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각산 관련자료/삼각산 증흥사관련 자료

삼각산(三角山)으로 서울의 북한산(北漢山)에 고려 때부터 있었던149칸)

아베베1 2011. 5. 7. 14:22

세종
 지리지
세종 지리지 / 경기 / 양주 도호부

⊙ 양주 도호부(楊州都護府)
본래 고구려의 남평양성(南平壤城)인데,【또는 북한산(北漢山)이라 한다.】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이 취하여, 그 25년 신미에【곧 동진(東晉) 간문제(簡文帝) 함안(咸安) 원년.】 남한산(南漢山)으로부터 도읍을 옮기어 1백 5년을 지나, 개로왕(蓋鹵王) 20년 을묘에【곧 송나라 폐제(廢帝) 원휘(元徽) 3년.】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이 와서 한성(漢城)을 에워싸니, 개로왕이 달아나다가 고구려 군사에게 살해되매, 이 해에 그 아들 문주왕(文周王)이 도읍을 웅진(熊津)으로 옮기었다. 그 뒤 79년, 신라 진흥왕(眞興王) 13년 계유에 〈신라가〉 백제의 동북쪽 변방을 취하고, 15년 을해에 왕(王)이 북한산성(北漢山城)에 이르러 국경[封彊]을 정하였며, 17년 정축에【곧 진(陳)나라 고조(高朝) 영정(永貞) 원년.】 북한산주(北漢山州)를 두었고, 경덕왕(景德王) 14년 병신에 한양군(漢陽郡)으로 고쳤다. 고려가 양주(楊州)로 고치어, 성종(成宗) 14년 을미에 12주(州)의 절도사(節度使)를 두었는데, 양주 좌신책군(楊州左神策軍)이라 하여, 해주 우신책군 절도사(海州右神策軍節度使)와 더불어 이보(二輔)를 삼았다. 현종(顯宗) 3년 임자에 이보(二輔)와 십이절도사(十二節度使)를 폐하여 안무사(按撫使)로 고치고, 9년 무오에 지양주사(知楊州事)로 강등시켰다가, 숙종(肅宗) 9년 갑신에【곧 송나라 휘종(徽宗) 숭녕(崇寧) 3년.】 남경 유수관(南京留守官)으로 승격시켰으며, 충렬왕(忠烈王) 34년 무신에【곧 원나라 무종(武宗) 지대(至大) 원년.】 한양부(漢陽府)로 고쳤다. 본조(本朝) 태조(太祖) 3년 갑술에 도읍을 한양에 정하고 부치(府治)를 동촌(東村) 한골[大洞里]에 옮겨, 다시 지양주사(知楊州事)로 강등시켰다가, 4년 을해에 부(府)로 승격시켜 부사(府使)를 두었고, 정축에 또 부치(府治)를 견주(見州) 옛터로 옮겼으며, 태종(太宗) 13년 계사에 예(例)에 의하여 도호부(都護府)로 하였다. 속현(屬縣)이 3이다. 견주(見州)는 본래 고구려의 매초현(賣肖縣)인데, 신라가 내소군(來蘇郡)으로 고쳤고, 고려에서 견주(見州)로 고치어, 현종(顯宗) 무오에 양주(楊州)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별호(別號)는 창화(昌化)이니, 순화(淳化) 때에 정한 것이다.】 사천현(沙川縣)은 본래 고구려의 내을매현(內乙買縣)인데, 신라가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견성군(堅城郡)의 영현(領縣)을 삼았으며, 고려 현종(顯宗) 무오에 양주(楊州) 임내(任內)에 붙였다. 풍양현(豊壤縣)은 본래 고구려의 골의노현(骨衣奴縣)인데, 신라가 황양(荒壤)으로 고쳐서 한양군(漢陽郡)의 영현(領縣)을 삼았고, 고려에서 풍양현(豐壤縣)으로 고쳐, 현종(顯宗) 무오에 양주(楊州)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뒤에 포천(抱川)에 옮겨 붙였으며, 금상(今上) 원년(元年) 기해에 다시 본부(本府)에 붙였다.
삼각산(三角山)【부(府) 남쪽에 있다. 일명(一名)은 화산(華山)이니, 3봉우리가 우뚝 빼어나서 높이 하늘에 들어가 있다.】 오봉산(五峯山)【부(府) 남쪽에 있다.】 천보산(天寶山)【부(府) 동쪽에 있다.】 소요산(消遙山)【부(府) 북쪽에 있다.】양진(楊津)【부(府) 남쪽에 있으니, 곧 한강[漢水]의 남쪽이다. 단(壇)을 쌓고 용왕(龍王)에게 제사지내는데, 봄·가을의 가운뎃달[仲月]에 〈나라에서〉 향(香)·축(祝)을 내리어 제사지낸다. 신라 때에는 북독 한산하(北瀆漢山河)라 칭하고 중사(中祀)에 올렸으나, 지금은 소사(小祀)에 실려 있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포천에 이르기 18리, 서쪽으로 원평(原平)에 이르기 22리, 남쪽으로 광주에 이르기 47리, 북쪽으로 적성(積城)에 이르기 83리이다.
건원릉(健元陵)은 우리 태조 강헌 지인 계운 성문 신무 대왕(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을 장사지냈다.【부(府) 남쪽 검암산(儉岩山)의 기슭에 있으니, 자룡[坎山]에 계좌 정향(癸坐丁向)이다. 능 남쪽에 신도비(神道碑)가 있고, 능지기[陵直]·권무(權務) 2인과 수호군(守護軍) 1백 호(戶)를 두고, 매호(每戶)마다 밭 2결(結)을 주었으며, 동리에 재궁(齋宮)을 짓고 개경사(開慶寺)라 하여 선종(禪宗)에 붙이고, 밭 4백 결을 주었다.】 낙천정(樂天亭)【부(府) 남쪽 황대산(皇臺山) 언덕에 있으니, 남쪽으로 한강에 임하였다. 우리 태종(太宗)이 거둥하여 계시던 곳이다.】 풍양 이궁(豐壤離宮)【부(府) 동남쪽에 있으니, 곧 풍양현(豐壤縣)의 옛터이며, 또한 태종이 거둥하여 계시던 곳이다.】
호수(戶數)가 1천 4백 81호, 인구가 2천 7백 26명이요,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1백 33명, 선군(船軍)이 1백 32명이다.
본부(本府)의 토성(土姓)이 4이니, 한(韓)·조(趙)·민(閔)·신(申)이요, 내성(來姓)이 5이니, 함(咸)【양근(楊根)에서 왔다.】·박(朴)【춘천(春川)에서 왔다.】·홍(洪)【남양(南陽)에서 왔다.】·최(崔)【수원(水原)에서 왔다.】·부(夫)【과천(果川)에서 왔다.】요, 망성(亡姓)이 2이니, 정(鄭)·예(艾)이다. 견주(見州)의 토성(土姓)이 7이니, 이(李)·김(金)·송(宋)·신(申)·백(白)·윤(尹)·피(皮)요, 사천현(沙川縣)의 토성(土姓)이 1이니, 경(耿)이며, 망성(亡姓)이 4이니, 이(李)·임(任)·송(宋)·허(許)이다. 풍양현(豐壤縣)의 토성(土姓)이 1이니, 조(趙)요, 망성(亡姓)이 4이니, 이(李)·강(姜)·윤(尹)·유(劉)이다. 인물(人物)은 중추원사 한산군 충정공(中樞院使漢山君忠靖公) 조인옥(趙仁沃)이다.【본조(本朝)의 개국 공신(開國功臣)으로 태조 묘정(太祖廟庭)에 배향되었다.】
땅이 기름지고, 간전(墾田)이 1만 5천 1백 90결(結)이다.【논이 10분의 3이 좀 넘는다.】 토의(土宜)는 오곡(五穀)과 조·메밀·뽕나무요, 토공(土貢)은 느타리[眞茸]와 지초(芝草)이며, 토산(土産)은 송이[松茸]와 잣[松子]이다. 자기소(磁器所)가 1이요,【부 북쪽 사천현(沙川縣) 한탄리[大灘里]에 있으니, 하품(下品)이다.】 도기소(陶器所)가 2이니, 하나는 부(府) 북쪽 소요산(消遙山) 아래에 있고,【중품이다.】 하나는 부(府) 동쪽 도혈리(陶穴里)에 있다.【하품이다.】
역(驛)이 6이니, 청파(靑坡)·노원(蘆原)·영서(迎曙)·평구(平丘)·구곡(仇谷)·쌍수(雙樹)요, 목장(牧場)이 2이니, 하나는 살고지들[箭串坪]이요,【부(府) 남쪽에 있으니, 동서가 7리요, 남북이 15리이다. 나라의 말을 놓아 먹인다.】 둘째는 녹양벌[綠楊坪]]이다.【부(府) 남쪽에 있으니, 동서가 5리요, 남북이 12리이다. 중군(中軍)과 좌군(左軍)의 말을 함께 놓아 먹인다.】 봉화(烽火)가 2곳이니, 대이산(大伊山)과【부(府) 동남쪽에 있으니, 북쪽으로 포천(抱川) 잉읍점(仍邑岾)에 응하고, 남쪽으로 가구산(加仇山)에 응한다.】 가구산(加仇山)이다.【부(府) 남쪽에 있으니, 북쪽으로 대이산(大伊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서울 목멱산에 응한다.】 회암사(檜巖寺)【천보산(天寶山) 아래에 있다. 불전(佛殿)과 승료(僧寮)가 수백 기둥이 되며, 승도(僧徒)들이 가리어 대가람(大迦藍)을 삼았다. 선종(禪宗)에 붙이고 밭 5백 결(結)을 주었다. 절에다 서번(西蕃)의 지공 화상(指空和尙)의 부도(浮屠)를 안치(安置)하였고, 비(碑)가 있다.】 소요사(逍遙寺)【소요산(消遙山) 허리에 있다. 태종(太宗) 3년 임오에 태조(太祖)가 절 남쪽 행전(行殿)에 머물러, 여러 달을 두고 〈절의〉 온갖 그림을 새롭게 하였으며, 금상(今上) 6년 갑진에 태조(太祖)의 원당(願堂)으로 하여 교종(敎宗)에 붙이고, 밭 1백 50결(結)을 주었다.】 진관사(眞觀寺)【삼각산(三角山) 서남쪽에 있다. 나라에서 수륙재(水陸祭)를 지내며, 선종(禪宗)에 붙이고 밭 2백 50결(結)을 주었다.】 승가사(僧伽寺)【삼각산(三角山) 남쪽에 있다. 선종(禪宗)에 붙이고 밭 1백 45결(結)을 주었다.】 중흥사(重興寺)【삼각산(三角山) 아래에 있다. 선종(禪宗)에 붙이고 밭 2백 결(結)을 주었다.】
관할[所領]은 도호부(都護府)가 1이니, 원평(原平)이요, 현(縣)이 6이니, 고양(高陽)·교하(交河)·임진(臨津)·적성(積城)·포천(抱川)·가평(加平)이다.
【원전】 5 집 617 면


 

 

농암집 제1권
 시(詩)
중흥사(重興寺)를 찾아가서


깊은 가을 서리 이슬 산숲 씻어 말끔하여 / 高秋霜露洗林丘
하늘 끝에 높이 뜬 삼봉 반겨 바라보네 / 喜見三峯天畔浮
절벽의 싸늘한 놀 비 기운 남아 있고 / 絶壁冷霞餘雨氣
무너진 성 기운 햇살 차가운 개울 비추네 / 壞城斜日映寒流
덩굴 얽힌 옛길이라 갈피 잡기 어려워 / 藤蘿古道深難取
등불 밝힌 절간 방 날 저물어 들어갔네 / 燈火禪房暝始投
아름다운 산수 속에 언제나 은둔하여 / 勝處每懷長往志
계수나무 부여잡고 스님 함께 머물고파 / 會攀叢桂共僧留


 

[주C-001]중흥사(重興寺) : 일명 삼각산(三角山)으로 불리는 서울의 북한산(北漢山)에 고려 때부터 있었던 149칸의 절로 북한산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 성종 22년(1491)에 한 번 화재를 겪었고 연산군 4년(1498)에 다시 세웠으며, 1915년에 폐사(廢寺)되었다.
[주D-001]삼봉(三峯) : 북한산을 이루고 있는 백운대(白雲臺), 국망봉(國望峯), 인수봉(仁壽峯)을 말한다.
[주D-002]계수나무 부여잡고 : 한(漢)나라의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지은 〈초은사(招隱士)〉에 “계수나무 무더기로 자라누나 산골 깊은 곳에, 꼿꼿하고 굽은 가지 서로 얽히었네.[桂樹叢生兮山之幽 偃蹇連卷兮枝相繚]” 한 데서 나온 말로, 세속을 피해 산림에 숨은 은사(隱士)를 형용할 때 흔히 인용된다. 《楚辭 卷12》

태조 7년 무인(1398,홍무 31)
 1월24일 (임신)
중흥사와 억정사의 전지에 대한 조세를 면제하다

임금이 도당(都堂)에 명하여 특별히 중흥(重興)·억정(億正) 두 절에 대한 전조(田租)의 공수(公收)를 면제하였다.
【원전】 1 집 115 면
【분류】 *재정-전세(田稅) / *사상-불교(佛敎)


세조 14년 무자(1468,성화 4)
 3월22일 (임오)
절의 전세의 수납을 빙자하여 민간을 침어한 중흥사와 장안사의 중을 추국하다

호조(戶曹)에서 홍주(洪州)에 사는 사노(私奴) 무리대(無里大) 등과 공주 정병(公州正兵) 진식충(陳息忠) 등의 장고(狀告)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중흥사(重興寺)의 중[僧]과 장안사(長安寺)의 중들이 각각 그 절의 전세(田稅)를 수납(收納)한다 하여, 민간(民間)에게 억지로 갑절이나 침어(侵漁)하기를 자행(恣行)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살 곳을 잃게 하였으니, 청컨대 유사(攸司)로 하여금 추국(推鞫)하게 하고 징수한 것은 본주(本主)에게 돌려주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원전】 8 집 171 면
【분류】 *사법(司法) / *농업-경영형태(經營形態) / *사상-불교(佛敎)


중종 15년 경진(1520,정덕 15)
 4월16일 (계유)
이신이 김식이 망명한 정상을 말하다

상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영의정(領議政) 김전(金詮)·좌의정(左議政) 남곤(南袞)·우의정(右議政) 이유청(李有淸)·의금부 당상(義禁府堂上) 권균(權均) 심정(沈貞) 손주(孫澍) 이행(李荇)을 부르니 처마밑에 입시(入侍)하였다. 이신의 말은 이러하였다.
“신은 낙안(樂安)의 관노(官奴)입니다. 젊어서부터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향산(香山)에 들어갔습니다. 정축년에 식량을 구걸하러 산에서 나와 삼각산(三角山)의 중흥사(中興寺)에 붙여 있었습니다. 김식이 중을 가엾이 여긴다는 말을 듣고 가보니, 김식이 제자와 《근사록(近思錄)》을 강론하는 중이었는데, 곧 저의 근각(根脚)을 묻고는 저에게 환속하여 수업하라고 권하고, 곧 흙집을 짓고 거기에 살게 하고 《대학(大學)》을 가르쳤습니다. 《대학》을 다 읽고 그 집에서 나와 상주(尙州)의 절로 간 것은 지난해 1월이었습니다.
11월에 김식 등이 죄를 받아 선산(善山)으로 귀양온다는 말을 듣고 곧 개령(開寧)에 있는 도범룡(都泛龍)의 집에 갔더니 범룡이 ‘오늘쯤 상전이 이를 것이다.’【도범룡은 숭선정(崇善正)의 종이며, 김식의 아들인 김덕순(金德純)은 숭선정의 사위이다.】 하기에, 신이 곧 가보니 김식이 이미 이르렀었는데, 저를 보고 매우 기뻐하고 곧 밥을 먹이고는 저를 데리고 선산으로 돌아가 하루 묵었다가 저를 경중(京中)에 있는 그 어미의 집에 보내면서 ‘잡된 말을 내지 말고, 다만 우리 어머니의 안부를 알아보고 사촌 매부 박인성(朴仁誠)을 만나 경중의 소식을 묻고서 빨리 돌아오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신이 김식의 서울 집에 이르러 그 어미의 안부를 묻고, 또 박인성을 만났더니 기별 두 장을 써 주었다가 문득 도로 빼앗고 말하기를 ‘사촌 심풍(沈豊)이 가지고 갈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과 심풍이 함께 충주 사는 손충순위(孫忠順衛)의 집에 갔더니, 한 말쯤 되는 식량을 주고 저희를 선산으로 보냈습니다. 가다가 조령(鳥嶺)에 이르러 숭선정의 종 작동(鵲同)을 만났는데, 저에게 부탁하기를 ‘김식이 그저께 이미 도망하였으니 너는 들어가지 말라.’ 하였습니다. 신이 그 말을 듣고 도로 상주에 있는 김세온(金世溫)의 집에 이르니, 그 마을에 사는 유생(儒生) 김윤종(金胤宗)이 말하기를 ‘김식은 이미 도망하였는데 잘한 일이다. 너는 박세희(朴世熹)가 붙여 사는 집에 가야 할 것이다. 박세희가 너를 보고자 한다.’ 하기에, 신이 김윤종과 함께 박세희가 붙여 사는 곳에 갔었고, 또 보은(報恩)의 왕래원(王來院)에서 만났는데, 그때는 박세희가 평안도로 이배(移配)될 때였습니다. 박세희가 말하기를 ‘김윤종이 늘 나에게 도망하라고 권하였고 나는 실로 용건(勇健)하나, 만약에 또 도망하면 상께서 반드시 놀라실 것이니, 나는 죽더라고 결코 도망할 수 없다. 그러나 너는 나를 데리고 가도록 하라.’ 하였으나, 신의 생각에는 ‘내가 그의 종붙이가 아닌데 어찌 기한(飢寒)을 무릅쓰고 가겠느냐.’고 여겨져서 드디어 물러왔습니다.
전일 최운(崔澐)이 저를 보고 말하기를 ‘네가 곤궁하거든 내집에 오너라.’ 하였으므로 드디어 회덕현(懷德縣)에 있는 그의 처부(妻父)의 집에 갔더니 최운이 있었는데, 저를 보고 자못 기뻐하며 말하기를 ‘너는 김식이 도망하여 붙여 있는 곳을 아느냐?’ 하기에, 신이 모른다고 대답하였더니, 최운이 말하기를 ‘김식이 반드시 무주(茂朱)에 있는 오희안(吳希顔)의 집에 갔을 것이다.’ 하고 곧 식량을 주어 오희안의 집으로 가게 하였습니다. 김식이 있는지를 물으니 ‘김식이 지금 없으나 내집으로 돌아올 것이니 다시 중이 되지 말라.’ 하고 이어서 조정의 기별을 말하기를 ‘듣건대 심정(沈貞)이 주초대부필(走肖大夫筆)이라는 참서(讖書)를 궐내(闕內)에 떨어뜨렸으므로 상께서 매우 놀라셨고, 그뒤에 홍경주(洪景舟)의 집에 가서는 말하기를 「상께서 외로우신 것을 사람들이 아느냐?」 하였는데, 홍경주가 드디어 소매안에서 대내(大內)에서 나온 글을 내어 보이니, 심정이 매우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런 일을 성주(聖主)께서 과연 이미 아시는구나.」 하고 홍경주와 함께 남곤(南袞)의 집에 가려 하였으나 홍경주가 가지 않았고, 그뒤에 심정이 사람을 시켜 엿보아 홍경주가 남곤의 집에 간 것을 알고 심정도 가서, 세 사람이 둘러앉아 함께 이야기한 뒤에 정광필(鄭光弼)의 집에 가서 말하니, 정광필이 말하기를 「상께서 그 사람을 워낙 흠결 없게 대우하시는데 어찌 그런 일이 있겠느냐.」 하였으나, 드디어 11월 16일에 신무문(神武門)을 거쳐 들어가 참소하여 해치는 일을 꾸몄다고 한다. 너는 이 말을 김식에게 가서 말하라.’ 하였습니다.
신이 그 말을 듣고 오희안의 집에 갔더니 과연 김식이 있었는데, 그날은 1월 12일이었습니다. 김식을 보고 최운의 말을 죄다 전했더니 김식이 말하기를 ‘소인이 하는 일을 내가 이미 아나, 다만 어떻게 하는지를 몰랐었는데, 오늘에야 비로소 그 상세한 것을 알았다.’ 하였습니다. 김식은 심정을 미워하여 저에게 말하기를 ‘내 둘째 아들 김덕순은 건장하고 용맹한 사람이다. 심정을 쏘려 꾀하였는데 내가 말린 적이 있다. 너와 내 아들은 자객(刺客)이 될 만하다. 김윤종에게 보검(寶劍)이 있으니 그 검으로 심정을 먼저 없애고 또 남곤과 홍경주를 없애면 일이 자못 쉬워질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이 말을 듣고 이틀을 묵은 뒤에 김식이 저를 데리고 함께 영산(靈山)에 있는 이중(李中)의 집에 갔는데, 이중도 말하기를 ‘내 매부 김억지(金億之)는 자못 장건하여 손으로 벽을 뚫을 수 있다.’ 하니, 김식이 도리어 말하기를 ‘정백(丁白)이 근일 간고(艱苦)한데, 한 고을에서 3백여 인을 불러 모을 수 있으니, 이런 무리를 서너 고을 모으면 군사를 일으키기도 쉬울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 집에서 영산으로 가는 중도에 거창(居昌)의 냇가에 이르러 말 위에서 이야기하는 사이에 발설하기를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또한 쉬우나, 여간한 재간(才幹)이 아니면 끝내 안정(安靖)하기 어렵다.’ 하였습니다. 2월 그믐날에 이중의 집에 이르러 머물러 있었는데, 이중은 김식의 제자입니다. 김식이 3월 초승에 이중과 함께 칠원(漆原) 아내(衙內)로 갔고 신은 이 중의 집에 있었는데, 김식이 칠원으로 떠날 때에는 가는 곳을 말하지 않았으나 이중의 종 물재(勿才)가 말하였으므로 알았습니다. 같은 달 초닷새날에 이중의 집에서 떠날 때에는 이 중이 집에 돌아와 있었는데 잡아 두고 보내지 않으므로, 신이 해를 당할 듯하여 드디어 도망하여 올라왔습니다. 또 신이 듣건대 김식이 무주의 오희안 집에 숨어서 붙여 있으려 한다고 합니다. 이윤검(李允儉)이 영해 부사(寧海府使)이니 그 아내(衙內)에도 가서 붙여 있을 수 있고, 박영(朴英)이 김해 부사(金海府使)이니 그 아내에도 가서 붙여 있을 수 있고 순천(順天)사는 조첨지(趙僉知)의 집 마을에 그의 숙모 집이 있으니 역시 가서 붙여 있을 수 있고, 창녕(昌寧) 옥야(沃野)에 사는 하정(河珽)의 집과 하정의 부모의 집에도 가서 붙여 있을 수 있습니다.”
상이 공사(供辭)를 다 보고 이르기를,
“의심스러운 곳을 다시 캐어 물어야 하겠다.”
하였다. 이신이 답하였다
“신이 사실대로 아뢰겠습니다. 신이 처음에는 이중의 집에서 도망하여 왔다고 공초(供招)하였으나, 실은 김식이 지난 1월 12일쯤 오희안의 집에서 신에게 말하기를 ‘우리 일은 오로지 심정이 꾸민 것이니, 먼저 심정을 없애면 일이 잘될 것이다. 너를 보건대 성품이 곧고 또 몸을 아끼지 않으니, 자객을 삼으면 맡을 만하다.’ 하였습니다. 신이 처음에는 자객이라는 것이 무슨 말인지 몰라 물었더니, 답하기를 ‘자객이라는 것은 검으로 불의에 사람을 찔러 죽이는 것이다. 네가 할 수 있겠느냐?’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감히 명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식이 매우 기뻐하였으며, 그날 저녁에 오희안이 가만히 말하기를 ‘접때 일은 오로지 심정·남곤·홍경주로 말미암은 것이니, 이 두세 사람을 없애면 일이 매우 잘될 것이다. 김식의 지휘에 따라서 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15일에 김식이 저를 데리고 영산에 있는 이중의 집에 갔는데, 이중이 신을 바깥 행랑에 들게 하고는 김식과 등불을 켜고 야화(夜話)하더니, 한밤에 서제(庶弟)를 시켜 신을 불러 들였습니다. 김식이 신에게 말하기를 ‘네가 심정을 없앨 수 있다면 일이 잘될 것이다.’ 하고, 이중도 말하기를 ‘접때 경성에 다녀왔는데, 조정에 있는 사람들은 다 분을 바른 부인(婦人)과 같으니, 시세(時勢)가 우습다.’ 하고는 손을 잡고 등을 어루만지며 ‘너는 용맹한 사람이니 자못 쓸 데가 있다.’ 하고 이어서 술을 먹였습니다. 김식(金湜)이 또다시 신에게 장검(張儉)이 망명(亡命)하였을 때에 공포(孔褒)가 숨겨 주고 일가(一家)가 서로 다투어 죽으려 한 일오자서(伍子胥)가 복수한 일을 말하였는데, 신이 허락하니 이때부터 낮에는 따로 있다 밤에는 반드시 서로 모였습니다.
3월 초승에 김식은 칠원에 가고 신이 혼자 이중의 집에 있는데 박연중·김덕순이 또 와서 한 방에서 함께 잤습니다. 박연중이 말하기를 ‘심정의 집은 문 밖에 있으니 드나드는 것을 엿보았다가 밤에 검을 가지고 돌입하면 따르는 자들이 흩어질 것인데 일을 성취하기에 무엇이 어렵겠느냐.’ 하였고, 김덕순이 말하기를 ‘검으로 하지 않더라고 활로 쏠 수 있다.’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나는 말하는 대로 하겠다.’ 하고 이달 20일에 힘을 같이하여 거사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박연중·김덕순은 칠원으로 가고, 신은 개령(開寧)에 있는 숭선정(嵩善正)의 종의 집에 들러서 숭선정을 보고 김덕순의 소식을 전하고 3일 묵었습니다. 또 전의(全義)에 들러 최운을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고 도로 전에 들렀던 숭선정의 종의 집에 가서 연중·덕순 등이 이미 상경하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신도 바로 서울에 당도하여 남대문 밖에 있는 권경(權經)의 빈 집에 들어 있다가 권경을 만나 꾀하는 일을 말하였더니, 권경이 말하기를 ‘유기(柳淇)가 너를 보면 쳐죽이려 할 것이니 멀리 피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신이 당초 약속할 때에 거사한 뒤에 금산의 횡천현(橫川縣) 땅으로 돌아가려고 생각하였습니다. 산이 깊고 흙이 기름져서 살 만하므로 그곳에서 사세가 돌아가는 것을 보려 하였습니다. 또 김식이 무주에서 개령에 있는 도범룡의 집에 와서 산가지[算]를 잡고 점치고는 웃었으며 이튿날 말하기를 ‘오래 있지는 않을 것이니 1∼2년일 것이다.’ 하였으나, 무슨 일을 가리키는지 몰랐습니다. 또 신이 당초 심풍과 경상도로 향할 때에 활과 검을 가지고 갔는데 음죽(陰竹)에 이르러 노상에서 이야기할 때 ‘예전에 혹 위에서 나온 일이 아닌데 중간에서 선류(善類)를 모해(謀害)한 자가 있었으니, 그렇다면 쳐죽이고 달아나야 한다.’는 말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가졌던 검을 신에게 주어 김식의 적소(適所)로 빨리 가서 주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공사(供辭)를 보고 도로 내리매, 심정(沈貞)이 아뢰기를,
“저 김식의 무리는 신이 그 뜻이 취할 만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매우 서로 좋아하였고 김식도 신의 집에 왕래하여 상종하였습니다. 그뒤에 박경(朴耕)의 일이 있었을 때, 조광조(趙光祖)·김식도 모의에 참여하였으므로 갇혔으나 나이가 젊었다 하여 다 죄를 입지 않았는데, 그 이후로 신이 그 사람됨을 의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좋아하였는데, 저들이 때를 만나 지위도 점점 높아져서는 하는 일이 번번이 신과 달랐습니다. 이 때문에 신을 배척하였으나, 신은 혐의를 두지 않았습니다. 5∼6년쯤 전에, 김식의 집에 와서 배우는 중이 있었는데 솔잎을 먹으며 불경(佛經)을 많이 알므로 김식이 자못 중하게 여긴다는 말을 듣고, 신도 보고자 하였습니다. 오래지 않아 중이라는 사람이 신의 집에 와서 만나기를 청하므로, 만나보고 배운 것을 물으니 《대학(大學)》을 읽었다고 대답하는데 말이 자못 속되지 않았고, 또 쌀 한 되로 닷새 동안 먹을 수 있다고 말하기에 쌀 한 말과 종이를 주었습니다. 그 뒤에 들으니 걷기를 잘해서 하루에 이틀 길을 가므로 김식이 더욱 신중(信重)하여 드디어 신(信)자로 이름지어 주었다 합니다. 김식이 중하게 여기는 것을 신이 본디 알거니와 지금 이신이 말한 것은 전혀 허망하지 않습니다.”
하고, 윤희인(尹希仁)이 아뢰기를,
“이신이 처음에 공초하기를 ‘최운(崔澐)이 「상께서 원자(元子)를 바꾸려 하시니 나라가 장차 날로 기울 것이다.」 했다.’ 하였는데, 이 말은 매우 상서롭지 않으므로 차마 글에 쓰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은 여정(輿情)을 경동(驚動)하려는 것이다. 최운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묻도록 하라.”
하였다. 이 신이 아뢰기를,
“최운은 식량을 가지고 나가 지리산에 놀고자 하나, 실은 안처순(安處順)과 김정(金淨)을 가서 보려는 생각입니다. 김식은 하정(河珽)의 아내(衙內)에 숨어 있으면서 전에 말하기를 ‘내 서울 집도 숨을 만하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이장곤(李長坤)은 잘 걸으므로 달아나기 쉬웠지만 나는 잘 걷지 못하니 어떻게 달아나겠는가.’ 하였습니다.【폐조(廢朝) 때에 이장곤이 죄를 피하여 달아났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식·최운을 빨리 찾아 잡도록 하라.”
하매, 남곤(南袞)이 아뢰기를,
“최운은 우선 궁문(窮問)한 뒤에 가서 잡아도 늦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식은 가서 잡도록 하라.”
하매, 남곤이 아뢰기를,
“망명한 사람은 예전에도 찾아 잡았으니 지금도 가서 잡아야 합니다.”
하고, 윤희인이 아뢰기를,
“이신의 공초에 ‘경중(京中)의 기별은 다 정광필(鄭光弼)의 집에서 왔다’ 하였습니다.”
하였으나, 상이 답하지 않았다. 남곤이 권경을 잡아다가 묻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식이 간 곳을 이미 알았거니와, 어떻게 찾아서 잡을 것인가?”
하매, 남곤이 아뢰기를,
“이신이 서울에 온 것을 김식이 알 것이니, 하정의 아내에 머물러 있지 않을 것입니다. 김식의 아들이 서울에 왔으니, 이를 잡아와야 합니다.”
하고, 이신이 아뢰기를,
“박연중은 숭선정의 집 여종의 지아비이며 무인(武人)인데, 역시 숭선정의 집에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식의 아들과 박연중은 빨리 잡아오라.”
하였다. 윤은필(尹殷弼)이 아뢰기를,
“김식의 처 사촌 오라비 심장(沈漳)·심풍(沈澧)도 잡아다가 물어야 합니다.”
하니, 상이 ‘그리하라.’ 하였다. 이유청(李惟凊)이 아뢰기를,
“망명하여 요망한 말을 하니, 이는 국가를 깔보는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저들이 ‘이 일은 상께서 아시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서 소인이 화(禍)를 꾸민 것일 것이다.’ 하였다 합니다. 또 전에 경연(經筵)에서 저들이 ‘문신(文臣)이 아니라도 경연에 들어올 수 있으며 조종(祖宗)의 법은 반드시 쓸 것 없다.’ 하였으니, 어찌 지나치게 심하지 않습니까?”
하고, 남곤이 아뢰기를,
“죄주어야 합니다. 이제 근각(根脚)을 알았으니, 가서 찾으면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이신을 시켜 자객이 되게 한 것은 전에 제자였기 때문입니다.”
하고, 심정(沈貞)이 아뢰기를,
“박연중의 집 사람을 이미 잡아왔으니, 그 거처를 묻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니, 상이 ‘그리하라.’ 하였다. 윤은필이 아뢰기를,
“심장·심풍은 이미 잡아왔고, 김덕순(金德純)은 잡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삼공(三公)에게 묻도록 하라.”
하였다. 김전(金詮)이 아뢰기를,
“김덕순이 있는 곳을 심풍 등에게 물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박연중을 잡으려는 것은 김식이 있는 곳을 묻기 위한 것이다. 빨리 도사(都事)를 보내어 김식을 잡도록 해야 한다.”
하매, 김전이 아뢰기를,
“신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였다. 이유청이 도사에게 말하기를,
“네가 칠원(漆原)에 가거든 먼저 칠원의 원[倅]을 구금한 뒤에 찾아 잡아라. 저 자가 혹 부녀의 복색을 하고 숨거나 또 성벽[壘壁] 사이에 숨는 일이 없지도 않을 것이니 아울러 살펴 가라. 또 먼저 소문을 내어 장차 칠원을 지나 다른 데로 가는 것처럼 하라.”
하였다. 남곤이 아뢰기를,
“김식을 찾는 절목(節目)에, 받아들여 붙여 준 사람의 죄목도 이미 썼으니, 숨겨 준 사람들을 잡아오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고, 윤은필이 아뢰기를,
“오희안(吳希顔)이 김식을 숨겨 주었으니, 이제 김식을 잡지 못하더라도 오희안을 잡아와야 합니다. 또 김식도 하정의 아내(衙內)에 있지 않다고 하니, 김식을 잡지 못하면 역시 하정을 잡아와야 합니다.”
하니, 상이 ‘그리하라.’ 하였다. 윤희인(尹希仁)이 삼공에게 말하기를,
“이중(李中)도 잡아다가 물어야 합니다.”
하고, 남곤이 말하기를,
“잡아와야 합니다.”
하고, 이행(李荇)이 도사에게 말하기를,
“네가 무주(茂朱) 등에 가서 김식을 잡지 못하거든 곧 수령[主倅]를 가둔 뒤에 다른 곳으로 가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에는 옥사(獄事)가 크면 대간(臺諫)의 장관이 들어와 참여하는 것이 관례였으니 이제도 들어와 참여하게 하라.”
하였다. 남곤이 아뢰기를,
“김식이, 박영(朴英)이 김해(金海)의 수령으로 나갔다는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였다 하니, 저 자가 반드시 전에 박영과 사귀었으므로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박영도 전에 2품을 지낸 대부(大夫)인데, 이신의 말 한 마디를 듣고 가서 그 아내(衙內)를 수색하면 외방 사람들이 소요할 듯합니다. 또 이신이 ‘김식이 반드시 칠원에 갔을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수색해야 하겠으나, 김해는 아직 묻지 않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상도 그 계(啓)를 옳게 여겼다. 남곤이 아뢰기를,
“대간이 추국(推鞫)에 참여한다면, 반드시 문사관(問事官)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래서 정사룡(鄭士龍)·소세양(蘇世讓)을 불러 문사관으로 삼았다. 남곤이 이신에게 말하기를,
“네가 들은 것을 죄다 아뢰되 무망(誣妄)한 말을 아뢰지 말도록 삼가라.”
하니, 이신이 아뢰기를,
“신이 어찌 감히 들은 것을 죄다 아뢰지 않겠습니까? 전에 공초한 데에 죄다 실려 있습니다. 그러나 들은 것을 죄다 말하였더라도, 김식이 ‘다 내가 한 말이 아니다.’ 한다면, 신의 고독한 몸으로 어찌하겠습니까? 저 사람이 군사를 일으켜 난을 일으킨다는 일은 신이 자세히 듣지 못하였으나 대개는 그러합니다. 또 홍순복(洪順福)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만고에 부끄럽지 않은 일을 할 수 있겠느냐.’ 하였습니다.”
하였고, 심풍(沈澧)이 공초하기를,
“김덕순(金德純)이 간 곳을 참으로 모릅니다.”
하였다. 권경(權經)에게 물으니, 권경이 공초하기를,
“신이 늘 김식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이신도 김식의 제자이니, 이 때문에 서로 안 지가 이미 오랩니다. 이달 초사흗날에 이신이 신의 문중의 집에 와서 잠시 서로 대화한 뒤에 남대문 밖에 있는 집에 나가 붙여 있었는데, 신의 아우 권위(權緯)를 보고 말하기를 ‘김식이 「이 일이 어찌 오래 갈 수 있겠느냐? 장차 찬탈(簒奪)의 계책이 반드시 심정(沈貞)에게서 나올 것이다.」 하였다.’ 합니다. 신이 이 말을 듣고 놀랍고 두려웠으며 큰 일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드디어 이신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공초를 보고서 추관(推官)에게 내려 권경에게 다시 묻기를,
“너는 죄다 말하여라.”
하매, 권경이 아뢰기를,
“신의 말은 전에 공초한 데에 가감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이신이 신의 아우 권위를 보고 말하기를 ‘김식이 「찬탈하는 일이 있게 되면, 내가 너를 돌격장(突擊將)으로 삼겠다. 유기(柳淇)·박인성(朴仁誠)도 한 쪽을 감당할 만하다.」 하였다.’ 합니다. 위가 이 말을 신에게 말하여 신이 얻어 들었습니다.”
하였다. 이신이 또 아뢰기를,
“오희안이 늘 신에게 말하기를 ‘노천 선생(老泉先生)【노천은 김식의 자(字)이다.】이 너를 미덥다고 하신다. 모든 일에 있어서 너는 신중히 해야 한다. 이제 간사한 심정 등이 이미 조광조(趙光祖)를 죽이고 군자(君子)들을 방축(放逐)하였는데, 조광조는 성현(聖賢)을 배우고 뜻을 백성에게 두고 나라를 자기 집처럼 걱정하는 사람이며, 노천의 학문도 어찌 송(宋)나라의 칠현(七賢)보다 많이 뒤지겠느냐? 중국에서는 자객(刺客)의 일을 하기 쉬운데, 우리 나라 사람은 기상이 잔열(殘劣)하여 능히 하는 사람이 없으나, 용맹한 사람이 보검(寶劍)으로 치고 찌르기가 무엇이 어렵겠느냐? 너는 두세 간사한 자를 찔러 죽여서 노천 선생을 보존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이신(李信)이, 김식(金湜)이 망명(亡命)한 정상을 극진하게 헐뜯었으므로 임금의 노여움이 바야흐로 심한데, 남곤·심정의 무리가 곁에서 넌지시 도와서 큰 화(禍)가 사류(士類)에게 만연하게 하였으니, 말하면 답답한 일이라 하겠다.
【원전】 15 집 646 면
【분류】 *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


[주D-001]사정전(思政殿) : 경복궁의 편전(便殿).
[주D-002]정축년 : 1517 중종 12년.
[주D-003]왕래원(王來院) : 역원(驛院)의 이름.
[주D-004]정백(丁白) : 곧 백정(白丁)이다.
[주D-005]장검(張儉)이 망명(亡命)하였을 때에 공포(孔褒)가 숨겨 주고 일가(一家)가 서로 다투어 죽으려 한 일 : 후한(後漢) 환제(桓帝) 때에 동부 독우(東部督郵) 장검이 중상시(中常侍) 후남(候覽)의 불궤(不軌)를 소핵(疏劾)하였다가 미움을 사고, 간사한 향인(鄕人)에 의하여 당(黨)을 만들었다고 무함당하여, 토포(討捕)의 명이 내리매 망명하여 친구 공포(孔褒)에게 갔으나 포는 집에 없고 포의 아우 공융(孔融)만 있었다. 융이 16세이었으므로 장검이 어리게 여겨 말하지 않았으나 공융이 잠검의 군색한 기색을 보고 “형이 없으나 나라고 돕지 못하겠느냐.” 하고 장검을 머물게 하였다. 이 일이 드러나서 공포 형제가 옥에 갇혔는데, 포는 “나한테 구해 달라고 왔으니 아우의 죄가 아니다.” 하고 포의 어머니는 “집안 일은 내 책임이니 내가 죄를 당해야 한다.”고 나서서 일가가 모두 다투어 죽음을 당하려 하므로 군현(郡縣)으로서는 결단하지 못하고 위에 아뢰었는데, 조서(詔書)에 의하여 마침내 공포만이 좌죄(坐罪)되었다.《후한서(後漢書)》 권67.
[주D-006]오자서(伍子胥)가 복수한 일 : 오자서는 중국 춘추(春秋) 때 초(楚)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운(員)이고 자서는 그의 자(字)이다. 오운의 아버지 오사(伍奢)는 초 평왕(楚平王)이 비무기(費無忌)의 참소에 따라 태자 건(建)을 죽이려 할 때에 간지(諫止)하였다가 도리어 비무기에게 무함당하여 큰 아들 오상(伍尙)과 함께 죽었다. 오원은 복수를 결심하고 정(鄭)나라로 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오(吳)나라로 가서 신고 끝에 오나라의 군사로 초나라를 쳐서 보복하였다. 《사기(史記)》 오자서열전(伍子胥例傳).
[주D-007]송(宋)나라의 칠현(七賢) : 선후하여 그곳을 거쳐간 노유개(魯有開)·장유(張兪)·범진(范鎭)·소순(蘇洵)·소식(蘇軾)·소철(蘇轍)·황정견(黃庭堅)의 시문(詩文)을 당상(堂上)에 새기고 이들의 초상을 그려 모신 기주부(夔州府) 칠현당(七賢堂)의 칠현과, 장재(張載)와 그 문인(門人) 여대충(呂大忠)·여대방(呂大防)·여대균(呂大均)·여대림(呂大臨)·범육(范育)·소병(蘇昞)의 초상을 그려 모시고 제사하는 서안부(西安府) 칠현사(七賢祠)의 칠현이 있으나, 어느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명일통지(明一統志)》.

중종 34년 기해(1539,가정 18)
 5월20일 (정해)
성을 넘은 죄로 잡힌 중 은수와 학조를 추고하다

영의정 윤은보, 판의금부사 유보, 좌의정 홍언필, 지의금부사 이귀령이 명을 받고 오니, 전교하기를,
“오늘 아침 동산색 내관이 과실을 따기 위하여 후원에 들어갔다가 바깥 성과 안 담장 사이에 중이 숨어 있어 붙잡아 물었더니, 그의 말이 ‘내가 한 짓이 아니라 함께 다니던 중 지운이 나를 꾀면서, 삭발하기 전에는 자주 이 성 안에 들어가 한 일이 많았다고 하였다.’ 하니, 지극히 놀라운 일이다. 친문을 하여 위엄을 보여서 실정을 캐내고야 말겠다.”
하고는, 상이 사정전 처마 밑에 나와 좌정하니, 영의정 윤은보 등이 입시하였다. 전교하기를,
“내관·선전관 등이 승가사(僧伽寺)에 가서 중 한 명을 붙잡았는데, 그 절의 중에게 물었더니 ‘이 중은 객승(客僧)으로 오늘 아침에 처음 왔는데 용모와 형체가 지운과 비슷하고 나이도 비슷하여 이름을 물었더니 학조(學祖)라고 하였다.’고 하기에 그 중이 지운인가 의심스러워 영추문(迎秋門) 밖에 붙잡아 놓았다고 한다. 은수를 데리고 나가 면질(面質)시켜라.”
하였다. 승지 한숙(韓淑)이 문사관(問事官)과 함께 은수를 데리고 나가 면질을 시킨 후 회계하기를,
“은수가 처음에는 그 중을 자세히 보면서 서로 아는 사이같이 하더니, 막상 면질을 하고서는 그 중은 지운이 아니라고 하였는데, 두 중의 얼굴에는 매우 당황하는 빛이 있었습니다.”
하니, 윤은보에게 전교하기를,
“정수암(淨水菴)·승가사·소림굴 등에서 잡아온 자들을 은수와 면질시킨 다음 아뢰어라.”
하였다. 윤은보 등이 회계하기를,
“승가사에서 잡아온 중 학조가 아마 지운인 듯 싶습니다. 은수의 말로는 그 중이 날쌔고 건장하다고 자세히 말하였는데【은수는 그 중이 날쌔어 높은 담을 뛰어넘고 큰 시냇물을 뛰어건너기를 평지 밟듯이 한다고 하였다.】 그 중은 ‘나는 지운이 아니라 학조이며 또 날쌔지도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소림굴(小林窟) 중은 두 명 다 은수를 보지 못하였다고 하고 은수 역시 두 중과는 모르는 사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학조가 만약 진짜 지운 같다면 은수를 끝까지 추고한 뒤에 지운을 추고하라.”
하였다. 한숙이 학조의 초사를 들고 와 아뢰니【‘동래(東萊)에서 나와 정처없이 떠돌다가 중흥사(重興寺)에 머물렀는데 승가사에서 재(齋)를 올린다는 말을 듣고 와서 자다가 붙잡혔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승가사의 원주승(元住僧)을 잡아다가 면질시키고 중흥사의 중도 잡아다가 학조의 행적을 물어보라.”
하고, 윤은보 등에게 전교하기를,
“은수는 학조를 지운이라 하고 학조는 지운이 아니라고 한다. 또 은수는 지운이 예조의 나장이었다고 말했는데, 예조에 상고해 보니 장소명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또 면질 때 바로 불지 않았으니 속이는 듯하다.”
하였다. 윤은보 등이 회계하기를,
“지운이 지시했다는 말은 거짓인 것 같으나, 은수가 번번이 학조에게 ‘너 때문에 죽게 되었다.’ 하고, 또 ‘지운이 나에게 「이 성 안에 원수 김금이(金金伊)가 있으니 나와 함께 찔러 죽이자.」고 하였으며, 또 지운이 나에게 「이 성을 넘으면 담 셋이 있는데 너와 나와는 죽거나 살거나 끝까지 한 마음이 되어 7∼8일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죽이고 말자.」 하였다.’고 합니다. 그 말이 비록 사실이 아닌 것 같으나, 말의 단서가 이미 나왔습니다. 다만 염려되는 것은 그가 매를 이겨 내지 못하고 죽어버리면 실정을 얻어 내지 못할까 하는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은수에게는 지금도 형을 가할 수 있으나 죽어 버리면 실정을 얻어 내기 어려울 것이다. 학조를 아직은 놓아 보내지 말고 승가사의 중이 오기를 기다려 그에게, 학조가 오늘 아침 너희 절에 갔다는데 어느 때쯤 왔으며 그의 걸음걸이는 더디던가, 빠르던가, 또 기색은 태연하던가, 놀라고 두려워하던가를 자세하게 물으라.”
하였다. 윤은보 등이 회계하기를,
“은수가 공초한 말로 학조를 힐문했더니, 학조의 말이 ‘저 중이 이미 다 말하지 않았는가. 내 죄가 천하에 가득하지만 성을 넘자고 꾀었다는 건에 대해서는 불복한다.’ 하였습니다. 이에 이리저리 캐물으면서 ‘네가 만약 죄가 없다면 왜 죄가 천하에 가득하다는 말을 하느냐?’ 하니, 학조의 대답이 ‘아무래도 죽을 것이기에 그렇게 말하였다.’ 하였습니다. 다만 승가사의 중은 학조가 어제 밖에서 왔다고 하고 오늘 아침에 들어왔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니, 전교하였다.
“오늘은 밤이 깊었으니 내일 추고하라.”
【원전】 18 집 296 면
【분류】 *사법-치안(治安) / *사법-재판(裁判) / *왕실-종사(宗社) / *사상-불교(佛敎)


  중종 34년 기해(1539,가정 18)
 5월21일 (무자)
중 은수에 형신을 가하게 하다

윤은보에게 전교하기를,
중흥사(重興寺) 중의 초사와 승가사(僧伽寺) 중의 초사가 서로 같다. 지금 다시 학조가 평소에 날쌔고 빠른 적이 있었던가를 물어 만약 있었다고 하면 학조를 다시 힐문하라.”
하였다. 윤은보 등이 회계하기를,
중흥사의 중을 추문하였더니 학조가 평소에 별로 날쌘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또 은수가 말한 것이 모두 거짓인 것 같아서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요망스런 말들이【은수가 대궐 안 신령님이 도와서 궁성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고 하였다.】 매우 많아서 조정에서 참국(參鞫)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대간의 장관이 와서 참국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그리하라고 전교하였다. 정원이 은수의 초사를 입계하였다.
【그 초사에 ‘서울 사는 내수사의 노비 윤만천(尹萬千)이 언문으로 된 편지를 나에게 보내왔는데, 그 내용 중에 여러 차례 짚신을 보내 주어 대단히 감사하니 한 번 와서 서로 만났으면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달 18일에 만천을 보려고 서울에 왔다가 궁성 밖까지 와서는 석정(石丁)의 누이 석덕(石德)이 보고 싶어서 해질 무렵 백립을 쓰고 건춘문(建春門)으로 들어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파수 군사가 막고 들여보내 주지 않아 어슬렁거리다가 궁성 북쪽에 이르러 성을 타고 넘었는데, 성 밑에 한 그루의 소나무가 있어 그 밑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날 밤 비가 쏟아져 소문(小門)에 들어가 밤을 지새고 다음 날은 마른 소나무 밑에 숨어 있었습니다.’ 하였다. 추관(推官)이 ‘석정은 누구인가?’ 하니, 은수가 ‘지금은 출가하여 중이 되었는데 승명은 경종(敬宗)입니다. 그 아비는 석돌이(石乭屎)로 건춘문 밖에 살고 있는데 그 누이 석덕이 내인으로 있습니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숨어있을 때 어떤 남자가 문 안에다 오줌을 누고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이 초사로 볼 때 어제 그가 말한 것은 모두 거짓으로 꾸며댄 것이다. 현장을 보고 온 내관의 말을 들으면 선원전(璿源殿) 북쪽에는 기왓장이 떨어져 나간 곳이 있고, 또 떨어진 장삼으로 문 틈을 막아 놓았다고 하는데, 그것이 하룻밤 사이에 한 짓은 아니다. 지금 은수의 공초와 내관이 한 말이 서로 일치된다. 또 그의 초사에 ‘어떤 남자가 문 안에서 오줌을 누는 것을 보았다.’고 했는데, ‘필시 선원전 고직(庫直)이거나, 문소전(文昭殿)의 수라(水剌)를 맡은 사람을 본 것이다. 이것으로 보면 은수 혼자서 들어온 것으로 다른 중은 관계없으니 다 놓아보내라. 그리고 윤만천과 석정의 아비를 잡아들이고 또 건춘문의 파수 군사에게도 사실 여부를 캐물어 보라.’”
하니, 윤은보 등이 아뢰기를,
“은수를 윤만천과 면질시켰더니 은수가 윤만천을 가리키면서 ‘내가 바로 봉은사(奉恩寺)의 중 망덕(網德)이다.【망덕은 은수의 속명이다.】 봉은사에서 병을 얻은 사실을 너는 알고 있지?’ 하니, 만천이 ‘내가 일찍이 봉은사를 드나들었으므로 이 중은 틀림없이 내 이름을 듣고 내 얼굴도 보았겠지만 나는 그를 본 일이 없다.’ 하였고, 석정의 아비 돌이는 ‘석정이 나이 12세에 출가하여 중이 되었는데 용문산(龍門山)에 머무르고 있다고 듣기만 하였지 전혀 왕래라곤 없었으므로 보지 못한 지가 오래이다.’ 하였습니다. 은수가 궁성을 넘어 들어와 여러 날을 숨어 있었던 정상을 추측하기 어려운데, 아직까지 승복하지 않고 있으니, 끝까지 추문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의 초사에서 말한 석덕을 보고 싶어서였다는 말은 사실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아무리 사리를 모르는 어리석은 자라 하더라도 궁성을 넘어 들어와서 내인을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끝까지 추문하여 실정을 얻어 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전교하였다.
“아뢴 말이 지당하다. 은수의 거짓말이 보통이 아니니 경종【석정의 승명.】은 잡아오지 말고, 다시 은수에게 ‘설령 석덕을 보기 위하여 왔더라도 보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았으면 곧 도로 나갈 것이지 며칠을 머물러 있었다는 것은 반드시 무슨 곡절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틈을 타 넘어와서 도둑질하고자 한 것은 아닌가, 또 동모한 사람은 없었는가?’ 하면서 여러모로 힐문해보고, 그래도 바로 납초하지 않으면 형신을 가하도록 하라.”
【원전】 18 집 297 면
【분류】 *사법-치안(治安) / *사법-재판(裁判) / *왕실-종사(宗社) / *사상-불교(佛敎)


선조 25년 임진(1592,만력 20)
 6월28일 (병진)
도원수 김명원이 중흥사의 승려가 평양 적진을 탐지한 일을 아뢰다

도원수 김명원이 치계하기를,
중흥사(重興寺)의 중 행사(行思)가 환속(還俗)하여 유중립(柳中立)으로 이름을 짓고서 개연(慨然)히 성안으로 들어가 적정(賊情)을 염탐하려는 뜻을 가지더니, 이윽고 갔다가 돌아와서 말하기를 ‘보통문(普通門)으로 들어가니 왜인 5∼6명이 죽 벌여 앉아 누구냐고도 묻지 않았다. 여러 곳을 두루 살펴보니 인가는 전부 비었고 외처(外處)의 잡인이 많이 모여 있었다. 왜장(倭將)이 상아(上衙)에 있는데 장표(章標)를 앞다투어 받기에 나도 그것을 받아 가지고 나왔다. 이어 그들의 하는 짓을 보니, 여러 장수들은 객사(客舍)의 상방(上房)과 대동문(大同門)의 서윤(庶尹) 관아와 학당(學堂) 등처에 나누어 거처하는데, 장춘원(長春院)을 헐어 내어 군영(軍營)으로 개조(改造)하느라 토목 공사를 일으켜 오랫동안 주둔할 계획임을 암시(暗示)하였으니 당분간은 서쪽으로 올 것 같지 않다. 오는 길에 영유(永柔) 사람을 만났는데 그의 말에 「오늘 성안에 들어가 우연히 사람들의 말을 들으니, 왜적들이 서로 이야기하기를, 금년에는 철이 늦어 전진하기 어려우니 서울로 올라가 새해를 맞은 뒤 명년에 요동을 침범하겠다.」’고 했다.’ 하였습니다.”
하니, 조정에서 이에 중립에게 상을 주어 사과(司果)로 삼았다.
【원전】 21 집 504 면
【분류】 *외교-왜(倭) / *군사(軍事) / *인사-관리(管理)


선조 29년 병신(1596,만력 24)
 3월3일 (경오)
병조 판서 이덕형이 중흥동 산성을 둘러보고 주위의 형세를 그림으로 올리다

병조 판서 이덕형(李德馨)이 아뢰기를,
“신이 1일에 나아가 중흥동(中興洞)에 못 미쳐 촌막에서 자고 이튿날 아침에 동구(洞口)에 이르러 서북쪽의 외성(外城)을 살펴보았습니다. 삼각봉(三角峰)이 높이 솟아 있고 그 곁에 두 봉우리가 차례로 나열해 섰으며, 성자(城子)는 끝봉우리의 허리에서부터 시작되어 시내의 어구 언덕에 이르러서 끝났습니다. 남쪽 외성은 시내의 암벽에서부터 시작되어 위로 서남쪽 최고봉에 이르러서 끝났습니다. 성(城)에 석문(石門)의 옛터가 있는데 이는 이른바 서문(西門)으로서 중간에 한 가닥의 길이 있어 곧바로 중흥사(中興寺)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길은 산비탈로 나 있는데 계곡은 굴곡이 졌으며, 길가에 운암사(雲巖寺)의 옛터가 있었습니다. 오솔길로 나뉘어져 벽하동(碧霞洞)으로 들어가는데, 벽하동은 중흥사가 있는 산 뒤에 있고 길은 백운봉(白雲峯)에 이르러 끊어졌습니다. 내성(內城)으로 들어가니 성에는 석문이 있는데 절과의 거리는 수백 보 가량 되었습니다. 사문(寺門)을 지나 동남으로 가다가 길이 셋으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동문(東門)으로 통하여 왕래하는 길로 성 밖에 수도암(修道菴)·도성암(道成菴) 등의 암자가 있고 그 밑은 곧 우이동(牛耳洞)이며, 하나는 동남문(東南門) 석가현(釋伽峴)으로 통하여 사을한리(沙乙閑里)로 내려가는 길이며, 하나는 문수봉(文殊峯)을 넘어 창의문(彰義門)으로 통하는 탕춘대(蕩春臺)의 앞들이 내려다 보이는 길입니다. 석가현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뻗다가 서쪽으로 향해 산세가 높이 일어나 문수봉이 되고, 문수봉으로부터 세 봉우리가 서쪽으로 뻗어내려 동구의 외성에 일어난 곳, 즉 앞에 이른바 서남쪽의 최고봉과 서로 접하게 되는데 형세가 극히 험악합니다. 문수(文殊)·승가(僧伽)·향림(香林) 등의 절이 산 허리에 나열해 있는데, 우이동·사을한리와 경성의 사현(沙峴)·홍제원(弘濟院)의 좌우 도로가 역력히 한 눈에 들어옵니다. 성자(城子)가 또 미로봉(彌老峯)의 허리로부터 시작되어 도성암의 상령(上嶺) 및 석가현을 거쳐서 위로 문수봉에 이르러 그쳤으니, 이것이 그 대세인 것입니다. 모든 봉우리는 아래로 뻗어내려 산록(山麓)이 되고 골짜기의 양편은 견아(犬牙)처럼 얽히었으며, 각처의 시내는 폭포를 이루어 흘러서 모두 동구로 나가는데 지세가 몹시 급하고 비좁아 넓지 못하므로 사람이 살기에는 불편합니다. 그러나 오직 중흥사(中興寺) 상단의 좌우 골짜기만은 토지에 육기(肉氣)가 있어 그런대로 의지해 살 만합니다. 삼각봉의 후면은 절벽이 깎아 세운 듯하고 그 밖은 곧 서산으로 통행하는 길인데 미륵원(彌勒院)으로부터 우이동(牛耳洞)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도성암의 상령(上嶺)과 석가현·문수봉에 지름길이 있기는 하나 사면의 산세가 높고 험절하니, 진실로 10여 인이 지키게 되면 적의 무리 수만 명이 있어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며, 또 중첩된 산봉우리가 원근을 가리고 있어 적이 성을 에워싸고자 하여도 그 형세가 실로 어려울 것입니다. 만약 산허리 요해처에 돈대(墩臺)를 설치하여 망보게 하고 그 속에 곡식을 비축해 두며, 하동구(下洞口) 및 도성령(道成嶺)·석가현(釋伽峴) 등 몇몇 곳을 굳건히 지키면 천험(天險) 만전의 형세가 있을 것입니다. 설사 적병이 그 속으로 들어온다 하더라도 두 마리의 쥐가 굴을 다투는 형세가 있어 아군의 다소를 헤아리지 못할 것입니다. 도성(都城) 근처에 이와 같이 유리한 지세를 두고도 방치하였으니 애석한 일입니다. 흠이라면 도로가 매우 험하여 출입할 일이 있을 때 인력이 배나 수고롭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 안의 약간 평평한 곳에는 사람들도 머물러 있기에 해롭지 않다고 여길 것입니다. 성첩이 무너진 것은 10분의 7∼8이 되는데, 수축을 한다 해도 높은 봉우리의 정상은 인력의 소비가 커서 용이하게 해내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혹시 각도의 승도(僧徒)를 소집하여 요해처에 집을 짓게 하고서 지역을 나누어 역(役)을 맡겨 주어 성자를 수축하게 한면, 민심도 의뢰하는 곳이 있게 되고 일도 쉽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주회(周回)의 지세를 그림으로 그려 아룁니다.”
하니, 상이 비변사로 하여금 의논하여 이뢰게 하였다.
【원전】 22 집 655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군사-관방(關防) / *예술-미술(美術)

선조 36년 계묘(1603,만력 31)
 5월23일 (무인)
호조에서 수리에 쓸 재목의 공납에 대해 아뢰다

호조가 아뢰기를,
“두 옹주 본가(本家)의 수리소와 두 부마 집의 수리소 및 가례청(嘉禮廳)의 별공작(別工作) 등의 정장(呈狀) 안에 ‘수리하는 데 쓰일 대부등(大不等)·중부등·소부등 1백여 조(條)와 ’재목(材木)은 총계가 1백 60여 조이고 연목은 3백 70개입니다. 그러니 가령 위에서 말한 수리소에 다 쓴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태반이 부족합니다. 더구나 전부터 여러 용도로 쓰이고 있는 것이 매우 많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궁성(宮城)을 수축하는 일을 추수하기를 기다려 하라는 것으로 이미 승전(承傳)을 받들었으니, 그때에 쓰게 될 재목도 미리 조치해야 할 것인데 현재 나올 데가 없습니다. 위에서 말한 수리 등에 쓰일 재목을 별복정하지 않는다면,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아도 다시 주선할 길이 없습니다. 다만 지금은 농사일이 한창이고 한재(旱災) 또한 매우 절박한데, 재목이 나온 곳은 모두가 형편없이 탕갈된 고을들입니다. 따라서 지금 만약 쓰일 수량을 여러 고을에 별도로 배정하고서 일시에 바치도록 독촉한다면 아마도 시굴 거영(時屈擧嬴)의 폐단을 면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 수리하는 일도 폐지할 수 없을 것이니, 신들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황송하게도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 또한 그만둘 수 없는 일이다. 공물을 감해 주고 재목으로 배정하여 상납하도록 하거나, 서울 안에 있는 산 중에 중흥사(中興寺) 같은 곳에서 수량을 헤아려 베어다가 쓰도록 하되, 참작해서 시행하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민생의 곤궁함과 재변이 겹쳐 나타나는 것이 이때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한발(旱魃)이 참혹하여 전국이 황무지가 되었다. 그리하여 팔방(八方)에서의 계문이 아침 저녁으로 올라오니, 이때는 바로 음식을 줄이고 용도를 절약하여 백성들을 쉬게 하고 자신을 수성(修省)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때이다. 그런데 제택(第宅)을 영건(營建)하기 위해 백성들의 농사지을 시기를 빼앗았으며, 그들로부터 재목을 마구 거두어들이기를 끝없이 하였다. 위에서 인사(人事)를 닦아 하늘의 위엄에 응답하는 방도를 취한 적이 없었는데도, 섭리(燮理)를 맡은 정승과 언책(言責)을 가진 간관들은 이 점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으니, 백성들의 원성이 날로 심해지고 하늘의 노여움이 더욱 커짐은 괴이할 것이 없다. 아, 탄식을 금치 못하겠다.
【원전】 24 집 482 면
【분류】 *왕실-종사(宗社) / *정론(政論) / *재정(財政) / *건설(建設) / *역사-사학(史學)


[주D-001]시굴 거영(時屈擧嬴) : 국가에 어려움이 많은 때에는 백성들을 급히 구제해야 되는데, 도리어 토목공사를 일으켜 사치를 꾀하는 것을 말함. 《사기(史記)》 한세가(韓世家

광해군 4년 임자(1612,만력 40)
 2월18일 (계미)
서청에 나아가 죄인을 친국하다

〈 오시에〉 왕이 서청(西廳)에 나아가 죄인을 친국하였다. 영의정 이원익, 좌의정 이덕형, 우의정 이항복, 판부사 심희수, 판의금 박동량, 지의금 송순, 동의금 신경진·박진원, 대사헌 이이첨, 대사간 유인길, 도승지 정엽(鄭曄), 좌승지 이호신(李好信), 우승지 이지완(李志完), 좌부승지 윤양(尹暘), 우부승지 민덕남(閔德男), 동부승지 홍서봉(洪瑞鳳), 주서 정기광(鄭基廣), 가주서 민응회(閔應恢)·최정원(崔貞元), 사관 홍경찬(洪敬纘)·신득연(申得淵)이 입시하였다. 김제세(金濟世)의【〈 제세는 바로 김경립(金景立)이다.〉 】 공초(供招)를 봉납(捧納)했는데, 공초 내용은 봉산에서의 공초와 대략 같았으나 때로 어긋나는 것이 있었다. 왕이 그 주모자를 자세히 물으라 하였다. 제세가 공초하기를,
“주모자는 최군입니다. 그의 집은 어의동(於義洞)에 있는데, 그 동생이 자세히 압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너는 이미 어보를 위조했으니 그 죄는 마땅히 죽어야 한다. 사실대로 공초하라.”
하고, 최군이 이름을 바꾼 것인지의 여부를 다시 자세히 물으니, 제세가 공초하기를,
“최군이라는 자는 처음에는 이황(李黃)이라고 했습니다.”
하였다. 이항복이 말하기를,
“최군은 이미 놓쳤으나 그 얼굴 모습, 나이 및 살고 있는 집은 이 역적의 형제들이 자세히 말할 수 있으니 포도 대장으로 하여금 이들 역적을 데리고 가서 그로 하여금 그 집을 정확하게 지적하게 한 뒤에, 그가 비록 도망쳤더라도 이웃집 사람을 잡고 이 집에 어떤 사람이 와서 살았는지를 물어보면 아마도 추적하여 체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왕이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저가 이미 ‘서울을 범한다.’고 하였으니 그 경위와 역모를 처음 시작할 때의 사실을 아울러 자세히 물어보라.”
하니, 제세가 공초하기를,
“서울을 범하는 일은 7, 8년 뒤에 경영하려 하였고 역모 꾸미는 일은 기유년에 시작했는데 호패제(戶牌制)를 피하려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서울을 범한다는 것에 대한 경위와, 역적 모의는 기유년 어느 달, 어느 곳에서 했는가?”
하니, 제세가 공초하기를,
“최군이 그냥 서울을 범한다고는 했으나 다른 의논은 없었습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김백함(金百緘)은 무슨 까닭으로 이러한 흉악한 계책을 꾸몄는가?”
하니, 제세가 공초하기를,
“김백함의 아비가 제 아비를 삶아 죽였다는 이유로 전년에 국문을 받았는데 다시 국문을 받을까 두려워서 이런 흉악한 계책을 낸 것입니다.”
하였다. 좌상과 우상이 말하기를,
“김직재(金直哉)가 국문을 받은 것은 전년에 있었던 일이고, 저가 역모를 꾸민 것은 기유년에 있었던 일이라고 하니 이것이 맞지 않는 단서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이것으로 다시 따져 물으라.”
하고, 왕이 이르기를,
“흉모의 절차를 바로 실토하지 않는 것은 평문(平問)을 하기 때문에 그런가?”
하니, 좌우가 모두들 아뢰기를,
“흉모는 반드시 형장을 사용한 뒤에라야 바른 대로 고합니다.”
하였다. 이어 이석룡(李石龍)·안석룡(安石龍)·최유해(崔有海) 등을 대질(對質)시키니, 최유해를 가리켜 최극해(崔極海)라고 하였고 이석룡을 가리켜 안응룡(安應龍)이라고 하였고 안석룡에 대해서는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이 중에 조석룡이 없는지를 지금 물어보라.”
하였는데, 제세가 공초하기를,
“이 사람이 분명히 조석룡입니다.”
하였다. 덕형이 말하기를,
“너는 이미 같이 과거에 나아갔다고 했는데, 이 사람은 바로 사노(私奴)이다. 어찌 사노와 함께 과거에 나갈 리가 있는가?”
하니, 공초하기를,
“조석룡은 곧 거자(擧子)의 사노였습니다.”
하였다. 다시 실정을 캐물으니 제세는 공초하기를,
“지금 비로소 자세히 보니 조석룡이 아닙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최극해는 확실하다고 하던가.”
하니, 〈 해방 승지 민덕남이 아뢰기를,
“물었더니 중흥사(中興寺)에서 만났다고 했습니다.〉 【대답하기를, “중흥사에서 만났습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만났을 때에 논의한 일은 무엇인가?”
하고, 또 최유해와 대면시켜 증거를 대어 캐물으니, 제세가 공초하기를,
“논의한 일은 역모였습니다.”
하고, 최유해는 공초하기를,
“상세히 아뢸 수 있게 해주소서.”
하였다.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원래의 공초는 천천히 받고 우선 서로 만나본 사유를 물으라.”
하니, 최유해는 공초하기를,
“살고 있던 뒤쪽에 불당(佛堂)이 있었습니다. 이곳에 글을 읽으러 올라 갔을 때 이 사람이 중 두 사람을 데리고 와서 묵었는데 모두들 생원(生員)이라고 했습니다. 담화하는 사이 방(榜)에 대하여 묻자 윤봉익(尹奉益)은 경자방(庚子榜)이라 하고, 김응진(金應辰)은 병오방(丙午榜)이라고 하였습니다. 심상하게 농짓거리를 하는 중에 횡설수설하는 자가 있으면, ‘이 사람도 경자방이다.’고 하였는데, 기롱하는 말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는가?”
하니, 대신들이 모두 아뢰기를,
“최유해는 우선 하옥시키고 김익진(金翼辰)은 잡아들여 공초를 받아야 합니다.”
하였다. 익진의 공초는 대략 제세의 공초와 같았다. 왕이 이르기를,
“어찌하여 꼭 김백함(金百緘)을 추대하여 대장으로 삼았는가?”
하니, 익진이 공초하기를,
“일을 알고 글자를 이해하며 용맹도 있기 때문에 대장을 삼은 것입니다.”
하였다. 정성민(丁聖民)·박이관(朴以觀)·박이정(朴以鼎)·민제룡(閔第龍)·한금룡(韓今龍) 등의 공초는 “제세와 전일에 혐의가 있어 틈이 생겼다.”고도 하고, 혹은 “제세가 그 재물을 탐하여 그런 것이다.”라고도 하였다.
【원전】 32 집 15 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 *변란-정변(政變) / *가족-친족(親族) / *사법-재판(裁判) / *사법-치안(治安) / *호구(戶口)


[주D-001]기유년 : 1609 광해군 원년.

