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 18현 두문 72현 /문묘배향 해동18현

해동 18현 설총 신라 경덕왕 때의 대학자. 자는 총지(聰智).

아베베1 2011. 4. 10. 16:02

 

설총(薛聰)

[요약정보]

UCI G002+AKS-KHF_12C124CD1DFFFFB0655X0
총지(聰智)
시호 홍유(弘儒)
생졸년 655 (태종무열왕 2) - ? (?)
시대 신라
본관 미상(未詳)
활동분야 학자 > 유학자

[관련정보]

[상세내용]
설총(薛聰)에 대하여
655년(태종무열왕 2)∼미상. 신라 경덕왕 때의 대학자. 자는 총지(聰智).
증조부는 잉피공(仍皮公, 또는 赤大公), 할아버지는 나마(奈麻) 담날(談捺)이고, 아버지는 원효(元曉), 어머니는 요석공주(瑤石公主)이다. 아마 6두품 출신인 듯하다. 관직은 한림(翰林)에 이르렀다. 《증보문헌비고》에는
경주설씨(慶州薛氏)의 시조로 기록되어 있다.
출생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원효불기(元曉不羈)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 의하면 태종무열왕 때, 즉 654∼660년 사이에 출생한 듯하다.
설총은 나면서부터 재주가 많았고, 경사(經史)에 박통(博通)하였으며 우리말로 구경(九經)을 읽고 후생을 가르쳐 유학의 종주가 되었다. 그리하여 신라십현(新羅十賢)의 한 사람이요, 또 강수(强首)·최치원(崔致遠)과 더불어 신라삼문장(三文章)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삼국사기》는 “우리말(方言)로 구경을 읽고 후생을 훈도하였다(以方言讀九經 訓導後生).”라 하였고, 《삼국유사》에도 “우리말(方音)로 화이(華夷)의 방속(方俗)과 물명(物名)을 이해하고 육경(六經)과 문학을 훈해(訓解)하였으니, 지금도 우리나라〔海東〕의 명경(明經)을 업(業)으로 하는 이가 전수(傳受)하여 끊이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 두 기록을 가지고 고려말부터 조선초에 걸쳐서 설총이두창제설(薛聰吏讀創製說)이 비롯되었으나, 이는 틀린 것이다. 여러 기록에서 ‘吏讀·吏道·吏吐·吏套·吏頭·吏札’ 따위로 불리는 이 방법은 향가표기법인 향찰(鄕札)을 가리키는 것인데, 우리말로 육경을 읽는 데 능통하였다고 하여서 이것을 이두 내지 향찰의 고안이라고 함은 잘못이다.
향가표기식 방법 즉 향찰의 사용은 이미 설총 이전부터 있었으니, 568년(진흥왕 29)에 북한산 비봉(碑峯)에 세운 진흥왕순수비문 가운데에도 이미 나타나 있고, 또 설총 이전에 향찰로 표기된 향가작품으로는 진평왕 때의 〈서동요 薯童謠〉·〈혜성가 彗星歌〉와 선덕여왕 때의 〈풍요 風謠〉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설총이 향찰(이두)을 창안한 것이 아니라 향찰을 집대성, 정리한 것이며, 따라서 설총은 향찰의 권위자로 봄이 타당하다.
설총은 육경을 읽고 새기는 방법을 발명함으로써 한문을 국어화하고 유학 내지 한학의 연구를 쉽게 그리고 빨리 발전시키는 데에 공이 컸다.
또 관직에 나아가 문한(文翰)에 관계되는 직, 즉 한림과 같은 직에 있었을 것이며, 신문왕 때에 국학(國學)을 설립하는 데 주동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719년(성덕왕 18)에는 나마의 관등으로서 감산사아미타여래조상기(甘山寺阿彌陀如來造像記)를 찬(撰)하였다. 이밖에도 많은 작품이 있었을 것이나 《삼국사기》를 엮을 때 이미 “또 글을 잘 지었는데 세상에 전해지는 것이 없다.
다만, 지금도 남쪽지방에 더러 설총이 지은 비명(碑銘)이 있으나 글자가 결락되어 읽을 수가 없으니 끝내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없다.”고 하면서 완전하게 남은 게 없음을 안타까워 하였다.
한편, 오늘날 설총의 문적(文蹟)으로는 우화적 단편산문인 〈화왕계 花王戒〉가 당시 신문왕을 풍간(諷諫)하였다는 일화로서 《삼국사기》 설총열전에 실려 있다. 이 〈화왕계〉는 〈풍왕서 諷王書〉라는 이름으로 《동문선》 권53에도 수록되어 있다.
죽은 뒤에도 계속 숭앙되어 고려 현종 13년(1022) 정월에 홍유후(弘儒侯)라는 시호를 추증받았다. 문묘(文廟) 동무(東廡)에 신라2현이라 하여 최치원(崔致遠)과 함께 종향(從享)되었으며,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東史綱目   東文選    增補文獻備考   東師列傳    大明律直解跋文 薛聰(李崇寧, 韓國의 人間像 4, 新丘文化社, 1980)    吏讀에 關한 新考察(金根洙, 國語文學 4―1, 全北大學校, 1955)  吏讀學史硏究序說(康允浩, 국어국문학 15∼20, 1956∼1959)  吏讀起源의 再考察(鄭寅承, 一石頌壽記念論叢, 1957)  新羅六頭品硏究(李基白, 省谷論叢, 1971)    薛聰과 그의 花王戒(朴魯春, 文湖 6·7 합병호, 建國大學校, 1972)
新羅骨品制下의 儒敎的 政治理念(李基白, 新羅思想史硏究, 1986)

