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신묘년 산행 /2011.4.10. 출근중 아파트내에서

2011.4.10. 자전거로 출근하다가 정원에 있는 백목련을 보고 ..

아베베1 2011. 4. 11. 08:19

 예전에 비해 목련화의 개화가 조금 늦은 듯하다

 하연색을 자랑하며 개화를 시작하니 순백의 아름다움을 주는 듯 합니다 

 목련꽃처럼 순수한 마음을 가져보기를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여야 .... 

 차가운 겨울의 인내를 견뎌내며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자연에 감사드린다 .

 

 선조님께서는 자연과 목련을 보고 노래한시 몇 구절을 인용하여 본다

 

상촌선생집 제60권
 청창연담 하(晴窓軟談下)
청창연담 하(晴窓軟談 下)


신묘년(1591, 선조24) 여름에 내가 하관(夏官 병조)의 낭관(郞官)으로 대궐에서 입직(入直)하고 있을 때 이 상국(李相國) 백사공(白沙公 이항복(李恒福))이 지신사(知申事 도승지)로서 역시 은대(銀臺 승정원)에 입직하고 있다가 절구 한 수를 보내 오기를,

후덥지근한 방 쳐박혀 기분 울적하였는데 / 深室霾炎氣欝紆
꿈 속에 물새되어 맑은 못에 목욕했네 / 夢爲鷗鷺浴晴湖
겉으로는 허깨비 따른다 할지라도 / 縱然外體從他幻
자연의 정취 즐기는 것 진짜 나는 이거라오 / 煙雨閑情却是吾

라 하였는데 기상이 매우 좋은 시라 하겠다.
신축년(1601, 선조34) 봄에 백사공이 질병을 이유로 정승의 지위를 사직하기에 내가 출사(出仕)하도록 권면했더니, 근체시(近體詩) 한 수를 써서 대답하기를,

중흥을 담당할 자 잘도 계책 꾀하는데 / 中興作者足謀謨
이 늙은이 어찌 감히 태평시대 쓰임 될까 / 老子何堪聖世需
공군은 원래 시대와 안 맞는 것 알고 있지만 / 自識孔君元齟齬
여상이 호도하지 않는다고 그 누가 말했던가
/ 誰言呂相不糊塗
명성 졸렬하게 되는 거야 별로 관심 없는데 / 時名短拙關心少
계획이 차질 생겨 하는 일마다 어긋나네 / 身計差池入手殊
이상하다 어찌하여 진 나라 왕 태부는 / 却怪晉家王太傅
백발의 나이에도 벼슬 마음 없다 했나
/ 白頭猶道宦情無

라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그 당시 형세를 어떻게 해 볼 수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었다.
태헌(苔軒) 고경명(高敬命)은 임진왜란 때 절의(節義)를 세웠는데, 태헌의 아들 종후가 복수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가 또 진양성(晉陽城)이 함락되던 날에 죽었으니, 부자(父子)가 함께 순절(殉節)한 것이야말로 진(晉) 나라의 변문(卞門)과 그 아름다움을 짝한다 하겠다. 종후 역시 문장에 능했는데 그가 순식간에 지은 격문(檄文)의 내용이 너무나 훌륭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그가 제주(濟州)에서 말을 모집할 때 지은 글 중에,

소매를 떨치고 일어날 사람이 / 投袂而起者
바다 밖에도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네 / 吾知海外有人
채찍을 손에 들고 임하였으니 / 執策而臨之
천하에 말이 없다고 말하지 말지어다 / 莫曰天下無馬

라는 내용이 있었는데, 말의 의미가 놀랄만큼 절묘하고 대우(對偶)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으므로 한 때 널리 암송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런 자질을 가지고도 끝내 불우하게 되고 말았으니 애석한 일이다. 신묘년 봄에 지제고(知製誥 한림(翰林))에 선발되었다가 곧바로 대간의 탄핵을 받고 말았는데, 아, 조정의 인사 행정이 이 모양이었으니 어떻게 왜구(倭寇)를 불러들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임진왜란 때 동래 부사(東萊府使) 송상현(宋象賢)이 성을 지키다 죽었는데, 죽기 전에 그의 가친(家親)에게 글을 보내기를,

외로운 성에 달무리 졌는데 / 孤城月暈
여러 진은 높이 베개하고 있구나 / 列鎭高枕
임금과 신하의 의리 중하고 / 君臣義重
아비와 자식의 정은 가볍네 / 父子恩輕

이라고 하였다. 그 말이 늠름하기만 한데 비록 옛날의 열혈 남아라 하더라도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겠는가.
우리 나라 서경(西京 평양)은 풍광과 누각의 경치가 빼어난데다 미녀들과 풍류를 즐길 수가 있어 끊임없이 중국에 가는 사신들이 이곳에 도착하게 되면 갈 길을 잊은 채 오래도록 여기에 머물며 즐기기 일쑤였고 거의 정신을 잃고서 완전히 빠져버리는 경우마저 있곤 하였다. 고려조(高麗朝)의 학사(學士) 정지상(鄭知常)의 시에,

비 갠 뒤의 긴 둑길 풀빛 더욱 푸르른데 / 雨歇長堤草色多
그대 보내는 남포에 구슬픈 노래 울리누나 / 送君南浦動悲歌
어느 때나 대동강 물 마를 날이 있을까 / 大同江水何時盡
이별의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 더하네 / 別淚年年添綠波

라고 하였는데, 온 세상이 다투어 전하면서 지금에 이르도록 절창(絶唱)으로 떠받들고 있다.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경진년(1580, 선조13) 년간에 가운(嘉運) 최경창(崔慶昌)이 대동 찰방(大同察訪)이 되고 군수(君受) 서익(徐益)이 평양서윤(平壤庶尹)이 되었는데 이들은 모두가 시인이었다. 이에 그 운(韻)을 따서 채련곡(採蓮曲)을 지었는데, 최(崔)의 시에,

길고 긴 강 언덕에 수양버들 늘어지고 / 水岸悠悠楊柳多
조각배 저 멀리 들려오는 연 따는 노래소리 / 小船遙唱採菱歌
붉은 꽃잎 모두 지고 가을바람 살랑살랑 / 紅衣落盡西風起
해 저물녘 텅 빈 강에 일어나는 저녁 물결 / 日暮空江生夕波

이라 하였고, 서(徐)의 시에서는,

많이들 연밥 따는 남쪽 호수 아낙네들 / 南湖士女採蓮多
새벽부터 단장하고 서로 노래 부르누나 / 曉日靚粧相應歌
치마 가득 찰 때까지 배도 꼼짝하지 않고 / 不到盈裳不回棹
가끔가다 부서지는 먼 물가의 하얀 물결 / 有時遙渚阻風波

라 하였다. 그 뒤에 이순(而順) 고경명(高敬命)과 익지(益之) 이달(李達)이 뒤미처 화운(和韻)하였는데, 고(高)의 시에,

뱃전에 부딪치는 맑은 물결 복숭아꽃 / 桃花晴浪席邊多
연꽃 속에 일렁이며 뱃노래 울려 퍼지누나 / 搖蕩蓮舟送棹歌
취해 기댄 미인 생각 아마 잊지 못할텐데 / 醉倚紅粧應不忘
산들바람 펄럭펄럭 휘장에 물결 이네 / 小風輕颺幙生波

라 하였고, 이(李)의 시에는,

들쭉날쭉 연잎 속에 연밥도 하 많은데 / 蓮葉參差蓮子多
연꽃 잎새 사이로 여인들 노래 소리 / 蓮花相間女郞歌
돌아올 땐 물목에서 짝과 약속 지키려고 / 來時約伴橫塘浦
고생고생 배 저으며 물 거슬러 올라가네 / 辛苦移舟逆上波

라 하였다. 이들 모두가 일대(一代)의 가작들인데 논하는 자들은 그 중에서도 이(李)의 작품의 가장 우수하다고 평가한다.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신축년(1601, 선조34) 겨울에 내가 옥당(玉堂)으로 있을 때에 선조대왕(宣祖大王)이 우리 나라 사람들의 시부(詩賦)를 초록(抄錄)해 올리라고 명하였다. 내가 일단 자료를 수집해놓고 미처 탈고(脫稿)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 때문에 면직을 청하고 집에 있게 되었으므로 마침내 문형(文衡)의 직책을 반납하였다. 이때 문형을 바로 오봉(五峯) 이공(李公)호민(好閔)이 맡게 되었는데, 그 역시 오래도록 시일을 미루다가 완성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을사년 봄에는 오봉도 문형에서 체직되고 서경(西坰) 유공(柳公)근(根)이 대신하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또 납언(納言 언관(言官))에 임명되었다가 은대(銀臺 승정원)에 들어가자 선조대왕이 다시 국(局)을 설치해 정선(精選)하라고 신명(申命)하면서 오봉과 서경과 나로 하여금 그 일을 관장하게 하였는데, 이때 해평(海平) 윤공(尹公) 근수(根壽), 월사(月沙) 이공(李公) 정귀(廷龜), 유천(柳川) 한공(韓公) 준겸(浚謙), 만취(晩翠) 오공(吳公)억령(億齡), 홍 부학(洪副學) 경신(慶臣), 정 첨추(鄭僉樞) 협(恊), 김 정(金正) 현성(玄成)이 참여하였다. 이렇게 해서 모두 네 종류로 분류하여 책을 만들었는데 서경이 서문을 썼다. 《동문선(東文選)》이 나온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80여 년이 지나는 동안 시문(詩文)의 거장(巨匠)들을 이루 손꼽을 수가 없고 그들의 저술 또한 한우충동(汗牛充棟)이라 할 것이니, 위로 옛 사람들의 풍아(風雅)와 짝할 법도 하건마는 음향(音響)과 격력(格力) 면에서 끝내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는데, 이는 어쩌면 한 쪽에 치우쳐 있는 우리 나라의 풍기(風氣)에 영향을 받아서 그렇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수록할 때에도 역시 각자의 소견대로 하였는데, 그러다 보니 뽑혀야 할 것도 다 뽑히지 못하고 버려야 할 것도 다 버리지 못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시를 짓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좋은 시를 선정하는 것이 어렵다는 말이 정말 그렇다고 하겠다.
선조대왕이 옥당(玉堂)에 명하여 《주역(周易)》 고경(古經)을 교열하게 하고, 《춘추(春秋)》좌씨(左氏)ㆍ정씨(程氏)ㆍ호씨(胡氏)의 전(傳)을 취집한 뒤 《사전춘추(四傳春秋)》의 예를 본받아 잘 정리해서 올리도록 명하였는데, 내가 부학(副學)으로서 실제로 그 일을 관장하였다. 두 경에 대한 일이 끝나자 또 유신(儒臣)들에게 명하여 《주역》을 번역해 풀이하도록 하였는데, 이때 《주역》에 대해 능통한지의 여부를 따지지도 않은 채 한 때의 명관(名官)이 모두 동원되었고 더러 팔괘 방위(八卦方位)를 모르는 자조차 참여하였다. 그리고는 각자 자기의 견해만 고집하면서 의견이 같은 사람끼리 패거리를 지어 의견이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등 그지없이 소란스럽게만 되었을 뿐 끝내 긴요한 곳을 계발(啓發)하지는 못하게 되었다. 어쨌든 몇 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책을 만들어 올렸는데, 일단 완성된 다음 그 책을 보니 고칠 필요가 없는 것을 고치거나 고쳐야 할 것을 고치지 않은 것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주역》이라는 책이 어떤 책인데 지팡이로 땅을 짚어보고 가는 소경으로 하여금 제멋대로 금방 단정을 짓게 한단 말인가. 백호관(白虎觀)과 석거각(石渠閣)에서 제유(諸儒)가 모여 제경(諸經)에 대해 의논한 다음 만들어낸 것들도 오히려 후세의 모범이 되지 못하고 있는데, 하물며 한 쪽에 치우쳐 있는 나라의 후학들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국(局)을 장차 폐지하려 할 즈음 특별히 1등의 선온(宣醞)을 하사받아 그지없이 즐겁게 노닌 다음 자리를 파하였는데,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사전(謝箋)을 올리기도 하고 두루마리 그림책을 만들어 성대했던 일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이때 우연히 나에게 절구 한 수가 떠오르기를,

성인의 마음을 엿보지도 못했는데 / 未見聖人心
성인의 일을 어떻게 알겠는가 / 焉知聖人事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씻어주어 / 安得洗人心
시의를 같이서 논할 수 있을까 / 與之論時義

하였는데, 이는 감히 한 시대를 가볍게 보려 해서가 아니고 내가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생각을 그냥 적어본 것뿐이다.
의주(義州) 통군정(統軍亭)은 세 나라의 경계에 위치하면서 경치가 장관이니 온 세상에서 다 찾아보아도 그 짝을 구하기가 힘들 것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시인들이 이곳을 주제로 읊은 시가 많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그 형세와 기상을 제대로 표현한 경우는 있지 않았다. 그런데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연소한 나이에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절구 한 수를 짓기를,

