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요람(歷代要覽)/경태(景泰)

경태(景泰) 명 대종(代宗), 세종(世宗) 32년(1450년)

아베베1 2011. 4. 9. 15:03

역대요람(歷代要覽)
경태(景泰) 명 대종(代宗), 세종(世宗) 32년(1450년)


원년(元年) 세종대왕 32년. 황제의 명(命)으로써 말 5천 필을 골라 10대로 나누어 경사(京師)에 보냈다.
○ 황제는 한림(翰林) 예겸(倪謙)과 급사중(給事中) 사마순(司馬恂)을 보내어 등극조서(登極詔書)를 반포(頒布)하고 채폐를 하사하였다.
○ 세종(世宗)이 승하(昇遐)하니, 문종대왕(文宗大王)이 즉위함. 황제는 또 태감(太監) 윤봉(尹鳳)을 보내어 제전(祭奠) 및 시호(諡號)를 주고 또 승습(承襲)을 허락하였다.
8월 영종(英宗)이 오랑캐 진중에서 돌아왔다.
2년문종 공순 흠명인숙 광문성효대왕(文宗恭順欽明仁肅光文聖孝大王) 원년(元年) 사은사(謝恩使) 황보인(皇甫仁)이 고명(誥命)을 가지고 왔다. 문종(文宗)이 승하(昇遐)하고 노산(魯山)이 즉위(卽位)함. 5월에 황제는 장자(長子) 견유(見濡)를 세워 태자(太子)로 삼고, 전(前) 태자를 기왕(沂王)으로 고쳐 봉하고, 이부(吏部) 진둔(陳鈍)을 보내어 책립(冊立)하였다는 조서(詔書)를 반포하였다. 또 9월에 좌감승(左監丞) 김유(金)를 보내어 제전(祭奠) 및 시호를 주고, 또 고명을 주었다.
5년노산(魯山) 2년. 배신 황치신(黃致身)이 경사(京師)로부터 돌아왔는데, 황제는 칙명을 내려 《송사(宋史)》 1부(部)를 주었다.
6년 을해년 세조 혜장 승천체도 열문영무 지덕융공 성신명예 흠숙인효대왕(世祖惠莊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 원년(元年) 노산(魯山)이 세조(世祖)에게 왕위(王位)를 전(傳)하였다.
7년 병자년에 칠신(七臣)박팽년(朴彭年)과 박인수(朴仁叟)는 세종조(世宗朝)에 등제(登第)하여 성삼문(成三問) 등과 항상 집현전(集賢殿)에서 왕에게 중히 여김을 받았다. 을해년에 광묘(光廟 세조(世祖))가 임금의 자리를 물려받자, 팽년은 왕(단종)의 일은 마침내 할 수 없음을 알고 경회루(慶會樓) 못에 임하여 스스로 죽고자 하니, 성삼문이 굳이 제지하며 말하기를, “방금 왕위가 비록 옮겨졌으나 임금께서 아직도 상왕(上王)으로 계시니, 우리가 죽지 않으면 아직도 후일에 도모할 수 있다. 도모해서 이루지 못하면 죽어도 늦지 않으니 금일의 일은 국가에 무익하다.”하니, 박팽년은 그 말을 좇아 드디어 성삼문과 몰래 모의하다가 얼마 후에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나가게 되었다. 광묘(光廟)에게 일을 아뢸 때에 신이라고 칭하지 않고 다만 ‘모관(某官) 박모(朴某)’라고 썼으나 조정(朝廷)에서는 알지 못했다. 이듬해에 들어와 형조 참판(刑曹參判)이 되어 성삼문과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成勝)ㆍ무인(武人) 유응부(兪應孚)ㆍ문관(文官) 하위지(河緯地)ㆍ이개(李愷)ㆍ유성원(柳誠源)ㆍ김질(金礩)ㆍ상왕(上王)의 외숙(外叔) 권자신(權自愼) 등과 더불어 상왕을 복위시킬 것을 모의했다. 당시 명 나라의 사신이 와서 태평관(太平館)에 머물고 있었는데 광묘가 상왕(上王)과 같이 사신을 청하여 창덕궁(昌德宮)에서 잔치를 베풀고자 하니, 박팽년 등이 모의하기를, “이날 성승 및 유응부로 하여금 운검(雲劍)이 되어 연청(宴廳)에서 거사(擧事)하여 성문(城門)을 닫고, 왕의 우익(右翼) 되는 사람을 제거하면 상왕을 복위시키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과 같으리라.”하였다. 유응부가 말하기를, “왕과 세자는 내가 맡을 것이니, 나머지는 여러분이 처치하라.”하였다. 모의가 이미 정해졌는데 마침 그날 왕은 명하여 운검(雲劍)을 파(罷)하여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세자 또한 병으로 따르지 않았으나 유응부는 오히려 들어가 치고자 하니, 성삼문이 제지하기를, “지금 세자가 본궁(本宮)에 있고, 운검은 쓰이지 않으니 이것은 하늘이 시킨 것이다. 만약 여기에서 거사하였다가 세자가 경복궁(景福宮)으로부터 군대를 동원한다면 성패(成敗)를 알 수 없으니, 다른 날을 기다려 거사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하였다. 