 

 

숙종 38년 임진(1712,강희 51)
 11월10일 (기축)
영의정 이유 등이 북한 산성의 행궁을 옮기는 일·권설 및 이택의 일 등에 대해 논의하다

대신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병조 판서 조태채(趙泰采)가 아뢰기를,
“북한 산성(北漢山城)의 행궁(行宮) 자리는 중흥사(重興寺)의 옛터만 못하니, 행궁을 다시 이 곳에 옮기어 세우도록 명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고, 영의정 이유(李濡)는 아뢰기를,
“당초에 예관(禮官)을 보내어 간심(看審)하게 하고 여러 대신이 함께 의논하여 품정(稟定)한 것이니, 조용하게 상확(商確)하여 처결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니, 임금이 다시 간심한 다음에 품처(稟處)하도록 명하였다. 지평 어유귀(魚有龜)가 앞서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고, 권설(權卨)의 일에 대해서는 임금이 대신들에게 물었다. 이유(李濡)는 피혐(避嫌)하여 주대(奏對)하지 않았고, 조태채(趙泰采) 및 지사(知事) 이기하(李基夏)와 형조 판서 박권(朴權)은 모두 말하기를,
“권설이 도둑을 다스리는 데 능한지의 여부는 비록 잘 알지 못하지만, 김부차(金夫差)에 관한 말은 혼란을 요행으로 여겨 능력을 자랑하는 계책이었으니, 쟁집(爭執)하는 것이 진실로 당연합니다.”
하고, 헌납 한영조(韓永祚)도 또한 대계(臺啓)를 옳게 여기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어유귀가 또 논하기를,
“어버이의 나이가 70인 사람은 3백리 밖에 서용(敍用)하지 않는데, 진도 군수(珍島郡守) 이사목(李思牧)은 어미의 나이가 70인데다가 독자(獨子)로서 멀리 천리의 땅에 있으면서 한 번 사장(辭狀)을 내고는 지금까지 여전히 그대로 눌러 앉아 있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교리 신심(申鐔)이 관료(館僚)의 구간(苟簡)함을 들어 마땅히 변통하는 도리가 있어야 함을 진달했다. 임금이 이르기를,
“이택(李澤)이 도배(徒配)된 일은, 그 자신이 남기(濫騎)하는 짓을 한 것과 차이가 있는 것인데, 대신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자, 이유(李濡)가 아뢰기를,
“이택의 일은 아랫사람을 검찰(檢察)하지 못한 데서 연유한 것이고, 그 자신이 남기한 것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벌을 이미 집행했으니 방송(放送)하라.”
하였다. 임금이 연은문(延恩門)에다 괘서(掛書)한 사람을 아직도 체포하지 못하였다 하여 포도 대장을 모두 추고(推考)하라고 명하였다.
【원전】 40 집 469 면
【분류】 *군사-관방(關防) / *왕실-종사(宗社) / *사법-행형(行刑) / *사법-탄핵(彈劾) / *사법-치안(治安) / *인사-관리(管理)


[주D-001]구간(苟簡) : 당장 미봉(彌縫)하는 것.
[주D-002]괘서(掛書) : 투서(投書). 반역(反逆)하거나 남을 모함할 때 관청 문·성문(城門)·궁문(宮門) 등에 써 붙이는 것.

 

영조 29년 계유(1753,건륭 18)
 9월3일 (을묘)
중흥사에 능엄경을 두라고 명하다

능엄경(楞嚴經)을 중흥사(中興寺)에 두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지난번 옛 강서원(講書院)의 서책(書冊)을 치부(置簿)한 것을 보니, 능엄경이 있었다. 이것은 내 손자를 가르치는 도리가 아니니, 북한(北漢) 중흥사에 보내어 두게 하라.”
하였다.
【원전】 43 집 495 면
【분류】 *사상(思想)

재용편 6
 제창(諸倉)
총융청의 각 창고(摠戎廳各倉庫)

신영고(新營庫)
영종 정묘년에 세웠으니, 군향(軍餉)ㆍ군기(軍器)ㆍ공화(公貨)와 각색(各色) 군물(軍物)을 저적(儲積)하는 곳이다. 연융대(鍊戎臺)에 있음. 고(庫)가 31문. 3문에는 군향(軍餉)이 있음. ○ 11문에는 군기가 있음. ○ 2문에는 공화(公貨)가 있음. ○ 7문에는 각색 군물이 있음. ○ 8문에는 있는 것이 없음.
평창고(平倉庫)
숙종 임진(1712, 숙종 38)에 건치함. 연융대(鍊戎臺)에 있음. 고가 17문. 9문에는 군향이 있음. ○ 1문에는 군물이 있음. ○ 7문에는 있는 것이 없음.
책응소고(策應所庫)
당저(當宁) 정묘(1807, 순조 7)에 장용영(壯勇營)의 직방(直房)을 본청(本廳)에 소속시킴. 고가 13문. 12문에는 군물이 있음. ○ 1문에는 전화(錢貨)가 있음.
강창고(江倉庫)
인조조(仁祖朝) 초(1823, 인조 원년)에 주교사(舟橋司)로 설치하였던 것을 뒤에 본청(本廳)의 창(倉)으로 삼음. 양화진(楊花津)에 있음. 고가 7문. 5문에는 곡물(糓物)과 탄(炭)이 있음. ○ 2문에는 있는 것이 없음.
관성소의 각 창고[管城所各倉庫]
숙종 신묘(1711, 숙종 37)에 건치함. 북한(北漢)에 있음. 중창(中倉) 이하 승창(僧倉)까지 모두 같음. 상창고(上倉庫)가 11문 2문에는 군향(軍餉)이 있음. ○ 2문에는 군기가 있음. ○ 1문에는 군향과 은화(銀貨)가 있음. ○ 1문에는 잡물이 있음. ○ 5문에는 있는 것이 없음. ○ 중창고(中倉庫)가 7문 4문에는 군향이 있음. ○ 1문에는 잡물이 있음. ○ 2문에는 있는 것이 없음. ○ 하창고(下倉庫)가 4문 2문에는 군향이 있음. ○ 1문에는 잡물이 있음. ○ 1문에는 있는 것이 없음. ○ 별고(別庫)가 3문 1문에는 군향(軍餉)이 있음. ○ 1문에는 잡물이 있음. ○ 1문에는 있는 것이 없음. ○ 훈창고(訓倉庫)가 12문 4문에는 군향이 있음. ○ 3문에는 군기가 있음. ○ 1문에는 소금과 가마솥[釜鼎]이 있음. ○ 1문에는 잡물이 있음. ○ 3문에는 있는 것이 없음. ○ 금창고(禁倉庫)가 14문 2문에는 군향이 있음. ○ 6문에는 군기(軍器)가 있음. ○ 1문에는 잡물이 있음. ○ 5문에는 있는 것이 없음. ○ 어창고(御倉庫)가 10문 4문에는 군향이 있음. ○ 2문에는 군기가 있음. ○ 1문에는 잡물이 있음. ○ 3문에는 있는 것이 없음. ○ 승창(僧倉) 각고(各庫)가 28문. 중흥사(重興寺)의 3문 가운데 1문에는 군기가 있음. ○ 진국사(鎭國寺)의 3문 가운데 1문에는 군기가 있음. ○ 상운사(祥雲寺)의 3문 가운데 1문에는 군기가 있음. ○ 서암사(西巖寺) 3문 가운데 1문에는 군기가 있음. ○ 국녕사(國寧寺)의 2문 가운데 1문에는 군기가 있음. ○ 원각사(圓覺寺)의 2문 가운데 1문에는 군기가 있음. ○ 부왕사(扶旺寺)의 2문 가운데 1문에는 군기가 있음. ○ 보광사(普光寺)의 2문 가운데 1문에는 군기가 있음. ○ 보국사(輔國寺)의 2문 가운데 1문에는 군기가 있음. ○ 용암사(龍巖寺)의 2문 가운데 1문에는 군기가 있음. ○ 태고사(太古寺)의 2문 가운데 1문에는 군기가 있으며, 나머지 15문과 별고(別庫)의 2문에는 모두 있는 것이 없음.
호남고(戶南庫)
숙종 기미(1715, 숙종 41)에 보장(保障)을 위하여 세웠으니, 또한 탕고(帑庫)이다. 강화부(江華府)에 있음.

[주D-001]신영(新營) : 창의문(彰義門) 밖에 있는 총융청의 본영.
[주D-002]공화(公貨) : 공금.
[주D-003]연융대(鍊戎臺) : 창의문(彰義門) 밖에 있음.
[주D-004]직방(直房) : 입직(入直)하는 처소(處所)
[주D-005]중흥사(重興寺) : 북한산성(北漢山城)에 있음.
[주D-006]진국사(鎭國寺) : 북한산성(北漢山城)에 있음.
[주D-007]상운사(祥雲寺) : 북한산성(北漢山城)에 있음.
[주D-008]서암사(西巖寺) : 북한산성(北漢山城)에 있음.
[주D-009]국녕사(國寧寺) : 북한산성(北漢山城)에 있음.
[주D-010]원각사(圓覺寺) : 북한산성(北漢山城)에 있음.
[주D-011]부왕사(扶旺寺) : 북한산성(北漢山城)에 있음.
[주D-012]보광사(普光寺) : 북한산성(北漢山城)에 있음.
[주D-013]보국사(輔國寺) : 북한산성(北漢山城)에 있음.
[주D-014]용암사(龍巖寺) : 북한산성(北漢山城)에 있음.
[주D-015]태고사(太古寺) : 북한산성(北漢山城)에 있음.
[주D1-001]본청(本廳) : ‘본청(本廳)’이 어느 본에는 ‘本營’으로 되어 있음.

 

숙종 36년 경인(1710,강희 49)
 12월18일 (무인)
판부사 이이명 등이 북한산을 살펴보고 돌아와 축성의 일을 의논하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우의정(右議政) 김창집(金昌集)·좌윤(左尹) 김진규(金鎭圭)가 함께 들어갔는데, 대개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김창집·김진규와 함께 북한(北漢)에 가서 살펴보고 막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각각 소견을 진계(陳啓)하게 하였는데, 김창집이 전일에 이기하(李基夏)가 바쳤던 도형(圖形)은 미진(未盡)한 바가 있다 하여 다시 도본(圖本)을 바치고, 인하여 말하기를,
“사면의 뾰족한 봉우리는 험준(險峻)하기가 견줄 데가 없었습니다. 단지 산기슭이 좌우로 질출(迭出)하여 안에 평평한 곳이 없었으며, 중흥사(重興寺)에 백제(百濟)의 궁터[宮址]가 있는데, 창고(倉庫)를 지을 만하였으나, 백성들이 거처할 곳은 진실로 용접(容接)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둘레는 대략 30여 리인데, 성을 쌓을 수 있는 것은 14리에 지나지 않았고, 성도 또한 높게 쌓을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하고, 이이명은 말하기를,
“밖의 형세가 진실로 천험(天險)이 되는데, 안도 매우 험준하여 수위(戍衛)하는 데 배치(排置)하기가 어렵겠습니다. 그러나 만약 피란(避亂)하여 군급(窘急)한 때를 당하게 되면, 바위에 다리를 놓고 골짜기를 뚫는 것이 어찌 불가하겠습니까? 도성(都城)의 가까운 곳에 이와 같은 곳은 다시 없을 것입니다.”
하고,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는 말하기를,
“먼저 내성(內城)을 쌓고 넓고 좁은 것을 살펴보아, 만약 부족(不足)하다면 문수동(文殊洞)까지 이어서 쌓는 것이 불가하지 않을 것입니다. 혹자는 마땅히 도성(都城)과 이어서 쌓아야 한다고 말하나, 이는 형세가 매우 난편(難便)합니다.”
하고, 김진규는 말하기를,
“밖의 형세가 험준한 것은 남한(南漢)에 견줄 바가 아닌데, 단지 수구(水口)가 두 산이 합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결점이 됩니다. 또 내면(內面)이 험준하고 좁아서 허다한 도성의 백성들을 10분의 1도 수용(收容)하기 어렵겠습니다. 의논하는 자가 지역이 도성과 가까와서 편하다고 하지만, 만약 도성을 지키지 못한다면, 어떻게 북한(北漢)만 홀로 지킬 수 있겠습니까? 전에 한 도성을 오히려 지키지 못할까 근심하였는데, 이제 또 게다가 북한을 더하면 병력(兵力)이 나뉘게 될 것이니, 어떻게 아울러 지킬 수 있겠습니까? 또 도로가 절험(絶險)하여 소와 말이 통행(通行)할 수 없으므로, 창고의 곡식을 빌려 주고 거두어 들일 때 백성들이 왕래(往來)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니, 이 또한 상량(商量)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지역은 도성과의 거리가 멀지 않으니, 진실로 얻기 어려운 것이다. 대계(大計)는 서둘러 단정(斷定)해서는 안되니, 여러 대신(大臣)이 모두 가서 살펴본 후에 다시 더 상확(商確)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금부(禁府)에서 이후열(李後說)의【곧 위원 군수(渭原郡守)인데, 일은 위에 보인다.】 원정(原情)은 거의 말이 조리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또 안핵 어사(按覈御史) 정식(鄭栻)의 계본(啓本)을 보면, 호인(胡人)의 시체(屍體)를 이후열이 발각될까 두려워하여 이장(移葬)하게 하였는데, 사문(査問)할 때 하리(下吏)가 사실대로 회계(回啓)할 것을 청하였으나, 이후열이 원래 대단한 것이 못된다고 핑계대고, 반드시 처음부터 끝까지 덮어 가리우고자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또 이만지(李萬枝) 등을 관아(官衙) 가운데에 용접(容接)해 두었다가, 압송(押送)할 때에 미쳐 주포(酒脯)를 먹이는 등 드러나게 일부러 놓아준 자취가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안핵 어사의 계본을 마땅히 금부에 보내어 점출(拈出)해서 거듭 추문(推問)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진실로 매우 놀라운 일이다. 거듭 엄중하게 추문(推問)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진규가 말하기를,
“장신(杖訊)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거듭 추문하여 자복(自服)하지 않으면, 마땅히 형신(刑訊)하도록 하라.”
하였다.
【원전】 40 집 381 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 *과학-지학(地學)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군사-관방(關防)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군정편 3
 총융청(摠戎廳)
북한산성(北漢山城)

〈설치 연혁(設置沿革)〉 북한산성은 삼각산(三角山)의 온조(溫祚)의 옛터에 있다. 숙종 37년 신묘(1711년)에 대신 이유(李濡)가 건의하여 산성을 쌓고 행궁(行宮)을 세우고 향곡(餉穀)ㆍ군기를 저장하여, 방위하는 곳을 만들었다. 성의 둘레 7,620보, 성랑(城廊) 121, 장대(將臺) 3, 못[池] 26, 우물 99, 대문 4, 암문(暗門) 10, 창고 7, 큰 절 11, 작은 절 3. 관성소(管城所)를 설치하였다. 성의 향곡은 선혜청에서 책정하여 보낸다. 성첩ㆍ군기는 훈련도감ㆍ금위영ㆍ어영청의 3개 영에서 창고를 설치하고 구역을 나누어서 지키며, 경리청(經理廳)을 설치 향교동(鄕校洞)에 있다 하여 관리하였다. 영종 23년 정묘(1747년)에 북한이 당연히 총융청의 근거지가 되어야 하므로 왕의 특명으로 경리청을 폐지하고, 합쳐서 본청에 붙이게 하고 전적으로 북한을 주관하게 하였다. 교련관 3명을 증설하여 그대로 훈련도감ㆍ금위영ㆍ어영청의 3창고의 감관으로 삼았다. ○ 정종 6년 임인(1782년)에 총융사(摠戎使) 이창운(李昌運)이 감원 대조규[減額大節目]를 작성하여, 경리군관 4명을 감원하고 본청 군관 3명만 남겨 두었다. 〈관제(官制)〉 정종(正宗) 17년 계축에 총융사 이방일(李邦一)이 본청의 재정이 피폐하므로 성첩을 수축하는 일을 삼군문(三軍門)에 환속시키기를 계청하였다. 관성소의 재목대금이 200냥인데 이식을 받아서 해마다 북한의 도로 수선에 보충 사용한다. ○ 청사ㆍ사찰(寺刹)을 수리할 때에는 군량증액조[添餉條]ㆍ월정고시조[月課條]ㆍ또는 공명첩(空名帖)ㆍ보토소(補土所) 등의 돈은 청구하여 사용한다. 별아병천총 관성장(別牙兵千摠管城將) 1명 정종 6년 임인에 관계의 차서에 구애됨이 없이 사람을 선택, 자의 임용하여 전적으로 곡물의 출납을 관리하고, 1주년마다 교체(交遞)하도록 규례를 정하였다. 숙종 37년 신묘에 성을 쌓은 뒤에 병사나 수사의 정력을 가진 사람으로 계청 임명하여 처음에는 행궁소 위장(行宮所衛將)이라 하였고, 뒤에는 도별장(都別將)이라 하였으며, 경종 2년 임인(1722년)에는 관성장이라 개칭하였다. 영묘(英廟) 23년 정묘(1747년)에는 경리청을 폐지하여 본청에 합속(合屬)한 뒤에 중군이 정례로 겸임하였고, 40년 갑신에 군제를 고치어 5개 영으로 만들 때[時]에 방어사(防禦使)의 경력이 있는 사람으로 선임[擇差]하여 중부천총(中部千摠)을 겸임하여 항시 본성에 머물게 하였다. 47년 신묘에 총융사 김효대(金孝大)의 계청에 의하여 관성장은 종전대로 중군이 겸임하도록 하였다. 정종 16년 임자(1792년)에 군제를 고치어 3개 영으로 만들 때에 아병천총겸관성장(牙兵千摠兼管城將)으로 명칭을 고쳤다. 파총 1명, 초관 5명, 별파진초관 1명, 수첩총(守堞摠) 2명, 교련관 4명, 기패관 5명, 군기감관 1명, 군관 3명, 부료군관 20명 매월에 궁술을 고시하여 성적을 봐서 유급으로 한다. 그 가운데 산직감관(山直監官) 3명도 들어간다. 문부장(門部將) 3명, 수첩군관 200명 경기의 각읍에 산재한다. 산성의 원역 46명. 서원 5명 고지기 11명, 대청지기 2명, 사령 5명, 군사 12명, 문군사 11명이다. 군제(軍制) 1사(司) 5초, 파하군(把下軍) 30명, 별파군 200명, 아병 5초 경기의 각 읍에 산재. 표하군 109명. 19명은 유급. 〈치영(緇營)〉 승병(僧兵)을 설치하고 치영이라 하였다. 중흥사(重興寺)에 있다. 총섭(摠攝) 1명 본시는 종전부터 거주하는 중으로 임명하였는데 정종 21년 정사(1797년)에 수원유수 조심태(趙心泰)의 계청에 의하여 용주사(龍珠寺)의 중으로 번갈아서 임명하게 하였다. 중군승(中軍僧) 1명, 장교승(將校僧) 47명 유급. 승군 372명 73명은 유급. 태고사(太古寺)는 태고대(太古臺) 아래에 있다. 136칸이다. ○ 경서(經書)ㆍ통사(通史)ㆍ고문(古文)ㆍ당시(唐詩)의 판목을 저장하였다. 중흥사는 등안봉(登岸峰) 아래에 있다. 149칸이다. ○ 치영이 있는 곳이다. 보국사(輔國寺)는 금위영의 창고 아래에 있다. 76칸 진국사(鎭國寺)는 노적봉(露積峰) 아래 중성문(中城門) 안에 있다. 104칸. 부왕사(扶旺寺)는 휴암봉(鵂巖峯) 아래에 있다. 111칸. 국녕사(國寧寺)는 의상봉(義相峯) 아래에 있다. 70칸. 보광사(普光寺)는 대성문(大城門) 아래에 있다. 75칸. 원각사(元覺寺)는 증봉(甑峰) 아래에 있다. 81칸. 용암사(龍巖寺)는 일출봉(日出峰) 아래에 있다. 88칸. 상운사(祥雲寺)는 영취봉(靈鷲峰) 아래에 있다. 89칸. 서암사(西巖寺)는 수구문(水口門) 안에 있다. 민지암(閔漬菴)의 옛 터. ○ 107칸. 이상의 11개 사찰에는 각각 승장 1명, 수승(首僧) 1명, 번승(番僧) 3명을 둔다. 봉성암(奉聖菴)은 귀암봉(龜巖峯) 아래에 있다. 25칸. 원효암(元曉菴)은 원효봉 아래에 있다. 10칸. 문수암(文殊菴)은 문수봉 아래에 있다. 행궁(行宮) 상원봉(上元峯) 아래에 있다. 내정전(內正殿) 28칸, 행각(行閣) 15칸, 수라간(水剌間) 6칸, 변소 3칸, 내문(內門) 3칸, 외정전 28칸, 행각 18칸, 중문(中門) 3칸, 월랑(月廊) 20칸, 외문 4칸, 산정문(山亭門) 1칸. 〈제창(諸倉)〉 관성소는 상창(上倉)에 있다. 대청 18칸, 내아(內面) 12칸, 향미고(餉米庫) 63칸, 군기고 3칸, 집사청(執事廳) 3칸, 군관청(軍官廳) 4칸, 서원청(書員廳) 4칸, 고지기 집[庫直家] 5칸, 월랑 2칸, 각문(各門)이 7. 중창(中倉) 대청 6칸, 향미고 78칸, 고지기 집 5칸, 대문 2칸. 하창(下倉) 대청 6칸, 향미고 34칸, 고지기 집 8칸, 대문 2칸. 별고(別庫) 행궁 옆에 있다. ○ 대청 3칸, 향미고 12칸, 고지기 집 5칸, 대문 2칸. 이상의 상창ㆍ중창ㆍ하창ㆍ별고를 ‘관성 4창(管城四倉)’이라 한다. ○ 별관(別館)이 4개처 산영루(山英樓) 10칸, 사정(射亭) 6칸, 동장대(東將臺) 3칸. 어제비각(御製碑閣) 1칸. ○ 동장대는 숙종 18년 임진에 왕의 특명에 의하여 세웠다. 훈련도감창[訓倉] 대청 18칸, 내아 8칸, 향미고 60칸, 군기고 16칸, 중군소 4칸, 낭청소(郞廳所) 5칸, 서원청 5칸, 구류간(拘留間) 3칸, 행각 11칸. 금위영창[禁倉] 대청 18칸, 내아 6칸, 향미고 54칸, 군기고 13칸, 중군소 5칸, 서원청 4칸, 월랑 8칸. 어영청창[御倉] 대청 18칸, 내아 7칸, 향미고 48칸, 군기고 10칸, 중군소 4칸, 서원청 2칸, 월랑 12칸. ○ 산성 부근의 토지는 구역을 나누어 획정한다. 신둔(新屯)ㆍ청담(淸潭)ㆍ서문하(西門下)ㆍ교현하(橋峴下)는 훈련도감창의 구역이며, 미아리(彌阿里)청수동(靑水洞)ㆍ가오리(加五里)ㆍ우이동(牛耳洞)은 금위영창의 구역이며, 진관리(津寬里)ㆍ소흥동(小興洞)ㆍ여기소(女妓所)ㆍ삼천동(三千洞)은 어영청의 구역이다. 속둔(屬屯) 4개소 : 갑사둔(甲士屯) 양주의 누원(樓院)에 있다. ○ 본시 병조의 목장이었는데 숙종 40년 갑오(1714년)에 본둔이 북한산성과 상호 보장(保障)해야 될 지점이라 하여, 연품하여 북한에 속하게 하고 토지를 개간하는대로 세를 징수하며, 환미(還米)를 두어서 모두 모곡을 받아서 둔속의 경비에 충당하고, 남는 액수는 원환곡(元還穀)에 보태게 하였다. 수유둔(水逾屯) 양주에 있다. 갑사둔에 속한다. ○ 본시 양향청(糧餉廳)의 둔이었는데 경종 원년 신축(1721년)에 경리청당상 민진후(閔鎭厚)가 요청하여 이를 북한에 속하게 하고 환조(還租)를 설치하였다. 금암둔(黔巖屯) 양주 금암에 있다. ○ 숙종 45년 기해(1719년)에 매입 설치하였다. 환조를 설치하고 모두 나누어서 모곡을 거두어 둔속의 경비에 충당한다. 신둔(新屯) 북한산성의 서문 밖에 있다. 금암둔에 속한다. ○ 숙종 46년 경자에 경리청 당상 민진원(閔鎭遠)이 매입 설치하였다. ○ 갑사ㆍ금암 2둔에는 모두 별장이 있다. 금암별장은 영종 37년 신사(1761년)에 고 별장 이성신(李聖臣)의 아들 인량(寅亮)을 영구히 별장에 임명하고 대대로 승전하도록 왕명을 받았다.

[주D-001]온조(溫祚)의 옛터 : 백제의 서울을 뜻함. 온조는 백제의 시조.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의 셋째 아들로 재위 B.C. 18년~A.D. 28년. 처음 위례성(尉禮城 : 광주(廣州))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가 백제로 고쳤으며, 말갈(靺鞨)의 침입이 잦아 타격을 받았다. B.C. 5년 서울을 남한산(南漢山)으로 옮겼음.
[주D-002]이유(李濡) : 1645년(인조 23)~1721년(경종 1). 자는 자우(子雨), 호는 녹천(鹿川), 본관은 전주(全州). 좌의정을 거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렀음.
[주D-003]공명첩(空名帖) : 성명을 적지 아니한 서임서(叙任書).
[주D-004]김효대(金孝大) : 1721년(경종 1)~1781년(정조 5). 자는 여원(汝原), 본관은 경주(慶州). 영조 때 총융사를 지내고, 나중에 형조 판서에까지 이르렀음.
[주D-005]민지암(閔漬菴) : 암자(菴子)의 이름. 민지는 인명(人名). 1248년(고려 고종 35)~1326년(충숙왕 13). 자는 용연(龍涎), 호는 묵헌(黙軒). 정승을 지냄.
[주D-006]수라간(水剌間) : 궐내의 진지를 짓는 곳.
[주D-007]월랑(月廊) : 행랑의 별칭.
[주D-008]민진후(閔鎭厚) : 1659년(효종 10)~1720년(숙종 46). 자는 정순(靜純), 호는 지재(趾齋), 예조판서ㆍ한성부판윤을 거쳐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오름.
[주D-009]민진원(閔鎭遠) : 1664년(현종 5)~1736년(영조 12). 자는 성유(聖猷), 호는 단암(丹巖), 본관은 여흥(驪興). 좌의정에 이름.
[주D1-001]관성소(管城所) : ‘관성소(管城所)’의 ‘所’가 어느 본에는 ‘將’으로 되어 있음.
[주D1-002]정종(正宗) : ‘정종(正宗)’의 ‘正’이 어느 본에는 ‘英’으로 되어 있음.
[주D1-003]공명첩(空名帖) : ‘공명첩(空名帖)’의 ‘名’가 어느 본에는 ‘亡’으로 되어 있음.
[주D1-004]교체(交遞) : ‘교체(交遞)’의 ‘遞’가 어느 본에는 ‘替’로 되어 있음.
[주D1-005]영묘(英廟) : ‘영묘(英廟)’의 ‘廟’가 어느 본에는 ‘宗’으로 되어 있음.
[주D1-006]때[時] : ‘때[時]’가 어느 본에는 ‘則’으로 되어 있음.
[주D1-007]선임[擇差] : ‘선임[擇差]’의 ‘差’가 어느 본에는 ‘定’으로 되어 있음.
[주D1-008]파하군(把下軍) : ‘파하군(把下軍)’의 ‘把’가 어느 본에는 ‘標’로 되어 있음.
[주D1-009]고문(古文) : ‘고문(古文)’의 ‘文’이 어느 본에는 ‘今’으로 되어 있음.
[주D1-010]104 : ‘104’가 어느 본에는 ‘百單四’로 되어 있음.
[주D1-011]향미고(餉米庫) : ‘향미고(餉米庫)’의 ‘餉’이 어느 본에는 ‘納’으로 되어 있음.
[주D1-012]5 : ‘5’가 어느 본에는 ‘4’로 되어 있음.
[주D1-013]60 : ‘60’이 어느 본에는 ‘16’으로 되어 있음.
[주D1-014]6 : ‘6’이 어느 본에는 ‘7’로 되어 있음.
[주D1-015]54 : ‘54’가 어느 본에는 ‘48’로 되어 있음.
[주D1-016]13 : ‘13’이 어느 본에는 ‘16’으로 되어 있음.
[주D1-017]2 : ‘2’가 어느 본에는 ‘4’로 되어 있음.
[주D1-018]12 : ‘12’가 어느 본에는 ‘20’으로 되어 있음.
[주D1-019]서문하(西門下) : ‘서문하(西門下)’의 ‘門’이 어느 본에는 ‘閘’으로 되어 있음.
[주D1-020]미아리(彌阿里) : ‘미아리(彌阿里)’의 ‘阿’가 어느 본에는 ‘河’로 되어 있음.
[주D1-021]청수동(靑水洞) : ‘청수동(靑水洞)’의 ‘靑’이 어느 본에는 ‘淸’으로 되어 있음.
[주D1-022]삼천동(三千洞) : ‘삼천동(三千洞)’의 ‘千’이 어느 본에는 ‘淸’으로 되어 있음.

 

 

상촌선생집 제11권
 시(詩)○오언율시(五言律詩) 103수
청평산에서 시를 지어 산승에게 주다[淸平山有作 贈山僧]


나는 춘천에서 오년 동안 귀양살이하는 동안 죄를 받고 있는 사람이라서 감히 밖에 나가 놀지 못하고 오두막집에 틀어박혀 이따금 왕래하는 산승을 만나 산중의 이름난 고적을 이야기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신유년 여름에 사면을 받아 서쪽으로 돌아오면서 비로소 임천(臨川)납극(臘屐)의 고사를 성취하였다.

게으른 손 초지를 찾아 오르니 / 倦客尋初地
드높은 비탈 위에 절간이 있네 / 層厓闢梵廬
구름 속에 진락의 집이 트이고 / 雲開眞樂觀
신령한 용 열경의 글씨 보호해 / 龍護悅卿書
폭포수는 짚신을 뿌려 적시고 / 飛瀑霑芒屨
돌다리 대가마로 건너간다네 / 危矼度竹輿
동산 위에 개인 달 둥실 떠올라 / 東林晴月上
하늘 그림자 텅 빈 못에 떨어져 / 天影落潭虛


[주D-001]임천(臨川) 납극(臘屐)의 고사 : 임천은 남조(南朝) 송(宋)의 산수 시인(山水詩人) 사영운(謝靈運)을 가리킴. 그가 임천내사(臨川內史)로 있을 때 밀납을 바른 나막신을 신고 산에 오르기를 좋아하였으므로 상촌이 사영운의 고사를 인용하여 가을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이다. 당 나라 원진(元稹)의 《長慶集 卷18 奉和嚴司空 …… 登龍山落梅臺佳宴》에 “사공의 가을 생각 하늘가에 미치는데, 납극으로 산에 오름 국화 감상 위해서네[謝公秋思眇天涯 蠟屐登高爲菊花].” 하였다.
[주D-002]초지 : 불교의 용어임. 십지(十地)의 제일지(第一地)로서 환희지(歡喜地)를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사찰을 뜻함.
[주D-003]진락 : 고려의 학자 이자현(李資玄)의 시호. 고려조 선종(宣宗) 때 대악서승(大樂署丞)을 사직하고 전국의 명산을 유람 중 춘천 청평산에 들어가 암자를 짓고 선학(禪學) 연구로 여생을 보냈다.
[주D-004]열경 : 세조 때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김시습(金時習)의 자. 삼각산(三角山)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던 중 수양대군이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책을 불태운 뒤에 전국 각지를 방랑하였는데, 청평산에도 들러 몇 수의 시를 남겼다. 여기서는 그의 글씨를 말한 듯하나 자세치 않음.

상촌선생집 제14권
 시(詩)○칠언율시(七言律詩) 107수
삼각산 중의 시축의 운을 차하다[次三角山僧詩軸韻]


삼각산을 유람할 때 중흥사를 보았는데 / 昔遊三角見中興
까마득한 높은 절벽 몇 층이나 되었는지 / 絕壁迢迢問幾層
사월이라 온갖 꽃은 흐드러지게 피었고 / 四月百花開爛熳
일천 자의 폭포수 맑디맑게 쏟아졌네 / 飛流千尺瀉泓澄
풍진 속에 가는 날짜 머리털보다 많으니 / 風塵時日多於髮
석장 날리는 생애 너희 중에 부끄럽네 / 杖錫生涯愧爾僧
요즘 듣건대 난야에 새 불상을 놓았다니 / 蘭若近聞新像設
단장 짚고 늦봄에 우리 함께 올라보세 / 一笻春晩擬同登


[주D-001]중흥사 : 서울 삼각산 노적봉 남쪽에 있던 절인데, 본디 중흥사(重興寺)라 표기한다.
[주D-002]난야 : 범어(梵語) 아란야(阿蘭若)의 약칭. 고요하고 청정하여 번뇌가 없는 곳으로, 절을 가리킨다.

 

 

상촌선생집 제18권
 시(詩)○칠언절구(七言絶句) 146수
월정 운에 차운하여 순상인에게 주다[次月汀韻 贈淳上人]


중흥사 안에서 놀던 일이 생각나네 / 重興寺裏憶曾遊
깊은 골짝 숲 속에서 몇 해를 보냈던가 / 絶壑長林幾度秋
맑은 운치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다네 / 淸賞至今猶未忘
누대 앞에 목련화가 피어 있던 그 시절이 / 木蓮花發小樓頭


서애선생문집 제6권
 서장(書狀)
군량(軍糧)과 백성의 양식을 논하는 서장 3월


적병들이 이달 22일에 벽제를 멀리 나와 혜음령(惠陰嶺)까지 이르러 창릉(昌陵 조선 예종의 능)ㆍ경릉(敬陵 조선 덕종의 능)ㆍ효릉(孝陵 조선 인종의 능)의 주산을 불태우고 날이 저물어서야 성중으로 돌아갔습니다. 24일에도 나와 삼각산의 중흥사(中興寺) 등을 불태웠습니다.
그곳에 매복하던 군사 창의 중위장(倡義中衛將) 박유인(朴惟仁)과 추의 중위장(秋義中衛將) 윤선정(尹先正) 및 의병장 이산휘(李山輝) 등은 중과부적으로 군사를 거두고 감히 맞붙어 싸울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적의 무리가 심히 많아서 들판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기 때문에 쉽사리 나가서 싸우기 어려웠으니, 그 형세가 그러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이 요즘 자세히 정세를 살펴보니 왜적이 사방으로 나와 노략질을 하지만 그 기세는 매우 약합니다. 우리 병사를 보기만 하면 꼭 도망하기 때문에 성 동서쪽 10리쯤 밖에서는 감히 제멋대로 풀을 베지 못하고, 만약 나오면 진을 통틀어 무리를 지어 근방을 가득 메우지만 또한 오래지 않아 물러가곤 합니다.
우리 군사들도 격려하여 무찌를 마음이 없지 않습니다. 예컨대 고양과 양주 등의 백성은 싸울 때마다 앞장서서 많이 죽이고 사로잡는데, 오직 걱정거리는 군량의 결핍입니다. 먹을 것이 없기 때문에 군사를 모을 수 없고, 군사를 모으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기회가 있더라도 계책을 세울 수 없으니, 가슴이 아프고 답답합니다. 만약 명 나라 군사의 양식 외에 아쉬운 대로 몇천 섬의 곡식만 있어 군량으로 사용한다면 어떻게 해보겠는데, 사방을 둘러보아도 양식을 변통할 곳이 없으니, 참으로 어찌할 수 없습니다.
서울에서는 처음 명군이 곧 온다는 소식을 듣고 성안에 가득하던 백성이 사방으로 도망가는 자가 수없이 많았습니다. 이윽고 명군이 갑자기 몰려오자 백성이 굶주림에 시달려도 구제할 수 없었습니다. 이전에 중국 군사의 말먹이 벼 1천 섬을 덜어내어 대략 구휼하였지만 그 형편은 만분의 일도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떠도는 백성들은 굶어 죽음이 임박하자 다시 성중에 드나들며 잿더미 속에서 먹을 것을 찾다가 더러는 적에게 잡혀 죽었습니다.
요즘은 들으니, 적들은 좋은 말로 속여서 돌아오게 하여 각기 쌀죽을 내어 주며 구원하는 척하기 때문에 서울 성안으로 돌아오는 백성이 날마다 끊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복병한 군인을 시켜 들어가는 것을 금지하면 백성들은 더욱 놀라 달아나 귀순하는 길을 막을까 두렵고, 모르는 체하면 이런 기회를 이용해서 적의 첩자가 오가며 우리의 기밀을 누설할까 두려우니, 난처하기 짝이 없습니다. 백성들이 하늘처럼 여기는 것은 오직 먹는 데 있을 따름인데, 지금 이미 살려 줄 길이 없다면 아무리 빈말로 날마다 달랜다 한들 흩어져 가는 민심을 수습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전쟁이 일어나자 군량을 조달하는 데 온갖 폐단이 어수선하게 일어나 얼마 남지 않은 백성은 뒹굴며 죽기만 기다리고, 들판엔 눈길 닿는 끝까지 한곳도 농사 지은 곳이 없습니다. 지난달에 신이 군관을 충청도 해변으로 보내 봄보리 1,000여 섬을 갖다가 서울 근처 백성들의 봄농사 밑천을 삼으려고 하였으나, 아직도 오지 않으니 때는 이미 지났습니다. 지금 비록 도착한다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다만 직산의 벼 3백 섬이 도착하여 어제부터 근처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 때맞추어 농사를 짓게 하였으나, 그것도 널리 미치지 못했습니다.
삼가 유지(諭旨)를 받으니, “백성은 정처 없이 떠돌며 굶주리다 못해 머리를 나란히 하고 구렁에 죽어간다고 하니, 한편으로는 곡식을 고루 나누어 죽어 가는 목숨을 살리고, 한편으로는 형편에 따라 농사를 권하여 가을 수확을 도모하도록 하라.” 하셨습니다. 신은 덕음(德音)을 받들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사오나, 밀가루 없는 수제비란 예로부터 어려운 일입니다. 근방의 굶주린 백성과 서울에서 피란길에 떠도는 사족(士族) 남녀 노약자들은 신이 여기에 있다 해서 구원을 바라고 날마다 찾아와서 아우성을 치는 사람이 백 명씩 천 명씩 떼를 지어 오지마는, 신은 빈손만 가지고 구원할 힘이 없습니다. 아침마다 하인을 시켜 돌아보게 하면, 하룻밤 사이에 죽는 자는 적으면 7, 8명이요, 많으면 10여 명이나 되니, 아픈 마음이 뼈를 깎는 듯하여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습니다. 만약, 이러한 상황으로 한두 달만 더 경과한다면 정말이지 아마도 살아남을 백성이 곧 없을 것 같습니다.
신은 듣자오니, 강화 같은 데는 떠도는 백성이 더욱 많고, 식량을 긁어모으는 군관들은 함부로 여염집에 들어가 굶주린 백성들의 입에 풀칠할 적은 곡식마저 독촉해서 원성이 거리에 넘치니, 차마 들을 수가 없습니다. 민심의 향배가 달린 이때에 그와 같은 행위는 마땅히 없어져야 합니다. 신은 비록 감히 말하지 않지만 적이 홀로 한심하게 여깁니다.
감히 바라옵건대 조정은 백성을 괴롭히는 모든 일은 다 제거하시고 부득이하여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제하더라도 후덕한 뜻을 선포하고 사나움을 금지하시면, 거의 백성은 작으나마 은혜를 입게 되고 아울러 국가의 영원한 계책이 될 것입니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16권
 지리전고(地理典故)
산천의 형승(形勝)


