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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조선국 소의흠숙정현왕후(昭懿欽淑貞顯王后) 선릉지(宣陵誌) (펌)

아베베1 2011. 5. 15. 17:47

 

 

용재집 제9권
 산문(散文)
유명 조선국 소의흠숙정현왕후(昭懿欽淑貞顯王后) 선릉지(宣陵誌)


삼가 살펴보건대, 왕후의 성(姓)은 윤씨(尹氏)이니 파평(坡平)의 세가(世家) 출신이시다. 그 원조(遠祖)인 휘(諱) 신달(莘達)이 고려 태조를 도와서 삼한공신(三韓功臣)에 봉(封)해졌으며, 그 손자인 윤금강(尹金剛)은 지위가 복야(僕射)에 이르렀다. 이분이 휘 집형(執衡)을 낳았는데 이어서 복야가 되었으며, 그 아들인 문하시중(門下侍中) 윤관(尹瓘)은 숙종(肅宗)ㆍ예종(睿宗) 두 왕조를 섬기면서 출장입상(出將入相)의 국량을 발휘하여 여진(女眞)을 평정하고 구성(九城)을 설치하였는바, 영원군개국백(鈴原郡開國伯)에 봉해졌다. 문하시중이 정당문학(政堂文學) 윤언이(尹彦頤)를 낳았고, 정당문학이 병부 시랑(兵部侍郞) 윤돈신(尹惇信)을 낳았으며, 증손(曾孫)인 감찰어사(監察御史) 윤순(尹純)에 이르러서 영평부원군(鈴平府院君) 윤부(尹珤)를 낳았다. 그 후로 휘 척(陟)은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문하평리(門下評理) 윤승순(尹承順)을 낳았으니, 이분이 고조이다. 증조는 본조(本朝)의 좌명공신(佐命功臣)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 윤곤(尹坤)이고, 조부는 증(贈)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 윤삼산(尹三山)이다. 부친은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 윤호(尹壕)이며, 모친 연안부부인(延安府夫人)은 성이 전씨(田氏)로서 증(贈)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 좌명(佐命)의 따님이니 역시 연안(延安)의 망족(望族)이다. 천순(天順) 임오년(1462, 세조8) 6월 무자(戊子)에 신창현(新昌縣)의 관사(官舍)에서 후(后)가 탄생하셨다.
당초 부부인이 신녀(神女)가 채색 구름을 타고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이어 임신이 되었으며 이윽고 후를 낳았기에, 부모가 기이하게 여기면서 귀인(貴人)이 될 징조임을 이미 알았다.
성화(成化) 계사년(1473, 성종4)에 후는 12세의 나이로 뽑혀서 궁(宮)에 들어가 숙의(淑儀)에 봉해지셨으니, 곧 성묘(成廟)께서 재위하신 지 5년째 되던 때이다. 후는 성품이 총민(聰敏)하고 마음가짐이 순수하고 근신(謹愼)하여, 위로 정희(貞熹)ㆍ소혜(昭惠) 두 후가 각별히 사랑하여 부도(婦道)를 가르치니 이를 잘 받들고 따라서 어김이 없으셨다. 이에 정희왕후가 매양 칭찬하기를 “윤 숙의(尹淑儀)로 시험해 보니, 궁중의 여인은 나이 어릴 때 뽑아야겠다. 그래야 가르침을 익히기가 쉽다.” 하셨다.
마침 왕비 윤씨(尹氏)가 죄로 폐출(廢出)되어 경자년(1480, 성종11) 10월에 마침내 중궁(中宮)의 자리에 오르시니, 요조숙녀(窈窕淑女)를 찾느라 오매불망 애쓸 것도 없고
갈류(葛藟)의 덕화(德化)가 본래부터 상궁들 사이에 스며 있었다. 온화한 몸가짐으로 예(禮)를 따르는 태도가 오랠수록 더욱 경건하시니, 성묘(成廟)가 매양 칭찬하기를 “부인들은 투기하지 않는 이가 드문 법인데, 어진 배필을 얻고부터는 나의 마음이 편안하다.” 하셨다. 소혜왕후(昭惠王后)도 기쁜 빛이 얼굴에 넘쳐 말하기를 “중궁으로 좋은 사람을 얻었으니, 밤낮에 무엇을 근심하리요.” 하셨다.
