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호신 (任虎臣神道碑

조선청백리 정간(貞簡) 임호신신도비(任虎臣神道碑)

아베베1 2011. 4. 7. 12:05

 전주최공 문성공 휘 아 , 중랑장공 휘 용봉, 사온동정공 휘 을인 , 호조참의 휘 담, 예문관제학 휘 덕지,

 성균생원 휘 숙 , 의령현감 휘 지성  부장 휘 호문 (전주최공 문성공 8세손)  저의 17직계 선조   

 

전주최공 문성공 휘 부장 호문 사위 증 우의정 일두 정여창 선생님의 외손녀 사위 되시는 분이다

 

성씨와 본관  풍천임씨(豊川任氏)

[요약정보]

본관명 풍천(豊川)
성씨명 임씨(任氏)
본관소재지 황해도(黃海道) 송화군(松禾郡)
본관이칭
시조명 임온(任溫)

[상세내용]

본관 연혁

풍천(豊川)은 황해도에 있었던 옛 지명으로 고구려 깨에는 구을현(仇乙縣) 또는 굴천(屈遷)이었으며, 757년(신라 경덕왕 16) 굴현현(屈峴縣)으로 개칭하고, 양악군(楊岳郡: 安岳)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 초에 풍주(豊州)로 이름을 바꾸고, 995년(성종 14) 도호부로 승격하였다가 1018년(현종 9) 군으로 강등되고 방어사(防御使)가 설치되었다. 1395년(태조 6) 진(鎭)이 설치되었고 병마사(兵馬使)가 지주사(知州使)를 겸했으며, 1413년(태종 13) 군현제 개편 때 은율(殷栗)을 합병하여 풍율군(豊栗郡)이라 하였다가 곧 분리하였다. 1469년(예종 1) 왕비 안순왕후 한씨의 외향(外鄕)이라 하여 풍천도호부(豊川都護府)로 승격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풍천군이 되어 해주부 관할이 되었다가, 1896년 황해도 풍천군이 되었다. 1909년 풍천군을 폐지하여 송화군(松禾郡)에 합병했으나, 1967년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 때 대부분의 옛 풍천도호부 지역이 과일군으로 분리 개편되었다.

성씨의 역사

시조 임온(任溫)은 중국 소흥부(紹興府) 자계현(慈溪縣)에서 고려로 건너와 정착해 시원을 이루었고, 6세손 임주(任澍)에 이르기까지 황해도 풍천(豊川)에서 살게 되면서 풍천임씨가 비롯되었다고 전해지나 후손들은 선대가 중국인이 아니라고 하기도 한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임도(任徒)·임천유(任天裕)의 비석과 지석에는 임주의 세계가 정확히 기록되어 있고 경주 불국사에 소장된 《경상도선생안(慶尙道先生案)》에도 그 선조가 중국에서 왔다는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의문이 드는 것이다.
임주는 충렬왕대 경상도안찰사(慶尙道按察使), 조봉대부(朝奉大夫), 감문위대장군(監門衛大將軍)을 지내는 등 가문의 기틀을 다졌다.

분적종 및 분파

임주의 아들 임자송(任子松)과 임자순(任子順)을 파조로 각각 백파(伯派)와 중파(仲派)로 나뉘었다.

주요 세거지

강원도 철원군 갈말면 내대리     강원도 철원군 갈말면 상사리
강원도 철원군 동송면 대위리     강원도 평강군 남면 정연리
경기도 포천군 창수면 운산리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충청남도 보령군 미산면 근전리  충청남도 보령군 미산면 봉성리
충청북도 옥천군 동이면 세산리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풍천임씨는 5,722가구 총 17,971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참고문헌]  《姓氏의 고향》(중앙일보사, 2002)

 

임호신(任虎臣)

[문과] 중종(中宗) 26년(1531)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5위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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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백(武伯)
지족(知足)
시호 정간(貞簡)
생년 병인(丙寅) 1506년
합격연령 26세
본관 풍천(豊川)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이력사항]

전력 생원(生員)
관직 호조판서(戶曹判書)
관직 한림(翰林)
타과 중종(中宗) 23년(1528) 무자(戊子) 생원시(生員試)

[가족사항]

