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신묘년 산행 /2011.4.11. 도봉 (다락-우이능선)

2011.4.11. 도봉산 다락능선 와이계곡 신선대 주능선 우이암 -우이동

아베베1 2011. 4. 11. 17:02
  

 

 

 

 

 

 

 

 

 

 

선현들의 두견화를 노래한 고 시

상촌선생집 제19권
 시(詩)○칠언절구(七言絶句) 175수
열흘을 병들어 누워 있으면서 두견화가 이미 핀 것도 몰랐다[臥病一旬 不覺杜鵑已開]


친구도 떨어지고 거문고도 술도 끊고 / 親知零落琴樽廢
대드는 이병 저병에 머리털만 다 희었네 / 愁疾交攻鬂髮華
문을 열흘 닫았더니 봄이 이미 늦어져서 / 閉戶一旬春事晩
작은 뜰에 두견화가 모두 다 폈네 그려 / 小庭開盡杜鵑花


백사집 제1권
 시(詩)
봄날에 나가 노닐다.


꽃다운 들 다스운 날에 화창한 바람 솔솔 부니 / 芳郊氣煖惠風徐
하늘 맑고 옷 가벼워 몸이 절로 펴지누나 / 天朗衣輕體自舒
둔한 말 가는 대로 평원을 따라다니며 / 縱蹇平原隨所往
두견화가 많은 곳에선 잠깐 머뭇거리네 / 杜鵑多處少蹰躇

 

택당선생 속집 제5권
 시(詩)
두견화와 두견새를 읊은 절구 두 수 아이들에게 지어 보라고 했다가 마음에 들지 않기에 내가 곧장 지어서 보여 주었다. 기묘년


촉백은 소리마다 피를 토하고 / 蜀魄聲聲血
산류는 나무마다 꽃이 붉도다 / 山榴樹樹紅
시절에 느껴 우는 외로운 신하의 눈물이여 / 孤臣感時淚
봄바람에 너와 함께 씻어 보리라 / 共爾灑春風

이(二)
밤이면 밤마다 텅 빈 산에 통곡 소리 / 夜夜空山哭
가지면 가지마다 맺혀 있는 원망의 피 / 枝枝怨血晞
꽃더러 알아듣고 한마디 해 보라면 / 若敎花解語
응당 불여귀라 대답하리라 / 應道不如歸


 

[주D-001]촉백(蜀魄) : 전국 시대 촉왕(蜀王) 망제(望帝)인 두우(杜宇)의 혼백이 붙어 있다는 두견새를 말한다.
[주D-002]산류(山榴) : 두견화, 즉 진달래의 별칭이다.
[주D-003]불여귀(不如歸) :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고 재촉하는 것처럼 들린다는 두견새 소리로, 불여귀거(不如歸去)의 준말이다.

 

 퇴계선생문집 제4권
 시(詩)
융경(隆慶) 정묘년(1567, 명종22) 답청일(踏靑日)에 병상에서 일어나 홀로 도산에 나가니, 두견화와 살구꽃이 어지러이 피어 있고, 작은 매화 한 그루에 가지에 뭉친 눈인양 하얀 꽃이 피어 몹시도 어여뻤다


도산에 오지 못한 채 해가 이미 바뀌어 / 不到陶山歲已更
산 바위는 주인 없이 봄빛만 절로 밝네 / 山巖無主自春明
온갖 꽃들 내가 처음 흥겨움을 기뻐하고 / 千紅喜我初乘興
하얀 매화 그대에게 늦정 있어 어여뻐라 / 一白憐君晩有情
앓다가 일어나도 좋은 꽃철 탐하고 / 病起尙耽芳節好
시 읊으니 알겠네 낮 바람의 가벼움을 / 吟餘更覺午風輕
다시금 유유히 강대를 향해 앉아 / 悠然又向江臺坐
우러렀다 굽어보니 감개가 절로 나네 / 俯仰乾坤感慨生

운물이 꽃다웁고 빛나는 볕 더딜 제 / 雲物芳姸麗景遲
저문 봄의 고운 풍경 눈에 가득 들어오네 / 韶華滿眼暮春時
도공은 술 끊었다 다시 술을 생각했고 / 陶公止酒還思酒
두로 시 읊지 말라해도 다시 시를 읊었네 / 杜老懲詩更詠詩
땅을 덮은 푸른 자리 온갖 푸새 어지럽고 / 蓋地翠茵千卉亂
산을 두른 붉은 담요 온갖 꽃이 펼쳤구나 / 漫山紅罽萬花披
분잡하고 화려한 일 한평생 싫어하여 / 平生苦厭紛華事
다 버리고 오로지 옥설 가지 의지하네 / 壓掃全憑玉雪枝


 

[주C-001]답청일(踏靑日) : 음력 3월 3일을 답청일[踏靑節]이라 하여, 들에 나가서 푸른 것을 밟는다.
[주D-001]도공(陶公)은 …… 생각했고 : 도잠의 지주시(止酒詩)가 있고, 또 음주시(飮酒詩)가 있다.

 

 

점필재집 시집 제2권
 [시(詩)]
예천의 귀모현에서 호랑이를 사냥했는데 산중에는 두견화가 한창 피었다[醴泉歸毛峴獵虎山中杜鵑花盛開]


펄럭이는 깃발이 구름 안개를 헤치어라 / 搖搖旌旆拂雲霞
범의 발과 무늬 찢겨지니 흥이 한층 더하네 / 碎掌嶊斑興轉多
괴이하기도 해라 깊은 산 남지의 날에 / 怪殺深山南至日
삼군이 모두 두견화를 머리에 꽂았네그려 / 三軍皆揷杜鵑花

사가시집 제14권
 시류(詩類)
두견화(杜鵑花)를 얻어 심으려고 영천 공자(永川公子)에게 부치다. 2수


내 일찍이 귀원의 두견화를 구경했는데 / 貴園曾見杜鵑花
붉고 탐스럽게 피어 놀처럼 찬란했었네 / 紅艶繁開爛似霞
만일 한 가지를 내게 나눠주어 심게 한다면 / 若使一枝分我種
봄 풍광은 응당 가난한 집도 안 저버리련만 / 春光應不背貧家

매년 이십사 번의 꽃 소식 바람 가운데 / 二十四番花信風
일번 바람이 붉은 두견화에 불어오는데 / 一番吹到杜鵑紅
매화는 너무 차갑고 살구꽃은 속되거니 / 梅花太冷杏花俗
이 꽃이 정히 화도의 중에 꼭 맞고말고 / 此物正合花道中


[주D-001]매년 …… 가운데 : 이십사 번(番)의 꽃 소식 바람이란 곧 꽃 피는 계절에 불어오는 바람을 말한 것으로, 예를 들면 1년 24절기(節氣) 가운데 소한(小寒)으로부터 곡우(穀雨)에 이르기까지 모두 4개월, 8절기 사이의 120일 동안에 걸쳐, 5일마다 일후(一候)로 잡아서 총 24후가 되는데, 하나의 후마다 일종(一種)의 꽃바람이 불어온다는 데서 온 말이다.


金化에서 지난 10월 29일에 번개가 쳐서 杜鵑花의 꽃이 떨어지는 이상한 일이 있었다는 江原監司의 서목


○ 江原監司書目, 金化呈, 以去十月二十九日夜, 雷電大作, 無異盛夏, 杜鵑花盛開, 雷動花落, 俱係異常事。

 

 

○ 백사가 일찍이 말하기를, “장유의 문장과 덕행은 비록 공자 문하에 둔다 하여도 안연이나 민자건에게 손색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약관에 음부경(陰符經)을 주해하였는데, 독특한 의견이 많이 있었다.
○ 같이 사귀어 노는 사람과 문하에 있는 선비에게 공이 장차 어질고 어질지 못할 것과 길하고 흉한 것과 벼슬이 높게 되고 낮게 되는 것을 예언하였는데 후에 그 말과 같지 않는 것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그 알아보는 식견에 감복하였다.
○ 병자년에 남한산성에 들어가 석문(石門)ㆍ백헌(白軒)과 함께 한 집에 있었는데, 세 사람이 함께 죽기를 약속하였다. 공이 하루 저녁에 절명사(絶命詞)를 짓기를,

평생 충효의 뜻이 / 平生忠孝志
이 날에 다 이지러질까 두렵네 / 此日恐全虧
해마다 봄 달밤에 / 年年春夜月
두견화 가지에 피 뿌리려네 / 血灑杜鵑枝

하였는데 마침내 서로 마주 앉아 눈물을 흘렸다.

