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군 마을의 유래 /의령군 정곡면 오방마을

의령군 정곡면 오방 마을 고성(철성)이씨 관련자료

아베베1 2011. 5. 24. 10:01

경남  의령군  정곡면 오방마을

 

정곡면 소재지에서 신번쪽 오리길 남짓한데 쏙 들어앉은 마을이다. 유곡면과 경계를 긋는 달재(다래재, 월현(月峴), 월나현(月羅峴)이라 쓰기도 한다) 바로 밑에 위치해 있다. 보통 정곡「오뱅이」라 부르며 먼저 철성 이씨(고성 이씨) 집성고촌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큰 인물이 많이 배출된 동네다. 마을 어귀의 논두렁 밑에 자연석 표석이 있는데 오방(五榜)이라 새겨져 있다. 「다섯 방문(榜文)」글(여러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서 써 붙이는 글, 벽보같은 것)이란 뜻이다. 큰 인물과 관련되는 지명이며 흔치 않은 지명의 유래라 할 것이다. 지금 쓰는 오방(五方)은 일제 때 쉽고 편리한 글자로 바뀌면서 소리(음)는 같지만 뜻은 엉뚱하게 변해졌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오방위(五方位), 오방신장, 오방대기등 오방의 의미는 이 마을의 입지조건이나 주위의 지형지세로 보아 근거가 없다. 동네 들머리에 칠성바구(지석묘로 추정됨)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완전히 없어졌고 또 동남을 가린 채 수구비보를 위해서 조성됐던 긴 숲도 허물어져 두어그루만 남아 있다. 산모퉁이를 돌아 나오면 도적골(도둑골)이라 부르는 아주 깊은 골짜기가 있으며 나이 많은 타박솔과 묵은 산전이 있다. 옛날 이 골짝어귀에 작은 동네가 있었다고 한다. 송정 안골로 통하는「큰골재」너실(판곡)로 가는「쑥골재」등 소로 잿길은 묻힌지 오래됐다. 옛 기록에 「사기점골」이 있지만 아무런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한길 가 산코숭이에 「통훈대부사간원정언, 증자현대부, 이조판서겸 지경연의금부, 춘추관성균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정의공(貞義公) 송암(松巖)이 선생신도비」가 서 있다. 임란 때의 진중일기랄 수 있는「용사일기(龍蛇日記)」를 저술한 이노(李魯)선생의 행적이 새겨져 있는 비석이다. 그리고 문화재(제62호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함휘각(含輝閣)에 목판 48장이 그대로 보존돼 있기도 하다. 바로 옆에 오산재(五山齋), 동네안에 금포정(琴抱亭) 등 문중재실 또한 훌륭하다. 처음 들어왔다는 구씨는 한집뿐이고 김씨 한집 그리고 고성 이씨는 12집이 살고 있다.

 

 

 

 

고려사절요 제27권

 공민왕 2(恭愍王二)
무술 7년(1358), 원 지정(至正) 18년


○ 봄 정월에 서울 성을 고쳐 쌓으려고 대신들 중에 나이 많은 이들을 찾아 가서 물으니, 시중(侍中)으로 치사한 이제현(李齊賢)이 글을 올려 아뢰기를, “우리 태조께서 사방을 정토(征討)하사, 3국(태봉ㆍ신라ㆍ후백제)을 통일하여 한 나라로 만든 뒤 7년 만에 훙하셨사온데, 그때 전쟁으로 상처 입은 백성들을 시켜 토목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은 차마 하지 못할 일이라 하여 송경(松京)에 성을 쌓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형편 때문에 불가했습니다. 현종(顯宗) 초년에 이르러 거란이 서울을 짓밟고 궁실에 불지르며 파괴하였는데, 당시에 성곽이 견고하였던들 거란이 이토록 쉽게 짓밟고 불지르고 유린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현종 20년에야 비로소 이가도(李可道)에게 명해서 서울에 성곽을 쌓게 하니, 뒤에 금산왕자(金山王子)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서해도(西海道)와 충청도와 사평진(沙平津) 북쪽 등을 침략하지 않은 곳이 없었으나 서울에는 들어오지 못하였고, 또 여고차라대(余古車羅大)가 황교(黃橋)에 둔병(屯兵)하였지만 서울에는 들어오지 못하였으니, 이는 성곽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하온즉 당연히 성곽을 고쳐 쌓아야 한다는 것은 지혜 있는 자와 어리석은 자를 가릴 것 없이 모두 알고 있는 일이라 이 논의가 이미 정해졌으니 음양가의 의논에 꺼리는 것이 있더라도, 확고하게 한 번 정한 논의를 변경하지 않아야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 2월에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 원의(元顗)가 졸하였다.
○ 염제신(廉悌臣)을 문하시중으로, 황석기(黃石奇)를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로, 김용(金鏞)을 중서시랑 문하평장사로, 전보문(全普門)을 문하평장사로, 김일봉(金逸逢)을 중서평장사로, 경천흥(慶千興)을 지문하정사 상의회의도감사(知門下政事商議會議都監事)로, 이천선(李千善)을 참지문하정사로, 안우(安祐)를 참지중서정사로, 정세운(鄭世雲)을 지문하사로, 유인우(柳仁雨)ㆍ최인원(崔仁遠)을 수사공상서 좌우복야(守司空尙書左右僕射)로, 배천경(裵天慶)을 판추밀원사로, 황상(黃裳)을 추밀원사로, 이춘부(李春富)를 지추밀원사로, 유숙(柳淑)을 동지추밀원사 상의회의도감사(同知樞密院事商議會議都監事)로, 이여경(李餘慶)을 동지추밀원사로, 정휘(鄭暉)ㆍ김원봉(金元鳳)을 추밀원부사로 삼았다.
○ 3월에 왜적이 각산수(角山戍)에 침략하여 배 3백여 척을 불태웠다.
○ 전 첨의평리 강지연(姜之衍)을 원 나라로 보내어 절일(節日)을 축하하게 하였다.
○ 정주부사(定州副使) 주영세(朱永世)와 전라도만호 강중상(姜仲祥)이 제 마음대로 자기 임지를 떠나 왕께 와 뵈니, 왕이 노하여 이르기를, “지금 국가에 난이 많아서, 남쪽에는 홍두적(紅頭賊)의 우환이 있고, 동쪽에는 왜노(倭奴)의 우환이 있어, 바다 연변에 사는 백성들이 평안히 살지 못하는데, 너희들이 어찌 감히 이런단 말이냐." 하고, 옥에 가두었다.
○ 개경의 외성(外城)의 수축을 명하였다.
○ 여름 4월에 전 합포진변사(合浦鎭邊使) 유인우(柳仁雨)가 왜적을 막아 내지 못하였으므로 순군옥에 가두었다.
○ 가뭄이 크게 들어 대사령을 내리고, 왕이 먹는 반찬 수를 줄이며, 음악을 폐하였다.
○ 대장군 최영(崔瑩)을 양광전라도체복사(楊廣全羅道體覆使)로 삼고, 왜적을 막아 내지 못한 자들을 모두 군법으로 다스리도록 명하였다.
○ 도평의사사에서 왕께 아뢰기를, “요즈음 안렴사와 수령들의 기강이 해이해져서, 여러 고을의 향리들이 제멋대로 욕심을 드러내어 군정(軍丁)을 점검할 때는 부잣집은 제외하고 조세를 거둘 때는 사사로이 큰 말을 쓰며, 병정에 나가야 할 서울 장정을 몰래 데려다가 제 농사를 짓게 하고, 양민들을 모아서 제 집 종을 삼는 등 백성들에게 토색질이 한이 없으니, 마땅히 어사대와 각 도의 안렴사를 시켜서 그 원악(元惡)을 찾아 내어, 죄가 중한 자는 극형에 처하고, 가벼운 자는 매를 때리고 귀양보내게 하소서." 하였더니, 왕이 이 말을 좇았다.
○ 왜적이 한주(韓州 충남 서천(舒川))와 진성(鎭城) 창고를 노략질하므로, 전라도 진변사(全羅道鎭邊使) 고용현(高用賢)이 바닷가에 있는 창고를 내지로 옮기자고 청하니, 왕이 이 말을 좇았다.
○ 동북면(東北面)을 진휼하였다.
○ 왜적이 면주(沔州 충남 당진(唐津))ㆍ용성(龍城 경기 진위(振威))을 침범하였다.
○ 태주(台州 절강성(浙江省)) 방국진(方國珍)이 사람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 조소생(趙小生)ㆍ탁도경(卓都卿)이 도망해서 해양(海陽)을 점령하니, 해양 사람 완자불화(完者不花)가 군사 8백 명을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였다.
○ 교주ㆍ강릉도(交州江陵道)를 진휼했다.
○ 왜적이 교동을 불사르니, 경성(京城)에 계엄을 내리고, 방리(坊里)의 장정들을 뽑아 군사를 만들었다.
○ 도평의사사가 아뢰기를, “요즈음 왜적의 침입으로 세미를 실은 배가 왕래하지 못하여 백관들의 녹봉을 주지 못하고 있사오니, 이제부터는 백(伯)으로 봉한 모든 사람들 중에 시중(侍中) 벼슬을 지낸 이에게는 재ㆍ추의 녹과(祿科)를 주고, 그 나머지 백에게는 이성 제군(異性諸君)의 예로 주도록 하소서." 하니, 왕이 좇았다.
○ 대장군 조천규(趙天珪)를 원 나라에 보내어 황후의 천추절(千秋節)을 축하하게 하였다.
○ 6월 1일 무진에 일식이 있었다.
○ 참지정사 경천흥(慶千興)을 서경군민 만호부 만호로, 참지정사 안우(安祐)를 안주군민 만호부 만호로, 추밀원부사 정휘(鄭暉)를 삭방도군민 만호부 만호로 삼았다.
○ 가을 7월에 중서평장사로 치사한 김승택(金承澤)이 졸하였다.
○ 강절행성승상(江浙行省丞相) 장사성(張士誠)이 보낸 사신이 와서 침향(沈香)ㆍ산수정(山水精)ㆍ산옥대(山玉帶)와 비단 등의 물건을 바치며 말하기를, “요즈음 중국이 평온하지 못하여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회동(淮東)에서 분연히 군사를 일으켜 다행히 오(吳)의 땅을 온전히 보전할 수 있었으나, 서쪽 도적이 흉악한 짓을 함부로 하여 백성들을 못살게 구니, 소탕할 뜻은 있지만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겠소. 내 들으니, 국왕은 덕이 있어 국내의 백성들이 생업을 즐긴다 하니 내 마음이 위로되오." 하였는데, 이때 사성이 항주(杭州)에 웅거하여 태위(太尉)라 일컬었다. 강절해도 만호(江浙海島萬戶) 정문빈(丁文彬)도 글을 보내고 토산물을 바쳐 왔다.
○ 참지정사 경천흥(慶千興)과 지문하성사 정세운(鄭世雲)과 동지추밀원사 유숙(柳淑) 등이 아뢰기를, “사방에서 난이 일어나 백성들은 만신창이가 되어 굶주리고 있는데, 지금 성을 쌓는다면 백성들이 장차 견디어내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왕이 재ㆍ추와 의논하고 그 역사를 중지하라고 명하였다.
○ 왜적이 검모포(黔毛浦 전북 부안(扶安))에 침입하여 전라도의 세미 실은 배를 불태웠다.
○ 8월에 왜적이 화지량(花之梁 경기 수원(水原))을 불태우고, 인주(仁州 인천(仁川))를 노략질하였다.
이암(李嵒)을 수문하시중으로 삼았다.
○ 서강(西江 예성강)에 성을 쌓았다.
○ 겨울 10월 정해일에 지진이 있었다.
○ 병부상서 홍사범(洪師範)을 원 나라에 보내어 황태자의 천추절을 축하하게 하였다.
○ 11월에 재변이 있었으므로 사면령을 내렸다.
○ 정원백(定原伯) 균(均)을 원 나라에 보내어 신정을 축하하게 하였다.
○ 12월 1일 을축에 일식이 있었다.


 

고려사절요 제27권
 공민왕 2(恭愍王二)
기해 8년(1359), 원 지정 19년


○ 봄 정월에 황석기(黃石奇)를 파면하고, 이승경(李承慶)을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로, 김득배(金得培)를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로 삼았다. 이승경이 일찍이 왕에게 아뢰기를, “신은 이인복(李仁復)을 간사한 사람으로 여깁니다." 하니, 왕이, “무슨 말이냐." 하였다. 이승경이, “인복이 평소 배운 것이 세상을 경륜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것인데, 이런 것을 어찌 한 번도 전하께 아뢰지 않는단 말입니까." 하였다.
○ 2월에 홍두군(紅頭軍)이 글을 보내기를, “백성들이 오랫동안 오랑캐에게 함몰된 것을 개탄하여, 의병을 일으켜서 중원을 회복하여, 동으로 제(齊)와 노(魯)를 넘어서고, 서쪽으로는 함진(函秦 함곡관(函谷關)을 넘어 옛 진 나라 지역)으로 나가며, 남으로는 민광(閩廣 복건(福建)ㆍ광동(廣東)ㆍ광서지역)을 지나고, 북으로는 유주(幽州)와 연지(燕地)에 도달하니, 마치 배고픈 자가 맛있는 음식을 얻은 듯이 백성들이 기꺼이 와서 붙고, 병든 자가 약을 얻은 듯하다. 이제 여러 장수들에게 군사들을 엄격히 다스리게 하여 조금도 백성들을 침노하지 못하게 해서, 귀화해 오는 백성은 무휼(撫恤)하고, 거역하는 자들은 죄주려 한다." 하였다.
○ 왜적이 장흥부(長興府)와 해남현(海南縣)을 침범하였다.
○ 여름 4월에 강절의 장사성(張士誠), 정문빈(丁文彬)이 보낸 사신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 이제현(李齊賢)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
○ 5월에 왜적이 예성강(禮成江)을 침범하여 옹진현(甕津縣)을 불태웠다.
○ 전라도 추포부사(全羅道追浦副使) 김횡(金鈜)이 보약도(甫若島 전남 무안(務安))에서 왜적을 쳐 20여 명을 사로잡았다.
○ 6월에 지면주사(知沔州事) 곽중룡(郭仲龍)이 홍주(洪州) 창고를 맡아 보면서 쌀 20석을 도둑질하여 관기와 관노에게 주었으므로, 삭직하여 충군하였다.
○ 가을 7월에 어사대(御史臺)에서 핵계(劾啓)하기를, “황상(黃裳)과 판각문사(判閣門事) 양백연(楊伯淵)이 전 판밀직사 신귀(辛貴)의 아내 강씨(康氏)와 간통하여 풍속을 어지럽혔으니, 파직시키고 금고시키소서." 하니, 왕이 이 말을 따랐다.
○ 연안백(延安伯) 인승단(印承旦)이 졸하였다.
○ 서원백(西原伯) 정오(鄭䫨)가 졸하였다. 정오는 청주(淸州) 사람인데, 고을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듣고 말하기를, “흉한 놈 하나가 없어졌군." 하였다.
○ 전 찬성사(贊成事) 민사평(閔思平)이 졸하였다.
○ 장사성(張士誠)이 보낸 사신이 와서 비단과 금띠를 바치고, 정문빈(丁文彬)도 토산물(土産物)을 바쳤다.
○ 동북면 병마사 정휘(鄭暉)가 보고하기를, “조소생(趙小生)과 탁도경(卓都卿)이 쳐들어 오려고 하니, 군사를 내어 막게 하소서." 하니, 왕이 예빈경(禮賓卿) 조돈(趙暾)을 보내어 조소생 등에게 타이르기를, “너희들이 귀순해 오면 상을 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으리라." 했다.
○ 강절성평장(江浙省平章) 화니적(火尼赤)이 바람을 만나 황주(黃州) 철화강(鐵和江)에 내박하니, 쌀 1백 석과 저포(苧布) 20필을 하사하였다.
○ 8월에 방국진(方國珍)이 보낸 사신이 방물을 바쳤다.
○ 겨울 11월에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 정휘(鄭暉)가 해동청(海東靑)을 바치니, 왕이 이르기를, “지금 군무가 한창 시작되니 마땅히 검소를 숭상해야 할 것인데, 어찌 이런 진기한 새가 필요하리오." 하고, 놓아 보냈다.
○ 요양(遼陽)과 심양(瀋陽)의 유민 2천 3백여 호가 와서 투항하니, 서북의 고을에 나누어 살게 하고, 관곡으로 양식을 대주었다. 이보다 앞서, 본국 사람 중에도 압록강을 건너가서 사는 자가 있었는데, 난리 때문에 모두 돌아왔다.
○ 홍두적 3천여 명이 압록강을 건너와서 노략질해 가지고 돌아갔는데, 도지휘사(都指揮使) 김원봉(金元鳳)이 이 일을 숨기고 보고하지 않았다.
○ 경천흥(慶千興)을 서북면 원수(西北面元帥)로, 안우(安祐)를 부원수로 삼았다.
○ 12월에 사람들이 마음대로 비구승, 비구니가 되는 것을 금하였다.
○ 정묘일에 홍두적의 괴수 위평장(僞平章) 모거경(毛居敬)의 4만 명이라고 떠드는 군사들이 얼음을 밟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義州)를 함락시키고, 부사(副使) 주영세(朱永世)와 고을 백성 1천여 명을 죽였다. 또 정주(定州)를 함락시켜 도지휘사(都指揮使) 김원봉(金元鳳)을 죽이고, 인주(麟州)를 함락시켰다.
○ 수문하시중 이암(李嵒)을 서북면 도원수(西北面都元帥)로, 경천흥(慶千興)을 부원수로, 김득배(金得培)를 도지휘사(都指揮使)로, 이춘부(李春富)를 서경윤(西京尹)으로, 이인임(李仁任)을 서경 존무사(西京存撫使)로 삼았다.
○ 전쟁이 일어났으므로, 홀치(忽赤)ㆍ충용(忠勇)ㆍ삼도감(三都監)ㆍ오군(五軍)에게 3년상을 면해 주었다.
○ 전 찬성사 강윤충(康允忠), 전 대언 홍개도(洪開道), 상장군 손거원(孫巨源)을 죽이니, 당시 의논하는 사람들이 이들을 원통히 여겼다.
○ 을해일에 적이 철주(鐵州 평북 철산(鐵山))에 들어오니, 안우(安祐)가 청강(淸江)에서 맞아 힘써 싸워서 물리쳤으므로, 왕이 안우에게 금띠를 하사하였다. 경천흥(慶千興)은 군사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안주(安州)에 나가 둔병하였으나 적을 두려워하여 나가지 못했으므로, 왕이 노하여 군법으로 다스리려 하였다. 이에 홍언박(洪彦博)이 아뢰기를, “경천흥은 공평하고 청렴하며 근신하고 독실하오나, 장수 노릇할 재주는 없사오니, 이것은 그를 쓴 사람의 잘못입니다." 하니, 왕의 노여움이 풀어졌다.
○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김희조(金希祖)를 서해도 도지휘사(西海道都指揮使)로 삼았다. 이때 이암이 서경(西京)에 이르니, 모든 군사가 아직 모이지 않았다. 이암이 이춘부(李春富)와 함께, 서경을 지킬 수 없는 것을 알고 창고를 불사르고 물러가서 요해지를 보전하려 하니, 호부낭중(戶部郎中) 김선치(金先致)가 말하기를, “만일 창고를 불태운다면 양식이 없으므로 적들이 졸지에 나라 안으로 쳐들어올 것이니, 이것은 좋은 계교가 아닙니다." 하니, 이암이 이 말을 좇았다. 이 때문에 창고와 가옥들이 온전하게 되었다. 여러 군사가 퇴군하여 황주(黃州)에 둔을 치니, 서울과 지방의 인심이 흉흉하고,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피난할 계획을 세워서 서로 다투어 쌀을 내다 가벼운 물건과 바꾸었으므로, 전에는 포목 1필에 쌀 2말씩 하던 것이, 이 때에 와서는 곡식 값은 싸지고 물건값은 비싸져서 대포(大布) 한 필에 5, 6말씩 하였다.
○ 여러 사(司)의 이서(吏胥)들을 뽑아 서북면(西北面)에서 싸울 군사로 보충하고, 승선(承宣) 이상에게 각각 말 한 필씩을 내게 하였다. 또 모든 선교(禪敎)의 절의 중과 인마(人馬)를 모아서 군용에 충당하였다.
○ 정해일에 적이 서경(西京)을 함락시켰다.
○ 호부상서 주사충(朱思忠)을 보내어 올이 가는 포목과 말안장과 말굴레와 술과 안주를 적의 장수에게 주고, 그들의 허실을 엿보도록 하였다.
○ 이암은 겁이 많아서 전쟁을 하지 못한다 하여, 평장사 이승경(李承慶)에게 그를 대신해서 모든 군사를 독려하여 전진하게 하고, 전 찬성사 권적(權適)에게 명하여 승병을 거느리고 전장에 나가도록 하였다.
○ 이해에 심하게 흉년이 들었는데, 경상도 진제사(慶尙道賑濟使) 예부시랑(禮部侍郞) 전이도(全以道)가 돌아와 아뢰기를, “감무와 현령은 가장 백성과 가까운 직책이니, 적당한 사람이 아니면 백성들이 기한을 면할 수 없습니다. 선왕께서는 그것을 아셨기 때문에, 과거에 뽑힌 선비들을 모두 감무와 현령의 직책에 썼는데, 지금은 모두 서도(胥徒)에서 뽑아 쓰기 때문에 온갖 방법으로 백성들을 괴롭히니, 장차 농사와 양잠ㆍ길쌈을 장려하고 교화를 닦고 밝히는 일을 어찌 하겠습니까. 신이 의성현(義城縣)을 순시할 때에 옛 둑이 있는 것을 보았으니, 만일 이것을 더 수축하면 심한 가뭄이 들더라도 가히 물을 대서 쓸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현령은 앉아서 보기만 하고 수리하지 않아서 농사의 시기를 놓치게 만들었으므로, 신이 명령을 받들어 곤장을 쳤습니다. 이제부터는 과거에 뽑힌 선비들만을 감무와 현령으로 쓰소서." 하니, 왕도 옳게 여겼으나, 끝내 이 말을 쓰지는 못하였다.


고려사절요 제27권
 공민왕 2(恭愍王二)
계묘 12년(1363), 원 지정 23년


○ 봄 정월에 양부와 전 시중 윤환(尹桓)ㆍ이제현(李齊賢)ㆍ이암(李嵒)ㆍ염제신(廉悌臣)을 불러 환도할 일을 의논하니 모두 아뢰기를, “송도(松都)는 종묘가 있는 곳이요, 국가의 근본이옵니다. 서운관에서 음양에 구애되는 것이 있다고 아뢰니, 마땅히 먼저 성 남쪽 흥왕사(興王寺)로 행차하시어 그곳에서 머무르셨다가 강안전(康安殿)이 수리되기를 기다려 옮기소서." 하니, 왕이 이 말을 따랐다.
○ 2월 을해일에 청주를 떠났다.
○ 경진일에 지진이 있었다.
○ 계미일에 흥왕사(興王寺)에 이르니 백관들이 환도를 축하하고 서울에 머물러 있던 재ㆍ추들이 왕을 축수(祝壽)하는 술을 올리니, 왕이 이르기를, “오늘 경성(京城)에 돌아오리라고 생각하지 못하였는데 돌아왔으니 이 모두 경들의 공이로다."하고, 마음껏 즐기다가 파했다.
○ 찬성사 김용(金鏞)을 제조순군(提調巡軍)으로 삼았다.
○ 3월 임인일에 지진이 있었다.
○ 찬성사 이공수(李公遂)와 밀직제학 허강(許綱)을 원 나라에 보내어 진정표(陳情表)를 올렸다. 이공수는 기황후(奇皇后)의 외종형이다. 일찍이 모든 기씨가 패하자 황후가 태자에게 이르기를, “네 이미 나이가 들었는데도 어찌 나를 위하여 원수를 갚지 않는가." 하였다. 때마침 최유(崔濡)가 원 나라에 있었는데 승상 소사감(搠思監)과 본국 출신 환자 박불화(朴不花)에게 아첨하고 장작동지(將作同知)가 되었다. 황후가 국왕을 원망한다는 것을 알고, 김용이 안우(安祐) 등 여러 장수를 죽였으므로 내응이 있을 것을 믿고 여러 불평 품은 자들과 더불어 황후를 달래어 국왕을 모함하여 폐하고,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세울 것을 꾀했다. 이때에 이공수가 서경에 이르러 태조의 원묘(原廟)에 가 뵙고 맹서하기를, “우리 왕을 복위시키지 못하면 신은 죽어서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연경(燕京)에 이르니 기황후가 음식을 베풀어 후히 위로하며 이공수에게 이르기를, “경이 마음을 다하여 우리 어머니에게 효도하니 곧 나의 친오빠입니다. 감히 친오빠를 대접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이공수가 대답하기를, “주(周) 나라 강원(姜嫄 주 나라 시조 후직(后稷)의 어머니)과 임사(任姒)는 성인을 낳아 길러 덕화로 터를 닦아 《시경(詩經)》에 그에 대한 칭송이 있었는데, 중간에 운수가 쇠해지자 강후(姜后)가 대죄하니 선왕(宣王)이 중흥하였사오며, 포사(褒姒)ㆍ달기(妲己)ㆍ여후(呂后)ㆍ무천측(武天則)은 친정을 뒤엎고 후손이 끊어졌사오니, 아름답고 악함이 분명하여 천추의 거울이 되었나이다. 우리 고려가 원 나라 큰 조정에 대하여 처음에는 장수들끼리 서로 형제의 의리를 맺었었고, 뒤에는 천자께서 구생(舅甥 여기서는 장인과 사위를 말함)의 관계를 정하신 지 백 년이 넘어 물고기와 물이 서로 만난것 같사온데, 하물며 지금 황후께서는 주 나라의 임사로서 삼한(三韓)이 매우 다행스럽게 여깁니다. 이제 우리 왕께서 천자를 위하여 적을 쳐서 국가(원 나라)를 위하여 공을 세우니, 마땅히 상을 주어서 이것을 사방에 밝게 보여 장수들을 격려시켜야 하는데도 어찌 사사로운 감정을 풀려고 공인의 의리를 폐하나이까. 병신년의 화는 실로 우리 집안의 세력이 너무 성하고 차는 데도 만족할 줄 모르고 분수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지 왕의 죄는 아니었사옵니다. 그런데 자기 집에 허물이 있는 줄은 모르고 공이 있는 왕을 폐하려 한다면 훗날에 반드시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황후는 그 말에 감동받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노여움이 다 풀리지 않아 이공수에게 덕흥군을 받들어 동으로 돌아가라 하니 이공수는 병을 청탁하고 그곳에 머물러 있기를 청했다. 이때 최유(崔濡)가 덕흥군에게 말하기를, “이공수가 여기 머물러 있는 것은 그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사오며, 일이 혹시 중간에 변하면, 후회해도 미치지 못할 것이니 독로첩목아(禿魯帖木兒)와 박불화(朴不花)에게 뇌물을 많이 주어 기어코 이공수를 데리고 가십시오." 하였다. 이공수가 이 말을 듣고 서장관 임박(林樸)에게 말하기를, “내 지금 부모도 없고 자손도 없는데 벼슬이 지극히 높으니 어찌 다시 조금이라도 거리끼는 마음이 있으리오. 마땅히 머리를 깎고 산에 들어가되 저들을 따르지는 않으리다." 하니, 두 사람이 들어가 이공수를 데려갈 것을 아뢰었는데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 왜국에서, 잡혀간 우리나라 사람 30여 구를 돌려보냈다.
○ 삼사우사 김광재(金光載)가 졸했다. 김광재는 김태현(金台鉉)의 아들로서 충정왕을 섬겨 매우 신임을 받았는데, 왕이 즉위하자 두문(杜門)하고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를 지극한 효도로 섬기더니, 어머니가 죽자 무덤 앞에 여막(廬幕)을 짓고 3년 상을 마쳤는데, 매양 제사 때를 당하면 눈물을 흘리며 울기를 그치지 않으니, 왕이 듣고 가상히 여겨 유사에게 명하여 그가 사는 곳에 정표(旌表)하여 영창효자리(靈昌孝子里)라 하게 하고, 그 마을 몇 집의 부역을 면제시켜 그를 받들어 섬기게 하였다. 그는 집에서 산업에 힘쓰지 않고 좌우에 거문고와 책만 두고 담박하게 지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 윤달 신미일 밤 5경에 적 김수(金守)ㆍ조련(曹連) 등 50여 명이 행궁인 흥왕사(興王寺)로 침입하여 문지키던 자를 죽이고 바로 안으로 들어가 말하기를, “나는 황제의 명령을 받들고 왔다" 하고, 지름길로 왕의 침전(寢殿)에 이르러 지게문 밖에서 환자 강원길(姜元吉)을 죽이니 숙위하던 군사들이 모두 도망해 숨었다. 이 때 환자 이강달(李剛達)이 왕을 업고 창문으로 나가 대비의 밀실로 달려가 담요를 뒤집어 씌워 숨겨 놓고, 공주가 지게문 앞에 막고 앉아 있었다. 적들이 침전으로 들어갔다. 환자 안도적(安都赤)은 용모가 왕과 비슷하므로 자기 몸으로 왕을 대신하고자, 왕의 잠자리에 누웠는데, 적은 왕인 줄 알고 죽이고서 좋아 날뛰면서 만세를 불렀다. 그들은 또 시위첨의평리(侍衛僉議評理) 왕재(王梓)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김한룡(金漢龍) 등을 죽이고 우정승 홍언박(洪彦博)의 집에 이르러 말하기를, “나와서 황제의 명령을 받아라." 하였다. 홍언박이 의관을 정제하고 나가려 하니, 그의 아들과 아내가 적들의 속임수라는 것을 깨닫고 피하기를 권했으나, 홍언박은 말하기를, “어찌 수상이 되어가지고 죽음을 피해 도망하리오." 하고, 나가 말하기를, “너희 도적들이 어찌 황제의 명령이라 일컫는가." 하니, 적들이 쳐서 죽였다. 이윽고 적들은 왕이 아직 살아 있는 것을 알고 거짓으로 여러 사람에게 말하기를, “삼가 주상을 놀라게 하지 말라." 하고, 도당 40여 명을 나누어 궁중의 모든 직책을 맡게 한 다음, 음식 만드는 자를 재촉하여 음식을 갖추어 올리게 하여 왕이 의심하지 않고 나오도록 하였다. 또 도당을 나누어 경성으로 달려가서 경성에 머물러 있는 재상들을 죽였다. 때마침 좌정승 유탁(柳濯)은 여러 재상들과 더불어 초하루마다 국가를 위하여 복을 비는 일로 묘련사(妙蓮寺)에 있다가, 이 변을 듣고 순군만호부로 가서 군사를 모아 적을 치려 하였으나, 적의 선기(先騎)가 이미 묘련사 동구에 이르렀다. 유탁 등이 말에 재갈을 물리고 지름길로 빠져 순군부에 가니, 김용만이 묘련사에 가지 않고 있다가, 먼저 순군부에 이르러 여러 사람을 모아놓고 적을 친다고 거짓으로 말하면서 여러 재상들에게 이르기를, “제공(諸公)들은 이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왕이 계신 곳으로 가시오. 나는 흩어진 군사들을 거두어 가지고 뒤따라 가리다." 하였다. 그러나 유탁은 김용에게 딴 뜻이 있는 것을 짐작하고 그곳에 머물러 무슨 변이 있는지 지켜 보았다. 김용은 자기의 문객인 순군제강(巡軍提控) 화지원(華之元)과 서로 눈짓하고 잡혀 오는 적들을 신문도 않고 그대로 죽여서 그들의 입을 막아버리는 것이었다. 밀직사 최영(崔瑩), 부사(副使) 우제(禹磾), 지도첨의(知都僉議) 안우경(安遇慶), 상호군(上護軍) 김장수(金長壽) 등은 경성에서 행궁(行宮)에 달려가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여러 장수들이 이르기를, “적들의 있는 곳을 살펴보고난 후 들어가야 한다." 하니, 김장수가 큰 소리로, “적의 무리들은 안에 있는데 무엇을 살펴 본단 말이오." 하고, 문을 부수고 먼저 들어가 적 3명을 베니 최영 등이 진격하여 모두 죽였다. 김장수는 적의 칼을 맞아 죽었다. 난이 평정되고 숙위(宿衛)가 다시 모이니 왕이 밀실에서 나와 그날로 경성으로 들어갔다. 백관에게 명하여 숙위하고 순찰하게 하였다.
○ 흥왕공신(興王功臣)을 정하고 토지와 노복을 차등있게 하사하는데 김용에게도 주었다. 김용이 염제신(廉悌臣)의 집에 이르러 술을 마시다가 염제신에게 말하기를, “세 가지 걱정거리가 없어졌으니 어찌 즐겁지 않으리오." 하였으나, 사람들은 그 뜻을 알지 못했다.
○ 신축년의 호종공신(扈從功臣)을 정했다.
○ 염제신을 우정승으로 유탁을 좌정승으로, 최영을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 우제(禹磾)ㆍ한휘(韓暉)를 밀직부사로 삼았다.
○ 흥왕사에서 난을 일으킨 적당의 무리 90여 명을 체포하였는데 김용이 제조가 되어 한 사람도 신문(訊問)을 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의심했다. 왕이 김용을 불러 이르기를, “너를 순군옥에 내려 정상을 신문해야 마땅하지만 다만 전일의 공을 생각하여 우선 죄를 감하노라." 하고, 명하여 밀성군(密城郡)으로 귀양보내고 그의 도당 대호군(大護軍) 고환(高懽)과 전리정랑(典理正郞) 화지원(華之元) 등 몇 사람도 외지로 귀양보냈다. 이달 초순부터 해와 달이 빛을 잃어 구름도 없는데도 날이 흐리더니, 김용이 쫓겨나자 날이 청명하여졌다.
○ 여름 4월에 장사성이 사신을 보내어 홍두적을 평정한 것을 축하하고 공작을 바쳤다.
○ 밀직상의(密直商議) 홍순동(洪淳同)과 지밀직(知密直) 이수림(李壽林)을 원 나라에 보냈는데, 백관과 기로들이 원 나라 어사대에 글을 올려 말하기를, “적을 평정하여 길을 통한 뒤에 첩서(捷書)를 바치고 신정을 축하하였으며, 사은하고 성절을 축하하는 등 사신을 계속 보냈으나, 한 사람도 동으로 돌아오는 자가 없으며, 또 봄이 다 가도록 정삭(正朔)을 반포하지 않고 대사(大赦)가 내려도 사신이 오지 않으니 이는 필시 조정이 참소하는 무리를 받아 들여 우리나라腠 소홀히 해서입니다. 지금 왕이 왕위에 오른 후로 조빙하는 예를 게을리 하지 않고 더욱 공경히 하였고, 마침 홍두적의 난리를 만났으나, 두 번이나 공을 세웠기에 혹 허물이 있더라도 여러 번 은사(恩赦)를 입었는데, 참소하는 말을 하는 자가 어떻게 모함하였기에 이렇게 딴 의논이 생겼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우리 왕의 공을 표창하시고 참소하는 사람의 죄를 바르게 다스리소서." 하고, 글을 중서성(中書省) 첨사원(詹事院)에도 바쳤다.
○ 염제신(廉悌臣)을 파직하고 유탁을 우정승에, 이공수(李公遂)를 좌정승으로 삼았다. 신축년 난리에 염제신이 그 어머니를 버리고 갔는데 대간이 고신에 서명하여 주지 않아 파면되었다.
○ 왜선 2백 13척이 교동(喬桐)에 정박하니, 경성을 계엄하고 안우경(安遇慶)을 방어사(防禦使)로 삼았다.
○ 대호군 임견미(林堅味)와 호군 김두(金斗)를 보내어 김용(金鏞)을 계림부(鷄林府)로 옮겨 가두게 하고 안렴사 이보림(李寶林)과 함께 국문하니, 김용이 말하기를, “내 8년 동안에 세 번 재상을 하여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한 것이 없었는데, 어찌 왕을 범할 마음이 있었겠는가. 다만 홍시중을 없애고 싶어서 한 일이다." 하였다. 임견미 등이 힐난하기를, “무엇 때문에 안도적(安都赤)을 죽였는가." 하니, 김용이 대답할 말이 없었다. 드디어 김용을 죽여 그 머리를 경성에 전하고 재산을 몰수했으며 도당 10여 명을 베었다. 그 밖에 곤장을 때려서 귀양보낸 자도 수십 명이었다. 왕은 그래도 김용을 못잊어 그 때문에 눈물을 흘리면서 두 번이나 탄식하며, “누구를 가히 믿을 것인가." 하였다. 그 뒤에 어떤 사람이 김용이 가졌던 묘아안정주(猫兒眼精珠)를 얻어 도당에 바치니 일좌(一座)가 돌려 가면서 구경했으나, 평리(評理) 최영만은 돌아다 보지도 않고 말하기를, “김용의 큰 뜻을 이런 물건들이 흐려 놓았는데 제공들은 무엇 때문에 구경하시오." 하였다.
○ 김용의 도당 방언휘(房彦暉)ㆍ최수자(崔守雌)를 곤장때렸다. 방언휘의 딸이 기유걸(奇有傑)에게 시집갔는데 김용이 일찍이 방언휘를 위협하고 꾀여서 자주 그 딸과 간음했으나, 제 남편이 있으므로 감히 맘대로 하지 못하고 최수자에게 주어 아내를 삼도록 했다.
○ 왜가 수안(守安)을 침범했다.
○ 병인일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이틀 동안 하늘에 뻗쳤다.
○ 5월에 교서를 내려 이르기를, “내가 왕위를 이어 받은 후로 내란이 여러 번 일어나고 외적도 두 번이나 침입했다. 깊이 생각하건대, 이 허물은 실로 나의 몸에 있도다. 하물며 환도 초기에 하늘이 화를 내린 것을 뉘우치지 않아 성변(星變)으로써 경고를 보이며 가뭄으로 재앙을 이루니, 먼저 내 몸을 자책하고 백성에게 혜택을 주어야 마땅하겠다. 경자년 이전의 여러 도ㆍ주ㆍ현의 세 가지 세금과 잡공(雜貢) 중에 아직 관청에 도착하지 않은 것은 모두 추징을 그만 두라. 근래 왕명으로 지방에 나간 신하들과 백성들을 다스리는 관리들이 으레 군법을 써서 감히 맘대로 사람을 죽이며, 또한 죄인에게 매를 때리고 나서 재물을 받고 속해 주니 내 심히 민망히 여기노라. 지금부터는 중한 형벌은 아뢰어 처리하고 죄가 가벼운 자는 매때리는 것과 재물 받는 것을 함께 행하지 말라. 기내(畿內)의 백성들이 난리로 인하여 유랑하여 밭과 들이 많이 황폐해졌으니, 너그럽게 구휼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백성들을 불러 들이겠는가. 경기 지방의 공전과 사전의 조세는 3년간 3분의 1씩을 감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 역어(譯語) 이득춘(李得春)이 원 나라에서 와서 말하기를, “황제가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삼고, 기삼보노(奇三寶奴)를 원자로, 이공수(李公遂)를 우정승으로 삼았습니다. 최유(崔濡)는 스스로 좌정승이 되고, 김용을 판삼사(判三司)로 삼았으니,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원 나라에 있는 자는 모두 위관(僞官)에 임명되었습니다. 또 요양성(遼陽省)에 군사를 청하였는데 군사가 출발하였습니다."하였다. 당시 왕은 원 나라에서 자신의 왕위를 폐하였다 해도 공헌(貢獻)을 폐한 일이 없었고, 여러 번 사신을 보내어 사대하는 예의를 더욱 공경히 하였으며, 진정(陳情)하고 계품(啓稟)하여 황제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랐으나, 최유(崔濡)와 박불화(朴不花) 등이 이것을 가려 진헌하는 예물을 빼앗아서 황제께 보내는 글이 하나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왕이 어찌할 수 없어 재ㆍ추들과 함께 요양성의 군사가 오는 것을 막을 방법을 의논하여 경천흥을 서북면도원수(西北面都元帥)로 삼아 안주(安州)에 둔을 치게 하고, 안우경을 도지휘사로 삼아 의주(義州)에 둔을 치게 하며, 이귀수(李龜壽)를 도순찰사로 삼아 인주(麟州 평북 의주(義州))에 둔을 치게 하고, 이순(李珣)을 도체찰사로 삼아 이성(泥城 평북 창성(昌城))에 둔을 치게 하며, 홍선(洪瑄)을 도병마사(都兵馬使)로 삼아 정주(靜州 평북 의주(義州))에 둔을 치게 하고, 우제(禹磾)ㆍ박춘(朴椿)을 도병마사로 삼아 군사를 나누어 강계(江界)와 독로강(禿魯江) 등에 둔을 치게 하며, 전공판서(典公判書) 지용수(池龍壽)를 순무사(巡撫使)로 삼아 용주(龍州 평북 용천(龍川))에 둔을 쳐서 북쪽을 방비하도록 하되, 모두 도원수의 절도(節度)를 받게 했다. 이인임(李仁任)에게 명하여 평양윤(平壤尹)을 삼아 군사의 군량을 조달하게 하고, 밀직부사 정찬(丁贊)을 서북면 도안무사로 삼아, 한휘(韓暉)와 함께 유병(遊兵)을 거느리고 여러 병영 사이를 왕래하면서 군정(軍情)을 살피도록 하고, 한방신(韓方信)을 동북면 도지휘사로, 김귀(金貴)를 도병마사로 삼아 화주(和州 함남 영흥(永興))에 둔을 치게 하여 동북쪽을 방비시켰다.
○ 이공수(李公遂)를 파면하였는데, 이는 이득춘(李得春)이 말을 잘못했기 때문이다.
○ 판밀직사 오인택(吳仁澤)과 밀직부사 김달상(金達祥)이 건의하여, 대간과 이부ㆍ병부를 제외한 동반의 3품 이하 6품 이상과 서반의 5품 이하의 정원을 더 늘리자고 하였다. 이때 국가는 해마다 군사를 일으켜 국고가 바닥이 나서 공이 있는 자에게는 모두 관직으로 상을 주었다. 오인택 등이 이 의논을 아뢰니, 전주(銓注)를 맡게 하여 전쟁에 나간 장사(將士)들은 모두 계급을 뛰어 넘어 승진하지 않은 자가 없으니 사람들이 기꺼이 군사로 나갔다. 그러나 청탁이 크게 성해지고 뇌물이 버젓이 행해져 공장(工匠)이나 천한 종이라도 벼슬을 받지 않는 자가 없어 관작이 지나치게 많아졌다.
○ 사신을 여러 도에 보내어 군사를 점검했다.
○ 밀직부사 주사충(朱思忠)이 덕흥군에게 내응했다 하여 목베었다. 주사충은 강직한 사람인데 옥에 갇힐 때 큰소리로 말하기를, “나는 본래 죄가 없는데 공도 없이 갑자기 귀하게 된 두서너 명의 집정(執政)들이 나를 이같이 핍박하는구나." 하였다. 그가 죽으니 사람들이 애석히 여겼다.
○ 6월에 판도판서(版圖判書) 김서(金湑)와 개성윤(開城尹) 양백안(楊伯顔)을 보내어 절령(岊嶺)의 책(柵)을 지키게 했다.
○ 원 나라에서 보낸 이가노(李家奴)가 조서를 내려 왕인(王印)을 회수했다. 이가노가 국경에 들어오자, 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의 종자를 잡아다가 폐립된 까닭을 물었다.
○ 전쟁에 나가는 여러 고을의 군사가 경성 동교에 둔을 치고 있었는데 밤 5경에 평택현(平澤縣) 군사 어량대(於良大) 등이 전쟁에 나가기를 꺼리어 여러 사람을 협박해서 반란을 꾀하여 성문으로 쳐들어 갔으나, 날이 이미 밝은 후라 일이 성공하지 못할 줄 알고 스스로 흩어지니 이들을 쫓아가 잡아서 순군옥에 넘기고 그 괴수 8명을 베었다.
○ 가을 7월에 이가노(李家奴)가 왔는데, 왕은 나가지 않고 백관으로 하여금 병위(兵衛)를 장엄하게 하여 맞이하게 했다. 이가노가 돌아가자 백관과 기로(耆老)들이 중서성에 글을 올려 말하기를, “세조께서 우리 충경왕(忠敬王)이 천하의 어느 나라보다 먼저 조근(朝覲)한 공을 가상히 여겨 제녀(帝女)를 충령왕에게 하가(下嫁)시키고, 본국의 풍속을 고치지 않을 것을 허락하여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덕흥군 탑사첩목아(德興君塔思帖木兒)는 충선왕의 출궁인(出宮人)이 백문거(白文擧)에게 시집가서 낳은 자인데 간신 최유(崔濡)가 조정에 거짓 고하여 우리 왕의 자리를 빼앗고 심지어 상국의 군사까지 번거롭게 하오니, 대대로 구생(舅甥)이 된 뜻을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이것을 황제께 아뢰어 탑사첩목아와 최유 등을 잡아 보내시어 본국 사람들의 분한 마음을 풀어주소서." 하였다.
○ 왕이 북방에서 싸우는 군사가 많이 굶어 죽는다는 말을 듣고 반찬수를 줄였다.
○ 8월에 재상이 왕에게 권하여 남방으로 거둥하여 덕흥의 난을 피하라 하는 자가 있어 왕도 매우 옳게 여겼으나, 오인택(吳仁澤)이 아뢰기를, “덕흥은 홍두적과 비교가 되지 아니 하옵니다. 전하의 행차가 남쪽으로 옮기게 되면 경성 북쪽에서는 누가 전하를 따르겠습니까. 오늘의 계책으로는 친정(親征)하는 것이 가장 상책입니다." 하니, 남으로 가자는 의논이 드디어 중지되었다.
○ 이인복(李仁復)을 서북면 도찰군용사(西北面都察軍容使)로 삼았다.
○ 겨울 11월에 홍두적을 쳐서 쫓은 공신을 정했다.
○ 12월에 덕흥군이 요동에 둔을 치고 척후기병(斥候騎兵)이 여러 번 압록강에 이르니, 조야가 크게 두려워하였다. 또 변방 장수가 혹 변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군사를 쓰는 방략(方略)은 모두 멀리 중앙에서 지휘를 하고 장수들이 스스로 두려워하여 감히 전결하지 못하니, 싸울 기회를 많이 잃었다. 또 모든 군졸들은 여름에 전쟁에 나가서 겨울이 되도록 교대하지 않고 양식마저 끊어져, 추위에 얼고 배고파 쓰러지고, 장교와 관속만이 인마(人馬)가 조금 힘이 있었으나 가벼운 병기로 무장한 군사로 강을 건너 자주 요심(遼瀋) 지방을 습격하여 그곳 백성들을 잡아다가 관청에서 상을 받으려고만 하므로 군사가 한 번도 싸워보지 못하고 피폐해졌다. 또 국가에서 건의하여 경천흥(慶千興)에게 서북을 유수(留守)하게 하고 안우경(安遇慶) 등 여러 장수에게 압록강을 건너가서 치게 하니, 평양윤(平壤尹) 이인임(李仁任)이 도원수 부진무(都元帥府鎭撫) 하을지(河乙沚)에게 말하기를, “우리 군사는 굶주리고 추워서 밤낮으로 집에 돌아갈 것만 생각하니 어찌 딴 마음이 없으리오마는, 법이 두려워서 감히 가지 못할 뿐입니다. 근래에 이 도순찰(李都巡察)이 봉주(鳳州)에 이르렀을 적에 군졸들이 모반하다가 잡혀 죽은 것이 그 한 가지 징험이 아니요, 강을 건너간다는 것도 가히 한심한 일입니다. 도원수는 성질이 의심이 많아 필시 능히 결단을 내리지 못할 것인즉, 딴 일을 핑계하여 원수에게 청해서 그대를 왕에게 보내어 일을 품하게 할 것이니, 그대는 잘 도모하라." 하고, 곧 군졸들이 모반한 사실을 기록한 글을 하을지에게 주어 보내면서 또 이르기를, “그대가 돌아가면 왕께서 반드시 불러 보실 것이니 그대는 이 글만 바치고 아예 딴 말은 하지 말라. 그러면 왕께서 깨닫고 반드시 군사를 돌이킬 것이다." 하였다. 하을지가 길을 재촉하여 돌아오니 왕이 글을 보고 과연 크게 놀라 글로 갖추어 보낼 사이도 없이 말로 경천흥에게 일러 도강을 중지하게 하였다. 하을지가 돌아오니 이인임이 말하기를, “군사가 장차 강을 건널 것인데 원수가 문서가 없다고 해서 머뭇거리고 일을 결정하지 못하면 어찌한단 말인가. 내 먼저 원수를 보고 극진히 이해를 말할 것이니 그 뒤에 그대가 돌아오라." 하였다. 이인임이 경천흥을 만나서 조용히 말하기를, “영공이 일찍이 상주목(尙州牧)이 되어 부임해 갈 때의 민심과 해관(解官)하고 올 때의 민심이 어떠했습니까." 하고 물었다. 경천흥이 말하기를, “해관하고 올 때 민심이 처음과 같지 않았다." 하니, 이인임이 다시 말하기를, “오늘의 일이 상당히 그와 비슷합니다. 주상은 옛 임금이며, 덕흥은 새 임금인데 어리석은 백성이 편안하고 배부른 것만 즐거운 줄 알지, 어찌 사(邪)ㆍ정(正)이 무엇인지 알리오. 더구나 우리 군사는 떠나온지 이미 오래 되어서 모두 돌아갈 생각만 하는 판이 아닙니까. 하루 아침에 강을 건너가고 보면 그 변을 측량하기 어려울 것이니 군사를 거두어 영(營)으로 돌아가 압록강을 굳게 지키고 적들이 강을 건너는 것을 막느니만 못합니다." 하였다. 경천흥이 놀라서 말하기를, “그러나 벌써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찌하리오. 그리고 하을지가 어느 때 돌아올는지. 국가에서 필시 처분이 있을 것이오." 하다가, 잠시 후에 을지가 돌아와서 왕의 명을 전하니 천흥이 기뻐하여 즉시 여러 장수를 불러 영으로 돌아가게 했다.


 

 

고려사절요 제28권
 공민왕 3(恭愍王三)
갑진 13년(1364), 원 지정 24년


○ 봄 정월에 최유(崔濡)가 원 나라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덕흥군(德興君)을 받들고 압록강을 건너와서 의주의 궁고문(弓庫門)을 포위하니, 도지휘사(都指揮使) 안우경(安遇慶)이 일곱 번 싸워 이를 물리쳤다. 최유가 산에 올라 우리 군사의 수효가 적고 후원군이 없는 것을 엿보고는 군사를 일곱 부대로 나누어 북을 치고 떠들썩하게 나오니, 우리 군사가 도망해 돌아와서 문 안으로 들어왔다. 중랑장(中郞將) 최흑려(崔黑驢)가 말에서 내려 창을 쥐고 문 밖에 서 있으니 최유가 전진하지 못하였다. 흑려가 우리 군사를 뒤에서 호위하여 천천히 몰아서 문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 군사가 다시 나가서 싸웠는데 적군이 도병마사(都兵馬使) 홍선(洪瑄)을 사로잡으니 우리 군사는 패하여 달아나서 안주(安州 평남)를 지켰다. 최유가 선주(宣州 평북)에 들어가 점거하였다. 왕이 찬성사 최영에게 명하여 도순위사(都巡慰使)로 삼아 정예 군사를 거느리고 급히 안주로 달려가서 모든 군사를 지휘하게 하였다. 길에서 도망하는 군사를 만나면 목을 베어 군중에 돌리니 군령이 비로소 엄숙하여졌다. 또 우리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에게 명하여 동북면(東北面)에서 정예 기병 1천 명을 거느리고 이성(泥城 평남 창성(昌城))으로 달려가게 하였다.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순(李珣)과 도병마사 우제(禹磾)ㆍ박춘(朴椿)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모이니 우리 군사의 기세가 다시 떨쳐졌다. 최유의 척후 기병이 정주(定州)에 이르니 안우경이 정예 기병 3백 명을 거느리고 습격하여 쳐서 이를 패퇴시키고, 그 장수 송신길(宋臣吉)을 사로잡아 죽여 몸뚱이를 쪼개어 군중에 돌리니 최유가 기운이 꺾였다.
○ 평창현령(平昌縣令) 배중련(裵仲連)이 탐욕스럽고 잔인하여 불법을 자행하므로 가산(家産)을 몰수하였다.
○ 황상(黃裳)을 동북면 도순토사(東北面都巡討使)에 임명하였다. 여진의 삼선(三善)ㆍ삼개(三介) 등이 홀면(忽面)ㆍ삼살(三撒)을 침범하므로 교주도 병마사(交州道兵馬使) 성사달(成士達)에게 명하여 정예 기병 5백 명을 내어 이를 치게 하였다. 처음에 북방 사람 김방괘(金方卦)가 우리 도조(度祖)의 딸에게 장가들어서 삼선과 삼개를 낳았으니,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에게는 고종 형제였다. 여진 땅에서 나서 자라 완력이 남보다 세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다. 불량한 젊은이를 모아 북쪽 변방에서 거리낌없이 돌아다녔으나 태조를 두려워하여 감히 방자한 행동을 취하지 못하였다. 태조는 함주(咸州 함북 함흥(咸興))에서 대대로 자라 은혜와 위엄이 그 전부터 쌓이니 백성들이 부모와 같이 우러러보고, 여진도 두려워하고 우러러보며 스스로 조심하였다. 이때에 와서 삼선ㆍ삼개가 태조가 가서 서북면을 원조한다는 소문을 듣고 여진을 꾀어 크게 침략을 자행하고 함주를 함락시키니, 지키던 장수 전이도(全以道)ㆍ이희(李熙) 등이 군사를 버리고 도망해 돌아왔다. 동북면 도지휘사 한방신(韓方信)과 병마사 김귀(金貴)가 화주(和州 함북 영흥(永興))에 진군했다가 역시 패하여 물러나와 철관(鐵關 함남 덕원(德源)의 북쪽)을 보전하였으니, 화주 이북 지방이 모두 함몰되었다. 관군이 여러 번 패하자 장수와 군사가 기운이 꺾여 밤낮으로 태조가 도착하기만 바라고 있었다.
○ 대호군 김두(金斗)가 서북면 체복사(西北面體覆使)로 갔다가 돌아왔다. 이때 군졸들이 춥고 배고파서 도롱이를 입어 몸을 덥히고, 말 한 필을 쌀 한 말로 바꾸었다. 길에서 죽는 자가 잇달았으며, 걸식하고 있는 도망병이 길에 가득 찼는데 얼굴이 매우 초췌하니 이웃 사람이나 친구라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 살아 돌아온 자가 백 명에 겨우 한두 사람뿐이었는데 권세 부리는 신하가 왕의 총명을 가려서 아뢰지 않으니 체복사가 연이어 가더라도 군중의 허실을 왕이 끝내 알지 못하였다.
○ 안우경(安遇慶)ㆍ이귀수(李龜壽)ㆍ지용수(池龍壽)ㆍ나세(羅世)가 좌익(左翼)이 되고, 이순(李珣)ㆍ우제(禹磾)ㆍ박춘(朴椿)과 우리 태조가 우익(右翼)이 되고, 최영이 중군이 되어 정주(定州)에 이르렀다. 태조가 여러 장수들이 패배한 것을 보고, 그들이 겁을 내어 힘써 싸우지 않았다고 말하니, 여러 장수들이 태조를 꺼렸다. 이때 적이 수주(隋州 평북 정주(定州))의 달천(㺚川)에 둔쳤는데, 여러 장수들이 태조에게 말하기를, “내일 싸움은 그대가 홀로 맡으시오." 하니, 태조는 여러 장수들이 자기를 꺼리는 줄 알고 조금 걱정하는 기색이 있었다. 이튿날 적이 세 부대로 나누어 쳐들어오므로, 태조는 가운데 있고 수하의 늙은 장수 두 사람을 좌우로 갈라서 각기 적의 한 부대씩 맡게 하여 힘을 내어 쳤다. 태조가 탔던 말이 진흙에 빠져 매우 위태로웠는데, 말이 힘을 내어 뛰어서 솟구쳐 나오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이상히 여겼다. 태조가 적의 장수 두서너 사람을 쏘아 넘어뜨리자 적이 그제야 패주하였다. 두 늙은 장수가 칼을 뽑아 마구 치니 적이 벌써 패하여 도망하였고 티끌과 먼지만이 하늘을 덮을 뿐이었다. 처음에 최유가 몽고ㆍ한족 군사에게 이익으로 꾀기를, “고려왕이 장수와 군사를 협박하여 서북면을 지키게 하였으니, 신왕이 온다는 소문을 들으면 싸우지도 않고 흩어질 것이다. 일이 성공되면 고려의 재상 이하 사람들의 가산을 상으로 주겠다" 하니, 여러 사람이 모두 이를 믿었다. 압록강을 건너오자 우리 군사가 굳게 막고 한 사람도 항복하는 자가 없었다. 몽고ㆍ한족 군사는 우리가 그들을 꾀어 깊이 들어오게 하고 군사를 매복시켜 놓고 기다리는가 의심하더니, 달천에서 패전하자 그제야 최유의 꾀에 빠진 줄 알고 밤에 거짓으로 우리 군사인 것처럼 하여 큰 소리로 떠들며 경동시키매, 최유의 군사가 그 진영을 불사르고 다시 압록강을 건너 달아났다. 우리 군사가 뒤쫓아 압록강까지 이르렀으나 도달하지 못하였다. 유인우(柳仁雨) ㆍ강지연(康之衍)ㆍ안복종(安福從) 등이 피곤해서 뒤떨어져 있으므로 이를 잡아서 죽였다. 저들 군사 중에 연경(燕京)에 돌아간 자는 겨우 17기뿐이었다.
○ 동녕로만호(東寧路萬戶) 박백야대(朴伯也大)가 연주(延州)에 쳐들어오니 최영이 그의 장수를 보내어 이를 쳐서 물리쳤다.
○ 김광조(金光祚)를 동북면 도순위사(東北面都巡慰使)에 임명하였다.
○ 2월에 우리 태조가 서북면에서 군사를 이끌고 철관(鐵關)에 이르니, 사람들이 마음으로 모두 기뻐하고 장수와 군사들의 담기(膽氣)가 저절로 배가 되었다. 한방신(韓方信)ㆍ김귀(金貴)와 함께 삼면(三面)에서 진격하여 크게 패배시키고, 화주(和州 함남 영흥(永興))ㆍ함주(咸州) 등의 주(州)를 모두 수복하였다. 삼선ㆍ삼개가 여진 땅으로 달아나 돌아오지 않았다. 왕이 태조에게 의지함이 더욱 중해졌다.
○ 김일봉(金逸逢)을 영도첨의(領都僉議)로 삼고, 우리 태조를 밀직부사로 삼고, 단성 양절 익대공신(端誠亮節翊戴功臣)의 공신호를 내려주었다.
○ 한방신에게 채단(彩緞)을 내려주고 우리 태조와 김귀에게 금띠를 내려주었다.
○ 경천흥(慶千興) 등이 개선하니, 왕이 유사에게 명하여 어가를 맞이하는 의식과 같이 하여 백관들은 국청사(國淸寺)의 남쪽 교외에서 잔치를 베풀어 그들을 위로하고, 여러 장수에게 적신의 전택과 재물을 주었다.
○ 서북면 도병마사 정찬(丁贊)의 휘하 목충(睦忠)이 종형 인길(仁吉)의 세력을 믿고 교만 방자하여 법을 지키지 않으니, 정찬이 이를 제어했으나 능히 금지시키지 못하였다. 목충이 원한을 품고 정찬이 덕흥군과 서로 통한다고 무고하여 순군부에 가두니 정찬이 근심하고 분하여 졸하였다. 정찬은 성품이 너그럽고 도량이 넓으며 무예가 있었다.
○ 한방신과 김귀가 개선하니 왕이 내전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 신유일에 혜성이 나타났다.
○ 3월에 왜선 2백여 척이 하동(河東 경남 하동(河東))ㆍ고성(固城 경남 고성(固城))ㆍ사주(泗州 경남 사천(泗川))ㆍ김해(金海)ㆍ밀성(密城 경남 밀양(密陽))ㆍ양주(梁州 경남 양산(梁山))에 침범하였다.
○ 좌정언(左政言) 김제안(金齊顔)을 파면시켰다. 처음에 환관 한휘(韓暉)가 변경에서 세운 공로로 첨의평리에 임명되었는데, 간관이 고신에 서명하지 않았다. 한휘는 김제안이 한 짓이라 생각하고 왕에게 참소하기를, “신은 나라를 위하여 집을 잊고 눈서리 내리는 한데서 거처하며 외방에서 적을 막았습니다. 제안은 나이가 어린데 외람되이 언관에 있으면서 두 마음이 있어 신의 사첩(謝牒)에 서명하지 않을 뿐 아니라 달천(㺚川) 싸움에 참가한 장사(將士)들의 사첩에도 아울러 서명하지 않으니 이는 장수들을 해체시키고자 하는 짓입니다." 하였다. 왕이 크게 노하여 첨서밀직사사(僉書密直司事) 원송수(元松壽)를 꾸짖기를, “제안은 경의 족인인데 경이 전선(銓選)을 관장하면서 제안을 끌어들여 간관을 삼은 것은 무엇을 하고자 함인가." 하니, 송수가 땅에 엎드려 땀을 흘리면서 대답하지 못하였다. 제안을 옥에 가두려 하니, 수시중 경천흥(慶千興)과 밀직부사 송인적(宋仁績)이 간하였으나 되지 않았다. 밀직부사 김달상(金達祥)이 왕에게 나아가서 아뢰기를, “제안은 간관이니 옥에 가둔다면 후대에 전하를 어떤 왕이라고 하겠습니까." 하니, 왕이 더욱 노하여 일어나서 내전으로 들어갔으나 옥에 가두지는 않았다. 제안이 병을 핑계하고 나오지 아니하니, 왕이 중사(中使)를 보내어 억지로 나오게 하여 한휘의 고신에 서명하게 하고는 마침내 파면시켰다.
○ 전라도의 조선이 왜적에게 막히어 운행되지 못하므로 왕이 동북면의 무사와 교동(喬桐)ㆍ강화(江華)ㆍ동강ㆍ서강의 전선 80여 척을 뽑아서 우도병마사(右道兵馬使) 변광수(邊光秀)와 좌도병마사 이선(李善)에게 명하여 나누어 거느리고 가서 엄호하게 하였다. 변광수의 배가 대도(代島)에 이르니 내포(內浦) 백성으로 왜적에게 사로잡혔던 자가 도망해 와서 고하기를, “적이 이작도(伊作島)에 군사를 매복시켰으니 경솔히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선이 듣지 않고 북치고 함성을 지르면서 먼저 나아가니 적이 배 두 척으로 맞아 싸우다가 속임수로 물러가더니 조금 후에 적의 배 50여 척이 포위하였다. 병마판관 이분손(李芬孫)과 중랑장 이화상(李和尙) 등이 앞서 적과 싸우다가 모두 적에게 살해되자 여러 배의 군사들이 이를 바라보고 넋을 잃어 바다에 몸을 던져 죽는 자가 10에 8, 9명이나 되었다. 변광수와 이선 등이 형세를 관망하면서 싸우지도 않고 물러가니, 싸우던 병졸이 크게 부르짖기를, “병마사는 어찌 사졸을 버리고 물러가시오. 조금만 머물러 국가를 위하여 적을 격파하십시오." 하였으나, 광수 등이 끝내 구원하지 않았다. 병사의 사기는 더욱 저하되어 크게 패하였다. 부사 박성룡(朴成龍)만이 힘을 다하여 싸워 배를 온전히 보전하여 왔는데 몸에 두서너 개의 화살을 맞았다. 병마판관 전승원(全承遠)이 판관 김현(金鉉)과 산원(散員) 이천생(李天生)과 함께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니, 적이 추격하였으나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적의 배 두 척이 갑자기 서쪽에서 측면으로 공격하자 사졸들이 능히 지탱하지 못하고 모두 물에 뛰어들었다. 승원만이 힘을 다하여 싸우다 서너 곳에 창을 맞고 물에 뛰어들었으나 헤엄을 잘 쳤기 때문에 죽지는 않았다. 밤에 돌아와서 배에 오르니 군사 하나가 화살에 맞고 물에 몸이 빠져 뱃전을 붙잡았으나 힘이 없어 능히 올라오지 못함을 보고, 승원이 배 가운데로 끌어올려 밤낮으로 배를 직접 저어 3일 만에 남양부(南陽府)에 도착하였다. 돌아온 것은 광수(光秀)ㆍ선(善) 등의 배 겨우 20척뿐이었다. 교동ㆍ강화ㆍ동ㆍ서강에 통곡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나 광수 등은 끝내 죄를 받지 않았다. 전라도 도순어사 김횡(金鈜)이 조선을 거느리고 내포에 이르러 적과 싸우다가 패하여 죽은 자가 반수 이상이 되었으나, 왕의 총애를 받는 측근이 김횡의 뇌물을 받고 도리어 칭찬하고 왕이 내온(內醞 임금이 신하에게 하사하는 술)을 내려주고 맞이하여 위로하니 사람들이 매우 분개하였다.
○ 여름 4월에 강절(江浙) 지방의 장사성(張士誠)이 만호(萬戶) 원세웅(袁世雄)을 보내어 예물을 가지고 왔다.
○ 회남(淮南)의 주평장(朱平章)이 만호 허성(許成)을 보내어 예물을 가지고 왔다.
○ 5월에 경상도 도순문사 김속명(金續命)이 왜적 3천 명을 진해현(鎭海縣)에서 쳐서 이를 크게 깨뜨리고 병장기를 바치니, 왕이 의복과 술과 금띠를 내려주고 전사(戰士)에게 차등 있게 관작을 주었다.
○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이암(李嵒)이 졸하였다. 암의 그 전 이름은 군해(君侅)이다. 두 번이나 시중이 되어 법도를 조심스러이 지키어 조금도 용서함이 없었으며, 집에서는 살림살이에 간여하지 않고 책으로써 스스로 즐겼으며, 예서(隷書)와 초서(草書)를 잘 썼다. 일찍이 태갑편(太甲篇)을 써서 왕에게 바치면서 그 아들 강(岡)에게 말하기를, “너는 명심해라. 나는 이미 늙어서 실무의 직책도 없고 간관의 직책도 없으니 마땅히 왕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으로써 직무를 삼을 뿐이다." 하였다. 후에 충정왕의 묘에 배향되었다.
○ 대호군 이성림(李成林)과 전교부령(典校副令) 이인(李韌)을 보내어 강절에 답례하였다.
○ 6월에 이공수(李公遂)ㆍ홍순(洪淳)ㆍ허강(許綱)이 원 나라에 있으면서 판서 이자송(李子松), 판사 김유(金庾)ㆍ황대두(黃大豆), 부령 장자온(張子溫), 북부령(北部令) 임박(林樸) 등과 함께 서신을 만들어 대지팡이 구멍에 넣어 정량(鄭良)ㆍ송원(宋元)을 샛길로 보내 보고하기를, “덕흥군이 영평(永平)에 있고, 최유는 원 나라로 돌아와서 권세 있는 자에게 결탁하여 많은 군사를 일으켜 동으로 가기를 꾀하고 있으며, 황제에게 청하기를, '덕흥이 본국에 돌아가게 되면 장정을 다 징발하여 천자의 위병(衛兵)에 충당하고, 해마다 양향(糧餉)을 바치며, 또 경상도와 전라도에 왜인만호부(倭人萬戶府)를 두고 왜놈들을 불러 와서 금부(金符)를 주어 상국의 원조가 되도록 하오리다.' 하였습니다. 그들의 계획이 이와 같사오니, 국가에서는 덕흥군이 이미 실패했다고 생각지 말고 방비를 더욱 신중히 하소서." 하였다.
○ 명주(明州)의 방국진(方國珍)이 사신을 보내와서 침향(沉香)ㆍ궁시(弓矢)와 옥해(玉海) 등 서적을 바쳤다.
○ 가을 7월에 여러 도의 양가의 자제를 뽑아서 8위(衛)에 보충시켜 상번(上番)하여 숙위하게 하고, 5군(軍)에 나누어 예속하여 서울 4문 밖에 주둔하게 하였다. 강릉도의 자제만은 그 도에 주둔하여 동북면을 방비하게 하였다.
○ 오왕 장사성이 사신을 보내와서 옥영(玉纓)ㆍ옥정자(玉頂子)ㆍ채단(彩段)을 바쳤다.
○ 8월에 왕이 시중 유탁(柳濯)ㆍ경천흥과 찬성사 최영을 불러 이르기를, “오인택(吳仁澤)과 김달상(金達祥)이 전주(銓注)를 맡아 현량(賢良)을 밀쳐 버리고 친인(親姻)을 추천 임용하며, 공로는 기록하지 않고 뇌물 준 자만 보니 천지의 화기를 손상하여 재앙이 옴이 여기에서 연유했다. 마땅히 먼 지방으로 물리쳐서 하늘의 재앙을 내리는 뜻에 응답해야 된다." 하였다. 이때 인택과 달상이 도당에 있었는데, 중사(中使)를 보내어 그 자리에서 교지를 선포하고 인택은 청풍군(淸風郡 충북 제천(提川))으로 귀양보내고, 달상은 옥주(沃州 충북 옥천(沃川))로 귀양보내니 국인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조금 후에 달상을 한양윤(漢陽尹)에 임명하였다. 전 군부판서 오영주(吳英柱)와 삼사판관(三司判官) 오영좌(吳英佐)를 귀양보내니 모두 인택의 아들이다. 영주 등이 그 어머니의 말을 따라 소경 석천록(石天祿)에게 점을 치기를, “최영과 이귀수가 어느 때에 배척되겠느냐." 하니, 천록이 말하기를, “오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이 말이 누설되어 영주 등이 죄를 얻게 되고, 천록도 역시 곤장을 맞고 귀양가게 되었다.
○ 9월에 호군 장자온(張子溫)이 원 나라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승상 패라첩목아(孛羅帖木兒) 등이 이르기를, '고려왕이 공은 있고 죄는 없는데 소인에게 곤욕을 치르니 어찌 소인을 먼저 다스리지 않으랴.' 하면서, 황제에게 아뢰어 왕을 복위하게 하고, 최유를 함거(檻車)에 실어 본국으로 송치하게 하였습니다." 하니, 왕이 크게 기뻐하여 자온에게 금대와 쌀ㆍ베 등의 물품을 내려주고 상호군으로 임명하였다.
○ 홍순(洪淳)ㆍ이자송(李子松)ㆍ김유(金庾)ㆍ황대두(黃大豆)가 원 나라에서 돌아왔다. 처음에 황제가 원 나라에 있는 고려 사람에게 모두 덕흥군을 따라 본국으로 가게 하니, 김첨수(金添壽)ㆍ유인우(柳仁雨)ㆍ강지연(康之衍)ㆍ황순(黃順)ㆍ안복종(安福從)ㆍ문익점(文益漸)ㆍ기숙륜(奇叔倫) 등이 모두 이에 붙어 따랐다. 홍순ㆍ이자송ㆍ김유ㆍ황대두는 피하여 따르지 않고 절개를 지켜 변하지 않았다.
○ 겨울 10월에 원 나라에서 한림학사 승지(翰林學士承旨) 기전룡(奇田龍)을 보내어 조서를 내려 왕을 복위시켰다. 도당에서 왕에게 교외에서 맞이하기를 청하니 왕이 윤허하지 않고 백관에게 명하여 맞이하게 하고, 또 이르기를, “만약 내가 교외에서 영접하지 않는 이유를 조사(詔使)가 묻거든 마땅히 대답하기를, 과군(寡君)이 일찍이 상국에 죄를 얻어 폄작(貶爵)되었으니 지금 복위되었다 해도 황제의 명령을 받기 전에는 감히 조사를 영접하지 못한다고 하라." 하였다. 원 나라의 사신이 행성에 이르자 왕이 편복을 입고 나아가 조서를 듣고는 그제야 면복을 갖추고 절하였다.
○ 원 나라에서 최유를 잡아 보내니 순군옥에 가두었다.
○ 이공수(李公遂)를 영도첨의(領都僉議)로, 홍순(洪淳)을 지도첨의 겸 감찰대부(知都僉議兼監察大夫)로, 이자송(李子松)과 김유(金庾)를 밀직부사로 삼아 모두 공신의 칭호를 주었다.
○ 찬성사 이인복(李仁復)을 원 나라에 보내어 왕의 복위를 사례하게 하고, 동지밀직사사 왕중귀(王重貴)에게는 천추절을 하례하게 하였다.
○ 11월에 최유가 처형되었다.
○ 전녹생(田祿生)을 감찰대부로, 염지범(廉之范)을 밀직부사로 삼았다.
○ 밀직부사 한공의(韓公義)를 원 나라에 보내어 신정을 하례하게 하였다.
○ 죄수를 사면하였다.
○ 전 판삼사사 손홍량(孫洪亮)에게 안석과 지팡이를 내려 주었다.
○ 12월에 왜적이 조강(祖江)에 쳐들어와서 관리(關吏)를 죽였다.
○ 풍저창사(豐儲倉使) 정득년(丁得年)에게 명하여 환관에게 쌀을 내려주게 하였더니, 득년이 이 명령이 양부(兩府)를 경유하지 않았다 하여 명을 받들지 않았다. 왕이 노하여 곤장을 때려 귀양보내고자 하였으나, 찬성사 최영이 아뢰기를, “책임은 신등에게 있사오니 득년의 죄가 아닙니다." 하므로, 이에 득년을 풀어 주었다.


 

 

동문선 제10권
 오언율시(五言律詩)
곡 평재 이 문경공 강(哭平齋李文敬公岡)


한방신(韓方信)

내가 행촌(이암(李嵒)) 문하에서 나왔으므로 / 我出杏村門
자네를 형제와 같이 여겼었네 / 視君如弟昆
충성스럽고 맑음은 태어난 성품이요 / 忠淸來有種
공손하고 검소함이 홀로 무리에서 뛰어났었네 / 恭儉獨超群
창생들이 기대에 보답할 줄 알았더니 / 謂答蒼生望
어찌 점치는 자의 말과 틀리는고 / 何違日者言
이제부터 합좌소에 / 從今合坐所
높은 의론을 다시 들을 수 없겠네 / 高論更難聞


 

[주D-001]점치는 자[日者]의 말 : 음양학(陰陽學)으로 점치는 자를 일자라 하는데, 아마 그때에 이강(李岡)을 정승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음양가가 있었던 모양이다.
[주D-002]합좌소(合座所) : 재상(宰相)들이 모여서 정무(政務)를 보는 자리.

 

동문선 제21권
 칠언절구(七言絶句)
기식영암선로(寄息影菴禪老)


이암(李嵓)

뜬 세상 헛이름은 바로 정승이요 / 浮世虛名是政丞
작은 창의 한가한 맛은 그저 산승일세 / 小窓閑味卽山僧
그 중에도 또한 풍류로운 곳이 있나니 / 箇中亦有風流處
한 송이 매화꽃이 부처등에 비치었네 / 一朶梅花照佛燈


동문선 제21권
 칠언절구(七言絶句)
응제(應製)


이암(李嵓)

옥련이 친히 송악에 다다르니 / 玉輦親臨松嶺上
영지(불로초(不老草))는 돌정자 사이에 빼어났구나 / 靈芝秀發石亭間
우리 왕의 거룩한 덕을 어찌 다 말하겠노 / 吾王盛德那能說
먼저 그 천령이 이 산과 같기를 축하하네 / 先賀天齡等此山


동문선 제103권
 발(跋)
서 난파선생 시권후 거인(書蘭坡先生詩卷後 居人)


권근(權近)

청천(淸川) 이상국(李相國)은 나의 부집(父執 아버지와 친한 동지)이니, 난파는 그의 호이며, 수보(壽父)는 그의 자이다. 일찍이 시문(詩文)을 유명한 공경들에게 구하였는데, 지취가 매우 높아서 진실로 그가 허여 하는 사람이 아니면, 비록 능하고 교묘하다 할지라도 이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그가 얻은 것은 행촌(杏村 이암(李嵒))의 글씨와 익재(益齋)ㆍ초은(樵隱)ㆍ목은(牧隱) 두서너 분의 시와 문 두어 편 뿐이었다. 하루는 나를 비루하다 하지 않고, 가지고 와서 보이고는 글을 쓰라 명하는 것이다. 내가 재능 없는 사람으로 감히 여러 선정(先正 선대의 어진 신하)의 뒤를 따라서 말한다는 것은 마땅한 바는 아니다. 그러나 공의 명함이 있으니, 감히 받들어 좇지 않으리요. 공은 선대로부터 공훈과 덕업을 서로 이어 받았으나 시조(始祖) 국공(國公)과 문정공(文貞公)은 더욱 그 뛰어난 분이었다. 공이 어려서부터 세속과 다른 것을 좋아하고 숭상하며, 집을 다스리는 데는 있고 없는 것을 묻지 않고, 모으고 쌓는 바가 서화와 금기(琴碁)요, 심는 것은 매ㆍ란ㆍ송ㆍ죽이며, 기르는 것은 혹은 사슴, 혹은 학이었는데, 한 가지 물건이라도 갖추지 않은 것이 있으면 한스러워하고 불만하게 생각하여, 반드시 구하여 이루었고 그런 뒤에야 마음이 쾌하였던 것이다. 손이 오면 반드시 물 뿌려 쓸고 향불을 피우고는 술상을 베풀고 차[茶]를 달여놓고, 시를 지으며 서로 부르고 수답하였으며, 술자리가 한창 즐겁게 어울리면, 혹은 계집종으로 하여금 거문고도 뜯고 시도 짓게하여 환락을 흡족히 한 연후에 파하였으나, 난잡한 데에 이르지는 않았다. 깨끗하고 현달한 요직을 역임하고, 중외(中外)에 출입하면서 가는 곳마다 법을 지키고 굽히지 않으니 언제나 명성과 업적이 따랐다. 만년에 이르러 벼슬이 후백(侯伯)에 오르니 총애와 대우가 더욱 융숭하고, 명성과 덕망이 더욱 높았으나, 그 숭상하는 바는 변치 않아 담담하게 세속을 초월하는 사상이 있었다. 또 공이 풍신은 맑고 명랑하였으며 용모와 태도가 쇄락하여 흰 수염은 서릿발 같이 빛나고, 붉은 안색은 옥같이 순결하여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신선같이 보여, 한 점의 티끌만한 누도 없으니 그 용모를 보면 가히 그 마음을 얻어 알 수 있을 것이다.
옛날 전조(前朝)의 의왕(毅王)이 문정공을 일러 ‘추소명월(秋宵明月 가을 밤의 밝은 달)’ 이라 하여 그의 흉금에 비의(比擬)하였다 하거니와 이제 공의 풍신을 보니 문정공을 욕되게 함이 없다고 이를 만하다. 이제부터 공의 자손들은 또한 반드시 공의 맑고 높은 취상(趣尙)을 법받아 근신하여 지킨다면 공의 세덕(世德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덕업)의 전함이란 마땅히 무궁할 것이다.


 

 

 

 

사가문집보유 제1권

 비지류(碑誌類)

 

좌의정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증시(贈諡) 강헌(康憲) 이공(李公)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


철성의 이씨는 고려의 대족이다. 휘 진(瑨)이라는 분이 있어 과거에 올랐으나 벼슬하지 않고 덕을 베풀어 후손에게 남겼다. 감찰대부(監察大夫) 휘 존비(尊庇)를 낳으니, 문장으로 이름이 나 현달하였다. 철성군(鐵城君) 휘 우(瑀)를 낳으니, 일을 처리하는 능력으로 인해 회주(淮州), 금주(金州), 전주(全州), 진주(晉州) 등 여러 주의 지방관을 역임하였으며, 이르는 곳마다 선정(善政)을 베풀어 떠난 뒤에도 백성의 사랑을 받음이 많았다.
문하시중(門下侍中) 휘 암(嵓)을 낳으니, 충정왕(忠定王)을 섬겨 좌정승(左政丞)이 되었으나 얼마 안 있어 자신의 뜻을 지켜 사직하였다가 공민왕(恭愍王) 때에 다시 재상이 되었고, 기해년(1359, 공민왕8)에 모적(毛賊)이 서관(西關)을 침범했을 때 도원수(都元帥)가 되어 승리로 이끈 공로가 있었으니, 장수와 재상의 재주를 겸비하여 공명이 세상을 덮었다. 시작(詩作)은 또한 간고(簡古)하였고, 진서(眞書), 초서(草書), 행서(行書)의 세 가지 서법은 모두 절묘하였으니, 졸하자 시호를 문정(文貞)이라고 하였다.
휘 강(崗)을 낳으니, 아버지의 풍도(風度)가 있어 사람들이 모두 공보(公輔)가 될 것으로 기대하였는데, 일찍 죽었다. 벼슬은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이르렀다. 신축년(1361, 공민왕10)에 홍건적의 변란이 일어나자 공민왕이 갑작스럽게 남쪽으로 파천하였는데, 공이 경상도 안렴사가 되어 받들어 맞이하는 위의(威儀)와 호위(護衛)가 매우 성대하고 접대하는 모든 물품이 충분하니, 사람들이 모두 떠들썩하게 칭찬하였다. 왕이 매우 중한 그릇으로 여겼는데, 마침내 졸하자 왕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하늘은 어찌 이리도 빨리 내 산을 빼앗아 가는가?”
하였다. 옛날 제도에 추밀(樞密)은 시호가 없었는데, 특별히 시호를 문경(文敬)이라고 하였다. 부인 곽씨(郭氏)는 판개성(判開城) 곽연준(郭延俊)의 딸이다. 홍무(洪武) 무신년(1368) 1월 모 갑자일에 공을 낳았다.
공의 휘는 원(原)이고, 자는 차산(次山)이고, 호는 용헌(容軒)이다. 처음에 공이 태어나 4개월 만에 문경이 졸하니, 곽 부인이 항상 공을 안고 슬피 울며 말하기를,
“하늘이 만약 이씨 집안에 복을 준다면 분명 이 아이에게 있을 것이다.”
하였다.
공은 어릴 적부터 숙성하여 어른 같았고, 조금 자라자 힘써 공부하여 게을리하지 않았다. 공의 누이인 권 문충공(權文忠公 권근(權近))의 부인 이씨가 일찍 아버지를 여읜 공을 가련하게 여겨 보살피기를 자기 자식같이 하였고, 문충도 가르치기를 자식같이 하였다. 학문이 날로 성취되어 글을 지으면 작자(作者)의 기운이 있었고, 토론을 할 때면 매번 견줄 사람이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문충이 놀라 말하기를,
“우리 장인어른이 죽지 않았다.”
하였다.
공은 나이 15세에 임술년(1382, 우왕8)의 진사과(進士科)에 급제하였다. 을축년(1385, 우왕11)에 포은(圃隱) 정 문충공(鄭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이 주관하는 시석(試席)에서 공이 장원급제하자 포은이 말하기를,
“문경의 재주와 덕이 크게 베풀어지지는 못했으나 지금 아이가 이와 같으니 하늘의 보시(報施)는 참으로 징험이 있도다.”
하였다.
무진년(1388)에 사복시 승(司僕寺丞)에 제수되고, 여러 번 자리를 옮겨 공조와 예조의 좌랑, 병조 정랑을 지냈다. 임신년(1392, 태조1)에 태조가 개국하여 공의 현능함을 큰 그릇으로 여기고 다스리기 힘든 큰 고을을 여러 차례 맡겼다. 세 번 대각(臺閣)에 들어가 지평(持平)이 되고 시사(侍史)가 되고 중승(中丞)이 되었는데, 굳세고 바르게 스스로 지조를 지키니, 대각이 위엄이 있고 당당하였다. 외직으로 나가 양근 군수(楊根郡守)가 되어서는 은혜로운 정사를 베풀었다. 재차 전교(典校)가 되고, 문한(文翰)을 담당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성대한 명성이 있었다.
공정왕(恭靖王)이 공을 발탁하여 우부승지로 삼았는데, 보고를 자세하고 분명하게 하며 왕명의 출납을 오직 진실하게 하니, 좌부승지로 올렸다. 태종이 즉위하여 공을 그대로 후설(喉舌)에 두고 아끼고 돌아보기를 더욱 독실하게 하였으며, 좌명(佐命)의 공훈으로 논하여 철권(鐵券)을 하사하고 사헌부 대사헌에 제수하고 철성군에 봉하였다. 외직으로 나가 경기 관찰사가 되었는데, 사람을 쓰고 버림이 엄격하고 분명하여 횡포하고 교활한 자들이 두려워 몸을 사렸다.
영락(永樂) 계미년(1403, 태종3) 여름에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가 고명(誥命)을 하사하였으므로 경사(京師)로 가서 사은하였다. 겨울에 외직으로 나가 평양 부윤(平壤府尹)이 되었다. 평양부는 예로부터 고을이 크고 일이 많아 다스리기 어렵다고 일컬어진 곳이다. 공이 편안히 어루만져 적절하게 처리하니, 정사가 매우 잘 다스려졌다. 이때 한창 대동관(大同館)을 수리하고 있었는데, 공이 백성의 소요를 염려하여 속관을 거느리고 직접 재목과 기와를 나르니, 백성이 즐겁게 일에 임하여 빠른 시일에 수리를 완료하였다. 부윤으로서 서북면 도순문찰리사(西北面都巡問察理使)를 겸하였다.
병술년(1406, 태종6)에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에 제수되고, 중군총제 참지의정부사(中軍摠制參知議政府事)로 옮겼다가 다시 대사헌에 제수되고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옮겼다. 무자년(1408)에 경상도 관찰사가 되고, 계사년(1413)에 동북면 도순문찰리사가 되었다. 을미년(1415)에 추충익대좌명 공신(推忠翊戴佐命功臣)의 호로 고쳐 하사받고, 예조 판서로 올랐다가 얼마 안 되어 대사헌으로 옮겼다. 이에 이르러 모두 세 번 헌장(憲長)이 되었는데, 안색을 바르게 하고 조정에 서서 악을 배척하고 선을 장려하니, 바른말을 하는 데에 헌신(憲臣)의 체모가 있었다. 판한성부사로 바뀌고, 이조와 병조의 판서, 의정부 참찬으로 여러 번 옮겼다가 찬성사(贊成事)로 승진하였다.
무술년(1418, 세종 즉위년)에 세종이 즉위하여 우의정으로 발탁하고, 공신호에 동덕(同德) 2자를 더 하사하였다. 기해년(1419)에 문황제가 고명과 관복을 하사하였으므로 공이 표문(表文)을 받들고 경사로 가서 사은하였다. 공은 자태가 훤칠하여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대단히 눈에 띄었다. 황제가 보고 특출하게 여겨 말하기를,
“황염 재상(黃髥宰相)은 후에 꼭 다시 오시오.”
하였다. 신축년(1421)에 좌의정으로 승진하였다. 과거 시험을 주관하여 안숭선(安崇善) 등 33인을 뽑았는데, 당시에 인재를 잘 뽑았다는 칭송이 있었다. 을사년(1425)에 선종 장황제(宣宗章皇帝)가 등극하였으므로 경사로 가서 진하(進賀)하였다.
공은 참지정사를 시작으로 묘당(廟堂)에 출입한 세월이 20여 년이고 수상(首相)을 지낸 세월이 9년인데, 정무(政務)를 관대하게 처리하여 바꾸고 확장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대체(大體)를 유지하였다. 세종이 뜻을 가다듬어 처음 정치를 할 때를 맞아 마음을 다해 보좌하고 의견을 개진하여 도움이 크고 많았다. 조정이 그 풍모를 사모하여 우러러보았으나 공은 또한 차고 넘치는 것을 경계하여 몇 년 전부터 사직을 청하려고 하였다. 이에 앞서 공을 시기하는 자가 있어 공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잘못을 탄핵하였으나 태종이 친히 죄를 벗겨 주었다. 태종이 훙하자 공을 시기한 자가 전의 감정을 품고서 대각을 부추겨 공을 죽이려고 하였다. 세종은 공이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음을 알면서도 대신(臺臣)의 청을 어기기가 어려워 여산군(礪山郡)으로 귀양 보내니, 이때가 병오년(1426, 세종8) 봄이다. 세종이 옛날의 공훈을 생각하여 돌아보고 살펴 주기를 소홀히 하지 않았으며, 큰일을 논의할 때마다 반드시 말하기를,
“철성이 있었으면 반드시 처리했을 것이다.”
하였다. 얼마 안 되어 공을 불러들여 다시 재상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공을 시기하는 자가 다시 저지하였다. 기유년(1429) 여름에 병으로 졸하니, 향년이 62세이다. 세조가 직첩(職牒)과 공신녹권(功臣錄券)을 도로 하사하였다.
공은 도량이 넓고 성품이 충정(忠貞)한 데다 바른 학문으로 보조하였기 때문에 논의에서 발언한 것과 사업에 시행한 것들이 성대하게 볼만하였다. 평소 사람들과 말할 때면 속이고 꾸민 적이 없었으며 또한 모나게 애안(崖岸)을 두어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여기지도 않았거니와 큰일에 임하여 결정할 때면 확고하게 흔들리지 않아 마치 산악처럼 우뚝하였다. 인사를 담당했던 10여 년 동안 어질고 유능한 인재를 위주로 선발하고 여탈(與奪)을 사적인 감정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았으니, 진짜 태평재상(太平宰相)이었다. 애석하다. 하루아침에 세상을 떠나 세종의 새롭게 하는 다스림을 도와 이루지 못했으니, 또한 운명이다.
공의 첫 번째 부인 양천 허씨(陽川許氏)는 전리사 판서(典理司判書) 허금(許錦)의 딸이다. 1남 2녀를 낳으니, 대(臺)는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이며, 장녀는 주부(主簿) 유방선(柳方善)에게 시집가고, 차녀는 부정(副正) 유급(柳汲)에게 시집갔다. 두 번째 부인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봉상대부(奉常大夫) 군기 총랑(軍器摠郞) 최정지(崔丁智)의 딸이니, 변한국대부인(弁韓國大夫人)에 봉해졌다. 6남을 낳으니, 곡(谷)은 대호군(大護軍)이고, 질(垤)은 한성 소윤(漢城少尹)이고, 비(埤)는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이고, 장(場)은 상호군(上護軍)이다. 질과 비와 장은 모두 무과(武科)에 급제하였고 당시 사람들의 칭송이 있었다. 증(增)은 행 영산 현감(行靈山縣監)이고, 지(墀)는 행 대호군 겸 승문원참교(行大護軍兼承文院參校)로 정축년(1457, 세조3) 문과에 급제하였다. 4녀를 낳으니, 장녀는 첨지(僉知) 윤삼산(尹三山)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구례 현감(求禮縣監) 이굉식(李宏植)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좌의정 권람(權擥)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선공감 부정(繕工監副正) 황종형(黃從兄)에게 시집갔다.
대(臺)는 목사(牧使) 권상(權詳)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을 낳으니, 월(越)은 첨지이고, 신(晨)은 부정(副正)이고, 의(嶷)는 첨지이고, 경(庚)은 주부이며, 3녀를 낳으니, 장녀는 함양군(咸陽君) 이희(李䛥)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현감 정자숙(鄭自淑)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첨정 이집(李諿)에게 시집갔다. 곡(谷)은 사예(司藝) 이양명(李陽明)의 딸에게 장가들어 2녀를 낳으니, 장녀는 부윤(府尹) 강희안(姜希顔)에게 시집갔는데 자식이 없고, 차녀는 생원 남전(南恮)에게 시집갔다. 질(垤)은 장령 정지당(鄭之唐)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을 낳으니, 준(準)은 현감이고, 칙(則)은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인데 임오년(1462)에 급제하였으며, 6녀를 낳으니, 장녀는 현감 조정로(趙廷老)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군수 박후(朴堠)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현감 허형(許蘅)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부사 이시보(李時珤)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지중추원사 김순(金淳)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참봉 경상(慶祥)에게 시집갔다. 비(埤)는 현감 윤환(尹煥)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의(儀)를 낳으니 선략(宣略)이고, 1녀는 생원 정순언(鄭純彦)에게 시집갔으며, 후취로 수의 교위(修義校尉) 오천(吳泉)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으니 위(偉)이고, 2녀를 낳으니 어리다. 장(場)은 군사(郡事) 이규(李糾)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을 낳으니 곤(崑)과 헌(巚)이고, 1녀는 남형(南衡)에게 시집갔다. 증(增)은 관찰사 이희(李暿)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을 낳으니, 현감 평(泙), 진사 굉(浤), 사(泗), 빈(濱)이며, 2녀를 낳으니, 장녀는 조동호(趙銅虎)에게 시집가고, 차녀는 어리다. 지(墀)는 정보(鄭保)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을 낳으니, 륙(陸)은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인데 갑신년(1464, 세조10)에 장원하였고, 진사 수(陲)와 습(隰)과 맥(陌)이다.
유방선(柳方善)은 2남을 낳으니, 장남은 유윤유(柳允庾)이고, 차남 유윤겸(柳允謙)은 전교시 교리(典校寺校理)이며, 5녀를 낳으니, 장녀는 방준(房峻)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김영견(金永堅)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최영조(崔榮祖)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군수 김원신(金元信)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허식(許植)에게 시집갔다. 유급(柳汲)은 2남을 낳으니, 유종경(柳從京)은 순창 군수(淳昌郡守)이고, 유종화(柳從華)는 종성 부사(鍾城府使)이다. 윤삼산(尹三山)은 6남을 낳으니, 윤오(尹塢)는 상호군(上護軍)이고, 윤당(尹塘)은 보공장군(保功將軍)이고, 윤호(尹壕)는 양주 목사(楊州牧使)이고, 윤해(尹垓)는 현감이고, 윤탄(尹坦)은 상호군이고, 윤파(尹坡)는 직장(直長)이며, 3녀를 낳으니, 장녀는 첨지 박매(朴梅)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서림정(西林正) 이지(李忯)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청원정(靑原正) 이림(李霖)에게 시집갔다. 이굉식(李宏植)은 5남을 낳으니, 현감 이맹희(李孟禧), 어모(禦侮) 이중희(李仲禧), 찰방 이계희(李季禧), 부정(副正) 이영희(李永禧), 이익희(李益禧)이며, 딸은 주부 김예중(金禮重)에게 시집갔다. 권람(權擥)은 2남을 낳으니, 권걸(權傑)은 길창군(吉昌君)이고, 권건(權健)은 진사이며, 7녀를 낳으니, 장녀는 청원군(淸原君) 한세귀(韓世龜)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경력(經歷) 박사화(朴士華)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감찰 신억년(申億年)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주부 김수형(金壽亨)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좌랑(佐郞) 신수근(愼守勤)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참봉 민사건(閔師騫)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신말평(申末平)에게 시집갔다. 황종형(黃從兄)은 3남을 낳으니, 생원 황관(黃瓘), 황찬(黃瓚), 황규(黃珪)이다.
월(越)은 2남을 낳으니, 상호군 적손(嫡孫)과 사손(嗣孫)이다. 신(晨)은 1남을 낳으니, 금(嶔)이다. 의(嶷)는 3남을 낳으니, 필(珌)과 완(琬)과 탁(琢)이다. 경(庚)은 5남을 낳으니, 정(精)과 준(遵)과 질(質)은 모두 생원이고, 박(博)은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이고, 규(逵)는 진사이다. 준(準)은 1남을 낳으니, 영(英)이다. 칙(則)은 2남을 낳으니, 졸(拙)과 - 1자 결락 - 이다. 의(儀)는 1남을 낳으니, 풍(豐)이다. 평(泙)은 2남을 낳으니, 효윤(孝胤)과 충윤(忠胤)이다. 륙(陸)은 2남을 낳으니, 이(峓)와 험(嶮)이다. 내외의 증손과 현손이 100여 인이나 된다.
처음 공이 졸하고 3일 뒤에 최 부인 역시 졸하였다. 광주(廣州) 관내 서쪽 율촌(栗村) 이좌감향(离坐坎向)의 언덕에 장례하니, 동역이분(同域異墳)이다. 그 후에 여러 아들들이 서로 이어 타계하여 40여 년이 지나도록 비석을 세우지 못하였는데, 지금 참교공(參校公)이 개연히 비석을 세우고자 하여 나에게 명(銘)을 지으라고 명하니, 나의 외조비(外祖妣) 이씨는 바로 철성부원군의 누이이다. 외람되이 친속의 위치에 있는 만큼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 없어서 삼가 명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당당한 철성이시여 / 堂堂鐵城
찬란한 공렬이로다 / 有炳勳烈
상부에선 깊고 넓으셨고 / 相府潭潭
인각에선 우뚝 높으셨지 / 麟閣屹屹
오래도록 국정을 총괄하여 / 久宅百揆
그 공로 대정(大政)에 남아 있거니 / 功存納麓
사람에게는 덕망 높은 원로요 / 人有筮龜
나라에선 나라 떠받치는 주춧돌이라 / 國有柱石
조물주는 어찌하여 / 造物者何
인간을 희롱하는가 / 戱劇於人
무슨 운수가 이리 기이하며 / 何數之奇
무슨 형통이 이리 막혔는가 / 何亨之屯
정부의 요직이든 뚝 떨어진 변방이든 / 黃閣朱崖
하찮은 자리든 귀한 자리든 / 蒼蠅白璧
공은 혐의스럽게 여기지 않았고 / 公則不嫌
공은 태연자약 처하셨네 / 公處自若
왕께서는 공을 못 잊어 / 王曰念公
공이 조만간 돌아오리라 / 公歸不日
공이 돌아와 복상하리라 하셨으나 / 公歸復相
하늘이 공을 데려감 어찌 이리도 급한가 / 天奪何急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 雖則云然
지니신 덕 길이 보존되어 / 所存者長
산이 숫돌 되고 강이 띠가 되도록 영원하리니 / 山礪河帶
공은 곧 떠나신 것 아니라네 / 公則不亡
옥 같고 난 같은 자손 태어나 / 玉立蘭茁
자손이 창성하다네 / 子孫其昌
광주의 산은 우뚝하고 / 廣陵峩峩
광주의 물은 넘실거리도다 / 廣水沄沄
그곳에 불후의 비석 세우니 / 立石不朽
바로 공의 무덤이로다 / 維公之墳


 

[주D-001]작자(作者)의 기운 : 작자는 창시(創始)하는 사람으로, 《예기》 〈악기(樂記)〉에 “작자를 성(聖)이라 하고, 술자(述者)를 명(明)이라 한다.” 하였다.
[주D-002]공정왕(恭靖王) : 공정은 조선 2대 왕 정종(定宗)이 명나라에서 받은 시호이다. 정종은 숙종 때까지 묘호가 없이 시호인 공정으로 호칭되다가 1681년(숙종7)에 이르러서야 묘호를 ‘정종’으로 올렸다. 《宗廟儀軌 卷3 追上尊號》
[주D-003]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가 고명(誥命)을 하사하였으므로 : 태종 문황제는 명나라 성조(成祖)로 조카인 혜제(惠帝)를 몰아내고 즉위하였다. 혜제는 태조(太祖)의 손자이며 의문태자(懿文太子)의 아들로 의문태자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1392년에 황태손(皇太孫)으로 책봉되고 1398년에 태조를 이어 즉위하였다. 그러나 세력이 큰 제왕(諸王)들을 제거하려다가 당시 연왕(燕王)이었던 성조에 의해 축출되고 건문(建文)이라는 연호도 혁제(革除)되었다. 태종이 즉위하여 혜제로부터 고명을 받았으나 이때에 이르러 그 고명을 반납하고 성조로부터 다시 받은 것이다. 《明史 卷4 恭閔帝本紀》 《太宗實錄 3年 4月》
[주D-004]공의 …… 주었다 : 잘 알려지지 않은 잘못이란 내은달(內隱達)의 딸을 두고 홍여방(洪汝方)과 서로 첩으로 들이려고 다툰 일이다. 이 일이 탄로 나 탄핵을 받았으나 태종이 여러 정황을 살펴 죄를 묻지 않은 일을 말한다. 《太宗實錄 18年 6月 10日》 《世宗實錄 8年 3月 15日》
[주D-005]군기 총랑(軍器摠郞) : 한국문집총간 7집에 수록된 《용헌집(容軒集)》 권4 부록(附錄) 〈신도비명(神道碑銘)〉에는 군부 총랑(軍簿摠郞)으로 되어 있다. 군부(軍簿)는 군부사(軍簿司)의 약칭으로 조선조의 병조에 해당한다.
[주D-006]함양군(咸陽君) 이희(李䛥) : 태종의 장남이며 세종의 맏형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의 둘째 아들이다. 《선원강요(璿源綱要)》와 실록에는 이름이 포()로 기록되어 있다.
[주D-007]참교공(參校公) : 이원(李原)의 7남으로 후취인 전주 최씨 소생이고, 이름은 지(墀)이다. 승문원 참교(承文院參校)를 지냈으므로 참교공이라고 한 것이다.

 

 

동문선 제121권
 비명(碑銘)
유명조선국 수충위사협책정난동덕좌익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감춘추관사 세자부 길창부원군 시 익평공 권공비명 병서 (有明朝鮮國輸忠衛社協策靖難同德佐翼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監春秋館事世子傅吉昌府院君諡翼平公權公碑銘) 幷序


신숙주(申叔舟)

적이 들으니, 뿌리가 깊은 것은 가지가 반드시 무성하고, 근원이 먼 것은 흐름이 반드시 길다는 것은 영원한 이치다. 나의 벗 권공(權公)은 휘가 람(擥)이며, 자(字)는 정경(正卿)이니, 그의 선조는 본래 김씨(金氏)였다. 한(漢) 나라 명제(明帝) 영평(永平) 8년 을축에 알지(閼智)가 시림(始林)에서 탄생하여 김씨라고 일컬은 것은 일이 지극히 기이하다. 그의 후예가 박씨(朴氏)ㆍ석씨(昔氏)와 더불어 교대로 신라의 임금이 되었다. 휘가 행(幸)이라는 사람에 이르러서 안동군(安東郡)을 지키다가 고려 태조에게 인정을 받아 비로소 권(權)이라고 사성(賜姓)하고 안동부로써 식읍(食邑)을 삼았으며, 벼슬은 삼한벽상삼중대광태사(三韓壁上三重大匡太師)에 이르렀다.
9대를 지나 복야(僕射) 휘 수평(守平)에 이르러, 맑은 덕이 있어서 세상에 드러났다. 복야가 한림 학사 휘 위(韙)를 낳았는데 비로소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예를 잘 안다고 알려졌다. 학사가 찬성(贊成) 휘 단(㫜)을 낳았다. 네 고을을 다스렸으며 다섯 도의 안찰사를 지냈는데, 이르는 곳마다 청렴하고 공평하다는 칭송이 있었다. 호를 몽암(夢菴), 시호를 문청(文淸)이라고 하였다. 문청이 시중(侍中) 휘 부(溥)를 낳았으니, 공훈과 덕이 세상에 으뜸이었다. 영가군(永嘉君)을 봉하니, 영가는 즉 안동이다. 호를 국재(菊齋), 시호를 문정(文正)이라고 하였다. 휘 고(皐)와 휘 희(僖)는 삼대에 걸쳐 봉작을 승습하였다.
희가 휘 근(近)을 낳으니, 성리학으로써 우리 나라 사람들을 개발하였다. 도덕과 문장이 전배(前輩)들보다 높이 뛰어났다. 명 나라의 태조 고황제가 한 번 보고 존경하여 소중하게 여기었으니, 이름이 온 중국에 떨치었다. 벼슬이 추충익대좌명공신(推忠翊戴佐命功臣)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 길창군(吉昌君)에 이르렀다. 호를 양촌(陽村), 시호를 문충(文忠)이라고 하였다. 순충적덕보조공신(純忠積德補祚功臣) 좌의정(左議政)을 추증하였다. 문충공(文忠公)이 휘 제(踶) 옛 휘 도(蹈)를 낳으니, 문장이 대를 이었다. 장원급제로 뽑혔으며, 우리 세종 임금이 중하게 믿는 바이다. 벼슬이 의정부 우찬성에 이르렀다. 호를 지재(止齋), 시호를 문경(文景)이라고 하였다.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을 추증하였으니, 공의 고(考)이다. 모두가 공(公)으로 인해서 증작(贈爵)이 있은 것이다. 비(妣)는 정경부인(貞敬夫人)이니,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 이준(李儁)의 딸이다.
영락(永樂) 병신년 5월 을미일에 공을 낳았다. 한 나라 명제(明帝) 영평(永平) 을축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무릇 천여 년이 된다. 대대로 드러난 공과 아름다운 덕이 있어서 고관(高官)을 맡았으니, 어찌 이른 바 뿌리 깊은 나무는 가지가 무성하고 근원이 먼 물은 흐름이 길다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공은 어려서부터 글읽기를 좋아하여 크고 트이고 넓고 우아하며, 뜻이 크고 기이한 꾀가 많았다. 책을 싣고 명산고적을 찾아서 가지 않은 곳이 없었는데, 반드시 상당(上黨) 한공 자준(韓公子濬)과 함께 하였다. 이르는 곳마다 번번히 머물러 글을 읽고, 문장을 지어 회포를 풀었다. 벼슬하는 것을 일삼지 아니하였으니, 나이 35세가 될 때까지 오히려 뜻이 커서 운치 있게 노니는 것만을 일삼았다.
남이 권하여 과거에 응시하였는데 단번에 잇달아 삼장(三場)을 장원급제하였다. 지금 임금이 그때 바야흐로 잠저(潛邸)에 있으면서 명령을 받고 《무경(武經)》을 주해(註解)하고 있었다. 공이 시종(侍從)이 되니 임금이 공에게 큰 재간이 있음을 알고 지극히 관대하였다. 그때 권간이 세력을 농간하여 사직이 위태롭게 흔들렸는데, 공이 먼저 큰 계책을 세우고 또 자준(子濬)을 추천하니, 임금이 곧 두 분에게 맡겨서 기획을 짜고, 충신과 의사를 불러 모아 모발에 빗질 하듯, 곡식의 싹을 호미로 매듯하여 드디어 대란을 평정하였다. 논공하여 수충위사협책정난공신(輸忠衛社協策靖難功臣)의 호를 주었으며, 임금이 즉위하여서 또 동덕좌익공신(同德佐翼功臣)의 호를 주었으니, 공이 모두 제1등이었다.
처음에 간사한 무리들이 서로 얼켜서 안팎으로 번갈아 선동하여 포학한 불꽃이 치성하였다. 그런 것을 한 치의 병장기도 한자의 칼날도 쓰지 않고 한갓 충의만으로 스스로 분기하였다. 비록 천명의 돌아감이 있고 참 임금이 천운에 응하였다고는 하나, 진실로 공의 계책과 덕망이 앞뒤로 도와서 성취하게 하지 않았다면, 어찌 능히 충의의 무리들이 한편으로 지지하여 하루아침이 못 되어 이렇게 청명한 천하를 이루어 종묘 사직을 안정하게 할 수 있었겠는가. 정난(靖難)하고 좌익(佐翼)하여 모두 훈렬(勳烈)에 으뜸되는 것이 마땅하다. 차례를 초월하여 동부승지를 임명하였다.
우리 나라 법에 과거에 급제한 자는 상례에 따라 연회를 열어서 그의 어버이를 영화스럽게 하여 주기로 되어 있다. 공이 대부인을 위하여 영친연(榮親宴)을 개설하니, 학같이 흰머리를 가진 어머니가 마루 위에 있고 고관대작이 문전을 메웠다. 임금이 그때 영의정과 더불어 또한 잔치에 참석하여 친히 대부인에게 축수하니, 영화가 온 세상에 빛났다. 이조 참판에 임명하고 길창군(吉昌君)을 봉하니, 길창은 또한 안동의 땅 이름이다. 임금이 즉위하자 황제의 고명(誥命)을 청하기 위하여 공이 연경(燕京)에 가게 되었다. 숙주(叔舟)도 또한 함께 갔다. 공은 풍채가 거룩하여 바라보기만 하여도 덕과 도량이 있는 것 같아서 중국 사람들이 사랑하여 사모하고 존경하여 예우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마침내 고명을 얻어 가지고 돌아오니, 임금이 기뻐하여 같이 갔던 사람들에게 모두 원종공신(元從功臣)의 호를 내리고, 공을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 집현전대제학(吏曹判書集賢殿大提學)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에 승진시켰다. 여러 번 승진하여 숭정대부(崇政大夫) 판중추원사겸판이조사(判中樞院事兼判吏曹事)가 되었다.
공은 어릴 때부터 기허(氣虛)한 것을 근심하여 매양 복잡하고 번극한 것을 싫어하더니, 이때에 이르러 한가하게 살기를 비니, 임금이 손수 편지를 써서 회보하기를, “경과 나는 서로 마음과 덕이 합치한다고 하는 정도로써 논할 수는 없다. 실로 하늘이 낳게 한 것이다. 경이 터럭만큼이라도 사심이 있었거나, 나에게 터럭만한 욕심이라도 있었다면, 물불을 무릅쓰고 돌진하여 몸과 처자를 잊고 하늘과 땅에 맹세하여 드디어 화란(禍亂)을 평정할 수 있었겠는가, 오늘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경이 실로 공업의 주인인 것이다. 이제 경이 은거하여 산수의 취미를 찾아 가려고 하는 글을 보니,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 경이 어찌 하늘이 맡긴 임무를 벗을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우찬성을 임명하였다. 얼마 안 되어 대광보국 우의정을 제수하고, 좌의정에 승진시켰다.
정난(靖難)하던 처음에 있어서 간사한 무리를 내쫓고 현능(賢能)한 이를 발탁하며, 굽은 것을 바로잡고 어지러운 것을 제거하는 데는 공이 실로 흉금을 열어 임금을 인도하고 은밀히 보좌하였다. 정승이 되어서는 관대하고 여유 있고 즐겁고 간이하며, 방정하고 엄격하며 침착하고 태연하였다. 힘써 기성(旣成)의 법을 준수하였으며, 그 대체를 보존하고 그 세절(細節)은 생략하였다. 경륜을 다하지 못하고 마침내 병으로 해임을 빌어 정승을 면하였다. 그러나 군국(軍國)의 중대한 일은 모두 사람을 보내어 가서 자문하였으며, 먹을 것을 내리고 문병하는 사자가 길에 끊어지지 않았다. 병이 점점 위중하여지니, 내의(內醫)를 시켜 약을 지키게 하고, 태관(太官 궁내에서 백관의 찬선(饌饍)을 맡은 관원)은 부엌일을 잇달게 하여 지극하게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성화(成化) 원년 을유년 2월 갑신일에 졸하니, 임금이 매우 슬퍼하여 반찬을 들지 않고 정사를 정지하였다. 부증(賻贈)에 더함이 있고 관에서 장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크고 작은 관원과 인민들이 높고 애석해 하여 탄식과 슬픔이 길에 차고, 친구들은 달려가 부르짖으며 슬퍼하였다.
나는 매양 공과 더불어 벼슬과 영화가 성대하고 가득해졌다고 하여 다투어 물러나기를 빌고자 하였더니, 공이 마침내 먼저 실천하여 어지러운 티끌 속에서 벗어나, 충정하고 유연하게 심신을 보양하게 되었으므로, 마땅히 높은 수를 길이 누릴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런 일에 이르렀으니 하늘의 이치도 또한 신빙하기 어렵단 말인가. 처음에 공이 물러가실 때, 면관(免官)의 허가 문서가 밤에 계하(啓下) 되었으므로 숙주가 일어나서 비지(批旨)의 제목을 보고 앉은 채 아침을 기다렸더니, 공이 과연 시 두어 편으로 스스로 자랑하기를,

지금부터는 한 승상이 부럽지 않구나 / 從今不羨韓丞相
한 필 말로 서호길 홀로 오가리 / 匹馬西湖獨往還

하였다. 나는 시를 보고 망연자실하였다. 일찍이 해마다 봄을 완상하자고 약속한 일이 있었다. 공의 집은 남산의 기슭에 자리잡고 있어서 도시를 내려다보면 복숭아와 오얏의 꽃이 만발하여, 붉고 흰 꽃빛이 눈앞에 찬란하였다. 한 번 상춘(賞春)의 자리를 열었을 뿐, 내가 해마다 북방의 진영을 순시 독찰하였으며, 돌아오면 일이 번잡하였고, 공도 병에 들어서 두 번 다시 약속을 찾지 못하였다. 이제 나 또한 평소의 뜻대로 벼슬에서 물러남을 얻었으므로 무거운 짐을 벗고 조용히 노닐 수 있게 되었는데, 이제 공이 가시어 다시는 공을 따라 노닐 수 없게 되었으며, 죽음과 더불어 같이 가버렸구나. 아, 슬프도다.
공은 문정공(文貞公) 이암(李嵓)의 손자인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원(原)의 딸에게 장가들 었다. 영원군부인(寧遠郡夫人)으로 봉하였다. 2남 8녀를 낳았으니, 맏아들의 이름은 걸(傑)이라고 하며, 보공장군(保功將軍) 행충좌위호군(行忠佐衛護軍)의 벼슬에 있다. 다음은 건(健)이니 어리다. 맏딸은 추충정난공신(推忠靖難功臣) 청원군(淸原君) 한서귀(韓瑞龜)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우사어(右司禦) 박사화(朴士華)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사헌 감찰(司憲監察) 신억년(申億年)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행 호군(行護軍) 남이(南怡)에게 시집갔으나 공보다 먼저 죽었다. 다음은 풍저창 직장(豐儲倉直長) 김수형(金壽亨)에게 시집갔다. 나머지는 다 어리다.
시조로부터 세상을 빛나게 한 남은 경사가 공에게 이르러 더욱 커졌다. 이미 크게 하고, 그의 수(壽)를 인색하게 함은 어찌된 일인가. 일찍이 듣건대, 베푼 것이 두터운 자에게는 보답이 융성하다고 하였는데, 공의 덕을 기르고 복을 흘러 보냄이 오히려 아직 그치지 아니하였으니, 가지의 무성함과 흐름의 장원(長遠)함은 이미 징험하였다. 또 장차 그것을 기대하는 것인가. 4월 정유일에 충주(忠州) 수읍(首邑)의 서쪽 미법곡(彌法谷) 선공(先公)의 무덤 아래에 장사하였다. 다음 해 가을에 악석(樂石 깨끗하고 견고해서 악기를 만들 수 있는 돌)을 다듬어, 장차 공의 훈덕(勳德)을 길이 전하고자 하매, 공의 서랑(婿郞)인 청원군(淸原君)이 나에게 부탁하여 글을 청하였다.
아, 공의 벼슬의 경력이라든가 훈업이라든가, 임금의 권애(眷愛)가 돈독하였던 것 등은 따로 나라의 사기(史紀)에 있을 것이니, 본래부터 여기에 자세히 기술할 필요가 없다. 집에 있어서는 효도하고 우애하였으며 친척을 대우하고 친구를 대접하는 데 있어서 각각 그 도리를 다하였다는 것도 비록 기록할 죽간(竹簡)과 비단을 쌓아 놓더라도 또한 다 기술할 수는 없다. 우선 대략 줄거리만 기술하고, 마침내는 슬퍼하고 애석해 하는 심정을 적는데 귀결될 뿐이다. 숙주는 공과 더불어 나이가 서로 비슷하여 젊을 때부터 같이 교유하면서 매양 공과 더불어 서로 묘갈명(墓碣銘)을 지어 주겠다고 농담으로 다투어 자랑하였더니, 이제 과연 그렇게 되었구나. 아, 슬프도다. 황천에서 일어날 수 있다면 이 글을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아, 슬프다.
명에 이르기를,

멀도다 공의 시조가 / 遠矣公始
시림에서 처음 나서 / 出自始林
고려의 초기에서 / 高麗之初
김을 권으로 바꾸었네 / 權而改金
경사를 누적하고 광택을 흘려 보내 / 積慶流光
초헌과 관복으로 차림 마주 보며 잇달았네 / 軒冕相望
어떤 이는 공덕으로 / 或以功德
어떤 이는 문장으로 / 或以文章
아름다움 이어받고 꽃다움 전하더니 / 襲美傳芳
공에게 이르러서 더욱 펼쳐졌네 / 至公彌張
뿌리 깊어 가지 크고 / 相深源遠
근원 멀어 흐름 길다 / 枝茂流長
공이 처음 분기할 때 / 公奮厥初
글읽기만 일을 삼고 / 讀書爲業
높이 높이 뛰어나서 얽매이지 아니하며 / 卓犖不覊
호수와 산을 찾아 떠돌아 노닐더니 / 湖山浪跡
단번에 과거삼장 장원급제 하였으니 / 一擧三魁
하는 일 광방하고 종적은 기이하다 / 事曠跡奇
대군자는 / 知大君子
이와 같아야 된다는 것을 알았네 / 所謂如斯
권간들이 정권 훔쳐 / 權姦竊柄
제멋대로 권세를 부리며 / 噓寒吸熱
정권을 농락하였네 / 操握弄機
화가 종사에 미치게 되었더니 / 禍及宗祐
거룩한 우리 나라 하늘이 돌보시어 / 天眷大東
우리의 성철하신 임금을 낳아 주시고 / 生我聖哲
도와서 같이 구원할 / 贊襄共濟
어진 보필을 내리셨네 / 錫之良弼
천명과 사람 마음 돌아감이 뚜렷하여 / 天命人歸
촛불에 나방 같은 권간들이 영향을 받았네 / 影響蛾燭
간흉을 제거하고 / 芟夷姦兇
준걸한 인재를 골라 뽑아 / 簡拔俊特
어지럽고 혼잡한 것은 분석하여 떼어내고 / 析離紛庬
막히고 정체된 것은 열어 인도했네 / 濬導滯塞
저들의 빼앗고 훔치던 것 물리치고 / 祛彼敓
우리의 윤택함을 펼치었네 / 敷我需澤
공은 묘당에 들어가 정승이 되어서는 / 入相廟堂
도덕을 넓고 크게 세상에 선양하니 / 恢弘道德
임금은 공에게 시귀인 양 앞길을 묻고 / 君有蓍龜
나라는 공에게 주석처럼 의지하였네 / 國有柱石
하늘이 어찌하여 서러워하지 않고 / 天何不愸
공의 연령 그렇게도 빠르게 빼앗는고 / 而奪其齡
우리들의 우정은 진정 즐겨하여 / 嬉戱眞情
아교와 옻칠처럼 망형의 사이였네 / 膠漆忘形
그대를 아껴하고 그대를 슬퍼함은 / 惜公慟公
공에서 그러하고 사에서도 그러하네 / 我公我私
슬프다. 공이시여 / 嗚呼公乎
여기에서 끝나는가 / 而止乎玆
죽고 삶은 변화하고 / 死生變化
가는 세월 머물지 않아 / 逝者不留
봄철은 제대로 동산을 지나는데 / 春過東山
나 홀로 서주에서 통곡하네 / 痛哭西州
덕과 공을 기록함은 / 記德銘勳
큰 솜씨가 없음이 부끄러워 / 愧乏鉅手
다만 평생의 정의만 진술하여 / 但列情素
후인에게 보일 뿐이네 / 以示于後

하였다.

동문선 제120권
 비명(碑銘)
유명 조선국 시호 문간공 안공 묘비명 병서 (有明朝鮮國諡號文簡公安公墓碑銘 幷序)

동사강목 제14하
기해년 공민왕 8년(원 순제 지정 19, 1359)

춘정월 황석기를 파면하고, 이승경(李承慶)을 문하시랑 평장사로 삼았다.
이승경은 원에서 어사가 되어서 제로(諸路)를 염방(廉訪)할 적에 일을 잘 처리한다고 이름이 있었는데, 모상(母喪)을 당하여 본국에 돌아왔었다가 그 후 원에서 불러도 부임하지 않으므로 왕이 이 직책을 임명하였다.

하4월 장사성과 정문빈이 사신을 보내와 빙문하였다.
○ 이씨(李氏)를 맞아들여 혜비(惠妃)로 삼았다.
이때에 왕은 오래도록 후사(後嗣)가 없었다. 재추들이 말하기를,
“공주가 아들을 낳지 못하니, 명가(名家)의 딸로서 자식을 낳을 만한 여자를 선택하여 비(妃)로 들이소서.”
하였다. 이에 이제현의 딸을 맞아들여 혜비(惠妃)로 봉하였다. 얼마 뒤에 공주가 분하게 생각하여 진수(珍羞)를 진상치 않으며 참소와 고자질이 다투어 일어났었다. 공주가 비로소 투기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5월 개미들이 서로 싸웠다.
그때에 붉은 개미와 검은 개미들이 떼를 지어 서로 싸웠다. 사천감(司天監)이 아뢰기를,
“병지(兵志)에 ‘개미들이 서로 싸우면 전쟁이 크게 일어난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듬해 이날에 또 개미들이 서로 싸우는 괴변이 있었으니, 모두 5월 6일이었다.
○ 왜가 예성강(禮成江)에 침구(侵寇)하였다.
그때에 왜구가 연해(沿海) 여러 군현에 횡행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예성강까지 침구하였고 또 옹진현(瓮津縣)을 분탕질하였다.

6월 홍언박 등에게 공신호를 주었다.
여러 기씨(奇氏)들을 제거한 공을 논하여 홍언박ㆍ경천흥ㆍ안우ㆍ정세운(鄭世雲)ㆍ유숙(柳淑)ㆍ김득배 등 19인에게 안사공신(安社功臣)의 호를 녹(錄)하여 철권(鐵券)을 주었다. 유숙이 여러 공신들에게 이르기를,
“이 공신 철권은 곧 죄안(罪案)이니, 원컨대 제공(諸公)들은 서로 힘쓰고 마음을 한가지로 하여 왕실에 보답하고, 다시는 사사로운 당파를 만들지 맙시다.”
하였다.
○ 새로 악기(樂器)를 제정하였다.
국도(國都)를 옮긴 뒤로부터 악공(樂工)들이 흩어지고 도망가서 음악이 폐지되고 유실되었다. 이에 이르러 대관들이 건의하여 새로 악기를 제정하자고 청하였으므로 왕이 그를 좇아 한 것이다.

추7월 전 찬성사 민사평(閔思平)이 졸하였다.
민사평은 어릴 때부터 기국(器局)이 있었고, 성품이 온화하고 고상하여 인아 친척(姻婭親戚)들과 화목하며 교유(交遊)를 잘하였다. 아무리 마음에 거슬리는 것이 있더라도 그것을 말로 나타내지 않았으며, 상대자로 하여금 마침내는 얼굴을 붉히고 복종하게 하였다. 관직에 있어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모가 나게 하지 않았고, 시서(詩書)로써 스스로 즐겼다. 시호는 문온(文溫)이다. 《급암집(及菴集)》이 세상에 전한다.
○ 장사성(張士誠)과 정문빈(丁文彬)이 사신을 보내와 교빙하였다.

8월 방국진(方國珍)이 사신을 보내와 교빙하였다.

동11월 해청(海靑)을 놓아 주었다.
동북면 병마사 정휘(鄭暉)가 해청을 헌상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이제 바야흐로 군무(軍務)가 일어나니 마땅히 숭상해야 할 것인데, 어찌 진기한 새를 쓰리요?”
하고, 놓아 주었다.
○ 요양과 심양의 유민(流民)들이 들어와서 의탁하였다.
무릇 2천 3백여 호가 난을 피하여 와서 의탁하므르 서북의 군현에 나누어 살게 하고, 관에서 양식을 대주었다. 이보다 전에 강을 건너가 살던 많은 국인(國人)들도 이때에 와서 병란(兵亂) 때문에 모두 돌아왔다.
○ 홍두적(紅頭賊)이 변방에 침구하였다. 이에 경천흥을 서북면 원수로, 안우를 부원수로 삼았다.
그때는 홍두적이 천하에 꽉 찼었다. 적의 괴수(魁首) 관선생(關先生)과 파두반(破頭潘) 등이 진격하여 원의 상도(上都)를 함락하였고, 다시 군사를 돌려 요양을 약탈하였다. 이해 2월에 그들이 서신을 우리 나라에 보내와 중원을 회복할 뜻을 표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그의 무리 3천여 인이 압록강을 건너와 약탈하여 갔으나, 도지휘사(都指揮使) 김원봉(金元鳳)이 이 사실을 숨기고 보고하지 않았다.

12월 홍두적이 의주(義州)ㆍ정주(靜州)ㆍ인주(麟州)를 함락하였다. 이에 이암(李嵓)으로 서북면 도원수를 삼아 방어하게 하였다.
8일(정묘)에 적의 괴수인 위평장사(僞平章事) 모거경(毛居敬)이 무리를 4만이라 일컫고, 얼음을 타고 압록강을 건너와서 의주를 함락하고 부사(副使) 주영세(朱永世)와 주민(州民) 1천여 인을 죽였다. 9일(무진)에는 또 정주를 함락하고 도지휘사 김원봉을 죽였다. 그리고 인주까지 함락하였다. 이에 안우가 군사를 출동하여 적을 막아 물리쳤다. 조정에서는 이암을 서북면 도원수로 삼고 경천흥을 부원수로 삼아 최영(崔瑩) 등 여러 장수들을 인솔하여 적을 방어하게 하고, 김득배를 도지휘사로, 이춘부(李春富)를 서경윤(西京尹)으로, 이인임(李仁任)을 서경 존무사(西京存撫使)로 삼아 나아가서 적을 방어하게 하였다.
○ 강윤충(康允忠)을 죽였다.
강윤충이 석기(釋器)의 옥사에 연좌되어 동래(東萊)로 귀양갔었는데 이에 이르러 죽였다. 그리고 또 전 대언(代言) 홍개도(洪開道)와 상장군 손거원(孫巨源)을 죽이니, 당시의 여론이 이를 원통하게 여겼다.
유씨(兪氏)는 이렇게 적었다.
강윤충이 임금의 어머니와 간통하였고 두 왕조에서 권세를 부렸으니 온 나라가 분히 여겨 이를 간 지 오래 되었다. 그런데 이제 그를 목베매 국인들이 원통하다고 일컬었음은 어찌된 일인가? 그것은 그 죄를 줄 만한 것에 죄를 주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옛날 맹초(孟椒)는 녹문관(鹿門關)의 장수를 벤 것으로 장손 흘(臧孫紇)을 죄주자 그는 복죄(服罪)하였고, 자산(子産)은 삼목(三木)으로 흑굉(黑肱)에게 죄를 가하여 정(鄭)이 외복(畏服)하였다. 그것은 참으로 죄의 명목에 해당하게 하여 목을 베거나 벌을 주는 것이 타당하였기 때문이다. 공민왕은 이 도리에 밝지 못하여 도리어 원흉(元凶)에게 관대히 해서 몇십 년을 지내다가 마침내 조그마한 죄로 그를 죽였으니, 인심이 복종하지 않음은 조금도 괴이할 것이 못 된다.
○ 안우(安祐)가 홍두적의 군사를 청강(淸江)에서 무찔렀다.
16일(을해)에 홍두적이 철주(鐵州)지금의 철산(鐵山)으로 옛터가 지금의 치소(治所) 북쪽 35리에 있다. 에 침구하였다. 그때에 안우는 70기(騎)를 거느리고 싸움터로 가다가 산에 올라 말을 쉬고 있는데 갑자기 적의 장수 모귀양(毛貴揚)의 군사가 크게 이르는 것을 만났다. 우리편 장사들이 모두 얼굴빛을 잃었으나, 안우는 태연 자약하게 담소하며 문득 몸을 돌려 손 씻고 양치질까지 하고서 조용히 말을 타고 군사를 거느려 바로 나아가, 청강 지금의 선천군(宣川郡) 북쪽 40리에 있다. 을 방어하며 진을 쳤다. 판관 정찬(丁贊)이 칼을 뽑아들고 큰소리로 호통치며 먼저 다리 위로 올라가서 적의 장수 1인을 목베니, 적이 조금 주춤하여 물러섰다. 안우가 이방실 등과 분연히 적을 공격하여 크게 적을 무찌르니, 적이 퇴각하여 인주ㆍ정주 등지에 둔쳤다. 얼마 안 되어 우(祐)는 김득배와 함께 다시 나가 싸우다가 적에게 패하여, 후퇴해서 정주(定州)로 돌아왔다. 경천흥은 군사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안주(安州)에 둔쳤으나, 적을 무서워하여 감히 나가 싸우지 못하였다. 왕이 노하여 군법으로 다스리려 하니, 홍언박이 아뢰기를,
“경천흥은 공정하고 청렴하며 근실하고 돈후하나 장략(將略)에는 능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이것은 그를 쓴 사람의 잘못입니다.”
하니, 왕의 노여움이 약간 풀렸다.
○ 이암(李嵒)이 후퇴하여 황주(黃州)에 머무르니, 적이 서경(西京)을 함락하였다.
20일(기묘)에 이암이 서경에 이르렀으나 여러 군사들이 아직 모이지 않았고, 적은 벌써 가까이 왔다. 이춘부가 서경을 지키지 못할 줄 헤아리고 창고를 불태우고 후퇴하여 요해(要害)에 둔쳐서 적을 막으려 하였다. 호부낭중 김선치(金先致)가 이를 보고 말하기를,
“그것은 좋은 계책이 못 됩니다. 이제 적은 멀리서 싸우러 왔으므로 그 날카로운 기세는 당하기가 어렵습니다. 적이 갑자기 나라 깊숙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중지시키려면, 이 성(城)을 미끼로 하여야 하겠습니다. 가령 우리 백성들이 동으로 달아나면 적이 보고서 반드시 우리를 겁장이로 여겨 그들의 진격을 조금 멈출 것이며, 우리를 겁장이로 여기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여질 것입니다. 그들이 조금 진격을 멈추고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여져서 진격하는 기세가 쇠하여졌을 적에 우리는 군사들의 모임을 기다렸다가 하루아침에 엄습하여 치면 도로 탈환(奪還)하게 될 것이니, 창고를 불태워서는 안 됩니다.”
하니, 이암이 그 의견을 좇아서 후퇴하여 황주에 둔쳤다. 이에 나라 중외의 인심이 흉흉하여 경성에서는 모두 도망갈 계획만 하였다. 28일(정해)에 적이 서경을 함락하였다. 김선치는 김득배의 아우다.
○ 이암이 파면되고, 이승경을 도원수로 삼았다.
이암이 유약하여 군사에 능하지는 못하다 하여 이승경을 보내 그를 대행(代行)하여 제군(諸軍)을 독려(督勵)하게 하였다. 또 전 찬성사(贊成事) 권적(權適)에게 승병(僧兵)을 거느리고 전투에 나가도록 명하였다.
○ 크게 흉년이 들었다.
○ 여러 주현에 안집(安集)을 설치하였다.
경상도 진제사(慶尙道賑濟使) 전이도(全以道)가 돌아와 아뢰기를,
“수령(守令)의 직책은 백성들을 구제하는 데 있으니, 진실로 감당할 만한 사람이 아니면 백성들이 피해를 받게 될 것입니다. 옛 제도에 감무(監務)와 현령(縣令)은 반드시 과거에 합격한 선비를 등용하였는데, 지금은 다 서리(胥吏)의 무리에서 나오기 때문에 갖은 방법으로 백성들을 침탈(侵奪)합니다. 그들이 어떻게 농상(農桑)을 권장하며 정치와 교화를 펴겠습니까? 또 그들의 품계가 모두 7ㆍ8품이어서 위계(位階)가 낮고 사람이 미약하기 때문에, 호강(豪强)한 자들이 그를 업신여겨서 불법(不法)을 자행하므로 향읍(鄕邑)이 시달리고 피폐해집니다.”
하니, 왕이 그의 말을 받아들여 5ㆍ6품으로 안집(安集)을 삼아서 종전의 폐단을 개혁하려 하였다. 그러나 안집이 비목(批目)에서 나오지 않았고, 모두 당시 재상들이 천거한 자들을 써서 백첩(白牒)으로 위임하였다. 그 뒤에 군공(軍功)으로 첨설(添設)된 관리와 공상(工商)을 하는 미천한 사람들까지 모두 안집을 얻어 하였다.