이듬해 신축년에 명(明)나라 헌종황제(憲宗皇帝)가 제칙(制勅)을 내려 “윤씨는 일찍부터 왕을 섬겨 능히 내치(內治)를 이루었고 오직 맡은바 직분을 수행하여 오래도록 변치 않았다. 이에 특별히 조선국왕(朝鮮國王)의 계비(繼妃)로 봉하고 고명(誥命)을 내려 그대의 영광으로 삼노니, 공경히 봉행(奉行)하여 규곤(閨閫)을 빛내도록 하라.” 하고, 아울러 관복(冠服)과 저사라(紵絲羅), 서양포(西洋布) 등을 하사하여 총애로운 은명(恩命)이 빛나니, 온 나라 사람들이 함께 영광스러워하였다.
당시 영원공(鈴原公)이 아직 생존하시어 후가 자주 친정집에 납시어 헌수(獻壽)하시니, 나라 사람들이 성사(盛事)라 여겼다.
홍치(弘治) 임자년(1492, 성종23)에는 빈(嬪)들을 거느리고 창덕궁(昌德宮)의 금원(禁苑)에서 친잠(親蠶)을 하셨으니, 근본을 도타이하는 데 힘쓰는 뜻이었다. 성묘가 이 일로 해서 사면령을 반포하셨다.
성묘가 승하하시자 울부짖고 가슴을 치면서 음식을 들지 않아 거의 생명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셨다가, 소혜왕후의 구호 덕분에 건강을 지키실 수 있었다.
연산조(燕山朝)에는 왕대비(王大妃)로 봉해지고 자순(慈順)이란 존호가 가상(加上)되었다. 소혜왕후의 상(喪)에 연산주(燕山主)가 상기(喪期)를 짧게 줄이려 하자, 후가 예(禮)에 의거하여 불가하다는 입장을 견지하는 한편 “나는 감히 따르지 못하겠다.” 하시니, 연산주가 매우 화를 내면서 ‘부인삼종(婦人三從)’이란 말로써 답하였다. 이에 후가 탄식하면서 “내가 소혜(昭惠)께 죄를 얻을 것이 분명하구나.” 하셨다.
연산주가 말년에 무도함이 더욱 심해지니 조야(朝野)가 위태하여 조석(朝夕)을 보장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정덕(正德) 병인년(1506, 중종1) 9월에 뭇 신하들이 후의 분부를 받들고 지금의 성상(聖上)을 추대하여 대통(大統)을 잇게 하니, 중흥의 공업(功業)이 옛날에 비해 더욱 빛났다. 이후로는 국정에 하나도 간여하지 않았으나 국가를 위한 심원한 계책은 잠시라도 잊은 적이 없으셨고, 환심이나 사는 고식적인 은혜는 털끝만큼도 내려 준 적이 없으셨다. 장경왕후(章敬王后)가 훙서(薨逝)했을 때, 후는 어진 덕을 지녔음에도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을 애석해하고 원자(元子)가 어미를 잃은 것을 불쌍히 여겨 통곡하며 슬퍼해 마지않으셨으며, 그 세자를 보살피신 것으로 말하자면 외간에서 다 알지 못하는 점이 있다. 궁중에
작서(灼鼠)의 변고가 있었을 때 어명으로 나인(內人)을 국문하였으나 실상을 밝혀내지 못하자, 후가 언문 서찰을 추관(推官)에게 보내시어 곧 사건을 밝히고 범인을 처벌하였다. 이에 조정의 사대부로부터 아래로 선비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입을 모아 통쾌하다고 하였다.
오호라, 성상을 탄생시켜 중도에 끊어질 뻔한 왕통을 크게 이었고, 동궁을 잘 보호하여 만세 왕업의 바탕을 더욱 공고히 다졌으니, 비록 옛날의 현비(賢妃)라 할지라도 성대한 덕과 공(功)이 이처럼 우뚝한 이가 있지는 않았다.
후가 일찍이 질병이 심하신 적이 있었는데, 상(上)이 친히 내원(內苑)에서 기도하면서 향을 사르고 하늘에 축원하시자 병환이 나았다. 이에 사람들은 효성의 감응이라고들 하였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또 병환이 들어 여러 달을 끌었다. 상이 늘 시약(侍藥)하면서 직접 맛을 보지 않고는 감히 약을 올리지 않으셨으나, 끝내 효험을 보지 못하고 경복궁(景福宮)의 정침(正寢)에서 훙서(薨逝)하시니, 가정(嘉靖) 경인년(1530, 중종25) 8월 22일이다. 춘추는 69세이다.