연려실기술 제28권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인조조의 상신(相臣)



윤방(尹昉)
윤방은, 자는 가회(可晦)이며, 본관은 해평(海平)이요, 호는 치천(稚川)이다. 윤두수(尹斗壽)의 아들인데 계해년에 났으며 78세에 죽었다. 문과에 올랐는데, 폐모를 정청(庭請)할 때 대궐에 나아갔다가 몸이 아프다고 핑계하고 물러나왔다. 계해년 반정에 정승에 임명되어 영의정에 이르렀다. 정축년에 종묘사직의 신주를 모시고 강화도에 들어갔는데 죄가 있어 중도부처되었다가 뒤에 풀리어 등용되었다. 시호는 문익공(文翼公)이다. 인조조에 유생들이 소를 올려 삼정승을 배척하기를, “묘당에서 일하는 것이 마치 유손(劉孫)의 초립(草笠) 같다.” 하였다. 유손은 초립 만드는 장인이었는데, 손재주가 없기로 유명한 자였다. 시속에 거칠고 겨우 모양만 된 것을 ‘유손의 초립’이라 하였다.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유손이 초립을 만든 것은 오히려 형체는 모두 이루지만 우리가 나라 일을 하는 것은, 모양도 되지 않았다.” 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이 말을 어른스러운 말이라 하였다. 《공사견문》
○ 공이 총재관(摠裁官)이 되어 《시정기(時政記)》를 보았더니 공의 덕량이 훌륭하다고 쓴 것이 있었는데 공이 재빨리 깎아 없애버렸다. 택당(澤堂)이 지은 신도비
○ 공이 과거에 올랐을 때, 문정공(文靖公) 방의 아버지 두수(斗壽) 은 평안 감사로 있었다. 임금이 금띠를 내리면서 공에게 주어 문정공에게 전해주도록 하였다. 공이 즉시 마당에 내려가, 무릎을 꿇고 받은 다음 사자에게 돌려주며 말하기를, “승정원을 거치지 않고 내려 주신 것은 신이 감히 사사롭게 받아 전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문정공이 듣고 기뻐하여 말하기를, “내 아들이 옳게 처리를 하였다.” 하였다. 《택당집(澤堂集)》
○ 기묘년 6월에 연안(延安)으로 귀양갔다가 8월에 풀리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신흠(申欽)
신흠은, 자는 경숙(敬叔)이며 호는 상촌(象村)이요,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병인년에 나서 을유년에 진사가 되었으며, 병술년에 문과에 올라 성균관에 배속되었다. 경인년에 한림(翰林)이 되고 계해년에 정승에 임명되어 영의정이 되었으며 정묘년에 죽으니, 세자가 조문하였다. 시호는 문정이다. 또 호를 경당(敬堂)ㆍ백졸(百拙)ㆍ남고(南皐)ㆍ현헌(玄軒)ㆍ현옹(玄翁)이라 하였다.
○ 어머니 송씨(宋氏)는 기수(麒壽)의 딸이다. 꿈에 큰 별이 품에 들어온 이튿날 공을 낳았는데, 오른쪽 볼에 탄환만한 붉은 사마귀가 있었다. 《계곡집(谿谷集)》 《청음집(淸陰集)》 《월사집(月沙集)》
○ 임진년에 도체찰사 정철의 종사관이 되었다. 영리한 아전과 법규에 익숙한 자 수십 명을 불러서 장부와 문서를 나누어 주어 일제히 읽게 하였다. 또한 군사와 백성들에게 불편한 일을 글로 올리게 하였는데 문서가 번잡하였고 하소연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공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묻고 손으로 판결하니 명쾌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시장
○ 명을 받들어《동정장사기실(東征將士紀實)》몇 권을 만들었다. 또 임금이 명하여 비서(秘書)에 보관했던《동국시문(東國詩文)》천여 권을 공에게 맡겨 편찬하여 올리게 하였다. 임금이 전에《주역(周易)》을 강론하기로 하여 국(局)을 설치하고 교정하게 하였는데 공이 그 선발에 참여하였다. 시장ㆍ광해주
○ 계축년에 선조의 유교(遺敎)를 받은 일곱 신하 중의 한 사람으로 옥에 들어갔다가 시골로 추방되어 김포(金浦) 선영 밑에 돌아왔다. 한 칸 초가에서 편안히 거처하며 집 이름을 하루암(何陋菴)이라 써 붙였다. 갑인년에 산기슭에 집을 짓고 이름을 감지와(坎止窩)라 하고,《선천규관(先天窺管)》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병진년에 춘천으로 귀양가서 초가집을 짓고 이름을 방암(放菴)이라 하였다. 신유년에 사면되어 돌아왔으며 계해년 반정에 맨 먼저 이조 판서가 되었다. 시장
○ 병인년 가을에 공을 독권관(讀券官 과거 때에 답안을 읽는 직책)에 임명하고 별시(別試)를 관장하게 하였는데, 아들 익전(翊全)과 손자 면(冕)이 모두 과거에 합격되었다. 사헌부에서 시관이 사사롭게 내통한 것을 논하여 여러 시관을 아울러 파면시키고 또 방(榜)을 무효로 하니 공은 성 밖으로 나가 대죄(待罪)하였다. 고시관(考試官) 조박(趙璞)이 시험지를 시간 지난 뒤에 받아서 그 아들이 합격되었는데 의금부에서 가두어 신문하였다. 공이 차자를 올리기를, “시간이 지난 뒤에 받은 시험지 다섯 장은 모든 시관이 공동으로 회의하였으며, 조전의(趙全義)의 글도 모든 시관이 공동으로 뽑은 것인데, 조박을 잡아 신문하니 신이 어찌 편안히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 임금이 타이르기를, “경이 조정에 나온 지 40여 년에 한 점의 사소한 허물도 없었는데, 이제 생각지도 않았던 말이 뜻밖에 나오니 경의 불행뿐만 아니고 실로 국가의 불행이다.” 하였다. 시장
○ 집이 가난하여 간간이 꾸어 먹어도 끼니를 잇지 못하였으며, 거처하는 집과 자는 방이 기울고 허물어져서 집안 사람들이 수리하기를 청하니, 공이 말하기를, “나라 일이 안정되지 않았는데 집은 수리하여 무엇하느냐.” 하였고, 죽을 때에도 의복이 한 벌밖에 없었다.
○ 정묘년에 태사(太史)가 아뢰기를, “전성(塡星)이 태미성(太微星)을 침범하니 수상(首相)에게 액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6월에 공이 죽었다.

오윤겸(吳允謙) 안주 목사(安州牧使)ㆍ동래부사(東萊府使)는 부임하지 않았다. 충청 감사(忠淸監司)ㆍ강원 감사(江原監司)ㆍ광주 목사(廣州牧使)
오윤겸은, 자는 여익(汝益)이며,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호는 추탄(愀灘) 또는 토당(土塘)이라 하였다. 기미년에 나서 임오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정유년에 평강 현감(平康縣監)으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계해년에 정승이 되었고 영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는 충정이며, 나이는 78세였다.
○ 공의 외조부 이정수(李廷秀) 석형(石亨)의 후손 는 문천(文川) 원이었는데 공의 어머니가 잉태할 때 꿈에 삼태성(三台星)이 관아의 남쪽에 굴러 떨어져서 품안에 들어왔다. 공을 낳게 되자 정수가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 아이가 삼태성 정기를 탔으니 반드시 삼공(三公)의 반열에 오를 것이다.” 하였다. 어머니가 또 꿈에 용이 올라가는 것을 보았는데 이 때문에 공의 어릴 때의 이름을 성용(星龍)이라 하였다. 연보
○ 우계(牛溪 성혼(成渾)) 문하에서 배웠는데, 우계가 사람에게 말하기를, “오윤겸은 어지러운 나라에서도 살 수 있는 사람이다.”고 하였다.
○ 임진년에 정철이 호남 체찰사(湖南體察使)로 갈 때, 종사관의 일을 보았는데 음관(蔭官)으로서 막부의 종사관이 된 것은 공이 처음이었다. 이 뒤에 평강 현감(平康縣監)이 되었다. 그때에 감사 정구(鄭逑)가 순찰하기 위해 강릉에 왔는데 부사(府使)에게 말하기를, “내가 평강에 가면 반드시 그 현감을 매질할 것이다.” 하였다. 강릉 부사가, “무슨 까닭입니까.” 하니, 정구가 말하기를, “이 사람이 스스로 선비라 일컫고서 문서를 기한에 못 마치니, 이 때문에 매질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였다. 강릉 부사가 말하기를, “공이 현에 이르시면 옳고 그른 것을 묻지 않고 갑자기 들어가 매질하면 그만이나, 만일 함께 이야기를 붙이면 매질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정구가 말하기를, “어찌 그럴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정구가 평강현에 이르자 곧 현감을 불러들이었는데, 공의 행동하는 것이 단아하며 언사가 자상하고 민첩하여 묻는 데 따라 해명하는 것이 물 흐르듯이 하였다. 정구가 자기도 모르게 심복하여 무릎을 맞대고 앉아서 밤새도록 이치를 이야기하였는데, 기뻐서 하는 말이, “참으로 금옥 같은 군자로다.” 하였다. 강릉으로 돌아오게 되자 부사에게 일러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과연 옳았소.” 하였다. 경포호에서 뱃놀이를 하는데, 호수 복판에 이르러 탄식하기를, “평강 현감과 함께 뱃놀이를 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하였다. 부사가 말하기를, “그것이 무슨 어려운 일입니까. 공무로 핑계하고 부르시면 곧 올 것입니다.” 하니, 정구가 그 말을 따랐다. 며칠을 머물러 공이 오는 것을 기다려, 다시 호수 가운데서 잔치를 베풀고 한껏 즐긴 후에 헤어졌다.
○ 정유년에 비로소 과거에 오르고 정사년에 일본에 사신으로 갔는데 관백(關白) 이하 모두가 공경히 대접하였다. 돌아오자 일본 사신이 와서 묻기를, “귀국에는 오공과 같은 분이 몇이나 있습니까.” 하였다. 답하기를, “너무 많아서 쉽게 셀 수가 없었다.” 하니, 일본 사신이 웃으며 말하기를, “귀국이 비록 장하다 하지마는 인재는 반드시 한 사람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 정사년 수의(收議)에 그의 말이 매우 엄정하였고 폐모하기 위한 복합(伏閤)에 또한 나아가지 않았으므로 대간이 멀리 귀양보내기를 청하였다.
○ 임술년에 바다를 건너 중국으로 가서 황성도(皇城島)에 이르렀는데, 배가 몇 번이나 뒤집힐 뻔 하였다. 여러 사람들은 얼굴이 질색이 되었는데 공은 단정히 앉아 글을 지어 쓰기를, “한 번 죽는 것은 이미 미리 정한 것, 이렇게 되어 다시 무엇을 의심하랴.” 하고, 조용하게 옷깃과 소매를 여미고 목숨이 다할 때를 기다렸으나 마침내 무사하였다. 공은 포은(圃隱)의 외손(外孫)이다. 일본과 금릉(金陵)에 사신으로 간 것이 마침 포은과 같은 시일이었으므로 사람들이 더욱 기이하게 여겼다.
○ 계해년에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명신록》
○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 전례로 주는 물건을 받지 않았다. 상세한 것은《통신사 전고(通信使典故)》에 있다.
○ 인조가 경연에서 묻기를, “색(色)ㆍ투(鬪)ㆍ득(得)의 세 가지 경계 가운데 어느 것이 어려운가.” 하였다. 공이 대답하기를, “색이 가장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나는 득(得)을 경계함이 어렵다고 본다.” 하였다. 공이 다시 대답하기를, “요사이 물건에 마음이 끌리는 것만이 아니라 부부간에도 혹시 예로써 서로 접하지 않으면 이것도 계색(戒色)을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얼굴을 고치며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하였다.
○ 원종(元宗)을 추숭하자는 의논에, 공이 대신으로서 옳지 않다고 힘껏 다투었는데 원종의 위패를 종묘에 모시는 일에는 공이 도감(都監)의 직책을 맡았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으니 공이 말하기를, “처음에 힘껏 다툰 것은 대신으로서의 책무이나 조정에서 예가 정해졌으니 명을 받들고 직책에 충실하는 것이 신하의 의리이다.” 하였다. 《명신록》
○ 임금이 일찍이 몸소 도정(都政)하는 자리에 나왔는데, 공이 이조 판서로서 오씨 성을 가진 사람을 맨 먼저 추천하여 초사(初仕) 제일 후보로 추천하였다. 임금이, “이것은 어떠한 사람이냐.”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신의 집안 사람으로 신의 조상을 받들어 제사를 모시는 사람인데 사람됨이 또한 직임을 감당할 만하기에 제일 후보로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즉시 그 사람에게 낙점을 하였다. 정사를 마치고 술자리를 베풀었는데, 공이 취하여 임금의 자리 아래 엎드려 눈물을 흘렸다. 임금이 공에게 이유를 물으니 공이 대답하기를, “나라가 망하려고 하여서 웁니다.” 하였다. 임금이 “무슨 일이냐.” 하고 물으니, 공이 아뢰기를, “신이 처음에 사사로운 관계의 사람을 제일 후보로 하였는데 전하께서 물으시므로 앞에서 신이 감히 숨기지 못하여 실상으로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 낙점을 내렸습니다. 이것은 신에 대한 사사로운 정에 얽매여 바른 도리로써 신을 책망하시지 못한 것입니다. 아래 있는 사람이 먼저 올바른 도리를 잃었으며 임금이 또한 따라서 정도를 잃었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고 어찌 되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얼굴빛을 온화히 하여 받아들였다. 《인계록(因繼錄)》
○ 임인년에 경성 판관(鏡城判官)에 임명되었다. 임해군(臨海君)의 종이 볼 일로 본부(本付 경성부)에 왔다가 어떤 과부를 때려 다치게 하였다. 공이 종을 묶어 가두고 엄한 형벌로 다스렸더니 죽어 버렸다. 사람들이 매우 위태롭게 여겼으나 온 고을은 쾌하다고 하였다. 연보
○ 광해조에 폐모 수의(廢母收議)에 반대하여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았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동대문 밖에서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들이 편지를 보내, “이런 큰일을 만나서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 하니, 공은, “평생에 배운 바가 바로 오늘에 있네.” 하는 여덟 글자로 답하였다.
○ 공이 죽을 때 말하기를, “내가 거룩하고 밝은 임금을 만났어도 세도(世道)를 만회하지 못하였으며, 나라에는 공이 없고 몸에는 덕이 없었다. 비석을 세우지 말고 시호를 청하거나 남에게 만장(挽章)을 구하지 말라.” 하였다. 《청음집》ㆍ묘갈
○ 정승을 그만둘 때에, 주자(朱子)의 갑인 봉사(甲寅封事)와 이황(李滉)의 성학(聖學 임금의 학문)에 힘쓰라는 차자를 베껴서 올렸는데, 끝에는 다시 간절히, “사무를 밝게 살피는 것으로 능사를 삼지 말며, 한 시대를 유지하는 것으로 만족함을 삼지 말 것입니다.” 하였다. 《청음집》ㆍ묘갈

