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지리 서원 전고 /우리 나라의 지세(地勢)는 어떠한가?

우리 나라의 지세(地勢)는 어떠한가 (백두대간)

아베베1 2011. 4. 21. 14:12

안동문화 7집
우리 나라의 지세(地勢)는 어떠한가?

나는 풍수학인(風水學人)이다. 풍은 바람이며 수는 물이다. 학인은 배우는 사람이니 풍수학인은 바람과 물을 배우는 사람이다. 바람과 물의 무엇을 알려는 것인가? 길을 알고자 한다. 바람과 물의 길을 우리 조상들은 ‘풍수지도(風水之道)’라 불렀다.
그런데 바람이 일어나는 곳도 땅이며, 물이 흐르는 곳도 땅이므로 풍수의 길은 땅의 길을 아는 것으로 귀결된다. 땅의 길을 지리(地理)라 한다. 지리란 땅의 뜻〔결, 이치〕이다. 바람과 물은 땅의 뜻을 따른다. 따라서 풍수는 지리다. 풍수지리는 우리 땅의 생김새와 그 위에서 일어나는 바람과 물의 길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의 경험이 쌓여서 이루어진 지혜다.
20세기 우리 민족 최대 비극 중의 하나는 전통의 단절이다. 우리는 우리의 조상들이 수천 년을 두고 쌓아온 생각과 지식을 하루아침에 팽개치고, 일본과 서양의 사고 방식과 지식으로 그 빈자리를 채우고 있다. 학교에서 배우는 『한국지리』는 그것 나름의 효용은 있을지라도 실제 우리의 땅과 물길을 이해하는 데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특히 일본인이 분류, 명명한 산맥 구분과 명칭에 이르면 엉터리라는 말 이외에는 형용이 불가능할 정도다.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은 그의 대표적 저술로 꼽는 『운해훈민정음(韻解訓民正音)』의 책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훈민정음 창제 이후 가장 깊은 문자론(文字論)을 전개한 조선중기의 대학자다. 조선 중기는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최완수(崔完秀)가 우리 문화의 황금기라 규정하고 ‘진경시대(眞景時代, 숙종 1675~정조 1800)’라고 이름 붙였듯이 조선의 문화가 난만하게 꽃 핀 시기이다. 진경시대는 조선에 전래된 주자의 성리학이 퇴계(1501~1570)와 율곡(1536년~1584)을 거쳐 조선성리학으로 확고한 기반을 잡고 이를 이념적 기반으로 하여 조선 고유의 문화를 창달한 시기다. 이 시대의 문화적 특징은 ‘우리 것, 즉 우리 땅에 대한 사랑’으로 압축된다. 여암은 영조의 명으로 『여지승람(餘地勝覽)』과 『동국여지도(東國餘地圖)』의 감수를 맡고, 『강계지(疆界志)』『도로고(道路考)』『산수위(山水緯)와 같은 저술을 남긴 것으로 유추할 수 있듯이 조선의 강토에 대해 남다른 애정과 지식을 갖고 있었다. 이런 그의 저술 가운데 『산경표(山經表)』가 있다.
나는 90년대 초『산경표』에 관한 기사와 산경도를 신문에서 접하면서 바로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 1987년 세계 최초의 의사 산악원정대인 전남의대 산악부를 이끌고 히말라야 렌포강(7,083m)등정에 성공한 의사이자 산악인인 조석필이 저술한 『산경표를 위하여』를 읽었다. 간략한 내용이었지만 우리 땅의 모습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길잡이로서 금 쪽 같은 책이다. 97년 조석필은 『산경표를 위하여』를 대폭 보완하여 『태백산맥은 없다』를 출간했다. 그가 스스로 『산경표』교도(敎徒)라고 밝혔듯이 우리 땅에 대한 그의 사랑은 각별하다. 그는 산악인으로서 산을 오르거나 산맥을 종주(縱走)하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우리나라 지도의 산맥 때문에 고생하다가 『산경표』를 만나 개안(開眼)을 했다. 그리고 10년! 그는 『산경표』와 함께 동고동락한 시간을 고스란히 『태백산맥은 없다』에 담았다. 이 책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꼭 읽어야 하는 책이다.

 

나는 언젠가는 반드시 ‘엉터리 산맥’ 대신에 ‘정확한 산경’이 지리교과서에 실리게 되리라 확신한다. 무작정 기다리기보다는 하루라도 빨리 그렇게 되도록 하는데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어서 이 글을 쓴다.
『산경표(山經表)』는 우리 나라의 산줄기〔山經〕를 족보를 적는 것처럼 정리한 책이다. 우리 땅의 모습은 지금 우리가 배우고 있는 ○○산맥이라는 말보다 조선시대에 이해하던 산경(山經)개념이 훨씬 더 정확하다. 『산경표』에 의하면 우리 나라 산세는 대간(大幹) 하나와 정간(正幹) 하나, 그리고 13개의 정맥(正脈)으로 나누어진다.
그중 백두대간은 우리 나라 땅을 동‧서로 크게 갈라놓은 산줄기를 일컫는 것으로 산줄기 중 가장 높으며 인체로 치면 허리뼈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이 대간의 흐름을 따라 큰 강의 발원처가 있으며 대간에서 나누어진 ‘큰 산줄기〔正脈〕’를 따라 강과 내가 형성된다. 백두대간은 우리 나라의 울타리다. 강의 울타리이며 생활과 문화의 울타리다. 대간과 정맥이강의 분수계(分水界)가 되고 그 안쪽이 ‘유역면적(流域面積)’이 되며 그 사이에 우리 나라의 10대 강이 다 흐르고 있다. 그러므로 국토 전반의 지세를 개관하고 우리의 역사와 언어, 각 지역의 생활과 문화의 차이를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간과 정맥 및 강의 흐름을 아는 것이 필수적이다.
『산경도』는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 1804~1866)의 환생(還生)이라고 여겨지는 이우형이 처음으로 제작했다. 이우형은 『대동여지도』복간(復刊)을 평생의 업으로 삼아 고산자가 목판으로 『대동여지도』를 간행한 지 124년이 지난 1985년『대동여지도』의 재판을 찍는데 성공했다. 그 간의 사연은 『태백산맥은 없다』에 자세하다.
『산경도』1번부터 13번까지의 정맥 이름을 차례로 알아보자. 청북, 청남, 해서, 임진북예성남, 한북, 한남, 금북, 한남금북, 금남, 호남, 금남호남, 낙남, 낙동정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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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대간(白頭大幹)