[주D-001]맹초(孟椒) : 노 양공(魯襄公) 23년, 난을 꾀하던 장손 흘이 맹손씨(孟孫氏)의 추격을 받아 녹문관(鹿門關)을 지키던 장수를 베고 도망갔는데, 맹손씨가 이를 죄주려 하나 사례(事例)가 없어 고민하자 맹초가 말하기를 “녹문의 장수를 베고 도망간 것으로 죄를 주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여 그렇게 시행하니, 도망가 있던 장손 흘도 그 죄목이 타당한 것으로 인정하였다. 《左傳 襄公23年》
[주D-002]자산(子産)은 …… 외복(畏服)하였다 : 노 소공(魯昭公) 2년에 정(鄭)의 공손흑(公孫黑 흑굉)이 난을 일으켜 유씨(游氏)를 제거하고 제가 그 자리를 차지하려 하였으나 병이 나서 실행하지 못하였다. 이에 여러 대부들이 공손흑을 제거하려 하매 비(鄙) 땅에 있던 자산이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돌아와 공손흑이 저지른 세 가지 죄목을 따지니 공손흑도 승복하여 자결하였다. 이에 그 시체를 거리에 내다 보이고 그의 죄목을 적어 방시(榜示)하니 정나라 사람들이 외복하였다. 《左傳 昭公2年》
동사강목 제14하
임인년 공민왕 11년(원 순제 지정 22, 1362)

춘정월 왕이 복주에 있었다.
○ 총병관 정세운과 도원수 안우 등이 홍두적을 크게 쳐부수고 경성을 수복하였다.
17일(갑자)에 안우ㆍ이방실ㆍ황상(黃裳)황석기(黃石奇)의 아들이다.ㆍ한방신(韓方信)ㆍ이여경(李餘慶)ㆍ김득배ㆍ안우경(安遇慶)ㆍ이귀수(李龜壽)ㆍ최영 등 여러 장수들이 군사 20만을 거느리고 동교(東郊) 천수사(天壽寺) 송경(松京) 보정문(保定門) 밖 3리에 있다. 에 둔쳤다. 정세운이 그들을 독려하여 나아가 경성을 포위하게 하고 자신은 뒤로 물러나와 도솔원(兜率院) 임진도(臨津渡) 동쪽 기슭에 있다. 에 둔쳤다. 이때 마침 진눈깨비가 내렸으므로 적들이 방비를 허술히 하였다. 이에 이르러 이여경이 숭인문(崇仁門) 송경의 동문(東門)이니 학교(鶴橋) 동쪽에 있으며 속칭 동대문이다. 을 담당하였는데, 그의 휘하 호군 권희(權僖)가 염탐하여 알려 주기를,
“적의 정예 부대가 모두 이곳에 모여 있으니, 불의(不意)에 공격한다면 승리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때에 적들이 성 가운데 채(寨)를 쌓고 방어하며 지켰으므로 여러 군사들이 앞으로 나아가지를 못하였다. 영해인(寧海人) 박강(朴强)이 말에서 내려 널판쪽을 지고 나아가서 사다리를 만들어 타고 올라가서는 칼을 뽑아들고 큰 소리로 호통을 치니, 채에 올라와 있던 적들이 모두 겁을 내어 채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박강이 따라 내려가면서 마구 난도질하여 수십 명을 죽였다. 이에 여러 군사들도 뒤를 잇따라 쳐들어가서 채문(寨門)을 쳐부수어 열었다.
18일(을축) 동틀 무렵에 권희가 다시 수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돌격하면서 북 치고 함성 올리며 분격(奮擊)하니, 적의 무리들이 놀라 허둥대는 것을 여러 장수들이 사면에서 휘몰아 공격하였다. 우리 태조는 휘하의 친병(親兵) 2천 명으로 앞장서서 크게 적을 무찔러 해질 무렵에는 적의 괴수 사류(沙劉)ㆍ관선생(關先生) 등을 목베니, 적의 무리들이 저희들끼리 서로 밀치고 짓밟혀서 죽어 자빠진 시체가 성에 가득하였다. 적의 수급 10여 만을 베고, 원 황제의 옥새(玉璽) 2개, 금보(金寶) 1개, 옥인(玉印) 3개, 금ㆍ는ㆍ동의 인장, 금ㆍ은의 그릇, 패면(牌面) 등의 물건을 노획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궁한 도적을 다 잡을 수는 없다.”
하고, 숭인문ㆍ탄현문(炭峴門) 동문(東門)을 회창문(會昌門)이라 하며, 속칭 탄현문으로 현성사(賢聖寺) 북쪽에 있다. 을 열어 주었다. 적의 남은 무리 파두반(破頭潘) 등 10여만 명이 달아나서 압록강을 건너 쫓겨갔다. 파두반은 달아나다가 요양 행성(遼陽行省)의 동지(同知) 고가노(高家奴)에게 사로잡혀 죽고, 드디어 적이 평정되었다.
성을 공격하던 날, 적들은 비록 형세가 궁해졌으나 진루(陣壘)를 구축하여 굳게 지켰는데, 저물녘에 우리 군사들이 진격하여 포위를 좁혀갔다. 태조는 길가 어느 집에 쉬고 있었는데, 밤중에 적들이 포위를 헤치고 달아나므로 태조가 말을 달려 추격하여 동문까지 이르렀다. 우리 군사와 적들이 성문에서 서로 뒤범벅이 되어 싸우니 문을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그때 뒤미처 온 적이 창으로 태조의 오른쪽 귀뒤를 찔러 형세가 매우 다급하였으나 태조는 칼을 뽑아 앞의 적 7~8인을 무찌르고, 말을 탄 채 성을 뛰어넘었다. 그런데 말이 넘어지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 김용이 왕의 교지라 거짓 꾸며서 안우등에게 총병관 평장사 정세운을 죽이게 하였다.
김용이 본래 정세운과는 사이가 나빴고 또 안우ㆍ김득배ㆍ이방실 등이 큰 공을 세워 왕의 신임이 두터워질까 두려워하여, 안우 등에게 정세운을 죽이게 하고는 이를 죄로 몰아서 그들을 다 죽이려 하였다.
22일(기사)에 김용이 왕의 교지를 거짓으로 꾸며 글을 만들어서 자기 조카인 전 공부 상서(工部尙書) 김림(金琳)을 시켜 은밀히 안우 등을 꾀어 정세운을 처치하도록 하면서,
“정세운이 본래부터 공경들을 시기하였으니 적을 무찌른 뒤에는 반드시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인데, 어찌하여 먼저 도모하지 않는가?”
하였다. 이에 안우와 이방실이 김득배의 장막(帳幕)에 나아가 말하기를,
“이제 정세운이 적을 겁내어 진격하지 않고 김용의 서신이 또 이와 같으니, 그의 말을 좇아 행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니, 김득배가 말하기를,
“이제 겨우 적을 평정하였는데 어찌 서로 죽여 없애겠소? 옛날 양저(穰苴)가 독단으로 장가(莊賈)를 목베었으며 위청(衛靑)이 소건(蘇建)을 죽이지 않은 것은 고금의 밝은 거울이니, 삼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오. 만일 부득이한 일이라면 왕의 궁궐 앞에 붙잡아 가서 왕의 처리를 받는 것이 옳지 않겠소?”
하니, 안우와 이방실이 일단 물러갔다가 밤중에 다시 와서 말하기를,
“정세운을 목베라는 것은 왕명이오. 이제 우리들이 전공(戰功)을 이루고도 왕명을 받들지 않았다는 그 후환(後患)이 있으면 어떻게 하겠소?”
하였으나, 김득배는 그러한 짓이 결코 옳지 않다고 굳이 고집하였다. 그러나 안우 등은 기어코 행하려 하여, 이에 술을 장만하여 놓고 사람을 시켜 정세운을 오라 해서 그가 이르자, 안우 등이 장사들에게 눈짓하여 그 자리에서 쳐죽였다. 홍언박(洪彦博)이 정세운(鄭世雲)의 죽음을 듣고 말하기를,
“총병이 군사를 출동할 적에 언동이 너무 오만하였으니 그가 이렇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였다.
23일(경오)에 정세운의 노포(露布 포백(布帛)에 써서 널리 알리는 전승보(戰勝報)) 가 행재소에 이르니, 왕이 사람을 보내어 정세운에게 의복과 술을 하사했는데, 이때 다시 정세운이 죽었다는 변고를 듣고 크게 노하여 장차 군사를 풀어 정세운을 죽인 자들을 토벌하려 하였으나, 조금 뒤에 여러 장수들이 정세운의 죄상을 진술한 서신을 보고서는 왕이 도리어 기뻐하면서 사자를 보내어 여러 장수들에게 옷과 술을 하사하고 빨리 개선하라고 독촉하였다.
이색(李穡)은 이렇게 적었다.
정세운은 비상한 사람이었다. 임금 섬기기를 충성으로 하여 일찍이 조금이라도 임금의 비위를 맞추어 아부한 적이 없었고, 뜻을 확고히 지녀 조금이라도 바꾼 적이 없었다. 신축년(1361)에 왕이 복주까지 피난갔을 적에 정세운이 분개하여 싸우기를 청하여서, 한 달 동안에 종묘 사직을 다시 안정시켰으니, 그의 훌륭함은 현묘(顯廟) 때의 강시중(姜侍中 강감찬(姜邯讚)을 말한다)과 맞먹는다 하겠다. 그런데 강시중이 개선하였을 적에는 현묘가 친히 성밖까지 나가서 맞이하였으니, 이제 정세운의 불행은 현릉(玄陵 공민왕을 말한다)으로서는 상심(傷心)할 일이다. 하늘이 무슨 까닭으로 그리하였을까? 아, 슬프도다.
【안】 《성호사설(星湖僿說)》에 이렇게 되어 있다.
김용이 왕의 교지를 빙자하여 세 원수(元帥)를 죽였으니, 왕의 교지를 빙자하여 흉악한 짓을 한 그의 죄는 참으로 크다 하겠다. 안우와 이방실은 말할 여지도 없겠지만 김득배에 있어서는 다만 바른말로 직간(直諫)하다가 차라리 같이 임금에게 죄를 얻을지언정, 차마 죄없는 자에게 칼을 들이대지는 않았어야 할 것이다. 홍두적을 토벌하는 이번 전쟁에 네 사람이 같이 일을 하였지만 실상은 정세운이 주장하였다. 그러니 참으로 공을 시기하는 마음이 없었던들, 분명찮은 서신 한 장으로 인하여 불의(不義)를 자행한 것이 이처럼 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직 먼저 편벽된 소견에 얽매임이 있었기 때문에 물욕(物慾)에 가리어 이치를 바로 보지 못한 것이니, 이것이 김용의 계략에 세 사람이 빠지게 된 것이며, 따라서 자기 자신들마저 화를 면하지 못한 것이다.
내가 김득배의 김해군시(金海郡詩)를 보니, 대개 공명(功名)을 자랑한 것이었다. 그 시에 이르기를,

분성을 와서 관리한 지 20년에 / 來管盆城二十春
당시의 부로들은 반이나 진토되었네 / 當時父老半爲塵
서기로부터 원수가 되었으니 / 自從書記爲元帥
손가락을 꼽아 본들 나 같은 이 몇일런가 / 屈指如余有幾人

하였다.
○ 홍여하(洪汝河)는 이렇게 적었다.
1월 18일(을축)에 적을 쳐부수었고, 22일(기사)에 세 원수가 정세운을 죽였고, 23일(경오)에 정세운의 노포(露布)가 행재에 이르렀다면, 김용의 편지 사건은 승첩(勝捷) 이전에 있었던 일이라 하겠다. 그러니 설사 왕의 교서라 하더라도, 왕은 아직 그들이 성공할는지의 여부를 모르고서 어떻게 죽이라 하였겠는가? 여러 장수들도 이 교서를 보았으면 왕에게 은밀히 아뢰었어야 할 것이다. 더구나 ‘정세운이 본래부터 그대들을 시기하였으니 그대들이 먼저 도모하지 않겠느냐?’ 한 것은 김용의 본심이 다 드러났다 하겠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의심을 갖지 않고 문득 주장(主將)을 죽였는가? 세 원수는 만세를 두고 그 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2월 조소생이 납합출(納哈出)을 이끌고 와서 동북면에 침구하였다.
이때에 원의 조정은 정치가 어지러웠다. 이에 오랑캐 납합출이 심양 등지를 차지하고서 행성 승상(行省丞相)이라고 자칭하였다. 조소생ㆍ탁 도경 등이 이미 쌍성을 빼앗기고는 본국을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납합출을 유인하여 삼살(三撒)지금의 북청(北靑) 과 홀면(忽面)지금의 홍원(洪原) 등지에 침구하였다.
○ 환자(宦者) 고용보(高龍普)가 복주되었다.
고용보가 원에서 세력을 잃자 본국에 돌아왔는데, 조일신(趙日新)의 반란 때에 도망하여 죽음을 면하고 드디어 중이 되어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 있는 것을, 왕이 중승(中丞) 정지상(鄭之祥)을 보내어 그를 목베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충혜왕이 붙잡힐 적에 고용보가 내응하였기 때문에 이 형벌이 있었다.”
한다.
○ 왜가 악양현(岳陽縣)지금은 진주(晋州)의 속현으로 진주 서쪽 1백 21리에 있다. 을 분탕질하였다.
○ 왕이 복주(福州)를 출발하여 상주(尙州)에 이르렀다.
25일(신축)에 복주를 출발하여 27일(계묘)에 어가가 상주에 이르렀다.
목사 최재(崔宰)가 공진(供進)하는 것은 모자람이 없었으나 선사하는 물건이 없었기에 좌우의 신하들로부터 잘못되었다는 지적을 받아 드디어 파면되었다.
○ 도원수 안우와 원수 이방실ㆍ김득배를 죽였다.
안우 등이 함창(咸昌)에 이르렀을 적에 왕은 대신 가운데서 계획이 있는 자를 뽑아 보내서 그를 맞아 비상(非常)한 일이 있을 것에 대비하게 하였다. 이에 시중 유탁(柳濯)을 보냈다. 유탁이 함창에 이르러 꿇어앉아서 술을 올리면서 원수가 서서 마시기를 청하니, 안우가 ‘그럴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유탁이 말하기를,
“이제 공(公)이 삼한(三韓)을 수복하였습니다. 내가 감히 관직의 지위를 마음에 두겠습니까?”
하고 눈물을 흘렸다.
29일(을사)에 안우가 개선하여 행궁에 나아가 알현(謁見)할 적에 김용이 목인길(睦仁吉)에게 인도하게 하고 안우가 중문(中門)에 이르자, 문 지키는 자를 시켜 안우의 머리를 철퇴로 쳤다. 그러나 안우는 얼굴빛을 조금도 변하지 않고, 차고 있던 주머니를 세 번이나 가리키면서 큰 소리로 부르짖기를,
“조금만 늦추어다오. 원컨대, 임금 앞에 나아가서 주머니 속의 서신을 바치고 죽임을 받겠다.”
하였으나 철퇴 든 자가 다시 쳐서 죽이고 그 시체를 뜰에 끌어내렸다. 왕은 안우가 죽은 것을 알지 못하고 전지(傳旨)하기를,
“너희들이 제멋대로 정세운을 죽였으니 마땅히 목을 베어 죽일 것이로되 이제 너를 목베지 않는 것은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하였다. 안우가 가리킨 주머니 속의 서신이란 곧, 안우 등을 속여서 정세운을 죽이게 한 김용의 서신이었다.
김용은 또 김림(金琳)이 자기의 음모를 누설시킬까 염려하여 먼저 김림을 목 베었다. 그리고 왕에게 보고하기를,
“안우 등이 멋대로 주장을 죽였으니 이는 전하를 염두에도 두지 않은 것으로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얼마 후에 왕은 안우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안우의 어린 아들이 벌거벗은 채로 길가에 섰는 것을 보고 애처롭게 여겨 그를 불러서 금중(禁中)에 머물게 하였다가 그가 갈 만한 곳을 물어서 돌려보냈다. 이에 안우의 휘하 장사들이 모두 놀래어 달아나려 하자 왕이 그들을 불러 주식(酒食)을 주며 위로하였다.
김용이 다시 교지(敎旨)를 선포하면서 방시(榜示)하기를,
“안우 등이 충성하지 못하여 제마음대로 정세운을 죽였기 때문에 그는 이미 죄를 받았다. 김득배와 이방실을 붙잡아 오는 자가 있으면 중한 상을 준다.”
하고, 대장군 오인택(吳仁澤), 만호 박춘(朴椿)ㆍ김유(金庾)ㆍ정지상(鄭之祥) 등을 나누어 보내서 그들을 체포하게 하였다. 이날 이방실이 행재소에 나아가려고 용궁현(龍宮縣)까지 왔었는데, 박춘이 그곳에 와서 왕의 교지가 있다고 일컬으니, 이방실이 뜰에 내려가서 꿇어앉자 오인택이 칼을 뽑아 그를 쳤다. 이방실이 곧 넘어져서 기절하였다가 한참 만에 다시 깨어나서 담을 넘어 도망가자 박춘이 그를 쫓아가 붙잡고, 정지상이 뒤에서 다시 쳐서 죽였다.
김득배는 기주(基州)지금의 풍기(豐基) 까지 와서 변이 있었음을 알고, 따르는 기병 두어 명을 데리고 도망쳐 산양현(山陽縣)지금은 상주에 속한다. 상주 북쪽 63리에 있다. 선영(先塋)의 곁에 숨었다. 이에 김득배의 아내와 자식들을 옥에 가두고 국문을 하니, 그의 사위인 직강(直講) 조운흘(趙云仡)이 장모에게 말하기를,
“사실대로 말을 하여 고초를 당하지 마소서.”
하니, 그 장모가 한참 동안 참고 견디다가 마침내 사실대로 고하였다. 그리하여 3월 1일(정미)에 김유ㆍ박춘ㆍ정지상 등이 김득배를 붙잡아 목베어 상주(尙州)에서 효수(梟首)하니 보는 자들이 탄식하며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안우는 탐진인(耽津人)이고, 김득배는 상주인이고, 이방실은 함안인(咸安人)이다. 김득배는 과거를 보아 진출한 자였다. 그의 문생(門生)인 직한림(直翰林) 정몽주(鄭夢周)가 왕에게 간청하여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내는데 그 제문에,
“홍두적이 쳐들어와서 임금이 피난하였을 적에 공(公)이 만번 죽음을 무릅쓰는 계책을 세워서 삼한(三韓)을 회복하는 큰 업을 이루었으니, 비록 죄가 있더라도 공(功)으로 죄를 덮었어야 할 것이요, 만일 죄가 공보다 더 무거우면 반드시 그 죄를 승복(承服)시킨 뒤에 목을 베어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말[馬]에 땀이 마르기도 전에, 개가(凱歌)가 끝나기도 전에, 태산 같은 큰 공을 세운 분이 칼날 밑에서 피로 물들게 되었습니까? 이것이 내가 피눈물을 흘리며 하늘에게 묻는 바입니다.”
하였다. 이것을 듣는 이들은 그를 의롭게 여겼다.
안우와 이방실의 아들들은 나이 겨우 10여 세였다. 그들이 저자로 돌아다니니, 사람들이 서로 물건을 그들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우리들이 오늘날 편안하게 침식(寢食)하는 것은 모두 세 원수의 공이다.”
하며, 눈물을 흘리는 자들까지 있었다.
오씨(吳氏)는 이렇게 적었다,
하늘을 떠받는 큰 공훈이 있는 세 원수가 모두 김용의 손에 죽임을 당하였다. 그런데도 왕은 이를 반성하여 깨닫지 못하였으니, 이는 아마 하늘이 왕씨(王氏)를 싫어하여 그의 총명을 빼앗아서 멸망을 재촉하는 조짐을 싹트게 함이 아니었을까. 일찍이 관찰하여 보건대, 위기를 당하여 난리를 평정할 적에는 장수에 주의(注意)하게 된다. 그런데 공(功)이 온 세상을 덮은 자로서 도리어 의심을 받고 시기를 당하고, 소인들이 이러한 틈을 타서 귀신과 물여우 같은 짓을 하여 ‘군사를 데리고 반역을 도모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군사의 마음이 모두 그에게로 돌아간다.’고 하여 반드시 손으로 장성(長城) 같은 장수를 죽이게 하니,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마저 삶아 죽이는 격으로 나라가 따라서 멸망한다. 앞 수레가 이미 엎어졌으니 뒷수레가 엎어질 것은 고금(古今)이 동일한 법칙이어서 오직 저 혼미하고 용렬한 공민왕은 구태여 깊이 책망할 것도 못된다. 그러나 당시에 시종하던 신하로서 이암ㆍ유탁ㆍ홍언박 등 여러 사람이 어찌 모두 적(賊) 김용의 도당들이기야 했겠는가마는 한 사람도 말 한 마디 내어 임금을 깨우치는 이가 없었다. 이는 오히려 세 원수의 아들들에게 서로 물건을 주어 은공을 갚으려는 시정인(市井人)들만도 못함이니, 아, 슬프다.
유씨(兪氏)는 이렇게 적었다.
김용의 계교가 본래 간악하고 묘해서, 왕이 그렇게 시킨 것이 아니라고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왕은 본래 잔인하고 시기심이 많은 임금으로서 평소에 김용을 심복으로 대하였었다. 이제 여러 장수들이 세상에 뛰어난 큰 공을 세우는 것을 보고는, 의구심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반드시 김용과 더불어 그들을 억제하는 방법을 비밀히 의논하여, 김용으로 하여금 왕의 마음을 엿보아 헤아리게 한 것이다. 그러기에 김용이 틈을 만들어서 간악한 짓을 할 수 있었으리라. 그렇지 않았다면 김용을 죽일 적에 왕이 눈물을 흘려서까지 김용을 생각하였겠는가. 당시의 일을 대략 짐작할 만하다.
【안】 김용이 세 원수를 죽였는데도, 김용이 죽였다고 쓰지 않은 것은 죄를 왕에게 돌리려는 뜻에서이니, 유씨의 의론이 대개 그 실정(實情)을 얻었다 하겠다.

3월 평장사 이공수(李公遂)를 보내어 경성을 수비하였다.
이때의 경성은 궁궐과 여항이 모두 폐허가 되고, 백골(白骨)이 산더미처럼 쌓였었다. 그러자 이공수와 참지정사 황상(黃裳), 추밀 김희조(金希祖) 등에게 명하여 경성을 수비하게 하였다. 또 이인복을 명하여 국사실록(國史實錄)을 수습하니 겨우 세 궤짝에 10여 상자만 남아 있었다. 이공수가 재능 있는 이를 뽑아서 일을 맡기고, 유민(流民)들을 안정시키며 생도들을 교육시켰다.
○ 사유하고 행궁에서 대포(大酺 임금이 신하들에게 크게 주식(酒食)을 내리는 일)하였다.
전쟁에 나갔던 장수와 군사들을 위로함이다.
○ 지진이 있었다.
○ 다시 관제(官制)를 개정하였다.
다시 원조(元朝)와 교통을 하였기 때문에, 관직이 외람되게 상국(上國)과 비슷한 것을 개정하여 대충 충렬왕 때의 옛 관제와 같이 하였는데, 예부(禮部)를 예의사(禮儀司), 공부(工部)를 전공사(典工司), 육부(六部)를 모두 판서(判書), 한림원(翰林院)을 예문관(藝文館), 사관(史館)을 춘추관(春秋館), 학사(學士)를 모두 제학(提學)이라 일컬었다.
○ 이암(李嵒)이 면직하니, 유탁(柳濯)을 좌정승으로, 유숙(柳淑)을 지도첨의사로 삼았다.
유숙은 연경(燕京) 왕저(王邸)에 있을 때부터의 옛 신하였기 때문에 왕에게 친근하고 믿는 바가 되어서, 항상 측근에 있었다. 처음에 안우 등이 정세운을 죽이고 말하기를,
“이미 총병관(摠兵官)은 죽였지만 유숙이 중앙에 있으면서 매양 기묘한 계책을 잘 내니 두려운 존재다.”
하였다. 유숙이 이 말을 듣고 왕에게 고하기를,
“여러 사람의 노염은 대적하기가 어렵습니다. 이제 여러 장수들이 신을 시기하는 것은 다만 신이 전하의 측근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신을 내보낸다면, 신은 하나의 포의(布衣)일 뿐이리니 누구의 입에 다시 오르내리겠습니까?”
하여, 나가서 동경 유수(東京留守)가 되었었는데, 이때에 다시 불러들인 것이다.

하4월 경성의 큰 우물에 흐린 물이 용솟음쳤다.
○ 복주를 승격시켜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로 하였다.
왕이 복주에 머물러 있을 적에, 복주 사람들이 마음을 다하여 공궤를 올렸고, 마침내는 여러 도의 군사를 징발하여 경도를 수복하였기 때문에 승격시킨 것이다. 또 수원(水原)이 먼저 적에게 함락되었기 때문에 주군(州郡)들이 감히 적의 예봉(銳鋒)을 꺾지 못하였다. 그런데 조그마한 고을이지만 오직 안성(安城)만이 계획을 세워 적을 섬멸하였으므로 적이 감히 남쪽으로 더 내려오지를 못하였다. 그래서 수원은 급을 내려 군으로 하고 그에 속해 있던 4부곡(部曲)을 덜어내어 안성에 예속시켜 안성을 군으로 승격시켰다.
○ 우리 태조를 동북면 병마사로 삼았다.
이때에 납합출(納哈出)의 노략질이 날로 심해져서 지휘사 정휘(鄭暉)가 여러 번 나가 싸웠으나 번번이 패하자, 우리 태조를 보내자고 청하였으므로 드디어 태조를 병마사로 임명하여 보냈다.

5월 성(省)의 낭관(郞官)들에게 명하여 6품 이상으로서 외직을 맡을 만한 자를 천거하게 하였다.
대간이 아뢰기를,
“비록 대간과 정조(政曹)에서 수령(守令)을 보거(保擧)하라는 명이 있습니다만, 모두 안면과 정실에 따라 천거하는 형편입니다. 원컨대, 이제부터는 천거된 사람을 인견(引見)하시어 천거된 자가 적격자가 아닐 경우에는 천거한 자를 반드시 책벌(責罰)하소서.”
하니, 왕이 그를 좇았다. 그래서 왕이 죽을 때까지 자주 재상들에게 명을 내려 각기 수령이될 만한 자를 천거하게 하였다.

6월 혜성(彗星)이 자미원(紫微垣)에 나타났다.
○ 사신을 원에 보내어 홍두적 평정한 일을 고하였다.

추7월 우리 태조가 납합출을 동북계에서 크게 무찌르니, 납합출이 도망하였다.
납합출이 군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탁도경ㆍ조소생 등과 홍원(洪原)의 달단동(韃靼洞)홍원현의 남쪽 30리에 있다. 에 둔쳤는데, 우리 태조가 그들의 선봉 1천여 인을 덕산동평(德山洞坪)함흥부(咸興府) 동쪽 40리에 있다. 에서 만나 쳐서 쫓고 함관령(咸關嶺)ㆍ차유령(車踰嶺)모두 함흥부 동북쪽 70여 리에 있다. 을 넘어 추격하여 거의 섬멸하였다. 이날 태조가 후퇴하여 답상곡(答相谷)함흥부 동북쪽에 있다. 에 둔쳤다. 납합출이 성이 나서 덕산동에 옮겨 둔치자, 태조가 밤을 틈타서 기습 공격하여 그들을 패주시키니, 납합출이 다시 달단동으로 돌아갔다. 태조도 다시 물러나와 사음동(舍音洞)함흥부 동북쪽 25리에 있다. 에 둔치고 척후병(斥候兵)을 보내니 척후병이 차유령에 이르자, 적들이 산에 올라와서 땔나무를 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척후병이 이를 태조에게 보고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병법에 마땅히 약한 데를 먼저 공격하라 하였다.”
하고, 드디어 그들을 공격하여 모조리 사로잡고 목베었다. 그리고 정예 기병 6백 명으로 잇달아 공격하여 차유령을 넘어 영 아래까지 이르니, 적들이 그제야 깨닫고 맞아 싸우려 하였다. 태조가 기병 10여 명을 이끌고 돌격하여 그의 비장(裨將) 한 사람을 쏘아 죽였다. 처음에 태조가 그곳에 이르러 여러 장수들에게 여러 번 패한 이유를 물으니, 여러 장수들이 말하기를,
“매번 전투가 한참 무르익을 때면, 쇠 투구에 붉은 기를 장식한 적장 한사람이 창을 휘두르며 돌진해 오는데 그때마다 우리 군사들이 모두 쫓겨서 감히 대적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하자, 태조가 그 적장을 물색하여 혼자 그를 대적하다가 거짓 패한 체하고 달아나니, 그 장수가 과연 분격하여 앞으로 다가오면서 창을 휘두르는 것이 매우 급박하였다. 이때 태조가 몸을 재빨리 날려서 말 안장에 몸을 붙이니 적장이 중심을 잃고 창에 쏠려 거꾸러지자 태조가 곧 쏘아 죽였다. 그러자 적들이 낭패하여 도망치는 것을 태조가 쫓아가며 공격하여 적의 둔친 데까지 이르렀다가 날이 저물어서 본진으로 돌아왔다. 납합출의 아내가 납합출에게 이르기를,
“당신이 천하를 두루 다녀보았지만 어디 저와 같은 장군이 있었습니까? 그러니 마땅히 피해서 속히 돌아갑시다.”
하였으나, 납합출이 그 말을 듣지 않았다. 태조가 함관령을 넘어서 바로 달단동에 이르러 납합출과 대치하여 진을 치자 납합출이 속임수로 말하기를,
“우리가 이곳에 온 의도는 홍두적을 추격하기 위함이었고 귀국(貴國)을 침략하려는 것이 아니었소. 이제 우리는 여러 번 싸우다가 패하여 군사 1만여 명을 잃었소. 그러니 전투를 끝낸다면 명령대로 따르겠소.”
하였다. 그때는 적의 형세가 매우 강성한 때이기에 태조는 그들의 속임수임을 짐작하고 그들을 빨리 항복시키고자 하였다. 그때에 납합출의 곁에 서있는 적장 한 사람을 태조가 활로 쏘니 그 장수가 보기좋게 명중되어 거꾸러졌다. 태조가 다시 납합출의 말을 쏘아 죽이매, 납합출이 다른 말을 바꾸어 타니, 또 쏘아 죽였다. 이리하여 큰 전투가 한참 계속되면서 서로 일진일퇴하였다.
태조가 납합출을 급히 추격하니, 납합출이 급해지자 말하기를,
“이만호(李萬戶 태조를 말한다)여, 우리 두 장수가 무엇 때문에 서로 이다지 핍박하는가?”
하고,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자 태조가 또 그 말을 쏘아 죽였다. 이때 납합출의 휘하 군사가 자기는 말에서 내리고 그 말을 납합출에게 주어 타게 하였으므로 납합출이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해가 또 저물자 태조도 군사를 인솔하여 물러서면서 스스로 후군(後軍)을 담당하였다. 적장들이 쫓아오자 태조가 연달아 적장 세 사람을 쏘아 죽이고 곧 이어 적의 무리 수십 인을 죽이니, 적이 크게 패하여 달아났다. 태조는 철기로 추격하여 적을 유린하니, 적들이 저희들끼리 서로 짓밟혀 죽었고, 노획한 것이 매우 많았다.
태조가 돌아와 정주(定州)지금의 정평(定平) 에 둔치고 수일 동안 머물면서 군사를 휴식하게 하였다. 그리고 요충지(要衝地)마다 군사를 매복시키고 군대를 삼군(三軍)으로 나누어서, 좌군(左軍)은 성관(城串)산 이름이니 함흥부 북쪽 2리에 있다. 을 경유하게 하고, 우군(右軍)은 도련포(都連浦)곧 도린포(道鱗浦)이니 함흥부 남쪽 35리에 있다. 를 경유하게 하고, 자신은 중군(中軍)을 거느리고 함흥평(成興坪)에서 납합출과 대치하였다.
태조가 단기(單騎)로 용기를 북돋우어 돌진하며 적을 시험하니, 적의 날랜 장수 세 사람이 한꺼번에 달려나왔다. 태조가 거짓 패한 체하고 말고삐를 끌어당기고 말을 채찍질하여 곧 달리려는 모양을 하니, 적의 세 장수가 서로 앞을 다투어 추격하여 왔다. 이때 태조가 갑자기 말을 빼어 오른편으로 빠져나와 뒤에서 쏘니, 세 장수가 모두 명중되어 거꾸러졌다. 이어 전전(轉戰)하면서 적을 요충지대로 끌어들여 좌우의 복병이 한꺼번에 내달아 포위 공격해서 적을 크게 쳐부수니, 납합출이 도저히 대적할 수 없음을 알고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도망하였다. 이에 동북의 변경이 모두 평정되었다.
그전에 환조가 원에 조회하러 갈 적에 납합출이 있는 곳을 지나면서 그에게 태조의 재능을 칭찬하여 말한 적이 있었다. 이에 이르러 납합출이 패전하여 돌아가면서 말하기를,
“지난날 이모(李某 환조를 가리킨다)의 말이 과연 거짓이 아니었구나.”
하였다. 그 후에 납합출이 사람을 보내 고려 왕에게 통호(通好)하면서, 비고(鞞鼓 적을 공격할 적에 두드리는 말에 메운 북이다) 하나와 좋은 말 한 필을 태조에게 특별히 보내어 예의를 표하였다. 이는 대개 마음으로 감복한 것이다.

8월 왕이 상주를 출발하여 청주(淸州)에 머물렀다.
이에 앞서 왕은 수원에 행행하여 궁궐을 지으려 하였으나 대신(臺臣)들이 말하기를,
“수원은 지역이 좁고 바다에 접해 있으므로 왜구의 염려가 있으며, 또 지난번에는 홍두적에게 항복하였기 때문에 인심을 보장할 수가 없습니다. 청주는 삼도(三道)의 요충지이므로 양곡을 운반하기에 편리하고 이미 순행(巡幸)할 처소도 준비되어 있으니, 원컨대 어가를 청주에 머무르소서.”
하니, 왕이 이를 좇아서 25일(정해)에 상주를 출발하여 30일(임진)에 청주에 도착하였다.
○ 원주(元主)가 학사 흔도(忻都)를 보내어 왕에게 옷과 술을 하사하였다.
○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송경(宋卿)이 파면되었다.
송경이 홍언박(洪彦博)에게 말하기를,
“백성들은 공이 다시 재상이 되기를 바란 지가 오랩니다. 공이 이제 총재(冢宰)가 되었는데 어찌하여 한 가지 일도 여망(輿望)에 맞추는 것이 없습니까? 종묘 사직이 적에게 함몰되고 주상이 피난을 떠나서 천하의 웃음거리가 된 것은 공이 일찍 도모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 제주가 배반하여 원에 붙었다.
탐라(耽羅)의 목호(牧胡)ㆍ고독불화(古禿不花)ㆍ석질리필사(石迭里必思) 등이 성주(星主) 고복수(高福壽)와 함께 배반하여 원에 부속하니, 원에서 그곳에 만호관(萬戶官)을 두어 다스렸다.

9월 녹전색(祿轉色)을 두었다.
왕이 파천한 이래로 녹전(祿轉)의 출납을 창관(倉官)에게 맡기지 않고 따로 한 부서를 두었으니 이를 ‘녹전색’이라 하였다. 또 조도(調度)가 넉넉지 못하였기 때문에 민호(民戶)에 차등을 두어 쌀ㆍ콩ㆍ팥 등을 거두어들이면서 이름을 ‘무단미(無端米)’라 하였는데 백성들이 매우 괴롭게 여겼다.
행궁에서 수요(需要)되는 금과 은이 모자라는데도 왕의 쓰임새는 절도가 없었다. 홍언박이 아뢰기를,
“내탕(內帑)의 저축이 어떻게 경도에 있을 때와 같겠습니까? 그러니 경비를 마땅히 줄여 쓰소서.”
하니, 왕이 한참 바라다볼 뿐 응답이 없었다.
○ 금살도감(禁殺都監)을 두었다.
홍두적이 경도를 함락하고서, 소와 말을 마구 잡아먹어 거의 없어졌으므로 이에 금살령(禁殺令)을 엄하게 내렸다.

동10월 지진이 있었으므로 하교하여 구언(求言)하였다.
7일(무인)에 지진이 있었고, 10일(신사)에 또 지진이 있었다. 이런 재이(災異)가 있으므로 왕이 백관과 수령들에게 명하여, 시정(時政)의 득실(得失)과 민간의 이해(利害)를 진언하게 하였다. 감찰 대부(監察大夫) 김속명(金續命), 헌납(獻納) 황근(黃瑾) 등이 상서하기를,
“땅이라는 것은 신도(臣道)의 표상(表象)입니다. 이제 상벌이 공평하지 못하기 때문에 대소의 신하들이 직무에 태만하기 일쑤이며, 또는 군공(軍功)으로 인하여 백정(白丁)이 갑자기 경상(卿相)으로 임명되기도 하고 조례(皂隷)가 외람되이 조반(朝班)에 서기도 하므로 신도가 어지러워져서 지진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청컨대 지금부터 신상 필벌로 명기(名器 작호(爵號)와 거복(車服))를 중히 여겨 아끼소서. 옛날에 선군(選軍)은 전토를 주었으므로 군사가 모두 먹을 것이 넉넉하여 전쟁에 나가기를 꺼리지 않았는데 근자에는 토호(土豪)들이 그 토지를 겸병(兼倂)하여서, 이제는 한 이랑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징발(徵發)할 즈음에 벌써 거의 다 해체되어 버리는데 어떻게 그들에게 적개심을 바라겠습니까? 청컨대 선군에게 전토를 주는 제도를 다시 회복하소서.
좌우 전후가 모두 바른 사람들이라면 임금께서 누구와 더불어 바르지 못한 일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전하께서 날마다 형벌에 처하고 남은 음흉한 무리들과 친압하여, 저속하고 황당 무계한 말을 듣기 좋아하며, 한밤중까지 유흥을 일삼고 한낮까지 늦잠자며 대신들을 멀리하여, 좋은 계획과 바른 의론이 들어올 곳이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삼전(三殿)의 환관(宦官)들을 각각 10여 인씩만 남겨 두고 그 나머지는 모두 도태(淘汰)하여 단정한 인사가 항상 좌우에서 전하를 모시게 하소서.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는 오로지 경전(經典)에 있는 것이요, 불서(佛書)로 다스림을 성취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전하께서 불법을 지나치게 믿으시므로 여러 중들이 이를 인연하여 드나들고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중들이 궁중에 출입하지 못하도록 금하고, 다시 경연(經筵)을 열어 날마다 다스리는 도리를 찾으시며, 항상 성현의 글만 보시고 이단(異端)의 말은 듣지 마소서. 여알(女謁)은 정치를 하는 데 있어 큰 해가 됩니다. 이제 바느질하는 낭자(娘子), 내료(內僚)의 딸로서도 분수에 지나치게 외람되이 옹주(翁主)와 택주(宅主)로 수봉(受封)된 자가 있어서 존비(尊卑)의 체통을 잃고 있습니다. 부득이한 종실(宗室)이나 훈구(勳舊)를 제외하고는 봉작(封爵)하는 일을 허락하지 마시고 이미 봉한 것은 빼앗아들이소서.
전리(田里)의 기쁨과 슬픔은 오로지 수령(守令)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제 비록 대성(臺省)에서 보거(保擧)하라는 명이 있사오나, 모두가 안면과 정실에 따라 하기 때문에 그 천거되었다는 사람이 심지어는 글자도 알지 못하는 자가 있으니, 원컨대 지금부터는 궁헌(宮軒)에 납시어 친히 인견하여 명실(名實)을 깊이 조사하셔서 천거된 자가 그만한 인물이 못되면 천거한 자를 반드시 벌주소서.”
하고, 끝으로 자주 사유(赦宥)하는 폐단을 말하자, 왕이 대간을 불러서 힐문(詰問)하였다. 그러나 대간이 면전에서 간쟁(諫爭)하기를 더욱 절실히 하므로 왕의 노여움이 심하였다. 유숙(柳淑)이 진언하기를,
“이미 바른말하기를 구하시고 이제 말한 자에게 노여움을 품으신다면 옳겠습니까?”
하니, 왕의 노여움이 조금 풀렸다.
○ 밀직제학(密直提學) 백문보(白文寶)가 또 상서하여 일을 아뢰기를,
“이제 상란(喪亂)의 뒤를 당하여 백성들이 삶을 영위하지 못합니다. 마땅히 너그러운 은덕을 베푸시어 살아남은 백성들을 살 수 있도록 보살피소서. 공리(功利)ㆍ화복(禍福)의 설(說)을 따르지 않고 요순(堯舜)ㆍ육경(六經)의 도리를 준행하면 하느님이 도우시어 나라의 복조(福祚)가 연장될 것입니다. 원컨대 예묘(睿廟)께서 청연각(淸燕閣)ㆍ보문각(寶文閣)을 설치했던 옛일을 생각하시어, 천인(天人)의 도덕에 대한 말을 강구(講究)하여 성학(聖學 제왕(帝王)의 학문을 말한다)을 밝히소서. 또 향곡(鄕曲)이 모두 바르게 되면 국가를 다스릴 수 있을 것입니다. 당(唐)은 향(鄕)에다 대중정(大中正)을 두었었고 우리 나라 초기에는 사심관(事審官)을 두었었습니다. 이제 마땅히 주현(州縣)에 다시 사심관을 두어 비위(非違)를 규찰(糾察)하도록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9품으로부터 1품에 이르기까지 각기 직첩(職牒)을 주는 것은 간악한 짓을 방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근세에는 조정의 사령(辭令)이 처음에는 여럿이 서명했었으나 나중에는 한 관서에서만 서명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어렵다가 나중에는 쉬워져서 관리들이 이를 빙자하여 농간(弄奸)을 부립니다. 이제부터는 6품 이상은 각자 첩(牒)을 써서 성(省)에 제출하여 갖추 서명 날인을 받도록 하고, 7품 이하는 전리(典理)와 군부(軍簿)에서 함께 서명 날인을 하게 하며, 품마다 같은 품으로 이동(移動)할 적에는 사령장만 주도록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삼대(三代)의 제도에는 하사(下士)와 서인(庶人)이 9인의 식구를 먹여 살릴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 나라는 지방이 2천 리니 산림(山林)이 비록 그 반을 차지한다 하더라도 1백 리의 나라보다는 10배나 됩니다. 그런데 경대부(卿大夫)의 녹봉(祿俸)이 9인의 식구를 먹여 살리기에도 부족하니, 하물며 그 나머지의 관리들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녹봉을 중하게 주는 방법을 유사(有司)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경사(京師)에 가까운 땅으로서 평탄하고 넓고 비옥하여 농사를 지을 만한 데를 목장(牧場)으로 만들어서 그 지리(地利)를 빼앗고 있습니다. 마땅히 목장을 산골짜기나 섬으로 옮겨서 그 지리를 제대로 이용하게 하소서. 경기(京畿) 안에 있는 8현(縣)의 전토도 반드시 녹과전(祿科田)으로만 나누어 줄 것이 아니라, 대부(大夫)나 사(士)들의 제전(祭田)으로 골고루 나누어 주시어 서울에 거주하는 자들의 긴급한 처지를 도와 주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나라의 전토에 대한 제도는 한(漢)나라의 한전제도(限田制度)를 본뜬 것으로서 10분의 1을 조세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경상도의 조세도 다른 도와 같기는 하나, 조운하는 비용이 배나 됩니다. 원래 정한 것으로는 족정(足丁)은 전토 7결(結)이고 반정(半丁)은 3결이오나, 더 주어서 조세 운반하는 비용에 충당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강회(江淮)의 백성들이 큰물이 지거나 가뭄이 들어도 근심하지 않는 것은 물레방아의 힘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은 그 방법을 알지 못하고 있으니, 마땅히 계수관(界首官)에게 명하시어 그 모양을 본따서 만들어 민간에 전하게 하소서. 이것은 가뭄에 대비하고 황무지를 개간하는 데 제일의 방책이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옛날 염호(鹽戶)가 없어져서 원액(元額)이 날로 줄어 삭염(朔鹽)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지금 민간에서 삭염의 세금으로 바치는 포백은 한결같이 전례대로 거두기 때문에 염호는 없는데 세금으로 바치는 포백은 여전히 있어서, 이서(吏胥)들이 이를 빙자하여 간악한 짓을 하므로 백성들은 비록 포백을 바치지만 소금 한 되의 세금도 관에서는 거두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소금의 다소를 포백의 수에 준(準)하여 골고루 주는 것을 법식으로 정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가난한 백성들이 대부(貸付)를 받을 적에 부호(富豪)한 집에서 예(例)대로 이자를 받지 말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봄은 기쁨의 신[喜神]이라 하고, 가을은 성내는 신[怒神]이라 합니다. 만일 기쁨의 신을 한번 거스르면 농사가 풍성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봄ㆍ여름에는 경한 형벌은 사면하여 주고, 중한 형벌도 등급을 감하여 속히 판결해 주며, 모역(謀逆) 이외의 대벽(大辟)은 겨울철에 집행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향역(鄕驛)의 아전들이 출가(出家)하여 부역을 도피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관으로부터 도첩(度牒)을 받아야 출가할 수 있게 하고, 3정(丁)이 되지 않는 집에서는 출가를 허하지 마소서.”
하였다.

12월 원에서 탑사첩목아(塔思帖木兒)를 세워 고려왕으로 삼았다.
곧 덕흥군(德興君) 혜(譓)충선왕의 아들이다. 이다. 기 황후(奇皇后)가, 왕이 기씨들을 죽인 데에 원한을 품고 기필코 보복하려 하였다. 그래서 태자에게 이르기를,
“네 나이 이미 장성하였는데, 어찌 나를 위하여 원한을 갚아주지 않느냐?”
하였다. 이때에 최유(崔濡)가 원에 있으면서 본국을 모해(謀害)하고, 또 김용이 국내에서 내응(內應)할 것을 믿어서 드디어 여러 나쁜 무리들과 황후를 꾀어 공민왕의 폐위를 꾀하였다. 덕흥군도 말하기를,
“지금 왕이 홍두적의 난리에 죽었습니다.”
하였다. 이에 덕흥군을 세워 왕으로 삼고 기 삼보노(奇三寶奴)를 원자(元子)로 삼았으며, 김용을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삼고, 최유는 스스로 좌정승이 되었으며, 국인으로서 원에 있는 자는 모두 위관(僞官)을 주니, 김첨수(金添壽)ㆍ유인우(柳仁雨)ㆍ문익점(文益漸) 등이 모두 그에 붙었다. 그전에 심왕(瀋王) 고(暠)의 손자 독타불화(篤朶不花)는 아버지의 지위를 습위(襲位)하여 심양왕으로 봉해졌다. 기 황후가 처음에는 독타불화를 고려왕으로 세우려 하였으나, 독타불화가 굳이 사양하기를,
“숙부는 후대를 이을 아들이 없으니, 그가 승하(昇遐)한 뒤에는 나라가 누구한테로 가겠습니까? 이제 숙부가 아무 탈이 없는데 어떻게 자리를 빼앗겠습니까?”
하니, 이에 탑사첩목아를 왕으로 삼았다. 천하 사람들이 독타불화를 현명한 자라고 여겼다.
공민왕은 이 변보(變報)를 듣고 조정의 신하들 가운데 혹 덕흥군에게 붙어 딴마음을 가지는 자가 있을까 의심하고 염려하여 홍사범(洪師範)을 서북면 체복사(西北面體覆使)로 삼아서 정세(情勢)의 진위(眞僞)를 살펴보게 하였다.
○ 이수산(李壽山)을 보내어 여진(女眞)과의 국경을 정하였다.
○ 얼음이 얼지 않았다.

[주D-001]양저(穰苴)는 …… 않은 것 : 군법(軍法)은 엄한 것이나 경우에 따라 달리 다스려야 한다는 말. 양저는 춘추 시대 제 경공(齊景公)의 장수로 성은 전씨(田氏)인데 사마(司馬) 벼슬을 하였으므로 사마양저(司馬穰苴)라고도 한다. 양저는 진(晉)과 연(燕)이 침입했을 때 경공의 명을 받아 출정하면서 감군(監軍) 장가(莊賈)가 회기(會期)를 어기자 그가 존귀한 신분이었지만 독단으로 참(斬)하여 군령을 엄하게 했다. 위청(衛靑)은 대장군이 되어 한 무제(漢武帝)의 명으로 흉노를 치러 나갔을 때 우장군 소건이 단독으로 적진에 들어갔다가 중과 부적(衆寡不敵)으로 패하고 단신 도망해오자, 위청은 제멋대로 처단할 수 없다 하여 소건을 잡아 행재소(行在所)로 보내니 다른 사람들이 잘 처리했다고 했다. 《史記 卷64 司馬穰苴列傳, 漢書 卷55 衛靑霍去病傳》
[주D-002]토끼가 …… 죽이는 격 : 한 고조(漢高祖)가 천하를 통일한 뒤, 천하 통일에 가장 공이 많았던 한신(韓信)이 여후(呂后)의 의심을 받아 잡혀 죽을 때 “나는 새를 다 잡으니 좋은 활도 쓸모없다고 감추어 두고, 들판에 달리는 토끼를 다 잡으니 사냥개가 필요없다고 삶아 죽이듯, 적국(敵國)을 다 무찌르니 훌륭한 장수를 다 죽이는구나.” 하였다.
[주D-003]청연각(淸燕閣)ㆍ보문각(寶文閣) : 모두 고려 예종(睿宗) 때 설치했던 학문 연구 기관. 예종 11년(1116) 궁중에 청연각을 설치하여 문신 중에서 학사ㆍ직학사(直學士)ㆍ직각(直閣) 등 각 1인씩을 뽑아 조석으로 경서(經書)를 강론하고 시부를 짓게 하였는데, 궁중에 있어 학사의 숙직과 출입이 불편하므로 그 옆에 보문각을 따로 설치하여 학자들의 회강(會講) 장소로 정하자 청연각은 경연청의 구실을 하였다.
동사강목 제15상
갑진년 공민왕 13년(원(元) 순제(順帝) 지정(至正) 24, 1364)

춘정월 최유(崔濡)가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왔다. 제군(諸軍)이 맞아 싸웠으나 패배하여 최유가 선주(宣州)에 입성하였다.
이보다 앞서 안우경(安遇慶)은 의주(義州)에 주둔하고 파사부(婆娑府)의 탈탈화손(脫脫禾孫)에게 이서(移書)하기를,
“최유 등은 조정을 모멸 농락하여 서얼(庶孽)을 세워 왕으로 삼으려 든다. 난신적자(亂臣賊子)는 사람들이 누구나 그를 주벌(誅罰)할 수 있다. 이제 정병을 거느리고 가서 역당(逆黨)을 토벌하려 한다. 대군이 한번 움직임에 인심이 분노하여 기세가 불길 같아 부딪히는 족족 반드시 불타고 말 것이라 무고하게 화를 입을 수 있다. 본직(本職 탈탈화손을 가리킨다)이 관할하는 각 부(各部)를 거두어 산채(山寨)로 들어가 군대의 예봉(銳鋒)을 멀리 피하라.”
하였다. 그리고는 드디어 병마사 김정서(金定瑞)와 옥천계(玉天桂)에게 요해지(要害地)를 나누어 지키게 하고 송분석(宋芬碩)에게 궁고문(弓庫門)을 지키게 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한밤중에 유가 원(元)의 군사 1만을 거느리고 초도(椒島)에 이르러 여명에 압록강을 건너와 궁고문을 포위하였다. 우경이 몸소 사졸에 앞장서서 휘하와 함께 7번을 싸워 물리쳤다. 적은 산에 올라 아군이 수가 적고 후원이 없음을 엿보고 보병(步兵)과 기병(騎兵)을 7대(隊)로 나누어 북을 울리고 고함을 지르며 일제히 진격해 왔다. 아군은 지탱할 수 없어서 의주성(義州城)으로 도망해 들어갔다. 낭장(郞將) 최흑려(崔黑驢)는 장사(壯士)였다. 그가 말에서 내려 창을 꼬나잡고 성문 밖에 서 있으니 적이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였다. 뒤 처진 군사들까지 다 성 안에 들어가고 난 뒤에야 그는 말에 올라 서서히 말을 몰아 돌아왔다.
이귀수(李龜壽)ㆍ홍선(洪瑄)ㆍ지용수(池龍壽) 등이 구원하러 와서 여러 차례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그래서 홍선은 그가 탄 말이 넘어져 사로잡히고 아군은 대패하여 달아나 안주성(安州城)을 의지하여 지키고 있자, 유(濡)가 선주(宣州)에 들어가 웅거하였다.
○ 최영(崔瑩)을 도순위사(都巡慰使)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급히 안주로 가서 제군(諸軍)을 지휘하게 하였다.
당시 제군이 패전하여 중외(中外)가 흉흉하고 두려워하므로 왕이 드디어 최영에게 명했던 것이다. 최영은 왕명을 들은 즉시로 출발해 가서 장졸들을 신칙 격려하고 기필코 적을 토멸할 것을 맹세하니 조야(朝野)가 최영을 믿어 두려움이 없게 되었다. 최영은 가는 길에 도망병을 만나기만 하면 그때마다 참수(斬首)하여 군중(軍中)에 돌려 보이니, 비로소 군령이 숙정(肅正)되었다.
○ 평창현령(平昌縣令) 배 중련(裵仲連)의 가산을 적몰(籍沒)하였다.
탐욕스럽고 잔인하며 불법을 저지른 때문이었다.
○ 김속명(金續命)을 서북면체복사(西北面體覆使)로 삼았다.
당시 군졸들은 일년 내내 추위에 떨고 굶주려서 지쳐 있었다. 도롱이를 입고 자기 체온으로 몸을 덥히며 한 말의 쌀을 얻기 위해 한 필의 말로 교환하였다. 도망한 군졸들이 비렁뱅이짓을 하며 길에 가득 차고, 굶어 죽은 시체가 길에 늘비하였다. 그러나 권세를 휘두르는 신하가 진상을 가리고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비록 체복사들이 길에 잇달았으나 왕은 끝내 군중의 허실을 알지 못하였다.
○ 여진(女眞)이 침략해 들어와 화주(和州) 이북 땅을 함락하였다.
당초에 북방인 김방괘(金方卦)가 우리 도조(度祖)의 딸에게 장가들어 삼선(三善)과 삼개(三介)를 낳았는데 여진에서 생장하였다. 체력이 뛰어나고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였는데, 악소배(惡少輩)들을 모아 북변을 횡행하였으나 우리 태조(太祖)가 두려워 감히 방자하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그때 우리 태조가 서북면(西北面)을 원조하고자 동북면(東北面)으로부터 정예 기병 1천 명을 거느리고 가서 서북면의 군대와 합류하자, 삼선 등이 빈틈을 타고 여진을 꾀어들여 홀면(忽面 홍원(洪原)을 가리킨다)과 삼살(三撒 북청(北靑)을 가리킨다)을 침략하였다. 왕은 교주도 병마사(交州道兵馬使) 성 사달(成士達)에게 명하여 정예 기병 5백 명을 출동시켜 치게 하였다. 적이 화주를 함락시키자 수장(守將) 전이도(全以道)와 이희(李熙)는 군사를 버리고 도망해 왔다. 도지휘사(都指揮使) 한방신(韓方信)과 병마사 김귀(金貴)가 군대를 이끌고 나아갔으나 또한 무너지고 말았다. 그래서 퇴각하여 철관(鐵關)지금의 덕원(德源) 북방 15리에 있다. 을 지키고 있고, 화주 이북 땅은 모두 함몰되었다.
○ 최영(崔瑩) 등이 최유(崔濡)의 군대를 토벌하여 크게 패배시키니, 유와 탑사첩목아(塔思帖木兒)가 달아났다.
최영이 군중에 이르고 우리 태조와 이순(李珣)ㆍ우제(禹磾)ㆍ박춘(朴椿) 등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 합류하자 군세가 다시 떨쳤다. 최유의 후기(候騎 척후 노릇을 하는 기병)가 정주(定州)에 이른 것을 안우경(安遇慶)이 정예 기병 3백 명을 거느리고 습격하여 패배시키고, 그 장수 송신길(宋臣吉)을 사로잡아서는 몸을 쪼개어 군중에 돌려 보이자 적의 기세(氣勢)가 꺾였다. 그런 뒤 이때에 이르러 안우경(安遇慶)ㆍ이귀수(李龜壽)ㆍ지용수(池龍壽)ㆍ나세(羅世)가 홍선(洪瑄)을 대신해 와서 좌익이 되고, 이순ㆍ우제ㆍ박춘과 우리 태조가 우익이 되고, 최영이 중군이 되어 행군하여 정주에 이르렀다. 태조가 여러 장수들이 후퇴하여 달아나는 것을 보고 그들이 겁을 내어 힘을 다해 싸우지 않음을 말하니 여러 장수들이 태조를 꺼렸다. 당시 적은 이미 수주(隨州)지금은 정주에 속해 있는데 폐군(廢郡)이 정주 남쪽 15리에 있다. 의 달천(㺚川)정주 동쪽 5리에 있다. 에 주둔하고 있었다. 여러 장수들이 태조에게 말하기를,
“내일의 싸움은 그대 혼자 맡으라.”
하였다. 이튿날 적이 3대(隊)로 나누어 공격하자 태조가 가운데에 있고 수하의 노장(老將) 두 사람이 각기 그 1대(隊)씩을 맡아 분발해 쳤다. 태조가 탄 말이 진흙 속에 빠져 몹시 위태롭게 되었는데 말이 힘껏 뛰어 빠져나오니 뭇사람들이 모두 경이(驚異)롭게 여겼다. 태조가 적장 두엇을 쏘고 두 노장과 합력하여 쳐서 크게 깨뜨리니 적들은 달아나 무너지고 오직 먼지만이 하늘을 가렸다.
당초에 최유가 몽한군(蒙漢軍)을 이익으로 꾀기를,
“새 왕이 고려에 들어가기만 하면 고려의 장졸들은 싸우지도 않고 흩어진다. 일이 평정되면 고려의 재상 이하들의 가산(家産)을 상으로 주겠다.”
하니, 뭇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믿었다. 그러나 압록강을 건너오자 아군이 완강하게 항전하고, 달천 전투에서 패배하자 몽한군은 그제야 최유의 계략에 빠진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밤에 거짓으로 아군인 것처럼 하여 큰 소리로 떠들며 경동(驚動)시키니 최유가 드디어 병영을 불지르고 압록강을 건너 달아났다. 아군이 추격하였으나 미치지 못하고, 피로하여 뒤처진 유인우(柳仁雨)ㆍ강지연(康之衍)ㆍ안복종(安福從) 등만 잡아 죽였다. 최유의 군사로 연경(燕京)에 되돌아간 자는 겨우 기병 17명뿐이었다. 당시 우리의 군사도 오랜 출정(出征)으로 얼고 굶주려, 전쟁이 끝나 살아 돌아온 자는 겨우 1백 명 중에 한두 사람 꼴이었다.

2월 우리 태조가 여진을 쳐서 크게 깨뜨리고 동북면 여러 성들을 남김없이 회복하였다.
태조가 서북면으로부터 군대를 이끌고 철관(鐵關)에 이르니 장졸들이 모두 기뻐하며 용기가 저절로 배가되었다. 태조가 드디어 한방신ㆍ김귀와 함께 3면으로 진격하여 삼선 등을 크게 패배시키고 화주(和州)ㆍ위주(威州) 등 고을을 모두 회복하였다. 삼선ㆍ삼개는 여진으로 달아나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 경천흥(慶千興)을 좌시중(左侍中)으로, 우리 태조를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삼았다.
우리 태조가 여러 차례 전공을 세우자 이로부터 왕의 의지가 더욱 무거워져 밀직부사로 임명하고 단성양절익대공신(端誠亮節翊戴功臣)의 호를 내렸다. 태조는 장수 구실을 함에 있어 호령이 명확하고 신뢰할 수 있으며 마음씀이 활달하고 너그러웠다. 전쟁이 없는 여가에는 이름난 유학자들과 함께 경사(經史)를 토론하되 특히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즐겨 보고 개연히 세도(世道)를 만회할 뜻을 두었다. 용기와 지략이 일세를 덮었으며 영특함과 예기가 뛰어나 일시 물망이 모두 우리 태조에게 쏠렸다.
○ 경성(京城)의 수졸(戍卒)을 혁파하였다.
○ 서북면병마사 정찬(丁贊)이 하옥(下獄)되어 죽었다.
정찬의 휘하 목충(睦忠)은 목인길(睦仁吉)의 종제로 종형의 권세를 믿고 교만하게 날뛰었는데, 정찬이 제재(制裁)를 가해도 금하게 할 수 없었다. 목충이 정찬에게 원한을 품고 그를 덕흥군(德興君)과 밀통한다고 무고하여 찬을 순군옥(巡軍獄)에 내리니 울분에 못이겨 죽었다. 정찬은 성품이 너그럽고 무예가 있어 당시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 혜성(彗星) 넷이 한꺼번에 나타났다.
하나는 태미(太微)에, 하나는 대각(大角)에, 하나는 북두(北斗)에, 하나는 저성(氐星)에 있었는데 빛깔이 붉고 길이가 한자 남짓 되었다.

3월 왜(倭)가 남쪽 변방을 침구하자 경기병마사(京畿兵馬使) 변광수(邊光秀)ㆍ가 선(李善)이 함께 이작도(伊作島)에서 싸우다 크게 패하였다.
왜선 2백여 척이 갈도(葛島)순천(順天)의 복포(伏浦) 동남쪽에 있는데 복포는 순천부 동쪽 45리에 있다. 에 정박하여 연해의 주군(州郡)들을 노략질하였는데 하동(河東)ㆍ고성(固城)ㆍ사주(泗州 사천)ㆍ김해(金海)ㆍ밀성(密城 밀양)ㆍ양주(梁川 양산)가 다 해를 입고, 전라도의 조선(漕船)이 통하지 못하게 되었다. 왕이 경기우도 병마사 변광수와 경기좌도 병마사 이선 등에게 명하여 동북면의 무사(武士)와 교동(喬桐)ㆍ강화(江華)와 동강(東江)ㆍ서강(西江)의 전선 80척을 선발해 거느리고 가서 호송하게 하였다. 대도(代島)에 이르자 적에게 포로되었던 자가 도망해 와서, 적이 이작도(伊作島)지금은 이칙도(伊則島)라고 쓴다. 덕적도(德積島)가 지금의 인천부(仁川府) 서쪽 1백 20리에 있는데 그 남쪽이 독갑도(禿甲島), 그 동쪽이 이칙도로 모두 남양(南陽)에 속해 있다. 에 복병하고 있으니 가벼이 나아갈 수 없다고 알렸다. 그러나 이선은 이 말을 듣지 않고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앞서 나아갔다. 적은 2척의 배로 맞아 싸우다가 거짓 물러나더니 조금 후에 적의 배 50여 척이 나와 포위하였다. 판관(判官) 이분손(李芬孫), 중랑장(中郞將) 이화상(李和尙)이 죽자, 여러 병선의 군사들은 바라보기만 하고는 넋을 잃어 바다에 뛰어들어 죽은 자가 열에 팔구 명이나 되었다. 변광수 등은 싸우지도 않고 물러갔는데 싸우던 군졸들이 크게 부르짖기를,
“병마사는 어찌 사졸을 버리고 물러가오? 잠시 머물러 국가를 위해 적을 깨뜨리시오.”
하였으나 광수 등은 끝내 구원하지 않아 사졸들의 사기가 더욱 저상되어 크게 패하였다. 오직 부사(副使) 박성룡(朴成龍)만이 힘써 싸워 배를 온전히 보전하여 돌아왔다. 이에 동ㆍ서강에 통곡소리가 메아리쳤다. 그러나 광수 등은 끝내 죄를 받지 않았다. 얼마 안 있어 전라도 도순어사(全羅道都巡禦使) 김굉(金鋐)이 조선(漕船)을 거느리고 내포(內浦)에 이르러 왜와 싸우다가 패하여 죽은 자가 태반이나 되었다. 김굉은 나주(羅州)의 세력자로 중앙의 요직에 있는 권력자에게 뇌물을 바치고 관작을 얻어 백성의 고혈을 긁기에만 급급하였다. 그런데 패전한 이때에 이르러 평소 뇌물을 받아먹은 왕의 총신(寵臣)들이 그를 칭찬하여 왕이 내온(內醞)을 하사하며 맞아 위로하기까지 하니, 사람들이 많이 분노하고 통탄하였다.
○ 장사성(張士誠)이 사신을 보내와 방문하였다.

5월 경상도 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 김속명(金續命)이 진해(鎭海)에서 왜를 쳐 섬멸하였다.
왜적 3천여 명이 진해현을 침구하였는데, 속명이 군대를 거느리고 신속히 공격하니 적이 창황하여 미처 배에 오를 겨를도 없이 현의 북쪽 산에 올라가 나무를 찍어 녹각책(鹿角柵)을 만들어 지켰다. 속명이 다시 진격하여 크게 패배시켰다.
○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이암(李嵒)이 졸하였다.
이암은 젊어서부터 재상의 기국(器局)이 있었으며 근엄하게 법도를 지켰다. 집에서는 살림살이의 있고 없음에 대해 묻는 법이 없으며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 즐겼다. 그는 서법(書法)이 당대에 절묘(絶妙)하여 일찍이 태갑편(太甲篇)을 써서 왕에게 바치고 그의 아들 강(岡)에게,
“너는 명심해라. 나는 이미 늙어서 관직도 없으며 간언(諫言)의 직책도 없다. 마땅히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으로 책무를 삼으라.”
하였다. 시호는 문정(文貞), 호는 행촌(杏村)이다.
○ 장사성(張士誠)에게 사신을 보내어 보빙(報聘)하였다.
당시 사성이 잇달아 사신을 보내오기에 드디어 대호군(大護軍) 이성림(李成林)과 전교 부령(典校副令) 이인(李靭)을 보내어 보빙하였다. 사성이 또 사신을 보내어 옥영(玉纓)ㆍ옥정자(玉頂子)ㆍ채단(綵緞) 등의 물건을 바쳤다. 이에 앞서 전녹생(田祿生)을 보내어 방국진(方國珍)에게 답례하였는데, 국진 또한 사신을 보내어 녹생과 함께 와 침향(沈香)ㆍ궁시(弓矢)와 《옥해(玉海)》ㆍ《통지(通志)》 등 책을 바쳤다.

6월 이리가 도성에 들어왔다.
당시 호랑이와 이리가 자주 경성(京城)에 들어왔다.
○ 왜가 해풍군(海豊郡)지금의 풍덕(豊德)을 침구하여 착량(窄梁 수원지방)까지 들어왔다.

추7월 제도(諸道)의 양가 자제(良家子弟)를 뽑아 숙위(宿衛)에 충당하였다.
뽑아서 8위(衛)에 충당해서 번상(番上)하여 숙위케 하되 5군(軍)에 나누어 소속시켜 경성(京城) 4문(門) 밖에 주둔하게 하였다. 다만 강릉도(江陵道)만은 그 도에 주둔하여 동북 지방을 방비하도록 하였다.

8월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오인탁(吳仁鐸), 부사(副使) 김달상(金達祥)이 죄가 있어 유배하였다.
이에 앞서 나라에서 해마다 군사를 일으키다 보니 국고가 고갈되어서 공이 있는 자에게 모두 관작으로 상을 주었다. 인탁과 달상이 문무관(文武官)의 자리를 증설하도록 건의하여 드디어 그 전주(銓注)를 맡았다. 정벌에 나아간 장사(將士)들이 모두 관등(官等)을 뛰어오르게 되어 사람들이 즐겨 종군하였다. 그러나 청탁이 성행해서 뇌물이 공공연히 횡행하여 공장(工匠)ㆍ천예(賤隸)도 관작을 받지 않는 자가 없어 관작이 크게 남수(濫授)되었다. 그래서 이때에 이르러 왕이 명을 내려 인탁을 청주(淸州)에, 달상을 옥주(沃州)에 유배하니 나라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동10월 원에서 사신을 보내어 왕(王 공민왕)을 복위시키고 최유(崔濡)를 함거(檻車)에 실어 보냈다.
이전에 최유가 원의 권신 삭사감(槊思監)과 환관 박불화(朴不花)를 통하여 모략 중상해서 왕을 폐위하고 군대를 일으켜 쳐들어오기까지 하였다. 패하여 돌아가서는 또 권세에 의탁하여 대군을 일으켜 다시 본국을 치기를 꾀하였다. 그리고 원주(元主)에게 청하기를,
“만일 본국에 돌아가기만 한다면 장정은 모두 징발하여 천자의 위병(衛兵)에 충당하고, 또 양식과 여자를 바쳐 이를 연례(年例)로 삼겠으며, 경상도와 전라도에 왜인 만호부(倭人萬戶府)를 설치해서 왜인을 불러 금부(金符)를 주어 상국(上國)의 후원이 되게 하겠습니다.”
하였다. 원에 머물고 있던 이공수(李公遂)ㆍ이자송(李子松)ㆍ임박(林樸) 등이 이 사실을 알고 편지를 써서 대지팡이 속에 넣어, 남루한 옷을 입혀 거지 행색으로 꾸민 하인에게 주어 샛길로 보내서 알리기를,
“덕흥군(德興君)이 이미 패하였다고 안심하지 말고 조심해 방비를 하소서.”
하였다. 이에 본국에서는 비로소 공수 등이 굴복하지 않고 있는 형편을 알았다. 그때 승상(丞相) 패라첩목아(孛羅帖木兒) 등이 고려 왕은 공은 있고 죄는 없는데 소인에 의해 곤경에 몰려 있으니 어찌 먼저 그 억울함을 변명해 주지 않을 수 있느냐고 해서, 감찰어사(監察御史) 유련(紐憐)이 아뢰어 왕의 공을 따지고 최유의 악(惡)을 말하였다. 원주는 즉시 탑사첩목아(塔思帖木兒 덕흥군(德興君))의 인장(印章)을 거둬들여 영평부(永平府)에 안치(安置)하고 왕을 복위하도록 명하고는 한림승지(翰林承旨) 기전룡(奇田龍)을 보내어 조서를 전달하고 최유를 함거에 실어 보냈다. 원의 사신이 이르자 도당(都堂)에서 왕에게 교외에 나가 맞이하도록 청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고 백관(百官)들이 맞이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는 이르기를,
“만약 내가 교외에서 마중하지 않는 것을 조사(詔使)가 묻거든 마땅히 대답하기를 ‘과군(寡君)이 일찍이 천조(天朝)에 죄를 얻어 폄작(貶爵)되었는데, 지금 비록 복위되었다고는 하나 아직 명명(明命)을 받지 못했으니 감히 조사를 맞이하지 못한다.’ 하라.”
하였다. 원의 사신이 행성(行省)에 당도하자 왕은 편복(便服)으로 조서의 내용을 듣고 나서 그제야 면복(冕服)을 갖추어 입고 명(命)을 배수(拜受)하였다.
○ 찬성사(賛成事) 이인복(李仁復)을 원에 보내어 복위를 사례하였다.
○ 영도첨의사(領都僉議事) 이공수(李公遂)가 원에서 돌아왔다.
공수는 원에 있으면서 절개를 지켜 딴마음을 갖지 않았고, 그곳에서 벼슬하여 태상경(太常卿)이 되었었다. 사직하고 고려로 돌아올 적에 충의(忠義)가 천하에 알려졌다. 연경(燕京)의 제화문(齊化門)을 나서며 종을 시켜 피리를 불게 하면서 말하기를,
“천하의 즐거움이 이보다 더한 것이 또 있겠는가.”
하였다. 도중에서 말이 지쳐 종이 화살로써 콩 1단을 사서 먹이니 공수가,
“무슨 까닭으로 궁한 백성들의 먹이를 빼앗느냐?”
하고, 면포(綿布)를 끊어 보상하였다. 여산참(閭山站)에서 아무도 없는 들판에 조 낟가리가 쌓여 있었는데 종자가 또 그것을 취해다가 말을 먹이니 공수가 조 1단의 값이 포(布) 몇 자나 되느냐고 물어 그 대답대로 값을 쳐서 포 양끝에 사연을 써서 조 낟가리 속에 두었다. 종자가,
“다른 사람이 반드시 가져갈 터인데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니, 공수가,
“그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반드시 이렇게 해야만 내 마음이 편안할 수 있다.”
하였다. 덕흥군(德興君)의 변(變)에 유인우(柳仁雨) 등은 모두 붙었지만 오직 공수ㆍ이자송ㆍ홍순(洪淳)ㆍ김유(金庾)ㆍ허강(許綱)ㆍ황대두(黃大豆)ㆍ장자온(張子溫) 등은 따르지 않았으며 오랫동안 연경에 있으면서 돈과 양식이 다 떨어졌지만 끝내 딴마음을 갖지 않았다. 이들을 모두 탁용(擢用)하여 표창하였다.
○ 임박(林樸)을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삼았다.
임박이 고려로 돌아오자 왕이 말하기를,
“덕흥(德興)이 고귀한 관직으로 유혹을 하였으나 너는 따르지 않았다. 나 또한 고귀한 관직으로 표창하겠다.”
하고, 이 관직을 제수하였다. 임박이 정심론(正心論) 20조를 올리니 왕이 더욱 소중히 여겼다.

11월 최유(崔濡)가 복주(伏誅)되었다.

12월 왜(倭)가 조강(祖江)지금 풍덕(豊德)의 덕수현(德水縣)에 있는데, 현은 개성부(開城府) 동쪽 30리에 있다. 에 들어왔다.
찬성사(賛成事) 최영(崔瑩)을 보내어 격퇴시켰다.

[주D-001]덕흥군(德興君)의 변(變) : 덕흥군은 충선왕(忠宣王)의 셋째아들. 중이 되었다가 원(元)나라로 도망가서, 원으로부터 왕의 책봉을 받고 고려를 치려고 공민왕 13년(1364) 최유(崔濡)와 함께 요양성(遼陽省)의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의주(義州)를 침범했으나, 안우경(安遇慶)․최영(崔瑩)에게 패해 다시 원나라로 돌아간 사건. 《東史綱目 第15上 恭愍王 13年春正月》
목은시고 제20권
 시(詩)
서곡음(瑞谷吟)

창화의 북쪽은 산들이 에워싸는 듯하고 / 昌和之北山如圍
서곡엔 솔 가득해 푸르름을 이루었는데 / 松滿瑞谷成翠微
그 가운데 두어 이랑 절집이 있었더니 / 其中數畝浮屠宮
이젠 향화 끊기고 종경 소리도 드물어라 / 蕭然香火鐘磬稀
옛날 신경의 터닦기 미처 덜 끝났을 때 / 新京攻位未云畢
철성의 두 형제와 내가 서로 의지하여 / 鐵城兄弟吾相依
삼 인이 서로 바싹 다가앉아 담소하면서 / 三人談笑更促膝
가끔은 밤새 앉아 아침을 맞기도 했으니 / 夜坐往往迎朝暉
당시의 풍류를 참으로 상상할 만하여라 / 當時風流可想見
무략과 문재가 기의 기틀을 함께했었지 / 虎略文才同氣機
중씨의 전사함은 세상이 놀란 바거니와 / 仲氏陣亡世所駭
계씨는 병사했으니 나는 뉘와 함께할꼬 / 季氏病歿誰與歸
못난 나만 유독 오십의 나이에 올라서 / 散材獨登知命年
특별한 은총 재차 입어 재상부를 열었네 / 再承異渥開黃扉
병이 오래간들 또한 무슨 해롤 것 있으랴 / 雖然病久亦無害
어이해 아직도 낚시터를 찾지 못하는고 / 奈何尙不尋魚磯
선왕은 돌아가고 하늘은 아득하기만 한데 / 鼎湖弓墜天茫茫
다행히 우리 성상이 바야흐로 임어하시네 / 幸我聖上方垂衣

[주D-001]철성(鐵城)의 두 형제 : 고려 말기의 상신(相臣)으로 벼슬이 문하 시중(門下侍中)에 이르고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에 봉해진 이암(李嵒)의 아들 4형제 중 끝으로 두 아들인 음(蔭)과 강(岡)을 가리키는데, 음은 무신(武臣)으로서 일찍이 공민왕(恭愍王) 8년 홍건적(紅巾賊)의 제1차 침입 때에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적을 크게 무찔러 그 공으로 상장군(上將軍)에 승진되었으나, 그 후 공민왕 10년 홍건적의 제2차 침입 때 안주(安州)의 싸움에서 전사(戰死)하였고, 강은 뛰어난 문사(文士)로서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고 공민왕 때 이부 낭중(吏部郞中), 지신사(知申事) 등을 역임하고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에 이르렀으나, 36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동사강목 제16상
을묘년 전폐왕 우(前廢王禑) 원년(명(明) 태조(太祖) 홍무(洪武) 8, 1375)

춘정월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 최원(崔源)을 명(明)에 보내어 고애(告哀)하게 하였는데, 최원이 구류되었다.
현릉(玄陵 공민왕(恭愍王)을 말한다)이 시해되고 김의(金義)가 명의 사신을 죽인 뒤부터는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감히 명에 사신을 통하지 못하였다. 대사성(大司成) 정몽주(鄭夢周)가 말하기를,
“먼저 스스로 주저하여 백성들에게 화를 끼쳐서는 안 된다.”
하였고, 전교령(典校令) 박상충(朴尙衷), 사예(司藝) 정도전(鄭道傳)도 그렇게 말하였으나, 시인(時人)들이 모두 명에 가는 것을 꺼렸는데, 최원이 말하기를,
“사직(社稷)이 편해질 수만 있다면 어찌 내 몸 한번 죽는 것을 아끼겠는가?”
하므로, 드디어 최원을 보내어 상사(喪事)를 고하고 시호(諡號)와 왕위의 승습(承襲)을 청하였었다.
○ 처음으로 서연(書筵)을 설치하였다.
전녹생(田祿生)ㆍ이무방(李茂芳)을 사부(師傅)로 삼았다. 선왕(先王)이 기르던 비둘기가 금중(禁中)에 있어 왕(王)이 항상 애완(愛玩)하였는데, 이무방이 《서경(書經)》 여오편(旅獒篇)을 진강(進講)하다가 아뢰기를,
“비둘기도 희귀한 새이니 원컨대 기르지 마소서.”
하므로, 우(禑)가 명하여 비둘기를 내버렸다. 우가 서연에 나와서 《대학(大學)》을 강독하는데 우부대언(右副代言) 윤방언(尹邦彦)에게 묻기를,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깊고 덕성스런 문왕이여! 아, 끊임없이 빛나고 공경하여 안정하시다[穆穆文王 於緝熙敬止].’고 한 말이 무슨 뜻인가?”
하였으나, 윤방언이 대답하지 못하자 우가 이르기를,
“나는 유자(儒者)라면 능히 경서(經書)를 정통했으리라고 여겼는데, 지금 고작 그 꼴인가?”
하였다.
우가 일찍이 강관(講官)을 부르자, 환자(宦者) 김현(金玄)이 아뢰기를,
“매월 날짜를 정하여 정강(停講)을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우가 이르기를,
“글 읽는 것은 시사(視事)가 아닌데 왜 폐지한단 말이냐?”
하였다.
○ 납합출(納哈出)이 사신을 보내왔다.
이때 김의(金義)가 북원(北元)에 있으면서 말하기를,
“왕이 훙(薨)하고 후사(後嗣)가 없으니 심왕(瀋王)을 받들어 왕으로 삼기 바란다.”
하자, 북원에게 드디어 심왕 고(暠)의 손자인 탈탈불화(脫脫不花)를 왕으로 봉하였기 때문에 납합출이 사신을 보내와서 묻기를,
“전왕(前王)의 아들이 없다면 지금 누가 왕위를 이어받았는가? 만일 아들이 있다면 조정에서 반드시 심왕을 보내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2월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나흥유(羅興儒)를 일본(日本)에 보내어 빙문(聘問)하게 하였다.
나흥유가 글을 올려 일본과 화친하기를 청하므로, 드디어 흥유를 통신사(通信使)로 삼아서 보내었다. 신사년(1281)에 동정(東征)한 이후부터 일본이 우리 나라와 국교(國交)를 끊었었다. 나흥유가 처음 일본 패가대(覇家臺 박다(博多))에 이르자 그곳 주장(主將)이 첩자(諜者)가 아닌가 여겨 그를 가두어 버리므로 거의 굶어 죽게 되었는데, 본디 우리 나라 진주(晋州)의 중[僧]이었던 양유(良柔)라는 자가 있어, 나흥유를 보고는 그들에게 풀어주기를 청하고 서로 화친하게 하였다. 이때 나흥유는 나이가 60세에 가까웠는데, 그가 거짓으로 말하기를,
“내 나이가 1백 50세이다.”
하자, 왜인(倭人)들이 말을 타고 잔뜩 몰려들어 구경을 하는가 하면, 화상을 그리고 찬(讚)을 지어서 주는 자까지 있었다.
○ 수령(守令) 고적(考績)하는 법을 정하였다.
토지를 개간하고, 호구(戶口)를 증가시키고, 부역(賦役)을 균평하게 하고, 사송(詞訟)을 간편하게 하고, 도적을 근절시키는 것 등 다섯 가지 일로 전최(殿最)의 기준을 삼았다.
【안】 원(元) 순제(順帝)가 수령(守令) 출척(黜陟)하는 법을 ‘호구를 증가하고, 토지를 개간하고, 사송을 간편하게 하고, 도적을 근절시키고, 부역을 균평하게 하는 것과 상평(常平)을 법도에 맞게 하는 것’ 여섯 가지 일로 정했었는데, 고려의 제도는 대개 여기서 비롯한 것이다.
○ 해[日]에 흑자(黑子)가 있었다.

3월 충혜 왕비(忠惠王妃)인 덕녕 공주(德寧公主)가 훙하자 경릉(頃陵)에 장사지냈다.
○ 환관(宦官) 윤충좌(尹忠佐)ㆍ황중길(黃中吉) 등을 원지(遠地)에 유배하였다.
이때에 우(禑)가 나이 어려 정령(政令)이 재상(宰相)에게서 나오고 환관이 제멋대로 용사(用事)하였기 때문에 간관(諫官) 유구(柳玽)ㆍ안종원(安宗源)이 도당(都堂)에 글을 올려 환관의 피해를 말하고, 충직하고 근신한 사람 10여 인을 골라서 청소하는 일에나 충당하고 나머지는 모두 파하여 보낼 것을 요청하였다. 대사헌(大司憲) 송천봉(宋天逢) 등이 또 상소(上疏)하여, 윤충좌가 권세를 제멋대로 하여 뇌물을 받고 전토(田土)를 널리 점유한 죄를 말하자, 드디어 관직을 삭탈하고 먼 곳에 귀양보냈다.
○ 왜(倭)가 경양(慶陽)지금 직산(稷山)의 속현(屬縣)이다. 을 침구(侵寇)하자 양광도 순문사(楊廣都巡問使) 한 방언(韓邦彦)이 그들과 싸워 패하였다.

하4월 찬성사(贊成事) 안사기(安師琦)가 죄가 있어 자살했다.
김의(金義)의 종자(從者)가 오자 이인임(李仁任)ㆍ안사기가 그를 후하게 대접하였다. 박상충(朴尙衷)이 상소하기를,
“김의가 명(明)의 사신을 죽인 죄는 의당 문책하여야 하는데도, 재상이 김의의 수행원을 매우 후하게 대접하니, 이는 안사기가 김의를 사주(使嗾)하여 사신을 죽인 형적이 이미 드러난 것입니다. 이제 만일 그 죄를 다스리지 않으면 화(禍)가 이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하므로, 우(禑)가 명하여 안사기를 하옥(下獄)시키니, 안사기가 스스로 목을 찔러 죽자, 이어 머리를 베어 효시(梟示)하였다. 이인임이 말하기를,
“김의를 원(元)에 보낸 자는 강순룡(姜舜龍)ㆍ조희고(趙希古)ㆍ성대용(成大庸)이다.”
하여, 모두 먼 곳에 귀양보냈다.
○ 충정왕(忠定王)을 태묘(太廟)에 부(祔)하였다. 문정공(文貞公) 이암(李嵓)과 문충공(文忠公) 이인복(李仁復)을 배향(配享)하였다.

5월 안동 부사(安東府使) 이보림(李寶林)을 발탁하여 대사헌(大司憲)으로 삼았다.
보림은 이제현(李齊賢)의 손자로 정사(政事)하는 재주가 있었다. 일찍이 남원부사(南原府使)로 있을 적에, 부세(賦稅) 날짜가 너무 급하여 미처 판출(辦出)하지 못해서 백성들이 혹 파산(破産)할 지경까지 이르렀는데, 마침 포세(逋稅 바치지 아니한 조세. 미납세)를 징수하여 베[布] 약간을 모아 안렴사(按廉使)에게 아뢰자, 안렴사가 그를 가상히 여겨 또 베를 내어 도와주었다.
보림은 송사(訟事)를 잘 처결하였는데, 노비송(奴婢訟)의 경우, 관(官)에서 한 사람당 베 한 필씩을 받아 총 6백 50필을 모아 향교(鄕校)의 삼반(三班)에서 각기 한 사람씩을 골라 그를 맡게 하여 현(縣)의 긴급 수용(需用)에 공급하도록 하고, 부리(府吏)들에게 주의시켜 다른 데는 일체 쓰지 못하게 하였다. 또 끊이지 않는 손님 접대로 말미암아 거두어 위자(委積)하는 일 때문에 백성들이 매우 고통스럽게 되자, 또 안렴사에게 아뢰어 베를 얻어 쌀 약간을 팔았으며, 예부터 내려오던 둔전(屯田)이 있었는데 방자한 아전들이 이를 농간(弄奸)하므로, 보림이 몸소 나가서 그 일을 살피니 아전들이 감히 속이지 못하였다. 쌀 2백 석과 콩팥 1백 50석을 얻어 나누어주고 거두어들이는 데에 법을 세워 본전(本錢)은 두고 이자(利子)만 쓰며, 새로 개간한 밭이 72석을 수확할 만하였는데, 이것으로 위자를 공급하고 이름하여 ‘제용재(濟用財)’ 라 하니, 이로부터 백성들의 무리한 부세가 없어졌다. 이 대문은 《목은집(牧隱集)》에서 나온 말이다. 그가 부임한 곳에 정사가 엄격하고 공명하므로, 드디어 이 직책에 발탁된 것이다. 우(禑)가 그를 인견(引見)하고 술을 주며 이르기를,
“헌부(憲府)는 국가의 이목(耳目)이니 삼갈지어다.”
하였다.
○ 북원(北元)의 사신이 오자 사람을 보내어 국경(國境)에서 사례하여 돌려보내고 전의부령(典儀副令) 정도전(鄭道傳)을 유배하였다.
이에 앞서 이인임(李仁任)이, 북원이 곧 탈탈불화(脫脫不花)를 들여보낼 것이라는 말을 듣고, 백관(百官)과 효사전(孝思殿)에서 회맹(會盟)하고 북원에 글을 바치려 하였는데 그 글에,
“원자(元子) 우(禑)가 이미 왕위를 이어받았는데, 탈탈불화가 망령되이 다른 마음을 먹고 있으니 금지하여 주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좌대언(左代言) 임박(林樸), 전교령(典校令) 박상충(朴尙衷) 및 정도전은,
“선왕(先王)께서 계책을 결정하여 남쪽의 명(明)을 섬겼으니, 이제 북쪽의 원(元)을 섬기는 것은 부당하다.”
하고 서명(署名)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북원이 사신을 보내와 말하기를,
“백안첩목아왕(伯顔帖木兒王 공민왕(恭愍王)을 가리킨다)이 우리를 배반하고 명에 붙었기 때문에 너희 나라의 임금 죽인 죄를 용서한다.”
하였다. 그러자 이인임ㆍ경복흥(慶復興)ㆍ지윤(池奫)이 사신을 맞으려 하니, 삼사좌윤(三司左尹) 김구용(金九容), 전리총랑(典理摠郞) 이숭인(李崇仁), 응교(應敎) 권근(權近) 및 정도전(鄭道傳)이 도당(都堂)에 글을 올려 아뢰기를,
“만일 북원의 사신을 맞는다면 온 나라 신민(臣民)이 모두 난적(亂賊)의 죄과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뒷날 무슨 면목으로 현릉(玄陵)을 지하(地下)에서 뵙겠습니까?”
하였으나, 인임 등이 물리쳐 받아들이지 않고, 정도전으로 하여금 원사(元使)를 맞게 하자, 도전이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사신을 목베어 올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포박하여 명으로 보내겠다.”
하며, 언사가 매우 불손하므로, 인임 등이 노(怒)하여 정도전을 회진(會津)으로 귀양보냈다. 이어 대사성(大司成) 정몽주(鄭夢周)가 글을 올려 아뢰기를,
“우리 나라가 바다 밖에 궁벽하게 있어서, 우리 태조(太祖)가 당(唐) 말기에 일어나면서부터 중국을 예(禮)로 섬겨 왔는데, 그 섬기는 것은 오직 천하의 의주(義主)를 따를 뿐이었습니다. 지난번에 원씨(元氏)가 북으로 파천(播遷)되고 명이 일어나자, 우리 승하하신 왕 공민(恭愍)께서는 분명히 천명(天命)을 알고 명에 표문(表文)을 올려 신하라고 일컬었습니다. 그리하여 황제께서 가상하게 여겨 왕의 작위로 봉하였고, 하사하는 것과 바치는 것이 서로 연달은 지가 지금 6년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금상(今上 우(禑)를 가리킨다)이 즉위하던 처음에 적신(賊臣) 김의(金義)가 천사(天使 명 나라 사신을 말함)를 전송하다가 도중에서 제멋대로 천사를 죽이고, 반(叛)하여 북원으로 들어가 원(元)의 여당(餘黨)과 함께 심왕(瀋王)을 〈고려에〉 들여보내려고 꾀하였으니 죄악이 더없이 큰데, 국가에서는 김의의 죄를 묻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재상 김서(金湑)를 시켜 북원에 조공(朝貢)을 바쳤습니다. 오계남(吳季男)은 국경을 지키는 신하로서 제마음대로 정료위(定遼衛) 세 사람을 죽였고, 장자온(張子溫)은 김의의 일행인데 정료위까지 가지도 않고 공공연하게 환국하였으나 또 내버려두고 불문에 붙였으며, 이제 북원 사신이 와서도 대신을 보내어 국경에 영접하기로 의논하고 곧 말하기를 ‘북원의 노여움을 격발시키지 않아서 군사를 늦추게 하려는 것이다.’ 합니다만, 대저 원씨가 나라를 잃고 멀리 와서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은, 한번 배불리 먹고 잠깐 동안이라도 생명을 연장하려 함이니, 말로는 왕을 들여보낸다 하나 실상은 자기 이익을 도모함이어서, 그들을 거절하면 우리의 강한 것을 보이는 것이요, 섬기면 도리어 그들의 뜻을 교만하게 만드는 것이니, 군사를 늦추려는 것이 실상은 재촉하여 불러들이는 격이 될 것입니다.
듣건대, 그 조서(詔書)에 우리에게 대역(大逆)의 죄를 씌우고 이어 용서하였다 하는데, 우리가 본디 죄가 없는데 무엇을 용서한다는 말입니까? 국가에서 만일 북원의 사신을 잘 대접하여 보낸다면, 이것은 온 나라 신민이 사실도 없이 스스로 대역의 이름을 뒤집어 쓰는 것이니, 신하된 자로서 차마 당할 수 있는 일입니까? 또 더구나 명의 조정에서 처음에 김의의 일을 듣고 이미 우리를 의심하고 있을 것인데, 또 원씨와 서로 통한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우리에게 ‘사신을 죽여 적(敵)을 편들었다.’고 할 것입니다. 만일 죄를 문책하는 군사를 일으켜 바다와 육지로 아울러 나온다면 무슨 말로 대답할 것입니까? 작은 적의 군사를 늦추려다가 실상은 천하(天下 명 나라를 가리킨다)의 군사를 일으키게 하는 것입니다. 사리가 매우 분명하여 사람이 깨닫기 쉬우니, 인심이 흉흉하여 다른 변이라도 생길까 염려됩니다.
바라옵건대, 전하(殿下)께서 영단을 내리시어 원의 사신을 잡아두고 원의 조서를 거두며, 오계남(吳季男)ㆍ장자온(張子溫)ㆍ김의가 데리고 갔던 자를 포박하여 명의 서울로 보내면, 우리의 애매한 죄가 변명하지 않아도 저절로 밝혀질 것입니다. 그래서 정료위(定遼衛)와 약속하여 군사를 양성해서 시기를 보아 북으로 쳐들어간다고 소리치면, 원씨(元氏)의 남은 무리들이 자취를 감추고 멀리 도망해서 국가의 무궁한 복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박상충도 글을 올려 매우 간절하게 말하였다. 이에 찬성사(贊成事) 황상(黃裳), 좌부대언(左副代言) 성석린(成石璘)을 보내어, 강계(江界)에 가서 원의 사신을 위로하여 돌려보내게 하였다.
도전(道傳)은 정운경(鄭云敬)의 아들인데, 문학(文學)으로 일컬어진 사람이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일찍이 우리 태조를 따라 동북면(東北面)에 가서 태조의 밝고 엄숙한 호령(號令)과 정제(整齊)한 군오(軍伍)를 보고는, 태조에게 다가와서 은밀히 말하기를,
“훌륭합니다. 이 군사를 가지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하자, 태조가,
“그게 무슨 말인가?”
하니, 도전이 속여 말하기를,
“동남방(東南方)에 가서 왜(倭)를 쳐야 합니다.”
하였다. 이로부터 천명(天命)이 어디에 있다는 것을 알고 빌붙을 뜻이 있었다.
【안】 예부터 국가가 거의 망할 때가 되면 반드시 일종의 소인(小人)이 있어 나라를 망쳐버리는데, 그 정상(情狀)은 동일하지 않다. 임금의 뜻을 엿보아서 그 뜻에 영합(迎合)하기만을 오로지 힘써, 한때의 권위와 총애를 도적질하는 것이 본디 일반적인 소인의 태도이지만, 그 중에는 또한 인(仁)을 빌어 사기(詐欺)를 행하고 몸을 삼가서 명예를 낚으며, 묵묵하게 세태(世態)를 헤아려서 은밀하게 화권(化權)으로 옮겨가는 자는 대개 소인 중의 웅걸(雄傑)이기에 갑자기 그를 판단할 수 없다. 정도전은 유술(儒術)로 진용(進用)된 사람으로 당세에 명망이 높았으니, 공양왕(恭讓王)이 그의 공로를 책(策)한 교서(敎書)에서,
“학문은 천인(天人 천리(天理)와 인사(人事))을 통달하였고 식견은 고금(古今)을 관통하였으며, 염락(濂洛)의 도(道)를 제창하였고 이단(異端)의 설을 배척하였으며, 퇴폐한 정사를 혁파하고 예악(禮樂)을 닦아 밝혔으니, 참으로 왕좌(王佐)의 재목이다.”
하였는데, 이 말은 대개 사실이다. 이때를 당하여 그 누가 도전을 어질다고 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나라를 팔아서 사욕을 채우려는 마음이 그의 가슴속에 쌓여 있음을 어찌 알았으랴. 슬프다, 공자가 말하기를,
자색(紫色)이 주색(朱色)을 빼앗고, 정성(鄭聲)이 아악(雅樂)을 어지럽히는 것을 미워한다.
하였으니, 바로 도전을 이름이구려. 신문정(申文貞 문정은 신흠(申欽)의 시호)이 말하기를,
“최영(崔瑩)이 죽고 나서는 고려에 사람이 없어졌고, 정도전이 들어가고 나서는 고려에 적(賊)이 생겼다.”
하였으니, 참으로 그렇구나.
6월 큰비가 와서 삼각산(三角山)이 무너졌다.
추7월 초하루(기미)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 간관(諫官) 이첨(李詹)ㆍ전백영(全伯英)을 옥에 가두었다가 장류(杖流)하고, 평리(評理) 전녹생(田祿生),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박상충(朴尙衷)을 죽였으며, 대사정 정몽주(鄭夢周) 및 김구용(金九容)ㆍ이숭인(李崇仁)ㆍ권근(權近)ㆍ정도전(鄭道傳) 등을 아울러 유배하였다.
우헌납(右獻納) 이첨, 좌정언(左正言) 전백영이 상소하여 이인임(李仁任)ㆍ지윤(池奫)을 베죽이자고 청하였는데, 상호군(上護軍) 우인열(禹仁烈), 호군(護軍) 한리(韓理)가 이인임의 뜻에 아부하여 글을 올려 아뢰기를,
“간관이 재상을 논핵하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하여, 이에 이첨과 백영을 옥에 가두고 최영(崔瑩)과 지윤을 시켜 국문하자, 진술하는 말이 박상충과 전녹생에게 관련되었으므로 최영이 상충과 녹생을 매우 참혹하게 국문하였다. 인임이 말하기를,
“이 무리들을 죽일 필요는 없다.”
하고 귀양보냈는데, 상충과 녹생은 모두 길에서 죽었다. 녹생은 문무 겸전(文武兼全)의 재주가 있었고, 상충은 강개(慷慨)하여 큰뜻이 있었으며 널리 배웠고 글을 잘 지었으며, 행신(行身)하는 데나 관직에 있을 때 반드시 올바른 도리로 하였건만, 모두가 죄없이 죽으니 사람이 애석하게 여겼다. 인임은 또 정몽주 등 여러 사람이 자기를 해치려고 꾀했다 하여 아울러 유배하였다.
【안】 《송경지(松京志)》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이운재(李雲栽)는 인임의 조카였는데, 인임의 행위에 분개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산에 들어가, 자신은 물들지 않겠다는 뜻을 보였다.
○ 항복한 왜(倭)를 꾀어 죽이려다 성사(成事)하지 못하였다.
이에 앞서 왜인 등경광(藤經光)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여 순천(順天)ㆍ연기(燕岐) 등 처에 나누어 살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전라도 원수(全羅道元帥) 김선치(金先致)에게 일러 그들을 꾀어 죽이라고 하였다. 김선치가 크게 주식(酒食)을 갖추어 먹이고 기회를 타서 죽이려 하였는데, 모의가 누설되어 등경광은 도망쳐버리고 겨우 3명만을 잡아 죽였다. 이러기 전에는 왜구들이 사람과 가축을 죽이지 않았는데, 이 뒤부터는 왜구들이 들어오기만 하면 남김없이 마구 무찔러 죽이므로, 바닷가의 고을들이 쓸쓸하게 텅 비어버렸다.

8월 왜(倭)가 낙안(樂安)ㆍ보성(寶城)에 침구하였다.
○ 도성(都城) 안의 오부(五部)의 호수(戶數)를 개정(改定)하였다.
무릇 집 칸수 20칸 이상을 1호(戶)로 하여 군정(軍丁) 1명을 내고, 칸수가 적으면 혹 4~5가(家)를 아울러 1호로 하였다.
최씨(崔氏)는 이렇게 적었다.
태조(太祖)가 6위(衛)를 설치하였는데, 위마다 38영(領)이 있고, 영마다 각기 1천 명씩이어서 상하(上下)가 서로 얽히어, 당(唐) 때 설치했던 부위병(府衛兵)의 남은 의의가 있었다. 그런데 숙종(肅宗)이 여진(女眞)을 삼킬 속셈으로 별무반(別武班)을 설치하여, 이서(吏胥)ㆍ상고(商賈)ㆍ복예(僕隸)ㆍ승려[緇髠] 등을 다 예속시켰으니, 벌써 옛 제도에 맞지 않았다. 그런데 의종(毅宗)ㆍ명종(正宗) 이래로는 군정(軍政)이 권신(權臣)ㆍ간신(奸臣)에게 돌아가서, 갑자기 군대를 조발(調發)하게 되면 문무관의나 무관의 산직(散職), 백정(白丁)ㆍ잡색(雜色)ㆍ천예(賤隸)ㆍ가동(家僮) 등을 현우(賢愚)도 따지지 않고 모두 군오(軍伍)에 편입시키며, 혹은 집칸수의 많고 작은 것으로 군정을 내는 데에 차등을 두었다. 군정(軍政)이 이토록 닦아지지 않았으니, 아무리 외침을 방어하고 나라를 보전하려 한들 되겠는가?
○ 지윤(池奫)을 서북면 도체찰사(西北面都體察使)로 삼았다.
이성만호(泥城萬戶)가 급보(急報)하기를,
“심왕(瀋王)이 김의(金義) 및 진봉사(進奉使) 김서(金湑)를 거느리고 벌써 신주(信州)에 도착하였다.”
하므로, 이에 임견미(林堅味)를 서경 상원수(西京上元帥)로, 양백연(楊伯淵)ㆍ이원계(李元桂)를 안주 원수(安州元帥)로, 나세(羅世)ㆍ박보로(朴普老)를 서해도 원수(西海道元帥)로, 조인벽(趙仁璧)ㆍ변안열(邊安烈)을 동북면 원수(東北面元帥)로 삼아서 제도(諸道)의 군사를 징발하여 지윤이 총지휘하도록 하였다. 지윤은 또, 군사를 징발하기를 청하자 이희필(李希泌)을 도지휘사(都指揮使)로 삼아서 군사를 거느리고 후원해 주도록 하고, 여러 절의 주지승(住持僧)으로부터 전마(戰馬) 각 한 필씩을 받고, 또 여러 절의 전조(田租)를 받아 군비(軍備)에 충당하였으며, 이임(李琳)을 서북면 선위사(西北面宣慰使)로 삼아 사변을 시찰하게 하였다.

9월 왜적이 자연도(紫烟島) 등 섬 지대에 침구하였다.
왜적의 선박이 덕적도(德積島)ㆍ자연도 두 섬에 크게 모여들었다. 이때에 장수와 군사가 모두 북쪽 정벌에 나갔으므로, 이에 각 방리(坊里)와 여러 능호(陵戶)의 군사를 모집하고, 또 양광도(楊廣道)ㆍ전라도(全羅道)ㆍ경상도(慶尙道)의 군사를 징발하여, 우리 태조 및 판삼사(判三司) 최영(崔瑩)에게 거느리게 해서, 동서강(東西江)에 군사의 위엄을 보여서 방비하게 하였다가 얼마 후 여러 도의 군사들을 돌려보냈다.

동10월 하윤원(河允源)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윤원은 ‘그른 줄을 알면서도 잘못 결단하면 하늘이 벌을 내린다. [知非誤斷皇天降罰]’는 여덟 글자를 푯말에 써서 대(臺)에 나갈 때마다 반드시 그것을 뒤에다 걸어 놓고 사무를 보곤 하였는데, 얼마 후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여 시묘(侍墓)하다가 죽었다.

11월 제주(濟州)에 반란이 일어나, 안무사(安撫使) 임완(林完),ㆍ목사(牧使) 박윤청(朴允淸)을 살해하였다.
제주 사람 차현유(車玄有) 등이 관사(官舍)를 불지르고 임완 및 박윤청, 마축사(馬畜使) 김계생(金桂生) 등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그 고을 사람 문신보(文臣輔), 성주(星主) 고개실(高開實) 등이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여 그들을 베었다.
○ 흰 무지개가 해를 꿰었다.
○ 좌정언(左正言) 김자수(金子粹)를 유배하였다.
이때에 왜적이 김해(金海)ㆍ대구(大邱)를 침구하자, 도순문사(都巡問使) 조민수(曺敏修)가 적과 싸워 연이어 패했는데, 다시 밀성(密城)에서 적을 요격(邀擊)하여 적 수십 급(級)을 베었다. 이리하여 우(禑)가 중사(中使)를 보내어 옷과 술을 하사하고, 김자수에게 명하여 회답하는 교서(敎書)를 지으라고 하자, 자수가 민수는 공보다 죄가 더 크다는 것으로 사양하니, 우가 노하여 자수를 옥에 가두고 지윤(池奫)을 명하여 국문하게 하였다. 지윤이 자수에게 위지(違旨)의 죄를 적용하려 하니 자수가 말하기를,
“선왕이 간관(諫官)을 둔 것은 임금의 잘못을 보완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왕의 말이 옳지 않을 때에는 간관이 간쟁하는 것이다. 바라건대, 제공(諸公)은 국가가 간관을 둔 뜻을 살피시오.”
하였는데, 지윤은 장류(杖流)시킬 것을 의논하였다. 김속명(金續命)이 들어가 태후(太后)에게 아뢰기를,
“간관이 비록 뜻을 거스르더라도 죄를 중하게 논하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하여, 곤장을 면하고 돌산수(突山戍)지금의 순천부(順天府) 동쪽 1백 70리에 있다. 로 귀양보냈다.

12월 안개가 크게 끼었다.
○ 왜구가 양광도(楊廣道)의 연해 주군을 노략질하였다.

[주D-001]신사년(1281)에 동정(東征) : 신사년은 고려 충렬왕(忠烈王) 7년으로, 원(元)의 압력에 의해 일본 정벌을 계획하였다가 이해에 원나라 장수 흔도(忻都)와 고려 장수 김방경(金方慶) 등이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합포(合浦)를 출발, 일본 정벌에 나섰으나 태풍과 질병으로 대패하고 귀환하였다. 이 뒤에도 여러 차례 동정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주D-002]염락(濂洛)의 도(道) : 성리학(性理學)을 말한다. 염은 송(宋)의 성리학자 주돈이(周惇頣)가 살던 염계(濂溪), 낙은 역시 송의 성리학자 정호(程顥)․정이(程頣)가 살던 낙수(洛水)를 의미한다.
[주D-003]자색(紫色)이 …… 미워한다 : 사이비(似而非) 유덕자(有德者)가 정덕(正德)을 지닌 사람을 가장하고, 음란한 악이 정악(正樂)을 해치는 것을 미워한다는 뜻. 주색(朱色)은 정색(正色), 자색은 간색(間色)이며, 정성(鄭聲)은 정나라 음악인데 매우 음란하다. 《論語 陽貨》
[주D-004]당(唐) …… 부위병(府衛兵) : 부병제(府兵制)를 말한다. 부병 제도는 각 고을에서 농한기를 이용하여 군사를 훈련하였다가 나라에 변란이 있으면 출정시키던 제도. 부병의 시초는 서위(西魏) 때 《주례(周禮)》를 본떠 전국에 6군(軍)을 두고, 6군을 다시 1백 부(府)로 나누어 낭장(郞將)으로 거느리게 하였다. 당나라는 전국 10도(道)에 6백 34부를 두었다.

권근(權近)

공의 휘는 종원(宗源)이며, 자는 사청(嗣淸)이고 성(姓)은 안(安)씨니, 관향은 순흥(順興)이다. 고(考)의 휘는 축(軸)이며, 호는 근재선생(謹齋先生)이니, 원(元) 나라의 제과(制科)에 급제하였다. 고려에 벼슬하여 도첨의 찬성사(都僉議贊成事)가 되었다. 졸(卒)하니, 시호를 문정(文貞)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관동 존무사(關東存撫使)로 있을 때 지은 《와주집(瓦注集)》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조(祖)의 휘는 석(碩)이니, 급제하였다. 증조의 휘는 희서(希諝)이니 본부 호장(本府戶長)이다. 덕을 쌓아 시용(施用)하지 아니하고 후손들에게 경사를 끼쳤으니, 문정공(文貞公)이 학문에 힘써서 집을 일으키고 지위는 재상에 이르렀다. 감천군부인(甘泉郡夫人) 문씨(文氏)에게 장가들었으니, 검교군 기감(檢校軍器監) 귀(龜)의 딸이다. 태정(泰定) 을축년 5월 계유일에 공(公)을 낳았다. 공은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지혜가 있더니, 차츰 자라서는 글을 읽을 줄 알며, 장난하며 노는 것을 일삼지 않고 행동하는 것이 여러 아이들과 다르니 식자들은 그가 반드시 귀하게 될 것을 알았다. 지정(至正) 신사년에 공의 나이 17세였다. 좌사(左使) 김광재(金光載)가 성균시(成均試)의 시관이 되었으며, 시중(侍中) 이암(李嵒), 찬성(贊成) 정을보(鄭乙輔)가 진사시를 맡아보았는데, 공이 일거에 잇달아 그 시험에 급제하였다. 임오년 초에 권전교 교감(權典校校勘)이 되었다가 3년이 지난 뒤에 드디어 정식으로 전교 교감이 되었다. 을유년에 뽑히어 예문춘추관에 들어가 이검열(二檢閱)이 되었다. 전부터 이 관(館)에 있는 자의 거의 다 소탈한 것을 서로 숭상하였는데, 공이 예법으로 다스리니 관 안이 숙연해졌다. 병술년에 거듭 수찬ㆍ공봉(供奉)의 벼슬을 더하였다. 품계가 찼으므로 당연히 전임하여야 하는데, 동료인 심동로(沈東老)가 나이는 많으나 직위가 낮으므로 공이 양보하여 먼저 전임할 수 있게 하였다. 문정공(文貞公)이 듣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겸양하는 것은 덕의 첫째이다. 내가 남에게 양보하면 남이 누가 나를 버리겠는가. 우리 가문에 사람이 있으니, 거의 더욱 창성하겠구나.” 하였다. 1년 뒤에 드디어 삼사 도사(三司都事)에 임명되었다. 이 해부터 유비창 부사(有備倉副使), 사복승(司僕丞), 공조령(供造令)으로 전임되었는데, 있는 곳마다 직무를 거행하여 칭찬과 명예가 더욱 널리 퍼졌다. 신묘년에 공민왕이 즉위하여 공에게 도관 좌랑(都官佐郞)을 제수하였다. 임진년에 군부 좌랑(軍簿佐郞)에 전임되고, 계사년에는 전법 정랑(典法正郞)에 발탁되었다. 그때 전지와 노예의 형송(刑訟)이 모두 전법(典法)에 모여들었는데, 공이 공평하고 마땅하게 재결하니, 사람들이 그의 밝음을 칭찬하였다.
갑오년 가을에 공의 나이가 30세였을 때에 뽑히어 경상도 안렴사가 되었다. 임금께 하직하던 날, 임금이 백성다스리는 방법을 물으니, 공이 여러 다른 안렴사들 보다 먼저 자세하고 절실하게 진술해 아뢰니, 임금이 좋다고 칭찬하였는데, 과연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있었다. 그 해 겨울에 판도(版圖)에 전임하였으며, 을미년에는 군부 정랑(軍簿正郞)으로서 여흥(呂興)의 군수가 되어 나가게 되었으나 어머니의 상을 만났으므로 부임하지 아니하였다. 병신년 여름에 임금이 원후(元后) 기씨(奇氏)의 일족이 세력을 믿고 불법한 행동을 하자 목을 베고, 공을 기용하여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 삼아 국법과 기강을 떨치게 하였다. 정유년에 기거랑 지제교(起居郞知製敎)가 되었다가 봉사(封事)를 올려 예부 낭중(禮部郞中)에 개임(改任)되었다. 무술년에 이부(吏部)에 전임하였다. 그때에 정방(政房)을 폐지하고 전선(銓選)하는 일을 이병부(吏兵部)에 귀속시켰는데, 공이 그 사무를 맡아서 권귀(權貴)에게 아부하지 아니하니, 동료들이 두려워하고 감복하였다. 경자년에는 품계가 조산대부 시어사(朝散大夫侍御史)에 이르렀다. 신축년 가을에는 양광도(楊廣道)의 안렴사로 나갔다. 그 해 겨울에 홍건적(紅巾賊)이 송경(松京)을 침범하니 공민왕이 남쪽으로 파천하게 되었으므로, 공이 먼저 충주(忠州)에 가서 임금께 바치는 물품을 준비하게 되었다. 그때 임금의 측근에 있는 자들이 공사(公事)로 말미암아 공에게 원한을 품은 자가 있어 임금에게 참소하기를, “안렴사 종원(宗源)이 충주에 도착하였다가 이미 재를 넘어 달아났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그 말을 믿고 중사(中使)를 보내어 잡아오게 하였다. 사자(使者)가 충주에 이르러 공이 관(館)에서 물품을 준비하는 것을 보고, 그가 모함 당했음을 알고 함께 잡아가지고 와서 그 사유를 보고하니, 임금이 놓아주고 불문에 붙였다. 좌우에 있는 자들이 또 다시 참소하여 드디어 구속되었으나 재상이 죄가 아니라는 것을 왕에게 사뢰니, 지청풍군사(知淸風郡事)로 벼슬이 낮추어졌다가 한 해를 지난 뒤에 파면되었는데, 그곳 백성들이 지금까지 사모한다. 계묘년에 도관 총랑(都官摠郞)이 되고, 갑진년에는 전법 총랑(典法摠郞)에 전임하였다.
신돈(辛旽)이 국가의 정권을 제 마음대로 휘두르게 되니, 그때 사람들이 그를 영상(領相)이라고 부르면서 사대부들이 다투어 쫓아가서 아부하였는데 한 집정 대신(執政大臣)이 공에게 말하기를, “모(某) 등이 공을 영상으로 추천하였으니, 간관(諫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속히 가서 뵙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공은 사양하며 말하기를, “나는 본래 어설프고 게을러서 세력에 붙쫓는 것은 내가 잘 할 줄 모릅니다.” 하니, 집정(執政)이 부끄럽게 여기고 도리어 공을 참소하여 강릉 부사(江陵府使)가 되어 나갔으나, 인자한 정사가 있어서 얼마 되지 않아 체대(遞代)되었다. 공은 이때부터 한가하게 살기를 7ㆍ8년 동안이나 하면서 종적을 감추고 나오지 아니하며 시서(詩書)로 스스로 즐겼다. 홍무(洪武) 신해년에 신돈이 복주(伏誅)되자 임자년 2월에 다시 사헌 시사(司憲侍史)가 되고 겨울에 전교령(典校令)에 가자(加資)되었으며, 계축년에 우사의 대부 지제교 직보문 충춘추(右司議大夫知製敎直寶文充春秋)에 천관(遷官)되었고, 갑인년에 좌사의(左司議)로 개임(改任)되었다. 을묘년에 성균대사성,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를 역임하고, 통헌우상시(通憲右常侍)에 가자되었다. 병진년 봄에 대사헌에 임명되니, 품계는 봉익대부(奉翊大夫)였다. 가을에 밀직사(密直司)에 들어가서 제학이 되고 종전대로 대사헌을 겸임하였다가 조금 뒤에 또 밀직부사로 개임되었다. 정사년에 동지(同知)로 가자되고, 무오년에 첨서(簽書)로 이임하였다. 기미년에는 품계가 광정대부(匡靖大夫)로 높여지고 판숭경부사(判崇敬府事)가 되었다. 얼마 안 되어 파직하고 중대광 흥녕군(重大匡興寧君)을 봉하였다. 경신년에는 상의 정당(商議政堂)으로서 다시 대사헌을 겸임하였다. 신유년에는 순성보조공신(純誠補祚功臣)의 호(號)를 받았으며, 문하평리 대사헌(門下評理大司憲)을 전대로 역임하였다. 임술년 봄에 또 흥녕군(興寧君)을 봉하고 순성익대보리공신(純誠翊戴輔理功臣)의 호를 더하였다. 그 해 여름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유량(柳亮) 등 33명을 뽑으니, 그때 세상에서 선비를 얻었다고 칭찬하였다. 유량은 지금 중추(中樞)가 되었으며, 나머지 사람들도 다 현달하게 되었다. 병인년에 정당문학 대진현 지춘추(政堂文學大進賢知春秋)에 임명되었다가, 정묘년에 파직하고 다시 군(君)을 봉하였다. 무진년 정월에 시중 최영(崔瑩)이 정권을 잡게 되어 탐오한 권신(權臣)들을 벨 적에, 공을 청렴하고 근엄하다고 하여 문하찬성사 판전공(門下贊成事判典工)을 제수하고 전선(銓選)의 일을 주관하게 하니, 공이 사양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6월에 고쳐서 상의(商議)가 되고, 8월에는 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가 되어 그대로 전선을 관장하였으며, 10월에는 예문관 대제학으로서 판상서사사(判尙瑞司事)를 겸임하고 또 판상서를 겸임하였으니, 즉 전선사무를 주관하는 벼슬이다. 기사년 6월에 중대광 문하찬성사 판판도(重大匡門下贊成事判版圖)에 가자되니, 세상에서 이상(二相)이라고 일컬었다. 봉명사신(奉命使臣)으로서 중국에 가서 성절(聖節)을 축하하고, 겨울에 돌아왔다. 공양군(恭讓君)이 임금이 되어 다시 대예문감 춘추(大藝文監春秋)에 임명하였으며, 경오년에 판삼사사 대우문 영서운관사(判三司事大右文領書雲觀事)에 임명되고, 신미년에는 올리어 삼중대광 흥녕부원군(三重大匡興寧府院君)을 봉하였다. 매양 스스로 벼슬과 지위가 성대하고 과만하다고 하여 사양하였다. 임신년 7월에 지금의 우리 주상께서 즉위하여, 공이 국초(國初)의 원로(元老)로서 맑은 덕과 무거운 명망이, 넉넉히 앉아서 선비와 속인을 진정시킬 수 있다고 하여 특진보국숭록대부 영삼사사 집현전대학사(特進輔國崇祿大夫領三司事集賢殿大學士)를 제수하였다. 계유년에 판문하부사가 되니, 위계(位階)와 훈등(勳等)과 관직(館職)은 전과 같다. 갑술년에 공의 나이가 이미 70인데, 2월에 다시 봉명사신으로 중국에 가게 되었다. 연산참(連山站)에 이르니, 요동 도사(遼東都司)에서 중국 조정의 명령이 있다고 일컫고 막으므로 돌아왔다. 3월 24일에 병이 들어 집에서 졸(卒)하였다. 부음을 듣고 임금이 매우 슬퍼하여 조회를 파하였다. 문하좌시중 평양백(門下左侍中平壤伯) 조준(趙浚)을 보내어 교서(敎書)를 가지고 가서 빈소에 치전(致奠)하고 부의(賻儀)를 많이 하였다. 봉상시에서 시호를 문간(文簡)이라고 하였다. 담당관이 의식(儀式)과 호위(護衛)를 갖추어 5월 경신일에 임진현 서국동(臨津縣瑞國洞)에 장사하였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대범하고 중후하며, 풍채와 신수가 맑고 밝았다. 몸가짐을 신중하게 하고 관직에 있어서는 부지런하게 하였다. 집에 있어서는 이익을 말하지 아니하며, 일에 당면하여서는 침착하고 조용하였다. 일찍이 빠르게 하는 말과 갑자기 당황해 하는 얼굴빛을 짓는 일이 없었으며, 남을 대접하는 말과 갑자기 당황해 하는 얼굴빛을 짓는 일이 없었으며, 남을 대접하는 데는 지위가 높아 갈수록 더욱 겸손하였다. 또 남의 과실을 말하지 아니하며 선행이 있는 것은 칭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매양 자제들을 타이를 적에는 망령된 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였다. 맏아들 중온(仲溫)이 일찍이 안동(安東)의 윤(尹)이 되었을 때에 친히 훈계 하는 말 수십 조(條)를 써서 주었는데, 매우 자세하고 또 절실하게 해야 할 법도를 열거하였다. 집 뒤 언덕에 정자를 짓고 쌍청(雙淸)이라는 현판을 달고 인하여 스스로 쌍청이라고 호하였다. 손님이 오면 반드시 술대접을 하였으나 풍성하고 사치한 것에 힘쓰지 않았으며, 거문고와 비파의 풍악을 즐겨하지 아니하고, 오직 예와 마음으로 흡족하게 대접할 뿐이었다. 두 번이나 전선(銓選)을 관장하였으나 사사로이 청탁하는 것을 채용하지 않았으며, 대간에 출입하였으나, 힘써 일의 대체를 따를 뿐 자잘한 것을 일삼지 아니하였다. 여러 대의 정승을 역임하였으나 자기의 자제들을 위하여 은전(恩典)이나 혜택을 요구하지 아니하였다. 삼가 기성(旣成)의 법을 지키며 분분하게 변경하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의논은 관후하여서 재상의 체모가 있었다. 밀직 조운흘(趙云仡)이 공보다 20여 년 뒤에 강릉부사가 되었는데, 그곳의 부로(父老)들이 공을 사모하여 잊지 못하는 것을 알고 산 사람을 위한 사당을 짓고 공의 초상을 그려서 걸어 두었었다. 공이 몰(歿)하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부음을 들은 자는 서로 조상하면서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공의 끝과 시초는 능히 완전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공은 봉익대부 우상시(奉翊大夫右常侍) 김휘남(金輝南)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1녀를 낳았다. 장자는 곧 중온(中溫)인데 봉익대부 밀직제학 집현관제학 상호군(奉翊大夫密直提學集賢館提學上護軍)이다. 판도 판서(版圖判書) 김안리(金安理)의 딸에 장가들었다. 자식이 없었으며 공보다 먼저 몰하였다. 다음은 경량(景良)인데 지금 자헌대부 서북면도순문사동 중추원사(資憲大夫西北面都巡問使同中樞院事)가 되었다. 일찍이 밀직으로서 양광도 관찰사(觀察使)를 지냈는데 명성과 공적이 있었다. 임금이 서북 지방을 중시하여 잘 다스릴 인재를 뽑아 배치하고자 하였으나, 그러한 사람을 구하기 어려워하였는데, 조정에서 공을 천거하였으므로 특별히 기용하여 다시 이 명령이 있었던 것이다. 삼남(三男)은 경공(景恭)인데 추충익대개국공신 자헌대부 흥녕군(推忠翊戴開國功臣資憲大夫興寧君)이다. 대사헌으로서 역시 전라도 관찰사였다. 이 세 아들이 다 과거에 급제하였으므로 어머니 김씨를 경녕택주(慶寧宅主)에 봉하고, 해마다 나라에서 내리는 녹봉을 받았는데, 지금은 흥녕군(興寧君) 좌명(佐命)의 공으로 계속하여 봉작하니 녹봉이 변함이 없었다. 사남(四男)은 경검(景儉)인데, 가선대부 공조전서(工曹典書)이다. 대간을 역임하였으며 주군(州郡)을 안찰하였는데 그 역시 인재로 일컬어진다. 여러 아들이 가훈을 잘 받들어서 청렴하고 근신하며 예를 지켜서 다 아버지의 풍도가 있었다. 딸은 모관(某官) 유후(柳厚)에게 시집갔으니, 역시 단정한 사람이어서 공의 집 사위가 되기에 알맞다. 손자와 손녀가 몇이 있다. 도순문사인 차남 경량은 대방군(帶方君) 양천룡(梁天龍)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아들이 없고, 둘째 아내 정씨(鄭氏)가 아들을 낳았는데, 민수(民秀)라고 한다. 삼남인 흥녕군(興寧君)은 정당문학(政堂文學) 정사도(鄭思道)의 딸에게 장가를 들어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순(純)이라고 하는데 좌습유(左拾遺)의 벼슬에 있다. 공조 전서인 사남 경검은 청성군(淸城君) 한수(韓脩)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와 딸 다섯을 낳았으니, 아들이 이름을 민동(民同)이라고 하며 창고도 감판(倉庫都監判)의 벼슬에 있다. 딸은 예빈시승(禮賓寺丞) 김맹성(金孟誠)에게 시집갔다. 차녀는 생원 이윤상(李允商)에게 시집가고, 3녀는 봉례랑(奉禮郞) 김천(金闡)에게 시집갔으며, 4녀는 낭장 이사흠(李士欽)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사위인 유밀직(柳密直)이 아들 둘을 낳았으니, 큰아들의 이름을 기(沂)라고 하며 좌정언(左正言) 벼슬에 있다. 차남은 이름을 한(漢)이라고 하며 동부령(東部令)의 벼슬에 있다. 증손자와 증손녀 몇 명이 있다. 습유(拾遺) 벼슬에 있는 손자 순(純)이 정당문학 정문권(鄭文權)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낳았으나 다 어리다. 맏아들은 이름을 숭직(崇直)이라고 하며 다음은 숭선(崇善)이라고 한다. 외손자인 좌정언(左正言) 유기(柳沂)가 밀직(密直) 이종덕(李終德)의 딸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았으니, 큰아들은 이름을 방선(方善)이라 하고, 다음은 방경(方敬)이라고 한다.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방순(方旬)의 딸에게 재취하여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이름을 방근(方謹)이라고 한다. 외손자인 동부령(東部令) 유한(柳漢)은 대사헌 박경(朴經)의 딸에게 장가를 들어 아들 하나를 낳았다. 손녀서(孫女婿)인 예빈시승 김맹성이 딸 둘을 낳았으나 다 어리다.
장사를 지낸 다음해의 여름에 흥녕군(興寧君)이 대부인의 명령으로 근(近)에게 와서 말하기를, “우리 선공(先公)의 덕행이 사람들의 이목에 널리 전파되고 있으니 속이지 못할 것이다. 오직 인멸해 없어지지 않게 하기를 꾀하여 장차 돌에 새겨서 의탁해 전하려 하니, 그대는 오랫동안 우리 아이들과 더불어 교유하였으며, 같이 학업을 닦았으며, 벼슬도 같은 때에 하였고, 또 일찍이 우리 선공의 일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더군다나 지금 예문 춘추관에 있어서 편수의 직무를 맡고 있으니, 공의 묘에 비명을 짓는 일을 그대는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근이 글 재주가 낮고 졸렬하다고 하여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그 명(銘)은 이러하다.

우뚝 솟은 높은 산이 / 崒嵂高山
순흥을 둘러싸고 / 于興是環
맑은 기운이 모였도다 / 淑氣攸鍾
신령함이 내려 와서 / 迺降厥神
대인을 낳았으니 / 迺生碩人
온후하고도 공손하다네 / 溫溫其恭
높은 벼슬 안 끊기고 / 位冠蟬聯
70세를 장수하니 / 壽享稀年
처음도 좋거니와 끝이 더욱 아름답네 / 善始令終
아들 있고 손자 있어 / 有子有孫
높은 벼슬이 문호에 차니 / 簪履盈門
이는 모두 가르치신 공이로다 / 敎誨之功
서국의 언덕 위에 / 瑞國之原
큰 집 같은 저 무덤은 / 夏屋之墳
공의 현궁이로다 / 惟公玄宮
돌 깎아 비 세우고 / 伐石作碑
나의 글을 새기어서 / 爰刻我辭
무궁한 후세에 길이 보이노라 / 永示無窮


동사강목 제16상
을묘년 전폐왕 우(前廢王禑) 원년(명(明) 태조(太祖) 홍무(洪武) 8, 1375)


춘정월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 최원(崔源)을 명(明)에 보내어 고애(告哀)하게 하였는데, 최원이 구류되었다.
현릉(玄陵 공민왕(恭愍王)을 말한다)이 시해되고 김의(金義)가 명의 사신을 죽인 뒤부터는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감히 명에 사신을 통하지 못하였다. 대사성(大司成) 정몽주(鄭夢周)가 말하기를,
“먼저 스스로 주저하여 백성들에게 화를 끼쳐서는 안 된다.”
하였고, 전교령(典校令) 박상충(朴尙衷), 사예(司藝) 정도전(鄭道傳)도 그렇게 말하였으나, 시인(時人)들이 모두 명에 가는 것을 꺼렸는데, 최원이 말하기를,
“사직(社稷)이 편해질 수만 있다면 어찌 내 몸 한번 죽는 것을 아끼겠는가?”
하므로, 드디어 최원을 보내어 상사(喪事)를 고하고 시호(諡號)와 왕위의 승습(承襲)을 청하였었다.
○ 처음으로 서연(書筵)을 설치하였다.
전녹생(田祿生)ㆍ이무방(李茂芳)을 사부(師傅)로 삼았다. 선왕(先王)이 기르던 비둘기가 금중(禁中)에 있어 왕(王)이 항상 애완(愛玩)하였는데, 이무방이 《서경(書經)》 여오편(旅獒篇)을 진강(進講)하다가 아뢰기를,
“비둘기도 희귀한 새이니 원컨대 기르지 마소서.”
하므로, 우(禑)가 명하여 비둘기를 내버렸다. 우가 서연에 나와서 《대학(大學)》을 강독하는데 우부대언(右副代言) 윤방언(尹邦彦)에게 묻기를,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깊고 덕성스런 문왕이여! 아, 끊임없이 빛나고 공경하여 안정하시다[穆穆文王 於緝熙敬止].’고 한 말이 무슨 뜻인가?”
하였으나, 윤방언이 대답하지 못하자 우가 이르기를,
“나는 유자(儒者)라면 능히 경서(經書)를 정통했으리라고 여겼는데, 지금 고작 그 꼴인가?”
하였다.
우가 일찍이 강관(講官)을 부르자, 환자(宦者) 김현(金玄)이 아뢰기를,
“매월 날짜를 정하여 정강(停講)을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우가 이르기를,
“글 읽는 것은 시사(視事)가 아닌데 왜 폐지한단 말이냐?”
하였다.
○ 납합출(納哈出)이 사신을 보내왔다.
이때 김의(金義)가 북원(北元)에 있으면서 말하기를,
“왕이 훙(薨)하고 후사(後嗣)가 없으니 심왕(瀋王)을 받들어 왕으로 삼기 바란다.”
하자, 북원에게 드디어 심왕 고(暠)의 손자인 탈탈불화(脫脫不花)를 왕으로 봉하였기 때문에 납합출이 사신을 보내와서 묻기를,
“전왕(前王)의 아들이 없다면 지금 누가 왕위를 이어받았는가? 만일 아들이 있다면 조정에서 반드시 심왕을 보내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2월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나흥유(羅興儒)를 일본(日本)에 보내어 빙문(聘問)하게 하였다.
나흥유가 글을 올려 일본과 화친하기를 청하므로, 드디어 흥유를 통신사(通信使)로 삼아서 보내었다. 신사년(1281)에 동정(東征)한 이후부터 일본이 우리 나라와 국교(國交)를 끊었었다. 나흥유가 처음 일본 패가대(覇家臺 박다(博多))에 이르자 그곳 주장(主將)이 첩자(諜者)가 아닌가 여겨 그를 가두어 버리므로 거의 굶어 죽게 되었는데, 본디 우리 나라 진주(晋州)의 중[僧]이었던 양유(良柔)라는 자가 있어, 나흥유를 보고는 그들에게 풀어주기를 청하고 서로 화친하게 하였다. 이때 나흥유는 나이가 60세에 가까웠는데, 그가 거짓으로 말하기를,
“내 나이가 1백 50세이다.”
하자, 왜인(倭人)들이 말을 타고 잔뜩 몰려들어 구경을 하는가 하면, 화상을 그리고 찬(讚)을 지어서 주는 자까지 있었다.
○ 수령(守令) 고적(考績)하는 법을 정하였다.
토지를 개간하고, 호구(戶口)를 증가시키고, 부역(賦役)을 균평하게 하고, 사송(詞訟)을 간편하게 하고, 도적을 근절시키는 것 등 다섯 가지 일로 전최(殿最)의 기준을 삼았다.
【안】 원(元) 순제(順帝)가 수령(守令) 출척(黜陟)하는 법을 ‘호구를 증가하고, 토지를 개간하고, 사송을 간편하게 하고, 도적을 근절시키고, 부역을 균평하게 하는 것과 상평(常平)을 법도에 맞게 하는 것’ 여섯 가지 일로 정했었는데, 고려의 제도는 대개 여기서 비롯한 것이다.
○ 해[日]에 흑자(黑子)가 있었다.

3월 충혜 왕비(忠惠王妃)인 덕녕 공주(德寧公主)가 훙하자 경릉(頃陵)에 장사지냈다.
○ 환관(宦官) 윤충좌(尹忠佐)ㆍ황중길(黃中吉) 등을 원지(遠地)에 유배하였다.
이때에 우(禑)가 나이 어려 정령(政令)이 재상(宰相)에게서 나오고 환관이 제멋대로 용사(用事)하였기 때문에 간관(諫官) 유구(柳玽)ㆍ안종원(安宗源)이 도당(都堂)에 글을 올려 환관의 피해를 말하고, 충직하고 근신한 사람 10여 인을 골라서 청소하는 일에나 충당하고 나머지는 모두 파하여 보낼 것을 요청하였다. 대사헌(大司憲) 송천봉(宋天逢) 등이 또 상소(上疏)하여, 윤충좌가 권세를 제멋대로 하여 뇌물을 받고 전토(田土)를 널리 점유한 죄를 말하자, 드디어 관직을 삭탈하고 먼 곳에 귀양보냈다.
○ 왜(倭)가 경양(慶陽)지금 직산(稷山)의 속현(屬縣)이다. 을 침구(侵寇)하자 양광도 순문사(楊廣都巡問使) 한 방언(韓邦彦)이 그들과 싸워 패하였다.

하4월 찬성사(贊成事) 안사기(安師琦)가 죄가 있어 자살했다.
김의(金義)의 종자(從者)가 오자 이인임(李仁任)ㆍ안사기가 그를 후하게 대접하였다. 박상충(朴尙衷)이 상소하기를,
“김의가 명(明)의 사신을 죽인 죄는 의당 문책하여야 하는데도, 재상이 김의의 수행원을 매우 후하게 대접하니, 이는 안사기가 김의를 사주(使嗾)하여 사신을 죽인 형적이 이미 드러난 것입니다. 이제 만일 그 죄를 다스리지 않으면 화(禍)가 이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하므로, 우(禑)가 명하여 안사기를 하옥(下獄)시키니, 안사기가 스스로 목을 찔러 죽자, 이어 머리를 베어 효시(梟示)하였다. 이인임이 말하기를,
“김의를 원(元)에 보낸 자는 강순룡(姜舜龍)ㆍ조희고(趙希古)ㆍ성대용(成大庸)이다.”
하여, 모두 먼 곳에 귀양보냈다.
○ 충정왕(忠定王)을 태묘(太廟)에 부(祔)하였다. 문정공(文貞公) 이암(李嵓)과 문충공(文忠公) 이인복(李仁復)을 배향(配享)하였다.

5월 안동 부사(安東府使) 이보림(李寶林)을 발탁하여 대사헌(大司憲)으로 삼았다.
보림은 이제현(李齊賢)의 손자로 정사(政事)하는 재주가 있었다. 일찍이 남원부사(南原府使)로 있을 적에, 부세(賦稅) 날짜가 너무 급하여 미처 판출(辦出)하지 못해서 백성들이 혹 파산(破産)할 지경까지 이르렀는데, 마침 포세(逋稅 바치지 아니한 조세. 미납세)를 징수하여 베[布] 약간을 모아 안렴사(按廉使)에게 아뢰자, 안렴사가 그를 가상히 여겨 또 베를 내어 도와주었다.
보림은 송사(訟事)를 잘 처결하였는데, 노비송(奴婢訟)의 경우, 관(官)에서 한 사람당 베 한 필씩을 받아 총 6백 50필을 모아 향교(鄕校)의 삼반(三班)에서 각기 한 사람씩을 골라 그를 맡게 하여 현(縣)의 긴급 수용(需用)에 공급하도록 하고, 부리(府吏)들에게 주의시켜 다른 데는 일체 쓰지 못하게 하였다. 또 끊이지 않는 손님 접대로 말미암아 거두어 위자(委積)하는 일 때문에 백성들이 매우 고통스럽게 되자, 또 안렴사에게 아뢰어 베를 얻어 쌀 약간을 팔았으며, 예부터 내려오던 둔전(屯田)이 있었는데 방자한 아전들이 이를 농간(弄奸)하므로, 보림이 몸소 나가서 그 일을 살피니 아전들이 감히 속이지 못하였다. 쌀 2백 석과 콩팥 1백 50석을 얻어 나누어주고 거두어들이는 데에 법을 세워 본전(本錢)은 두고 이자(利子)만 쓰며, 새로 개간한 밭이 72석을 수확할 만하였는데, 이것으로 위자를 공급하고 이름하여 ‘제용재(濟用財)’ 라 하니, 이로부터 백성들의 무리한 부세가 없어졌다. 이 대문은 《목은집(牧隱集)》에서 나온 말이다. 그가 부임한 곳에 정사가 엄격하고 공명하므로, 드디어 이 직책에 발탁된 것이다. 우(禑)가 그를 인견(引見)하고 술을 주며 이르기를,
“헌부(憲府)는 국가의 이목(耳目)이니 삼갈지어다.”
하였다.
○ 북원(北元)의 사신이 오자 사람을 보내어 국경(國境)에서 사례하여 돌려보내고 전의부령(典儀副令) 정도전(鄭道傳)을 유배하였다.
이에 앞서 이인임(李仁任)이, 북원이 곧 탈탈불화(脫脫不花)를 들여보낼 것이라는 말을 듣고, 백관(百官)과 효사전(孝思殿)에서 회맹(會盟)하고 북원에 글을 바치려 하였는데 그 글에,
“원자(元子) 우(禑)가 이미 왕위를 이어받았는데, 탈탈불화가 망령되이 다른 마음을 먹고 있으니 금지하여 주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좌대언(左代言) 임박(林樸), 전교령(典校令) 박상충(朴尙衷) 및 정도전은,
“선왕(先王)께서 계책을 결정하여 남쪽의 명(明)을 섬겼으니, 이제 북쪽의 원(元)을 섬기는 것은 부당하다.”
하고 서명(署名)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북원이 사신을 보내와 말하기를,
“백안첩목아왕(伯顔帖木兒王 공민왕(恭愍王)을 가리킨다)이 우리를 배반하고 명에 붙었기 때문에 너희 나라의 임금 죽인 죄를 용서한다.”
하였다. 그러자 이인임ㆍ경복흥(慶復興)ㆍ지윤(池奫)이 사신을 맞으려 하니, 삼사좌윤(三司左尹) 김구용(金九容), 전리총랑(典理摠郞) 이숭인(李崇仁), 응교(應敎) 권근(權近) 및 정도전(鄭道傳)이 도당(都堂)에 글을 올려 아뢰기를,
“만일 북원의 사신을 맞는다면 온 나라 신민(臣民)이 모두 난적(亂賊)의 죄과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뒷날 무슨 면목으로 현릉(玄陵)을 지하(地下)에서 뵙겠습니까?”
하였으나, 인임 등이 물리쳐 받아들이지 않고, 정도전으로 하여금 원사(元使)를 맞게 하자, 도전이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사신을 목베어 올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포박하여 명으로 보내겠다.”
하며, 언사가 매우 불손하므로, 인임 등이 노(怒)하여 정도전을 회진(會津)으로 귀양보냈다. 이어 대사성(大司成) 정몽주(鄭夢周)가 글을 올려 아뢰기를,
“우리 나라가 바다 밖에 궁벽하게 있어서, 우리 태조(太祖)가 당(唐) 말기에 일어나면서부터 중국을 예(禮)로 섬겨 왔는데, 그 섬기는 것은 오직 천하의 의주(義主)를 따를 뿐이었습니다. 지난번에 원씨(元氏)가 북으로 파천(播遷)되고 명이 일어나자, 우리 승하하신 왕 공민(恭愍)께서는 분명히 천명(天命)을 알고 명에 표문(表文)을 올려 신하라고 일컬었습니다. 그리하여 황제께서 가상하게 여겨 왕의 작위로 봉하였고, 하사하는 것과 바치는 것이 서로 연달은 지가 지금 6년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금상(今上 우(禑)를 가리킨다)이 즉위하던 처음에 적신(賊臣) 김의(金義)가 천사(天使 명 나라 사신을 말함)를 전송하다가 도중에서 제멋대로 천사를 죽이고, 반(叛)하여 북원으로 들어가 원(元)의 여당(餘黨)과 함께 심왕(瀋王)을 〈고려에〉 들여보내려고 꾀하였으니 죄악이 더없이 큰데, 국가에서는 김의의 죄를 묻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재상 김서(金湑)를 시켜 북원에 조공(朝貢)을 바쳤습니다. 오계남(吳季男)은 국경을 지키는 신하로서 제마음대로 정료위(定遼衛) 세 사람을 죽였고, 장자온(張子溫)은 김의의 일행인데 정료위까지 가지도 않고 공공연하게 환국하였으나 또 내버려두고 불문에 붙였으며, 이제 북원 사신이 와서도 대신을 보내어 국경에 영접하기로 의논하고 곧 말하기를 ‘북원의 노여움을 격발시키지 않아서 군사를 늦추게 하려는 것이다.’ 합니다만, 대저 원씨가 나라를 잃고 멀리 와서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은, 한번 배불리 먹고 잠깐 동안이라도 생명을 연장하려 함이니, 말로는 왕을 들여보낸다 하나 실상은 자기 이익을 도모함이어서, 그들을 거절하면 우리의 강한 것을 보이는 것이요, 섬기면 도리어 그들의 뜻을 교만하게 만드는 것이니, 군사를 늦추려는 것이 실상은 재촉하여 불러들이는 격이 될 것입니다.
듣건대, 그 조서(詔書)에 우리에게 대역(大逆)의 죄를 씌우고 이어 용서하였다 하는데, 우리가 본디 죄가 없는데 무엇을 용서한다는 말입니까? 국가에서 만일 북원의 사신을 잘 대접하여 보낸다면, 이것은 온 나라 신민이 사실도 없이 스스로 대역의 이름을 뒤집어 쓰는 것이니, 신하된 자로서 차마 당할 수 있는 일입니까? 또 더구나 명의 조정에서 처음에 김의의 일을 듣고 이미 우리를 의심하고 있을 것인데, 또 원씨와 서로 통한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우리에게 ‘사신을 죽여 적(敵)을 편들었다.’고 할 것입니다. 만일 죄를 문책하는 군사를 일으켜 바다와 육지로 아울러 나온다면 무슨 말로 대답할 것입니까? 작은 적의 군사를 늦추려다가 실상은 천하(天下 명 나라를 가리킨다)의 군사를 일으키게 하는 것입니다. 사리가 매우 분명하여 사람이 깨닫기 쉬우니, 인심이 흉흉하여 다른 변이라도 생길까 염려됩니다.
바라옵건대, 전하(殿下)께서 영단을 내리시어 원의 사신을 잡아두고 원의 조서를 거두며, 오계남(吳季男)ㆍ장자온(張子溫)ㆍ김의가 데리고 갔던 자를 포박하여 명의 서울로 보내면, 우리의 애매한 죄가 변명하지 않아도 저절로 밝혀질 것입니다. 그래서 정료위(定遼衛)와 약속하여 군사를 양성해서 시기를 보아 북으로 쳐들어간다고 소리치면, 원씨(元氏)의 남은 무리들이 자취를 감추고 멀리 도망해서 국가의 무궁한 복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박상충도 글을 올려 매우 간절하게 말하였다. 이에 찬성사(贊成事) 황상(黃裳), 좌부대언(左副代言) 성석린(成石璘)을 보내어, 강계(江界)에 가서 원의 사신을 위로하여 돌려보내게 하였다.
도전(道傳)은 정운경(鄭云敬)의 아들인데, 문학(文學)으로 일컬어진 사람이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일찍이 우리 태조를 따라 동북면(東北面)에 가서 태조의 밝고 엄숙한 호령(號令)과 정제(整齊)한 군오(軍伍)를 보고는, 태조에게 다가와서 은밀히 말하기를,
“훌륭합니다. 이 군사를 가지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하자, 태조가,
“그게 무슨 말인가?”
하니, 도전이 속여 말하기를,
“동남방(東南方)에 가서 왜(倭)를 쳐야 합니다.”
하였다. 이로부터 천명(天命)이 어디에 있다는 것을 알고 빌붙을 뜻이 있었다.
【안】 예부터 국가가 거의 망할 때가 되면 반드시 일종의 소인(小人)이 있어 나라를 망쳐버리는데, 그 정상(情狀)은 동일하지 않다. 임금의 뜻을 엿보아서 그 뜻에 영합(迎合)하기만을 오로지 힘써, 한때의 권위와 총애를 도적질하는 것이 본디 일반적인 소인의 태도이지만, 그 중에는 또한 인(仁)을 빌어 사기(詐欺)를 행하고 몸을 삼가서 명예를 낚으며, 묵묵하게 세태(世態)를 헤아려서 은밀하게 화권(化權)으로 옮겨가는 자는 대개 소인 중의 웅걸(雄傑)이기에 갑자기 그를 판단할 수 없다. 정도전은 유술(儒術)로 진용(進用)된 사람으로 당세에 명망이 높았으니, 공양왕(恭讓王)이 그의 공로를 책(策)한 교서(敎書)에서,
“학문은 천인(天人 천리(天理)와 인사(人事))을 통달하였고 식견은 고금(古今)을 관통하였으며, 염락(濂洛)의 도(道)를 제창하였고 이단(異端)의 설을 배척하였으며, 퇴폐한 정사를 혁파하고 예악(禮樂)을 닦아 밝혔으니, 참으로 왕좌(王佐)의 재목이다.”
하였는데, 이 말은 대개 사실이다. 이때를 당하여 그 누가 도전을 어질다고 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나라를 팔아서 사욕을 채우려는 마음이 그의 가슴속에 쌓여 있음을 어찌 알았으랴. 슬프다, 공자가 말하기를,
자색(紫色)이 주색(朱色)을 빼앗고, 정성(鄭聲)이 아악(雅樂)을 어지럽히는 것을 미워한다.
하였으니, 바로 도전을 이름이구려. 신문정(申文貞 문정은 신흠(申欽)의 시호)이 말하기를,
“최영(崔瑩)이 죽고 나서는 고려에 사람이 없어졌고, 정도전이 들어가고 나서는 고려에 적(賊)이 생겼다.”
하였으니, 참으로 그렇구나.
6월 큰비가 와서 삼각산(三角山)이 무너졌다.
추7월 초하루(기미)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 간관(諫官) 이첨(李詹)ㆍ전백영(全伯英)을 옥에 가두었다가 장류(杖流)하고, 평리(評理) 전녹생(田祿生),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박상충(朴尙衷)을 죽였으며, 대사정 정몽주(鄭夢周) 및 김구용(金九容)ㆍ이숭인(李崇仁)ㆍ권근(權近)ㆍ정도전(鄭道傳) 등을 아울러 유배하였다.
우헌납(右獻納) 이첨, 좌정언(左正言) 전백영이 상소하여 이인임(李仁任)ㆍ지윤(池奫)을 베죽이자고 청하였는데, 상호군(上護軍) 우인열(禹仁烈), 호군(護軍) 한리(韓理)가 이인임의 뜻에 아부하여 글을 올려 아뢰기를,
“간관이 재상을 논핵하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하여, 이에 이첨과 백영을 옥에 가두고 최영(崔瑩)과 지윤을 시켜 국문하자, 진술하는 말이 박상충과 전녹생에게 관련되었으므로 최영이 상충과 녹생을 매우 참혹하게 국문하였다. 인임이 말하기를,
“이 무리들을 죽일 필요는 없다.”
하고 귀양보냈는데, 상충과 녹생은 모두 길에서 죽었다. 녹생은 문무 겸전(文武兼全)의 재주가 있었고, 상충은 강개(慷慨)하여 큰뜻이 있었으며 널리 배웠고 글을 잘 지었으며, 행신(行身)하는 데나 관직에 있을 때 반드시 올바른 도리로 하였건만, 모두가 죄없이 죽으니 사람이 애석하게 여겼다. 인임은 또 정몽주 등 여러 사람이 자기를 해치려고 꾀했다 하여 아울러 유배하였다.
【안】 《송경지(松京志)》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이운재(李雲栽)는 인임의 조카였는데, 인임의 행위에 분개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산에 들어가, 자신은 물들지 않겠다는 뜻을 보였다.
○ 항복한 왜(倭)를 꾀어 죽이려다 성사(成事)하지 못하였다.
이에 앞서 왜인 등경광(藤經光)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여 순천(順天)ㆍ연기(燕岐) 등 처에 나누어 살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전라도 원수(全羅道元帥) 김선치(金先致)에게 일러 그들을 꾀어 죽이라고 하였다. 김선치가 크게 주식(酒食)을 갖추어 먹이고 기회를 타서 죽이려 하였는데, 모의가 누설되어 등경광은 도망쳐버리고 겨우 3명만을 잡아 죽였다. 이러기 전에는 왜구들이 사람과 가축을 죽이지 않았는데, 이 뒤부터는 왜구들이 들어오기만 하면 남김없이 마구 무찔러 죽이므로, 바닷가의 고을들이 쓸쓸하게 텅 비어버렸다.

8월 왜(倭)가 낙안(樂安)ㆍ보성(寶城)에 침구하였다.
○ 도성(都城) 안의 오부(五部)의 호수(戶數)를 개정(改定)하였다.
무릇 집 칸수 20칸 이상을 1호(戶)로 하여 군정(軍丁) 1명을 내고, 칸수가 적으면 혹 4~5가(家)를 아울러 1호로 하였다.
최씨(崔氏)는 이렇게 적었다.
태조(太祖)가 6위(衛)를 설치하였는데, 위마다 38영(領)이 있고, 영마다 각기 1천 명씩이어서 상하(上下)가 서로 얽히어, 당(唐) 때 설치했던 부위병(府衛兵)의 남은 의의가 있었다. 그런데 숙종(肅宗)이 여진(女眞)을 삼킬 속셈으로 별무반(別武班)을 설치하여, 이서(吏胥)ㆍ상고(商賈)ㆍ복예(僕隸)ㆍ승려[緇髠] 등을 다 예속시켰으니, 벌써 옛 제도에 맞지 않았다. 그런데 의종(毅宗)ㆍ명종(正宗) 이래로는 군정(軍政)이 권신(權臣)ㆍ간신(奸臣)에게 돌아가서, 갑자기 군대를 조발(調發)하게 되면 문무관의나 무관의 산직(散職), 백정(白丁)ㆍ잡색(雜色)ㆍ천예(賤隸)ㆍ가동(家僮) 등을 현우(賢愚)도 따지지 않고 모두 군오(軍伍)에 편입시키며, 혹은 집칸수의 많고 작은 것으로 군정을 내는 데에 차등을 두었다. 군정(軍政)이 이토록 닦아지지 않았으니, 아무리 외침을 방어하고 나라를 보전하려 한들 되겠는가?
○ 지윤(池奫)을 서북면 도체찰사(西北面都體察使)로 삼았다.
이성만호(泥城萬戶)가 급보(急報)하기를,
“심왕(瀋王)이 김의(金義) 및 진봉사(進奉使) 김서(金湑)를 거느리고 벌써 신주(信州)에 도착하였다.”
하므로, 이에 임견미(林堅味)를 서경 상원수(西京上元帥)로, 양백연(楊伯淵)ㆍ이원계(李元桂)를 안주 원수(安州元帥)로, 나세(羅世)ㆍ박보로(朴普老)를 서해도 원수(西海道元帥)로, 조인벽(趙仁璧)ㆍ변안열(邊安烈)을 동북면 원수(東北面元帥)로 삼아서 제도(諸道)의 군사를 징발하여 지윤이 총지휘하도록 하였다. 지윤은 또, 군사를 징발하기를 청하자 이희필(李希泌)을 도지휘사(都指揮使)로 삼아서 군사를 거느리고 후원해 주도록 하고, 여러 절의 주지승(住持僧)으로부터 전마(戰馬) 각 한 필씩을 받고, 또 여러 절의 전조(田租)를 받아 군비(軍備)에 충당하였으며, 이임(李琳)을 서북면 선위사(西北面宣慰使)로 삼아 사변을 시찰하게 하였다.

9월 왜적이 자연도(紫烟島) 등 섬 지대에 침구하였다.
왜적의 선박이 덕적도(德積島)ㆍ자연도 두 섬에 크게 모여들었다. 이때에 장수와 군사가 모두 북쪽 정벌에 나갔으므로, 이에 각 방리(坊里)와 여러 능호(陵戶)의 군사를 모집하고, 또 양광도(楊廣道)ㆍ전라도(全羅道)ㆍ경상도(慶尙道)의 군사를 징발하여, 우리 태조 및 판삼사(判三司) 최영(崔瑩)에게 거느리게 해서, 동서강(東西江)에 군사의 위엄을 보여서 방비하게 하였다가 얼마 후 여러 도의 군사들을 돌려보냈다.

