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통제사 이충무공 신도비

통제사(統制使) 증 좌의정 이공(李公)의 시장 (이순신)

아베베1 2011. 4. 29. 11:15

택당선생 별집 제10권
 행장(行狀) 하
통제사(統制使) 증 좌의정 이공(李公)의 시장


공의 휘는 순신(舜臣)이요, 자는 여해(汝諧)이다.
이씨는 본래 덕수현(德水縣)에서 나왔는데, 고려(高麗) 전법 판서(典法判書) 이소(李劭)로부터 현달하기 시작하였다. 3대를 거쳐 본조에 이르러서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홍문관 대제학 이변(李邊)이 나왔는데, 문학으로 진출하여 정정(貞靖)의 시호를 추증받았다. 이분이 통례원 봉례(通禮院奉禮) 휘 효조(孝祖)를 낳았다. 봉례가 병조 참의 휘 거(琚)를 낳았는데, 성묘(成廟)와 연산(燕山)의 두 조정에서 벼슬하면서 대관(臺官)으로 탄핵을 엄정하게 하였으므로 ‘범 같은 장령[虎掌令]’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분이 휘 백록(百祿)을 낳았는데, 평시서 봉사(平市署奉事)로 호조 참판을 증직받았다.
참판이 휘 정(貞)을 낳았으니, 병절교위(秉節校尉)로서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과 의정부 좌의정과 덕연부원군(德淵府院君)을 추증받았다. 배필인 초계 변씨(草溪卞氏)는 정경부인(貞敬夫人)을 추증받았는데, 가정(嘉靖) 을사년(1545, 인종 1) 3월 8일에 한성(漢城) 건천동(乾川洞) 저택에서 공을 낳았다. 공을 분만할 즈음에 부인의 꿈속에 참판공이 나타나서 이르기를, “지금 태어나는 아들은 반드시 귀하게 될 것인데, 이름을 순신(舜臣)이라고 하라.”고 하였으므로, 마침내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
공은 어린아이때부터 영민한 데다 호방한 성격을 지녀 어디에도 매이는 법이 없었다.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놀 적에 항상 전쟁놀이를 하였는데, 아이들이 공을 추대하여 대장으로 삼곤 하였다. 동네 사람 중에 기분 나쁘게 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공이 번번이 혼내 주곤 하였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공을 두려워하였다.
그러다가 장성해서는 자신을 낮춰 공손하고 성실한 자세를 유지하였는데, 글을 읽어 대의(大義)를 통하면서도 문예에 대한 공부는 그다지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무인(武人)의 길을 택하게 되었는데,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솜씨가 다른 사람보다 월등하였다. 그런데 공이 비록 무인들과 어울려 노닐었을지라도, 고상하고 간솔(簡率)하게 대하면서 조용히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입으로 외설스러운 말을 하는 적이 없었으므로, 동료들 모두가 공보다 못한 점을 느껴 어울리기를 꺼려 하였다.
만력(萬曆) 병자년(1576, 선조 9)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이때 무경(武經)의 시험을 볼 적에, 장량(張良)이 벽곡(辟穀)을 하고 도인(導引)한 일에 대해 강설한 내용이 선유(先儒)가 논한 것과 합치되었으므로, 고관(考官)이 대단히 기이하게 여겼다. 공은 일단 출신(出身)한 뒤에도 빨리 출세하려는 욕심이 없었으며, 청탁하는 일도 전혀 하지 않았다.
권지 훈련원봉사(權知訓鍊院奉事)가 되었다. 이때 병조 판서 김귀영(金貴榮)이 자신의 얼녀(蘖女 첩 소생의 딸)를 공에게 첩으로 주려 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내가 이제 막 벼슬길에 들어섰는데, 벌써부터 권문(權門)에 자취를 의탁한다면 어찌 옳다고 하겠는가.” 하고, 그 즉시로 중매하는 사람을 사절하였다.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가 이조 판서로 있으면서, 공의 사람됨을 듣고 높이 평가한 위에 기왕이면 동종(同宗 관향(貫鄕)이 같은 사람)을 서용(敍用)하려고 하여 사람을 통해 만나 보자고 청하였으나, 공은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고서 말하기를, “동종의 입장에서야 만나 볼 수도 있는 일이지만, 현재 전조(銓曹)를 담당하고 계시는 이상 만날 수가 없는 일이다.” 하였다.
동구비 권관(童仇非權管)에 조용(調用)되었다. 임기가 만료된 뒤에 다시 훈련원에서 근무하다가 충청 병사(忠淸兵使)의 군관(軍官)이 되었다. 공은 구차하게 낮고 고달픈 자리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뜻을 꺾고서 남을 따른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리고 주장(主將)에게 비위(非違) 사실이 있으면 극진하게 말하여 이를 바로잡았고, 청렴한 자세로 자신의 몸을 단속하면서 털끝만큼도 사정(私情)을 개입시키는 법이 없었다.
발포 만호(鉢浦萬戶)로 전직(轉職)되었다. 수사(水使) 성박(成鎛)이 관사(館舍)의 오동나무를 베어 거문고 만들 재목으로 쓰려 하자, 공이 거절하며 허락하지 않았는데, 수사가 크게 화를 내면서도 감히 베지를 못하였다. 얼마 있다가 경차관(敬差官)의 뜻을 거슬러 미움을 받은 나머지 탄핵을 받고 파면되어 돌아왔다.
건원보 권관(乾原堡權管)에 서용되었다. 오랑캐 우을지내(亏乙只乃)의 세력이 커져서 오랫동안 변방의 큰 근심이 되어 왔는데, 공이 부임하자마자 기책(奇策)을 내어 유인한 다음 생포해서 바쳤다. 그런데 병사(兵使)가 자기 손으로 그 일을 이루지 못한 것을 꺼린 나머지, 거꾸로 공이 군대를 제멋대로 동원하였다는 죄목으로 죄를 청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도 속으로는 공의 공로를 가상하게 여기면서도 상을 주지 못하였다.