우리민족의 영산 백두산(白頭山, 2,744m)에서 시작되는 백두대간은 동해(東海)를 바라보며 포태산(胞胎山, 2,289m)를 거쳐 함경남도 갑산(甲山)의 두류산(頭流山, 2,309m)에 이르면서 압록강과 두만강의 유역을 동‧서로 나눈 뒤 북동쪽으로 장백정간을 솟구친다. 이어서 남서쪽으로 방향을 바꾼 대간은 후치재(厚致峙, 1,335m), 부전령(赴戰嶺, 1,445m)을 지나 진흥왕순수비가 있는 황초령(黃草嶺, 1,200m)으로 이어져 압록강의 남쪽과 동해로 들어가는 물의 분수령(分水嶺)을 이룬다.
다시 남쪽으로 차일봉(遮日峰, 1,743m), 철옹산(鐵瓮山, 1,085m)을 거쳐 평안남도 양덕군의 두류산(頭流山, 1,324m)에서 대동강의 남쪽 정맥인 해서정맥(海西正脈)을 서남쪽으로 만들고 원산(元山)의 서남쪽으로 이어지는 대간은 마식령(馬息嶺, 788m), 백암산(白岩山, 1,110m), 추가령(楸哥嶺, 752m)으로 연결되어 임진강 북쪽 유역의 경계를 이루며, 한강 북쪽 한북정맥의 시발점이 된다.
동해안을 따라서 국토의 척추처럼 이어지는 백두대간은 금강산(金剛山, 1,638m), 진부령(陳富嶺, 529m), 설악산(雪嶽山, 1,708m), 오대산(五臺山, 1,563m), 대관령(大關嶺, 832m), 두타산(頭陀山, 1,353m)을 거쳐 강원도 철암, 황지 고한, 사북, 상동에 이르러 함백산(咸白山, 1,573m)과 태백산(太白山, 1,567m)에서 힘을 모은 뒤, 남쪽으로 낙동강의 동쪽 분수 산줄기인 낙동정맥(落東正脈)을 만든다.
낙동정맥을 뒤로 한 채 대간의 본줄기는 절묘하게도 내륙 깊숙이 소백산(小白山, 1421m), 죽령(竹嶺, 689m), 새재(423m), 이화령(梨花嶺, 548m), 속리산(俗離山, 1,508m)으로 뻗어내려 한강과 낙동강을 남북으로 분수(分水)한다. 이로부터 추풍령(秋風嶺, 221m), 황학산(黃鶴山, 1,111m), 삼도봉(三道峰, 1,177m), 덕유산(德裕山, 1,614m), 육십령(六十嶺, 734m)을 거쳐 전라남도 영취산(靈鷲山, 510m)에서 호남정맥(湖南正脈)을 갈래하여 금강의 동쪽 분수 산맥을 만든 뒤 섬진강의 동쪽 분수령인 지리산(智異山, 1,915m)에서 끝이 나는 우리 나라의 거대 골격(骨格)이다. 지도상의 총 길이는 1,625km, 걸음으로 8,125리, 부지런한 등산가가 반 년을 넘게 걸어야 하는 거리지만 하루라도 빨리 걸었으면 여한이 없겠다고 조석필은 말한다.

대간의 시작이자 대륙으로 향하는 첫 산인 백두산의 영험스러움을 모르는 사람이 없듯이 대간의 끝인 지리산도 백두산만큼 신령스럽다. 지리산은 천왕봉(天王峰, 1,915m), 반야봉(般若峰, 1,752m), 노고단(老姑壇, 1,507m)의 3대 주봉을 비롯하여 해발고도 1,500m를 넘는 고봉들(帝釋, 烟霞, 三神. 촛대, 靈神, 德坪, 明善, 토끼봉 등)과 해발고도 1,000m 이상되는 준령 20여 개가 어우러져 거대한 산악군(山嶽群)을 형성한다. 천왕봉에서 노고단에 이르는 주능선의 길이가 42km이며 10km내외의 대소 능선도 15개를 헤아린다. 가을 단풍으로 유명한 피아골을 비롯하여 뱀사골, 칠선(七仙), 한신 등 4대 계곡 외에 심원(深院), 대성동(大成洞), 백무동(白武洞)등 20여 개의 크고 작은 골짜기가 특색을 자랑한다. 불일, 구룡, 용추, 칠선, 차발목, 삼홍소 등 이름 있는 폭포들이 계곡을 따라 산재한다. 울창한 자연림과 운무로 뒤덮인 영산(靈山)에 걸맞게 유서 깊은 고찰, 국보, 보물 등의 문화재도 풍성하다. 남서쪽의 제1관문 화엄사(華嚴寺)와 부도로 유명한 연곡사 및 천은사(泉隱寺), 실상사(實相寺), 쌍계사(雙磎寺) 등이 모두 신라 때 세워진 고찰이다. 명승과 비경을 열거한 지리산 10경(景)이 있는데 노고운해(老姑雲海). 피아골 단풍, 반야낙조(般若落照), 섬진청류(蟾津淸流), 벽소명월(碧沼明月), 불일폭포(佛日瀑布), 세석철쭉, 연하선경(烟霞仙景), 천왕일출(天王日出), 칠석계곡(七仙溪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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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협(過峽)

산은 살아있는 용이며 변화 무쌍한 존재다. 대간의 흐름을 상상할 때마다 나는 ‘용행호보(龍行虎步)’라는 말 이외의 다른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용행무애(龍行無碍)이니 무슨 걸림이 있으랴마는 용도 쉬어야 하고 힘을 모으기도 해야 하며 질풍노도처럼 치달리다가도 때로 산들바람이 되기도 하는 법이다. 용이 쉬는 곳이 혈이며 힘을 모으는 곳이 과협이다. 치달리는 곳이 산줄기고 산들바람 어리는 땅이 명당이다.
과협처는 ‘산줄기의 잘록한 부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용의 생사진가(生死眞假)를 판정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인자수지』에는 과협에 관한 설명이 매우 많은데 간단히 요약한다.