 [부]  성명 : 임추(任樞)
[조부]  성명 : 임유겸(任由謙)
[증조부] 성명 : 임한(任漢)
[외조부] 성명 : 허수(許邃)
[처부] 성명 : 최호문(崔浩文)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규장각[奎106])

 

임호신(任虎臣)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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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백(武伯)
시호 정간(貞簡)
생졸년 1506 (중종 1) - 1556 (명종 11)
시대 조선 전기
본관 풍천(豊川)
활동분야 문신 > 문신

[상세내용]

임호신(任虎臣)에 대하여
1506년(중종 1)∼1556년(명종 11).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무백(武伯). 판서 유겸(由謙)의 손자로, 호조참판 추(樞)의 아들이다.
1528년(중종 23) 유생전강(儒生殿講)때 《대학》으로 합격하고, 153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검열·대교, 1533년에 세자시강원설서가 되어 동지사인 아버지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와서 예문관봉교가 되었으나 권신 김안로(金安老)에 의하여 황간현감으로 쫓겨났다.
1538년 사간원헌납, 시강원필선을 거쳐 1541년 의정부검상, 이듬해 충청도진휼경차관으로 나가 가흥창(可興倉)·아산창(牙山倉)의 곡식으로 기민을 진휼하도록 하는 한편, 수령·방백을 문책하였다.
1543년 도원수 이기(李芑)종사관(從事官), 사간, 황해도재상어사로 나가 지방관의 탐학상을 지적, 견책하도록 하였다.
1544년 사헌부집의가 되었으나 신병으로 사직하였다. 이어 군자감정(軍資監正)·홍문관직제학, 1545년(명종 즉위)에 우부승지경연참찬관을 겸하고, 1546년에 우승지·도승지·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1547년 한성부우윤이 되어서는 정미조약의 체결을 반대하였고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1550년 동지중추부사동지춘추관사를 겸하고 《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51년에 성절사(聖節使)명나라에 다녀오고 이때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1552년 경연특진관, 이듬해 한성부좌윤, 1554년 우윤을 거쳐 1555년 형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신병으로 사직하였다.
1556년 호조판서에 기용되었으나 다시 병으로 사직하고 지돈령부사로 죽었다. 청정(淸淨)하고 신중함이 뛰어나다는 평을 받았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호조판서

조선시대 6판서(六判書) 중 하나이고, 호조(戶曹)의 으뜸 벼슬로 정이품(正二品)이며, 정원은 1원이다. 아래로 호조참판(戶曹參判: 從二品), 호조참의(戶曹參議: 正三品 堂上) 각 1원과 호조정랑(戶曹正郞: 正五品), 호조좌랑(戶曹佐郞: 正六品) 각 3원이 있다. 1392년(태조 1)에 정삼품의 전서(典書) 2원을 두었으나, 1403년(태종 3)에 1원을 감하고 1405년(태종 5)에 판서로 고쳐 정이품으로 올렸다. 1593년(선조 26)에는 훈련도감을 설치하면서 훈련도감의 제조(提調)직을 겸하도록 하였다. 그밖에 비변사를 비롯하여 장생전(長生殿)·선혜청(宣惠廳)·예빈시(禮賓寺)·광흥창(廣興倉)·군자감(軍資監)·선공감(繕工監) 등의 제조도 겸하였다. 1894년(고종 31) 이후에 탁지대신(度支大臣)·탁지부대신으로 개칭되었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仁祖實錄  明宗實錄  國朝榜目  海東名臣錄  知退堂集

 

임호신신도비(任虎臣神道碑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자헌대부 호조판서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資憲大夫戶曹判書兼五衛都摠府都摠管) 증시 정간공(贈諡貞簡公) 임공신도비명(任公神道碑銘) 병서(幷序)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연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議政府領議政 兼 領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事) 강녕군(江寧君) 홍섬(洪暹)은 글을 짓고,  전연사 제검(典涓司 提檢) 어모장군(禦侮將軍) 이잡(李磼)은 글을 쓰다.

