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신묘년 산행 /2011. 5.18. 정의 공주묘 탐방

2011.5.18. 죽산군 안맹담 정의공주 양위 묘지탐방

아베베1 2011. 5. 18. 19:30

 

 

 

 

 

연려실기술 제3권
 세종조 고사본말(世宗祖故事本末)
세종(世宗)


세종 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 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은, 휘는 도(祹)요, 자는 원정(元正)이니 태종의 셋째 아들이다. 원경왕후(元敬王后)가 홍무 30년 정축, 태조 6년 4월 10일 임진에 한양(漢陽) 잠저에서 낳았다. 무자년(1408)에 처음으로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졌다가 임진년(1412)에 대군(大君)으로 승진되었고, 무술년(1418)에 세자(世子)로 책봉되었다.그해 8월에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에서 왕위를 물려받아 경태(景泰) 원년 경오 2월 17일 임진에 별궁(別宮) 영응대군(永膺大君)의 집 에서 승하하니, 왕위에 있은 지 32년이고, 수는 54세였다. 명 나라에서 시호를 장헌(莊憲) 엄함과 공경으로써 백성에 임함을 장(莊)이라 하고, 착함을 행하여 기록할 만함을 헌(憲)이라 한다. 이라 하였다.능은 영릉(英陵) 처음에는 광주(廣州) 헌릉(獻陵)의 서편 산에 장사했다가, 예종(睿宗) 원년 기축 3월 6일에 여주(驪州) 서북편 성산(城山)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옮겼으며, 표석(表石)이 있다. 이승소(李承召)가 묘지(墓誌)를 지었고, 윤회(尹淮)가 행장을 지었다. 처음에는 정인지가 글을 지은 신도비(神道碑)가 있었으나, 능을 옮길 때 묻어두고 쓰지 않았다. 이다.

 

○ 비(妃) 선인제성소헌 왕후(宣仁齊聖昭憲王后) 심씨(沈氏)는, 본관은 청송(靑松)이니 영의정(領議政)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안효공(安孝公) 심온(沈溫)의 딸이다. 홍무 28년 을해 9월에 양주(楊州) 사제(私第)에서 났으며, 영락(永樂) 무자년에 가례(嘉禮)를 행하여 처음에는 경숙옹주(敬淑翁主)로 봉해졌다가, 정유년(1417)에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으로 봉해지고, 무술년에 경빈(敬嬪)으로 책봉되었다.얼마 안 되어 공비(恭妃)로 승진되었고 임자 선덕(宣德) 7년 에 왕비가 되었다. 정통(正統) 병인 11년 세종 28년 3월 24일 신묘에 별궁 세조(世祖)의 잠저. 에서 승하하니, 수가 52세였다. 문종(文宗) 2년에 선인제성(宣仁齊聖)이라는 존호(尊號)를 올렸다. 능은 영릉 세종의 능과 같은 언덕에 있다. 애초에는 헌릉(獻陵) 서편 산에 장사지냈다가 기축년(1469)에 이장하였다. 이다.

 

○ 18남 4녀를 두었다.
사(嗣) 문종대왕(文宗大王) 순서로는 첫째이다.
  사(嗣) 세조대왕(世祖大王) 순서로는 둘째이다.
3남 안평대군(安平大君) 용(瑢) 시호는 장소(章昭)다. 연일 정씨(延日鄭氏)에게 장가들었으니, 판서(判書) 증 좌의정(贈左議政) 연(淵)의 딸이다. 2남을 두었으며, 계유년(1453)에 화를 입었고,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4남 임영대군(臨瀛大君) 구(璆)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의녕 남씨(宜寧南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우의정(右議政) 충간공(忠簡公) 지(智)의 딸이다. 전주 최씨(全州崔氏)에게 재취하였으니, 봉례(奉禮) 증 우의정(贈右議政) 승녕(承寧)의 딸이다. 5남 2녀를 두었다.
5남 광평대군(廣平大君) 여(璵) 시호는 장의(章懿)이다. 평산 신씨(平山申氏)에게 장가들었으니, 동중추부사 증 좌의정 자수(自守)의 딸이다. 1남을 두었다.
6남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 시호는 정민(貞愍)이다. 전주 최씨(全州崔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좌찬성 증 좌의정 경절공(敬節公) 사강(士康)의 딸이다. 1남을 두었다. 정축년(1457)에 화를 입었고, 그 뒤에 신원되었다.
7남 평원대군(平原大君) 임(琳) 시호는 정헌(定憲)이다. 처음의 시호는 정덕(靖德)이다. 남양 홍씨(南陽洪氏)에게 장가들었으니, 부사(府使) 증 좌의정 이용(利用)의 딸이다.
8남 영응대군(永膺大君) 염(琰) 시호는 경효(敬孝)이다. 해주 정씨(海州鄭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참판 증 좌의정 충경(忠敬)의 딸이다. 여산 송씨(礪山宋氏)에게 재취하였으니, 동지중추부사 증 좌의정 복원(復元)의 딸이다. 1녀를 두었다.
1녀 정소공주(貞昭公主) 일찍 죽었다.
2녀 정의공주(貞懿公主) 연창위(延昌尉) 양효공(良孝公) 안맹담(安孟聃)의 아내이다. 4남 2녀를 두었다. 맹담의 본관은 죽산(竹山)이고, 아버지는 도관찰사(都觀察使) 망지(望之)이다.
1남 화의군(和義君) 영(瓔) 영빈(令嬪) 강씨(姜氏)가 낳았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밀양 박씨(密陽朴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참판 증 좌찬성(贈左贊成) 공효공(恭孝公) 중손(仲孫)의 딸이다. 계유년에 화를 입었다.
2남 계양군(桂陽君) 증(璔) 신빈(愼嬪) 김씨가 낳았다. 좌익 공신(佐翼功臣)이고, 시호는 충소(忠昭)이다. 청주 한씨(淸州韓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좌의정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양절공(襄節公) 확(確)의 딸이다. 3남 3녀를 두었다.
3남 의창군(義昌君) 공(玒) 신빈 김씨가 낳았다. 시호는 강도(剛悼)이다. 연안 김씨(延安金氏)에게 장가들었으니, 도관찰사 증 찬성 수(脩)의 딸이다. 1남 2녀를 두었다.
4남 한남군(漢南君) 어() 혜빈(惠嬪) 양씨(楊氏)가 낳았다. 정축년에 귀양가서 죽었으며, 시호는 정도(貞悼)이다. 안동 권씨(安東權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정랑(正郞) 증 지돈녕부사 격(格)의 딸이다. 1남 1녀를 두었다.
5남 밀성군(密城君) 침(琛) 신빈 김씨가 낳았다. 익대 좌리 공신(翊戴佐理功臣)이고, 시호는 효희(孝僖)이다. 여흥 민씨(驪興閔氏)에게 장가들었으니 판윤 증 찬성 승서(承序)의 딸이다. 4남 2녀를 두었다.
6남 수춘군(壽春君) 현(玹) 혜빈 양씨가 낳았다. 시호는 안도(安悼)이다. 영일 정씨(迎日鄭氏)에게 장가들었으니, 부윤 증 좌찬성 위양공(威襄公) 자제(自濟)의 딸이다. 1녀를 두었다.
7남 익현군(翼峴君) 곤(璭) 신빈 김씨가 낳았다. 좌익 공신(佐翼功臣)이고, 시호는 충성(忠成)이다. 평양 조씨(平壤趙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소윤 증 찬성 철산(鐵山)의 딸이다. 1남 1녀를 두었다.
8남 영풍군(永豊君) 전(瑔) 혜빈 양씨가 낳았다. 정축년에 화를 입었으며,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순천 박씨(順天朴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참판 팽년(彭年)의 딸이다. 1녀를 두었다.
9남 영해군(寧海君) 당(瑭) 신빈 김씨가 낳았다. 시호는 안도(安悼)이다. 평산 신씨(平山申氏)에게 장가들었으니, 한성윤 증 찬성 윤동(允童)의 딸이다. 2남 1녀를 두었다.
10남 담양군(潭陽君) 거(璖) 신빈 김씨가 낳았다. 일찍 죽었으니 시호는 이양(夷襄)이다.
1녀(一女) 정현옹주(貞顯翁主) 상침 송씨(尙寢宋氏)가 낳았다. 좌익공신 좌찬성 영천부원군(鈴川府院君) 충경공(忠景公) 윤사로(尹師路)의 아내이다. 2남을 두었다. 사로의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아버지는 참의 은(垠)이다.
2녀 정안옹주(貞安翁主) 숙원 이씨(淑媛李氏)가 낳았다. 청성위(靑城尉) 심안의(沈安義)의 아내이다. 1남 1녀를 두었다. 안의의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아버지는 관찰사 선(璿)이다.
태종 18년 무술 6월에 책봉하여 세자가 되었다. 8월에 태종이 지신사(知申事) 이명덕(李明德)을 불러서 이르기를, “내가 왕위에 오른 지, 이제 벌써 19년이나 되었다. 아침에나 밤에나 삼가며 두려워하였으나 위로 하늘의 뜻을 보답하지 못하여 여러 차례 재변이 내리고 또 묵은 병이 있으니, 이제 세자에게 이 자리를 전해 주려 한다.” 하였다. 정부와 육조(六曹) 및 모든 공신들이 궁문을 헤치고 들어와서 하늘을 부르며 통곡하여 내렸던 명령을 거두기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태종이 보평전(報平殿)에 거둥하여 내신(內臣)에게 명하여 빨리 세자를 불러들여 국새(國璽)를 전하고, 곧 자기의 거처를 연지동(蓮池洞) 별궁으로 옮겼다. 세자가 그 뒤를 따라가서 국새를 받들고 친히 내정(內庭)에 나아가 굳이 사양하여 밤이 되었는데도 윤허하지 않았다.드디어 경복궁에서 즉위하여 조하(朝賀)를 받고 죄인에게 사면령을 반포하고는 백관을 거느리고 전문(箋文)을 갖추어 상왕전(上王殿)에 사은하고 군국(軍國)에 관한 대사는 모두 상왕에게 여쭙기로 하였다.
11월에 세종이 곤룡포와 면류관을 갖추고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서 상왕에게 성덕 신공(聖德神功)이라는 존호와 대비(大妃)에게 후덕(厚德)이라는 존호를 올리고, 상왕의 시어소(時御所)에 행차하여 경헌례(敬獻禮)를 행하였다. 《국조보감》 《동각잡기》

 

○ 상왕이 이르기를, “내가 세자에게 왕위를 전한 것은 애초에 세상일을 잊어버리고 뜻대로 편히 지내고자 해서이다. 다만 군사(軍事)에 대해서만 친히 보살피려 하는 것은 임금이 나이 젊어서 군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 그의 나이가 서른이 되고 일에 경험이 많기를 기다려서 모두 전해주려 한다.지난 날에 만일 모든 아들로 하여금 원수(元帥)를 삼아서 여러 도의 군사를 나누어 맡게 하였더라면 임금이 어찌 오늘에 이르기까지 군사 일을 알지 못하였겠는가. 그러나 내가 그렇게 하지를 못했으니, 이는 저 양녕(讓寧)이 시기하고 음험한데 모든 아우들이 제각기 병권(兵權)을 잡고 있으면 어찌 서로 용납하였겠는가. 그래서 그렇게 못한 것이다.” 하였다. 《국조보감》

 

○ 세종이 상왕에게 상수(上壽)할 때 뭇 신하들이 모시고 잔치를 벌였다. 상왕은 이르기를, “내가 왕위를 피한 것은 복을 쌓아두고자 해서였는데 이제 와서 도리어 더욱 높아졌도다.” 하였다.술에 취하자 뭇 신하가 춤을 추었는데, 상왕 역시 춤추며 이르기를, “왕위를 맡기는데 만일 적임자를 얻지 못했다면 비록 걱정을 잊으려 한들 되었겠는가. 임금은 참으로 개국한 뒤를 계승하여 문치(文治)로 태평을 이룩할 임금이로다.” 하였다. 《국조보감》

 

○ 정종(定宗)이 피서하기 위하여 광나루에 머무를 때, 상왕이 임금과 더불어 동교(東郊) 대산(臺山)에 거둥하여 정종을 맞이하고, 술자리를 차려 매우 즐기다가 해가 저물어서야 헤어졌다.상왕이 흰말을 타고 돌아오다가 중도에 말에서 내려 지신사 하연(河演)을 불러 이르기를, “내 평소부터 이 말이 길이 잘든 것을 사랑해 왔는데, 이제 이 말을 임금에게 주리라.” 하고는, 곧 상승(尙乘)으로 하여금 안장을 갈아서 임금께 드리도록 명하였다.

