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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2(恭愍王二) | ||||
무술 7년(1358), 원 지정(至正) 18년 |
○ 봄 정월에 서울 성을 고쳐 쌓으려고 대신들 중에 나이 많은 이들을 찾아 가서 물으니, 시중(侍中)으로 치사한 이제현(李齊賢)이 글을 올려 아뢰기를, “우리 태조께서 사방을 정토(征討)하사, 3국(태봉ㆍ신라ㆍ후백제)을 통일하여 한 나라로 만든 뒤 7년 만에 훙하셨사온데, 그때 전쟁으로 상처 입은 백성들을 시켜 토목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은 차마 하지 못할 일이라 하여 송경(松京)에 성을 쌓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형편 때문에 불가했습니다. 현종(顯宗) 초년에 이르러 거란이 서울을 짓밟고 궁실에 불지르며 파괴하였는데, 당시에 성곽이 견고하였던들 거란이 이토록 쉽게 짓밟고 불지르고 유린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현종 20년에야 비로소 이가도(李可道)에게 명해서 서울에 성곽을 쌓게 하니, 뒤에 금산왕자(金山王子)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서해도(西海道)와 충청도와 사평진(沙平津) 북쪽 등을 침략하지 않은 곳이 없었으나 서울에는 들어오지 못하였고, 또 여고차라대(余古車羅大)가 황교(黃橋)에 둔병(屯兵)하였지만 서울에는 들어오지 못하였으니, 이는 성곽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하온즉 당연히 성곽을 고쳐 쌓아야 한다는 것은 지혜 있는 자와 어리석은 자를 가릴 것 없이 모두 알고 있는 일이라 이 논의가 이미 정해졌으니 음양가의 의논에 꺼리는 것이 있더라도, 확고하게 한 번 정한 논의를 변경하지 않아야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 2월에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 원의(元顗)가 졸하였다.
○ 염제신(廉悌臣)을 문하시중으로, 황석기(黃石奇)를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로, 김용(金鏞)을 중서시랑 문하평장사로, 전보문(全普門)을 문하평장사로, 김일봉(金逸逢)을 중서평장사로, 경천흥(慶千興)을 지문하정사 상의회의도감사(知門下政事商議會議都監事)로, 이천선(李千善)을 참지문하정사로, 안우(安祐)를 참지중서정사로, 정세운(鄭世雲)을 지문하사로, 유인우(柳仁雨)ㆍ최인원(崔仁遠)을 수사공상서 좌우복야(守司空尙書左右僕射)로, 배천경(裵天慶)을 판추밀원사로, 황상(黃裳)을 추밀원사로, 이춘부(李春富)를 지추밀원사로, 유숙(柳淑)을 동지추밀원사 상의회의도감사(同知樞密院事商議會議都監事)로, 이여경(李餘慶)을 동지추밀원사로, 정휘(鄭暉)ㆍ김원봉(金元鳳)을 추밀원부사로 삼았다.
○ 3월에 왜적이 각산수(角山戍)에 침략하여 배 3백여 척을 불태웠다.
○ 전 첨의평리 강지연(姜之衍)을 원 나라로 보내어 절일(節日)을 축하하게 하였다.
○ 정주부사(定州副使) 주영세(朱永世)와 전라도만호 강중상(姜仲祥)이 제 마음대로 자기 임지를 떠나 왕께 와 뵈니, 왕이 노하여 이르기를, “지금 국가에 난이 많아서, 남쪽에는 홍두적(紅頭賊)의 우환이 있고, 동쪽에는 왜노(倭奴)의 우환이 있어, 바다 연변에 사는 백성들이 평안히 살지 못하는데, 너희들이 어찌 감히 이런단 말이냐." 하고, 옥에 가두었다.
○ 개경의 외성(外城)의 수축을 명하였다.
○ 여름 4월에 전 합포진변사(合浦鎭邊使) 유인우(柳仁雨)가 왜적을 막아 내지 못하였으므로 순군옥에 가두었다.
○ 가뭄이 크게 들어 대사령을 내리고, 왕이 먹는 반찬 수를 줄이며, 음악을 폐하였다.
○ 대장군 최영(崔瑩)을 양광전라도체복사(楊廣全羅道體覆使)로 삼고, 왜적을 막아 내지 못한 자들을 모두 군법으로 다스리도록 명하였다.
○ 도평의사사에서 왕께 아뢰기를, “요즈음 안렴사와 수령들의 기강이 해이해져서, 여러 고을의 향리들이 제멋대로 욕심을 드러내어 군정(軍丁)을 점검할 때는 부잣집은 제외하고 조세를 거둘 때는 사사로이 큰 말을 쓰며, 병정에 나가야 할 서울 장정을 몰래 데려다가 제 농사를 짓게 하고, 양민들을 모아서 제 집 종을 삼는 등 백성들에게 토색질이 한이 없으니, 마땅히 어사대와 각 도의 안렴사를 시켜서 그 원악(元惡)을 찾아 내어, 죄가 중한 자는 극형에 처하고, 가벼운 자는 매를 때리고 귀양보내게 하소서." 하였더니, 왕이 이 말을 좇았다.
○ 왜적이 한주(韓州 충남 서천(舒川))와 진성(鎭城) 창고를 노략질하므로, 전라도 진변사(全羅道鎭邊使) 고용현(高用賢)이 바닷가에 있는 창고를 내지로 옮기자고 청하니, 왕이 이 말을 좇았다.
○ 동북면(東北面)을 진휼하였다.
○ 왜적이 면주(沔州 충남 당진(唐津))ㆍ용성(龍城 경기 진위(振威))을 침범하였다.
○ 태주(台州 절강성(浙江省)) 방국진(方國珍)이 사람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 조소생(趙小生)ㆍ탁도경(卓都卿)이 도망해서 해양(海陽)을 점령하니, 해양 사람 완자불화(完者不花)가 군사 8백 명을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였다.
○ 교주ㆍ강릉도(交州江陵道)를 진휼했다.
○ 왜적이 교동을 불사르니, 경성(京城)에 계엄을 내리고, 방리(坊里)의 장정들을 뽑아 군사를 만들었다.
○ 도평의사사가 아뢰기를, “요즈음 왜적의 침입으로 세미를 실은 배가 왕래하지 못하여 백관들의 녹봉을 주지 못하고 있사오니, 이제부터는 백(伯)으로 봉한 모든 사람들 중에 시중(侍中) 벼슬을 지낸 이에게는 재ㆍ추의 녹과(祿科)를 주고, 그 나머지 백에게는 이성 제군(異性諸君)의 예로 주도록 하소서." 하니, 왕이 좇았다.
○ 대장군 조천규(趙天珪)를 원 나라에 보내어 황후의 천추절(千秋節)을 축하하게 하였다.
○ 6월 1일 무진에 일식이 있었다.