풍천 임씨(豊川 任氏)는 대대로 명망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고려 말에 판무산현사(判撫山縣事) 휘(諱) 중선(中善)이란 분이 있어 유항선생(柳巷先生) 한수(韓脩)의 사위가 되었다. 이 분은 현감 휘 효돈(孝敦)을 낳았으며 현감은 군수 휘 한(漢)을 낳았다. 이분은 공조 판서 휘 유겸(由謙)을 낳았고 판서는 관찰사 휘 추(樞)를 낳았다. 이 분은 일찍부터 공보(公輔 : 3卿과 4輔=왕의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대신)의 덕망이 있었으나 권신의 미움을 사서 직위가 그 덕과 걸맞지 못하였다. 하양(河陽)의 명망있는 집안인 군수 허수(許邃)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정덕(正德) 병인년(1506년) 2월 3일 공(公)을 낳았다.
공(公)의 휘는 호신(虎臣)이요 자(字)는 무백(武伯)이다. 공(公)은 태어나서 자질과 품성이 매우 고상하였다. 글을 읽을 때는 암송하고 이취(理趣)를 깊이 탐구하였으며, 단지 장구(章句)에만 얽매이지 않았다. 약관에 대학(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에 힘쓰고 실천하니 사람들이 유학자의 기상이 있다고 칭찬하였다. 무자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신묘년 문과에 병과로 합격하여 권지(權知 : 임시직) 승문원 부정자에 기용되었다. 역사방면에 재능을 보여 예문관에 추천되어 들어가 검열이 되었고 차례로 대교(待敎)에 승진하였고, 선발되어 시강원 설서(侍講院 說書)가 되었다. 가을에 관찰공(觀察公)이 동지사(冬至使 : 동지를 전후에 명나라에 보내던 정기적 사신)가 되어 중국에 갈 때 공(公)은 질정관(質正官 : 중국글의 의문점을 알아오던 임시관직)이 되어 따라가게 되자 이름있는 사람들이 시를 써 주었는데 봉황이 어린 새끼를 거느린 것에 비유하는 것이 많았다. 돌아오는데 중국을 나오기 전에 관찰공의 상을 당하니 관을 모시고 만리를 호곡하고 몸이 상하도록 슬퍼하니 이를 보는 중국인마다 탄복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병신년에 상을 마치고 다시 예문관 봉교(奉敎)에 임명되었는데 이 때 권간(權姦:金安老)이 국정을 담당하여 자기와 뜻이 맞지 않은 사람을 배척하여 몰아내고 공물을 받지 않는 달이 없으니 공(公)을 황간현령으로 내보냈다. 공(公)은 태연하게 취임하여 조금도 말이나 얼굴빛에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무술년에 어머니의 병으로 인하여 성균관 전적으로 옮겼다가 병조와 형조, 양조의 좌랑, 사간원 헌납을 역임하였다. 평소의 지론이 온화하고 너그러워서 전에 자신을 괴롭힌 자에게도 조금도 노엽게 생각하지 않고 거리낌이 없었으며 다른 사람을 대함에는 은혜와 원한을 따지지 않았으니 이는 공(公)의 성격이 그러한 것이었다. 홍문관 교리로 옮기고, 이조 정랑으로서 시강원 문학과 필선(弼善)을 겸하였으며, 잠시 의정부 검상(檢祥)으로 옮겼다가 사인(舍人)으로 승진하였다.
임인년에 흉년이 드니 조정에서는 공(公)이 활인하는 데 수단이 있음을 알고 천거하여 충청도 구황경차관(救荒敬差官 : 흉년에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임시로 보내는 관리)이 되었다. 공(公)은 친히 음식을 가지고 병든 집을 출입하니 한 지방 이 공에게 힘을 입어 모두 온전히 살게 되었다. 여름에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으로 옮겼고 가을에 사헌부 집의에 임명되어 잘못된 것을 규탄하여 대체(大體)를 힘써 보존하였으니 옛날 어사의 기풍이 있었다. 다시 사간원 사간이 되었는데 각 관부에 충당되는 노비로서 대립(代立 : 대신 사람을 내보내는 것)하는 자는 본인에게 그 댓가로서의 포(布 : 포목)를 징수케 하는 일이 매우 많았다. 조정에서는 이를 허락하고 해당 관서로 하여금 거두어 바로 나누어 주게 하였다. 공(公)은 이를 막고서 말하기를, “이는 염치를 배양하는 것이 아니고 사대부를 대하는 것이 오히려 각박한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그 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당시의 논의는 공(公)의 말이 옳다고 하였다.