 

○ 임금이 낙천정(樂天亭)에서 상왕을 뵐 때, 사신 조량(趙亮)과 이절(易節)이 뒤를 따라 이르렀기 때문에 들여서 잔치를 베풀었다. 조량이 찬탄하기를, “하늘이 이런 선경을 마련해 주었으니 전하께서는 한가하게 지내며 수양하기에 가장 알맞고, 새 전하께선 조정[明朝]을 공경하며 늙으신 상왕을 높여 충성과 효도가 겸전하시니, 내 일찍이 사신 간 나라가 많았으나 새 전하처럼 어진 분은 보지 못하였오.” 하고, 이내 “돈이 아무리 많아도 자손의 어진 것은 사지 못하리.”라는 옛 구절을 읊었다. 이에 상왕이 사례하기를, “이제 사신의 말을 들으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절로 내리오.” 하였는데, 그 자리에 모시고 있던 신하들도 모두 감격하여 울었다. 《국조보감》

 

○ 상왕이 일찍이 포천(抱川)에 행차하였을 때에 곽존중(郭存中)에게 이르기를, “나는 나라를 맡길 사람을 얻어 산수 사이에서 한가히 노니 걱정없는 이로 이 세상에 하나이다. 역대 제왕들의 부자 사이를 보면 실로 나의 오늘과 같은 이가 없었느니라.” 하였다.
또 일찍이 지신사 김익정(金益精)을 불러 이르기를, “임금께서 날마다 와 이야기를 하니 매우 좋기는 하나, 정사를 폐할까 두렵다. 네가 가서 여쭈어 격일로 오게 하라.” 하니, 김익정이 대답하기를, “상감께서는 매양 일을 처리하신 뒤에 와 뵙는 것이며, 와 뵙는 동안에도 일이 있으면 곧 따라 여쭙게 하여 지체가 없습니다. 상감께서는 늘 옛날 문왕이 그 아버지께 날마다 세 차례 뵙던 일을 본받지 못함을 한스럽게 생각하시는데, 어찌 격일로 와 뵈려 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왕이 이르기를, “그러면 호위하는 군사가 어찌 피로하지 않겠는가.” 하니, 익정이 대답하기를, “다만 매일 당번된 금군만을 거느리고 올 따름이니, 뉘가 감히 수고로움을 꺼리겠습니까.” 하였다.

 

○ 2년 경자에 대비가 돌아가셨다. 상례는 한결같이 고례(古禮)를 따랐다. 부르짖고 슬퍼하여 수일 동안을 음식을 들지 않았으며, 때마침 날씨가 덥고 습했으나 평상을 버려두고 짚자리에 엎드려 밤낮없이 통곡하였다. 모신 이들이 몰래 유지(油紙)를 그 밑에 깔았더니, 세종이 이를 알고 걷어버리라 명하였고, 큰 비가 와서 물이 여차(廬次)에 스며 들었으나, 임금은 그래도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신하들이 굳이 옮기기를 청하여 드디어 다른 곳으로 옮겼지만, 날이 밝자 곧 여차로 돌아왔다. 《국조보감》

 

○ 3년 신축에 우의정 이원(李原) 등이 상왕을 태상왕(太上王)으로 높이려는 뜻을 상왕에게 여쭈니, 상왕이 이르기를, “내가 태상왕의 호를 사양함은 그 뜻이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우리 태조께서 태상왕이 되었고, 둘째는 인덕전(仁德殿 정종)이 태상왕이 되지 못했으며, 셋째는 내 덕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였는데, 굳이 청하자 그제서야 허락하였다. 가을 9월에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옥책(玉冊)ㆍ금보(金寶)로써 상왕을 높여 성덕 신공 태상왕(聖德神功太上王)으로 모셨다.

 

○ 4년 임인에 태상왕의 병이 위독하여 신궁(新宮)으로 옮길 때, 임금이 도보로 그 뒤를 따랐다. 임금이 태상왕의 병환이 있은 이래로 약과 음식 등을 모두 손수 받들어 드렸다. 병세가 위독해지자 밤이 새도록 그 곁에서 뫼시되 일찍이 옷끈을 풀고 눈을 붙인 적이 없었으므로 신하들이 모두 근심하였다. 태상왕이 돌아가신 뒤,흙비[霾雨]가 심하여 대신들이 술을 드시기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고, 정원에 꾸지람을 내려 이르기를, “상중에 술을 마심은 예법이 아닌데, 너희들은 어찌 감히 비례(非禮)의 말을 아뢰는가.” 하니, 김익정(金益精)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태상왕 병환이 심하시던 날로부터 음식을 드시지 않은 지 이제 이미 20여일이 되었습니다. 이에 신들은 어쩔 줄을 몰라서 옮고 그름을 헤아리지 못하고 감히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하였다.

 

○ 태종의 초상에 명 나라 황제가 내관 유경례(劉敬禮)와 예부 낭중(禮部郞中) 양선(楊善) 등을 보내어 부물(賻物)을 주어 치제(致祭)하고, 시호를 내렸다. 임금이 태평관(太平館)에 나가서 예를 거행할 때 임금이 우시니, 사신도 또한 울면서 말하기를, “오늘 여러 신하가 모두 우는 정경을 보니 더욱 부왕께서 인후하고 덕이 있었음을 알겠나이다.” 하였고,또 세자를 보고서 말하기를, “덕스런 얼굴이 전하와 같으니, 이는 한 나라의 복입니다.” 하였다. 잔치하면서 효령대군(孝寧大君)이 술을 돌리자 임금이 자리에서 일어나니, 사신이 관반(館伴)황희(黃喜)에게 그 연유를 물었다. 황희는 “군신의 분수가 진실로 엄하기는 하나 전하께서 일어서심은 형제의 천륜을 위해서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더니, 사신이 “전일 우리나라에서 촉왕(蜀王)이 들어와 황제를 뵈올 때, 황제께서 동궁에게 명하여 길을 비키게 하더니, 이제 전하가 효녕을 대우함이 이와 같소이다.” 하고 감탄하였다.

 

○ 임금은 침착하고 과묵하며 제왕의 위의가 있었다. 왕위에 오르자 총명과 지혜는 만민에 뛰어난 성인이었고, 너그러움과 온유함은 뭇 백성을 용납하고 기르는 덕을 지녔다. 사물을 처리함에 혼자서 판단하여 주장이 있었고 위엄있고 모범이 되어 근엄하고 중정한 조심성이 있었으며, 정미한 의리는 신묘한 경지에 이르러,사물의 조리를 세밀히 관찰하는 분별력이 있었다. 날마다 네 번째 인경 소리가 나면 일어나 옷을 입고 평명(平明)에 조회를 받고 나서는 곧 일을 보고, 다음에는 신하를 번갈아 만나보고, 다음에는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그러고 나서야 내전(內殿)에 들어갔는데 오히려 서적을 보아 조금도 게을리함이 없었다. 그리하여 정사는 시행되지 않음이 없었고 일은 처리되지 않음이 없었다. <신도비 지문(誌文)>

 

○ 임금은 늘 이르기를 “나는 서적에 대해서 눈으로 한번 거친 것은 곧 잊지 않았다.” 하였으니, 총명과 글 좋아함은 천성이 그러하였던 것이다. 또 이르기를, “나는 궁중에 있을 때 손을 거둔 채로 한가히 앉아 있었던 적이 없었다.” 하였다. 《국조보감》
○ 임금은 천성이 학문을 좋아하여 세자로 있을 때 항상 글을 읽되 반드시 백 번씩을 채우고, 《좌전(左傳)》과 《초사(楚辭)》같은 것은 또 백 번을 더 읽었다. 일찍이 몸이 불편할 때에도 역시 글 읽기를 그만두지 않았으니, 병이 점차 심해지자 태종은 내시를 시켜 갑자기 책을 모두 거두어 가지고 오게 하였다.그리하여 다만 《구소수간(歐蘇手簡)》 한 권이 병풍 사이에 남아 있었는데, 임금은 천백 번을 읽었다. 왕위에 오른 뒤에는 날마다 경연을 열어 제왕으로서의 공덕은 백왕(百王) 중에서 높이 뛰어났었다. 일찍이 근신(近臣)에게 이르기를, “글읽는 것이 가장 유익하니, 글씨를 쓴다든지 글을 짓는 것은 임금이 유의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만년에 기력이 줄어 비록 조회는 보지 않았으나, 문학에 관한 일에는 더욱 유의하여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국(局)을 나누어 설치해서 모든 책을 편찬케 하였으니, 《고려사(高麗史)》ㆍ《치평요람(治平要覽)》ㆍ《역대병요(歷代兵要)》ㆍ《언문(諺文)》ㆍ《운서(韻書)》ㆍ《오례의(五禮儀)》ㆍ《사서오경음해(四書五經音解)》 등이 모두 직접 재단을 거쳐 이루어졌는데, 하룻 동안에 열람한 것이 몇십 권에 이르렀다. 《필원잡기(筆苑雜記)》
○ 동북 지방의 다른 민족들이 모두 복종하여 국경 안이 편안하니, 당시 사람들이 해동요순(海東堯舜)이라 일컬었다. 《국조보감》
국초에는 고려가 망한 뒤를 이었기 때문에 예악에 손댈 겨를이 없었는데, 임금이 비로소 종(鍾)ㆍ경(磬)과 당악(唐樂)ㆍ국악의 악보(樂譜)를 제정하고, 보루각(報漏閣)을 지어 시의(時儀 물시계)를 정하였으며, 《칠정편(七政篇)》ㆍ《오례의(五禮儀)》ㆍ《삼강행실(三綱行實)》ㆍ《명황계감(明皇誡鑑)》ㆍ《치평요람(治平要覽)》ㆍ《역대병요(歷代兵要)》 등이 모두 임금의 직접 재단에서 나온 것이다.정인지(鄭麟趾)의 <영릉비서(英陵碑序)>에, “실로 동방의 요순이다.” 한 것이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이었다. 비기(秘記)에 전하기를, “황려(黃驪 여주)의 산에는 마땅히 성인(聖人)을 장사할 곳이 있다.” 하였으니, 이것이 곧 영릉(英陵)이었다. 《지봉유설(芝峯類說)》
○ 임금은 모든 진기한 물건들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림원(上林苑)에 명하여 온갖 꽃과 새들을 모두 민간에게 나누어 주었다.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 하경복(河敬復)이 길들인 사슴을 바치고자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상한 새나 기이한 짐승은 옛 사람들이 경계한 바이니, 들이지 말라.” 하였다.
○ 임금이 경회루 동편에 남는 재목으로 별실(別室)을 지었는데, 돌 층대를 쓰지 않고, 또 짚으로 지붕을 올려 되도록 검소하게 한 후 늘 이곳에서 거처하였다. 문 밖에 짚자리가 깔려 있음을 보고 물으시기를, “이건 누가 한 짓인가. 비록 작은 물건이라도 내 명령이 내리기 전에는 안에 들이지 말라.” 하였다.
○ 강음현(江陰縣) 백성 조원(曺元)이 농토 문제로 관가에 송사를 할 때, 현관(縣官)이 송사를 지체한다고 분개하여 말하기를, “지금 임금이 밝지 못하여 이제 이따위를 수령으로 삼았다.” 하였다. 금부(禁府)와 삼성(三省)의 관원이 모두 죄 주기를 청했으나 임금은 심문하지 말라고 명하고 이르기를, “요즘 홍수와 가뭄이 서로 잇달아서 백성이 몹시 괴로운데, 조원의 고을 수령이 이러한 괴로움을 생각하지 않고 손님과 술을 마시느라고 송사를 지체하고 판결하지 않았으니, 조원의 말은 다만 이를 미워해서 그러한 것이리라.” 하고, 끝내 죄 주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국조보감》
○ 임금이 일찍이 병이 나서 누웠는데, 나인(內人) 등이 무당의 말에 혹하여 성균관(成均館) 앞에서 기도를 하니 유생들이 무녀를 쫓아냈다. 중사(中使)가 크게 노하여 그 연유를 아뢰었더니,세종이 병든 몸을 부축케 하여 일어나 앉으면서 이르기를, “내 일찍이 선비를 기르지 못했는가 염려하였는데, 이제 선비들 기운이 이러하니 내 무슨 걱정을 하리오. 이 말을 들으니 내 병이 낫는 것 같구나.” 하였다.
명종조(明宗朝)에 유진동(柳辰仝)이 이 이야기를 경연에서 아뢰며, 말하기를, “군주가 선비의 기운을 돋구어 주는 것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합니다.” 하였다. 《동각잡기》
○ 한 어린 궁녀가 후궁(後宮) 중 가장 사랑을 받아 항상 좌우에서 모셨는데, 임금의 사랑을 믿고 작은 일을 청한 일이 있었다. 세종이 하교하기를, “아녀자가 감히 간청하는 말을 하였으니 이는 내가 사랑을 보여서 그런 것이다. 이 계집이 어린데도 불구하고 이러하니 자라면 어떠할 것인가를 짐작하겠다.” 하고는, 곧 물리쳐 멀리하여 다시는 가까이 하지 않았다. 《공사견문(公私見聞)》
○ 측실(側室) 홍씨(洪氏)의 오라비 유근(有根)이 사랑을 받아 임금이 벗은 헌옷은 반드시 그에게 내려 주었다. 그가 일찍이 겸사복(兼司僕)이 되었을 때, 임금이 거둥하다가 연(輦) 끄는 말이 저는 것을 보고 물으니, 이에 유근은 자기 말을 스스로 자랑하며 자기 말로 대신 끌게 하였다.임금이 이르기를, “만일 대간이 이 일을 알게 되면 반드시 극형을 청할 것이니, 소문을 퍼뜨리지 말라.” 하고, 유근을 도보로 돌아오게 하였다. 그 뒤에 대간이 듣고 유근을 베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은 놓아주고는 그를 한 평생 버렸다. 《소문쇄록(謏聞瑣錄)》
○ 9년 정미에 금천(衿川)에 행차하여 매사냥을 구경하고 돌아오는데, 강가에 이르자 갑자기 바람과 눈보라가 매우 치며 물결이 사나와 배들이 통행하지 못하였다. 명령을 내려 금천의 쌀과 콩을 가져다가 호종한 군사에게 나누어 주고 새벽이 될 무렵에야 겨우 건넜었다.좌의정 이직(李稷)이 길가에서 뵈었더니, 임금이 이르기를, “태종께서는 매사냥을 구경하러 가셨지만 강을 건너지는 않았으니, 매우 염려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내 이제 잘못하여 남의 말을 듣고 강을 건너갔으니, 이것은 하늘이 나를 꾸짖은 것이오.” 하였다.
사헌부에서 백관이 미처 문안하지 못하였으므로 예관(禮官)을 탄핵하였는데 임금이 또 이르기를, “오늘 일은 나의 과오이니 논하지 말라.” 하고, 이로부터는 다시 강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 해동청(海東靑 보라매)을 바치고 금은(金銀) 바치는 것을 감해달라고 건의하는 자가 있었다. 임금이 상왕으로 있을 때 이르기를, “해동청은 얻기가 매우 어려우며, 또 날마다 꿩 한 마리를 먹여야 하고, 길들이기도 어려울 뿐더러 달아나기라도 하면 응사(鷹師)가 그것을 찾기 위해 촌락에 침입하게 되어 백성에게 폐해가 되므로 내가 모두 놓아 버렸다.” 하였다. 변계량(卞季良)이 아뢰기를, “전하의 이 말씀은 사책(史冊)에 써서 만세에 법이 되도록 할 만 합니다.” 하였다.
○ 임금은 항상 소갈증으로 고생하였다. 대언 등이 아뢰기를, “의원의 말에 이는 먼저 음식물로 치료를 해야 하는데, 흰 수탉ㆍ누런 암탉ㆍ양 고기가 모두 갈증을 다스릴 수 있다 하니, 청컨대 유사로 하여금 날마다 들이도록 하소서.” 하니, 세종이 이르기를,“내 어찌 내 한 몸을 위해서 동물의 생명을 해치겠는가. 하물며 양이란 본국에서 나는 것이 아님에랴.” 하였다. 대언 등이 다시금 아뢰기를, “관가에 기르는 양이 번식하니, 청컨대 한번 드셔보소서.” 하였으나, 임금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 임금이 서교(西郊)에 행차하여 농사짓는 것을 구경할 때, 말을 천천히 몰아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별장인 새 정자에 올랐다. 때마침 단비가 내려 잠깐 동안에 온 들이 흡족하였다. 임금이 매우 기뻐하여 곧 그 정자 이름을 희우(喜雨)라 하였다.
○ 임금이 항상 근정전(勤政殿)에 앉아서 대신과 더불어 정신을 가다듬어 정치를 잘 되게 하려 하였으므로 황희(黃喜)와 허조(許稠)는 정부에서 물러가서도 오히려 옷을 끄르지 못하였으니, 불시에 부르는 일이 있을까 해서이다. 《정암집(靜菴集)》 <연주(筵奏)>
○ 임금이 신하를 예법으로 대우하여 당대에는 사대부로서 극형을 당한 이가 없었다. <지장(誌狀)>