규례에 따라 참군(參軍)으로 승진하였을 때에, 덕연공(德淵公 부친의 봉호임)의 상을 당하였다. 상복을 벗은 뒤에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로 올랐으며, 선발되어 조산 만호(造山萬戶)를 제수받았다. 이때 방백(方伯)의 건의에 따라 녹둔도(鹿屯島)에 둔전(屯田)을 설치하였는데, 이 일을 공에게 맡겨 아울러 관장토록 하였다. 이에 공이 지역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가 군사가 적은 것을 걱정하여 여러 차례나 병력을 증강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병사(兵使) 이일(李鎰)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가을철 수확기가 되자 오랑캐가 과연 군사를 동원하여 영채(營寨)를 습격해 왔다. 이에 공이 단신으로 뛰쳐나가 항거하여 싸우면서 그 추장(酋長)을 활로 거꾸러뜨리자 오랑캐가 바로 군대를 철수시켜 물러갔으므로, 공이 그 뒤를 추격하여 포로로 잡힌 둔졸(屯卒) 60여 인을 빼앗아 가지고 돌아왔다. 그런데 병사가 공을 죽여서 자신의 허물을 은폐할 목적으로, 형구(刑具)를 벌여 놓고 장차 공을 참수(斬首)하려고 하였다.
이에 군관 등이 이 광경을 둘러서서 보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공에게 술을 마시고 죽음의 두려움을 없애도록 권하였으나, 공은 정색(正色)하고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이다. 무엇 때문에 술을 마시고 취한단 말인가.” 하였다. 그리고는 바로 뜰로 나아가 항변하면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기를 거부하자, 병사가 기가 꺾인 나머지 그 일을 중지하고 가두어 둔 채 위에 보고하였는데, 선묘(宣廟)가 공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살펴보고는 종군(從軍)해서 공을 세우도록 명하였다. 얼마 있다가 배반한 오랑캐를 쳐서 수급(首級)을 바치고 사면(赦免)을 받았다.
전라 순찰사(全羅巡察使) 이광(李洸)이 공을 자신의 군관으로 삼으면서 “그대와 같은 인재가 어찌하여 이토록 굴욕을 당한단 말인가.” 하고는, 위에 아뢴 결과 본도(本道)의 조방장(助防將)이 되게 하고, 다시 무신겸선전관(武臣兼宣傳官)을 겸하게 하였다.
기축년(1589, 선조 22) 봄에 정읍 현감(井邑縣監)에 임명되었는데, 잘 다스린다는 소문이 자자하였다. 이때 도사(都事) 조대중(曺大中)이 정여립(鄭汝立)의 역옥(逆獄)에 연루되어 추가로 신문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금오랑(金吾郞)이 문서를 수색하던 중에 공이 그에게 답장한 글을 보고는 공에게 그 글을 없애도록 하라고 은밀히 말해 주었다. 그러나 공은 말하기를, “내가 쓴 글 가운데에는 별다른 말이 없다. 그리고 이미 수색하고 있는 중에 나왔고 보면, 이 글도 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하였는데, 결국에는 이 때문에 연좌(連坐)되는 일은 있지 않았다.
조대중의 영구(靈柩)가 고을 앞을 지나가게 되자, 공이 제물(祭物)을 갖추어 곡(哭)을 하고 보내었다. 이에 어떤 사람이 공을 힐난하자, 공이 말하기를, “조공(曺公)이 자복(自服)을 하지 않고 죽었으니, 과연 죄가 있는지도 확인할 수가 없다. 따라서 지금 막 본도(本道)를 거쳐가는 마당에 사객(使客)이 괄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였다.
이때 정상 언신(鄭相彦信)도 감옥에 갇혀 있었는데, 공이 마침 임명장을 받고 서울에 왔다가, 옛날 막부(幕府)에서 모셨던 어른이라고 하여 옥문(獄門)에 나아가서 문후(問候)를 올리니, 듣는 이들이 의롭게 여겼다.
비국이 순서를 무시하고 올려서 등용할 대상자를 선발하였는데, 공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이는 대개 문충공(文忠公) 유성룡(柳成龍)이 공과 동향(同鄕)이라서 평소부터 공의 훌륭함을 알고는 조정에 적극 추천하였기 때문이었다.
경인년(1590, 선조 23)에 고사리 첨사(高沙里僉使)로 승진하였는데 대간(臺諫)이 너무 빨리 옮겨 준다고 논하였고, 뒤이어 당상(堂上)으로 품계가 오르면서 만포 첨사(滿浦僉使)에 제수되었으나, 이때에도 빨리 승진시킨다고 대간이 논하는 바람에 개정되어 그대로 눌러 있게 되었다. 신묘년(1591, 선조 24)에 진도 군수(珍島郡守)로 옮겨졌다가 곧바로 가리포 첨사(加里浦僉使)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에 발탁되었다. 이때 왜적이 침략할 조짐이 벌써 보이기 시작하였는데도 조야(朝野)에서는 태연하기만 하였다. 그러나 공만은 홀로 깊이 근심한 나머지 날마다 왜적을 막을 대비책을 세우면서, 쇠사슬을 만들어 진영(鎭營)의 입구와 바다의 항구에 가로로 늘여 놓기도 하였다.
또 거북선을 창제(創製)하였는데, 그 제도를 보면 마치 엎드린 거북 모양을 하고 있었다. 위에는 판자를 덮고 뾰죽하게 쇠꼬챙이를 꽂아 놓아 왜적이 올라탈 수 없게 하였으며, 그 안에다 군사를 숨기고 팔면(八面)으로 총을 쏠 수 있게 하였는데, 이 배를 선봉(先鋒)으로 삼아 적선을 불태우고 충돌하게 하였으므로, 항상 승리를 거둘 수가 있었다.
