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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간 증 이조판서 고봉(高峯) 기 선생(奇先生)의 시장

아베베1 2011. 4. 29. 11:14

택당선생 별집 제10권
 행장(行狀) 하
대사간 증 이조판서 고봉(高峯) 기 선생(奇先生)의 시장


공의 휘(諱)는 대승(大升)이요, 자(字)는 명언(明彦)이다. 세상에서는 고봉 선생(高峯先生)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혹은 존재(存齋)라고 일컫기도 한다.
기씨(奇氏)는 본래 행주(幸州)에서 나왔으니, 행주는 지금 경기 고양군(高陽郡)에 속한다. 그 선세(先世)는 고려(高麗)에서 현달하였는데, 장상(將相)과 훈척(勳戚)으로 얼마나 번창했는지 국사(國史)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는 휘 면(勉)이라는 분이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냈다. 이분이 휘 건(虔)을 낳았는데,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로 세조조(世祖朝)에 벼슬을 그만두었으며, 청백리(淸白吏)로 뽑혀 소명(召命)을 받고 복관(復官)이 되었으나, 벼슬길에 다시 나아가지 않았다. 시호(諡號)는 정무(貞武)인데, 이분이 공에게 고조가 된다. 증조는 휘가 축(軸)으로 풍저창 부사(豐儲倉副使)를 지냈으며, 좌승지(左承旨)를 증직받았다. 조부 휘 찬(襸)은 홍문관 부응교(弘文館副應敎)로 이조 참판을 증직받았다.
부친인 휘 진(進)은 호가 물재(勿齋)인데, 아우인 복재(服齋) 기준(奇遵)과 함께 학행(學行)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기묘년(1519, 중종 14)에 사화(士禍)가 일어나자 향리에 물러가서 살고 있던 중 천거를 받고 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공의 훈전(勳典)에 따라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으며, 호를 하사받고 군(君)에 봉해졌다. 모친인 진주 강씨(晉州姜氏)는 사과(司果) 강영수(姜永壽)의 딸이요, 문량공(文良公) 강희맹(姜希孟)의 증손인데, 가정(嘉靖) 정해년(1527, 중종 22) 11월 11일에 광주(光州) 소고룡(召古龍)의 저택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겨우 5, 6세 무렵부터 무게 있게 행동하는 것이 벌써 어른과 같았다. 그리고 7세부터는 문득 글공부에 힘써 일과(日課)를 정해 놓고 암송하였는데, 아침 일찍 일어나 단정하게 앉아서 낭랑하게 글 읽는 소리가 저녁 때까지 이어졌다. 이에 동복(童僕)이 시험 삼아 공의 뜻을 물어보기라도 하면, “너희들이 이런 맛을 어떻게 알겠느냐.”라고 대답하곤 하였다.
8세에 모부인(母夫人)이 세상을 떠나자 호곡(號哭)하며 애통한 심정을 극진히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차마 그 소리를 듣지 못하였다. 상복을 벗고 나서는 집안이 번잡스러운 것을 싫어하여 곧장 마을의 서당에 가서 공부하면서 학업에 더욱 매진하였다. 공은 총명한 데다 기억력이 비상하여 함께 배우는 아이들의 학업 과정을 모두 동시에 마쳤으며, 시구를 지어 내면 사람들이 놀라곤 하였다.
물재공(勿齋公)이 일찍이 훈계하는 글을 내린 적이 있었는데, 공은 이를 가슴에 새기고서 그대로 행하였다. 그리하여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정하고 날마다 부지런히 정진하였으며, 과거 공부 같은 것은 그저 하찮게 여기기만 하였다.
중종(中宗)과 인종(仁宗)이 서로 잇따라 승하(昇遐)하자, 공이 포의(布衣)의 신분인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소식(素食)을 하며 졸곡(卒哭)을 마쳤다. 그리고 사림(士林)에 변고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서는 음식을 폐하고 눈물을 흘렸으며, 그대로 문을 닫고서 몇 년 동안 출입하지 않았다.
기유년(1549, 명종 4)에 비로소 응시하여 생원(生員)과 진사(進士)의 두 시험에 모두 입격(入格)하였다. 그리하여 약관(弱冠)의 나이에 벌써 사림(士林)에 이름을 드러내면서 문장으로 과장(科場)을 압도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윤원형(尹元衡)이 이를 시기한 나머지 공의 시권(試券)이 우등(優等)에 속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축출하였는데, 정작 공 자신은 이런 것을 또한 개의하지 않았다.
을묘년(1555, 명종 10)에 물재공이 세상을 떠나자, 여묘(廬墓)살이를 하면서 상을 마쳤다. 32세 되던 해에 다시 응시하여 무오년(1558, 명종 13) 문과(文科)에 등제(登第)하였다. 이때 마침 퇴계 선생이 소명(召命)을 받고 서울에 올라와 있었는데, 공이 선생과 함께 학문을 논하고 난제(難題)를 문답하면서 사단 칠정(四端七情)에 관해 논변(論辨)하였다. 그 뒤에 퇴계가 글을 보내 말하기를, “무오년에 도성에 들어갔던 일로 말하면 정말 낭패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스스로 다행스럽게 여기는 것은 우리 명언(明彦)을 만나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하였다.
