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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宣德) 명 선종(宣宗), 8년(1426년) |
원년(元年) 병오.황제께서 우리나라에서 누차 표문(表文)을 보내어 지방의 산물(産物)을 바쳤다 하여 내관 윤봉과 박실을 보내어 칙서를 가지고 와 채폐(彩幣)를 주었다.
○ 처음으로 윤봉(輪封)하였다.
12월 13일 《육전속집(六典續集)》을 시행하였다.
○ 배신 김시우(金時遇)가 경사(京師)로부터 돌아왔는데, 황제는 특별히 《오경(五經)》ㆍ《사서(四書)》ㆍ《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을 하사하였다.
2년 황제는 태감(太監) 창성(昌盛)과 윤봉(尹鳳)을 보내어 칙서(勅書)를 가지고 와 말 5천 필을 뽑아 바치게 하고, 은(銀)과 채폐를 하사하였다.
○ 황제의 칙명으로써 공조 판서(工曹判書) 성달생(成達生)의 딸ㆍ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 차지남(車指南)의 딸ㆍ우군사정(右軍司正) 안복지(安復志)의 딸ㆍ시위사우령호군(侍衛司右右領護軍) 정효충(鄭孝忠)의 딸ㆍ중군부사정(中軍副司正) 최미(崔瀰)의 딸ㆍ좌군사직(左軍司直) 노종득(盧從得)의 딸을 뽑고, 또 차반(茶盤)을 만들 수 있는 부녀(婦女) 10명을 골라서 흠차(欽差) 창성(昌盛) 등을 딸려 보내 바쳤다.
3년 황제의 칙명으로써 순창수(淳昌守) 한영정(韓永矴)의 딸을 보내라 하므로 창성을 딸려 보내어 바쳤다.
○ 원민생(元閔生)이 경사(京師)로부터 돌아오니, 황제는 칙명을 내려 육량관(六梁冠) 1정(頂)을 주었다.
4년 2월 황제는 소감(少監) 김만(金滿)을 보내어 최씨(崔氏)의 아버지 최득비(崔得霏)에게 제전(祭奠)을 내리고, 11월에 또 김만을 보내어 칙유(勅諭)를 가지고 와 매와 개를 바치게 하였다.
○ 공녕군(恭寧君) 이인(李裀)을 보내어 경사에 가 세공(歲貢)인 금은(金銀)으로 된 그릇을 면제해줄 것을 청하니, 황제는 칙서(勅書) 두 벌을 내렸는데, 한 가지는, “금은은 원래 본국에서 생산하는 것이 아니니 지금부터 공물(貢物)을 바치되 다만 토산물(土産物)로써 성의를 다하라.”하고, 한 가지는, “지금부터 조정(朝廷)에서 보내는 내관(內官)과 내사인(內史人) 등이 왕의 나라에 이르거든 예(禮)로써 대접하되 물건으로써 선사하지 말 것이니, 물건을 요구하는 데는 오직 어보(御寶 옥새(玉璽))가 찍힌 칙서로 증거를 삼아서 응하고, 만약 짐(朕)의 말이라고 핑계하여 요구하거나 무리하게 요구하는 것이면 다 듣지 말라. 왕(王)의 부자(父子)는 조정을 공경히 섬긴 지 이미 해를 많이 겪어 오래될수록 더욱 돈독하여 짐이 깊이 아는 바이므로 좌우의 근신이 이간(離間)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왕은 걱정 말라.”하였다.
5년 배신 오승(吳陞)이 경사(京師)로부터 돌아오는데 황제는 칙명을 내려 특별히 세자(世子)의 조복(朝服) 1부(部)를 주었다.
○ 황제는 창성(昌盛)을 보내어 칙서를 가지고 와 칭찬하여 장려하고, 황제가 사용하던 보장(寶裝)인 조환(條環)ㆍ칼ㆍ은폐(銀幣)ㆍ자기(磁器) 등의 물건을 주고, 여러 가지 해산식물(海産食物)ㆍ표범ㆍ개ㆍ해청(海靑 독수리[鵰]의 일종)ㆍ황백(黃白)의 매를 요구하였다.
6년 황제는 윤봉(尹鳳) 등을 보내어 칙서를 가지고 와 해청(海靑)ㆍ누런 매를 바치게 하였다.
7년 황제는 창성(昌盛) 등을 보내어 칙서를 가지고 와 칭찬하고 경우(耕牛) 1만 마리를 뽑아 요동(遼東)으로 보내어 물건과 바꾸게 하였다.
○ 배신 윤효동(尹孝童)이 경사(京師)로부터 돌아오는데 황제는 칙명을 내려 이르기를, “전에 명(命)하여 매수(買收)하려던 경우는 이제 왕(王)의 아룀을 들으니, 나라에서 생산되는 것이 많지 않다 하니, 있는 대로 형편에 따라 보내 와 교역하라.”하였다.
8년 윤 8월 황제는 지휘첨사(指揮僉事) 맹날가(孟
○ 부신(部臣) 박안신(朴安臣)이 경사(京師)로부터 돌아왔는데, 가지고 온 칙서에 또 이르기를, “올린 글을 보니, 자제를 보내어 북경국학(北京國學) 혹은 요동향학(遼東鄕學)에 들어와 독서(讀書)하도록 하겠다 하니, 선(善)에 힘쓰고 도(道)를 구하는 마음을 잘 알겠다. 그러나 산천(山川)이 멀고 기후가 달라 자제가 와서 혹시 객지 생활에 오랜 편안히 지낼 수 없거나 혹시 부자(父子)간의 생각하는 정이 양쪽에서 다 간절할 것이므로 이제 왕(王)에게 《오경(五經)》ㆍ《사서(四書)》ㆍ《대전(大全)》 각 1부(部)를 주어 자제를 가르치는데 쓰도록 하노라.”하였다.
○ 최윤덕(崔潤德) 등을 보내어 길을 갈라 가서 이만주(李滿住)를 쳤다.
9년 황제는 첨사(僉事) 맹날가(孟
10년 선종(宣宗)이 붕(崩)하고, 영종 법천입도 인명성경 소문헌무 지덕광효 예황제(英宗法天立道仁明誠敬昭文憲武至德廣孝睿皇帝) 휘 기진(祁鎭)이 즉위하여 낭중(郞中) 이약(李約)을 보내어 등극조서(登極詔書)를 반포하고, 또 내관(內官) 이충(李忠)을 보내어 우리나라의 부녀(婦女) 김흑(金黑) 등 52인을 돌려보냈는데, 이는 먼저 뽑혀 들어갔던 여자였다.
○ 배신 남지(南智)를 보내어 아뢰기를, “본국으로부터 온 서적(書籍)은 적고, 신이 지금 간직하여 둔 바의 《호삼성음주자치통감(胡三省音註資治通鑑)》과 조완벽(趙完璧)의 《통감원위(通鑑源委)》가 편질(編帙)이 흩어지고 빠진 데가 많이 있어 참고하고 열람하는 데 방해가 있으며, 또 김이상(金履祥)의 《통감(通鑑)》ㆍ진경(陳桱)의 《역대필기(歷代筆記)》ㆍ승상(丞相) 탈탈(脫脫)이 편찬한 《송사(宋史)》등의 책이 본국(本國)에는 없으므로 모든 책을 얻어서 강구(講究)하기를 원하오니, 바라건대, 내려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