○ 참지정사 경천흥(慶千興)을 서경군민 만호부 만호로, 참지정사 안우(安祐)를 안주군민 만호부 만호로, 추밀원부사 정휘(鄭暉)를 삭방도군민 만호부 만호로 삼았다.
○ 가을 7월에 중서평장사로 치사한 김승택(金承澤)이 졸하였다.
○ 강절행성승상(江浙行省丞相) 장사성(張士誠)이 보낸 사신이 와서 침향(沈香)ㆍ산수정(山水精)ㆍ산옥대(山玉帶)와 비단 등의 물건을 바치며 말하기를, “요즈음 중국이 평온하지 못하여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회동(淮東)에서 분연히 군사를 일으켜 다행히 오(吳)의 땅을 온전히 보전할 수 있었으나, 서쪽 도적이 흉악한 짓을 함부로 하여 백성들을 못살게 구니, 소탕할 뜻은 있지만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겠소. 내 들으니, 국왕은 덕이 있어 국내의 백성들이 생업을 즐긴다 하니 내 마음이 위로되오." 하였는데, 이때 사성이 항주(杭州)에 웅거하여 태위(太尉)라 일컬었다. 강절해도 만호(江浙海島萬戶) 정문빈(丁文彬)도 글을 보내고 토산물을 바쳐 왔다.
○ 참지정사 경천흥(慶千興)과 지문하성사 정세운(鄭世雲)과 동지추밀원사 유숙(柳淑) 등이 아뢰기를, “사방에서 난이 일어나 백성들은 만신창이가 되어 굶주리고 있는데, 지금 성을 쌓는다면 백성들이 장차 견디어내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왕이 재ㆍ추와 의논하고 그 역사를 중지하라고 명하였다.
○ 왜적이 검모포(黔毛浦 전북 부안(扶安))에 침입하여 전라도의 세미 실은 배를 불태웠다.
○ 8월에 왜적이 화지량(花之梁 경기 수원(水原))을 불태우고, 인주(仁州 인천(仁川))를 노략질하였다.
○ 이암(李嵒)을 수문하시중으로 삼았다.
○ 서강(西江 예성강)에 성을 쌓았다.
○ 겨울 10월 정해일에 지진이 있었다.
○ 병부상서 홍사범(洪師範)을 원 나라에 보내어 황태자의 천추절을 축하하게 하였다.
○ 11월에 재변이 있었으므로 사면령을 내렸다.
○ 정원백(定原伯) 균(均)을 원 나라에 보내어 신정을 축하하게 하였다.
○ 12월 1일 을축에 일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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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지류(碑誌類) | ||||
좌의정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증시(贈諡) 강헌(康憲) 이공(李公)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 |
철성의 이씨는 고려의 대족이다. 휘 진(瑨)이라는 분이 있어 과거에 올랐으나 벼슬하지 않고 덕을 베풀어 후손에게 남겼다. 감찰대부(監察大夫) 휘 존비(尊庇)를 낳으니, 문장으로 이름이 나 현달하였다. 철성군(鐵城君) 휘 우(瑀)를 낳으니, 일을 처리하는 능력으로 인해 회주(淮州), 금주(金州), 전주(全州), 진주(晉州) 등 여러 주의 지방관을 역임하였으며, 이르는 곳마다 선정(善政)을 베풀어 떠난 뒤에도 백성의 사랑을 받음이 많았다.
문하시중(門下侍中) 휘 암(嵓)을 낳으니, 충정왕(忠定王)을 섬겨 좌정승(左政丞)이 되었으나 얼마 안 있어 자신의 뜻을 지켜 사직하였다가 공민왕(恭愍王) 때에 다시 재상이 되었고, 기해년(1359, 공민왕8)에 모적(毛賊)이 서관(西關)을 침범했을 때 도원수(都元帥)가 되어 승리로 이끈 공로가 있었으니, 장수와 재상의 재주를 겸비하여 공명이 세상을 덮었다. 시작(詩作)은 또한 간고(簡古)하였고, 진서(眞書), 초서(草書), 행서(行書)의 세 가지 서법은 모두 절묘하였으니, 졸하자 시호를 문정(文貞)이라고 하였다.
휘 강(崗)을 낳으니, 아버지의 풍도(風度)가 있어 사람들이 모두 공보(公輔)가 될 것으로 기대하였는데, 일찍 죽었다. 벼슬은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이르렀다. 신축년(1361, 공민왕10)에 홍건적의 변란이 일어나자 공민왕이 갑작스럽게 남쪽으로 파천하였는데, 공이 경상도 안렴사가 되어 받들어 맞이하는 위의(威儀)와 호위(護衛)가 매우 성대하고 접대하는 모든 물품이 충분하니, 사람들이 모두 떠들썩하게 칭찬하였다. 왕이 매우 중한 그릇으로 여겼는데, 마침내 졸하자 왕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하늘은 어찌 이리도 빨리 내 산을 빼앗아 가는가?”
하였다. 옛날 제도에 추밀(樞密)은 시호가 없었는데, 특별히 시호를 문경(文敬)이라고 하였다. 부인 곽씨(郭氏)는 판개성(判開城) 곽연준(郭延俊)의 딸이다. 홍무(洪武) 무신년(1368) 1월 모 갑자일에 공을 낳았다.공의 휘는 원(原)이고, 자는 차산(次山)이고, 호는 용헌(容軒)이다. 처음에 공이 태어나 4개월 만에 문경이 졸하니, 곽 부인이 항상 공을 안고 슬피 울며 말하기를,
“하늘이 만약 이씨 집안에 복을 준다면 분명 이 아이에게 있을 것이다.”
하였다.공은 어릴 적부터 숙성하여 어른 같았고, 조금 자라자 힘써 공부하여 게을리하지 않았다. 공의 누이인 권 문충공(權文忠公 권근(權近))의 부인 이씨가 일찍 아버지를 여읜 공을 가련하게 여겨 보살피기를 자기 자식같이 하였고, 문충도 가르치기를 자식같이 하였다. 학문이 날로 성취되어 글을 지으면 작자(作者)의 기운이 있었고, 토론을 할 때면 매번 견줄 사람이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문충이 놀라 말하기를,
“우리 장인어른이 죽지 않았다.”
하였다.공은 나이 15세에 임술년(1382, 우왕8)의 진사과(進士科)에 급제하였다. 을축년(1385, 우왕11)에 포은(圃隱) 정 문충공(鄭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이 주관하는 시석(試席)에서 공이 장원급제하자 포은이 말하기를,
“문경의 재주와 덕이 크게 베풀어지지는 못했으나 지금 아이가 이와 같으니 하늘의 보시(報施)는 참으로 징험이 있도다.”
