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계곡 장유 신도비명

계곡(谿谷) 장공(張公) 신도비명 병서(幷序)

아베베1 2011. 4. 16. 08:11

 

 조선의 대문장가 계곡 장유

송자대전 제156권

 신도비명(神道碑銘)
계곡(谿谷) 장공(張公) 신도비명 병서(幷序)


본조의 문헌(文獻)은 선조조(宣祖朝)에 이르러 완비되었고 혼조(昏朝)에 침체되었다가 인조조(仁祖朝)에 다시 신장되었다. 그러나 일대의 우두머리로 고려ㆍ신라를 능가하고 조송(趙宋)의 세대까지 젖어든 이를 논한다면, 오직 계곡 문충공(文忠公)이 바로 그 사람이다.
공의 휘는 유(維), 자는 지국(持國)이다. 덕수 장씨(德水張氏)는 본시 중국 원(元) 나라 때 순룡(舜龍)이 고려에 와서 벼슬하여 찬성사(賛成事)에 이르고 덕성부원군(德城府院君)에 수봉된 때부터 비롯되었다.
고조 옥(玉)은 장원으로 급제하고 증조 임중(任重)은 장례원 사의(掌隷院司議)이고 조부 일(逸)은 현감이고 부친 운익(雲翼)은 형조 판서인데, 고조로부터 판서공에 이르기까지 다 문명(文名)이 있었다.
판서공이 판윤(判尹) 박숭원(朴崇元)의 딸을 맞았는데, 박 부인이, 아침 해가 몸을 비추다가 이윽고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공이 만력(萬曆) 정해년 12월 25일에 선천부(宣川府) 내아(內衙)에서 출생하였다. 판서공이 장공(長公 장유의 형)을 가르칠 때 공이 겨우 5세의 나이로 옆에서 듣고도 뜻을 해득하였고 10세에 경서(經書)를 죄다 외었으며, 15세에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에게 가르쳐 주기를 청하였고 또 문원공 김 선생 장생을 따라 배웠다. 김 선생이 일찍이 공에 대하여,
“총예 역학(聰睿力學)하고 견해가 뛰어나니, 그 성취를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고 말하면서 사문(斯文)의 책임으로 기대 권면하였다.
16세에 제사 자집(諸史子集)을 두루 통하였고 19세에 과장(科場)에 나갔다. 이때 공의 문명이 이미 자자하여 거자(擧子)들이 연달아 찾아와서 문의하였으나, 공이 끊임없이 대답하였고 또 숨김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그 식견과 도량을 크게 탄복하였다. 드디어 향시(鄕試)에 장원하고 20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공은 어릴 적부터 문예에만 국한되는 것을 옹졸하게 여기고는, 송 나라 현인들의 글을 읽어 의리의 오묘함을 추구하였고 《음부경주해(陰符經註解)》를 지어 제가(諸家)의 오류를 바로잡았다.
광해 기유년(1609)에 문과에 합격하고 승문원에 소속되어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를 겸하였다. 괴원(槐院)에서 신진을 선발할 때 공이 동지(同志)들과 함께 권귀(權貴)의 자제를 척거(斥去)했는데, 마침 감정을 품은 자가 공의 사관천(史館薦)을 저해하여, 3년 만에 비로소 사관(史館)의 직무가 제수되었고 그사이에 주서(注書)가 되기도 하였다.
임자년(1612, 광해군4)에 무옥(誣獄)에 걸려 파직되었다. 공은 13세 때에 판서공을 여의었는데, 그제야 모부인을 모시고 안산(安山) 시골집에 내려가 경전(經傳)을 즐기면서 걱정을 잊었다. 이때 모후(母后)가 서궁(西宮)에 유폐되고 이륜(彛倫)이 무너졌으므로 제공이 반정(反正)을 모의하는데 공이 계책을 협찬하였고 인조가 즉위하여서는 다시 사관(史館)에 들어와 전적(典籍)으로 승진되고 예조랑(禮曹郞)에서 이조(吏曹)로 전임되었는데, 모든 처사가 여론에 크게 부합되었다.
호당독서(湖堂讀書)를 거쳐 옥당(玉堂)에 들어와서는 명을 받들어 호남(湖南)을 순찰, 성심껏 추구하여 묵은 병폐를 말끔히 씻었으므로 정랑(正郞)에 승진, 이등훈(二等勳)에 책록되었으며, 정공 경세(鄭公經世)가 경연(經筵)에서 공의 문학과 재식(才識)이 당세의 으뜸이라고 아뢰었으므로 상이 특별히 통정(通政) 품계를 더하고 병조 참지(兵曹參知)에 제수하였다. 그러나 공은 애당초 강상(綱常)이 침체된 시기에 사람된 도리를 바로잡으려 하였던 것뿐이요, 공명에 대하여는 그 본의가 아니었다. 복명을 마치고 본직을 극력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주사 당상(籌司堂上)에 임명하였다.
이괄(李适)의 반란 때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하여 남하하는 도중 대사헌에 제수되어서는 아무리 훈귀(勳貴)라 해도 범죄 사실이 있으면 가차없이 논핵하였다. 호종 공로로 가선(嘉善) 품계에 승진, 신풍군(新豐君)에 봉하고 간직(諫職 대사간)은 그대로 띠게 하였다. 차자를 올려서, 자주 경연(經筵)에 임할 것과 세자(世子)를 보도(輔導)하는 도를 진달하였다.
