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남계 서원 묘정비

남계서원묘정비(藍溪書院廟庭碑) 일두 정여창

아베베1 2011. 4. 8. 10:09

 

전주최씨 문성공 8세손  휘 호문( 저의 17대 조고) 장인되시는 분이다  

함양남계서원비(咸陽蘫溪書院碑)

함양부(咸陽府) 남계서원(蘫溪書院) 묘정비(廟庭碑)

후학(後學)인 청풍(淸風) 김종후(金鍾厚)는 비문(碑文)을 짓고, 봉정대부(奉正大夫) 전(前) 행 홍릉 참봉(行弘陵參奉) 황운조(黃運祚)는 글씨를 쓰고,
자헌대부(資憲大夫) 전 병조판서 겸 예문관제학(兵曹判書兼藝文館提學) 홍낙명(洪樂命)은 전액(篆額)을 하다.

우리 동방은 기자(箕子)가 오랑캐를 중화(中華)로 만든 뒤로 2000여 년이 되었으나, 유학(儒學)은 오히려 미미하였다. 고려(高麗) 때 정포은(鄭圃隱 : 정몽주(鄭夢周)) 한 분이 계셨으나 평론(評論)하는 자들이 더러 충절(忠節)로 그의 진면목(眞面目)을 덮어버리기도 하였으니, 당시에는 유학이 존귀하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우뚝하게 유학을 위해 앞장서서 중국에서 실추된 유학을 이어받은 자는 실로 한훤당(寒暄堂) 김선생(김굉필(金宏弼))과 일두(一蠹) 정선생(정여창(鄭汝昌))에서 시작되어 이를 계승하여 여러 노선생(老先生) 예닐곱 분이 일어났다. 이제 와서는 기반이 든든하고 빛을 발하여 천하의 도통(道統)이 우리나라로 전해지게 되었으니, 아! 성대하도다. 그러나 김 선생과 정 선생, 두 분이 모두 사화(士禍)를 당하여 언론(言論)과 풍지(風旨)가 그다지 드러나지 않았으니, 이는 학자(學者)가 1000년이 지난 뒤에도 추모하고 개탄하는 이유이다.

정 선생은 대대로 함양(咸陽)에서 살았으며 자손(子孫)이 아직까지도 지키고 있다. 가정(嘉靖) 연간에 개암선생(介菴先生) 강익(姜翼)이 의론(議論)을 주도하여 남계서원(蘫溪書院)을 세워 선생을 제사하였으며, 병인년(명종 21, 1566년)에 편액(扁額)을 하사받았다. 우리나라에 서원이 있게 된 것은 주무릉(周茂陵 : 주세붕(周世鵬))이 죽계(竹溪)에 세운 것에서 시작되었고, 남계서원이 그 다음이 되었다. 아! 선생은 학자의 조상이고 남계서원은 서원의 조종(祖宗)이니, 어찌 더 이상 이보다 더할 것이 있겠는가. 서원을 지은 지 200년이 넘었으나 뜰에 비석이 없었는데, 유생(儒生)들이 한창 돌을 캐어 글을 새겨서 세우기로 계획을 세우고 나 종후(鍾厚)에게 비문(碑文)을 지어달라고 요구하였으므로 내가 감히 적임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사양하지를 못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선생의 행적에 대한 대체적인 내용은 실제의 기록에 대략 나타나 있으며, 그의 늠름한 자태와 특이한 행실에 대해서는 보고 들은 사람이 모두 복종하였으니, 이것도 참으로 대현(大賢)의 일면(一面)이다. 경서(經書)와 제자(諸子)를 탐구하여 꿰뚫고 성(性)과 기(氣)를 분변한 것에 대해서는 추강(秋江) 남공(남효온(南孝溫))이 찬술(撰述)한 글에 자세하니, 후생(後生)인 소자(小子)가 어찌 감히 다시 형용할 수 있겠는가.
정포(旌褒)한 것에 대해 말하면, 정암선생(靜菴先生)으로부터 출발하여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과 문충공(文忠公) 이원익(李元翼)이 서로 이어서 조정에 진달하여 마침내 만력(萬曆) 경술년(광해군 2, 1610년)에 공자(孔子)의 묘정(廟庭)에 종사(從祀)하게 되었고 숙종(肅宗) 을묘년(숙종 1, 1675년)에 동계(桐溪) 정선생(정온(鄭蘊))을 서원에 배향(配享)하였으며, 기사년(숙종 15, 1689년)에 또 강개암(姜介菴 : 강익(姜翼))을 배향하였으니, 이는 모두 많은 선비들이 상소하여 요청해서 명을 받은 것이다.
개암선생(介菴先生)은 젊었을 때에는 방자하고 얽매임이 없었는데 마음을 바꾸어 도(道)를 추구하게 되어서는 순수하게 되었다. 효성이 천부적이었으며 학문의 조예(造詣)가 정미(精微)하였으며, 나름대로 법칙을 세워서 스스로 터득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애써 노력하는 데 힘쓰는 것으로 주안(主眼)을 삼았다. 천거(薦擧)로 소격서 참봉(昭格署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숙배(肅拜)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당시의 나이가 40여 세였는데, 같은 시대의 동년배(同年輩)들이 경험이 많고 덕행이 높은 분(노성숙덕(老成宿德))으로 추대하였다.

동계선생(桐溪先生)은 휘(諱)가 온(蘊)으로, 진사(進士)에 입격(入格)하여 행의(行誼)로 추천이 되었다. 뒤이어 문과(文科)에 급제하였으며, 벼슬은 이조참판(吏曹參判)에 그쳤다. 바른 얼굴빛과 곧은 말로 조정에서 활약하였고, 폐주(廢主) 때에는 아우를 살해하고 모비(母妃)를 금고(禁錮)해야 한다는 논의를 배척하였다가 제주(濟州)에 10년 동안 찬배(竄配)되었다. 뒤에 인조(仁祖) 병자년(인조 14, 1636년)을 당해서는 남한산성(南漢山城)이 포위된 상황에서 누차 항장(抗章)을 올려 오랑캐와 화해하려는 논의를 힘껏 막았으며, 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패도(佩刀)를 뽑아들어 배를 갈랐으나 죽지 않았다. 암곡(巖谷)에 물러나 살면서 여생(餘生)을 마치면서, 마침내 세상이 영원토록 강상(綱常)의 중책(重責)을 몸소 짊어지게 되었으니, 아! 정 선생의 도가 높도다.
강 선생과 정 선생, 두 분은 독실한 학문이나 높은 절개로 모두 종향(從享)되셨다. 이는 영원히 후세에 전해지고 없어지지 않을 것이니, 어찌 비석을 필요로 하겠는가.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이제부터는 이 서원에 들어와서 이 비석을 보는 자는 여러 선생들의 도덕(道德)과 절의(節義)에 감격하여 스스로 격려할 줄을 알게 되어, 들어가서는 집안과 고을에서 효도하고 순종할 것이며 나와서는 나라에 충성할 것이니, 비석도 도움이 있는 것이다. 여러 군자(君子)들은 어찌 서로 더불어 권면하지 않을 것인가.

숭정 152년 기해년(정조 3, 1779년) 12월 일에 세우다.