“땅을 살피는 것은 용을 보는 데 그 묘미가 있으며 용을 보는 기술은 협(峽)을 찾는 것에 있으니 협은 용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곳이다. 용행이 길면 반드시 과협이 많다. 그러면 기맥이 참되기 때문에 박환(剝換)이 바르고 깨끗하며 역량이 온전하게 되므로 참된 용은 과협이 많은 것을 말한다. 과협처는 ‘지기가 묶여 모아지는 곳’으로 맥을 바르게 진행시키고자 함이다. 그러므로 협을 살피는 것이 지리학의 관건이 되며 길흉선악이 협에서 결정된다.”

과협은 산줄기의 한 부분이 ‘장구허리’처럼 잘록한 곳으로 용이 힘차게 나아가기 위해서 힘을 모으는 곳이다. 마치 고무 호스로 물을 멀리 뿌리고자 할 때 끝 부분을 꾹 눌러서 잘록하게 만드는 것과 같다. 이처럼 과협은 기가 묶인 곳이기 때문에 ‘속기(束氣)’라고도 한다. 산줄기가 이어지면 반드시 능선과 계곡이 형성되고 능선 중에는 산마루와 안부(鞍部)와 고개가 있다. 일차적으로 고개 부분이 과협처지만 전부는 아니다. 대간을 넘는 많은 고개 중에서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고개는 대부분 과협이다.
고개가 과협일 가능성은 높지만 다른 부분의 능선에 비해 상대적으로 단순하게 낮기만 한 곳은 과협이 아니다. 완만한 경사를 그리면서 비교적 직선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고개는 과협이 아니라 안부일 가능성이 높다. 과협은 산의 밑 부분, 즉 평지가 깊고 가파른 계곡을 이루면서 거의 산의 중심부 근처까지 먹어들어 간다. 산의 능선 부근만이 낮은 것이 아니라 산의 아래쪽이 산의 중심 부근으로 압축되어 있다. 장구를 수평으로 이등분하여 놓아 둔 상태를 연상하면 된다. 이화령을 예로 들면, 문경 쪽에서 터널로 들어 갈 때나 정상에서 내려가면서 좌측 연풍(延豊) 쪽을 내려다보면 그런 사실을 알 수 있고 대축척 지도의 등고선을 보면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
과협은 어느 산줄기에나 있다. 크고 작은 차이가 있을 뿐 그 형태는 같다. 낮은 능선이나 작은 언덕, 특히 혈장 뒤의 내룡 부분에 있는 것은 일목 요연하다. 대간과 정간의 흐름을 설명할 때 왜 높은 산은 놓아두고 고개를 말하는지를 이해하기 바란다. 고개는 함부로 깎아서 훼손해서는 안된다. 그곳은 과협으로서 용이 속기로 힘을 모아 다시 전진하는 병참기지와 같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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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백정간(長白正幹)과 두만강(豆滿江)

장백정간은 백두대간의 두류산(頭流山, 2,309m)에서 갈라져 함경북도 지방의 지형을 북쪽 두만강(頭滿江)유역과 남쪽 동해안 지역으로 갈라 놓는 분수산맥(分水山脈)이다. 백두대간과 함께 북쪽으로 이어진 우리 나라 땅의 근골(筋骨)이면서 높고 강하여 정간(正幹)으로 구분된 듯하다.
함경남‧북도의 경계가 되는 두류산은 사화산(死火山)이다. 이곳에서 시작되는 정간은 동북쪽으로 괘상봉(掛上峰, 2,136m), 궤상봉(櫃上峰, 2,541m), 관모봉(冠帽峰, 2,541m), 고성산(高城山, 1,756m), 차유봉(車踰峰, 1,559m)까지 북상하다가 무산령(茂山嶺, 606m)에 이르러 점점 남쪽 해안으로 다가가 슬봉(1,048m), 백사봉(白沙峰, 1,138m), 송진산(松眞山, 1,164m)으로 이어져 두만강 하구의 서수라곶에서 끝난다.
장백정간이 분수산맥이 되어 만드는 강이 바로 우리 나라에서 세 번째로 긴 두만강이다. ‘두만강 푸른 물’은 백두산 동남쪽 대연지봉(大臙脂峰, 2,360m)에서 발원하는 석을수(石乙水)가 동쪽으로 흐르다가 함경북도 무산군의 연면수(延面水), 서두수(西頭水), 소홍단수(小紅端水)등과 합류하여 상류를 이룬다. 무산군의 북쪽에 있는 회령군의 보을천(甫乙川), 회령천(會寧川), 팔을천(八乙川)과 종성군의 서풍천(西豊川)이 중류로 들어가며, 두만강으로 흘러드는 하천 중 가장 길고 풍부한 수량으로 두만강의 하류로 들어가는 경원군의 오룡천(五龍川)과 ‘한 많은 아오지 탄광’으로 유명한 경흥군의 아오지천(阿吾地川)이 하류에서 합하여 서수라곶(西水羅串)에서 1,300리〔521km〕의 대장정을 동해와 만나면서 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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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북정맥(淸北正脈)과 압록강(鴨綠江)

정맥은 대간에서 갈라진 산줄기〔山經〕다. 『산경표』는 대간에서 갈라져 독자적으로 뻗어 가는 산줄기, 즉 정맥을 13개로 구분하였는데, 그 기준은 물길〔江〕이다. 우리 나라 강의 흐름을 이해하려면 산경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며 일본인이 구분한 산맥 개념으로는 도저히 강의 정확한 흐름을 이해할 수 없다. 백두대간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대간과 각 정맥의 사이에는 강이 형성되어 있어 그 흐름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다.
청북정맥은 함경남도 함흥(咸興) 서북쪽 백두대간의 마대산(馬垈山, 1,745m)에서 갈라져 낭림상(狼林山, 2,014m)을 거쳐 평안북도 신의주의 미라산(彌羅山)에서 끝난다. 이 정맥의 북쪽은 압록강의 남쪽 유역을 형성하고, 남쪽은 청천강의 분수산맥이 된다. 또한 이 정맥은 10세기 초 여진을 막기 위하여 천리장성을 축조한 곳이기도 하다.
압록강은 백두산의 최고봉인 백두봉
1)(白頭峰, 2,744m)의 남동쪽 약 8Km부근에서 발원하여 중국과 국경을 이루며 790Km를 흘러서 황해로 들어가는 우리 나라에서 제일 긴 강이다. ‘압록’이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물빛이 오리머리 빛과 같이 푸르다〔水色如鴨綠〕’고 하여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압록강은 아득한 옛날부터 우리 나라와 중국의 활동 무대이자 교류의 길이었기 때문에 패수(浿水), 염난수(鹽難水), 마자수(馬訾水), 청수(靑水), 엄리대수(奄利大水), 청하(靑河)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려졌다. 특히 중국은 압록강을 황하, 양자강과 함께 ‘천하의 삼대수(三大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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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남정맥(淸南正脈)과 청천강(淸川江)