 

[주D-001]시어소(時御所) : 임금이 타는 수레와 말을 맡은 관원.
[주D-002]여차(廬次) : 상주(喪主)가 거처하는 곳.
[주D-003]옥책(玉冊)ㆍ금보(金寶) : 왕이나 후비에게 존호를 올릴 때에 금보와 옥책을 드리는데, 보(寶)는 도장과 같은 것이며, 책(冊)은 거기에 관한 글을 지어 바치는 것을 말한다.
[주D-004]관반(館伴) : 외국 사신이 유숙하는 관(館)에서 접대의 책임을 맡은 사람.
[주D-005]응사(鷹師) : 매를 다루는 사람.

 

양효공안맹담신도비

유명조선국부마 수록대부▨창위 시양효공▨▨신도비명 병서. 좌익공신 대광보국 숭록대부 하동▨ 정인지 찬

천순 육년 임오년 십이월 이십 오일 을유에 우리 세종장헌대왕의 딸 정의공주 부마 연창위 안공이 병환으로 자택에서 세상을 떠나니 나이는 48세였다. 종척과 왕실의 외척이며 사대부가 놀라고 슬퍼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부음이 들리자 임금은 크게 애도하고 조회를 폐하였다. 제문을 내렸는데, “어릴 적부터 함께 놀아 아픔이 가슴을 찌른다.”는 말이 있었다. 시호는 양효공이라 하였다. 그 이듬해 계미년 이월 이십 오일 갑신에 유사에서 예로써 양주 도봉산 해촌동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공주는 영구를 따르며 소리쳐 울부짖으며 친히 하관을 지켜보았다. 우제 · 졸곡 때 조석 상식과 삭망전에서부터 소대상 · 담제 등의 제사까지 반드시 친히 영좌 곁에서 모셨는데, 슬픔을 가누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음식을 제때에 먹지 않아 몹시 허약해졌다. 복제가 끝난 뒤에 사당을 세우는 제도와 나아가고 물러나며 오르내리는 절차를 예법대로 준수하니 여러 자식들이 감히 어긋나게 하지 못했다. 공주의 귀한 신분으로 교만하지 않고 아내로서의 도리를 다한 것은 고금에 보기 드문 일이니, 공이 예로써 가정을 지킨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성화 이년 병술년에 공의 막내아들이 찾아와 말하기를,“돌은 이미 준비되었습니다. 당신께서 혼인을 한 관계가 있으니 명을 지어 주시기 바랍니다.”하였다. 생각하여 보니, 내 아들이 일찍이 공의 맏사위였는데 부부가 모두 일찍 죽었다. 병자년에 며느리를 잃고 정축년에 아들을 잃었는데, 그 후 오년 만에 또 공을 잃으니, 그 슬픔을 견딜 수 있겠는가. 삼가 행장을 살펴보니 공의 성은 안씨이고 휘는 맹담이며, 자는 덕수이며, 죽산의 대족이다. 고려 수충보절 찬화공신 중대광 죽성군은 우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를 지냈는데, 시호는 문정이다. 휘 극인은 봉익대부 서북면 도순문찰리사 겸평양부윤 휘 숙노를 낳았고, 찰리사는 가선대부 함길도 도관 찰출척사 함흥부윤 휘 망지를 낳았다. 관찰사는 하양의 세가인 봉상시 주부 허지신의 딸을 맞이하여 영락 십삼년 을미년 십이월 이월 팔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릴 적부터 단아하고 전중하며 총명하였다. 선덕 삼년 무신년에 공주를 배필로 맞아들여, 죽성군에 봉해지고 숭정대부 품계를 받았다. 아버지는 숭정대부 의정부 찬성에 증직되고 어머니는 장신택주에 봉해졌으며, 조부는 정헌대부 이조 판서에 증직되고 조모 황씨는 정부인에 봉해졌다. 공은 임자년에 연창군에 봉해지고, 정통 칠년 임술년에 숭록대부에 오르고, 구년 갑자년에 관제를 고쳐 광덕대부로 되었다. 경태 원년 경오년 칠월에 일체 부마 칭호를 고쳐 위라 부르니 종실과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사년 계유 십일월 성록대부에 오르고, 천순 원년 정축년 정월에 수록대부에 오르니 벼슬이 최고에 올랐다. 팔월에 원종공신 녹권을 하사하니, 아버지는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으로 올려 증직하고 어머니는 정경대부인으로 올려 봉하였다. 삼년 기묘년 팔월에 대부인의 초상을 당하였는데, 오년 신사년 시월에 상복을 벗자, 도로 본직에 제수되었다. 공은 생업을 일삼지 않았으며 초서와 활쏘기 말타기를 잘하고 음률에 밝았으며 약물을 갖추어 놓고 남에게 봉사하였다. 부귀하다 하여 교만하지 않았고 길을 갈 때도 보좌하는 하인이 없었으며 식사할 때는 음식을 두 가지 이상 놓고 먹지 않았다. 또 불법을 좋아하였는데 대체로 천성 때문이었다. 아깝게도 하늘이 수명을 내려주지 않았으니 운명인 것이다.

공은 사남 이녀를 두었는데, 장남 여달은 소위장군 행호분위 부호군이고, 차남 온천은 조산대부 제용감 부정인데 거상 중에 죽었고, 셋째 상계는 통덕랑 종친부 전부이고, 넷째 빈세는 선략장군 용양위부호군 겸선전관이다. 장녀는 절충장군 용양위 대호군 세자좌익위 정광조에게 시집갔다. 곧 나의 적장자인데 부부가 다 일찍 죽었고, 차녀는 통정대부 병조 참지 한치례에게 시집갔다. 호분은 호군 안기의 딸에게 장가들어 일남을 두었는데 원경이라 하고, 일녀는 어리다. 부정은 회의도정 추의 딸에게 장가들어 일남을 두었는데, 언경이라 하고 이녀는 다 어리다. 전부는 상의원 첨정 안훈의 딸에게 장가들어 일남을 두었는데 몽경이라 하고 일녀는 어리다. 용양은 중호군 이계현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대호군은 일녀를 두었는데 어리다. 참지는 일남을 두었는데 한익이라 하고 이녀는 모두 어리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공은 어릴적 부모로부터 일찍이 의로운 법을 배우고
묘령에 공주의 배필이 되었으니, 그 영광 아니 큰가.
귀한 몸으로 고개 숙여 행실을 진실하게 하였고
부자로서 예를 좋아하여 스스로 매우 검소하였네.
검약으로 가정을 꾸려가니 남들과 다툼이 없었고
덕있는 이를 높이고 자신을 겸손히 하여
남을 대할 때 공경으로 하였네.
효도하고 우애가 두터워서 끝내 비방이란 없었는데,
어인 일로 장수 못했는지 그 뉘 옥황상제께 여쭤보소.
공주는 아내의 도리를 다했으니 흡사 하늘이 내신 배필이어라.
그 경사 천추에 흘러 자손은 길운을 만나리.

