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요람(歷代要覽)/선덕(宣德)

선덕(宣德) 명 선종(宣宗), 8년(1426년)

아베베1 2011. 4. 9. 15:01

역대요람(歷代要覽)
선덕(宣德) 명 선종(宣宗), 8년(1426년)


원년(元年) 병오.황제께서 우리나라에서 누차 표문(表文)을 보내어 지방의 산물(産物)을 바쳤다 하여 내관 윤봉과 박실을 보내어 칙서를 가지고 와 채폐(彩幣)를 주었다.
○ 처음으로 윤봉(輪封)하였다.
12월 13일 《육전속집(六典續集)》을 시행하였다.
○ 배신 김시우(金時遇)가 경사(京師)로부터 돌아왔는데, 황제는 특별히 《오경(五經)》ㆍ《사서(四書)》ㆍ《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을 하사하였다.
2년 황제는 태감(太監) 창성(昌盛)과 윤봉(尹鳳)을 보내어 칙서(勅書)를 가지고 와 말 5천 필을 뽑아 바치게 하고, 은(銀)과 채폐를 하사하였다.
○ 황제의 칙명으로써 공조 판서(工曹判書) 성달생(成達生)의 딸ㆍ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 차지남(車指南)의 딸ㆍ우군사정(右軍司正) 안복지(安復志)의 딸ㆍ시위사우령호군(侍衛司右右領護軍) 정효충(鄭孝忠)의 딸ㆍ중군부사정(中軍副司正) 최미(崔瀰)의 딸ㆍ좌군사직(左軍司直) 노종득(盧從得)의 딸을 뽑고, 또 차반(茶盤)을 만들 수 있는 부녀(婦女) 10명을 골라서 흠차(欽差) 창성(昌盛) 등을 딸려 보내 바쳤다.
3년 황제의 칙명으로써 순창수(淳昌守) 한영정(韓永矴)의 딸을 보내라 하므로 창성을 딸려 보내어 바쳤다.
○ 원민생(元閔生)이 경사(京師)로부터 돌아오니, 황제는 칙명을 내려 육량관(六梁冠) 1정(頂)을 주었다.
4년 2월 황제는 소감(少監) 김만(金滿)을 보내어 최씨(崔氏)의 아버지 최득비(崔得霏)에게 제전(祭奠)을 내리고, 11월에 또 김만을 보내어 칙유(勅諭)를 가지고 와 매와 개를 바치게 하였다.
○ 공녕군(恭寧君) 이인(李裀)을 보내어 경사에 가 세공(歲貢)인 금은(金銀)으로 된 그릇을 면제해줄 것을 청하니, 황제는 칙서(勅書) 두 벌을 내렸는데, 한 가지는, “금은은 원래 본국에서 생산하는 것이 아니니 지금부터 공물(貢物)을 바치되 다만 토산물(土産物)로써 성의를 다하라.”하고, 한 가지는, “지금부터 조정(朝廷)에서 보내는 내관(內官)과 내사인(內史人) 등이 왕의 나라에 이르거든 예(禮)로써 대접하되 물건으로써 선사하지 말 것이니, 물건을 요구하는 데는 오직 어보(御寶 옥새(玉璽))가 찍힌 칙서로 증거를 삼아서 응하고, 만약 짐(朕)의 말이라고 핑계하여 요구하거나 무리하게 요구하는 것이면 다 듣지 말라. 왕(王)의 부자(父子)는 조정을 공경히 섬긴 지 이미 해를 많이 겪어 오래될수록 더욱 돈독하여 짐이 깊이 아는 바이므로 좌우의 근신이 이간(離間)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왕은 걱정 말라.”하였다.
5년 배신 오승(吳陞)이 경사(京師)로부터 돌아오는데 황제는 칙명을 내려 특별히 세자(世子)의 조복(朝服) 1부(部)를 주었다.
○ 황제는 창성(昌盛)을 보내어 칙서를 가지고 와 칭찬하여 장려하고, 황제가 사용하던 보장(寶裝)인 조환(條環)ㆍ칼ㆍ은폐(銀幣)ㆍ자기(磁器) 등의 물건을 주고, 여러 가지 해산식물(海産食物)ㆍ표범ㆍ개ㆍ해청(海靑 독수리[鵰]의 일종)ㆍ황백(黃白)의 매를 요구하였다.