 

남계서원묘정비(藍溪書院廟庭碑)

 

咸陽灆溪書院之碑」 咸陽灆溪書院廟庭碑後學淸風金鍾厚 撰」
奉正大夫前行 弘陵㕘奉黃運祚 書」資憲大夫前兵曹判書兼藝文館提學洪樂命 篆」
我東自箕子以夷為華旣二千有餘年而儒學猶蔑蔑髙麗有▨鄭圃隱而論者或以忠莭掩之」

當時盖未知尊也其卓然為斯道倡接墜緖扵中土者實自寒暄金先生一蠧鄭先生始繼之以」
諸老先生六七作至于今磊落燀爀而天下道統之傳歸于我矣猗歟盛㢤然而金鄭二先生皆」
遘禍言論風㫖不甚顯此學者所以想慕痛慨扵千載之下者也鄭先生世居咸陽子孫尙傳守」
焉 嘉靖秊間有介菴姜先生翼倡議立灆溪書院以祠先生丙寅▨賜額盖 國朝之有書院」
創于周武陵之竹溪而蘫溪次之嗚呼先生者學者之祖也蘫溪者書院之宗也豈復有尙扵此」
者乎書院之作踰二百秊而庭無碑諸生方謀伐石刻辭以竪之徵文扵鍾厚鍾厚不敢以匪人」
辭謹按先生事行大致略着扵實紀而其英姿異行見聞皆服斯固大賢之一節至若究貫經子」
辨析性氣則秋江南公䝺述僃矣後生小子何敢更容模象也㢤其旌褒則發自静庵先生以及」
鄭文翼公光畢李文忠公元翼相繼陳于 朝遂扵 萬暦庚戌從祀孔子廟庭 肅宗乙夘以」
鄭桐溪先生配享書院己巳又享以姜介庵皆多士䟽請得 命也介庵先生少斥弛不覊變而」
之道醇如也誠孝出天學造精微立法以貴自得務勉强為主用薦除昭格署㕘奉未拜而卒時」
年四十餘而同時儕流推之為老成宿徳焉桐溪先生諱藴擧進士薦以行誼尋擢文科官止吏」
曹㕘判正色直言以立朝廢主時斥殺弟錮 母妃之議竄濟州十秊後當 仁祖丙子在南漢」
圍中屢抗章力争和虜不得則抽佩刀剚腹不殊屛居巖谷以終遂以身負天下萬卋綱常之重」
噫鄭先生之道尙矣若姜鄭二先生或以篤學或以峻莭皆從與享之斯可以永垂来後而不泯」
何待碑㢤雖然従今以徃入是院而睹是碑者為激感扵諸先生之道徳節義而知自勵入而孝」
順扵家扵郷出而忠扵國則碑亦有助矣諸君子盍相與勉之」
崇禎一百五十二年己亥十二月 日建」

 
 
() 1552( 7) () () () (), 1566( 21) () . 1675( 1) () , 1689( 15) () .
() 200 () () , , () . () , () , () ().
, 1970 .
송자대전 제144권
 기(記)
안음현(安陰縣) 광풍루 기(光風樓記)

내가 일찍이 야사(野史)를 읽었는데 거기에,
“한훤(寒暄 김굉필(金宏弼))은 이(理)에 밝고,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는 수(數)에 밝다.”
하였다. 나는 그윽이 이 말을 의심하여 말하기를,
“이른바 수는 소자(邵子 송 나라 소옹(邵雍)에 대한 경칭)의 말대로 ‘하나가 둘을 낳고 둘이 넷을 낳고, 넷이 여덟을 낳는다.’는 것이고 보면, 이는 곧 《대역(大易 《주역》을 높여서 일컫는 말)》의 근본으로서 이른바, 이(理)가 실로 그 가운데 있다. 그러므로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주자(周子 송 나라 주돈이(周敦頤)에 대한 경칭)는 이로 보았고 소자는 수로 보았으나, 모두 이일 따름이다.’ 하였다. 그렇다면 두 선생의 도(道)는 조금도 다르게 볼 수 없는 것으로서, 다 함께 염락(濂洛)의 원파(源派)로 거슬러 올라갔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정 문충공(鄭文忠公)이 송유(宋儒)의 도를 창명(倡明)하여 그 지극히 중정(中正)한 법도가 마치 해가 중천(中天)에 있는 것과 같은데, 선생같이 고명(高明)한 자질(資質)로서 그 학문이 어찌 편벽되이 수학(數學)에 기울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이 문순공(李文純公 문순은 이황(李滉)의 시호)이 무엇을 가지고 《유현록(儒賢錄)》에 이름을 올렸으며, 전후(前後)의 인사(人士)가 무엇을 가지고 문묘(文廟)에 배향시키자는 청이 있었겠는가.”
하였다.
올봄에 안음 현감(安陰縣監) 장후 세남(張侯世南)이 글을 보내와서 청하기를,
“고을에 있는 광풍루(光風樓)와 제월당(霽月堂)은 바로 일두 선생이 세운 것인데, 이 두 건물이 모두 세월이 오래되었으므로 보수(補修)해야 되겠습니다. 당(堂)은 상서(尙書) 박장원(朴長遠)이 이미 수리하였고, 누(樓)는 지금 재력(財力)을 모아서 수리하고 있습니다. 이는 실로 전현(前賢)의 유적이니, 어찌 기(記)를 지어 빛내지 않으리까.”
하기에, 나는 환연(渙然 의문이 풀리는 모양)히 다음과 같이 응하였다.
전일(前日)에 귀로 듣고 마음에 의심하던 것이 이제야 모두 얼음 녹듯이 풀렸다. 아, 선생은 염락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수사(洙泗 공자의 문하를 말함)에 도달한 이가 아닌가. 대저 광풍제월(光風霽月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은 바로 황노직(黃魯直 송 나라 황정견(黃庭堅))이 무극옹(無極翁)의 기상을 표현한 것이다. 그후에 두 정 부자(程夫子)가 말하기를,
“주무숙(周茂叔 주돈이)을 재차 뵙고 바람 쐬며 시를 읊고 달 구경을 하면서 돌아오니 ‘나는 증점(曾點)의 생각과 같다.’는 뜻이 있었다.”
하였고, 주자(朱子)도 말하기를,
“바람과 달은 가없고, 뜨락의 풀은 한결같이 푸르다.”
하였다. 그렇다면 이 한 구절, 두 마디 말이 비록 흔한 말 중의 하나인 것 같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도리(道理)가 무궁하고 그 지취가 실로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이 뜻을 종시 알 수 없다는 것인가. 이것은 외부로부터 느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경사(敬肆 공경과 방종)와 수패(修悖 바른 것과 어긋나는 것)의 분별을 명확하게 판별하여 도(道)의 본원(本原)에 통달하는 공부에 종사해서 가슴속이 쇄락하여 털끝만한 인욕(人欲)의 속박도 없이 태극(太極)을 마음에 간직한 뒤에야 기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선생이 몸을 닦고 남을 다스리는 도리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다시 논한다면 주 부자가 이미 태극도(太極圖)와 선천도(先天圖)를 들어 서로 표리(表裏 안과 밖)가 된다고 하였으니, 수(數) 안에 이(理)가 있는 실지를 여기에서 더욱 증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소자(邵子)의, 양류(楊柳)의 바람과 오동(梧桐)의 달이 일찍이 염계로 더불어 그 기상을 같이 하였으니, 설사 선생이 수에 범람(汎濫)했다고 한들 어찌 한훤당과 더불어 길은 달라도 같은 도(道)로 돌아가는 데 해(害)될 것이야 있겠는가. 뒤에 이 누에 올라서 선생을 상상하는 자가 한갓 기상만을 가져 헤아리지 않고 반드시 그 근본한 바를 안다면, 그 도를 배우고 사람을 사랑하는 실지에 있어 어찌 도움 되는 바가 없다고 하겠는가.
박공(朴公)은 효우(孝友)를 숭상하는 정사를 펴고 청정(淸淨)한 풍교(風敎)를 좋아하여 먼저 이 당(堂)을 수리하였으니 그 뜻이 심원하다 하겠고, 장후는 마침 흉년을 당하여 우선 백성들을 구제하기에도 겨를이 없는데 능히 여기에 유의(留意)하였으니, 참으로 어진 이를 추숭(追崇)하고 이목(耳目)을 새롭게 하여 정사하는 근본을 얻었다고 하겠다. 누 북쪽에 점풍대(點風臺)의 옛터가 있고 대 밑에 욕기암(浴沂巖)이 있는데, 장후가 역시 수축하여 옛 모습을 되찾게 하고자 한다. 고을의 경생(經生)과 학자(學子)가 진실로 이름을 인하여 실지를 추구한다면 참으로 염락에 말미암아 수사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장차 귀를 기울이면서 들으련다.
숭정 을축년(1685, 숙종11) 7월 일에 쓴다.

