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요람(歷代要覽)/성화(成化)

성화(成化) 명 헌종(憲宗), 세조(世祖) 11년(1465년)

아베베1 2011. 4. 27. 14:08

역대요람(歷代要覽)
성화(成化) 명 헌종(憲宗), 세조(世祖) 11년(1465년)


원년(元年) 을유 세조 11년.
2년 처음으로 변정도감(辨正都監)의 새 인장(印章)을 쓰고 관제를 고쳤다.
3년 형조도감(刑曹都監)을 고쳐 장례원(掌隷院)이라 하고, 2월 9일부터 장례원의 인장을 비로소 사용했다.
○ 길주(吉州)의 역적 이시애(李施愛)가 반역(叛逆)하므로 구성군(龜城君)이 이준(李浚)과 어유소(魚有沼) 등에게 명하여 토벌하여 평정하도록 하였다.
○ 요동 백호(遼東百戶) 백옹(白顒)이 칙유(勅諭)를 가지고 왔는데, “건주위(建州衛) 이만주(李滿住) 등을 협공(挾攻)하라.”하였다. 어유소와 남이(南怡)를 파견하여 건주위의 모든 성채(城寨)를 공격하여 이만주와 그의 아들 이고납(李古納) 등을 죽이고 사람과 가축을 사로잡았으며, 집과 창고를 불태우고, 잡혀간 중국의 남녀를 구출해 내고는 나무 껍질을 베끼고 쓰기를, “모년 모월 일, 조선 대장 어유소는 건주를 멸하고 돌아가노라.”하였다. 중국의 군사들이 뒤에 이르러 베낀 나무에 쓴 글씨를 보고 자세히 상주(上奏)하였다.
4년 황제가 우리나라가 이만주를 토벌하였으므로, 내관(內官) 강옥(姜玉) 등을 보내어 칙서를 내려 포상(褒賞)하고, 은(銀)과 옷 안팎감을 하사하였다.
○ 세조(世祖)가 승하(昇遐)하고 예종대왕(睿宗大王)이 즉위하였다.
5년예종 양도 흠문성무 의인소효대왕(睿宗襄悼欽文聖武懿仁昭孝大王) 원년(元年) 황제가 태감(太監) 정동(鄭同)을 보내어 제전(祭奠)과 시호 및 부의(賻儀)를 하사하고, 또 태감 최안(崔安) 등을 보내어 고명(誥命)을 내리고 구장면복(九章冕服)을 하사하였다. 예종이 승하하였다. 성종(成宗)이 즉위하였다.
6년성종 강정 인문헌무 흠성공효대왕(成宗康靖仁文獻武欽聖恭孝大王) 원년 황제가 태감 김흥(金興) 등을 보내어 제전(祭奠)과 시호 및 부의(賻儀)를 하사하고, 횡간(橫看)을 반포하였다.
7년 《대전(大典)》을 반포하고, 선성(先聖)에게 배알(拜謁)하고, 친히 사직(社稷)에 제사를 지냈다.
8년 군적(軍籍)을 개정하였다.
9년 대전(大典)을 반포하였다.
10년 친히 선농(先農)에 제사를 지내고, 친히 적전(籍田)을 갈았다.
○ 주청사(奏請使) 김질(金礩)이 경사(京師)에서 돌아왔는데, 황제가 칙서(勅書)를 내리기를, “아뢴 글을 보고 왕의 생부(生父) 휘(諱)는 먼저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일찍 죽었고, 생모(生母) 한씨(韓氏)는 아직 생존해 있으면서, 모두 명호(名號)가 없으니 비록 남의 후사(後嗣)가 된 양자는 대의(大義)로서 본생부모(本生父母)를 돌아볼 수 없지만, 현양(顯揚)하고자 하는 마음에 자연 그대로 있을 수 없다 하므로 왕의 효성을 알았노라. 이에 특별히 고(故) 세자를 조선 국왕으로 봉하여 시호를 ‘회간(懷簡)’이라 하고, 한씨는 왕비로 봉하여 왕이 어버이를 현양(顯揚)하고자 하는 뜻을 이루게 하노라.”하였다.
○ 성균관(成均館)에 존경각(尊經閣)을 세웠다.
11년 황제가 호부낭중(戶部郞中) 기순(祈順)과 행인(行人) 장근(張瑾) 등을 보내어 태자를 책립(冊立)한 조서(詔書)를 반포하였다.
12년 왕비가 몸소 누에를 쳤다.
○ 선성(先聖)에게 배알하고 대사례(大射禮)를 행하였다.
○ 황제가 계비(繼妃) 윤씨(尹氏)의 고명(誥命)을 배신(陪臣) 심회(沈澮)에게 부쳐 보내고, 아울러 관복(冠服)을 하사하였다.