서울[漢都] 성 안에는 경치 좋은 곳이 비록 적으나 그 중에서 노닐 만한 곳은 삼청동(三淸洞)이 가장 좋고, 인왕동(仁王洞)이 그 다음이고, 쌍계동(雙溪洞)ㆍ백운동(白雲洞)ㆍ청학동(靑鶴洞)이 또 그 다음이다. 삼청동은 소격서의 동쪽에 있다.계림제(鷄林第)로부터 북쪽에 어지럽게 서 있는 소나무 사이에는 맑은 샘물이 쏟아져 나온다. 물을 따라 올라가면 산은 높고 나무는 빽빽히 섰으며 바위로 된 골짜기가 깊숙하다. 몇 리를 못 가서 바위가 끊어져 낭떠러지를 이룬 곳이 있는데, 물이 낭떠러지의 허공에 뿌려져 흰 무지개를 드리운 것 같고 흩어지는 물방울은 구슬이 뛰는 것 같다.그 아래에 물이 모여서 깊고 큰 못이 되었다. 그 곁은 평탄하고 넓어서 사람 수십 명이 앉을 만하다. 높은 소나무들이 그 위에 엉켜 덮여 있고 바위 사이에는 모두가 진달래와 단풍잎으로 봄과 가을에는 붉은 그림자가 비치어 빛이 난다. 지위가 높고 점잖은 사람으로 와서 노는 이가 많다. 그 위로 두어 걸음 올라가면 연굴(演窟)이다.
인왕동은 인왕산 아래의 구불구불하고 깊은 골짜기가 복세암(福世庵)을 에워두른 곳인데, 골짜기의 물은 합류하여 시내를 이루고 있다. 서울 사람들이 다투어 와서 활쏘기를 한다. 쌍계동은 성균관의 웃골[上谷]에 있다. 두 샘물이 산골의 실개천을 이루었는데 김뉴(金紐) 자(字)는 자고(子固)이다. 가 개천가에 초당을 짓고 복숭아를 심어 무릉도원을 모방하니 진산(晉山) 강희맹(姜希孟)이 여기에 대하여 글[賦]을 지었다. 김뉴의 문장과 풍류가 당시 세상에 드날렸으므로 호걸들이 그를 따라 노는 이가 많았다. 백운동은 장의문(藏義門) 안에 있는데 중추(中樞) 이염의(李念義)가 이곳에 살았다. 시인들이 그의 유거(幽居)를 제목으로 하여 시를 지은 것이 있으나 이염의는 글을 알지 못하였다.청학동은 남학(南學)의 남쪽 골에 있는데 골이 깊고 맑은 개천이 있어서 활쏘기 장소를 차릴 만하다. 그러나 산이 민둥민둥하여 수목이 없는 것이 유감이다.
성 밖에 놀 만한 곳은 장의사(藏義寺)의 앞 개천이 가장 좋은데 시냇물이 삼각산의 여러 골짜기에서 흘러나온다. 골짜기 안에는 여제단(厲祭壇)이 있고 그 남쪽에는 무이정사(武夷精舍)의 옛 터가 있다. 절 앞에는 겹쳐 포개진 돌들이 수십 길이나 되어 수각(水閣)을 이루었는데 절 밑 수십 보(步) 되는 곳에 차일암(遮日岩)이 있다.바위는 매우 험하고 높아 냇물을 베고 있으며 바위 위에 장막을 쳤던 구멍이 있고, 바윗돌은 층층으로 포개져서 계단과 같다. 급한 물줄기가 어지럽게 쏟아져서 맑은 하늘에 우레가 우는 듯 귀를 시끄럽게 하는데 물은 맑고 돌은 희어서 완연히 속세를 벗어난 뛰어난 경치이므로 벼슬아치들이 와서 노는 이가 끊어지지 않는다.물을 따라 몇 리를 내려가면 부처바위[佛岩]가 있는데 바위에 불상을 새겨 놓았다. 시냇물은 북쪽으로 꺾어져 곧게 서쪽으로 흐른다. 그 사이에 예전에는 물방아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없다.
그 아래의 몇 리 되는 곳이 홍제원(弘濟院)이다. 홍제원의 남쪽에 작은 언덕이 있고 언덕에는 큰 소나무들이 가득한데 그 위에 예전에는 정자가 있었다. 중국 사신이 옷을 갈아 입던 곳이었는데 정자가 없어진 지 이미 오래이다.사현(沙峴)의 남쪽에서 모화관까지의 사이에는 좌ㆍ우 양쪽에 키 큰 소나무 들과 밤나무 숲이 겹겹으로 서로 뒤섞이어 덮여 있다. 서울의 활쏘기 하는 이, 전송하는 이, 영접하는 이들이 많이 여기에 모인다. 그러나 쏟아지는 계곡의 급류도 맑게 흐르는 물도 없다.목멱산(木覔山)의 남쪽 이태원(梨泰院)의 들에는 고산사(高山寺)의 동쪽에 솟아나는 샘물이 있으며 큰 소나무가 골에 가득하여 성 안의 부녀자들이 빨래하러 많이 간다. 서쪽으로 가면 진관사(津寬寺)ㆍ중흥사(中興寺)ㆍ서산사(西山寺)가 있고,골[洞]의 북쪽에는 청량사(淸涼寺)ㆍ속개사(俗開寺) 등이 있으며, 골의 동쪽에는 풍양사(豐壤寺)가 있고, 남쪽에는 안양사(安養寺) 등이 있다. 모두 높은 산과 큰 시내가 있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쉴 만한 곳이 한두 곳이 아니지만, 서울에서 가깝지 않기 때문에 놀러 오는 사람이 드물다.《용재총화》
○ 개성부 : 송악이 진산(鎭山)이다. 처음 이름은 부소(扶蘇)였고 또 곡령(鵠嶺)이라고도 일컬었다. 그 아래가 만월대(滿月臺)이다. 소위《송사(宋史)》에, “큰 산을 의지하고 궁전을 지었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만월대의 뒤가 자하동(紫霞洞)이다. 동부(洞府)는 그윽하고 막혔으며 시냇물은 맑고 잔잔하여 가장 뛰어난 절경이다. 남쪽에 있는 용수산(龍首山)ㆍ진봉산(進鳳山)이 내안산(內案山)을 이루고 있다. 진봉산에는 철쭉꽃이 많이 피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진봉산 철쭉이라고 한다.
○ 천마산(天磨山) : 송악의 북쪽에 있다. 모든 봉우리가 높고 험하여 하늘을 찌르는 듯한데 바라보면 푸른 기운이 서린다.
○ 면주동(綿紬洞) : 오관산(五冠山) 밑에 있으며, 골 안은 매우 넓다. 골짜기 입구에 해를 가리는 바위가 있는데 바윗돌은 넓고 평탄하여 앉을 만하다. 돌을 파서 구멍을 만들었는데 사람들은 옛사람들이 장막의 기둥을 세운 곳이라고 말한다. 《여지승람》에는 장단(長湍)에 들어 있다.
○ 산대암(山臺岩) : 송경(松京)의 숭인문(崇仁門) 밖에 있다. 백 길이나 되는 절벽의 형상이 색을 칠한 누각같다. 화담(花潭)은 영통동(靈通洞) 입구에 있다. 못가에는 그림 병풍을 펴 놓은 것 같은 푸른 절벽이 높게 서 있고 못 곁에 작은 바위가 있는데 4면이 깎은 듯하다. 여기에도 또한 장막을 쳤던 구멍이 있다.이 못에서부터 위는 산이 둘러 있어 길이 꾸불꾸불하여 시냇물을 여러 번 건너야 영통동에 이르게 된다. 영통동은 오관산 밑에 있다. 《여지승람》에는 장단에 들어 있다. ○ 화담은 경치가 뛰어나게 좋으며, 서경덕(徐敬德)이 은거하던 곳이다. 못가의 바위에 서사정(逝斯亭)이 있다.
○ 박연(朴淵) : 천마산과 성거산(聖居山) 사이에 있다. 형상이 돌로 만든 장독과 같아 넘어다보면 아주 검다. 못의 중심에 솟아나온 반석(盤石)이 있는데 섬바위라고 한다. 물이 절벽으로 흘러 사나운 폭포가 되어 아래로 떨어지는데 열 길은 될 것이며, 마치 흰 무지개가 하늘에 비치고 나는 구름이 높은 돌다리를 씻는 듯, 우레가 내닫고 번개가 치는 것 같아서 소리가 천지를 진동한다.속세에 전하기를, “예전에 박 진사(朴進士)라는 사람이 이 못 위에서 피리를 불었더니 용왕의 딸이 감동하여 박 진사를 끌어들여 남편으로 삼았다. 그래서 못 이름을 ‘박연’이라고 한다. 또는 박 진사의 어머니가 와서 울다가 못에 떨어져 죽었으므로 못 이름을 고모담(姑姆潭)이라고도 한다.” 한다. 폭포 아래에 범사정(泛槎亭)이 있다.
○ 대흥동(大興洞) : 박연에서 올라가면 산은 점점 더 높아지고 물은 더욱 맑아지며 바윗돌은 매우 험준하다. 관음굴 앞에 이르면 물이 깊어 못을 이루고 있다. 물 속에서 솟아나온 돌이 있는데 이를 구담(龜潭)이라고 한다. 또 몇 리를 올라가면 깊은 웅덩이가 있는데 물이 몹시 맑다. 4면이 모두 돌인데 어떤 것은 책상이나 평상 같고, 어떤 것은 담장이나 집과 같다.그 위는 모두가 오래된 소나무이다. 또 몇 리를 올라가면 샘물이 동쪽 벼랑에서 솟아 나오는데 여기를 보현동(普賢洞)이라고 하고 또 두어 걸음 올라가면 마담(馬潭)이라고 하는 곳이 있다. 또 몇 리를 올라가면 대흥사(大興寺)가 있다. 골짜기에 수목이 무성하여 여름에는 목련화의 향기가 코를 찌르고 가을이면 단풍과 황엽(黃葉)이 물 밑에 거꾸로 비치니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다. 모두《여지승람》에 있다.
○ 장단의 석벽 : 강물의 원류는 안변(安邊)ㆍ영풍(永豐)에서 나와 이천(伊川)ㆍ안협(安峽)을 거쳐 마전(麻田)에 이르러 대탄(大灘)과 합류하고 부동(府東)에 이르러 두기진(頭耆津)이 되는데 양쪽 언덕에 푸른 돌이 수십 리를 벽처럼 서 있어 바라보면 그림과 같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고려 태조가 거둥하여 놀던 곳이라고 한다. 그 아래가 임진 나루터이다.
○ 여주의 청심루(淸心樓) : 객관(客館)의 북쪽에 있다. 여강의 동쪽 언덕인 봉미산(鳳尾山)에 신륵사(神勒寺)가 있는데 벽돌 탑이 있어 세상에서는 벽사(甓寺)라고 부른다. 절 옆 강변에 강월헌(江月軒)이 있는데 낭떠러지의 돌들이 아주 기묘하다. 강의 남쪽 언덕 아래에 말바위가 있는데 전설에는 바위 아래에 여룡(驪龍)이 있는 곳이 있다고 한다.
○ 영평(永平) 결(缺)
○ 충청도 청풍(淸風 청주)의 한벽루(寒碧樓) : 객관의 동쪽에 있는데 큰 강물을 굽어보고 있다.
○ 단양의 도담(島潭) : 군 북쪽 24리 되는 곳에 있다. 세 바위가 한복판에 솟아 있다. 못에서부터 물을 수백 보쯤 거슬러 올라가면 푸른 석벽이 만 길이나 되어 보이는데 황양목(黃楊木)과 측백나무가 바위틈에 거꾸로 나 있고, 바위에 구멍이 문같이 생겨 있어 바라보면 딴 세상 같다.
○ 구담(龜潭) : 양쪽 언덕의 석벽이 하늘에 높이 솟아 해를 가리었다. 왼 쪽과 오른 쪽에 강선대(降仙臺)ㆍ채운봉(彩雲峯)ㆍ옥순봉(玉笋峯)이 만 길이나 솟아 있는데 순전히 하나의 돌이다. ○ 가은암(可隱岩)ㆍ상선암(上仙巖)ㆍ중선암(中仙巖)ㆍ하선암(下仙巖)이 있다.
○ 이락루(二樂樓) : 군의 서쪽에 있다. 김일손(金馹孫)의 기문(記文)이 있다. 운암(雲巖)은 읍의 동남쪽에 있다. 서애 유성룡의 정자 터가 있다.
○ 제천의 의림지(義林池) : 못 서쪽에 후선정(候仙亭)이 있다.
○ 영춘(永春)의 성산(城山) 남쪽에 있는 석굴 : 높이가 한 길 남짓하고 넓이는 10척이 넘으며 깊게 들어가서 끝이 없다. 물이 철철 흘러나오는데 깊이는 무릎이 잠길 정도이고 얼음과 같이 맑고 싸늘하다. 고을 사람이 횃불 열 자루를 갖고 들어갔는데 굴이 아직 끝나기 전에 횃불이 다하여 돌아 나왔다 한다.
○ 소백산 결(缺)
○ 충주의 달천(達川) : 임진왜란 때 명 나라의 장수가 물맛을 보고 “중국의 여산 폭포(廬山瀑布)와 같다.”고 말하였다. 달천은 속리산에서 발원하여 금천(金遷) 앞에 이르러 청풍강(淸風江)과 합류한다. 금천은 대도시이다. 금천의 서쪽 십여리 되는 곳에 가흥창(嘉興倉) 조운창 이 있다. <팔역지(八域誌)>
○ 탄금대(彈琴臺) : 신라 때 선인(仙人) 우륵이 거문고를 타던 곳이다.
○ 보은의 속리산 : 현(縣)의 동쪽 44리 되는 곳에 있다. 아홉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는데 산 정상에 문장루대(文藏樓臺)가 있다. 천연적으로 돌이 포개져 힘차게 공중에 솟아 있는데 그 높이는 몇 길이나 되는지 알 수 없으며 그 넓이는 삼천 명은 앉을 만하다. 대(臺) 위에 가마솥 같은 구덩이가 있는데 물이 철철 넘쳐서 가뭄에도 줄지 않고 장마에도 불지 않는다.세 갈래로 나누어져서 반공(半空)으로 흘러내려가는데 동쪽으로 흐르는 것은 낙동강이 되고, 남쪽으로 흐르는 것은 금강이 되며, 서쪽으로 흘러 북쪽으로 꺾어진 것은 달천이 된다. 산 아래에는 여덟 개의 다리를 아홉 번 돈다는 팔교구요(八橋九遙)라는 이름이 있다. 한 줄기의 물이 빙 돌고 굽이마다 다리가 있는데, 법주사(法住寺)에 이르게 된다. 절의 서쪽 봉우리에 거북처럼 생긴 돌이 있는데, 자연히 생겨난 천연석이다. 《여지승람》
○ 영동(永同)의 용연(龍淵) : 현의 서쪽 16리에 있으며, 골짜기 입구의 양쪽 언덕은 깎아 세운 듯한 석벽이 2리쯤 들어가면 두 봉우리가 맞보고 있는데 바위로 된 봉우리는 높고 가파르다. 중간에 돌절구처럼 생긴 곳이 있어 못의 하류가 여기에 괴어 있는데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세상에서는 기연(妓淵)이라고 부르는데 물이 넘쳐서 폭포가 되어 수백 척을 날아 흐른다. 그 아래에 깊은 못이 있다. 《여지승람》
○ 공주의 금강 : 강물을 내려다 보는 곳에 사송(四松)ㆍ금벽(錦壁)ㆍ독락병(獨樂屛) 등의 정자가 있다. 올라가서 조망을 즐길 만한 경치가 있다. 쌍수산성(雙樹山城)의 공북루(拱北樓)는 매우 장엄하고 화려하다.
○ 첫째 유성(儒城), 둘째 경천(敬天), 셋째 이인(利仁), 넷째 유구(維鳩)는 세상에서 말하는 살 만한 곳이다.
○ 계룡산의 서북쪽에 있는 용연(龍淵) : 물이 넘쳐서 큰 시내를 이루니 산의 남쪽과 북쪽에 경치 좋은 곳이 많다. 동쪽에는 봉림(鳳林)이 있고 북에는 갑사(岬寺)와 동학사(東學寺)가 있다.
○ 부여의 백마강 : 조룡대(釣龍臺)ㆍ낙화암ㆍ자온대(自溫臺)ㆍ고란사(皐蘭寺) 등이 있으니 백제 때의 고적이다. 암벽이 기묘하고 아름다우며 경치가 뛰어나게 좋다.
○ 덕산(德山)의 가야산 결(缺)
○ 보령(保寧)의 영보정(永保亭) : 최고의 명승지라고 일컫는다. 박은(朴誾)의 시에,
땅은 푸드덕거리며 날아가려는 날개와 같고/地如拍拍將飛翼
누각은 흔들흔들 매지 않은 배와 같다/樓似搖搖不繫篷
고 한 곳이 바로 여기이다.
○ 청라동(靑蘿洞) 결(缺)
○ 해미(海美)의 가야산 : 상왕산(象王山)과 서로 연해 있다. 동쪽 가야사(伽倻寺)가 있는 동학(洞壑)은 곧 옛날 상왕(象王)의 궁궐이 있던 터이다. 서쪽에 수렴동(水簾洞)이 있는데 산악과 폭포가 매우 기묘하다. 북쪽에 강당동(講堂洞)ㆍ무릉동이 있는데 수석이 또한 아름답다.
○ 남포(藍浦)의 성주산(聖住山) : 남ㆍ북의 두 산이 합하여 큰 골짜기가 되었다. 수구(水口)가 밝고 깨끗하다. 산 밖에서 검은 옥벼루를 생산하는데 이따금 관상(觀賞)에 쓰일 만한 돌이 난다.
○ 화계(花溪) 결(缺)
○ 홍주의 광천(廣川) 결(缺)
○ 청주의 화양동(華陽洞) : 선유산(仙游山) 칠성대(七星臺)로부터 서쪽으로 재[嶺]의 능선을 넘어가면 여기가 외선유동(外仙游洞)이다. 조금 내려가면 청주의 파곶산(葩串山)인데 동천(洞天)이 깊숙이 뚫려 있다. 큰 시냇물이 암석의 골짜기와 돌벼랑으로 쏟아져 내려와 천번 돌고 만번 굴러 흐르니 경치가 기괴하고 맑고 빼어나다. 그 아래가 화양동인데 수석(水石)이 더욱 기묘하고 뛰어나다. 그 가운데 만동묘(萬東廟)가 있다.
○ 강원도 회양(淮陽)의 단발령(斷髮嶺) : 천마산의 금성현(金城縣)의 경내에 있다. 속언에, “이 재에 올라 금강산을 본 자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고자 하기 때문에 이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 금강산 : 또는 개골(皆骨)ㆍ열반(涅槃)ㆍ풍악(楓岳)ㆍ지달(怳怛)이라고도 부르며 모두 1만 2천 봉이다. 내산과 외산을 합하여 1백 8개소의 절이 있다. 단발령으로부터 장안사(長安寺)에 이르는 사이에 백천동(百川洞)ㆍ업경대(業鏡臺)ㆍ백화암(白華菴)ㆍ표훈사(表訓寺)를 지나게 된다. 정양사(正陽寺)에 오르면 천을대(天乙臺)ㆍ개심대(開心臺)ㆍ헐성루(歇星樓)가 있어서 가장 이 산의 참된 모습을 보여 주는데 바로 중향성(衆香城)과 마주 대하고 있어서 경치를 완상하기에 더욱 좋다.명소(名炤)와 낙월(落月)ㆍ대향로(大香爐)ㆍ소향로(小香爐)ㆍ금강대ㆍ망고대(望高臺) 등의 봉우리들이 앞뒤로 둘러 벌여 섰다. 북쪽으로 들어가면 만폭동인데 바위 위에 양사언(楊士彦)이 쓴 ‘봉래풍악 원화동천(蓬萊楓岳 元化洞天)’이라는 여덟 글자가 있다. 골짜기 안의 보덕굴(普德窟)에는 관음각(觀音閣)이 있다. 절벽을 파서 판자를 걸고 밖으로 구리쇠 기둥을 세워 그 위에 작은 집 세 칸을 만들었는데 쇠사슬로 얽어서 바윗돌에 못박아 놓았다.
물줄기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여덟 개의 못이 있는데, 관음담(觀音潭)ㆍ진주담(眞珠潭)ㆍ화룡담(火龍潭)ㆍ벽하담(碧霞潭)ㆍ□ 구(龜) □이라 한다. 진주담과 벽하담이 가장 기묘하다. 수건애(手巾崖)라는 돌이 있고, 사자암이라는 봉우리가 있으며, 불지암(佛地菴)ㆍ송라암(松蘿菴)이라는 암자가 있다.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것이 마하연(摩訶衍)ㆍ묘길상(妙吉祥)이다. 송라암의 동쪽 큰 골에는 무수한 폭포들이 갈라지고 나누어져서 아득하게 퍼져 흐르는 것이 마치 흰 무지개 같다. 봉우리와 암석은 솟아 있는 것은 날이 선 칼과 같고, 날카로운 것은 송곳과 같고, 우뚝 치켜 든 것은 손과 같고, 서루 마주 닿은 것은 이빨과 같고, 굽은 것은 팔꿈치 같고, 가로 뻗은 것은 팔과 같다.불지암(佛地庵)은 또한 매우 그윽하고 가장 아름답다. 만회암(萬灰庵)을 거쳐 백운대에 오르는데, 구경하는 사람들은 쇠줄을 붙잡고 올라가서 중향(衆香)ㆍ백옥(白玉)ㆍ석병(石屛)을 관람한다. 중향성은 만인봉(萬仞峯)의 정상에 있다. 모두 흰 돌인데 층계가 있어 탁자를 펴 놓은 것 같다. 탁자 위에 한 개의 서 있는 돌을 안치하였는데 불상 같으나 얼굴의 형상이 없다.좌ㆍ우의 돌 상탁 위에도 작은 석상들을 두 줄로 배열하였는데 또한 얼굴의 형상은 분명치 않다. 속언에 담무갈(曇無竭)이 여기에 머물어 살았다고 전한다. 금강산의 주봉은 비로봉(毗盧峯)이다. 정면으로 동해 바다를 굽어보고 있는데 여름이라도 오히려 춥다. 산기운과 안개가 얼룩지고 엉겨서 구름빛 같다.또 원통곡(圓通谷)ㆍ수미탑(須彌塔)ㆍ백탑동(百塔洞) 등 여러 경치 좋은 곳이 있는데 어느 것이나 기이한 경치가 아닌 것이 없다. 구룡연에 내팔담(內八潭)이 있는데 큰 폭포가 높은 산봉우리로부터 날아 내려오면서 굽이굽이에 못을 이룬 것이 여덟 층인데, 위험하여 들어가기는 어렵다.영원암(靈源庵)ㆍ마하연(摩呵衍)에서 내수참(內水站)으로 넘어가면 여기가 내금강과 외금강의 분계이며 은선대(隱仙臺)를 지나 유점사에 이른다. □ 영기연(永其淵)은 금강산의 북쪽 기슭에 있다.
○ 고성(高城)의 금강외산 : 불정암(佛頂巖)에는 구멍이 있는데 깊이가 바닥이 없다. 속언에 용녀(龍女)가 나와 불정화상(佛頂和尙)의 설법을 들었다고 전한다. 불정대(佛頂臺)에 올라 12폭포를 바라보면 푸른 언덕과 석벽들이 그림 병풍처럼 둘러섰는데 폭포가 쏟아져 내려오는 형상이 흰 무지개 같은 것이 열둘이다.유점사의 불전은 능인전(能仁殿)이라고 하는데 역대의 왕실에서 하사한 옛 기물들이 많다. 만경동(萬景洞)에는 선담(船潭)이 있다. 상원(上院)ㆍ중원(中院)ㆍ내원(內院)ㆍ만경대를 이리저리 다니면 동해의 뛰어난 경치를 시원스럽게 볼 수 있다. 성불암(成佛菴)에서 해뜨는 것을 보고 발연사(鉢淵寺)에서 중의 무리가 폭포로 달려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발연으로부터 비스듬히 신계사(新溪寺)로 돌아 옥류동(玉流洞)에 이르러 구룡연을 항하면 곧 내팔담(內八潭) 외에, 아홉번째로 꺾이는 곳인데 폭포가 기이하고 웅장하다. 신물(神物)이 물의 소용돌이 속에 숨어 있어서 사람의 소리가 조금만 높으면 문득 우레가 울고 비가 오는 이상한 일이 있다고 한다.
○ 만물초(萬物草) : 금강산 동북쪽의 동천(洞天)에 있다.
○ 삼일포(三日浦) : 겹쳐진 봉우리와 포개진 멧부리로 둘러쌓였는데 그 가운데에 36봉이 있다. 계곡은 맑고 그윽하며 몽천사(夢泉寺)라는 절이 있다. 호수의 중심에 작은 섬이 있는데 푸른 돌이 편편하지 않다. 거기에 사선정(四仙亭)이 있는데 옛날 영랑(永郞)ㆍ술랑(述郞)ㆍ남랑(南郞)ㆍ안상(安詳) 등 네 신선이 놀던 곳이라고 한다.호수의 남쪽 작은 봉우리에 돌로 된 감실(龕室)이 있다. 봉우리의 북쪽 낭떠러지의 돌에는, ‘영랑도남석행(永郞徒南石行)’이라고 붉게 쓴 여섯 글자가 있다. 암자 뒤 문암(門巖)에서 해뜨는 것을 볼 수 있다. 호수의 가운데에 또 매향비(埋香碑)ㆍ사자암 등 여러 좋은 경치가 있다.
○ 해산정(海山亭) : 고을의 관아 서쪽에 있다. 서쪽으로는 금강산을 쳐다보고 동쪽으로는 바다를 바라보며, 남쪽으로는 긴 시내를 굽어보고 있다.
○ 남강(南江)의 대호정(帶湖亭) 결(缺)
○ 해금강(海金剛) :《여지승람》에는 포구라고 하였다. 산에 바위가 우뚝 솟아 층층으로 포개져서 계단과 같고 위에는 백여 명이 앉을 만하다. 바다 가운데 암석이 바둑처럼 놓여 있는데 돌은 모두 흰빛이다.해안에는 석봉이 그림처럼 벌여 서 있다. 동쪽을 바라보면 5리나 되는 사이에 석봉이 병풍처럼 벌여 있고, 봉우리 아래에는 돌들이 있어서 용이 움켜잡고 호랑이가 끌어당기는 것과 같다. 물을 따라 내려가기도 하고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면서 구경하면 그 경치는 이루 말할 수 없으며 배에서 뱃사람이 전복 따는 것도 보인다.
○ 통천의 총석정(叢石亭) : 군의 북쪽 20리에 있다. 가로 뻗은 봉우리가 갑자기 바다로 뻗어 섬과 같다. 바닷가 언덕 낭떠러지에 줄지은 돌들이 빗살과 같이 정연하게 늘어섰고, 수십 개의 돌기둥이 언덕 곁에 모여 섰는데 언덕에서 10여 보(步) 떨어진 곳에는 또 네 개의 돌기둥이 따로 떨어져 물 가운데 섰다. 돌은 모두 6면으로 되어 있다.줄지어 선 돌 수백 개가 한 돌기둥을 이루었는데 기둥도 또한 6면(六面)이다. 돌기둥 위에는 다복솔[矮松]이 있는데 수명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알 수 없다. 여기를 사선봉(四仙峯)이라고 일컫는다. 봉우리에서 조금 북쪽 해안에는 돌의 모양이 또 틀리니, 어떤 것은 길고 어떤 것은 짧으며, 어떤 것은 쌓여 있고 어떤 것은 흩어져 있으며, 어떤 것은 기대어 있고 어떤 것은 가로질러 있다. 이 돌은 모두 4면인데 혹 5면도 있으며 기괴하고 이상하게 생겼다. 총석정은 가로지른 봉우리 위에서 돌기둥을 마주 굽어보고 있다.
○ 금란굴(金幱窟) : 나무 없는 민둥 봉우리가 가운데는 높고 주위는 조금씩 낮아져서 바다를 굽어 본다. 봉우리의 낭떠러지에 굴이 있는데 넓기는 7, 8척이나 되고 깊이는 10여 보(步)쯤 된다. 물의 깊이는 헤아릴 수 없다. 굴의 네 모퉁이의 석벽은 높이가 3척이며, 돌의 무늬는 노란색인데 아롱져서 금색으로 무늬가 있는 가사(袈裟)와 같다.
○ 옹천(甕遷) : 또는 왜륜천(倭淪遷)이라고도 한다. 군의 남쪽 65리에 있다.
○ 흡곡(歙谷)의 시중대(侍中臺) : 현의 북쪽 7리에 있다. 긴 능선이 구불구불하게 동쪽에 도사리고 있다. 3면이 모두 큰 호수인데 물가는 모래섬을 굽어 둘러 있고 밖은 큰 바다가 둘러 있다.바다 가운데 일곱 개의 섬이 호수와 바다 사이에 죽 늘어섰으며 푸른 솔이 길을 끼고 있다. 시중대의 옛이름은 칠보(七寶)였는데 감사 한명회(韓明澮)가 올라와 유람할 때 그를 정승에 임명한다는 명령이 왔기 때문에 마침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 간성(杆城)의 청간정(淸澗亭) : 군의 남쪽 40리에 있다. 석봉이 우뚝 솟았는데 층층마다 대(臺)와 같고 높이가 수십 길이나 된다. 위에는 용트림을 한 소나무 몇 그루가 있다. 대의 동쪽에 만경루가 있으며, 대의 아래에는 돌들이 어지럽게 울쑥불쑥 바다에 꽂혀 있다. 놀란 파도가 함부로 돌을 때리니 물방울이 눈처럼 날아 사방에 흩어진다.
○ 선유담(仙游潭) : 군의 남쪽 10리 되는 산골에 있다. 작은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는데 반은 호수의 한가운데로 들어가 있다.
○ 영랑호(永郞湖) : 군의 남쪽 55리에 있는데 둘레가 30여 리이다. 암석이 기묘하고 괴이하며, 호수의 동쪽에 작은 봉우리가 있는데 반은 호수의 가운데로 들어가 있다.
○ 화담(花潭) 결(缺)
○ 양양의 낙산사(洛山寺) : 부의 동북 쪽 15리의 오봉산(五峯山)에 있다. 일명 낙산사라고 한다. 이화정(梨花亭)ㆍ빈일료(寶日寮)가 있고 절의 동쪽 두어 마장 되는 곳에 관음굴이 있다.
○ 설악 외산(雪嶽外山) : 신흥사(神興寺)ㆍ내원암(內院庵)을 지나 방향을 바꿔 계조굴(繼祖窟)을 향하면 굴은 천후산(天吼山) 아래에 있다. 두루 식당폭포(食堂瀑布)를 구경할 수 있다.
○ 쌍성호(雙城湖) : 부(府)의 북쪽 40리 되는 간성군과의 경계에 있다. 호수의 주위가 수십 리나 되며, 뛰어난 경치가 영랑호보다 더 좋다.
○ 강릉의 경포대 : 부의 동북쪽 15리 거리에 있다. 일명 경호(鏡湖)라고도 한다. 주위는 20리인데 물은 깊지도 않고 얕지도 않으며 사면과 중앙의 깊이가 같다. 서쪽의 언덕에 산봉우리가 있고, 봉우리 위에 대(臺)가 있으며, 옆에 약(藥)을 만들던 돌절구가 있다. 갯벌의 동쪽에 판자다리가 있는데 강문교(江門橋)라고 한다.다리 밖은 죽도(竹島)이고 죽도의 북쪽은 흰 모래가 5리나 된다. 모래밭 저편에는 끝없는 바다가 있는데 해뜨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절묘한 경치이다. 호수에서는 적곡합(積穀蛤)이 난다. 보충 : 예전에는 경포대에 온방(溫房)과 양실(涼室)이 있었는데 감사 박명준(朴命俊)이 철거했다. 이는 사객(使客)들을 오래 묵지 못하게 하려고 한 것이다.《희암집(希庵集)》
○ 한송정(寒松亭) : 경포대의 남쪽 두어 마장되는 곳에 있다. 차[茶] 끓이던 샘과 돌 부엌과 돌절구가 있는데 네 신선이 놀던 곳이다.
○ 대관령 : 아흔 아홉 굽이이다. 서쪽에는 서울로 통하는 큰 길이 있다. 재의 허리에 원읍현(員泣峴)이라는 고개가 있고, 재 아래에는 구산동(丘山洞)이라는 골짜기가 있어 경치가 뛰어나게 아름답다.
○ 오대산 : 강릉부의 서쪽 1백 40리의 거리에 있다. 동쪽에는 만월봉(滿月峯), 남쪽에는 기린봉(麒麟峯), 서쪽에는 장령봉(長嶺峯), 북쪽에는 상왕봉(象王峯), 중앙에는 지로봉(智罏峯) 등 다섯 봉우리가 둘러섰는데 각 봉의 대(臺)마다 각각 한 암자가 있다. 산 아래에 월정사(月精寺)가 있고 절 곁에는 사고(史庫)가 있다.또 금강연이라는 못이 있는데 사면이 모두 반석이며, 폭포가 10척(尺)을 흘러 굽이쳐 돌아서 못이 되었다. 서대(西臺) 밑에 통을 댄 수함(水檻)이 있는데 곧게 솟아오르는 샘물은 그 빛과 맛이 보통 물과 다르다. 이것이 서쪽으로 흘러서 한강의 원류가 된다.
○ 삼척의 죽서루(竹西樓) : 절벽이 천 길이나 되는데 기이한 바위가 무더기로 늘어섰다. 그 위에 높다란 누각을 가설하여, 아래로 오십천(五十川)을 굽어본다. 냇물이 굽이쳐 돌아서 못이 되었다.
○ 태백산의 황지(黃池) : 산 위에 들이 벌여 있는데, 위에는 작약봉(芍藥峯)이 있고, 아래에는 우리나라 시조가 살던 옛터가 있다고 하나 그 곳을 알 수가 없다. 황지의 물이 남쪽으로 30여 리를 흘러가서 작은 산을 뚫고 남쪽으로 나가는데 이를 천천(穿川)이라고 한다. 이것이 낙동강의 원류가 된다.
○ 울진의 망양정(望洋亭) :《여지승람》에는 평해에 들어 있다.
○ 평해(平海)의 월송정(越松亭) : 군의 동쪽 7리에 있다. 푸른 솔이 만 그루나 있고 흰 모래는 눈과 같다. 이상의 아홉 고을을 영동 9군(嶺東九郡)이라고 한다.
○ 인제 설악의 한계폭포(寒溪瀑布) : 산 위에 성이 있고, 냇물이 성 안에서 흘러나와 폭포를 이루었다. 매달린 것 같은 물줄기가 수백 척(尺)이나 내려 쏟아지니 바라보면 하늘에서 흰 무지개 드리운 것 같다. 임진왜란 때 중국 장수가 중국의 여산폭포보다 좋다고 말하였다 한다. 원통역에서부터 동쪽은 겹친 멧부리와 높은 나무의 숲에 싸여 계곡은 깊숙하고 그윽하며, 시냇물은 가로 세로 흘러서 건너는 곳이 서른 여섯 곳이나 된다.또 남쪽 봉우리는 절벽이 천 길이나 되는데 기묘하고 괴이하여 형용할 수가 없다. 그 아래에 맑은 샘물이 바위에 부딪쳐 못을 이루었는데, 또 그 동쪽 몇 리 되는 곳에는 벼랑을 따라 작은 길이 있고 암벽의 빈 구멍은 입을 벌리고 있으며 봉우리 바위는 높게 뻗어나 용이 움켜잡고 범이 끌어당기는 것과 같고 층층대와 같이 여러 층의 돌이 무수하니 지형이 뛰어난 경치가 영서에서 제일이다.
○ 원주의 치악산 : 산 안에는 계곡이 많고 경치가 그윽하며 기이하다. 산에는 신령한 감응이 많아서 사냥꾼도 감히 짐승을 잡지 못한다.
○ 사자산(獅子山) : 치악산의 동북쪽에 있다. 30리에 걸쳐 물과 바위가 있는데 주천강(酒泉江)의 근원이다. 남쪽에는 도화동(桃花洞)ㆍ두릉동(杜陵洞)이 있는데 모두 시내와 샘물의 경치가 뛰어나게 좋다.
○ 춘천의 우두촌(牛頭村) : 소양강 위에 두 갈래 물이 합류한 삼각주(三角洲) 안에 있으며 물 부근에 돌이 있다.
○ 정선의 풍혈(風穴) : 대음산(大陰山)의 바윗돌 사이에 있다. 그 아래에 얼음을 두면 여름이 지나도록 녹지 않는다. 또 물구멍이 있는데, 남강(南江)의 물이 여기에 이르러 나뉘어져 땅 속으로 들어갔다가 모마어촌(毛麻於村)에 이르러 땅 위로 솟아 나온다.
○ 대음강(大陰江)의 하류에 용암연(龍岩淵)이 있다.
○ 철원의 북관정(北寬亭) : 결(缺)
○ 보개산(寶蓋山) : 결(缺)
○ 고석정(孤石亭) : 큰 바위가 3백 척 높이로 우뚝 솟았다. 바위를 따라 올라가면 구멍이 하나 있는데 배를 땅에 대고 들어가면 열 사람 정도가 앉을 만하다. 큰 냇물이 바위 아래에 이르러 못이 되고 서쪽으로 꺾어져 남쪽으로 흐른다. 앞뒤에 바위 멧부리가 벽처럼 서 있다.
○ 순담(筍潭) : 결(缺)
○ 평강(平康)의 정자연(亭子淵) : 큰 시냇물이 세 방면의 분수령으로부터 마을 앞에 흘러 와서 깊이가 두 배를 수용할 만하다. 석벽이 병풍같이 둘러 있고, 언덕 위에는 정자와 누대가 있다. 여기는 황씨(黃氏)가 대를 물려가며 사는 곳이다.
○ 이천(伊川)의 광복산촌(廣福山村) : 현의 북쪽 60리에 있다. 안변(安邊)ㆍ영풍(永豐)의 물이 여기에 이르러 깊어지고 고리처럼 둘렀다. 북쪽에는 고미탄(古美灘)의 깊은 물과 검산(劍山)의 막힌 데가 있다.
○ 경상도 안동의 학가산(鶴駕山) : 두 갈래의 물 사이에 있다. 산세는 오관산(五冠山)과 삼각산과 흡사하나 다만 돌로 된 봉우리가 적다. 아래에 풍산(豐山)의 들이 있다.
○ 영호루(映湖樓) : 낙동강의 원류가 태백산의 황지(黃池)에서 나와 남쪽 예안에 이르러 동쪽으로 꺾어져 서쪽으로 흐르다가 여기에 와서 비로소 커지면서 굽이쳐 돌아 호수가 된다. 무협(巫崍)이 그 왼쪽에 벌여 있고, 성산(城山)이 오른쪽에 버티고 있다. 누각의 편액은 고려 공민왕의 글씨이다. 누각의 북쪽에 신라 때의 옛 절이 있는데 절의 정전이 들 가운데 높다랗게 서 있다. 서쪽에는 관왕묘(關王廟)의 석상이 있다.
○ 귀래정(歸來亭)과 임청각(臨淸閣) : 이씨(李氏)가 대대로 전해오며 사는 곳인데 영호루와 함께 읍 중의 이름난 경치이다.
○ 하회(河回) : 서애 유성룡의 옛집이 있는 곳이다. 깊이 괴인 물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으며 산은 학가산(鶴駕山)에서 나누어진 것이다. 석벽이 강 위를 빙 둘러 있어 그 경치가 조용하고 빼어나게 아름답다. 위에는 옥연정(玉淵亭)과 작은 승암(僧菴)이 바위 사이에 띄엄띄엄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니 진실로 뛰어난 경치이다. 하회 마을의 위와 아래에는 또 삼구정(三龜亭)ㆍ수동(繡洞)ㆍ구담(九潭)ㆍ가일(佳逸) 등 강가에 이름난 마을들이 있다.
○ 임하(臨河)의 몽선각(夢仙閣), 학봉 김성일의 옛집, 내성(奈城)의 청암정(靑岩亭) 찬성 권벌(權撥)의 옛집, 춘양(春陽)의 한수정(寒水亭) 정언 권두경(權斗經)의 세거지 은 모두 태백산 남쪽 물가에 자리잡은 이름난 마을들이다.
○ 청량산(淸涼山) : 산맥이 태백산에서 내려와 예안강(禮安江) 위에서 우뚝 솟았다. 밖에서 바라보면 다만 흙 봉우리가 두어 줄기뿐이다. 강물을 건너 골 안에 들어가면 사면의 석벽이 만 길이나 되는 높이로 빙 둘러 있어서 말로 형용할 수가 없다. 안에 난가대(爛柯臺)가 있는데 최고운(崔孤雲 최치원)이 바둑 두던 곳이라고 한다. 그 곁에 한 노파의 석상이 석굴 속에 안치되어 있다. 산에는 연대사(蓮臺寺)가 있다.
○ 문경의 새재[鳥嶺] : 결(缺)
○ 계립령(鷄立嶺) : 결(缺)
○ 병천(甁川) : 속리산의 남쪽에 환적대(幻寂臺)가 있다. 온갖 바위와 골짜기로 오솔길도 알 수가 없다. 냇물이 청화산(靑華山)을 따라 동쪽으로 흘러 용추(龍湫)에 흘러가는데 이것이 병천이다. 냇물의 남쪽에 있는 도장산(道藏山)과 청화산과 마주 보고 있다. 두 산 사이의 용추에서부터 그 위를 통틀어 용유동(龍游洞)이라고 한다.골 안의 평지는 모두 반석이다. 큰 냇물이 돌 위에 질펀하게 퍼져 흐르면서 조그마한 폭포가 되기도 하고, 작은 못이 되기도 하며 물발[水簾)이 되기도 하면서 물통[水槽] 같기도 하고 절구 같기도 하며, 짐승 같기도 하여 천태만상의 경치는 기기괴괴하다. 그 가운데 송씨(宋氏)의 정자가 있다.
○ 선유산(仙遊山) : 청화산의 동북쪽에 있다. 산정은 평탄하고 계곡이 매우 길다. 위에 칠성대(七星臺)ㆍ호소굴(虎巢窟) 진인(眞人) 최도(崔)와 도사 남궁두(南宮斗)가 도를 수련하던 곳이다. 이 있다. 시냇물이 흘러내려가 낭풍원(閬風苑)이 되고, 동쪽으로 흘러 대탄(大灘)으로 들어간다.
○ 풍기(豐基)의 욱금동(郁錦洞) : 소백산 아래에 있다. 물과 바위가 수십 리에 걸쳐 있다. 위에 비로전(毗盧殿)이 있고, 욱금동 입구에 퇴계의 서원이 있다.
○ 죽령 : 결(缺)
○ 예안의 도산 : 황지(黃池)에서 나오는 물이 여기서 큰 시내를 이룬다. 시내 위의 양쪽 산이 합하여 긴 골짜기가 되고 산기슭에는 모두 석벽이 있다. 퇴계가 거처하던 암서헌(岩棲軒)이 지금도 있다. 도산의 하류에 있는 분강(汾江)은 유수 이현보(李賢輔)의 고향이고, 그 남쪽은 좨주 우탁(禹倬)의 고향으로서 모두 경치가 좋은 곳이다.
○ 순흥(順興)의 죽계(竹溪) : 소백산에서 흘러나온다. 물과 바위가 청명하다. 위에 백운동 서원이 있다.
○ 청하(淸河)의 내연산(內延山) : 바위와 폭포의 좋은 경치가 있다. 산에 대ㆍ중ㆍ소 세 개의 돌솥이 바위 위에 벌여 있다. 사람들이 움직이는 세 개의 돌[三動石]이라고 일컫는다. 손가락으로 건드리면 약간 움직이는데 두 손으로 흔들면 움직이지 않는다.
○ 합천의 가야산 : 해인사가 있고 거기에 장경각(藏經閣)이 있다. 입구에는 홍류동(紅流洞)의 무릉교(武陵橋)가 있다. 나는 듯 쏟아지는 냇물과 반석으로 된 계곡이 수십리나 된다. 동북쪽에 만수동(萬水洞)이 있다.
○ 청송(靑松)의 주왕산(周王山) : 돌로 동부(洞府)를 만들었다. 샘과 폭포가 뛰어나게 기묘하다.
○ 대구의 팔공산(八公山) : 석봉이 가로 뻗쳐 있고 시내와 산이 자못 아름답다.
○ 비슬산(琵瑟山) : 산 속에 솟아 오르는 샘물과 천석(泉石)이 있다.
○ 청도(淸道)의 운문산(雲門山) : 이어져 있는 봉우리와 첩첩이 겹친 멧부리가 둘러 있고, 계곡은 깊숙하고 그윽하다.
○ 오산(鰲山) : 군의 남쪽 2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동쪽에 한 골짜기가 있는데 이름을 고사동(高沙洞)이라고 한다. 날씨가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려고 하면 먼저 골짜기가 울고 구름 기운을 뿜어낸다. 구름이 고사동 안으로 들어가면 비가 오고, 고사동 밖으로 나가면 바람이 분다.
○ 의흥(義興)의 바람구멍 : 현(縣)의 동쪽 30리에 있는 화산(華山)의 기슭에 있다. 넓이는 3자 2치이고, 길이는 2자 8치이다. 바람이 구멍에서 나오는데 매우 차다. 초여름에도 반드시 얼음이 언다.
○ 의성의 얼음구멍 : 빙산(氷山)의 큰 바위 아래에 있다. 높이는 3자이고, 넓이는 4자 8치이며, 가로 들어간 것이 5자 1치인데 이것을 바람구멍이라고 한다. 또 바위 바닥에 바로 내려 뚫어진 구멍이 있는데 넓이는 1자나 되나 깊고 얕은 것은 알 수 없다.입하(立夏) 뒤에 살얼음이 얼고, 매우 더워지면 얼음이 굳어지고, 토우(䨪雨 안개가 끼고 내리는 이슬비)가 끼면 얼음이 녹는다. 봄과 가을에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으며, 겨울이 되면 따뜻한 기운이 봄과 같다. 이것을 얼음구멍이라고 한다.
○ 진주의 지리산 :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한다. 산을 둘러싸고 아홉 고을이 있으며, 산의 높이와 넓이는 몇백 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가장 높은 봉우리는 동쪽은 천왕봉(天王峯)이라 하고, 서쪽은 반야봉(般若峯)이라 한다.서로 연결된 계곡은 깊고 커서 백 리나 되는 긴 골짜기가 많다. 산의 맨 꼭대기에 향적사(香積寺)ㆍ가섭대(迦葉臺)가 있고 내를 따라 서쪽에는 화암사(華岩寺)ㆍ연곡사(燕谷寺)가 있으며, 남쪽에는 신흥사(神興寺)ㆍ쌍계사가 있다.이 절에는 최고운(崔孤雲 최치원)의 화상이 있다. 냇가의 석벽에는 큰 글자로 ‘고운(孤雲)’이라고 새긴 것이 많다. 큰 냇물이 신흥사 앞에서 섬진강으로 흘러들어간다. 또 한 줄기 물이 향적사(香積寺) 앞에서 내려와 살천(薩川)에 이르러 진주를 돌아서 동쪽으로 흐르는데 이것을 청천강(菁川江)이라고 한다. 천왕봉에서 동쪽으로 내려가면 천불암(千佛菴)이 있고, 암자에서 조금 북쪽으로 올라가면 작은 굴이 있다.동쪽으로 바다를 굽어보며 서쪽으로 천왕봉을 등지고 있어 맑은 경치가 절묘(絶妙)하다. 이 굴을 ‘암법주굴(巖法主窟)’이라고 부른다. 또 만수동ㆍ청학동이 있는데 만수동은 지금의 구품대(九品臺)이고, 청학동을 지금은 해계(海溪)라고 한다.
○ 함양의 지리산 : 북쪽에 영원동(靈源洞)ㆍ군자사(君子寺)ㆍ유점촌(鍮店村)ㆍ벽소운동(碧霄雲洞)ㆍ추성동(楸城洞)이 있는데 모두 경치 좋은 곳이다. 산골물이 합쳐서 임천(瀶川)이 되고, 흘러 내려 가서 용유담(龍游潭)이 된다. 용유담의 양쪽에는 바윗돌이 평평하게 깔리고 겹쳐 쌓였는데 다 갈아 놓은 것 같다.가로 놓이기도 하고 옆으로 펴지기도 하였다. 어떤 것은 큰 장독을 닮았는데 그 깊이는 바닥이 없고, 어떤 것은 술단지 같기도 하여 천 가지 만 가지로 기기괴괴하다. 물 속에는 가사어(袈裟魚)라는 물고기가 있다. 물은 군(郡)의 남쪽 25리 지점에 이르러 엄천(嚴川)이 된다. 시내를 따라 올라가고 내려가면 개천과 돌의 경치가 매우 기이하다.
○ 산청의 환아정(換鵞亭)
○ 웅천(熊川)의 수락암(水落巖) : 율천현(栗川峴)의 남쪽 시냇물이 산허리의 바윗돌 사이로 흘러 들어가 수십 길의 폭포를 이루는데, 세 갈래로 나누어 아래로 쏟아진다. 그 지방 사람들이 다음해의 장마와 가뭄을 점치게 되는데 전라도가 가물려면 서쪽 갈래가 마르고, 경상도가 가물려면 동쪽 갈래가 마르며, 충청도가 가물려면 가운데 갈래가 흐르지 않는다고 한다.
○ 동래의 해운대(海雲臺) : 현(縣)의 동쪽 18리에 있다. 산기슭이 바다에 들어가서 누에고치의 머리와 같다. 그 위는 모두 동백(冬柏)과 두충(杜沖)으로 덮여 있다.
○ 순흥(順興)의 부석사(浮石寺) : 떠 있는 바위와 식사(息沙)가 있고 선비화(仙飛花) 나무가 있으며 취원루(聚遠樓)가 있다.
○ 밀양의 영남루(嶺南樓)
○ 전라도 전주의 만경대(萬景臺) : 부(府)의 동남쪽 10리 거리인 고덕산(高德山)의 북쪽 기슭에 있다. 석봉이 기이하게 빼어나고 형상이 층층으로 겹쳐진 구름과 같다. 그 위에는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다. 사면에 숲이 울창하고, 석벽은 그림과 같다. 서쪽으로 여러 산도(山島)를 바라볼 수 있고, 북쪽으로는 기준성(箕準城)과 통하며, 동남쪽은 태산(太山)을 등지고 있어서 경치가 천태만상이다.
○ 광주의 무등산 : 서석산(瑞石山)이라고도 한다. 한가운데는 높고 주위는 차차 낮으며, 높고 크게 50여 리를 웅장하게 서려 있다. 위에는 돌 수십 개가 가지런히 서 있는데, 높이는 백 척이나 될 것 같다. 주봉사(主峯寺)가 있고, 그 곁에 세 개의 돌이 있는데 높이가 수백 척이나 된다. 이름을 삼존석(三尊石)이라고 한다. 또 십대(十臺)가 있으니 그 중의 하나가 풍혈대(風穴臺)이다. 석벽 아래에 바람구멍이 있다.
○ 영암의 월출산 : 가장 높은 봉우리를 구정봉(九井峯)이라고 한다. 바위가 우뚝 솟은 것이 있으니 높이가 두 길이 된다. 그 곁에 구멍 하나가 있는데 겨우 사람 하나가 들어갈 만하다. 그 구멍을 따라 산 정상에 올라가면 20명이 앉을 수 있다. 그 평평한 곳에 오목하게 파여서 물동이처럼 물을 담고 있는 것이 아홉 개가 있는데 비록 가물더라도 마르지 않는다.봉우리 아래에 돌 두 개가 층층으로 된 바위 위에 우뚝 따로 서 있으니 높이는 한 길이 넘고 둘레는 열 아름이나 되는데 서쪽은 산 정상에 붙었고 동쪽은 절벽을 굽어보고 있다. 그 무게는 비록 몇천, 몇백 명을 동원하더라도 움직일 것 같지 않은데도 한 사람이 흔들면 떨어질 듯하면서 떨어지지 않으니 움직이는 돌이라고 부른다. 영석산(靈石山)이라고도 한다. 북쪽에 도갑사(道岬寺)가 있고, 서쪽 기슭에는 조암(槽巖)의 물과 바위가 있다.
○ 강진의 백운동(白雲洞) : 월출산의 남쪽에 있다.
○ 장흥의 천관산(天冠山) : 돌로 생긴 산세가 기묘한 경치이다. 항상 자줏빛 구름과 흰구름이 그 위에 덮여 있다.
○ 금산(錦山)의 덕유산(德裕山).
○ 제원천(濟源川) : 냇물과 산의 경치가 뛰어나게 좋다.
○ 무주(茂朱)의 적상산(赤裳山) : 산의 사면이 벽처럼 섰는데 층층으로 끊겨져서 치마와 같다. 여기에 사고(史庫)가 있다.
○ 주계(朱溪) : 냇물과 산의 경치가 뛰어나게 좋다.
○ 용담(龍潭) : 주취산(珠崒山)에서 냇물이 흘러가 수성천(壽城川)이 되어 달계(達溪)로 들어간다.
○ 구례 : 서쪽에는 봉동(鳳洞)의 물과 바위가 있고 동쪽에는 화엄사(華嚴寺)ㆍ연곡사(燕谷寺)의 아름다운 경치가 있으며, 남쪽에는 구만(九灣)이 있다. 지리산의 서쪽 가지가 여기서 끝난다. 잔수진(潺水津)이 둘러 안고 있다.
○ 장수의 장계(長溪) 결(缺)
○ 동복(同福)의 적벽(赤壁) : 내를 따라 올라가면 물염정(勿染亭)이 있다.
○ 남원의 광한루 결(缺)
○ 부안의 변산 : 산기슭이 서해(西海) 속으로 뾰족하게 들어갔다. 산봉우리가 백여 리를 빙 둘러 여러 겹으로 겹쳤으며 깊숙하고 그윽하다.
○ 순천 조계산(曹溪山)의 송광사(松廣寺) : 물과 바위가 깨끗하고 봉만(峯巒)이 밝고 곱다.
○ 순창의 복흥(福興) : 양쪽에 산을 끼고 큰 들이 열렸다. 냇물이 동쪽으로 흐르고 있다.
○ 황해도 문화(文化)의 구월산 결(缺)
○ 해주의 부용당(芙蓉堂) 결(缺)
○ 수양산(首陽山) : 폭포가 있고 산정(山頂)에 대(臺)가 있다. 그 가운데에 석담(石潭)의 물과 바위가 있다.
○ 연안의 와룡지(臥龍池) : 세상에서 부르는 이름은 남대지(南大池)이다. 겨울에 용이 이 못의 얼음을 가[耕]는 것을 보고 다음해의 풍년과 흉년을 점친다.
○ 장연(長淵)의 백사정(白沙汀) : 남쪽에는 연지(蓮池)가 있고 북쪽에는 승선봉(勝仙峯)이 있다. 삼면이 바닷가인데, 흰 모래가 평평하게 펴져 있는데,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무더기로 쌓여서 모래 언덕을 이루었다. 잔솔과 해당화가 붉은빛과 푸른빛을 서로 비친다. 또 입죽암(立竹巖)ㆍ비로봉(毗盧峯)이 있다.
○ 평산(平山)의 총수산(葱秀山) : 깎아 세운 듯한 절벽과 가파른 벼랑이 흐르는 물을 아래로 굽어보고 있다. <동월기(董越記)>
○ 멸악산(滅惡山) : 면악(綿岳)이라고도 한다. 동쪽 기슭의 화천동(花川洞)에 높은 재와 큰 무덤이 있다. 속언에 전하기를, 청(淸) 나라 사람들의 조상이 살던 땅이라고 한다. 《팔역지》
○ 황주(黃州) 결(缺)
○ 함경도 무산(茂山)의 백두산 : 바로 장백산(長白山)이다. 산이 모두 세 층으로 되어 있다. 높이는 2백 리나 되고 가로 뻗친 것이 천 리나 된다. 그 정상에 못이 있는데 주위가 80리이다. 남쪽으로 흐르는 것은 압록강이 되고, 북쪽으로 흐르는 것은 송화강과 혼동강(混同江)이 된다.동북쪽으로 흐른 것은 소하강(蘇下江)과 속평강(速平江)이 된다. 동쪽으로 흐른 것은 두만강(豆滿江)이 된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동쪽으로 흐르는 것은 아야고하(阿也苦河)가 된다.”고 하였는데, 아마 속평강(速平江)을 가리킨 듯하다. 《여지승람》에는 회령부에 들어 있다.
○ 회령의 쌍개암(雙介巖) : 부(府)의 남쪽 1백 43리에 있다. 바위의 높이는 열 길이 넘는다. 가운데에 두 개의 구멍이 있는데, 물이 항상 솟아 나온다. 그 동쪽 1리 거리에 또 바위가 있는데 바다를 위압하는 기세로 대치하고 있다. 양쪽 벼랑은 천 척(尺)이다. 위에 깊은 못이 있는데, 비가 오기를 빌면 잘 감응한다.
○ 경흥의 적지(赤池)
○ 부령(富寧)의 형제암(兄弟巖) : 부(府)의 남쪽 20리에 있다. 산기슭에 두 바위가 마주 보고 섰는데,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다. 작은 시내가 그 사이를 흘러내린다.
○ 허통곡(虛通谷) : 물과 돌이 맑고 경치가 기묘하나, 찾아가는 사람이 드물다.
○ 경성(鏡城)의 명간천(明澗川)
○ 명천(明川)의 칠보산 동부(七寶山洞府) : 돌로 된 지세가 깎아지른 듯이 험하고 굴은 조각한 것 같다.
○ 귀문관(鬼門關)
○ 길주의 성진(城津)
○ 장백산
○ 마천령(磨天嶺)
○ 단천(端川)의 마운령(磨雲嶺)
○ 이성(利城)의 시중대(侍中臺)
○ 함흥의 함관령(咸關嶺)
○ 낙민루(樂民樓) : 남쪽으로 군자하(君子河)를 굽어보고 있다. 물 위에 만세교(萬歲橋)가 있는데, 다리의 길이는 5리나 된다.
○ 영흥의 용흥강(龍興江)
○ 안변(安邊) 설봉산(雪峯山)의 석왕사(釋王寺) : 산 위에 세 개의 석봉이 높이 서 있기 때문에 검봉산(劍峯山)이라고도 한다.
○ 황룡산(黃龍山) : 산 위에 용추(龍湫)가 있다. 또 골 안에 구연(九淵)이 있는데, 물과 돌이 뛰어나게 좋으며 오압산(烏鴨山)이라고도 한다. 학포(鶴浦)의 큰 호수는 주위가 30여 리이고, 사면이 모두 흰 모래이다. 언덕의 모래 가운데에 해당화가 환하게 핀다. 약한 바람이 잠깐만 불어도 가는 모래가 날려 작게는 무더기를 이루고 크게는 봉우리를 이룬다. 경치는 영동 육호(嶺東六湖)에 비길 곳이 아니다.
○ 국도(國島) : 부(府)의 동쪽 60리 바다 가운데에 있다. 흰 모래가 명주와 같다. 그 위를 산이 반원의 구슬처럼 둘러 있다. 벼랑의 돌들은 모두 모나고 바르며 벽처럼 가지런하게 늘어섰다. 언덕의 돌들은 평평하고 둥근 것이 배열되어 있는데 한 면에 한 사람씩 앉을 만하나 가지런하지는 않다.수백 보를 가면 낭떠러지의 높이가 수백 척이 되는데, 그 돌들은 흰 빛이고 모나고 바르며, 길고 짧은 것이 일치한다. 한 줄기마다 그 꼭대기에 모두 작은 돌 한 개씩을 이고 있어서 화표주(華表柱)의 머리와 같다. 작은 굴이 있는데, 배를 타고 들어가면 점점 좁아져서 배가 들어갈 수가 없어, 굴의 깊이를 헤아릴 수도 없다.굴의 좌ㆍ우쪽에 묶어 세운 듯한 돌들은 바깥면의 것과 같으나 더욱 정연하고 가지런하다. 굴의 윗면에서 아래로 드리워진 석각(石脚)들은 모두 평평하고 반듯하여 장기판이나 바둑판을 엎어 놓은 것 같으며 마치 그 하나하나를 톱으로 끊어 놓은 것과 같다. 굴 북쪽에 둥근 돌이 배열된 곳이 있는데, 천 명은 앉을 수 있다.벼랑의 곁을 동남쪽으로 수백 보 더 가면 낭떠러지의 돌모양이 조금 달라진다. 물에 닳아 조그만 원으로 길이 5, 60척 되는 돌이 네모난 철망을 만들어 담아 놓은 것 같은데, 전면이 한 가닥이 다른 한 가닥과 같아서 사람들이 철망석이라고 한다. 이곡(李穀)의 기문 사면으로 둘러선 돌기둥 가운데는 모래 흙으로 화살대를 만들었다는 말이 전해 온다.
○ 영풍(永豐)
○ 평안도 평양 : 금수산의 모란봉이 진산(鎭山)이다. 대동강이 성(城) 밖을 둘러서 남쪽으로 흐른다. 대동문(大同門)의 문루는 강을 굽어보고 동쪽을 향하고 있다.
○ 연광정(練光亭) : 덕암(德巖)의 절벽 위에 있다. 강의 남쪽에는 십 리나 되는 긴 느릅나무 숲이 있다. 연광정을 돌아 북쪽으로 가면 청류벽(淸流壁)이 있다. 벽(壁)이 끝난 곳에 부벽루가 있는데 영명사(永明寺)의 동쪽이다. 절 뒤의 금수산(錦繡山) 산 정상을 을밀대(乙密臺)라고 부른다. 누대 아래의 강가에 기린굴(麒麟窟)과 조천석(朝天石)이 있고, 강의 상류에는 백은탄(白銀灘)과 능라도(綾羅島)가 있다.
○ 성천(成川)의 강선루(降仙樓) : 비류강(沸流江)을 굽어보고 있다. 삼백 칸이나 되어 건축이 웅장하고 화려하여 8도의 누각 중에서 첫째이다. 서쪽으로 흘골산(紇骨山)을 마주보고 있는데, 12개의 기이한 봉우리가 병풍처럼 깎아 세운 듯하다.
○ 안주(安州)의 백상루(百祥樓) : 누대의 곁 성 밖에는 칠불사(七佛寺)와 칠승석상(七僧石像)이 있다.
○ 영변의 약산동대(藥山東臺)
○ 묘향산 : 태백산이라고도 한다. 밖은 흙산이나 봉우리의 허리 위는 모두 기암수석이다. 동부(洞府)는 겹겹으로 둘러져서 성곽과 같고, 큰 냇물이 그 사이에 넓게 퍼져 있다. 위에 단군이 화생(化生)하였다는 석굴이 있다.
○ 의주의 통군정(統軍亭) : 압록강 위에 있다.


 

[주D-001]겨울에 …… 점친다 : 매년 겨울에 얼음이 터질 때, 세로 혹은 가로 터진다. 사람들이 이것을 용경(龍耕)이라고 하여 다음해의 풍년ㆍ흉년을 점친다. 가로 터지면 다음해 풍년이, 세로 터지면 홍수가 나고, 전연 터지지 않으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동국여지승람》참조.

 

 

서애선생문집 제6권
 서장(書狀)
군량(軍糧)과 백성의 양식을 논하는 서장 3월


적병들이 이달 22일에 벽제를 멀리 나와 혜음령(惠陰嶺)까지 이르러 창릉(昌陵 조선 예종의 능)ㆍ경릉(敬陵 조선 덕종의 능)ㆍ효릉(孝陵 조선 인종의 능)의 주산을 불태우고 날이 저물어서야 성중으로 돌아갔습니다. 24일에도 나와 삼각산의 중흥사(中興寺) 등을 불태웠습니다.
그곳에 매복하던 군사 창의 중위장(倡義中衛將) 박유인(朴惟仁)과 추의 중위장(秋義中衛將) 윤선정(尹先正) 및 의병장 이산휘(李山輝) 등은 중과부적으로 군사를 거두고 감히 맞붙어 싸울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적의 무리가 심히 많아서 들판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기 때문에 쉽사리 나가서 싸우기 어려웠으니, 그 형세가 그러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이 요즘 자세히 정세를 살펴보니 왜적이 사방으로 나와 노략질을 하지만 그 기세는 매우 약합니다. 우리 병사를 보기만 하면 꼭 도망하기 때문에 성 동서쪽 10리쯤 밖에서는 감히 제멋대로 풀을 베지 못하고, 만약 나오면 진을 통틀어 무리를 지어 근방을 가득 메우지만 또한 오래지 않아 물러가곤 합니다.
우리 군사들도 격려하여 무찌를 마음이 없지 않습니다. 예컨대 고양과 양주 등의 백성은 싸울 때마다 앞장서서 많이 죽이고 사로잡는데, 오직 걱정거리는 군량의 결핍입니다. 먹을 것이 없기 때문에 군사를 모을 수 없고, 군사를 모으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기회가 있더라도 계책을 세울 수 없으니, 가슴이 아프고 답답합니다. 만약 명 나라 군사의 양식 외에 아쉬운 대로 몇천 섬의 곡식만 있어 군량으로 사용한다면 어떻게 해보겠는데, 사방을 둘러보아도 양식을 변통할 곳이 없으니, 참으로 어찌할 수 없습니다.
서울에서는 처음 명군이 곧 온다는 소식을 듣고 성안에 가득하던 백성이 사방으로 도망가는 자가 수없이 많았습니다. 이윽고 명군이 갑자기 몰려오자 백성이 굶주림에 시달려도 구제할 수 없었습니다. 이전에 중국 군사의 말먹이 벼 1천 섬을 덜어내어 대략 구휼하였지만 그 형편은 만분의 일도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떠도는 백성들은 굶어 죽음이 임박하자 다시 성중에 드나들며 잿더미 속에서 먹을 것을 찾다가 더러는 적에게 잡혀 죽었습니다.
요즘은 들으니, 적들은 좋은 말로 속여서 돌아오게 하여 각기 쌀죽을 내어 주며 구원하는 척하기 때문에 서울 성안으로 돌아오는 백성이 날마다 끊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복병한 군인을 시켜 들어가는 것을 금지하면 백성들은 더욱 놀라 달아나 귀순하는 길을 막을까 두렵고, 모르는 체하면 이런 기회를 이용해서 적의 첩자가 오가며 우리의 기밀을 누설할까 두려우니, 난처하기 짝이 없습니다. 백성들이 하늘처럼 여기는 것은 오직 먹는 데 있을 따름인데, 지금 이미 살려 줄 길이 없다면 아무리 빈말로 날마다 달랜다 한들 흩어져 가는 민심을 수습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전쟁이 일어나자 군량을 조달하는 데 온갖 폐단이 어수선하게 일어나 얼마 남지 않은 백성은 뒹굴며 죽기만 기다리고, 들판엔 눈길 닿는 끝까지 한곳도 농사 지은 곳이 없습니다. 지난달에 신이 군관을 충청도 해변으로 보내 봄보리 1,000여 섬을 갖다가 서울 근처 백성들의 봄농사 밑천을 삼으려고 하였으나, 아직도 오지 않으니 때는 이미 지났습니다. 지금 비록 도착한다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다만 직산의 벼 3백 섬이 도착하여 어제부터 근처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 때맞추어 농사를 짓게 하였으나, 그것도 널리 미치지 못했습니다.
삼가 유지(諭旨)를 받으니, “백성은 정처 없이 떠돌며 굶주리다 못해 머리를 나란히 하고 구렁에 죽어간다고 하니, 한편으로는 곡식을 고루 나누어 죽어 가는 목숨을 살리고, 한편으로는 형편에 따라 농사를 권하여 가을 수확을 도모하도록 하라.” 하셨습니다. 신은 덕음(德音)을 받들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사오나, 밀가루 없는 수제비란 예로부터 어려운 일입니다. 근방의 굶주린 백성과 서울에서 피란길에 떠도는 사족(士族) 남녀 노약자들은 신이 여기에 있다 해서 구원을 바라고 날마다 찾아와서 아우성을 치는 사람이 백 명씩 천 명씩 떼를 지어 오지마는, 신은 빈손만 가지고 구원할 힘이 없습니다. 아침마다 하인을 시켜 돌아보게 하면, 하룻밤 사이에 죽는 자는 적으면 7, 8명이요, 많으면 10여 명이나 되니, 아픈 마음이 뼈를 깎는 듯하여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습니다. 만약, 이러한 상황으로 한두 달만 더 경과한다면 정말이지 아마도 살아남을 백성이 곧 없을 것 같습니다.
신은 듣자오니, 강화 같은 데는 떠도는 백성이 더욱 많고, 식량을 긁어모으는 군관들은 함부로 여염집에 들어가 굶주린 백성들의 입에 풀칠할 적은 곡식마저 독촉해서 원성이 거리에 넘치니, 차마 들을 수가 없습니다. 민심의 향배가 달린 이때에 그와 같은 행위는 마땅히 없어져야 합니다. 신은 비록 감히 말하지 않지만 적이 홀로 한심하게 여깁니다.
감히 바라옵건대 조정은 백성을 괴롭히는 모든 일은 다 제거하시고 부득이하여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제하더라도 후덕한 뜻을 선포하고 사나움을 금지하시면, 거의 백성은 작으나마 은혜를 입게 되고 아울러 국가의 영원한 계책이 될 것입니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17권
 변어전고(邊圉典故)
산성(山城)


경기도 한성부(漢城府) 북한산성(北漢山城)양주(楊州)에 속한다. 은 경성(京城)에서 북쪽으로 30리에 있으며, 동북으로 양주와의 거리가 30리이다. 숙종(肅宗) 신묘년(1711)에 석성(石城)을 쌓았다.
중흥동 석성(重興洞石城)은 중흥사(重興寺) 북쪽에 있으며, 주위가 9천 4백 17척(尺)이고, 성중에는 산이 있는데 노적가리 같다 하여 노적산(露積山)이라고 일컫는다. 《여지승람》
○ 개성부(開城府) 대흥산성(大興山城)은 천마산(天磨山)과 성거산(聖居山) 두 산 사이에 있으며, 성거산은 옛날에는 우봉현(牛峯縣)에 속하였고, 아래에 박연폭포(朴淵瀑布)가 있다. 숙종 2년 병진(1676)에 석성을 쌓았다.
○ 광주(廣州) 남한산성(南漢山城)은 경성에서 동남으로 40리 되는 한수(漢水) 남쪽에 있으며, 북으로 광주 옛 고을과 5리보다 조금 먼 거리이다. 동쪽은 백제(百濟) 옛 도읍이니, 온조왕(溫祚王) 13년(B.C.6)에 위례성(慰禮城)으로부터 여기에 도읍을 옮기고 성곽과 궁궐을 세웠으며, 위례성 민호(民戶)를 옮겨와서 12세 3백 80여 년을 지냈으며, 근초고왕(近肖古王) 26년(191)에 이르러 다시 남평양(南平壤)지금의 서울 으로 옮겼다. 초고왕이 옮긴 뒤부터 백제와 신라를 거쳐 고려에 이르기까지 1천여 년 동안의 성의 흥폐(興廢)는 다시 상고할 길이 없으며, 이조 때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하여 이 성에 뜻을 많이 두었으나 당국(當國)한 사람이 건의하지 못하고 말았다. 《계곡집(谿谷集)》,《남한성기략(南漢城記略)》
○ 광해(光海) 신유년(1621)에 보장(保障)으로 정하였다.
○ 인조(仁祖) 갑자년(1624) 이괄(李适)의 난 후에 여러 사람이 서울 가까운 곳에 마땅히 보장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영의정 이원익(李元翼)과 연평군(延平君) 이귀(李貴)가 이 성을 보수하기를 건의하니, 처음에 심기원(沈器遠)에게 명하여 그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가 얼마 있다 심기원이 상(喪)을 당하여 갔으므로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가 그 임무를 대신 맡았고, 목사 문희성(文希聖)과 별장 이일원(李一元) 등이 감독하였다. 갑자년(1624) 가을에 시작하여 병인년(1626) 가을에 공사를 끝내 마침내 고을의 감영을 옮기니, 비축한 물자와 백성들이 은연히 하나의 웅진(雄鎭)이 되었다. 《남한성기략》
○ 이서가 도첩(度牒)을 발행하여 승도(僧徒)를 통제하여 구역을 나누어 맡아 공사를 책임지게 하였다.
○ 병자년(1636) 3월에 남한산성에 온조묘(溫祚廟 )를 세웠다.
○ 수원(水原) 독성산성(禿城山城)은 옛 감영의 동쪽 7리 되는 곳에 있는데, 석축(石築)이다.
○ 강화(江華) 정족산성(鼎足山城)은 옛날에는 삼랑성(三郞城)이라 일컬었으며, 단군조(檀君條)에 상세하다. 선원각(璿源閣) 사각(史閣)이 그 안에 있다. 영조 무오년(1738)에 성을 개축하였다.
○ 통진(通津) 문수산성(文殊山城)은 부의 서쪽 20리 되는 곳에 있으며, 숙종 계유년(1693)에 후릉(厚陵)에 거동할 때에 이 산을 바라보고 승전(承傳)을 보내 형세를 그려서 들이게 하고, 강도(江都) 나룻길에 중요한 곳이라 하여 갑술년(1694) 봄에 비로소 석축(石築)을 쌓으라고 하였다.
○ 충청도 청주(淸州)의 상당산성(上黨山城)은 율봉역(栗峯驛) 북산에 있는데, 석축이다. 안에 12개 우물이 있으며, 《여지승람(輿地勝覽)》에는 “지금은 없어졌다.”고 하였다. 지금은 병사(兵使)와 우후(虞侯)가 머물러 있다.
○ 공주(公州) 쌍수산성(雙樹山城)은 공산성(公山城)이라고도 하는데, 주의 북쪽 2리 되는 곳에 있으며, 석축이다. 안에 우물 셋과 연못 하나가 있으며 군창(軍倉)이 있다. 세상에 전해지기를, 백제 때의 옛 성이며, 신라 김헌창(金憲昌)이 웅거하던 곳이라 한다. 《여지승람》
갑자년 이괄의 난 때에 인조가 머물렀던 행궁(行宮)이 있으며, 지금은 충청 중군(中軍)이 거처한다.
경상도 칠곡(漆谷) 가산산성(架山山城)칠곡ㆍ의홍(義興)ㆍ신녕(新寧)ㆍ군위(軍威)ㆍ하양(河陽)에 속하며, 칠곡은 본래 성주(星州) 아래 팔거(八莒)의 속현(屬縣)이다.
○ 인조 기묘년(1639)에 경상 감사 이명웅(李命雄)이 비로소 가산산성을 쌓았으니, 주위가 3천 8백 30보(步), 1천 7백 52첩(堞)이다. 처음에는 근방 몇몇 군(郡) 지역을 떼어 한 읍(邑)을 설치하고 병영을 옮겨 진소(鎭所)로 할 작정이었으나, 조정에서 다만 성주(星州) 1현만 떼어 칠곡부를 설치하였다. 이윽고 시기하는 자들이 백성들을 부역시킨다고 탄핵하였으며, 이로부터 산성의 일은 세상 사람들이 기피하였다. 뒤에 임담(林墰)이 감사가 되어 형승(形勝)을 임금께 갖추어 올려 이명웅에게 추후로 포상하기를 청하니, 이명웅에게 이조 판서를 추증하였다. 《미수기언(眉叟記言)》
○ 선산(善山) 금오산성(金烏山城)선산ㆍ금산(金山)ㆍ개녕(開寧)ㆍ지례(智禮)에 속한다. 은 지금 별장(別將)을 두었다.
○ 금오산은 고려 때 남숭산(南嵩山)이라 일컬어 해주(海州) 북숭산(北嵩山)과 짝하였다. 산성은 석축이며, 주위가 7천 6백 44척이고 높이가 7척인데, 석벽을 이용하여 성으로 한 것이 반이나 된다. 높고 험준하고 기이하고 가파르며 안에는 연못 셋과 시내 하나가 있으며, 고려 말에 백성이 왜(倭)를 피해 들어가 살았다. 군사를 나누어 지키고 있다. 《여지승람》
○ 성주(星州) 독용산성(禿用山城) 성주ㆍ고령(高靈)에 속한다.
○ 주의 서쪽 33리 되는 곳에 있으며, 석축이고, 주위가 1만 3천 64척인데, 그 안에 시내 셋과 샘이 하나 있다. 《여지승람》
○ 문경(聞慶) 조령산성(鳥嶺山城) 문경ㆍ함창(咸昌)에 속한다. 은 지금 별장을 두고 있다.
○ 조령은 현의 서쪽 27리 되는 연풍현(延豐縣) 경계에 있는데, 세상에서 초점(草帖)이라 부른다. 《여지승람》
○ 문경의 북쪽 조령 동쪽에 한 산성이 있는데, ‘어류(御留)’라 부른다. 혹 말하기를, 고려 태조가 잠깐 머무른 곳이라고 하며, 그 안의 넓이는 남한산성에 비교하여 10분의 9가 되고, 형세의 험고(險固)함은 남한산성에 비할 바가 아니다. 동남쪽은 절벽이 만 길이나 되어 새와 짐승도 넘지 못하며, 북쪽은 동남쪽에 비해 조금 낮지만 또 인력(人力)으로는 도저히 통과 할 수 없어 성첩(城堞)을 약간만 설치하면 안심할 만하다.그 서쪽에도 통과할 만한 길은 있지만 남한산성의 가장 험한 곳과 비교해 보아도 몇 곱절이나 된다. 성을 쌓은 곳은 5~6백 파(把)에 불과하고, 성안에는 샘이며 수목이 무진장이다. 자연적인 험함은 실로 동남 지방의 제일이라 4~5만 병갑(兵甲)을 수용할 만하니, 만전(萬全)한 곳은 이를 두고는 없을 것이다. 성 북쪽의 월암(月巖)과 그 동쪽의 작성(鵲城)ㆍ순흥(順興)과 그 서쪽의 조령ㆍ희양성(曦暘城)과 그 남쪽의 고모(姑母)ㆍ토천(兎遷)이 혹은 그지없이 험한 산성이요, 혹은 사닥다리 길이어서 관(關)을 설치하여 약간의 군사를 포치하여 머룰러 둔다면 성원(聲援)이 서로 닿고 호령(號令)을 서로 통할 수 있으니, 호령(湖嶺) 삼도(三道)와 동북 기전(畿甸)을 또한 진정(鎭定)시킬 수 있어서 서북에 일이 생기면 파천하여 머물 곳이 될 것이고 남방에 위급이 있으면 방어할 곳이 될 것이다. 백강집(百江集)
○ 진주(晉州) 촉석산성(矗石山城) 진주에 속한다
○ 주의 남쪽 1리 되는 곳에 있으며 석축이고, 주위가 4천 3백 59척이며, 높이가 15척인데, 안에 우물과 샘이 각각 세 개씩 있다.
○ 대구(大丘)의 공산성(公山城), 인동(仁同)의 천생성(天生城), 의령(宜寧)의 정진(鼎津), 삼가(三嘉)의 산성, 합천(陜川)의 야로산성(冶爐山城), 성주(星州)의 가야산성(伽倻山城)은 모두 천연적으로 험한 곳이니, 마땅히 차례로 수축하여 곡식을 쌓고 군사를 주둔시켜 굳게 지키면서 움직이지 않고 청야(淸野)하여 적을 기다리면, 적이 앞으로는 노략질할 것이 없고 뒤로는 꺼리는 바가 없을 것이니, 나라를 보호하고 도적을 막는 방도에 실로 편리할 것이다. 《서애집(西厓集)》
○ 전라도 장성(長城)의 입암산성(笠巖山城)장성ㆍ태인(泰仁)ㆍ고창(高敞)ㆍ정읍(井邑)ㆍ흥덕(興德)에 속한다. 은 지금 별장과 승장(僧將)이 있다. 입암산(笠巖山) 옛 성은 석축인데, 주위가 1만 2천 28척이며, 사면은 높고 가운데는 평평하며 안에 시내가 하나 있다. 《여지승람》 정읍(井邑)
○ 정읍 입암산성은 산세가 험하고 높으며 꼭대기는 움푹 파였고 사면은 높고 가운데는 평평하다. 성이 그 지형 관계로 모양이 말 구유 같으며 각(閣)이 비계[棚] 위에 있다. 밖에서 쳐다보면 은은하고 엄연해서 그 안을 헤아릴 수 없다. 성중에서는 사방으로 눈을 가리는 것이 없으며 샘과 못이 넉넉하여 1만 마리의 말을 물 먹일 수 있다. 험하고 견고하기가 금성(金城)에는 미치지 못하나 형세는 훨씬 낫다. 동ㆍ남ㆍ북 세 문이 적의 공격을 받을 곳이고, 입암(笠巖) 한면(一面)은 위령(葦嶺)의 큰길을 굽어 보며 제압하니, 지세가 더욱 기기하고 장대하다. 《백사집(白沙集)》의 체찰사(體察使) 때의 장계
○ 담양(潭陽) 금성산성(金城山城) 담양ㆍ순창(淳昌)에 속한다. 은 지금 별장이 있다.
○ 부의 북쪽 15리 되는 곳에 있으며, 석축이고 주위가 1천 8백 4척이며, 안에 시내 하나와 샘 아홉 개가 있다. 《여지승람》
○ 담양의 금성은 어느 때에 쌓은 것인지 알 수 없다. 《역대병요(歷代兵要)》를 상고하면, “고려 말에 아기발도(阿只拔都)가 장차 광주(光州) 금성에서 말에 먹이를 먹이겠다고 소리쳤다.”고 기록되었는데, 주(註)에는 지금 담양부에 있다고 하였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우리 태조가 남원(南原)에서부터 운봉(雲峯)을 넘어 적의 형세가 매우 성함을 듣고 제장(諸將)과 함께 꾀하기를 “만일에 차질이 있으면 물러가 금성을 보전하자.”고 했다고 하니, 이 금성이 그 금성인지 알 수 없다. 동ㆍ서ㆍ남 세 문이 적의 공격을 받을 곳이며, 담양에서부터 올라오는 데는 길이 산등으로 나서 한 줄기가 백 번이나 꼬불꼬불하여 6, 리를 돌아야 비로소 남문에 도달한다.남문 밖 양 곁은 모두 깊은 구렁이며 동문 밖 6, 0보(步)는 돌이 옆으로 서서 성중의 한 면을 노려보고 있으며 화살이 올 수 있는 거리이니 가장 꺼리는 곳이다. 지금 만약 양마성(羊馬城)을 뒤로 물려 쌓는다면 먼저 점거당할 우려에 대비하게 될 것이며, 서문의 양 곁은 산이 모두 높게 솟아 적이 오면 구멍 가운데 든 것 같아서 감히 함부로 곧장 충돌하지 못할 것이다. 샘이 증암(甑巖) 밑에서 솟아 시내를 이루어 흘러내리는데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으며, 또 9개 우물이 있다. 동북과 정남에는 벽이 천 길 높이로 서 있으며, 성 모양이 기이하고 장대하며 넓다. 사변이 높고 가운데가 꺼졌으며 밖에는 큰 봉우리가 없어서 안을 엿보기가 어렵고, 성 밖의 사면은 길이 여러 갈래로 퍼져있으니 참으로 형세가 좋은 곳이다. 《백사집》
○ 정유란(丁酉亂)에 왜군이 호남의 여러 성을 보고 그 허술함을 비웃지 않는 곳이 없었으나, 담양의 금성을 보고서는 말하기를, “조선이 이 성을 굳게 지켰다면 우리 군사가 어떻게 함락시켰는가.” 하였다. 《서애집》의 체찰사 때의 장계
○ 무주(茂朱)의 적상산성(赤裳山城)은 안에 사고(史庫)가 있다. 그래서 무주 부사가 수성장(守城將)을 겸하고 있다.
○ 상산(裳山)은 현의 남쪽 15리 되는 곳에 있는데, 민간에서 치마성[裳城]이라 부른다. 사면이 절벽이며 층층이 높아서 마치 사람의 치마 같기 때문에 이름하였다. 옛사람이 험준함을 이용하여 성을 만들었으며 겨우 두 길이 통할 뿐인데 그 안은 평탄하고 넓어 개울물이 사방에서 흐르니 정말 하늘이 만든 험지이다. 글안(契丹)과 왜구의 난 때는 근처 수십 군민이 모두 이 성에 의지하여 안전하였으며, 고려 때 최영(崔瑩)이 산성을 쌓고 창고를 지어 뜻밖의 변란에 대비하자고 청했었다. 우리 세종조에 체찰사 최윤덕(崔潤德)이 고을을 돌아보다가 이에 이르러, 마침 운무(雲霧)가 자욱하여 두루 돌아보지 못하고서 성을 쌓고 창고 설치하기에 마땅치 않다고 하여 일이 결국 중단되었다. 《여지승람》 장빈호찬(長貧胡撰)
○ 상산 고성(古城)은 석축으로 주위가 2만 6천 9백 20이다.
○ 남원(南原) 교룡산성(蛟龍山城)
○ 부의 서쪽 7리 되는 곳에 있으며, 북쪽에는 밀덕(密德)ㆍ복덕(福德) 두 봉우리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다. 산성은 석축으로 주위가 5천 7백 17척이고 높이가 10척이며, 안에는 99개의 우물과 조그만 시내 하나가 있고 군창(軍倉)이 있다. 《여지승람》 산이 조종(祖宗)이 없이 들 가운데 우뚝 솟았으며, 두 봉우리가 있는데 북쪽은 밀덕이고 남쪽은 복덕이다. 산을 둘러 성을 쌓았는데 서쪽은 높고 동쪽은 낮으며, 성은 모두 석축이고 8개 우물이 있다. 명 나라 장수 유정(劉綎)이 일찍이 이 성에 올라 지맥(地脈)을 좇아 우물을 파자 간간이 물이 나오니 유정이 말하기를, “성이 크면서 펀펀하니 인력을 반드시 들여야 하겠다.” 하였다. 성 밖 서ㆍ남ㆍ북 삼면에는 안을 들여다 볼 만한 높은 봉우리가 없고, 밀덕과 복덕 두 줄기는 동으로 뻗쳐 내렸는데, 마치 두 마리 이무기가 나란히 누워 있는 것 같다. 그 가운데는 세 동(洞)으로 나누어지는데, 가운데가 적암(赤巖)이고, 북쪽이 우암(牛巖)이며, 남쪽이 빙암(氷巖)이다.두 봉우리는 머리가 되고 두 줄기는 등이 되며 세 동(洞)은 배가 되어 폐부(肺腑)가 겹쳐 가리고 남ㆍ북이 막히어 수미(首尾)가 서로 통하지 않고, 가슴과 등이 서로 관통되지 않아서 혹시라도 급할 때를 당하면 쇠와 북[金鼓]의 호령으로 지휘할 수 없다. 동문이 적의 공격을 받을 곳인데, 문 밖에 큰 길이 있어 소와 말이 모두 통하며, 길 위에서 성안을 내려다 보면 개미 새끼까지 헤아릴 수 있다. 문에서 수백 보 되는 거리에 높은 언덕이 있는데, 화살이 미칠 수 없는 곳이며, 뒤쪽이 평평하여 적이 오면 군사를 감출 만하다. 우리 태조가 일찍이 이곳에 군사를 주둔시켰다가 적과 싸워 쳐부셨다. 《백사집》
○ 전주(全州) 위봉산성(威鳳山城)은 별장이 있다.
○ 동복(同福) 옹성산(甕城山)은 세 바위가 있는데, 모양이 독[甕]과 같으므로 옹성이라 이름하였다. 성의 남ㆍ북에 두 문이 있는데, 다만 이곳이 적의 공격을 받을 곳이다. 구불구불한 돌 길은 겨우 인적(人跡)이 통하며, 길이 벼랑 아래에 나고 성은 벼랑 위에 있어 성 위에 왕래하는 사람을 내려다 볼 수 있으며, 한 사람이 돌을 굴리면 천 사람이 지나가지 못한다.동성(東城) 아래 10여 보 되는 곳에 뾰죽한 봉우리가 마주 서 있고 사이에 좁은 길이 있는데, 두 사람이 나란히 설 수 없으며, 남에서 서쪽으로 뻗치고 북에서 동쪽까지는 모두 온 돌[全石]이 벽을 깎아질러서 만 길이나 되니, 원숭이조차 지나가지 못할 그야말로 천험(天險)이다. 성안에 7개의 우물이 있으나 그다지 풍족하지는 않으며, 서봉(西峯) 아래로 가만히 적벽(赤壁)을 통하여 새끼줄을 드리워 큰 시내에서 물을 길을 수 있는데, 깎아지른 석벽이 공중에 달려 있어 적병은 그것을 볼 수 없다. 옛 터가 많이 퇴폐했었는데, 황진(黃進)이 현감으로 있을 때, 옆으로 동북면의 한 구석을 가로질러 내성(內城)을 쌓았다. 《백사집》
○ 나주(羅州) 금성산성(錦城山城)은 서ㆍ남ㆍ북 세 면은 지세가 험준하고, 동문 밖의 한 면은 평평하여 적의 공격을 받을 곳이다. 성중에 5개의 우물이 있는데, 동문 큰 골의 2개의 우물이 가장 크다. 또 네 봉우리가 있는데, 북쪽은 정녕(定寧), 남쪽은 다복(多福), 서쪽은 오도(悟道), 동쪽은 노적(露積)인데, 정녕이 주봉(主峯)이고, 동ㆍ서ㆍ남 세 봉우리는 앞에서 손을 맞잡고 읍하는 것 같아 손짓에 서로 응하고 언어를 서로 통할 수 있다. 동ㆍ북 두 봉우리의 갈래는 고리처럼 둘러서서 골을 이루어 군사를 감출 만하며, 혹은 샘이 부족하다 말하나 성 쌓을 때에 부역하는 사람 5천 명이 동문의 샘 한 곳에서 물을 마셔도 물이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산은 북쪽은 높고 남쪽은 낮으므로 성의 형세가 옆으로 기울어졌다.동문 밖 산등성은 수백 보로 이어져 가다가 장원봉(壯元峯)에 이르렀고, 산등성을 좇아 성안을 우러러 볼 수 있으며, 철환(鐵丸)이 미치는 거리다. 서ㆍ남 두 면은 성이 산허리를 둘러서 내외로 구분되어 첩(堞)을 지키는 사람은 몸이 산 밖에 있되, 동ㆍ남의 이면(裏面)과는 지척간이지만 서로 돌아볼 수 없으니, 이것이 병가(兵家)에서 꺼리는 바다. 역대 연표(歷代年表)를 상고하건대, 삼별초(三別抄)가 반란을 일으켜 진도(珍島)에 웅거하다가 전라도로 침범해 오니 군(郡)ㆍ현(縣)이 모두 항복했는데, 상호장(上戶長) 정여(鄭呂)가 성을 지키기를 주창하여 여러 고을 사람을 거느리고 와서 금성을 보전하기로 하고, 가시나무를 심어 책(柵)을 삼고 무기를 들고 사수(死守)하니 적이 7일 밤낮을 공격하였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글안(契丹)이 침노해 오자, 현종이 남쪽으로 파천하여 군사를 이곳에 머무르게 하니, 글안이 패하여 물러났으므로 현종이 이 주(州)를 승격시켜 목(牧)으로 했다고 한다. 《백사집》
○ 강진(康津) 수인산성(修因山城)은 병영(兵營) 동쪽에 있다. 본영에서 남문에 이르자면 좁은 길을 돌고 돌아 문 밖에 닿으며, 지세가 비좁아서 사람이 나란히 서질 못한다. 북문은 더욱 험준하며, 다만 동문이 적의 공격을 받을 곳이고, 문밖에 골이 있는데 수덕(修德)이라 한다. 산세가 높았다 낮았다 하여 성의 안과 밖이 서로 환히 보이며, 화살이 모두 미친다. 동문에서 남쪽으로는 별도로 소동문(小東門)이 있으며, 문밖 백 수십 보 되는 곳에 한 봉우리가 우뚝 막아 섰는데, 물희봉(勿喜峯)이라 부른다. 적이 만약 먼저 점거하면 성중 한 면은 감히 발을 붙이지 못할 것이다.선적봉(仙跡峯)은 성 밖에 또 깎아지른 뫼가 있는데 수십 보를 돌출했으며, 네 구석이 깎아질러 쉽게 오를 수 없다. 노적(露積)이 주봉(主峯)인데, 서ㆍ남ㆍ북 세 면은 매우 험한 곳이지만 사이에 언덕이 있어 적이 의지할 만하고, 물희봉은 더욱 크게 해를 받을 곳이며, 동문 안팎은 장애가 없으니 장점이 단점을 가리지 못한다. 옛날에는 샘을 걱정했으나 동문 밖 수십 보 되는 곳에 여러 골짜기의 샘이 합해 시내를 이루었으며, 지금은 구성(舊城) 밖에 별도로 자성(子城)을 쌓으면서 시내를 에워싸 시내가 성안에 들어갔다. 주위가 7백여 척 가량 된다. 《백사집》
○ 황해도 황주(黃州) 정방산성(正方山城)은 별장이 있다.
○ 정방산은 주의 남쪽 20리 되는 곳에 있다. 《여지승람》
○ 해주(海州) 수양산성(首陽山城)은 별장이 있다.
○ 수양산은 고을의 동쪽 5리 되는 곳에 있으며, 산꼭대기에 대(臺)가 있고, 산성은 석축인데, 주위가 2만 8백 56척이고, 높이가 18척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옛날 안함(安咸)ㆍ원로(元老)ㆍ동중(蕫仲) 세 사람이 처음 터를 잡아 쌓았으며, 산중에 또 고죽군(孤竹郡)의 옛 터가 있다 한다. 《여지승람》
○ 은율(殷栗) 구월산성(九月山城)은 별장이 있다.
○ 구월산은 현의 동쪽 10리 되는 곳에 있으며, 산허리에 물이 있는데, 고요연(高腰淵)이라 부른다. 모양이 가마솥 같고, 그 깊이는 헤아릴 수 없다. 속세에서 말하기를 용이 있어 가물 때에 비를 빌면 바로 효험이 있다고 한다. 산성은 석축인데, 주위가 1만 4천 3백 86척이고, 높이가 15척이다. 성 모양이 큰 배와 같으며, 남ㆍ북은 길이 없고 동ㆍ서에는 다만 잔도(棧道)가 있을 뿐이다. 성안은 나무가 다발로 묶어놓은 것 같으며, 물이 여러 골짜기에서 나와 시내 하나를 이루고, 성의 서쪽에 이르러서는 양 곁에 우뚝 솟은 산이 문처럼 서 있는데, 물이 문밖으로 흘러 나가 폭포가 되었다. 성중에 좌우 두 창고가 있는데, 문화(文化)ㆍ신천(信川)ㆍ안악(安岳)의 창고는 왼쪽에 속하고, 은율(殷栗)ㆍ풍천(豐川)ㆍ송화(松禾)ㆍ장연(長淵)ㆍ장련(長連)의 창고는 오른쪽에 속한다. 《여지승람》
○ 평산(平山) 태백산성(太白山城)
○ 서흥(瑞興) 대현산성(大峴山城)은 별장이 있다.
○ 대현산은 부의 북쪽 7리 되는 곳에 있으며, 고을의 진산(鎭山)이다. 산성은 석축인데, 주위가 2만 2백 38척이고, 높이가 23척이며, 안에 2개의 샘과 1개의 못이 있다. 서흥ㆍ수안(遂安)ㆍ곡산(谷山)ㆍ신계(新溪)ㆍ우봉(牛蜂)ㆍ토산(兔山)ㆍ황주(黃州)ㆍ봉산(鳳山) 등에 군창(軍倉)이 있다. 《여지승람》
○ 재령(載寧) 장수산성(長壽山城)은 별장이 있다.
○ 장수산은 군(郡)의 북쪽 5리 되는 곳에 있는데, 고을의 진산이며, 산성은 석축인데, 주위가 8천 9백 15척이고, 높이가 9척이다. 암석이 험준하게 막혔고, 안에 7개의 샘이 있으며, 군창이 있다.
○ 평안도 자산(慈山)의 자모산성(慈母山城)자산ㆍ성천(成川)ㆍ영유(永柔)에 속한다. 은 별장이 있다.
○ 자모산은 군의 서쪽 20리 되는 곳에 있으며, 산성은 석축인데, 주위가 1만 2천 7백 33척이고, 높이가 13척이다. 성안 골짜기마다 샘이 솟아 사람들이 말하기를, 99개의 샘이 있다고 한다. 군창이 있다. 《여지승람》
○ 용강(龍岡) 황룡산성(黃龍山城)은 별장이 있다.
○ 선천(宣川) 검산산성(劍山山城)
○ 검산은 군 서쪽 20리 되는 곳에 있고, 봉우리가 험준하여 칼날 같다. 《여지승람》
○ 선천 동림산성(東林山城)은 군의 북쪽 62리 되는 곳에 있으며, 바로 옛날의 선주성(宣州城)이다. 서ㆍ북은 토축(土築)이고, 동ㆍ남은 석축이며, 주위가 1만 7천 5백 62척이고, 안에 샘 5개가 있다. 《여지승람》
○ 창성(昌城) 당아산성(當峨山城) 《여지승람》에는 당아리산(堂阿里山)이라 하였다.
○ 의주(義州) 백마산성(白馬山城)은 주의 남쪽 30리 되는 곳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백룡마(白龍馬)가 나와 놀아서 이름하였다고 한다.
○ 영변(寧邊) 철옹산성(鐵甕山城)
○ 약산(藥山)은 부의 서쪽 8리 되는 곳에 있으며 진산이다. 고기(古記)에, “약산의 험준함은 동방에서 제일이다.” 하였으며, 봉우리들이 층층 겹겹으로 서로 둘러 서서 모양이 마치 철옹(鐵甕) 같다. 《여지승람》
○ 세종조에 평안도 도체찰사 황희(黃喜)가 약산 성터를 정하여 영변부(寧邊府)를 설치해서 도절제사 영(都節制使營)으로 삼았다. 이때에 북쪽 오랑캐가 누차 변방을 침입하므로 중요한 곳에 성을 쌓아서 막으라고 명하였다. 판관 이정(李禎 퇴계 이황의 증조)이 감독하였다. 《서애집》
○ 용천(龍川) 용골산성(龍骨山城)
○ 용골산은 일명 용호산(龍虎山)이라고 하며, 군의 동쪽 8리 되는 곳에 있는데, 진산이다.
○ 철산(鐵山) 운암산성(雲暗山城)
○ 웅골산(熊骨山)은 군의 동쪽 10리 되는 곳에 있는데 진산이며, 운엄사(雲嚴寺)가 있다. 《여지승람》
○ 곽산(郭山) 능한산성(凌漢山城)
○ 능한산은 웅화산(熊花山)이라고도 하며, 군의 동북쪽 7리 되는 곳에 있는데, 진산이다. 산성은 석축인데, 주위가 6천 9백 13척이고 높이가 13척이며, 성안에 23개의 우물과 1개의 못이 있고, 군창이 있다.
○ 평양(平壤) 보산산성(保山山城)
○ 압록강(鴨綠江) 이남 청천강(淸川江) 이북의 각 읍에는 모두 산성이 있으니, 의주(義州)의 백마(白馬), 용천의 용골, 철산의 운암, 선천의 검산, 곽산ㆍ정주의 능한, 가산(嘉山)의 효성(曉星)이 모두 험준한 곳을 택하여 요해지(要害地)에 웅거한 것이니, 고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식암집(息菴集)》
○ 구성(龜城)이 가장 요해지인데, 예전엔 산성이 있어 형세가 매우 좋았다. 지금은 편의에 따라 수축해서 적의 침입을 막아야 할 것이다. 곽산의 능한산성과 창성(昌城)의 청산산성(靑山山城)은 예전에는 창고가 있었으니, 지금 또한 마땅히 수축해야 한다.
○ 여러 곳의 산성이 자못 읍내와 서로 멀어 위급에 임해서야 비로소 고을에 사는 백성들을 거두어 산성에 들어가게 하니, 적이 멀리 있으면 어리석은 백성들은 험하고 먼 것을 꺼려 성에 들어가 보호받기를 싫어하고, 적이 가까이 있으면 산과 들로 숨어 명령을 좇으려 하지 않는데, 하물며 이웃 고을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바랄 수 있겠는가. 전라도 한 도로 말하면 담양부(潭湯府)를 마땅히 금성(金城)에 설치하여 근처 몇 고을을 떼어서 더해주고, 정읍과 장성을 입암(笠巖)에 옮겨서 또한 이와 같이 해야 할 것이다. 영남의 모든 산성도 모두 그 고을의 감영이 되게 하여 주둔 군사가 서로 바라볼 수 있고 서로 의지할 수 있는 형세를 이루게 하면 나라가 저절로 견고해 질 것이다. 강항(姜沆)의 《간양록(看羊錄)》
○ 성은 본래 고을을 보호하는 것이니, 사람의 집에 울타리가 있어 보호하는 것과 같다. 우리나라는 고을은 빈약하고 산이 많으므로 산성과 고을의 구별이 생겼으니, 본말을 알지 못함이 심하다. 대개 성을 다른 곳에 쌓고서 위급에 임해서야 비로소 고을 백성들을 거두어 들이니, 백성들이 들어가려 하지 않아 마침내 빈 성이 되어 모든 일이 어긋나며, 들어간 사람도 마음을 붙히지 못하고 서로 이끌고 도망치니, 장차 누구와 함께 성을 지키겠는가. 평시의 살던 집과 부고(府庫)와 백성을 이용하여 더불어 함께 지켜 사람마다 부모ㆍ가족에 대한 애착이 있는 것과 비교하면 이해가 서로 전혀 다르다. 가령 산성을 고수하고 읍에 있는 창고와 백성과 가축을 모두 버려 적에게 준다면 산꼭대기만 지킨들 끝내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반드시 망할 것이다. 《반계수록》
○ 우리나라 사람은 의레 산성을 말하지만, 지난 번 금주성(金州城)은 평지인데도 포위된 지 3년 동안 싸워 끝내 함락되지 않았다. 만약 외로운 산성에 갑자기 투입했다면 몇 달이 되지 않아서 식량이 끊어지고 사람들이 흩어져서 보전하지 못했을 것이니, 어찌 해를 넘기며 지탱하기를 바라겠는가. 그 이해를 여기서도 볼 수 있다. 《반계수록》