대사헌에 전임되었다가 병으로 사면하였고 대사성(大司成)에서 다시 대사간에 제수되었다가 이조 참판에 전임되었다. 이때 신정(新政)이 얼마 안 되고 옛것만을 그대로 인습하여 치효(治效)가 막연하므로 공이 소(疏)를 올려 아뢰기를,
“천하를 다스리는 도는 그 뜻이 있는 뒤에야 그 일이 있고 그 일이 있는 뒤에야 그 성과가 있는 것입니다. 옛날 제왕(帝王)에게는 각기 일대(一代)의 규모가 있어서, 삼왕(三王 우(禹)ㆍ탕(湯)ㆍ문무(文武))은 인의(仁義)를 행하였고 오패(五覇)는 인의를 가탁하였는데, 그 성쇠는 비록 다르나 다 실심(實心)으로써 실사(實事)를 행하였으니, 그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전철을 고수하고 구습을 답습하여, 총명은 문부(文簿)에 맡겨지고 지려(智慮)는 규례에 국한되어, 사람을 쓰는 데 현사(賢邪)를 구분하지 않고 일을 만드는 데 원대한 경륜을 생각지 않으시니, 과연 유독(幽獨 은미(隱微)하고 혼자 있는 곳)에서의 경건하고 해태하는 갈림길과 본원(本源 마음의 자리)에서의 간직하고 방치하는 사이에서 능히 실심(實心)으로써 실공(實功)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의지를 확장하고 규모를 수립하여 옛적의 철왕(哲王)을 표준으로 삼고 수제(修齊)ㆍ치평(治平)을 자신의 임무를 삼으소서. 대저 상의 한 번 기뻐하고 성내는 것과 한 번 주고 빼앗는 것에 만물의 영욕(榮辱)과 생사(生死)가 달려 있으니, 만약, 확장된 도량이 없다면 어떻게 높은 지위에 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좌전(左傳)》에 ‘산수(山藪)는 나쁜 것을 감춰 주고 천택(川澤)은 더러운 것을 받아들이고 국군(國君)은 치욕을 참는다.’ 하였으니, 이는 지극한 말입니다. 전하께서 임어하신 초기에 간언(諫言)을 간격없이 받아들이시어 모든 일이 거의 잘 전환되어 갔으나, 식자(識者)들은 오히려 혹 억지에서 나오시지 않았는가 염려하였는데, 근자에 와서는 이이(訑訑 스스로 만족하고 과시하는 모습)한 기색으로 대하여, 심지어 정외(情外)의 죄명(罪名)으로써 부가하거나 과당(過當)한 엄명(嚴命)으로써 억누르고 계십니다. 대저 신하로서 직언(直言)을 서슴지 않는 자는 마치 하늘을 더위잡고 뇌정(雷霆)을 들이받는 것과 같아서, 그 일이 참으로 어렵고 그 뜻이 가상한 것인데, 도리어 이를 경시(輕視)하여 장단(長短)을 따지고 곡직(曲直)을 다투어 기어이 자신을 내세우고 상대를 꺾으려 하시니 도량이 어찌 그처럼 넓지 못하십니까. 삼가 바라건대, 마음을 비워 놓고 기색을 온화하게 하시어 진언(盡言)을 받아들여 중미(衆美)가 모두 모여 하나로 돌아오게 하소서. 대저 임금으로서 미워하는 바는 붕당(朋黨)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더욱이 금세에는 붕당이 나라를 망치는 고황(膏肓)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붕당을 제거하는 요체는 오직 정명(正明)과 공평 두 가지이니, 정명하면 곡직에 가리움이 없고 공평하면 거조에 실책이 없습니다. 이 두 가지에 능하다면 어찌 제거하기 어려울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그윽이 보건대, 성상(聖上)께서는 붕당에 대해, 너무 심하게 미워하므로 지나친 의심이 생기게 되고 너무 급하게 꺾으려 하므로 그 본정을 살피지 못하게 됩니다. 이 한 생각이 한번 치우치게 되면 허명(虛明)하였던 마음속에 장애가 있게 되므로, 일에 발로되는 데 거의 공평을 잃게 마련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마음을 물[水]과 같이 가져 만물을 허명(虛明)하게 관찰하심으로써 한쪽에만 치우침이 없이 대중(大衆)에 화합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논하는 이들이, 중흥의 으뜸가는 소(疏)라 하였다. 이후부터 대사간ㆍ대사헌ㆍ홍문관 부제학ㆍ성균관 대사성에 연이어 제수되었고 혹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전임되기도 하였다.
병인년(1626, 인조4)에 상이 사친(私親 인조의 생모 구씨(具氏))의 상(喪)을 만나자, 정공 경세(鄭公經世)가 《예기(禮記)》의, ‘임금의 어머니가 적부인(適夫人)이 아닐 경우에는, 임금이 시마복(緦麻服)을 입는다.’는 말을 들어서 금상(今上)이 입을 복을 시마(緦麻)로 정해야 한다고 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예기》의 그 말은, 아버지의 첩(妾)일 경우를 이른 것이오.”
하자, 정공이 그제야 자신의 오판을 크게 깨달았다. 이때 연평(延平) 이공 귀(李公貴)와 완성(完城) 최공 명길(崔公鳴吉)이 말하기를,
“주상은 지금 조종의 뒤를 이은 것이요 개인의 뒤만을 이은 것이 아니며 더욱이 ‘부자(父子)’의 호칭이 있으니, 마땅히 삼년복으로 정해야 하오.”
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부자로 호칭하는 것은 옳다 하겠지만, 아버지가 생존하였을 적에는 어머니를 위하여 장기(杖朞)를 입는 법인데, 더욱이 금상(今上)은 이미 대통(大統)을 이어 조종(祖宗)과 체(體)가 되었으니, 마땅히 아버지가 생존하였을 적의 예를 따라서 기년복(朞年服)으로 정해야 하오.”
하자, 조정 의논이 그대로 결정되었다. 장사가 끝난 뒤에 또 묘(墓)를 원(園)으로 호칭해야 한다고 하므로 공이 다시 차자를 올려서 잘못을 논하였다. 처음에 문원공(文元公)이, 부모로 호칭하는 것을 적극 그르다 하면서,
“이미 부모로 호칭할 바에는 의당 삼년복을 입어야 하고 또 신주도 종묘(宗廟)에 모셔야 할 것이다.”