[주D-001]무극옹(無極翁) : 주돈이(周敦頤)가 그의 태극도설(太極圖說)에서 “무극은 곧 태극이다.[無極而太極]” 하였기 때문에 주돈이의 별칭(別稱)으로 사용한 것.
[주D-002]나는 …… 같다 : 공자가 몇몇 제자와 한가로이 있을 때에 제자들에게 각각 그 뜻을 말하게 하였는데, 증점(曾點)이 말하기를 “늦은 봄에 봄옷이 마련되면 관자(冠者) 5, 6명, 동자(童子) 6, 7명과 함께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고, 시(詩)나 읊으면서 돌아오겠습니다.” 하니, 공자가 감탄하면서 “나도 점의 생각과 같다.”고 하였다. 즉 증점의 생각은 곧 물욕에서 벗어나 순진한 인간의 본심에서 우러난 것이기 때문이다. 《論語 先進》
[주D-003]선천도(先天圖) : 소옹(邵雍)이, 주 문왕(周文王)이 지은 ‘역(易)’을 후천역(後天易)으로 하고, 복희(伏羲)가 지은 ‘역’을 선천역(先天易)으로 하여 만든 그림이니, 복희선천괘위도(伏羲先天卦位圖)와 선천괘위도 등으로 불린다. 우주 만물의 생성 과정(生成過程)을 상수(象數 형상과 수)에 의하여 풀이하였는데, 《주역(周易)》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역(易)에 태극이 있다.” 하였으니, 주 돈이의 태극도나 소옹의 선천도가 모두 ‘역’에 근거를 두어서, 이(理)를 말한 것과 수(數)로 풀이한 것이 상호 관계를 이룬다.
[주D-004]양류(楊柳)의 …… 달 : 버들가지 사이를 불어 가는 맑은 바람과 오동나무 위에 비추는 밝은 달로서, 소옹의 기상을 표현한 것.
 
() , , ,, , 2004
() ,, , 1988
() ,4, , 1985
임하필기 제24권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오현(五賢)의 종사(從祀)