내가 강을 건너가서는 / 我欲過江去
곧바로 송골산에 오르고 싶네 / 直登松鶻山
서쪽에서 화표주(華表柱)의 학 불러 내다가 / 西招華表鶴
구름 속에서 서로 한 번 놀아보려네 / 相與戲雲間

이라 하였는데, 이 시가 대작(大作)은 아니라 하더라도 스스로 기발하여 뒤에 전할 만하다 하겠다. 그 뒤에 시인 묵객들이 와서 읊은 것 가운데 이런 정도의 수준을 보여주는 시는 아직 보지 못하였다.
송강공(松江公)이 만력(萬曆) 임진년에 삼도체찰사(三道體察使)의 명을 받고 서로(西路)에서 바닷길로 남하(南下)하다가 장연(長淵)을 거치면서 금사사(金沙寺)에 주차(駐箚)하였다. 이때 시를 짓기를,

금사사에 열흘 간 머무는 동안 / 十日金沙寺
고국에 대한 마음 일각(一刻)이 삼추같네 / 三秋故國心
밀려오는 밤 물결 상쾌한 기운 앗아가고 / 夜潮分爽氣
돌아가는 기러기 슬픈 소리 들려오네 / 歸雁有哀音
오랑캐 생각하며 칼을 자주 쳐다보고 / 虜在頻看劍
친구가 죽었으니 거문고 줄 끊고 싶네 / 人亡欲斷琴
당시 태헌(苔軒 고경명(高敬命))이 전사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임
평소 읽던 출사표 글 / 平生出師表
국난(國難)에 임해 다시 읊어보네 / 臨難更長吟

이라 하였는데, 그 시가 청완(淸惋)하면서 사람을 격앙케 한다.
우리 나라에 대단한 문장가들이 많이 배출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자기 식대로 하려고만 힘썼을 뿐 당(唐) 나라 때의 작품에서 모범을 취해보려고 노력한 작품조차 극히 드문 실정이다. 그런데 충암(沖菴 김정(金淨))과 망헌(忘軒 이주(李冑)) 이후로는 최경창(崔慶昌)ㆍ백광훈(白光勳)ㆍ이달(李達) 등 몇 사람이 가장 저명하다. 충암의 시 가운데 사람들의 입으로 전송(傳誦)되어 오는 것이 원래 많은데, 가령

강남 땅 못다 꾼 꿈 고요한 대낮인데 / 江南殘夢晝厭厭
꽃다운 해 날마다 시름만 더해가네 / 愁逐年芳日日添
꾀꼬리 제비 오지 않고 봄날 또 저무는데 / 鶯燕不來春又暮
살구꽃에 이슬비 발을 도로 내려놓네 / 杏花微雨下重簾

이라고 한 것이나, 또

가을 바람 낙엽지는 금강의 가을인데 / 西風木落錦江秋
연무 덮인 모래섬 바라보면 시름겨워 / 煙霧蘋洲一望愁
해 저물녘 술은 깨고 사람은 멀리 떠나는데 / 日暮酒醒人去遠
감당 못할 이별 생각 강 누각에 가득하네 / 不堪離思滿江樓

라고 한 시 등은 당 나라 사람들의 시집 속에 놔두어도 쉽게 분간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망헌의 시 가운데

통주는 천하의 절경이라 / 通州天下勝
누각들 하늘에 솟았구나 / 樓觀出雲霄
저자엔 금릉의 물화(物貨) 가득하고 / 市積金陵貨
물줄기 양자강에 합류하네 / 江通楊子潮
가을이라 까마귀떼 물가에 내려 앉고 / 飢鴉秋落渚
저녁이라 외로운 새 요동으로 돌아간다 / 獨鳥暮歸遼
말 탄 이 내 몸 천리 길 나그네라 / 鞍馬身千里
정자 올라 바라보는 멀고 먼 고국땅 / 登臨故國遙

라고 한 것 역시 충암에 버금가는 시라고 하겠다. 최(崔)의 시에,

지난 해 절 언덕에 배를 갖다 대놓고는 / 去歲維舟蕭寺岸
꽃 꺾어 물가에서 전송을 하였었지 / 折花臨水送行人
이별 슬픔 저 산승은 아는지 모르는지 / 山僧不管傷離別
문을 닫고 무단히 또 봄 한 철을 보내누나 / 閉戶無端又一春

이라고 한 것이나, 백(白)의 시에,

못 속엔 붉은 연꽃 바람이 집에 가득터니 / 紅藕一池風滿院
나무마다 매미 소리 비가 마을로 몰려가네 / 亂蟬千樹雨歸村

이라고 한 것이나, 이(李)의 시에,

병객의 외로운 배 달빛만 밝게 비춰주고 / 病客孤舟明月在
노승의 적막한 절 꽃잎만 많이 져 있구나 / 老僧深院落花多

라고 한 표현들은 한 번 음미하면 그 맛을 알 수가 있다.
신 참판 종호(申參判從濩)는 성묘조(成廟朝)의 사신(詞臣)이었다. 일찍이 상림춘(上林春)이라는 기생을 돌봐주다가 그의 집에 들러 시를 짓기를,

서울 거리 봄 바람에 이슬비 지나감에 / 紫陌東風細雨過
먼지 하나 일지 않고 버들가지 비꼈어라 / 輕塵不動柳絲斜
열두 난간 발 친 곳에 옥같은 미녀 있어 / 緗簾十二人如玉
대궐 안의 시인들 말 가는 대로 찾아드네 / 靑瑣詞臣信馬過

하였는데, 이 시가 한때 전해져 읊어지면서 이에 따라 상림춘의 이름도 배나 값이 뛰었다. 참판공이 일찍 죽고 상림춘이라는 자도 민간에 묻혔는데, 나이가 노년에 접어들자 공의 시로 첩(貼)을 만든 다음 귀족 자제에게 가지고 가서 그 제목대로 시를 지어달라고 청하는 한편 명공(名公)과 거경(巨卿)에게도 모두 애원하며 시를 받아내었다. 그 중에서도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의 시가 으뜸이었는데, 그 시에,

경국지색 그 솜씨 아직 자태에 남았는데 / 容謝尙存傾國手
밤 깊어 부르는 노래 슬피 탄주하는구나 / 哀絃彈出夜深詞
소리마다 인생의 황혼 원망하는 듯도 한데 / 聲聲似怨年華暮
뜬 인생 너에게도 오는 늙음을 어이하랴 / 奈爾浮生與老期

라고 하는 등 슬픔과 원망의 감정을 격렬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 당시 시골에 내려가 있던 모재가 어쩌면 자신의 심정을 은근히 빗대고 싶은 생각이 또한 들어서 그렇게 했는지도 모르겠는데, 깊이 음미해 보면 그가 가탁한 바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봄 꿈은 진 나라 호해(胡亥) 때보다 어지럽고 / 春夢亂於秦二世
나그네 시름 노 나라 삼가 때만큼 몰려오네 / 羈愁强似魯三家

라고 하는 시는 누구의 작품인지는 모르겠으나 말의 뜻이 모두 새롭고 구절 역시 초경(峭勁)하니 심상한 묵객이 지은 것은 아닐텐데 어떤 이는 문관(文官) 박란(朴蘭)의 시라고도 한다.
원천석(元天錫)은 고려 사람으로 공민왕(恭愍王) 때 벼슬하지 않고 원주(原州)에 살면서 목은(牧隱 이색(李穡)) 등 제로(諸老)와 서로 왕래하였다. 그의 유고(遺稿) 중에는 후세에서 알 수 없었던 당시의 사적(事迹)을 직설적으로 기재한 것들이 있는데, 신우(辛禑)를 공민왕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그의 직필(直筆) 가운데에서도 대표적인 것이라 하겠다. 그의 시 가운데 ‘삼가 주상전하가 강화로 옮겨가고 원자가 즉위했다는 말을 듣고 느낀 감상[伏聞主上殿下遷于江華元子卽位有感]’이라고 제(題)한 2수를 보건대,

훌륭한 임금 부자(父子) 꼭 알맞게 나오셨기에 / 聖賢相遇適當時
이제부터 운세가 돌아온다 믿었었다오 / 天運循環自此知
나라 걱정하는 마음 초야라고 어찌 없을까 / 田畝豈無憂國意
간절한 마음 쏟아 안위를 염려하네 / 更殫忠懇念安危

라 하고, 또

새 임금 즉위하고 옛 임금은 강화로 / 新主臨朝舊主遷
쓸쓸한 해변가 운무만 가득하네 / 蕭條海郡但風煙
하늘 문 바른 길을 그 누가 좌우하나 / 天關正路誰開閉
역사의 전철 어떠한지 밝히 살펴 보리라 / 要見明明鑑在前

이라 하였으며, ‘도통사 최영이 형을 당하다[都統使崔瑩被刑]’라는 제목의 시 3수를 보건대,


라 하고, 또

조정에 우뚝 서니 범하는 자 감히 없고 / 獨立朝端無敢干
충의에 입각하여 난리마다 평정했네 / 直將忠義試諸難
나라 안 어디서나 백성들의 소망 되어 / 爲從六道黔首望
삼한의 종묘 사직 편안하게 만들었네 / 能致三韓社稷安
같은 반열 영웅들도 얼굴이 부끄럽고 / 同列英雄顔更厚
죽지 않은 못된 자들 뼈 속이 서늘했지 / 未亡邪侫骨猶寒
다시 당한 난국을 그 누구가 타개할까 / 更逢亂日誰爲計
간교한 일 꾀하는 지금 사람 가소롭네 / 可笑時人用事奸

이라 하고, 또

내가 지금 부음 듣고 애도하며 시 짓나니 / 我今聞訃作哀詩
공을 슬퍼하기보다 나라가 걱정이요 / 不爲公悲爲國悲
하늘 운세 어찌 될지 그 누구가 알까마는 / 天運誰能知否泰
안정시킬 나라 터전 아직도 안 돼 있네 / 邦基未了定安危
잘 드는 칼 부러졌으니 한탄한들 어이하리 / 銛鋒已折嗟何及
외로웠던 그 충성심 안타깝기 그지없네 / 忠膽常孤恨不支
홀로 산하 대하고서 이 노래를 부르는데 / 獨對山河歌此曲
흐르는 물 흰구름 모두가 탄식하네 / 白雲流水摠噫噫

라 하였으며, ‘듣건대 이 달 15일에 국가가 정창군을 왕으로 세우고 전왕 부자는 신돈의 자손이라 하여 서인으로 폐했다고 함[聞今月十五日 國家以定昌君立王位 前王父子以爲辛旽子孫廢爲庶人]’이라는 제목의 시 2수를 보건대,

전 임금 부자지간 서로들 분리되어 / 前王父子各分離
일만 리 동쪽 서쪽 한 구석에 옮겨졌네 / 萬里東西天一涯
몸이야 서인으로 전락된다 할지라도 / 可使一身爲庶類
마음이야 천고토록 변할 리가 있겠는가 / 寸心千古不遷移

라 하고, 또

왕건(王建) 태조 그 맹세 하늘에 응답되어 / 祖王信誓應于天
끼친 은택 수백 년 간 흘러져 전해 왔네 / 餘澤流傳數百年
어찌하여 일찍부터 진위(眞僞)를 분간 못했던가 / 分揀假眞何不早
푸른 하늘 밝게 살펴 비춰보고 있으리 / 彼蒼之鑑照明然

이라 하였으며, ‘국가가 영을 내려 전왕 부자에게 죽음을 내리다[國有令前王父子賜死]’라는 제목의 시 1수에,

높은 지위 부유한 생활 모두 임금 은혜인데 / 位高鍾鼎是君恩
반목하며 복수심에 집안을 죽여 없앴구나 / 反目含讐已滅門
나라에 어찌 큰 복이 내려질 수 있겠는가 / 一國豈能流景祚
말 못할 원한 지하에서 풀기 어렵게 되었구나 / 九原難可雪幽寃
옛날 풍속 없어지고 태평 시대 돌아옴에 / 古風淪喪時還泰
공평한 새 법 시행되고 도는 더욱 높아지리 / 新法淸平道益尊
옥 지대(址臺) 쪽을 향해 부르는 만세 소리 / 且向玉墀呼萬歲
산골까지 넉넉하게 은총 내려 주시기를 / 願施優渥及山村
이라 하였으며, ‘한산군이 참소를 당해 장단으로 유배됨[韓山君被讒謫長湍]’이라는 제목의 시 2수를 보건대,

천보 시대 빛 감추고 가혹한 정치 나왔는데 / 天寶韜光政令苛
누구 있어 옥을 쪼고 다시 갈듯 할 것인가 / 有誰如琢復如磨
그 동안 삼일 밤을 꿈 속에서 만났는데 / 邇來夢謁連三夜
혼령으로 노닐면서 지어준 노래 생각나네 / 記取魂遊作一歌
이 나라 정치 상황 화택 규(睽)로 돌아가고 / 邦國經綸歸火澤
강물에 떠 있는 배 풍파에 시달리나 / 江河舟楫困風波
하늘이 사문을 없애려 않는다면 / 天如未喪斯文也
광 땅 사람 있다 한들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
/ 縱有匡人奈我何