[주D-001]청야(淸野) : 청야는 적병이 침입할 때에 백성들을 전부 성안으로 몰아 들이고, 들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아 적병으로 하여금 거처할 곳과 먹을 것이 없어 곤란을 당하게 하는 전술이다.

 청장관전서 제3권
 영처문고 1(嬰處文稿一) - 기(記)
북한산(北漢山) 유람기


이틀 밤을 묵고 다섯 끼니를 먹으면서 산의 내외에 있는 열한 개의 사찰과 암자(庵子)ㆍ정자(亭子)ㆍ누(樓)를 각각 하나씩 관람하였다. 보지 못한 것은 암자가 하나 사찰이 둘이니, 봉성사(奉聖寺)와 보국사(輔國寺)이다. 중은 ‘이는 사찰(寺刹) 중에서 최하의 것이다’ 하였다. 함께 유람한 사람은 자휴(子休 남복수(南復秀)의 자)와 여수(汝修 남홍래(南鴻來)의 자)와 나 3인이었다. 시(詩)는 모두 41편이며, 암자(庵子)ㆍ사찰ㆍ정자ㆍ누각에는 각각 기(記)가 있다.
이 산은 대개 백제(百濟)의 고도(古都)이니 우리 조종(祖宗)께서 군사를 훈련하고 양곡을 저장하여 보장(保障)하는 곳으로, 서울과의 거리는 30리다.
문수문(文殊門)으로 들어가 산성(山城)의 서문으로 나왔다. 때는 신사년(1761, 영조 37) 9월 그믐날이다.

세검정(洗劍亭)
수많은 돌을 따라 올라가니 정자는 큰 반석 위에 있다. 돌은 흰 빛인데, 시냇물은 돌 사이로 흐른다. 난간에 의지하여 바라보고 있노라니 물소리가 옷과 신을 스쳐갔다. 정자의 이름은 세검정이며 왼쪽에는 선돌[立石]이 있는데 ‘연융대(鍊戎臺)’라 새겨져 있다.

소림암(小林庵)
세검정의 북쪽 수십 보 되는 곳에 석실(石室)이 있고, 3개의 석불(石佛)이 앉아 있는데, 예로부터 내려오며 향화(香火)가 끊어지지 않는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굴(窟)만 보았고 감실(龕室 탑 밑에 있는 작은 석실로 여기서는 불단(佛壇)을 말함)은 없었는데, 지금은 작은 지붕을 만들어 덮었다. 중은 이를 정화(淨和)라고 한다.

문수사(文殊寺)
저녁때 문수사에 이르러 평지를 굽어보니 하늘의 절반쯤 오른 듯하다. 불감(佛龕 불상을 모신 감실)을 큰 석굴(石窟)로 만들었다. 감실을 따라 좌우로 구불구불 걸어가는데 물방울이 비오듯하여 옷을 적신다. 끝까지 가자 돌샘이 있는데 물빛이 푸르고 차갑다. 좌우에는 5백 나한(羅漢)을 나란히 앉혀 놓았다. 석굴의 이름은 보현사(普賢寺)라고 하기도 하고 문수사라고도 한다. 삼불(三佛)이 있는데 돌로 만든 것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이고 옥(玉)으로 만든 것은 지장보살(地藏菩薩)이며, 금으로 도금한 것은 관음보살(觀音菩薩)이다. 이 때문에 삼성굴(三聖窟)이라고도 한다. 굴 옆에 칠성대(七星臺)라고 부르는 대(臺)가 있다. 여기에서 머물러 밥을 먹고 북으로 문수성문(文殊城門)에 들어갔다.

보광사(普光寺)
날이 저물어 성문에 이르니 바로 산이 끝나는 곳이다. 성문의 아래는 지형이 약간 낮고 단풍나무[楓]ㆍ남나무[楠]ㆍ소나무[松]ㆍ삼나무[杉]가 수없이 많으며, 텅 빈 골짜기에는 메아리가 잘 울린다. 찬 기운이 처음으로 사람을 엄습하였다.
드디어 보광사에 이르러 법당(法堂)의 오른쪽 조정(藻井 화재를 예방한다는 뜻으로 수초(水草) 모양의 그림을 그려넣은 천장)에 세 사람의 성명(姓名)을 크게 써 놓았다.
화상(和尙)들은 모두 무예[兵]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으며, 벽실(壁室)에는 창ㆍ칼ㆍ활ㆍ화살 등을 저장하고 있었다.
항혼 무렵에 태고사(太古寺)에 도착하여 투숙하였다.

태고사(太古寺)
절의 동쪽 산봉우리 밑에 고려(高麗)의 국사(國師)인 보우(普愚)의 비(碑)가 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호)이 찬술하고 권주(權鑄)가 글씨를 썼다. 국사의 시호는 원증(圓證)이고 태고(太古)는 호이다. 신돈(辛旽 고려 말엽의 요승(妖僧))이 권세를 잡자 글을 올려 그 죄를 논하였으므로 당시의 임금에게 축출되었으니 불가로서 탁월하게 충절이 있는 자이다. 입적(入寂)하자 사리(舍利) 백 개가 나왔는데 이것을 세 곳의 부도(浮屠 사리탑)에 저장하였다.
비음(碑陰 비의 후면)에 우리 태조(太祖)가 나라를 세우기 전의 벼슬과 성명(姓名)이 있는데 벼슬은 ‘판삼사사(判三司事)’라고 되어 있다.
상(上 영조를 가리킴)이 금년에 특별히 명하여 비각을 지어 덮게 하였다.
숙민상인(肅敏上人)이라는 자가 있는데 조금은 글을 알고 성품이 온화하고 담박하여 말을 나눌 만하였다.
조반을 먹고 용암사(龍巖寺)로 향하였다.

용암사(龍巖寺)
이 절은 북한산의 동쪽으로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북쪽에는 다섯 봉우리가 있는데 큰 것이 셋이니, 백운봉(白雲峯)ㆍ만경봉(萬景峯)ㆍ노적봉(露積峯)이다. 그러므로 삼각산(三角山)이라 부른다. 인수봉(仁壽峯)과 용암봉(龍巖峯)은 작은 것이다.

중흥사(重興寺)
용암사를 떠나 오던 길을 따라 내려가니 지대가 조금 평평하였다. 거기에 중흥사(重興寺)라는 절이 있는데 고려 시대에 세워진 것이다. 11개의 사찰중에 가장 오래되었고 크다. 앉아 있는 금불(金佛)은 높이만도 한 길[丈]이 넘었다.
승장(僧將)이 개부(開府 부(府)를 창설하는 것)하여 주둔하고, 팔도(八道)의 승병(僧兵)을 영솔하였는데, 이름은 ‘궤능(軌能)’이라 하고 직책의 이름은 ‘총섭(總攝)’이라 하였다. 옆에 마석(磨石)이 있는데 암석에다가 그대로 조각한 것이었다.

산영루(山映樓)
중흥사에서 비스듬히 걸어 서쪽으로 가면 숲이 하늘을 가리우고 맑은 시냇물이 콸콸 흐른다. 갓[冠]같기도 하고 배[舟]같기도 한 큰 돌이 많은데, 쌓이고 쌓여 대(臺)를 이룬 것도 간혹 있었다.
대개 세검정과 같으나 더 그윽하였다.

부왕사(扶旺寺)
이 절은 북한산 남쪽 깊은 곳에 있다. 골짜기는 청하동(靑霞洞)이라 하는데 동문(洞門)이 그윽하고 고요하여 다른 곳은 모두 이와 짝하기 어렵다.
임진 왜란 때 승장(僧將)이었던 사명대사(四溟大師 이름은 유정(惟政))의 초상이 있는데, 궤[梧]에 의지하여 백주미(白麈尾 흰 사슴 꼬리로 만든 총채)를 잡았으며, 모발은 빠져 없고 배를 지나는 긴 수염만이 남아 있다. 서쪽 벽에는 민환(敏環)의 초상이 있다. 쉬면서 점심을 먹었다.

원각사(圓覺寺)
남쪽 성문(城門)에 올라 서해를 바라보니 하늘과 연접되었다. 마니(摩尼)의 여러 산이 바다 사이에 있어 주먹만하였다.
나한봉(羅漢峯)이 있으니 높이 솟은 모양이 부처[浮屠]가 서 있는 것 같다. 그 아래에 절터가 있는데 고려 시대에 3천 명의 중이 거처하였으므로 ‘삼천승동(三千僧洞)’이라 한다.

진국사(鎭國寺)
산영루를 등지고 험악한 길을 이리저리 찾아 북으로 가면 세 길쯤 되는 돌에 ‘백운동문(白雲洞門)’이라고 새겨져 있다.
돌길을 따라 사문(寺門)에 당도하니, 붉은 나무와 흰 돌이 훤하게 구렁을 이루고 물소리가 시원하고 맑게 들리었다.

상운사(祥雲寺)
진국사로부터 상운사에 이르는데는 적석(積石)이라는 고개가 사이에 끼어있다. 해질녘에야 절에 도착하여 밥을 먹고 투숙하였다.
아침에 서암사(西巖寺)로 향하는데 골짜기로 3~4리쯤 가니 물이 폭포를 이루었다가 구불구불하게 흘렀다.
대개 고개[嶺]의 좌우는 자못 넓고 깊었다.

서암사(西巖寺)
성의 서문에서 가까운 곳에 큰 누(樓)가 물과 돌이 교차된 곳에 임하여 있다. 바람이 이는 거센 여울과 소나무에서 나는 바람소리, 텅 빈 가운데 음운(音韻)이 생기니 쏴쏴하는 빠른 소리는 비오는 것 같아 대면하여 말하여도 음성을 분별할 수가 없다.
이 절은 가장 낮지만 유독 깨끗하고 시원한 것으로 소문이 났다. 밥을 먹고 진관사(津寬寺)로 향하였다.

진관사(津寬寺)
서문에서 10리쯤 나오면 들에는 밭이 많고 높은 곳은 사람들의 무덤이 되어 있다. 남쪽으로 작은 골짜기를 찾아가니 비로소 숲이 있다.
이 절은 바로 고려의 진관대사(津寬大師)가 거처하던 곳이다. 큰 돌기둥 수십 개가 아직도 시내의 왼쪽에 나란히 있다. 숲과 돌의 아름다움은 비록 내산(內山 성안의 산)만 못하지만 불화(佛畫)의 영묘(靈妙)하고 기이한 것 만은 못지않았다.


해동야언 2
성종(成宗)

○ 성종은 뜻이 학문에 독실하여 삼시(三時)로 강서(講書)를 하고, 밤이 되면 옥당(玉堂)에서 입직하는 선비들을 불러들여 그들과 강론하며, 강론이 끝나면 술을 주면서 조용히 고금치란(古今治亂)과 민간의 이해(利害)에 대해 묻곤 하였는데, 언제나 서로 평복으로 대하였으며, 각중(閣中)에는 촛불을 단지 하나만 켤 따름이었다. 신하들이 밤이 깊어서 크게 취하여 나가면 어전(御前)의 촛불을 주어 원(院)에 돌아가게 하였는데, 이는 곧 김연거(金蓮炬)의 유의(遺意)이다. 《용재총화》이하 동
○ 성묘(成廟)는 학문이 깊고 박식하며 문장을 넓고 엄숙했다. 문사(文士)에게 명하여 《동문선(東文選)》,《여지승람(輿地勝覽)》,《동국통감(東國通鑑)》을 편찬케 하고, 또 교서관(校書館)에 명하여 책을 인쇄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는데, 이를테면《사기(史記)》ㆍ《좌전춘추(左傳春秋)》ㆍ《전후한서(前後漢書)》ㆍ《진서(晉書)》ㆍ《당서(唐書)》ㆍ《송사(宋史)》ㆍ《원사(元史)》, 그리고 《강목통감(綱目通鑑)》ㆍ《동국통감(東國通鑑)》ㆍ《대학연의(大學衍義)》ㆍ《고문선(古文選)》ㆍ《문한유선(文翰類選)》ㆍ《사문유취(事文類聚)》ㆍ《구소문집(歐蘇文集)》ㆍ《서경강의(書經講義)》ㆍ《천원발미(天原發微)》ㆍ《주자성서(朱子成書)》ㆍ《자경편(自警編)》ㆍ《두시(杜詩)》ㆍ《왕형공집(王荊公集)》ㆍ《진간재집(陳簡齋集)》같은 것인테, 이것음 모두 내(성현)가 기억하는 바요, 그 밖의 인쇄한 제서(諸書)가 또한 많다. 또 서강중(徐剛中)의 《사가집(四佳集》ㆍ강경순(姜景醇)의 《사숙재집(私淑齋集)》ㆍ신범옹(申泛翁)의 《보한재집(保閑齋集)》을 취집하여 간행하였는데, 다만 이윤보(李胤保)와 우리 문안공(文安公 성임(成任))의 시문(時文)은 산일(散逸)이 되어서 인쇄를 못하였으므로 한스럽다.
○ 선묘(宣廟 성종)는 학문을 좋아하는 것이 양성(兩聖 세종ㆍ세조)을 이어받았고 유림을 사랑하고 장려함이 보통 규모에서 멀리 뛰어났으므로, 당시 문장력이 걸출한 선비가 옥서(玉署 홍문관)에 찬란하게 빛났으니, 이를테면, 매계(梅溪 조위)와 삼괴당(三魁堂 신종호)이며, 뇌계(㵢溪 유호인) 그리고 나의 선대인(先大人) 김흔(金訢) 같은 이들은 더욱 많은 은총을 입어서 항상 지은 바를 매월 써서 올리게 하였다. 매계와 뇌계는 모두 부모가 늙었다 하여 외직(外職)을 청하므로, 특별히 쌀과 콩을 주어 그 부모에게 넉넉하도록 하였다. 뇌계가 외직에 가면서 한 시구를 올리기를,
북쪽을 바라보니 군신간이 멀어졌고 / 北望君臣隔
남으로 내려오니 모자가 같이 사네 / 南來子母同
라고 하였는데, 임금이 조용히 감상하며 이르기를, “호인(好人)이 몸은 비록 외방에 있으나, 마음은 군(君)을 잊지 않는구나.” 하고, 또 매계가 상사를 당하였을 때는 제사를 내려 영화롭게 하여 은총이 죽고 산 사람에게까지 미치니, 사람마다 감동해 일어났다. 인재를 고무(鼓舞)하고 사기를 진작함에 있어 진실로 천세에 드물게 볼 수 있는 성사라고 하겠다. 영상 성희안(成希顔)이 홍문관의 정자(正字)로서 상사를 만나 벼슬을 그만두었다가 복을 마치자 다시 벼슬을 주니, 전례대로 은명(恩命)을 사례하였다. 임금이 다시 불러 합문(閤門) 밖에 오게 하여 위로하고, 중관(中官)에게 명하여 매(鷹) 하나를 팔에 얹어 가지고 와서 하사하며 말하기를, “그대는 노모가 있으니, 공사에서 물러나 틈이 있으면 교외에 가서 사냥하며 자미(滋味)를 봉양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하라.”고 하였다. 또 밤에 입대(入對)하니, 주과(酒果)를 하사하셨는데, 공은 소매 속에 감귤을 열두어 개나 넣고는 인하여 취해서 엎드려 인사를 가리지 못하는지라 중관이 업고 나갔는데, 소매 속에 넣은 감귤이 모두 땅에 떨어진 줄도 깨닫지 못하였다. 다음날 임금은 감귤 한 쟁반을 옥당에 보내며 이르기를, “어제 성희안이 귤을 소매에 감춘 것은 그 노친에게 드리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하사한다.” 하였다. 공이 뼈에 새기고, “죽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 하더니, 마침내 정국(靖國)의 거사로 보은하였다. 선묘(宣廟)의 선비를 대우하는 데 지성스러움과 사람을 알아보는 명철한 식견이 진실로 사람이 충성을 다하게 한 것이었으나, 공은 위태한 것을 개혁(중종반정)하여, 나라를 안정하게 하고 공훈이 사적에 오르니 역시 지우(知遇)를 저버리지 아니하였다. 《용천담적기》이하 동
○ 문성 양성(文成兩聖 문종ㆍ성종)은 해서(楷書)의 필법에 정밀하였다. 문묘(文廟)는 곧고 단단하고 생동한 진체(眞體 정자로 쓰는 것)는 진인(晉人 왕희지)의 오묘(奧妙)함을 빼앗았지만, 다만 석각(石刻)한 수본(數本)만이 있을 뿐이고, 세상에 전하는 지극한 보배는 귀신이 감추어서 진적(眞跡)은 보기 드무니 아깝도다.
○ 성묘(成廟)의 글씨는 곱고 예쁘고 단아하고 무게가 있어서 자연스레 조송설(趙松雪)의 규도(規度)에 깊이 들어갔다. 임금이 또 가끔 먹 장난에 뜻을 두고 소화(小畫)를 그렸는데, 그것은 모두 하늘이 내려주신 재능으로 별로 모습(模習)조차 아니 하여도 그 오묘함이 옛 법도에 이르렀다. 온갖 정무를 보는 여가에 청연(淸讌)의 자리가 있으면 때때로 한묵(翰墨)과 친하여 간략하게 붓을 휘두르곤 했는데, 한 치 되는 쪽지나 한 자 되는 폭도 세상에 산락(散落)되어 그것을 얻은 사람은 공경하여 애완하여 깊이 싸두는 것이 아름되는 옥에 비할 것이 아니었다. 상사생(上舍生) 박원령(朴元秢)은 글씨를 좀 잘 썼는데, 성묘가 이를 보고 가상히 여기며 그 고을에 글을 내리어 지필을 주게 하여 장려하니 영화가 향려(鄕閭)에 빛나서 경동(驚動)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다. 무릇 재예 세기(才藝細技)가 어찌 족히 임금의 기림을 움직였으리오 마는 성능(聖能)하다 하여 그것을 폐하지 아니하였으니, 권장하기를 융성히 함은 이처럼 성심에서 나왔다. 이로 말미암아 문장(文章)ㆍ서화(書畵)ㆍ공기(工技)ㆍ백술(百術)이 그 격려에 힘입어 정진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이에 성인의 고무(鼓舞) 전이(轉移)의 계기가 다만 한 번 빈소(嚬笑)하는 순간에 있음을 알았다. 만일 그 성의가 범정(凡情)에서 크게 초월한 것이 아니라면, 비록 백방으로 권칙(勸勅)하더라도 엄정한 정과(正課)를 세움에 있어 다만 소란하여 점차 쇠퇴하고 말았을 것이다. 어찌 사람의 심정을 감동하는 데 이같이 깊음이 있으리오.
○ 성묘(聖廟)는 왕대비(王大妃)를 위하여 날마다 곡연(曲宴)을 베풀고 내수비(內需婢) 5ㆍ6명을 뽑아 속악(俗樂)을 익히게 하였는데, 그중 한 명이 용모가 아름답고 재주가 뛰어났다. 그가 항시 성종에게 눈짓을 마지않는지라 성묘가 그것을 보고 그 부모에게 명하여 시집보내게 하고, 다시는 궁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더니, 이로부터 곡연도 파하게 되었다. 또 성묘는 굳이 볼 일이 없으면 하루 세 차례 경연(經筵)을 열었으며, 또 날마다 세 번 왕대비전(王大妃殿)에 문안드리곤 하였다. 또 종실(宗室)을 데리고 후원(後苑)에서 활을 쏘고 난 뒤에는 종실과 마주 대하고서 반드시 소작(小酌)을 베풀었는데, 거기에는 기악(妓樂)이 따랐으니, 이는 진실로 태평성사(太平盛事)였다. 그러나 어떤 의론하는 자는 혹 연산군(燕山君)이 연락(宴樂)을 탐한 것은 눈과 귀에 익숙해져서 그러하였다 하니, 아까운 일이다. 김흔의《전언왕행록》
○ 궁에서 나온 사람이 있었는데, 상자 속에 거두어둔 절지 찰한(截紙札翰)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에 이르기를,
깊숙한 정자에서 흐르는 물줄기 바라보니 / 幽亭瞰流水
높은 나무는 잔잔한 시냇가에 늘어졌다 / 高樹俯潺湲
화류(대추빛깔의 준마)가 푸른 풀언덕에서 우니 / 驊騮嘶靑草
봄이 푸른 아지랑이 속에 있도다 / 春在翠微間
또,
절벽은 천 길이나 되는 듯 솟았는데 / 絶壁立千仞
솔바람은 불어 마지않네 / 松風鳴未休
난간에 비기고 섰는 무한한 회포 / 憑欄無限意
약속이나 한 듯이 고향 산천에도 가을이 들었으리라 / 依約故山秋
하였다. 또,
새 외를 처음 맛보니 수정같이 산듯하다 / 新瓜初嚼水精寒
형제의 정 친한 것으로 어찌 차마 홀로 보랴 / 兄弟情親忍獨看
또,
형에게 묻노니 무엇으로 세월을 보내시오 / 問兄何事送羲娥
멀리 생각하니 양금과 위가일 것이리 / 遙想洋琴與渭歌
또,
친척과 모이기를 기약하고 / 期會親戚
아리따운 기생을 맞이했네 / 聘招佳妓
의(義)는 비록 군신이나 / 義雖君臣
은혜로 말하면 형제로세 / 恩則兄弟
라고 하였으니, 보는 자가 성묘가 평소 장난삼아 썼다가 버린 것임을 알겠다. 위에 두 절구는 반드시 그림에 쓴 시일 것인데, 누구의 소작인지 알지 못하겠고, 나머지는 모두 월산대군(月山大君)에게 준 편지 초고이다. 성묘는 매양 월산대군을 내전에 데려다가 곡연(曲宴)을 베풀고, 나가면 편지로 수창(酬唱)한 것을 보내지 않는 날이 없었으니, 대개 그 우애가 지극한 것이었다. 《소문쇄록》
○ 세종은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유명한 문사 20명을 골라 경연(經筵)을 겸하고, 모든 문한의 일은 모두 다 위임하였다. 아침 일찍 들어와서 밤늦게 서야 파하였는데, 일관(日官)이 시간을 알린 후에야 나갔으며, 조석 식사는 내관(內官)으로 하여금 손님 대접하듯이 하니, 그 융숭하게 대접하는 뜻이 지극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다투어 가며 서로 권면하여서 뛰어난 재주 큰 선비가 많이 나와서 문원(文苑)에 유명한 자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세조는 병자난(丙子難 사육신사건) 때에 집현전을 파하고, 문신 수십 명을 골라 예문(藝文)이라고 겸칭하며 날마다 불러들여 의논하고 생각을 하였다. 성묘가 즉위하여서는 옛날의 집현전에 의하여 다시 홍문관(弘文館)을 설치하고, 본관(本官)으로 경연을 겸하게 하며, 더욱 후하게 대우하였다. 매양 선온(宣醞)을 주고 승지를 불러 모아서 같이 마시게 하였고, 또 많은 노비를 주어 심부름하는 데 대비하도록 하였으며, 또 조예(皁隸)들로 하여금 모두 은패(銀牌)를 차게 하였다. 게다가 용산강(龍山江) 가에 별당을 짓고 관관(館官)을 분번(分番)하여 독서하도록 하였고, 또 상사(上巳 3월 3일)와 중양(重陽) 가절에는 주악(奏樂)을 주어 교외에서 유흥으로 즐기게 하였으니, 그 은총과 영광이 지극하였다. 그러나 문(文)으로 이름난 자는 세종 때의 성대함만은 못하였다. 《용재총화》이하 동
○ 신라와 고려 때는 불교를 숭상하여 오로지 불공과 반승(飯僧 중에게 밥 먹이는 것)을 상례로 하였다. 우리 태종이 비록 사사(寺社) 노비를 혁신하였다고는 하지만 그 유풍이 오히려 남아 있었다. 으레 공경(公卿)이나 선비의 집이라도 빈소(殯所)에는 중들이 모여 앉아 불경을 읽었는데, 이것을 불석(佛席)이라 하였고, 또 산사에서는 칠칠재(七七齋)를 지내는데, 부자는 다투어 호화스럽고 사치하게 하고, 가난한 집에서도 관례에 의하여 갖추어 베풀므로 물과 곡식을 소모함이 심히 컸었다. 또 친척과 붕료(朋僚)들은 포물(布物)을 가지고 와서 시주하였는데, 이를 식재(食齋)라고 하였다. 또 기일에는 중을 맞이하여 먼저 밥을 먹인 뒤에 혼을 불러 제사지냈는데, 이것을 승재(僧齋)라고 한다. 성묘는 정학(正學)을 숭상하고 이단을 배척하여 모든 불사에 대해 다 고치면서 그 폐단을 극언하였다. 이로부터 사대부의 집에서는 법과 물의를 두려워하여 비록 상사와 기일을 당하여도 다만 법에 의하여 제사를 행할 뿐이고, 중과 부처를 공양하지 않았다. 그대로 인습하고 폐하지 않는 자는 오직 무뢰한 백성들이었으니, 이들도 멋대로 하지는 못하였다. 또 도승(度僧)의 법을 엄하게 금하여, 주군(州郡)에까지 단속하여 중으로서 첩(牒)이 없는 자는 머리를 길러 속세로 돌아오게 하니, 안팎 사찰이 모두 비게 되었다. 물(物)이 성하면 쇠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 성균관은 교훈을 전장(專掌)하였는데, 국가에서는 양현고(養賢庫)를 설치하고 관관(館官)으로 겸임하게 하여 항상 유생 2백 명을 양성하게 하였는데,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가 아뢰어 존경각(尊經閣)을 세워서 많은 경적을 인쇄하여 간직하게 하였으며, 광천군(廣川君) 이극증(李克增)이 아뢰어 전사청(典祀廳)을 짓게 하였고, 나(성현)도 아뢰어 향객청(享客廳)을 건설하게 하였다. 그 후 성전(聖殿)의 동서 행랑과 식당을 모두 짓고, 또 포목 5백 필과 쌀 3백여 석을 주며, 또 학전(學田)을 두어 관중(館中)의 모든 수요를 충당하게 하였다. 이극증이 아뢰기를, “이제 성은을 받아 많은 미포를 받았으니, 주식을 준비하고 조정의 문사 및 제생을 모이게 하여 더욱 사문(斯文 유림)의 성사(盛事)가 되게 하여 주소서.” 하니, 성묘가 윤허하는지라, 이에 문사 대회를 명륜당에서 열었는데, 찬품(饌品)이 극히 정결하였다. 승지가 선온(宣醞)과 어주(御廚)의 진미를 주었는데 계속 끊어지지 않았다. 계축년 가을에 성균관에 거둥하여 선성(先聖)과 선사(先師)에게 제사지내고 물러와 하연대(下輦臺)에 마련한 장전(帳殿)에 앉으니, 문신 재추(宰樞)가 모두 전(殿) 안으로 들어와 모시고 당하관(堂下官) 문신들은 뜰에 열지어 앉았으며, 8도 유생이 구름과 같이 서울에 모였으니, 무려 만여 명이나 되었다. 상하 할 것 없이 모두 꽃을 꽂고 잔치에 참여하였으며, 또 새로 악장(樂章)을 지어 연주하여 흥을 돕고, 각 관청에서 나누어 맡아서 주찬(酒饌)을 설비하게 하고, 임금은 자주 내신(內臣)을 보내어 감독하고 살피게 하니, 사람마다 취하고 배불렀다. 이 같은 일은 옛날부터 들어볼 수 없는 성사였다.
○ 태종이 영락(永樂 명 성조의 연호) 원년에 좌우의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무릇 정치는 반드시 전적(典籍)을 널리 보아야 하는 것인데, 우리 동방은 해외에 있으므로 중국의 서책은 드물게 이르고, 이미 있는 판각은 닳아 없어지기가 쉬우며, 또 천하의 글을 모두 판각으로 하기도 어려우므로 내가 구리로 본떠 주자(鑄字)를 만들어서 글을 얻는 데 따라 인쇄하여 이를 세상에 널리 전하면 진실로 무궁한 이익이 될 것이다.” 하고, 드디어《고주(古註)》ㆍ《시경(詩經)》ㆍ《서경(書經)》ㆍ《좌씨전(左氏傳)》의 자본(字本)으로 주자를 만드니, 이것이 주자의 시초인데, 그 이름을 ‘정해자(丁亥字)’라고 하였다. 세종이 또 경자년에, 주자가 글자가 크고 고르지 못하다고 해서 다시 개주(改鑄)하니, 그 모양이 작으면서 바른지라 이로부터 인쇄하지 않은 서책이 없었는데, 그 이름을 ‘경자자(庚子字)’라고 하였다. 또 갑인년에 위선음즐(爲善陰騭) 등서의 자(字)를 본으로 하여 주자를 만들었는데, 경자자에 비하여 좀 큰 편이나, 자체가 매우 좋았다. 또 세조에게 명하여 《강목(綱目)》의 대자(大字)를 쓰게 하고, 드디어 연(鉛)을 주조하여 주자를 만들어서 강목을 인쇄하였으니, 이것은 지금 이른바 “훈의(訓義)”라는 것이다. 임신 연간에 문종(文宗)이 경자자를 다시 녹여, 안평대군에게 명하여 쓰게 하였는데, 이것을 ‘임신자(壬申字)’라고 한다. 을해년에 세조가 임신자를 녹여 강희안(姜希顔)에게 명하여 쓰게 하고, 그 이름을 ‘을해자(乙亥字)’라고 하였는데, 지금까지 활용하고 있다. 그 후 을유년에 원각경(圓覺經)을 인쇄하고자 정난종(鄭蘭宗)에게 명하여 쓰게 하였는데, 자체가 바르지 못하였다. 그것을 ‘을유자(乙酉字)’라고 하였다. 성종 신묘년에 왕형공(王荊公)과 구양공(歐陽公)의 문집을 자본(字本)으로 한 주자를 만들었는데, 그 자체가 경자자보다 작으면서도 더욱 정밀하였다. 그것을 ‘신묘자(辛卯字)’라고 하였다. 또 중국에서 신판 《강목(綱目)》의 자본을 얻어 주조한 주자를 만들었는데, 이를 ‘계축자(癸丑字)’라고 한다.
○ 성묘가 폐비 윤씨를 사사(賜死)하면서 그 전지(傳旨)에 이르기를, “윤씨는 그 성질이 본래 흉험(凶險)하며, 인륜에 어긋난 불순한 행실이 많다. 지난번 궁중에 있을 때에 날로 포악함이 심해지고, 이미 삼전(三殿 정희왕후ㆍ소혜왕후ㆍ안순왕후)에 불순히 하였을 뿐 아니라, 방자하게 과인(寡人)의 몸에 흉처(凶處)를 내고, 노예같이 대우하는가 하면, 지나칠 때는 족적(足跡 자손인 듯)을 삭거(削去)하겠다고까지 악담을 한다. 이것은 다만 작은 일이므로 논할 것도 못 된다. 심지어는 역대모후가 어린 아들을 내세우고 정치를 마음대로 한 것을 보고 스스로 기쁨으로 여겨서 항상 독약을 지니고 다니면서 혹 품속에 품고 다니고, 어느 때는 상자에 감추어 두곤 하였는데, 그것은 오직 자기가 꺼려하는 자만 제거하자는 것이 아니라, 장차 과인의 몸에도 해를 끼치려함이다. 또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오래 살면 장차 할 일이 있다.’고 하니, 이는 무도한 죄이다. 종사(宗社)에 관계있는 일이지만 그래도 대의(大義)로 차마 끊지 못하고, 다만 서인(庶人)으로 폐하여 그 친정집에 있게 하였던바, 이제 외인(外人)들이 원자(元子)가 점차로 자라남을 봄으로써 전후의 분규되는 일이 대부분 이것으로 말썽이 될 것이다. 비록 당시에 있어서는 깊게 염려할 것이 못 되지만, 후일의 화는 어찌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만일 흉험한 성질로써 후일 위복(威福)의 권세를 잡게 되면 원자가 현명하여도 또한 반드시 그 사이에서 훌륭한 일을 할 수 없게 될 것이고, 제멋대로 날뛰는 것이 날로 더욱 방자하여질 것이니, 한(漢)의 여후(呂后)와 당(唐)의 무후(武后)의 화를 머리 들고 기다리게 될 것이다. 내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매우 한심스럽다. 이제 만일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면서 일찍 대계를 정하지 못하였다가 국사가 구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면 후회한들 소용이 없어서 내가 실로 종사의 죄인이 되고 말 것이다. 옛날 구익부인(鉤弋夫人)은 죄가 없어도 한 무제(漢武帝)가 오히려 만세의 계책을 세웠는데, 항차 이같이 흉험하고 또 용서하기 어려운 죄가 있는 것이겠느냐.” 하고 이에 이달 16일에 그 사제에서 사사(賜死)하였으니, 종사대계(宗社大計)이므로 부득이한 일이었다. 《소문쇄록》이하 동
○ 임인년 10월 4일에 당양공주(唐陽公主)가 죽었는데,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공주가 죽어서는 조시(朝市)를 정지하는 일이 없다.”고 하였는데, 임금이 특별히 명하여 하루의 조회를 정지하고 홍문관으로 하여금 전사(前事)를 상고하게 하였더니, 홍문관에서 말하기를, “송 나라 장공주(長公主)가 죽었을 때에 5일의 조회를 정지한 일이 있다.”고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옛날에도 이같을진대 지금이라고 어찌 그렇게 아니 하리요.” 하고, 3일간 조회를 정지하였다.
○ 성화(成化 명 나라 헌종의 연호) 계유년 5월에 경상 감사가 예조에 공문을 보냈는데, 그에 이르기를, “영해부(寧海府 지금의 경북의 영덕군)에 지화(地火)가 났는데, 낮에는 연기가 나고, 밤에는 화광이 있으며, 나무를 던지면 불이 일어난다. 길이가 8척이요, 넓이가 20척이나 된다.”고 하였는지라, 임금이 홍문관에 명하여, 고사를 상고하게 하니, “진(晉)의 혜제(惠帝) 원희(元熙) 연간에 지연(地燃)이 있었고, 조(趙)의 석호(石虎)와 후진(後秦)의 부견(苻堅) 때에, 그리고 당의 정관(貞觀) 때에 백주(白洲 지금의 황해도 배천)에서 지화가 있었고, 본조에 들어와서 세종 때에 영해(寧海)에서 이 같은 해염이 있었으며, 또 문종 때에는 상주(尙州)에서 지화가 있었다.”고 하는지라, 내신(內臣) 이효지(李孝智)에게 명하여 가서 살피게 하였더니, 불에 탄 석괴(石塊)를 가지고 왔는데, 숯같이 검으며, 불에 넣으면 불꽃이 일어났다.
○ 갑진년 9월에 봉상시(奉常寺)에서 김양경(金良璥)의 시호를 올렸는데, 공위공(恭威公)ㆍ편숙공(褊肅公) 그리고 제극공(齊克公)이라 하였다. 임금이 승정원에 물으니, 대답하기를, “김양경은 평소에 마음이 치우친 병통이 있었으므로 시호 역시 그러하나이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김국광(金國光)과 윤계겸(尹繼謙)의 시호를 정할 때에 고치고자 하였으나, 후폐가 있을까 두려워서 고치지 못하였는데, 이제 정직한 사람이 그 붕우들의 사사 청탁을 받지 아니한다고 하여 모두 그 마음을 편급(偏急)하다고 하며, 조의(朝儀) 또한 쏠리듯 따라가니, 정직으로써 편급의 시호를 얻는 것을 어찌 옳다 하겠는가. 내가 이 시호를 고치고자 하는데, 경들은 어떠하오.” 하니, 정원에서 말하기를, “봉상시(奉常寺)에서 시호를 이미 정하였으므로, 고치는 것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정직한 사람을 어찌 편급하다고 칭호하겠습니까. 대개 편급으로 득명한 자는 그 부당한 일을 가지고 편벽되게 고집부리고 억지로 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김양경의 편급한 병통은 생각하건대 공론이 모두 그러한 것 같으니, 이제 만일 고쳐 정하면 후폐가 있을까 염려됩니다. 다만 봉상시에서 의진(擬進)한 6자(공위ㆍ편숙ㆍ제극) 중에서 임금께서 정하시는 것이 어떠할까 하나이다.” 하였다. 공숙공(恭肅公)이라고 어필로 써서 내렸으니, 일에 공순하게 하고, 위에 봉공하는 것을 공(恭)이라 하며, 마음가짐이 결단성이 있는 것을 숙(肅)이라고 한다. 갑진년 11월에 봉상시에서 이계손(李繼孫)이 시호를 의진(擬進)하였는데, 장경공(長敬公)과 정헌공(玎憲公)이라 하였다. 사람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아니함을 장(長)이라 하고, 뜻 이루기를 힘쓰지 아니함을 정(玎)이라고 한다. 김 문간공(金文簡公)이 마침 경연에 있다가 아뢰기를, ”이계손(李繼孫)은 영안도(永安道) 관찰사로 있으면서 학교를 일으키고 인재를 양성하여 그 중에서 과거한 자도 많습니다. 그러나 남을 부지런히 가르쳤다는 말은 그에 맞지 않습니다. 회기불권(誨人不倦)은 김구(金鉤)와 김말(金末) 같은 사람에게 타당합니다. 이계손으로 말하면, 감사로 있으면서 학문을 진흥시켰을 뿐이고, 스스로 가르치지는 않았는데, 어찌 이같은 시호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계손은 사람됨이 재상의 체모가 있어서 선인군자(善人君子)입니다만, 장(長) 자를 굳이 쓰지 않더라도, 다른 좋은 시호를 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술의불면(述義不勉)도 맞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는 일찍이 죄를 얻어 귀양간 일이 있으므로 정(玎) 자는 불가하나이다.”하니, 임금이 드디어 경헌공(敬憲公)이라고 써서 내렸다.
○ 성화(成化 명 나라 헌종의 연호) 병오년에 직제학(直提學) 김흔(金訢)은 그의 외증조되는 성개(成慨)가 쓴 위징(魏徵)의 십점소(十漸疏)를 드리면서 아울러 규경(規警)을 삼으라는 차자(箚子)를 올렸더니, 임금은 전에 입었던 흰 비단 첩리(帖裏 속옷)와 흑서피(黑黍皮 서는 쥐와 같다.)의 신을 주고, 또 금전지(金箋紙)에 손수 쓴 글을 보냈다. 그 글에 “전번에 보내준 차자와 위징 소축(疏軸)은 깊이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위징의 이 말은 실로 만세의 시귀(蓍龜)가 된다. 일찍이 그대의 부친이 그대에게 권면하기를, 위 정승(위징)으로 자부하도록 하였고, 그대가 또 나에게 권하여 당우(唐虞)와 같은 정치를 하라고 하니, 이는 아비는 그 아들을 사랑하고, 신하는 그 임금을 사랑하는 것이라 할 만하다. 내가 비록 현숙하지 못하나, 어찌 그를 감히 잊으리오. 그대의 성의를 가상히 여겨서 상주어 표창하니, 항시 좌우에 두고 스스로 경계하라.”고 하였다. 그 글씨는 혜정(楷正)하나, 굳이 취할 바가 없었으나, 김흔은 공조 참의로, 그 아버지인 김우신(金友臣)은 단양 군수(丹陽郡守)로 삼았다.
○ 무신년 2월 6일에 세자(世子) 빈(嬪)을 납궁(納宮)하였는데, 아침부터 풍우가 심하게 이는지라, 그 빈부(嬪父)인 좌참찬(左參贊) 신승선(愼承善)에게 손수 쓴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세속은 혼일(婚日)에 풍우가 있는 것을 꺼린다고 하나, 무릇 바람으로써 동하게 하고, 비로써 윤택히 하여 만물이 자람에 있어 풍우의 공이 아님이 없다.”고 하였다. 전하여 듣는 것이므로 비록 다 기록하지는 못하였지만, 진실로 제왕의 말이로다. 정오부터 날씨가 개고 청명하였다. 충민공(忠敏公) 《잡기》
○ 성묘조에 물재(勿齋) 손순효(孫舜孝)는 연산군이 부하(負荷 임금의 큰 직무)를 이기지 못할 것임을 알았다. 하루는 임금을 어탑(御榻)에 가까이 가서 용상을 어루만지며 청한 것이 있었는데, 대간(臺諫)에서는 죄주기를 청하고, 또 어떤 밀계(密啓)인지 듣고자 하였지만, 임금은 “호색으로 나를 경계한 것일 뿐이다.” 하곤 끝까지 말하지 아니하였다. 《병진정사록》
○ 고려 때의 문사는 모두 《시경》과《이소경》으로 학업을 일삼더니, 오직 정포은(鄭圃隱)이 성리학(性理學)을 처음으로 제창하였고, 아조(我朝)에 이르러서 권양촌(權陽村 권근)ㆍ권매헌(權梅軒 권눌) 형제가 능히 경학에 밝고 또 문장에 능하였다. 권양촌은 사서 오경의 구결(口訣)을 정하고 또 《천견록(淺見綠)》과《입학도설(入學圖說)》을 지어서 유학에 우익(羽翼 보조)한 공이 적지 않다. 그 후임으로 스승된 자는 황현(黃絃)ㆍ윤상(尹祥)ㆍ김구(金鉤)ㆍ김말(金末)ㆍ김반(金泮)이다. 황현의 학문은 잘 들을 수 없고, 윤상은 경전이 가장 정결하며, 작문(作文)도 조금은 할 줄 알았다. 김구와 김말은 경전과 작문이 모두 정밀하였는데, 김말은 고집스러움을 면치 못하고 항시 의논이 있을 때면, 상하를 가리지 않고 다투어 마지않으며, 수업(受業)하는 자도 역시 두 가지를 갖추었다. 두 공(김구ㆍ김말)이 모두 세조의 알아주심을 얻어서 벼슬이 1품에 이르렀다. 김반은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가 나이 늙어서 치사(致仕)하였는데, 끝내 그 고향에서 아사(餓死)하였다. 또 그 다음을 들어 말하면, 공기(孔頎)ㆍ정자영(鄭自英)ㆍ구종직(丘從直)ㆍ유희익(兪希益)ㆍ유진기(兪鎭頎)인데, 그들은 익살스럽고 말은 잘하나, 작문하는 데는 편지 같은 작은 문구도 한마디 못 지어서 남으로부터 편지를 받고도 회답을 하지 못했다. 하루는 생원 김순명(金順明)이 마침 방에 있다가 말하는 것에 따라 답장을 썼는데, 그 사어(辭語)가 심히 아름다우므로 기(頎)가 감탄하며 말하기를, “자네가 나에게서 배웠는데, 자네는 글을 잘 쓰고 나는 글을 쓰지 못하니, 진실로 청(靑)이 쪽풀에서 나왔으나, 쪽풀보다 푸르다는 말이 이를 두고 이름이다.” 하였다. 정자영(鄭自英)은 오경만 잘 알 뿐 아니라, 또한 능히 제사(諸史)를 널리 섭렵하였고,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다. 구종직은 용모가 매우 출중하여 세조의 발탁을 받아 벼슬이 1품에 이르렀고, 유희익은 그다지 현달하지 못하였으며, 유진기는 고집으로 사리에 불통하였다. 근자에는 노자형(盧自亨)과 이문흥(李文興)이 오랫동안 학관에 있었으므로 성종이 연로하다고 하여 우대하여 당상관으로 승진시켰는데 모두 고향에 가서 죽었다. 《용재총화》
○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는 정자를 한수(漢水) 남쪽에 짓고 그 이름을 압구정(押鷗亭)이라고 하였다. 임금을 옹립한 공을 한 충헌공(韓忠獻公 충헌은 송 나라 명신인 한기(韓琦)의 시호)에게 견주면서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가 명예를 얻고자 하였다. 늙었으므로 강호(江湖)로 사퇴하겠다고 말은 하면서도 작록에 미련이 남아 있어 가지 못하더니, 임금이 작별의 시를 지어주니, 조중 문사(朝中文士)가 서로 다투어 화운(和韻)을 하여 수백 편이 되었다. 그중 판사 최경지(崔敬止)의 시가 제일이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세 번 불러 보심이 은근하여 두터운 총애를 받았으니 / 三接慇懃寵渥優
정자가 있어도 돌아가서 쉴 생각 없네 / 有亭無計得來遊
가슴 속에 기심(機心) 고요해지면 / 胸中自有機心靜
벼슬하는 마당에서도 백구는 친할 수 있으리 / 宦海前頭可押鷗
라고 하였더니, 한명회가 미워하여 현판 다는 데 끼워넣지 아니하였다. 《추강냉화》
○ 충정공(忠貞公) 허종(許琮)은 어릴 때부터 출중 하여 보통 아이들과 같지 아니하였다. 나이 12ㆍ3세 때에 여러 아이들과 같이 절에 가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야반에 도적이 와서 아이들의 옷과 신발을 도적질해 갔다. 이튿날 여러 아이들은 겁이 나서 모두 흩어졌으나, 허종은 홀로 끄떡도 하지 아니하고 베개를높이하고 길게 누워 붓을 들고 벽에 글을 쓰기를, “내 옷은 탈취해 갈지라도, 내 신은 훔치지 않는 것이 좋았을 것인데, 옷도 신도 모두 탈취해 갔으니, 내 생각에는 도선생(盜先生)을 위하여 좋지 않게 여기노라.”라고 하여 듣는 자들이 이미 그 바탕이 비범함을 알았다. 《사재척언》
○ 양천군(陽川君) 허종은 생김새가 훤칠하고 풍채가 점잖아서 당시에 대인군자로 추중하였다. 젊어서부터 박식하고 문장을 잘 지었으며, 천문(天文)ㆍ역률(曆律)ㆍ의복(醫卜)의 기술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또 궁마(弓馬)에도 능하였으므로 국가에 대사가 있으면 반드시 공을 원수로 삼았다. 그러나, 가산(家産)은 돌보지 아니하여 사는 집은 겨우 바람과 햇볕을 가릴 정도이면서도 항시 공은 담담하게 여겼다. 《청파극담》
○ 홍치(弘治 명 나라 효종의 연호) 무신년에 시강(侍講) 동월(董越)과 급사(給事) 왕창(王敞)이 효종의 등극 조서를 반포하기 위하여 우리나라에 오는데, 허 충정공(許忠貞公)이 원영사(遠迎使)로 의주에 마중갔는데, 양사(兩使)는 잘난 체하며 사람을 업신여기며, 좌우의 집사(執事)가 조금만 실수하면 성내어 말하기를, “나는 너희들 나라의 환관이 아니다. 어찌 이렇게 무례하냐.” 하고 꾸짖었으니, 이는 지난날 봉사자(奉仕者)가 대부분 우리나라에서 중국에 들어가서 환관된 자이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허종을 만나니, 공의 큰 키와 단정히 서 있는 자태며 의관이 위연(偉然)함을 보고, 양사는 깜짝 놀라며 서로 눈짓하고 말하기를, “당당한 인품이로다. 이 사람이여.”라고 하더니, 이로부터 엄하고 모난 것이 조금 누그러져서 좌우에서 혹 잘못하는 일이 있어도 모두 따지지 않았고, 매양 공을 보면 붙들고 조용히 이야기하였다. 서로 경사(經史)를 토론하면, 밤이 깊어야 파하더니, 하루는 왕 급사(王給事)가 사신으로 촉(蜀)에 간 일이 있다고 말하니, 공이 묻기를, “촉을 가려면 두 길이 있습니다. 곧 육로는 포사(褒斜)에서 들어가고, 수로는 형문(荊門)에서 들어가는데, 공은 어느 길로 들어갔습니까.” 하니, 왕 급사가 답하기를, “강을 타고 들어갔소.” 하는지라, 공이 또 묻기를, “강이 민강(岷江)에서 시작하여 기산(■山)의 동쪽 골짜기에 이르러 물이 극히 험하다가, 이릉(夷陵)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천천히 흐른다고 하였는데, 과연 그러하던가요.” 하였다. 다시 말을 이어, 강이 모모(某某)란 곳에 이르는 강 연안 위아래의 양(襄)ㆍ번(樊)ㆍ형(荊)ㆍ악(鄂) 등지의 수천 리 사이를 산천의 원근과 호구(戶口)의 다과며 고금 영웅들의 뺏고 차지하고 나누어 점령한 것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들어 세니, 양사가 심복하고 공의 손을 잡으며, “만일 가슴속에 만권 서책을 갈무리하지 않고서야 어찌 이와 같겠소.”라고 말하였다. 또 공이 중국 전고(典故)를 물으면 비록 궁중에서 금하는 비결이라도 공을 위하여 모두 말하고 조금도 숨김이 없었다. 양사가 돌아가려고 강에 왔을 때에는 섭섭하여 차마 작별을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공이 빨리 조회하러 사신 와서 중국 사람으로 하여금 해외에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고 싶다.” 하였다. 환조하여 진신(縉紳)들에게 떠들고 찬양하며 말하기를, “천상(天上)은 알지 못하는 바이지만, 인간으로서는 짝할 이가 없다.” 하였다. 그 후에 낭중(郞中) 애복(艾璞)이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왔는데, 사람됨이 거만하고 외람되어 경상(卿相) 같은 귀인을 만나도 모두 흘겨보면서 예를 하지 아니하였는데, 국경에 들어와 첫말에 공의 기거(起居)를 묻더니, 공을 본 뒤에는 얼굴빛을 고치고 기색을 화하게 하여 대하고, 영송(迎送)하는 데 자신을 낮추며 대우하는 예법이 심히 정중하였다. 《패관잡기》
○ 이음애(李陰崖 이자)가 상우당(尙友堂 허종) 시집에 발문(跋文)하여 이르기를 “국조의 명신으로 말하면 영릉(英陵 세종) 때는 황희(黃喜)ㆍ허주(許稠)요, 선릉(宣陵 성종) 때는 허공이니, 휘(諱)는 종(琮)이요, 자(字)는 종경(宗卿)이요, 호는 상우당(尙友堂)이다. 처음 벼슬할 때에 불교를 만만(謾謾)히 본다고 역정을 받아 광릉(光陵 세조)이 지나친 위엄으로 눌러서 그 뜻가짐을 시험하고서야 곧 벼슬을 승진시킬 것을 명하였는데, 조용하게 위의를 잃지 않고 있었다. 이로부터 화려한 명성이 날로 드러나서 순서를 뛰어 재상에 이르렀고, 계급을 따르지 아니하였다. 체격과 용모가 훤칠하고 풍채가 화하고도 엄숙하여, 마치 가을 하늘과 겨울 날씨 같아서, 멀리서 바라보면 엄숙한 듯하고 가까이 나아가 대하면 온화한 성품이었다. 특히 성리학(性理學)을 좋아하여 차분히 상고하고 연구하였으니, 대부분 그가 자득한 것은, 한 푼어치씩 쌓고 한 치 길이씩 덧붙여서 이목(耳目)에 칠한 정도의 자와는 비유가 되지 아니했다. 또한 모든 역사에 통달하였는데, 주문공(朱文公)의 《통감강목(通鑑綱目)》을 20일 만에 끝마치니, 그 정근(精勤)하고 준민(俊敏)함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나라 일을 처리한 것이 모두 본받아 법으로 삼을만했다. 선릉(宣陵)에게 지우(知遇)되어 그 덕이 원수(元首 임금)와 비등하여, 들어와서는 고요(皐陶) 기(夔) 같은 명신(名臣)이 되고, 나아가서는 방숙(方叔)과 소호(召虎) 같은 중신(重臣)이 되었다. 기뻐하고 고무되어 대유(大猷 큰 성과)를 기대하였는데, 급작스레 죽었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느냐. 그의 시와 문도 그 덕망과 같아서, 깎고 다듬는 일을 일삼지 아니하여서도 혼후(渾厚)하면서 단정하고 정성스러워서 자연히 성률(聲律)에 맞았다.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훌륭한 말이 있다더니, 어찌 사실이 아니겠는가.” 하였다.《병진정사록》
○ 손 판원(孫判院 손순효)은 삼휴설(三休說)과 사휴설(四休說)을 취합하여 칠휴거사(七休居士)라고 하였다. 사람됨이 순수하고 근실해서 다른 일이 없었으며, 매양 곧은 뜻으로 곧은 행실을 하였으나, 풍속과 강상(綱常)에 관한 일에는 반드시 먼저 뜻을 가다듬었으며, 취하면 호기스런 말이 그치지 않았다. 강원도 감사로 있을 때에 마침 크게 가물어 기우제를 지내도 효과가 없자, 공이 말하기를, “비가 오지 않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수령(守令)의 정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만일 성심이 하늘을 감동시키면 하늘이 감동하여 반드시 응해 줄 것이다.” 하며, 드디어 재계(齋戒)하고 몸소 나가서 기우제를 지냈더니, 그 날 밤중에 빗소리가 들렸다. 기뻐하여 일어나서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하늘에 감사를 드리겠노라.” 하고, 관복을 입고 뜰 가운데 서서 무수히 하늘에 절하였다. 우세가 점차 급하여, 한 아전이 우산을 가져다가 받치고 있었는데, 공이 말하기를, “높으신 어른 앞에서, 어찌 우산이 필요하랴.” 하고, 명하여 가져가게 하니, 의복이 다 젖어 있었다. 또 경상 감사로 있을 때에는 효자와 열녀문을 지날 때면 반드시 말에서 내려 재배하며, 비록 비가 올지라도 피하지 아니하였는데, 그때에 도사(都事) 이집(李緝)이 도롱이를 두르고 밭에 앉아 있는지라 공이 재배를 마치고 도사에게 말하기를, “족하(足下)는 무엇을 하고 있소.” 하니, 이집이 대답하기를, ”나는 영감(令監)보다 먼저 절하였습니다.” 하므로, 좌우에서 입을 가리고 웃지 아니한 사람이 없었다. 언젠가 또 평양에 갔을 때에는, 기자묘(箕子廟)를 보고 말에서 내려 우러러 보고 절하며 말하기를,“ 동쪽 사람으로 예의(禮義)의 나라에 살게 된 것은 오로지 태사(太師)의 교훈 때문이었다.” 하였다. 또 한번은 천령(穿嶺)에서 사냥에 배행한 일이 있었는데, 맹호를 포위하자 공이 술에 취하여 나무화살을 뽑아 활에 메고 말을 달려 들어가서 쏘려고 하였다. 여러 사람이 극력 만류하여 그만두었는데, 하는 일들이 모두 이와 같았다. 항시 임금의 앞에서 충서(忠恕) 두 자를 써서 지성스럽게 진계(陳啓)하니, 성종이 충직하다고 여겨 드디어 크게 등용하였다. 공은 지위가 높을수록 마음가짐이 더욱 검약하여 매양 술상에는 흑두채(黑豆菜)나 고채(苦菜 씀바귀)가 아니면 송아(松芽) 같은 것으로 안주로 삼았고 오로지 번화한 것은 싫어하였다. 《용재총화》
○ 정포은(鄭圃隱) 문충공(文忠公)의 사당이 예전에는 영천현(永川縣)에 있었다. 손문정(孫文貞) 칠휴공(七休公)이 이 도(경상도)의 안찰사(按察使)로 순찰하여 영천(永川) 군경을 지나다가, 마상에서 술이 취하여 잠이 들어 혼혼(昏昏)히 졸면서 포은촌(圃隱村)을 지나가는데 꿈에 빈발(鬢髮)이 하얗고 의관이 점잖은 한 노인이 희미하게 나타나서 스스로 포은(圃隱)이라 하며 말하기를, “사는 집이 퇴폐하여 풍우를 가리지 못한다.” 하면서 부탁의 뜻이 있는 듯한지라, 칠휴가 놀라 깨어 이상히 여기고 옛 노인에게 물어서 그 고지(古趾)를 찾아서 군민들을 권면하여 사당을 짓게 하였다. 사당이 완성되자 제물을 갖추어 몸소 전을 드리고 낙성식을 하였으며, 스스로 큰 잔을 들어 마시고 취하여 벽에 글을 쓰기를, “문 승상(文承相 남송 말기의 충신인 문천상(文天祥))과 충의백(忠義伯 포은의 봉호가 충의백임) 두 선생은 간담(肝膽)이 서로 비치도다. 일신을 잊어버리고 인간의 기강을 세웠으니, 천만 세를 두고 경앙(景仰)하여 마지않는도다. 이(利)가 있는 곳을 찾아 고금이 분주하건만, 서리와 같이 맑고 눈같이 희며, 송백(松栢)과 같이 창창(蒼蒼)하도다. 여기에 한 칸 집을 얽어서 풍우를 가리게 하였으니, 공의 영혼이 편안할 때, 내 마음도 편안하도다.” 하였다. 가만히 생각하면, 충성된 혼과 굳센 넋은 천지간에서 애연(藹然)한 화기로 조화원기(造化元氣)와 같이 흐르나니, 어찌 구구히 사당집의 성하고 헐어진 것으로써 인간에게 청구하는 바가 있으리오마는, 생각건대 이 늙은이의 흉중이 평화하고 아름다우며 평소에 충서(忠恕)로써 마음을 삼았으므로 혹 황홀한 사이에 서로 감통(感通)할 수 었었던 것인가. 《용천담적기》
○ 칠휴가 열읍(列邑)을 안행(按行)하면서 길가에 있는 효자와 열녀의 정문을 보면, 반드시 말에서 내려 전배(展拜)하며 지나는데, 어느 날은 금오산(金烏山) 아래에 있는 길재(吉再) 선생의 고거(故居)에 나아가서 글을 지어 전드리기를, “사당 아래서 우러러 절하니, 생시의 모습이 방불하외다. 오직 오산(烏山)과 낙수(洛水)는 예 같은데, 선생을 생각함이여, 어디 계신지요. 누른 파초 열매와 붉은 여자(荔子 과일 이름)를 전드리니 영령(英靈)이여 흩어지지 않을 것을 바라나이다.” 하였다. 이 늙은이는 문자를 깎고 다듬는 데에 뜻이 없으면서도 흉중에서 나오는 바가 자연히 이와 같았으니, 그 풍개(風槩)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용천담적기》
○ 손물재(孫勿齋 손순효)가 방백(方伯)으로 있을 때에 가뭄을 만나면 매양 재계하고 정성을 들여서 비를 비는데, 문득 응하여 비가 오면 모르되, 그렇지 아니하면 노(怒)하여 신에게 말하기를, “내가 비를 너에게 빌었는데, 너는 비를 주지 아니하니, 어찌 된 것이냐.” 하였으니, 신을 노하게 하는 말은 비록 스스로 반성하는 도리는 아니나, 만일 자신이 정성스럽지 아니하였으며, 반드시 능히 이 같은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병진정사록》
○ 무릇 사람이 죽으려고 할 때에는 정신이 어지럽지 아니하나, 귀화자(歸化者 죽는 자)가 정도를 지키지 않는 사람이라면, 진실로 불가능한 일이다. 이상(二相) 손순효(孫舜孝)는 항시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고통이 없이 죽기를 원한다.” 하더니 하루는, 재상들과 밤새 술을 마시며 담화하고는, 새벽에 일어나서 그 부인에게 말하기를, “나의 기운이 불편하니 아이들을 불러오고 속히 밥을 지으라.” 하고, 이어 말하기를, “내가 어릴 때에 책을 끼고 사문(師門)에 다니던 것을 흉내내 보겠다.” 하고는 이에 한 권의 책을 끼고 계단을 두어 차례 오르내리더니, “피곤하다. 내 쉬겠다.” 하고서는, 가만히 베개에 누우니, 집안 식구는 잠들었으리라 생각하였는데 얼마 후 보니, 숨이 끊어져 있었다. 좋은 소주를 큰 병에 넣어 영석(靈石) 아래 묻어 두라고 전부터 명(命)하여서, 그같이 하였다. 《소문쇄록》
○ 참판(參判) 권경우(權景祐)는 성묘조 때에 감찰로 있으면서 서장관이 되어 중국 사신으로 간 일이 있었다. 그때 역관들이 과대하게 물화를 가져오므로 역로(馹路)가 떠들썩하였다. 그 물화를 부탁한 것은 권귀의 집안과 많이 관련되었는데, 공은 일체를 탐색하여 아뢰게 하되 한 필의 직물이라도 부탁한 자는 모두 조옥(詔獄 의금부)에서 국문하였다. 그리하여 공은 세 품계를 뛰어 승진하게 되었다. 정언이 되어서는 대간을 창도하여 임사홍(任士洪)의 축출을 청하였는데, 말이 매우 강직하였다. 임사홍이 그날 밤에 공의 집에 가서 거짓 모르는 체하고 말하기를, “누가 감히 이런 언론을 하였는가.” 하니, 공이 솔직히 대답하기를, “오직 나라야 감히 그렇게 할 수 있소.” 하니, 임사흥은 기가 막히어 감히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홍문관에 있을 때 말하기를, “폐비가 비록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마땅히 여염(閭閻)집에 함부로 처해 있을 수는 없다.” 하니, 임금이 진노하여 이르기를, “너는 음흉하게 세자에게 붙어서 후일의 영화를 바라는 것이로구나.” 하면서, 하옥을 명하고 많이 힐책하니, 공이 조금도 막히지 아니하고 정성을 다하여 역대 임금의 폐비에 대한 일을 끌어다 증거로 진술하니, 그 말이 더욱 개절(剴切)한지라, 임금이 이에 노여움을 풀고 그의 관직만 파하였다. 《패관잡기》
○ 판서 정석견(鄭錫堅)은 시원스러워서 작은 예절에 구애하지 아니하였다. 홍문관은 본래 구사(丘史)가 없고, 다만 선노(選奴) 하나만 있었다. 그러므로 관원들이 출행할 때에는 타사(他司)에서 구사를 빌리는 것이 예(例)로 되어 있는데, 정석견은 응교(應校)가 되어서도 홀로 구사를 빌리지 아니하고, 다만 납패(蠟牌)를 든 조졸(皁卒)이 앞에서 인도하여 가운데서 말을 타고, 그 뒤에 종 하나만 따라가는지라, 길에서 보는 자들이 손가락질을 하고 비웃으며 말하기를, 산자관원(山字官員 셋만 늘어선 것이 산(山) 자와 같음을 가리킨 말)이라고 하였다. 동료가 희롱하기를, “한 번 구사를 빌리는 것이 무엇이 그렇게 대의에 어긋나기로 이같이 위엄을 잃느냐.” 하니, 정석견이 웃으며 말하기를, “구사를 빌리는 것은 남의 눈앞의 일이요, 호위하는 자의 많고 적은 것은 등 뒤의 일이다. 보이지도 않는 일을 하기 위하여 남의 앞에서 구차한 말을 하는 것은 내 맹세코 하지 않겠다. 차라리 산자관(山字官)이 될지언정, 남에게 구사를 빌리는 것은 원치 아니한다.” 하니, 듣는 자들이 모두 대소하였다. 《사재척언》
○ 청성군(淸城君) 한치형(韓致亨)이 형조 판서가 되어서 근무가 심히 성실하여 그 밑에 있는 낭관들이 아침저녁으로 견디지 못하고 매우 괴로워하였다. 그 족질인 한건(韓健)이 정랑으로 있었는데, 어느 날 틈이 있을 때에 문안차 가서 조용히 말하기를, “함종군(咸從君) 어세겸(魚世謙) 같은 이는 비록 늦게 출근하여 일찍이 파하여도 오히려 아무 일이 없는데, 존숙(尊叔)은 어찌 노고를 이렇게 많이 하시나이까.” 하니, 한 청성군이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대답하기를, “함종은 도덕과 문장이 모두 우수하여 비록 송사를 결단함에 게으르더라도 취할 바가 있지만, 나와 너는 하나도 잘하는 것이 없으니, 다만 직무에 부지런한 것이 좋지 아니하냐. 나의 뜻은 이렇다.” 하니, 한건이 부끄러워하면서 물러갔다. 《충민공잡기》
○ 강응정(姜應貞)의 자는 공직(公直)이요, 호는 중화재(中和齋)며 은진(恩津)에 살았고, 효행으로 칭찬이 있었다. 일찍이 어머니 병환에 3년 동안 띠를 풀지 아니하고 약은 반드시 친히 맛보고 드리더니, 하루는 꿈에 천신이 뜰에 내려와서 강공직에게 말하기를, “내일 손님이 올 것이니, 반드시 너의 어머니 병을 치료하리라.” 하더니, 이튿날 아침에 과연 한 소년이 와서 이름은 원의(元義)이며 윤왕동(輪王洞)에 산다면서 유숙하기를 청하는지라, 공직이 쉬게 하였다. 어머니 병을 물으니, 소년이 과연 의약을 알므로 소년의 말에 따라 시험하였더니, 15일 만에 병이 나았다. 후일 부모상에 거할 때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라 행하고, 겨울에도 맨발에 솜옷을 입지 아니하였다. 이것을 나라에서 알게 되자, 정문을 짓고 그 집에는 정역(丁役)을 면하게 하였다. 강공직은 사람됨이 경서를 잘 외우며, 인명(人命)에 대해 추점(推占)을 하였고 또 의술을 알았고, 겸하여 《지리서(地理書)》에도 능통하였다. 소시에 태학(太學)에서 놀며 장안의 준사(俊士)와 함께 주문공의 향약(鄕約) 고사에 따라 아침과 밤에 《소학》을 강론하였는데, 당시의 저명한 선비들이 모두 모였다. 이를테면 김용석(金用石)자는 연숙(鍊叔)ㆍ신종호(申從濩)자는 차소(次韶)ㆍ박연(朴演)자는 문숙(文叔)ㆍ손효조(孫孝祖)자는 무첨(無忝)ㆍ정경조(鄭敬祖)자는 효곤(孝昆)ㆍ권주(權柱)자는 지경(枝卿)ㆍ정석형(丁碩亨)자는 가회(嘉會)ㆍ강백진(康伯珍)자는 자온(子蘊)ㆍ김윤제(金允濟)자는 자주(子舟) 들인데, 이들은 그 우두머리요,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이를 기뻐하지 아니한 자들이 있어 말하되, 소학계 혹은 효자계라고 지칭하며, 부자(夫子)의 사성(四聖)과 십철(十哲)에 비기며 조롱하였다. 공은 때를 만나지 못하여 고향에서 죽을 때까지 과거를 보지 아니하였다. 《남효온 사우명행록》
○ 김굉필(金宏弼)의 자는 대유(大猷)인데, 점필재(佔畢齋) 김종직에게 수업하였고, 경자년의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현풍(玄風)에서 살았다. 행실이 견줄 수 없을 만큼 돈독하여, 평소에도 반드시 관대(冠帶)를 하였고 인정(人定)을 친 후에야 취침하며, 닭이 울면 곧 일어났다. 그리고 정실(正室) 이외에는 여색을 가까이한 적이 없었다. 손에는 《소학》을 놓지 아니하고, 어떤 사람이 혹 국가사를 물으면 반드시 대답하기를 “소학 동자가 어찌 대의(大議)를 알겠냐.” 하였다. 일찍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문학을 배우면서 여전히 천기(天機)를 알지 못하여도 《소학》을 읽는 중에 지난날의 잘못을 깨우친다.”라고 하였는데, 점필재 선생이 평하기를, “이 글은 성인을 배우는 근본 터전이니, 노재(魯齊 원 나라의 허형) 후에 어찌 그만한 사람이 없으리오.”하였으니, 그를 추중함이 이와 같았다. 30세 후에야 다른 글을 읽었으며, 후진들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였으니, 곧 이현손(李賢孫) 명양부정(鳴陽副正) 같은 사람이다. 그리고, 이장길(李長吉)ㆍ이적(李勣)ㆍ최충성(崔忠成)ㆍ박한참(朴漢參)ㆍ윤신(尹信)이 모두 그 문하에서 나왔는데, 그들은 좋은 인재로서 독실한 행실이 또한 그 스승과 같았다. 나이가 더욱 많아지고 도가 더욱 높아지자 세상일을 돌이킬 수 없을 것과, 도가 행해지지 못할 것을 익히 알고서 빛을 감추고 자취를 숨기려 하였으나 세상 사람도 역시 알았다. 필재(畢齋) 선생이 이조 참판으로 있으면서 아무런 건의하는 일이 없으니, 김대유(金大猷)가 시를 지어 보내기를,
도가 겨울에는 가죽옷을 입고, 여름에는 얼음물을 마시는 데 있다지마는 / 道在冬裘夏飮氷
개면 행하고 비오면 그치는 것이야 어찌 마음대로 할 수 있겠소 / 霽行潦止豈專能
난초가 만약 속된 것을 따른다면 결국 변할 것이니 / 蘭如從俗終當變
누가 소만이 밭갈고 말만을 탄다고 믿으리오 / 誰信牛畊馬可乘
라고 하였다. 선생이 화답하기를,
분수 밖에 벼슬을 하여 벌빙하는 데까지 이르렀는데 / 分外官聯到伐氷
임금을 돕고 세상을 바로잡는 데 내가 어찌 능할쏜가 / 匡君救俗我何能
후배들로 하여금 나의 우졸을 조롱하게 하였으나 / 從敎後輩嘲迂拙
권세와 이익을 구차하게 바라지 아니하네 / 勢利區區不足剩
라고 하였는데, 이는 대개 그 말을 싫어해서 지은 글이다. 이로부터 점필재와 달리하게 되었다. 정미년에 부상(父喪)을 만나서는 죽을 먹고 곡읍(哭泣)하는 슬픔이 지나쳐서 기절하였다가 다시 소생하였다. 대유는 《소학》에 의하여 몸가짐을 하며, 옛 성인으로써 준칙을 삼고, 또 후학(後學)을 불러들였는데, 순순(恂恂)히 쇄소(灑掃)하는 예를 지켜 행하고 육예(六藝)의 학을 닦는 제자가 전후에 가득한지라, 비방하는 여론이 바야흐로 비등하니, 정자욱(鄭自勗 정여창)이 그만둘 것을 권하였으나, 대유는 듣지 아니하였다.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중 행(陸行)은 선교(禪敎)를 베풀고, 제자 천여 명이 학업을 하는데, 그 벗이 만류하며 ‘화환(禍患)이 두렵다.’ 하니, 육행이 답하기를, ‘선지 선각(先知先覺)로 하여금 후지 후각자(後知後覺者)를 깨우쳐 주는 것이니, 내가 아는 것으로써 남에게 일러줄 뿐이다. 화복이 있는 것은 하늘이 하는 것이니, 내가 어찌 관여할 것이리요.’ 하였다. 육행은 비록 중이나, 어찌 취할 말이 없으리오. ” 하였으니, 그 말이 지공(至公)하다고 하겠다. 《추강냉화》
○ 김대유(金大猷)는 성리학에 연원(淵源)을 가지고 근면 독실하여 게으르지 아니하였다. 송묘조 때에 덕행으로 처음 등용되었다가 여러 번 천거되어 형조 좌랑에 추천되었다. 과거 수십 년 전에 나를 책망하기를, “군과 이미 절교를 하고자 하였으나, 인정상 차마 그러지 못하노라.” 하므로, 내가 그 이유를 물으니, 말하기를, “군이 결단할 것이 아니다.” 하므로, 다시 추궁하여 물은즉, “백공(伯恭 남효온)ㆍ백원(百源 이총)ㆍ정중(正中 이정은)ㆍ문병(文柄 허반)은 모두 진풍(晉風)이 있으니, 진(晉)은 청담(淸淡)이 누(累)가 되어 10년이 가지 않아서 화가 이들에게 있었느니라.” 하므로, 나도 그로부터 맹세하고 다시는 이들과 왕래하지 아니하였더니, 후에 모두 화를 면하지 못했다. 신영희(辛永禧)《사우언행록》
○ 정여창(鄭汝昌)의 자는 자욱(自勗)인데, 일찍이 지리산(智異山)에 들어가서 3년을 나오지 아니하고 오경(五經)을 연구하여 궁극하고 심오한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사물의 본체와 작용이 근원은 같으나 나누어진 것이 다른 것을 알았으며, 선악이 본성은 같으나 기(氣)가 다름을 알았고, 유석(儒釋)이 도(道)는 같으나 행적(行迹)의 차가 있음을 알았다. 성리학에 잠심하여 성(性)을 깨달으니, 성한 사람이나 미친 사람들까지도 모두 공경하였다. 경자년에 왕이 성균관에 조서를 내려 경전에 밝고 덕행이 있는 유생을 구하라 하니, 관중에서 정자욱(鄭自勗)이 제일이라고 천거하였다. 지관사(知館事) 서거정(徐居正)이 장차 자욱에게 강경을 하도록 하려고 하니, 자욱이 그만 물러났다. 계묘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그 부친인 정육을(鄭六乙)은 이시애(李施愛)의 난으로 죽었는데, 그때 자욱의 나이가 어렸으므로 상례 치른 일은 알 수 없으나, 후에 모친의 거상에는 전례(典禮)하는 법도와 죽 먹는 것을 일체 《주자가례》에 의하여 지극히 하였다. 경술년에 참의 윤긍(尹兢)이 그의 효행과 학행이 사림에서 견줄 이가 없다고 천거하여서, 특별히 조정에서 소격서 참봉(昭格署參奉)으로 삼았는데, 자욱이 상서하여 사면하니, 임금이 교지를 내려 포상한지라 이름이 더욱 중하여졌다. 자욱은 사람됨이 성품이 단중(端重)하여, 술을 마시지 아니하였고, 훈채(葷菜)를 먹지 아니하며, 또 우마육(牛馬肉)을 먹지 아니하였다. 겉으로는 평범한 말을 하지만, 내심은 분명하였다. 젊어서 학관에 있을 때 남과 같이 잠을 자되, 코를 골면서도 잠을 자지 아니하였으나 사람들은 알지 못하였는데, 어느날 최진국(崔鎭國)에게 발견되었으므로 관중에서 정아무개가 참선(參禪)하고 잠을 안 잔다고 떠들어 대었다. 《사우언행록》
○ 정자욱 선생은 소시 때에 술을 즐겨하였는데, 하루는 벗들과 지나치게 술을 마시고 들판에 넘어져서 밤을 새고 돌아오니, 그 모부인이 꾸짖기를, “네가 이같으니 내가 누구를 믿고 의뢰하겠는가.” 하니, 선생은 깊이 자각하고 그 후로는 임금이 주는 술이나 음복주 이외엔 입에 대지 아니하였다. 《병진정사록》
○ 정 선생은 젊어서 두류산(頭流山 지리산) 기슭에 정자를 복축(卜築)하고 만년을 보낼 계획을 하고 있더니, 성묘(成廟)가 소격서 참봉을 주고 부르자 선생은 간곡히 사임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고 이에 나오게 되었다. 선생은 몸가짐이 심히 엄격하여, 종일토록 단좌하고 있으면서 비록 아주 더운 날이라도 그 처자도 살갗을 본 일이 없었다. 평소에 시짓기를 좋아하지 아니했으므로, 다만 한편의 시가 세상에 전하니, 그 시에 이르기를,
창포는 바람에 날려 가볍고 부드럽게 흔들리는데 / 風蒲獵獵弄泛柔
4월이라 화개에는 이미 보리가 가을이로세 / 四月花開麥已秋
두류산 천봉만학 다 보고서 / 看盡頭流千萬疊
한 척의 조각배로 다시 대강을 흘러 내려가네 / 孤帆又下大江流
라고 하였다. 이 시를 읊으면 흉중(胸中)이 쇄락(洒落)하고 세상의 속된 점이 하나도 없으니, 대개 이 사람의 사람됨을 알겠다. 화개(花開)고을 이름이다.
○ 포은(圃隱 정몽주) 이후에 우리나라 성리학은 실로 김대유(金大猷) 선생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동지(同志)인 정 선생 자욱(自勗)도 성리학을 연구한 사람이다. 김대유는 이(理)에 정밀하고 정자욱은 수(數)에 정밀했는데, 아깝게도 상서로운 때를 만나서 못하여 비명으로 죽었으니, 창창(蒼蒼)한 저 하늘이 그를 어찌 하겠느냐. 중묘조 때에 다 영의정을 증직하였으며, 가묘(家廟)를 세우고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 남효온(南孝溫)의 자는 백공(伯恭)이요, 호는 추강(秋江) 또는 행우(杏雨)라고 한다. 재행(才行)이 탁월(卓越)하나 항시 의식(衣食)이 거칠고, 또 조랑말을 타고 다니므로 아동과 부녀자가 서로 따라다니며 손가락질하며 웃곤 하였다. 성질이 술을 즐기었는데, 그 모친의 꾸지람을 듣고서 지주부(止酒賦)라는 글을 짓고 10년을 마시지 아니하더니, 풍병이 나자 다시 마시었다가, 병세가 좀 가라앉자 다시 지주부를 짓고 5년을 마시지 아니하였다. 후에 병세가 위독해지자, 다시 술과 같이 생애하며 벼슬도 하지 아니하고, 그 집에서 세상을 마치었다. 폐조(廢朝)에서는 점필재 문도라고 하여 대유를 처형하였고, 또 소릉(昭陵)의 복위 상소를 하였다 하여 백공의 시체를 능지처참하였다. 옛날 범희문(范希文) 공이 말하되, “충신(忠信)한 분은 하늘이 돕는다고 하였는데, 두 사람은 하늘이 돕지 아니하였으니, 어찌된 이유일까.”《사우언행록》
○ 남추강(南秋江 남효온)은 성품이 강개(慷慨)하였는데, 일찍이 청한자(淸寒子 김시습)를 스승으로 삼고 물질 이외의 세상에 노닐면서 세속과는 아무 상관을 하지 않았다. 나이 18세에 성묘에게 상서하여 소릉의 복위를 청한 일이 있었고, 때로는 시사에 울분하면 무악산(毋岳山)에 올라가서 통곡하고 돌아왔는데, 시사를 논할 때는 위언격론(危言激論)을 가리지 아니하고, 비록 꺼리고 숨기는 일이라도 거리낌이 없는지라, 대유와 자욱이 경계하여 말렸으나, 끝내 듣지 아니하였다. 김ㆍ정 두 공은 성리학에 밝고 모든 조행은《소학》을 법으로 삼으니, 그 하는 바가 실로 남추강과 다르다. 그러나 교분에 있어서는 서로 두터워 진실로 소위 ‘지란동취(芝蘭同臭)’라고 하겠다. 《병진정사록》
○ 남효온(南孝溫)의 자는 백공(伯恭)이요, 호는 추강(秋江)이다. 성품이 기개가 있어, 남에게 얽매이지 아니하고, 학문에 독실하며, 옛것을 좋아하고 지절(志節)이 있었다. 일찍이 상서하여 소릉의 복위를 청하였다가 귀양간 일이 있으나,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아니하였다. 주계정(朱溪正) 심원(沈源)과 안응세(安應世) 자정(子挺)과 벗이 되었다. 진사 시험에 합격하고는 동문과 시험에는 나가지 아니하니, 그 자친이 권유하므로 때로는 시험에 나갔으나, 즐겨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끝내 급제하지 못하였다. 홍치(弘治) 임자년에 겨우 39세로 졸하였다. 성화(成化) 기해년에 내가 서울에 불려가 장차 일본에 가게 되었는데, 남백공이 나의 시축을 구경하고 나를 한강에까지 전송한 일이 있었다. 이로부터 서로 사이가 좋아서 같이 송도에서 놀며 천마산(天磨山)에 올라가기도 하였다. 집이 고양(高陽)에 있었으므로, 당나귀를 몰아서 서로 찾아 압도(鴨島)에 가서 자면서 갈대로 불을 피우고 물고기와 게를 구워 먹으면서 운자(韻字)를 불러 시 짓는 것으로 밤을 새웠다. 나의 소개로 점필재를 호남에서 보았는데, 전부터 그의 시를 사랑한다면서 고인(古人)에 비교하였다. 그가 죽고 나자 남은 아들 충서(忠恕)가 미친병이 있어서 또 비명으로 죽었다. 나머지는 모두 사위뿐이어서 문집 초고를 모으지 않았다. 《소문쇄록》
○ 한훤(寒暄 김광필) 선생은 좌랑으로 있을 때에 진사 신영희(辛永禧)씨에게 달려가서 말하기를, “오늘 나는 마땅히 그대와 절교를 하겠다. 지금 사기(士氣)를 보면 동한(東漢)의 말과 같아서 어느 때에 무슨 화가 일어날지 모르겠는데, 나는 화가 박두하여 진퇴를 어찌할 도리가 없으나, 그대들은 멀리 고향에 가서 숨어 사시오. 그렇지 아니하면 나는 곧 이 자리에서 절교하겠노라. 내 말을 잘 들어 주겠는가. 그렇지 아니하겠는가.” 하면서 다짐하는지라, 신공은 이로 인하여 직산(稷山)으로 내려가서 사산(斜山) 아래로 가서 안정(安亭)이라고 호하였다. 안정은 일찍이 남효온ㆍ홍유손(洪裕孫)과 같이 죽림(竹林) 우사(羽士 신선)를 맺은 일도 있어서 문장행의(文章行義)가 당시 영수였으므로, 남으로 지나는 자는 그 문에 예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었다. 《경현록》
○ 강국오(姜菊塢) 경순(景醇)은 진산 강씨(晉山姜氏)의 세고(世稿)를 편찬하면서, 김 참판(金參判) 수령(壽寧)과 같이 그 시문을 메우고 고치고 하여 보는 사람의 마음을 유쾌하게 하였으며, 부조(父祖)의 시명을 후세에까지 떨쳤다. 사람들은 이것을 효행이라고 하지만 나는 불효라고 생각한다. 또 상사(上舍 생진과(生進科)에 합격한 사람) 신영희(辛永禧)의 집에는 그 조부 문희공(文禧公)의 시집이 있는데, 그 우인이 말하기를, “자네의 가집(家集)을 인쇄하여 세상에 전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신영희가 대답하기를, “나의 조부는 비록 글 잘한다는 명성이 세상에 으뜸이었으나, 가집(家集)에 실려 있는 것은 하나도 전할 것이 없고, 다만 한 문생의 만장 시에 말한, ‘32세에 졸하였으니, 불행한 것 안회(顔回)와 같도다.’ 라고 한 구절 외에 아름다운 시가 없으니, 어찌 가히 간행하겠는가.” 라고 하여서 사람들은 그것을 불효라고 하지만, 나는 효행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조부(祖父)의 행예(行藝)를 바른 대로 기술하여야 비로소 효행이라고 할 것이다. 가령 공교한 말과 허식하는 붓을 빌려다가 칭예한다면 그 부모의 영혼이 있을진대, 부끄러운 마음이 명명(冥冥)한 가운데에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추강냉화》
○ 남효온과 신영희는 모두 상사로 현달하지 못하고 일찍 죽었다. 그들은 사람됨이 옛 일을 좋아하고 기개가 있으며, 남에게 아부하지 아니하고 세속의 틀에서 벗어났다. 효온의 견흥시(遣興詩)에,
괴생이 안기(安期 예전 신선)와 벗을 삼으니 / 蒯生友安期
세상에서 뛰어난 늙은이인 줄을 알았다 / 知爲不世翁
대초를 어린아이같이 보고 / 豎兒看大楚
패공이라도 개미만하게 여겼다 / 蟻封視沛公
어찌하여 제왕에게 유세하여 / 如何說齊王
큰 공을 세우려 하였던가 / 顧欲作元功
만일 걸구의 변명이 아니었더면 / 若非桀狗辨
거의 대벽(大辟 사형)에 빠지고 말았으리 / 幾陷大辟中
또,
필부인 양왕손은 / 匹夫楊王孫
한 무제 때에 났다 / 生當漢武時
무제가 한창 서북방에서 일할 적에 / 帝方事西北
온 세상이 구치에 힘쓰건만 / 擧世務駈馳
허리띠를 늦추고 만호봉이 되었으나 / 緩帶食萬戶
다만 지리한 것 배웠어라 / 顧乃學支離
평소에 기후를 업신여기더니 / 平生殘祈侯
알몸으로 장사하기 기약대로 하였도다 / 稗葬得如期