하였다.무진년(1388)에 사복시 승(司僕寺丞)에 제수되고, 여러 번 자리를 옮겨 공조와 예조의 좌랑, 병조 정랑을 지냈다. 임신년(1392, 태조1)에 태조가 개국하여 공의 현능함을 큰 그릇으로 여기고 다스리기 힘든 큰 고을을 여러 차례 맡겼다. 세 번 대각(臺閣)에 들어가 지평(持平)이 되고 시사(侍史)가 되고 중승(中丞)이 되었는데, 굳세고 바르게 스스로 지조를 지키니, 대각이 위엄이 있고 당당하였다. 외직으로 나가 양근 군수(楊根郡守)가 되어서는 은혜로운 정사를 베풀었다. 재차 전교(典校)가 되고, 문한(文翰)을 담당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성대한 명성이 있었다.
공정왕(恭靖王)이 공을 발탁하여 우부승지로 삼았는데, 보고를 자세하고 분명하게 하며 왕명의 출납을 오직 진실하게 하니, 좌부승지로 올렸다. 태종이 즉위하여 공을 그대로 후설(喉舌)에 두고 아끼고 돌아보기를 더욱 독실하게 하였으며, 좌명(佐命)의 공훈으로 논하여 철권(鐵券)을 하사하고 사헌부 대사헌에 제수하고 철성군에 봉하였다. 외직으로 나가 경기 관찰사가 되었는데, 사람을 쓰고 버림이 엄격하고 분명하여 횡포하고 교활한 자들이 두려워 몸을 사렸다.
영락(永樂) 계미년(1403, 태종3) 여름에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가 고명(誥命)을 하사하였으므로 경사(京師)로 가서 사은하였다. 겨울에 외직으로 나가 평양 부윤(平壤府尹)이 되었다. 평양부는 예로부터 고을이 크고 일이 많아 다스리기 어렵다고 일컬어진 곳이다. 공이 편안히 어루만져 적절하게 처리하니, 정사가 매우 잘 다스려졌다. 이때 한창 대동관(大同館)을 수리하고 있었는데, 공이 백성의 소요를 염려하여 속관을 거느리고 직접 재목과 기와를 나르니, 백성이 즐겁게 일에 임하여 빠른 시일에 수리를 완료하였다. 부윤으로서 서북면 도순문찰리사(西北面都巡問察理使)를 겸하였다.
병술년(1406, 태종6)에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에 제수되고, 중군총제 참지의정부사(中軍摠制參知議政府事)로 옮겼다가 다시 대사헌에 제수되고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옮겼다. 무자년(1408)에 경상도 관찰사가 되고, 계사년(1413)에 동북면 도순문찰리사가 되었다. 을미년(1415)에 추충익대좌명 공신(推忠翊戴佐命功臣)의 호로 고쳐 하사받고, 예조 판서로 올랐다가 얼마 안 되어 대사헌으로 옮겼다. 이에 이르러 모두 세 번 헌장(憲長)이 되었는데, 안색을 바르게 하고 조정에 서서 악을 배척하고 선을 장려하니, 바른말을 하는 데에 헌신(憲臣)의 체모가 있었다. 판한성부사로 바뀌고, 이조와 병조의 판서, 의정부 참찬으로 여러 번 옮겼다가 찬성사(贊成事)로 승진하였다.
무술년(1418, 세종 즉위년)에 세종이 즉위하여 우의정으로 발탁하고, 공신호에 동덕(同德) 2자를 더 하사하였다. 기해년(1419)에 문황제가 고명과 관복을 하사하였으므로 공이 표문(表文)을 받들고 경사로 가서 사은하였다. 공은 자태가 훤칠하여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대단히 눈에 띄었다. 황제가 보고 특출하게 여겨 말하기를,
“황염 재상(黃髥宰相)은 후에 꼭 다시 오시오.”
하였다. 신축년(1421)에 좌의정으로 승진하였다. 과거 시험을 주관하여 안숭선(安崇善) 등 33인을 뽑았는데, 당시에 인재를 잘 뽑았다는 칭송이 있었다. 을사년(1425)에 선종 장황제(宣宗章皇帝)가 등극하였으므로 경사로 가서 진하(進賀)하였다.공은 참지정사를 시작으로 묘당(廟堂)에 출입한 세월이 20여 년이고 수상(首相)을 지낸 세월이 9년인데, 정무(政務)를 관대하게 처리하여 바꾸고 확장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대체(大體)를 유지하였다. 세종이 뜻을 가다듬어 처음 정치를 할 때를 맞아 마음을 다해 보좌하고 의견을 개진하여 도움이 크고 많았다. 조정이 그 풍모를 사모하여 우러러보았으나 공은 또한 차고 넘치는 것을 경계하여 몇 년 전부터 사직을 청하려고 하였다. 이에 앞서 공을 시기하는 자가 있어 공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잘못을 탄핵하였으나 태종이 친히 죄를 벗겨 주었다. 태종이 훙하자 공을 시기한 자가 전의 감정을 품고서 대각을 부추겨 공을 죽이려고 하였다. 세종은 공이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음을 알면서도 대신(臺臣)의 청을 어기기가 어려워 여산군(礪山郡)으로 귀양 보내니, 이때가 병오년(1426, 세종8) 봄이다. 세종이 옛날의 공훈을 생각하여 돌아보고 살펴 주기를 소홀히 하지 않았으며, 큰일을 논의할 때마다 반드시 말하기를,
“철성이 있었으면 반드시 처리했을 것이다.”
하였다. 얼마 안 되어 공을 불러들여 다시 재상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공을 시기하는 자가 다시 저지하였다. 기유년(1429) 여름에 병으로 졸하니, 향년이 62세이다. 세조가 직첩(職牒)과 공신녹권(功臣錄券)을 도로 하사하였다.공은 도량이 넓고 성품이 충정(忠貞)한 데다 바른 학문으로 보조하였기 때문에 논의에서 발언한 것과 사업에 시행한 것들이 성대하게 볼만하였다. 평소 사람들과 말할 때면 속이고 꾸민 적이 없었으며 또한 모나게 애안(崖岸)을 두어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여기지도 않았거니와 큰일에 임하여 결정할 때면 확고하게 흔들리지 않아 마치 산악처럼 우뚝하였다. 인사를 담당했던 10여 년 동안 어질고 유능한 인재를 위주로 선발하고 여탈(與奪)을 사적인 감정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았으니, 진짜 태평재상(太平宰相)이었다. 애석하다. 하루아침에 세상을 떠나 세종의 새롭게 하는 다스림을 도와 이루지 못했으니, 또한 운명이다.
