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지리 서원 전고 /사전전고(祀典典故) 산. 명산등

산전전고 악(嶽 명산(名山))ㆍ바다ㆍ독(瀆 강하(江河))ㆍ산천(山川)

아베베1 2011. 4. 10. 21:21

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사전전고(祀典典故)
악(嶽 명산(名山))ㆍ바다ㆍ독(瀆 강하(江河))ㆍ산천(山川)


악(嶽)은,

 

남에는 지리산(智異山) 남원(南原)ㆍ 중부에는 삼각산(三角山) 서울의 북쪽ㆍ 서에는 송악산(松嶽山) 개성부(開城府)ㆍ 북에는 비백산(鼻白山) 정평(定平) 이다.
바다(海)는, 동해(東海) 양양(襄陽)ㆍ남해(南海) 나주(羅州)ㆍ서해(西海) 풍천(豐川) 이다.
독(瀆)은, 남에는 웅진(熊津) 공주(公州) 과 가야진(伽倻津) 양산(梁山), 중부에는 한강(漢江) 서울의 남쪽, 서에는 덕진(德津) 장단(長湍) 과 평양강(平壤江) 평양 과 압록강(鴨綠江) 의주(義州), 북에는 두만강(豆滿江) 경원(慶源) 이다.
단(壇)에는 다만 단을 둘러싼 담이 하나 있고, 단이 없으면 묘우(廟宇) 삼간(三間)이 있다.
명산 대천은, 동에는 치악산(雉嶽山) 원주(原州) 이요, 남에는 계룡산(鷄龍山) 공주(公州)ㆍ죽령산(竹嶺山) 단양(丹陽)ㆍ우불산(亏弗山) 울산(蔚山)ㆍ주흘산(主屹山) 문경(聞慶)ㆍ금성산(錦城山) 나주(羅州) 이요, 중부에는 목멱산(木覓山) 서울[都城] 안 이요, 서에는 오관산(五冠山) 장단(長湍) 과 우이산(牛耳山) 해주(海州) 이요, 북에는 감악산(紺嶽山) 적성(積城) 과 의관령(義舘嶺) 회양(淮陽) 이다.
이 밖에 또 서에 마니산(摩尼山) 강화(江華), 남에 한라산(漢拏山) 제주(濟州), 북에 백두산(白頭山) 갑산(甲山) 을 더 넣었다. 이상은 사전(祀典)에 추가해서 실린 것이다.
남에는 양진 명소(楊津溟所 명소는 수신(水神)에게 제사지내는 곳) 충주(忠州) 와 양진(楊津) 양주(楊州), 서에는 장산곶(長山串) 장연(長淵) 과 아사진송곶(阿斯津松串) 안악(安岳) 과 청천강(凊川江) 안주(安州) 구진익수(九津溺水 평양(平壤)), 북에는 덕진 명소(德津溟所) 회양(淮陽) 와 비류수(沸流水) 영흥(永興) 이다. 단(壇)이 없으면 묘우(廟宇) 삼간이 있다.
신좌(神座)는 북쪽에서 남으로 향해 있고, 중춘(仲春 음력 2월)과 중추(仲秋 음력 8월)에 제사를 지낸다. 1월에 먼저 원장제(元狀祭)를 행한다. 축문에는 국왕의 성과 이름을 일컫고, 악(樂)은 없으며, 천(川)ㆍ독(瀆)에는 축문과 폐백을 물에 가라앉힌다. 제물은 악(嶽)ㆍ해(海)에는 각각 그 지방의 토산물을 썼으며, 독에는 모두 흑색을 쓴다. 명산ㆍ대천의 축문에는 ‘국왕’이라 칭한다.
○ 인조 19년에 비로소 마니산에 제사를 지냈다.
○ 숙종 16년에 서흥현(瑞興縣) 황해도 서흥군 에 독질(毒疾)이 있어서 백성이 많이 갑자기 죽으므로, 임금이 친히 제문을 지어 관리를 보내 본도의 명산에 제사를 지냈다.
○ 가뭄이 심할 때에는 비 오기를 비는 망제(望祭)를 지낸다. 즉 북쪽 교외(郊外)로 나가서 악ㆍ해ㆍ독 및 모든 산천의 신위를 설치하고 각각 그 방위에서 모두 안을 향하여 망제를 한다. 기미년에 북단(北壇) 기우제(祈雨祭) 헌관 영풍군(靈豐君) 식(㵓)이 올린 소에, “돼지 한 마리의 제물로 악ㆍ독ㆍ산천 19신위를 향사하니 조각조각 잘라서 보기에 너무나 빈약합니다.”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이와 같이 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어 증설할 수 없습니다.” 하여, 증설하자는 논의가 드디어 그쳤다.