동10월 하윤원(河允源)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윤원은 ‘그른 줄을 알면서도 잘못 결단하면 하늘이 벌을 내린다. [知非誤斷皇天降罰]’는 여덟 글자를 푯말에 써서 대(臺)에 나갈 때마다 반드시 그것을 뒤에다 걸어 놓고 사무를 보곤 하였는데, 얼마 후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여 시묘(侍墓)하다가 죽었다.

11월 제주(濟州)에 반란이 일어나, 안무사(安撫使) 임완(林完),ㆍ목사(牧使) 박윤청(朴允淸)을 살해하였다.
제주 사람 차현유(車玄有) 등이 관사(官舍)를 불지르고 임완 및 박윤청, 마축사(馬畜使) 김계생(金桂生) 등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그 고을 사람 문신보(文臣輔), 성주(星主) 고개실(高開實) 등이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여 그들을 베었다.
○ 흰 무지개가 해를 꿰었다.
○ 좌정언(左正言) 김자수(金子粹)를 유배하였다.
이때에 왜적이 김해(金海)ㆍ대구(大邱)를 침구하자, 도순문사(都巡問使) 조민수(曺敏修)가 적과 싸워 연이어 패했는데, 다시 밀성(密城)에서 적을 요격(邀擊)하여 적 수십 급(級)을 베었다. 이리하여 우(禑)가 중사(中使)를 보내어 옷과 술을 하사하고, 김자수에게 명하여 회답하는 교서(敎書)를 지으라고 하자, 자수가 민수는 공보다 죄가 더 크다는 것으로 사양하니, 우가 노하여 자수를 옥에 가두고 지윤(池奫)을 명하여 국문하게 하였다. 지윤이 자수에게 위지(違旨)의 죄를 적용하려 하니 자수가 말하기를,
“선왕이 간관(諫官)을 둔 것은 임금의 잘못을 보완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왕의 말이 옳지 않을 때에는 간관이 간쟁하는 것이다. 바라건대, 제공(諸公)은 국가가 간관을 둔 뜻을 살피시오.”
하였는데, 지윤은 장류(杖流)시킬 것을 의논하였다. 김속명(金續命)이 들어가 태후(太后)에게 아뢰기를,
“간관이 비록 뜻을 거스르더라도 죄를 중하게 논하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하여, 곤장을 면하고 돌산수(突山戍)지금의 순천부(順天府) 동쪽 1백 70리에 있다. 로 귀양보냈다.

12월 안개가 크게 끼었다.
○ 왜구가 양광도(楊廣道)의 연해 주군을 노략질하였다.


 

[주D-001]신사년(1281)에 동정(東征) : 신사년은 고려 충렬왕(忠烈王) 7년으로, 원(元)의 압력에 의해 일본 정벌을 계획하였다가 이해에 원나라 장수 흔도(忻都)와 고려 장수 김방경(金方慶) 등이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합포(合浦)를 출발, 일본 정벌에 나섰으나 태풍과 질병으로 대패하고 귀환하였다. 이 뒤에도 여러 차례 동정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주D-002]염락(濂洛)의 도(道) : 성리학(性理學)을 말한다. 염은 송(宋)의 성리학자 주돈이(周惇頣)가 살던 염계(濂溪), 낙은 역시 송의 성리학자 정호(程顥)․정이(程頣)가 살던 낙수(洛水)를 의미한다.
[주D-003]자색(紫色)이 …… 미워한다 : 사이비(似而非) 유덕자(有德者)가 정덕(正德)을 지닌 사람을 가장하고, 음란한 악이 정악(正樂)을 해치는 것을 미워한다는 뜻. 주색(朱色)은 정색(正色), 자색은 간색(間色)이며, 정성(鄭聲)은 정나라 음악인데 매우 음란하다. 《論語 陽貨》
[주D-004]당(唐) …… 부위병(府衛兵) : 부병제(府兵制)를 말한다. 부병 제도는 각 고을에서 농한기를 이용하여 군사를 훈련하였다가 나라에 변란이 있으면 출정시키던 제도. 부병의 시초는 서위(西魏) 때 《주례(周禮)》를 본떠 전국에 6군(軍)을 두고, 6군을 다시 1백 부(府)로 나누어 낭장(郞將)으로 거느리게 하였다. 당나라는 전국 10도(道)에 6백 34부를 두었다.

목은문고 제3권
 기(記)
장성현(長城縣) 백암사(白巖寺) 쌍계루(雙溪樓) 기문


삼중대광(三重大匡) 복리군(福利君) 운암(雲菴) 징공 청수(徵公淸叟)가 절간(絶磵) 윤공(尹公)을 통하여 누대의 이름을 지어 달라고 청하였다. 이와 함께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 정씨(鄭氏)가 지은 사찰의 기문을 자료로 보여 주었는데, 사찰의 내력은 상세히 기술하고 있었으나 시내[溪]는 어떠하며 누각[樓]은 어떠한지에 대해서는 모두 생략하고 써넣지 않았으므로, 대개 누각의 이름을 짓기가 어려웠다.
이에 절간(絶磵)을 통해서 알아보았더니, ‘사찰이 두 개의 시냇물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 물은 바로 사찰의 남쪽에서 합류하고 있다. 그 물의 근원을 살펴보건대, 하나는 동쪽으로 가까이 있고 하나는 서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형세상으로는 크고 작은 흐름의 차이를 보이고 있었으나, 각자 한군데로 합쳐져서 못을 이룬 다음에 똑같이 산을 나와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데 사찰의 사면을 에워싼 산들이 모두 높고 가파르기만 해서, 찌는 듯이 더운 여름철에도 더위를 피해 시원한 바람을 쐴 곳이 없었기 때문에, 두 물이 합류하는 곳에다 터를 정하고 누각을 세우게 되었는데, 왼쪽 시냇물 위에 걸터앉아서 오른쪽 시냇물을 아래로 굽어보고 있노라면, 누각의 그림자와 물빛이 위아래에서 서로 비춰 주는 등, 실로 보기 드문 승경(勝景)을 이루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경술년(1370, 공민왕19) 여름에 큰물이 져서 돌로 쌓은 제방이 허물어지는 바람에 누각도 함께 무너지게 되었는데, 이와 관련해서 청수(淸叟)가 말하기를, “누각은 우리 스님이 일으켜 세운 것인데, 이대로 놔두어서야 되겠는가. 우리 스님인 각엄 존자(覺儼尊者)로부터 스승과 제자 사이에 전해 온 것이 모두 5대(代)에 이르렀으니, 산문(山門)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인 것이 지극하다고 할 것인데, 지금 누각을 망치고 만다면 그 책임이 장차 누구에게 돌아오겠는가. 그래서 내가 기일을 약정하고 공사를 시작해서 옛날의 모습을 복구한 결과, 썩은 것은 다시 견고해지고 빛이 바랜 것은 다시 선명해지게 되었으니, 이쯤 되면 나 자신을 위로하기에는 충분하다 하겠다. 그러나 내가 마음속으로 털끝만큼이라도 우리 스님의 마음을 어기지나 않을까 하고 두려워했던 그 심정을 우리 문도들이 꼭 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요, 또 우리 문도로서 내 뒤를 이어 이 절에 머무르는 자가 혹시라도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산문의 일을 장차 보장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된다면 어찌 유독 누각뿐이겠는가. 불상(佛像)이 먼지로 뒤덮이고 불당(佛堂)이 비바람에 퇴락하여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도 뻔한 이치이다. 이렇게 본다면 누각 하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쯤이야 글로 남길 가치가 없다 하더라도, 이에 대해서 굳이 글 잘하는 이에게 부탁해서 기문을 지어 달라고 하는 것은, 바로 불후(不朽)하게 전해지도록 도모하는 한편 우리 문도를 경계시키려 함이라고 하겠다. 그러니 이 부탁을 거절하지 않으면 다행이겠다.” 하였다.
나는 일찍이 행촌(杏村 이암(李嵒)) 시중공(侍中公)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자질(子姪)들과 어울려 노닐었는데, 스님은 바로 그 계씨(季氏)이다. 그래서 내가 그 부탁을 거절하기가 어렵기에, 절간(絶磵)의 말에 따라서 쌍계루(雙溪樓)라고 명명하고 기문을 짓게 되었다. 나는 지금 늙어서 누각에 밝은 달빛이 가득할 때 그 속에서 한 번이라도 묵을 길이 없으니, 소년 시절에 그곳의 객이 되지 못한 것이 한스럽기만 하다. 사제간에 서로 계승한 기록은 사찰의 문서에 기재되어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쓰지 않는다.


[주C-001]장성현(長城縣) …… 기문 : 《목은문고》 원문에 누락된 글자가 많이 눈에 띄는데, 이 부분들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36 장성현(長城縣) 불우(佛宇) 정토사(淨土寺) 조에 나오는 이색의 기문을 참고하여 보완해서 국역하였다.

목은문고 제9권
 서(序)
《농상집요(農桑輯要)》 후서(後序)


고려(高麗)의 풍속은 그저 질박하고 너그럽기만 할 뿐 생계를 꾸려 나가는 데에는 어리숙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농사를 짓는 집에서는 한결같이 하늘만 쳐다보고 있기 때문에, 장마나 가뭄이 들기만 하면 번번이 농사를 망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여기에 또 자신들의 생활은 매우 빈약하기만 해서 귀천(貴賤)과 노유(老幼)를 막론하고 음식이라고 해야 채소나 건어물 혹은 육포(肉脯) 따위가 고작이요, 미곡(米穀)만 중시하고 기장 같은 곡식은 경시하는가 하면 삼베나 모시만 많이 생산하고 명주나 무명에는 관심이 적은 형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안으로는 뱃속이 허전하고 밖으로는 살을 제대로 감싸지 못한 나머지, 그들을 바라보면 마치 병들었다가 금방 일어난 모습을 하고 있는 경우가 열에 여덟아홉이나 되는 실정이다. 그런가 하면 상례(喪禮)나 제례(祭禮) 때에는 채식만 하고 고기는 입에도 대지 않다가, 잔치라도 한 번 벌이게 되면 소와 말을 때려죽이고 야생의 짐승들을 사냥해서 푸짐하게 먹는 광경을 얼마든지 볼 수가 있다.
사람이 일단 이목구비를 갖춘 몸뚱이를 가지고 있는 이상에는 성색취미(聲色臭味)의 욕망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따라서 가볍고 따뜻한 옷을 몸에 편하게 여기고 살지고 맛난 음식을 입에 달게 여기면서 넉넉하게 남겨 두기를 좋아하고 모자라거나 떨어지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야말로, 오방(五方 중국과 사방의 주변 민족)의 사람들 모두가 천성적으로 똑같이 지니고 있는 속성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유독 고려만은 이처럼 다른 모습을 보여 주게 되었단 말인가.
풍성하게 하되 사치스럽게 되지 않도록 하고 검소하게 하되 누추하게 되지 않도록 배려하면서, 인(仁)과 의(義)에 근본을 두고 하나의 표준을 만든 것이 바로 성인(聖人)의 중제(中制 중용의 도에 맞는 예법)인 만큼, 사람들이 일을 행할 때마다 이를 아름답게 여기면서 따르고 있는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섯 마리의 닭이나 두 마리의 돼지 같은 것은 사람의 손으로 길러지기만 할 뿐 사람의 힘을 돕는 데에는 아무 쓸모가 없는데도 차마 죽이지를 못하고, 소와 말은 사람의 노동력을 대신해 주는 공이 무척이나 큰데도 모질게 때려잡고 있다. 또 사냥을 나가서 치달리는 수고를 하다 보면 혹 몸을 상하거나 목숨을 잃는 경우가 나오는데도 이런 일은 과감하게 행하고, 추환(芻豢)을 우리 속에서 꺼내어 잡는 일은 감히 행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백성들이 경중(輕重)을 식별하지도 못한 채 의리를 해치고 중제(中制)를 무너뜨리고 있는데, 본심(本心)을 잃는 것이 이 정도까지 이르게 한 것이 어찌 백성들의 죄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내가 이 점을 나름대로 가슴 아프게 생각해 왔다. 백성의 생활 근거를 마련해 주면서 왕도정치를 일으키는 것이 바로 나의 뜻이었는데, 결국에는 이를 행할 수 없게 되고 말았으니 이제 와서 내가 또 어떻게 하겠는가.
봉선대부(奉善大夫) 지합주사(知陜州事) 강시(姜蓍)가 나에게 글을 급히 보내 말하기를, “《농상집요》를 행촌(杏村 이암(李嵒)) 이 시중(李侍中)이 외생(外甥)인 판사(判事) 우확(禹確)에게 주었는데, 이번에는 제가 다시 이 책을 우확에게서 얻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의식(衣食)을 넉넉하게 하는 방법과 전재(錢財)를 풍요롭게 하는 방법을 비롯해서 씨 뿌려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길러 번식시키는 방법이 빠짐없이 갖추어져 있는데, 이러한 내용을 조목별로 같은 내용끼리 정리해서 세밀하게 분석하며 환하게 밝혀 놓았으니, 실로 생계를 꾸려 나가는 데에 있어 훌륭한 지침서가 되리라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제가 합주(陜州 합천(陜川)의 옛 이름)의 치소(治所)에서 판각하여 널리 전파시키려 하는데, 글자가 크고 책이 무거워서 멀리 보내기에는 어려운 걱정이 있기에 이미 작은 해서(楷書)로 베껴서 다시 적어 놓았고, 안렴사(按廉使)로 있는 김공 주(金公湊)가 또 비용에 보태 쓰도록 포목 약간을 내놓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니 선생께서 이 책 뒤에다 한마디 말씀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하였다.
나 역시 이 책에 대해서는 일찍이 완상(玩賞)을 하며 음미한 바가 있다. 그런데 내가 우리 고려의 풍속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걱정하는 마음이 깊지 않은 것이 아니었고, 또 조정에 몸을 담고 있었던 기간 역시 하루나 이틀 정도가 아니었는데, 조정에 건의해서 이 책을 간행하도록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 이는 나의 잘못이라고 하겠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강군(姜君)의 뜻이 나와 같다는 것을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백성의 생활 근거를 마련해 주면서 왕도정치를 일으키는 그 일로 말하면 또 이 정도로 그치지는 않을 것인데, 강군은 이에 대해서도 일찍이 강구해 본 적이 있는가? 만약 그 일을 기필코 시행해 보려고 한다면, 이단을 몰아내는 일부터 시작해야만 마땅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 고려의 풍속을 변화시킬 길이 없을 것이요, 따라서 이 책에 기재되어 있는 것들도 한갓 글자로만 남게 될 것이니, 강군은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주D-001]다섯 마리의 …… 돼지 : 《맹자(孟子)》 진심 상(盡心上)에, “다섯 마리의 암탉[五母雞]과 두 마리의 암퇘지[二母彘]가 새끼 칠 때를 놓치지 않게 하면, 노인들이 고기를 먹지 못하게 되는 걱정이 없을 것이다.”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해서 말한 것이다.
[주D-002]백성의 …… 일으키는 것 : 《맹자》 양혜왕 상(梁惠王上)에 원문의 ‘제민산(制民産)’ ‘흥왕도(興王道)’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실려 있다.

 

목은문고 제9권
 서(序)
원암(元巖)의 연회(宴會)에서 창화(唱和)한 시의 서문


옛날의 군자들은 자기 임금을 보좌하면서 그 의리를 극진히 행하였다. 그래서 임금 역시 그 신하들을 예우하면서 풍성함을 한껏 누리게 하였다. 그리하여 풍성하게 예우하고 의리를 극진히 행하는 가운데 뜻이 같아지고 기운이 합해져서, 울연(蔚然)히 구름이 용을 따르고 유연(悠然)히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처럼 된 것이었다. 그리고 노년에 접어들어서도 물러나 쉬는 일과 나아와 쓰이는 일을 서로들 번갈아 가면서 하였으니 황발(黃髮)을 드리우고 백발을 얹은 그 나이에는 몸에 매인 일이 없이 한가롭게 여생을 즐기는 것이 당연했을 텐데도, 자리를 떠났다고 해서 하루라도 국가를 잊은 적이 일찍이 있지 않았었다. 그리하여 대사(大事)를 의논할 일이 생기면 나아와 결단을 내리고 국난(國難)이 발생하면 나라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으니, 군신 간에 어쩌면 그렇게도 깊이 서로들 마음이 들어맞았단 말인가. 그런데 내가 원암(元巖)에서 여러 원로들이 함께 모여 연회를 베풀며 창화한 시를 읽어 보고는 이와 비슷한 감회에 젖어서 여러 차례나 탄식을 금하지 못하였다.
상이 남쪽으로 거둥할 적에,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 염공(廉公 염제신(廉悌臣))과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이공(李公 이암(李嵒))과 칠원부원군(漆原府院君) 윤공(尹公 윤환(尹桓))과 회산부원군(檜山府院君) 황공(黃公 황석기(黃石奇))과 당성부원군(唐城府院君) 홍공(洪公 홍빈(洪彬))과 수춘군(壽春君) 이공(李公 이수산(李壽山))과 계성군(啓城君) 왕공(王公)이 실로 의리에 입각해서 따라오자, 상이 매우 가상하게 여긴 나머지 그들을 대우함에 있어 또한 예모를 깍듯이 하였다. 8월 병술일에 원암으로 행차했다가 정해일에 속리사(俗離寺)로 거둥하였는데, 다음 날에 큰비를 만났으므로 다시 원암으로 돌아와서 하루를 머물게 되었다.
이때 제로(諸老)가 일단 관직을 떠나 한가로운 몸으로 자처하고 있었던 데다가 도성(都城)으로 돌아갈 날이 가깝게 된 것을 또 기쁘게 여긴 나머지, 술잔을 들어 서로 권하면서 노래를 불러 흥을 돋우게 되었다. 그리하여 대장군(大將軍) 김하적(金何赤)이 젓대를 불고 장군(將軍) 김사혁(金斯革)이 아쟁을 탔는가 하면 창안(蒼顔) 백발의 원로들 모두가 웃고 이야기하면서 시문(詩文)을 창화(唱和)하기에 이르렀으니,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신선들이 노니는 것처럼 여겨졌을 법도 하다. 아, 만신창이가 되어 신음하였던 것이 바로 얼마 전의 일인데, 이처럼 태평 시대의 문채(文彩)를 이루게 되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제로가 이미 늙긴 하였으나 상이 부소(扶蘇 개성(開城)의 옛 이름) 남쪽 법궁(法宮 대궐의 정전(正殿))의 안에 계시지 못한 것을 가슴 아프게 여기고는, 솔선해서 무기를 잡고 서로 번갈아 야외의 막사에서 숙직하면서 풍우(風雨)와 한서(寒暑)에도 그 일을 그만두는 법이 없었다. 이에 각 급(級)의 관원들이 이를 본받고 모범으로 삼아 각자 자신의 직책을 수행하면서 감히 결함이 있게 하지 않았으니, 조석으로 주선(周旋)하는 그 사이에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켜 국체(國體)에 도움이 되게 한 것이 또한 많았다고 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묘당(廟堂)에 앉아서 호령을 하는 것과 비교해서 다를 것이 뭐가 있다고 하겠는가.
시상(柴桑)과 죽림(竹林)에서 노닐던 이들로 말하면, 명교(名敎 인륜(人倫)의 가르침인 유교(儒敎))의 죄인이라고 해야 할 것인데도, 일을 벌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이것을 소재로 해서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지어 부르곤 하였다. 그런데 더구나 이 원암의 성대한 모임으로 말하면, 국가의 원기(元氣)와 직결되는 것인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다만 오늘날 세상에서 그림을 잘 그리는 자는 누구이며 노래를 잘 지어 부르는 자는 누구일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림으로 그릴 경우에는, 내가 비록 제로(諸老)에 대해서 자제(子弟)의 예를 갖추고서 아쟁을 타고 젓대를 부는 대열에 끼이고 싶어도 이미 그렇게 될 수 없는 일이라고 하겠지만, 노래를 지어 부르는 것으로 말한다면 나와 같은 불초(不肖)가 부르지 않는다면 누가 또 하겠는가.
그렇긴 하지만 한번 살펴보건대, 그 속리산(俗離山)으로 말하면 장엄하고 숭고하여 그 높이가 위로 하늘에까지 잇닿았으니, 우리 후생(後生)이 마땅히 우러러 사모해야 할 대상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제로의 풍류와 문채로 말하면 또 그 산과 높이를 다툰다 해도 가하다고 할 것이니, 어찌 꼭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려서 전해야만 하겠는가.


 

[주D-001]울연(蔚然)히 …… 것처럼 : 군신(君臣)이 서로 감응하여 의기가 투합한 것을 말한다.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 구오(九五)에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따르나니, 성인이 나오시면 만물이 모두 우러러보게 마련이다.[雲從龍 風從虎 聖人作而萬物覩]”라는 말이 나오고, 유비(劉備)가 제갈량(諸葛亮)을 얻고 나서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다.[猶魚之有水也]”라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 《三國志 卷30 蜀書5 諸葛亮傳》
[주D-002]시상(柴桑)과 …… 이들 : 도연명(陶淵明)이나 죽림칠현(竹林七賢)처럼 세상일에 상관하지 않고 혼자서 숨어 사는 이들을 말한다. 시상은 도연명이 만년에 돌아가서 은거한 고향의 이름이다.

 

목은문고 제13권
 서후(書後)
이수보(李壽父)의 시권(詩卷) 뒤에 적은 글


이군 수보(李君壽父)가 나에게 행촌(杏村 이암(李嵒))이 쓴 수보(壽父)라는 두 글자를 비롯해서 이에 대한 익로(益老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시(詩)와 설공(偰公 설장수(偰長壽))의 명(銘)을 보여 주었는데, 거기에 인수(仁壽)에 대한 해설이 이미 빠짐없이 실려 있었으나, 이군의 요청을 거절하기가 어렵기에 내가 또 다음과 같이 일러 주었다.
사람과 초목과 금수 모두가 만물에 속한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그중에서도 사람으로 말하면 천지(天地)와 더불어 삼재(三才)에 참여하는 고귀한 존재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고금의 역사를 살펴보면 초목이나 금수와 함께 썩어 버리지 않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어려운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부귀한 사람 중에서는 이윤(伊尹)ㆍ부열(傅說)과 주공(周公)ㆍ소공(召公) 등이, 그리고 빈천한 사람 중에서는 백이(伯夷)ㆍ숙제(叔齊)와 공자(孔子)ㆍ안자(顔子) 등이 출현하지 않았던가. 이들은 모두 천지와 더불어 삼재에 참여해도 부끄럽지 않을 자격을 갖춘 분들이었기 때문에, 각각 당시에 현달하고 후세에 이름을 드날리면서 이처럼 오래도록 썩지 않고 전해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 수보 역시 부귀와 빈천 때문에 공연히 마음을 괴롭히지 말고, 이윤ㆍ부열ㆍ주공ㆍ소공과 백이ㆍ숙제ㆍ공자ㆍ안자 등이 초목이나 금수와 함께 썩어 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그 까닭을 찾아내도록 제대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이름과 자(字)에 걸맞게 사는 길이 될 것이다.


사가시집 제52권
 시류(詩類)
백암사(白巖寺)로 돌아가는 성 상인(成上人)을 보내다 7수


장성 고을은 아득히 먼 호남에 있는데 / 長城渺渺隔湖南
이곳의 쓸쓸한 고찰이 바로 백암사인데 / 古刹蕭條是白巖
한창 가을바람이 나뭇잎 불어 떨칠 제 / 政爾秋風吹更落
옛 산에 돌아가 다시 참선을 하겠네그려 / 故山歸去更禪參

병 하나 석장 하나에 신 한 켤레를 신고 / 一甁一錫仍一鞋
절에 가서 다시 한 학과 함께 거처하겠네 / 蕭寺還同一鶴棲
섣달 눈 산에 가득고 사람은 아니 올 제 / 臘雪滿山人不到
산다화 아래서는 비취새가 울어 댈 걸세 / 山茶花下翠禽啼

넓디넓은 천지간에 머나먼 길을 보내지만 / 蕩蕩乾坤送路賖
스님이야 가는 곳마다 그곳이 집이고말고 / 師行到處卽爲家
괴나리봇짐 싸고 또 산중으로 들어가니 / 挑包又向山中去
하늘 한쪽의 흐르는 물 뜬구름 모양일세 / 流水浮雲天一涯

스님이 지금 내게 검은 지팡이 하나를 주니 / 師今贈我一烏筇
학도 같고 용도 같아라 천성이 공교하네 / 鶴樣龍形自化工
연래엔 늙고 병들어 두 다리가 불편하니 / 老病年來雙脚軟
짚고 일어서는 데 가장 도움이 많을 걸세 / 扶携起立最多功

한 봉함의 작설차는 더없이 향기로워서 / 一封雀舌十分香
물 길어다 한가히 절각당에 달이노라니 / 汲水閑煎折脚鐺
어안을 이미 지나서 해안이 솟아나기에 / 魚眼已過生蟹眼
마셔 보니 마른 창자를 윤택게 할 만하네 / 啜來端可潤枯腸

행촌이 철성 가문에 덕을 많이 쌓았는데 / 杏村積德鐵城門
지금 우리 세 사람은 또한 그의 외손일세 / 今我三人亦外孫
원찰의 주지승은 이름이 성만덕인데 / 願刹主僧成萬德
의당 깊은 은혜를 진중히 수호하겠지 / 也宜珍重護深恩
백암사(白巖寺)는 행촌(杏村)의 원당(願堂)인데, 지금의 감사(監司) 이공 집(李公諿), 아사(亞使) 윤공 파(尹公坡)가 모두 행촌의 외현손(外玄孫)이고, 거정(居正) 또한 행촌의 외현손이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장성의 하 사군을 위하여 당부하건대 / 爲報長城河使君
그대 또한 철성 이씨와 연인이 되거니 / 君於鐵李亦連姻
백암사 원찰을 먼저 수호해야 할 걸세 / 白巖願刹宜先護
절 주지는 지금 성 상인이 되었데그려 / 主寺今逢成上人


 

[주D-001]병(甁) …… 하나 : 병은 승려가 사방을 돌아다닐 때에 반드시 휴대하는 물 항아리를 가리키고, 석장(錫杖) 역시 승려나 도사가 짚는 지팡이를 말한 것으로, 위에 여러 개의 쇠고리를 달았던 까닭에 석장이라 이름한 것이다.
[주D-002]흐르는 물 뜬구름[流水浮雲] : 승려가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주D-003]절각당(折脚鐺) : 다리가 부러진 냄비를 말한다. 소식(蘇軾)의 〈송유의귀(送柳宜歸)〉 시에 “다리 부러진 냄비엔 묽은 죽을 데우고, 가지 굽은 뽕나무 아래선 이별주를 마시네.[折脚鐺中煨淡粥 曲枝桑下飮離杯]”라고 하였다. 《蘇東坡詩集 卷48》
[주D-004]어안(魚眼)을 …… 솟아나기에 : 어안과 해안(蟹眼)은 모두 물이 끓을 때에 마치 물고기의 눈처럼 크게 일어나는 기포(氣泡)와 게의 눈처럼 자잘하게 일어나는 기포를 말한 것으로, 소식(蘇軾)의 〈시원전다(試院煎茶)〉 시에 “게의 눈을 이미 지나서 고기 눈이 나오니, 설설 소리가 솔바람 소리와 흡사하구나.[蟹眼已過魚眼生 颼颼欲作松風鳴]”라고 하였다. 《蘇東坡詩集 卷8》 여기서는 어안과 해안이 소식의 시와 반대로 쓰였다.
[주D-005]행촌(杏村)이 …… 쌓았는데 : 행촌은 고려의 재상으로 본관이 철성(鐵城)인 이암(李嵒)의 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7권
 강원도(江原道)
회양도호부(淮陽都護府)


동쪽으로는 통천군(通川郡) 경계까지 69리, 고성군(高城郡) 경계까지 51리, 남쪽으로는 양구현(楊口縣) 경계까지 64리, 금성현(金城縣) 경계까지 50리, 서쪽으로는 평강현(平康縣) 경계까지 91리, 북쪽으로는 함경도 안변부(安邊府) 경계까지 39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4백 60리이다.
【건치연혁】 본래는 고구려의 각련성군(各連城郡)이다. 각(各)은 객(客)으로 쓰기도 하고, 가혜아(加兮牙)라고도 한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연성군(連城郡)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는 이물성(伊勿城)이라 일컬었으며, 성종(成宗) 14년에는 교주단련사(交州團鍊使)로 고쳤고, 현종(顯宗) 9년에는 방어사(防禦使)로 고쳤다가, 충렬왕(忠烈王) 34년에는 철령(鐵嶺)이 적병을 파수(把守)하여 끊는 데에 공이 있다고 하여 회주목(淮州牧)으로 승격시켰다. 충선왕(忠宣王) 2년에는 모든 목(牧)이 없어져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낮추어 부(府)로 하였다. 본조(本朝)에서는 태종(太宗) 13년에 통례에 따라 도호부(都護府)로 하였고, 세조조(世祖朝)에는 진(鎭)을 두었다.
【속현】 화천현(和川縣) 부의 동쪽 30리에 있다. 본래는 고구려의 수성천현(藪狌川縣)이다. 신라 때에 수천(藪川)으로 고치고 대양군(大楊郡)의 영현(領縣)으로 하였다. 고려 초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본부(本府)의 속현(屬縣)으로 하였는데, 본조에서 그대로 따랐다. 남곡현(嵐谷縣) 부의 서쪽 30리에 있다. 본래는 고구려의 적목진(赤木鎭)으로, 사비근을(沙非斤乙)이라고도 하였다. 신라 때에 단송(丹松)으로 고치고 연성군(連城郡)의 영현으로 하였다. 고려 때에는 현종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그대로 본부에 예속시켰으며,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수입현(水入縣) 부의 동쪽 40리에 있다. 본래는 통구현(通溝縣)의 땅이었는데, 떼내어 본부의 속현으로 하였다. 장양현(長楊縣) 부의 동쪽 40리에 있다. 본래는 고구려의 대양관군(大楊管郡)으로, 마근압(馬斤押)이라고도 하였다. 신라 때에 대양군(大楊郡)으로 고쳤으며, 고려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본부의 속현으로 하였다.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진관】 도호부(都護府) 1 철원(鐵原). 현(縣) 7 양구(楊口)ㆍ낭천(狼川)ㆍ금성(金城)ㆍ이천(伊川)ㆍ평강(平康)ㆍ금화(金化)ㆍ안협(安峽)이다.
【관원】 부사(府使)ㆍ교수(敎授) 각 1인.
【군명】 각련성(各連城)ㆍ연성(連城)ㆍ이물성(伊勿城)ㆍ회주(淮州)ㆍ교주(交州)
【성씨】 본부 송(宋)ㆍ방(房)ㆍ고(高)ㆍ이(李)ㆍ현(玄), 김(金) 청도(淸道). 채(蔡) 평강(平康). 전(全) 정선(旌善). 정(鄭) 무안(務安). 화천(和川) 김(金)ㆍ은(殷). 수입(水入) 김(金) 삼척(三陟). 윤(尹) 내성(來姓)이다. 남곡(嵐谷) 박(朴)ㆍ전(田)ㆍ노(盧)ㆍ현(玄). 장양(長楊) 맹(孟)ㆍ경(敬)ㆍ화(華). 문등(文登) 신(辛)ㆍ양(楊)ㆍ수(壽)ㆍ형(邢)ㆍ신(信). 웅림(熊林) 방(房). 북척(北尺) 전(田).
【형승】 중첩된 산이 그윽이 깊으며, 매우 험하다. 이곡(李穀)의 〈동유기(東遊記)〉에 있다.
【산천】 의관령(義舘嶺) 부의 북쪽 1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천보산(天寶山) 부의 남쪽 11리에 있다. 금강산(金剛山) 장양현(長楊縣)의 동쪽 30리에 있다. 부(府)와의 거리는 1백 67리이다. 산의 이름이 다섯 가지이니, 금강(金剛), 개골(皆骨), 열반(涅槃), 풍악(楓嶽), 지달(怾怛)로, 백두산의 남쪽 줄기이다. 회령부(會寧府)의 우라한현(亐羅漢峴)으로부터 갑산(甲山)에 이르러 동쪽은 두리산(頭里山)이 되고, 영흥(永興)의 서북쪽은 검산(劒山)이 되었으며, 부의 서남쪽은 분수령(分水嶺)이 된다. 서북쪽으로는 철령(鐵嶺)이 되며, 통천(通川)의 서남쪽은 추지령(楸池嶺)이 되고, 장양(長楊)의 동쪽과 고성(高城)의 서쪽까지가 이 산이 되었다. 분수령(分水嶺)에서 여기까지는 8백 30여 리이다. 산은 모두 1만 2천 봉으로, 바위가 우뚝이 뼈처럼 서서 동쪽으로 푸른 바다를 굽어보며, 삼나무와 전나무가 들어서 있어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그림과 같다. 일출봉(日出峯)ㆍ월출봉(月出峯)의 두 봉우리가 있어서 해와 달이 뜨는 것을 볼 수 있다. 산 안팎에 모두 1백 여덟 개의 절이 있는데, 표훈사(表訓寺)ㆍ정양사(正陽寺)ㆍ장안사(長安寺)ㆍ마하연(摩訶衍)ㆍ보덕굴(普德窟)ㆍ유점사(楡岾寺)가 가장 이름난 사찰이라고 한다.
○ 신라 경순왕(敬順王)이 나라가 약하고 형세가 고립되었다고 하여 국토(國土)를 가지고 고려에 항복하기를 모의하니, 왕자(王子)가 말하기를, “나라의 존망(存亡)은 반드시 천명(天命)이 있는 것이니, 마땅히 충신(忠臣)ㆍ의사(義士)와 백성의 마음을 수습하여 스스로 굳게 지키다가 힘이 다한 뒤에 그칠 일이지, 어찌 천 년의 사직(社稷)을 하루아침에 가벼이 남에게 넘겨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고립되고 위태함이 이와 같으니 사세로 볼 때 보전할 수 없는데, 죄 없는 백성들로 하여금 싸우다 죽어서 간(肝)과 뇌수(腦髓)를 땅에 칠하게 하는 일을 나는 차마 할 수 없다.” 하고, 드디어 사자(使者)를 보내어 고려에 항복하기를 청하니, 왕자가 울부짖으며 임금을 하직하고, 곧 이 산으로 들어가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만들고 삼베옷 입고 푸성귀를 먹으며 여생을 마쳤다.
○ 최해(崔瀣)의 중을 전송하는 서문(序文)에, “깊은 산 골짜기 사람의 자취가 드물게 이르는 곳에는 마땅히 이물(異物)이 있어서 여기에 모이기 마련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장도릉(張道陵)의 학문을 하는 자는 어느 산을 몇 번째 동천(洞天)이라고 하고, 아무개 진군(眞君)이 다스리는 곳이라고 한다. 이에 도(道)를 사모하고 세상을 싫어하며 수련(修鍊)하여 곡식을 먹지 않는 자가 이따금 그 가운데 깃들어 살면서 돌아오기를 잊는다. 나는 비록 그것이 사람의 정(情)에 가깝지 않음을 미워하나, 나와 상대는 다름이 있는 것이므로 또한 그들과 심하게 따지려고 하지 않는다. 하늘의 동쪽 끝 바다 가까이에 산이 있어서 세속에서는 풍악(楓嶽)이라고 부르는데, 중들은 금강산(金剛山)이라고 하니, 그 설(說)은 《화엄경(華嚴經)》에서 근본한 것이다. 《화엄경》에, ‘바다 동쪽 보살(菩薩)이 머물던 곳의 이름을 금강산이라 한다.’는 글이 있다고 한다. 나는 이 글을 읽은 적이 없기 때문에 과연 이 산인지는 모르겠다. 요사이 보덕암(普德菴)의 중이 찬술한 《금강산기(金剛山記)》라는 것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주는 자가 있었다. 읽어 보니 모두 상도(常道)에 어그러지는 허탄한 이야기로 하나도 믿을 것이 없었다. 그 가운데에서, ‘황금불상(黃金佛像) 53구(軀)가 서역으로부터 바다에 떠서 한(漢) 나라 평제(平帝) 원시(元始) 4년 갑자년에 이 산에 이르렀으므로 절을 세웠다.’ 하였는데, 불법(佛法)이 동쪽으로 흘러온 것은 한 나라의 명제(明帝) 영평(永平) 8년 을축년이고, 우리나라에서 불법이 행해진 것은 또 양(梁) 나라 무제(武帝) 대통(大通) 원년 정미년부터이니, 이 해는 한 나라 명제 영평 을축년보다 4백 1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뒤떨어졌다. 만약 저 《금강산기》의 설대로라면 이것은 중국에서 전혀 부처가 있음을 알지 못하던 62년 전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미 부처를 위하여 법당을 세웠다는 것이 되니, 그것이 가장 우스운 것이다. 다른 것도 이와 같다. 비록 그렇지만 들으니, ‘옛날에는 불도(佛道)를 배우는 사람들이 이 산 속으로 들어가서 부지런히 뜻과 행실에 힘써 그 도(道)를 실증(實證)한 자가 자주 있었다.’ 한다. 이것은 처음 이 산은 사람 사는 곳에서 수백 리가 멀리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바위로 된 봉우리가 벽처럼 서 있어 이르는 곳마다 모두 천길 만길이어서 낭떠러지와 험준한 골짜기에 몸을 의지할 만한 암자나 움집도 없었으며, 채소나 과일을 심어서 먹을 만한 자투리땅도 없었으니, 여기에 산다는 것은 구멍에 숨거나 나무 위에 둥지를 만들어서 새나 짐승과 섞여 살거나 풀 뿌리나 나무껍질로 주린 배를 채우는 자가 아니라면 하루도 머무를 수 없었을 것이다. 부처의 법은 도를 닦는 데에 반드시 수고로움을 참고 괴로움을 견디는 일을 시험한 뒤에야 깨달음이 있다. 그런 까닭에 그 스승인 석가모니는 설산(雪山)에서의 6년 동안의 고행(苦行)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법을 참고 배워 부지런히 닦는 데 뜻을 둔 자는 산에 들어가지 않으면 또한 불법을 이룰 수 없었던 것이다. 근래에는 그렇지 않아서 산중에 암자가 해마다 늘어나서 거의 백 개나 된다. 그 중에 큰 절로는 보덕사(報德寺)ㆍ표훈사(表訓寺)ㆍ장안사(長安寺) 등이 있는데, 그 절들은 모두 관청에서 짓고 수리하여 전각(殿閣)은 하늘처럼 높이 산골짜기에 가득하며, 금빛과 푸른빛의 단청(丹靑)은 빛나고 밝아서 사람의 눈을 부시게 한다. 상주(常住)하는 경비(經費) 같은 것에 이르러서는 재물을 맡은 고(庫)가 있고, 보(寶)를 맡은 관원이 있다. 성곽을 등지고 있는 좋은 밭은 주군(州郡)에 가득하고, 또 강릉(江陵)ㆍ회양(淮陽) 두 도(道)에서는 해마다 조곡(租穀)을 곧장 관(官)에 들여서 다 엄중히 산으로 수송한다. 비록 흉년을 만나더라도 감면(減免)되는 일이 없다. 매번 사자를 보내서 해마다 옷과 양식과 기름과 소금 등의 물품을 지급하는데, 반드시 빠짐이 없게 한다. 그 중들은 대체로 관(官)에 예속되지 않는다. 백성이 도피하여 부역을 면하는 자가 항상 수천 수만 명이 있어 편안히 앉아 먹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한 사람도 설산(雪山)에서 고행한 석가모니처럼 부지런히 닦아 도(道)를 얻은 자가 있었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다. 그 위에 더욱 심한 자가 있으니, 사람을 속여 유혹하기를, ‘한번 이 산을 보면 죽어서 악도(惡道)에 떨어지지 않는다.’ 하니, 위로는 공경(公卿)으로부터 아래로는 사(士)ㆍ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아내와 자식을 데리고 다투어 가서 예배(禮拜)한다. 눈이 내리는 추운 겨울과 장마가 내려서 길이 막힐 때를 빼고는 산을 유람하는 무리들이 길에 늘어서 있다. 또한 과부와 처녀들이 따라가서 산 속에 며칠씩 머무르면서 추한 소문이 때때로 들리건만 사람들은 괴이쩍게 여길 줄을 모른다. 혹은 근시(近侍)가 왕명을 받들고 역마(驛馬)로 달려 향(香)을 내려주는 일이 1년 4계절에 끊이지 않는데, 관리들은 그들의 권세를 두려워하여 급히 달려가 명(命)을 기다리니, 그 수요(需要)를 공급하는 비용이 자칫하면 만금(萬金)으로 계산된다. 산 옆에 사는 백성들은 응접(應接)하는 일에 피곤하여 성내며 꾸짖어 말하기를, ‘산은 어째서 다른 고을에 있지 않았던가.’ 하는 자도 있다. 아, 사람들이 이 산을 사랑하는 것은 보살이 여기에 머무르기 때문이고, 보살을 존경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속에서 사람에게 복을 주기 때문이다. 그 보이지 않는데에 복을 주는 일은 알 수가 없는데, 중들이 이 산을 속여 팔아서 스스로 따뜻하고 배부르기를 도모하여 백성들이 그 해를 입으니, 더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러므로 나는 사대부(士大夫)로서 산으로 놀러 다니는 자를 보고서 비록 이것을 중지시킬 힘은 없으나 마음속으로는 가만히 비루하게 여겼는데, 이제 불도(佛徒) 선지사(禪智師)가 이 산에 가게 되었기에, 나의 평소에 가슴속에 쌓아 두고 토로하지 않았던 것을 적어서 준다. 선지사는 벌써 중이 되었으면서 왜 이 산에 들어가는 것이 이렇게 늦었는가? 산중에 만약 사람이 있거든 나를 위해서 말을 전해 주시오. 마땅히 나의 말을 옳게 여기는 자가 있을 것이오.” 하였다.
○ 권근(權近)의 중을 전송하는 서문에, “금강산은 우리나라 동해(東海) 가에 있는데 그 지형의 아름다움이 천하에서 제일이다. 그러므로 그 이름이 천하에 알려진 것이다. 내가 어릴 때에 일찍이 들으니, ‘천하 사람들이 와서 보기를 원하지 않는 이가 없으나, 그렇게 되지 못함을 한탄하여 그 그림을 걸어 놓고 예배(禮拜)하는 자가 있었다.’고 하니, 그 사모함의 간절함이 이러하였다. 나는 다행히도 이 나라에 나서 이 산과의 거리가 수백 리도 안되건만, 벼슬에 얽매이고 세속의 명리(名利)에 분주하여, 일찍이 한 번도 가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표연히 떠나 멀리 가고 싶은 마음은 일찍이 가슴속에서 오락가락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병자년 가을에 내가 중국에 가서 천자(天子)를 알현하니, 황제(皇帝)가 친히 글제를 내고서 시(詩) 20여 수를 짓게 하였다. 그중의 하나가 금강산(金剛山)이라는 제목이었다. 이에 이 산의 이름이 과연 온 천하에 높아서 내가 어릴 때에 들은 것이 거의 빈말이 아님을 알았다. 평소에 한번도 가 보지 못한 것을 한탄하면서 하늘 같은 복으로 본국에 돌아간다면 반드시 먼저 이 산에 가서 평소의 뜻을 이루겠다고 마음먹었다. 이제 이미 돌아왔으나, 전일처럼 얽매여서 나의 뜻을 아직도 이루지 못하고 있다. 하루는 중 나암(懶菴)이 소매 속에 시를 넣어 가지고 왔기에, 열람(閱覽)하니, 금강산 유람길 떠나는 데에 전송하는 작품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시책을 어루만지며 스스로 탄식하기를, ‘내 어찌하면 속세를 털어버리고 구름처럼 험한 곳을 지나 높은 정상에 올라 다리로는 천길의 높은 곳을 밟고 눈으로는 천리 먼 곳까지 바라보며, 언덕이나 개밋둑을 작게 여기고 속세를 좁게 여기며, 창해(滄海)에 목욕하는 해를 굽어보고, 천지의 넓고 큰 기운을 받아서, 동해(東海)에 뛰어들어 죽은 노련(魯連)을 생각하며, 태산(泰山)에 올라 천하를 작게 여기던 공자(孔子)를 희망하면서, 넓고 큰 마음으로 스스로 만족하며 유유하게 돌아가기를 잊어 나의 평생의 가슴속에 쌓인 답답함을 시원하게 씻어 버릴 수 있을까.’ 하였다. 아, 이 산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도 많고, 내가 보고 싶어한 지도 또한 오래되었다. 몇 백 리 되지도 않는 가까운 거리에서 수십 년이라는 긴 세월을 지내면서 아직 한 번도 눈으로 보지 못하였으니, 천하에서 보고 싶으면서 보지 못한 사람이 몇 사람이겠는가. 그 보지 못한 사람들은 다만 한가하거나 바쁘거나 멀고 가까움의 차이가 서로 같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눈에 보이지 않는 운수(運數)가 있어서 속물(俗物)은 선경(仙境)을 밟을 수 없어서일까. 또 이미 본 자의 얻은 바가 다 같은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스님이 얻는 바도 여러 사람들과 같을 뿐일까. 만일 훗날에 내가 혹 한 번 올라가 볼 수 있게 된다면 내가 얻는 바는 또 어떠할는지 모르겠다. 다만 내가 지금 보고 싶으나 볼 수 없음이 한스러울 뿐이다. 그런 까닭에 이 시책을 보고 더욱 감상이 이는 것이다. 나암(懶菴)은 대대로 벼슬한 집안으로 비단옷을 버리고 누더기를 입었으나, 얼굴이 청초(淸楚)하고 행실이 깨끗하니, 나는 장차 그와 더불어 속세 밖의 벗으로 하려 한다.” 하였다.
○ 하륜(河崙)의 중을 전송하는 시(詩)의 발문(跋文)에, “풍악은 진실로 기이하고 뛰어나서 사랑할 만하다. 납의(衲衣)를 입은 중들이 그 사이에 살고 있는데, 돌계단이 천길이나 되어서 사람의 자취가 드물게 이르기 때문에 마음이 경계와 더불어 고요하여 간혹 그 도(道)를 깨닫는 자도 있다. 그러나 그 산을 금강산(金剛山)이라고 일컫는 것은 장경의 설에서 따온 것이다. 장경(藏經)에서 금강산을 말하기를, ‘동해(東海) 안 8만 유순(由旬)이 되는 곳에 1만 2천의 담무갈(曇無竭 보살의 이름)이 항상 그 가운데에 머무른다.’ 하였으니, 이는 풍악(楓嶽)을 말한 것은 아니다. 석가모니가 서방(西方)에서 나서 등정각(等正覺)열반(涅槃)을 이룬 것은 중국의 주 나라와 시대가 같다. 주 나라 이전부터 반고씨(盤古氏) 이후로 하 나라ㆍ 상 나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성현(聖賢)의 많음과 교화(敎化)의 아름다움을 칭송할 만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우씨(夏禹氏)가 도산(塗山)에 모이자, 옥과 비단을 가지고 온 나라가 만국(萬國)이나 되었으며, 무왕(武王)이 상 나라를 치자 기약하지도 않고 모인 자가 8백 나라나 되었다. 무왕이 이미 상 나라를 쳐서 이기고는 기자(箕子)를 조선(朝鮮)에 봉하였는데, 조선은 동해(東海) 가에 있으면서 국토가 크고 사물(事物)의 번성함을 칭송할 만한 것이 또한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석가모니가 말한 바는 만축(萬軸)이나 되는데, 어찌 한마디도 중국의 일에는 언급한 것이 없고, 유독 동해 가운데에 있는 금강산의 거리와 담무갈(曇無竭)의 숫자에 대해서는 이렇게도 자세히 언급하였단 말인가. 그 밖에 과거와 미래, 천당(天堂)과 지옥(地獄)에 대한 설도 모두 매우 자세하게 설명하였는가. 그러나 현재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생략하였다. 어째서 그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은 자세히 말하고, 사람들이 누구나 아는 것은 언급하지 않았는가. 이는 모두 가설(假說)을 이야기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워하고 사모할 줄을 알아서 선(善)으로 향하는 생각을 자라나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풍악(楓嶽)을 일컬어 금강산(金剛山)이라고 한 것은 가설 중의 가설인 것이다. 지금 스님이 가는 것은 그 풍악의 기이하고 뛰어난 경치를 사랑해서인가, 그 금강(金剛)이라는 가설(假說)을 사모해서인가. 거짓된 설이 한번 나오자, 온 세상 사람들이 그치기 않고 분주히 달려가기에 내가 변론하려 한 지가 오래되었다. 이제 스님이 시(詩)를 청하는 것을 인하여 이미 그 옛날 산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었던 뜻을 제영(題詠)하고, 이어서 이 설을 쓴 것이니, 스님은 참작할지어다. 만약 ‘모든 상(相)은 상(相)이 아니니, 진(眞)도 가(假)도 다 공(空)이다.’라고 말한다면, 내가 감히 변론할 바가 아니다.” 하였다.
○ 이곡(李穀)의 시에 “하늘을 찌르는 구름 빛이 신령스런 광채를 내뿜으니, 천자(天子)가 해마다 향(香)을 내리네. 한번 바라보고 싶어 하던 평생의 마음을 이미 마쳤으니, 굳이 깊은 곳에서 새끼로 만든 평상에 앉아야 할 것은 없다.” 하였다.
○ 권근(權近)의 명 나라 황제에게 바친 응제시(應制詩)에, “높고 높은 천만봉(千萬峯)이 눈처럼 희게 서 있으니, 바다의 구름이 옥부용(玉芙蓉)을 열어 내놓았네. 신령한 빛이 출렁거리니 창해(滄海)가 가깝고, 맑은 기운이 일어나니 조화(造化)가 모임이로다. 우뚝이 높게 솟은 언덕과 봉우리는 조도(鳥道)에 임하고, 맑고도 그윽한 골짜기는 신선의 자취를 숨기고 있네. 동쪽으로 노닐어 문득 그 높은 정상에 올라 홍몽(鴻濛)을 굽어보며 한번 시원히 가슴을 씻었으면.” 하였다.
○ 고려 전치유(田致儒)의 시에, “풀과 나무 조금 나서 벗겨진 머리의 터럭같고, 연기와 노을이 반만 걷혔으니 어깨 드러낸 가사(袈裟)와 같구나. 우뚝 높은 봉우리 뼈뿐이어서 홀로 외롭고 깨끗하니, 응당 육산(肉山)의 살찌고 크기만 한 것을 웃으리라.” 하였다.
○ 안축(安軸)의 시에, “뼈처럼 선 봉우리들 칼과 창이 번쩍이네. 여기 사는 중들 재를 지낸 뒤 앉은 채 영위함이 없구나. 어찌하여 산 아래의 생민(生民)들은 귀인의 행차 접대에 시달려서 바라보곤 때때로 이마를 찡그리며 지나가는고.” 하였다.
천마산(天磨山) 장양현(長楊縣)의 서쪽에 있다. 부와의 거리는 1백 34리이다. 개탄산(介呑山) 부의 동쪽 26리에 있다. 단발령(斷髮嶺) 천마산(天磨山)에 있다. 부와의 거리는 1백 54리이다. 세상에서 말하기를, “속인이 이 고개에 올라 금강산을 본 자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고자 한다. 그런 까닭에 단발령이라고 이름 지은 것이다.” 하였다. 철령(鐵嶺) 부의 북쪽 39리에 있다. 돌성[石城]의 남은 터가 있다.
○ 이곡(李穀)의 기(記)에, “철령은 우리나라 동쪽에 있는 요해지(要害地)로 이른바 한 사람이 관문에서 막으면 일만 사람이 덤벼도 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철령 이동(以東)의 강릉(江陵)의 여러 고을을 관동(關東)이라 한다. 지원(至元) 경인년에 반왕(叛王) 내안(乃顔)의 무리인 하지[哈丹] 등의 적이 북쪽으로 달아나서 동쪽으로 나와 개원(開元)의 여러 고을로부터 관동으로 뛰어 들어오니, 국가에서 만호(萬戶) 나유(羅裕) 등에게 그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철관(鐵關)을 막아 수호하게 하였다. 적이 화주(和州)ㆍ등주(登州)의 서쪽 여러 고을 인민을 겁탈하고 노략질하고, 등주에 이르러 등주 사람으로 하여금 엿보게 하니, 나공(羅公)은 적이 왔다는 소문을 듣고 관(關)을 버리고 달아났다. 그런 까닭에 적은 아무도 없는 땅을 가듯 하니, 온 나라가 흉흉(洶洶)해지고 사람들은 그 해를 입게 되어 산성(山城)에 올라가거나 바다 속의 섬에 들어가서 그 칼날을 피하였다. 중국에 구원병을 요청하기에 이르러서야 겨우 섬멸되었다. 이제 내가 본 철관(鐵關)의 험난함은 진실로 한 사람으로 하여금 지키게 한다면 비록 천만 사람이 쳐다보고 공격하더라도 몇 해 몇 달로써는 들어올 수 없겠다. 나공은 참으로 담이 작도다.” 하였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끝없이 높고 높아서 거대한 형세가 관동(關東)을 진압하네. 산정은 하늘끝까지 치솟고, 뿌리의 깊이는 땅의 마지막까지 통했네. 겨울의 위세는 봄까지 춥고, 어두운 빛은 낮에도 어슴푸레하네. 학(鶴)은 산허리의 이슬에 소리치고, 원숭이는 동구의 바람에 부르짖네. 무너진 벼랑에 날리는 비가 거무스름하고, 빼어난 고개에는 저녁놀이 붉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속세가 멀고, 앞길을 찾으니 돌계단이 뚫렸네. 빽빽이 모여 선 봉우리는 수자리하는 보루(堡壘)를 떠받들고, 중첩한 산들은 신령의 궁전을 안고 있다. 붉은 기운은 높고 푸른 곳에 둘렀고, 붉은 아지랑이는 푸른 하늘에 내뿜는다. 말굽은 나뭇가지 끝에 달려가고, 사람의 그림자는 구름 속에서 번득인다. 떨어지는 물은 은하수의 물결에 이어졌고, 수풀은 달 속의 계수나무 떨기에서 나뉘어 왔구나. 연주(兗州)ㆍ대종(岱宗)을 여우 사는 언덕처럼 보고, 화산(華山)ㆍ숭산(嵩山)을 황새 우는 언덕에 견주어 본다. 봉관(鳳管)은 이처럼 교묘하게 읊기 어렵고, 교초(鮫綃)에 그려도 이처럼 공교할 수는 없으리. 촉도(蜀道)를 뚫어 엶은 다섯 명의 역사를 번거롭게 하였고, 태항산(太行山)ㆍ왕옥산(王屋山)을 옮겨 놓으려고 한 것은 우공(愚公)을 웃노라. 바라보고 듣는 것이 다 특이하니, 조화(造化)의 공을 누가 알랴.” 하였다.
○ 안축(安軸)의 시에, “큰 재가 공중의 절반을 가로지르니, 동쪽과 서쪽의 길이 여기에서 나뉘어진다. 높은 곳에 올라서 관 버리고 달아난 옛날의 장수를 비웃노니, 험난한 관을 등지고 있으면서 얼마 안 되는 군대를 겁내었네. 깎아지른 계곡에는 얼음과 눈이 섞여 있고, 아스라한 봉우리에는 바위에 구름이 얹혀 있다. 옛 보루를 수리하는 사람 없이 천하는 문(文)만을 숭상하네.” 하였다.
○ 길이 관문으로 들어가매 잠깐 눈앞이 열리니, 붉은 깃발과 검은 창이 함께 오락가락하는구나. 홀연히 백성을 근심할 직책에 놀라면서, 도리어 세상을 구제할 재주 없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노라. 연기와 불이 보이는 마을 거리는 매우 쓸쓸하고, 풀과 쑥대 우거진 성참(城塹)은 부러지고 무너진 지 오래구나. 모이고 흩어지는 변방의 아전들이 오히려 의관을 갖추고 왕래하는 사람에게 인사하는 것이 가련하구나.” 하였다.
동파령(東坡嶺) 수입현(水入縣)에 있다. 부와의 거리는 88리이다. 고개 밑에서 물이 나와 남쪽으로 흘러가 현 북쪽 10리에 이르러서 다시 땅속으로 들어갔다가 현 남쪽에서 다시 나온다. 그런 까닭으로 이름을 수입현(水入縣 물이 들어가는 마을)이라고 하였다. 본부와의 거리는 90리이다. 추지령(楸池嶺) 화천현(和川縣) 동쪽 19리에 있다. 부와의 거리는 69리인데, 아주 높고 험하다. 쌍령(雙嶺) 남곡현(嵐谷縣) 30리에 있다. 부와 거리는 55리이다. 쇄령(洒嶺) 장양현(長楊縣) 북쪽 30리에 있다. 부와의 거리는 2백 3리이다. 회령(灰嶺) 부의 북쪽 57리에 있다. 배재(拜岾) 금강산 서쪽에 있다. 부와의 거리는 1백 64리이다. ○ 이곡(李穀)의 〈동유기(東遊記)〉에, “지정(至正) 기축년 가을에 금강산을 유람하려고 천마령(天磨嶺)을 넘어서 산 아래 장양현에서 자고, 아침 일찍 잠자리 위에서 식사를 한 뒤에 산에 오르니, 구름과 안개가 덮여 어두컴컴하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풍악(楓嶽)을 유람하는 이가 구름과 안개 때문에 보지 못하고 돌아가는 일이 허다하다.’ 하니, 같이 유람하는 자들이 다 근심스런 빛으로 묵묵히 기도를 하였다. 산에서 5리쯤 되는 곳에 이르자, 검은 구름이 차츰 엷어지면서 햇빛이 새어 나오더니, 배재에 올랐을 때에는 하늘도 밝고 기운도 맑아서 산이 밝기가 닦아 놓은 것 같았다. 이른바 1만 2천 봉을 낱낱이 셀 수 있을 듯하였다. 이 산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은 반드시 이 재를 지나게 되는데, 재에 오르면 산이 보이고, 산이 보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마를 조아리게 된다. 그런 까닭에 배재(拜岾 절하는 고개)라고 한 것이다. 예전에는 집이 없어서 돌을 포개어 대(臺)처럼 만들어서 휴식하는 곳으로 썼는데, 지정(至正) 정해년에 지금의 자정원사(資正院使) 강공(姜公) 금강(金剛)이 천자의 명을 받들고 와서 큰 종을 주조하여 재 위에 종각(鐘閣)을 지어 걸어 놓고서 그 곁에 절을 지어 주고 종 치는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우뚝 솟아 아름답게 채색한 집의 광채가 설산(雪山)에까지 반사되니 또한 산문(山門)의 일대 장관이었다.” 하였다. 금강대(金剛臺) 표훈사(表訓寺) 북쪽에 있다. 석벽(石壁)이 천길이나 되어서 사람은 오를 수가 없고 두 마리 검은 새가 그 위에 집을 짓고 산다. 그 곳에 사는 중이 그것을 현학(玄鶴)이라고 하였다. 만폭동(萬瀑洞) 금강산 가운데에 있다. 일백 군데에서 흘러나오는 샘물이 골짜기 속으로 쏟아지니, 그 형상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런 까닭에 만폭동이라고 이름 지은 것이다. 골짜기 어귀에 봉우리가 있으니, 오인봉(五人峯)이라고 하는데 사람들이 ‘푸른 학이 그 모퉁이에 살고 있다.’ 한다. 깊고 큰 물 하나가 있으니, 관음담(觀音潭)이라고 한다. 관음담 가의 돌벼랑은 푸른 이끼가 끼어 발이 미끄러워서 사람들은 다 칡덩굴을 잡고서야 지나갈 수 있으므로 그 이름을 수건애(手巾崖)라고 한다. 돌 중심에 방아 절구처럼 움푹 패인 곳이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관음보살(觀音菩薩)이 손수건을 빤 곳이라.’ 한다. 보덕굴(普德窟) 앞에 이르자, 급한 여울이 돌을 휘감아 와서 벼랑의 허공에 부딪치니, 눈처럼 희게 날리는 물방울이 심하게 내뿜어져서 대낮인데도 어두워지려 한다. 돌바닥은 물이 깊어서 푸른 쪽빛과 같다. 또 두어 걸음 가면 성난 폭포가 깎아지른 듯한 언덕으로 쏟아지는데, 작은 것은 구슬을 내뿜고, 큰 것은 눈을 흩날려 섞여 내리는 것이 이루 다 셀 수 없으니, 주연(珠淵 구슬 못)이라고 한다. 또 한 개의 돌이 있어서 형상이 거북이가 못 가운데에 엎드려 있는 것 같으니, 구담(龜潭)이라고 한다. 또 한 개의 못이 있어서 깊이를 헤아릴 수 없으니, 화룡담(火龍潭)이라 하고, 그 위에 봉우리가 있으니, 사자암(獅子巖)이라고 한다. 수재(水岾) 금강산 동쪽에 있다. 세상에서 이르기를, “사람이 소리쳐 부르면 반드시 흐리고 비가 오는 까닭에 수재(물 고개)라고 이름 지은 것이다.” 한다. 골짜기가 매우 깊숙하다. 돌아가는 길은 점점 평탄해져서 바위는 적고 흙이 많다. 수십 리를 가면 유점사(楡岾寺)에 도착한다. 망고봉(望高峯) 즉 금강산의 동쪽 봉우리이다. 송라암(松蘿庵)에서 막혀 있는 벼랑을 지나가려면 벼랑이 돌난간과 같아서 쇠줄을 수직으로 드리우고 사람들이 그것을 붙잡고 올라간다. 세상에서 말하기를, “만약 떠들썩하게 지껄이면 갠 날에도 반드시 비가 온다.” 한다.
○ 성임(成任)의 시에, “바위 사이로 사람의 말소리가 산골에 요란하더니, 구름 끼고 비가 내려 잠깐 사이에 지척도 분간할 수 없구나. 아래로 두어 봉우리를 내려오자 하늘이 이미 개었으니, 어두워지고 밝아지는 것을 누가 다시 그 시작과 끝을 추측할 수 있으랴.” 하였다.
만경봉(萬景峯) 즉 금강산의 서쪽 봉우리이다. 또 백운대(白雲臺)ㆍ국망재(國望岾)가 있으니 모두 금강산의 큰 봉우리이다. 비로봉(毘盧峯) 즉 금강산의 주봉(主峯)이다. 바위 무늬가 오랫동안 산기운과 안개로 인하여 알록달록한 것이 마치 눈빛 같다. 산 이름을 개골(皆骨)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말휘령(末暉嶺) 장양현(長楊縣) 서북쪽 35리에 있다. 부와의 거리는 1백 60리이다. 이현(梨峴) 장양현 동쪽 55리에 있다. 부와의 거리는 1백 76리이다. 한사리평(寒沙里坪) 부의 서쪽 45리에 있다. 용연(龍淵) 부의 북쪽 29리에 있으니, 즉 양근군(楊根郡) 대연(大淵)의 하류이다. 덕진(德津) 부의 서쪽 1리에 있다. 화천현(和川縣)에서 흘러나와서 소양강(昭陽江)으로 들어간다. 명담(鳴潭) 금강산에 있다. 세상에서 말하기를, “이무기가 때때로 나와서 생물을 해친다.” 한다.【토산】 연철(鉛鐵) 부의 서쪽 수비산(愁非山)에서 난다. 자석(磁石)ㆍ옻[漆], 궁간상(弓軒桑) 부의 동쪽 동파령(東坡嶺)에서 난다. 잣[海松子]ㆍ오미자(五味子)ㆍ지치[紫草]ㆍ인삼(人蔘)ㆍ복령(茯苓)ㆍ송이[松蕈]ㆍ석이버섯[石蕈]ㆍ꿀[蜂蜜]ㆍ영양(羚羊)ㆍ산무애뱀(白花蛇)ㆍ누치[訥魚]ㆍ여항어(餘項魚)ㆍ쏘가리[錦鱗魚].
【봉수】 개탄산 봉수(介呑山峯燧) 남쪽으로 금성현(金城縣)의 기성북산(歧城北山)에 응하고, 동쪽으로 화천현(和川縣) 여이파산(餘伊破山)에 응한다. 여이파산 봉수(餘伊破山峯燧) 부의 동쪽 45리에 있다. 동쪽으로 추지령(楸池嶺)에 응하고, 남쪽으로 개탄산(介呑山)에 응한다. 추지령 봉수(楸池嶺烽燧) 동쪽으로 통천군(通川郡) 금란성(金幱城)에 응하고, 서쪽으로 여이파산(餘伊破山)에 응한다. 소산 봉수(所山烽燧) 부의 서쪽 25리에 있다. 북쪽으로 함경도 안변부(安邊府)의 철령(鐵嶺)에 응하고, 서쪽으로 남곡현(嵐谷縣) 북산(北山)에 응한다. 남곡북산 봉수(嵐谷北山烽燧) 부의 서쪽 33리에 있다. 남쪽으로 쌍령(雙嶺)에 응하고 북쪽으로 소산에 응한다. 쌍령 봉수(雙嶺烽燧) 남쪽으로 평강현(平康縣) 송현(松峴)에 응하고, 북쪽으로 남곡현(嵐谷縣)의 북산(北山)에 응한다. 『신증』 장미산 봉수(獐尾山烽燧) 동쪽으로 추지령에 응하고, 서쪽으로 소산에 응한다.
【학교】 향교 부의 동쪽 1리에 있다.
【역원】 은계역(銀溪驛) 부의 서쪽 5리에 있다. 찰방(察訪)을 둔다. 본도에 소속된 역은 19개이니, 풍전(豐田)ㆍ생창(生昌)ㆍ직목(直木)ㆍ창도(昌道)ㆍ신안(新安)ㆍ용담(龍潭)ㆍ임단(林丹)ㆍ옥동(玉洞)ㆍ건천(乾川)ㆍ서운(瑞雲)ㆍ산양(山陽)ㆍ원천(原川)ㆍ방천(方川)ㆍ함춘(含春)ㆍ수인(水仁)ㆍ마노(馬奴)ㆍ부림(富林)ㆍ남교(嵐校)ㆍ임천(林川)이다. ○ 찰방 1명을 둔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詩)에, “험난한 산길을 걸어 철령(鐵嶺)을 내려와서 아늑하고 조용한 은계를 찾네. 맑은 물 동구로 흘러나와, 한 가닥 푸른 수정을 둘렀네. 흘러가다가 돌을 만나면 혹은 미친 듯 노호(怒號)하여, 큰 소리가 북을 울리는 것 같구나. 끼고 있는 봉우리에는 꽃이 눈부시고, 물가를 따라 풀이 우거졌다. 갠 산 아지랑이는 사람을 쫒아 가니, 10리에 말굽 소리 끊어졌네. 홀연히 보니 버드나무 저쪽에 역사가 있어서, 아스라한 집이 꽃다운 풀 언덕에 잇닿았네. 수풀이 깊으니 새들이 지저귀고, 나무가 빽빽하니 매미가 운다. 한가로이 바위에 앉아서 수건을 벗으니, 5월에 바람이 서늘하구나. 고요한 곳이라 문득 자고 싶어 소나무 난간 서쪽을 베개 삼고 의지하고 있노라니, 잠깐 동안에 몸에 날개가 돋았네. 천계(天鷄)에 옛 보금자리를 찾으니, 허름한 베치마 입은 딸과 쑥대처럼 헝클어진 머리를 한 아내가 문에 나와서 함께 소매를 당기며 처음에는 웃더니 도리어 슬피 우네. 각각 오래도록 못 보았소, 말고삐를 돌리기가 어찌 그리 늦으셨소. 내 한때 잘못을 저질렀소 하며 놀라 기뻐하며 앞에 와서 서로 이끄네. 이날 비가 처음으로 흡족하게 오고, 창문 가까이에서 죽계(竹鷄)가 울었다. 놀라 일어나니 아무도 없어 가슴을 어루만지며 공연히 슬퍼하네. 알겠노라. 인간의 모든 일은 깨어 있거나 꿈속에서나 한가지라는 것을. 얻는 것과 잃는 것의 거리가 하늘과 땅 같다고 말하지 말라. 모두 다 같이 여옹(呂翁)의 한단몽(邯鄲夢)일세. 근심도 기쁨도 모두 미(迷)일 뿐인데 어찌하여 자랑하는 자들은 콧김이 하늘을 찌를 듯하는가. 머리를 돌려 공자(孔子)나 묵자(墨子)가 한평생 바삐 서둘렀음을 웃노라.” 하였다.
신안역(新安驛) 부의 남쪽 30리에 있다. 교생원(校生院) 부의 서쪽 11리에 있다. 차산원(遮山院) 부의 동쪽 60리에 있다.
【불우】 보현암(普賢菴) 금강산에 있다. 도산사(都山寺) 금강산에 있다. ○ 이곡(李穀)의 기(記)에, “우리나라의 산수가 천하에 이름이 높은데, 금강산의 기묘함은 더욱 으뜸이 된다. 또 불경에 담무갈보살(曇無竭菩薩)이 이 산에 머물렀다는 설이 있어서 세상에서는 드디어 인간세계의 정토(淨土)라고 일컫는다. 향과 폐백을 내리는 천자의 사자(使者)가 길에 잇달았으며, 사방의 남녀들이 천리를 멀다 하지 않고 소나 말에 싣거나 지거나 이고서 부처와 중을 공양하는 자가 서로 잇달았다. 산 서북쪽에 재가 있어서 가로로 끊어져 험하고 높아서 하늘에 올라가는 듯하다. 사람이 여기에 이르면 반드시 머물러 쉬는데, 지대가 너무도 궁벽하여 사는 백성이 아주 적어 혹 풍우를 만나면 노숙(露宿)하다가 병이 들곤 한다. 지원(至元) 기묘년에 쌍성 총관(雙城摠管) 조후(趙侯)가 산의 중 계청(戒淸)과 의논하여 그 요충지인 임도현(臨道縣)에 땅 몇 이랑을 사서 절을 짓고, 임금의 수(壽)를 비는 도량(道場)으로 삼았다. 봄가을에 곡식을 배로 실어다가 그곳에 출입하는 자에게 밥을 제공하고, 그 나머지를 산속의 여러 절에 나누어 주어서 겨울과 여름의 식량에 충당하게 하여 해마다 전례로 삼았다. 그런 까닭에 도산(都山)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조후가 이 절을 처음 지을 때에 그곳 안에 있는 중들에게 명령하기를. ‘중이 되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위로는 사은(四恩)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삼도(三途)를 구제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주리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며, 학문을 끊고 하는 일 없이 마음만 닦는 자는 최상이고, 부지런히 강설(講說)하고 열심히 교화하여 인도하는 자는 그 다음이고, 머리를 깎고서도 집에서 살며 부역(賦役)을 피하고서 산업을 영위하는 자는 하등(下等)이다. 중으로서 하등이 되면 부처의 죄인일 뿐만 아니라 또한 국가의 놀고 먹는 백성인 것이다. 너희들이 이미 관(官)에 부역하지도 않고 있으니 나의 일을 돕지도 않는 자들은 처벌할 것이다.’ 하였다. 이에 여러 중들은 부끄러워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면서 다투어 자기가 할 수 있는 기술의 도구는 가지고 와서는 도끼를 가진 자는 도끼질하고, 톱을 가진 자는 톱질을 하며, 나무를 자르거나 흙을 바르거나 하였다. 조후가 자기 집의 곡식을 실어다가 그들을 먹이고, 자기 집의 기와를 벗겨다가 얹었다. 그래서 백성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며칠이 못되어서 완공하였다. 공사를 마치고는 사람을 보내어 그 일의 기문을 청하여 왔기에, ‘나는 비록 조후를 알지는 못하지만, 그가 어질다는 소문을 들은 지는 오래되었다. 대개 일을 하는 데에는 남에게 이롭고 편리하게 해야 할 것이니, 자기 자신을 위하여 복을 구하는 자는 하등이다. 저 임도현(臨道縣)은 온 산의 요충지이다. 그런 까닭에 이 절을 지어서 출입하는 자를 편리하게 한 것이다. 쌍성(雙城)도 한 쪽의 요충지이니, 이런 마음을 확장시켜 그 정사를 시행한다면 반드시 백성을 편리하게 하는 점이 많을 것이다. 요사이 동남쪽 변방 백성들이 그 경내로 흘러 들어가는 자가 있었는데, 조후는 즉시 까닭을 지적하여 꾸짖고, 거절하여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은 항산(恒産)이 없으므로 항심(恒心)이 없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떠돌아다니는 것이다. 사람이 항심이 없다면 어디 간들 용납될 수 있겠느냐.’ 하였다. 나는 여기에서 조후의 사람됨을 더욱 알게 되었으니, 감히 기문을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보덕굴(普德窟) 만폭동(萬瀑洞) 안에 있다. 관음각(觀音閣)이 있다는데, 절벽을 파서 판자를 걸치고, 구리 기둥을 밖에 세워서 작은 방 세 칸을 그 위에 짓고, 쇠사슬로 묶어서 바윗돌에 못을 박아 놓아 공중에 떠 있으므로 사람이 올라가면 흔들린다. 그 안에 부처를 모신 함(函)을 안치하고 구슬과 옥으로 장식하였으며, 겉에 철망을 둘러서 손으로 만지지 못하게 하였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고려 안원왕(安原王) 때에 중 보덕(普德)이 창건(創建)하였다.” 한다.
○ 이제현(李齊賢)의 시에, “음산한 바람은 바위 구비에서 나오고, 냇물은 깊어 더욱 푸르구나. 지팡이에 의지하여 층암(層岩) 꼭대기를 바라보니, 나는 듯한 처마가 구름 낀 나무 위에 얹혀 있구나.” 하였다.
마가연(摩訶衍) 만폭동의 가장 깊은 곳에 있다.
○ 이제현의 시에, “산중에 해가 한낮인데도, 풀에 맺힌 이슬이 짚신을 적시네. 오래된 절에는 살고 있는 중도 없이 흰 구름만 뜰에 가득하구나.” 하였다.
불지암(佛地菴) 만폭동(萬瀑洞)에 있다.
○ 성임(成任)의 시에, “손님이 와서 숙박하건만, 나와서 맞이하는 사람 없구나. 산은 최상의 땅을 둘렀고 중은 대승(大乘)의 경을 외운다. 산골의 시냇물이 어느 때인들 마르랴. 등잔불은 밤새도록 밝구나. 속세의 물거품 같은 꿈을 도리어 이 속에서 향하니 술이 깨는구나.” 하였다.
송라암(松蘿庵) 만폭동에 있다. 두 개의 암자가 마주 보고 있으니, 큰 송라암ㆍ작은 송라암이라고 한다. 암자 아래에 고성(古城)이 있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장양(長楊)의 수령이 난을 피하여 여기로 들어왔다.” 하고 어떤 이는, “그 수령이 반란을 꾀하여 여기에 의거하였다.” 한다. 어느 것이 옳은 지는 알 수 없다. 암자 동쪽에 큰 골짜기가 있으니, 백 갈래의 나는 듯한 샘물이 쏟아져 내려와서는 가지처럼 나뉘고 팔다리처럼 갈라지는데, 아득히 멀어서 흰 무지개같이 보인다. 봉우리들은 높고 험하여 바윗돌들이 우뚝우뚝 솟았으니, 우뚝한 것은 칼과 같고 예리한 것은 송곳 같다. 솟아오른 것은 손과 같고, 나란히 된 것은 치아와 같다. 굽은 것은 팔꿈치 같고 가로지른 것은 팔과 같은데, 푸르름이 여기저기 퍼져서 군데군데 나타나고 첩첩이 드러난다.
○ 성임의 시에, “큰 송라암이 작은 송라암과 마주 보고 있는데, 동쪽 우물과 서쪽 대(臺)가 이렇게 좋은 곳은 세상에 많지 않다. 두 명의 선승(禪僧)이 서로 마주 앉아서, 푸른 산빛이 가사에 떨어지는 것도 모르네.” 하였다.
장안사(長安寺) 표훈사 아래에 있다. 법당(法堂)과 불전(佛殿)과 불상(佛像)을 모두 중국의 기술자가 제작하였다.
○ 이곡(李穀)의 비문에, “성스러운 천자가 즉위한 7년에 황후 기씨(奇氏)가 원비(元妃)로서 황자(皇子)를 낳았다. 이윽고 황후가 되어 흥성궁(興聖宮)에 거처하게 되자, 내시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내가 전생의 인연으로 황제의 은혜를 입음이 이에 이르렀다. 이제 황제와 태자를 위하여 수명을 하늘에 빌고자 한다. 부처의 힘을 의탁하지 않으면 어찌 하리요.’ 하고, 모든 복리(福利)라는 것을 거행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금강산 장안사가 가장 뛰어나게 좋다는 소문을 듣고, ‘복을 빌어 성상께 보답하는 데에는 이만한 곳은 없겠다.’ 하고, 지정(至正) 3년에 내탕(內帑)의 저폐(楮幣) 1천 정(錠)을 내어 절을 중수하는 자금으로 쓰게 하여, 영구히 중의 공양에 사용하게 하였다. 다음해에 또 이와 같이 하고, 또 다음해에도 그와 같이 하였다. 중 5백 명을 모아서 옷과 발우를 주고 법회(法會)를 열어 낙성식을 올리게 하였다. 이에 궁관(宮官) 자정원사(資政院使) 신 용봉(龍鳳)에게 명하여 전말을 돌에 새겨서 후세에 전하라 하고 드디어 신 이곡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게 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금강산은 고려의 동쪽에 있어서 서울과의 거리는 5백 리이다. 이 산의 뛰어남은 천하에 이름이 났을 뿐만 아니라, 실로 불경에도 실려 있다. 《화엄경(華嚴經)》에 말하기를, ‘동북쪽의 바다 가운데에 금강산이 있으니, 담무갈보살이 1만 2천 명의 보살들과 항상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설법하는 곳이다.’ 하였다. 옛날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것을 알지 못하고 신선(神仙)의 산이라 지칭(指稱)하였다. 이에 신라 때부터 탑과 절을 증축(增築)하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사찰이 벼랑과 골짜기에 가득하다. 그중에 장안사가 그 산기슭에 있어서 온 산의 도회처(都會處)가 된다. 이것은 신라 법흥왕(法興王) 때에 처음으로 세웠으며, 고려 성왕(成王) 때에 중수한 것이다. 아, 법흥왕 때에서 4백여 년 뒤에 성왕이 중수하였는데, 성왕으로부터 지금까지가 또한 거의 4백 년이 된다. 그런데도 아직 중수할 자가 없었다. 비구(比丘) 굉변(宏卞)이 그 쇠락함을 보고 동지들과 더불어 이른바 담무갈보살에게 맹세하기를, ‘이 절을 새롭게 하지 못한다면 이 산을 두고 맹세할 것입니다.’ 하고, 즉시 그 일을 나누어 맡아서 널리 많은 사람을 모집하여 산에 가서 재목을 채취하며, 사람들에게서 식량을 모으고, 임금을 주고 인부를 고용하여 돌을 다듬고 기와를 구워서 먼저 불당을 새롭게 하였으며, 빈관(賓館)과 승방(僧房)도 차례로 대강 완성하였다. 그런데 비용이 여전히 부족하므로 또 탄식하기를, ‘석가세존께서 기원(祇園)을 만드실 때에는 급고독 장자(給孤獨長者)가 금을 땅에 폈으니, 지금이라고 어찌 그러할 사람이 없겠는가. 다만 만나지 못함이다.’ 하고, 드디어 서쪽으로 중국의 서울로 유세(游說)를 떠났다. 일이 중국의 중궁(中宮)에 알려지고, 또 고자정(高資政)이 주장하며 힘을 썼다. 그런 까닭에 그 성취가 이와 같이 된 것이다. 그윽이 생각건대, 불교가 때를 따라 융성하기도 하고 쇠미하기도 하였다. 예전에 우리 세조 황제가 이것을 숭상하고 믿었으며, 역대의 황제도 서로 이어 받들어 빛나고 크게 하였다. 지금 황제께서 선왕의 뜻과 일을 계승하여 더욱 유의하시었다. 대체로 성인(聖人)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과 부처의 살생하지 말라는 가르침은 동일한 인애(仁愛)이며, 동일한 자비인 것이니, 중궁의 보고 느낀 것이 까닭이 있다. 또 옛날 덕을 천하에 베푼 자로는 오제(五帝)와 삼왕(三王)만한 이가 없고, 가르침을 후세에 전한 자로 공자만한 이가 없으나, 지금의 관점에서 본다면, 오제삼왕(五帝三王)으로서 사당에서 향사를 받는 이는 거의 드물고, 공자는 비록 사당이 있다고는 하나, 예제(禮制)에 제한되어 제물을 바치는 것에 모두 일정한 수량이 있어서 그 무리가 먹는 것이 겨우 충당될 뿐이다. 오직 부처만은 그를 위한 궁전이 오랑캐의 나라에서나 중국에서나 바둑돌처럼 퍼져 있고 별처럼 벌여 있어서, 불전과 섬돌의 장엄함과 단청의 장식이 천자의 거처에 비교할 만하며, 향불과 옷과 음식의 봉공(奉供)은 봉읍(封邑)에서의 수입과 비교할 만하다. 이것은 그가 사람을 감동시킴이 실로 깊고도 넓기 때문이니, 이 절이 흥성하는 것은 당연하다. 모든 집을 칸수로써 계산하면 1백 20칸이 넘는다. 불전(佛殿)ㆍ경장(經藏)ㆍ종루(鐘樓)와 삼문(三門)ㆍ승료(僧寮)ㆍ객실에서부터 주방과 욕실의 작은 부분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구조의 장대하고 아름다움을 지극히 하였다. 불상(佛像)으로는 비로자나(毗盧遮那)가 있고, 좌우에는 노사나(盧舍那)가 있고, 석가모니 불상은 높게 중앙에 자리잡았다. 1만 5천의 부처가 두루 둘러 옹위하여 정전(正殿)에 있고, 관음대사(觀音大士)ㆍ천수(千手)ㆍ천안(天眼)과 문수(文殊)ㆍ보현(普賢)ㆍ미륵(彌勒)ㆍ지장(地藏) 등은 선실(禪室)에 있다. 아미타(阿彌陀)ㆍ오십삼불(五十三佛)ㆍ법기보살(法起菩薩)은 노사나(盧舍那)를 옹위하여 해장궁(海藏宮)에 있는데 모두 지극히 장엄하게 꾸몄다. 장경(藏經)은 모두 사부(四部)인데 그중 은으로 쓴 한 가지는 바로 황후가 하사한 것이다. 《화엄경》 세 책과 《법화경(法華經)》 8권은 모두 금자(金字)로 써서 또한 지극히 아름답게 꾸몄다. 옛날부터 소유하고 있던 토지는 국법에 의거하여 결(結)로써 계산하면 1천 50결이나 된다. 함열(咸悅)ㆍ인의현(仁義縣)에 있는 것이 각각 2백 결, 부령(扶寧)ㆍ행주(幸州)ㆍ백주(白州)에 각각 1백 50결, 평주(平州)ㆍ안산(安山)에 각각 1백 결씩이 있으니, 곧 성왕(成王)이 희사한 것이다. 염분(鹽盆)은 통주(通州) 임도현(林道縣)에 있는 것이 1개소, 경저(京邸)에 있는 것으로는 개성부(開城府)에 있는 것이 1구(區), 시장의 점포로써 남에게 세준 것이 30칸이다. 모든 돈과 곡식과 집기의 수량은 맡은 자가 있기 때문에 여기에 쓰지 않는다. 태정(泰定) 연간으로부터 이 절을 중수한 시주는 중정사(中政使) 이홀독첩목아(李忽篤帖木兒) 등 제씨로 그 성명을 비석의 뒤쪽에 열기하였다. 명(銘)에 이르기를, ‘산이 뼈를 드러내니 뾰족하고 날카로우며, 높이 우뚝 솟아 있는데 이름이 금강이라네. 불경에 나타나는 바이며, 보살이 머물던 곳으로 청량산(淸涼山)의 다음이라네. 연기와 구름을 불어 내뿜으니, 천지의 기운이 서려서 신령스런 광채를 내네. 새와 짐승도 길이 들고, 벌레와 뱀도 어질고, 풀과 나무도 향기나네. 승려의 높은 암자 공중에 가로질러 바위에 걸쳐 있어서 멀리 서로 바라보이네. 장안정사(長安精舍)는 산 아래에 있는 큰 도량이네. 일찍이 신라 때에 창건하여 여러 번 만들고 무너져서 항상 일정하지 않았다네. 하늘이 성신(聖神)을 내시어 세조의 손자가 만방(萬方)에 군림하셨네. 덕(德)은 살리기를 좋아하는 데에 흡족하여 모든 영성(靈性)을 품은 자를 포근히 적셔 주는 부처를 사모하시네. 아, 현명하신 황후는 땅의 후덕함을 본받아 황제의 강함을 받드시네. 불교에 귀의하여 신묘한 복을 취하여 우리 황제를 봉축(奉祝)하네. 오직 이 복된 땅은 신선과 부처가 깊숙이 숨어 있던 곳으로 어지러이 상서(祥瑞)를 낳았다네. 천자께 경사 있음이여, 하늘이 그 명(命)을 거듭하니 수를 누림이 끝이 없겠네. 황태자가 탄생함이여, 길이 큰 기반을 굳혀 하늘과 더불어 장구하겠네. 황후가 내신(內臣)에게 이르기를, 「저 법신(法身)의 교화가 드러나 이미 그 궁전을 새롭게 하였으니, 마땅히 그 공을 기록하여 잊지 않도록 하라.」 하셨네. 저 산의 언덕 위에 높다란 비석이 있어 명문(銘文)을 새기었네.’ 하였다.” 하였다.
○ 이곡의 시에, “새벽 안개로 반 걸음 앞도 분간할 수 없더니, 해가 높이 떠서 맑고 밝으니 용과 하늘에 감사하네, 구름이 이어진 산은 서ㆍ남ㆍ북에 멀리 둘렀고, 눈처럼 희게 선 봉우리는 뾰족한 것이 1만 2천이라네. 한 번 보니 문득 참 면목(面目)을 알겠구나. 다생(多生)에서 아마 좋은 인연을 맺었으리. 밤에 다시 연대(蓮臺)에서 자노라니, 시냇물과 솔바람이 모두 선(禪)을 말하네.” 하였다.
표훈사(表訓寺) 만폭동 어귀에 있다. 세상에서 말하기를, “신라의 중 능인(能仁)ㆍ신림(神林)ㆍ표훈(表訓) 등이 이 절을 창건하였다.” 한다. 오래된 비석에, 원 나라 황제가 태황태후(太皇太后)와 함께 돈과 명주를 시주하였다는 글이 있다. 절 문의 오른쪽에, 원 나라 양재(梁載)가 찬술한 〈상주분량기(常住分粮記)〉가 돌에 새겨져 있는데, 고려의 시중(侍中) 권한공(權漢功)의 글씨이다.
○ 성임의 시에, “일천 바위 일만 구렁에 연기와 안개가 많으니, 굽게 꺾여진 한 구역에 이름난 가람(伽藍)이 감추어져 있구나. 높고 낮은 전당(殿堂)들은 소나무와 삼나무 속에 숨겨져 있는데, 구름 사이로 한 가닥 길이 시내 남쪽으로 뚫렸네. 옛날부터 나의 천성은 기이한 경치를 즐겨 보았는데, 하물며 이제 내 몸에는 관복(官服)도 없음이랴. 향나무 수풀 아래에 말을 멈추고, 기이한 장관을 하나하나 마음대로 찾노라. 밤이 깊어 등잔불 그림자 선실(禪室)에 비추는데, 죽창(竹窓)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중의 이야기를 듣네. 깨끗이 나의 헛된 꿈에 취한 것을 일깨워 주고, 깡그리 나의 평생의 부끄러움을 씻어 주네. 최고의 맛은 본래 평범하지 않음을 귀히 여기는 것이니, 시세에 따라 쓰고 단 맛을 다투지 않는다네. 이 속세의 때가 사람을 움켜잡아 움직일 때마다 붙어 있는 것처럼 되어서 머리 가에 서리와 눈만이 공연히 더해졌구나. 명산(名山)에 만약 와서 참배하지 않았다면 어디에서 마음속의 번뇌를 끊을 수 있었으랴. 배회하면서 두 번 세 번 깊이 탄식하노라니, 산새가 나를 도와 지저귀네.” 하였다.
정양사(正陽寺) 표훈사의 북쪽에 있으니, 즉 이 산의 정맥(正脈)이다. 그런 까닭에 정양사라고 이름 지은 것이다. 지대가 높고 트여서 산 안팎의 여러 봉우리들이 하나하나 모두 보인다. 세상에서 말하기를, “고려 태조(太祖)가 이 산에 오르니, 담무갈(曇無竭)이 돌 위에 몸을 나타내어 광채를 발산하였다. 태조가 신료(臣僚)들을 거느리고 정례(頂禮)한 뒤에 이어 이 절을 창건하였다.” 한다. 그런 까닭에 절 뒤의 언덕을 방광대(放光臺)라 하고, 앞의 고개를 배재(拜岾)라고 한다. 또 진헐대(眞歇臺)가 있다.
○ 성임(成任)의 시에, “정양사는 지대가 트였고, 진헐대에는 가을이 개었구나. 구름과 산이 모두 눈 앞에 있으니, 속세가 어찌 마음에 관계됨이 있으랴. 해가 비추니 병풍 같은 봉우리가 천 겹이로다. 공중에 벌여 선 옥(玉)은 몇 무더기인가. 보기를 탐내어 갈 길을 잊고 지팡이에 의지하며 다시 배회하노라.” 하였다.
지불암(知佛菴)ㆍ금장암(金莊菴)ㆍ선주암(善住菴)ㆍ신림사(神琳寺)ㆍ천친암(天親菴)ㆍ수선암(修善菴)ㆍ개심암(開心菴)ㆍ묘덕암(妙德菴)ㆍ천덕암(天德菴)ㆍ원통사(圓通寺)ㆍ진불암(眞佛菴). 사자암(獅子菴) 곁에 사자 모양의 돌이 있기 때문에 사자암이라고 이름지은 것이다. 묘봉암(妙峯菴)ㆍ삼장사(三藏寺) 모두 금강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부의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의관령사(義舘嶺祠) 고성 안에 있다. 《사전(祀典)》에 소사(小祀)로 기재되어 있다. 봄가을에 향과 축문(祝文)을 내려주어 제사 지내게 한다. 성황사(城隍祠) 의관령(義舘嶺)에 있다. 덕진명소사(德津溟所祠) 덕진의 언덕 동쪽 봉우리에 있다. 봄가을에 향축(香祝)을 내려주어 제사를 지내도록 한다. 《사전》에 소사로 실려 있다. 여단(厲壇) 부의 북쪽에 있다.
【고적】 문등폐현(文登廢縣) 부의 동쪽 40리에 있다. 본래는 고구려 문견현(文見縣)이다. 근시파혜(斤尸派兮)라고도 하였다. 신라가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대양군(大楊郡)의 영현으로 하였다. 고려 현종(顯宗)이 춘주(春州)에 이속(移屬)시켰다가 뒤에 본부에 예속시켰다. 본조에서도 그대로 하였다. 남산성(南山城) 현의 남쪽 10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6백 67척이다. 예전에는 군창(軍倉)이 있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남곡현 북산성(嵐谷縣北山城)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8백 84척이다. 지금은 폐지되었다. 화천현 고산성(和川縣古山城) 현의 동쪽 5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84척이다. 지금은 폐지되었다. 장양현 고산성(長楊縣古山城) 현의 동쪽 4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9백 52척이다. 지금은 폐지되었다. 의관령 고성(義舘嶺古城)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9백 4척이다. 지금은 폐지되었다. 고질운현(古軼雲縣) 김부식(金富軾)이 말하기를, “본래는 고구려 관술현(管述縣)인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치고 연성군(連城郡)의 영현으로 하였다.” 한다. 지금은 어디인지 자세히 알 수 없다. 고희령현(古稀嶺縣) 김부식이 말하기를, “본래는 고구려 저수현현(猪守峴縣)이다. 경덕왕이 이름을 고치고, 연성군의 영현으로 하였다.” 한다. 지금은 어디인지 자세하지 않다. 웅림소(熊林所) 부의 동쪽 30리에 있다. 북척소(北尺所) 장양현에 있다. 천보산 고성(天寶山古城)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5천 6백 36척이고, 높이가 3척이다.
【명환】 고려 이유백(李惟伯) 문종(文宗) 2년 동북로감창사(東北路監倉使)가 아뢰기를, “교주방어판관(交州防禦判官) 이유백은 성지(城池)를 수리하고 기구와 기계를 정비하여 여러 고을 중에 제일입니다.” 하였다. 거느리고 있는 연성(連城)ㆍ장양(長楊) 등의 아전과 백성들이 말하기를, “유백은 농사를 권장하고 백성을 구휼하니, 비록 임기가 만료되었으나, 더 빌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임금이 가상히 여겨 이부 상서(吏部尙書)로 삼았다. 이암(李嵒) 부사(府使)로 있었다. 백성들의 사모함을 받았다. 이혼(李混) 충선조(忠宣朝)에 좌천되어 목사(牧使)로 있었다. 『신증』 본조 박삼길(朴三吉) 면천(沔川) 사람이다. 성종조(成宗朝)에 부사로 있었다. 청백리(淸白吏)로 이름이 났다.
【열녀】 고려 권금(權金)의 아내 역사책에는 그의 성명이 나오지 않는다. 권금이 밤에 범에게 잡히니 장정 7, 8명도 모두 감히 구제하지 못하였는데, 아내가 그의 허리를 안고 문지방에 기대고 큰 소리로 부르짖으니, 범이 버리고 갔다. 권금은 곧 죽었으나,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려(旌閭)하였다.
【제영】 산이 좋으니 사는 사람은 많은 것이 도리어 싫겠구나 이곡의 시에, “지대가 궁벽하니 지나는 손이 응당 오는 일이 적겠고, 산이 좋으니 사는 사람은 도리어 많은 것이 싫겠구나. 북쪽 재에 겹친 관문(關門)은 쇠자물쇠가 굳고, 남쪽 강물 한 가닥에는 푸른 비단이 출렁이네.” 하였다. 눈이 관산(關山)에 가득하니 나는 새도 끊어졌는데 강회백(姜淮伯)의 시에, “몇 해나 백구(白鷗)와의 맹세를 저버렸던고. 이 몸이 환해(宦海) 물결 위의 부평초 같구나. 눈이 관산에 가득하니 나는 새도 끊어졌는데, 황혼의 화각(畫角) 소리에 황성(荒城)을 닫는구나.” 하였다. 철령(鐵嶺)의 관문이 높으니 가을 기운이 많구나 이달충(李達衷)의 시에, “은계(銀溪)에 길이 머니 그늘이 빠르고, 철령의 관문이 높으니 가을 기운이 많구나.” 하였다. 『신증』 깊은 수풀에 판자집을 열었네 성현의 시에, “높은 산길을 다 지나 어지러운 나무 사이를 비스듬히 뚫노라니, 깊은 수풀에 판자집을 열었으니 지나가는 나그네가 말안장을 내리네. 골짜기가 깊숙하니 구름은 항상 어둡고, 산이 높으니 기온이 아직도 차구나. 서울이 여기서 몇 리인가. 돌아가는 꿈만이 날마다 멀고 아득하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부내면(府內面) 처음은 1리, 끝은 25리다. 부북(府北) 처음은 2리, 끝은 45리이다. 남곡(嵐谷) 서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95리다. 이동(二東) 동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45리다. 사동(四東) 동남쪽으로 처음은 35리, 끝은 80리다. 장양(長楊) 동남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1백 60리다. 수입(水入) 동남쪽으로 처음은 1백 20리, 끝은 2백 리다.
○ 본래 금성현(金城縣)의 통구현(通溝縣) 남쪽 경계이다. 초북(初北) 처음은 2리, 끝은 45리이다.
【성지】 금강고성(金剛古城) 만폭동(萬瀑洞) 송라암(松蘿庵)의 아래에 있는데 성은 무너지고 문(門)의 터만 남아 있다. 산의 이름은 금강(金剛)으로 성의 이름이다. 철령관(鐵嶺關) 고려 고종 9년 철령(鐵嶺)에 성을 쌓고 관문을 만들었는데, 좌우로 산등성이를 따를 성을 쌓아 동북의 웅관(雄關)이 되었는데 옛터가 남아 있다. ○ 본조 광해주(光海主) 11년에 심하(深河)에서 전패하자 북우(北虞)를 염려하여 영상(嶺上)에 관을 설치하는데 시작하다 그만두었다.
○ 철령은 나제(羅濟) 때부터 북쪽 말갈족들이 모두 이곳을 지나왔었다. 고려에 이르러 비록 관성(關城)을 세워 거란 여진의 충돌이 동북로(東北路)에는 거의 없어 편안하였다. 본조에 이르러 성화(聖化)가 멀리 미쳤고, 봉강(封疆)을 크게 물리쳤으나 혹 급한 사건이 나는데 적은 마천(摩天)ㆍ후치(厚致)ㆍ황초(黃草) 등지의 영로(嶺路)로 통하므로 함흥에서만 싸우게 된다. 그래서 함흥을 지키지 못하면 하루아침에 석권(席捲)의 세(勢)로 곧 영하(嶺下)에 이르게 된다. 만약 철령을 지키지 못하면, 이는 마치 촉(蜀)이 검각(劍閣)을 잃은 것과 같다. 이 때문에, 옛터를 따라 관을 세우고 또한 산을 따라 봄에는 동쪽으로 바다에까지 이르고, 서쪽으로는 삼방(三防)에까지 이른다. 수목을 길러 놓으면 남ㆍ북이 서로 차단된 듯한 형세로 적은 감히 덤벼들지 못한다.

【창고】 장양창(長楊倉)ㆍ남곡창(嵐谷倉)ㆍ화천창(和川倉)ㆍ문등창(文登倉) 모두 그 옛 현에 있다. 신안창(新安倉) 역(驛)의 곁에 있다. 신읍창(新邑倉) 동으로 60리에 있다. 수입창(水入倉)ㆍ사동창(四東倉) 모두 그 면(面)에 있다.
【진도】 서강진(西江津) 옛 이름은 덕진(德津)인데 서로 1리에 있다. 연송포진(連松浦津) 바로 맥판동(麥阪冬)인데 다리를 세웠으며 금성(金城)과 경계이다.
【누정】 읍한정(挹漢亭) 읍의 남쪽에 있다. 칠송정(七松亭) 남으로 5리에 있는데 강의 북쪽 언덕이다.
【단유】 의관산단(義舘山壇) 고성(古城) 안에 있는데, 고려 때 명산으로 소사(小祀 산천에 제사 지내는 의식)를 지냈으며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덕진명소단(德津溟所壇) 덕진안(德津岸) 동봉(東峯)에 있으며 고려의 대천(大川)으로 소사(小祀)를 지냈는데 본조에서도 따랐다.


[주D-001]장도릉(張道陵) : 동한(東漢) 사람으로, 부수금주(符水禁呪)의 술법으로 혹세무민(惑世誣民)하였는데, 제자가 되는 사람은 쌀 다섯 되를 냈기 때문에 그의 술법을 오두미도(五斗米道)라 하였다.
[주D-002]설산(雪山) : 인도의 북쪽에 뻗어 있는 큰 산으로, 항상 산꼭대기에 눈[雪]이 있다고 한다. 석가모니가 과거세(過去世)에 설산대사(雪山大士)로 여기에서 불도를 수행하였다고 한다.
[주D-003]악도(惡道) : 불경에 나쁜 죄를 지은 일로 장차 태어나 고통을 받을 곳으로 3악도(三惡道)ㆍ4악도ㆍ5악도 등이 있다고 한다.
[주D-004]노련(魯連) : 노중련(魯仲連)으로, 전국 시대(戰國時代)의 제(齊) 나라 사람이다. 조(趙)ㆍ위(魏) 두 나라 왕에게 진(秦)을 높여 제(帝)라고 하는 것을 반대하도록 하였다. “진(秦) 나라가 함부로 제(帝)라고 일컫는다. 나는 동해(東海)에 뛰어 들어 죽을 뿐이다.” 한 유명한 말을 한 사람이다.
[주D-005]태산(泰山)에 …… 공자(孔子) : 《맹자(孟子)》 진심(盡心) 편에, “공자(孔子)가 동산(東山)에 올라서는 노(魯) 나라를 작게 여기고, 태산(泰山)에 올라서는 천하(天下)를 작게 여겼다.” 하는 말이 있다.
[주D-006]유순(由旬) : 인도(印度)의 이수(里數)의 단위로, 대유순(大由旬)은 80리, 중유순은 60리, 소유순은 40리에 해당한다고 한다.
[주D-007]등정각(等正覺) : 부처의 10칭호 중의 하나로, 평등(平等)한 정리(正理)를 깨달았다는 뜻이다.
[주D-008]열반(涅槃) : 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해탈(解脫)하고 진리를 궁구(窮究)하여 혼미한 생사(生死)를 초월해서, 불생불멸(不生不滅)의 법을 체득한 경지 즉 불교의 최고 이상이다.
[주D-009]반고씨(盤古氏) : 중국 고대의 전설상의 제왕으로, 인류 최초의 제왕이라고 한다.
[주D-010]도산(塗山) : 중국의 산 이름으로, 《좌전(左傳)》에, “우(禹)가 제후(諸侯)를 도산(塗山)에 모으니, 옥(玉)과 명주를 갖고 온 자가 만국(萬國)이나 되었다.” 하였다.
[주D-011]홍몽(鴻濛) : 천지 자연의 원기(元氣)이다.
[주D-012]태항산(太行山) …… 우공(愚公) : 옛날 우공이 자기 집 앞의 산을 불편하게 생각하여, 오랜 세월을 두고 다른 곳에 옮기려고 노력한 데서 나온 말이다..《열자 탕문(列子湯問)》
[주D-013]천계(天鷄) : 〈술이기(述異記)〉에, “동남쪽에 도도산(桃都山)이 있는데, 그 위에 큰 나무가 있어서 이름을 도도(桃都)라고 한다. 가지와 가지 사이가 8천 리나 되는데, 그 위에 천계(天鷄)가 있다. 해가 처음 뜨면 먼저 이 나무를 비추어 천계가 울면 천하의 닭이 다 운다.”라는 이야기가 있다.
[주D-014]죽계(竹鷄) : 새의 일종으로, 모양이 작은 닭 같은데 꼬리가 없다고 한다.
[주D-015]여옹(呂翁)의 한단몽(邯鄲夢) : 여옹은 여동빈(呂洞賓)을 말한다. 당(唐) 나라의 소설에, “노생(盧生)이라는 사람이 한단(邯鄲)의 여관에서 도사 여옹(呂翁)을 만나 자신의 곤궁함을 한탄하니, 여옹이 베개를 주면서 베고 자게 하였다. 노생이 꿈에서 크게 부귀영화를 누리고 80세까지 살았다. 깨어 보니, 노생이 처음 잠들기 시작할 때에 여관 주인이 기장을 찌고 있었는데, 그것이 아직 다 쪄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람의 세상사는 이 꿈처럼 허무한 것임을 풍자한 것이다.
[주D-016]사은(四恩) : 네 가지의 은혜, 즉 부모ㆍ국왕(國王)ㆍ중생(衆生)ㆍ삼보(三寶)의 은혜를 말한다.
[주D-017]삼도(三途) : 자기가 한 악업(惡業) 때문에 죽은 후에 간다는 지옥도(地獄道)ㆍ아귀도(餓鬼道)ㆍ축생(畜生道)를 말한다.
[주D-018]기원(祇園) : 인도 마갈타국의 기타태자(祇陀太子)가 소유한 동산인데, 수달장자(須達長者)가 이 동산을 사서 이곳에 기원정사(祇園精舍)를 세웠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3권
 전라도(全羅道)
전주부(全州府)


동으로 진안현(鎭安縣) 경계까지 47리, 서쪽으로 임피현(臨陂縣) 경계까지 74리, 금구현(金溝縣) 경계까지 19리, 남으로 금구현(金溝縣) 경계까지 38리, 임실현(任實縣) 경계까지 42리, 북으로 익산군(益山郡) 경계까지 37리, 여산군(礪山郡) 경계까지 61리, 고산현(高山縣) 경계까지 40리, 서울로부터는 5백 16리가 된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百濟)의 완산(完山)이며 비사벌(比斯伐), 또는 비자화(比自火)라고도 한다. 신라 진흥왕(眞興王) 16년에 완산주(完山州)를 두었다가 동왕 26년에 주를 폐지하고, 신문왕(神文王) 때 완산주(完山州)를 다시 설치하였다. 경덕왕(景德王) 15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어 9주를 완비하였다. 효공왕(孝恭王) 때 견휜(甄萱)이 여기에 도읍을 세우고 후백제(後百濟)라 하였다. 고려 태조 19년에 신검(神劍)을 토벌하여 평정하고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라 하였다가 23년에 다시 전주(全州)라 하였다. 성종(成宗) 12년에 승화절도안무사(承化節度安撫使)라 하였고, 14년에 12주에 절도사를 두고 순의군(順義軍)이라 하여 강남도(江南道)에 예속시켰다. 현종(顯宗) 9년에 안남대도호부(安南大都護府)로 승격하였다가 뒤에 다시 전주목(全州牧)으로 고쳤다. 공민왕(恭愍王) 4년에 원(元) 나라 사신 야사불화(埜思不花)를 가둔 일 때문에 부곡(部曲)으로 강등하였다가 5년에 다시 완산부(完山府)라 하였다. 본조(本朝) 태조 원년에 임금의 고향이므로 완산유수부(完山留守府)로 승격시켰고, 태종(太宗) 3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세조(世祖) 때에 진(鎭)을 두었다.
【속현】 옥야현(沃野縣) 전주의 서북 70리에 위치한다. 본래 백제의 소력지현(所力只縣)이었는데 신라 때 옥야현으로 고치어 금마군(金馬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초에 전주에 예속시켰다. 명종(明宗) 6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뒤에 다시 내속시켰다. 군창(軍倉)이 있다.
【진관】 군(郡)이 6이다. 익산(益山)ㆍ김제(金堤)ㆍ고부(古阜)ㆍ금산(錦山)ㆍ진산(珍山)ㆍ여산(礪山) , 현(縣)이 11이다. 정읍(井邑)ㆍ 흥덕(興德)ㆍ부안(扶安)ㆍ만경(萬頃)ㆍ옥구(沃溝)ㆍ임피(臨陂)ㆍ금구(金溝)ㆍ용안(龍安)ㆍ함열(咸悅)ㆍ고산(高山)ㆍ태인(泰仁).
【관원】 부윤(府尹)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각 1인.
【군명】 견성(甄城)ㆍ완산(完山)ㆍ비사벌(比斯伐)ㆍ안남(安南)ㆍ승화(承化)ㆍ순의군(順義軍).
【성씨】 본부(本府) 이(李)ㆍ최(崔)ㆍ유(柳)ㆍ박(朴)ㆍ전(全)ㆍ경(庚)ㆍ한(韓)ㆍ백(白), 방(房) 내성(來姓)이다. 양(梁) 주계(朱溪). 장(張) 결성(結城). 김(金) 모평(牟平). 우주(紆州) 박(朴)ㆍ이(李)ㆍ정(鄭)ㆍ황(黃)ㆍ최(崔)ㆍ염(廉)ㆍ배(裵)ㆍ유(柳)ㆍ홍(洪). 양량(陽良) 백(白)ㆍ나(羅)ㆍ강(康)ㆍ유(劉). 이성(利城) 이(李)ㆍ백(白)ㆍ정(鄭)ㆍ손(孫)ㆍ진(陳)ㆍ최(崔). 두모촌(豆毛村) 책(冊)ㆍ최(崔)ㆍ이(李). 이성(伊城) 조(趙)ㆍ배(裵)ㆍ장(張)ㆍ구(仇)ㆍ염(廉)ㆍ고(高)ㆍ온(溫). 옥야(沃野) 임(林)ㆍ장(張)ㆍ염(廉)ㆍ구(仇)ㆍ양(梁). 경명(景明) 김(金)ㆍ임(林)ㆍ배(裵)ㆍ인(印).
【풍속】 사람들이 약삭빠르다. 주기(州記)에, “비옥한 땅과 척박한 땅이 섞여 있고 사람들이 약삭빠르다.” 하였다. 백성들이 어리석거나 완고하지 않다. 이규보(李圭報)의 기(記)에, “인물이 번성하고 가옥이 즐비하여, 옛 나라의 풍모가 있다. 그러므로 그 백성은 어리석거나 완고하지 않고 모두가 의관을 갖춘 선비와 같으며, 행동거지가 볼 만하다.” 하였다. 집을 다스리는 자는 대부분 곡식을 저축하여 흉년에 대비한다. 이경동(李瓊同)의 기(記)에 있다. 남국의 인재가 몰려 있는 곳이다. 서거정(徐居正)의 기(記)에 있다. 물건을 싣는데 수레를 사용하며, 저자는 줄을 지어 상품을 교역한다.
【형승】 국가의 풍패(豐沛)로 산천이 영수(靈秀)하다 윤곤(尹坤)의 기(記)에 있다. 주 나라의 조상이 일어난 곳이요, 일도의 으뜸이다. 모두 서거정의 기에 있다. 안팎으로 산과 개천이 있다. 성임(成任)의 시(詩)에, “안팎의 산과 강이 판적에 들어 있다.” 하였다.
【산천】 건지산(乾止山) 전주부의 북쪽 6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이규보(李圭報)의 기(記)에, “전주에 건지산이 있는데 수목이 울창하여 주(州)의 웅진(雄鎭)이다.” 하였다. 완산(完山) 작은 산이다. 부의 남쪽 3리에 있다. 부의 이름은 이 산 이름에서 딴 것으로 일명 남복산(南福山)이라고도 하는데, 읍을 설치한 후로부터 나무하는 것을 금지했다. 고덕산(高德山) 부의 동남쪽 10리에 있다. 고달산(高達山)이라고도 한다. 무악산(毋岳山) 부의 서남쪽 20리에 있다. 금구현(金溝縣) 조에도 있다. 기린봉(麒麟峯) 부의 동쪽 6리에 있다. 봉우리 위에는 작은 못이 있다. 청량산(淸涼山) 부의 동북쪽 40리에 있다. 서방산(西方山) 부의 동북쪽 25리에 있다. 가련산(可連山) 부의 서쪽 10리에 있으며, 건지산(乾止山)의 산세가 여기에 와서 끊어졌는데, 사람들의 말이 이어져야 할 곳에서 끊어졌다고 하여 가련이라 이름한 것이라고 한다. 여현(礪峴) 부의 남쪽 42리에 위치한다. 웅현(熊峴) 부의 동쪽 47리, 진안현(鎭安縣) 경계에 있다. 서고산(西高山) 부의 서쪽 15리에 있다. 태실산(胎室山) 부의 남쪽 20리에 있다. 여기에 예종(睿宗)의 어태(御胎)를 안치하였다. 황화대(黃華臺) 부의 서쪽 4리에 있다. 읍인(邑人)들이 봄ㆍ가을로 올라가 제사술을 마셨다. 만경대(萬景臺) 고덕산(高德山) 북쪽 기슭에 있다. 돌 봉우리가 우뚝 솟아 마치 층운(層雲)을 이룬 듯이 보이는데, 그 위에 수십 명이 앉을 만하다. 사면으로 수목이 울창하며 석벽(石壁)은 그림같이 아름답다. 서쪽으로 군산도(群山島)를 바라보며 북쪽으로는 기준성(箕準城)과 통한다. 동남쪽으로는 태산(太山)을 지고 있는데 기상이 천태만상이다. 정몽주(鄭夢周)의 시에, “천인(千仞) 높은 산에 비낀 돌길을, 올라오니 품은 감회 이길 길이 없구나. 청산이 멀리 희미하게 보이니 부여국(扶餘國)이요, 황엽이 휘날리니 백제성(百濟城)이라. 9월 높은 바람은 나그네를 슬프게 하고, 백년 호기는 서생(書生)을 그르치게 하는구나. 하늘가로 해가 져서 푸른 구름이 모이니, 고개 들어 하염없이 옥경(玉京)을 바라보네.” 하였다. 안천(雁川) 주의 북쪽 25리에 있으니 즉 고산현(高山縣) 남천(南川)의 하류가 주계(州界)에 이르러 직연(直淵)이 되고 안천이 되며, 삼례역(參禮驛) 남쪽에 와서 추천(楸川)과 합류한다. 남천(南川) 부의 남쪽 3리에 있다. 금상 4년에 시내를 막고 돌을 쌓으니 길이가 6천 자나 되었다. 남천(南川)의 근원은 여현(礪峴)에서 나오는데 부의 동남에 이르러 성을 둘러 북으로 가련산(可連山)을 지나 추천이 되고, 무악산(毋岳山)에서 나온 물과 합해서 삼례역(參禮驛) 남쪽에 이르러 다시금 고산(高山) 웅현(熊峴)의 물과 합쳐서 서쪽으로 흘러 회포(洄浦)가 되며, 조수(潮水)가 여기까지 들어온다. 옥야(沃野) 이성(利城)을 지나서 신창진(新倉津)이 되었다. 신창진(新倉津) 부의 서쪽 70리에 있다. 김제군(金堤郡)과 만경현(萬頃縣) 조에도 있다. 덕진지(德眞池) 부의 북쪽 10리에 있다. 부의 지세는 서북방(西北方)이 비어 있어 전주의 기맥(氣脈)이 이쪽으로 새어버린다. 그러므로 서쪽으로는 가련산으로부터 동으로 건지산(乾止山)까지 큰 둑을 쌓아 기운을 멈추게 하고 이름을 덕진(德眞)이라 하였으니, 둘레가 9천 73자이다. 풍월정(風月亭)의 시에, “깊은 못을 한번 바라보니 푸른 하늘이 비쳐 있네. 옛부터 이 못을 파기에 몇 사람의 공이 들었을까. 마을 연기 멀리 끼어 가을 달이 몽롱하고, 어부의 피리 소리는 저녁 바람에 비꼈도다.” 하였다. 『신증』 유순(柳洵)의 시에, “깊고 맑은 물에 허공이 비쳐 있고, 덕을 쌓았으니 제물(濟物 사물을 구제하는 것)하는 공(功)을 갖추었네. 이곳에 참 용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세상 어느 곳에서 뇌풍(雷風)을 찾았으리오.” 하였다. 공덕지(孔德池) 부의 서쪽 60리에 있다. 판토포지(板吐浦池) 부의 북쪽 30리에 있다. 굴연(堀淵) 부의 동쪽 4리에 있다. 돌기둥 여섯 개가 있는데 녹담정(綠潭亭)의 기둥이라고 전해온다.
『신증』 발산(鉢山) 부의 동쪽 3리에 있다. 우락암(于樂巖) 옥야창(沃野倉) 북쪽 2리에 있다. 그 위에 50여 명이 앉을 수가 있다. 봉황암(鳳凰巖) 부의 서쪽 5리에 있다. 그 아래에 못이 있다. 황학대(黃鶴臺) 부의 남쪽 5리에 있다. 석봉(石峯)이 솟아 있고, 큰 시내가 끼고 돌아간다. 전하는 말에 황학(黃鶴)이 놀던 곳이라 한다.
【토산】 석류(石榴), 종이 상품(上品)이다. 생강[薑]ㆍ울금초(鬱金草)ㆍ벌꿀[蜂密]ㆍ웅어[葦魚]ㆍ옻[漆]ㆍ사기그릇[磁器].
【성곽】 읍성(邑城) 돌로 쌓았는데 둘레는 5천 3백 56척이고 높이는 8척이다. 그 안에 2백 23개의 우물이 있다.
【궁실】 경기전(慶基殿) 부성(府城)의 남문(南門) 안에 있다. 영락(永樂 명(明) 성조(成祖)의 연호이다.) 경인년에 태조(太祖) 강헌대왕(康獻大王)의 어용(御容)을 봉안(奉安)하였다. 참봉(參奉) 2명을 두었다. 유순(柳洵)의 시에, “시기에 호응하여 도록(圖錄)에 맞게 동한(東韓)을 평정하니, 도탄에 빠진 백성을 평안하게 하였도다. 성덕(聖德)을 마땅히 백세에 제사하리니, 천추에 묘모(廟貌)는 단청(丹靑)이 맑으리라.” 하였다. 실록각(實錄閣) 경기전(慶基殿)의 동쪽 담 안에 있는데 본조의 실록(實錄)이 수장되어 있다. 김길손(金吉孫)의 기(記)에, “아국(我國)은 조종(祖宗) 이래로 세대에 따라 실록을 편찬하여 안과 밖에 수장하였으니, 안에는 춘추관(春秋館)이 있고, 밖에는 충주(忠州)ㆍ성주(星州)와 같이 모두 장서각(藏書閣)이 있는데, 오직 본부(本府)만이 없었다. 을축년 겨울에 비로소 부성(府城) 안 승의사(僧義寺)에 두었다가 갑신년 가을에 진남루(鎭南樓)에 이안했다. 세조께서 본도(本道)에 명하여 장각(藏閣)을 세우도록 하였으나 연이어 흉년이 들어 공역(工役)을 중흥하지 못하고 몇 년 동안 미루어오다가, 임진년 봄에 세조와 예종(睿宗)의 양조 실록이 이루어지니, 주상께서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양성지(梁誠之)를 파견하여 이것을 부에 봉안하도록 하였다. 그때에 상국(相國) 김지경(金之慶)은 본관(本館)의 구신(舊臣)으로서 이곳에 안찰(按察)로 나와 있으면서, 애써 장각을 세우고자 하여, 양공(梁公)과 더불어 경기전(慶基殿)의 동편에 자리를 정하고 사유(事由)를 갖추어 장계(狀啓)를 올리고, 인근 여러 포(浦)의 선군(船軍) 3백 명을 역군으로 하고, 부윤인 상국(相國) 조근(趙瑾)을 책임자로 하였으며, 순창(淳昌) 군수 김극련(金克鍊)으로 하여금 감독하도록 하여, 지난해 12월 중공(衆工)이 일을 같이하여 금년 5월을 지나 공사를 마쳤다.” 하였다.
객관(客館) 이경동(李瓊同)의 〈서헌기(西軒記)〉에, “신묘년에 우리의 좌주(座主) 조근(趙瑾) 공이 전주 부윤으로 왔는데, 관리와 백성이 모두 그 교화에 좇았다. 공은 판관(判官) 김신(金信)과 더불어 여러 사람들에게 도모하여 말하기를, ‘부의 관(館)은 대청(大廳)에 중앙에 있고 좌우에 익실(翼室)이 있는데, 동편은 높고 서쪽은 낮으며 동편은 넓고 서쪽은 좁은데, 다행히 창리고(創吏庫)에 남은 재물이 있어 서헌(西軒)을 고쳐 동헌(東軒)과 같이 하고자 하는데, 그대들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이민(吏民)들이 모두 이에 찬동하였다. 이에 일 없이 노는 사람들을 고용하고 다른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으나 건물이 새로워지니, 주(州)의 남녀들이 감탄을 하면서 바라보았는데, 건물이 고쳐진 것만 볼 뿐이요, 공역(工役)이 어떻게 해서 되었는지를 알지 못하였다. 공의 뒤를 잇는 사람도 백성 사랑하기를 공과 같이 하고 관직 수행을 공과 같이 하며, 건물과 장벽(墻壁)을 늘 보수(補修)하여 임금의 세계근원(世系根元)이 길이 발상한 이 고장으로 하여금 그 기반을 공고히 함으로써, 조선(朝鮮) 억만년의 무강(無疆)한 복조와 더불어 상서(祥瑞)를 같이한다면, 어찌 우리 부의 큰 행복이 아니겠느냐.” 하였다.
【누정】 진남루(鎭南樓) 공관(公館)의 후원(後園)에 있으며 영락(永樂) 기축년에 감사(監司) 겸 부윤인 윤향(尹向)이 지은 것이다. 신유년에 부윤 한승순(韓承舜)이 중수하고 정곤(鄭坤)이 기문을 썼다. 윤향(尹向)의 시에, “백제성 중에 백척 루며 경영은 바야흐로 태평시기에 당하였네. 기린봉(麒麟峯)에 비 뿌리어 주렴(珠簾)을 흔들고, 무악산(毋岳山)에 구름 이어 그림 기둥에 떠있네. 기둥에 기대어 동남으로 몇 개 군에 임하고, 난간에 의지하여 서북으로 서울을 바라보네. 누에 오르니 3년을 지낼 손[客]이 가소롭고 호기(豪氣)는 오히려 바다 구석까지 넘쳐 있네.” 하였다. ○ 허주(許周)의 시에, “맑은 경치를 연유하여 새 누각에 의지해 섰네. 눈은 깜짝 지는 잎을 보고 가을을 깨닫도다. 수많은 민가의 저녁 연기는 어렴풋이 푸르고, 사산(四山)의 아리따운 기운은 무성하게 피어오르네. 유수(留守)의 부절을 나누니 2천 석이요, 월(鉞 군(軍)이나 지방 장관의 표시로 임금이 준 도끼)을 짚고 서서 50주를 관풍(觀風)하네. 다행히 세월은 성시(盛時)를 당했으니, 닭 울고 개 짖는 소리 궁촌에까지 들리네.” 하였다. ○ 이경동(李瓊同)의 기문에, “전주는 본래 백제 완산(完山) 땅인데, 당(唐) 나라 현경(顯慶 당 고종의 연호.) 연간에 백제가 망하고 그 땅이 신라(新羅)에 들어왔다. 경덕왕(景德王)이 처음으로 전주(全州)라 불렀는데, 신라가 기울자 견휜(甄萱)이 여기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워 후백제라 하였다. 40년이 지난 뒤 고려의 태조가 이를 멸하고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두었다가 곧 다시 전주라 하였다. 뒤에 혹 승화(承化)라 하기도 하고, 또는 순의(順義)라고도 하여 비록 그 연혁(沿革)은 일정하지 않으나, 언제나 남방에 있어서 큰 고을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우리 태조께서 임금이 되자 선조(先祖)가 처음으로 터를 잡은 땅을 근원해서 주(州)를 승격하여 부로 하고, 자제(子弟)들을 뽑아서 숙위(宿衛)에 넣음으로써 총애를 유달리 하였으며, 승하하신 뒤에는 경기전(慶基殿)을 지어 수용(晬容)을 봉안하니, 전주를 중요히 여김이 이에 성대하였다. 조정에서는 언제나 재상(宰相) 중에서 위망(威望)이 있고 다스림의 대체를 알고 있는 사람을 뽑아 부윤으로 삼았다. 우리 성상께서 태묘(太廟)에 제사한 다음해에 남원(南原)의 윤효손(尹孝孫) 공이 당시 예조 참의(禮曹參議)였는데, 늙은 어버이를 모시기 위하여 사임하고 임금의 특별한 임명을 받고 전주의 부윤으로 내려왔다. 공의 덕으로 말하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친구간에 신의가 있으며 뛰어난 정치를 베풀었다. 귀신을 섬기는 일이나 사람을 다스리는 일을 한결같이 지성(至誠)으로 하였으니, 봄과 가을의 석전(釋奠 공자를 모시는 제사를 말한다.)에는 반드시 몸소 나아갔으며, 수재(水災)와 한재(旱災)에는 매양 기도를 올리면 곧 감응이 있었다. 노인을 공양하는 외로운 사람을 돕는 일에 그 정성을 다하였으며, 첩소(牒訴)는 바쁜 중에도 모두 손수 써서 처리하였으며, 부역을 간소하게 하고 세금을 고르게 하며, 형벌은 가볍게 하고 정치는 맑게 하니, 백성이 마침내 기쁨으로 복종하였다.
임금이 그 정치가 뛰어남을 들으시고 을미년 여름 6월 21일에 교서를 내려서 포장(褒獎)하여 이르기를, ‘민생의 즐거움과 근심은 수령에게 달렸다. 이전에 전주 백성이 재해를 입어 식량이 거의 바닥이 났었는데, 그대가 백성을 다스리면서부터 많이 구제하여서 걸인이 목숨을 부지하고 유랑하는 자들이 제자리로 돌아갔으며, 특히 정사를 고르게 하고 소송을 다스리니, 백성은 편안히 살게 되고, 치적 또한 남다른 바가 있으니, 그 백성을 잊지 못하는 마음이 어떻다고 할 것인가. 여기에 당의(唐衣) 표리(表裏) 한 벌로 그대의 뛰어난 치적을 표창하노라.’ 하고, 곧 감사에게 명하여 포상(褒賞)하는 의의(意義)를 열읍(列邑)에 널리 알려 그 나머지 사람들을 권장하니, 아름답도다. 그 가상함이 이에 이르니 그 누가 감동되지 아니하랴. 당시의 통판(通判) 김신(金信)이 또한 엄명(嚴明)하고 청신(淸愼)하여 간활한 자들을 복종시키고 공을 보좌함에 공로가 있었다. 공이 아뢰기를, ‘신이 재주가 없는 몸으로 외람되게 직책을 맡아 주야로 바삐 잘못이 없을까 두려워하였는데, 홀연히 임금의 은명(恩命)이 내리니, 이는 비록 하늘을 속이고 임금을 속인 죄 피할 길이 없다 하겠으나, 이전 재신(宰臣) 중에도 없던 영광된 일이라 신이 어찌 감히 하늘의 은총을 탐하여 사적인 것으로 삼으리오. 마땅히 성은을 넓혀 영광을 막료들과 함께 하고자 하나이다.’ 하니, 김후(金侯 김신(金信))가 또한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이에 두 공(부윤과 통판)이 성상(聖上)의 돌보아 주심이 중한 것을 체득하고 계속 교화를 넓혀 게을리하지 않고 더욱더 경건하게 하여, 은혜와 위엄이 다 같이 드러나고 기강(紀綱)이 크게 행해졌으니, 전주 백성의 은혜 받음이 어떻다고 할 것인가. 부의 북쪽에 누(樓)가 있으니 이것이 바로 진남루(鎭南樓)로서 여기에 본조실록(本朝實錄)이 수장되어 있다. 정의(政議)에서 너무 소홀하다고 하여 달리 각(閣)을 세우고 실록을 옮겨 놓으니, 드디어 진남루는 예전대로 복구되었다. 하루는 공을 찾아뵈니 공이 자리를 내어주고, 이 누각의 연고를 언급하고 나에게 기문을 쓰게 하였다.
삼가 생각하건대, 완산(完山)이 주가 된 것은 양(梁 중국 육조(六朝) 중의 소연(蕭衍)이 세운 나라) 나라 때이니, 지금으로부터 천여 년 전의 일이다. 그동안 정치의 잘못과 풍속의 선악은 때에 따라 서로 오르고 내림이 있었다. 내가 어려서 책을 끼고 어른을 따라 거리에서 놀 때는, 풍속은 화려한 것을 좋아하고 검소한 것을 즐기지 아니했고, 후생들은 노는 데에만 힘쓸 뿐 책을 읽고 활쏘기와 차 모는 것을 익히는 자는 아주 적었다. 그런데 그 후에 습속이 크게 변하여, 자제들은 향학(鄕學)에서 글을 읽고 성균관(成均館)에 뽑히는 자가 시험 때마다 7ㆍ8명에 이르고, 문과와 무과에 오르는 사람이 거의 시험 때마다 빠지는 수가 없었다. 사시(四時)로 연방회(蓮榜會)를 열면 참여하는 자가 언제나 수십 명이 되었으니, 후진은 흥기하고, 상숙(庠塾)에는 글을 강론하고 배우는 소리가 높았다. 봄 가을 향사(鄕射)에는 활을 쥐고 술잔을 높이 든 자 쏘면 반드시 명중하니 간성(干城)의 재목이며, 집안을 다스리는 자 곡식을 저축하여 흉년에 대비하는 사람이 많았다. 길에서는 여자와 같이 수레를 탄 사람을 볼 수가 없으니, 옛날에 보던 바와는 크게 상반된다고 하겠다. 일찍이 《지리지(地理誌)》를 보니, ‘풍속은 교활하고 늙은 사람이 보면 창피한 일도 있다.’ 하였는데, 내가 보고 기억한 바로는 어려서 장성하기까지 수십 년에 불과하나 풍속은 많이 변하여서 기약한 일 없이 자연적으로 좋아졌으니, 다시 한번 좋아진다면 가장 이상적인 도에 이르게 되리라는 것을 누가 의심하겠는가. 이제 성상께서 바야흐로 흥운(興運)을 융성하게 하고, 윤공(尹公)이 처음으로 총명(寵命)을 받아 우리 호남(湖南) 50여 주의 열백(列伯)을 창도(唱導)하여 우리 완산(完山) 1천여 년의 구도(舊都)를 거듭 새롭게 하니 정치의 융성함과 풍속의 아름다움이 이때를 당하여 더욱 중하도다. 아, 주는 비록 오래나 천명은 새롭고, 누각은 오래나 그 이름은 처음이니, 옛날에 숨었다가 오늘에 드러남이여, 그 기대함이 있음이로다. 산하(山河)의 뛰어남과 경치의 부미(富美)함은 정사(政事)의 급한 바가 아니므로 굳이 기록하여 뒤에 전할 필요가 없으리라. 이것으로 기문을 대신하노라.’ 하였다.

