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 조선청백리 /예조 참판 金公 묘갈명(최관사위)

예조 참판 김공(金公) 묘갈명

아베베1 2011. 5. 23. 23:42

 

 

 

 

좌참찬 최관(崔寬)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종연(宗衍)을 두었으니, 후릉 참봉(厚陵參奉)으로 2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득대(得大)와 석대(錫大)이다.

 

 

서계집 제13권

 갈명(碣銘) 13수(十三首)
예조 참판 김공(金公) 묘갈명


공은 휘는 시진(始振), 자는 백옥(伯玉), 성은 김씨(金氏), 호는 반고(盤皐)이다. 그의 선조는 경주(慶州) 사람으로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이다. 9대조 균(稛)은 태조(太祖)를 도운 공로로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 두 대를 전해 종순(從舜)에 이르러서는 한성 판윤(漢城判尹)이 되었다. 5대조 천령(千齡)은 홍문관 직제학을 지냈으며, 문장과 절행(節行)으로 당대에 드러났다. 고조 휘 만균(萬鈞)은 대사헌이고, 증조 휘 경원(慶元)은 공청도 병마절도사(公淸道兵馬節度使)를 지냈는데, 아들이 없어 동생인 좌의정 명원(命元)의 둘째 아들 수인(守仁)을 데려와 후사로 삼았다. 이분이 공의 조부이고, 관직은 사축서 별제(司畜署別提)에 그쳤다. 부친은 휘가 남헌(南獻)인데 이분 역시 일찍 별세하여 벼슬하지 않았으며,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모친 정부인(貞夫人)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사인(舍人) 흔(昕)의 따님이다.
공은 광해(光海) 10년인 무오년(1618) 11월 14일에 태어났다. 15세에 부친상을 당하였고, 16세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인조(仁祖) 22년인 갑신년(1644)에 정시(庭試)에 입격하였다.
을유년(1645, 인조23)에 승문원에 선발되어 들어가 정자에 이르렀고, 예문관에 들어가 검열이 되었다.
병술년(1646)에 봉교로 전직되고 설서(說書)로 천직되었으며, 전적으로 승진하였다.
정해년(1647) 봄에 지평에 배수되고 정언으로 개차되었다. 관(官)에서 인평대군(麟坪大君) 저택의 부옥(副屋)을 지어주는 일에 대해 간하자, 상이 노여워하여 대간의 직책을 해임하였다. 얼마 뒤 병조 좌랑에 서용되었는데, 조모의 봉양을 위해 직산 현감(稷山縣監)이 되었다.
기축년(1649) 봄에 병으로 돌아왔다. 가을에 병조 좌랑에 서용되고 지평으로 천직되었다. 체차되어 문학에 배수되고, 어사로서 경상좌도를 안행(按行)하였다.
효종(孝宗) 원년인 경인년(1650) 봄에 지평과 정언이 되었다. 여름에 다시 문학이 되었고, 얼마 있다 지평으로 이배되었는데, 상소한 것이 상의 뜻에 거슬려 사직하여 체차되었다. 가을에 실록을 수찬하는 일에 참여하였고, 병조 정랑에 배수되었다.
신묘년(1651, 효종2) 봄에 경기 도사(京畿都事)가 되었으니, 지난여름 언사(言事)로 인해 오래도록 시종신에 제수되지 않았기 때문에 힘써 외직으로 나갈 것을 구했던 것이다. 겨울에 내직으로 들어와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
임진년(1652) 봄에 다시 실록을 수찬하는 데 참여하였고, 수어 종사(守禦從事)를 겸하였다. 여름에 상소하여 윤순지(尹順之)가 문형(文衡)에 합당하지 않은 것과 윤선도(尹善道)가 사특하고 방자한 것을 논핵하였는데, 상이 노여워하자 인하여 해면을 청하면서 다시 윤선도의 일을 논하니, 상이 더욱 노여워하여 홍문관의 직임을 해면시켜 주었다. 6월에 외직으로 나가기를 청해 남양 현감(南陽縣監)이 되었다.