 

 (薛聡)


   薛聡[주:字聡智新羅神文王時人翰林麗朝追封弘儒侯從祀文廟]

公以方言解九經義訓導後生又以俚語製吏札行於官府○神文王嘗燕居引聡謂曰今日宿雨初歇
薰風微凉高談善謔可以舒鬱子必有異聞盍爲我陳之聡曰唯臣聞昔花王之始來也植之香園護以
翠幕當三春而發艶凌百花而獨出於是艶艶之靈夭夭之英無不奔走上謁忽有一佳人名曰薔薇朱
顔玉齒鮮粧靚服伶俜而來綽約而前曰妾聞王之令德願薦枕於香帷王其容我乎又有一丈夫名曰

▼원문보기2b  처음으로

白頭翁布衣韋帶戴白持杖龍鍾而步傴僂而來曰僕在京城之外居大道之旁竊謂左右供給膏粱雖
足巾衍諸藏須有良藥故曰雖有絲麻無棄菅蒯不識王亦有意乎王曰丈夫之言亦有道理而佳人難
得將如之何丈夫曰凡爲君者莫不親近老成而興昵比夭艶而亡然而夭艶易合老成難親是以夏姬
亡陳西施滅吳孟軻不遇以終身馮唐郞潛而皓白自古如此吾其奈何花王謝曰吾過矣於是王愀然
作色曰子之言諷諭深切請書之以爲戒


 

성호사설 제13권
 인사문(人事門)
백의 유령(白衣踰嶺)


영남의 풍속이 선비를 높이고 도(道)를 중히 여기기 때문에 현인을 존숭하는 것이 풍속이 되었다. 전조(前朝)의 최 문창(崔文昌 문창(文昌)은 최치원(崔致遠)의 시호)ㆍ설 홍유(薛弘儒 홍유(弘儒)는 설총(薛聰)의 시호)ㆍ안 문성(安文成 문성(文成)은 안향(安珦)의 시호)ㆍ정 문충(鄭文忠 문충(文忠)은 정몽주(鄭夢周)의 시호)이 모두 영남 사람이다. 성조(聖朝)에 들어와서 길야은(吉冶隱 야은(冶隱)은 길재(吉再)의 호)이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호)ㆍ포은(圃隱 정몽주의 호)의 문하에 놀았고, 김 사예(金司藝 김숙자의 관직명) 숙자(叔滋)에 이르러 야은에게 수업하였으며 김한훤(金寒暄 한훤(寒暄)은 김굉필(金宏弼)의 호)ㆍ정일두(鄭一蠹 일두(一蠹)는 정여창(鄭汝昌)의 호)가 모두 사예(司藝)의 아들 김점필(金佔畢 점필(佔畢)은 김종직(金宗直)의 호)에게 배웠는데, 이회재(李晦齋 회재(晦齋)는 이언적(李彦迪)의 호)ㆍ이퇴계(李退溪 퇴계(退溪)는 이황(李滉)의 호)에 이르러 사문(斯文)이 크게 천명(闡明)되었으니, 모두 영남의 세가(世家)이고 성묘(聖廟)에 종사(從祀)된 이도 영남에서 7인이나 된다. 포은(圃隱)은 나라에 충성하다 죽었고, 야은(冶隱)은 벼슬하지 않고 물러갔으며, 한훤(寒暄)ㆍ일두(一蠹) 두 공(公)도 다 동시에 화를 입었다. 퇴계(退溪)는 기묘사화에 징계하여 나가기는 어렵게 여기고 물러가기는 쉽게 여기며, 벼슬에 뜻이 없었다. 혹 부득이하여 잠깐 나가더라도 관직이 체임되면 곧 발길을 재촉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정묘년 국휼(國恤)에 산릉(山陵)에도 못 미쳐 가서 예조 판서가 체임되자 이에 곧 길을 떠났고 수일도 머무르지 않았다.
이것으로 풍속이 이루어져서 지금 세상에도 출신한 자가 백의로 영(嶺)을 넘는 것을 깊이 부끄럽게 여기고, 또한 파직을 당하고 곧 돌아가지 않는 것을 수욕으로 여기니, 대현(大賢)의 일동 일정이 풍화에 관계되는 것이 이와 같다. 근세에 조정 의논이 거의 폐척(廢斥)하는데도 오히려 그대로 옛풍속을 고치지 않고 글을 읽고 도를 말하며 충효(忠孝)가 귀한 것을 아니, 다른 날 국가에 일이 많으면 반드시 힘입는 것이 있을 것이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3권
 사전전고(祀典典故)
오현(五賢)의 종향(從享) 김굉필ㆍ정여창ㆍ조광조ㆍ이언적ㆍ이황


