(都僉議侍郞贊成事)에 벼슬하였고, 시호는 충순공(忠順公)이었다. 충순공(忠順公)은 황증조(皇曾祖)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시호 문순공(文順公) 휘(諱) 민적(閔頔)을 낳았으며, 문순공(文順公)은 황조(皇祖) 대광(大匡) 여흥군(驪興君) 휘 민변(閔抃)을 낳았으며, 대광(大匡)은 황고(皇考) 순충 동덕 찬화 공신(純忠同德贊化功臣)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여흥 부원군(驪興府院君) 수문전 대제학(修文殿大提學) 영예문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 시호 문도공(文度公) 휘(諱) 민제(閔霽)를 낳았다. 어머니 송씨(宋氏)는 삼한 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봉(封)해졌는데, 고려 중대광(重大匡) 여양군(礪良君) 휘(諱) 송선(宋璿)의 딸이었다. 선(善)을 쌓아 경사(慶事)가 돌아와서 이에 숙덕(淑德)을 낳으니, 총명하고 지혜로움이 남보다 뛰어났으므로, 곧 계년(筓年)이 되자 짝을 골라서, 와서 우리 태종의 빈(嬪)이 되었다. 태종이 젊어서 세상을 구제하려는 뜻이 있어서, 마음을 경전(經典)과 사기(史記)에 두고 가산(家産)을 돌보지 않으니, 태후가 능히 집을 다스리는 데 검소하게 하고 주궤(主饋)에 삼가하여서 그 공(功)을 이루게 힘쓰고, 많은 아들들을 가르쳐서 의방(義方)을 따르게 하였고, 첩(妾)과 시녀를 예로 대우하여 부인의 도리를 극진히 하였다. 홍무(洪武) 임신년(壬申年)에 정녕 옹주(靖寧翁主)로 봉(封)해졌다.
무인년(戊寅年)에 태종이 정사(定社)할 때에 형세가 심히 외롭고 위태로왔는데, 태후가 마음을 다하여 도와서 큰 일을 이루게 하였다. 경진년(庚辰年) 봄에 정빈(貞嬪)으로 봉(封)해졌고, 그 해 겨울에 태종의 즉위하자 정비(靜妃)로 봉해졌다. 영락(永樂) 계미년(癸未年)에 황제가 관포(冠袍)를 하사하였으며, 이 해로부터 정유년(丁酉年)에 이르기까지 누차 황제의 하사(下賜)를 받은 것이 모두 다섯 번이었다. 무술년(戊戌年) 겨울에 우리 전하가 호(號)를 ‘후덕 왕대비(厚德王大妃)’라 바치었고, 경자년(庚子年) 9월에 시호(諡號)를 ‘원경 왕태후(元敬王太后)’라 올렸다. 춘추는 56세였다. 태후는 유한(幽閑)하고 정정(貞靜)한 덕(德)을 타고났으며, 태종에게 능히 짝이 되어 내치(內治)에 오로지하여서 20년 동안 궁중의 법도[壼儀]가 엄숙하고 화목(和穆)하였고, 또 거룩한 아들[聖子]을 낳아서 종묘와 사직을 맡도록 하여 영광스러운 봉양(奉養)을 누리었다. 훙(薨)하자 빈(嬪)·잉(媵)·첩(妾)·시녀(侍女)들이 마음을 다하여 비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부인(婦人)은 모의(母儀)가 지극하였으니, 4남 4녀를 낳았는데, 우리 전하는 세째이다. 장자는 곧 제(禔)이고, 다음은 보(補)이니 효령 대군(孝寧大君)에 봉해졌고, 다음은 종(褈)이니 성녕 대군(誠寧大君)에 봉해졌으나 먼저 졸(卒)하였다. 장녀(長女)는 정순 공주(貞順公主)이니, 청평 부원군(淸平府院君) 이백강(李伯剛)에게 시집갔으나 같은 이씨(李氏)가 아니다. 다음은 경정 공주(慶貞公主)이니, 평양 부원군(平壤府院君) 조대림(趙大臨)에게 시집갔으며, 다음은 경안 공주(慶安公主)이니, 길창군(吉昌君) 권규(權跬)에게 시집갔으나 또한 먼저 졸(卒)하였다. 다음은 정선 공주(貞善公主)이니,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에게 시집갔다. 의빈(懿嬪) 권씨(權氏)가 1녀를 낳았는데, 정혜 옹주(貞惠翁主)이니, 운성군(雲城君) 박종우(朴從愚)에게 시집갔다. 