매월정(梅月亭) 객관(客館)의 동북쪽 구석에 있다. 성화(成化 명 나라 헌종(憲宗)의 연호) 계묘년에 부윤 이봉(李封)이 세웠다. 『신증』 이숙함(李淑瑊)의 시에, “매화[梅兄]와 달[桂魄]이 다 같이 청신(淸新)하여, 높은 정자를 웃고 차지하여 주인이 되었도다. 호반(湖畔)에서 임포(林逋)의 신선된 이야기를 들었더니, 지금은 들보 위에 이백(李白)의 전신구(傳神句)를 보겠네. 찬 겨울에 처음으로 매화 향기 언덕에 퍼지고, 가을이면 둥근 달이 그림자를 비치네. 담장 구석에 대나무도 쓸쓸히 서 있으니, 바람에 말을 전하여 같이 친해보자.” 하였다. ○ 허침(許琛)의 시에, “가련하다, 매화 꽃술 달 가운데 청신하니, 냉담(冷淡)한 심기(心期)를 몇 사람이나 알아줄까. 구름이 끊어진 곳에 참 모습을 더하고, 눈이 차가운 곳에 옛 정신을 비치네. 주렴이 흔들거리니 성긴 그림자가 비끼고, 지붕 모서리에 창랑히 반달이 나왔으니, 다 같이 세간에 속물이 아닐진대, 나도 한몫 끼어 서로 친해본들 어떠리.” 하였다. ○ 신용개(申用漑)의 시에, “매화[玉蕊]와 달[金波]이 서로 청신함을 다투어, 맑은 빛 담담한 모습이 우리의 벗이로다. 달 그림자[廣寒影]가 천상에 춤추니, 고야산(姑射山)에 아가씨처럼 고운 신선이 그 아닌가. 눈이 깊으니 달 속 두꺼비는 뼛속까지 차갑고, 바람 탄 무학(舞鶴)은 날개가 바퀴처럼 크구나. 나부산(羅浮山)은 고래로 신선과 진인(眞人)이 사는 곳. 사웅(師雄)으로 하여금 하룻밤을 친하게 한들 어떠리.” 하였다.
제남정(濟南亭) 성의 남쪽 시내 위에 있다. ○ 홍여방(洪汝方)의 기문에, “계축년 봄에 이곳의 부윤으로 와서 하루는 과업을 권장하러 남문을 나섰다가, 동천(東川) 가에 누(樓)가 있고, 한쪽에 고인의 시판(詩板)이 있었는데, 또한 목은(牧隱) 선생이 남겨 놓은 시가 있는 것을 보고서 나는 이것을 다시 세울 생각을 가졌다. 놀고 있는 사람을 모집하고 재목을 모으고 있는 중 갑인년 가을에 나는 병으로 면직이 되고, 동년(同年)인 조종생(趙從生) 공이 대신 와서 나의 뜻을 이어서 경영을 하며, 규모를 넓히고 단청(丹靑)을 선명하게 하여 그 오른편에 송백(松柏)을 심어 놓으니, 실로 제향(帝鄕)의 승관(勝觀)이더라.” 하였다. ○ 노사신(盧思愼)의 시에, “교남(橋南) 교북(橋北)으로 많은 사람을 보내고 맞이하니, 날마다 수레와 말발굽이 여기를 바라고 지나가네. 높은 정자가 강가에 있으니 올라가 바라보는 이 아니 취하고 어이하리.” 하였다. 『신증』 성현(成俔)의 기에, “나의 벗 이백승(李伯勝) 후(侯)가 전주 부윤이 된 지 3년에, 진남(鎭南)ㆍ제남(濟南) 두 누각의 기문을 나에게 부탁하였다. 직접 내 발로 그곳에 가보지 못했고, 내 눈으로 그 경치를 보지 못한 터에, 후(侯)가 나에게 기문을 쓰라고 하니, 내가 후를 위해 기문을 쓴다 하면 마음과 안목(眼目)이 서로 모순이 되는 것이니, 바람을 잡고 달을 잡는 것처럼 효험 없는 일이 되지 아니하겠는가. 예전에 한창려(韓昌黎)는 등왕각(滕王閣)을 보지 않고 기문을 쓴 일이 있는데, 다만 세월만 서술하고 광경은 언급하지 아니하였다. 지금 나의 기문이 이와 비슷해야 하나. 삼가 글을 보고 말하건대, 누(樓)는 주성의 남문(南門) 밖에 있으니 어느 때 지은 것인지 모르겠다. 목은 선생이 일찍이 읊은 시가 남아 있고, 홍여방(洪汝方) 공이 중수하였는데, 연대가 오래되니 황폐한 채로 버려두고 손을 보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안침(安琛)이 남방의 감사로 와서 이 누각을 보고 다시 고칠 뜻이 있었으나 임기가 문득 차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제 후가 와서 안공(安公)이 부지런히 부탁하기에, 감사에게 청하여 재목을 모으고 공인을 모집하여 그 제도(制度)를 일신하고, 문식을 더하였다. 또한 담장을 쌓아 빙 둘려서 관문(館門)에까지 닿게 하였다. 그러한 뒤에 형세는 장대하고 누의 경개(景槪)는 또 뛰어나게 되었다. 대천(大川)이 산골짜기에서 흘러나와 누각 아래로 굽이쳐 흐르고, 그 동서로는 돌을 쌓아 방죽을 이루어 물이 언덕을 깎아먹는 것을 막도록 하였다. 그 밖으로는 뭇 산이 둥글게 줄을 지어 손을 마주 잡은 것 같기도 하고 서로 읍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만경대(萬景臺)는 유리알 같은 물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기린봉(麒麟峯)은 동쪽 구석에 우뚝하게 솟아 있다. 논밭은 수놓은 것 같고 촌락은 즐비하다. 아침저녁으로 연기는 수목 사이에 어렴풋하고 망망한 넓은 들은 안계(眼界)가 공활(空闊)하다. 오르는 자는 마음이 넓어지고 정신이 맑아져서 그 흥취(興趣)가 무궁하다. 대개 유락(游樂)의 적취(適趣)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깊은 것과 넓은 것이 그것이다. 만약 여러 귀빈을 초청하여 술잔을 나누며 촛불 들고 밤까지 노는데, 예로써 대접함에는 진남루(鎭南樓)의 깊은 것이 좋고, 난간에 의지하여 사방을 둘러보고 천지를 부앙(俯仰)하며 성정을 즐겁게 하고 울적함을 풀기에는 제남루(濟南樓)의 넓은 것이 좋으리라. 주의 인물은 풍성하고, 예문(禮文)은 번다하며, 소송 문서는 밀려 좌우로 지휘하며 응접할 겨를이 없다가, 하루아침 이 누각에 오르면 사람의 왕래는 무한하고, 물상이 널려 있는 것은 무궁하여 눈에 보이는 것 모두가 그 마음에 감동을 주지 않는 것이 없다. 천부(千夫)의 삼태기와 가래로 애써 농사한 자는 조세를 왕실에 먼저 바치고, 십묘(十畝)의 상자(桑柘)로 부지런히 길쌈하는 자는 비단을 귀가[閭右]에 먼저 올리며 어부는 고기를 잡아 자기가 먹지 못하고, 목자(牧者)는 말을 먹여도 자기는 타지 못한다. 짐을 지고 실어 허리 굽혀 왕래하는 자 그 누구나 다 의식(衣食)을 꾀하기 위한 것이다. 굶주린 자는 배부르게 먹이고자 하고, 추운 자는 옷을 입게 하고자 하며, 피곤한 자는 휴식시키기를 하고자 하여서 백성의 편안하지 못한 것을 보기를 자신의 몸이 아픈 것처럼 한다. 이런 마음으로 정치에 임하면 남방 백성을 구제하려 하는 마음이 공황(龔黃 공수(龔遂)와 황패(黃霸). 둘 다 한(漢) 나라 신하)의 정치와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니, 그 정교(政敎)에 도움이 어찌 적다고 하랴.”라고 하였다.
공북정(拱北亭) 부(府)의 서북쪽 5리에 있다. 서거정(徐居正)의 기(記)에, “부의 북쪽 5리쯤에 정자가 있으니 공북정이라 한다. 조정에서 덕음(德音)을 펴거나 사명(使命)이 있으면 부윤이 관리들을 인솔하여 의관을 갖추고 이곳에 나와서 경례하여 맞이하며, 만약 국왕의 생일이나 국가의 큰 경사, 큰 상서를 만나면 부(府)와 주(州)가 각기 전문(箋文)을 받들어 대궐을 향하여 예를 행하고, 또한 여기에서 사신을 떠나보낸다. 그런데 집을 지은 지가 오래되어 거의 다 무너지게 되었으니, 예를 행하는 자가 들에서 일을 도모한다는 탄식이 있게 되었다. 신사년 겨울에 이언(李堰)이 부윤이 되어 개연(慨然)히 이를 다시 세울 뜻을 가지고 바야흐로 일을 경영하려 하였는데, 실행하지 못하고 전임이 되었다. 이형손(李亨孫)이 후임으로 와서 공인을 모으고 자재(資材)를 갖추어 거의 일이 되어가는 차에 부모의 상을 당하여 또 교대되어 갔다. 계속해서 부윤 이번(李蕃)과 통판(通判) 최지(崔漬)가 와서 공사를 완결시키기를 도모하고, 읍인 김사효(金思孝)를 시켜 공사를 독려하였다. 일 없이 노는 사람을 데려다 일을 시키고 농민들을 괴롭히지 아니하였으며, 수개월이 지나 완성을 보자 주의 부로(父老)들이 이 일을 자랑하고자 나에게 기문(記文)을 부탁하였다. 생각하건대 전주(全州)는 산천의 좋은 기운이 얽히고 서려 왕업의 자취를 창립하였으니, 실로 우리 조선(朝鮮)의 근본이 되는 땅으로 주(周) 나라의 태빈(邰豳)과 같은 곳이요, 목조(穆祖)가 북방으로 옮겨간 것은 마치 주의 태왕이 빈(邠)을 떠난 때이다. 태조(太祖)께서 나라를 열고, 열조의 성군이 서로 이어받아 부(府)를 설치하고 윤(尹)을 두어 한 도의 머리가 되게 하니, 대개 영광스럽게 하기 위함이었다. 전주의 부로와 자제들이 오래 선왕(先王)의 남은 교화를 입고 열성(列聖)의 깊은 은혜를 받아 풍패(豐沛)에 살면서 노래를 부르고, 시를 읊조리니 임금을 생각하는 정성 실로 만 배나 더하리라. 전후로 내려온 수령들은 모두가 조정에서 중선(重選)된 사람들이었고, 지금의 부윤과 통판(通判)이 또한 일시(一時)의 명망(名望)을 받는 이들로 정사(政事)는 왕명을 공경하고 왕사(王使)를 예로 맞는 것을 우선으로 하였으니, 이는 곧 공북(拱北)을 중시하는 까닭이다. 아, 고인이 말하기를, ‘그 경내(境內)에 들어가면 교화(敎化)를 안다.’고 하였으니, 지금으로부터 전주(全州)를 지나면서 우리의 풍속을 물으면 우리의 풍속이 어떠하며 우리의 고장이 어떠한가를 알 것이니, 춘추(春秋) 시대에 왕을 높이던 그 의(義)와 예(禮)를 깊이 체득하는 것이 반드시 이 정자(亭子)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정자를 수리함이 미관상 아름답게 하여 노는 곳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라 한다면 이는 두 분 부윤과 통판의 뜻을 모르는 말이다. 뒤에 오는 사람들이 오늘 새로 고친 거룩한 뜻에 어긋남이 없기를 바라노라.” 하였다. 『신증』 노사신(盧思愼)의 시에, “완산국(完山國)의 번영을 다 흠모하니, 성안에 가득찬 문물(文物)이 무성한 귀인[纓簪]이네. 덕음(德音 임금의 말)이 널리 퍼져 교외에까지 나아가 다투어 맞이하니, 북궐(北闕)에는 언제나 임금을 받드는 마음[捧日心]이 걸려 있더라.” 하였다. ○ 유순(柳洵)의 시에, “임금의 명령을 지니고 달려가니 스스로 공경하네. 우연히 정자 위에 오르니 귀현[華簪]들이 모였구나. 팔마(八馬 고관의 행차 앞에서 교통을 정리하며 가는 사람) 남행하는 나그네 다시 임금 생각하는 마음 간절함을 누가 알리요.” 하였다. 내사정(內射亭) 성내(城內) 남쪽에 있다. 부윤 정자제(鄭自濟)가 지었다.
쾌심정(快心亭) 제남정(濟南亭)으로부터 4리 떨어져 있다. 시내를 따라 올라가면 산이 끊어지고 물이 돌아 내려가는 낭떠러지가 있는데, 돌을 쌓아 터를 만들고 그 위에 정자를 세웠다. 노사신(盧思愼)의 시에, “강물은 길이 흘러 운잠(雲岑)을 둘렀는데, 강 위 높은 정자에는 꽃과 대[竹]가 깊구나. 붉은 난간을 서성거리며 두 눈이 맑으니 세상 그 무엇이 내 마음을 가리랴.” 하였다. 『신증』 신용개(申用漑)의 시에, “푸른 산이 우뚝 끊어진 모퉁이로 병풍처럼 푸른 물이 둘렀는데, 누가 좋은 정자를 물가에 지었는가. 잔잔한 물결에 바람이 없어 거울처럼 비치고, 우뚝우뚝 솟은 봉우리로 해가 지니 붉게 흙더미를 이루었네. 찬 하늘이 떨리니 가을이 장차 저무는데, 멀리 떠난 나그네가 등림(登臨)하여 머리를 홀로 돌리네. 또한 젓대 소리가 나를 흥기시키니, 맑은 시가 기루재(倚樓才 시를 빨리 쓰는 재주)를 빌릴 필요가 없네.” 하였다.
『신증』 청연당(淸讌堂) 객관(客館) 서쪽에 있다. 부윤 강징(姜澂)이 세웠다. 만화루(萬化樓) 향교(鄕校)에 있다. ○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학교[庠序]는 궐리당(闕里堂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곡부현(曲阜縣)에 세운 집)에 공자(孔子)가 처음으로 교학(敎學)을 시행한 집과 비슷하고, 장수(藏修)는 모두가 초국(楚國) 재목이로다. 연어(鳶魚)는 호호(浩浩)하게 천지(天地)를 나누었고, 현송(絃誦)은 양양하게 담 밖으로 퍼지는구나. 물이 방지(方池)에 출렁이니 가슴속 생각이 깨끗하고, 바람이 문행(文杏) 나무를 흔드니 웃음 소리가 시원하도다. 학생들을 분발 흥기시킴에 내가 방책이 없으니, 누전(樓前)에 자유(子游)와 자하(子夏)의 행실을 행하는 학생들에게 부끄럽구나.” 하였다.
【학교】 향교(鄕校) 부의 서쪽 5리에 있다. ○ 서거정(徐居正)의 기(記)에, “삼가 생각하니, 우리나라는 유학(儒學)을 숭상하고 도(道)를 중시하여 학교를 세우고 스승을 세워, 비록 궁벽한 고을이라도 다 그러하거늘, 하물며 전주는 우리 조종(祖宗)의 고향 땅이며 남쪽 지방의 인재가 모인 같은 곳이니 더 말할 것이 있으랴. 그러니 교육을 제일로 삼고 고을의 자제들이 또 문헌세가(文獻世家)들이 많아 선(善)을 좋아하고 학문을 좋아하므로 일향(一鄕)의 교화가 잘되고 많은 인재가 그 중에서 배출되니, 이는 비록 지령(地靈)의 좋은 기운이 모여서 된 것이라고는 하나 또한 교육에 바탕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부의 학[序學]이 이전에는 정청(政廳) 안에 있었는데, 신유년에 태조의 빛나는 용상(容像)을 경기전(慶基殿)에 봉안하게 되자 학교와 경기전이 너무 가까워 시서(詩書)를 외는 소리와 태만한 학생에게 매질하는 소리가 시끄러워서 성령(聖靈)을 편안히 모실 곳이 못 되었다. 마침내 성의 서쪽 6ㆍ7리 되는 곳으로 옮겼는데 무릇 성전(聖殿)과 강당(講堂) 재랑(齋廊)과 부엌이 차례로 완비되었다. 그러나 부지가 매우 넓고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도적이나 범의 화가 근심이 되어 담장을 두르고 자물통을 단단히 하니, 오직 단단하고 치밀한 것을 제일로 하였다. 기해년에 계림(鷄林) 이유인(李有仁) 선생이 부윤으로 와서는 먼저 선성(宣聖 공자를 말함)을 뵌 다음에는 제생을 불러들여 제사 지내는 일에 관해서 강론하고, 교화를 일으키고 어진 이를 독려함을 마음으로 삼고, 학과에 순서가 있고 공급(供給)은 넉넉하며, 수선(修繕)하는 작은 일도 여유있게 조치하였다. 이듬해 경자년 봄에 다섯 채의 새 누각을 지으니, 높고 밝아서 제반 마련이 알맞았다. 완성을 본 다음에는 선생이 제생을 인솔하고 누에 올라 술잔을 기울여 낙성식을 하였다. 선생이 여러 학생들을 돌아보며 하는 말이, ‘그대들이 이 누각에 올라오니 얻은 바가 있는가.’ 하니, 제생이 대답하기를, ‘전에 누각을 짓기 전에는 교사가 낮고 좁아서 우리가 책을 읽는 여가에 비록 답답함을 풀고 정신을 맑게 하고자 하나, 사방을 돌아보아도 쉴 자리와 놀 자리가 없어 늘 답답한 마음을 풀 길이 없었습니다. 이제 이 누각에 오르니 우리의 번거로운 마음을 씻어 주고 막힌 생각을 밝게 해서 산을 보고서는 인(仁)을 체득할 수 있고, 물을 보면 지혜를 기를 수 있으며, 솔개가 하늘을 날고, 고기가 물 속에 뛰노는 것을 보고 도체(道體)의 밝게 드러난 것을 깨닫게 되었으니, 한번 내려보고 우러러보는 것이 배우는 것이요, 한번 움직이고 고요함이 또한 배우는 것이라, 무릇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천지간 만물의 많은 것이 그 어느 것인들 천성을 기르는 데 도움되지 않는 것이 있겠습니까. 그 공(功)을 미루어 나가면 천지의 화육(化育)에 참여하여 천지(天地)와 그 공을 같이 할 수 있을 것이니, 선생이 우리에게 베푼 은혜는 지극함이 있습니다. 만약 유락(遊樂)에 빠져 흥청거리는 것이나 강송(講誦)을 하다 말다 하는 것은 선생이 우리에게 바라는 바가 아닐 것입니다’ 하였다. 선생이 웃으며 머리를 끄덕이니 제생이 공(公)의 주신 은혜를 빛내기 위하여 나에게 기문을 부탁하였다. 내 또한 이 고을에 적(籍)이 속해 있는 사람으로 그 뜻을 사양할 수 없노라.” 하였다.
【역원】 삼례역(參禮驛) 부의 북쪽 35리에 있다. 본도에 속한 역은 열두 개이니 반석(半石)ㆍ오원(烏原)ㆍ갈담(葛覃)ㆍ소안(蘇安)ㆍ재곡(材谷)ㆍ양재(良才)ㆍ앵곡(鸎谷)ㆍ거산(居山)ㆍ천원(川原)ㆍ영원(瀛原)ㆍ부흥(扶興)ㆍ내재(內才)가 그것이다. ○ 찰방(察訪) 1명이다. ○ 고려 현종(顯宗)이 거란 병사를 피하여 삼례역에 이르렀다. 절도사(節度使) 조용겸(趙容謙)이 들에 엎드려 어가(御駕)를 맞이하였다. 박섬(朴暹)이 상주(上奏)하기를, “전주는 옛날의 백제(百濟)인데 성조(聖祖)께서도 또한 싫어하던 곳이니, 청하건대 왕께서는 그곳에 가시지 마십시오.” 하니, 왕이 그 말을 좇았다. 반석역(半石驛) 부의 남쪽 3리에 있다. 앵곡역(鸎谷驛) 옛날에는 장곡역(長谷驛)이라 하였다. 부의 서쪽 30리에 있다. ○ 고려 현종이 이 역에 묵었다. 이날 밤에 절도사 조용겸이 왕을 이 역에 머무르게 하고, 왕을 끼고 호령을 하고자 하여 전운사(轉運使) 이재(李載), 순검사(巡檢使) 최집(崔檝), 전중소감(殿中少監) 유승건(柳僧虔)이 흰 깃대를 관(冠)에 꽂고, 북을 치고 소리치며 들어오므로 지채문(智蔡文)이 사람을 시켜 문을 닫고 굳게 지키니, 적이 감히 들어오지 못했다. 금광원(金光院) 부의 북쪽 50리에 있다. 숙점원(宿店院) 부의 서쪽 35리에 있다. 안덕원(安德院) 부의 동쪽 10리에 있다. 사대원(四大院) 부의 남쪽 5리에 있다. 허고원(虛高院) 부의 북쪽 30리에 있다. 장신원(長信院) 부의 남쪽 21리에 있다. 상관원(上館院) 부의 남쪽 40리에 있다. 추천원(楸川院) 부의 서쪽 11리에 있다. 신원(新院) 부의 동쪽 31리에 있다. 월당원(月塘院) 부의 동쪽 4리에 있다. 부윤 김정준(金廷雋)이 세우고, 재호(齋號)는 월당(月塘)을 따서 이름으로 하였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일은 백년이나 지나 햇수는 멀지만, 그 이름은 한 읍에 전하니 월당(月塘)의 맑음이여.” 하였다. 피계원(皮界院) 부의 남쪽 11리에 있다. 보산원(補山院) 부의 북쪽 30리에 있다. 대초원(大初院) 부의 서쪽 25리에 있다. 광제원(廣濟院) 부의 북쪽 30리에 있다. 탄현원(炭峴院) 부의 서쪽 16리에 있다. 모로원(毛老院) 부의 북쪽 17리에 있다. 남복원(南福院) 부의 남쪽 8리에 있다. 모즐지원(毛叱知院) 부의 남쪽 35리에 있다. 내현원(奈峴院) 부의 북쪽 40리에 있다.
【불우】 귀신사(歸信寺) 무악산(毋岳山)에 있다. ○ 고려 신우(辛禑) 때에 왜병(倭兵) 3백여 기(騎)가 주성(州城)을 함락하고 이 절에 주둔하였는데, 병마사 유실(柳實)이 격퇴하였다. ○ 윤진(尹珍)의 시에, “북쪽 뜰에는 산들바람 대밭에 불고, 남향 창문을 열면 넓고 아득한 만겹 산이로구나. 소나무 관문과 돌길 시내 건너 들어와서, 고승(高僧)을 대하고 앉아 잠시 한가함을 얻었도다.” 하였다. 보광사(普光寺) 고덕산(高德山)에 있다. ○ 이곡(李穀)의 기(記)에, “전주의 남쪽 고덕산에 절이 있으니, 이를 보광사(普光寺)라 한다. 실로 백제(百濟)로부터 내려오는 큰 절이다. 비구(比丘) 중향(中向)이 어려서 이 절에서 자랐는데, 그 절이 황폐해지는 것을 걱정하고 개연히 중흥시킬 뜻을 품었는데, 주(州)의 사람 중에 지금의 자정사(資政使) 고룡봉(高龍鳳) 공이 황제의 우대를 받고 성품이 또한 착한 것을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원통(元統 원(元) 순제(順帝)의 연호) 갑술년에 바다를 건너 서유(西遊)하여 경사(京師)에 가서 만나보고 말하기를, ‘고공(高公 즉 고룡봉(高龍鳳))은 변지(邊地)에서 태어난 몸으로 상국(上國)에 와서 이토록 뜻을 얻으니 어찌 인과(因果)가 아니겠습니까. 공은 군상의 측근에서 주야로 반걸음도 좌우에서 떠나지를 아니하니 군상(君上)의 은택에 빛남과 여복(輿服 타는 수레와 입는 옷)의 아름다움을 고향에 있는 친척과 붕우들이 알 수가 없으니, 소위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만약 고향에 절을 지어서 위로 임금을 위해 축수(祝壽)하고, 아래로 대중들과 복을 같이하여 우뚝하게 한 자리 귀앙(歸仰)할 장소를 마련한다면, 낮에 비단옷을 입는 격[晝錦]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공이 흔연히 승낙하고 천민(千緡)에 상당한 지폐를 출자하여 절을 새로 단장하고 삼장(三藏 불교의 경(經)ㆍ율(律)ㆍ논(論))을 두게 했다. 그 뒤 공은 재신(宰臣)의 이간질을 당하여 남방에 출거(出居)하게 되고 중향(中向)도 또한 산으로 돌아와서 건물을 수리하고 공이 하루속히 돌아오기를 빌었다. 지정(至正 원(元) 순제(順帝)의 연호)으로 개원(改元)하기 2개월 전에 간신들을 출척하고, 정화(政化)를 다시 베풀어 바람과 우레처럼 호령을 발하고 뇌성과 비처럼 시행하자, 공은 다시 사환(賜環)되어 임금의 사랑이 더욱 새로웠다. 중향은 다시 경사에 들어갔는데 공은 전에 뜻을 다 마치지 못한 것을 서운하게 여겨 그 비용을 더해서 공사를 독려하여 완성하도록 하였다. 세시(歲時)에 전장(轉藏)하고 전후로 보시(布施)한 것을 합하니, 천에 달하는 사람이 2만 50명이요, 황금물로 칠을 해서 불상을 새롭게 한 사람이 15명이며, 백금으로 새겨서 기명(器皿)을 장식한 사람이 30명이었다. 무릇 건물의 기둥은 1백여 개나 되는데, 정축년 봄에 시작해서 계미년 겨울에 완성을 보았다. 일이 끝나는 달에는 산인(山人) 담숙(旵淑) 등이 시주를 널리 모아서 크게 화엄회(華嚴會)를 개최하여 낙성식을 하니, 그동안에 쓴 일꾼이 3천명이요, 시일은 50일이 걸렸다. 선비와 부녀자들이 부지런히 다니며 공양(供養)하고 찬탄(讚嘆)하니, 골짜기를 메우고 산등에 넘쳐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중향(中向)이 마땅히 본말(本末)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는 것이 옳다 하여 고공(高公)의 명으로 나에게 기문(記文)을 부탁한 것이다. 삼가 생각건대 견훤씨(甄萱氏)가 본국에 들어온 지 4백 년이 넘는다. 절은 비록 백제 때에 창건되었으나 여러 차례 병화를 입고 비(碑)나 기문도 없어 그 세월을 상고할 길이 없으나, 혹은 일으키고 혹은 폐하더니, 오늘에 이르러 반드시 고공(高公)을 기다려서 비로소 옛날의 모습을 복구하게 되었다. 공은 삼한(三韓) 땅에 태어났으니 경사(京師)로부터 5천 리인데, 인연이 닿아서 일월(日月) 같은 천제(天帝)의 빛에 의지하고 비와 이슬 같은 큰 은혜를 입었으니, 향국(鄕國)에 그 여택이 많이 미쳤다. 또한 불사(佛事)를 크게 베풀어서 복을 빌고[祝釐] 근본을 갚아서[報本] 끝없이 드리우니, 그 어찌 우연한 일이라 하겠는가.” 하였다.
서고사(西高寺) 서고산(西高山)에 있다. 남고사(南高寺) 만경대(萬景臺)의 뒤에 있다. 천룡사(天龍寺) 부의 동쪽 성 밑에 있다. ○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온 집이 푸른 산 옆에 와서 산다네. 얕은 모자 가벼운 옷으로 침상에 누웠네. 폐부가 마르니 촌 술맛이 더욱 좋고, 정신이 혼미하니 들차[野茶] 향기가 또한 좋구나. 대나무 뿌리는 지상에 흩어져 뻗으니 용이 허리를 움직이는 것 같고, 파초 잎이 창 앞에 닿으니 봉의 꼬리처럼 길구나. 삼복(三伏)이 일찍 그치고 백성의 송사가 적으니, 이때 다시 부처님을 섬김도 무방하리라.” 하였다. 경복사(景福寺) 고달산에 있다. 이절의 비래당(飛來堂)에는 보덕대사(普德大士)의 화상이 있다. ○ 이규보의 기(記)에, “보덕(普德)의 자는 지법(智法)인데 고구려 반룡산(盤龍山)의 연복사(延福寺)에 거주하였다. 어느날 홀연 제자에게 말하기를, ‘고구려는 도교(道敎)만을 숭상하고 불법을 존숭하지 않으니 이 나라는 반드시 오래가지 못하리라. 몸을 편히 피란할 곳이 어디 있겠느냐.’ 하니, 제자 명덕(明德)이 말하기를, ‘전주(全州)의 고달산(高達山)이 안주하여 움직이지 아니할 곳입니다.’ 하였다. 보장왕(寶藏王) 26년 정묘 3월 3일에 제자가 문을 열고 나가보니 집은 이미 고달산에 옮겨져 있었으니, 반룡산으로부터 1천여 리나 떨어진 곳이다. 명덕(明德)의 말이, ‘이 산이 비록 뛰어나긴 했으나 샘물이 말라 있다. 내 만약 스승께서 옮겨 오실 것을 알았다면 틀림없이 반룡산의 샘도 옮겨왔을 텐데.’ 하였다.” 한다.
임천사(臨川寺) 서산(西山)에 있다. 사대사(四大寺)ㆍ흑석사(黑石寺) 두 절 모두 고덕산(高德山)에 있다. 원암사(圓巖寺) 청량산에 있다. 봉서사(鳳棲寺) 서방산에 있다. 대원사(大圓寺) 무악산(毋岳山)에 있다. ○ 고려 박춘령(朴椿齡)의 시에, “문서 다루는 3년 생활에 몸에는 백 가지 병이라, 공사에서 물러나 때때로 옛 정이 든 벗을 찾아가네. 높고 낮은 데 수목은 빽빽하여 길이 없나 의심하고, 철 따라 꽃이 피니 달리 봄이 있도다. 골짜기는 음청(陰晴)하여 부앙(俯仰)간에 다르고, 연기와 노을은 자색과 푸른색으로 아침저녁 다르네. 원공(遠公)은 시냇물을 건너지 마소. 산인(山人)들이 스스로 보내고 맞이하네.” 하였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부의 서쪽 3리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기린봉(麒麟峯)에 있다. ○ 이규보(李奎報)의 〈몽험기(夢驗記)〉에, “나는 일찍이 완산(完山)에 장서기(掌書記) 벼슬로 있었다. 평소에 성황사에 가는 일이 없었는데, 하루는 꿈에 사당에 가서 당하에서 절하였는데 법조(法曹)의 동배자(同拜者)가 있는 듯하였다. 법왕(法王)이 사람을 시켜 말하기를, ‘기실(記室 고을 원의 비서일은 맡은 사람)은 계(階)에 오르라.’하였다. 내가 청사에 올라서 재배(再拜)하니 법왕이 베로 된 모자에 검은 빛의 유의(襦衣)를 입고 남쪽 뜰에 앉았다가 일어나 답배(答拜)하는 것이었다. 나를 이끌어 앞으로 오게 하니 홀연히 한 사람이 탁주를 들고 와서 부었는데 술과 찬이 또한 초라하였다. 한참 동안 같이 마시다가 말하기를, ‘들으니 목관(牧官)이 근자에 새로 12국사를 찍었다 하는데 그런 일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니 또 말하기를, ‘어찌 나에게 주지 아니하는가. 내가 여러 아들이 있는데 읽도록 하고 싶으니 몇 책을 보내줄 수 있는가.’ 하였다. 내가 예예 하고 대답하니 또 말하기를, ‘아전의 우두머리 누구는 좋은 사람이니 보호하여 주기를 청하노라.’ 하였다. 내가 다시 승낙하고, 화복이 어떨지를 물었더니 법왕이 길 위에 달리다 축이 꺾인 수레를 가리키며 하는 말이, ‘그대의 운수가 마치 이 수레의 모양이니, 금년을 넘기지 못하고 전주를 떠나리라.’하고 곧 가죽띠 두 개를 가지고 나에게 주면서 말히기를, ‘자네는 존귀할 것이므로 이것을 준다.’하였다. 꿈을 깨니 온 몸에 땀이 흐르는 것이었다. 당시에 안렴사(按廉使) 낭장(郎將) 노공(盧公)이 목관을 시켜 12국사를 새로 찍게 한 일이 있고, 또 관리 중에 아무개가 내 뜻에 맞지 않아서 어떤 일로 인하여 내몰고자 한 일이 있었는데, 이것을 말한 것이다. 다음 낮 그 아전을 불러 12국사 두 책을 갖다가 바치게 하였고, 그 사람의 죄는 불문에 부치었다. 이 해에 과연 동료자의 고소로 파직을 당하고서 비로소 차축에 비유한 말을 깨우쳤다. 그러나 한가한 생활 7년에 한 번도 벼슬을 받지 못하여 곤란이 막심하였으므로 다시는 그 말을 믿지 아니하였다. 비록 요직을 지내고 벼슬이 3품에 오르고서도 여전히 깊이 믿지를 아니하다가 이제 상국(相國)의 지위를 제수받고서야 이에 존귀하게 되리라 하던 말이 부합되어 틀림이 없는 것을 크게 믿게 되었다. 아, 신도(神道)의 그윽한 감응도 역시 때로는 믿을 만하니 어찌 모두가 허망하다고만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신증』 관찰사 이언호(李彦浩)가 소상(塑像)을 부셔버리고 위판(位版)으로 대신하였다. 여단(厲壇) 부의 북쪽 5리에 있다.
【고적】 고토성(古土城) 부의 북쪽 5리에 있다. 터가 남아 있는데 견훤이 쌓은 것이다. 고덕산성(高德山城) 돌로 쌓았는데 둘레는 8천 9백 20척(尺), 높이가 8척이며, 그 안에 우물이 7개, 시내 하나가 있다. 우주 폐현(紆州廢縣) 우(紆)는 오(汚)로 쓰기도 한다. 주의 북쪽 50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우소저현(于召渚縣)인데, 신라에 와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금마군(金馬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가 고려 초에 예속시켰다. 이성 폐현(伊城廢縣) 주의 서쪽 25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두이현(豆伊縣)인데, 왕무(往武)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는 두성(杜城)으로 고치어 예속시키고 고려에 와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이성 폐현(利城廢縣) 주의 서쪽 75리에 있다. 본래는 백제의 내리아현(乃利阿縣)이다. 신라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어 김제군(金堤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가 고려 초에 예속시켰다. 경명향(景明鄕) 영명(榮明)이라고도 한다. 부의 북쪽 1백 20리에 있다. 양량소(陽良所) 우주(紆州)의 동북쪽, 즉 우양촌(右楊村) 철소(鐵所)에 있다. 두모촌소(豆毛村所) 이성현(利城縣)에 있다. 녹균정(綠筠亭) 청사(廳事)의 북쪽에 있다. 지정(至正) 정미년에 목사 한계상(韓系祥)이 정(亭)을 바꾸어 누(樓)로 만들었다. 이달충(李達衷)이 편액을 관풍루(觀風樓)로 고치고 기문을 적었는데 지금에 와서 폐지하였다. 효자리(孝子里) 부의 남쪽 3리에 있다. ○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돌을 세워 효자를 표창하였는데, 성씨를 아니 새겼네. 어느 때 사람이며, 효행은 어떠하였는고.” 하였다.
【명환】 신라 용원(龍元) 신문왕(神文王) 때 총관(摠管)이다. 김웅원(金雄元) 헌덕왕(憲德王) 3년 도독(都督)이 되었다. 고려 정항(鄭沆) 예종(睿宗) 조의 우정언(右正言)이며, 시사를 의논할 적에 곧게 직면하여 권신들에 거슬리어 통판(通判)으로 나갔다가 불려와 사간(司諫)이 되었다. 오연총(吳延寵) 전주 목사이며, 정사가 관대하고 공평하였으며, 가혹하지 아니하였으며, 아전과 백성을 편안하게 하였다. 뛰어난 치적이 알려져 추밀원(樞密院) 좌승선(左承宣)에 소배(召拜)되었다. 박춘령(朴椿齡) 완산(完山)의 수령이다. 조영인(趙永仁) 의종(毅宗) 때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서기(書記)에 임명되었는데 정무를 잘한다는 명성이 있었다. 이규보(李奎報) 신종(神宗) 2년 기미년에 사록(司錄) 겸 장서기(掌書記)에 임명되었다. 박원계(朴元桂) 사록(司錄) 겸 장서기였다. 경내에 호랑이 소동이 났는데 목사와 판관이 잡지를 못하고 박원계(朴元桂)에게 맡겼더니 원계가 말을 타고 좁은 지역에서 한 화살로 적중시켜 죽였다. 백득주(白得珠) 장원하여 서기(書記)가 되었다. 당시에 안렴사가 대궐로 가면서 절구 한 수를 남기었다. 백득주가 화답하기를, “사신[星使]이 임금께 돌아간 후에 유영(柳營)은 벌써 봄이네. 무정한 푸른 풀도 원망을 하거늘, 하물며 정이 있는 사람에 있어서랴.” 하였다. 안렴사가 평상에서 내려와 손을 잡고 작별했다. 곽예(郭預) 고종(高宗) 때에 사록(司錄)이 되었다. 김지대(金之垈) 고종 때 사록에 임명되었다. 고아와 과부들을 구제하고 부호와 강포한 사람들을 누르고 잘못을 귀신처럼 적발하니 아전과 백성들이 공경하고 두려워하였다. 정선(鄭僐) 원종(元宗) 말에 사록이 되었다. 한공의(韓公義) 충혜왕(忠惠王) 때 목사로 나가 은혜로운 정사를 시행하였다. 이우(李瑀) 이암(李嵒)의 아버지이다. 재간(才幹)이 있어 목사가 되어 나갔는데, 유애(遺愛)가 있었다. 정운경(鄭云敬) 공민왕(恭愍王) 때 목사이다. 처를 거느리고 집에서 사는 중이 있었는데 하루는 밖에 나갔다가 죽었다. 그 처가 관가에 고소하였으나 증거가 없어 오래 판결을 보지 못했다. 정운경이 그 처가 사통하는 자가 있는가 물었으나 없다고 대답하였다. 다만 이웃에 한 놈이 늘 희롱하기를, “노승이 죽으면 일이 좋겠다.” 하는 것이었다. 이에 그놈을 밖에 잡아 두고 먼저 그 어미를 국문하여 말하기를, “모월 모일 너의 자식이 집에 있었느냐, 아니면 나갔느냐.” 하니, 어미의 말이, “이날 밖에서 돌아와 하는 말이 친구와 술을 마셔 취하였다 하였습니다.”고 하였다. 즉시 이웃 남자에게, 같이 술마신 자가 누군가 물으니 바로 사실을 자복하였다. 김도(金濤) 공민왕 때 사록(司錄)이 되었다. 윤곤(尹坤) 부윤이 되었다.
본조 허조(許稠) 태종 때에 판관(判官)이 되었는데, 청절(淸節)을 지키고 강직하고 현명하였다. 일찍이 스스로 맹세하기를, “그릇된 법으로 일을 처단하면 황천이 벌을 내린다.[非法斷事皇天降罰]”는 여덟 글자를 작은 판에 써서 청사에 걸었다. 권담(權湛) 세종 때의 부윤이다. 홍여방(洪汝方)ㆍ김길통(金吉通) 다 같이 부윤을 지냈다. 이언(李堰) 성품이 청렴하고 강직하였으며 세조께서 교서를 내려 포상하였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이봉(李封) 부윤이 되어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있었다. 이유인(李有仁) 부윤인데 치적이 있다. 학교를 증수(增修)하니 교생들이 그가 죽은 날에는 제사를 차렸다.
『신증』 윤효손(尹孝孫) 부윤인데, 정사는 자비롭고 어진 것을 숭상하였고 아전들과 백성이 그를 사랑하므로 포상하여 가선(嘉善)으로 품계를 올렸다. 김선(金瑄) 부윤인데, 정사를 부지런히 삼가하였다. 가선(嘉善)으로 포상하여 올려 주었다. 최자숙(崔自淑) 판관인데 아전들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그를 사랑하였다.
【인물】 고려 최균(崔均) 어려서부터 열심히 공부하여 출중하였으며, 인종(仁宗) 때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자주 벼슬이 올라 소부(少府) 주부(主簿)가 되었다. 그때의 재상(宰相) 최윤의(崔允儀)가 봉지(奉旨)하고, 문사(文士)를 택하여 예의(禮儀)를 상정(詳定)함에 있어서 최균(崔均)을 제일 먼저 뽑았다. 뒤에 최윤의가 임종할 때에 홀로 최균을 천거하여 임금은 각문지후(閣門祗侯)를 제수하였다. 명종(明宗) 때에 예부시랑으로서 병마부사(兵馬副使)를 겸임하였는데, 서경(西京)의 조위총(趙位寵)을 공격하다가 잡혀 해를 입었으며 예부상서로 추증되었다. 최척경(崔陟卿) 아전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의종(毅宗) 초에 경산부(京山府) 판관(判官)이 되었다. 임기가 만료되어 서울에 돌아와서는 10여 년간 권문세가에 드나들지 아니했다. 뒤에 다시 탐라령(耽羅令)이 되었다가 자주 옮겨 감찰어사가 되고, 좌정언 지제고(左正言知制誥)에 제수되었다가, 예부시랑 비서감(禮部侍郞祕書監)까지 지냈다. 맑은 이름과 굳은 절개는 늙어서도 쇠하지를 아니했다. 애초에 박춘령(朴椿齡)이 완산(完山)을 지킬 때, 연구(聯句 몇 사람이 함께 연철(聯綴)해서 시를 완성하는 형식)로써 군동(群童)을 뽑는데, 최척경ㆍ최균(崔均)ㆍ최송년(崔松年)을 얻었다. 교체되어 돌아갈 때에 함께 데리고 가서 권하여 학문을 시켜, 뒤에 세 사람이 다 명사(名士)가 되었으니, 당시에 완산 삼최(完山三崔)라 불렀다. 이준양(李俊陽) 청백함으로 유명하고, 의종(毅宗) 때에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최보순(崔甫淳) 최균(崔均)의 아들인데 벼슬은 평장사,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유광식(柳光植) 풍도와 모습이 매우 크고 청검하고 절약하였으며 신중하고 말이 적었다. 중외(中外)로 여러 직책을 역임하였는데 모두 치적을 올렸다. 고종(高宗) 때에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로 치사하고 소요자적(逍遙自適)하였는데, 세칭 수부쌍전(壽富雙全)하다고 하였다. 시호는 대숙(戴肅)이다. 유소(柳韶) 유광식의 아들인데 성품은 강직(剛直)하고 꿋꿋했으며 남을 인정함이 적었고, 집안 살림에 관심을 두지 아니했으며 벼슬은 평장사에 이르렀다. 최성지(崔誠之) 최보순(崔甫淳)의 4세손이며 충선왕(忠宣王) 때 사람인데, 벼슬은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광양군(光陽君)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며 성품은 강직하고, 말을 함부로 하지 아니했고 글씨는 매우 반듯하였다. 시(詩)는 온자(溫藉)해서 좋고 음양 술수를 잘했다. 풍헌(風憲)과 어사직(御史職), 선거(選擧)와 이부직(吏部職)ㆍ성관(星官 천문관직(天文官職))ㆍ예원(藝苑 한림원직(翰林院職)) 등을 20년간 역임을 했다. 유방헌(柳邦憲)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를 지내고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최득평(崔得枰) 성품이 염정(廉靜)하고 스스로 지조를 지켜서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고 두려워하였다. 벼슬은 이부(吏部)의 전서(典書)로 치사(致仕)하였는데, 충렬(忠烈)ㆍ충선(忠善)ㆍ충숙(忠肅)의 삼조(三朝)를 섬겼다. 그 중에 충선왕이 더욱 중용하였다. 최재(崔宰) 최득평(崔得枰)의 아들이다. 충숙왕(忠肅王) 때 과거에 급제하였다. 임금이 그가 자기 아버지의 풍도를 지녔다고 하여, 감찰지평(監察持平)을 제수하였다. 충혜왕(忠惠王)이 즉위한 뒤 면직되었다. 임금이 원 나라로 끌려간 뒤 임금이 설치한 것은 모두 다시 바뀌었는데, 도감(都監)을 세우고 최재(崔宰)를 판관(判官)으로 삼으니 최재는 탄식하고 말하기를, “임금의 실덕은 임금 자신이 한 것이 아니요, 좌우에서 임금의 과실을 유도하여 인도한 것이다. 앞에서 맞이하고 뒤에서 맞아 들쳐 올리니, 내가 실로 이것을 부끄러워한다.” 하고 병을 칭탁하고 나오지 아니하였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완산군(完山君)으로 봉하고 문정(文貞)이라 시호하였다.
최용갑(崔龍甲) 1등으로 뽑혀 급제하였다. 이자을(李資乙) 1등으로 뽑혀 급제하였다. 최용갑(崔龍甲)과 함께 문명(文名)이 있었다. 이곡(李穀)의 〈완산도중시(完山途中詩)〉에, “장원(壯元)한 최(崔)ㆍ이(李)의 재명(才名)이 크고, 경계 머리[界首] 완산(完山)이 전라도에 기상이 웅장하구나. 과객은 신분이 귀한 것을 자랑하지 말라. 공경(公卿)이 이 한 고을에서 많이 나왔네.” 하였다. 최칠석(崔七夕) 장수(將帥)의 재량이 있었다. 이문정(李文挺) 지순(至順) 경자년 과시에 뽑히어 벼슬은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 최부(崔府) 벼슬은 판서이며, 시호는 정간(靖簡)이다. 이백유(李伯由) 이문정(李文挺)의 손자인데 개국공신이며, 완성군(完城君)에 봉하였다. 이의손(李義孫)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은 이조 참판이며 문명(文名)이 있다. 이사철(李思哲) 과거에 급제하고 정난공신(靖難功臣)에 들었으며 벼슬은 좌의정이다. 최경지(崔敬止) 함열(咸悅) 우거(寓居) 편에 보인다. 이경동(李瓊仝) 이문정(李文挺)의 4대손이며, 임오년 과거에 급제하였고, 중시(重試)와 발영시(拔英試) 과에도 합격하여 벼슬은 병조 참판까지 이르렀고, 문명(文名)이 높았다.
『신증』 유헌(柳軒) 과거에 급제하였고 벼슬은 대사간(大司諫)이었으며 기량(器量)이 있었다. 유숭조(柳崇祖)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成均館) 동지(同知)를 지냈다. 경학(經學)에 정통하고 사람을 가르치는 데 부지런하였다.
【효자】 본조 박진(朴晉) 아버지가 병이 들자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 시중하였는데, 언제나 옆을 떠나지 아니하였고 밤에도 허리띠를 풀지 아니하였으며, 약을 달이면 꼭 먼저 맛을 보았다. 아버지는 병이 위태하자 시를 지어 박진(朴晉)에게 주어 말하기를, “나이 80에 병상[蟻床]에 누우니, 육순된 아들이 약을 먼저 맛보네. 사생(死生)은 운명이기에 끝내 피할 수 없으니, 네 어머니 묘 가까이에 수당(壽堂 생존시에 지어 두는 묘)을 세워 두라.” 하였다. 아버지가 작고하자 장례와 제사를 예로써 하고, 묘막에서 3년을 지내니 고을에서 칭송하였다. 태조 7년에 마을에 정문을 세웠으며 벼슬은 지군사(知郡事)를 지냈다. 박유성(朴有誠) 나이 50세 때에 부모가 죽자 6년간 묘막 생활을 했다. 상을 마친 뒤에는 부모의 형상을 그려 벽에 붙이고 아침저녁으로 상식을 그치지 아니했다. 성종(成宗) 6년에 이 일이 임금께 알려져 특별히 광흥창(廣興倉) 봉사(奉事)에 제수되었다. 복윤문(卜閏文) 효행이 있었다. 『신증』 오영로(吳齡老) 생원(生員)인데 계모의 상을 입고 기년(期年)에야 비로소 소식(疏食)을 시작했다. 연산(燕山) 때에 아버지가 작고했는데, 그때 단상법(短喪法)이 엄했는데도, 오영로는 오히려 예대로 상을 입었다. 금상 4년에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박세직(朴世直) 생원(生員) 나이 10세에 어머니를 잃고, 3년 동안 슬프게 울었으며, 아버지가 작고해서는 묘막에서 죽으로 3년상을 마치었다. 금상 23년에 상으로 벼슬을 주었다. 김천동(金千同) 사노였으며 어머니가 종기를 앓아 거의 죽게 되었는데 손가락을 잘라 약에 타서 드리니 병이 나았다. 금상 23년에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열녀】 고려 임씨(林氏) 낙안군사(樂安郡事) 최극부(崔克孚)의 처이며, 왜구가 마을에 쳐들어왔는데, 임씨가 피난하여 달아나자 왜구가 쫓아와서 욕보이려 하였다. 굳게 항거하니 왜구가 한 팔을 끊었는데 그래도 따르지 아니했고, 또다시 다른 팔을 끊어도 끝내 따르지 않고 마침내 죽음을 당했다. 그 집과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본조 이씨(李氏) 최이원(崔以源)의 처인데 나이 19세에 남편이 죽었다. 부모가 그 뜻을 뺏고자 하니 이씨는 밤에 시부모 집으로 돌아가버렸다. 부모가 후회하고 개가시킬 것을 포기하였다. 세종 24년에 일이 임금께 알려져서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김씨(金氏) 박형문(朴衡文)의 처이며 남편이 죽자 3년간 머리를 빗지 아니했다. 조석으로 직접 상식을 올리고 상복을 벗은 뒤에는 시절에 따라 옷을 지어 신주(神主)에 바치었다. 금상 23년에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제영】 욕방의관비왕사(欲訪衣冠悲往事) 이색(李穡)의 시에, “견성(甄城)의 경치가 오르기를 권하니, 옛 사람을 위무(慰撫)하며 유연히 웃음을 머금도다. 의관을 찾고자 하니 지나간 일들이 슬퍼지고 부질없이 도기(圖記)만을 가지고 옛 궁터를 말하네. 술은 황국(黃菊)에 맑은 서리 내린 후 맛을 다하고, 주렴(珠簾)은 청산(靑山) 낙조(落照) 사이에 걷혀 있네. 고금(古今)의 영웅이 지나가는 새와 같으니, 피곤하기를 기다리지 말고 돌아갈 줄을 알아야 하겠네.” 하였다. 견훤농병지(甄萱弄兵地) 정추(鄭樞)의 시에, “중간에 길이 산과 강을 갈라 놓으니, 남주(南州)의 물색(物色)이 구분되었네. 얽힌 소나무는 옛날 역원(驛院)을 알리고, 긴 대나무는 이전의 마을을 표시하고 있네. 말[馬] 그림자는 거치른 다리에 비치고, 까마귀 소리는 황폐한 절간의 구름 속에서 들리네. 견훤이 군병을 지휘하던 땅, 물가에 임하여 싸립문이 걸렸네.” 하였다. 천년종왕기(千年鍾王氣) 권근(權近)의 시에, “큰 고을이 남과 북을 갈라 놓으니, 완산(完山)이 가장 특기하도다. 천년의 왕기가 모여 있으니, 일대에 큰 토대를 열었구나.” 하였다. 완산거진승남양(完山巨鎭勝南陽) 설장수(偰長壽)의 시에, “완산(完山)의 거진(巨鎭)은 남양(南陽)에 뛰어나고, 성한 기운이 제향(帝鄕)에 아련하여라.” 하였다. 세마기가누근수(洗馬幾家樓近水) 석선탄(釋禪坦)의 시에, “완산의 4월 완화(浣花) 앞에, 하늘 기운은 사람을 가두어 취한 듯이 잠이 오네. 말을 씻기는 집은 몇 집인고, 누(樓)는 물가에 있는데. 모래 물가에 우는 비둘기, 비는 촉촉이 내리네.” 하였다. 남리임구제효우(南里林鳩啼曉雨) 성임(成任)의 시에, “남리(南里) 수풀 속 비둘기는 새벽비에 울고, 동풍(東風) 연기 속 버들은 봄 성(城)에 어둡다.” 하였다. 압계공업서하산(鴨鷄功業誓河山)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대세(大勢)를 반드시 휼방(鷸蚌)의 고사를 참고로 해서 보아야 하네. 오리와 닭의 공업(功業)을 산하(山河)에 맹세하도다. 추풍이 한 번 견훤을 위하여 웃으니, 노발(怒髮)은 무단히 관을 들먹거리는구나.” 하였다. 완산가려고명도(浣山佳麗古名都)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완산은 곱고 새뜻하니 옛날의 명도(名都)로다. 용호(龍虎)가 서리고 걸터앉은 듯 울성하게 얽혀 있네. 정령(精靈)이 쌓여 지키고 도우니, 기운(氣運)도 아름다워라. 때에 발설하니 바른 부서(符瑞) 이루었네. 국조의 근원이 이곳에서 비롯되니, 대대로 맑은 덕음(德陰)이 동우(東隅)에 덮였어라. 신풍(新豐) 계견(鷄犬)을 어찌 족히 비기리요. 충후(忠厚)는 빈풍(豳風)과 다를 것이 없도다.”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부동(府東) 끝이 5리이다. 부서(府西) 끝이 5리이다. 부남(府南) 끝이 10리이다. 부북(府北) 끝이 7리이다. 봉상(鳳翔) 동북쪽으로 처음이 3리, 끝이 40리이다. 귀이동(龜耳洞)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우림곡(雨林谷) 서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조촌(助村)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양량소(陽良所) 원래의 양량소는 북쪽에 있으며, 처음이 1백 10리이고, 끝이 1백 30리이다. 연산(連山) 남쪽이고, 진산(珍山)의 서쪽이며, 고산(高山)의 북쪽이고, 은진(恩津)의 동쪽에 있다. 초곡(草谷) 동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소양(所陽) 동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60리이다. 완전(薍田)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5리이다. 전포(田浦)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25리이다. 용진(龍進)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상관(上關) 동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50리이다. 오백조(五百條) 북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5리이다. 우동(紆東)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우서(紆西)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35리이다. 우북(紆北) 북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60리이다. 위의 3면은 우주(紆州)이다. 이동(伊東)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25리이다. 이남(伊南) 서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이서(伊西)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35리이다. 이북(伊北)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위의 4면은 이성(伊城) 땅이다. 이동(利東) 서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60리이다. 이서(利西) 서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80리이다. 이북(利北)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위 3면은 이성(利城) 땅이다. 동일도(東一道) 서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서일도(西一道) 서북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60리이다. 남일도 서북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남이도(南二道) 서북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70리이다. 북일도(北一道) 서북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60리이다. 북이도(北二道) 서북쪽으로 처음이 60리, 끝이 80리이다. 위의 6면은 옥야(沃野) 땅이다. ○ 이성(利城) 3면은 동쪽으로 익산(益山)과 접하고, 남쪽으로는 김제(金堤)ㆍ만경(萬頃)과 접하며, 서쪽으로는 임피(臨陂)와 접하고, 북쪽으로는 함열(咸悅)과 접한다. ○ 옥야(沃野) 6면은 남쪽으로 사수(泗水)와 연하고, 서쪽으로는 김제(金堤)와 접한다. 낭산(朗山) 서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5리이다. 귀산(歸山) 서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40리이다. ○ 경명향(景明鄕)ㆍ북일백(北一百)ㆍ두모촌(豆毛村)은 이성(利城) 땅이다.
【창고】 창고(倉庫)가 3곳이 있다. 본읍. 고(庫)가 10곳이 있다. 감영(監營)이 성내에 있다. 옥야창(沃野倉) 서쪽으로 70리이다. 이성창(利城倉) 서쪽으로 60리이다. 우주창(紆州倉) 북쪽으로 10리이다. 봉익창(鳳翔倉) 동리쪽으로 40리이다. 외성창(外城倉) 동쪽으로 30리이다.
내성창(內城倉) 위봉산성(威鳳山城)에 있다. 양량소창(陽良所倉) 동북쪽으로 1백 20리에 있다.
【진도】 신창진(新倉津) 서쪽 70리에 있으며, 김제(金堤)와는 남쪽으로 20리 거리이다. 사천진(沙川津) 횡탄(橫灘) 아래쪽에 있다.
【토산】 대[竹]ㆍ감ㆍ붕어[鯽魚]ㆍ게[蟹].
【누정】 호경루(護慶樓) 남천(南川) 곁에 있다. 큰 시내가 누정 밑을 둘러 흐르고, 동남쪽으로는 푸른 산이 둘러 있다. 만화루(萬化樓) 위와 같다. 매월정(梅月亭) 객관(客館) 동쪽에 있다.
【궁실】 조경묘(肇慶廟) 부성(府城)의 동문(東門) 안 경기전(慶基殿) 북쪽에 있다. 영종(英宗) 47년에 세웠다. 이조(李朝)의 시조(始祖) 위판(位版)을 봉안하고 있다. 성은 이씨이고 휘는 한(翰)이며, 신라 때 벼슬은 사공(司空)이다. 배필은 김씨로 군윤(軍尹) 은의(殷義)의 딸인데, 신라 태종(太宗)의 10세 손이다. 봄과 가을에 상삭(上朔)에서 상순(上旬) 사이에 날을 택하여 제사를 지낸다. ○ 영(令) ㆍ별검(別檢)이 각 1명이다.
【사원】 화산서원(華山書院) 선조 무인년에 세우고, 효종 무술년에 사액했다. 이언적(李彦迪) 문묘(文廟) 편에 보인다. 송인수(宋麟壽) 청주(淸州) 편에 보인다.


 

[주D-001]풍패(豐沛) : 풍패(豐沛)는 한 고조(漢高祖)의 고향이다. 여기서는 태조(太祖)의 선대가 전주 이씨(全州李氏)이기 때문이다.
[주D-002]예를……되었다 : 《좌전(左傳)》에, “정국(鄭國)에 큰일이 있으면 자피(子皮)를 싣고 들에 가서 모의한다.” 하였다.
[주D-003]태빈(邰豳) : 주(周)의 선대가 일어난 땅이다.
[주D-004]주의 태왕이……때이다 : 주 문왕(周文王)의 조부 태왕(太王)이 침략하는 적인(狄人)을 피하여 도읍지인 빈(邠)을 버리고 기산(岐山)으로 옮겨가매 백성들이 따라갔다.
[주D-005]사환(賜環) : 옛날에 신하가 임금에게 쫓겨났을 때에 구경에 가서 처분을 기다렸는데, 임금이 결(訣)을 주면 돌아오지 말라는 것이요, 환(還)을 주면 돌아오라는 뜻이다.
[주D-006]전장(轉藏) : 불교의 장경(藏經)을 독송강설(讀訟講說)하는 것이다.
[주D-007]원공(遠公)은……건너지 마소 : 동진(東晉)의 중 혜원(慧遠)이 여산(廬山)에 있으면서 손을 전송할 때에 호계(虎溪)를 넘지 않았는데 한 번은 도연명(陶淵明) 육수정(陸修靜)을 전송하면서 이야기하다가 저도 모르게 호계를 넘었다.
[주D-008]유애(遺愛) : 그 사람이 간 뒤에도 백성에게 대한 사랑이 백성의 마음에 남아 있어 잊지 않는 것이다.
[주D-009]병상[蟻床] : 진(晉) 나라 은중감(殷仲堪)의 아버지가 마음에 병이 있어, 평상 밑에 개미들 싸우는 것이 마치 소싸움[鬪牛]하는 것처럼 들렸다 한다.
[주D-010]휼방(鷸蚌)의 고사 : 휼새[鷸]가 조개[蚌]를 쪼아 먹으려고 조개의 벌린 껍질 속에 입을 넣었다가, 서로 버티는 동안에 어부(漁父)가 두 마리를 한꺼번에 잡아갔다는 것이다.
[주D-011]오리와 닭의 공업(功業) : 태봉(泰封) 말기의 참서(讖書)에,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친다.” 하였는데, 과연 고려 태조가 계림(鷄林 신라)을 먼저 얻고 뒤에 압록강(鴨綠江)까지 국경을 개척하였다.
[주D-012]신풍([新豐) : 풍(豐)은 한 고조의 고향으로, 한(漢)의 고조가 천하를 통일한 후 성과 거리의 모양을 풍(豐) 땅과 같이 만들어 놓고 풍 땅의 백성을 이곳에 이주시키고 신풍(新豐)이라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2권
 경상도(慶尙道)
고성현(固城縣)


동쪽으로 거제현(巨濟縣) 경계까지 53리이고, 남쪽으로 바닷가까지 1리이며, 서쪽으로 진주(晉州) 경계까지 25리이고, 사천현(泗川縣) 경계까지는 40리이다. 북쪽으로 진해현(鎭海縣) 경계까지 43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9백 5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가야국(伽倻國)이었는데 신라가 빼앗아서 고자군(古自郡)을 설치하였고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명칭으로 고쳤다. 고려 성종(成宗) 때에 고주 자사(固州刺史)로 하였다가 뒤에 현으로 강등하였다. 현종(顯宗)이 거제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현령을 두었고, 원종(元宗)이 주(州)로 승격시켰다. 충렬왕(忠烈王)이 남해(南海)와 합병하였으나 곧 복구하였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현령으로 강등하였고, 본조에서는 그대로 따랐다.
【관원】 현령(縣令)ㆍ훈도(訓導) 각 1인.
【군명】 고자(古自)ㆍ고주(固州)ㆍ철성(鐵城).
【성씨】 본현 채(蔡)ㆍ이(李)ㆍ박(朴)ㆍ김(金)ㆍ남(南), 김 촌성(村姓)이다. 등(登)ㆍ주(朱) 모두 당(唐). 오(吳) 해주(海州). 궤촌(跪村) 남. 발산(鉢山) 이 곤의(坤義) 김ㆍ이 해빈(海濱) 박ㆍ하(河). 구허(丘墟) 김ㆍ박 보안(保安)과 같다. 도선(道善) 김 진여(珍餘)와 같다. 녹명(鹿鳴) 이ㆍ김ㆍ최(崔). 어례(魚禮) 박 적진(積珍) 이ㆍ박. 곡산(曲山) 김.
【풍속】 풍속이 검소하고 솔직하다. 관풍안(觀風案)에 있다.
【형승】 외로운 성이 바다에 임했다. 이선(李宣)의 시에 있다.
【산천】 무량산(無量山) 현 서쪽 10리 지점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미륵산(彌勒山) 현 남쪽 67리 지점에 있다. 우산(牛山) 현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좌이산(佐耳山) 현 서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남산(南山) 현 남쪽 2리 지점에 있으며 옛 성터가 있다. 불암산(佛巖山) 현 서쪽 2리 지점에 있으며, 옛 토성(土城) 터가 있다. 성산(城山) 현의 북쪽 24리에 있으며 옛 성터가 있다. 벽산(碧山) 현 동쪽 15리 지점에 있는데 날씨가 가물면 비가 내리도록 기도한다. 무기산(舞妓山) 현 북쪽 2리 지점에 있다. 속세에 전하기를, “예전에 고주 자사(固州刺史)가 기생을 데리고 여기에서 노래하고 춤추었으므로, 이렇게 이름하였다.” 하였다. 용수암(龍水巖) 현 북쪽 20리 지점에 있다. 샘이 있는데 바닥이 없는가 싶을 정도로 깊다. 가물 때에 비 내리기를 빌면 영험이 있다. 성현(城峴) 현 서쪽 60리 지점에 있으며 옛 성터가 있다. 천왕점(天王岾) 현 북쪽 15리 지점에 있다. 바다 현 동남쪽에 있다. 말을상곶(末乙上串) 현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둘레가 1백 30리이며, 목장이 있다. 주악곶(住岳串) 현 남쪽 50리 지점에 있다. 해평곶(海平串) 현 남쪽 40리 지점에 있다. 둘레가 1백 40리이며 목장이 있다. 죽도(竹島) 열락산(悅樂山)이라고 한다. 남문(南門) 밖에 있으며 온 섬에 대나무가 있다. 종해도(終海島) 견내량(見乃梁) 서남쪽에 있다. 둘레가 21리이며 예전에는 양을 기르는 목장이 있었다. 송도(松島)ㆍ자란도(自卵島)ㆍ하박도(河撲島) 둘레가 50리이다. 상박도(上撲島) 둘레가 24리이다. 연대도(煙臺島)ㆍ오아도(吾兒島)ㆍ적화도(赤火島) 이상은 모두 현 남쪽 바다 복판에 있다. 가조도(加助島) 말을상곶(末乙上串) 남쪽에 있으며 민전(民田)이 있다. 추라도(楸羅島) 둘레가 40리이다. 노태도(老太島) 크고 작은 두 개의 섬이 있다. 욕지도(欲知島) 둘레가 65리이다. 연화도(蓮華島) 둘레가 53리이다. ○ 위의 두 섬은 왜놈의 고깃배가 보통 때 왕래하는 곳이다. 적질도(赤叱島) 이상은 모두 현 동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시락도(時落島) 둘레가 41리이다. 어응적도(於應赤島) 이상은 모두 현 동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수월포(愁月浦)ㆍ양지포(陽知浦) 모두 현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마소포(馬所浦) 현 서쪽 70리 지점에 있다. 자화포(資火浦) 현 북쪽 35리 지점에 있다. 가화포(加火浦) 현 북쪽 20리 지점에 있다. 소소포(召所浦) 현 북쪽 10리 지점에 있다. 춘원포(春元浦) 현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 구허포(丘墟浦) 현 동쪽 30리 지점에 있다. 장평포(長平浦) 현 동쪽 50리 지점에 있다. 어례향포(魚禮鄕浦) 현 서쪽 30리 지점에 있다. 쌍봉포(雙峯浦)ㆍ수대포(水大浦) 모두 현 서쪽 20리 지점에 있다. 지포(池浦) 현 서쪽 40리 지점에 있다. 당항포(當項浦) 현 북쪽 30리 지점에 있다. 『신증』 상족암(床足巖) 소을비포(所乙非浦)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돌기둥 네 개가 있으며 바위가 평상 같다. 파도가 밀려오면 물이 그 밑을 지나간다. 둔미도(芚彌島) 가도(柯島) 밖에 있다. 독박도(禿朴島) 현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토산】 녹반(綠礬) 주악곶(住岳串) 바닷가 바위에서 난다. 대구[大口魚]ㆍ전복[鰒]ㆍ해삼ㆍ굴[石花]ㆍ청어ㆍ문어ㆍ전어ㆍ홍합ㆍ미역ㆍ대[竹]ㆍ송이[松蕈]ㆍ석류ㆍ유자, 왜저(倭楮) 자란도(自卵島)에 심는다. 표고[香蕈]ㆍ감 『신증』 황어ㆍ조기[石首魚]ㆍ숭어[秀魚]ㆍ농어[鱸魚]ㆍ오징어[烏賊魚]ㆍ낙지[絡締]ㆍ곤쟁이[紫蝦]ㆍ맥문동ㆍ녹용(鹿茸)ㆍ차[茶].
【성곽】 읍성(邑城) 석축(石築)이며 둘레는 3천 5백 24척이고 높이는 15척이다. 성안에 우물 넷과 못 하나가 있다.
【관방】 사량영(蛇梁營) 현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으며 물길로 70리 거리이다. 석성(石城)이며 둘레는 1천 2백 51척이고 높이는 13척이다. ○ 수군 만호(水軍萬戶) 1명이다. 당포영(唐浦營) 현 남쪽 67리 지점에 있다. 석성이며 둘레가 1천 4백 45척, 높이 13척이다. ○ 수군 만호 1명이다. 가배량수(加背梁戍) 현 남쪽 34리 지점에 있다. 예전에는 수군 도만호영(水軍都萬戶營)이 있었으나 거제현(巨濟縣) 옥포(玉浦)로 옮겼는데, 성종(成宗) 22년에 왜구가 자주 침입하므로 다시 석성을 쌓았다. 둘레는 8백 83척, 높이는 13척이다. ○ 권관(權管)을 차임(差任)하여 방수(防戍)한다. 소을비포수(所乙非浦戍) 현 서쪽 47리 지점에 있다. 석성이며 둘레 8백 25척, 높이 14척이다. ○ 권관을 차임하여 방수한다. 좌신포(佐申浦) 현 동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혜질이곶(惠叱伊串) 현 서쪽 30리 지점에 있다. 모두 순라(巡邏)하는 곳이다.
【봉수】 미륵산 봉수(彌勒山烽燧) 동쪽으로 거제현 계룡산(鷄龍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우산(牛山)에 응한다. 우산 봉수(牛山烽燧) 남쪽으로 미륵산에 응하고 서쪽으로 좌이산(佐耳山)에 응하며, 북쪽으로 천왕점(天王岾)에 응한다. 천왕점 봉수 동쪽으로 곡산(曲山)에 응하고, 남쪽으로 우산에 응한다. 곡산 봉수(曲山烽燧) 동쪽으로 진해현(鎭海縣) 가을포(加乙浦)에 응하고, 서쪽으로 천왕점에 응한다. 좌이산 봉수 동쪽으로 우산에 응한다.
【누정】 안청루(晏淸樓) 현성(縣城) 남쪽 문루(門樓)이다. ○ 김수온(金守溫)의 시에, “동남쪽 지역에도 성대(聖代)의 아름다움은 모두 한결같아서, 극남(極南) 변방의 군성(群城)을 다스렸네. 강은 마도(馬島)와 이어져 파도가 넓고, 땅은 진한(辰韓)에 들어가니 귤과 유자 달리네. 아전들 관청에서 물러가니 봄이 적적하고, 삽살개 달 아래에 잠드니 밤도 명랑하다. 변방 백성이 왕화(王化)를 알고자 치첩(雉堞)에 다락이 높고 깃발도 눕혀 놓았네.” 하였다. 관해루(觀海樓) 견내량(見乃梁) 북쪽 벼랑에 있다. 낙열정(樂悅亭) 죽도(竹島)에 있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작은 섬이 창해(滄海) 물가에 깎아지른 듯, 만죽(萬竹)은 묶어 놓은 듯 짙푸르구나. 만죽을 뚫고 가서 반석 위에 앉으니, 만고의 티끌 마음 한번 씻기네. 부상(扶桑)에서 돋는 해 붉은 산호(珊瑚) 같고, 만 이랑 물결은 번쩍번쩍 금이 굼실거리는 듯. 눈 속에 누른 귤 별처럼 달리고, 갑자기 파랑새 한 쌍이 날아오네. 먼저 묻노니 어느 곳이 단구(丹丘)이던가. 삼신산(三神山)도 지척일사 금오(金鰲) 머리에 있네. 자진(子晉)을 불러서 생학(笙鶴)을 타고, 12동천(洞天)에 한껏 놀고 싶어라. 아래로 구주(九州)에 놀고 다시 9주가 있으니, 하루살이 같은 사람 세상 3천 년인가.” 하였다.

【학교】 향교(鄕校) 현 서쪽 5리 지점에 있다.
【역원】 배둔역(背屯驛) 현 북쪽 27리 지점에 있다. 송도역(松都驛) 현 북쪽 2리 지점에 있다. 구허역(丘墟驛) 현 동쪽 30리 지점에 있다. 도선원(道善院) 현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 성산원(城山院) 현 북쪽 25리 지점에 있다. 견내량원(見乃梁院) 견내량 북쪽 벼랑에 있다. 송정원(松亭院) 현 서쪽 18리 지점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현 서쪽 2리 지점에 있다. 『신증』 그 지방 사람들이 해마다 5월 초하루에 5일까지 모여서 두 대(隊)로 나눈 다음, 사당(祠堂)의 신상(神像)을 싣고 화려한 깃발을 세우고 여러 마을을 두루 들른다. 마을 사람들은 술과 음식을 가지고 제사하고, 광대[儺人]이 다 모여서 온갖 놀이가 벌어진다. 여단(厲壇) 현 북쪽에 있다. 관음점사(觀音岾祠) 현 서쪽 10리 지점에 있다. 봄ㆍ가을이면 현령이 여기에서 상박도(上撲島)ㆍ하박도(下撲島)ㆍ욕지도(欲知島)의 신에게 망제(望祭)를 지낸다.
【고적】 문화량페현(蚊火良廢縣) 김부식(金富軾)이 말하기를, “신라 때에는 고성군(固城郡)의 속현이었다.” 하였는데, 지금은 자세하지 않다. 곤의부곡(坤義部曲) 현 북쪽 15리 지점에 있다. 해빈부곡(海濱部曲) 현 동남쪽 67리 지점에 있다. 도선부곡(道善部曲) 현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 진여부곡(珍餘部曲) 현 동남쪽 25리 지점에 있다. 구허부곡(丘墟部曲) 현 동쪽 30리 지점에 있다. 죽림부곡(竹林部曲) 현 동쪽 40리 지점에 있다. 박달부곡(博達部曲) 현 서쪽 20리 지점에 있다. 활촌부곡(活村部曲) 현 북쪽 20리 지점에 있다. 궤촌부곡(跪村部曲) 현 서쪽 50리 지점에 있다. 발산부곡(鉢山部曲) 현 동쪽 1리 지점에 있다. 곡산향(曲山鄕) 현 동북쪽 20리 지점에 있다. 녹명향(鹿鳴鄕) 현 북쪽 30리 지점에 있다. 어례향(魚禮鄕) 현 서쪽 30리 지점에 있다. 보령향(保寧鄕) 현 서쪽 40리 지점에 있다. 적진향(積珍鄕) 현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 의선향(義善鄕) 현 북쪽 40리 지점에 있다. 번계(樊溪) 현 서쪽 33리 지점에 있다. 예전에 만호영(萬戶營)이 있었으나 지금은 당포(唐浦)로 옮겼다.
【명환】 신라 김양(金陽) 흥덕왕(興德王) 3년에 태수를 지냈다. 본조 신처강(辛處康) 정치를 잘하여 백성이 아전을 보지 못하였다. 『신증』 성수재(成秀才).
【인물】 고려 이존비(李尊庇) 예전 이름은 인성(仁成)이다. 원종(元宗) 초 과거에 뽑혔고 문명(文名)이 있었으며, 이ㆍ호부 시랑(吏戶部侍郞)을 지냈다. 충렬왕(忠烈王) 때 원(元) 나라에서 일본을 정벌할 적에 존비가 경상ㆍ전라ㆍ충청 도순문사(都巡問使)가 되어서 군량과 전함을 조달하게 하였는데, 일 처리가 적당하여 백성을 뒤흔들지 않았다. 판밀직사 세자원빈(判密直事世子元賓)일 때 죽었다. 세자가 부음(訃音)을 듣고 울면서, “존비는 정직한 사람이었는데 수명이 어찌 이같이 짧은가.” 하였다. 이암(李嵒) 예전 이름은 군해(君侅)이며 존비의 손자이다. 충선왕(忠宣王) 때 17세로 과거에 올랐다. 충정왕(忠定王) 때에 왕을 모시고 원 나라에 갔다. 공민왕 초년에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여 청평산(淸平山)에 들어갔으나, 다시 불려와서 문하시중 철성부원군(門下侍中鐵城府院君)으로 제수 되었다. 집에 있으면서 양식이 있는지 없는지도 묻지 아니하고 그림과 글씨만을 낙으로 삼았으며, 당대에 글씨 쓰는 솜씨가 묘하니, 일찍이 태갑편(太甲篇)을 써서 왕에게 바쳤다. 호는 행촌(杏村)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이강(李岡) 이암의 아들이다. 15세 때 과거에 올랐고 벼슬이 여러 번 승직되어 지신사(知申事)가 되었다. 그때에 외적이 침입했다는 변방 보고가 잇달았으나, 조정과 민간이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던 까닭은 이강의 공이 대부분이었다. 벼슬이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이르러서 죽었으니, 나이 36세였다. 왕이 매우 슬퍼하여, 보통 전례에 추밀(樞密)에게는 시호를 내리지 않는 법이나 특별히 문경(文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본조 이원(李原) 이강의 아들이고, 18세 때 과거에 올랐다. 본조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서 벼슬이 좌정승(左政丞)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호는 용헌(容軒)이다. 아들 이대(李臺)와 이비(李埤)는 동지중추(同知中樞)를 지냈고, 이지(李墀)는 과거에 올라 돈녕부정(敦寧府正)을 지냈다. 남수문(南秀文) 병진년 과거와 중시(重試)에 장원하였고 문장으로써 세상에 알려졌으며, 벼슬은 직집현전(直集賢殿)에 이르렀다. 이칙(李則) 이원의 손자이다. 과거에 올라 벼슬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정숙(貞肅)이고, 문명(文名)이 있었으며, 성품이 활달해서 얽매이지 않았다. 이육(李陸) 이원의 손자이다. 갑신년 친시(親試)에 장원하였고 또 중시와 발영시(拔英試)에도 뽑혔다. 벼슬은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이르렀고, 문명이 있었다.
『신증』 【열녀】 본조 옥지(玉只) 젊은 나이에 남편을 여의고 시어머니와 살았다. 남이 욕보이고자 하니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제영】 누상농동수고성(樓上籠銅戍鼓聲) 이첨(李詹)의 시에, “군성(郡城)을 새로 철문성(鐵門城)으로 쌓았는데, 누 위에는 북소리가 둥둥거리네. 유민(流民)을 점검하니 예전 수효가 돌아왔고, 절후는 3월이라 두루 봄갈이하고 있네.” 하였다. 박도연분운외기(撲島煙氛雲外起) 이집(李集)의 시에, “박도 연기는 구름 밖에서 일고, 대숲 봉화는 밤이 깊도록 맑네.” 하였다. 장진왜산백일명(瘴盡倭山白日明) 이인손(李仁孫)의 시에, “적을 제어하는 데에 어찌 반드시 정벌해야 하랴. 예의(禮儀)로서 절충하면, 이것이 장성(長城)과 같네. 밭갈이 해변까지 이어져 누른 보리 구름 같고, 장기(瘴氣)가 다 없어지니 왜국의 산도 대낮같이 밝네.” 하였다. 병수산형수지진(竝水山形隨地盡)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관하(關河)가 아득한데, 기러기처럼 남으로 가서, 하늘가를 두루 돌아 철성(鐵城)에 이르렀네. 물에 접한 산형은 지세를 따라 끝났는데, 공주에 가득한 바닷빛은 사람 가깝자 환하구나.”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동읍내 끝이 10리이다. 서읍내 끝이 15리이다. 상서(上西) 처음이 15리이고, 끝이 40리이다. 하리일운(下里一運) 서로 처음은 25리 끝이 45리이다. 하리이운(下里二運) 서로 처음은 40리, 끝이 65리이다. 가동(可洞) 북으로 처음은 5리, 끝은 20리이다. 대둔(大芚) 북으로 처음은 50리, 끝은 30리이다. 마암(馬巖) 동북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40리이다. 구만(九萬) 동북으로 처음은 35리, 끝은 45리이다. 회현(會賢) 동북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42리이다. 광내일운(光內一運) 동으로 처음은 5리, 끝은 15리이다. 광내이운(光內二運) 동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50리이다. 도선(道先) 남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30리이다. 춘원(春元) 남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70리이다. ○ 곡산향(曲山鄕)은 동북으로 20리, 녹명향(鹿鳴鄕)은 북으로 30리, 죽림부곡(竹林部曲)은 동으로 40리에 있는데, 후에 죽림수(竹林戍)라 고쳤다. 어례향(魚禮鄕)은 서로 30리에 있다. 보령향(保寧鄕)은 서로 40리, 적진향(積珍鄕)은 동으로 20리, 의선향(義善鄕)은 북으로 40리, 곤의부곡(坤義部曲)은 북으로 15리, 해빈부곡(海濱部曲)은 동남으로 67리, 도선부곡(道善部曲)은 동으로 20리, 진여부곡(珍餘部曲)은 동남으로 25리, 구허부곡(邱墟部曲)은 동남으로 30리, 박달부곡(博達部曲)은 서로 20리, □촌부곡(□村部曲)은 서로 20리, 궤촌부곡(跪村部曲)은 서로 50리, 발산부곡(鉢山部曲)은 동으로 1리에 있다.
【영아】 우수영 겸 삼도통제영(右水營兼三道統制營) 남으로 50리에 있는데, 본조 초에 우수영(右水營)을 거제(巨濟)의 오아포(烏兒浦)에 두었다가, 선조(宣祖) 26년에는 처음으로 통제사(統制使)를 두어, 경상ㆍ전라ㆍ충청 3도의 주사(舟師 수군)를 관장하게 하고 이순신(李舜臣)을 통제사로 하였다. 35년에는 본현의 두룡포(頭龍浦)로 옮기고 오아포를 행영(行營)으로 하였다가 뒤에 폐하였다. 관원 경상우도수군절도사 겸 경상전라충청삼도 수군통제사중군(慶尙右道水軍節度使兼慶尙全羅忠淸三道水軍統制使中軍) 우후(虞侯)가 겸하는데 3월부터 8월까지 견내량(見乃梁)에 머무르며 지킨다. 한학훈도(漢學訓導)ㆍ왜학훈도(倭學訓導)ㆍ심약(審藥) 각 1인. ○ 영성(營城) 둘레가 1만 1천 7백 30척, 우물이 10, 못이 5이다. ○ 본영 수군의 속읍 창원(昌原)ㆍ진주(晉州)ㆍ김해(金海)ㆍ하동(河東)ㆍ거제(巨濟)ㆍ고성(固城)ㆍ곤양(昆陽)ㆍ남해(南海)ㆍ웅천(熊川)ㆍ진해(鎭海)ㆍ사천(泗川). 창고 저향창(儲餉倉)ㆍ포량창(砲粮倉)ㆍ원문창(轅門倉)ㆍ유방창(留防倉)ㆍ진휼창(賑恤倉)ㆍ군창(軍倉)ㆍ섬향고(贍餉庫)ㆍ보민고(補民庫)ㆍ군기고(軍器庫)ㆍ화약고. 본영에는 각종의 전선(戰船) 36척이 있고, 속읍(屬邑)ㆍ속진(屬鎭)에는 각종 전선 1백 48척이 있다.
【진보】 사량도진(蛇梁島鎭) 도중(島中)에 있었는데, 진주(晉州) 구라량(仇羅梁)으로 옮겼으며, 이곳에는 만호가 있다. 성의 둘레는 1천 2백 52척이다. ○ 수군 만호 한 사람이 있다. 당포진(唐浦鎭) 남으로 67리이다. 통영은 남으로 20리에 있다. 성종 19년에 쌓았으며, 둘레는 1천 4백 45척이다. 수군만호가 한 사람이 있다. 남촌포보(南村浦堡) 동남으로 30리에 있으며, 광해주 6년에 현의 남쪽인 도선촌(道善村)에 세웠다가 11년에는 적진포(積珍浦)에 소모진(召募鎭)을 옮겨 세우고 남촌(南村)이라 칭하였다. ○ 별장(別將)이 한 사람이다. 구솔비포보(舊乺非浦堡) 서로 47리이며, 처음에는 권관(權管)을 두었다가 성종 22년에 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8백 25척이다. 선조 37년에는 거제의 수영(水營) 옛 터에 옮겼다가 39년에는 이곳에 소모진(召募鎭)을 다시 옮기고 금명(今名)이라 칭하였다. 별장(別將)이 한 사람이다. 삼천포보(三千浦堡) 통영(統營)의 서남쪽 5리에 있는데, 광해주 11년에 사천현(泗川縣)으로부터 미륵산(彌勒山) 아래로 옮기고 삼천포라 하였다. 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2천 50척이며, 권관(權管)이 한 사람이다.
혁폐 가배량보(加背梁堡) 남으로 34리인데 옛날에는 수군 도만호(水軍都萬戶)가 있었으며, 후에 거제현의 옥포(玉浦)로 옮겼다. 성종 22년에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다시 권관을 두고 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8백 83척이다. 선조 37년에는 다시 거제의 우수영 옛 터로 옮겼다. 번계진(樊溪鎭) 서로 34리에 있는데, 옛날에는 수군만호가 있었다. 후에 당포(唐浦)로 옮겼다. 성산진(城山鎭) 서로 24리에 있는데 미공(未攻)으로 고쳐 설치했으며, 고성(古城)이 있다. 좌신포(佐申浦) 동남으로 30리에 있다. 혜질이포(惠叱伊浦) 서로 30리에 있는데, 위 두 곳은 예전에 후라(候邏)하던 곳이다. 죽림수(竹林戍) 죽림부곡(竹林部曲)에 있는데 고려 때 수자리를 두었었다.
【창고】 읍창(邑倉)ㆍ제민창(濟民倉) 남으로 5리에 있다. 속창(屬倉) 바로 진주(晉州) 가산창(駕山倉)의 속창(屬倉)으로 견내량(見內梁)에 있다. 고성(固城)ㆍ거제(巨濟)를 위해서 설치했는데 원창(元倉)과 같이 군수물자를 실어 보낸다. 진보창(鎭堡倉)이 다섯이다.
【목장】 혁폐 말상곶(末上串) 남으로 30리이다. 해평곶(海平串) 남으로 40리이다. 삼천포(三千浦)ㆍ당포(唐浦)ㆍ종해도(終海島)ㆍ포도도(葡萄島)
【진도】 견내량진(見乃梁津) 동남으로 50리인데 거제로 들어간다. 이곳에서 맞은 편은 바로 영등포진인데, 나룻가에는 관해루(觀海樓)가 있다.
【토산】 비자(榧子)ㆍ지황(地黃)ㆍ김[海衣].
【사원】 충렬사(忠烈祠) 강산도(剛山島)에 있는데 광해주 갑인년에 세웠고, 경종 계묘년에 사액하였다. 이순신 아산(牙山) 편에 있다.


 

[주D-001]삼신산(三神山) : 신선이 있는 곳으로 금강산ㆍ지리산ㆍ한라산을 말한다. 단구는 중국 동해에 있다고 하는, 신선이 있다는 곳이다.
[주D-002]자진(子晉) : 주(周) 나라의 왕자로, 열일곱 살에 산동(山東) 땅으로 놀러 갔다가 신선이 되어 학을 타고 피리 불며 하늘로 올라갔다 한다.
[주D-003]구주(九州) : 중국 사람들이 옛날 중국의 본토를 아홉 지방으로 나누었는데, 뒤에 세계가 훨씬 넓은 것을 알고서 9주 외에 또다시 9주가 있다고 말하였다.
[주D-004]장기(瘴氣) : 그 지방의 풍토병(風土病)을 말하는 것인데, 옛날 사람들은 그 지방에 독한 공기가 있어서 그런 병이 든다고 생각하였으므로 그 공기를 장기라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5권
 충청도(忠淸道)
청주목(淸州牧)


동쪽으로 청안현(淸安縣)의 경계까지 42리, 같은 현 시화역(時化驛)의 경계까지 44리, 남쪽은 문의현(文義縣)의 경계까지 20리, 회인현(懷仁縣)의 경계까지 24리, 보은현(報恩縣)의 경계까지 22리, 서쪽으로 전의현(全義縣)의 경계까지 54리, 목천현(木川縣)의 경계까지 55리, 연기현(燕岐縣)의 경계까지 38리, 북쪽으로 진천현(鎭川縣)의 경계까지 32리, 서울까지의 거리는 2백 93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百濟)의 상당현(上黨縣) 낭비성(娘臂城)이라고도 하고, 낭자곡(娘子谷)이라고도 하였다. 신라 신문왕(神文王) 5년에 처음 서원소경(西原小京)을 두었다가, 경덕왕(景德王) 때에 서원경(西原京)으로 승격시켰고, 고려 태조 23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성종 2년에 목(牧)을 설치하고, 14년에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전절군(全節軍)이라 불렀고, 중원도(中原道)에 소속되었다. 현종(顯宗) 3년에 폐지하고 안무사(安撫使)로 삼았다가 9년에 8목(牧)을 설치하여 다시 목으로 되었다. 본조에서는 그대로 따르던 중, 세종 31년에 관찰사로써 목의 일을 겸하여 맡아 보게 하다가 이내 폐지하였고, 세조 때에는 진(鎭)을 설치하였다.
【속현】 청천현(靑川縣) 고을 동쪽 60리에 있다. 옛날에는 살매현(薩買縣)이었고, 청천(靑川)이라고도 하였으며, 고려 때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이 고을(청주(淸州))에 소속되었다. 주안향(周岸鄕) 옛날에는 주애(朱崖)라고 했는데, 고을의 동남쪽 60리에 있다. 문의(文義)ㆍ회인(懷仁) 두 현을 지나야 그 땅에 도착한다.
【진관】 군(郡)이 둘이다 천안(天安)ㆍ옥천(沃川). 현(縣)이 열이다 직산(稷山)ㆍ목천(木川)ㆍ문의(文義)ㆍ회인(懷仁)ㆍ청안(淸安)ㆍ진천(鎭川)ㆍ보은(報恩)ㆍ영동(永同)ㆍ황간(黃澗)ㆍ청산(靑山).
【관원】 목사(牧使)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각 1인.
『신증』 연산군 을축년에 이 고을 출신의 환관(宦官) 이공신(李公臣)을 죽이고 이 고을을 폐지해서, 땅을 분할하여 이웃 고을에 예속시키고 이 도(道)를 고쳐 충공도(忠公道)로 하였다가 지금의 임금(중종) 초년에 모두 복구하였다.
【군명】 상당(上黨)ㆍ낭비성(娘臂城)ㆍ서원경(西原京)ㆍ청주(靑州)ㆍ낭성(娘城)ㆍ전절군(全節軍).
【성씨】 본주 한(韓)ㆍ이(李)ㆍ김(金)ㆍ곽(郭)ㆍ손(孫)ㆍ경(慶)ㆍ송(宋)ㆍ고(高)ㆍ준(俊)ㆍ양(楊)ㆍ동(東)ㆍ방(方)ㆍ정(鄭)ㆍ왕(王)ㆍ황보(皇甫) 모두 개경(開京). 노(盧) 포천(抱川). 유(柳) 목천(木川). 홍(洪) 회인(懷仁). 김(金) 경주(慶州). 서문(西門) 속성(續姓)이다. 박(朴)ㆍ신(申)ㆍ갈(葛) 모두 촌성(村姓)이다. 주안(周岸) 하(河)ㆍ오(吳)ㆍ조(趙)ㆍ장(張)ㆍ유(柳). 추자(楸子) 김(金)ㆍ한(韓)ㆍ필(畢). 배음(拜音) 박(朴)ㆍ이(李)ㆍ필(畢). 청천(淸川) 손(孫)ㆍ전(田)ㆍ문(文). 간신(間身) 이(李)ㆍ전(全)ㆍ유(兪). 덕평(德平) 신(申). 조풍(調豐) 이(李).
【풍속】 인다호걸(人多豪傑) 고려 태조가 말하기를, “청주(靑州)는 땅이 기름지고, 사람 중에 호걸이 많다.” 하였다.
【형승】 동남지주집(東南之走集) 이숭인(李崇仁)이 이모지(李慕之)를 전송하는 글의 서문에, “청주(淸州)는 실로 동남쪽의 집합지로서, 그 땅이 넓고 인구가 많아서 사업이 번잡하다.” 하였다. 지대민조(地大民稠) 노숙동(盧叔同)의 〈향교기(鄕校記)〉에, “서원(西原)은 전도(全道)의 본영(本營)이요, 땅이 넓고 인구가 조밀하다.” 하였다. 경양요광(境壤遼曠) 이영구(李英耈)의 〈향교기〉에, “구역이 넓고 인재가 많아 실로 다른 고을에 비교할 곳이 아니다.” 하였다.
【산천】 당선산(唐羨山) 고을 동쪽 1리에 있는 진산(鎭山)인데, 토성(土城) 터가 있다. 낙가산(洛迦山) 고을 동쪽 20리에 있다. 선도산(仙到山) 고을 동쪽 20리에 있다. 검단산(儉丹山) 청천현(靑川縣)에 있다. 고을 동쪽 64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백제의 중 검단(儉丹)이 살던 곳이므로 그렇게 이름지어졌다. 저산(猪山) 고을 서쪽 30리에 있다. 용자산(龍子山) 고을 서쪽 36리에 있는데, 또 전의현(全義縣) 편에 보인다. 미륵산(彌勒山) 청천현(靑川縣)에 있다. 구라산(謳羅山) 고을 동쪽 41리에 있다. 상령산(上嶺山) 고을 동쪽 15리에 있다. 속리산(俗離山) 주안향(周安鄕)에 있다. 기곡산(箕谷山) 청천현에 있다. 파곶산(葩串山) 청천현에 있다. 오근진(吳根津) 고을 북쪽 20리에 있는데, 곧 청안현(淸安縣)의 반탄(磻灘) 하류이다. 진목탄(眞木灘) 고을 서쪽 35리에 있는데, 오근진의 하류이다. 연기현(燕岐縣)의 동진(東津)을 거쳐 공주(公州)에 이르러 금강으로 들어간다. 청천천(靑川川) 청천현(靑川縣)에 있으며 그 근원이 셋이 있는데, 하나는 청아현 좌귀산(坐龜山)에서 나오고, 하나는 같은 현의 구자은현(仇自隱峴)에서 나오며, 또 하나는 보은현(報恩縣) 속리산에서 나와, 합류하여 괴산군(槐山郡) 괴탄(槐灘)으로 들어간다. 대교천(大橋川) 고을 남쪽 1리에 있으며, 근원은 적현(赤峴)에서 나와 오근진으로 흘러 들어간다. 초수(椒水) 고을 동쪽 39리에 있는데, 그 맛이 후추 같으면서 차고, 그 물에 목욕을 하면 병이 낫는다. 세종과 세조가 일찍이 이곳에 행차한 일이 있다. ○ 방문중(房文仲)의 시에, “땅 신령이 서기(瑞氣)를 빚어내어 그 까닭 헤아릴 수 없으나, 아마도 은하수 한 줄기가 통하는가 싶도다. 향기로운 액체가 신묘하게 엉기어 온갖 병을 물리치고, 푸른 물줄기는 흘러흘러 삼농(三農)을 살리네. 고요할 땐 물상(物象)이 잠기어 진경(秦鏡)을 끌어 놓은 듯하고, 움직일 땐 거문고 소리를 내어 순풍(舜風)을 띤 듯하도다. 봉황 부채[鳳扇]비낀 속에 직녀(織女)를 맞이하고, 난여(鸞輿 임금이 타는 수레)도 아득히 천제(天帝)가 내려왔네. 탕반(湯盤 은 나라 탕왕이 쓰던 쟁반)인 양 명계(銘戒)가 될 만하거니, 요석(堯腊)을 어찌 약으로만 다스리리요. 목욕하심을 보고 백성들이 기뻐하던 날, 신하들은 춤추고 다투어 만세를 부르네. 스스로 발을 용납할 만한 땅이 없음을 탄식하니, 어떻게 남은 물결을 얻어 가슴을 씻어 내리. 오랫동안 신초(申椒)를 차고 있음이 도리어 우습구나. 이제까지 3기(紀 12년) 동안을 소중(消中)으로 눕다니.” 하였다.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하늘과 땅이 서기(瑞氣)를 빚어 신령스런 샘이 나니, 세조(世祖)께서 이 해에 수레를 멈추었네. 모든 풍류 소리 임금 계신 곳에 들려옴을 맞이하고, 다투어 고운 해가 우연(虞淵 해지는 곳)에 목욕함을 우러러 보았도다. 어찌 사람의 일이 뜬구름처럼 변할 줄 알았으랴, 오직 행궁(行宮)에 낙조(落照)만이 걸렸음을 볼 뿐이로다. 홍문관[玉署]옛 신하들이 와서 말을 쉬면서, 슬픈 눈물을 바람 앞에 뿌림을 금하지 못하노라.” 하였다.

【토산】 청옥(靑玉) 구라산(謳羅山)에서 나온다. 청옥석(靑玉石) 고을 동쪽 30리에 있는 소음리(召音里)에서 나온다. 녹반(綠礬) 청천현(靑川縣)의 반석천(磻石遷)에서 나온다. 주토(朱土) 주안향(周岸鄕)의 소흘곶리(所屹串里)에서 나온다. 사기그릇[磁器]ㆍ오지그릇[陶器]ㆍ꿀[蜂蜜]ㆍ송이[松蕈]ㆍ석이버섯[石蕈]ㆍ지치[紫草]ㆍ인삼(人蔘)ㆍ복령(茯苓)ㆍ안식향(安息香)ㆍ지황(地黃)ㆍ산무애뱀[白花蛇].
【성곽】 읍성(邑城)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3천 6백 48자이고, 높이가 8자인데, 그 안에 우물 13개가 있다.
【봉수】 거질대산(巨叱大山) 봉수 고을 동쪽 11리에 있다. 남쪽은 문의현(文義縣) 소이산(所以山)에 응하고, 북쪽은 진천현(鎭川縣) 소을산(所乙山)에 응한다.
【누정】 공북루(拱北樓) 고을 북쪽 3리에 있다. ○ 백문보(白文寶)의 응제시(應製詩 임금의 명령에 의해 지은 시) 서문에, “때는 신축(辛丑)년, 임금의 수레가 복주(福州 안동)로부터 상주(尙州)를 거쳐 옮겨와, 행궁(行宮)이 청주(淸州)에 머무르게 되었다. 임인년 가을 9월 19일에 임금이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하정표(賀正表)를 청주 교외(郊外)에서 올리고, 이어 공북루에 납시어 일재(一齋) 권한공(權漢功)이 전에 지은 오언절구(五言絶句)를 보시고, 즉시 지신사(知申事) 원송수(元松壽), 대언(代言) 이색(李穡), 성사달(成士達)에게 명하여 차운하여 바치게 하였다. 이에 좌정승 홍양파(洪陽坡), 이행촌(李杏村)ㆍ황회산(黃檜山) 및 여러 대부(大夫)와 선비들이 모두 화답하는 시를 지어 바쳤다. 백문보는 그때 마침 왕명을 받들고 서울에 가고 없었는데, 이 일을 듣고 매우 부러워 목을 내밀고 바라보면서, 신은 성사(盛事)에 참여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다. 부름을 받고 돌아오면서 속으로 생각하기를, 신도 화답하는 시를 지어서 그들의 끝부분에 붙여 놓는 것도 다행한 일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이 고을의 원 김성갑(金成甲)이 유사암(柳思庵 유숙(柳淑))의 말로써 부탁하기를, ‘임금의 명을 받들어 지은 시가 완성되어 장차 현판에 새기려 하는데, 서문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니, 백문보가 글을 못한다고 사양하다가, 한 번 쓰면 영원히 전할 것으로 여겨 드디어 붓을 들고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기를, ‘옛날에 임금과 신하가 함께 노래를 지어 읊조린 것은, 본래 태평한 시대의 일이었습니다. 지난해에는 난리통에 어지러워, 그런 상황에서 어찌 오늘 같은 성대한 일이 있으리라 여겼겠습니까. 아, 우리 전하께서 대국을 공경하여 섬기는 그 정성이 공북(拱北 북극성을 향한다는 뜻임)이라 이름 지은 이 누각에 잘 표현되어 있지 않습니까.’ 하고 그 시에 이르기를, ‘공북의 이름은 비록 오래 되었으나, 우리 임금께서 공경의 뜻을 나타낸 것은 이것이 처음이로다. 먼지는 이제 말끔히 씻겼으니, 풍물을 이제 바로 써야겠도다. 임금 계신 곳 멀리 우러러보고, 시내와 들은 앞 뒤로 훤히 틔었도다. 이 백성들 임금 은혜 느낄 줄 아니, 책임은 나 한 사람[一人予]에게 있으리.’ 하였다.” 했다.
○ 고려 권한공(權漢功)의 시에, “공북루를 새로 지은 것은 경신년 10월 초순인데, 지은 시는 권찬선(權贊善)부터이고, 공은 윤상서(尹尙書)로부터다. 옛 길은 단풍 든 나무 사이로 뻗었고, 맑은 못에는 푸른 하늘이 거꾸로 비치도다. 머뭇거리어서 해는 지려는데, 산 빛은 나의 시름을 자아내누나.” 하였다.
○ 고려 신천(申蕆)의 시에, “고을과 산천이 좋으니, 백성이 태고의 풍속을 즐기네. 좌중의 손님들은 전의 내한(內翰)이었고, 목사는 옛 중서(中書)로다. 소나무ㆍ참나무 우거진 봉우리가 빼어났고, 뽕나무와 삼을 심은 들판이 툭 트이었도다. 난간에 의지하여 시를 읊으려 하니, 수풀에 새들이 나를 재촉하는구나.” 하였다.
○ 고려 원송수(元松壽)의 시에, “경치 좋은 이 누에 올라, 맑은 날 처음 응제(應製)하네. 오늘의 총애 기꺼이 받으나, 옛 사람의 글을 잇기 부끄럽구나. 길은 남녘으로 곧바로 틔었는데, 산이 머니 북녘은 훤히 비어 있구나. 예천(醴泉)이 즐겁게 놀기 좋으니, 영광이 나 같은 이 없도다.” 하였다.
○ 이색(李穡)의 시에, “임금님 수레 이른 새벽에 움직이니, 문물이 태평할 시초로다. 누각이 높아 하늘 보기 가까운데, 임금님 분부 받들어 시를 이루네. 산 빛에 기쁨이 생기고 가을 기운은 충허(沖虛)를 모으도다. 뒷날 남녘으로 순행(巡幸)하실 때, 함향(含香)이 나에게도 있으리.” 하였다.
○ 성사달(成士達)의 시에, “이 해도 다하여 날씨도 쌀쌀해지려는데, 임금님 모시고 누대에 올라 붓을 적시어 옛글에 화답하노라. 가을은 깊어 연꽃 떨어져 버리고, 바람 설레는 나무 그늘도 공허한데, 임금 모시는 영광 속에서도 오히려 나는 부끄러워 망설이도다.” 하였다.
○ 홍언박(洪彦博)의 시에, “임금님 모신 수레 동쪽으로 돌아오던 날, 가을 바람에 나뭇잎이 지기 시작하였네. 강산은 나더러 머물러 있으라 하고, 시구는 남의 글을 빌려서 썼도다. 길은 곧아 멀리 남녘에서 조회(朝會)하고, 누각은 높아 허공의 북두성을 향하네. 늙어서도 항상 임금 모시니, 벽 위에 적을 내 이름 잊지 말라.” 하였다.
○ 고려 이암(李嵒)의 시에, “옛 고을에 누각이 우뚝한데, 누가 처음 지었을까. 가을 빛은 온 산의 나무들에 짙고, 풍경은 두어 줄의 글에 들어오도다. 멧부리는 서쪽을 바라보기에 좋고, 푸른 구름은 빈 북녘을 메웠도다. 누에 올라 시종(侍從)에 참여하니, 그 영광 스스로 부끄럽네.” 하였다.
○ 이제현(李齊賢)의 시에, “나라 남쪽을 두루 살피시던 날, 표(表)를 북루에서 처음 올렸소. 술통 앞에 호탕히 흥이 겨워, 거침 없이 붓을 놀려 글을 쓰노라. 바람은 높아 기러기 물가를 따르고, 구름은 맑은데 학은 허공을 날도다. 늙어가매 이제 병이 많으니, 임금 은혜, 슬퍼하는 나를 저버리려는가.” 하였다.
○ 고려 황석기(黃石奇)의 시에, “공북루 좋다고 하나, 임금이 오시긴 이번이 처음이네. 못 경치가 그지없이 좋으니, 어찌 벽 위에 쓸 수 있으리오. 누각에 올라 보니 넓어서 좋고, 쳐다보니 참으로 시원하구나. 예천상(醴泉相) 고맙기도 하구려, 시를 남겨 나를 상기시키네.” 하였다.
○ 유숙(柳淑)의 시에, “공북루에 임금 모시고 관상하는 날은, 나라가 중흥(中興)하는 시초로다. 훌륭한 일 장차 전해 보이려고, 굳이 새 시를 스스로 쓰노라. 깃발은 길에 가득 휘날리고, 곤룡포(袞龍袍)는 멀리 허공에 임했도다. 이곳이 비록 즐겁다 하나, 송산(松山 송도)이 안타까이 나를 기다리리.” 하였다.
○ 고려 김한룡(金漢龍)의 시에, “강산은 비 갠 뒤요, 운물(雲物)은 첫가을이로다. 속대(束帶 예복을 입음)하고 임금 모시고, 갈림길에서 국서(國書)를 올리네. 누에 오르니 문득 흥이 일어, 황홀하여 허공에 의지한 듯하구나. 중선(仲宣)의 부(賦)를 짓고자 하노니, 옆 사람이여, 나를 비웃지 말라.” 하였다.
○ 고려 우길생(禹吉生)의 시에, “임금 모시고 누에 오른 날, 처량한 비 처음 개었도다. 임금이 와서 표를 보내고, 도적(홍건적)은 항복하는 글을 보내왔네. 햇빛이 늦게 떠오르니 산은 그림 같고, 가을은 깊어 물은 허공 같도다. 이 남녘 고을이 참으로 아름답기는 하나, 하염없이 바라보니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는구나.” 하였다.
○ 이강(李岡)의 시에, “임금 모시고 남녘으로 순행(巡幸)하는 날, 누에 올라 처음 보는 풍경, 산천은 혼연(渾然)히 그림 같고, 풍경 또한 글로 표현키 어렵도다. 서리 내린 하늘은 고요하기만 하고, 안개 걷힌 들판은 훤하기만 하도다. 바로 알겠네. 천년 뒤에, 이 응제(應製) 반드시 나를 비웃으리.” 하였다.
○ 염흥방(廉興邦)의 시에, “이 누각 세운 지 그 얼마인고, 단청(丹靑)이 처음같이 빛나는구나. 늘어선 선장(仙杖 임금의 의장(儀杖))은 햇빛을 가리고, 낡은 현판에 새긴 글씨는 선명도 하구나. 가을이라 바야흐로 추수가 한창인데, 밝은 해는 허공을 넘으려 하는구나. 성사(盛事)를 참으로 기릴 만한데, 주고 받는 시가 나의 차례로구나.” 하였다.
○ 고려 전녹생(田祿生)의 시에, “임금께서 이 누에 올라 바라보시는 날, 만물을 기쁘게 보시는 처음이라. 이 아름다운 풍경을 누가 읊을 수 있으리요. 서투른 글은 차마 쓸 수가 없네. 임금님 얼굴 가깝기도 하거니, 북녘에 절하는 뜻은 헛되지 않겠지. 볼수록 산수는 빼어났고, 구름과 안개 또한 나를 반기네.” 하였다.
○ 고려 최용(崔龍)의 시에, “남녘으로 순행(巡幸)한 뒤, 누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기 처음이라. 난간에서 옥색(玉色)을 보고, 벽을 쓸어 먼지 낀 글을 찾아보노라. 먼 곳 멧부리는 갠 뒤라 더욱 뾰족하고, 모난 못은 허공처럼 맑네. 이 풍경 완상할 만하니, 시 짓고 읊조리는 데 어찌 빠지리오.” 하였다.
○ 고려 권주(權鑄)의 시에, “누각을 돌며 해와 달을 보니, 비로소 이름을 짓는 시초 알겠노라. 증손(增損 시문의 글자를 더하고 줄임)을 누가 교묘히 하리요, 형용하자니 글쓰기 스스로 부끄럽네. 고기를 보니 못에 푸른 물결 일으키고, 학을 타니 길 하늘로 치닫네. 일재(一齋)의 운에 화답하려 하니, 맑은 바람이 문득 나를 깨운다.” 하였다.
○ 고려 박중미(朴仲美)의 시에, “누각의 값어치 세 갑절로 늘었구나, 임금께서 처음으로 수레 멈추시네. 구름 안개 뭉게뭉게 일어나고, 풍경은 도서(圖書)에 들어오도다. 들이 넓으니 봉우리 눈썹같이 벌여 있고, 수풀이 성기니 눈앞이 탁 트이도다. 글짓는 신하들 다투어 읊어대는데, 쓸모없는 재목인[樗散] 내가 도리어 서글프구나.” 하였다.
○ 고려 김군정(金君鼎)의 시에, “남산 위에 상서로운 기운이 떠도니, 임금 행차 처음으로 이 누에 멈추었네. 성덕은 참으로 그리기 황공하고, 기이한 풍경은 특서(特書)하기 합당하도다. 가을 바람은 늙은 나무에 불고, 구름 그림자는 훤한 시내로 지나가도다. 훗날 다시 말고삐를 여기 돌리거든, 강산 또한 나를 알아보리.” 하였다.
○ 고려 화지원(華之元)의 시에, “이 누각 풍경이 좋으니, 임금님 황송스럽게 처음 거둥하였네. 남녘으로 순행하는 깃발 다시 갖추고, 북녘으로 올리는 글을 멀리 전하도다. 흐뭇한 이야기 온 동네에 파다하고, 화기(和氣)는 공중에까지 가득하도다. 운예망(雲霓望 가뭄에 구름이나 무지개를 바라보는 심정)을 기록함에 있어, 어찌 나만이 뒤지리오.” 하였다.
○ 고려 우현보(禹玄寶)의 시에, “이 누각에 몇 사람이나 올랐던고, 임금이 거둥하신 건 전에 없던 처음 일이네. 이미 시를 기(記)로 삼았으니, 어찌 꼭 역사에 적어야만 하리오. 깎인 언덕은 난간 앞에 트이고, 성긴 버들은 처마를 둘러 훤하도다. 가까이 모심도 내 분수에 넘지마는, 부축하여 오르는데 나를 허락하셨네.” 하였다.
○ 고려 이인(李靭)의 시에, “누에 올라 경치를 구경하는 날, 대궐을 향하여 처음 글을 올렸도다. 임금님 분부로 신하들에게 시를 읊으라시니, 시를 이룸에 임금을 마주 뵙고 쓰는구나. 재 넘는 구름은 오락가락하고, 시내에 비친 달은 몇 번을 차고 또 기울었나. 현종(顯宗)이 여기에서 나라를 크게 회복하였으니, 땅 신령이 도리어 나를 위로하는구나.” 하였다.
○ 고려 한방(韓昉)의 시에, “누각이 서원(西原) 북쪽에서 절하노니, 단청이 처음같이 빛나는도다. 잠깐 새로 행차[警蹕]를 머무르시니, 다시 옛 거서(車書)를 보게 되도다. 나무는 늙어 천 그루[千章]나 되고, 처마는 높아 사방이 훤히 비라보인다. 글 제목을 나열하기 어려우니, 어려운 운자(韻字)에 나보다 못한 이는 없으리.” 하였다.
○ 고려 조계방(曹繼芳)의 시에, “이 누각이 늘 좋기도 하더니, 임금 수레를 처음으로 맞았구나. 이 경치 구경 누가 사양하리오마는, 시를 읊는 데는 오래토록 못하는구나. 저녁 볕은 먼 산길을 비추고, 흐르는 물은 맑은 공간을 끊었도다. 어부와 나뭇군에게 말을 건네니, 한가로운 무리는 그대들과 나뿐이리.” 하였다.
○ 고려 허전(許佺)의 시에, “임금 수레 서원(西原)에 머물고, 누에 올라 표문 올리기 처음이라. 오늘의 일을 쓰기 위하여, 지난날의 글을 다시 찾아보노라. 먼 곳 물은 하늘에 이어 맑고, 성긴 숲은 강 언덕을 따라 훤하도다. 성덕을 노래하는 다행한 인연이, 나에게까지 미칠 줄 어찌 생각이나 하였으리.” 하였다.
○ 고려 전득량(田得良)의 시에, “임금 깃발이 남녘으로 순행한 뒤, 비녀와 치마를 다시 마련하기 처음이라. 전문(箋文)을 올림은 예의를 지킴이니, 성덕을 그리는 시를 지어 바치노라. 눈에 가득 기이한 풍경이 빼어났고, 머리를 돌리니 지난 일이 헛되기만 하구나. 재주 없는 몸이 외람되이 차운하려 하니, 여러 선배들이여, 나를 나무라지 말라.” 하였다.
○ 고려 이방직(李邦直)의 시에, “임금 타신 수레 순행하여 오는 날, 삼한(三韓)이 옛적으로 돌아가기 처음이라. 임금님 분부 있어 화답하는 시 짓노니, 곧 붓을 놀려 다투어 쓰는구나. 물을 굽어보니 거울인 듯하고, 난간에 의지하니 황홀하여 허공에 오른 듯하구나. 공 있는 신하가 10대를 지난 뒤면, 남은 경사[餘慶]는 나에게서 시작되리.” 하였다.
○ 한상질(韓相質)의 시에, “사신으로 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날, 조선(朝鮮)이 개국한 초기이라. 임금은 성지(聖旨)를 맞이하고, 부로(父老)들은 첨서(簽書 편지)를 하례하도다. 길에 떠들썩 풍악을 잡고, 깃발은 하늘을 덮었구나. 이런 것이 금의환향이라는 것, 그 영광 누가 나인 줄 알리.” 하였다.

망선루(望僊樓) 객관(客館) 동쪽에 있었는데, 옛 이름은 취경루(聚景樓)이다. 지정(至正) 신축년(공민왕 10년)에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紅巾賊)을 피하여, 안동(安東)으로부터 이곳에 옮겨 와 수개월 동안 머물렀었다. 도적이 평정되자 문과와 감시(監試)의 합격자 방을 붙였었는데, 훗날 사람이 그 방을 써서 누각에 게시하였다. 누각은 오랫동안 헐어 있었는데, 천순(天順) 신사년(세조 7년)에 목사 이백상(李伯常)이 새로 중수하고, 한명회(韓明澮)가 누각의 편액을 고쳐서 ‘망선루’라 하였다.
『신증』 이의무(李宜茂)의 부(賦)에, “이 누에 올라 쉬노라니, 먼 변방까지 한눈에 들어오는구나. 그지없이 넓은 하늘을 바라보니, 문득 마음은 넓어지고 정신은 평온해진다. 먼지의 어둡고 흐릿한 것을 지나치니, 초연(超然)히 원대한 생각이 피어오르네. 봉래산(蓬萊山)을 지척에 바라보니, 환패(環珮)의 달그락 소리 들리는 듯하여, 문득 범골(凡骨)이 한 번 허울을 벗으니, 사뭇 바람을 타고 내려오는 성싶구나. 명월(明月 달과 야광주(夜光珠)의 두 가지 뜻)로 꾸며 관(冠)을 만들고, 청운(靑雲 구름과 벼슬의 두 가지 뜻)의 옷을 입고 활짝 꽃을 피우도다. 봉황새로 하여금 먼저 중매하게 하고, 파랑새를 시켜서 인사하게 하라. 천제의 궁궐에 나아가 머리 조아리니, 진인(眞人)의 풍모를 지녔구나. 뭇 계집이 나의 아리따움을 시기하여, 도리어 나를 가리켜 무지개[蝀螮]라 하네. 이미 이렇게 할 수도 없고, 버리려 하여도 안 되며, 마음을 낮추고 얼굴을 취하려 해도 그것 또한 나의 재주가 아니로다. 해는 져서 장차 함지(咸池)로 들어가려 하니, 꽃다운 것을 모두 잡아서 쉬게 하도다. 노복(奴僕)은 말[馬] 생각을 안타깝게 하여 우두커니 서서 돌아만 보네. 가는 길이 더디고 더딤을 한탄하노니, 큰 들은 아득히 평평하기만 하도다. 짐승들은 바삐 뛰며 무리를 찾고, 새들은 날다가 지쳐 날개를 걷는다. 그윽하고 곧음이 처신할 곳인 줄 깨달았으니, 동서와 남북을 헤매어 무엇하리오. 신선 살이를 바라는 것은 분수가 아니니, 나는 장차 전원(田園)에서 할 일이 있노라. 강산을 어루만지며 노니나니, 풍월을 즐기며 글 읽는 소리로다. 날마다 하는 일 없이 유유자적하노니, 노담(老聃 노자(老子))을 본받고 장주(莊周 장자(莊子))를 소망하도다. 이 즐거움 바꿀 것이 없으니, 어찌 내가 한 고을에서 답답히 지낸다 하리오.” 하였다. 쇄(誶 졸장(卒章))에 이르기를, “기장이 풍년들고 보리가 한 줄기에 두 이삭씩 팼으며, 나의 들과 질퍽한 들에 고기 살찌고 나물 또한 향기로우니, 나의 맛있는 반찬이로다. 진실로 내 여기 삶이 즐거우니, 여기서 늙어 죽은들 무슨 한 있으리. 신선들에게는 따라 미치지 못할망정, 내 스스로 갈천씨(葛天氏)의 태평성대에 비기노라.” 하였다.
○ 양희지(楊熙止)의 시에, “마을에 부슬비 내리고, 절에서는 저녁 종소리 울리기 시작하도다. 이끼 낀 벽에 달팽이 지나간 자국 글자를 이루었고, 모래층 뜰의 새 발자국은 전서(篆書)로구나. 못은 깊어 바닥까지 깨끗하고, 누각은 높아서 훤하게 트이었도다. 임금 수레 가신 뒤 소식 없고, 귀뚜라미 울음 소리 나에게 하소연하는 듯하구나.” 하였다.

『신증』 청연당(淸讌堂) 동헌(東軒) 북쪽에 있다.
【학교】 향교 고을 동쪽 2리에 있는데, 정통(正統) 갑자년(세종 26년) 봄, 세종이 초수(椒水)에 행차하였을 때 서적을 하사하였다.
【역원】 율봉역(栗峯驛) 고을 북쪽 7리에 있으며, 본도에 소속된 16역을 찰방(察訪)한다. 장양(長楊)ㆍ태랑(台郞)ㆍ쌍수(雙樹)ㆍ저산(猪山)ㆍ시화(時化)ㆍ덕역(德驛)ㆍ증약(增若)ㆍ가화(嘉和)ㆍ토파(土坡)ㆍ순양(順陽)ㆍ화인(化仁)ㆍ회동(會同)ㆍ신흥(新興)ㆍ원암(原巖)ㆍ함림(含林)ㆍ전민(田民). ○ 찰방(察訪) 1명이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밭에 보리는 알이 들고 매화 열매는 여물었는데, 강 남쪽으로 가는 나그네 하염없이 시름 짓네. 작은 못 예나 다름 없이 연꽃도 말쑥한데, 그 시절 술잔 권하던 사람은 보이지 않네.” 하였다.
쌍수역(雙樹驛) 고을 남쪽 16리에 있다. 저산역(猪山驛) 저산 밑에 있다. 장명역(長命驛) 고을 서쪽 56리에 있는데, 곧 장지역(長池驛)을 폐지한 자리에다 태조 5년에 새로 설치하였다. 율병원(栗餠院) 고을 동쪽 44리에 있다. 판교원(板橋院) 고을 동쪽 45리에 있다. 미원(米院) 고을 동쪽 38리에 있다. 덕산원(德山院) 고을 남쪽 20리에 있다. 정진원(情盡院) 성(城)의 남쪽 2리에 있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사람의 일이란 끝없는 우주(宇宙) 사이에서, 남으로 오고 북으로 가니 어느 때나 한가할꼬. 이 다리, 정진(情盡)이란 이름함이 마땅하지 않으니, 돌아가는 구름을 따라 옛 산에 이르기 때문이다.” 하였다. 포원(蒲院) 고을 북쪽 37리에 있다. 북원(北院) 고을 북쪽 7리에 있다. 장명원(長命院) 장명역 동쪽 5리에 있다. 금원(金院) 고을 북쪽 15리에 있다. 조풍원(調風院) 고을 북쪽 40리에 있다. 인제원(仁濟院) 고을 남쪽 6리에 있다. 작원(鵲院) 고을 서쪽 20리에 있다. 장원(場院) 고을 서쪽 39리에 있다. 오근원(吳根院) 오근(吳根) 부곡(部曲) 옛터에 있다.
『신증』 초정원(椒井院) 초수(椒水) 곁에 있다.
【교량】 대교(大橋) 바로 정진원(情盡院) 앞 다리이다. 신교(新橋) 고을 서쪽 1리에 있다. 진목탄교(眞木灘橋) 진목탄 위에 있다. 오근천교(吳根川橋) 고을 북쪽 20리에 있는데, 겨울에는 다리를 설치하고, 여름에 큰 물이 나면 배를 이용한다.
【불우】 공림사(空林寺) 속리산(俗離山)에 있다. 응천사(應天寺)ㆍ동림사(桐林寺)ㆍ송천사(松泉寺) 모두 용자산(龍子山)에 있는데, 이색(李穡)이 지은 〈나옹진당기(懶翁眞堂記)〉가 있다. 동환희사(東歎喜寺)ㆍ보살사(菩薩寺)ㆍ화림사(化林寺)ㆍ영천사(靈泉寺) 모두 낙가산(洛迦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당(城隍堂) 당선산(唐羡山)에 있다. 여단(勵壇) 고을 북쪽에 있다.
【총묘】 한명회(韓明澮) 묘 고을 서쪽 39리에 있다.
【고적】 고상당성(古上堂城) 율봉역(栗峯驛) 북쪽 산에 있다. 돌로 쌓았고 둘레가 7천 7백 73자, 성안에 우물 열 둘이 있었는데, 지금은 허물어졌다. 부모성(父母城) 고을 서쪽 15리에 있는데 돌로 쌓았고, 둘레는 2천 4백 27자이고, 성안에 큰 못이 있었으나 지금은 허물어졌다. 산성(山城) 고을 동쪽 2리에 있는데 흙으로 쌓았고, 둘레는 5천 22자, 안에 우물 넷이 있었으나 지금은 허물어졌다. 저산성(猪山城) 돌로 쌓은 것인데, 둘레는 5백 45자,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으나 지금은 허물어졌다. 미륵산성(彌勒山城) 돌로 쌓았고, 둘레는 5천 7백 79자, 안에 우물 둘이 있었으나 지금은 허물어졌다. 구라산성(謳羅山城) 돌로 쌓았고, 둘레는 2천 7백 90자, 안에 우물 둘이 있었으나 지금은 허물어졌다. 상령산성(上嶺山城) 돌로 쌓았고 터가 남아 있다. 안에 큰 우물이 있어 가뭄에 비를 빌면 감응이 있었다. 오근(吳根) 부곡 고을 북쪽 30리에 있다. 석곡(錫谷) 부곡 고을 서남쪽 25리에 있다. 배음소(拜音所) 배음(背音)이라고도 한다. 추자소(楸子所) 초자(椒子)라고도 한다. 덕평향(德平鄕) 전의현(全義縣) 서쪽을 넘어서 들어간다. 조풍부곡(調豐部曲) 청안현(淸安縣)을 넘어서 들어간다. 신은소(新銀所)ㆍ한신(閒身) 부곡(部曲) 모두 청천현(淸川縣)에 있다. 영모정(永慕亭) 고을 북쪽 30리에 있었는데, 지금은 다만 그터만 남아 있다.
○ 이색(李穡)의 기문에, “청주 추동(楸洞)에 곽씨(郭氏)의 밭이 있었다. 곽씨가 그 가운데 집을 짓고 살면서 농사를 지어서 손님 접대와 관혼상제의 비용을 장만하고 아침저녁 끼니외에는 남기기를 바라지 아니하였다. 한 때 조정에 벼슬하느라고 농사를 중지하여 땅이 묵어 다시 돌보지 않은 것 같더니, 조금 있다가 처자를 거느리고 가서 밭갈이를 하면서 글을 읽고, 시를 짓는 틈틈이 나무꾼, 농부들과 함께 담소(談笑)하고 권세와 이익에는 관심이 없었다. 곽씨(郭氏)의 대부(大父) 장원공(狀元公)은 지원(至元 원 나라 세조 때의 연호) 무렵에 충직하고 문장을 잘하였다. 세조(世祖) 황제가 천하를 통일했지만 오직 일본(日本)만이 조공(朝貢)하지 아니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먼 나라를 덕으로 회유하는 데는 불러들여 어루만지는 것 만한 것이 없으니, 고려에서 한 사람의 사신을 보내어서 나의 뜻을 분명히 가르쳐 주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고려의 임금과 신하들은 황공하게 명을 받고 사신으로 갈 만한 사람을 신중히 물색하였으나 서장(書狀)을 맡을 만한 이가 없었다. 사람들이 모두 요령껏 피하려 하였으나 오직 장원공만이 가기를 희망하였으므로, 이 사실을 재상에게 이야기하자 재상이 크게 기뻐하여 왕에게 알리고 장원공을 가도록 하였다. 공의 장인 최양(崔諹)이 재상을 만나서 잘 아뢰어 공을 가지 못하게 하려 하니 장원공이 분연히 말하기를, ‘죽음은 마찬가지입니다.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 처자들의 손에서 죽는 것보다 낫지 않습니까.’ 하였다. 그가 일본에 간 뒤에 과연 돌아오지 못하였으므로, 임금과 신하들이 애석하게 여기어 벼슬과 토지를 주었으니, 지금의 추동이 그것이다. 장추(長楸)라는 말은 《이소경(離騷經)》에서 나온 것인데, 풀이하는 이가 말하기를, ‘교목(喬木)이라는 말과 같은 뜻이니 고국(故國)을 가리킨 것이라.’ 하였다.
그의 아들 정랑군(正郞君)은 종신토록 슬퍼하여 호곡(號哭)하고, 벼슬에 나아가기를 달갑게 여기지 아니하였고, 70살이 넘어서도 아버지를 더욱 간절히 사모하였다. 그의 손자 통헌공(通憲公)이 추동 가운데 정자를 짓고, 물을 끌어들여 연꽃을 심어 놓고 할아버지의 뜻을 받들기 위하여서는 하지 아니하는 일이 없었다. 정랑공이 일찍이 아들에게 말하기를,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으니 나의 슬픔을 무어라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네가 다행히 벼슬에 올랐으니 내 기쁨을 알 것이다. 게다가 내가 병이 없고, 네가 또한 옆에 있는데 문장은 내가 너만 못하니, 네가 문장으로 당대에 붓을 잡을 만한 이를 찾아 뵙고 내가 동쪽을 바라보며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기록하여 자손들에게 보이도록 하여라.’ 하였다. 이에 정자 이름을 영모정(永慕亭)이라 하였다. 대개 아침에 사모하다가 저녁에 잊어버리면 그것은 영모(永慕)가 아니며, 아들은 사모하나 손자가 잊어버리면 역시 영원한 사모가 못 된다. 아침과 저녁이 한 시각 같고, 아들과 손자가 한 몸 같으니 그 사모함이 영원한 것이 아니겠는가.
통헌공이 나에게 글을 부탁한 지 오래되었다. 통헌공은 나와 동년(同年)인데, 강개(慷慨)하고 의지가 있어서 법사(法司)에 있어서는 법대로 집행할 뿐이고, 강한 자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언관(言官)으로 있을 적에는 말해야 하는 것을 거리낌 없이 말하고, 일을 피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행성(行省)에서 힐책할 때에는 기강(紀綱)이 더욱 떨쳤고, 섬으로 귀양갈 적에도 그의 명성은 더욱 자자하였다. 도끼를 잡으면[持斧 어사] 엄정하고 공명할 뿐이요, 가혹하지 않고, 지방의 장관[專城]이 되어서는 백성을 어루만질 따름이었으므로 그 고정하고 부지런함을 칭송하였으니. 장원공의 충직함과 정랑공의 효성을 겸한 것이다. 마땅히 높은 벼슬에 올라 사림(士林)의 으뜸으로 조정에 서는 것이어늘 일찍이 한 해 동안 안정된 적이 없으며, 추동(楸洞)의 거처는 해를 넘기도록 일찍이 그곳을 떠난 적이 없었다. 옛날 삼괴(三槐)를 심은 왕씨(王氏)가 덕을 몸에 닦고, 하늘에 보답하기를 바란 것이 마치 좌계(左契)를 지니고 손을 맞대어 서로 꼭 드러맞는 것과 같다고 하였는데, 장원공의 충의에 대한 보답이 이러함은 어찌된 일인가.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보답할 때는 명성이나 지위나 덕이나 그 귀결은 똑같다. 덕이 있어도 명성이 나타나지 않거나, 명성이 있으면서도 지위가 걸맞지 않는 것을 군자는 근심하지 않으나 덕이 그 지위에 맞지 않거나, 명성이 혹 그 실정보다 지나치면 군자는 크게 두려워하는 법이다. 지금의 통헌공의 덕과 명성은 하늘이 장원공에 보답한 것이다. 그 지위가 비록 높다 하지만, 사림의 의론이 탐탁지 않게 여겨 불만이 있다. 그러나 나이가 아직 60[身順]이니 더 높이 쓰이느냐 안 쓰이느냐 하는 것은 미리 알지 못하니 그러므로, 하늘이 지위로써 보답했느냐 안했느냐 하는 것은 모두 오늘에 결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늘이 장차 그 보답을 크게 하려고 해서 늦추는 것인지, 어째서 그 보답해야 할 때에 아직도 보답하지 않는지는 모를 일이다. 하늘이 정하고 정하지 않음이 오래된 것을 나는 곽씨 집에서 징험하려 한다. 철원(鐵原)의 최씨가 80살에 아들을 낳았는데, 이제 그 후손이 많다고 한다. 곽씨네 집에 후손이 아직 없는 것을 근심할 것은 없다. 하늘이 반드시 곽씨네 집을 후하게 대할 것이다. 곽씨가 후손이 없으니 하늘의 과보(果報)를 반드시 기필할 수는 없고 이제 영모정은 터만 남았으니, 하늘의 과보를 반드시 기필할 수는 없다. 만약 하늘이 기필한다면 곽씨가 무엇을 근심하겠는가.” 하였다.
○ 한수(韓脩)의 시에, “지원 천자(至元天子 원 나라 세조)가 황극(皇極 왕위)을 세워서 산에 다리 놓고 바다를 건너 남에서 북에서 모두 조공하였네. 오직 일본만이 복종하지 않기에, 우리가 사신을 보내어 위엄과 덕을 보이려 하였네. 조정의 신하들이 목을 움츠리고 모두 사정을 내세워, 직접 위험한 곳에 달려가기를 원치 않았도다. 우리 고을의 호걸 곽장원공은 가슴의 회포가 하늘과 땅처럼 크고 넓어서, 몸을 잊고 순국함이 평소의 뜻이기에, 명을 받고 기쁘게 서장관이 되었네. 문 앞을 지나면서도 처자들과 이별을 나누지 않았고, 돛을 달고 만리의 파도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바다의 하늘 망망하여 기러기도 날지 않으니, 뉘라서 자경(子卿 소무(蘇武)의 자(字))이 한 나라 부절[漢節]을 가졌음을 알리요. 아들 홀로 집에 남아서, 동녘을 바라보며 밤낮으로 애태우네. 산에 올라 바라 보는 두 눈에는 눈물[玄花]이 떨어지고, 하늘에 울부짖는 마음에는 붉은 피가 맺히네. 어버이를 종신토록 간절히 그리워함을 하늘이 불쌍히 여겨 슬하에 특별히 기린아(麒麟兒 슬기와 재주가 뛰어난 사나이)를 주었네. 자식의 마음은 다만 어버이 몸을 편케 하려고, 잠자리와 감지(甘旨 맛있는 음식)에 모자람이 없었으나, 그래도 어버이를 기쁘게 하지 못함을 알고, 알아서 더 잘하려고 항상 부지런히 힘써, 새 정자를 알맞는 곳에 지으니, 겨울에 춥지 않고 여름에 덥지 않네. 못도 파서 샘물을 끌어들이고, 아름다운 화초도 심어 새들이 노래하게 하였네. 봄바람에 꽃피고 가을달이 밝으니, 모두 우리들의 슬픔을 달래준다. 백 년 동안 어버이 뜻을 받들어[養志] 즐거움 다해드리며, 충성은 나라에 옮겨 이 고을을 생각하였네. 도를 지킴에 어찌 일찍이 왕척직심(枉尺直尋 조금이라도 도의를 굽힘. 하리요. 지금까지 오히려 올바른 방법으로 말을 몰았네. 그러므로 지위가 그 덕을 채우지 못했을 때, 공은 원망치 않았으나, 옆에 사람들이 안타까이 여겼도다. 아, 우리 고장의 자랑으로서, 큰 선비[巨手]가 기문(記文)을 지어 죽백(竹帛)을 빛냈도다. 넓고 넓은 천하의 백억만이여, 몇 사람이나 신하와 자식의 도리를 다하였는가. 알겠노라, 영모정의 3대는 천하와 후세가 모두 본받으리.” 하였다.
○ 권근(權近)의 시에, “호탕한 장원랑(狀元郞)이여, 크고 높은 뜻과 절개 기특하여라. 왕명을 받들어 먼 곳으로 사신을 가니, 나라뿐이라, 사정은 돌보지 않았네. 탄 배가 가고 돌아오지 않으니, 아득하여 마침내 따라갈 수도 없구나. 효자가 길이 그리워하여, 근심과 슬픔에 생각이 많았네. 새벽에 일어나 동녘을 바라보니, 푸른 바다 어이 건너리. 바닷물이 얕다 하리라. 이 한은 끝이 없으니, 바닷물이 마를 때가 있을지언정, 이 한은 끝날 때가 없으리. 어진 손자 이 정자를 지어서, 마음의 슬픔을 붙이려 했네. 슬퍼하며 일어나 부여잡고 울부짖으니, 잣나무도 마른 가지가 많았다네. 해와 달이[居諸] 이 세상을 비추려고, 동쪽에서 나왔지만, 어버이의 음성과 얼굴은 대할 수 없구나. 눈물이 항상 저절로 흐르니, 먼 곳 무덤 위의 풀도 서쪽으로 쏠리어 하늘거린다네. [스스로 주석하기를, ‘세상에서 말하기를, 장원공의 무덤이 일본에 있는데, 그 풀이 모두 서쪽으로 향하여 난다.’ 하였다.] 원래 충효의 가문에는 남은 경사[餘慶]가 끊이지 않는다는데, 백도(伯道 통헌공)가 아들이 없으니, 천도는 어이 알아 주지 않음인가. 응당 기문(記文)을 읽는 사람들, 천추(千秋)에 탄식을 더하리라.” 하였다.
구리 돛대[銅檣] 고을 성안 용두사(龍頭寺)에 있다. 절은 폐사가 되었지마는 돛대는 남아 있으며, 높이가 10여 길이다. 세상에서 전하거늘, “처음 주(州)를 설치할 때에 술자(術者)의 말을 써서, 이것을 세워 배가 가는 형극을 나타내었다.” 한다.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우뚝 서서 백척이나 높이 솟았으니, 오가는 사람이 방황하는 것 같다고 하네. 누가 구리 기둥을 만계(蠻溪) 위에 옮겨다 세웠는고, 한(漢)나라 동산의 금줄기[金莖]인가 싶구나. 뿌리는 깊이 박혀 지축(地軸)을 이었고, 꼭대기는 구름 밖에 치솟아 은하수를 꿰뚫었네. 옛 사람 이를 세운 뜻이 없지 않으니, 큰 고을과 더불어 한 지방을 진압함이라네.” 하였다.

은행 나무[鴨脚樹] 고려 공민왕 때에 왕방(王昉)ㆍ조반(趙胖) 등이 명 나라로부터 돌아와 왕에게 아뢰기를, “예부(禮部)에서 신들을 불러 말하기를, ‘너희 나라 사람 파평군(坡平君) 윤이(尹彝)와 중랑장(中郞將) 이초(李初)라는 사람이 와서 황제에게 호소하기를 고려가 군사를 움직여 장차 상국(上國)을 침범하려 하는 것을, 재상 이색(李穡)과 조민수(曺敏修) 등이 옳지 않다 하여 즉시 모두 죽이고 귀양을 보냈는데, 그 폄직된 재상들이 나를 보내어 천자께 고하고, 친왕(親王)께서 천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치도록 청하였다.’ 하고 윤이와 이초 등이 기록한 이색과 조민수의 이름을 내어 보였다.” 하니, 대간(臺諫)이 윤이와 이초의 무리들을 국문하기를 청하고, 잇달아 이색ㆍ이림(李琳)ㆍ변안렬(邊安烈)ㆍ이인민(李仁敏)ㆍ정지(鄭地)ㆍ이숭인(李崇仁)ㆍ이종학(李種學)ㆍ이귀생(李貴生) 등을 청주 옥사에 가두고, 문하평리(門下評理) 윤호(尹虎) 등을 파견하여 국문하였으나, 여러 죄수들이 모두 불복하였다. 그때 갑자기 천둥이 치고 비가 쏟아져 앞에 냇물이 넘치어 성의 남문을 무너뜨리고 곧바로 북문까지 뻗치니, 성안의 물 깊이가 한 길이나 넘어 관사(官舍)가 물에 잠기고, 백성들의 집은 거의 없어졌다. 객관(客館) 문 앞에 은행나무 수십 그루가 있었는데, 옥관(獄官)들이 정신없이 이 나무에 올라가서 죽음을 모면하였다. 왕이 수재로 교서를 내리어 죄수를 모두 놓아 주도록 하였다.
○ 권근(權近)의 시에, “유언비어가 불행히도 주공(周公)에게 미쳤더니, 별안간 큰 바람이 곡식들을 쓰러뜨렸네. 이제 서원(西原)에서 큰 물이 넘쳤다고 하니, 천도(天道)가 고금에 같음을 알겠도다.” 하였다.

【명환】 신라 원태(元泰) 신무왕(神武王) 5년에 서원소경(西原小京)을 설치하고, 아찬(阿飡) 원태로서 사신(仕臣)을 삼았다.
고려 이세화(李世華) 간의대부(諫議大夫 문하부(門下府)의 벼슬)로서 이곳에 나와 지켰는데 한가로이 지켰으나 몽고병이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김진(金鎭) 목의 부사(副使)가 되었다. 유신(柳伸) 기거사인(起居舍人 문하부의 벼슬)을 거쳐 외직으로 목사가 되었는데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공경하였다. 김주정(金周鼎) 목사가 되었다. 이행검(李行儉) 군수가 되었는데, 청렴결백으로 칭송을 받았다. 권화(權和) 목사가 되었을 때, 고성(固城)의 요망한 백성 이금(伊金)이 미륵불이라 일컫고 대중을 현혹하여 말하기를, “내가 석가모니불[釋迦佛]이 될 수 있다. 무릇 귀신에게 빌고 제사하는 사람이나, 말이나 소의 고기를 먹는 사람이나, 재물을 남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 사람은 모두 죽을 것이다. 만일 내 말을 믿지 않는다면 3월에 가서 해와 달이 모두 빛이 없어질 것이다.” 하고, 또 “나는 풀에 푸른 꽃이 피게 하고, 나무에 곡식의 열매를 맺게 하되 한 종자로써 두 번 수확할 수가 없다.” 하니, 어리석은 백성들이 믿고 쌀과 명주와 금ㆍ은을 시주하면서 후환을 두려워하고 마소가 죽어도 버리고 먹지 않으며 재물을 가진 사람은 모조리 남에게 주었다. 또 말하길, “내가 산천의 귀신들을 동원하여 내어 보내면 왜적을 사로잡을 수 있다.” 하니, 무당들이 더욱 공경하고 믿어서 서낭당 따위를 헐어버리고, 이금(伊金)을 부처님같이 섬기며 복과 이익을 빌었으며, 무뢰배들이 따라다니면서 제자라 자칭하면서 서로 속이니, 심지어 수령(守令)들도 나가 맞이하여 객관에 두고 대접하기까지 하였다. 그들이 청주에 이르자 권화가 그들을 꾀어서 그 우두머리 5명을 결박하여 가두고 조정에 보고하였더니, 정부[都堂]에서 여러 도에 공문을 보내어 모조리 잡아다가 베어 버렸다. 이모지(李慕之) 목사로 있을 때 은혜로운 정치를 베풀고, 재물의 용도를 절약하였다. 정미 20섬, 현미 70섬, 좁쌀 80섬, 메밀 30섬, 베 천 필을 얻어 그것을 밑천으로 이자놀이를 하여 이 고을의 의재(義財)를 장만하였다. 이색(李穡)의 기록이 있다. 최기우(崔奇遇) 예종(睿宗) 때 통판(通判)이었다.
본조 이원증(李元增)ㆍ이영구(李英耈)ㆍ박효함(朴孝諴) 모두 목사였다.
『신증』 윤장(尹璋)ㆍ김휘(金暉) 모두 목사였다.
【인물】 고려 총일(聰逸) 태조 때에 한찬(韓粲)이 되었다. 왕가도(王可道) 본성은 이(李)씨이다. 성종 때에 장원에 뽑혀서 벼슬이 이부 상서 참지정사상주국 개성현 개국백(吏部尙書參知政事上柱國開城縣開國伯)에 이르고, 왕씨의 성을 하사하였고, 덕종(德宗)은 그의 딸을 왕비로 삼았다. 시호를 영숙(英肅)이라 하고, 현종(顯宗)의 묘정에 배향(配享)하였다. 곽원(郭元) 성종 때에 갑과(甲科)에 올라 여러 번 승진하여 기거사인(起居舍人)이 되었고, 현종 12년에 중추직학사(中樞直學士)에 임명되었다. 성품이 청렴하고 문장을 잘 지었으며, 대성(臺省)을 역임하였는데, 유능한 관리라고 칭송을 받았다. 곽상(郭尙) 선종(宣宗) 때에 감찰어사(監察御使)로 뽑혀 임명되었고, 형부 상서ㆍ참지정사(刑部尙書參知政事)를 역임하였다. 시호를 순현(順顯)이라 하였다. 곽여(郭輿) 곽상의 아들로서 과거에 올라 예부 원외랑(禮部員外郞)이 되었다가 금주(金州)로 돌아와 숨어 있었는데 예종(睿宗)이 사신을 보내어 불러 들여 대궐 안에 있게 하고 선생이라고 부르니, 당시의 사람들이 금문(金門 대궐 문)의 신선[羽客]이라고 하였다. 굳이 물러가기를 청하였기 때문에 성 동쪽 약두산(若頭山) 한 봉우리를 하사하고, 거기에 집을 짓게 하니 호를 동산거사(東山居士)라 하였다. 정지상(鄭知常)이 산재(山齋)의 기문을 지었다. 이공승(李公升) 의종(毅宗) 때의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능히 글을 지었다. 인종(仁宗) 때에 과거에 뽑히어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갔고, 의종(毅宗) 때에는 사신으로 금(金) 나라에 갔었다. 당시 금 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이는 관할하는 부하에게 은 한근을 거두어 들이는 것이 관례였으나, 이공승은 조금도 취하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그의 청렴함에 탄복하였다. 뒤에 벼슬이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정숙(貞肅)이다. 경대승(慶大升) 힘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일찍부터 큰 뜻을 품고 있어 집안 일은 돌보지 않았다. 음보(蔭補)로 교위(校尉)가 되었다가 여러 번 승진하여 장군이 되었다. 아버지 진(珍)은 욕심이 많아서 남의 토지를 많이 빼앗았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자 경대승이 토지문서를 모조리 선군(選軍 군사를 뽑는 일을 맡은 관청)에 바치고 하나도 가지지 않으니, 사람들이 그 청렴함에 탄복하였다. 경대승이 일찍이 정중부(鄭仲夫) 등이 세력을 휘두르는 것을 통분히 여겨 그들을 치고자 하였으나, 일이 너무 크고 어렵기 때문에 은근히 참고 있었다. 마침 정중부의 아들 균(筠)이 공주(公主)를 차지할 계책을 하여 명종(明宗)이 근심하는 것을 보고, 경대승이 허승(許升)과 함께 정균(鄭筠)을 직려(直廬)에서 죽이니 궁중이 들끓었다. 경대승이 침전(寢殿) 밖에 이르러 큰 소리로 아뢰기를, “신들이 사직을 호위하니 전하께서는 두려워 마소서.” 하니, 왕이 궁문에 거둥하여 경대승을 불러 술을 내리며 위로하였다. 이에 경대승이 청하여 금군(禁軍)을 출동시켜 정중부를 잡아 목베었다. 대승이 나이 30세에 죽으니, 장사지낼 때 길에서 슬피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월(李軏) 처음 이름은 재(載)였다. 문장으로 이름이 나고, 벼슬은 수사공 참지정사(守司空參知政事)에 이르렀다. 정의(鄭顗) 상세한 것은 평양(平壤) 명환 조에 보인다. 곽예(郭預) 고종(高宗) 때에 제일인(第一人)으로 과거에 뽑혀 벼슬이 감찰대부(監察大夫)에 이르렀다. 사람됨이 평담하고 강직해서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벼슬하기 전과 같았다. 글을 잘 지었으며, 글씨체가 가냘프면서도 굳세어 일가를 이루었다. 그가 한림원에 있을 때에 비오는 날이면 맨발에 우산을 들고 혼자서 용화지(龍化池)에 가서 연꽃을 감상하였는데, 훗날 사람들이 그 풍치(風致)를 높이 여겨 그 일을 가지고 시를 짓는 이가 많았다고 한다. 한강(韓康) 고종 때에 급제하여 국자대사성(國子大司成) 한림학사를 역임하고, 충렬왕 때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었다가 이에 찬성사(贊成事)에 임명되었고, 또 중찬(中贊)에 올랐다가 벼슬을 내놓았다. 왕이 한강을 불러 시행할 만한 시사문제를 진술하게 하니, 한강이 종묘를 수축하고 악기를 갖추어 시절의 제사를 엄숙히 지낼 것과 사냥 등의 오락을 중지할 것,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을 절약하여서 몹시 추운 겨울과 여름에 간장과 죽으로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할 것 등을 청하였다.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이백겸(李伯謙) 이공승(李公升)의 4대 손이다. 충렬왕 때에 과거에 올라 여러 차례 승진하여 선부전서(選部典書)가 되었으며, 외직으로 제주(濟州)와 해주(海州) 두 고을의 목사가 되었는데, 가장 유능한 관리로 소문이 났다. 한악(韓偓) 한강의 손자이다. 충선왕(忠宣王) 때에 대언(代言)에 임명되었으며, 충숙왕(忠肅王) 때에는 선부전서(選部典書)와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제수하였고, 왕을 따라 원 나라에 들어갔었다. 당시에 심왕(瀋王)이 왕위를 넘보는 것을 한악이 기이한 계획을 써서 왕을 재앙에서 벗어나게 했으므로, 공이 1등으로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을 봉하고 선력좌리공신(宣力佐理功臣)을 주고 중찬(中贊)에 임명하였다. 시호를 사숙(思肅)이라 하며, 충혜왕(忠惠王)의 사당에 배향하였다. 정해(鄭瑎) 정의(鄭顗)의 손자로서 과거에 올라 벼슬이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다. 성품이 온순하고 부드럽고 점잖았으며, 일을 처리할 적에 흔들리지 아니하였다. 정포(鄭誧) 정해(鄭瑎)의 손자로 18세에 과거에 올랐으며, 충혜왕 때에 벼슬이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에 이르렀다. 시와 문장이 간결하고 예스러우며 글씨체도 정묘하였다. 문집으로 《설곡집(雪谷集)》이 있다. 정오(鄭䫨) 정포(鄭誧)의 형으로 과거에 올라 충혜왕 초에 감찰장령(監察掌令)이 되었고, 뒤에 추충진의보리공신(推忠陳義輔理功臣)을 하사하였다. 시호는 문극(文克)이다. 정추(鄭樞) 정포(鄭誧)의 아들이며 자는 공권(公權)이다. 공민왕 초에 급제하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좌사의(左司議)가 되었다. 정언(正言) 이존오(李存吾)와 함께 신돈(辛旽)이 나라를 그르치는 일을 극언(極言)하다가 귀양을 가서 동래 현령(東萊縣令)이 되었으며,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 항상 권력을 잡은 간사한 무리들이 정권을 마음대로 하는 것을 미워하고 분개하다가 등창이 나서 죽었다. 성품이 공손하고 검박하며 조심성이 있고 인정이 두터웠다. 당시 가묘(家廟)의 제도가 없어졌으나, 정공권은 제기(祭器)를 별실에 간직해 두고 제사 때는 반드시 몸소 제삿거리를 씻어 개끗이 하기를 힘썼다. 문집으로 《원재집(圓齋集)》이 있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라고 하였다. 곽린(郭麟)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충직하고 문장이 능하였다. 일찍이 김유성(金有成)과 함께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였다. 〈영모정기(永慕亭記)〉에 자세히 기록되었다. 곽추(郭樞) 장원으로 뽑히어 벼슬이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에 이르렀다. 대대로 문장을 관장한 집안이며,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이거의(李居義) 벼슬이 전서(典書)에 이르렀다. 한공의(韓公義) 한악의 아들로서 청성군(淸城君)에 봉하였고, 시호는 평간(平簡)이다. 한중례(韓仲禮) 한악(韓偓)의 아들로서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렀으며, 계성군(繼城君)에 봉하였다. 경복흥(慶復興) 공민왕 때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임명되었다. 홍건적을 쳐서 평정하고, 또 최영(崔瑩)ㆍ안우경(安遇慶) 등과 함께 덕흥군(德興君)을 압록강에서 쳐부수고 싸움에 이긴 글을 올렸으므로 좌시중(左侍中)에 임명되었다. 개선하자 왕이 유사(有司)에 명하여 왕의 행차를 맞이하는 의식과 동일하게 하고, 백관으로 하여금 국청사(國淸寺)의 남쪽 들에서 잔치를 베풀게 하였다. 뒤에 이인임(李仁任) 등이 경복흥의 깨끗하고 강직함을 시기하여 그가 술만 마시고 정사를 보지 않는다고 하였으므로 청주로 귀양가서 죽었다.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한수(韓脩) 공의(公義)의 아들인데, 15세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초서와 예서를 잘 썼다. 충정왕(忠定王) 초에 정방(政房)의 필도적(必闍赤)이 되었다. 왕이 강화도에서 왕위를 물려줄 때에 한수가 참여하였으므로 명망이 당시에 높았다. 공민왕 때에 여러 차례 승진하여 대언(代言)이 되고 인물을 전형하여 뽑는 일을 맡았다. 신돈이 한창 왕의 총애를 받을 무렵에 한수가 비밀리 아뢰기를, “신돈은 올바른 사람이 못 되니 난을 일으킬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신돈이 패망하자 왕이 말하기를, “한수는 선견지명이 있다.” 하였다. 신우(辛禑 우왕) 때에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임명하고, 수충찬화공신(輸忠贊化功臣)의 칭호를 주고 상당군(上黨君)에 봉하였다가 뒤에 다시 청성군(淸城君)으로 고쳐 봉하였다. 그가 죽자 사람들이 모두 아깝게 여겼다. 시호는 문경(文敬)이요, 문집으로 《유항집(柳巷集)》이 있어 세상에 전한다. 한방신(韓方信) 한악의 아들로 대장의 지략이 있었다. 과거에 올라 공민왕 때에 추밀원직학사(樞密院直學士)를 역임하였고, 홍건적의 난에 안우(安祐) 등과 함께 서울을 수복하였으므로 공훈 1등에 책봉하여 서원군(西原君)을 봉하고, 정당문학으로 승진하였다. 나라에서도 홍건적을 평정한 공으로 봉훈대부 비서감승(奉訓大夫祕書監丞)에 임명하였다. 뒤에 벼슬이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다.
본조 정탁(鄭擢) 정추(鄭樞)의 아들인데, 개국공신으로 태종의 사당에 배향하였다. 시호는 익경(翼景)이라 한다. 정총(鄭摠) 정추의 아들이다. 장원급제하였고 뒤에 개국공신이 되었다.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렀고, 서원군(西原君)에 봉하였으며, 시호는 문민(文愍)이라 한다. 한상질(韓尙質) 한수의 아들로 과거에 올라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열(文烈)이라 한다. 한상경(韓尙敬) 한수의 아들이며 개국공신으로 서원군(西原君)에 봉하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라 한다. 한확(韓確) 정난공신(靖難功臣)으로 벼슬이 의정부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양절(襄節)이고 세조의 사당에 배향되었다. 덕종(德宗)의 인수왕비(仁粹王妃)의 아버지이다. 아들 치인(致仁)은 서성군(西城君), 치의(致義)는 청양군(淸陽君), 치례(致禮)는 서릉부원군(西陵府院君)이다. 한백륜(韓伯倫)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벼슬이 의정부 우의정에 이르렀으며, 청천부원군(淸川府院君)에 봉하였다. 시호는 양혜(襄惠)이며, 예종(睿宗)의 안순왕후(安順王后)의 아버지이다. 한계미(韓繼美) 정난좌익공신(靖難佐翼功臣)으로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하였다. 한계희(韓繼禧) 한계미의 아우이며 과거에 올라 벼슬이 의정부 좌찬성에 이르렀다. 익대좌리공신(翊戴佐理功臣)의 호를 내리고 서평군(西平君)에 봉하였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한명회(韓明澮) 젊어서 권람(權擥)의 무리와 함께 유학하였다. 나이가 40에 가까워서 비로소 경덕궁직(景德宮直)이 되는 등 처지가 매우 불우하였으나, 계유년에 세조를 도와 큰 난을 평정한 뒤 네 차례나 공훈을 세워 동맹[動盟]에 으뜸이 되었고 세 번이나 영상(領相)이 되었다. 시호는 충성(忠成)이라 한다. 장순왕후(章順王后)와 공혜왕후(恭惠王后)는 모두 그의 딸들이다. 세조의 묘정에 배향하였다. 한언(韓堰) 과거에 올라 벼슬이 이조 참판에 이르렀다. 『신증』 한치형(韓致亨)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질경(質景)이라 하였다. 한세환(韓世桓) 과거에 올라 벼슬이 이조 판서에 이르렀다.
【효자】 고려 손유(孫宥) 이 고을의 아전[吏]이다. 신우(우왕) 4년에 왜구가 그가 살고 있는 동네에 침입하였는데, 어린 아들, 딸들이 옷을 붙잡고 울부짖었으나 손유는 돌아보지 않고 즉시 집으로 달려가 어머니를 업고 도망쳐 해를 면하였다.
본조 경연(慶延) 천성적으로 효성이 지극하였다. 그의 아버지가 병이 들었는데 한겨울에 생선을 먹고 싶어하므로 경연이 그물을 들고 물에 들어가서 잉어 두 마리를 잡아다 올렸더니 아버지의 병이 과연 치유되었다. 뒤에 부모가 돌아가자 묘 앞에 여막을 짓고 전후 6년 동안이나 시묘살이를 하고, 가례(家禮)대로 제사를 받들면서 아내와 함께 손수 제삿거리를 장만하니, 이웃이 모두 교화되었다. 성종이 그 소문을 듣고 불러들여 선치전(宣致殿)에서 인견하고 격려하여 특별히 4품 벼슬을 주고 사재주부(司宰主簿)에 임명하였다. 얼마 후에 이산 현감(尼山縣監)으로 나가니, 아전과 백성들이 모두 경외하면서 사모하였다. 그가 죽자 고을 시람들이 장사지낼 거리와 기름ㆍ꿀 등을 장만하여 그의 아내에게 보내었더니, 아내가 말하기를, “어찌 남편의 깨끗한 덕을 감히 더럽힐 수 있겠는가.” 하고 모두 받지 않았다. 『신증』 김석봉(金石鳳) 두 아우와 같이 살면서 부모를 봉양함에 있어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자 슬퍼하고 사모하여 정성을 다하였고 매양, 초하루 보름에는 반드시 술과 음식을 갖추어 아버지를 대접하니, 사람들이 감동하여 옷을 벗어 비용을 도와주는 이도 있었다. 이 사실이 임금께 알려져 그 마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제영】 이천서입금강류(二川西入錦江流)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큰 들판은 남쪽으로 문군(文郡)에 이어서 사라지고, 두 냇물은 서쪽으로 금강에 들어 흐른다.” 하였다. 유녀전두채간빈(遊女田頭採澗蘋)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동풍이 살짝 불어 가는 비를 들판에 뿌리니, 봄빛이 불탄 자리에 아득히 보이네. 산골집에 해가 더디니 꽃이 필 듯하고, 시내에 얼음이 녹으니 물이 힘차게 흐르네. 목동들은 소등에서 갈대 피리를 불고, 유녀들은 밭머리에서 시내의 마름꽃을 따네. 말 위에서 계절에 놀라 읊조리노니, 고향은 아득하여 내 시름 자아내네.” 하였다. 포곡제춘권우경(布穀啼春勸耦耕) 옛 사람의 시에, “아침부터 병(病)을 달래어 동영(東榮 동쪽 처마끝이란 뜻)에 앉았으니, 산빛은 아득한데 비가 잠깐 개었구나. 우거진 먼 숲은 안개에 젖었고, 먼 멧부리는 아스라이 흰구름 비꼈도다. 수양버들은 땅을 쓸어 떠나는 시름을 자아내고, 뻐꾹새는 봄을 울어 밭갈이를 재촉한다. 바람 시켜 꽃 다 지게 하지 마오, 이 시정(詩情) 붙일 곳 없어 다시금 시름짓네.” 하였다. 금방전호공북루(金榜傳呼拱北樓)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임금님 수레 남쪽 나라 순행하니 금방(金榜)을 공북루에서 전하여 부르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효종(孝宗) 7년에 서원현(西原縣)으로 강등하였다 노비(奴婢)가 주인을 살해했기 때문이다. 현종(顯宗) 8년에 복구하고 숙종(肅宗) 6년 현으로 내려갔다가 15년에 복구하였으며, 영종(英宗) 7년에 현으로 강등하였다. 무신역란(戊申逆亂) 때문이다. 16년에 복구하였다가 정종(正宗) 원년에 현으로 강등하였다. 역녀(逆女) 효임(孝任)의 출생지이기 때문이다. 순조(純祖) 25년 현으로 강등하고 34년에 복구하였다가 철종(哲宗) 13년에 현으로 내렸다. 김순성(金順性)이 역모를 하였기 때문이다. 고종(高宗)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고읍】 동주내(東州內) 끝이 10리이다. 서주내(西州內) 끝이 15리이다. 남주내(南州內) 끝이 10리이다. 북주내(北州內) 끝이 10리이다. 산외일(山外一) 동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산외이(山外二) 동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산내일(山內一) 동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산내이(山內二) 동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80리이다. 산내이상(山內二上) 동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80리이다. 산내이하(山內二下)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서강내일(西江內一)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40리이다. 서강내이(西江內二) 서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서강외일(西江外一)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서강외이(西江外二)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남일(南一)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남이(南二) 위와 같다. 남차이(南次二) 서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40리이다. 북강내일(北江內一)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북강내이(北江內二)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북강외일(北江外一) 처음이 20리, 끝이 50리이다. 북강외이(北江外二)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수신(修身) 서북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60리이다. 청천(靑川) 이곳이 고읍(古邑)이다. 처음이 60리, 끝이 1백 50리이다. 주안(周岸) 원래 주모향(周牟鄕)인데, 문의(文義)ㆍ회인(懷仁)의 남쪽 경계 넘어 있다. ○ 남쪽으로 처음이 70리, 끝이 80리이다. 덕평(德坪) 본래는 덕평향(德坪鄕)인데 천안(天安) 남쪽 경계 너머에 있다. ○ 서쪽으로 처음이 80리, 끝이 90리이다.
【영아】 병영(兵營)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에 최영(崔瑩)의 건의로 도절제사영(都節制使營)을 이산현(伊山縣)에 설치하였는데, 이조 태종(太宗) 2년에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으로 고쳤고, 16년에 해미현(海美縣)으로 옮겼다가 효종(孝宗) 2년에 다시 이곳으로 옮겼다.
【관원】 충청도 병마절도사ㆍ중군(中軍) 병마우후(兵馬虞侯)이다. ○ 상당산성(上黨山城)에 유진(留鎭)한다. 심약(審藥) 각 1인. ○ 중영(中營) 인조(仁祖) 때에 두었다. ○ 중영장(中營將) 1인. ○ 속읍(屬邑)은 청주ㆍ천안ㆍ문의ㆍ회인ㆍ청산ㆍ보은ㆍ황간(黃澗)ㆍ영동ㆍ청안(淸安)ㆍ진천ㆍ직산ㆍ목천(木川)이 있다.
창고 읍창(邑倉)ㆍ병영창(兵營倉) 모두 읍내에 있다. 군향창(軍餉倉) 상당(上黨)에 있다. 청천창(淸川倉) 옛 읍에 있다. 신원창(薪院倉) 서북쪽 20리에 있다. 금성창(金城倉) 서북쪽 50리에 있다. 주안창(周岸倉) 주안에 있다. 오근창(梧根倉) 북쪽 20리에 있다. 오공창(吾公倉)은 잘못 부른 것이다.
【교량】 오근진교(梧根津橋)ㆍ작천교(鵲川橋) 위의 다리는 장마철에 범람하면 배로 건넌다.
【토산】 철ㆍ감ㆍ대추ㆍ종이ㆍ칠ㆍ쏘가리[錦鱗魚]ㆍ은어.
묘사 만동묘(萬東廟) 숙종 갑신년에 세웠는데 매년 3월 9일에 제사지낸다. 신종현황제(神宗顯皇帝) 묘ㆍ의종열황제(毅宗烈皇帝) 묘
【사원】 화항서원(華巷書院) 선조 경오년에 세우고 현종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이이(李珥) 문묘조에 있다. 이색(李穡) 장단(長湍) 조에 있다. 경연(慶延) 자는 대유(大有)이고 호는 남계(南溪)이며, 본관은 청주이다. 벼슬은 이산 현감(尼山縣監)이었는데, 징군(徵君)이라 호를 내렸다. 박훈(朴薰) 자는 향지(馨之)이고 호는 강수(江叟)이며 본관은 밀양이다. 벼슬은 승지였는데 이조 판서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慶)이다. 김쟁(金淨) 자는 원충(元冲)이고 호는 충암(冲庵)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벼슬은 형조 판서였는데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송인수(宋麟壽) 자는 미수(眉叟)이고 호는 규암(圭庵)이며, 본관은 은진(恩津)인데, 명종(明宗) 정미년에 화를 당했다. 벼슬은 이조 참판이었는데, 이조 판서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한충(韓忠) 자는 서경(恕卿)이고 호는 송재(松齋)이며 본관은 청주인데, 중종(中宗) 신사년에 남곤(南袞)에게 살해되었다. 벼슬은 승지였는데 이조 판서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송상현(宋象賢) 개성 조에 있다. 이득윤(李得胤) 자는 극흠(克欽)이고 호는 서계(西溪)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벼슬은 괴산(槐山) 군수였다.
○ 화양서원(華陽書院) 숙종 병자년에 세우고 그 해에 사액하였다. 병신년에 왕이 친필로 사액하였다. 송시열 문묘 조에 있다.
○ 표충사(表忠祠) 영종 신해년에 세우고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이봉조(李鳳祥) 자는 의숙(儀叔)이며 본관은 덕수(德水)인데, 영종 무신년에 충청 병사로 있다가 역적에게 살해되었다. 벼슬은 훈련대장이었는데 좌찬성으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남연년(南延年) 자는 수백(壽伯)이며 본관은 의령(宜寧)인데, 무신년에 청주 영장(淸州營將)으로 있다가 순절(殉節)하였다. 좌찬성으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홍림(洪霖) 자는 춘경(春卿)이며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무신년에 병사(兵使)의 비장(裨將)으로 있다가 순절하였다. 호조 참판으로 추증되었다.