권지 승문원정자(權知承文院正字)를 거쳐 부정자(副正字)로 승진하였다. 그리고 사관(史官)의 추천을 받았으나 오래도록 발탁되지 못하다가, 신유년(1561, 명종 16) 여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임명되고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게 되었으며, 그 뒤 규례에 따라 봉교(奉敎)로 승진하였다. 계해년(1563, 명종 18)에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로 자리를 옮겼으며, 말미를 청해 고향에 내려갔다가 다시 봉교가 되었는데, 고과(考課)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점수가 깎여 체차되었다.
이에 앞서 윤원형(尹元衡)이 국권(國權)을 장악하고 정사를 어지럽게 하자, 명묘(明廟)가 말년에 그 세력을 꺾을 목적으로 이량(李樑)을 진출시켜 그를 대적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량이 다시 인척(姻戚)의 세력에 의지하여 권세를 쥐고 선동하면서 기염을 토하자, 공이 한 시대의 명류(名流)인 윤두수(尹斗壽) 형제와 이문형(李文馨), 허엽(許曄) 등과 함께 청의(淸議)를 만회하기 위하여 힘을 기울였다. 이에 이량이 자기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을 미워한 나머지 그들을 붕당(朋黨)으로 지목하고는, 대간(臺諫)을 꼬드겨 논핵하게 해서 삭직(削職)하고 밖으로 축출하도록 하는 한편, 장차 사화(士禍)를 일으키려 하였으므로 중외(中外)가 크게 경악하였다.
그러나 며칠이 지난 뒤에 옥당(玉堂)에서 차자(箚子)를 올리자 명묘가 크게 깨닫고서 이량 등을 귀양 보내고 조정에서 축출하였으므로, 공이 다시 서용(敍用)되어 사관(史官)이 되었다. 이어 홍문관 부수찬으로 승진하면서 경연 검토관(經筵檢討官)과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대하였으며, 호당(湖堂)에서 사가 독서(賜暇讀書)하는 은혜를 입기에 이르렀다. 이로부터 공이 사림(士林)의 중망(重望)을 받게 되었는데, 이렇게 해서 명묘와 선묘(宣廟) 사이에는 조정이 다시 정도(正道)를 회복하게끔 되었다.
갑자년(1564, 명종 19)에 사체(辭遞)하고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이 되었으며 지제교로 선발되었다. 얼마 있다가 다시 수찬에 임명되었으며, 병조 좌랑과 성균관의 전적 및 직강을 역임한 뒤에 이조 정랑으로 승진하면서 교서관 교리를 겸대하였다. 휴가를 청해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 예조 정랑과 홍문관 교리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숙배(肅拜)하지 않았다.
병인년(1566, 명종 21) 10월에 헌납(獻納)으로 소명(召命)을 받고 올라와서 의정부의 검상(檢詳)과 사인(舍人)으로 승진하였다. 정묘년(1567, 명종 22)에 장령(掌令)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바로 체차되어 사예(司藝)가 되었으며, 다시 사인과 장령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공 자신은 학문이 아직 크게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여러 차례나 화려한 요직을 역임하는 과정에서도 항상 한직(閑職)을 구하곤 하였다.
정묘년 5월에 홍문관 응교로 재직중에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뽑혀 허국(許國)과 위시량(魏時亮) 두 조사(詔使)를 영송(迎送)하였다. 이때 마침 명종(明宗)이 승하(昇遐)하였는데, 조사가 중도에 부음(訃音)을 듣게 되었으므로, 손님과 주인 사이에 행해야 할 예문(禮文) 가운데 많은 변동 사항이 있게 되었다. 허국과 위시량 두 조사는 모두 학식이 넓은 데다 예법을 준수하는 유신(儒臣)이었는데, 서로 자문을 구하며 강정(講定)하는 과정에서 상규(常規)를 벗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공이 단독으로 그들을 응접하는 일을 담당하면서 모두 그들의 뜻에 맞게 하였다.
조정에 돌아와서 사헌부 집의로 옮겨졌다. 이때 경연에 입시해서 제일 먼저 논하기를, “선정(先正) 조광조(趙光祖)가 소인에게 참소를 당해 죽었는데, 중묘(中廟) 말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의 억울함을 살펴 주게 되었고, 그 당시에 함께 처벌을 받은 사람들이 혹 서용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선왕(先王)이 어린 나이로 처음 정사를 펼치게 되자, 소인이 또 사림(士林) 가운데 학행(學行)이 있는 자들을 무함하면서, 부박(浮薄)한 무리들이 기묘년의 풍조를 일으키려 하고 있다고 논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난역(亂逆)의 율(律)을 뒤집어쓰게 한 결과, 이언적(李彦迪)과 같은 대유(大儒)가 죄를 얻어 배소(配所)에서 죽기까지 하였습니다. 지금 비록 금망(禁網)이 이미 해제되었다고는 하지만, 시비(是非)가 아직도 분명해지지 않았으니, 조광조와 이언적을 표장(表章)하여 시비를 분명히 정하고 인심을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하고, 또 논하기를, “노수신(盧守愼)과 유희춘(柳希春) 등은 모두 학문이 높은 유신(儒臣)인데, 오래도록 유배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비록 석방해서 돌아오게 하더라도 나이가 벌써 노년에 접어든 만큼, 차서(次序)에 따라 진출시킨다면 크게 등용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단계를 뛰어올려 발탁함으로써 현인을 등용하는 도리를 극진히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얼마 있다가 전한(典翰)과 직제학(直提學)으로 승진하면서 교서관 판교(校書館判校)를 겸대하였다. 그리고 조금 뒤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품계가 오르면서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다가 다시 우부승지로 옮겼으며 규례에 따라 다른 직책을 겸대하였다. 명을 받들고 의주(義州)에 가서 조사(詔使)를 송별하며 위로하였다. 조정에 돌아와서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었다가 곧바로 체차되어 공조 참의가 되었다. 다시 우승지에 임명되었다가 체차되어 대사간이 되었으며 다시 좌승지로 자리를 옮겼다.
