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호정 하륜 신도비문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진양부원군(晉陽府院君) 하공(河公) 신도비명 병서

아베베1 2011. 4. 28. 09:41

춘정집 제12권
 신도비명(神道碑銘)
유명 조선국 증(贈) 충근익대신덕수의협찬공신(忠勤翊戴愼德守義協贊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진양부원군(晉陽府院君) 하공(河公) 신도비명 병서


영락(永樂) 11년 임진년(1412, 태종 12) 겨울 10월에, 의정부 좌정승(議政府左政丞) 진산(晉山) 호정(浩亭 하륜(河崙)) 선생이 계량(季良)에게 부탁하여 말하기를, “나의 선고(先考)께서는 덕을 심으시고는 스스로 보응(報應)을 누리지 않고 복을 후손에게 끼쳤기에, 소자가 두 번이나 공신들의 회맹(會盟)을 주도하고, 벼슬이 모든 신료들의 우두머리에 있으며, 은전(恩典)을 입어 위로 3대까지 봉호(封號)를 받거나 증직(贈職)되었다. 이는 묘도(墓道)에 비석을 세워 후세 자손들에게 보임으로써 선영의 소재를 알게 하여 감히 혹시 잘못 전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자면 마땅히 글이 있어야 할 것인데 그 글이 없으니, 그대가 글을 지어 주게.” 하므로, 계량은 감히 사양하지 못했다.
삼가 살피건대, 공의 성은 하씨(河氏), 휘는 윤린(允潾), 자는 소개(所開)이니, 진양(晉陽)의 대족(大族)이다. 선대에 좌사낭중(左司郞中) 휘 공진(拱辰)이 고려조에 공이 있어 삼조(三朝)를 통해 현달하였고 문하 시랑동평장사(門下侍郞同平章事)의 증직을 받았다. 증조의 휘는 부심(富深)인데, 급제했으나 은거하여 벼슬하지 아니했다. 조부의 휘는 식(湜)이니 증 순충보조공신(純忠輔祚功臣)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판사평부사(判司平府事) 진원군(晉原君)이다. 부친의 휘는 시원(恃源)이니 증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純忠積德秉義輔祚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우정승 판병조사(議政府右政丞判兵曹事) 진강부원군(晉康府院君)이다. 승봉랑(承奉郞) 풍저창 부사(豐儲倉副使) 정균(鄭均)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원(元) 나라 지치(至治) 신유년(1321, 충숙왕 8) 4월 정사에 공을 낳았다.
7세에 모친상을 당했는데, 울부짖으면서 슬픔을 다함이 마치 어른과 같았다. 경오년(1330, 충숙왕 17)에 처음으로 취학(就學)했다. 계유년(1333, 충숙왕 복위 2)에 고을의 장자(長者)인 증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 강공(姜公) 휘 승유(承裕)가 공에게 말하기를, “선대에서 나라에 공이 있는 자는 그 후손이 반드시 창성하게 된다.” 하고, 자기의 딸을 공의 아내로 삼게 했다. 찬성공은 성품이 엄격했는데, 공이 아버지처럼 섬겼다.
지정(至正) 갑신년(1344, 충목왕 즉위년)에 처음으로 충목왕(忠穆王)의 조정에 벼슬하여 식목도감 녹사(式目都監錄事)가 되었다.
정해년(1347, 충목왕 3) 봄에 부인 강씨(姜氏)가 길몽을 꾸고 난 뒤에 임신하여 겨울 12월에 아들을 낳았으니, 지금의 정승공(政丞公)이다.
기축년(1349, 충정왕 1)에 선관서 승(膳官署丞)에 제수되고, 임진년(1352, 공민왕 1)에는 승진하여 선관서 영(膳官署令)이 되었다.
병신년(1356, 공민왕 5)에는 문하녹사(門下錄事)로 옮겼다. 고려 말기에 국가의 창고가 텅 비어서 문하부(門下府)의 아침저녁 식사 비용을 녹사에게 일임시켜 넉넉하게 마련하도록 책임지우니, 녹사가 된 자들은 대부분 면직되기를 빌었다. 그러나 공은 심력을 다해 주선하여 마련하고 조금도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으니 문하부 관원들이 칭찬했다.