상이 슬픔으로 죽을 들지 못하신 것이 3일이었고, 초빈(草殯)을 차린 뒤에도 날마다 오곡전(五哭奠)을 올리며 지극히 슬퍼하시니 좌우 사람들이 차마 듣지 못하였으며, 안으로 궁중과 밖으로 조정 사람들이 모두들 목 놓아 통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예관(禮官)이 재신(宰臣)들을 모아서 시호(諡號)를 의논하니 모두 “시법(諡法)을 살펴보면 ‘크게 사려하여 능히 다스림[大慮克就]을 정(貞)이라 하고 행실이 밖으로 드러남을 현(顯)이라 한다.’ 하였다. 대행대비(大行大妃)께서는 시국이 혼란하던 날에 큰 계책을 결정하여 대업(大業)이 다시 흥성하게 되었고 나라가 평안하던 때에 큰 의심을 분변하여 대본(大本)이 더욱 견고하게 되었으니, 정(貞)하지 않은가. 덕이 중궁(中宮)에서 드러나 음험하고 부정(不正)한 청탁이 없었고 교화가 외정(外庭)에서 행해져 엄숙하고 화락한 거동이 있었으니, 현(顯)하지 않은가. 삼가 ‘정현왕후(貞顯王后)’란 시호를 올린다.” 하였고, 또 ‘소의흠숙(昭懿欽淑)’이란 휘호(徽號)를 가상(加上)하였다. 그리고 이해 10월 29일 을유(乙酉)에 선릉(宣陵)의 좌측 간좌 곤향(艮坐坤向)의 둔덕에 안장(安葬)하였으니, 유명(遺命)을 따른 것이다.
오호라, 후의 성덕(聖德)은 두루 갖춰지지 않음이 없었거니와, 효성에 이르러서는 더욱이 천성에서 나온 것이라서 위로 자전(慈殿)을 모심에 마음을 지극히 기쁘게 해 드리고 무릇 제철에 나는 먹거리를 만나면 먼저 원묘(原廟)에 올림에 끝내 조금도 해이하지 않으셨다. 또 다른 소생(所生)의 자녀들을 마치 자기 자식처럼 사랑하고 보살피셨으니, 연산주가 세자로 있을 때에는 자기 생모가 아닌 줄 알지 못하였다.
병환이 들어서는 가진 재물을 나누어 두루 친척들에게 하사하셨으되, 일찍이 은택을 끼쳤다는 평판을 바란 적이 없었다. 또 한번은 메추라기 고기를 먹고 싶어하여 친정쪽 사람이 이를 얻어서 바친 적이 있었는데 후는 ‘바깥사람이 알지 못하도록 하라’고 경계하셨으니, 사람들이 알고서 메추라기 고기를 바치는 폐단이 생길까 우려하셨기 때문이다. 질병이 들었을 때는 사람의 정신이 흐려지기 쉬운 법인데 성심(聖心)의 근신(謹愼)하기가 이와 같기에 이르셨으니, 평상시의 성행(聖行)을 대략 알 수 있을 것이다.
오호라, 후의 성덕(聖德)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바가 있거니와, 내행(內行)의 아름다움에 이르러서는 숨겨져 드러나지 않았다. 삼가 사람들의 이목에 남아 있는 것들을 거두어 모아서 기록하니, 천백 분의 하나 둘일 뿐이다. 그러나 후인들이 이를 통하여 징험해 보면 비록 옛날의
도신(塗莘)이나 임사(任似)라 할지라도 이보다 더하진 않을 터이니, 오호라, 성대하도다.
후는 금상(今上)을 탄생시켰고, 또 세 공주를 낳았으나 모두 요절하였다. 금상께서는 처음 파원부원군(坡原府院君) 윤여필(尹汝弼)의 따님을 맞아서 중궁(中宮)으로 봉하셨으니, 곧 장경왕후(章敬王后)이시다. 이에 1남 1녀를 낳으셨으니, 세자는 증 의정부 우의정 박용(朴墉)의 따님을 아내로 맞으셨고, 효혜공주(孝惠公主)는 연성위(延城尉) 김희(金禧)에게 하가(下嫁)하셨다. 지금의 중궁은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윤지임(尹之任)의 따님으로 3녀를 낳으셨으니, 맏이인 의혜공주(懿惠公主)는 청원위(淸原尉) 한경록(韓景祿)에게 출가하였고, 나머지 두 공주는 아직 어리다. 전 빈(嬪) 박씨(朴氏)는 1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드님은 전 복성군(福城君) 이미(李嵋)로 전 현감(縣監) 윤인범(尹仁範)의 따님을 아내로 맞았고, 맏따님인 혜순옹주(惠順翁主)는 광천위(光川尉) 김인경(金仁慶)에게 하가하였고, 둘째 혜정옹주(惠靜翁主)는 당성위(唐城尉) 홍려(洪礪)에게 하가하였다. 귀인(貴人) 홍씨(洪氏)는 1남을 낳았으니, 금원군(錦原君) 이령(李岭)으로 돈녕부 주부(敦寧府主簿) 정승휴(鄭承休)의 따님을 아내로 맞았다. 숙원(淑媛) 홍씨(洪氏)는 1남을 낳았으니, 해안군(海安君) 이희(李㟓)로 충청도 수군절도사(忠淸道水軍節度使) 유홍(柳泓)의 따님을 아내로 맞았다. 숙원 안씨(安氏)는 1남을 낳았으니, 영양군(永陽君) 이거(李岠)이다. 숙원 이씨(李氏)는 2녀를 낳았으니, 맏이인 정순옹주(貞順翁主)는 여성위(礪城尉) 송인(宋寅)에게 하가하였고, 둘째는 아직 어리다.
가정(嘉靖) 9년 경인년(1530, 중종25) 10월 일에 삼가 지(誌)를 적는다.


