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河西 김인후 신도비문 (펌)

하서(河西) 김 선생(金先生) 신도비명 병서(幷序)

아베베1 2011. 4. 16. 07:56

 

 하서 김인후 선생은 해동 18현 중의 한분으로 호남 유림의 거유인 분이다

 

 

송자대전 제154권

 신도비명(神道碑銘)
하서(河西) 김 선생(金先生) 신도비명 병서(幷序)


본조 인물의 도학ㆍ절의ㆍ문장이 각기 차등이 있어서, 모두를 겸하여 치우치지 않은 이가 거의 드문데, 하늘이 우리나라를 도와 배출시킨 하서 김 선생만은 예외인 것 같다.
선생의 휘는 인후(麟厚), 자는 후지(厚之)이다. 울주 김씨(蔚州金氏)는 신라왕(新羅王 경순왕(敬順王)) 김부(金溥)에게서 나왔는데, 시조 학성부원군(鶴城府院君) 덕지(德摯)가 김부의 별자(別子 적자(嫡子)의 아우)이다.
본조에 와서, 직장(直長) 의강(義剛)과 훈도(訓導) 환(丸)과 참봉(參奉) 영(齡)은 바로 선생의 증조ㆍ조부ㆍ아버지이고, 어머니는 옥천 조씨(玉川趙氏)이다.
참봉공은 매우 효성스럽고 선(善)을 좋아하여 옛날 군자(君子)의 풍도가 있었다. 선생은 나면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풍신(風神)이 수아(秀雅)하였으며, 두어 살 때에 신[履]을 똑바로 신었고 지름길을 택하지 않았으며, 외물(外物 물욕)에는 일절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서적(書籍)과 한묵(翰墨)만을 좋아하였다. 일찍이 나물 껍질[菜皮]을 손수 벗기면서 그 끝[心] 부분까지 다 벗기고는 말하기를,
“생리(生理)의 본말(本末)을 관찰하기 위해서이다.”
하였다. 9세 때에 복재(服齋) 기준(奇遵)이 보고 기이하게 여기며,
“그대는 의당 우리 세자(世子 인종(仁宗)을 말함)의 신하가 될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인종의 천품이 생지(生知 배우지 않고도 사물의 도리에 통하는 것)하여 온 신민(臣民)이 다 그 성덕(聖德)을 우러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점차 장성하여서는 항상 조용히 앉아서 엄연(儼然)히 상제(上帝)를 직접 대하듯 하였고, 글을 강론하다가 마음에 드는 대문을 만날 적에는 흔연 자득(欣然自得)하여 밤새도록 자지 않았으니, 그 조예가 이미 심원하였던 것이다.
가정(嘉靖) 신묘년(1531, 중종26)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나이는 22였다. 그때 당화(黨禍)를 겪은 지 얼마 안 되어 선비들이 학문한다는 소문을 기휘(忌諱)하였는데 선생은 퇴계 이 선생과 지기(志氣)가 상합, 오가면서 학문을 강마하여 이택(麗澤)의 도움이 매우 많았다.
경자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괴원(槐院 승문원(承文院))에 소속, 말미를 받아 호당(湖堂)에서 글을 읽다가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를 거쳐 박사(博士)로 승진하여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를 겸하였다.
마침 인종이 동궁(東宮)에 있으면서 학문이 날로 높아가다가 선생을 만나 크게 기뻐하여 그 은우(恩遇)가 날로 융숭하였고 때로는 선생이 직숙(直宿)하는 곳까지 친림(親臨)하여 종용히 문의하였으며, 특별히 서책(書冊)을 하사하고 또 묵죽(墨竹)을 그려서 미의(微意)를 보이므로 선생이 시를 지어 사례하였는데, 그 묵죽의 인본(印本)이 세상의 보물로 되어 있다.