사종(嗣宗 완적(頑籍))은 망위(亡魏)를 위하여 / 嗣宗爲亡魏
문제(文帝 진 나라 사마소)를 여우같이 여겼다 / 狐媚視文帝
미친 듯이 국생을 좋아하여 / 猖狂引麴生
60일 동안 취하여 끝장보았다 / 六旬托末契
위주(僞主)의 청혼을 물리친 것은 / 却得僞主婚
그 대절이 만세에 빛나리라 / 大節昭萬世
증적(曾賊)이 무례를 꾸짖으니 / 曾賊責無禮
우습구나. 제 생각 못하는 위인 / 可笑不自計

47회나 올린 상소 / 四十七奏疏
영수(靈修 임금)의 총명을 넓히려 하였건만 / 欲廣靈修聰
마지막 사자론도 / 終然四字論
귓등에 지나는 바람만도 못하였네 / 不啻耳過風
계통의 점친 것 의뢰하여 / 賴用季通筮
말년에는 둔옹이라 호 지었네 / 末路號遯翁
한천에 한 칸 집을 세운 것은 / 寒泉一間舍
꼭 참동계(參同栔 신선되는 글) 정하기에 합당하였네 / 端合訂參同

호원이 대송을 몰아내니 / 胡元駈大宋
양경은 황진에 어두웠네 / 兩京迷黃塵
노재 허문정공은 / 魯齊許文正
피발하고 그 신하가 되었다 / 被髮爲其臣
요 순의 도를 가져다가 / 欲將堯舜道
억지로 판옥인을 교화하려 하였건만 / 强敎板屋人
방(方)과 원(圓)은 같이할 수 없는 것이 / 方圓不能周
필경에는 새 백성 이루지 못하였다 / 畢竟無新民
라 하였고 신영희의 우의시(愚意詩)에는,
남복은 뜰을 소제하고 / 男僕掃庭除
여종은 규당을 쓰네 / 女僕掃閨堂
장부는 변진을 소탕하고자 뜻하는 것 / 丈夫掃邊塵
한 집안에 있지 않다 / 志不在門楣
두옥 아래에 높이 누워 / 高臥斗屋下
내 흉중이 있는 기를 흔드노라 / 掉我胸中旗
야인은 장부가 아니다 / 野人非丈大
장부는 각자 기이하리라 / 大夫各自奇

말달려 급한 언덕 내리달려 / 走馬下急坂
매를 불러 높은 구름가로 들어간다 / 呼鷹入雲際
눈이 녹은 곳 찾아 말에서 내리고 / 下馬雪消處
바위에 걸터앉아 조금 쉬자니 / 踞石時少憩
마부는 찬밥을 펼쳐놓고 / 僕夫開冷飯
불 피우고 물 끓인다 / 敲火湯沸細
집은 10리나 남았는데 / 家在十里餘
산허리에 석양이 곱게 비치었네 / 山腰夕陽麗
또,
꽃까지 꺾어 해진 갓 꽂았으나 / 花枝揷破笠
때묻은 소매 춤추는 팔 위에 펄럭인다 / 垢袂翻舞臂
하였다. 영희는 기개가 있었으나, 세상에는 뜻을 잃었다. 어느 사비(私婢)에게 장가들었다가, 그 상전에게 욕을 보고 화가 나서 세상을 떠났고, 효온도 죽은 뒤에 참화를 만났으니, 어찌 이들의 운명이 이렇게 기박할까. 《소문쇄록》
○ 김시습(金時習)은 강릉인(江陵人)이며, 신라의 후예이다. 자는 열경(悅卿)이요, 호는 동봉(東峯)ㆍ벽산청은(碧山淸隱) 또는 청한자(淸寒子)라고도 한다. 세종 을묘생인데, 5세에 능히 글을 지었으므로, 세종이 승정원에 불러서 부시를 짓게 하고, 크게 기이하게 여기어, 그 부친을 불러 이르기를, “이 아이를 잘 기르라. 내가 장차 크게 쓰리라.” 하였다. 을해년에 광묘가 섭정하자, 사문(沙門)에 들어가서 이름을 설잠(雪岑)이라 하고, 수락정사(水落精舍)에 거하면서 수도연형(修道煉形)을 하였다. 유생(儒生)을 보면, 말마다 공맹(孔孟)을 칭하고 입으로 불법은 이르지 아니하였다. 사람이 수련(修煉)의 일을 물어도 또한 즐겨 말하지 아니하였다. 또 어떤 사람이 괴애(乖崖) 김수온(金守溫)의 좌화(坐化)한 일을 말하니, 설잠이 말하기를, “예(禮)에 좌화는 귀하게 여기지 아니한다. 나는 다만 증자(曾子)의 역책(易簀)자로(子路)의 결영(結纓)을 죽음에 있어 귀하게 여긴다. 그리고, 다른 것은 알지 못한다.” 하였다. 신축 연간에는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으며, 글을 지어 그 조부의 제사를 지냈는데, 그 글이 이르기를, “삼가 아룁니다. 제(帝)가 오륜(五倫)을 베풀었사온데,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 먼저가 되고, 3천 가지 죄 중에서 불효가 제일 크다 합니다. 무릇 천지 사이에 살면서 누가 양육의 은혜를 저버리오리까. 그러므로 호랑(虎狼)이 같은 악수(惡獸)며, 수달(豺獺) 같은 미충(微虫)이라도 어버이를 사랑하는 성품을 온전히 할 수가 있고, 또 근본을 알며 갚은 정성을 삼가나이다. 이것은 모두 천리(天理)의 당연함 이어서 물욕(物慾)에 가려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우둔한 소자는 본지(本支)를 이으려고 젊어서는 이단(異端)에 침체되어 미몽(迷懵)하여 강구하지 못하였습니다만, 장차 수도(修道)로써 발탁될 것이요, 황설(謊說)로 윤회(輪回) 같은 것이 없음을 깨달았나이다. 젊어서는 그런대로 수도하였지만, 말년에 바야흐로 뉘우쳐서 이에 예전(禮典)과 성경(聖經)을 상고하고 찾아서 추원(追遠)하는 홍의(弘儀)를 고정(攷定)하였고, 청빈한 활계(活計)로 참작(參酌)하였나이다. 그리하여 간략(簡略)하면서 조촐히 할 것을 힘쓰며, 풍부히 하며 정성스럽게 하나니, 한 무제(漢武帝)는 70세에야 비로소 전천추(田千秋)의 말을 깨달았고, 원덕공(元德公)은 백 세가 되고서야 허노재(許魯齋)의 풍화에 감화되었나이다. 상로(霜露)에 젖음을 느끼고 세월이 감을 근심하니 경황(驚惶)함을 마지아니하며, 탄아(嘆訝)마저 진실로 많습니다. 그저 죄를 속(贖)할 수 있어서 천지의 양제(兩際)에서 용납된다면 혹시나 면목을 가지고 구원(九原)에서 조종(祖宗)을 뵈려고 하나이다.” 라고 하였다. 임인년 이후부터서는 세상이 쇠하려는 것을 보고 시달려 인간의 일은 하지 아니하고 여염간(閭閻間)에 버려진 사람이 되어, 날로 남과 더불어 장례원(掌隷院)에서 다투고 송사하였다. 하루는 술을 마시고 시중을 지나가다가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을 보고, “네 놈도 그만 쉬어라.” 하고 외치니, 정창손이 들은 척도 아니하며 지나갔다.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위태롭게 여겼으며 일찍이 교유하던 자들도 모두 절교하며 왕래하지 아니하였다. 홀로 시중의 정신병자들과 같이 재미있게 놀고 때로는 술에 취하여 길가에서 거꾸러지는가 하면, 늘 헛웃음을 웃고 하더니, 후일에 설악산(雪岳山) 또는 춘천산(春川山)에 들어가 있으면서 출입이 무상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한계를 알지 못하였지만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정중(正中 이정은)ㆍ자용(子容 우선언)ㆍ자정(子挺 안응세), 그리고 나남효온이다. 그가 시문을 지은 것이 수만 편인데, 옮겨갈 때에 흩어져서 거의 없어졌고, 간혹 조정의 신하와 유사들이 절취하여 자기 소작으로 만들었다. 《사우명행록》
○ 김시습은 유양양(柳襄陽 유자한)에게 수백 마디 편지를 보냈는데, 그 대략을 말하자면, “나는 난 지 8개월 만에 글자를 보고 알았다. 그리고 친척 할아버지 되는 최치운(崔致雲)이 나의 이름을 시습(時習)이라고 지어 주었다. 3세 때에 능히 글을 엮었는데, 거기에,
복숭아꽃은 붉고 버들잎은 푸르러 3월이 저물었는데 / 桃紅柳綠三月暮
구슬이 바늘에 꿰인 것은 솔잎에 이슬일세 / 珠貫靑針松葉露
라는 시를 지었다. 5세 때에는 《중용》과《대학》을 수찬(修撰) 이계전(李季甸)의 문하에서 읽었는데, 그때 사예(司藝) 조수(趙須)가 자설(字說)을 지어 달라고 명하여 지어준 일도 있다. 정승 허조(許惆)가 나의 집에 와서 말하기를, ‘나는 늙었으니, 노자(老字)를 운(韻)으로 시를 지어라.’ 하므로, 내가 그 소리에 응하여서
늙은 나무가 꽃이 피었으니 마음은 안 늙었네 / 老木開花心不老
라고 하였더니, 허 정승이 무릎을 치며 탄상하고, ‘이는 이른바 신동이라는 것이다.’ 하였다. 세종께서 이것을 들으시고 대언사(代言司)로 불러 지신사(知申事) 박이창(朴以昌)에게 시험하라고 명하니, 박이창은 자기 무릎 위에 앉히고 벽화 산수도를 가리키면서, ‘네가 저 벽화를 두고 시를 지을 수 있겠느냐.’ 하기로, 내가 응하기를,
작은 정자에 배가 매인 집은 누가 사는고 / 小亭舟宅何人在
하였다. 이같이 작문 작시(作文作詩)한 것이 매우 많았다. 세종이 전지(傳旨)하기를, ‘내가 친히 데려다 보고자 하나 사람들이 듣고 해괴히 여길까 두려워한다. 가리고 숨겨 키워서 나이가 들고 학업이 성취함을 기다려서 장차 크게 쓰겠노라.’ 하면서, 물건을 주시고 집에 돌아가게 하였다. 13세 때에는 대사성 김반(金泮)의 문하에 가서 《논어》ㆍ《맹자》ㆍ《시전》ㆍ《서전》, 그리고 《춘추》를 읽었으며, 또 대사성 윤상(尹祥)에게 가서 《주역》과 《예기》, 그리고 제사(諸史)를 읽었다. 좀 장성하여서는 영달을 기쁘게 여기지 아니하고, 또 친척과 이웃에서 넘치게 칭찬하는 것을 싫어하였다. 그러다가 세상과 내 마음이 서로 어긋나서 곤란하게 되는 차에, 세종과 현릉(顯陵 문종)이 연이어 승하하셨고, 세종 초기에 원로(元老)와 대가들이 모두 귀신의 명부(鬼簿)에 오르고, 다시 이교(異敎 불교)가 크게 일어나 사문(斯文 유교)을 능멸하니, 나의 뜻은 이미 거칠 대로 거칠어졌다. 드디어 중과 짝을 하고 산수를 찾아 놀았으니, 세상 사람이 나를 보고 불교를 좋아한다고 하나, 나는 이도(異道)로써 세상에 나타나지 않고자 하였으므로, 세조가 전지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모두 나가지 아니하고 몸가짐은 더욱 거칠고 방탕해졌다. 이로부터 사람 축에도 들지 못하여 나보고 어리석다 하고, 혹은 나를 미치광이라고 하면서, 우마(牛馬)와 같이 대하나, 나는 모두 그에 응해 준다. 이제 성성(聖上)이 등극(登極)하여 어진이를 등용하고 충간(忠諫)을 잘 들으시므로 벼슬하려고도 한다. 그러나 나로 말하면 10여 년 전후에 육적(六籍 여섯 가지 경서)을 익숙하게 연구하여 점차 정밀하여졌지만, 여러 번 내 몸과 세상이 서로 어긋나서, 둥근 도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박는 것 같고, 옛 친구는 모두 죽고 새 사람은 낯이 익지 아니하니, 누가 나의 본뜻을 알아주리오. 그러므로, 다시 산수간에 방탕하였노라. 이것이 모두 사실이니, 공만은 알아주시오. ”하였다. 《패관잡기》
○ 매월당(梅月堂 김시습)은 평소의 그 심회(心懷)를 세상 사람이 엿볼 수 없다. 그의 시집을 보면, 미궐(薇蕨) 두 자를 잘 사용하였는데, 그 본뜻이 있는 곳은 알지 못하겠다. 어느 날 내(김정국)가 늙은 중을 만나니 많은 현묘한 이치를 들은지라 그가 배운 스승을 물으니, 그가 답하기를, “젊을 때 사미(沙彌)로 있으면서 오세(五歲 김시습의 별칭)를 모시고 섬기었는데, 오세의 저술로 세상에 전하는 것은 겨우 백에 하나나 둘이 될까 합니다.”라고 말하므로, 그 이유를 물으니 그 중이 말하기를, “노승이 중흥사(中興寺)에서 오래도록 모시고 있었는데, 매양 비온 뒤에 산물이 불으면, 백여 장의 종이를 끊어 가지고는 나에게 필연(筆硯)을 들리고 뒤따르게 하여 물결을 따라 내려가 반드시 급류를 찾아 앉아서는, 절구ㆍ율시 또는 오언 고풍(五言古風)을 침음(沈吟)하여 시를 짓되, 조각 종이에 쓰고 물에 흘려 멀리 보내고 나서는, 또다시 써서 흘려 보내고 하기를 밤새도록 하여 조각 종이가 다 없어져야 집에 돌아옵니다. 어느 때는 하루에 백여 수의 시를 지어 읊었습니다.” 하였으니, 이 또한 그의 본뜻을 엿보기 어려운 점이다. 《사재척언》
○ 동봉(東峯) 김시습은 어려서부터 시문에 능하다는 명성이 있었는데, 세상 법규를 털어버리고 머리를 깎고 중이 되고서는, 그 이름을 설잠(雪岑)이라 고쳤다. 남추강(남효혼)과 더불어 세상 밖에 놀면서 미친 듯이 읊조리며 방랑하며 한 세상을 희롱하였다. 세상을 도피하여 불문(佛門)에 들어가서도, 그 계율(戒律)을 지키지 아니하니, 세상 사람이 미친 중으로 지목하였다. 시가(市街)에 지나가면서 어느 때는 한 곳만을 눈여겨보고는 돌아가기를 잊으며, 때로는 우두커니 서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는가 하면, 어느 때는 가로(街路)에서 똥오줌을 누어서 여러 사람이 보는 것도 피하지 아니하며, 또 뭇 아이들이 욕하고 웃으며 다투어 기와 쪽을 조약돌을 던지면서 쫓기도 하였다. 그가 소유한 노비(奴婢)와 전택(田宅)을 남들이 가져가고 도둑질하는 대로 맡겨두고 조금도 개의하지 아니하고 있다가, 얼마 뒤에 그 사람에게 돌려줄 것을 청하니, 그 사람이 좋아하지 아니하는지라 설잠은 관청에 고발하여 면대하여 공술하고, 싸우기를 시끄럽게 하고 시정(市井)에서 싸우듯이 하며, 마침내 승소하고 증서를 받아 품 안에 품고 관문을 나오더니,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크게 웃곤, 급히 증서를 내어 찢어서 개천물에 던졌으니, 그가 사람을 조롱하고 세상을 업신여김이 이와 같았다. 세조가 일찍이 법회(法會)를 내전에서 베풀면서, 설잠도 간선되어 그 회에 참여하였다. 새벽이 되자, 문득 도망쳐 어느 곳으로 갔는지 몰라 사람을 시켜 찾아 보았더니, 가로상에 있는 똥독 속에 빠져 있고, 겨우 얼굴만 보일 정도였다. 한 사미(沙彌)가 있었는데 그 목소리가 맑고 깨끗하여, 쟁쟁(錚錚)한 소리를 내면서 낭랑히 길게 읊으면, 그 소리가 창공에 울리어 처량한 여감(餘感)이 있으므로, 달빛 환한 밤을 만날 때마다 깊은 밤에 홀로 앉아 그 사미에게 이소경(離騷經)을 한 차례 읊게 하곤, 그때마다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젖게 하였다. 성질이 술을 좋아하였는데 취하면, “우리 영묘(세종)를 보지 못하는구나.” 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매우 비통한 심정을 풀지 못하였다. 여러 비구(叱丘)들은 항시 신사(神師)로 추대하며, 온갖 정성을 다해 시중을 드리더니, 어느 날은 합사(合辭)하여 청하기를, “저희 제자들은 대사(大師)님을 모신 지 오래오나, 아직까지 일교(一敎)를 해 주시기를 꺼리오니, 대사님은 그 청정한 법안(法眼)을 끝내 누구에게 주시려고 하십니까. 제생들이 나아갈 방향을 헤매고 있으니 저희들의 소원은 금비(金篦)로 긁어내시는 것입니다.” 하고, 청하기를 더욱 간절히 하니, 설잠이, ‘그래라.’ 하고, 크게 법연(法筵)을 열어서 설잠이 몸에 가사와 법의를 갖추고 가부좌를 하니, 중들이 모여들어 합장하고 무릎을 꿇고 벌여 앉아서 귀를 기울이며 들으려고 한지라, 설잠이 말하기를, “소를 한 마리 끌어오라.”고 하였다. 모두들 이유를 헤아리지 못하고 소를 끌어다가 뜰 앞에 매어 두었다. 설잠이 또다시 꼴 한 뭇을 소 뒤에 두라고 하는지라, 그대로 행하니 설잠은 크게 웃으며, “너희들이 법을 듣는다는 것은 이와 같으니라.” 하니, 소란 축류(畜類) 가운데 가장 우둔한 것이니 사람의 미명(迷冥)하고 무식한 자를 시속에서 소 뒤에 꼴을 둔 것이라고 한다. 중들은 낯빛을 붉히며 물러갔다. 근대의 시승(詩僧)을 말하면 설잠이 그 영수(領袖)인데, 그 시가 법도에 맞고 중후하여 중의 티가 없다. 금오산(金鰲山)에 들어가서 저서(금오신화)를 석실(石室)에 감추고 말하기를, “후세에 반드시 설잠을 아는 이가 있으리라.” 하였다. 그 글은 대개 괴이한 것을 기술하여 우의(寓意)한 것인데, 전등신화(傳燈新話) 등을 본떠서 지은 것이다. 《용천담적기》
○ 심원(深源)의 자는 백연(伯淵)이요, 호는 성광(醒狂), 묵재(黙齊) 또는 태평진일(太平眞逸)이라고 한다. 태종의 현손이며 나(김정국)와 동년생으로 달과 날이 나보다 뒤졌다. 경서에 밝고 덕행이 있으며 겸하여 의술에 능하였다. 성품이 충성스럽고 효성스러우며 무당과 불교를 좋아하지 아니하였으며, 평소에도 갓과 띠를 두르고 손에는 책을 놓기 아니하였다. 전강(殿講)에서 사서와 오경을 통하여 명선대부(明善大夫)에 오르고, 주계부정(朱溪副正)의 행직을 받았다. 나이 25세를 전후하여 다섯 차례 치도(治道)를 상소하였는데, 어느 때는 윤허(允許)를 얻고 어느 때는 얻지 못하였다. 또 조정에서 고모부 임사홍(任士洪)의 무도하고 딴 마음이 있음을 논박한 일로 그의 조부에게 미움받아 장단(長湍)으로 귀양가고, 또 이천(伊川)으로 귀양갔었다. 병든 부모를 찾아 보아야겠다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 글이 간곡하고 지극한지라 윤허를 얻었다. 정미년에는 종친과(宗親科) 시험에서 경사(經史)를 당하여 제1인으로 발탁되니 풍악과 술 그리고 2품을 내렸으나 군(君)에 봉하지 아니하였는데, 이는 전에 그의 조부에게 불순히 한 허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우명행록》
○ 주계정(朱溪正) 심원은 다만 성리학에만 능숙할 뿐 아니라, 또한 시를 잘 지었다. 비온 뒤 저녁 때 바라보고 지은 시에 이르기를,
한 보지락 봄비에 살구꽃은 지고 / 一犁春雨杏花殘
여기저기 사람들은 맑은 물 속에서 밭갈이하누나 / 處處人耕白水間
홀로 창망한 강해 위에 섰으니 / 獨立蒼茫江海上
서운함을 이기지 못하고, 삼각산만 바라보누나 / 不勝惆悵望三山
하고, 또 운계사(雲溪寺)에 가서 읊기를,
나무 그늘 얼룩지고 돌은 서려 있는데 / 樹陰濃淡石盤陀
휘돌아드는 한 줄기 길은 시냇물 지나간다 / 一逕縈回透澗阿
확확 닥치는 향풍이 코에 스치니 / 陣陣春風通鼻觀
멀리 저 숲 아래 남은 꽃송이 있음을 알겠구나 / 遙知林下有殘花
하였다. 《소문쇄록》
○ 주계군 심원은 선견지명이 있었다. 성묘조 때에 자기 고모부 되는 임사홍(任士洪)의 간사함을 알고 상소하여 힘껏 사리를 밝히어 마침내 임사홍을 멀리 귀양보내었다. 연산조 말년 임사홍이 세도를 부릴 적에 드러내어 죽였는데, 중종이 즉위하여서는 그의 충의를 가상히 여기어 작위를 주고 정문(旌門)을 세우게 하였으니, 대개 심원의 의향은, “내가 종친으로서 마땅히 나라와 흥망을 같이할 것이요, 어찌 한 사가(私家)의 고모부를 두둔하겠는가.” 한 것이었다. 상소를 읽으면 늠름한 생기가 떠오른다. 《패관잡기》
○ 정은(貞恩)의 자는 정중(正中)이요, 호는 월호(月湖), 풍곡(風谷) 또는 설창(雪牕)이라고 한다. 수천부정(秀泉副正)을 제수되었는데, 음률이 세상에 으뜸이어서 강개히 슬픈 곡조를 타면, 지나가던 행인들이 듣고 눈물을 흘렸다. 사람됨이 독후(篤厚)하고 스스로 겸손하며, 학식과 도량이 있었으며 총명하였다. 학문을 할 때에는 먼저 이(理)를 밝히고 난 후에 문(文)을 하므로 스승이 수고롭지 않았으며, 시를 지을 때에는 먼저 격(楁)에 맞추고 난 후에 문사를 꾸미므로 사람들이 싫어하지 아니한다. 또 덕(德)을 닦을 때에는 먼저 내심을 가다듬고, 후에 외형을 바르게 하므로 사람들이 알지 못하였다. 처신할 때에는 지위가 높은 것으로 사람을 억압하지 아니하여 가장 가난한 선비 같았다. 《사우명행록》
○ 종실인 수천부정 정은은 날마다 시주(詩酒)와 금파(琴琶)로 스스로의 즐거움으로 삼고, 시문과 음률이 백원(百源 이창)과 이름이 같았다. 김대유(金大猷)의 책망을 듣고 모든 구습을 버리고, 짐짓 속태(俗態)를 꾸미고 두문불출하고 과감히 친구와 왕래를 끊었더니, 과연 홀로 무사히 보존하였다. 참판 김유(金紐)는 그의 거문고 소리를 듣고 솜씨가 시냇가에 피어 있는 매화의 격(格)과 같다고 감탄하였다. 그가 지은 입춘첩시(立春帖詩)에 이르기를,
가늘게 홍전을 오려 소춘에 걸었다 / 細剪紅箋架小春
하고 또 마상(馬上)에서 구두로 시를 읊기를,
뽕나무가 마르니 소가 혀를 토한다 / 桑乾牛吐舌
고 하였으니, 그의 시 짓는 솜씨가 대개 이와 같았다. 《사우언행록》
○ 국조(國朝)의 아악(雅樂)으로 말하면, 박연(朴堧) 후에 사족(士族)으로는 칭할 만한 자가 없더니, 성화(成化) 연간에 유추(有秋)임흥(任興) 가 처음 드러나고 이어 정중(正中 이정은)과 백원(百源 이창), 그리고 국문(國聞) 정자지이 한때에 같이 일어나서 구습(舊習)을 일소하였고, 향방을 교화하는데 있어서 위에서 말한 4명이 으뜸이었다. 나(남효온)는 음률을 알지 못하나, 날마다 사자(四子)와 더불어 술을 마시며, 즐겁게 놀곤 하였다. 광대들의 논평을 들으면 대개 다음과 같으니, “유추(有秋)는 마음씨는 평화하면서 그 가락이 저하하고, 국문은 가락은 절묘한데 마음씨가 혹(酷)한 편이다. 또 백원은 웅혼(雄渾)하기는 하나 솜씨가 좀 잡되고, 정중은 곡조는 고상하나 기(氣)가 편벽된다.” 하였다. 내가 정중과 같이 송도(松都)에서 놀 때에 그가 거문고를 타면, 사인(士人)과 기녀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지 아니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서울에 돌아오는 날에 말에 오르기를 머뭇거리니 행인들도 서서 보았다. 백아(伯牙)가 죽은지 천 년 후인 오늘에 이 사람이 아니고 또 누가 있겠는가. 기(氣)가 편벽되다는 말은 지나치지 않다. 백원과 유추는 언제나 악기를 가지고 밤낮으로 연습하나, 정중은 집 안에 풍물(風物)이 없어 여기저기 가는 곳에서 우연히 다른 악기를 가지고도 그의 음률은 순수하였다. 나는 언제나 그 수예(手藝)가 매우 고상함에 감복한다. 그러나 음률을 아는 자는 간혹 조롱하여 말하기를, “정중의 거문고는 백아(伯牙)와 같으나, 때로는 백원에게 미치지 못한다.” 하니, 어찌 제세경략(濟世經略)의 재주가 쌓여서 적은 기술에 돌아갔으므로 나오는 것이 편벽된 것이 아니랴. 나는 흐르는 눈물을 견디지 못하였으니, 아 뜻을 펴지 못함이여. 《추강냉화》
○ 현손(賢孫)의 자는 세창(世昌)이요, 신요(神堯 태조 이성계)의 후손으로 벼슬이 명양부정(鳴陽副正)에까지 이르렀다. 예에 맞게 행동하고 몸가짐을 독실히 하였으므로, 김대유(金大猷) 다음으로 꼽는다. 일찍이 관례(冠禮)를 행하려고 하자 대유가 만류하였다. 그 모친의 상사에는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행하였다. 《사우언행록》
○ 종실(宗室) 명양부정은 성품이 조촐하여 속세에서 벗어났고, 글과 시 짓기를 좋아하였으니 그 사람됨과 같았다. 그의 견의시(遣意詩)에 이르기를,
병은 품은 채 세상 일을 멀리하고 / 懷疴謝塵事
종일토록 시편을 뒤적거린다 / 終日檢詩篇
마 넝쿨은 거친 벽을 뚫고 / 藥蔓穿疎壁
거미줄은 짧은 서까래에 쳐 있네 / 蛛絲掛短椽
술병을 기울여 남은 술을 다 마시고 / 傾壺盡餘酒
목침을 높이 베어 나는 솔개를 돌아본다 / 高枕眷飛鳶
가는 곳마다 생업이 있으리마는 / 到處生涯在
어찌 하필 성밭이 소용되리 / 何須負郭田
작은 비에 띠집이 젖었는데 / 小雨茅齋濕
새로 갠 후엔 베개와 자리가 시원하다 / 新晴枕席涼
물이끼는 주춧돌 따라 올라오고 / 水衣緣礎上
뜰풀은 담장보다 더 자라 있네 / 庭草過墻長
이슬이 외꽃을 씻어 깨끗하고 / 露浥苽花淨
바람은 혜엽(蕙葉)의 향기 머금고 있다 / 風含蕙葉香
유연히 낮잠을 깨고 나니 / 悠然午眠破
수풀 위에 석양이 아련하다 / 林杪淡夕陽
하였다. 가을 시에는,
하얀 이슬이 내린 뒤라 숲이 깨끗하고 / 白露園林淨
높은 바람에 나뭇잎이 쇠잔하다 / 高風草木衰
술잔을 엎어 죽엽(竹葉 술 이름)을 따르고 / 覆杯流竹葉
물길어 상지(桑枝 차 이름)를 달인다 / 汲井煮桑枝
지는 해에 기러기 변방에 줄지었고 / 落日雁橫塞
가을 창에는 벌레가 실을 토해낸다 / 秋窓虫吐絲
누가 병들고 가난한 사람 가련히 여기겠는가 / 誰憐貧病客
길게 초인사나 읊어보자 / 長吟楚人詞
또,
빈 소반에는 마치채(馬齒菜)가 남아 있고 / 空盤推馬齒
거친 후원에는 계장초(鷄腸草)만 늘어졌네 / 荒苑長鷄腸
수각에서는 청노(靑奴 풀 이름)가 냉냉하나 / 水閣坍奴冷
암전에서는 부비(腐婢 풀 이름)가 향긋하다 / 巖田腐婢春
이끼는 주춧돌에 두루 끼어 있고 / 苺苔侵礎遍
쑥대는 창을 둘러서 자란다 / 蓬艾繞窓長
자소의 잎은 도는 바람 따라 흔들거리고 / 紫蘇葉帶回風響
홍요의 꽃은 되비치는 햇빛에 붉었구나 / 紅蓼花含返照明
시냇가에 새는 비를 맞아 온몸이 젖었고 / 溪禽帶雨全身濕
산감은 서리 맞고 반볼이 붉었네 / 山枾經霜半臉紅
하였다. 항시 수척한 병이 있더니 30이 못 되어 죽었는데, 그가 평소에 읊은 감회시(感懷詩)를 보면, 가히 수하지 못할 징조를 볼 수 있었다. 그 시에 이르기를,
광음은 번개같이 잠깐인데 / 光陰如電瞥
세월은 나에게 빌려주지 아니하네 / 歲月不貸余
명예를 얻는 것이 비록 때가 있다지마는 / 成名雖及時
필경에는 허공이 돌아가네 / 畢竟空歸虛
형해는 나의 것이 아니니 / 形骸非我有
하루아침 다시 남음이 없으리라 / 一朝無復餘
영화를 어찌 의뢰할까 / 英華豈足賴
천지는 참으로 나그네 집이다 / 天地眞蘧盧
우습구나 저 궁도인이여 / 笑彼窮途人
통곡한들 마침내 무엇하리 / 痛哭終何如
하였다. 《소문쇄록》
○ 안응세(安應世)의 자는 자정(子挺)이요, 호는 월창(月窓)ㆍ구로주인(鷗鷺主人)ㆍ연파조도(煙波釣徒) 또는 여곽야인(藜藿野人)이라고 한다. 사람됨이 청담쇄락(淸淡洒落)하고 안빈희분(安貧喜分)하여, 공명을 구하지 아니하였고, 선불(仙佛)을 배우지 아니하며, 박혁(博奕)을 즐기지 않았다. 또 시에 능하며 특히 악부(樂府)를 잘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불의의 재물은 집을 돕는 데 그칠 뿐이요, 불의의 음식은 오장을 돕는 데 그칠 뿐이니, 더욱 참견할 것이 못 된다.” 하였으니 자정의 마음가짐이 대개 이와 같았다. 백옥(白玉)에도 티가 있으니 주색을 좋아하였다. 경자년에 진사가 되었고 이해 9월에 죽으니, 나이 26세로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모두 통탄해 마지아니않았다. 《사우언행록》이하 동
○ 안우(安遇)의 자는 시숙(時叔)인데, 효행이 지극하여 고을에서 으뜸이었으며, 그의 부친상에는 일체를 《주자가례》에 따라 행하였다. 점필재에게서 수업하였는데, 얼마 뒤 벼슬할 마음이 없어서 그때부터 점필재와 뜻이 달라졌다. 일찍이 그 고을에서 천거되어 서울에서 행하는 회시(會試)에 간 일이 있는데, 그때 사관(四館 사학(四學))에 있는 연소자들이 교만하고 방자하여 나이 많은 시골 선비들을 매로 때리려고 하니, 시숙이 이르기를, “어찌 부모의 유체(遺體)를 가지고 죄 없이 스스로 훼손하면서 명리를 구할 수 있겠느냐.” 하며 들어가지 아니하고 돌아왔다. 그 절조가 가히 동한(東漢)에 견줄 만하다고 하겠다.
○ 유종선(柳從善)은 진주인(晉州人)이며, 자는 여등(如登)인데, 산에서 살면서 스스로 세상과 인연을 끊으니, 친구나 친척이라도 그의 얼굴 보기 드물었다.
○ 우선언(禹善言)의 자는 덕보(德父)요, 호는 풍애(楓崖)이며 단성군(丹城君) 우공(禹貢)의 아들이다. 사람됨이 기개가 있고 남에게 얽매이지 아니하였다. 신축년에 남쪽으로 영남에 가서 점필재 선생을 그 여막에서 뵈니, 선생은 기뻐하여, “자를 자용(子容)이라 하라.” 하였다.
○ 최하림(崔河臨)의 자는 진국(鎭國)이요, 호는 태허당(太虛堂)이다. 성품이 공명을 좋아하여 경자년에 진사가 되었는데, 이해 여름에 요승(妖僧) 학조(學祖)가 그의 제자 설의(雪儀)로 하여금 가만히 불상을 돌려 놓게 하고서, 세상 사람에게 말하기를, ‘부처가 스스로 걷는다.’고 하니, 곡식과 비단ㆍ베를 가지고 오는 자가 날로 천의 숫자로 헤아릴 정도였다. 태학(太學)에서 상서하여 다섯 차례나 요승을 죽이라고 청하였으나, 임금의 윤허를 얻지 못하였다. 상소문은 대개 최진국의 손에 의하여 작성되었다. 병오년 7월에 죽었는데, 그때 나이가 32세였다. 집이 가난하여 염장(斂葬)할 수 없었으므로 벗들이 치전(致奠)하여 장사지냈다. 그가 지은 안택기(安宅記)가 세상에 전한다.
○ 고순(高淳)의 자는 희지(熙之)요, 또 진진(眞眞) 또는 태진(太眞)이라고 하며 제주인(濟州人)이다. 귓병이 있어 땅에 글자를 써서 서로 뜻을 통했다. 무술년에 조서에 응하여 시사(時事)를 논하는 상서를 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망령하다는 이름을 얻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알리자, 고희지(高熙之)는 듣고 오히려 기쁘게 여기며 스스로 호를 망희지(妄熙之)라 하였다. 여러 선비들 사이 중에서 신덕우(辛德優)와 초면 인사를 하였는데, 선비들은 서로 주고받는 말이 떠들썩하였다. 고희지가 종이에 한 절구를 지었는데, 그에 이르기를,
소각에 봄바람이 고요하니 / 小閣春風靜
청담으로 모두 여흥이 났다 / 淸談摠有餘
귀먹은 나는 아무 재미가 없어 / 聾人無一味
홀로 머리를 숙이고 책을 본다 / 垂首獨看書,
하였는데, 신덕우는 기뻐하며 그 시에 화답하여 이르기를,
세상이 시끄럽고 혼탁하니 / 世聲聒溷濁
분양의 냄새나 다름이 없네 / 糞壤嗟鼻餘
부러워하오, 방로들보다 나은 그대를 부러워하노니 / 羡君勝房老
획 속에 천 권의 글을 숨기고 있네 / 晝隱千卷書
하고, 이후부터 지심(知心)의 벗이 되었다.
○ 고희지(高熙之)는 일찍이 귓병이 있었으나, 성품이 독실하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하루는 시를 읊고 취침하였는데, 그의 돌아간 아버지 중추(中樞)-고수종(高守宗)-가 꿈에 나타나, 시를 주며 말하기를,
화발은 창창하여 예보다 줄었는데 / 華髮蒼蒼減昔年
외로운 몸 적적하게 산 앞을 지키고 있네 / 孤身寂寂守山前
백골이라서 지감 없다 말하지 말라 / 莫言白骨無知感
너의 읊는 소리에 나는 잠을 못하노라 / 聞汝吟詩我不眠
하였다. 내(남효온)가 그 시에 서문을 써 주었는데 그 대략에, “천지간의 한 기운은 이르면 펴지고 흩어지면 돌아가나니, 기실은 하나이다. 사람이 죽은 뒤에 그 기(氣)가 여러 자손들의 신상에 흩어져 있다가, 자손이 동하면 그 신명(神明)이 감동하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비록 그러하나 사람은 곧고 초연하여 마치 다시 부모의 척강(陟降)하는 거동을 항시 좌우에 모시고 있는 듯이 함을 보게 될 것이니, 고희지 같은 이는 이른바 오직 맑은 자라[淸者]고 할 것이다.” 하였다. 《추강냉화》이하 동
○ 우리나라 사람들이 오랑캐의 춤을 본받아서 머리를 내두르고 눈을 까며, 어깨를 솟구고 팔을 구부리고 두 다리와 열 손가락을 한꺼번에 오므렸다 폈다 하면서, 구부리고 활을 쏘는 형상을 하기도 하고, 어느 때는 개가 네 발을 헤매고 다니는 모양을 하기도 한다. 또 곰처럼 구부리고 새처럼 펴기도 하며, 혹은 물러가서 바람 소리를 낸다. 공경대부로부터 사서인(士庶人)이며 창기나 배우 여자에 이르기까지, 음률을 이해하고 몸이 성한 자는 하지 않는 자가 별로 없었다. 그 이름을 호무(胡舞)라고 하는데, 여기에 관현(管絃)을 같이 하면서 즐겼다. 의정부 우찬성인 어유소(魚有沼)는 더욱 잘하여서, 나도 또한 풍류로 해본 일이 있는데, 망우(亡友) 안자정(安子挺)이 그 잘못을 극언하여 비난하기를, “미인(媚人)의 행동과 유만(柔嫚)의 태도는 사람으로 할 바 아니거늘, 하물며 오랑캐는 금수와도 같은데 어찌 내 몸으로 금수 같은 일을 하겠는가.” 하므로, 나는 듣고 퍽 그렇지 않게 여겼는데, 그 후 《한서(漢書)》에서 개차공(蓋次公)의 효단장경 목후사(效檀長卿沐猴辭)를 읽고 난 연후에야 안자정의 말이 정론(正論)임을 알았으며, 이로 인하여 전현(前賢)이나 후현의 법규가 서로 같음을 알았다.
○ 경징(慶徵) 군의 휘는 연(延)이요, 자는 대유(大有)이며, 청주인(淸州人)이다. 겨울에 그의 부친이 병이 나서 어회(魚膾)를 먹고자 하는지라, 군이 얼음을 뚫고 그물을 쳐도 고기를 얻지 못하자, 군이 울며 말하기를,
“옛사람은 얼음을 깨고 고기를 잡은 일이 있었는데, 나는 이제 그물을 치고도 고기를 잡지 못하니, 성감(誠感)이 부족하기 때문이리라.” 하고, 버선을 벗고 얼음 구멍에 들어가서 하룻밤을 지내고 난 후에 검은 잉어를 얻어서 공양했다. 또 시금치를 먹고자 하는지라, 군이 밭에 있는 채근(菜根)을 보고 울부짖으니, 문득 시금치가 나와 그 부친을 봉양하였고, 이어 부친의 병이 나았다. 그 후 부친이 죽자, 3년을 시묘 살면서 죽ㆍ채소ㆍ과일 먹는 것까지 《가례》에 의하였으며, 그의 모친을 섬기기를, 매일 혼정신성(昏定晨省)을 하였는데, 나이 50이 넘어서도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모친이 죽자 그 부친의 초상 때와 같이 《가례》에 의하여 행하였다. 세조가 불렀으나 나가지 아니하였다가, 주상(성종) 9년, 부름에 응하여 사재감(司宰監) 주부(主簿)가 되었는데, 어느 날 불려서 내전에 들어가니 임금이 묻기를, “경은 집에 있을 때 얼음을 깨니 고기가 뛰었다는데, 과연 그런 일이 있는가.” 하였다. 군이 답하기를, “겨울은 고기가 없는 때라 부친은 잡지 못하리라 하였사온데, 그물을 치고서 애써 구하다가, 다행히 잡았습니다. 부친은 기뻐서 너의 효성에 감동한 까닭이라고 하며, 고을 사람들은 깊은 연유도 살피지 아니하고, 효성에 감동하였기 때문이라고 하나, 신은 실로 그와는 같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또 임금이 묻기를, “경은 무슨 책을 읽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사서》와 《이경》을 읽었습니다.” 하니, 또 묻기를, “사서와 이경 중에서 어느 말이 제일 옳던가.” 하니, “사서 이경 중 《서전》에 순(舜)의 대효를 말하였사온데, 이는 신이 하고자 하는 바이오나 능하지 못하옵고, 또 주공(周公)의 충성을 말하였사온데, 신이 하고자 하오나 능히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듣고 오래도록 감탄하였다.
○ 청주(淸州)에 양수척(楊水尺) 3형제가 살면서 소행이 어질지 못하더니, 경징(慶徵) 군이 그의 부모에게 효도한다는 말을 듣고는 감화하여, 그 나쁜 버릇을 버리고서 온화하고 공손하게 아들의 도리를 행하며, 또 혼정신성하였다. 부모의 초상 때에는 한 모금 물도 입에 대지 아니하고, 또 3년을 시묘살이 하면서 술과 과일을 먹지 아니하였다. 3년상을 마친 뒤에는 3형제가 같이 살면서 우애하는 환심이 극진하였고, 서로 경계하기를, “만일 우리가 좋지 않는 행실을 하여서, 경 생원(경징군)이 그를 들으면 그 또한 부끄럽지 않겠느냐.” 하였다.
○ 생원 유원(兪垣)은 면천인(沔川人)이다. 무신년간에 책을 끼고 궐문에 나가 배운 것 중에서 수천 가지 말을 진술하였는데, 그 말이 모두 조정의 병폐를 간절히 집어 내었다. 그런데, 사림들은 모여서 그저 웃곤 하였다. 유원은 자기가 거처하는 정자를 청풍정(淸風亭)이라 하고, 또 그 벗인 박생(朴生)은 그 재(齋)를 명월재(明月齋)라 편액하였는데, 진신(縉紳)들 사이에서 웃을 만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유청풍ㆍ박명월 같다고 조롱하였다. 두 사람은 불우하여 과거 시험을 보지 아니하였으며, 또한 일찍 벼슬에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하었다.
○ 임인년에 개령현(開寧縣) 송방리(松坊里)에 사는 어떤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옛 석불을 얻었는데, 이목구비가 모두 없어졌기로 그저 밭 언덕에 두었는데, 우연히 천식을 앓고 있는 어떤 사람이 와서 절하였더니, 병이 좀 나은 것 같은지라 드디어 영험이 있다 하며, 어느 사람은 무슨 빛이 비친다고 하므로, 이웃 여러 고을에서 오랜 병으로 시달리던 자며, 아들이 없는 사람과 아직 장가들지 못한 사람, 노비를 잃은 사람들, 무릇 마음속에 하려고 하는 것이 있는 사람은 기도하면 문득 징험이 있다고 하여, 남녀가 이리저리 돌아가며 미포(米布)와 지전(紙錢)이며, 향촉(香燭)ㆍ화과(花果)를 가지고 오는 사람들이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한 중이 와서 향불 올리는 것을 주관하고 시주하는 자가 있어서, 기와집을 짓고 또 큰 절을 지으려 하니, 사족(士族) 부녀(婦女)들이 모두 친히 와서 기도 드리고, 개령 현감(開寧縣監)과 금산(金山) 고을 훈도(訓導) 같은 이들도 와서 자식의 병이 낫기를 빌었고, 혹은 후사를 이을 수 있도록 빌었다. 이때에 금산 군수 이인형(李仁亨)은 이 말을 듣고, 유생과 아전 포졸을 보내어, 그 중을 잡아오게 하고, 시주하는 사람들을 쫓아버리게 하였다. 이때 마침 김 문간공(文簡公 점필재)이 응교(應敎)의 명을 사퇴하고 금산에 있었는데, 이인형에게 하시(賀詩)를 주어 이르기를,
채전에 버려두어 몇 봄인지 모르던 것 / 抛擲菜田不記春
함부로 생긴 주먹만한 돌에 어찌 신이 있으리 / 頑然拳石有何神
애초에는 빌어먹는 목거사 같더니 / 初如求食木居土
점차 돈 모으는 토사인이 되었네 / 漸作撞錢土舍人
남녀 몇 집안이나 장차 더럽히려는가 / 男女幾家將汚染
향등은 1리나 그대로 따라 있네 / 香燈一里欲因循
우리 원님 곧은 것 그대로 빈주 원님일세 / 我侯直是邠州守
요호를 격파하고 맑은 세상 만드리라 / 擊破妖孤
하였더니, 사람들이 아름답게 여기어서, “성조(聖朝)에 영웅 있는 줄 이제야 알겠노라.”는 글귀가 있기까지 하였다. 이제 개령의 석불은 요호보다도 더욱 괴상한데도, 누가 감히 쳐서 고혹된 것을 없애지 못하였는데, 명부(明府)가 다른 고을임에도 불구하고 의연히 아전들을 보내어 요수(妖首)를 쫓아 잡아오고, 시주하는 지전(紙錢)을 태워서 우민으로 하여금 환하게 그들의 잘못된 행위를 깨닫게 하였으니, 진실로 세상에 드문 하나의 기특한 일이라 하겠다. 《소문쇄록》
○ 응교(應敎) 최보(崔溥)는 나주인(羅州人)이며, 정자(正字) 송흠(宋欽)은 영광인(靈光人)이다. 동시에 옥당(玉堂)에 있으면서 함께 말미를 받아 고향에 온 일이 있었다. 그들 본집의 거리가 겨우 15리쯤 되었는데, 하루는 송 정자가 최 응교의 집을 찾아가서 말마디 하다가, 최 응교가 묻기를, “그대는 무슨 말을 타고 왔는가.” 하니, 송 정자가 답하기를, “역마를 타고 왔습니다.”고 하니, 최 응교가 다시 말하기를, “국가에서 준 역마를 자네 집에 매어둔 것과, 자네 집에서 우리 집에 오는 것은 사사일인데, 어찌 역마를 타고 왔는가.” 하며, 최 응교가 조정에 돌아가서 이 일을 알리고 파직시키려고 생각하였다. 송 정자가 응교에게 찾아가서 사과하자, 최 응교는, “자네 같은 연소한 사람들은 앞으로 마땅히 조심하는 것이 좋다.”고 일렀으니, 조종조(祖宗朝 성종) 때에 사대부들이 법을 지키며, 벗들 사이에 선(善)으로 권려하고, 의(義)로써 심복시킴이 이 같았으니, 가히 모든 일을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전언왕행록》
○ 성종이 승하하던 날에 성중에 있는 사대부며 거족으로서 혼인하는 집이 여러 집이었는데, 어떤 사람은 아침을 타서 가고, 어떤 사람은 오시(午時)가 되어서 가며, 어떤 사람은 모르는 체하고 갔었다. 그 후 이 일이 발각되어 이들 모두 벌받게 되었다. 그런데 죽성군(竹城君) 박지번(朴之蕃)은 무인으로 글자를 알지 못하는 무식한 사람이었다. 이때 하루 전날 밤에 아들의 초례를 지내게 되어서 손님과 동료들이 다 모여 있는데, 갑자기 대궐 안에서 상왕의 병환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박지번이 이에 말하기를, “군부(君父)의 병이 위독하니, 어찌 신하로서 차마 혼례(婚禮)를 사사로이 행하리오.” 하고, 드디어 손님들과 동료들을 사절하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당시에 어느 논란하는 자가 말하기를, “유림(儒林)이 오히려 무신보다 못하니, 한탄할 일이다.” 하였다. 《용재총화》

[주D-001]김연거(金蓮炬)의 유의(遺意) : 당 나라의 무종(武宗) 때에 한림학사를 지극하게 대접하여 밤 늦도록 만나서 이야기하다가 숙직실로 돌아갈 때에 황제 방에 있던 금련 촛대를 내시에게 들려서 앞길을 밝혀 주게 한 고사.
[주D-002]조예(皁隸) : 각 관청의 사령들은 보통 검은 옷에 검은 벙거지를 쓰게 되었으므로, 그를 조예 혹은 검은 하인이라고 말한다.
[주D-003]구익부인(鉤弋夫人) : 한 나라 무제(武帝)의 후궁인데, 무제는 장성한 아들이 없이 늦게야 구익부인이 아들을 낳았으므로 그를 후계로 정하고, 후일에 황제의 모친으로 정권에 간여할까 염려하여 사랑하는 구익부인을 사약하여 죽였다.
[주D-004]벌빙하는 데까지 이르렀는데 : 대부의 지위에 올랐다는 말. 예전 중국에서는 대부(大夫)의 지위에 있으면, 각자가 빙고(氷庫)를 묻어놓고 겨울에 얼음을 저장하였다가 여름에 쓰게 되어 있었다.
[주D-005]걸구의 변명 : 괴생은 초한 시대(楚漢時代)의 괴철(蒯徹)이라 하는 웅변가인데, 그는 그때의 한 나라의 대장인 제왕 한신(齊王韓信)을 달래어서 한 나라와 분리하여 독립하기를 권하였으나, 한신이 듣지 아니하였다. 그 후에 한신이 실각하여 한 나라 임금에게 죽음을 당한 뒤에 한신을 반역하라고 꾀었다고 괴철을 체포해다가 심문할 적에 괴철의 말이 “걸주의 개가 요 순을 보고도 짖는 것은 요순이 착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주인이 아니기 때문인데, 나도 내 주인이 아니라서 그랬다. 나도 내 주인인 한신을 위하여 충성할 뿐이었다.”고 답변하여 살려주게 되었다.
[주D-006]증자(曾子)의 역책(易簀) : 증자가 죽을 때에 노(魯) 나라의 정권을 잡은 계손씨(系孫氏)가 보내준 자리[簀]를 의리에 합당하지 않는다 하여 다른 자리로 바꾸어 깔고 죽었다 한다.
[주D-007]자로(子路)의 결영(結纓) : 자로는 위(衛) 나라의 내란에 싸우다가 창에 맞아 죽게 되었을 때, “군자는 죽을 때에도 갓을 버리지 못한다.” 하고, 끊어진 갓끈을 다시 매고 죽었다 한다.
[주D-008]금비(金篦) : 금으로 만든 칼. 그것으로 눈에 끼어 있는 백태를 긁어낸다고 한다.
[주D-009]초인사 : 전국 말기에 초 나라 사람 굴원(屈原)과 송옥(宋玉)이 지은 글. 그 글은 모두 원체가 비대한 것이다.