하였는데, 공도 이 점에 대해 문원공에게 글로써 왕복 변론하여 끝내 자신의 주견을 세웠던 것이다. 겨울에 천둥의 재변이 있자, 공이 또 차자를 올려서,
“천둥이란 하나의 위노(威怒)인데, 순음(純陰)이 용사(用事)하는 10월에 천둥이 발동하였으니, 이는 시기를 잃고 망동(妄動)한 것입니다. 그 효상(爻象)을 추구해 보면, 전하의 호령이 정당하지 못하였거나, 위노(威怒)가 중도(中道)에서 벗어난 듯합니다. 바라건대, 매사를 깊이 성찰(省察)하소서.”
하였다.
정묘년에 청 나라 오랑캐가 들어오므로 대가(大駕)를 따라 강도(江都 강화도)로 들어갔다. 때에 국력이 부진하여 오랑캐에게 화친 체결을 강요받았는데, 오랑캐 사신 유해(劉海)는 본시 중국 사람으로 문장에 능하고 또 교활한 위인이었다. 그가 진현(進見)할 때에 상이 용탑(龍榻) 위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으므로 유해가 노기 띤 표정으로 꿋꿋이 서서 앞으로 나아오지 않자 좌우가 해괴하게 여겼다. 공이 나아가서,
“저 자가 너무 무례하니, 바라건대 밖으로 내쫓으소서.”
하므로, 유해가 그제야 풀이 꺾인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예식을 갖추고 물러갔다.
이어 화친 체결이 약정된 뒤에 유해가 상에게 맹약 장소에 친림하기를 청하자 의논하는 이들이, 당 태종(唐太宗)이 위수(渭水)의 편교(便橋)에 나가서 힐리(頡利)와 맹약하던 일을 인용하여 그대로 수락할 것을 청하였으나, 공이 상에게 수락하지 말기를 청하고 나서 유해를 만나 극력 투쟁하여 마침내 대신(大臣)이 대신 나가 주관하게 되었다.
그런데 유해가 조약을 체결할 때 명 나라와 단절할 것을 제1조로 내세우므로 공이 큰소리로 단호히 배격하자, 유해가 《논어(論語)》의, 관중(管仲)이 자규(子糾)를 위해 죽지 않은 것을 공자(孔子)가 관중더러, 인(仁)한 사람이라고 일컬은 말을 들어 달래고 위협하였다. 통역(通譯)이 이를 잘 알아듣지 못하므로 공이 그 자음(字音)과 어맥(語脈)을 살펴 그 뜻을 체득하고 즉시 《논어》의 ‘사람이란 누구나 다 한 번은 죽게 마련이지만, 사람에게 신(信)이 없으면 아무 일도 안 된다.’는 말을 들어 꺾어 버렸다.
뒤에 유해가 다시 바른 데로 돌아서서, 매번 본국더러 사체(事體)를 얻었다고 말하였고, 도독(都督) 원숭환(袁崇煥)도 이 사실을 전해 듣고는 매번 본국의 사신을 만날 적마다 맨 먼저 당시의 일부터 말하면서, 으레 장 시랑(張侍郞)은 지금 어느 직책에 있으며, 안부는 어떠냐고 물었다.
오랑캐가 물러간 뒤에 다시 본국에게 명 나라의 연호를 쓰지 못하도록 하므로, 조정에서 그대로 따르는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공이 개연히 나서서,
“저들과 화의(和議)를 체결하던 첫날에, 명 나라에 관련되는 일에 대해 죽어도 따를 수 없다고 한 사실은, 온 국민이 다 알았고 또 성의(聖意)도 그대로 확정하신 바인데, 어찌 경솔히 스스로 서둘러서 그 소수(所守)를 상실할 필요까지 있겠습니까. 사대(事大)하는 도리에는 연호를 받드는 것이 가장 중대하므로 이를 한 번 실수하면 후회해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하자, 상이 마침내 공의 말에 따랐다. 상이 환궁하여 특별히 이조 판서를 제수하였다. 공이 사퇴하는 차자를 세 번이나 올렸으나 상이 이르기를,
“경(卿)에게는 재(才)와 학(學)이 있고 또 덕(德)과 행(行)이 있으니, 참으로 여정(輿情)에 부합되는 자이다.”
하고 비답을 내리므로 공이 드디어 세도(世道)로써 자임(自任)하여 공도(公道)를 확장하고 사로(仕路)를 숙청시켰다. 명 나라 조사(詔使)가 온다 하여, 특별히 공을 원접사(遠接使)로 삼았다. 문형(文衡)이 아닌 사람으로서 이 임무를 맡은 예는 이전에 없었던 바인데, 결국 조사가 오지 않고 말았다.
무진년에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을 겸하였다. 흥양 현감(興陽縣監) 정홍임(鄭弘任)이 내수사(內需司)에 소속된 사람을 수치(囚治)하였다가 상의 뜻에 거슬려 파직 심문을 당하게 되므로, 공이 임금은 사재(私財)를 소유할 수도 사인(私人)을 비호할 수도 없다고 말하고 이어 초 영왕(楚靈王)이 신무우(申無宇)를 용서하던 고사를 말하자,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렸다.
때에 오랑캐에게 사로잡혔다가 도망쳐 온 자가 있었는데, 조정에서 오랑캐의 공갈을 무서워하여 그를 잡아 보내려 하므로 공이 바로 차자를 올려 불가한 것을 진언하기를,
“이는 천리와 인정으로 보아 차마 못할 일입니다. 옛날에 평원군(平原君)은 하나의 공자(公子)로서 자신이 진(秦) 나라에 잡혀 있으면서도 위제(魏齊)를 선뜻 내어 주지 않았는데, 지금 당당한 국가로서 어찌 차마 추로(醜虜)의 한마디 말을 두려워하여 우리의 백성을 호랑이의 입속에 던져 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의논이 이를 옳지 못하다 하므로 공이 다시 여섯 가지 조목을 열거하고 자신의 거취(去就) 문제까지 들어 논쟁하였으며 심지어,
“이러고서야 이 다음 오랑캐가 들이닥치면 무슨 면목으로 호령을 내려, 간과(干戈)를 잡고 오랑캐와 대항하도록 하겠습니까.”