라 하고, 또

옥돌은 원래 완전한데 일이 잘못 틀어졌지 / 玉自無瑕事已訛
두 발 잘린 초인(楚人)의 뜻 정녕 다름 아니었네
/ 荊人兩刖定非侘
바다 동쪽 바람과 달 응당 분을 품을 게고 / 海東風月應含憤
이 세상 영웅들도 서로들 탄식하리 / 天下英雄所共嗟
만 백성 똑같이 새로운 일월 쳐다보나 / 萬姓同瞻新日月
삼한의 옛 산하는 그대로 여전하네 / 三韓自固舊山河
저 푸른 하늘만은 시비 분명 살필 텐데 / 明知枉正蒼蒼在
자나깨나 원하노니 건강 유의하시기를 / 寤寐祈傾體氣和

라고 하였다. 시어(詩語)가 질박하여 제대로 표현되지 못한 곳이 많긴 하지만 일에 대해서만은 숨김없이 곧이곧대로 썼으니 정인지(鄭麟趾)의 《고려사(高麗史)》에 비교해 보면 해ㆍ별과 무지개처럼 현격하게 차이가 날 뿐만이 아닌데 이를 읽다 보면 몇 줄기 눈물이 흘러 떨어지곤 한다. 대저 고려가 망하게 된 것은 무진년(1388, 우왕14)에 임금을 폐위시킨 데에서 유래한다. 그런데 임금을 폐위시킨 뒤에도 목은(牧隱)과 같은 사람들이 아직 남아 있어 한 가닥 공의(公議)는 없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그 때 정도전(鄭道傳)과 윤소종(尹紹宗) 등의 무리가 ‘임금이 왕씨(王氏)가 아니라고 하는 자는 충신이고 왕씨라고 하는 자는 역적이다.’는 주장을 내놓은 뒤 조정을 선동하고 인심을 현혹시켜 마침내 사류(士類)를 결딴내고 사람들의 입에 재갈을 물릴 수 있었던 것인데, 이런 상황에서 겨우 5년을 지탱하다가 나라가 망하고 만 것이었다. 이러한 때에 태어나서 바르고 올곧게 자신을 세우려는 사람들의 삶이야말로 얼마나 고달프고 낭패를 당한 것이었겠는가. 그런데도 인심이 다 현혹되지는 않고 사람의 입을 다 재갈 물릴 수는 없어 초야에서 이렇듯 동호(董狐)의 직필(直筆이 나왔으니, 이 어찌 눌린 바위 틈 사이로 죽순이 나온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백 평사 광홍(白評事光弘)의 호는 기봉(岐峯)으로 광훈(光勲)의 형이다. 서관(西關 평양)에서 주색에 빠져 노닐다가 끝내는 그 길로 죽었는데, 그가 지은 관서곡(關西曲)이 세상에 유행되었다. 그 뒤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이 서로(西路)에서 벼슬살이하면서 백(白)이 돌봐 준 기생에게 시를 지어 주기를,

대동강 가 꽃 경치는 예전과 다름없고 / 浿水煙花依舊色
능라도 무성한 풀 이제껏 봄이로다 / 綾羅芳草至今春
낭군 한 번 가신 뒤로 소식 영영 안 오는데 / 仙郞去後無消息
관서곡 한 가락이 눈물 자아내는구나 / 一曲關西淚滿巾

이라 하였는데 한 때 전송(傳誦)되었다.
홍 상국 섬(洪相國暹)의 자(字)는 퇴지(退之)요 호는 인재(忍齋)로서 의정(議政) 언필(彦弼)의 아들이다. 젊었을 때 김안로(金安老)의 모함에 떨어져 정형(庭刑)을 받고 흥양(興陽)으로 유배되었는데, 안로가 망하자 마침내 크게 현달(顯達)하였다. 그가 형을 받을 때 어떤 사람이 소 찬성 세양(蘇贊成世讓)에게 말하기를 “퇴지가 여기에서 끝나게 되다니 애석하다.”고 하였는데, 찬성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필시 앞길이 유망하게 될 것인데 어찌 갑자기 죽겠는가.” 하자, 그 사람이 어떻게 그것을 아느냐고 물으니, 찬성이 말하기를 “전일 염여퇴(灔澦堆 중국 양자강 구당협(瞿唐峽) 상류의 큰 암석이 있는 곳)라는 제목의 과제시(課製詩) 결구(結句)에서 그가 ‘원숭이 끊임없이 울어대면서 급한 여울 올라가는 나를 전송하누나[淸猿啼不盡送我上危灘].’라고 하였는데, 이런 시구를 지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운명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홍섬이 마침내 의정부에 정승으로 들어가 20년 동안이나 지내다가 나이 82세에 죽었으니, 시를 통해서도 이처럼 사람의 궁달(窮達)을 점칠 수 있는 것인가.
박 상국 순(朴相國淳)은 자(字)가 화숙(和叔)으로서 박우(朴祐)의 아들이요 눌재(訥齋) 박상(朴祥)의 조카이다. 그의 맑은 덕과 꿋꿋한 절개는 남이 따라갈 수 없었으며 정승으로 10년 동안 있으면서 아무 잘못도 없었다. 그런데 계미년(1583, 선조16)에 정인(正人)을 헐뜯는 자가 그를 모함에 빠뜨리면서 그의 죄 열 가지를 들어 배척할 것을 청하였는데, 선조대왕이 그에게 다른 뜻이 없다는 것을 통촉해 준 덕분으로 화를 면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병을 핑계로 물러나와 영평(永平) 땅에서 살았는데, 경치 좋은 그곳에서 유유자적하다가 아무 병 없이 생을 마쳤다. 그가 배척을 받고 서호(西湖)에 있을 때 시를 짓기를,

거문고 책 끼고 낭패당해 용산으로 물러나와 / 琴書顚倒下龍山
목란선(木蘭船)에 의지하고 바람 따라 흘러가네 / 一棹飄然倚木蘭
석양 노을 조각조각 붉기만 하고 / 霞帶夕暉紅片片
비온 뒤의 가을 물결 넘실넘실 푸르구나 / 雨增秋浪碧漫漫
꼬시래기 잎새 다 시들어 소객(騷客)의 마음 슬퍼지고 / 江蘺葉悴騷人怨
물여뀌 꽃 다 졌으니 백로도 밤에 추워하리 / 水蓼花殘宿鷺寒
백발 머리에 강 떠도는 나그네 신세 되어 / 頭白又爲江漢客
서리 이슬 잔뜩 맞고 여울을 거슬러 올라가네 / 滿衣霜露泝危灘

이라 하였는데 한때 널리 읊어졌다. 또 그의 ‘승려의 시축에 제함[題僧軸]’이라는 시에,

아침에 암자 물러나와 한가한 틈을 타서 / 小齋朝退偶乘閑
궤안에 기대고는 쓸쓸히 먼 산 바라보네 / 隱几蕭然看遠山
예로부터 세상 분규 그칠 날이 없었지만 / 終古世紛無盡了
오늘날 처신하기 더욱 더 어렵구나 / 秪今人事轉多艱
하늘 질러 지나간 새 까마득히 안 보이고 / 長空過鳥元超忽
석양녘 외로운 구름 갔다가는 돌아오네 / 落日孤雲自往還
생각나네 그 언젠가 먼 절에서 노닐던 일 / 遙想舊遊天外寺
목련꽃 활짝 피고 물은 졸졸 흘렀었지 / 木蓮花發水潺潺

이라 하였는데, 이것 역시 경절(警絶)하다고 칭해졌다. 그는 호를 사암(思庵)이라 하였다. 사암이 영평에 있을 때 소절(小絶) 한 수를 짓기를,

이따금 들려오는 외마디 산새 소리 / 谷鳥時時聞一箇
책상 머리 적요한데 서책들만 널려 있네 / 匡床寂寂散群書
어떡하나 백학대 앞 흐르는 저 시냇물 / 每憐白鶴臺前水
산문만 나가면은 이내 흙탕물 될 것이니 / 纔出山門便帶淤

라 하였는데, 한가하게 노닐며 자재(自在)하는 뜻과 홀로 높이 속세를 초월한 기상 모두가 이 시에 갖춰져 있다고 할 만하다.
노 상국 수신(盧相國守愼)은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蘇齋)로서 을사사화(乙巳士禍) 때의 명류(名流)이다. 20년 동안 진도(珍島)에 유배되어 있다가 명묘(明廟) 말년에 양이(量移 환경이 나은 곳으로 유배지를 옮기는 것)되었으며, 선조(宣祖)가 즉위하자 곧바로 부름을 받고 관각(館閣)에 몸을 담았는데, 10년이 채 못 되어 단규(端揆 우의정)의 지위에 오르는 등 임금으로부터 지극한 은총을 받았다. 문장 또한 기건(奇健)하여 당대의 으뜸이었는데, 특히 섬에 있을 때 지은 시 가운데 놀랄 만한 절창이 많아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었다. 가령 그의 아우와 작별할 때 지은 시 1구를 보면,

석양 숲속 까마귀들 피 토하듯 울어대고 / 日暮林烏啼有血
썰렁한 하늘 저 기러기 슬프구나 짝도 없네 / 天寒哀雁影無隣

이라 하였고, 효릉(孝陵 인종(仁宗)의 능)을 참배했을 때의 시 1구를 보면,

그런 일 실제 있어 효릉이라 명명했고 / 有實陵名孝
사심이 없었기에 인종이라 시호했네 / 無私諡曰仁

이라 하였고, 이런 일에 대해서 읊은 시 1구를 보면,

논의야 그 당시에 정해질 수 있겠지만 / 物議當年定
인심은 후세에야 공정해지는 법이라오 / 人心後世公

이라 하였는데, 이런 작품들을 통해서 그의 전체(全體)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성수종(成守琮)은 바로 청송 선생(聽松先生 성수침(成守琛))의 아우로서 기묘사화(己卯士禍) 때의 명류이다. 일찍 문과(文科)에 합격했으나 과방(科榜)에서 삭제당한 뒤 한거(閑居)하였는데, 그의 시 가운데

저자 거리 변두리에 뚝 떨어진 몇 겹 청산 / 數疊靑山落市邊
해 저물녘 성안에선 연기가 흩어지는구나 / 層城日暮散風煙
사는 곳이 토굴같아 별로 사람도 안 오는데 / 幽居近壑人來少
혼자서 국화 따다 돌밭에 앉곤 하네 / 獨採黃花坐石田

이라고 한 하나의 소절(小絶)을 읊어 보면 그 사람됨을 상상할 수 있다.
서화담(徐花潭)은 이름은 경덕(敬德)이요 자는 가구(可久)로서 타고 난 자질이 상지(上知)에 가까운데 황폐한 곳에서 일어나 스스로 학문을 할 줄을 알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소역(邵易 소강절(邵康節)의 역)에 조예가 깊었는데 그가 뽑아낸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의 수(數)를 보면 하나도 잘못된 곳을 찾을 수가 없으니 기걸스럽다고 하겠다. 가령 그가 중국에 태어나 대유(大儒)를 직접 스승으로 모시고 배웠더라면 그 고명하고 투철하게 된 경지가 현재 보이는 발전 정도로 그치지만은 않았을 것인데, 하여튼 희역(羲易 복희(伏羲) 선천역(先天易))의 오솔길을 제대로 찾아낸 자는 아조(我朝)에서 화담 한 사람뿐이었다. 그의 시에,

책 읽으며 당초에는 경륜에 뜻 뒀는데 / 讀書當日志經綸
늙어가며 다시금 안회(顔回)의 가난이 좋아졌네 / 歲暮還甘顔氏貧
다툼의 요소 부와 귀는 손을 대기 곤란하니 / 富貴有爭難下手
막는 이 없는 자연 속에서 몸을 편히 해야 하리 / 林泉無禁可安身
낚시하고 나물 캐면 그런 대로 배 채우고 / 採山釣水堪充腹
바람과 달 시 읊으면 정신도 명랑해진다오 / 咏月吟風足暢神
의심없이 깨우쳐야 이것이 진정 쾌활한 것 / 學到不疑眞快活
일백 년 헛되이 살다 가는 사람은 되지 말아야지 / 免敎虛作百年人

이라 하였는데, 이를 통해 그의 뜻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성대곡(成大谷)의 이름은 운(運)으로서 아름다운 자질을 갖고 태어나 일찍부터 세상의 그물을 빠져 나갔는데, 그의 형이 우연히 을사사화(乙巳士禍)를 당해 비명(非命)에 죽고 말자 이로부터 더욱 출세(出世)에 뜻이 없어져 보은(報恩) 속리산(俗離山) 아래에 숨어 살다가 80여 세의 나이로 죽었다. 시 역시 그의 사람됨을 닮아 충담(沖澹)하고 한아(閑雅)하여 서호처사(西湖處士 송(宋) 임포(林逋))의 유운(遺韻)을 간직하고 있다. 그의 시구(詩句) 가운데 아름다운 것을 예로 들면,