광해군(光海君) 2년(1610)에,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 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였다. 이에 앞서 조헌(趙憲)이 동환봉사(東還封事)에서 이르기를, “김굉필은 도학(道學)을 맨 처음 창도하여 전대(前代)를 계승하고 후학(後學)을 개도(開導)한 업적이 있고, 조광조는 사도(斯道)를 계명(繼明)하여 세상을 구원하고 사람을 착하게 한 공로가 있고, 이언적은 도(道)를 순수하고 독실하게 체득하여 위태로움을 일으켜 세운 공로가 있습니다. 더구나 이황으로 말하자면, 우리나라 유학을 집대성하고 주자(朱子)의 적통을 이어받아, 오늘날의 선비 가운데 조금이라도 존군 애친(尊君愛親)을 알고 예의염치(禮義廉恥)가 있는 사람이면 다들 그의 덕에 감화되어 흥기한 자들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어서 네 현인(賢人)을 추장(推奬)하여 종사하는 반열에 올리도록 하옵소서. 그렇게 하면 거의 포숭(褒崇)하고 향용(嚮用)하는 일이 그 의리를 모두 극진히 하게 되어, 문왕(文王)을 기다려 흥기하는 자들이 일반 백성들 속에서 힘차게 일어날 것입니다.”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태학생(太學生) 임숙영(任叔英) 등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하늘이 우리나라를 보살피시어 열성(列聖)이 서로 계승하면서 유액(誘掖)하고 진작(振作)하여 인재가 배출되었습니다. 이때에 예컨대 문경공 신(臣) 김굉필과 문헌공 신 정여창과 문정공 신 조광조와 문언공 신 이언적과 문순공 신 이황 같은 사람들이 있어 명세(命世)의 선비로서 후대에 전해지지 않은 실마리를 오랜 뒤에 계승하였는데, 무리들 가운데서 탁월하고 출중하여 일세의 태산북두(泰山北斗)와 같았고, 앞뒤에서 창도하고 계승하여 장야(長夜)의 일월(日月)과 같았습니다. 그들의 학문을 논하자면 염락관민(濂洛關閩)이고, 그들의 뜻을 논하자면 요순(堯舜) 시절의 임금과 백성이었으니, 이야말로 세상에 보기 드문 진유(眞儒)이고 백대(百代)의 영원한 종사(宗師)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껏 숭보(崇報)하는 은전이 결여되어 문묘에 제향되지 않고 있으니, 밝은 시대의 흠전(欠典)이자 사림(士林)의 결망(缺望)치고 어느 것이 이보다 크겠습니까.
대체로 성품이 온화하고 재주가 명철하며 뜻이 독실하고 힘써 실천함으로써 의리(義理)의 학문에 침잠(沈潛)하여 고명(高明)한 경지에 나아가고, 충신(忠信)하고 독경(篤敬)하여 모든 행동을 예의에 따르고 멸절(滅絶)된 학문에 분기(奮起)하여 일세의 유종(儒宗)이 된 것은 김굉필의 학문으로, 정몽주(鄭夢周) 뒤로는 이 한 사람뿐입니다. 그와 같은 시대에 태어나 뜻과 도가 서로 합치되고 상호 간에 취의(取義)하여 서로 더불어 연마함으로써, 오경(五經)을 밝히어 그 귀취(歸趣)를 연구하고 《노론(魯論)》을 강(講)하여 그 관건(關鍵)을 발명(發明)하고 의리의 근원에 정심(精深)하여 마침내 체용(體用)의 학문을 궁구한 것은 정여창의 학문으로, 사문(斯文)에 있어 정말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조광조로 말하자면, 강개(慷慨)하게 뜻을 세우고 독실하게 학문을 좋아하여 주경(主敬)에 잠심(潛心)하고 본원(本源)에 함영(涵泳)함으로써, 연마하고 궁구한 것은 두루 통달을 하였으되 더욱 밝았고, 휵양(畜養)한 것은 높고 깊으면서도 더욱 두터웠습니다. 낙민(洛閩)의 학맥을 잇고 수사(洙泗)의 학통을 접하였으니, 그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방도와 계왕개래(繼往開來)한 공이야말로 옛날의 성인에 손색이 없는 셈입니다. 이언적으로 말하자면, 영특함이 남보다 출중하고 타고난 자질이 도(道)에 가까웠으며, 경(敬)을 유지하는 공부가 깊어 크게 정력(定力)이 있었습니다. 치지(致知)와 성의(誠意)에 대해 강론으로 밝히고 몸소 실천하였으며, 일용 동정(日用動靜)하는 사이에 조종(操縱)하고 성찰(省察)하였습니다. 오잠(五箴)과 삼성(三省)으로써 치기(治己)를 더욱 엄격히 하였고, 십조(十條)와 팔규(八規)로써 임금에게 더욱 간절히 말하였으니, 중묘(中廟)께서 가상히 여기고 추장하여 송(宋)나라의 진덕수(眞德秀)에 견줄 만하다고 칭찬하신 것이 마땅하였습니다. 이황으로 말하자면, 자품(姿稟)이 초매(超邁)하고 충양(充養)이 연굉(淵宏)하였고, 참으로 알고 몸소 실천하였으며, 깊고 오묘한 것들을 계발하였습니다. 《계몽전의(啓蒙傳疑)》와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지어 성리(性理)의 학문을 밝혔고,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와 《이학통록(理學通錄)》을 지어 도(道)에 나아가는 근원을 천명하였습니다. 성학십도(聖學十圖)와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에 있어서도 성인의 경전을 밝히고 이단을 배척하는 설이 아닌 것이 없으니, 네 현인을 집대성하여 우리 동방의 고정(考亭 주자(朱子))이 된 자는 어찌 이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그대로 따랐다.
숙종(肅宗) 7년(1681)에 김수항(金壽恒)이 헌의(獻議)하기를, “경술년(1610, 광해군2)에 오현(五賢)을 종사할 때 이미 거행한 예를 《승정원일기》에서 고출(考出)하였는데 비록 소루함을 면하지 못하였으나 그 당시의 예관(禮官) 및 헌의(獻議)한 대신들이 다들 명신 석보(名臣碩輔)들이니, 그 의론과 식견이 필시 근거가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컨대, 성전(聖殿) 및 동서무(東西廡)에 각기 고제(告祭)를 병행(幷行)하는 것이나, 새로 들어가 종사하는 신위의 위판(位版)을 만들어 양무(兩廡)에 분배(分配)할 때 봉안제(奉安祭)를 설행하는 것이나, 아직 봉안하기 전에 별도로 교문(敎文)을 지어 가묘(家廟)에 치제(致祭)하는 등의 일은 지금 이에 따라 거행을 하면 되겠습니다. 송조(宋朝)의 삼현(三賢)으로 말하자면 사체(事體)가 자별(自別)하여 가묘에 치제하는 일은 진실로 논할 것이 없고 또한 교문을 짓지 않은 채 별도로 제문을 지어 고하는 것도 안 될 일인 듯합니다. 위판은 조성하여 마땅히 명륜당(明倫堂)에 두어야 할 것이고, 제판(題版)을 임시로 봉안한 뒤에는 또한 고유(告由)하는 절차가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만 제사를 설행할 때 글을 갖추어 ‘장차 올리려 한다.’는 뜻을 고하는 일이 만약 이때에 있을 경우에는 꼭 별도로 고유를 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주D-001]염락관민(濂洛關閩) : 염은 염계(濂溪)로 송학(宋學)의 비조인 주돈이(周敦頤)가 거주하던 곳이며, 낙은 낙양(洛陽)으로 정호(程顥)ㆍ정이(程頤) 형제가, 관은 관중(關中)으로 장재(張載)가, 민은 민중(閩中)으로 주희(朱熹)가 거주하던 곳으로, 곧 이들이 주장한 성리학을 이르는 말이다.
[주D-002]수사(洙泗) : 본래는 중국 산동성(山東省)에 있는 수수(洙水)와 사수(泗水)를 말하는데, 공자(孔子)의 고향과 가까운 까닭에 전의되어 유교(儒敎) 또는 유학(儒學)을 이르는 말로 쓰인다.
[주D-003]계왕개래(繼往開來) : 성현의 가르침을 계승하고 후손에게 가르쳐 전한다는 말로, 계왕성개래학(繼往聖開來學)의 준말이다.
[주D-004]오잠(五箴) : 이언적이 27세에 지은 원조오잠(元朝五箴)을 말한다.
[주D-005]십조(十條)와 팔규(八規) : 십조는 일강십목소(一綱十目疏)이고, 팔규는 진수팔규(進修八規)이다.《晦齋集 卷7, 卷8 韓國文集叢刊 24輯》
[주D-006]진덕수(眞德秀) : 남송(南宋)의 유학자로, 자는 경원(景元) 또는 경희(景希)이다. 복건성(福建省) 포성(浦城) 출신으로 정주학(程朱學)을 계승하여 ‘소주자(小朱子)’라고 불리었다. 저서에 《대학연의(大學衍義)》, 《문장정종(文章正宗)》, 《서산문집(西山文集)》 등이 있다.
[주D-007]송조(宋朝)의 삼현(三賢) : 숙종 8년(1682) 5월에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에 종사할 때 함께 종사한 송나라의 양시(楊時), 나종언(羅從彦), 이동(李侗)을 말한다.《肅宗實錄 8年 5月 20日》

 

 

잠곡유고 제4권
 소차(疏箚)
오현(五賢)을 종사(從祀)하기를 청하는 소(疏) 기유년(1609)에 태학생(太學生)으로 있을 적에 올린 것이다.