계사년(1653, 효종4) 봄에 내직으로 들어와 부교리가 되고, 다시 실록을 수찬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지제교로 선발되었다. 여름에 헌납이 되었고, 얼마 안 가 파직되었다. 가을에 서용되어 부수찬에 배수되었다. 동료들과 차자를 올려 대사간 목행선(睦行善)을 논핵한 것이 상의 뜻에 거슬려 사직하여 체차되었다. 이에 상이 전부(銓部)에 명하여 의주(擬注)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갑오년(1654) 여름에 비로소 의망이 허락되었다. 이해 가을에 직강을 제수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근시(近侍)나 이조의 낭관을 제수하지는 않았다.
을미년(1655) 봄에 어사 10명을 파견하여 노비를 추쇄(推刷)하려고 하였다. 공도 가게 되어 다시 경상좌도를 주관하게 되었는데, 전부(銓部)에서 공을 수원(水原)과 양주(楊州)에 의망한 데다 또 황첨(黃籤)까지 내리니, 공이 편치 못해 스스로 사면하였다. 가을에 가서 다시 사예가 되었다. 비로소 어사의 일로 영남(嶺南)에 나갔는데 우도(右道) 어사가 병으로 면직되자 공이 우도까지 겸하여 관장하였다.
병신년(1656) 봄에 조모 한 부인(韓夫人)의 병이 위중하여 돌아가 문후할 것을 청해 허락을 받았다. 사도시 정(司䆃寺正)에 배수되었으나 어사의 일을 마치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영남으로 나갔다. 여름에 한 부인의 상을 당해 영남에서 분상(奔喪)하였다.
무술년(1658)에 상기가 끝나자 응교에 배수되고 집의로 이직되었다. 체차되어 사예가 되고 부수찬으로 이직되었으며, 사간으로 천직되고 검상으로 전직되었다. 다시 집의가 되어 부제학 신천익(愼天翊)을 체차할 것을 논핵하였다. 그를 탄핵하는 글에 이르기를, “뜨내기처럼 처세하여 조정에 나와서도 아무 도움이 못 되고 황당무계하게 처신하여 향리에 물러나서도 아무 교훈이 못 되고 있습니다.” 하였다. 천익은 명성이 있는 선배였기 때문에 탄핵하는 글이 나왔는데도 아무도 감히 동조하여 비난하는 글을 올리지 못하였다.
기해년(1659) 봄에 상의원 정(尙衣院正)이 되었다가 파직되었다. 이해 여름에 발탁되어 전남 관찰사에 배수되었다.
신축년(1661, 현종2) 가을에 임기가 차서 돌아와 동부승지에 배수되고 병조 참지가 되었다.
임인년(1662) 봄부터 여름까지 또 세 차례 은대(銀臺)에 들어갔는데, 호남 관찰사 때의 일로 파직되었다. 가을에 특별히 서용되어 경기우도 균전사(京畿右道均田使)와 첨지중추부사가 되고, 호조 참의로 이직되었다.
계묘년(1663) 봄에 대사간에 배수되었는데 외직에 나갔을 때의 일로 체차되었다. 여름에 판결사(判決事)가 되었다. 가을에 우부승지에 배수되었고, 곧이어 체차되어 호조 참의가 되었다. 이후로 대간과 판결사를 모두 한 차례씩 하였고, 은대에 들어간 것이 네 차례였으며, 균전사의 일도 마무리하였다.
갑진년(1664) 봄에 김만균(金萬均)의 일로 회천(懷川 송시열(宋時烈))에게 배척을 당해 사직하여 체차되었다. 얼마 뒤에 다시 좌부승지에 배수되고 우부승지로 전직되었다. 형조 참의, 광주 부윤(廣州府尹), 호조 참의, 좌승지를 역임하였다. 11월에 외직으로 나가 호서(湖西)를 안찰하였다.
이듬해 여름 어가가 온천으로 행행할 적에 공이 온양(溫陽) 행궁에서 대사(待事)하였는데, 일이 모두 제대로 거행되어 상하에 공급하는 데 차질이 없었다. 현종이 매우 가상하게 여겨 특명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로 올려주었다. 가을에 부절을 반납하고 돌아왔다. 겨울에 형조 참판에 배수되고 부총관을 겸하였다.
병오년(1666) 봄에 예조 참판이 되었다. 연경(燕京)에 사신으로 갔다가 6월에 돌아와 다시 예조 참판이 되고 비국 제조를 겸하였다. 옥당 유명윤(兪命胤) 등이 차자를 올려 공을 탄핵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는데, 즉시 인혐하여 체차되었다. 가을에 좌윤에 배수되었다. 입시한 것으로 인해 다시 특별히 비국 제조에 충원되고 소결(疏決)을 겸관(兼管)하였으며 좌윤에서 해면되었다. 이윽고 다시 좌윤이 되고 동지의금부사를 겸하였으며, 오래지 않아 외직으로 나가 수원 부사(水原府使)가 되었다.
정미년(1667) 봄에 병으로 해면하고 돌아와 4월 16일에 황화방(皇華坊) 옛집에서 운명하였으니, 향년 50세였다. 이해 6월 모일에 목천현(木川縣) 동쪽 행암촌(杏巖村) 자좌(子坐) 언덕에 안장하였다.