유응부가 말하기를, “일은 신속하게 처리하는 것이 중요하니, 만약 늦춘다면 훗날 일이 누설될까 두렵고, 세자가 비록 이 자리에 있지 않을지라도 우익(羽翼)들이 모두 여기에 있으니, 금일에 다 죽이고 상왕의 호령을 받들어 무사(武士)로 하여금 그쪽으로 가서 세자를 제거하면 될 것이니 천재일시(天載一時)의 얻기 어려운 좋은 기회를 잃어서는 안 된다.”하였다. 성삼문이 말하기를, “완벽한 계획이 아니다.”하니, 드디어 멈추고 거사하지 않았다. 김질(金礩)은 일이 반드시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알고, 처부(妻父) 정창손(鄭昌孫)에게 달려가 모의하여 말하기를, “금일 세자가 왕을 수행(隨行)하지 않고, 특히 운검(雲劍)을 없애어, 박팽년ㆍ성삼문이 그 모의를 중지하였으니, 이것은 천명(天命)입니다. 먼저 고발하여 요행으로 생명을 구하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하니, 정창손이 곧 대궐로 가 반역(反逆)을 아뢰어 말하기를, “신(臣)은 실로 몰랐고, 김질 홀로 거기에 참여하였으니, 김질의 죄는 만번 죽어도 마땅합니다.” 하였다. 왕은 김질 및 정창손을 특별히 용서하고 공신(功臣)에 올리도록 하고, 박팽년 등을 체포 문초하니 자백하였다. 왕은 그 재주를 사랑하여 몰래 사람을 시켜 박팽년에게 말하기를, “네가 나에게 귀순(歸順)하여 처음의 음모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숨긴다면 살 수 있다.”하니, 박팽년은 웃으며 대답하지 아니하고 왕을 대하면 반드시‘나으리[進賜]’라 불렀다. 왕은 그의 등을 치게 하고 말하기를, “너는 이미 나에게 ‘신(臣)’이라고 칭하였으니 이제 비록 칭하지 않아도 소용이 없다.”하니, 대답하기를, “팽년은 상왕(上王)의 신하이므로 충청 감사(忠淸監司)에 임명된 지 1년 동안 나으리에게 아뢰는 문서에 일찍이‘신’이라 칭하지 않았습니다.”하였다. 사람을 시켜 그가 올린 문서를 조사하는데 과연 신이라는 글자는 하나도 없었다. 그 아우 박대년(朴大年)ㆍ아들 박헌(朴憲)과 함께 모두 죽고, 그 처(妻)는 관비(官婢)가 되었으나 종신토록 절개를 지키었다. 박헌은 생원(生員)에 합격하였고 또한 정직하였다. 형(刑)을 당함에 임하여 사람들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너는 나를 난신(亂臣)이라고 하지 말라. 우리들 죽음은 계유(癸酉)의 사람(김종서(金宗瑞) 일당)과 같은 것이 아니다.”하였다. 김명중(金命仲)은 다시 금부도사(禁府都事)가 되었는데 사사로이 박팽년에게 말하기를, “공(公)은 어찌하여 군부(君父)에게 효도하지 아니하고 이 화(禍)를 당하기에 이르렀소?”하니, 박팽년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마음 속이 평안(平安)하지 못하여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하였다. 윤훈(尹壎)은 박팽년과 성삼문과 종유(從游)했는데, 사람에게 말하기를, “성공(成公)은 농담하면 잘 웃고, 앉고 눕는 것이 절도(節度)가 없고, 박공(朴公)은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의관(衣冠)을 풀지 아니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존경심을 일으키게 한다.”하였다. 광묘(光廟)가 영의정(領議政)이 되어 부중(府中)에서 잔치를 베푸는데, 박팽년이 시를 짓기를,
묘당 깊은 곳 현악(絃樂) 울리는데 / 廟堂深處動哀絲
만사 지금 도무지 모를래라 / 萬事如今摠不知
버들은 푸르러 동풍(東風)이 하늘하늘 / 柳綠東風吹細細
꽃은 밝아 봄날이 정히 더디도다 / 花明春日正遲遲
선왕)의 대업은 금궤(金櫃 국가와 왕에게 관계되는 기밀문서를 보관하는 궤)를 열었고 / 先王大業抽金櫃
성주의 넓은 은혜에 옥배(玉杯)를 기울이네 / 聖主鴻恩倒玉巵
어찌 길이 즐기지 아니하리 / 不樂何爲長不樂
태평시절에 노래 화답하고 실컷 취해 춤추네 / 賡歌醉飽太平時