삼가 신들이 오현(五賢)을 종사하는 일로 피를 토하는 정성을 가지고 개진한 다음 엎드린 채 명이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으면서 이번에는 반드시 성명(成命)이 내려질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윤음(綸音)이 한번 내려지자 많은 선비들이 경악하고 있는바, 실로 전하께서 이런 전교를 내리실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성상의 비답에 이르기를, “너희들의 상소를 보니 어진 이를 존숭하는 정성이 참으로 가상하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전하께서 이미 다섯 신하의 어짊을 아신 것이며, 신들이 그들을 높이 떠받드는 것을 기뻐하신 것입니다. 존숭하는 것도 오히려 가상하게 여기시었는데, 하물며 존숭을 받는 자에 대해서겠습니까. 이것으로 미루어본다면 전하께서는 다섯 신하를 존숭하고 계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무릇 신들이 존숭하는 자에 대해서는 비단 육관(六館)의 선비들만이 존숭하는 것이 아니라 온 나라의 선비들이 존숭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육관의 선비들이 존숭하고 온 나라의 선비들이 존숭하며, 전하께서도 역시 존숭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그 공덕이 문묘(文廟)에 종향(從享)되기에 부끄럽지 않다는 것이 어찌 빛나고 빛나 분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전하께서는 도리어 일이 중대하다고 해명하시었습니다. 무릇 종사(從祀)하는 일은 참으로 중대한 일입니다. 그러나 만약 중대하다고 여겨서 끝내 거행하지 않는다면, 천하의 중대한 일이 모두 거행할 만한 때가 없을 것입니다. 다섯 신하의 큰 공과 성대한 덕은 중대한 일이 되기에 충분한데, 전하께서는 오히려 의심을 가지시고 결단을 내리지 않으시니, 이는 전하께서 한갓 종사하는 것이 중대한 일이라는 것만 알고, 다섯 신하를 종사하지 않는 것이 흠전(欠典)이 된다는 것은 모르시는 것입니다.
선왕께서는 총명하고 슬기로운 자질을 가지시고 도덕을 중하게 여기고 어진 이를 높이 떠받드는 뜻을 가지시어, 어진 이를 높이고 덕을 숭상하는 일이라면 극도로 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다섯 신하를 대우하는 데에 이르러서는 더욱더 융숭하게 대우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높은 관작을 추증하고 아름다운 시호(諡號)를 내렸습니다. 그러면서도 단지 이 종사하는 한 조항에 대해서만은 가벼이 허락하지 않았는데, 거기에 어찌 다른 이유가 있어서겠습니까. 
예를 높여서 그 일을 중하게 하고, 날짜를 오래 끌어서 의논을 격발시킴으로써 다섯 현인의 덕을 더욱더 드러내어 한 세상의 추향(趨向)을 보려고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금년에 허락할까 내년에 허락할까 하다가 신하와 백성들이 복이 없어서 선왕께서 갑자기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러니 하늘에 계신 선왕의 혼령이 전하께서 뜻을 이어주기를 바라고 계시지 않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이러한데도 “선왕조에서 미처 거행하지 못한 것을 내가 어찌 감히 가벼이 거행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시니, 신들은 실로 성상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무릇 이른바 가벼이 거행한다고 하는 것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늘 말하였는데 즉시 시행하고, 한 사람이 말하였는데 문득 따르는 것이 그것입니다. 지금 이 다섯 신하에 대한 일은 그 시간을 상고해 보면 수십 년도 넘었고, 사람들의 숫자로 말하면 온 나라 사람들이 다 말하였습니다. 그러니 어찌 온 나라 사람들이 수십 년에 걸쳐서 말한 것을 비로소 시행하는 것을 두고 가벼이 시행한다고 하는 경우가 있겠습니까.
전날에 신들이 진소하였을 때 전하께서는 매번 “우선은 뒷날을 기다리라.”고 하교하시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전하의 안색이 검고 순모(舜慕)가 바야흐로 간절하여 온갖 기무를 처리함에 있어 미처 겨를이 없어서 하지 못하는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정녕하게 내린 성상의 분부를 받고 공손히 물러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말씀하신 뒷날이라는 것이 바로 오늘이라고 여겼습니다. 지금 이미 그 날이 되었는데 다시 뒷날을 기다리라는 하교가 있으니, 이는 뒷날이 무궁하여서 다섯 신하를 종사할 날이 다시는 없는 것입니다. 말이 이에 미치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줄줄 흘러내립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전에 이미 대신에게 수의(收議)하였으니, 이는 대신에게 허락한 것이고, 신들에게 조처하겠다는 전교를 내렸으니, 이는 신들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다를 시행하지 않고 갑자기 성명을 도로 거두시었으니, 성상의 이 분부는 한번 내린 명령은 되돌리지 않는다는 데에 누가 될까 염려됩니다.
무릇 다섯 신하의 공덕(功德)의 성대함은 만대토록 우러르고 백대토록 스승으로 삼을 만한 것입니다. 그런즉 비록 성묘(聖廟)에 종사되지 않더라도 참으로 조금도 덜해지거나 깎이는 바가 없을 것입니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신라(新羅)와 고려(高麗) 때에도 종사한 사람이 있는데, 성조(聖朝)의 성대한 문명으로 훌륭한 선비가 이 나라에 태어난 아름다움이 있는데도 최치원(崔致遠)과 설총(薛聰)의 반열에 올라가 참여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서, 조종들께서 인재를 배양하신 아름다운 덕으로 하여금 마침내 징험할 수 없는 데로 돌아가 버리게 하고 만 것입니다. 아, 이는 사문(斯文)이 망한 것이고 국가의 불행입니다. 어찌 어진 신하가 다섯이나 있는데도 도리어 신라나 고려보다 아래에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오늘날에 사람들의 마음이 어둡고 성인의 길이 황폐해져서 사람들이 앞다투어 이록(利祿)에 대한 마음을 품고, 밝은 이치의 학문을 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에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명리(名利)의 마당으로 달려나가고 있는 탓에 윤리를 더럽히는 무리와 강상(綱常)을 어지럽히는 역적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뒤를 이어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이 다섯 신하를 종사하는 예를 속히 거행하지 않은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들은 모두 형편없는 자질을 가진 몸으로 외람되이 성균관 학생의 반열에 끼여 있는 탓에 학문을 함에 있어서 방향을 모르고 말을 함에 있어서 요체를 들 줄 몰라서 한갓 성상의 귀만 시끄럽게 하고, 전하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온 종이에 가득 늘어놓은 말이 한갓 형식적인 데로 돌아가게 되고 말았으며, 전하께서도 역시 이러한 내용으로 답하시었는바, 부끄럽고 황공하여 스스로 용납할 곳이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신들의 말을 죄라고 여기지 마시고 오직 어진 이를 존숭하는 의리를 높이 사서 속히 성명을 내려 성대한 의식을 거행할 수 있게 하여 주소서. 그리하여 위로는 조종조에서 인재를 배양한 아름다움을 밝혀서 선왕께서 미처 행하지 못하신 뜻을 이루고, 아래로는 온 나라의 공론을 펴서 풍속이 무너진 것을 변하게 하소서. 그럴 경우 어찌 한갓 사문(斯文)만의 다행이겠습니까. 실로 국가의 다행일 것입니다. 신들은 격절하고 두려운 마음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주C-001]오현(五賢) : 문경공(文敬公)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문헌공(文獻公)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문정공(文正公)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문원공(文元公)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문순공(文純公)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가리킨다. 이 다섯 사람을 문묘에 종사하자는 논의는, 선조 원년(1568)에 태학생 홍인헌(洪仁憲)이 상소를 올려 조광조를 문묘에 종사하기를 청하고 대사간 백인걸(白仁傑)이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등 사현(四賢)을 종사하기를 청한 데에서 시작되었다. 이황이 죽은 뒤에는 이황까지 아울러 오현을 종사하자는 의논이 발론되었는데, 광해군 2년(1610)에 삼사(三司)와 경외의 유생들이 상소를 올리자 대신에게 수의(收議)한 다음 종사하였다. 《燃藜室記述 別集 卷三 祀典典故》
[주D-001]육관(六館) : 국자감(國子監)의 별칭으로, 성균관을 가리킨다. 당(唐)나라의 제도에 국자감이 국자학(國子學), 태학(太學), 사문학(四門學), 율학(律學), 서학(書學), 산학(算學)을 거느렸으므로, 이를 통칭하여 육관이라 하였다.
[주D-002]순모(舜慕) : 부모를 그리는 마음을 말한다.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 “대효(大孝)는 종신토록 부모를 사모하나니, 50세까지 부모를 사모하는 것을 나는 대순(大舜)에게서 보았다.” 하였다.
청장관전서 제69권
 한죽당섭필 하(寒竹堂涉筆下)
남계묘정비(灆溪廟庭碑)