김류(金瑬) 전주(全州) 판관ㆍ함흥(咸興) 판관은 성절사(聖節使)로 부임하지 않았다.
김류는 자는 관옥(冠玉)이며, 본관은 순천(順天)이요, 호는 북저(北渚)이다. 신미년에 나서 무자년에 죽었는데 나이는 78세였다. 목사 여물(汝岉)의 아들인데 병신년에 문과에 올랐고, 정사 원훈(靖社元勳)ㆍ영국공신(寧國功臣)ㆍ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이 되었다. 정묘년에 정승에 임명되어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충이다. 죽었을 때 세자가 조문하였고 임금은 고기 없는 찬을 닷새 동안 들었다.
○ 병신년에 승문원에 있다가 복수장(復讐將) 김시헌(金時獻)을 따라 충청ㆍ경상도 사이를 출입하였다. 공무로 인하여 충주(忠州)에 갔을 때, 목사(牧使)가 무인(武人)이었는데 공에게 괄시를 받았다고 크게 유감으로 생각하더니 사헌부에 있는 자기의 조카를 충동하여 공을 탄핵하여 사판(仕版)을 깎이게 되었다. 충주의 여러 사람들이 그 억울한 것을 호소하였는데, 신축년 봄에 도승지(都承旨) 김시헌이 상소하여 공의 억울한 사실을 진술하고 자기가 직접 눈으로 본 것을 증거로 대었다. 임금이 대신들에게 의논할 것을 명하였으나 대신들이 의논하기 전에 공의 이름이 마침 옥당 신록(新錄)에 들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아침에 풀리면 저녁에 기록할 수는 있지마는 오(午)시에 풀리지 않았으면, 사(巳)시에 기록될 수는 없다.” 하고, 마침내 명하여 그 기록을 삭제하도록 하였다. 조금 뒤에 대신들이 풀어야 한다고 의논하니, 비로소 임금이 명하여 풀어 주고 선택되어 한림(翰林)으로 들어갔다. 《백헌집(白軒集)》ㆍ시장
○ 전주 판관으로 있을 때, 한 백성이 거짓으로 소장(訴狀)을 올려 시험하려 하여 공이 죄를 주려고 하였으나 시일을 놓치고 말았다. 후에 공이 마침 성(城)을 나가다가 동문에서 말을 끌고 가는 사람 한 명을 보고 즉시 말하기를, “이놈이 전날 거짓 소장을 올린 놈이구나.” 하였다. 그 사람이 당장 굴복하였는데 아전과 백성들이 귀신이라고 하였다. 시장
○ 반정 초에 실시한 정치는 대개 공에게서 나온 것이 많았다. 밤낮으로 노력을 아끼지 않고 정신과 생각을 다하였기 때문에 며칠 사이에 수염과 머리털이 다 희게 되었다. 시장
○ 명 나라에서 강(姜)ㆍ왕(王) 두 사신이 왔을 때, 공이 접반사가 되어 조정의 명으로 섬에서 모문룡을 만났다. 공이 일찍이 모문룡을 위하여 그 비문을 지었으므로, 모문룡이 매우 존대하였으며 공이 말하는 것을 모두 따랐다. 시장
○ 신미년 봄에 임금이 공과 이귀(李貴)를 편전에 불러 집안 사람의 예로써 대접하고 이어 소연(小宴)을 베풀었다. 잔치가 반쯤 되어 임금이 동궁과 대군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너희들은 이 두 분을 보기를 아버지를 보듯 하라.” 하였다.
○ 신흠이, 공이 반정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가 평소에 보니 눈 빛이 기이한 것이 참으로 영웅의 자질이었다.”고 하였다. 죽을 때가 되어 소를 올렸는데 대략에, “임금을 사랑하는 저의 정성은 죽어도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전하께서 하늘의 노여움에 삼가서 천명이 오래 보존되도록 빌 것이며, 백성의 원망을 불쌍히 여기어서 나라의 근본을 공고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사로운 뜻을 누르시고 충성된 말을 용납하시고 어진 인재를 맞아들이고 벼슬을 함부로 주지 마시고 중히 여기소서.” 하였다. 《우암집(尤菴集)》 비문
○ 겨우 돌이 되어 미처 말을 잘하지 못하였는데, 홀연히 나비가 거미줄에 걸린 것을 보고 문득 말하기를, “거미가 나비를 잡아먹는 것이 밉다.” 하니, 듣는 사람이 기특히 여겼다.
○ 7, 8세에 능히 글자를 알고 기골이 비범하였다. 어른이 연구(聯句)를 지으라고 명하였더니 말이 떨어지자 즉시 부르기를,

