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 휘 덕지 등/연촌공 휘 덕지 신도비

烟村崔先生神道碑銘 幷序

아베베1 2011. 4. 14. 22:42

 

 

전주최씨 문성공파 휘 아 5세손 연촌공 휘 덕지 19대조 연촌공 신도비

 

 

 

艮齋先生文集後編續卷之七

 神道碑銘
烟村崔先生神道碑銘 幷序 


本朝作成之化。莫盛於世文兩廟之際。禮樂文物。彬彬有三代風。於是才俊盈庭。贊襄鴻猷。咸以功名自奮。蓋亦千載一時。時則有烟邨崔先生。歷敭內外。可以有爲。而決然投紱。嘉遯自樂。及再被恩召。亦纔出旋歸。未幾。國家多難。淸流之禍甚慘。世之篤論者以爲。悅卿今之伯夷。六臣今之方練。烟邨,霧巷。比六臣較高者。是也。先生諱德之。字可久。自號烟邨迂叟。系出全州。高麗門下侍中諡文成諱阿玄孫。曾祖諱龍鳳。中郞將。祖諱乙仁。司醞直長同正。考諱霮。336_313d入本朝直提學。妣全州朴氏。經德齋諱從壽女也。先生自幼。承襲家庭。德器夙成。永樂乙酉登第。由承文院。選入翰苑。歷玉堂臺閣。累典州郡。皆有成績。嘗爲淸道郡守。上疏論貢法損實便否。此可見爲政施措之一端。後以南原府使。退居靈巖永保邨。扁書樓以存養。若將終身。文廟元年辛未。特召以藝文館直提學。兼春秋館記注官。明年冬。上書乞退。上謂近臣曰。曩於召對。見其爲人純實。年未甚老。予欲留之。咸曰。歸志已定。必不留。不如從之以遂其高。先生卽日治裝。諸名卿賢大夫。咸與載酒送之江之滸。欽336_314a慕而歌頌者。凡四十餘篇。享年七十二而卒。葬于全州所陽面周德山酉坐原。崇禎三年庚午。湖南士林建祠於靈巖月山下。肅廟辛酉。賜額鹿洞。又享于全州西山院南原舟巖祠。朝廷錄用其子孫。事載國乘。配平壤趙氏。中郞將安鼎女。別葬于羅州元井洞艮坐原。有三男二女。男長淍。護軍。次潎。司勇。季淑。生員。女適忠贊金總。通禮愼後庚。護軍生四男。曰岱,嵆,崐,崗。司勇生四男。曰大成,智成,集成,忠成。生員無子。以司勇子智成。爲後。先生遺稿。散逸於兵燹。惟遺事一卷。傳於世。而諸賢論述亦附焉。朴忠文彭336_314b年曰。先生在朝。其聲名爵位。當不止此。而今也退休田里。已不與世相關。而萬口咨嗟。稱頌不已。其所以感人心而負物望。有不在彼而在此也。李文質芮曰。居官守道。一以古人自處。仕已無喜慍色。又曰。富貴榮華。皆無足以動其心。高風餘韻。足以使貪夫廉而懦夫立。又曰。一出一處。大有關於名敎。李文康石亨曰。無求於世兮。樂夫天命。逍遙一室之內兮。尙友千古之賢聖。李文靖植曰。先生純實之行著於聖諭。諄德也。中歲納祿。遯跡山海。高節也。存心養性。揭扁自警。正學也。有一於是。尙可師範百世。况兼之乎。又336_314c曰。急流勇退。道與神謀。自不蹈於大難。朴文純世釆曰。至德範世。而民或不知其所以爲賢。至於尤菴先生。則又推先生上言中損實踏驗者。而贊之曰。此實朱夫子所嘗眷眷者。而所謂業去稅存四字。則夫子當時極其痛歎。必欲變通者也。豈謂五百年之後。復見於先生文字閒耶。農巖先生嘗製書院請額疏。亦曰。不以一節自喜。而志於大道。不以閒散自適。而力於實踐。又引朱子所謂取舍之分明。然後存養之功密。存養之功密。則其取舍之分益明者。而質之曰。若某者。其庶乎此矣。合而論其世。考其實。則先生天稟336_314d甚高。德學甚粹。蓋其稟也高。故灑落如光風。其德也粹。故渾實如良玉。建乎居閒旣久。充養益篤。行之家。施之邦。沛然無所迂滯。而明知達識。超乎事物幾微之表。深造厚積。進乎精密正大之域。以至淸風高節早然爲百世師。然迹其平生。謙虛沈晦。不求異於人。人亦無能盡知者。嗚呼。此先生之所以爲先生也已矣。後孫圭庠,圭燮。謁余以隧道之文。累辭不獲。遂爲之銘曰。
殷師敎逖。羅麗治慌。天啓我朝。人文宣朗。英陵繼作。浸淫三古。百工煕載。萬物咸覩。允矣先生。誕膺336_315a盛運。學具體用。德孚遠近。翺翔館閣。歷選州牧。展布所蘊。爛然聲績。顯陵嗣位。再膺召命。宸眷彌重。同朝相慶。一朝卷懷。于彼巖堧。我讀我書。我食我田。天下煕煕。爵祿是榮。天下穰穰。名利是嬰。孰如先生。惟道是視。一出一處。實關世紀。易曰知幾。詩云明哲。愷悌君子。不俟終日。存心養性。敬以事夫。我庸勒石。昭示後賢。