성화 이년 병술 칠월 일 세움. 빈세 비문과 두전을 쓰다

 

 

良孝公安孟聃神道碑
良孝安公墓碑(篆題)
有明朝鮮國駙馬綏祿大夫▨昌尉諡良孝公▨▨神道碑銘 幷序
……佐翼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河東▨ 鄭麟趾 撰
天順六年壬午十二月二十五日乙酉 我世宗莊憲大王之女貞懿公主駙馬延昌尉安公 以疾卒於第 春秋四十八矣 宗戚曁士 大夫 無不駭且悲焉 訃聞 上▨悼輟朝 其賜祭文 有齠齕同遊痛貫衷曲之語 諡良孝公 越明年癸未二月二十五日甲申有司以禮葬于楊州道峯山海村洞之原 公主隨柩號泣 親臨窆棺 虞卒哭朝夕上食望奠以至祥禫之祭 必親侍靈側 悲不能已 水漿不時進 毀瘠不自勝 制盡 立廟制度 進退升降之節 動遵禮法 諸子無敢違異 主之無驕貴相盡婦道 古今罕有 因以知公之以禮持家也 成化二年丙戍 季子來曰 石己具矣 子有婚姻之舊 請銘 余惟吾豚犬會爲長婿 夫婦皆蚤死 丙子哭婦 丁丑哭子 五年而又哭公 可勝悲哉 謹按其狀 公姓安氏 諱孟聃 字德壽 竹山望族也 高麗輸忠保節賛化功臣 重大匡 竹城君 右文舘大提學 知春秋館事 諡文貞 諱克仁 生奉翊大夫 西北面都巡問察理使兼平壤府尹諱淑老 察理使 生嘉善大夫 咸吉道都觀察黜陟使 咸興府尹 諱望之 觀察使 娶河陽世家 奉常主簿許之信之女 以永樂十三年乙未十二月二十八日生公 幼而端重聰慧 宣德三年戊申 齒尙公主 封竹城君 階崇政大夫 考贈崇政大夫議政府賛成 母封莊信宅主 祖贈正憲大夫 吏曹判書 祖母黃氏 封貞夫人 壬子 封延昌君 正統七年壬戍 陞崇祿大夫 九月甲子 改官制爲光德大夫 景泰元年庚午七月 凡駙馬改名稱尉 所以別宗室也 四年癸酉十一月 加成祿大夫 天順元年丁丑正月 陞綏祿大夫 位極矣 八月 賜原從功臣券 加贈考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右議政 母加封貞敬大夫人 三年己卯八月 丁大夫人喪 五年辛巳十月 服除 還拜本職 公不事生產 善草書射御 曉音律 備藥物施與 不以富貴生驕 行無引卒 食不重味 又好浮屠法 盖其天性然也 惜乎 天不之年 命也夫 生四男二女 長曰如獺 昭威將軍行虎賁衛副護軍 次曰温泉 朝散大夫 濟用副正 喪中歿 次曰桑鷄 通德郎 宗親府典簿 次曰貧世 宣略將軍 龍驤衛副護軍兼宣傳官 女長適折衝將軍 龍驤衛大護軍 世子左翊衛鄭光祖 即吾之嫡長子也 夫婦皆蚤死 次適通政大夫兵曹叅知韓致禮 虎賁 娶護軍安耆之女 生一男曰元卿 一女幼 副正 娶懷議都正菆之女 生一男曰彥卿 二女皆幼 典簿 娶尙衣院僉正安訓之女 生一男曰夢卿 一女幼 龍驤 娶中護軍李繼賢之女 大護軍 生一女幼 參知 生一男曰韓翊 二女皆幼 銘曰
公自趨庭 夙承義方 妙齡尙主 不顯其光 貴而能降 行己有恪 富而好禮 自奉甚約 克儉爲家 與物無竸 尊德撝謙 接人以敬 孝且友愛 終無間言 不壽奈何 誰叩帝閽 主盡婦道 俔天之匹 慶流千載 子孫逢吉
成化二年 丙戍 七月 日 立
貧世 拜書 幷篆

 

세종 10년 무신(1428,선덕 3)

 2월12일 (갑자)
왕녀를 책봉하여 정의 공주로 삼고 안맹담을 죽성군으로 삼다

왕녀(王女)를 책봉하여 정의 공주(貞懿公主)로 삼고, 안맹담(安孟聃)을 죽성군(竹城君)으로 삼았다.
【원전】 3 집 114 면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궁관(宮官) / *인사-관리(管理)

세종 10년 무신(1428,선덕 3)
 2월13일 (을축)
정의 공주를 죽성군 안맹담에게 시집보내다

정의 공주(貞懿公主)를 죽성군(竹城君) 안맹담(安孟聃)에게 시집보내었다. 맹담은 관찰사(觀察使) 안망지(安望之)의 아들이다.
【원전】 3 집 115 면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궁관(宮官) / *왕실-의식(儀式)


세종 10년 무신(1428,선덕 3)
 2월30일 (임오)
죽성군 안맹담의 선세 삼대를 추증하게 하다

이조에 명하여 죽성군(竹城君) 안맹담(安孟聃)의 선세(先世) 삼대(三代)를 추증(追贈)하게 하였다.
【원전】 3 집 118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사법-행형(行刑) / *가족-가산(家産)


세종 12년 경술(1430,선덕 5)
 윤 12월23일 (기미)
승정원에 전지하여 형제의 아내와 서로 대면하는 예에 대해 묻다

승정원(承政院)에 전지(傳旨)하기를,
“세자와 세 대군(大君)이 이제 헌수(獻壽)하려 하는데, 옛적 예법에 형제의 아내는 서로 대면하지 않는 법이다. 지금 세자와 대군과 죽성군(竹城君) 안맹담(安孟聃)과 순빈(純嬪)과 옹주(翁主) 세 사람이 동서에 마주 앉으면 곧 서로 보게 될 것이니, 이를 어떻게 처리하면 되겠는가. 내가 태종(太宗) 때에는 서로 보았지만, 이것은 부모의 앞에서이기 때문이었다. 우리 나라의 일반 풍속이 어떠한가.”
하니, 대언(代言)들이 아뢰기를,
“일반 풍속으로는 서로 보는 사람도 있고, 서로 보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안맹담(安孟聃)은 연회에서 모실 수 없으며, 만일 술잔을 올리려 하면, 곧 차례대로 들어가서 술잔을 드리고, 곧 되돌아 나오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일 아침 조계(朝啓) 때에 정승과 함께 직접 의논하겠다.”
【원전】 3 집 285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三灘先生集卷之十四
 墓誌
世宗莊憲大王遷陵誌石文 a_011_510b


恭惟我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太宗恭定大王第三子也。元敬王后閔氏。以大明洪武三十年丁丑四月初十日壬辰。誕于漢陽邸。自幼聰明絶倫。兩宮奇愛之。長封忠寧大君。性好學。雖在疾病。猶不釋卷。世子禔多失德。永樂十六年戊戌夏。群臣請廢立。太宗以王有潛德。具奏于太宗文皇帝。冊爲世子。秋八月。太宗倦勤。禪位于王。遣使請命。明年己亥春正月。帝遣使錫命爲王。繼遣使賜宴。又賜太宗宴。敕曰。王能簡賢命德。俾宗祀011_510c有托。不唯王一家之慶。且爲王一國之人慶也。歲庚子。元敬王后不豫。避忌于外第。王步行扶輦。至有露宿之時。及薨。哀毀踰禮。是年。設集賢殿。博選儒雅。置二十員以備顧問。壬寅夏五月。太宗薨。致喪三年。宣德元年丙午。宣宗皇帝賜綵幣書籍。自是寵賚頻繁。史不絶書。丁未秋。始置宗學。悉令宗室子弟受學。其諸子未就外傅者。亦敎以義方。嫡庶之間。禮嚴恩篤。人無間言。戊申冬。制朝會樂。始於大會。不用女樂。我國歲貢金銀。然非土宜。常患不給。乃遣親弟表請。朝議難之。帝曰。朝鮮王必不欺。豈可強人所無哉。許免貢。婆猪江野人數犯邊。癸丑四月。命將討之。斥地置慶興等鎭。自麗季。咸吉道沿邊之地。爲011_510d野人所據。至是盡復舊疆。甲子。對馬一歧島倭入寇上國。又侵軼我濟州之境。王使人諭島主。主承命。執送賊倭六十二人。於是械獻京師。帝賜綵幣嘉獎。夫以倭奴之頑悍。屈於折札。野人之桀驁。熸於偏師。非恩信素孚而威靈遠讋。則何以得此哉。初世子禔避謗在外二十年。召還京。群臣切諫皆不納。事二兄友諸弟。極其敬愛。以至九族之親。亦皆敦睦。王英睿冠古。輔以聖學。自卽位以來。宵旰求治。禮樂刑政。制度文爲凡先世所未遑者。皆擧而力行。酌古今文質之中。修五禮儀注。述祖宗功德之盛。作定大業等樂。創制訓民正音。以二十八字。盡通天下言語。文字紐切之妙。人所叵測。損益累朝憲章。以成經濟011_511a六典。規模宏遠。條貫詳密。可爲萬世法程。尤洞曉天文律曆。修七政算內外篇。作諸儀象。所以授人時也。取資治通鑑諸家註釋。讎校纂輯。名曰訓義。又撰三綱行實,治平要覽等諸書。所以隆文敎厚人倫也。哀矜庶獄。則有恤刑之敎。慮民淫僻。則作戒酒之書。虛懷受諫。尊賢禮士。終王之世。大臣無有遭刑戮者。尤重親民之職。朝臣未經守令者。不敢陞授顯秩。三十年間。吏稱其職。民安其業。朝庭淸明。四方晏如。號爲東方堯舜云。妃昭憲王后沈氏。靑松世家。皇曾祖諱龍。高麗贈門下侍中。靑華府院君。祖諱德符。相高麗恭愍王。再爲門下侍中。逮我恭靖王朝。爲議政府左政丞。封靑城伯。皇考諱溫。某官。皇妣安氏。領011_511b敦寧府事諡昭懿公天保之女。封三韓國大夫人。以洪武乙亥九月己未。生王后于楊州私第。少有聰慧貞淑之德。永樂戊子歲。后將笄。以選嬪于王。封敬淑翁主。敬事兩宮。篤承眷愛。后之進退。王必起立。其見敬禮如此。丁酉秋九月。改封三韓國大夫人。王之封世子也。進封敬嬪。及卽位。封恭妃。壬子正月。有司言中宮有美稱非古也。改封王妃。后正位中宮之後。益自謙謹。禮接嬪媵。甚得歡心。後宮有進御者。必加慰納。所生諸子。養之宮中。盡心撫育。同於己出。御膳進則必躬自省視。宮中之事。無敢專制。大小皆稟於上。亦未嘗爲親戚子弟求官與婚。儉以律身。慈以逮下。雞鳴進戒。述宣陰敎。011_511c配德並明。母儀一國。於戲。世宗有文王之聖。王后石有大姒之賢。故以能致關睢之化。螽斯之慶。本支百世。祚流無極。正統十一年丙寅春三月二十四日辛卯。以疾薨于外第。春秋五十二。王悼失良佐。以白衣素膳終三十日。夏六月。降冊諡昭憲王后。越五年庚午春二月十七日壬辰。王亦以疾薨于別宮。春秋五十四。在位三十三年。文宗率群臣上諡曰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廟號世宗。又表請易名。帝遣使致祭。賜諡莊憲。初。合葬于獻陵之西岡。以今上殿下卽位之元年己丑春三月初六日庚寅。移葬于呂興府治之北城山南向之原。實成化五年也。后誕八男二女。長文宗恭順大王。景泰三年011_511d壬申五月十四日薨。次世祖惠莊大王。成化四年九月初八日薨。次瑢。歲癸酉。謀不軌賜死。次璆。臨瀛大君。先遷陵二月卒。次璵。廣平大君。次瑜。亦謀不軌賜死。次琳。平原大君。與璵皆先卒。次琰。永膺大君。先遷陵二年卒。女長未䈂而卒。贈貞昭公主。次懿公主。下嫁延昌尉安孟耼。愼嬪金氏生六男。長璔。桂陽君。次玒。義昌君。次琛。密城君。次璭。翼峴君。次璋。寧海君。次璖。潭陽君。遷陵之年。唯密城在。餘皆先卒。惠嬪楊氏生三男。長。次玹。壽春君。早卒。次瑔。與以瑢黨貶死于外。淑婉李氏生一女。貞安翁主。適儀賓沈安義。尙寢宋氏生一女。貞顯翁主。適鈴川尉尹師路。宮人姜氏生一男瓔。亦以瑢黨貶死于外。文011_512a宗顯德王后權氏。贈議政府左議政專之女。誕一男一女。男卽魯山君。女敬惠公主。下嫁鄭悰。司則楊氏生一女。敬淑翁主。適儀賓姜子順。世祖慈聖王妣尹氏。贈議政府左議政璠之女。誕二男一女。男長懿敬世子。早卒。次卽今上殿下。女懿淑公主。下嫁儀賓鄭顯祖。某官朴氏生二男。長曙。德原君。次晟。昌原君。瑢娶贈左議政鄭淵之女。生二男。長友直。次友諒。皆連坐死。臨瀛娶右議政崔承寧之女。生五男二女。男長澍。烏山君。次浚。龜城君。次淳。定陽君。次淨。八溪君。次澄。懽城君。女長中牟縣主。適兵曺參判居昌君愼承善。次淸河縣主。適司䆃正安友騫。側室生四男六女。男長涵。英陽副正。次潾。丹溪副正。次濯。輪山副011_512b正。次沃。玉川副正。女皆幼。廣平娶某官申自守之女。生一男。漙。永順君。瑜娶贈左議政崔士康之女。生一男。平原娶贈左議政洪利用之女。無子。永膺娶某官宋福元之女。生一女。側室生一男一女。皆幼。瓔娶密山君朴仲孫之女。無子。側室生一男。桂陽娶左議政韓確之女。生七男三女。男長澧。寧原君。次瀜。江陽君。次湜。富林都正。餘幼。女長適某官安繼편001。餘幼。側室生一男一女。男幼。女適某官鄭從善。義昌娶某官金脩之女。生一男二女。男灝。蛇山君。女長適參奉辛禹鼎。次幼。娶戶曹正郞權格之女。無子。密城娶軍器副正閔承寧之女。生四男二女。男長誡。雲山君。次譡。春城君。次。遂安都正。次䛿。石陽都正。女長適某官011_512c某。次幼。壽春娶全州府尹鄭自濟之女。生一女。適某官沈順老。翼峴娶某官趙鐵山之女。生一男一女。男漬。槐山君。女幼。瑔娶朴彭年之女。寧海娶某官申允童之女。生一男一女。皆幼。貞懿公主生四男二女。男長安如獺。僉知事。次溫泉。副正。次桑雞。典籤。次貧世。參判。貞顯翁主生二男。長尹磻。僉知事。次磷。護軍。貞安翁主生一男一女。男幼。女適某官崔孟思。