하니, 광묘는 좋아하여 칭찬하고 판(板)에 새겨 부중(府中)에 달았다. 박팽년은 성질이 침착하여 말이 적고, 소학(小學)으로써 몸을 닦고, 문장은 맑고 깨끗하고, 필적(筆蹟)은 종요(鍾繇 위(魏) 나라의 서예가)와 왕희지(王羲之 진(晉)나라의 서예가)를 모방하였다. 성삼문(成三問)은 자(字)는 근보(謹甫)요, 창녕인(昌寧人)이다. 세종(世宗) 정묘년에 중시(重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경연(經筵)에 오래 모시며 임금의 학문을 보좌하였다. 영묘(英廟)는 만년(晩年)에 묵은 병이 있어 누차 온천에 거둥하였는데, 언제나 성삼문 및 박팽년ㆍ신숙주(申叔舟)ㆍ최항(崔恒)ㆍ이개(李愷) 등으로 하여금 편복(便服 평복(平服))을 하고 어가(御駕) 앞에서 고문(顧問)에 대비하게 하니 당시 사람들이 영화롭게 여겼다. 계유년에 광묘(光廟)가 김종서(金宗瑞)를 죽일 때 성삼문과 박팽년 등은 집현전(集賢殿)의 관원으로서 숙직하여 호위하였으므로 정난공신(靖難功臣)의 호(號)를 내려주었는데 성삼문은 그것을 부끄러워하여 음식이 맛이 없었다 한다. 공신(功臣) 등이 돌아가며 연회를 베풀었는데 삼문만은 베풀지 않았다. 을해년에 광묘가 왕위를 이어 받을 때 땅에 엎드려 울며 덕이 없다고 말하였는데, 좌우의 종신(從臣)은 감히 한 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다. 성삼문은 예방승지(禮房丞旨)로서 국보(國寶 국왕의 인장)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실성통곡(失聲痛哭)하자 광묘는 그때에 머리를 들고 바라보았다. 이듬해 병자년에 그 아버지 성승 및 박팽년 등과 더불어 노산(魯山)을 복위(復位)시킬 것을 모의하여 여러 사람이 집현전에서 회의하는데, 성삼문이 말하기를, “신숙주(申叔舟)는 나의 친한 벗이나 죄가 커서 죽이지 않을 수 없다.”하니, 모두 말하기를, “그렇다.”하였다. 또 김질(金礩)에게 말하기를, “너의 처부(妻父) 정창손이 마땅히 수상(首相)이 될 것이다.”하고, 무신(武臣)으로 하여금 각각 죽일 사람을 맡게 하는데, 형조 정랑(刑曹正郞) 윤영손(尹寧孫)은 신숙주를 맡았다. 사신을 청하여 잔치하는 날에 운검(雲劒)을 파(罷)함으로써 계획을 정지하였으나, 윤영손은 알지 못하고 바야흐로 신숙주가 뒷방에서 머리를 감는데 윤영손이 칼을 어루만지고 앞으로 나아가니, 성삼문이 눈짓으로 제지하자 곧 물러갔다. 그 후 조금 있다가 일이 누설되어 성삼문에게 차꼬를 씌워 전정(殿庭)에 들이니, 광묘(光廟)가 친히 묻기를, “너희들의 이 거사는 어찌 된 일이며, 무엇 때문에 나에게 반역하느냐?”하니, 성삼문이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전(前) 임금을 복위(復位)시키고자 할 뿐이오. 천하에 누가 그 임금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있겠소? 나의 마음은 온 나라 사람이 다 아는데, 나으리는 무엇이 이상해서 묻소? 나으리가 나라를 훔쳤으니, 저는 신하로서 차마 임금의 폐위(廢位)를 보지 못하겠소. 나으리는 평소에 걸핏하면 주공(周公)을 인용하였는데 주공도 또한 이러한 일이 있었소? 제가 이 일을 한 것은 하늘에 두 해가 없고, 백성에게 두 임금이 없기 때문이오.”하였다. 종실(宗室)에게 ‘나으리’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나라 사투리이였다. 광묘는 발을 구르며 꾸짖어 말하기를, “내가 처음 왕위를 이어받을 때 왜 제지하지 않고 도리어 나를 따르고서 이제 나를 배반하느냐?”하니, 삼문이 말하기를, “내가 처음에 금지할 수 없는 것은 사세가 그러했을 뿐이오. 내가 이미 나아가 제지할 수 없음을 알고 오직 물러가 한 번 죽음이 있음을 알 뿐이나, 죽기만 하면 무익하니 참고서 지금까지 이른 것은 일을 도모하고자 할 뿐이었소.”하였다. 광묘가 말하기를, “너는 ‘신(臣)’이라 칭하지 않고 나를 ‘나으리’라고 부르니 너는 나의 녹(祿)을 먹지 않았느냐? 녹을 먹고 배반하는 것은 반역하는 자이다. 너를 병방승지(兵房丞旨)에서 예방승지(禮房丞旨)로 바꾸었더니 반드시 이것을 원망한 것이다. 명분(名分)은 상왕(上王)을 복위시키기 위한 것이라 하나 실은 제가 하려는 것이다.”하니, 성삼문은 말하기를, “상왕이 계신데 나으리는 어찌하여 나를 신이라 하오? 나는 정말 나으리의 녹(祿)을 먹지 않았으니 믿지 않거든 나의 집을 몰수하여 세어 보시오. 나으리의 허망(虛妄)함은 취할 것도 없소.”하였다. 광묘는 성을 잔뜩 내어 무사(武士)로 하여금 쇠를 달구어 그의 다리를 뚫게 하였으나 굴복하지 않고, 팔뚝을 끊게 하였으나 굴복하지 않고서, 천천히 말하기를, “나으리의 형벌이 참혹하오.”하였다. 그때에 신숙주(申叔舟)가 임금 앞에 있었는데, 성삼문이 그를 책하여 말하기를, “처음 네가 집현전(集賢殿)에 있을 때에 세종(世宗)께서 나날이 왕손(王孫)을 안고 뜰 안에 걸어나와 이리저리 거니시며 여러 유신(儒臣)에게 이르기를, ‘과인(寡人)이 오래오래 명대로 살다가 죽은 뒤에는, 경(卿)들이 모름지기 이 아이를 생각하라.’하셨다. 그 말씀이 아직도 귀에 남아 있는데 너만 홀로 잊었느냐? 