세조 13년 정해(1467,성화 3)
 12월9일 (신축)
건주위를 정벌한 군공을 논하다

건주위(建州衛)를 정벌(征伐)한 군공(軍功)을 논(論)하여 강순(康純)·윤필상(尹弼商)을 1등(一等)으로 삼아서 각각 작(爵) 2자급(資級)을 뛰어올리고, 노비(奴婢) 아울러 10구(口)를 내려 주었고, 어유소(魚有沼)·남이(南怡)·노사신(盧思愼)을 2등(二等)으로 삼아서 1자급(資級)을 뛰어올리고, 노비(奴婢) 아울러 8구(口)를 내려 주었고, 임득정(林得楨)·신숙주(申叔舟)·구치관(具致寬)·홍윤성(洪允成)·김국광(金國光)·우공(禹貢)·이숙기(李淑琦)·운수 도정(雲水都正) 이효성(李孝誠)·하숙부(河叔溥)·권맹희(權孟禧)·이극균(李克均)·김용달(金用達)·경유공(慶由恭)을 3등(三等)으로 삼아서, 노비(奴婢) 아울러 6구(口)를 내려 주었고, 한계미(韓繼美)·이극배(李克培)·오백창(吳伯昌)·배맹달(裵孟達)·이종생(李終生)·김유완(金有完)·이경(李經)을 4등(四等)으로 삼아서, 노비(奴婢) 아울러 4구(口)를 내려 주었고, 모두 자품(資品)을 올렸다. 조신손(趙信孫)·이종산(李鍾山)·최명손(崔命孫)·이효간(李孝幹)·문수덕(文修德)·김순신(金舜臣)·이평(李枰)·이의형(李義亨)·허혼(許混)·김춘경(金春卿)·박숙무(朴叔楙)는 조병(調兵)한 일로써 1자급(資級)을 뛰어올렸고, 이수의(李守義)·강거인(姜居仁)·전보(田寶)·민처령(閔處寧)·김혼도(金混都)·경손(慶孫)·김양중(金養中)·정효지(鄭孝智)·이광세(李匡世)·신복륜(申卜倫)·유영수(柳永脩)·강복(康輻)·한상직(韓尙直)·김사도(金思道)·지효근(智孝根)·영한(甯漢)은 산료(散料)한 일로써, 한치의(韓致義)·민질(閔質)·김후(金厚)·송인(宋麟)·홍계용(洪繼庸)·김칭(金偁)·박종수(朴從秀)·김민(金民)·우전(禹奠)·박춘산(朴春山)·이탁(李擢)·권평(權枰)은 유방(留防)한 일로써, 어세겸(魚世謙)·김견수(金堅壽)·김백겸(金伯謙)·황사윤(黃斯允)·조간(曹幹)은 봉사(奉使)한 일로써 모두 1자급(資級)을 올려 주었다.
【원전】 8 집 150 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외교-야(野)
성씨와 본관
전주박씨(全州朴氏)

[요약정보]

본관명 전주(全州)
성씨명 박씨(朴氏)
본관소재지 전라북도(全羅北道) 전주시(全州市)
본관이칭
시조명 박언화(朴彦華)

[상세내용]

본관 연혁

전주(全州)는 전라북도 중앙에 위치한 지명으로 고대 마한(馬韓)의 원산성(圓山成)에서 유래하며, 백제시대에 완산(完山) 또는 비사벌(比斯伐)·비자화(比自火) 등으로 불렸다가, 555년(위덕왕 2)에 완산주(完山州)로 하였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완(完)을 의역(意譯)하여 전주(全州)로 고쳤고, 900년(효공왕 4)에 견훤(甄萱)이 무주(武州: 光州)로부터 이곳으로 후백제의 도읍을 옮겨 백제 부흥의 노력을 하였다. 936년(고려 태조 19)에 후백제가 망하자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가 설치되었다가 940년에 다시 전주로 회복되었다. 983년(성종 2)에 12목 가운데의 하나인 전주목이 설치되었으며, 993년에 승화(承化)로 개칭하고 절도안무사(節度安撫使)를 두었다. 995년에는 강남도(江南道) 관하의 전주순의군절도사(全州順義軍節度使)가 되었다가 1018년(현종 9)에 다시 안남대도호부로 승격되고, 1022년에 전주목으로 개칭되어 1곳의 속군과 11곳의 속현을 포함하는 큰 고을이 되었다. 1310년(충선왕 2)에 전주로 강등되고, 1355년(공민왕 4)에는 부곡으로 강등되었다가 이듬해에 완산부(完山府)로 복구되었다. 1392년(태조 1)에 전주이씨의 본향지라 하여 완산부유수(完山府留守)로 승격되었으며, 1403년(태종 3)에 전주부(全州府)로 개칭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전주부 전주군이 되었고, 1896년 전라북도 전주군으로 개편된 이래 1935년 전주면이 부로 승격하여 독립하고 1949년 전주시로 개칭되었다.

성씨의 역사

전주박씨(全州朴氏) 시조 박언화(朴彦華)는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여섯째 아들로 완산대군(完山大君: 완산은 전주의 옛이름)에 봉해지게 되어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받들고 관향을 전주(全州)로 삼아 세계를 계승하였다.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전주박씨는 765가구 총 2,440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참고문헌]

《韓國人의 姓譜》(삼안문화사, 1986)   《姓氏의 고향》(중앙일보사, 2002)
뿌리를 찾아서(http://www.rootsinfo.co.kr)  傳統族譜文化社(http://www.genealogy.co.kr)
디지털한국학(http://koreandb.kdaq.empas.com/)