홍문관 전한(典翰) · 직제학에 임명되었고 을사년에 승정원 동부승지에 발탁되었으며 병으로 교체되었다가 가을에 다시 우부승지가 되어서, 차례로 승진하여 도승지에 이르렀다. 정미년에 왕께서 친히 종묘에 부례(祔禮:종묘에 신주를 봉안하는 예식)할 때 은혜를 베푸시니 집사를 제수 받고 또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를 받았다. 얼마 안 있어 병으로 체직되었고, 다시 한성부 좌윤으로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를 겸하였다. 이성실록(二聖實錄:중종과 인종의 실록)을 편찬하는 데 참여하였고 외직으로 나가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영남은 지역이 넓고 일이 번잡하여 사람들이 오래 견디지 못하였으나 공(公)이 이르자 다스리는 것이 오히려 간편해지고 관청의 규칙도 많지 않게 하여 문서와 장부가 가득 쌓였으나 일이 정체되지 않았으니 사람들은 관리로서의 재능을 칭찬하였다. 임기가 만료되어 조정에 들어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무신년에 어머니상을 당하였고 경술년에 상복을 벗고 장례원 판결사(掌隸院 判決事)를 두 번 역임하였는데 이치를 밝혀 송사를 명철하게 하여 그 억울함을 바로잡았고, 신해년에는 성절사(聖節使)로서 중국에 갔다왔다. 을묘년에 특별히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하고 호조 판서에 임명되어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하였다. 이 때 기근이 들고 왜구가 변경을 침입하였는데 공(公)은 탁지(度支:호조)를 관장하고 있었으므로 마음을 다하여 수입을 헤아려 지출을 하며 때마다 자세한 실정을 재량하고 적절한 시기에 마땅히 처리하여 일이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어려운 일이라고 여겼다. 번거롭고 힘든 직무를 처리함에 마음과 힘을 다하여 애쓴 나머지 창증(脹症:배가 부어오르는 병)이 생겨서 병진년 2월부터 병을 이유로 한사코 사직하여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로 전임되었다. 집에다가 녹봉을 받지 말라고 금하였는데 이는 대개 일하지 않고는 녹봉을 받으려 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병환이 깊어져 마침내 8월 8일에 졸하니 향년 51세였다. 관리가 왕에게 알리니 심히 애도하여 조회를 받지 않으시고 이르기를, “선량한 재상이 죽었구나!”라고 하였다. 조야가 서로 조문하였고 벗들이 호상하였는데 고관대작이 가득 앉아서 자기 부모가 죽은 것과 같이 곡하였다. 10월 20일 양주(楊州) 천보산(天寶山) 남쪽 기슭 관찰공(觀察公)묘 곁에 장사지냈다. 태상시(太常寺)에서 시호(諡號)를 정간(貞簡)이라 하였다.
공(公)의 사람됨은 학문에 있어서는 착실하여 속에 품은 이치를 궁구하고자 하였으며 마음에 있어서는 공평무사하고 솔직온화하였다. 젊어서부터 방 하나를 깨끗이 청소하고 이곳을 거처할 장소로 삼았는데 편액(扁額)을 지족암(知足菴)이라 하였다. 손수 선현의 격언을 창문 벽에 써 붙이고 종이 한 장도 헛되이 하지 않았으니 이는 대개 눈여겨보아 문득 경계하고 은괄(檃栝:굽거나 뒤틀린 나무를 바로잡는 틀=잘못을 바로 잡음)하여 해이하지 않으려 한 것이다. 진심을 속이고 거짓으로 꾸미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분수에 맞게 행동하였다. 