청천강은 ‘살수(薩水) ’ 다. 살수는 ‘살수대첩’의 현장이다. 중국 역사상 난세 중의 난세였던 위, 진, 남‧북조를 끝내고 중국을 통일한 나라가 수(隋)다. 초대 황제인 문제(文帝) 양견(楊堅)은 581년 제위에 오른 뒤 604년 죽을 때까지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추진하여, 오랜 전란에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백성의 생활을 어루만져 민생을 두터이 하고 나아가 국토를 확장한 어진 임금이었다. 또한 현명한 아내의 견제로 궁녀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오직 황후에게만 다섯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둘째인 광(廣)은 자신의 본색을 숨기고 음모로 태자에 책봉된 뒤에 형인 용(勇)과 병석에 있는 아버지 문제를 시해하고 문제의 둘째 왕후인 선화부인(宣華夫人)을 차지하는 패륜으로 천자의 위에 오르니 그가 폭군으로 유명한 양제(煬帝, 604~618)다.
수양제는 장안(長安)에서 낙양(洛陽)으로 수도를 옮기고 거대한 궁성을 축조하여 민생을 어렵게 하더니 급기야는 순전히 유람을 하기 위하여 수 천리 남쪽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 광릉(廣陵)까지 운하를 뚫는 대역사를 일으킨다. 혹독한 중노동에 백성들이 수도 없이 죽어나감에도 불구하고 다시 만리장성의 증축 공사를 시작하니 백성의 원성은 날로 높아 가는데 자신의 학정을 간하는 사람은 불문곡직 처형했다.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고구려와 충돌하던 수양제는 드디어 612년 정원, 113만이 넘는 육군과 4만군의 해군을 이끌고 수륙 양로를 통하여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보급 물자를 운반하기 위하여 동원된 인원은 전부병 숫자의 배에 달하였으니 이는 그 때까지의 세계 역사상 최대 규모의 병력동원이었다. 손쉽게 승리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요하(遼河)를 건넌 수군이 요동성(遼東城)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고구려의 완강한 저항과 긴 보급로의 관리를 둘러싼 수군(隋軍) 지휘부의 혼란으로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지구전(持久戰)의 양상을 띄게 되었다.
초조해진 수양제는 우중문(于仲文)과 우문술(于文述)이 이끄는 30만의 별동대로 하여금 요동성을 우회하여 압록강과 청천강을 건너 곧바로 평양성을 공격하는 속전속결의 전술을 꾀했다. 이는 바다를 건너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온 해군과 연합하여 고구려의 수도를 공략하려는 계책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은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에 의하여 간파 당하고 거짓 퇴각전술에 속은 수군의 무리한 진군과 아군의 보급로 차단으로 싸움다운 싸움도 한번 해 보지 못한 채, 해군과 연합해보기도 전에 후퇴만을 거듭하다가 살수에서 전군이 궤멸하는 참담한 실패로 끝나게 되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고구려의 기상을 남김없이 발휘한 이 살수대첩을 학교에서 처음 배울 때, 을지문덕이 수나라 장군 우중문의 약을 올려 살수에서 수군의 명맥을 끊기 위해서 보낸 오언고체시(五言古體詩)를 배우면서 얼마나 가슴 설레였던가?

<興隋將于仲文> 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神策究天文 신묘한 계책은 하늘의 변화를 헤아리며
妙算窮地理 교묘한 계산은 땅의 이치를 꿰뚫었도다.
戰勝功旣高 싸움에서 이긴 공이 이미 높으니
知足願云止 만족할 줄 알고 바라건대 그만 두시지.

청남정맥은 대간의 마대산과 낭림산에서 청북정맥과 함께 갈라져 묘향산(妙香山, 1,909m), 용문산(龍門山, 1,180m)을 거쳐 강룡산(降龍山, 446m), 만덕산(萬德山, 243m), 광동산(廣東山, 396m)으로 이어져 강서군 남포(南浦)의 대동강 북쪽 하구에서 끝난다.
『향산록(香山錄)』에서 ‘북방의 제일’이며 ‘일국의 명산’이자 ‘제불(諸佛)의 대찰(大刹)’이라고 칭송한 묘향산과 보현사(普賢寺)를 이 정맥에서 만날 수 있다. 묘향이란 『아함경(阿含經)』에 나오는 불교 용어로 기향(奇香)을 뜻하는데, 이 향은 바람이 불 때에 바람 부는 반대 방향에서도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기이한 향이다. 우리 나라 4대 명산을 가리키는 말로 널리 알려진 것이 동금강(東金剛), 서구월(西九月), 남지리(南智異), 북묘향(北妙香)이다. 이 중 묘향산은 서산대사가 “빼어나게 아름다워 수려하면서도 웅장한 산〔秀而壯〕”이라고 극찬하여 더욱 유명하다. 일연의 『삼국유사』에서 단군의 아버지인 환웅(桓雄)이 내려온 ‘신단수(神檀樹)아래’가 이곳 묘향산이라고 생각했으니 일찍부터 우리 민족이 경배의 대상으로 삼아온 신성한 산〔神山, 名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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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서정맥(海西正脈)과 대동강(大洞江)

해서정맥은 우리 나라 북부지방과 중부지방의 경계가 되는 산줄기다. 동해의 원산만에서 서해의 장산곶까지 이르는 이 정맥의 이남과 이북은 겨울철 평균 기온이 2℃ 이상의 차이가 있다. 진달래의 개화도 5일 이상의 차이가 나서 자연히 생활과 문화의 권역이 나누어진다.
해서정맥은 백두대간의 두류산(頭流山, 2,309m)에서 출발한다. 이산은 원산 서쪽에 있으며 함경남도와 평안남도에 걸쳐있다. 대간에는 두류산이라는 같은 이름의 높은 산이 셋 있다. 앞에서 살핀 함경도 장백정간과 이곳과 대간의 끝에 있는 지리산이다.
‘두류’란 산(山)을 뜻하는 우리말 ‘두래’에서 나온 이름이다. 두래는 (달)의 분음(分音)으로 두리, 두류 등으로 변하였다. 한자를 붙여 지명을 만들 때 두류(頭流, 豆流, 斗流, 頭留), 두성(頭星)등으로 표기된다. 이중 두류(頭流)는 ‘백두산의 맥세가 흘러내려서 이루어진 산’이라는 설도 있다.
황해도를 남북으로 크게 가르며 진행하는 해서정맥은 화개산(華開山, 1,041m), 언진산(彦眞山, 1,120m), 천자산(天子山, 756m)을 지나, 별로 높지도 않은데 이름은 무시무시한 멸악산(滅惡山, 816m)를 거쳐, 길을 깨친 달마산(達摩山, 596m)이 스승인 불타산(佛陀山, 608m)에 경배하며 ‘장산곶’에 이른다.