나는 네가 악한 짓을 하기를 이렇게 극도에 이를 줄 몰랐다.”하였다. 다시 문초할 때에는 왕은 신숙주로 하여금 피하게 했다. 제학(提學) 강희안(姜希顔)이 연루되어 끌려와 고문해도 자백하지 아니하자, 왕은 성삼문에게 묻기를, “강희안이 모의에 참여했느냐?”하니, 성삼문은 말하기를, “정말 모르오. 나으리가 명사(名士)를 다 죽였으니 마땅히 이 사람은 남겨두어 쓰시요. 정말 현사(賢士)오.”하였다. 강희안은 이로 말미암아 화를 면하게 되었다. 성삼문은 수레에 실려 문을 나가는데 안색이 태연하여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너희들은 현주(賢主)를 보좌하여 태평을 이루라. 나는 지하에 돌아가 옛 임금을 뵙겠다.”하고, 감형관(監刑官) 김명중(金命仲)에게 웃으며 일러 말하기를, “이 일이 무슨 일이냐?”하였다. 성삼문이 죽고 나서 그 집을 몰수하니 을해년 이후부터의 녹봉(祿俸)은 한 방에 따로 두어 모년(某年) 모월(某月)의 녹(祿)이라고 써 두었고, 집에는 남은 바가 없었으며 침방(寢房)에는 오직 거적자리가 있을 뿐이었다. 아들 다섯이 있었는데 장남은 이름이 성원(成元)이었다. 처는 관비(官婢)가 되었으나 절개를 온전히 했다. 성승(成勝)의 사랑하던 종이 함길도(咸吉道)에 가서 살았는데, 일찍이 서생(書生) 정세린(鄭世麟)에게 이야기해 말하기를, “성승이 도총관(都摠管)이 되어 들어가 숙직하는 날에 선위(禪位)의 일이 있음을 듣고 종을 불러서 성삼문이 있는 승정원(承政院)에 보내어 국사(國事)를 물은 것이 그 횟수를 알 수 없을 만큼 많으나 삼문(三問)이 대답하지 아니하여 종은 헛되이 갔다가 헛되이 돌아왔다. 최후에 갔을 때에 성삼문은 일어나 변소에 가서 하늘을 우러러보고 한숨 쉬며 말하기를, ‘일은 끝났다.’하였다. 종이 이 사실을 아뢰니 성승 역시 한숨을 쉬고 곧 종을 시켜 말에 안장을 갖추고 나와 집에 이르렀는데, 종이 몰래 쳐다보니 수없이 눈물을 흘렸다. 다음날은 병을 핑계로 관청에 나가지 않고 한 방에 누워 일어나 먹지 않으니 처자(妻子) 역시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고, 오직 성삼문만이 와서 좌우를 물리치고 함께 이야기할 뿐이었다.”하였다.
○ 이개(李愷)의 자(字)는 청보(淸甫)이고, 한산인(韓山人)으로 목은(牧隱)의 증손(曾孫)이며 이종선(李種善)의 손자이다. 나면서부터 글을 잘하여 조부(祖父)의 기풍(氣風)이 있었다. 병자년에 변(變)의 모의에 참여하였다가 바로 박팽년과 성삼문과 함께 대궐 뜰에서 묶이어 담금질을 당할 때 이개는 서서히 묻기를, “이것이 무슨 형벌이냐?”하였다. 생김새가 야위어 약하나 곤장(棍杖) 밑에서도 안색이 변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다 장하게 여겼고, 끝내 굽히지 않아 성삼문과 함께 같은 날에 죽었는데, 수레에 실림에 임하여 시(詩)를 짓기를,
우(禹)의 솥이 무거울 때 생명도 또한 크나 / 禹鼎重時生亦大
기러기 털 가벼운 곳에 죽음 또한 영화롭다
/ 鴻毛輕處死亦榮
새벽에 자지 않고 문을 나서니 / 明發不寐出門去
현릉(顯陵 문종(文宗)의 능)의 송백이 꿈 가운데 푸르고나 / 顯陵松栢夢中靑
하였다.
유성원(柳誠源)의 자(字)는 태초(太初)이다. 세종조(世宗朝)에 등과(登科)했다. 계유년에 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이고 백관이 노산(魯山)에게 청(請)하기를, “마땅히 세조(世祖)의 공(功)을 표창하기를 주공(周公)에 비하여 해야 합니다.”하고, 집현전(集賢殿)으로 하여금 공(功)을 표창하는 교서(敎書)의 초안을 쓰게 할 때에, 집현전의 관원이 모두 이미 가버리고 홀로 유성원만이 있다가 협박을 받아 기초(起草)하고는 집으로 가서 슬피 통곡하니 집안 사람이 그 까닭을 몰랐다. 노산(魯山)이 상왕(上王)이 되니 성균사예(成均司藝)로 있으면서 속으로 불평을 품었다. 병자(丙子)의 모의가 발각되어 성삼문을 잡아가는데, 유성원이 그때에 성균관에 있다가 여러 유생(儒生)이 성삼문의 옥사(獄事)를 알리니, 곧 집으로 돌아와 계집종을 불러 그릇을 가져오게 하여 처와 함께 술을 따라 영결(永訣) 술을 마시고 사당(祠堂)에 올라가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았다. 가서 보니 관대(冠帶)를 벗지 않고 사당(祠堂) 앞에 우러러 누워 패도(佩刀)를 뽑아 목을 겨누고 나무 조각을 가지고 칼자루를 다진 지 오래되어서 이미 때가 늦었다. 아무도 그가 이렇게 한 까닭을 몰랐는데, 얼마 후에 나졸이 와서 시체를 가지고 가 찢었다.