하였다. 이때에 공이 시의(時議)와 불합하여 벼슬을 사체(辭遞)하였다가 의정부 우참찬에 제수되었다. 마침 가뭄으로 인하여 차자를 올리기를,
“지금 전하께서는 옛것만을 인습 고수하고 한번 해보려는 큰 뜻을 분발하지 않으면서, 규례를 삼가 지키고 부서(簿書)를 세밀히 다루어 큰 실수만 없애고 큰 간특(奸慝)만 없앤다면 소강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고 여기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 같은 생각은 태평한 시대에서도 오히려, 진전하지 않으면 퇴각하고 마는 염려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 전하의 처지야말로 얼마나 중요한 시기입니까. 각고(刻苦)하기를 월 구천(越句踐)과 같이 하고 절검(節儉)하기를 위 문공(衛文公)과 같이 하고 영웅들을 포섭하기를 한 광무(漢光武)와 같이 하고 정력을 다하여 정치에 힘쓰기를 당 태종(唐太宗)과 같이 하시더라도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두려운데, 지금의 상황으로 본다면 어찌 답답한 데 가깝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제왕(帝王)의 학문은 《대학(大學)》의 강조(綱條 삼강령(三綱領)과 팔조목(八條目))와 《중용(中庸)》의 구경(九經 수신(修身)ㆍ존현(尊賢) 등 천하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 대도(大道))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만약 한번 해보려는 뜻만 확립된다면 바로 이를 들어서 시행하여도 충분합니다. 그렇지 않고 글[書]은 글대로, 도(道)는 도대로, 마음은 마음대로 각기 배치된다면, 이는 속유(俗儒)들이 입으로 읽고 귀로 듣는 것에 다름이 없습니다. 또 성인(聖人)의 말에 ‘적다고 걱정할 것이 아니라 균등하지 못할까를 걱정해야 한다.’ 하였으니, 균등이란 바로 공평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임금은 사재(私財)를 축적할 수 없는 것인데, 지금 내수사(內需司)는 사재를 축적하는 부고(府庫)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당초에는 반드시 이조(吏曹)의 관여하에 운영되었습니다. 즉 내수사는 주대(周代)의 제도를 모방한 것으로, 총재(冢宰)로 하여금 임금의 재용(財用)을 관여하게 해서,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이 본시 일체라는 의미를 알리고자 한 것인데, 지금 내수사의 관속은 모두 환시(宦侍)나 하례(下隷)가 맡고 있습니다. 본원이 한번 어긋나면 말류의 폐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반드시 이조로 하여금 서명(署名)하게 하고 정원(政院)으로 하여금 출납하게 하여 정명 공평한 다스림을 보이소서. 속담에 ‘나라의 언로는 사람의 혈맥과 같다.’고 하였으니, 혈맥이 막히면 사람이 병들고 언로가 막히면 나라가 망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임어하신 이후로 직언을 하다가 죄를 입은 이가 한두 사람에 그치지 않습니다. 전하에게 거슬리면 전하가 싫어하고 집정(執政)에게 거슬리면 집정이 싫어하기 때문에 대각(臺閣) 위에 직신(直臣)이 소삭(消削)되고 직언이 좌절되었습니다. 이를 전환시키는 관건은 다만 전하에게 있으니, 전하께서 굽은 것을 펴고 막힌 것을 소통시키신다면, 인심이 크게 기뻐하고 국맥(國脈)이 영원할 것입니다.”
하였다. 또 대사헌으로서 차자를 올려, 성학(聖學)을 힘쓰고 직언을 받아들여 백성을 편안케 하는 도에 대해 극론하였다. 그 성학설(聖學說)에,
“임금의 도는 체(體)와 용(用)이 있으니, 곧 자신을 닦는 것과 백성을 편안케 하는 것입니다. 임금은 묘연(䏚然)한 한 몸으로 만민의 위에 처하여 표준이 되었으므로 그 정당함을 다한 뒤에야 남의 부정을 책할 수 있고 그 공평을 다한 뒤에야 남의 불공평을 책할 수 있으니, 《서경(書經)》 홍범(洪範)의 ‘건극(建極)’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이루는 데는 학문이 있을 뿐입니다. 제왕(帝王)의 학문은 포의(布衣)와 같지 않지만, 입지(立志)를 진절(眞切)하게, 궁리(窮理)를 정밀하게, 실천을 독실하게 하는 것에는 다름이 없는데, 임금은 안으로는 갖은 욕심이 협공하고 밖으로는 만 가지 일이 답지하여, 그 마음이 흔들리기 쉽고 그 일이 전일하기 어려우므로, 강마(講磨)ㆍ계옥(啓沃 흉금을 털어놓고 일러 주는 일)하는 도움이 다만 경연(經筵)에 있습니다. 만약 여기에 태만하면 가망이 없게 됩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즉위하신 처음부터 경연을 열고 학문을 강마하는 바가 조종(祖宗)의 고사와 같지 못하였고, 근자에 와서는 그 회수마저 점차 드문 데다가 경연에 임할 적에는 간묵(簡默)한 것만을 힘쓸 뿐, 종용히 자문하신 적이 없었으며, 강을 마치고 환궁하면 함께 대하시는 바가 환시(宦侍)나 궁첩(宮妾)뿐입니다. 이러고서야 진덕 수업(進德修業)을 바란다면 너무 소루하지 않겠습니까. 그 병통의 원인을 따져 본다면 도무지 성지(聖志)가 확립되지 못하신 데 있습니다. 뜻이 확립되지 못하면 학문이 진취되지 못하고 학문이 진취되지 못하면 덕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덕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그 심술(心術)과 정령(政令)에 발로되는 바가 모두 치우치고 어그러져 그 정당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만약 번연(翻然)히 개도(改圖)하고 분연히 발분하여, 성현도 반드시 배울 수 있고 삼대(三代)를 반드시 이룰 수 있다고 확신, 자주 경연에 나오시어 전일하고 정밀하게 연구하여, 마음에 존양(存養)하고 몸에 체험하고 일에 미루되, 쉬지 않고 수지(守持)하고 성실로써 시행하신다면, 덕이 어찌 이루어지지 않으며 다스림이 어찌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공의 전후 권계(勸戒)가 모두 이상 두 차자의 뜻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기사년(1629, 인조7)에 나공 만갑(羅公萬甲)이 직언(直言)으로 상의 뜻에 거슬려 찬축(竄逐)을 당하게 되자, 공이 그를 매우 강력히 구하려 하니 상이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좌천시키매 대신ㆍ경재(卿宰)와 삼사(三司)가 합계(合啓)로써 논쟁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나주는 본시 인구가 많고 지역이 넓은 데다가 왕화(王化)가 제대로 미치지 못한 고을인데, 공이 백성들을 가엾이 여겨 덕(德)으로써 유도하고 예(禮)로써 다스려 풍속이 크게 달라졌다.