[편-001]宋 :

 

忍齋先生文集卷之三
 碑誌
有明朝鮮國通訓大夫宗親府典籤安公墓碣銘 幷序 a_032_360a


安氏出畿之竹山縣。有諱漢平。顯于麗季。官至贊成事。贊成生門下侍中諱社卿。侍中生文貞公諱克仁。032_360b文貞生察理使諱淑老。察理生咸吉道觀察黜陟使諱望之。觀察生孟聃。尙世宗大王女貞懿公主。爲延昌尉。延昌生敦寧都正桑鷄。都正生監察邦炯。監察娶文化大姓吏曹正郞柳麟童之女。生公。寔弘治癸丑八月二十四日丙戌也。公名從㙉。字而厚。生而秀偉。不類凡兒。正郞公無子。鍾愛公。托以後事。嘉靖乙酉。中司馬試。戊子。用門蔭。始授健元陵參奉。旋因事罷。癸巳。復拜世子翊衛司侍直。丙申。遷義盈庫直長。戊戌。陞主簿。選拜掌隷院司評。操守旣確。文以學問。裁決詞訟。無不當理。出爲井邑縣監。遭辛丑032_360c旱乾。民無以灌漑。公試鑿一池。有泉忽湧。民賴其利。老農相賀。因號爲靈泉。癸卯。秩滿。入爲北部主簿。升授禮賓寺判官。移漢城府判官。甲辰。復入掌隷院爲司議。是年冬。出爲臨陂縣令。乙巳。歲飢。湖南尤甚。公賑恤甚誠。至於隣邑飢氓。流入縣界。就食者相望。全活不可勝計。及公遞還。縣民將欲鐫碑頌德。公禁不止。竟遣家僮撞碎。而後乃已。其不欲近名。公之素性然也。己酉。入拜司饔院判官。庚戌。陞司導寺僉正。夏。出守醴泉郡。時朝廷分遣御史。往糾守令之救荒無狀者。御史擧劾失實。幾罷公。觀察使惜之。以公032_360d治狀聞。上卽降褒命。俾仍其任。適有兩岐麥生於郡。人以謂善政之應。壬子。上欲激揚時習。命選中外廉謹吏。廷議以公名聞。乃賜表裏以奬之。名足以副其實。公焉得終掩之乎。癸丑。移守錦山郡。又遭歲荒。賑恤之多。如治臨陂時。乙卯。入拜司宰監僉正。丙辰。又移宗親府典籤。丁巳五月而病。竟不起。卒於是月二十一日癸酉。享年六十有五。以是年八月十一日辛卯。葬于楊州東古州內城隍山午坐子向之原。公天性孝友。氣度豁如。忠厚內植。遇物以信。好善有誠。疾惡如仇。和於妻子而使自嚴畏。慈於婢僕而032_361a威不可狎。不事產業。於物無長。而栽花種竹。以寓淸遠之趣。睦於親戚。又喜賙急。如有孤子女無人收恤者。必資送以嫁娶之。貧不能自活者。必分俸祿以賑救之。此亦人所難也。奉公之勤。不遺細務。子愛平民而嚴於猾吏。欺誣屛息而民安其業。苟有事之害於民者。公輒欲更張。以便於民。人或言其不可。公奮曰。諉諸舊條而不敢變。拘以歲入而不肯減。則民隱無時可祛。而將焉用夫字牧者。然而居家薄於自奉。而在官能節調度。出宰四邑。庾廩輒盈。豈非古之所謂循吏者乎。中年多病。深味先聖愼疾之訓。專精醫藥。032_361b惡煩喜靜。絶迹干謁。不惟自守之高如此。聲蹟上徹。褒命屢及。而官不貴顯。其施不博。豈非命也歟。公娶申參贊公濟之女。生三男二女。長曰彥鈞。迪順副尉。次彥鎔。進士。次彥鏛。女長適弘文館典翰李友閔。爲一時名學士。次適生員姜惟慶。先卒。彥鈞娶牧使柳栽女。生二男一女。男曰景海。餘幼。彥鎔娶金錫良女。生一女。彥鏛娶宣敎郞成彥博女。生一男。典翰生一女。彥鎔兄弟力學好脩。期以名顯于世。天將昌公之後。而爲善者果無報乎。彥鎔杖而哭。徵銘於暹曰。欲以此掩諸幽。嗚呼。暹於公。親且舊。不可以不文辭。032_361c銘曰。
人欲貴顯。欲展厥蘊。與其未諧。寧專一郡。少試康濟。古人襟韻。莫榮於名。公不欲近。碑猶必碎。曰我職分。棲遲疾病。擬迹小隱。人競我退。窒而不慍。旣豐稟賦。何施之靳。眷彼隍麓。螭首。于後考德。盍來拭抆。


 

芝湖集卷之十三
 
英陵六大君傳 戊辰六月 a_143_573a


惟我世宗大王昭憲王后。凡有八嗣一女。一嗣文宗大王。二嗣世祖大王。而安平大君第三。臨瀛,廣平大君居其次。錦城,平原,永膺大君又居其次。女貞懿公主下嫁延昌尉安孟聃云。蓋顯陵姿極賢聖。爲東方守文之良主。光廟天縱英武。著化家爲國之盛烈。若安平曁廣平,錦城。皆有間世才德。而廣平弱冠早歿。安平終罹禍綱。錦城又自扞王法。皆不143_573b得令終。誠可惜哉。
安平諱瑢。字淸之。號琅玕居士。以永樂戊戌生。天資俊邁。儀表英偉。博洽經史。兼通內典。文章夙成。筆法與子昂並肩。加有飛動意。其餘篆籕八法。無不精妙。又善畫圖琴瑟之技。嘗承命與諸學士。裒集唐宋八家詩以進。又手抄白樂天三體詩,梅聖兪宛陵集。以行於世。世宗聞公所居無堂名。乃賜以匪懈公。遂倩一時文人。歌詠其事。作武夷精舍於北郊。又臨西湖。起淡淡亭。藏書萬卷。往來遊賞。其文華風流。輝映當世。文人名士。無不樂與之遊。景泰元年庚午。143_573c華使倪謙司馬恂之在館也。偶見公戲書泛翁策三字。大驚異。更請筆蹟。公一夜揮灑累百紙以與之。兩使極加歎賞曰。當今天下善書者。陳學士某爲最。而若比此則其不及遠矣。仍作詩以謝。上命公曰。此詩誠可傳。不宜泯沒也。公將求和章於搢紳間而未及。無何。上賓天。是年秋。太監尹奉詔而來。爲言兩使旣還朝。獻以公書。帝亦覽而奇之。卽命入石傳布。又自以縑素受書而去。於是。公之藝能。聞於海內矣。金節齋,朴平陽,申高靈作詩文以侈之。二年壬申。文宗昇遐。魯山嗣位。當是時。王室孤弱。大臣皇甫143_573d仁金宗瑞等。受遺敎輔政。方燕居深念。欲遏禍亂。明年十月。世祖首誅左相金宗瑞。詣闕上急變。卽命招大臣宰臣。椎殺領議政皇甫仁,兵曹判書趙克寬,贊成李穰。又遣人殺尹處恭。斬吏曹判書閔伸。遣禁府都事愼先庚。押大君。送于江華。敎曰。奸臣皇甫仁金宗瑞等。交結安平大君瑢。廣植親黨。分據中外。陰養死士。潛輸邊郡兵器。以圖不軌。今奸黨皆已伏辜。瑢至親不忍加法。其安置于外。又誅兵郞李賢老。竄右相鄭苯于樂安。平安監司趙遂良于固城。忠淸監司安完慶于梁山。參贊許詡于巨濟。池淨于靈巖。李143_574a石貞于延日。旣已皆坐死籍沒。兩司又啓曰。瑢首惡不可共戴一天。請按法誅之。魯山初不從。翌日。左相鄭麟趾等。率百官更請。乃遣禁府鎭撫李伯淳賜死。而以陰有異志。築武夷精舍。欲與宗瑞等相從。多處淡淡亭爲罪。又添以帷薄不忍言之罪。語在國乘。公得年僅三十六。夫人延日鄭氏。兵曹判書贈左議政淵之女。有二子。長友直。宜春君。娶右議政南智女。癸酉竄珍島以死。次友諒。德陽正。娶沈氏女。亦坐死。俱無后。公所書英陵碑極其致力。而被禍後朝家磨去。故不傳於世。獨安孝公沈溫墓額八法在焉。外143_574b方樓觀寺刹尙多所書扁額。而其親蹟至今流傳。寸楮尺幅。無不爲寶。墨本之傳世者亦不一。而惟月精寺水陸文最活動。詩文尤散落不存。宗室朗善君俁。收拾若干篇。藏于家。錦城諱瑜。字某。其生年不能知。而我廣平大君。以洪煕乙巳生。正統丙辰年十二歲。與公一時入學。仍就宗學。以此推之。公年亦不過差少一二歲。公德器淸高。辭氣灑然。無一點塵累。娶右贊成全州崔士康女。爲夫人。承命出爲昭悼公芳碩之后。嘗築室於瑞雲坊華山下。鑿池種蓮。亭于其上。以承恩扁其額。而文孝公河演爲之記。安平死143_574c後越二年乙亥春。大臣六卿政院。以和義君瓔與崔承孫金玉謙。讌射于錦城第。又通平原大君妾楚腰纖啓流于外。仍收大君告身。又安置。內官嚴自治於濟州道死。時世宗後宮惠嬪楊氏。以保護魯山出入禁中。重被譴責。和義乃惠嬪之出。而又與大君及自治陰護魯山。故皆被罪至此。是年六月。世祖受禪。尊魯山。爲恭懿溫文太上王。夫人宋氏。爲懿德王大妃。時上王往往開昌德宮北牆。往來大君舊第。人疑韓明澮等欲置上王於隘地。而令力士圖之。以故。魯山舊臣。尤悲憤。密爲之謀。丙子六143_574d月。終有成三問等六臣之獄。死者甚衆。丁丑正月。以宗親政府之請。上命修理大君第。出置上王。嚴其防禁。又安置大君於順興府。六月。貞熹王后之娚。前藝文提學尹士昫。以百姓金永水言。告判敦寧宋玹壽與敦寧判官權完等謀逆。於是下玹壽,完于獄。廷臣言上王得罪宗社。不宜居京師。乃降封爲魯山君。出置寧越。大妃降封爲夫人。又追廢。顯德王后改葬。以庶人之禮。秋。大君陰與本邑府使李甫欽約。率邑人以復上王位。及事覺。以十月二十日。賜死甫欽伏法。玹壽等處絞。順興一邑之人。擧被143_575a誅戮。而和義之同母弟漢南君,永豐君瑔曁寧陽尉鄭悰。皆安置於外。瑔又朴彭年之女壻。悰乃文宗朝駙馬。玹壽夫人宋氏之父完。顯德王后之幾寸親也。悰後加罪以死。而魯山終亦不保。大臣鄭麟趾宗室讓寧大君禔等。前後皆請之也。大君有一子。曰孟漢。咸從君。妾子曰銅。噫。諸大君中平原。又早歿。惟臨瀛,永膺。以純謹無他。被光廟眷遇。得以天年終。平原諱琳。字某。娶南陽洪氏。府使利用女。無后。以齊安大君琄爲后。臨瀛諱璆。字獻之。庚子生。壽五十。諡貞簡。娶宜寧南氏。右議政智女。無后。又娶全州143_575b崔氏。奉禮承寧女。生五子二女。子曰澍。烏山君。浚。龜城君。領議政。淳。定陽君。淨。八溪君。澄。歡城君。女適領議政愼承善,參判安友騫。側出。又有四子三女。永膺諱琰。字明之。甲寅生。壽三十四。諡敬孝。初娶宋玹壽女。再娶海州鄭氏。參判忠敬女。皆無后。三娶礪山宋氏。同樞復元女。生一女。適綾川君具壽永。側出又有二子二女。廣平諱璵。字煥之。號明誠堂。諡章懿。性度寬洪。容姿豐美。聰明孝悌。善屬文。書法亦妙。挽強射遠。又能擊毬,音律。算數亦極精妙。此非子孫之言。蓋史家之評如是。其詳在卞季良,李季甸等所撰行狀143_575c誌文云。娶平山申氏。同樞自守女。生一子。曰溥。永順君。再登文科。兩策勳籍。卒諡恭昭。與龜城君浚並名一時。光廟嘗稱之曰。文永武龜。永順。乃余七代祖也。