하위지(河緯地)의 자는 천장(天章)이고 선산인(善山人)으로 세종조(世宗朝)에 장원했다. 사람됨이 조용하고 말이 적어 한 마디도 가려서 버릴 말이 없고, 공손하고 예의가 있으며, 대궐의 문을 지날갈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리고, 비록 비가 내려 길바닥에 물이 괼지라도 일찍이 길을 피한 적이 없고, 언제나 집현전(集賢殿)에 있으면서 경연(經筵)에 임금을 모시어 보좌한 바가 많았다. 노산(魯山)이 왕위를 계승할 때에 노산이 나이가 어리고 8공자(公子)가 강성(强盛)하여 인심이 흉흉하였다. 박팽년(朴彭年)은 일찍이 하위지에게 도롱이를 빌려 주었는데, 하위지가 시(詩)로써 답해 부치기를,
남아의 득실(得失)이 예나 이제나 같은데 / 男兒得失古猶今
두상(頭上)에는 분명히 백일(白日)이 임했도다 / 頭上分明白日臨
도롱이를 줌에는 마땅히 뜻이 있으리니 / 持贈蓑衣應有意
오호(五湖)의 연월(煙月)에 서로 찾자고 / 五湖煙月好相尋
하였으니, 이는 시사(時事)에 상심(傷心)한 것을 읊은 것이다. 김종서(金宗瑞)를 죽이고 광묘(光廟)가 수상(首相)이 되니, 그는 조복(朝服 벼슬자리)을 다 팔고 사간(司諫)의 전직(前職)으로 선산(善山)으로 물러가니, 광묘(光廟)가 왕에게 아뢰어 좌사간(左司諫)으로 불렀다. 하위지가 글을 올린 대략에, “신은 질병이 얽히어 오래도록 회복되지 않았는데 특별히 소환하여 좌사간의 직(職)을 임명하고, 새 정사를 하여 보자는 뜻으로 타이르시므로 병을 이겨 출발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히 출발할 날에 감기가 들어 옛 병이 더욱 심해져서 더함은 있어도 덜함은 없어, 비록 병을 이겨 내고자 하나 될 수가 없어 머리를 드리우고 신음하다가 대궐을 연모(戀慕)하며 눈물을 흘립니다.”하였고, 또 이르기를, “신은 삼가 생각건대, 오늘날의 변(變)은 서적(書籍)에도 드문 바로, 혹은 왕의 유언(遺言)을 받아 보좌하고 (김종서(金宗瑞)) 혹은 숙부(叔父) 근친(近親)으로 (안평대군(安平大君)) 두 분 다 나라와 더불어 기쁨과 근심을 같이 할 이들인데 무도함의 심함이 이에 이르렀으니 차마 들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지나간 것은 어찌할 수 없으니, 그것을 논(論)해 무엇하리오?”하였고, 또 이르기를, “권세(權勢) 있는 간신을 제거한다는 것은 예로부터 어렵거니와 그 뒤를 잇는 것은 더욱 어려우니, 새 정사를 하는 시초에 마땅히 길이 생각해 뒤를 돌아보고 넓게 꾀하고 깊이 헤아려 할 것이요, 혹시 마음이 이리저리 어름거리어 구차스럽게 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한들 어떠하며 무엇이 해로우냐고 말하지 말고 이전에 세운 공을 소홀히 해서 후회를 하지 않도록 하며, 생각이 있는 자로 하여금 할 일을 말하기를 꺼리게 하거나 임금의 세력이 구속받음이 있어 혹시 임금의 총명을 가리움이 되게 하지 마소서. 장래의 화를 염려하여 미리 기미를 방지하고 미리 막고 근본을 튼튼히 할 계책으로 더욱 왕실을 강하게 하고, 더욱 권문(權門)을 막으며 더욱 혐의스러운 일을 제거하고, 더욱 붕당(朋黨)의 징조를 끊으소서.”하였고, 또 말하기를, “원하건대, 정치를 보좌하는 책임을 맡은 이는 더욱 임금을 보전(保傳)하는 도리를 더욱 다하여 임금의 몸이 날로 편안하게 하고, 임금의 학문이 날로 향상되게 하고, 임금의 덕이 날로 성취되어 정사를 친히 보아 백만 백성이 밤낮으로 우러러 바라는 큰 희망에 부응하소서.”하였고, 또 이르기를, “전하 역시 마땅히 귀를 열어 바른 의론(議論)을 맞아들이고, 강직(剛直)한 사람을 가까이하고, 참소하고 아첨하는 사람을 멀리하며, 보정(輔政)하는 대신(大臣)을 공경하고 중히 여겨 간난(艱難)한 운(運)을 구제하여 문종황고(文宗皇考)의 바라신 바를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한갓 스스로 겸손하기만 하여 ‘내가 어찌 감히 할 수 있나.’라고만 말씀하셔서는 안 됩니다.”하였다. 후에 광묘(光廟)가 왕위를 이어받고 교서(敎書)로 하위지를 간절히 불렀다. 하위지가 불려 와서 예조 참판(禮曹參判)이 되어 매우 총애를 받았으나 하위지는 상왕이 나이가 젊어 양위한 것을 불쌍히 여기고 식록(食祿)을 부끄럽게 여겨 참판 이후의 녹은 따로 한 방에 쌓아 두고 먹지 않았다. 병자(丙子)의 변(變)에 이르러, 성삼문 등에게 낙형(烙刑)을 한 다음에 하위지에게 미치니, 하위지가 말하기를, “사람이 반역의 이름을 썼으면 다른 도형(徒刑) 및 유형(流刑)과 비교가 안 되는데 다시 무슨 죄를 묻겠으며, 이미 나에게 반역의 이름을 붙인 이상 그 죄는 응당 죽여야 하는데 대저 무슨 말을 다시 하겠느냐?”하였다. 왕은 분노가 누그러져 낙형(烙刑)을 시행하지 않았으나 성삼문과 더불어 같은 날에 죽였다. 세종(世宗)이 인재를 양육하여 문묘(文廟 문종(文宗)) 때에 이르러 한창 성하였는데, 당시 인재를 논(論)하는데 하위지를 첫째로 삼았다.