“황해도는 동으로 함경도와 강원도에 인접해서 마식령 산맥의 산세에 닿고, 남은 예성강을 지경으로 경기도의 들판과 만나며 북은 대동강의 건너 평안도를 바라보는데, 서쪽으로는 바다로 솟아나가 중국의 산동을 마주 보고 있다. 들판도 있으나 험한 산에 골짜기도 깊고, 오랫동안 수부(首府)에 가까워서 예부터 관의 흑정에 민감했으며, 도둑이 많아 조정을 괴롭히곤 하였다. 팔대 명산의 하나이며 태고적 단군의 도읍지인 구월산은 그 줄기가 남서쪽으로 우회하여 추산을 따라 불타산에 이르고, 막바지로 그친 곳에 장산곶(長山串)이라는 험한 해안 마루턱이 있으니 옛노래에,

장산곶 마루에 북소리 나더니
금일도 상봉에 님만나 보겠네
갈길은 멀구요 행선은 더디니
늦바람 불라고 서낭님 조른다.

하던 곳이 그곳이다. 그곳에 지방민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이 있기에 기록하였으되,”

‘장산곶 매’의 전설로 시작되는 『장길산(長吉山)』을 내가 어찌 이러쿵 저러쿵 하리오. 다만 한 마디, “장산곶은 해서정맥이 끝나는 곳이다.”
‘봉이 김선달’이 팔아먹은 대동강은 길이 438Km로 우리 나라에서 다섯 번째로 긴 강이다. 단군왕검이 도읍한 이래 수천 년 동안 서경(西京)으로 불린 평양은 대동강의 젖줄로 그 풍요로움을 꽃피웠다. 얼마나 좋은 곳이기에 ‘평양감사도 제 싫으면 못한다.’는 속담까지 낳았을까? 오랜 역사만큼 대동강과 평양성에 얽혀 있는 다양하고 흥미로운 사연들은 언제까지나 우리에게 생생할 것이다.
고교시절에 나는 교과서에 나오는 산문과 시를 열심히 외웠다. 입시공부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재미가 있었다. 『청춘예찬』『신록예찬』『기미독립선언문』『훈민정음해제』에서『별 헤는 밤』을 비롯한 숱한 시와 시조들, 『두시언해』의 한시와 『용비어천가』까지.
그러나 이제는 그것들 중 아직까지 전문을 외우는 것은 거의 없다. 하지만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은 시가 남호(南湖) 정지상(鄭知常, ?~1135)의 『송인(送人)』이다. 지금 누구의 번역인지는 모르겠지만 한시와 번역시를 함께 외우며 관념으로나마 임을 보내는 아픈 마음을 내 것인 양 여겼었다. 그래서일까? 내가 한 번도 본적 없고, 어쩌면 평생 볼 것 같지도 않은 대동강이 지금도 언제나 그 시와 함께 있다.

<送人> 임을 보내며
雨歇長堤草色多 비 개인 언덕 위 풀빛 푸른데
送君南浦動悲歌 남포로 임 보내는 구슬픈 노래.
大洞江水何時塵 대동강 물이야 언제 마르리
別淚年年添綠疲 해마다 이별 눈물 보태는 것을.

아! 열 일곱, 풀잎 같은 그 때, 나는 대동강 가에서 눈물 지으며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랑했던 임을 떠나 보냈다. 그 때 남호는 세월을 거슬러 내 친한 벗이었으며 대동강 언덕은 잦은 이별로 익숙한 자리였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아련한 그 시절이 너무도 선명하게 기억 속에 자리한다. 이 시, 「임을 보내며」와 함께.
아직은 갈 수 없는 곳이지만 최창조와 유홍준은 북한을 다녀와서 각각 「중앙 M&B」에서『북한 문화유사 답사기』와『나의 북한 문화유적답사기』를 펴냈다. 이를 통해 지금은 대동강과 평양의 모습을 짐작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안동문화 7집
● 임진북예성남정맥(臨津北禮成南正脈)과 예성강(禮成江)

이 정맥은 해서정맥의 화개산(華開山, 1,041m)에서 남서쪽으로 흘러 임진강과 예성강의 유역을 동서로 갈라놓는 산줄기이다. 학봉산(鶴峰山, 664m), 수룡산(秀龍山, 717m)을 지나 별로 높지도 않으면서 감히 ‘하늘을 만진다’는 천마산(天摩山, 762m)거쳐 송악산(松岳山, 488m)에서 끝은 맺는데, 그 지점은 임진강과 한강의 합수점이며 개성의 남산인 진봉산(進鳳山, 310m)이다. 송악산은 고려의 도읍지인 개성(開城)의 진산(鎭山)이다. 개성이 고려의 수도로서 정해지는 과정과 풍수적 입지에 대해서는 최창조의 『한국의 풍수사상』에 자세하게 실려있다.
예성강은 황해도 곡산군(谷山郡) 대각산(大角山, 1,277m)에서 발원하여 황해도 동부를 남류하여 서해로 흘러드는 강이다. 총 길이 174Km로 우리 나라 10대강의 끝자리를 차지한다. 4계절에 걸쳐 수량이 풍부하고 하구에서 100리 거리인 한포(汗浦)까지 선박의 항해가 자유로워서 수운이 발달하였다. 고려가 송나라와 교섭할 때 이곳에서 모든 배를 띄웠기 때문에 ‘예성(禮成)’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사대(事大)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예성강벽란도’ 고교 시절 예성강은 늘 ‘이도령과 성춘향’처럼 벽란도와 짝을 이루어 기억하였으며 지금도 연결되어 있다. 당연히 벽란도는 예성강 하구 가까이 있는 섬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벽란도(碧瀾渡)는 예성강의 하류에 있는 하항(河港)으로 고려의 수도인 개성의 관문이다.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외국의 사실과 문물이 오가는 국제적 교역지점이었으며 고려 제일의 하항이자 유일한 국제항구로 크게 번영했다. 또한 개경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건너야 하는 나루로서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예성항(禮成港)이었다가 송나라 사신이 묵던 ‘벽란정(碧瀾亭)’이라는 관사(館舍)이름을 따서 ‘벽란도’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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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북정맥(漢北正脈)과 임진강(臨津江)