군사 소리가 천지를 움직인다 / 軍聲動天地

하여 보는 이가 그가 원대한 그릇이 될 것을 알았다.
○ 과거를 서두르지 않고 성리학에 몰두하였다.
○ 별시에 장원이 되었는데, 그가 지은 글을 선조가 보고 경원에 있는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나이 젊은 선비가 병법의 말을 많이 사용하였다. 아마 병법을 아는 자가 아닌가.” 하였다.
○ 대비를 폐하는 정청 때에 양사(兩司)에서 합계하여 정청에 참여하지 않은 자는 귀양보내기를 청하였는데 공의 이름도 그 가운데 있었다. 공을 공격하여 말하기를, “그 마음이 어디 있는가는 불을 보듯 분명하니, 정청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논할 것도 없다.” 하였다.
○ 혼자 있을 때에 늘 통분해하며 뜻이 나라를 바로잡아 다시 세우는 데에 있었다. 마침 정승 신경진(申景禛)이 왔는데 공은 평소부터 그의 사람됨이 침착하고 굳세어 함께 일을 할 만한 자임을 알고 있었다. 눈물을 흘려 울면서 말하기를,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찌 어미 없는 나라가 있는가. 이씨의 종묘사직이 아침저녁으로 왕망(王莽)과 동탁(董卓)의 손에 옮겨지는 것과 같은 지경이니, 우리가 어찌 멸족될 것을 두려워하여 위태로운 나라를 앉아서 보고만 있겠는가. 또 하물며 우리 두 사람의 아버지께서 나라 일로 함께 돌아가셨으니, 우리 두 사람이 종묘사직을 위하여 함께 죽지 않으면 어떻게 돌아가신 어른들을 지하에서 뵐 것인가.” 하였다. 신공이 팔을 걷어붙이며 무릎을 맞대고 말하기를, “그것이 나의 뜻이다.” 하여 드디어 큰 계획이 정해져서 서로 죽음으로써 다짐하였다.
○ 계해년 봄에 인조가 잠저에 있을 때, 공의 집에 찾아가서 밤이 새도록 담론하였다.
○ 공이 일찍이 당을 지어서 논하는 것들에 대해 개탄하고 있었다. 때문에 이조 판서가 되어서는 오로지 조정하는 것으로 뜻을 삼았다. 항상 사람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일만 번 죽음을 각오하고 나서 반정을 한 것은 종묘사직을 위한 것이다. 이제 또 당을 세운다면 반정의 본의가 아니다.” 하였다.
○ 명 나라에서 사신 강왈광(姜曰廣)과 왕몽윤(王夢尹)이 왔는데 공이 접반사가 되었다. 공의 행동이 예에 맞으니 두 사신이 공경하였다. 공이 그들의 시에 화답하면 그들은 매양 절묘하다고 칭찬하였다. 그들이 돌아간 뒤에 우리 사신의 인편에 공에게 책과 갈포(葛布) 등을 부쳐 보냈는데 전에 잘 보지 못한 드문 일이었다.
○ 이괄의 난리 때에 임금이 공주(公州)에 파천하여 산성(山城) 지킬 것을 의논하였는데, 공이 임금을 따라 산성에 올라가 임금 앞에 서서 차고 있던 칼을 손으로 빼어 성 안팎의 형세를 가리켜 그리며, 수비하는 계책을 논하는 것이 매우 상세하여 여러 사람의 마음이 굳게 되었다.
○ 성격이 엄하며 무섭고 모습이 준수하고 시원스러웠다. 키는 보통 사람을 넘지 않았지마는 모양이 뛰어나서 젊었을 때 우계(牛溪 성혼)가 여관에서 보고 큰 그릇이라 하였다.
○ 공의 선친에게 강씨 성을 가진 친구가 있었는데, 일찍 죽었으므로 선친이 그가 남긴 아들을 자기 아들처럼 길렀고 노비와 의복ㆍ음식도 같이 하였었다. 그 사람이 죽으니 공이 장사와 제사를 유감없이 하였다.
○ 공이 남을 깊이 잘 사귀지 않고 또 술을 잘 마시지 못하였으나 마음 맞는 사람을 만나면 이야기가 옥가루 날리듯 하고 술잔을 권하면 온화한 기운이 풍겼다.
○ 공의 글은 기운이 웅혼하고 법도가 엄하였다. 사람들이 산소의 비석에 공의 글을 얻으면 다행으로 여겼다.


이정귀(李廷龜) 두 아들은 명한(明漢)과 소한(昭漢)이다.

○ 이정귀는 자는 성징(聖徵)이며, 본관은 연안(延安)이요, 호는 월사(月沙)이다. 갑자년에 나서 을해년에 죽었는데 나이는 72세였다. 을유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경인년에 문과에 올랐다. 정유년에 통정대부, 무술년에 가선대부ㆍ대제학이 되고 무진년에 정승에 임명되어 영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죽을 때에 세자가 조상하러 왔다.
○ 말을 배우자 곧 글자를 알고 능히 글을 만들었고 한 편이 나올 때마다 사람을 놀라게 하니 신동이라 일컬었다. 《청음집(淸陰集)ㆍ비》
○ 임진년에 명 나라 사신 송응창(宋應昌)이 정주(定州)에 와서 머물렀는데 학문 연구에 도움을 얻으려고 문학하는 선비를 보고자 하였다. 공과 황신응(黃愼應)이 뽑히어《대학》을 강의하였다. 응창이 육상산(陸象山)의 학설을 좋아하고 정주(程朱)의 학설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공이 논설을 지어 두 학파의 차이점을 힘써 변론하여 크게 칭찬을 받았다.
○ 정유년에 명 나라 장수 양호(楊鎬)가 평양에 도착하여 군사와 성과 양식과 기계에 관한 실정을 묻고, 삼조(三曹 이조ㆍ호조ㆍ병조)의 판서들이 와서 대답하게 하였다. 조정에서 걱정하였으나 공이 풍부한 재주와 눈치가 있었으므로 자문(咨文)을 주어 대신 갔다 오도록 했다. 종사관으로 명 나라 장수 마귀(麻貴)를 따라서 남정(南征)하였다
○ 명 나라에서 양 안찰사가 갑자기 서울에 왔을 때, 임금이 나가 접대하려 했으나 역관(譯官)을 갖추지 못하였다. 창졸히 공을 시켜 접대하게 하였더니, 보는 대로 알아내어 주선하는데 실수가 없었다. 일을 모두 마치자 임금이 기뻐하며 이르기를, “이정귀의 재주가 이렇게까지 좋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다.” 하고, 관직을 7계급이나 뛰어 올려 주어 승지가 되었다. 이때부터 손님에 대한 의례(儀禮)가 있을 때마다 공이 꼭 임금 앞에 있었다. 중국의 사신들이 관사에 가득하여 응접하기에 번잡함을 이루 말할 수도 없었는데, 공이 안에서는 응대하고 밖으로는 외교하는 글을 맡아서 남들이 미루는 일도 공은 처리하기를 물 흐르는 것같이 하였다. 언젠가 병이 들어 여러 날 되었는데 임금이 묻기를, “이정귀는 어디 있느냐.” 하고, 특별히 내구(內廐)의 말을 하사하였다.
○ 공이 예조 판서로 함경도에 가서, 능을 살피고 돌아오면서 풍악(楓岳)에 들렀었다. 부로(父老) 수십 명이 경계를 넘어와 맞이하여 말하기를, “우리는 흡곡(歙谷)에 사는 백성입니다. 대감이 호조(戶曹)에 계실 때에 일찍이 우리 고을을 살리셨으니, 그 은혜를 감히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하고, 저마다 술을 받들고 절하며 고마워하였다.
○ 경기 감사가 되었을 때, 조정에서 막 국(局)을 설치하여《동국시문(東國詩文)》을 편찬하려 했다. 윤근수(尹根壽)와 이호민(李好閔)이 그 일을 주장하였는데 임금에게 아뢰기를, “이정귀가 비록 지방 일을 맡았으나 이 국(局)에 없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였더니, 왕래하면서 참정(參定)하도록 윤허하였다. 이것은 사원(詞苑 문단)의 아름다운 일로 전하여졌다.
○ 칙사 웅화(熊化)가 올 때에 공이 접반사가 되었는데, 서로 즐겁게 사귀어 말끝마다 꼭 선생이라고 일컬었다. 공의 화답하는 시를 보고는, “글자마다 당 나라 사람의 넋이다.” 하고 《황화집》의 서(序)를 지어 달라고 청하였다.
○ 관복(冠服)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북경에 가는데, 진강수장(鎭江守將) 구탄(丘坦)이 마음 속으로 공을 사모하여 채붕(綵綳)을 설비하고 공장(供帳)을 성대히 하여 길가에서 영접하고 위로하였다. 간 곳마다 중국 사람들이 반가이 맞으며 모여서 보고 말하기를, “조선 이 상서(李尙書)가 왔다.”고 하였다.
○ 공이 죽던 날 저녁에, 구름도 없는데 번개가 치고 붉은 기운이 하늘 끝까지 밤새도록 가득 차 있었다.
○ 타고난 자질이 호걸스럽고 시원스러워 우뚝히 빼어났다. 높은 체하고 엄한 체하기를 즐겨하지 않고, 꾸미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선을 좋아하고 선비를 좋아하였으니, 모두 지성에서 나왔다.
○ 어머니 김씨가 공을 잉태하여 해산할 때가 되자, 범이 와서 대문 밖에 엎드려 있어 사람들이 감히 쫓아 보내지 못하였는데 해산하자 곧 갔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문장에 뛰어날 징조다.”고 하였다.
○ 문장이 있고 아울러 복록을 겸하여 누렸으며 공명이 장한 것을 세상에서 고려의 이익재(李益齋)와 비교하였다.
○ 임진란에 권(權)부인 판서 극지(克智)의 딸 의 일행이 중로에서 헛 놀래어 절벽에서 스스로 떨어졌는데 천행으로 목숨을 잃지 않았고, 뒤에 강을 건너는데 배가 엎어져서 한 배에 탄 사람이 모두 죽었으나 다만 부인과 맏아들만 함께 살았다. 사람들이 그것을, 선행을 쌓은 것에 대한 보답이라 하였다. 병자란에 공의 한 집안에서 죽은 사람이 셋이나 되었으므로 권씨는 슬퍼 상심하다가 교동(喬桐) 객사에서 죽었다.

김상용(金尙容)
김상용의 자는 경택(景擇)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요, 호를 선원(仙源) 또는 풍계(楓溪)라 하였다. 신유년에 나서 임오년에 사마시에 합격되었고, 음사로 참봉이 되었다. 경인년에 문과에 올라 한림이 되었으며, 임신년에 정승에 임명되었다. 병자년에 절의로 순사하였는데 나이는 77세였다. 정려(旌閭)하였고, 시호는 문충이다.
○ 돈독하고 후덕하며 겸손하고 조심성이 있었다. 용모가 온화하고 맑았으며 겉과 속이 하나 같았으니, 바라보면 그가 덕 있는 군자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성질이 산수를 좋아하여 유명한 옛그림을 보면 좌우에 벌여 놓고 그 집을 이름지어 ‘와유암이라 하였다. 평생 남보다 특이한 행동도 하지 않으며 남에게 굽히는 일도 없었고 스스로 특수하게 높은 체도 아니하였고 본심 아닌 것을 꾸며서 명예를 구하지 아니하였다. 《청음비》
○ 대비를 폐할 때 참여하지 않았고, 활쏘며 놀기를 7년간이나 하였다.