남계서원(灆溪書院)은 문헌공(文獻公) 정일두(鄭一蠹 일두는 정여창(鄭汝昌)의 호) 선생을 향사(享祀)하는 곳이다. 그 봉사손(奉祀孫) 덕제(德濟)가 묘정비(廟庭碑)를 세웠는데 비문은 본암(本菴 김종후(金鍾厚)의 호)이 지었다.
이 비문을 두고 마을의 대성(大姓)과 사족(士族)들의 비판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는 비문 내용에 성리학(性理學)의 도통(道統)을 열서(列書)하면서 회재 선생(晦齋先生 회재는 이언적(李彦廸)의 호)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본암(本菴)의 과실이라 하였다. 이어서 그렇게 쓰도록 종용한 덕제의 허물도 따졌다.
덕제가 부득이 본암에게 개찬(改撰)을 청하자, 본암이 드디어 제현(諸賢)을 차례로 기록한 것을 삭제하고 다만 ‘예닐곱 분이 나왔다.’고 써서 그대로 비석에 새겼다.
그러나 사론(士論)은 오히려 ‘예닐곱 분이 나왔다.’고 한 ‘예닐곱’ 중에는 또 회재를 넣지 않으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여기고 비판의 소리가 더욱 거세져서 노씨 선국(盧氏宣國)이 도끼로 비문을 찍어 본암의 이름을 깎아냈다. 정씨(鄭氏)는 감사에게 고소하였고 이어 선국(宣國)은 함양(咸陽) 옥에 갇혔다. 지금까지 두세 명의 감사가 바뀌도록 모두 이 사건의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다. 정씨의 말에 의하면,
“마을 사족(士族)의 조상들 가운데 이 서원(書院)의 창건에 공이 있는 이가 많은데 비문에는 다만 강개암(姜介菴 개암은 강익(姜翼)의 호)만을 일컫고 다른 사람은 조금도 언급되지 않았으므로 쟁론(爭論)의 단서가 생긴 것이다.”
하고, 사족(士族)들의 말에 의하면,
“정씨가 사림(士林)들과 의론하지 않고 밤중에 비를 세웠으므로 공론들이 좋지 않다.”
하였다. 그 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는 기자(箕子)가 미개한 나라[夷狄]를 문명국[中華]으로 만든 이후 2천여 년 동안에 유학(儒學)은 존재가 없었다가 고려(高麗)에 와서 정포은(鄭圃隱 포은은 정몽주(鄭夢周)의 호)한 사람이 있었으나 논자(論者)들은 그의 충절(忠節)만을 말하고 유학은 덮어두고 말하지 않았으니, 당시에는 대체로 유학을 높일 줄을 몰랐던 것이다.
이에 우뚝이 사도(斯道)를 위하여 땅에 떨어진 유학의 실마리를 중국에서 이어온 이는 실로 한훤(寒暄 김굉필(金宏弼)의 호) 김 선생(金先生)과 일두(一蠹) 정 선생(鄭先生)을 필두로 하여 이를 이은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호)ㆍ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호)ㆍ율곡(栗谷 이이(李珥)의 호)ㆍ우계(牛溪 성혼(成渾)의 호)ㆍ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호)ㆍ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호)ㆍ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의 호) 제선생(諸先生)이 대대로 일어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크게 빛나서 천하의 도통(道統)이 우리나라에 돌아왔으니 아름답고도 훌륭하구나.
그러나 김(金)ㆍ정(鄭) 두 선생은 모두 화를 입어 언론(言論)과 풍지(風旨)가 크게 드러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학자들이 오래도록 사모하고 가슴아파하는 이유이다. 정 선생(鄭先生)은 함양(咸陽)에 세거(世居)하였으므로 그 자손이 아직도 그곳에 살고 있다.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연간에 개암(介菴) 강익(姜翼) 선생이 발론하여 남계서원을 세워 선생을 제사하였고, 병인년(1566, 명종 21)에 사액(賜額)되었다.
대개 우리나라에 서원(書院)이 있게 된 것은 주무릉(周武陵 무릉은 주세붕(周世鵬)의 별호)의 죽계서원(竹溪書院)이 최초이고 남계서원이 그 다음이다. 아, 선생은 학자의 모범이고 남계는 서원의 으뜸이다. 어찌 이보다 더할 것이 있겠는가?
서원을 창건한 지 2백여 년이 지나도록 비를 세우지 못했는데 이제 여러 선비들이 돌을 다듬고 비문을 새겨 세울 것을 의론하고 종후(鍾厚)에게 비문을 짓기를 청하므로 종후는 감히 적임자가 아니라고 사양할 수 없었다.
삼가 상고하건대, 선생의 사업(事業)과 행실(行實)의 대체(大體)는 《실기(實紀)》에 대략 나타나 있다. 그 영특한 자질과 탁월한 행실은 보고들음에 모두 탄복하겠으니, 이는 진실로 대현(大賢)의 일절(一節)이라 하겠으며, 경(經)ㆍ자(子)를 연구하고 성정(性情)과 이기(理氣)를 명백히 분석한 것 등은 추강 남공(秋江南公 추강은 남효온(南孝溫)의 호)의 찬술(撰述)에 자세히 갖추어 있으니, 후생이 어찌 감히 다시 이를 본떠서 말하겠는가?
공을 정려(旌閭)하고 포장(褒獎)한 것은 정암(靜庵) 선생에서부터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ㆍ문충공(文忠公) 이원익(李元翼)에 이르기까지 조정에 계속 건의하여 마침내 만력(萬歷) 경술년(1610, 광해군 2)에 공자묘(孔子廟)에 배향되었다. 이는 모두 여러 선비들의 소청(疏請)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개암(介菴)은 젊어서 구속되는 바 없이 행동하였으나 자라서는 기질을 변화시켜 도(道)로 들어가서 마침내 순후(醇厚)하게 되었다. 타고난 효성에다 학문은 정미(精微)한 경지에 이르렀고 법도를 세움에는 스스로 터득하는 것을 주로 삼았다.
천거에 의해 소격서 참봉(昭格署參奉)에 임명되었는데, 임명되고 나서 곧 죽었다. 이때 겨우 40여 세였으나 당시의 동료들이 모두들 노성(老成)한 숙덕(宿德)으로 높였다.
동계(桐溪) 선생의 휘는 온(蘊)이다.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행의(行誼)로 천거되었다. 얼마 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다.
조정에서는 엄정한 태도로 곧은 말을 잘하였고 폐주(廢主 광해군) 때에는 아우를 죽이고 모비(母妃)를 금고(禁錮)하는 의론을 반대하다가 10년 동안이나 제주도에서 귀양살았다.
그후 인조(仁祖)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는 여러 번 소를 올려 오랑캐와 강화하는 것을 간쟁하다가 되지 않자 차고 있던 칼을 뽑아 할복(割腹)을 기도하였으나 미수에 그쳤다.
그 후로는 은퇴하여 산속에서 세상을 마침으로써 천하 만대의 막중한 강상(綱常)을 한 몸에 짊어졌다. 아, 정 선생의 도는 높기도 하였고 강ㆍ정(姜鄭 강익ㆍ정온) 두 선생은 하나는 독학(篤學)으로, 하나는 높은 절의로써 모두 여기에 모셔지게 되었으니, 이는 길이 후세에 썩지 않을 만하다. 어찌 비석을 세워야만 전할 것이겠는가. 그렇지만 이후로 이 서원에 들어와서 이 비를 보는 사람들이 이 비로 해서 여러 선생들의 도덕과 절의에 감격하여 스스로 힘쓸 바를 알아, 들어와서는 집에서 효도하고 마을에서 공순하며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한다면 이 비를 세우는 것 또한 도움됨이 있을 것이다. 여러 군자들이여, 어찌 서로 면려(勉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후학(後學) 청풍(淸風) 김종후(金鍾厚)가 짓고 황운조(黃運祚)가 쓰다.