陽村先生文集卷之二十
 序類
贈朴淸道廬墓詩序 a_007_207a


校書郞崔直之以其外大父朴君臨絶遺子詩一絶示予曰。吾外祖早入大學。補經德齋。學旣通。應擧不第。退而不求仕。家于完山。嘉遯自樂。不惑於佛神妖007_207b誕之說。篤信斯道之正。年至八十。康強無恙。有男曰晉。中進士。仕內侍。出宰淸道。女則吾母也。吾父與吾昆弟聯擢科第。躋于仕版。以榮于家。實惟我祖翁訓誨之力是賴耳。淸道舅亦且六旬。悶親之老。棄官歸侍。修滫瀡奉湯藥。朝夕惟謹。及有疾將殆。賦詩以示。其辭曰。八十年當卧蟻床。六旬孝子藥先甞。死生存命終難避。近汝慈墳立壽堂。明日遂終。淸道廬墓三年。都觀察使成公,完山府伯安公嘉其孝行。旌表門閭。爲鄕黨榮已極矣。舅民乃欲分韵求諸縉紳之作。以耀先君潛德於無窮。使人走千里抵京師。以囑直007_207c之。直之亦不勝凱風寒泉之感。歷謁縉紳請之矣。是不可無序。吾子旣辱知吾舅。又嘗與吾父遊。而吾昆弟亦甞從而問學。雖未甞面吾祖而耳其言。然子之知吾家有素矣。若得吾子言冠篇首。以誇示于今而不泯于後。豈惟吾舅與吾父子幸也。吾祖亦且感激於地下矣。予義不辭。與之言曰。古者有鄕生抱道而不仕。生而能以其德善一鄕。沒而可祀於其鄕者。若予之外大父其人也。吾於平日雖未獲升堂而致拜。以接其緖論之高。今觀其臨絶之詩。則篤父子之情。達死生之理。從容得正而斃。殆與曾子啓手知免之007_207d之訓同一氣象。平日之所養可知也已。淸道又能養志不違。葬祭以禮。旌其閭而顯其家。稱於鄕而播於國。子之父子昆弟。振振其仁。曄曄其光。躡文科而踵膴仕。是盖乃祖德積而不施。慶發於無窮。孝友之美。勳烈之成。當世世相承而益振矣。奚待夫予言而後不泯哉。建文元年己卯十二月初吉。
陽村先生文集卷之二十

陽村先生文集卷之二十
 序類
贈朴淸道廬墓詩序 a_007_207a


校書郞崔直之以其外大父朴君臨絶遺子詩一絶示予曰。吾外祖早入大學。補經德齋。學旣通。應擧不第。退而不求仕。家于完山。嘉遯自樂。不惑於佛神妖007_207b誕之說。篤信斯道之正。年至八十。康強無恙。有男曰晉。中進士。仕內侍。出宰淸道。女則吾母也。吾父與吾昆弟聯擢科第。躋于仕版。以榮于家。實惟我祖翁訓誨之力是賴耳。淸道舅亦且六旬。悶親之老。棄官歸侍。修滫瀡奉湯藥。朝夕惟謹。及有疾將殆。賦詩以示。其辭曰。八十年當卧蟻床。六旬孝子藥先甞。死生存命終難避。近汝慈墳立壽堂。明日遂終。淸道廬墓三年。都觀察使成公,完山府伯安公嘉其孝行。旌表門閭。爲鄕黨榮已極矣。舅民乃欲分韵求諸縉紳之作。以耀先君潛德於無窮。使人走千里抵京師。以囑直007_207c之。直之亦不勝凱風寒泉之感。歷謁縉紳請之矣。是不可無序。吾子旣辱知吾舅。又嘗與吾父遊。而吾昆弟亦甞從而問學。雖未甞面吾祖而耳其言。然子之知吾家有素矣。若得吾子言冠篇首。以誇示于今而不泯于後。豈惟吾舅與吾父子幸也。吾祖亦且感激於地下矣。予義不辭。與之言曰。古者有鄕生抱道而不仕。生而能以其德善一鄕。沒而可祀於其鄕者。若予之外大父其人也。吾於平日雖未獲升堂而致拜。以接其緖論之高。今觀其臨絶之詩。則篤父子之情。達死生之理。從容得正而斃。殆與曾子啓手知免之007_207d之訓同一氣象。平日之所養可知也已。淸道又能養志不違。葬祭以禮。旌其閭而顯其家。稱於鄕而播於國。子之父子昆弟。振振其仁。曄曄其光。躡文科而踵膴仕。是盖乃祖德積而不施。慶發於無窮。孝友之美。勳烈之成。當世世相承而益振矣。奚待夫予言而後不泯哉。建文元年己卯十二月初吉。
陽村先生文集卷之二十
 양촌선생문집 제20권
 서류(序類)
여묘(廬墓) 사는 박 청도(朴淸道)에게 주는 시의 서

교서랑(校書郞) 최직지(崔直之)가 그의 외할아버지 박군(朴君)이 임종할 때 그의 아들에게 유언한 시(詩) 한 절구를 나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우리 외할아버지가 일찍이 태학(太學)의 경덕재(經德齋)에 들어가 학문을 통하였으되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하지 못하매, 물러나 벼슬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완산(完山)에 살아 스스로 은둔을 즐기면서, 불신(佛神)의 요사스럽고 허황한 말에 현혹되지 않고 사도(斯道 유교(儒敎))의 정당함을 독신하였는데, 나이 80에 이르도록 건강하여 병이 없었습니다. 아들 진(晉)은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내시(內侍)로 벼슬하다가 청도(淸道) 수령으로 나아갔으며, 딸은 곧 우리 어머니입니다. 우리 아버지와 우리 형제가 모두 과거에 올라 벼슬하여 문호를 빛낸 것은 실로 우리 외할아버지의 가르침을 힘입은 것입니다. 청도 외삼촌 또한 나이 60에 어버이의 늙음을 민망히 여겨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봉양하는데, 몸소 용변을 받아 내고 탕약(湯藥)을 받들며 아침저녁으로 삼갔습니다. 병들어 돌아가시게 되매 시(詩)를 지어 보였는데 그 시에,