유응부(兪應孚)는 무인(武人)으로 활을 잘 쏘고 용감하며 날래어 인가(人家)의 담을 뛰어 넘을 정도였다. 영묘(英廟 세종(世宗))와 문묘(文廟)가 다 그를 믿고 중히 여기어 관위(官位)가 1품(品)에 이르렀다. 병자(丙子)의 변(變)에 성승(成勝)과 더불어 별운검(別雲劍)이 되어 일을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중지되어 일이 발각되자 대궐 뜰로 잡혀갔는데, 왕이 묻기를, “너는 어찌 하려고 했느냐?”하니, 유응부가 말하기를, “잔칫날에 내가 한 자의 칼로써 그대를 폐위하고 전 임금을 복위시키고자 하였으나 불행히 간인(奸人)에게 고발되었을 뿐이오. 내가 다시 무엇을 구하겠소? 그대는 다만 빨리 나를 죽이시오.”하였다. 왕이 진노하며 말하기를, “너는 상왕(上王)을 핑계하고 사직(社稷)을 빼앗으려고 한 것이다.”하고, 무사를 시켜 유응부의 살가죽을 벗기고 묻게 하였다. 유응부는 굴복하지 않고, 성삼문 등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사람들이 서생(書生)과는 일을 도모할 수 없다고 말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지난번 사신을 청하여 잔치하는 날에 나는 운검(雲劍)을 시험하고자 하였으나 너희들이 굳이 제지하여 말하기를, ‘아주 안전한 계책이 아니다.’고 하더니, 금일의 화(禍)에 이르렀다. 너희들은 사람이면서도 꾀가 없으니 짐승과 다른 것이 무엇이냐?”하고, 왕에게 말하기를, “만약 일을 묻고 싶으면 저 더벅머리 선비에게 물으시오.”하고, 곧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왕은 더욱 진노하여 명하여 불에 달군 쇠를 가지고 배꼽 아래와 넓적다리 위에 놓게 하니, 기름과 불이 아울러 끓어도 유응부는 안색이 태연하고 쇠가 식기를 서서히 기다려 그것을 내던지며, “다시 달구어 뜨겁게 해 오라.”하고, 마침내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천성(天性)이 지극히 효도하여 무릇 어머니의 마음을 위안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하지 않는 바가 없었다. 아우 유응신(兪應信)과 더불어 함께 사냥을 일삼아 금수(禽獸)를 만나면 쏘아서 맞히지 않음이 없고, 가난하여 섬곡식의 저축도 없으나 어머니를 봉양하는 준비는 일찍이 넉넉하지 않음이 없었다. 어머니가 언제나 포천(抱川)의 전장(田庄)을 왕래할 때는 형제가 따라갔는데, 하루는 말 위에서 몸을 날려 나는 기러기를 쳐다보고 활을 쏘니, 활시위 소리에 응하여 기러기가 떨어지니 어머니가 크게 기뻐했다. 신장(身長)이 보통 사람을 넘고 용모가 엄숙하고 씩씩하며, 청렴하기가 오릉중자(於陵仲子)와 같아서 몸이 재상(宰相)이 되었으나 거적자리로 방문을 가리고, 먹는 데는 한 점의 고기도 없고, 때때로 양식이 떨어져 아내와 딸이 원망하고 괴로워했다. 죽는 날에 아내가 통곡하며 길가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살아서는 잘 도와주지도 못하고, 죽어서는 큰 화(禍)를 얻었다.”하였다. 유응부는 성품이 또 용감하여 처음 거사(擧事)하기를 모의할 때 여러 사람 가운데서 주먹을 휘둘러 말하기를, “권모(權某)와 박모(朴某)를 죽이는 데는 이 주먹으로도 충분하다. 어찌 큰 칼을 쓰겠는가?”하였다. 일찍이 함길도절도사(咸吉道節度使)가 되어 시(詩)를 짓기를,
좋은 매 삼백이 누각 앞에 앉았도다 / 良鷹三百坐樓前
하였는데, 여기에서도 그 기상을 엿볼 수 있다. 아들은 없고 두 딸이 있다.