이에 앞서 윤원형(尹元衡)이, 인묘(仁廟)의 경우는 재위한 기간이 1년을 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문소전(文昭殿)에 부묘(祔廟)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울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가 명종(明宗)을 부묘해야 할 때를 당하게 되자, 사론(士論)이 이번 기회에 인종(仁宗)까지 아울러 부묘하려고 하였다. 이에 공이 이 의논을 주장하게 되었는데, 대신(大臣)과 의견이 합치되지 않자 공이 입시하여 그 오류를 지적하며 극언하였으므로, 이 때문에 대신이 마음속으로 공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대사헌(大司憲) 김개(金鎧)가 오래도록 폐고(廢錮)되어 있다가 다시 조정에 들어와서는, 마음속으로 사론(士論)을 꺼린 나머지 먼저 기묘년의 사류(士類)를 헐뜯고 나서, 지금 조정에도 아직 이런 풍조가 남아 있다고 배척하니, 상의 뜻이 자못 그쪽으로 기울어졌다. 이에 공이 동료들과 함께 청대(請對)하여, 김개가 사악한 자들을 비호하고 바른 이들을 해치는 정상을 아뢰었으나, 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예관(禮官)이 사친(私親)의 사당에 관원을 보내 제사를 올리도록 청하면서 황백부(皇伯父)라고 칭했는데, 공이 지방에 있다가 이 말을 듣고는 “이것은 창읍왕(昌邑王)이 즉위해서 태뢰(太牢)의 음식으로 애왕(哀王)을 제사 지내도록 한 것과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하였다. 그리하여 이때에 이르러 입시한 기회에, 예학(禮學)이 밝게 드러나지 못한 탓으로 처음 정사를 행할 때에 잘못된 거조(擧措)가 있게 되었다고 논하는 한편, 황백부의 황(皇)이라는 글자는 제후국에서 일컬어서는 안 되는 만큼 먼저 이름부터 바로잡아야 한다는 점을 아뢰었으며, 또 주자(朱子)의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를 발간해서 사대부들이 예학을 익힐 수 있게 해 줄 것을 청하였다.
공이 전후로 경연(經筵)에 입시해서 글을 강설(講說)할 때 치밀하게 분석하여 해설했을 뿐만이 아니라, 그 기회에 시사(時事)에까지 적용하여 정치를 개혁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게 하였다. 그래서 이를 듣는 이마다 탄복하곤 하였는데, 그와 반대로 공을 좋아하지 않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이때 인재들이 바야흐로 조정에 진출해서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을 급선무로 삼아 많이들 건의하였으므로 논의가 분분하였다. 그런데 공의 경우는 뜻을 세워 현인(賢人)을 구하고 나서 그들에게 위임하여 성취시키게 하는 것을 우선적으로 행해야 할 대강령으로 삼고 있었다. 말하자면 근본을 바르게 하는 데에 뜻을 두고서 먼저 교화(敎化)한 다음에 법제(法制)를 정비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장(更張)하려는 의논과 상당히 배치되었는데, 이러한 점에서 대신(大臣)이 더더욱 공에게 불평스러운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이때 퇴계 선생은 이미 남쪽으로 내려가 있었는데, 공에게 글을 보내어 거취(去就)를 논하면서, 장남헌(張南軒)이 우윤문(虞允文)과 뜻이 맞지 않아 지위를 버리고 출사(出仕)하지 않았던 고사를 들어 비유하기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공이 이로부터 시골로 돌아가 은퇴할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체차(遞差)되었다. 경오년(1570, 선조 3) 봄에 휴가를 청해 시골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이때 사대부들이 도성에서 모두 나와 전송하였다.
공이 일단 시골로 돌아와서는 고마산(顧馬山) 남쪽에 서실(書室)을 짓고, 퇴계의 글 가운데 나오는 “가난할수록 더욱 즐길 줄 알아야 한다.[貧當益可樂]”는 말을 취해 낙암(樂庵)이라고 편액(扁額)을 내걸고서 학문에 전심(專心)하는 장소로 삼았는데, 제자와 종유(從遊)하는 자들이 이로부터 더욱 많이 불어나게 되었다. 대사성에 제수되고 또 부경사(赴京使)에 임명되었다. 이에 공이 재차 상소를 올려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대죄(待罪)하면서, 성현이 말한 출처(出處)의 의리를 밝히고, 대신의 뜻을 거스른 만큼 의리상 진취(進取)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언급하자, 체차하라는 허락이 내려졌다. 신미년(1571, 선조 4) 여름에 홍문관 부제학으로 소명(召命)을 받았고, 또 이조 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임신년(1572, 선조 5)에 종계(宗係)를 변무(辨誣)하는 일로 주청 부사(奏請副使)에 선발되면서 대사성을 임명받았다. 이에 공이 사신의 일이 중대한 점을 감안하여 부득이 조정에 나아가게 되었는데, 도중에 또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으나 입조(入朝)해서 사직한 결과 체차되었다. 그 뒤 곧바로 다른 사정이 생겨 사행(使行)이 정지되었다. 공조 참의와 대사간에 차례로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여 체차되었다.