친구가 춥고 굶주린 것을 보면 음식을 권하고 입은 옷을 풀어 주었으며 조금도 난색을 드러냄이 없었다. 몸은 귀하게 되었지만 아담하고 꾸밈이 없는 것은 벼슬하지 않은 선비와 다름이 없었고 문밖은 쓸쓸하고 적막하여 지위 있는 집 같지 않았다. 이문정공(李文靖公)의 ‘결함세루(缺陷世累)’는 말을 깊이 깨닫고 항상 친우에게 말하기를, “이것이 나의 마음이다.”라고 하였다. 사생의 이치에 통달하여 항상 옛 선인의 ‘백년편작만년계(百年便作萬年計 : 짧은 백년이 곧 만년의 경계가 된다.)’의 7자를 좌우명으로 써 붙이고 삶에 연연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자의 계율로 삼았다. 밖으로는 공평하고 꾸밈이 없었으며, 안으로는 정해진 방향이 있어서 일에 임하여는 의연히 동요하지 않고 급한 일을 만나도 항상 스스로 조용하게 행동하였다.
임자년에 조정에서 청렴하고 신중한 사대부를 뽑아서 더욱 연마할 것을 장려하였는데, 공(公)과 그 아우 참의 보신(輔臣)이 함께 뽑히자 사람들이 영화로운 일이라 하니, 공(公)은 수심에 잠겨 말하기를, “어찌 염근(廉謹) 두 글자를 더럽히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병진년에 동궁이 글을 배우게 되자 왕께서 재상 가운데 학식과 행실이 뛰어난 자를 간택하여 보양관으로 이름하여, 그로 하여금 감화시키고 심성을 기르게 하고자 하였다. 공(公)은 좌상 안현(安玹) · 영상 이준경(李浚慶) · 참찬 조사수(趙士秀)와 더불어 마침내 일시에 뽑히었다. 공(公)은 굳게 지조를 지키며 욕심이 없어 지위가 높고 권세있는 것을 멀리하였다. 조정에 들어온 이래로 여러번 사화를 겪었으나 공(公)은 홀로 초연하여 그 사이에 간여하지 않았다. 조문정공(趙文貞公 : 趙士秀)은 남에 대하여 인정하는 것이 드물었으나 유독 공(公)이 졸하자 애통하여 말하기를, “어떻게 정직하고 온화, 담백하기가 무백(武伯:공의 字)과 같은 이를 다시 볼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공(公)은 부장 최호문(崔浩文)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우의정에 증직된 정여창(鄭汝昌)의 외손녀이다. 자질과 성품이 단정하고 의젓하며 집안을 잘 다스리니 외가의 가풍이 있었다.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 원(元)은 아산현감이며 차남 개(凱)는 정산현감인데, 모두 학식이 있어 능히 그 가업을 이었다. 장녀는 정자(正字) 정숙남(鄭淑)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선비 박호겸(朴好謙)에게 출가하였다. 아산군수는 군수 이한(李漢)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는데 경기(慶基)이다. 정산현감은 군수 윤좌(尹佐)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 4녀를 낳았는데 장녀는 유학 이돈(李惇)에게 출가하였다. 경기(慶基)는 도사 신승서(申承緖)의 따님에게 출가하여 1녀를 낳았다. 부인은 판서공(判書公)의 상을 당하고부터 슬픔으로 내실을 지키면서 미망인이 된 것을 항상 한탄하였으며 비록 담을 사이에 둔 친척집에도 왕래하지 않았다. 임신년 9월 6일 병으로 아산의 임소(장남의 근무지)에서 졸하니 이 해 12월 18일 공(公)의 묘에 부장하였다. 상을 마치자 여러 손자들이 영원히 공(公)의 행적을 기리고자 의논하여 섬(暹)에게 이르기를, “귀하는 우리 부친을 알고 있는데 어찌 신도비에 명(銘)을 하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오호라! 섬(暹)은 송구스럽게도 성균관에서 공(公)과 같이 공부하였고 또 무자년 · 신묘년에 같이 급제하였다. 또 송구스럽게도 친우로서 글이 졸렬하다고 하여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눈물 흘리면서 명(銘)하노니,