6년 황제는 윤봉(尹鳳) 등을 보내어 칙서를 가지고 와 해청(海靑)ㆍ누런 매를 바치게 하였다.
7년 황제는 창성(昌盛) 등을 보내어 칙서를 가지고 와 칭찬하고 경우(耕牛) 1만 마리를 뽑아 요동(遼東)으로 보내어 물건과 바꾸게 하였다.
○ 배신 윤효동(尹孝童)이 경사(京師)로부터 돌아오는데 황제는 칙명을 내려 이르기를, “전에 명(命)하여 매수(買收)하려던 경우는 이제 왕(王)의 아룀을 들으니, 나라에서 생산되는 것이 많지 않다 하니, 있는 대로 형편에 따라 보내 와 교역하라.”하였다.
8년 윤 8월 황제는 지휘첨사(指揮僉事) 맹날가(孟可)를 보내어 칙서를 가지고 와 선유(宣諭)하기를, “짐(朕)이 이미 범찰(凡察) 이만주(李滿住) 등에게 타일러 노략질해 간 사람ㆍ말ㆍ소를 다 돌려주라 했으니, 왕(王)도 역시 모름지기 건주위(建州衛)의 우마(牛馬) 등 물건 얻은 것을 돌려주고 지금부터 각각 천도(天道)에 순(順)하여 이웃 나라와 화목하고, 아랫사람을 단속하여 서로 침범하지 말아서 태평의 복을 함께 누리게 하라.”하였다. 10월에 또 창성(昌盛)을 보내어 해청(海靑)과 음식을 잘 만드는 여자를 요구하였다.
○ 부신(部臣) 박안신(朴安臣)이 경사(京師)로부터 돌아왔는데, 가지고 온 칙서에 또 이르기를, “올린 글을 보니, 자제를 보내어 북경국학(北京國學) 혹은 요동향학(遼東鄕學)에 들어와 독서(讀書)하도록 하겠다 하니, 선(善)에 힘쓰고 도(道)를 구하는 마음을 잘 알겠다. 그러나 산천(山川)이 멀고 기후가 달라 자제가 와서 혹시 객지 생활에 오랜 편안히 지낼 수 없거나 혹시 부자(父子)간의 생각하는 정이 양쪽에서 다 간절할 것이므로 이제 왕(王)에게 《오경(五經)》ㆍ《사서(四書)》ㆍ《대전(大全)》 각 1부(部)를 주어 자제를 가르치는데 쓰도록 하노라.”하였다.
○ 최윤덕(崔潤德) 등을 보내어 길을 갈라 가서 이만주(李滿住)를 쳤다.
9년 황제는 첨사(僉事) 맹날가(孟可)를 보내어 홀라온(忽剌溫) 야인(野人)에게 칙명(勅命)으로 타일러 그들이 잡아갔던 우리나라 사람을 돌려보내게 하고, 이어 우리나라를 타일러 역시 일찍이 돌려보내지 않은 야인의 인구와 우마(牛馬)를 돌려보내게 하였다.
10년 선종(宣宗)이 붕(崩)하고, 영종 법천입도 인명성경 소문헌무 지덕광효 예황제(英宗法天立道仁明誠敬昭文憲武至德廣孝睿皇帝) 휘 기진(祁鎭)이 즉위하여 낭중(郞中) 이약(李約)을 보내어 등극조서(登極詔書)를 반포하고, 또 내관(內官) 이충(李忠)을 보내어 우리나라의 부녀(婦女) 김흑(金黑) 등 52인을 돌려보냈는데, 이는 먼저 뽑혀 들어갔던 여자였다.
○ 배신 남지(南智)를 보내어 아뢰기를, “본국으로부터 온 서적(書籍)은 적고, 신이 지금 간직하여 둔 바의 《호삼성음주자치통감(胡三省音註資治通鑑)》과 조완벽(趙完璧)의 《통감원위(通鑑源委)》가 편질(編帙)이 흩어지고 빠진 데가 많이 있어 참고하고 열람하는 데 방해가 있으며, 또 김이상(金履祥)의 《통감(通鑑)》ㆍ진경(陳桱)의 《역대필기(歷代筆記)》ㆍ승상(丞相) 탈탈(脫脫)이 편찬한 《송사(宋史)》등의 책이 본국(本國)에는 없으므로 모든 책을 얻어서 강구(講究)하기를 원하오니, 바라건대, 내려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