홍재전서 제2권
 춘저록(春邸錄) 2 ○ 시(詩)
시단봉(柴丹峯)에서 붓을 달려 쓰다

견여 타고 멀리 시단봉으로부터 돌아와 / 肩輿遙自丹峯歸
중흥사에 당도하니 벌써 석양이로세 / 行到重興已夕暉
참알하는 중이 오니 속된 사람임을 알겠고 / 參謁僧來知俗樣
깃발 펄럭이며 가니 티끌이 나부낌을 보겠네 / 旖旎旗去見塵飛
숲 속엔 괴이한 새들의 울음이 그치지 않고 / 林間恠鳥啼難盡
시내 밖엔 좋은 꽃들이 흔히도 피었구려 / 溪外名花開不稀
선조 때에 이곳 임어한 것을 멀리 생각하니 / 緬憶先朝臨此地
아무 산과 아무 물이 정히 방불하여라 / 某山某水正依俙

 

梅月堂集梅月堂傳
 
梅月堂先生傳 坡平尹春年著 a_013_057a


先生姓金。名時習。字悅卿。江陵人。高麗侍中台鉉之後。曾祖安州牧使久柱。祖五衛部將謙侃。父忠順衛日省。母張氏。先生生於宣德乙卯。有生知之質。三歲。能作詩。見乳母開花乳母名 碾麥。朗然吟之曰。無雨雷聲何處動。黃雲片片四方分。人皆神之。五歲。英廟召之于承政院。試之以詩。大加稱嘆。013_057b賜帛五十疋。使之自輸。先生遂各綴其端。曳之而出。人益奇之。路上老嫗有以豆腐饋之者。輒吟詩曰。稟質由來兩石中。圓光正似月生東。烹龍炮鳳雖莫及。最合頭童齒豁翁。於是。名動一國。人目之曰五歲。而不敢名。娶訓鍊院都正南孝禮之女爲妻。年二十一。景泰乙亥。讀書于三角山重興寺。人有自京城而還者。先生卽閉戶不出者三日。一夕。忽痛哭。盡焚其書。佯狂陷於溷廁而逃之。於是。削髮爲僧。名曰雪岑。或居013_057c于楊州之水落寺。或居于慶州之金鼇山。之東之西。靡有定處。而累變其號。曰淸寒子。曰東峯。曰碧山淸隱。曰贅世翁。曰梅月堂。世祖嘗設雲水千人道場于圓覺寺。諸僧咸曰。此會上不可無雪岑。上遂命召之。旣至。自投於寺廁中。諸僧以爲病狂黜之。然先生所造益深。聲聞益遠。人之欲問道者。咸歸之。以千百數。先生陽爲狂妄輕躁之態。或以木石擊之。或彎弓欲射013_057d之。以試其志。其弟子有曰善行者。事之累年。雖受箠楚。終不辭去。或怪而問之。行曰。吾師嘗於居山時。盛水于小瓢。捧跪于佛座前。自朝達夜。至于三日。禪定如此。卽是佛也。余心服而不能去云。先生雖於詩學爲餘事。然格高思妙。迥出常情。遣興述懷。放情肆筆。以紙窮爲限。成輒焚之。故世不多傳。成化辛丑。長髮還俗。作文以祭其祖父。遂娶安氏之女爲妻。出入閭閻。一日。被酒過市。見領議政鄭昌孫呼之曰。奴汝宜013_058a休。或於月夜。誦離騷經。輒痛哭。其後妻歿。無所依賴。復還山。弘治癸丑二月日。卒于鴻山縣無量寺。遺命無燒葬。先生於平日。親畫其老少之二像。仍自贊。留于寺。其從遊之士。曰洪裕孫餘慶,南孝溫伯恭。其弟子僧。曰道義。曰學梅。世以先生爲多幻術。能驅役猛虎。變酒成血。吐氣作虹。邀請五百羅漢。然亦不可盡信。


 


 

견한잡록(遣閑雜錄)
견한잡록(遣閑雜錄)


심수경(沈守慶) 찬(撰)