공의 첫 번째 부인 양천 허씨(陽川許氏)는 전리사 판서(典理司判書) 허금(許錦)의 딸이다. 1남 2녀를 낳으니, 대(臺)는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이며, 장녀는 주부(主簿) 유방선(柳方善)에게 시집가고, 차녀는 부정(副正) 유급(柳汲)에게 시집갔다. 두 번째 부인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봉상대부(奉常大夫) 군기 총랑(軍器摠郞) 최정지(崔丁智)의 딸이니, 변한국대부인(弁韓國大夫人)에 봉해졌다. 6남을 낳으니, 곡(谷)은 대호군(大護軍)이고, 질(垤)은 한성 소윤(漢城少尹)이고, 비(埤)는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이고, 장(場)은 상호군(上護軍)이다. 질과 비와 장은 모두 무과(武科)에 급제하였고 당시 사람들의 칭송이 있었다. 증(增)은 행 영산 현감(行靈山縣監)이고, 지(墀)는 행 대호군 겸 승문원참교(行大護軍兼承文院參校)로 정축년(1457, 세조3) 문과에 급제하였다. 4녀를 낳으니, 장녀는 첨지(僉知) 윤삼산(尹三山)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구례 현감(求禮縣監) 이굉식(李宏植)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좌의정 권람(權擥)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선공감 부정(繕工監副正) 황종형(黃從兄)에게 시집갔다.
대(臺)는 목사(牧使) 권상(權詳)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을 낳으니, 월(越)은 첨지이고, 신(晨)은 부정(副正)이고, 의(嶷)는 첨지이고, 경(庚)은 주부이며, 3녀를 낳으니, 장녀는 함양군(咸陽君) 이희(李䛥)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현감 정자숙(鄭自淑)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첨정 이집(李諿)에게 시집갔다. 곡(谷)은 사예(司藝) 이양명(李陽明)의 딸에게 장가들어 2녀를 낳으니, 장녀는 부윤(府尹) 강희안(姜希顔)에게 시집갔는데 자식이 없고, 차녀는 생원 남전(南恮)에게 시집갔다. 질(垤)은 장령 정지당(鄭之唐)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을 낳으니, 준(準)은 현감이고, 칙(則)은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인데 임오년(1462)에 급제하였으며, 6녀를 낳으니, 장녀는 현감 조정로(趙廷老)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군수 박후(朴堠)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현감 허형(許蘅)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부사 이시보(李時珤)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지중추원사 김순(金淳)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참봉 경상(慶祥)에게 시집갔다. 비(埤)는 현감 윤환(尹煥)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의(儀)를 낳으니 선략(宣略)이고, 1녀는 생원 정순언(鄭純彦)에게 시집갔으며, 후취로 수의 교위(修義校尉) 오천(吳泉)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으니 위(偉)이고, 2녀를 낳으니 어리다. 장(場)은 군사(郡事) 이규(李糾)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을 낳으니 곤(崑)과 헌(巚)이고, 1녀는 남형(南衡)에게 시집갔다. 증(增)은 관찰사 이희(李暿)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을 낳으니, 현감 평(泙), 진사 굉(浤), 사(泗), 빈(濱)이며, 2녀를 낳으니, 장녀는 조동호(趙銅虎)에게 시집가고, 차녀는 어리다. 지(墀)는 정보(鄭保)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을 낳으니, 륙(陸)은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인데 갑신년(1464, 세조10)에 장원하였고, 진사 수(陲)와 습(隰)과 맥(陌)이다.
유방선(柳方善)은 2남을 낳으니, 장남은 유윤유(柳允庾)이고, 차남 유윤겸(柳允謙)은 전교시 교리(典校寺校理)이며, 5녀를 낳으니, 장녀는 방준(房峻)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김영견(金永堅)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최영조(崔榮祖)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군수 김원신(金元信)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허식(許植)에게 시집갔다. 유급(柳汲)은 2남을 낳으니, 유종경(柳從京)은 순창 군수(淳昌郡守)이고, 유종화(柳從華)는 종성 부사(鍾城府使)이다. 윤삼산(尹三山)은 6남을 낳으니, 윤오(尹塢)는 상호군(上護軍)이고, 윤당(尹塘)은 보공장군(保功將軍)이고, 윤호(尹壕)는 양주 목사(楊州牧使)이고, 윤해(尹垓)는 현감이고, 윤탄(尹坦)은 상호군이고, 윤파(尹坡)는 직장(直長)이며, 3녀를 낳으니, 장녀는 첨지 박매(朴梅)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서림정(西林正) 이지(李忯)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청원정(靑原正) 이림(李霖)에게 시집갔다. 이굉식(李宏植)은 5남을 낳으니, 현감 이맹희(李孟禧), 어모(禦侮) 이중희(李仲禧), 찰방 이계희(李季禧), 부정(副正) 이영희(李永禧), 이익희(李益禧)이며, 딸은 주부 김예중(金禮重)에게 시집갔다. 권람(權擥)은 2남을 낳으니, 권걸(權傑)은 길창군(吉昌君)이고, 권건(權健)은 진사이며, 7녀를 낳으니, 장녀는 청원군(淸原君) 한세귀(韓世龜)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경력(經歷) 박사화(朴士華)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감찰 신억년(申億年)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주부 김수형(金壽亨)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좌랑(佐郞) 신수근(愼守勤)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참봉 민사건(閔師騫)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신말평(申末平)에게 시집갔다. 황종형(黃從兄)은 3남을 낳으니, 생원 황관(黃瓘), 황찬(黃瓚), 황규(黃珪)이다.
월(越)은 2남을 낳으니, 상호군 적손(嫡孫)과 사손(嗣孫)이다. 신(晨)은 1남을 낳으니, 금(嶔)이다. 의(嶷)는 3남을 낳으니, 필(珌)과 완(琬)과 탁(琢)이다. 경(庚)은 5남을 낳으니, 정(精)과 준(遵)과 질(質)은 모두 생원이고, 박(博)은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이고, 규(逵)는 진사이다. 준(準)은 1남을 낳으니, 영(英)이다. 칙(則)은 2남을 낳으니, 졸(拙)과 - 1자 결락 - 이다. 의(儀)는 1남을 낳으니, 풍(豐)이다. 평(泙)은 2남을 낳으니, 효윤(孝胤)과 충윤(忠胤)이다. 륙(陸)은 2남을 낳으니, 이(峓)와 험(嶮)이다. 내외의 증손과 현손이 100여 인이나 된다.