소혜궁주(昭惠宮主) 노씨(盧氏)가 1녀를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신녕 궁주(信寧宮主) 신씨(辛氏)가 3남 7녀를 낳았는데, 장남 인(裀)이 공녕군(恭寧君)에 봉해졌으며,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장녀 정신 옹주(貞信翁主)는 영평군(鈴平君) 윤계동(尹季童)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정정 옹주(貞靜翁主)이니 한원군(漢原君) 조선(趙璿)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모두 아직 어리다. 궁인(宮人) 안씨(安氏)가 1남 3녀를 낳았는데, 모두 아직 어리다. 김씨(金氏)가 1남을 낳았는데, 비(裶)이니 경녕군(敬寧君)에 봉해졌다. 고씨(高氏)가 1남을 낳았고, 최씨(崔氏)가 1남1녀를 낳았고, 이씨(李氏)가 1남을 낳았고, 김씨(金氏)가 1녀를 낳았으나 모두 아직 어리다. 우리 중궁(中宮) 공비(恭妃) 심씨(沈氏)는 문하 시중(門下侍中) 휘(諱) 심덕부(沈德符)의 네째아들 심온(沈溫)의 딸인데, 4남 2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곧 세자(世子)이고, 나머지는 모두 아직 어리다. 양녕 대군(讓寧大君)이 김한로(金漢老)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낳았으나 모두 아직 어리다. 효령 대군(孝寧大君)이 전 판중군도총제부사(判中軍都摠制府事) 정역(鄭易)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을 낳았는데, 모두 아직 어리다. 성녕 대군(誠寧大君)이 전 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 성억(成抑)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자식이 없다. 정순 공주(貞順公主)가 1녀를 낳았는데, 용양 시위사(龍驤侍衛司) 호군(護軍) 이계린(李季疄)에게 시집갔으나, 또한 같은 이씨가 아니다. 경정 공주(慶貞公主)가 4녀를 낳았는데, 장녀는 돈녕부 승(敦寧府丞) 안진(安進)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유학(幼學) 김중암(金仲淹)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경안 공주(慶安公主)가 2남을 낳았는데, 장남은 한성 소윤(漢城少尹) 정연(鄭淵)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다음은 아직 어리다. 정선 공주(貞善公主)가 2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아직 어리다. 경녕군(敬寧君)이 호조 참의(戶曹參議) 김관(金灌)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을 낳았으나, 모두 아직 어리다. 공녕군(恭寧君)이 병조 참판(兵曹參判) 최사강(崔士康)의 딸에게 장가들어 2녀를 낳았으나, 모두 아직 어리다.
신은 간절히 보건대, 우리 태종의 성한 덕과 높은 공이 진실로 이미 백왕(百王)의 위에 높이 뛰어났으며, 배필(配匹)의 어짐과 내조(內助)의 공(功)도 또 촉도(蜀塗)의 길고 험난한 데 더불어 부서(符瑞)를 같이하여서 아름다움을 짝할 만한 것이었다. 군신(群臣)들이 다 능(陵)의 신도비(神道碑)에 명(銘)을 새기어 영세(永世)에 밝게 보이기를 원하므로, 전하께서 신(臣) 변계량(卞季良)에게 명하시니, 신 변계량이 명을 받들어 삼가고 두려워하나, 감히 사양하지 못하여 삼가 배수(拜手)하고 계수(稽首)하여 명(銘)을 바친다.