무술년(1358, 공민왕 7)에 선덕랑(宣德郞) 북부 영(北部令)에 임명되었다.
경자년(1360, 공민왕 9)에는 부친상을 당했으므로 벼슬에서 물러나 복제(服制)를 마쳤다.
계묘년(1363, 공민왕 12)에는 지숙주군사(知肅州郡事)가 되어 품계가 조봉랑(朝奉郞)에 이르렀으니, 실로 공민왕 12년이다. 위왕(僞王 덕흥군(德興君))이 반기를 들자 첩목아(帖木兒 최유(崔濡))가 몽고병과 한병(漢兵)을 거느리고 우리나라에 침입했으므로, 각 도(道)의 우리 군사들이 서북(西北)에 모이니 위왕이 패하여 달아났다. 그 장수들이 왕래하는 길이 다 숙주(肅州)를 거치게 되었는데, 공이 그들을 대함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해는 흉년이어서 돌아가는 군사 가운데 굶주려서 얼굴이 누렇게 뜬 자가 많았다. 공이 봉록(俸祿)을 덜고 또 고을 사람 중 비축한 양식이 있는 자에게 권유하여 서로 도와 구제하게 한 덕분에 목숨을 부지한 사람이 많았다. 정사를 하는 데 인자하고 관대함을 근본으로 삼아 거두어들이는 것은 없어지고 형벌은 줄어드니, 아전과 백성들이 은덕으로 여겼고, 다른 사람으로 갈리게 되자 눈물을 흘리며 전송했다.
을사년(1365, 공민왕 14) 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가을에 정승공이 과거에 급제하고, 이듬해 사관(史官)이 되었다. 공이 말하기를, “조정에 벼슬하는 아들이 있고 나는 늙었으니, 다시 벼슬하고 싶지 않다.” 하고, 고을의 부로들과 함께 금강사(金剛社)를 결성하고 한가히 노닐면서 세월을 보냈다. 당시에 왜구(倭寇)가 한창 치성(熾盛)했는데, 공이 족인(族人)에게 이르기를, “우리 고을은 서쪽과 남쪽이 바다에 접해 있어서 해마다 왜구가 오기만 하면 서쪽과 남쪽 사람들이 먼저 그 해를 입는데 필시 읍리(邑里)에까지 미치게 될 형세이니, 북촌(北村)으로 이사하여 그 칼날을 피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정사년(1377, 우왕 3) 가을에 드디어 가족을 이끌고 가서 동곡(桐谷)에 집을 마련했는데, 이듬해 가을에 왜구가 과연 읍리에 들어와 온 경내가 소란스러웠고 겁박과 약탈을 당한 자가 많았다. 공은 동곡에서 강성현(江城縣)의 산성(山城)으로 들어가 온 집안이 홀로 안전하게 되니, 고을 사람들이 공의 선견지명에 탄복했다. 정승공이 그때 대사성(大司成)이었는데, 재상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섬 오랑캐가 자주 침범해 와서 연로한 어버이가 번번이 산성에 들어가게 되니 그 어려움을 견딜 수 없습니다. 지금의 순흥 부사(順興府使)는 선비입니다. 바라건대, 저 대신 그를 대사성에 임명하고 저의 부친을 순흥 부사에 임명하여 안전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해주소서.” 했다. 재상이 그 말을 의롭게 여겨, 경신년(1380, 우왕 6) 봄에 공을 부사(府使)에 제수하니, 품계는 봉익대부(奉翊大夫)였다. 이보다 앞서 공은 일찍이 첨설관(添設官)을 받고 누차 옮겨서 봉익대부 예의 판서(禮儀判書)에 이르렀던 까닭에 지금 부사가 된 것이니, 그 품계를 따른 것이라고 한다.
부임한 뒤에는 어진 정사를 베풀어서 백성들이 바야흐로 사모하고 즐거워하는 상황이었는데 병이 들고 말았다. 9월 24일에 부인에게 말하기를, “내 나이 예순이고 아들도 제대로 자립했으니, 무슨 유한(遺恨)이 있겠소. 하물며 인생의 길고 짧음은 천명 아님이 없어서 모두 저승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다만 선후가 있을 뿐이니 상심하지 마시오.” 하고, 말을 마치고 나서 곧 운명하였다. 정승공이 영구(靈柩)를 모시고 진양(晉陽)에 돌아가 그해 12월 갑신에 동방동(桐房洞) 감산(坎山) 북쪽에 장사 지내니, 부모의 묘와는 불과 몇 보 떨어져 있다.