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가 동궁에 발생한 작서(灼鼠)의 변(變)으로 인하여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예로부터 치도(治道)를 잘한 인군(人君)은 모두 현재(賢才)를 가까이하고 사습(士習)을 시정하는 것으로 근본을 삼아 왔으니, 이는 현재를 가까이해야만 보필을 오로지하여 기질(氣質)을 변화시킬 수 있고 사습을 시정해야만 이륜(彛倫)을 밝혀 풍속을 바르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지난 기묘년의 참화는 온 조야(朝野)가 다 제신(諸臣)들의 억울함을 가엾이 여기고 있는 바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본심을 털어놓고 무고(無辜)를 밝혀내어 위로는 전하의 한결같은 의혹을 풀어드리고 아래로는 제신들의 억울한 마음을 해소시키지 못하고는, 도리어 여기에 단언 정색(端言正色)하고 나서는 이가 있으면 대뜸 물정 모르는 무리로 배격하곤 하니 사습이 시정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앞으로 전하께서는 허심탄회한 마음과 차분한 생각으로 재변이 일어나게 된 동기를 깊이 사유(思惟)하시되, 학문을 강마하는 데서 기미를 연구하고, 존양 성찰(存養省察)하는 데서 일단을 미루어, 본원이 맑고 표리가 진실함으로써 털끝만큼의 사위(私僞)가 끼이지 않게 하소서. 그러면 사정(邪正)을 분별하기 어렵지 않고, 시비(是非)가 제대로 판정되어, 이미 투박해진 사습을 시정할 수 있고, 이미 해이해진 기강을 진작시킬 수 있을 것이니, 침체된 교화와 퇴패된 풍속을 그리 염려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여 그 사의(辭意 말의 뜻)가 매우 간절하였다. 이로부터 중종이 정암(靜菴) 등 제현(諸賢)의 억울함을 절실히 시인, 자못 회오(悔悟)하는 뜻을 보였고 그 뒤에도 신원(伸冤)을 청하는 이가 더욱 많았다가 마침내 인종이 즉위하자마자 통쾌한 신원의 명이 내려졌으니, 이는 선생이 그 기회를 열어 놓은 것이다. 어버이 봉양을 위하여 옥과 현감(玉果縣監)으로 나가서는 민정에 따르는 정사를 힘써 온 고을이 혜택을 입었고, 그 이듬해(1545)에는 조사(詔使) 장승헌(張承憲)이 오자, 선생을 제술관(製述官)으로 불렀다. 그때 인종이 막 즉위한 터이라 시의(時議)가 다 선생을 만류하여 신정(新政)을 보필시키려 하였으나 선생은 시사(時事)가 염려되어 친병(親病)을 들어 사양하고 임지로 돌아왔다.
그해 7월에 임금이 갑자기 승하하자, 선생이 부음(訃音)을 듣고 너무 놀라고 절통하여 거의 기절하였다가 다시 깨어났는데, 이내 신병(身病)을 이유로 현임(縣任)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부터서는 모든 임관(任官)에 일절 응하지 않았다. 연이어 어버이의 상(喪)을 당하여 정리(情理)와 의식(儀式)을 다하였고, 상복(喪服) 제도에 있어서는 일체 예경(禮經)을 따랐으며, 상을 마친 뒤에 교리(校理)로 불렀으나 역시 전(箋)을 올려 사양하였고, 명종(明宗)이 군신(君臣)의 대의(大義)를 들어 돈유(敦諭)하였으나 역시 신병 때문에 나아가기 어렵다는 정상을 간곡히 진달하는 한편, 하사된 식물(食物)까지 사양하였다.
경신년(1560, 명종15) 봄에 갑자기 병이 났는데, 마침 상원(上元 정월 보름)이었다. 가인(家人)에게, 시식(時食)을 마련시켜 가묘(家廟)에 올리고 나서, 옥과 현감 이후의 관작은 사용하지 말라는 유명(遺命)을 남기고는, 그 이튿날 임오일에 51세를 일기로 별세하자, 상이 듣고 경도(驚悼)하며 특별히 부의(賻儀)를 내렸다.
선생은 천품이 청명 온수(淸明溫粹)하고 흉금이 쇄락하므로 사람들이 맑은 물속의 부용(芙蓉)에 비유하였으며, 뜻을 세우고 학문을 하는 데는 이치를 궁리하고 경(敬)을 주로 삼고, 삼가 생각하고 밝게 분별하는 공부를 쌓았으므로, 그 깊은 조예를 남이 헤아릴 수 없었다.
