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신묘년 산행 /2011.4.4. 무수골 산행

2011.4.4. 도봉산 우이암 할미바위에서의 하루

아베베1 2011. 4. 6. 15:49

 

 

 

 

 

 

 

 

 

 

 

 

 

 

 

 

 

 

 

 

 

 고려 헌종이 거란족 침입으로 남경으로 피난하여 도봉산 도봉사에 잠시 피신하였던 기록 고려사 절요    

 

고려사절요 제3권

 현종 원문대왕(顯宗元文大王)
경술 원년(1010), 송 대중상부 3년ㆍ거란 통화 28년


○ 봄 윤 2월에 연등회(燃燈會)를 부활시켰다. 나라의 풍속에, 왕궁과 국도에서 시골까지 1월 15일부터 이틀 밤 연등회를 베풀었는데, 성종 때부터 폐지하고 베풀지 않았으므로 이때에 이를 부활시켰다.
○ 여름 4월에 왕이 친히 태묘(太廟)에 제사지내었다.
○ 서숭(徐崧) 등 8명과 명경(明經) 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지공거(知貢擧) 손몽주(孫夢周)가 아뢰어 시(詩)ㆍ부(賦)를 시험하고 시무책(時務策)은 시험하지 않았다.
○ 5월에 상서좌사낭중(尙書左司郞中) 하공진(河拱辰)과 화주방어낭중(和州防禦郞中) 유종(柳宗)을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 귀양보내었다. 이보다 먼저 공신이 일찍이 동서 양계(東西兩界)에 종사하였는데, 함부로 군사를 내어 동여진(東女眞)의 부락에 침입하였다가 패하니, 유종이 이 소식을 듣고 여진을 깊이 원망하였다. 때마침 여진 사람 95명이 고려에 와서 조회하려고 화주관(和州館)에 이르니 유종이 이를 다 죽였다. 그 때문에 이들을 모두 귀양보내었다. 여진이 또한 거란에 호소하니 거란주가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고려의 강조(康兆)가 임금 송(誦)을 시해하고 순(詢)을 임금으로 세웠으니 대역이다. 마땅히 군사를 일으켜서 죄를 물어야 하겠다." 하였다.
○ 가을 7월에 거란이 급사중(給事中) 양병(梁炳)과 대장군(大將軍) 야율윤(耶律允)을 보내와서 전왕(목종(穆宗))에 대한 일을 물었다.
○ 덕주(德州)에 성을 쌓았다.
○ 8월에 내사시랑(內史侍郞) 진적(陣頔)과 상서우승(尙書右丞) 윤여(尹餘)를 거란에 보내었다.
○ 승니(僧尼)가 술을 빚어 담그는 것을 금지하였다.
○ 9월에 좌사원외랑(左司員外郞) 김연보(金延保)를 거란에 보내어 추계 문후(秋季問候)를 하고 좌사낭중(左司郞中) 왕좌섬(王佐暹)과 장작승(將作丞) 백일승(白日昇)을 거란의 동경(東京 요양(遼陽))에 보내어 우호를 닦았다.
○ 겨울 10월 초하루 병오일에 이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參知政事) 강조(康兆)를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로, 이부시랑(吏部侍郞) 이현운(李鉉雲)과 병부시랑(兵部侍郞) 장연우(張延祐)를 부사(副使)로, 검교상서 우복야 상장군(檢校尙書右僕射上將軍) 안소광(安紹光)을 행영도병마사(行營都兵馬使)로, 어사중승(御史中丞) 노정(盧頲)을 부사(副使)로, 소부감(少府監) 최현민(崔賢敏)을 좌군병마사로, 형부시랑 이방(李昉)을 우군병마사로, 예빈경(禮賓卿) 박충숙(朴忠淑)을 중군병마사로, 형부상서 최사위(崔士威)를 통군사(統軍使)로 삼아 군사 30만 명을 거느리고 통주(通州 평북 선천군(宣川郡))에 주둔하여 거란에 대비하게 하였다.
○ 계축일에 거란이 급사중(給事中) 고정(高正)과 합문인진사(閤門引進使) 한기(韓杞)를 보내와서 군사를 일으키겠다고 알리었다. 참지정사 이예균(李禮鈞)과 우복야 왕동영(王同穎)을 거란에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다.
○ 11월에 기거랑(起居郞) 강주재(姜周載)를 거란에 보내어 동지를 하례하였다.
○ 거란주가 장군 소응(蕭凝)을 보내와서 친정(親征)함을 알리었다.
○ 팔관회를 부활시키고 왕이 위봉루(威鳳樓)에 거둥하여 풍악을 관람하였다. 예전에 성종이 팔관회 시행에 따르는 잡기가 정도(正道)에 어긋나는 데다가 번거롭고 요란스럽다 하여 이를 모두 폐지하고, 다만 그날 왕이 법왕사(法王寺)에 행차하여 향불을 피우고 구정(毬庭)으로 돌아와서 문무관의 조하(朝賀)만 받았다. 이것을 폐지한 지가 거의 30년이나 되었는데, 이때에 와서 정당문학 최항(崔沆)이 청하여 이를 부활시켰다.
○ 신묘일에 거란주가 친히 보병과 기병 40만 명을 거느리고 의군 천병(義軍天兵)이라 칭하고 압록강을 건너와서 흥화진(興化鎭 평북 의주군(義州郡))을 포위하니, 순검사(巡檢使) 형부낭중 양규(楊規)가 진사(鎭使) 호부낭중 정성(鄭成)ㆍ부사(副使) 장작주부(將作注簿) 이수화(李守和)ㆍ판관(判官) 늠희령(廩犧令) 장호(張顥)와 함께 농성하여 굳게 지켰다.
○ 임진일에 최사위 등이 군사를 나누어 귀주(龜州 평북 귀성군(龜城郡)) 북쪽 뉴돈(恧頓)ㆍ탕정(湯井)ㆍ서성(曙星)의 세 길로 나가서 거란과 싸우다가 패전하였다.
○ 거란주가 통주성 밖에서 벼를 거두던 남녀를 잡아서 각기 비단옷을 주고 종이로 봉한 화살 하나씩을 주며, 군사 3백여 명을 거느리고 그들을 압령하여 홍화진에 보내어 항복을 권유하게 하였다. 그 봉한 화살에 글이 있었는데, 그 글에, “짐은, 전왕 송(誦 목종(穆宗))이 우리 조정에 복종하여 섬긴 지가 오래되었는데 지금 역신 강조가 임금을 시해하고 어린 임금을 세웠으므로 친히 정병을 거느리고 이미 국경에 다다랐으니, 너희들이 강조를 사로잡아 어가 앞에 보내면 곧 군사를 돌이킬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바로 개경으로 들어가서 너의 처자들을 죽일 것이다." 하였다.
계사일에 또 칙서를 화살에 매어 성문에 쏘아 꽂혔는데, 그 칙서에, “흥화진의 성주와 군인ㆍ백성들에게 신칙하노라. 짐은, 전왕 송이 그 조업(祖業)을 계승하여 나의 번신(藩臣)이 되어 우리 국경을 지키다가 갑자기 간흉에게 살해되었으므로 정병을 거느리고 와서 죄인을 토벌하는 것이다. 간흉에게 위협당하여 따른 자는 모두 사면해 줄 것이다. 하물며 너희들은 전왕이 어루만져준 은혜를 받았고, 역대 역순(逆順)의 유래를 알고 있으니, 마땅히 짐의 마음을 알아서 후회를 끼침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이 날에 이수화 등이 표문을 올렸는데, 그 표문에,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사는 자는 마땅히 간흉을 제거해야 될 것이요, 아버지를 섬기고 임금을 섬기는 자는 모름지기 절조를 굳게 지켜야 하니, 만약 이 이치를 어긴다면 반드시 그 앙화를 받을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민정을 굽어살피어 마음을 돌리소서. 크게 하늘의 그물을 열어 주시면서 하필 조작(鳥雀)이 먼저 품안에 들어오기를 구하십니까. 병거를 돌리셔야 우리 용사들의 복종을 얻으실 것입니다." 하였다.
갑오일에 거란주가 비단옷과 은그릇 등의 물품을 진장(鎭將)에게 차등 있게 내려주고 이어서 칙서에, “올린 표문은 자세히 살폈다. 짐이 오성(五聖)을 계승하여 만방을 다스림에 있어 충량에게는 반드시 정포(旌褒)하고 흉역은 모름지기 주벌하였다. 강조는 그 옛 임금을 죽이고 저 어린 임금을 끼고 점점 방자하게 간악한 짓을 하여 위세를 부렸다. 그러므로 친히 주벌을 행하여 특히 형명을 바루고자 하였다. 바야흐로 전군(全軍)을 거느리고 근경(近境)에 다다라서 특별히 윤음을 내렸으니, 이는 대개 회유하는 뜻을 보인 것인데, 문득 아뢴 글을 보건대 항복한다는 말은 없으니 진술이 성심에서 나오지 않았으며 수식된 문장은 겉으로만 공순할 뿐이다. 더구나 너희들은 일찍이 조정에 벼슬하였으니 반드시 역(逆)과 순(順)을 알 것인데, 어찌 역당에게 협조하여 전왕의 원수를 갚으려고 생각지 않느냐. 마땅히 안위를 돌아보고 미리 화복을 분별하라." 하였다.
을미일에 이수화가 또 회답하는 표문을 보냈다. 그 표문에, “신들이 어제 조서를 받들고 문득 마음속의 말을 진술하니, 죄수를 보고 우는 은혜를 내리시고 그물을 풀어주는 인자함을 베푸소서. 송죽처럼 눈과 서리를 견뎌내 백성의 마음을 더 편안하게 하겠으며 분골쇄신하여 길이 천년 만에 나타나는 성인을 받들겠습니다." 하였다. 거란주가 표문을 보고는 그들이 항복하지 않을 줄 알고 정유일에 포위를 풀었다. 다시 칙서에, “너희들은 백성을 위안하고 기다리라. 20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인주(麟州 평북 의주군(義州郡)) 남쪽 무로대(無老代 평북 의주군)에 주둔하고, 20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진군하여 통주에 이르겠다." 하고는 거란주가 군사를 동산(銅山) 아래로 옮겼다.
○ 기해일에 강조가 군사를 이끌고 통주성 남쪽으로 나와서 군사를 세 부대로 나누어 물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다. 한 부대는 통주 서쪽에 진을 쳐서 세 곳의 물[三水]이 모이는 곳에 웅거했는데 강조는 그 속에 있고, 또 한 부대는 근처의 산에, 나머지 한 부대는 성에 붙여서 진을 쳤다. 강조는 검차(劍車)로써 진을 배치하여 거란의 군사가 들어오면 검차가 포위하여 공격하니 부서지지 않는 것이 없었다. 거란의 군사가 여러 번 물러가니 강조는 드디어 적을 깔보는 마음이 생겨 다른 사람과 바둑을 두고 있었다. 거란의 야율분노(耶律盆奴)가 상온(詳穩) 야율적로(耶律敵魯)를 거느리고 삼수채(三水砦)를 격파하자 진주(鎭主)가 거란 군사가 이르렀다고 보고하였으나, 강조는 믿지 않고서 말하기를, “입 안의 음식과 같아서 적으면 씹기가 불편하니 마땅히 많이 들어오도록 하라." 하였다. 두 번째 급함을 보고하기를, “거란 군사가 이미 많이 들어왔습니다." 하니, 강조가 놀라 일어나면서, “정말이냐?" 하는데 정신이 황홀한 중에 목종이 보이며 뒤에 서서 꾸짖기를, “네 놈은 끝장이 났다. 천벌을 어찌 도피할 수 있겠느냐." 하는 듯하였다. 강조가 즉시 투구를 벗고 무릎을 꿇으면서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하는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거란 군사가 벌써 이르러 강조를 결박하였다. 이현운(李鉉雲), 도관원외랑(都官員外郞) 노진(盧戩), 감찰어사(監察御史) 노이(盧顗)ㆍ양경(楊景)ㆍ이성좌(李成佐) 등은 모두 잡혔고, 노정(盧頲), 사재승(司宰丞) 서숭(徐崧), 주부(注簿) 노제(盧濟)는 모두 죽었다. 거란 군사가 강조를 모전(毛氈)으로 싸서 수레에 싣고 가버리니 우리 군사가 크게 어지러워졌다. 거란 군사는 이긴 기세를 타서 수십 리를 추격하여 머리를 3만여 급이나 베었고 내버려진 군량과 무기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거란주가 강조의 결박을 풀어주고 묻기를, “네가 나의 신하가 되겠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나는 고려 사람인데 어찌 다시 너의 신하가 되겠느냐." 하였다. 두 번 물었으나 처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또 살을 찢으면서 물었으나 대답은 역시 처음과 같았다. 거란주가 이현운에게 그와 같이 물으니 대답하기를, “두 눈으로 이미 새 일월을 보았는데 한마음을 가지고 어찌 옛 산천을 생각하겠습니까.[兩眼已瞻新日月一心何憶舊山川]" 하였다. 강조가 노하여 현운을 발길로 차면서 말하기를, “너도 고려 사람인데 어찌 이런 말을 할 수 있느냐." 하였다. 이때에 거란 군사가 휘몰아 전진하니 좌우기군장군(左右奇軍將軍) 김훈(金訓)ㆍ김계부(金繼夫)ㆍ이원(李元)ㆍ신녕한(申寧漢)이 완항령(緩項嶺)에서 군사를 매복하고 있다가 모두 짧은 무기를 가지고 갑자기 나와서 패배시키니 거란 군사가 조금 물러갔다.
○ 거란이 강조의 서신을 거짓 꾸며서 흥화진으로 보내어 항복하기를 권유하니, 양규(楊規)가 말하기를, “나는 왕명을 받고 왔다. 강조의 명령을 받을 것이 아니다." 하고 항복하지 않았다. 또 노진(盧戩)과 그 합문사(閤門使) 마수(馬壽)를 시켜 격서를 가지고 통주에 이르러 항복하기를 권유하니, 성 안의 사람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중랑장(中郞將) 최질(崔質)과 홍숙(洪淑)이 소매를 떨치며 일어나서 노진과 마수를 체포하고 이어 방어사(防禦使) 이원귀(李元龜)ㆍ부사(副使) 최탁(崔卓)ㆍ대장군(大將軍) 채온겸(蔡溫謙)ㆍ판관(判官) 시거운(柴巨雲)과 더불어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니 여러 사람의 마음이 그제야 통일이 되었다.
○ 12월 경술일에 거란 군사가 곽주(郭州 평북 정주군(定州郡) 곽산면(郭山面))에 침입하니 방어사 호부원외랑 조성유(趙成裕)는 밤에 도망하고 우습유 승리인(乘里仁), 대장군 대회덕(大懷德), 신녕한(申寧漢), 공부낭중 이용지(李用之), 예부낭중 간영언(簡英彦)은 모두 죽었다. 성이 드디어 함락되니 거란은 군사 6천여 명을 남겨두어 성을 지키게 하였다.
임자일에 거란 군사가 청수강(淸水江 청천강)에 이르니 안북도호부사(安北都護府使) 공부시랑 박섬(朴暹)이 성을 버리고 도망하여 고을 백성이 모두 무너졌다.
○ 이전에 왕이 거란 군사가 이른다는 소식을 듣고 중랑장 지채문(智蔡文)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화주(和州 함남 영흥군(永興郡))를 지켜 동북방을 방비하게 하였다. 강조가 패하자, 채문에게 명하여 군사를 옮겨 서경을 구원하게 하니, 채문이 즉시 군용사(軍容使) 시어사(侍御史) 최창(崔昌)과 더불어 나아가 강덕진(剛德鎭 평남 함천군(咸川郡))에 머물렀다.
○ 계축일에 거란 군사가 서경에 이르러 중흥사(中興寺)의 탑을 불살랐다.
○ 갑인일에 숙주(肅州 평남 평원군(平原郡))가 무너졌다. 이날 노이(盧顗)가 향도(鄕導)가 되어 거란 사람 유경(劉經)과 더불어 격서를 가지고 서경에 이르러 항복하기를 권유하니, 부유수(副留守) 원종석(元宗奭)은 부하 관속 최위(崔緯)ㆍ함질(咸質)ㆍ양택(楊澤)ㆍ문안(文晏) 등과 이미 항복할 표문을 만들었다. 채문 등이 이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서경에 이르니 성문이 닫혀 있었다. 최창이 소리질러 분대어사(分臺御史) 조자기(曹子奇)를 불러 말하기를, “우리들은 임금의 명령을 받들고 걸음을 배로 늘려 왔는데 성문을 닫고 들이지 아니함은 무슨 이유이냐?" 하니, 자기(子奇)가 노이와 유경이 항복하기를 권유한 사실을 자세히 알리고 드디어 성문을 여니 채문이 들어가서 고궁의 남쪽 행랑에 주둔하였다. 최창이 원종석에게 노이 등을 구류하고 성을 굳게 지킬 것을 떠보았는데 종석이 따르지 않자, 최창이 은밀히 채문과 모의하여 군사를 성 북쪽에 보내어 노이 등이 돌아가는 것을 기다려 습격하여 죽이고 표문을 빼앗아 불살랐다. 이때 성 안 사람의 마음이 일치하지 않으므로 채문이 나가서 성 남쪽에 주둔하니 따라간 자는 대장군 정충절(鄭忠節)뿐이었다. 조금 후에 동북계도순검사 탁사정(卓思政)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르러 드디어 함께 군사를 합쳐서 다시 성에 들어갔다. 왕은 삼군(三軍)이 패전하고 주ㆍ군이 모두 함락되었으므로 표문을 올려 조회하기를 청하니, 거란주가 이를 허락하였다. 드디어 거란 군사가 우리나라에서 포로를 사로잡거나 노략질함을 금지하고, 마보우(馬保佑)를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왕팔(王八)을 부유수(副留守)로 삼고는 을름(乙凜)을 보내어 기병 1천 명을 거느리고 보우 등을 호송하게 하였다.
을묘일에 거란주가 또 한기(韓杞)를 시켜 돌기(突騎) 2백 명을 거느리고 서경 성 북문에 이르러 외치기를, “황제가 어제 유경ㆍ노이 등을 보내어 조서를 가지고 와서 효유하였는데 어찌하여 지금까지 전연 소식이 없느냐. 만약 명령을 거역하지 않는다면 유수와 관료들은 와서 나의 지시를 받으라." 하였다. 탁사정이 한기의 말을 듣고 채문과 모의하여 휘하의 정인(鄭仁) 등을 시켜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갑자기 나가서 한기 등 백여 명을 쳐서 죽이고 나머지는 모두 사로잡아 한 사람도 돌아간 자가 없었다. 사정이 채문을 선봉으로 삼아 나가서 을름과 싸우게 했더니 을름과 보우가 패하여 달아났다. 이에 성안의 인심이 조금 안정되었으므로 사정은 성으로 들어오고 채문과 이원(李元)은 나가서 자혜사(慈惠寺)에 진을 쳤다. 거란주가 다시 을름을 보내어 공격하니 나졸(邏卒)이 보고하기를, “적병이 안정역(安定驛 평북 평원군(平原郡))에 와서 진을 쳤는데 그 형세가 매우 강성하다." 하였다. 채문이 사정에게 빨리 알리고 병진일에 드디어 사정ㆍ중 법언(法言)과 함께 군사 9천 명을 거느리고 임원역(林原驛 평남 대동군(大同郡))에서 적군을 맞아 쳐서 머리 3천여 급(級)을 베고 법언은 전사하였다. 그 이튿날 채문이 다시 나가서 싸우니 거란 군사가 패하여 달아났다. 이에 성 안의 장수와 군사들이 성에 올라 이를 바라보고는 앞다투어 나가 추격하여 마탄(馬灘)에 이르자, 거란이 군사를 되돌려 쳐부수고 마침내는 성을 포위하였으며 거란주는 성 서쪽 절에 머물렀다. 사정은 두려워지자 장군 대도수(大道秀)를 속여 말하기를, “그대는 동문으로 나는 서문으로 나와 앞뒤에서 공격하면 이기지 못할 것이 없다." 하고 드디어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밤에 도망하였다. 도수는 대동문(大東門)을 나와서야 비로소 속임을 당한 줄 알았으나 또한 힘으로 적을 당해낼 수도 없었으므로, 드디어 관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거란에게 항복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무너지고 성 안에서는 흉흉하고 두려워하였다.
기미일에 통군녹사 조원(趙元)과 애수진장(隘守鎭將) 강민첨(姜民瞻), 낭장(郞將) 홍협(洪叶)ㆍ방휴(方休)가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이내 함께 신사(神祠)에 빌고 점을 쳐서 길조를 얻었다. 이에 여럿이 조원을 추대하여 병마사로 삼고, 흩어진 군사를 거두어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었다.
○ 경신일에 양규(楊規)가 흥화진(興化鎭)에서 군사 7백여 명을 거느리고 통주에 이르러 군사 1천 명을 수합하여, 신유일에 곽주에 들어가서 거란의 주둔 군사를 쳐서 모두 베어 죽이고 성 안의 남녀 7천여 명을 통주로 옮겼다. 이날에 거란주가 서경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자, 포위를 풀고 동쪽으로 갔다.
○ 계해일에 서경의 신사(神祠)에서 회오리바람이 갑자기 일어나니 거란의 군사와 말이 모두 넘어졌다.
○ 귀양보냈던 하공진(河拱辰)과 유종(柳宗)을 소환하여 관작을 회복시켰다.
○ 신미일에 지채문(智蔡文)이 도망해 서울로 돌아와서, 임신일에 서경에서 패전한 사실을 아뢰니 여러 신하들이 항복하기를 의논하는데 강감찬만은 아뢰기를, “오늘날의 일은 죄가 강조(康兆)에게 있으니 걱정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적은 수의 군사로 많은 군사를 대적할 수 없으니 마땅히 그 예봉을 피하여 천천히 흥복(興復)을 도모해야 합니다." 하고는 마침내 왕에게 남쪽으로 가기를 권하였다. 채문이 청하기를, “신이 비록 노둔하고 겁쟁이이지마는, 원컨대 좌우에서 견마의 힘을 다하겠습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어제 이원(李元)과 최창(崔昌)이 도망해 돌아와서 스스로 호종하기를 청하였는데, 지금은 다시 보이지 않으니 신하된 도리가 과연 이러할 수 있느냐. 그런데 지금 경은 이미 밖에서 노고했는데 또 나를 호종하고자 하니 그대의 충성을 깊이 가상하게 여긴다." 하고 이내 주식(酒食)과 은으로 장식한 말안장과 고삐를 내려 주었다. 이 밤에 왕이 후비(后妃)와 이부시랑 채충순(蔡忠順) 등과 금군(禁軍) 50여 명과 함께 서울을 나왔다.
계유일에 적성현(積城縣 경기 연천(漣川)) 단조역(丹棗驛)에 이르니 무졸(武卒) 견영(堅英)이 역인(驛人)과 함께 활시위를 당겨 행궁을 범하려 하므로 채문이 말을 달려 이를 쏘았다. 적의 무리가 도망하여 무너졌다가 다시 서남쪽 산에서 갑자기 나와서 길을 막았는데, 채문이 또 쏘아 이를 물리쳤다. 포시(晡時 오후 4시경)에 왕이 창화현(昌化縣 경기 양주(楊州))에 이르니 아전[吏]이 아뢰기를, “왕께서는 나의 이름과 얼굴을 아시겠습니까." 하였으나 왕은 일부러 듣지 못한 척하였다. 그러자 아전이 노하여 장차 난리를 일으키려고 사람을 시켜 외치기를, “하공진이 군사를 거느리고 온다." 하였다. 채문이 말하기를, “무슨 이유로 오느냐?" 하니 아전은, “채충순과 김응인(金應仁)을 사로잡기 위한 것이다." 하자, 응인과 시랑 이정충(李正忠), 낭장 국근(國近) 등이 모두 도망하였다. 밤에 적이 또 이르자 시종하는 신하ㆍ환관ㆍ궁녀들이 모두 도망하여 숨고, 현덕(玄德)ㆍ대명(大明) 두 왕후와 시녀 두 사람ㆍ승지 양협(良叶)ㆍ충필(忠弼) 등만이 왕을 모시었다. 채문이 나갔다 들어왔다 하면서 그때 그때의 시기(時機)에 따라 변고에 대처하니 적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새벽이 되자 채문이 두 왕후에게 먼저 북문으로 탈출하여 나가기를 청하고, 손수 임금의 말을 몰고 사잇길로 가서 도봉사(道峯寺)로 들어가니 적은 이를 알지 못하였고 충순이 뒤따라 왔다. 채문이 아뢰기를, “지난 밤의 적은 공진(拱辰)이 아닌 듯하니 신이 가서 뒤를 밟아보겠습니다." 하였다. 왕은 그가 도망할까 두려워하여 허락하지 않으니 채문이 아뢰기를, “신이 만약 주상을 배반하여 행동이 말과 어긋난다면 하늘이 반드시 신을 죽일 것입니다." 하니, 왕이 그제야 허락하였다. 곧 창화현으로 가다가 길에서 국근을 만났는데 국근이 말하기를, “나의 의복과 행장을 모두 적에게 빼앗겼다." 하였는데, 채문이 말하기를, “네가 신하가 되어 충성하지 못했으니 목숨을 붙이고 산 것만도 다행이다." 하였다. 때마침 하공진과 유종(柳宗)이 행재(行在)로 달려가고 있었는데 채문이 길에서 그들을 만나 적이 침입한 변고를 자세히 말하고 또 그들에게 힐문하니 과연 공진이 한 짓은 아니었다. 공진은 도중에 중군판관(中軍判官) 고영기(高英起)가 패전하여 남쪽으로 달아남을 보고 그를 데리고 함께 왔다. 이때 공진이 거느린 군사가 20여 명이나 되므로 채문이 마침내 그 군사로 창화현을 포위하여 적이 도적질해간 말 15필과 안장 10부(部)를 찾아내 왕께 돌아가려 하였는데, 채문이 공진등에게 말하기를, “내가 여러분과 함께 나아가면 왕께서 반드시 놀라실 것이니 여러분은 조금 뒤에 오기를 바란다." 하고는 마침내 혼자 갔다. 충필(忠弼)이 절문에 있다가 이를 바라보고 들어가서, “지장군(智將軍)이 왔습니다." 하고 아뢰니, 왕이 기뻐하며 문밖에 나와서 그를 맞이하였다. 채문이 아뢰기를, “신들이 적이 빼앗아간 장물(臟物)을 찾았는데 실상 공진(拱辰)이 한 짓은 아니오며, 또 공진과 함께 왔습니다." 하였다. 왕이 공진과 유종(柳宗)을 불러 위로하였다.
○ 갑술일에 왕이 양주(楊州)에 머무르니 하공진이 아뢰기를, “거란이 본디 역적(강조(康兆))를 토벌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았는데 이제 이미 강조를 잡아갔으니, 만약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한다면 그들이 반드시 군사를 돌이킬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점을 쳐서 길한 괘를 얻으니 드디어 공진과 고영기(高英起)를 보내어 표문(表文)을 받들고 거란의 진영으로 가게 하였다. 창화현에 이르러 표문을 낭장(郞將) 장민(張旻)과 별장(別將) 정열(丁悅)에게 주어 먼저 군문 앞에 가서 고하기를, “국왕이 와서 뵙기를 진실로 원하나 다만 군대의 위엄을 두려워하고 또 내란으로 인하여 강(임진강) 남쪽으로 피난하였기 때문에 배신(陪臣) 공진 등을 보내어 사유를 진술하게 하였습니다. 공진 등이 또한 두려워서 감히 앞으로 나아오지 못하니 빨리 군사를 거두소서." 하였다. 장민 등이 다다르기 전에 거란 군사의 선봉이 벌써 창화현에 이르렀다. 공진 등이 앞의 뜻을 자세히 진술하니 거란 군사가 묻기를, “국왕은 어디 있느냐?" 하므로 대답하기를, “지금 강 남쪽을 향하여 가셨으니 계신 곳을 알 수 없다." 하였다. 또 길이 먼가 가까운가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강 남쪽이 너무 멀어서 몇 만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하니, 뒤쫓던 거란의 군사가 그제야 돌아갔다.