부인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진사 증(增)의 따님이며, 참판 중삼(重三)의 손녀이다. 공보다 11년 뒤에 별세하여 공의 왼편에 부장(祔葬)하였다.
공은 아들 없이 딸 하나만 두어 동생 정자(正字) 익진(益振)의 작은아들 양신(亮臣)을 데려다 후사로 삼았다. 딸은 민암(閔黯)의 아내가 되었으니, 아들은 장도(章道)이고 딸은 정언 오상유(吳尙游)의 아내가 되었다. 양신은 거상할 때 지나치게 애훼하여 일찍 죽었다. 좌참찬 최관(崔寬)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종연(宗衍)을 두었으니, 후릉 참봉(厚陵參奉)으로 2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득대(得大)와 석대(錫大)이다.
공은 천품이 강건하고 고결하며 지조가 고매하여 일찍부터 수립한 바가 있어 시속에 흔들리지 않았다. 궁달(窮達)에 따라 행동이 바뀌거나 이해(利害)에 따라 뜻이 변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유행을 좇아 취할 것을 도모하는 자를 보면 늘 가까이 다가와 혹시라도 자신을 더럽힐까 염려하였다. 또 세상 사람들이 다투어 편당하여 시비가 공정하지 않은 것을 노여워하여 자주 배척하여 말하면서 조금도 가차를 두지 않았다. 이로 인해 때를 놓쳐 득세하지 못한 자들이 다투어 공을 붙좇아 비방하는 논의가 산처럼 쌓였지만 종내 스스로 변명한 적 없이, “기묘년의 사화가 일어난 뒤에야 유운(柳雲)을 알게 되었다.”라고만 하였다.
소싯적에 피난하면서 회덕(懷德)에 우거하여 이송(二宋 송시열(宋時烈)ㆍ송준길(宋浚吉))에게 드나들며 상당히 친분이 있었다. 당시 이송은 중망(重望)이 있어 그 문하에 드나드는 자들이 모두 복건(幅巾)을 썼는데, 공만 홀로 진건(晉巾)을 썼다. 조정에 오르게 되어선 두 사람이 진심으로 추어주었고 공도 허물없이 내왕하였는데, 논의할 일이 있을 때 구차하지 않게 거리낌 없이 바른말을 해대자 이송이 실로 좋아하지 않게 되었고, 평소 사귀던 친구들도 따라서 배척하고 공격하면서, “훗날 보답을 받으려고 한다.” 하였다. 공은 듣고 웃으며, “내 어찌 거사(居士)처럼 맑은 이슬이나 마시면서 이승의 몸으로 내세의 복을 구하겠는가. 나는 내 마음이 편한 것을 추구할 뿐 다른 것은 돌아볼 겨를이 없다.” 하였다.
공이 호남(湖南)에서 공무로 금구(金溝)의 전후 읍재(邑宰)를 면직시켰는데, 이들은 모두 세상에서 훌륭하게 여기는 사람들이고 공 역시 실로 다른 뜻은 없었다. 호서(湖西)에 있을 때 송시도(宋時燾)가 세력을 믿고 함부로 사람을 죽이고는 거짓으로 죄를 덮으려 하였다. 공이 그 진상을 살펴 축출하였는데, 이 때문에 비방이 더욱 심해졌다. 천방사(千房寺) 중이 그 절에 불을 지르고 관리에게 대들자, 논의하는 자들이 반란죄로 다스려야 한다고 하였다. 공은 “증거가 드러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하여 변란을 부채질해서는 안 된다. 오직 진무하여 안정시킬 뿐이다.” 하고는 주범만 체포하여 치죄하고 나머지는 모두 풀어 주자, 이 일로 상 앞에서 공을 비난하는 자가 있기까지 하였다. 예송(禮訟)이 일어나면서부터 의견을 달리하는 자들이 걸핏하면 시망(時網)에 걸렸으니, 시론에 부합되지 않아 끝내 크게 쓰이지 않은 것은 실로 이 때문이다. 대각에 있을 때엔 자주 언사(言事)로 인해 상의 뜻에 거슬려 몇 년 동안 소외되고 배척당하였다. 그러다 효종이 말년에 가서 이르기를, “서린 뿌리와 뒤얽힌 가지에 시험해 보지 않으면 예리한 연장을 구별해 낼 수 없다.” 하면서 지위가 낮은 산직(散職)에서 발탁하여 호남 관찰사로 임명하니, 사람들이 비로소 상이 공을 알아본 지 오래되었으며 지난날 공을 억압했던 것은 다듬어 성취시켜 훗날 쓰려고 했던 것임을 알게 되었다. 전에는 전정(田政)이 제대로 수행되지 않아 공사(公私) 모두 피폐해졌는데, 공이 균전사에 임명되어 제도를 정비하고 법제를 수립하니, 뒷날 모두 본받을 만하였다. 수원 부사(水原府使)로 재직할 때 부내(府內)에 거주하는 이일선(李一善)의 친척이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횡포를 부렸는데, 관리들도 감히 문책하지 못하였다. 