홍서봉(洪瑞鳳)
결(缺)

이홍주(李弘冑) 전랑(銓郞)ㆍ평안ㆍ함경ㆍ경기 감사
이홍주의 자는 백윤(伯胤)이며, 종성(宗姓 전주 이씨(全州李氏))으로 정종(定宗)의 6대 손이다. 호는 이천(梨川)이라 하였다. 음사로 금부도사(禁府都事)가 되었고, 갑오년에 문과에 올랐으며, 갑자년에 8도 도원수(都元帥)가 되었다. 임술년에 나서 임오년에 진사를 하였고, 병자년에 정승이 되어 영의정에 이르렀다. 무인년에 죽었는데 나이는 77세였으며 시호는 충정이다. 백헌집 묘지
○ 평양 서윤(平壤庶尹) 때, 암행어사가 치적이 제일이라고 아뢰니, 임금이 옷감을 특사하면서 이르기를, “벼슬에 있으면서 온화하고 일처리가 조용하였으니, 은혜를 끼치는 체하지 않아도 백성이 스스로 잘 살고, 밝게 살피는 체하지 않아도 일이 처리되지 않음이 없었다. 명 나라 칙사(勅使)가 평양으로 두 번 지나갔는데도 지방이 조용하니 매우 가상히 여긴다.” 하였다. 의주(義州)와 안동(安東)에 있을 때, 두 번 다 옷감을 하사받았다.
○ 칙사가 평양성에 들어왔는데, 성안에 불이 나서 관청의 창고가 불에 연소되었으나, 공은 침착하여 얼굴빛도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천천히 접반사 여러 사람에게 말하기를, “남아 있는 물건으로도 지탱할 수 있다.” 하였다.
○ 갑자년에 장만(張晩)을 대신하여 8도 도원수로 삼았으나 공이 사양하였다. 임금이 답하기를, “경의 국량이 넓고 깊어 물정을 진정시킬 만하며, 몸가짐이 깨끗하여 뭇사람을 복종시킬 만하다. 물정을 진정시키면 교만한 억센 군사도 감히 업신여기거나 만만히 보지 못할 것이며, 사람이 복종하면 윗사람에게 친하고 어른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게 될 것이다. 이 두 가지만 있으면 적을 위압하기에 족할 것이다. 원수의 중한 책임을 맡을 자는 경을 두고 또 누가 있겠는가.” 하였다.
○ 정승에 임명할 때에 임금이 이르기를, “경의 재주와 덕이 본래 보필하는 임무에 합당하니, 반드시 위태로운 국가로 하여금 평안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 도량이 넓고 침중하며 평상시에 말과 웃음이 적으며 군사를 통솔하는 데 모질지 않고도 엄하여 군문이 엄숙하였다.
○ 예조 판서로 있을 때, 조정에서 한참 원종추숭(元宗追崇)에 대하여 의논하였다. 공이 사직하며 말하기를, “전일에 대간으로 있으면서 감히 추숭하는 것은 예가 아니라고 논하였습니다. 신이 비록 학문에는 어둡지만 의견을 이미 정하였습니다. 자신의 의견을 변경하고 뜻을 굽혀서까지 순종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억지로 하기 어려운 줄 알면서 몰아붙여 강제로 쫓게 하는 것은 성조(聖朝)의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하였다.
○ 겨우 약관이 지나 잇달아 상주가 되었는데, 한결같이 예법에 따라 일 년 동안이나 죽을 먹으며 애통하였으므로 몸이 상하여 죽을 뻔하였다. 누나를 섬기기를 어머니같이 하며, 일가 사람에게 화목함이 친소가 없이 하였다.
○ 성품이 원래 검약하여 아침저녁의 끼니를 잇지 못할 때가 많았고, 거처하는 곳은 두어 칸의 조그만 집이었다. 물건에 기호하는 것이 없고, 작은 뜰에는 쓸쓸한 화초와 대나무뿐이었다.
○ 대사간 김덕함(金德諴)이 아뢰기를, “이홍주는 젊을 때부터 근신하였으니, 선비로서 태학에 자주 드나들면서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였으며, 조정에 나온 지 이미 40여 년이 되었는데도 그 마음은 물과 같고 그 몸에 허물이 없습니다. 나라만 알고 공사만 아는 그의 정성은 조야에서 모두 알아주는 바입니다.” 하였다.
○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나 번번이 사양하여 교대해 주기를 원하였으며, 일을 당하여 의논을 주장할 때에는 굳세게 정색을 하고서 올바른 도리를 따르고 털끝만큼도 남의 눈치를 볼 뜻이 없었다. 장계곡(張谿谷)이 일찍이 극구 칭찬하여 말하기를, “참으로 바르고 곧은 사람이다.” 하였다.
○ 진서(眞書)ㆍ초서를 잘 썼으므로 문묘 중수비의 비문을 썼다.


이성구(李聖求) 전라 감사ㆍ경기 감사

이성구의 자는 자이(子異)며, 태종의 8대손이요, 호는 분사(分沙)이다. 수광(晬光)의 아들로 갑신년에 났으며, 계묘년에 진사가 되고 무신년에 문과에 올랐다. 정축년에 정승이 되어 영의정에 올랐는데 갑신년에 죽었다.
○ 대비를 폐할 때에 바른 것을 지켜 흔들리지 않았다. 백사(白沙 이항복)가 정협(鄭浹)을 천거한 죄로 정승에서 파면되자 공이 지평으로서 반박하기를, “이항복이 정협을 천거하여 쓸 때에 어찌 후일에 정협의 반역을 미리 알 수 있었겠습니까. 대신에게까지 연루시킴은 너무 심합니다.” 하였으나, 간당들이 탄핵하여 파면시켰다. 반정할 당시에 사간에 임명되었는데, 함부로 잡아 가둔 사람들을 너그럽게 놓아 주고, 성문의 통행 금지를 풀고, 광해조 때 만든 침향산(沈香山)을 불태우고, 기생을 흩어 보낸 일은 모두 공이 먼저 주장하여, 새로운 교화를 도운 것이다. 동주집(東洲集) 비문
○ 정묘년에 전라 감사가 되었는데, 아버지의 병이 갑자기 위독하였다. 임금이 선전관을 보내어, “급히 돌아오게 하고 후임의 도착을 기다리지 말라.” 하였다.
○ 이규(李烓)의 전 가족이 처형되는 것을 구하다가 탄핵을 입어 벼슬이 떨어지자, 양화강(楊花江) 위에 우거하면서 집에 써 붙이기를 ‘만휴암(晩休菴)’이라 하였다. 어느 날 불이 났는데 나와서 밭둑에 앉아 말하기를, “술독은 탈이 없느냐.” 하더니, “술을 따라 동네 이웃 사람들에게 사례하라.” 하고, 다른 것은 묻는 것이 없었다.
○ 죽던 날 저녁에 흰 기운이 올라와 하늘에 가득하더니 흩어지지 않고 땅에 비추어 밤이 밝았다.
○ 임금이 반정하던 당시에, 공은 사간이 되었는데, 기생을 파하도록 건의하여 지방에서 서울로 뽑혀왔던 기생들을 모조리 돌려보내었으니 이것은 처음 시작한 맑고 밝은 큰 정사였다. 얼마 후에 공이 의정부의 사인이 되었을 때에 지은 한 절구(絶句)가 있으니,

이원을 파하자고 아뢴 것은 간관이란 직명 때문이었는데 / 奏罷梨園爲諫名
연못의 정자에 오니 기생이 없으므로 풍정을 저버렸네 / 却來蓮閣負風情
못물은 가득하고 연꽃은 서늘한데 / 池塘水滿芙蓉冷
홀로 난간에 기대어 빗소리 듣는구나 / 獨凭危欄聽雨聲

하였으나 이는 농담이었다. 김시양(金時讓)이 화답하기를,

청루에 박행하다는 이름을 피하지 않았으니 / 不避靑樓薄倖名
한 장의 소가 참으로 임금 사랑하는 심정이 있었네 / 封眞有愛君情
어찌 응향각(연못 가의 정자 이름) 빗소리 듣는 날 / 如何聽雨凝香日
도리어 당초 정성(음탕한 음악) 내친 것을 후회하는가 / 却悔當初放鄭聲

하였다. 《하담록》


최명길(崔鳴吉)