 

[주D-001]죄수를 보고 우는 : 우 임금이 길을 가다가 죄수를 보고는 타고 있던 수레에서 내려서 울었다 한다.
[주D-002]그물을 풀어주는 : 탕 임금이 그물을 벌려놓고 빌기를, “하늘에서 내려오고 땅에서 나오는 놈은 다 내 그물에 걸려라." 하였다. 탕이 그 그물의 3면을 풀어 놓으면서 빌기를, “왼편으로 갈 놈은 왼편으로 가고, 오른편으로 가려거던 오른편으로 가며, 명령을 듣지 않을 자는 그물에 걸려라." 하였다.

 

고려사절요 제3권
 현종 원문대왕(顯宗元文大王)
신해 2년(1011), 송 대중상부 4년ㆍ거란 통화 29년


○ 봄 정월 초하루 을해일에 거란주가 서울에 들어와서 태묘와 궁궐ㆍ민가에 불을 질러 모두 타버렸다. 이 날 왕은 광주(廣州)에 머물렀는데 두 왕후가 간 곳을 잃어 채문에게 가서 찾게 하였다. 요탄역(饒呑驛)에 이르러서야 만나 모시고 돌아오니, 왕이 기뻐서 왕후를 위하여 3일 동안 머물렀다.
○ 정축일에 하공진ㆍ고영기가 거란의 진영에 이르러 군사를 돌이킬 것을 청하니 거란주가 이를 허락하였다. 마침내 공진 등을 붙잡아 두니 호종하던 여러 신하들은 공진 등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자 모두 놀라고 두려워서 흩어져 달아나는데, 오직 시랑 충숙(忠肅)과 장연우(張延祐)ㆍ충순(忠順)ㆍ주저(周佇)ㆍ유종(柳宗)ㆍ김응인(金應仁) 만은 떠나가지 않았다.
○ 무인일에 왕이 광주를 출발하여 비뇌역(鼻腦驛)에서 머물렀다. 채문이 아뢰기를, “호종하는 장수와 군사가 모두 처자를 찾는다 칭탁하고 사방으로 흩어졌는데 어두운 밤에 간적(姦賊)이 몰래 일어날까 두려우니, 청컨대 표지를 만들어 장수와 군사들의 관에 나누어 꽂아서 분별하게 하소서." 하니, 그 말을 따랐다.
○ 기묘일에 유종이 아뢰기를, “양성(陽城 경기 안성군(安城郡))은 신이 대대로 거주한 고을인데 이곳에서 거리가 멀지 않으니, 양성으로 행차하소서." 하니, 왕이 기뻐하며 드디어 행차하였다. 밤에 유종과 김응인 등이 거짓으로 왕의 명령이라 일컫고 임금의 말안장을 부수어 고을 사람에게 주었다. 날이 샐녘에 고을의 아전[吏]들이 모두 도망하였다. 유종과 응인 등이 또 두 왕후를 각기 그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고 호종하는 장졸을 임명하여 동쪽 변방으로 가서 위급한 상황에 대비하게 하도록 청하였다. 왕이 이에 대해 채문에게 묻자 채문이 크게 울면서, “지금 임금과 신하가 도리를 잃어 앙화를 당하여 이와 같이 파천하고 있으니, 마땅히 인의(仁義)에 따라 행동하여 인심을 수습해야 될 것인데, 왕후를 버리고서 살기를 구하는 일을 어찌 차마 하겠습니까."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장군의 말이 옳다." 하고 드디어 떠나갔다. 사산현(蛇山縣)을 지나다가, 채문이 기러기 떼가 밭에 내려앉는 것을 보고 왕의 마음을 위로하고 기쁘게 해 드리고자 말을 달려 앞으로 나아갔다. 기러기가 놀라 날아오르자, 몸을 돌려 쳐다보고 쏘니 시위 소리에 맞춰 기러기가 떨어졌다. 왕이 크게 기뻐하자, 채문이 말에서 내려 기러기를 주워 왕의 앞에 나아가서 아뢰기를, “신하중에 이 같은 사람이 있는데 어찌 도적을 근심하겠습니까." 하니, 왕이 크게 웃으면서 위로하고 권장하였다. 천안부(天安府 충남 천안)에 이르니 유종과 응인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먼저 석파역(石坡驛)에 가서 음식을 준비하여 영접하겠습니다." 하고는 드디어 도망하였다.
○ 신사일에 왕이 공주(公州)에 머무니 절도사 김은부(金殷傅)가 예를 갖추어 교외에 나와 영접하면서 아뢰기를, “성상께서 산과 물을 지나시고 서리와 눈을 무릅쓰시며 이렇게 지극한 상황에 이르실 줄 어찌 생각하였겠습니까." 하고, 이어 의대(衣帶)와 토산물을 바치니 왕이 가상히 여겨 받아서 옷을 갈아입고 토산물은 호종하는 신하에게 나누어 주었다. 날이 저물녘에 파산역(巴山驛)에 이르니 아전들이 모두 도망하여 수라를 들지 못하시게 되었는데, 은부가 바친 음식이 마침 이르러 아침과 저녁에 나누어 올렸다. 왕이 채문에게 이르기를, “현덕왕후(玄德王后)는 잉태를 하였으니 마땅히 멀리 갈 수가 없을 것이다. 그의 본관이 선주(善州) 경북 선산군(善山郡))인데 이 곳에서 멀지 않으니 선주로 보내야 하겠다." 하였다. 채문이 전일의 의논을 고집하였으나 왕은, “사세가 할 수 없다." 하면서 드디어 왕후를 보내었다. 여양현(礪陽縣(전북 익산군(益山郡) 여산면(礪山面))에 머물렀을 때 장수와 군사들이 배반할 마음을 두자 채문이 아뢰기를, “성조(聖祖 태조)께서 후삼국을 통합할 때에 공이 있는 자는 비록 공이 작더라도 반드시 상을 주셨는데, 하물며 지금은 험난한 지경을 겪고 있으니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야 합니다. 마땅히 먼저 상을 내려 권장하소서." 하니, 왕이 그 말을 따라 현안지(玄安之) 등 16명을 중윤(中尹)으로 임명하였다.
임오일에 삼례역(參禮驛 전북 전주군(全州郡) 삼례면)에 이르니 전주절도사 조용겸(趙容謙)이 야인의 옷차림으로 임금의 행차를 맞이하였다. 박섬(朴暹)이 아뢰기를, “전주는 곧 옛 백제로서 성조께서도 미워하셨으니 주상께서는 행차하지 마소서." 하니, 왕이 옳다 여겨 바로 장곡역(長谷驛)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이날 저녁에 용겸이 왕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왕의 위세를 끼고 호령을 하고자 꾀하여 전운사(轉運使) 이재(李載)ㆍ순검사(巡檢使) 최집(崔檝)ㆍ전중소감(殿中少監) 유승건(柳僧虔)과 더불어 흰 표지를 관에 꽂고 북을 치고 소리지르며 나아갔다. 채문이 사람을 시켜 문을 닫고 굳게 지키니 적이 감히 들어오지 못하였다. 왕은 왕후와 더불어 말을 타고 역청(驛廳)에 있었다. 채문이 지붕에 올라 묻기를, “너희들이 어떻게 이와 같이 할 수 있느냐. 유승건이 왔느냐?" 하니, 적이 말하기를, “왔다." 하였다. 또 묻기를, “너는 누구냐?" 하니, 적이, “너는 또 누구냐?" 하였다. 채문이 다른 말로 대답하니 적이 말하기를, “지장군(智將軍)이로구나." 하였다. 채문이 그 소리를 알아듣고 말하기를, “너는 친종(親從) 마한조(馬韓兆)로구나." 하였다. 이어 왕명으로 승건을 부르니, 승건이 말하기를, “네가 나오지 않으면 내가 감히 들어갈 수 없다." 하였다. 채문이 문 밖으로 나가서 승건을 불러 어가의 앞에까지 오게 하니 승건이 울면서 아뢰기를, “오늘날의 일은 용겸이 한 짓이므로 신은 알지 못합니다. 청컨대 명령을 받들어 용겸을 불러 오겠습니다." 하므로, 왕이 이를 허락하였더니 승건이 나가서 도망해 버렸다. 왕이 양협(良叶)에게 명하여 용겸과 이재를 불러오게 하였다. 그들이 오자 여러 장수들이 죽이려 하였는데, 채문이 꾸짖어 이를 말리고 두 사람을 시켜 대명궁주(大明宮主)의 말을 이끌고 가게하였다가 얼마 뒤에 전주로 돌려 보내었다.
○ 을유일에 거란 군사가 물러갔다.
○ 정해일에 왕이 노령(蘆嶺)을 넘어 나주(羅州)에 들어갔다.
○ 경인일 밤에 적정을 염탐하는 사람이 거란 군사가 이르렀다고 잘못 보고하니, 왕이 크게 놀라서 밖으로 달려 나갔다. 채문이 아뢰기를, “대가(大駕)가 밤에 나가시면 백성이 놀라 요란할 것이니 행궁으로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신이 염탐해 알아본 후에 행차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하였다. 채문이 나가서 살펴보니 통사사인(通事舍人) 송균언(宋均彦)과 별장(別將) 정열(丁悅)이 거란의 전봉(前鋒)인 원수(元帥) 부마(駙馬)의 서신과 하공진의 주장(奏狀)을 가지고 왔다. 채문이 그들을 데리고 행궁으로 나아가니, 왕이 공진의 주장을 보고는 거란 군사가 벌써 물러간 것을 알고 기뻐하며 균언을 도병마녹사로, 정열을 친종낭장(親從郞將)으로 삼았다. 거란 부마의 서신은 거란 문자로 썼는데 해독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그 뜻을 알 수가 없었다.
○ 신묘일에 귀주 별장(龜州別將) 김숙흥(金叔興)이 중랑장(中郞將) 보량(保良)과 함께 거란 군사를 쳐서 머리 1만여 급을 베었다.
○ 임진일에 양규(楊規)가 거란 군사를 무로대(無老代 평북의 주ㆍ군)에서 습격하여 머리 2천여 급을 베고 사로잡혀 있던 남녀 3천여명을 빼앗았다.
계사일에 양규가 또 이수(梨樹)에서 싸워 석령(石嶺)까지 추격하여 머리 2천 5백여 급을 베고 사로잡혀 있던 남녀 1천여명을 빼앗았다.
○ 을미일에 왕이 행차를 돌려서 복룡현(伏龍縣)에서 머물렀다.
○ 병신일에 양규가 또 여리참(餘里站)에서 싸워 머리 1천여 급을 베고 사로잡혀 있던 남녀 1천여 명을 빼앗았다. 이날 세 번 싸워서 모두 이겼다.
○ 경자일에 왕이 전주에 머물러 7일을 지냈다.
○ 임인일에 양규가 다시 거란 군사의 전봉을 애전(艾田)에서 맞받아 쳐서 머리 1천여 급을 베었다. 조금 후에 거란주의 대군이 불시에 이르자, 양규와 김숙흥이 종일토록 힘껏 싸웠으나 군사가 모두 죽고 화살이 다하여 모두 적의 진중에 뛰어들어 죽었다. 양규는 후원도 없는 외로운 군사를 거느리고 한 달만에 모두 일곱 번 싸워 거란 군사를 매우 많이 죽이고 사로잡혀 있던 사람 3만여 명을 빼앗았고, 낙타ㆍ말ㆍ무기를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얻었다. 거란 군사는 여러 장수들에게 초격(鈔擊)되었고, 또 큰 비로 인하여 말과 낙타가 지쳤으며 무기를 모두 잃어버렸다.
계묘일에야 압록강을 건너 군사를 이끌고 물러가는데, 진사(鎭使) 정성(鄭成)이 이를 추격하여 그들이 반쯤 건너갔을 때에 뒤에서 치니 거란 군사 중에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항복했던 여러 성이 모두 수복되었다.
○ 중대성(中臺省)을 폐지하고 다시 중추원을 설치하였다.
○ 채충순(蔡忠順)을 비서감(祕書監)으로, 박섬(朴暹)을 사재경(司宰卿)으로, 주저(周佇)를 예부시랑 중추원직학사(禮部侍郞中樞院直學士)로 삼았다. 박섬은 안북(安北)에서 도망하여 서울에 돌아와서 그 가족을 거느리고 본향인 무안현(務安縣)으로 가다가 길에서 왕의 행차를 만나 나주까지 따라갔다가 얼마 뒤에 하직하고 돌아갔는데, 거란 군사가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 와서 왕을 뵙자 곧 이 벼슬을 주니 사람들의 비난이 많았다.
○ 2월 정미일에 왕이 전주를 출발하여 무신일에 공주에 머물러 6일을 지냈는데 절도사 김은부(金殷傅)가 맏딸을 시켜 어의(御衣)를 지어 바쳤다. 그로 인하여 그를 맞아들이니 곧 원성왕후(元成王后)이다.
○ 양규에게 공부상서를, 김숙흥에게 장군(將軍)을 증직하였다.
○ 중랑장 지채문(智蔡文)에게 전지 30결을 내려주었는데, 교하기를, “짐이 적을 피하여 먼 길에 낭패를 당했는데 따라온 신하중에 도망해 흩어지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나, 오직 채문만이 풍상을 무릅쓰고 산천을 지나며 말고삐를 잡는 노고를 아끼지 않고 끝내 송죽같은 절개를 보전하였소. 진실로 남다른 공이 많으니 어찌 특별한 은전을 아끼리오." 하였다.
○ 정사일에 왕이 청주(淸州)에 머물렀다.
○ 감찰어사(監察御史) 안홍점(安鴻漸)이 아뢰기를, “거란 군사가 장단(長湍)에 이르자 바람과 눈이 갑자기 일어나면서 감악(紺岳)의 신사(神祠)에 깃발과 군마가 있는 듯하여 거란 군사가 두려워서 감히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옛날에 진(秦) 나라 부견(苻堅)이 진(晉) 나라를 치다가 팔공산(八公山)의 풀과 나무가 진(晉) 나라 군사로 변한 것을 바라보고는 두려워 물러갔으니 신명이 돕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청컨대 맡은 관청이 보답하는 제사를 지내게 하소서." 하니, 그 말을 따랐다.
○ 연등회를 행궁에서 거행하였다. 이후에는 으레 2월 보름에 연등회를 거행하였다.
○ 경신일에 왕이 청주를 출발하여 정묘일에 서울로 돌아와서 수창궁(壽昌宮)에 거처하였다.
○ 형부가 아뢰기를, “유언경(劉彦卿)은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받았음에도 보답하려 힘을 다할 생각은 하지 않고 앞장서서 적에게 항복했으니 그 처자를 귀양보내소서." 하니, 그 말을 따랐다.
○ 3월에 유진(劉瑨)을 내사시랑 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로, 조지린(趙之遴)ㆍ최사위(崔士威)를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삼았다.
○ 여름 4월에 탁사정(卓思政)을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로 삼았다.
○ 종묘에 비오기를 빌고 시사(市肆)를 옮기며, 짐승의 도살을 금하고 우산[繖]과 부채[扇]를 쓰지 않으며, 원통한 옥사를 심리하고 궁핍한 백성을 구휼하였다.
○ 유사에 명하여 양규(楊規)의 아내 은율군군(殷栗郡君) 홍씨(洪氏)에게 곡식을 주고 아들 대춘(帶春)을 교서랑(校書郞)에 임명하고, 왕이 친히 홍씨에게 교서를 지어 내려주기를, “너의 남편은, 재주는 장수의 지략을 갖추고 겸해 정치하는 도리를 알아 절의를 다하고 정성을 바쳤으니 충성스러운 지조는 비할 데가 없다. 요전에 북쪽 변경에서 구적(寇賊)을 뒤쫓아 잡아 성(城)과 진(鎭)이 보전되고, 여러 번 싸움에 이겼으나 마침내는 죽음에 이르렀으니 항상 그 공로를 생각하여 너에게 종신토록 해마다 벼 1백 섬을 내려주리라." 하였다.
○ 노정(盧頲)에게 예빈경(禮賓卿)을 증직하였다.
○ 대장군 채온겸(蔡溫謙)ㆍ신영한(申寧漢), 낭장 원태(元泰), 별장 최원(崔元), 습유(拾遺) 승리인(乘里仁), 태사승(太史丞) 유인택(柳仁澤)이 전사하였으므로, 그들의 집에 쌀과 베로 차등 있게 부의(賻儀)를 주었다.
○ 유사에 명하여 서울과 지방에서 전사한 해골을 거두어 장사지내고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 재상에게 교하기를, “《논어(論語)》에, '위태하여도 돕지 아니하고 넘어져도 붙들지 아니하면 저 신하를 어디 쓸 것이냐.' 하였으며, 《서경(書經)》에, '나무가 먹줄을 받으면 바루어지고 임금이 간언을 따르면 성스러워진다.' 하였으니, 군신간의 의리로 어찌 마음을 다하여 바로잡아 구제하지 않을 수 있으랴. 짐이 외람되이 왕위를 계승한 후로 고생과 위태함을 고루 겪었으므로 아침 저녁으로 조심하고 부끄러워하면서 허물이 없기를 생각하고 있으니 경들은 내가 미치지 못하는 점을 힘써 보좌하고, 나가서는 뒷말을 하고 보는 앞에서는 순종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 송악(松岳)에 비오기를 빌었더니 큰 비가 왔다.
○ 공부 낭중 왕첨(王瞻)을 거란에 보내어 군사를 돌이킨 데 대해 사례하였다.
○ 영빈관(迎賓館)과 회선관(會仙館)을 설치하여 여러 나라 사신을 접대하였다.
○ 5월에 동북 여진(東北女眞)의 추장(酋長) 저을두(鉏乙豆)가 그 무리 70명을 거느리고 와서 토산물을 바치니 그들에게 의복과 은으로 만든 기명을 각각 내려주었다.
○ 평양의 목멱(木覓)ㆍ교연(橋淵)ㆍ도지암(道知巖)ㆍ동명왕(東明王) 등의 신에게 훈호를 올렸다.
○ 문하시랑 평장사 위수여(韋壽餘)가 늙었다고 퇴직하기를 청하니 허락하지 않고 안석과 지팡이를 내려 주었다.
○ 가을 7월에 최사위(崔士威)를 서북면 행영도통사로, 장연우(張延祐)ㆍ채충순(蔡忠順)을 함께 중추사(中樞使)로 삼았다.
○ 형부가 아뢰기를, “낭중(郞中) 백행린(白行隣)은 왕의 행차가 남쪽으로 파천할 그 즈음에 서울에 남아 있으면서 스스로 어사중승(御史中丞)이라 일컫고, 이인례(李因禮)ㆍ거정(巨貞) 등과 더불어 종들을 모집하여 군사를 삼았으나 적군을 보자 싸우지도 못하고 무너졌으니 제명하소서." 하니, 그 말을 따랐다.
○ 교하기를, “지난 해에 거란이 서경을 포위하자 사문(沙門) 법언(法言)이 의용(義勇)을 떨쳐서 제 생명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하여 죽었으니 수좌(首座)를 증직하도록 하라." 하였다.
○ 8월에 형부가 아뢰기를, “조용겸(趙容謙)ㆍ유승건(柳僧虔)ㆍ이재(李載)ㆍ최즙(崔檝)ㆍ최성의(崔成義)ㆍ임탁(林卓)은 주상께서 남쪽으로 행차하실 때에 행궁을 놀라게 하였으니 제명하고 귀양보내소서." 하니, 그 말을 따랐다.
○ 문인위(文仁渭)를 우복야(右僕射)로, 장연우(張延祐)를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로 삼았다.
○ 강조의 당을 논죄하여 탁사정(卓思政)ㆍ박승(朴昇)ㆍ최창(崔昌)ㆍ위종정(魏從政)ㆍ강은(康隱)을 바다 가운데의 섬으로 귀양보내었다.
○ 교하기를, “증 장군(贈將軍) 김숙흥(金叔興)이 스스로 변성(邊城)을 지키면서 적군과 싸우는 데 용감하여 이미 파죽지세(破竹之勢)로 공을 이루었으나 마침내 진중에서 목숨을 바쳤다. 옛 공로를 생각하니 마땅히 후하게 상을 주어야겠다. 그 어머니 이씨에게 한평생 해마다 곡식 50석을 주라." 하였다.
○ 호부시랑(戶部侍郞) 최원신(崔元信)을 거란에 보내었다.
○ 관인전(寬仁殿) 문에 거둥하여 늙은이ㆍ고아와 홀아비ㆍ병이 위독한 자들에게 술과 음식을 차려 대접하고 물품을 차등 있게 주었다.
○ 참지정사(參知政事) 최사위(崔士威)를 서경유수(西京留守)로 삼았다.
○ 송악성(松岳城 개성(開城))을 보수하였다.
○ 서경에 황성(皇城)을 쌓았다.
○ 동여진이 백여 척의 배로 경주에 침입하였다.
○ 청하(淸河 경북 영일(迎日))ㆍ흥해(興海(경북 영일))ㆍ영일(迎日 경북 영일)ㆍ울주(蔚州 경남 울산(蔚山))ㆍ장기(長鬐 경북 영일)에 성을 쌓았다.
○ 9월에 참지정사(參知政事) 조지린(趙之遴)이 졸하였다. 지린은 관리로서의 재간은 있었으나 성품이 술을 좋아해 밤낮으로 즐겼다. 목종(穆宗) 때 이부시랑 지은대사(吏部侍郞知銀臺事)에 임명되었는데 사람들은 그가 붕당을 만들고 남의 것을 마구 들어먹는다고 비난하였다.
○ 탐라(耽羅)에서 주ㆍ군의 예(例)에 따라 주기(朱記)를 내려주도록 청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 겨울 10월에 유방(庾方)을 참지정사 서경유수 겸 서북면 행영도병마사(參知政事西京留守兼西北面行營都兵馬使)로 삼았다.
○ 도관 낭중(都官郞中) 김숭의(金崇義)를 거란에 보내어 동지(冬至)를 하례하였다.
○ 궁궐을 수선하고 건축하였다.
○ 11월에 형부 시랑(刑部侍郞) 김은부(金殷傅)를 거란에 보내어 생신을 하례하였다.
○ 12월에 문인위(文仁渭)를 참지정사로 삼았다.
○ 교하기를, “옛날의 현명한 왕들은 백성을 자식과 같이 대하였으니, 짐이 백성을 다스리는 자리에 있으면서 감히 마음을 다하지 않으랴. 방금 흉년을 당하고 또 지독한 추위를 만났으니 오직 홀아비나 과부, 고아나 자식없는 외로운 자들이 배고픔과 추위를 면하지 못할까 염려된다. 그런 이들이 있는 고을에서는 각기 의복과 양식을 주어 생활하게 하라." 하였다.
○ 이해에 예부 시랑(禮部侍郞) 주기(周起)가 아뢰어 비로소 진사(進士)의 시험에 성명을 봉하는 법[糊名法]을 정하였다.
○ 거란이 하공진(河拱辰)을 죽였다. 예전에 공진이 억류를 당하였을 때 속으로 본국에 돌아오기를 도모하여 겉으로 충성스럽고 근실함을 보이니 거란주가 매우 후하게 대우하였다. 공신이 고영기(高英起)와 은밀히 모의하고 거란주에게 아뢰기를, “본국이 이미 멸망하였으니 신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검점하고 오겠습니다." 하니, 거란주가 이를 허락하였다. 얼마 뒤에 고려 왕이 서울에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는 영기는 거란 중경(中京)에 있게 하고 공진은 연경(燕京)에 있게 하며 모두 양가(良家)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공신이 준마를 많이 사들여서 동로(東路)에 벌여놓고 본국에 돌아갈 계획을 하니 어떤 사람이 그 계획을 밀고하였다. 거란주가 국문하니 공진이 사실대로 빠짐없이 대답하고 또 말하기를, “제가 본국에 대해서는 감히 배반할 마음을 가질 수 없으니 죄는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살아서 대조(大朝)를 섬기고 싶지 않습니다." 하였다. 거란주가 의롭게 여겨 그를 용서하고, 절개를 바꿔 자기에게 충성을 다하도록 타일렀으나 공진의 말이 더욱 강경하고 공손하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살해를 당하였다.

