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贈領議政吉昌府院君權公神道碑銘

有明朝鮮國輸忠衛社協策靖難同德佐翼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監春秋館事世子傅吉昌府院君諡翼平公權公碑銘) 幷序

아베베1 2011. 5. 16. 16:36

동문선 제121권
 비명(碑銘)
유명조선국 수충위사협책정난동덕좌익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감춘추관사 세자부 길창부원군 시 익평공 권공비명 병서 (有明朝鮮國輸忠衛社協策靖難同德佐翼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監春秋館事世子傅吉昌府院君諡翼平公權公碑銘) 幷序

 


신숙주(申叔舟)

적이 들으니, 뿌리가 깊은 것은 가지가 반드시 무성하고, 근원이 먼 것은 흐름이 반드시 길다는 것은 영원한 이치다. 나의 벗 권공(權公)은 휘가 람(擥)이며, 자(字)는 정경(正卿)이니, 그의 선조는 본래 김씨(金氏)였다. 한(漢) 나라 명제(明帝) 영평(永平) 8년 을축에 알지(閼智)가 시림(始林)에서 탄생하여 김씨라고 일컬은 것은 일이 지극히 기이하다. 그의 후예가 박씨(朴氏)ㆍ석씨(昔氏)와 더불어 교대로 신라의 임금이 되었다. 휘가 행(幸)이라는 사람에 이르러서 안동군(安東郡)을 지키다가 고려 태조에게 인정을 받아 비로소 권(權)이라고 사성(賜姓)하고 안동부로써 식읍(食邑)을 삼았으며, 벼슬은 삼한벽상삼중대광태사(三韓壁上三重大匡太師)에 이르렀다.
9대를 지나 복야(僕射) 휘 수평(守平)에 이르러, 맑은 덕이 있어서 세상에 드러났다. 복야가 한림 학사 휘 위(韙)를 낳았는데 비로소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예를 잘 안다고 알려졌다. 학사가 찬성(贊成) 휘 단(㫜)을 낳았다. 네 고을을 다스렸으며 다섯 도의 안찰사를 지냈는데, 이르는 곳마다 청렴하고 공평하다는 칭송이 있었다. 호를 몽암(夢菴), 시호를 문청(文淸)이라고 하였다. 문청이 시중(侍中) 휘 부(溥)를 낳았으니, 공훈과 덕이 세상에 으뜸이었다. 영가군(永嘉君)을 봉하니, 영가는 즉 안동이다. 호를 국재(菊齋), 시호를 문정(文正)이라고 하였다. 휘 고(皐)와 휘 희(僖)는 삼대에 걸쳐 봉작을 승습하였다.
희가 휘 근(近)을 낳으니, 성리학으로써 우리 나라 사람들을 개발하였다. 도덕과 문장이 전배(前輩)들보다 높이 뛰어났다. 명 나라의 태조 고황제가 한 번 보고 존경하여 소중하게 여기었으니, 이름이 온 중국에 떨치었다. 벼슬이 추충익대좌명공신(推忠翊戴佐命功臣)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 길창군(吉昌君)에 이르렀다. 호를 양촌(陽村), 시호를 문충(文忠)이라고 하였다. 순충적덕보조공신(純忠積德補祚功臣) 좌의정(左議政)을 추증하였다. 문충공(文忠公)이 휘 제(踶) 옛 휘 도(蹈)를 낳으니, 문장이 대를 이었다. 장원급제로 뽑혔으며, 우리 세종 임금이 중하게 믿는 바이다. 벼슬이 의정부 우찬성에 이르렀다. 호를 지재(止齋), 시호를 문경(文景)이라고 하였다.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을 추증하였으니, 공의 고(考)이다. 모두가 공(公)으로 인해서 증작(贈爵)이 있은 것이다. 비(妣)는 정경부인(貞敬夫人)이니,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 이준(李儁)의 딸이다.
영락(永樂) 병신년 5월 을미일에 공을 낳았다. 한 나라 명제(明帝) 영평(永平) 을축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무릇 천여 년이 된다. 대대로 드러난 공과 아름다운 덕이 있어서 고관(高官)을 맡았으니, 어찌 이른 바 뿌리 깊은 나무는 가지가 무성하고 근원이 먼 물은 흐름이 길다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공은 어려서부터 글읽기를 좋아하여 크고 트이고 넓고 우아하며, 뜻이 크고 기이한 꾀가 많았다. 책을 싣고 명산고적을 찾아서 가지 않은 곳이 없었는데, 반드시 상당(上黨) 한공 자준(韓公子濬)과 함께 하였다. 이르는 곳마다 번번히 머물러 글을 읽고, 문장을 지어 회포를 풀었다. 벼슬하는 것을 일삼지 아니하였으니, 나이 35세가 될 때까지 오히려 뜻이 커서 운치 있게 노니는 것만을 일삼았다.
남이 권하여 과거에 응시하였는데 단번에 잇달아 삼장(三場)을 장원급제하였다. 지금 임금이 그때 바야흐로 잠저(潛邸)에 있으면서 명령을 받고 《무경(武經)》을 주해(註解)하고 있었다. 공이 시종(侍從)이 되니 임금이 공에게 큰 재간이 있음을 알고 지극히 관대하였다. 그때 권간이 세력을 농간하여 사직이 위태롭게 흔들렸는데, 공이 먼저 큰 계책을 세우고 또 자준(子濬)을 추천하니, 임금이 곧 두 분에게 맡겨서 기획을 짜고, 충신과 의사를 불러 모아 모발에 빗질 하듯, 곡식의 싹을 호미로 매듯하여 드디어 대란을 평정하였다. 논공하여 수충위사협책정난공신(輸忠衛社協策靖難功臣)의 호를 주었으며, 임금이 즉위하여서 또 동덕좌익공신(同德佐翼功臣)의 호를 주었으니, 공이 모두 제1등이었다.