조정을 하직하고 향리로 돌아오던 도중에 천안군(天安郡)에 이르러서 갑자기 둔종(臀腫)을 앓게 되었는데, 태인현(泰仁縣)에 와서 병세가 더욱 위독하게 되었다. 이때 공의 큰며느리의 부친인 유사(儒士) 김점(金坫)이 고부(古阜)에서 달려와 문병하자, 공이 말하기를, “수요(壽夭)와 사생(死生)은 운명이니, 개의할 것이 없다. 다만 소싯적부터 문한(文翰)에 힘을 기울이면서 성현의 학문에 뜻을 두었는데, 중년 이래로 비록 소득이 있었다고는 하더라도 공부가 독실하지 못해서 평소의 뜻에 부응하지 못했으므로 날마다 두려운 심정으로 지내 왔다. 가령 옛날의 성현들을 앞에 모시고서 자세히 말씀을 나눈다면 나 역시 그다지 부끄러운 점이 없으리라고 여겨지기도 하지만, 사업(事業)의 면에 있어서는 옛사람들에게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이 점을 항상 부족하게 여겨 왔다. 하지만 하늘이 나에게 수명을 조금 더 연장해 주어, 조용한 숲 속에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며 학자들과 학문을 강론할 수 있게 해 준다면, 이 또한 하나의 행운이라고 할 것인데, 지금 병이 이렇게까지 악화되었으니 또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김점이 집안일에 대해서 물으니, 공이 대답하기를, “척박한 토지나마 몇 마지기 정도는 있으니, 자손들이 스스로 생활해 나갈 수가 있을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그대의 집안에서 우리 며느리가 들어왔으니, 우리 집과 다를 것이 없다. 내가 이제 곧 죽으려 하는데, 비록 병이 중하다고는 하나, 그래도 거기까지 갈 수는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는 이튿날 빨리 그곳으로 출발하도록 명하였는데, 시자(侍者)가 병세가 위독한 만큼 머물러 있도록 청하였으나, 공은 “내가 공관(公館)에서 죽을 수는 없다.” 하고, 마침내 의관을 정제(整齊)하고서 가마에 올랐다. 그리하여 김공의 집에 도착한 다음에 이틀 간을 묵고 나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때 아들인 기효증(奇孝曾)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너는 성품이 경박(輕薄)하니, 만약 뜻을 단속하여 제대로 함양(涵養)하기만 한다면 내가 걱정이 없겠다.” 하고 말을 마치고 나서 바로 숨을 거두었는데, 그때가 11월 1일이었다. 이날 밤 공의 숨이 끊어질 무렵에 홀연히 바람이 거세게 불며 천둥과 번개가 쳤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이때 공의 나이 46세였다.
공이 중도에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상이 듣고서, 어의(御醫)에게 약물을 가지고 급히 달려가서 구원하도록 하는 한편, 어찰(御札)을 내려 위문하였는데, 모두 제때에 미치지 못하였다. 상이 부음(訃音)을 듣고는 경악하고 애도하면서 부의(賻儀)를 특별히 더 내리게 하였다. 경사(京師)의 사대부들 역시 모두 가슴 아프게 생각하면서 공이 예전에 머물렀던 우사(寓舍)에 나아가 신위(神位)를 설치하고 곡을 하였다. 그리고 간원(諫院)이 아뢰기를, “기모(奇某)는 어려서부터 성현의 학문에 뜻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소견이 월등하게 뛰어나 이황(李滉)과 서한을 왕복하면서 성리(性理)에 관한 설을 토론하였는데, 선현(先賢)이 미처 드러내지 못한 점을 밝힌 바가 있습니다. 또 경악(經幄)에 입시해서 진달드린 내용을 보더라도, 이제(二帝)와 삼왕(三王)의 법도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한세상에서 유종(儒宗)으로 추앙하였는데, 불행히도 병이 들어 향리로 돌아가다가 도중에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집안이 대대로 청한(淸寒)하여 장례조차 제대로 치를 수가 없으니, 상례와 장례 등의 일을 관청에서 보살펴 주게 함으로써, 국가에서 유학(儒學)을 숭상하고 도를 존중하는 뜻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이듬해인 계유년(1573, 선조 6) 2월에 나주(羅州) 관아 북쪽 오산리(烏山里) 통현산(通峴山) 광곡(廣谷) 묘좌(卯坐)의 언덕에 안장하였으니, 공이 평소에 점지해 둔 곳이었다. 이때 원근에서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이 무려 수백여 인에 이르렀다. 그 뒤 경인년(1590, 선조 23)에 녹훈(錄勳)을 할 때, 공이 일찍이 논의에 참여하고 주문(奏文)을 작성했던 공을 참작하여, 수충익모광국공신(輸忠翼謨光國功臣)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의금부성균관춘추관사(吏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經筵義禁府成均館春秋館事) 덕원군(德原君)을 추증하였다.