대저 선생은 처음 김모재(金慕齋)에게서 《소학(小學)》을 배워 공력이 가장 깊었고 《대학(大學)》에 있어서는 혼자 단정히 앉아 1천 번이나 읽었는가 하면, 되풀이해서 실마리를 찾아내어 터득하고야 말았다. 이후부터 문인 제자를 가르치는 데에도 이 과정을 변동한 적이 없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일부(一部)의 《대학》 안에는 체용(體用)이 구비하고, 조리가 정돈되어 있다. 이 글을 제외하고는 도(道)에 나아갈 수 없다. 이 글을 읽지 않고 다른 경(經)을 보려 하는 것은, 마치 집터를 닦지 않고 집부터 먼저 지으려는 것과 같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이 글을 읽고 나서 아무 의심도 없는 자는, 진실한 소득이 있는 것이 아니다. 과연 글자마다 연구하고 구절마다 사유(思惟)해 보았다면, 반드시 통철하지 못한 곳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장구(章句)에서 통철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혹문(或問)》을 참고하고 혹 《혹문》에서 통철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제가(諸家)의 설(說)을 참고하여 오랜 세월이 흐르면 반드시 얼음 녹듯 하는 성과를 보게 될 것이다.”
하였으며, 《논어》ㆍ《맹자》와 《시경》ㆍ《역경》에 있어서는 깊이 생각하고 실제로 체험하고 나서 말하기를,
득력(得力)하는 데는 《논어》ㆍ《맹자》만 한 글이 없다.”
하였고, 또 일찍이 말하기를,
“태극도설(太極圖說)은 의리(義理)가 정심(精深)하고 서명(西銘)은 규모가 광대하니, 한 가지도 폐지할 수 없다.”
하고, 사색(思索)하기를 마지않았다. 그 조수(操守)에 있어서는, 경(敬)을 마음의 주재(主宰)로 삼아, 매일 생활하는 사이에 엄연ㆍ숙연하여 사기(辭氣)가 안정되고 시청(視聽)이 단정, 표리에 간격이 없고 동정이 한결같았으며, 정의가 발로하는 데는 홀로 기미(幾微)에서 알아차리고 사물을 접하는 데는 반드시 의리에서 췌탁(揣度)하여 선리(善利)와 공사의 구분에 더욱 신중을 기하였으며, 성명(性命)ㆍ음양의 묘(妙)에서 인륜 효제(人倫孝悌)의 실제에 이르기까지 온통 한 몸에 모아 본말(本末)이 구비되어, 대중 지정(大中至正)한 규모에 탁연하였다. 그러므로 학문에 있어, 독행(篤行)에 전력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에게는, 지(知)에 밝지 못하면 행(行)에 반드시 막힘이 있다고 말해 주고, 내치(內治)에 전력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에게는 외부가 정제하지 못하면 내부가 반드시 태만해진다고 말해 주었다. 또 일찍이 학문에는 반드시 지행(知行)이 아울러 진취되고 내외가 함께 닦아져야 된다고 하였다.
제가(諸家)의 합당하지 못한 설(說)을 증정(證訂)하는 데는 털끝만한 것도 반드시 분별하였다. 즉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설(說)에 대하여는 돈오(頓悟)한다는 첩경(捷徑)에 빠질까 염려하고, 일재(一齋 이항(李恒))의 설에 대하여는 도기(道器 이(理)와 기(氣))를 혼동(混同)하여 한가지로 본 것을 아쉬워하였다. 인심(人心)ㆍ도심(道心)을 논한 데는 나씨(羅氏 명(明)의 나흠순(羅欽順))의 체용설(體用說)을 배격하였으며, 퇴계 이 선생의 사단 칠정 이기호발론(四端七情理氣互發論)에 대하여는,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기 선생이 이를 깊이 의혹하다가 선생에게 질문하고 나서 일체 막힌 데가 없었고, 드디어 이를 이 선생(李先生)과 논변한 글이 자못 수만 자에 이르렀으니, 세상에 전하는 ‘퇴고왕복서(退高往復書)’가 바로 이것이다.
대저 선생은 도리(道理)에 환하여 의혹이 없어 묻는 대로 답하기를 마치 소매 속에 있는 물건을 꺼내 주듯 하되, 모두 핍진하고 적절하였으므로 아무리 퇴계같이 정밀한 학문으로도 누차 자신의 소견을 버리고 따랐으며,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 김 선생도 선생의 설로써 예서(禮書)를 고증한 곳이 많았다.
선생의 의논은 신기(新奇)한 데 유혹되거나 격요(繳繞 테두리에 얽매이는 것)에 현란되지 않고 그저 평정 명백(平正明白)하여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또 부수려 하여도 부숴지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은 도(道)를 안다고 자부(自負)하지 않고 언제나 부족해하였다. 일찍이 지은,