선조 원년 무진에 태학생(太學生) 홍인헌(洪仁憲) 등이 소를 올려 조광조(趙光祖)를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기를 청하고, 대사간(大司諫) 백인걸(白仁傑) 등이 잇달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에 백인걸이 차자를 올리기를, “우리 동방의 도학이 정몽주ㆍ김굉필로부터 비로소 근원이 있게 되었는데, 조광조에 이르러 그의 걸출한 재주로 정자ㆍ주자의 학문을 드러내 밝히고, 규범을 따라 실천하여 예절에 맞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크게 명분과 절의(節義)를 장려하고, 유교의 학문을 흥기(興起)시켰습니다. 임금의 지우(知遇)를 받아 도리를 다하여 덕정(德政)을 행하게 하니, 거의 이제(二帝)와 삼왕(三王)의 태평 성세를 다시 볼 것 같더니, 간신 남곤(南袞)ㆍ심정(沈貞) 등이 귀신과 물여우 같은 음해(陰害)를 자행하여 참소로 의옥(疑獄)을 얽어서 마침내 억울하게 죽게 만들었습니다.조정과 민간에서의 한스러워함이 오랠수록 더욱 새로운데도 유독 궁중(宮中)에서만은 간사한 꾀로 두텁게 덮어 가려졌기 때문에 알지 못하였을 뿐이었습니다. 중종의 만년에 광조의 무리인 어진 인재들을 등용하셨고, 인종(仁宗)께서는 말년에 명하시어 이미 사직하였던 광조의 관작을 복구(復舊)하게 하셨으니, 공론의 통분을 조금은 풀었다고 할 수 있으나, 세상 사람들의 심정이 아직도 분하게 여기며 한탄하고 있는 것은 광조의 도덕과 충의(忠義)를 아직도 모두 밝게 드러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즉위하신 처음을 당하여, 바람이 불면 초목(草木)이 쓰러지듯이, 온 나라의 민심이 전하의 명에 순응하고 있습니다. 이 기회에 나라의 여론을 안정시키지 않으면 안 될 것이며, 선비들의 풍습을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마땅히 참된 유현(儒賢)을 추중 장려하여 그에 대한 찬양과 존숭(尊崇)을 극진하게 하고, 높은 벼슬과 아름다운 시호를 추증하여 문묘에 종사하는 성전(盛典)에 참여하게 하여, 하늘의 이치를 밝히고, 사람의 마음을 맑게 하며 한 마음으로 도덕을 지켜 풍속을 같이 하게 된다면, 어찌 맑은 조정의 훌륭한 업적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정암집(靜庵集)》
경오년 4월에 관학(館學)의 유생(儒生)들이 소를 올려 김굉필ㆍ정여창ㆍ조광조ㆍ이언적 등 4명을 문묘에 종사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같이 중대한 일을 경솔하게 거행할 수 없다.” 하였다. 소를 세 번이나 올렸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정암집》
5월에 병조 참판 백인걸(白仁傑)이 소를 올려 조광조를 문묘에 종사할 것을 청하였다. 영의정 이준경(李浚慶)이 논의하여 아뢰기를, “문묘에 종사하는 일에 대하여 인걸의 의견이 비록 조광조를 지적하고 있으나 우리나라의 의리지학(義理之學)은 실로 김굉필에게서부터 계발(啓發)된 것이니, 두 사람은 문묘에 종사하여도 실로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교(聖敎)에 경솔하게 할 수 없다고 하시니, 신 등이 감히 입을 놀리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석담일기》
계유년에 관학(館學)의 유생들이 소를 올려 오현(五賢)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공론이 오래된 후에야 결정할 일이다. 경솔하게 할 수 없다.” 하였다.
삼가 상고하여 보건대, 우리 조선에서는 건국한 이래로 여러 유학자 중에 문묘에 종사할 만한 사람이 없지 않은데, 지금까지 종사하지 않았으니 어찌 성대한 의식이 결여된 것이 아니겠는가. 전조(前朝)에서 문묘에 종사한 이는 문충공 정몽주 한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설총(薛聰)ㆍ최치원(崔致遠)ㆍ안향(安珦) 등은 유도(儒道)에 기여(寄與)함이 없다. 만약 의리로 따져서라면 세 사람은 다른 곳에서는 제사할 수 있으나, 문묘에 배향하는 것은 옳지 않다. 다만 지금 여러 선현들 모두를 종사하기를 청한다면 그 사이에 어찌 우열이 없겠는가. 문경공 김굉필, 문헌공 정여창은 언론과 뜻이 미약하여 드러나지 않았으며, 이문원(李文元)은 벼슬길에 나아가고 물러감이 자못 논의할 만한 것이 있고, 오직 문정공 조광조는 도학(道學)을 창도(倡導)하여 밝히고 뒷사람들을 계도(啓導)하여 깨우쳤으며, 문순공 이황은 의리에 깊이 몰두하여 한 시대의 모범이 되었으니, 두 사람을 특히 드러내어 종사한다면 누가 옳지 않다고 하겠는가. 《석담일기》
갑술년에 전적(典籍) 조헌(趙憲)이 사현(四賢)의 종사를 청하였는데, 그 소의 대략에, “전하께서, 지난번에 관학 유생들이 종사하라는 소를 여러 번 올렸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시고, 근신(近臣)들이 경연(經筵) 석상에서 아뢴 것 또한 승낙하지 않으시어 온 세상의 선(善)을 향하는 마음을 막으시니, 신은 마음속으로 민망하게 생각합니다. 김굉필은 일찍이 도학을 부르짖어 옛 선현의 도를 이어 장래 후학의 길을 열어 놓은 업적이 있으며, 조광조는 그 뒤를 이어 더욱 성인의 도를 밝히어서 세상을 건지고 사람의 마음을 맑게 한 공적이 있고, 이언적은 도(道)를 본받음이 순수 독실하여 쓰러지려는 것을 붙들고 위태로운 것을 버티어 바로잡은 노력이 있습니다.