처음에 간사한 무리들이 서로 얼켜서 안팎으로 번갈아 선동하여 포학한 불꽃이 치성하였다. 그런 것을 한 치의 병장기도 한자의 칼날도 쓰지 않고 한갓 충의만으로 스스로 분기하였다. 비록 천명의 돌아감이 있고 참 임금이 천운에 응하였다고는 하나, 진실로 공의 계책과 덕망이 앞뒤로 도와서 성취하게 하지 않았다면, 어찌 능히 충의의 무리들이 한편으로 지지하여 하루아침이 못 되어 이렇게 청명한 천하를 이루어 종묘 사직을 안정하게 할 수 있었겠는가. 정난(靖難)하고 좌익(佐翼)하여 모두 훈렬(勳烈)에 으뜸되는 것이 마땅하다. 차례를 초월하여 동부승지를 임명하였다.
우리 나라 법에 과거에 급제한 자는 상례에 따라 연회를 열어서 그의 어버이를 영화스럽게 하여 주기로 되어 있다. 공이 대부인을 위하여 영친연(榮親宴)을 개설하니, 학같이 흰머리를 가진 어머니가 마루 위에 있고 고관대작이 문전을 메웠다. 임금이 그때 영의정과 더불어 또한 잔치에 참석하여 친히 대부인에게 축수하니, 영화가 온 세상에 빛났다. 이조 참판에 임명하고 길창군(吉昌君)을 봉하니, 길창은 또한 안동의 땅 이름이다. 임금이 즉위하자 황제의 고명(誥命)을 청하기 위하여 공이 연경(燕京)에 가게 되었다. 숙주(叔舟)도 또한 함께 갔다. 공은 풍채가 거룩하여 바라보기만 하여도 덕과 도량이 있는 것 같아서 중국 사람들이 사랑하여 사모하고 존경하여 예우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마침내 고명을 얻어 가지고 돌아오니, 임금이 기뻐하여 같이 갔던 사람들에게 모두 원종공신(元從功臣)의 호를 내리고, 공을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 집현전대제학(吏曹判書集賢殿大提學)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에 승진시켰다. 여러 번 승진하여 숭정대부(崇政大夫) 판중추원사겸판이조사(判中樞院事兼判吏曹事)가 되었다.
공은 어릴 때부터 기허(氣虛)한 것을 근심하여 매양 복잡하고 번극한 것을 싫어하더니, 이때에 이르러 한가하게 살기를 비니, 임금이 손수 편지를 써서 회보하기를, “경과 나는 서로 마음과 덕이 합치한다고 하는 정도로써 논할 수는 없다. 실로 하늘이 낳게 한 것이다. 경이 터럭만큼이라도 사심이 있었거나, 나에게 터럭만한 욕심이라도 있었다면, 물불을 무릅쓰고 돌진하여 몸과 처자를 잊고 하늘과 땅에 맹세하여 드디어 화란(禍亂)을 평정할 수 있었겠는가, 오늘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경이 실로 공업의 주인인 것이다. 이제 경이 은거하여 산수의 취미를 찾아 가려고 하는 글을 보니,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 경이 어찌 하늘이 맡긴 임무를 벗을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우찬성을 임명하였다. 얼마 안 되어 대광보국 우의정을 제수하고, 좌의정에 승진시켰다.
정난(靖難)하던 처음에 있어서 간사한 무리를 내쫓고 현능(賢能)한 이를 발탁하며, 굽은 것을 바로잡고 어지러운 것을 제거하는 데는 공이 실로 흉금을 열어 임금을 인도하고 은밀히 보좌하였다. 정승이 되어서는 관대하고 여유 있고 즐겁고 간이하며, 방정하고 엄격하며 침착하고 태연하였다. 힘써 기성(旣成)의 법을 준수하였으며, 그 대체를 보존하고 그 세절(細節)은 생략하였다. 경륜을 다하지 못하고 마침내 병으로 해임을 빌어 정승을 면하였다. 그러나 군국(軍國)의 중대한 일은 모두 사람을 보내어 가서 자문하였으며, 먹을 것을 내리고 문병하는 사자가 길에 끊어지지 않았다. 병이 점점 위중하여지니, 내의(內醫)를 시켜 약을 지키게 하고, 태관(太官 궁내에서 백관의 찬선(饌饍)을 맡은 관원)은 부엌일을 잇달게 하여 지극하게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성화(成化) 원년 을유년 2월 갑신일에 졸하니, 임금이 매우 슬퍼하여 반찬을 들지 않고 정사를 정지하였다. 부증(賻贈)에 더함이 있고 관에서 장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크고 작은 관원과 인민들이 높고 애석해 하여 탄식과 슬픔이 길에 차고, 친구들은 달려가 부르짖으며 슬퍼하였다.
나는 매양 공과 더불어 벼슬과 영화가 성대하고 가득해졌다고 하여 다투어 물러나기를 빌고자 하였더니, 공이 마침내 먼저 실천하여 어지러운 티끌 속에서 벗어나, 충정하고 유연하게 심신을 보양하게 되었으므로, 마땅히 높은 수를 길이 누릴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런 일에 이르렀으니 하늘의 이치도 또한 신빙하기 어렵단 말인가. 처음에 공이 물러가실 때, 면관(免官)의 허가 문서가 밤에 계하(啓下) 되었으므로 숙주가 일어나서 비지(批旨)의 제목을 보고 앉은 채 아침을 기다렸더니, 공이 과연 시 두어 편으로 스스로 자랑하기를,