처음에 정승공이 부친의 병환 소식을 듣고 약을 준비하여 길을 배나 빨리 달려 2일 만에 도착했으나, 임종에 미치지 못했는데, 가슴을 두드리고 발을 구르며 지극한 슬픔으로 밤낮 빈소 곁을 떠나지 않았다. 관은 전목(全木)을 쓰고 곽의 두께는 7치로 했으며, 모든 상장(喪葬)의 용구(用具)는 일체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거하고 불교의 법식을 쓰지 않았다.
조선조 무인년(1398, 태조 7)에 이르러, 정승공의 정사공(定社功)으로, 공에게 충근익대신덕수의협찬공신(忠勤翊戴愼德守義協贊功臣) 특진보국숭록대부(特進輔國崇祿大夫) 문하우정승 판병조사(門下右政丞判兵曹事) 진양백(晉陽伯)을 추증(追贈)하고, 임오년(1402, 태종 2)에는 정승공의 좌명공(佐命功)으로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진양부원군(晉陽府院君)을 가증(加贈)하였다.
공은 타고난 바탕이 후하고 진중하며 몸가짐이 청렴하고 간결하여, 망녕된 말을 하지 않고 농담도 하지 않았으며, 일찍이 집안 살림살이에 마음을 쓴 일이 없었다. 효도와 우애는 천성에서 나왔으며, 친척 간에 친목하고 고을 사람들에게 화순하여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공의 선고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백부가 노비를 고르게 분배하려 하지 않아 아우와 조카가 관청에 소송하고자 하자, 공은 “어찌 감히 숙부와 쟁송(爭訟)한단 말이냐?” 하며 힘껏 말리었다. 백부가 돌아가시자 아우와 조카가 전에 소송하려던 말을 강경히 주장하니, 공은 “종형제 사이에 서로 소송하는 일도 옳지 않다.” 했다. 공이 돌아가신 뒤에 종형제가 서로 소송하여 드디어 재산을 나누게 되었는데, 정승공은 받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우리 선고께서 하시지 않았던 일인데, 내가 감히 받을 수 있겠는가.” 했다. 여러 아들에게 주기를 청하니, 공이 말하기를, “여러 아들이 받는 것은 곧 내가 받는 것이다.” 하고, 마침내 허락하지 않았다.
부인 강씨(姜氏)는 집안을 잘 다스렸으며, 일상의 행동은 예법에 따랐다. 효도로써 어버이를 받들고 순종으로 남편을 섬겼다. 아들과 손자를 가르치는 데는 엄하면서도 너그럽고, 족친과 인척들을 대하는 데는 은혜롭고도 두루 미쳤다. 을해년(1395, 태조 4) 여름에 병으로 누우니, 정승공이 당시에 중추원사(中樞院事)로 있었는데 휴가를 청하고 역말을 달려 3일 만에 도착하여 약을 먼저 맛보고 올리자, 강씨가 “너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이미 오래인데 내가 오늘날까지 죽지 않아서 흡족하게 너의 영광스러운 봉양을 받았으니, 약을 먹고 살아나기를 원하지 않는다.” 했다. 공이 울며 권하니, 7월 4일에 정승공에게 말하기를,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늙고 젊음에 달려 있지 않다. 너와 너의 누이가 모두 무사할 때 내가 이제 먼저 가는 것이 어찌 다행이 아니겠느냐. 억지로 여러 가지 약을 내올 필요가 없다.” 하고, 이튿날 돌아가셨으니, 향년이 76세이다. 9월 병오에 공의 묘 남쪽 몇 보쯤 되는 곳에 부장(祔葬)했다. 무인년(1398, 태조 7)에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에 추증(追贈)되었다.
아들의 휘는 윤(崙)이니 분충장의동덕정사좌명공신(奮忠仗義同德定社佐命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좌정승 판이조사 수문전대제학 영경연서운관사 감춘추관사 세자부(議政府左政丞判吏曹事修文殿大提學領經筵書雲觀事監春秋館事世子傅)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이다. 봉익대부 예의 판서(禮儀判書) 성산 이공(星山李公) 휘 인미(仁美)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병술년(1406, 태종 6)에 진한국대부인에 봉해졌다. 딸은 정순대부(正順大夫) 연안 부사(延安府使) 유극서(柳克恕)에게 출가했다.