처음 공이 졸하고 3일 뒤에 최 부인 역시 졸하였다. 광주(廣州) 관내 서쪽 율촌(栗村) 이좌감향(离坐坎向)의 언덕에 장례하니, 동역이분(同域異墳)이다. 그 후에 여러 아들들이 서로 이어 타계하여 40여 년이 지나도록 비석을 세우지 못하였는데, 지금 참교공(參校公)이 개연히 비석을 세우고자 하여 나에게 명(銘)을 지으라고 명하니, 나의 외조비(外祖妣) 이씨는 바로 철성부원군의 누이이다. 외람되이 친속의 위치에 있는 만큼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 없어서 삼가 명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당당한 철성이시여 / 堂堂鐵城
찬란한 공렬이로다 / 有炳勳烈
상부에선 깊고 넓으셨고 / 相府潭潭
인각에선 우뚝 높으셨지 / 麟閣屹屹
오래도록 국정을 총괄하여 / 久宅百揆
그 공로 대정(大政)에 남아 있거니 / 功存納麓
사람에게는 덕망 높은 원로요 / 人有筮龜
나라에선 나라 떠받치는 주춧돌이라 / 國有柱石
조물주는 어찌하여 / 造物者何
인간을 희롱하는가 / 戱劇於人
무슨 운수가 이리 기이하며 / 何數之奇
무슨 형통이 이리 막혔는가 / 何亨之屯
정부의 요직이든 뚝 떨어진 변방이든 / 黃閣朱崖
하찮은 자리든 귀한 자리든 / 蒼蠅白璧
공은 혐의스럽게 여기지 않았고 / 公則不嫌
공은 태연자약 처하셨네 / 公處自若
왕께서는 공을 못 잊어 / 王曰念公
공이 조만간 돌아오리라 / 公歸不日
공이 돌아와 복상하리라 하셨으나 / 公歸復相
하늘이 공을 데려감 어찌 이리도 급한가 / 天奪何急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 雖則云然
지니신 덕 길이 보존되어 / 所存者長
산이 숫돌 되고 강이 띠가 되도록 영원하리니 / 山礪河帶
공은 곧 떠나신 것 아니라네 / 公則不亡
옥 같고 난 같은 자손 태어나 / 玉立蘭茁
자손이 창성하다네 / 子孫其昌
광주의 산은 우뚝하고 / 廣陵峩峩
광주의 물은 넘실거리도다 / 廣水沄沄
그곳에 불후의 비석 세우니 / 立石不朽
바로 공의 무덤이로다 / 維公之墳
[주D-001]작자(作者)의 기운 : 작자는 창시(創始)하는 사람으로, 《예기》 〈악기(樂記)〉에 “작자를 성(聖)이라 하고, 술자(述者)를 명(明)이라 한다.” 하였다.
[주D-002]공정왕(恭靖王) : 공정은 조선 2대 왕 정종(定宗)이 명나라에서 받은 시호이다. 정종은 숙종 때까지 묘호가 없이 시호인 공정으로 호칭되다가 1681년(숙종7)에 이르러서야 묘호를 ‘정종’으로 올렸다. 《宗廟儀軌 卷3 追上尊號》
[주D-003]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가 고명(誥命)을 하사하였으므로 : 태종 문황제는 명나라 성조(成祖)로 조카인 혜제(惠帝)를 몰아내고 즉위하였다. 혜제는 태조(太祖)의 손자이며 의문태자(懿文太子)의 아들로 의문태자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1392년에 황태손(皇太孫)으로 책봉되고 1398년에 태조를 이어 즉위하였다. 그러나 세력이 큰 제왕(諸王)들을 제거하려다가 당시 연왕(燕王)이었던 성조에 의해 축출되고 건문(建文)이라는 연호도 혁제(革除)되었다. 태종이 즉위하여 혜제로부터 고명을 받았으나 이때에 이르러 그 고명을 반납하고 성조로부터 다시 받은 것이다. 《明史 卷4 恭閔帝本紀》 《太宗實錄 3年 4月》
[주D-004]공의 …… 주었다 : 잘 알려지지 않은 잘못이란 내은달(內隱達)의 딸을 두고 홍여방(洪汝方)과 서로 첩으로 들이려고 다툰 일이다. 이 일이 탄로 나 탄핵을 받았으나 태종이 여러 정황을 살펴 죄를 묻지 않은 일을 말한다. 《太宗實錄 18年 6月 10日》 《世宗實錄 8年 3月 15日》
[주D-005]군기 총랑(軍器摠郞) : 한국문집총간 7집에 수록된 《용헌집(容軒集)》 권4 부록(附錄) 〈신도비명(神道碑銘)〉에는 군부 총랑(軍簿摠郞)으로 되어 있다. 군부(軍簿)는 군부사(軍簿司)의 약칭으로 조선조의 병조에 해당한다.
[주D-006]함양군(咸陽君) 이희(李䛥) : 태종의 장남이며 세종의 맏형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의 둘째 아들이다. 《선원강요(璿源綱要)》와 실록에는 이름이 포()로 기록되어 있다.
[주D-007]참교공(參校公) : 이원(李原)의 7남으로 후취인 전주 최씨 소생이고, 이름은 지(墀)이다. 승문원 참교(承文院參校)를 지냈으므로 참교공이라고 한 것이다.
[산문(散文)]
계림 이씨(鷄林李氏)는 고려 제현(齊賢)으로부터 현달하기 시작하였으니, 삼중대광(三重大匡)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이었다. 그의 아들 달존(達尊)은 보문각 제학(寶文閣提學)이었고, 이분이 소부윤(少府尹) 휘 학림(學林)을 낳았다. 소부윤은 승정원 우부대언(承政院右副代言) 휘 담(擔)을 낳았고, 우부대언은 경상도 관찰출척사(慶尙道觀察黜陟使) 휘 희(暿)를 낳았다. 관찰출척사는 모현(某縣)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았으니 형조 판서 안등(安騰)의 따님으로, 이분이 부인을 낳아 이공(李公)에게 출가시켰다.
철성 이씨(鐵城李氏)는 고려 존비(尊庇)로부터 현달하기 시작하였으니, 판밀직사사 세자원빈(判密直司事世子元賓)이었다. 그의 아들 우(瑀)는 철성군(鐵城君)이고, 철성군이 문하시중(門下侍中) 휘 아무개를 낳았고, 문하시중은 집현전 제학 휘 강(岡)을 낳았고, 제학은 의정부 우의정 휘 원(原)을 낳았다. 우의정은 모현(某縣) 최씨(崔氏)를 아내로 맞았으니 군부총랑(軍簿摠郞) 최정지(崔丁智)의 따님으로, 이분이 이공을 낳아 부인의 배필이 되게 하였다. 이러고 보면 대대로 명망이 있는 두 큰 집안끼리 서로 혼인한 것이니, 나라에서 망족(望族)을 일컫는 자들은 반드시 이 두 집안을 꼽는다.
부인은 아기 적부터 유순하고 단아(端雅)하였으며 자라서는 예의가 발랐다. 어릴 때 조모 남씨(南氏)의 손에 길러졌는데 조모의 뜻을 받들어 색양(色養)하는 것이 지극하지 않음이 없었으므로, 부친인 관찰사 부군이 기뻐서 “내가 일 때문에 혼정신성(昏定晨省)을 어기면 무릇 맛있는 음식을 장만해 바치는 일을 내 딸이 든든히 맡아서 한다.” 하였다. 관찰사 부군이 세상을 떠나자 부인은 조모를 더욱 지성껏 봉양하여 조모 남씨가 부인을 좋은 아들처럼 의지하였고, 종족과 향당(鄕黨) 사람들이 그 효성을 칭찬하였다.