소매 짧은 봄 옷이 몸에 꼭 맞고 / 春服稱身雙袖短
일곱 줄 옛 거문고 손에 익구나 / 古琴便手七絃長
십 년 동안 산중 약초 모조리 맛 보았고 / 十年嘗盡山中藥
이따금 손님 와서 좋은 얘기 들려주네 / 客到時聞口齒香

이라고 한 것이 있고, 남명(南冥) 조식(曹植)을 전송한 시에서,

북명(北冥)의 기러기 홀로 남쪽 바다로 떠나는데 / 冥鴻獨向海南飛
가을 바람에 낙엽지는 계절을 맞았구나 / 正値秋風落木時
땅에 널린 곡식 낱알 오리 닭들 쪼아 먹는데 / 滿地稻梁鷄鶩啄
푸른 하늘 높이 날며 귀찮은 세상일 잊었구나 / 碧雲天外自忘機

라고 하였는데, 이와 같은 것들이 매우 많다.
조남명(曹南冥)의 이름은 식(植)이요 자는 건중(楗中)인데 절의(節義)를 숭상하여 깎아지른 듯한 천 길 벼랑과 같은 기상이 있었으며 벼슬하지 않고 은둔 생활을 하였다. 문장 역시 기위(奇偉)하여 범상치가 않았는데, 가령

천 석들이 종을 보게나 / 請看千石鍾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도 안 난다네 / 非大叩無聲
만고에 변함 없는 천왕봉을 보세나 / 萬古天王峯
하늘이 울어대도 우는 일 전혀 없네 / 天鳴猶不鳴

이라고 한 시를 보면 그 시운(詩韻)이 호장(豪壯)할 뿐만이 아니라 자부하는 것이 얕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괴이한 것은 그로부터 1대(代)를 전해 내려와 정인홍(鄭仁弘)이라는 자가 허다한 옥사(獄事)를 만들어내어 사람을 죽이고 1백 년 동안 내려온 윤기(倫紀)를 무너뜨려버린 점이다. 그러나 귀산(龜山)이 육당(陸棠)에 대해서 어떻게 할 수 있었겠는가.
남명의 시에,

사람들 바른 인물 좋아하는 것 / 人之好正士
호랑이 가죽 좋아함과 비슷하구나 / 好虎皮相似
살았을 땐 어떻게든 죽이려 하고 / 生則欲殺之
죽고 나면 아름답다 일컫네그려 / 死後稱其美

라 하였는데, 세간의 속성을 속속들이 알고서 잘도 형용했다 하겠다.
남추강(南秋江 남효온(南孝溫))의 현금부(玄琴賦)야말로 국조(國朝) 사부(詞賦)의 으뜸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 문재(文才) 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말미에서 오음(五音)에 관해 논한 것을 보면 지극히 은미한 뜻이 들어 있는데, 어쩌면 느낀 바가 있어서 그렇게 나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것을 읽을 때면 미상불 눈물이 흘러내리곤 한다.
근래 규수(閨秀)의 작품으로는 조 승지 원(趙承旨瑗)의 첩인 이씨(李氏)의 것이 제일이다. 경치를 읊은 그녀의 시 중 1구에,

강물에 몸 담근 갈매기 꿈 하나 널찍하고 / 江涵鷗夢濶
하늘에 들어간 기러기 근심도 하 길구나 / 天入雁愁長

이라고 하였는데, 고금의 시인 가운데 이렇게 표현한 자는 아직 없었다. 허초당(許草堂 허엽(許曄))의 딸이자 김 정자 성립(金正字誠立)의 처로서 스스로 경번당(景樊堂)이라고 호를 지은 여류(女流)의 시집이 세상에 간행되었는데 어느 시편을 보아도 놀랄 만큼 예술성이 뛰어나다. 그 중에서도 전해 오는 광한전(廣寒殿) 상량문(上樑文)은 무척 아름답고 청건(淸健)하여 사걸(四傑 초당(初唐)의 왕발(王勃)ㆍ양형(楊炯)ㆍ노조린(盧照隣)ㆍ낙빈왕(駱賓王)을 말함)의 작품과 비슷한 점이 있다. 그런데 다만 시집에 실려 있는 것 가운데 가령 유선시(游仙詩)같은 것은 태반이 옛 사람의 시편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일찍이 그 근체시(近體詩) 2구를 보건대,

금방 얼굴 화장하고 또 거울 쳐다보고 / 新粧滿面猶看鏡
못다 꾼 꿈 마음 걸려 누각에서 서성이네 / 殘夢關心瀨下樓

라 하였는데, 이것은 바로 옛 사람이 지은 시이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그녀의 남동생 허균(許筠)이 세상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시편을 표절(剽竊)하여 슬쩍 끼워넣은 것이다.’고 하는데, 이 말이 그럴 듯하기도 하다
차천로(車天.輅)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 아비 차식(車軾) 때부터 대대로 문재(文才)가 있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천로의 재주가 더욱 절륜하여 장편(長篇) 대작(大作)을 끊임없이 왕성하게 지어내는 등 사단(詞壇)의 우두머리가 되기에 충분하였는데, 그의 시 가운데 가령,

바람 결에 울부짖는 발해의 파도 소리 / 風外怒聲聞渤海
눈 속에 잠긴 수심 음산의 빛이로다 / 雪中愁色見陰山

이라고 한 구절은 널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람됨이 경솔하고 불량하여 과거 응시생으로부터 뇌물을 받아먹고 시험장에서 대신 답안지를 작성해서 합격시켜 준 경우도 매우 많았으며, 만년에는 이재영(李再榮)과 함께 권간(權奸)에 빌붙고는 그의 아들 대신 제술해주는가 하면 상소를 올려 시의(時議)에 억지로 맞추려고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분개하였는데 얼마 있다가 병으로 죽었다. 재주란 이처럼 논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옛 사람이 ‘문장 실력은 하나의 조그마한 기예에 불과하다.’고 한 것이 정말 맞는 말이라 하겠다.
자순(子順) 임제(林悌)는 성격이 호방하고 시도 잘했는데 일찍이 지은 패강곡(浿江曲) 10 수 가운데 하나를 보면,

대동강 가 소녀들 봄볕 밟고 거니는데 / 浿江兒女踏春陽
어느 곳 봄볕인들 애간장이 안 끊기랴 / 何處春陽不斷腸
끝없이 내리는 저 햇살로 베를 짤 수만 있다면 / 無限煙絲若可織
님을 위해 재단해서 춤옷을 만들어 주련마는 / 爲君裁作舞衣裳

이라 하였다. 시어가 매우 염려(艶麗)한데 이는 대체로 번천(樊川 두목(杜牧))을 본받아 지은 작품이라 하겠다.
고려 정지상(鄭知常)의

복사꽃 붉은 비 새들은 재잘재잘 / 桃花紅雨鳥喃喃
청산 속에 파묻힌 집 산봉우린 삐쭉삐쭉 / 繞屋靑山間翠嵐
머리 위에 얹힌 모자 삐딱하게 그냥 둔 채 / 一頂烏紗慵不整
꽃 언덕 길 술에 취해 강남 꿈꾸며 자는구나 / 醉眠花塢夢江南

이라고 한 시는 착상이 기발하고 표현이 아름다운데 우리 나라의 시 가운데에는 여기에 비할 만한 작품이 드물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한 점 군산 위의 석양 빛 붉은 노을 / 一點君山夕照紅
끝도 없는 그 세력 오와 초를 집어 삼키누나 / 濶呑吳楚勢無窮
바람은 초저녁 달에 계속 불어 올라가고 / 長風吹上黃昏月
땅거미 져 오는데 초롱 속의 촛불 하나 / 銀燭紗籠暗淡中

이라고 한 시는 기상이 넓고 커서 다른 사람들을 삼켜버릴 만하다 하겠다.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은 시인이다. 그리고 기위(奇偉)한 기질의 소유자로서 남과 서로 어울리지 않으면서 시속을 따라 행동하지 않았으며, 청련(靑蓮 이백(李白))의 시를 배우려 노력하였고 그 가법(家法)의 규모가 매우 컸다. 언젠가 그의 소절(小絶) 한 수를 읊어보건대,

어떤 사람 물가에 기대어 서 있는데 / 人方憑水檻
해오라기 한 마리도 여울가에 멈춰 섰네 / 鷺亦立沙灘
머리가 흰 것이야 서로 비슷하다마는 / 白髮雖相似
나는 한가한 반면에 해오라긴 여유 없네 / 吾閑鷺未閑

이라 하였는데, 세상을 흘겨보며 자신의 멋대로 살려고 하는 호방한 뜻을 알 수가 있다.
동파(東坡)의 시에,

주공과 관숙(管叔) 그리고 채숙(蔡叔)이여 / 周公與管蔡
유감일세 초가 삼간에서 같이 안 산 것 / 恨不茅三間

이라 하였는데, 내가 이 시를 읊을 때면 문득 길게 탄식을 하곤 한다. 가령 희단(姬旦 주공)이 다시 세상에 나온다면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될 것인가. 옛날에 내가 백이(伯夷) 숙제(叔齊)의 사당을 참배하면서 시를 짓기를,

군신 간의 의리는 은(殷)과 주 때 없어졌고 / 君臣義廢商周際
형제 간의 우애는 관숙(管叔) 채숙(蔡叔)때 무너졌네 / 兄弟恩壞管蔡時
우습구나 소부(巢父) 허유(許由) 무슨 일을 하였는가 / 却笑巢由何事者
일생을 영수(潁水)에서 요만 피하고 다니다니 / 一生淸潁避堯爲

라 하였는데, 이를 보고서 어떤 이는 과격하다고도 했으나 실은 그렇게 과격한 논은 아닌 것이다.
정송강(鄭松江)이 해직되어 남쪽 지방에 있을 때 시를 짓기를,

도성 아래 남쪽 지방 수풀만 울창한데 / 掖垣南畔樹蒼蒼
돌아오는 꿈 속 멀리 옥당에 올랐다오 / 歸夢迢迢上玉堂
두견새 울음 소리 산 대나무 찢어지고 / 杜宇一聲山竹裂
외로운 신하 흰 머리털 이때 더욱 길어지네 / 孤臣白髮此時長

이라 하였는데, 그 표현이 사람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한다.
또 어떤 이에게 준 시의 말구(末句)에,

어떻게 하면 돌로 변해 / 何當化爲石
저무는 강 머리에 우뚝 서 있게 될꼬 / 屹立暮江頭

라 하였는데, 이것 역시 뛰어난 표현으로서 그러한 발상 자체에 호감이 간다.
지천(芝川) 황정욱(黃廷彧)은 문장에 깊은 조예가 있었다. 그의 시구 가운데,

평생토록 귀거래(歸去來)를 노래삼아 불렀는데 / 平生漫說歸田好
반 세상 지나도록 벼슬 길에 매어 있네 / 半世猶歌行路難

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 뜻이 매우 격렬하다.
간이(簡易) 최립(崔岦)은 문장을 지음에 있어 고문(古文)을 추급(追及)하려 힘쓰고 시는 여사(餘事)로 여겼는데 그런 시 역시 남보다 뛰어나게 기건(奇健)한 구절들이 있었다. 내가 그와 함께 경사(京師)로 가는 동안 연로(沿路)에서 서로 주고받은 시들이 매우 많았는데 그 시구들을 한 때 좋아했었다. 가령,

두우(斗牛)를 쏘는 검기(劍氣) 그 누가 보았던가 / 劍能射斗誰看氣
황제도 보기 전에 벌써 옷에 향기 나네 / 衣未朝天已有香

이라고 한 것이나, 또

상림원(上林苑) 맴도는 갈가마귀 나무 앉을 자리 없고 / 烏繞上林無樹着
남포 좇는 저 기러기 옛 모래섬 아니구나 / 雁遵南浦故洲非

라고 한 것이나, 또

종남산과 위수 물 늘상 보듯 친숙한데 / 終南渭水如常見
무덕과 개원 시절 다시 볼 수 있을런가 / 武德開元得再攀

이라고 한 것들은 언어 표현이 정절(精切)하고 교건(矯健)하다 하겠다.
우계(牛溪) 성혼(成渾)이 사암(思庵 박순(朴淳))을 애도한 시에,

세상 밖 구름 산 깊고 또 깊숙한데 / 世外雲山深復深
시냇가 초가집 이젠 찾기 어려워라 / 溪邊草屋已難尋
배견와 위에 떠오른 삼경의 달이여 / 拜鵑窩上三更月
선생의 일편 단심 지금도 비춰주네 / 曾照先生一片心

라 하였는데, 사암을 애도하는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고 하겠다. 배견와는 바로 사암이 거하던 별장의 이름이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중봉(重峯) 조헌(趙憲)을 애도하면서,

아 슬프다 여식이여 / 吁嗟乎汝式
공자(孔子)ㆍ안자(顔子) 배우고 가의(賈誼)ㆍ굴원(屈原) 사모했지 / 學孔顔而慕誼原
곧게 죽으려 하더니 끝내 순절(殉節)하였구나 / 欲死於直而竟死於節
아 슬프다 여식이여 / 吁嗟乎汝式