때에 사대 교린(事大交隣)에 관한 사명(辭命)이 빈번하였다. 상이, 장모(張某)의 문장이 그립다고 하므로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와 김공 반(金公槃)이,
“장모의 문장은 경학(經學)에서 체득한 때문에 말과 이치가 함께 닿고 또 식견이 명확 심오하여 저절로 기의(機宜)에 적중되므로 성인(聖人)의 ‘초창(草創)ㆍ윤색(潤色)’이란 말은 진정 그를 이른 것입니다.”
하였다. 경오년에 형조 판서로 들어왔는데, 역시 폐기된 정무가 없었다.
상이 장차 장릉(章陵 원종(元宗))을 추존(追尊)하려 하므로 공이 마침 대사헌(大司憲)으로 전례문답(典禮問答) 8조(條)를 지어 차자와 아울러 올렸으나 반응이 없었다. 때에 상의 뜻이 더욱 굳어져 있었다. 공이 다시 종백(宗伯 예조 판서의 별칭)에 제수되어 대제학을 겸하였는데, 장릉 추존 문제는 다 예조의 소관이므로, 자신의 마음을 어겨 가면서 그대로 봉행할 수 없다고 단정하고 이를 항론(抗論)하다가 체직되었다. 일찍이 입시(入侍)하여 이에 관한 시비를 매우 자세하게 진변(陳辨)하므로 상이 비록 말로는 근간(謹懇)하였으나 뜻은 끝내 굽히지 않았다. 관학 유생(館學儒生)들도 이를 논쟁하다가 관학을 그만두고 나가므로 공이 상에게, 몸을 굽혀 유생들을 위유(慰諭)하여 사도(斯道)의 원기(元氣)를 붙잡아야 한다고 청하였다. 명 나라 장수 황룡(黃龍)이 섬 백성들에게 구금되므로, 조정에서 순역(順逆)의 사리를 들어 효유하자, 섬 사람들이 감동하여 뉘우쳤는데 그 격문(檄文)은 공이 지은 것이었다.
임신년에 상이 끝내 장릉을 추존하므로 공이 글을 올려 스스로 탄핵하기를,
“송 나라 복의(濮議) 때 여회(呂誨)ㆍ범진(范鎭) 등이 차례로 좌천되었는데, 이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조정의 시비를 논정하고 사대부의 진퇴를 밝힐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지금에 와서는 대례(大禮 원종 추존 하는 의식)를 거행할 때 거기에 해당되는 문자(文字)가 반드시 신(臣)의 손에서 지어질 것이니, 이를 사양하고 받들지 않는다면 직무를 유기하게 되고 억지로 따른다면 뜻을 굽히게 됩니다. 직무를 유기하는 것은 충실하지 못하게 되고 뜻을 굽히는 것은 곧지 못하게 됩니다.”
하고, 본직(本職) 사면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승하하므로 애책(哀冊)과 지문(誌文)을 지어 올리자, 전례에 따라 품계를 더하였다. 대사헌에서 다시 이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때에 예송(禮訟)을 치른 뒤라 위아래 관료들 사이가 서로 의심하고 또 어수선하므로 공이 이를 조정하기 위하여 공평ㆍ진실한 마음을 다하다가 얼마 안 되어 병으로 사체(辭遞)된 후로는 다시 세도(世道)로써 자임하지 않으니, 식자(識者)들은 공이 포부를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유감스럽게 여겼다.
병자년에 남한산성으로 대가(大駕)를 호종하여 군부(君父)의 화(禍)를 구하는 데 온갖 힘을 다하다가 대가를 따라 환도하여서야, 모부인이 강도(江都)에서 별세한 소식을 들었다. 장사를 마치고 반곡(返哭)한 뒤에 상이 기복(起復)을 명하고 의정부 우의정에 제수하므로 공이 너무 놀라고 황공하여 진심으로 사면을 청하였으나 상이 기어이 공을 기복시키기 위하여 공에게 가한 융숭한 예의가 고금에 없었다. 공이 드디어 가마에 실려 모부인의 무덤 옆에 나와서 전후 18차의 소를 올리자, 비로소 공의 사면을 윤허하였다. 공은 노쇠(老衰)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집상(執喪)하는 데 조금도 해태함이 없다가 병이 점차 악화되어 무인년(1638, 인조16) 3월 17일에 별세하였다.