[주D-001]김(金)ㆍ정(鄭) …… 화를 입어 : 김ㆍ정은 김굉필(金宏弼)과 정여창(鄭汝昌). 이들은 모두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연산군(燕山君) 4년(1498)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일파로 몰려서 김굉필은 희천(熙川), 정여창은 종성(鍾城)에 각기 유배되었고, 그 후 다시 갑자사화(甲子士禍 : 1504)가 일어나 김굉필은 사사(賜死)되고 정여창은 이미 죽은 뒤였으므로 부관참시(剖棺斬屍)된 것을 말한다.
[주D-002]죽계서원(竹溪書院) : 주세붕(周世鵬)이 안향(安珦)을 제사하기 위해 세운 소수서원(紹修書院)이 순흥(順興)의 죽계(竹溪)에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주D-003]실기(實紀) : 정구(鄭逑)가 인조(仁祖) 13년(1635)에 엮은 것으로 1책이다. 정식 명칭은 《문헌공실기(文獻公實紀)》.
[주D-004]추강 남공(秋江南公)의 찬술(撰述) : 《秋江集 師友名行錄》에 “정여창(鄭汝昌) …… 지리산에 들어가 3년간 나오지 않고 오경(五經)을 연구하여 그 깊은 진리를 다 터득, 체(體)와 용(用)은 근원은 한가지이지만 갈린 끝만이 다르고, 선(善)과 (惡)의 성(性)은 같으나 기질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 그의 성리학은 누구나 존경하였다 …… ”고 한 것을 말한다.

 

 

학봉집 제1권
 시(詩)
대곡서당(大谷書堂)의 공사(工事)를 감독하다가 우연히 진퇴체(進退體)의 시구를 얻어서 제생(諸生)들에게 보이다. 갑신년(1584, 선조 17). 이하는 《금성록(錦城錄)》이다.


푸른 시내 옥 울리며 푸른 산을 감돌고 / 碧溪鳴玉抱靑巒
골짝은 깊숙하여 경내 절로 한가롭네 / 洞府幽幽境自閒
산 속 집은 가리어져 민가와 격해 있고 / 峀幌掩來煙火隔
구름이 트인 곳에 바다가 드넓네 / 雲關開處海天寬
뉘라 알랴 선비들이 공부하는 서당이 / 誰知俊造藏修地
심상하게 성과 시장 사이에 있을 줄을 / 只在尋常城市間
학문 흥기시키려는 제현들의 뜻 덕분에 / 多賴諸賢興學意
오두도 또한 역시 글 물결을 건너누나 / 遨頭亦與涉文瀾


 

[주C-001]대곡서당(大谷書堂) : 나주 금성산(錦城山) 기슭에 있는 서원으로 문경공(文敬公)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문헌공(文獻公)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문정공(文正公)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문원공(文元公)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문순공(文純公) 퇴계(退溪) 이황(李滉) 등 오현(五賢)을 향사(享祀)하였다.
[주C-002]진퇴체(進退體) : 율시(律詩)에서 운자(韻字)를 쓰는 격식 가운데 하나로, 한 수의 시에서 두 개의 비슷한 운자를 압운(押韻)으로 하여 격구(隔句)마다 운자를 전환하는 시체(詩體)를 말한다.
[주D-001]오두(遨頭) : 고을 수령을 가리킨다. 송(宋) 나라 때 4월 19일을 성도(成都)에서는 완화(浣花)라고 하면서 두자미(杜子美)의 초당(草堂)에 있는 창랑정(滄浪亭)에서 태수(太守)가 잔치를 벌였는데, 이때 온 고을 사람들이 나와 보면서 태수를 오두라고 하였다.


鄭汝昌


鄭汝昌河東人虞候六乙子麟趾三從孫定宗孫婿世宗庚午生宇伯勗一蠹 又夢翁金宗直門人八歲詔使張寧見而
歎異作說名之盖能昌其家之謂也十七父死於施愛之亂求遺軆於積屍之中而返葬成宗癸卯進士深深性理之源遂
窮軆用之學以孝行薦為昭格署參奉庚戌以奉事登别試歴翰林為說書輔導以

▼원문보기24b  처음으로
正忤於東宫出補安隂嘗與金宏弼同志宏弼明於理汝昌明於數入智異山三年不出明五經之藴朱溪君南孝溫常敬服
焉其學以濂洛為凖的讀書以窮理為先處心以不欺為主曰用工夫不出誠敬之外嘗有詩曰風蒲獵弄輕柔四月花開麥己秋看盡頭流千萬疊扁舟又下大江流燕山戊午配鍾城甲子卒于謫所年五十五尋遭剖棺之慘中宗丁卯贈都承旨戊寅贈右相加贈領相謚文獻光海庚戌從

 

 

 

과거 및 취재

정여창(鄭汝昌)

[문과] 성종(成宗) 21년(1490) 경술(庚戌) 별시(別試) 병과(丙科) 7위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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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욱(伯勖)
일두(一蠹)
시호 문헌(文獻)
생년 경오(庚午) 1450년
합격연령 41세
본관 하동(河東)
거주지 미상(未詳)

[이력사항]

[가족사항]

 
[부]  성명 : 정육을(鄭六乙)         [조부]  성명 : 정복주(鄭復周)
[증조부]  성명 : 정지의(鄭之義)   [외조부]  성명 : 최효손(崔孝孫)
[처부]   성명 : 이말생(李末生)   봉작 : 도평군(桃平君)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규장각[奎106])

 

 

 一蠹先生遺集卷之一
 
岳陽 a_015_467a


風蒲泛泛弄輕柔。四月花開麥已秋。看盡頭流千萬疊。孤舟又下大江流

 

 

간이집 제8권
 동군록(東郡錄)
대나무에게 넙죽 절하는 창포[蒲拜竹]


가녀린 잎새 한들한들 그 자태 또한 볼만한데 / 輕柔獵獵也風姿
차군에 재배를 올리건만 차군은 아는 체도 않네 / 再拜此君君不知
구절포(九節蒲)의 장년 따위를 과시할 틈이 있으리요 / 九節長年何暇詑
탄우의 기상에 얼룩덜룩 죽순이 절로 터지는걸 / 呑牛氣自籜斑披


 

[주D-001]가녀린 …… 볼만한데 :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의 〈악양(岳陽)〉이라는 칠언 절구(七言絶句) 첫머리에 ‘풍포렵렵농경유(風蒲獵獵弄輕柔)’라는 표현이 있어서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었는데,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송(宋)나라 도잠(陶潛)의 〈임평도중(臨平道中)〉 시에 “가녀린 잎새 한들한들 바람과 장난치니, 잠자리 앉혀 보려 한들 마음대로 되겠는가.[風蒲獵獵弄輕柔 欲立蜻蜓不自由]”라는 절창(絶唱)이 전한다. 《一蠹集 遺集 卷1》
[주D-002]차군(此君) : 대나무의 별명이다. 동진(東晉)의 왕휘지(王徽之)가 대나무를 무척이나 좋아하여 “하루도 차군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何可一日無此君]”라고 말한 데에서 대나무의 별칭이 차군(此君)으로 되었다. 왕휘지가 어느 날 어떤 사대부의 집에 멋있는 대나무가 있는 것을 보고는 그 집에 들르자, 그 집주인이 술자리를 마련해 놓고 기다렸는데, 왕휘지가 곧장 대숲으로 가서 감상한 뒤에 바로 떠나려고 하니, 주인이 당황하면서 그를 끝내 만류하여 술자리를 함께했다는 고사가 있다. 《晉書 卷80 王羲之列傳 王徽之》
[주D-003]구절포(九節蒲)의 장년(長年) : 구절포는 1촌(寸)에 아홉 마디 이상 되는 창포로, 장수(長壽)하는 선약(仙藥)으로 일컬어져 왔다. 《抱朴子 仙藥》
[주D-004]탄우(呑牛) : 대나무 줄기의 반점(斑點)을 범의 무늬로 비유하여 말한 것이다. 호랑이나 표범의 새끼는 아직 무늬가 제대로 갖추어지기 전부터 소를 집어삼킬 기상[呑牛之氣]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 있다. 《尸子 卷下》
계곡선생집 제9권
 제문(祭文) 42수(首)
증 영의정 이이에게 임금이 내린 제문[贈領議政李珥賜祭文]