나이 팔십이라 죽어야 마땅한데 / 八十年當臥蟻床
육십난 효자 약을 맛보누나 / 六旬孝子藥先嘗
사생은 천명이라 피하기 어렵나니 / 死生存命終難避
너의 어미 무덤 곁에 나를 묻어 다오 / 近汝慈墳立壽堂
하고, 이튿날 드디어 돌아가셨는데, 청도에서 3년 동안 시묘(侍墓)를 살았습니다. 그리하여 도관찰사(都觀察使) 성공(成公)과 완산부백(完山府伯) 안공(安公)이 그 효행을 가상히 여겨 문려(門閭)에 정표하니, 향당(鄕黨)의 영광이 이미 극진하였습니다. 외삼촌께서는 운(韻)을 돌려 여러 진신(縉紳)들의 글을 구하여, 돌아가신 아버지의 숨은 덕을 영원히 빛내려고 천리 길에 사람을 보내 서울에 이르러 직지(直之)에게 부탁하는지라, 직지 또한 개풍 한천(凱風寒泉)의 감회를 참지 못하여 진신들을 역방(歷訪)하며 청하였는데, 여기에 서문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대는 이미 우리 외삼촌을 알고 또한 일찍이 우리 아버지와 더불어 교유하였으므로, 우리 형제도 일찍이 나아가 글을 배웠습니다. 비록 우리 외할아버지를 뵙지 못하고 말씀도 듣지 못하였지만, 그대는 내 집을 본래부터 아는 처지라, 만약 그대의 글을 얻어 책머리에 붙여서 오늘날에 과시(誇示)하고 후세에 없어지지 않게 한다면, 어찌 우리 외삼촌과 우리 부자만의 다행이겠읍니까! 우리 외할아버지 역시 지하에서 감격할 것입니다.”
하므로, 나는 의리로 보아 사양할 수 없어 다음과 같이 쓴다.
“옛날에 시골 선비로서 도학을 갖추고 벼슬하지 않으며, 살아서는 능히 그 덕으로 한 고장을 잘 교화시키고 죽어서는 그 고장의 향사(享祀)를 받는 이가 있었으니, 지금 그대의 외할아버지 같은 이가 바로 그런 분이다. 내가 평일에 비록 그 문하에 나아가 뵙고 그 서론(緖論)의 고아(高雅)함을 접하지는 못하였으나, 지금 그 임종할 때의 시를 보니, 부자의 정의에 독실하고 사생의 이치에 밝아서 조용히 올바르게 죽었으니, 자못 증자(曾子)의 ‘내 손을 열어 보아라. 내가 이제 훼상(毁傷)을 면한 줄 알았노라.’고 한 훈계와 그 기상이 같은지라. 평일에 수양한 바를 알 수 있다. 청도가 또한 뜻을 받들어 어기지 않았고 장제(葬祭)를 예로 받들어, 문려를 정표 받고 가문을 빛내 고장이 칭송하고 나라에 전파하였다. 그대의 부자 형제가 진진(振振)한 인(仁)과 빛나는 영광으로 문과(文科)에 올라 좋은 벼슬을 하였으니, 이는 그 할아버지가 덕을 쌓되 자긍하지 않았으므로, 경사가 무궁하게 발하는 것이다. 효우(孝友)의 아름다움과 훈렬(勳烈)의 이룸이 대대로 계승하여 더욱 떨치리니, 어찌 내 말을 기다린 뒤에 민멸하지 않으랴.”
건문(建文 명 혜제(明惠帝)의 연호) 원년 기묘(1399, 정종1) 12월 1일

[주D-001]경덕재(經德齋) : 고려 예종(睿宗) 4년(1109)에 국학(國學)에 베푼 7재(齋) 중의 하나로 모시(毛詩)를 전공하던 곳이다.
[주D-002]내시(內侍) : 고려 때 숙위(宿衛) 및 근시(近侍)의 임무를 맡아 보던 관원. 재예와 용모가 뛰어난 세족의 자제 또는 시문에 능한 문신 출신으로 임명하였다.
[주D-003]개풍 한천(凱風寒泉) : 개풍은 《시경》 패풍(邶風) 중의 편명. 한천은 개풍 중 ‘원유한천(爰有寒泉)’의 구절에서 인용된 것인데, 이는 자식들이 어버이를 잘못 섬기는 것을 자책한 시다.
[주D-004]내 손을……알았노라 : 증삼(曾參)이 병들어 제자들을 훈계한 말로, 몸을 온전히 보전하여 죽는 것도 효도의 하나인데, 이를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論語 泰伯》

 

 

騎牛先生文集卷之一
 
次朴淸道 晉○完山人。號竹亭。廬墓韻 二首 a_007_358d


 

有德必有壽。吾觀聖賢句。強康且樂易。固自幽潛富。尙志更無違。神明能勿佑。蕭然乘化歸。終始孰當究。

承家淸道公。偶得我來覯。一展平生言。蔚乎有傳授。又出搢紳詩。珠玉照衣袖。促膝讀琅然。果得使願副。余何贊一辭。寫字恐遷就。 淸道之大人病革。以絶句詩遺其子而歿。其外孫校書郞崔直之求和於當時諸賢。


錦谷先生文集卷之十七
 [墓表]
校理朴公墓表 a_303_450b


龍城府南無愁洞午坐之原。卽故校理朴公諱文燦之藏也。朴氏肇於新羅王。而十五世祖諱彦華。封全州大君。而子孫仍爲姓貫。伊後昭穆未詳。不能强推。麗季有諱志讓。文科典禮參議。生諱從壽。廉潔慷慨。不求仕進。隱居完山。不惑佛神。篤信正學。入太學。補經德齋。生諱晉號竹亭。自在孩提。誠孝出天。鄕黨稱303_450c之以今世曾子。年至强仕。經德公勉其赴擧。中南省試。歷官靈巖,淸道。俱有聲績。後聞親癠。卽日棄歸。有水斷成陸。得以利涉。花開雪中。味供背節之異。旌其閭而載於三綱錄。公之甥姪校書崔直之。卽烟村之兄。爲闡揚舅氏至行。遍謁陽村以下三十二賢之詩與文。遂成一帖。屢經兵燹。而手寫翰墨。宛然尙傳。大是奇事也。竹亭長男諱有誠。以孝行卓異。除廣興奉事。孫諱承龍。弘文博士。卽高,曾,祖,禰也。妣全州李氏。昌賢之女也。公字而顯號湖亭。以世宗戊申。生於全州四稧里。世祖戊寅。司馬。庚辰登第。歷官弘文303_450d校理,羅州牧使。移寓南原杏亭村。卒於成宗甲寅。享年六十七。配慶州金氏。直提學綽之女。葬在公墓下午坐。子桂賢。子三重。俱擧進士。子霖。以行誼。屢入剡薦。子堯天。子大虎。才兼文武。當壬辰之亂。以老母在堂。不能倡義。而與趙慶男,柳仁沃等。間有討賊斬獲之功。以下多不盡錄。公之世遠矣。兵火之餘。文獻蕩失。無以詳悉。其十二代孫暘與曼等。懼其墓道之無徵。持來家帖而謁余文。感其追遠之誠。姑記如此云。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3권
 전라도(全羅道)
전주부(全州府)