허후(許詡)는 영의정(領議政) 허조(許稠)의 아들인데, 세가(世家)로서 충성스럽고 효성스러웠다.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섬기는데 기쁜 안색으로 봉양했다. 세종조(世宗朝) 20여 년에 몸을 삼가고 말을 조심하였으며, 문종(文宗) 때에 벼슬하였는데 벼슬마다 직무를 잘했다. 문묘(文廟)가 승하하자 유언(遺言)으로 황보인(皇甫仁)ㆍ김종서(金宗瑞)가 수상(首相)이 되어 어린 임금을 보좌했고, 허후는 우참찬(右參贊)이 되었다. 광묘(光廟)가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있을 때 명 나라에 사신으로 가는데 허후가 말하기를, “지금 재궁(梓宮)이 빈소(殯所)에 계시고, 어린 임금이 나라를 맡아 대신(大臣)이 붙지 않고 백성이 의심하니 공자(公子)는 나라의 종신(宗臣)으로 나라를 떠나 어디로 가시렵니까? 하였다. 광묘(光廟)가 그 말을 따르지 않았으나 마음으로 그 말을 좋게 여겼다. 계유년에 광묘가 몰래 권남(權擥)과 한명회(韓明澮)와 더불어 정란(靖亂)할 것을 모의하고 김종서(金宗瑞)를 그의 집에 가서 죽였다. 당시 임금은 부마(駙馬) 정종(鄭宗)의 집으로 거처(居處)를 옮겼는데, 광묘가 밤에 문밖에 나아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김종서 등이 난(亂)을 꾀하여 일이 급해 미처 아뢰지 못하고 이미 죽였습니다.”하였다. 임금은 나이가 어려 놀라 일어나 말하기를, “이 일을 어찌하겠소? 숙부는 나를 살려 주시오.”하니, 광묘가 대답하여 아뢰기를, “이는 어렵지 않습니다. 신이 맡아 처리하겠습니다.”하고, 즉 왕 앞에서 모든 대신들을 패초(牌招)하고, 무사(武士)에게 문을 지키게 하여 문으로 들어오는 대로 그 당(黨)을 가려 제거하였다. 영의정 황보인(皇甫仁)과 이조 판서 조극관(趙克寬) 등은 모두 죽였으나, 허후는 전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경사(京師)에 가는 것을 말린 말을 한 것 때문에 죽음을 면하였다. 불러들여 앉게 하고 술을 돌리며 풍악을 시작하자 재상(宰相) 정인지(鄭麟趾)와 한확(韓確) 등은 손뼉을 치며 웃고 떠들었다. 허후는 수심에 잠겨 즐거워하지 않고 고기도 먹지 않으니, 광묘가, “무슨 이유냐?”하니, 허후는 조부(祖父)의 기일(忌日)이라고 핑계댔다. 광묘는 그것이 핑계하는 말인 줄 알았으나 묻지 않았다. 조금 있다가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저자에 효수(梟首)하게 하고 그 자손을 죽였는데, 허후가 말하기를, “이 사람들이 무슨 큰 죄가 있다고 효수하고 처자(妻子)까지 죽이게 한단 말이오? 그리고 나는 김종서와는 교분이 깊지 않아 그 마음을 알 수 없으되, 황보인에 대해서는 내가 평소에 잘 알기 때문에 추호도 반역을 도모할 리는 없습니다.”하니, 광묘(光廟)가 말하기를, “네가 고기를 먹지 않은 뜻이 바로 여기에 있었구나?”하였다. 허후가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조정의 원로(元老)가 같은 날에 다 죽어가니, 내가 살아 남은 것도 충분한데 또 차마 고기까지 먹겠습니까?”하고, 곧 눈물을 흘렸다. 광묘가 매우 진노했으나 오히려 그 재덕(才德)을 아껴 죽이려고 하지는 않았는데, 이계전(李季甸)이 힘써 권하여 외방으로 허후를 귀양보냈다가 마침내 허후를 목매어 죽였다. 이들이 죽은 뒤로 조정은 모두 변하였다. 처음 허후가 승지(承旨)가 되었을 때 사람들이 모두 와서 축하하였으나, 그의 아버지 허조만은 근심하는 빛을 띠고 밤새도록 자지 못했다. 사람들이 이유를 물으니, 허조가 말하기를, “천도(天道)는 가득 차면 손(損)을 부르는 법인데 나는 세상에 공덕이 없으면서도 지위가 신하 중에 제일 높았고, 아들 역시 승지가 되었으니 허씨의 화(禍)가 멀지 않다.”하였다. 허후가 죽고 허씨의 동생과 조카들이 모두 금고(禁錮)를 당하니, 그 말이 과연 맞았다.
○ 이상은 〈육신전(六臣傳)〉인데, 남효온(南孝溫)이 편찬한 것이다. 남효온의 호는 추강(秋江)이다. 성품이 강개(慷慨)하여 청한자(淸寒子 김시습(金時習))에게 사사(師事)했는데 속세를 벗어나 구속받지 않았다. 나이 18세에 성묘(成廟)에게 소릉(昭陵)의 추복(追復)을 요청하는 글을 올렸고, 매양 시사(時事)를 분하게 여겨 혹 무악산(毋岳山)에 올라 통곡을 하다가 돌아오고, 과격한 의론이 비록 기휘(忌諱)에 저촉되더라도 돌아보지 않았다. 대유(大猷 김굉필(金宏弼)의 자)와 백욱(伯勗 정여창(鄭汝昌)의 자)이 경계했어도 끝내 듣지 않았다. 그들은 소학(小學)으로써 몸을 닦았으니 실로 추강(秋江)과는 그 길을 달리했다.
○ 노산군(魯山君)이 영월(寧月)에 귀양갔다가 마침내 죽음을 당했다.