세종 13년 신해(1431,선덕 6)
 12월27일 (무오)
왕세자와 진평대군·안평 대군 등이 풍정을 드리다

왕세자와 진평 대군 이유(李瑈)·안평 대군 이용(李瑢)·죽성군 안맹담(安孟聃)이 풍정(豐呈)을 드리고 밤 4경이 되어 그제야 파하였다.
【원전】 3 집 365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세종 14년 임자(1432,선덕 7)
 1월16일 (병자)
안맹담·이무생·홍인 등에게 벼슬을 제수하고, 종실 명부의 작을 고쳐 결정하다

이여(李璵)로 광평 대군을, 안맹담으로 연창군을, 이무생으로 원윤을 이흔(李欣)으로 부원윤을, 이석(李碩)으로 부정윤(副正尹)을, 홍인(洪裀)으로 총제를, 이상흥(李尙興)으로 동지총제를, 김효정(金孝貞)으로 집현전 부제학을, 권선으로 우사간을, 이사검(李思儉)으로 판의주목사를 삼았다. 이보다 앞서 종실 대군의 아내를 삼한 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부원군·제군과 공신·의정인 부원군의 아내를 다 아무개[某] 한국 대부인이라고 일컬었다. 그러나 신하의 아내를 국을 붙여 일컫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므로, 일찍이 상정소에 명령하여 옛 제도를 상고하게 하였더니, 의논하여 아뢰기를,
“종실 명부(宗室命婦)로서 정 1품의 처는 모부 부인이라고 일컫고 도호부 이상의 관호를 사용하며, 종 1품의 처는 모군 부인이라고 일컫고, 정·종2품의 처는 모현 부인이고 일컬으며, 정·종 3, 4품의 처는 예전대로 신인(愼人)·혜인(惠人)이라고 일컬으며, 공신의 명부로서 정 1품의 처는 모군 부인이라 일컬으며, 정·종2품의 처는 모현 부인이라 일컫고, 문무관 각 품의 처는 예전대로 할 것이며, 다만 2품 이상의 처에게 3품 이하의 처의 예에 좇아 이조에서 직첩을 주는 것은 온당하지 아니하니, 이조에서 여러 사람의 논의에 서명해서 합하여 계문하고 임금이 임명하게 하며, 또 위에서 말한 종실·공신·문무 2품 이상의 수절(守節)한 적모로서 옛 제도에 따라 아들의 직위로 인하여 가작하는 이에게는, ‘대’(大) 자(字)를 더하도록 하소서.”
하니, 명부(命婦)의 작은 이 때에 이르러 고쳐서 결재하였다.
【원전】 3 집 368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사급(賜給) / *인사-임면(任免)


조선
연대
1466년(세조12년)
유형/재질
비문 / 돌
문화재지정
시도지정문화재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0호
크기
높이 187cm, 너비 104cm, 두께 26cm
출토지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63-1번지
소재지
(한국)경기도박물관-경기도 용인시 기흥읍 상갈리 85, (한국)-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 63-1번지
서체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정인지(鄭麟趾) / 안빈세(安貧世)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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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효공안맹담신도비(良孝公安孟聃神道碑)

 

良孝公安孟聃神道碑  良孝安公墓碑(篆題)

有明朝鮮國駙馬綏祿大夫▨昌尉諡良孝公▨▨神道碑銘 幷序
……佐翼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河東▨ 鄭麟趾 撰


天順六年壬午十二月二十五日乙酉 我世宗莊憲大王之女貞懿公主駙馬延昌尉安公 以疾卒於第 春秋四十八矣 宗戚曁士 大夫 無不駭且悲焉 訃聞 上▨悼輟朝 其賜祭文 有齠齕同遊痛貫衷曲之語 諡良孝公 越明年癸未二月二十五日甲申有司以禮葬于楊州道峯山海村洞之原 公主隨柩號泣 親臨窆棺 虞卒哭朝夕上食望奠以至祥禫之祭 必親侍靈側 悲不能已 水漿不時進 毀瘠不自勝 制盡 立廟制度 進退升降之節 動遵禮法 諸子無敢違異 主之無驕貴相盡婦道 古今罕有 因以知公之以禮持家也 成化二年丙戍 季子來曰 石己具矣 子有婚姻之舊 請銘 余惟吾豚犬會爲長婿 夫婦皆蚤死 丙子哭婦 丁丑哭子 五年而又哭公 可勝悲哉 謹按其狀 公姓安氏 諱孟聃 字德壽 竹山望族也 高麗輸忠保節賛化功臣 重大匡 竹城君 右文舘大提學 知春秋館事 諡文貞 諱克仁 生奉翊大夫 西北面都巡問察理使兼平壤府尹諱淑老 察理使 生嘉善大夫 咸吉道都觀察黜陟使 咸興府尹 諱望之 觀察使 娶河陽世家 奉常主簿許之信之女 以永樂十三年乙未十二月二十八日生公 幼而端重聰慧 宣德三年戊申 齒尙公主 封竹城君 階崇政大夫 考贈崇政大夫議政府賛成 母封莊信宅主 祖贈正憲大夫 吏曹判書 祖母黃氏 封貞夫人 壬子 封延昌君 正統七年壬戍 陞崇祿大夫 九月甲子 改官制爲光德大夫 景泰元年庚午七月 凡駙馬改名稱尉 所以別宗室也 四年癸酉十一月 加成祿大夫 天順元年丁丑正月 陞綏祿大夫 位極矣 八月 賜原從功臣券 加贈考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右議政 母加封貞敬大夫人 三年己卯八月 丁大夫人喪 五年辛巳十月 服除 還拜本職 公不事生產 善草書射御 曉音律 備藥物施與 不以富貴生驕 行無引卒 食不重味 又好浮屠法 盖其天性然也 惜乎 天不之年 命也夫 生四男二女 長曰如獺 昭威將軍行虎賁衛副護軍 次曰温泉 朝散大夫 濟用副正 喪中歿 次曰桑鷄 通德郎 宗親府典簿 次曰貧世 宣略將軍 龍驤衛副護軍兼宣傳官 女長適折衝將軍 龍驤衛大護軍 世子左翊衛鄭光祖 即吾之嫡長子也 夫婦皆蚤死 次適通政大夫兵曹叅知韓致禮 虎賁 娶護軍安耆之女 生一男曰元卿 一女幼 副正 娶懷議都正菆之女 生一男曰彥卿 二女皆幼 典簿 娶尙衣院僉正安訓之女 生一男曰夢卿 一女幼 龍驤 娶中護軍李繼賢之女 大護軍 生一女幼 參知 生一男曰韓翊 二女皆幼 銘曰
公自趨庭 夙承義方 妙齡尙主 不顯其光 貴而能降 行己有恪 富而好禮 自奉甚約 克儉爲家 與物無竸 尊德撝謙 接人以敬 孝且友愛 終無間言 不壽奈何 誰叩帝閽 主盡婦道 俔

 

 

天之匹 慶流千載 子孫逢吉 成化二年 丙戍 七月 日 立  貧世 拜書 幷篆

 

 

   
 
 세종조 고사본말(世宗祖故事本末)