정승의 아들 구(久)는 중군도총제부 도총제(中軍都摠制府都摠制)인데, 봉익대부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이종덕(李種德)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장녀는 이조 우참의(吏曹右參議) 홍섭(洪涉)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좌군도총제부 총제(左軍都摠制府摠制) 이승간(李承幹)에게 출가했다. 서남(庶男)이 셋 있으니, 장(長)과 연(延)은 모두 어리고 영(永)은 의흥시위사 대호군(義興侍衛司大護軍)이다. 서녀(庶女)가 셋 있으니, 장녀는 지곡산군사(知谷山郡事) 김질(金秩)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중군 사직(中軍司直) 장희걸(張希傑)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어리다. 연안 부사의 아들은 정(汀)인데, 통덕랑(通德郞) 형조 정랑(刑曹正郞)이다.
내가 생각건대, 정승공의 도덕과 문장의 아름다움, 지위와 공훈의 성대함은 비길 사람이 없으니, 진실로 일찍이 그 복을 발하게 된 유래가 오래되었을 것이다. 아, 진양공(晉陽公)이 선을 쌓고 덕을 이룬 것으로 보면 의당 그 보응을 누렸어야 할 것인데, 능히 자신의 몸에 향유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하늘이 장차 그 보응을 크게 하기 위하여 늦춘 것이 아니겠는가. 옛사람이 말하기를, “선을 행하면 보답이 없지 않다.” 했다더니, 나는 진양공에게서 그것을 확인했다. 지금으로부터 천만대에 이르기까지 그 끼친 덕택의 장구함과 남은 경사의 영원함이 또 다함이 있겠는가. 아, 아름답도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흐름이 긴 내는 / 有流斯張
그 원천이 깊고 / 維畜其源
가지가 무성한 나무는 / 有枝斯茂
그 뿌리가 견고하네 / 維固其根
아, 훌륭하도다 하씨 집안이여 / 懿哉河氏
진실로 덕 있는 가문일세 / 實惟德門
우뚝한 저 좌사낭중(左司郞中)은 / 卓彼左司
능히 나라에 공훈이 있었으며 / 克有殊勳
선(善)을 두터이 쌓아 / 乃厚其積
후손의 복을 열었네 / 以啓後昆
인후(仁厚)하신 진양공은 / 振振晉陽
부지런히 덕을 닦았는데 / 惟德是勤
인륜을 중히 여겨 집안의 송사를 막으니 / 厚倫息訟
사람들이 그 의에 감복하고 / 人服其義
왜란을 미리 알고 집을 옮기니 / 移家避寇
사람들이 그 지혜에 탄복했네 / 人服其智
두 고을에 은혜를 베푸시니 / 惠于二州
백성들이 부모처럼 사모하고 / 民慕怙恃
어질고 의롭고 지혜까지 있었으니 / 仁義且智
현달한 영화를 누려 마땅하건만 / 顯融是宜
거두어 집으로 물러나 지내면서 / 斂而家居
마침내 포부를 베풀지 않았네 / 竟莫以施
하늘이 효자를 주어 / 天錫爾類
능히 영명하고 어진 아들을 낳으니 / 克生英賢
성주의 지우(知遇)를 입어 / 遇我聖主
조선의 재상이 되었네 / 以相朝鮮
안위가 경각에 달렸는데 / 安危呼吸
담소하며 일을 주선하고 / 談笑指陳
낭묘에 조용히 앉으시니 / 從容廊廟