 

[주D-001]진(秦)……물러갔으니 : 후진(後秦) 황제 부견(苻堅)이 진(晉)을 치러 갔다가 패하고 오는 길에, 팔공산(八公山)의 초목이 모두 진(晉) 나라 군사로 보여 군사들이 놀라 무너졌다.

 

국조보감 제26권
 선조조 3
12년(기묘, 1579)


○ 5월. 지중추부사 백인걸(白仁傑)이 상소하여 당시의 폐단을 말하면서 첫 머리에 "녹미(祿米)를 주시니 특별하신 성은에 늙은 신하의 마음이 감격에 차서 차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지 못하겠으므로 우선 조종조 이래 변을 불러들인 것 중에서 큰 변에 대해 말씀드리고 난 다음에 당금의 재변을 불러들인 이유를 언급하겠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전하의 재기(才氣)는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영명(英明)하신데도 정치의 공효에 대해서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청컨대 신은 전하께서 병통이 있게 된 근본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신이 전에 경연에 입시했을 적에 늙고 어두워서 성상의 물으심에 대답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물러나와 같이 입시했던 사람의 말을 들어보니 성상께서 지금의 조정 형편은 어떠하냐고 물으셨다 하는데, 이것은 바로 신이 말씀드리고자 하던 것입니다. 신이 초야에 있으면서 들으니, 벼슬아치들 사이에 심의겸과 김효원이 당으로 나뉘었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대신과 근신들이 진정시킬 계책을 의논한 다음 경연에서 아뢰어 두 사람을 모두 외직으로 보임시켰으나, 조정은 조용해지지 않고 떠도는 의논이 구름처럼 일어났습니다. 그리하여 조금이라도 의겸의 무리에 가까운 자면 서인(西人)이라 지목하고 조금이라도 효원의 무리에 가까운 자면 동인(東人)이라 지목하여 조정의 인사들이 모두 지목하는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한 사람을 논박하면 여러 사람들이 반드시 ‘아무개는 아무의 당이기 때문에 논박을 당한 것이다.’라고 하며 떠들어대고, 한 사람을 천거하여 등용하면 여러 사람들이 반드시 ‘아무개는 아무의 당이기 때문에 천거를 받은 것이다.’라고 하며 떠들어대는 등 사정(私情)으로 지목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대간과 전조(銓曹)가 손발을 쓸 수가 없으며, 사류들도 비록 강개하여 논핵하고자 하지만 위에서는 서로 공격하는가 의심하고 아래서는 자기를 배척하는 것으로 의심할까 두려워하고 있으니, 동(東)ㆍ서(西)라는 두 글자는 바로 나라를 망치게 될 화근입니다. 우뚝이 드러난 선비는 세상에서 많이 볼 수가 없지만 그렇다고 용렬하고 어리석은 자를 등용할 수 없고 보면 오늘날 쓸 만한 선비들은 모두 동서의 지목 속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동인으로 서인을 공격해서도 안 되고 서인으로 동인을 공격해서도 안 되는데 그렇다고 동인과 서인을 모두 배척하고자 한다면 이는 전하의 조정을 텅 비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동과 서를 조화시켜 그들로 하여금 함께 공경하고 협력하게 하는 것이 군자의 논의일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조광조의 공덕은 마땅히 문묘에 종사(從祀)되어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변방의 방비를 신칙하고 군정을 닦으며 기계를 수선해야 합니다.”
하였다. 그리고 서북 지방의 오랑캐와 남쪽 변방의 해적에 관한 일을 논하였는데 상소의 말이 수천 마디나 되었다. 상은 후한 비답을 내리고 정원으로 하여금 한 벌을 등서하여 대내로 들여와 어람에 대비하게 하였다.
○ 김성일을 사헌부 장령으로 삼았다. 성일은 근시(近侍)로 있을 적에 귀한 사람들을 논핵하였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전상(殿上)의 호랑이라고 일컬었다. 하원군 정(河原君珵)은 왕실의 친족으로 술에 빠져 방자하게 행동하고 여리(閭里)에 침해를 끼치고 있었는데, 성일이 그 집의 노복을 체포하여 중형으로 다스리니, 궁가(宮家)들이 원망하고 노하였으나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상이 경연 석상에서 "근래에 염치가 아주 없어지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그러한가?” 하고 묻자, 성일이 대답하기를,
“대신으로서 뇌물을 받은 자도 있으니 염치가 없어진 것은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이때 정승 노수신(盧守愼)이 앞 자리에 있다가 나아가 엎드리고 아뢰기를,
“성일의 말이 옳습니다. 신의 일가 사람이 북방의 변장이 되었는데 신에게 늙은 어미가 있다 하여 작은 초피 갖옷을 보내 왔기에 신이 받아서 어미에게 주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간이 바른 말을 하고 대신이 허물을 인책하였으니 둘 다 잘 하였다고 할 만하다. 신료들이 서로 이와 같이 책려(責勵)한다면 나랏일을 잘해 갈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노수신도 성일에게 후히 사례하였고 좋지 않게 여기지 않았다.
○ 9월. 윤두수(尹斗壽)를 다시 서용하여 연안 부사(延安府使)로 삼았다. 윤두수가 하직인사를 드리던 날 상이 인견하고 위로하면서 묻기를,
“어떻게 고을을 다스리려고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연안군의 백성들은 송사하기를 좋아하여 사무가 너무나 많다고 하니 신은 재능이 용렬하고 명망이 가벼워서 감당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하자, 상이 한참 동안 잠잠히 있다가 이르기를,
“내가 경을 대우하는 데 내직과 외직이라 하여 차이를 두지 않고 있으니, 경도 내직과 외직을 구분하지 말고 잠시 외직에 나가 있으라. 이 뒤에 다시 부를 것이다.”
하였다. 두수가 물러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처음 생각에는 오랫동안 성상과 이별하게 되었으므로 한번 우러러 뵙고자 하였다. 그런데 상께서 정녕하게 말씀하신 바람에 감격하여 샘 솟듯이 눈물이 흘러 마침내 감히 용안을 우러러 뵙지 못했다.”
하였다. - 윤두수는 심의겸의 집과 가장 친했다. 또한 을해년(1575, 선조 3)에 김효원의 당을 지나치게 배척하자 논자들이 조정을 탁란시키는 무리라고 지목하였다. 그리고 뇌물을 탐했다는 이유로 탄핵까지 하였는데, 상만은 구신으로 대우하여 마침내 크게 등용하였다. -
○ 지중추부사 백인걸(白仁傑)이 죽었다. 인걸의 자는 사위(士偉)이고 호는 휴암(休菴)이다. 인걸이 늙어서 일을 하지 못하자 서울에 있는 사대부들이 중시하지 않았으나 마음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녹봉미와 마초값[騶直]을 모두 도봉서원(道峯書院)에 보내고 왕래하고 유숙하면서 우러르는 회포를 붙였다. 이때에 이르러 병세가 위독하자 상이 문병하고 의원과 약을 내려보내 치료케 하였다. 그가 죽자 하교하기를,
“어진 재상이 죽었으니 내 마음이 놀랍고 애통하다. 부의를 더욱 후하게 하라.”
하였다. 백인걸은 고매하고 활달하며 강개한 기백과 절의가 있었고 높은 뜻은 편안함을 추구하지 않았다. 처음에 조광조를 스승으로 삼아 종신토록 한결같이 높이 사모하고 심복하였다. 을사년의 난(難) 때부터 만 번 죽음을 무릅쓰고 곧은 말로 항거하였는데 다른 사람은 감히 먼저 하지 못하였다. 그가 정직하다는 명성이 한 때에 진동하자 간사한 무리들도 무섭고 두려워서 감히 그들의 분함을 풀지 못했다. 같은 때에 죄를 얻은 자들이 서로 잇따라 귀양가고 사사(賜死)되었는데 백인걸은 중도부처(中道付處)에 그쳐 5년간 귀양살이를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여러 해 동안 곤궁하였으나 뜻을 꺾지 않았고 만년에 등용되어서는 다시 시대와 뜻이 맞지 않았으나 충성스럽고 의로운 마음은 머리가 희도록 변치 않아 일에 따라 선을 권하고 악을 못하도록 하되 반드시 그 뜻을 극진히 하였다. 나이 팔십이 넘어서도 여전히 학문의 강론에 힘써 밤낮으로 연구를 하되, 성명(性命)에 관한 책이 아니면 읽지를 않았다. 그리고 집에 거처할 때에는 가난하고 검소하였으며 입고 먹는 것은 소략하고 거칠었는데, 먼지가 자리에 가득 쌓여도 쓸지 않았다. 상이 그의 기풍과 절의를 중히 여겨 끝끝내 변하지 않고 총애하였다.

농암집 제5권
 시(詩)
도봉산에 들어가며


푸른 산 만 길 높이 솟아 있는 곳 / 靑峯萬丈出
그 아래 정암 사우 자리 잡았지 / 遠識靜菴祠
초겨울 날씨라서 쌀쌀도 한데 / 蕭瑟初冬候
몇 사람 그곳에서 모이자 했네 / 蒼茫數子期
차가운 물 말 몰아 건너가는데 / 寒流渡馬淺
시든 국화 날 향해 고개 떨구네 / 老菊向人垂
막대 짚고 기우제단 서성이자니 / 倚杖雩壇久
이곳에서 즐겼던 지난봄 추억 / 春游憶在茲

동사강목 제6하
경술년 현종 원문왕(顯宗元文王) 원년 휘(諱)는 순(詢), 자(字)는 안세(安世)이다. 태조 제8자 안종(安宗) 욱(郁)의 아들이며, 모는 효숙 왕후(孝肅王后) 황보씨(皇甫氏)이다(송 진종 대중상부 3, 거란 성종 통화 28, 1010)


춘윤2월 연등회(燃燈會)를 부활시켰다.
국속(國俗)에 왕궁(王宮)과 국도(國都)에서 향읍(鄕邑)에 이르기까지 정월 보름부터 이틀 밤을 연등회를 베풀었는데, 성종이 상도에 벗어난 일이라고 하여 이를 폐지하였더니, 이때에 와서 다시 2월 보름에 이를 행하게 하였다.
○ 과선(戈船)을 제작하였다.
이때 동번(東蕃)의 해적이 동해를 침략하므로 과선 75척을 제작하여 진명구(鎭溟口) 폐현(廢縣)인데, 지금의 덕원부(德源府) 남쪽 24리 지점에 있었다 에 매어 두어 이를 대비하게 하였다.

하4월 과거에서 시무책을 제외하였다.

5월 낭중(郞中) 하공신(河拱辰)과 유종(柳宗)을 섬에 유배시켰다.
이에 앞서 상서 낭중 하공신이 일찍이 동서 양계(東西兩界)에 나가 있을 때 함부로 군사를 내어 동여진을 치다가 패하였다. 화주(和州)지금의 영흥(永興) 방어낭중(防禦郞中) 유종이 이 소식을 듣고 여진을 크게 원망하였다. 때마침 여진 사람 95명이 고려에 와서 조회하려고 화주관(和州館)에 이르니, 유종이 이들을 다 죽였다. 그 때문에 이들을 모두 유배시킨 것이다.
여진이 또한 거란에게 호소하니, 거란주가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강조는 임금을 시해한 큰 역적이다. 마땅히 군사를 일으켜서 그 죄를 문책해야 하겠다.”
하였다.
【안】 《속강목(續綱目)》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대중상부 3년에 거란주 융서(隆緖)가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강조가 임금 송(誦)을 시해하고 순(詢)을 세우고는 그가 정승 노릇을 하니, 큰 역적이다. 마땅히 군사를 일으켜서 그 죄를 문책해야 하겠다.’ 하니, 여러 신하는 모두 옳다 하였다. 소적렬(蕭敵烈)은 아뢰기를 ‘국가가 여러 해 계속 정토를 일삼으니 사졸들이 지쳤고, 더구나 금년에는 흉년이 들었음에리까? 섬오랑캐의 작은 나라는 성루(城壘)가 완고하니, 승전한다 하더라도 전쟁은 그치지 않을 것이요, 만일 승리하지 못한다면 후회를 끼칠까 염려되니, 사신 한 사람을 보내어 그 까닭을 묻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저들이 만일 죄를 자복하면 그만두고 그렇지 않으면 풍년을 기다려서 군사를 일으키는 것도 늦지 않습니다.’ 하였는데, 듣지 않았다.”

추7월 거란이 사신을 보내와 전왕에 대한 것을 물었다.

8월 거란에 사신을 보내어 수호(修好)하기를 청하였다.

동10월 강조가 스스로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가 되어 통주(通州)에 나가 주둔하였다.
강조는 스스로 도통사가 되고 이현운(李鉉雲)ㆍ장연우(張延祐)는 각각 부사가 되었으며, 안소광(安紹光)은 도병마사(都兵馬使)가, 노정(盧頲)은 부사가 되고, 최현민(崔賢敏)ㆍ이방(李昉)ㆍ박충숙(朴忠淑)은 각각 좌군병마사(左軍兵馬使)ㆍ우군병마사ㆍ중군병마사가 되고, 최사위(崔士威)는 통군사(統軍使)가 되어 군사 30만을 거느리고 통주(通州)지금 선천부(宣川府)의 옛 소재지인데, 선천부의 북쪽 62리 지점에 있다 에 주둔하여 거란에 대비하였다.
○ 거란이 사신을 보내와 군사 일으킨 것을 알렸다.
○ 거란에 사신을 보내어 강화하기를 청하였다.
이때에 거란이 군사를 출발시키려 하니 조정에서는 크게 두려워하였다. 연달아 사신을 보내어 강화하기를 빌었으나 거란주는 듣지 않고 아울러 사신까지 구류시켰다. 전후를 통하여 구류당한 사람은 진적(陳迪)ㆍ윤여(尹餘)ㆍ김연보(金延保)ㆍ왕좌섬(王佐暹)ㆍ백일승(白日昇)ㆍ이예균(李禮均)ㆍ왕동영(王同頴) 등 10여 명이었다.