임진년(1592, 선조 25) 4월에 왜적이 대거 침입하여 먼저 부산(釜山)과 동래(東萊)를 함락시키고는 영남을 거쳐서 경사(京師)로 향하였다. 이에 공이 군대를 옮겨 그들을 공격하려고 하였으나, 부하들이 모두 진영을 옮겨 다른 지방으로 가는 것을 난처하게 여기는 가운데, 오직 군관(軍官) 송희립(宋希立)과 만호(萬戶) 정운(鄭運)만이 공의 의논에 동조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공은 말하기를, “오늘날 사태가 이에 이르렀으니 오직 왜적을 치다가 죽어야 마땅하다. 감히 안 된다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목을 벨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여러 진보(鎭堡)의 군사들을 본영(本營)의 앞바다에 집결시킨 뒤에 기약을 정해 출발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때 마침 경상 수사(慶尙水使) 원균(元均)이 수군을 모두 잃고는 사람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으므로, 공이 즉시 군대를 이끌고 떠나면서 옥포 만호(玉浦萬戶) 이운룡(李雲龍)과 영등 만호(永登萬戶) 우치적(禹致績)을 선봉으로 삼았다. 옥포에 이르러서 먼저 왜적의 배 30척을 격파하고 고성(固城)에 이르렀는데, 여기에서 왜적이 경사(京師)에 들어가고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몽진(蒙塵)했다는 말을 듣고는, 공이 서쪽을 향해 통곡한 뒤에 군대를 이끌고서 본영으로 돌아왔다.
원균 등이 다시 군대를 요청해 옴에 따라 진격하던 도중에 노량(露梁)에서 왜적의 배 13척을 격파하였다. 그리고 계속 추격하여 사천(泗川)에 이르렀을 때에 공이 왼쪽 어깨에 탄환을 맞았으나 손에서 활을 놓지 않고 하루 종일 독전(督戰)하였는데, 전투가 끝나고 나서야 군중(軍中)에서 이 사실을 비로소 알고는 용동(聳動)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6월 초에 왜적을 당포(唐浦)에서 만났다. 이때 왜적의 대장이 몇 층 누각을 세운 화려한 배에 타고 있었는데, 황금 투구에 비단옷을 입고 의장(儀仗)을 매우 성대하게 차리고 있었다. 이에 공이 북을 한 번 치고 육박전을 전개하면서 통전(筒箭)을 날려 그 대장을 쏘아 죽이고는 나머지 적들도 모조리 섬멸하였다. 정오 무렵에 적선(賊船)이 또 대대적으로 달려들자, 공이 포획(捕獲)한 누선(樓船)을 왜적으로부터 1리(里)쯤 떨어진 전방에 배치하고는 불을 질렀다. 그러자 배 안에 있던 화약(火藥)이 폭발하면서 그 화염이 천지를 진동하였는데, 이렇게 해서 왜적이 또 패하여 물러났다.
얼마 뒤에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 이억기(李億祺)가 수군을 총동원하여 와서 합세하였으므로, 고성 앞 포구에서 연합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때 적의 우두머리가 삼 층의 누선에 타고서 푸른 일산을 쥐고 있었는데, 전투를 개시하자마자 그를 쏘아 죽이고 30여 척의 배를 박살내자, 살아남은 적들이 해안에 상륙하여 도주하였다. 이로부터 몇 차례 더 전투를 행할 때마다 모두 승리를 거두자, 왜적이 군대를 거두어 멀리 도망쳤으므로, 공도 마침내 이억기와 더불어 본영으로 돌아왔다.
왜적이 또 양산(梁山)에서 호남을 향하자, 공이 다시 고성 견내량(見乃梁)으로 진격하다가, 바다를 새까맣게 뒤덮고 오는 적선과 마주치게 되었다. 이에 공이 물러나는 척하면서 적을 유인하여 한산도(閑山島) 앞바다까지 왔을 때, 군대를 돌려 대전(大戰)을 벌인 결과 대포 연기가 하늘을 찌르는 가운데 70여 척의 적선을 모조리 격파하였다. 그리하여 왜적의 대장 평수가(平秀家)가 간신히 몸을 빼어 달아나는가 하면 장졸(將卒) 등 죽은 자가 수만 명에 달했으므로 이를 듣고는 왜적 내부가 진동하였다.
왜적이 또 안골포(安骨浦)에서 평수가의 군대를 지원하러 오면서 전선(戰船)의 장비를 더더욱 단단히 갖추었으나, 공이 이를 역습하여 40여 척을 불태워 버렸다. 그리고는 부산(釜山)으로 진격하여 그곳에 진을 치고 있는 왜적을 박살냄으로써 근거지를 뒤엎어 버리려고 하였는데, 왜적이 높은 언덕에 올라 영채(營寨)를 세우고는 굳게 지키기만 하였으므로, 마침내 빈 배 1백여 척을 불사르고 돌아왔다.
당시에 왜적이 제로(諸路)에 가득 차 있는 상태에서 관군(官軍)과 의병(義兵) 모두가 계속 패하기만 한 채 감히 대항하지 못하였는데, 공이 홀로 대첩(大捷)한 상황을 잇따라 아뢰었으므로, 상이 가상하게 여겨 세 차례나 가자(加資)한 끝에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이르게 하고 교서(敎書)를 내려 표창하였다.