명(銘)에 이르기를, ‘하늘이 해동(海東)을 사랑하여 우리 태종을 내려 주셨네. 부지런하신 태종께서 성한 덕(德)을 몸에 지녔네. 거룩한 아버지를 추대하여 능히 위대한 공업을 이루고 이에 황제의 조정에 조근(朝覲)하여 아뢰니 황제가 따르고 용납하였네. 황제의 은총(恩寵)을 넉넉히 입어 백성들을 보호하였도다. 기미(幾微)를 훤하게 알아 난(亂)을 평정하고, 적장(嫡長)을 이에 높이었네, 비록 집안 싸움을 만났으나, 우애가 오히려 두터웠네. 효제(孝悌)의 지극함은 전고(前古)에 듣기 드물었네. 오직 덕이 두텁고 오직 공(功)이 성하니, 천감(天鑑)이 매우 밝아 이에 거듭 보우(保佑)하셨네. 휘황찬란한 금보(金寶)가 전후(前後)에 빛나고, 황제의 고명(誥命)이 잇달아 이르니, 내가 이에 왕위를 받았네, 할아버지의 훈계에 오로지 복종하여 한북(漢北)에 환도(還都)하고 예악(禮樂)을 제작하니, 밝게 빛나도다. 상(喪)을 당하여 여막(廬幕)에 살면서 애모(哀慕)함이 끝이 없고, 장례(葬禮)와 제례(祭禮)를 옛 법대로 식(式)을 삼았네. 중국 조정을 공경하여 섬기니, 황제가 지성(至誠)함을 칭송하였네. 엄숙히 제사를 받드니, 신명(神明)에 감응하였네. 교린(交隣)함에 도(道)가 있으니, 왜방(倭邦)이 내정(來庭)하였네. 왕씨 후예(王氏後裔)를 불상히 여겨 그 생업(生業)을 이루게 하였네. 중외(中外)가 평안한 지 20년을 내려오니, 촉촉한 감로(甘露)가 해마다 함흥부(咸興府)에 내렸도다. 혼매(昏昧)한 이를 폐하고 덕(德) 있는 이에 명하여서 백성들의 임금을 삼았도다. 오랜 세월을 향수(享壽)하여 아버님이 이 땅에 임(臨)하기를 기약하였더니, 어찌 빈천(賓天)을 재촉하여, 한 병이 낫지 않았던가? 슬프고 슬프도다. 거룩한 아드님[聖子]이 몹시 애통함이 비할 데 없도다. 철선(輟膳)을 3일 동안 하고 상심을 이기지 못하네. 무릇 온갖 상사(喪事)을 오직 예(禮)대로 이행하였네. 황제가 듣고 몹시 슬퍼하여 사자를 보내어 제사지내며, 시호(諡號)를 주어 포장(褒奬)하여 높이고, 부의(賻儀)를 내려 줌이 매우 융숭하였네. 휼전(䘏典)을 갖추어 신공(臣工)에게 시호(諡號) 내림을 기뻐하도다. 태후(太后)를 생각하고 사모하니, 진실로 숙옹(肅雝)하였네. 정사(定社)함을 비밀히 도우고 진실로 크게 총명한 이의 짝이 되어 성철(聖哲)한 아들을 낳아 종묘(宗廟)의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네. 하늘처럼 건전하고 밝으심은 공정 대왕(恭定大王)의 덕이요, 땅처럼 후(厚)하고 바르심은 원경 왕후(元敬王后)의 법칙이네. 살아서는 금슬(琴瑟)의 벗이요, 죽어서는 같은 땅에 묻히었네. 자손이 번성하니, 아아! 그 기린(麒麟)같은 자손이 끊이지 않고 종묘 제사를 억만 년 이어가리.’하였다.
신이 절하고 사(詞)를 바치니 굳고 단단한 돌에 새기어 만세토록 마멸(磨滅)되지 않고, 우리 동방(東方)에 비추게 하소서.”
【원전】 2 집 249 면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국왕(國王) / *역사-사학(史學) / *어문학-문학(文學)


[주D-001]상(商) : 은(殷).
[주D-002]목왕(穆王) : 목조(穆祖).
[주D-003]천부(千夫) : 천 명의 군사.
[주D-004]환왕(桓王) : 환조(桓祖).
[주D-005]제릉(齊陵) : 신의 왕후의 능.
[주D-006]공정왕(恭靖王) : 정종(定宗).
[주D-007]황제(皇帝) : 성조(成祖) 영락제(永樂帝).
[주D-008]9장(九章) : 조선조 때의 임금의 정복인 면류관과 곤룡포에, 의(衣)에는 산(山)·용(龍)·화(火)·화충(華蟲)과 종이(宗彝)의 다섯 가지를 그리고, 상(裳)에는 마름·분미(粉米)·보(黼)·불 등 네 가지를 수놓은 것.
[주D-009]안가(晏駕) : 임금의 죽음.
[주D-010]양암(諒闇) : 임금이 부모의 상중(喪中)에 있음, 또는 그 기간 중에 거처하는 방. 양음(諒陰).
[주D-011]대뢰(大牢) : 나라 제사 때에 소를 통째 제물로 바치던 일. 처음에는 소·양·돼지를 함께 바치는 것을 대뢰라고 하였으나, 뒤에는 소만 바치게 하였음.
[주D-012]감로(甘露) : 단 이슬. 임금이 선정(善政)을 하여 천하가 태평하면 하늘이 상서(祥瑞)로 내리는 것이라 함.
[주D-013]주사(舟師) : 수군(水軍).
[주D-014]즉세(卽世) : 죽음.
[주D-015]복제(服制) : 상제(喪制)에 있어 날을 달로 계산하여 복제(服制)를 빨리 끝마치던 제도.
[주D-016]향(珦) : 뒤의 문종(文宗).
[주D-017]음사(淫祀) : 옳지 않은 귀신에게 지내는 제사.
[주D-018]철선(輟膳) : 수라를 들지 않음.