공은 타고난 바탕과 성품이 탁월하고 위걸(偉傑)스러웠으며, 뜻과 기상이 고매하였다. 그리하여 겨우 지학(志學 15세를 말함)의 나이가 되었을 때, 문득 옛 성현처럼 되겠다고 스스로 다짐하였다. 경전을 널리 연구하면서 그 속에 깃든 미묘한 뜻을 정밀하게 탐구하였음은 물론, 고금의 역사에도 두루 통달하여 어디에도 막히는 바가 없었다. 그리하여 천(天)과 인(人)이나 성(性)과 명(命)의 도리를 분명하게 살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흥망(興亡)과 인물의 득실(得失)에 대해서도 마치 손바닥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환히 알기에 이르렀다.
그중에서도 공은 특히 예학(禮學)에 깊은 조예를 보여 주었다. 그리하여 국가 조정의 일에서부터 집안과 향리의 일에 이르기까지, 내용과 형식이나 상례(常禮)와 변례(變禮)를 강구함에 있어, 그 의절(儀節)과 도수(度數)를 깊이 따져 절충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구류(九流 각종 학술의 유파)와 백가(百家) 등 이단(異端)의 학술에 대해서도 모두 섭렵하여 그 요점을 터득하였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산법(算法)에 정통하여 전문 명가(名家)라도 거의 미칠 수 없는 경지를 보여 주었다. 이는 대체로 공의 총명함이 보통의 경지를 뛰어넘었기 때문에 손대는 것마다 마치 얼음이 녹듯 풀려서 그러한 것이었다.
이렇듯 고명(高明)한 경지에서 마음을 노닐면서도 항상 자신의 몸가짐을 방정(方正)하게 하였으며, 사양하고 받아들이며 주고받는 것이라든가 진퇴(進退)와 거취(去就)를 결정할 때에 있어서도 반드시 바른 도리에 입각해서 행하곤 하였다. 공은 엄정(嚴正)하면서도 각박하게 하지 않았고, 사람들과 기꺼이 어울리면서도 그 속에 빠져 들지 않았다. 영걸스러운 기상이 밖으로 흘러넘치면서도 자신을 단속하고 일을 행함에 있어 항상 겸손함을 위주로 하였기 때문에, 중도(中道)에 들어맞지 않는 경우가 드물었다.
공은 지성으로 효성과 우애를 실천하였다. 어린아이때에 모친을 잃어 복상(服喪)하지도 못했던 것을 항상 가슴 아프게 생각한 나머지, 기일(忌日)을 맞을 때마다 반드시 한 달 전부터 소식(素食)을 하면서 애모(哀慕)하는 마음을 변치 않았으며, 부친의 뜻을 받들어 봉양하는 일을 장성할수록 더욱 돈독히 하였다. 백형(伯兄)인 모(某)가 공보다 한 살이 더 많았는데, 부친을 섬기듯 모시면서 집안일을 반드시 상의하여 행하곤 하였다. 집안의 상례(喪禮)와 제례(祭禮)도 한결같이 옛날의 예법대로 준행(遵行)하였으며, 가정 내부의 일이나 향리의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도, 안으로 마음을 단정하게 하고 밖으로 온화하게 대했으므로 일절 다른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명종(明宗) 말년에 공이 얼굴빛을 바르게 하고 조정에 서자, 사대부들이 상서로운 기린이나 봉황을 대하듯 우러러보면서 중하게 의지하였다. 그러다가 선묘(宣廟)의 지우(知遇)를 받아 오래도록 경악(經幄)에서 모시게 되자, 간절한 마음으로 임금을 요순(堯舜)처럼 되게 하여 삼대(三代)의 태평 시대를 복원할 뜻을 지니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입대(入對)할 때마다 있는 힘을 다 기울여 분명하게 지적하면서 진달을 드리곤 하였는데, 제일의(第一義)가 아니면 아예 거론하지 않았다.
공은 시사(時事)를 논할 적에 무엇보다도 먼저 근본을 확립하고 장구하게 시행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데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속습(俗習)에 얽매이지도 않고 공허한 이론에 치달리지도 않으면서, 반드시 활시위를 한껏 당긴 뒤에야 쏘려고 하는 자세를 견지하며 시기가 성숙되기를 기다려서 발동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일시적으로 변통(變通)하려는 의논 같은 것은 오히려 급급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심지어는 상의 앞에서 쟁론을 벌이면서 “이 일은 뒤에 가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고 말하기까지 하였는데,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면 공의 말대로 귀결되곤 하였다. 이는 대체로 공이 본래 평소부터 큰 강령(綱領)과 이를 크게 활용할 곳들을 미리 정해 두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었다.