집안을 다스리는 것은 더욱 정숙하고 종들을 부림에 법도가 있었으며, 의방(義方)에 따라 움직여 터럭만 한 어긋남도 없었다. 공이 일찍이 진해(鎭海)와 영산(靈山) 두 고을의 현감으로 간 적이 있었는데, 부인은 늘 “대저 관직에 있으면서 더러운 이름을 얻는 것은 모두 부인(婦人) 때문이었다. 내 어찌 나의 지아비께 누를 끼치리요.” 하고, 이로써 더욱 스스로 삼가고 조심하였다. 그리하여 집안의 말은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집 밖의 말은 집안으로 들이지 않았으니, 두 고을의 백성들이 공의 청렴하고 공평함에 탄복하고 아울러 부인의 덕을 칭찬해 마지않았다.
공이 병으로 사직하고 안동(安東)의 별서(別墅)에 살면서 날마다 향리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것으로 낙(樂)을 삼고 집안 형편을 돌보지 않았다. 그러나 부인은 남편의 뜻을 미리 알아서 잘 받들고 힘써 손님상을 잘 차려내어 집안에 자주 양식이 궁핍했어도 공이 알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공은 늘 마음이 편안하고 부인은 남편의 뜻을 어김이 없었으니, 향리에서 그 덕을 칭찬하였다.
공이 불행히도 세상을 떠나자 부인은 남은 자식들을 잘 교육시켜 선대의 유업을 실추하지 않도록 하여, 자손들이 명성과 지위가 현달하였고 이씨(李氏)의 가문이 이로써 더욱 커졌다.
공의 휘는 아무개인데 조정이 공의 차자(次子) 아무개의 작위(爵位)가 이품(二品)이라 하여 공을 이조 참판에 추증하였다. 지금 상국(相國)인 진천(晉川) 강공 혼(姜公渾)이 공의 묘갈명을 썼다. 부인은 과부로 30년을 살다가 정덕(正德) 기사년 2월 모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88세이다. 이해 12월 정해(丁亥)에 남편인 참판공의 묘소 우측 묘좌 경향(卯坐庚向)의 기슭에 안장하였다. 이 고을은 임하현(臨河縣)이고 산은 수다산(水多山)이다.
부인은 4남 2녀를 낳았고, 내외손(內外孫)은 모두 약간 명이니, 이러한 사실들은 모두 상국의 글에 실려 있다. 장남 여(膂)는 경오년의 과거에 장원으로 뽑혀 지금 홍문관 수찬으로 있으니, 사람들이 이로써 이씨(李氏) 집안의 여경(餘慶)이 끝없이 뻗어갈 것임을 안다. 명은 다음과 같다.
어느 집안이 덕문인고 / 孰爲德門
이씨의 선조로다 / 李氏之先
그 향기를 퍼뜨려서 / 載播厥芬
더욱 드러나서 이어졌어라 / 益顯以延
어찌 그 뿌리가 두터우면서 / 孰厚其根
열매가 많이 맺지 않으리요 / 而實不蕃
이 부인으로 말하자면 / 至于夫人
여덕이 더욱 새로웠나니 / 女德彌新
좋은 배필을 얻으매 / 配得其良
마치 한 쌍의 봉황이 우는 듯 / 鳳凰鏘鏘
혁혁히 높은 벼슬이 / 象笏朱軒
자손들에까지 미치었으니 / 曁子若孫
가도가 융성하매 / 家道之肥
문벌이 이로써 빛났도다 / 門閥以煇
장수하고 강녕하시어 / 壽考康寧
그 영화를 다 누리셨어라 / 以盡其榮
내 글로써 명을 지어 / 我文以銘
이 비석에 새기노니 / 維石之貞
이 글에 부끄러움 없기에 / 不愧于辭
이로써 보여 무너뜨리지 않게 하노라 / 用示無隳
[주D-002]공정왕(恭靖王) : 공정은 조선 2대 왕 정종(定宗)이 명나라에서 받은 시호이다. 정종은 숙종 때까지 묘호가 없이 시호인 공정으로 호칭되다가 1681년(숙종7)에 이르러서야 묘호를 ‘정종’으로 올렸다. 《宗廟儀軌 卷3 追上尊號》
[주D-003]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가 고명(誥命)을 하사하였으므로 : 태종 문황제는 명나라 성조(成祖)로 조카인 혜제(惠帝)를 몰아내고 즉위하였다. 혜제는 태조(太祖)의 손자이며 의문태자(懿文太子)의 아들로 의문태자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1392년에 황태손(皇太孫)으로 책봉되고 1398년에 태조를 이어 즉위하였다. 그러나 세력이 큰 제왕(諸王)들을 제거하려다가 당시 연왕(燕王)이었던 성조에 의해 축출되고 건문(建文)이라는 연호도 혁제(革除)되었다. 태종이 즉위하여 혜제로부터 고명을 받았으나 이때에 이르러 그 고명을 반납하고 성조로부터 다시 받은 것이다. 《明史 卷4 恭閔帝本紀》 《太宗實錄 3年 4月》
[주D-004]공의 …… 주었다 : 잘 알려지지 않은 잘못이란 내은달(內隱達)의 딸을 두고 홍여방(洪汝方)과 서로 첩으로 들이려고 다툰 일이다. 이 일이 탄로 나 탄핵을 받았으나 태종이 여러 정황을 살펴 죄를 묻지 않은 일을 말한다. 《太宗實錄 18年 6月 10日》 《世宗實錄 8年 3月 15日》
[주D-005]군기 총랑(軍器摠郞) : 한국문집총간 7집에 수록된 《용헌집(容軒集)》 권4 부록(附錄) 〈신도비명(神道碑銘)〉에는 군부 총랑(軍簿摠郞)으로 되어 있다. 군부(軍簿)는 군부사(軍簿司)의 약칭으로 조선조의 병조에 해당한다.
[주D-006]함양군(咸陽君) 이희(李䛥) : 태종의 장남이며 세종의 맏형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의 둘째 아들이다. 《선원강요(璿源綱要)》와 실록에는 이름이 포()로 기록되어 있다.
[주D-007]참교공(參校公) : 이원(李原)의 7남으로 후취인 전주 최씨 소생이고, 이름은 지(墀)이다. 승문원 참교(承文院參校)를 지냈으므로 참교공이라고 한 것이다.
용재집 제10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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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인(貞夫人) 이씨(李氏) 묘갈명(墓碣銘) |
계림 이씨(鷄林李氏)는 고려 제현(齊賢)으로부터 현달하기 시작하였으니, 삼중대광(三重大匡)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이었다. 그의 아들 달존(達尊)은 보문각 제학(寶文閣提學)이었고, 이분이 소부윤(少府尹) 휘 학림(學林)을 낳았다. 소부윤은 승정원 우부대언(承政院右副代言) 휘 담(擔)을 낳았고, 우부대언은 경상도 관찰출척사(慶尙道觀察黜陟使) 휘 희(暿)를 낳았다. 관찰출척사는 모현(某縣)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았으니 형조 판서 안등(安騰)의 따님으로, 이분이 부인을 낳아 이공(李公)에게 출가시켰다.