동으로 진안현(鎭安縣) 경계까지 47리, 서쪽으로 임피현(臨陂縣) 경계까지 74리, 금구현(金溝縣) 경계까지 19리, 남으로 금구현(金溝縣) 경계까지 38리, 임실현(任實縣) 경계까지 42리, 북으로 익산군(益山郡) 경계까지 37리, 여산군(礪山郡) 경계까지 61리, 고산현(高山縣) 경계까지 40리, 서울로부터는 5백 16리가 된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百濟)의 완산(完山)이며 비사벌(比斯伐), 또는 비자화(比自火)라고도 한다. 신라 진흥왕(眞興王) 16년에 완산주(完山州)를 두었다가 동왕 26년에 주를 폐지하고, 신문왕(神文王) 때 완산주(完山州)를 다시 설치하였다. 경덕왕(景德王) 15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어 9주를 완비하였다. 효공왕(孝恭王) 때 견휜(甄萱)이 여기에 도읍을 세우고 후백제(後百濟)라 하였다. 고려 태조 19년에 신검(神劍)을 토벌하여 평정하고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라 하였다가 23년에 다시 전주(全州)라 하였다. 성종(成宗) 12년에 승화절도안무사(承化節度安撫使)라 하였고, 14년에 12주에 절도사를 두고 순의군(順義軍)이라 하여 강남도(江南道)에 예속시켰다. 현종(顯宗) 9년에 안남대도호부(安南大都護府)로 승격하였다가 뒤에 다시 전주목(全州牧)으로 고쳤다. 공민왕(恭愍王) 4년에 원(元) 나라 사신 야사불화(埜思不花)를 가둔 일 때문에 부곡(部曲)으로 강등하였다가 5년에 다시 완산부(完山府)라 하였다. 본조(本朝) 태조 원년에 임금의 고향이므로 완산유수부(完山留守府)로 승격시켰고, 태종(太宗) 3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세조(世祖) 때에 진(鎭)을 두었다.
【속현】 옥야현(沃野縣) 전주의 서북 70리에 위치한다. 본래 백제의 소력지현(所力只縣)이었는데 신라 때 옥야현으로 고치어 금마군(金馬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초에 전주에 예속시켰다. 명종(明宗) 6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뒤에 다시 내속시켰다. 군창(軍倉)이 있다.
【진관】 군(郡)이 6이다. 익산(益山)ㆍ김제(金堤)ㆍ고부(古阜)ㆍ금산(錦山)ㆍ진산(珍山)ㆍ여산(礪山) , 현(縣)이 11이다. 정읍(井邑)ㆍ 흥덕(興德)ㆍ부안(扶安)ㆍ만경(萬頃)ㆍ옥구(沃溝)ㆍ임피(臨陂)ㆍ금구(金溝)ㆍ용안(龍安)ㆍ함열(咸悅)ㆍ고산(高山)ㆍ태인(泰仁).
【관원】 부윤(府尹)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각 1인.
【군명】 견성(甄城)ㆍ완산(完山)ㆍ비사벌(比斯伐)ㆍ안남(安南)ㆍ승화(承化)ㆍ순의군(順義軍).
【성씨】 본부(本府) 이(李)ㆍ최(崔)ㆍ유(柳)ㆍ박(朴)ㆍ전(全)ㆍ경(庚)ㆍ한(韓)ㆍ백(白), 방(房) 내성(來姓)이다. 양(梁) 주계(朱溪). 장(張) 결성(結城). 김(金) 모평(牟平). 우주(紆州) 박(朴)ㆍ이(李)ㆍ정(鄭)ㆍ황(黃)ㆍ최(崔)ㆍ염(廉)ㆍ배(裵)ㆍ유(柳)ㆍ홍(洪). 양량(陽良) 백(白)ㆍ나(羅)ㆍ강(康)ㆍ유(劉). 이성(利城) 이(李)ㆍ백(白)ㆍ정(鄭)ㆍ손(孫)ㆍ진(陳)ㆍ최(崔). 두모촌(豆毛村) 책(冊)ㆍ최(崔)ㆍ이(李). 이성(伊城) 조(趙)ㆍ배(裵)ㆍ장(張)ㆍ구(仇)ㆍ염(廉)ㆍ고(高)ㆍ온(溫). 옥야(沃野) 임(林)ㆍ장(張)ㆍ염(廉)ㆍ구(仇)ㆍ양(梁). 경명(景明) 김(金)ㆍ임(林)ㆍ배(裵)ㆍ인(印).