공이 본영의 지세(地勢)가 호남 쪽에 치우쳐 있는 만큼 본영을 한산도로 옮겨서 양도(兩道)를 제압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하였는데, 이는 한산도가 거제현(巨濟縣) 남쪽에 위치하여 그야말로 양호(兩湖)의 수로(水路)에 있어 인후(咽喉)에 해당되는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조정이 마침내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의 직책을 신설하고는 공으로 하여금 본직(本職)을 수행하면서 그 직책을 겸하게 하였으니, 통영(統營)이 설치된 것은 바로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이에 앞서 원균이 배 한 척을 타고 공에게 와서 하소연을 하자 공이 연명(聯名)으로 승첩을 아뢰곤 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공의 공적이 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공을 승진시켜 통제사로 삼았던 것인데, 원균은 공의 아래에 있게 된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한 나머지 이때부터 공에게 두 마음을 품기 시작하였다. 그런 까닭에 공이 항상 부드럽게 대하면서 포용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원균은 사납게 굴고 제멋대로 화풀이를 하면서 공의 절제(節制)를 따르려 하지 않았다. 이에 공이 대사(大事)를 그르칠까 염려한 나머지 자신의 허물을 들어 인피(引避)하며 체차시켜 주기를 청하자, 조정에서 이를 묵과할 수 없다고 여겨 원균을 충청 병사(忠淸兵使)로 전직(轉職)시키기에 이르렀는데, 원균은 쌓인 감정을 풀지 않은 채 조정의 고관들과 결탁하고는 온갖 방법으로 공을 무함하기 시작하였다.
왜장(倭將) 평행장(平行長)이, 일찍이 대마도(對馬島)가 우리나라를 섬겨 오다가 이때에 이르러 앞장서서 침입한 사실이 부끄럽다는 뜻을 우리나라 사람에게 보이면서, 다시 우호 관계를 회복하자고 거짓으로 청해 왔다. 이에 조정이 포로가 된 왕자(王子)를 탈출시키려는 목적으로, 경상 병사(慶尙兵使) 김응서(金應瑞)로 하여금 그들과 왕복하며 일을 의논하게 하였다.
그러자 평수길(平秀吉)이 이 기회를 이용해서 반간계(反間計)를 행할 목적으로 평행장의 부하인 요시라(要時羅)에게 우리 조정에 비밀 보고를 올리게 하기를, “화의(和議)가 성립되지 않는 것은 전적으로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전쟁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인데, 지금 그가 다시 침입하려고 한다. 그러니 만약 수군으로 하여금 바다 한가운데에서 요격(邀擊)하여 그를 죽이게만 한다면, 군대는 저절로 해산되고 말 것이다.” 하고는, 가등청정이 타고 오는 배의 기패(旗牌)와 채색(彩色)을 가르쳐 주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되자 조정이 크게 현혹된 나머지 공에게 빨리 진격하라고 명하면서 평행장이 말한 것처럼 하라고 재촉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공의 생각에는 그 말이야말로 속임수로서 속마음을 헤아리기 어렵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며칠 동안이나 편의책(便宜策)을 강구하면서 행동을 늦추고 있었다. 그러자 요시라가 또 와서 말하기를, “가등청정이 벌써 바다를 건너와 해안에 정박하였다. 수군이 어째서 이런 기회를 놓쳤단 말인가.” 하였다.
이에 대간(臺諫)이 교대로 탄핵하면서 공이 머뭇거렸다는 이유를 들어 논죄(論罪)하였는데,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은 사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환히 꿰뚫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유상(柳相 유성룡(柳成龍)을 가리킴) 역시 혐의가 있어 감히 공을 구제할 수가 없었는데, 이는 당시에 이미 조정의 논의가 두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상이 시신(侍臣)을 보내 사실을 확인하도록 하였으나, 그 시신 역시 원균의 당파에 소속된 사람이었으므로 사실과 반대로 보고를 올렸다.
그리하여 정유년(1597, 선조 30) 2월에 공이 체포되어 고신(拷訊)을 받고는 장차 중형(重刑)을 받게 될 운명에 처하였는데, 정상탁(鄭相琢)이 상에게 아뢰기를, “이순신(李舜臣)은 명장이니 죄를 용서해 주고 나서 공을 세우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자, 상 역시 공의 공로를 생각하여 특별히 용서하고는 종군(從軍)해서 스스로 공을 세우도록 명하였다.
이때 모부인(母夫人)이 아산(牙山)에서 세상을 떠났다. 공이 지름길로 달려가 곡을 하고 성복(成服)을 하고 나서 곧바로 길을 떠나며 “내가 한마음으로 충성과 효도를 바치려고 했던 뜻이 이제 와서는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고 탄식하였다. 이에 군사와 백성들이 길을 막고 목 놓아 울었으며, 원근에서도 모두 탄식하며 애석하게 여겼다.
원균이 대신 통제사(統制使)가 되고 나서는, 공이 행했던 군정(軍政)과는 모조리 반대로만 행하였다. 공이 진소(鎭所)에 있을 적에 운주당(運籌堂)을 짓고는 이곳에서 장사(壯士)들과 회의를 하였는데, 그때에는 사졸(士卒)의 무리들도 모두 마음대로 통행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원균은 그 안에다 기첩(妓妾)을 모아 놓고 담장을 두른 다음 질펀하게 술자리를 벌이면서 업무는 돌아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아랫사람들을 매질하면서 잔혹하게 대했으므로, 군사들의 마음이 이반(離反)된 나머지 모두들 말하기를, “왜적이 오면 도망치는 수밖에는 없다.” 하였다.
이때 요시라(要時羅)가 또 와서는 “대군이 바야흐로 바다를 건너오고 있으니 앞길을 막고 공격해야 한다.”고 하자, 조정이 다시 원균에게 지시를 내려 빨리 싸우도록 재촉하였다. 원균은 이미 공과는 정반대로 행동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렵다는 말을 감히 꺼낼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래서 이해 7월에 병력을 총동원하여 전진하였는데, 왜선(倭船)이 좌우로 유인하여 아군 스스로 곤경에 처하게 만든 다음에 야음(夜陰)을 틈타서 엄습(掩襲)하여 전군을 궤멸시키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원균이 도망치다가 죽었으며, 1백여 척의 배가 모조리 가라앉고 사졸들 역시 모두 몰살을 당하였는가 하면, 마침내는 한산도(閑山島)의 본영까지도 함락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공이 앞으로 몇 년 동안 쓸 수 있도록 비축해 놓은 양식과 무기까지도 모두 불타 없어지고 말았다.