[주D-019]진선(進膳) : 수라를 듬.
[주D-020]고비(考妣) : 돌아간 부모.
[주D-021]철조(輟朝) : 제왕이 조회를 폐함.
[주D-022]의릉(毅陵) : 의종(毅宗).
[주D-023]계년(筓年) : 여자가 시집갈 나이로 처음 비녀를 꽂는 해.
[주D-024]주궤(主饋) : 공궤(供饋)를 주장함.
[주D-025]의방(義方) : 의(義)를 지켜 외모를 단정히 함.
[주D-026]정정(貞靜) : 부녀가 인품이 높아 얌전하고 점잖음.
[주D-027]촉도(蜀塗) : 중국 사천성(四川省)의 촉(蜀) 지방으로 통하는 험난한 길이라는 뜻으로, ‘거친 인생 행로’를 일컫는 말.
[주D-028]적장(嫡長) : 적실(嫡室)에서 난 후손의 맏아들과 맏손자.
[주D-029]천감(天鑑) : 상제(上帝)의 감시(監視).
[주D-030]내정(來庭) : 조정에 들어와서 임금을 뵘.
[주D-031]빈천(賓天) : 임금의 죽음을 말함.
[주D-032]휼전(䘏典) : 사망한 사람의 사후를 장식하는 의식 제도.
[주D-033]숙옹(肅雝) : 삼가고 화합함.

寅齋先生文集卷之四
 附錄
政院日記 a_008_395b


世宗十四年壬子冬十月初十日乙未。大司憲申槩啓。近日本府糾摘成均館生徒多少。只九十餘人。學者甚少。此無佗。師儒之士。不過三員故也。上謂申商,許稠曰。以閒官加設兼官。使之勸學。何如。其議以啓。十一月二十二日丁丑。大司憲申槩等啓。聽訟之際。事干朝士。則以書劾問。巧飾答通。不卽輸008_395c情。甚爲未便。請依前例。三品以下。親進劾問。上曰。待朝士不可輕賤。故已立親問之禁。何可輕改。槩曰。自立相爲容隱之法。未盡推劾。決事爲難。上曰。然。遂傳旨刑曹官吏推劾罪人之際。相爲容隱之親。亦皆拿來憑問。傷恩敗倫。實爲未便。謀反以上外。毋得拿來推考。已曾立法。若其立證受罪之事則已矣。至於相考之事。亦拘容隱之禁。未得推問。以致淹延。亦爲未便。其立論受罪事外。相爲容隱族親。推考條件。令政府諸曹同議以啓。
008_395d十六年甲寅三月二十九日丁未。召議政府六曹議事。一。今者。通事金精秀回自北京曰。指揮金聲之弟言曰。去冬。裵指揮見辱於揚木答兀。皇帝欲發遼東軍九千皇城軍一千。致討以灑之。其皇城軍糧餉。令朝鮮供之。予聞之。以爲一千名一朔之糧。不過四百石。加一朔則八百石。其數不爲多矣。且此事不得已聽從。若待勅書而後轉輸。則無乃事緩乎。預先次次轉輸以待之何如。彼人等聞本國資糧。必結怨於我國。然聖旨不可不從。何計其怨我乎。然今當慶源,寧008_396a北。一時並設。糧餉不敷。將以此奏之。必不準矣。準不準之間。奏請何如。此非細事。其熟議以啓。僉曰。此是傳言。待見勑書後更議。申槩獨曰。今不多之數。次次輸轉預備何如。一。金精秀又言禮部程郞中。言於宋成立曰。中宮東宮進獻紅苧布。何以同裹於一袱與一油芚。成立答曰。若別裹則過乎負重。用是同封耳。程郞中又曰。啓汝殿下。自今別裹可也。予聞之。以爲兩宮布子。同封一袱。其來尙矣。前無言說。今始言之。必有以也。抑恐成立錯言而然。僉曰。上敎允008_396b當。宜山君來則必知其實。然臣等謂不是成立之所錯。恐怒甲移乙之辭也。一。被虜帖兒漢。厥初委係本國。奏聞留置。今更思之。此女之有無。不關國之利害。且其夫去秋來請肆欲還送。然其時奏聞留置。今無故發還。似乎不可。待其夫更請而發還乎。待見勑諭後發還乎。領議政黃喜等議。其夫更請而發還爲便。工曹判書趙啓生議。初旣奏聞留置。當具其辭更奏後發還。贊成盧閈議。