하늘이 근원한 도 / 道原於天
사람을 통해 전해지나니 / 因人以傳
인물의 성쇠(盛衰)에 따라 / 人之汚隆
도의 발현 여부가 결정되도다 / 道實係焉
옛날 명철하신 임금들께서 / 稽昔哲王
유현(儒賢)을 높이 떠받든 결과 / 致崇儒先
유도(儒道)가 더욱 중하게 되어 / 斯文增重
도맥이 연면(連綿)히 흘러왔도다 / 道脈以延
우리 본조로 말하면 / 予唯本朝
징험할 문헌이 충분도 한데 / 文獻足徵
다섯 신하 출현하여 / 爰有五臣
유도 크게 펼쳐짐에 / 儒道大弘
문질(文質) 빈빈(彬彬)하게 되어 / 質有其文
군자의 나라 되었도다 / 彬彬可稱
비범한 기운 품부받고 / 間氣所鍾
경이 뒤이어 나왔는데 / 卿乃代興
재지(才志)가 크고 높고 / 才高志大
기질(氣質) 청수하였어라 / 氣淸質粹
한 번 변화시켜 도에 이르게 하려 하며 / 一變至道
참다운 지식 실천 궁행했고 / 眞知實履
경과 의 견지하며 / 敬義夾持
성과 명 양쪽 다 이루었도다 / 誠明兩至
글로 내보임에 / 發而爲文
심오한 경지 자유자재 구사하였고 / 精深閎肆
세상일 관심 둠에 / 留心世務
그 계책 정밀하기만 하였도다 / 孰講精思
체용(體用) 온전히 갖추어져 / 全體大用
빠짐없이 관통하였나니 / 貫穿靡遺
기회만 마련되면 / 如有用我
솜씨 보이려 별렀도다 / 擧以措之
포의(布衣) 벗고서 조정에 진출함에 / 釋褐登朝
기린이 출현한 듯 봉황이 나타난 듯 / 麟出鳳儀
선조 대왕 지우(知遇) 받아 / 遭逢宣廟
자나깨나 보필했네 / 寤寐英弼
그 덕업 표창하여 / 賞卿德業
시종(侍從) 반열 발탁함에 / 置卿近密
엄숙하게 책선(責善)하고 / 陳善責難
시시비비 가렸나니 / 雍容吁咈
왕업(王業)을 이루는 일 / 謨猷底績
군신(君臣)간에 뜻 맞았네 / 契合彌切
간사한 자 눈흘기고 / 群邪側目
남몰래 참소가 들어갔어도 / 盜言潛媒
임금이 밝게 살펴 주시어 / 天鑑孔昭
음모가 저절로 좌절됐도다 / 蜮弩自摧
장차 크게 쓰이면서 / 方期大用
정승에 오를 그 즈음에 / 進踐台階
홀연히 대들보 내려앉아 / 樑木欻隕
유림에 슬픔 안겼도다 / 儒林興哀
경세제민(經世濟民)의 그 재질과 / 經濟之才
심오하고 은미한 학문 세계 / 淵微之學
저술 통해 드러내어 / 形於論著
대충은 실마리 잡게 했네 / 略可尋繹
격몽요결(擊蒙要訣)과 / 擊蒙有訣
성학집요(聖學輯要) 보게 되면 / 聖學有輯
성정의 본말(本末)과 / 情性源委
이기의 상관성이 / 理氣離合
적나라하게 파헤쳐져 / 窮深極微
해와 별처럼 빛나는데 / 炳若日星
독창적인 주장을 개진한 것도 / 間擴未發
모두가 유경에 근본했어라 / 悉本遺經
사람은 이미 가고 없어도 / 其人雖亡
그 도 환하게 밝혀 주면서 / 其道則明
선현(先賢) 빛내고 후세 이끌어 주었나니 / 光前啓後
그 공적 길이 귀감이 되리로다 / 百世可程
내가 잠저에 있을 때부터 / 予從潛邸
그 풍도(風度) 사모했는데 / 夙慕風規
시서(詩書)를 읽으면서도 / 誦詩讀書
같은 시대 아닌 것을 한탄했도다 / 恨不同時
이제 보위(寶位) 이어받아 / 逮玆踐阼
임금과 스승 책임 겸하게 되었는데 / 任兼君師
훌륭한 전범(典範)이 멀지 않으니 / 賢範匪遠
유추해 교화를 펼 수 있으리라 / 化理可推
이에 유사에게 명을 내려서 / 爰命有司
표창하는 의식 거행케 하였나니 / 式擧褒隆
추증(追贈)하는 직질(職秩)은 / 何以贈之
영의정을 제수하고 / 秩視上公
제사를 올릴 때는 / 何以祭之
술과 음식 맛있게 마련토록 하였노라 / 庶羞醇醲
구천(九泉)에 계신 혼령이시여 / 九原有知
나의 충정(衷情)을 받아 주시라 / 感予深衷

[주D-001]징험할 …… 한데 : 도맥(道脈)의 전승을 증거할 만한 문헌이 많다는 뜻이다. 《논어(論語)》 팔일(八佾)에 “하(夏) 나라의 예(禮)를 내가 말할 수는 있으나 그 후손의 나라인 기(杞) 나라에서 충분한 증거를 찾을 수 없으며, 은(殷) 나라의 예를 내가 말할 수는 있으나 그 후손의 나라인 송(宋) 나라에서 충분한 증거를 찾을 수 없으니, 이는 문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문헌이 충분하다면 내 말을 증거할 수가 있을 텐데 말이다.”라는 공자의 말이 실려 있다.
[주D-002]다섯 신하 :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말한다.
[주D-003]문질(文質) …… 되어 : 형식과 내용이 아름답게 조화된 것을 말한다. 《논어(論語)》 옹야(雍也)에 “본바탕인 질(質)이 겉모양인 문(文)보다 수승하면 촌스럽게 되고, 문(文)이 질(質)보다 수승하면 겉만 번지르르하게 되나니, 문과 질이 조화되어야만 군자라 할 수 있다.” 하였다.
[주D-004]한 번 …… 하며 : 왕도 정치(王道政治)의 실현을 목표로 삼았다는 말이다. 《논어(論語)》 옹야(雍也)에 “제(齊) 나라를 한 번 변화시키면 노(魯) 나라의 수준을 만들 수 있고, 노 나라를 한 번 변화시키면 선왕(先王)의 도에 이르게 할 수 있다.” 하였다.
[주D-005]경과 의 견지하며 : 안과 밖을 공경하는 마음과 의리 정신으로 닦고 대처해 나갔다는 말이다. 《주역(周易)》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군자는 공경심으로 안을 바루고 의리에 입각하여 밖을 바르게 한다.[君子 敬以直內 義以方外]”라 하였다.
[주D-006]성과 …… 이루었도다 : 천부적인 덕성과 후천적인 학습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었다는 말이다. 《중용(中庸)》에 “선천적인 성(誠)을 바탕으로 후천적인 명(明)의 경지에 자연히 이르는 것을 성(性)이라 하고, 명(明)을 바탕으로 성(誠)에 이르는 것을 교(敎)라 한다.” 하였다.
[주D-007]유경 : 성현(聖賢)이 남긴 글을 말한다.
[주D-008]잠저 : 잠룡(潛龍)의 거처, 즉 왕위에 오르기 이전의 시절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