      【효자】 본조 박진(朴晉) 아버지가 병이 들자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 시중하였는데, 언제나 옆을 떠나지 아니하였고 밤에도 허리띠를 풀지 아니하였으며, 약을 달이면 꼭 먼저 맛을 보았다. 아버지는 병이 위태하자 시를 지어 박진(朴晉)에게 주어 말하기를, “나이 80에 병상[蟻床]에 누우니, 육순된 아들이 약을 먼저 맛보네. 사생(死生)은 운명이기에 끝내 피할 수 없으니, 네 어머니 묘 가까이에 수당(壽堂 생존시에 지어 두는 묘)을 세워 두라.” 하였다. 아버지가 작고하자 장례와 제사를 예로써 하고, 묘막에서 3년을 지내니 고을에서 칭송하였다. 태조 7년에 마을에 정문을 세웠으며 벼슬은 지군사(知郡事)를 지냈다. 박유성(朴有誠) 나이 50세 때에 부모가 죽자 6년간 묘막 생활을 했다. 상을 마친 뒤에는 부모의 형상을 그려 벽에 붙이고 아침저녁으로 상식을 그치지 아니했다. 성종(成宗) 6년에 이 일이 임금께 알려져 특별히 광흥창(廣興倉) 봉사(奉事)에 제수되었다. 복윤문(卜閏文) 효행이 있었다.

 

        

  성종 2년 신묘(1471,성화 7)
 6월23일 (갑자)
예조에서 절행한 사람들을 포상하여 풍속을 격려하게 할 것을 청하다

예조(禮曹)에서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의 계본(啓本)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만경(萬頃) 사람 유학(幼學) 김호인(金好仁)은 그 어미가 병이 있거늘, 김호인이 스스로 다리 살을 베어 약(藥)에 타서 올리었더니 어미의 병이 드디어 나았고, 그의 아비 김맹방(金孟倣)도 일찍이 다리 살을 베어 아비의 병을 고쳤다 하니, 부자(父子)가 서로 이어서 효행(孝行)이 있고, 금산(錦山) 사람 양적(梁逷)의 처(妻) 삼덕(三德)은 지아비가 범에게 잡힌 바 되자, 삼덕이 왼손으로는 지아비의 발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짧은 낫을 휘둘러 범을 치고 곡읍(哭泣)하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범이 버리고 가거늘, 마침내 집 동쪽에 장사지내고 3년 동안 상복(喪服)을 입고 시아비를 따라서 살았다 하니, 청컨대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정문 복호(旌門復戶)하도록 하소서.
태인(泰人) 사람 전 주부(主簿) 허중민(許仲民)의 집에, 밤에 불이 나서 연기와 화염이 집에 가득하였는데, 허중민은 불길을 무릅쓰고 어미를 안고서 나왔다 합니다. 남원(南原) 사람 전 직장(直長) 임옥산(林玉山)은 어버이에게 효도하더니, 어미가 죽으매 7일을 먹지 아니하고 애훼(哀毁)하기를 예도에 지났으며, 아비가 또 병으로 40일을 누우니, 임옥산이 시약(侍藥)함에 옷의 띠를 풀지 않고 호흡(呼泣)하며 똥을 맛보고, 분향(焚香)하여 빌면서 몸으로써 대신하기를 구하여 아비의 병이 회유되었다 하며, 아비가 죽게 되니 정성껏 상제(喪祭)를 다하여 향인(鄕人)이 칭송한다 합니다. 전주(全州) 사람 진무부위(進武副尉) 박유성(朴有誠)은 어버이를 섬겨 효도하더니, 부모(父母)가 죽으매 묘(墓) 곁을 떠나지 않고 3년상을 마쳤고 양친(兩親)의 진영(眞影)을 그려, 삭망(朔望)에 치제(致祭)하되 지금까지 거두지 않았다 합니다. 생원(生員) 최신한(崔信漢)은 어릴 때부터 어버이를 섬기더니, 아비가 죽으매 여묘(慮墓) 3년을 살고 슬퍼하기를 한결 같이 하였고, 어미를 지극한 효도로 섬겨 20여 년 동안 몸소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였으며, 어미가 죽으매 또한 여묘 3년을 살았다 합니다. 청컨대 이조(吏曹)·병조(兵曹)로 하여금 존몰(存沒)을 상고하여 재주에 따라 서용(敍用)하게 하소서.창평(昌平) 사람 별시위(別侍衛) 진숭형(陳崇亨)의 처(妻) 박씨(朴氏)는 그의 지아비가 죽으매 묘소를 3년 지키고 조석(朝夕)으로 슬피 울면서 3년상을 마친 뒤에, 침방(寢房)에 반혼(返魂)하여 조석과 삭망에 전(奠)을 행하되 슬퍼하기를 처음과 같이 하였습니다. 익산(益山) 사람 학생(學生) 조민(曹敏)의 처 소사(召史)는 지아비가 죽으매 3년상을 행하고, 머리를 깍아 중이 되어 그 지아비의 형상을 그려 벽에 걸고 조석으로 분향하고 치전(致奠)하되, 애모(哀慕)하는 정성이 늙었어도 쇠하지 않는다 합니다. 청컨대 그 도(道)의 관찰사(觀察使)로 하여 각각 미두(米豆) 아울러 10석(石)을 주게 하고, 또 소거관(所居官)으로 하여금 때마다 치전(致奠)하는 식물(食物)을 주어, 포상(褒賞)하는 법을 보이게 하며, 또 모든 사람의 절행(節行)한 실적(實迹)을 8도(八道)에 널리 효유하여, 풍속을 격려(激勵)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원전】 8 집 586 면
【분류】 *풍속-예속(禮俗) / *윤리-강상(綱常)


[주D-001]정문 복호(旌門復戶) : 열녀(烈女)·의부(義婦) 등을 상줄 때 그 문려에 홍문(紅門)을 세워 주고, 그 집에 조세(租稅)를 면제하여 주던 것을 말함.
 전주박씨

 

충절 편 

경덕재 (經德濟) 박종수(朴從壽)