공은 천품이 저절로 도(道)에 가까웠고 영예(英睿)가 어려서부터 성취되었으며, 청명 온수(淸明溫粹)하고 관후 화평(寬厚和平)하였다. 그러나 절제가 있어 지나치지 않고 또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일찍부터 현유(賢儒)를 따라 학문하는 방향을 듣고 나서, 글 읽는 것으로써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요체를 삼았는데, 그 글 읽는 방법은, 억지로 탐구하여 관통하려 하거나 괜히 천착하여 합리화시키려 하지 않고, 우선 정당한 문의(文義)부터 탐구해서 적절한 이취(理趣)를 체득하여, 고인(古人)의 본의를 마치 자신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처럼 만들었으므로, 문자(文字)가 자연스러워서 각기 제구실을 다하고 자신의 식견이 소명 통철(昭明洞澈)하여 조금도 막힘이 없었다. 김 선생(金先生 김장생(金長生)을 말함)이 일찍이,
“지국(持國)의 견해는 아무리 옛날 유현(儒賢)이라도 미치기 어렵다.”
고 말하고, 매번 의심난 곳이 있으면 으레 글로써 왕복하였는데, 공의 시원스런 논설은 별로 마음을 쓰는 것 같지 않으면서도 조사(措辭)와 이치가 아울러 적절하였으므로 김 선생이 흔히 자신의 소견을 버리고 따르곤 하였다. 공은 모든 글을 모두 관통하여, 수용하는 데 그 본원을 연구하는 자료로 삼았으므로 체험이 저절로 깊고 실천이 저절로 독실하였다. 때문에 내행(內行)도 순무(純茂)하여 모부인을 섬기는 데 조금도 그 뜻을 거스른 적이 없었고 백씨(伯氏)를 공경하는 데 마치 엄부(嚴父)를 받들 듯하였는가 하면, 병이 들었을 적에는 탕약을 먼저 맛보고 나서 드렸으며, 그윽한 규문(閨門) 안에서도 신독(愼獨)하는 공부를 버리지 않았다. 하인을 거느리는 데는 인자를 다하고 사람을 접하는 데는 공손을 다하였으며, 제사를 드리는 예절에 조금만 위배되는 바가 있어도 온종일 불안해하였다.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지성에서 유출되어, 가사(家事)는 일절 묻지 않고 생각이 온통 조정에 있었다. 언제나 재능을 겸양(謙讓)하여 마치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 같으면서도, 의리에 정당한 일에는 직접 뇌정(雷霆 임금의 진노(震怒))에 저항(抵抗)하여 아무리 맹분(孟賁)ㆍ하육(夏育)과 같은 용맹으로도 그 뜻을 빼앗을 수 없었고, 사수(辭受)의 절차가 매우 엄격하여, 사람들이 감히 비의(非義)로써 시험하지 못하였다. 때문에 훈로(勳勞)가 높은 경상(卿相)에다 왕실의 인척(姻戚)까지 겸하였어도 생활이 쓸쓸하여 마치 한사(寒士)의 집과 같았으며, 세상의 부귀 환락을 누리는 자 보기를 자신을 더럽힐 것같이 여겼을 뿐이 아니었다. 그러나 동료 사이에서 미워한 이가 없었던 것은, 공이 본시 심후 혼융(深厚渾融)하여 스스로 잘난 척하지 않은 때문이다.
일찍이 천하의 큰 본심은 임금의 한 마음에 있다 하고, 또 하늘의 도(道)와 임금의 덕은 그 요체가 신독(愼獨)하는 공부에 있다 하여, 매번 임금을 위하여 되풀이해서 진계(陳戒)하기를 ‘신하로서 임금의 잘못된 마음을 바로잡아 드리는 것으로써 급선무를 삼지 않고, 한갓 행사(行事)에만 국한하는 자는 다 구차할 뿐입니다.’ 하였으므로, 정심(正心)ㆍ성의(誠意)ㆍ수기(修己)ㆍ안민(安民) 등에 관한 말이 진강(進講)하는 때에 끊임이 없었어도, 독고(瀆告 재삼 되풀이해서 고하는 것)한다는 혐의를 받지 않았다. 일의 가부(可否)를 논하는 데는 마치 시귀(蓍龜 옛날에 점칠 때 사용하던 시초와 거북이)와도 같았으니, 이는 글을 관통함으로써 이치가 저절로 밝아진 것이다. 즉 이치 밖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또 문(文)과 도(道)를 두 가지로 보는 것을 말학(末學)의 누습(陋習)으로 단정하였는데, 이는 한구(韓歐 한유(韓愈)와 구양수(歐陽脩))로서도 어쩔 수 없었던 바이며, 주자(朱子)가 깊이 배척한 바이다. 어떤 이는 공을 보고, 유도(儒道)에만 전주(專主)하지 않은 점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혹 공이 워낙 고명(高明)한 때문에 선도(禪道)의 공허 정일(空虛靜一)을 좋아한 적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만년까지도 끝내 대중(大衆)에 화합되지 못해서인지 모르겠다.