 

[주D-001]삼농(三農) : 평지 농사[平地農]ㆍ산 농사[山農]ㆍ습지 농사[澤農] 등을 말한다.
[주D-002]진경(秦鏡) : 진시황(秦始皇) 때에 큰 거울이 하나 있었는데, 그 거울은 물건의 본질을 밝혀 주는 것이므로 아무리 변형하여도 본질 그대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래서 그 거울을 조마경(照魔鏡)이라 한다.
[주D-003]순풍(舜風) : 옛날 순(舜)임금이 궁중에서 거문고를 탔는데, 그 곡조 이름을 후세에서 남훈곡(南薰曲)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그 거문고의 화평한 음조로 온 세상 사람이 다 화평한 심정으로 안락한 생활을 즐겼다 한다.
[주D-004]요석(堯腊) : 석(腊)은 우리 나라에서 편포(便脯)라 하는 것으로, 고기를 두껍게 하여 말린 것인데, 두껍기 때문에 잘 마르지 아니하고 속이 상하기 쉽다. 그러므로 그것을 먹고 중독을 일으키기 쉽기로 석독(腊毒)이란 말까지 있게 되었다. 요(堯)임금같이 원래가 검소한 분은 그런 것을 잘 먹지 아니하므로, 그 독에 중독 될 리가 없다는 말이다.
[주D-005]신초(申椒) : 초(椒)는 향기나는 나무이므로 남자들이 차는 것이라고 《이소경(離騷經)》에 있다.
[주D-006]진인(眞人) : 응진(應眞)은 사람인데 하늘의 공양을 받을 만한 진인(眞人)이란 말이다.
[주D-007]무지개[蝀螮] : 동체(蝀螮)는 무지개라는 말인데, 때로는 그 무지개를 요사스럽다는 뜻으로 쓰기도 한다.
[주D-008]삼괴(三槐) : 소동파(蘇東坡)가 지은 〈삼괴당명(三槐堂銘)〉이 있는데 송 나라 태조 때에 왕호(王祜)라는 사람이 정승이 될 것인데 태조의 뜻을 거슬러 마침내 정승이 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자기 집 마당에다 홰나무[槐] 세 그루를 심으면서, “나는 정승을 못하였지만 둘째 아이는 반드시 정승을 할 것이다.” 하였는데, 과연 그 둘째 아들인 왕단(王旦)이 정승이 되었는데 그들은 대대로 덕망이 높았던 사람들이라고 〈삼괴당명〉에 기록되어 있다. 홰나무는 예전부터 정승에 비유하는 나무였다.
[주D-009]왕척직심(枉尺直尋)……굽히다 : 심(尋)은 한 발이라는 말인데 보통 8척을 심이라고 하였다. 맹자에게, “한 자쯤 굽혀서 한 자를 펼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고 제자 진대(陳代)가 권고하니, 맹자는 조금이라도 굽혔다면 도의를 잃은 것이라는 취지로 말하였다.
[주D-010]이월(李軏)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8권과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확인한 결과 이월(李軏)은 이궤(李軌)의 오류인 것으로 판단된다.
[주D-011]심왕(瀋王) : 원(元) 나라에서 고려 충렬왕이 왕위를 아들인 충선왕에게 양위한 뒤에 원 나라에 공로가 있다 하여 심양왕(瀋陽王)에 봉하였는데, 뒤에 심양왕의 왕위는 그 조카인 고(暠)가 본국의 왕위까지 얻으려고 원 나라 조정에 모략한 일을 말하는 것이다.
[주D-012]덕흥군(德興君) : 덕흥군(德興君)은 충선왕의 셋째 아들인데 원 나라 서울에 있었다. 그는 간신 최유(崔濡)와 부동하여 원 나라 군사 1만 명을 빌어 가지고 본국으로 처들어온 것을 이들이 쳐서 섬멸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약천집 제1권
 시(詩)
세 번째


김생을 장인(丈人)으로 보고 행촌을 벗으로 삼으니 / 丈視金生友杏村
탄연과 영업은 아들과 손자뻘이라오 / 坦然靈業是兒孫
석봉은 뒤에 나와 한갓 비대하기만 하니 / 石峯後出徒肥大
삼백 년 동안 공이 홀로 높구나 / 三百年來公獨尊


[주D-001]김생(金生)을 …… 삼으니 : 김생(711~791)은 신라 때의 명필로, 자는 지서(知瑞), 별명은 구(玖)이다. 해동(海東)의 서성(書聖)이라 칭해졌고 송(宋) 나라에도 왕희지(王羲之)를 능가하는 명필로 알려졌다. 장인(丈人)은 어르신 또는 선배를 이른다. 행촌(杏村)은 고려말의 문신인 이암(李嵓 : 1297~1364)의 호로, 초명은 군해(君亥)이고, 자는 고운(古雲)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본관은 고성(固城)으로, 글씨에 뛰어나 동국(東國)의 조자앙(趙子昻)이라고 일컬어졌다.
[주D-002]탄연(坦然)과 영업(靈業) : 탄연(1070~1159)은 고려의 승려이며 명필가이다. 호는 묵암(默菴)이며, 속성(俗姓)은 손씨(孫氏)로, 교위(校尉) 숙(肅)의 아들이다. 선교(禪敎)의 중흥에 이바지 하였으며 시문에 능하였는바, 국사(國師)에 추증되고 대감(大鑑)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영업은 확실하지 않다.
[주D-003]석봉(石峯) : 조선 중기의 명필인 한호(韓濩 : 1543~1625)의 호이다. 자는 경홍(景洪)이며, 개성(開城) 출신으로, 글씨를 잘 써 한석봉 서체(書體)를 이루었다.

양촌선생문집 제38권
 비명류(碑銘類)
유명 조선국 시(諡) 문간공(文簡公) 안공(安公) 묘비명(墓碑銘) 병서(並序)


공(公)은 휘는 종원(宗源)이요 자는 사청(嗣淸)이요 성은 안(安)이니, 관향은 순흥(順興)이다. 아버지의 휘는 축(軸)이요 호는 근재(謹齋)인데, 원(元) 나라 제과(制科)에 급제하고 고려에 벼슬하여 도첨의 찬성사(都僉議贊成事)가 되었다가 졸(卒)하였으니,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일찍이 관동존무사(關東存撫使)로 있을 때 지은《환주집(丸注集)》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조고(祖考)의 휘는 석(碩)이니 급제(及第)요, 증조(曾祖)의 휘는 희서(希諝)니 본부 호장(本府戶長)이다. 덕을 쌓아 시용(施用)하지 않고 후손들에게 그 경사를 남겼으므로, 문정공(文貞公)이 학문에 힘써서 집을 일으키고 지위는 재상에 이르렀다. 감천군부인(甘泉郡夫人) 문씨(文氏)에게 장가들었으니,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귀(龜)의 딸이다. 태정(泰定 원 진종(元晉宗)의 연호) 을축년(1325, 충숙왕12) 5월 계유일에 공(公)을 낳았다.
공은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지혜가 있더니, 차츰 자라면서 스스로 글을 읽을 줄 알며, 장난하며 노는 것을 일삼지 않고 행동이 다른 아이들과 다르므로, 유식한 이들은 그가 반드시 귀하게 될 것을 알았다. 지정(至正 원 순제(元順帝)의 연호) 신사년(1341, 충혜왕2)에 공의 나이 17세였다. 좌사(左史) 김광재(金光載)가 성균시(成均試)의 시관이 되고, 시중(侍中) 이암(李嵒)과 찬성(贊成) 정을보(鄭乙輔)가 예위(禮圍 진사시(進士試))를 맡아보았는데, 공이 한꺼번에 잇달아 그 시험에 합격하였다. 임오년(1342, 충혜왕3) 초에 임시로 전교교감(典校校勘)이 되었다가, 3년을 지난 뒤에 정식으로 전교시 교감이 되었다. 을유년(1345, 충목왕1)에 예문관(藝文館)ㆍ춘추관(春秋館)에 뽑혀 들어가 두 검열(檢閱)을 겸했는데, 전부터 이 관(館)에 있는 자는 거의 소방(疏放)한 것을 숭상하였으나, 공은 예법으로 다스려 관 안을 숙연하게 하였다. 병술년(1346, 충목왕2)에 거듭 수찬(修撰)ㆍ공봉(供奉)의 벼슬을 더하였다. 품계가 차면 당연히 전임(轉任)하여야 하는데, 동료인 심동로(沈東老)가 나이는 많고 직위가 낮으므로 공이 그에게 양보하여 먼저 전임할 수 있게 하였다. 문정공이 이를 듣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겸양이란 인격의 가장 으뜸이다. 내가 남에게 양보하면 남이 누가 나를 버리겠는가. 우리 가문에 사람이 있으니 더욱 창성하겠구나.”
하였다. 1년 뒤에 드디어 삼사도사(三司都事)에 임명되고, 이해부터 유비창 부사(有備倉副使)ㆍ사복승(司僕丞)ㆍ공조령(供造令)으로 전임되었는데, 부임하는 곳마다 업무를 잘 수행하여 칭찬과 명예가 더욱 널리 퍼졌다. 신묘년(1351, 충정왕3)에 공민왕이 즉위하여 공에게 도관 좌랑(都官佐郞)을 제수하고, 임진년에 군부 좌랑(軍簿佐郞)에 전임하고, 계사년에는 전법 정랑(典法正郞)에 발탁되었다. 이때 전민(田民)의 형송(刑訟)이 모두 전법(典法)에 모여들었는데, 공이 공평하고 마땅하게 재결하므로 사람들은 그 밝음을 칭찬하였다. 갑오년(1354, 공민왕3) 가을, 공의 나이 30세로 경상도 안렴사(慶尙道按廉使)에 뽑혀 임금에게 하직하던 날, 임금이 백성 다스리는 방법을 묻자, 공이 다른 안렴사들보다 먼저 자세하고 절실하게 진술하여 아뢰므로 상이 좋다고 칭송하였는데, 과연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있었다. 그해 겨울에 판도(版圖)에 전임하였으며, 을미년에는 군부 정랑(軍簿正郞)으로 여흥(呂興)을 맡아서 나가게 되었으나,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부임하지 못하였다. 병신년 여름에 임금이 원후(元后) 기씨(奇氏)의 세력을 믿고 불법을 자행하던 그 일족을 목 베고, 공을 기용하여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 삼아 헌강(憲綱)을 떨치게 하였다. 정유년에는 기거랑 지제교(起居郞知製敎)가 되었다가, 봉사(封事)를 올려 예부 낭중(禮部郞中)에 개임(改任)되었고, 무술년에는 이부(吏部)에 전임하였다. 그때에 정방(政房)을 폐지하고 전선(銓選)하는 일을 이ㆍ병부(吏兵部)에 귀속시켰는데, 공이 그 일을 맡아 권귀(權貴)에게 아부하지 아니하므로 동료들은 두려워하며 감복하였다. 경자년(1360, 공민왕9)에는 품계가 조산대부 시어사(朝散大夫侍御史)에 이르렀고, 신축년 가을에는 양광도 안렴사(楊廣道按廉使)로 나갔다.
그해 겨울에 홍건적(紅巾賊)이 송경(松京)을 침범하여 공민왕이 남쪽으로 파천(播遷)하게 되자, 공이 먼저 충주(忠州)에 가서 어공(御供)을 준비하게 되었다. 그때 임금의 측근에 어떤 일로 공에게 원한을 품은 자가 있어 임금에게 참소하기를,
“안렴사 종원이 충주에 도착하였다가 이미 조령(鳥嶺)을 넘어 달아났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말을 믿고 중사(中使)를 보내 잡아오게 하였다. 사자가 충주에 이르러 공이 관(館)에서 어공을 준비하는 것을 보자, 그가 모함당했음을 알고 잡아가지고 함께 와서 사유를 보고하니, 임금이 놓아주고 불문에 붙였다. 측근들이 또 참소하여 드디어 구속하였으나, 재상이 죄가 없다는 것을 상에게 아뢰므로, 지청풍군사(知淸風軍事)로 좌천시켰다가 한 해를 지난 뒤에 파면시켰는데, 그곳 백성들은 지금까지 사모하고 있다. 계묘년(1363, 공민왕12)에 도관 총랑(都官摠郞)이 되고 갑진년에는 전법 총랑(典法摠郞)에 전임되었다. 신돈(辛旽)이 국정을 제 마음대로 휘두르매, 그때 사람들은 그를 영상(領相)이라 부르면서 사대부(士大夫)들이 다투어 붙좇아 아부하였다. 한 집정대신(執政大臣)이 공에게 말하기를,
“모(某) 등이 공을 영상(領相)에게 추천하였으니, 간관(諫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속히 가서 뵙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공이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본래 어설프고 게으른 사람이라 추세(趨勢)는 잘 할 줄 모릅니다.”
하였다. 집정은 부끄럽게 여기면서 도리어 공을 참소하여 강릉 부사(江陵府使)로 나가게 하였으나, 정사를 어질게 하였으므로 얼마 되지 않아 체대(遞代)되었다. 공은 이때부터 7~8년 동안 한가롭게 지내면서 종적을 감추고 나오지 아니하며 시서(詩書)로 즐겼다.
홍무(洪武 명 태조(明太祖)의 연호) 신해년(1371, 공민왕20)에 신돈(辛旽)이 복주(伏誅)되자 임자년 2월에 다시 사헌시사(司憲侍史)가 되고, 겨울에 전교령(典校令)을 더하였다. 계축년에 우사의대부 지제교 직보문 충춘추(右司議大夫知製敎直寶文充春秋)에 옮기고, 갑인년에 좌사의(左司議)로 개임(改任)되고, 을묘년에 성균 대사성(成均大司成)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를 역임하고, 통헌(通憲) 우상시(右常侍)를 더하였다. 병진년 봄에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니 품계는 봉익대부(奉翊大夫)였으며, 가을에는 밀직사(密直司)에 들어가 제학(提學)이 되고 그대로 대사헌을 겸임하였다가 좀 뒤에 또 밀직부사로 개임되었다. 정사년에 동지(同知)가 더해지고, 무오년에 첨서(簽書)로 이임(移任)되었다. 기미년에 품계가 광정(匡靖)으로 높여짐과 동시 판숭경부사(判崇敬府事)가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파직하고 중대광 흥녕군(重大匡興寧君)을 봉하였다. 경신년에는 상의정당(商議政堂)으로 다시 대사헌을 겸임하였고, 신유년에는 순성보조공신(純誠補祚功臣)의 칭호를 받았으며, 문하평리 대사헌(門下評理大司憲)을 전대로 역임하였다. 임술년 봄에 또 순흥군(順興君)을 봉하고 순성익대보리공신(純誠翊戴輔理功臣)의 칭호를 더하였다. 그해 여름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유량(柳亮) 등 33명을 뽑았는데, 그 당시 선비를 잘 뽑았다는 칭송이 있었다. 유량은 지금 중추(中樞)가 되었고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현귀(顯貴)하게 되었다.
병인년에 정당문학 대진현 지춘추(政堂文學大進賢知春秋)에 임명되었다가 정묘년에 파직하고 다시 군(君)을 봉하였다. 무진년 정월에 시중(侍中) 최영(崔瑩)이 정권을 잡고 탐오(貪汚)한 권신(權臣)들을 벨 적에, 공은 청렴하고 근엄하다 하여 문하찬성사 판전공(門下贊成事判典工)을 제수하고, 전선(銓選)의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공이 이를 사양하다가 끝내 되지 못하매 6월에 고쳐서 상의(商議)가 되고 8월에 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가 되어 그대로 전선을 관장하였으며, 10월에는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으로 판상서사사(判尙瑞司事)를 겸임하였으니, 곧 전선의 일을 주관하는 벼슬이다. 기사년 6월에 중대광 문하찬성사 판판도(重大匡門下贊成事判版圖)를 더하게 되니, 세상에서 일컫는 이상(二相)이다. 봉명사신(奉命使臣)으로 중국에 가서 성절(聖節)을 축하하였고 겨울에 돌아왔다. 공양군(恭讓君)이 임금이 되어 다시 대예문 감춘추(大藝文監春秋 대예문(大藝文)의 대(大)는 대제학(大提學)을 말함)에 임명하였다. 경오년에 판삼사사 대우문 영서운관사(判三司事大右文領書雲觀事)에 임명되고, 신미년에는 올리어 삼중대광(三重大匡)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을 봉하였는데, 매양 스스로 벼슬이 과만하다고 사양하였다. 임신년 7월에 지금의 우리 주상께서 즉위하여, 공은 국초의 원로로서 그 청백하고 높은 덕망이 능히 앉아서도 세상 사람을 진정시킬 수 있다 하여 특진보국숭록대부 영삼사사 집현전 태학사(特進輔國崇祿大夫領三司事集賢殿太學士)를 제수하였다. 계유년에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가 되니, 품계(品階)ㆍ훈등(勳等)ㆍ관직(館職)은 전과 같았다. 갑술년에는 공의 나이가 이미 70이었는데, 2월에 다시 봉명사신으로 중국에 가게 되어 연산참(連山站)에 이르니, 요동도사(遼東都司)가 중국 조정의 명령이 있다고 막으므로 되돌아왔다. 3월 24일 병이 들어 집에서 졸(卒)하니, 임금은 부음을 듣고 매우 슬퍼하며 조회를 파하였다. 그리고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 평양백(平壤伯) 조준(趙浚)으로 교서(敎書)를 받들게 하여 빈소에 전(奠)드리게 하고 부의를 많이 하였으며, 봉상시(奉常寺)에서는 문간(文簡)의 시호를 올렸다. 유사(有司)가 의식절차를 차려 5월 경신일에 임진현 서국동(臨津縣瑞國洞)에 장례하였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대범하고 중후하며, 풍채가 청신하고 명랑하였다. 몸가짐을 신중하게 하고 관직에 있어 근실하였다. 집에 있어서는 이(利)를 말하지 아니하며, 일을 처리할 때에는 침착하고 조용히 하였다. 일찍이 말을 급하게 하거나 당황해 하는 얼굴빛을 짓는 일이 없었으며, 남을 대접하는 데는 지위가 높아질수록 더욱 겸손하였다. 또 남의 과실을 말하지 않으며 선행(善行)이 있는 것은 칭찬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매양 자제들을 타이를 적에는 망녕된 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였다. 맏아들 중온(仲溫)이 일찍이 안동(安東)의 윤(尹)이 되었을 때에 친히 훈계하는 말 수십 조목을 써서 주었는데, 매우 자세하고도 절실하여 모두 법도가 될 만하였다. 집 뒤 언덕에 정자를 지어 쌍청(雙淸)이란 현판을 걸고 그 쌍청으로 자신의 호를 삼았다. 손이 오면 반드시 술대접을 하였으나 풍성하고 사치한 것에 힘쓰지 않았으며, 거문고와 비파를 즐기지 않고 오직 예절과 마음으로 흡족하게 대접할 뿐이었다. 두 번이나 전선(銓選)을 맡았으나 사사로이 청알(請謁)하는 것을 써 주지 않았으며, 대간(臺諫)에 출입하면서도 대체를 따를 뿐 세쇄한 일은 간섭하지 않았다. 여러 조(朝)의 정승을 역임하였으나 자신의 자제들을 위하여 은택을 구하지 않았고, 삼가 성헌(成憲)을 지키고 분분히 변경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의논은 관후하여 재상의 체모가 있었다. 밀직(密直) 조운흘(趙云仡)이 공보다 20여 년 뒤에 강릉 부사로 부임하여, 그곳 부로(父老)들이 공을 사모하여 잊지 못하는 줄 알고, 공의 생사당(生祀堂)을 지어 초상을 걸어 두게 하였다. 공이 죽자 부음을 들은 원근의 모든 사람들이 서로 조상하며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공의 일생은 참으로 완전하다고 이를 만하다.
공이 봉익대부 우상시(奉翊大夫右常侍) 김휘남(金輝南)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1녀를 낳았다. 장남은 곧 중온(中溫)이니 봉익대부 밀직제학 집현관제학 상호군(密直提學集賢館提學上護軍)으로서, 판도판서(版圖判書) 김안리(金安理)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후사를 못 둔 채 공보다 먼저 죽었다. 다음은 경량(景良)으로 지금 자헌대부 서북면도순문사 동중추원사(資憲大夫西北面都巡問使同中樞院事)로 있다. 그는 일찍이 밀직(密直)으로 양광도 관찰사(楊廣道觀察使)를 지냈는데, 명성과 치덕이 있었다. 임금이 서북 지방을 중시하여 잘 다스릴 인재를 뽑아 위임하고자 하였으나, 그러한 사람을 구하기 어렵던 차에 조정에서 공을 천거하므로, 특별히 기용하여 다시 서북면 도순문사를 임명한 것이다. 다음은 경공(景恭)으로 추충익대개국공신 자헌대부 흥녕군(推忠翊戴開國功臣資憲大夫興寧君)인데, 역시 대사헌으로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를 지냈다. 이 세 아들이 다 과거에 급제하였으므로 어머니 김씨가 경녕택주(慶寧宅主)에 봉해지고 해마다 나라에서 내리는 녹봉을 받았었는데, 지금도 흥녕군이 좌명(佐命)한 공로로 전과 같이 봉작(封爵)하여 녹봉이 변함없다. 다음은 경검(景儉)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전서(工曹典書)인데, 대간(臺諫)을 역임하고 주군(州郡)을 다스려 인재로 일컬어졌다. 여러 아들이 가훈(家訓)을 잘 받들어서 청렴하고 근신하여 예를 지키는 것이 모두 아버지의 풍도를 지녔다. 딸은 모관(某官) 유후(柳厚)에게 시집갔으니, 그 역시 단정한 사람으로서 공의 집 사위가 되기에 알맞다.
손자와 손녀가 몇이 있다. 도순문사(都巡問使)는 대방군(帶方君) 양천룡(梁天龍)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아들이 없고, 이실(二室) 정씨(鄭氏)가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은 민수(民秀)라고 한다. 흥녕군(興寧君)은 정당문학(政堂文學) 정사도(鄭思道)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순(純)을 낳았는데 좌습유(左拾遺) 벼슬에 있다. 공조 전서(工曹典書)는 청성군(淸城君) 한수(韓脩)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5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민동(民同)이라 하며 창고도감 판관(倉庫都監判官)의 벼슬에 있다. 맏딸은 예빈시 승(禮賓寺丞) 김맹성(金孟誠)에게 시집가고, 차녀는 생원(生員) 이윤상(李允商)에게 시집가고, 3녀는 봉례랑(奉禮郞) 김천(金闡)에게 시집가고, 4녀는 낭장(郞將) 이사흠(李士欽)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어리다. 사위인 유 밀직(柳密直 밀직은 관명)은 아들 둘을 낳았는데, 장남 기(沂)는 좌정언(左正言) 벼슬에 있고, 차남 한(漢)은 동부령(東部令) 벼슬에 있다.
증손자와 증손녀 몇 명이 있다. 습유(拾遺)는 정당문학(政堂文學) 정공권(鄭公權)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낳았는데 다 어리며 장남은 숭직(崇直)이라 하고 차남은 숭선(崇善)이라 한다. 유 정언(柳正言 정언은 관명이며 이름은 기(沂))은 밀직 이종덕(李鍾德)의 딸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았으니, 장남은 방선(方善)이라 하고 차남은 방경(方敬)이라 하며, 또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방순(方旬)의 딸을 재취(再娶)하여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방근(方謹)이라 한다. 동부령(東部令)은 대사헌(大司憲) 박경(朴經)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낳았고, 김 시승(金寺丞 시승은 예빈시승(禮賓寺丞)을 가리킨다)은 딸 둘을 낳았으니 모두 어리다.
이미 장례를 치른 이듬해 여름에 흥녕군이 대부인(大夫人)의 명으로 근(近)에게 와서 말하기를,
“우리 선공(先公)의 덕행이 사람들의 이목에 널리 전파되어 있음은 속일 수 없는 것이오. 오직 없어지지 않게 하기를 꾀하여 장차 돌에 새기고 그것에 의탁해 전하려 하니, 그대는 우리 아들과 교유하면서 같이 학업을 닦았으며, 벼슬도 한 때에 하였소. 또 일찍이 우리 선공의 일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 예문 춘추관(藝文春秋館)에서 편수의 직무를 맡고 있으니, 선공의 묘에 비명(碑銘)을 짓는 일을 그대는 사양하지 마시오.”
하므로, 근(近)이 글재주가 졸렬하다 하여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우뚝 치솟은 높은 산이 순흥(順興)을 둘러싸고 맑은 기운이 모였도다. 이에 그 신령이 하강하고 이에 그 대인(大人)을 낳았으니, 온후하고도 공손한 인물이었다. 높은 벼슬 끊기지 않고 70세를 장수하니, 처음도 좋거니와 끝이 더욱 아름답도다. 아들 있고 손자 있어 높은 벼슬이 문호에 차니 이는 모두 교회(敎誨)한 공이로다. 서국(瑞國) 언덕에 큰 집 같은 저 무덤은 오직 공의 현궁(玄宮)이라, 돌을 깎아 비를 세우고 나의 글을 새겨 길이 무궁하게 보이노라.


양촌선생문집 제2권
 시(詩)
행촌(杏村)의 소루(小樓)에 쓰다.


땅이 외지니 거마(車馬)가 끊어지고 / 地僻輪蹄絶
누 세워진 세월은 까마득하네 / 樓成歲月賖
오동나무 높아서 해를 가리고 / 桐高能蔽日
숲이 배서 집을 아주 숨기려들어 / 樹密欲藏家
옛 건축이 터조차 황폐해 가니 / 遺構基將廢
전현(前賢)의 발자취는 이미 멀어라 / 前修躅已遐
소상의 자손에게 말 전하노니 / 寄語蕭相後
검약을 배우고 사칠랑 마소
/ 師儉莫驕奢


[주D-001]소상(蕭相)의……마소 : 《사기(史記)》 소상국세가(蕭相國世家) 에 “담장과 집을 수리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뒤에 자손이 어질면 나의 검약함을 배울 것이고, 어질지 못하더라도 세가(勢家)에게 빼앗기지는 않을 것이다.’ 했다.” 한 데서 온 말인데, 여기서는 행촌(杏村) 이암(李嵒)의 소루(小樓)에 비유한 말이다.

연려실기술 제3권
 세종조 고사본말(世宗祖故事本末)
세종조(世宗朝)의 상신




이원(李原) 무신생이며, 15세에 진사가 되었다.

이원은 자는 차산(次山)이며, 호는 용헌(容軒)이고, 본관은 고성(固城)이다. 고려 말 을축년에 급제하였으니, 나이가 18세였다. 좌명 공신(佐命功臣)으로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이 되었다. 무술년에 정승이 되어 벼슬이 좌의정 겸 수문전 대제학(修文殿大提學) 판이병조사(判吏兵曹事)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양헌공(襄憲公)이고, 62세에 죽었다.
○ 공은 난 지 넉 달 만에 아버지 이강(李岡) 호는 평재(平齋)니 행촌(杏村) 이암(李嵒)의 아들이다. 이 죽고, 자부(姊夫) 권근(權近)이 가르치기를 아들과 같이 하여 학문이 날마다 진보되었다. 권근이 매양 그와 의논하였는데, 뛰어남이 짝이 없었으므로 권근이 놀라면서 말하기를, “우리 장인은 영원히 돌아가신 것이 아니다.” 하였다.
○ 기해년(1419)에 사은사(謝恩使)로 명 나라에 갔을 때, 그의 풍채가 좋고 의젓하여 만인 중에서 우뚝하니, 문황제(文皇帝)가 보고 기이하게 여겨서, 이르기를 “누런 수염 재상은 후에도 다시 오라.” 하였다. 《사가집(四佳集)》에 있는 공의 비문
○ 을사년(1425)에 명 나라 선종(宣宗)이 등극하니, 명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축하하였다.
○ 공을 미워하는 자가 애매한 일로 모함하였을 때에, 태종이 친히 변명하여 주었다. 태종이 돌아가신 뒤에 공을 미워하는 자가 전날의 사감을 가지고 사헌부에 사주하여 공을 죽이려 하였다. 세종은 그가 죄가 없는 줄을 아나, 사헌부의 청을 어기기가 어려워 여산(礪山)으로 귀양보냈으니, 곧 병오년(1426) 봄이었다.세종은 그의 옛 공훈을 생각하여 전과 다름없이 돌보아 주었으며, 매양 큰일을 의논할 때에는 반드시 이르기를, “철성(鐵城)이 있었더라면 반드시 처리했을 것이다.” 하였다. 얼마 안되어 불러서 다시 정승을 삼으려 하였으나 그를 질투하는 자의 저해를 입었으며, 기유년(1429) 여름에 병으로 죽었다. 《사가집(四佳集)》


정탁(鄭擢)

정탁은 자는 여괴(汝魁)이며, 호는 춘곡(春谷)이고,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고려 말에 급제하였으며, 조선에 들어와서 개국 정사 공신(開國定社功臣)으로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이 되었고, 임인년(1422)에 우의정이 되었다가 치사하였으며, 시호는 익경공(翼景公)이다.
○ 공양왕 때 병조 좌랑으로 있을 때에 김초(金貂)가 불교를 배척하다가 죄를 얻어서 장차 극형에 처하게 된 것을 정탁이 글을 올려서 변론하였다. 그 글에 이르기를, “《서경》에 이르기를, ‘선왕(先王)이 이루어 놓은 법을 보면 길이 허물이 없으리라.’ 하였습니다.이른바 이루어 놓은 법이라는 것은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에 지나지 않는데 불씨(佛氏)가 이에 모두 배치되니, 이것은 김초가 선왕이 세운 법을 허문 것이 아니라 곧 전하께서 스스로 허무는 것입니다.” 하였다. 대언 등이 왕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여 감히 아뢰지 못하였는데, 정몽주(鄭夢周)가 글을 올려 아뢰어서 마침내 김초가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동국통감(東國通鑑)》


유관(柳寬)

유관은 자는 경부(敬夫)이며, 처음 이름은 관(觀)이고, 자는 몽사(夢思)이며, 호는 하정(夏亭)이고,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고려 말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비서(判秘書)에 이르렀으며, 조선에 들어와서 형조 판서를 거쳐 갑진년(1424)에 우의정이 되었다가 치사하였고,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공이 죽자, 세종이 흰옷을 입고 백관을 거느리고 울었다.
○ 공의 온량(溫良)하고 돈후(敦厚)한 성품은 태어날 때에 얻은 천성이었다. 공조 총랑(工曹摠郞)이 되었을 때에 나이가 열아홉 살이었는데, 이해에 태조가 왕위에 오르자 운검(雲劍)의 책임을 맡아서 좌우에서 떠나지 않았다. 공은 자질이 밝고 민첩하였으며, 풍채가 빛나 네 임금을 연달아 섬겼으되 모두 사랑을 받아서 그보다 더 사랑받은 자가 없었다. 태조가 돌아가신 뒤에는 특별히 공에게 명하여 능을 지키게 하였다.
○ 기축년(1409)에 길주도 안무 절제사(吉州道安撫節制使) 영길주목(領吉州牧)이 되어서 북방을 지킬 때, 야인이 침입하자 그 괴수를 죽이고 격퇴시켰으므로 그 위세가 북방에 진동하였다. 태종이 사신을 보내어 술을 내리고, 이어 그곳에 머물러 두어 교화를 펴게 하였다.
○ 공이 우의정이 되었을 때에 글을 올려서 당 나라 한유(韓愈)가 지은 <태학생탄금시서(太學生彈琴詩序)>를 인용하고, 또 송 태종(宋太宗)이 대포(大酺)를 하사하던 옛일을 인용하여 3월 3일과 9월 9일을 명절로 삼아 대소 관료들로 하여금 경치좋은 곳을 골라서 놀며 즐겨, 태평의 기상을 표현하도록 할 것을 청했는데, 세종이 옳게 여겼다. 공이 나이 많아서 치사하니, 명하여 제사과(第四科)의 녹을 주어 일생을 마치도록 하였다. 《동각잡기》
○ 공은 청렴하고 방정하여 비록 가장 높은 벼슬에 올랐으나 초가집 한 간에 베옷과 짚신으로 담박하게 살았다. 공무에서 물러나온 뒤에는 후생을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아 제자들이 모여들었는데, 누구라도 와서 뵈면 고개를 끄덕일 뿐, 그들의 성명도 묻지 않았다. 집이 흥인문(興仁門) 밖에 있었는데,때마침 사국(史局)을 금륜사(金輪寺)에 설치하였으니 그 절은 성안에 있었다. 공이 수사(修史)의 책임을 맡았는데 간편한 사모에 지팡이를 짚고 걸어다니며 수레나 말을 쓰지 않았다. 어떤 때는 어린 아이와 관자(冠者) 몇 사람을 이끌고 시를 읊으며 오고가니 사람들이 모두 그의 아량에 탄복하였다.
○ 초가집 두어 간에 밖에는 난간도 담장도 없어, 태종이 선공감(繕工監)에 명하여 밤중에 울타리를 그의 집에 설치하여 주되 공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했고, 또 어찬(御饌)을 끊이지 않게 내렸다.
○ 어느 때 장마비가 한 달 넘게 내려서 집에 새는 빗발이 삼줄기처럼 내릴 때, 공이 손에 우산을 들고 비를 피하면서 그 부인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이 우산도 없는 집에서는 어떻게 견디겠소.” 하니, 그 부인이 말하기를, “우산 없는 집엔 다른 준비가 있답니다.” 하자, 공이 웃었다. 《필원잡기》
○ 손님을 위해서 술을 접대할 때는 반드시 탁주 한 항아리를 뜰 위에다 두고 한 늙은 여종으로 하여금 사발 하나로 술을 바치게 하여 각기 몇 사발을 마시고는 끝내 버렸다. 공이 비록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으나, 제자들을 가르침에 게을리하지 않았으므로 학도가 매우 많았다.매양 시향(時享)에는 하루 앞서 제생(諸生)을 예의를 갖추어 돌려보내고, 제삿날에는 제생을 불러 음복(飮福)을 시켰는데 소금에 저린 콩 한 소반을 서로 돌려 안주를 하고, 이어 질항아리에 담은 탁주를 그가 먼저 한 사발 마시고는 차례로 좌상에 한두 순배를 돌렸다. 《청파극담(靑坡劇談)》
○ 공의 벼슬이 정승이 되었으나, 그의 행동은 일반 사람과 다름없었다. 어떤 사람이라도 찾아오면 겨울에도 맨발에 짚신을 끌고 나와서 맞이하였고, 때로는 호미를 가지고 채소밭을 돌아다녔으나 괴롭게 여기지를 않았다. 《용재총화》
○ 공은 총명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 평소에 한번 배운 글을 종신토록 잊어버리지 않았고, 매양 밤중에 그 글을 외우며 뜻을 생각하고 항상 민생을 건질 것을 마음 먹었다.그리하여 교량(橋梁)이나 원우(院宇)를 지으려 하는 자 있으면 비록 중들에게라도 곧 돈과 베를 시주하였고, 또 남에게 주기를 좋아하였으나 비록 하찮은 물건이라도 남에게서 취하지는 않았다. 항상 말하기를, “친구 사이에는 으레 재물을 서로 나누어 쓰는 의리가 있다 하나, 아예 요구하지 않는 것이 옳다.” 하였다.


조연(趙涓) 갑인생

조연은 자는 여정(汝靜)이며, 처음 이름은 경(卿)이고,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한산백(漢山伯) 조인벽(趙仁璧)의 아들이고, 환조(桓祖)의 외손이다. 그는 무인이었으므로 과거에 응하지 않았는데, 13세에 진사(進士)에 올랐으며 좌명 공신(佐命功臣)으로 한평부원군(漢平府院君)에 봉해졌고 병오년(1426)에 우의정이 되었으며, 시호는 양경공(良敬公)이다.
○ 공이 우상으로 있을 때에 곡산부원군(谷山府院君) 연사종(延嗣宗)ㆍ병조 판서 조말생(趙末生) 등과 더불어 송사 중에 있는 노비를 받고 힘을 써서 이기게 하였더니, 사헌부에서 이를 적발하여 공 등을 모두 중도 부처(中道付處)하였다. 《조야첨재(朝野僉載)》


황희(黃喜)

황희는 자는 구부(懼夫)이고, 처음 이름은 수로(壽老)였으며, 본관은 장수(長水)이고, 호는 방촌(厖村)이다. 고려말 기사년(1389)에 급제하여 조선에 들어와 병오년(1426)에 정승이 되어 영의정에 이르렀고, 나이 여든에 치사하여 임신년(1452)에 죽으니 나이가 아흔이었다. 제사(諸司)의 이서(吏胥)와 노예들이 모두 치제하였으며 시호는 익성공(翼成公)이고, 종묘에 배향되었다.
○ 공은 14세에 음관(蔭官)출신으로 복안궁 녹사(福安宮錄事)가 되었고, 소년에 사마(司馬) 양시(兩試)에 합격하였으며, 27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습유 우보궐(拾遺右補闕)이 되었는데, 성격이 곧아서 바른 말을 과감히 하였다. 《조야첨재》
○ 고려 말에 적성훈도(積城訓導)가 되었다. 《경훈전고(警訓典故)》에 상세하다.
○ 태종조(太宗朝)에 이조 판서로서 양녕대군(讓寧大君)을 폐위하는 것을 간하였더니, 태종이 크게 노하여 공조 판서로 좌천시키고, 또 평안도 도순무사(平安道都巡撫使)로 내보냈다가 무술년에 양녕이 폐위되어 서인이 되자 그를 교하(交河)에 좌천시켰다. 대신과 대간들이 모두 그에게 죄를 주기를 청해 마지 않았으나,태종은 공의 생질 오치선(吳致善)을 공이 있는 교하로 보내어 이르기를, “경이 비록 공신은 아니지만 나는 경을 공신으로 대우하여 하루라도 좌우를 떠나지 못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제 대신과 대간들이 경에게 죄 주기를 청해 마지 않으니, 양경(兩京 개성 서울) 사이에는 둘 수 없다. 경의 본관(장수(長水))에 가까운 남원(南原)으로 옮기게 할 것이니 경은 어머니를 모시고 편하게 같이 가라.” 하였고,또 사헌부에 명하여, “그가 갈 때에 관리가 압송하지 말라.” 하였다. 오치선이 복명(復命)하자, 태종이 묻기를, “황희가 무어라 하던고.” 하니, 치선이 아뢰기를, “‘살과 뼈는 부모께서 주신 것이지만, 의식이나 쓰는 것은 모두 임금의 은혜였으니, 신이 어찌 은덕을 배반하겠습니까. 실로 다른 마음이 없었습니다.’ 하고는 울면서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하였다.
○ 4년 임인에 태상왕이 명하여 공을 불렀다. 공이 이르러 통이 높은 갓을 쓰고 푸른 색 거친 베로 만든 단령(團領)을 입고 남색 조알[條兒]을 띠고 승정원에 들어왔는데, 막 시골에서 왔으므로 몸체만 큼직할 따름이어서 사람들이 특이하게 여기지 않았다.
태상왕이 세종에게 이르기를, “황희의 전날 일은 어쩌다가 그릇된 것이니, 이 사람을 끝내 버릴 수 없다. 나라를 다스리려면 이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된다.” 하고는 곧 예조 판서로 제수하였다. 때마침 흉년이 들어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나갔다. 그는 마음이 넓고 모가 나지 않았으며,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에게 한결같이 예의로써 대하고 국사를 의논할 때에는 전례를 잘 지켜 고치고 바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소문쇄록(謏聞瑣錄)》
○ 계묘년(1423)에 강원도에 크게 흉년이 들었다. 세종이 걱정하여 특별히 공을 관찰사로 삼았는데, 정성을 다하여 구제했기 때문에 백성들이 크게 괴로워하지 않았다. 세종이 크게 가상이 여겨서 숭정대부(崇政大夫) 판우군부사(判右軍府事)에 제수하고, 을사년(1425)에는 찬성사로서 대사헌을 겸직시켜 소환하였다. 《조야첨재》에는 이르기를, “공이 돌아온 뒤에 관동 백성들이 그의 은덕을 사모하여 울진(蔚珍)에서 그가 행차를 멈추었던 곳에다 대를 쌓고 소공대(召公臺)라 이름하였으며, 남곤(南袞)이 글을 짓고 송인(宋寅)이 글씨를 써서 비를 세웠다.” 하였다.
○ 공이 아버지의 상사를 당했는데, 판강릉부사(判江陵府事) 군서(君瑞)이다. 때마침 나라에 일이 있어 공을 기복(起復)시키니, 굳이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좌상이 되었을 때에 어머니 상사를 당하여 또 기복시키니, 간곡히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여 곧 나와 일을 보았다. 《조야첨재》 《동각잡기》에 이르기를 “어머니 상사를 당하여 몇 개월이 지난 뒤에 기복되었다.” 하였다.
○ 그때에 세자가 장차 명 나라로 떠날때 공으로 수행하게 하니, 공은 간곡히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명 나라에서 칙서(勅書)를 보내어 세자는 반드시 들어올 것이 없다 하니, 그는 또 글을 올리기를, “세자께서 이미 명 나라에 조회하지 않기로 되었고, 또 국가에 일이 없으니 삼년상을 마치게 해 주소서.” 하였다.세종은, “대신을 기복하는 것은 선왕 때에 이미 이룩된 법이다.” 하여 윤허하지 않고, 이어 글을 내리기를, “옛날에는 나이가 60이 되면 비록 상복을 입었어도 고기를 먹는 법인데, 이제 황희는 이미 기복도 하였으려니와 나이가 60이 넘었으니 어찌 소찬을 하면서 일을 보리요. 정원에서 그를 불러 고기 먹기를 권고하라.” 하였다.
그가 빈청(賓廳)에 나아갔더니 지신사 정흠지(鄭欽之)가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고 고기 먹기를 권하였다. 공이 머리를 조아리면서 말하기를, “신이 마침 병이 없으니 어찌 감히 고기를 먹겠습니까. 청컨대, 이 뜻을 잘 아뢰어 주시오.” 하였다. 흠지가 감히 그렇게 아뢸 수 없다 하니, 공이 그제서야 이마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고기를 먹었다. 《동각잡기》
○ 공이 정승이 되었을 때 김종서가 공조 판서가 되었다. 일찍이 공처(公處)에 모였을 때에 종서가 공조로 하여금 약간의 주과(酒果)를 갖추어 드렸더니, 공이 노하여 이르기를, “국가에서 예빈시(禮賓寺)를 정부의 곁에 설치한 것은 삼공(三公)을 접대하기 위해서이다. 만일 시장하다면 의당 예빈시로 하여금 장만해 오게 할 것이지 어찌 사사로이 제공한단 말인가.” 하고는, 종서를 앞에 불러 놓고 준절히 꾸짖었다.
정승 김극성(金克成)이 일찍이 이 일을 경연에서 아뢰고, “대신이란 마땅히 이러해야 조정을 진정시킬 수 있습니다.” 하였다. 《동각잡기》
○ 그때에 김종서가 여러 차례 병조ㆍ호조의 판서가 되었는데 한 가지 일이라도 실수한 것이 있을 때마다 공이 박절할 정도로 꾸지람을 하되 혹은 본인 대신 종을 매질하기도 하고 때로는 구사(丘史)를 가두기도 하였다. 동렬(同列)들이 모두 지나친 일이라 하고 종서 역시 매우 고달펐다. 어느날 맹사성(孟思誠)이 묻기를, “김종서는 당대의 명경(名卿)인데 대감은 어찌 그렇게도 허물을 잡으시오.” 하였더니, 공은 말하기를, “이것은 곧 내가 종서를 아껴서 인물을 만들려는 거요.종서의 성격이 고항(高亢)하고 기운이 날래어 일을 과감하게 하니 뒷날 우리의 자리에 있게 되어 모든 일을 신중히 하지 않는다면 일을 허물어뜨릴 염려가 있으니,미리 그의 기운을 꺾고 경계하여 그로 하여금 뜻을 가다듬고 무게있게 하여 혹시 일을 당해서 가벼이 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지, 결코 그에게 곤란을 주려 함이 아니오.” 하니, 사성이 그제야 심복하였다. 그뒤에 공이 물러가기를 청할 때 종서를 추천하여 자기의 자리를 대신하게 하였다. 《식소록(識少錄)》
○ 형조 판서 서선(徐選)의 아우 서달(徐達)은 공의 사위이다. 서달이 일찍이 사람을 죽였는데, 공과 우상 맹사성 역시 이 일에 관련되어 의금부에 갇히게 되었다. 이튿날 보석되어 다만 파직되었으나 후임을 내지 않았다가 열흘이 지나자 복직을 시켰다.
○ 공이 좌상이 되었을 때에 사헌부에서 공이 감목(監牧) 태석구(太石鉤)의 죄를 완화시키려고 대관(臺官) 이심(李審)의 아들 백견(伯堅)에게 청탁하였다 하여, 파면시켜서 앞으로 청탁을 받고 법을 굽히는 일이 없도록 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답하기를, “대신이란 가벼이 죄를 줄 수 없다.” 하다가, 뒤에는 사헌부의 청을 윤허하여 그를 파면시켰다.그러나 후임을 내지 않고 있다가 이튿날 다시 복직시켰다. 사간원에서 소를 올리기를, “황희는 일찍이 의정(議政)이 되어 대체를 돌보지 않고 친한 자를 사사로이 돌봐주기 위하여 사헌부에 청탁하였으니, 다만 그 직만 파면하였음은 황희로 보아서는 큰 다행입니다. 또 교하(交河)의 둔전을 이양받으려고 청하였으니, 이것은 옛날 직부(織婦)를 내쫓고 집안에 심은 채소를 뽑아버렸던 일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그런 지 한 해가 채 못되어 갑자기 백관의 수반(首班)에 제수하자, 임명을 받아 엄연히 부끄러운 줄을 알지 못하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여 이르기를, “모든 일에 대하여 시비를 숨김없이 모두 진술하니,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그러나 국정을 맡은 대신을 너희들의 말을 듣고서 가벼이 거절할 수 없다.” 하였다.
○ 그때에 사간원에서 논박하기를, “영의정 황희가 교하수(交河守)에게 둔전을 청하여 사사로이 농장을 삼으려 하였으니, 백관의 수반인 정승의 자리에 둘 수 없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고 안숭선(安崇善)에게 이르기를, “황희는 국정을 맡은 대신이고,또 태종께서 신임하시던 사람이니, 내 어찌 경솔히 끊어 버리겠는가. 태종께서 일찍이 나에게 이르기를, ‘양녕(讓寧)이 세자가 되었을 때에 종수(宗秀)의 무리가 그에게 아부하여 많이들 불의를 행해서 양녕으로 하여금 도리어 어긋나게 하였을 때에,황희에게 묻기를 어떻게 처리하였으면 좋을까 하였더니, 황희가 대답하기를, 세자는 나이가 어리고 또 그의 과실이란 사냥을 좋아한 것에 불과합니다 하였다. 당시에는 황희가 중립하여 사태를 관망한다고 생각하였으나, 이제 생각하니, 황희는 실로 죄가 없다.’ 하시고, 또 사단(史丹)의 일을 인용하여 해명해 주시면서, 이내 눈물지으며 말씀하던 것이 아직도 내 귀에 남아 있으니, 내 이제 어찌 함부로 신진 간신(新進諫臣)의 말을 들어서 그를 끊어 버리겠는가.” 하였다. 《국조보감》
○ 태학(太學) 유생이 길에서 그를 만나자 면박하기를, “네가 정승이 되어 일찍이 임금의 그릇됨을 바로잡지 못한단 말이냐.” 하였으나, 공은 노여워하지 않고 도리어 기뻐하였다. 정암(靜菴)의 <연주(筵奏)>
○ 공이 상부(相府)에 있은 지 27년이나 되어, 조종(祖宗)때에 이미 이룩된 법을 힘써 따르고, 변경하기를 기뻐하지 않았으며, 일을 처리함에는 이치에 따라서 하고 규모는 원대하였으며, 인심을 진정시키는 도량이 있어서 대신의 체모를 얻었다. 태종으로부터 세종에 이르기까지 신임이 매우 두터워,세종이 매양 황희의 견식과 도량이 크고 깊어서 큰 일을 잘 판단한다고 칭찬하면서 그를 점치는 시구(蓍龜)와 물건의 중량을 다는 권형(權衡)에 견주었다. 더러 옛 제도를 변경하려고 의논하는 자가 있으면, 그는 반드시, “신이 변통하는 재능이 부족하니, 무릇 제도의 변경에 있어서는 감히 가벼이 의논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평시에는 의논을 너그럽게 하였으나, 큰 일을 당해서는 맞대고 그 자리에서 시비를 가려 의연(毅然)히 굽히지 않았다.
나이 팔십에 비로소 치사를 허락하였고,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에는 임금이 반드시 근시(近侍)로 하여금 공에게 나아가 자문한 뒤에 결정하였다. 나이가 구십이 되어서도 총명이 조금도 쇠퇴하지 않아서, 조정의 전장(典章)이나 경사자집(經史子集)에 대해 마치 촛불로 비추는 듯이 산 가지로 세는 듯이 하여, 비록 기억 잘하는 장년도 감히 따르지 못하였다.우리 조선의 어진 정승을 논할 때는 반드시 공을 제일로 삼았으며, 공의 훈업(勳業)이나 덕량을 송 나라의 왕문정(王文正)과 한충헌(韓忠獻)에 견주었었다. <묘비(墓碑)>
○ 공은 평시에 거처가 담박하였고, 비록 아손(兒孫)과 동복들이 앞에서 울부짖고 희롱하여도 조금도 꾸지람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수염을 뽑는가 하면 뺨을 치는 놈까지 있어도 역시 제멋대로 하게 두었다. 일찍이 아래에 있는 신료들과 함께 일을 의논할 때, 바야흐로 붓을 풀어 글을 쓰려 하는데 종의 아이가 종이 위에 오줌을 싸도 그는 아무런 노여워하는 빛이 없이 다만 손으로 훔쳤을 뿐이었다.
공이 일찍이 남원(南原)에서 귀양살이할 때에 7년 동안을 문을 닫고 단정히 앉아서 찾아오는 손님도 맞이하지 않고 다만 운서(韻書) 한 질을 갖고 거기에만 눈을 대고 있었을 따름이더니, 그뒤 비록 나이가 많아서도 글자의 획이나 음이나 뜻에 대해서는 백에 하나도 틀리지 않았었다. 《필원잡기》
○ 공은 나이가 많고 벼슬이 무거워질수록 더욱 스스로 겸손하여, 나이가 구십여 세나 되었는데도, 늘 고요한 방에 앉아서 종일토록 말없이 두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며 글을 읽을 따름이었다. 창 밖에 늦복숭아가 무르익어서 이웃 아이들이 다 따는데, 공은 나직한 소리로,“다 따먹지 말아라. 나도 좀 맛보자.” 하고 조금 있다가 나가서 보니, 나무에 가득하던 열매가 다 없어졌다. 매양 아침 저녁으로 밥먹을 때에 아이들이 모두 모여들어 그가 밥을 덜어서 주면 지껄이며 먹기를 다투곤 하였는데 공은 다만 웃을 뿐이었다. 《용재총화》
○ 공은 기쁨이나 노여움을 일찍이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고, 종들을 은혜로 대우하여 일찍이 매를 대지 않았으며, 그가 사랑하는 여종이 작은 종과 희롱하기를 지나치게 하였으나 공은 볼 때마다 웃었다. 일찍이 이르기를, “노예도 역시 하늘 백성이니 어찌 함부로 부리리오.” 하고는,그 뜻으로 훈계하는 글을 써서, 자손들에게 전하여 주기까지 하였다. 어느날 홀로 동산을 거닐 때, 이웃에 살고 있는 버릇없는 젊은이가 돌을 던지니, 무르익은 배가 돌에 맞아 땅에 가득 떨어졌다. 그가 큰 소리로 시동(侍童)을 부르자, 그 젊은이가 놀라 달아나 숨어서 가만히 들어본 즉, 시동을 시켜 그릇을 갖고 오게 하여 배를 담아서 그 젊은이에게 주되, 끝내 아무런 말이 없었다.
정언 이석형(李石亨)이 뵈러 갔더니, 그가 《강목(綱目)》과 《통감(通鑑)》을 내어서 책 표지에 제목을 쓰게 하였다. 얼마 안되어 추하게 생긴 여종 한 사람이 약간의 안주를 갖고 공의 의자에 기대고 서서 이석형을 내려다 보며 공에게 묻기를, “곧 술을 올릴까요.” 하니, 공은 조용히 “조금 있다가.” 하였다.여종이 한참 기다리다가 고함을 치면서, “어쩌면 그리도 꾸물거리누.” 하니, 공은 웃으면서, “그럼 드려오렴.” 하였다. 술상을 들에오니, 아이들이 모두 남루한 차림에다 맨발로 들어와서 혹은 공의 수염을 잡아당기기도 하고, 더러는 공의 옷을 밟고 안주를 다 집어 먹고 공을 두들기곤 하였는데 공은 “아야 아야” 하였다. 그 아이들은 모두 노비의 자식들이었다. 《청파극담(靑坡劇談)》
○ 그의 정자인 반구정(伴鷗亭)이 임진강 하류에 있었다. 파주읍(坡州邑) 서편 15리에 있다. 자손이 그곳에 집을 짓고 이내 반구라 이름하였다. 《미수기언(眉叟記言)》


맹사성(孟思誠)

맹사성은 자는 성지(誠之)이며, 본관은 신창(新昌)이다. 한성윤(漢城尹) 맹희도(孟希道)의 아들이고, 최영(崔瑩)의 손자 사위이다. 고려 병인년(1386) 문과에서 장원하였고, 정미년(1427)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다. 치사하여 신해년(1431)에 죽으니, 나이가 72세였다. 세종이 백관을 거느리고 곡하였다.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 공의 아버지 희도는 전교부령(典校副令)인데 공양왕 때에 효행으로 정려(旌閭)하였다. 정계가 어지러움을 보고는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온양 오봉산(五峯山) 밑에 살면서 호를 동포(東浦)라 하였다. 태조 때에도 역시 정려하였다.
○ 공의 천성이 지극히 효도하고 청백하였다. 그가 살고 거처하는 집은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였으며 매양 출입할 때에 소타기를 좋아했으므로,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 공은 청결하고 검소하며 고아하여 살림살이를 일삼지 않고, 식량은 늘 녹미(祿米)로 하였다. 어느날 햅쌀로 밥을 지어 드렸더니, 공이 “어디에서 쌀을 얻어왔소.” 하고 물었다. 그 부인이 답하기를, “녹미가 오래 묵어서 먹을 수 없기에 이웃 집에서 빌렸습니다.” 하니, 공은 싫어하며 말하기를, “이미 녹을 받았으니, 그 녹미를 먹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무엇 때문에 빌렸소.” 하였다. 《무인기문(戊寅記聞)》
○ 공은 청결하고 검소하며 단정하고 후중해서 상부(相府)에 있을 때에 대체를 지녔었다. 공은 경자생이면서 장난삼아 계묘계에 들었다. 어느날 세종을 모시고 있었는데 세종이, “공은 나이가 몇이요.” 하여, 공이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물러나온 뒤 계묘계 중에서 동갑이 아니라 하여 제명되어 한때에 웃음거리가 되었었다.
공은 음률을 잘 알아서 항상 피리를 갖고 다니며 날마다 서너 곡조를 불었다. 문을 닫은 채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하지 않다가 공무에 관한 일을 여쭈러 오는 자가 있으면 문을 열고 맞이하였는데, 여름이면 소나무 그늘에 앉고 겨울이면 방 안 포단(蒲團)에 앉되,좌우에는 다른 물건이 없었으며 일을 여쭌 자가 가고 나면 곧 문을 닫았다. 일을 여쭈러 오는 자는 동구에 이르러서 피리 소리가 들리면 공이 반드시 있음을 알았다. 《필원잡기》
○ 공은 온양에 근친(覲親)하러 오갈 때에 각 고을의 관가에 들리지 않고 늘 간소하게 행차를 차렸으며, 더러는 소를 타기도 하였다. 양성(陽城)과 진위(振威) 두 고을 원이 그가 내려온다는 말을 듣고 장호원(長好院)에서 기다렸는데, 수령들이 있는 앞으로 소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므로 하인으로 하여금 불러 꾸짖게 하니,공이 하인더러 이르기를 “너는 가서 온양에 사는 맹고불(孟古佛)이라 일러라.” 하였다. 그 사람이 돌아와 고했더니, 두 고을 원이 놀라서 달아나다가 언덕 밑 깊은 못에 인(印)을 떨어뜨렸다. 후대의 사람들이 그곳을 인침연(印沈淵)이라 이름하였다.
○ 공의 집이 매우 협착하였기 때문에, 병조 판서가 일을 여쭈러 찾아 갔다가 마침 소낙비가 내리는 바람에 곳곳에서 비가 새어 의관이 모두 젖었다. 병조 판서가 집에 돌아와 탄식하기를, “정승의 집이 그러한데, 내 어찌 바깥 행랑채가 필요하리요.” 하고는, 마침내 짓던 바깥 행랑채를 철거하였다.
○ 공이 온양으로부터 조정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비를 만나서 용인(龍仁) 여원(旅院)에 들렀는데, 행차를 성대하게 꾸민 어떤 이가 먼저 누상에 앉았으므로 공은 한쪽 모퉁이에 앉았었다. 누상에 오른 자는 영남에 사는 사람으로 의정부 녹사(錄事) 취재(取才)에 응하러 상경하는 자였다.공을 보고 불러서 위층에 올라오게 하여 함께 이야기하며 장기도 두었다. 또 농으로 문답하는 말 끝에 반드시 ‘공’ ‘당’하는 토를 넣기로 하였다. 공이 먼저 묻기를, “무엇하러 서울로 올라가는공.” 하였더니, 그가 “벼슬을 구하러 올라간당.” 하였다. 공이 묻기를 “무슨 벼슬인공.” 하니, 그가 “녹사 취재란당.” 하였다. 공이 또, “내가 마땅히 시켜주겠공.” 하니, 그 사람은 또, “에이, 그러지 못할 거당.” 하였다.뒷날 공이 정부에 앉았는데, 그 사람이 취재차 들어와 뵈었다. 공이 이르기를, “어떠한공.” 하니, 그 사람이 비로소 깨닫고는 갑자기 말하기를, “죽었지당” 하니,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괴이하게 여겼다. 공이 그 까닭을 얘기하니, 모든 재상이 크게 웃었다. 드디어 그 사람을 녹사로 삼았는데, 그는 공의 추천을 입어서 여러 차례 고을 원을 지내게 되었다. 후인들이 이를 일러, ‘공당 문답’ 이라 하였다.


권진(權軫)

권진은 자는 희정(希正)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고려 조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신해년(1431)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을묘년(1435)에 죽었는데, 나이가 일흔 아홉이었다. 세종이 백관을 거느리고 곡하였다. 시호는 문경공(文景公)이다.
○ 공이 다스린 고을마다 좋은 성적을 내었다. 조선에 들어와서 합주(陜州) 원으로 나갔다가, 정종(定宗) 경진년(1400)에 조박(趙璞)의 옥사에 연루되어 영해(寧海) 축산도(丑山島)에 귀양살이 갔는데 얼마 안되어 사면되어 돌아왔다.


최윤덕(崔潤德) 《해동잡록(海東雜錄)》에, ‘공의 자는 백수(伯修)요, 본관은 통천(通川)이며 양장공(襄莊公) 운해(雲海)의 아들이다.’ 하였다.

최윤덕은, 자는 여화(汝和)이며, 본관은 흡곡(歙谷)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갑인년(1434)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정렬공(貞烈公)이고, 종묘에 배향되었다.
○ 공의 아버지 최운해(崔雲海)는 국초의 명장이었다. 그가 태어난 뒤에 어머니가 죽었는데, 운해는 변방을 지키느라고 《명신록(名臣錄)》에 이르기를, “공의 아버지가 합포(合浦)를 지켰다.” 하였다. 돌아오지 못하였으므로, 같은 이웃에 살고 있는 양수척(楊水尺)의 집에 맡겨져서 자라났다. 점차 자라서는 힘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 센 활을 잘 쏘았는데, 때로는 수척을 따라 사냥하러 나가서 많이 잡기도 하였다. 어느날 산중에서 마소[馬牛]를 먹이다가,범이 별안간 숲 속에서 뛰어나오자 마소들이 흩어졌다. 공이 말을 타고 화살 하나로 범을 쏘아 죽이고는 돌아와 수척에게 이르기를, “아롱진 무늬를 가진 큼직한 것이 무슨 짐승인지 나오기에 내가 쏘아 죽였다.” 하여 수척이 가서 보니, 큰 호랑이었다. 수척이 윤덕을 기이하게 여겼다.
서미성(徐彌性) 거정(居正)의 아버지이다. 이 나가서 합포(合浦)를 지킬 적에 수척이 공을 데리고 가서 뵙고 공을 기려 마지 않았더니, 미성이 이르기를, “한번 시험해 보겠다.” 하였다. 함께 사냥을 할 때 공이 좌우로 달리며 쏘아 맞히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구경하는 사람이 모두 칭찬하였다.미성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이 애가 비록 손이 빠르긴 하나 아직 법을 모르니, 이 애의 기술은 사냥꾼의 기술에 불과하여 옳은 기술이라고 볼 수 없다.” 하고는 이내 활쏘기와 말달리는 방법을 가르쳐서 마침내 명장이 되었다. 《필원잡기》 ○ 운해(雲海)는 벼슬이 서북면 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 승추부사(承樞府事)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양장공(襄莊公)이다.
○ 태조가 해주(海州)에 거둥하여 강무(講武)할 때, 가까운 길을 취해 큰 냇물을 건너고자 하였더니, 공이 아뢰기를, “신이 먼저 물의 깊이를 알아가지고 오게 해주소서.” 하고는, 말을 타고 곧 물 속에 들어가 고삐를 잡고 목을 움추리고 거짓으로 그 몸을 기울이니 물이 안장에 미쳤다.곧 돌아와서 아뢰기를, “물이 깊어서 건너지 못하겠으니 전하께서 이 내를 건너시려는 것은, ‘큰길로 가고 지름길로 가지 말며, 배를 타고 가고 헤엄치지 말라.’는 옛말의 뜻과 어긋납니다.” 하니, 태조가 그 말을 옳게 여겨 건너는 것을 중지하였다. <행장(行狀)>
○ 과거에 태안군(泰安郡)의 수령으로 있을 때에 그가 찼던 화살통에 쇠로 장식했던 것이 헐어 떨어지자, 공인(工人)이 관가의 쇠로 기워 고쳤는데, 곧 명하여 기웠던 쇠장식을 도로 떼어 내었으니, 그 청렴함이 이러하였다. <행장>
○ 공이 이상(貳相 의정부의 좌우찬성을 달리 이르는 말)으로 평안도 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 판 안주 목사(判安州牧使)를 겸임하였는데, 공무가 끝나면 공청 뒤 빈 땅을 경작하여 오이를 심고 손수 매어 가꿨다. 소송하러온 자가 누구인지 모르고 묻기를, “대감께서 지금 어디에 계신지요.” 하자, 그가 속여 말하기를, “아무 곳에 있다.” 하고는,들어가서 옷을 바꿔 입고 판결에 임하였다. 시골에 사는 한 지어미가 울면서 이르기를, “호랑이가 제 남편을 죽였습니다.” 하니, 공이 이르기를, “내 너를 위해서 원수를 갚아 주겠다.” 하고는 범의 자취를 밟아 손수 쏘아 죽인 후 그 배를 쪼개고 뼈와 고기와 사지를 꺼내어 의복으로 싸서 관을 맞추어 매장하여 주었더니, 그 지어미가 슬피 울었다. 그 고을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사모하기를 부모와 같이 한다. 《청파극담》
○ 안주(安州)를 다스릴 때에 버드나무 수만 그루를 고을 남쪽에다 심어서 고을의 터를 보호하고 수해를 막으니, 사람들이 감당(甘棠)에 비하여 감히 베지를 못하였다.
○ 살고 있는 집 남쪽에 못 두 곳을 만들어 연꽃을 그 가운데다 심고 꽃나무와 아름다운 풀을 그 곁에다 심어서, 매양 공무에서 물러나온 뒤에 노인들을 청해 술상을 차려 놓고 그 사이에서 담소하였으니, 산야(山野)의 취미가 있었다.


노한(盧閈) 병진생

노한은 자는 유린(有鄰)이며, 본관은 교하(交河)이고, 민제(閔霽)의 사위이다. 16세에 벼슬하여 을묘년(1435)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계해년(1443)에 죽었는데 나이가 68세였다. 시호는 공숙공(恭肅公)이다.
○ 태종 계미년(1403)에 판합문사(判閤門事)로 하삼도(下三道)에 염문사(廉問使)로 갔는데, 때마침 바닷가에 전선(戰船)을 만들기 위한 오랫 동안의 역사가 끝나지 않았으므로 복명하는 날 소대(召對)해서, 역졸(役卒)들의 괴로운 실상을 극력 진술했다. 태종이 얼굴빛이 변하면서 이르기를, “진시황(秦始皇)과 수양제(隨煬帝)의 포악한 것에 비해서 어떠한가.” 하였다. 공이 갓을 벗고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기를,“신이 명을 받들어서 삼도를 두루 시찰하였는데, 변방 백성의 괴로움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었으므로 죽음을 무릅쓰고 진달한 것입니다. 또 진시황과 수양제는 배를 만든 일은 있었으나, 어찌 백성이 곤경에 빠질 것을 걱정하여서 사신을 보내어 물은 일이 있었겠습니까.” 하였더니, 태종이 웃으면서, “경은 갓을 쓰라. 그리고 사과하지 않아도 좋다.” 하였다.
○ 임자년(1432)에 우찬성이 되었을 때에 명 나라에서 보내온 환관(宦官) 창성(昌盛)과 윤봉(尹鳳) 등이 매년 연달아 나와서 청구하고 토색함이 그지 없었는데, 조금이라도 맞지 않으면 문득 모욕을 주었다. 세종이 공으로 하여금 관반(館伴)을 삼았더니, 공이 얼굴을 온화하게 하고 안색을 바르게 하여 한 마디 말을 할 때에도 법도가 있었으므로, 비록 미친듯이 위세를 부리던 창성과 윤봉도 망녕되이 함부로 하지 못하였다.
공의 어머니 왕씨(王氏) 부원군(府院君) 수(琇)의 딸가 나이 이미 80에 병이 있으므로 공이 벼슬을 사양하고 돌아가 봉양하기를 힘껏 청하였다. 세종이 이르기를, “명 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일은 경이 아니면 불가하다.” 하고, 명하여 낮에는 사신을 접대하고 밤이면 돌아가 어머니를 모시게 하였다.
○ 우의정으로 병조 판서를 겸하게 되자, 민부인(閔夫人)이 들어와 사은하니, 세종이 이르기를, “나의 사사로운 은혜가 아니라, 곧 태종께서 남긴 말씀에 의한 것이요.” 하였다.


허조(許稠)

허조는 자는 중통(仲通)이며, 호는 경암(敬菴)이고, 본관은 하양(河陽)이다. 고려 말 경오년(1390)에 급제하였고, 조선에 들어와 무오년(1438)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고, 종묘에 배향되었다.
○ 태종조에 공이 대간으로서 일을 논하다가 전주 판관(全州判官)으로 좌천되었는데, 이조 정랑의 자리가 비게 되어 태종이 관안(官案)을 검열하다가 이르기를, “이 사람이 이 직에 알맞다.” 하고는 곧 제수하였다. 《동각잡기》
○ 공은 대범ㆍ엄숙ㆍ방정ㆍ공평ㆍ청렴ㆍ근신하여 매양 닭이 울면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 관디를 차리고 바로 앉아서 종일토록 게으른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었다. 그는 정성껏 나라의 일을 생각하여 사사로운 일은 말하지 않았으며,국정을 의논할 때는 홀로 자기의 신념을 지켜서 남들에게 맞추어 오르내리지 않았다. 가법(家法)이 몹시 엄하여 자제에게 허물이 있으면 반드시 사당에 고한 다음 벌을 내리고, 노비들에게 죄가 있으면 법에 의하여 다스렸다.
공은 어릴 때부터 깎은 듯이 여위어서 어깨와 등이 굽은 듯하였다. 일찍이 예조 판서로 있을 때에 상하 관원의 복색을 마련하여 제도가 분명하였으므로, 시정의 경박한 자식들이 공을 매우 미워하여 ‘수응 재상(瘦鷹宰相)’이라 별명을 지었다. 《필원잡기》
○ 공은 마음가짐이 맑고 바르며, 집 다스림이 엄하고 법도가 있었으며, 자제를 가르치되 털끝만큼이라도 잘못이 있을까 싶어 삼가게 하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허공은 음양(陰陽 부부관계)의 일도 알지 못할 것이다.” 하니,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음양의 일을 몰랐다면, 저 후(詡)와 눌(訥)이 어디에서 나왔단 말인가.” 하였다. 《용재총화》 ○ 창기(娼妓)에 관한 제도를 고치지 않았음은 전고(典故)에 실렸다.
○ 공은 매양 부모의 기일(忌日)을 당하면, 반드시 그의 모부인(母夫人)이 손수 지은 어릴 때에 입던 푸른빛 작은 단령(團領)을 입고 눈물을 흘리며 치재(致齋)하였다.
그의 형 허주(許周)가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서 치사하였는데, 공은 매양 정부에서 합좌(合坐)할 때마다 닭이 울면 반드시 형에게 가고, 갈 적에는 반드시 하인들을 동구에 떼어 두고 수레에서 내려 걸어서 들어갔다. 허주도 역시 공이 반드시 찾아올 것을 짐작하고 밤마다 의관을 바로 하고 등불을 켜고 자리를 베풀어 몸을 안석에 기대고 기다렸는데,공이 오면 반드시 작은 술상을 차렸다. 공이 조용히 묻기를, “오늘 정부에 이러이러한 일이 있는데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 하면, 허주는 대답하기를, “내 의견에는 마땅히 이러해야 될 것 같네.” 하였다. 공은 기뻐하여 물러나와 말하기를, “옛말에 ‘사람은 어진 부형이 있음을 즐거워한다.’ 하더니, 이를 두고 이름이다.” 하였다. 《청파극담》
허주는, 시호가 간숙(簡肅)이고, 성격이 준엄하여 가법이 있었다. 제사는 한결같이 주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를 따랐다. 자제에게 허물이 있으면 반드시 사당에 고하고 벌을 주었다. 일찍이 병이 들어 제사에 참여할 수 없어서 동생 허조에게 대행하도록 했더니, 전의 제도를 다소 변경하였다.허주가 이르기를, “작은 아들이 종가에서 옛 제도를 함부로 변경하였으니, 이것은 종자(宗子)를 무시한 것이다.” 하고는 노하여 보지도 않고, 또 문지기로 하여금 문에서 거절하게 하였다. 공이 황공하여 새벽에 그 문에 이르렀으나, 밤이 깊도록 들어가지 못하였다. 여러 날이 지나서야 겨우 접견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
○ 공이 책상 앞에 단정하게 앉아 있을 때에, 밤중에 도둑이 그 집에 들어와서 물건을 모두 가져 가는데, 공은 졸지도 않으면서 마치 진흙으로 만들어 놓은 인형처럼 앉아 있었다.도둑이 간 지 오래 되어서 집안 사람이 비로소 이를 알고 쫓아갔으나 잡지 못하여 분통해 하니, 공이 말하기를, “이보다 더 심한 도둑이 와 마음 속에서 싸우고 있는데, 어느 겨를에 바깥 도둑을 걱정하리오.” 하였다. 《정암집(靜菴集)》 ○ 선배의 극기의 공[克己之功]이 이와 같았다.
○ 조선의 어진 정승으로 황희(黃喜)와 공을 첫째로 꼽는데, 다만 두 사람은 모두 고려조에 과거에 올랐던 사람들이었으므로 청의(淸議)를 주장하는 자는 이 때문에 그들을 부족하게 여겼다. 《병진정사록》


신개(申槩) 기해생. 경오년 생원(生員)ㆍ진사(進士)

신개는 자는 자격(子格)이며, 호는 인재(寅齋)이고, 또 다른 호는 양졸당(養拙堂)이다. 태조 계유년(1393)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기미년(1439)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궤장(几杖)을 받고 을축년(1445)에 죽으니 나이가 72세였다. 시호는 문희공(文僖公)이고, 종묘에 배향되었다.
○ 공은 어렸을 때부터 어른과 같았으며, 일찍이 외조모 원씨(元氏)에게서 컸다. 나이 겨우 세 살이었는데, 창벽 사이에 그림을 그리고 더럽힌 자가 있거늘 외조모가 아이들을 모아 놓고 힐책하니, 아이들이 다투어 변명하였으나 공은 홀로 말하지 않고 제 키를 가리키는데, 과연 키가 그림 그린 벽에 한자 남짓 미치지 못하였다. 외조모가 기특하게 여겨 말하기를, “반드시 이 아이가 우리 집을 일으킬 것이다.” 하였다. 《해동잡록》
○ 평소에 말을 빠르게 하지 않았고 당황한 얼굴 빛을 짓지 않았으며, 종들에게 죄가 있어도 매를 때리지 않았다. 《해동잡록》
○ 한원(翰苑)에 있을 때에 태조가 실록을 보고자 하였는데, 공이 소를 올려서 불가함을 논하니, 태조가 그만두었다. 《사가집(四佳集)》 <묘비(墓碑)>
○ 성격이 강직하여 여러 차례 글을 올려서 대신의 잘못을 꺾었으므로 시론(時論)이 갸륵하게 여겼다. 태종이 일찍이 이르기를, “신개는 간신(諫臣)의 기풍이 있다.” 하였다. 을사년(1425)에 강음(江陰)에 좌천되었다. 《사가집》 <묘비>
○ 일찍이 언충신(言忠信)ㆍ행독경(行篤敬)ㆍ소심익익(小心翼翼)ㆍ대월상제(對越上帝) 등 열네 글자를 써서 세 아들에게 보이면서 이르기를, “사군자(士君子)의 마음엔 마땅히 이것으로 목표를 삼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귀령(李貴齡) 시호는 강호(康胡)이다. 《조야기문(朝野記聞)》과 <상신고(相臣攷)>에 기록되었다. 혹은 검교정승(檢校政丞)이 되었다고 하였다.


하연(河演) 아들 셋이 있었는데, 내외 증손(曾孫)이 백여 인이나 되었다.

하연은 자는 연량(淵亮)이며, 호는 경재(敬齋)이고,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태조 병자년(1396)에 생원ㆍ진사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예문관 대제학을 거쳐 을축년(1445)에 정승이 되어 영의정에 이르렀고, 궤장을 받고 치사하였다. 단종(端宗) 계유년(1453)에 죽으니 나이는 78세였다. 시호는 문효공(文孝公)이며, 문종(文宗)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 정유년에 동부대언(同副代言)이 되었는데, 태종이 그의 손을 잡으면서 이르기를, “경이 이 자리에 오른 이유를 아는가.” 하자, 공이 “모릅니다.” 고 대답하니, 태종이 이르기를, “전일 경이 사헌부에 있을 때 능히 헌직(憲職)을 감당했으므로, 내가 그때에 경을 알았다.” 하였다.
○ 공은 평상시에 늘 검은 사모를 썼는데, 그 뿔은 빼어 버리고 향을 태우며 고요히 앉아서 종일토록 읊조렸다. 공의 시는 기벽(奇僻)하여 옛시의 격조에 가깝고 필법이 굳세어 체를 얻었다. 일찍이 춘방(春坊)에 있을 때에 시를 지어 손수 쓰니, 하륜(河崙)이 감탄하기를, “하문학(河文學)이 시를 지어서 하문학이 썼으니, 역시 인간 보물이다.” 하였다. 《필원잡기》
○ 공이 일찍이 경상도의 안사(按使)가 되었을 때에 남지(南智)가 아사(亞使)가 되었는데, 공이 매우 중히 여겨 하관으로 대우하지 않았다. 일찍이 진주에 이르러 아름다운 산천의 경치를 찬탄하였으니, 공이 진주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남지가 얼굴빛을 고치면서 말하기를,“산수는 비록 아름다우나, 품관(品官)은 몹시 좋지 못합니다.” [이것은 진주 출신인 하연을 가리킨 것임] 하니, 공이 크게 웃었다. 사람들이 공의 아량에 심복하였더니, 뒤에 공은 남지와 함께 정승에 올랐다. 《필원잡기》
○ 공은 평안하고 검소하며 강직하고 명철하며 풍채가 단아하였다. 효도를 다하여 어버이를 섬겼고, 종족간에 매우 화목하였으며, 옛친구를 버리지 않고 경조사에 인사를 빠뜨리지 않았다. 살림살이에는 힘쓰지 않고 기첩(妓妾)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규문(閨門)이 엄숙하였다.닭이 울면 일어나서 의관을 바로하고 대궐을 향하여 앉는데 좌우에는 도서(圖書)뿐이었다. 그에게 시를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흔연히 곧 붓을 잡고 쓰니 시상(詩想)이나 필법이 늙을수록 더욱 절묘하였고, 천성이 옛 도리를 좋아하여 일마다 모두 옛사람을 자기의 목표로 삼았으며, 사대부를 예법으로 대우하여 문에서 오래 기다리는 손님이 끊일 적이 없었다.오랫동안 이조에 있었으나 사사로운 청탁을 좋아하지 않았고, 정승이 되었을 때에는 법을 좇아 흔들리지 않고 시종 여일하게 근신하였으니, 그는 태평 시대의 문치(文治)를 이룩한 재상이었다. 또 학문이 정하고 깊고 문장이 법도 있고 우아하여 일세의 우러름을 받았다. 공이 죽은 뒤, 유명(遺命)에 따라 불사(佛事)를 짓지 않았다.
○ 공은 부모를 섬기는데 몹시 효도하였다. 두 어버이의 나이가 모두 80이었는데, 어버이 마음을 기쁘게 할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구경당(具慶堂)을 짓고 설날이나 명절이 되면 반드시 잔을 들어 수(壽)를 올리니, 사대부들이 영광으로 여겨서 시를 지어 찬송하는 이들도 있었다.구경당은 초가로 지어 해마다 새로 이엉을 하였는데, 어버이가 돌아가시자, 영모(永慕)로 편액을 고쳤다. 자질들이 기와로 바꾸기를 청하니, 공이 탄식하기를, “선인(先人)이 거처하시던 곳을 어떻게 고치겠는가. 역시 그대로 두어, 후대의 사람으로 하여금 선인의 검소함을 본받게 하여라.” 하였다.


황보인(皇甫仁)

황보인은 자는 사겸(四兼) 또는 춘경(春卿) 이며, 호는 지봉(芝峯)이고,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태종 갑오년(1414)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묘년(1447)에 정승이 되어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문종(文宗)의 유명을 받아서 단종(端宗)을 돕다가, 계유년(1453)에 김종서(金宗瑞)와 함께 죽었는데, 숙종조(肅宗朝)에 관작이 회복되었고 시호는 충정공(忠定公)이다.
○ 공은 일찍이 차원부(車原頫)의 원통함을 간절히 논하느라고 사모가 거꾸로 쓰여진 줄을 몰랐더니, 원부가 그로 인하여 특별히 신설(伸雪)되었었다. 그때 사람들이 그를 사모를 거꾸로 쓴 시종이라 일컬었다. 《해동잡록》
○ 공의 무덤이 파주(坡州) 천참(泉站) 서편 발흥(勃興) 큰 길 가에 있었는데, 그 묘표(墓表)의 글에는 커다랗게 ‘영천 황보공지묘(永川皇甫公之墓)’ 라 새겼고, 또 작은 글씨로, ‘공 휘 인 노산조 수상 경태 계유 정난시 병 이자 일손 피화(公諱仁魯山朝首相景泰癸酉靖難時幷二子一孫被禍)’ 라는 스물 두 글자를 새겼고,또 ‘정덕 기묘 이월 입석 거 피화 위 육십 칠년(正德己卯二月立石距被禍爲六十七年)’ 이라 새겼는데, 수장(收葬)한 이나 그 무덤에 표석을 세운 이의 이름은 모두 나타내지 않았다. 《미수기언(眉叟記言)》


남지(南智)

남지는 자는 지숙(智叔)이며, 본관은 의녕(宜寧)이고, 영상 남재(南在)의 손자이다. 음사로서, 기사년(1449)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는 충간공(忠簡公)이다.
○ 공은 낮은 벼슬에 있을 때부터 담력과 뜻이 있었다. 사헌부 지평이 되었을 때에, 도승지 조서로(趙瑞老)가 간음을 하였다는 비방이 있었으나 감히 먼저 발언하는 자가 없었는데, 내가 하겠다고 공이 말하였다. 어느날 일찍 조회에 들어가면서 소유(所由 사헌부의 이속) 20여 인으로 하여금 먼저 이르러 조서로가 들어오기를 기다려서 그의 구사(丘史)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묶어오게 한 뒤,곧 조방(朝房)에서 국문하기를, “너의 주인이 아무날 어느 곳에 갔으며 어느 집에서 잤느냐.” 하니, 구사들이 모든 것을 실상대로 말하였다. 또 간음한 집의 심부름하는 노파를 잡아서 국문하였더니 숨기지 못하였다. 세종이 그때 간음법(奸淫法)을 중하게 여겼기 때문에 조서로를 곧 서인으로 삼았다. 《소문쇄록》
○ 하연(河演)이 경상도 감사로 있을 때에 공이 새로 경상도 도사로 임명되어 온단 말을 듣고 걱정하기를, “이 사람은 나이 젊고 문벌이 높은 집의 자제여서 필시 직무를 옳게 보지 못할 것이니, 내 장차 어찌할꼬.” 하였다. 그가 처음 이르러서 뵈러 들어올 적에,하연이 시험삼아 판단하기 어려운 공문서를 주면서 말하기를, “그대는 이를 처결해 오라.” 하고 공이 물러간 뒤에 사람을 시켜서 엿보게 하니 그가 장중(帳中)에서 손님과 술을 많이 마시고 있었다. 하연이 탄식하기를, “과연 나의 추측과 틀림없구나.” 하였더니, 공이 이튿날 술이 깨자 일어나 그 문서를 한 번 훑어보고는 손톱으로 그어 표시를 하여 하연에게 드리면서 말하기를,“아무 글자는 빠졌으니 아마 그릇된 것 같고, 아무 일은 그릇되었으니 분변하여야겠습니다.” 하므로 하연이 자기도 모르게 깜짝 놀랐다. 그뒤부터 특별히 간곡하게 대우하였다. 그뒤 하연이 정승으로 있을 때에 공도 정승이 되니, 하연이 이르기를, “감사가 발이 빠르지 못했더라면 거의 도사에게 밟힐 뻔하였구나.” 하였다. 《소문쇄록》
○ 안평대군(安平大君)이 공과 더불어 혼인하기를 청하니, 공이 이르기를, “내 여식이 있으나 얼굴이 못생겨서 귀댁의 며느리가 되기엔 어려우니, 한번 간선을 해 보시오.” 한 즉, 안평이 말하기를, “신부의 선을 직접 보는 것은 궁중의 일이니, 내 어찌 감히 참람한 짓을 하리요.대감은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오. 신부의 잘 나고 못난 것을 나는 개의치 않소.” 하였다. 공이 또 말하기를, “늙은 여종 하나를 보내어 내 딸을 보시오. 후회가 있을까 걱정됩니다.” 하니, 안평이 듣지 않았다. 공은 그대로 술을 마시다가 취하자 일어나면서 말하기를, “한 가지 일이 있으니 다시 여쭈려 합니다.마침 하양(河陽)에 사는 소경 김학로(金鶴老)를 만났습니다. 그는 점을 잘 치는데, 우리 집의 길흉을 말한 것이 다 맞았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댁의 두 딸이 다 운이 좋지 못해서 일생을 잘 지내기 어렵다.’ 하였는데, 혹 이것이 누가 될까 염려됩니다. 맏딸은 임영대군(臨瀛大君)에게 시집갔는데, 지금 홀로 살고 있고, 이 딸은 둘째입니다.” 하니,안평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대감은 어찌 무당과 점장이의 말을 믿습니까. 대인(大人)이 요망스런 말을 물리치는 뜻에 어긋나는가 합니다.” 하였다. 이에 공이 곧 말하기를, “그러면 승낙합니다. 우리 같은 한족(寒族)이 종실과 혼인하는 것은 실로 다행입니다. 다만 박복한 딸이고, 얼굴도 잘 생기지 못하여 뒷말이 있을까 염려했더니,이제 대군의 뜻이 확고하니 어찌 감히 사양하여 피하겠습니까.” 하였다. 이해에 안평의 아들 우직(友直)이 공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다음해 임신년에 공이 풍병(風病)을 얻어 세상일에 상관을 못했다. 또 그 다음해에 안평이 죄를 입었는데, 공이 사돈이면서도 연루되지 않은 것은 병이 났기 때문이었다. 《소문쇄록》 ○ 임영대군의 부인 남씨(南氏)는 아들을 못 낳았기 때문에 쫓겨났다.
○ 공이 죽은 후 사위 우직 때문에 시호를 얻지 못하더니, 성종(成宗) 기유년(1489)에 그의 손자 남흔(南忻)이 소를 올려서 청하자, 대신에게 의논하여 시호를 충간(忠簡)이라 하였다. 《소문쇄록》


[주D-001]운검(雲劍) : 의장(儀仗)에 쓰는 큰 칼을 차고 임금의 거둥에 따라다니며 호위하는 무사
[주D-002]대포(大酺) : 임금이 백성에게 주식(酒食)을 나누어 주고, 마음껏 놀게 하는 것.
[주D-003]소공대(召公臺) : 주(周)의 소공(召公)이 자기 관내(管內)의 백성에게 은덕을 베풀었으므로 백성들이 그의 행차가 감당(甘棠)나무 밑에서 멈추었다가 떠난 후 감당나무를 보호하고 시를 지은 일이 있다.
[주D-004]구사(丘史) : 관원이 출입할 때, 모시고 다니는 하인.
[주D-005]직부(織婦)를 내쫓고 : 노상(魯相) 공의휴(公儀休)가 자기 집에서 베를 잘 짜는 부인을 내쫓으면서 “내집에서 베를 짜면 민간의 부인이 무슨 직업을 가지겠느냐” 하였다는 고사에서 온 것.
[주D-006]사단(史丹)의 일 : 한대(漢代)의 사단(史丹)이 태자를 바꾸도록 간한 사실을 말한다.
[주D-007]양수척(楊水尺) : 사냥을 하거나 버드나무로 그릇 등을 만들어 팔았던 천민.
[주D-008]강무(講武) : 열병(閱兵)을 겸한 사냥.

 

경상도(慶尙道)
순흥
(順興) 소수서원(紹修書院) 가정(嘉靖) 임인년에 세웠고 명종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안유(安裕)ㆍ안축(安軸) 자는 당지(當之)이며, 호는 근재(謹齋)요, 본관은 복주(福州)이다. 고려조에서 문과에 급제하여 찬성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고,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에 봉해졌다.ㆍ안보(安輔)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다.ㆍ주세붕(周世鵬) 호는 신재(愼齋)이며 참판을 지냈고 예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단계서원(丹溪書院) 효종 임진년에 세웠다. : 김담(金淡) 이조 판서를 지냈고, 시호는 문절공(文節公)이다.
기영사(耆英祠) 병진년에 세웠다. : 금축(琴軸) 호는 송계(松溪)이며, 진사이다.ㆍ남몽오(南夢鰲) 호는 삼송(三松)이며 진사이다.ㆍ박선장(朴善長) 호는 수서(水西)이며, 도사를 지냈다.ㆍ권호신(權虎臣) 호는 도은(陶隱)이며, 생원이다.
금성단(錦城壇) 영조 임술년에 세웠는데 은액충신신단(恩額忠臣神壇)이다. : 금성대군 유(錦城大君瑜)
도계견일사(道溪見一祠) 효종 정축년에 세웠다. : 이수형(李秀亨) 호는 도촌(桃村)이며 평시령(平市令)을 지냈다.ㆍ이여빈(李汝馪) 호는 취사(炊沙)이며 전적(典籍)을지냈다.
초계(草溪) 청계서원(淸溪書院) 가정 갑자년에 세웠다. : 이희안(李希顔) 명종조의 유일(遺逸)ㆍ김치원(金致遠) 호는 탁계(濯溪)이며, 찰방을 지냈고, 추향되었다.ㆍ이대기(李大期) 호는 설학(雪壑)이며, 정랑을 지냈다.
송원서원(松原書院) 강희(康熙) 임신년에 세웠다. : 안우(安遇) 호는 노계(蘆溪)이며, 현감을 지냈다.ㆍ노필(盧㻶) 호는 묵재(墨齋)이며, 지평을 지냈다.ㆍ안극가(安克家) 호는 뇌암(磊巖)이며, 현감을 지냈고 추향되었다.ㆍ노극성(盧克誠) 호는 매죽와(梅竹窩)이며 직장을 지냈고 추향되었다.
영주(榮州) 이산서원(伊山書院) 가정 무오년에 세웠고, 선조 갑술년에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
삼봉서원(三峯書院) 숭정 계미년에 세웠다. : 김이음(金爾音) 호는 삼로(三路)며, 본관은 함창(咸昌)이고, 호조 참판을 지냈다.ㆍ이해(李瀣) 명종조 사람ㆍ김개국(金盖國) 호는 만취(晩翠)이며, 정랑을 지냈고, 집의에 증직되었다.ㆍ김융(金隆) 호는 물암(勿巖)이며, 참봉을 지냈고, 승지에 증직되었다.
오계서원(汚溪書院) 만력 계미년에 세웠다. : 이덕홍(李德弘) 호는 간재(艮齋)이며, 현감을 지냈고 참판에 증직되었다.
의산서원(義山書院) 만력 경술년에 세웠다. : 이개립(李介立) 호는 성오당(省吾堂)이며, 현감을 지냈고 참판에 증직되었다.ㆍ김응조(金應祖) 호는 학사(鶴沙)이며 좌윤(左尹)을 지냈다.
장암서원(壯巖書院) 갑자년에 세웠다. : 홍익한(洪翼漢)ㆍ윤집(尹集)ㆍ오달제(吳達濟)
귀산정사(龜山精舍) 만력 을묘년에 세웠는데, 상현사(象賢祠)라고도 한다. : 김담(金淡)ㆍ박승임(朴承任) 호는 소고(嘯皐)이며 대사간을 지냈다.ㆍ김늑(金玏) 호는 백암(栢巖)이며, 이조 참판을 지냈고, 판서에 증직되었다.ㆍ김영조(金榮祖) 호는 망와(忘窩)이며, 이조 참판을 지냈고, 추향되었다.
사계정사(泗溪精舍) 효종 경자년에 세웠다. : 황효공(黃孝恭) 호는 귀암(龜巖)이다.ㆍ나이준(羅以俊) 호는 매헌(梅軒)이며 사간을 지냈다. 병자호란에 진사로서 홀로 성전위판(聖殿位版)을 배행(陪行)하였다.
용궁(龍宮) 삼강서원(三江書院) 숭정 계미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정몽주(鄭夢周)ㆍ이황(李滉)ㆍ유성룡(柳成龍)
소천서원(蘇川書院) 신사년에 세웠다. : 전원발(全元發) 호는 국파(菊坡)이며 고려조에서 병부 상서를 지냈고 축산부원군(竺山府院君)에 봉해졌다.
마산리사(馬山里社) 융경(隆慶) 무진년에 세웠는데 완택향사(浣澤鄕社)이다. : 정귀령(鄭龜齡) 호는 삼수(三樹)이며, 현감을 지냈고,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ㆍ정옹(鄭雍) 수찬을 지냈다.ㆍ정사(鄭賜) 직제학을 지냈으며 찬성에 증직되었다.ㆍ정환(鄭渙) 응교를 지냈다.ㆍ정광필(鄭光弼)
기천정사(箕川精舍) 현종 기유년에 세웠다. : 문근(文瑾) 기묘록(己卯錄)에 있다.ㆍ문관(文瓘) 근(瑾)의 아우이며, 호는 옥계(玉溪)고, 승지를 지냈다.ㆍ이구(李搆) 기묘록(己卯錄)에 있다.ㆍ이문흥(李文興) 호는 몽암(夢庵)이며, 대사성을 지냈다.ㆍ안준(安俊) 호는 노포(蘆浦)이며 고려조에서 판봉상(判奉常)을 지냈다.
충효사(忠孝祠) 갑신년에 세웠다. : 반유(潘濡) 찰방에 증직되었다.ㆍ반충(潘沖) 호는 관물당(觀物堂)이다.
용곡리사(龍谷里社) 을축년에 세웠다. : 강응청(姜應淸) 호는 삼산(三山)이며 인의(引儀)를 지냈다.ㆍ강제(姜霽) 호는 백석(白石)이며, 이조좌랑을 지냈다.ㆍ강우(姜䨞) 호는 석봉(石峯)이며, 현감을 지냈다.
개령(開寧) 덕림서원(德林書院) 임진년에 세웠고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 김종직(金宗直)ㆍ정붕(鄭鵬)ㆍ정경세(鄭經世)
예안(禮安) 도산서원(陶山書院) 만력 갑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ㆍ조목(趙穆)
역동서원(易東書院) 융경 경오년에 세웠고, 숙종 병술년에 사액하였다. : 우탁(禹倬)
청계서원(淸溪書院) 정미년에 세웠다. : 이식(李埴) 퇴계(退溪)의 아버지이며 진사이다.ㆍ이우(李堣) 호는 송재(松齋), 호조 참판을 지냈다. 퇴계의 숙부이다.ㆍ이해(李瀣)
분강서원(汾江書院) 숙종 기묘년에 세웠다. : 이현보(李賢輔)
향현사(鄕賢祠) 만력 임자년에 세웠다. : 이계양(李繼陽) 진사이며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퇴계의 조부이다.ㆍ김효려(金孝廬) 진사이며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동계정사(東溪精舍) 숙종 기묘에 세웠다. : 금난수(琴蘭秀) 호는 성성재(惺惺齋)이며, 현감을 지냈고, 승지에 증직되었다. 퇴계 문인인데 징역(徵辟)하여도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영양(英陽) 영산서원(英山書院) 효종 신묘년에 세웠고, 숙종 갑술년에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ㆍ김성일(金誠一)
향현사(鄕賢祠) 숙종 기사년에 세웠다. : 남민(南敏) 당(唐)의 안렴사(按廉使)였다. 신라가 영양군(英陽君)으로 봉하고, 의령 남씨(宜寧南氏)의 시조(始祖)로 삼았다. 본래의 성명은 김충(金忠)이며, 천보연간(天寶年間)에 중국 사신으로 왜(倭)에 갔다가 표류(漂流)되어 영해(寧海)에 표착되었다. 남으로부터 왔다 하여 성(姓)을 남(南)으로 하사하였다.
인동(仁同) 동락서원(東洛書院) 을미년에 세웠고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 장현광(張顯光)
오산서원(吳山書院) 만력 갑술년에 세웠고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길재(吉再)
소암서원(嘯巖書院) 갑술년에 세웠다. : 채몽연(蔡夢硯) 호는 투암(投巖), 이조 참의에 증직되었다.ㆍ채무(蔡楙) 호는 백포(栢浦), 병랑(兵郞)을 지냈다.
현암사(賢巖祠) 임신년에 세웠다. : 장잠(張潛) 호는 죽정(竹亭), 진사이다.
선산(善山) 금오서원(金烏書院) 융경 임신년에 세웠고, 만력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길재(吉再)ㆍ김종직(金宗直)ㆍ정붕(鄭鵬)ㆍ박영(朴英)ㆍ장현광(張顯光)
월암서원(月巖書院) 숭정 무진년에 세웠고 계유년에 사액하였다. : 김주(金澍) 호는 농암(礱巖)이며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고려조에서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냈다.ㆍ하위지(河緯地)ㆍ이맹전(李孟專) 단종 때 생육신(生六臣)이다.
낙봉서원(洛峯書院) 숭정 병자년에 세웠다. : 김숙자(金淑滋)ㆍ김취성(金就成) 호는 진락(眞樂), 처사이다.ㆍ박운(朴雲) 호는 용암(龍岩)이며 진사이다.ㆍ김취문(金就文) 호는 구암(久庵), 대사간을 지냈다.ㆍ고응섭(高應涉) 호는 왕곡(枉谷), 사성(司成)을 지냈다.
무동향현사(茂洞鄕賢祠) 임오년에 세웠다. : 전좌명(田佐命) 호는 성암(性庵), 좌랑을 지냈고, 우상(右相)에 증직되었다.ㆍ이우(李瑀) 호는 옥산(玉山), 이(珥)의 아우이다. 군자정(軍資正)을 지냈다.ㆍ전윤무(田胤武) 호는 가정(檟亭), 현감을 지냈다.
□□영당(□□影堂) 숭정 임오년에 세웠다. : 장현광(張顯光)
칠곡(漆谷) 사양서원(泗陽書院) 효종 신묘년에 세웠다. : 정구(鄭逑)ㆍ이윤우(李潤雨) 호는 석담(石潭), 대사간을 지냈고,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군위(軍威) 남계서원(南溪書院) 태창(泰昌) 경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유성룡(柳成龍) ○ 또 김유신 사당이 있고, 제사(諸祠)조에 들어 있다.
칠원(漆原) 덕연서원(德淵書院) 신묘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주세붕(周世鵬)ㆍ배세적(裵世績) 호는 정곡(靜谷), 현감을 지냈다.ㆍ배석지(裵錫祉) 호는 율리(栗里), 현감을 지냈다.ㆍ황협(黃悏) 호는 독회당(獨悔堂), 처사이다.ㆍ주박(周博) 세붕(世鵬)의 아들. 자는 약지(約之), 호는 귀봉(龜峯), 교리를 지냈다.
동래(東萊) 충렬사(忠烈祠) 을사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송상현(宋象賢)ㆍ윤흥신(尹興新) 다대포(多大浦)의 첨사를 지냈다.ㆍ노개방(盧蓋邦) 교수(敎授)를 지냈으며 승지를 증직하였다.
충렬사(忠烈祠) 을축년에 세웠다. : 정발(鄭撥) 부산 첨사를 지냈다.ㆍ조영규(趙英珪) 양산(梁山) 군수이다. 호조 참판에 증직되었다.ㆍ문덕겸(文德謙) 교생(校生)이다.ㆍ김희수(金希壽) 비장(裨將)이다ㆍ송백(宋伯) 호장(戶長)을 지냈다.ㆍ김상(金祥) 부민(府民)이다.ㆍ송봉수(宋鳳壽) 비장을 지냈고, 판관에 증직되었다.ㆍ신여로(申汝櫓) 겸인(傔人)이다. ○ 문 밖에 정포(旌褒)된 이는 상현의 첩 금섬(金蟾)과 발(撥)의 첩 애향(愛香)이다.
함안(咸安) 서산서원(西山書院) 숙종 갑신년에 세웠으며 계사년에 사액하였다. : 이맹전(李孟專)ㆍ조려(趙旅)ㆍ원호(元昊)ㆍ김시습(金時習)ㆍ성담수(成聃壽)ㆍ남효온(南孝溫) 단종 때의 생육신이다.
도림서원(道林書院) 계미년에 세웠고 정축년에 사액하였다. : 정구(鄭逑)
덕암서원(德巖書院) 만력 정사년에 세웠다. : 조순성(趙純性) 동지좌중군(同知左中軍)을 지냈다. 태조가 여러 번 불러도 나아가지 않았다.ㆍ박한주(朴漢柱) 정언을 지냈으며, 승지에 증직되었다. 무오당적에 들었다. 호는 우졸재(迂拙齋)이다.ㆍ조종도(趙宗道) 호는 대소헌(大笑軒)이다.
송정서원(松亭書院) 임인년에 세웠다. : 조임도(趙任道) 지평에 증직되었다.
영산(靈山) 덕봉서원(德峯書院) 임오년에 세웠다. : 이후경(李厚慶) 호는 외재(畏齋), 현감을 지냈고 참의에 증직되었다.ㆍ이도고(李道攷) 호는 복재(復齋), 처사이다.
도천서원(道泉書院) 을해년에 세웠다. : 신사장(辛斯藏) 호는 곡강(曲江),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냈다.ㆍ이중(李中) 예조정랑을 지냈다.ㆍ배학(裵鶴) 호는 임천(林泉), 참봉을 지냈다.
함창(咸昌) 임호서원(臨湖書院) 신미년에 세웠다. : 표연말(表沿沫) 무오당적에 들었다.ㆍ홍귀달(洪貴達) 갑자화적에 들었다.ㆍ채수(蔡壽)ㆍ권달수(權達手)ㆍ채무일(蔡無逸) 호는 휴암(休庵), 헌납을 지냈고, 추향되었다.
도계정사(陶溪精舍) 경진년에 세웠다. : 유포(柳砲) 호는 가촌(嘉村), 현감을 지냈다.ㆍ유달준(柳達遵) 호는 대암(臺巖), 생원이다.ㆍ이겸(李謙) 호는 수헌(睡軒), 진사이다.ㆍ정윤해(鄭允海) 호는 서귀재(鋤歸齋), 참봉을 지냈다.ㆍ이영갑(李英甲) 호는 야옹(野翁), 도사를 지냈다.
아곡정사(雅谷精舍) 경진년에 세웠다. : 박눌(朴訥) 찰방을 지냈으며 참판에 증직되었다.ㆍ남영(南嶸) 호는 고산, 군수를 지냈다. 참판에 증직되었다.ㆍ박성민(朴成敏) 호는 수묵옹(守默翁)이다.ㆍ남근명(南近明) 호는 수운(峀雲), 현감을 지냈고 참판에 증직되었다.ㆍ유종인(柳宗仁) 호는 취미(翠微)이다.ㆍ홍약창(洪約昌) 호는 귀촌(龜村), 임진년에 순절하였다.
언양(彦陽) 반귀서원(磻龜書院) 임진년에 세웠다. : 정몽주(鄭夢周)ㆍ이언적(李彦迪)ㆍ정구(鄭逑)
양산(梁山) 송담서원(松潭書院) 정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백수회(白受繪) 호조 참의에 증직되었다.
충렬사(忠烈祠) 병자년에 세웠다. : 조영규(趙英圭) 군수를 지냈고, 참판에 증직되었다. 임진년에 순절하였다.
경산(慶山) 고산서원(孤山書院) 경오년에 세웠다. : 이황(李滉)ㆍ정경세(鄭經世)
장기(長鬐) 죽림영당(竹林影堂) 을유년에 세웠다. : 송시열
연일(延日) 오천서원(烏川書院) 만력 무자년에 세웠으며 계축년에 사액하였다. : 정습명(鄭襲明) 고려조에서 추밀(樞密)을 지냈으며, 시호는 영양공(榮陽公)이다.ㆍ조몽주(趙夢周)
□□방묘(□□傍廟) 경신년에 세웠다. : 정사도(鄭思道) 호는 설곡(雪谷)이다.ㆍ정철(鄭澈) 선조조의 정승
자인(慈仁) 관란서원(觀瀾書院) 경자년에 세웠다. : 이언적(李彦迪)
용계서원(龍溪書院) 기축년에 세웠다. : 최문병(崔文炳) 호는 성재(省齋), 좌윤을 증직하였다.ㆍ이광후(李光後) 호는 매헌(梅軒)이다.ㆍ이창후(李昌後) 호는 죽헌(竹軒)이다.ㆍ김응명(金應鳴) 호는 취죽당(翠竹堂), 생원이다.
울산(蔚山) 구강서원(鷗江書院) 무오년에 세웠으며, 갑술년에 사액하였다. : 정몽주(鄭夢周)ㆍ이언적(李彦迪)
신녕(新寧) 백학서원(白鶴書院) 무오년에 세웠다. : 이황(李滉)ㆍ황준량(黃俊良) 호는 금계(錦溪), 자는 중거(仲擧)이다. 지평(持平)과 성주 목사(星州牧使)를 지냈다.
귀천서원(龜泉書院) 병인년에 세웠다. : 권수(權銖) 임진 때 사람 ○ 다른 책엔 “명천사(鳴泉祠) 현감 윤명운(尹明運)을 향사한다.”고 되어 있다.
하양(河陽) 금호서원(琴湖書院) 갑자년에 세웠다. : 허조(許稠) 세종조의 정승이다.
밀양(密陽) 예림서원(禮林書院) 만력 정축년에 세웠고 숭정 을유년에 사액하였다. : 김종직(金宗直)ㆍ박한주(朴漢柱)ㆍ신계성(申季誠) 호는 송계(松溪), 처사이다.
삼강향현사(三江鄕賢祠) 가정 계해년에 세웠다. : 민구령(閔九齡) 호는 욱재(勗齋), 처사다. 다섯 형제가 삼강(三江)에 집을 짓고 살고, 우애가 매우 두터웠다. 무신[虎臣]이 천랑(薦郞)하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아니하였다.ㆍ민구소(閔九韶) 호는 경재(敬齋)이다.ㆍ민구연(閔九淵) 호는 우우재(友于齋)이다.ㆍ민구주(閔九疇) 호는 무명당(無名堂)이다.ㆍ민구서(閔九叙) 호는 삼매당(三梅堂)이다.
중봉충효사(中峯忠孝祠) 정해년에 세웠다. : 손인갑(孫仁甲)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義兵將)이다.ㆍ노개방(盧盖邦) 교수였다. 임진란 때 함께 죽었다.ㆍ손약해(孫若海) 인갑(仁甲)의 아들이다. 함께 죽었다.ㆍ신동현(申東顯) 호는 매당(梅堂), 판관에 증직되었다.
승려사우(僧侶祠宇) : 서산대사 휴정(西山大師休靜)ㆍ홍제당 유정(弘濟堂惟政)ㆍ기허당 영규(奇虛堂靈圭) 모두 임진란 때 의병장이다.
청도(淸道) 자계서원(紫溪書院) 만력 무인년에 세웠고 현종 신축년에 사액하였다. : 김극일(金克一) 호는 절효(節孝), 일손(馹孫)의 아버지이다. 지평을 지냈고, 집의에 증직되었다.ㆍ김일손(金馹孫)ㆍ김대유(金大有) 기묘록(己卯錄)에 있다.
남계서원(南溪書院) 숙종 경진년에 세웠다. : 김지대(金之垈) 고려조에서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냈고, 시호는 영헌공(英憲公)이다.
선암서원(仙巖書院) 융경 무진년에 세웠다. : 박하담(朴河淡) 호는 소요당(消遙堂), 생원이다. 효행으로 여러 번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자는 응청(應淸)이다.
남해(南海) 충렬사(忠烈祠) 숭정 계유년에 세웠으며, 영조 때 사액하였다. : 이순신(李舜臣)
단성(丹城) 도천서원(道川書院) 고려 때 창건하였으며 만력 임자년에 중건(重建)하였다. : 문익점(文益漸) 호는 삼우당(三憂堂)이며, 우문제학(右文提學)을 지냈고, 시호는 충선공(忠宣公)이다.
두릉서원(杜陵書院) 무자년에 이건(移建)하였다. : 권도(權濤) 호는 동계(東溪), 대사간을 지냈고,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도정서원(道正書院) 경진년에 세웠다. : 정탁(鄭琢) 선조조의 정승
청곡향현사(淸谷鄕賢祠) 임오년에 세웠다. : 이천경(李天慶) 호는 신당(新堂), 본관은 벽진(碧珍), 남명(南冥)의 문인이다.
거창(居昌) 도산서원(道山書院) 현종 병신년에 세웠으며 임인년에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정온(鄭薀)
완계서원(浣溪書院) 현종 갑진년에 세웠으며 숙종 경신년에 사액하였다. : 김식(金湜)
용원사우(龍源祠宇) 병인년에 세웠다. : 문위(文緯) 자는 순부(純夫), 호는 모계(茅溪), 본관은 단성(丹城), 거창(居昌)에 이거(移居)하였다. 남명(南冥)과 덕계(德溪)의 문인이다. 독행(篤行)으로 천거되어 교관(敎官)에 제수되었다.
원천서원(源泉書院) 신묘년에 세웠다. : 윤순거(尹舜擧)ㆍ변벽(卞璧) 호는 귀산(龜山)이다.ㆍ전팔고(全八顧) 호는 원천(源泉)이다.
포충사(褒忠祠) 영종 정사년에 세웠으며 무오년에 사액하였다. : 이술원(李述原) 무신년에 순절(殉節)하였으며, 대사헌에 증직되었다.
경충사(景忠祠) 결(缺) : 신명익(愼溟翊) 승지에 증직되었다.
용천향현사(龍泉鄕賢祠) 결(缺) : 형사보(刑士保)ㆍ유자방(柳子芳)ㆍ이계준(李繼俊)ㆍ전팔고(全八顧)ㆍ전팔급(全八及)ㆍ서숙(徐䎘)
성주(星州) 천곡서원(川谷書院) 가정 무오년에 세웠고 계유년에 사액하였다. : 정이천(程伊川)ㆍ주자(朱子)ㆍ김굉필(金宏弼)ㆍ정구(鄭逑)ㆍ장현광(張顯光)
충현사(忠賢祠) 만력 임인년에 세웠다. : 이조년(李兆年) 대제학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열공(文烈公)이다.ㆍ이인복(李仁復) 고려조에서 대제학을 지냈고,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호는 초은(樵隱),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ㆍ이숭인(李崇仁) 호는 도은(陶隱), 고려조에서 대제학을 지냈다. 태조조에 들어 있다.ㆍ정곤수(鄭崑壽) 선조조의 명신
향현사(鄕賢祠) 병신년에 세웠다. : 김맹성(金孟性) 호는 지지당(止止堂), 이조 정랑이다.ㆍ도형(都衡) 호는 행정(杏亭)이며 병조 좌랑이다.ㆍ송희규(宋希奎) 을사당적에 들어 있다.ㆍ김희삼(金希參) 호는 칠봉(七峯), 부사를 지냈다.ㆍ홍계현(洪繼玄) 호는 대암(臺巖), 처사이다ㆍ여희림(呂希臨) 지평을 지냈다.
회연서원(檜淵書院) 천계 임술년에 세웠으며 숙종 경오년에 사액하였다. : 정구(鄭逑)ㆍ김우옹(金宇顒)ㆍ이윤우(李潤雨)
노강영당(老江影堂) 숙종 신묘년에 세웠다. : 송시열(宋時烈)
유계서원(柳溪書院) 숙종 임오년에 세웠다. : 정곤수(鄭崑壽)ㆍ이순(李淳) 호는 야로(野老)이다.ㆍ박찬(朴澯) 호는 설봉(雪峯)이다.
청천서원(晴川書院) 임진년에 세웠다. : 김우옹(金宇顒)ㆍ김담수(金聃壽) 참봉을 지냈으며 호는 서계(西溪)이다.ㆍ박이장(朴而章) 이조 참판을 지냈으며 호는 용담(龍潭)이다.
신계향현사(新溪鄕賢祠) 숙종 계유년에 세웠다. : 이승(李承) 호는 청휘당(晴暉堂), 별제(別提)에 증직되었다.
향현사(鄕賢祠) 숭정 경오년에 세웠다. : 송사이(宋師頤) 호는 신연(新淵), 참봉을 지냈다.ㆍ이홍량(李弘量) 호는 육일헌(六一軒), 참봉을 지냈다.ㆍ이홍우(李弘宇) 호는 모재(茅齋), 현감을 지냈다.ㆍ이홍기(李弘器) 호는 용재(容齋), 현감을 지냈다.
안봉영당(安峯影堂) 숭정 을해년에 세웠다. : 이장경(李長庚) 고려조 사람. 농서군공(隴西郡公)ㆍ광산부원군(廣山府院君)에 봉해졌다.ㆍ이백년(李百年) 밀직사사(密直司事)를 지냈다.ㆍ이천년(李千年)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다.ㆍ이만년(李萬年) 시중(侍中)에 추봉되었다.ㆍ이억년(李億年) 문과에 합격하였다.ㆍ이조년(李兆年) 위에 보라.ㆍ이인기(李麟起) 평양 부윤을 지냈다.ㆍ이승경(李承慶) 평장사를 지냈다.ㆍ이포(李褒) 문하시중을 지냈다.ㆍ이원구(李元具) 호는 가정(稼亭), 성산군(星山君)을 봉했다.ㆍ이인복(李仁復) 위에 보라.ㆍ이인임(李仁任) 출향(黜享)되었다.ㆍ이인민(李仁敏)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이다.ㆍ이숭인(李崇仁) 앞에 있다.ㆍ이직(李稷) 태조조의 정승ㆍ이제(李濟) 태조조의 명신ㆍ이사후(李師厚) 한성윤(漢城尹)이다.ㆍ이육(李稢) 호는 지강(芝江), 감사를 지냈다.ㆍ이광적(李光廸) 공조 판서를 지냈다.
덕봉충렬사(德峯忠烈祠) 경진년에 세웠다. : 박영서(朴永緖) 갑자년 이괄의 변에 들어 있다.
옥천충렬사(玉川忠烈祠) 을사년에 세웠다. : 이사룡(李士龍) 성주 포수(星州砲手)인데, 청 나라가 명 나라를 칠 때 청 나라에 징발되어 가서 탄환을 빼고 공포를 세 번 쏘다가 발각되어 난작(亂斫) 살해되었다.
안의(安義) 용문서원(龍門書院) 만력 임오년에 세웠고, 현종 임인년에 사액하였다. : 정여창(鄭汝昌)ㆍ임훈(林薰) 명종조의 유일ㆍ임운(林芸) 호는 첨모당(瞻慕堂), 연은전(延恩殿) 참봉을 지냈다.ㆍ정온(鄭薀)
성천서원(星川書院) 계미년에 세웠다. : 송준길(宋浚吉)ㆍ이숙(李䎘) 숙종조의 정승
역천사우(嶧川祠宇) 숭정 을해년에 세웠다. : 정유명(鄭惟明) 호는 역양(嶧陽), 진사이다.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본관은 초계(草溪), 온(蘊)의 아버지이다. 효성이 지극하였다.ㆍ임득번(林得蕃) 호는 석천(石泉), 진사이다. 지평에 증직되었다.
귀연사우(龜淵祠宇) 갑술년에 세웠다. : 신권(愼權) 호는 요수(樂水), 선교랑(宣敎郞)을 지냈다.ㆍ성팽년(成彭年) 호는 석곡(石谷), 진사이다. 지평에 증직되었다.
황암사우(黃巖祠宇) 정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곽준(郭䞭) 《임진록(壬辰錄)》에 들어 있다.ㆍ조종도(趙宗道) 위에 보라.ㆍ정용(鄭庸)ㆍ유개(劉盖) 두 의사(義士)의 사당은 따로 있다.
산청(山淸) 서계서원(西溪書院) 만력 병오년에 세웠으며 정사년에 사액하였다. : 오건(吳健) 선조조의 명신
영해(寧海) 단산서원(丹山書院) 만력 병오년에 세웠다. : 우탁(禹倬)ㆍ이곡(李穀)ㆍ이색(李穡)
인산서원(仁山書院) 병자년에 세웠다. : 이휘일(李徽逸) 참봉
구봉정사(九峯精舍) 현종 병오년에 세웠다. : 박의장(朴毅長) 자는 사강(士剛), 본관은 무안(務安)이다. 병사(兵使)를 지냈으며, 호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임진왜란 때 경주를 탈환하였고 다섯 번 병사를 지내는 동안 청렴하고 근신하기가 한결 같았다.ㆍ박홍장(朴弘長) 의장(毅長)의 아우, 자는 사임(士任), 목사를 지냈다.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적에게 굽히지 아니하였으므로 나라의 명령을 욕되게 하지 아니하였다.
향현사(鄕賢祠) 숭정 기사년에 세웠는데, 충렬사라고도 한다. : 박종문(朴宗文) 도사를 지냈다.ㆍ정담(鄭湛) 《임진록》에 들어 있다.
도계정사(陶溪精舍) 임진년에 세웠다. : 박선(朴璿) 호는 도와(陶窩), 교관을 지냈다.ㆍ권경(權璟) 호는 대은(臺隱), 지평을 증직하였고, 추향되었다.
함양(咸陽) 남계서원(藍溪書院) 가정 임자년에 세웠으며 만력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 정여창(鄭汝昌)ㆍ정온(鄭薀)ㆍ강익(姜翼) 호는 개암(介庵), 참봉을 지냈고, 추향되었다.
별사(別祠) 숭정 갑술년에 세웠다. : 유호인(兪好仁) 성종조의 명신
당주서원(溏洲書院) 만력 신사년에 세웠으며 현종 경자년에 사액되었다. : 노진(盧禛) 선조조의 명신
백연서원(栢淵書院) 기유년에 세웠으며 사액되었다. : 최치원(崔致遠) 자는 고운(孤雲), 시호는 문창후(文昌侯)이다.ㆍ김종직(金宗直)
도곡향현사(道谷鄕賢祠) 신사년에 세웠다. : 조승숙(趙承肅) 호는 덕곡(德谷), 고려조에서 부여 감무(扶餘監務)를 지냈다.ㆍ정복주(鄭復周) 호는 죽당(竹堂), 고려조에서 전농사(典農事)를 지냈다.ㆍ노숙동(盧叔同) 호는 송재(松齋), 대사헌을 지냈다. 청백리(淸白吏)이며, 옥계(玉溪)의 증조부이다.ㆍ노우붕(盧友朋) 호는 신고당(信古堂), 참봉을 지냈고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귀천 향현사(龜川鄕賢祠) 임오년에 세웠다. : 박맹지(朴孟智) 호는 춘당(春塘), 교리이다.ㆍ양관(梁灌) 호는 일로당(逸老堂), 동돈녕(同敦寧)을 지냈다.ㆍ강한(姜漢) 호는 금헌(琴軒), 현감을 지냈다.ㆍ표연말(表沿沫)ㆍ양희(梁喜) 호는 구졸재(九拙齋), 이조 참판을 지냈다.ㆍ하맹보(河孟寶) 호는 우계(愚溪)이다.
영덕(盈德) 신안영당(新安影堂) 임오년에 세웠다. : 주자(朱子)
남강서원(南江書院) 천계 신유년에 세웠다. : 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
흥해(興海) 곡강서원(曲江書院) 만력 병오년에 세웠다. : 이언적(李彦廸)ㆍ조경(趙絅)
영천(永川) 임고서원(臨皐書院) 가정 을묘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정몽주(鄭夢周)ㆍ장현광(張顯光)
도잠서원(道岑書院) 만력 계축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조호익(曺好益) 임진란 때 의병장이다.
도계향사(道溪鄕社) 숙종 정해년에 세웠다. : 박인로(朴仁老) 만호이다. 호는 무하옹(无何翁)이다.
입암서원(立巖書院) 계미년에 세웠다. : 장현광(張顯光)ㆍ정사진(鄭四震) 호는 수암(守庵), 세마(洗馬)를 지냈다.
송곡서원(松谷書院) 임오년에 세웠다. : 유방선(柳方善)ㆍ곽순(郭珣)ㆍ이현보(李賢輔)ㆍ심지원(沈之源) 호는 만사(晩沙)이다.
경주(慶州) 서악서원(西岳書院) 가정 신유년에 세웠고 천계 계해년에 사액하였다. : 설총(薛聰) 시호는 홍유후(弘儒侯)이다.ㆍ김유신(金庾信)ㆍ최치원(崔致遠)
옥산서원(玉山書院) 융경 임신년에 세웠고, 만력 계유년에 사액하였다. : 이언적(李彦迪)
숭렬사우(崇烈祠宇) 숙종 경진년에 세웠고 신묘년에 사액하였다. : 최진립(崔震立) 임진란의 여러 장수[諸將]조에 들어 있다.
귀강사우(龜岡祠宇) 경오년에 세웠고 화상이 있다. : 이제현(李齊賢) 호는 익재(益齋), 자는 중사(仲思)이다. 고려조에서 시중(侍中)을 지냈으며,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다.
동강사우(東江祠宇) 숙종 정해년에 세웠다. : 손중돈(孫仲暾) 호는 우재(愚齋), 이조 판서를 지냈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경절공(景節公)이다.
인산영당(仁山影堂) 기해년에 세웠다. : 송시열(宋時烈) 을사년에 조령(朝令)으로 중건하였다.
진주(晉州) 은열사(殷烈祠) 천희(天禧) 신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강민첨(姜民瞻) 병부 상서ㆍ추밀원사를 지냈으며, 시호는 은렬공(殷烈公)이다.
덕천서원(德川書院) 임인년에 세웠고 만력 기묘년에 사액하였다. : 조식(曺植)ㆍ최영경(崔永慶) 《기축록(己丑錄)》에 있다.
산성정충당(山城旌忠堂) 임진년에 세웠다. : 김천일(金千鎰)ㆍ최경회(崔慶會)ㆍ김시민(金時敏)ㆍ양산숙(梁山璹) 이하는 동무(東廡)ㆍ김상건(金象乾)ㆍ김준민(金俊民) 거제(巨濟) 사람ㆍ강희열(姜希烈) 의병장이다.ㆍ조경형(曺慶亨) 진해(鎭海) 사람ㆍ최기필(崔琦弼) 판관을 지냈다.ㆍ유함(兪晗)ㆍ이욱(李郁)ㆍ강희복(姜希復) 의병장이다.ㆍ장윤현(張胤賢) 수문장(守門將)을 지냈다.ㆍ박승남(朴承男) 판관을 지냈다.ㆍ하계선(河繼先)ㆍ최언량(崔彦亮)ㆍ고종후(高從厚) 이하는 서무(西廡)ㆍ이잠(李潛) 의병장이다.ㆍ이종인(李宗仁) 김해사람ㆍ성영달(成穎達) 우후(虞侯)이다.ㆍ장윤(張潤) 사천(泗川) 사람ㆍ윤사복(尹思復) 첨정(僉正)을 지냈다.ㆍ이인민(李仁民)ㆍ손승선(孫承善) 의병대장(義兵代將)이다.ㆍ정유경(鄭維敬) 주부(主簿)를 지냈다.ㆍ김태백(金太白) 수문장을 지냈다.ㆍ박안도(朴安道)ㆍ양제(梁齊) ○ 또 충민사(忠愍祠)가 있는데 김천일과 황진(黃進)과 최경회(崔慶會)와 장윤(張潤)만을 향사한다.
대각사우(大覺祠宇) 만력 경술년에 세웠다. : 하항(河沆) 호는 각재(覺齋), 징사(徵士)다.ㆍ손천우(孫天佑) 처사이다.ㆍ김대명(金大鳴) 군수를 지냈다.ㆍ하응도(河應圖) 현령을 지냈다.ㆍ이정(李瀞) 목사를 지냈으며, 임진년에 왜를 친 공이 있다.ㆍ유종지(柳宗智) 처사이다.ㆍ하수일(河受一) 정랑(正郞)을 지냈다.
종천사우(宗川祠宇) 정사년에 세웠다. : 하홍탁(河弘度) 호는 겸재(謙齋), 진사이다.ㆍ하진(河溍) 호는 태계(台溪), 헌납을 지냈다.ㆍ하연(河演) 시호는 문효공(文孝公), 세종조의 정승
임천사우(臨川祠宇) 을유년에 세웠다. : 이준민(李俊民) 자는 자수(子修), 호는 신암(新庵), 본관은 전의(全義)이다. 좌참찬을 지냈으며, 시호는 효익공(孝翼公)이다.ㆍ강응태(姜應台) 수찬을 지냈다.ㆍ하증(河憕) 처사이다.ㆍ한몽삼(韓夢參)
신당서원(新塘書院) 무자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조지서(趙之瑞) <갑자화적(甲子禍籍)>에 들었다.
정산향현사(鼎山鄕賢祠) 무인년에 세웠다. : 유백온(兪伯溫) 호는 정산(鼎山), 생원이다. : 정온(鄭蘊)ㆍ강숙경(姜叔卿)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ㆍ하조(河潮) 벼슬은 지평(持平)ㆍ이제신(李濟臣) 처사ㆍ이담(李淡) 처사ㆍ하천주(河天澍) 처사ㆍ진극경(陳克敬) 처사ㆍ박민(朴敏) 승지에 증직되었다.
□□사우 신축년에 세웠다. : 조임도(趙任道) 지평에 증직되었다.
인계향현사(仁溪鄕賢祠) : 최탁 벼슬은 익찬(翊贊)
사천(泗天) 귀계서원(龜溪書院) 만력 병오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이정(李禎) 호는 귀암(龜岩)이며, 자는 강이(剛而), 본관은 사천(泗川)이다. 중종 때 괴과(魁科)에 합격하여 부제학을 지냈다. : 김덕함(金德諴) 인조조의 명신
합천(陜川) 이연서원(伊淵書院) 만력 병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
신천서원(新川書院) 천계(天啓) 갑자년에 세웠다. : 하연(河演)ㆍ하우명(河友明) 호는 연당(蓮塘)ㆍ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냈으며 효도로써 정문(旌門)이 세워졌다.ㆍ하혼(河渾) 찰방(察訪)ㆍ김유(金紐) 호는 박재(璞齋), 별제(別提)를 지냈다.
용연서원(龍淵書院) 경자년에 세우고 정미년에 사액(賜額)하였다. : 박인(朴絪) 호는 무민당(无悶堂), 참봉이다.ㆍ박소(朴紹) 중종조의 명신(名臣)
명곡향현사(明谷鄕賢祠) 기미년에 세웠다. : 배일장(裴一長)
삼가(三嘉) 용암서원(龍巖書院) 만력(萬曆) 계묘년에 세우고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조식(曺植)
고암사우(古巖祠宇) 신미년에 세웠다. : 노흠(盧欽) 호는 입재(立齋), 진사이다.ㆍ이흘(李屹) 호는 노파(蘆坡), 고려 때 세마(洗馬)를 지냈다.ㆍ임진무(林眞懋) 호는 임곡(林谷), 진사이다.
평천서원(平川書院) 무진년에 세웠다. : 정옥량(鄭玉良) 호는 경재(耕齋), 현감(縣監)을 지냈으며, 승지(承旨)에 증직되었다. 효성이 지극하였고, 청백리(淸白吏)이다.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의령(宜寧) 덕곡서원(德谷書院) 갑오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
창녕(昌寧) 관산서원(冠山書院) 갑오년에 세웠고 신묘년에 사액하였다. : 정구(鄭逑)
연암향현사(燕巖鄕賢祠) 갑오년에 세웠다. : 이장곤(李長坤) 기묘(己卯)의 명현(名賢)ㆍ성안의(成安義) 호는 부용당(芙蓉堂), 승지를 지냈으며 이조 판서를 증직하였다.ㆍ이승언(李承彦) 벼슬은 참군(參軍), 찬성(贊成)에 증직되었다.
물계(勿溪) 세덕사(世德祠) 기축년에 세웠다. : 성송국(成松國) 고려 시중(侍中)이다.ㆍ성삼문(成三問)ㆍ성제원(成悌元)ㆍ성담수(成聃壽) 호는 문두(文斗)이다.ㆍ성수침(成守琛)ㆍ성수종(成守琮)ㆍ성운(成運)ㆍ성혼(成渾)ㆍ성윤해(成允諧) 호는 판곡(板谷), 현감을 지냈다.
봉화(奉化) 문암서원(文巖書院) 만력(萬曆) 갑진년에 세웠으며 사액(賜額)하였다. : 이황ㆍ조목(趙穆)
문계리사(文溪里社) 갑자년에 세웠다. : 금휘(琴徽) 벼슬은 사온령(司醞令)이다.ㆍ금원정(琴元貞) 호는 농수(聾叟), 진사(進士)이다.ㆍ유종개(柳宗介) 벼슬은 학유(學諭)를 지냈고 참의(參議)에 증직되었다.ㆍ금축(琴軸) 호는 남계(南溪), 참봉이다.
반천리사(盤泉里社) 병진년에 세웠다. : 김중청(金中淸) 호는 구전(苟全), 승지를 지냈다.
현풍(玄風) 도봉서원(道峯書院) 만력 정사년에 세웠는데,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ㆍ정구(鄭逑) ○ 서원 곁에 따로 사당이 있다.ㆍ곽승화(郭承華) 진사(進士)ㆍ원개(元凱) 참봉(參奉)ㆍ배신(裴紳) 호는 낙천(洛川), 자는 경여(景餘), 교관(敎官)을 지냈다.ㆍ곽율(郭) 호는 예곡(禮谷), 생원(生員)이다.
예연서원(禮淵書院) 숙종 갑인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곽준(郭䞭)ㆍ곽재우(郭再佑)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義兵將)이다.
송담사우(松潭祠宇) 숙종 계유년에 세웠다. : 박성(朴惺) 호는 대암(大庵), 부사(府使)를 지냈다.
청백사(淸白祠) 숙종 정해년에 세웠다. : 곽안방(郭安邦) 군수(郡守)ㆍ곽지운(郭之雲) 호는 연일당(燕日堂), 호조 좌랑을 지냈다.
풍기(豐基) 욱양서원(郁陽書院) 현종 임인년에 세웠다. : 이황(李滉)ㆍ황준량(黃俊良)
우곡서원(愚谷書院) 숙종 갑신년에 세웠다. : 유운룡(柳雲龍) 호는 겸암(謙巖), 목사(牧使)를 지냈다.ㆍ황섬(黃暹) 호는 식암(息庵), 대사헌을 지냈다.ㆍ이준(李埈) 호는 창석(蒼石), 부제학(副提學)이다.ㆍ김광엽(金光曄) 호는 죽일(竹日), 응교(應敎)를 지냈다.
예천(醴泉) 정산서원(鼎山書院) 만력(萬曆) 정축년에 세우고 숙종 정사년에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ㆍ조목(趙穆)
봉산서원(鳳山書院) 갑술년에 세웠다. : 권오복(權五福) 무오당적(戊午黨籍)에 들어 있다.
향현사(鄕賢祠) 숭정(崇禎) 무인년에 세웠다. : 조용(趙庸) 호는 송정(松亭), 예조 판서를 지냈으며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ㆍ윤상(尹祥)ㆍ권오복(權五福)ㆍ정총(鄭塚)
고령(高靈) 도암서원(道巖書院) 병오년에 세웠다. : 김면(金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義兵將)이다.ㆍ이기춘(李起春) 호는 옥산(玉山)이며 처사(處士)이다.
문연서원(文淵書院) 병자년에 세웠다. : 박윤(朴潤) 호는 죽연(竹淵)이다.ㆍ박택(朴澤) 호는 요락당(樂樂堂), 처사이다.ㆍ윤규(尹奎) 호는 월오(月塢), 처사이다.ㆍ박정번(朴廷璠) 호는 학암(鶴巖), 승지를 증직하였다.ㆍ최여계(崔汝契) 호는 매헌(梅軒)이며, 처사이다.
운천서원(雲川書院) 신묘년에 세웠다. : 홍익한(洪翼漢)ㆍ윤집(尹集)ㆍ오달제(吳達濟)
영연사(靈淵祠) 신묘년에 세웠다. : 신덕린(申德麟) 호는 순은(醇隱), 대제학을 지냈다.ㆍ박은(朴誾) 갑자화적(甲子禍籍)에 들어 있다.ㆍ정사현(鄭師賢) 호는 월담(月潭), 처사(處士)이다.
매림사(梅林祠) 정해년에 세웠다. : 정수강(鄭壽崗) 생원(生員)ㆍ오선기(吳善基) 호는 한계(寒溪), 처사이다.
상주(尙州) 도남서원(道南書院) 만력(萬曆) 병오년에 세웠고 정사년에 사액하였다. : 정몽주(鄭夢周)ㆍ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ㆍ노수신(盧守愼)ㆍ유성룡(柳成龍)ㆍ정경세(鄭經世)
옥성서원(玉城書院) 숭정(崇禎) 임신년에 세웠다. : 김득배(金得培) 호는 난계(蘭溪), 고려 상락군(上洛君)이다.ㆍ신잠(申潛) 기묘년의 명현(名賢)ㆍ김범(金範) 명종 때의 유일(遺逸)이다.ㆍ이전(李琠) 호는 월간(月澗)이며 현감을 지냈다.ㆍ이준(李埈) 전(琠)의 아우이다. 앞에 있다.
근암서원(近嵒書院) 을사년에 세웠다. : 홍언충(洪彦忠) 갑자화적(甲子禍籍)에 들어 있다.ㆍ이덕형(李德馨)ㆍ김홍민(金弘敏) 호는 사담(沙潭), 전한(典翰)을 지냈다. 범(範)의 아들이며 승지에 증직되었다.ㆍ홍여하(洪汝河) 호는 목재(木齋), 사간(司諫)을 지냈으며 고종후(高從厚)의 외손이다.
속수서원(涑水書院) 효종 정유년에 세웠다. : 신우(申佑) 안렴사(按廉使)이다.ㆍ손중돈(孫仲暾) 좌참찬을 지냈고 시호는 경절공(景節公)이다.ㆍ김우굉(金宇宏) 호는 개암(開巖), 부제학을 지냈다.ㆍ조정(趙靖) 자(字)는 안중(安仲), 호는 금간(黔澗), 본관은 풍양(豐壤)이다. 봉상정(奉常正)을 지냈으며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증직되었다.
백옥동영당(白玉洞影堂) 임진년의 병화(兵火)에 불타고 그 뒤 을해년에 중수했다. : 황희(黃喜)ㆍ김식(金湜) 호는 사서(沙西), 이조 참판을 지냈다. 시호는 충간공(忠簡公)이다.ㆍ김충(金冲) 호는 서대(西臺)이다.ㆍ고인계(高仁繼) 호는 월봉(月峯), 벼슬은 사예(司藝)이다.ㆍ송량(宋亮) 호는 우곡(愚谷)이다.
봉산서원(鳳山書院) 현종 갑진년에 세웠다. : 노수신(盧守愼)ㆍ심희수(沈喜壽) 선조 때의 정승ㆍ성윤해(成允諧) 호는 판곡(板谷), 현감을 지냈다. 연(連)의 조카이며 사부(師傅)를 제수(除授)받았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흥암서원(興巖書院) 임오년에 세우고 을유년에 어필(御筆) 사액하였다. : 송준길(宋俊吉)
충렬사(忠烈祠) 기축년에 세웠다. : 권길(權吉) 상주(尙州)의 판관(判官)이다ㆍ김종무(金宗武) 찰방(察訪)ㆍ정기용(鄭起龍)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ㆍ박걸(朴傑) 호장(戶長)을 지냈고, 임진년에 권길과 함께 죽었다. 따로 사당을 지어 향사(享祀)한다.
연악서원(淵岳書院) 신묘년에 세웠다. : 박언성(朴彦誠) 호는 낙지정(樂志亭), 감찰(監察)에 증직되었다.ㆍ김언건(金彦健) 호는 운정(芸亭), 감찰에 증직되었다.ㆍ강응철(康應哲) 호는 남계(南溪), 찰방이다.
화동서원(化東書院) 무자년에 세웠다. : 김상용(金尙容)ㆍ김상헌(金尙憲)
운계서원(雲溪書院) 신묘년에 세웠다. : 신석번(申碩蕃) 호는 백원(白原), 장령(掌令)을 지냈다.
안동(安東) 호계서원(虎溪書院) 만력(萬曆) 병자년에 세우고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ㆍ유성룡(柳成龍)ㆍ김성일(金誠一)
주계서원(周溪書院) 만력 임자년에 세우고 계유년에 사액하였다. : 구봉령(具鳳齡) 호는 백담(栢潭), 이조 참판을 지냈다.ㆍ권춘란(權春蘭) 자는 언회(彦晦), 호는 회곡(晦谷)이다. 사간을 지냈으며, 퇴계(退溪)와 백담(栢潭)의 문인(門人)이다.
삼계서원(三溪書院) 만력 계축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권벌(權撥) 명종 때의 명신(名臣)
병산서원(屛山書院) 만력 계축년에 세웠다. : 유성룡(柳成龍)ㆍ유진(柳) 성룡(成龍)의 아들이다. 호는 수암(修巖), 참판에 증직되었고 추향(追享)되었다.
도동서원(道東書院) : 우탁(禹倬)
청성서원(靑城書院) : 권호문(權好文) 호는 송암(松巖), 처사(處士)이다. 퇴계의 문인(門人)이다.
물계서원(勿溪書院) 현종 신축년에 세웠다. : 김방경(金方慶) 고려 첨의중찬(僉議中贊)이다.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지고, 시호는 충렬공(忠烈公)이다.ㆍ김응조(金應祖) 호는 학사(鶴沙), 참판을 지냈다.ㆍ김구용(金九容) 호는 척약재(惕若齋), 전판교(典判校)를 지냈다.ㆍ김양진(金揚震) 호는 허백당(虛白堂), 참판을 지냈다.
경광서원(鏡光書院) 융경(隆慶) 무진년에 세웠다. : 배상지(裴尙志) 호는 백죽당(栢竹堂), 고려 사복정(司僕正)이다.ㆍ이종준(李宗準) 무오당적(戊午黨籍)에 들어 있다.ㆍ권우(權宇) 호는 송소(松巢), 이계정사(伊溪精舍)로 옮겨져 독향(獨享)된다.ㆍ장흥효(張興孝) 호는 경당(敬堂), 추향(追享)되었다.
노림서원(魯林書院) 효종 계사년에 세웠다. : 남치리(南致利) 호는 비지(賁趾), 처사이다.
도연서원(道淵書院) 계유년에 세웠다. : 정구(鄭逑)
사빈서원(泗濱書院) 을축년에 세웠다. : 김진(金璡) 호는 청계(靑溪),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성일(誠一)의 아버지이다.ㆍ김극일(金克一) 호는 약봉(藥峯), 사성(司成)을 지냈고, 성일(誠一)의 형이다.ㆍ김수일(金守一) 호는 귀봉(龜峯)이다.ㆍ김명일(金明一) 호는 운암(雲巖), 생원이다.ㆍ김성일(金誠一)ㆍ김부일(金復一) 호는 남악(南岳), 사성을 지냈으며 성일의 아우이다.
덕봉서원(德峯書院) 갑신년에 세웠다. : 김용(金涌) 호는 운천(雲川), 병조 참의를 지냈고 참판에 증직되었다. 수일(守一)의 아들이다. ○ 묵계정사(默溪精舍)로 이봉(移奉)하였다.
묵계정사(默溪精舍) 병자년에 세웠다. : 옥고(玉沽) 호는 응계(凝溪), 장령(掌令)이다.ㆍ김계행(金係行) 호는 보백당(寶白堂), 대사성(大司成)을 지냈다.ㆍ김용
이계정사(伊溪精舍) : 권우(權宇) 경광서원(鏡光書院)에서 옮겨 모셨다.
백록리사(栢麓里社) 효종 임진년에 세웠다. : 이종준(李宗準)ㆍ이홍준(李弘準) 호는 눌재(訥齋), 진사이다.ㆍ정유일(鄭惟一) 호는 문봉(文峯)이며 대간(大諫)을 지냈다.ㆍ홍준형(洪俊亨) 호는 매헌(梅軒), 참봉이다.ㆍ김성구(金聲久) 감사(監司)를 역임했다. 추향(追享)되었다.ㆍ권두인(權斗寅) 정랑(正郞)을 지냈다. 추향되었다.
대구(大丘) 연경서원(硏經書院) 가정(嘉靖) 갑자년에 세우고 현종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ㆍ정구(鄭逑)ㆍ정경세(鄭經世)
향현사(鄕賢祠) 숭정(崇禎) 기묘년에 세웠다. : 김경창(金慶昌) 호는 계동(溪東), 지평(持平)을 지냈다.ㆍ이숙량(李叔樑) 호는 매암(梅庵), 왕자사부(王子師傅)를 지냈다. 현보(賢輔)의 아들이며, 퇴계의 문인(門人)이다.
이강서원(伊江書院) 숭정 병자년에 세웠다. : 서사원(徐思遠) 호는 낙재(樂齋), 호조 정랑(戶曹正郞)을 지냈다. 앞에 나왔다.
낙빈서원(洛濱書院) 을미년에 세웠고 갑술년에 사액하였다. : 박팽년(朴彭年)ㆍ하위지(河緯地)ㆍ유성원(柳誠源)ㆍ성삼문(成三問)ㆍ이개(李塏)ㆍ유응부(兪應孚)
표충사(表忠祠) 경술년 때 세웠으며 현종 13년에 사액하였다. : 신숭겸(申崇謙)ㆍ김낙(金樂) 고려 때의 정승ㆍ신원길(申元吉) 승지(承旨)에 증직되었다.
향현사(鄕賢祠) 을묘년에 세웠으며 귀암서원(龜巖書院)이라고도 한다. : 서침(徐沉) 호는 귀계(龜溪), 제처사(制處使)로서 환상(還上)의 모곡(耗穀)을 감면해 주었으므로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은공을 갚았다.ㆍ서거정(徐居正)ㆍ서성(徐渻)
상덕사(尙德祠) 기축년에 세웠다. : 이숙(李䎘) 흉년에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여 소생시켰으므로 도내 인심이 그에게 쏠렸다.
황청향현사(黃淸鄕賢祠) 갑술년에 세웠다. : 손처눌(孫處訥) 호는 모재(慕齋)이다.
백원향현사(百源鄕賢祠) 임신년에 세웠다. : 서시립(徐時立) 호는 전귀당(全歸堂), 참봉을 지냈으며 호조 정랑에 증직되었다. 효자이다.
남강향현사(南崗鄕賢祠) 갑술년 봄에 세웠다. : 박수춘(朴壽春) 호는 국담(菊潭), 임진왜란때 의병(義兵)을 일으키고 순절(殉節)하였다.
사양서원(泗陽書院) 신묘년에 세웠다. : 정구(鄭逑)ㆍ이윤우(李潤雨)
하동(河東) 영계서원(永溪書院) 기묘년에 세웠다. : 정여창(鄭汝昌)ㆍ김성일(金誠一)
청하(淸河) 학산서원(鶴山書院) 무진년에 세웠다. : 이언적(李彦迪)
거제(巨濟) 반곡서원(盤谷書院) 갑신년에 세웠다. : 송시열(宋時烈)ㆍ김진규(金鎭圭) 호는 죽천(竹泉),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ㆍ김창집(金昌集)
김산(金山) 경렴서원(景濂書院) 무자년에 세웠다. : 김종직(金宗直)ㆍ최선문(崔善門) 공조 판서를 지냈고 시호는 문혜공(文惠公), 청백리(淸白吏)이다.ㆍ이약동(李約東)ㆍ조위(曺偉)ㆍ김시창(金始昌) 앞에 나왔다.
진보(眞寶) 봉람서원(鳳覽書院) 만력(萬曆) 임인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
김해(金海) 신산서원(新山書院) 만력 무오년에 세웠는데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조식(曺植)ㆍ신계성(申季誠)
예암향현사(禮巖鄕賢祠) 무자년에 세웠다. : 조이추(曺爾樞) 호는 사우당(四友堂)이다.
창원(昌原) 회원서원(檜原書院) 숭정(崇禎) 갑술년에 세웠는데 사액하였다. : 정구(鄭逑)ㆍ허목(許穆)
운암향현사(雲巖鄕賢祠) 신사년에 세웠다. : 박신윤(朴身潤) 호는 우곡(愚谷)이다.
의성(義城) 빙계서원(氷溪書院) 가정(嘉靖) 정사년에 세웠으며 선조 병오년에 사액하였다. : 김안국(金安國)ㆍ이언적(李彦迪)ㆍ유성룡(柳成龍)ㆍ김성일(金誠一)ㆍ장현광(張顯光)
학산충렬사(鶴山忠烈祠) 숙종 정축년에 세웠다. : 박팽년(朴彭年)ㆍ하위지(河緯地)ㆍ유응부(兪應孚)ㆍ성삼문(成三問)ㆍ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ㆍ오두인(吳斗寅)ㆍ이세화(李世華)ㆍ박태보(朴泰輔)
진민사(鎭民詞) 정덕(正德) 정축년에 세웠다. : 김용비(金龍庇) 고려조의 태자첨사(太子詹事)이다.
장대서원(藏待書院) 임자년에 세웠다. : 김광수(金光粹) 호는 송은(松隱), 진사이다.ㆍ이민성(李民宬) 호는 경정(敬亭), 승지를 지냈다.ㆍ신원록(申元祿) 호는 매당(梅堂)이다.ㆍ신지제(申之悌) 자는 순보(順甫), 호는 오봉(梧峯), 승지를 지냈고,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본관은 아주(鵝州)요, 의성(義城)에 살았다.
충렬사(忠烈祠) : 김홍술(金洪術) 고려조의 장군(將軍)이다.
청송(靑松) 병암서원(屛巖書院) 무인년에 세웠으며 임오년에 사액하였다. : 이이(李珥)ㆍ김장생(金長生)
송학서원(松鶴書院) 계미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ㆍ김성일(金誠一)ㆍ장현광(張顯光)
문경(聞慶) 소양향현사(瀟陽鄕賢祠) 숙종 계사년에 세웠다. : 김낙춘(金樂春) 호는 인백당(忍百堂)이다.ㆍ정언신(鄭彦信) 선조 때의 정승이다.ㆍ심대부(沈大孚) 호는 가은(嘉隱), 헌납(獻納)을 지냈으며 추향(追享)되었다.ㆍ이심(李襑) 호는 색은(穡隱), 찬성(贊成)에 증직되었으며 추향되었다.
한천향현사(寒泉鄕賢祠) 숙종 정축년에 세웠다. : 안귀손(安貴孫)ㆍ신숙빈(申叔彬) 처사(處士)이다. 개(槩)의 손자이다.ㆍ성만징(成晩徵) 호는 추담(秋潭), 교관(敎官)을 지냈고 추향되었다.
고성(固城) 갈천서원(葛川書院) 임진년에 세웠다. : 이암(李嵒) 호는 행촌(杏村),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에 봉해졌다.ㆍ노필(盧㻶)ㆍ어득강(魚得江)ㆍ조사석(趙師錫) 숙종 때의 정승
충렬사(忠烈祠) 만력(萬曆) 갑인년에 세웠으며 계묘년에 사액하였다. : 이순신(李舜臣)
유월사(柳月祠) 기축년에 세웠다. : 심광세(沈光世) 호는 휴옹(休翁), 벼슬은 사인(舍人)이다.
비안(比安) 귀천서원(龜川書院) 숙종 기미년에 세웠다. : 박서생(朴瑞生) 호는 율정(栗亭), 대사헌을 지냈고 청백리(淸白吏)이다.ㆍ이우(李瑀)

연려실기술 제3권
 세종조 고사본말(世宗祖故事本末)
세종조(世宗朝)의 상신




이원(李原) 무신생이며, 15세에 진사가 되었다.