13년 주청사(奏請使) 윤필상(尹弼商)이 경사(京師)에서 돌아왔는데, 황제는 우리나라가 매년 한 차례씩 궁각(弓角 활을 만드는 소의 뿔) 50부(部)씩 사갈 것을 허락했다.
○ 선성묘(先聖廟)에 배알하였으며, 양로회(養老會)를 베풀고 진언(進言)토록 하였다.
14년 추쇄도감(推刷都監)을 설치하였다.
○ 황제의 칙명(勅命)에 따라 어유소(魚有沼)를 파견하여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하도록 하였는데, 만포진(滿浦鎭)까지 갔다가 강에 얼음이 아직 얼지 않아 임의로 군사를 파하였다. 다시 윤필상(尹弼商)으로 하여금 가서 정벌하도록 하였는데, 사람과 가축 그리고 잡혀 갔던 한인(漢人)들을 데려와서 배신을 보내어 노획물을 바쳤다.
15년 황제가 내관(內管) 정동(鄭同) 등을 보내어 이르기를, “건주위의 도적들이 오래 전부터 포악(暴惡)함을 회개하지 않기에 짐이 군사를 보내어 토벌하게 하였는데, 왕이 이미 군사를 동원하여 와서 돕다가 비록 앞 군사는 강물이 풀려 건너기 어려웠기 때문에 우리 군사와 함께 그 공을 이룰 수 없었지만, 나중 군사들은 소굴에 들어가 공격하여 그들의 부족을 사로잡고 죽였고, 집과 쌓인 물건을 불태웠으며, 그들이 잡아간 우리 변방의 사람들을 데려 왔고, 또 배신을 파견하여 노획물을 보내 왔으니, 왕의 충성이야말로 선대(先代)를 잘 계승하고, 짐의 명령에 대해서 저버리지 않았다 하겠도다.”하고, 이어 백금과 문금(紋錦)을 하사하였으며, 군사를 거느렸던 윤필상과 절도사(節度使) 김교(金嶠) 등에게도 은(銀)을 하사하였다.
○ 배신 한명회(韓明澮)가 주문(奏文)을 받들고 경사(京師)에 갔는데, 그 상주하는 글에 이르기를, “계비(繼妃) 윤씨(尹氏)는 성품이 어긋나서 명을 공경히 받들지 못하고 덕(德)을 잃었음이 더욱 심하여 신민(臣民)들에게 크게 실망되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신(臣)의 조모 윤씨(尹氏)와 신의 모(母) 한씨(韓氏)의 명을 받아 외제(外第)에 폐치(廢置)하고 부실(副室) 윤씨를 아내로 삼았습니다. 바라건대, 특별히 계비 책립(冊立)의 고명(誥命)을 내려 주옵소서.”하였다.
○ 배신 한명회가 경사로부터 돌아왔는데 매년 궁각(弓角) 2백 대(對)씩 사올 것을 허락하였다.
16년 황제가 태감(太監) 정동(鄭同)을 보내어 세자를 책봉하였는데, 정사(正使) 정동이 죽었다.
17년 부유한 양민(良民)들을 뽑아 양계(兩界 함경도와 평안도)에 들어가 거주하도록 하였다.
○ 창경궁(昌慶宮)을 개수(改修)하였다.
○ 성균관(成均館)에 토지 4백 결(結)을 내려주고, 향학(鄕學)에도 등차를 두어 토지를 내려주었다.
○ 정의 현감(旌義縣監) 이섬(李暹)이 표류(漂流)하여 직례성(直隷省) 양주부(楊州府)에 이르렀는데, 예부(禮部)에서 상주(上奏)하여 허락을 맡고 배신 박건(朴楗)에 딸려 보내왔다.
18년 《대전(大典)》을 반포하여 처음으로 개가(改嫁)한 자손들은 동반(東班)과 서반(西班)에 벼슬하지 못하게 하였다.
19년 군적(軍籍)을 조사하였다.
23년 정미. 헌종이 붕(崩)하고, 효종 건천명도 성순중정 성신문무 지인대덕경황제(孝宗建天明道誠純中正聖神文武至仁大德敬皇帝) 휘(諱) 우당(祐樘)이 즉위하였다. 성종(成宗) 18년


 

[주D-001]현양(顯揚) : 《효경(孝經)》에,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부모를 드러나게 함이 효도의 마지막이다.”한 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