천지의 중간에 두 사람 있으니 / 天地中間有二人
공자(孔子)는 원기요 주자(朱子)는 진기일세 / 仲尼元氣紫陽眞
한 시(詩)에 의하면 선생의 지취(志趣)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선생은 젊어서부터 경제(經濟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하는 것)의 뜻이 있었다. 김안로(金安老)가 복주(伏誅)된 뒤에 김모재(金慕齋)ㆍ이회재(李晦齋) 등 제 선생이 점차 기용되었으나 선생만은 시사의 기미를 간파하고 즉시 물러날 뜻을 두었으며, 인종이 승하한 뒤에는 너무 놀라고 애통해하다가 기절하여 생(生)을 그만둘 듯이 하였고 집 안에 들어앉아 폐인으로 자처하여 세상사를 단념, 사자(死者)를 보내고 생자(生者)를 섬기려는 의사조차 전혀 없었으며, 매년 7월 1일이 되면 대뜸 집 남쪽에 있는 산골짜기로 들어가 통곡하다가 날이 새어서야 돌아오곤 하였다. 이는 인종 승하의 원인을 감히 물을 수 없어 그저 속으로만 애통해할 뿐, 말로 표현한 적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끝내 알지 못하였다. 그리고 일찍이 지은 ‘유소사(有所思)’ 와 ‘조신생(吊申生)’이란 모든 사(詞)는 그 우의(寓意)가 격렬한 데다가 일편(一篇) 중에 그 뜻이 누차 표현되어 있어, 읽는 이가 저절로 머리칼이 곤두서고 담(膽)이 찢어지는 듯하나, 끝내 그 본지의 소재는 헤아릴 수 없다. 고금의 사적을 열람하다가, 간신(奸臣)이 화(禍)를 빚어내어 군부(君父)로 하여금 그 화에 걸리게 한 대목에 이를 적에는 으레 주먹을 불끈 쥐고 강개해하면서 자신이 직접 당한 것처럼 여길 뿐이 아니었으니, 이는 한마음으로 삼재 조화(三才造化)의 묘리(妙理)를 함축하고 한 몸으로 만세 강상(萬世綱常)의 중책을 맡은 사실을 끝내 속일 수 없었다.
가정에는 윤리를 바르게 하고 은의(恩義)를 돈독히 하는 것을 위주하여 규문(閨門)이 화순 옹목(和順雍睦)한 가운데 엄정으로써 다스리므로 선생의 가정을 방문하는 이는 마치 조정에 들어선 듯하였으며, 술을 마셔 얼근해지면 이어 시가를 읊었는데, 그 음조(音調)가 우렁차고 창쾌하여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씩씩하면서도 화열하게 하였으며, 한가한 날에는 으레 관동(冠童 어른과 아이)을 데리고 야외에 나가 소요하면서 제생들을 향하여 말하기를,
“배우는 이가 수시로 기수(沂水)와 정초(庭草)의 기상(氣像)을 체험한 뒤에야 능히 조금의 진취를 보게 된다.”
하였으므로, 후학 중에 선생의 인접(引接)을 받은 이는, 마치 춘풍(春風)에 훈습되고 경운(慶雲)을 목도하는 듯하였다.
저작(著作)에는 풍아(風雅 《시경》의 풍과 아)를 근본으로, 소선(騷選)ㆍ이두(李杜 이백(李白)과 두보(杜甫))를 참고로 하였고, 감촉되는 바가 있을 적에는 일체 시(詩)를 읊어 발산시키되, 청절(淸絶)하면서도 과격하지 않고 간절하면서도 촉박하지 않고, 즐거우면서도 음탕한 데 이르지 않고 걱정스러우면서도 애상(哀傷)한 데 이르지 않으니, 이는 성정(性情)이 다스려지고 도덕이 함축된 때문이요, 그 소장(疏章)은 통창 전아(通暢典雅)하여 으레 도리가 앞섰으니, 참으로 인의에서 나온 말이었다.
문집 몇 권이 세상에 전해지고, 《주역》 관상편(觀象篇)과 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 등의 저작은 유실되어 전해지지 않으니, 애석한 일이다. 그리고 천문(天文)ㆍ지리(地理)ㆍ의약(醫藥)ㆍ복서(卜筮)ㆍ산수(算數)ㆍ율력(律曆) 등에도 모두 정통하였고, 필법이 경건(勁健)하여 절대로 연미(姸媚)한 태도가 없었으니, 이른바 덕성이 서로 연관된 때문이다.