한편 생각해 보건대, 공이 죄를 얻게 된 것이나 원균이 패망한 것 모두가 왜적의 첩자(諜者)에 농락당한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대체로 왜적은 먼저 부산(釜山)과 동래(東萊) 지방을 점거하여 대마도(對馬島)와 상응하는 형세를 취하면서 한번 돛을 달고는 곧장 건너오곤 하였으므로, 우리 군대가 바다를 향해 진격하더라도 그들은 싸우지 않고 피하기만 하면서 멀리 동해에 머물러 있곤 하였다. 그런데 이곳의 형세는 서해(西海)의 수로(水路)와는 제어하는 면에서 차이가 있었는데, 우리 군대가 이곳의 길목을 차단할 수 없었던 것도 바로 이때문이었다고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는 우리 수군이 누차 승첩을 올리는 것만 보고서 반드시 싸우도록 요구하였던 것인데, 원균 역시 반드시 패하리라는 것을 알고서 진격했다가 끝내는 패망하고 말았으니, 이 모두가 사실은 멀리 조정에서 지시를 잘못 내린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산도가 일단 결딴난 뒤로는 적이 이제는 서해(西海)를 통해 상륙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계속 앞으로 나아가 남원(南原)을 함락시킴에 이르러서는 전라도와 충청도를 더 이상 지킬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으므로, 도원수(都元帥)가 진주(晉州)에 머물러 있다가 공을 보내 남은 군사들을 수습하도록 하였다. 그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공이 다시 통제사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공이 10여 기(騎)를 이끌고 순천부(順天府) 경내로 치달려 들어가서 병선(兵船) 10여 척을 구하고 도망친 군졸 수백 명을 수습한 다음에 난도(蘭島)에서 왜적을 깨뜨렸다. 조정에서는 공의 병력이 허약한 것을 감안하여 공에게 상륙해서 진퇴(進退)하도록 하였으나, 공이 아뢰기를, “신이 한번 상륙하고 나면 왜적의 배가 서해를 통해 곧장 위로 올라갈 것이니 경사(京師)가 바로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이때 호남에서 피난을 온 사민(士民)의 배 100여 척이 여러 섬에 흩어져 머물면서 공을 의지처로 삼고 있었다. 이에 공이 그들과 약속하여 한곳에 집결시킨 뒤에 그 배들을 군대의 뒤에 배치하여 성세(聲勢)를 돕도록 하는 한편, 공 자신은 홀로 10여 척을 거느리고 앞으로 나아가 진도(珍島) 벽파정(碧波亭)에서 적선을 맞이하였다. 그러자 적선 수백 척이 마치 태산이 짓누르는 것과 같은 형세로 습격해 왔는데, 공이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일자(一字)의 형태로 진영을 정비한 다음에 화포와 화살을 사면에서 쏘며 진격하니 적병이 바람에 쓸리듯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거제 현령(巨濟縣令) 안위(安衛)가 배를 끌고 뒤로 물러나려 하자, 공이 뱃머리에 서 있다가 작은 배 한 척을 급히 보내 안위의 머리를 베어 오라고 명하였다. 이에 안위가 마침내 진격하여 결사전(決死戰)을 벌인 결과 왜적을 크게 깨뜨리고 그들의 이름난 장수 마다시(馬多時)를 사로잡아 목을 베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해서 군대의 명성이 다시금 떨쳐지기 시작하였다.
승첩(勝捷)의 소식이 전해지자 상이 공의 자급(資級)을 숭품(崇品)으로 올려 주려고 하였으나, 언자(言者)가 공의 작위와 직질(職秩)이 이미 높다고 하였으므로, 다만 제장(諸將) 이하에게 상을 내리도록 하였다. 양 경리(楊經理 양호(楊鎬))도 서울에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는 은냥(銀兩)과 비단을 보내 그 공적을 위로하며 칭찬하였다.
당시에 육로(陸路)가 병화(兵禍)를 입어 군량 수송이 이어지지 않았으므로 군중(軍中)이 이를 걱정하였다. 이에 공이 어느 날 밤에 격문(檄文)을 돌려 피난을 온 여러 배들에게 사정을 알리자, 그 배들이 이미 공을 중하게 의지하고 있던 터라서, 서로 다투어 곡물 수송에 조력(助力)하고 의복도 함께 보내 주었으므로, 사졸들이 그 덕분에 배부르고 따뜻하게 지낼 수가 있었다.
공이 비록 기복(起復 거상(居喪) 중에 벼슬길에 나오는 것)을 하여 종군(從軍)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소식(素食)을 하면서 날마다 쌀 몇 일(溢 1일은 한 되의 24분의 1임)만을 먹고 있었으며, 게다가 작전 계획을 세우고 조발(調撥)하는 등의 일로 밤에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였으므로, 몸이 몰라보게 야위어 갔다. 이에 상이 특별히 사신을 보내어 권도(權道)를 따르도록 분부를 내리면서 맛있는 음식을 보내 주자, 공이 눈물을 흘리면서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무술년(1598, 선조 31) 봄에 진영을 강진(康津) 고금도(古今島)로 옮기고 나서 백성을 모집하여 둔전(屯田)을 행하였는데, 남쪽 백성들이 줄을 이어 공에게 귀의하였으므로 마침내 큰 진영을 이루었다.
이해 가을에 도독(都督) 진린(陳璘)이 수군 5천 명을 거느리고 우리나라에 왔는데, 그의 성격이 사납고 오만하였으므로, 상이 혹시라도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걱정하여 잘 대접하라고 공에게 밀지(密旨)를 내려보냈다. 이에 공이 위의(威儀)를 성대하게 갖추고 먼 섬에까지 나아가 영접을 하였으며, 본영에 도착해서는 대대적으로 연회를 베풀어 환대하였으므로, 중국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사람들이 민간에 들어가 약탈을 자행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나라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일어나며 분개하자, 공이 홀연히 군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막사(幕舍)를 철거한 뒤에 배낭을 메고 배에 올라타고서 출발하도록 하였다.