공이 부임해서는 그를 잡아 와 그의 죄를 조목조목 나열하고는 참수하여 머리를 장대에 꽂아 사람들에게 전시하였다. 어떤 이가 이 일을 의당 먼저 아뢰어야 한다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조정에 보고하면 허락을 얻으리란 보장이 없다.” 하였다. 이에 온 부내가 두려워 떨었으며 원근 사람들은 모두 통쾌해하였다. 뒤에 일선이 와서도 감히 따지지 못했다. 일선이란 자는 예전에 청나라 사람에게 잡혀갔다가 역관(譯官)으로 자주 우리나라에 온 자이다. 그래서 종족들이 그의 세력을 믿고서 악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공은 두 차례나 관찰사를 지내고 지위가 경재(卿宰)에 이르렀는데도 재산을 늘릴 생각을 하지 않아 짤막한 처마에 좁은 집은 가까스로 운신(運身)할 수 있을 정도이고 문에는 가리개도 없었다. 들어앉으면 구들이 차가운데도 불 때는 연기가 나지 않았으며 방이 컴컴한데도 촛불도 없었고 한밤중에 취침하여 새벽에 일어나 머리 빗고 세수하였으니, 이렇게 고생스러운데도 당연한 것처럼 생활하였다. 대청 앞의 서까래 몇 개가 빗물에 썩어 들어가 식구들이 바꾸자고 하니, 공은 기와를 잘 덮어두게만 하고서 말하기를, “물건이 사람보다 먼저 망가지는 경우는 없다. 내 자손들이 이 집에서 편안히 살다가 이 서까래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기만 해도 다행이다.” 하였다. 평소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시문(詩文)은 단아하고 법도가 있었다. 소차(疏箚)를 특히 잘 지어 내용이 바르고 이치에 합당하였으며 사물의 핵심을 명확하게 지적하였다. 한번은 섬돌 위의 작은 소나무를 두고 읊기를,
돌 틈의 소나무 한 그루 가지가 점점 옆으로 퍼지누나 / 石罅孤松老更盤
어느 때나 구름 끝에 닿을 만큼 자랄 수 있을까 / 何時長得拂雲端
재목이 모두가 다 동량이 되지는 않는 법 / 生材未必皆樑棟
곧은 심지로 세한에 버텨내는 것이 귀할 뿐 / 只貴貞心保歲寒
하였으니, 여기에 기탁(寄託)한 뜻이 깊다 하겠다.
공은 총명하고 기억력이 비상하였으며 백가(百家)의 학문에 정통하였다. 책을 한 권 읽으면 반드시 깊이 생각하고 열심히 탐구하여 그 의미를 심도 있게 파악하였고, 특히 역법(曆法)에 능해 신기하게 맞추는 일이 있었다. 신축년(1661, 현종2)에 큰 별이 떨어지자 공은 그 징조가 외국에 나타날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해에 연경에 대상(大喪)이 있었고, 을사년(1665)에 혜성이 출현해 하늘을 지나가자 또 10년 뒤에 오초(吳楚)의 분야(分野)에서 전쟁이 일어날 징조라고 하였는데, 갑인년(1674, 숙종 즉위년)에 오삼계(吳三桂)가 난을 일으켰으니, 모두가 공의 말처럼 된 것이었다. 한번은 상국(相國) 정태화(鄭太和)와 얘기를 나누면서 공이 이르기를, “경년(庚年)과 신년(辛年)에 사람들이 거의 몰살될 터인데, 그때 가서 공은 어떻게 구원하겠습니까?” 하니, 정공이 이르기를, “어째서 공의 근심거리는 되지 않는단 말입니까?” 하자, 공이 대답하기를, “소인은 미처 그 근심을 함께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뒤에 정공이 매번 사람들에게 이 얘기를 하면서 탄복하였다.
공이 세상에 버림받은 뒤 친구들도 모두 배반하였는데 끝까지 버리지 않은 이는 이경휘(李慶徽), 이경억(李慶億), 서필원(徐必遠), 이상진(李尙眞) 등 4, 5명뿐이었다. 이 몇 분은 공과 의기투합하여 모두 시속에 고개를 숙이거나 부화뇌동하려 하지 않았다. 갑인년 이후에 회천이 세력을 잃어 세사(世事)가 크게 변했지만, 공과 서공(徐公), 이공(李公) 등 여러 현인들은 대부분 이미 그전에 별세하였다. 가령 제공(諸公)이 지금까지 생존해 계시다면 틀림없이 잘 인도하고 유지하여 전반적인 국면이 다 기울어 도탄에 빠지는 상황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니, 세운(世運)을 부지하여 말속(末俗)을 구제하는 것이 어찌 보잘것없겠는가. 세당이 예전에 공에게 아낌을 받았다는 이유로 종연(宗衍)이 공의 사업과 행적을 열거하고서 묘갈명을 써 달라고 하니, 감히 사양할 수 없어 명을 쓴다. 명은 다음과 같다.