지금부터는 한 승상이 부럽지 않구나 / 從今不羨韓丞相
한 필 말로 서호길 홀로 오가리 / 匹馬西湖獨往還

하였다. 나는 시를 보고 망연자실하였다. 일찍이 해마다 봄을 완상하자고 약속한 일이 있었다. 공의 집은 남산의 기슭에 자리잡고 있어서 도시를 내려다보면 복숭아와 오얏의 꽃이 만발하여, 붉고 흰 꽃빛이 눈앞에 찬란하였다. 한 번 상춘(賞春)의 자리를 열었을 뿐, 내가 해마다 북방의 진영을 순시 독찰하였으며, 돌아오면 일이 번잡하였고, 공도 병에 들어서 두 번 다시 약속을 찾지 못하였다. 이제 나 또한 평소의 뜻대로 벼슬에서 물러남을 얻었으므로 무거운 짐을 벗고 조용히 노닐 수 있게 되었는데, 이제 공이 가시어 다시는 공을 따라 노닐 수 없게 되었으며, 죽음과 더불어 같이 가버렸구나. 아, 슬프도다.
공은 문정공(文貞公) 이암(李嵓)의 손자인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원(原)의 딸에게 장가들 었다. 영원군부인(寧遠郡夫人)으로 봉하였다. 2남 8녀를 낳았으니, 맏아들의 이름은 걸(傑)이라고 하며, 보공장군(保功將軍) 행충좌위호군(行忠佐衛護軍)의 벼슬에 있다. 다음은 건(健)이니 어리다. 맏딸은 추충정난공신(推忠靖難功臣) 청원군(淸原君) 한서귀(韓瑞龜)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우사어(右司禦) 박사화(朴士華)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사헌 감찰(司憲監察) 신억년(申億年)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행 호군(行護軍) 남이(南怡)에게 시집갔으나 공보다 먼저 죽었다. 다음은 풍저창 직장(豐儲倉直長) 김수형(金壽亨)에게 시집갔다. 나머지는 다 어리다.
시조로부터 세상을 빛나게 한 남은 경사가 공에게 이르러 더욱 커졌다. 이미 크게 하고, 그의 수(壽)를 인색하게 함은 어찌된 일인가. 일찍이 듣건대, 베푼 것이 두터운 자에게는 보답이 융성하다고 하였는데, 공의 덕을 기르고 복을 흘러 보냄이 오히려 아직 그치지 아니하였으니, 가지의 무성함과 흐름의 장원(長遠)함은 이미 징험하였다. 또 장차 그것을 기대하는 것인가. 4월 정유일에 충주(忠州) 수읍(首邑)의 서쪽 미법곡(彌法谷) 선공(先公)의 무덤 아래에 장사하였다. 다음 해 가을에 악석(樂石 깨끗하고 견고해서 악기를 만들 수 있는 돌)을 다듬어, 장차 공의 훈덕(勳德)을 길이 전하고자 하매, 공의 서랑(婿郞)인 청원군(淸原君)이 나에게 부탁하여 글을 청하였다.
아, 공의 벼슬의 경력이라든가 훈업이라든가, 임금의 권애(眷愛)가 돈독하였던 것 등은 따로 나라의 사기(史紀)에 있을 것이니, 본래부터 여기에 자세히 기술할 필요가 없다. 집에 있어서는 효도하고 우애하였으며 친척을 대우하고 친구를 대접하는 데 있어서 각각 그 도리를 다하였다는 것도 비록 기록할 죽간(竹簡)과 비단을 쌓아 놓더라도 또한 다 기술할 수는 없다. 우선 대략 줄거리만 기술하고, 마침내는 슬퍼하고 애석해 하는 심정을 적는데 귀결될 뿐이다. 숙주는 공과 더불어 나이가 서로 비슷하여 젊을 때부터 같이 교유하면서 매양 공과 더불어 서로 묘갈명(墓碣銘)을 지어 주겠다고 농담으로 다투어 자랑하였더니, 이제 과연 그렇게 되었구나. 아, 슬프도다. 황천에서 일어날 수 있다면 이 글을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아, 슬프다.
명에 이르기를,