임진강은 다스려지지 않은 강이다. 아직까지는 다스릴 수 없는 강이다. 나는 임진강을 생각하면 슬프다. 분단의 현장인 탓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수재(水災)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의 여름철 집중호우는 가히 ‘대책이 없다’는 표현이 가능할 정도다. 어느 곳에 비를 퍼부을지 정확한 예측도 불가능하거니와 무엇보다도 단 시간에 내리는 강우량이 공포스러울 정도다. TV에서 임진강 중하류의 연천, 포천, 동두천과 하류의 문산이 물에 잠기는 것을 애 타는 마음으로 지켜보면서 임진강을 속수무책으로 방치해야 하는 분단의 비극이 슬프다. 임진강은 아직도 ‘버림받은 강’으로 흐른다.
함경남도 마식령(馬息嶺, 778m)고개에서 시작하여 서남쪽으로 흐르는 임진강은 강원도 최북단이자 동시에 비무장지대의 이북을 흐르는 고미탄천(古味呑川)과 평안천(平安川)을 받아들인 뒤 연천에서, 평강(平康)과 철원(鐵原)을 지나온 한탄강(漢灘江)과 합류한다. 아직은 갈 수 없는 땅이지만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무덤이 거기 있으며 절경으로 유명한 연천군의 고랑포(高浪浦)를 지나 문산 일대의 저평지를 흐르는 문산천과 손을 잡아 넓은 경기평야를 만들고 하구(河口)에서 한강과 함께 몸을 썩으며 황해로 들어간다.
한북정맥은 대간의 추가령(楸哥嶺, 752m)에서 갈라져 남쪽으로 임진강과 한강의 하구로 이어진다. 중부지방의 내륙에 위치하며 비교적 높은, 해발 1,000m급의 산으로 연결되면서 의정부로 이어져 서울의 북쪽으로 들어온다. 동쪽은 회양, 화천, 가평, 남양주 등을 이루고 서쪽은 평강, 철원, 포천, 양주 등의 경계를 이룬다.
추가령을 출발한 정맥은 적근산(赤根山, 1,073m), 대성산(大成山, 1,175m), 광덕산(廣德山, 1,047m), 국망봉(國望峰, 1,168m), 운악산(雲岳山, 935m)을 지나 도봉산(道峰山, 740m)을 일으킨다. 내가 한번도 오르지 못한 도봉산에 대한 기억은 고등학교 때 외운 박두진의 시, ‘도봉’과 함께 있다.

“산새도 날아와/우짖지 않고,/구름도 떠 가곤 오지 않는다.//인적 끊인 곳/홀로 앉은/가을 산의 어스름.//호오이 호오이 소리 높여/나는 누구도 없이 불러 보나//울림은 헛되이/빈 골골을 되돌아올 뿐.//산그늘 길게 들이며/붉게 해는 넘어가고,/황혼과 함께/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삶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사랑은 한갓 괴로울 뿐./ 그대 위하여 나는 이제도, 이/긴 밤과 슬픔을 갖거니와,//이 밤을 그대는, 나도 모르는/어느 마을에 쉬느뇨?”

도봉을 일으킨 정맥은 서울의 진산(鎭山)인 북한산(北漢山, 837m)으로 이어진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의 삼각산이 북한산을 가리킨다는 것을 안 것은 그 시조를 외우고 나서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북한산을 진산으로 한 서울은 조선 5백년의 수도일 뿐만 아니라 천만의 인구가 밀집한 이 나라 최대의 명당인 서울의 지형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이제 우리 모두의 상식이 되었다. 아래의 「서울 부근지형도」는 최창조의 『한국의 풍수사상』에 실려있다.
서울의 조산(朝山)인 관악산(冠岳山, 629m)은 한남정맥(漢南正脈)에 있다. 산은 물을 넘지 않는 법이다. 산이 비록 서로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 있더라도 물을 사이에 두고 있으면 서로 계보가 다른 산이 된다. 이것이 또한 산경으로 분류하는 것이 산맥으로 구분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산줄기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는 뜻이다.
관악산은 화성(火星)이다. 화기(火氣)를 많이 품고 있는 산이다. 화성의 산은 대체로 산의 정상부가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불꽃가루처럼 뾰족하다. 관악산의 정상이 불꽃같기도 하거니와 한강 부근에서 보면 산 전체가 마치 거대한 불기둥과 같다. 이 거대한 화산의 화기가 서울에 화재를 자주 일으키게 된다고 판단한 조선 왕조는 여러 가지 풍수적 압승(壓勝)을 가하게 되는데 산의 중턱에 물동이를 묻고 남대문의 현판인 숭례문(崇禮門) 글씨를 세로로 쓰고 경복궁 앞에 수신(水神)인 해태를 설치했다. 그것들이 화기를 누를 수 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수도서울 시민으로 하여금 ‘불조심’을 하게 하는 방법으로서는 아마 그보다 더 좋은 방법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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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남정맥(漢南正脈)과 한강(漢江)

한남정맥은 한남금북정맥의 끝인 칠현산(七賢山, 516m)에서 시작된다. 이 정맥은 대간의 속리산에서 출발한 한남금북정맥을 이어서 줄곧 서북쪽으로 치달아 백운산(白雲山), 성륜산(聖倫山), 보개산(寶蓋山)으로 이어져 한강유역의 남쪽 분수령이 된다. 수원의 광교산(光敎山, 582m), 안양의 수리산(修理山, 395m)을 지나서 김포평양의 야트막한 언덕과 들판을 누비다가 소래산(蘇來山), 성주산(聖主山, 217m), 계양산(桂陽山, 395m), 가현산(歌鉉山, 215m),을 만든 뒤, 마지막 힘을 모아 문수산성이 있는 문수산(文殊山, 376m)을 일으켜 강화도를 바라보며 한양의 관문이 된다.
한강은 남쪽 강과 북쪽 강이 양수리(兩水里)에서 만나 ‘한 강(一江)’이 되고 ‘한강〔大江〕’이 된다. 한강은 언제나 ‘오! 한강’이며 『오! 한강』은 허영만 화백의 걸작인 만화 제목이기도 하다. 주인공 이름이 ‘이 나라의 물과 땅’, 곧 ‘이 강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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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남정맥(錦南正脈)과 금강(錦江)