선묘(宣廟) 초년에 퇴계가 조정에 있을 적에, 추숭(追崇)하는 전례(典禮)와 문소(文昭 소목(昭穆)을 말함)의 논의를 공이 모두 평소에 강정(講定)해 두었는데, 퇴계가 대부분 이를 따랐다. 그리고 그때에 공의전(恭懿殿 명종(明宗)의 형인 인종(仁宗)의 왕비)이 명묘(明廟)와 수숙(嫂叔)의 관계가 있는 만큼 무복(無服)이 마땅하다는 주장이 있었는데, 퇴계도 여기에 동의하였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형제간이라 할지라도 왕통(王統)을 차례로 이었으면, 군신의 관계가 성립된다. 따라서 부자(父子)의 관계와 동일하게 여겨야 할 것이니, 마땅히 기년복(朞年服)을 입어야 한다.” 하자, 퇴계가 크게 깨닫고는 조정에 글을 보내 말하기를, “군자(君子)가 있지 않으면, 어떻게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사람들 모두가 변례(變禮)에 통달한 공의 식견을 대단하게 여기는 한편으로, 훌륭한 말을 듣고서 자신의 잘못된 생각을 빨리 바꿀 줄 아는 퇴계의 태도를 칭찬하였다.
당시로 말하면 간악한 권신(權臣)이 혼탁하게 어지럽혀 놓은 뒤를 이어받은 때였기 때문에, 사기(士氣)가 시들시들해진 채 떨쳐지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공이 그 사이에 우뚝 서서 어질고 훌륭한 이들을 스승과 벗으로 삼고 후진(後進)들을 격려하고 인도하며 선을 장려하고 악을 물리쳤다. 그리하여 몇 년 동안이나 마치 큰 물을 막는 제방처럼 조정에 우뚝 서 있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소기묘(小己卯 기묘는 조광조(趙光祖)를 가리킴)로 지목하기까지 하였다.
이렇듯 공이 신정(新政)에 기여한 공로가 매우 컸음에도 불구하고, 얼마 있다가 상신(相臣)과 뜻이 맞지 않아 해직되어 고향에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세상을 걱정하는 뜻 만큼은 공이 일찍이 뇌리에서 잊은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임신년(1572, 선조 5)에 입조(入朝)하게 되었을 때, 그것이 비록 어떤 일과 관련하여 소명(召命)을 받고서 들어오는 것이긴 하였으나, 그래도 처음의 뜻을 잊지 않고서 조금 시험을 하여 하나의 계기를 마련해 볼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조정에 들어오고 나서는 위와 아래의 분위기를 잠자코 살펴본 뒤에 물러나와 “나랏일이 벌써 그르쳐지고 말았다.”고 탄식하였다. 그리고 이 뒤로부터는 조정에 나아가 일해 볼 생각이 더욱더 없어진 나머지, 바야흐로 자신의 뜻을 가슴속에 접어 두고는 조용히 수양할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부족한 점을 더욱 보완하는 한편, 제자를 양성하고 책을 저술하여 후세에 보탬이 되게 하려고 하였던 것인데 불행히도 수명의 제약을 받고 말았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그리고 공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세도(世道)가 곧바로 어그러져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논의가 일어나면서 국가의 큰 걱정거리가 되었다. 그리하여 공이 세워 두었던 제반 시책(施策)들이 모두 제대로 행해지지 못한 채, 진신(搢紳)들이 서로 알력을 하고 선악(善惡)이 한데 뒤섞이게 된 나머지, 조정이 마침내는 크게 혼란스럽게 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정해년(1587, 선조 20)에 이르러서는 잘못된 논의가 기승을 부려 편당(偏黨)을 나누어 정치적으로 박해를 가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는데, 선진(先進)의 명현(名賢)이 이를 조정하여 화해시키려고 힘썼으나, 또한 이를 막을 수는 없었다.
당시에 공을 추가로 거론하면서 당인(黨人)으로 뒤집어씌우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나, 그 논의를 주도하는 자가 “고봉(高峯)을 모당(某黨)으로 끌어들여 연루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고 하여 마침내 중지된 적도 있었다. 식자(識者)들이 이를 두고서 논하기를, “공이 만약 죽지 않았다면 당론(黨論)을 조정하여 화해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공의 존재 여부가 바로 국가의 운명과 깊이 관련되어 있었던 것이 또한 이와 같았다.
공은 거의 도의 경지와 가까운 자품(資稟)을 타고 태어났으므로 도체(道體)를 환히 꿰뚫어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퇴계와 더불어 이기론(理氣論)과 격물치지(格物致知)의 뜻에 대해서 논변할 적에, 투철한 식견과 박학한 학식을 발휘하여 퇴계의 창을 들고서 퇴계의 방 안에 들어가곤 하였으므로, 퇴계가 자신의 견해를 많이 수정하여 따르면서 공 홀로 허령(虛靈)한 근원의 경지를 보고 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퇴계는 주자(朱子) 이후에 나온 제유(諸儒)의 학설을 절충하여, 송 나라 육상산(陸象山)과 명 나라 왕양명(王陽明)의 학설이 사이비(似而非)라고 통렬히 비판하였는데, 그러는 과정에서 의심이 나거나 막히는 점이 있으면 반드시 공에게 물어보곤 하였으니, 다른 문인들은 감히 이런 일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 공은 또 노소재(盧蘇齋 소재는 노수신(盧守愼)의 호임)를 상대로 나정암(羅整庵)의 《곤지기(困知記)》에 나오는 잘못된 견해를 논변하며 설을 지어 해명함으로써 퇴계의 뜻을 마무리하였는데, 이러한 내용이 모두 문집 가운데에 보인다.