온갖 일이 새롭게 되었네 / 百度維新
그 무게 태산 같고 / 泰山其重
그 도량 바다 같으니 / 滄海其容
훈덕의 으뜸이고 / 勳德之魁
유학의 종장일세 / 斯文之宗
임금 말씀에 정승은 / 王曰政丞
실로 나와 덕을 함께 했으니 / 實予同德
정사와 좌명의 공에 / 定社佐命
내가 그 큰 공을 아름답게 여긴다 하시고 / 予懋丕績
위로 삼대에 걸쳐 관작을 추증하니 / 追爵三世
그 벼슬 모두 다 높았네 / 竝峻其秩
정승공 공훈으로 품계를 받음에 / 旣勳而階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의 지위 높았고 / 領府維崇
모친에게도 관작을 추증하여 / 錫之妣爵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에 봉했네 / 辰國是封
잠긴 덕이 크게 드러남에 / 不顯潛德
비록 죽었으나 오히려 산 것이니 / 雖死猶生
진양의 산 높디높고 / 晉山峩峩
진양의 물 차갑구나 / 晉水冷冷
감산(坎山) 기슭 우러러봄에 / 瞻彼坎麓
길한 기운 가득하니 / 維吉之叢
부모의 묘소 / 維考維妣
모두 그 가운데 안장되었네 / 俱葬于中
계속 이어질 남은 경사 / 綿綿餘慶
어찌 끝이 있으랴 / 曷其有終
큰 비석에 명을 새겨서 / 刻銘穹碑
고하기를 무궁히 하니 / 以告無期
밝고 밝은 후손들 / 昭玆來裔
누군들 공을 생각지 않으리 / 孰不公思


 

春亭先生文集卷之十二
 碑誌
有明朝鮮國贈忠勤翊戴愼德守義協贊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晉陽府院君河公神道碑銘 幷序 a_008_157d


永樂十一年歲在壬辰冬十月。議政府左政丞晉山浩亭先生。囑季良曰。惟我先考種德不食。委祉後人。而余小子再啑勳盟。位冠百僚。且承恩典。封贈三世。此其碑于墓道。以示來世。俾知先塋之所在。而無敢或訛。宜有辭而闕焉。君其筆之。季良不敢辭。謹按。公姓河氏。諱允潾。字所開。晉陽大族也。先世有左司郞中諱拱辰。有功高麗。顯三朝。贈門下侍郞同平章008_158a事。曾祖考諱富深。及第隱不仕。祖考諱湜。贈純忠補祚功臣輔國崇祿大夫判司平府事晉原君。考諱恃源。贈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政丞判兵曺事晉康府院君。娶承奉郞豊儲倉副使鄭諱均之女。以元至治辛酉四月丁巳。生公。年七歲。丁內憂。呼泣盡哀。若成人然。庚午。始就學。癸酉。鄕之長者贈崇祿大夫議政府贊成事姜公諱承裕謂公曰。先世有功於國者。其後必昌。以其子妻之。贊成性嚴。公父事之。至正甲申。始仕忠穆王朝。爲式目都監錄事。丁亥春。姜氏得吉夢有娠。冬008_158b十二月。生男。今政丞公也。己丑。授膳官丞。壬辰。陞爲令。丙申。遷門下錄事。高麗之季。公廩虛竭。門下府朝夕之費。一委錄事。而責其豊潔。爲錄事者卛多乞免。公盡心營辦。略無難色。府官稱之。戊戌。拜宣德郞北部令。庚子。遭外艱終制。癸卯。知肅州郡事。階朝奉郞。實恭愍王十三年也。僞王反。帖木兒卛蒙,漢兵將入寇。諸道軍會西北。僞王敗走。其將帥往來。皆道于肅。公待之無闕。其年饑。軍士還者多菜色。公減俸祿。又勸郡人之有蓄者相助賑濟。多所全活。爲政以仁恕爲本。抽斂絶而刑罰省。吏民德之。及其見代。涕泣以008_158c送。乙巳春。還鄕。秋。政丞公登第。明年。爲史官。公曰。有子立朝。吾老矣。不欲復仕。乃與鄕之父老。結爲金剛社。優游卒歲。時倭寇方熾。公語族人曰。吾鄕西南濱海。島寇歲至。