최명길의 자는 자겸(子謙)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요, 호는 지천(遲川)이다. □ 문과에 올랐으며, 정사공신(靖社功臣)으로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대제학을 지내고 정축년에 영의정이 되었는데 시호는 문충공이다.
○ 양파(陽坡 정태화(鄭泰和))에게 고모의 사위 아무개가 있었는데 음사로 한 고을 수령 자리를 구하였다. 이때 공이 이조 판서로 있었는데, 양파가 고모의 청에 못 이겨 가서 청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내가 전후에 벼슬을 제수한 것이 어찌 모두 다 적당한 사람을 얻었다고야 말할 수 있겠는가만 능히 내 양심에는 부끄럽지 않을 뿐이다. 이 사람은 능히 그 직책을 감당할 만한가.” 하고는 끝까지 추천하지 않았다. 양파가 이 말을 가지고 자제들에게 매양 말하기를, “최 정승이 내 말에는 일찍 따르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할 수 없는 일에 대하여서는 분명하기가 이와 같다.”고 하였다. 《공사견문》
○ 몸집은 잔약하고 작았으나, 앉아 있는 모습이 금석(金石)과 산악처럼 굳고 무거워서 기운이 곁에 있는 여러 사람에게 번졌다. 자제들도 감히 우러러보지 못하였다. 《지천유사(遲川遺事)》
○ 공이 푸른색과 초록색을 가리지 못할 정도로 속된 세상일은 살피지 않았다. 조카가 당나귀를 타고 왔는데 공이 말하기를, “네 말의 귀가 어찌 그리 기냐.” 하였다. 웃으며 대답하기를, “이것은 나귀이지 말이 아닙니다.” 하였다. 《지천유사》
○ 공이 호조 판서가 되었는데, 어느 관청에서 기와 500장을 달라고 청하였다. 공이 결재하기를, “500장은 너무 많으니 한 우리를 주라.” 하였다. 이는 기와 천 장을 한 우리라고 하는 것을, 공이 100장이 한 우리가 되는 것으로 잘못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인데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지천유사》
○ 유도삼(柳道三)이 글 잘하기로 자처했는데, 승문원의 참하(參下)로 있으면서 문자에 관한 것이면 언제나 완성(完城) 대감에게 가서 초고를 받았다. 처음에 쓰는 두어 줄은 극히 평범하므로 도삼이 마음에 매우 쉽게 여겼다. 그러나 중간에 이르면 조리가 유창하고, 끝에 이르면 뜻이 분명하게 들어맞아 글의 기운이 폭풍처럼 일어나니, 참으로 하늘에 맞닿는 풍랑과 같았다. 《지천유사》
○ 공이 일찍이 집에 있을 때, 어떤 사람이 경의(經義)를 지어 보내어 평점을 청한 일이 있었는데, 공이 상지하(上之下)로 비점을 매기고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이 세상에 크게 울릴 것이다.” 하였는데, 찾아서 물으니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것이었다. 그 후에 공이 대제학이 되어 과거를 주관하였는데, 어느 경의(經義) 한 장을 장원에 뽑으려 하였는데, 여러 고관(考官)이 모두 지벌(地閥)이 두드러진 사람이 아니라고 싫어하였다. 공이 “문학이 남보다 뛰어났는데 어찌 전례에만 구애할 것인가.”고 역설하여 장원을 주장하였는데 바로 송시열이었다. 《지천유사》
○ 정양파(鄭陽坡)가 공이 밀어준 덕으로, 40세 후에 곧 정권을 잡게 되었다. 그러더니 늙어서 혹 처리하기 어려운 일을 만나면 번번이 머리를 긁으며 말하기를, “완성(完城)이 나를 그르쳤다.”고 하였다. 《지천유사》
○ 계해년에 조정에서 훈신들에게 집을 내려주었는데 적몰(籍沒)한 여러 죄인들의 집이었다. 공은 사치하고 화려한 것을 싫어하여 끝내 거기 들어가지 않았다. 내려준 전답을 받자 또 말하기를, “권세 있던 사람들이 백성의 전지를 강탈한 것이 무수하였기 때문에, 내가 받은 전답 가운데에도 반드시 백성의 전지가 많을 것이다.” 하여 마침내 도로 찾아 가기를 허락한다고 큰 거리에 방을 붙였다. 그 후에 와서 호소하는 자가 있으면, 공이 하나하나 문서를 만들어 돌려주었다. 《지천유사》
○ 공이 정승 자리에 있을 때, 구오(具鏊)가 수원 부사(水原府使)가 되었다. 구오는 능천(綾川)부원군 인후 의 아들이다. 그때 그는 나이 젊고 이름난 무사(武士)였다. 구오가 수원으로 부임하면서 공에게 들러 인사하고 공과 함께 한참 동안 이야기한 뒤에 절하고 물러갔다. 그가 겨우 대청을 내려가자, 공이 갑자기 얼굴빛이 달라지며 천천히 완릉공(完陵公 공의 아들)에게 말하기를, “괴이한 일이다. 구오가 오래지 않아 죽을 것이다.” 하였다. 완릉공이, “어찌된 말씀입니까.” 하고 물으니, 답하기를, “내가 그 사람이 대청을 내려 걸어 나갈 때 보니, 정신이 벌써 흩어져 마치 인형이 걸어가는 것 같았다.” 하였는데, 며칠이 안 되어 구오가 병도 없이 갑자기 죽었다. 《지천유사》
○ 숙종 병진년에 인조 묘정에 추배하기를 명하였으나, 사헌부의 반대 때문에 이루지 못하였다. 상세한 것은 숙종(肅宗)조에 있다.

장유(張維)
장유의 자는 지국(持國)이며,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호는 계곡(谿谷)이다. 처음 호는 묵소(嘿所)이고 운익(雲翼)의 아들이다. 정해년에 나서 기유년에 문과에 올라 대제학이 되었으며, 정사(靖社)의 공으로 신풍부원군(新豐府院君)이 되었다. 정축년에 일어나 다시 우의정이 되고, 무인년에 죽었는데, 나이가 52세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 임자년 옥사에 혼인 관계 있는 집의 죄에 연루되어 파면되어서 12년 동안 안산(安山)에 물러나 있었다. 반정의 계획에 은밀하게 협력을 한 것이 많았다. 《백헌집》에 있는 공의 비문
○ 정경세(鄭經世)ㆍ심광세(沈光世)가 공의 학식을 당세 제일이라고 아뢰며, “선조조에 노 정승 수신(守愼)에게 하던 고사에 따라 계급에 관계없이 지위를 높여서 대우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명하여 통정대부를 가자하였다.
○ 천성이 호걸스럽고 기품이 청수(淸秀)하며 흉금이 쇄락하여 한 점의 티끌도 없으니 풍채가 사람을 비치고 눈은 밝은 별과 같았다.
○ 백사가 일찍이 말하기를, “장유의 문장과 덕행은 비록 공자 문하에 둔다 하여도 안연이나 민자건에게 손색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약관에 음부경(陰符經)을 주해하였는데, 독특한 의견이 많이 있었다.
○ 같이 사귀어 노는 사람과 문하에 있는 선비에게 공이 장차 어질고 어질지 못할 것과 길하고 흉한 것과 벼슬이 높게 되고 낮게 되는 것을 예언하였는데 후에 그 말과 같지 않는 것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그 알아보는 식견에 감복하였다.
○ 병자년에 남한산성에 들어가 석문(石門)ㆍ백헌(白軒)과 함께 한 집에 있었는데, 세 사람이 함께 죽기를 약속하였다. 공이 하루 저녁에 절명사(絶命詞)를 짓기를,

평생 충효의 뜻이 / 平生忠孝志
이 날에 다 이지러질까 두렵네 / 此日恐全虧
해마다 봄 달밤에 / 年年春夜月
두견화 가지에 피 뿌리려네 / 血灑杜鵑枝