퇴계가 조정을 하직하고 돌아갈 적에, 선묘(宣廟)가 조정의 신하 가운데에 학문을 하는 신하를 꼽는다면 누구를 들 수 있느냐고 하문하였다. 이때 뭇 현신(賢臣)들이 조정에 가득하였는데, 퇴계가 감히 알지 못하겠노라고 사양하다가, 단지 아뢰기를, “기모(奇某)로 말하면 문자를 박람(博覽)한 데다가 이학(理學)에 있어서도 조예가 뛰어나니 통유(通儒)라고 할 만한데, 다만 수렴(收斂)하는 공부가 아직 지극하지 못하다고 여겨집니다.” 하였다. 또 어떤 이가 퇴계에게 묻기를, “기고봉은 아는 것에 비해서 행동하는 면이 뒤떨어지는 것은 아닌가?” 하자, 퇴계가 대답하기를, “고봉은 의리에 입각해서 임금을 섬기고, 예법에 입각해서 진퇴(進退)를 하고 있다. 그러니 아는 것에 비해서 행동하는 면이 뒤떨어진다고 어떻게 말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퇴계가 영남에서 창도(倡道)한 뒤로 공은 멀리 호남에 있었는데, 경사(京師)에서 서로 세 차례 만난 것을 제외하고는, 오직 서한을 통해서 왕복했을 따름이었다. 퇴계는 겸허하고 장중(莊重)한 반면에, 공은 호쾌하고 준걸스러웠으며, 기상(氣像)이 또 서로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은 마음속으로 깊이 퇴계를 섬기면서 어묵동정(語默動靜) 사이에 오직 퇴계를 본받으려고 노력하였다. 그 결과 퇴계의 문하에서 종유(從遊)한 자들이 수백 명이나 되었지만, 퇴계와 마음이 계합(契合)되어 추천을 받은 사람으로는 오직 공이 첫손가락에 꼽혔다.
이는 대체로 무두질한 가죽과 팽팽한 활줄이 서로 도와 주는 것처럼, 그리고 궁성(宮聲)과 치성(徵聲)이 서로 어울리는 것처럼, 세상에 보기 드문 멋진 인연을 맺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뒤로 제유(諸儒)가 이를 두고 말하기를, “공이 실로 퇴계로부터 재단(裁斷)할 바를 취하게 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퇴계 역시 공으로부터 유익한 점을 많이 얻게 되었다.”고 하였고, 또 “공과 퇴계의 관계는 횡거(橫渠)와 정씨(程氏), 그리고 서산(西山)과 회암(晦庵)의 관계와 흡사하다.”고 하였는데, 이 말이 또한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아, 우리 동방의 도학(道學)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호임)으로부터 시작되어 그 뒤로 사현(四賢)이 차례로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박문약례(博文約禮)의 취지와 거피 식사(距詖息邪)의 공으로 말하면, 아직도 크게 갖추어지지 못한 점이 있었다. 그러다가 퇴계에 와서 비로소 학문의 목표가 바르게 확립되면서 이단(異端) 사설(邪說)이 거의 모두 깨끗이 숙청(肅淸)되기에 이르렀다.
공의 도로 말하면 대체로 퇴계와 같다고 할 수 있는데, 명군(明君)과 양신(良臣)이 서로 만나 그 도를 활짝 꽃피우지 못한 채, 오직 학문을 강명(講明)하고 정사를 보좌하려 했던 내용만이 간책(簡策)에 전해지고 있을 뿐이니, 이는 실로 관락(關洛)이 처했던 경우와 똑같다고 할 수 있다. 사문(斯文)이 흥하고 쇠하는 것도 어쩌면 그 사이에 운수(運數)가 우연히 작용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공이 대각(臺閣)에 몸담고 있을 적에는, 일단 알고 있는 이상에는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일단 말을 한 이상에는 극진하게 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다가 조정에서 물러나 돌아온 뒤로부터는 장소(章疏)를 올린 적이 한번도 없었으니, 이는 분수를 뛰어넘어서 굳이 무익한 주장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이 세상을 떠난 뒤에 허봉(許篈)이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처음으로 공이 주대(奏對)한 내용을 초록(抄錄)하여 《논사록(論思錄)》 2권을 만들었다. 이와 함께 퇴계와 문답한 책 3권과 문집 약간 권이 세상에 유행한다. 공의 글을 보면 모방해서 꾸미는 일이 전혀 없이 웅대한 기력(氣力)이 흘러넘치면서 법도에 입각한 준엄한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 그중에서도 비지(碑誌)와 간독(簡牘)에서 공의 특장(特長)을 더욱 볼 수가 있는데, 이 모두가 진정 덕이 있는 군자의 말들이라 하겠다.
부인 정부인(貞夫人) 이씨(李氏)는 함풍(咸豐)이 관향으로 19세에 공에게 출가하였다. 공은 가정 교육을 매우 엄격하게 실시하였는데, 부인이 그 뜻을 받들어 근실하게 수행하였다. 부인은 또 식견이 비범한 위에 가정을 다스리는 데에 부지런하였다. 그리하여 과부로 지낸 25년 동안 자녀를 교육시키면서 의리에 입각한 규범을 분명하게 행하였으므로, 부인의 훈계를 듣고 교화된 자가 또한 적지 않았다.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다. 장남 기효증(奇孝曾)은 일찍부터 재명(才名)을 날려 진사에 올랐으며 관직이 첨정(僉正)에 이르렀다. 그다음 아들의 이름은 기효민(奇孝閔)과 기효맹(奇孝孟)이다. 딸은 사인(士人)인 김남중(金南重)에게 출가하였는데, 정유년 난리 때에 기효민, 기효맹과 함께 왜적을 만나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기효증은 1남 2녀를 두었다. 아들 기정헌(奇廷獻)은 현감이고, 장녀는 승지 조찬한(趙纘韓)에게 출가하였으며, 다음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한이겸(韓履謙)에게 출가하였다.