선조의 휘는 종수 호는 경덕재 또는 죽당이시며 중시조의 제15세손이다. 선조께서는 고려 시대에 태어나시어 일찍히 태학보(太學補)에 가시어 경덕재 (經德齋)에서 학문을 연구 하셨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경덕선생 이라칭하였으며경덕재 (經德濟) 선조께서는 천성이 예의(禮義)바르고 청백하며 불의(不義)에 타협을 할 줄모르고 강개(慷慨)한 분이어서 결코 벼슬길에 나가지않았으며 전주(全州)에 조용히살면서도 유교(儒敎)의 정도를 따를뿐이었고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이 세상에 뛰어나 일가를 이루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朝鮮王祖)가 들어서자 절개를 지켜 전주(全州)에 살면서 오직 유학(儒學)하는 선비로서 유도(儒道)를 독실하게 믿고 지키면서 충의(忠義)로운 마음으로 예전의 고려(高麗) 왕조의 일만을 생각하고 있을 때 조정에서 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번번히 사양하고 당대의 문장가로 이름이 높던 권근(權近)을 비롯한 32현인들과 도의(道義)로서 사귀고 시(詩)로서 교유(交遊)하며 지냈으므로 많은 시(詩)를 남겼으나 후손이 시첩(詩帖)으로 전해 오다 병난(兵難)을 거치면서 글들과 시첩이 소실(消失)되어 버리고 오직 남은 것이라고는 본인의 임종시 아들이 병구완하는 것을 보고 아들 죽정공에게 남긴 절구시(絶句詩) 한수밖에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 절구시(絶句詩) 

八十年堂臥蛾床  팔십년당와아상

六十老子藥先嘗    육십노자약선상

死生在命終難避  사생재명종난피

汝慈墳立壽堂    여자분입수당

 

「 여든살 먹은 내가 병석에 누워있으니

  예순살된 늙은 아들이 병구완하며 약 맛을 보는구나

  목숨은 천명에 달려있어 마침내는 피 할 길이 없나니

  너는 무덤 곁에서 집을 지어놓고 가까이 있겠지」

 

선조의 위패가 전북 임실군 지사면 원산리 덕암서원에 포은(圃隱) 정몽주 (鄭夢周) 선생과 최만육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음력(陰曆) 2월 16일 지역 유림(儒林)과 후손들에 의해 제사(祭祀)를올리고 있다. 또한 선조는 포은 정몽주 선생의 외손이시다.

 

효행 편

죽정공 (竹亭公) 진(晉)

◎효자(孝子) 죽정공(竹亭公) 선조께서는 당시 군수(郡守)의 관직(官職)을 수행(遂行)하다 부친(父親)의 병환(病患)이 위독(危篤)하여 부친을 모시기위해 관직(官職)을 사직(辭職)하고 병환(病患)을 구완하여 부모에게 효행을 한사실과 부친께서 세상(世上)을 뜨시여 그는 통곡(痛哭)하면서 시묘(侍墓)생활(生活)을 3년간 실시하는 등 효행이 지극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어  당시 금세(今世) 증삼이라 불리었으며  전주부사 안공이 선조의 효행을 가상히 여겨 임금님에게 글을 올려 그후 이조(李朝)초기 태조(太祖)7년 (1398. 무인(戊寅))에 효자비(孝子碑)를 정려(旌閭)받아 전주시 남문거리에 최초 건립이 되었으나 도시발전으로  효자비는 전주시(全州市) 교동 전주향교(全州鄕校) 앞에 이축 되어 후손에 의해 보존(保存)되고 있다. 


◎ 完山誌 (완산지)와 全州市(전주시) 地表調査報告書(지표조사보고서)

- 죽정공 박진 효자비각

전주 향교 정면 우측에 비각이 있으며 순조 5년 을축(1805년) 후손 필성이 지은 「全州府(전주부) 孝子(효자) 朴晉(박진) 旌閭記(정려기)」가걸려있고 그 아래 자연석의 비석이 서있다. 전면 중앙에 「孝子郡守朴晉之閭」라고 새기고  좌측에 「洪武(홍무)三十一年 戊寅立(무인입)」우측에는 「崇禎後再甲辰十世孫 重刊立閣 李龜靈書」라 추각하였다.

지상높이 104㎝, 폭은 윗변 58㎝, 밑변 48㎝, 두께 17㎝이다

※ 홍무 三十一년은 1398년으로 1600년전에 세워진 비이다.

       (사진참조)

 

◎ 효행(孝行) 사실(事實)

선조의 이름은 진(晉). 자는 내신(乃臣) 이시며 완산대군(完山大君)의 16세손이시다.

선조께서는 아버지 경덕재 (經德濟), 어머니는 고려초의 개국공신(開國功臣) 영상(領相) 배현경(裵賢慶)의 후손으로 재덕(才德)을 겸비한 어미하에서 고려(高麗) 충혜왕(忠惠王) 병자년(丙子年) 1336년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부모(父母)를 공경하고 사랑하며 얼굴빛을 온순히 하면서 부모님을 봉양하는 절차와 부모님께 순종하는 도리를 깨우쳐 알고서 매우 극진히 모셨다. 부모님께서 병환이나계시면 밤낮으로 탕약을 끓여 받들어 모시고 결코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허리띠조차 풀지않고 정성스럽게 병구완을 하시었다. 약을 받쳐 올릴때는 먼저 약맛을 직접보시고 올렸으므로 주위 어른들은 그를 가리켜 참으로 금세(今世)의 증삼(曾參) 이로구나 하면서 칭찬해 마지않았다. 선조는 나이가들어 주위에서 과거시험에 응시할 것을 권유하였고 또한 경덕부군께서 아들에게 사내대장부로 태어나서 어버이에게 대한 효도를 이제 나라에 충성(忠誠)된일을 하는 것으로 옮겨야한다고 권언 하였다.