정도는 민멸되고 / 雅道淪喪
허위가 득세하니 / 虛僞興行
이익과 명예를 좇아 / 利名劫驅
너도 나도 바람에 휩쓸리듯 / 小大趨風
자기를 싫어하는 자는 짓밟고 / 惡我推沈
자기를 좋아하는 자는 추어주니 / 好我扶升
편 가르고 당 만드는 것 / 旣偏旣黨
바르고 공정한 것 아니라네 / 靡正靡公
원망과 해독이 오래 쌓여 / 怨毒蓄久
화가 뻗어나 / 禍發用長
이십 년이 되도록 / 訖玆二紀
판세가 번복되네 / 翻覆棋枰
명철하고 현성한 이들이 / 爾哲爾聖
뒤이어 묻히니 / 相隨于坑
모두가 취할 때 / 於萬醉中
홀로 깨어 있는 자 드물다네 / 鮮矣一醒
아 우뚝한 공은 / 唯公卓然
강건하고 방정하게 자신을 견지해 / 秉持剛方
고립 독행하며 / 孤立獨行
기대지도 않고 치우치지도 않았네 / 不倚不傾
사람들이 밀치고 떠밀어 / 群排衆擠
세상을 마치매 / 一世以終
재주를 못 펴고 뜻이 꺾이니 / 才屈志挫
유식자가 탄식하네 / 有識嗟傷
아 공과 같은 분들을 / 噫如公輩
하늘이 데리고 가지 않았다면 / 使天未喪
도탄에 빠진 지금 / 及此墊溺
어찌 생민을 보호해 줄 이 없으랴 / 豈缺捍防
아득한 천지신명이 하신 일을 / 冥冥所爲
도무지 헤아릴 수 없어라 / 或不可推
어찌 나만 홀로 눈물 흘리랴 / 胡我獨涕
만대가 함께 슬퍼하네 / 萬代同悲


 

[주D-001]유운(柳雲) : 1485~1528. 자는 종룡(從龍), 호는 항재(恒齋)이다. 1519년(중종14) 기묘사화 때 남곤(南袞)의 추천으로 대사헌이 되었는데,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당인들을 애써 구하다가 간당(奸黨)의 탄핵으로 파직당하였다.
[주D-002]연경에 대상(大喪)이 있었고 : 이해 1월에 청나라 세조(世祖)가 사망하였다.
[주D-003]오초(吳楚)의 분야(分野) : 고대 중국에서 하늘의 이십팔수(二十八宿)의 방위에 따라 전 중국을 12개 지역으로 나누어 대응시키고 이를 ‘십이분야(十二分野)’라 하였는데, 춘추 시대 오나라와 초나라가 위치하던 장강(長江) 중하류 지역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