11월 거란이 사신을 보내와 친정(親征)을 알렸다.
○ 팔관회(八關會)를 부활시켰다.
팔관회가 폐지된 지 거의 30년이었는데, 이때 와서 정당문학 최항의 청에 따라 이를 부활시켰다.
최씨는 이렇게 적었다.
“연등(燃燈)ㆍ팔관(八關)은 곧 석씨(釋氏)의 허탄 망령된 교법이다. 성종이 상도에 벗어난 것임을 알고 이를 폐지시켰는데, 이제 다시 이것을 선두로 거행하였다. 이때에 난적(亂賊)은 안에서 소란스럽고 강구(强冦)는 밖에서 치열하였으니, 왕이 능히 정신을 가다듬어 정사를 부지런히 하였다면 도망쳤던 치욕은 거의 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에 석씨의 교법을 따르기에 급급하였으니, 어찌 새로 정사를 함에 있어 큰 누가 되지 않았겠는가?”
○ 거란주가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통주(通州)에 이르러서 강조를 잡아 주참하였다.
16일(신묘)에 보병(步兵)과 기형(騎兵) 40만 명을 거느리고 의군천병(義軍天兵)이라 칭하며 압록강을 건너와서 흥화진(興化鎭)을 포위하니, 도순검사(都巡檢使) 양규(楊規), 진사(鎭使) 정성(鄭成), 부사(副使) 이수화(李守和), 판관(判官) 장호(張顥) 등이 성을 굳게 지켰다.
거란주가 우리 나라 사람을 붙잡아 각기 비단옷을 주고 화살에 매단 봉서(封書)를 준 다음 군사 1백여 명으로 그들을 성 아래에 보내어 항복을 권유하게 하였다. 그 글에 이르기를,
“짐(朕)은 전왕(前王) 송(誦)이 우리 조정을 섬겨온 지 오래인데 이제 역신(逆臣) 강조가 임금을 죽이고 어린 임금을 세운 까닭으로 친히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국경에 다다랐으니, 너희들이 강조를 사로잡아 나의 수레 앞에 보내면 곧 군사를 돌이킬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곧장 개경(開京)으로 들어가서 너희 처자들을 죽일 것이다.”
하였다. 18일(계사)에 또 칙서(勅書)를 보내어 항복을 권유하였다. 이수화(李守和) 등이 표문을 올려 사의를 표하고 항복하지 않을 의사를 보였다. 19일(갑오)에 거란주가 비단옷과 은그릇 등의 물품을 진장(鎭將)에게 주고, 칙사를 보내어 성심을 다하도록 타일렀다. 20일(을미)에 이수화가 또 보낸 회답의 표문에,
“이제 조서를 받들고 문득 심중에 있는 말을 하오니 읍고(泣辜)의 은혜를 내리시고 해망(解網)의 인자를 베푸소서.”
하였다. 거란주는 그들이 항복하지 않을 줄 알고 다시 칙서를 보내어 위로해 타이르기를,
“너희들은 백성을 위안하고 기다리라.”
하였다. 22일(정유)에 포위를 풀고 20만의 군사를 인주(麟州)지금의 의주부(義州府) 남쪽 35리 지점에 있다 남쪽 무로대(無老代)지금은 미상 에 주둔시키고, 20만의 군사는 진군하여 통주(通州)에 이르게 하고, 거란주는 동산(銅山)지금의 철산(鐵山) 아래로 군사를 옮겼다.
이에 앞서 강조와 최사위(崔士威) 등은 군사를 세 부대로 나누어 귀주(龜州)지금의 귀성(龜城) 의 북쪽에 나아가 거란과 싸우다 패전하고 군사를 이끌고 통주성(通州城) 남쪽으로 나와서 군사를 세 부대로 나누어 물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다. 한 부대는 통주에 진을 쳐서 세 곳의 물이 모이는 곳에 웅거했는데 강조는 그 속에 있고, 다른 한 부대는 통주 부근의 산에, 나머지 한 부대는 성에 붙여서 진을 쳤다.
강조는 검거(劒車)로써 진을 배치했다가 거란의 군사가 이르면 합세하여 공격하니 부수어지지 않는 것이 없었으므로 드디어 적을 깔보는 마음이 생겨 다른 사람과 바둑을 두었다. 24일(기해)에 거란의 선봉(先鋒) 야율분노(耶律盆奴)와 야율적로(耶律敵魯)가 삼수채(三水砦)를 격파하였다. 진주(鎭主)가 거란의 군사가 이르렀음을 알리니, 강조는 믿지 않고 말하기를,
“입안의 음식과 같이 적으면 씹기가 불편하니, 마땅히 많이 들어오도록 하라.”
하였다. 재차 알리기를,
“거란 군사가 벌써 많이 들어왔습니다.”
하니, 강조가 놀라 일어나면서,
“정말이냐?”
하는데, 정신이 황홀한 가운데 전왕(前王)이 나타나 뒤에 서서 꾸짖기를,
“네 놈은 끝장이 났다. 천벌을 어찌 피할 수 있겠느냐?”
하는 듯하였다. 강조가 곧 투구를 벗고 무릎을 꿇으며,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하는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거란 군사가 벌써 이르러 강조를 결박하여 전(氈)으로 싸서 싣고 갔다. 이현운ㆍ노전(盧戩)ㆍ노의(盧顗)ㆍ양경(楊景)ㆍ이성좌(李成佐) 등이 모두 잡히고, 노정(盧頲)ㆍ서숭(徐崧)ㆍ노제(盧濟) 등이 모두 죽으니, 삼군(三軍)은 크게 요란하였다.
거란 군사는 이긴 기세를 타서 수십 리를 추격하여 머리를 3만여 개나 베었고, 내버려진 군량과 무기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거란주가 강조의 결박을 풀어 주고 묻기를,
“너는 나의 신하가 되겠느나?”
하니, 대답하기를,
“나는 고려 사람인데, 어찌 너의 신하가 되겠느냐?”
하였다. 재차 물었으나 처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살을 발라내면서 물었으나 역시 대답은 처음과 같았다. 거란주가 이현운에게 그와 같이 물으니 대답하기를,
두 눈이 이미 새 일월을 보았는데 / 兩眼已瞻新日月
한 마음이 어찌 옛 산천을 생각하겠소 / 一心何憶舊山川
하였다. 강조가 노하여 이현운을 발길로 차면서 말하기를,
“너는 고려 사람인데 어찌 이런 말을 할 수 있느냐?”
하였다.
○ 장군 김훈(金訓) 등이 거란 군사를 완항령(緩項嶺)지금의 정주(定州) 서쪽 15리 지점에 있는데 지금은 당안령(當安嶺)이라 일컫는다 에서 패배시켰다.
거란 군사가 이미 강조의 군사를 이기고 휘몰아 전진하였는데, 좌우기군 장군(左右奇軍將軍) 김훈ㆍ김계부(金繼夫)ㆍ이원(李元)ㆍ신영한(申寧漢) 등이 완항령에서 군사를 매복하였다가 모두 단병(短兵)을 가지고 졸지에 나와서 습격하니, 거란 군사가 조금 물러갔다.
○ 거란이 항복한 장수 노전(盧戩)을 보내어 통주(通州)에 이르러 항복하기를 권유하니, 중랑장 최질(崔質) 등이 이들을 체포하였다.
거란주가 노전 등을 시켜 격서(檄書)를 가지고 통주에 이르러 항복하기를 권유하니, 성안 사람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중랑장 최질과 홍숙(洪淑)이 소매를 떨치며 일어나서 노전 등을 체포하고 곧 방어사(防禦使) 이원귀(李元龜) 등과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니 여러 사람의 마음이 그제야 하나가 되었다.
【안】 충선왕(忠宣王)이, 노전의 공로가 하공신(河拱辰)과 양규(楊規)의 공로와 동등하다고 하여 그 자손을 함께 녹용(錄用)하였으니, 반드시 어떠한 훈로(勳勞)가 있었을 것인데 사서에는 이에 대한 기록이 없다.

12월 거란 군사가 곽주(郭州)에 이르니, 수장(守將) 조성유(趙成裕)와 안북도호(安北都護) 박섬(朴暹)이 성을 버리고 도망하였다. 거란 군사는 전진하여 숙주(肅州)를 함락시켰다.
6일(경술)에 거란 군사가 곽주에 들어가니, 방어사(防禦使) 조성유는 밤에 도망하고, 우습유(右拾遺) 승이인(乘里仁), 장군 대회덕(大懷德)ㆍ신영한(申寧漢), 낭중(郞中) 이용지(李用之)ㆍ간영언(簡英彦)은 모두 죽었다. 성이 드디어 함락되니 거란은 군사 6천여 명을 남겨 두어 성을 지키게 하였다.
8일(임자)에 거란 군사가 청수강(淸水江)지금의 청천강(淸川江) 에 이르니, 안북도호 부사 박섬이 성을 버리고 도망하여 그 고을 백성이 모두 흩어졌다.
10일(갑인)에 거란 군사가 드디어 숙주를 함락시켰다.
○ 별똥이 곽주에 떨어졌다.
○ 중랑장 지채문(智蔡文)과 도순검사 탁사정(卓思政)이 거란 군사를 서경(西京)에서 패배시키고, 승장(僧將) 법언(法言)은 전사하였다.
처음에 왕이 거란 군사가 이른다는 소식을 듣고 중랑장 지채문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화주(和州)에 주둔하여 동북방을 방어하게 하였더니, 강조가 패하자 그에게 명하여 군사를 옮겨 서경을 구원하게 하니, 채문은 곧 군용사(軍容使) 최창(崔昌)과 함께 나아가 강덕진(剛德鎭)지금의 성천(成川) 에 주둔하였다.
거란이 노의(盧顗)를 향도(嚮導)로 삼아 거란 사람 유경(劉徑)과 함께 격서를 가지고 서경에 들어가 항복하기를 권유하게 하니, 부유수(副留守) 원종석(元宗奭)은 부하들과 항복할 것을 의논하였다. 채문 등은 이 소식을 듣고 서경으로 달려갔다. 최창이 종석에게 노의 등을 체포하고 성을 굳게 지킬 것을 타이르니 종석이 따르지 않으므로, 최창이 채문과 모의하여 군사를 성 북쪽에 보내어 노의 등이 돌아가는 것을 기다려 습격하여 죽이고 항복할 뜻을 쓴 표문을 빼앗아 불살랐다.
이때 성안 인심이 동요하므로 채문이 나가서 성 남쪽에 주둔하였는데, 때마침 동북계 도순검사(東北界都巡檢使) 탁사정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르러 드디어 채문과 군사를 합쳐서 다시 성에 들어갔다.
이때 왕은 삼군이 패하고 주군이 함락되었기 때문에 표문을 올려 조근하기를 청하니 거란주가 이를 허락하고, 드디어 사로잡고 노략질함을 금지하고 마보우(馬保佑)를 개성 유수로 삼고, 왕팔(王八)을 부유수로 삼고는 을늠(乙凜)을 보내어 기병(騎兵) 1천 명을 거느리고 보우 등을 호송하게 하였다.
11일(을묘)에 거란주가 또 한기(韓杞)를 시켜 돌기(突騎) 2백 명을 거느리고 서경 북문에 이르러 노의 등이 돌아오지 않는 까닭을 묻게 하고, 또 유수와 관료들은 와서 지시를 받게 하였다. 사정이 채문과 함께 모의하여 휘하의 정인(鄭仁)을 보내어 날랜 기병 1백 명을 거느리고 졸지에 나가서 한기 등 1백여 명을 쳐죽이고 나머지는 모두 사로잡아 한 사람도 돌아간 자가 없었다. 사정이 또 채문을 선봉으로 삼아 나가서 을늠과 싸우게 했더니 을늠과 보우가 패하여 달아났다. 이에 성안 인심이 조금 안정되었으므로 사정은 성으로 들어오고 채문은 나가서 자혜사(慈惠寺)에 주둔하였다. 거란주가 다시 을늠을 보내어 공격하게 하였는데 성세가 매우 강성하였다.
12일(병진)에 채문이 사정 및 중 법언과 함께 군사 9천 명을 거느리고 임원역(林原驛)지금의 평양부(平壤府) 북쪽 20리 지점에 있다 의 남쪽에서 적군을 맞아 공격하여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는데 법언은 전사하였다.
○ 거란주가 서경을 포위하니, 탁사정이 성을 버리고 도망하고, 조원(趙元)과 강민첨(姜民瞻) 등이 흩어진 군사를 거두어 성을 굳게 지켰다.
13일(정사)에 채문이 다시 나가서 싸우니 거란 군사가 패하여 달아났다.
이에 성안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나가 추격하여 마탄(馬灘) 지금의 평양부동쪽 40리 지점에 있다 에 이르자 거란이 군사를 되돌려 쳐부수고, 드디어 진군하여 성을 포위하고 거란주는 성 서쪽 절에 머물렀다. 사정이 두려워하여 장군 대도수(大道秀)를 속여 말하기를,
“그대는 동문에서 나오고 나는 서문에서 나와 앞뒤에서 공격하면 이기지 못할 것이 없다.”
하고는, 드디어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밤에 도망하였다. 도수는 동문에 나와 비로소 속임을 당한 줄 알고 또 힘이 적을 당해 낼 수 없으므로,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거란에게 항복하니, 여러 장수도 모두 무너지고 성안 인심이 흉흉하였다.
15일(기미)에 통군녹사(統軍錄事) 조원(趙元)과 애수진장(隘守鎭將) 애수진은 지금의 고원(高原)에 있다 강민첨(姜民瞻)은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함께 신사(神祠)에 빌고 점을 쳐서 길조(吉兆)를 얻었다. 이에 여러 사람이 조원을 추대하여 병마사(兵馬使)로 삼고, 흩어진 군사를 거두어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 순무사(巡撫使) 양규(楊規)가 거란 군사를 곽주에서 섬멸하였다.
이에 앞서 거란주가 거짓 강조의 편지를 써서 흥화진(興化鎭)에 보내어 항복하기를 권유하니, 양규는 말하기를,
“나는 왕명을 받고 온 사람이지, 강조의 명을 받은 사람이 아니니 항복하지 않겠다.”
하였다. 이때에 와서 양규는 흥화진(興化鎭)에서 군사 7백여 명을 거느리고 16일(경신)에 통주에 이르러 군사 1천 명을 수합한 다음 17일(신유)에 곽주에 들어가서, 거란의 주둔 군사를 쳐서 모두 베어 죽이고 성안의 남녀 7천여 명을 통주로 옮겼다.
○ 거란주가 서경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포위를 풀어 동쪽으로 갔다.
이때 서경의 신사(神祠)에서 회오리바람이 갑자기 일어나서 거란의 군사와 말이 모두 흩어졌으므로 사람들은 신령의 도움을 얻은 것이라 하였다.
○ 현릉(顯陵)을 옮겨 재궁(梓宮)을 향림사(香林寺) 부아악(負兒岳)에 있는데, 아마 지금의 삼각산(三角山)인 듯하다 에 봉안하였다.
○ 귀양보냈던 하공신(河拱辰)과 유종(柳宗)을 소환하였다.
적군이 깊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 왕이 남쪽으로 가서 창화현(昌化縣)에 머물렀다.
27일(신미)에 지채문이 서경에서 도망와 군사의 패전 상황을 아뢰니, 여러 신하들이 항복하기를 의논하는데, 예부 시랑 강감찬(姜邯賛)이 홀로 아뢰기를,
“오늘날의 일은 죄가 강조에게 있으니 걱정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적은 군사로 많은 군사를 대적할 수 없으니 마땅히 그 예봉(銳鋒)을 피하여 서서히 흥복(興復)을 도모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는, 드디어 왕에게 남쪽으로 가기를 권하였다. 채문이 아뢰기를,
“신이 비록 노둔하고 겁이 많지마는 원컨대, 좌우에 있으면서 견마(犬馬)의 힘을 다하겠습니다.”
하니, 왕은 그를 가상히 여겨 주식(酒食)을 하사하였다.
28일(임신) 밤에 왕이 후비(后妃)와 이부 시랑 채충순(蔡忠順) 등 및 금군(禁軍) 50여 명과 함께 경성(京城)을 나왔다. 29일(계유)에 적성현(積城縣) 단조역(丹棗驛)지금의 적성현 서쪽 4리 지점에 있다 에 이르니 무졸(武卒) 견영(堅英)이 난을 꾀하여 장차 행궁(行宮)을 범하려 하므로 채문이 이를 쏘아 물리쳤고, 남산(南山)에 이르니 또 적이 졸지에 나와서 길을 막으므로 채문이 또한 이를 쏘아 물리쳤다. 창화현(昌化縣)지금의 양주 속현 에 이르니, 그 고을 아전이 난을 꾸미려고 사람을 시켜 외치기를,
“하공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오는데 채충순과 김응인(金應仁)을 사로잡기 위해서다.”
하자, 김응인 등은 모두 도망하고 채충순ㆍ주저(周佇) 등 몇 사람만이 남아서 왕을 모셨다. 밤에 적이 또 행궁을 핍박하니 시종하는 관원과 시녀들이 모두 도망하여 숨고, 다만 현덕(玄德)ㆍ대명(大明) 두 왕후 및 시녀 두 사람과 근신(近臣) 몇 사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채문이 기회에 따라 잘 대처하니 적이 감히 가까이하지 못하였다.
새벽에 채문이 두 왕후에게 먼저 북문으로 나가기를 청하고 손수 임금의 말을 몰고 사잇길로 가서 도봉사(道峯寺) 도봉산(道峯山)은 지금의 양주부(楊州府)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로 들어가니 적이 이를 알지 못하였다. 채문이 아뢰기를,
“지난밤의 적은 하공신이 아닌 듯하오니 곧 창화현으로 돌아가서 뒤를 밟아 보겠습니다.”
하였다. 때마침 하공신과 유종이 부름을 받고 행재(行在)로 달려가므로 채문이 그들에게 힐문(詰問)하니 과연 하공신이 한 짓이 아니었다. 하공신은 도중에서 중군판관(中軍判官) 고영기(高英起)가 패전하여 남쪽으로 달아나는 것을 보고 그를 데리고 함께 왔던 것이다. 드디어 창화현에 있던 적을 찾아내어 죽였다.
○ 상서 낭중(尙書郞中) 하공신을 보내어 표문을 만들고 거란의 진영으로 가게 하였다.
30일(갑술)에 왕이 양주(楊州)에 머무르니 하공신이 아뢰기를,
“거란이 본디 역적(逆賊 강조)을 토벌한다는 것으로 명분을 삼았는데 이제 이미 강조를 잡아갔으니,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한다면 저들이 반드시 군사를 돌이킬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태사(太史)에게 명하여 점을 치게 했더니, 건괘(乾卦)가 고괘(蠱卦)로 변함을 얻어 길(吉)하다고 하였다.
《고려사》 세가(世家)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태사가 아뢰기를, ‘건(乾)은 군(君)이 되고 부(父)가 되니, 건(乾)이 건장하면 통하지 않음이 없다. 구오(九五)의 효사(爻辭)에 「나는 용이 하늘에 있으니, 대인(大人)을 만나면 이롭다.」 하였고, 고괘(蠱卦)의 생김새는 존자(尊者)는 위에 있고, 비자(卑者)는 아래에 있음이니, 이도 역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섬기는 상(象)이다.’ 했다.”
드디어 하공신과 호부 원외랑(戶部員外郞) 고영기를 보내어 표문을 받들고 거란의 진영으로 가게 하였다. 창화현에 이르러 하공신이 표문을 낭장(郞將) 장민(張旻) 등에게 주어 먼저 군문(軍門) 앞에 가서 알리기를,
“국왕이 와서 뵈옵기를 진실로 원하오나 다만 군사의 위엄을 두려워하고 또 내란으로 인하여 강 남쪽으로 피난하였기 때문에 신(臣) 공신(拱辰) 등을 보내어 사유를 진술하게 하였는데, 공신 등도 역시 두려워하여 감히 앞으로 나가지 못하오니 빨리 군사를 거두기를 청합니다.”
라고 하게 하였는데, 장민 등이 이르기 전에 거란 군사의 선봉이 벌써 창화현에 이르렀다. 공신이 앞의 뜻을 갖춰 진술하자, 거란 군사가 국왕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니 공신은 대답하기를,
“지금 강 남쪽으로 향해 갔으니 있는 곳은 알 수 없다.”
하였다. 또 거리가 먼가 가까운가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강 남쪽이 너무 멀어서 몇 만 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하니, 뒤쫓던 거란 군사가 곧 되돌아갔다.


[주D-001]읍고(泣辜) : 우(禹) 임금이 길을 가다가 좌수를 보고 타고 있던 수레에서 내려서 울었다 한다. 《說苑 君道》
[주D-002]해망(解網) : 탕(湯)이, 어느 어부가 그물을 벌여 놓고 “하늘에서 내려오고 땅에서 나오는 놈은 다 내 그물에 걸려라.” 하는 것을 보고 그 그물의 3면을 풀어 놓으면서 빌기를 “왼편으로 갈 놈은 왼편으로 가고 오른편으로 가려거든 오른편으로 가며, 명령을 듣지 않을 놈은 그물에 걸려라.” 하였다. 《史記 殷本紀》

송자대전 제2권
 시(詩) ○ 칠언 절구(七言絶句)
도봉서원(道峯書院)에 쓰다.


푸른 절벽 깎아 세운 듯 동구 열렸으니 / 蒼崖削立洞門開
도랑물 잔잔히 몇 굽이 돌아왔나 / 澗水潺湲幾曲廻
요순 군민 만들려는 당시의 뜻을 / 堯舜君民當世志
후인들 사당 앞에 와서 기리네 / 廟前空有後人來

송자대전 부록 제19권
 기술잡록(記述雜錄)
권상하(權尙夏)


회옹 부자(晦翁夫子 주희(朱熹))는 주자(周子 주돈이(周敦頤)를 높인 말)ㆍ정자(程子 정호(程顥)와 정이(程頤)를 높인 말)ㆍ장자(張子 장재(張載)를 높인 말)의 뒤에 태어나서 여러 사람의 말을 절충(折衷)하여 경전(經傳)을 발휘(發揮)해서 만세의 보전(寶典)으로 만들었으니, 이른바 여러 현인(賢人)을 집대성(集大成)했다는 말이 참으로 거짓이 아니라 하겠다.
그러나 회옹 부자가 죽고 나서는 성학(聖學)이 전해지지 않아서 괴이한 논설(論說)들이 시끄럽게 나와 사도(斯道 성인의 도)가 묻혀 버리고 드러나지 못하였는데, 하늘의 도움으로 우리나라에 참된 유학자(儒學者)가 배출되어 유학의 문을 열어젖히고 성리(性理)의 호리(毫釐)를 분석하였으니, 그 이학(理學)을 밝힌 공이야말로 저 염락(濂洛)이 융성했던 시대보다 신속하고도 훌륭했다 할 것이다. 그러다가 우리 우암 선생에 이르러서는, 그들이 밝혀 놓은 이학을 더욱 확대시키고 천명(闡明)하여, 멀리는 고정(考亭 주희가 살던 지명으로, 곧 주희를 가리킴)의 정통(正統)을 연접하고 가깝게는 제유(諸儒)의 업적을 집대성하여 거룩하게 백세의 종사(宗師)가 되었으니, 그의 공이 크다고 이를 만하다.