하였는데 마침내 서로 마주 앉아 눈물을 흘렸다.
○ 죽는 날 아침에 긴 무지개가 누운 방 지붕에 가로 뻗쳐 있어, 보는 사람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 가도의 장수 황룡(黃龍)이 그 아랫사람에게 구금당하였다. 공이 임금의 명을 받들어 격문을 보내어 반역함과 순종함에 대해 논변하였는데, 말이 엄숙하고 거동이 단정하니, 섬사람들이 감격하고 개혁하여 도수(島帥)가 옛날과 같이 되었다.
○ 아들과 조카를 가르치는데 반드시 효제충신의 도로써 하였다. 또 경계하여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은 자제를 가르치면서 오직 영화롭게 출세하는 것에 힘을 쓰고, 과거 외의 일은 함부로 구하지 못하게 한다. 너희들은 이것에 힘쓰라.”고 하였다.
○ 나면서 남달리 뛰어났으며, 어려서 맏형을 따랐는데, 그의 배우는 것을 곁에서 듣고 빨리 기억하였다. 윤월정(尹月汀)에게《한사(漢史)》를 배웠으며, 사계(沙溪)에게《예기》를 배웠다. 열 살에 두 경의 정문(正文)을 다 외웠으며, 12, 3세에《소미통감》을 다 읽고 또 능히 외었다. 16세 때에 창려문(昌黎文)을 받아서 읽고 문득 고문의 법도를 알았다. 19세에 한성시(漢城試)에 장원하였고, 20세에 진사가 되고 23세에 과거에 올랐다. 글을 짓는 것이 한유(韓愈)의 짓는 법을 따라 진부한 말들은 쓰지 않았다. 선배들의 명작을 보고서도 뜻에 차지 않는 것이 많았다. 얼마 후에 임자년의 화를 만나 벼슬을 그만두고 한가하게 있게 되어 마침내 문장에 힘을 썼다. 다만 병이 많았으므로 부지런히 글을 읽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30세 때에 문체가 대략 성취되었다. 일찍이 스스로 평가하여 말하기를, “나의 작품 중에 사부 6, 7편은 마땅히 고려조의 이 문순(李文順)과 나란히 할 것이며, 고문 수십 편은 중국에는 감히 내놓을 수 있으나《동문선》에 끼우는 것은 탐탁하게 여기지 아니한다. 다만 시는 본래 늦게 배웠기 때문에 끝까지 소가(小家)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후인이 품위(品位)를 매길 때에는 우리나라 어느 분들 사이에 끼워 줄런지 알지 못하겠구나.” 하였다. 《계곡만필》 《명신록》합록
○ 정축년에 기복(起復)으로 정승을 제수하였으나 공이 한사코 사양하였다. 좌의정 최명길이 소를 올리기를, “선조 갑오년간에 이덕형(李德馨)이 기복으로 병조판서가 되었을 때는 몇 번 차자를 올린 뒤에는 끝내 사양하지는 못하였습니다. 또한 광해조에 박승종이 또한 기복으로 정승을 제수하였으나 굳이 사양하여 나오지 않고 직명을 띤 채 3년상을 집에서 지냈습니다. 그러나 승종은 효자의 이름을 얻지 못하였고 덕형만은 홀로 중흥(中興)의 명신이 되었으니 오늘날 동료 정승(장유)은 스스로 처신하기를 마땅히 어느 것을 취하고 어느 것을 버려야 하겠습니까. 이덕형은 굳게 뜻을 지키지 못하였고, 박승종은 임금의 명을 거역하였습니다. 두 시대의 흥하고 망한 까닭이 이런 데에서 결정되는 것이니, 오늘날 임금과 신하가 꼭 생각할 일입니다.” 하였다. 《지천집》
○ “좌의정(최명길)이 신(장유)을 찾아와, 이덕형의 호(한음(漢陰))를 들면서 신에게 말하기를, ‘기복하는 것은 한음이 이미 먼저 행하였으니 대감도 사람됨이 한음과 같이 되었으면 또한 족할 것이오.’ 하였습니다. 신이 응답하여 말하기를, ‘한음은 진실로 어진 정승이나 그에게 배울 만한 것이 매우 많은데 내가 다 배우지 못하면서 기복한 것 한 가지만을 배워서 옳을 것인지.’ 하고, 또 말하기를, ‘지나간 임진년의 변란에 이덕형과 이호민(李好閔)이 모두 기복(起復)되었던 것은 원수의 왜적이 국내에 가득하였던 때문이었다. 그러나 덕형이 병조판서로서 공석에서 무변(武辨)한 사람에게 비방받고 풍자함을 당하고는 부끄러운 얼굴을 면치 못하였소.’ 하였습니다.” 하였다. 《계곡집》
○ 재변(災變)에 관하여 소를 올려서, 임금의 뜻을 세우고, 임금의 도량을 넓히고, 임금의 마음을 평정하게 해야 한다는 세 가지 조항을 진술하였는데, “임금의 뜻을 세운다는 것은, 옛날 밝은 철왕(哲王)을 표준삼아 수신하여 치국과 평천하하는 것을 임무로 삼으라는 것이며, 임금의 도량을 넓히라는 것은, 마음을 허(虛)하게 하고 기운을 화하게 하여 모든 말을 용납하고 받아들여 뭇사람의 착한 것이 모두 나오게 하여 하나로 협력하게 하는 것이며, 임금의 마음을 평(平)하게 한다는 것은 마음을 물과 같이 하여 허명(虛明)하게 물건을 비추어 편당 없이 중도로 모아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하고, 임금의 잘못된 것을 지적하는 말이 매우 간절하니 사람들이 중흥(中興 반정) 이래 으뜸가는 소라 일렀다.
○ 좌부빈객을 겸하였을 때, 정승이었던 공의 장인 선원(仙源)이 우빈객이었고, 정승이었던 청음(淸陰)이 우부빈객이었다. 공은, “빈객의 정원이 네 사람인데, 한 집안에서 세 자리를 차지하였다.” 하여 사퇴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신경진(申景禛)
신경진의 자는 군수(君受)며,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을해년에 났으며 신립(申砬)의 아들이다. 경자년에 무과에 올라 효성령별장(曉星嶺別將)이 되었다가 부름을 받아 공조 참의에 임명되었다. 정사공신에 참여하여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이 되었다. 정축년에 정승을 배수하여 영의정에 이르렀다. 훈련대장으로 15년을 지냈으며, 계미년에 죽으니 나이 69세였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며 묘정에 배향되었다. 《명신록》
○ 나라를 위해 죽은 사람의 아들이라는 자격으로 선전관에 제수되어, 복수하겠다는 소를 올렸다. 평안 병사(平安兵使) 이경준(李慶濬)을 따라, 진중으로 출입하다가 탄환이 전투복에 맞았으나 몸을 뚫지는 않았다. 군공(軍功)으로 첨정(僉正)이 되었다. 오성(鰲城 이항복)이 여러 번 추천하여 경원(慶源)과 벽동(碧潼) 두 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물러가서 영서(嶺西)의 산골짜기에 거하였는데, 마침내 승평(昇平)부원군 김류와 함께 반정의 큰 계책을 정하였다. 백헌집 비문
○ 임금이 언젠가 구궁(舊宮)에 행차하여, 친척들을 불러들여 만난 적이 있었는데, 나아가 뵈는 이가 모두 앞을 다투었다. 그러나 공이 혼자 즐거워하지 않고 말하기를, “신하가 어찌 감히 사사롭게 뵐 수 있는가.” 하였다. 정경세(鄭經世)가 듣고 감탄하며 말하기를, “식견이 다른 사람은 따라가지 못할 바이다.” 하였다. 《명신록》
○ 남한산성에서 동성(東城)을 지키는데 홀연히 대포알이 날아와 단(壇) 위를 쳐서 대장기(大將旗)가 부러지니 사람들이 모두 놀랐는데, 공은 태연히 진정시켰다. 《명신록》
○ 승평군(昇平君)과 반정을 의논하면서 먼저 추대할 분을 정하려 할 때에 공이 인조대왕을 두고 말하기를, “신성문무(神聖文武)가 실로 천명을 받을 만한 이다.” 하였다.
○ 장옥성(張玉城)의 막하에 있을 때, 하루는 공이 저보(邸報)를 보고 분함을 못 이겨 말하기를, “옛날에 임금의 곁에 있는 악한 자들을 제거하였다고 하더니,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말한 것이다.” 하였다. 장공이 그 뜻을 알고 말하기를, “그대가 어찌 말이 경솔한가.” 하였다.
○ 안주(安州) 목사로 있을 때,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다. 시묘살이를 하면서 3년 동안에 한 번도 집에 오지 않았으며, 아침저녁으로 무덤에서 울고 큰비나 눈이 와도 그만두지 않았다.
○ 남한산성에서 공은 동쪽 성을 지켰는데, 군중이 정돈되어 엄숙하였다. 날마다 출병하여 잘 싸워 적을 죽이고 잡은 것이 많았다. 적과 서로 바라볼 수 있는 곳에 높은 언덕이 있는데, 적이 그곳을 점령하여 성을 내려다보았다. 공이 포수를 선발하여 쏘게 하니, 한 방에 그 장수가 맞아 떨어졌다. 우리 군사가 모두 용기를 내어 마구 쏘아대니 적이 감히 달려들지 못하였다.
○ 계해년 첫 정사에 일을 너무 많이 변경하기에 힘쓰니 공이 아뢰기를, “선왕의 법을 따르고서 잘못된 것은 없다.” 하니, 듣는 사람들이 옳게 여겼다.
○ 임종할 때, 정신과 언어가 평일과 같은데, 한 마디도 집안일을 말하는 것은 없고, 다만 나라 일을 걱정하였다. 낮에 큰 별이 갑자기 떨어졌는데, 이날 대사동(大寺洞) 집에서 죽었다.

심열(沈悅)
심열의 자는 학이(學而)이며,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연원(連源)의 증손인데 호는 남파(南坡)이다. □ 문과에 올랐고, 반정 후에 호조 판서로 맨 처음 뽑히었다. 반정 후에 호조 판서 노릇을 잘한 이로는 공이 첫손에 꼽히었다. 무인년에 정승을 배수하여 영의정이 되었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춘소집지(春沼集誌)》

강석기(姜碩期)
강석기의 자는 복이(復而)이며, 본관은 금천(衿川)이고, 호는 월당(月塘)이다. □년에 문과에 올랐으며 예학(禮學)을 공부하였다. 폐모론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추숭(追崇)하자는 의논을 힘써 배척하였다. 경진년에 우의정을 배수하였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강빈의 아버지였기 때문에 □ 추화(追禍)를 입었다.

심기원(沈器遠)
심기원의 자는 수지(遂之)이며, 본관은 청송(靑松)이고, 달원(達源)의 현손(玄孫)이다. 권필(權鞸)에게서 글을 배웠다. 포의로 정사 1등공신이 되었다. 임오년에 정승을 배수하여 좌의정에 이르렀고, 청원부원군(靑原府院君)이 되었다. 갑신년에 반역을 도모하다가 처형되었다.

김자점(金自點)
김자점의 자는 성지(成之)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김질(金礩)의 후손이요, 유홍의 외손이다. 포의 정사 1등공신이 되고 낙흥부원군(洛興府院君)이 되었다. 계미년에 정승을 배수하여 영의정에 이르렀다가 기축년에 갈리었고, 경인년에 귀양갔으며, 신묘년에 반역을 도모하다가 처형되었다.

이경여(李敬輿) 세종의 6대손이다
이경여의 자는 직부(直夫)이고, 종성(宗姓)이며, 호는 백강(白江)이다. □ 문과에 올랐으며, 계미년에 정승에 임명되어 영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서경우(徐景雨)
서경우의 자는 시백(施伯)이며, 본관은 달성(達城)이요, 서성(徐渻)의 아들이다. □ 문과에 올라 갑신년에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이경석(李景奭) 검열(檢閱)ㆍ전랑(銓郞)ㆍ호당(湖堂)ㆍ문형(文衡)ㆍ문신정시(文臣庭試)
이경석의 자는 상보(尙輔)이며, 정종의 7대손이다. 을미년에 났으며 호는 백헌(白軒)인데, 처음 호는 쌍계(雙溪)라 하였다. 계해년에 문과에 올랐으며 중시(重試)에 수석이 되었다. 을미년에 정승을 배수하여 영의정에 올랐으며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신해년에 죽었는데 나이가 77세였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김상헌(金尙憲)
김상헌의 자는 숙도(叔度)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요, 상용(尙容)의 아우이고, 호는 청음(淸陰)이다. □년에 문과에 올랐으며, □ 바로 좌의정이 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 장약관(掌藥官) 박시량(朴時亮)이 어느 날 조회 때, 길에서 진흙이 묻는다고 대분투(大分套) 큰 가죽신의 속명(俗名)이니, 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겉에 신는 덧신이다. 를 신었으며, 부음했던 역관 장현(張炫)이 집을 짓는데 부연(附椽)을 하였는데, 모두 나라에서 법으로 금한 것이다. 공이 대사헌이 되어 두 사람을 가두어 다스리려 하였는데 시량의 처자가 추탄(楸灘) 오윤겸(吳允謙)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였다. 윤겸이 말하기를, “비록 내 아들이 법을 범하였더라도 김공은 반드시 용서하지 않을 것인데, 어찌 감히 부탁할 생각을 하겠느냐.” 하였다. 마음으로 매우 불쌍히 여겼지만 끝내 한 마디도 도와주지 못하여, 두 사람이 마침내 형벌로 신문을 받았다. 한 공자(公子)가 산정(山亭)을 지으면서 둥근 기둥을 사용하였다가 공이 대사헌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곧 기둥을 깎아서 모나게 하였다. 《공사견문》 ○ 전각(殿閣)에 둥근 기둥을 사용하기 때문에 사사집은 감히 하지 못하는 것이다.
○ 공은 유희분과 이종 형제였다. 희분이 사형을 당하자 공이 복(服)을 입고 가서 곡을 하려고 하니, 한 사람이 말리기를, “지금 가서 곡을 하는 것은 좋지 않을 것 같소.”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유희분이 형을 받은 역모로 인한 것이 아니고 다만 권세를 탐하다가 미혹하여 깨닫지를 못한 데 불과하다. 살아 있을 때에는 비록 그 집에 드나들지 않았으나 죽어서까지 친척간에 의(義)를 끊을 수는 없다. 가서 곡하고 복을 입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공사견문》