학문은 경서를 연구하는 데에 근본을 두니
공은 일찍이 명백하게 밝혔네.
밝은 이치 참으로 정밀하여
옥과 같은 훌륭하게 이루었도다.
간관(諫官)과 한림학사가 되어
지초(芝草)와 봉황처럼 빼어났구나.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어 사방에 이름나니
다른 사람은 견줄 수가 없구나.
마음은 굳게 절조를 지키고 보존하여
부지런히 일하려 했구나.
저 신장(申棖:공자의 제자)을 비웃으며 얼음물을 마시고 황벽나무를 먹는 것을
스스로의 길로 삼았도다.
재주는 돌아보고 마음쓰는 것에 두루 미치고
나라의 동량으로 기대되었는데
하늘은 그 수명을 줄인 것이
뜻밖에 귀인(貴人)이었구나
덧없이 살아가는 인생인데
죽음 또한 우리가 어쩌겠는가?
옹암(瓮巖)이 높고 험하나
울창한 저 언덕엔 아름다운 묘가 있도다.
현숙한 배필의 영이 합장되어 있고
부친의 덕도 비석에 있으니,
내 말이 정에 지나침이 없음은
족히 후인들은 알 것이로다.

만력(萬曆) 2년 갑술 10월 일 세움.

 

임호신신도비(任虎臣神道碑)

 

任虎臣神道碑
有明朝鮮國資憲大夫戶曹判書兼五衛都摠府都摠管 贈諡貞簡公任公神道碑銘幷序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江寧君洪暹 撰

 

典 涓
司 提 檢 禦 侮 將 軍 李磼 書


豊川任氏世有名人當麗季有判撫山縣事諱中善壻于柳巷先生韓脩生縣監諱孝敦縣監生郡守諱漢是生工曹判書諱由謙判書生觀察
使諱樞早負公輔之望 見忤權倖位不稱德娶河陽名族郡守許邃之女生公正德丙寅十一月初三日也公諱虎臣字武伯生而資禀甚高讀書倍文尋究理趣不但 爲章句之陋弱冠入大 學學務踐履人稱有儒者氣中戊子司馬試捷辛卯丙科權知承文院副正字以史才見薦入藝文館爲檢閱序陞待敎選爲侍講院說書秋 觀察公如 京師賀冬 至公以質正官隨之名流贈詩多以鳳將雛比之還未出上國界遭觀察公喪扶櫬萬里號擗毀戚華人見者無不歎服丙申喪畢復拜奉敎時 權姦當國斥逐異已無 虛月出公爲黃澗縣令公怡然就道無幾微見於辭色戊戌因親病遽拜典籍歷兵刑兩曹佐郎司諫院獻納持論平恕無纖芥慍意於前時軋 已者坦懷接物意絕恩 怨公之素性然也轉弘文校理吏曹正郎兼侍講院文學弼善俄遷議政府檢祥陞舍人値壬寅歲飢朝廷知公有活人手段擧爲忠淸道救荒 敬差官親齎粥餌出入
病戶一方賴以全活夏移輔德秋授執義糾擧務存大體有古御史風復爲司諫各衙門根隨奴代立者徵價布於本身甚濫朝廷許令該曹收
直分給公執之曰此非 所以養廉其待士大夫也不已簿乎言雖不用時論之拜弘文館典翰直提學乙巳擢拜承政院同副承旨病遞秋復爲右副循序至都承旨 丁未 上親行祔禮于 廟加恩執事公受嘉善階未幾病遞還拜左尹兼同知春秋館叅修 二聖實錄出爲慶尙道觀察使嶺南地廣務繁人多不堪公至治尙簡易不多敎條文簿塡委而事無停滯人稱其能官滿還朝同知樞府戊申丁外艱庚戌釋服判決掌隸院者至再燭理旣明訟直其寃辛亥如 京師賀 聖節乙卯 特加資憲拜戶曹判書兼 都摠管時饑饉連仍島夷擾邊公長度支內殫心計量入爲出時裁闊狹以適機宜而事無不集人以爲難也治劇盡瘁之餘激成賬證自丙辰二月引疾固辭遞拜知敦寧禁其家毋得受祿俸盖不欲無事而食也病遂沉綿終于八月初八日享年五十一有司以聞 上悼甚輟朝曰良宰相亡矣朝野相吊執友臨護犀金滿坐如哭
私親十月二十日祔葬于楊州天寶山南麓觀察公墓側太常易名曰貞簡公爲人學欲着實近裏心欲平正坦夷自少靜掃一室以爲捷息之
所扁曰知足菴手書先 賢格言于窓壁殆無虛紙盖欲寓目輒警栝不弛也不肯矯情任眞推分如見親舊寒窘推食解衣略無難色身旣貴淡素無異布衣門閭蕭然不類有位者之家深味李文靖缺陷世累之語嘗語所親曰是吾心也達於死生之理常書古人百年便作萬年計七字于座右以爲貪生惡死者之戒外若坦率而 內有定方臨事毅然不撓遇急常自靜暇壬子朝廷選士大夫廉謹者獎勸砥礪公與其弟叅議輔臣俱與其選人以爲榮公愀然曰安得無忝此二字丙辰 東宮向學 上欲揀宰相中學行俱邁者號爲輔養官使之薰陶涵養公與安左相玹李領相浚慶趙叅賛士秀與焉極一時之撰也耿介寡 慾遠跡權要立朝以來累經士林之禍而公獨超然無與
於其間趙文貞於人少許可獨以公歿爲痛曰寧復見正直平澹如武伯者公娶部將崔浩文之女即 贈右議政鄭汝昌外孫女姿性端莊善理內職有外家風生二 男二女長曰元牙山縣監次曰凱定山縣監俱有學守能業其家女長適正字鄭淑男次適士人朴好謙牙山娶郡守李漢之女生一男曰慶基定山娶郡守尹佐之女生一男四女女長適幼學李惇慶基娶都事申承緒之女生一女夫人自喪判書公守慼閨閤常恨未亡雖連墻骨肉之家亦未嘗徃來焉壬申九月初六日病歿于牙 山任所以是年十二月十八日葬同公塋喪旣襄諸孤謀不朽於暹曰子知吾父盖銘諸神道嗚呼暹忝與公同遊大學又同戊子辛卯榜又辱執友不敢以文拙辭拭 淚而爲之銘曰 學本窮經公早講明燭理惟精 玉汝于成諫坡西淸芝秀鳳鳴 謙虛遠名物無與爭內保堅貞 多欲營營笑彼申倀氷自程 才周眷 傾佇畀邦衝天靳其齡
儻來簪纓若寄浮生歿亦吾寧 瓮巖崢嶸欝彼佳城配祔淑靈 考德有銘言無過情足後人聽
萬曆二年甲戌十月 日立