회옹은 공자(孔子) 이후의 일인자(一人者)요, 우암은 회옹 이후의 일인자이다.

선생은 훌륭한 덕과 크나큰 업적으로 백세의 종사가 되었으니, 그의 한마디 말과 문자(文字) 하나하나가 모두 무궁토록 후세에 전할 만하다.

선생의 문집(文集) 가운데는 어떤 글을 막론하고 취할 것은 그 전문(全文)을 다 취해서 넣어야지, 산삭(刪削)하는 일은 큰 안목(眼目)을 지닌 사람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다. 경의(經義)와 예의(禮疑)는 모두 본집(本集) 가운데 편입시켜야 하며, 시집(詩集)은 《주자대전(朱子大全)》의 예(例)에 따라 차례대로 편입시키는 것이 매우 온당하나, 다만 연월(年月)의 선후를 상고하기가 용이치 못한 점이 있다.

도봉산(道峯山) 무우대(舞雩臺)의 남쪽에 푸른 절벽이 높다랗게 깎아질렀는데, 그 아래는 큰 바위가 시내를 가로질러 있다. 이 바위에다 선생이 친히 써 놓은 회옹(晦翁)의 시(詩) 두 구(句)를 새겨 놓았는데, 필력(筆力)이 웅장하고 힘차서 만 길이나 되는 산봉우리와 서로 겨룰 만하였다.
선생은 옥천(沃川)에서 생장(生長)하여 어릴 때부터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풍도(風度)를 익히 들었던 터라, 평소에 그를 존경하고 숭앙하기를 석담(石潭 이이(李珥))의 다음으로 하였는데, 선생이 지은 비문(碑文)ㆍ행장(行狀) 등의 문자에서 이 사실을 볼 수 있다.

선생이 제주(濟州)에 안치(安置)되었을 때, 특별히 임경업(林慶業) 장군을 위하여 전기(傳記)를 지었는데, 임 장군에 대한 표장(表奬)이 곡진하였으니, 이는 대체로 말세의 느낌에서 나온 것이었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이 계축년(1613, 광해군5)에 올린 소(疏) 가운데, 대비(大妃 선조(宣祖)의 계비인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역모(逆謀)에 가담했다는 등의 말이 있고 이어서 그러나 결코 대비를 폐출(廢黜)해서는 안 된다는 뜻을 나타낸 사실이 있는데, 춘당(春堂 송준길(宋浚吉)) 선생이 정한강의 이 소(疏)를 보고서 하루는 미촌(美村 윤선거(尹宣擧))에게,
“정공(鄭公)의 이 사실을 어떻게 보는가?”
하고 묻자, 미촌이,
“광해군(光海君)을 달래려고 하면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네.”
하고 대답하니, 춘당 선생은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우암 선생이 뒤에 그 말을 듣고는,
“길보(吉甫 윤선거(尹宣擧))의 말은 매양 이해(利害)를 주장하는 것이 이와 같다.”
하였다.

이(尼 윤증(尹拯)이 이산(尼山)에 살았으므로 그를 가리킴)는 탄곡(炭谷 권시(權諰))이 장인(丈人)이고 권유(權惟)ㆍ권기(權愭)가 처남(妻男)이었으므로, 젊었을 때부터 다년간 한방에서 지냈고, 그의 아우(윤증의 아우인 윤추(尹推)를 말함)는 이유(李)가 장인이고 이삼달(李三達)이 처남이었으므로 정분(情分)이 천륜(天倫)에 가까운 사이이니, 서로 돈독히 믿는 사이임을 알 수 있다.
남인(南人)들은 ‘허견(許堅)과 이남(李枏 왕족(王族)인 복선군(福宣君))이 비록 죄가 있기는 하지만, 그들을 역적(逆賊)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대체로 역적이란 군상(君上)을 모해(謀害)한 자를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허견과 이남은 분수에 넘치는 것을 바랐으니, 무언가 기대하는 것이 있기는 하였다. 그리하여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김석주(金錫胄)의 봉호)이 강압적으로 옥사(獄事)를 일으켜 대신(大臣)들을 마구 살해하였으니, 이는 사림(士林)의 크나큰 화(禍)였다.’ 하였다.
윤증은 마음속으로, 선생이 거제(巨濟)에서 유배(流配) 생활이 풀려 돌아오면 훈척(勳戚)들을 내쫓고 윤휴(尹鑴)ㆍ허적(許積) 등의 무리에게 신원을 해 주어야만 지극히 공정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선생의 뜻은 왕실(王室)을 반석(盤石)처럼 편안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공을 쌓는 일이요 죄를 짓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때문에 윤증이 크게 경악하여 권이정(權以鋌 권시(權諰)의 손자요, 송시열의 외손자며, 윤증의 처질(妻姪)이다)에게,
“너의 외조(外祖 송시열을 가리킴)가 장차 천 길이나 되는 구덩이에 빠져 죽을 것이다……”
하였다. 그의 주견(主見)이 이러했기 때문에, 뒷날에라도 혹 남인이 다시 득세하게 되면, 윤증 자신 역시 선생의 고제(高弟)이기에 화(禍)를 면치 못할까 염려한 나머지, 선생과 파당(派黨)을 약간 달리하여 호신(護身)의 계책을 도모하려 했던 것이다. 이것이 소위 같은 서인(西人) 중에서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갈라지게 된 원인이다.

송자대전 부록 제11권
 연보(年譜) 10
숭정(崇禎) 62년 기사. 선생 83세


1월 초하루는 기사(己巳) 29일(정유) 상소하여 원자(元子)의 위호(位號 작위(爵位)와 명호(名號))에 대해 논하고, 이어 송원소(訟冤疏 억울함을 변론한 소)를 올렸다가 엄한 꾸지람을 받고 제주(濟州)로 귀양 갔다.
이때 윤증의 당이, 선생이 우계 선생(牛溪先生)의 흠을 들추어내어 헐뜯었다 하여 끝없이 선생을 물고 늘어졌다. 그러므로 선생이 소를 올려 윤증이 무함한 시말(始末)을 자세히 진술하고 또 수옹공의 무함당한 것을 변론하였으며, 이어 증의 부자가 절의(節義)를 배척하고 세도(世道)를 퇴패하게 한 내용을 말한 다음 상에게, 교화(敎化)의 근원에 힘쓰고 성학(聖學)을 밝혀 사설(邪說)을 종식(終熄)시키기를 청하였다. 그런데 상소문을 완성하고 난 뒤에, 선생이 상이 정의(廷議 조정의 의논)를 물리치고 갑자기 원자(元子)의 위호를 정하니 여러 신하들이 중궁(中宮)의 춘추가 아직 젊어서 앞 일을 알 수 없는 데다가 왕자가 태어난 지 겨우 몇 달인데 위호를 정하는 것은 너무 서두르는 일이라고 대답했다는 말과, 이조 판서(吏曹判書) 남용익(南龍翼)이 극력 간쟁하다가 꾸지람을 당했다는 말과, 상이 또 조정에서 다시 간하는 말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모든 것을 묻지 말라고 명했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선생이 사류(士流)들이 왕자(王子)를 좋아하지 않고 흉도(凶徒)가 또 유위한(柳緯漢)을 사주하여 상소로 무함할 것을 의심하고는 그 소를 올렸다. 그 소의 대략에,
“오늘날 인사(人事)의 잘못 중에는 건본(建本 세자(世子)를 세우는 일)의 계획을 일찍 정하지 않는 것보다 더 큰 잘못이 없는데, 군신(群臣) 중에는 한 사람도 국가에 충성을 바치는 이가 없습니다. 다행히 상의 마음이 건본하는 쪽으로 쏠려 원자의 호칭(號稱)을 서둘러 정하여 만세(萬世)의 터전을 세우셨으니, 종사(宗祀)와 생민을 위한 염려가 보통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에는 오히려 석연(釋然)치 못한 점이 있습니다. 처음 왕자의 임신 소식을 듣고 온 나라 신민의 기대가 대단했었는데, 정작 탄생하신 뒤에는 전하를 위하여 국본(國本)을 정하기를 청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지금 성단(聖斷 임금의 결단)이 이미 결정되셨는데도 천안(天顔)의 지척 앞에서 오히려 순종하려 하지 않아 간단한 말로 책임이나 면하려 하고 혹은 서둔다는 말로 반대의 뜻을 분명히 드러내니, 아, 이것이 무엇하는 짓입니까? 이는 평소의 속셈이 그러해서가 아니겠습니까? 비록 전하께서 위엄으로 억눌러 묵묵히 물러가기는 하였으나 즐거운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는 것임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때가 달라지면 일이 달라지고 일이 달라지면 변란이 생기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이미 결정하신 일인데도 여러 신하의 마음이 오히려 이와 같으니, 이것이 어찌 때가 달라지면 일이 달라질 징조가 아니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원자라 명칭하는 것이 직접 세자로 봉하는 것만 못하고 건본(建本)만을 보여 주는 것이 호칭을 정하여 동궁(東宮)으로 삼으시는 것만 못하니, 전하께서는 빨리 결단을 내리어 의심치 마시고 봉호(封號)를 내린 다음 사보(師保)를 선택함으로써 온 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전하에게 사자(嗣子)가 있음을 알게 하신다면, 국가가 반석처럼 단단해지는 것이 여기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하고, 또 귀양 간 여러 흉인(凶人)의 석방을 청하였는데 이는 상이 비록 후사(喉司 승정원(承政院)의 별칭)의 말에 따라 위한(緯漢)을 먼 섬으로 귀양 보내기는 했으나 큰 화가 곧 일어나려 하기 때문이었다. 이어 선생이,
“이는 국가의 대사(大事)이다. 더구나 오늘날 상하의 촉망(屬望)이 왕자(王子)를 버리고 어디 있기에 이처럼 서두르기만 하고 조용히 처리하지 못하는가? 또 여러 신하가 정후(正后 중궁(中宮))도 왕자를 낳을 것이라고 주달한 것은 일이 생기기 전에 주도면밀하게 처리해야 된다는 염려에서이니, 상을 위하여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수백 마디에 달하는 소(疏)를 기초하였다. 즉,
“송 신종(宋神宗)이 28세에 철종(哲宗)을 낳았는데, 그 어머니는 후궁(後宮) 주씨(朱氏)였습니다. 횡거(橫渠) 장자(張子)가 그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자, 정자(程子)가 횡거의 충성을 찬미하였고 주자(朱子)와 여동래(呂東萊)가 그의 충성을 한천편(寒泉編 《근사록(近思錄)》을 가리킨다)에 드러냈으니, 장자ㆍ정자나 주자ㆍ여동래의 생각이 모두 같았던 것은 종사(宗祀)에 대한 순수한 천리의 바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천리라 한다면 오늘날 인심이라 해서 어찌 다르겠습니까?”
하였고, 또,
“오늘날 여러 신하들이 위호를 정하는 것이 너무 빠르다고 하는 것은, 송 철종은 그때 10세였는데도 오히려 번왕(藩王)의 위(位)에 있다가 신종에게 병이 있은 뒤에야 비로소 태자에 책봉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때에는 가왕(嘉王)과 기왕(岐王)의 위협이 있었는데도 오히려 이처럼 여유 있게 처리한 것은 제왕(帝王)의 거조는 항상 여유 있는 것을 귀히 여기는 것이기 때문인데, 더구나 혐의와 위협이 없는 오늘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오늘날 여러 신하가 정후(正后)도 왕자를 낳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일이 생기기 전에 미리 주도면밀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염려에서입니다. 이것이 중종 때 이언호(李彦浩)의 말과 비슷하나 언호의 말은 사(邪)였고 여러 신하의 말은 정(正)입니다.”
하였고, 또,
“과거에 허목(許穆)이 상소하여 국본(國本)이 정해지지 않았다고 진언(進言)하자, 고 상신(相臣) 정태화(鄭太和)가 ‘원자가 탄생하신 날이 바로 국본이 정해진 날입니다.’ 하였으므로, 허목의 말이 먹혀들지 않았습니다. 그 뒤 적휴(賊鑴) 등이 허목의 말을 부연하여 암암리에 화기(禍機)를 도발시켜 끝내 영사(領事) 신(臣) 김수항(金壽恒) 이하를 축출하였기 때문에 역적 허견(許堅)의 역모(逆謀)가 더욱 방자해졌습니다. 지금은 성명(聖明)께서 위에 계시므로 이런 걱정은 없으나 아첨하는 종자들이 만세(萬歲) 뒤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대개 선생의 뜻은 간사한 무리들이 이로 인하여 화를 빚어낼까 염려하여 상으로 하여금 깊이 살피게 하려는 것이었다. 자제(子弟)와 문인들이 모두 이 소가 화를 도발시킬 것이라 여기고 번갈아 가며 간하고 말렸으나 선생은 끝내 듣지 않았다. 이 소가 들어가자, 상이 진노(震怒)하여 그날 밤으로 승지(承旨) 이현기(李玄紀)ㆍ윤빈(尹彬)과 옥당(玉堂) 남치훈(南致薰)ㆍ이익수(李益壽) 등을 불러 선생의 소 가운데 ‘10세였는데도 오히려 번왕의 위에 있다가 신종에게 병이 있은 뒤에야 비로소 태자에 책봉되었다.’는 말을 반복하다가 하교(下敎)하기를,
“송모(宋某)는 산림(山林)의 영수(領首)로서 감히 이의(異議)를 제기하니, 부도(不道)한 무리들이 장차 뒤를 이어 일어날 것이다.”
하였다. 이때 좌우에서 현기 등이 없는 사실을 마구 날조하였다. 상이 윤증의 일을 묻자, 현기 등이 증의 부자를 극력 찬양하고 선생을 공격하였다. 상이 선생의 삭출(削黜)을 특명하고 또 선생을 위하여 변명하는 자는 비록 대신이라도 용서치 않는다 하고는 드디어 윤증을 수록(收錄)하였다. 윤빈(尹彬)이, 선생이 노쇠하여 망언(妄言)을 한 것이니, 너그러이 용서할 것을 청하자, 상이 노하여 빈을 나국(拿鞫)하라 명하였다가 바로 먼 변방으로 귀양 보내었으니, 이때가 2월 1일이었고 이날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이때 조정이 일변(一變)하여 윤휴의 무리가 다시 들어갔다. 대사간(大司諫) 이항(李沆)ㆍ정언(正言) 목임일(睦林一)ㆍ장령(掌令) 이윤수(李允修)ㆍ지평(持平) 이제민(李濟民) 등이 합계(合啓)하여 선생에게 죄주기를 청하면서,
“국가에 큰 경사가 있어 명호가 이미 정해지고 분의(分義)가 이미 정해졌는데, 감히 방자하게 상소하여 인심을 현혹시켰으니, 먼 변방으로 귀양 보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지난 을유년 세자(世子)를 책봉할 때, 이경여(李敬輿)가 인심(人心)이 소란하여 평온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하자, 인조(仁祖)께서 안치(安置)를 특명하였는데, 더구나 송모는 국본(國本)이 이미 세워졌고 분의가 정해진 뒤에도 감히 불복(不服)의 뜻을 가졌고, 또 인용한 송조(宋朝)의 일은 신하로서 차마 말할 수 없는 바이다.”
하고, 제주도 귀양 보낼 것을 특명하였다. 당시의 사류(士類)들도 거의 다 쫓겨났다.

2월 초하루는 기해(己亥) 8일(병오) 제주를 향해 출발하면서 아들 기태(基泰)를 보내어 효종(孝宗)의 수찰(手札)을 바치게 하였다.
이때 화색(火色 화색(禍色)을 말함)이 이미 박두하여 사람들이 모두 선생을 위해 두려워하였으나, 선생은 오직 한결같이 국가만을 걱정할 뿐, 일신(一身)의 화복은 염두에 두지 않고 태연한 마음으로 길을 떠나면서,
“나는 책임을 끝까지 다했다.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이다.”
하였다. 문인과 친지 중에는 혹 눈물을 흘리는 사람까지 있었으나, 선생은 웃으면서 소씨(蘇氏)의 철심석간(鐵心石肝)이란 말과 주자(朱子)가 유 원성(劉元城)을 논평한 말을 들어 깨우쳐 주었다. 이에 앞서 영상(領相) 김수흥(金壽興)이 상께 아뢰기를,
“효종(孝宗)께서 송모에게 수양(修攘 안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밖으로 오랑캐를 물리치는 것)의 대계(大計)를 논한 수찰(手札)을 내린 적이 있는데, 송모는 배도(裴度)가 옥대(玉帶)를 반납(反納)한 고사(故事)에 따라 자진 반납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상께서 선색(宣索)하셔서 국사(國史)에 빠진 곳을 보충하고 성조(聖祖)께서 뜻한 일을 후세에 드러나게 하소서.”
하자, 상이 특별히 사관(史官)을 보내어 수찰을 바치라 하였다. 선생은 그 어찰(御札) 중에 말한 곡절이 많으므로 소(疏)를 올려 그 내용을 자세히 진술해야 되겠다는 뜻으로 회계(回啓)하고 사관을 먼저 돌려보낸 다음 소를 지어 올리려는 차에 귀양의 엄명이 내렸다. 선생은 수찰을 올리는 일은 이미 왕명(王命)이 있었고 또 회계까지 하였으니, 지금 죄를 입었다 하여 중지할 수 없다면서 친히 봉배(封拜 봉함하고서 절하는 것)한 다음 아들 기태에게 주어 대신 예궐(詣闕)하여 바치게 하였다. 기태가 서울에 당도해 보니, 상의 노여움이 대단하였고 또 군흉(群凶)이 조정에 가득하므로 감히 올리지 못하고 선생을 뒤따라 제주로 돌아왔다.
○ 지난 갑인년에 선생이 화를 입었을 적에 친지 중에 어떤 이가, 어찰을 바치어 화를 면할 계획을 세우라고 권하자, 선생은 크게 놀랐다. 그러므로 귀양 갈 적에는 그 어찰을 조카 기덕(基德)에게 주어 깊이 간직하게 하였으나, 혹시 남의 말을 듣고 만일의 요행을 바랄까 염려하여 거듭 당부하는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내 차라리 죽을지언정 어찌 차마 이 어찰을 가져 구차히 살기를 구하여, 우리 효종대왕께서 은밀히 당부하신 뜻을 저버리겠는가? 일이 급박하게 되었을 때에 혹 나를 살릴 의사를 가진 사람이 와서 이 어찰을 달라고 해도 네 눈을 뽑아 줄지언정 이 어찰을 내주어서는 안 된다.”
하였다. 그런데 이때 어찰을 바치려 한 것은 상의 교지가 있었을 뿐 아니라 이 기회에 국사(國史)에 빠진 것을 보충하기를 바라서였으나 끝내 바치지 못하였다.
○ 11일(기유) 연산(連山)을 지나다가 문인 정천(鄭洊)을 보내어 사계 선생의 묘소에 글을 고하게 하였다.
그 글에,
“문인 송모가 조정에 죄를 입고 멀리 제주로 귀양 가는 길에 문원공(文元公) 사계 김 선생 묘소를 지나면서도 참배하지 못하는 것은, 이천(伊川)이 귀양 가는 길에 숙모(叔母)를 찾아뵙고 가기를 청한 것을 주자(朱子)가 불만(不滿)으로 여겼다는 일을 선생께 배운 적이 있기 때문에 감히 묘소에 올라 참배치 못하고 송강(松江)의 후손(後孫)인 정천을 시켜 글을 고합니다. 생각건대 군성(群聖)을 모아 대성(大成)한 분은 공자이고 군현(群賢)을 모아 대성하신 분은 주자입니다. 전후의 성현이 그 법도는 다 같다고 하나, 박문약례(博文約禮)가 지극하고 공부역행(功夫力行)이 도저하여, 요(堯)ㆍ순(舜)ㆍ우(禹) 이후로 대성의 도에 부합되지 않음이 없기는 주자처럼 완전한 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율곡 선생의 학문은 오로지 주자만을 높여서 ‘내가 다행히 주자 뒤에 나와서 학문이 거의 틀리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하였는데, 선생께서는 바로 그 계통을 이으셨습니다. 전에 선생이 강론하실 때를 보면, 비록 정자(程子)ㆍ장자(張子)의 말이라도 이동(異同 서로 같지 않은 것)이 있으면 취사(取捨)하지 않은 바가 없었고, 또 일찍이 ‘주자가 아니었다면 공자(孔子)의 도가 밝아지지 못했고 밝아지지 않았다면 도가 전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하신 말씀을 소자는 귀담아 듣고 가슴속에 간직하여 비록 성인이 다시 나온다 하여도 이 말씀은 변경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악기(惡氣)가 모여 이루어진 윤휴 같은 자가 나와서 감히 주자를 공격하고 배척하는 데 여력(餘力)을 남기지 않으므로 소자가 제 분수도 헤아리지 못하고 그를 극력 배척하였다가 미움을 사서 거제(巨濟)로 귀양 가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전에 윤선거는 우계 선생 댁의 문객(門客)이고 또 제자(弟子)이면서도 윤휴를 적극 도와 사문(斯文)을 해치므로, 소자가 난신적자(亂臣賊子)를 다스리려면 먼저 그 무리부터 다스려야 한다고 춘추의 법에 의거하여 선거까지 아울러 공격하였더니, 그 자식 증이 스스로 반성하여 제 아비의 허물을 덮을 생각은 하지 않고 도리어 소자를 원수로 여겨 드러내 놓고 공격하여 윤휴의 형세를 더욱 성하게 하고 종국(宗國)을 거의 망하게 하였는가 하면, 감히 율곡 선생까지 비방하므로 소자가 경악을 금할 수 없어 그를 공격한 말이 혹 너무 과격했던 듯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소자를 원수로 대하여 파도와 같은 공세(攻勢)를 퍼붓는데, 그의 동조자들은 대부분 과거에 율곡 선생을 공격하던 사람들의 자손입니다. 지금 조정에 일이 있어 소자가 귀양 가게 되고 윤증이 날뛸 것이므로, 소자는 진실로 우리 도가 나로 말미암아 다 망하지 않게 된다면 비록 만번 죽어도 한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생각건대 선생의 가르침을 받았으나 힘써 실천하지 않아서 아직 기질(氣質)을 변화시키지 못한 탓으로, 이것이 혈기(血氣)의 사심(私心)에서 나온 것이요 혹시 의리의 올바른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만일 소자의 처사가 과연 사심에서 나온 것이라면 남해(南海)의 신(神)에게 벌을 받을 뿐만 아니라 선생에게 죄를 받음이 심할 것입니다. 우선 이 글로써 선생의 존령(尊靈)에 고하여 조문석사(朝聞夕死)의 터전으로 삼을까 하오니, 바라건대 선생은 살펴 주소서.”
하였다. 윤증이 원한을 품고 암암리에 선생 해칠 계획을 세운 것은 그 조짐이 지난겨울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선생이 지난겨울 영릉(寧陵)에서 돌아오자 문원공(文元公)의 증손(曾孫) 만준(萬埈)이 허둥지둥 달려와서 선생에게 고하기를,
“증의 군흉(群凶)들과 큰 화(禍)를 일으키려 하는데, 그 화가 제일 먼저 선생에게 닥칠 것입니다.”
하였고, 또 이성(尼城 윤증이 사는 곳)에서 온 어떤 사람이 전하기를,
“증의 당이 선언하기를 ‘시대(時代)가 장차 변할 것인데, 송모가 가장 먼저 화를 당할 것이고 그 나머지도 차례로 화를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했습니다.”
하였는데, 이때 와서 보니 두 사람의 말이 과연 틀리지 않았다. 이어 흉도(凶徒)들이 한결같이 윤증을 떠받들어 대사헌(大司憲)에 추대하고 또 증의 부자를 이끌어서 윤휴를 신원(伸冤)하였으니, 이때에 이르러 증의 부자가 윤휴를 도운 사실이 숨김없이 드러났다. 그러므로 선생이 선사(先師)에게 고한 바가 이러하였다.
○ 12일(경술)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의 서문을 썼다.
《차의》가 오래전에 완성되었으나, 잘못된 곳이 있을까 염려하여 계속 정정하다가 이때에서야 비로소 서문을 지어 권상하에게 주면서,
“오늘부터는 이 《차의》를 그대와 중화(仲和 김창협(金昌協))가 서로 상의하여 수정하되, 동보(同甫 이희조(李喜朝))는 사람이 찬찬하니, 함께 상의하도록 하라.”
하였다.
○ 16일(갑인) 문인 권상하와 이별하며 후사(後事)를 부탁하였다.
권공(權公)이 흥농(興農)에서부터 배행(陪行)하여 14일(임자)에 태인(泰仁)에 이르러 하룻밤을 지나고 새벽에 일어나자 선생이,
“율곡 선생의 수적(手蹟 석담 일기(石潭日記) 따위)이 매우 많고 또 사계 선생이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이공(李公)과 율곡의 비문(碑文)을 산정(刪定 글의 자구(字句)를 깎고 다듬어 정리하는 것)할 때 왕복한 문자(文字)와 행장(行狀) 초본(草本)을 신재(愼齋)께서 수집하여 깊이 간직하였다가 말년에 나에게 전해 주셨는데, 나는 이를 치도(致道 권상하(權尙夏))에게 부탁하려 한다. 나의 입장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실로 미안하기는 하나, 치도는 부디 잘 지켜 율곡의 자손이 달라고 하더라도 이는 다른 물건과 다르므로 내주어서는 안 된다. 내가 당초에는 박화숙과 함께 간수하기로 했으나 지금 화숙이 저러하니, 어찌하겠느냐? 후일 나의 손자 주석(疇錫)이 살아 돌아오거든 함께 간직하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
하였고, 또,
“《이정전서(二程全書)》의 분류(分類)를 그대와 함께 의논하여 범례(凡例)를 정하려고 정본(淨本 정리된 책)을 화양동에 갖다 두었으니, 돌아갈 때 가져다가 수정하되, 《근사록(近思錄)》과 《어류(語類)》에 보이는 것은 주자의 설과 섭씨(葉氏)의 주(註)를 본조(本條) 밑에 기재하는 것이 좋을 듯하니, 요량하여 하라.”
하였고, 또,
“《어류》를 소분(小分)한 것이 흥농(興農) 서가(書架)에 있으니, 역시 가져다가 검토 교정하라.”
하였고, 또,
“《퇴계전서(退溪全書)》의 차의(箚疑)를 시작하여 겨우 1권까지 진행되었으니, 치도가 그 일을 끝마쳐서 나의 뜻을 이루어 달라.”
하였다. 이날 권공이 배사(拜辭)하고 돌아갔다.
○ 24일(경신) 강진(康津)에 당도하였고 26일(임술) 백련사(白蓮寺)로 옮겨 머물렀다.
백련사는 해변에 위치하였으므로 이곳에 머무르며 바람이 자기를 기다렸는데, 그 고장 선비들이 와서 선생을 영접하고 위로하는 이가 많았다. 선생은 문인 박광일(朴光一)ㆍ박중회(朴重繪) 등과 경전(經傳)을 강론하였다.