使邊將知會來請後還送。戶曹判書安純等曰。國之利害。何關此女之有無。卽今008_396c發還可也。一。禮曹啓。倭客齎來銅鑞鐵。或三分之二。或爲半。於浦所留置。和賣何如。戶曹右參判朴信生議。除鑞鐵外。銅鐵爲半。並其餘物。令京中齎來和賣。兵曹左參判鄭淵曰。以典農寺綿布。每年秋冬。常換綿紬。以待倭客出來。送于浦所。令買銅鐵。以備國用。折半京中齎來。且許其浦所私相貿易。刑曹左參判崔士儀曰。因此生變可慮。又國用銅鐵藥材等物。恐不齎來。依前施行。參贊李孟畇曰。轉輸有弊。依前啓施行。但令禮曹量其物主尊卑與其舟楫相通之008_396d時。加減轉輸。安純等曰。前旣減輸。今又減數。恐違歸附之望。義當仍舊。吏曹判書申槩等曰。驛路疲弊。皆委浦所和賣。喜等議。除京中輸轉。若不獲已國用之物。則送綿紬于浦所。量宜貿易。載船齎來。一。議於黃喜,孟思誠,許稠,盧閈,安純等。太監尹鳳前者養母給糧之請。予欲從之。然傳聞之。請開其聽從之端。似乎不可。故未敢從之。今適其弟重富進馬。憑其馬價。欲給米豆共三十石。何如。僉曰。上敎允當。又議于喜曰。昔李叔蕃謂貞陵非正室。乃妾也。卞季良非008_397a之曰。非妾也。乃嫡也。今誠妃亦如是也。卿其時密近太宗。必知其時衆議。其悉陳之。喜曰。年久忘之矣。然臣心以爲貞陵。何與於配祭之例。誠妃亦如是也。倘或誠妃不諱三年後。則必與貞陵同矣。上曰。予已具悉。
夏四月初二日己酉。以申槩爲吏曹判書。初七日甲寅。吏曹啓。咸吉道吉州。地廣人稠。事務煩劇。牧使領軍而出。則曠官廢事。誠爲可慮。復置判官。從之。
冬十月二十六日己巳。謝恩使申槩,洪理等。往008_397b太平館,以明日發行辭。使臣等曰。明日起程。則是殿下促我等也。申槩將此意以啓。上怒。卽命都承旨安崇善。往告使臣曰。自我祖宗以來。四十餘年恭事朝廷。慶事到國。則不踰十日。遣使謝恩。明有前例。今使臣。本月十二日到國。二十一日遣使謝恩。例也。予強從使臣之請。不得已遷延。退定二十七日。使臣何發促行之言乎。若使促行。則以前定二十一日發程。何敢退定乎。發程後行之緩急。專在使臣之意。使臣等曰。二十七日發程徐行。以待我等一時越江。幸008_397c甚。二十七日庚午。謝恩使吏曹判書申槩,副使同知中樞院事洪理等。齎擎表箋及卞明奏本。如京師。上率世子以下文武百僚。拜表箋如儀。
十七年乙卯三月初五日丁丑。謝恩使申槩,副使洪理回自京師。二十七日己亥。以申槩,爲刑曹判書。
十八年丙辰五月初五日庚午。領議政黃喜,參贊申槩等詣晝停所。請進酒曰。謁陵之後。固當飮福。且今日是俗節。願進酒。上曰。旱災太甚。008_397d且今有地震。災變荐臻。豈可飮酒自歡。喜等又啓曰。聖體夙興。遠來拜陵。侵犯嵐霧。今不進酒。恐致違和。上曰。予不飮酒。欲民效之。且合懼災之意。槩涕泣固請。不允。 時上親謁獻陵
十九年丁巳六月十七日乙巳。上命辛引孫,金墩賚李蕆書。往申槩家議之。槩等又議數策以啓。上曰。可並書送之。十九日丁未。右承旨金墩啓。今猶未知李滿住所居。乞依申槩上言。使監護官1。與凡察率來諳事性直人閑話。先言佗事。反覆譬喻。以問滿住居處。隨宜鉤鉅其008_398a情。則庶或知之矣。上使金河因閒話問之。使彼不知我之有意也。
冬十月二十四日庚辰。以申槩爲議政府左贊成。