멀도다 공의 시조가 / 遠矣公始
시림에서 처음 나서 / 出自始林
고려의 초기에서 / 高麗之初
김을 권으로 바꾸었네 / 權而改金
경사를 누적하고 광택을 흘려 보내 / 積慶流光
초헌과 관복으로 차림 마주 보며 잇달았네 / 軒冕相望
어떤 이는 공덕으로 / 或以功德
어떤 이는 문장으로 / 或以文章
아름다움 이어받고 꽃다움 전하더니 / 襲美傳芳
공에게 이르러서 더욱 펼쳐졌네 / 至公彌張
뿌리 깊어 가지 크고 / 相深源遠
근원 멀어 흐름 길다 / 枝茂流長
공이 처음 분기할 때 / 公奮厥初
글읽기만 일을 삼고 / 讀書爲業
높이 높이 뛰어나서 얽매이지 아니하며 / 卓犖不覊
호수와 산을 찾아 떠돌아 노닐더니 / 湖山浪跡
단번에 과거삼장 장원급제 하였으니 / 一擧三魁
하는 일 광방하고 종적은 기이하다 / 事曠跡奇
대군자는 / 知大君子
이와 같아야 된다는 것을 알았네 / 所謂如斯
권간들이 정권 훔쳐 / 權姦竊柄
제멋대로 권세를 부리며 / 噓寒吸熱
정권을 농락하였네 / 操握弄機
화가 종사에 미치게 되었더니 / 禍及宗祐
거룩한 우리 나라 하늘이 돌보시어 / 天眷大東
우리의 성철하신 임금을 낳아 주시고 / 生我聖哲
도와서 같이 구원할 / 贊襄共濟
어진 보필을 내리셨네 / 錫之良弼
천명과 사람 마음 돌아감이 뚜렷하여 / 天命人歸
촛불에 나방 같은 권간들이 영향을 받았네 / 影響蛾燭
간흉을 제거하고 / 芟夷姦兇
준걸한 인재를 골라 뽑아 / 簡拔俊特
어지럽고 혼잡한 것은 분석하여 떼어내고 / 析離紛庬
막히고 정체된 것은 열어 인도했네 / 濬導滯塞
저들의 빼앗고 훔치던 것 물리치고 / 祛彼敓
우리의 윤택함을 펼치었네 / 敷我需澤
공은 묘당에 들어가 정승이 되어서는 / 入相廟堂
도덕을 넓고 크게 세상에 선양하니 / 恢弘道德
임금은 공에게 시귀인 양 앞길을 묻고 / 君有蓍龜
나라는 공에게 주석처럼 의지하였네 / 國有柱石
하늘이 어찌하여 서러워하지 않고 / 天何不愸
공의 연령 그렇게도 빠르게 빼앗는고 / 而奪其齡
우리들의 우정은 진정 즐겨하여 / 嬉戱眞情
아교와 옻칠처럼 망형의 사이였네 / 膠漆忘形
그대를 아껴하고 그대를 슬퍼함은 / 惜公慟公
공에서 그러하고 사에서도 그러하네 / 我公我私
슬프다. 공이시여 / 嗚呼公乎
여기에서 끝나는가 / 而止乎玆
죽고 삶은 변화하고 / 死生變化
가는 세월 머물지 않아 / 逝者不留
봄철은 제대로 동산을 지나는데 / 春過東山
나 홀로 서주에서 통곡하네 / 痛哭西州
덕과 공을 기록함은 / 記德銘勳
큰 솜씨가 없음이 부끄러워 / 愧乏鉅手
다만 평생의 정의만 진술하여 / 但列情素
후인에게 보일 뿐이네 / 以示于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