부인 윤씨(尹氏)는 현감 임형(任衡)의 딸이고 두 아들은 종룡(從龍)ㆍ종호(從虎)이고 세 여서(女婿)는 조희문(趙希文)ㆍ양자징(梁子徵)ㆍ유경렴(柳景濂)이다. 종룡의 아들 중총(仲聰)은 참봉으로 후사가 없고 종호는 찰방(察訪)으로 아들 남중(南重)을 두었으며, 남중의 아들은 형복(亨福)ㆍ형록(亨祿)ㆍ형우(亨祐)ㆍ형지(亨祉)이고 두 여서는 이규명(李奎明)ㆍ기진발(奇震發)이다. 형복의 아들은 창하(昌夏)ㆍ태하(泰夏)이고 형우의 아들은 기하(器夏)이고 형지의 아들은 명하(鳴夏)ㆍ대하(大夏)이며, 형록에게 출계(出系)한 이는 중남(仲男)이다. 창하의 아들은 익서(翼瑞)ㆍ두서(斗瑞)ㆍ시서(時瑞)이고 태하의 아들은 천서(天瑞)ㆍ지서(地瑞)ㆍ원서(元瑞)이고 명하의 아들은 치서(致瑞)이며, 이규명의 아들은 일지(逸之)ㆍ실지(實之)ㆍ필지(苾之)ㆍ밀지(密之)ㆍ길지(佶之)이고, 기진발의 아들은 정연(挺然)ㆍ정지(挺之)ㆍ정한(挺漢)인데, 내외 증ㆍ현손 수십 명이 문행(文行)으로써 서로 숭상하였다.
그해 3월 계유일에 장성(長城) 서쪽 원당산(願堂山) 선영(先塋)에 남향으로 된 묘에 안장되었고 문인들이 서원을 세워 향사하였다. 숭정(崇禎 명 의종(明毅宗)의 연호) 임인년(1662, 현종3)에 현종대왕이 ‘필암(筆巖)’이라 사액(賜額)하고 다시 이조 판서ㆍ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에 추증, 문정(文靖)이란 시호를 내렸는데 시법(諡法)에, 도덕이 널리 알려진 것을 문(文), 관락(寬樂)하여 유종의 미를 거둔 것을 정(靖)이라 한다. 아, 성조(聖朝)의 융숭한 보답이 이에 이르러 유감이 없었다.
대저 우리 해동이 은사(殷師 기자(箕子))의 세대가 멀어진 이후로 성인의 학이 밝지 못하였다가 우리 중종ㆍ명종 세대에 이르러 치도(治道)와 교화가 융성하여, 모두가 낙민(洛閩)으로 준칙을 삼았다. 그러나 도기 위미설(道器危微說)에 있어 오히려 의혹하는 이가 많았는데, 선생만은 홀로 대의를 간파하여,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것으로 곧장 정맥(正脈)을 찾아내었다.
또한 본조(本朝)의 종유 명현(宗儒名賢)이 이따금 정도(正道)가 침체된 시기에 나서서 주선 위이(周旋委蛇)하여 사직을 붙들고 사림을 구제하려다가 신명까지 상실하곤 하였으나 선생은 스스로 시기의 미(微)와 현(顯)을 알아 세상을 등지고 미련없이 인생을 마쳤으니, 이로써 본다면 그 밝은 지(知)와 통달한 식견이 어지러운 사물(事物) 밖에 초월하고 깊은 조예와 두터운 덕이 정밀 정대한 경지에 이르렀으며, 그 청풍 대절(淸風大節)은 온 세상에 진동하여 탐욕스러운 자가 청렴해지고 겁 많은 자가 자립하게 되었으니, 백세(百世)의 스승이라 하여도 옳을 것이다. 그러나 그 근본을 따져 보면, 사실 바른 도학(道學)에서 기인된 것이다. 사람이란 반드시 도를 알아야 하는데, 도를 알려면 학문을 버리고서야 어찌 되겠는가. 세상에서 한갓 절의(節義)만으로 선생을 논하는 이는 얕은 지견(知見)이라 하겠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공통된 도 다섯 가지 중에 / 達道有五
군신 부자가 / 君臣父子
가장 큰 것이니 / 此其大經
그 도리 다하려면 / 欲盡其理
어찌 성경에서 구하지 않으랴 / 盍究聖經
지가 있고 행이 있네 / 有知有行
학문의 도가 / 學問之道
진정 여기에 있거니 / 亶在於是
이를 버리고 어디로 갈쏜가 / 捨是曷程
아 선생은 / 於惟先生
천부가 특이하여 / 天賦之異
기질이 청수하고 / 質粹氣淸
지력이 웅호하며 / 志豪力雄
용맹스레 옛것에 매진해 / 勇邁終古
광대 고명한 데 이르렀네 / 廣大高明
여러 학설(學說) 다 섭렵하고는 / 旣極群言
도리를 하나로 총괄하였으니 / 反以約之
참으로 집대성일세 / 允矣集成
군신의 의와 / 君臣之義
부자의 인이 / 父子之仁
작기 제자리 얻었으니 / 各得其貞
사람에게 준 교화 / 其所及人
사방에 두루 미쳐 / 沛然旁達
모두 전형으로 삼았네 / 式圍式型
세도 인문과 / 世道人文
천질과 민이가 / 天秩民彝
해와 별처럼 밝았으니 / 炳如日星
예부터 지금까지 / 循古訖今
그 공덕 논한다면 / 計功論德
어느 뉘 맞설쏜가 / 孰與先生
성조의 표창과 / 聖朝褒崇
다사의 존모가 / 多士尊慕
태산북두와 같네 / 岱宗魁衡
원당산 앞쪽에 / 願堂之陽
이 비 세우니 / 銘此豐碑
천만년 유전하리 / 維千萬齡