이라 하였는데, 세상에서 말할 줄 안다고들 하였다.
진간재(陳簡齋 송(宋) 진여의(陳與義))의 시 가운데,

나그네 생활 흘러가네 시권 속에 파묻혀서 / 客子光陰詩卷裏
살구꽃 소식 들려오네 비소리에 뒤섞여서 / 杏花消息雨聲中

이라는 구절이 있고, 우리 나라 김 박사 질충(金博士質冲)의 시 가운데,

삼 년 간의 약 꾸러미 병은 여전히 낫지 않고 / 三年藥裏人猶病
한밤중의 비 소리 꽃이 모두 활짝 피네 / 一夜雨聲花盡開

라는 구절이 있는데, 대체로 볼 때 시어(詩語)가 서로 비슷하다. 그런데 박사의 작품 역시 당시 사람들에 의해 많이 읊어졌다.
최간이(崔簡易)가 백이(伯夷) 숙제(叔齊)의 사당을 주제로 하여 시를 읊기를,

그 당시 삼강의 인륜 중히 여겨서 하였을 뿐 / 只爲三綱當日重
훗날 오등의 영화 바라고 한 일 아니었네 / 非期五等後時榮
청운지사(靑雲之士) 열전(列傳) 지어 문자를 달릴 적에 / 靑雲作傳馳文字
이름만 줄곧 논하다니 견식이 어설프군
/ 一味論名見卽輕

이라 하였는데, 이는 전에 사람들이 내놓지 못한 것으로서 칠언 근체시(近體詩) 가운데 아래 2구에 나오는 것이다.
간이공(簡易公)이 전주부윤(全州府尹)으로 있다가 부름을 받고 서추(西樞)로 들어와 중국과의 외교 문서를 전담하였다. 그런데 괴원(槐院 승문원)에 제조(提調)가 매우 많아 각자 소견을 고집하였기 때문에 문서 하나를 만들어 낼 때마다 짜깁기해야 되는 경우가 태반이었으므로 간이가 무척 고심하였다. 이즈음 어떤 이에게 준 시 1연(聯)을 보면,

난세에 글 쓰는 것 고삐 풀린 망아지요 / 亂世用文方釋馬
구미 맞춰 말 만들 땐 파리떼 윙윙 거리누나 / 從人安字轉成蠅

이라 하였는데, 해학적인 표현을 근사하게 구사하면서도 율려(律侶)가 자연적으로 들어맞았다고 하겠다.
운장(雲長) 송익필(宋翼弼)은 서출(庶出)이라는 신분의 구속을 받았지만 천품이 무척 고매했고 문장 역시 고상하였다. 가령

짙푸른 버들 숲에 연무(煙霧) 뚝뚝 떨어질 듯 / 柳深煙欲滴
고요한 연못 위에 해오라기 나는 것 까먹은 듯 / 池淨鷺忘飛

라고 한 구절을 보면 그 시격(詩格)이 여러 사람들을 뛰어넘고 있는데, 그 청파(淸葩)한 점이 귀하게 여겨질 뿐만 아니라 이치로 따져도 저절로 수긍이 간다.
백사(白沙) 이 상국(李相國)이 무오년(1618, 광해군10) 봄에 대비(大妃)를 폐위한 일을 간하자 시의(時議)가 극전(極典)을 적용하려고 하면서 하수인들을 사주한 결과 참형(斬刑)에 처하라고 요청하는 상소가 하루에도 서너 번씩 올라오곤 하였다. 이때 대사헌 이병(李覮)과 대사간 윤인(尹訒) 등이 절도(絶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시키라고 청하자 상이 멀리 유배보내도록 하여 처음에 관서(關西)로 귀양보내었다. 이에 다시 하수인들을 사주해서 절새(絶塞)에 놔두도록 청하여 육진(六鎭)에 이배(移配)했다가 또 삼수(三水)로 옮겼는데 상이 특별히 북청(北靑)으로 옮기게 하였다. 도성을 떠나던 날 절구(絶句) 한 수를 읊기를,

태양이 빛을 감춰 대낮에도 어두운데 / 白日陰陰晝晦微
북풍이 불어닥쳐 길손 옷깃을 찢는구나 / 朔風吹裂遠征衣
요동 땅 그 성곽은 옛날 그대로 있을텐데 / 遼東城郭應依舊
정령위(丁令威) 한 번 가서 못 돌아올까 염려되네
/ 只恐令威去不歸

라고 하였는데 이를 듣고 모두 눈물을 흘렸다. 이때 영상인 덕양 기공(德陽奇公 기자헌(奇自獻)) 및 정 첨추 홍익(鄭僉樞弘翼),김 정 덕함(金正德諴)이 함께 바른말을 하다가 모두 북쪽 변경으로 유배되어 동시에 떠나갔는데 이들이 가면서 국맥(國脈)도 다하고 말았다. 당시 옥당의 장관은 정조(鄭造)였다.
정군 익지(鄭君翼之 익지는 정홍익의 자(字)임)가 도중에서 시를 짓기를,


이라 하였는데, 그 말 역시 읊어볼 만한 운치가 있다.
왕감주(王弇州 명(明) 왕세정(王世貞))의 열사(閱史)라는 시를 보건대,

책 덮고 사립에 기대 흥망 성쇠 살펴보니 / 掩卷柴門數落暉
옛적부터 성인 정치 모두들 바랐지만 / 古來俱羨聖之威
어찌 알았으랴 이 세상 하 많은 일 / 那知天地長多事
모두가 영웅들 날뛴 탓임을 / 總爲英雄未息機
차마 두 눈 뜬 채 인체를 보게 되고 / 雙眼耐他人彘在
육신은 잘도 제파되어 돌아왔구나 / 一身贏得帝羓歸
건어물도 조룡의 악취 막지 못했고 / 鮑魚不救祖龍臭
제 환공(齊桓公)의 살찐 몸 구더기가 슬었었지 / 螻蟻翻因齊霸肥
대궐에 있다가도 사태가 일변하면 초가로 옮겨지고 / 黃屋事移輸白屋
곤룡포 입다가도 인연이 다하면은 서민 옷 입게 되네 / 衮衣緣盡着靑衣
임금의 자손들도 때때로 운명 뒤바뀌고 / 王孫子姓時時改
한식날 찾아와도 왕릉들 배를 곯는구나 / 寒食園陵箇箇饑
망아지 틈새 지나가듯 세상 목숨 어느새 다 끝나고 / 塵世隙駒俄自了
비평가들 붓 한 번 까딱만 하면 쉽게도 못된 놈되고도 남지 / 竪儒毫免易成非
강남 땅 사슴 돼지 노닐던 그 곳 / 江南鹿豕同遊處
아름드리 거목들만 하늘 찌르네 / 喬木連雲盡百圍

라 하였는데, 가령 제왕들에게 혼이 있다면 이 곡(曲)을 듣고 어찌 기가 막히지 않겠는가.
이공 수광(李公睟光)의 자는 윤경(潤卿)이요 호는 지봉(芝峯)인데 나와 노닌 지 지금 40 년이 된다. 단아한 풍도가 진세(塵世)를 벗어나 세상의 변고를 차례로 다 맛보았으면서도 조금이라도 좌절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이와 함께 기미를 보고 일어나 함정에 떨어지는 화를 면할 수 있었으니, 그야말로 금옥군자(金玉君子)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지금은 경(卿)의 직질(職秩)을 가진 신분으로 외직(外職)에 보임되기를 원하여 밖으로 나가 순천부(順川府)를 맡고 있는데, 병진년(1616, 광해군8)에 조정을 하직할 당시 김포(金浦) 시골 집으로 나를 찾아왔었다. 그리고 금년 여름에는 그의 생질 유생(柳生)이 오는 편에 시권(詩卷)을 부쳐 보냈는데 그 가운데 칠언 근체시 2수가 들어 있었다. 그 시를 보건대,

늘그막에 남쪽 시골 수령으로 내려와서 / 暮年身世宰炎鄕
다스릴 능력 없어 탄식만 하고 앉아 있네 / 治郡無能坐嘯長
한가한 집 뜨락엔 봄 제비도 오지 않고 / 春燕不來閑院落
조그마한 연못가엔 맑은 물결 찰랑이네 / 晴波欲滿小池塘
붉은 매화 그림자 아래 문서 처리할 일도 없고 / 紅梅影下文書靜
귤나무 그늘 가에 자리가 향기롭네 / 綠橘陰邊几席香
퇴근하고 문 닫히자 인적도 끊어지고 / 衙罷閉門人跡少
창 너머 새 소리에 또 기우는 저녁 햇살 / 隔窓啼鳥又斜陽

이라 하였고, 또

난간 밖 연못의 빛 푸른 이끼 물들이고 / 檻外池光梁綠苔
주렴(珠簾)에 비낀 가랑비 노란 매실 익히누나 / 一簾微雨欲黃梅
출근해도 문 닫힌 채 적막하기 그지없고 / 衙居寂寞門長掩
퇴근해도 어제처럼 인 꺼낼 일 하나 없네 / 公退尋常印不開
밀감 향내 맡으면서 산 사슴 잠이 들고 / 盧橘香邊山鹿睡
석류 꽃 그늘 아래 새들 모여 앉아 있네 / 石榴花下怪禽來
창문 밖엔 하루 종일 찾아오는 인적 없어 / 軒窓盡日淸如水
오늘도 시상(詩想)에 젖다 낮잠에 빠져드네 / 輸與騷翁晝夢回

라고 하였는데, 격운(格韻)이 청려(淸麗)하여 스스로 미칠 수가 없다. 지봉은 시를 지을 때 옛 사람들을 추급(追及)하려고 노력하면서 경룡(景龍 당 중종(唐中宗)의 연호) 개원(開元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 년간에 활약했던 제자(諸子)들과 보조를 맞추려 하였고 중당(中唐) 이하는 논하지 않았다. 그의 글 역시 훌륭하게 법도를 갖추고 있다.
아조(我朝)에 들어오면서 시인들이 각 시대마다 나와 그 숫자가 수백 명이 될 뿐만이 아닌데 근대(近代)의 시인들을 말한다면 세 가지 부류로 나뉘어진다. 화평(和平)하고 담아(淡雅)하여 일가(一家)를 이룬 자로는 용재(容齋) 이행(李荇)과 낙봉(駱峯) 신광한(申光漢)이 있는데 신은 비교적 맑고 이는 비교적 원만한 편이다. 대가(大家)를 든다면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이 응당 으뜸을 차지하고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과 허백당(虛白堂) 성현(成俔)이 그 뒤를 따른다. 그리고 눌재(訥齋) 박상(朴祥),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지천(芝川) 황정욱(黃廷彧), 간이(簡易) 최립(崔岦) 같은 이들은 험괴(險瓌)하고 기건(奇健)함을 장기(長技)로 삼는다. 시 세계에 대해 바른 깨달음을 얻은 자는 여전히 많지 않은데, 사암(思庵) 박공순(朴公淳)이 근래 조금 당대(唐代)의 시파(詩派)를 섭렵하여 매우 청소(淸邵)한 시를 지었다
소재(蘇齋)가 유배 중에 지은 시 작품들은 지극히 청건(淸健)하다. 그러나 만년에 들어와 서술한 것은 너무 가라앉았으니 후생들이 본받아서는 안 될 것이다.
호음(湖陰)의 장기(長技)는 근체시에 있다. 장편과 절구는 근체시에 미치지 못한다.

관각체(館閣體)는 대부분 응제(應製 임금의 명으로 시문을 짓는 것)로 주고받은 것이기 때문에 비록 거공(巨公) 홍장(鴻匠)이라 할지라도 임시 변통으로 얽어서 만든 결함이 없지 않지만 그 빛나는 재치만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선조조(宣祖朝)에 문형(文衡)을 담당한 자 약간 명을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홍섬(洪暹). 자는 퇴지(退之), 호는 인재(忍齋)로서 의정(議政)까지 되었으며 82세의 나이로 죽었다. 재임(再任)했다.

박충원(朴忠元). 자는 중초(仲初)로 판서까지 되었으며 75세의 나이로 죽었다.
박순(朴淳).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庵)으로 의정까지 되었으며 67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황(李滉).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로 찬성까지 되었으며 70세의 나이로 죽었다.

노수신(盧守愼).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蘇齋)로서 의정까지 되었으며 76세의 나이로 죽었다.

정유길(鄭惟吉). 자는 길원(吉元), 호는 임당(林塘)으로 의정까지 되었으며 74세의 나이로 죽었다.

김귀영(金貴榮). 자는 현경(顯卿), 호는 동원(東園)으로 의정까지 되었으며 74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이(李珥).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으로 찬성까지 되었으며 49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산해(李山海). 자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로 의정까지 되었으며 71세의 나이로 죽었다.

황정욱(黃廷彧). 자는 경문(景文), 호는 지천(芝川)으로 부원군이며 75세의 나이로 죽었다.