 

[주D-001]갈류(葛藟)의 덕화(德化) : 왕비가 질투심이 없어서 아랫사람들을 잘 거느림을 뜻한다. 《시경》 주남(周南) 규목(樛木)에, 문왕(文王)의 비(妃)인 후비(后妃)가 질투가 없어 중첩(衆妾)이 그 덕을 즐거워한다는 것을 칭송하여 “남산에 아래로 굽은 나무가 있으니, 칡넝쿨이 얽혔도다. 화락한 군자여, 복록이 편안하네.[南有樛木 葛藟纍之 樂只君子 福履綏之]” 하였다.
[주D-002]작서(灼鼠)의 변고 : 중종(中宗) 22년 2월 25일, 세자의 생일에 누가 쥐를 잡아서 사지와 꼬리를 자르고 입ㆍ귀ㆍ눈을 불로 지져서 동궁(東宮)의 북정(北庭) 은행나무에 걸어 두고 동궁을 저주한 사건이다. 그 후 3월 초하루에도 같은 사건이 대전(大殿)의 침실 곡란(曲欄)에서 일어났다.
[주D-003]도신(塗莘) : 우(禹) 임금이 도산(塗山)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고, 문왕(文王)이 신(莘) 땅의 여인인 태사(太似)를 아내로 맞이했던 데서 온 말이다.
[주D-004]임사(任似) :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어머니인 태임(太任)과 무왕(武王)의 어머니인 태사를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