十二月二十五日壬午。召領議政黃喜,左贊成申槩,右贊成李孟畇,左參贊趙末生,右參贊崔士康,禮曹判書權踶,兵曹判書皇甫仁,僉知中樞院事金聽,吏曹參議崔致雲等。使辛引孫,金墩議事。一禮部云。冠服奏請則可以蒙賜。且云。遠遊冠。舊例也。今親王服皮弁冠。予欲奏008_398b請。何如。僉曰。依禮部所言奏聞而並請服爲可。一。今衝天角。曩者中朝使臣有云。體制失眞。今欲於冠服奏請時並請之。何如。僉曰。可。申槩曰。其來已久。宜勿奏請。一。勑諭云。童倉等欲移婆猪。恐朝鮮國不肯放。本人及所管五百戶,指揮高早化管下五十家。並護送出境上。今移居婆猪童倉。前日無移徙之請。我亦無禁遏之令。而今若此。且其所管未滿一二百戶。而以虛事奏聞。其計狡矣。何如而可。僉曰。本人等雖久居我境。其租稅徭役。一皆蠲免。特令完恤。移徙之008_398c請。前所未聞。今欲移徙者。意必忌我國輒解唐人之逃來。故欲與滿住結黨爲寇。而移居于婆猪。以此奏聞爲可。又於奏本。其管下多少眞僞。並錄亦可。一。滿住報復之心。未嘗少弛。而東八站舊路。近於婆猪。欲請刺楡塞新路。何如。僉曰。限賊變寢。經由刺楡新路赴京。以此奏請爲可。一。東八站之路。可畏如此。赴京使臣迎送軍。不宜單弱。加其軍額。移咨遼東。何如。喜等曰。舊額四十。又加四十爲便。槩等曰。宜加一百六十。喜等又曰。軍數倍於前。宜移咨遼東。俾知之。008_398d金聽,崔致雲等議曰。軍數不多。不須移咨。一。計稟使誰可。須擇遣知國家大體古今事變者。乃可辦事。並議以啓。喜等薦禮曹判書權踶,中樞院副使閔義生,吏曹參議崔致雲等。上曰。宜以此意草奏本。遂以權踶爲計稟使。迎送軍數。從槩等議。加一百六十。命勿移咨遼東。
二十年戊午六月初二日丙戌。上謂都承旨辛引孫曰。古昔帝王。親覽祖宗實錄者頗多。且孔子作春秋。至於定,哀。朱子於中庸。論神宗昭穆之制曰。考之史籍。則人臣亦觀當代之史矣。惟008_399a唐太宗欲觀國史。褚遂良,朱子奢等以爲不可。文宗欲觀史。魏謩,鄭朗。亦以爲不可。然此皆觀當時之史。故臣下以爲不可。若祖宗實錄。則觀之何害。昔我太宗欲觀太祖實錄。卞季良等以爲太祖實錄。修史甚善。皆直筆也。今殿下進而賜覽。後人皆疑。反爲不信之史矣。太宗不果見。今予卽位。欲修太宗實錄。大臣或以爲但具史草以傳。則後世自當修史。今不必汲汲。且不宜以宰相監修。予以重事。故竟命宰臣修之。予又念子孫不知祖宗事業。將何所監。008_399b欲以觀太宗實錄。議諸臣僚。柳廷顯等以爲監于成憲。善繼善述。實爲美意。乃得觀焉。今又思之。若非當世之史。則監觀成憲。祖與宗何別。旣觀太祖實錄。則太宗實錄。亦宜觀覽。議諸兼春秋大臣。黃喜,申槩等皆曰。歷代人君。雖有觀祖宗實錄者。恐非可法也。唐太宗欲觀史。褚遂良,朱子奢等以爲陛下獨覽起居。於事無失。若以此法傳示子孫。或有飾非護短之史官。不免刑誅。則莫不順旨全身。千載何所信乎。臣等之議。正與此同。此數臣皆號名臣。其言必有008_399c所見。且太宗事。皆殿下所親覩。若以爲法戒。則歷代之史備矣。何必今之實錄乎。況祖宗之史。雖非當代。而撰修之臣。今皆在焉。若聞殿下省覽。則心必未安。臣等亦以爲未便。上不果覽。
二十一年己未六月初十日戊子。以許稠爲左議政。申槩爲右議政。上謂金墩曰。爾若見黃喜。則曰領議政老且病。許稠雖無病。亦年過七旬。今以申槩年齡未老。氣亦疆健。乃以爲右議政。領議政當頤養於家。聽斷機務可也。不必強仕008_399d也。
八月十八日癸巳。御思政殿。親抽四書五經中一書。講館試。入格擧子三十人。東宮及宗親讀卷官,右議政申槩,刑曹判書鄭麟趾,藝文提學崔致雲,右承旨趙瑞康,左副承旨許詡,集賢殿副提學安止,直提學金鑌,應敎金汶,李思哲等入侍。二十一日丙申。御勤政殿。策試擧子。謂讀卷官右議政申槩曰。今觀學生。不究性理之書。徒務詞章。予將問其理學。乃出策題曰。嘗觀六籍之文。其義往往似有抵牾。予竊疑焉。008_400a易曰。作易者其有憂患乎。又曰。樂天知命。故不憂。其言之相戾。何歟。書稱文王曰。不遑暇食。用咸和萬民。稱武王曰。垂拱而天下治。其所以爲治之不同。何也。詩曰。昊天曰明。及爾出王。則天非冥冥而難知也。又曰。上天之載。無聲無臭。則天不可得而測也。亦將有說乎。子大夫講之熟矣。其各詳辨以對。予將親覽焉。遂使諸生疏行列坐。令人守之。毋得相通與語。又幸慕華館。試武擧騎射。