공의 언행과 관련한 자료로는 가장(家狀)이 있고 연보(年譜)가 있으며, 또 국승(國乘 나라의 역사)에 기재된 제유(諸儒)의 평이 있다. 그러나 이 모두를 기재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기에, 지금 중요한 것만을 간추려서 시호(諡號)를 내릴 때에 참고할 자료로 제공하는 바이다.


 

[주D-001]창읍왕(昌邑王)이 …… 한 것 : 여기서 창읍왕은 한 무제(漢武帝)의 손자인 유하(劉賀)를 말한다. 소제(昭帝)가 죽은 뒤에 곽광(霍光)의 도움으로 즉위했으나, 행동이 음란하기 그지없어 즉위 27일 만에 태후(太后)의 명에 의하여 폐위되었다. 애왕은 무제의 여섯째 아들로서 유하의 부친인 창읍 애왕(昌邑哀王) 유박(劉髆)을 가리킨다.
[주D-002]장남헌(張南軒)이 …… 고사 : 장남헌은 송(宋) 나라 주희(朱熹)의 친구로 세상에서 남헌 선생(南軒先生)으로 일컬어졌던 장식(張栻)을 말한다. 장식이 좌사원외랑(左司員外郞)으로 재직하던 중에, 근신(近臣)인 장열(張說)이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에 임명되자, 상소를 올려 부당함을 극간(極諫)하는 한편, 묘당에 나아가 재상인 우윤문(虞允文)을 대면하고서 “환관이 집정(執政)하는 것이 경(京)과 보(黼)에서부터 시작되더니, 근신이 집정하는 것이 또 상공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고 질책하였는데, 그 뒤로 미움을 받아 원주(袁州)로 쫓겨났다가 급기야는 시골로 돌아가 몇 년 동안이나 집에서 칩거했던 일을 말한다. 《宋史 卷429 張栻列傳》
[주D-003]공은 …… 태어났으므로 :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 하(下)에, “안씨(顔氏)의 아들은 거의 도의 경지와 가깝다고 하겠다. 좋지 못한 점이 있으면 알지 못하는 적이 없었고, 일단 알면 다시는 그런 일을 행하지 않았다.”라고 공자가 안회(顔回)를 칭찬한 말이 있다.
[주D-004]퇴계의 …… 하였으므로 : 고봉이 퇴계의 설을 깊이 이해한 뒤에 퇴계의 설을 가지고 퇴계의 논점을 비판하였다는 말이다. 후한(後漢) 하휴(何休)가 《춘추(春秋)》 삼전(三傳)에 대해서 저술을 하였는데, 정현(鄭玄)이 그 내용을 반박하여 수정을 가하자, 하휴가 “강성(康成)이 나의 방에 들어와서는, 나의 창을 잡고서 나를 치는구나.”라고 탄식하였던 고사가 전한다. 강성(康成)은 정현의 자(字)이다. 《後漢書 卷35 鄭玄列傳》
[주D-005]곤지기(困知記) : 명(明) 나라 나흠순(羅欽順)의 저술로, 대체적으로는 주자학(朱子學)을 신봉하면서도, 단지 일원기론(一元氣論)을 주장하는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정암(整庵)은 그의 호이다.
[주D-006]무두질한 …… 것처럼 : 가죽은 퇴계를, 활줄은 고봉을 가리킨다. 춘추 시대 진(晉) 나라 동안우(董安于)는 완만한 성격을 고치려고 허리에 활줄을 차고 다녔고, 전국 시대 서문표(西門豹)는 조급한 성격을 고치려고 허리에 무두질한 가죽을 차고 다녔다는 고사가 전한다. 《韓非子 觀行》
[주D-007]궁성(宮聲)과 …… 것처럼 : 주객(主客)이 서로 멋지게 어울리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오성(五聲) 가운데 궁(宮)은 가장 탁한 토성(土聲)으로서 주음(主音)에 해당하고, 치(徵)는 약간 맑은 화성(火聲)으로서 궁음(宮音)에서 나오는 소리이다.
[주D-008]횡거(橫渠)와 …… 관계 : 송(宋) 나라 장횡거(張橫渠), 즉 장재(張載)는 이른바 이일분수(理一分殊)의 도리를 밝혀 이학가(理學家)인 정이천(程伊川)의 추숭을 받았으며, 진서산(眞西山), 즉 진덕수(眞德秀)는 주희(朱熹)를 학문의 종주로 삼았다.
[주D-009]사현(四賢) :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을 말한다.
[주D-010]거피 식사(距詖息邪) : 잘못된 행동[詖行]을 막으며, 삿된 주장[邪說]을 종식시킨다는 말로, 《맹자(孟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나온다.
[주D-011]관락(關洛) : 관중(關中)의 장재(張載)와 낙양(洛陽)의 정씨(程氏) 형제를 가리키는 말로, 송(宋) 나라의 이학가(理學家)를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