3월 초하루는 무진(戊辰) 배를 출발시켜 4일(신미) 제주(濟州) 북포(北浦)에 정박하였다. 5일(임신) 성(城)으로 들어갔고 6일(계유)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금오랑(金吾郞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의 별칭) 이 세형(李世馨)은 백사(白沙) 문충공(文忠公)의 증손으로 선생을 호송함에 있어 정성을 다하였다. 백련사에 6일을 머물렀으나 순풍(順風)을 만나지 못하자, 선생은 행지구속(行止久速 가고 멈추고 빨리 하고 더디게 하는 것)이 금오에게 달려 있지만, 육지에 오래 머물러 있는 것을 매우 불안하게 여기고 금오에게 배를 정돈하여 빨리 출발하기를 청하였다. 선생은 이미 권상하에게 후사(後事)를 부탁하였고 또 자손을 훈계하는 데 정녕(丁寧 간곡하고 자상한 것)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때 회석(晦錫)의 고아(孤兒)가 그 외조(外祖) 이단하(李端夏)의 집에서 자라고 있었는데, 선생은 그를 잊지 못하는 마음이 가장 간절하였다. 이에 이공(李公)에게 편지를 보내어 주자의 벽립만인(壁立萬仞 만 길의 절벽에 서서도 굽히지 않는다는 뜻)과 직지일자(直之一字 사람에게는 곧음밖에 없다는 뜻)란 말로써 간곡히 자신의 뜻을 전하고 이러한 뜻을 들어 회석의 고아에게 가르쳐 주기를 부탁하였다. 배에 오를 적에는 또 불성부직(不誠不直 성실하지 않으면 정직하지 못하다는 뜻)이란 네 글자로써 증손(曾孫) 일원(一源) 등을 경계하는 한편, 주자행장(朱子行狀)을 읽어서 앞으로의 수용(受用)을 삼도록 하였고, 또 문자(文字)로써 권(權)ㆍ윤(尹) 등 여러 외손자를 경계하였다. 이미 발선(發船)하여서는 풍랑이 사나워 밤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소안도(所安島)에 닿았고, 2일(기사) 소안도에 머물면서 바람이 자기를 기다렸다. 3일(경오) 다시 발선(發船)하여 겨우 대양(大洋)으로 들어서자 높은 파도가 사나워 배가 거의 뒤집힐 지경이었으므로 사공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면서 돛을 내리고 부처에게 빌 뿐이었다. 그러나 선생은 태연한 표정으로 단정히 앉아 주자(朱子)의 비하축융봉(飛下祝融峯)이란 시구를 외고 있었다. 손자 주석(疇錫)이 제문(祭文)을 지어 바다에 던지고 제사를 지내자, 파도가 잠잠해졌다. 밤이 깊은 뒤에 다시 돛을 올리고 출발하여 이튿날 아침에 북포(北浦)에 닿아 해변 갯마을에서 하루를 지내고 이튿날 비로소 성(城)으로 들어갔다. 위리안치된 뒤로는 매일 손자 주석과 함께 《주자대전(朱子大全)》ㆍ《주자어류(朱子語類)》ㆍ《역학계몽(易學啓蒙)》ㆍ《강목(綱目)》 등의 책을 보았다.
○ 15일(임오) 두 아우와 손자 주석에게 글을 주어 귤림서원(橘林書院)에 고하게 하였다.
서원은 바로 김충암(金冲菴)ㆍ송규암(宋圭菴)ㆍ김청음(金淸陰)ㆍ정동계(鄭桐溪) 네 선생을 모신 곳이다.
○ 숙종 21년(을해)에 선생을 여기에 배향(配享)하였다.
○ 율곡과 우계 두 선생의 출향(黜享 문묘(文廟)의 배향을 철폐시키는 것) 소식을 들었다.
원주(原州) 사람 안전(安)이란 자가 상소하여 율곡과 우계 두 선생을 문묘(文廟)의 배향에서 내쫓을 것을 청하고, 또 선생을 종통(宗統)을 어지럽히고 국본(國本)을 동요(動搖)시킨 죄목(罪目)으로 얽어매어 안율(按律 법에 따라 처벌하는 것)하기를 청하였다. 또 관학(館學)ㆍ대간(臺諫)이 서로 뒤를 이어 양현(兩賢)의 출향을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관학ㆍ대간이, 또 선생이 양현의 남은 글을 주워 모은 것과 윤증을 극력 배척한 것으로 죄를 삼았다. 선생이 이 소문을 듣고, 만년(晩年)의 영광으로 여기고 또,
반궁의 요려 앞에 이르러 / 却到泮宮腰膂處
님 위한 눈물 옷깃 적시네 / 泣麟餘涕謾沾裾
란 시를 지었다.

윤3월 초하루는 무술(戊戌) 12일(기유) 주자의 객위자목설(客位咨目說)에 따라 야복(野服)을 만들라 하였다.
선생은 끝내 풀려나지 못할 것을 알고 심의(深衣) 등 예복을 가져왔었고 이제 다시 야복을 만들라 하였으니, 상의 하상(上衣下裳)의 제도이다.
○ 《논맹혹문정의통고(論孟或問精義通攷)》를 편수(編修)하였다.
선생은 일찍이 《논어혹문》ㆍ《맹자혹문》 중에서 다만 모설(某說)의 잘잘못만을 말했을 뿐, 그 설을 기재하지 않은 것을 유감으로 여기고, 정문(程門) 여러 제자들의 말이 수록된 《정의(精義)》를 구하려 한 지가 거의 40여 년이나 되었는데, 말년에 이선(李選)이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그 책을 구해 왔으므로 선생이 그 책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이에 그 설(說)을 고거(考據)하고 손수 표지(標識)를 가하여 혹문의 해당 조항 밑에 붙여 빠지고 생략된 것을 보충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주자의 취사(取捨)한 이유를 알게 하고 《논맹혹문정의통고》라 이름하였다. 또 서문(序文)을 쓰고 권상하에게 편지를 보내어 뒤를 이어 교감 수정하라 하였다.

4월 초하루는 정묘(丁卯) 5일(신미) 가율(加律 형을 더 하는 것)의 계(啓)가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
선생의 조카 기덕(基德)과 종손(從孫) 강석(康錫)이 이 소식을 가지고 오자, 온 집안이 경황(驚惶)하여 통곡하였으나, 선생은 웃으며,
“나는 이 몸을 시인(時人 송시열을 모해하는 사람)에게 내어 준지가 이미 오래다.”
하고 책 보기를 그치지 않았다.
○ 9일(을해) 문곡(文谷) 김공(金公)의 후명(後命 유배(流配)된 죄인에게 사약(賜藥)을 내려 죽이는 것)을 듣고 망곡(望哭)하였다.
선생은,
옥도의 구슬픈 바람 대나무에 불어오니 / 沃島悲風吹竹樹
전후의 그 충정 하늘만이 알리라 / 丹衷前後上天知
란 시를 지었다.
○ 29일(을미) 동생 성보(誠甫)와 이별하였다.
선생의 밑 동생 감정공(監正公)이 선생을 따라 제주까지 왔다가 이때 병이 심하여 이별하고 돌아가자, 선생이 슬픈 심정을 금치 못하여,
단장의 해문에서 수평선 바라보니 / 魂斷海門空極目
하늘 가 저 기러기 차마 못보겠네 / 不堪天末雁行聯
란 시를 지었다.