○ 계미년에 예조 판서 민진후(閔鎭厚)가 아뢰기를, “한라산은 해외의 명산으로 홀로 사전(祀典)에서 누락되었습니다.” 하니, 숙종이 명하여 대신에게 수의(收議)하게 하였다. 영의정 신 완(申琓)이 헌의(獻議)하기를, “명산ㆍ대천이 모두 사전에 실려 있는데 한라산만이 홀로 누락되었으니 예조의 계사(啓辭)에 이른바 《오례의(五禮儀)》가 완성되기 전에는 탐라가 아직 귀순하지 않은 때이므로, 이로 인해 누락된 것 같다는 것이 그럴 듯합니다. 사전에 추가해서 기재한다 해도 아마 거리낄 바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윤지완(尹趾完)은 헌의하기를, “본주[濟州] 계본(啓本)에 이른바, 《오례의》를 편찬ㆍ완성할 때에 제주는 순종하기도 하고 거역하기도 했다는 말은 고증할 만한 말이 아닙니다.혹 해외로 구별하여 내지와 다르다 하여 그런 것이 아닐는지요. 국전(國典)에 없는 것을 이제 새로 행하기는 어렵사오나, 다만 제주의 사세가 다른 모든 도(道)의 주(州)ㆍ군(郡)과는 다른 점이 있으니, 만일 본주로 하여금 춘추로 제후가 봉내(封內 제후가 맡아서 다스리고 있는 나라 안)의 산천에 제사하는 예(禮)와 같이 향사한다면 혹 무방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전교하기를, “한라산이 해외의 명산으로 홀로 사전에 들지 않아 흠궐(欠闕)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영상의 논의에 의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 숙종이 온양 온천에 행행(行幸)하게 되니 예조에서 아뢰기를, “행행하실 때 경과하는 도중에 있는 명산ㆍ대천의 제사를 한강에는 오는 3월 3일에 행하고, 과천(果川) 관악산(冠岳山)과 직산(稷山) 성거산(聖居山)에는 각각 그곳에 주필(駐蹕)하시는 날에 설행하고, 온정(溫井)에는 8일에 설행하되 향축(香祝)과 폐백은 서울에서 내려 보내고, 신명에게 제물로 바칠 양(羊)이나 돼지 등의 희생(犧牲)은 그 도에서 바치도록 하옵소서.” 하니, 그대로 좇았다.
○ 영종 정해년에 좌상 한익모(韓翼謩)의 아룀으로 말미암아 영종이 명을 내리기를, “백두산의 망사(望祀)를 비백산(鼻白山)의 예에 따라 설행하라.” 하고, 갑산부(甲山府)에서 80리 되는 망덕산(望德山)에 제각(祭閣)을 세웠다.
○ 사방에 있는 명산과 해(海)와 독(瀆)의 제사는 그 의식이 대단히 존엄하였으니, 옛날에 이른바, 책명(冊命)에 천자의 이름이 있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런데 신이 듣자오니, 호남 인사들의 말이, ‘지리산(智異山)의 제사에 지방관이 직접 가서 제사지내는 것을 즐겨하지 아니하여, 교생(敎生)을 시켜서 대리로 행사하게 하고, 축사(祝辭)에 국왕이 삼가 신하 아무[某]를 보냈다.’라고 하옵는데, 교생이 헌관이 되면 마땅히 ‘삼가 신하 교생을 보내어……’라고 일컬을 것이니, 그 외람하고 뒤섞여서 불경(不敬)함이 심합니다. 이것은 비단 지방관의 죄일 뿐만 아니라 감사도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오니, 이 뒤에도 만일 이 버릇을 계속한다면 감사와 수령에게 불경의 죄를 가하기로 하고, 제례를 마치고 각 도의 감사는 어느 관원 아무를 헌관으로 삼아 제사를 행한 사실을 즉시 계문하도록 하면, 묵은 폐단을 깨끗이 제거하게 될 것이며, 신(神)을 공경하는 예에도 거의 가할 것입니다. 《백헌집(白軒集》 경자년 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