이원은 자는 차산(次山)이며, 호는 용헌(容軒)이고, 본관은 고성(固城)이다. 고려 말 을축년에 급제하였으니, 나이가 18세였다. 좌명 공신(佐命功臣)으로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이 되었다. 무술년에 정승이 되어 벼슬이 좌의정 겸 수문전 대제학(修文殿大提學) 판이병조사(判吏兵曹事)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양헌공(襄憲公)이고, 62세에 죽었다.
○ 공은 난 지 넉 달 만에 아버지 이강(李岡) 호는 평재(平齋)니 행촌(杏村) 이암(李嵒)의 아들이다. 이 죽고, 자부(姊夫) 권근(權近)이 가르치기를 아들과 같이 하여 학문이 날마다 진보되었다. 권근이 매양 그와 의논하였는데, 뛰어남이 짝이 없었으므로 권근이 놀라면서 말하기를, “우리 장인은 영원히 돌아가신 것이 아니다.” 하였다.
○ 기해년(1419)에 사은사(謝恩使)로 명 나라에 갔을 때, 그의 풍채가 좋고 의젓하여 만인 중에서 우뚝하니, 문황제(文皇帝)가 보고 기이하게 여겨서, 이르기를 “누런 수염 재상은 후에도 다시 오라.” 하였다. 《사가집(四佳集)》에 있는 공의 비문
○ 을사년(1425)에 명 나라 선종(宣宗)이 등극하니, 명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축하하였다.
○ 공을 미워하는 자가 애매한 일로 모함하였을 때에, 태종이 친히 변명하여 주었다. 태종이 돌아가신 뒤에 공을 미워하는 자가 전날의 사감을 가지고 사헌부에 사주하여 공을 죽이려 하였다. 세종은 그가 죄가 없는 줄을 아나, 사헌부의 청을 어기기가 어려워 여산(礪山)으로 귀양보냈으니, 곧 병오년(1426) 봄이었다.세종은 그의 옛 공훈을 생각하여 전과 다름없이 돌보아 주었으며, 매양 큰일을 의논할 때에는 반드시 이르기를, “철성(鐵城)이 있었더라면 반드시 처리했을 것이다.” 하였다. 얼마 안되어 불러서 다시 정승을 삼으려 하였으나 그를 질투하는 자의 저해를 입었으며, 기유년(1429) 여름에 병으로 죽었다. 《사가집(四佳集)》

 

 

연려실기술 별집 제14권

 문예전고(文藝典故)
필법(筆法)


김생(金生)은 신라 원성왕(元聖王) 때의 사람이다. 송(宋) 나라 숭녕 연간(崇寧年間)에 고려의 학사(學士) 홍관(洪瓘)이 송 나라에 들어가서 김생이 쓴 행초 한 권을 한림대조(翰林待詔) 양구(楊球)ㆍ이혁(李革)에게 보였더니 크게 놀라면서, “오늘날에 왕우군(王右軍 희지)의 진적을 볼 줄을 생각하지 못하였다.” 하였다.홍관이 말하기를, “이것은 신라 사람인 김생의 글씨이다.” 하였으나, 두 사람은 웃으면서, “천하에 왕우군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같은 정묘한 필법이 있으랴.” 하므로, 홍관이 변명하여도 끝내 믿지 않았다. 조맹부(趙孟頫)가 지은 창림사비(昌林寺碑)의 발문(跋文)에, “당 나라 때 신라의 중 김생이 쓴 것이다. 그가 쓴 그 나라의 창림사비는 자획에 남긴 법이 있어서 비록 당 나라 사람의 이름난 솜씨라도 이보다 낫지는 못할 것이다. 옛말에, ‘어느 땅이든지 나무가 나지 않으랴.’ 하였는데, 진정 그렇다.” 하였으니, 이 발문을 보면 김생의 필법이 고금에 뛰어났음을 알겠다. 《필원잡기》
○ 우리 동방에서 필법으로는 김생이 제일이었고, 학사 요극일(姚克一)과 중 탄연(坦然)ㆍ영업(靈業)이 그 다음이었는데 모두 왕우군(王右軍)의 필법을 본받았다. 이규보(李奎報)가 일찍이 평론하면서 최충헌(崔忠獻)의 글씨를 신품(神品) 제1로 삼고 탄연의 글씨를 제2, 유신(柳紳)의 글씨를 제3으로 삼았으나 공평한 의논이 아니다.원(元) 나라 때부터 필법을 배우는 자는 모두 조맹부(趙孟頫)를 본받았으므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조맹부의 필적이 수백 벌이었다. 예겸(倪謙)이 사신으로 와서 말하기를, “중국에서는 조공(趙公)의 필법을 보기가 드물다.” 하였으니, 대개 우리나라에 많이 있음을 감탄한 것이었다. 고려 충선왕(忠宣王)이 원 나라에 들어가서 만권당(萬卷堂)을 지었었다. 돌아올 때에 문적(文籍)과 서화를 많이 싣고 왔는데, 조맹부의 글씨가 우리나라에 많았음은 대개 여기에 연유한 것이었다. 행촌(杏村) 이암(李嵒)이 조맹부의 필법을 깊이 체득하였다. 《필원잡기》
○ 지금 영남 여러 절에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비문이 있다. 원주(原州) 자복사(資福寺) 비문은 왕태조(王太祖 왕건)가 지었는데, 당태종(唐太宗)의 글씨를 모아서 썼으니 기이한 보배이다. 현화사(玄化寺)의 비는 현종(顯宗)이 친히 그 비의 액면(額面)을 전자(篆字)로 썼고 주저(周佇)가 비문을 지었으며 채충순(蔡忠順)이 썼다. 영통사(靈通寺) 비는 김부식(金富軾)이 비문을 짓고 오언후(吳彦侯)가 썼는데, 비록 모두 기이하고 고아하였으나 글씨체는 달랐다.보현원(普賢院) 언덕 위에 반쯤 부러진 비가 있었는데 문장이 호건(豪健)하고 자체가 굳세게 보였다. 원(元) 나라의 위소(危素)가 지었으며 우집(虞集)이 쓴 것으로서, 참으로 당대에 뛰어난 기이한 보배였으나, 사람들이 애호하고 아끼지 않아서 지금은 깨어져서 남은 것이 없다. 현릉(玄陵)의 비는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비문을 지었고 유항(柳巷)ㆍ한수(韓脩)가 썼다. 국조(國朝)에 이르러서는 원각사(圓覺寺) 비의 비문을 김수온(金守溫)이 지었고 성임이 썼으며, 영릉(英陵)의 비는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썼다. 《용재총화》
○ 우리나라에도 글씨를 잘 쓴 사람이 비록 많았으나, 해서체로 쓰는 사람은 대개 적었다. 김생(金生)은 가느다란 글씨에 능하여서 털끌 만한 데에도 모두 정통하였으며, 이암(李嵒)은 자앙(子昻 조맹부의 자)과 같은 때의 사람인데 필력(筆力)이 서로 비슷하였으나 행서와 초서는 모두 자앙에게 양보하였다. 한수(韓脩)도 그때에 유명하였으며, 필력이 굳센 것은 왕우군(王右軍)의 필법을 많이 배웠다. 그가 쓴 현릉(玄陵) 비문은 지금도 남아 있다. 성석린(成石磷)의 글씨는 다만 면밀할 뿐이었으나 80세에 건원릉(健元陵) 비에 썼는데도 필력이 쇠하지 않았다.안평대군의 글씨는 오로지 자앙(子昻)의 체를 공부하여서 호매한 필력이 서로 낫고 못함이 없었으며 늠름한 기운이 날아 움직일 듯하였다. 예겸(倪謙)이 일찍이 사신이 되어서 우리나라에 왔다가 현판에 쓰인 두 글자를 보고, “이 글씨는 보통 솜씨가 아니다. 나는 이 사람을 만나보고 싶다.” 하므로, 임금이 안평에게 가보기를 명하였다. 예겸이 그 필적을 흠모하여, “지금 진학사(陳學士)가 글씨를 잘 써서 중국에서 명예를 독차지했으나, 이 왕자에게는 미치지 못한다.” 하였다.더욱 예로써 대우하며 글씨를 받아 갔다. 그 뒤에 우리나라 사람이 중국에서 훌륭한 글씨라고 하여 사 가지고 오면 그것은 안평의 수적(手跡)이었으므로 안평이 크게 기뻐하여 만족하게 여겼다. 그때에 최흥효(崔興孝)라는 사인(士人)이 유익(庾翼)의 필법을 본받아서 잘 쓴다고 자칭하며 항상 필탁(筆橐 붓주머니)을 가지고 여러 관청과 여러 대가(大家)를 순방하면서 휘호하여 주었는데, 글자의 체가 거칠고 상스러웠다. 안평이 그를 맞이하여 글씨를 청하였었는데 마침내 찢어서 벽을 바르고 말았다.성임(成任)ㆍ강희안(姜希顔)ㆍ정동래(鄭東萊)는 그 당시에 글씨 잘 쓰기로 이름났으나, 희안은 본래 성질이 쓰기를 꺼려했으므로, 그의 필적이 세상에 전한 것이 드물었고, 성임은 병풍과 족자를 많이 썼으며 그가 쓴 원각사 비는 더욱 절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성종(成宗)이 그의 필적을 보고, “잘 썼다. 명예는 헛되이 얻는 것이 아니로다.” 하였다. 동래는 글씨에 힘을 기울이고 공부를 많이 하였다.남이 그의 글씨를 청하면 써주기를 꺼려하지 않았으므로 세상에 전하는 것이 많았으나 글씨가 무르고 약하여서 보잘것이 없었다. 물상을 묘사하는 데에 있어 천기를 얻은 자가 아니면 능히 정묘하지는 못하는데, 한 가지에 정묘하더라도 여러 가지에 정묘하기는 더구나 어렵다. 《용재총화》
○ 글씨 잘 쓰기가 어렵지마는, 편액 쓰기는 더욱 어렵다. 비록 조자앙의 필법으로도 편액을 쓰는 데에는 이설암(李雪菴)에 미치지 못하였으니, 하물며 자앙보다도 못한 사람이랴. 우리 동방에서는 공민왕(恭愍王)이 쓴 강릉(江陵) 임영관(臨瀛館)과 안동(安東) 영호루(映湖樓)의 현판 글씨가 참으로 노련하고 힘차서 보통 사람으로서는 미칠 바 아니었는데, 강릉관은 근래에 화재를 입어서 그 편액마저 잃었으니 아까운 일이다. 개경(開京 개성) 안화사(安和寺)의 본전(本殿) 편액은 송 나라 휘종(徽宗)이 썼고 문간 편액은 채경(蔡京)의 글씨다.그들이 비록 임금과 신하로서의 도리는 잃은 사람이지만, 그러나 그 연대의 오래됨과 필적의 묘함은 보물이 될 만하다. 안평대군이 대자암(大慈庵)ㆍ해장전(海藏殿)ㆍ백화각(白華閣)을 쓴 글자는 왕성하게 날아 움직일 듯한 모습이 있으니 역시 뛰어난 보물이다. 모화관(慕華館) 현판은 제학(提學) 신색(申穡)이 쓴 것인데, 비록 안평대군보다는 못하더라도 역시 볼 만하였고, 성임이 쓴 경복궁 문전의 편액은 오로지 설암(雪菴)의 체를 모방하여서 면밀한 것이 법이 있었다. 정국형(鄭國馨)의 말에는 창덕궁의 여러 전과 여러 문의 편액은 자체가 바르지 못하고 틀린 곳이 많이 있다고 하였다. 《용재총화》
○ 우리나라의 필법으로서는 신라의 김생을 종주로 삼는다. 지금 전하여 오는 진적은 전연 없으나 탑본한 것도 역시 기이하고 뛰어나 법이 있으며, 고려 이후의 사람으로서는 미칠 바가 아니다. 신라의 중 영업(靈業)의 글씨도 청수하고 굳세어서 취할 만하였고 고려의 중 탄연(坦然)은 오로지 <성교서(聖敎序)>의 필법을 본받아서 둥글게 잡아 휘는 획법(劃法)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일깨워주었다.국조에 이르러서는 안평ㆍ자암(自菴)ㆍ봉래(蓬萊)ㆍ석봉(石峯)을 사대가(四大家)로 삼는데, 내가 일찍이 윤순 백하(尹淳白下 백하는 운순의 호)에게 그들의 우열을 물으면서, “봉래는 다만 초서가 장기였으나, 진실로 나보다 훌륭하다.” 하였더니, 그 뒤에 석봉을 국조에서 제일이라고 정하였다. 청지(淸之 안평대군)의 글씨는 수미(秀媚)하여 사랑스러우며 재기(才氣)가 가장 우수하였으니, 마땅히 자앙(子昻)과 함께 서로 높고 낮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앙의 필법을 전적으로 사용하여서 속됨을 면치 못하였다.또 청지는 귀공자로서 이 필법을 맨 먼저 창시하여 한 시대를 눈부시게 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열조(列朝)의 어필(御筆)이 모두 이 필법을 사용하니, 드디어 나라의 습속이 되었다. 이 몇 해 전에는 온 세상이 쏠리어서 우군(右軍)ㆍ자앙(子昻)이라고까지 하였고, 또는 청지가 우군의 획법으로써 자앙의 필체를 썼다고 하니, 웃을 수밖에 없다.동사백(董思白)이 천자문 한 권으로 자앙을 배척하니 당연하다. 자암(自菴)의 해서는 비루하여 볼 만한 것이 못 되는데, 대자(大字)와 행서ㆍ초서는 필법이 자못 훌륭하나 필력은 둔하고 느리다. 일찍이 홍산(鴻山) 유세모(柳世模)의 집에서 큰 글씨 한 폭을 보니 의젓하게 뛰어나서 그의 글씨도 쉽게 평론할 것이 아니었다. 봉래의 초서는 호탕하여 탈속하였는데 언뜻 보면 장우(張遇)보다도 뛰어나고 왕희지(王羲之)를 지나칠 것 같으나 재기는 있어도 학문이 없고 겉보기는 근사하여도 뼈대가 없어서 대가가 되지 못하였다.경홍(景洪)은 재주와 학문이 높지 못하였으나 연습을 쌓은 공으로 비록 옛 사람의 획법은 알지 못하였어도 자연히 서로 합치하였는데, 처지가 미천하였던 까닭에 관청의 서사(書寫)에 일정한 법식의 구속을 받았었다. 해서는 더욱 비루하였으나 필력은 볼 만하였고, 행서ㆍ초서의 잘된 곳은 웅장하고 힘차서 송ㆍ원의 명필보다도 뛰어났다고 하여도 잘못이 없을 정도였다.백하(白下)는 늦게 나서 중국의 획법을 독학하였는데, 서체가 신기ㆍ절묘하고 재사(才思)가 교묘ㆍ화려하여 동방 사람의 비열함을 완전히 씻었으니, 후학을 계발한 공이 4대가에 비교할 바가 아니며, 이 밖에도 그 세대에 논의할 만한 자가 있었다. 원교의 《서결후론(書訣後論)》
○ 중 축구(丑丘)가 글씨를 잘 썼는데, 자신이 말하기를 “나의 글씨는 독곡(獨谷) 성 정승(成政丞)의 글씨와 같다.” 하면서 벽에 붙여두고 자랑하였다. 하루는 성 정승이 그의 방에 와서 벽에 쓴 글씨를 보고, “이것은 지난날에 내가 쓴 것인데, 네가 어디서 얻었느냐.” 하였다. 축구는 크게 기뻐하여 매우 만족하게 여겼다. 《용재총화》
○ 권홍(權弘)은 일찍이 문한(文翰)으로 저명하였는데 전서와 예서에 더욱 공교하였다. 남산 변두리에 집을 짓고 양쪽에 못을 파고 연(蓮)을 심었다. 복건(幅巾)과 청려장(靑藜杖) 차림으로 소요하면서 유유자적하니 신선처럼 여연(灑然)하였다. 그가 쓴 글 중에서 헌릉비(獻陵碑)와 전자(篆字)로 쓴 성균관비(成均館碑)가 가장 좋다. 《필원잡기》
○ 권홍의 자는 ☐인데, 벼슬이 최고의 품위(品位)에 이르렀으며, 87세까지 살았다. 시호는 문순(文順)이다.
○ 강석덕(姜碩德)은 성품이 옛것을 좋아하였으며, 풍류가 있고, 시문을 하여 근대에는 견줄 데가 없었다. 시를 지으면 매우 고상하고 옛 풍취가 있었으며, 글씨와 그림도 역시 절묘하였다. 그의 아들 희안(希顔)도 시와 글씨와 그림이 모두 뛰어나서 그 시대에 견줄 사람이 없었다. 《필원잡기》
○ 신라 김생(金生), 신라 중[僧] 영업, 고려 중[僧] 나연(羅然), 최우(崔瑀)진양공(晉陽公), 유신(柳紳), 홍회(洪淮) 학생(學生), 문공유(文公裕)재상(宰相), 신라 종승(宗僧) 충희(沖曦), 신라 종승 도휴(道休), 박효문(朴孝文)시랑(侍郞),유공권(柳公權)재상(宰相), 김거실(金居實)소성후(邵城侯), 기홍수(奇洪壽)재상(宰相), 장자목(張子牧) 우사(羽士), 중 오생(悟生), 중 혈연(孑然) 등 이상은 문순공(文順公) 권홍(權弘)의 필결(筆訣) 평론에 모두 보인다. 김생을 신품(神品)이라 하고, 그 이하는 묘품(妙品) 절품(絶品)으로 되었다.
○ 한수(韓脩), 설경수(偰慶壽), 성석린(成石磷), 중[儈] 혼수(混脩), 이암(李嵒), 최흥효(崔興孝), 안평대군 용(瑢), 신색(申穡), 성개(成槪), 강희안(姜希顔), 성임(成任), 박팽년(朴彭年), 안침(安琛), 정난종(鄭蘭宗), 공부(孔俯), 박경(朴耕), 신효중(申孝仲), 박효원(朴孝元), 한형원(韓亨元), 신공제(申公濟), 성세창(成世昌), 김구(金絿), 김희수(金希壽), 임사홍(任士弘), 성수침(成守琛), 소세양(蘇世讓), 송인(宋寅), 이제신(李濟臣), 김인후(金麟厚), 이황(李滉), 김노(金魯), 이충원(李忠元), 이산해(李山海), 이우(李瑀),이문건(李文楗), 변헌(卞瓛), 양사언(楊士彦), 이해룡(李海龍), 황기로(黃耆老), 성혼(成渾), 이후(李珝), 김현성(金玄成), 백광훈(白光勳), 의창군(義昌君), 한호(韓濩), 이숙(李潚), 심극명(沈克明), 윤근수(尹根壽), 이광(李珖), 이홍주(李弘冑), 장유(張維), 김류(金瑬), 조문수(曺文秀), 오준(吳竣), 이지정(李志定), 윤순거(尹舜擧), 이현(李袨), 신익성(申翊聖), 윤신지(尹新之), 윤선거(尹宣擧),김좌명(金佐明), 윤문거(尹文擧), 허목(許穆), 조속(趙涑), 유이승(柳以升), 김대덕(金大德), 심익현(沈益顯), 이정영(李正英), 이명은(李命殷), 조위명(趙威明), 홍석귀(洪錫龜), 윤심(尹深), 박숭현(朴崇賢), 박태유(朴泰維), 김홍도(金弘度), 박태보(朴泰輔), 송일중(宋日中), 이익신(李翊臣), 남구만(南九萬), 신호(申瓁), 이진휴(李震休), 김의신(金儀信), 이숙(李淑), 이진수(李眞洙), 윤순(尹淳), 서명균(徐命均), 조명교(曺命敎)


 

[주D-001]성교서(聖敎序) : 당태종(唐太宗)이 불경을 인출(印出)한 뒤에 자신이 <성교서(聖敎序)>를 짓고 왕희지가 쓴 글자를 모아서 글씨를 썼는데, 여기서는 그 필체를 말한 것이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14권
 문예전고(文藝典故)
문집(文集)


중국 사람은 자기가 지은 문장을 곧 발간하여 세상에 널리 펴는데, 아마 일을 좋아하기 때문일 것이다. 전조(前朝 고려조)의 이규보(李奎報)와 본조의 서거정(徐居正)ㆍ강희맹(姜希孟)의 문집도 그들의 생시에 출간하였다. 《지봉유설》
○ 강희맹이 《진산세고(晉山世稿)》를 편찬하고, 김수녕(金壽寧)과 함께 점(點)을 치고 뭉개고 보태고 덜고 하여 남이 보기 좋게 하여, 선조의 시명(詩名)을 후세에 선양하였다. 사람들은 이것을 효도라고 하지만, 나는 불효라고 한다.신영희(辛永禧)의 집에 그의 조부 문희공 석조(文禧公碩祖)의 시집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자네 집 문집은 간행할 만한가.” 하니, 영희가 말하기를, “나의 할아버지가 비록 글을 잘 한다는 명성은 있었으나, 《가집(家集)》에 기재된 것에는 하나도 전할 만한 것이 없네. 일찍이 한 문생(門生)에 대한 만시로서,

32세에 죽었구나 / 三十二而卒
불행히도 안회와 같구려 / 不幸同顔回

라는 것이었는데, 이 시구 외에는 좋은 시가 없으니 어찌 간행하겠나.” 하였다고 한다. 남들은 이것을 불효라고 하나 나는 효도라고 한다. 왜 그런가 하면 조부의 문예에 대해 곧게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교묘하게 꾸민 말과 거짓을 꾸민 붓으로 선조를 높인들 선조의 마음이 저승에서 어찌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추강냉화》
○ 성삼문(成三問)이 우리나라 사람의 글을 엮어서 《동인문보(東人文寶)》라고 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한 채 죽었는데, 김일손(金馹孫)계온(季昷) 이 계승하여 완성하고, 책명을 《동문수(東文粹)》라고 하였다. 그러나 일손은 문장의 번화함을 전적으로 미워하고 다만 온자(醞藉)한 글만 취하였다. 때문에 비록 규범에 유의했다고는 하나, 쇠약하고 기력이 없어 볼 만한 것이 못 된다.그가 가려 뽑은 《청구풍아(靑丘風雅)》도 비록 시가 산문과 같지는 않으나, 조금이라도 호방한 시가 있으면 버리고 기록하지 않았으니, 이 무슨 변통성 없는 편견인가. 서거정이 가려 뽑은 《동문선(東文選)》 같은 것은 유별(類別)해서 모은 것이지 선집은 아니다. 《용재총화》
최치원(崔致遠) 《계원필경(桂苑筆耕)》
최자(崔滋)시중(侍中) 《동인문기(東人文幾)》 몇 10권
최해(崔瀣)예산(猊山) 《삼한귀감(三韓龜鑑)》 1질
김태현(金台鉉)시중(侍中) 《동국문감(東國文鑑)》 몇 10권
이규보(李奎報) 《이상국전후집(李相國前後集)》 몇 10권
이극기(李克己) 원외(員外) 《김거사집(金居士集)》 몇 10권
이인로(李仁老)대간(大諫) 《은대집(銀臺集)》 1질
최당(崔讜) 《쌍명재(雙明齋)》 1질
이인로(李仁老) 《파한집(破閒集)》 2질인데, 고려조의 시화(詩話)이다.
최자(崔滋)졸옹(拙翁)ㆍ수태위(守太尉) 《보한집(補閒集)》 2질인데, 고려조의 시화이며 자신이 서문을 지었다.
최자 《농은집(農隱集)》
임춘(林椿) 《서하집단간(西河集斷簡)》 1질
이제현(李齊賢) 《익재집(益齋集)》 몇 10권
이제현 《역옹패설(櫟翁稗說)》 1질
예종(睿宗) 《예종창화집(睿宗唱和集)》 1질. 곽여(郭輿) 등과 함께 창화(唱和)하였다.
이승휴(李承休) 《동안거사집(動安居士集)》 1질
나흥유(羅興儒) 《중순당집(中順堂集)》 1질
승인(僧人) 《식영암집(息影菴集)》 1질
중[僧] 굉연(宏演) 《죽간집(竹磵集)》 1질. 나옹(懶翁)의 제자 구양현(歐陽玄)ㆍ위소(危素) 두 학사가 서문을 지었다.
안경공(安景恭) 《관동와주(關東瓦注)》 1질
이색(李穡) 《목은집(牧隱集)》 몇 10권
이곡(李穀) 《가정집(稼亭集)》
이인복(李仁復) 《초은집(樵隱集)》 1질
정몽주(鄭夢周) 《포은집(圃隱集)》 1질
이숭인(李崇仁) 《도은집(陶隱集)》 2질
이달충(李達衷) 《제정집(霽亭集)》 1질
정보(鄭誧) 《운곡집(雲谷集)》 1질
정추(鄭樞) 《원재집(圓齋集)》 1질
유숙(柳淑) 《사암집(思庵集)》 1질
정총(鄭摠) 《복재집(復齋集)》 1질
이방직(李邦直) 《의곡집(義谷集)》 1질
이원굉(李元紘) 《춘곡집(春谷集)》 1질
염흥방(廉興邦) 《동정집(東亭集)》 1질
염정수(廉廷秀) 《훤정집(萱庭集)》 1질
권근(權近) 《양촌집(陽村集)》 몇 10권
변계량(卞季良) 《춘정집(春亭集)》 몇 10권
정도전(鄭道傳) 《삼봉집(三峯集)》 몇 10권
박의중(朴宜中) 《부재집(負齋集)》 1질
이첨(李詹) 《쌍매당집(雙梅堂集)》 몇 10질
정이오(鄭以吾) 《교은집(郊隱集)》 7권
김구용(金九容) 《척약재집(惕若齋集)》 1질
한수(韓脩) 《유항집(柳巷集)》 1질
중[僧] 선탄(禪坦) 《선탄집(禪坦集)》
성석린(成石磷) 《독곡집(獨谷集)》 2질
성석인(成石珚) 《상곡집(桑谷集)》 1질
권우(權遇) 《매헌집(梅軒集)》 2질
이집(李集) 《둔촌집(遁村集)》 1질
설손(偰遜) 《근사재집(近思齋集)》
유관(柳觀)관(寬)으로 고쳤다. 《하정집(夏亭集)》 1질
이암(李嵓)ㆍ강(岡)ㆍ원(原) 세 사람 《철성연방집(鐵城聯芳集)》
정해(鄭偕) 《팔계집(八溪集)》
중[僧] 둔우(屯雨) 《천봉집(千峯集)》 1질
설장수(偰長壽) 《운재집(芸齋集)》 1질
중[僧] 성민(省敏) 《계정집(桂庭集)》 1질
유방선(柳芳善) 《태재집(泰齋集)》 1질
윤택(尹澤) 《율정집(栗亭集)》 1질
윤회(尹淮) 《청경집(淸卿集)》 1질
황희(黃喜) 《방헌집(厖軒集)》 1질
함부림(咸傅霖) 《난계집(蘭溪集)》 1질
강회백(姜淮伯) 《통정집(通亭集)》 1질
강석덕(姜碩德) 《완역집(玩易集)》 1질
강희안(姜希顔) 《인재집(仁齋集)》 1질
강희안 《양화소록(養花小錄)》 1질
이혜(李惠) 《단활집(短豁集)》
신숙주(申叔舟) 《보한재집(保閑齋集)》 2질
권람(權擥) 《소한당집(所閑堂集)》 2질
최항(崔恒) 《태허정집(太虛亭集)》 2질
김수온(金守溫) 《식우집(拭疣集)》 2질
서거정(徐居正) 《사가정집(四佳亭集)》 몇 10권
서거정 《동문선(東文選)》
강희맹(姜希孟) 《사숙재집(私淑齋集)》 몇 10권
성임(成任)문안(文安) 《안재집(安齋集)》 1질
성간(成侃) 《진일집(眞逸集)》 1질
이상은 모두 《용재총화(慵齋叢話)》에 기재된 것이다.

용재총화 제9권
용재총화 제9권


우리 나라는 중국과 같지 않다. 우리 나라 사람이 글을 읽을 때에는 음(音)과 뜻이 있고 또 구결(口訣)이 있어 쉽게 배울 수 없으나, 중국에서는 모두 문자로 말하고 음과 뜻과 구결이 없기 때문에 학문하기가 쉽다. 우리 나라 사람은 간사하고 편파적이고 의심이 많아 항상 사람을 믿지 않으므로 역시 남도 나를 믿지 않지만, 중국인은 순후(純厚)하고 의심이 없어서 비록 외국인과 상거래를 하더라도 그다지 다투거나 힐난하는 법이 없다. 우리 나라 사람은 비록 조그마한 일에도 경솔하게 떠들기 때문에 사람은 많아도 성취하는 일은 별로 없지만, 중국인은 조용하고 말이 없으므로 사람이 적더라도 쉽게 일을 성취한다. 우리 나라 사람은 많이 마시고 먹는데, 만일 한 끼라도 굶으면 배가 고파 어쩔 줄을 모른다. 가난한 사람은 부잣집에서 벌어다 먹기까지 하면서도 낭비만 하고 아낄 줄을 모르기 때문에 곤경에 이르며, 신분이 높은 자는 주식(酒食)을 많이 벌여놓고도 싫어할 줄 모른다. 만일 군사가 출정하게 되면 군사 식량의 운송이 반 이상을 차지하고, 길 떠나는 사람은 몇 리 안 되는 도정(道程)이라도 말에 실은 짐이 길을 메울 정도이다. 중국인은 많이 먹지 아니하여 한번에 구운 떡 하나면 조석 끼니를 떼울 수 있고 꼭 밥을 먹어야 하는 건 아니다. 군졸(軍卒)은 마른 양식을 말 안장에 걸어놓아 굶주림에 대비하고, 길 떠나는 사람은 비록 천만 리 먼 길이라 할지라도 은전(銀錢)만 가지고 가면 요구하는 대로 밥도 먹을 수 있고, 술도 마실 수 있으며 말도 탈 수 있고, 종도 거느릴 수 있어 머무르는 데는 집이 있고, 자내 데는 계집이 있으므로 가기 어려운 곳이 없다. 우리 나라 사람으로 관에 있는 자는 조반(早飯)ㆍ조반(朝飯)ㆍ주반(晝飯)을 먹으며 아무 때고 술을 마신다. 또 종들을 들볶아 성찬(盛饌)만 가져오라 하고, 이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반드시 매질을 한다. 그러나 중국인으로 관에 있는 자는 공경대부(公卿大夫)라 할지라도 집에서 고기와 밥 한 그릇만을 차려서 관청으로 운반하여다 먹는다. 우리 나라 사람으로 외방에 사신(使臣)가는 자는 관리들이 지경(地境) 내어서 영송(迎送)을 하는데, 먼저 주식을 갖추고 준비하였다가 고을에 들어오면 며칠 동안 머물게 하고, 크게 잔치를 베풀어 흠뻑 취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술이 깨어있는 날이 없으니, 이렇게 하여 병을 얻어 페인이 되는 사람도 헤아릴 수 없다. 송별할 때는 경치 좋은 산수를 골라 장막을 치고 소매를 붙잡아 놓지 아니하며, 종일토록 그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능력이 모자라는 사람은 관의 돈을 다 써 없애서 날로 퇴폐해지고, 능력 있다는 자는 영리를 꾀하여 자기의 사욕을 채우므로 관가(官家)는 날로 쓸쓸해지고, 관리와 백성은 점차 초췌(憔悴)해져서 그 괴로움을 견딜 수 없다. 반면에 중국인으로 사신 나가는 자는 만기(萬騎)가 앞에서 인도(引導)하고, 절월(節鉞)이 휘황(輝煌)하니, 그야말로 성사(盛事)라 할 만하다. 고을에 들어가면 관리들은 당하(堂下)에서 절하고 사신은 방에 들어가 돼지 족발과 변변치 않은 쌀밥 정도를 먹고 따라온 사람과 같이 한 평상에서 자고 이튿날 떠나는데, 관리들이 5리 밖까지 나와서 석 잔 술로 전송한다. 관리가 인정(人情)을 닦고 싶으면 사적으로 술가 음식을 갖추어 길떠남을 이유로 대접하기 때문에 사신은 오래 머물지 아니하고, 관에는 낭비하는 물건이 없게 되어 주현(州縣)은 항상 풍족하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노비(奴婢)가 반을 차지하는 까닭으로 유명한 고을이나 큰 읍이라도 군졸(軍卒)이 적은데, 중국은 모두 나라 사람이고 집집마다. 정병(精兵)이기 때문에 아무리 작은 벽읍(僻邑)이라도 수만의 무리를 급히 갖출 수 있다. 우리 나라 사람은 경솔(輕率)하고 안정되지 못하여 백성은 관리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관리는 선비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선비는 대부(大夫)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대부는 공경(公卿)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여, 상하가 서로 업신여기고 남을 모함할 생각만 한다. 그러나 중국은 백성이 관리 두려워하기를 표범같이 하고, 관리는 공경대부(公卿大夫) 두려워하기를 귀신같이 하며, 공경대부는 임금 두려워하기를 하늘과 같이 하는 까닭으로 일을 맡으면 잘 처리하고, 명령을 내리면 쉽게 복종한다.
당자서(唐子西)의 논탕천기(論湯泉記)에 이르기를, “어떤 설(說)에는 염주(炎州) 땅의 성질이 몹시 더운 까닭으로 산곡(山谷)에 탕천(湯泉)이 많다 하고, 어떤 설에는 물에서 유황(硫黃)이 나오면 땅 속이 따뜻하니 당초부터 남북(南北)을 가리지 않는다.”하였으나, 지금 임동(臨潼) 탕천은 정서(正西)에 있고, 염주의 남은 물도 반드시 뜨겁지 않으니 땅의 성질에 관한 설은 이미 맞지 않은 것이다. 또 유황을 물속에 넣어도 물이 뜨거워지지 않으니 유황의 설도 역시 맞다고 할 수 없다. 내 생각에는 탕천은 하늘과 땅 사이에 자연히 따로 한 종류가 되어 있어 본래 그러한 성질을 받은 것뿐이지, 반드시 땅의 성질이나 유황으로 인하여 따뜻해진 것이 아니다. 지금의 우리 나라는 육도(六道)마다 모두 온정(溫井)이 있으나, 경기(京畿)ㆍ전라도(全羅道)만 없다. 고서(古書)에 이르기를, “수주(樹州)에 온천이 있다.”하였는데, 수주는 곧 지금의 경기도 부평부(富平府)이다. 조정에서 사람을 보내어 답사하였으나 그 근원을 얻지 못하였으니, 고서에 잘못 기재된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싫어하여 그 줄기를 막아버린 것인지 모르겠다. 경상도 영산현(靈山縣)에 온천이 있는데, 샘이 다른 곳보다 조금 차서 목욕하는 사람이 뜨거운 돌을 샘 속에 넣어 따뜻하게 한다. 또 목욕하러 오는 일본인이 연달아 끊이지 않았으므로 현(縣)에서 꺼려하여 임금께 아뢰어 그 샘줄기를 막아버렸다. 동래(東萊) 온천이 가장 좋은데, 마치 비단결 같은 샘물이 땅으로부터 솟아 나오는데, 물을 끌어들여 곡(斛)에다 받아둔다. 따뜻한 것이 끓는 것과 같아서 마실 수도 있고 데울 수도 있다. 일본인으로 우리 나라에 오는 자는 반드시 목욕을 하고 가려 하므로, 얼룩옷[班衣]을 입은 사람들의 왕래가 번번하여 주현(州縣)은 그 괴로움이 많았다. 충청도(忠淸道) 충주(忠州) 안부역(安富驛) 큰 길가에 온천이 있는데, 샘물이 미지근하고 별로 뜨겁지 않다. 온양(溫陽) 온천은 꼭 알맞게 따뜻하여 세종(世宗)과 세조(世祖)께서 친히 여러 번 임행(臨幸)하였고, 그뒤에 정희왕후(貞熹王后)도 갔었는데 행궁(行宮)에서 세상을 떠났다. 청주(淸州)에는 초수(椒水)가 있는데, 물은 따뜻하지 않으나 그 냄새가 후추와 같았는데 사람들은 이 물로 씻으면 안질이 잘 낫는다고 하였다. 세종께서 친히 임행하였고, 그뒤에 세조께서 복천사(福泉寺)에 가면서 이곳을 지나다가 머물렀다. 강원도에는 세 개의 온천이 있는데, 그 하나는 이천현(伊川縣)의 북쪽 깊은 산속에 있다. 세종께서 옛 동주(東州)의 들에서 강무(講武)하시고 온천에 들렀었다. 또 하나는 고성현(高城縣)의 속읍인 환가(豢豭)에 있으니 금강산 동쪽 기슭이다. 샘이 큰 시냇가에 있는데, 세조께서 친히 납시어 지금까지도 어실(御室)과 불당(佛堂)이 있다. 나머지 하나는 평해군(平海君) 서쪽 백암산(白巖山) 밑에 있는데, 샘이 상등성이 높은 언덕에서 솟아 나온다. 샘물이 알맞게 따뜻하고 매우 깨끗하다. 중 신미(信眉)가 큰 집을 짓고 쌀을 꾸어주고 받고 하여 목욕하러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베풀었는데, 지금까지도 옛날과 같이 하고 있다. 황해도(黃海道)에 온천이 가장 많다. 백천(白川) 대교온정(大橋溫井)ㆍ연안(延安) 전성온정(氈城溫井)ㆍ평산온정(平山溫井)ㆍ문화온정(文化溫井)ㆍ안악온정(安岳溫井) 등이 있다. 그중에서도 해주(海州)의 마산온정(馬山溫井)이 가장 기이(奇異)하여 미지근한 것도 있고 몹시 뜨거운 것도 있다. 바로 샘 옆이 바다이기 때문에 그 냄새가 좋지 않고 맛은 짜다. 들 가운데 30여 군데쯤 있는데, 그중에는 괴어서 못을 이룬 곳도 있고, 혹은 조그마하게 물웅덩이를 만든 것도 있으며, 혹은 물밑이 뜨거워서 밟기 어려운 곳도 있다. 또 어떤 것은 넘치는 샘이 물을 뿜어내어 뜨거운 물거품이 용솟음쳐서 주위에 있는 진흙이 뜨거워 열 때문에 엉겨서 돌과 같이 단단하다. 채소(菜蔬) 줄기를 그 속에 던져보면 순식간에 익어버린다. 아침 저녁에 김[蒸]이 서려서 온 들이 연기가 낀 것 같고, 평지는 따뜻하여 마치 토상(土床)에 누운 것과 같다. 평안도(平安道)에는 삭주온정(朔州溫井)과 성천온정(成川溫井)이 있고, 또 양덕현(陽德縣)에 온정이 있는데, 그 물이 끓는 탕(湯)과 같아서 날짐승이 털을 데쳐 뜯어낼 수 있을 정도이다. 용강현(龍岡縣) 온정이 가장 기이한데, 물이 뜨거워서 아주 참을성 있는 사람이 아니면 오래 들어가 있을 수 없고, 물을 이끌어 곡(斛)에다 받아두어야만 목욕할 수 있다. 천정(泉井) 속에 조그마한 구멍이 있는데, 너무 깊어서 바다와 통하지 않는가 의심스럽다. 영안도(永安道 함경도의 옛 이름)에도 온천의 우물이 있다. 전라도(全羅道)에는 다만 무장(茂長)의 염정(鹽井)이 있을 뿐 온천은 없다. 지금 이 사실들을 살펴보면 온천은 북방(北方)의 한랭한 심산 골짜기에 많이 있으며, 염기(炎氣)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이 명백하고, 수성(水性)도 또한 각각 다른 종류가 있어서 그 이치를 미루어 생각할 수 없다.
숙도(叔度)ㆍ방옹(放翁)ㆍ번중(藩仲)ㆍ백승(伯勝) 등은 모두 문명(文名)이 있었다. 어렸을 때 술과 계집에 빠져 난봉을 부려서 당시 사람들이 사이(四李)라 불렀다. 여흥(驪興) 신륵사(神勒寺)에서 글을 읽고 학업을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는데, 서울로 돌아가려 하니 부사(府使)가 연석을 베풀고 이를 위로하였다. 사이가 청하기를, “원하건대 기생을 태우고 배를 중류에 띄워 기쁨을 다하고 싶습니다.” 하니, 부사가 이를 허락하였다. 사이가 다투어 배 안에서 기생을 껴안고 풍악 소리를 내어 하늘에 용솟음치게 하고 술에 취하여 주정하고 장난하니, 뱃사공도 모두 머리 끝까지 취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해 사이(四李)가 스스로 노를 저어 순풍에 돛을 달고 흘러 내려와 하룻밤 사이에 한강(漢江)에 이르렀다. 이튿날은 빗물이 크게 불은데다 사공과 여러 기생이 굶주리고 고단하여 갈 수가 없었다. 배를 조금씩 끌고 올라가서 5일 만에야 비로소 부(府)에 도착하니, 부사(府使)가 크게 노하여 기생과 뱃사공을 벌하고 이들을 심문하니, 뱃사공들이 기생들을 모두 범(犯)하였었다. 방옹(放翁)의 장인(丈人) 박씨(朴氏)는 성품(性品)이 매우 인색하여 고령(高靈)에 노적가리 만석(萬石)이 있으나 쓰지를 않았다. 방옹이 그 벗과 함께 고령에 가서 창곡(倉穀)을 가져다가 날마다 소와 말을 잡아서 향락(享樂)하여, 박 노인이 이 소문을 듣고 급히 가서 몰아내려고 하자, 방옹이 말하기를, “명년(明年)에 만약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맹세코 집에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하고, 진주(晉州)의 단속사(斷俗寺)에 있으면서 독서만 하였는데, 방옹이 기묘년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진주에도 같이 과거에 합격한 자가 10여 명이나 있었는데, 성찬(盛饌)을 갖추고 촉석루(矗石樓) 위에다 크게 잔치를 베풀고는, “큰 손님이 장차 이곳에 이르리라.” 하였다. 여러 기생이 해가 저물도록 기다렸더니, 방옹이 가마를 타고 그 친구 몇 명과 함께 누(樓)에 도착하여 의자에 걸터앉았다. 옷은 누추하고 머리에 쓴 갓은 반이나 찢어진데다가 키가 작고 얼굴이 여위어 풍채가 아주 볼품이 없었으므로 기생들이 놀라 말하기를, “이 사람이 큰 손님이요?” 하고 서서 눈웃음만 쳤다. 방옹이 아랑곳하지 않고 큰 소리로, “명년에는 장원급제(壯元及第)하고, 몇 년 안 가서는 감사(監司)가 되리라.” 하고, 며칠을 머물면서 마음껏 즐겼다. 이듬해 갑신년에 과연 장원급제하고 몇 년 뒤에 당상관에 올라 진주에 오게 되었는데, 고운 비단을 걸친 의상이 선명하니 기생들이 탄복하여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지금은 경기 관찰사가 되었다. 번중(藩仲)은 을유년에 장원급제하여 형조 판서가 된 뒤에 죽었고, 숙도(叔度)는 임오년에 급제하여 벼슬이 지중추부사에 이르렀으며, 백승(伯勝)은 병술년에 급제하여 지금은 첨지중추부사가 되었으니, 모두 당시의 호걸들이다.
김구지(金懼知) 군의 자(字)는 근부(謹夫)인데, 개성(開城)에서 서울로 와서 숭례문(崇禮門) 밖에 있는 남의 집 방을 세내어 살았다. 사서 삼경을 깊이 이해하지는 못하였으나 통하지 않는 바가 없었다. 또한 과거에 역시 여러 번 초시(初試)에만 합격하였을 뿐 마침내 급제하지는 못하였다. 사람됨이 순진하고 근면하였으며 쾌활하고 온화하여 사람들과 사귈 때는 예(禮)에 거슬림이 없었다. 이런 까닭으로 많은 조정 명사(名士)들이 이 사람과 사귀었다. 집안이 어려워서 종이 없었고, 남의 여자종을 얻어 첩으로 삼았으며, 항상 여염집의 어린이 수 십 대(隊)를 모아 긴 행랑을 만들어 거처하게 하였다. 자질이 능하고 능하지 못함에 따라 나누어 가르치되, 아침에 모여들게 하고 저녁에는 흩어지게 하였으며, 그 가운데서 능한 자를 뽑아 유사(有司)를 삼았다. 또 일직(日直) 제도가 있었는데, 그 법은 학궁(學宮)의 의례(儀禮)를 모방하였다. 외지 못하는 자와, 게을러서 읽지 아니하는 자와, 다투어 서로 욕하는 자와, 스승과 연장자에게 무례한 자와, 결석한 자와, 늦게 온 자가 있을 것 같으면 일직이 유사에게 글로써 고하고, 유사는 스승에게 고하여, 그 죄의 경중(輕重)에 따라 벌하였다. 10일마다 또 시를 짓게 하여 고하(高下)의 차례에 따라 이름을 뜰에서 부르니, 사람들이 더더욱 근면하게 힘썼다. 세시(歲時) 명절에는 서로 술병을 가지고 와서 드렸다. 나와 유우후(柳于後)ㆍ이숙도(李叔度)ㆍ방옹(放翁)ㆍ이자범(李子犯)ㆍ유관지(柳貫之)가 모두 그 문하에서 나왔다. 이때에 유사덕(劉師德)ㆍ곽신민(郭信民)ㆍ유여흠(兪汝欽)도 모두 가르쳤으나, 김군이 제일 부지런하고 엄하였다. 조정에서 가상히 여겨 특별히 군직(軍職)을 주고 그 뒤에 환관(宦官)의 사부(師傅)가 되게 하였다. 사부가 맡은 일은 환관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내종친(內宗親)으로서 아직 대궐을 나오지 않은 자가 모두 가르침을 받았다. 세조께서 불러 글을 강독하게 할 때 김군이 그 뜻에 능통하여 묻는 대로 대답하니, 모두 이치에 합당하였다. 전교(傳敎)하기를, “이 사람은 다른 사부(師傅)에 비할 바가 아니다. 참으로 쓸만한 인재다.” 하고, 특별히 은대(銀帶)를 하사하고, 장흥 주부(長興主簿)를 배하였다. 성종(成宗)이 월산대군(月山大君)과 함께 가르침을 받았는데 즉위하여서는, 사랑이 매우 두터워 종묘서영(宗廟署令)에 제수되었다. 조관(朝官)이 된 이후부터는 어린이들을 다시 가르치지 아니하고, 항상 사인(士人)과 놀면서 술 마시고 담회(談會)하여 허송하는 날이 없었다.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였고, 나이 70에 벼슬이 통훈에 이르러 죽었으며 자식이 없었다. 김우신(金友臣)ㆍ조륜(趙崙)ㆍ이사강(李思剛) 등이 또한 환관(宦官)의 사부(師傅)로서 임금을 도운 공이 있어 조륜과 이사강은 문관(文官)의 반열(班列)에 오르고, 김우신은 당상관에 올라 호조 참의에 이르렀다. 첨지(僉知) 최세원(崔勢遠)은 경사(經史)에 박통(博通)하였으나 나이가 40이 지나도록 급제하지 못하였다. 세조(世祖)께서 영의정(領議政)이 되었을 때 덕종(德宗)은 도원군(桃原君)이었는데, 결백하고 정직한 선비로 유명한 자들을 뽑아 스승을 삼으려 하니, 첨지(僉知)가 여러 사람의 추천으로 반독(伴讀)이 되어 아침 저녁으로 도움이 많았다. 세조께서 임금이 되고 덕종(德宗)이 세자가 될 때 첨지는 병자과(丙子科)에 급제하였다. 유가(遊街)하는 날에는 동궁(東宮)으로부터 천동(天童)을 모두 내려주었고, 삼관(三館)에서 연회할 때는 반감(飯監)과 각 색장(色掌)이 모두 찬물(饌物)을 가지고 오니, 그 영화가 지극하였다. 덕종(德宗)께서 일찍 승하하시니, 첨지가 전래대로 승진되어 당상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군직(軍職)을 맡는 어려움에 처하였다. 상서(上書)하여 덕종을 도우면서 많은 사랑을 받은 일 등을 말했으나, 성종(成宗)께서 돌보지 않으시고 총애를 희망하는 것이라 하여 끝내 발탁하지 않았다. 첨지가 한을 품은 채로 죽으니, 이것으로 미루어보면 때를 만나고 만나지 못함과 벼슬하고 벼슬하지 못함이 모두 하늘에 달렸다하겠다.
해마다 여름과 겨울에 성균관 유생이 종이에 궐(闕) 자를 써서 공자(孔子)를 왕(王)으로 존경하여 받들었는데, 동학(東學 서울 사학(四學)의 하나. 동부(東部)에 있었음)을 복성공(復聖公 안자)의 나라로 삼고, 남학(南學)을 술성공(述聖公 자사)의 나라로 삼았으며, 중학(中學)을 종성공(宗聖公 증자)의 나라로 삼고, 서학(西學)을 아성공(亞聖公 맹자)의 나라로 삼아 제후가 천자를 우러러봄과 같이 하였다. 성균관 상사(上舍)ㆍ하사(下舍)의 사람을 백관(百官)의 직에 추천하되, 이조가 인물을 전형하여 선발하는 일을 맡아 현부(賢否)를 변별(辨別)하였다. 후보자 추천에 모두 합격하여 승지에 제수된 자에게는 은대연(銀臺宴)을 베풀며, 사람의 성에 공(孔) 자와 구(丘) 자에 관계됨이 있는 자는 모두 종정(宗正)의 직을 주었다. 만약 불손한 자가 있으면 가느다란 띠로 목을 매어 데리고 와서 방 판자 밑에 가두고, 의금부 제조(提調)에게 명하여 죄를 묻게 하며, 심하게 도리를 어기는 자는 초인(草人)의 형상을 만들어서 목을 벤다. 도읍(都邑)을 옮기게 되면 궐(闕) 자를 처음에는 동재(東齋)에 붙였다가 명륜당(明倫堂)에 올려 특사(特赦)를 내린 뒤에 서재(西齋)에 붙인다. 재추(宰樞)가 되는 자는 종이로 띠를 만들어 맥초(麥草)를 붙여 금빛이 나게 하고, 백지(白紙)를 잘라 망건(網巾)에 붙여서 옥관자(玉貫子)라 부른다. 장수가 된 자는 종이를 잘라 깃[羽]을 만들어 갓 위에 꽂아 융복(戎服)의 모양을 만든다. 사학(四學)에서는 사신을 보내어 조회하는데 닭으로 송골매[海東靑]를 삼아 바치며, 예조에서는 온 사신에게 연회를 베풀되, 술 한 잔을 주며 안주로는 볶은 콩을 쓰고, 재(齋)에서 수직(守直)하는 어린아이에게 명하여 솥 뚜껑을 치고 노래를 하면서 대접하니, 이를 동악(動樂)이라 한다. 성균관에서도 또한 사신을 사학에 보내는데 이를 천사(天使)라 하고, 그 사학에서는 베옷과 이불을 방 기둥에 싸서 이를 결채(結綵)라 하여 맞이하였다. 전에 윤심(尹深) 상사(上舍)가 천사가 되어 겉에는 속이 붉은 옷을 입고, 대나무를 타고 저자 복판을 지나자, 사람들이 다투어 웃었는데 윤심은 손을 휘두르며 중국 말하는 시늉을 하면서 옆에 아무도 없는 양 제멋대로 떠들며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석전제(釋奠祭) 첫날은 이름을 뽑아 삼공(三公)을 삼고, 그 나머지 상사(上舍)는 모두 별명(別名)으로 백(伯)을 봉(封)하며, 하재(下齋)에서도 모든 직을 제수하는 데 차등이 있었다. 사학(四學) 유생(儒生)으로서 와서 제기(祭記)를 돕는 자에게는 장난으로 제(題)를 삼아 제술(製述)하게 하고 그 고하(高下)의 차례를 만들어 천장급제(天場及第)라 하였으며, 방(榜)을 뜰에서 부르고 크게 정초(政草)를 써서 대성전(大成殿) 앞에 펴면, 헌관 선생(獻官先生)이 모두 모여 이를 보니, 조정과 다름이 없었다. 태종(太宗) 때에 내환(內宦)이 천도(遷都)의 일을 보고 달려가 상주(上奏)하기를, “성균관 유생이 모반(謀叛)합니다.” 하니, 태종이 자세히 그 연유를 물어보고 전교하기를, “이는 유생의 고례(古例)이다. 그 유래가 오래되었으니 다시 말하지 말라.” 하였다. 나는 옛날 벼슬하던 젊은 시절에 이것을 하였는데, 기묘년 천도하는 소문(詔文)에 동도(東都)의 나쁜 점을 논하여, “산 우뚝한 것이 땅을 덮어 험하고, 못이 시내에 이르러 무너졌다. 맹지(孟智)는 개ㆍ돼지의 마음을 품고 양근(良謹)은 이리ㆍ승냥이의 횡포(橫暴)를 마음대로 한다.” 하였고, 서도(西都)의 아름다움을 찬(贊)하기를, “암랑(巖廊)의 사이에 큰 인물이 많고 수사(洙泗) 물가에 버들이 무성하도다.”하였으며, 희롱하여 말하기를, “더욱 천령(千齡)의 운수를 북돋우고, 길이 만년의 아름다움을 기른다.” 하였다. 상사(上舍) 임맹지(任孟智)의 별명은 견(犬)이요, 정양근(鄭良謹)의 별명은 여진(女眞)이며, 또 최개지(崔盖地)ㆍ지달하(池達河)ㆍ박암신(朴巖臣)ㆍ정량(鄭良)ㆍ정석(鄭奭)ㆍ최제(崔濟)ㆍ최수(崔洙)ㆍ양수사(楊守泗)ㆍ유종준(柳宗濬)ㆍ권의(權依)ㆍ이익배(李益培)ㆍ전영부(全永孚)ㆍ오만년(吳萬年)ㆍ윤령(尹齡)은 모두 유생(儒生)의 이름을 사용한 것이다.
문무과(文武科)에 동시에 방(榜)을 같이 한 자를 동년(同年)이라 하는데, 잡과(雜科)와 승시(僧試) 선과(禪科)에 합격한 자도 또한 문무(文武)를 동년이라고 하니, 이는 끌어다 문무과와 같게 하기 위함이다. 그 시법(試法)은 선종(禪宗)에서는 《전등록(傳燈錄)》과 《선문염송(禪門拈頌)》을 강(講)하고, 교종(敎宗)에서는 《화엄경(華嚴經)》을 강하여 각각 30명을 뽑는다. 전에는 내시별감(內侍別監)이 명을 받들고 갔고, 지금은 예조 낭청(郞廳)이 간다. 그 종(宗)의 판사(判事) 장무(掌務)와 전법(傳法) 3명과 증의(證義) 10명이 함께 앉아 시취(試取)하는데, 뇌물을 판사와 증의에게 바치면 합격하고, 뇌물을 바치지 않으면 능력이 있고 이름이 있는 자라도 합격하지 못하니, 사사로움을 따르고 욕심이 많은 것은 세상 사람들보다 더 심하다. 합격한 사람은 대선(大禪)이라 한다. 선종에서는 대선에서 중덕(中德)으로, 중덕에서 선사로, 선사에서부터 올라 대선사(大禪師)가 되는데, 판사를 임명한 사람은 도대선사(都大禪師)라 한다. 교종(敎宗)에서는 대선에서 중덕이 되고, 중덕에서 대덕이 되며, 대덕으로부터 올라 대사(大師)가 되는데, 판사에 임명된 자는 도대사(都大師)라 한다. 양종(兩宗)에서는 내외의 절을 각각 15개씩 나누어 관장한다. 중덕에 오른 자는 주지(住持)로 추천하여 임명하고, 선종과 교종은 삼망(三望)을 갖추어 예조에 올리며, 예조는 이조에 옮겨 입계(入啓)하여 임금에게 낙점(落點)을 받는다.
세종(世宗)이 집현전 유신(儒臣) 신고령(申高靈) 등 여러 명을 뽑아 휴가를 주어 진관사(津寬寺)에서 독서하게 하고, 그후에는 홍익성(洪益城 홍응(洪應))ㆍ서달성 (徐達城 서거정(徐居正))ㆍ이명헌(李明憲) 등 여러 명을 장의사(藏義寺)에서 독서하게 하였다. 세조(世祖)가 집현전을 혁파하고 유신으로 유명한 자를 뽑아 겸예문(兼藝文)이라 하였는데, 맡은 일은 없이 다만 궁궐에서 치도를 논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정사(政事)를 의논하였는데, 여기에 뽑힌 사람이 많았다. 성종(成宗)이 다시 홍문관(弘文館)을 설치하였으니, 채기지(蔡耆之)ㆍ허헌지(許獻之)ㆍ조태허(曺太虛 조위(曺偉))ㆍ권숙강(權叔强)ㆍ양사행(楊斯行)ㆍ유극기(兪克己) 등이 명을 받아 장의사에서 독서하였다. 옛날 승사(僧舍)가 남호(南湖) 귀후서(歸厚署 조선 시대 장례에 관한 사무를 보던 관아)뒤 언덕에 있는데, 세상에서 16나한(羅漢)이 영험(靈驗)이 있다 하여 향화(香火)가 끊이지 않았다. 중 상운(尙雲)이 그 사(舍)에 거처할 때 장가를 들어 아들을 낳았는데, 사헌부가 중에게 죄를 신문하여 처벌하고 속인(俗人)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불상은 흥천사(興天寺)로 옮겼다. 그리고 그 집을 홍문관(弘文館)에 주어 번(番)을 나누어 독서하게 하니, 독서당(讀書堂)이라 하였다. 조정 선비로 구경하러 와서 노는 사람들은 술을 많이 가지고 오고, 또 임금께서 가끔 술과 음식을 하사하여 연석을 배풀게 하고 위로하여,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고 있다.
성 밖 3면에 사대원(四大院)이 있는데, 세조(世祖)가 재간 있는 중에게 명하여 이를 수축하게 하였다. 보제원(普濟阮)은 동대문 밖에 있고, 3월 상사(上巳)와 9월 중양(重陽)에는 누(樓) 위에서 기로 (耆老)와 재추(宰樞)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홍제원(洪濟院)은 사현(沙峴) 북쪽 교외에 있는데, 들 가운데 높은 언덕이 있고, 푸른 소나무가 그 위에 가득 찼으며, 위에 조그마한 정자가 있다. 중국 사신이 들어오는 날에는 이 정자에 머물러 옷을 갈아입었다. 그뒤 정자가 허물어지자 지금은 천사가 원(院)에서 쉰다. 제천정(濟川亭)은 한강 북쪽 언덕 위에 있는데 경치가 뛰어났다. 유람하려는 중국 사신은 우선 이 누에 오르며 벼슬아치로서 객을 영송(迎送)하는 사람들이 나날이 모여든다. 사평원(沙平院)은 한강의 남사(南沙) 교외에 있는데 지세가 낮아 오직 날이 저물어서 강을 건너지 못하는 행인만이 자고 가는 곳이다. 양화도(楊花渡) 북쪽 언덕에는 희우정(喜雨亭)이 있는데,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집이었다가 나중에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소유로 되었다. 성종(成宗)이 해마다 농형(農形)을 살필 때와 세곡(稅穀)을 실어나르는 배를 모아 수전(水戰)을 익힐 때면 친히 임행(臨幸)하였는데, 망원정(望遠亭)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어제(御製) 시 몇 수가 있었는데, 문명(文名) 있는 조신에게 명하여 모두 차운(次韻)하게 하여 판(板)을 둘러 정자 위에 걸어두었는데, 대군(大君)이 죽은 뒤로는 성종(成宗)이 정자에 가지 않았으며, 제천정에 자주 행차했으나 정자가 좁은 까닭으로 개영(改營)하게 하였다. 어떤 중이 전천교(箭串橋)를 구축할 때 많은 돌을 채벌하여 대천을 건너는 다리를 만들었는데, 다리가 3백여 보를 넘고 안전하기가 집 안에 있는 것과 같아서 행인이 평지를 밟는 것과 같았었다. 그리하여 성종(成宗)이 그 중을 유능하다고 여겨 구축하도록 명하였다. 관력(官力)을 번거롭게 하지 않으려고 미포(米布)를 많이 급여하였는데, 중은 낭비만 하고 수 년이 되어도 성과가 없이 겨우 동우(棟宇)만을 세워 성종이 끝내 올라가 보지 못하였으므로 백관(百官)이 슬퍼하였다. 그뒤에 천사(天使) 왕헌신(王獻臣)이 올 때 조정에서는 수축을 마치고 단청을 가하였다. 그뒤에 전교(箭郊)에 큰 다리를 만들어 제반교(濟盤橋)라 하고, 또 동대문 밖 왕심평(往尋坪)에 큰 다리를 구축하여 영도교(永渡橋)라 하였는데, 어필(御筆)로 정하였다.
유문양(柳文陽)이 말하기를, “육조(六曹) 가운데 깨끗하고 조용하기가 예조만한 곳이 없다. 내가 지금 판서가 된 지 5년이나 되었지만 아직도 싫증을 느끼지 못하겠다. 다만 어려운 것이 셋 있는데, 예의사(禮儀使)가 그 첫 번째 어려움이요, 왜야인(倭野人)을 접대하는 것이 두 번째 어려움이며, 제학(諸學)의 취재(取才)가 그 세 번째 어려움이다.” 하였다.
고려 공민왕(恭愍王)이 홍건적(紅巾賊)의 난(亂)을 만나 남쪽 청주(淸州)로 행차할 때 원암역(元巖驛)에 이르니, 그때에 행촌(杏村) 시중(侍中) 이암(李嵓), 칠원(漆原) 시중 윤환(尹桓), 서곡(瑞谷) 시중 염제신(廉悌臣), 당성(唐城) 홍원철(洪元哲), 수춘(壽春) 이수산(李壽山), 계성(啓城), 왕재(王梓), 회산(檜山) 황석기(黃石奇)가 있었는데, 모두 나이 많고 덕이 높아 칠로(七老)라 일컬었다. 연집시(宴集詩)에,
벽옥의 술잔은 깊어 맛있는 술이 향기로운데 / 碧玉杯深美酒香
거문고 소리는 늘어지고 피리소리는 길도다 / 嵇琴聲緩笛聲長
그 가운데 또 가느다란 노래 소리 섞이니 / 箇中又有歌喉細
칠로가 서로 기뻐하는데 귀밑털이 서리와 같도다 / 七老相歡鬢似霜
한 것은 황석기(黃石奇)의 사(辭)다. 사가 비록 묘하지는 못하나 그 당시 여러 노인의 가상을 상상해 볼 만하다.
독곡(獨谷 성석린(成石璘)의 호)이 기우(騎牛) 이선생(李先生)과 친하였는데, 하루는 방문하였으나 만나지 못하였다. 문짝에 쓰기를,
덕이는 태평한 해를 보지 못했는데 / 德彝不見太平年
80에 또 봄을 만났으니 다시 하늘에 감사하도다 / 八十逢春更謝天
도리 꽃이 성에 가득하고 향우가 지나갔는데 / 桃李滿城香雨過
적선은 어떤 술집에서 자고 있는가 / 謫仙何處酒家眠
하였다. 또 어렸을 적에 조시중(趙侍中)이 좌주(座主)를 맞아 잔치를 하였다. 독곡이 그 자리에서 축하하는 시를 지었는데,
선비를 보면 바야흐로 좌주의 어짊을 아나니 / 得士方知座主賢
시중이 시중 앞에 헌수하도다 / 侍中獻壽侍中前
하늘이 좋은 비를 내려 가객을 머무르게 하고 / 天敎好雨留佳客
바람은 꽃잎을 날려 춤추며 연석에 떨어지게 하도다 / 風送飛花落舞筵
하여 좌우에 있는 사람이 모두 탄복하였다.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성석용(成石容). 독곡의 형)이 듣고 책망하기를, “선비가 재주를 꺼림은 샘많은 계집을 싫어하는 것보다도 심하거늘 어찌하여 너는 사양하지 않고, 감히 먼저 시를 지어 몸가짐을 생각하지 않는가.” 하였다. 이것은 당시는 말세 사람들이 흔히 재주 있음을 시기하여 서로 해하는 까닭으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김문평(金文平)은 문장이 웅혼(雄渾)하고 종횡무진 누비고 다니며. 오로지 사마자장(司馬子長)의 궤범(軌範)을 모방하였는데, 온 세상에 맞설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 시 또한 기상(氣像)이 높고 깊이 골수(骨髓)를 얻었다. 성품이 검속(檢束)할 줄을 모르고 압운(押韻)이 바르지 못하여 모두들 시(詩)가 문(文)보다 못하다고 하였으나 실상은 시나 문이나 모두 넉넉하였다.〈격옹도(擊瓮圖)〉라는 시에는,
독 속에 있는 천지가 갑자기 활짝 열리어 / 瓮中天地忽開豁
산천 품물이 한가지로 밝게 되살아나도다 / 山川品物同昭蘇
하고, 〈심중추산재(沈中樞山齋)〉라는 시에는,
삐딱한 사립문 시냇가 언덕에 면해 있어 / 紫門不整臨溪岸
산비가 아침마다 내려 물이 불어남을 보겠도다 / 山雨朝朝看水生
하고, 〈용궁헌제(龍宮軒題)〉라는 시에는,
마음껏 백배를 마시고 누상에 누워 / 痛飮百杯樓上臥
발을 걷으니 남북이 모두 청산이로다 / 捲簾南北是靑山
하였다. 또 산사(山寺)를 두고 시를 지었는데,
창은 비었는데 중은 장삼을 깁고 / 窓虛僧結衲
탑은 조용한데 객이 시를 짓도다 / 塔靜客題詩
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생각 너머의 정취를 얻은 것으로 보통 사람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송사문(宋斯文)은 용모가 못생기고 행동거지가 거칠고 옹졸하며 긴 수염이 더부룩하였고 눈이 어둡고 사팔뜨기였다. 과거에 급제한 뒤부터 장년(長年)에 이르는 동안 외방교수(外方敎授)로 있다가 교체되어 혜민서(惠民署 조선 시대 구차한 백성을 치료 하여 주는 관아) 교수가 되어, 오로지 의녀(醫女)를 가르치는 데 힘썼다. 의녀는 각사(各司)에서 나이 어린 계집종을 뽑아서 쓰는데, 단정하고 교태 있는 계집종들이 다투어 와서 글을 배울 때면, 송사문의 모습은 마치 늙은 곰이 꽃 수풀 속에 꿇어앉는 것 같았다. 악원(樂院) 옆에 살았는데, 나날이 왕래 하면서 동료들을 만나게 되어,“어디를 가느냐.”고 물으면 송사문이 소리를 높여 읊기를,
우거는 장악원에 이웃해 있고 / 居隣掌樂院
직무는 혜민서를 맡았도다 / 職帶惠民署
아침부터 화류지에 있으면서 / 朝從花柳地
또 다시 화류를 향하여 가도다 / 又向花柳去
하여 듣는 사람이 이가 시리도록 웃었다.
조정에서는 3월 상사일(上巳日)과 9월 중양절(重陽節)마다 보제루(普濟樓)에서 기로연(耆老宴)을 베풀고, 훈련원(訓鍊院)에서 기영회(耆英會)를 베풀고 모두 주악(酒樂)을 하사하였다. 기로연에는 전직 당상(堂上)이 가서 참례하고, 기영회에는 70세가 된 2품 이상의 종재(宗宰)와 정일품 이상 및 경연 당상(經筵堂上)이 가서 참례(參禮)하였다. 예조 판서는 모든 일을 고찰하여 연회를 관리하고, 승지(承旨)도 또 명을 받들어 간다. 편을 나누어 투호(投壺)하여 이기지 못한 자는 술잔을 가져다가 이긴 사람에게 주고 읍(揖)하고 서서 마신다. 악장(樂章)을 연주하고 술을 권하여 연회를 열고, 크게 음악을 연주하여 각각 차례로 술잔을 전하여 마시며, 반드시 취한 다음에야 끝낸다. 날이 저물어 서로 부축하여 나오니, 이 회에 참석하게 된 사람들은 모두 영광으로 여겼다.
조정은 문무(文武)의 선비를 대우함이 한결같다. 춘추(春秋) 상정(上丁)에 소왕(素王 공자)에게 석전(釋奠)을 지내고 이튿날 음복연(飮福宴)을 베푸는데, 의정부(議政府)와 육조(六曹)의 당상관과 낭청의 문신으로 있는 자가 모두 가서 참례하고 훈련원 관원도 참여한다. 춘추에 큰 독(纛)에 제사를 지내고 이튿날은 음복연을 베풀어 주악을 하사하니, 의정부 육조(六曹) 당상(堂上)이 가서 참례하고 성균관원(成均館員)도 역시 참여한다. 문무 남행원(南行員 음관)은 선생을 불러가며 서로 술을 권하다가 머리끝까지 취하기도 한다. 매년 상사일과 중양절(重陽節)에는 유생 과시(儒生科試)를 베풀고, 우두머리로 합격한 세 사람은 회시(會試)에 나가는 것을 허가한다. 또 문신 과시(文臣課試)를 의정부(議政府)에서 베풀고 수석인 사람은 가자(加資)하는데, 정부 육조(六曹)ㆍ관각(館閣)ㆍ당상관(堂上官)이 참여한다. 또 춘추(春秋)로 무도시(武都試)를 베풀고 초종장(初終場)에는 주악을 하사하여 정부 육조ㆍ도총부(都摠府) 당상관이 참여하고, 그 나머지 날에는 당상관 각각 한 명이 참여한다. 1등(等) 한 사람은 수에 상관없이 가자하고 그 나머지는 벼슬을 준다. 대개 연품(宴品)이 같고 문무(文武)가 한 가지이나, 훈련원에 나가는 것을 즐겨하고, 성균관에 가는 것을 꺼리는 것은 다름 아니라, 무의 방탕함을 즐기고 문의 예법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성종(成宗)이 듣고 문무 연회(文武宴會)가 있는 날은 정부 육조ㆍ당상관에게 명하여 전원이 가서 참석하게 하였으나, 처음에는 모두 갔으나 그뒤에는 좀 소홀해졌다.
세종(世宗) 갑인년에 별시(別試)를 친 다음 방을 내거는 날 상사(上舍) 박충(朴忠)이 자라처럼 움츠리고 집에 있으면서 심부름하는 종을 시켜 방목(榜目)을 가서 보게 하고 앉지도 못하고 서서 기다렸다. 저녁 때에 그 종이 천천히 돌아와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앉아서 말에게 먹일 여물만을 장만하고 있었다. 상사가 낙담하여 누웠다가 천천히 돌아보면서 묻기를, “방(榜)에 내 이름이 없더냐?” 하니, 종은 “들긴 들었으나 별로 빛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사가, “어찌되었느냐?”물으니, 종이 말하기를, “최항(崔恒)께서는 장원이 되고 어르신은 말좌가 되었나이다.” 하니, 상사가 왈칵 성을 내어 낯빛을 변하고 크게 꾸짖으면서, “아, 야 이놈아, 그것은 내가 바라던 바이다.” 하였다. 최항은 나이 젊은 유학(幼學)이요, 박충은 나이 많은 생원이라 그 종은 말좌라고 부끄럽게 여겼지만 상사는 말좌를 다행으로 생각한 것이다.
성균관의 상하재(上下齋)는 각각 50명이며, 동서(東西)가 모두 2백 명이니, 하재는 사학(四學) 유생 중에 뛰어난 사람으로써 충당하였다. 그 외에 동서학(東西學)에서 각각 3명씩 납미(納米)를 허하고, 찬(饌)은 관(官)에서 급여하면서 사량(私糧)이라 이름하였다. 영성(寧城 최항)이 사량으로 관에 있었으나, 이해 별시(別試)에는 삼관(三館)에서 사량을 거절하여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되었다. 영성이 표(表)를 올려 말하기를, “먹는 데는 비록 공사(公私)의 분별이 있으나 학문에는 너와 나의 구별이 없습니다.” 하고, 시험 장소에 들어가게 되니 시험장 안의 늙은 상사들이 비웃기를, “어디에 있는 가죽 불알이 이같이 날뛰느냐.” 하니, 영성이 답하기를, “당신 애비는 철불알이오?” 하였다. 마침내 장원에 뽑혀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고 훈공과 업적이 한 시대에 으뜸이었다.
태종(太宗) 병신년 중시(重試)에 이조 정랑 김자(金赭)가 병조 정랑 양여공(梁汝恭)과 함께 시험장에 들어갔는데, 양여공은 문장에 능하고 김자는 호걸이었다. 양여공이 해가 질 무렵에야 시편(詩篇)을 작성하였는데, 감자가 양여공에게 말하기를, “너는 향생(鄕生)으로서 병조 낭관이 되었으니 족하다.” 하고는, 시권(詩卷)을 빼앗아 이름을 고쳐 써서 바쳤는데, 김자가 그렇게 해서 장원급제하였다.
세종(世宗) 병진년 별시(別試)에 처음에는 서의(書疑 과제(科題)ㆍ시ㆍ부ㆍ표책(表策)ㆍ의(疑)ㆍ의(義) 중 하나)로써 하다가 갑자기 대책(對策)을 썼다. 윤영평(尹鈴平 윤사균(尹士均))은 어려서부터 과거 공부에는 소질이 없었는데 우연히 서울에 왔다가 친구를 따라 응시하여 친구들의 힘을 입어 선(選)에 들었으나, 전시(殿試) 날에는 친구들이 자기의 답안 작성에만 몰두하여 도움을 얻지 못하였다. 윤영평은 초지(草紙)를 가지고 한 마디도 쓰지 못하고 있는데, 해가 질 무렵에 회오리 바람이 어지럽게 일어나 어떤 서초(書草)가 앞에 날아와 떨어져 윤영평이 드디어 주워서 써 바쳤는데 장원에 뽑혔다. 서초는 강희(姜曦)가 지은 것으로, 강희는 기미년 별시에서 제 일등으로 합격하였다.
숙도(叔度)가 대사헌으로부터 성균관 대사성으로 옮겨 제수되자 길이 먼 것을 꺼려 희롱하기를, “사성(司成)이란 것은 유생의 본보기가 되어야 할 것이니, 마땅히 경서에 밝고 행동을 잘 닦은 자로 삼아야 할 것인데 내가 무슨 재주가 있다고 이 임무를 맡겠는가. 최경례(崔敬禮)는 반궁(泮宮)의 옆에 살고 능히 우공(禹貢) 한 편을 외우니, 이도 역시 대사성이 될 만하다. 재주가 있고 가까운 곳에 거처하니 어찌 불가하겠는가.” 하였다. 최경례는 무인(武人)으로 젊어서 다만 우공을 외울 뿐이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숙도의 말을 듣고 웃지 않는 이가 없었다.
조카 사형(士衡)은 성품이 너그러웠다. 밤에 아내와 함께 누웠을 때 마침 사형은 잠이 깨어 있었는데, 계집종이 방에 들어와 자루를 열고 쌀을 가져갔다. 이튿날 아침에 아내가 자루를 검사하여 이 사실을 알고 계집종과 사내종을 때렸다. 사형은 아직 누워서 일어나지도 않고 그 일을 묻지도 않다가 천천히 말하기를, “쌀을 훔친 자를 내가 아오.” 하고는, 또 말이 없었다. 아내가 말하기를, “만일 알 것 같으면 말해 보십시오.” 하니, 사형이 말하기를, “쌀 훔친 자는 종년 아무개인데 몇 말을 가져갔소.” 하였다. 아내가 큰 소리로, “왜 그때에 말하지 않으셨소.” 하니, 사형이 웃으면서, “당신 잠 깨울까봐 말하지 않았을 뿐이오.” 하였다. 사람들이 그가 비록 말하지 않음은 비웃었으나 그 진실하고 솔직함은 좋아하였다.
글씨 잘 쓰기도 어렵지만 제액(題額 액자에 그림이나 글씨를 그리거나 씀)은 더욱 어렵다. 제액에 있어서는 조자앙(趙子昻)의 필법도 이설암(李雪庵)에게 양보했거늘, 하물며 자앙(子昻)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에 있어서랴. 우리 나라 공민왕(恭愍王)이 쓴 강릉(江陵) 임영관(臨瀛館)과 안동(安東) 영호루(映湖樓)는 참으로 능숙하고 힘차서 보통 사람들이 따를 바가 아니다. 강릉관(江陵館)은 요즈음 화재를 입어 그 액자를 잃었으니 아까운 일이다. 내가 개경(開京) 안화사(安和寺)에 갔을 때 전액(殿額)을 보니, 바로 송(宋) 나라 휘종(徽宗)이 쓴 것이요, 문액(門額)은 채경(蔡京)의 글씨라, 비록 모두 군신(君臣)으로서 도를 잃은 사람이지만, 그 연대가 오래되고 필법이 묘한 것은 보배라 할 만하다. 서인 이용(李瑢 안평대군)이 쓴 대자암(大慈菴)ㆍ해장전(海藏殿)ㆍ백화각(白華閣)의 글자는 울연(蔚然)히 날아 움직이는 느낌이 있으니, 또한 훌륭한 보물이다. 지금 모화관(慕華館)은 제학(提學 신장(申檣))이 쓴 것인데 비록 이용만은 못하나 역시 볼 만하고, 우리 백씨(伯氏)가 쓴 경복궁(景福宮) 문전의 액자는 오로지 이설암을 모방한 것이지만 찬찬하고 법이 있어 사람들이 모두 훌륭하게 여긴다. 정국형(鄭國馨)이 쓴 창덕궁(昌德宮)의 제전(諸殿)ㆍ제문(諸門)의 액자는 자체(字體)가 바르지 못하고 짜이지 못하여 어긋난 데가 많다.
○ 허문경공(許文敬公 허조)은 조심성이 많고 엄격하여 집안을 다스리는 데도 법도가 있었다. 자제의 교육은 모두 소학(小學)의 예를 써서 하였는데, 조그마한 행동에 있어서도 반드시 삼갔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허공(許公)은 평생에 음양(陰陽)의 일을 모른다.” 하니, 공이 웃으면서, “만약 내가 음양의 일을 알지 못하면 후(詡 큰 아들)와 눌(訥 둘째 아들)이 어디에서 나왔겠소.” 하였다. 이때에 주읍(州邑)의 창기(娼妓)를 없애려는 의논이 있어서 정부 대신에게 물었더니, 모두 “없애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공에게 이 말이 미치기 전에 사람들은 모두 그가 맹렬히 반대할 줄 알았는데, 공이 이 말을 듣고 웃으면서, “누가 이 계획을 세웠는가. 남녀 관계는 사람의 본능으로서 금할 수 없는 것이다. 주읍 창기는 모두 공가(公家) 소속이니, 취하여도 무방한데, 만약 이 금법(禁法)을 엄하게 하면 사신으로 나가는 나이 젊은 조정 선비들이 모두 그릇되이 사가(私家)의 여자를 빼앗게 될 터이니, 많은 영웅 준걸이 죄에 빠질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없애는 것이 마땅치 않은 줄로 안다.” 하여, 마침내 공의 뜻을 좇아 전과 다름없이 그냥 두고 없애지 않았다.
○ 둔촌선생(遁村先生 이집(李集))은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나서 사귀는 사람은 모두 당시에 영웅호걸이었다. 세상일을 비방하다가 말이 신돈(辛旽)에게 미쳤다. 신돈이 몰래 해치려고 하자, 선생은 아버지를 모시고 도망갔다. 동년(同年) 최원도(崔元道)가 영천(永川)에 산단 말을 듣고 드디어 그를 찾아가니, 최원도가 매우 두텁게 접대하고 3년을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마침 선생의 아비가 세상을 떠났는데, 최원도는 빈렴(殯斂)의 모든 일을 자기 아비와 똑같이 하여 그 어머니 무덤 옆에 장례를 지내게 하고 시를 지어주면서 말하기를,
세상의 어지러움을 슬퍼하여 눈물로 옷깃을 적시는구나 / 慷慨僞時淚滿襟
나그네의 효도와 정성은 저 세상에까지 이르도다 / 流離孝懇達幽陰
한산은 아득히 멀어 구름과 연기로 가로막히고 / 漢山迢遞雲煙阻
나현은 돌고 돌아 풀과 나무가 무성하도다 / 羅峴盤回草樹深
하늘이 쌍마의 갈기의 선후를 점침과 같으니 / 天占後先雙馬鬛
누가 군과 나 두 사람의 마음을 알리오 / 誰知君我兩人心
원하건대 세세에 길이 이와 같이 하여 / 願焉世世長如此
모름지기 우리 우정 굳게 굳게 하리라 / 湏使交情利斷金
하였으니,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모두 그 신의를 칭송하고 있다. 나현은 어머니를 장례지낸 곳이데, 지세가 도내에서 으뜸이었다. 그뒤에 최씨는 쇠(衰)하고 이씨는 귀성(貴盛)해지자 사람들은, “객이 주기(主氣)를 빼앗았다.” 하였다.
장인(匠人)의 임무는 비록 천하지만 성품이 공교한 사람이 일을 해야 하는 까닭에 세상 적임자가 드물다. 국초(國初)에 환자(宦者) 김사행(金師幸)과 세종조(世宗朝)에 이천과 장영실은 벼슬이 2품에 이르렀다. 그뒤에 김우묘(金雨畝)와 이명민(李命敏)이 있었는데 이명민은 창덕궁(昌德宮)의 인정전(仁政殿) 짓는 것을 감독하였는데 계유(癸酉)의 난에 죽었다. 세조조(世祖朝)에는 김개(金漑)가 제조(提調)가 되었었고, 최근에는 김극련(金克鍊)과 임중(林重)이 감역(監役)이 되었으며, 지금은 김영우(金靈雨)와 이지강(李止堈)이 그 임무에 능숙하다.
노선성(盧宣城 노사신(盧思愼))이 친구와 함께 술을 마실 때 숙도(叔度)가 취하여 주위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호언장담하였다. 차공(次公)이 말하기를, “너의 기상(氣像)이 마치 번쾌(樊噲)와 같다.” 하니, 숙도가, “번쾌는 한(漢) 나라의 명장이니, 너의 비유함이 정당하다.” 하고, 더욱 의기양양하여 번쾌로 자처하였다. 차공이 말하기를, “번쾌를 죽여야 마땅하다.”하니, 숙도가 그때에서야 말이 없는지라 온 좌중(座中)이 모두 웃었다.
중추(中樞) 안율보(安栗甫)는 그 성격이 친구를 사랑하여 술자리에서는 화목하여 취하면 친구 손을 잡고 서로 희롱하였다. 예조 정랑이 되어 공사(公事) 때문에 판서 홍인산(洪仁山 홍윤성(洪允成))을 찾아가자 홍인산이 술자리를 베풀었다. 두 공이 모두 잘 마시는지라 종일토록 술에 빠져 있었다. 사랑하는 첩이 술잔을 권하는데 바로 홍인산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여자였다. 중추(中樞)가 억지로 그 손을 잡으니, 여자가 놀라 일어나다가 적삼 소매가 끊어졌다. 중추가 따라나오다가 엎어져 뜰 가운데 누워 인사불성이 되었는데, 때마침 소나기가 내려 옷이 모두 젖었다. 홍인산이 거두지 말도록 종에게 경계하였는데 날이 저물자 허둥지둥 집으로 돌아갔다. 홍인산이 의상을 보내며 말하기를, “천우(天雨)가 무정하여 귀하의 옷을 더럽혔는데, 이는 실로 내가 술을 권해서 그렇게 된 것이니 옷 한 벌을 갖추어 보내거니와, 여자의 소매를 끊은 것은 그대가 스스로 변상하여 주시오.” 하였다. 중추가 그 연고를 물어서 알고는 크게 놀라면서 말하기를, “당상(堂上)에게 무례했으니 무슨 낯이 있겠는가.” 하고, 벼슬을 내어놓고 떠나려 하니 홍인산이 듣고 굳이 말렸다. 중추가 그 집에 가서 사죄하니 또 술상을 베풀었다. 실컷 마셔 크게 취하여 다시 여자의 손을 잡으니, 홍인산이 껄껄 웃으며 말하기를, “안공(安公)의 풍정(風情)은 당할 자가 없도다.” 하였다. 사림에서 웃음거리로 전한다.
이광성(李廣城 이극배(李克培))은 문장(文章)과 다스림의 재주가 모두 넉넉해서 항상 스스로 국사(國士)라 하고, 인물을 평할 때는 좋게 말하는 경우가 드물었으나, 특별히 백씨(伯氏)와는 아주 절친한 사이였다. 이광성이 도승지이고 백씨가 우승지였는데, 이광성이 어느 기생을 사랑하여 자취를 감추자 백씨가 간 곳을 알아내고 시를 지어 말하기를,
관아가 파하여 돌아옴에 날이 저물려 하는데 / 衙罷歸來日欲低
명화와 국사가 둘이 서로 만났구나 / 名花國士兩相擕
뉘 집 골목 속에 수레를 숨겼는가 / 誰家巷裏藏車駕
사온서의 동쪽이요, 예부의 서쪽일세 / 司醞東邊禮部西
하고는, 몰래 시를 그 벽에 붙여두었는데, 이광성이 보고 찢어서 소매 속에 넣어버렸다. 이로부터 더욱 뜻이 서로 맞았다. 이광성이 체질될 적에 세조(世祖)가, “군(君)에 대신할 자가 누구냐?”고 물으니, 이광성이 아뢰기를, “성(成) 아무개보다 나은 사람이 없습니다.” 하여, 백씨가 도승지에 등급을 뛰어넘어 제배(除拜)되었다.
강자평(姜子平) 공이 노선성(盧宣城)과 서로 우의가 두터웠다. 노선성의 아들 노희량(盧希亮)은 도승지이고, 강공(姜公)은 우승지였는데, 하루는 저녁 때가 되어 노선성이 미복(微服) 차림으로 강자평의 집에 가서 신분을 알리면서, “도승지가 왔다.” 하니, 강공은 관대를 정제하고 달려나와서 절하였다. 노선성이 크게 웃자 강공이 일어나서 곧 관복을 벗고 말하기를, “내가 늙은이에게 속았다.” 하였다. 그때 사람들이, “자식에게 예를 지키고 아비에게 예의를 지키지 않는 것은, 친분과 명위(名位)가 같지 않은 까닭이다.” 하여 옳은 일이라 하였다.
어판원(魚判院 어효첨(魚孝瞻))은 일처리가 확실하였다. 내자시(內資寺) 판사(判事)가 되어 공계(公鷄)를 길렀는데, 동료 부정(副正)이 손님을 맞으면서, 찬이 없자 닭 한 마리를 삶아 먹었다. 공이 이를 알고 매일 아침 사원(司員)이 모든 곳에서 아전에게 명하여, 사(司)의 회계를 읽게 하고 끝에 가서는 반드시, “부정이 암탉 한 마리를 훔쳐 먹어버렸다.” 하고, 날마다 이와 같이 했다. 부정이 나와 꿇어앉아서, “하관(下官)이 틀림없이 갚겠습니다.”하자, 공이 말하기를,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간 곳을 알고자 함이다.” 하였다. 공이 형조 참판이 되어 관아에 나간 날에, 어떤 아전이 부근(附根)의 제수(祭需)를 찾으니, 공이 말하기를, “부근은 무슨 물건이냐. 부근을 가져오너라.” 하였다. 아전은 부득이하여 지전(紙錢)을 거두고 절하면서, “이것은 저의 과실이 아니라 어 참판의 과실입니다.” 하니, 공이 곧 이것을 태워버렸다. 공이 공조 참판이 되었는데, 공조는 일이 없는 한가로운 벼슬이었다. 전에 있던 당상관은 한 달에 한두 차례 관청에 나올 뿐이었지만, 공은 매일 진시에 와서 유시에야 일을 마치니, 공조 낭관이 괴로움을 참지 못하여 원망하였다. 공은 말하기를, “관(官)에 있으면 이치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 만에 하나 예기치 않게 공사(公事)를 물으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하였다. 청명한 날이라도 반드시 우산을 가지고 다녀 사람들이 그의 고집스러움을 비웃었다. 그러나 공은, “하늘의 변화는 알 수 없으니 혹시 오늘 비가 올지 어떻게 알겠는가.” 하였다.
○ 김현보(金賢甫)는 용모가 파리하고 약하였는데, 그의 친구 어자경(魚子敬)이 조롱하기를, “김현보가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燕京)에 갔을 때 중도에 죽었다는 소식이 잘못 전해져서, 온 집안이 통곡하거늘 한 종이 문에서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면서 통곡하여, ‘용모가 아깝다.’하였는데, 그 종이 무슨 마음으로 그 용모를 아깝다 했는지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김현보가 가사옹(假司饔) 제조(提調)가 되자 어자경이 말하기를, “현보가 나라 잔칫날에 사옹원(司饔院) 차비(差備)에 참례(參禮)하고 돌아와 어미를 뵙고, ‘오늘 매우 기쁜 일이 있었습니다.’ 하니, 어미가 ‘어떤 일이냐.’고 물었다. 현보가 대답하기를, ‘사옹원 제조(提調)가 되었습니다.’ 하니, 어미가 ‘무슨 관직이냐?’ 하니, 대답하기를, ‘사옹원 제조가 되었습니다.’ 하니, 어미가 ‘무슨 관직이냐?’ 하니, 대답하기를, ‘그 임무는 어찬(御饌)을 받들어 바치고 연회를 관장하는 일인데, 반드시 풍채가 웅위한 사람을 뽑아서 합니다.’ 하니 어머니가 놀라면서, ‘가문에서 그렇게 시킨 일이로다. 어젯밤에 꿈에 네 아버지가 나타나, 장차 기쁜 경사가 있을 것이므로 꿈에 나타난 것이다.’하였다.” 하였는데, 그 아버지 중추공(中樞公)이 용모가 못생겼기 때문에 어자경이 이와 같이 놀린 것이었다. 김현보가 도승지가 되니 양(羊)뿔과, 금대(金帶)를 하사하였는데, 그 띠가 너무 넓었다. 어자경이 말하기를, “군은 마땅히 잘 싸서 감추어두었다가 자손에게 전하라. 후세의 자손으로서 군의 용모를 알지 못하는 자는 마땅히 ‘우리 선조(先祖)가 이 띠를 띠었으니, 이 띠는 반드시 용모가 봄 채소를 올려 놓은 네모난 넓은 소반과 같았으리라.’ 하리라.” 하였는데, 이것은 풍만함을 말한 것이다.
○ 축산군(竺山君)은 정랑(正郞) 민보익(閔輔翼)과 한 동리에 살았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서로 만나서 반드시 술을 취하도록 마셔서 두건이 벗어져 맨 머리가 되면서도 날마다 술 먹는 것을 약속하였다. 민보익은 황달병에 걸려 얼굴이 먹처럼 시커멓게 되었는데도 오히려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아, 내가 늘 책망하였다. 민보익이 사중에 와서 몰래 술을 찾으면서 판서가 알지 못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죽었다. 축산군은 몹시 슬퍼하다가 민보익이 죽은 지 며칠 안 되어 죽었다. 축산군은 순근(純謹)한 종친(宗親)이요, 민보익 역시 문학(文學) 명유(名儒)이나 술을 삼가지 아니하여, 서로 이어서 세상을 버리니, 술이 사람에게 화(禍)를 끼침이 심각하다.


 

[주D-001]결채(結綵) : 본래는 임금이 지날 때나 중국의 칙사(勅使)가 올 때 색실이나 색종이 헝겊 등을 문이나 길에 내걸어 장식하는 일을 말한다.
[주D-002]적선(謫仙) : 이태백(李太白)을 귀양내려온 신선이라 하였는데, 이 기우자(騎牛子)라는 분이 성이 이씨이므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주D-003]격옹도(擊瓮圖) : 중국 송(宋) 나라의 유명한 정치가 사마광(司馬光)이 어려서 여러 아이들과 같이 놀다가 물이 가득한 큰 물독에 한 아이가 빠졌으므로 여러 아이들은 모두 도망치는데, 사마광은 가서 큰 돌을 가져다가 그 독을 깨어서 물이 쏟아지니 그 아이가 살았다 한다. 후세에 그것을 그림으로 그렸으니 그것을 격옹도라 한다.
[주D-004]계유(癸酉)의 난 : 세조가 수양대군으로서 김종서 등을 죽인 것이 계유년이었다.
[주D-005]번쾌를 …… 마땅하다 : 번쾌는 한(漢) 나라 고조(高祖)를 도와서 천하를 평정한 장수였다. 그후에 고조가 죽은 뒤에 말을 잘못하였다 하여 계포(季布)라는 사람이 임금에게 번쾌가 당치 않은 말을 하니 번쾌를 목베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용재총화 제8권
용재총화 제8권


우리 나라에서 불교를 숭상한 지는 오래되었다. 신라의 옛 서울에서는 민간에서 승려를 부르는 일이 많았는데, 또 송도도 그러하였다. 왕궁과 큰 집들이 모두 절과 서로 연결돼 있어 왕이 후궁과 더불어 절에 가서 향을 피우지 않은 달이 없었으며, 팔관회(八關會)와 연등회(燃燈會)와 같은 대례(大禮)를 베풀되 모두 절에서 하였다. 왕의 맏아들은 태자가 되며, 둘째 아들은 머리를 깎아 중이 되게 하였으니, 비록 유림(儒林)의 명사라 할지라도 모두 이를 본받았다. 절에는 모두 종이 있어서 많게는 수천 수백에 이르고, 주지(住持)가 된 자는 더러 비첩(婢妾)을 두기도 하니, 그 호사스러움이 삼공(三公)과 구경(九卿)보다도 나았다. 십이종(十二宗)을 두어 불교를 관장하였으며, 중으로서 봉군(封君)의 관직을 받은 사람이 많았다. 아조(我朝) 태종(太宗) 때에는 십이종을 개혁하여 다만 양종(兩宗)을 두고 사전(寺田)을 모두 혁파했으나, 그래도 유풍(遺風)은 끊기지 않았다. 사대부들이 그 친속을 위하여 모두 재(齋)를 올리고, 또 빈당(殯堂)에다 법연(法筵)을 설치하기도 하였으며, 기제(忌祭)를 행하는 자는 반드시 중을 맞아다가 음식을 먹이었다. 또 시승(詩僧)이 있어 관리들과 더불어 서로 수창(酬唱)하는 일이 자못 많았으며, 독서하는 유생들은 모두 절에 올라가서 하였다. 비록 절을 부수고 벽을 훼손하는 폐단이 있기는 하나 유학자와 중이 서로 의뢰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는데, 세조(世祖) 때에 극도에 달하였다. 중들이 촌락에 섞여 살면서, 비록 제멋대로 행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사람들이 이를 꾸짖지 못하고, 조관(朝官)이나 수령들도 항의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중을 의지하여 뒤에서 이익을 얻는 자까지 있었다. 성균관 유생(儒生)으로서도 부처의 사리를 바치고 은총을 구하여도 사림(士林)들이 해괴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성종 때부터 도첩을 발급하지 못하게 하는 법을 엄하게 세워 도첩의 발급을 허락하지 아니하니, 이로 말미암아 성(城) 안에는 중들이 줄어들고 내외의 절은 모두 비었으며, 재를 올려 중에게 밥먹이는 사족(士族)이 없어졌다. 이는 임금이 숭상하는 바에 따라 습속도 함께 변한 것이다.
일찍이 성 안의 니사(尼社)는 정업원(淨業院)만 남겨두고 헐어버리고 모두 동대문 밖 안암동(安巖洞) 등으로 내쫓았기 때문에 서너 채가 있다. 남대문 밖 종약산(種藥山 약봉, 지금의 서울역 뒤 큰 언덕) 남쪽에 옛날부터 한 채가 있었는데, 그 뒤에 두 여승이 각기 그 곁에 작은 집을 짓고 여기에 거처하더니, 지금은 10여 채가 되었다. 늙은 여승들이 과부를 꾀어서 시주(施主)로 삼아 모두 큰 집을 짓고 비단을 깔고 단청을 올렸다.
4월 8일의 연등회와 7월 보름의 우란분(盂蘭盆)과 12월 8일의 욕불(浴佛 불상을 물로 씻는 관불(灌佛)) 때에는 다투어 다과와 떡 같은 것을 시주하여 부처에게 공양하고 중을 대접하는데, 중들은 범패(梵唄)를 부르고 곱게 차려입은 부녀자들은 산골짜기에 모여들어 추잡한 소문이 밖에까지 들리는 일이 꽤 있었으며, 나이 어린 여승들은 아이를 낳고 도망가는 자가 많았다.
병조 판서 안숭선(安崇善)이 승문원 제조(提調)가 되어 내병조(內兵曹)를 경복궁 광화문 안의 동쪽 구석에 만드는데, 대청(大廳)과 낭료(廊寮)가 모두 갖추어지고 그 규모가 굉장하고 치밀하였다. 여러 낭관이 이에 진력(盡力)하여 오래가지 않아 완성되었다. 판서(判書)가 임금께 여쭙기를, “병조는 이 집이 아니라도 있을 곳이 있지만, 승문원은 사대(事大)의 직무를 맡고 있어서, 관장하는 문서도 많으므로 관청이 좁아서 들어가지 못합니다. 비옵건대 이 집을 승문원에서 쓰도록 하소서.” 하니, 곧 윤허(允許)하여 판하(判下)되어 낭관들이 모두 실색(失色)하였으나 어찌할 수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승문원이 궐내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문서를 조사하는 날에 도제조(都提調)와 제조(提調)가 나란히 앉아 문서를 감사하여 올리면 내자시(內資寺)는 술을 갖다 바치고, 사재감(司宰監)은 포육을 갖다 바쳤다. 이 일이 끝나면 퇴청하는데 낭청은 그대로 앉아 술자리를 벌였다. 교리(校理) 조안정(趙安貞)이 한 구를 지었는데,
문서를 감사하는 날에 / 監進文書日
제조가 각각 모여 오도다 / 提調各散回
마른 노루포는 한 입에 저미고 / 乾獐一口割
임금이 내린 술은 두항아리를 열었도다 / 宣醞兩尊開
대선생(大先生)을 부르면서 마시고 / 呼大先生飮
여러 동료를 불러 오도다 / 請諸僚友來
신고령의 술잔이 오르내리니 / 高靈鍾上下
옥 같은 모습이 취한 줄을 몰랐도다 / 不覺玉山頹
하였다. 원중(院中)에 인원은 많고 음식은 적어서 낮에는 다만 한 그릇 밥과 소름에 절인 나물 한 접시로 점심을 먹었다. 당시에 이를 희롱하는 사람이 있어 말하기를,
소반 위에 깨진 주발은 배보다 큰데 / 盤中破鉢大於舟
거친 밥은 엉성하여 꿩 대가리보다 적도다 / 糲飯參差小雉頭
배가 차지 않아 이내 출출하니 / 腸未果然還自惄
시종하는 종들에게는 먹다 남은 찌꺼기도 돌아오지 않도다 / 騶僮曾不瀝餘休
하였다. 어전(御前) 문사(文士)로서 학관이 되어 이로 인하여 직을 얻은 사람이 매우 많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이를 활인원(活人院)이라 하였다. 신고령이 예조 판서를 겸직하여 오로지 사대(事大)의 예를 관장한지라, 임금께 여쭈어 봉급을 더 주기를 청하니, 이로 인하여 조금 넉넉해졌다.
우리 나라에서 3형제가 과거에 급제한 이는 많았으나, 5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한 이는 적었다. 그러므로 부모가 죽은 사람은 뒤에 증직(贈職)을 하고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 해에 쌀 20석을 하사하였다. 전조(前朝)에 있어서는 홍우수(洪禹壽)ㆍ홍부(洪富)ㆍ홍강(洪康)ㆍ홍덕(洪德)ㆍ홍명(洪命)뿐이요, 아조(我朝)에 들어와서는 이예장(李禮長)ㆍ이지장(李智長)ㆍ이성장(李誠長)ㆍ이효장(李孝長)ㆍ이서장(李恕長) 5형제와 안중후(安重厚)ㆍ안근후(安謹厚)ㆍ안관후(安寬厚)ㆍ안돈후(安敦厚)ㆍ안인후(安仁厚) 5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 우리 문안공(文安公 성임(成任))이 항상 내게 말씀하시기를, “우리 형제가 세 사람뿐이어서 다섯에 미치지 못하나, 내가 초시(初試)ㆍ중시(重試)ㆍ발영시(拔英試)에 급제하고 화중(和仲)이 또한 급제하고, 너도 초시ㆍ발영시ㆍ중시에 급제하였으니, 또한 다섯을 넘는다. 수로 견주어보면 우리 부모가 마땅히 그 영화를 누릴 일인데 국법에 있지 않은 것이 또한 한스러운 일이다.” 하였다.
우리 나라에 부자(父子)가 재상이 된 자로는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와 그 아들 남원부원군(南原府院君) 수신(守身)이 모두 영의정이 되었고, 이인손(李仁孫) 공이 우의정이고, 그 아들 광릉부원군(廣陵府院君) 이극배(李克培)가 영의정이 되었으며,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 정창손(鄭昌孫) 공이 영의정이고, 그 아들 정괄(鄭佸)이 우의정이었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재상이 된 자는 상락(上洛) 김사형(金士衡)과 그 증손 김질(金礩), 서원(西原) 한상경(韓尙敬)과 그 손자 한명회(韓明澮), 좌상 노한(盧閈)과 그 손자 영의정 노사신(盧思愼)이다. 장원 급제하여 재상이 된 사람은 좌상 맹사성(孟思誠), 문성(文城) 유량(柳亮), 하동(河東) 정인지(鄭麟趾), 영성(寧城) 최항(崔恒), 익성(益城) 홍응(洪應), 길창(吉昌) 권람(權擥), 거창(居昌) 신승선(愼承善)이다. 생원시(生員試)ㆍ진사시(進士試)ㆍ초시(初試)ㆍ중시(重試)에 연달아 장원으로 뽑힌 사람은 우홍명(禹洪命)이요, 생원시에 장원하고 문과에 장원한 사람은 남계영(南季瑛)이요, 또 생원시에 장원하고 문과에 장원한 사람은 정하동(鄭河東)이요, 초시에 장원하고 또 중시에 장원한 사람은 연성(延城) 이석형(李石亨)이다. 생원 진사시에 장원하고 문과에 장원한 사람으로 1년에 잇달아 뽑힌 것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데, 배맹후(裵孟厚)는 생원ㆍ진사에 모두 잇달아 장원에 뽑히고, 김흔(金訢)은 진사에 장원하고 문과에 장원하고, 신차소(申次韶)는 진사에 장원, 초시에 장원, 중시에 장원이요, 김천령(金千齡)은 진사에 장원하고 문과에 장원하였다. 일등 세 사람이 한때에 재상이 된 사람은 최영성(崔寧城)ㆍ조창녕(曺昌寧)ㆍ박연성(朴延城)인데 사림(士林)이 우러러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 우리 나라는 문장가가 매우 적고 저서는 더욱 적다. 신라 시대의 최치원(崔致遠)이 《계원필경(桂苑筆耕)》몇 권을 저술하였는데, 모두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이요, 시중 최자(崔滋)가 동인문(東人文) 몇 십 권을 편찬하고, 예산(猊山) 최해(崔瀣)가 《삼한구감(三韓龜監)》한 질(帙)을 편찬하고, 시중(侍中) 김태현(金台鉉)이 《동국문감(東國文鑑)》 몇 십 권을 편찬하고, 서달성(徐達城)이 왕명을 받들어 《동문선(東文選)》몇 십 권을 편찬한 것인데, 모두 전현(前賢)의 시문(詩文)을 모은 것이다. 문순공(文順公) 이규보(李奎報)가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전후집 몇 십 권을 저술하고, 원외랑(員外郞) 김극기(金克己)가 《김거사집(金居士集)》 몇 십 권을 저술하였는데, 고판(古板)은 교서관(校書館)에 있으나 반은 깎여졌다. 《은대집(銀臺集)》은 한 질이 있을 뿐이요, 《쌍명재(雙明齋)》한 질과 《파한집(破閑集)》상ㆍ하질은 모두 이인로(李仁老)가 저술한 것이며, 《보한집(補閑集)》상ㆍ하질은 시중(侍中) 최자(崔滋)가 저술한 것이다. 《서하집(西河集)》은 글이 떨어져 나간 한 질인데 임춘(林椿)이 저술한 것이요, 《익재집(益齋集)》몇 십 권과 《역옹패설(櫟翁稗說)》한 질은 이제현(李齊賢)이 저술한 것이요, 예종(睿宗) 《창화집(唱和集)》두 질은 예종이 곽여(郭輿) 등과 더불어 수창(酬昌)한 것을 저술한 것이요, 《동안거사집(動安居士集)》한 질은 이승휴(李承休)가 저술한 것이요, 《중순당집(中順堂集)》한 질은 나흥유(羅興儒)가 저술한 것이다. 《식영암(息影庵)》한 질은 중이 지었는데, 그 이름은 알 수가 없다. 《죽간집(竹磵集)》한 질은 나옹(懶翁)의 제자 중 굉인(宏寅)이 구양현위(歐陽玄危)와 더불어 사귀어 양학사(兩學士)가 서(序)를 쓴 것인데, 시(詩)가 가장 웅건하다. 관동와주(關東瓦注) 한 질은 안경공(安景恭)이 관동 안렴사(關東按廉使)가 되었을 때 저술한 것이요,《목은시문집(牧隱詩文集)》몇 십 권은 한산백(韓山伯) 이색(李穡)이 저술한 것이니, 동방의 문부(文府)라 할 만하다. 《가정집(稼亭集)》몇 권은 이곡(李穀)이 저술한 것이요, 《초은집(樵隱集)》한 질은 이인복(李仁復)이 지은 것이요, 《포은집(圃隱集)》한 질은 문충공 정몽주(鄭夢周)가 지은 것이요,《도은집(陶隱集)》두 질은 이숭인(李崇仁)이 지은 것이요, 《농은집(農隱集)》한 질은 졸옹(拙翁) 최해(崔瀣)가 지은 것이다. 《제정집(霽亭集)》한 질은 이달충(李達衷)이 지은 것이요, 《설곡집(雪谷集)》한 질은 정포(鄭誧)가 지은 것이요, 《원재집(圓齋集)》한 질은 정추(鄭樞)가 지은 것이요, 《사암집(思庵集)》한 질은 유숙(柳淑)이 지은 것이요, 《복재집(復齋集)》한 질은 정총(鄭摠)이 지은 것이요, 《의곡집(義谷集)》한 질은 이방직(李邦直)이 지은 것이요, 《춘곡집(春谷集)》한 질은 이항구(李亢紌)가 지은 것이요, 《동정집(東亭集)》한 질은 염흥방(廉興邦)이 지은 것이요, 《훤정집(萱庭集)》한 질은 염정수(廉庭秀)가 지은 것이요, 《양촌시문집(陽村詩文集)》몇 십 권은 문충공 권근(權近)이 지은 것이요, 《춘정집(春亭集)》몇 십 권은 변계량(卞季良)이 지은 것이요, 《삼봉집(三峯集)》몇 십 권은 정도전(鄭道傳)이 지은 것이요, 《부재집(負齋集)》한 질은 박의중(朴宜中)이 지은 것이요, 쌍매당(雙梅堂) 몇 십 질은 이첨(李詹)이 지은 것이요, 《교은집(郊隱集)》7권은 정이오(鄭以五)가 지은 것이요, 《척약재집(惕若齋集)》한 질은 김구용(金九容)이 지은 것이요, 《유항집(柳巷集)》한 질은 한수(韓修)가 지은 것이다. 《선탄집(禪坦集)》은 선탄이 지은 것이요, 《독곡집(獨谷集)》두 질은 정승 성석린(成石璘)이 지은 것이요, 《상곡집(桑谷集)》한 질은 우리 증조공(曾祖公)이 지은 것이요, 《매헌집(梅軒集)》두 질은 제학(提學) 권우(權遇)가 지은 것이요, 《둔촌집(遁村集)》한 질은 이집(李集)이 지은 것이다. 《근사재집(近思齋集)》은 설손(偰遜)이 지은 것이요, 《운제집(芸齊集)》한 질은 설장수(偰長壽)가 지은 것이요, 《하정집(夏亭集)》한 질은 정승 유관(柳觀)이 지은 것이다. 《철성연방집(鐵城聯芳集)》은 이암 (李嵓)ㆍ이강(李岡)ㆍ이원(李原) 등이 지은 것이요, 《팔계집(八溪集)》은 정해(鄭偕)가 지은 것이요, 《천봉집(千峯集)》한 질은 중 둔우(屯雨)가 지은 것이요, 《계정집(桂庭集)》한 질은 중 성민(省敏)이 지은 것이요, 《태재집(泰齋集)》한 질은 유방선(柳芳善)이 지은 것이요, 《율정집(栗亭集)》한 질은 윤택(尹澤)이 지은 것이요, 《청경집(淸卿集)》한 질은 윤회(尹淮)가 지은 것이요, 《방헌집(厖軒集)》한 질은 정승 황희(黃喜)가 지은 것이요, 《난계집(蘭溪集)》한 질은 함부림(咸傅霖)이 지은 것이요, 《통정집(通亭集)》한 질은 강회백(姜淮伯)이 지은 것이요, 《완역재집(玩易齋集)》한 질은 강석덕(姜碩德)이 지은 것이요, 《인재집(仁齋集)》한 질과 《양화소록(養花小錄)》한 질은 강희안(姜希顔)이 지은 것이요, 《단활집(短豁集)》한 질은 이혜(李惠)가 지은 것인데, 사람됨이 키가 적고 입이 비뚤어졌기 때문에 이같이 이름하였다. 《보한재집(保閑齋集)》2권은 영의정 신숙주가 지은 것이요, 《소한당집(所閑堂集)》두 질은 좌의정 권람(權擥)이 지은 것이요, 《태허정집(太虛亭集)》두 질은 영의정 최항(崔恒)이 지은 것이요, 《식우집(拭疣集)》두 질은 김수온(金守溫)이 지은 것이요, 《사가정집(四佳亭集)》몇 십 권은 달성군(達城君) 서거정(徐居正)이 지은 것이요, 《사숙재집(私淑齋集)》몇 십 권은 진산군(晉山君) 강희맹(姜希孟)이 지은 것이요, 《안재집(安齋集)》한 질은 곧 우리 백씨(伯氏)가 지은 것이요, 《진일집(眞逸集)》한 질은 우리 중씨(仲氏)가 지은 것이다. 고려로부터 조선에 이르는 사이에 저작자가 무한히 많고, 저술한 것이 비록 많으나 자손이 있으되 미약하여 모으지 못하고 비록 모으고자 하나 흩어져 다 없어졌다. 지금까지 세상에 전하는 것을 모아 위와 같이 기록한다.
옛날에는 문과 전시(殿試)에 3등으로 뽑힌 사람을 담화랑(擔花郞)이라 하였는데, 방을 내걸 때 담화랑은 어전(御前)에서 모화(帽花)를 받아 모든 신은(新恩)에게 나누어 꽂아주었다. 나의 중형이 계유년 봄에 과거에 뽑혀 담화랑이 되어 전농시(典農寺) 직장(直長)의 자리에 임명되었다. 이 때에 사문(斯文) 김자감(金子鑑)이 판사(判事)가 되었는데, 뜰에 있는 배[梨]가 바람 부는 대로 어지럽게 떨어지므로 사문(斯文)이 중형(仲兄)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내가 한 구(句)를 지을 테니, 그대는 대구를 짓겠는가?” 하고,
뜰에 가득한 배와 밤은 청지기가 즐거워하고 / 滿庭梨栗廳直樂
하므로, 중씨가 곧 응답하여 짓기를,
책상에 쌓인 문서는 판사가 근심하는도다 / 堆案文書判事憂
하니, 사문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족하(足下)는 청지기로서 나에게 대항하는 것인가?”하므로, 중형이 겸손하게 사과를 하여 조금 풀렸다. 그 뒤에 전농시를 폐하여 군자대창(軍資大倉)으로 만들었다.
정정절(鄭貞節) 공과 그 아우 정봉원(鄭蓬原) 공은 모두 나의 육촌이다. 나의 큰형이 정정절 공의 집에 가서 뵈니, 정정절이 곧 불러들이었다. 공은 아직 아침이라 누워서 일어나지 않았는데, 무명 이불에 풀로 짠 자리를 깔고 있어 쓸쓸하기가 짝이 없었다. 공이 말하기를, “네가 추위를 무릅쓰고 멀리서 오느라고 수고했다. 내 이불 밑에 손을 넣어라.” 하고, 서로 경사(經史)를 강론하였다. 또 정봉원 공을 뵈러 갔을 때에는 꽤 오래 문밖에 서 있은 뒤에야 공이 관복을 정제하고 나와 큰 손님을 대하듯 하였는데, 형제간이지만 기상이 이같이 서로 같지 않았다.
함동원(咸東原)이 젊었을 때에 화류계에서 방랑하였으나, 직무에 임해서는 신중하였고 일을 잘 처리하여 드디어 명재상이 되고 공훈(功勳)으로 봉군(封君)이 되었다. 호남 감사가 되어 선정(善政)으로 소문이 자자하더니, 그후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항상 전주 기생을 사랑하였는데, 이별하기 어려워서 호패(號牌)를 기생에게 비밀히 주고 밤에 몰래 따라오라 하였다. 여러 날이 지난 후, 기생이 부윤(府尹)에게 이별을 고하니, 당시 부윤으로 있던 이언(李堰)은 성품이 청렴하고 고상하면서도 급하여 기생이 하직하는 것을 보고 크게 노하여, “법관(法官)이 어찌 기생을 데리고 갈 리가 있는가 네 말이 거짓이다.” 하였다. 기생이 대사헌의 호패를 내보이며 말하기를, “공이 ‘관부(官府)에서 만약 믿지 않거든 이것으로써 표를 삼으라.’하셨소이다.” 하니, 이언이 땅에 침을 뱉고 크게 꾸짖기를, “내가 함동원을 지조 있는 선비라 여겼는데, 지금 와서 보니 참으로 하품인(下品人)이로다.”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모두 공의 솔직함을 좋아하고 이언의 빡빡함을 비웃었다. 늙어서는 오랬동안 병중에 있었으며, 딸 하나가 있었으나 그 딸마저 먼저 죽었는데, 또 주색을 싫어하여 첩을 두지 아니하고 집안일을 돌봐줄 사람이 없어 끼니를 자주 거르기도 하였다. 옛날 정분이 있던 여의(女醫)가 이 소문을 듣고, 곧 찾아가 공을 뵈니, 남루한 옷을 입고 거적자리에 길게 누웠는데, 다만 한 하인만이 옆에 모시고 있을 뿐이었다. 여의가 말하기를, “공 같은 호걸(豪傑)이 어찌 이와 같이 되셨습니까.” 하니, 공이 아무 말도 없이 똑바로 쳐다보면서 눈물만 흘렸다.
세조께서 항상 문사(文士)를 근정전(勤政殿) 뜰에 모으고 과장(科場)의 예에 의하여, 도이산융낙역래조(島夷山戎絡繹來朝)라는 전(箋)을 내어 20여 명을 뽑았는데, 큰형이 수석을 차지하였다. 세조께서 친히 일등이란 두 자를 권미(卷尾)에다 써주시었는데, 강진산(姜晉山)이 둘째요, 서달성(徐達城)이 셋째였다. 큰형은 판사재(判司宰)로서 첨지중추(僉知中樞)에 제수하고, 강진산은 판통예(判通禮)로 예조 참의에 제수하고 서달성은 사간(司諫)으로 공조 참의에 제수하였다. 세조께서 명하시어 방을 내걸고 유가(遊街)하려 할 때, 마침 간관(諫官)의 간언(諫言)으로 인하여 그만두었으나, 특별히 주악(酒樂)을 큰형의 집에 하사하고 내종친(內宗親) 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ㆍ익현군(翼峴君) 이운(李運)ㆍ의창군(義昌君) 이공(李玒)ㆍ밀성군(密城君) 이침(李琛)ㆍ영해군(寧海君) 이당(李瑭)ㆍ영천위(玲川尉) 윤사로(尹師璐) 및 명공(名公) 거경(鉅卿)들을 오게 하시어 마음껏 즐기고 파하였다. 이튿날에 동방인(同榜人)이 모두 술병을 가지고 찾아오니, 당시의 사림이 모두 영광으로 여겼다. 큰형의 전사(箋詞)에 이르기를, “천지를 덮어주는 인(仁)을 체득하였으니, 성대한 덕이 나타나지 않겠는가. 성교(聲敎)가 남북에까지 미치게끔 되었으니, 수방(殊方 이(夷)와 융(戎)을 말함)에서 모두 몰려오도다. 공손히 생각건대 전하(殿下)는 하늘과 더불어 한 가지로 크시니, 옛날에도 앞설 사람이 없도다. 종사(宗社)가 다시 편안하니 무공(武功)이 화란(禍亂)을 다스려 평정하고, 인의(仁義)가 이미 효험을 얻어 문치(文治)가 나라를 편안케 하니, 해도만리(海濤萬里)에는 오랑캐들이 분주하고, 구중궁궐에는 오랑캐 풍속이 예를 갖추도다.” 하였고, 박치명(朴致命)의 사(詞)에는, “단간대(單干臺) 위에 상제(上帝)가 친히 임하는 것처럼 수고롭지 아니하고, 간우계(干羽階) 앞에 앉아서 오랑캐가 스스로 찾아옴을 보도다.” 하였다. 윤무송(尹茂松)은 곧 신고령(申高靈)의 처형이니 한때 재상을 제수받은 일이 있다. 동년(同年) 모임에서 신고령이 한 구를 지었는데,
청안의 옛 친구들이 모두 백발이로다 / 靑眼故人俱白髮
하니, 윤무송이 급히 대구하기를,
검은 머리의 현상이 다만 단심이로다 / 黑頭賢相只丹心
하였다. 신고령이 탄복하여 무릎을 꿇고 말하기를, “나는 형만큼 정밀하지 못하다.” 하였다. 신고령이 고부(古阜) 기생 지단심(只丹心)을 사랑한 까닭에 이렇에 말한 것이다.
요즈음은 풍속이 날로 야박해지지만 오직 시골 사람만은 아름다운 풍속이 그대로 있다. 대체로 이웃 천인(賤人)들이 모두 모여서 회합을 하는데, 적으면 혹 7, 8, 9명이요, 많으면 혹 100여 인이나 되어 매월 번갈아가며 술을 마시고, 초상을 당한 자가 있으면 같은 무리들이 상복을 갖추고 관곽(棺槨)을 갖추고, 혹은 횃불도 갖추고 음식을 갖추어, 상여줄을 잡고 무덤을 만들며 사람들이 모두 시마복(緦麻服)을 입으니, 이는 참으로 좋은 풍속이다.
내가 어렸을 때에 남강(南江)에서 손님을 전송하고 돌아오는 길에 전생서(典牲暑) 남쪽 고개에 이르렀을 때에, 마침 부슬비가 내리자 말이 거품만 뿜고 나아가지 못하는데, 문득 따뜻한 기운이 불과 같이 얼굴을 스치고 또 취한 기운이 있어 견딜 수가 없었다. 길가 동쪽 골짜기를 바라보니 어떤 사람이 삿갓을 썼는데, 키가 수십 척이요 낯이 소반 같고 눈이 횃불과 같아 괴이한 현상이 범상치 않았다. 내가 묵묵히 생각하기를, “내가 만약 마음을 놓치면 반드시 저놈의 계략에 떨어지겠다.” 하고, 드디어 말을 멈추어 나아가지 않고 한참을 눈여겨보니 그 사람이 문득 머리를 돌려 하늘을 향하고 점점 소멸하여 하늘로 올라가버렸다. 마음이 안정되면 허깨비가 들어오지 못한다더니, 참으로 그러한가 보다.
중추 김성동(金誠童)은 상낙부원군(上洛府院君)의 아들이다. 집이 남대문 밖 연지(連池) 곁에 있었는데, 키가 아홉 자요 성품이 침착하고 신중한데다가 말이 없고 손님이나 친구들과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항상 방안에 있으면서 다른 사람과 얘기하지 않고 종일토록 책만 읽었다. 적성 현감(縣監)을 지낸 뒤에 과거에 급제하여 드디어 갑과(甲科)에서 3등으로 뽑혀 당상관(堂上官)이 되었다. 부평(富平)에서 수령으로 있을 때 공무를 당하여서는 청렴하고 신중하였고 일은 시원스럽게 처리하였으며 조세를 독촉하는 일이 없어, 백성이 편안하게 살며 부모처럼 섬기었다. 그때 감사가 임금에게 선정(善政)을 아뢰어 특별히 중추원(中樞院) 가선대부(嘉善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그가 공무(公務)에 있어서는 부족함이 있을까 골몰하면서도 집안일은 조금도 경영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 원대함을 보고 기대하기를, “참으로 재상감이다.”하였는데, 얼마 있지 아니하여 부부가 모두 죽었다. 집의(執義) 윤수언(尹粹彦)은 내 친구 윤자방(尹子芳)의 아들인데, 집이 김성동의 집과 이웃해 있었다. 사람됨이 문무(文武)에 뛰어나서 소년으로 등제(等第)하여 사인(舍人)으로부터 나아가 집의(執義)가 되고, 아침저녁으로 은대(銀臺)에 오르기를 지척(咫尺)에 있는 것 같이 여기었다. 평안도에 사신으로 갈 때에 윤자방이 황해 감사라, 집의가 해주(海州)로 아버지를 뵈러 가다가 돌연 병으로 인하여 죽었다. 중추의 관이 발인한 지 며칠이 못되어 집의의 관이 들어와 사림(士林)의 똑똑한 사람들이 한번에 죽으니, 인근 지척의 사이에 흉사(凶事)가 연달아 일어나 사림에서 비통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의 빙고(氷庫)는 옛날의 능음(凌陰)이다. 동빙고는 두모포(豆毛浦)에 있는데, 오직 하나뿐이어서 제사지내는 데만 사용하였다. 얼음을 저장할 때에는 봉상시(奉常寺)가 주관하고, 별제(別提) 두 사람과 함께 검찰(檢察)하였다. 또 감역부장(監役部將)과 벌빙군관(伐氷軍官)이 저자도(楮子島) 사이에서 채취하는 것을 감독하였는데, 이는 개천 하류의 더러움을 피하기 위함이다. 서빙고(西氷庫)는 한강 하류 둔지산(屯知山)의 기슭에 있는데, 무릇 고(庫)가 8경(梗)이나 되므로, 모든 국용 (國用)과 제사(諸司)와 모든 재추(宰樞)가 모두 이 얼음을 썼었다. 군기시(軍器寺)ㆍ군자감(軍資監)ㆍ예빈시(禮賓寺)ㆍ내자시(內資寺)ㆍ내섬시(內贍寺)ㆍ사담시(司贍寺)ㆍ사재감(司宰監)ㆍ제용감(濟用監)이 주관하여 별제 두 사람과 같이 검찰하였고, 또 감역부장과 벌빙군관이 있고 그 나머지 각사(各司)는 8경에 나누어 소속시켰는데, 얼음이 얼어서 4치 가량 된 뒤에 비로소 작업하였다. 그때는 제사(諸司)의 관원들이 서로 다투어 힘쓰므로 군인이 비록 많으나 잘 채취하지 못하고, 촌민들이 얼음을 캐가지고 군인들에게 팔았다. 또 칡끈을 얼음에 동여매어서 넘어지는 것을 방지하고, 강변에는 땔나무를 쌓아놓아 얼어 죽는 사람을 구제하며, 또 의약을 상비(常備)하여 다친 사람을 구제하는 등 그 질환에 대한 조치가 상비되었다. 처음 8월에는 군인을 빙고에 많이 보냈는데, 고원(庫員)이 군인을 인솔하여 고(庫)의 천정을 수리하고 대들보와 서까래가 썩은 것을 바꾸고, 담이 허물어진 것을 수리하였다. 또 고원한 사람은 압도(鴨島)에 가서 갈대를 베어다가 고의 상하 사방을 덮는데, 많이 쌓아 두텁게 덮으면 얼음이 녹지 않는다. 전술한 관인들은 밤낮으로 마음껏 취하도록 마시고 얼음을 저장하는 일은 하리(下吏)들에게 맡기었다. 계축년에 얼음의 저장을 소홀히 하자 왕이 노하여 모두 파직을 시켰고, 갑인년에는 관리가 주의하여 얼음을 저장했기 때문에, 국상(國喪)과 중국 사신을 대접하는 연회에도 얼음이 넉넉하고 가을까지 빙고에 남아 있었으니, 그 검사하는 방법을 치밀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길흉(吉凶)을 점치는 일은 모두 소경이 맡아 하였다. 국초에 복진(卜眞)이란 점쟁이가 있었는데 둔갑술을 하였다. 하루는 복진이 문득 궁궐에 나아가 왕을 뵙자 왕이 묻기를, “대궐의 문단속이 매우 엄한데, 너는 어찌 들어왔는가?” 하니, 복진이 여쭙기를, “신이 둔갑술로 몸을 감추어 들어왔으므로 대궐 문지기가 모두 알지 못하였나이다. 오늘이 신의 명이 다하는 날이오니 원컨대 상께서 구해 주시옵소서.”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네가 비술(祕術)로써 몰래 대궐에 들어왔으니, 네 죄가 아주 무거우므로 용서할 수 없다.” 하고, 곧 명하여 죽였다. 그뒤에 김학루(金鶴樓)란 사람이 점치는 법을 알았고, 또 김숙중(金叔重)이란 사람이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생원 박운손(朴雲孫)이 관비(館婢)와 간통하고 관비의 지아비를 시기하여 살해하였으므로 살인죄로 옥에 갇히었는데, 판결하는 날에 형조의 낭관들이 모두 모이고 김숙중이 또한 그 옆에 있어 차례로 길흉(吉凶)을 이야기하였다. 정랑(正郞) 노회신(盧懷愼)은 호부(豪富)로서 한때에 이름을 떨쳤는데, 김숙중을 돌아보고, “저 죄인의 명이 조석(朝夕)에 달려 있는데 면할 도리가 있을까.” 하니, 김숙중이 꽤 오래 명수를 점쳐보다가. “이 죄인이 형벌을 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벼슬길이 넓게 트여서 해를 당할 일이 없고, 정랑의 명수가 오히려 이 죄인만 못합니다.” 하여,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그 맹랑함을 비웃었다. 박운손이 형벌을 받는 날에 도망하여 죽음을 면하고 뒤에 벼슬이 3품에 이르러 나이 70이 되어 죽었는데, 노회신은 얼마 안 가서 일찍 죽었다. 우리 선군께서 김숙중을 후대하였는데, 내가 나이 다섯 살 때에 역질(疫疾)에 걸려 죽게 되었을 때 김숙중을 불러 길흉을 묻고 또 백형ㆍ중형의 명까지 점치게 하니, 김숙중이 말하기를, “맏아드님은 복록이 장구하여 벼슬이 이조 판서에 이를 것이요, 둘째 아드님은 비록 청귀(淸貴)하나 명이 길지 않고, 막내 아드님은 복록이 맏아드님과 비슷하나 영화는 오히려 더 나으니, 호랑이 굴 속에 두어도 해를 입지 않을 것입니다.”하더니, 과연 말한 바와 같았다. 김효순(金孝順)이란 사람이 또한 점을 잘 쳤기 때문에 백형 선비 시절에 상사(上舍) 이관의(李寬義)와 함께 그 길흉을 점쳤는데, 김효순이 백형의 명수를 점쳐 말하기를, “올해에는 반드시 장원급제하여 나중에 귀현(貴顯)에 이르리라.” 하고, 상사(上舍)의 명수를 점쳐 말하기를, “늙어 죽을 때까지 속된 선비를 면치 못하겠다.” 하였다. 상사가 문명(文名)이 있어서 여러 사람들이 받들어 거벽(巨擘)으로 삼았으며, 과거에 힘들이지 않을 것이라 보았는데, 점친 말을 듣고 통곡하여 흐느껴 울자 김효순이 위로하여 말하기를, “그러나 만년(晩年)에는 군신이 경사롭게 만나는 격입니다.” 하였다. 그 뒤에 상사가 마침내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늙어서 시골에 물러가 있다가, 나이 70에 일민(逸民)으로서 임금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성종(成宗)께서 편전(便殿)에서 인견(引見)하고 치도(治道)를 강론할 때 전교(傳敎)를 내려 “참으로 훌륭한 인재이지만 늙었으므로 쓰기 어렵다.”하시고, 후하게 의복을 하사하시어 돌려보냈다. 김산실(金山實)이 우리 이웃에 살고 있는데, 정미년ㆍ무신년 간에 길흉을 물으니, 김산실이 말하기를, “대명(大明)이 처음 나오는 곳에 만리에 빛을 보리니, 이는 벼슬길에 높이 오를 징조라, 반드시 고관(高官)을 얻을 것입니다.”하더니, 그해에 홍치 황제(弘治皇帝)가 새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시어 사은사(謝恩使)로 명경(明京)에 나아갔으므로 그 일이 바로 맞았다. 김산실이 고관을 얻겠다 한 말은 틀렸으나, 사실 그 징조에 있어서는 헛되지 않았다.
국초(國初) 이후로 법률이 문란해져서 사대부가 이익을 얻는 길이 또한 넓어졌다. 세상에 전하기를, “태종(太宗)이 외방에서 사냥하시다가 날이 저물어 평복 차림으로 시내를 지나니, 10여 이이 말에 식물을 싣고 임금 앞을 지나다가, ‘승정원이 어디 있습니까.’하고 묻자, 태종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물 아래 연기 나는 곳으로 내려가면 그 곳이 곧 승지(承旨)가 있는 곳이다.’하였다.”한다. 세종(世宗) 때에는 여러 창고의 공물(公物)을 단속할 줄 모르고, 궁궐 안의 찬물(饌物)은 승정원이 오로지 관장하였는데 어선(御膳)의 나머지를 다 먹을 수 없어서 나누어 자기 집까지 보내었다. 연회(宴會)가 있을 때면 예빈시(禮賓寺)에서 연석을 베풀고 주관(酒官)이 술을 올리며, 창고의 아전이 기생에게 소요되는 옷감을 주되, 쌀 열 섬 이하는 마음대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게 되므로 하루에 쓰이는 종이가 수백 권이요, 술은 수백 병이며, 다른 물건도 또한 이와 같았다. 관리로서 객지에 있는 사람이 되질을 하는 과정에서 땅에 흘린 곡식을 창관(倉官)에게 빌려 썼는데, 그 수가 적어도 몇 섬이 넘었으니 비록 땅에 흘린 곡식이라고는 하나 실상은 정곡(正穀)이었다. 그릇을 관에서 빌려쓰고 돌려보내지 아니하여도 관에서는 이를 묻지 않았다. 허비가 이렇게 많은데도 공용이 군색하지 아니하니,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세조(世祖)로부터는 육전(六典)을 고쳐 횡간(橫看)의 안(案)을 만들어서 비록 적은 물건이라도 모두 계품(啓稟)한 뒤에 쓰게 하니, 이로부터는 사람들이 남용하는 일이 없었으나, 저축해 둔 것이 또한 없어서 국가에서 항상 그 부족함을 근심하니, 어째서 이렇게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철원(鐵原)은 옛날 동주(東州)의 땅인데, 이곳을 짐승 숲이라 불러왔다. 세종께서 가끔 이곳에서 사냥을 하시어 수많은 짐승을 잡았는데, 예빈시에서 쓰는 고기와 공청(公廳)의 수요 이외에 재추(宰樞)에게 골고루 하사하는 것도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았었다. 이로부터 문소전(文昭殿)의 초하루나 보름 제사 때 쓰는 고기는 오직 철원과 평강(平康)에서만 바쳐도 남음이 있었다. 지금 동주의 들은 태반이 밭이 되고 금수(禽獸)가 줄어들어 양읍(兩邑)에 짐승 잡기가 어려워지니, 잡히지 아니하면 불안해서 침식을 잊을 정도다. 상하의 관리가 수풀을 뒤지며 겨우 벌을 면하고 있는 형편인데도 지금까지 폐하지 않는 것은 그래도 다른 곳보다 낫기 때문이다.
정정절(鄭貞節) 공은 판서 정흠지(鄭欽之)의 아들이다. 아버지는 형조 판서이고 정정절은 대사헌이 되어 부자가 한때에 재추(宰樞)가 되었다. 부자가 모두 용모가 건장하고 수염이 길고 아름다웠다. 하루는 큰 길거리에서 만나 판서는 초헌(軺軒)을 타고 대헌(大憲)은 초헌을 부축하고 가면서 이야기를 주고받으니, 그 풍채가 너무도 훤하여 길가에서 보는 사람이 영화롭게 여기어 흠모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군자가 집을 지으려면 반드시 먼저 사당을 세워서 조상의 신주를 받드니, 이는 주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이다. 삼국ㆍ고려 시대 이후로 오로지 불교를 숭상하여 가묘(家廟)의 제도가 분명하지 못하고, 사대부가 모두 예로써 조상을 제사지내지 않더니, 포은(圃隱) 문충공이 도학을 밝히기를 주창함으로부터 제사지내는 의식을 엄하게 세우니, 그뒤에 집집마다 사당을 세우고 비로소 가사(家舍)를 적사(嫡嗣)에게 전하고 적서(嫡庶)의 분별을 중하게 하므로, 자식 없는 사람은 반드시 친족 자제를 취하여 후사(後嗣)를 삼았다. 국가의 대제(大祭)는 맹월(孟月)에 하고 사대부의 시제(時祭)는 중월(仲月)에 하였으니, 이런 것도 모두 차서가 있었다.
김[苔]은 남해(南海)에서 나는 것을 감태(甘苔)라 하고, 감태와 비슷하나 조금 짧은 것을 매산(莓山)이라 하는데, 구워서 먹는다. 내 친구 상사(上舍) 김간(金澗)이 절에서 독서할 때 밥상에 있는 것을 먹어보니, 아주 맛이 좋으나, 무엇인지 알지 못하다가 중에게 자세히 물어본 뒤에야 비로소 그 이름을 알았다. 하루는 내 집에 와서 말하기를, “그대는 매산 구이를 아는가? 천하의 진미라네.”하기에, 내가, “이것은 임금님이 잡수시는 상에만 올리는 물건이므로 궐 밖 사람이 맛볼 수 없는 것이나 자네를 위하여 구하리다.” 하고, 숭례문 밖으로 나가 연지(蓮池) 속에 태발(苔髮)이 물위에 어지럽게 떠있는 것을 보고 조리로 떠내어 구워놓고 하인을 보내 상사를 불러오게 하니, 상사가 이 말을 듣고 곧 왔다. 두 사람이 마주앉아 술을 마실 때 나는 매산을 먹고 상사는 오로지 김만 먹더니 겨우 두어 꽂이를 먹고 나서 말하기를, “구이 가운데 모래가 있어 먼저 먹던 것 같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점점 가슴속이 메스꺼워 뱃속이 편안치 않다.” 하고, 곧 집으로 돌아가 토하고 설사하여 수일을 앓은 뒤에 일어나서 말하기를, “중이 준 매산은 아주 맛이 있었는데, 그대의 매산은 아주 나쁘다.” 하였다. 내가 뜰안에 있는 나무에 청충(靑虫)이 가득히 있어 잎을 갉아먹는 것을 보고, 이를 주워모아 종이에 꼭 싸서 봉하고 어린 종을 시켜 이를 보내면서, “요행히 매산을 얻었으니 그대는 한 끼 밥 반찬으로 하라.” 하였다. 이때는 이미 황혼이라 상사 부부가 이불을 깔고 같이 앉았다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너의 주인이 먹지 아니하고 내게 보내주니 참으로 벗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고, 마침내 봉한 것을 뜯으니, 벌레들이 마구 쏟아져 나와, 혹은 이불 속으로 들어가고 혹은 치마 속으로 들어가므로, 부부가 놀라 소리를 질렀다. 벌레가 닿은 곳은 모두 탈이 나서 온 집안이 크게 웃었다.
선(善)을 행한 집에는 반드시 뒤따르는 경사가 있는 법인데, 독곡(獨谷)은 평생에 착한 마음을 가지고 몸가짐을 청렴히 하며, 행동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인(仁)으로 하였으니, 그 자손이 번화한 경사를 누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장윤(長胤) 참찬공(參贊公)은 후손이 없고, 차자 참의공(參議公)은 뱃속에서부터 장님이었고, 그 아들 창산군(昌山君) 및 그의 아들이 또한 뱃속에서부터 장님이 되어, 3대가 연달아 이렇게 되었으며, 나의 중씨는 문장과 학문이 사람들이 추앙하는 바가 되었으나 나이 겨우 30에 죽고, 그의 두 아들도 모두 광질(狂疾)을 얻었으니, 참으로 천도(天道)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속담에, “아침에 마신 술은 하루의 근심이요, 맞지 않는 가죽신은 1년의 근심이요, 성질 나쁜 아내는 평생의 근심이다.”라는 말이 있으며, 또, “배가 부른 돌담과 말 많은 아이와 헤픈 주부는 쓸모가 없다.”는, 말이 있는데, 말은 비록 속되나 역시 격언이다.
경 읽는 판수들은 모두 머리를 깎았는데, 세상 사람들은 이를 선사(禪師)라 하였다. 늙은 판수 김을부(金乙富)라는 사람이 광통교(廣通橋) 가에 살았는데, 점치는 것으로 업을 삼았다. 사람이 다투어 점을 쳐보았으나 맞지 않는 것이 너무 많아 부인들이 모두 말하기를, “광통교 선사는 흉하다고 하면 길하다.” 하였다. 참판 김현보(金賢甫)가 그 아들이 과거를 볼 때, 김현보가 그 글 지은 것을 보고 말하기를, “너의 문사(文詞)는 너무 속되어서 선(選)에 들지 못할 것이다.”하였는데, 방이 걸릴 때 그 아들이 높은 점수로 뽑히었다. 동료들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광통교 선사는 흉하다 하면 길하다.” 하였다.
만약 사람들에게 대두(大豆)와 소두(小豆)의 꽃 색깔을 물으면 흔히, “대두의 꽃은 노랗고 소두의 꽃은 붉다.”하는데, 이는 다만 그 열매의 빛을 보고 말한 것으로, 실제로는 소두의 꽃은 노랗고 대두의 꽃은 붉다. 만약 석균(石菌)의 땅에 붙은 뿌리를 물으면 사람은 모두, “털이 난 것은 밖에 있고 거죽이 번지르르한 것은 땅에 붙었다.”하는데, 이는 다만 거죽이 번지르르한 것은 진흙에 섞여 있음을 보고 말함이요, 실제로는 털이 난 것이 땅에 붙어 있고 거죽이 번지르르한 것이 밖에 있는 것이다. 만약 한새[鷴鳥]의 꼬리를 물으면 사람들은 모두 검다고 하는데, 이는 새의 두 날개가 꼬리를 덮고 있어 검게 만든 것으로, 실제로는 희다. 대개 세상 사람이 억측으로 사물을 보는 것이 흔히 이와 같다.
같이 급제한 신생(申生)은 수염이 많으나 누렇고 크기가 작고 등이 굽었다. 그러나 성품이 부지런하고 분명하여 조금도 남에게 신세를 지는 일이 없었다. 일찍이 예조 정랑이 되어 기생들을 검찰(檢察)할 때 너무 각박하여 기생들이 모두 노래를 지어 조롱하였다. 또 순채와 송이버섯을 싫어하며 “이것이 무슨 맛이 있다고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느냐.” 하였다. 친구가 모두 웃으며 말하기를, “신군은 특이한 사람이다.” 하였다. 또 꾀꼬리 소리를 듣고 말하기를, “좋도다. 갹조(噱鳥)의 소리여.”하므로, 친구들이, “이는 꾀꼬리인데 어찌 갹조라 하느냐.” 하니, 신생이 말하기를, “그 울음이 갹갹하니 이는 갹조요, 꾀꼬리가 아니다.”하자, 친구들이 모두 그 고지식함을 웃었다. 이때에 어떤 이가 시를 짓기를,
나뭇가지에는 갹갹하고 우는 꾀꼬리 머물고 / 樹頭黃鳥止
순채와 송이는 내가 좋아하지 않도다 / 蓴菜松菌非我喜
붉은 수염의 등이 굽은 작은 남아는 / 紫髥曲脊小男兒
이원(梨園)의 기생을 검찰할 줄 알도다 / 猶知檢察梨園妓
하였다.
○ 대제학 박연(朴堧)은 영동(永同)의 유생이었다. 어렸을 적에 향교에서 수업할 때, 이웃에 피리 부는 사람이 있었는데 제학이 독서하는 틈에 겸하여 피리를 익히니, 그 지역에서 모두 훌륭하다고 인정하였다. 제학이 과거 보러 서울에 가다가 이원(梨園)의 훌륭한 배우를 보고 교정을 받는데 배우가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음절이 속되어 절주에 맞지 않으며 습관이 이미 굳어져서 틀을 고치기 어렵다.” 하니, 제학이 말하기를, “그렇더라도 가르침을 받겠소이다.” 하고, 나날이 왕래하여 게을리하지 않았다. 수일 만에 배우가 들어보고서, “선배는 가르칠 만하다.” 하고, 또 수일 만에 들어보고는, “규범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장차 대성에 이르리라.”하더니, 또 수일 후에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무릎을 치고 말하기를, “나는 도저히 미치지 못하겠다.” 하였다. 그뒤에 급제하여 또 금슬(琴瑟)과 제악(諸樂)을 익히니, 정묘(精妙)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세종(世宗)의 총애를 얻어 드디어 관습도감(慣習都監) 제조(提調)가 되어 오로지 음악에 관한 일은 관장하였다. 제종이 석경(石磬 돌로 만든 경쇠)을 만들고 제학을 불러 교정케 하니, 제학이 말하기를, “모율(某律)은 1푼이 높고, 모율은 1푼이 낮다.” 하여, 다시 보니, 고율(高律)에 진흙 찌꺼기가 있었다. 세종께서 명하여 진흙 찌꺼기 1푼을 없애게 하고 또 저율(低律)에는 다시 진흙 찌꺼기 1분을 붙이게 하였더니, 제학이 아뢰기를, “이제는 음률이 고릅니다.” 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그 신묘함에 탄복하였다. 그 아들이 계유(癸酉)의 난에 관여되어 제학도 또한 이로 인하여 파직되고 향리로 내려갈 때, 친구들이 강가에서 전송하였는데, 제학이 말 한 필과 종 하나만 데리고 그 행장이 쓸쓸하였다. 배[舟] 안에서 같이 앉아서 술자리를 베풀고 소매를 잡고 이별하려 할 때 제학이 전대 속에서 피리를 꺼내어 세 번 불고서 떠나가니, 듣는 사람들은 모두 처량하게 여기어 눈물은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 내가 백형(伯兄)을 모시고 개성(開城)으로 떠나려 할 때 파산(坡山)의 별장에서 쉬면서 달밤에 이야기하다가 우연히 고도(故都)의 일에 이르러 내가 개연(慨然)히 탄식하며, “개성은 우리 조상이 거처하던 곳이라, 응당 분묘가 있을 것입니다.”하였더니, 백형이 말씀하시기를, “현조(玄祖) 총랑공(摠郞公)은 창녕에다 모시었고, ”고조(高祖) 문정공(文靖公) 양위(兩位)는 포천(抱川)에다 모시었고, 증조(曾祖) 정평공(靖平公) 양위와 조(祖) 공도공(恭度公) 양위는 모두 과천(果川)에다 모시었고, 오직 총랑 부인 오씨(吳氏)만 산소가 개성에 있어, 엄군(嚴君)께서 일찍이 말씀하신 적이 있으나 그때에 나이 어려서 자세히 여쭈어보지 못한 것이 평생의 큰 한이다. 지금 비록 장지가 있다 해도 세월이 이미 오래되어 묘 봉우리가 평평하게 되었을 것이니, 무엇으로 알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 이튿날에 임진강을 건너 호관(壺串)을 지날 때, 길 옆에 옹중(翁仲)이 있는 오래된 무덤을 보기만 하면 비통하게 말하기를, “어찌 이것이 아닌 줄 알겠는가.” 하고, 서로 서글퍼해 마지 않았다. 종이 안장과 농두(籠頭)를 잡고 앞을 인도하여 동쪽으로 10리 남짓 가서 대로(大路)로 나와 다시 산골짜기의 조그만한 길로 접어들 때, 백형이 말하기를, “이 길은 전일에 가던 길과 같지 아니하다.” 하고, 머리를 돌려 바라다 보니 옛날에 가던 길과는 수 리나 떨어져 청교역(靑郊驛)이 아득히 서쪽에 있었다. 비로소 깨닫고, “여기는 천수산(天水山) 동쪽 기슭이다.” 하고, 길을 잃고 정신없이 큰 고갯마루를 타고 오르다가 몸이 피곤하여 말에서 내려 잠깐 쉬면서 깊은 골짜기를 내려다보니, 어지러운 무덤 가운데 석비(石碑)가 우뚝이 서 있는지라, 내가 가보려고 하자, 백형이 날이 저문다고 하며 말렸다. 그러나 내가 말을 달려 가보니 바로 오씨의 무덤이었다. 전면에 삼한국 대부인 동복 오씨지묘(三韓國大夫人同福吳氏之墓)라 쓰여 있고, 후면에 고조 및 증조 3형제분의 이름이 쓰여져 있었다. 내가 백형을 맞아 사배 (四拜)하니 백형이 감탄하여 말하기를, “이는 조고(祖姑)의 신령이 우리들을 이곳에 이끌어온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찌 이런 기이한 일이 있겠는가.” 하고, 오래 흐느껴 울다가 떠났다. 얼마 있지 아니하여 백형이 유수(留守)에 제수되고 시좌(時左 성준(成俊))ㆍ자강(子强 성건(成健)) 형제가 서로 이어 경기 감사 순찰사가 되어 지금까지도 제향을 폐하지 않고 있다.
개구리는 오랫동안 가물면 소리가 없다가 비가 오면 시끄럽게 우는데, 어째서 그런지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다. 주례(周禮)에 진회(蜃灰 조개 재)를 뿌려서 기도[禳]하는 것은 그 소리를 미워해서이고, 공치규(孔稚圭)가 이것을 양부(兩部)의 북을 치고 피리 부는 것에 비한 것은 그 소리를 좋아해서이다. 지금 맹인들이 경을 읽을 때 개구리 소리를 모방하는 것도 또한 일종의 음악이다.
권성(權姓)인 재추(宰樞)가 문관으로서 조정에 현달(顯達)하였다. 아버지가 죽자 남의 무덤을 파헤치고 장사지내려 할 때 무덤 주인이 말하기를, “이 무덤은 우리 아버지의 무덤이다. 우리 아버지는 벼슬은 비록 낮았으나 뜻이 엄하고 굳세어 보통 사람이 아니었으니, 부디 파내지 말라. 반드시 해가 있으리라.”하였으나, 재추가 듣지 아니하고 마침내 그 무덤을 파서 관을 열어 시체를 버리니, 그 아들이 시체를 어루만지며 통곡하기를, “영혼이 만약 있다면 어찌 이 원통함을 보복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날 밤에 풍수(風水) 이관(李官)의 꿈에 수염이 붉은 한 장부가 분노하여 꾸짖기를, “네가 어찌 나의 안택(安宅)을 빼앗아 타인에게 주었는가. 화근은 실로 네게 있다.” 하고,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치니, 이관은 가슴을 앓아 피를 흘리다가 바로 죽고, 얼마 가지 아니하여 재추도 또한 나라의 죽임을 당하고 가문이 멸망하니, 사람들이 모두 무덤을 파낸 까닭이라고 하였다.
신축년에 채기지(蔡耆之)와 성경숙(成磬叔)이 승지로서 죄를 입어 모두 파직을 당하고 관동(關東)에 놀러 갈 때 흰옷과 짧은 도롱이로 각각 한 어린 종을 거느리고 가는데, 무관(武官) 회옹(晦翁)이 따라갔다. 포천(抱川)에 이르러 시내에서 저녁밥을 먹는데, 한 소년이 촌락에서 나와 경숙의 옆에 걸터앉으며, “당신들은 영안도(永安道) 사직(司直)이 아니오, 내가 소를 사고자 하오.” 하니, 경숙이 답하기를, “소가 없소니다.” 하여, 좌우가 모두 웃었다. 금화현(金化縣)에 이르니, 현감이 앞길에 나와서 현(縣)으로 맞아들이고자 하므로, 경숙이 말하기를, “오늘은 이미 날이 저물었고, 금성(金城)까지는 아직도 길이 멀며 사면(四面)에 인가가 없으니, 주인의 말을 따르는 것이 좋겠다.” 하니, 기지가 노하여, “처음에 족하를 믿음직하다고 여겼는데, 어찌 일을 다스림에 착오가 이와 같은가.” 하고, 인색을 붉히면서 길을 떠나 10리 정도 갔을 때,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였다. 회옹이 말하기를, “영안을 왕래하는 사람들은 모두 길가에서 노숙하므로 내가 비록 재주는 없으나 활소기와 말타기로써 업을 삼았으니, 어찌 도적 같은 것을 두려워하겠습니까. 길 위에서 자고 가도록 합시다.” 하니, 경숙이 말하기를, “영안 사람들은 여러 사람들이 모여 무리를 지어 있기 때문에 노상에서 자지만 그래도 흔히 도적을 만나 물건을 잃었는데, 족하가 아무리 용무(勇武)를 믿는다고 하나 어찌 한 몸으로 많은 무리를 당하겠소.” 하였다. 이러는 동안 마침 서쪽 골짜기의 소나무 사이에 좁은 길이 있어, 혹은 인가(人家)가 있을 것이라 하고, 혹은 무덤이 있을 것이라 하였는데, 경숙이 말하기를, “골짜기 깊숙한 곳이 오히려 큰 길 옆보다는 낫다. 집이 있으면 자고 집이 없으면 나무를 베어 목책을 만들어 자면 해될 것이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좁은 길을 찾아갔더니, 소점(小店)이 있어 한 여자가 아이를 안고 문에 나와 말하기를, “집에 주인 어른은 계시지 않고 다만 주부만 있을 뿐이니, 손님을 들일 수 없습니다.”하므로, 모두 집 앞 채소밭에 앉아 저녁을 먹을 때 이미 어두워져서 주위를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조금 후 한 사람이 말을 타고 오는데 개가 그 뒤를 따라왔다. 어린애가, “주인 어른 오신다.” 소리치니, 여자가 나와 맞이하며 말하기를, “손님이 밖에 가득한데 도적인 듯합니다.” 하였다. 늙은이가 말하기를, “누군지는 모르지만 밤늦게 왔으니 황당(荒唐)한 일임에 틀림없다.” 하고, 드디어 말에서 내려 기침을 하며 사방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행장에 곰가죽과 호피(虎皮)가 있으니, 반드시 사족(士族)이리라.” 하였다. 좌중이 모두 갓을 기울여 쓰고 말이 없으므로 늙은이가 성경숙의 갓을 벗기어 보고 갑자기 물러서면서, “이분은 성영공(成令公)이시다.” 하고 또 기지의 갓을 벗기어 보고는, “이분은 채영공(蔡令公)이신데 두 영공께서 어찌하여 이곳에 이르셨습니까.” 하여, 서울의 일을 자세히 물은 다음 비로소 그 까닭을 알고 방으로 맞아들여 병풍을 펴고 자리를 깐 다음, “내 집은 몹시 빈한하여 오직 좁쌀막걸리밖에 없습니다.” 하고, 종을 불러 술을 걸러 동이에 넣고 두 딸을 불러 나와 절하게 하자 모두가 경의(敬意)를 표하였다. 늙은이가 말하기를, “나의 정처(正妻)는 자식이 없고 이것들은 모두 종의 소생입니다.” 하고, 두 사람 옆에 앉히어 각각 차례로 술을 따르게 하고 채기지의 종으로 하여금 피리를 불게 하였다. 술이 거나하게 취했을 때에 채기지가 말하기를, “따님의 손을 잡아보고 싶은데 주인의 뜻이 어떠하실는지요?” 하니, 늙은이가 말하기를, “딸들이 비록 촌티가 나고 못났으나 옆에 모시게 한 까닭은 영공의 기쁨을 돕게 하고자 한 것인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하였다. 채기지가 나아가 그 손을 잡고 여러 가지로 희롱할 때 집이 낮아 일어설 수가 없어 모두들 앉아서 춤을 추면서 새벽까지 놀았다. 늙은이의 성은 진(秦)이니, 당시에 이조 녹사(吏曹錄事)로 있다가 휴가를 얻어 고향에 와 있는 것이었다. 창도역(昌道驛)에 이르러, 회옹이 병이 나서 수일을 머물렀는데, 일행의 말이 풀을 먹고 똥을 많이 누었다. 역졸이 비를 가지고 와서 쓸면서, “누가 우리 감사가 앉는 마루를 더럽히는고.” 하고, 몹시 노한 기색을 보이자 성경숙이 천천히 달래면서 말하기를, “노하지 말게, 우리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만약 찰방(察訪)이 되면 마땅히 자네에게 말미를 주도록 하겠네.” 하니, 역졸이 말하기를, “어찌 흰옷에 가는 실띠를 띤 사람이 찰방이 될 수 있겠소. 만약 그렇다면 영안도(永安道)로 대구(大口)를 싣고 왕래하는 사람들이 모두 찰방이 되겠습니다.” 하여, 사람들이 모두 포복절도하였다. 신안역(新案驛)을 지날 때 길에서 역마를 타고 달려오는 한 관인(官人)과 마주쳤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말에서 내려 풀밭에 숨어 엎드렸는데, 관인이, “이 사람들은 누구인데 방황하고 물러가지 않는가.”물었다. 또 보니, 한 여자가 붉은 저고리와 흰 치마를 입고 역마를 타고 오므로 성경숙이 말하되, “이는 참으로 장부의 행차로다. 내가 일찍이 한림원을 거쳐 은대(銀臺)에서 벼슬하고 기생들이 연주하고 노래하는 자리에서 취해 놀다가 오늘날 불우한 환경에 빠짐이 이와 같으니, 우리들 처지에서 저들을 보니 참으로 천상의 신선과 같도다.” 하였다. 채기지가 말하기를, “그대가 일찍이 관서(關西)에 사신으로 갈 때 두 기생을 데리고 갔었으니, 저 것도 한때, 이것도 한때인데 어찌 저것을 부러워하오?” 하여, 일행이 모두 웃었다. 회양(淮陽)의 속읍인 화천현(和川縣)에 이르렀을 때, 회옹이 입맛이 없어 콩죽을 먹고자 하니, 성경숙이 현(縣)의 아전을 불러 옷을 전당잡히고 죽을 구하니, 아전이 말하기를, “저의 집이 비록 가난하지만, 어찌 죽을 옷과 바꿀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저녁에 콩죽 한 주발과 꿀 한 바리를 가져왔는데, 채기지가 모두 먹어버렸으므로 아전이 또 한 주발을 보내었다. 이번에는 성경숙이 먹어버리고 회옹은 다만 먹다 남은 찌꺼기만 먹었다. 추령(楸嶺)을 넘어 중대원(中臺院)에 이르러 마침 비바람을 만났는데, 그 맹렬한 찬 기운이 마치 가을과 같았다. 앞서 서울을 떠날 때 성경숙은 두터운 저고리를 가져오지 아니하여 이때에 이르러 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였다. 정중(亭中)에 한 역졸이 막걸리를 가져와 권하니 모두 그 더러움을 싫어하며 마시지 않았는데, 성경숙은 한 사발을 기울이고 말하기를, “겹옷 입은 사람은 비바람 속에서는 막걸리를 마셔도 또한 무방하다.” 하였다. 통천(通川)에서 수일을 머물 때 군수 안국진(安國珍)과 더불어 놀고 남으로 고성군(高城郡)에 이르니, 마침 홍자심(洪子深)이 군수가 된지라, 삼일포(三日浦)에서 놀다가 다시 동해의 봉화봉(烽火峯)에서 노니, 그 기이한 경치야말로 비할 데가 없었다. 자심이 그 봉을 승선대(承宣臺)라 이름지었으니, 여기서 양인이 모두 승지를 지냈기 때문이다. 바닷고기를 잡아서 몹시 마셔서 크게 취하니, 군수가 오미자장(五味子漿)을 조제하여 병에 넣어둔 것을 성경숙이 살그머니 훔쳐 마시자 회옹이 이것을 보고 병을 채가지고 도망하였다. 성경숙이 몽둥이를 가지고 쫓아가니, 희옹이 병 속에 침을 뱉어 남이 먹지 못하게 하였다. 채기지가 노하여 병을 거꾸로 하여 땅에 쏟아버리니, 한 병의 장이 모두 없어졌다. 낙산사(洛山寺)에 이르러 중이 말하기를, “행차가 저희 절에 도착할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마침 길 가는 사람이 간성(扞成)으로부터 오므로, ‘승지 일행이 어디쯤 오더냐.’물으니, 답하기를, 승지는 보지 못했고 다만 말 꽁무니에 도롱이와 옷을 매달고 오는 객 두서너 사람을 보았을 뿐인데, 필시 강릉(江陵)의 정병(正兵)일 것입니다.’하더니, 지금 보니 그 대들이 모두 도롱이와 옷을 매달고 왔으니, 길 가는 사람이 잘못 본 것이로다.”하므로, 서로 크게 웃었다. 양양(襄陽)에 이르러 드디어 일행은 서울로 돌아왔다. 이듬해 임인년에 회옹은 회양 부사(淮陽府使)에 제수되었고, 3년 후 계묘년에는 성경숙이 강원 감사에 제수되었다.