또 어떤 이는 공을 보고, 모문자(某文字 삼전도 비문(三田渡碑文))를 의진(擬進)하지 않았어야 한다고 하는데, 공은 정묘년 변고가 있은 뒤부터 존주(尊周)하는 의리가 해와 별처럼 뚜렷했기에 이 문자(文字)에도 정전(鄭甸)ㆍ초이(楚夷)의 고사(故事)를 들어 스스로 호소하였다가 하마터면 사건이 발생할 뻔하였어도 이를 후회하지 않았다. 그리고 공은 이 일에 대해 스스로, 자신을 죄주어도 할 수 없고 자신을 알아주어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으니 아, 그 또한 슬픈 일이다. 또 어떤 이는 공을 보고, 한자(韓子 한유(韓愈))처럼 문장을 인하여 도(道)를 깨달았다고 하는데, 역시 잘못된 말이다. 공은 어려서 선사(先師 김장생(金長生)을 말함)를 따라 학문에 관한 본말(本末)ㆍ빈주(賓主)의 결과를 배웠으므로, 스스로 순서를 따라 공부를 힘쓰는 방향을 알았다. 다만 공의, 《중용(中庸)》에 대한 논설이 주자(朱子)의 장구(章句)와 약간 다른 점이 있다. 하지만 이는 공이 여기에 대해 우연의 의문이 있었으나 감히 우길 수는 없으므로, 연구하는 도중 다소 이의를 제기한 바가 있었을 뿐, 그 말이 겸손하고 그 예절이 공손하였으니, 이 점은 사실 주자(朱子)도 일찍이 허여(許與)한 바이다. 어찌 온릉(溫陵)이나 상산(象山 육구연(陸九淵))의 무리처럼 억지로 이설(異說)을 내세워 함께 맞서려는 자와 비하겠는가. 다만 고금의 글을 다 읽고 난 자라야 거의 공을 논평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문장을 논하자면, 혼연(渾然), 또는 호연(浩然)히 유전(流轉)하다가 담연히 마무리되었는데, 그 가운데에 만물이 포장(包藏)되어 그 변화가 그지없다. 그러나 반드시 경훈(經訓)에 의거하여 이치가 앞서고 의의가 정당하였고, 빈말[空言]이 아니었으니, 명 나라 대가(大家)들의, 화려하고 장대하여 마한(馬韓 사마천(司馬遷)과 한유(韓愈))과 맞설 수 있다고 장담하여도 그 실속이 없는 문장에 비한다면 훨씬 뛰어난데도 공은 아마 대수롭잖게 여겼을 것이다. 공은 위로 한구(韓歐 한유와 구양수(歐陽脩))를 넘겨다보았으면서도, 그 의리(義理)는 정(程子)ㆍ주(朱子)를 주장한 때문에 상하(上下) 5, 6백 년 사이에 공과 그 경중을 겨룰 이가 없다. 아, 참으로 성대하다. 대저 구양공(歐陽公 구양수)의 박흡(博洽)으로도 유원보(劉原父 송 나라 유창(劉敞))에게서 글을 읽지 않았다는 지적을 받았는데, 공도 가끔 구양공의 실수를 논하곤 하였으니, 가사 유공(劉公)이 공을 논한다면 어떠한 말이 나올는지 모르겠다. 우리나라 선비들이 변방에 나서 중국 문헌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으니, 개탄스런 일이다.
부인 김씨는 문충공(文忠公) 선원 상국(仙源相國 김상용(金尙容))의 딸로 단수 정정(端粹貞靜)하고 겸공 신외(謙恭愼畏)하며 부도(婦道)가 원만하여 도타운 덕행이 공과 아름다움을 짝하였다. 아들 선징(善澂)은 문과 출신으로 판서(判書)에 이르고 한 딸은 바로 우리 인선 성모(仁宣聖母 효종비(孝宗妃))이다.
공이 별세할 때 수십 길[丈]의 청홍(晴虹)이 옥상(屋上)에 가로 뻗쳐서, 공이 걸림없이 왔다가 걸림없이 떠나는 듯한 감응을 보였으니, 어찌 그만한 감응이 없었겠는가. 문집이 세상에 유행되고, 연역(演繹)하던 연주(連珠) 수십 편은 임종 하루 전에 절필(絶筆)하였다. 상이 영의정에 추증,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렸다. 묘(墓)는 안산(安山) 월곡리(月谷里) 앞에 안장되었고 어제(御題) 표액(表額)이 있다. 다만 신도비(神道碑)가 오래도록 건립되지 못하였다가 금년 봄에 성모(聖母)가 승하하기에 임하여 현종대왕과 함께 선징(善澂)에게 명하여, 공의 비명(碑銘)을 천신(賤臣) 시열에게 청하도록 하였다. 시열은 천박한 견문으로 너무도 황공하여 감히 이 소임을 감당할 수 없으나 감히 사양할 수도 없어, 삼가 위와 같이 서술하였을 뿐, 공의 선미(善美)를 찬양하는 데는 그 자격이 아니므로, 삼가 일시(一時) 명공 거경(名公鉅卿)들의 논평을 열거하였다. 즉 백사(白沙) 이공 항복(李公恒福)의 한창 시절에 공의 나이가 매우 적었으나 백사는 ‘모(某)의 문장 덕행은, 아무리 성문(聖門) 제자(諸子)의 서열에 두어도 서로 백중(伯仲)이 될 만하다.’ 하였고, 석주(石洲) 권필(權韠)은 말하기를 ‘탄탕 명백(坦蕩明白)하여 표리(表裏)가 통연(洞然)하였으니, 문장이 도리어 사람만 못하다.’ 하였으며, 상촌(象村) 신흠(申欽)ㆍ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ㆍ수몽(守夢) 정엽(鄭曄) 등 제공도 모두 나이를 생각 않고 서로 교유하면서 ‘상린(祥麟) 서봉(瑞鳳)과 같다.’ 하였고, 혹은 ‘어렸을 때의 본심을 상실하지 않은 이는, 다만 모가 거의 가깝다.’ 하였고, 혹은 ‘어린 임금을 부탁할 만하다.’ 하였고, 혹은 ‘마땅히 삼대(三代) 시대의 인물과 똑같이 논해야 한다.’ 하였다. 이 몇 마디의 말은, 후세의 상론(尙論)하는 이들도 거의 이를 모두 적절한 논평이라 할 것이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송 나라 구양공(歐陽公)이 / 有宋歐陽