유성룡(柳成龍).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로 의정까지 되었으며 66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양원(李陽元). 자는 백춘(伯春), 호는 노저(鷺渚)로 의정까지 되었으며 66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덕형(李德馨).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으로 의정까지 되었으며 53세의 나이로 죽었다. 재임했다.

홍성민(洪聖民). 자는 시가(時可), 호는 졸옹(拙翁)으로 찬성까지 되었으며 59세의 나이로 죽었다.

윤근수(尹根壽). 자는 자고(子固), 호는 월정(月汀)으로 부원군이며 80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항복(李恒福). 자는 자상(子常), 호는 백사(白沙)로 63세의 나이로 죽었다.

심희수(沈喜壽). 자는 백구(伯懼)이고 호는 일송(一松)이다.

이정귀(李廷龜). 자는 성징(聖徵)이고 호는 월사(月沙)인데 재임했다.

이호민(李好閔). 자는 효언(孝彦)이고 호는 오봉(五峯)이다.

유근(柳根). 자는 회부(晦父)이고 호는 서경(西坰)이다.

한사(寒士) 권필(權韠)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자는 여장(汝章)으로 참의 권벽(權擘)의 아들이다. 권벽은 문장을 잘했는데 권필이 어려서부터 가정의 훈도를 받은 결과 약관(弱冠)에 문예(文藝)가 이루어졌다. 소릉(少陵 두보(杜甫))의 시풍을 배우려고 노력하였으며 작품을 보면 매우 맑고 아름다운데 뒤에 와서 시를 짓는 사람들이 그를 으뜸으로 쳤다. 그런데 그의 시가 시휘(時諱)에 저촉되는 바람에 임자년(1612, 광해군4)에 정형(廷刑)을 받고 북쪽 변경으로 유배당하게 되었는데 도성 문을 나가다가 죽고 말았다. 이때 그의 나이 43세였는데, 원근에서 이를 듣고 탄식하며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사람됨 역시 소탈하고 무슨 일이든 겁없이 해치우는 성미였으며 사소한 의절(儀節)에 구애받지 않았는데 과거 공부도 포기한 채 세상을 도외시하고 떠돌아다니면서 시와 술로 스스로 즐겼다. 임진왜란을 당해 강화(江華)로 흘러 들어가 우거(寓居)하고 있을 때는 그를 존경하여 추종하는 자가 날로 문에 나아왔는데 심지어는 식량을 싸들고 천 리 먼 곳에서 미투리를 삼아 신고 와서 따르는 자도 있었다. 그러다가 그가 죽자 문인들이 죄없이 그가 죽게 된 것을 가슴 아파한 나머지 과거를 포기하고 세상과 관계를 끊어버리는 자들도 많이 나왔다. 그의 저술 《석주집(石洲集)》이 세상에 전해진다. 아들 하나가 있었으며 그 문인은 심척(沈惕)이라고 한다.

이춘영(李春英)이라는 자의 자(字)는 실지(實之)이고 호는 체소(體素)인데 백 참찬 인걸(白參贊仁傑)의 외손이다. 소싯적에 성우계(成牛溪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벼슬이 첨정(僉正)에 그친 채 죽었는데 그때의 나이 44세였다. 시의 됨됨이가 순탄하고 넉넉하였으며 소장공(蘇長公 소식(蘇軾))을 끔찍이도 좋아하여 성취된 바가 걸출하였는데 시보다는 글이 우수하였다. 근래 문필에 종사하는 자들 치고 그의 작품을 보고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멀찌감치 물러나지 않는 이가 없는데, 유문(遺文)으로는 겨우 3권(卷)이 집에 소장되어 있다.

김현성(金玄成)이라는 자의 자는 여경(餘慶)이요 호는 남창(南窓)으로서 시가 고아(高雅)한데다 당(唐)의 시체(詩體)를 모범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의 시를 무척 좋아하는 자가 가끔 있었다. 올해 77세의 나이인데도 쇠하지 않았는데, 필법(筆法) 또한 오흥(吳興 왕희지(王羲之))을 사모하여 그 경지에 매우 가까이 갔으므로 한 때 공사(公私) 간에 금석(金石)을 새기는 일은 모두 그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갑자년(1564, 명종19)에 급제하여 직질(職秩)이 아경(亞卿)에 이르렀는데 본래 한미(寒微)한 출신으로서 스스로 문묵(文墨)에 힘써 집안을 일으켰으니 이것도 보기 드문 일이라 하겠다. 사람 됨됨이 역시 소탈하여 세상의 때가 묻지 않았는데, 어려서 뜻한 학문의 열정이 늙어서도 시들지 않았으니 그것 또한 높이 평가할 만하다. 신유년(1621, 광해군13)에 죽었는데 그때의 나이가 80이었다.

아조(我朝) 열성(列聖)의 문장으로는 문묘(文廟)가 으뜸이고 성묘(成廟)와 선묘(宣廟) 역시 선천적으로 문재(文才)를 타고났는데 한 무제(漢武帝)나 당 현종(唐玄宗)에 비교해 보아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문묘가 지은 제극성문(祭棘城文)을 보노라면 그 내용 중에 “무정(無情)의 차원에서 말할 때 음양(陰陽)이라 하고 유정(有情)의 차원에서 말할 때 귀신(鬼神)이라 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비록 노유(老儒) 숙학(宿學)이라 할지라도 이 이상 더 어떻게 말하겠는가. 왕족 가운데 시를 잘했던 자들도 많았는데 풍월정(風月亭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으뜸이고 성광자(醒狂子 이심원(李深源))와 서호주인(西湖主人 이총(李摠))이 그 뒤를 따른다 하겠다.

귀족 자제들 가운데 시에 능했던 자로는 고원위(高原尉)와 여성위(礪城尉)를 들 수 있는데, 고원의 작품은 청조(淸藻)하고 여성의 작품은 전밀(典密)하다. 그런데 고원은 일찍 죽어 그 재능을 다 채우지 못했으니 애석한 일이다.

아조(我朝)에서 문장가들이 성대하게 배출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고려조(高麗朝)와 비교해 보면 조금 뒤떨어진다. 이 문순(李文順 이규보(李奎報))의 굉사(宏肆)함이나 이 문정(李文靖 이색(李穡))의 호한(浩汗)함 같은 것은 아조에서는 찾아 볼 수가 없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시를 으뜸으로 친다 해도 이는 실로 과장된 것이 아니다. 가령 그의 시 가운데,

가랑비 오는데 승려는 옷을 깁고 / 細雨僧縫納
차가운 강물 위에 나그네 배 젓는구나 / 寒江客棹舟

라는 구절을 읊노라면 미상불 그 정세(精細)함에 탄복을 하게 되고, 또

십 년 세월 이 세상 일 홀로 읊으며 / 十年世事孤吟裏
중추 가절 나그네 되어 숲 사이를 서성이네 / 八月秋客亂樹間

이라는 구절을 감상하노라면 미상불 그 상랑(爽朗)함에 탄복을 하게 되며, 또

신라 시대 당간(幢竿)깃발 바람에 펄럭이고 / 風飄羅代蓋
부처 나라 꽃잎 위에 빗방울이 내리치네 / 雨蹴佛天花

라는 구절을 대하노라면 미상불 그 방원(放遠)함에 탄복을 하게 된다.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의 시는 한결같이 소동파(蘇東坡)와 황산곡(黃山谷)을 모방하였는데, 선천적으로 재주가 매우 뛰어나 자연적으로 터득한 것이라고도 하겠다. 끝없이 이어져 내려가는 장편 또한 뜻에 운치가 있는데 이는 작위적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것으로서 정말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따라갈 수 없는 것이라 하겠다.

김식우(金拭疣)의 문장은 《장자(莊子)》에 근본하였는데 그 발원(發源)하는 바가 지극히 커서 짝을 찾을 수 없을 정도이다. 다만 그의 시를 보면 모두가 생각나는 대로 지은 것이라서 아름답기는 하나 정밀하지가 못한데, 대가(大家)에게도 장점과 단점이 모두 있다고는 하지만 문단으로 볼 때에는 흠이 되는 일이 아니라고 할 수가 없다.
강사숙(姜私淑 강희맹(姜希孟))은 시와 문 모두가 정치(精緻)하고 전아(典雅)한데 이 점에서는 본래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에 필적한다고 하겠으나 규모의 호대함으로 본다면 사가를 따라가지 못한다.
이삼탄(李三灘 이승소(李承召))의 작품 역시 사숙(私淑)에 버금간다고 하겠으나 다만 깜짝 놀랄 만한 표현을 구사하는 점에 있어서는 뒤떨어진다.
사가(四佳) 이후로는 허백(虛白 성현(成俔))의 작품 세계가 지극히 크다. 고금의 여러 체(體)를 짓지 않은 것이 없는데, 그 엄청난 저술량은 바로 제공(諸公)들 가운데 비견될 만한 사람을 찾을 수가 없다고 하겠다. 《악학궤범(樂學軌範)》ㆍ《풍소궤범(風騷軌範)》ㆍ《용재총화(慵齋叢話)》ㆍ《상유비람(桑楡備覽)》ㆍ《태평통재(太平洞載)》 모두가 그의 저술인데 한 때 이를 문부(文府)로 높이 평가하기도 하였다. 그 가운데 《상유비람》 60여 권은 모두 국조(國朝)의 고사를 기록해 놓은 것으로서 세도(世道)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난리 통에 잃어버리고 말았는데 다른 간본(刊本)도 없어 마침내 영영 없어지고 말았으니 애석한 일이다. 그 밖에 네 책은 모두 조정에서 판각해 두었으므로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허백(虛白)의 집안에서 문장가 4명이 나왔으니 허백의 백씨(伯氏)인 임(任)과 허백의 중씨(仲氏)인 간(侃)과 허백의 아들인 세창(世昌)이 그들이다. 모두들 글을 잘했으나 그중에서도 간의 재주가 으뜸이었는데 일찍 죽고 말았다. 젊었을 시절에는 간이 허백보다도 나았다고 한다.
김모재(金慕齋 김안국(金安國))는 허백의 문인이다.
홍귀달(洪貴達)은 문장가로서 중하게 여겨질 뿐만이 아니라 사람됨의 측면에서도 승류(勝類)라 할 것인데 연산군(燕山君)이 꺼려 죽이고 말았다. 세상에 전해지는 말로는 김열경(金悅卿 김시습(金時習))이 늘 그를 기롱(譏弄)하여 말하기를 “귀달이 문장을 하다니 세상이 웃을 일이다.”고 하였다 하는데, 어쩌면 김의 이 말은 희롱조로 나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가령 열경이 지금 세상에 태어났다고 한다면 필시 한 번 웃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을 것이요 아마도 포복절도(抱腹絶倒)하고야 말았을 것이 분명하다.
열경은 아조(我朝)의 백이(伯夷)이다.
성로(成輅)라고 하는 자의 자는 중임(重任)으로 시가 청고(淸苦)한데 소시적에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문하에서 배웠다. 송강이 망하고 난 뒤에 그 문하에서 노닐던 자들 모두가 안면을 바꾸고 시속의 취향을 좇으면서 스스로 단장하여 호감을 사려고 하였는데, 성로만은 세상 일을 포기하고 완전히 관계를 끊어버렸다. 그리고는 양화도(楊花渡) 어귀에 자그마한 띳집을 짓고 살면서 최저 생활도 이어가지 못했는데 예전에 서로 알고 지내던 자들 아무도 범접하지를 못하였다. 이렇게 문을 닫고 내객(來客)을 물리친 채 20년을 지내다 죽었는데 그때의 나이 67세였다. 이 사람은 대체로 옛날의 개사(介士)라 할 것이다.
아조(我朝)의 사람들은 시어(詩語)를 잘 안배하지 못하는데, 이에 대해 사람들은 말하기를 “성음(聲音)이 중국과 다른 만큼 아무리 억지로 해보려 해도 비슷하게 되지 않는 것이 필연적이다.”고들 하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성음이란 자연적으로 나오는 것이니, 중국이니 외국이니 하는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언사(言詞)는 달라도 압운(押韻)하는 것은 동일한 만큼 한 귀퉁이를 미루어 나가면 다른 세 귀퉁이도 반증(反證)할 수가 있는 것이다. 다만 우리 나라에서 시를 지을 때 어휘를 구사하는 것이 부족하여 적절한 시어를 배치하지 못할 뿐이지 성음이 다른 것은 걱정할 일이 아닌 것이다.
백낙천(白樂天)의 궁사(宮詞)에,


이라 하였는데, 원망하는 여인과 버려진 재주가 어찌 끝이 있겠는가. 이를 읊노라면 사람으로 하여금 한 번 탄식하게 한다.