 

 

 

시대
조선
연대
1574년(선조7년)
유형/재질
비문 / 돌
문화재지정
비지정
크기
높이 178cm, 너비 95cm, 두께 22cm
출토지
경기도 양주군 회천읍 율정리
소재지
(한국)경기도박물관-경기도 용인시 기흥읍 상갈리 85, (한국)-경기도 양주군 회천읍 율정리
서체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홍섬(洪暹) / 이잡(李磼) / 미상

( ) . 1574( 7) () () () , () () . () () , () () .
(1506~1556) 1531( 26) () () . 1533( 28) (使) () () () () . , (), (), ( ) . 1555( 10) () () , 51 . () , () () 2 2 , 1552년(명종 7년)에는 아우 임보신(任輔臣)과 함께 청백리(淸白吏)에 뽑히기도 하였다.
 
() , 5, , 1992

 

 

 

 

 

 

 

하동정씨(河東鄭氏)

[요약정보]

본관명 하동(河東)
성씨명 정씨(鄭氏)
본관소재지 경상남도(慶尙南道) 하동군(河東郡)
본관이칭
시조명 정도정(鄭道正)정응(鄭膺)정손위(鄭遜位)

[상세내용]

본관 연혁

하동(河東)은 경상남도 최서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신라 때에는 한다사군(韓多沙郡)이었으며 757년(신라 경덕왕 16) 하동군(河東郡)으로 개칭하였고, 악양현(岳陽縣)·합포현(陜浦縣: 花開) 등 4개현을 영현으로 관할하였다. 고려시대의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1018년(현종 9) 진주(晉州)의 속현으로 병합되었다가 1172년(명종 2) 감무를 두면서 독립하였다. 1414년(태종 14)에 남해현과 합해 하남현(河南縣)이라고 하였다가 1415년(태종 15)에 다시 분리하여 하동현이 되었다. 1461년(세조 7) 섬진강변으로 읍의 중심지를 옮겼고 1704년(숙종 27)에는 하동도호부로 승격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진주부 하동군이 되었다가, 1896년에는 경상남도 하동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관할 19개 면이 12개 면으로 분면되었고, 1939년에 하동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성씨의 역사