이 세 사람은 중국에서 찾아본다 해도 허형(許衡)ㆍ설선(薛瑄) 이외에는 견줄 사람이 드물며, 우리나라에서 찾아본다면 설총ㆍ최치원ㆍ안유 같은 이는 그가 도달한 경지에 미치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더구나 이황은 동방의 유학을 집대성(集大成)하여 주자(朱子)의 정통(正統)을 이었고 조정에 나아가서는 임금을 인도하여 도(道)에 맞게 하려는 정성이 상소에 간절히 어리고, 물러나오면 사람의 재능에 따라 교육을 베푸는 뜻이 강의(講義)와 토론에 절실히 드러나서, 착한 자는 그의 말을 듣고 우러러 사모하며, 악한 자는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하여도 스스로 계칙하였습니다.지금 세상의 선비들이 조금이나마 임금을 높이고 어버이를 사랑할 줄 알며, 예의와 염치가 있는 것은 모두가 그의 도덕에 훈도(薰陶)된 것입니다. 국가가 이미 그를 생시(生時)에 크게 등용하지 못한 것으로 식자들이 태평성세는 보기가 어려운 것이라고 탄식하고 있는데, 또 죽은 뒤에도 높이 추장(推獎)하기를 즐겨하지 않으시니, 오직 질투하고 방종(放縱) 탄망(誕妄)한 무리들이 옆에서 보고 속으로 기뻐할 뿐만 아니라, 전일에 분발했던 이들도 모두 위기가 저상(沮喪)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급히 사현(四賢)을 추장하시어 문묘 종사의 열(列)에 두게 하시기를 엎드려 원합니다 …….” 하였다. 《정암집》
병자년에 백인걸(白仁傑)이 소를 올렸는데 대략에, “우리나라에서 문묘에 종사한 선현들 중에는 오직 정몽주만이 선비들의 여망(輿望)에 맞을 뿐이고, 그 밖의 설총ㆍ최치원ㆍ안유는 모두 조광조의 아래에서도 매우 뒤떨어지는 인물들입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큰 예(禮)를 누리고 있는데, 유독 조광조의 도학의 공적에만 보답하는 제사가 없으니, 신은 실로 마음 아프게 생각합니다. 대신들과 의논하셔서 종사의 예전에 참여하게 하소서 …….” 하였다. 《정암집》
기묘년 5월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백인걸이 소를 올렸는데, 대략에, “우리나라에서 기자(箕子)가 8조의 가르침[八條之敎]을 편 뒤로 수천 년 동안에 유학으로 세상에 이름난 이를 전연 들을 수 없더니, 정몽주가 비로소 홀로 도학(道學)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김굉필이 그 계통을 잘 받들었으나 오히려 크게 드러내지 못한 것을 조광조에 이르러 학문에 대한 뜻을 독실하게 하고, 모든 행동은 도학의 규범에 따랐습니다 ……. 광조가 현인이란 것은 아무도 이의가 없사온데, 여러 흉악한 무리들이, 그를 바르지 않은 학문과 위장된 행동을 하는 사람이라고 하고, 심지어 여묘(廬墓)를 지키는 시정(市井)의 천한 사람까지도 남을 거짓 속인 사람이라고 지목하여 문죄(問罪)하려고 하고, 사부(士夫)로서 유학의 향방(向方)을 가진 자는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여얼(餘孼)이라고 가리켜 공격 배척하였기 때문에, 그의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실이 아주 없어져서 전하지 못하였습니다.전하께서 즉위하신 처음에, 신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궁중에서는 지금도 반드시 광조(光祖)를 역적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였더니, 전하께서는 이르시기를, ‘광조가 역적이 아님은 궁중에서 이미 알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유생들이 사액(賜額)을 청하여 올린 소는 별로 중대한 관계가 있는 일이 아니었는데도 윤허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 하였다. 《정암집》
신사년 10월에 호조 판서 이이(李珥)가 아뢰기를, “지금 교화를 밝히고자 하신다면 반드시 선현을 높이 추장(推獎)하시어 후배들로 하여금 모범받게 하셔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매양 중대한 일이므로 어렵다고만 하셨습니다. 비록 근일(近日)의 유현들을 모두 사전(祀典)에 넣을 수는 없으시더라도 도학을 남보다 먼저 주창하여 밝힌 조광조와 이학(理學)을 깊이 연구한 이황, 이 두 사람은 진실로 문묘에 종사하셔서 많은 선비들의 향학심을 일으키게 함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광해조 무신년에 관학(館學)의 유생들이 소를 올렸는데, 임숙영(任叔英)이 지었다. 소의 대략에, “하늘이 우리나라를 돌보시어 역대의 성주(聖主)께서 서로 계승하시고 부축하여 진작하시니, 인재가 잇달아 많이 나왔습니다. 문경공 김굉필ㆍ문헌공 정여창ㆍ문정공 조광조ㆍ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ㆍ문순공 이황(李滉)과 같은 이는 모두 한 세상에 뛰어난 유학자로서 멀리 전하지 아니한 학통(學統)을 이어 출중(出衆)하고 발군(拔群)하여 한 시대에 태산(泰山)과 북두성(北斗星)처럼 우러러보게 하였으며, 앞에서 창도(倡導)하고 뒤에서 계승하여 긴 밤에 방향을 잃은 사람들에게 해와 달같은 광명을 비춰 주었습니다.그들의 학문을 논한다면 주염계(周濂溪)ㆍ정자(程子)ㆍ장횡거(張橫渠)ㆍ주자(朱子)의 학통이며, 그들의 뜻을 말한다면 요순(堯舜) 시대의 임금과 신하 같은 왕도(王道)를 펴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진실로 세상에 드물게 보는 참 유학자이며, 오랜 세대에 걸쳐 존경받을 스승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높이 보답하는 예전이 없어서 향기로운 향사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 하였다. 《정암집》