5월 초하루는 병신(丙申) 4일(기해) 효종(孝宗)의 휘일(諱日 죽은 날)이므로 곡하고, 글을 지어 자신의 뜻을 서술하였다.
그 글에,
“4일 기해에 효종대왕의 휘일을 당하여 새로 빌려 든 집에 수찰(手札)을 봉안(奉安)했다. 전에 봉안했던 곳은 벌레가 있고 냄새가 더러워서 수찰을 모실 만한 곳이 못 되기 때문이었다. 이날의 비통이 전보다 갑절이나 더하였다. 듣건대 저들은 효종의 세실(世室)을 미리 정하자고 한 것을 나의 죄로 삼아 심지어 국문(鞫問)을 청하기까지 한다 하니, 저들의 마음에는 효종의 덕이 세실을 정하기에 부족하다고 여기나 감히 말할 수 없으므로 미리 정했다는 것을 문제로 삼아 나를 죄주려고 하는 것이다. 옛날 주자(朱子)는 고종(高宗) 때 나서 고종에서 벼슬하였으나 고종의 세실을 청하였는데도, 저들은 모두 적휴(賊鑴)의 도당이므로 주자를 본받을 수 없다고 여기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 경제(漢景帝) 원년에 신도가(申屠嘉)가 무제(武帝)의 세실을 정하자는 사실도 보지 못했단 말인가? 이는 《사략(史略)》 2권에 있는데, 오늘날 어찌 이를 보지 못한 사람이 있다 하겠는가? 만약 효종의 덕이 세실을 정하기에 부족하다면, 어찌 하후승(夏侯勝)이 무제(武帝)에게 한 것과 같이 직접 배척하지 않았겠는가? 휴의 도당은 일찍이 아들인 금상(今上) 앞에서도 명성대비(明聖大妃 현종비(顯宗妃))를 배척했으니, 어찌 손자인 금상 앞에서 효종(孝宗)을 배척하지 못하겠는가? 나는 이 말을 듣고는 원통하고 억울함을 금할 수 없으나 호소할 곳이 없었다가 이날을 당하니, 곡성이 하늘까지 사무치고 눈물이 구천(九泉)까지 흐름을 깨닫지 못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효종대왕은 성덕(盛德) 지선(至善)이 아님이 없었다. 작은 나라로서 명(明) 나라를 위해 춘추대의(春秋大義)를 밝힌 것은 삼성(三聖 우(禹)ㆍ주공(周公)ㆍ공자(孔子))의 공(功)을 계승하기에 충분하였다. 비록 그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무궁한 후세에 교훈을 전한 것은 《춘추(春秋)》와 다름 없으니, 어찌 관덕(觀德 현덕(顯德)과 같은 뜻)의 표본이 될 만하지 않은가? 저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만든 것은 실로 선거(宣擧)의 죄다. 선거가 일찍이 말하기를 ‘구천(句踐)은 속임수를 썼고 경연광(景延廣)은 미친 짓이었다.’ 하였고, 또 반락태오(盤樂怠傲 놀고 즐기며 남을 경멸하고 오만한 것)하다는 말로 효종대왕의 우근척려(憂勤惕勵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자신을 닦는 것)를 논한 적이 있는데, 지금 저들이 선거를 높여 감히 세실에 대해 잘못이라 말하니, 통탄스럽다.”
하였다. 또 종형(從兄) 충현공(忠顯公)과 송상민(宋尙敏)의 제문(祭文)을 지어 그들의 절의(節義)를 드러내는 한편, 군흉(群凶)이 나라를 어지럽히고 상도(常道)를 파괴한 것을 말하여 손자 주석에게 주어 조만간 돌아가서 그들의 묘소에 고하라 하였다.
○ 14일(기유) 나국(拿鞫)을 윤허하고 읍정(邑庭)에 전지(傳旨)하였다.
수찬(修撰) 김방걸(金邦杰)이 상소하여 선생의 경자년에 제의한 예론(禮論)과 경신년에 올린 차자(箚子)에서 관고(貫高)의 일을 인용한 것과 효종의 세실(世室) 세우기를 청한 것과 태조(太祖)에게 시(諡)를 올리게 한 것과 계축년에 김수흥(金壽興)에게 준 편지 내용과 병인년 봄에 지은 애공(哀公)이 탄식스럽다는 시 등을 열거하여 선생의 큰 죄로 삼아 사형(死刑)을 청하였다. 양사(兩司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의 합칭)의 권해(權瑎)ㆍ이현기(李玄紀)ㆍ김주(金澍)ㆍ이수징(李壽徵)ㆍ심발(沈橃)ㆍ이만원(李萬元)ㆍ조식(趙湜)ㆍ이원령(李元齡) 등이 합계(合啓)하여 나국(拿鞫)을 청하고 또 문곡(文谷) 김공(金公)에게 사사(賜死)하기를 청하자, 심재(沈榟)ㆍ이관징(李觀徵)ㆍ민종도(閔宗道)ㆍ윤심(尹深)ㆍ이우정(李宇鼎)ㆍ유명천(柳命天)ㆍ권대제(權大載)ㆍ윤이제(尹以濟)ㆍ유하익(兪夏益)ㆍ권유(權愈)ㆍ신후재(申厚載)ㆍ오시복(吳始復)ㆍ박상형(朴相馨)ㆍ정박(鄭樸)ㆍ이서우(李瑞雨)ㆍ유명현(柳命賢)ㆍ박정설(朴廷薛)ㆍ유하겸(兪夏謙)ㆍ이의징(李義徵)ㆍ목임유(睦林儒)ㆍ이현기(李玄紀) 등이 또 상소하여 대간(臺諫)의 청에 따르기를 청하니, 상이 김공(金公 김수항(金壽恒))의 사사(賜死)는 명하였으나 선생을 나국(拿鞫)하라는 청은 윤허하지 않았다. 적신(賊臣) 조사기(趙嗣基)가 또 상소하여 선생의 죄를 모함하는가 하면, 명성대비(明聖大妃)까지 무욕(誣辱 없는 사실을 만들어 모욕하는 것)하였고, 또 군흉(群凶)들이 장추(長秋 왕비(王妃))의 폐위(廢位)를 계획하고는 선생을 빨리 제거하려 하여 나국을 극력 간청하였다. 그리고 삼사(三司)가 입대(入對)를 청하여 수백여 가지에 달하는 선생의 죄상(罪狀)을 합계(合啓)하고, 또 상을 위협하여 말하기를,
“만일 신등이 논한 것에 일호라도 사실과 다른 것이 있다고 여기신다면 변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하므로, 상이 드디어 선생의 나국을 윤허하였으니, 바로 4월 21일(정해)이었다. 이날 음산한 바람이 크게 일어 나무가 부러지고 궁궐이 진동되었는데, 3일 뒤에 중궁(中宮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 폐출(廢黜)의 변고가 생겼다. 중외(中外)의 유생(儒生) 수백 명이 궐문 앞에 모여 선생을 위해 통곡했고, 문인 이기주(李箕疇)ㆍ이조(李竨)ㆍ이만형(李萬亨)ㆍ박세휘(朴世輝) 등이 계속 상소하여 선생의 원통함을 호소하다가 모두 먼 변방으로 귀양 갔다. 이때 금오랑(金吾郞) 권처경(權處經)은 권대운(權大運)의 족속으로 봉명(奉命)을 자청하고 와서 무슨 명으로 왔다는 것을 숨기고 말하지 않았으나, 선생은 후명(後命) 때문에 온 것임을 짐작하고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후사(後事)를 부탁하였다. 그리고 권상하(權尙夏)에게 영결(永訣)을 알리는 편지에서, 주문(朱門 주자학(朱子學))의 전통을 계승하기를 부탁하였고, 또 장남헌(張南軒)이 우제사(虞帝祠)를 세운 것초인(楚人)들이 소왕(昭王)을 제사한 고사에 따라 화양동(華陽洞) 절벽 아래에 한 칸의 사당(祠堂)을 세워 명(明) 나라의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을 제사하라 하였다. 조금 뒤에 권처경이 금부(禁府)의 관리에게 명하여 선생을 끌어내어 당(堂)에서 거리가 먼 객사(客舍) 뜰아래 꿇어앉히고, 교생(校生)으로 하여금 당상(堂上)에서 교지(敎旨)를 읽게 하였다. 선생이 위리(圍籬)에서 나올 적에 성조(聖祖 효종대왕을 가리킨다)의 수찰(手札)과 명성왕후(明聖王后)의 수찰을 소매 속에 넣고 나와서, 공청(公廳)에 놓고 마지막 작별을 고하려 하였다. 그러나 처경이 이것마저 허락하지 않고 당상(堂上) 탁자(卓子) 위에 봉안(奉安)하라 하므로 선생이 앞으로 나아가 그 수찰을 바치었다. 전지 읽기가 끝나자 선생이 사배(四拜)하였다.
○ 17일(임자) 별도포(別刀浦)로 옮겼고, 26일(신유) 발선(發船)하여, 27일(임술) 남해(南海) 증도(甑島)에 닿았다.
선생은 군명(君命)을 지체할 수 없다고 말하고 속히 포구(浦口)로 나가서 바람을 기다리자고 청하여, 드디어 포구 가로 옮겨 10일 동안 머문 뒤에 배에 올랐다. 선고비(先考妣)에게 고하는 글을 지어 손자 주석(疇錫)에게 주어 묘소에 고하게 하였다. 즉,
“불초(不肖)가 태어날 때 상서가 있었다 하여 아름다운 이름을 지어 주셨습니다. 불초가 어렸을 적에는 망녕되이 한번 떨쳐보려는 마음을 가지고 성인(聖人)도 배워서 될 수 있다고 여겼더니, 철이 날 만한 나이가 되어서는 기질(氣質)에 구애되고 물욕에 가리어 하루 사이에도 가르침을 어기고 이치를 거스르는 바가 항상 10에 8, 9가 되었습니다. 그럴 적이면 항상 꾸짖고 권면(勸勉)하면서 ‘불세(不世)의 아름다운 상서를 헛되게 만들 작정이냐?’ 하셨고, 또 ‘주자(朱子)는 후세의 공자(孔子)이시고 율곡(栗谷)은 후세의 주자이시니, 공자를 배우려면 마땅히 율곡에서부터 시작해야 된다.’고 책려(策勵)하고는 불초에게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기묘록(己卯錄)》ㆍ《해동야언(海東野言)》 등의 책을 손수 초(抄)하여 불초에게 주면서 ‘정암(靜菴)을 배우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셨고, 또 일찍이 청교역(靑郊驛)에서,
매월당 앞의 물이요 / 梅月堂前水
도봉산 위의 구름일세 / 道峯山上雲
라는 시를 지어 보여 주셨으니, 대개 김열경(金悅卿 김시습(金時習))도 사모하신 것입니다. 불초가 성동(成童)이 되어서는 과업(科業 과거 공부)도 겸하여 익히라 하면서 ‘집안의 생계(生計) 역시 소홀한 것이 아니다.’ 하셨고, 또 오로지 과업에만 전념할 것을 염려하여 ‘나의 증조(曾祖)는 팔자가 좋아서 어진 두 아드님을 두었고 사위 역시 명현(名賢)이었으니, 이 어찌 과거의 영화에 비교될 바이겠느냐?’ 하셨고, 또 호란(胡亂)을 당하여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거둥하여 일시 머무는 곳)로 가실 적에 도중에서 보낸 편지에 ‘난리가 났다 하여 학업을 게을리 말라.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은 것이다.’ 하셨습니다. 불초는 평소에 이와 같은 교훈을 받았기 때문에 두 분을 여읜 뒤로는 감히 우매(愚昧)에 그칠 수 없다고 다짐하고 드디어 김 선생(金先生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 나아갔더니, 사문(師門)의 가르침은 한결같이 주자(朱子)를 주로 하고 율곡을 대유(大儒)로 여겼습니다. 불초는 이때서야 가정에서 배운 노맥(路脈)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이 30이 가까워져서야 비로소 음사(蔭仕)에 참여하고는, 고을이나 하나 얻어 어머님을 봉양할 계획을 세웠었는데, 갑자기 오랑캐의 난리를 만나 천지가 뒤집혔으므로, 정묘년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오신 아버님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산중에 은거하며 거친 음식이나마 어머님의 뜻을 봉양하기로 하였습니다. 만약 아버님의 고궁(固窮 곤궁하다 하여 변치 않고 뜻을 견고히 지키는 것) 안의(安意 마음을 편히 가지는 것)의 절개가 아니었다면, 불초가 어디에서 본받아 끝내 뜻을 지킬 수 있었겠습니까? 효종대왕이 즉위하신 처음에 외람되게도 부르심을 받았고 어머님에게 음식을 내리어 우대하시는 은혜를 입더니, 오래지 않아서 청 나라 오랑캐에게 참소가 들어가 나라가 위태롭게 되었으므로 드디어 평민으로 돌아와서 집 안에 들어앉아 글을 읽고 거친 음식으로나마 어머님을 봉양하면서 평생을 마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뒤 효종대왕께서 큰 뜻을 품고는, 친구 김익희(金益煕)가 조상(吊喪)하러 오는 편에 은밀히 성의(聖意 임금의 뜻)를 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불초는 복을 마친 뒤에 감히 끝내 은거할 수 없어 임금의 부르심을 따라 겨우 경기(京畿)에 이르렀을 때 성후(聖候 임금의 건강)가 편치 못하여 급히 부르신다는 말을 듣고 허둥지둥 달려가 상을 뵈었으니, 계합(契合 의사가 서로 맞는 것) 지우(知遇)가 천고(千古)에 드물 정도였습니다. 드디어 목숨을 바치기로 허락하였는데, 겨우 반년 만에 효종이 승하하셨습니다. 이에 가만히 천운(天運)을 보니, 간 이를 보내고 계승한 이를 섬기는 의리를 제대로 따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 현종(顯宗)의 온양(溫陽) 거둥에 수행하고 다시 궁문(宮門)으로 들어간 것은 정릉(貞陵)의 원통함을 위해서였으니, 이는 곧 아버님께서 일찍이 그 서론만을 제기하고 감히 끝까지 다 말씀하지 못하신 바이며, 쌍청당(雙淸堂 송시열의 8대조 송유(宋愉))께서도 스스로 계획하셨던 바입니다. 정릉을 복위(復位)시키던 처음에 꿈속에 이상한 징험(徵驗)이 나타났으므로 선대(先代)의 뜻을 조금이나마 받들었다고 여겼었습니다. 이어 불행히도 간얼(姦孼)의 소생(所生)인 윤휴(尹鑴)란 자가 옅은 식견으로 감히 주자의 도를 헐뜯는데, 명문(名門)의 자제인 윤선거(尹宣擧)가 소당(少黨 젊은 무리)을 동원하여 그자의 말이 행해지고 세력이 성해지도록 도와주므로 불초가 매우 걱정이 되어 스스로 분수도 요량하지 않고 나서서 감히 맹자(孟子)와 주자의 거피벽사(距詖闢邪 편벽된 행동을 막고 사악한 말을 물리치는 것)하던 의리를 본받아 죽음을 무릅쓰고 배격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원수를 만들어 지난 을묘년에는 끝내 윤휴의 모함을 받아 북쪽으로 귀양 갔다가 다시 남쪽으로 옮겼고 또 남쪽에서 더 남쪽인 거제(巨濟)에 위리안치되었다가 6년 만에 성은을 입어 풀려났고 이어 소명(召命)을 받았습니다. 불초도 자신의 종적(蹤跡)이 불안함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감히 정자(程子)가 서경 국자감(西京國子監)에 응했던 의리에 따라 소명에 응하였다가, 성모(聖母 명성왕비(明聖王妃))에게서 머물라시는 수찰(手札)을 받았으니, 이는 바로 아버님이 젊었을 때 과거장(科擧場)에서 지으신 ‘친필로 조서(詔書) 내려 사마광(司馬光)을 만류한 고 태후(高太后 송 영종(宋英宗)의 비(妃))이다.’ 한 고사와 같았으므로 마음에 감동되어 그럭저럭 몇 달 동안 있다가 돌아왔습니다. 그 뒤에 다시 나간 것은 오로지 존주대의(尊周大義)를 밝히고 효종의 세실(世室)을 세워 대법(大法)을 밝히기 위함이었는데, 이때부터 윤휴의 잔당(殘黨)이 밤낮으로 기회를 노리다가 다시 오늘의 화를 일으켜, 불초가 처음 제주로 귀양 갔다가 다시 나국(拿鞫)의 명을 받게 된 것입니다. 명령은 성화(星火)같이 엄하고 박해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아 쇠약한 몸에 천식(喘息)이 심하니, 아마도 중도에서 죽을 것 같습니다. 북으로 영릉(寧陵)을, 동으로 송추(松楸)를 바라보며 영결(永訣)을 고할 뿐, 다시는 참배하고 성묘하는데 성심을 다하지 못하겠으니, 아, 슬픕니다. 대개 불초가 가르침을 받는 데 부지런하지 않은 바 아니고 가르침을 받은 지가 오래되지 않은 바 아니나 기질이 편벽되어 남과 화합하지 못하였으므로 오늘의 화를 당하게 되었으니, 이는 바로 큰 불효(不孝)입니다. 이제야 탓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불초가 이렇게 된 근본을 따져 보면 실은 주자를 높이고 춘추대의(春秋大義)을 밝힌 데서 비롯된 것이니, 이는 끝내 아버님의 유교(遺敎)를 저버리지 않은 것이요, 또 율곡ㆍ우계 두 현인(賢人)과 함께 배척을 당하였습니다. 옛날 군소(群小 많은 소인)가 학궁(學宮 태학(太學))을 헐고 성현(聖賢)의 소상(塑像 흙으로 만든 우상(偶像))의 허리를 자르고 어깨를 끊었으며, 또 위로 정자(程子 정이(程頤))를 공격하여 참(斬)하기를 청하는 모욕을 가하고 끝내는 주자에게까지 그 화가 미쳤으나, 주자는 정자와 함께 배격당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여기셨습니다. 오늘에는 주자만이 배격을 당할 뿐 아니라, 적휴(賊鑴)가 공자도 휘(諱)할 것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인[奴]의 복장을, 공자가 송(宋) 나라를 지날 때 입었던 미복(微服)에 비교하였고 또 공자를 모독하는 말을 글제로 하여 대성전(大成殿)에서 과거(科擧) 보였으니, 놀랍고 참혹함이 소상의 허리를 자르고 어깨를 끊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옛날 노동(盧仝)은 《춘추》 만을 가져 종시(終始)를 연구했을 뿐이었는데도 한퇴지(韓退之)가 ‘그의 자손은 10대까지 사죄(死罪)를 용서받아야 된다.’ 했는데, 청음 선생(淸陰先生 김상헌(金尙憲))은 한 몸으로 천경지의(天經地義)를 도맡아 천하 후세에 많은 공을 남겼는데도 지금 그 손자가 생명을 보존(保存)치 못하였고 또한 충정(忠正)하기 때문에 억울하게 죽었으니, 이는 모든 백성이 슬퍼하는 바입니다. 대저 영욕(榮辱)이란 때에 따라 있는 것이니, 다만 어떠한 사람과 함께하였는가를 따질 뿐입니다. 그러므로 좋지 못한 명예가 위로 아버님에까지 미쳤으나 불초는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더욱이 효종대왕께서 아버님을 총애하고 권장하신 말씀이 일성(日星)처럼 빛났음이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청음 선생이 아버님의 대절(大節)을 묘갈문(墓碣文)에 드러내었고 신재(愼齋) 김 선생(金先生 김집(金集))이 웅건한 필력(筆力)으로 아버님의 휘(諱)를 비석 전면에 써서 가상(嘉尙)히 여기는 뜻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묘표(墓表)의 글은 아버님께서 항상 칭찬하시던 종제(宗弟) 준길(浚吉)의 글이옵니다. 여러 현인들이 아버님의 절의를 드러냄이 이와 같으니, 저 여우나 쥐 같은 무리가 함부로 떠드는 말을 어찌 따질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괴이한 것은 지난 정묘년에 아버님께서 불초에게 보낸 편지에, 윤팔송(尹八松 윤증의 조부 황(煌))을 호담암(胡澹菴 송 나라 호전(胡銓))에 비교하셨고, 또 팔송이 지은 아버님의 만사(輓詞)에서 서궁(西宮)에 나아가 인목대비를 뵌 일을 극찬(極讚)하였는데, 지금 그 손자인 윤증이 끝없는 무함을 하고 있으니, 이는 그 잘못이 우리 집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저희 집안에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아, 말은 끝났으나 뜻은 한량없고 또 죽음에 임한 즈음이어서 말에 조리가 없으니, 부모님의 존령(尊靈)은 살펴 주소서.”
하였다. 또 한 장의 편지로 박화숙에게 영결을 고하면서,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人心)을 바로잡으라는 효종대왕의 명을 받았으므로 감히 세도(世道)를 자임(自任 스스로의 책임으로 여김)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말과, 적휴(賊鑴)를 공격하면서 선거까지 공격하였다가 오늘과 같은 화를 입게 된 뜻을 말하였으며, 끝으로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이 인의(仁義)를 배우다가 잘못되었다는 말을 인용하여, 선거에게 가언(嘉言)ㆍ선행(善行)이 있어서 도리어 세상을 의혹시키고 백성을 속인다는 것을 밝혀서, 화숙의 자각(自覺)을 바랐다.
○ 28일(계해) 해남(海南) 읍내에 도착하였다.
이때 선생에게 병이 생긴 지 오래였으므로 별도포(別刀浦)에서 발선(發船)할 때부터 자손들이 따르며 간호하기를 청하였으나, 처경(處經)이 허락하지 않고 또 노비까지도 엄금하여 배에 동승(同乘)하지 못하게 하였다. 해남에 도착한 뒤에 자손들이 밤을 틈타 들어가서 선생을 뵈니, 선생이 그제야 국모를 폐출(廢黜)한 사실과 오두인(吳斗寅) 등이 상소하다가 죽은 사실을 듣고 대성통곡하면서,
“사태가 이러한데 신하된 자가 살아 있어서야 되겠느냐?”
하고는 곡기(穀氣)를 끊고 곧 효종대왕의 계지술사(繼志述事)한 일을 자세히 말한 다음, 흉도(凶徒)들이 세실(世室)을 미리 청한 것을 죄로 삼은 내용을 서술한 상소문을 기초(起草)하였다.