지는 별 먼 변방 요새에 멈춰 서 있고 / 落星依遠戍
기우는 달 평평한 숲에 반쯤 걸렸네 / 斜月半平林

이라고 한 것은 양 원제(梁元帝)의 시이고,

고향 땅 강물에 가로막혀 못 가는데 / 故鄕一水隔
바람 연기 이쪽 저쪽 자유로 드나드네 / 風煙兩岸通

이라 하고, 또

해와 달은 하늘의 덕을 빛내 주고 / 日月光天德
산과 물은 제왕의 거처를 장중하게 해 주누나 / 山河壯帝居

라고 한 것은 진(陳) 나라 후주(後主)의 시이고,

겨울철 갈가마귀 천 점 만 점 수를 놓고 / 寒鴉千萬點
물줄기 하나 외로운 마을 돌아 흘러 나가누나 / 流水繞孤村

이라고 한 것은 수 양제(隋煬帝)의 시이다. 그 시들이 어찌 아름답지 않은가. 그런데도 모두 나라를 망하게 한 임금들이 되고 말았으니, 문장은 보잘것 없는 기예라고 한 옛 사람의 말이 확실히 그렇다고 하겠다.
송 휘종(宋徽宗)은 문장이나 서화(書畫) 등 기예 일체에 관해서 경지에 이르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런데 한 가지 능력이 없었던 것은 천하를 다스리는 일이었다.
학사가(學士家)는 이치를 궁구(窮究)하는 것을 제일의(第一義)로 삼아야 한다. 이치를 투철하게 알지도 못했으면서 현묘한 이야기나 아로새겨 자신의 비루함을 아름답게 꾸미고 괜히 책으로 만들어 내어 자신의 위대함을 과시하려 한다면, 이런 저술들은 글을 정당하게 평가하는 자에게 걸릴 경우 모두 도외시되고 말 것이다. 내가 《상촌집》을 펴놓고 읽어 보건대, 옛 일을 논한 것이 진부하지 않고 현재의 일을 묘사한 것이 속되지 않았으며, 온축된 것이 많고 근본이 바르며 해석에 선입견이 없고 말이 진지하며 생각이 치밀하고 운치가 뛰어나 구름 밖에 높이 솟은 듯하고 안개 낀 골짜기처럼 신비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했으니, 멀리 행해질 만하고 오래도록 혜택을 끼쳐 줄 저술이라 여겨진다. 상촌이야말로 이치를 궁구하는 선비라 할 것이고 그 저술이야말로 언행이 일치되어 나온 글이라 할 것이니, 일찍부터 기림을 받는 것이 당연하고 상호(相好)를 빛내게 함이 당연하며 후손은 의당 창성할 것이고 전해지는 것 또한 의당 오래도록 될 것이다. 이에 서(序)한다.
흠차산해이독호부(欽差山海理督戶部) 도화신(刀化神)은 머리를 조아리고 쓴다.


 

[주D-001]공군은 …… 말했던가 : 공군(孔君)은 후한(後漢) 헌제(獻帝) 때 북해상(北海相)이 되었다가 뒤에 조조(曹操)와 뜻이 맞지 않아 그에게 피살된 공융(孔融)을 말함. 여상(呂相)은 송(宋) 나라 여단(呂端)을 말하는데, 《宋史 呂端傳》에 태종(太宗)이 여단을 정승으로 삼으려 했을 때, 어떤 이가 말하기를 “여단은 호도(糊塗)하는 사람이다.”고 하니, 태종이 “여단은 작은 일은 호도할지 모르지만 큰 일에 대해서는 호도하지 않는다.”고 하였음.
[주D-002]이상하다 …… 없다 했나 : 왕 태부는 왕도(王導)를 말하는데, 가뭄이 크게 들었을 때 상소하여 사직하면서 완강하게 버티다가 황제가 여러 차례에 걸쳐 조서를 내리며 간곡히 요청하자 나와서 일을 보았음.
[주D-003]진(晉) 나라의 변문(卞門) : 부자와 형제들이 모두 국가에 충성을 바치다 순절한 변호(卞壺)의 집안을 말함.
[주D-004]《사전춘추(四傳春秋)》 : 원제(原題)는 《춘추사전(春秋四傳)》으로서 모두 38권으로 되어 있는데 편자(編者)는 미상임. 맨 처음에 두예(杜預)ㆍ하휴(何休)ㆍ범녕(范寗)ㆍ호안국(胡安國)의 4서(序)가 실려 있고 다음으로 강령(綱領)ㆍ제요(提要)ㆍ열국도설(列國圖說)ㆍ이십국년표(二十國年表)ㆍ춘추제국흥폐설(春秋諸國興廢說)이 기재되어 있는데, 경문 아래에 모두 좌씨(左氏)ㆍ공양(公羊)ㆍ곡량(穀梁)의 3전(傳)의 주(注)를 내고 호전(胡傳)은 따로 표출(標出)하였음.
[주D-005]화표주(華表柱)의 학 : 한(漢) 나라 정령위(丁令威)가 죽은 뒤에 학으로 변해 고향인 요동(遼東)으로 돌아와서는 성문의 화표주(華表柱)에 앉았다는 고사임. 화표주는 백성의 불만을 듣기 위해 세워놓은 게시판임.
[주D-006]친구가 …… 끊고 싶네 : 춘추 시대 초(楚) 나라 사람 종자기(鍾子期)가 백아(伯牙)의 거문고 소리를 잘 이해하였는데, 그가 죽자 백아가 거문고 줄을 끊고 종신토록 연주하지 않았다는 고사로서 지기(知己)를 잃은 슬픔을 말한 것임. 《列子 湯問》
[주D-007]명경같은 …… 않으리라 : 《耘谷行錄》에는 제2구의 ‘俗’ 자가 ‘物’로, 제8구의 ‘掛’ 자가 ‘抉’로 되어 있음. 문에 눈알을 걸어 놓는다는 것은 자신이 죽은 뒤에라도 상대가 망하는 것을 끝까지 지켜 보겠다는 뜻인데, 《史記 伍子胥傳》에 “내가 죽거든 내 눈알을 파내어 오(吳) 나라 동쪽 문 위에 걸어놓아라. 월(越) 나라가 오 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보겠노라.” 하였음.
[주D-008]마음이야 …… 있겠는가 : 《耘谷行錄》에는 寸心이 正名으로 되어 있음.
[주D-009]나라에 …… 있겠는가 : 《耘谷行錄》에는 豈能이 必應으로 되어 있음.
[주D-010]천보 시대 : 천보(天寶)는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로서 옛날 성대했던 시절을 의미함. 그런데 《耘谷行錄》에는 天寶가 至寶로 되어 있음.
[주D-011]화택 규(睽) : 주역 64 괘 중의 하나인데, 상리하태(上離下兌) 즉 상괘(上卦)와 하괘(下卦)가 위로 치솟는 불과 아래로 스며드는 늪으로 되어 있어 서로 어긋나는 상황을 상징함.
[주D-012]하늘이 …… 하겠는가 : 《論語 子罕》에 나오는 공자(孔子)의 말을 인용하여 당시의 상황을 비유한 것임.
[주D-013]옥돌은 …… 아니었네 : 유명한 변화읍벽(卞和泣璧)의 고사임. 초 나라 사람 변화가 옥돌을 얻어서 초 여왕(楚厲王)에게 바쳤으나 속임수를 쓴다고 여겨져 왼쪽 발이 잘렸는데, 무왕(武王) 때 또 바쳤다가 같은 이유로 오른쪽 발마저 잘리자 원통한 심정으로 옥돌을 안고 울었다고 함. 《韓非子 和氏》
[주D-014]동호(董狐)의 직필(直筆) : 동호는 춘추 시대 진(晉) 나라의 태사(太史)인데, 조순(趙盾)이 그 임금 영공(靈公)을 시해했다고 곧장 쓴 고사를 말함. 실제로 임금을 시해한 자는 조천(趙穿)이었는데, 이때 조순이 정경(正卿)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그를 토벌하지 않았으므로 죄를 그에게 돌린 것으로서 기록을 하는 자가 거리낌없이 바른 대로 쓰는 것을 말함. 《春秋左氏傳 宣公 2年》
[주D-015]귀산(龜山)이 …… 있었겠는가 : 귀산은 송(宋) 나라 양시(楊時)인데 사후에 그의 제자였던 육당(陸棠)이 스승을 배반하였음. 남명과 정인홍의 관계도 이와 같다고 하는 뜻임.
[주D-016]음산 : 곤륜산(崑崙山)의 북쪽 지맥(支脈)으로서 예로부터 중원(中原)의 병풍이라고 불리워졌음.
[주D-017]두우(斗牛)를 …… 보았던가 : 《晉書 張華傳》에 “오(吳) 나라가 멸망당하기 전에 북두성과 견우성 사이에 늘 보라색 기운이 감돌았으므로 뇌환(雷煥)을 불러 바로보게 했더니 그가 말하기를 ‘보검의 정기가 위로 하늘에 통해서 그렇다.’고 하였다.” 하였음.
[주D-018]무덕과 개원 : 무덕(武德)은 당 고조(唐高祖)의 연호이고 개원(開元)은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인데, 태평시대를 말함.
[주D-019]오등 : 공(公)ㆍ후(侯)ㆍ백(伯)ㆍ자(子)ㆍ남(男) 등 다섯 등급의 작위.
[주D-020]청운지사(靑雲之士) …… 어설프군 : 백이 숙제에 대한 사마천(司馬遷)의 견해를 비평한 것임. 《史記 伯夷列傳》에 “백이 숙제가 비록 훌륭했다 하더라도 공자가 칭찬해 주었기 때문에 그 이름이 더욱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 행실을 닦고 이름을 세우려고 하는 평민들의 경우, 청운지사의 힘을 빌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후세에까지 그 이름이 전해질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여기서 청운지사는 은근히 사마천 자신을 가리킨 것임.
[주D-021]요동 땅 …… 염려되네 : 요동 사람 정령위가 선술(仙術)을 배운 뒤 학으로 변해 요동 성문 게시판에 내려 앉았는데 소년이 활을 쏘려 하자 날아 올라가 공중을 배회하면서 “집 떠난 지 천 년 만에 정령위가 새로 변해 이제 찾아 왔는데, 성곽은 여전하나 사람은 모두 다르구나 ……”라고 한 뒤 공중으로 솟구쳐 사라져 갔다고 함.
[주D-022]준엄한 …… 와 있구나 : 불골(佛骨)은 석가불(釋迦佛)의 뼈로서 불사리(佛舍利)를 말함. 당 헌종(唐憲宗)이 불사리를 대궐 안으로 맞아들여오자 한유(韓愈)가 논불골표(論佛骨表)를 올려 불교를 비판하면서 극간(極諫)하였는데, 이에 황제가 격노하여 한유를 조주 자사(潮州刺史)로 좌천시켰음. 조양은 바로 조주인데, 귀양가는 자신의 심경을 한유에 빗대어 말한 것임.
[주D-023]인체 : 인체는 사람 돼지라는 뜻으로 인시(人豕)라고도 함. 한(漢) 나라 여후(呂后)가 고조(高祖)의 애희(愛姬) 척부인(戚夫人)의 팔다리를 자르고 눈을 뽑고 벙어리와 귀머거리를 만든 뒤 측간에 놔두고는 인체라고 불렀음. 《史記 呂后記》
[주D-024]제파 : 《五代史 四夷附錄 第1》에 “덕광(德光)이 진(晉)을 멸망시킨 뒤에 한 고조(漢高祖)가 태원(太原)에서 군대를 일으키니 덕광이 크게 두려워하여 북쪽으로 돌아가던 중 난성(欒城)에서 병에 걸려 살호림(殺胡林)에서 죽었다. 이에 거란[契丹]이 그의 위장을 꺼낸 다음 소금으로 채워서 수레에 싣고 북쪽으로 돌아갔는데 진(晉) 나라 사람들이 이를 제파(帝羓)라 하였다.” 하였음.
[주D-025]건어물도 …… 막지 못했고 : 조룡의 조(祖)는 시(始), 용(龍)은 인군(人君)의 상으로서 즉 진(秦) 나라 시황제(始皇帝)를 가리키는데, 《史記 秦始皇紀》에 “36년 가을, 사자(使者)가 관동(關東)에서 밤에 화음(華陰) 땅 평서(平舒)의 길을 지나가는데, 어떤 사람이 구슬을 쥐고 길을 막으며 말하기를 ‘내 대신 호지군(滈池君)에게 전해 주어라.’ 하고 이어 말하기를 ‘올해 조룡이 죽는다.’ 하였다.” 하였음. 진시황이 사구(沙丘) 평대(平臺)에서 죽었는데, 마침 무더위가 한창이라서 온량거(轀涼車) 안에 있던 진시황의 시체에서 악취가 풍겨 나오자 시황의 죽음을 눈치채지 못하게 건어물을 잔뜩 실었다고 함.
[주D-026]제 환공 …… 슬었었지 : 《史記 齊太公世家》에 “환공이 병이 들자 다섯 명의 공자(公子)가 왕위 쟁탈전을 벌였다. 그러다가 환공이 죽고 난 뒤에는 서로들 공격하면서 궁궐을 텅 비워둔 채 아무도 장사지내려 하지 않았다. 이렇게 6~7일 동안 환공의 시체가 방치된 결과 구더기가 시체에서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하였음.
[주D-027]망아지 틈새 지나가듯 : 《莊子 知北遊》에 “사람이 하늘과 땅 사이에 태어났다가도 마치 흰 망아지가 틈새를 지나가듯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하였음.
[주D-028]그의 시가 …… 죽고 말았다 : 권필이 광해군의 비(妃) 유씨(柳氏)의 아우 유희분(柳希奮) 등 척족(戚族)들의 방종함을 비난하는 궁류시(宮柳詩)를 지었는데, 광해군이 크게 노하여 시의 출처를 찾던 중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된 조수륜(趙守倫)의 집을 수색하다가 권필의 시를 찾아내었다. 이에 권필이 친국(親鞫)을 받고 귀양길에 올랐는데, 동대문 밖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이 주는 술을 폭음하고 이튿날 죽고 말았다.
[주D-029]공군은 …… 말했던가 : 공군(孔君)은 후한(後漢) 헌제(獻帝) 때 북해상(北海相)이 되었다가 뒤에 조조(曹操)와 뜻이 맞지 않아 그에게 피살된 공융(孔融)을 말함. 여상(呂相)은 송(宋) 나라 여단(呂端)을 말하는데, 《宋史 呂端傳》에 태종(太宗)이 여단을 정승으로 삼으려 했을 때, 어떤 이가 말하기를 “여단은 호도(糊塗)하는 사람이다.”고 하니, 태종이 “여단은 작은 일은 호도할지 모르지만 큰 일에 대해서는 호도하지 않는다.”고 하였음.
[주D-030]제극성문(祭棘城文) : 극성은 황주(黃州) 남쪽에 있던 옛 진영인데, 고려 말 홍건적을 방어하다 관군이 몰살당했는가 하면 누차 병화(兵禍)를 입어 백골이 그대로 널려 있었던 곳이라고 함. 날이 궂으면 귀신의 곡성이 들려오기도 하고 여기(癘氣)가 침습해 백성이 많이 상했으므로 나라에서 단을 쌓고 춘추로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조선 문종 때 이런 현상이 더욱 심했으므로 왕이 직접 제문을 지어 제사를 올렸다고 함.
[주D-031]한 귀퉁이를 …… 것이다 : 기본을 알면 얼마든지 적용해 나갈 수 있다는 말인데, 《論語 述而》의 “한 귀퉁이를 언급해 주었는데 남은 세 귀퉁이를 반증하지 못하면 다시 더 일러주지 말아야 한다.”는 말에서 나온 것임.
[주D-032]은총을 …… 없는 이는 : 원제는 《후궁사(後宮詞)》로서 《白樂天詩集 卷19》에 나오는데, 이에 따르면 제2구의 却이 布로, 제3구의 如花가 胭脂로, 제4구의 風이 來로 되어 있음