[주D-001]정업원(淨業院) : 동대문 밖 동망봉(東望峯)에 있는 안양암(安養庵)을 말한다. 단종 비(妃) 정순왕후 송씨(宋氏)가 단종이 사사된 후 이곳에서 보살 할멈 노릇을 하였다 한다.
[주D-002]도이산융낙역래조(島夷山戎絡繹來朝) : 섬과 산의 오랑캐가 연속하여 조회한다는 뜻이다.
[주D-003]계유(癸酉)의 난 : 단종 원년 계유년에 수양대군이 전조(0前朝) 때부터 내려오던 원로 신하를 제거하고 스스로 정권을 잡은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은 사사(賜死)되고, 김종서(金宗瑞)ㆍ황보인(皇甫仁) 등은 피살되었다.

임하필기 제12권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제현(諸賢)의 문집(文集)


《계원필경(桂苑筆耕)》은 최치원(崔致遠)이 지었고,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은 강감찬(姜邯贊)이 지었고, 《구선집(求善集)》은 최충(崔沖)이 지었고, 《소화집(小華集)》은 박인량(朴寅亮)이 지었고, 《김문열집(金文烈集)》은 김부식(金富軾)이 지었고, 《쌍명재일고(雙明齋逸稿)》는 이인로(李仁老)가 지었고, 《백가의집(百家衣集)》은 임유정(林惟正)이 지었는데 조문민(趙文敏)이 서문을 썼고, 《서하집(西河集)》은 임춘(林椿)이 지었는데 아조(我朝)의 최석정(崔錫鼎)이 서문을 쓰기를, “숙종(肅宗) 때에 야승(野僧 시골의 승려)이 땅을 파다가 구리 동이[銅尊]를 얻었는데 그 안에 《서하집》의 인본(印本)인 시문 6권이 들어 있었으므로 후손 임재무(林再茂)가 이를 다시 간행하여 널리 반포하였다.” 하였다.
그리고 《이상국집(李相國集)》은 이규보(李奎報)가 지었고, 《김거사집(金居士集)》은 김극기(金克己)가 지었고, 《남양집(南陽集)》은 백비화(白賁華)가 지었고, 《묵헌집(默軒集)》은 민지(閔漬)가 지었고, 《홍애집(洪厓集)》은 홍간(洪侃)이 지었고, 《동암집(東菴集)》은 이진(李瑱)이 지었고, 《송파집(松坡集)》은 최성지(崔誠之)가 지었고, 《익재난고(益齋亂稿)》는 이제현(李齊賢)이 지었고, 《예산농은졸고(猊山農隱拙稿)》는 최해(崔瀣)가 지었고, 《근재집(謹齋集)》은 안축(安軸)이 지었고, 《철성연방집(鐵城聯芳集)》은 이암(李嵒)이 지었고, 《가정집(稼亭集)》은 이곡(李穀)이 지었고, 《초은집(樵隱集)》은 이인복(李仁復)이 지었고, 《제정집(霽亭集)》은 이달충(李達衷)이 지었고, 《근사재일고(近思齋逸稿)》는 설손(偰遜)이 지었고, 《둔촌집(遁村集)》은 이집(李集)이 지었고, 《목은집(牧隱集)》은 이색(李穡)이 지었고, 《반양이선생유고(潘陽二先生遺稿)》는 박상충(朴尙衷)과 박소(朴紹)가 지었고, 《포은집(圃隱集)》은 정몽주(鄭夢周)가 지었는데 아조(我朝)에서 노수신(盧守愼)에게 명하여 서문을 쓰게 하였다.
그리고 《석탄집(石灘集)》은 이존오(李存吾)가 지었고, 《운곡집(耘谷集)》은 원천석(元天錫)이 지었고, 《야은집(冶隱集)》은 길재(吉再)가 지었고, 《양천세고(陽川世稿)》는 허금(許錦) 등이 지었고, 《독곡집(獨谷集)》은 성석린(成石璘)이 지었다.

임하필기 제16권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연방집(聯芳集)


고성 이씨(固城李氏) 문정공(文貞公) 이암(李嵒)의 아들 이강(李岡)과 손자 이원(李原), 정당문학 강회백(姜淮伯)의 아들 강석덕(姜碩德)과 손자 강희안(姜希顔), 강희맹(姜希孟)이 서로 이어서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는데, 각각 《철성연방집(鐵城聯芳集)》과 《진산세고(晉山世稿)》를 남겨서 한때 사람들에게 회자(膾炙)되었다.


임하필기 제30권
 춘명일사(春明逸史)
우리나라 사람이 중국 기록에 실린 일


우리나라 사람으로 중국에 들어가 혹은 공훈과 사업으로써 천추(千秋)에 이름났거나 혹은 문장과 서화로써 당대에 예명(藝名)을 드날린 자들이 상하 수천 년에 걸쳐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러나 여기에는 가장 드러난 자들을 기록하여 참고할 수 있도록 한다.
대련(大連)과 소련(少連)이 효행으로써 공자(孔子)에게 칭찬을 받은 것은 《예기(禮記)》에 실려 있으니, 이는 말할 필요도 없다. 조원리(曺元理)는 《서경잡기(西京雜記)》에 보이고, 을지문덕(乙支文德)은 《수서(隋書)》에 실려 있으며, 개소문(蓋蘇文)ㆍ고선지(高仙芝)ㆍ흑치상지(黑齒常之)는 《신당서(新唐書)》에 실려 있다. 왕모중(王毛仲)ㆍ이정기(李正己)ㆍ왕사례(王思禮)ㆍ이회광(李懷光)ㆍ대문예(大門藝)는 《구당서(舊唐書)》에 실려 있다. 김생(金生)은 《화한삼재도(和漢三才圖)》에 보이고, 김사란(金思蘭)ㆍ김면(金沔)ㆍ김사신(金士信)ㆍ이다조(李多祚)는 《책부원귀(冊府元龜)》에 실려 있으며, 김충의(金忠義)는 《역대서화기(歷代書畫記)》에 실려 있다. 장보고(張保皐)와 정년(鄭年)은 《문원영화(文苑英華)》에 실려 있고, 김가기(金可記)는 《태평광기(太平廣記)》에 실려 있으며, 최치원(崔致遠)은 《광여기(廣輿記)》에 실려 있고, 왕거인(王巨仁)은 《전당시(全唐詩)》에 보인다. 한신일(韓申一)은 《청이록(淸異錄)》에 보이고, 박인량(朴寅亮)은 《민수연담(澠水燕談)》에 보이며, 이자겸(李資謙)과 김부식(金富軾)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보인다. 금(金)나라의 시조인 함보(函普)는 《금사(金史)》에 실려 있고, 정가신(鄭可臣)ㆍ이제현(李齊賢)ㆍ이공수(李公遂)는 《일하구문(日下舊聞)》에 보이고, 김도(金濤)는 《엄주별집(弇州別集)》에 보인다. 홍관(洪灌)ㆍ이인로(李仁老)ㆍ김방경(金方慶)ㆍ곽예(郭預)ㆍ김훤(金暄)ㆍ이영(李穎)ㆍ이암(李嵒)ㆍ성석린(成石磷)ㆍ윤언민(尹彦旼)ㆍ이영(李寧)ㆍ이숭인(李崇仁)은 《패문재서화보(珮文齋書畫譜)》에 보이고, 서거정(徐居正)ㆍ정추(鄭樞)ㆍ남곤(南袞)ㆍ이덕형(李德馨)은 《열조시집(列朝詩集)》에 보이며, 설손(偰遜)ㆍ정몽주(鄭夢周)ㆍ이색(李穡)ㆍ김구용(金九容)ㆍ조운흘(趙云仡)ㆍ권근(權近)ㆍ정도전(鄭道傳)ㆍ신숙주(申叔舟)ㆍ권남(權擥)ㆍ박원형(朴元亨)ㆍ허종(許琮)ㆍ성현(成俔)ㆍ이행(李荇)ㆍ노공필(盧公弼)ㆍ정사룡(鄭士龍)ㆍ소세양(蘇世讓)ㆍ김안로(金安老)ㆍ허흡(許洽)ㆍ신광한(申光漢)ㆍ이희보(李希輔)ㆍ윤인경(尹仁鏡)ㆍ임백령(林百齡)ㆍ서경덕(徐敬德)ㆍ홍섬(洪暹)ㆍ신응시(辛應時)ㆍ이극감(李克堪)ㆍ고경명(高敬命)ㆍ유근(柳根)ㆍ최전(崔澱)ㆍ허봉(許篈)은 《명시종(明詩綜)》에 보인다. 김안국(金安國)ㆍ심언광(沈彦光)ㆍ이이(李珥)는 《정지거시화(靜志居詩話)》에 보이고, 박충원(朴忠元)ㆍ어숙권(魚叔權)ㆍ이후백(李後白)ㆍ기대승(奇大升)ㆍ이산해(李山海)는 《허문목집(許文穆集)》에 보이며, 윤근수(尹根壽)는 《태평청화(太平淸話)》에 보인다. 이원익(李元翼)ㆍ원균(元均)ㆍ이항복(李恒福)ㆍ유성룡(柳成龍)ㆍ권율(權慄)ㆍ이복남(李福男)ㆍ이순신(李舜臣)ㆍ김응하(金應河)ㆍ김상헌(金尙憲)은 《비어고(備禦考)》에 실려 있다.


임하필기 제35권
 벽려신지(薜荔新志)
[벽려신지(薜茘新志)]


사시향관(四時香館)에는 꽃나무가 수백 종이나 된다. 개중에 백장미(白薔薇), 백모란(白牡丹), 백련화(白蓮花)는 소동파(蘇東坡)의 세 가지 흰 음식인 쌀밥, 무나물, 소금에 비길 만하다. 격자(格子) 곁에 석상(石床)이 있는데, 거기에는,
좋은 꽃들 삼백 그루나 심었더니 / 多種好花三百本
나지막한 울타리 비바람에 사시로 향기롭다 / 短籬風雨四時香
삼백육십 일에 / 三百六十日
꽃은 사시로 향기로우리라 / 花應四時之香
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태호석(太湖石)이 세 개가 있는데, 하나는 움푹 들어간 구멍이 수십 개 나 있고, 다른 하나는 늙은 범이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과 같고, 또 다른 하나는 푸른 학이 목을 빼고 있는 것처럼 생겼으니, 기이한 광경이다. 또 많은 인부들을 동원하여 한강 가에 있는 돌을 운반해 오다가 절반을 깨뜨려 버렸는데, 버려두기가 아깝다고 생각하여 재실 앞으로 운반해다가 세 개의 태호석으로 짝을 이루니 그 형상 또한 기이하였다. 명산(名山)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형태가 바뀐다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것인가.

향기는 멀리 풍기는 것을 취하고, 술은 냄새가 향기로운 것을 취하고, 돌은 메마른 것을 취하고, 거문고는 소리가 화락한 것을 취하고, 차는 빛깔을 취하고, 대는 그림자를 취하고, 달은 빈 것을 취하고, 바둑은 고요한 것을 취하고, 지팡이는 친근한 것을 취한다. 그리고 물은 가득 고인 것을 취하고, 눈은 나부끼는 것을 취하고, 칼은 겁나는 것을 취하고, 포단(蒲團)은 해진 것을 취하고, 미인은 시샘하는 것을 취하고, 중은 한가함을 취하고, 꽃은 은은한 향기를 취하고, 금석(金石)과 정이(鼎彝)는 오래된 것을 취한다.

어떤 과객이 임하려에 들러서 나의 그윽한 일을 묻기에 옛사람의 시구를 가지고 응답하였다.
“무슨 감개한 일이 있기에 이처럼 은거를 합니까?” 하기에, “대체로 마음이 넉넉하면 몸도 넉넉하지만, 몸이 한가하고 마음이 한가하지 못할까 그것이 두렵소이다.[大都心足身還足 只恐身閒心未閒]” 하였다. “무슨 공부를 하며 소일을 합니까?” 하기에, “꽃을 아끼어 봄에는 일찍 일어나고, 달을 사랑하여 밤에는 잠을 자지 않습니다.[惜花春早起 愛月夜無眠]” 하였다. “무엇으로 생활을 하며 일생을 마치려고 합니까?” 하기에, “아들은 씨앗 뿌리고 손자는 밭갈이 하는 속에 흉년이 없고, 붓으로 꽃을 피우고 먹으로 비를 내리는 속에 풍년이 있습니다.[子種孫耕無歉歲 筆花墨雨有豐年]” 하였다. “어디를 오가면서 무료함을 달래렵니까?” 하기에, “봄 언덕에 연한 풀이 직물처럼 덮여 있으니, 사슴과 어울려서 서로 잠을 자렵니다.[陽坡草軟厚如織 仍與麋鹿相對眠]” 하였다. “이곳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하고 묻자, “산 위에 흰 구름이 많습니다.[嶺上多白雲]”라고 대답하였다. “초가집을 이루었군요.” 하기에, “거연히 나의 천석입니다.[居然我泉石]” 하였다. “무슨 소리를 듣게 됩니까?”라고 묻는 데 대해서는, “쓰르라미는 봄가을 알지 못하고, 개구리는 공과 사를 가리지 않습니다. 흐르는 물은 오히려 귀를 어둡게 하고, 우는 매미는 거듭 나를 속입니다.[蟪不知春秋 蛙不爲公私 流水猶聾耳 鳴蟬重我欺]”라고 대답하였는데, 이것은 나의 시구이다.

양연(養硯 신위(申緯)) 노인이 젊을 때 지은 시에,
나라를 기울게 할 풍류는 삼짇날의 버들이요 / 傾國風流上巳柳
일생의 처량함은 석양의 꽃이로다 / 一生惆悵夕陽花
라고 읊은 구절이 있는데, 매우 경절(警絶)하다. 그러나 초년의 풍류는 한 시대를 뒤흔들었던 반면에 말년의 쓸쓸함은 쇠잔한 꽃과 같았으니, 한탄스러운 일이다.

진묘관(秦妙觀)은 선화(宣和) 연간의 유명한 기생으로서, 일찍이 초상화로 외방에 전해진 자였다. 육승지(陸升之)가 어떤 사람에게 이야기하기를, “전번에 임안(臨安)에서 객지 생활을 할 때 한 늙은 부인이 쑥대머리에 때 낀 얼굴로 시장에서 구걸을 하고 있었는데, 처마의 낙숫물로 발을 씻으면서 흐느껴 하소연하기를, ‘관인(官人)은 일찍이 진묘관에 대해 들어 본 일이 있습니까? 소첩이 바로 진묘관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비록 얼굴은 초췌하였으나 음성이나 행동거지는 태연하였습니다.” 하였다. 육승지는 이야기를 마치자 눈물로 옷깃을 적셨는데, 그것은 아마 만년(晩年)에 유락하는 자신의 신세가 그녀와 서로 같음을 슬퍼했기 때문이리라.
신자하(申紫霞)가 노경에 교외에 살면서 늙은 기생에게 시를 지어 주기를,
노래 부르고 춤추는 번화한 것은 전신의 일이요 / 歌舞繁華前身事
영웅과 아녀가 번갈아서 등장을 하였도다 / 英雄兒女遞登場
하였는데, 내가 ‘장(場)’ 자 운에 따라서 화답하기를,
노래 부르고 춤출 때에는 봄꿈이 길었건만 / 歌舞前身春夢長
봄꿈 깨고 나면 어느 곳인들 슬퍼함이 없으랴 / 覺來何處不悲傷
쇠잔하고 왕성함은 인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 銷殘盛壯非人力
냉락하고 번화한 것은 각각 한바탕 꿈인 것을 / 冷落繁華各一場
누대는 무심하게도 한밤의 달을 돌려보내고 / 樓榭無心歸夜月
영웅은 부질없이 슬퍼하며 석양에 눈물 흘린다 / 英雄枉惜淚斜陽
그대는 이생의 일을 헤아리지 말지니 / 莫君商量此生事
미인의 머리는 세기도 쉽단다 / 容易名花頭上霜
하였으니, 이는 신자하의 말을 부연한 것이다.

뒤꼍에 연못을 파서 물을 끌어 오고 돌을 쌓아 산을 만든 다음 ‘퇴사담(退士潭)’이라고 이름을 짓고 시를 적어 놓았는데, “행동거지는 여기에서 하고 시비는 알 바가 아니다.[行止止於此 是非非所諳]”라는 구절이 있다.

단상(湍相)이 정승에 제배되었다는 기별이 밤중에 이르렀는데, 공은 이미 취침 중이었다. 집안사람들이 알리려고 하자 공의 종제(從弟)인 정민공(貞敏公)이 “내일 아침에 사뢰자.” 하고 만류하였다. 아침에 공은 저보(邸報)를 보고 아무 말씀이 없었다.
나는 무진년에 정승에 제배되었다는 명을 받았는데, 서울의 저보가 역시 밤중에 이르렀다. 집안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곧바로 내가 자고 있는 방으로 들어왔고, 나도 놀라서 일어났다. 그때 문득 단상의 옛일이 떠올라 말하기를, “나는 도저히 단상을 따를 수 없구나.” 하였다.

무관(武官) 윤정주(尹庭舟)의 이름은 임금이 하사한 이름인데, 가오(嘉梧)의 본토박이로 힘이 세었다. 그는 숙종조(肅宗朝) 때 매우 대우를 받았다.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사가로 폐출되었을 때 그는 매일 한 되의 쌀과 한 마리의 꿩을 싸 가지고 가서 그 담 안에 던져 놓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그는 뒤에 열여덟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고 또한 절도사(節度使)를 지냈다. 가오의 사람 중에 드러난 사람은 이 사람뿐이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황만화(黃蔓花)를 신이(辛夷)라고 하는데, 《본초(本草)》에는 목필화(木筆花)가 신이로 되어 있다. 또 세상 사람들은 모두 홍장미(紅薔薇)를 해당(海棠)이라고 하는데, 《군방보(群芳譜)》에는 산단(山丹)이 해당으로 되어 있다.

소나무를 심은 지 10년 만에 무성하게 자라 뜰 절반을 뒤덮었으니, 토질이 알맞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옛날 사람은 오대부송(五大夫松)을 ‘오송(五松)’이라고 칭하였는데, 진(秦)나라 역사책에 보면 오대부라는 벼슬이 있다. 진시황(秦始皇)이 봉선(封禪)하고 돌아오는 길에 소나무 밑에서 쉬면서 그 소나무를 오대부로 봉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한 그루의 소나무라 하더라도 또한 오대부라고 할 수 있다.

도(稌 찰벼)와 나(稬 찰벼)는 패국(沛國)에서 술과 단술을 만드는 재료를 일컫는 말이었다.
갱(秔 메벼)은 유(糯 찰벼)의 등속이다.
선(秈 메벼)은 차진 것도 있고 차지지 않은 것도 있다.
갱(稉)은 세속에서 갱(粳 메벼)으로 쓴다.
홍도(紅稻)는 적사(赤사)이다. 송(宋)나라 공명지(龔明之)의 《중오기문(中吳紀聞)》에는, “홍련(紅蓮)은 올벼인데, 예전부터 있었다.”고 적혀 있다. 그리고 육노망(陸魯望 육귀몽(陸龜蒙))의 시에는, “석양바람 불어올 때 흰 국화를 읊고, 향도로 밥을 지으니 홍련임을 알겠노라.[遙爲晩風吟白菊 近炊香稻識紅蓮]”라고 읊었다. 내가 상고하건대, 홍련을 백국과 대(對)를 맞추었으니, 이것은 만도(晩稻 늦벼)이다.
오릉(烏稜)은 한릉(旱稜)이다. 《육서(六書)》에 이르기를, “밭에 심은 것은 남쪽 지방에서는 9월에 수확하고, 북쪽 지방에서는 10월에 수확한다.” 하였다. 내가 상고하건대, 《시경》 빈풍(豳風) 칠월(七月)에, “시월에는 벼를 거두어들인다.” 하였으니, 빈(豳)나라도 서쪽 지방의 높고 차가운 지대여서 그랬던가.
우리나라는 동쪽, 서쪽, 북쪽이 모두 지대가 높고 차가우므로 9월에 수확하는데, 호남과 영남만은 지대가 따스하므로 반드시 10월에 수확을 한다. 풍토가 각각 다르므로 동일하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금년에 벼를 벤 데서 명년에 다시 나는 것을 착()이라 하고, 금년에 벼가 떨어져서 명년에 저절로 나는 것을 이(秜)라 한다. 들벼로서 심지 않아도 저절로 나는 것을 여(穭)라 하니, 《광무기(光武記)》에 이르기를, “곡식이 저절로 났다.[嘉穀旅生]” 하였다.
조[粟]는 뭍에서 나는 종자 가운데 으뜸가는 것이다. 당나라 맹선(孟詵)의 《식료본초(食料本草)》에 의하면, “북방 사람은 좁쌀[小米]이라 하는데, 싹이 붉은 것은 문(虋 붉은 기장)이라 하고, 싹이 흰 것은 기(芑 흰 차조)라 한다.” 하였다.
양(粱 조)은 서(黍 기장), 직(稷 메기장)의 총칭이다. 직(稷)은 오곡(五穀)의 장(長)이다. 또한 직은 명자(明粢)이다. 《좌전》의 “젯메로 쓸 서직은 쓿지 않는다.[粢食不鑿]”는 구절에 대한 그 소(疏)에, “자(粢)는 직의 별명이다.” 하였다.
출(秫 차조)은 《송사(宋史)》에 이르기를, “고려(高麗)에는 메벼[秔], 기장[黍], 삼[麻], 보리[麥]는 있어도 차조는 없다.” 하였다.
서(黍 찰기장)는 차진 조[黏粟]이다. 출 또한 직의 차진 것이다. 서는 오곡의 첫 번째이다. 공자는 먼저 찰기장밥을 드셨다. 채옹(蔡邕)은 명선서(鳴蟬黍)라 하였다.
거(秬)는 《상서(尙書)》에서 검은 기장[黑黍]이라 하였다. 비(秠)는 한 껍질 속에 두 개의 알맹이가 든 검은 기장으로서, 종묘의 제사 때 쓰이는 창주(鬯酒)를 만드는 것이다.
맥(麥 보리)은 오곡의 시초이다. 《이아(爾雅)》에 이르기를, “떨어진 양식을 이어 주는 곡식이다.” 하였다.
소맥(小麥 참밀)은 가을에 심겨져 겨울에 자라고 봄에 이삭이 패고 여름에 열매가 여무니, 사시의 기운을 다 갖춘 것이다. 옛 노래에서 읊기를, “높은 밭에 참밀을 심었더니 오래도록 이삭이 패지를 않는구나.[高田種小麥 終久不成穗]” 하였다.
대맥(大麥 보리)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옛날의 시에서 말한, “푸르고 푸른 보리가 저 언덕에 났도다.[靑靑之麥 生彼陵陂]”라는 것이다.
모(麰 갈보리)는 내모(來麰)ㆍ춘모(春麰)이다.
내(䅘 밀)의 경우 제(齊)나라 사람들은 줄기를 견(䅌 보릿대)이라 칭하였다.
연맥(燕麥 귀리)은 일명 작맥(雀麥)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세속에서는 이모(耳牟 귀리)라고 한다.
교맥(蕎麥 메밀)은 일명 숙맥(菽麥)이라고도 하고, 화교(花蕎)라고도 한다. 육방옹(陸放翁)의 시구에, “메밀꽃이 덮인 눈과 같다[蕎麥如鋪雪]”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의 세속에서는 목맥(木麥)이라고 한다.
촉서(薥黍 수수)는 고량(高粱)이다. 우리나라의 방언에는 수수를 출(秫)이라 한다. 혹은 별명으로 당미(唐米 수수쌀)라 한다.
숙(菽 콩)은 뭇 두태(豆太)의 총칭이다. 《광운(廣韻)》에 의하면 숙은 숙(尗)과 같다.
답(荅 팥)은 소두(小豆)인데, 등나무처럼 난다.

한 가지 곡식이 흉년 든 해를 겸년(歉年)이라 하고, 두 가지 곡식이 흉년 든 해를 기년(饑年)이라 하고, 세 가지 곡식이 흉년 든 해를 근년(饉年)이라 하고, 네 가지 곡식이 흉년 든 해를 황년(荒年)이라 하고, 다섯 가지 곡식이 흉년 든 해를 대침년(大侵年)이라 한다. 그리고 다섯 가지 곡식이 다 풍년 든 해를 유년(有年)이라 한다. 《이아(爾雅)》에는, “곡식이 흉년 든 해를 기년이라 하고, 채소가 흉년 든 해를 근년이라 하고, 과일이 흉년 든 해를 황년이라 한다.” 하였고, 《광운》에는, “곡식이 없는 해를 기년이라 하고, 채소가 없는 해를 근년이라 한다.” 하였다. 그렇다면 채소를 심어서 먹는 것을 오곡 다음으로 치는 것이 당연하다.

그해 농사가 풍년 들려고 하면 단 풀이 먼저 나니, 단 풀은 냉이[薺]이다. 그해 농사가 흉년 들려고 하면 쓴 풀이 먼저 나니, 쓴 풀은 두루미냉이[葶藶]이다. 그해가 악한 해가 되려고 하면 악한 풀이 먼저 나니, 악한 풀은 물마름[水藻]이다. 그해가 가물려고 하면 가문 풀이 먼저 나니, 가문 풀은 납가새[蒺藜]이다. 그해가 돌림병이 발생하려고 하면 병풀이 먼저 나니, 병풀은 쑥[艾]이다. 그해가 장마 지려고 하면 장마풀이 먼저 나니, 장마풀은 쑥대풀[蓬]이다.

고(考)는 《예기》 곡례(曲禮)에, “생전에는 부(父)라고 부르고, 사후에는 고(考)라고 부른다.” 하였는데, 《설문(說文)》에는, “고는 노(老)의 뜻이다.” 하고, 《석명(釋名)》에는, “고는 성(成)의 뜻이니, 성덕(成德)이 있음을 말한다.” 하였다.
비(妣)는 《이아(爾雅)》의 주(註)에, “비(媲)의 뜻이니, 고의 배필이다.” 하였다.
옹(翁)은 《광아(廣雅)》에, “옹은 아버지이다.” 하였다. 그리고 《사기》에는, “나의 아버지[吾翁]는 바로 너의 아버지[若翁]이다.” 하였다.
공(公)은 아버지이다. 《전국책(戰國策)》에 의하면, “진진(陳軫)이 장차 위(魏)나라에 가려고 하니, 그 아들 진응(陳應)이 아버지[公]의 행차를 만류하였다.” 하였다. 또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공이라고 한다. 가의(賈誼)의 치안책(治安策)에 의하면, “그 자식을 안고 젖 먹이며 시아버지[公]와 더불어 무례하게 나란히 앉았다.” 하였다.
부군(府君)은 《문중자(文中子)》에 ‘동천부군지술(銅川府君之述)’이란 말이 있다.
대가(大哥)는 당나라 현종(玄宗)이 영왕(寧王)에게 준 서신에서 대가라고 일컬었다.
형형(兄兄)은 북제(北齊)의 남양왕(南陽王) 고작(高綽)이 아버지를 형형이라고 부르고, 적모(嫡母)를 가가(家家)라고 부르고, 유모(乳母)를 자자(姊姊)라고 부르고, 아내를 매매(妹妹)라고 불렀다.
야(爺)는 고악부(古樂府)의 목란(木蘭) 시에, “책(冊)마다 아버지의 이름이 들어 있다[卷卷有爺名]”는 말이 있다. 오(吳)나라 사람들은 아버지를 자(㸙)라 부르고, 또 파(爸)라 불렀다. 형(荊) 땅의 방언에는 아버지를 다(爹)라고 하였다. 《정자통(正字通)》에는, “의붓아비[假父]를 동(㸗)이라 한다.” 하였다.
모(母)는 《석명(釋名)》에는 덮어 주다[冒]의 뜻이라 하였고, 《증운(增韻)》에는 사모하다[慕]의 뜻이라 하였다. 그리고 《창힐편(蒼頡篇)》에는, “그 가운데에 있는 두 점은 사람의 젖을 상징한 것이다.” 하였다.
태부인(太夫人)은 《한서(漢書)》 문제기(文帝紀)의 주(註)에 이르기를, “열후(列侯)의 처를 부인(夫人)이라 칭한다. 열후가 죽고 아들이 다시 열후가 되면 이에 태부인이라 일컬을 수 있다.” 하였다.
모(姥)는 공작행(孔雀行)에서 읊기를, “열심히 공모를 봉양하네[勤心養公姥]”라고 하였다. 공(公)은 아버지를 말하고, 모(姥)는 어머니를 말한다. 강남(江南)에서는 어머니를 아언(阿嫣)이라 부른다. 그리고 《자전(字典)》에는, “세속에서 어머니를 낭(娘)이라 칭한다.” 하였고, 《운회(韻會)》에는, “낭(娘)은 양(孃)과 같다.” 하였다. 송나라 인종(仁宗)은 유씨(劉氏)를 대양양(大孃孃)이라 부르고, 양씨(楊氏)를 양양(孃孃)이라 불렀다. 촉(蜀) 땅 사람들은 어머니를 저(姐)라 부르고, 강인(羌人)은 저(媎)라 부르는데, 저(媎)는 저(姐)와 같다. 그리고 강동(江東) 사람들은 제(姼)라 부르고, 초(楚)나라 사람들은 황(媓)이라 부르고, 또 내(嬭)라 부르며, 제(齊)나라 사람들은 미(㜷)라 부르고, 강회(江淮) 사람들은 제(媞)라 부르고, 회남(淮南) 사람들은 염(媣)이라 부르고, 오(吳)나라 사람들은 미(㜆)라 부른다.
소자(所子)는 《한서(漢書)》의 주에, “형제의 아들을 길러서 자기의 아들로 삼는 것을 소자라 한다.” 하였다.
여(女)는 《박아(博雅)》에는, “여는 따르다[如]의 뜻이다.” 하였고, 《백호통(白虎通)》에는, “사람을 따른다는 뜻이니, 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르고 아버지의 명령을 따르기 때문에 여(女)라 한다.” 하였으며, 《석명(釋名)》에는, “서주(徐州)와 청주(靑州)에서는 딸을 오(娪)라 하는데, 오는 거스르다[忤]의 뜻이다. 딸이 갓 태어났을 때 사람들은 기뻐하지 않고 언짢아한다.” 하였다.
손(孫)은 자(子) 자와 계(系) 자로 이루어졌으니, 조상을 계승함을 말한다. 《이아》에는, “손은 공순하다[順]의 뜻이니, 조상에게 순종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현손(玄孫)은 《이아》의 주에, “현(玄)은 친속(親屬) 관계가 희미함을 말한다.” 하였다.
현손의 아들을 내손(來孫)이라 한다. 《석명》에, “내손은 무복(無服)의 관계에 있으므로 그 뜻이 소원(疏遠)하니 내래(乃來)라고 부른다. 또는 이손(耳孫)이라고도 한다.” 하였고, 응소(應昭)의 주에, “이손은 증조와 고조와의 거리가 더욱 멀어서 귀로만 들을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내손의 아들을 곤손(昆孫)이라 하니, 곤(昆)은 후(後)의 뜻이다.
곤손의 아들을 잉손(仍孫)이라 하니, 잉(仍)은 거듭하다[重]의 뜻이다. 《석명》에, “예(禮)를 가지고 그대로 유지할 뿐, 은의(恩義)는 실로 없는 것이다.” 하였다.
잉손의 아들을 운손(雲孫)이라 한다. 《석명》에, “거리가 이미 멀어 떠다니는 구름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형(兄)은 구(口) 자와 인(儿) 자로 이루어졌는데, 인(儿)은 인(人)이다. 구(口)와 인(人)으로 글자가 이루어진 것은 아우가 모르는 것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백호통》에, “형(兄)은 견주다[況]의 뜻이니, 아버지에 견주는 것이다. 강남과 강북에서는 형을 황이라 부른다.” 하였다.
제(弟)는 순종하다[順]의 뜻이니, 형에게 순종함을 말한다.
자(姊)는 자문하다[咨]의 뜻이다. 먼저 태어났으므로 자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형(女兄)을 저(姐)라 하고, 여제(女弟)를 매(妹)라 한다.
중(仲)은 가운데[中]의 뜻이니, 지위가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숙(叔)은 젊다[少]의 뜻이니, 어린 사람에 대한 호칭이다.
계(季)는 계(癸)의 뜻이니, 갑을(甲乙)의 차서에 계(癸)가 끝에 있기 때문이다.
부(夫)는 부축하다[扶]의 뜻이니, 도(道)로써 부접(扶接)함을 말한다.
부인이 남편을 이천(移天)이라 하니, 집에 있으면 아버지가 하늘이되 시집가면 남편이 하늘이 됨을 말한다. 또는 소천(所天)이라고도 한다.
처(妻)는 제(齊)의 뜻이니, 남편과 더불어 동체(同體)이기 때문이다.
빈(嬪)은 부인(婦人)의 미칭(美稱)이니, 서로 손님처럼 공경함을 취한 것이다.
부(婦 아내)는 복(服)의 뜻이니, 남편을 복종해 섬긴다는 것이다. 또 아들의 처를 부(婦 며느리)라고 하는데, 시부모를 복종해 섬긴다는 것이다. 강남에서는 부를 구(姁)라 부르고, 강인(羌人)은 발(妭)이라 불렀다. 《자휘(字彙)》에는 부를 식(媳 며느리)이라 하였다.
고(姑 고모)는 고(故)의 뜻이다. 곧 나에게 구고(久故)의 사람이 됨을 말하니, 아버지의 자매(姊妹)이다. 또 남편의 어머니를 고(姑 시어머니)라고 한다. 《광운》에는, “고(姑)는 위(威)라고 말하는데, 무섭기 때문이다.” 하였다. 또 장(嫜 시부모)이라고도 한다. 안사고(顔師古)는, “존장(尊章)은 구고(舅姑)라는 말과 같다.” 하였다.
질(姪)은 바꾸다[迭]의 뜻이니, 바꾸어 가며 진어(進御)함을 말한다.
형제의 처들이 서로 사(姒 위 동서)니 제(娣 아래 동서)니 하고 부른다. 《이아》에, “같은 남편을 섬기는 여자들이 먼저 난 사람을 사(姒)라 하고, 뒤에 난 사람을 제(娣)라 한다.” 하였다.
형제의 처들이 서로 축리(妯娌 동서)라고 부른다.
수(嫂)는 《석명》에는, “수는 나이 많은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하고, 《의례(儀禮)》에는, “수는 존엄(尊嚴)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하였다. 또 구수(丘嫂)라고도 하는데, 구(丘)는 크다는 뜻이다.
장인(丈人)은 태산(泰山)에 장인봉(丈人峯)이 있으므로, 처(妻)의 아버지를 악장(岳丈)이라 부르고 처의 어머니를 태수(泰水)라 부른다.
생(甥)은 생(生) 자와 남(男) 자로 이루어졌으니, 여자가 출가하여 다른 남자의 배필이 되어 낳은 것이다.
서(壻)는 사(士) 자와 서(胥) 자로 이루어졌는데, 서는 재서(才諝 재지(才智))가 있음을 일컫는 말이다. 임금의 사위를 공서(公壻)라 하고, 공주(公主)에게 장가든 자를 주서(主壻)라고 한다. 죽은 딸의 남편을 구서(丘壻)라고 하는데, 구는 공(空)의 뜻이다. 그리고 자매(姉妹)의 남편끼리는 요서(僚壻 동서(同壻))라 하고, 손서(孫壻)는 낭서(郞壻)라 한다. 비서(婢壻)는 여종과 간통한 외부인이고, 유서(游壻)는 창기(娼妓)의 지아비이다.
반자(半子)는 《당서(唐書)》 회골전(回鶻傳)에, “가한(可汗)이 상서하기를, ‘지금은 사위이니 반 자식입니다.’라고 했다.” 하였다.
포대(布代)는 《천중기(天中記)》에 이르기를, “데릴사위를 포대라고 한다. 풍포(馮布)라는 자가 재간(才幹)이 있었는데, 손씨(孫氏)에게 데릴사위로 들어가자 그의 장인이 번거로운 일만 있으면 풍포에게 대신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하였다.
모(母)는 적모(嫡母)이다.
첩(妾)은 접(接)의 뜻이다. 또는 방처(傍妻)라고도 하고 처첩(處妾)이라고도 하는데, 처첩은 동녀(童女)이다.

김공 경연(金公敬淵)이 소싯적에 꿈속에서 “푸른 적삼에 흰 말을 타고 소동루를 향하는데, 장수의 깃발 앞세우고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靑衫白馬小東樓 牙纛去時不復還]”라는 시구를 얻었다. 이 시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그가 의주 부윤(義州府尹)에 제수되어 부임할 때 한 성루(城樓)를 보고, “이것이 무슨 누대인고?” 하고 우연히 물어보았더니, ‘소동문루(小東門樓)’라는 것이었다. 공은 깜짝 놀라며, “이것이 바로 소동루인가. 나는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리로다.”라고 말하였는데, 이내 병이 나서 영영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맹자(孟子)》에서 말한 “대인이 할 일이 있다.[有大人之事]”는 구절의 ‘대인’은 지위를 가지고 말한 것이고, “그 심지(心志)를 잘 기르는 자는 대인이 된다.[養其大者爲大人]”는 구절의 ‘대인’은 덕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주역》에서 말한 “대인을 만나 보는 것이 이롭다.[利見大人]”는 구절의 ‘대인’은 덕과 지위를 겸해서 말한 것이다.
지금 사람은 아버지를 대인이라고 칭한다. 그러나 《한서(漢書)》 소광전(疏廣傳)에, “소수(疏受)가 소광(疏廣)에게 말하기를, ‘대인의 의론을 따르겠습니다.’라고 했다.” 하였으니, 숙부도 대인이라 칭할 수 있고, 또 《후한서(後漢書)》 범방전(范滂傳)에, “범방이 그 어머니와 결별하면서 말하기를, ‘대인께서는 차마 못하는 사랑을 잘라 버리소서.’라고 했다.” 하였으니, 어머니도 대인이라고 칭할 수 있는 것이다.

제자가 선생에 대해서 더러 선(先) 자든 생(生) 자든 그 어느 한 글자만을 칭하는 경우가 있었다. 한(漢)나라 때 숙손통(叔孫通)이 여러 제자들과 함께 조정 의식을 만들었는데, 제생(諸生)들이 “숙손생(叔孫生)은 참으로 성인이시다.” 하였고, 《한서》 매복전(梅福傳)에 의하면, 매복이 “숙손선(叔孫先)은 충성치 않은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안사고(顔師古)의 주(註)에, “선(先)은 선생(先生)과 같은 것이다.” 했다. 또 장석지전(張釋之傳)과 공수전(龔遂傳)에는 왕생(王生)을 위하여 버선끈을 매어 주었느니 한 말이 있고, 또한 공경(公卿)들이 등선(鄧先)이니 장담선(張談先)이니 하고 자주 말들을 하였으니, 모두 이 뜻이다.

건륭(乾隆) 연간에 선부(膳夫)가 포갱(匏羹 박국)을 올리니, 건륭황제가 “귀하지 못한 물건이다.” 하면서 퇴짜를 놓았다. 그러자 건륭황제가 죽을 때까지 중원 천하에 박이라는 박은 익지를 않았다. 이것으로 보면 제왕은 천제의 아들인 것이다. 그러니 역사책에서, “오랑캐 또한 천상(天象)에 응하였구나.” 하고 조롱한 것은 잘못이다. 울타리에 여는 박꽃이 지금도 성하지 않으니 괴상한 일이다.

고려 때 대궐 뜰을 구정(毬庭)이라고 한 것은 모양이 공과 같았기 때문이다. 근세에 말[馬]의 훈련장을 구정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훈련장이 희구(戱毬)처럼 둥글기 때문이다.

정조(正祖)가 군관(軍官) 서유대(徐有大)를 불러 음식물을 하사하면서, “너는 가서 후원에 있는 귀신들을 먹여라.” 하고 분부하였다. 서공은 분부를 듣자마자 곧바로 갔다가 조금 후에 복명하였다. 정조가 묻기를, “너는 어떤 사람들에게 주었느냐?” 하니, “국출신(局出身)들에게 먹였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정조는 깜짝 놀라며, “너는 너무나 영리하구나.” 하였다. 이때부터 서유대에 대한 정조의 총애가 쇠해 갔다. 신하가 임금을 섬길 때 그 뜻을 받드는 것이 좋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어버이를 섬길 때 말씀하지 않은 뜻까지 읽는 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금상(今上) 신미년(1871, 고종8) 10월 7일에 산실청(産室廳)을 설치하였는데, 나는 약원(藥院)의 직임을 지닌 사람으로서 주선하고 물러 나왔다. 이날 밤 꿈에 높은 누대(樓臺) 위에 있노라니 얼룩무늬의 털을 가진 짐승이 무리를 지어 들어오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에게 물어보았더니 범이라고 하였다. 또 그 숫자를 물어보았더니 15마리라고 하였다. 꿈에서 깨서 생각해 보았더니 대개 범은 남자의 상징이고 15는 양수(陽數)이다. 그러나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세히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11월 4일 경인에 원자(元子)가 탄생하였으니 비로소 그 꿈의 징조를 알았다. ‘경’ 자와 ‘인’ 자는 범에 속하고, 달수의 11과 날수의 4를 합하여 15가 되는 것이다.

산실청의 당직실이 이문원(摛文院)과 가까워 매일 책을 가져다가 읽었는데, 와서 보는 제공(諸公) 중에 더러 웃는 자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책을 대하는 것이 가장 즐거운 일입니다.” 하고 말했다. 일찍이 한 노인이 이르기를, “항상 책을 책상에 놓아두면, 눈은 비록 책을 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마음은 항상 책에 있게 된다.” 하였는데, 이 말이 격언이다. 진실로 조용할 때에 묵묵히 앉아서 책을 펼쳐 본다면 어진 스승과 좋은 벗을 대하는 것과 같아서 마음이 자연 순정(純正)해지니, 혼자 있을 때의 공부는 이 책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정표천(鄭瓢泉)이 젊은 시절 서쪽 어떤 고을의 수령이 되어 부임하러 갈 때 단상(湍相)을 찾아뵙고 하직 인사를 하였는데, 상공(相公)이 말하기를, “자네는 내려가서 꼭 글을 많이 읽게.” 하니 정공은 그러리라 하고 물러갔다. 임기가 끝나서 돌아올 때 정공이 또 단상 댁에 들러 뵈었더니, 상공이, “글을 읽었는가?” 하고 물었다. 이에, “읽지 않았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상공은 깜짝 놀라며, “그러면 무엇을 했는가?” 하고 물었다. “돈 몇만 관을 싣고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니, 상공이 괴상히 여기고, “어디에 쓰려고 하는가?” 하고 물었다. “토지를 사려고 합니다. 사대부가 국사에 전력하려면 먼저 집안 걱정을 잊어야 가능합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상공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자네 말이 옳네. 나는 다섯 번 감사 노릇을 하였으나 집안이 이처럼 가난하니, 이것은 내가 평생을 두고 후회하는 일일세.” 하였다. 나중에 사람들이 정공의 말을 기억하고 정공을 관찰해 보았더니, 정공은 서쪽 고을의 수령으로 갔다 온 뒤로는 다시는 돈을 갖고 오지 않았다.
옛날 사마 온공(司馬溫公)이 정승이 되었을 때 매번 사대부들의 사생활이 넉넉한가의 여부를 물어보았으니, 이것은 그들이 거취를 가볍게 할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기공(杜祁公)은 장원 급제한 사람을 보고 그 가산의 있고 없음을 물어보았으니, 이것은 그들이 생활이 어려워 국사를 제대로 보지 못할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지금 상공과 정공 두 분의 문답은 그 차원이 모두 여느 사람보다 한층 높은 것이다.

어떤 관상쟁이가 동어(桐漁 이상황(李相璜))의 젊은 시절의 상을 보니 취할 만한 데가 없었다. 그 집에 머물러 함께 자면서 살펴보았으나 일상생활의 행동 가운데에도 더욱 칭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러다가 동어가 뒷간에 갔을 때의 태도를 보고는 말하기를, “크게 귀할 상이다.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앉은 모습이 바로 옥토끼가 달을 희롱하는 형상이니, 매우 귀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
송나라 때 한 위공(韓魏公 한기(韓琦))은 목소리가 여자 목소리였고, 문로공(文潞公 문언박(文彦博))은 걸음걸이가 자박거렸는데, 관상쟁이가 말하기를, “이 두 가지 일이 없으면 대신의 상이 아니다.” 하였다.

이여해(李汝諧)가 송나라 사람의 글씨를 기증하였는데, 그 서법이 예서도 아니고 해서도 아니었다. 뒤에 청나라 사람 판교(板橋) 정섭(鄭燮)이 쓴 ‘어리석어지기가 어렵다’는 뜻의 ‘난득호도(難得糊塗)’ 네 글자를 보았더니, 그 아래에, “똑똑하기도 어렵고 어리석기도 어려우나, 똑똑한 경지에서 점차 어리석은 경지로 들어가기는 더 어렵다. 한 단계를 늦추고 한 걸음을 물러서며 자신의 생각을 낮추는 것이 어찌 뒷날 복을 받는 계책이 아니겠는가.”라는 글을 적었는데, 그 서체는 바로 송나라의 서법이었다.

윤야(潤埜) 이기부(李基溥)가 난초 그림 여덟 폭을 연경(燕京)의 대종사(大鍾寺)에서 얻어 와서 나의 글씨와 바꾸었다. 뒤에 그 난초 그림이 궁궐로 흘러 들어갔다가 또 외간으로 흘러 나갔는데, 그중 두 폭은 종이 더미 속에서 발견되어 지금 향관(香館)에 보관하고 있다.

정경산(鄭經山 정원용(鄭元容))의 《수향편(袖香編)》에는 국조전고(國朝典故), 예약문물(禮樂文物) 등 400조목이 기록되어 있는데, 김풍고(金楓皐 김조순(金祖淳))와 수작한 말이 30여 조목이나 되었으니, 선배들의 교제는 후진들이 미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선대부(先大父) 문정공(文貞公 이계조(李啓朝))이 고금의 격어(格語)와 이문(異聞)을 기록한 것이 3, 4십 권이나 되는데, 그중에는 한 가지도 당세의 일을 적은 것이 없었다. 집에 간수하고 ‘만벽당총서(晩碧堂叢書)’라고 하였다.

가대인(家大人)께서 승자(陞資)하자 윤경당(尹褧堂)이 옥관자(玉貫子)를 보내며 축하의 말을 하기를, “이에 연꽃을 새겨 묘하게 꾸민 옥관자를 드리고, 이로써 정승의 자리에 오르기를 빕니다.” 하였다. 전편이 모두 이와 같은 말들이었는데, 내가 어릴 때여서 다 기억하지 못하고 기억하는 것은 이 한 구절뿐이니, 매우 한스럽다.

지사(知事) 이기남(李箕男)은 병자호란이 끝난 뒤에 진공 정사(進貢正使)로 연경에 갔는데,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우리나라 사람들이 고향에 전해 달라고 편지를 많이 부쳤다. 한글로 쓴 편지가 한 상자나 되었는데, 이기남은 사양치 않고 받아 가지고 압록강에 이르러서 모두 물속에 던져 버리고 종신토록 그 편지의 출처를 말하지 않았다. 이기남의 자손들이 많은 것은 실로 그 음보(陰報)를 받은 것이다.

병자호란 뒤에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연경에 갔다가 돌아온 자가 한인(漢人)의 시를 읊기를,
나에게 장부의 눈물이 있으나 / 我有丈夫淚
감히 울지 못한 지 삼십 년이나 되었네 / 不敢泣下三十年
오늘날 심양의 길에서 / 今日瀋陽路
그대를 위하여 가을바람 앞에서 한 번 눈물을 뿌리노라 / 爲君一灑秋風前
하였으니, 그 말이 격절하고 강개하였다. 한인의 도장에 이따금 “나는 본래 한을 품은 사람이다.[僕本恨人]”란 말이 있는데, 그것은 참으로 까닭이 있다.

천일정(天一亭)으로 가는 길이 이태원(異胎院)을 경유한다. 임진왜란 뒤에 왜인(倭人)들을 살게 해 준 곳이다. 그 풍속이 지금도 사납고 독하니 왜인의 종자가 남아 있어서일 듯한데, 습속은 그 유래가 있는 것이다.

수령으로 나갈 때 장기(瘴氣)가 있는 지역을 피하는데, 수령 자체에도 장기가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 세금을 난폭하게 거두고 아랫사람을 박해하여 윗사람을 받드는 것은 조부(租賦)의 장기요, 법조문을 엄격히 적용하여 이욕을 챙기고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을 명백하게 가리지 않는 것은 형옥(刑獄)의 장기요, 백성들의 이익을 침범하여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는 것은 화재(貨財)의 장기요, 쇠와 나무를 다루어 거복(車服)을 호화롭게 꾸미는 것은 공역(工役)의 장기요, 첩희(妾姬)를 많이 가려서 성색(聲色)을 즐기는 것은 유박(帷薄)의 장기다.

‘한수정후(漢壽亭侯)’에 대하여 늙은 학구(學究)들이 이따금 ‘한나라의 수정후’로 풀이하였다. 나도 일찍이 그렇게 알았는데, 뒤에 지리지(地理誌)를 보매 한수라는 땅이 있었으니, 정후가 벼슬 이름이라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유현덕(劉玄德)이 의성 정후(宜城亭侯)였던 것으로 보면, 정후가 벼슬 이름이라는 것은 더욱 분명하다.

사람은 글은 할 줄 모르면서도 소아(騷雅)의 기운이 있고, 중은 게(偈)는 할 줄 모르면서도 청고(淸高)한 기상이 있다. 그리고 술 한 잔도 마실 줄 모르는 사람도 술의 정취를 이해하고, 돌 한 개조차 그릴 줄 모르는 사람도 그림의 품격을 안다. 이것은 마음이 슬기롭기 때문이다.

진미공(陳眉公 진계유(陳繼儒))에게 다소잠(多少箴)이 있었는데, 그 말이 속되지 않았다. 지금 있는 한 본(本)은 어떤 사람의 저작인지 모르겠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기욕(嗜慾)은 적게 갖고 견문(見聞)은 많이 가질 것이며, 본심(本心)은 많이 갖고 부끄러워하는 얼굴 모습은 적게 가질 것이며, 귀한 사람에게 붙는 일은 적게 하고 천한 사람을 편드는 일은 많이 할 것이며, 독립(獨立)하는 일은 많이 하고 구속(拘束)받는 일은 적게 할 것이며, 서울에 사는 일은 적게 하고 시골에 사는 일은 많게 할 것이며, 하찮은 음식은 많이 먹고 좋은 음식은 적게 먹을 것이며, 말은 적게 하고 두려워하는 일은 많게 할 것이며, 자수(自守)하는 일은 많게 하고 탐선(耽羨)하는 일은 적게 하라. 나에게 맛있는 술이 있으니 기쁘게 잔치를 베풀으리라.” 하였다.

산속의 삶에는 여덟 가지 덕목이 있으니, 마음을 비울 것, 몸을 편안히 할 것, 욕심을 버릴 것, 예절을 지킬 것, 할아비는 낚시질을 할 것, 아이들은 글을 읽을 것, 그림 그리는 일은 망설일 것, 풍자는 하지 않을 것 등이다. 이런 일들을 놓아두면 밥벌레나 같을 것이다.

산새가 우는 것은 진솔루(眞率漏)라 이르고, 뜰의 개구리가 우는 것은 양부취(兩部吹)라 이른다. 이에 대해 연구(聯句)를 쓰기를, “수풀에 부는 바람은 시간을 알리는 새를 날리고, 물 위에 떨어지는 장맛비는 개구리 울음을 재촉하도다.[一林風送報更鳥 傍水霖淫催鼓蛙]”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산사실록(山史實錄)이다.

옛날에 있던 낙하금(落霞琴)은 중국 사람이 준 것인데, 거기에 명(銘)이 씌어 있기를, “이 낙하금 한 개는 치운(穉雲)이 만든 것이다. 그 가운데 ‘고산유수곡(高山流水曲)’이 있으니, 종자기(鍾子期)가 아니면 그 누구와 흥취를 부치리오. 도광(道光) 계미년 계하(季夏) 초에 주강(珠江)의 포서(捕署)에서 명을 짓다. 학파(學坡) 왕갱(王賡)이 쓰고 전당(錢塘) 조기(曹錡)가 제작하다.” 하였다.

“말을 조심하라는 훈계는 고금이 다를 것이 없었으니, 《논어》에는 열다섯 번 보이고 《주역》에는 열두 번 보인다.[愼言揭訓無今昔 十五於論十二易]” 이것은 내가 옛날에 지은 시구이다. 《논어》에는 ‘말을 조심하라’는 것이 열다섯 번 보이고, 《주역》에는 열두 번 보인다. 진계유(陳繼儒)가 말하기를, “옛날의 은거한 자는 말을 대담하게 하였으나, 오늘날의 은거하는 자는 말을 공손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입에서 나오는 것이나 붓으로 쓰는 것이나 모두가 말인데, 입에서는 조심하고 붓에서는 조심하지 않으면서 말을 공손하게 한다고 하면 옳겠는가.” 하였다.

선유(先儒)들이 칠정(七情)의 뜻을 논할 때 대부분 ‘정(情)은 성(性)이 동한 것이다.’라고 여겼으니, 희(喜)ㆍ노(怒)ㆍ애(哀)ㆍ구(懼)ㆍ애(愛)ㆍ오(惡)ㆍ욕(欲)이 이로 말미암아 나온 것이다.
희는 ‘대우(大禹)가 자신의 허물에 대한 지적을 받으면 기뻐했다’는 바로 그것이고, 노는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이 한 번 노하매 천하가 안정되었다’는 바로 그것이고, 애는 ‘문왕(文王)이 불쌍한 사람들을 애처롭게 여겼다’는 바로 그것이고, 구는 ‘맹자가 이단을 두려워했다’는 바로 그것이고, 욕은 ‘의(義)는 내가 하고 싶다’는 바로 그것이다. 요순(堯舜)이 백성을 사랑했던 것이나, 공자(孔子)가 간색(間色)인 자줏빛을 미워했던 것은 정(情)의 올바른 것이다.
손백종(孫伯宗)이 조정에서 물러 나와 기뻐했던 것이나, 오왕(吳王)이 자서(子胥)에 대해 노여워했던 것이나, 완적(阮籍)이 이웃 여자를 애처롭게 여겼던 것이나, 장선(莊善)이 ‘두려워하는 것은 나의 사적인 것이다’라고 한 것이나, 묵자(墨子)의 겸애(兼愛)나, 양화(陽貨)가 무례한 것을 미워했던 것이나, 신장(申棖)의 욕심은 정(情)의 사특한 것이다.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성인의 기쁨은 물건에 따라서 기뻐하고, 성인의 노함 또한 당사자에 따라서 노하니, 이것은 마음에 매이지 않고 상대방에게 매인 것이다. 사람이 누가 배우지 않고 능할 수 있겠는가마는, 그 절도에 맞는 것은 바로 성(性) 가운데의 도리이다.” 하였다.

하늘과 땅 사이에는 하나의 기(氣)가 오르내릴 뿐이다. 하늘은 기(氣)로써 베풀고 땅은 질(質)로써 받는다. 기가 오르면 양(陽)이 되어 더위가 이르고, 기가 내리면 음(陰)이 되어 차가움이 생긴다. 그러므로 세서(歲序)가 오월(午月)에 이르면 더운 기운이 혹심하다. 하짓날은 기가 당연히 내리니 더위가 점점 물러간다. 겨울이 되어 천기(天氣)가 크게 차가우면 땅의 받는 기가 도리어 더워져서 우물물이 따스해진다. 또 자월(子月)이 되면 차가운 기운이 극에 달한다. 동짓날은 기가 당연히 올라가니 차가운 기가 점점 사라진다. 여름이 되어 천기가 크게 더우면 땅의 저축된 기가 도리어 차가워 우물물이 서늘해진다. 이것은 구괘(姤卦)와 복괘(復卦)의 상(象)이다. 사람의 몸에 증험해 보면, 여름에는 몸은 더위를 이기지 못하나 배는 차갑고, 겨울에는 몸은 추위를 견디지 못하나 배는 따뜻하니, 몸은 하늘과 같고 배는 땅과 같은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고첩(古帖)을 많이 모아 책상에 비치하였는데, 그 이익된 점이 다섯 가지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나의 경우는 다섯 가지 해가 있다. 긴긴 날을 보내고 속된 것을 제거하는 데는 이익됨이 없지 않으나, 농사짓고 나무하는 데에 방해가 되니 그것이 첫째 해이다. 서파(書派)를 분별하는 데는 이익이 없지 않으나, 꽃을 가꾸고 채소 물주는 일에 방해가 되니 그것이 둘째 해이다. 기이한 글자를 많이 아는 데는 이익이 없지 않으나,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술을 마시는 데에 방해가 되니 그것이 셋째 해이다. 풍류를 즐기고 고아한 태도를 갖는 데는 이익이 없지 않으나, 북쪽 창 밑에서 낮잠을 자는 데에 방해가 되니 그것이 넷째 해이다. 훈수법(薰修法)과 같은 것에는 이익이 없지 않으나, 손님을 대하여 담론을 하는 데에 해가 되니 그것이 다섯째 해이다.

《주사(酒史)》를 지은 사람은 그 이름이 전하지 않으나,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소나무 밑에 마주 앉아서, 앞산에 석양이 곱게 물들고 아지랑이가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줄도 깨닫지 못한 채 끊임없이 담론하다가 손님이 일어서려고 하면 한 잔 마시지 않을 수 없다. 비가 촉촉히 내릴 때 여관에서 이웃집의 술 거르는 소리를 들으면 한 잔 마시지 않을 수 없다. 맑은 물에 목욕하고 나서 높은 절벽에 누워 꾀꼬리 소리를 들으면 한 잔 마시지 않을 수 없다. 국화는 늙어 가고 단풍은 쇠잔해 가므로 가을 흥취를 견디지 못하여 뜰을 배회하고 있을 때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가 찾아오면 한 잔 마시지 않을 수 없다. 가을이 깊어 가는 산옥(山屋)에서 등불을 켜고 유협전(遊俠傳)을 읽어 내려가다가, ‘바람 소리 우수수 나니 역수가 차갑구나.[風蕭蕭兮易水寒]’라는 글귀에 이르게 되면 한 잔 마시지 않을 수 없다. 내일 적을 치러 나가려고 깃발과 북을 정돈하고 장검을 어루만지며 날이 새기를 기다리는데 별안간 붉은 햇빛이 땅에 가득함을 보게 되면 한 잔 마시지 않을 수 없다. ‘공손대낭(公孫大娘)이 칼춤을 추어 태수(太守)의 천묘(千畝)나 되는 대나무밭을 쓸어버렸다.’는 대문을 배울 때는 한 잔 마시지 않을 수 없다. 제갈량(諸葛亮)의 출사표(出師表)를 읽을 때는 한 잔 마시지 않을 수 없다. 도연명(陶淵明)의 자만가(自挽歌)에 화답할 때는 한 잔 마시지 않을 수 없다. 당시(唐詩)를 읽다가 이청련(李靑蓮 이백(李白))의 여산폭포(廬山瀑布) 시에 이르면 한 잔 마시지 않을 수 없다. 산창(山窓)에 눈은 개고 새벽 달은 밝으며 우주에 한 점의 티끌 기운이 없으면 한 잔 마시지 않을 수 없다. 거문고를 타다가 끝나갈 때에 갑자기 가을바람이 몰아치는 소리를 듣고 정신이 바짝 나면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다. 대숲의 그늘이 주렴에 가득하고 임원(林園)은 깨끗한데 창 밖에서 바둑 두는 소리가 들리면 술 생각이 먼저 동하게 된다. 낙화(落花)를 보면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고, 좋은 술잔을 받으면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다.
근심이 있는 자가 밤새도록 뒤척이다가 두세 잔 들이마시면 어렴풋이 잠이 오니 또한 쾌족한 일이다.”

사람의 장단점은 반드시 죽은 뒤에 나타난다. 죽은 뒤에는 대부분 단점을 드러내고 장점은 드러내지 않는데, 어찌 감히 장점이 있기를 바라겠는가. 단점만 없으면 다행이다.

정원(政院)의 인신(印信)은 강희(康煕) 연간에 제작한 것인데, 인문(印文)이 아직도 닳지 않고 있다. 인신을 주조할 때 금과 쇠를 혼용해서 만들었으니, 이 때문에 오래되어도 닳지 않는다고 한다.

옛말에, “상사(上士)는 마음을 닫고 중사(中士)는 입을 닫고 하사(下士)는 문을 닫는다.” 하였으니, 이 말은 ‘큰 은자(隱子)는 성시(城市)에 숨는다’는 말과 같다.

매화는 한옥(寒屋)에 두는 것이 어울리고, 살구는 장대(粧臺)에 두는 것이 어울린다. 그리고 배꽃은 봄비와 어울리고, 연꽃은 새벽바람과 어울리고, 해당화와 복숭아꽃과 오얏꽃은 노래 부르고 춤추는 자리에 어울리고, 모란꽃과 작약꽃은 계극문(棨戟門)에 어울리고, 꽃다운 계수나무와 그윽한 난초는 은사(隱士)에게 주는 것이 좋다.

옛날 세상에 뜻을 둔 자들은 근력이 있어 분주하게 움직였는데 나는 연약하니 첫 번째 불능(不能)이요, 국사가 어려움이 많은데 나는 편안히 누워 있으니 두 번째 불능이요, 좋은 수레를 타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영화를 누리는 자가 많은데 나는 산속에 살고 있으니 세 번째 불능이다. 그리고 생황과 퉁소, 북과 악기를 앞뒤에서 연주하는 자들이 많은데 나는 다만 까마귀 떼와 새의 지저귀는 소리만 들으니 네 번째 불능이다. 할 수 있는 것은 고요히 앉아 저술을 게을리 하지 않으며, 옛사람들의 저술을 외우고 선현(先賢)들을 비판하지 않으며, 자신의 옳은 것을 뽑아서 남의 잘못을 입증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일찍이 사람을 시켜서 나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고 시를 짓기를,
의원의 사람은 의도 가운데 있고 / 意園人在意圖中
그림 밖의 귤산은 한수의 동쪽에 있도다 / 圖外橘山漢水東
한수의 동쪽에 있는 천석이 나의 의원이니 / 漢東泉石吾園意
집 이름을 오리귤옹이라 하는 것이 옳겠다 / 名室可吾李橘翁
하였는데, 속된 말이고 보니 웃음이 절로 나온다. 의원이라고 일컬은 것에 대해 말하자면, 내가 귤산의원(橘山意園)이란 네 글자를 일찍이 강사(江榭)에 편액으로 썼는데 중국 사람이 그림을 그려 보내왔기 때문에 시의(詩意)가 이와 같은 것이다.

내가 노경에 꿈속에서 산중에 들어가 보았더니, 석벽에 ‘천광대사정식(天光大師淨食)’이란 여섯 글자의 대자(大字)가 새겨져 있고, 그 곁에는 밥 먹는 중들이 수없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나에게 큰 숟가락 여섯 개를 주었다. 그 모양이 고려 때의 숟가락과 같았다. 두 개는 따라온 자들에게 나눠 주고 네 개는 품에 품고 깨었다. 그 숟가락을 그림으로 그려 고경(古鏡)이라는 선승(禪僧)에게 질정하였더니, 그가 말하기를, “향산(香山)에 운광대사(雲光大師)가 남긴 숟가락이 있는데, 그 모양이 이와 같다.”고 하였다. 불가(佛家)의 말에 네 가지 정식(淨食 깨끗한 생활)이란 것이 있으니, 유구식(維口食 주술(呪術)이나 점치는 일)을 아니하며, 앙구식(仰口食)을 아니하며, 방구식(方口食 부호(富豪)에게 아첨하여 생활하는 것)을 아니하며, 하구식(下口食 논밭을 갈거나 탕약을 지어서 생활하는 것)을 아니하는 것이다. 아니하다[不]의 뜻이 정(淨)이다. 앙구식은 조정에 의지하여 먹는다는 뜻이다. 우리 유가(儒家)로 보면, 천광(天光)에는 ‘천광이 배회한다[天光徘徊]’라는 글귀의 뜻과 같은 것이 있고, 정식(淨食)에는 ‘인의(仁義)에 배부르다’는 말과 같은 것이 있다. 숟가락을 받은 것은 남조(南朝) 때 강엄(江淹)이 오색의 붓을 받았다는 꿈과 같은 점이 있는 것일까.

서사가(徐四佳 서거정(徐居正))가 노경에 들어 하루에 지은 시가 더러는 10수가 되기도 하였다. 그가 자소(自笑) 시를 짓기를,
한 수의 시를 읊고 나서 또 시를 읊으니 / 一詩吟了又吟詩
종일 시만 읊고 그 밖의 것은 모르노라 / 盡日吟詩外不知
옛날에 지은 시들 펼쳐 보니 만 수나 되는데 / 閱得舊詩今萬首
죽은 날에 가서야 시를 짓지 않을 걸 아노라 / 儘知死日不吟詩
하였다. 임신년에 나는 고향에 돌아온 지 40일 만에 시 400편을 지었는데, 장단시(長短詩)와 율절시(律絶詩)가 다 구비되었다. 더위 먹은 병이 아직 낫지 않았을 때 붓을 던져 버리고 일어서서 읊기를,
올해의 질병이 지난해와 같으니 / 今年疾病去年如
해마다 질병으로 기거가 나태하다 / 疾病年年懶起居
처자식의 병을 병통으로 여길 뿐만이 아니니 / 非但病吾妻子病
병 속에 세월을 좁은 집에서 보내노라 / 病中歲月一蝸廬
하였다. 기당(祁堂) 홍 상국(洪相國 홍순목(洪淳穆))이 나더러, ‘일이 없어서 병이 생긴다’고 조롱하기에 내가 읊기를,
오래도록 한가하여 세상일 잊고 보니 / 久閒忘世事
질병이 자주 찾아드는구나 / 疾病頻侵尋
침범한 질병은 달게 여기나 / 自甘侵疾病
이미 사그라진 마음엔 어찌하리요 / 其奈已灰心
하였다.

소동파(蘇東坡)가 변방으로 귀양 갔을 때 정대모(程大侔)에게 답장하기를, “여기는 음식에 고기가 없고, 질병에 약이 없고, 거처에 내실이 없고, 나감에 벗이 없고, 겨울에는 숯이 없고, 여름에는 찬 샘이 없으니, 대체로 없는 것뿐이라오.” 하였다.
나의 고향에는 소공의 없던 것이 다 있는데, 다만 고기와 약이 없을 뿐이다.

소식(蘇軾)의 ‘동파(東坡)’라는 호는 백낙천(白樂天 백거이(白居易))의 《남빈지(南賓志)》에서 나왔다. 동파, 서파(西坡)는 다 백 문공(白文公 백거이)의 고적(故蹟)이다. 《용재수필(容齋隨筆)》에, “동파가 백낙천을 사모하였기 때문에 인하여 호를 삼았다.” 하였다. 그리고 미주(眉州) 마이산(蟆頤山)에 노옹천(老翁泉)이 있는데, 동파는 만년에 또한 ‘노천거사(老泉居士)’라고 호를 지었으니, 이것이 섭몽득(葉夢得)의 《석림연어(石林燕語)》에 보인다. 부자(父子)가 같은 호를 한 것 또한 특이한 일이다.

그림으로 산수를 보면 산수의 영향이 그림만 못하고, 산수로 그림을 보면 산수의 기운이 그림보다 낫다. 화초(花草), 영모(翎毛)는 붓끝에서 생기가 나고, 누대(樓臺), 인물(人物)은 눈동자가 정신을 전할 수 있다.
속담에, “용은 그리기 쉬워도 범은 그리기 어렵다.” 했다. 그것은 용은 보지 못하는 것이고 범은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에,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이태백이 고래 타고 하늘에 올라갔는데, 누구와 달밤에 놀거나.”라는 것이 있는데,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밝은 달의 주인이 어찌 이태백 하나뿐이겠는가. 다만 그는 그것을 일전도 들이지 않고 샀을 뿐이다. 소동파가 말하지 않았던가. 한가한 사람이 바로 주인이라고.”

선화(宣和) 연간에 어느 주점(酒店)의 벽에, “시비는 낚시터에 이르지 않고, 영욕은 항상 말 탄 사람을 따른다.[是非不到釣魚處 榮辱常隨騎馬人]”라는 시구가 씌어 있었다. 나는 이에 대해 말하기를, “낚시질하는 것은 한가한 것이 바쁜 것 같고, 말 타는 것은 귀한 것이 천한 것 같다.” 하였다.

김노가재(金老稼齋 김창업(金昌業))가 연경에 가다가 한 주점을 보고, “어찌 궁벽한 곳에 있는가?” 하니, 그 주인 여자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꽃이 향기로우면 나비가 스스로 오는 법이지요.[花香蝶自來]” 하였다. 중국 말은 비록 일상적인 대화나 시골 사람의 말이라 하더라도 시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식한 촌 여자의 문답하는 말도 모두 이와 같거니와, 관청에서 통용하는 언어로 말하면 더욱 문자의 풀이인 것이다. 각성(各省) 중에서 복건성(福建省)의 말이 아름답지 못하다 한다.

사람들은 모두 ‘가을밤이 길다’는 말은 하지만 ‘여름밤이 길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산속에 살면서 일이 없으면 여름밤도 역시 길게 느껴진다. 그래서 시를 읊기를,
주시에서는 겨울밤 긴 걸 읊었고 / 周詩冬夜永
당시에서는 가을밤 긴 걸 읊었다 / 唐詩秋夜長
어째서 여름밤이 긴 걸 괴로워하는가 / 如何苦夏夜
걱정이 있는 것도 상심이 있는 것도 아니건만 / 非憂又非傷
하고, 또 읊기를,
겨울밤에는 눈이 펑펑 내리고 / 冬夜䨦䨦雪
가을밤에는 바람이 살랑살랑 분다 / 秋夜颯颯風
여름밤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 소리 / 夏夜一簷雨
차갑게 나의 어둔 귀를 울린다 / 冷冷起我聾
하였으며, 또 읊기를,
내가 귀 먼 것은 타고난 것인데 / 我聾天所賦
어디서 들려오는 빗소리인가 / 何來一雨聲
산속의 더러운 것들 말끔히 씻는데 / 洗滌山中累
밤중에 홀로 놀래노라 / 中夜獨自驚
하였다.

설경(雪景)은 산의 경치만 한 것이 없고, 산의 설경은 달빛 아래에서 보는 것만 한 것이 없다. 눈을 읊은 시에서,
눈 쌓인 산 위에 까마귀 나니 / 寒鴉一點雪千山
흑백이 분명하여 쉽사리 보겠다 / 黑白分明容易覵
까마귀 눈 더럽히지 않으니 눈 더욱 깨끗한데 / 鴉非汚雪雪逾潔
눈이 까마귀와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 而雪於鴉那有關
라고 하였으니, 바로 실경(實景)이다.

송나라 조 청헌(趙淸獻 조변(趙汴))은 59세에 우렛소리를 듣고 도를 깨치고서 자호를 지비자(知非子)라 하였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허물을 고친 데 대한 말이라고 한다.
나는 금년이 59세다. 거백옥(蘧伯玉)보다 10년 뒤에 잘못을 알았으나 잘못을 아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우렛소리가 나의 도심(道心)을 일으키는 일이 없는 것이 한스럽다.

《태을삼식서(太乙三式書)》는 역리(易理)에 근거를 둔 책이다. 연경 저자에 두 본이 있으니, 하나는 등본(謄本)이고 다른 하나는 침본(鋟本)인데, 모두 금서(禁書)이다. 틀린 전사본(轉寫本)보다는 판서(板書)가 조금 낫다. 그러나 학력(學力)을 갖춘 뒤에야 마음을 안정할 수 있으니, 아이들은 이것을 익혀서는 안 된다. 대개 패관소설(稗官小說) 중에서 《산해경(山海經)》과 지리지(地理誌) 외에는 책상머리에 둘 필요가 없다.

소동파가 말하기를, “나무를 심는 데 있어서는 큰 것은 살릴 수가 없고, 작은 것은 이 늙은이가 그 생장을 기다릴 수가 없다. 따라서 중간치를 고르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뿌리에 흙덩이를 많이 띠고 있는 것이 좋다.” 하였다. 나는 매번 소공의 말을 취한다.

차(茶)를 채취할 때는 가는 것을 채취하고, 차를 저장할 때는 따뜻하게 저장하고, 차를 끓일 때는 뜨겁게 끓이도록 노력해야 한다. 가는 것을 채취하지 않으면 쓰고, 따뜻하게 저장하지 않으면 곰팡이가 피고, 뜨겁게 끓이지 않으면 맛이 없다. 더욱이 깨끗한 것을 귀히 여기는데, 햇빛을 보여 맛이 달아나게 해서는 안 된다.

해서(海西)에서는 먹이 생산된다. 중국 강남(江南)의 휘주(徽州)와 흡주(歙州)의 경우, 그을음은 아궁이로부터 먼 곳에 있는 것을 채취하고 기름은 맑고 깨끗한 것을 채취한 다음 부드럽게 빻아 얇게 뜬다. 이렇게 한 다음이라야 비로소 진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수토가 알맞고 시절이 적합한 것을 귀하게 여기니, 늦가을에 만들 경우는 몇 해를 경과해도 먹이 부서지지 않는다.

진미공(陳眉公 진계유(陳繼儒))이 말하기를, “옛 비문이나 석각의 법첩(法帖)을 표구할 적에는 전액(篆額)을 절대 버려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치 현인(賢人)이 갓을 쓰지 않는 것과 같다.” 하였으니, 이 말은 법첩의 운치를 깊이 얻은 것이다. 그러나 한비(漢碑) 300종(種) 가운데 전액을 전한 것은 불과 10분의 1인데, 어떻게 현인들을 일일이 갓을 쓰게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벼루를 씻기 좋아하니, 구양공(歐陽公)의 “3일 동안 벼루를 씻지 않으면 마치 세면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한 말에 대해 실로 동감한다. 갓 벼루를 씻어서 대하면 때를 씻고 일월을 보는 것보다 못하지 않다.

마음이 한가하고 몸이 편안하면 책을 보고, 마음이 호탕하고 손이 건장하면 글씨를 쓰고, 마음이 한유(閑遊)하고 눈이 밝으면 그림을 그리고, 마음이 맑고 손가락이 가벼우면 거문고를 탈 것이다.
마음과 몸이 다 나약하면 병이 나게 되고, 마음과 손이 다 무력하면 눕게 되고, 마음과 눈이 다 어두우면 졸음이 오게 되고, 마음과 손가락이 다 활발하면 노래를 부르게 된다.

초서(抄書)는 많음을 구할 필요가 없다. 한 토막이라도 가치 있는 글을 얻으면 보배가 된다. 따라서 그러한 글을 부지런히 구할 뿐이니, 부지런히 구하면 아홉 길 산이 저절로 이루어진다. 어찌 곧장 높은 태산을 이루는 자가 있겠는가.

독서(讀書)는 강령(綱領)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욕심을 부려 많은 양을 탐해서는 안 된다. 송독(誦讀)함에 있어서는 다만 온고지신(溫故知新)을 하면 저절로 풍부한 지식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급히 달리면 미끄러지고 엎어지게 마련이니, 절대 경계해야 한다.

글씨를 쓰는 데는 생획(生畫)이 있고 또 숙획(熟畫)이 있다. 생획을 쓸 줄 모르면서 먼저 숙획을 일삼는다면, 이것은 바로 나루를 건너뛰어 배를 타는 격이다. 그 어찌 순조롭게 피안(彼岸)에 닿아 현묘(玄妙)의 문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의 명승(名勝)에 대해 나중에 시 53수를 지었더니, 기당(祁堂 홍순목(洪淳穆))이 말하기를, “봉래(蓬萊)ㆍ영주(瀛洲)의 청랭(淸冷)한 기운이 궤안(几案) 사이에 피어오르니 소동파의 이른바 ‘시 가운데 그림이 있다.’라는 것이오. 처음에는 비록 늘그막에 자리에 누운 채 젊은 시절의 유람을 생각하면서 세속에 찌든 마음과 병든 몸을 위로하기 위해서 쓴 작품이지만, 속을 후련하게 해 주는 정도가 참으로 ‘백석(白石)으로 밥을 지어 먹고 벽하(碧霞)를 마신다.’는 수준을 훨씬 능가하는구려.” 하였다.

사시향관 잡영(四時香館雜詠) 30수와 전원 잡영(田園雜詠) 12수를 기당(祁堂)에게 부쳤더니, 서신을 보내오기를, “꽃향기 그윽한 곳이기에 하루가 참으로 한 해와 맞먹을 터이니, 옛날 공리자서(公理子西)가 힘주어 말했던 것처럼 그 높은 운치는 노둔한 자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오. 못난 자신을 돌아보건대, 그와 같은 경제(經濟)를 일찍이 배우지 못한 것이 한스럽소. 어찌 뜻이야 본래 없었겠소만, 하늘이 청복(淸福)을 누리게 하는 일은 쉽게 얻을 수 없나 봅니다. 그러니 재주가 있고 없는 것 또한 분수에 정해져 있는 것 아니겠소. 지금은 늘그막에 다다랐으니, 다만 나의 능력이 아득히 미치지 못함을 탄식할 뿐이라오.” 하였다.

내가 지은 사찬(史贊) 15수, 사영(史詠) 42수, 황명사영(皇明史詠) 45수에 대하여 기당(祁堂)이 평하기를, “사찬과 사영은 필묵(筆墨)에 있어서 좋은 법문(法門)이오. 전번에 보내온 시권(詩卷)이 이미 산중 실록(山中實錄)이었는데, 이제 또 정사(正史)에 뜻을 두고 수천년의 시비득실을 환하게 살피어 짧은 절구로 공정 무사하게 평가하였소. 이는 바로 사(史) 중에 사(史)이니, 어떻게 함부로 한마디 찬(贊)을 할 수 있겠소. 그러나 좁은 소견으로 볼 때 의논할 만한 곳이 없지 않소. 고명(高明)한 그대의 옛 현인들을 벗 삼는 뜻으로써 한나라의 장량(張良), 당나라의 이필(李泌), 송나라의 전약수(錢若水) 같은 인물에 대하여 음상(吟賞)한 바가 없고, 또 절의(節義)를 논한다면 송나라의 악비(岳飛)와 문천상(文天祥), 명나라의 방효유(方孝儒)와 철현(鐵鉉)과 구식사(瞿式耜)와 사가법(史可法)을 꼽을 수 있는데, 또한 하나는 거론하고 하나는 거론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혹시 매화가 이소(離騷)를 원망하고 해당화가 두보(杜甫)에게 한을 품는 것과 같은 지경에 이르지 않겠소.” 하였다. 그리고 끝에 시 한 수를 적기를,
오래 사는 신선이라 고금의 세상을 구경하며 / 閱世洞僊翫古今
상전벽해 속에 한가히 거문고를 타는구나 / 海桑三變付瑤琴
바람 불고 비 뿌릴 때 한담설화(閑談屑話)를 하고 / 風翻雨掣空言在
잎 떨어지고 꽃 피는 속에 묘리를 찾노라 / 葉落花開妙理尋
대필 문장에는 총명기가 서린 눈을 멈추었고 / 大筆文章留慧眼
선악에 대한 공정한 평가는 공리를 좇는 마음 진정시켰네 / 平衡袞鉞定機心
매화가 원망하고 해당화가 한을 품는다 해도 / 梅之幽怨棠之恨
꽃들이 워낙 많아서 다 읊을 수 없겠네 / 猶有群芳未盡吟
하였다.

영남사 팔영(詠南社八詠)은 정주계(鄭周溪), 조추담(趙秋潭), 조성산(趙星山), 박금령(朴錦舲), 이종산(李鍾山), 김석거(金石居), 박초파(朴蕉坡)가 짓고, 그중 하나는 내가 지은 것이다.
홍기당(洪祁堂 홍순목(洪淳穆))이 차운하면서 적기를, “여름 날씨가 무더운 것은 본디 대풍이 들 징조이지만, 초막 속에 칩거하는 신세가 딱하기는 하구려. 불같이 달아오르는 해가 중천에 오르면 뜰에 선 나뭇잎들이 모두 탄다오. 비록 더위를 잘 견디기로 유명한 사안(謝安)이 죽을 마시고 여공(呂公)이 술을 대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부동자세로 있을 수가 없다오. 더구나 평소의 공부에 아량(雅量)과 정력(正力)이 없으니 오죽하겠소. 오직 가슴속의 구학(丘壑)을 가지고 마음을 깨끗이 하여 꿈속의 신선 세계를 노닐매 은자의 맑은 정취가 갑자기 세파에 찌든 어리석은 중생에게 이르고 쟁그랑거리는 패옥 소리가 멀리서 이르러 오니, 마치 두꺼운 얼음을 먹고 맑은 술을 마시는 것과 같소이다.” 하였다.

홍기당이 《남화경(南華經)》의 장편에 대해 평하기를, “《남화경》의 장운(長韻)을 읽으면 두 겨드랑이에서 바람이 생겨서 회오리쳐 곧장 올라갈 수 있다.” 하였다.

칠언 율시로 13경을 찬(贊)하여 홍기당에게 보냈더니, 답서에 이르기를, “이것은 이른바 ‘좋은 소리로 나를 회유한다.’는 것이오. 오석산(烏石山)과 영원산(靈源山) 같은 명산이 멀리 있지 않아서 속세를 떠난 은자처럼 천석(泉石) 사이를 배회하고 지팡이를 짚은 채 긴 대나무와 성긴 소나무 숲 속을 거닐면서 낭랑하게 시를 읊었으니, 어찌 한 점이라도 세속 사람의 기운이 있겠소. 그런 때문에 입만 열면 저절로 주옥 같은 문장이 이루어지는 것이오. 이제 또 경전(經傳) 쪽에 생각을 돌려서 문장을 구사하였는데, 과연 그 철철 넘치는 문장 솜씨는 막을 수 없이 흘러나오고 있군요.“라고 하였다.
박평로(朴平老)는 나의 《가오고략(嘉梧藁略)》 15권을 가져다 보고 적기를, “문(文)과 시(詩)의 묘처(妙處)는 어찌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겠소마는, 비록 재주에 우열이 있고 공부에 천심(淺深)이 있다 하나 더러는 주옥 같은 문장으로 사단(詞壇)을 주름잡고 더러는 보옥 같은 서문으로 나라의 융성함을 떨치니 그 관계된 바가 중하거니와 또한 세대가 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옛날 사람이 말하기를, ‘한유(韓愈)의 글은 팔대(八代)의 쇠미함을 일으키고, 육유(陸游)의 문장에는 중원의 태평한 기상이 있다.’ 하였으니, 어찌 여기에서 취사선택을 하지 않겠습니까.” 하였으니, 식견이 높은 언론이다.

박평로가 말하기를, “벽자(僻字)와 은어(隱語)를 쓰는 것은 졸렬함을 숨기기 위한 방법인데, 시에서는 더욱 심하다. ‘시는 성정에서 나오는 것이다.’라든가 ‘시는 뜻을 말하는 것이다.’라든가 하는 말이 어찌 아름다운 풍경을 가지가지 기법으로 꾸며서 표현하는 것을 이름이겠는가. 후세에서는 과거(科擧)의 문체를 제외하고는 음영(吟詠)하는 것을 ‘성정에서 나오는 것이다.’라든가 ‘뜻을 말하는 것이다.’라든가 하는 말이 그래도 혹 근사하다. 그러나 속투(俗套)를 스스로 자랑하는 일은 옛날의 문장가가 취하지 않는 바이다.” 하였다.

어릴 때부터 두루마리를 펼쳐 놓고 운자(韻字)를 뽑는 일을 하는 것은 드물었다. 그것은 제목이 없이 시를 짓는 일에 능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근체시(近體詩)의 경우에는 화초(花草)ㆍ서화(書畫)ㆍ다당(茶鐺)ㆍ주구(酒甌) 등 백여 글자를 찾아 망라하면 평생을 써도 다 쓰지 못한다. 이것은 나의 자만이 아니다. 노경에는 절대로 음풍 영월(吟風咏月)은 하지 않고 근래에 와서 지은 것은 오직 금석색(金石索) 59수, 임하려(林下廬) 8경(景), 이역죽지사(異域竹枝詞) 30수인데, 오히려 부화(浮華)에 가까우니 또한 부끄럽다.

경산(經山) 정공(鄭公 정원용(鄭元容))이 뽑아서 이룬 《문영진선(文英珍選)》은 《예기(禮記)》, 《좌전(左傳)》, 《공양전(公羊傳)》, 《곡량전(穀梁傳)》, 《국어(國語)》, 《전국책(戰國策)》, 《가어(家語)》, 《노자(老子)》, 《장자(莊子)》, 《순자(荀子)》, 《묵자(墨子)》, 《열자(列子)》, 《문자(文子)》, 《관윤자(關尹子)》, 《육자(鬻子)》, 《한비자(韓非子)》, 《상자(商子)》, 《관자(管子)》, 《안자(晏子)》, 《항창자(亢倉子)》, 《윤문자(尹文子)》, 《등자(鄧子)》, 《공손자(公孫子)》, 《귀곡자(鬼谷子)》, 《강태공육도(姜太公六韜)》, 《사마자(司馬子)》, 《손자(孫子)》, 《오자(吳子)》, 《황석공소서(黃石公素書)》, 《울료자(尉繚子)》, 《공총자(孔叢子)》, 《가자(賈子)》, 《육자(陸子)》, 《동자(董子)》, 《한자(韓子)》, 《유자(劉子)》, 《사기(史記)》, 《한서(漢書)》 등의 글을 담은 5책인데, 문장의 궤범(軌範)이다. 그의 아들 남한 유수(南漢留守) 정주계(鄭周溪 정기세(鄭基世))에게 부탁하여 그 책을 베껴서 책상에 두고 보는데, 소득이 적지 않다.

《황각장주(黃閣章奏)》 15책은 정경산이 30년 동안 경영한 정승의 사업을 실은 것이다. 나라를 위한 원대한 계책과 깊이 있고 고상한 문장이 모두 여기에 담겨져 있으니, 정승 집안의 보물이라 할 만하다.

정주계가 나의 《임하필기》의 서문을 지었는데, 그 글이 순정(純精)하면서도 전아(典雅)하다. 문장이 아름다우면서도 빼어난 가운데 함축미가 있어서, 법도를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두루 통하였고 매우 찬양하지 않으면서도 찬양하는 뜻을 다했으니, 참으로 기문(奇文)이다.

《소화시평(小華詩評)》은 내가 젊은 시절에 손수 베낀 것인데, 할아버지께서 이르시기를, “나에게 이 책이 있으니, 인장(印章)이 찍혀 있다. 그런데 안성(安城) 사람이 빌려갔다.”고 했다. 40년 뒤에 내가 초평(草坪) 사는 일가 집에서 그 책을 보았는데, 일가는 이 책을 안성 사람에게 얻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책에 도장이 찍혀 있었기 때문에 거두어 회수할 수 있었다.

경소(景召)가 죽어서 내가 제문을 가지고 조문하기를, “나이는 50이요, 직위는 겨우 이조 참의(吏曹參議)였네. 경소는 청빈하여 생활이 어려웠으나, 평생 동안 구차한 말을 하지 않았네. 발자취가 공사(公事)가 아니면 밖에 나가지 않았네. 수령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서 성도(成都)에 철비(鐵碑)가 서 있네. 대상 날 거리가 멀어서 결별할 수 없었네.” 하였으며, 시를 읊기를,
아, 네 나이 겨우 오십이니 / 嗟爾得年纔識非
꽃다운 풀에 이슬 갓 말랐다 / 振山芳草露初晞
생전에 고생 겪은 일 그것이 애석하지 / 適來堪惜經酸苦
사후에 벼슬 좋고 나쁜 것 무슨 상관인가 / 死後何關爵顯微
세월이 다시 돌아온들 누가 붙잡으랴 / 歲月再回誰挽駐
인정은 무한한데 단지 슬퍼만 하노라 / 人情無限只歔欷
이승에서 겪는 고락은 다 같은 일 / 此生憂樂一般事
공연히 시 지으며 죽은 것 부러워한다 / 空賦詩篇羨大歸
하였다.

‘바위 위의 석호는 새끼를 안고 존다.[巖上石虎抱兒眠]’는 말은 선문(禪門)의 오도어(悟道語)요, ‘구름은 푸른 하늘에 있고 물은 병에 있다.[雲在靑天水在甁]’는 말은 승가(僧家)의 견성게(見性偈)이다. 무릇 시문(詩文)과 서화(書畫)는 먼저 허령(虛靈)한 기운을 얻은 뒤에야 저절로 묘경(妙境)에 들어가게 된다.
김추사(金秋史)는, “그림에 독서한 사람으로서의 기상이 없으면 화원(畫院)의 품격에 가깝다.” 했고, 신자하(申紫霞)는, “글씨에 전자나 예서의 기운이 없으면 속되다.” 했으며, 서풍석(徐楓石 서유구(徐有榘))은 “시문에는 마땅히 서화의 기운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마소를 거간하는 시장 거리에서 밥을 빌어먹는 격인데, 어느 겨를에 선비의 옷차림으로 당당하게 걸으면서 박식한 유자(儒者)들과 어울려 지내는 유한공자(遊閒公子)가 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사람들은 와당문(瓦當文)을 좋아하여 마멸되고 깨어진 기와 조각을 취한다. 옛날 사람들은 박락(剝落)된 곳에서 심획(心畫)을 찾아내서 보철(補輟)을 하였다. 그런데 오늘날의 서예가들은 박락된 곳을 발견하면 기이한 것만을 탐하여 단절(斷折)하고 파탈(破脫)하면서 글자의 모양대로 졸렬하게 그린다. 이러고서 어떻게 순정(純正)하고 정일(精一)한 경지를 엿볼 수 있겠는가. 이것은 바로 나귀를 타고 나귀를 찾는 것과 꼭 같은 것이다.

동정(洞庭) 장산인(張山人)이 이르기를, “산꼭대기에 있는 샘은 가벼우면서 맑고, 산 아래에 있는 샘은 맑으면서 무겁고, 돌 가운데 있는 샘은 맑으면서 달고, 모래 가운데 있는 샘은 맑으면서 차고, 흙 가운데 있는 샘은 맑으면서 후중하다. 그리고 유동(流動)하는 물은 안정(安靜)한 물보다 양호하고, 그늘진 곳의 물은 볕을 향한 물보다 낫다. 산이 가파른 데는 샘이 적고, 산이 수려한 데는 신령함이 있다. 진원(眞源)은 맛이 없고, 진수(眞水)는 향이 없다.” 하였다.
내가 천마산(天摩山) 꼭대기에서 물을 마셔 보니 가벼웠고, 퇴사담(退士潭)에서 물을 마셔 보니 무거웠고, 승가사(僧伽寺)에서 물을 마셔 보니 달았고, 수곡(壽谷)의 묘정(竗井)에서 물을 마셔 보니 차가웠고, 청해(靑海)의 동정(東井)에서 물을 마셔 보니 후중하였다. 안정한 물, 볕을 향한 물, 샘이 적은 것, 신령함이 있는 것, 맛이 있는 것, 향이 있는 것도 모두 족히 말할 수가 있다.

나의 고향에서는 채소가 생산된다. 3, 4월 사이에 석순(石筍)을 따서 순사(蓴絲)처럼 푹 삶아 가지고 상추처럼 밥을 싸 먹는다. 그리하여 드디어 야부(野夫)와 산승(山僧)의 먹거리가 되어 버렸으니, 연(蓮)이나 국화처럼 찧어서 제삿술을 빚는 데 넣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임술년에 정경산(鄭經山 정원용(鄭元容))이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헌수(獻壽)하려고 학 두 마리를 구하여 잘못 길들이다가 하루아침에 날아가 버렸는데, 지금까지 한스럽게 여긴다. 학만 보면 문득 이 일이 생각나지만 도리어 다시 시원한 생각이 든다. 그래서 말하기를, “새장을 열지 않아도 흰 꿩은 저절로 날아가고, 팔찌 위에서 배불리 먹지 못하자 매는 떠나 버렸다.” 하였다.

포명보(包鳴甫)가 말하기를, “순화첩(淳化帖)의 창힐자(蒼頡字)는 아직도 괘체(卦體)를 띠고 있다.” 하였다. 이것은 글자를 얻는 근본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서법(書法)은 모두 오행(五行)에 근거를 두고, 오행은 다 팔괘(八卦)에서 연역된 것이니, 그 어떤 것이 괘체가 아니겠는가. 특히 생획(生畫)이 팔괘의 처음 획과 같기 때문이다.

한비(漢碑)의 탑본(搨本)은 우리 동방의 오운(五耘) 윤동절(尹東晢)에게서 나왔는데, 처음에 내가 약관 시절 그 탑본을 얻어서 임서(臨書)하였다. 뒤에 연경에서 구입하였거나 조사(朝士)에게 증여받은 것으로서 서한(西漢) 이후로부터 당(唐)ㆍ송(宋)ㆍ원(元)에 이르기까지의 석각(石刻)이 백여 본이나 된다. 진즉 그 원류(源流)를 서술하여 옛사람의 한례가(漢隸歌)를 본받으려고 하였으나 뜻만 있고 성취하지 못하였으니, 어느 날에 정본(正本)이 나올지 모르겠다.

옛 기물(器物) 중 제기류(祭器類)인 정(鼎)ㆍ내(鼐)ㆍ이(彝)ㆍ고(觚)의 구별에 대해서는 비록 적고재(積古齋 완원(阮元))의 《적고재종정이기관지(積古齋鐘鼎彝器款識)》와 주위필(朱爲弼)의 《적고도석(積古圖釋)》이 있으나, 글과 도식이 끝내 서로 부합되기 어렵다. 그래서 한 번 도식을 상고하고 기록하여 책을 펼치면 일목 요연하게 하려고 하였는데, 지금까지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 매우 한스럽다.

연시(燕市)에 나와 있는 옛 그림은 모두 가짜여서 잘 그린 근고(近古)의 것만 못하지만, 근고의 것도 가짜가 많아서 고금이 동일하니, 화보(畫譜)의 인판(印板)이 본래의 명수(名手)임만 같지 못하다. 이를테면 개자원(芥子園 왕개(王槩))과 십죽재(十竹齋 호정언(胡正言))는 고의(故意)를 얻었지만 신운(神韻)이 없다. 그리고 십죽재는 글씨와 그림이 속되지 않아서 옛 명가(名家)들이 대부분 그 법을 취하였다.

거문고를 10년이나 배웠지만 초장(初章)의 이음(理音)도 이루지 못하였다. 5장의 상성(商聲)이 가장 중도를 얻기 어렵다. 박두계(朴荳溪 박종훈(朴宗薰))는 이음을 잘하고, 신취미(申翠微 신재식(申在植))는 상성을 잘하고, 김유관(金游觀 김흥근(金興根))은 농현(弄絃)이 격식에 맞고, 서매원(徐梅園 서기순(徐箕淳))은 조율(調律)이 어긋나지 않았는데, 모두 문장과 도덕을 겸비한 인물들이다.

술을 좋아하기로는 나만 한 사람이 없고, 바둑을 좋아하기로도 나만 한 사람이 없다. 그러나 술은 입술에 적시지도 못하고 바둑은 손을 대지도 못한다. 듣자하니, ‘술잔이 이르기만 해도 얼큰히 취하고, 바둑은 첫수에 결판이 난다’는 말이 있는데, 이러한 말은 모두 고인들의 운치 속에서 생긴 것이다. 나는 그 기구만을 앞에 진열해 둔 채 그 천진(天眞)함을 취하고 있을 뿐이다.

방언에 마불차(麻不借 산신), 배불락(盃不落 술잔), 승소병(僧笑餠 떡), 찬리채(鑽籬菜 닭고기), 수사화(水梭花 물고기)라는 말이 있다. 이것들은 모두 산중유사(山中幽事)이니, 구하면 얻을 수 있고 구하지 않아도 이른다. 그런데 화도(畫圖)의 옥려(屋廬)와 시의(詩意)의 산수(山水)를 얻지 못한 것이 한이다.

속담에, ‘10년 공부 나무아미타불’이란 말이 있다. 불가의 말에 나무(南無)는 크다[大]의 뜻이고, 미타(彌陀)는 비다[空]의 뜻이다. 내가 생각건대, 10년 공부가 하루아침에 크게 비어 버리는 것은 결코 대장부의 일이 아니니, ‘나무’ 앞에 ‘물(勿)’ 자를 더하는 것이 가하다.

네모난 연못에 자그마한 배를 띄운 다음 푸른 돛과 흰 휘장을 달고 찻잔과 술동이를 준비해 놓고는 한두 시객(詩客)과 서로 깔고 누운 채 어린아이를 시켜 조가(釣歌)를 부르며 노를 젓게 하였는데, 머리가 들리면 꼬리가 막히고 꼬리가 흔들리면 머리가 부딪혔다. 하루 밤낮을 꼬박 술잔만 한 작은 연못 속을 돌았으니, 강한(江漢)과 하타(河陀)의 뱃놀이에도 오히려 견디지 못할 듯싶다. 그런데 하물며 항미(杭眉)ㆍ전당(錢塘)의 뛰어난 경치와 명발(溟渤)의 광활한 곳을 어찌 논할 수 있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도 모르게 술잔을 기울이며 한 번 통곡하였다.

수선화(水仙花) 시에, “문 앞에서 웃음 짓는데 큰 강은 비껴 흐른다.[門前一笑大江橫]”라는 구절이 있는데, 지난날 상감께서 이 구절을 외우며 근시(近侍)에게 명하여 그것을 제목으로 삼아 시를 짓게 하였다. 나는, ‘화음(華陰) 사람이 수선화 여덟 섬을 먹고 신선이 되었다’는 말을 가지고 시구를 지었다. 황산곡(黃山谷)의 시에서는, “어느 때에나 특별히 자신전에 올라서, 궁중 매화와 더불어 차등을 정해 볼건가.[何時特上紫宸殿 包與宮梅定等差]”라고 읊었다. 그때 김유관(金游觀 김흥근(金興根))의 시에, “일생에 평소의 마음 가진 사람임을 알겠다[一生知是素心人]”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이 시구는 황산곡의 시와 서로 백중을 겨룰 만하다.

민(閩) 땅에는 홍말리(紅茉莉)가 있고, 촉(蜀) 땅에는 자수구(紫綉毬)가 있고, 초(楚)나라에는 홍리화(紅梨花)가 있고, 연(燕)나라에는 황석류(黃石榴)가 있고, 천태산(天台山)에는 황해당(黃海棠), 백해당(白海棠), 백계화(白桂花), 자계화(紫桂花), 벽계화(碧桂花), 백매괴(白玫瑰)가 있고, 낙양(洛陽)에는 황작약(黃芍藥)이 있고, 창주(昌州)에는 향해당(香海棠)이 있고, 나의 동산에는 연한 홍수구(紅綉毬), 황석류, 백해당이 있다.

옛말에, “책의 정오(正誤)를 바로잡을 때 의심스러운 것을 빼 놓는 사람은 평생 입으로 광언(誑言)을 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하였는데, 이것이 ‘의심스러운 것은 빼 놓는다[疑者闕之]’는 뜻이다. 의심스러운 것을 빼 놓는다면 그의 평생의 실천 공부를 알 수 있다. 나는 이것을 평생 배웠지만 잘 해내지 못한다.

양생가(養生家)가 괴강신(魁罡神)을 꺼려하는데, 그 실질을 나무라는 것은 그 나태함을 나무라는 것이다.
내가 잘 눕는 것은 기운이 나태하기 때문이고, 앉아서 잘 조는 것은 정신이 나태하기 때문이다. 글 읽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몸이 나태하기 때문이다. 장기나 바둑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성벽이 나태하기 때문이다.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은 운치에 대한 생각이 나태하기 때문이다. 산에 놀러가지 않는 것은 경치를 탐하는 생각이 나태하기 때문이다. 떨어진 꽃을 쓸지 않는 것은 봄철의 나태함 때문이고, 뜰에 난 풀을 제거하지 않는 것은 여름철의 나태함 때문이며, 향산(鄕山)에 살기를 좋아하는 것은 세상에 대한 나태함 때문이다.

금강산에 있는 승려가 나에게 정공장(丁公杖)이라는 지팡이를 보내왔기에 명(銘)하기를,
굳세게 할 수도 있고 부드럽게 할 수도 있으니 / 能剛能柔
늙은이들을 편안하게 해 주고 어린이들을 돌봐 주리로다 / 老少安懷
왼쪽으로 가든 오른쪽으로 가든 / 左之右之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로다 / 與爾必偕
하였다. 또 문궤(文几)를 보내왔기에 명하기를,
둥근 것은 양을 상징하니 / 圓象陽
등을 대고 의지하고 / 靠背而倚
모난 것은 음을 상징하니 / 方象陰
베개로 삼아 즐기노라 / 支枕而喜
덕은 벼슬에 맞지 않고 / 德未孚于爵
나이는 연치로 숭상할 나이가 아니니 / 年未尙于齒
저 문궤는 / 彼其之几
야인의 궤로다 / 野人之几
하였다. 중국 사람이 나에게 세면기를 보내왔기에 명하기를,
너의 낯을 씻으니 / 洗爾面
너의 때가 씻어진다 / 爾垢斯滌
사람들은 너를 보고 / 凡人視爾
너의 하얀 얼굴을 예뻐한다 / 憐爾白晢
그중에는 기필하지 못할 것도 있으니 / 其中未必
조석으로 경계할지어다 / 朝夕驚惕
하였다. 붓을 보내왔기에 또 명하기를,
입은 우호를 이룰 수도 전쟁을 부를 수도 있는데 / 惟口出好興戎
네게서 나와서 나에게 들어온다 / 出自爾入于吾
나는 이것을 믿으니 / 吾斯之信
군자의 관건이로다 / 君子之樞
하였다. 또 고경(古鏡)에 명하기를,
모든 곱고 미운 것이 / 凡厥媸姸
그 면상에서 도망가지 못한다 / 莫逃其面
소인은 곁으로 엿보고 / 宵人之窺
군자는 정면으로 보도다 / 君子之見
너의 형용에 따라서 / 隨爾形容
교사하고 정직함이 드러난다 / 巧正斯卞
여기에 높이 다니 / 高懸左玆
밝은 빛이 두루 비친다 / 晃朗周遍
동식물의 모든 형태는 살필 수 있으나 / 能察動植肖蠕
일편단심은 어떻게 비출 수 있겠는가 / 安能照丹心一片
하였다.

천지 사이에는 없는 것이 없으니, 견문과 생각으로써 추측해서는 안 된다. 일찍이 진계유(陳繼儒)의 《미공비급(眉公祕笈)》을 상고하였더니, 거기에 실려 있기를, “손설거(孫雪居)가 한양(漢陽) 수령으로 있을 때 어떤 산중 백성이 돌을 깎다가 그 속에 흰 거북이 있어서 바치므로 강물에 놓아주었다. 그리고 천보(天寶) 연간에 이응물(李應物)이 지주산(砥柱山)에 있는 돌을 쪼개다가 그 속에서 옛날의 보습을 얻었는데, 거기에 ‘평륙(平陸)’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으므로 이내 그 고을 이름을 평륙현(平陸縣)으로 고쳤다. 또한 당나라의 하후자(夏侯孜)는 정릉 산릉사(貞陵山陵使)로서 정릉에 쓰려고 단단한 돌을 파다가 돌 속에서 금비녀를 얻었다. 그 금비녀의 반 토막 남짓은 아직도 돌 속에 있다.” 하였다.
또 《동관여론(東觀餘論)》에 이르기를, “심양(潯陽)의 역병(役兵)이 돌 하나를 파니 그 돌 속에 비판(碑板)과 같은 돌 하나가 또 있었다. 살펴보니 바로 왕일소(王逸少 왕희지(王羲之))가 쓴 ‘어지럼증에 대한 처방문[頭眩方]’이었다.” 하였다. 황장예(黃長睿 황백사(黃伯思))가 이르기를, ‘매몰된 지 오래되면 흙이 더러 돌로 변한다.’ 하였으니, 이 각판(刻板)이 돌 속에 들어간 것은 의심할 것이 없다. 그것은 바로 호박(琥珀) 속의 의충(蟻蟲)이나 수정(水晶) 속의 도화편(桃花片 조개의 일종)과 같은 것이다. 남당(南唐) 때 왕문병(王文秉)이 쪼개진 돌에서 금잠(金蠶)을 얻고 송나라 때 두관(杜綰)이 떨어진 돌에서 고어(枯魚)를 얻은 것은 일종의 화기(化機)이다.

세 개의 벼루는 산재(山齋)의 큰 보물이었다. 그 가운데 용도연(龍圖硯)에 명(銘)하기를,
천지가 상을 나타내니 / 天地著象
용이 신도를 짊어졌다 / 龍負神圖
양은 둥글고 음은 모나니 / 陽圓陰方
진주를 얽어서 꾸밈을 하였다 / 珠綴絡紆
문방사우 중에서 으뜸가는데 / 四寶爲首
석묵으로 조화를 이룬다 / 石墨和濡
천자의 조서가 내리지 않더라도 / 不待丹詔
종신토록 함께하리라 / 終身輒俱
하였고, 천통연(天統硯)에 명하기를,
춘관이 음악을 맡으니 / 春官司樂
하늘이 통서(統緖)가 되었다 / 天乃爲統
영륜(伶倫)이 율려를 매달고 / 伶懸律呂
한나라의 매승(枚乘)은 아송의 소리를 숭상하였다 / 漢枚雅頌
넓히는 것이 덕이 되니 / 濶之爲德
조석으로 봉공한다 / 朝夕奉供
귀에 중용의 소리가 들리니 / 渢渢乎耳
대하와 대송 음악이로다 / 大夏大宋
하였고, 후조연(後凋硯)에 명하기를,
숭악에 뿌리박고 / 嵩嶽托根
해와 달과 별보다 뒤에 시든다 / 後三光凋
매서운 풍상 속에 / 烈烈風霜
우뚝 솟은 운표로다 / 落落韻標
옥 바탕의 순수한 푸름으로 / 玉質淳蒼
자주 조탁을 받으나 / 數鍼琢雕
참사에 더럽혀지지 않고 / 讒邪不汚
맑은 바람과 함께 하늘 높이 솟았노라 / 淸風雲霄
하였다.

옛사람이 이웃의 노인이 꽃을 즐기고 손자를 희롱하며 따뜻한 햇볕만 좋아했지 성문 안의 일 따위는 아예 알지 못하는 것을 보고, “노옹이 손자만 안고 독은 안지 않았는데, 마침 꽃밭에 물을 주려고 하자 비가 오는구나.[老翁抱孫不抱甕 恰欲灌花山雨來]”라는 시구를 지었다.
내가 사시향관 잡영(四時香館雜詠)에서 읊기를,
손길 가는 대로 짚은 노인의 지팡이 / 時來隨手老人笻
물 북쪽 밭 남쪽 도처에 만난다 / 水北田南到處逢
어린애 이끌고 바람 쐬며 들구경을 하니 / 携幼乘涼田水聽
늘어진 수양버들이 흩어진 머리를 스친다 / 垂垂楊柳掠髼鬆
하였고, 또 읊기를,
당자서(唐子西)의 시처럼 해는 소년같이 길고 / 日長如少子西詩
도연명의 귀거래사처럼 구름은 무심히 바위굴에서 나온다 / 雲出無心陶令辭
한 조각 한가한 마음이 구름과 함께 머무는데 / 一片野心雲與住
창 밖에 해 긴 것 무엇이 해 되겠는가 / 何妨窓外日遲遲
하였으며, 또 읊기를,
남쪽 들에 들밥 내오는데 개 또한 따르고 / 南畝饁筐犬亦隨
종종걸음 치는 건장한 부인 어린애를 안았네 / 踉蹡健婦抱孩兒
쑥대머리로 풀을 깔고 앉아 전구를 부르고 / 蓬頭藉草田謳作
더러는 호미를 베개 삼아 베고 밥때를 기다린다 / 或枕尖鋤待食時
하였고, 또 읊기를,
시골에 사는 재미를 그 누가 알겠는가 / 鄕居滋味有誰知
낙이 무궁하여 각각 철따라 다르다 / 樂在無窮各異時
춥고 덥고 다습고 시원한 것들 내 스스로 얻는데 / 寒暑燠涼吾自得
타인이 어찌 내 하는 일 물을 필요 있겠는가 / 他人何必問吾爲
하였는데, 옛사람들과 시의 뜻은 같으나 격은 같지 않다.

소동파의 말에, “서책을 교정하는 일은 먼지를 쓰는 것과 같다.”는 것이 있다. 나는 10년 동안 서책을 교정하였다. 무릇 초록(抄錄)을 함에 있어서 종으로, 횡으로, 거꾸로, 수직으로 두루두루 더듬어 보고 나서 목판에 새긴다. 목판에 새긴 뒤에는 또 더듬어 보고 더듬어 본 뒤에야 인쇄를 한다. 인쇄를 한 뒤에는 또 더듬어 본다. 이렇게 해도 필경에는 긴요한 곳에 오자나 낙자가 있다. 그 책을 찾는 일이 긴요하므로 눈은 반드시 서가 밑에 있게 되니, 이것은 조화 속의 다사(多事)한 것이다.

산중에는 특별한 음식이 없고 약초(藥草)에다 생선과 과일을 겸한다. 내가 사는 산에도 특별한 음식이 없다. 연잎으로 술을 빚고, 목두(木頭)로 나물을 뜯으며, 산약(山藥 마)과 채마밭의 아욱으로 순포(筍脯)를 대신하고, 못의 순채와 들 미나리에 생강과 계피를 탄다. 주자(朱子)의 이른바 ‘파로 끓인 국과 보리밥’이나 소동파(蘇東坡)의 ‘세 종류의 부추 반찬’ 역시 하나의 지락(至樂)인 것이다.

법첩(法帖)을 보면 그 정신이 배어 있는 곳만을 취할 뿐이지, 어찌 면목(面目)과 두발(頭髮) 가운데 어떤 것이 크고 어떤 것이 작고 어떤 것이 곱고 어떤 것이 추한지를 세세하게 평할 필요가 있겠는가. 책을 펼쳤을 때 먼저 그림자의 의미를 이해한 사람이어야만 더불어 말할 수 있다.

산중에서 사는 방법에는 네 가지가 있다. 과목(果木)은 반드시 네모나게 벌여서 심고, 연못은 반드시 빙 둘러서 파며, 거문고와 비파는 반드시 타넘지 말되, 마음만은 매어 놓지 않는 것이다.

백소부(白少傅)가 직접 지은 생묘지(生墓誌)에 이르기를, “밖으로는 유행(儒行)을 가지고 몸을 닦고 안으로는 석교(釋敎)를 가지고 마음을 맑게 하며, 곁으로는 도사(圖史)ㆍ산수(山水)ㆍ금주(琴酒)ㆍ영가(詠歌)를 가지고 뜻을 즐겁게 하였다.” 하였다.
나는 스스로 명(銘)하기를, “살아서는 성인을 만나고 죽어서는 성인을 따른다. 성인이란 이른바 ‘이 사람’인 것이다.” 하였다.

종려나무 털로 만든 신은 촉(蜀) 땅의 승려들 사이에서 나왔다. 오(吳)나라 사람은 그것을 만들 수 없다. 내가 순천(順天)의 송광사(松廣寺)에서 그 신을 보았는데, 그 만듦새가 몹시 예스러웠으니 바로 촉 땅의 물건인 것 같았다.

안동(安東) 강 세마(姜洗馬)의 집에 《가사방위서(家舍方位書)》가 있다. 그 책에 따라서 몇 년마다 한 번씩 방향을 고쳐서 사는데, 자손이 아직도 끊임없이 이어 간다. 나도 연경 저자에서 한 권을 구하여 그 설을 대략 알게 되었지만, 만일 그대로 따라서 행한다고 하면 파옹(坡翁 소동파)의 택승정(擇勝亭)이 아니고서는 사용할 수가 없을 것이다.

나는 기질이 약한데도 인삼을 먹을 수 없기 때문에 매번 기운이 빠지고 피로할 때면 보할 약제가 없었다. 그러자 홍기당(洪祁堂 홍순목(洪淳穆))이 나에게, “먼저 작은 것을 먹고 뒤에 큰 것을 먹어 보오.”라고 하면서, 인삼 약제를 복용하도록 권하였다. 그리하여 10년 동안 공을 들여서 지금은 약을 복용하는 사람이 되었으니, 기당은 선각자라고 할 만하다.

사람이 세상에 생존하자면 밥으로 하늘을 삼으니, 술이나 담배나 차는 주식 밖의 것이다. 명말 청초에는 담배와 차를 금하였는데, 지금은 상하가 통용하고 노소의 구별이 없다. 호인(胡人)은 담배를 ‘담파고(痰破姑)’라고 한다. 담배를 피우기에는 잠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식사를 마쳤을 때, 시름에 잠겼을 때, 무료할 때, 냄새날 때, 사색할 때, 비 올 때, 오락할 때 가장 알맞으니, 이것이 담배의 여덟 가지 맛이다.