철성 이씨(鐵城李氏)는 고려 존비(尊庇)로부터 현달하기 시작하였으니, 판밀직사사 세자원빈(判密直司事世子元賓)이었다. 그의 아들 우(瑀)는 철성군(鐵城君)이고, 철성군이 문하시중(門下侍中) 휘 아무개를 낳았고, 문하시중은 집현전 제학 휘 강(岡)을 낳았고, 제학은 의정부 우의정 휘 원(原)을 낳았다. 우의정은 모현(某縣) 최씨(崔氏)를 아내로 맞았으니 군부총랑(軍簿摠郞) 최정지(崔丁智)의 따님으로, 이분이 이공을 낳아 부인의 배필이 되게 하였다. 이러고 보면 대대로 명망이 있는 두 큰 집안끼리 서로 혼인한 것이니, 나라에서 망족(望族)을 일컫는 자들은 반드시 이 두 집안을 꼽는다.
부인은 아기 적부터 유순하고 단아(端雅)하였으며 자라서는 예의가 발랐다. 어릴 때 조모 남씨(南氏)의 손에 길러졌는데 조모의 뜻을 받들어 색양(色養)하는 것이 지극하지 않음이 없었으므로, 부친인 관찰사 부군이 기뻐서 “내가 일 때문에 혼정신성(昏定晨省)을 어기면 무릇 맛있는 음식을 장만해 바치는 일을 내 딸이 든든히 맡아서 한다.” 하였다. 관찰사 부군이 세상을 떠나자 부인은 조모를 더욱 지성껏 봉양하여 조모 남씨가 부인을 좋은 아들처럼 의지하였고, 종족과 향당(鄕黨) 사람들이 그 효성을 칭찬하였다.
집안을 다스리는 것은 더욱 정숙하고 종들을 부림에 법도가 있었으며, 의방(義方)에 따라 움직여 터럭만 한 어긋남도 없었다. 공이 일찍이 진해(鎭海)와 영산(靈山) 두 고을의 현감으로 간 적이 있었는데, 부인은 늘 “대저 관직에 있으면서 더러운 이름을 얻는 것은 모두 부인(婦人) 때문이었다. 내 어찌 나의 지아비께 누를 끼치리요.” 하고, 이로써 더욱 스스로 삼가고 조심하였다. 그리하여 집안의 말은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집 밖의 말은 집안으로 들이지 않았으니, 두 고을의 백성들이 공의 청렴하고 공평함에 탄복하고 아울러 부인의 덕을 칭찬해 마지않았다.
공이 병으로 사직하고 안동(安東)의 별서(別墅)에 살면서 날마다 향리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것으로 낙(樂)을 삼고 집안 형편을 돌보지 않았다. 그러나 부인은 남편의 뜻을 미리 알아서 잘 받들고 힘써 손님상을 잘 차려내어 집안에 자주 양식이 궁핍했어도 공이 알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공은 늘 마음이 편안하고 부인은 남편의 뜻을 어김이 없었으니, 향리에서 그 덕을 칭찬하였다.
공이 불행히도 세상을 떠나자 부인은 남은 자식들을 잘 교육시켜 선대의 유업을 실추하지 않도록 하여, 자손들이 명성과 지위가 현달하였고 이씨(李氏)의 가문이 이로써 더욱 커졌다.
공의 휘는 아무개인데 조정이 공의 차자(次子) 아무개의 작위(爵位)가 이품(二品)이라 하여 공을 이조 참판에 추증하였다. 지금 상국(相國)인 진천(晉川) 강공 혼(姜公渾)이 공의 묘갈명을 썼다. 부인은 과부로 30년을 살다가 정덕(正德) 기사년 2월 모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88세이다. 이해 12월 정해(丁亥)에 남편인 참판공의 묘소 우측 묘좌 경향(卯坐庚向)의 기슭에 안장하였다. 이 고을은 임하현(臨河縣)이고 산은 수다산(水多山)이다.
부인은 4남 2녀를 낳았고, 내외손(內外孫)은 모두 약간 명이니, 이러한 사실들은 모두 상국의 글에 실려 있다. 장남 여(膂)는 경오년의 과거에 장원으로 뽑혀 지금 홍문관 수찬으로 있으니, 사람들이 이로써 이씨(李氏) 집안의 여경(餘慶)이 끝없이 뻗어갈 것임을 안다. 명은 다음과 같다.
어느 집안이 덕문인고 / 孰爲德門
이씨의 선조로다 / 李氏之先
그 향기를 퍼뜨려서 / 載播厥芬
더욱 드러나서 이어졌어라 / 益顯以延
어찌 그 뿌리가 두터우면서 / 孰厚其根
열매가 많이 맺지 않으리요 / 而實不蕃
이 부인으로 말하자면 / 至于夫人
여덕이 더욱 새로웠나니 / 女德彌新
좋은 배필을 얻으매 / 配得其良
마치 한 쌍의 봉황이 우는 듯 / 鳳凰鏘鏘
혁혁히 높은 벼슬이 / 象笏朱軒
자손들에까지 미치었으니 / 曁子若孫
가도가 융성하매 / 家道之肥
문벌이 이로써 빛났도다 / 門閥以煇
장수하고 강녕하시어 / 壽考康寧
그 영화를 다 누리셨어라 / 以盡其榮
내 글로써 명을 지어 / 我文以銘
이 비석에 새기노니 / 維石之貞
이 글에 부끄러움 없기에 / 不愧于辭
이로써 보여 무너뜨리지 않게 하노라 / 用示無隳
[주D-001]색양(色養) : 온화한 얼굴빛으로 부모를 섬기는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부모의 얼굴빛을 보고 그 뜻을 잘 받드는 것이라고 한다. 자하(子夏)가 효(孝)를 묻자, 공자가 “얼굴빛을 온화하게 가짐이 어렵다.[色難]” 하였다. 《論語 爲政》
용헌집 ( 容軒集 ) |
형태서지 | 저 자 | 가계도 | 행 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
형태서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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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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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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附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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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黨君李佇晉山府院君河崙漢城府院君趙英茂鷲山府院君辛克禮雞城君李來義安大君和完山府院君李天佑昌寧府院君成石璘完川君李淑靑海君李之蘭漆城君尹抵義城君金英烈坡平君尹坤錦川君朴訔平壤君朴錫命長興府院君馬天牧漢川府院君趙溫吉昌君權近鐵城府院君李原星山府院君李稷文城府院君柳亮漢平府院君趙涓平陽府院君金承䨟麻城君徐益南陽君洪恕漆原君尹子當雞林君李升商蓮城君金定卿利城君徐愈長川府院君李從茂永陽君李膺豐山君沈龜齡谷山君延嗣宗沔城府院君韓珪煕川君金宇越川君文彬礪山府院君宋居信贈同知中樞院事金德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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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散文)] | ||||
정부인(貞夫人) 이씨(李氏) 묘갈명(墓碣銘) |
계림 이씨(鷄林李氏)는 고려 제현(齊賢)으로부터 현달하기 시작하였으니, 삼중대광(三重大匡)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이었다. 그의 아들 달존(達尊)은 보문각 제학(寶文閣提學)이었고, 이분이 소부윤(少府尹) 휘 학림(學林)을 낳았다. 소부윤은 승정원 우부대언(承政院右副代言) 휘 담(擔)을 낳았고, 우부대언은 경상도 관찰출척사(慶尙道觀察黜陟使) 휘 희(暿)를 낳았다. 관찰출척사는 모현(某縣)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았으니 형조 판서 안등(安騰)의 따님으로, 이분이 부인을 낳아 이공(李公)에게 출가시켰다.