세종 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 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은, 휘는 도(祹)요, 자는 원정(元正)이니 태종의 셋째 아들이다. 원경왕후(元敬王后)가 홍무 30년 정축, 태조 6년 4월 10일 임진에 한양(漢陽) 잠저에서 낳았다. 무자년(1408)에 처음으로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졌다가 임진년(1412)에 대군(大君)으로 승진되었고, 무술년(1418)에 세자(世子)로 책봉되었다.그해 8월에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에서 왕위를 물려받아 경태(景泰) 원년 경오 2월 17일 임진에 별궁(別宮) 영응대군(永膺大君)의 집 에서 승하하니, 왕위에 있은 지 32년이고, 수는 54세였다. 명 나라에서 시호를 장헌(莊憲) 엄함과 공경으로써 백성에 임함을 장(莊)이라 하고, 착함을 행하여 기록할 만함을 헌(憲)이라 한다. 이라 하였다.능은 영릉(英陵) 처음에는 광주(廣州) 헌릉(獻陵)의 서편 산에 장사했다가, 예종(睿宗) 원년 기축 3월 6일에 여주(驪州) 서북편 성산(城山)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옮겼으며, 표석(表石)이 있다. 이승소(李承召)가 묘지(墓誌)를 지었고, 윤회(尹淮)가 행장을 지었다. 처음에는 정인지가 글을 지은 신도비(神道碑)가 있었으나, 능을 옮길 때 묻어두고 쓰지 않았다. 이다.
○ 비(妃) 선인제성소헌 왕후(宣仁齊聖昭憲王后) 심씨(沈氏)는, 본관은 청송(靑松)이니 영의정(領議政)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안효공(安孝公) 심온(沈溫)의 딸이다. 홍무 28년 을해 9월에 양주(楊州) 사제(私第)에서 났으며, 영락(永樂) 무자년에 가례(嘉禮)를 행하여 처음에는 경숙옹주(敬淑翁主)로 봉해졌다가, 정유년(1417)에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으로 봉해지고, 무술년에 경빈(敬嬪)으로 책봉되었다.얼마 안 되어 공비(恭妃)로 승진되었고 임자 선덕(宣德) 7년 에 왕비가 되었다. 정통(正統) 병인 11년 세종 28년 3월 24일 신묘에 별궁 세조(世祖)의 잠저. 에서 승하하니, 수가 52세였다. 문종(文宗) 2년에 선인제성(宣仁齊聖)이라는 존호(尊號)를 올렸다. 능은 영릉 세종의 능과 같은 언덕에 있다. 애초에는 헌릉(獻陵) 서편 산에 장사지냈다가 기축년(1469)에 이장하였다. 이다.
○ 18남 4녀를 두었다.
사(嗣) 문종대왕(文宗大王) 순서로는 첫째이다.
사(嗣) 세조대왕(世祖大王) 순서로는 둘째이다.
3남 안평대군(安平大君) 용(瑢) 시호는 장소(章昭)다. 연일 정씨(延日鄭氏)에게 장가들었으니, 판서(判書) 증 좌의정(贈左議政) 연(淵)의 딸이다. 2남을 두었으며, 계유년(1453)에 화를 입었고,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4남 임영대군(臨瀛大君) 구(璆)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의녕 남씨(宜寧南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우의정(右議政) 충간공(忠簡公) 지(智)의 딸이다. 전주 최씨(全州崔氏)에게 재취하였으니, 봉례(奉禮) 증 우의정(贈右議政) 승녕(承寧)의 딸이다. 5남 2녀를 두었다.
5남 광평대군(廣平大君) 여(璵) 시호는 장의(章懿)이다. 평산 신씨(平山申氏)에게 장가들었으니, 동중추부사 증 좌의정 자수(自守)의 딸이다. 1남을 두었다.
6남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 시호는 정민(貞愍)이다. 전주 최씨(全州崔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좌찬성 증 좌의정 경절공(敬節公) 사강(士康)의 딸이다. 1남을 두었다. 정축년(1457)에 화를 입었고, 그 뒤에 신원되었다.
7남 평원대군(平原大君) 임(琳) 시호는 정헌(定憲)이다. 처음의 시호는 정덕(靖德)이다. 남양 홍씨(南陽洪氏)에게 장가들었으니, 부사(府使) 증 좌의정 이용(利用)의 딸이다.
8남 영응대군(永膺大君) 염(琰) 시호는 경효(敬孝)이다. 해주 정씨(海州鄭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참판 증 좌의정 충경(忠敬)의 딸이다. 여산 송씨(礪山宋氏)에게 재취하였으니, 동지중추부사 증 좌의정 복원(復元)의 딸이다. 1녀를 두었다.
1녀 정소공주(貞昭公主) 일찍 죽었다.
2녀 정의공주(貞懿公主) 연창위(延昌尉) 양효공(良孝公) 안맹담(安孟聃)의 아내이다. 4남 2녀를 두었다. 맹담의 본관은 죽산(竹山)이고, 아버지는 도관찰사(都觀察使) 망지(望之)이다.
1남 화의군(和義君) 영(瓔) 영빈(令嬪) 강씨(姜氏)가 낳았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밀양 박씨(密陽朴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참판 증 좌찬성(贈左贊成) 공효공(恭孝公) 중손(仲孫)의 딸이다. 계유년에 화를 입었다.
2남 계양군(桂陽君) 증(璔) 신빈(愼嬪) 김씨가 낳았다. 좌익 공신(佐翼功臣)이고, 시호는 충소(忠昭)이다. 청주 한씨(淸州韓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좌의정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양절공(襄節公) 확(確)의 딸이다. 3남 3녀를 두었다.
3남 의창군(義昌君) 공(玒) 신빈 김씨가 낳았다. 시호는 강도(剛悼)이다. 연안 김씨(延安金氏)에게 장가들었으니, 도관찰사 증 찬성 수(脩)의 딸이다. 1남 2녀를 두었다.
4남 한남군(漢南君) 어() 혜빈(惠嬪) 양씨(楊氏)가 낳았다. 정축년에 귀양가서 죽었으며, 시호는 정도(貞悼)이다. 안동 권씨(安東權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정랑(正郞) 증 지돈녕부사 격(格)의 딸이다. 1남 1녀를 두었다.
5남 밀성군(密城君) 침(琛) 신빈 김씨가 낳았다. 익대 좌리 공신(翊戴佐理功臣)이고, 시호는 효희(孝僖)이다. 여흥 민씨(驪興閔氏)에게 장가들었으니 판윤 증 찬성 승서(承序)의 딸이다. 4남 2녀를 두었다.
6남 수춘군(壽春君) 현(玹) 혜빈 양씨가 낳았다. 시호는 안도(安悼)이다. 영일 정씨(迎日鄭氏)에게 장가들었으니, 부윤 증 좌찬성 위양공(威襄公) 자제(自濟)의 딸이다. 1녀를 두었다.
7남 익현군(翼峴君) 곤(璭) 신빈 김씨가 낳았다. 좌익 공신(佐翼功臣)이고, 시호는 충성(忠成)이다. 평양 조씨(平壤趙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소윤 증 찬성 철산(鐵山)의 딸이다. 1남 1녀를 두었다.
8남 영풍군(永豊君) 전(瑔) 혜빈 양씨가 낳았다. 정축년에 화를 입었으며,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순천 박씨(順天朴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참판 팽년(彭年)의 딸이다. 1녀를 두었다.
9남 영해군(寧海君) 당(瑭) 신빈 김씨가 낳았다. 시호는 안도(安悼)이다. 평산 신씨(平山申氏)에게 장가들었으니, 한성윤 증 찬성 윤동(允童)의 딸이다. 2남 1녀를 두었다.
10남 담양군(潭陽君) 거(璖) 신빈 김씨가 낳았다. 일찍 죽었으니 시호는 이양(夷襄)이다.
1녀(一女) 정현옹주(貞顯翁主) 상침 송씨(尙寢宋氏)가 낳았다. 좌익공신 좌찬성 영천부원군(鈴川府院君) 충경공(忠景公) 윤사로(尹師路)의 아내이다. 2남을 두었다. 사로의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아버지는 참의 은(垠)이다.
2녀 정안옹주(貞安翁主) 숙원 이씨(淑媛李氏)가 낳았다. 청성위(靑城尉) 심안의(沈安義)의 아내이다. 1남 1녀를 두었다. 안의의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아버지는 관찰사 선(璿)이다.
태종 18년 무술 6월에 책봉하여 세자가 되었다. 8월에 태종이 지신사(知申事) 이명덕(李明德)을 불러서 이르기를, “내가 왕위에 오른 지, 이제 벌써 19년이나 되었다. 아침에나 밤에나 삼가며 두려워하였으나 위로 하늘의 뜻을 보답하지 못하여 여러 차례 재변이 내리고 또 묵은 병이 있으니, 이제 세자에게 이 자리를 전해 주려 한다.” 하였다. 정부와 육조(六曹) 및 모든 공신들이 궁문을 헤치고 들어와서 하늘을 부르며 통곡하여 내렸던 명령을 거두기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태종이 보평전(報平殿)에 거둥하여 내신(內臣)에게 명하여 빨리 세자를 불러들여 국새(國璽)를 전하고, 곧 자기의 거처를 연지동(蓮池洞) 별궁으로 옮겼다. 세자가 그 뒤를 따라가서 국새를 받들고 친히 내정(內庭)에 나아가 굳이 사양하여 밤이 되었는데도 윤허하지 않았다.드디어 경복궁에서 즉위하여 조하(朝賀)를 받고 죄인에게 사면령을 반포하고는 백관을 거느리고 전문(箋文)을 갖추어 상왕전(上王殿)에 사은하고 군국(軍國)에 관한 대사는 모두 상왕에게 여쭙기로 하였다.
11월에 세종이 곤룡포와 면류관을 갖추고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서 상왕에게 성덕 신공(聖德神功)이라는 존호와 대비(大妃)에게 후덕(厚德)이라는 존호를 올리고, 상왕의 시어소(時御所)에 행차하여 경헌례(敬獻禮)를 행하였다. 《국조보감》 《동각잡기》
○ 상왕이 이르기를, “내가 세자에게 왕위를 전한 것은 애초에 세상일을 잊어버리고 뜻대로 편히 지내고자 해서이다. 다만 군사(軍事)에 대해서만 친히 보살피려 하는 것은 임금이 나이 젊어서 군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 그의 나이가 서른이 되고 일에 경험이 많기를 기다려서 모두 전해주려 한다.지난 날에 만일 모든 아들로 하여금 원수(元帥)를 삼아서 여러 도의 군사를 나누어 맡게 하였더라면 임금이 어찌 오늘에 이르기까지 군사 일을 알지 못하였겠는가. 그러나 내가 그렇게 하지를 못했으니, 이는 저 양녕(讓寧)이 시기하고 음험한데 모든 아우들이 제각기 병권(兵權)을 잡고 있으면 어찌 서로 용납하였겠는가. 그래서 그렇게 못한 것이다.” 하였다. 《국조보감》
○ 세종이 상왕에게 상수(上壽)할 때 뭇 신하들이 모시고 잔치를 벌였다. 상왕은 이르기를, “내가 왕위를 피한 것은 복을 쌓아두고자 해서였는데 이제 와서 도리어 더욱 높아졌도다.” 하였다.술에 취하자 뭇 신하가 춤을 추었는데, 상왕 역시 춤추며 이르기를, “왕위를 맡기는데 만일 적임자를 얻지 못했다면 비록 걱정을 잊으려 한들 되었겠는가. 임금은 참으로 개국한 뒤를 계승하여 문치(文治)로 태평을 이룩할 임금이로다.” 하였다. 《국조보감》
○ 정종(定宗)이 피서하기 위하여 광나루에 머무를 때, 상왕이 임금과 더불어 동교(東郊) 대산(臺山)에 거둥하여 정종을 맞이하고, 술자리를 차려 매우 즐기다가 해가 저물어서야 헤어졌다.상왕이 흰말을 타고 돌아오다가 중도에 말에서 내려 지신사 하연(河演)을 불러 이르기를, “내 평소부터 이 말이 길이 잘든 것을 사랑해 왔는데, 이제 이 말을 임금에게 주리라.” 하고는, 곧 상승(尙乘)으로 하여금 안장을 갈아서 임금께 드리도록 명하였다.
○ 임금이 낙천정(樂天亭)에서 상왕을 뵐 때, 사신 조량(趙亮)과 이절(易節)이 뒤를 따라 이르렀기 때문에 들여서 잔치를 베풀었다. 조량이 찬탄하기를, “하늘이 이런 선경을 마련해 주었으니 전하께서는 한가하게 지내며 수양하기에 가장 알맞고, 새 전하께선 조정[明朝]을 공경하며 늙으신 상왕을 높여 충성과 효도가 겸전하시니, 내 일찍이 사신 간 나라가 많았으나 새 전하처럼 어진 분은 보지 못하였오.” 하고, 이내 “돈이 아무리 많아도 자손의 어진 것은 사지 못하리.”라는 옛 구절을 읊었다. 이에 상왕이 사례하기를, “이제 사신의 말을 들으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절로 내리오.” 하였는데, 그 자리에 모시고 있던 신하들도 모두 감격하여 울었다. 《국조보감》
○ 상왕이 일찍이 포천(抱川)에 행차하였을 때에 곽존중(郭存中)에게 이르기를, “나는 나라를 맡길 사람을 얻어 산수 사이에서 한가히 노니 걱정없는 이로 이 세상에 하나이다. 역대 제왕들의 부자 사이를 보면 실로 나의 오늘과 같은 이가 없었느니라.” 하였다.
또 일찍이 지신사 김익정(金益精)을 불러 이르기를, “임금께서 날마다 와 이야기를 하니 매우 좋기는 하나, 정사를 폐할까 두렵다. 네가 가서 여쭈어 격일로 오게 하라.” 하니, 김익정이 대답하기를, “상감께서는 매양 일을 처리하신 뒤에 와 뵙는 것이며, 와 뵙는 동안에도 일이 있으면 곧 따라 여쭙게 하여 지체가 없습니다. 상감께서는 늘 옛날 문왕이 그 아버지께 날마다 세 차례 뵙던 일을 본받지 못함을 한스럽게 생각하시는데, 어찌 격일로 와 뵈려 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왕이 이르기를, “그러면 호위하는 군사가 어찌 피로하지 않겠는가.” 하니, 익정이 대답하기를, “다만 매일 당번된 금군만을 거느리고 올 따름이니, 뉘가 감히 수고로움을 꺼리겠습니까.” 하였다.