남이웅(南以雄)
남이웅의 자는 적만(敵萬)이며, 본관은 의령(宜寧)이고, 지(智)의 후손이며, 호는 시북(市北)이다. □에 문과에 오르고, 진무공신(振武功臣)으로 춘성부원군(春城府院君)이 되었다.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상사에 수릉관(守陵官)이 되었다. 병술년에 정승을 배수하여 좌의정에 이르렀다.
○ 공은 호탕하고, 조경(趙絅)은 청백 검약하였다. 기질과 취미는 같지 않아도 사귀는 정의는 매우 친밀하였다. 어떤 사람이 조경에게 묻기를, “보통 사람이 서로 벗하는 것은 반드시 뜻과 취미가 서로 부합해야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 것인데, 공과 남공은 뜻이 같지 않으면서도 사귐이 깊은 것은 어찌된 것입니까.” 하였다. 조경이 웃으며 말하기를, “나의 천성이 매우 좁기 때문에 남공의 너그러움을 즐기는 것이고, 남공은 너무 화(和)하기 때문에 나의 검약한 것을 취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서로 좋아하는 것이오.” 하였다. 《공사견문》
○ 공의 손자가 동지(同知) 이무림(李茂林)의 집에 장가들었다. 신부가 시부모를 뵈려고 하는데 옷차림이 매우 사치스러웠다. 공이 그 예를 받지 아니하고 옷을 고쳐 입게 하고서야 보았다. 본래 세업(世業)이 풍족하여 부자라고 일컬었지마는, 그 법제를 준수하며 자손들을 엄하게 단속하는 것이 이러하였다. 《공사견문》


이행원(李行遠) 경기 감사ㆍ좌의정

이행원의 자는 사치(士致)이며, 본관은 전의(全義)고, 호는 서화(西華)이다. 제신(濟臣)의 증손이었다. 임진년에 나서 19세에 진사하였으며, 26세에 알성과에 급제하여 옥당 남상(玉堂南床)을 하였다. 정해년에 정승을 배수하였고 무자년에 죽었는데 나이는 57세였다.
○ 갑자년 이괄의 변에 아버지 현령 중기(重基)ㆍ임지(任地)가 적병의 길목에 있었다. 와 함께 종군하여 역적을 토벌하겠다고 청하여 마침내 감사 임서(林㥠)의 부름을 받아 그 막하(幕下)에 따랐다. 원종(元宗) 부묘(祔廟)할 때에 힘써 다투어 상소하였으나 잡히어 국문당하고 멀리 귀양갔다. 우암집(尤菴集) 비문
○ 병자년에 남한산성에 농성하였을 때 우리 군사가 폭동을 일으키려 하였는데 칼을 집고 난동하는 병사를 꾸짖어 물리치니, 시남(市南 유계(兪棨)의 호)이 곁에서 그 일을 보고 매우 탄복하였다. 상세한 것은《병자록》에 있다.
○ 부빈객(副賓客)으로서 심양(瀋陽)으로 세자를 따라갔다. 대사헌으로 강빈의 옥사 상세한 것은 강빈의 옥사 조에 있다. 를 정론(停論)하여, 이조 판서에 선임되었다. 정해년에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 벼슬길에 있은 지 30년 동안에, 전택이나 노비가 하나도 더 늘어난 것이 없었다. 난리 후에 집이 황폐하였는데 어떤 이가 새로 꾸며 짓기를 권하니 공이 말하기를, “국가의 걱정이 아직 안정되지 않았는데 어찌 집을 짓겠느냐.” 하였다. 신익성(申翊聖)이 목재와 기와를 보내 주어서 몇 칸 집을 지었다.
○ 젊었을 때, 일찍이 꿈에 시를 지었는데,

늙어서 장수와 정승에서 물러나니 / 老來辭將相
돌아가 임천에 누워 있을지로다 / 歸去臥林泉
고목으로 집을 삼고 / 古樹仍爲屋
푸른 이끼로 담요를 삼으리로다 / 靑苔鋪作氈

하였다. 정승을 배수하게 되자 항상 스스로 걱정하고 두려워하였다. 무자년 봄에 사은정사(謝恩正使)로 뽑히어 병을 참고 길을 떠났는데 의주(義州)까지 가서 죽었다.
○ 계해년 반정 때, 이날 가주서로서 숙직하였는데 밤에 고함 소리가 크게 일어나고 궁궐 안이 다 비었었다. 공은 즉시 무기 창고로 들어가서 활을 잡고 승정원 지붕에 뛰어올랐다. 불빛 가운데서 김욱ㆍ이귀ㆍ최명길ㆍ심명세 등을 본 후에야 역성(易姓 왕족의 성이 바뀌는 것)의 변이 아닌 것을 알았다. 지붕에서 명세의 자를 부르며 말하기를, “그대들이 이 어떤 거사인가.” 하니, 심명세가 사람을 시켜 부축해 내려오도록 하였다. 즉시 인조 앞에 나가 뵈니, 이때 장유가 입으로 교서의 초고를 부르면서 공으로 하여금 쓰게 하였는데 글씨를 나는 듯이 썼으나 한 자의 착오도 없었다. 여러 사람이 탄복하여 말하기를, “비주서(飛註書)로구나.” 하였다.
○ 일본 사신 현방(玄方)이 왔을 때, 공이 선위사(宣慰使)가 되었다. 왜인들이 그 풍채를 바라보고 공경하여 탄복하기를 마지않았다. 그 뒤 10여 년이 되어 현방이 시를 지어 보내고 문방구를 선사하면서 안부를 물었다. 심양에 있을 때 마침 청 나라에서 우리나라에 대하여 허물을 잡아 김상헌 등을 잡아가서 갖가지로 공갈하고 힐책하였다. 공이 말을 잘하여 좋은 말로 변명하니 청 나라 사람들이 감탄하며 말하기를, “이 빈객(李賓客)은 순선(純善)한 사람이다.” 하였다.
○ 공의 할아버지는 효정공(孝靖公) 정간(貞幹)이었는데, 백살된 어머니를 잘 봉양하므로 세종이 그 어머니에게 궤장과 궁중 음악을 하사하여 영화롭게 하였다.《경수집(慶數集)》이 있다. 효정공의 아들인 부윤(府尹) 사관(士寬)은 일곱 아들을 낳았는데 여섯 사람이 여덟 번 과거에 올랐으며, 두 사람은 세 가지 훈공으로 기록되었다.


정태화(鄭太和)

정태화의 자는 □
○ 정축년 난리 뒤에 임금이 경연에서 이르기를, “지금 감사(監司)들의 임무가 무거우니 모름지기 여기에 합당한 사람을 미리 알아서 준비하라.”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정태화가 비록 나이는 젊지만 큰 재목이니 먼저 뽑아 쓰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충청감사 □, 임금이 또 경연에서 누가 충청 감사를 할 수 있는 사람인가를 물었는데 명길이 아뢰기를, “대신은 사람 추천하는 것으로써 임금을 섬기는 것인데, 신이 천거한 사람이 있으니 감히 더 기다릴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이때 공은 보덕으로서 당연히 동궁을 따라 심양에 가야 될 것인데, 명길이 청하여 머물러 있게 하더니, 마침내 당하관에서 발탁되어 충청 감사에 임명되었고, 그 이듬해에 또 평안 감사에 올랐다. 《곤륜집(昆崙集)》

 

[주D-001]감지와(坎止窩) : 물은 흐르게 되면 흘러가고 구덩이를 만나면 그치는 것인데[流行坎止], 이것은 군자가 출세할 수 있으면 나가고 난세(亂世)를 만나면 들어가 숨는다는 뜻이다.
[주D-002]세 가지 경계 : 공자의 말에 군자가 세 가지의 경계할 것이 있는데, 젊을 때에 색(色)을 경계하고, 장년(壯年)에는 싸움을 경계하고, 늙어서는 얻으려는 욕심[得]을 경계하여야 한다는 말이 있다.
[주D-003]황화집(皇華集) : 《시경(詩經)》에 황화편(皇華篇)이 있는데, 이것은 사신(使臣)가는 일을 노래한 것이고, 황화집은 사신이 왕래하면서 지은 시문집(詩文集)이다.
[주D-004]와유암(臥遊庵) : 남북조 때 종병(宗炳)이 산수를 좋아하며 늙어서 방안에다 산수의 그림을 붙여 놓고 그것을 보며 와유(臥遊)라 하였다.

月軒集卷之二
 詩○七言絶句
杜鵑花 a_016_194a


坐看軒外杜鵑花。始覺春光到我家。莫使狂風容易落。病人偏惜送年華


山頭見杜鵑花 ( 山頭見杜鵑花

 

處處群芳吐欲華、隔年相見意如何。明朝[缺]日南州去、却恨今年負此花。豔豔山頭花滿枝、此花那識遠相離。歸期定在鶯聲日、爲報東風莫盡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