○ 조정의 과거를 말하면 거듭 장원한 이가 거의 없었으나, 정인지(鄭麟趾)는 급제와 중시(重試)에서 장원을 하였고, 남계영(南季瑛)은 생원시와 급제에서 장원하였으며, 이석형(李石亨)은 한 해에 생원시와 진사시 그리고 급제에서 장원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초시에서도 모두 장원을 하였다. 김수온(金守溫)은 발영시(拔英試)와 등준시(登俊試)에서 장원을 하였고, 김흔(金訢)은 진사시와 급제에서 장원하였다. 신종호(申從濩)는 진사시와 급제와 중시에서 장원을 하였고, 배맹후(裵孟厚)는 생원시와 진사시에서 장원을 하였다. 김천령(金千齡)은 진사시와 급제에서 장원을 하였고, 김극성(金克成)은 생원시와 급제에서 장원하였으며, 김구(金絿)는 생원시와 진사시에서 장원을 하였고, 양응정(梁應鼎)은 생원시와 중시에서 장원을 하였으며, 김홍도(金弘度)는 진사시와 급제에서 장원을 하였으며, 이이(李珥)는 한 해에 생원시와 급제에서 장원하였고, 생원시의 초시와 급제 복시에서도 모두 장원을 하였으며, 정윤희(丁胤禧)는 급제와 중시에서 장원을 하였고, 강신(姜紳)은 진사시와 급제에서 장원을 하였으니 이들은 진실로 어려운 일을 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이석형ㆍ신종호ㆍ이이 같은 이는 더욱 어려운 일을 하였다. 한 집안이 거듭 장원 급제한 일도 있으니, 김흔ㆍ김전(金銓) 형제와 김흔의 아들 김안로(金安老)도 모두 장원을 하였다. 김천령ㆍ김만균(金萬均)ㆍ김경원(金慶元)은 연이어 3대가 장원을 하였고, 채수(蔡壽)와 그 사위 김안로ㆍ이자(李耔)가 모두 장원을 하였으니, 진실로 드문 일이다. 조정에서 5형제가 모두 과거에 합격한 일이 거의 없으나, 그러한 사람에 대해서는 그 부모가 생존하면 쌀을 주고 죽은 이에게는 관작을 주는 것이 법례로 되어 있다. 이예장(李禮長)ㆍ이지장(李智長)ㆍ이함장(李諴長)ㆍ이효장(李孝長)ㆍ이서장(李恕長)은 모두 문과에 합격하였으며, 안중후(安重厚)ㆍ안근후(安謹厚)ㆍ안돈후(安敦厚)는 문과에, 안관후(安寬厚)ㆍ안인후(安仁厚)는 무과에 각각 합격하였다. 이기(李芑)ㆍ이행(李荇)ㆍ이미(李薇)는 문과에, 이권(李菤)ㆍ이영(李苓)은 무과에 합격하였으며, 윤호(尹晧)ㆍ윤탁(尹晫)ㆍ윤철(尹㬚)ㆍ윤순(尹㫬)ㆍ윤서(尹曙)는 4년 동안에 연이어 문과에 합격하였으니, 그 부모가 더욱 기이하다. 또 심연원(沈連源)ㆍ심달원(沈達源)ㆍ심봉원(沈逢源)ㆍ심통원(沈通源)이 모두 문과에 합격하였는데, 심연원은 중시(重試)에, 심봉원은 탁영시(擢英試)에 각각 합격하였고, 심달원은 일찍 죽었으나, 그 아들 심전(沈銓)이 또 중시에 합격하였으니, 진실로 드문 일이다. 박형린(朴亨麟)ㆍ박홍린(朴洪麟)ㆍ박종린(朴從麟)ㆍ박붕린(朴鵬麟)은 모두 문과에 합격하였고, 황위(黃瑋)ㆍ황성(黃珹)ㆍ황진(黃璡)ㆍ황찬(黃璨)은 모두 문과에, 황수(黃琇)는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윤방(尹昉)ㆍ윤양(尹暘)ㆍ윤휘(尹暉)ㆍ윤훤(尹暄)은 모두 문과에 합격하였는데, 그 부친인 전(前) 의정(議政) 윤두수(尹斗壽)가 아직 생존하고 있으니, 비록 5형제는 아니라도 또한 어려운 일이다.
○ 무자년 이후에는 사마방(司馬榜) 안에 장원 급제한 자가 많아서 때로는 5, 6명이나 되고, 적어도 2,3명 이하는 없었는데 계묘년 사마방에는 오직 심수경(沈守慶) 한 사람뿐이니, 이는 기이한 일이다. 계묘년 후 갑진년부터 계축년까지 10년 동안의 식년시와 별시와 알성 정시(謁聖庭試)에 매번 급제하였고 계묘년 사마시에 연이어 2등을 하고, 그 후 여러 방에서도 2등을 하였으니, 더욱 기이하다. 이것은 우연한 것 같으면서도 우연이 아니다.
○ 고려 때 매번 방을 내걸 때에 장원 급제한 이는 용두회(龍頭會)를 열어 당시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자랑으로 여겼다. 김양경(金良鏡)은 뛰어난 재주로 과거 시험에 2등을 하여 벼슬이 재상이 되어서도 여전히 불만을 품고 있더니, 그 이웃에 용두회를 여는 이가 있자, 시를 지어 보내기를,
듣자니 그대 집 귀빈들의 잔치는 / 聞道君家宴貴賓
아름다운 숲 모두 하나의 봄이네 / 佳林渾是一枝春
성대한 자리에 참석하려 하여도 분수 아님이 부끄러워 / 欲參高會慙非分
문득 그때 2등 됨을 한하네 / 却恨當年第二人
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 용두회를 열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다. 나처럼 재주없는 자도 어쩌다 요행히 장원을 하였는지라, 장원의 명예를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웃에 사는 유근(柳根)ㆍ황혁(黃赫)ㆍ황치성(黃致誠)이 모두 장원을 하여 네 명의 장원이 이웃하고 있으니, 역시 성대한 일이다. 내가 장난삼아 김양경의 시에 차운(次韻)하기를,
옛날 용두회의 주빈이 성대하더니 / 昔會龍頭盛主賓
폐지된 지가 몇 해나 되는고 / 邇來停廢幾秋春
우리 이웃이 전조의 일을 본뜨려고 하나 / 吾隣欲效前朝事
세상 사람들이 해괴하게 여길까 두려워라 / 却恐觀瞻駭世人
하였다. 김양경은 김인경(金仁鏡)으로 이름을 고쳤다.
○ 무자년 이후 사마방(司馬榜) 안에서 의정부에 참여한 자는 무자년의 윤원형(尹元衡)ㆍ권철(權轍)ㆍ홍섬(洪暹)이고, 신묘년의 민기(閔箕)ㆍ이탁(李鐸)ㆍ정유길(鄭惟吉)이고, 갑오년의 노수신(盧守愼)이고, 정유년에는 없었으며, 경자년의 박순(朴淳)ㆍ김귀영(金貴榮)이고, 계묘년의 강사상(姜士尙)ㆍ나ㆍ심수경(沈守慶)이며, 병오년 춘시와 추시에는 모두 없었고, 기유년의 정지연(鄭芝衍)ㆍ유홍(兪泓)이다. 임자년에는 유전(柳琠)ㆍ정탁(鄭琢)이고, 을묘년에는 이양원(李陽元)ㆍ최흥원(崔興源)ㆍ윤두수(尹斗壽)이며, 무오년에는 이산해(李山海), 신유년에는 정철(鄭澈)이며, 갑자년에는 유성룡(柳成龍)ㆍ이원익(李元翼)이고, 정묘년에는 김응남(金應男)이고, 경오년 이후는 때를 아직 알지 못한다.
○ 조정에서 장원 급제한 이로 의정부에 참여한 자가 거의 없으나, 정인지(鄭麟趾)ㆍ최항(崔恒)ㆍ권남(權擥)ㆍ홍응(洪應)ㆍ신승선(愼承善)ㆍ유순정(柳順汀)ㆍ김안로ㆍ심통원(沈通源)ㆍ정유길(鄭惟吉)ㆍ박순ㆍ노수신ㆍ정철ㆍ심수경이다. 나는 재주로 없고 덕망도 없는 사람으로서 외람되게 이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갑신년 여름에 내가 좌참찬이 되었을 때, 영의정에는 박순, 좌의정에는 노수신, 우의정에는 정유길이며, 우찬성에는 정철과 나였는데, 모두 장원 급제를 하였다. 3공(三公 박순ㆍ노수신ㆍ정유길)은 모두 대제학을 지냈고, 찬성(정철)은 이때 제학을 겸하고 있었으며, 나도 일찍이 제학을 지냈으니, 이 다섯 사람은 한때 동료로서 성대한 일이라고 하겠다. 내가 시를 짓기를,
담담한 정승청에 장원들만 모였으니 / 潭潭相府會龍頭
인간 성사로 비교하기 드무네 / 盛事人間罕比侔
한때 규와 벽처럼 빛난다고들 말하는데 / 爭道一時奎璧煥
나 같은 용렬한 사람이 명류에 끼임이 부끄럽네 / 只慙庸品厠名流
하니, 찬성이 화답하기를,
5학사에 5장원이 있고 보니 / 五學士爲五壯頭
내 이름 비교도 안 되네 / 聲名到我不相侔
다만 좋은 일에는 분별이 없는 듯하니 / 只應好事無分別
당시 제일류라 하리로다 / 等謂當時第一流
하였다. 정철이 3공에게 화답의 시를 구하고, 이어서 조중(朝中)에도 여러 화답의 시를 구해서 성대한 일을 전하려고 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정철이 산직(散職 이름만 있는 벼슬로 녹만 먹는 직)이 되었으므로 성과를 보지 못하였다.
○ 병술년 가을에 내가 우찬성이 되니, 그때 영의정 노수신과 좌의정 정유길은 을해생(71세)이고, 나는 병자생(70세)이고, 좌참찬 황임(黃琳)과 우참찬 안자유(安自裕)는 정축생(69세)으로, 모두 기로소 당상(耆老所堂上)에 참여하였으니, 한때 동료로서 또한 성사(盛事)라 하겠다. 내가 시를 짓기를,
정승들의 높은 연세 을ㆍ병ㆍ정이라 / 相府高年乙丙丁
누가 뛰어난 노인들이 한자리에 모임을 알까 / 誰知一席會耆英
이때 성사를 꼭 기록해 두자 / 此時盛事應須記
수역이 열린 여기에서 태평을 보리라 / 壽域開邊見太平
하였다.
○ 재상 중에 연령이 80세 이상 된 이를 내 눈으로 본 바 있으니, 송순(宋純)은 지중추(知中樞)로 92세이고, 오겸(吳謙)은 찬성으로 89세이고, 홍섬(洪暹)은 영의정으로 82세이고, 원혼(元混)은 판중추(判中樞)로 93세이며, 임열(任說)은 지중추로 82세이고, 송찬(宋贊)은 우참찬으로 88세이고, 나는 영중추(領中樞)로 82살인데, 모두 아직 병이 없이 건강하니 다행이다.
○ 기로회(耆老會)는 당(唐)ㆍ송(宋) 시대로부터 있었고, 전조(고려) 때에도 있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기로소(耆老所)를 두어 연령이 70세이고 관작이 2품 이상이면 참여시켰다. 조종조에서는 의레 3월 3일과 9월 9일에 훈련원이나 반송정(盤松亭)에서 기로소 노인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는데, 그때에는 기로소 안에 간직된 물건으로써 춘추에 잔치를 베풀 뿐이었다. 나는 을유년에 좌참찬으로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때 의정(議政) 노수신(盧守愼)과 의정 정유길(鄭惟吉), 판부사(判府事) 원혼(元混), 팔계군(八溪君) 정종영(鄭宗榮)과 지사(知事) 임열(任說)과 지사 강섬(姜暹)이 동료가 되었고, 그 후 판서 황임(黃琳), 판서 안자유(安自裕), 판서 이인(李遴), 영부사 김귀영(金貴榮)이 또 동료가 되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서 제공(諸公)들이 서로 이어서 작고하고, 오직 김귀영ㆍ강섬과 나만이 생존하여 인원수가 매우 적은 관계로 기로회를 하기 어려웠다. 조종조에서는 종2품도 참여시킨 예가 있으므로 송찬(宋贊)ㆍ목첨(睦詹)ㆍ신담(申湛)ㆍ기(李墍)도 참여하였는데, 지금은 송찬이 지중추로 88세이고, 나는 영부사로 82세이며, 이기는 이조 판서로 76세인데 아직 병 없이 건강하다. 임진난 후에는 폐지되어 기로회를 열지 못하다가, 의정 유홍(兪泓), 판서 이헌국(李憲國)ㆍ이증(李增), 참판 유희림(柳希霖)ㆍ이희득(李希得)ㆍ이관(李瓘)이 모두 참여하였으나 또한 기로회는 열지 못하였다. 이헌국은 73세이며, 이증은 72세이고, 유희림은 78세이며, 이희득은 76세로 모두 병 없이 건강하다. 정유년이었다.
○ 독서당(讀書堂)은 세종 때에 창설하였는데, 연소한 자로 문장에 능숙하고 명망이 있는 자를 뽑아서 장가 독서(長暇讀書 오랫동안 휴가를 주어서 강학에 전심하게 하는 제도)하게 하였다. 중종 때에는 동호변(東湖邊)에 집을 짓고, 관에서 모든 물품을 공급하여 총애가 유달랐다. 나는 병오년 가을에 급제하고, 무신년 봄에 장가 독서에 선발되었고, 을묘년 가을에는 당상관으로 승진되었다. 전후 8년 동안 서당에 있었던 동료 20명이 승진하고 침체되고 오래살고 일찍 죽은 것이 각각 달랐으니, 민기(閔箕)ㆍ정유길(鄭惟吉)ㆍ김귀영과 나는 의정(議政), 이황(李滉)은 찬성(贊成)이 되었으며, 김주(金澍)는 판윤(判尹), 박충원(朴忠元)ㆍ윤현(尹鉉)ㆍ윤춘년(尹春年)ㆍ윤의중(尹毅中)은 판서, 박민헌(朴民獻)은 참판, 허엽(許曄)은 감사(監司), 남응룡(南應龍)은 참의(參議), 유순선(柳順善)은 승지(承旨), 김홍도(金弘度)는 정언(正言), 김인후(金麟厚)와 한지원(韓智源)은 교리(敎理), 윤결(尹潔)은 수찬(修撰), 김질충(金質忠)은 좌랑(佐郞), 안수(安璲)는 박사(博士)가 되었다. 그 중 박충원ㆍ정유길ㆍ이황ㆍ박민헌ㆍ김귀영은 모두 70세가 넘어서 작고하였다. 나의 나이는 지금 82살이다. 22명 중에서 70세가 넘은 이는 6명뿐이고, 생존자는 6명뿐이며, 《선생안(先生案)》 중에도 70세가 넘는 이는 매우 드무니, 70세는 과연 희귀하다 하겠다.
○ 나의 동년(同年 과거에서의 동기를 말함)인 계묘년 사마방(司馬榜) 중에는 문과에 급제한 자가 61명이며, 음직(蔭職 과거를 거치지 않고 조상의 공덕으로 받는 관직)으로 벼슬한 자가 31명인데, 강사상(姜士尙)과 나는 의정, 심강(沈鋼)은 영돈녕, 박계현(朴啓賢)ㆍ황임(黃琳)ㆍ이임(李琳)ㆍ윤의중(尹毅中)은 판서, 이감(李戡)ㆍ이중경(李重慶)ㆍ김덕룡(金德龍)ㆍ심전(沈銓)ㆍ손식(孫軾)ㆍ황응규(黃應奎)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윤주(尹澍)ㆍ정척(鄭惕)ㆍ홍천민(洪天民)ㆍ조징(趙澄)ㆍ유승선(柳承善)ㆍ김언침(金彦沈)ㆍ신희남(愼喜男)ㆍ권벽(權擘)ㆍ유종선(柳從善)ㆍ장사중(張士重)ㆍ조부(趙溥)ㆍ김백균(金百鈞)ㆍ이억상(李億祥)ㆍ권순(權純)ㆍ임여(任呂)ㆍ이집(李楫)은 통정대부가 되었다. 70세가 넘은 이를 말하면, 지방에 있는 자는 상세히 알지 못하나, 서울에 있는 이는 이봉수(李鳳壽)ㆍ이집이 83세, 엄서(嚴曙)가 82세, 정척이 80세, 유성남(柳成男)과 이권충(李勸忠)이 77세, 황린(黃璘)과 신희남이 75세, 권벽이 74세, 조부ㆍ허현ㆍ박홍(朴泓)이 73세, 심호(沈鎬)ㆍ권순이 73세, 김언침ㆍ이감(李鑑)ㆍ이인(李遴)이 71세, 심전ㆍ김진(金鎭)이 70세였는데, 모두 작고하였고, 나는 82세, 황응규는 80세, 장사중은 74세인데, 모두 아직도 무병하다. 2백 명이 같은 방(榜)으로 급제한 지도 55년이나 되어 세 명만이 생존해 있으니, 아, 서글프다. 장사중은 정유년 여름에, 황응규는 무술년 가을에 작고했다.
○ 나와 동갑인 병자생으로 계를 한 이가 35명이다. 그 중 70이 넘은 이는 소흡(蘇潝)ㆍ박인수(朴麟壽)ㆍ성세평(成世平)ㆍ윤위(尹緯)ㆍ유성남(柳成男)ㆍ홍섬(洪暹)인데, 모두 작고하고, 정걸(丁傑)과 나는 82세로 아직 무병하니, 35명 중에 2명이라도 생존한 것은 다행이다. 정걸도 정유년 여름에 작고했다.
○ 을묘년 여름에 왜구(倭寇)가 호남에 침범하니, 호조 판서 이준경(李浚慶)이 도순찰사(都巡察使), 홍문관 전한인 나와 이조 좌랑 김귀영(金貴榮)이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토벌하였다. 그 후 이준경은 벼슬이 영의정이 되어 70세가 넘었고, 김귀영은 좌의정으로 74세이며, 나는 우의정으로 지금 82세이니, 3명이 모두 의정(議政)에 참여하고 70세가 넘었으니, 진실로 우연이 아니다. 우리 나라에서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이는 변계량(卞季良)ㆍ윤회(尹淮)ㆍ권제(權踶)ㆍ정인지(鄭麟趾)ㆍ신숙주(申叔舟)ㆍ최항(崔恒)ㆍ서거정(徐居正)ㆍ어세겸(魚世謙)ㆍ홍귀달(洪貴達)ㆍ성현(成俔)ㆍ김감(金勘)ㆍ신용개(申用漑)ㆍ남곤(南袞)ㆍ이행(李荇)ㆍ김안로(金安老)ㆍ소세양(蘇世讓)ㆍ김안국(金安國)ㆍ성세창(成世昌)ㆍ신광한(申光漢)ㆍ정사룡(鄭士龍)ㆍ홍섬(洪暹)ㆍ정유길(鄭惟吉)ㆍ박충원(朴忠元)ㆍ박순ㆍ노수신(盧守愼)ㆍ김귀영ㆍ이이(李珥)ㆍ이산해(李山海)ㆍ유성룡(柳成龍)ㆍ이양원(李陽元)ㆍ이덕형(李德馨)ㆍ윤근수(尹根壽)로, 중임(重任)을 서로 전할 때 자연 우열(優劣)은 있으나 모두 인심에 흡족하였으니, 어찌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연소하여 정승이 된 이로 말하면 조종조의 일은 상세히 모르겠으나, 당대(선조)에 박순(朴淳)은 겨우 50세에, 유전(柳琠)은 55세에, 이산해(李山海)는 50세에, 정철(鄭澈)은 54세에, 유성룡은 49세에, 김응남(金應南)과 이원익(李元翼)은 50세에 각각 정승이 되었으니, 이는 근대에 드문 일이다. 70세 이후에 정승이 된 이는 전혀 없는데, 겨우 나만이 75세에 정승이 되었으니, 참으로 욕되게 한 일이다. 김귀영이 축하하는 시를 지어 주기를,
금항아리를 백두의 경이 차지하니 / 金甌拈得白頭卿
천심(임금의 마음)이 노성한 이를 중하게 여김이로다 / 自是天心重老成
조야가 모두 몽복(문왕이 강태공을 만난 고사)을 칭송하는데 / 朝野共稱賢夢卜
갓 털고 친구의 축하하는 정 알리라 / 彈冠應識故人情
하니, 내가 화답하기를,
욕되게 여러 조에 다섯 경을 지냈고 / 忝辱諸曹歷五卿
찬성으로도 6년이건만 아무 한 일 없었네 / 贊成六載竟無成
하루 아침에 총애를 받고 보니 / 一朝誤荷非常寵
열등한 이 몸 어찌 물정에 맞다 할까 / 駑劣何能稱物情
하였다.
○ 조정의 의정(議政)으로 70이 지나서 기로소에 참여한 이는 권희(權僖)ㆍ권중화(權仲和)ㆍ이서(李舒)ㆍ성석린(成石磷)ㆍ조준(趙浚)ㆍ하륜(河崙)ㆍ황희(黃喜)ㆍ허주(許稠)ㆍ하연(河演)ㆍ최윤덕(崔潤德)ㆍ최항(崔恒)ㆍ노사신(盧思愼)ㆍ어세겸(魚世謙)ㆍ유순(柳洵)ㆍ정광필(鄭光弼)ㆍ이유청(李惟淸)ㆍ윤은보(尹殷輔)ㆍ유부(柳溥)ㆍ홍언필(洪彦弼)ㆍ윤인경(尹仁鏡)ㆍ기(李芑)ㆍ상진(尙震)ㆍ윤개(尹漑)ㆍ이명(李蓂)ㆍ이준경(李浚慶)ㆍ권철(權轍)ㆍ홍섬ㆍ노수신ㆍ정유길ㆍ김귀영(金貴榮)과 나이다. 나는 덕이 없는 사람으로 공통적으로 높이는 두 자리에 참여하고 명상(名相)의 대열에 참여하였으나, 어찌 그 외람됨을 말하랴. 최항 이상은 기로소의 《선생안(先生案)》에 있으므로 이렇게 기록하였으나, 다시 들으니, 최항의 나이는 70이 못 되었다 하고, 그 나머지도 자세하지 않다. 정승이 되면 비록 70이 못 되어도 으레 모두 연회에 참여하게 되니, 그가 연회에 참여한 까닭으로 《선생안》에 기록한 것인가.
○ 중종조에 명기(名妓) 상림춘(上林春)이 있었는데, 거문고를 잘 탔다. 참판 삼괴당(三魁堂) 신종호(申從濩)가 돌보아주어 그 집이 종루(鍾樓) 곁에 있었는데, 하루는 삼괴당이 들러서 부른 즉흥시에
제오교 머리에 푸른 버들 늘어지니 / 第五橋頭煙柳斜
늦바람과 햇빛이 더욱 맑고 화창하다 / 晩來風日轉淸和
열두 상렴 늘어진 곳에 사람이 옥과 같은데 / 緗簾十二人如玉
청아한 시인이 말 가는 대로 지나가네 / 靑瑣詞臣信馬過
하였는데, 호사자가 그림을 그리고, 그 시를 그림 끝에 썼다. 그 후 판부사 정사룡(鄭士龍)이 7언 율시를 지어 주고, 우의정 정순붕(鄭順朋), 영의정 홍언필(洪彦弼), 우의정 성세창(成世昌), 찬성 김안국(金安國)ㆍ신광한(申光漢) 등 여러 공이 연이어 화답하니, 드디어 시첩이 되었다. 나도 소시적에 상림춘(上林春)을 보고서 책 끝에 시를 쓴 일이 있으나,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여성군(礪城君) 송인(宋寅)의 비(婢) 석개(石介)는 가무(歌舞)를 잘하여 당시에 견줄 만한 이가 없었는데, 영의정 홍섬이 절구 3수를 지어 주고 좌의정 정유길(鄭惟吉), 영의정 노수신(盧守愼), 좌의정 김귀영(金貴榮), 영의정 이산해(李山海), 좌의정 정철(鄭澈), 우의정 이양원(李陽元)과 내가 연이어 화답하고, 기타 재상들도 많이 화답해서 드디어 큰 시첩이 되었다. 둘 다 천한 여자의 몸으로 여러 명상(名相)들의 시를 얻었으니, 빼어난 예술이야 어찌 귀하지 않으리오.
○ 중이 시를 고관(高官)과 유생(儒生)들에게 구해서 몸가짐의 보배로 삼고 이것을 시축(詩軸)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중들의 고풍(古風)이다. 명공 거경(名公巨卿)들까지도 모두 써 주었는데, 여성군 이암(頤菴 송인의 호)이 가장 많이 써 주었고, 나 또한 잘 써 주는 편이다. 이는 중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산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 세종이 양화(楊花) 나루 옆에 있는 희우정(喜雨亭)에 거동하여 수레를 멈추고 날을 보낼 때 문종은 동궁으로서 따라가고, 안평대군(安平大君) 또한 따라 갔다. 그날 저녁에 안평대군이 성삼문(成三問)ㆍ임원준(任元濬)과 강으로 가서 술을 마시며 달구경하는데, 동궁이 동정귤(洞庭橘) 두 쟁반을 보내주었다. 그 쟁반에 씌어져 있기를,
단향목의 향기는 그저 코에만 좋고 / 栴檀偏宜鼻
고기의 맛은 입에만 좋다 / 脂膏偏宜口
동정귤을 가장 사랑하니 / 最愛洞庭橘
코에도 향기롭고 맛도 달아서이다 / 香鼻又甘口
하였다. 그리고 시를 지어 들이게 하니, 안평대군과 성삼문ㆍ임원준이 각각 시를 지어 올렸다. 안평대군은 그때 사연을 서술한 글과 시를 손수 쓰고, 그림 잘 그리는 안견(安堅)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였는데, 명사(名士)로 계속 화답한 이가 매우 많았다. 서거정(徐居正) 역시 화답을 하였는데, 그가 편찬한 《필원잡기(筆苑雜記)》에는, “동궁이 동정귤을 근신(近臣)에게 보내주고 그 쟁반 안에 글을 써 주었다…….” 하였으며, 성현(成俔)이 지은 《용재총화(慵齋叢話)》에도 이 일이 기재되었는데, 내용이 《필원잡기》와 같다. 서거정과 성현은 모두 안평대군과 같은 시대 사람들인데, 그 기재 내용이 이처럼 다름은 어찌된 것인가. 세조 때에 안평대군이란 말을 숨기려고 근신이라고만 한 것이 아닌가.
○ 사인사(舍人司)의 연정(蓮亭)에서 학을 한 쌍 길렀는데, 무자년과 기축년에 학이 알을 낳아 새끼를 깠다. 인가에서는 학은 기르되 대부분 새끼를 까 기르지 못하는데 새끼를 깠으니, 기특한 일이다. 기축년 여름에 내가 찬성으로 우연히 연정을 지나게 되었는데, 연꽃은 한창 피었고 학(鶴)의 새끼는 기우뚱기우뚱 걷고 있었다. 내가 장난삼아 사인(舍人) 권극지(權克智)에게 말하기를, “연정에서는 근래 전직자를 초청하는 일이 드무니, 옛날 성사(盛事)가 자못 쓸쓸하게 되었네.” 하였더니, 사인 권극지가 말하기를, “연꽃이 본래는 성하지 못하였는데 지금은 연꽃이 가득하며, 학이 또한 새끼를 깠으니, 내 생각에는 연정의 일이 옛날보다 낫습니다.” 하므로, 서로 껄걸 웃었다. 내가 즉시 기둥 위에 시를 쓰기를,
일찍이 중서성에 들어간 지 30년 만에 / 曾入中書卅載餘
지금 다시 와 보니 슬프기만 하구나 / 如今重到足嗟吁
옛날 있었던 일 모두 없어졌다 말하지 마소 / 莫言故事全消歇
연꽃은 연못에 가득하고 학은 새끼를 쳤네 / 荷滿池塘鶴産雛
하였다.
○ 사인사의 연정에는 연못과 누대(樓臺)의 좋은 경치가 있고, 사인(舍人)은 직무가 없으므로 매양 선생(先生 사인사의 전직자)들을 청하여 음악과 기녀들의 풍악을 울렸는데, 재상도 많이 오므로 사람들은 이를 영주(瀛洲 신선 있는 곳)에 오르는 것에 비유하였다. 가정(嘉靖) 임자년 봄에 치숙(治叔) 송찬(宋贊)은 좌사인(左舍人)이 되고, 나는 우사인(右舍人)이 되었더니, 만력(萬曆) 신묘년 가을에 이르러서는 어언 40년이 된지라, 송치숙은 82세로 벼슬이 참판을 거쳐 동지중추부사가 되고 나는 나이 76세로 벼슬이 참정(參政)을 거쳐 판중추부사가 되어 《선생안(先生案)》에 같이 연명(聯名)하였으니, 이 역시 인세(人世)의 다행이다. 하루는 약속하고 연정(蓮亭)에 가서 술이 반취되었는데, 내가 절구시 한 수를 읊기를,
기억하건데 연정온 지도 40년 / 憶入蓮亭四十年
당시 동료로 있었던 것도 인연이었네 / 當時僚契亦因緣
같이 백발이 된 것도 참으로 다행이니 / 俱成白首眞多幸
오늘도 손 잡고 옛 자리에서 취해보세 / 此日同携醉舊筵
하니, 송치숙이 화답하기를,
함께 이 정자에서 취한 적이 청년 시절인데 / 共醉玆亭在盛年
서로 백발 휘날리니 무슨 인연인가 / 相携黃髮是何緣
누가 오늘 함께 노는 흥을 알까 / 誰知此日同遊興
주인의 풍류가 베푼 자리에 맞네 / 地主風流趁肆筵
하였다. 사인 노직(盧稷)이 이 시를 현판에 새겨 벽에 달았다. 송찬은 지금 88세이며, 나의 나이는 82세이니, 더욱 다행한 일이다.
○ 중종 때에 이락정(二樂亭) 문경공(文景公) 신용개(申用漑)가 찬성으로 대제학을 겸하고 있었는데, 대제학을 남곤(南袞)에게 전하려 하여 하루는 남곤과 담화하며 시를 짓기를 청하였다. 남곤이 시를 지어 올렸는데,
버들 우거지고 낮닭 울려는데 / 楊柳陰陰欲午鷄
졸지에 궁벽한 시골에 수레 가득 찬 것 놀랐었네 / 忽驚窮巷溢輪蹄
다투어 풍채 구경 하느라고 이웃은 집을 비우고 / 爭看風裁空隣舍
재촉하여 술자리 마련하는 노처는 궁색하네 / 促具盤筵窘老妻
흥이 나면 술잔이나 기울일 줄 알았는데 / 乘興但知傾藥玉
누구인지 생각도 않고 허리띠를 잡아 끌었노라 / 忘形不覺挽鞓犀
중얼중얼 높으신 분 찾으신 것 시로 지어볼까 하였으나 / 沈吟欲賦高軒過
정중하여 거친 문자 감히 못 쓰겠네 / 鄭重荒詞未敢題
하니, 문경공이 감탄하며 말하기를, “의발(衣鉢)이 갈 곳이 있다.”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서 남곤이 대제학을 맡았다. 이 일이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에 나오는데, 문경공이 필시 이날 남곤의 시에 차운을 하였을 것인데 《패관잡기》에는 기재되지 않았으므로 지금 감히 내가 문경공을 헤아려 시를 짓기를,
우연히 고문(남곤의 집을 높여 말함)에 후한 대접을 받아 / 偶過高門見殺鷄
반나절이 넘도록 말을 매어 두었노라 / 淹留半日縶駑蹄
옥 같은 시구는 음을 아는 벗으로 허락했고 / 瓊詞許以知音友
한 말 술은 공손히 대접하는 부인에게 물어본다 / 斗酒謀諸擧案妻
방고에 비기면서 말 볼 줄 안다 하면서 / 自擬方皐能相馬
모름지기 온교를 번거롭게 연서를 시험했네 / 須煩溫嶠試燃犀
의발을 전하고자 하는데 인망에도 합하니 / 欲傳衣鉢孚人望
성가의 짝 없기는 품제에 달려 있네 / 聲價無雙在品題
라고 하였다.
○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면 장원을 존대하여 장원님이라 부르고 감히 이름을 부르지 못하며, 보면 문득 절을 하고 감히 읍(揖)을 못하니, 급제한 사람도 그러하다. 이는 사문(斯文)의 고풍이다.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한 자가 또 문과 급제에서 같이 합격하면 재년(再年)이라고 한다. 계묘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함께 합격하고, 또 급제에 같이 합격한 사람이 9명인데, 그 중에서 이광전(李光前)은 생원시에서 장원하고, 나는 급제시에서 장원을 하였기로 서로 장원님이라고 불렀으니, 이 또한 하나의 드문 일이다. 이광전은 급제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죽었으니, 아까운 일이다.
○ 생원과 진사를 연방(蓮榜)이라 하고, 혹은 사마(司馬)라고도 한다. 함께 합격한 사람끼리는 서로 형과 아우로 부르며, 정이 친하여 춘추로 모임을 갖고 사이좋게 지냈는데, 세월이 오래되면 폐지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우리 계묘년에 함께 합격한 사람들은 서울에 있는 이가 가장 많았으므로, 춘추의 모임을 오래도록 폐지하지 않고 정해년에 이르러서는 45년이나 되니, 생존자가 겨우 15명뿐이다. 서로 의논하기를, “우리 동기생들이 정은 비록 두터우나 1년에 두 번 모임으로 어찌 기쁨을 말하기 흡족하리오. 하물며 지금 나이는 늙고 수효도 적으니 더욱 자주 모여야겠기에 달마다 집집마다 돌아가며 모임을 갖는 것이 어떠냐.”고 말하니, 모두 좋다고 승낙하며 다투어 먼저 모임을 가지려 하였다. 그 후 모임이 한 바퀴 돌고 다시 시작되니, 듣는 이들이 성사(盛事)라며 부러워들 하였다. 임진년 여름에 생존자가 10명으로, 엄서(嚴曙)는 81세로 벼슬이 부정(副正)이고, 유성남(柳成男)은 76세로 벼슬이 역시 부정이었다. 나는 76세로 의정을 지냈고, 정척(鄭惕)은 75세로 승지로 산관(散官)이 되었고, 이권충(李勌忠)은 74세로 벼슬이 장원(掌苑)이고, 권벽(權擘)은 72세로 벼슬이 참의이다. 박홍(朴泓)은 72세로 벼슬이 사의(司議)이고, 이굉(李宏)은 69세이며 현감으로서 산관이 되었고, 이유관(李惟寬)은 69세이며 군수를 지냈으며, 장사중(張士重)은 68세로 참의로 있다가 난리를 만나 산관이 되었다. 계사년 겨울에 서울로 돌아오니 생존한 이는 나와 정척ㆍ정사중 3명뿐이니, 아, 슬픈 일이다.
○ 우리 마을에 기로회(耆老會)가 둘이 있는데 하나는 아이현(阿耳峴) 아래에 사는 노인들의 모임으로 경진년 가을부터 모임을 시작하였는데, 임진년 여름에 난리로 흩어졌다. 모임은 매월 각 집에서 돌아가며 가져 한 번 돌면 다시 시작하는데, 활도 쏘고 혹은 작은 표적의 활도 쏘며 바둑도 두고 혹은 시를 지어 매우 즐겁게 지냈다. 처음에는 20명이던 것이 끝에 가서 9명이었다. 영주 감사(瀛州監司) 의경(義卿)은 90세이고, 동지(同知) 송찬은 82세이며, 영해 감사(瀛海監司) 지경(智卿)은 80세이다. 판중추부사 나는 77세이며 전 직장 성학령(成鶴齡)은 76세이고, 전 직장 심수약(沈守約)은 73세이다. 첨정(僉正) 남전(南銓)은 73세이며, 전 응패두(鷹牌頭) 심수의(沈守毅)는 72세이고, 주부(主簿) 심수준(沈守準)은 69세였다. 또 하나는 만리현(萬里峴) 아래에 사는 노인들의 모임으로, 임오년 봄부터 시작하였다가 임진년 여름에 난리로 말미암아 이 모임도 흩어졌다. 매달 돌아가며 모임을 갖는 것이나 활 쏘고 바둑 두고 시 짓는 것이 모두 아이현의 모임과 같았다. 처음에는 12, 13명이던 것이 끝에는 70명이나 되었다. 동지 송찬과 나의 나이는 위에 썼고, 첨지(僉知) 이이수(李頤壽)와 경력(經歷) 안한(安瀚)은 80세이며, 좌윤(左尹) 목첨(睦詹)은 78세, 첨지 서봉(徐崶)은 75세, 참의 송하(宋賀)는 79세였다. 임진난 후 갑오년 겨울에 생존해서 서울에 사는 자는 동지 송찬과 경력 안한과 나 세 명뿐이었다. 감격스러움을 견디지 못하여 송찬과 안한에게 시를 지어주기를,
우리 마을 노인들 다년간 모임 갖더니 / 吾鄕耆老會多年
한번 동서로 흩어진 후 세상사 몇 번이나 변했는고 / 一散東西事幾遷
지금 살아 있는 이는 단지 세 사람 / 今日生存只三箇
옛일 회상하노라면 그저 멍해지네 / 回思舊興却茫然
하니, 송동지가 화답하기를,
성 서쪽에서 활이나 쏘며 여생을 보내노라니 / 城西爭鵠屬殘年
습관이 되어 다른 일은 하기 어려웠네 / 成癖難爲他技遷
오늘 쓸쓸히 활쏘던 옛일을 생각하노라니 / 今日漂零思射
슬픔을 금치 못하여 눈물이 흐르네 / 不禁哀涕自潸然
하였고, 또 안경력이 화답하기를,
이웃에서 성은 알아도 나이는 몰랐으니 / 四隣知姓不知年
젊어 사귄 정 늙은들 변할까 / 自少交情老豈遷
오늘 셋이 솥발처럼 앉으니 / 今日三人成鼎坐
그 동안의 마음이 흰 머리에 비춰지네 / 這間肝膽照皤然
하였다.
○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은 남곤(南袞)과 용재(容齋) 이행(李荇)과 더불어 어렸을 때부터 문학으로써 서로 벗하였는데, 남곤과 용재는 모두 읍취헌을 추대하여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읍취헌은 17세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8세에 급제하였으며 26세에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이 되었다가, 연산조(燕山朝) 때에 갑자사화를 만나 피살되었다. 남곤과 용재는 모두 대제학을 지내고 벼슬이 의정(議政)에 이르렀다. 용재가 읍취헌의 시문을 모아서 이름을 《읍취헌유고(挹翠軒遺稿)》라 하고 세상에 간행하였다. 또 읍취헌의 아들 참판공(參判公) 박공량(朴公亮)이 읍취헌의 산일(散逸)된 글을 수습하여 《별고(別蒿)》를 만들고, 읍취헌의 손자인 박유(朴愈)와 박무(朴懋)가 인쇄를 하여 두 개의 원고를 하나로 합해서 상하권을 만들고 나에게 발문(跋文)을 부탁하였다. 유고(遺稿) 권말(卷末)에 오율(五律) 세 수가 있으니,
하늘이 사문을 망치려나 / 天欲斯文喪
문장도 없어지고 세상도 파리하네 / 時如殄瘁章
백명이라도 이 사람과는 못 바꿀 걸 / 百身人莫贖
만고 동안 밤만 될 것 같다 / 萬古夜還長
한묵은 삼매 지경이 넘어갔고 / 翰墨餘三昧
풍류는 일장에서 다했네 / 風流盡一場
차마 어찌 호해주를 / 忍將湖海酒
공연히 국화 옆 땅에 부을까 / 空酹菊花傍
하였으니, 이는 택지(擇之) 용재의 시이고,
뛰어난 재주 때를 만나지 못하여 / 高才時不遇
야박한 세상 문장을 싫어하네 / 薄俗惡文章
한 가지 일이라도 후세에 전한다면 / 一事堪傳後
인생은 길 필요 없는 것 / 浮生不較長
죽고 살았으니 길이 다름을 슬퍼하고 / 存亡嗟異路
시 짓고 술마시던 그곳이 그립구나 / 詩酒憶逢場
지금도 종남산 빛이 / 尙有終南色
의연하게 읍취헌 곁에서 푸르도다 / 依然挹翠傍
하였으니, 이는 호숙(浩叔) 이원(李沅)의 시이고,
젊어서 짓던 일 경솔히 마쳤더니 / 少作吾輕了
이제 도리어 10년 공을 들여야 하리 / 還添十載功
늙어서야 묘경에 놀라고 / 晩來驚入妙
죽은 뒤에야 공부 더함을 깨달았네 / 身後覺增工
불우한 일생은 짧았지만 / 奇釁一生短
길이 울린 명예 만년에 다시 없으리라 / 長鳴萬世空
종남산의 푸른빛 누가 잡으리 / 終南翠誰挹
저녘 빛이 하늘에 뻗어 있네 / 暮色尙連穹
하였으니, 이는 명중(明仲) 이우(李堣)의 시이다.
○ 근래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공은 시에 능하여 이름이 난 자이다. 어떤 사람이 술을 노래하는 시를 짓기를 청하며 감(甘) 자 운을 부르니, 임억령이 즉시 응하기를,
늙어서야 비로소 이 맛 단 줄 알았네 / 老去方知此味甘
라고 하거늘 또 삼(三) 자 운을 부르니, 응하기를,
한 잔 술에도 도통하니 석 잔을 마시랴 / 一杯通道不須三
하였다. 또 남(男) 자 운을 부르니, 곧 응하기를,
그대는 혜강(동진 때 죽림 7현의 한 사람)과 완적(죽림 7현의 한 사람)이 유계(한고조)를 조롱한 것을 아는가 / 君看嵇阮陶劉季
공후백자남도 부러워하지 않는다 / 不羨公侯伯子男
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기이(奇異)한 작품이다. 내가 감탄하고 나서 그 시에 차운하여 자손들을 경계하기를,
일찍 들으니, 대우는 마셔보고 달게 여겼다지만 / 曾聞大禹飮而甘
술 좋아하고 몸 온전한 이는 열에 두셋뿐이다 / 嗜酒全身十二三
한 잔 술도 잡지 말고 마땅히 삼가 경계할 것이요 / 勿把一杯宜戒愼
모름지기 여색을 멀리할 줄 아는 자가 정남이다 / 須知遠色是貞男
하였다. 임석천의 뜻을 뒤집은 것이나 시는 훨씬 미치지 못한다.
○ 남대문 밖 한 이웃에서 동년배 문사(文士)로 재상이 된 자가 5명이 있으니, 윤부(尹釜)는 경오생으로, 22세 때 사마시에 합격하고 28세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으며, 수(壽)는 50세였다. 오상(吳祥)은 임신생으로, 20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23세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으며, 수는 62세였다. 윤현(尹鉉)은 갑술생으로, 18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24세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으며, 수는 65세였다. 유창문(柳昌門)은 갑술생으로, 27세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고, 수는 57세였다. 나는 병자생으로 28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31세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이 의정(議政)에 이르렀으며, 나이 82살인데도 여전히 병이 없다. 나는 5인 중에서 재주와 덕이 최하이면서 벼슬과 수(壽)는 최고이고 보니, 하늘이 주신 풍부하고 군색한 것은 실로 알지 못하겠다. 이는 늦게 영달한 이유에서인가. 재주 없는 내가 장원 급제한 것은 첫 번째 요행이고, 급제한 지 10년 만에 승지에까지 오른 것은 두 번째 요행이고, 본래 명망도 없으면서 벼슬이 의정에 이른 것은 세 번째 요행이고, 권세를 잡지 않았으므로 집에 손님이 드문 것은 네 번째 요행이다. 네 가지 요행이 있는 데다 나이가 80이 넘었으니, 다섯째 요행이다. 어찌 하늘이 주신 운명으로 사람의 힘으로는 미치지 못할 것이 아니겠는가. 《영규율수(瀛奎律髓)》를 보면, 유우모(劉禹謨)가 여상공(呂相公)에게 올린 시가 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중하고 맑은 명망을 천하가 두루 아니 / 重名淸望遍華夷
신선인가를 알지 못하겠네 / 恐是神仙不可知
한 번에 용호방(과거)에서 장원이 되더니 / 一擧首登龍虎榜
10년 만에 몸이 봉황지(한림 벼슬)에 이르렀네 / 十年身到鳳凰池
묘당에선 다만 말 없는 자 같고 / 廟堂只似無言者
집은 항상 귀하지 않을 때와 같구나 / 門館長如未貴時
문득 낙양에서 나와 지키던 것 뺀다면 / 除却洛京居守外
성조의 현상은 다시 누구라고 쓰랴 / 聖朝賢相復書誰
하였다. 경인년 가을에 이웃에 사는 벗 죽계(竹溪) 안한(安瀚)이 이 시의 두 연(聯)이 나의 관적(官跡)과 근사하다고 하며 베껴서 보여 주거늘, 내가 곧 감히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뜻으로 그 시에 차운하여 보냈다. 임진난 후 갑오년 가을에 우연히 《영규율수》를 열람하다가 이 시를 보고서 그때 차운하였던 시가 기억나기는 하나, 가물가물하여 한 구절도 기억나지 않기에 감히 또 졸렬한 시를 지어서 훗날 보는 데에 대비하였으니, 그 시에,
나라가 언제나 태평할꼬 / 乾坤何日屬淸夷
난후에 천심을 실로 모르겠네 / 亂後天心實未知
평생 벼슬길은 험하기만 하고 / 半世宦途嘗險阻
하루 아침 사람일은 모두 어긋났네 / 一朝人事盡差池
선도 복숭아는 3천 년이 가도 익지 않는데 / 蟠桃未熟三千載
백발은 부질없이 80이 되어가네 / 華髮空垂八十時
나라 위한 단심은 아득하기만 하니 / 許國丹衷徒耿耿
어려운 이 고비 건져줄 이 그 누구랴 / 艱危弘濟更伊誰
하였다.
○ 내가 명조 때 가정(嘉靖) 병오년 식년시(式年試)에 장원 급제를 하였는데, 그때 문과(文科)가 33명, 무과가 28명이고, 중시 문과(重試文科)가 18명, 중시 무과(重試武科)가 35명이며, 역과(譯科)가 19명, 그리고 음양과(陰陽科)와 율과(律科)가 각각 8명씩으로 모두 1백 47명이었다. 이것을 합하여 《방목(榜目 합격 기록)》 한 책을 만들어 인쇄하여 각기 간직하였다. 만력(萬曆) 임진년 여름에 왜구가 경성을 함락하여 나라도 망하고 집안도 망하는 바람에 공사서적(公私書籍)들이 모두 깡그리 없어졌다. 계사년 여름에 왜구가 물러가고, 그 해 겨울에 성상이 경성으로 돌아왔다. 갑오년 가을에 어떤 사람이 우연히 《병오방목(丙午榜目 병오년에 급제한 자를 적은 기록)》을 얻어 주기에 내가 펴 보니, 1백 47명 중에서 생존한 자는 오직 나 한 사람뿐이었다. 49년 안에 인사(人事)가 이같이 변하였다. 생존자인 내가 이 책을 얻은 것은 아, 또한 다행한 일이다.
○ 국법(國法)에 서얼(庶孼)은 과거를 보지 못하도록 하는데, 이는 옛날에는 없던 일이다. 당초 이런 법을 세운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고, 근래에는 벼슬길을 열어주자는 의론이 여러 번 있었으나, 결국 행해지지 않고 있으니, 또한 그 무슨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서얼로 문장에 능한 자는 선조(先朝) 때에는 어무적(魚無跡)과 조신(曹伸)이 가장 유명하였고, 근세에는 어숙권(魚叔權)과 권응인(權應仁)이 또한 유명하며, 그 나머지는 모두 기억하지 못하나, 재주를 가지고도 출세하지 못함은 어찌 억울하지 않으리오. 그리고 나라에서 인재를 수용하는 데에도 방해가 될 것이다.
○ 설날 아침에 도소주(屠蘇酒)를 마시는 것이 옛 풍습이다. 젊은이가 먼저 마시고 노인이 뒤에 마시는데, 지금 풍속은 또 설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사람을 만나면 그 이름을 부르고, 그 사람이 대답하면 “나의 허술한 것을 사가라.” 하는데, 이것은 자기의 병을 파는 것으로 재앙을 면하고자 하는 것이다. 내 일찍이 우리 나라 사람의 설날 아침에 대한 절구를 좋아하였는데, 이르기를,
사람들이 나보다 먼저 도소주 마시는 이 많으니 / 人多先我飮屠蘇
이제는 쇠퇴한 줄 알겠으니 큰 포부를 저버렸다 / 已覺衰遲負壯圖
일마다 병을 파나 병은 끝나지 않으니 / 事事賣癡癡不盡
그대로 옛 나를 가지고 지금의 내가 될 뿐이네 / 猶將古我到今吾
라고 한 것이다. 내가 80세 되던 설날 아침에 장난삼아 이 시에 차운하여 이르기를,
약한 몸 병이 많아 도소주 빨리 못 깬다 / 微軀多病少醒蘇
80살 강녕은 생각조차 못했는데 / 八十康寧是不圖
어찌 병 팔려고 먼저 술 마실까 / 何用賣癡先飮酒
시장에서의 강한 상대에게나 대항해 볼까 / 詩場强敵可支吾
라고 지어서 서교(西郊) 송동지(宋同知 송찬)에게 보냈다.
○ 우리 나라의 명절 중에 설날ㆍ한식(寒食)ㆍ단오(端午)ㆍ추석(秋夕)에는 묘제(墓祭)를 지내고, 3월 3일과 4월 8일, 그리고 9월 9일에는 술 마시고 논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묘제는 3월 상순에 지낸다.’고 하였는데, 중국에서는 지금도 이같이 행한다. 우리 나라 풍속에는 네 명절에 지내는데, 그 출처는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겠다. 《오례의(五禮儀)》에는, ‘설날ㆍ단오ㆍ추석에는 사당에서 제사지낸다.’ 하여 한식은 빠졌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모두 묘제는 지내니, 또한 그 어찌 된 까닭인지 모르겠다. 중국에서는 한식에 그네를 타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단오에 그네를 타니, 명절에 행하는 풍속 역시 무슨 연유로 다르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나라에서 지내는 능묘(陵墓)의 제사가 지극히 번거롭고, 사삿집 묘제(墓祭) 역시 번거롭지만 예(禮)를 어기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임진난 후에는 나라의 제사가 감해졌으니, 사삿집 묘제도 감해야 할 것이다.
○ 백낙천(白樂天)의 자경시(自警詩)에 이르기를,
누에 늙어 고치 되어도 제 몸은 못 가리고 / 蚕老繭成不庇身
벌은 굶주려 가며 꿀 만들어서 다른 사람 위하네 / 蜂飢蜜熟屬他人
모름지기 알아 두자꾸나 늙어서도 집안 걱정 하는 자 / 須知年老憂家者
두 벌레의 헛수고 같다는 것을 / 恐似二虫虛苦辛
이라고 하였으니, 진실로 통달한 자의 말이로다. 내가 난리로 집안이 망하여 몸을 의탁할 곳이 없길래 두어 칸 집을 사고자 하는데, 나이 80이 넘었으니 여생이 얼마나 되나 하고 있던 차에 우연히 백낙천의 시를 보고 깊이 느낀 바 있어 웃고 집 사는 것을 그만두었다.
○ 근세에 어린이들을 교육시키는 책이 있어 이름을 《동몽선습(童蒙先習)》이라고 하는데, 누구의 저작인지는 모르겠다. 어떤 이가 사문(斯文) 박세무(朴世茂)의 저작이라 하기에 그 조카 박정립(朴挺立)에게 물어보았더니, 과연 자기 숙부의 저작이라고 하였다. 그 책은 먼저 오륜(五倫), 다음으로는 역대 사실을 서술하였으며, 그 다음은 우리 나라의 사실과 경사(經史) 약간을 서술하였으니, 어린이에게 마땅히 먼저 읽힐 것이 된다. 어린이를 가르치는 자는 어찌 이것을 먼저 가르치지 않겠는가.
○ 근세에 우리 말로 장가(長歌)를 짓는 자가 많으니, 그 중 송순(宋純)의 〈면앙정가(俛仰亭歌)〉와 진복창(陳復昌)의 〈만고가(萬古歌)〉는 사람의 마음을 조금 흡족하게 한다. 면앙정가의 줄거리를 보면 아늑한 산천과 널찍한 전야의 모양과 높고 낮은 정대(亭臺), 휘돌아드는 지름길, 그리고 춘하추동 사시와 아침 저녁의 경치를 두루 기록하지 않음이 없는데, 우리 말에 한자를 써서 그 변화를 지극히 하였으니, 진실로 볼 만하고 들을 만하다. 송공(宋公)은 평생 동안 가사를 잘 지었는데, 이것은 그 중에서도 가장 잘된 작품이다. 〈만고가(萬古歌)〉는 먼저 역대 제왕(帝王)의 현부(賢否)를 서술하고, 다음에는 신하들의 현부를 서술하였는데, 대개가 양절 반씨(陽節潘氏)의 논(論)을 본받아서 우리 말로 가사를 짓고 곡조를 맞추었으므로 또한 들을 만하다. 사람들은 진복창이 삼수(三水)에서 귀양살이할 때 지은 것이라고 하는데, 참으로 재주가 덕(德)보다 나은 자라 하겠다.
○ 세상에서 선조를 위하여 비명문(碑銘文)과 묘지문(墓誌文)을 지을 때는 반드시 글 잘하고 덕망이 있는 사람에게 청하는데, 혹 청하여도 얻지 못하거나 미루다 써주지 못하는 자도 많다. 비갈(碑碣)은 묘(墓) 밖에 세우고, 지석(誌石)은 묘 앞에 묻는 것인데, 이는 만일 세월이 오래되어 비갈이 없어지면 지석을 상고하여 누구의 묘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비갈과 지석을 설치하는 뜻이 대개 여기에 있으니, 각기 다른 글을 쓰지 말고 같은 글을 쓰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그런데 예로부터 각기 다른 글을 쓰기 위하여 두 사람에게서 각기 다른 글을 받으니, 이는 무슨 뜻일까. 나의 어리석은 견해가 이러하니, 예(禮)를 아는 자는 부디 헤아려주기 바란다.
○ 우리 나라 사대부(士大夫)의 상례(喪禮)와 제례(祭禮)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기재되었는데, 상례는 전적으로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쓰지만 간혹 조금 다르고, 제례는 《주자가례》와 다른 점이 많으니, 이는 필시 우리 나라 음식(飮食)의 절차가 중국과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제물(祭物)은 직품(職品)의 차등(差等)에 따라 간략하고 쉽게 갖추게 되어 있으나, 지금 사람들은 국가 제도를 따르지 않고 임의로 풍성하고 사치스럽게 한다. 그러나 가난한 집에 이르러서는 사시의 시제(時祭)를 모두 지내지 못하고, 다만 한두 시제만 지내는 자가 있는가 하면 혹은 전혀 지내지 못하는 자도 있으며, 기제(忌祭)마저 핑계대고 지내지 않는 자도 있다. 이는 모두 제물이 풍성하고 사치스러운 폐단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것이니, 말할 수 없이 한탄스럽다.
○ 한양 경복궁(景福宮) 광화문(光化門) 위에 큰 종이 있고 종루(鐘樓)에도 큰 종이 있는데, 모두 새벽과 저녁에 울린다. 신덕왕후(神德王后 태조의 계비 강씨)의 정릉(貞陵)이 돈의문(敦義門) 안에 있고 능 곁에 절이 있었는데, 능을 옮기자 절도 폐지되었으니, 오직 큰 종만 있을 뿐이다. 원각사(圓覺寺)는 도심지에 있었는데, 절이 폐지되자 또한 큰 종만 있을 뿐이다. 중종 때에 김안로(金安老)가 정승이 되어 건의하여 두 종을 동대문과 남대문에 옮겨 두고 또한 새벽과 저녁에 울리려고 하다가, 김안로가 죄를 입게 되면서 종을 달지 못하고 수풀 속에 버려둔 지 60여 년이 되었다. 만력 임진년 여름에 왜구가 서울을 함락하고 멋대로 불을 지르니, 광화문 종과 종루의 종도 모두 불에 녹게 되었다. 계사년 여름에 왜구가 물러가자, 그해 겨울에 성상이 환도(還都)하였고, 갑오년 가을에는 남대문에 종을 걸어 새벽과 저녁으로 울리게 하니, 그 종 소리를 듣는 서울 사람들이 슬퍼하면서도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정유년 겨울에 명 나라 장수 양호(楊鎬)가 서울에 와서는 종을 명례동(明禮洞) 고개 위에 옮겨달도록 명령하였다.
○ 역서(曆書)는 국가의 큰 정사로, 중국에서는 매년 역서를 반포한다. 우리 나라도 역서를 만드는데 중국과 비슷하여 별다른 차이가 없으나, 오직 주야(晝夜)에 있어서 중국은 극장(極長)이 60각인데 우리 나라는 61각이며, 중국은 극단(極短)이 40각인데 우리 나라는 39각이다. 이는 우리 나라가 한쪽에 치우쳐 있어 해가 뜨는 동쪽과 가까우므로, 1각의 가감 차이가 나는 것이다. 항상 이것을 주자(鑄字)로 인쇄하여 중외(中外)에 반포하였는데, 임진년 여름에 왜구가 도성(都城)을 함락하여 모든 역기(曆器) 등의 물건이 깡그리 없어지게 되었다. 그해 겨울에 의주(義州)로 따라갔던 일관(日官) 몇 명이 우연히 《칠정산(七政算)》과 《대통력주(大統曆註)》등의 서적을 얻어서 계사력(癸巳曆)을 만들어서 목판으로 몇 권 인쇄하여 반포하였다. 계사년 겨울에 성상이 환도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옛날 역서(曆書)를 인쇄하던 주자(鑄字)를 얻어 바치므로 옛 역서에 의하여 인쇄 반포하게 되었으니, 다행이라 하겠다.
○ 육방옹(陸放翁)의 이름은 유(游)이고 자(字)는 무관(務觀)으로, 송(宋) 나라 시인의 대가이다. 그의 시는 호방하고 평이하여 난삽(難澁)하고 기괴(奇怪)한 병통이 없으므로, 내가 전부터 좋아하였다. 우연히 유간곡(劉澗谷)이 정밀히 뽑은 한 부를 얻었는데, 이는 판서 성임(成任)이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이 간직한 것을 등사하여 인쇄한 것이다. 그런데 다만 글자가 적어서 노안(老眼)에 합당치 못하기에 글씨 잘 쓰는 친구 안한(安翰)에게 청하여 등사하여 보기에 편리하게 하였다. 시들은 노경(老境)에 지은 것이 많은데 지금 안공(安公)과 나도 80이 넘었으니, 노인이 지은 시를 노인이 등사하고 또 노인이 보는 것은 하나의 기이한 일이다. 육방옹은 벼슬이 예부 낭중 보장각 대제(禮部郞中寶章閣待制)로 있다가 치사(致仕)하였다. 향년(享年) 85세였다.
○ 세종 16년 갑인년 알성친시방(謁聖親試榜)에서 을과(乙科) 1등으로 3명이 있었으니, 유학(幼學) 최항(崔恒)과 전 문소전직(文昭殿直) 조석문(曹石門 후에 석문(錫文)으로 개칭), 그리고 생원(生員) 박원형(朴元亨)이다. 이들 셋이 모두 영의정이 되었고, 최항은 대제학까지 하였으니, 그 알성친시방에서 인재 얻은 것이 성대하다 하겠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과거(科擧)는 ‘갑과(甲科)ㆍ을과(乙科)ㆍ병과(丙科)가 있다.’고 하였는데, 조종조(祖宗朝)에서는 혹 갑과와 병과는 없이 다만 을과(乙科)만 두어 3등으로 나누었으며, 혹은 을과 병과 정과(丁科)를 두었고, 혹은 무슨 과가 없이 1, 2, 3등만 두었으니, 그 제도는 모두 상세하지 않다. 세조 12년 병술년 5월의 발영시(拔英試)에서는 일찍 급제한 자로 정2품 이하는 응시를 허락하여 합격자 40명을 뽑았고, 같은 해에 또 등준시(登俊試)를 보였는데, 발영시의 예에 따라 합격자 10명을 뽑았다. 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는 등준시에 참여하여 제5위가 되고, 또 무자년 중시(重試)에서는 제1위가 되었으며, 춘양군(春陽君) 이래(李徠)는 같은 해인 무자년 식년시에서 병과 제2위가 되었으니, 영순군은 광평대군(廣平大君 세종의 다섯째 아들)의 아들이고, 춘양군은 보성군(寶城君)의 아들이다. 이들은 모두 군(君)으로서 시험에 참여하였다. 국초부터 세조까지의 매년 방목(榜目)을 보면 종실(宗室)로 등과(登科)한 자는 없었으며, 그 후에도 없었으니, 아마 이 두 사람은 특명으로 응시한 듯하나, 공도(公道)는 아니다.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는 정인지(鄭麟趾)의 아들로, 세조의 부마였는데, 친시(親試)에 참여하여 제3위를 하였다. 이 또한 상규(常規)는 아니다.
○ 부인(婦人)으로 문장에 능한 자를 말하자면 옛날 중국의 조대가(曹大家)와 반희(班姬), 그리고 설도(薛濤) 등 이외에도 많이 있어 이루다 기재하지 못하겠다. 중국에서는 기이한 일이 아닌데, 우리 나라에서는 드물게 보는 일로 기이하다 하겠다. 문사(文士) 김성립(金誠立)의 처(妻) 허씨(許氏 허난설헌)는 바로 재상 허엽(許曄)의 딸이며, 허봉(許篈)ㆍ허균(許筠)의 여동생이다. 허봉과 허균도 시에 능하여 이름이 났지만 그 여동생인 허씨는 더욱 뛰어났다. 호는 경번당(景樊堂)이며 문집(文集)도 있으나, 세상에 유포되지 못하였지만, 백옥루(白玉樓) 상량문 같은 것은 많은 사람들이 전송(傳誦)하고 시 또한 절묘하였는데, 일찍 죽었으니 아깝도다. 문사 조원(趙瑗)의 첩(妾) 이씨(李氏)와 재상 정철(鄭澈)의 첩 유씨(柳氏) 또한 이름이 났다. 논하는 자들은 혹, “부인은 마땅히 주식(酒食)이나 의논할 것인데, 양잠하고 길쌈하는 것을 집어치우고, 오직 시를 읊는 것으로 일삼는 것은 미행(美行)이 아니다.” 하나, 나의 생각에는 그 기이함에 감복할 뿐이다.
○ 나라 풍습에 바둑ㆍ장기(將棋)ㆍ쌍륙(雙陸) 등을 잡기(雜技)라고 한다. 바둑은 검고 흰 것으로 해변에서 검정 돌과 조개껍질이 물에 씻기어 반질반질한 것을 쓰고, 장기는 차(車)ㆍ포(包)ㆍ마(馬)ㆍ상(象)ㆍ사(士)ㆍ졸(卒)을 나무로 깎아 만들어 글자를 새기고 채색을 칠하여 쓰며, 쌍륙은 흑백마아(黑白馬兒)를 나무로 깎아 만들거나 또는 뼈로도 만들어 쓴다. 이것들은 모두 판국(板局)이 있어서 통틀어 박국(博局)이라고 부른다. 그 기술은 각각 잘하고 못함이 있어서 승부를 겨루는데, 이는 모두 소일거리로 놀이이다. 다만 혹 즐기다가 뜻을 상실하는 자도 있으며 혹은 도박으로 재산을 날리는 자도 있으니, 잡기는 이로움은 없고 손해만 있다 하겠다.
○ 중종 때 사문(斯文) 박상(朴祥)의 호는 눌재(訥齋)로 벼슬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 《눌재집(訥齋集)》이 있어 세상에 유포되다가 난리 후에 문집은 없어지고 그 나머지만 있다. 충주 목사(忠州牧使)로 있을 때 율시(律詩) 3수를 지었는데, 많은 사람이 전송(傳誦)하므로 지금 기록하여 없어지지 않도록 한다. 탄금대(彈琴臺)에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지난 일은 아득해서 찾을 수 없는데 / 往事悠悠不可探
탄금대 물은 쪽빛처럼 푸르네 / 彈琴臺下水如藍
문장가 강수는 무덤마저 없고 / 文章康首無遺墓
명필 김생
은 쓰러진 암자만 있구나 / 翰墨金生有廢庵
해 떨어진 강 위에 배는 쌍쌍이 있고 / 落日上江船兩兩
바람 비껴 서리는 물가에 해오라기는 세 마리씩 있네 / 斜風盤渚鷺三三
가아야, 뱃노래 부르지 말라 / 淘辭莫遣歌兒唱
듣는 나 부끄럽기만 하다 / 大守聞來面發慙
하였고, 다음은 시냇가에서 읊은 시로,
남여(의자처럼 걸터앉아서 타는 가마)로 성밖 성긴 솔밭을 지나노라니 / 藍輿出郭度踈松
3월 풍광이 눈에 가득 무르녹네 / 三月風光滿眼濃
산새는 봄 좋다 지저귀고 / 山鳥好春如說話
들꽃은 아름답게 맞아 주네 / 野花嬌笑似迎逢
시냇가에서 술 마시는 서너 사람 / 臨溪酌酒人三四
꿩 잡고 생선 지지니 맛이 더욱 좋네 / 煮雉烹鮮味再重
21년을 지방에만 있어 / 二十一年長在外
서울 바라고 고봉에 오른들 무엇하리 / 望京安得上高峯
하였다. 다음은 동년승(同年僧) 벽사(甓寺) 주지에게 보내는 시로,
남도에서 과거보던 병진년 / 采蓮南省丙辰年
대사도 그때 대선에 발탁되었지 / 師亦同時擢大禪
유교 불교가 다른 세계라 말하지 마오 / 儒釋莫言殊世界
과거 시험은 다행히 같이 보았네 / 科名曾幸共因緣
신륵사 강 위의 달빛 찾지 못하고 / 未尋神勒江心月
중원(충주군)의 창고 속 돈이나 먹고 지내네 / 謾食中原庫裏錢
멀리 상상하노라니 상방(절집)의 세상일 고요한데 / 遙想上房塵事靜
종일 향불 피우며 부처에게 예배하리 / 炷香終日禮金仙
하였다.
○ 나의 소년 시대에는 선비가 고시(古詩)를 학습하는 데는 모두 한퇴지(韓退之 한유)와 소동파(蘇東坡)의 시를 읽었으니, 이는 예부터 내려온 일이다. 근년에는 선비들이 한퇴지와 소동파의 시는 비근(卑近)하다 하여 읽지 않고 이태백(李太白)과 두자미(杜子美 두보)의 시를 취하여 읽는데, 모르겠지만 이태백과 두자미의 시를 용이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 시를 배우는 것만이 아니라 모든 풍습이 옛것을 싫어하고 새것을 좋아하고, 명예를 쫓고 내실을 업신여기지 않음이 없으니, 인심이 일정하지 않음이 진실로 우스운 일이다.
○ 문사 차천로(車天輅)는 문장에 능하여 세상에 이름이 났는데, 가장 잘하는 것은 시와 4ㆍ6변려체(四六騈儷體)이다. 임진년 여름에 왜구가 서울을 함락하자, 성상이 서쪽 의주(義州)로 가서 머무르며 중국에 구원을 청하니, 황제(皇帝 명의 신종)가 시랑(侍郞) 송응창(宋應昌)과 도독 이여송(李如松)을 보내어 토벌하게 하였다. 계사년 봄에 도독 이여송이 왜구를 평양(平壤)에서 대파하니, 그해 여름에 왜구가 동래(東萊)와 부산(釜山) 등지로 물러갔다. 가을에 도독 이여송이 중국으로 돌아가느라 작별에 임하여 이별시를 여러 문사에게 구하니, 차천로는 시와 7언 율시 1백 수(首)와 7언 배율시(七言排律詩) 1백 운(韻)을 지어 주었다. 율시는 상하평성(上下平聲)으로 각각의 운자를 붙여서 2일 만에 지었고, 배율시는 양(陽) 자 운을 붙여서 반나절 만에 지었는데, 그 시가 풍부하고 민첩(敏捷)하여 당대에 짝이 없었으니, 진실로 천재로다. 그 시가 마침내 세상에 널리 퍼졌다.
○ 만리현(萬里峴) 아래에 있는 향로회(鄕老會)에서는 여름에는 점심을 마련하고 겨울에는 만두를 장만하는데, 술은 약간 내놓는다. 임진년 여름에 난리를 만나 흩어졌다가 갑오년 겨울에 서울에 돌아와 모이니, 생존자는 다만 송서교(宋西郊 송찬)ㆍ안죽계(安竹溪 안한)ㆍ나ㆍ심청천(沈聽天 심수경) 3명뿐이었다. 3명도 모두 난리로 집이 없어져서 성중(城中)에서 협방(夾房)살이를 하므로 서로 찾는 일이 매우 드물었다. 을미년 가을 9월에 서교가 말하기를, “옛날 계(契)에서 아직 3명이 살아 있으니, 돌아가며 계모임을 하자.”고 하여 내가 먼저 만두와 술을 차렸는데, 옛날에 비해서 더욱 간소하였다. 자리에서 내가 시를 읊기를,
두 해나 큰 난리를 겪고도 / 二年經大亂
세 늙은이 여생 보전하였네 / 三老保餘生
옛 모임을 여전히 계속하여 / 舊會猶堪續
새 술이나 꼭 마셔보세 / 新醅正可傾
서로 수염과 귀밑털이 흰 것을 바라보며 / 相看鬚䰅白
똑같이 웃으며 담소가 맑네 / 共作笑談淸
계모임에 몇 사람인지 알겠어 / 托契知多少
우리가 가장 정이 두텁구나 / 吾儕最有情
하니, 서교가 화답하기를,
부슬부슬 내리던 비 그쳤으니 / 濛濛昏雨歇
어서 앉아 지난 일이나 이야기하세 / 促席話平生
청안으로 문장을 의논하고 / 靑眼論文對
단심은 마시기에 기울어지네 / 丹心挾酒傾
가는 기러기 짝 부르느라 급하고 / 征鴻呼侶急
찬 국화 맑은 향기 보내 주네 / 寒菊送香淸
취해서 지는 해 보자스랴 / 倚醉看斜日
뉘라서 오래 있는 정 알까 / 誰知坐久情
하였고, 죽계가 화답하기를,
다시 옛 계를 계속하니 / 重修舊契客
경오ㆍ계유ㆍ병자생이네 / 庚癸丙年生
선과는 금쟁반에 올리고 / 仙果金盤薦
향기로운 술은 잔 가득 기울이네 / 香醅盡盞傾
흰 머리는 상산사호처럼 늙고 / 白頭商嶺老
높은 흥은 죽림처럼 맑네 / 高興竹林淸
백 세를 살아도 날이 많지 않으니 / 百歲無多日
모름지기 이 정을 다하리 / 終須盡此情
하였다. 이때 서교는 86세이고, 죽계는 83세이며, 나는 80살이었다.
○ 계묘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동기생끼리 매월 돌아가며 방회(榜會)를 열었는데, 임진년 여름에 난리를 만나 분산되었다. 갑오년 봄에 서울에 돌아오니, 생존자는 다만 나와 정쌍곡(鄭雙谷 정척), 그리고 장송령(張松嶺 장사중) 3명뿐이었다. 을미년 가을 9월에 내가 말하기를, “3명이라도 방회를 하는 것이 좋다.” 하고, 내가 먼저 모임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내가 읊기를,
2백 명이나 되던 동년방이 / 二百同年榜
생존한 자 세 사람뿐이네 / 生存只箇三
쓸쓸하기 이렇게 심하나 / 凋零雖太甚
회라도 하면서 견디어 보세 / 會集亦猶堪
죽어 가약을 배반한단 말인가 / 抵死拚佳約
우리끼리 미담이나 하고 지내 보세 / 從人作美談
때는 좋은 가을이라 / 正逢秋色好
창 밖에 종남산을 바라나 보세 / 窓外望終南
하니, 쌍곡이 화답하기를,
때는 9월 / 令節月當九
늙은이 셋이 마주 앉았네 / 衰翁坐對三
새 기쁨은 정이 가시지 않고 / 新歡情不盡
옛 정의는 생각할수록 어찌 견디겠는가 / 舊義思何堪
회포는 시나 술로 의탁하고 / 懷抱憑詩酒
세월은 미담이나 하며 지내세 / 光陰付笑談
배회하며 차마 못 가겠소 / 徘徊不忍去
작별하면 동남으로 떨어지리 / 一散隔東南
하고, 송령이 화답하기를,
아름다운 때 단란히 모여 / 佳節團樂會
친한 벗 셋이 앉았네 / 親朋鼎坐三
가을이라 나는 회포 어이하며 / 送秋懷作惡
늙은이 병들어 견디기 어렵네 / 垂老病難堪
흥이 나면 시 짓고 술 마시며 / 寓興詩兼酒
만나면 웃고 이야기하네 / 逢場笑且談
석양이 되어 돌아가는 길에는 / 夕陽歸去路
단풍이 남산에 가득하네 / 楓葉滿山南
하였다. 이때 나는 80살이고, 쌍곡은 79세이며, 송령은 72세였다.
○ 지사(知事) 송찬(宋贊)은 중종 정유년에 생원시에 장원하고 경자년에 급제하였다. 인종과 명종 때 두루 관직을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에까지 올랐으며, 기축년에 80세로 가의대부(嘉義大夫)의 품계에 올랐으며, 을미년 가을에는 특명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진하여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또 조정에서 주찬(酒饌)과 미두(米豆)를 보내니, 이는 사조(四朝 중종ㆍ인종ㆍ명종ㆍ선조)에 걸쳐 벼슬한 노인에 대해 우대하는 예절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조야에서 모두 감탄하였고, 송찬은 성상께 글을 올려 사례하였다. 이때 송찬의 나이 86세였으나 정력이 정정하니, 사람들이 지상의 신선이라고 하였다. 내가 시로써 하례하기를,
80세에 품계를 더함은 국전에 있으나 / 八十加階國典存
지난 해 녹봉을 더해 준 것은 특별한 은혜로세 / 頃年增秩亦殊恩
하루 아침 신명을 받으니 / 一朝又是紆新命
세상에서는 드문 영광이라고들 하는구나 / 稀世榮光萬口喧
주찬을 하사하고 미두까지 겸했으니 / 酒饌頒來兼米豆
조정에서 노인 우대하는 은택이 흡족하다 / 朝家優老澤初霑
90세 노인에게도 마땅히 그러할 일 / 九旬耆舊宜如許
한가할 때 은혜를 입었다고 혐의 마소 / 閑周蒙恩且莫嫌
하였다. 은명(恩命)이 내린 후에 공이 말하기를, “늙은이가 은혜를 입은 것이 온당치 못하다.” 하였으므로 ‘한가할 때 은혜를 입었다고 혐의 마소.’한 것이다.
○ 기해년 봄에 공(公)의 연세 90세여서 조정에서는 숭정대부(崇政大夫 종1품)에 가자하도록 명하였다. 내가 하례하는 시를 보내기를,
향년 90은 세상에서 어려운 일이라 / 享年九十世應難
숭정대부에 오르는 것 사리상 당연하도다 / 仍致崇班理固安
지상 선인이라 하는 말 망령되다 마소 / 稱以地仙非妄語
천하에 구한들 어찌 많이 볼 수 있으리오 / 求之天下豈多看
성조에서 우대하는 은혜 대단히 무겁고 / 聖朝優異恩殊重
노인을 존중하는 예 또한 너그럽네 / 耆席通尊禮亦寬
아, 나 같은 후생도 80이 되었소 / 嗟我後生猶八壽
채찍을 잡고 길이 당신을 음단(吟壇)에서 모시고 싶네 / 執鞭長欲侍吟壇
하였더니, 공(公)이 화답하기를,
붕새가 구만리 장천을 차고 난다는 고담은 알기 어렵고 / 鵬歌高談解道難
나직이 한 가지 사이를 나는 메추라기야 제 분수에 편안하오 / 低飛唯分一枝安
꿈으로 점치던 강태공은 찾을 길 없으리니 / 匪態渭老何緣訪
바다에 뜬 갈매기나 친해본들 무엇하리 / 浮海沙鷗欲押看
까마득히 높은 숭정대부는 나이 덕에 올랐으니 / 縹緲崇班憑齒躐
놀랍고 황공한 내 마음 술로나 진정시키리 / 驚惶卑抱酌醪寬
채찍을 잡다는 말은 도리어 희롱이 되나니 / 執鞭謙語還爲謔
도량이 넓은 정승의 집안에 옥단(玉壇)이나 세우소 / 落落台躔立玉壇
하였다.
○ 상주(尙州)는 본래 문헌(文獻)의 고을로 명사가 많이 나왔다. 나와 같은 해 급제한 판사 서극일(徐克一)이 이 고을에 살았는데, 두 아들 서상남(徐尙男)과 서한남(徐漢男)을 두었다. 기축년에 세상을 떠나니, 두 아들이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여막 곁에는 송정(松亭)이 있고, 한 동자(童子)가 여막에 와서 글을 배우고 있었는데, 동자가 어느 날 밤에 꿈을 꾸니, 송정에 6명이 모여 앉아 동자에게 말하기를, “저기 우두머리에 앉은 이는 상국(相國) 노소재(盧蘇齋 노수신)이고, 다음은 판사 김충(金冲)이고, 다음은 판사 노기(盧祺)이고, 다음은 판사 서극일이고, 다음은 현감 김범(金範)이며, 다음은 진사 김언건(金彦健)이다.” 했다. 그리고 좌중이 그 정자 이름을 관행정(觀行亭)이라 하고, 시(詩) 한 수를 지어 동자로 하여금 여러 번 읽어서 기필코 외우도록 하였다. 깨어서 기억하니, 그 시에,
청산 아래 두어 서까래 여막 효자가 지어 / 靑山山下數椽盧孝子營
효자는 거의 계시듯이 하는 효성을 다하네 / 孝子幾竭如在誠
효자는 풍우도 가리지 않고 날마다 세 번 와서 / 孝子不廢風與雨日三來
울부짖으며 명복을 비네 / 號哭聲中冥夢回
관행정에 여섯 명의 신선이 모였으니 참으로 즐거운 일이고 / 觀行亭中六仙會眞樂事
관행정이란 이름 영원히 전해지리 / 觀行亭名留百수
낙동강 가에 가히 여섯 신선의 사당 지을 만한데 / 洛江江上可以立六仙社
낙동강 맑은 물 만고에 푸르리 / 洛江萬古流不舍
하였는데, 아마 이는 노소재의 솜씨인 듯하다. 일이 매우 기이하여 아직도 세상에 전해진다.
○ 내가 75세에 아들을 낳고 81세에 또 아들을 낳았으니, 모두 비첩의 몸에서 태어났다. 80세에 자식을 낳은 것은 근세에 드문 일로 사람들은 경사라 하나, 나는 재변이라고 여긴다. 장난삼아 두 절구를 지어서 서교(西郊 송찬)와 죽계(竹溪 한안) 두 늙은 친구에게 보냈더니, 두 노인이 모두 화답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세상에 전파되었으니, 더욱 우습다. 나의 시에,
75세 생남도 세상에 드문 일인데 / 七五生男世古稀
어이하여 80에 또 생남했나 / 如何八十又生兒
알겠구나. 조물주가 참으로 하는 일이 많아 / 從知造物眞多事
이 늙은이를 후대하여 하는 대로 내버려 둔 것을 / 饒此衰翁任所爲
80 생남은 재앙인가 두려우니 / 八十生兒恐是災
축하는 당치 않소 웃기나 하소 / 不堪爲賀只堪咍
괴이한 일이라고 다투어 말하게나 / 從敎怪事人爭說
어쩌리 세상 풍정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을 / 其奈風情尙未灰
하였다.
○ 가정(嘉靖 중국 명 나라 세종의 연호) 경자년 겨울에 내가 장원(長源) 윤결(尹潔) 군과 태휘(太輝) 허엽(許曄) 군과 더불어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였는데, 하룻밤에는 태휘가 나와 장원에게 시 한 구씩 지어 시편을 만들자고 권하기에 드디어 7언 근체시(近體詩) 한 수씩을 매일 밤 짓다가, 17일째 되던 밤에 그쳤다. 시편마다 등(燈) 자와 월(月) 자를 써서 시축(詩軸)을 만들고 그 이름을 《등월록(燈月錄)》이라고 하였다. 내가 시편 끝에, “시 짓기를 밤마다 한 편씩 하여 17일째 밤에 그치니, 시 또한 17수이다. 그 말은 등불과 달빛이 서로 비춰 준다는 것이고, 그 뜻은 우리 마음을 서로 환히 알아 준다는 것이다. 부생(浮生)의 모이고 흩어짐이 덧없으므로, 훗날의 면목(面目)을 이 시편에 의탁하여 찾을까 하노라.” 하였다. 태위의 시에,
중흥사에서 17일 밤 읊은 새로운 시는 / 重興十七首新詩
늙어서 보면 기쁨을 가히 알리라 / 老眼看來喜可知
천석은 재사의 시에 흥청거리고 / 泉石始經才子弄
산림은 응당 보물인 양 갈무리됐네 / 山林應盡寶藏奇
등잔불에 책을 읽으니 빛이 찬란하고 / 玉虫逐卷光猶爛
달은 중천에 떠 그림자 옮기지 않네 / 圓桂當中影不移
훗날 난정에서 절창을 읊을 적에 / 他日蘭亭堪絶唱
내 몸 병들어도 따르고 싶구나 / 吾人雖病欲相隨
하였다. 장원과 태휘는 모두 정축생인데, 장원은 정유년에 태휘는 경자년에 각각 진사(進士)가 되었으며, 나는 병자생으로 진사가 되지 못하였다. 그 후 장원은 계묘년에 급제하고, 나와 태휘는 병오년에 급제하였다. 정미년 봄에 나와 장원이 정언(正言)이 되었는데, 한담하던 중에 우연히 중흥사에서 시를 짓던 일을 이야기하다가, 장원이 말하기를, “그때 시 초고(草藁)가 송둔암(宋鈍庵 송인) 공에게 있다 하니, 가져다 볼까.” 하기에, 드디어 가져다 보고 태휘의 시운(詩韻)에 따라서 각기 한 편씩 지었다. 장원이 소서(小序)를 짓기를, “경자년 겨울에 내가 심희안(沈希安 심수경의 자)과 삼각산 중흥사에 기숙하며 공부하던 여가에 등불을 피우고 이야기하다 연구(聯句)를 짓기 시작하여 17일째 밤에 그쳤다. 그런데 그때는 별로 마음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산만하여 다시 기억하지 못하였다. 내가 계묘년에 급제하고 희안은 병오년에 장원으로 뽑혀 금년 봄에 함께 사간원(司諫院)에 들어와서 바야흐로 그 동안의 헤어지고 만남을 이야기하던 중에 우연히 송둔암 공이 중흥사에서 쓴 시고(詩稿)를 얻어 책상 위에 놓아 두고 때때로 펴 본다는 말을 듣고 크게 놀랍게 여겨 드디어 편지를 보내 구해 오니, 희안이 쓴 초고인데, 희안의 시는 그때 이미 원숙(圓熟)하고 나는 아직도 생삽(生澁)하였다. 손을 꼽아 헤아려보니 이미 8년이 지난지라, 서로 더불어 감탄하면서 태휘의 시운을 따라서 각기 장률(長律)을 짓고, 장차 화시(和詩)를 평상시에 왕래하는 이들에게 구하여 한가할 때 일개 해이(解頤 옛일을 회상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빙그레 웃는 것을 말함)로 삼으려고 한다. 돌아보건대, 구본(舊本)은 더럽고 헐어서 책을 펴보기 어렵기로 이제 다시 고쳐 쓴다.” 하였다. 장원이 또 시를 읊기를,
산당에서 등잔불을 돋우며 밤새워 시를 읊었지 / 山堂挑燈夜覔詩
그때는 알아줄 사람 있으리라 생각이나 했으랴 / 當時不料有人知
이런 시편 완상한 저이들 참 일도 많아라 / 被他傳玩眞多事
이제 와서 다시 보니 또한 기특한 노릇이로세 / 到此重看亦一奇
진리를 찾던 것은 모두 젊어서의 일인데 / 搜討共憑筋力壯
이별마저 잦다보니 세월도 흘렀네 / 別離頻見歲星移
직책이 보곤(임금에게 간하는 직책)에 있건만 적은 보답도 없으면서 / 職居補袞虛微報
공연히 마음껏 술도 못마셔 보네 / 空負奚童荷鍤隨
하였고, 나는,
산중에서 우연히 지은 연구의 시편 / 山中聯句偶成詩
남들에게 전해질 줄 처음에야 알았으랴 / 却被人傳未始知
부끄럽소. 나의 공부는 지금도 거친데 / 愧我工夫今鹵莽
당신들의 격률은 더욱 청기로운 것이 / 多君格律轉淸奇
반생 동안 골몰하여 임천을 멀리하니 / 半生汨沒林泉遠
지난 자취 까마득히 세월만 지났네 / 陳迹蒼茫歲月移
이합은 사단이 많으니 운수라고나 할까 / 離合多端還有數
미원(사간원)에서 다시 어울리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 薇垣何幸更追隨
하였고, 둔암 여성위(礪城尉) 송인(宋寅)인데, 공신으로 정2품 봉군(封君)을 이어받았다. 의 시에는,
두 사람은 모두 당세에 시로 이름이 났네 / 兩君當世共鳴詩
붓을 들면 사람이 놀라는 것 자신들은 모르리라 / 下筆驚人不自知
고사에서 함께 지내며 흥취가 넘쳤던 시를 / 古寺同栖饒興趣
새로 번갈아가며 읊으면서 웅장함을 겨루네 / 新聯迭唱鬪雄奇
듣자니, 오랫동안 명예 중함을 사모하여 / 傳聞久仰聲名重
시를 읊으면 해 지는 줄도 몰랐다네 / 唫玩都忘晷景移
아, 나의 불구는 그대로 절름발이가 되었지만 / 嗟我畸孤仍蹙鈍
시단에서 받아준다면 채찍 잡고 따라가겠소 / 肯容壇壘執鞭隨
하였다. 또 임당(林塘) 홍문관 교리 정유길로, 벼슬은 좌의정에 이르렀고 대제학을 지냈다. 의 시에,
미원에 별이 뜰 때 시를 지으란 명령 받아 / 星動薇垣荷索詩
맑은 시편이 노부까지 알 것을 허락한다 / 淸篇仍許老夫知
삼봉(삼각산)의 푸른 빛이 창앞에서 보이는데 / 三峯蒼翠當窓見
두 사람의 문장은 특히 기이하네 / 二子文章特地奇
고고한 모습은 남곽의 은사를 닮아가지만 / 枯槁漸成南郭隱
북산으로 못 돌아간 지 오래로구나 / 勒回長被北山移
내년 봄 배꽃이 떨어질 녘에 찾아가 / 明春好趁梨花落
물가에 산책하노라면 한 중이 따를 걸세 / 散策溪頭一衲隨
하였다. 정미년 겨울에 바야흐로 이것을 빙자하여 동료들에게 많은 화답의 시를 구하였는데, 무신년 가을에 장원(長源)이 피화(被禍) 윤장원이 친우와 시사(時事)를 의논하였는데, 진복창(陳復昌)이 듣고 그 친우를 협박하여 주달하게 하였으므로 고문을 당하여 죽었다. 하니, 다시 화답의 시를 구하지 못하고 책상자에 간직하였다가, 을해년 가을에 우연히 그 상자를 열어 보니, 나도 모르게 슬픔이 일어 책 끝에 시를 썼으니,
등월의 남은 빛이 아직도 이 시에 남아 있는데 / 燈月餘輝尙在詩
그때 심사를 뉘라서 알아 줄까 / 當年肝肺有誰知
되려 늙은 나만 오래 삶이 부끄럽기만 하네 / 却慙老物生偏久
한스럽다, 그대 큰 재주로 운수 홀로 기구한 것을 어찌하리 / 堪恨高才數獨奇
세정은 많이 변하는 것을 / 無耐世情多變幻
예로부터 인사는 그저 무상하구나 / 自來人事喜遷移
차마 손수 쓴 것 보다가 책상에 간직해둠은 / 忍看手藁留巾笥
저승에서 만날 때 혹시라도 가져갈까 해서라네 / 泉下他時儻可隨
하였다. 10여 년 후에 아계(鵝溪) 영의정 이산해(李山海)로, 문형(文衡)을 주관하였다. 가 시축을 빌어보더니, 시를 짓기를,
부질없는 세상에 공연히 두어 수 시를 전하니 / 浮世空傳數首詩
담백한 마음을 아이들이 어찌 알리오 / 沖襟寧許小兒知
두 분의 재주 원래 대적할 이 없고 / 二公才調元無敵
대가들이 포장(화답의 시로 큰 시첩을 만듬)을 하였으니 또 하나의 기사로세 / 諸老鋪張又一奇
달 지자 새벽종 울리니 읊으며 옛일이나 기억하세 / 殘月曙鍾吟裏憶
저문 산은 공연히 푸르렀다가 아름답게 쇠잔하네 / 晩山空翠卷中移
평생에 장원님을 애석히 여겼는데 / 平生每惜長源丈
젊어서 이름 높더니 화 또한 따라들었네 / 妙歲名高禍亦隨
하였다. 이 시축을 임진난에 잃었으니, 아, 가히 한탄할 일이다.
○ 성균관(成均館)에서 춘추로 행하는 석전제(釋奠祭)가 끝나면 문무 대소관(文武大小官)이 모여 음복례(飮福禮)를 행하는데, 그 예가 매우 성대하였다. 1품부터 당상(堂上) 3품까지는 명륜당상(明倫堂上)의 교의(交倚)에 앉고, 당하(堂下) 3품부터 9품까지는 계단 위에 마련한 긴 의자에 앉아있다가, 조촐하게 차린 상 앞에 서서 차례로 엎드렸다가 일어나 음복하였다. 음복이 끝나면 상과 교의 그리고 긴 의자를 철거하고, 제자리로 가서 평좌(平座)하면 각기 큰 상을 드리는데, 주찬(酒饌)이 매우 풍성하였다. 이는 모두 성균관에서 마련하는 것으로, 당상관ㆍ당하관 할 것 없이 서로 주거니받거니하였다. 또 술을 잘 마시는 자에게는 따로 큰 잔을 주어 아주 취한 뒤에야 파하였다. 춘추로 행하는 독제(纛祭)를 지낸 뒤에도 음복의 예를 훈련원(訓鍊院)에서 행하는데, 석전제와 마찬가지이다. 병조(兵曹)에서 보병에게 군포(軍布)를 주면 본원(本院 훈련원)에서 마련하는 것이다. 관례에 따라 관악(官樂)과 영기(伶妓)를 주어 가무(歌舞)를 성대히 베풀어서 환락이 극도에 달한 뒤에야 파하였다. 또 춘추로 행하는 무예도시(武藝都試)를 여는데, 종장(終場)하는 날에는 정부 6조의 당상관 전원과 도총부(都摠府)와 훈련원에서는 각기 당상관 한 사람씩이 참석하였다. 관례에 따라 조정에서는 주악(酒樂)을 내리고, 각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모든 기구를 공급하게 하여 또한 환락이 극도에 달한 뒤에야 파하였다. 이것들은 모두 조정의 성대한 일이었는데, 임진난 후 음복 등의 행사가 모두 행해지지 않으니, 크게 탄식할 일이다.
○ 국가의 과거법전(科擧法典) 안에는 다만 식년시(式年試)만 있고, 별시(別試)는 근대에 나온 것으로, 시험 내용을 보면 사서(四書 대학ㆍ중용ㆍ논어ㆍ맹자)와 삼경(三經 시경ㆍ서경ㆍ주역) 중에서 제비를 뽑아 강하거나 전혀 강하지 않기도 하니, 이를테면 알성정시(謁聖庭試)를 보는 사람은 더욱 등한시했다. 유생(儒生)들이 강서(講書)를 힘쓰지 않음은 실로 별시(別試)가 자주 있기 때문이다. 임진난 후에는 식년시는 치르지 않고 별시만 더욱 잦았으므로, 경서(經書)를 강하는 것이 전폐되어 과거의 모양새를 이루지 못하니, 가히 탄식할 일이다.
○ 문과 식년 초시(文科式年初試)는 생원(生員)과 진사(進士)가 성균관에서 생활한 지 3백 일이 넘는 자를 50명 뽑으니, 이는 생원과 진사가 성균관에서 지내도록 권유하는 것이다. 양현고(養賢庫)를 성균관 옆에 설치하고 따로 미두(米豆)를 저장하여 매일 2백 명 분의 식량을 공급하였다. 그러나 생원과 진사들은 성균관에 있기를 좋아하지 않으므로, 또 원점 부시법(圓點赴試法 지낸 일수에 따라 시험에 응시하게 하는 법)을 세워 성균관에서 있은 지 3백 일이 넘는 자는 관시(館試 성균관에서 행하는 시험)에 응시하게 하고, 1백 50일이 되는 자는 한성시(漢城試 서울에서 행하는 시험)나 향시(鄕試 지방에서 실시하는 시험)에 응시하게 하니, 생원ㆍ진사를 배양하고 권면하는 뜻이 지극하였다. 그러나 이른바 성균관에서 지낸다는 것은 주야로 있으면서 공자(孔子)를 모시고 독서를 부지런히 하는 것이 원칙인데, 지금 성균관에서 지내는 것은 유명무실하고, 다만 과거에만 응시하기 위해서이니, 어찌 한심하지 않으리오. 조석으로 식당에 가서 식사가 끝나면 책에 서명하고 그 서명한 것을 계산해서 장부에 올리는 것을 원점(圓點)이라 한다. 어떤 사람은 하루도 성균관에서 기숙하지 않고, 자기 집에서 조석으로 와서 식사만 하고 책에 서명한 후 곧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이런 식으로 3백 일을 채우니, 이것을 성균관에서 지냈다고 하겠는가. 임진난 후에는 식년시도 거행하지 않고 원점마저 폐지되었으니, 더욱 개탄할 일이다.
○ 세상에서 유학(幼學)으로 문과 급제한 이를 비렴(飛簾)이라 하는데, 그 뜻은 자세하지 않다. 혹자는 말하기를 ‘생원이나 진사를 거치지 않고 급제한 이를 세상에서 희귀(希貴)하게 여겨서 급제자를 발표한 뒤 유가(遊街)할 때 사람들이 발을 걷고 구경하기 때문이다.’고 한다. 을미년 겨울에 실시한 별시에서 나의 친척 조카 성이민(成以敏)이 유학으로 장원 급제하였다. 일찍이 동지중추부사 이충원(李忠元)도 또한 유학으로 장원 급제하였으므로, 성이민이 시관(試官)을 위하여 잔치를 베푼 날에 동지(同知 이충원)도 청하여 참석하였다. 나는 병으로 참석하지 못하고 이동지에게 1절의 시를 지어 보내기를,
장원 급제하기 세상에 드문 일로 / 居魁及第世稀看
유학이 장원하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로세 / 幼學居魁是更難
듣자니 동지가 축하하는 자리에 갔다 하니 / 聞道同知臨慶席
문생과 좌주가 부디 즐겁게 지내소 / 門生座主幸同歡
하였다. 이 동지가 시에 차운하여 보내기를,
큰 거리 많은 집들이 발을 걷고 보면서 / 九街千戶擧簾看
모두들 문과에 장원되기 어렵다 하네 / 共道文科第一難
늙은 정승님 옛일 회상하며 / 黃髮相公懷舊事
좋은 시 읊으니 기쁨 넘치겠소이다 / 爲吟佳句侈玆歡
하였다. 나도 일찍이 장원 급제하였기로, 이동지의 시에 ‘옛일을 회상한다.’고 한 것이다. 또 내가 시를 보내기를,
은문(문생이 시험관을 부를 때)을 잔치에 초대하니 세상이 부러워하고 / 恩門邀宴世多看
의발을 서로 전하니 더욱 어려움을 깨닫겠네 / 衣鉢相傳更覺難
다만 당신이 말석이라도 참석 못해 한스럽소 / 却恨衰翁孤席末
좋은 용두회(장원)가 기쁨을 얻지 못하므로 / 龍頭佳會未成歡
하였다.
○ 조정에서 사명(使命)을 받아 지방에 나가면 각 고을에서는 기생을 천침(薦枕 침실을 같이하도록 천거하는 것)하는 예(例)가 있다. 감사(監司)는 풍헌관(風憲官)이라, 비록 본읍에서 천침하더라도 데리고 가지 못하는 것이 역시 예로부터 있는 전례였다. 진천(晉川) 강혼(姜渾)이 영남 지방의 관찰사로 있을 때 성주(星州)의 은대선(銀臺仙)이라는 기생에게 정을 쏟더니, 하루는 성주에서 떠나 열읍(列邑)을 순행할 때 점심 때가 되어 부상역(扶桑驛)에서 쉬게 되었는데, 부상역은 성주에서 가는 곳까지의 절반 길이나, 기생 또한 따라와서 저물어도 차마 서로 작별하지 못하여 부상역에서 묵게 되었다. 이튿날 아침에 시를 써서 기생에게 주었으니,
부상역 여관에서 한바탕 기쁘게 보내려니 / 扶桑館裏一場歡
나그네 이불도 없고 촛불은 재만 남았네 / 宿客無衾燭燼殘
열두 무산 새벽 꿈에 어른거려 / 十二巫山迷曉夢
여관의 봄밤이 찬 줄도 몰랐노라 / 驛樓春夜不知寒
하였다. 이는 침구를 이미 개령(開寧 지금 김천의 면(面))에 보내어 미처 가져오지 못하였기로 이불이 없이 잔 것이다. 또 어떤 감사가 있었는데, 기생과 상방(上房)에서 자고 새벽이 되어 변소 간 틈에 따르던 사람이 와서 밀고(密告)하기를, “공이 나간 후에 연소자(年少者)가 갑자기 방으로 들어가 기생을 범하고 나갔으니, 참 해괴한 일입니다.” 하니, 감사가 웃으며 말하기를, “너는 다시는 말하지 말라. 그 자의 아내를 내가 빌려 간통한 것이니, 본남편의 그러한 일이 무엇이 괴이할까 보냐.” 하였다. 진천 강혼의 법을 준수함과 감사의 넓은 도량은 가히 어려운 일이다.
○ 가정(嘉靖) 신해년 가을 내가 이부랑(吏部郞)으로서 관서(關西) 지방에 사명(使命)을 띠고 갔을 때에 기성(箕城 평양)의 기생 동정춘(洞庭春)과 정을 나누었다가 조정에 돌아왔는데, 그 후 동정춘이 편지를 보내기를, “님을 사모하나 보지 못하니, 생이별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겠소. 차라리 죽어서 함께 묻히기라도 바라니, 멀지 않아 선연동(嬋娟洞)으로 가겠나이다.” 하였다. 선연동은 기성 칠성문(七星門) 밖에 있는 곳으로, 평양 기생이 죽으면 모두 여기에 장사지낸다. 내가 장난삼아 한 구를 지어 보냈으니,
종이 가득 쓴 글 모두 맹세한 말 / 滿紙縱橫摠誓言
나도 훗날 저승에서 만나기로 기약하네 / 自期他日共泉原
장부도 한번 죽음을 명하기 어려우니 / 丈夫一死終難免
마땅히 선연동 속의 혼이 되어 보리 / 當作嬋娟洞裏魂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동정춘이 병으로 죽었는지라, 내가 장난삼아 다시 율시 한 수를 짓기를,
생이별에 길이 슬픔에 젖었으니 / 生別長含惻惻情
어찌 사별까지 생각했으리. 문득 목이 맺히네 / 那知死別忽呑聲
부음을 듣자마자 간장이 찢어지는 듯하여 / 乍聞凶訃腸如裂
가만히 목소리와 용모 생각하니 눈물이 흐르네 / 細憶音容淚自傾
편지 몇 번이고 패수에서 왔건마는 / 書札幾曾來浿水
꿈에도 기성에는 가지 못했네 / 夢魂無復到箕城
선연동에 묻힌다는 장난말이 예언이 되었으니 / 嬋娟戱語還成讖
저승에서 같이 지내자는 맹세 저버려 부끄럽소 / 愧我泉原負舊盟
하였더니, 벗들이 보고서 웃었다. 기미년 봄에 내가 호서(湖西) 지방 관찰사로 있을 때 참판 권응창(權應昌) 공이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있어서 그의 서제(庶弟) 송계(松溪) 권응인(權應仁)이 따라가 있었다. 내가 홍주에 가던 날 송계가 고을 사람에게 가르치던 가요율시(歌謠律詩) 두 수를 주었는데, 그 끝구에,
인생은 뜻대로 남북이 없는 것이니 / 人生適意無南北
선연동의 혼만 되려 하지 마소 / 莫作嬋娟洞裏魂
하였는데, 간절하고도 온당하여 의미가 있었으니, 그때 내가 홍주 기생 옥루선(玉樓仙)을 사랑하였으므로 송계의 시는 징험이 된다. 홍주를 순행할 때 옥루선에게 율시 한 수를 주었는데,
동풍 향해 앉았어도 남몰래 마음 쓰라려 / 坐向東風暗斷魂
창 앞에서 우는 새소리마저 차마 듣지 못하겠네 / 窓前啼鳥不堪聞
이별은 많고 만나기는 드물고 봄은 어느새 저물어 가는데 / 離多會少春將晩
길 멀어 편지마저 드문 채 날도 저물려 하네 / 路遠書稀日欲曛
못 믿겠네. 오작교에 까막까치 있단 말 / 未信星橋曾有鵲
무산에 구름마저 없다스랴 / 却疑巫峽更無雲
이 마음 표현하자니 도리어 슬퍼서 / 此情欲寫還怊恨
공연히 금로에 저녁 향불만 피우노라 / 空對金爐換夕薰
하였다. 이어 다른 이로부터 많은 시를 받아 시축(詩軸)을 이루었다. 만력(萬曆) 계사년 봄에 공사로 말미암아 홍주에 가서 옥루선(玉樓仙)이 살아있는지 물으니, 시골 마을에 살아있으며 시축도 간직하고 있다 하기에 가져다 보니, 수적(手跡)이 완연한지라, 약간의 발문(跋文 책 끝에 그 책의 내용과 관계 사항을 쓴 것)을 써서 돌려 주었다. 손꼽아 헤아려보니 기미년부터 금년 계사년까지는 35년이며, 나의 나이는 78살인데, 다시 옛날에 왔던 지방을 오게 되었으니, 가히 다행이라 하겠다.
○ 가정 경신년 겨울에 호남 지방 감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신유년 봄에 병으로 전주에 머물며 조리하던 중에 기생 금개(今介)와 함께 산 지 한 달 남짓 되었다. 금개의 나이 겨우 20살인데, 성질이 약삭빠르고 영리하였다. 전주에서 돌아올 때 정오가 되어 우정(郵亭)에서 쉬고 있는데, 기생 또한 따라와 송별하기에 내가 시를 지어 주기를,
봄 내내 병중에서 보내다가 / 一春都向病中過
이별하기 어려운 것 넌들 어찌 하리 / 難思無端奈爾何
침상에서 몇 번이나 눈썹을 찡그렸고 / 枕上幾回眉蹙黛
술자리에서는 그저 애교의 눈웃음이었네 / 酒邊空復眼橫波
객사에 늘어진 버들 애타게 보며 / 愁看客舍千絲柳
참고 양관의 한 곡조 들어 주소 / 忍聽陽關一曲歌
문밖에 해가 져도 떠나지 못하겠으니 / 門外日斜猶未發
좌중에 누가 고민이 많음을 알아주랴 / 座間誰是暗然多
하였다. 그 후 20여 년이 지나서 내가 첩(妾)을 잃었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전주 기생 금개가 일찍이 사람을 따라 상경했다가 그 사람이 죽어 과부로 지내는데, 마침 공의 첩을 잃었다는 말을 듣고 옛정을 사귀고자 한다.” 하기에, 내가 허락하고자 하였으나 마침 사고가 있어서 이루지 못하였으니, 헤어졌다가 다시 합치는 것도 운수가 있는가 보다.
○ 가정 경술년 봄에 어떤 사건으로 벼슬을 잃고 백부의 임소(任所)인 대구(大邱)로 갔다가, 이어 성주(星州) 가야산(伽倻山)에 놀러가니, 성주 목사 조희(曹禧) 공은 나의 친척되시는 어른인지라, 수일을 머물게 하고 어린 기생으로 하여금 따라다니도록 하였다. 기생의 나이는 겨우 16살이었다. 대구로 돌아가게 되자 목사 조희가 그를 따라보내서 몇 개월이나 같이 지냈는데, 장난으로 절구를 지어 주기를,
어여뿐 기생들 중에서도 제일로 아리따운 그대 / 綽約梨園第一容
나그네로 오늘 우연히 만났네 / 客中今日偶相逢
다른 이의 금석 같은 굳은 맹세 믿지 말고 / 靡他信誓堅金石
천 마디 만 마디 말하건대, 부디 따라가지 말게 / 萬語千言愼莫從
하였다. 다른 이의 시도 많이 받았다. 동료들 중에 사명을 받고 남쪽으로 내려간 이들이 이것을 보고 많이 화답하였다. 계해년 봄에 내가 본도(경기도) 감사로 있으면서 성주에 가서 기생의 안부를 물으니, 그는 경적(京籍)에 뽑혀 갔다고 하였다. 내가 갈리어 돌아오니, 그 기생은 또 고향으로 돌아갔다 한다. 기러기와 제비처럼 가는 길이 어긋나니, 가히 한탄할 뿐이다. 얼마 후에 그 기생이 병으로 죽으니, 권송계(權松溪)는 성주 사람이라, 그 부음(訃音)을 전하고 시로써 조상하거늘, 내가 그 시에 차운하기를,
늙어서 낙신부를 지을 마음 없으니 / 老去無心賦洛神
물결 위에 걷는 버선 먼지 나는 것 못 보노라
/ 凌波不見襪生塵
아직도 처음 만나던 모습만 생각나는데 / 當年謾憶初呈態
오늘 죽었다는 소식 듣고 놀랐네 / 此日驚聞忽化身
운우지락 있던 그때 꿈 희미하니 / 暮雨朝雲迷舊夢
춤추고 노래하던 옷과 부채 누구에게 전했을꼬 / 舞衫歌扇付何人
성주는 이로부터 화려한 맛 감해져서 / 星山自此繁華減
적막한 임풍루(성산에 있는 누각) 누각 이름 에 손님만 앉았으리 / 寂寞臨風 樓名 座上賓
하였다.
○ 징군(徵君) 성운(成運)은 보은(報恩) 종곡(鍾谷) 사람이다. 행동거지가 매우 고상하고 문장이 또한 절묘(絶妙)하였다. 그 시에 이르기를,
종산 속에 들어와서 / 一入鍾山裏
솔과 대를 벗삼아 초막에 누웠네 / 松筠臥草廬
하늘은 높아도 머리는 숙여야 하고 / 天高頭肯俯
땅은 좁다 해도 무릎은 펼 만하다 / 地窄膝猶舒
명성 있는 사람 누가 있을꼬 / 名下何人在
숲 속에 늙은이 남아있네 / 林間此老餘
사립문에는 손님도 절로 끊어졌는데 / 柴門客自絶
금서는 놓는 날이 없네 / 無日罷棄書
하였다. 또 을사 위사훈(乙巳衛社勳)을 혁파하였다는 말을 듣고, 시를 짓기를,
일은 지났거니 슬퍼한들 무엇 하리오만 / 事往嗟何及
어진 이를 회상하니 눈물이 옷깃에 가득하네 / 懷賢淚滿衣
물결이 뒤집히면 용도 말라죽고 / 波軋龍爛死
소나무가 넘어지면 학도 놀라 날아가네 / 松倒鶴驚飛
지하(地下)에는 은원이 없으련만 / 地下無恩怨
인간세상에는 시비만이 남아있네 / 人間有是非
우러러 저 햇빛을 보라 / 仰瞻黃道日
누가 그 빛을 가리리 / 誰復俺光輝
하였으니, 두 시가 모두 대단히 아름답다. 성징군은 세상에 뜻이 없고 남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처사(處士)였다.
○ 당(唐) 나라 회창(會昌 당 무종의 연호) 연간에 낙양(洛陽)에 살던 전 회주 사마(懷州司馬) 호고(胡杲)는 89세, 위위경(衛尉卿)으로 치사(致仕 나이가 늙어서 벼슬을 사직함)한 길민(吉旼)은 88세, 전 자주 자사(磁州刺史) 유진(劉眞)은 87세, 전 용무군장사(龍武軍長史)인 정거(鄭據)는 85세, 전 시어사 내공봉관(侍御史內供奉官) 노진(盧眞)은 83세, 전 영주 자사(永州刺史) 장혼(張渾)은 77세, 형부 상서(刑部尙書)로 치사한 백거이(白居易)는 74세였는데, 7명이 칠로회(七老會)를 만들고, 각각 칠언 육운 배율시(七言六韻排律詩) 한 수씩을 지었으며, 백거이는 그 서문을 썼다. 낙양에 오래 살던 노인 이원상(李元爽)은 136세, 승(僧) 여만(如滿)은 95세인지라, 2명을 추가하여 가입시켰으므로 이것이 구로회가 되니, 그때 사람들이 사모하여 후세에 전해지도록 하였다. 그리고 비서감(秘書監) 적겸모(狄兼謩)와 하남윤(河南尹) 노정(盧貞)은 나이 70이 못 되어서 모임에는 비록 참여하였으나 대열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송(宋) 나라 지화(至和 인종의 연호) 연간에 저양(雎陽)에서 살던 태자의 태사(太師)로 치사한 두연(杜衍)은 80세, 예부 시랑(禮部侍郞)으로 치사한 왕환(王煥)은 90세, 사농경(司農卿)으로 치사한 필세장(畢世張)은 94세, 병부 낭중(兵部郞中)으로 치사한 주관(朱貫)은 88세, 가부 낭중(加部郞中)으로 치사한 풍평(馮平)은 87세였는데, 5명이 오로회(五老會)를 만드니, 그때 사람들이 그 모임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그 성사(盛事)를 기록하였으며, 두연이 칠언 율시(七言律詩) 한 수를 지으니, 다른 4명도 모두 차운을 하였다. 동향 사람 전명일(錢明逸)은 두연의 명을 받고 서문을 지었다. 송(宋) 나라 원풍(元豐 신종의 연호) 연간에 낙양에 살던 사도(司徒)로 치사한 부필(富弼)은 79세, 태위 판하남부(太尉判河南府) 문언박(文彦博)은 77세, 상서 사봉낭중(尙書司封郞中)으로 치사한 석여언(席汝言)은 77세였다. 또 조의대부(朝議大夫)로 치사한 왕상공(王尙恭)은 76세, 태상 소경(太常少卿)으로 치사한 조병(趙丙)은 76세, 비서감(秘書監)으로 치사한 유궤(劉几)는 75세, 위주 방어사(衛州防禦使)로 치사한 풍행(馮行)은 75세, 천장각 대제 제거 숭복궁(天章閣待制提擧崇福宮) 초건중(楚建中)은 72세, 사농 소경(司農少卿)으로 치사한 왕신언(王愼言)은 72세, 선휘 남원 사판 대명부(宣徽南院使判大名府) 왕공진(王拱辰)은 71세, 태중 대부 제거 숭복궁(太中大夫提擧崇福宮) 장문(張問)은 70세, 용도각 직학사 제거 숭복궁(龍圖閣直學士提擧崇福宮) 장도(張燾)는 70세, 단명 전학사 겸 한림 학사(端明殿學士兼翰林學士) 사마광(司馬光)은 64세였는데, 13명이 기영회(耆英會)를 만들고, 민(閩 지금 복건성의 지명) 사람인 정환(鄭奐)에게 명하여 회원들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였다. 이때 왕공진이 대명부(大名府)에 있으면서 문로공(文潞公 문언박)에게 글을 보내 사마광(司馬光)을 기영회에 가입시키도록 청하니, 이때 사마광은 나이 70이 못 되어서 기영회에 가입할 수 없으나, 문로공이 전부터 그의 인격을 존중하던 터라 적겸모(狄兼謩)의 고사를 인용하여 기영회에 가입시키기를 청하였는데, 사마광은 후배라고 사양하니, 문로공이 정환에게 몰래 그의 초상화를 그려서 전하게 하였다. 문로공이 첫번째로 모임을 열었으며 그 나머지 회원들도 차례로 모임을 가졌다. 부공(富公 부필)이 먼저 오언 장편시(五言長篇詩)를 짓고, 다음에 문로공이 칠언 육운 배율시를 지으니, 나머지 회원들도 배율시로 5언이나 7언시를 지었으며, 또는 7언 장편시를 지은 자도 있었는데, 사마광이 그 시편에 서문을 썼다. 위에서 말한 칠로회나 오로회, 그리고 기영회에서는 모두 모임을 할 때의 나이가 쓰여져 있으나 그들의 향년(享年 평생 산 나이)이 얼마인지 상고할 수 있는 자로는 오직 백거이는 86세, 두연은 81세, 문언박은 92세, 사마광은 68세였다. 나머지 회원의 나이는 모두 기록한 것이 없다. 우리 고을의 노인들이 당송(唐宋) 제현(諸賢)의 일을 사모한 나머지 10여 명이 모임을 만들어 여러 해를 지내다가 난리를 만나 해산하였는데, 난리 후에 생존한 이는 다만 서교(西郊) 송공(宋公 송찬)과 죽계(竹溪) 안공(安公 안한), 그리고 나(심수경) 세 명이었는데, 죽계도 이제 또 작고하였다. 두 명만으로는 모임을 다시 하지 못하겠으니, 가히 탄식을 이길 수 있겠는가.
○ 독서당(讀書堂)이 두모포(豆毛浦)의 북변(北邊) 산기슭에 있으니 서울과는 7, 8리가 된다. 조종조(祖宗朝)에서는 인재를 기르려는 뜻이 대단하여 모든 은총(恩寵)이 이 서당(書堂)에 특별하니 사람들은 신선이 사는 영주(瀛洲)에 오름에 비유하였다. 성종 때는 수정배(水精盃)를, 중종 때에는 선도배(仙桃盃)를 하사하였으며, 명종 기유년 여름에는 서당에 선온(宣醞)을 베풀고 또 혜호배(蟪䗂盃)를 하사하였다. 혜호는 벌레 이름으로 술을 마시기만 하면 죽는다. 이 벌레 모양으로 술잔을 만든 것은 술을 경계하기 위해서이다. 관물(觀物) 민기(閔箕) 공ㆍ낙촌(駱村) 박충원(朴忠元) 공ㆍ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 공ㆍ국간(菊磵) 윤현(尹鉉) 공, 그리고 내가 선온(宣醞)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이튿날 독서당 동료들이 나에게 사은(謝恩)의 글을 지으라고 하여 한 구절을 지었으니,
수정배ㆍ선도배와 더불어 함께 전해지리 / 與水精仙桃而竝傳
하였는데, 이 말은 이 술잔을 하사한 성종과 중종 때에 서당에 대한 은총이 더욱 현저하였으므로 이렇게 쓴 것이다. 임당이 이 구절을 독서당의 《고사록(故事錄)》에 쓰고, 이것을 ‘실록이라.’ 하였다. 이 일은 이미 49년이 지난지라, 동료들은 모두 작고하고 나만 살아 있으니, 아, 슬프다. 임진난 후에는 서당마저 폐지된 지 오래되니 실로 한탄스럽구나.
○ 나의 당질 심일승(沈日昇)이 사옹원(司饔院) 참봉으로서 사기소(沙器所) 감조관(監造官)이 되어 나에게 말하기를, “술에 대한 시를 지어 보내 주시면 잔대에 그 시를 써서 구워 만들겠다.” 하기에 내가 5언 절구를 지었으니,
주덕송은 참으로 읊을 만하며 / 酒德眞堪頌
얼큰히 취하면 화평스럽다 / 醺醺養太和
술잔에 내 훈계를 부치노니 / 巵觴我寓戒
오직 원하건대 술은 많이 들지 마소 / 唯願酌無多
하였더니, 심일승이 그 시를 새겨 새 술잔을 구워 보내왔다. 대개 이 시는 나의 자식이나 조카를 훈계하고자 한 것이지, 타인에게야 어찌 준수하기를 바라리오마는, 술의 재앙은 비참하니, 몸을 보호하고자 하는 자라면 어찌 유념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 명종 임술년 겨울에 왕명으로 김주(金澍)ㆍ박충원(朴忠元)ㆍ오상(吳祥)과 나를 정원(政院)에 불러 비단에 그린 긴 병풍 네 벌을 내리시니, 병풍마다 8폭으로 되어 있고 그 끝 폭은 비어 두었다. 그림은 네 벌이 각기 다르니, 곧 성천도(成川圖)ㆍ영흥도(永興圖)ㆍ의주도(義州圖)ㆍ영변도(寧邊圖)였다. 하교(下敎)하기를, “김주는 성천도를, 박충원은 영흥도를, 오상은 의주도를, 심수경은 영변도를 각기 맡아 기문(記文)과 장편시(長篇詩)를 지어서 비어 있는 비단폭에 직접 써서 들이라.” 하였다. 네 명이 배복(拜伏)하고 황공히 물러와서 저마다 수일 내에 기사(記事)와 시(詩)를 써서 바쳤는데, 나와 같은 거친 문장과 졸렬한 글씨로 성상의 상을 입기까지 하였으니, 영광스럽고도 다행함을 어찌하리오. 이보다 앞서 한양궁궐도(漢陽宮闕圖)가 있었는데, 홍섬(洪暹)에게 기문을 짓고 정사룡(鄭士龍)에게 장편시를 짓게 하였다. 또 평양도(平壤圖)는 정유길(鄭惟吉)이 장편시를 짓고 전주도(全州圖)는 이량(李樑)이 장편시를 지었는데, 모두 병풍에 그린 것이라고 한다. 듣자니, 이 병풍 그림을 좌우에 두고 영원히 전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임진년의 병화로 모두 불에 타고 말았으니, 아, 애통하다.
○ 서거정(徐居正)이 편찬한 《동인시화(東人詩話)》에 이르기를, “전조(前朝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정승 사암(思菴) 유숙(柳淑)이 벼슬을 사직하고 시골로 돌아가는 벗을 전송하는 시를 지었는데,
인간들이 기름을 짜듯이 서로들 괴롭히는데 / 人間膏火自相煎
명철한 공은 길이 역사에 전하리 / 明哲如公史可傳
이미 위급한 때에 사직을 편안히 하고 / 已向危時安社稷
다시 시골로 가니 신선이 되겠구려 / 更從平地作神仙
오호에 놀던 꿈은 끊어지고 연파(자연풍경을 말함)만 푸르고 / 五湖夢斷煙波綠
삼경에 가을이 깊으니 들국화 곱구나 / 三逕秋深野菊鮮
그러나 나는 벼슬을 버리고 가지를 못하니 / 顧我未能投紱去
요새는 쌍빈이 흰눈처럼 날리네 / 邇來雙鬢雪飄然
하였다. 신돈(辛旽)이 이 시를 보고 명철(明哲)이나 오호(五湖) 등의 말을 들어 왕에게 참소하여 죽였다.” 하였다. 김종직(金宗直)이 편찬한 《청구풍아(靑丘風雅)》에도 이 시가 쓰여져 있는데, 여기에는 이인복(李仁復)이 유숙(柳淑)을 전송하며 지은 시라 하고, 그 시 끝에 주(註)를 내기를, “끝 구절을
서풍(여기에서는 불교를 지칭한 것으로, 곧 신돈을 말함.)이 부는 속세에 대한 뜻은 막연하네 / 西風塵土意茫然
라고 하였다가, 신돈이 볼까 염려하여
요새는 쌍빈이 흰눈처럼 날리네 / 邇來雙鬢雪飄然
라고 고쳤다.” 하였다. 서거정과 김종직은 모두 문장을 박람(博覽)한 사람이며 또 시대의 선후도 서로 멀지 않는데, 기록된 내용이 이처럼 다름은 괴이하다. 신돈이 이 시를 가지고 왕에게 참소하였다면 유숙이 지은 것이 명백하다.
○ 부모에 대한 삼년상(三年喪)은 성인(聖人)이 정한 제도이다. 그러므로 효자(孝子)와 자손(慈孫)이 혹 곡읍(哭泣)과 음식의 절차에는 예(禮)에 지나치는 일도 있으나, 기상(期祥 복 입는 기간)과 복제(服制 복 입는 제도)는 감히 고치지 못한다. 또 국상(國喪)의 제도는 조종조(祖宗朝)에서 상세히 정해서 법 조항의 첫 번째에 명시하였으므로 대대로 이 법령을 준수하였으니, 한 사람의 사견(私見)으로 변경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그런데 지난번 왕후(王后) 상(喪)에 한 음관(蔭官)이 제의하기를, “졸곡(卒哭) 후 백관(百官)이 오사모(烏沙帽)와 흑각대(黑角帶)를 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하여, 조정에서 회의를 열어서 백모(白帽)와 백대(白帶)를 고치니, 그렇게 큰 예(禮)를 경솔히 고칠 수 있을까. 진실로 한심한 일이다. 대신(大臣)과 예관(禮官)들은 그 책임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 국상 복제(國喪服制)에 변방(邊方)은 상사(喪事)를 행하지 않게 되어 있는데, 이는 적(敵)에게 국상(國喪)이 있음을 알리지 않고자 해서이다. 변장(邊將)이라 해서 국상을 지키는 제도에 어찌 내지(內地)와 다름이 있으리오마는, 듣자니 무사들은 국상이 있어도 술과 기생으로 노는 것이 평시와 같다 하니, 진실로 한심하다. 명종의 상이 있을 때 내가 안변 부사(安邊府使)에서 남도 병사(南道兵使)로 전근되었는데, 수개 월 동안 갑산 행영(甲山行營)에서 유방(留防 머물러 있으면서 적을 방비함)하게 되었다. 영중(營中)에 정원루(定遠樓)라는 누각이 있기에, 내가 시를 짓기를,
스스로 우습구나, 인생은 부질없이 고생만 하는데 / 自笑浮生謾苦辛
해마다 전근하느라 머리털만 희어 가네 / 年年飄轉鬂絲新
누가 옥장(장군의 영막)의 이 외로운 손을 알아 줄까 / 誰知玉帳孤眠客
일찍이 나도 청릉 속에 누웠던 사람이라네 / 曾是靑綾慣臥人
천리나 떨어진 달밤에 지내기 어려운데 / 千里月明難度夜
뜰에 꽃이 지니 봄도 지났네 / 一庭花落已經春
호두연함은 원래 나의 일이 아니니 / 虎頭燕頷非吾事
그저 허명으로 이 몸을 그르칠까 한하네 / 却恨虛名誤此身
하였다. 이해가 만력(萬曆) 기사년 봄이다. 수십년 후에 들으니 그 시판(詩板)이 아직도 있다고 하더라.
○ 명종 때에 내가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 다시 부수찬(副修撰)으로 있다가, 부교리(副校理)와 부응교(副應校)를 지냈는데, 모두 오래지 않아서 교체되었고, 계축년 초봄에 응교(應校)가 되었다가 그 해 초가을에 교체되었다. 그 동안 성상이 부지런히 경연(經筵)에 나오니 하루에 세 번이나 접한 날도 많으며 어떤 때는 밤까지 접하기도 하였다. 판서 박계현(朴啓賢)이 한림(翰林)이 되어서 나에게 말하기를, “공의 진강(進講)하는 소리는 가히 들을 만하다.”고 칭찬한 일이 있었다. 그 해 겨울 부모를 모시기 위하여 부평 부사(富平府使)가 되기를 원하니, 박계현이 나에게 이별시를 지어 주기를,
강독은 당세에 제일이라 추존하니 / 講讀當今推第一
모름지기 다시 범순부가 온 것 같다 / 會須重喚范淳夫
하였는데, 범순부는 송(宋) 나라의 시강(侍講) 범조우(范祖禹)의 자(字)이다. 정이천(程伊川 정이)은 그는 온화한 기색으로 “시비를 개진해서 임금의 뜻을 인도한다.”고 칭찬하였고, 소동파(蘇東坡 소식)는 “그는 강사(講師)의 삼매(三昧)를 얻었다.”고 칭찬하였다. 용렬하고 노둔한 나 같은 사람이 어찌 감히 만분의 일이라도 비유가 되겠는가. 그저 시인의 허탄한 말일 뿐이다. 갑인년 가을에 내가 병으로 부평 부사를 그만두고 집에 한가로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특지(特旨)로 전한(典翰)에 임명하였으니, 관원(館員)에게 특지라는 것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을묘년 5월에 직제학에 오르고, 그해 8월에 승지가 되니 그 은총이 근래에 보기 드문 일이다. 그러나 조금의 보답(報答)도 없었으니, 진실로 죄가 있다. 그 후에는 왕이 경연에 나오는 일이 드물 뿐만 아니라 관원들도 병을 핑계하고 2, 3개월 동안 직(職)에 머무른 자가 없었으니, 식자(識者)로서는 한심한 일이다.
○ 송(宋) 나라 참정(參政) 채제(蔡齊)는 술을 좋아한 사람으로 장원으로 급제하여 날마다 진한 술을 마시고 가끔 술에 취하니, 그 대부인(大夫人)은 연세 높은 노부인으로 매우 근심하였다. 가속(賈餗) 공속이 채제의 어짊을 사랑하여 그가 술로써 학문을 폐하고 병이 생길까 염려하여 시를 주어 풍자하였으니,
성군의 사랑이 두터워 장원으로 뽑히고 / 聖君寵厚龍頭選
자모의 은혜 깊어서 백발이 늘어졌네 / 慈母恩深鶴髮垂
임금의 사랑과 어머니 은혜를 모두 갚지 못한 채 / 君寵母恩俱未報
술로 병이 들면 후회한들 무엇하리 / 酒如成病悔何追
하니, 채제가 놀라 일어나 사죄하였다. 이로부터 친객(親客)이 아니면 술을 대하는 일이 없으며, 종신(終身)토록 한 번도 취하지 않았다. 세상에 술을 즐기는 자는 비록 부모의 훈계도 듣지 않는데, 채공은 과객의 풍자로 인하여 즉시 그 허물을 고쳤으니, 참으로 현인이라 하겠다.
○ 명종(明宗) 즉위(卽位) 3년인 무신년 봄에 독서당(讀書堂)에 같이 선발된 자는 교리 윤춘년(尹春年), 좌랑 한지원(韓智源), 전적 박민헌(朴民獻), 수찬 윤결(尹潔), 그리고 좌랑 나였다. 윤춘년은 갑술생으로 계묘년 식년시에서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에 이르고 나이가 60이 넘어 작고하였다. 한지원은 계유생으로 갑진년 가을 별시에 급제하여 벼슬이 교리에 이르렀는데, 나이 50도 못 되어 작고하였으며, 박민헌은 병자생으로 병오년 봄 별시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고 나이 70이 넘어 작고하였다. 윤결을 정축생으로 계묘년 식년시에 급제하여 벼슬이 수찬이 되었다가 32세로 비명에 죽었다. 나는 병자생으로 병오년 가을 식년시에 급제하여 벼슬이 의정(議政)에 이르렀고 나이 80이 넘었는데도 아직 병이 없다. 나는 5명 중에서 재덕(才德)이 가장 낮은데 벼슬과 수(壽)는 가장 높으니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벼슬은 혹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재앙을 없앨 수 있으며 수명은 혹 조심하고 섭생으로써 요절(夭折)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개 그 본분은 천명에 있어서 사람의 힘으로 될 바가 아니다.
○ 송(宋) 나라 승상(承相) 노공(潞公) 문언박(文彦博)은 자기 고향인 낙양(洛陽)으로 돌아왔을 때 78세였는데, 조산대부(朝散大夫) 정향(程珦), 조의대부(朝議大夫) 사마단(司馬旦)과 사봉 낭중(司封郞中) 석여언(席汝言)과 더불어 동갑회(同甲會)를 만들고 각기 시를 지었다. 노공의 시에,
4명의 나이 3백 12살인데 / 四人三百十二歲
또한 동갑 병오생이네 / 况是同生丙午年
양원(양 나라 효왕의 화원)에서 시를 읊는 격이요 / 占得梁園爲賦客
상령에서 지초를 캐는 신선이로세 / 合成商嶺採芝仙
청담은 물 흐르듯 바람은 저절로 나고 / 淸談亹亹風生席
흰머리 날리니 눈이 어깨에 가득 찬 듯하네 / 素髮蕭蕭雪滿肩
이 같은 모임은 일찍이 없었던 일이니 / 此會從來誠未有
낙양에서 응당 그림으로 길이 전하리 / 洛中應作畵圖傳
하였다. 내가 항상 부러워하고 그 시에 차운하기를,
노공과 동갑으로 네 어진 분이 있었는데 / 潞公同甲四名賢
80에서 아직 두 살이 모자라네 / 八十將臨未二年
낙양에는 노인이 많다지만 / 共道洛中多壽考
누가 이 지상에 신선 있는 줄 알리 / 誰知地上有神仙
백 살이던 자야(예전에 오래 산 장자야)의 걸음을 따를 것이요 / 百齡子野堪追武
구로회를 만든 향산(당 나라 백낙천)과 어깨를 겨루리 / 九老香山可竝肩
어찌 그림으로 길이 남기련가 / 何用畵圖垂不朽
좋은 시구 지금도 전해지네 / 好看詩句至今傳
하였다. 노공의 향년(享年)은 92세였고, 정향(程珦)과 사마단과 석여언의 향년은 몇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같은 때에 낙양에서는 나이 70이 되면 동갑회를 만들었다고 하니, 또한 기특한 일이다. 나와 동갑은 병자생으로 35명이 있어 동갑 계(契)를 하였는데, 5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는 나 혼자 생존하였다. 노공의 시에 차운한 여흥(餘興)으로 감탄한 나머지 다시 한 수를 지었으니,
동갑 병자생 35명은 / 同丙生人三十五
젊어서 계를 하여 이제 노쇠하였네 / 少年爲契到衰年
세월은 흘러 많은 사람 세상 떠나 / 光陰遞去多辭世
80년 동안 모두 신선이 되었네 / 八十踰來盡作仙
번화하던 자리 적막하여 홀로 탄식하고 / 盛席寥寥空自嘆
외롭고 쓸쓸한 몸 누구와 같이하리 / 孤形孑孑比誰肩
길게 살고 오래 보는 것 참으로 어려운 일 / 長生久視眞難事
다만 팽조와 노자만 만고에 전해지네 / 只有彭耼萬古傳
하였다.
○ 우리 나라에서 장원 급제하여 대제학이 된 자는 권제(權踶)ㆍ정인지(鄭麟趾)ㆍ최항(崔恒)ㆍ김안로(金安老)ㆍ정사룡(鄭士龍)ㆍ정유길(鄭惟吉)ㆍ박순(朴淳)ㆍ노수신(盧守愼)ㆍ이이(李珥)이다. 조종조에서는 예문관 대제학이 문형을 맡고 홍문관 대제학은 다른 사람이 겸임하였는데, 중종 이후에는 예문관과 홍문관의 두 대제학을 한 사람이 겸직하게 되었다. 특히 어세겸(魚世謙)과 이행(李荇), 그리고 김안로는 의정(議政)이 된 뒤에도 대제학을 겸하고 있어서 여론이 좋지 않기도 하였다.
○ 선가(禪家 불교의 한 종파)에서는 사제(師弟)간에 도(道)를 전하는 것을 의발(衣鉢)을 전한다고 하는데, 이는 의발로 도를 비유하는 것이다. 고려 때에 문생(門生 과거에 급제한 사람)과 좌주(座主 과거의 수석 고시관)가 의발을 서로 전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이는 문자을 의발에 비유한 것이다. 대제학도 의발을 서로 전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조종조에서는 대제학에게 큰 벼루가 있어서 서로 전하였다고 하나 지금도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다.
○ 벼슬이 1품으로 나이 70세 이상이 되어도 국가에 중요한 일에 관계하여 치사(致仕)하지 못하는 자에게 궤장(几杖 70세가 넘은 노재상에게 주는 안석과 지팡이)을 하사하는 것이 국가의 법례이다. 만력(萬曆) 계유년 4월에 영중추부사 홍섬(洪暹)이 이미 영의정을 지내고 나이 70에 궤장의 하사를 받고 궤장연(几杖宴)을 베풀 때 여러 재상들이 많이 모였다. 내시 중사(中使)와 도승지 이희검(李希儉)은 선온(宣醞 하사하는 술)을 가져오고, 주서(注書) 이준(李準)은 교서(敎書)와 궤장을, 우의정 노수신(盧守愼), 좌참찬 원혼(元混), 여성군(礪城君) 송인(宋寅), 판윤(判尹) 강섬(姜暹), 형조 참판 박대립(朴大立), 우윤(右尹) 김계(金啓)가 자리에 참여하고, 나 또한 호조 참판으로 말석에 참여하였다. 이때 상공(相公 홍섬)의 대부인(大夫人)의 나이 87세였는데, 그는 영의정 송질(宋軼)의 딸이었다. 상공의 선군(先君) 홍언필(洪彦弼)도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궤장을 하사 받았으니, 대부인은 영의정의 딸이고 영의정의 아내이며 영의정의 어머니다. 두 번이나 이런 영화를 보니, 이는 근고에 없던 성사(盛事)였다. 노의정(盧議政 노수신)이 자리에서 시를 지어 주기를,
삼종 동안 모두 정승 집 문밖에 나가지 않았으니 / 三從不出相門闈
이 같은 영화는 오늘이 처음이로세 / 此事如今始有之
조정에서는 영수장 짚고 다니다가 / 更拄省中靈壽杖
집안에서는 노래자(중국 초 나라의 현인이며 효자로 70세에 아이옷을 입고 어린이 장난을 하여 부모를 위안하였다)의 옷을 입었네 / 却被堂上老萊衣
우로와 같은 은혜 천년에 참으로 드문 일이요 / 恩霑雨露眞千載
기쁘게 맞아들인 대관들은 한때에 극진한 분이었네 / 歡接冠紳盡一時
어디서 와서 나도 자리에 참여하니 / 何處得來叨席次
좋은 시로 정승 집 빛내지 못함이 부끄럽네 / 愧無佳句賁黃扉
하였다. 나도 시를 지었으니,
궤장의 큰 은혜는 이 나라에 드물거니 / 几杖鴻恩罕此邦
정승님 집안 경사 다시 짝이 없네 / 相公家慶更無雙
세 정승을 이어받으니 삼괴 구극 벼슬 다 지냈고 / 傳三議政官槐棘
대부인 모셨으니 복은 바다와 강물 같네 / 奉大夫人福海江
자리에 가득 찬 영광 꽃이 자리에 비쳐 있고 / 滿座榮光花映席
하늘에 오를 듯 기쁜 일 술마저 동이에 가득하네 자리 위에 만든 꽃이 두 바구니가 있고, 선온한 술이 열 항아리가 있었다. / 騰空喜氣酒盈缸 席上有造花二盆宜醞十缸
이때 이 성사를 기록하여 전하려 하나 / 一時盛事應須記
어디서 크게 펴 놓을 서까래 같은 붓을 얻으리오 / 安得鋪張筆似杠
하였다. 여성군 송인은 상공의 표제(表弟 외종제)로, 기문(記文)과 배율시(排律詩)를 짓고 또 다른 이의 장편시며 율시(律詩)도 수집하여 시첩(詩帖)을 만들었다. 상공이 화공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고 여성군은 그 그림 뒤에 여러 시를 써서 일가(一家)의 보물로 간직하게 되었다. 대부인의 향년이 94세, 상공의 향년이 82세이니, 인간 세상의 복된 경사가 진실로 짝이 없도다.
○ 계유년 인재(忍齋) 홍상공(洪相公 홍섬)의 궤장연(几杖宴) 때에 지은 소재(蘇齋) 노상공(盧相公 노수신)의 시와 나의 시는 이미 위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때 계유년에서 벌써 25년이 지나고 보니 그 잔치에 있었던 사람은 오직 나와 이준(李準)만이 생존해 있을 뿐이다. 이공(이준)은 벼슬이 2품이고 나는 벼슬이 의정을 거치고 나이 80을 넘긴 터라 그때 잔치를 추억하노라니 어렴풋이 일어나는 회포를 견디지 못하고 그때 시를 생각하니, 그 즉석에서 경솔히 지었기로 자못 정(情)을 다하지 못한지라 이제 점 찍으며 고쳐 짓는데, 추한 여자가 화장한 격으로 다만 더욱 추하게 만들까 염려하면서도 다음의 시를 읊기를,
궤장은 원래 나이와 작위가 높은 이를 위함이니 / 几杖元因齒爵堪
고문에서 성은 내리심을 독차지하였네 / 高門偏荷聖恩覃
두 임금 대에 계속하여 70살이 두 분이요 / 二朝繼顯稀年二
삼대를 이어받은 정승이 셋이로다 / 三代相傳議政三
대부인 모시고 편안히 복받고 / 奉大夫人綏福履
재상을 맞이하니 동남에서 모두 왔네 / 邀諸宰相盡東南
인간 세상 영화가 누군들 이 같을까 / 世間榮耀誰如此
왁자하게 만인의 입에 오르내리네 / 喧播應爲萬口談
하였다. 인재의 아들 홍기영(洪耆英)은 나의 사위이다. 그 잔치 때에 만든 화첩(畵帖)을 병화로 잃었다 하기로 이 글을 주어서 보관하도록 하니, 이는 그때 화첩의 만분에 일이라도 충당할까 해서이다.
○ 독서당(讀書堂)은 옛날에 대청(大廳)과 남루(南樓)가 있고, 남루 북편에는 침방(寢房)이 있었다. 임자년 연간에 당료(堂僚) 임당(林塘)ㆍ정유길(鄭惟吉)과 낙촌(駱村) 박충원(朴忠元), 국간(菊磵) 윤현(尹鉉), 동원(東園) 김귀영(金貴榮), 그리고 내가 서로 상의하여 남루 동편에 당 하나를 지으니 매우 산뜻하였다. 누각을 문회당(文會堂)라고 하였는데, 30여 년이 지난 후에 당원(堂員)들이 또 새 집을 남루(南樓) 서북쪽 못가에 지으니 더욱 산뜻하였다. 독서당의 선생(先生 전직장)들을 모시고 낙성연(落成宴)을 베푸니 나와 지사(知事) 임열(任說)이 참여하였다. 당시 당원으로는 교리 유근(柳根)ㆍ이항복(李恒福), 그리고 봉교(奉敎) 이호민(李好閔)이 자리에 있었다. 사미(四美 양신(良辰)ㆍ상심(常心)ㆍ미경(美景)ㆍ낙사(樂事))와 이난(二難 훌륭한 임금과 훌륭한 빈객)을 갖추었으니 그 또한 훌륭한 모임이었다. 술이 반취되어 내가 먼저 칠언 율시와 오언 율시를 지으니, 제공(諸公)이 서로 수창(酬唱)하여 수십여 편이 되었다. 다만 내가 먼저 지은 시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모두 기억나지 않는다. 7언시에,
생각해보니 내가 독서당에 들어갔던 것은 30년 전으로 / 憶昨登瀛卅載前
남루와 동각에 올라 신선과 짝하였네 / 南樓東閣伴神仙
몸이 대궐로 돌아가 관에 오래 얽매이니 / 身歸闕下官長繫
길이 호변에 막혀 꿈만 자주 꾸네 / 路隔湖邊夢屢牽
좋은 날 외람되게 늙은이 초청되어 / 勝日猥蒙招舊物
화려한 집에 욕되게도 첫 자리에 앉았었네 / 華堂忝得赴初筵
눈에 보이는 풍경은 예나 다름없는데 / 眼中風景渾如昔
부끄럽다 시 쓰자니 서까래 같은 붓이 없네 / 愧乏題詩筆似椽
하였고, 또 5언시에는,
몇 해나 구관을 그리워하였더니 / 幾年思舊館
오늘에야 신당을 감상하네 / 今日賞新堂
나무 그림자는 3층 문지방에 어른거리고 / 樹影三層砌
하늘 빛은 반 마지기 연못에 비추네 / 天光半畝塘
학은 어리석어 처음으로 춤 배우고 / 鶴癡初學舞
연꽃은 늙어도 향기를 머금었네 / 荷老尙含香
날이 저물어도 돌아갈 줄을 잊었으니 / 盡日忘歸去
어찌 시 짓고 술 마시기 사양하리 / 寧辭詠且觴
하였다. 이때는 만력 정해년 8월 25일이었다. 이때 임지사(임열)는 78세이며 나는 72살이었다. 유교리(유근)는 39세이며 이교리(이항복)는 32세이고 이봉교(이호민)는 38세였다. 이 일을 그림으로 그리고 제명(題名)하여 각기 보관하였다. 정해년부터 지금까지가 11년이 되었는데, 유공(柳公)과 두 이공(李公)의 벼슬은 모두 2품이 되고, 나 역시 벼슬이 1품으로 아직도 죽지 않았는데, 서당은 병화에 타고 터만 있어서 다시는 사문(斯文)의 모임을 갖지 못하겠으니, 실로 한탄할 바로다.
○ 의정(議政) 유송당(兪松塘 유홍)은 벼슬이 2품이 되었을 때에 치사(致仕)하고, 광주(廣州) 용진(龍津) 무수동(無愁洞)에 농막을 짓고 그 이름을 퇴우정(退憂亭)이라 하고, 여러 재상들에게 시를 구하니, 의정 박사암(朴思菴)이 첫머리에 칠언 율시를 쓰고, 의정 노소재(盧蘇齋)ㆍ정임당(鄭林塘)ㆍ김동원(金東園)ㆍ이아계(李鵝溪)가 차례로 쓰고, 다른 재상들도 많이 화답하였으며, 나도 화시를 지었으니,
비로소 티끌 세상 나오니 문득 신선이로세 / 纔出塵寰便是仙
무수동 속에 별천지 감추어져 있네 / 無愁洞裏別藏天
젊어서 큰 공을 세워 은혜 갚았으니 / 黑頭勳業酬恩日
청산에 돌아와 여생을 보내게 되었네 / 靑嶂栖遲乞退年
누가 세상에 일 많음을 알까 / 誰識世間忙歲月
몇 번이고 외방의 좋은 산천 생각했네 / 幾思方外好山川
나도 소매를 떨치고 그대 따라가리라 / 從君拂袖吾將決
돌아가는데 어찌 성 아래 옥토가 필요하랴 / 歸去寧須負郭田
하였다. 임당(林塘)은 끝까지 물러나지 못하고 72세로 작고하였다. 나도 벼슬이 2품으로 70살이 된 후로는 여러 번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얻지 못하다가 80이 넘어서야 겨우 물러나게 되었다. 내가 만일 수년 전에 죽었더라면 물러나려는 뜻을 끝내 얻지 못하였을 것이다. 아무튼 이제 돌아가게 되었으니 어찌 하늘이 주신 다행이 아니리오. 이에 이전 시에 차운하기를,
슬프다, 송당이 이미 신선이 되었구나 / 怊悵松塘已作仙
출세하고 은둔하고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것 모두가 하늘의 소관일세 / 行藏修短摠關天
거친 전원으로 돌아가려 청한 것이 오늘까지 많았는데 / 荒園乞退多今日
별장에서 시를 구하던 옛날이 생각나는구나 / 別墅求詩憶昔年
얻고 잃었다 한 것 몇 번인가 희미해 꿈만 같고 / 得喪幾回迷似夢
세월을 어찌하리 냇물처럼 흘렀네 / 光陰無耐逝如川
율리 사는 비선리에 밤나무가 많으므로. 에 늦게 왔다고 말하지 말라 / 莫言栗里 飛仙多栗 歸來晩
생계는 그래도 두어 마지기 밭이 있다네 / 生計猶存數畝田
하였다.
○ 서자[庶孼]로서 문장에 능한 자는 조종조 때 어무적(魚無跡)과 조신(曺伸)이 이름이 났고 근세에는 권응인(權應仁)이 또한 이름이 났는데 그 문장이 세상에 전해지지 못한 채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진실로 아깝다. 평소 나와 수창(酬唱)한 시가 상당히 많은데 10년 전에 나에게 두 편의 율시를 보냈기로 그 시에 차운할 일이 있는데, 권응인의 시는 기억치 못하고 다만 나의 졸작만 기록해 본다.
처세하기 참으로 취한 듯 위의도 잃어버렸네 / 處世眞同醉失儀
평생의 이내 심사를 누가 알아 줄까 / 百年心事竟誰知
죽고 살고 오래 살고 요절하는 것 모두 운수 소관이요 / 死生修短皆關數
잘 되고 못 되고 근심과 기쁨 각기 때가 있다네 / 榮辱憂歡各有時
병골은 지리멸렬하여 오래 살기 어려운데 / 病骨支離侵壽域
빛난 직함 판서 다음 자리 부끄럽구나 / 華銜慙愧亞台司
임금을 섬기고 나라를 다스리는데 무엇 하나 능하리 / 致君謀國何能得
자기 힘 헤아리고 한직에 옮겨가면 분수 마땅할 걸 / 自料投閑分是宜
하였고, 둘째 시에는,
저 달 오래 보노라면 두 고장 비춰 주어 / 明月長看照兩鄕
서로 생각하는 천리 길에 머리털 희어졌네 / 相思千里鬢成霜
바람 비 궂은 날에 향탁(임금 앞)에 나가는 것 못 견디어 / 不堪風雨趨香十
그림과 글씨로 초당 위에 누웠던 것 공연히 부러워라 / 空羨圖書臥草堂
평상을 내려 보아도 유자를 만날 길 없고 / 下榻末由逢孺子
고기 보려 하나 호량(아름다운 호수와 언덕)에 같이 갈 자 누구런가 / 觀魚安得共濠梁
운수는 하늘이 주신 것 그대로 따르려나 / 窮通且可安天賦
다만 양공이 예장을 버린 것이 한스럽네 / 只恨良工棄豫章
하였다.
○ 사람이 관직을 받는 것은 이조(吏曹)에서 그 재주를 보고서 헤아려 직책을 주나, 실은 하늘의 명(命)에 있고 사람의 힘으로 능히 하는 바 아니다. 세상에서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 그리고 홍문관(弘文館)의 관원과 정부의 이조(吏曹)ㆍ병조(兵曹) 두 조랑(曹郞 좌랑과 정랑을 말함)을 청요(淸要)의 직이라 하며, 또 이상(二相 의정부의 좌ㆍ우찬성)과 삼사재(三四宰 의정부의 좌ㆍ우참찬)와 육조 판서(六曹判書)와 팔도감사(八道監司)와 양계 병사(兩界兵使), 그리고 개성 유수(開城留守)와 승지(承旨)는 모두 화현(華顯)의 직이라고 한다. 나는 삼사(三司 사헌부ㆍ사간원ㆍ홍문관)의 관직과 정부의 이조ㆍ병조의 낭관을 두루 지내고, 또 이상(二相)과 삼사재(三四宰)를 지내고, 또 호ㆍ예ㆍ병ㆍ형ㆍ공조의 판서를 두루 지냈다. 외방으로는 강원ㆍ충청ㆍ전라ㆍ경상ㆍ함경ㆍ경기 감사와 함경남도 평안도의 병사(兵使)와 개성 유수와 승지를 지냈다. 본래 재덕과 인망이 없어서 그런 직책에 맞지 않건만, 이력이 이와 같으니 어찌 하늘이 준 명에 말미암는 바 아니리오. 세상에서는 혹 지력(智力)으로 얻으려 하는 자도 있는데, 이들은 하늘의 명을 모르는 자라 하겠다.
○ 나는 13세 때에 부친이 별세하였으므로 자모(慈母)에게 교육을 받았다. 그 후 성장해서 벼슬과 명망이 현달(顯達)하자, 자모의 봉양과 은혜 갚을 뜻을 항상 품고 있었다. 가정(嘉靖) 을축년 여름에 개성 유수로 임명되었고, 정묘년 여름에 만기가 되어 조정에 돌아왔고, 그 해 가을에 또 원해서 안변 부사(安邊府使)가 되었고, 무진년 여름에 함경남도 병사로 전임되었다가, 기사년 여름에는 본도(경상도) 감사에 부임되었다. 신미년 여름에는 만기가 될 때 병을 빙자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처음부터 끝까지 7년 간 네 곳을 전임하면서 맛난 음식의 공양을 조금이라도 대접하여 숙원을 이루었으니 얼마나 다행이리오. 모친의 연세 86세에 갑자기 작고하니, 하늘처럼 크나큰 은혜 망극할 뿐이었다. 모친은 평생에 교훈이 엄격하였다. 모든 관청이나 고을의 송사에 한 번이라도 뇌물을 받고 간청을 들어주는 일이 없었으므로 정치를 하고 백성을 다스리는데 비난하고 헐뜯는 말을 듣는 일이 없었던 것은 실로 낳아 주신 부모를 욕되게 하지 않으려 해서이다. 벼슬이 1품에까지 오르고 나이 80이 넘은 것은 부모의 여경(餘慶)이라고 생각한다.
○ 참의 임억령(林億齡)은 호가 석천(石川)이며 해남(海南) 출신으로, 시(詩)가 빼어나고 참신하여 일찍 세상에 이름이 났다. 을사사화(乙巳士禍) 때에 그 아우 임백령과 뜻이 같지 않아 위사훈(衛社勳)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조정에 벼슬하고 있다가 늦게야 담양 부사(潭陽府使)로 부임하였는데, 시를 읊기를,
아침에 북궐에 나아갔다가 저녁에 남주에 오니 / 朝趨北闕暮南州
성군 시대의 가짜 허유(요 임금 때의 고사로, 요 임금이 천하를 주려하자, 기산에 숨었다.)에 비유하네 / 竊比明時偉許由
종적은 구름 같아 퍼졌다가 없어지고 / 蹤跡似雲舒或卷
행장은 물과 같아 그쳤다가 다시 흐르네 / 行藏如水止還流
혼탁한 세상에 도잠(동진 때 시인으로, 자는 연명임)의 허리 굽히는 것 무엇이 해로우리 / 何妨混世陶腰折
명예 다투어 후예(옛날 활 잘 쏜 사람)와 활쏘며 노닐던 것 뒤에 후회하네 / 追悔爭名羿彀遊
해변에 돌아와 늙을 것을 내 이미 결정하였노라 / 歸老海邊吾已決
누런 꽃 붉은 귤 고향의 가을일세 / 黃花朱橘故園秋
하였고, 또 읊기를,
아전들 돌아간 빈 뜰에는 새 날아 들고 / 吏散庭空鳥印蹤
살구꽃 그림자 듬성듬성 달 밝은 밤이로세 / 杏花䟱影月明中
백두와 오사모 쓰기 싫어 / 白頭剛厭鳥紗帽
객이 가면 매달고 객이 오면 머리에 쓰네 / 客去而懸客至籠
하였다.
○ 세상에 유생(儒生)으로 점을 좋아하는 자가 많은데, 나는 평생에 한번도 점을 쳐 본 일이 없다. 이는 이순풍(李淳風)과 소강절(邵康節) 같은 이를 만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점장이들은 길흉을 말하나 반드시 믿지는 못한다. 그들이 모년(某年)에 길하다고 하면 혹 요행을 바라기도 하지만, 끝내 그 징험이 없고, 또 모년에는 흉하다고 하면 헛되이 근심과 회의로 세월을 허비하나, 끝내 그 징험이 없으니 어찌 무익하고 해롭지 아니하랴. 유생으로 혹은 자기가 점을 잘 친다고 하면서 곧잘 사람의 길흉을 말하나 선비로서는 마땅히 할 바가 아니다.
○ 지리풍수설(地理風水說)은 아득하고 거짓말이므로 족히 믿을 것이 못 된다. 그러나 더러는 그 말에 얽매여 그 어버이의 장사할 시기가 지나도 장사를 지내지 않는 자가 있고, 혹은 먼 선조의 묘를 파서 이장하는 자도 있으니, 극히 당치 않는 일이다. 세종 때의 재상 어효첨(魚孝瞻)이 상소하여 극력히 풍수설의 잘못된 점을 진술하였는데 명백하고 성대하였다. 그는 그 부모를 가원(家園) 옆에 장사지냈으며, 그 아들인 정승 어세겸(魚世謙)도 그 부모를 장사지내는 데 땅을 가리지 않았다. 그 집안의 법도가 이러하였으니, 진실로 탄복할 일이다. 고려 때의 모든 왕릉도 모두 같은 산에 썼으며, 중국에서도 역대의 여러 능을 같은 산에 썼으니, 반드시 정견(定見)이 있으리라.
○ 동호(東湖)의 저자도(楮子島)는 절승(絶勝)이다. 전조(前朝 고려) 때 정승 한종유(韓宗愈)가 별장을 짓고 여생을 보내며 시를 읊기를,
10리나 되는 판판한 호수에 가랑비 지날 제 / 十里平湖細雨過
긴 피리 소리 갈대꽃 저 편에서 들리네 / 一聲長篴隔蘆花
금정(나라)에서 국(정치)을 조리하던 손을 가지고 / 直將金鼎調羹手
다시 낚싯대 잡고 늦게 모랫가로 내려가네 / 還把漁竿下晩沙
홑적삼 짧은 모자로 연못을 돌아드니 / 單衫短帽繞池塘
건너편 언덕 늘어진 버들 서늘한 바람 보내는구나 / 隔岸垂楊送晩涼
산보하다 돌아오니 달은 산 위에 떠올랐고 / 散步歸來山月上
지팡이 끝에 연꽃 향기 어려 있네 / 杖頭猶襲露荷香
하였으니, 시 또한 흥취가 좋다. 봉은사(奉恩寺)는 저자도에서 서쪽으로 1리쯤에 있다. 몇 해 전에 내가 동호 독서당에서 사가독서할 때에 타고 간 배를 저자도 머리에 정박하고 봉은사를 구경하고 돌아오니, 강가 어촌에 살구꽃이 만발하여 봄 경치가 더욱 아름답기에, 배 안에서 시를 짓기를,
동호의 빼어난 경치는 모두들 알고 있지만 / 東湖勝槪衆人知
자자도 앞은 더욱 절경이네 / 楮島前頭更絶奇
절에 가는 길 솔잎 우거진 길이요 / 蕭寺踏穿松葉徑
어촌을 두루 보니 살구꽃 흐드러진 울타리로세 / 漁村看盡杏花籬
따스한 모래밭 연한 풀에 원앙 한쌍 잠들었고 / 沙暄草軟雙鳶睡
물결은 잔잔하고 바람은 솔솔 부는데 돛대 한척 흘러가네 / 浪細風微一棹移
봄 흥취와 봄 수심을 채 읊기도 전에 / 春興春愁吟未了
압구정 언덕엔 벌써 석양이로세 / 狎鷗亭畔夕陽時
하였다. 지금 40여 년이 지났는데 다시 가서 구경을 못하니, 가물거리는 회포를 견디지 못하겠도다. 압구정은 저자도의 서쪽 수리(數里)에 있는데, 재상 한명회(韓明澮)가 별장을 지어 또한 이로써 유명하다.
○ 서울에서 이름이 있는 정원이 한둘이 아니지만, 특히 이형성(李亨成)의 세심정(洗心亭)은 가장 경치가 좋다. 정원 안에는 누대(樓臺)가 있고 그 누대 아래에는 맑은 샘이 콸콸 흐르며, 그 곁에는 산이 있어 살구 나무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서 봄이 되면 만발하여 눈처럼 찬란하고 기타 다른 꽃들도 많았다. 이형성은 매우 시를 좋아하여 매양 시객(詩客)을 맞아들여 시를 지으므로, 나도 여러 번 가서 구경한 일이 있었다. 상사(上舍) 이굉(李宏)이 세심정을 구경하고자 그 집에 갔는데, 주인 이형성이 마침 병으로 나오지 아니하니, 이굉이 시 한 수를 지어 그 문병(門屛)에 크게 쓰기를,
섬돌 앞의 푸른 대는 속된 것 고치기 어렵고 / 階前綠竹難醫俗
대 아래의 맑은 물은 마음 씻지 못하노라 / 臺下淸川未洗心
하여, 한때 세상에 전해져 웃음거리가 되었다. 임진년 초봄에 내가 어느 친우의 집에 가니 그 자리에 이형성의 여종이 거문고를 타고 있기에 내가 절구 한 수를 지어 그 여종에게 주며 그 주인인 이형성에서 전하라고 하였다. 그 시에,
거문고 소리 들을 만한데 타는 여자 누구뇨 / 彈琴可聽誰家女
스스로 세심대 하인이라고 말하네 / 自說洗心臺下人
만 그루 살구꽃 피기를 기다려 / 要待萬株山杏發
술병 가지고 봄놀이 감세 / 爲携壺酒去尋春
하였다. 그 후 병난(兵亂)으로 세심대의 경치도 다시는 감상하지 못하였다.
○ 고려 때에 졸옹(拙翁) 최해(崔瀣), 가정(稼亭) 이곡(李糓), 목은(牧隱) 이색(李穡), 초은(樵隱) 이인복(李仁復), 그리고 흥령군(興寧君) 안축(安軸)은 모두 중국의 원 나라에서 급제하였다. 최해는 재주가 뛰어났고 지조가 높았으나, 때를 만나지 못하여 마침내 사자산(獅子山) 아래에 살며 스스로 《예산은자전(猊山隱者傳)》을 저술하고 작고하였다. 이곡은 원 나라에서 한림 국사원 검열(翰林國史院檢閱)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고려의 찬성사(贊成事)가 되었고, 이색은 원 나라에서 한림 지제고(翰林知制誥)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고려의 시중(侍中)이 되었으며, 이인복은 고려의 검교시중(檢校侍中)이 되었고, 안축도 고려의 찬성사가 되었다. 이곡은 한산(韓山)의 향리(鄕吏)이며, 이색은 바로 그의 아들이다. 이인복은 성산 향리(星山鄕吏) 이조년(李兆年)의 손자로 세상에서 현인이라 칭하였는데, 원 나라 동년(同年 같이 급제한 사람) 승지 마언휘(馬彦翬)와 학사(學士) 부자통(傅子通)에게 시를 지어 보내기를,
매양 경림(한림원)을 향하여 술 취해 돌아오던 일 생각하니 / 每向瓊林憶醉歸
하사하신 꽃 봄볕 따스하고 그림자 하늘하늘거렸네 / 賜花春煖影離離
작별한 뒤에야 옛정 두터움을 깨달았건만 / 別來更覺交情厚
늙었으니 어찌 세상사 그른 것 알소냐 / 老去安知世事非
노둔한 자로 잔두(사소한 이익을 단념하지 못함)를 그리워한 것 부끄럽고 / 駑鈍尙慙懷棧豆
붕새 날 적에 누가 울타리 돌아보랴 / 鵬飛誰復顧藩籬
그대 동이(우리 나라) 비루하다 웃지 마소 / 請君莫笑東夷陋
해상에 세 봉우리(삼신산) 푸른 공중에 솟아있네 / 海上三峯聳翠微
하였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이 이 시를 《청구풍아(靑丘風雅)》에 기록하고, 주(註)를 달기를, “이때 원 나라는 난말(亂末)의 시기라, 이 글로써 두 사람(마언휘와 부자통)을 초청하여 동방에서 피난하도록 권한 것이다.” 하였는데, 승지(마언휘)와 학사(부자통)는 황제의 근시(近侍)로 계급이 높은 벼슬인데, 이인복이 비록 동기생으로 친했다 하더라도 외국인을 감히 이렇게 초청할 수 있을까. 하물며 끝구를 보아도 초청의 뜻이 없는데, 점필재는 무슨 근거로 이런 주를 달았는지 모르겠다.
○ 만력(萬曆) 신묘년 가을에 기로당(耆老堂)에 참석한 자는 영부사(領府事) 김귀영(金貴榮)과 지사(知事) 강섬(姜暹), 그리고 나였다. 그 후에 동지(同知) 송찬(宋贊)과 좌윤(左尹) 목첨(睦詹)과 참판 신담(申湛)과 대사성(大司成) 이기(李墍)가 모두 종2품으로 참석하였는데, 뒤에 참석한 제공이 윤번으로 모임을 갖기로 하여 송찬이 먼저 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에 김영부사와 목좌윤, 그리고 내가 참석하고, 신참판과 이대사성은 일이 있어 참석하지 못하였다. 내가 자리에서 시를 짓기를,
서교(송찬의 호) 영감 베푼 자리 술상도 성대하이 / 郊翁設席盛杯盤
기영들이 모였으니 참으로 장관이네 / 會得耆英有足觀
발그레한 뺨 흰 머리에 꽃이 모자 위에 꽂혀 있고 / 紅頰白鬚花壓帽
수놓은 병풍이며 비단 장막과 기생이 난간처럼 둘러있네 / 繡屛羅幕妓圍欄
풍류는 멀리 삼한 때부터 내려왔으니 / 風流逈自三韓舊
고운 단장 참으로 구로의 기쁨 같네 / 爭像眞同九老歡
가장 하례할 일 주인이 80세 넘은 일 / 最賀主人踰八耊
세상에 이런 일은 보기도 드물구나 / 世間玆事見之難
하였다. 모두가 각기 화시를 지났으나 모두 기억이 안난다. 임진난이 지나고 정유년에 이르러서는 오직 송공(宋公 송찬)과 이공(李公 이기), 그리고 나만 생존하였으므로, 기로회를 다시 갖지 못하였으니, 이루 말할 수 없이 한탄스럽다.
○ 정덕(正德 명 나라 무왕 때 연호) 정축년에 나의 선친과 계부(季父) 묵재(黙齋) 공이 같은 방(榜)에 급제를 하였으며, 계미년 연간에는 김명윤(金明胤)과 그 아우 김홍윤(金弘胤)이 연방(連榜)에서 급제를 하였는데, 김홍윤은 장원이었다. 남곤(南袞)이 축하시를 김명윤의 부친인 찬성 김극핍(金克愊)에게 보내고, 겸하여 나의 조부 소요공(逍遙公)에게도 보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두 아드님이 나란히 급제하는 것 세상에 자랑거리인데 / 二子登科世供誇
집안에서 장원이 나온 것에 더욱 영광이겠소 / 壯元門戶更光華
광산 김씨와 풍산 심씨 아울러 / 光山金與豐山竝
예전부터 경사 많은 줄 알았소이 / 知是從前積慶多
하였다. 광산은 바로 김명윤의 본관이고, 풍산은 바로 우리 심가의 본관이다. 나는 불초한데도 요행으로 급제를 하였으나, 이후 자손들은 급제하지 못하였고 김명윤의 집안도 급제한 자가 없으니, 어찌 경사가 많다는 말이 선대에만 징험이 있고 후대에는 없는가. 두 집안이 모두 쇠한 것은 자손들이 학업에 힘쓰지 않았기 때문인가 보다.
○ 상국(相國)노소재(盧蘇齋 노수신)가 석가산(石假山)에 십청정(十靑亭)을 짓고, 재상들에게 시(詩)를 청하기에 내가 시를 짓기를,
담 아래 높다랗게 석가산을 만드니 / 墻下嵯峨作假山
산 앞 한 줌 샘물 만족할 만하여라 / 山前一掬水堪慳
아침엔 아지랭이 저녁엔 안개 언제나 끼어 있고 / 朝嵐暮靄尋常裏
많은 골짜기와 봉우리 지척간에 벌려 있네 / 衆壑群峯咫尺間
굽이친 물가에서 때때로 새발 전자 그려 있고 / 曲渚時時留鳥篆
깊숙한 시냇물은 곳곳에 이끼 무늬 끼어 있네 / 幽溪處處着苔斑
좋은 경치 두루 놀 것 필요 없네 / 不須崇華觀遊遍
길이 산만 대하고 홀로 문 닫고 있네 / 長對孱顔獨閉關
열 그루 사철나무 정자를 에워싸니 / 十樹冬靑擁一亭
변함없이 푸른 빛은 갈수록 푸릇푸릇 / 靑靑不改更靑靑
찬기운 쌀쌀해지자 바람이 문을 지나고 / 寒聲遞動風過戶
그림자 어른거리는데 달은 뜰에 가득하네 / 密影交加月滿庭
매화와 버들 서로 피어날 제 푸른 빛 한층 아름답고 / 梅柳爭時增秀色
눈보라 서릿발 몰아칠 때 경치 더욱 기이하네 / 雪霜嚴裏轉奇形
세상에 영고가 있음을 한하지 말라 / 世間何限榮枯事
높은 집에 모범됨을 보아 알라 / 看取高標有典刑
하였더니, 노상국이 보고 웃으며 버리지 않았다. 대[竹]또한 푸르나 십청(十靑)의 대열에 들지 못한 것은 대는 마를 때가 있어서 십청에 비교가 못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노상공에 말하기를, “취사(取捨)가 매우 온당치 못한 듯하다.” 하였다 한다.
○ 상국(相國) 노소재(盧蘇齋)가 70세 되던 갑신년 원일(元日)에 시를 짓기를,
벼슬을 그만두고 전원에 돌아오니 / 寄也歸而免
슬그머니 찾는 사람 드물구나 / 居然到者稀
누가 성인이 원하던 바대로 따르리오 / 誰從聖人欲
오래도록 대부(큰 벼슬)의 그른 것에 어두웠네 / 久昧大夫非
한 번 맺은 군신의 계분 / 一理君臣契
깊은 충심 노병으로 어긋났네 / 深衷老病違
다만 매화와 버들빛만이 / 只應梅柳色
예전처럼 들어와서 옷깃 적시누나 / 依舊入霑衣
하였다. 내가 70살 되던 을유년 원일에 노상국의 시에 차운하기를,
문득 새해 옴을 깨달으니 / 斗覺新年至
누가 70살이 드물다고 하였는고 / 誰言七十稀
영화와 쇠락함 실컷 겪었고 / 飽經榮與落
옳고 그른 일 많이도 견디었네 / 多耐是兼非
오래 살고 단명하는 것은 하늘이 응당 정한 것이고 / 修短天應定
행하고 쉬는 것 이치이니 어찌 어길쏘냐 / 行休理敢違
물러날 것 생각하였다가 / 思量乞身事
기필코 관복을 벗으리라 / 準擬解朝衣
하였으니, 이 시는 장차 벼슬에서 물러나고자 하면서 회포를 표현한 것이다. 80살이 되던 을미년 원일에 또 앞의 시에 차운하기를,
인생 70이 드물다면 / 人生稀七十
80이란 더욱 희귀하리 / 八十更應稀
위무공의 경계를 배우려 하였지만 / 欲學武公戒
전부터 거원의 지난날 잘못했다는 것도 알았노라 / 曾知蘧瑗非
은혜를 탐하다 몸이 묶여 있고 / 食恩身局束
물러나기 바랬지만 일이 어긋났네 / 乞退事乖違
원하는 일 언제나 될꼬 / 志願何時遂
슬프구나 먹고 입는 것 때문일세 / 嗟哉食與衣
하였다. 여러 번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여 이 시로써 송서교(西郊 송찬)에게 보이니, 송서교가 화답하였다. 그 한 연구에,
성안에 그대로 있는 것 옳은 일이요 / 城內仍留是
전원에 가려는 것 그른 일일세 / 林間欲去非
하였으니, 이는 병란이 아직 그치지 않았으므로, 물러나 향촌(鄕村)에 살기 어렵기 때문에 이렇게 시에 쓴 것이다. 내가 다시 시를 지어 보내기를,
작록은 사람마다 누릴 수 있지만 / 爵祿人皆享
늙도록 사는 것은 세상에 드무네 / 期願世固稀
머무르라고 하는 것도 과연 옳지만 / 仍留果爲是
가려는 것도 그름은 아닐세 / 欲去未應非
늙었으니 마땅히 물러가야지 / 晩節尤宜退
처음 마음 어찌 변할쏘냐 / 初心詎肯違
요분(전쟁)은 언제나 평정되리 / 妖氛何日定
다만 갑옷을 입고 나가 싸우기를 바랄 뿐이네 / 唯望一戎衣
하였다. 병신년 늦겨울에서야 퇴휴(退休)의 은전을 받았다. 생각하면 여생은 많지 않고 휴일인들 얼마나 되리오마는, 소원을 얻었으니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있겠다.
○ 가정(嘉靖) 경술년 봄에 나의 백부(伯父)가 대구 부사(大邱府使)로 있었는데, 나는 이조 좌랑으로 있다가 벼슬을 그만두고 대구로 가서 백부에게 문안한 일이 있었다. 영천(永川)과 하양(河陽)은 모두 인접한 고을이었는데, 그때 영천 군수는 사문(斯文) 김취문(金就文)이고, 하양 현령(河陽縣令)은 사문 민호(閔箎)였다. 민공과는 일찍이 교분이 있었는데, 하루는 사명으로 대구부에 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영천(永川) 명월루(明月樓)는 사람들이 승경이라고 하니, 어찌 한번 구경가지 않습니까.” 하거늘, 나는 그 고을 군수와 안면도 없으려니와 더욱 벼슬이 없는 사람으로 구경 놀이는 온당치 못하다고 하며 사양하니, 민공이 억지로 끌고가 보니, 과연 명월루는 승경이었다. 올라가서 구경한 뒤에 작은 술상을 차려놓고 담화하는데, 군수 김취문과 민공이 나에게 시(詩)를 짓기를 여러 번 청하였으나 사양하고 짓지 않았다. 술이 얼큰해져서 김공이 칠언 율시 한 수를 써서 내놓으며 말하기를, “평생 시를 지은 적이 없으나 오늘은 훌륭한 시를 보고자 감히 이처럼 약자가 선수를 쳤나이다.” 하거늘, 내가 즉석에서 화시를 지어 주었다. 이튿날 돌아올 때에 듣자니 어제 김취문의 시는 명월루의 현판에 있는 옛 시를 자기 시인 양 써서 나를 속였다는 것이다. 모두들 껄걸 웃고 작별하였다. 그 뒤에 참판 조사수(趙士秀) 공의 집에 가서 뵈오니, 조공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내가 영남 관찰사로 영천(永川)에 가서 명월루에 있는 그대의 시를 보았는데, 그 한 연구(聯句 연구는 율시의 둘째 셋째 구절)에,
꾀꼬리 한 소리에 봄빛은 다 가고 / 黃鳥一聲春色盡
새파란 십리 들에 석양이 더디다 / 靑蕪十里夕陽遲
하였는데, 매우 아름다운 시라고 칭송하였다. 이는 당시 영천 군수였던 김취문이 나의 졸시(拙詩)를 현판(縣板)으로 만든 것이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난 계해년 봄에 내가 영남 지방의 관찰사로 영천에 가니 시판(詩板)이 그때까지도 있었다. 그러나 김취문과 민호는 모두 작고하였으니, 옛일의 감회를 마지 못하겠다.
○ 고려 때에 이규보(李奎報)와 진화(陳澕)는 문장이 당시에 떨쳤다. 한림별곡(翰林別曲)에 이른바, “이정언(李正言)ㆍ진한림(陳翰林)의 쌍운에 주필(走筆 빠르게 쓰는 것)이라 함은 곧 이규보와 진화를 말함이니, 두 사람은 빨리 짓는 것으로 같이 명성을 날렸다. 이규보는 벼슬이 태보평장사(太保平章事)에 이르고, 진화는 우사간(右司諫)에 이르렀는데, 그들 연세의 많고 적음은 알 수 없다. 서거정(徐居正)이 편찬한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이르기를, “동국의 명필을 말하자면 김생(金生)이 제일이고, 다음은 요학사(姚學士) 극일(克一)과 중 탄연(坦然)이라.” 하였다. 그런데 이규보의 평론에는, “최충헌(崔忠獻)이 제일이고 탄연이 두 번째, 유신(柳紳)이 세 번째이다.” 하였으니, 이는 권력자에게 아부한 것으로 공론(公論)이 아니다. 만일 권력에 아부하여 명예를 얻는다면 문장인들 어찌 보잘 것 있으리오. 그가 지은 두문시(杜門詩)에 이르기를,
인간 세상 요란하게 비방하는 소리 피하기 위해 / 爲避人間謗議騰
문닫고 높이 누워 자니 머리마저 헝클어졌네 / 杜門高臥髮鬅鬙
처음은 방탕한 사내 여자 생각하는 것 같더니 / 初如蕩蕩懷春女
점차 고요하게 도 닦는 중을 닮아가네 / 漸作寥寥結夏僧
아이가 옷을 당기며 재롱떠는 것 족히 즐겁고 / 兒戲牽衣聊足樂
찾아든 손 문을 두드려도 대답조차 할 것 없네 / 客來敲戶不須경
빈궁(貧窮)과 영달(榮達), 명예와 수치는 모두 하늘의 명이거늘 / 窮通榮辱皆天賦
어쩌다 굴뚝새가 대붕(大鵬)을 부러워하리 / 斥鷃何曾羨大鵬
하였으니, 당시에도 대단한 비방이 있었던 것이다.
○ 세조(世祖)는 선위(禪位)를 노산(魯山 단종)에게서 받고 노산을 높여 상왕(上王)이라고 하니, 박팽년(朴彭年)ㆍ성삼문(成三門)ㆍ유성원(柳誠源)ㆍ이개(李塏)ㆍ하위지(河緯地)ㆍ유응부(兪應孚)ㆍ김질(金礩)과 성삼문의 부친 성승(成勝)이며, 상왕의 처남 권자신(權自愼) 등이 몰래 상왕의 복위(復位)를 꾀하였는데, 거사하기로 약속한 날에 기회를 잃자 김질이 성사가 못 될 줄을 알고 달려가 그의 장인 상국(相國) 정창손(鄭昌孫)에게 고하여 궐내에 들어가 변고를 아뢰었다. 김질은 녹공을 받고 그 나머지는 모두 주살(誅殺)되었다. 대사를 약속하고서 기회를 잃은 것이나 김질이 고변한 것은 다 하늘의 뜻이지 어찌 사람의 힘이라 하겠는가. 당초에 세조가 안평대군(安平大君)과 대신 김종서(金宗瑞) 등을 주살하고 정난공신(靖難功臣)이 될 때 박팽년과 성삼문은 집현전 숙위(宿衛 당직)로 있었으므로 전례에 따라서 공신훈에 참여하였다. 성삼문이나 김질 등 공신들이 차례로 연회를 베푸는데 성삼문은 홀로 베풀지 않았고, 또 세조가 선위를 받을 때는 예방 승지(禮房承旨)로 있으면서 국새를 안고 실성통곡(失聲痛哭)하였다. 세조가 만약 그만이 연회를 베풀지 않은 것이라든지 선위(禪位)할 때 실성통곡한 정상을 의심하고 힐문하였다면 어찌 위태롭지 않았을까. 성삼문의 처사는 가히 오활(迂闊)하다고 하겠다. 박팽년은 당시 충청 감사로 있으면서 모든 상소(上疏)에 신(臣) 자를 쓰지 않고 다만 박아무개라고만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세조가 만일 살펴서 깨닫고 신 자를 쓰지 않은 내심을 힐문하였다면 어찌 위태롭지 않았으리오. 박팽년의 처사도 오활한 것이다. 대사를 거행하고자 하면서 처사를 이처럼 오활하게 하고서야 어찌 탄로와 실패를 면하겠는가.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이 편찬한 《육신전(六臣傳)》은 세상에 드물므로 보는 사람도 많지 않다. 박팽년은 문장이 충담(沖澹)하고 필법이 고묘(高妙)하였으며, 성삼문은 세종조에 중시(重試)에 장원하여 영총(榮寵)이 지극하고 명망(名望) 또한 중하였으며, 유성원ㆍ이개ㆍ하위지도 모두 세종의 총애를 받은 사람들이며, 유응부는 무관 재상이었다. 세조가 영의정을 지낼 때 나라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박팽년이 시를 짓기를,
묘당 깊은 곳에서 처량한 거문고 소리 들리는데 / 廟堂深處動哀絲
일만 가지 일 지금 와선 모두 알지 못하겠네 / 萬事如今摠不知
버들은 푸른데 바람은 솔솔 불어오고 / 柳綠東風吹細細
꽃은 붉은데 봄날은 정히 더디기도 하네 / 花明春日正遲遲
선왕의 구업은 금궤에 간직하고 / 先王舊業抽金櫃
성주(聖主)의 신은은 옥치를 보내 왔네 / 聖主新恩倒玉巵
즐겁지 않은 정이야 어찌 오래 가랴 / 不樂何爲長不樂
노래하고 술마시며 시 지으니 태평시절이로세 / 賡歌醉賦太平時
하였다.
○ 과장(科場)에서 남의 글을 표절하는 것은 금법(禁法)이 매우 엄격하나, 명리(名利)를 좋아하고 파렴치한 무리들은 도도하게 범하여 사풍(士風)을 불미스럽게 하였다. 알성(謁聖 공자 사당에 참배)이 있은 후에 제술(製述 시나 부 같은 것을 지음)로 인재를 취하는 것이 조종조(祖宗朝) 이후에 점차로 잦아져 급작스레 요란하게 되자, 뽑는 것이 정밀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표절하여 합격하는 자가 또한 많았다. 명종 때에 외척 권신(外戚權臣)의 아들인 이정빈(李廷賓)은 과거 공부도 하지 않고서 표절로 장원을 하고 빛나고 중요한 벼슬을 역임하였으므로 공론(公論)이 일어나 마침내 삭직(削職)을 당하였고, 같은 때에 또 여계선(呂繼先)이란 자는 문사 차천로(車天輅)의 글을 표절하여 장원을 하였는데, 일이 탄로되어 국문을 당하고 또한 과거에서도 삭제되었으니, 국가의 수치가 어떠하리오. 알성한 뒤에 간혹 친히 임(臨)하여 시관(試官)에게 경서를 강(講)하게 하여 옛날에 경서를 펴 들고 어려운 곳을 질문하던 것처럼 해서 혹은 급제를 혹은 상(賞)을 주었더라면 또한 족히 많은 선비들을 위안하게 할 것이니, 제술(製述)로써 인재를 취하는 것은 하지 않는 것이 체모에 합당할까 한다. 나의 조부(소요공 심정)는 양천현(陽川縣) 동북쪽에 있는 공암(孔巖) 서쪽 강 연안에 집을 짓고 이름을 소요당(逍遙堂)이라 하였다. 이곳 지세는 한강(漢江) 이남의 강 연안에 있는 정자 중에서 가장 승경인지라, 당시 명사(名士)들이 시를 지어 정자 벽에 가득하였다. 그 중 남곤(南袞)의 율시 두 수 있는데, 그 한 수에,
물은 여주로부터 산은 화산(삼각산을 말함)에서 내려와 / 水從驪漢山從華
모두가 정자 앞으로 모여들어 기이한 자태 나타내네 / 盡向亭前更效奇
외로운 섬 교묘하게도 강 넓은 곳에 당해 있고 / 孤島巧當江濶處
긴 연기 달 뜰 때 일어나네 / 長煙遍起月生時
바라보니 중경 어귀와 볼수록 같고 / 望中京口看猶似
꿈속에 구지(중국 서북방의 산위에 있는 곳)에 와 있는 듯 의심되네 / 夢裏仇池到自疑
그대가 소요하려고 하더니 어찌 그리도 급히 되었나 / 君欲逍遙寧遽得
이 다음 늙어서 흰 수염 날리며 길이 쉬러 가겠네 / 他年長往鬢垂絲
하였다. 또 사문(斯文) 장옥(張玉)은 서문을 4. 6변려체(倂儷體)로 5, 60구나 지었는데, 사람들은 가작(佳作)이라 칭찬하며 등왕각(滕王閣) 서문에 비유하였다. 그 첫머리에 이르기를,
파릉현 북쪽과 / 巴陵縣北
한양성 서쪽에 / 漢陽城西
삼도(공암과 다른 두 조그마한 섬)가 떠 온 것을 / 三島浮來
육오(바다의 삼신산을 자라가 떠받들고 있다 함)가 이고서 있다네 / 六鰲載立
십리나 되는 긴 강은 / 十里長江
해구로 굽이쳐 흐르고 / 流下海口
천척이나 되는 절벽은 / 千尺斷岸
깊은 물에 달려든 듯 / 走入波心
하였고 또,
천향이 소매에 가득하니 / 天香滿袖
멀리서 서호의 바람이 회오리치고 / 遠飄四湖之風
강우가 낯을 스치니 / 江雨入顔
북궐에서 하사한 술 조금 있네 / 微醒北闕之酒
하였다. 이밖에도 경구(警句)가 매우 많으나 내가 젊어서 보았으므로 그 전편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그저 한스럽다.
○ 예나 지금이나 문인으로서 저술한 잡기(雜記)가 많은데, 내가 본 것을 들어보면 《남촌철경록(南村輟耕錄)》ㆍ《강호기문(江湖記聞)》ㆍ《유양잡조(酉陽雜俎)》ㆍ《시인옥설(詩人玉屑)》ㆍ《학림옥로(鶴林玉露)》등의 서적과 고려 때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 이제현(李齊賢)의 《역옹패설(櫟翁稗說)》과 우리 나라에서는 서거정(徐居正)의 《태평한화(太平閑話)》ㆍ《필원잡기(筆苑雜記)》ㆍ《동인시화(東人詩話)》, 이육(李陸)의 《청파극담(靑坡劇談)》,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 조신(曹伸)의 《소문쇄록(謏聞鎖錄)》, 김정국(金正國)의 《사재척언(思齋摭言)》, 송세림(宋世琳)의 《어면순(禦眠楯)》,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 권응인(權應仁)의 《송계만록(松溪漫錄)》 등은 모두 견문을 기록한 것으로 한가할 때 볼 수 있는 자료이다. 내가 신미년 가을부터 몸소 겪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을 연대에 따라서 기록한 것이 모두 몇 가지가 되는데, 그 이름을 《견한잡록》이라 하였다. 비록 여가를 보내는데 주를 두어서 쓸모없고 난잡하기는 하지만, 꼭 모두가 쓸데없고 무익한 말만은 아닐 것이니, 보는 이는 부디 비웃지 말았으면 한다. 만력 기해년 봄에 청천당(聽天堂)은 발문(跋文)을 쓴다.