二十二年庚申夏四月初三日甲戌。賜領議政008_400b黃喜,右議政申槩,軺軒。仍傳旨禮曹。自今二品以上許令乘軺軒
二十四年壬戌五月二十一日庚辰召領議政黃喜,右議政申槩,淸平府院君李伯剛,右贊成崔士康,星原君李正寧,左參贊皇甫仁,右參贊李叔畤,前都節制使李蕆,知中樞院事鄭麟趾,僉知中樞院事庾順道,都承旨趙瑞康,右副承旨姜碩德議獻陵修補事。使晉陽大君瑈,安平大君瑢傳敎曰。獻陵,健元陵,齊陵皆可修治。須當置局。監掌其事。其司何以命名。喜等008_400c啓。當曰山陵修理都監。上曰。可。仍敎曰。禮文有曰,人君卽位而爲椑歲一漆之。則預置壽陵。未爲嫌也。且人君年旣老而爲之。則臣子之心。猶可嫌也。今予年未暮矣。何嫌之有。若置山陵修理都監。則兼治壽陵之事可也。喜等曰。上敎允當。但數陵一時修理。則未暇兼治壽陵之事。上曰。當從卿等之議。遂設山陵修理都監。以申槩,李伯剛爲都提調。河演,李蕆,李正寧,金宗瑞,同知中樞院事李思儉爲提調。又置使副使,判官各二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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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400d秋七月二十日戊寅。召領議政黃喜,右議政申槩,左贊成河演,右贊成崔士康,左參贊皇甫仁,右參贊李叔畤,兵曹判書鄭淵,參判辛引孫等。議備邊之策。僉議云。甲山地面賊人聲息屢報。宜加兵卒以備禦敵。慶尙道泗川,固城,寧海。最爲近海。防禦緊急。邑城未築。宜急築之。下三道及黃海道沿邊散居人民。被賊可畏。宜令移入陸地。以避賊變。又各官城及甕城,敵臺,池濠。一時並作爲難。宜當漸次築之。且下三道沿邊各官築城畢役後。內地各官邑城。以次築之爲008_401a便。從之。
八月初八日壬申。上令議政府,禮曹。議王世子嬪喪主除服之節。領議政黃喜,判書閔義生,右參贊李叔畤,參判尹炯等議。王世子嬪卒哭後。喪主除衰服。以白衣白靴烏角帶烏紗帽。常侍魂殿。朝夕上食。若朔望祭及俗節別祭。則著衰服行祭。期年而止。有不得已之故。具辭以聞。然後出入。右議政申槩議。喪主以衰服常侍魂殿。期年而除。左贊成河演議。喪主以衰服常侍魂殿。期年後。以白衣白靴烏角帶烏紗帽。008_401b朔望祭及俗節別祭。詣魂殿致齊行。祭三年而止。上從喜等議。又議嬪墓立石馬與否。黃喜,甲槩,李叔畤等議。先王陵室。有石人二石虎二石羊二石望柱二。而無石馬。今世子嬪墓。亦宜除石馬。河演議。石馬有古制。自今於陵室。皆置石馬二爲便。閔義生,尹炯等議。元敬王后之陵。石人四石羊四石虎四石望柱二。無石馬。貞昭公主墓。石人二石羊二石虎二。今除石馬。加羊虎各一。以別貞昭公主墓制。上從演議。九月初四日辛酉。春秋館監館事申槩,知館事008_401c權踶,同知館事安止等啓。太祖康獻大王,恭靖大王,太宗恭定大王實錄。事多闕逸。請修改。從之。