경술년 7월 17일에 오현(五賢)을 문묘에 종사하자는 일로 삼사(三司)와 서울과 지방의 유생들이 소를 올려 논청(論請)하였다. 대신들에게 수의를 명하자, 모두 빨리 시행하기를 청하니, 헌의에 의하여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응천일기(凝川日記)》
김굉필ㆍ정여창ㆍ조광조ㆍ이언적을 문묘에 종사하자는 청은 경오년부터 시작하였는데, 이황이 별세하기에 이르러 많은 선비들의 소원은 더욱 간절하였고 주청(奏請)은 더욱 빈번하여졌다. 39년의 세월이 흐르도록 선조가 허락하지 아니한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 아니고, 그 일을 특히 중대시하여 감히 쉽게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광해가 즉위한 지 2년 만에, 제일 먼저 대신들에게 문의하여 그 청을 윤허하였다. 경술년 9월 신해에 친히 선성(先聖)에게 석전(釋奠)을 거행하였는데, 그보다 닷새 앞서서 오현을 동ㆍ서무(東西廡)에 서열(序列)한다는 고유제(告由祭)를 올렸다. 《우복집(愚伏集)》 <묘정계첩서(廟庭禊帖序)>. 선비를 시험보여 김개(金闓) 등을 취하였다.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ㆍ이황이 자기의 스승 조식(曹植)을 족하지 못하게 말한 것을 분하게 여겨 소를 올려 그들을 헐뜯고 무고(誣告)하므로 김육(金堉)이 성균관 장의(成均館掌議)로서 인홍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하니 광해가 노하여 그의 죄를 적발(摘發)하고 금고(禁錮)의 처분을 내릴 것을 명하였으나 대신의 주선으로 벌을 면하였다. 《조야기문》
오현을 종사한 뒤에 예조 판서 이정귀(李廷龜)가 아뢰기를, “우리나라의 문묘 종사는 《대명회전(大明會典)》에 기재되어 있는 위호(位號)와 승사(陞祀)ㆍ출사(黜祀)와는 매우 다릅니다. 안하(顔何)ㆍ순황(荀況)ㆍ공백료(公伯寮)ㆍ진염(秦冉)ㆍ유향(劉向)ㆍ대성(戴聖)ㆍ가규(賈逵)ㆍ왕숙(王肅)ㆍ마융(馬融)ㆍ두예(杜預)ㆍ하휴(何休)ㆍ왕필(王弼) 등은 명 나라에서는 지금 문묘에서 출향(黜享)하였고, 거백옥(蘧伯玉)ㆍ임방(林放)ㆍ정현(鄭玄)ㆍ정중(鄭衆)ㆍ노식(盧植)ㆍ복건(服虔)ㆍ범녕(范甯)ㆍ오징(吳澄) 등은 중국에서는 지금 고치어 향교에서 제사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모두 그대로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후창(后蒼)ㆍ양시(楊時)ㆍ왕통(王通)ㆍ구양수(歐陽修)ㆍ호원(胡瑗)ㆍ설선(薛瑄)ㆍ호거인(胡居仁)ㆍ왕수인(王守仁)ㆍ진헌장(陳獻章)을 종사위(從祀位)에 더 넣었으며, 정통(正統) 정사년에는 호안국(胡安國)ㆍ채침(蔡沈)ㆍ진덕수(眞德秀)를 종사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하지 않았습니다.신장(申棖)과 신당(申黨)은 본래 한 사람인 것을 《가어(家語)》와 《사기(史記)》에 각기 그 이름이 실려 있기 때문에 두 사람으로 잘못 알고 함께 제사하다가 중국에서는 신당은 버리고, 신장만을 두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고치지 아니하였습니다. 대체로 우리나라의 사전(祀典)은 오직 중국의 정통 원년에 간행하여 정한 제도에 좇고 있으나, 중국에서는 가정(嘉靖) 9년에 이르러 예관(禮官)이 널리 전례(典禮)를 상고하기 시작하고, 겸하여 황돈(篁燉)ㆍ정민정(程敏政) 등의 논(論)도 채택하여 마침내 수정 정리하여 승사(陞祀) 또는 출사한 일이 있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시행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대명회전》에 이미 수정한 제도를 간행(刊行)하여 반포하였습니다.
신 등이 가만히 공평하게 상고하여 보고 또 논평하옵건대, 마융(馬融)은 양기(梁冀)를 위하여 이고(李固)를 죽이라는 장주(章奏)를 기초하였으며, 탐오(貪汚)한 죄로 벼슬을 파면당하고, 머리를 깎이고 북방(北方)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형벌을 받았으며, 유향은 신선(神仙)되는 방술(方術)을 즐겨 말하며, 임금에게 글을 올려 황금(黃金)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하였다가 실험에 성공하지 못하여 죄를 받았으며, 공백료는 자로(子路)를 계손(季孫)에게 모함하여 공자(孔子)를 저해하였고, 순황(荀況)은 그의 학설을 이사(李斯)에게 전하였으며 성악설(性惡說)을 저술하였고, 왕숙(王肅)은 권세 있는 간사한 신하에게 몸을 더럽혀 위(魏)를 배반하고 진(晉)을 좇았습니다.하휴는 《춘추(春秋)》를 주해하면서 주(周) 나라를 밀어 내치고 노(魯) 나라를 종주국으로 하였고, 가규는 도참(圖讖)을 경(經)에다 덧붙였으며, 왕필은 노자(老子)ㆍ장자(莊子)의 설을 주지(主旨)로 삼았고, 대성은 탐장(貪贓)을 범하였으며, 두예(杜預)는 상기(喪期)를 단축하여 성인의 가르침에 죄를 지었고, 안하ㆍ진염에 이르러서는 모두 어디서 나온 이름인지 드러나지 않았으며, 또 《가어(家語)》의 70명 제자 명단에도 실려 있지 않으므로 정민정(程敏政)은 말하기를, ‘이름이 잘못 전하여진 것이다.’고 하였으니, 중국에서 이런 자들을 출향(黜享)한 것은 마땅한 처사입니다. 왕통은 비록 참람하게 경서(經書)를 모방하였다는 나무람이 있으나, 위(魏)ㆍ진(晉) 때 유학이 무너진 뒤 공자ㆍ맹자의 도학을 강설(講說)하였고, 나이 30세가 못 되어서 제자를 가르쳤습니다. 