이에 진린이 깜짝 놀라면서 괴이하게 여겨 사람으로 하여금 그 연유를 묻게 하자, 공이 말하기를,
“중국 군대가 오는 것을 보고 마치 부모를 영접하는 것처럼 반겼는데, 지금 포학하게 약탈을 자행하는 것을 보고는 사졸들이 견디지 못한 나머지 각자 도망치고 있다. 그런데 내가 대장(大將)으로 있는 이상, 나 혼자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겠기에, 장차 다른 섬으로 진영을 옮길까 해서 그런 것이다.”
하니, 진린이 크게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이 들어 곧장 공에게 나아가서 허리를 굽혀 사죄하며 매우 정성스럽게 만류하였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대인(大人)이 만약 나의 말을 들어주기만 한다면, 내가 즉시 머물러 있도록 하겠다.”
하니, 진린이 말하기를,
“일체 공이 말한 대로 따를 것이요, 감히 위배하지 않도록 할 것이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중국 군사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노예처럼 여기면서 아무 거리낌 없이 행동하고 있다. 내가 편의대로 그러한 일을 금단(禁斷)할 수 있도록 대인이 다행히 허락해 준다면, 두 나라 군대가 아무 탈 없이 서로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진린이 허락하였다. 그 뒤로는 중국 사람들이 금법(禁法)을 범할 때마다 공이 직접 단속하였으므로, 섬 안이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녹도 만호(鹿島萬戶) 송여종(宋汝悰)이 중국 배와 함께 연합하여 왜적을 공격해서 배 6척과 수급(首級) 70개를 노획하였는데, 중국 사람들은 아무 소득이 없었다. 진린이 이때 마침 공과 더불어 연회석상에 있다가 이 말을 듣고는 부끄러워하면서 성을 내자, 공이 말하기를,
“대인이 와서 우리 군대를 통솔하고 있으니, 우리 군대의 승첩은 곧 천병(天兵)의 승첩이다. 어찌 감히 여기에 사(私)를 개입할 수가 있겠는가. 노획한 전과(戰果)를 모두 대인에게 바치고자 하니, 대인은 이 모두를 주문(奏文)으로 보고하기 바란다.”
하니, 진린이 크게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공이야말로 동방의 명장이라고 평소에 듣고 있었는데, 지금 보니 과연 그렇다.”
하였다. 이렇게 되자 송여종이 실망한 나머지 자신의 심정을 하소연하자,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왜적의 머리야 썩은 고깃덩어리에 불과한데, 중국 사람에게 준다고 해서 아까울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대가 세운 공에 대해서는 물론 내가 알아서 장계(狀啓)로 보고할 것이다.”
하니, 송여종도 승복(承服)하였다.
이 일이 있은 뒤로부터는 진린이 공의 군대 다스리는 법과 제승(制勝) 전략에 대해서 하나하나 흠앙하며 탄복을 하였으며, 심지어는 우리나라의 큰 판옥선(板屋船)을 스스로 빌려 타고서는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군무(軍務)에 대해서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자문을 구하곤 하였다. 그리고 항상 말하기를, “공은 소국(小國)에 있을 인물이 아니다. 만약 중국 조정에 들어와서 벼슬을 했더라면 천하의 상장(上將)이 되었을 터인데, 어찌하여 이런 곳에서 스스로 곤욕을 자초하는가.” 하였으며, 선묘(宣廟)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이모(李某)는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질을 소유한 인물이요, 보천 욕일(補天浴日)의 공을 세울 인물이다.” 하였는데, 그 말이 꼭 맞는 말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대개는 심복(心服)해서 나온 말들이었다.
육군 제독 유정(劉綎)이 묘병(苗兵 남병(南兵))을 이끌고 와서는 진린(陳璘)과 함께 평행장(平行長)을 협공(夾攻)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리하여 수군이 항구로 진격하여 전투를 벌이게 되었는데, 승부를 아직 예측하지 못할 상황에서 유정의 군대가 약속을 어기고 응하지 않았다. 이는 대체로 평행장이 이미 관백(關白)인 풍신수길(豐臣秀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속히 철수하여 물러가려고 꾀하면서도 우리 수군이 저지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유정에게 뇌물을 먹였기 때문에 공격을 늦춘 것이었다.
한편 평행장은 또 남몰래 진린에게 청탁하여 그들이 돌아갈 수 있도록 길을 빌려 줄 것을 매우 간절하게 요청하였는데, 진린 역시 그의 뇌물을 받고는 이를 허락하려고 하였다. 이에 공이 나무 조각에다 은밀하게 글을 써서 진린에게 보내 그 잘못을 풍자하니, 진린이 부끄럽게 여겨 그 일을 그만두었다. 평행장이 이 사실을 알고는 또 공에게 사람을 보내 총검(銃劍)을 선물로 주었으나, 공이 준엄하게 꾸짖으며 물리쳤다. 왜적의 보루(堡壘)에는 당시에 양식이 고갈된 상태였는데, 중국 사람들이 왕래하는 덕분에 꽤나 중국의 식량을 무역하곤 하였으나, 이 일이 있은 뒤로부터는 마침내 영문(營門)이 닫히면서 출입이 끊어지고 말았다.
진린이 부끄러워하면서도 이익을 잃게 되는 것을 아깝게 여긴 나머지, 평행장은 놓아주고 그 대신 남해(南海)의 왜적에게 가서 공격하려고 하면서, 공을 재촉하여 먼저 떠나도록 하였으나 공이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하며 따르지 않았다. 이에 평행장이 또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자 사천(泗川)에 있는 왜적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는데, 이들은 바로 살마주(薩摩洲)의 군사들이었다. 이들은 무적(無敵)을 자랑하는 강용(强勇)한 군사들이었기 때문에, 가능하면 싸우지 않고 기회를 엿보다가 반드시 전황(戰況)이 가장 중요한 곳에만 투입하곤 하였는데, 평행장이 위급한 상황에 처한 것을 보고는 병력을 총동원해서 달려오기에 이르렀다.