6월 초하루는 병인(丙寅) 3일(무진) 장성(長城)에 도착하였다. 삼현려비(三賢閭碑)의 음기(陰記 비석 뒷면에 새기는 글)를 짓고 문곡(文谷) 김공(金公) 묘지문(墓誌文)을 지었다.
이때 선생은 이미 곡기를 끊어 숨이 곧 넘어갈 것 같았다. 그러나 처경이 길 떠나기를 재촉하여 인부(人夫)를 동원하여 선생을 가마에 태워 겨우 이곳에 당도하여서는 더욱 위중하여 더 지탱하지 못할 듯하므로 처경이 머물면서 병을 조리하기를 허락하였다. 이에 선생이 조금 소생(蘇生)되어 정신을 가다듬고 훈계하는 글을 자손들에게 전하기를,
“주자는 음양(陰陽)ㆍ의리(義利)ㆍ흑백(黑白)을 판단함에 용감하고 엄격하기가 마치 일도양단(一刀兩斷)하듯 하여 의위(依違 마음에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하거나 인잉(因仍 어름어름하여 일시의 미봉만을 생각하는 것)함이 조금도 없었으니, 이는 바로 《대학(大學)》의 성의장(誠意章)의 일이다. 주자는 이와 같았기 때문에 마침내 아성(亞聖 공자에 버금 가는 성인)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고 만 길의 절벽 위에 서서 만세에 공로를 끼친 것은 도리어 자사(子思)ㆍ맹자(孟子)보다 나은 점이 있다. 그러나 독서(讀書)ㆍ궁리(窮理)가 지극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렇게 될 수 있었겠느냐? 그러므로 《대학》의 가르침은 반드시 격물치지(格物致知)를 먼저하는 것이다. 대개 시비(是非) 사이에 의위(依違)하면 끝내는 음과 이와 흑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니, 이는 모두 사람들이 하기 쉬운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에는 음과 양이 있고 일에는 이와 의가 있고 물(物)에는 흑과 백이 있어 《논어》에 “자리가 바르지 않으면 앉지 않는다.” 한 것과 《소학(小學)》에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한 것 등을 말한다. 일상생활에 항상 접하는 것이니 너희들은 경계하라. 천근(淺近)한 것만을 보면 심원(深遠)한 것을 잊을 염려가 있으니, 너희들은 저 이윤(尼尹)을 보지 못하였느냐? 흑수(黑水)가 주자를 공격하고 나서자, 윤증이 처음에는 의위(依違)하였다가 마침내는 서로 뜻이 맞아 겉으로 배척하고 속으로 도와 그 형세를 키워서 끝내는 큰 화가 천하에 가득하여 집과 나라를 파괴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므로 맹자와 주자가 사설(邪說)을 배척하는 데 죽을힘을 다하고 원수처럼 여겼던 것이다. 털끝만큼의 착오가 천 리(千里)로 어긋나는 것인데, 하물며 그 착오가 털끝만할 뿐이 아닌 것이랴? 저 이윤인들 말류(末流)가 이러한 데까지 이르리라는 것을 어찌 알았겠느냐? 애석할 뿐이다. 변변치 못한 내가 망녕되이 맹자와 주자가 피행(詖行)을 막고 사설(邪說)을 멸식(滅熄)시킨 일을 본받고 또 난신(亂臣)ㆍ적자(賊子)는 누구나 죽여야 한다는 훈계를 독실히 믿었다가 귀양 길에서 죽는 참변을 당하게 되었으나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흑수(黑水)가 ‘공자를 휘(諱)할 것 없다.’ 하고 주자를 공격하는 것을 일삼는가 하면, ‘아들이 어머니를 신하로 할 수 있다.’는 말로 명성왕후(明聖王后)를 모욕하자, 그 잔당이 서로 이어 마침내 공자를 모욕하는 말을 과거(科擧)의 제목(題目)으로 삼아 대성전(大成殿) 앞에 게양(揭揚)하였고, 효종대왕의 세실(世室)을 미리 서둘렀다 하여 물의를 일으켰으며, 명성왕후가 두 번씩이나 모욕을 당하였고 양현(兩賢 율곡과 우계)이 문묘(文廟)에서 축출당하였다. 감히 말할 수 없는 보다 더 큰일도 있지만 차마 말할 수 없다. 내가 이러한 때에 죽는 것을 모욕이라 보겠느냐, 아니면 당연하다고 보겠느냐? 주자는 공자 소상(塑像)의 허리와 어깨가 끊기고 이천(伊川)의 학이 금지 당한 때를 당하여 주자에게 참형(斬刑)을 가하자는 상소가 한탁주(韓侂胄)의 무리에서 나왔고 조자직(趙子直)ㆍ여자약(呂子約)ㆍ채계통(蔡季通) 등 여러 현인이 계속 눈앞에서 죽어갔으며, 문인 중에 어떤 자는 선생을 배반, 부과(赴科 과거에 응시하는 것)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공자가 미복(微服)으로 송(宋) 나라를 지난 고사(古事)로써 풍간(諷諫 슬며시 나무라는 뜻을 붙여서 비유로 남을 깨우치는 것)하기도 하였으나, 주자는 ‘내가 만 길의 절벽 위에 서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어찌 우리 도(道)의 빛이 아니겠는가.’ 하였고 또 우둔지장(遇遯之章)을 지어서 임금에게 올리지는 못하였으나 ‘가슴이 끓어오른 나머지 당장 죽는다 해도 후회하지 않고 의혹하지 않겠다.’ 하였으니, 대개 주자의 학은 궁리(窮理)ㆍ존양(存養 존심(存心) 양성(養性))ㆍ천리(踐履 실천)ㆍ확충(擴充 나에게 있는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넓혀 채우는 것)을 주로 삼고 경(敬)으로 시종(始終)을 관통하는 공력(功力)을 삼은 것이다. 그리고 임종(臨終)할 때 문인들에게 전수한 진결(眞訣)에 ‘천지가 만물을 내는 소이(所以)와 성인이 만사를 수응하는 소이는 직(直)일 뿐이다.’ 하였다. 다음날 다시 물었을 적에는 ‘도리는 다만 이와 같을 뿐이니, 모름지기 노력하여 견고히 지키라.’ 하였다. 공자는 ‘사람이 태어나는 이치는 본디 직(直)한 것이다. 직하지 못하면서 생존하는 것은 요행인 것이다.’ 하였고 맹자가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른 것도 이 직일 뿐이었으니, 이는 공자ㆍ맹자ㆍ주자 세 분 성인의 헤아림이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글을 읽어 이치를 밝히지 못하면 직하지 못한 것을 직으로 여기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사문(師門)의 가르침은 직일 뿐이다. 우리 조상(祖上)의 덕으로 말하면 유씨(柳氏) 할머니가 젊은 과부로 절개를 지킨 것, 쌍청(雙淸) 할아버지가 세상을 피해 은거한 것, 서부(西阜) 할아버지가 효도로 새[禽鳥]를 감응시킨 것, 문충공(文忠公) 규암(圭菴)이 진충성인(盡忠成仁)한 것, 이씨(李氏) 할머니가 첩의 요구를 사절한 것, 습정 선생(習靜先生)이 간흉(姦凶)을 배척하다가 비명에 가신 것, 나의 아버님 수옹 선생(睡翁先生)이 몸을 돌보지 않고 절개를 세운 것, 충현공(忠顯公) 야은(野隱)이 대의(大義)를 세워 백세에 우뚝한 것 등은 모두 주문(朱門)의 정법(正法)에 어긋남이 없으니, 너희들은 힘쓰라. 가까운 데서 본받으면 성공하기 쉬운 법이니, 너희들은 가까이는 선조의 덕을 지키고 멀리는 주문을 높인다면 내가 구천(九泉)에서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
하였고, 또 선대(先代)의 삼현려(三賢閭)를 드러내어 밝히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여 ‘삼현려’ 세 글자를 큰 글씨로 쓰고, 이어 음기(陰記)를 지었으며, 자손에 대한 경계와 여러 가지 일에 대한 분부가 자세하지 않음이 없었다.
문곡(文谷) 김공(金公)의 여러 자제(子弟)가 김공의 시말(始末)을 갖추 기록, 그 외사촌(外四寸) 이담(李湛)을 시켜 선생에게 묘지명(墓誌銘)을 청하므로 이군(李君)이 노중(路中)에서 선생을 뵙고 기록을 바쳤는데, 이때에 선생이 자제(子弟)에게 명하여 받아쓰라 하고 입으로 불렀다. 자제가 선생의 기력이 너무 쇠약한 것을 걱정하여 간단히 몇 줄의 글로 완성하기를 청하자, 선생이,
“그리해서는 안 된다. 이 글이 후세에 큰 의논이 될 것인데, 어찌 소략(疏略)하게 다루겠느냐?”
하고는, 문자의 서차(敍次)와 포철(鋪綴)에 잘못됨이 없도록 하였고 또 명문(銘文)을 손수 써서 이군에게 주었다. 이튿날 이군이 조용한 여가에 선생을 뵙자, 선생이,
“문곡의 묘지명(墓誌銘)은 나의 정력이 이 지경이 된 까닭에 끝내 뜻대로 되지 못하였다.”
하고 이어서,
“내 일찍이 문곡과 함께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를 증정(證訂)하자고 상의했었는데, 오늘날 일이 이 지경이 되었구나. 《대전차의》의 증정을 치도(致道)에게 부탁했으니, 함께 완성하기를 바란다는 뜻을 중화(仲和 김창협(金昌協))에게 전하라. 이것이 바로 계지술사(繼志述事)하는 도이다.”
하였다.
○ 7일(임신) 정읍(井邑)에 도착하였다. 8일(계유) 진시(辰時)에 관(館)에서 후명(後命 귀양 간 죄인에게 사약을 내리는 일)을 받았다.
흉도(凶徒)가 선생의 병세가 위급하다 함을 듣고 혹시 도중에서 운명할까 염려하였다. 이에 권대운(權大運)ㆍ목내선(睦來善)ㆍ김덕원(金德遠)ㆍ민암(閔黯) 등이, 선생의 죄악이 이미 드러났으니 국문(鞫問)할 것 없이 바로 사사(賜死)하자고 청하므로 상이 즉시 윤허하였다. 선생이 장성(長城)에 머물렀을 적에 정확하지는 않으나 이미 이런 소문을 어렴풋이 들었다. 처경이 다시 길을 독촉하여 노령(蘆嶺)을 넘어 밤에 정읍에 도착하였다. 선생은 후명이 내렸음을 듣고 곧 상소문을 기초하여 전후(前後)의 출처대의(出處大義)와 원통함을 품고 죽는다는 뜻을 말하고, 또 성조(聖祖 효종)의 수찰(手札)을 손자 주석(疇錫)에게 맡겼으니 조만간에 바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는 뜻을 말하고는, 처음 어찰(御札)을 바치려 할 때 지은 상소문과 성조(聖祖)ㆍ성모(聖母 명성왕후)의 수찰을 손자 주석에게 주어 바칠 수 있는 날을 기다려 바치게 하였다. 후명이 이르자 아들 기태(基泰)가,
“국법(國法)에 형(刑)을 집행할 때 현일(弦日 상현일(上弦日)과 하현일(下弦日))을 피하는 것이므로, 문곡 상공(相公)이 사약(賜藥)을 받을 때에도 현일을 피했었다.”
하면서 금랑(禁郞) 박이인(朴履寅)과 논쟁하자, 선생이 듣고 엄히 꾸중하면서,
“내 생명은 곧 다하려 한다. 숨이 끊어지기 전에 빨리 후명을 받는 것이 어찌 마땅하지 않겠느냐?”
하고, 약 들이기를 재촉하였다. 이때 자손과 문인들이 들어가 뵈니, 선생이 기운이 끊어지려 하였으나 눈을 떠 권상하를 보고 그의 손을 잡으며,
“내가 항상 조문석사(朝聞夕死)로써 자기(自期)했더니, 지금 80세가 넘었으나 끝내 들은 바가 없이 죽는 것이 나의 한이다. 오늘 같은 세상에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니, 나는 웃으며 지하(地下)에 돌아갈 것이다. 이후의 일은 오직 치도(治道)만을 믿는다.”
하였다. 권공(權公)이,
“돌아가신 뒤에 어떤 예를 적용할까요?”
하고 묻자, 선생이,
“《상례비요(喪禮備要)》를 따라야 할 것이나, 반드시 《가례(家禮)》를 주로 삼고 미비된 점은 《상례비요》를 참작 사용하라.”
하였다. 또,
“공복(公服)을 사용할까요?”
하고 묻자, 선생이 머리를 흔들며,
“나는 평소 공복을 만든 적이 없다.”
하였다. 또,
“심의(深衣)는 의당 사용해야 하겠지만, 그 다음에는 무슨 옷을 사용할까요?”
하고 묻자, 선생이,
“주자가 치사(致仕)하고 한가로이 지낼 적에 상의하상(上衣下裳)의 의복을 입었으니, 내 일찍이 이를 모방하여 만들어 두었다.”
하였다. 또 그 다음을 묻자,
“난삼(襴杉)은 명(明) 나라의 유제(遺制)이다.”
하고, 이어서,
“묘도(墓道)에는 큰 비석(碑石)을 세우지 말고 다만 조그만 돌을 세운 다음 치도가 간단하게 몇 줄의 비문을 지어 누구의 묘라는 것만을 드러내라.”
하고, 또,
“학문은 주자를 주로 삼고 사업은 효종대왕이 하고자 한 뜻을 주로 삼아야 한다. 우리나라는 나라가 작고 힘이 약하여 뜻을 이룰 수는 없으나 항상 ‘인통함원 박부득이(忍痛含冤迫不得已 원통함을 품고 어찌할 수 없어서 한다는 말)’ 여덟 글자를 가슴속에 새겨 뜻을 같이하는 사람끼리 전수하여야 할 것이다.”
하고, 또,
“주자의 학문은 치지(致知)ㆍ존양(存養)ㆍ실천(實踐)ㆍ확충(擴充)인데 경(敬)으로 시종(始終)을 관통(貫通)한 것이니, 이는 면재(勉齋 황간(黃榦))가 지은 주자행장(朱子行狀)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하고, 또,
“천지가 만물을 내는 것과 성인이 만사를 수응하는 것은 직(直)일 뿐이므로 공자와 맹자 이후로 전수한 것이 다만 이 하나의 직 자뿐이었고, 주자가 임종(臨終)하실 때 문인들에게 말한 것도 이 직 자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하고, 또,
“옛 분들은 어찌하여 정릉(貞陵)의 복위(復位)를 청하지 않고 소릉(昭陵)의 복위를 먼저 청하였는가? 내가 벼슬하여 한 일은 오직 이 한 가지일 뿐이나, 후세 사람에게 할 말이 있게 되었다.”
하고, 또,
“태조대왕(太祖大王)의 추시(追諡)에 대하여는, 만약 평상시라면 내 어찌 이를 서둘렀으랴마는 오늘날의 사태를 보건대 존주(尊周)의 의리가 어둡고 막혀 거의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내가 여기에 권권(眷眷)했던 것이다. 박화숙이 의견을 달리하였으나 참으로 쉽게 구하기 어려운 친구이다. 우연히 이 일에만 의견이 맞지 않은 것이다.”
하고, 또 김만준(金萬埈 김장생의 증손)의 손을 잡고,
“너희 집안의 화를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느냐?”
하였다. 만준이,
“증조부의 문집(文集) 판본(板本)의 보관 문제를 선생께서 항상 염려하셨습니다마는 지금은 운반하여다가 서원(書院)에 두었습니다.”
하자, 선생이,
“집람서(輯覽序) 중 개정(改正)한 두 글자를 다시 새겼느냐?”
하므로 만준이,
“이미 고쳤습니다.”
하였다. 조금 뒤 금리(禁吏 의금부(義禁府)의 관리)들이 들어와서 자손들을 쫓아내어 옆에 있지 못하게 하였다. 이 고장 사람 임한일(任漢一)이 지난밤부터 선생을 모시는 데 정성을 다했는데, 이때도 또 공생(貢生) 이후진(李厚眞)과 함께 선생을 모셨다. 선생이 눈을 떠 그들을 보고 시간을 묻고는,
“내 목숨이 다하려 하니, 후명을 받기 전에 죽을까 염려이다.”
하고 약 들이기를 재촉하는 뜻이 보였다. 이어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고는,
“내가 곧 죽게 되었는데, 어찌하여 약이 이리 더디냐?”
하였다. 조금 뒤 약이 들어왔으나 선생은 이미 약을 볼 수 없었다. 금리가 앞으로 나와서 큰소리로 약을 내린다는 뜻을 고하자, 선생이 곧 몸을 일으켜 앉아서 상의(上衣)를 가져오라 하고는 다시 뒤로 기대며 눈을 감았다. 한일이 공생을 시켜 직령의(直領衣)를 갖다 드리게 하자, 선생이 어깨를 약간 움직이며 입히라 하였다. 한일이,
“지금의 기력으로는 일어나서 옷을 입으실 수 없습니다.”
하자, 선생이 곧 손으로 옷깃을 당겨 가슴 위에 갖다 대었다. 한일이 바로 그 뜻을 깨닫고 옷을 펴서 몸 위에 걸친 다음 누운 자리 채 받들어 청상(廳上)으로 나왔다. 금랑(禁郞)이 교생(校生)에게 교지(敎旨)를 읽히는 동안에 선생이 옷으로 무릎을 가리고 눈을 감은 채 앉아서, 때로는 몸을 굽히려 하는 듯도 하였고 때로는 경청(傾聽)하는 듯도 하다가 드디어 약 사발을 받아 마시고 자리에 누워 서거하였다. 선생이 서거하던 전날 밤에는 흰 기운[白氣]이 하늘을 가로질렀고 서거하던 날 밤에는 규성(奎星)이 땅에 떨어져 붉은 빛이 이곳 옥상(屋上)에 뻗치니, 읍인(邑人)들이 감탄하며 이상하게 여겼다. 이때 문인들이 치상(治喪) 절차를 한결같이 선생의 유명(遺命)에 따라 관(棺)은 부판(付板)을 사용하였다. 문인으로서 복(服)을 입은 이가 1백여 명이었는데, 모두 황면재(黃勉齋)가 주자의 복을 입은 의식에 따라 백포건(白布巾)에다 수질(首絰)을 두르고 흰 띠에다 상복을 입었으며, 본도(本道 여기서는 전라도를 이른다)의 선비들도 와서 초상(初喪)을 도와주는 이가 많았고, 읍재(邑宰 고을의 원) 권익흥(權益興)도 상구(喪具)를 주선하는 데 정성을 다하였다.
○ 이때 자손과 문인들은 처경의 엄금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였는데, 선생이 거의 숨이 다하려는 사이에 홀연히,
“해가 이미 저물었느냐? 아이들은 어디에 있느냐?”
하므로, 이후진(李厚眞)이,
“도사(都事)의 명이 엄하여 들어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자, 선생이 몸을 돌리고 미소를 지으면서,
“어쩌면 그리 심하게 구느냐.”
하였다. 조금 뒤 조카 기학(其學)과 종손(宗孫) 종석(宗錫)이 보은(報恩)으로부터 달려와서, 도사가 군졸(軍卒)을 풀어 사관(舍館)을 세 겹으로 포위하여 지친(至親)과 문인들이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다가 종석이 격분하여,
“천하에 어찌 이런 법이 있느냐?”
하고는 군졸을 떠밀어 여러 겹의 포위를 뜷고 바로 선생의 처소로 들어가 여러 차례 선생을 부르니, 선생이 비로소 눈을 떠 종석의 손을 잡고,
“네가 왔구나. 하마터면 너를 보지 못할 뻔했다. 이미 결서(訣書)를 만들어 두었는데, 그것을 보았느냐?”
하고는 독서ㆍ수행(修行)과 성심으로 조상을 받들 것을 경계하고, 또,
“네 아들은 잘 있으며, 요사이 무슨 글을 읽느냐? 부디 잘 가르치도록 하라. 그 아이가 나의 선인(先人)의 제사를 받들 아이이다.”
하였다. 조금 뒤 금오리(金吾吏 의금부(義禁府)의 관리)가 들어와서,
“시간이 되었으니, 여러분은 다 물러가시오.”
하였다. 김극돈(金克惇)이 종석에게,
“대감께서 누운 자리가 매우 불결하니, 지금 그 자리를 바꾸지 않으면 후명을 받은 뒤 되모실 적에는 새 자리로 바꾸어 깔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하므로 종석이 자리를 바꿀 뜻을 고하자, 선생이 정신이 혼미한 중에서도 손으로 자리를 만지면서,
“이 자리가 좋다. 나의 선인(先人)은 평생 이런 자리도 깔아보지 못하셨는데, 어찌 바꾸겠느냐?”
하였다. 전지(傳旨)를 들을 적에,
“송모(宋某)는 혼조(昏朝) 얼신(孼臣 간신(奸臣))의 자식으로……”
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하늘을 세 번 쳐다보고 지극히 원통해 하는 기색이 있는 듯하였다. 염습(殮襲)할 적에 두 눈을 감지 않았으므로 수암(遂菴) 권공(權公)이 여러 번 손으로 쓰다듬었으나 끝내 눈을 감지 않았다. 뒤에 권공이 그 문인 윤봉구(尹鳳九)에게 당시의 일을 말할 적에는,
“나의 선생은 지하(地下)에서도 눈을 감지 못하셨을 것이다.”
하면서, 눈물이 앞을 가리곤 하였다.
○ 12일(정축) 발인(發靷)하였다.
상여(喪輿)를 쓰지 않고 다만 죽격(竹格 상여 대신 대나무로 만든 멜틀)에다 유지(油紙)로 시신(尸身)을 덮었을 뿐이었다. 지나는 곳마다 사우(士友)들이 하인[奴]을 보내어 운상(運喪)을 돕게 하였고, 평소 선생과 의견을 달리하던 사람도 간혹 와서 조상(吊喪)하고 하인을 보내어 운상을 돕게 하고는,
“이 어른의 상사(喪事)에 어찌 차마 태연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는 이도 있었다. 이때 원근(遠近)에서 호상(護喪)하는 이가 매우 많았고 친지(親知)들은 혹 화가 더해질 것을 염려하면서도 상여의 앞뒤에 서기를 서로 다투었다. 북도(北道)의 선비도 와서 조곡(吊哭)하는 이가 있었다.
○ 15일(경진) 흥농(興農)에 도착하였고 24일(기축) 관(棺)을 바꾸었다.
선생의 시체를 입관(入棺)할 때 명성왕후(明聖王后)가 하사한 홍사반령(紅紗盤領)과 녹사반령(綠紗盤領) 한 벌씩을 넣었다.

7월 초하루는 을미(乙未) 18일(임자) 수원(水原) 만의(萬義) 무봉산(舞鳳山)에 임시로 장사 지냈다.
이전에 부인(夫人)의 장사 때 선생이 부인의 무덤 오른편을 비워 두게 하여 자신의 묻힐 곳으로 삼았었는데 마침 풍수(風水)가, 합폄(合窆)이 산운(山運)에 맞지 않는다 하므로 합장하지 못하였다. 선생의 유명(遺命)에 따라 상례의 절차를 한결같이 사례(士禮)를 의거했으므로, 달을 넘겨 장사 지내는 제도를 적용하였고 원근에서 와서 구경한 자가 거의 1천여 명이었다.


[주D-001]가왕(嘉王)과 기왕(岐王) : 송 영종(宋英宗)의 아들 조호(趙顥)와 조군(趙頵)의 봉호(封號)이다.
[주D-002]이언호(李彦浩)의 말 : 중종(中宗) 9년에 김정(金淨)과 박상(朴祥)이 신비(愼妃)의 복위(復位)를 청하자, 대사간(大司諫) 이행(李荇)과 대사헌(大司憲) 권민수(權敏手)는, 신씨가 복위된 뒤에 아들을 낳는다면 원자(元子)로 삼기가 어렵다 하여 반대하였는데, 이언호(李彦浩)가 그들의 반대를 도와준 것을 말한다.
[주D-003]소씨(蘇氏)의 철심석간(鐵心石肝) : 감정(感情)이 전혀 없다는 말. 소식(蘇軾)이 이공택(李公擇)에게 준 편지에 보인다. 《東坡續集 11册 卷6》
[주D-004]유 원성(劉元城)을 논평한 말 : 유안세(劉安世)는 벼슬에 있을 때 극간(極諫)하여 숨김이 없었고 죄를 주면 바로 받아들였다고 평한 말을 이른다. 《朱子語類 卷130》
[주D-005]주자(朱子)가 불만(不滿)으로 여겼다 : 정이(程頤)가 부릉(涪陵)으로 귀양의 명을 받은 뒤에 바로 떠나지 않고 숙모(叔母)를 찾아 뵙기를 청한 일이 있었는데, 주희(朱熹)가 임금의 명을 받고 즉시 출발하지 않고 지체한 일을 못마땅하게 여긴 것을 말한다.
[주D-006]요려(腰膂) : 허리와 팔이 잘린 공자(孔子)의 소상(塑像)을 말한다. 이는 주희가 어떤 사람에게 준 글에 “근자에 들으니, 향교(鄕校)가 승방(僧房)이 되고 공자의 소상이 허리와 팔이 잘린 채 길가에 버려졌다.” 한 말을 전용(轉用)한 것이다.
[주D-007]세실(世室) : 오랜 세대를 두고 천묘(遷廟)하지 않는 위패(位牌)를 모시는 종묘(宗廟).
[주D-008]하후승(夏侯勝)이 무제(武帝)에게 : 한 선제(漢宣帝)가 즉위하여 무제(武帝)의 덕을 기리고자 무제(武帝)의 묘악(廟樂)을 만들기를 명하자, 군신(群臣) 중에서 유독 하후승만이 반대하여 말하기를, “무제가 비록 사이(四夷)를 물리치고 국경(國境)을 개척한 공이 있으나, 선비를 많이 죽였고 지나치게 사치스러워 백성을 괴롭혀 …… 백성에게 덕이 없으니, 묘악을 만드는 것은 마땅치 않다.” 하였다. 《漢書 卷75》
[주D-009]경연광(景延廣)은 미친 짓 : 이는 다른 대신들은 거란(契丹)에게 칭신(稱臣)하는 표문을 보내자고 하는데, 연광만이 거란 사신에게, 우리나라에 대검(大劍) 10만 자루가 있으니, 싸우고 싶거든 얼마든지 오라고 호언장담하다가 그 뒤 급습해 온 거란의 군사에게 사로잡혀가서 자살한 것을 인용하여, 효종과 송시열의 북벌(北伐) 계획을 부질없는 짓이라고 비유한 말이다.
[주D-010]관고(貫高)의 일 : 이는 한(漢) 나라 때 고조(高祖)가 조왕(趙王) 장오(張敖)를 모욕 주었다 하여 관고가 고조를 죽이자고 청하였는데, 그 뒤 조왕이 체포되었을 때 스스로 나서서 사건을 독담하여 갖은 체형(體刑)을 받으면서도 끝내 조왕의 무죄를 변명하므로 고조가 장하게 여기고 방면해 주었으나, 신하로서 임금을 시해하려 하였으니, 다시는 임금을 섬길 면목이 없다면서 자살한 것을 말한다.
[주D-011]태조(太祖)에게 시(諡)를 올리게 한 것 : 송시열의 발론(發論)으로 숙종(肅宗) 9년에 태조에게 정의광덕(正義光德)이란 시호를 추상(追上)한 일을 말한다.
[주D-012]장남헌(張南軒)이 우제사(虞帝祠)를 세운 것 : 장식(張栻)이 계주(桂州)의 태수(太守)가 되어 우제사(虞帝祠)를 세워 제사한 것을 말한다. 《朱子大全 卷1 虞帝廟迎送神樂歌詞》
[주D-013]초인(楚人)들이 소왕(昭王)을 제사한 고사 : 당 헌종(唐憲宗) 14년에 한유(韓愈)가 지은 《양주의성현역기(襄州宜城縣驛記)》에 “동북에 우물이 있는데, 세상에서는 소왕정(昭王井)이라 하고 이 우물 동북쪽으로 수십 보 밖에 소왕묘(昭王廟)가 있는데, 지금은 다만 초가(草家) 한 칸만이 있을 뿐이나 해마다 10월이 되면 백성들이 모여 제사 지낸다.”고 한 것을 말한다.
[주D-014]태어날 때 …… 아름다운 이름 : 송시열을 임신했을 때 그 어머니 곽씨(郭氏)가 명월주(明月珠)를 삼키는 꿈을 꾸었고 출산되기 직전에 그 아버지가, 공자(孔子)가 제자들을 거느리고 집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하여 그의 소자(小字 어릴 때의 이름)를 성뢰(聖賚)라 한 것을 말한다.
[주D-015]복위(復位)시키던 …… 징험(徵驗) : 권이진(權以鎭)의 아버지 권유(權惟 송시열의 사위)가 정릉 참봉(貞陵參奉)이 되어 입직(入直)하던 날 밤 꿈속에 어떤 부인이 적의(翟衣)를 입고 정자각(丁字閣)에 앉아 권유를 급히 불러서 “3백 년 동안 폐해졌던 나의 지위를 회덕(懷德)의 대유(大儒)가 회복시켜 주었는데, 나는 그분의 장래에 있을 화를 구해 줄 수 없으니 어찌 한스럽지 않은가?” 했다 한다. 《黃江問答》
[주D-016]하인[奴]의 …… 미복(微服) : 이는 정축년 호란(胡亂)에 강화성(江華城)이 함락되자, 세자(世子)가 종실(宗室)인 진원군(珍原君) 세완(世完)을 시켜 남한산성에 있는 인조(仁祖)에게 보고하려 할 때 윤선거(尹宣擧)가, 진원군의 말을 끄는 하인이 되기를 자청한 일을 그 아들 윤증(尹拯)이 공자가 난을 만나 미복으로 송(宋) 나라를 지나간 일에 비유한 것을 말한다.
[주D-017]흑수(黑水) : 윤휴(尹鑴)가 여주(驪州) 여강(驪江)에서 살았으므로 그를 배척해서 일컫는 말. 즉, 여(驪)는 검다[黑]는 뜻이 있으므로 흑(黑)으로 바꾸어 소인(小人)임을 암시한 것이고 강(江)은 물[水]이므로 이를 합하여 흑수라 한 것이다.
[주D-018]우둔지장(遇遯之章) : 한탁주(韓侂胄)가 정권을 잡아 조정을 어지럽히고 도학(道學)을 위학(僞學)이라 지목하자, 주희(朱熹)는 자신이 누조(累朝)의 지우(知遇)를 받았고 또 시종(侍從)의 직(膱)에 있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 하여, 간사한 무리가 임금의 총명을 가리는 화(禍)를 극언(極言)하고 또 승상(丞相) 조여우(趙汝愚)의 억울함을 밝히는 수만 언(數萬言)에 달하는 봉사(封事)를 초(草)하였다. 이에 자제와 문인들이 번갈아 가며 화를 사게 될 것이라고 간하였으나 그가 듣지 않자, 채원정(蔡元定)이 들어가서 시초(蓍草)로 점을 쳐서 결정하기를 청하였다. 그리하여 점을 쳐서 둔(遯)이 가인(家人)으로 변한 불길한 괘가 나오자, 그는 비로소 아무 말 없이 물러 나와 그 초고(草稿)를 불에 넣었다 한다. 《朱子年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