양시는 남송(南宋)에 도통(道統)을 전하였으니, 도학을 지킨 공이 정자(程子)ㆍ주자(朱子)에 못지 않으며, 호원(胡瑗)은 ‘체용의 학(體用之學)’을 앞장서서 부르짖었으며, 크게 학교의 법을 천명하였습니다.구양수(歐陽修)는 충의(忠義)와 문장(文章)뿐 아니라, 한자(韓子)ㆍ맹자(孟子)를 추존(推尊)하여 공자에게 계통을 댔습니다. 설선ㆍ호거인은 중국의 선유(先儒)들 중에서 그 학문이 가장 순수하고 바른 것이었고, 후창(后蒼)은 비록 뚜렷이 드러난 사업은 없으나, 한(漢) 나라의 초기에 예(禮)를 해설한 글이 수만 자나 되어 《예기(禮記)》가 다시 세상에 전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을 중국에서 종사위(從祀位)로 추가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 중에서 정현ㆍ정중ㆍ복건ㆍ노식ㆍ범녕ㆍ오징(吳澄)은 정민정의 논평에는 그들의 저작이 성인의 학문을 발전시키기에 부족하다고 하였습니다. 거백옥ㆍ임방은 실은 공자 문하의 제자가 아니라고 하여 중국에서는 모두 고향(故鄕)에서 향사하고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향사할 시골이 없으니 이제 갑자기 문묘 종사를 폐지할 수 없습니다.상산(象山) 육구연(陸九淵)이나 양명(陽明) 왕수인(王守仁)ㆍ백사(白沙) 진헌장(陳獻章)에 이르러서는, 중국에서는 비록 아울러 승사(陞祀)하고 있으나, 그들이 저술한 논설이 이단(異端)으로 흘렀음을 면치 못하였으니, 증사(增祀)하는 서열에 넣을 것으로 논의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 중국에서는 공자를 ‘지성선사(至聖先師)’라고 일컫고, 네 분의 배향위는 ‘복성안자(復聖顔子)’ㆍ‘종성증자(宗聖曾子)’ㆍ‘술성자사(述聖子思)’ㆍ‘아성맹자(亞聖孟子)’라고 일컬으며, 십철(十哲)과 문하 제자들은 모두 ‘선현(先賢)’이라 일컫고, 좌구명(左丘明) 이하는 모두 ‘선유(先儒)’라고 일컫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모두 시호와 봉작(封爵)의 칭호를 쓰고 있습니다. 공자의 시호는 역대에서 각기 증손(增損)한 바 있으나 당(唐) 나라의 개원(開元) 때에 이르러 비로소 ‘문선왕(文宣王)’을 봉하였으며, 오랑캐인 원(元) 나라에 이르러서는 ‘대성(大成)’을 더 붙여 ‘대성문선왕’이라고 하였습니다.구준(丘濬)은 말하기를, ‘하늘에 계신 공자의 영이 반드시 그 시호 받기를 즐겨하지 않을 것이다.’고 하였는데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제 일컬어 ‘지성선사(至聖先師)’라 하였으니, 그 칭호가 비로소 위대하며 그 높음이 비할 데 없어서 전대의 호칭보다 탁월하다고 할 만합니다. ‘성(聖)’이라 일컫고, ‘현(賢)’이라 일컫고, ‘유(儒)’라고 일컫는 것을 모두 명 나라의 정한 제도에 의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러나 다만 70제자는 모두 ‘선현’이라고 일컫는데, 주염계ㆍ정자ㆍ장횡거ㆍ주자 같은 이는 공자ㆍ맹자 이후의 대현(大賢)으로 오직 출생의 선후 때문에 자리가 좌구명(左丘明) 이하의 열(列)에 있어서 아울러 ‘유(儒)’라고 일컫고 ‘현(賢)’이라 일컫지 못하니, 구별없음이 너무 심합니다.만약 출생한 순서를 가지고 자리의 고하를 정한다면, 자사(子思)가 어찌 공리(孔鯉)의 윗자리에 있을 수 있으며, 맹자가 어찌 안자ㆍ증자의 열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문묘는 도(道)의 모임이니 그 시대의 선후를 논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신 등의 망녕된 의견으로는 주염계ㆍ정자ㆍ장횡거ㆍ주자는 ‘선현’이라고 일컫고, 전상(殿上)에 올려 모시는 것이 사리에 맞을 것 같습니다. 이제 오현(五賢)을 종사하는 때를 당하여 정승들의 헌의도 또한 이미 발단하였으니, 청컨대 대신들에게 잘 검토하게 하여 재결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이에 좇았다.
이항복(李恒福)이 헌의하였는데 그 대략에, “진(秦) 나라가 서적을 불사른 뒤로 예(禮)와 악(樂)이 흩어져 없어졌을 때, 홀로 노(魯) 나라의 고당생(高堂生)이 의례(儀禮)를 암송으로 강설(講說)하여 소분(蕭奮)에게 전하고, 소분은 맹경(孟卿)에게, 맹경은 후창(后蒼)에게 전하여, 드디어 대대로 전문(專門)의 학문이 되었습니다. 정민정이 그의 사업이 현저하지 않다고 하였고, 후창은 맹경 뒤의 사람이고, 맹경은 한 나라 중엽 이후의 사람인데, 이제 한 나라의 초기라고 한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후창의 학문은 두 번 전하여 두 대씨(戴氏)에게 이르렀습니다. 두 대씨는 형제로서 그 형은 대성(戴聖)인데 세상에서 대대(大戴)라고 말하는 이이고, 대덕(戴德)은 아우인데 세상에서 소대(小戴)라고 하는 이입니다. 각각 예서(禮書)를 논저한 것이 있어서 주자가 대대(大戴)씨의 예(禮)를 많이 인용하였습니다.그가 탐장(貪贓)으로 패(敗)하였다는 것은 역사가들이 혹은 말하기를, ‘그와 원수진 집에서 허구로 무함한 것이라 하나, 이것은 본래 그 허실을 감히 밝혀 알 수 없는 것이며, 정민정에 대하여는 후대의 선비 중에 부족하게 여기는 이가 많습니다. 다만 시제(試題)를 팔아먹은 것이 수치스러울 뿐 아니라 그가 저술한 한두 편의 글은 우리 유학(儒學)의 죄인됨을 면치 못하였으니 그러한 사람의 논정(論定)한 것이 후세의 단안(斷案)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윤두수(尹斗壽)는 헌의하기를, “신의 망녕된 논의로는 차라리 우리나라의 옛 제도에 의하여 행하고, 후일의 공론을 기다리는 것이 혹 무방할 것 같습니다 …….” 하였다. 《병문집(幷文集)》