이날 밤에 큰 별 하나가 바다 속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군중(軍中)에서 괴이하게 여겼다. 공이 중국 배와 함께 노량(露梁)에서 적을 맞아 전투를 벌였는데, 밤부터 아침에 이르기까지 무려 수십 합(合)의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적병이 퇴각하기 시작하였는데, 바로 이때 공이 홀연히 적의 유탄(流彈)에 맞아 운명하고 말았다. 공의 조카인 이완(李莞)은 담력과 용기가 대단하였는데, 즉시 공의 시신(屍身)을 안고 방에 들어가 이 사실을 숨기고는 곡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는 깃발을 들고서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전투를 독려하였으므로, 배 안에서 모두 공의 죽음을 알지 못하였다.
도독(都督)이 왜선(倭船)에 포위되자 우리 군대가 가서 구원하였다. 정오 무렵에 왜적이 크게 패하여 달아나기 시작하였는데, 평행장은 이런 와중에 틈을 타서 주사(舟師)를 바다 밖으로 빼내어 달아났다. 진린이 사람을 보내 공을 위로하였는데, 그때는 이미 배 안에서 발상(發喪)을 하고 있는 때였다. 도독이 공의 죽음을 듣고는 의자 아래로 굴러 떨어지면서 땅을 치고 크게 애통해하였으며, 두 나라 군사들이 모두 통곡하는 소리가 바다를 진동시켰다.
상이 관원을 보내 조문을 하고 제사를 올리게 하였으며, 특별히 의정부 우의정에 추증토록 하였다. 공의 영구(靈柩)가 아산(牙山)으로 돌아오자 일로(一路)의 사민(士民)들이 호읍(號泣)하고 제사를 올렸으며, 이렇듯 조문하는 행렬이 천리 길에 줄을 이었다. 이듬해에 선영(先塋)의 언덕에 안장(安葬)하였다. 공의 부하들이 수영(水營)에 사당을 세우게 해 줄 것을 조정에 요청하자, 충민(忠愍)이라는 편액(扁額)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거제(巨濟)의 군민(軍民)들도 사당을 세워 때가 되면 제사를 올렸으며, 호남 사람들도 차령(車嶺)에 비석을 세워 사모하는 슬픈 심정을 부쳤다.
갑진년(1604, 선조 37) 겨울에 이르러 비로소 임진년 이래의 전공(戰功)을 평가할 적에 공을 으뜸으로 논하였다. 좌의정으로 추가하여 증직하는 동시에 효충장의적의협책선무공신(效忠仗義迪毅協策宣武功臣)의 녹권(錄券)을 내리고 덕풍군(德豐君)에 봉하였으며, 관원을 보내 이를 알리고 제사를 올리게 하는 한편, 전지(田地)와 노비를 하사하였으니, 공을 추모하는 전례(典例)가 두루 갖추어졌다고 하겠다.
공의 부인인 상주 방씨(尙州方氏)는 정경부인(貞敬夫人)에 봉해졌다. 슬하에 아들 셋을 두었다. 장남 이회(李薈)는 현감이고, 다음 이예(李䓲)는 정랑(正郞)이다. 막내인 이면(李葂)은 용맹스럽고 병법을 좋아하여 공이 항상 자신을 닮았다고 대견하게 여겼는데, 정유년(1597, 선조 30) 가을에 모친을 따라 아산(牙山)에 있던 중에 왜적을 만나서 싸우다가 죽었다. 딸 하나는 사인(士人)인 홍비(洪棐)에게 출가하였다. 서출(庶出)인 아들이 둘 있는데, 이훈(李薰)과 이신(李藎) 모두 무과(武科)에 급제하였으나, 관직은 얻지 못하였다.
공은 집안에서의 행실이 또한 독실하였다. 형 두 사람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공이 너무나도 가슴 아프게 생각한 나머지 고아가 된 조카들을 데려다가 양육하였으며, 결혼을 시키고 유산을 나눠 주는 것 역시 자신의 자식들보다 먼저 하였다. 그리고 공이 절조를 지키면서 몸가짐을 꼿꼿하게 견지하는 것을 보면, 마치 석벽(石壁)이 높다랗게 우뚝 서 있는 것만 같았는데, 비록 문학(文學)을 업으로 삼고 승묵(繩墨)으로 자신을 단속하는 인사들이라 할지라도 공에게 미치지 못하는 점이 있었다.
공이 훈련원(訓鍊院)에 근무할 적에 무관의 직책으로서는 가장 아랫자리에 해당하였는데도, 공은 태연자약하게 거하면서 오직 자신의 신념대로 곧게 행동할 따름이었다. 유상 전(柳相琠)이 공에게 멋진 모양의 전통(箭筒)이 있는 것을 보고는 달라고 요청한 일이 있었는데, 공이 거부하면서 말하기를, “이 전통 한 개야 매우 하찮은 물건이지만, 소인이 상납(上納)을 하고 대감이 받으신다면 의리를 해치는 점이 크다고 할 것입니다.” 하니, 유상이 부끄러워하며 굴복하였다.
병조 정랑 서익(徐益)이 호기(豪氣)를 부리면서 상대방에게 지기를 싫어하였으므로, 동료들 모두가 그를 꺼렸다. 그런데 그가 항상 훈련원의 참하관(參下官) 자리를 제멋대로 옮기려고 하였으므로 공이 법규에 입각해서 쟁론을 벌였는데, 그가 공의 주장을 힐난할 수가 없게 되자 공을 하옥(下獄)시켜 형률(刑律)을 적용하려고 하였다. 이에 서리(胥吏)가 공에게 알려 주기를, “사잇길로 뇌물을 행하면 죽음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공이 이 말을 듣고는 노하여 꾸짖으면서 말하기를, “죽게 되면 죽을 뿐이지, 어떻게 구차하게 면할 수가 있단 말인가.” 하였다.