 

[주D-001]이택(麗澤) : 벗끼리 서로 도와 학문을 닦고 수양에 힘쓰는 것이다.
[주D-002]작서(灼鼠)의 변(變) : 조선 중종 22년(1527) 7월에 세자(世子)의 생일을 기하여, 쥐를 잡아 사지(四肢)와 꼬리를 자르고 입ㆍ코ㆍ귀ㆍ눈을 불로 지져 동궁(東宮)의 북정(北庭)에 있는 나무에 걸어 두어 세자를 저주한 사건. 그때 우의정(右議政) 심정(沈貞) 등이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고 범인 체포를 청하였으나 범인은 쉽게 잡히지 않고 의옥(疑獄)이 자꾸 커지다가 경빈 박씨(敬嬪朴氏)가 의심을 받고 그 아들 복성군 미(福城君嵋)와 함께 폐서인(廢庶人)이 되어 쫓겨났다.
[주D-003]득력(得力) : 숙달하거나 깊이 깨달아서 확고한 힘을 얻는 것이다.
[주D-004]기수(沂水)와 …… 기상(氣像) : 옛날에 증점(曾點)이 “나는 늦은 봄에 봄옷으로 갈아입고 성인(成人) 5, 6명, 소년 6, 7명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쐰 다음, 시가(詩歌)를 읊으면서 돌아오겠다.”고 흉금을 밝힌 말과 송 나라 주돈이(周敦頤)가 인품이 청고(淸高)하고 흉금이 쇄락(灑落)하여 뜰에 가득한 풀을 베어내지 않으면서 “저 풀의 생생(生生)하는 의사(意思)도 나의 것과 같다.”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5]소선(騷選) : 굴원(屈原)이 지은 《이소경(離騷經)》의 문체(文體)를 후인(後人)이 본받아 소체(騷體)라 하고, 《문선(文選)》에 뽑힌 시체(詩體)를 후인이 본받아 선체(選體)라 한다.
[주D-006]천질과 민이 : 하늘이 정한 존비(尊卑)ㆍ귀천(貴賤)의 차등과 사람이 지켜야 할 떳떳한 도리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