이 비단 같은 정맥은 대간의 영취산(靈鷲山, 1,076m)에서 갈라진 금남호남정맥의 끝인 주화산에서 운장산(雲長山, 1,126m), 왕사봉(王師峰, 634m), 금산의 대둔산(大屯山, 878m)을 거쳐 공주의 계룡산(鷄龍山, 828m)에 이른다. 계룡산은 예로부터 오악(五嶽)으로 꼽혀왔으며, 주봉인 천황봉(天皇峰, 845m)에서

연천봉(連天峰, 739m), 삼불봉(三佛峰, 775m)등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마치 ‘닭의 볏을 쓴 용과 같다’해서 계룡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특히 계룡산 신도안은 풍수지리설에서 말하는 이상적 지형으로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하나로 꼽히며 계룡산은 나말여초(羅末麗初)부터 치제(致祭)하던 명산이다. 조선을 창건한 이태조가 계룡산을 답사하고 이 곳에 도읍을 정하기로 하고 공사를 시작했으나 수도로는 부적당하다는 이설(異說)이 나와 1년만에 공사를 멈추었다. 한양이 도읍지로 결정된 뒤에도 계룡산은 늘 신비로운 영산으로 여겨졌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룡산과 신도안 일대는 도참풍수설에 의한 『정감록(鄭鑑錄)』, 즉 ‘정씨왕조세계통일정부’가 세워진다고 보는 감결(鑑訣)의 모태다. 또한 주변에는 신흥 종교 단체가 곳곳에 들어서 있다. 계룡산에는 정말 신령한 기운이 있을까?
1988년 9월 8일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데이비스 분교와 자연체계연구소가 후원한 세미나의 주제는 ‘지령(地靈, The spirit of place)'이었다. 80여 개의 주제를 토론한 결과 중에서 첫 번째를 살펴보자.

“세계 모든 민족의 고유 문화에는 어떤 장소에 ‘성스러운 힘’이 있다고 하는 믿음이 공통적으로 존재한다. 그러한 믿음은 그 민족이 공간 행위에 있어서 의미의 초석이 된다. 그러나 그와 같은 땅이 갖고 있는 성스러운 힘의 가치와 의미 체계를 현대 사회에서 합리적으로 해석하고 평가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계룡산을 지난 정맥은 부여의 진산인 부소산(扶蘇山, 106m) 백마강(白馬江)의 조룡대(釣龍臺)에서 백제 멸망의 슬픈 전설과 함께 끝난다.
옛날의 금강(錦江)은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지만 이제부터 금강은 제홀로 흐를 수 없다. 영원토록 신동엽(申東曄, 1930~1969)의 장편 서사시 『금강』과 함께 흐른다.

“우리들의 어렸을 적/황토 벗은 고갯마을/할머니 등에 업혀/누님과 난, 곧잘/파랑새 노랠 배웠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녹두밭에 앉지 마라./녹두꽃 떨어지면/청포장수 울고 간다.// …

우리들은 하늘을 봤다/1960년4월/역사를 짓눌던, 검은 구름장을 찢고/영원의 얼굴을 보았다.// …잠깐 빛났던/당신의 얼굴은/영원의 하늘,/끝나지 않는/우리들의 깊은/가슴이었다. …

일본 군대는/1894년9월/충청남도 서산에 상륙,/금강 방면으로 내려왔다.// …일어나자,/조국의/아들딸들아,//일어나자/반도의/중생들아.//목숨 살아 있는/동학교인들이여, 모든 농사꾼이여//일어나라,/조국의/모든 아들딸들이여,//손톱도 발톱도/돌도, 산천도, 이 나라의 기름 먹은/흙도 바람도/새도 벌레도 일어나라,//두레꿈이여/조국이여/너를 부른다, 두레꾼이여,/녹두알이여, 너를 부른다,// 땅도 강물도/깃 털고 중천 높이 솟아라/너를 부른다.//너의 피를 부른다/여문 뼈, 노랑수건 휘날리며 오라/농민이여.// …사흘 밤낮의 싸움 끝에/전봉준은/총 후퇴령을 내렸다,// …
1894년 3월/우리는/우리의 가슴 처음/만져보고, 그 힘에/눌라./몸뚱이, 알맹이채 발라,/내던졌느니라./많은 피 흘렸느니라.// …겨울 속에서/봄이 싹트듯/우리 마음 속에서/연정이 잉태되듯/조국의 가슴마다에서,/혁명, 분수 뿜을 날을/오리라.// …논길,/서해안으로 뻗은 저녁노을의/들길, 소담스럽게 결실한/붉은 수수밭 사잇길에서/우리의 입김은 혹/해후할지도/몰라.”

언제쯤이어야 껍데기들이 꺼지고 알맹이가 대접받는 세상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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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남정맥(湖南正脈)과 영산강(榮山江)