동문선 제52권
 주의(奏議)
풍왕서(諷王書)


설총(薛聰)

신은 듣자오니, 옛날 화왕(花王 모란(牧丹))이 처음으로 이곳에 이르렀을 때, 향내 풍기는 동산 속에 심고 푸른 장막으로써 둘렀더니, 늦은 봄을 당해 곱게 피자, 온갖 꽃을 무시하고 유독 빼어났답니다. 그러자 가깝고 먼 곳에서 곱고 고운 정령과 젊디젊은 꽃들이 모두 달려와서 화왕을 뵙되 오직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답니다. 별안간 한 아리다운 아가씨가 고운 얼굴 하얀 이빨, 밝은 단장과 고운 옷차림으로 사뿐사뿐 걸으며 어여쁘게 앞에 와서 아뢰기를, “저는 눈처럼 흰 모래 물가를 밟고 거울인 양 맑은 바다 위를 마주보면서, 봄비에 목욕하여 때를 씻고, 맑은 바람을 쏘여 스스로 노닐었사옵니다. 저의 이름은 장미라 하옵니다. 대왕의 아름다운 덕망을 듣사옵고, 저 향내 풍기는 휘장 속에서 잠자리를 모시고자 하오니, 대왕께서 저를 허용하시겠사옵니까.” 하였습니다. 또 어떤 사내가 베옷에 가죽 띠를 띠고 흰 머리로 지팡이를 짚고 절름거리는 걸음으로 고불고불 걸어 오더니 아뢰기를, “저는 서울 밖 한 길가에 살고 있사옵니다. 아래로는 아득한 들 경치를 굽어보고, 위로는 높이 솟은 산 빛을 비겼사옵니다. 저의 이름은 백두옹(白頭翁)이라 하옵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대왕께서는 좌우의 공급이 넉넉하여 비록 기름진 쌀과 고기로써 창자를 채우고 아름다운 차(荼)와 술로써 정신을 맑게 한다 하오나, 상자 속에 깊이 간직한 좋은 약으로써 기운을 도울 것이요, 영사(靈砂)로써 독을 제거하여야 할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옛말에, ‘비록 실과 삼의 아름다움이 있더라도, 갈[菅]이나 사초[蒯]도 버리지 말라. 모든 군자는 결핍될 때를 대비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알지 못하겠습니다. 대왕께서 뜻이 있으신지요,” 하였답니다.
어떤 자가 아뢰기를, “이 둘이 함께 왔으니, 어떤 것을 취하고 어떤 것을 놓친단 말씀입니까.” 하였더니, 화왕은, “저 사내의 말도 일리는 있겠지마는, 그렇게 되면 아름다운 아가씨를 놓치게 되겠으니, 장차 어떻게 하였으면 좋단 말인가.” 하고 답하였답니다. 그제서야 그 사내가 앞으로 나아가 아뢰기를, “저는 대왕을 총명하고도 의리를 아시는 분인 줄 알고 왔더니, 이제 보니 글렀습니다. 대개 임금된 분들이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를 좋아하고, 곧고 올바른 자를 싫어하지 않는 이가 드물었기 때문에, 맹가(孟軻)는 불우하게 일생을 마쳤었고, 풍당(馮唐)은 말단 벼슬로 머리가 희어졌습니다. 예로부터 이러하니, 낸들 어이하겠습니까.” 하였더니, 화왕은 곧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 했다.” 하고 사과하였답니다.