[주D-001]규와 벽 : 28수(宿) 중의 두 가지로, 규는 문장을 맡은 별이고, 벽은 정치를 맡은 별이다.
[주D-002]방고 : 구방고(九方皐)로, 옛날 말을 잘 알아보는 사람이었다.
[주D-003]온교 : 동진(東晉) 사람으로, 양자강에서 무소의 뿔을 불에 태워서 비춰 보니, 그 강 속이 환하게 들여다 보였다고 한다.
[주D-004]칠정산(七政算) : 내편(內篇)과 외편(外篇)으로 되어 있는데, 세종 때 이순지(李純之)ㆍ김담(金淡) 등이 왕명으로 편찬한 역서. 내편은 중국 원 나라의 《수시력법(授時曆法)》과 명 나라의 《통궤력법(通軌曆法)》을 참고하여 한양을 기준으로 삼아 우리 나라의 도수에 맞도록 만든 것이고, 외편은 《회회력경통(回回曆經通)》과 《가령력서(假令曆書)》를 개정 증보한 것이다.
[주D-005]강수 …… 김생 : 강수(康首)는 신라 때의 문장가이고, 김생(金生)은 신라 때의 명필이다.
[주D-006]신륵사 : 일명 벽절이라 하는데, 그것은 그 절의 탑이 벽돌로 되어서이다.
[주D-007]난정 : 중국 절강성 회계현 산음(山陰) 지방에 있던 정자로, 동진(東晉) 때에 많은 명사들이 그곳에서 모임을 갖고 놀았는데, 지금까지 왕희지(王羲之)가 지은 난정서(蘭亭序)가 유명하다.
[주D-008]북산으로 못 돌아간 지 오래로구나 : 남북조 시대 제(齊) 나라의 주옹(周顒)이라는 사람이 북산에 은거하며 덕행이 있었는데, 황제가 불러 나가서 벼슬하다가 여의치 못하자, 다시 북산으로 돌아가려 하니, 그와 동지인 공치규(孔稚圭)라는 사람이 북산이문(北山移文)을 지어서 산은 그런 사람이 오는 것을 거절한다는 뜻을 밝혔다.
[주D-009]피화(被禍) : 명종 때에 동료인 안명세(安名世)의 필화(筆禍) 사건을 변호하여 주다가 함께 사형을 당하였다.
[주D-010]문생과 좌주 : 과거에 합격된 사람이 그 과거의 시험관에게 문생[제자]이라고 하고, 그 과거의 시험관을 좌주라고 부른다.
[주D-011]의발 : 불교 선종(禪宗)에서 스승이 죽을 때에 자기의 제자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사람에게 자기가 쓰던 가사(袈裟)와 바리때를 전해주고 죽는데, 이것은 그를 자기의 후계자로 인증한다는 뜻이다.
[주D-012]무산 : 중국 호북 지방에서 양자강 물을 거슬러 사천 지방으로 가려면 무산이 있는데, 예전에 초(楚) 나라 양왕이 그 무산 아래에 놀러갔다가 가끔 미인을 만나서 흥겹게 놀았는데, 그 미인은 무산의 신녀(神女)라고 자칭하면서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된다고 하였다.
[주D-013]낙신부를 …… 못 보노라 : 옛날 중국 삼국 시대의 조조(曹操)의 아들 조비(曹丕)와 조식(曹植)이 함께 견씨(甄氏) 집 처녀를 사모하다가, 결국은 형인 조비에게 빼앗겼다. 그 후에 조비는 아버지 조조의 후계자로 황제가 되었는데, 그는 견씨를 사랑하던 마음이 식어져서 다른 여자를 사랑하자 견씨가 원망하는 말을 하였다 하여 사약을 내려 죽였다. 그 후에 조식이 꿈에 그 견씨를 만나서 예전에 사모하였다는 것을 호소하였으나, 그것은 역시 꿈이어서 바로 깨고 말았다. 조식은 섭섭함을 이기지 못하여 낙신부(洛神賦)를 지었는데, 견씨를 낙수(洛水)의 신녀라고 비유하고 그 신녀가 낙수 물 위를 사뿐사뿐 걸어오는데, 버선에 물이 묻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먼지가 난다고 형용하였다.
[주D-014]호두연함 : 중국 한(漢) 나라 반초(班超)의 상이 범의 머리에 제비 턱이므로, 후(侯)로 봉해질 상이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 말대로 후일 후(侯)에 봉해지게 되었다.
[주D-015]삼괴 구극 : 삼괴는 3재상의 위(位)를 말하는 것으로, 중국에서는 3재상이 세 계수나무 아래에 좌정했다. 그러므로 3공과 같음. 구극은 9경(九卿)을 말한다.
[주D-016]예장 : 예(豫)와 장(樟)은 모두 좋은 재목으로, 재능이 있는 사람을 비유한다.
[주D-017]한림별곡(翰林別曲) : 고려 고종(高宗) 때에 생긴 시가의 하나로, 학자들이 벼슬을 그만두고 향락적이고 풍류적인 생활 감정을 표현한 노래이다. 시부ㆍ명필ㆍ명주(名酒)ㆍ화훼ㆍ음악ㆍ누각ㆍ추천 등이 실려 있다.

 

 

 

 목은시고 제4권
 시(詩)
삼각산(三角山)을 바라보며


세 봉우리가 태초 때부터 깎여 나왔는데 / 三峯削出太初時
하늘 가리킨 선인장은 천하에 드물구나 / 仙掌指天天下稀
무성한 솔 그림자엔 해 달 빛이 스며들고 / 松影扶疎橫日月
짙고 옅은 바위 빛엔 연기 안개 섞이었네 / 巖姿濃淡雜煙霏
어깨 솟구친 나그네는 나귀 타고 가는데 / 聳肩有客騎驢去
신선 된 어떤 이는 학을 타고 돌아가는고 / 換骨何人駕鶴歸
젊어서부터 이미 참다운 면목을 알거니 / 自少已知眞面目
사람들이 등 뒤엔 옥환이 살쪘다 말하네 / 人言背後玉環肥


[주D-001]선인장(仙人掌) : 중국 화산(華山)에 있는 봉우리 이름인데, 삼각산(三角山)을 화산이라고도 부르므로 거기에 빗대어 한 말이다. 당(唐)나라 최호(崔顥)의 시에, “무제의 사당 앞엔 구름이 흩어지려 하고, 선인장봉 위에는 비가 처음 개었도다.[武帝祠前雲欲散 仙人掌上雨初晴]” 하였다.
[주D-002]어깨 …… 가는데 : 소식(蘇軾)의 시 〈증사진하충수재(贈寫眞何充秀才)〉에, “또 보지 못했나, 눈 속에 나귀 탄 맹호연이 눈썹 찌푸리고 시 읊으며 산처럼 어깨 솟구친 것을.[又不見雪中騎驢孟浩然 皺眉吟詩肩聳山]” 한 데서 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