그후 선조는 부친의 가르침을 받들어 과거공부에 힘써 남성시(南省試)에 합격하고 이어서 승부시(升赴試)에 급제하고 진사(進士)에 올라 청도 군수(郡守)이 임명되었고 또한  영암 군수(郡守)에 부임하여 고을을 다스렸다. 그후 조선(朝鮮) 시대(時代)로 접어들어 때는 바야흐로 홍무(洪武) 갑술년(甲戌年) 1394년 조선(朝鮮) 태조(太祖) 3년이었다. 지방(地方) 목민관으로서 백성을 교화하는데 힘써 고을 사람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정사에 힘써 돌보았기 때문에 그의 덕을 칭송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선조는 관직으로 인하여 부모님을 조석으로 가까이 모시지 못함을 한스러워 하셨다. 그래서 자주 사람을 보내거나 서찰(書札)을 올려 문안 여쭙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나 소식이 두절되면 부모님에 대한 불효의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시기도 하셨다. 그후 을해년(乙亥年) 1395년 태조 4년 8월에 부친께서 병환이 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즉시 관직을 정리하고 황급히 서둘러 가마를 재촉하여 부모님이 계시는 전주부(全州府)의 남쪽에 있는 한 정자에 이르렀으나 이 무렵 비가 많이 와서 물이 엄청나게 불어나 다리가 부수어져 떠내려가고 길은 끊겨 이미 몇일 동안 아무도 통행(通行)을 못하는 실정이었으나 선조는 급한 마음에 한필의 말로 갈아타고 곧바로 강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하늘이 감동(感動)했음인지 이상하게도 강물이 갈라져 길이 열어졌는데 마치 맨 땅과 같아서 어렵지 않게 강을 건너고 나니 강물은 다시 합해저 흐르는 것으로 주위사람들은 놀라며 탄복해 마지않았다. 어렵게 도착 아버지 병구완에 정성을 다하였고 효행으로 지극히 모셨으나 동지(冬至) 섣달 엄동설한에 아버지께서 병환으로 누워 계시면서 아버지가 아무런 음식을 못 드시기에 음식 드시기를 간청하니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무것도 먹고싶지 않고 삶은 꽃을 먹고싶구나 하셨으나 때가 아닌데 어떻게 한단 말이냐 하고 한탄을 하였으나 선조는 목욕을 재개하고 하늘에 축원을 하였다. 그리고 양지바른 산을 찾아 나서니 이상하게도 몇몇 진달래 나뭇가지에 홀연히 꽃이 피어 있어 그 꽃을 꺽어다 삶아서 아버지에게 올렸다. 이일로 인하여 그 꽃을 얻은 산(山)을 박모산(朴某山)이라고 이름붙여 불려젔다. 이렇게 정성을 다하여 부친을 공경하였고 또 다른 효행으로 때가이른 시기에 수박이 먹고싶다는 아버지의 말씀에  어려운 수박을 구해 아버지에게 올렸다는 내용이 알려저 그곳을 수박동이라 이름붙혀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한 정성을 다하였건만 경덕부군은 향년 80세에 세상을 뜨시는데 임종(臨終) 직전에 아들을 보고 절구시(絶句詩) 한 수를 남겻다.


◎ 효자 비각 중수기

  비각의 중수는 수 차례 이루어 졌으나 기록이 없고 2001년 7월 비각의 누수로 비각 기둥과 도리를 보존한채 지붕 서가래와 창살 및 기와를 전면 보수하고 비단축석과 단청을 새로히하여 7월 10일 고유재에 19세 손인 태현과 후손들이었으며  전북 유림회장 이영하씨와 전주 향교 전교외에 다수가 참석하여 고유제를 올렸다.  


◎ 입(入)  장수후 선조의 행록

선조께서 입(入) 장수(長水) 하신지 약 450년이 되었으므로 많은 발자취가 남아있으며 지역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떠한 삶을 하셨는지 역사의 기록으로 돌아 볼 수 있다. 시조의 21세인 삼윤(三胤)은 진사였으며 시조 23세 손(孫)인 언상(彦相)은 통정대부(通政大夫)였으며 그분의 아들 호(昈)는 선무랑사옹주부(宣務郞司甕主簿)로 가통을 이어왔으며 시조의 33세 손인 계대(啓大)는 통정대부로 관직(官職) 도정(都政)직을 역임하여 가문을 계승하여왔다. 역사의 記錄(기록)은 長水(장수)鄕校(향교) 碧溪勝覽(벽계승람) 編纂委員會(편찬위원회)에서 발행한 碧溪勝覽(벽계승람) (1975년)에 기록되어있는 내용과 전북(全北) 교임록(校任錄) 및 장수(長水) 향교(鄕校) 경임록(經任錄)의 기록(記錄)을 참고(參考)한것이다.


해동잡록 1 본조(本朝)
최덕지(崔德之)

○ 본관은 전주(全州)로서 스스로 존양당(存養堂)이라고 호했다. 우리 태종(太宗) 때 급제하고, 여러 차례 주(州)ㆍ군(郡)의 수령을 맡아 왔는데, 모두 치적을 남겼다. 세종조(世宗朝)에 벼슬이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에 이르렀고, 시에 이름이 높았다. 문종(文宗) 말년에 관직을 버리고 영암(靈岩)으로 물러가 살았는데, 그때의 명사들이 모두 전송하였다. 성삼문(成三問)은 시를 지어 주기를

 

고향으로 돌아감은 은둔한 계책이 아닐 것이니 / 歸田非隱計

출처는 정히 이같이 하느니 / 出處正如斯
한주는 소광을 생각하고 / 漢主思疏廣
당종은 규공을 중히 여겼다오 / 唐宗重戣孔
강산은 공을 기다리고 있는 듯 / 江山如有待
원숭이와 새들과도 서로 아는 사이 / 猿鳥亦相知
종히 의리를 온전히 할 수 있으니 / 終始能全義
공 같은 이는 나의 스승인 것을 / 如公我所師
하였다. 〈본록(本錄)〉
○ 익산(益山) 수령이 되어 몸을 처신함이 검약(儉約)하고, 일을 처리하는 데는 상세하고 밝게 하였다. 《명환록(名宦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