한공(韓公)의 뒤 이었는데 / 繼昌黎賢
이공(二公)이 태어남은 / 而二子生
정주 이전에 있었네 / 在程朱先
공은 맨 나중에 나서 / 惟公則後
그 글 탐구 토론하고 / 探討其書
또 이로부터 소급해서 / 因茲沿溯
그 여서 정리한 뒤 / 遂理緖餘
세상에 범람한 / 然後汎濫
구류 백가(百家)를 / 九流百氏
은미한 이 마음으로 / 以一心微
천고의 은비(隱秘)한 데 쌓아 / 函千古祕
땅이 만물을 싣고 바다가 포용하듯 / 地負海涵
광대하고 충만하였네 / 溥博浩瀰
그 말과 그 행에 / 之言之行
그 본원(本原) 얻었으니 / 其原寔逢
집에 있거나 나라에 있거나 / 在家在邦
원망하는 이 뉘 있으랴 / 孰有怨恫
옛날 송 나라 사람이 / 維昔宋人
회옹에게 위협하기를 / 要晦翁云
정심이니 성의이니 하는 말 / 正心誠意
임금이 이미 싫어한다 하므로 / 上所厭聞
회옹이 개탄하면서 / 晦翁曰咨
이것 말고 또 뭐가 있겠나 했는데 / 捨此伊何
공의 보도(輔導)만이 / 惟公啓沃
시종 변함없었으니 / 諒亦靡他
아무리 이를 사법이라 하지만 / 雖云死法
이만한 활법(活法) 없고 / 莫如斯活
아무리 이를 상담이라 하지만 / 縱曰常談
그 묘리 뉘 맞설쏜가 / 其妙孰埒
아무리 한 구 이공(二公)의 설이 / 雖韓歐說
고금에 화려했지만 / 震耀今古
실제의 이치 따져 보면 / 原其實理
어찌 빈과 주 없을쏜가 / 豈無賓主
공의 학문만이 / 惟公所學
본과 말 있었으므로 / 寔有本末
문원 김 선생도 / 所以文元
공과의 토론 마지않았네 / 不厭商確
이것 저것 다 거둬들이는 데 / 俱收並蓄
공이 진정 그 사람이지만 / 公固有之
어찌 한갓 많은 걸 탐냈으랴 / 而豈徒多
의심난 건 사실 보류했거든 / 實闕殆疑
하물며 초학(初學) 후배들이야 / 況其初晩
어찌 그 이동 없을쏜가 / 不無異同
다만 먼 후세에 / 惟百世人
공의 시종 알게 되리 / 究厥始終


 

[주D-001]오패(五覇) : 춘추 시대에 제후(諸侯)의 맹주(盟主)로서 패업(覇業)을 이룩한 제 환공(齊桓公), 진 문공(晉文公), 진 목공(秦穆公), 송 양왕(宋襄王), 초 장왕(楚莊王)을 말한다.
[주D-002]초 영왕(楚靈王)이 …… 고사 : 춘추 시대 초 영왕이 장화궁(章華宮)을 지어 놓고는, 꾀를 내어 도망쳐 오는 자들을 받아들이므로 신무우(申無宇)의 한 문지기도 그곳으로 도망쳐 갔다. 이에 무우가 곧장 장화궁으로 들어가 문지기를 잡아냈는데 그곳의 유사(有司)가 왕궁(王宮)에서 사람을 잡아갔다 하여 그를 잡아다가 왕에게 바치자, 그가 법(法)의 정당성을 들어 말하므로 왕이 그를 석방한 일을 말한다. 《春秋左傳 昭公7年》
[주D-003]평원군(平原君)은 …… 않았는데 : 평원군은 전국 시대에 조 혜문왕(趙惠文王)의 아우 조승(趙勝). 위(魏)의 공자(公子) 위제(魏齊)가 범수(范睢)를 때려 그의 갈비뼈와 이를 부러뜨린 적이 있었는데, 그 뒤에 범수가 진(秦)의 재상이 되자, 위제가 그를 두려워하여 평원군의 집에 망명(亡命)해 있었다. 이에 진왕(秦王)이 범수의 원수를 갚아 주기 위하여 위제의 머리를 요구해 오자, 조왕(趙王)이 군사를 풀어 평원군의 집을 포위하고 위제를 잡으려 하였으나 평원군이 그를 내주지 않고, 그냥 도망치도록 내버려 둔 고사.
[주D-004]초창(草創)ㆍ윤색(潤色) : 《논어(論語)》 헌문(憲問)의 “정(鄭) 나라에서 외교 문서를 작성할 적에 비심(裨諶)이 초창(草創)하고 세숙(世叔)이 토론하고 자우(子羽)가 수정하고 자산(子産)이 윤색(潤色)한다.”는 공자(孔子)의 말을 인용한 것.
[주D-005]복의(濮議) : 송 영종(宋英宗)의 생부(生父) 복안의왕(濮安懿王)을 추존하는 전례(典禮)를 의논할 때 그에 대한 호칭으로 황백(皇伯), 또는 황친(皇親) 두 가지가 거론되었는데, 여회(呂誨)ㆍ여대방(呂大防)ㆍ범순인(范純仁) 등이 전자(前者)를 주장하다가 파직당한 일을 말한다. 《宋史 傅堯兪列傳》
[주D-006]정전(鄭甸)ㆍ초이(楚夷) : 춘추 시대에 정(鄭)은 왕성(王城)에 가까운 전복(甸服 주대(周代) 구복(九服)의 하나. 즉 사방 1천 리로 하는 왕기(王畿)를 중심으로 하여 사방 5백 리씩을 하나의 복(服)으로 하는 후복(侯服)ㆍ전복ㆍ남복(男服)ㆍ채복(采服)ㆍ위복(衛服)ㆍ이복(夷服)ㆍ진복(鎭服)ㆍ번복(藩服) 등이 있음)에, 초(楚)는 융적(戎狄)에 가까운 이복(夷服)에 속하는 제후(諸侯)인데, 초 장왕(楚莊王)이 도리어 정백(鄭伯)을 침략하였다. 여기서는 장유(張維)가 의진(擬進)한 삼전도 비문(三田道碑文) 전체의 뜻이, 인조(仁祖)가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당하였던 일을 정ㆍ초의 고사에 비유한 것을 말한다.
[주D-007]온릉(溫陵) : 천주(泉州)의 별호(別號). 송(宋) 나라 때 주희(朱熹)의 학설을 배격한 지천 주사(知泉州事) 임률(林栗)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