철성 이씨(鐵城李氏)는 고려 존비(尊庇)로부터 현달하기 시작하였으니, 판밀직사사 세자원빈(判密直司事世子元賓)이었다. 그의 아들 우(瑀)는 철성군(鐵城君)이고, 철성군이 문하시중(門下侍中) 휘 아무개를 낳았고, 문하시중은 집현전 제학 휘 강(岡)을 낳았고, 제학은 의정부 우의정 휘 원(原)을 낳았다. 우의정은 모현(某縣) 최씨(崔氏)를 아내로 맞았으니 군부총랑(軍簿摠郞) 최정지(崔丁智)의 따님으로, 이분이 이공을 낳아 부인의 배필이 되게 하였다. 이러고 보면 대대로 명망이 있는 두 큰 집안끼리 서로 혼인한 것이니, 나라에서 망족(望族)을 일컫는 자들은 반드시 이 두 집안을 꼽는다.
부인은 아기 적부터 유순하고 단아(端雅)하였으며 자라서는 예의가 발랐다. 어릴 때 조모 남씨(南氏)의 손에 길러졌는데 조모의 뜻을 받들어 색양(色養)하는 것이 지극하지 않음이 없었으므로, 부친인 관찰사 부군이 기뻐서 “내가 일 때문에 혼정신성(昏定晨省)을 어기면 무릇 맛있는 음식을 장만해 바치는 일을 내 딸이 든든히 맡아서 한다.” 하였다. 관찰사 부군이 세상을 떠나자 부인은 조모를 더욱 지성껏 봉양하여 조모 남씨가 부인을 좋은 아들처럼 의지하였고, 종족과 향당(鄕黨) 사람들이 그 효성을 칭찬하였다.
집안을 다스리는 것은 더욱 정숙하고 종들을 부림에 법도가 있었으며, 의방(義方)에 따라 움직여 터럭만 한 어긋남도 없었다. 공이 일찍이 진해(鎭海)와 영산(靈山) 두 고을의 현감으로 간 적이 있었는데, 부인은 늘 “대저 관직에 있으면서 더러운 이름을 얻는 것은 모두 부인(婦人) 때문이었다. 내 어찌 나의 지아비께 누를 끼치리요.” 하고, 이로써 더욱 스스로 삼가고 조심하였다. 그리하여 집안의 말은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집 밖의 말은 집안으로 들이지 않았으니, 두 고을의 백성들이 공의 청렴하고 공평함에 탄복하고 아울러 부인의 덕을 칭찬해 마지않았다.
공이 병으로 사직하고 안동(安東)의 별서(別墅)에 살면서 날마다 향리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것으로 낙(樂)을 삼고 집안 형편을 돌보지 않았다. 그러나 부인은 남편의 뜻을 미리 알아서 잘 받들고 힘써 손님상을 잘 차려내어 집안에 자주 양식이 궁핍했어도 공이 알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공은 늘 마음이 편안하고 부인은 남편의 뜻을 어김이 없었으니, 향리에서 그 덕을 칭찬하였다.
공이 불행히도 세상을 떠나자 부인은 남은 자식들을 잘 교육시켜 선대의 유업을 실추하지 않도록 하여, 자손들이 명성과 지위가 현달하였고 이씨(李氏)의 가문이 이로써 더욱 커졌다.
공의 휘는 아무개인데 조정이 공의 차자(次子) 아무개의 작위(爵位)가 이품(二品)이라 하여 공을 이조 참판에 추증하였다. 지금 상국(相國)인 진천(晉川) 강공 혼(姜公渾)이 공의 묘갈명을 썼다. 부인은 과부로 30년을 살다가 정덕(正德) 기사년 2월 모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88세이다. 이해 12월 정해(丁亥)에 남편인 참판공의 묘소 우측 묘좌 경향(卯坐庚向)의 기슭에 안장하였다. 이 고을은 임하현(臨河縣)이고 산은 수다산(水多山)이다.
부인은 4남 2녀를 낳았고, 내외손(內外孫)은 모두 약간 명이니, 이러한 사실들은 모두 상국의 글에 실려 있다. 장남 여(膂)는 경오년의 과거에 장원으로 뽑혀 지금 홍문관 수찬으로 있으니, 사람들이 이로써 이씨(李氏) 집안의 여경(餘慶)이 끝없이 뻗어갈 것임을 안다. 명은 다음과 같다.
어느 집안이 덕문인고 / 孰爲德門
이씨의 선조로다 / 李氏之先
그 향기를 퍼뜨려서 / 載播厥芬
더욱 드러나서 이어졌어라 / 益顯以延
어찌 그 뿌리가 두터우면서 / 孰厚其根
열매가 많이 맺지 않으리요 / 而實不蕃
이 부인으로 말하자면 / 至于夫人
여덕이 더욱 새로웠나니 / 女德彌新
좋은 배필을 얻으매 / 配得其良
마치 한 쌍의 봉황이 우는 듯 / 鳳凰鏘鏘
혁혁히 높은 벼슬이 / 象笏朱軒
자손들에까지 미치었으니 / 曁子若孫
가도가 융성하매 / 家道之肥
문벌이 이로써 빛났도다 / 門閥以煇
장수하고 강녕하시어 / 壽考康寧
그 영화를 다 누리셨어라 / 以盡其榮
내 글로써 명을 지어 / 我文以銘
이 비석에 새기노니 / 維石之貞
이 글에 부끄러움 없기에 / 不愧于辭
이로써 보여 무너뜨리지 않게 하노라 / 用示無隳
[주D-001]색양(色養) : 온화한 얼굴빛으로 부모를 섬기는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부모의 얼굴빛을 보고 그 뜻을 잘 받드는 것이라고 한다. 자하(子夏)가 효(孝)를 묻자, 공자가 “얼굴빛을 온화하게 가짐이 어렵다.[色難]” 하였다. 《論語 爲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