二十五年癸亥夏四月二十日乙巳。領議政黃喜,右議政申槩,左贊成河演,右贊成皇甫仁,左參贊權踶,右參贊李叔畤等詣闕啓曰。稱臣於世子而朝之。則嫌於至尊。況資善,承華堂。乃至尊臨御之所。尤不可也。上曰。予非固執而不聽。予病之差否。不可以歲月期也。日深不減。則朝參庶務。其可久廢乎。前日卿等啓曰。太008_401d宗文皇帝使太子監國。專以耳聾眼暗而爲之。然皇帝或親諭本國使臣。而暫無聾暗。但以病故。使太子監國耳。今我疾病而使世子攝政。何不可之有。喜等更啓曰。如不得已。則坐於東宮正門東壁。群臣行再拜禮。何如。上曰。大臣之言如此。則予心亦安矣。群臣雖不稱臣於世子。可也。世子於師傅宗親尊長朝參之際。凡所行禮。其商確古今以聞。喜等更啓曰。此事稽諸典籍。然後可以議定。上曰。使禮曹,集賢殿相考諸書。擬議以聞。仍命改前下敎旨曰。資善,承華008_402a堂。乃予臨幸之所。世子嫌於南面。可於東宮正門。南面而坐。一品以下。再拜庭下。世子不答。又命晉陽大君瑈,安平大君瑢。書晉,宋以後列國世子故事。仍問於喜等曰。世子嬪。不幸損世。今未終制。蓋古制。禮無二嫡。然次妃升爲后者亦多。今東宮承徽之中。無德儀出衆者。然於其中。擇其德優者。封嬪主內治如何。喜等啓曰。封嬪則名分至重。不可輕議。姑以其中有德行者。主內治。徐觀德行。然後命之爲主。亦未晚也。
二十六年甲子夏四月初五日乙酉。右議政申槩008_402b遘疾累日。命上京調理。仍賜內醞及廏馬一匹。五月二十七日丙子。賜几杖于右議政申槩。
二十七年乙丑春正月十八日壬辰。上使晉陽大君瑈。傳旨申槩,河演,權踶,金宗瑞曰。內禪之事。堯舜之後數千年間。不過十餘君。然或有勢不得已者。或樂於優游頤養者。皆非美事也。我國戊寅庚辰戊戌之事。皆有變故而然。近年水旱相仍。且予宿疾纏綿。連喪二子。天之不佑也明矣。因疾不受朝。又不見隣國之使。祭享香祝。亦008_402c不親傳。深居九重之內。凡事皆令宦者傳命。錯誤者多。人君之職。果如是乎。欲令世子卽位治事。予則退居。軍國重事。予將親斷。是則非歷代內禪之比。卿等其知之。槩等驚駭失色。涕泣曰。殿下何有是言。春秋鼎盛。雖有宿疾。聰明自若。起居如常。二事之故。非天之譴。壽夭脩短。本是氣數之難逃。雖宦者傳命。小事悉以文書出納。大事則東宮引承旨親問。熟議以啓。然後還付承旨施行。事無一毫之失。以此治國。何不可之有。殿下深知內禪之不可而欲效之。臣等008_402d未知其可也。且太祖以來。連三世內禪。今又行之。朝廷聞之。以爲朝鮮家法如此。眞外夷也。又將何辭奏達朝廷乎。朝廷若問四世內禪之故。則亦將何以對。戊寅庚辰戊戌之事。皆有辭焉。今無如彼之變而效之可乎。願亟收是命。勿播於外。臣等雖死不奉敎。上強之。槩等極言不可。以至夜分。明日復爭之。上曰。將來之事。雖聖人不能預料。後日內禪與否。未可必也。然今日則姑從卿等之請。
二十四日戊戌。以申槩爲議政府左議政。河演008_403a爲右議政。皇甫仁爲左贊成兼吏曹事。
夏四月二十八日辛未。左議政申槩,右議政河演,禮曹判書金宗瑞,左參贊李叔畤來問安。上曰。予之宿疾日增。旣不受朝。又不見隣國客人。常處深宮。凡大小公事。使宦者傳命。事多錯誤。且一應庶務。勉強親斷。恐生佗證。欲禪于世子。予則頤養。只斷軍國重事。槩等泣曰。殿下雖有宿疾。春秋鼎盛。雖使宦寺傳命。皆以文書啓達。或命東宮,大君出議。事無差誤。以此治國。何不可之有。亟收是命。上強之。槩等固008_403b請。上曰。姑從卿等之請。
二十八年丙寅春正月初五日癸酉。議政府左議政申槩卒。
二月初九日戊申。賜祭于左議政申槩。

세종 24년 임술(1442,정통 7)
 12월12일 (무술)
이흥덕이 최사강이 칙유를 받들고 옮을 알리다

사은사(謝恩使)의 통사(通事) 이흥덕(李興德)이 먼저 와서 아뢰기를,
최사강(崔士康)이 박미(朴美)에게 청(請)을 허가한 칙유(勅諭)를 받들고 옵니다.”
하였다.
【원전】 4 집 450 면
【분류】 *외교-명(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