공이 자신의 신념을 지키면서 아부하지 않는 것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반 평생 동안 불우하게 지내기만 하였을 뿐 세상의 알아줌을 받지 못하였다. 그리고 난리를 당해 지위가 높아지면서 그 정성이 위와 아래에 모두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의논에 용납되지 못한 채 모함에 걸려 형옥(刑獄)을 받게 된 것 역시 바로 이때문이었다. 그러나 공이 계획을 세우고 일을 제어하는 것을 보면, 어느 것 하나 빠뜨리는 일이 없이 기미를 살펴보고서 용맹스럽게 떨쳐일어나 결행(決行)을 하였으므로, 어떤 강한 적도 공의 앞에서는 힘을 쓸 수가 없었으니, 그렇다면 공 자신이 평소에 길러 두었던 힘이 바로 그 밑바탕이 된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공은 군사를 다스릴 때 간략하면서도 법도가 있게 하였으며 한 사람이라도 함부로 죽인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삼군(三軍)의 뜻이 하나로 모아진 가운데 감히 공의 명령을 위배하는 자가 나오지 않았는데, 비록 호기를 부리면서 거만하게 구는 자라 할지라도 공의 위명(威名)을 듣기만 하면 기가 꺾여 꼼짝하지 못하였다. 공은 전투에 임할 때에도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서 항상 여유를 보여 주었다. 그리하여 승리의 가능성이 보이면 앞으로 나아갔고, 어렵다고 파악될 때에는 뒤로 물러났으며, 반드시 세 번 취타(吹打)를 울려 군대의 위세를 뽐낸 뒤에 돌아오곤 하였다. 그래서 공이 운명(殞命)하던 날에도 기율(紀律)과 절도(節度)가 평소와 다름이 없었기 때문에 끝내는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공이 진영에 있을 때에는 척후(斥候)를 멀리 내보내고 경계(警戒)를 엄히 하였다. 그리하여 왜적이 오는 것을 반드시 먼저 알았으므로 사졸들이 귀신처럼 환히 안다고 탄복하였다. 그리고 공은 매일 밤마다 사졸들을 쉬게 하고는 반드시 자기 손으로 화살을 챙겨 둔 다음에 활 쏘는 군사들에게 항상 화살 없이 활만 주었다가 적선(賊船)이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린 뒤에야 화살을 분배해 주었으며, 공 자신도 활을 몸소 당겨 사졸들과 나란히 사격을 하곤 하였다. 그래서 장사(將士)들이 혹시라도 공이 탄환을 다시 맞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공을 부축하고 만류하면서 “어찌하여 나라를 위해서 몸을 아끼지 않으십니까.”라고 말을 하면, 공이 하늘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나의 운명은 저기에 달려 있다. 어찌 너희들만 왜적을 상대하게 해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공이 목숨을 걸어 놓고서 일에 충실하겠다고 평소에 마음을 정해 둔 것이 또한 이와 같았다.
아, 국조(國朝)의 장신(將臣) 가운데에는 태평 시대에 조그마한 적을 만나서 공을 세우고 이름을 떨친 자들이 또한 많이 있다. 그러나 공과 같은 경우는 계속 나라의 힘이 쇠해지고 오래도록 군대 쓸 줄을 모르던 뒤끝에 천하의 막강한 왜적을 만나게 된 것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고 작은 수십 차례의 전투를 치르는 과정에서 모두 전승(全勝)을 거두었으며, 서해(西海)의 길목을 차단함으로써 왜적이 수륙(水陸)으로 병진(並進)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나라가 중흥(中興)할 수 있는 밑바탕을 마련해 주었으니, 당시의 훈신(勳臣) 가운데 공을 능가할 수 있는 자는 당연히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신념대로 행동한 그 절조와, 국난(國難)에 목숨을 바친 그 충성심과, 군대를 지휘하며 용병(用兵)을 한 그 절묘한 작전과, 갖가지 일을 총괄하며 능란하게 처리한 그 지혜로움으로 말하면, 이미 공이 그동안 보여 주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인데, 비록 각 시대마다 한두 명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옛날의 이름난 장군이나 훌륭한 장수라 할지라도, 도저히 공을 능가할 수는 없다고 여겨진다.
공의 사적(事績)에 대해서는 조야(朝野)에서 기록해 놓은 것이 많이 있다. 그리고 군민(軍民)이 공을 추모하며 그리워하는 노래들 역시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지금은 우선 대략적인 내용만을 간추려 이 시장(諡狀)을 작성한 다음, 삼가 태상(太常)에 고하여 시호를 내릴 때에 참고할 자료로 제공하는 바이다.


 

[주D-001]장량(張良)이 …… 일 : 한(漢) 나라의 개국 공신인 장량이 유후(留侯)로 봉해진 뒤에, “인간 세상의 일을 버리고 적송자(赤松子)를 따라 노닐고 싶다.”고 하고는, 음식을 먹지 않는 벽곡(辟穀)과 몸을 가볍게 하는 도인(導引)을 행했다는 기록이 《사기(史記)》 유후 세가(留侯世家)에 나온다.
[주D-002]경천위지(經天緯地) : “하늘로 날줄을 삼고 땅으로 씨줄을 삼는다.[經之以天 緯之以地]”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천하를 경영할 만한 탁월한 정치적 식견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國語 周語下》
[주D-003]보천 욕일(補天浴日) : 여와(女媧)가 터진 하늘을 꿰매어 비가 새지 않도록 하고, 희화(羲和)가 감연(甘淵)에서 해를 목욕시켜 가뭄을 막았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말로, 위급한 상황을 타개하고 만회하여 위대한 공적을 세우는 것을 뜻한다. 《列子 湯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