西南人先受其害。勢必及邑里。宜移就北村。以避其鋒。至丁巳秋。遂挈家結廬于桐谷。明年秋。寇果入邑里。闔境擾攘。多被刦掠。公自桐谷。入江城縣之山城。擧家獨全。鄕人服公先見。政丞公時爲大司成。上書宰相曰。島夷數至。老親輒入山城。不勝其艱。今順興府使。儒者也。乞以自代。除父順興。俾獲安處。宰相義其言。庚申春。授公府使。階奉翊。先是。公008_158d嘗受添設官。累轉至奉翊大夫禮儀判書。故今爲府使。因其資云。旣至有惠政。民方慕悅而疾作。九月二十四日。謂夫人曰。吾年六十。子亦成立。有何遺恨。況人生脩短。莫非天命。皆歸於盡。只有先後耳。勿傷心。語竟乃絶。政丞公奉柩歸晉陽。以其年十二月甲申。葬于桐房洞坎山北。距先考墓幾步距先妣墓幾步。始政丞公聞病備藥。倍道疾馳。二日而至。未及承訣。擗踊摧折。晝夜不離殯側。棺用全木。槨用七寸。凡喪葬之具。一依文公家禮。不用浮屠法。至國朝戊寅。以政丞公定社功。贈忠勤翊戴愼德守義協贊功臣。008_159a特進輔國崇祿大夫門下右政丞判兵曺事晉陽伯。壬午。以佐命功。加領議政府事晉陽府院君。公稟資厚重。操履廉簡。不妄語。亦無戲言。未嘗以營產留意。孝友出於天性。睦於族親。和於鄕黨。愉愉如也。公之先考早逝。伯父不肯均分蒼赤。弟侄欲訴於官。公曰。安敢與叔父爭。力止之。伯父歿。弟侄以前言強之。公曰。從兄弟相訟。亦不可。及公歿。從兄弟相訟乃分之。政丞公不受曰。吾先子之所不爲也。吾敢受乎。請與諸子曰。諸子受。是吾受也。竟不許。姜氏善治家。動循禮則。奉親以孝。事夫以順。敎子孫嚴而恕。待族姻惠008_159b而周。乙亥夏。寢疾。政丞公時爲中樞院事。謁告馳馹。三日而至。嘗藥以進。姜氏曰。汝父逝已久。吾至今未亡。足見汝榮養。不願飮藥求生也。公涕泣以勸。七月初四日。謂政丞公曰。人之死生。不在老少。汝及汝娣俱無恙。吾今先逝。豈不自幸。不須強進諸藥。明日卒。年七十六。以九月丙午。祔于公墓之南幾步。戊寅。贈辰韓國大夫人。男諱崙。奮忠仗義同德定社佐命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政丞,判吏曺事,修文殿大提學,領經筵書雲觀事,監春秋館事,世子傅。晉山府院君。娶奉翊大夫,禮儀判書星山李公008_159c諱仁美之女。丙戌。封辰韓國大夫人。女適正順大夫延安府使柳克恕。政丞男久。中軍都摠制府都摠制。娶奉翊大夫,知密直司事李種德之女。長女適吏曺右參議洪涉。次女適左軍都摠制府摠制李承幹。庶男三。長,延。皆幼。永。義興侍衛司大護軍。庶女三。長適知谷山郡事金秩。次適中軍司直張希傑。次幼。府使男汀。通德郞刑曹正郞。余惟政丞公道德文章之美。名位勳業之盛。無有比擬。固嘗謂其必有發之者久矣。嗚呼。晉陽公之積善成德。宜享其報矣。而不克有於其躬者。豈非天將大其報而遲之也歟。古人有言008_159d爲善無不報。余於晉陽公而徵之矣。自今至于千萬世。其流澤之久。餘慶之永。又可旣耶。嗚呼休哉。銘曰。
有流斯張。維畜其源。有枝斯茂。維固其根。懿哉河氏。實惟德門。卓彼左司。克有殊勳。乃厚其積。以啓後昆。振振晉陽。惟德是勤。厚倫息訟。人服其義。移家避寇。人服其智。惠于二州。民慕怙恃。仁義且智。顯融是宜。斂而家居。竟莫以施。天錫爾類。克生英賢。遇我聖主。以相朝鮮。安危呼吸。談笑指陳。從容廊廟。百度維新。泰山其重。滄海其容。勳德之魁。斯文之宗。王曰政丞。實予同德。定社佐命。予懋丕績。追爵三世。並峻008_160a其秩。旣勳而階。領府維崇。錫之妣爵。辰國是封。不顯潛德。雖死猶生。晉山峨峨。晉水冷冷。瞻彼坎麓。維吉之叢。維考維妣。俱葬于中。綿綿餘慶。曷其有終。刻銘穹碑。以告無期。昭玆來裔。孰不公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