호남정맥은 ‘L’자 모습이다. 금남호남정맥에서 갈라진 정맥은 만덕산(萬德山, 762m), 단풍으로 유명한 내장산(內藏山, 763m)을 거쳐서 ‘그 어떤 산과도 비교되기 싫어’ 무등(無等)이 된 빛고을, 광주의 진산인 무등산(1,187m)을 지난다. 천운산(天雲山, 602m), 제암산(帝岩山, 779m)을 거쳐 사자산(獅子山, 666m)에 다다른 정맥은 동쪽으로 머리를 돌려 일림산(日林山, 664m), 존제산(尊帝山, 704m)을 만들고 다시 조계산(曹溪山, 884m)을 일으킨다.
조계산은 전라남도 승주군 송광면, 쌍암면, 주암면 일대에 걸쳐 있는 산이다. 예로부터 소강남(小江南)이라 불려 왔을 만큼 경치가 뛰어난 이산은 광주의 무등산, 영광의 월출산과 함께 삼각형을 이루고 있는 명산이다. 고온 다습한 해양성 기후의 영향을 받아 산 전체가 울창하도록 수림이 무성하고 수목의 종류가 많아 전라남도 채종림 지대로 지정되어 있다. 그뿐 아니라 봄철의 벚꽃, 동백, 철쭉, 여름의 짙은 숲, 가을의 단풍, 겨울의 눈꽃 등 두루 아름다워 사계절 내내 뛰어난 풍치를 보이고 있다.
조계산 동쪽에는 태고총림(太古叢林)이자 건축가 김봉열이 “한국의 최고(最高)이며 가장 잘 보존되었으며 최후까지 보존될 사찰”이라고 갈파한 선암사(仙巖寺)가 있다. 또한 이 산의 서쪽에는 송광사(松廣寺)가 있다. 송광사는 우리 나라 삼보 사찰 중 승보사찰이다. 삼보(三寶)는 불교의 세 가지 보배를 가리키는데 깨달은 사람, 곧 부처를 가리키는 불보(佛寶)와 부처의 가르침을 적어 놓은 불경, 즉 법보(法寶) 및 그 가르침을 따르는 교단인 승보(僧寶)를 말한다. 양산 통도사(通道寺)는 불상 대신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셔놓은 금강계단(金剛階段)이 있으므로 불보사찰이라 부르며 합천 해인사(海印寺)는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장경각(藏經閣)이 있어 법보사찰이 되었으며 송광사는 우리 나라 조계종의 창시자인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1158~1210)이후 15국사(國師)가 배출되어 승보사찰의 영광을 입었다. 또한 사찰의 건물만도 쉰 다섯 채에 이르는 우리 나라 최대 규모의 사찰이다.
조계산을 지난 호남정맥은 도솔봉(兜率峰, 1,123m)을 지나서 전라남도의 가장 높은 독립봉인 백운산(白雲山, 1,218m)를 만들고 섬진강의 만덕산(萬德山, 197m)에서 끝난다.
나는 영산강(榮山江)에 대하여 아무런 이미지도 없다. 또 굳이 책을 찾아서 이런 저런 지식을 구축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영산강의 하구에는 목포(木浦)가 있고 목포에는 『목포의 눈물』이 있어 강과 함께 흐른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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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남정맥(洛南正脈)과 섬진강(蟾津江)

지리산 영신봉(靈神峰, 1,652m)에서 출발한 이 정맥은 하동의 옥녀산(玉女山, 614m), 함안의 여항산(餘航山, 744m), 창원의 구룡산(九龍山, 434m), 불모산(佛母山, 694m)을 지나서 김해시의 분성산(盆城山, 360m)에서 끝나는 약 200km의 산줄기다.

섬진강의 섬(蟾)은 두꺼비다. 도대체 두꺼비와 이 강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고려 우왕(禑王) 11년(1385년) 왜구가 섬진강 하구에 침입했을 때, 수십 만 마리의 두꺼비가 울부짖어서 왜구가 광양(光陽) 쪽으로 피해갔다는 전설이 있어 이 때부터 두꺼비 섬(蟾)‘자를 붙여 섬진강으로 했다고 전한다.
섬진강은 호남 동부 지역을 남쪽으로 흐르는 강으로 길이는 212km이고, 유역 면적은 약 4,897km에 이른다.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의 팔공산(八空山)에서 발원하여 임실군의 갈담 저수지로 들어간다. 하류는 전라남도와 경상남도의 경계를 이루며 광양만(光陽灣)으로 흘러드는데 상류인 임실군의 섬진강댐 건설로 강물이 대체로 산지를 흐르고 있어 유역에 이렇다 할 평야가 없다. 섬진강의 다른 이름으로 모래가람, 다사강(多沙江), 사천(沙川)이 있는 데서 짐작되듯이 고운 모래로 유명하다. 또한 구례(求禮)부터 하동(河東)까지 강을 따라 가는 길과 섬진강의 풍광은 예로부터 시인묵객이 다루어 노래하던 절경이다. 그것은 이어받아 김용택도 줄기차게(?) 섬진강을 노래부른다.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쌀밥 같은 토끼풀꽃/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에/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어둠을 끌어다 죽이며/그을린 이미 훤하게/꽃등도 달아준다/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지리산 뭉퉁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일어서서 껄껄 웃으며/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보면/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이마 끄덕이는/고개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어디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섬진강1」전문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두만강은 가수 김정구의 강이며 대동강은 봉이 김선달의 강이다. 금강은 영원히 신동엽의 강이지만, 섬진강이 김용택의 강이 될 수 있을까? 섬진강은 여전하지만 김용택은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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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동정맥(洛東正脈)과 낙동강(洛東江)

백두대간이 태백산에서 내륙으로 몸을 틀면서 동해를 따라 새로운 산줄기를 만든다. 이 산줄기가 낙동정맥(洛東正脈)으로 태백산 줄기인 구봉산(九峰山)에서 남쪽으로 갈라져 태백시의 백병산(白屛山, 1,259m), 통고산(通古山, 1,067m), 울진의 백암산(白岩山, 1,004m), 청송의 주왕산(周王山, 907m), 경주의 단석사(斷石山, 829m), 언양의 가지산(迦智山, 1,240m), 울산의 취서산(鷲棲山, 1,059m), 부산의 금정산(金井山, 802m)을 거쳐 송도해수욕장 옆, 다대포의 몰운대(沒雲臺)에서 끝나면 그 길이는 약 370km이다.
낙동강은 백두대간, 낙동정맥, 낙남정맥의 안쪽을 흐르는 강이다. 흔히 ‘낙동강 칠백리’라 하는 것은 안동에서 부산까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안동에서 발원지인 황지(黃池)까지가 육백리이니 낙동강의 총 길이는 천 삼백 리다. 낙동강의 특징 중 눈 여겨 볼 것은 강의 경사도가 극히 완만하여 급류나 폭포가 없다는 것이다. 특히 하구인 부산과 상류인 안동의 하상고도(河床高度)가 비슷하여 과거에는 안동까지 배가 올라올 수 있어 영남 내륙 수로 교통의 동맥이 되었다. 유로(流路)의 경사가 완만하기 때문에 강의 흐름이 느리고 굴곡이 심하여 뱀이 기어가는 것 같은 사행천(蛇行川)이 되었으며 강의 전 지역에서 태극 형상의 지형이 많이 생겼다.
낙동강에 왔으니 강바람 맞으며 노래 하나 부르자, “두만강만 강이냐, 낙동강도 강이다.”

낙동~강 강바람이 치마폭에 스치면
군인간 오라버니 소식이 오네
큰애기 사공이면 누가 무라나
늙으신 부모님은 내가 모시고
에헤야 데헤야
노를 저어라 삿대를 저~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