7년 영종(英宗)이 복위(復位)하여 연호(年號)인 경태(景泰)를 천순(天順)이라 고쳤다. 그 원년(元年)에 한림원 수찬(翰林院修撰) 진감(陳鑑)과 태상박사(太常博士) 고득(高得)을 보내어 복위한 조서(詔書)를 반포하기를, “전날 짐이 공손히 천명(天命)에 응하여 대통(大統 황통(皇統))을 이어받은 지 15년이 되던 해, 뜻밖에 북녘 오랑캐의 사변(事變)을 당하여 종사(宗社)와 생민(生民)을 위하여 친히 군사를 이끌고 방어하러 나가면서 서제(庶弟)인 성왕(郕王)한테 감국(監國)하게 하였더니, 패하여 승여(乘輿 임금이 탄 수레)가 차단되고 말았다. 그때 문무(文武)의 제신(諸臣)들이 이미 황태자를 옹립(擁立)하여 받들었는데, 감국하는 자가 문득 제위(帝位)를 빼앗을 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얼마 안 가서 황천(皇天)이 재앙을 뉘우치어 오랑캐의 추장이 마음을 돌려 짐을 받들어 남쪽으로 돌아오게 하였더니 그는 복위시킬 생각은 아예 없었고, 도리어 유폐(幽閉)하려는 계략을 감행하여 곧 황태자를 바꾸고 자기 자식을 책립(冊立)하였으나 오직 하늘이 돕지 않아 얼마 안 가서 죽었다. 간언(諫言)을 받아들이지 않고 더욱 잘못된 소견을 고집하였다. 하물며 부덕(不德)한 짓을 많이 하였고 난치(難治)의 병에 걸려 조정에 나오지도 못하니, 민심이 분기(奮起)하려고 생각하였다. 금년 월 일에 짐은 공후(公侯)와 부마백(駙馬伯)과 문무(文武)의 군신(群臣) 및 육군(六軍 천자(天子)의 군사)과 온 백성들의 추대를 받아 드디어 성모(聖母) 황모(皇母) 황태후(皇太后)에 명(命)을 받고 천지ㆍ사직ㆍ종묘에 삼가 고(告)하고 황제의 자리에 다시 올라 천하에 대사령(大赦令)을 내려 모두 함께 유신(維新)하게 하노라.”하였고, 또 황태자 복위의 조서도 반포하였다.


 

[주D-001]칠신(七臣) : 세조(世祖) 병자(丙子)년에 상왕(上王)을 복위(復位)시키려던 주모자(主謀者)를 남효온(南孝溫)이 여섯 사람으로 정하여 육신전(六臣傳)을 지었으므로 후세에 그대로 육신(六臣)으로 부른다. 그러나 그것이 꼭 타당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는 성삼문의 아버지 도총관(都摠管) 성승(成勝)을 넣어 칠신(七臣)이라 하였다.
[주D-002]상왕(上王) : 세조가 조카인 어린 왕 단종(端宗)을 퇴위시킬 때에 우선 명분(明分)으로 상왕(上王)이란 칭호로 모시었다.
[주D-003]운검(雲劍) : 임금의 의장(儀仗)에 속한 것인데 임금의 좌우에 칼을 들고 호위하는 무관(武官)이다.
[주D-004]정난공신(靖難功臣) : 세조가 안평대군(安平大君)과 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인 뒤에 그것이 국가에 공이 된다 하여 정난공신(靖難功臣)이란 칭호를 자기의 도당과 조정에 있는 중요한 신하에게 내렸다.
[주D-005]예방승지(禮房丞旨) : 승지(承旨)는 왕의 명령과 아뢰는 문서를 출납하는 관직인데 여섯 명이다. 그것은 이조ㆍ호조ㆍ예조ㆍ병조ㆍ형조ㆍ공조에 관한 것을 각기 맡으므로 이조를 맡은 승지는 도승지(都承旨)가 되고 예조를 맡은 것은 예방승지이요, 병조를 맡은 것은 병방승지인데, 육조(六曹)의 순위를 따라서 지위가 차차 낮은 것이다.
[주D-006]우(禹)의 솥이 …… 영화롭다 : 우(禹)가 구정(九鼎)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무거우므로 그것을 드는 이를 역사(力士)라 한다. 옛 사람의 말에, “생명이 구정보다 중한 경우가 있고 죽음이 기러기 털보다 가벼운 경우가 있다.”하였으니, 이것은 의리(義理)에 따라서 생명을 중하게 아껴야 할 경우가 있고 죽음을 아끼지 않아야 할 경우가 있다는 말이다.
[주D-007]노산(魯山) : 육신(六臣)의 사건이 있은 뒤에 세조는 상왕(上王)을 강등시켜 노산군(魯山君)으로 봉하였다. 여기서는 이 글을 쓸 때에 단종(端宗)이란 시호로 추존이 되기 전이므로 노산이라고 칭한 것이다.
[주D-008]오호(五湖) : 중국 남방에 동정호(洞庭湖)와 파양호(鄱陽湖) 등 오호가 있는데 여기서는 강호(江湖)를 말한 것이다.
[주D-009]오릉중자(於陵仲子) : 제(齊) 나라 진중자(陳仲子)가 오릉(於陵) 땅에 살았으므로 오릉중자라 부른다. 그는 청렴하여 의롭지 못한 음식을 먹지 않고 사흘 동안 먹지 못하는 때도 있었다.
[주D-010]천도(天道)는 …… 부르는 법인데 : 물이 너무 가득 차면 넘쳐서 도리어 손이 되는 데에 비유한 말인데, 여기서는 너무 권세와 영화가 지나치면 재앙이 오게 된다는 말이다.
[주D-011]소릉(昭陵)의 추복(追復) : 세조는 단종(端宗)의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가 달려드는 괴이한 꿈을 꾸자 그 아들이 죽으므로 분하게 여겨 권씨의 능인 소릉을 파헤쳐 시체를 내어 버리고 종묘에서 그 신주를 내쳤다. 추복(追復)이란 것은 소릉을 복위(復位)시키는 것이다.
[주D-012]감국(監國) : 임금이 출정(出征)한 때에 태자(太子)가 수도 지키는 것을 감국(監國)이라 하는데 이때에는 태자가 어리므로 동생을 시켜 감국(監國)하게 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