○ 2년 경자에 대비가 돌아가셨다. 상례는 한결같이 고례(古禮)를 따랐다. 부르짖고 슬퍼하여 수일 동안을 음식을 들지 않았으며, 때마침 날씨가 덥고 습했으나 평상을 버려두고 짚자리에 엎드려 밤낮없이 통곡하였다. 모신 이들이 몰래 유지(油紙)를 그 밑에 깔았더니, 세종이 이를 알고 걷어버리라 명하였고, 큰 비가 와서 물이 여차(廬次)에 스며 들었으나, 임금은 그래도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신하들이 굳이 옮기기를 청하여 드디어 다른 곳으로 옮겼지만, 날이 밝자 곧 여차로 돌아왔다. 《국조보감》
○ 3년 신축에 우의정 이원(李原) 등이 상왕을 태상왕(太上王)으로 높이려는 뜻을 상왕에게 여쭈니, 상왕이 이르기를, “내가 태상왕의 호를 사양함은 그 뜻이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우리 태조께서 태상왕이 되었고, 둘째는 인덕전(仁德殿 정종)이 태상왕이 되지 못했으며, 셋째는 내 덕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였는데, 굳이 청하자 그제서야 허락하였다. 가을 9월에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옥책(玉冊)ㆍ금보(金寶)로써 상왕을 높여 성덕 신공 태상왕(聖德神功太上王)으로 모셨다.
○ 4년 임인에 태상왕의 병이 위독하여 신궁(新宮)으로 옮길 때, 임금이 도보로 그 뒤를 따랐다. 임금이 태상왕의 병환이 있은 이래로 약과 음식 등을 모두 손수 받들어 드렸다. 병세가 위독해지자 밤이 새도록 그 곁에서 뫼시되 일찍이 옷끈을 풀고 눈을 붙인 적이 없었으므로 신하들이 모두 근심하였다. 태상왕이 돌아가신 뒤,흙비[霾雨]가 심하여 대신들이 술을 드시기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고, 정원에 꾸지람을 내려 이르기를, “상중에 술을 마심은 예법이 아닌데, 너희들은 어찌 감히 비례(非禮)의 말을 아뢰는가.” 하니, 김익정(金益精)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태상왕 병환이 심하시던 날로부터 음식을 드시지 않은 지 이제 이미 20여일이 되었습니다. 이에 신들은 어쩔 줄을 몰라서 옮고 그름을 헤아리지 못하고 감히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하였다.
○ 태종의 초상에 명 나라 황제가 내관 유경례(劉敬禮)와 예부 낭중(禮部郞中) 양선(楊善) 등을 보내어 부물(賻物)을 주어 치제(致祭)하고, 시호를 내렸다. 임금이 태평관(太平館)에 나가서 예를 거행할 때 임금이 우시니, 사신도 또한 울면서 말하기를, “오늘 여러 신하가 모두 우는 정경을 보니 더욱 부왕께서 인후하고 덕이 있었음을 알겠나이다.” 하였고,또 세자를 보고서 말하기를, “덕스런 얼굴이 전하와 같으니, 이는 한 나라의 복입니다.” 하였다. 잔치하면서 효령대군(孝寧大君)이 술을 돌리자 임금이 자리에서 일어나니, 사신이 관반(館伴)황희(黃喜)에게 그 연유를 물었다. 황희는 “군신의 분수가 진실로 엄하기는 하나 전하께서 일어서심은 형제의 천륜을 위해서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더니, 사신이 “전일 우리나라에서 촉왕(蜀王)이 들어와 황제를 뵈올 때, 황제께서 동궁에게 명하여 길을 비키게 하더니, 이제 전하가 효녕을 대우함이 이와 같소이다.” 하고 감탄하였다.
○ 임금은 침착하고 과묵하며 제왕의 위의가 있었다. 왕위에 오르자 총명과 지혜는 만민에 뛰어난 성인이었고, 너그러움과 온유함은 뭇 백성을 용납하고 기르는 덕을 지녔다. 사물을 처리함에 혼자서 판단하여 주장이 있었고 위엄있고 모범이 되어 근엄하고 중정한 조심성이 있었으며, 정미한 의리는 신묘한 경지에 이르러,사물의 조리를 세밀히 관찰하는 분별력이 있었다. 날마다 네 번째 인경 소리가 나면 일어나 옷을 입고 평명(平明)에 조회를 받고 나서는 곧 일을 보고, 다음에는 신하를 번갈아 만나보고, 다음에는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그러고 나서야 내전(內殿)에 들어갔는데 오히려 서적을 보아 조금도 게을리함이 없었다. 그리하여 정사는 시행되지 않음이 없었고 일은 처리되지 않음이 없었다. <신도비 지문(誌文)>
○ 임금은 늘 이르기를 “나는 서적에 대해서 눈으로 한번 거친 것은 곧 잊지 않았다.” 하였으니, 총명과 글 좋아함은 천성이 그러하였던 것이다. 또 이르기를, “나는 궁중에 있을 때 손을 거둔 채로 한가히 앉아 있었던 적이 없었다.” 하였다. 《국조보감》
○ 임금은 천성이 학문을 좋아하여 세자로 있을 때 항상 글을 읽되 반드시 백 번씩을 채우고, 《좌전(左傳)》과 《초사(楚辭)》같은 것은 또 백 번을 더 읽었다. 일찍이 몸이 불편할 때에도 역시 글 읽기를 그만두지 않았으니, 병이 점차 심해지자 태종은 내시를 시켜 갑자기 책을 모두 거두어 가지고 오게 하였다.그리하여 다만 《구소수간(歐蘇手簡)》 한 권이 병풍 사이에 남아 있었는데, 임금은 천백 번을 읽었다. 왕위에 오른 뒤에는 날마다 경연을 열어 제왕으로서의 공덕은 백왕(百王) 중에서 높이 뛰어났었다. 일찍이 근신(近臣)에게 이르기를, “글읽는 것이 가장 유익하니, 글씨를 쓴다든지 글을 짓는 것은 임금이 유의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만년에 기력이 줄어 비록 조회는 보지 않았으나, 문학에 관한 일에는 더욱 유의하여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국(局)을 나누어 설치해서 모든 책을 편찬케 하였으니, 《고려사(高麗史)》ㆍ《치평요람(治平要覽)》ㆍ《역대병요(歷代兵要)》ㆍ《언문(諺文)》ㆍ《운서(韻書)》ㆍ《오례의(五禮儀)》ㆍ《사서오경음해(四書五經音解)》 등이 모두 직접 재단을 거쳐 이루어졌는데, 하룻 동안에 열람한 것이 몇십 권에 이르렀다. 《필원잡기(筆苑雜記)》
○ 동북 지방의 다른 민족들이 모두 복종하여 국경 안이 편안하니, 당시 사람들이 해동요순(海東堯舜)이라 일컬었다. 《국조보감》
국초에는 고려가 망한 뒤를 이었기 때문에 예악에 손댈 겨를이 없었는데, 임금이 비로소 종(鍾)ㆍ경(磬)과 당악(唐樂)ㆍ국악의 악보(樂譜)를 제정하고, 보루각(報漏閣)을 지어 시의(時儀 물시계)를 정하였으며, 《칠정편(七政篇)》ㆍ《오례의(五禮儀)》ㆍ《삼강행실(三綱行實)》ㆍ《명황계감(明皇誡鑑)》ㆍ《치평요람(治平要覽)》ㆍ《역대병요(歷代兵要)》 등이 모두 임금의 직접 재단에서 나온 것이다.정인지(鄭麟趾)의 <영릉비서(英陵碑序)>에, “실로 동방의 요순이다.” 한 것이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이었다. 비기(秘記)에 전하기를, “황려(黃驪 여주)의 산에는 마땅히 성인(聖人)을 장사할 곳이 있다.” 하였으니, 이것이 곧 영릉(英陵)이었다. 《지봉유설(芝峯類說)》
○ 임금은 모든 진기한 물건들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림원(上林苑)에 명하여 온갖 꽃과 새들을 모두 민간에게 나누어 주었다.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 하경복(河敬復)이 길들인 사슴을 바치고자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상한 새나 기이한 짐승은 옛 사람들이 경계한 바이니, 들이지 말라.” 하였다.
○ 임금이 경회루 동편에 남는 재목으로 별실(別室)을 지었는데, 돌 층대를 쓰지 않고, 또 짚으로 지붕을 올려 되도록 검소하게 한 후 늘 이곳에서 거처하였다. 문 밖에 짚자리가 깔려 있음을 보고 물으시기를, “이건 누가 한 짓인가. 비록 작은 물건이라도 내 명령이 내리기 전에는 안에 들이지 말라.” 하였다.
○ 강음현(江陰縣) 백성 조원(曺元)이 농토 문제로 관가에 송사를 할 때, 현관(縣官)이 송사를 지체한다고 분개하여 말하기를, “지금 임금이 밝지 못하여 이제 이따위를 수령으로 삼았다.” 하였다. 금부(禁府)와 삼성(三省)의 관원이 모두 죄 주기를 청했으나 임금은 심문하지 말라고 명하고 이르기를, “요즘 홍수와 가뭄이 서로 잇달아서 백성이 몹시 괴로운데, 조원의 고을 수령이 이러한 괴로움을 생각하지 않고 손님과 술을 마시느라고 송사를 지체하고 판결하지 않았으니, 조원의 말은 다만 이를 미워해서 그러한 것이리라.” 하고, 끝내 죄 주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국조보감》
○ 임금이 일찍이 병이 나서 누웠는데, 나인(內人) 등이 무당의 말에 혹하여 성균관(成均館) 앞에서 기도를 하니 유생들이 무녀를 쫓아냈다. 중사(中使)가 크게 노하여 그 연유를 아뢰었더니,세종이 병든 몸을 부축케 하여 일어나 앉으면서 이르기를, “내 일찍이 선비를 기르지 못했는가 염려하였는데, 이제 선비들 기운이 이러하니 내 무슨 걱정을 하리오. 이 말을 들으니 내 병이 낫는 것 같구나.” 하였다.
명종조(明宗朝)에 유진동(柳辰仝)이 이 이야기를 경연에서 아뢰며, 말하기를, “군주가 선비의 기운을 돋구어 주는 것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합니다.” 하였다. 《동각잡기》
○ 한 어린 궁녀가 후궁(後宮) 중 가장 사랑을 받아 항상 좌우에서 모셨는데, 임금의 사랑을 믿고 작은 일을 청한 일이 있었다. 세종이 하교하기를, “아녀자가 감히 간청하는 말을 하였으니 이는 내가 사랑을 보여서 그런 것이다. 이 계집이 어린데도 불구하고 이러하니 자라면 어떠할 것인가를 짐작하겠다.” 하고는, 곧 물리쳐 멀리하여 다시는 가까이 하지 않았다. 《공사견문(公私見聞)》
○ 측실(側室) 홍씨(洪氏)의 오라비 유근(有根)이 사랑을 받아 임금이 벗은 헌옷은 반드시 그에게 내려 주었다. 그가 일찍이 겸사복(兼司僕)이 되었을 때, 임금이 거둥하다가 연(輦) 끄는 말이 저는 것을 보고 물으니, 이에 유근은 자기 말을 스스로 자랑하며 자기 말로 대신 끌게 하였다.임금이 이르기를, “만일 대간이 이 일을 알게 되면 반드시 극형을 청할 것이니, 소문을 퍼뜨리지 말라.” 하고, 유근을 도보로 돌아오게 하였다. 그 뒤에 대간이 듣고 유근을 베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은 놓아주고는 그를 한 평생 버렸다. 《소문쇄록(謏聞瑣錄)》
○ 9년 정미에 금천(衿川)에 행차하여 매사냥을 구경하고 돌아오는데, 강가에 이르자 갑자기 바람과 눈보라가 매우 치며 물결이 사나와 배들이 통행하지 못하였다. 명령을 내려 금천의 쌀과 콩을 가져다가 호종한 군사에게 나누어 주고 새벽이 될 무렵에야 겨우 건넜었다.좌의정 이직(李稷)이 길가에서 뵈었더니, 임금이 이르기를, “태종께서는 매사냥을 구경하러 가셨지만 강을 건너지는 않았으니, 매우 염려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내 이제 잘못하여 남의 말을 듣고 강을 건너갔으니, 이것은 하늘이 나를 꾸짖은 것이오.” 하였다.
사헌부에서 백관이 미처 문안하지 못하였으므로 예관(禮官)을 탄핵하였는데 임금이 또 이르기를, “오늘 일은 나의 과오이니 논하지 말라.” 하고, 이로부터는 다시 강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 해동청(海東靑 보라매)을 바치고 금은(金銀) 바치는 것을 감해달라고 건의하는 자가 있었다. 임금이 상왕으로 있을 때 이르기를, “해동청은 얻기가 매우 어려우며, 또 날마다 꿩 한 마리를 먹여야 하고, 길들이기도 어려울 뿐더러 달아나기라도 하면 응사(鷹師)가 그것을 찾기 위해 촌락에 침입하게 되어 백성에게 폐해가 되므로 내가 모두 놓아 버렸다.” 하였다. 변계량(卞季良)이 아뢰기를, “전하의 이 말씀은 사책(史冊)에 써서 만세에 법이 되도록 할 만 합니다.” 하였다.
○ 임금은 항상 소갈증으로 고생하였다. 대언 등이 아뢰기를, “의원의 말에 이는 먼저 음식물로 치료를 해야 하는데, 흰 수탉ㆍ누런 암탉ㆍ양 고기가 모두 갈증을 다스릴 수 있다 하니, 청컨대 유사로 하여금 날마다 들이도록 하소서.” 하니, 세종이 이르기를,“내 어찌 내 한 몸을 위해서 동물의 생명을 해치겠는가. 하물며 양이란 본국에서 나는 것이 아님에랴.” 하였다. 대언 등이 다시금 아뢰기를, “관가에 기르는 양이 번식하니, 청컨대 한번 드셔보소서.” 하였으나, 임금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 임금이 서교(西郊)에 행차하여 농사짓는 것을 구경할 때, 말을 천천히 몰아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별장인 새 정자에 올랐다. 때마침 단비가 내려 잠깐 동안에 온 들이 흡족하였다. 임금이 매우 기뻐하여 곧 그 정자 이름을 희우(喜雨)라 하였다.
○ 임금이 항상 근정전(勤政殿)에 앉아서 대신과 더불어 정신을 가다듬어 정치를 잘 되게 하려 하였으므로 황희(黃喜)와 허조(許稠)는 정부에서 물러가서도 오히려 옷을 끄르지 못하였으니, 불시에 부르는 일이 있을까 해서이다. 《정암집(靜菴集)》 <연주(筵奏)>
○ 임금이 신하를 예법으로 대우하여 당대에는 사대부로서 극형을 당한 이가 없었다. <지장(誌狀)>

[주D-001]시어소(時御所) : 임금이 타는 수레와 말을 맡은 관원.
[주D-002]여차(廬次) : 상주(喪主)가 거처하는 곳.
[주D-003]옥책(玉冊)ㆍ금보(金寶) : 왕이나 후비에게 존호를 올릴 때에 금보와 옥책을 드리는데, 보(寶)는 도장과 같은 것이며, 책(冊)은 거기에 관한 글을 지어 바치는 것을 말한다.
[주D-004]관반(館伴) : 외국 사신이 유숙하는 관(館)에서 접대의 책임을 맡은 사람.
[주D-005]응사(鷹師) : 매를 다루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