하동정씨(河東鄭氏)는 《조선씨족통보》에 의하면 연원을 알 수 없는 여섯 계통으로 분류하고 있으나, 현존하는 하동정씨의 후손들은 본관을 같이 하면서 계통을 달리하는 3파가 있다.
첫째 계통의 시조 정도정(鄭道正)은 신라 진성왕 때 하동지방의 호족출신으로 923년(경명왕 7) 후백제군이 신라를 침범할 때 하동호장(河東戶長)이 되어 향병(鄕兵)을 단련하여 하동성(河東城)을 지켰다. 그 뒤 고려로 통합될 때는 경순왕을 개성까지 호위하여 내의성상시(內議省常侍)에 제수되었고 이어 광평성평장사(廣評省平章事)에 올랐다.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알 수가 없다. 다만 고려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정석숭(鄭碩崇)을 일세조로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둘째 계통의 시조 정응(鄭膺)은 고려 덕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도첨의좌정승(都僉議左政丞)을 지냈으며 한때 태자관(太子官)의 첨사(詹事)를 맡기도 했다.
셋째 계통의 시조 정손위(鄭遜位)는 고려 숙종(肅宗), 예종(睿宗), 인종(仁宗), 의종(毅宗), 명종(明宗) 등 5왕조에서 벼슬을 하였다. 정헌대부(正憲大夫) 지예부사(知禮部事), 응양대장군(鷹揚大將軍),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으며 하동백(河東伯)에 봉해졌다. 그 후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삼고 하동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그의 아들 정세유(鄭世裕)는 명종 때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를 거쳐 형부상서(刑部尙書)에 이르렀다.

분적종 및 분파

파명(派名)을 살펴보면, 정도정(鄭道正) 후손 분파는 9세손인 정난(鄭難)의 후손이 산원공파(散員公派), 정침(鄭?)의 후손이 흥의공파(興義公派)이고, 하성부원군 정흥인(鄭興仁)의 아들 정인지(鄭麟趾)의 후손이 문성공파(文成公派)이다. 이 파는 그 아들 대에서 다시 익위공파(翊衛公派), 하성위공파(河城尉公派), 장정공파(莊靖公派), 대사헌공파(大司憲公派), 찬성공파(贊成公派)로 나누어진다. 정흥안(鄭興安)의 후손이 진사공파(進士公派), 정흥도(鄭興道)의 후손이 현감공파(縣監公派)로 나누어졌다. 8세손 정을진(鄭乙珍)의 후손이 소윤공파(少尹公派)로 나누어졌다. 정난연(鄭蘭衍)의 후손은 증손 정지(鄭地)와 정전(鄭㙉)의 대에 경열공파(景熱公派)와 병사공파(兵使公派)로 나누어졌다. 또한 정국교(鄭國僑)의 후손은 진사공파(進士公派)로 분리되었다.
정응(鄭膺)의 후손 분파는 6세손 정희(鄭熙)까지 단일 계통으로 내려오다가 그의 증손을 파조로 하여 분리가 되었다. 정서생(鄭瑞生)의 후손이 한임공파(翰林公派), 정형(鄭衡)의 후손이 별제공파(別提公派), 정맹손(鄭孟孫)의 후손이 주부공파(主簿公派), 정운(鄭耘)의 후손이 현령공파(縣令公派), 정송(鄭松)의 후손이 의주공파(義州公派), 정직(鄭稷)의 후손이 판관공파(判官公派), 정온(鄭)의 후손이 직장공파(直長公派), 정목(鄭穆)의 후손이 유수공파(留守公派), 정적(鄭積)의 후손이 장령공파(掌令公派), 정육(鄭稑)의 후손이 사직공파(司直公派), 정조(鄭稠)의 아들이 선무랑공파(宣務郞公派), 정세(鄭稅)의 후손이 생원공파(生員公派)로 나누어졌다.

주요 세거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대운리
경상남도 하동군 고전면 성평리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일원
전라남도 신안군 장산면 도창리
전라남도 보성군 겸백면 도안리
전라남도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
충청북도 옥천군 안남면 도농리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덕촌리
충청북도 영동군 학산면 지내리
평안북도 철산군 부서면 오봉동
평안북도 철산군 부서면 인평동
평안북도 철산군 부서면 강하동
황해도 안악군 서하면 중도리
황해도 안악군 용문면 용운리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하동정씨는 49,440가구 총 158,396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참고문헌]

《姓氏의 고향》(중앙일보사, 2002)  한국의족보(http://blog.naver.com/april0422/80003808079)
뿌리를 찾아서(http://www.rootsinf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