[주B-001]주의(奏議) : 신하가 임금에게 바치는 하나의 문체(文體) 이름이다. 그 내용은 대체로 시사(時事)를 논하여 경계한 것이다.


임하필기 제12권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우리나라의 스승

신문왕 12년(692)에 설총(薛聰)을 높은 품계에 발탁하였다. 설총은 박학하여 우리나라 말로 구경(九經)의 뜻을 풀이하였으며 이를 통해서 후생들을 훈도하였다. 성덕왕(聖德王) 16년(717)에 태감(太監) 수충(守忠)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문선왕(文宣王)과 십철(十哲) 및 72제자의 화상(畫像)을 올렸는데 명을 내려서 이를 태학에 두도록 하였으며, 경덕왕(景德王) 6년(747)에는 국학(國學)을 고쳐서 태학감(太學監)이라고 하였다.
사신(史臣) 권근(權近)이 말하기를, “경덕왕 5년(746)에 비로소 여러 박사(博士)를 두었는데, 이때 강수(強首)와 설총 등이 의리를 통달하여 깨쳐서 구경을 우리나라 말로 강의하여 후학들을 훈도하였으며, 한때 이들이 우리 동방의 영걸(英傑)이 되었다. 그리고 말엽에는 최고운(崔孤雲 최치원(崔致遠))이 재능이 정민(精敏)하여 학문을 좋아하였고 중국에 유학해서 당시의 제배(儕輩)들이 그의 문장을 대단히 일컬었는바, 그는 능히 천하의 선비들을 두루 벗하였다고 할 만하다. 그런데 신라가 삼국 시대에는 비록 그 문헌(文獻)이 일컬을 만한 것이 있었으나 처음 나라를 세울 때의 정령(政令)이나 제도들은 문교(文敎)에 근본을 둔 것들이 아니었으며, 그 뒤에 와서 비록 중화(中華)의 기풍을 사모하기는 하였지만 볼만한 것은 겨우 한둘에 불과하였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