  

 농암집 제2권
 시(詩)
만폭동


영산이라 신선 골짝 열려 있는 곳 / 靈山闢紫洞
천만 겹 산봉우리 에워싸였네 / 合沓千萬重
높은 벼랑 은하수에 치솟았고요 / 高厓上雲漢
푸른 여라 청풍 나무 드리워졌네 / 綠蘿垂靑楓
쿵쿵대며 쏟아지는 수십 개 못물 / 噴薄數十潭
어허 내가 삼협 속을 거닐고 있나 / 如行三峽中
물소리는 동주굴을 흔들어 대고 / 聲搖銅柱窟
물에 어린 향로봉 일렁거리네 / 影動香鑪峯
오월에도 더운 기운 간데 없고요 / 五月失火雲
백설 같은 폭포수 한겨울 같아 / 飛雪若大冬
끊임없이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 淸飆灑不歇
찬 솔가지 세차게 흔들어 대네 / 肅肅留寒松
예 와서 세속 더위 씻어버리니 / 我來濯塵熱
높은 흥취 창공에 충만하여서 / 高興彌蒼穹
옥처럼 맑은 샘에 손을 담그고 / 泉源弄珠璧
가지 끝의 목련꽃 더위잡으며 / 木末搴芙蓉
고개 들어 영랑봉 우러러보고 / 矯首望永郎
노래 불러 못속 용 교감한 뒤에 / 幽歌感潭龍
돌아올 적 해는 벌써 저물어가고 / 歸時日已晩
금대라 동쪽 하늘 비가 뿌리네 / 雨下金臺東


 

[주D-001]삼협(三峽) : 중국 사천성(四川省) 봉절현(奉節縣)과 호북성(湖北省) 의창현(宜昌縣) 사이에 있는 구당협(瞿塘峽), 무협(巫峽), 서능협(西陵峽)으로 전장 204킬로미터이며, 양쪽 언덕이 절벽이고 강의 흐름이 급하다.

 

 

사가시집 제5권
 시류(詩類)
다시 앞의 운을 사용하여 방 사문(房斯文)에게 부치다.


높다란 태화봉엔 사철 내내 눈이 내리고 / 太華峯高四時雪
가벼운 구름 조각조각 어지러이 깔렸는데 / 輕雲片片亂如席
연꽃은 만 길이나 피어 비단 굴을 이루고 / 荷開萬丈錦繡窟
푸른 절벽엔 길이 없어 속세와 격해 있으니 / 靑壁無路紅塵隔
내 바람을 가르고 한번 날아 올라가서 / 我欲凌風一飛獵
눈으로 어슴푸레 신선 자취를 바라보고 / 目中髣髴神仙跡
청운으로 의상 삼고 백예로 갖옷 삼아 / 靑雲爲裳白霓裘
위아래로 천지를 널리 두루 유람하고 / 上下天地汗漫遊
비렴을 앞세우고 백호를 뒤따르게 하여 / 前飛廉兮後白虎
달 속의 약 찧는 토끼를 찾아 올라가 / 訪我月中搗藥兎
영약을 얻어 높은 언덕처럼 쌓아두고 / 乞得靈劑築如坻
얼굴이 목련꽃처럼 붉고 윤택게 하고 싶네 / 顔似渥丹花辛夷
세월이 하도 빨라 어느덧 청춘을 지나라 / 光陰倏忽靑銅面
한번 가면 안 돌아옴이 나간 화살 같구려 / 一去不還猶往箭
어찌하면 내 가슴속의 괴로움을 씻어낼꼬 / 安得洗我胸中酸
내 배로 약수 건너 수레로 삼산을 올라야 / 舟我弱水車三山
세정과 속기를 마침내 제거할 수 있으리 / 世情俗氣終能刪


 

[주D-001]태화봉(太華峯) : 한유(韓愈)의 고의(古意) 시에 “태화봉 꼭대기의 옥정에 자란 연은, 꽃이 피면 열 길이요 뿌리는 배와 같다네.〔太華峯頭玉井蓮 開花十丈藕如船〕”라고 하였다.
[주D-002]청운(靑雲)으로 …… 삼아 : 백예(白霓)는 흰 무지개를 가리키는데, 《초사(楚辭)》 구가(九歌) 동군(東君)에 “청운으로 윗옷 삼고 백예로 아래옷 삼아, 긴 화살 뽑아서 천랑성을 쏘도다.〔靑雲衣兮白霓裳 擧長矢兮射天狼〕”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3]비렴(飛廉) : 풍신(風神)의 이름이다.
[주D-004]달 …… 토끼 : 진(晉) 나라 부현(傅玄)의 의천문(擬天問)에 “달 속에는 무엇이 있는고 하니, 흰 토끼가 약을 찧고 있다네.〔月中何有 白兎搗藥〕”라고 하였다.
[주D-005]내 …… 올라야 : 약수(弱水)는 서해(西海)의 선경(仙境)인 봉린주(鳳麟洲)에 있다는 강 이름이고, 삼산(三山)은 동해(東海) 가운데 있다는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의 삼신산(三神山)을 말한다.

 

 

 

 

 서계집 제3권

 

남산(南山)과 고산(高山)의 사이로 난 길옆 벼랑에 문득 목련반쯤 핀 것을 보고

 

 


천산 만산에 눈 덮인 / 千山萬山雪
이월 삼월 어름 / 二月三月時
놀라워라 추운 개울가에 / 驚見寒溪上
목련꽃 한 가지 / 辛夷花一枝


음양이 번갈아 주객이 되니 / 陰陽相主客
천지가 하나의 도균일세 / 天地一陶勻
샛바람 힘을 알겠으니 / 認得東風力
봄을 훔치는 것을 외려 보네 / 猶看偸漏春

 

 

[주C-001]목련 : 대본에는 ‘辛夷’로 되어 있다. 문헌에 따라 목련 혹은 자목련이라고 한 곳도 있고, 개나리 또는 나리꽃이라고 한 곳도 있는데, 여기서는 정황에 맞추어 목련으로 번역하였다.
[주D-001]도균(陶勻) : 도기를 제조할 때에 쓰는 선반(旋盤)으로 물(物)이 순환하는 것을 비유해서 쓰는 말인데, 천지가 운행하여 만물을 생성함을 비유한 것이다.

             

  목련의 백과사전의 내용

 

 목련은 오래 전부터 정원에 심어 꽃을 감상하던 나무로 잎은 중국 악기인 비파를 닮았다. 꽃은 4월에
잎보다 먼저 피며 줄기 끝에 한 송이씩 달린다. 이 때문에 목련꽃이 떨어지고 나면 줄기 끝에 뭉툭하게
잘린 것 같은 자국이 남는다.

북쪽을 향해 꽃을 피우는 목련은 임금님을 향하는 충절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는 햇볕을 많이 받은 남쪽
화피편의 세포가 북쪽 화피편의 세포보다 빨리 자라나 꽃이 북쪽으로 기울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화피편이 외층과 내층으로 나뉘어져 있기 때문에 화피편의 한쪽 끝을 잘라내 입김을
불어 넣으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게 된다.

줄기의 경우 탁엽흔이라 해서 잎눈이나 꽃눈을 중심으로 줄기를 빙 두르는 선이 있는데,
줄기를 구부리면 탁엽흔이 갈라져 벌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목련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목련은 또한 진화가 덜 된 원시적인 식물이기 때문에 겉씨식물과 같은 완벽한
씨방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열매가 씨를 완벽하게 감싸지 못하여 열매 속의
씨앗이 일부 빠져 나오기도 한다. 씨앗은 주홍색으로 크기는 보통 1cm정도 된다.

서양에서는 흔히 목련의 꽃을 팝콘에 비유하며, 불교에서는 나무에 핀 연꽃이라는
의미로 목련(木蓮)이라고 부른다. 사찰의 문살 문양에서 보여지는 6장의 꽃잎을
가진 연꽃은 목련을 형상화한 것이다. 또한 월트디즈니의 만화영화 제목인 뮬란은
중국어로 목련을 뜻한다고 한다. 1982년 일본의 어느 농촌 마을에서 약 2,000년
전에 목련이 서식했던 흔적을 발견했는데, 이 곳에서 발견된 씨앗 중 일부를
심었더니 놀랍게도 싹이 텄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목련은 대부분 우리나라가 원산인 Magnolia kobus가
아닌 Magnolia denudata이다. Magnolia denudata는 중국 원산의 백목련으로
우리나라 목련에 비해 꽃의 크기가 크고 화피편도 9장이다. 또한 우리나라 목련은
꽃잎 안쪽이 붉은색을 띠는 반면 백목련은 전체적으로 흰색이다. 이외에도 꽃잎 안쪽은
흰색, 바깥쪽은 자주색인 자주목련과 안쪽과 바깥쪽이 모두 자주색인 자목련이 있다.

꽃봉오리는 약간 매운 맛이 나는데 한방에서는 이를 신이화(辛夷花)라고 하여
약용으로 쓴다. 꽃으로 술을 빚거나 말린 꽃을 차로 달여 먹기도 한다. 목련술은
감기에 잘 걸리고 콧물이 잘 나오는 사람에게 효과가 있으며, 목련차는 혈압을
떨어뜨리고 비염이나 두통에 좋다고 한다.

    

                          

 

 

 

                             뜰 앞의 목련(木蓮)을 보면서


        고난과 어려움속에 모진 풍파 이겨내며

    사계의 변함에  아름다운 모습보이네

   

     인고의 세월이 얼마 이던가 ...

     오늘에야 당신의 멋진 모습보는 구나

    

     그대가 인간 에게 주는 고마움 과 즐거움

      나그네는 정녕 잊을수가 없네

 

     아름다움과  예쁜 모습이 사라질 무렵

     그대 백목련 자목련의 모습이 그리워 지며

    

      일년후에 다시올 그대의

      아름다움을 상상 하여 보네   

       

     나그네는 늘 그대를  생각하며

     그대의 아름다움에 찬사를 보낸다

 

    나그네의 아름다운 인생  

    그대와 함께 즐겁게 살리라

      

    신묘년 삼월  집에서 목련피는 계절에즈음하여   씀   

 

목련은 고전에  辛夷’로 되어 있다. 문헌에 따라 목련 혹은 자목련이라고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