연(蓮)을 심는 데는 염소똥이 알맞고, 대[竹]와 사계화(四季花)를 심는 데는 말똥이 알맞고, 모란을 심는 데는 백출(白朮)이 알맞고, 석류를 심는 데는 월수(月水)가 알맞고, 내금(來禽)과 사과(樝果)를 심는 데는 사람 오줌이 알맞다.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이 내가 사는 데서 10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한다. 이름이 계산촌(鷄山村)인데, 앞에는 계양리(鷄養里)가 있고, 또 계시촌(鷄塒村)ㆍ계량촌(鷄糧村) 등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진혈(眞穴)을 찾지 못한다.

송구봉(宋龜峯 송익필(宋翼弼))은 내가 사는 데서 5리 떨어진 장천리(長川里)에서 태어났다 하고, 야사에는 송사련(宋祀連)이 배천(白川)에 살았다고 하였는데, 장천과 배천 그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이의신(李懿信)은 유명한 지사(地師)였는데, 내가 사는 데서 10여 리 떨어진 야목리(冶木里)에서 살았다. 처음에 용인 이씨(龍仁李氏)가 그를 속여서 본래 정해 놓은 명당을 얻었다. 이것으로 보면 아무리 유명한 지사라 하더라도 산천의 명당만은 원래 정해진 임자에게 돌아가므로 스스로 주인을 정할 수 없는 것이다.

한사리(寒沙里)는 가오리(嘉梧里)에서 7리 남짓 떨어진 곳에 있다. 예전부터 그 마을에 명당이 있다는 말이 전하는데, 중고(中古)에 한 종실의 걸출한 사람을 그 명당에 장사 지냈다. 뒤에 그 자손이 그 명당을 팔려고 상서(尙書) 이기연(李紀淵)에게 물으니, “조상을 위하는 도리는 먼저 신명(神明)에게 죄를 얻어서는 안 된다.” 하고 공은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그러자 그 자손은 다시 홍씨(洪氏)에게 팔고 그 묘를 옮겼는데 관곽(棺槨)과 의금(衣衾)이 꼭 어제의 것처럼 선명하고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300년 된 것이 이와 같았으니 땅속의 일은 헤아리기 어렵다.

뻐꾸기는 밭갈이를 재촉하고, 매미는 호미질을 재촉하고, 갈가마귀는 풍년을 말해 주고, 나는 솔개는 비를 부르고, 비오리는 가을을 알린다 하니, 이것은 모두 농가(農家)의 말이다.

향촌(鄕村)에는 매양 날씨가 흐릴지 맑을지를 미리 알아볼 수 있는 곳이 있다. 나의 고향에서는 천마산(天摩山)을 가지고 알아본다. 일찍이 《박물지(博物志)》를 보았더니, “아침에 비둘기가 울면 석양에 반드시 바람이 불고, 석양에 비둘기가 울면 그 이튿날 아침에 반드시 비가 온다.” 하였는데, 이것은 과연 산중의 천문(天文)이다.

진천(鎭川)에 사는 김씨(金氏) 성을 가진 어떤 사람의 집에 전해 내려오는 도실배(桃實杯)는 크기가 표주박만 한데, 소동파의 시가 새겨져 있다. 그 선대에서 봉명사신(奉命使臣)으로 송나라에 들어갔을 때 소동파가 기증한 것이라 하는데, 《동파집》을 상고하매 또한 시어(詩語)와 그 연보(年譜)가 있으니, 전혀 그른 말이라고 할 수는 없다.

《지봉집(芝峯集)》에 이르기를,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가 일찍이 교주(交州)에 시를 남겨서 판(板)에 새겨 걸었다. 을사년 홍수 때 그 시판이 물에 떠내려가 없어졌는데, 결국 강도(江都) 700리 밖에서 입수하여 시골 사람의 땔나무감이 되는 것을 면하고 다시 공의 손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공이 그 시에 대해 서문을 썼고, 회양 부사(淮陽府使) 장군(張君)은 그 시판을 벽에 걸었다.” 하였다. 월사의 시에서 읊기를,
산은 둘러 있고 중첩된 관문은 험한데 / 山擁重關險
강은 굽이치고 두 영은 길다 / 江蟠二嶺長
풍운은 선굴을 보호하고 / 風雲護仙窟
일월은 부상에 가깝다 / 日月近扶桑
가을엔 은어회가 잘게 요리되고 / 秋膾銀鱗細
봄엔 잣잎술이 향기롭게 빚어진다 / 春醪栢葉香
임기가 끝날 때 대신으로 써 준다면 / 瓜時倘許代
나는 회양 땅을 소중히 여기리 / 吾不薄淮陽
하였다. 지봉은 그 참변을 목격하였다 한다. 나도 회양을 지날 때 이 시를 보고 베꼈다. 교주는 회양의 별칭이다.

《약천집(藥泉集)》에 정동명(鄭東溟 정두경(鄭斗卿))의 살계(殺鷄) 시가 있다. 동명이 북평사(北評事)로 있을 때 밤중에 퇴고(推敲)를 하는데 아직 다 정리하지 못했을 때 닭 울음소리가 들려 그 닭을 잡아다가, “내가 시를 아직 이루지 못하였는데 네가 감히 먼저 울다니”라고 나무라고 즉시 베어 죽였는데, 이 일이 고담(古談)으로 전해진다. 남약천(南藥泉 남구만(南九萬))의 시에,
밤중에 먼저 울자 일어나서 춤을 춘 자가 있었는데 / 半夜先鳴曾起舞
새벽 맡아 한 번 울다가 도리어 봉변을 당하였네 / 司晨一唱反逢嗔
글 잘짓는 사람이 이때부터 생각이 막혔으니 / 長卿自是多淹思
잘못 창 앞의 붉은 볏의 닭을 죽였구나 / 枉殺牕前絳幘人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별호(別號)가 중첩으로 나오는 경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서계(西溪) 양홍주(梁弘澍), 정세호(鄭世虎), 남주(南趎), 박세당(朴世堂), 김담수(金聃壽), 이덕윤(李德胤).
졸암(拙菴) 이충작(李忠綽), 이직언(李直彦).
동계(桐溪) 정온(鄭蘊), 이흘(李屹), 권달수(權達手).
송암(松菴) 권항(權伉), 권징(權徵), 유관(柳灌).
송당(松堂) 조준(趙浚), 권맹손(權孟孫), 박영(朴英), 김광재(金光載).
노봉(老峯) 김극기(金克己), 민정중(閔鼎重).
풍암(楓巖) 권식(權寔), 임복(林復), 문위세(文緯世).
초려(草廬) 고려조(高麗朝)의 김진양(金震陽), 조선조(朝鮮朝)의 이유태(李惟泰).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 주박(周博), 남계하(南啓夏), 김수일(金守一), 권덕린(權德麟), 신명인(申命仁).
쌍백당(雙栢堂) 최기(崔沂), 홍중주(洪重疇), 이세화(李世華), 홍순각(洪純慤).
동명(東溟) 황윤중(黃允中), 최기백(崔基銆), 정두경(鄭斗卿), 김세렴(金世濂).
동강(東岡) 조상우(趙相愚), 최후상(崔後相), 김첨경(金添慶), 김우옹(金宇顒), 허요(許窰).
회곡(晦谷) 신유(申愈), 조한영(曺漢英), 남선(南銑), 조광좌(趙光佐).
송정(松亭) 신명화(申命華), 김수(金洙).
묵재(默齋) 김관(金瓘), 김홍익(金弘翼), 홍언필(洪彦弼), 최유해(崔有海), 이심원(李深源), 심안세(沈安世).
송강(松江) 조징(趙澄), 정철(鄭澈), 조사수(趙士秀).
현주(玄洲) 조찬한(趙纘漢), 이명한(李明漢).
성재(誠齋) 권고(權皐), 민이승(閔以升), 유탁(柳濯), 박은(朴誾), 오억령(吳億齡).
만취당(晩翠堂) 김맹권(金孟權), 권율(權慄), 김위(金偉).
잠곡(潛谷) 김의정(金義貞), 김육(金堉).
옥봉(玉峯) 이원(李媛), 백광훈(白光勳).
서하(西河) 고려조의 임춘(林椿), 조선조의 이민서(李敏敍).
행촌(杏村) 고려조의 이암(李喦), 조선조의 민순(閔純).
저촌(樗村) 심육(沈錥), 이정섭(李廷燮).
쌍계(雙溪) 송응상(宋應祥), 이복원(李福源), 김뉴(金紐).
운곡(雲谷) 송한필(宋翰弼), 이광좌(李光佐), 이택(李澤), 최계훈(崔繼勳), 최수(崔授), 남노성(南老星).
사우당(四友堂) 송국택(宋國澤), 한명회(韓明澮).
석탄(石灘) 고려조의 이양중(李養中)과 이존오(李存吾), 조선조의 한효중(韓孝仲)과 이신의(李愼儀).
간이(簡易) 한숙(韓淑), 최립(崔岦).
현석(玄石) 한인급(韓仁及), 박세채(朴世采).
석봉(石峯) 한수(韓脩), 한호(韓濩).
퇴우당(退憂堂) 김수흥(金壽興), 박승종(朴承宗).
백석(白石) 남탁(南晫), 허직(許稷), 박태유(朴泰維).
규봉(圭峯) 심연(沈演), 심봉의(沈鳳儀).
양촌(陽村) 고려조의 권근(權近), 조선조의 정재희(鄭載禧)와 이겸지(李謙之).
눌재(訥齋) 박증영(朴增榮), 이태연(李泰淵), 이예(李芮), 이충건(李忠楗), 양성지(梁誠之), 박상(朴祥), 김찬(金瓚).
봉암(鳳巖) 한홍조(韓弘祚), 한몽린(韓夢麟).
도곡(陶谷) 한술(韓述), 이필중(李必重), 이양원(李養源).
약봉(藥峯) 이탁(李鐸), 심단(沈檀), 서성(徐渻), 김극일(金克一).
보만재(保晩齋) 한명상(韓命相), 이육(李堉), 서명응(徐命膺).
동고(東皐) 강신(姜紳), 김노(金魯), 이명(李蓂), 이준경(李浚慶), 성준득(成準得), 이수록(李綏祿), 박이서(朴彝敍).
성암(省菴) 박필전(朴弼傳), 송준(宋駿), 김효원(金孝元), 성호(成浩), 조명국(趙鳴國), 이지번(李之蕃).
송파(松坡) 조휘(趙徽), 이덕민(李德敏), 남응침(南應琛), 남세주(南世周), 서문상(徐文尙), 최성지(崔誠之), 이해창(李海昌).
둔촌(遁村) 고려조의 이집(李集), 조선조의 조문형(趙文衡).
약천(藥泉) 조계원(趙啓遠), 남구만(南九萬).
치암(恥菴) 고려조의 박충좌(朴忠佐), 조선조의 송질(宋鑕), 구사민(具思閔), 한세양(韓世讓), 이지렴(李之濂).
농암(聾巖) 심지명(沈之溟), 이현보(李賢輔).
만사(晩沙) 심우승(沈友勝), 서경우(徐景雨), 심지원(沈之源).
일재(一齋) 민회현(閔懷賢), 권한공(權漢功), 이항(李恒).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성담중(成聃仲).
사암(思菴) 박순(朴淳), 성세장(成世章).
추담(秋潭) 성만징(成晩徵), 오달제(吳達濟), 김우급(金友伋).
어은(漁隱) 오국헌(吳國獻), 민제(閔霽), 허회(許淮).
설정(雪汀) 이흘(李忔), 조문수(曺文秀).
설봉(雪峯) 박찬(朴燦), 강백년(姜栢年), 허홍(許烘), 윤수(尹燧).
죽계(竹溪) 안순(安純), 문관(文瓘), 최경장(崔慶長).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 안처순(安處順).
약포(藥圃) 이희수(李喜壽), 안숙(安璹).
초당(草堂) 강경서(姜景敍), 구면(具), 허엽(許曄).
양파(陽坡) 홍언박(洪彦博), 정태화(鄭太和).
고은(皐隱) 안지(安止), 이규보(李圭輔).
석문(石門) 이경직(李景稷), 임규(任奎), 오이익(吳以翼), 윤봉오(尹鳳五).
동리(東里) 윤옥(尹玉), 정세규(鄭世規).
화곡(華谷) 정종명(鄭宗溟), 이경억(李慶億).
구천(龜川) 어효첨(魚孝瞻), 이세필(李世弼).
백곡(栢谷) 정곤수(鄭崑壽), 김득신(金得臣).
몽와(夢窩) 김창집(金昌集), 유희령(柳希齡), 최철견(崔鐵堅).
모당(慕堂) 홍이상(洪履祥), 손처눌(孫處訥).
매계(梅溪) 목서흠(睦敍欽), 문근(文瑾).
율곡(栗谷) 이이(李珥), 조명욱(曺明勗).
옥산(玉山) 이우(李瑀), 이석(李晳).
남곡(南谷) 이후(李垕), 조정서(趙正緖).
창해(滄海) 이사호(李士浩), 허격(許格).



기내(畿內 경기)의 행정구역 중 옛날의 보정부(保定府)는 지금의 고양(高陽)이고, 하간부(河間府)는 교하(交河)이고, 장평부(長平府)는 양성(陽城)이고, 용릉부(舂陵府)는 남양(南陽)이고, 광릉부(廣陵府)는 양주(楊州)이고, 서안부(西安府)는 부평(富平)이고, 영주부(永州府)는 강화(江華)이고, 청성부(淸城府)는 광주(廣州)이고, 남웅부(南雄府)는 시흥(始興)이고, 영창부(永昌府)는 영평(永平)이고, 운양부(鄖陽府)는 죽산(竹山)이다.
충청도의 행정구역 중 옛날의 순천부(順天府)는 지금의 대흥(大興)이고, 진강부(鎭江府)는 단양(丹陽)이고, 지주부(池州府)는 청양(靑陽)이고, 하중부(河中府)는 직산(稷山)이고, 운중부(雲中府)는 회인(懷仁)이고, 소흥부(紹興府)는 신창(新昌)이고, 공주부(贛州府)는 석성(石城)이고, 광주부(廣州府)는 연산(連山)이고, 중경부(重慶府)는 충주(忠州)이고, 천주부(泉州府)는 영춘(永春)이다.
전라도의 행정구역 중 옛날의 순천부(順天府)는 지금의 창평(昌平)이고, 청주부(靑州府)는 낙안(樂安)이고, 여남부(汝南府)는 광주(光州)이고, 서안부(西安府)는 진안(鎭安)이고, 연평부(延平府)는 남평(南平)이고, 염주부(廉州府)는 영산(靈山)이고, 계림부(桂林府)는 전주(全州)이고, 동평부(東平府)는 제주(濟州)이고, 호주부(湖州府)는 장흥(長興)이다.
경상도의 행정구역 중 옛날의 진정부(眞定府)는 지금의 진주(晉州)이고, 광평부(廣平府)는 청하(淸河)이고, 회안부(淮安府)는 안동(安東)이고, 서안부(西安府)는 함양(咸陽)이고, 사명부(四明府)는 봉화(奉化)이고, 남강부(南康府)는 안의(安義)이고, 남평부(南平府)는 영천(永川)이고, 운안부(雲安府)는 양산(陽山)이고, 광주부(廣州府)는 남해(南海)이고, 광주부(廣州府)는 신녕(新寧)이고, 하원부(河源府)는 하양(河陽)이고, 태주부(泰州府)는 영해(寧海)이고, 운남부(雲南府)는 곤양(昆陽)이고, 합서부(陜西府)는 예천(醴泉)이고, 기주부(夔州府)는 양산(梁山)이다.
강원도의 행정구역 중 옛날의 산남부(山南府)는 지금의 양양(襄陽)이고, 형남부(荊南府)는 강릉(江陵)이고, 곡성부(穀城府)는 횡성(橫城)이다.
황해도의 행정구역 중 옛날의 진정부(眞定府)는 지금의 평산(平山)이고, 상주부(常州府)는 강음(江陰)이고, 엄주부(嚴州府)는 수안(遂安)이고, 회남부(淮南府)는 해주(海州)이고, 동주부(潼州府)는 안악(安岳)이다.
평안도의 행정구역 중 옛날의 보정부(保定府)는 지금의 안주(安州)이고, 진정부(眞定府)는 정주(定州)이고, 운중부(雲中府)는 삭주(朔州)이고, 천수부(天水府)는 영원(寧遠)이고, 임조부(臨洮府)는 위원(渭原)이고, 혜주부(惠州府)는 용천(龍川)이고, 요동진(遼東鎭)은 의주(義州)이고, 대동진(大同鎭)은 철산(鐵山)이고, 동천부(潼川府)는 창성(昌城)이다.
함경도의 행정구역 중 옛날의 하중부(河中府)는 지금의 길주(吉州)이고, 서안부(西安府)는 삼수(三水)이고, 천수부(天水府)는 회령(會寧)이고, 침주부(郴州府)는 영흥(永興)이고, 광신부(廣信府)는 영풍(永豐)이다.

우리나라 선현들의 문집은 많이 읽지 못하였다. 그 가운데 기송(記誦)한 것은 전편(全篇)이거나 혹은 한두 구이지만, 비록 편언(片言)이라도 생각나는 대로 아래에 기록한다.
안회헌(安晦軒 안향(安珦))의 학교(學校) 시에,
향 피우고 등불 밝혀 곳곳에서 불공들 드리는가 하면 / 香燈處處皆祈佛
퉁소 불고 장고 치며 집집마다 굿들을 하는구나 / 簫管家家盡祀神
오직 몇 칸의 공자 사당만은 / 獨有數間夫子廟
뜰에 풀만 수북하고 사람 하나 없이 쓸쓸하네 / 滿庭春草寂無人
하였으니, 사문(斯文)에 공이 있는 말씀이다.
이익재(李益齋 이제현(李齊賢))의 보덕굴(普德窟) 시에,
음산한 바람은 산골짜기에서 일고 / 陰風生巖谷
시냇물은 깊고도 푸르구나 / 溪水深更綠
지팡이를 짚고 절벽을 바라보니 / 倚杖望層巓
높은 처마 구름 위에 떠 있구나 / 飛簷駕雲木
하였는데, 선생이 말하기를, “이 말은 지어서 된 것이 아니다.” 하였다 한다.
정포은(鄭圃隱 정몽주(鄭夢周))의 출새(出塞) 시에,
말고삐 나란히 잡고 멀리 군사를 따라가다가 / 聯鞍千里遠從軍
함주에 이르러서 또 그대를 보내려 하노라 / 欲到咸州又送君
정말 너무도 슬퍼 남아의 창자 끊어질 지경이니 / 政是男兒腸斷處
가을바람에 나는 화각 소리 차마 듣지 못하겠다 / 秋風畫角不堪聞
하였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일어나서 춤을 추게 하는 기상이 담겨 있다.
이목은(李牧隱 이색(李穡))의 익재선생명(益齋先生銘)에, “북두 태산(北斗泰山)처럼 높은 문장은 창려(昌黎)의 한퇴지(韓退之 한유(韓愈))와 같고, 광풍 제월(光風霽月)처럼 맑은 마음은 용릉(舂陵)의 주무숙(周茂叔 주돈이(周敦頤))과 같다.” 하였으니, 천만 근의 힘이 실려 있다.
김점필재(金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옥금(玉金)이 밤에 소금(小笒)을 불다’라는 시에,
가냘픈 피리 소리 녹음 속의 마을에서 나는데 / 嫋嫋聲穿綠暗村
시내 위에 뜬 초승달 주렴을 환하게 비추누나 / 半鉤溪月滿簾痕
그대는 처량하고 구슬픈 곡조를 타지 말게나 / 憑君莫弄淸商調
매화가 고원에 떨어질까 두렵소이다 / 恐有梅花落故園
하였으니, 그 강개한 뜻이 사람을 눈물짓게 한다.
김하서(金河西 김인후(金麟厚))가 다섯 살 때 지은 ‘대보름날 밤’이라는 시에,
높고 낮음은 땅의 형세에 따라 생기고 / 高低隨地勢
이르고 늦음은 자연 현상에서 이루어진다 / 早晩自天時
남의 말을 어찌 다 근심할 수 있겠는가 / 人言何足恤
밝은 달은 본래 사정이 없는 것이다 / 明月本無私
하였으니, 만고의 공언(公言)이다.
소양곡(蘇陽谷 소세양(蘇世讓))의 ‘패강(浿江)에 배를 띄우고’라는 시에,
강물은 깊고 아득하여 거울처럼 평평한데 / 江水沈沈鏡面平
미세한 바람 지는 해에 비단 물결 이는구나 / 細風斜日縠紋生
작은 배로 노를 저어 중류에 내려가니 / 扁舟蕩槳中流去
어느 곳에서 피리 소리가 들려오느냐 / 何處一聲羌笛橫
하였으니, 진루(塵累)가 없는 시이다.
신기재(申企齋 신광한(申光漢))의 야행(夜行) 시에,
길은 어두운데 산 위에 달이 없고 / 路黑山無月
마을은 희미한데 밤에 등불이 있구나 / 村迷夜有燈
사립문 안에선 봄꿈에 빠졌을 텐데 / 柴衡春夢熟
사립문 두드리려 하나 누가 응하겠는가 / 欲扣定誰應
하였으니, 어두운 길을 더듬어 가도 스스로 그 길이 있는 것이다.
이퇴계(李退溪)의 계당 우흥(溪堂偶興) 시에,
온종일 구름은 비를 머금고 / 盡日雲含雨
이슥토록 새들은 봄을 부른다 / 移時鳥喚春
산촌이라 범과 자주 마주치고 / 山村頗狎虎
시냇길엔 만나는 사람이 적네 / 溪路少逢人
하였으니, 한 세상을 훈계한 뜻이어서 나도 모르게 경의를 표하게 된다.
이율곡(李栗谷)의 ‘우연히 짓다[偶成]’라는 시에,
취미를 얻으니 걱정이 절로 잊혀지는데 / 得趣自忘憂
시를 읊으매 시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 吟詩不成句
꿈속에서 고향에 잠깐 돌아갔는데 / 鄕關夢乍回
나뭇잎이 가을 비에 떨어지누나 / 木落秋江雨
하였으니, 신선이 될 생각이 있다.
정한강(鄭寒崗 정구(鄭逑))의 ‘야산(倻山)을 바라보며’라는 시에,
전체의 면목은 다 내놓지 않고 / 未出全身面
일각의 기이함만 조금 드러냈네 / 微呈一角奇
비로소 조화의 뜻을 알겠노니 / 方知造化意
천기를 드러내지 않으려 함이다 / 不欲露天機
하였는데, 흰 구름이 가로 끼었으니 일각만 약간 드러난 것이다.
노소재(盧蘇齋 노수신(盧守愼))의 ‘종이를 보내 준 데 사례하며 원 상인(元上人)에게 주다’라는 시에,
천하에서 제일 흰 종이 한 묶음을 / 一束剡藤天下白
산승이 가져다 주면서 인정을 베푸네 / 山僧持贈作人情
근래에 글 쓰는 힘이 모두 쇠약해졌으나 / 邇來文力都衰颯
아직도 도중에 일기 쓰는 일은 하려 한다네 / 猶擬途中記雨晴
하였는데, 마치 노인의 시구를 듣는 것 같다.
권석주(權石洲 권필(權韠))의 취음(醉吟) 시에,
예리한 석 자의 태아검을 차고 / 三尺太阿劍
백년토록 양보음을 읊으리라 / 百年梁甫吟
벼슬을 하자니 백안시하는 사람 많고 / 逢迎多白眼
유세를 하자니 황금이 적구나 / 遊說少黃金
풍진의 모든 일에 한 번 눈물을 훔치는데 / 風塵萬事一揮淚
남아의 이 마음을 그 누가 알아주리 / 誰知男兒方寸心
하였는데, 마치 이광전(李廣傳)을 읽는 것 같다.
유서애(柳西厓 유성룡(柳成龍))의 강상낙화(江上落花) 시에,
매번 꽃이 필 무렵에 꽃을 보지 못했는데 / 每到花時不見花
올해도 신병이 지난해처럼 많구나 / 今年病似去年多
매화꽃 다 떨어지고 복사꽃 늦게 피었는데 / 梅花落盡桃花晩
비바람은 무정하게 좋은 세월 보내는구나 / 風雨無情送歲華
하였으니, 몸과 마음을 바쳐 나랏일을 돌보는 뜻이 담겨 있다.
윤오음(尹梧陰 윤두수(尹斗壽))의 삼일포(三日浦) 시에,
삼일포 가운데 작은 배 띄워 선유하니 / 三日湖中泛小舟
한 구역 아름다운 경치 물과 구름이 한가롭다 / 一區形勝水雲悠
적다 보니 옛날 놀던 곳 다시 기억나는데 / 書來重憶曾遊處
서른여섯 봉우리의 무한한 가을빛이네 / 三十六峯無限秋
하였으니, 바람을 타고 허공을 날아가되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는 기상이다.
성우계(成牛溪 성혼(成渾))의 ‘아이의 시권에 쓰다[題兒子詩卷]’라는 시에,
너의 나이 열두 살인데 / 汝年十二歲
새로운 시구를 좋아하니 / 能好新詩句
오히려 도연명(陶淵明)의 아들이 / 猶勝陶家兒
늘 배나 밤을 찾는 것보다는 낫다 / 梨栗長在口
하였으니, 종일 단정히 앉은 채 춘풍화기(春風和氣)를 띤 기상이다.
이한음(李漢陰 이덕형(李德馨))의 신안제(新安題) 시에,
일은 풍운과 함께 변하고 / 事與風雲變
강은 세월과 같이 흐른다 / 江同歲月流
고금 영웅들의 뜻은 / 英雄今古意
모두 한 빈 배와 같다 / 都付一虛舟
하였으니, 동정호(洞庭湖)의 추월(秋月)을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기상이다.
이지봉(李芝峯 이수광(李睟光))의 ‘중양절에 빗줄기를 대하여’라는 시에,
뜰에 가득한 비바람은 서늘한 가을을 보내는데 / 滿庭風雨送秋涼
병 앓는 이 늙은 몸 좋은 날 만나니 눈물 줄줄 흐른다 / 病裏逢辰老淚長
도연명(陶淵明)에 비한다면 가난이 더 심하니 / 若比淵明貧更甚
꽃도 없고 술도 없이 중양절을 지내노라 / 無花無酒過重陽
하였으니, 옛날 문사(文士)의 본색이다.
이월사(李月沙 이정귀(李廷龜))의 요야(遼野) 시에,
먼 산은 지워진 듯 나무는 떠 있는 듯 / 遠山如抹樹如浮
넓은 건곤을 한눈에 다 볼 수 있구나 / 納納乾坤盡一眸
흡사 동정호에 가을 물 가득하여 / 怳似洞庭秋水滿
가벼운 배 밝은 달밤 중류에 떠 있는 듯 / 輕舟明月泛中流
하였으니, 요동벌 700리에 사람은 콩알만 하게 보이고 말은 개미만 하게 보여 그 끝을 분변하지 못하는 모양을 잘 나타냈다.
신상촌(申象村 신흠(申欽))의 춘주탄(春州灘) 시에,
춘주의 사십탄은 / 春州四十灘
여울마다 물결이 서 있는 것 같다 / 灘灘浪似立
돛대가 꺾이지 않도록 조심해야지 / 愼莫摧帆檣
북풍이 밤에 세차게 불어온다 / 北風夜來急
하였으니, 나라를 걱정하는 뜻이 아련히 표리에 보인다.
최간이(崔簡易 최립(崔岦))의 괴석(怪石) 시에,
창 사이에 이 한 마리가 달려 있는데 / 窓間一蝨懸
주목하고 보니 수레바퀴처럼 크다 / 目定車輪大
내가 이 괴석을 얻은 뒤로는 / 自我得此石
꽃피는 산을 향해 앉지 않노라 / 不向花山坐
하였는데, 못을 자른 듯 쇠를 꺾은 듯 흉험(凶險)하여 무서운 생각이 든다.
이오리(李梧里 이원익(李元翼))의 무제(無題) 시에,
오열하는 듯 흐르는 청평의 물은 / 嗚咽淸平水
동쪽으로 흘러서 한강에 들어간다 / 東流入漢津
두견새는 밝은 달밤에 울어 / 鵑啼明月夜
외로운 이 신하를 슬프게 하는구나 / 血泣一孤臣
하였는데, 정말 공의 평생 심사를 쏟아 놓은 시이다.
이동악(李東岳 이안눌(李安訥))의 ‘집에서 보내온 편지를 받고’라는 시에,
변방에서 종군하느라 오래도록 돌아가지 못하고 / 絶塞從軍久未還
고향 서신 왔어도 제때에 보지 못하고 해를 넘긴다 / 鄕書雖到隔年看
집사람은 남편이 파리해진 것을 알지 못하고 / 家人不解征人瘦
겨울옷을 예전처럼 크게 만들었구나 / 裁出寒衣抵舊寬
하였는데, 절반도 채 다 못 읽어서 백발이 성성해지는 느낌을 준다.
장여헌(張旅軒 장현광(張顯光))의 ‘금오(金烏)에 들러’라는 시에,
대나무는 지난날의 푸름을 지니고 있고 / 竹有當年碧
산은 옛날처럼 높구나 / 山依昔日高
청풍이 오히려 머리털을 쭈뼛하게 하는데 / 淸風猶竪髮
고인이 멀어졌다고 누가 말하겠는가 / 誰謂古人遙
하였으니, 회오리바람을 타고 9만 리를 올라가는 기상이 담겨 있다.
정동명(鄭東溟 정두경(鄭斗卿))의 ‘산인(山人)이 시를 권하다’라는 시에,
산속에 사는 사람이 좋은 술을 권하니 / 山人勸美酒
취한 뒤에 긴 노래가 나온다 / 醉後長歌發
산속의 살림살이 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 / 莫道山家貧
소나무 사이에 밝은 달이 있다 / 松間有明月
하였으니, 왕마힐(王摩詰)이 이따금 눈 속에 파초를 그린 것과 같은 격의 시이다.
최지천(崔遲川 최명길(崔鳴吉))의 야좌(夜坐) 시에,
칼날 같은 추위 이불에서 생기고 밤은 긴데 / 鎌稜生被夜漫漫
벽을 비치는 등잔불 교묘하게 추위를 견디네 / 照壁燈花巧耐寒
존엄한 도성이 지척에 있음을 알겠는데 / 咫尺嚴城知不隔
궁중의 종소리 달빛과 어울려 구름 끝에 떨어진다 / 禁鍾和月落雲端
하였으니, 경루(瓊樓), 옥우(玉宇)의 높은 곳에서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있다.
이택당(李澤堂 이식(李植))의 촌거즉사(村居卽事) 시에,
나뭇잎 떨어지고 가을은 저물어 가는데 / 木落三秋盡
바람 불어 뭇 골짝은 소리 내어 운다 / 風饕衆竅鳴
호수 고기는 축일에 오르고 / 湖魚丑日上
들술은 묘시에 기울인다 / 野酒卯時傾
발자취 멀리하니 세상에 구하는 일 없고 / 迹遠無求世
마음 간직하니 명예에 연연하지 않는다 / 心存不役名
산재가 기거하는 곳이니 / 山齋睡起處
이불 덮어쓰고 솔바람 소리를 듣는다 / 擁被聽松聲
하였으니, 위 마룻대며 아래 추녀 끝을 훌륭한 목수가 잘 다듬어 놓은 격이다.
조용주(趙龍洲 조경(趙絅))의 ‘형강을 건너다[渡荊江]’라는 시에,
걸어서 형강의 물 머리에 이르니 / 行到荊江江水頭
흰 갈매기 헤엄치는 물결 밖에 외로운 배 있다 / 白鷗波外有孤舟
어부가 나에게 창랑의 재미를 말해 주는데 / 漁翁說我滄浪趣
인간의 만호후보다 단연코 낫다 한다 / 絶勝人間萬戶侯
하였으니, 천하의 분경(奔競)하는 사람을 깨우칠 만하다.
장계곡(張谿谷 장유(張維))의 절구(絶句)에,
기러기는 석양에 먼 공중을 지나가고 / 鴈度遙空晩
조수는 먼 물가 바람에서 생긴다 / 潮生極浦風
어촌에는 가난한 집이 많은데 / 漁村多白屋
석양 속에 절반으로 보인다 / 一半夕陽中
하였으니, 무한한 그림의 뜻이 멀고 가까운 곳에 출몰하고 있다.
이백강(李白江 이경여(李敬輿))의 용계(龍溪) 시에,
용계의 물은 졸졸 흐르는데 / 嗚咽龍溪水
산문에서 손님을 전송하니 때는 가을이로다 / 山門送客秋
서풍 속에 나그네는 시름에 겨워 / 西風游子恨
공연히 석양빛 비치는 다락에 기대네 / 空倚夕陽樓
하였으니, 졸졸 흐르는 용계의 물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그 누가 석양의 한을 씻을 수 있겠는가.
김청음(金淸陰 김상헌(金尙憲))의 ‘길 옆의 무덤’이라는 시에,
길 곁의 한 고총 쓸쓸하게 있는데 / 路傍一古塚
그 자손 지금 어느 곳에 살고 있는가 / 子孫今何處
오직 한 쌍의 석인만이 있어 / 惟有雙石人
길이길이 지키고 떠나가지 않는다 / 長年守不去
하였으니, 선생의 덕풍(德風)은 산처럼 높고 물처럼 길다.
이서하(李西河 이민서(李敏敍))의 ‘시냇가에서 한가히 읊조리다’라는 시에,
비바람 치듯이 물소리는 격렬하고 / 水聲激激疑風雨
대낮도 분변 못하게 아지랑이 짙게 끼었다 / 山靄盈盈晝不分
진종일 쓸쓸하게 한 가지 일도 없어서 / 盡日蕭然無一事
꽃 심고 채소 심으며 조석을 보내노라 / 栽花種菜度朝昏
하였으니, 표범이 남산(南山)에 숨어 있어서 아욱도 캐지 못하겠다.
유시남(兪市南 유계(兪棨))의 산천재(山泉齋) 시에,
성스럽고 어리석음은 출발점에서 갈리고 / 聖蒙由發軔
사람과 귀신은 앞길에서 판단된다 / 人鬼判前關
맑고 탁한 도랑물들은 / 淸濁溝渠水
원류가 다같이 산에서 나왔다 / 源流幷出山
하였으니, 문장과 도학은 본래 거리가 멀지 않은 것이다.
이정관재(李靜觀齋 이단상(李端相))의 청풍주중영월(淸風舟中詠月) 시에,
달은 강심에 찍힌 채 수면은 거울처럼 평평한데 / 月印江心鏡面平
고운 것 더러운 것 온갖 것이 다 와서 드러난다 / 姸媸萬態畢來呈
탁한 물을 만난다 해도 흔적을 볼 수 없으니 / 縱逢濁水還無見
물결의 맑은 빛이 저절로 밝음을 지니고 있다 / 波際淸光自在明
하였으니, 혼자 우뚝 서서 두려워하지 않는 기상을 담고 있다.
박서계(朴西溪 박세당(朴世堂))의 대탄(大灘) 시에,
산이 쪼개져서 푸른 강은 급히 흐르고 / 山破蒼江急
바람이 감돌아서 지는 해는 더디게 간다 / 風回斜日遲
물결 사이에 있는 한 쌍의 흰 새는 / 波間雙白鳥
내가 돌아올 때를 기다리고 있구나 / 會待我歸時
하였으니, 청정(淸貞)한 절의가 멀리 북두칠성을 쏜다.
남약천(南藥泉 남구만(南九萬))이 지은 효종(孝宗)의 만사(輓詞)에,
마음 단단히 다잡고 나라의 운명 연장하며 / 銳意恢天步
근심과 근면으로 십 년을 일관하셨네 / 憂勤一十年
뛰어난 지모는 모든 제도를 바르게 다지고 / 英猷貞百度
훌륭한 계책은 뭇 현인들을 굴복시키셨다 / 長策屈群賢
먼 곳의 인재들을 불러 모으니 / 杞梓多生楚
경세(經世)의 재사(才士)들이 다 모여 있다 / 驊騮竟向燕
중흥의 업은 다 이루지 못하였으나 / 中興未究業
그 사적은 청사에 밝게 빛나리 / 昭晰在靑編
하였으니, 임금과 신하가 제대로 만난 시대에 영웅들이 성심(誠心)을 내보인 것이다.
김문곡(金文谷 김수항(金壽恒))의 ‘가을밤 회포가 있어’라는 시에,
가을빛 띤 난초 언덕엔 향기가 다했는데 / 蘭皐秋色歇芳菲
몇 곳이나 강담의 나그네 돌아가지 못했을까 / 幾處江潭客未歸
땅 끝 하늘 끝에 소식이 끊어졌으니 / 蠻海極天消息斷
꿈속에서 기러기 따라 남쪽으로 날아가리라 / 夢隨征鴈向南飛
하였으니, 한바탕 부는 시원한 바람에 뜬구름이 모두 걷힌 기상이다.
민노봉(閔老峯 민정중(閔鼎重))의 영설(詠雪) 시에,
화방에 갓 핀 꽃처럼 번화하고 / 繁似花房初發榮
백옥 같은 자태에 싸늘한 기를 띠었다 / 凜如玉立勢崢嶸
변방에서부터 와서 끝까지 유람하였네 / 來從絶塞窮遊覽
관산이 괴로운 행로라고 누가 말했던가 / 誰道關山是苦行
하였으니, 풍설(風雪)을 무릅쓴 행인의 노고를 잘 표현하였다.
김농암(金農巖 김창협(金昌協))의 전중군안(田中群鴈) 시에,
만 리 길 따뜻한 곳을 찾아가는 기러기는 / 萬里隨陽鴈
서리 내리기 전에 북쪽 변방을 출발한다 / 先霜發北邊
갈대를 머금고 먼길을 근심하며 날다가 / 含蘆愁遠道
이삭을 먹기 위해 쓸쓸한 밭에 내려앉는다 / 啄穗下寒田
그림자만 보면 그물인가 의심하고 / 顧影頻疑網
소리만 들으면 활소린가 겁을 낸다 / 聞聲誤怯弦
고상한 뜻 갖고 높은 하늘을 날다가 / 冥冥九霄意
그만 끝내는 곡식의 유혹을 받았구나 / 終被稻粱牽
하였다. 학문과 덕행을 닦은 훌륭한 사람이니, 그의 시를 누가 읽지 않겠는가.
김삼연(金三淵 김창흡(金昌翕))의 우중(雨中) 시에,
빗발이 빽빽하게 먼 소나무 위를 건너가고 / 雨足森森度遠松
구름 걷히니 두세 봉우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 雲披露却兩三峯
서루의 사면엔 시냇물 소리 요란하고 / 書樓四面溪聲合
절에선 석양에 치는 종소리 들려온다 / 碧寺虛傳日暮鍾
하였으니, ‘한밤중에 종소리가 나그네의 배에 들린다.[夜半鍾聲到客船]’는 고시의 맛을 풍기고 있다.
박구당(朴久堂 박장원(朴長遠))의 평강도중(平康道中) 시에,
산이 높아 해가 쉬이 지니 / 山高日易夕
마을 길에 소와 양이 내려온다 / 村逕下牛羊
우연히 간수 가의 돌에 앉아 / 偶坐澗邊石
행색이 바쁜 줄을 잊었노라 / 不知行色忙
하였으니, 깨끗하여 속세의 기미가 없다.
최곤륜(崔崑崙 최창대(崔昌大))의 병중(病中) 시에,
임원엔 석양볕 아직 많이 남았는데 / 林院多夕照
외로운 연기 먼 봉우리에 피어오른다 / 孤煙生遠峯
멀리서 생각하노니 서산의 중은 / 遙念西山僧
혼자 와서 석양 종을 울리리라 / 獨來鳴暮鍾
하였으니, 종소리가 나무 사이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김식암(金息菴 김석주(金錫胄))의 ‘관서(關西)로 떠나는 사람을 보내며’라는 시에,
흰 얼굴 붉은 적삼 수놓은 치마에 가렸으니 / 白面紅衫映繡裙
지난날 풍류 지닌 젊은 낭군이었지 / 風流昔日少郞君
맑은 강 한 굽이에 천 가닥 수양버들은 / 淸江一曲千條柳
이쁜 사람으로 하여금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게 하노라 / 猶許佳人唱遏雲
하였는데, 부귀상(富貴像)이 담겨 있다.
조후계(趙后溪 조유수(趙裕壽))의 ‘낙화암(落花巖)에서 피리를 불다’라는 시에,
외로운 피리 소리 푸른 벽을 찢고 / 孤管裂靑壁
그 울림이 푸른 조수를 끌어당긴다 / 餘音曳綠潮
석양에 처량한 생각 갖는 것은 / 悲涼日暮意
다만 백제에 대한 원한 때문 / 只以怨前朝
하였는데, 처량한 거문고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박정재(朴定齋 박태보(朴泰輔))의 ‘사군(四郡)의 산수(山水)를 찾아가는 사람을 보내며’라는 시에,
남생은 평소 호방하고 활달하여 / 南生雅放曠
산수를 즐기고 좋아한다 / 嗜好在山水
가을바람에 문을 나가서 / 秋風出門去
모든 일을 될 대로 내버려 둔다 / 萬事理不理
나는 수를 놓고 치마를 만들어서 / 我願繡作裙
온종일 방 안에 걸어 두고 싶노라 / 終日掛屋裏
그대는 기특한 경치를 사랑하지만 / 君自愛奇景
나는 기특한 선비를 사랑하노라 / 我自愛奇士
하였으니, 착실한 공부가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였다.
서만정당(徐晩靜堂 서종태(徐宗泰))의 ‘금강산에 들어가다’라는 시에,
금강산에 드는 것 성인의 문에 드는 것 같으니 / 入山如入聖人門
이리 보나 저리 보나 도의 존재 아닌 것이 없다 / 鑽仰無非見道存
저절로 심상하게 놀라 움직이는 곳이 있는데 / 自有尋常驚動處
마음으론 알아도 입으론 말하기 어려우리라 / 秖應心會口難言
하였으니, 무이구곡(武夷九曲)의 진퇴(進退)에 차서가 있다.

문왕(文王)이 강태공(姜太公) 꿈을 꾸던 그날 밤에 강태공도 같은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이 말은 급현 태공묘비(汲縣太公廟碑)에 보인다. 그러나 문왕이 위수(渭水)에 사냥가려고 할 때 점은 쳤지만 강태공 꿈을 꾸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강태공이 문왕 꿈을 꾸었다는 사실도 서책에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약원(藥院)의 직소(直所)에서 의서(醫書)를 보았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사람은 천지의 변화하는 기운을 받아서 태어난다. 한 달 만에 고액(膏液)이 엉기고, 두 달 만에 혈맥이 형성되고, 석 달 만에 배낭(胚囊)이 이루어지고, 넉 달 만에 태반(胎盤)이 이루어지고, 다섯 달 만에 힘줄이 이루어지고, 여섯 달 만에 뼈가 이루어지고, 일곱 달 만에 형체가 이루어지고, 여덟 달 만에 움직이고, 아홉 달 만에 뛰고, 열 달 만에 출생한다. 형해(形骸)가 이루어지고 나면 오장(五臟)이 안에서 나누어진다. 간장은 눈을, 신장은 귀를, 비장은 혀를, 폐장은 코를, 담장은 입을 주관한다. 하늘에는 사시(四時), 오행(五行), 구요(九曜), 360일이 있고, 사람에게는 사지(四肢), 오장(五臟), 구규(九竅), 360마디가 있다. 하늘에는 풍우(風雨)와 한서(寒暑)가 있고 사람에게는 취여(取與)와 희로(喜怒)가 있다. 그리고 담장은 구름, 폐장은 기체, 비장은 바람, 신장은 비, 간장은 우레가 된다. 사람은 천지와 서로 같은데, 마음이 주인이 된다.” 하였다.

공자(孔子)는 하늘에 대해 잘 말씀하지 않았다. 하늘에 관해 여러 책에 나타난 것은 다음과 같다.
하늘은 여러 물건의 정기요, 만물의 조상이다. 구름이 떠다니는 것은 기체가 왕래하는 것이고, 일월 성신(日月星辰)은 기체가 쌓인 것이며, 우로 상설(雨露霜雪)은 기체가 응결된 것이다. 음양(陰陽)은 기체의 어머니이다.
봄은 창천(蒼天)이니, 만물이 발생하고 그 색이 푸르다. 여름은 호천(昊天)이니, 만물이 장성하고 그 기운이 성대하다. 가을은 민천(旻天)이니, 만물이 성숙하고 모두 문채가 있다. 겨울은 상천(上天)이니, 음기(陰氣)가 위에 있고 만물이 복장(伏藏)한다.
천한(天漢)은 수기(水氣)인데, 정광(精光)이 하늘에 전운(轉運)한다. 하늘의 정기는 해가 되고, 땅의 정기는 달이 되었다. 바람은 천지가 기운을 내부는 것이다. 천지의 기운이 화합하면 비가 오는데, 폭우(暴雨)를 동(凍)이라 한다. 우레는 1양(陽)이 2음(陰)의 아래에 분발하는 것이니, 양기(陽氣)가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더운 달에 발한다. 바람은 1음이 2양의 아래에 엎드린 것이니, 음기(陰氣)가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추운 달에 발한다. 천지가 서로 응하지 않는 것을 몽무(雺霧)라고 한다.
나무와 돌의 괴귀(怪鬼)는 기(夔) 또는 망랑(罔閬)이라 하고, 물의 괴귀는 용(龍) 또는 망상(罔象)이라 하며, 흙의 괴귀는 분양(羵羊)이라 하며, 나무의 정령은 팽후(彭侯)라 하는데 삶아 먹을 수 있는 것이다. 분양은 잣나무 뿌리를 무서워하기 때문에 묘역(墓域)에 잣나무를 많이 심는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단순히 금수(禽獸)나 충어(蟲魚)라는 것만 알지, 그 성격은 분변하지 못한다. 여러 책을 널리 상고해 보는 것도 학문에 일조가 되는 일이다.
《주례(周禮)》의 고공기(考工記)에, “천하에 큰 길짐승[獸]이 다섯 가지가 있으니, 곧 지방(脂肪)이 있는 것, 고혈(膏血)이 있는 것, 털이 짧은 것, 날개가 달린 것, 비늘이 있는 것이다.” 하였으니, 날짐승[禽]도 길짐승이라고 할 수 있다. 도가(道家)의 양생법(養生法)인 오금희(五禽戱)는 바로 곰이 나무를 부여잡고 힘을 쓰는 것처럼 하는 동작, 새가 목을 빼고 먹이를 먹는 것처럼 하는 동작, 범이 돌아보는 것처럼 하는 동작, 원숭이가 걷는 것처럼 하는 동작, 거북이가 머리를 움츠리는 것처럼 하는 동작이니, 길짐승도 날짐승이라고 할 수 있다.
용은 맑은 물에서 먹고 맑은 물에서 놀고, 이무기도 맑은 물에서 먹고 맑은 물에서 놀며, 물고기는 탁한 물에서 먹고 탁한 물에서 논다. 물고기 가운데 흐르는 물속에서 사는 놈은 등 비늘이 희고, 고여 있는 물속에서 사는 놈은 등 비늘이 검다.
까마귀는 바람에 목욕을 하고, 까치는 비에 목욕을 하고, 닭은 흙에 목욕을 하고, 새는 모래에 목욕을 한다. ‘음력 10월에 검은 새가 목욕한다’ 하였는데, 검은 새는 까마귀요, 목욕한다는 것은 날아서 잠깐 올라갔다가 잠깐 내려갔다가 하는 것을 말한다.
개는 눈을 좋아하고, 말은 바람을 좋아하고, 돼지는 비를 좋아한다. 그리고 까마귀는 넓고 조용한 곳을 좋아하고, 까치는 좁고 시끄러운 곳을 좋아한다. 오리는 물속에 잠기기를 좋아하고, 갈매기는 물 위로 뜨기를 좋아한다.
닭은 잡아맬[繫] 수 있기 때문에 계(鷄)라 이르고, 오리는 친압할[狎] 수 있기 때문에 압(鴨)이라 이른다.
말은 입을 얽고 소는 코를 뚫는데, 이것은 사람이 한다. 말은 하루에 100리를 가고, 소는 하루에 100이랑을 간다. 소는 순풍(順風)에 달리고, 말은 역풍(逆風)에 달린다. 《좌전》에, “발정난 마소도 서로 미치지 못한다.” 하였다.
양은 성질이 이슬을 무서워하므로 느지막이 나갔다가 일찌감치 돌아온다.
귀가 긴 짐승은 꼬리가 짧으니 토끼 등속이 바로 그것이고, 다리가 짧은 짐승은 꼬리가 기니 범과 표범의 등속이 바로 그것이다.
고양이는 일명 몽귀(蒙貴)라고도 하고 오원(烏圓)이라고도 하는데, 눈동자가 아침과 저녁에는 둥글고 낮에는 쭈그러져서 실오라기와 같다. 콧끝은 항상 차고 오직 하지(夏至) 하루에만 따뜻하며, 털은 이나 벼룩을 용납하지 않는다. 검은 고양이가 어두움 속에서 털을 역으로 세워 화성(火星)처럼 빛내고 귀 부분을 넘어서까지 낯을 씻으면 손님이 온다.

곤충이나 짐승들의 수명 및 변화는 다음과 같다.
하루살이는 3일, 누에는 27일, 매미는 30일 동안 산다. 쓰르라미는 여름 동안만 살기 때문에 봄과 가을을 모른다. 그리고 쥐는 300년, 원숭이는 800년, 여우와 사슴은 각각 1000년, 학은 2000년, 거북은 3600년, 기린은 3000년을 산다.
100년 묵은 여우는 미녀가 되고, 100년 묵은 박쥐는 신선이 된다. 두꺼비는 1000년이 되면 머리에 뿔이 나고 이마 밑에 단서(丹書)가 생긴다. 범은 500년이 되면 하얀색으로 변하고, 1000년이 되면 이빨이 빠지고 뿔이 난다. 제비는 1000년이 되면 호염(胡髥)이 나고 문을 북쪽으로 향해서 집을 짓는다. 거북은 1000년이 되면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연잎 위에서 논다. 사슴은 1000년이 되면 푸른 사슴이 되고, 500년이 더 되면 흰 사슴이 되고, 또 500년이 더 되면 검은 사슴이 된다.

까마귀는 암수를 구별하기가 어렵다. 오른쪽 날개로 왼쪽을 가리는 놈은 수컷이고 왼쪽에서 오른쪽을 가리는 놈은 암컷이다. 벌은 생식기가 꼬리에 있는데, 꼬리가 갈라진 놈은 암컷이고 꼬리가 뾰족한 놈은 수컷이다. 게는 배꼽이 둥근 놈은 암컷이고 뾰족한 놈은 수컷인데, 수컷은 낭해(䱺)라 하고 암컷은 박대(博帶)라 한다. 거북은 수컷은 대모(瑇瑁)라 하고 암컷은 자휴(觜蠵)라 하며, 고래는 수컷은 경(鯨)이라 하고 암컷은 예(鯢)라 한다. 물새는 수컷은 빛깔이 붉은데 비(翡)라 하고 암컷은 빛깔이 푸른데 취(翠)라 한다. 수컷이 우는 놈을 원(鴛)이라 하고 암컷이 우는 놈을 앙(鴦)이라 한다. 오리는 수컷이 울지 않고, 매미는 암컷이 울지 않는다. 메추라기는 수컷은 개(鶛)라 하고 암컷은 비(痺)라고 하는데, 수컷은 발이 높고 암컷은 발이 낮다. 말은 수컷은 즐(騭)이라 하고 암컷은 탄(驒)이라 한다. 집비둘기는 암놈이 수놈을 타고, 바닷게는 암놈이 수놈을 업는다. 비둘기는 암컷은 앞을 펴고 수컷은 뒤를 편다. 기러기는 수컷이 부르고 암컷이 응한다. 새매는 수컷이 작고 암컷이 크다.

한 방향으로 통한 길을 도로(道路), 두 방향으로 통한 길을 기(岐), 세 방향으로 통한 길을 극(劇), 네 방향으로 통한 길을 구(衢), 다섯 방향으로 통한 길을 강(康), 여섯 방향으로 통한 길을 장(莊), 아홉 방향으로 통한 길을 규(逵)라 한다.

나는 50이 넘어서 젊은 소실을 두었는데 쇠로(衰老)한 것이 부끄러워서 매번, “백발이 홍안에 비치는 것 차마 보지 못하겠네[不堪白髮照紅顔]”라는 시구를 외었다. 60이 넘어서 전라도 감영에 있는 생사당(生祠堂)에서 내 초상화를 찾아왔는데, 바로 38, 9세 때 그린 것이었다. 곧 소실을 앞으로 가까이 오게 해서, “내 젊을 때의 모습을 볼 것 같으면 사람이 어찌 태어나서 늙을 자 있겠느냐.”라고 하였으니, 또한 한 남자의 통쾌한 일이었다.

공자는, “제사 지내지 않아야 할 귀신에게 제사 지내는 것은 아첨이다.” 하였다. 나는 귀신을 섬기지도 배척하지도 않는 사람이지만, 일찍이 말하기를, “정성껏 조상께 제사 지내고 그다음은 지신(地神)을 받들어야 한다. 대개 나라에 태묘(太廟)와 태사(太社)가 있듯이 사가에도 받드는 바가 있는 것이다.” 하였다.

김만재(金晩齋 김세균(金世均))는 일찍이 이선단(二仙丹)으로 학질(瘧疾)을 치료하고, 또 건나복(乾蘿葍)으로 이질(痢疾)을 치료하였다. 여러 번 시험해서 여러 번 효과를 보았다. 그래서 이선단과 건나복을 많이 저축해 놓고 찾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기쁘게 응하고 조금도 괴로워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남에게 신의가 있던 박문효(朴文孝)에 비할 만하였다.

옛사람의 필기(筆記)를 보았더니, 어떤 사람이 새집으로 이사 가서 변소가 있었던 곳인 줄 모르고 그곳에 사당을 지었는데 훗날 그 집에 불길한 일이 매우 많았다고 한다. 이 말은 비록 경험하지 못한 일이나, 조심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명나라 사람의 차기(箚記)에 이르기를, “강남 어떤 사람의 집에 하루는 나비 떼가 날아들어 창문과 기둥을 어지럽게 쳤다. 그래서 그 집주인이 편액을 ‘백접당(百蝶堂)’이라 써서 걸었는데, 뒤에 자손이 번성하였다. 강남에는 길쌈하는 집이 많았는데, 그 나비는 이웃집의 누에나방이었던 것이다. 선가(仙家)에서 독만큼 큰 누에고치를 가지고 축수(祝壽)하는 비방으로 삼으니, 그 길조(吉兆)는 알 만하다.” 하였다.
우리나라에는 황주(黃州)와 봉산(鳳山) 등지에 야생 누에나방이 있는데, 그 빛깔이 사랑스럽다. 야생 누에고치는 집에서 기르는 누에고치와 다르다.

옛사람의 말에, “명산을 지나면서 뒤에 다시 보겠다는 기약을 한 자는 반드시 보지 못한다.” 하였다. 나는 약관 시절에 부용당(芙蓉堂)을 꼭 다시 보리라 기약했는데, 30년 뒤에 결국 보았다. 석왕사(釋王寺)는 스쳐 지나고 들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훗날의 기약을 논할 수 있겠는가. 경포대(鏡浦臺)와 설악산(雪嶽山)이야말로 반드시 기약했던 일을 이루려고 하는데, 종당에 어떻게 될는지 모르겠다. 명산을 지나면서 훗날을 기약하지 않는 분은 박두계(朴荳溪 박종훈(朴宗薰))이다.

장량(張良)과 이필(李泌)의 우열(優劣)을 논하는 사람이 있기에 내가 말하기를, “장량은 고제(高帝) 같은 임금을 만났기 때문에 힘쓰지 않고서도 성공하였지만, 이필은 올바른 임금을 만나지 못하였으니 어찌 마음과 힘을 다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니 처지는 같고 힘쓰는 것은 달랐다.” 하였다.

심 문충공(沈文忠公 심순택(沈舜澤))이 헐성루(歇惺樓)에 이르러 말하기를, “볼 것은 바로 일만이천 봉인가. 내 이미 다 보았으니 돌아가야겠다.” 하였는데,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중서(中書)에 거듭 제수하는 왕명이 이르렀다. 그 전유(傳諭)하는 말에 이르기를, “금강산 속 좌의정이 머무는 곳에 전유하노라.” 하였으니, 임금과 신하가 제대로 만났다는 것은 명산에 질정해도 틀림이 없다. 지금까지도 칭송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내가 7, 8세 때 왕고(王考)를 충청 감사의 임소에서 모실 때 금강(錦江)에서 뱃놀이를 하였는데, 나에게 소동파(蘇東坡)의 적벽부(赤壁賦)를 외도록 명하고 또 시를 짓게 하셨다. 내가 곧바로 짓기를, “누대 위에서는 미인이 춤을 추고, 맑은 강에는 흰 갈매기가 떠 있다.[樓上美人舞 淸江泛白鷗]” 하였더니, 왕고께서 찬탄하시며 말씀하시기를, “너는 초년에 부귀하고 만년에 휴퇴(休退)할 상이다.” 하셨다. 나는 50세 후에는 시골에서 살았기 때문에 몸이 매이지 않은 배와 같았으니, 시의 예언을 비로소 깨달았다.

선왕고께서는 80세에 편찮으셔서 오래도록 회복하지 못하셨다. 그러자 여러 의원들은 모두, ‘당연히 보제(補劑)를 써야 한다.’고 하였는데, 유독 조종익(趙鍾翼) 의원만은 비아탕(肥兒湯) 처방을 내고 양황련(兩黃連)과 노회(蘆薈)를 가미하여 5, 6첩을 달여 드리니, 즉시 효과가 났다. 노인의 증세가 어린애와 같다는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었다. 조 의원은 어의(御醫) 중에 유명한 자였다.

우리나라의 조정 규모는 송(宋)나라에 비할 만하다. 그래서 《송조명상론(宋朝名相論)》을 지었는데, 송나라 명상 중에는 문장(文章), 사공(事功), 도덕(道德), 학문(學文)에 뛰어난 자들이 줄줄이 나왔다. 상민중(向敏中) 같은 정승은 앞 시대의 훌륭한 인물들에게는 미치지 못했지만, 관직에 나와 직무를 돌볼 때는 규구(規矩)를 잃지 않았고 집안을 다스리거나 처신을 하는 데에서도 결점을 보이지 않았으니, 이런 사람은 중등인이 될 만하다. 만일 이런 사람을 본받는다면 후세의 비방은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선친께서 대사헌으로 계셨을 때 올린 상소에 대한 임금의 비답에 ‘경간(卿懇)’이란 두 글자가 있었으므로, 상소를 하여 이 두 글자를 거두시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옛날 영조 때 충목공(忠穆公) 이은(李溵)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 이 두 글자가 있었으니, 이것은 그 고사였던 것이다.

나의 족질(族姪) 이교영(李喬榮)은 문사(文士)인데 근래에 지은 나의 시를 보고, “도연명(陶淵明)의 시체(詩體)군요.”라고 하였다. 내가 그의 시를 외어 보라고 하였더니, 그가 백운(白雲) 시를 읊기를,
흰구름은 무슨 일을 하려고 / 白雲何事爲
정처 없이 이리저리 오가는가 / 搖曳無定跡
소나무와 계수나무 사이로 흘러들지만 / 流入松桂叢
깃든 학은 조는 중이라 그것을 모른다 / 棲鶴眠不識
하였고, 또 한 수를 읊기를,
산 위의 달은 공중 가득히 실려 있고 / 山月滿空載
솔바람은 비와 함께 솔솔 부는구나 / 松風與雨斜
강호가 별천지가 아니니 / 江湖非別界
이곳에 문득 집을 짓노라 / 此處便爲家
하였다. 내가 이들 시에 대하여 소감을 말하기를, “시어(詩語)에 진루(塵累)의 기미는 없으나 다만 선어(禪語)에 가까우이.” 하고는 내가 지은 백로주(白鷺洲) 시를 외기를,
백로주 가엔 흰 해오라기 날고 / 白鷺洲邊白鷺飛
백운산 위엔 흰 구름 많다 / 白雲山上多白雲
구름은 멈추고 해오라기는 졸고 산수는 고요한데 / 雲住鷺眠山水靜
한가한 사람은 잠이 없어 이들과 무리를 이루었다 / 幽人無夢自成群
하였다.

영남 사람이 말하기를, “이퇴계(李退溪)의 옛집을 수리할 때 보니, 들보에 ‘우리 집에 한 사람이 있는데 아마 바다 속의 사람일 것이다. 입에 천상의 물을 머금고 있다가 내뿜어 불의 정신을 씻는다.[吾家有一人 應是海中人 口含天上水 噴灑火精神]’는 뜻의 20글자가 있었는데, 이웃집들이 그것을 따라 하였다. 뒤에 이웃집에 불이 났는데, 유독 그 글씨가 붙은 곳만은 불에 타지 않았다고 한다.” 하였다. 이것은 퇴조비(退潮碑)의 탑본(搨本)이 불을 막아 준다는 것과 같은 유이다.

내가 관동(關東)을 유람할 때 낙산사(洛山寺)에 들렀더니 어떤 중이 나에게 누런 탱자를 주었다. 그래서 장난삼아 시를 읊기를,
우습다 회수 건너온 열매가 / 可笑渡淮實
어찌 나의 손에 들어왔는고 / 胡爲到我手
불법을 수행하는 사람은 어찌 내가 / 行人焉識我
이따금 시골 노인의 벗이라는 걸 알았는가 / 往往野翁友
하였다. 나의 호가 귤산(橘山)이기 때문에 곁에 있던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배를 잡고 웃었다.
옛날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선생은 자취를 감춘 채 소양강(昭陽江)을 건너다가 소년들에게 봉변을 당하였고 그에 대한 시를 남겨 세간에 전하고 있지만, 나의 행적이야 누가 알겠는가.

원릉(元陵)의 만사(輓辭)에, “여염엔 자녀들 남겨 두고, 성궐은 평상시와 같다.[閭閻遺子女 城闕若平生]”라는 구절이 있으니, 이 참봉(李參奉 이광려(李匡呂))이 남을 대신해서 지은 것인데 명구(名句)로 전하고 있다. 내가 《동명집(東溟集)》을 보았더니 ‘장 옥성(張玉城)의 옛집을 읊다.’라는 시에, “영웅은 이미 진토가 되었는데, 문관은 평상시와 같다.[英雄已塵土 門館若平生]”라는 시구가 있었다. 두 시는 우열을 가릴 수 없으니, ‘푸른빛이 쪽에서 나왔다.’고 할 수 없겠다.

김수팽(金壽彭)이란 자는 호조의 이서(吏胥) 중에 칭송을 받은 자이다. 정조 때에 금곡(金穀)을 오랫동안 관리하였는데, 번고(飜庫)할 때에 한 낭관(郞官)이 은(銀)으로 만든 바둑돌 몇 개를 가지자 김수팽은 한 움큼을 가졌다. 낭관이 크게 놀라며 괴이하게 여기자 김수팽이 말하기를, “관원이 한 개를 취할 경우 아전이 한 움큼을 취하는 것이 상례(常例)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낭관이 크게 부끄러워하였으니, 이것은 세상을 깨우치는 훌륭한 말이 될 만하다.

임신년 10월 18일, 차자(箚子)에 대한 비답을 퇴계원(退溪院)에서 받고 날이 저물어 불암사(佛巖寺)에서 잤는데, 19일 새벽에 어떤 사람이 홍패(紅牌)와 백패(白牌) 두 짐을 붉은 보로 싸서 집의 정청(正廳)에 안치하는 꿈을 꾸었다. 혹시 이 몽징(夢徵)이 뒤에 나타날는지.

정사년 가을에 폭풍이 동대문 밖으로부터 일어나서 큰 나무들이 쓰러졌는데, 바람이 지나간 곳은 마치 구겨 놓은 수세미와 같았다. 이런 현상은 100리 안팎이었다. 8월에 내가 순원왕비(純元王妃)의 애보(哀報)를 듣고 혜화문(惠化門)에 들어가서 수목들이 즐비하게 쓰러져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기미년과 경신년 사이에 동협(東峽)의 산허리에서 불이 나서 풀과 나무가 순식간에 탔는데 산불의 원인을 알 수 없다. 내가 임신년에 설악산에 들어가서 보니 아직도 꺼멓게 탄 채로 서 있는 큰 나무들이 있었으니, 깊은 산에는 괴상한 일들이 더욱 많다.

순조(純祖)가 부인의 복색 중에 있는 ‘중리소상(中裏小裳)’이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 묻자, “무저비(無低卑)인데, 곧 상하가 통용함을 이른 것입니다.”라고 대답한 자가 있었다. 순조는 또 조신(朝臣)의 집 소실의 칭호를 ‘아내서(衙內胥)’라고 하도록 분부하였는데, 이는 곧 국초(國初)에 고려인(高麗人)을 정병(正兵)으로 강정(降定)한 것이다. 그의 안사람인 부인도 감히 칭존(稱尊)하지 못하고 단지 ‘아내서’라고만 하였는데, ‘서’는 ‘그 사람[彼]’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아마 궁중에서 전래한 말인 것 같다.

내가 하루는 오줌을 누다가 그만 실수로 옷을 적셨다. 그리하여 이불을 둘러쓴 채 앉아서 가동(家僮)으로 하여금 젖은 옷을 불에 말리게 하고, 자소시(自笑詩)를 불러 주어 쓰게 하기를,
옛날의 건강하고 탄탄하던 몸을 만져 보니 / 按摩昔日康強軀
닭 가죽처럼 쭈그러지고 학 뼈처럼 메말랐다 / 一半鷄皮更鶴癯
오줌을 누면 가로 나가서 바지 밑이 젖고 / 放溺橫奔袴底濕
밥을 대하면 어지럽게 흘려 밥상머리가 더럽다 / 對飱亂落盤頭麤
어째서 네 모습이 이와 같이 되었는고 / 胡爲爾狀如斯否
인생이 다된 것을 쓸쓸하게 웃노라 / 堪笑人生已矣乎
애석하다 안방에 있는 젊은 소실을 / 可惜室中伏侍御
고운 얼굴 공연히 늙어 촌할멈 되도록 한 것 / 紅顔空老作村姑
하였다.

내가 윤침계(尹梣溪 윤정현(尹定鉉))에게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가기를 권하였더니, 윤침계는 일언지하에 곧 결정해 버렸다. 또 이런 식으로 이공 헌구(李公憲球)에게 권하였으나, 이공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작고하였다. 또 심암(心菴) 조공(趙公 조두순(趙斗淳))에게 권하였더니, 조공이 처음에는 놀랍고 괴이쩍게 생각하다가 10여 년 후에 벼슬에 나가지 않는 나를 보고, “나보다 낫다.” 하고는, 그날로 서장을 올려 사직을 청하였다. 이 세 분들은 모두 내가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가게 깨우쳐 준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벼슬에서 물러가기를 청한 지 오래되었으나 아직까지 결말을 짓지 못하고 있으니, 남에게 권하기는 쉽고 자신이 실천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명철(明哲)하여 몸을 보존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데, 나는, 절의를 세우고 의리를 위해 죽는 것은 쉬워도, 명철하여 몸을 보존하기란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절의를 세우는 일에 유의하다가 되지 않는다면 불의에 빠지지도 않고 몸을 보존하는 계책도 스스로 그 가운데 있지만, 오로지 몸을 보존하는 것만으로 마음을 쓴다면 소인과 비루한 사람의 태도가 되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명예를 좋아하는 것은 배우는 자에게는 병이 되고 배우지 않는 자에게는 약이 되니, 명예를 좋아하는 일을 금하면 사대부의 명예와 법도가 실추된다. 이것은 세속의 비루함을 깊이 탄식한 말이다.
‘속된 시골 사람에게나 인정받는 사이비 군자인 향원(鄕愿)은 덕을 해치는 존재다.’라고 하였으니, 성인의 세상에서는 이런 사이비 군자가 덕을 해치는 존재이지만, 세속이 말단으로 떨어진 시대에는 이런 사람 한 명마저도 어떻게 볼 수 있겠는가.

선군의 차기(箚記)에 《명사(明史)》 효종본기(孝宗本紀)의 황후 성씨(皇后姓氏)에 관한 일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처음에는 무엇 때문에 이것을 기록했는지 알지 못했는데, 그 후 철종조(哲宗朝)에서 염씨 성향(廉氏姓鄕)의 일로 인해 옥사가 일어났을 때 명나라의 사례를 준용하였으니, 이때에야 비로소 선군께서 생각하신 바가 계셨던 것을 알았다.

설악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에 만년송(萬年松)이 있는데, 키는 몇 자에 불과하나 가지와 줄기는 넓게 퍼져 있다. 풍로(風露)가 세차게 떨어지는 곳에서 다만 땅을 덮고 자랐을 뿐이다. 그 잎을 따서 차를 끓이면 매우 청렬(淸洌)하다. 나는 설악산에 들어가서 차도 마시고 그 소나무도 구경하였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 아홉 수로 극운(極運)을 삼는데, 가장 순탄하기 어려운 것은 59이다. 나는 임신년 겨울에 유핵(乳核)을 앓았는데, 오랫동안 낫지 않아 59의 액회(厄會)를 당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의원이 포공영(蒲公英 민들레) 즙을 발라 주어 약효를 보았으니, 약이 어쩌면 사람의 목숨을 연장하는 것이 아닐까. 수를 누리는 사람은 약의 효과를 얻어서 그런 것이다.

내가 시골에서 살 때 시골 사람들이 워낙 무식해서 신분의 높고 낮음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나의 초선(蕉扇)을 빌려다가 혼인 도구로 삼기를 청하는 자가 있었다.
옛날 이퇴계(李退溪)가 시골에서 살 때 면임(面任)이, “방역(坊役)의 명년 당번은 상공 댁의 차례입니다.”라고 고하니, 퇴계 선생은 그저 웃고 대꾸하지 않았다. 이 일이 갑자기 생각나서 나 역시 웃었다.

사람들은 모두, “세상에 유감없는 상(喪)이 없다.”고 한다. 경산(經山) 정공(鄭公 정원용(鄭元容))으로 말하면 수는 91세에 이르고 직위는 영상에 올라 작고하였으며, 복을 입는 사람들이 수십여 명이나 되는 호상이었는데도, 오히려 남은 한이 있었다. 이때 임금으로부터 술과 약이 원조(元朝)에 하사되었는데 미처 받지 못하고 작고하였으니, 이것이 남은 한이다. 사람의 자식은 부모가 비록 10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작고했다 하더라도 무궁한 한이 있게 마련이다.

전옥서(典獄署)에 전해 내려오는 말이 있으니, “전옥서 안에 유명한 샘이 있는데, 샘 가에 서 있는 묵은 구기자나무의 뿌리가 우물 속으로 서려 들어갔다. 죄인이 형장을 맞은 뒤에 그 물로 씻으면 낫지 않는 자가 없다.” 하였다.
이봉환(李鳳煥)이란 자가 전옥서 참봉이 되어 그 구기자나무 뿌리를 파내서 달여 먹었는데, 그 후로는 물이 영험이 없었다. 이봉환이 죄에 걸려 형을 받고 전옥서에 갇히니, 사람들은 구기자나무 뿌리를 파낸 응보라고 지목하였다. 이봉환은 호가 우념(雨念)인데, 글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나는 젊을 때 규장각에서 활자를 주조하는 일을 보살폈다. 그때 거기에 나이 20쯤 된 영리한 사람 하나가 있었는데, 총명이 월등하여 물어보면 무슨 일이든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여러 날을 대해 보고 매우 기특하게 여겨 그의 성명과 주소를 물어보았지만 우물거리고 대답하지 않았다. 사람을 시켜서 탐찰(探察)하였으나 끝내 그의 내력을 알지 못하였다. 지금 30년이 흘렀는데, 인재를 잃은 것이 더욱 한스럽기만 하다.

격포(格浦)를 다시 설치하려고 할 때 도형(圖形)을 가지고 격포에 대한 것을 삼군부(三軍府)에 물었는데, 여러 장신(將臣)들이 모두 그것을 몰랐다. 나는 이때 마침 공소(公所)에 있었는데, 물어 오지 않았기 때문에 말해 주지 못했다. 나는 일찍이 도백(道伯)으로 격포를 순찰했기 때문에 연혁(沿革)의 근원이나 요충(要衝)의 긴요한 것들을 익히 알고 있었는데, 나에게 물어보지 않았고 나도 입을 열지 않았다. 세상 만사 가운데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취하는 것이 이와 같다.

만회암(晩悔菴)은 어떤 중이 옛 절을 폐기하고 새 터에 고쳐 세운 것이다. 계유년 여름에 내가 꿈속에서 절에 올라가니, 관세음보살이 공중에 나타나서 노한 기색을 띠었고 또 몇 마디 말을 하였는데 그 말은 기억나지 않으며, 관세음보살이 또 어떤 중을 포박하여 이불로 덮어씌우는 것이었다. 꿈을 깨고 나서 매우 괴이하게 생각되어, 중으로 하여금 옛 절을 중수하고 옛 부처를 도로 봉안하게 하였다. 이 절이 두 번이나 꿈에 나타난 것 또한 괴이한 일이다.

왕어양(王漁洋 왕사정(王士禎))이 이르기를, “호주(湖州)에서는 오로지 양털만을 이용해서 붓을 만드는데 너무 부드러워서 빳빳한 힘이 없다. 그래서 초서(貂鼠 노랑가슴담비)의 털을 구하여 붓을 만들되 토끼털로 심을 박았는데, 종요(鍾繇)와 왕희지(王羲之)가 사용했던 서수필(鼠鬚筆)은 반드시 이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약간 퉁퉁해서 들어 올리거나 떨어뜨리거나 하는 운용이 사람의 뜻과 같이 되지 않는다.” 하였다.
나는 이 말에 깊이 감동을 받고 만주(灣州)에 있을 때 담비털을 많이 구하여 중국 선비가 준, 이미 묶여진 호주의 양털을 풀어서 섞어가지고 붓을 만들었다. 그 제작에 있어서 약간 수척하게 하고 퉁퉁하지 않게 하였더니 들어 올리고 떨어뜨리고 하는 운용이 과연 법에 맞았다. 그래서 진상하는 물품으로 정하였다. 그런데 종요와 왕희지에게 한번 보여 주지 못하고 또 왕어양과 더불어 한번 평론해 볼 수 없는 것이 한스럽다.

태상(太常 봉상시(奉常寺))에서 포(脯)를 만드니, 천지(天地)ㆍ악독(岳瀆)ㆍ묘사(廟社)의 제수로 쓰인다. 뜰에 가득히 고기를 널어 놓으면 까마귀와 까치가 감히 가까이하지 못하고 뭇 새들도 그 위로 날아가지 못한다. 그래서 금지하는 기물을 설치하지 않는데, 오백년 동안 한결같이 그러하다.
걷어다가 저장해 놓아도 쥐에게 먹히지 않으니 또한 이상한 일이다. 내가 봉상시를 담당했을 때 매번 이런 말을 들었는데, 이것은 아마 신령(神靈)이 보호하기 때문일 것이다.

일찍이 듣건대, 시(詩)와 문(文)을 짓는 데는 피해야 할 여섯 가지 병통이 있으니, 곧 거친 것[荒], 고운 것[姸], 탁한 것[濁], 가벼운 것[輕], 깔끄러운 것[澁], 완고한 것[固]이다. 거칠면 다듬어지지 않았다는 탄식이 있고 고우면 겉만 번지르르할 혐의가 있으며, 탁하면 특특해지고 가벼우면 빈약해지며, 깔끄러우면 용납할 수 없고 완고하면 변통할 수 없으니, 이것이 다 병통이다. 이상은 어떤 사람의 말이다. 이와 같은 여섯 가지 병통이 있으면 비록 사마천(司馬遷), 한유(韓愈), 이백(李白), 두보(杜甫) 같은 높은 문장이라 할지라도 그 질책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저(牴)와 궤()는 짐승 이름으로, 마음가짐이 충직(忠直)하다. 명나라 승천문(承天門) 안의 화표주(華表柱)의 정상에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인데, 나는 일찍이 연궁교(燕宮橋) 가에서 이것을 본 적이 있다. 또 위휘부(衛輝府) 앞에 있는 돌에도 있다 한다. 이것은 또한 용구자(龍九子) 따위와 같은 것이다.

삼일포(三日浦)는 어떤 세도가가 언덕을 쌓아 관개(灌漑)에 사용하였는데, 수심이 여러 길이다. 이 때문에 영랑(永郞)과 술랑(述郞)의 단서(丹書)가 다 침몰되어 고적(古蹟)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근자에 들으니, 언론에 밀려서 언덕을 허물었더니 단서가 나타났다 한다.
경포대(鏡浦臺)가 무너져서 잠시도 머물러 있기 어려웠는데, 근자에 또 중수하였다. 나는 이에 다시 찾아가 보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며, 뒤미처 경포대에 시를 쓰기를,
현도관(玄都觀)에는 지난번에 들렀던 유몽득이 다시 찾아갔고 / 玄觀前來劉夢得
동정호에는 나타난 여순양을 사람들이 몰라본다 / 洞庭不識呂純陽
하였다.

옛날 구양영숙(歐陽永叔 구양수(歐陽脩))은 《주역(周易)》의 계사(繫辭)를 헐뜯었고, 사마군실(司馬君實 사마광(司馬光))은 맹자(孟子)를 꾸짖었고, 왕안석(王安石)은 《춘추(春秋)》를 비방하였고, 두 정자(程子)는 옛 《대학(大學)》을 뜯어고쳤고, 주자(朱子)는 자하(子夏)의 시서(詩序)를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모두 의론이 아직 정론화되지 못했을 때였다. 명말 청초에도 이런 의론이 없지 않았는데, 우리나라의 제현(諸賢)들은 처음부터 이의가 없었으니 중국과 차이가 있는 것이다.

명유(明儒)가 윤길보(尹吉甫)에 대해 논하기를, “윤길보는 비록 임금을 위하여 숭고(崧高)ㆍ증민(烝民)ㆍ한혁(韓奕)ㆍ강한(江漢) 같은 훌륭한 네 편의 시를 지은 일이 있다. 그러나 후처(後妻)에게 미혹되어 그의 아들로 하여금 마름과 연으로 옷을 해 입고 이상조(履霜操)를 짓게 하였으므로 여희(驪姬)의 참소를 받아들인 진(晉)나라 헌공(獻公)에 비하겠으니, 명신(名臣)이 아니다.” 하였다.
이는 달론(達論)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공과 사는 다른 것이고, 또한 오랑캐 험윤(玁狁)을 친 공을 가지고 《시경》에서 “문무를 겸한 윤길보는, 온 나라의 모범일세.[文武吉甫 萬邦爲憲]”라고 칭송을 하였으니, 어찌 명신이 되기에 부족하겠는가.

내가 《어양속집(漁洋續集)》을 보니 필법이 속되지 않아 매우 아끼며 감상하였다. 뒤에 그 《필기(筆記)》를 얻어 보고 황자홍(黃子鴻 황의(黃儀))의 글씨임을 알았는데, 그 사람은 박학(博學)하고 글씨에 뛰어났으며 소사(小詞)를 잘하였다 한다.

중국 봉산현(鳳山縣)에 삼보강(三寶薑)이란 생강이 있다. 이 생강은 명나라 초에 삼보 태감(三寶太監)이 심은 것이라 전하는데, 온갖 병을 치료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생강이 생산되는 고장은 오직 전주(全州)의 봉상면(鳳翔面) 뿐인데, 혹시 삼보강을 인용해서 이름한 것인가. 또한 기록할 만한 일이다.

남창(南昌) 진홍서(陳弘緖)가 태산(泰山)에 올라가서 해가 돋기를 기다리고 있었더니 채색 아지랑이가 만 가닥으로 뻗치면서 붉은 쟁반 같은 덩어리가 그 속에서 솟아 나왔는데, 밝은 광채가 출렁거려 안정되지 못하다가 한참 뒤에야 햇바퀴를 이루었다. 진홍서가 이내 깨닫기를, ‘붉은 기운이 여기에 이르러 비로소 모여서 해가 되는구나. 해는 하루하루 생기는 것이니, 어제의 묵은 해가 오늘의 해로 다시 돋는 게 아니로구나.’ 하였다. 사람들은 대부분 이 주장을 따랐다.
기운이 모여서 해가 된다는 것은 기담(奇談)으로서야 나쁠 것이 없다. 그러나 기운은 모이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는 것인데, 그 모이지 않은 곳에는 어떻게 해를 이룰 수 있겠는가. ‘태양의 기가 양(陽)이 회복될 때를 타서 모일 곳을 얻어 모인다.’고 한다면 그 말은 혹 옳은 말이 될 수도 있겠지만, 붉은 쟁반 같은 덩어리의 밝은 광채는 처음 솟을 때의 현상이고 햇바퀴를 이룬 것은 약간 올라왔을 때의 현상인데, 어떻게, ‘오늘의 해는 어제의 해가 아니다.’라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만일 기운이 모이는 것으로 말한다면 오늘의 기운은 어제의 기운이 아니겠는가. 공자께서, ‘인간의 본성과 하늘의 이치[性與天道]’에 대해 말씀하시지 않았던 것은 함부로 말할 것이 못 되기 때문었을 것이다.

우리 선조인 백사(白沙) 문충공(文忠公 이항복(李恒福))의 문집은 세 질인데, 초판은 정금남(鄭錦南)이 장수로 촉석성(矗石城)을 지키고 있을 때 판각했고, 재판은 이잠와(李潛窩)가 강릉 부사(江陵府使)로 있을 때 판각했고, 삼판은 영남 감영에서 판각했다. 나의 선고 문정공(文貞公 이계조(李啓朝))께서 오천(梧川) 문충공(文忠公 이종성(李宗城))의 교정본(校正本)을 가지고 인쇄에 부치니, 비로소 일통(一統)의 문자(文字)가 갖추어졌다.
정금남은 충무공(忠武公) 정충신(鄭忠信)이고 이잠와는 참판 이명준(李命俊)인데, 다 백사의 문인이었다.

중국 사람이 나에게 옛날 먹 두 자루를 주었는데, 그 먹에는 유미(隃糜)라는 두 글자가 찍혀져 있었다. 상고해 보면, 당(唐)나라 때 고려에서 송연묵(松煙墨)을 중국에 바쳤는데, 쌀가루와 녹교(鹿膠)를 타서 먹을 만들고 그 이름을 유미라고 하였으니, 이는 지리지(地理志)에 보인다. 유미는 한(漢)나라 때의 고을 이름이고 그 지방에서 석묵(石墨)이 생산되었는데, 혹시 먼 지방에서 생산되었다는 뜻을 취하여 유미라고 하였던 것인가. 아니면 이러한 이름이 있어서 함께 행해졌던 것인가. 실로 분변할 수 없는 일이다.

40년 이래로 서울의 사대부들은 다시는 단오선(端午扇)을 사용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염조 대선(廉造大扇)을 숭상하다가 뒤에는 심씨 소선(沈氏小扇)을 숭상하고 또 곡두 소선(曲頭小扇)을 숭상하였다.
가지각색의 비단을 부채에 발라서 부치다가 곧 모두 폐지하고, 또 붉은색을 숭상하다가 얼마 안 가서 폐지하였다. 지금은 전부가 소절선(小切扇)을 사용한다. 한때의 유행은 아무리 작은 물건이라 하더라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진기한 짐승은 옛날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도 있다. 나는 진기한 길짐승은 보지 못했지만 언젠가 해정(海淀)에서 앵무새를 본 적이 있었는데, 등은 푸르고 턱 밑은 붉은빛으로 매우 진기하였다. 돌아와서 유관(游觀) 김공(金公 김흥근(金興根))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였더니, 김공이 깜짝 놀라며, “왜 가져오지 않았는가?” 하였다.
상고하건대, 광주(廣州)는 강남(江南)이라 붉은 앵무새가 많이 서식한다. 또 오색 앵무새도 서식한다 하니, 그것은 혹시 별종이 아닌지.

무소뿔의 무늬는 동일하지 않다. 뿔이 자랄 때 산을 보면 산의 모양이 되고, 물을 보면 물의 모양이 된다. 만력(萬曆) 연간에 상고현(上高縣)에서 범 한 마리를 잡았는데, 무늬가 온통 조수(鳥獸)처럼 생겼다 한다. 그 범은 혹 산수표(山水豹)의 따위로서 무소의 무늬와 같은 것이었던가.

연경 시장의 꽃가게에는 별로 기이한 품종이 없다. 그런데 불수감(佛手柑)이란 나무는 열매가 가지에 주렁주렁 달려 있고, 높이는 한 길에 불과하여 동이에 담길 정도였다. 키가 크고 굵은 품종을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거무스레한 종이에 쓴 금자 도경(金字道經)은 행서도 아니고 해서도 아니면서 글자가 파리대가리처럼 작았는데, 동기창(董其昌)의 글씨였다. 어린 대나무를 원료로 해서 만든 종이에 쓴 《경연일기(經筵日記)》 한 책은 반 행서로 씌어 있으며 겨우 글자 모양을 분변할 수 있는데, 문징명(文徵明)의 글씨였다.
이용면(李龍眠 이공린(李公麟))은 구사(九辭)를 소재로 해서 그림을 그렸고, 당인(唐寅)은 소년행(少年行)을 소재로 해서 그림을 그렸으며, 유송년(劉松年)은 아미산(蛾嵋山)ㆍ여산폭포(廬山瀑布)ㆍ검각잔도(劍閣棧道)를 그렸는데, 매우 훌륭하였다. 이들은 족히 동기창의 글씨, 문징명의 글씨와 더불어 막역한 인연을 맺을 수 있겠다.

화주(華州) 사람 곽완위(郭宛委 곽종창(郭宗昌))가 일찍이 요동(遼東)에서 왜국(倭國)의 장수 풍신수길(豐臣秀吉)의 글씨 한 장을 입수하였는데, 행초(行草)가 고아(古雅)하고 창경(蒼勁)하여 진당(晉唐)의 기풍이 있었다. 이것은 바로 임진년 후에 전적(典籍)을 요구하는 서신이었는데, 인개족(鱗介族)으로서 이처럼 옛것을 좋아했다 한다.
대개 중국 사람은 왜인(倭人)의 재예(才藝)는 사랑하면서도 수족(水族)으로 지목하였으니, 천하의 공론을 알 수 있다.

만력(萬曆) 연간에 내부(內府)에 간직된 벼루들을 꺼내서 전대의 연호를 만력이라는 글자로 새기는 작업을 하였는데, 그중에 있는 벼루 하나는 바로 당나라 문종(文宗)이 우세남(虞世南)에게 하사한 것이었다. 이에 조사정(趙士楨)이, 이 벼루를 그대로 보관해서 전대의 임금과 신하가 서로 더불어 아름답게 지냈던 일을 드러내 보이자고 하였다.
연경 시장에서 벼루를 구입하면 이따금 만력 자가 찍힌 벼루가 많았는데, 이것은 그 내부에서 유출된 것이고 실은 만력 연간에 제작된 벼루가 아니었다. 그러니 그 옛 벼루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던 것이다.
대개 옛사람의 인장이 찍혀 있는 서적은 더욱 값지게 여기는데, 어찌 전대의 연호를 없애 버릴 필요가 있겠는가. 나는 책을 간직할 때 선배들의 도서(圖書)를 없애 버리지 않고 또 나의 도장도 찍지 않는다. 그것은 은밀한 뜻이 있기 때문이다.

성도(成都)에서 밭을 갈던 농부 하나가 설도(薛濤 당(唐)의 여류 시인)의 무덤을 발견하였는데, 채전(彩牋) 수만 장을 빙 둘러서 순장을 하였다고 한다. 설도가 만든 설도전(薛濤牋)이 천년이 지나도록 썩지 않았다는 것은 믿지 못하겠거니와, 옛날에 죽은 사람을 들에 장사한 것은 산에 묏자리를 잡는 방법에 어두웠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밭을 가는 사람들이 무덤 속에 매장된 기물들을 많이 얻게 되었다. 근세에는 장사할 만한 들이 없으므로 명산 대지(名山大地)가 모두 오염되고 있으니, 이 또한 산의 재액이다.

어양산인(漁洋山人 왕사정(王士禎))이 촉(蜀) 땅에 사신 갈 때 검주(劍州)를 지나다가 남문 밖을 보니, 등애묘(鄧艾廟)라는 자그마한 사당이 지어져 있었다. 그것을 본 왕사정은, “강백약(姜伯約 강유(姜維))을 제사 지내지 않고 도리어 등애를 제사 지내는구나.” 하고 탄식하며 그 사당을 헐어 버리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뒤에 당나라 사람 당언겸(唐彦謙)이 읊은 시에서,
소열제(昭烈帝)가 남긴 백성들은 죽어도 오히려 부끄러워하여 / 昭烈遺黎死尙羞
칼을 들어 돌을 찍으면서 항복을 주장한 초주를 원망할 것이다 / 揮刀斫石恨譙周
그런데 어째서 천년 후에 촉나라를 멸망시킨 등애의 사당을 세워서 / 如何千載留遺廟
무후 제갈량(諸葛亮)과 대등하게 파산에 제사를 지내는가 / 血食巴山伴武侯
라고 한 것을 보고, “나보다 앞서 이미 말하였구나.” 하였다.
나는 이 말을 제갈량의 출사표(出師表) 아래에 붙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젊은 시절에 김추사(金秋史 김정희(金正喜))가 공방(貢房)의 소금 되는 되가 매우 고기(古器)라고 하는 말을 들었는데, 듣자마자 잊어버렸다. 갑술년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사옹원(司饔院)에서 오래된 소금 되를 매일 사용하고 있는데, 이로써 5대째 궁중에서 소금 되는 일을 직업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소금 되의 제작 연대를 알 수 없다.” 하였다. 내가 그 되를 가져다가 보았더니, 바로 옛 동준(銅尊)으로서 뚜껑이 있었으며 푸른빛이 밝고 윤기가 나 사람의 얼굴이 비쳤다. 이와 같은 것이 다섯 개이고 그중 하나가 가장 오래된 것인데 사재감(司宰監)의 공인(貢人)에게 있다고 하니, 김추사가 말한 것이 바로 이 소금 되였던 것이다.

진보현(眞寶縣)의 수정사(修定寺)에 있는 석벽(石壁)이 장마 때 물에 씻겨서 떨어지니, 돌이 조각조각 쪼개졌는데 완연히 꽃나무 무늬가 있어 마치 신필(神筆)의 그림이 나오는 듯했다. 연경(燕京) 십삼산(十三山)에 이런 돌이 있으니, 헤아리기 어려운 조화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나라의 국새(國璽)는 명나라에서 준 것인데,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병자년에 청나라에게 빼앗겼다가, 뒤에 자문(咨文) 등에서 모사하여 연경에서 다시 주조(鑄造)하였다. 그런데 계유년의 경복궁(景福宮) 화재 때 그 소재를 몰랐다가 와력(瓦礫) 속에서 찾아내니, 귀뉴(龜紐)는 녹아 버렸으나 인문(印文)은 온전하였다. 그래서 다시 도금하여 예전대로 봉모당(奉謨堂)에 간직하였다. 상감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전국보(傳國寶)는 태조조(太祖朝)에서 교명(敎命) 등에 사용하였으니, 이것 또한 선대의 뜻과 일을 계승하는 것이다.” 하셨다.
을해년 세자 책봉 때 이 국새를 사용하였다.

사람들이 무엇을 취사선택할 때에는 반드시 ‘흥(興)’이니 ‘항(恒)’이니 하니, 김공 수흥(金公壽興)과 김공 수항(金公壽恒) 형제가 동시에 정승에 올랐기 때문이다. 영어(穎漁 김병국(金炳國))가 정승에 오른 뒤 그 백씨인 영초(穎樵 김병학(金炳學))가 말하기를, “우리 집안에서 다시 ‘학(學)’과 ‘국(國)’을 내놓았다.” 하였다.

구양공(歐陽公 구양수(歐陽脩))의 《집고록(集古錄)》 발문에 이르기를, “차(茶)가 옛 사서(史書)에 나타난 것은 위(魏)ㆍ진(晉) 이후부터이다. 당나라 덕종(德宗) 때인 건중(建中) 초 한굉(韓翃)의 사다표(謝茶表)에, ‘오(吳)나라 임금이 어진 이를 예우하자 차[茗]를 차려 놓았다는 소문이 들렸고, 진(晉)나라 신하는 손님을 사랑하여 곧 차를 대접하였다.’ 하였다.” 하였다. 구양공이 인용한 것은 고작 이것이다. 《운곡잡기(雲谷雜記)》에는 《안자춘추(晏子春秋)》에 있는 ‘명채(茗菜)’라는 글자를 인용하였고, 《동약(僮約)》에는 ‘무양다(武陽茶)’라는 말이 있으니, 이것은 위ㆍ진 이전의 일들이다. 그리고 《야객총서(野客叢書)》에는 《주례(周禮)》의 ‘다가(茶檟)’라는 ‘다(茶)’를 말하였으니, 이것은 육경(六經) 중의 일이다.

동아현(東阿縣)의 물은 갖풀을 달이는 데 가장 알맞다. 그러므로 아교(阿膠)라고 하는데, 아교의 명목은 하나뿐이 아니다. 어교(魚膠), 수교(獸膠), 조교(鳥膠), 인교(人膠)가 있는데, 인교는 뱀을 말한다. 난교(鸞膠)는 특히 거문고 줄에 합당하다. 두보(杜甫)의 시에 이르기를, “기린 뿔과 봉새 부리를 세상에서 알지 못하는데, 아교를 고아 거문고 줄 이으면 기묘한 소리가 난다.[麟角鳳觜世莫識 煎膠續絃奇自現]” 하였다.

뇌연(雷淵) 남유용(南有容)은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는데, 항상 비단 도포를 입었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묻자, “좋은 책은 매양 표상금(縹緗錦)으로 표장을 하는 것이니, 나는 장차 나의 글을 보호하려는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이것은 진(晉)나라의 학륭(郝隆)이 햇볕에 배를 드러내 놓은 채, ‘뱃속의 책을 말린다.’고 한 고사와 같은 뜻이다.

보이차(普洱茶)는 운남성(雲南省)에서 생산된다. 몇 가지 종류가 있으니, 목방(木邦)에서 생산되는 목방차(木邦茶)와 보이(普洱)에서 생산되는 보이차가 그것이다. 목방차는 덩어리를 만든 다음 보이차라는 이름을 붙여서 판매하는데, 그 지역이 서로 가깝기 때문이다.
보이차의 진품(珍品)에는 모첨(毛尖), 아다(芽茶), 여아(女兒) 등의 이름이 있다. 모첨은 곡우(穀雨) 전에 따는 것이니 덩어리로 만들지 않고, 아다는 약간 자라면 따서 덩어리로 만들되 2냥(兩) 또는 4냥을 기준으로 삼는데, 운남성 사람들이 중하게 여긴다. 여아도 아다의 종류인데 곡우 뒤에 따서 1근(觔)에서 10근까지를 한 덩어리로 만든다. 이민족의 처녀들이 차를 은화(銀貨)로 바꾸어 모아서 시집 밑천을 삼기 때문에 여아차라고 이름한 것이다.
그 나머지는 조보엽(粗普葉)이라 하는데, 모두 운남성 안의 곳곳에서 판매한다. 그리고 거친 것을 취하여 고약처럼 고아서 떡을 만드는데, 똑같은 모양으로 찍어 내어 선물용으로 준비한다. 또한 예주차(蕊珠茶)라는 것이 있는데, 열병(熱病)을 다스릴 수 있으니 항주(杭州)에서 생산되는 용정차(龍井茶)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향이 너무 강렬하고 차성(茶性)이 또 극히 차가우며 맛이 쓴 쪽에 가까워서, 용정차의 중화(中和)한 기운이 없다. 그 밖에는 회화나무와 버드나무의 겨우살이를 따서 차 대신 달여 마신다.
내가 두 번째 연경에 들어갔을 때 찻가게의 사람에게 자세히 들었는데, 상품(上品)은 용정차이고, 그다음은 덩어리를 짓지 않은 보이차이며, 또 그다음은 2냥 또는 4냥으로 덩어리를 지은 것이다. 그 밖의 1근에서 10근까지를 한 덩어리로 만든 것이나 고약처럼 고아서 만든 것들은 모두 논할 것이 못 된다고 하였다.

도장 파는 돌이라면 매양 중국 복건성(福建省)의 수산(壽山)에서 생산되는 돌을 꼽는다. 중국 사람들은 대부분 수산의 돌을 선물로 준다. 그것은 중국 절강성(浙江省) 청전현(靑田縣)에서 생산되는 돌과 수산에서 생산되는 돌이 진귀(珍貴)하기 때문이다. 이들 돌은 값이 가장 높아서 구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세상에 나도는 도장 돌들은 반드시 수산의 돌이라 칭하므로, 청전의 돌은 보지 못하겠다.

연경(燕京)의 조신(朝臣)들 사이에 성행하고 있는 필체는 철보(鐵保)의 필체이고, 석각(石刻)과 묵본(墨本)은 모두 가짜이다.
찰례부(察禮部)에서 나에게 자그마한 글씨 한 폭을 선물하여 크게 생색을 내기에 나는 마음속으로 이상하게 여기고 얼른 그 글씨 획을 보았더니 틀림없이 말린 물고기 뼈와 같았는데, 자세히 살펴본즉 마치 강유(剛柔)가 있는 연철(鍊鐵)과 같았으니 참으로 천연적으로 얻어진 심획(心畫)이었다.
한 역원(驛員)이 이 글씨를 빌려서 구들 위에 걸어 놓자 청나라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구경하고 은자(銀子) 50냥으로 사기를 원하였으니, 중국에서 서화를 중하게 여기는 것은 거개 이와 같았다.

최공 국보(崔公國輔)는 문사(文士)였는데 언젠가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오늘 아무 상공(相公)을 뵈었더니, 막 한 재상과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대화 내용은 모두 서책의 제목과 옛사람의 이름에 관한 것이었네. 나는 그것을 한바탕 들었지만 무슨 책이고 어떤 사람인지를 전혀 모르겠네. 그대는 혹시 알겠는가. 나는 문자를 약간 이해하나 평생 해 온 공부는 경사(經史)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는데, 지금 일자무식이 되었으니 그것은 무엇 때문이겠는가. 이것은 다름이 아닐세. 근일에 고증학(考證學)이 성행하여 말하는 대상이 패관 총서(稗官叢書)와 명말 청초(明末淸初)의 인물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세. 후생들의 학문이 병들었네.” 하였다.
이 말은 아닌 게 아니라 세상을 경각시키는 말이다.

소동파(蘇東坡)의 시에, “일엽편주는 어느 곳으로 돌아가는가, 집이 강남의 단풍잎 속 마을에 있다.[扁舟一棹歸何處 家在江南黃葉村]”라는 시구가 있는데,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러다가 뒤에 내가 연경에 가서 보니 물가가 온통 누런 단풍이었는데, 이것은 바로 백양목(白楊木)이었다. 남경(南京)의 풍경도 아마 그러했을 것이다. ‘유항(柳巷)’이란 뜻도 대충 이해가 간다. 마을 앞에는 반드시 항구(巷溝)가 있어 버드나무를 심었을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문전에 버드나무 심어 깊이 골을 이루었다.[門前種柳深成巷]”라는 것이다.

내가 속리산(俗離山)에 들어갔다가 송면촌(松面村)을 지나고 화양동(華陽洞)을 거쳐서 돌아왔는데, 호서(湖西)에서 살기 좋은 터는 바로 송면촌이었다. 속리산이 뒤를 막아 주고 화양동이 수구(水口)가 되었으니, 평상시에나 난리 시에나 살 만한 곳이었다. 그다음은 초평(草坪)이었는데, 지나는 곳마다 대추나무가 그들먹하였다. 보은(報恩) 한 경내에서 매년 가을마다 흥판(興販)을 하는데 거래량이 7000석이라 하니, 그 밖의 것은 미루어 알 수 있다.

지부지기[瓦松]는 흔히 고옥(古屋)에서 난다. 옛날 사람이, ‘사환가(仕宦家)에서 난다.’고 한 말은 잘못이다. 여항(閭巷)에는 고옥이 없으므로 나지 않는다. 오직 사우(祠宇)에만은 나니, 사우는 항상 수리를 하지 않아 고옥이 된 때문에 그렇다.

차 이름은 하나뿐이 아니다. 일본 차에도 맛 좋은 차가 있으니, 그중에서도 능삼(綾森), 응조(鷹爪), 유로(柳露), 매로(梅露), 국로(菊露), 초적(初摘), 백문(白文), 명석(明昔), 명월(明月), 청풍(淸風), 박홍(薄紅), 엽로(葉老), 낙우(樂友), 백발(白髮), 남산수(南山壽) 등의 이름을 가진 차가 가장 좋다.

운석(雲石 조인영(趙寅永)) 상공(相公)이 바둑을 잘 두는 어떤 참판과 종종 대국을 하는데, 대국을 할 때마다 상공이 몇 집씩을 이겼다. 하루는 나라 안에서 바둑 잘 두기로 유명한 한 명관(名官)이 찾아와 뵈었다. 상공이 앞서 대국하던 자더러 그 바둑 솜씨의 고하를 시험해 보게 하였더니, 뒤에 온 자는 그 솜씨도 물어보지 않고 자신을 낮추어 치선(置先)을 하였다. 상공이 깜짝 놀라며 말하기를, “나는 영공(令公)과 바둑을 둘 때 항상 굽혀 치선을 하는 사람인데, 영공은 어째서 저분한테 스스로 굽히오?” 하니, 명관이, “본래 우리 두 사람은 이렇게 둡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상공은 비로소 깨닫고 앞서 대국하던 자를 나무라기를, “대감께서 잘못하셨습니다. 어째서 노부(老夫)를 그처럼 속일 수 있단 말이오?” 하였다. 그리고 상공은 그 참판과 평생 다시는 대국을 하지 않았다.
춘산(春山 김홍근(金弘根)) 상공이 어떤 고수와 대국을 하였는데, 계속 졌다. 그러자 상공이 바둑판을 밀쳐놓고 말하기를, “그대의 바둑 솜씨가 뛰어난 것은 온 나라 사람이 다 아는 바이네. 나를 계속 지게 하면 그대에게 무슨 빛이 나는가. 실로 기가(棋家)의 심심풀이하는 법이 아닐세.”라고 하였으며, 그 뒤로 다시는 그와 더불어 대국을 하지 않았다.
두 상공의 규모는 비록 다르나, 선배들의 일로서 흠모할 만하다.

몽오(夢梧) 김종수(金鍾秀)가 남해(南海)에 유배되었을 때 시를 짓기를,
귤나무에는 바람 불고 대숲에는 비 떨어지는데 / 橘柚風來竹雨零
가시울타리 쳐진 깊숙한 곳엔 등잔불빛 푸르네 / 棘籬深處一燈靑
하늘과 잇닿은 깊은 물 방향을 흐리게 하기에 / 連天積水迷方所
밤이 되면 북두칠성을 길이 우러러 보옵니다 / 夜來長瞻北斗星
하였다. 이 시가 궁중으로 흘러들어 가 임금을 감동시켜, 몽오는 유배에서 풀려 돌아왔다. 옛날 사람들은 시를 가지고 임금을 감동시킨 일이 많았다.

신사년에 나는 처음으로 중화(中和)에 유배되었는데, 주인집 벽을 보니 시가 적혀 있기를,
창문은 서령의 천추에 쌓인 눈빛을 머금고 / 窓含西嶺千秋雪
문전엔 동오의 만리에서 온 배를 정박시켰다 / 門泊東吳萬里船
하였다. 이에 나는 깜짝 놀라며, “나는 반드시 유배지를 옮기게 될 것이다.” 하였는데, 얼마 안 가서 거제(巨濟)로 옮겨졌다. 거제로 갈 때 안산(安山) 지경을 경유하였는데, 꿈에 김영초(金穎樵 김병학(金炳學))를 노상에서 만났다. 그 이튿날 상국(相國)의 묘소를 지나게 되었고 이날은 바로 상공의 대기일(大朞日)이었으며 또 추석이어서 막 다례(茶禮)를 행하고 있었으니, 매우 기이한 일이었다.

세속에서 남자를 사나해(似羅海 사나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읍(邑)의 큰 것을 말한다. 통영(統營)을 지날 때 들으니 여자를 가사나해(假似羅海 가시나이)라고 불렀다.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이 여병(女兵)을 이용해서 왜적을 물리쳤는데, 이 때문에 일상 용어로 쓰이게 되었다.

신발 장수에 대한 호칭의 유래는 송경(松京)의 두문동(杜門洞)과 정병가(正兵家)에서 신발 장수를 불러 대가를 바치라고 한 데서 나왔다. 이 때문에 ‘값바치[價捧上赤]’라 부른다.

정묘조(正廟朝)에 각신(閣臣)이 사사로이 임금을 만났을 때 김공 종수(金公鍾秀)가 윤공 행임(尹公行恁)을 향하여 ‘소[牛]’라고 하니, 윤공은 김공을 향하여 ‘도깨비[魍魎子]’라 하였다. 정조가 변명하도록 하자 윤공이, “사서(史書)에 ‘윤탁을 「소」라고 하지 말라.[無以尹鐸爲少]’ 하였고, 역서(曆書)에 ‘도깨비는 김[甲子金]’이라 하였으니, 신은 소가 아니고 김종수는 도깨비입니다.” 하니, 듣는 자들이 포복절도하였다.

양문(梁門)의 어느 대신 하나가 책을 많이 모았다가 만년에 친지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니, 그는 책은 원래 정해진 주인이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책을 받은 자가 수권(首卷)의 등쪽에 춘도(春圖)가 붙어 있는 것을 보고 그 까닭을 물으니, 그 대신은, “그것은 바로 불을 피하는 법술이다.” 하였다 한다.

만력 황제(萬曆皇帝 명(明)의 신종(神宗))는 광운지보(廣運之寶)를 매번 책의 첫머리에 찍었다. 을해년 내가 연경에 들어갔을 때 송가장(宋家莊)에서 《송원강목(宋元綱目)》 1질을 보고는 매우 귀중하게 생각하였다. 뒤에 두실(斗室 심상규(沈象奎))의 집에서 흘러나온 구경 칠판(九經漆板)에도 이 광운지보가 찍혀 있었다. 또 한 향촌(鄕村)에서 본 대판(大板)의 《사문유취(事文類聚)》 1질은 당세에 희귀한 보배였다.

판서 김세호(金世鎬)의 향장(鄕莊)은 나의 집과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그 집에서 당판(唐板)의 《강목(綱目)》 1질을 보았는데, 이것은 바로 10세 동안 전해 내려온 것이다. 임진왜란 때 왜놈들이 마판(馬板)으로 삼아 그 흔적이 많이 있으나, 조금도 결락된 부분이 없이 완전하다. 나는 평소에 이런 말을 들었었는데 오늘날 보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하였다.

경산(經山 정원용(鄭元容)) 상공(相公)은 만년에 본인이 지어 놓은 시문을 보기 좋아하였다. 그 까닭을 우러러 여쭈었더니 대답하기를, “지어 놓은 시문은 보기가 매우 쉬우니, 마음이 수고롭지 않음일세.”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보통으로 들었는데, 노경에는 과연 낯선 글을 보는 것이 눈에 익은 글을 보는 것만 못하였다. 그것은 소일을 위주로 하기 때문이다.

비우어(肥愚魚)는 서남해에서 생산되는데 통칭 청어(靑魚)라 한다. 서수라(西水羅)는 동해에 가까운데 더러 청어가 잡힌다. 그 길이는 한 자 남짓하고 너비는 대여섯 치 되며 그 색깔은 짙푸른데 구우면 흘러나온 기름이 불을 끌 정도이고 맛은 보통이 아니다.
내가 홍원(洪原) 수령으로 나가서 고을을 순행할 때 북어별(北魚鱉)이 비어(肥魚) 속에 나타난 것을 보고 사람을 시켜서 급히 잡아 오게 하였더니, 어부가 벌써 바다에 놓아 버렸다. 보고도 못 먹은 것은 정(鄭)나라 자산(子産)이 선물받은 물고기를 연못에 놓아준 것과는 다르나, 어부가 폐단을 막은 것은 제대로 된 일이다.

부(蚨 물나비)는 물가 부들에서 기생하는 곤충인데, 그 곤충은 헤어졌다가 다시 합하고 함께 부들 위에 붙어 있다.
청동(靑銅 돈)을 부라고 하는 것은 그 쌓인 청동이 흩어졌다가 다시 들어오게 하려는 뜻에서이다. 옛날 한 부자가 청동 만 전을 표시를 하여 흩었는데 10년이 채 안 되어서 전액이 다시 들어왔다 하니, 아마 이것을 이름인가.

숭례문(崇禮門)이란 현판은 양녕대군(讓寧大君)의 글씨라고 세상에서 전하는데, 이것은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나온 말이다.
연전에 남대문을 중수할 때 양녕대군의 사손(祀孫)인 이승보(李承輔) 대감이 윤성진(尹成鎭) 대감과 함께 문루(門樓)에 올라가서 판각의 개색한 것을 보았더니, 후판 대서(後板大書)는 공조 판서 유진동(柳辰仝)의 글씨였다 한다. 아마 이것은 옛날 화재가 난 뒤에 다시 쓴 것인가 싶다.
유진동은 대를 잘 그렸으므로 호를 죽당(竹堂)이라 하였다. 유진동이 아이 때 그 부형이 그림을 못 그리게 하니 눈물로 댓잎을 그렸다 한다. 그의 신도비는 남약천(南藥泉 남구만(南九萬))이 찬하였다.

함경도 감영 안채의 아랫방은 신령스러워 영험이 많다고 한다. 옛날에 판서 이희갑(李羲甲)이 함경 감사로 있을 때 두 어린 딸이 일시에 함께 그 방으로 들어가서 목을 매어 죽었다. 이후로는 그 신을 높이 받들어 무슨 물건이든 들어오기만 하면 반드시 먼저 이 방의 신에게 올렸다.
판서 김세균(金世均)이 함경 감사가 되었는데, 그 부인은 바로 판서 이희갑의 질녀였다. 그 부인은 감사를 따라 내려간 뒤에 그 신위를 한 번도 돌보지 않았다. 그래서 이해에 병으로 눕게 되었는데, 어떤 두 여자가 부인의 좌우에 눕는 것이었다. 부인이, “웬 사람이냐?” 하고 말을 꺼내니, 두 여자는 일시에 소리를 내어 말하기를, “우리는 바로 사촌 간인데, 다른 사람이 받드는 곳을 그대는 못 본 체하니 무엇 때문인가?” 하였다. 그러자 부인이, “영렬(營列)은 폐지하지 않고 있는데, 어찌 돌보지 않는다고 하는가?” 하니, 두 여자가, “그것은 주장하는 사람이 있으니, 우리는 간여할 수 없다.” 하였다. 그래서 의복(衣服)과 자장(資粧) 등속을 푸짐하게 마련하여 두 보따리를 그 신위의 곁에 놓았더니, 다시는 별일이 없었고 부인의 병도 나았다.
이에 앞서 내가 함경 감영에 있을 때 부인이 혼자 마루 머리에 앉아 있었는데, 곶감 한 개가 앞에 던져졌다. 마음속으로 괴상히 여기고 사람을 시켜서 지켜보게 하고 조금 후에 아랫방에 들어가 보았더니 곶감이 과연 한 개가 비었다. 그래서 비로소 영험이 있음을 깨닫고 이후로는 후하게 받들었더니 다시는 다른 일이 없었다.

옛날 심일송(沈一松 심희수(沈喜壽))은 이인(異人)인 첩(妾)을 얻어 그의 내조를 많이 입었다. 이 이야기는 야사에 실려 있다.
판서 조영국(趙榮國)도 이인을 얻어 첩으로 삼았다. 그런데 단지 전설만 있고 기록은 없으니, 유감이다.

인조조(仁祖朝)에 연양(延陽 이귀(李貴))의 사당을 짓도록 명하자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金瑬))이 아뢰기를, “신들 존사(尊師)의 사당은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는데 먼저 문생(門生)의 사당을 세우니 마음이 불안합니다.” 하였다. 그러자 인조는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선생의 사당과 서천(西川) 정공(鄭公)의 사당을 짓도록 명하였는데, 이 두 사우(祠宇)는 지금도 존재한다. 백사 선생의 사당은 7세에 이르도록 전해 오다가 뒤에 셋집이 되었는데, 내가 되찾아서 보수하였다.
전에 세들어 살던 사람은 바로 구씨(具氏) 집안이었으니, 구(具) 재상과 공주(公主)의 사당을 함께 받든 지 오래였기 때문에 고적(古蹟)이 많다. 아교풀에 갠 금박 가루로 송학(松鶴)을 그린 병풍 두 폭이 있는데, 이것은 안평대군(安平大君)이 그린 것으로서 공주에게 하사된 것이다. 그 밖에 제기(祭器)가 있는데, 도자기ㆍ접시ㆍ숟가락 등 수십 개로서 큰 것은 주척(周尺)으로 2척 남짓 되었다. 다식판(茶食板)도 크고 작은 것이 몇 개 있는데 모두 오래된 물건이었다. 임금이 거둥할 때 쓰는 평상(平床)도 한 개 있었는데, 근일에 없어졌다.

서천(西川)의 옛집은 회현동(會賢洞)에 있는데, 여러 번 집주인이 바뀌었다가 지금은 사손(祀孫)이 들어가서 살고 있으며 사우(祠宇)가 우뚝 솟아 있다. ‘회현동의 정씨 가문’이라는 칭호는 서천에게서 시작된 것이다.

정동(貞洞)의 판서 오취선(吳取善)의 집 문밖에 있는 우물은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옛날 어떤 사람이 그 우물에서 아홉 마리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었는데, 그 뒤로는 집주인이 자주 바뀌고 그 집에서 자주 과거에 오르는 자가 나왔다. 그 수가 거의 아홉에 차자 다시는 과거에 오르는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은 강 합하(姜閤下)의 집이 되었다.

환재(瓛齋) 박공(朴公 박규수(朴珪壽))은 농담을 잘했다. 증광시(增廣試)를 치른 뒤에 나에게 농담하기를, “어떤 사람이 용 서른세 마리가 마구간에 있는 꿈을 꾸고 이해 증광 초시의 합격을 마음속으로 자부하였다네. 그런데 회시(會試) 때에 이르러서는 매일 용 한 마리가 끌려가는 꿈을 꾸었다는구먼. 회시장에 들어가는 날에는 단지 한 마리 용만 남았더라네. 그러다가 회시장 안에서 책 상자에 의지하여 한 마리 용마저 끝내 끌려가는 꿈을 꾸고 그 사람은 탄식해 마지않았다는구먼.” 하였다. 이 말은 《신제해(新齊諧)》에 증보할 만하다.

담배는 여송국(呂宋國)에서 나왔다. 이 사실은 필기(筆記)에서 많이 볼 수 있으나, 그 품종에 대한 기록은 보지 못하겠다. 연전에 왜선(倭船)에 들어가서 여송국의 담배를 보았는데, 품종이 우리나라 영남의 담배와 같고 너무 독해서 피울 수가 없었으니, 그 품종은 분명 이것이 유출된 것이다.

자칭 예를 안다고 하는 호중(湖中)의 한 사대부 집안이 먼저 외간상(外艱喪)을 만나고 뒤에 내간상(內艱喪)을 만났는데, 상제가 곡을 할 때 ‘비고(妣考)’라고 소리를 냈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었더니, 그 상제가 답하기를, “외간상에 ‘애고(哀考)’라고 하는데 내간상에 어찌 비(妣)를 칭하지 않을 수 있겠소.” 하였다.
요즘 예를 안다는 것은 모두 이와 같으니, 매우 가소롭다.

내가 아이 적에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 하나를 보았다. 성은 이(李)이고 호는 기야(箕埜)였는데, 지극히 연로하고 또 술도 잘 마셨다. 그는 과장(科場)에 들어가서 남의 시권(試券)을 써 주기도 하였는데, 흥이 나면 중간에 매화도 그리고 대나무도 그려서 남을 낭패하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과장에 들어가면 술을 금하였으니,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이 증상이 발하였다. 사람들은 그를 ‘광생(狂生)’이라 불렀다.

단농 상서(丹農尙書)가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있을 때, 최군 희진(崔君喜鎭)이 그 막중(幕中)에 있으면서 밭 사이에서 고려자기 하나를 얻었다. 높이는 한 자쯤 되고 너비도 그와 같았는데 고색이 창연하여 매우 보배스러웠다. 이 자기를 규재(圭齋) 남 태사(南太史 남병철(南秉哲))에게 바치니, 남 태사 또한 애지중지하였다.
남공이 죽은 뒤에 이 자기는 하인들의 거처에서 가래침을 뱉는 그릇이 되었으며 반은 이미 떨어져 나갔다. 최군이 그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자주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였는데, 이것은 ‘사람이 죽으면 거문고도 따라서 없어진다’라는 것이다. 중국 사람은, “고려의 사대부와 자기는 가짜가 없다.”고 말한다. 이 말은 전인들의 필기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대장(大將) 이완식(李完植)이 청소(晴沼) 조공(趙公 조용화(趙容和))에게 와서 조문을 하는데 그 집이 워낙 좁아서 갓이 대질려 부서지고 모자만 남았다. 이공은 갓이 부서진 것을 모르는 체하면서 조문하는 일을 예식대로 행하고 수작하는 데서도 조금도 언짢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조문을 마치고 돌아올 때 군교(軍校) 무리가 새 갓을 이미 대령하고 있었는데, 그는 또한 돌아보지 않은 채 받아 썼을 뿐이다. 여기에서 장신(將臣)의 큰 기량을 볼 수 있고, 또한 영문(營門)에 모든 기구가 갖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조공은 항상 이공을 칭찬해 마지않았다.

심두실(沈斗室 심상규(沈象奎))이 이름을 지을 때 정조가 규(奎) 자를 하사하고 자를 치교(穉敎)라고 하였으니, 곧 규장각 대교(奎章閣待敎)의 뜻이 담긴 것이다.
심암(心菴 조두순(趙斗淳))이 항상 심공의 일을 말하기를, “이 어른은 젊을 때 남숙 초도포(藍熟綃道袍)에 부죽립(付竹笠)을 쓰고 오려마(烏驪馬)에 걸터앉아, 화려한 안장이 번쩍번쩍 빛을 내었고 하인 10여 명이 줄줄이 따르면서 종로거리를 지나갔다. 이때 이 어른의 벼슬은 이조 참판에 직제학(直提學)이었다.” 하였다. 심암은 이렇게 말하면서 몹시 부러워하였는데, 그는 직제학을 지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나는 자주 이 말을 들었기 때문에 일부러, “합하께서는 무엇 때문에 직제학을 지내지 못하셨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조공이 문득 정색을 하며, “괴이한 일이지, 괴이한 일이지.” 하였다. 선배들은 벼슬에 미련을 갖는 것이 이와 같았다.

임오년 가을에 나는 중화(中和)로부터 거제(巨濟)로 향하면서 안산점(安山店)에서 잤는데, 이날 밤 꿈에 걸어서 논밭 사이의 길에 당도하니 한 대신(大臣)이 앞에 와서 읍을 하는 것이었다.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바로 영초(穎樵 김병학(金炳學)) 상공(相公)이었으며 흰 도포에 흰 띠를 띠었는데 안색이 초췌하였다. 내가 깜짝 놀라며, “합하를 여기에서 만나게 된 것은 참으로 뜻밖입니다.” 하니, 공도 이와 같이 답하였다.
이튿날 지나가는 길이 완연히 꿈에서 지나던 곳과 같았다. 앞 언덕을 바라보니 산소 하나가 있었는데, 석물 모습이 대신의 묘소와 같았다. 막 다례(茶禮)를 행하고 있기에 물어보았더니, 바로 김공의 산소였다. 친구와 이처럼 의기가 투합하다니, 매우 이상스런 일이다. 때는 추석날이었다.

홍공(洪公) 아무개는 병자호란 때 종사관으로 순절하면서 편지를 써 말 머리에 묶어서 집에 보냈는데, 뒤에 영험이 종종 집에 나타나서 어버이 봉양하는 예절을 항상 부인에게 가르쳐 주는가 하면 그 어버이를 모시고 평상시처럼 수작을 하였다. 모친이 그 형체를 보기를 원하니, 누차 거절하다가 끝내는 거울에 잠깐 모습을 드러냈다. 모친이 병을 앓자, 그의 백씨에게 말하기를, “금번 병환은 회생할 수 없으니, 속히 장례 준비를 하십시오.” 하였다. 그리고 상을 당한 뒤에는 백씨가 곡을 하면 그 곁에서 또 곡소리를 내어 삼년상을 마쳤다. 그의 아들이 과거에 합격하여 패(牌 합격증서)를 받아 사당에 들어가니, 사당문이 저절로 열리면서 ‘신은(新恩)’이라고 부르는 소리가 세 번 났으며, 그때부터 아무런 영향(影響)이 없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홍기당(洪祁堂 홍순목(洪淳穆))에게서 자세히 들었다.

수석(修石) 정기선(鄭基善)이 남한 유수(南漢留守)로 있을 때 큰 범이 밤에 아헌(衙軒)에 들어와 유수가 앉는 곳에 앉았는데, 며칠 안 가서 대부인(大夫人)이 병으로 영중(營中)에서 죽었다.
송석(松石) 김학성(金學性)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 부친의 병환이 위중하자 여러 손님들과 마루 위에서 밤을 지샜는데, 큰 구렁이가 들보에서 떨어져 사람들이 모두 아연실색하였다. 그 뒤 그 부친의 병환이 점점 나아서 임기를 채우고 돌아왔다.
두 분의 일은 길흉이 같지 않으니, 모든 일은 사람 운세의 통색(通塞)에 매여 있고 그 재앙에 매여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관내를 순시하는 감사에게 제공되는 음식은 경기가 다른 도보다 으뜸이다. 경기 고을 수령들의 내찬(內饌)은 모두 당일에 내려 보내는데, 세도가의 문객이 주인집의 찬을 얻어먹기 때문에 이와 같이 한 것이다.
선대인께서는 경기 감사에서 경상 감사로 옮겨 가셨는데, 관내를 순시하고 돌아오실 때마다 경기의 일을 말씀하셨다.
내가 전라 감사로 있을 때 관내를 순시하면서 보니, 모든 규모가 경기 관내와 못한 점이 없었으며 사치풍의 성행이 경기 고을과 서로 백중을 이루었다.

영남 감영의 보선고(補饍庫)는 한 영내에서 소중하게 여기므로, 감사가 아니면 얻어먹을 수 없다. 그리고 오직 맏아들만이 얻어먹게 되고, 이 밖에는 비록 부형이라 하더라도 얻어먹을 수 없다. 감영의 규례가 예전부터 이와 같았다.
나는 일찍이 한 번 얻어먹은 적이 있다. 그런데 근자에는 이 보선고가 폐지되고 일반 주방에서 제공하기 때문에 감영의 모양새가 쓸쓸하다. 고속(庫屬)이 넉넉하지 못한 것 또한 유감스러운 일이다.
도내의 역마(驛馬)는 단지 감사의 부인에 대해서만 거행(擧行)하고 기타에 대해서는 거행하지 않으니, 위의 일과 유사하다.

춘천(春川) 실운(室雲)에 있는 감로수(甘露樹)는 하지(夏至) 때에 꿀 같은 즙이 나오는데, 그것을 먹으면 다리 힘이 튼튼해진다고 한다. 동협(東峽) 사람들은 그 효과를 많이 본다. 나무 이름은 속칭 색수리(塞水里)이다. 《사기(史記)》를 상고해 보면, “정경(鄭敬)이 군(郡)의 공조 도위(工曹都尉)가 되었을 때 청사 앞에 감로(甘露) 같은 이슬이 맺힌 회화나무가 있었다. 그러자 이속(吏屬)들은 모두, ‘명부(明府)의 선정의 소치이다.’ 하였는데, 정경만은, ‘명부의 정사가 어떻게 감로를 내리게 할 수 있겠는가. 다만 나무의 즙일 뿐이다.’ 하였다.” 하였으니, 혹시 이와 같은 것인가.

탐라(耽羅)의 바다 속에 옥두지(玉杜支 옥으로 된 뒤주)가 있는데, 전설에, ‘쌀 한 줌을 던지면 문득 가득 찬다.’ 하고, 또 ‘백씨(白氏) 성을 가진 목사(牧使)가 건져 낸다.’고 한다.
그런데 근일에 백낙연(白樂淵)이 탐라 목사가 되어 수군(水軍)을 많이 동원해서 줄로 그 뒤주의 다리 부분을 묶어서 들어 올리려고 할 때에 풍랑이 크게 일어났으므로 역부(役夫)들이 도피하였다 한다. 그 물건은 필시 시기를 기다리는 물건일 것이리라.

중국 사람 주만청(周萬淸)은 초서를 잘 썼다. 호산(壺山) 박 상공(朴相公)이 소시에 주만청의 초서 한 폭을 얻어 벽에 걸어 놓았다. 그런데 하루는 김추사(金秋史)가 갑자기 와서 주인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벽을 보더니, “여기 있었구나. 여기 있었구나.” 하고는 곧 서폭을 소매 속에 넣어 가지고 가 버렸다. 뒤에 박공이 또 한 폭을 벽에 걸어 놓았는데, 내가 박공을 뵈려고 가서 문에 들어서면서 크게 놀라 그 서폭을 바라보았다. 이에 박공은 웃으며 김추사의 일을 이야기하면서, “그대의 성벽도 알 만하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나는 감히 그 서폭을 달라고 청하지 못하였다. 뒤에 공의 성복(成服)하는 날 내가 가서 참석하였는데, 그 서폭이 아직도 벽에 걸려 있었다. 그래서 나는 비로소 그 서폭을 소매 속에 넣어 가지고 돌아왔다. 흘러간 세월에 대한 감회가 이와 같다.

김추사가 임종 시에 벽에 있는 자그마한 난초 그림 한 폭을 가리키며, “내가 죽은 뒤에는 사람들이 이 화폭이 보배라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하였으니, 사람의 기벽(嗜癖)은 임종 시에도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일본 사람은 고려자기를 좋아하여 값을 아끼지 않는다. 갑신년에 개성 사람 하나가 고총(古塚)을 파 들어가다가 왕릉에서 옥대(玉帶)를 발굴하고 또 운학(雲鶴)이 그려진 자기 반상기 한 벌을 발굴하였는데, 값이 700냥이나 나갔다. 그때는 원(元)나라 장인(匠人)들이 왕래했기 때문에 그 만듦새가 여느 것과는 달랐다. 사람들은 더러운 기운이 깊이 스며 있는 것조차 모르고 좌석 주변에 놓아두기를 좋아하는데, 종래의 중국 사람들의 기록에서는 이를 비난한 경우가 많았다.

홍기당(洪祁堂 홍순목(洪淳穆))은 집안의 변고를 당하여 음식을 먹지 못한 채 서거하였는데, 임종 시에 시를 읊기를,
육십구 년간의 일 만사가 헛된 것 / 六十九年萬事空
인간의 한 꿈은 비와 바람일 뿐 / 人間一夢雨兼風
천추에 청산의 뼈를 누가 알겠는가 / 千秋誰識靑山骨
백일은 무궁히 붉은 마음 비춰주리 / 白日無窮照赤衷
하였으니, 허 급제(許及第) 집안의 일과 동일하다.

을유년 봄에 문후(問候)하는 반열에 달려가서 보니, 삼정승과 호조 및 선혜청의 당상관들이 마치 경사를 만난 사람들처럼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가만히 들어 보았더니, 하는 말들은 바로 200석의 쌀을 실은 배가 경강(京江)에 와서 정박하였으므로 반록(頒祿)하는 데 보탬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나라의 재정이 곤궁함을 알 수 있었다.

노소재(盧蘇齋 노수신(盧守愼))의 묘가 상주(尙州)에 있는데, 사태로 떨어져 나가서 봉분이 남은 것이 없다. 그래서 올 병자년에 이장을 하였다. 이장을 할 때에 관을 열어 보니, 교대(絞帶)가 새 것과 같고 얼굴빛이 산 사람과 같았다. 300여 년이나 되었는데도 이와 같은 일이 있으니, 지리(地理)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부마도위(駙馬都尉) 신익성(申翊聖)이 옥관자가 붙은 망건을 벗어서 공주 앞에 던지면서, “나는 이 원수 놈의 물건 때문에 대제학(大提學)을 하지 못한다.” 하였다. 이 말이 궁중으로 흘러 들어가 선조가 신공더러 대제학에 합당한 사람을 추천하도록 하였다. 신공이 합당한 사람을 추천하자 선조가 말하기를, “그대가 대제학을 추천하였으니, 그대 자신이 대제학이 된 것이나 다름없느니라.” 하였다.
금상 경진년에 왕세자에 대한 송두문(送痘文)을 나더러 지어 올리게 하였다. 나는 대제학이 아니므로 지을 수 없다고 사양하였으나, 결국 짓는 일을 면하지 못하였다.
전후의 일이 비록 다르나, 부끄럽기는 마찬가지이다.

영성군(靈城君) 박공(朴公 박문수(朴文秀))이 길에서 이조 판서를 만나 묻기를, “오늘은 어떤 벼슬자리를 냈소?” 하니, “문임(文任 홍문관이나 예문관의 제학) 자리를 냈소이다.” 하였다. 이에 “누굽니까?” 하니, “아무아무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박공은 손을 들어서, “그런 인물과 같군요.”라고 하였다. 이조 판서는 크게 화를 내고 오천공(梧川公 이종성(李宗城))을 찾아뵙고 그 이야기를 하니, 오천공이 말하기를 “그런 인물이란 세상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것이니, 영성의 말은 반드시 이런 뜻일 것이오.” 하였다.

이일학(二日瘧 이틀거리)을 치료하는 신기한 비방을 터득한 사람이 있다. 살아 있는 대귀(大龜)의 등 위에 구멍 셋을 뚫고 구멍마다 석웅황(石雄黃) 3돈쭝을 넣은 다음 짚으로 싸고 진흙을 발라서 약성이 남아 있도록 불에 익힌다. 이것을 학질을 앓는 자가 그 병을 앓는 날 이른 아침에 1돈쭝씩 소주와 같이 먹으면, 세 차례를 지나지 않아서 곧 낫는다. -대귀는 세속에서, 아주 큰 남생이를 일컫는 말이다.

안동 김씨(安東金氏) 가문에 정승이 가장 많다. 처음에는 퇴우당(退憂堂 김수흥(金壽興))과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형제가 함께 상부(相府)에 있었고, 뒤에는 영초(穎樵 김병학(金炳學))와 영어(穎漁 김병국(金炳國)) 형제가 함께 상부에 있었으며, 지금은 김공 병덕(金公炳德)과 김공 병시(金公炳始) 종형제가 함께 상부에 있다.

문충공(文忠公) 김재찬(金載瓚)이 사제(私第)에 있을 때 하루는 소패(召牌)를 내었는데, 호조 낭관이 와서 뜰에 서자 분부하기를, “나의 약현(藥峴) 집 행랑채가 다 무너졌으니 속히 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그래서 며칠 안 가서 다 수리하였으니, 옛날 법에 대신의 집은 담부(淡府)이기 때문이다. 근일에는 이 법이 없는데, 상부(相府)의 비중이 가벼워진 원인은 실로 이 때문이다.

신독재(愼獨齋) 김공(金公 김집(金集))은 본래 적자가 없어서 서자로 적통을 이었다. 그 적통을 이은 서자는 봉내(封內)를 쓸 적에 황강(黃岡 김계휘(金繼輝))을 증조(曾祖)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를 조(祖)로, 신독재를 부(父)로, 율곡(栗谷 이이(李珥))을 외조(外祖)로 해서 다 적고 나서는 통곡하기를,
한 번 죽었으면 아무 일이 없었을 것인데 / 一死都無事
평생토록 몸을 가진 것이 한이로다 / 平生恨有身
하였다.

‘하늘이 벌어진다’는 말은 의심스럽기 이를 데 없다. 그런데 갑신년 겨울밤에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하였는데, 서북쪽 사이에서 하늘이 열려 불빛 같은 것이 중천에 뻗치더니 조금 후에 빛이 걷히고 하늘이 합하였다. 이것은 혹시 유기(流氣)의 사광(射光)인가. 실로 알지 못할 일이다.

내가 어렸을 적 어느 날 초경(初更), 소나기가 내린 뒤에 마치 새 울음소리도 같고 귀신 소리도 같은 이상한 소리가 시끄럽게 성중에 가득하였다. 그것을 못 들은 사람이 없었고 모르는 사람이 없었는데, 지금도 그 소리가 무슨 소리였는지 알지 못하겠다.

주합루(宙合樓) 앞에 있는 감나무 한 그루는 바로 정조 임금이 손수 심은 것이다. 9월 진전(眞殿)의 다례(茶禮) 때 그 감을 따서 제물로 썼다. 제사 지내고 남은 것을 얻어서 맛보았더니, 매우 감칠맛이 났다. 근일에도 그 감나무가 있는지 모르겠다. 주합루 앞에 있는 동학(銅鶴)은 익종조(翼宗朝)에 만들어 놓은 것이다.

어떤 사람이 손자를 데리고 놀면서 동전 한 닢을 주었더니, 그 아이가 그만 삼켜 버렸다. 그 아이의 할아버지는 깜짝 놀라서 급히 의원의 집으로 달려가다가 길에서 정수동(鄭守東)을 만나서 그 까닭을 말하였더니, 정수동이 껄껄대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애기는 반드시 죽지 않을 것이오. 요즘 사람들은 공전(公錢)과 사전(私錢)을 수만 냥씩 먹고도 오히려 죽지 않거늘, 하물며 손자가 그 할아버지의 돈 한 닢을 먹었는데 죽을 리가 있겠소.” 하였다. 이 말은 족히 격언(格言)이 될 만하다.


[주D-001]진솔루(眞率漏) : 진솔한 시계라는 뜻이다.
[주D-002]양부취(兩部吹) : 양부는 음악의 입부(立部)와 좌부(坐部)이니, 양부취는 곧 양부고취(兩部鼓吹)를 말한다.
[주D-003]부자(父子)가 …… 일이다 : 소동파의 아버지인 소순(蘇洵)의 호가 노천(老泉)이기 때문이다.
[주D-004]매화가 …… 품는 것 : 굴원(屈原)이 이소경(離騷經)에서 많은 꽃들을 등장시켰으나 매화만은 등장시키지 않았고, 두보 또한 시에서 많은 꽃들을 인용하였으나 해당화만은 인용하지 않았다.
[주D-005]적고재(積古齋)의 …… 있으나 : 이 부분은 원문의 글자대로는 뜻이 잘 통하지 않는다. 필사하는 데 착오가 있는 듯하므로 문맥이 통하도록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주D-006]밤중에 …… 있었는데 : 진(晉)나라 때 조적(祖逖)은 강개하고 기절이 있었는데, 유곤(劉琨)과 함께 자다가 밤중에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유곤을 차서 깨우며, “이것은 나쁜 소리가 아니다.” 하고 일어나서 춤을 추었다 한다. 뒤에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일어나 춤을 춘다는 말은 큰 뜻을 품은 사람이 분발하여 떨쳐 일어나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
[주D-007]삼일포(三日浦) : 시 제목이 《오음유고(梧陰遺稿)》에는 ‘기고성태수차경숙(寄高城太守車敬叔)’으로 되어 있다.
[주D-008]요야(遼野) : 시 제목이 《월사집(月沙集)》에는 ‘학야도중(鶴野途中)’으로 되어 있다.
[주D-009]경간(卿懇) : ‘경의 간청’이라는 뜻으로, 품계가 높은 신하의 상소에 대해 임금이 비답(批答)을 내릴 때 쓰는 말이다. 대신(大臣), 상보국(上輔國), 산림(山林) 등이 올린 상소에 이 말을 쓰고, 그 이하의 신하가 올린 상소에는 ‘너의 간청’이라는 뜻의 ‘이간(爾懇)’이라는 말을 쓴다.
[주D-010]원릉(元陵) : 동구릉(東九陵)의 하나로, 조선조 영조와 그 계비(繼妃)인 정순왕후(貞純王后)의 능이다.
[주D-011]번고(飜庫) : 창고에 있는 물건을 뒤적거려 조사하는 일이다. 번고(反庫)라고도 쓴다.
[주D-012]강정(降定) : 무관(武官)에 대한 징벌(懲罰)의 한 가지로, 벼슬을 낮추어 군역(軍役)을 시키는 것을 이른다.
[주D-013]유몽득(劉夢得) : 당나라의 시인 유우석(劉禹錫)으로, 몽득(夢得)은 그의 자이다. 당초 그는 좌천을 당하여 10년 동안 지방에서 지내다가 장안으로 돌아왔는데, 그때 마침 현도관(玄都觀)에 복숭아꽃이 만발하였으므로, “현도관 안의 천 그루 복숭아는, 모두 유랑이 떠난 뒤에 심은 것이다.[玄都觀裏桃千樹 盡是劉郞去後栽]”라는 시구를 읊었다. 이 시구에 원망하는 뜻이 담겨 있다는 비난이 일어나 또 지방관으로 폄직되어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13년 만에 다시 현도관에 들러 시를 읊었다는 고사가 있다.
[주D-014]여순양(呂純陽) : 당나라 때 신선 여동빈(呂洞賓)으로, 순양자(純陽子)는 그의 호이다. 여동빈은 강호에 유랑하다가 신선 종리권(鍾離權)을 만나 연명술(延命術)을 받고 신선이 된 다음 양절(兩浙) 사이를 다니며 놀았는데,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한다.
[주D-015]이상조(履霜操) : 악부(樂府)의 금곡가사(琴曲歌辭) 이름이다. 윤길보(尹吉甫)의 아들 백기(伯奇)가 죄 없이 후모(後母)의 참소를 받고 쫓겨나서 마름과 연으로 옷을 해 입고 아가위를 따서 먹었다.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서리를 밟으며 쫓겨나게 된 것을 상심해하면서 거문고를 끌어다가 이상조를 탔으며, 이 곡이 끝나자 하수에 몸을 던져 죽었다 한다.
[주D-016]담부(淡府) : 어느 정도의 상부(相府)라는 뜻이다.
[주D-017]봉내(封內) : 과거 답안지 오른쪽 끝에 성명, 생년월일, 주소, 사조(四祖) 등을 쓰고 봉하여 붙이던 일이다. 봉미(封彌)라고도 한다.

점필재집 문집 부록
 [문인록(門人錄)]
문인록을 첨부함[附門人錄]



김맹성(金孟性)
김맹성(金孟性)의 자는 선원(善源)이고 호는 지지당(止止堂)이며, 정통(正統) 정사년에 출생하였고, 해평인(海平人)이다. 조 매계(曺梅溪)가 선생의 시집(詩集)에 쓴 서문에 이르기를,
“성산(星山)의 가천(伽川)에 살면서 독서(讀書)와 저술(著述)하기를 좋아하였고, 시 짓기를 더욱 좋아하여 날마다 음풍(吟諷)을 일삼았으며, 가인(家人)에 대한 생활 영위의 일은 일삼지 않았다. 그리고 천성이 술을 마시지는 못하나 손이 오면 술 대접하기를 좋아했고, 문득 거나하게 취하여, 있고 없는 것을 묻지 않았으며, 부귀(富貴)와 영리(榮利)에 담박하였다. 선원(善源)은 문벌 좋은 집에서 태어났으니, 고 재상인 정숙공(靖肅公) 안순(安純)의 외손이요 문숙공(文肅公) 안숭선(安崇善)의 생질이었다. 그래서 내외손(內外孫)의 친당(親黨)들이 조정에 가득하여 간혹 벼슬하기를 권하기도 하였으나 이를 탐탁찮게 여기었다. 일찍부터 중한 명성이 있었고 개연히 세상에 나가볼 뜻도 있었으나, 누차 과제(科第)에 실패하고 나서는 가천 가에 집을 지어 지지당(止止堂)이라 편액을 걸고 시주(詩酒)를 스스로 즐기면서 장차 그대로 생애를 마치려는 뜻이 있었다.”
하였다. 그리고 점필 선생(佔畢先生)이 지지당 선생과 정분이 가장 두터웠으니, 서로 왕래하면서 경학(經學)을 강론했고, 서로 수창(酬唱)한 시첩(詩帖)은 이루 다 기억할 수도 없다. 그리고 점필 선생의 아들 곤(緄)이 단정하고 신중하며 학문에 뜻을 두었으므로, 지지당 선생이 그를 사랑하여 마침내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성종(成宗)이 즉위한 처음에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유일(遺逸)을 천거하게 하자 지지당을 불러 중부 참봉(中部參奉)으로 삼았다. 뒤에 병신년 과거(科擧)에 급제하고 나서는 간성(諫省)을 거쳐 금종(禁從)의 직에 올라 화려한 명성이 더욱 널리 퍼졌는데, 이윽고 어떤 일에 연좌되어 고령(高靈)에 유배되었다. 고령은 가천(伽川)과의 거리가 10여 리밖에 안 되었으나 한 번도 자기 집을 가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어려운 일로 여겼다. 오랜 뒤에 환조(還朝)하여 이조 정랑(吏曹正郞)과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이 되었고, 정미년 봄에 서울에서 작고하니, 향년이 51세였다. 집이 매우 가난하였으므로, 요우(僚友)인 정자건(鄭子健)이 극력 주선해줌을 힘입어 무난히 고향으로 반장(返葬)하였다. 한훤 선생(寒暄先生)이 지지당 선생을 사사(師事)하였으니, 지지당 선생의 간직한 바를 또한 상상할 만하다. 감히 공경하여 앙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점필 선생의 문집 가운데 지지당 선생과 서로 수창한 시만도 거의 30여 수(首)가 되니, 점필유고(佔畢遺稿)의 보존된 것을 이미 10의 2, 3이라 하였고 보면, 30여 수 이외에 그 망실(亡失)된 것이 아마 더욱 많을 듯하다. 그러나 선생의 문집 속에는 점필 선생과 왕복한 시는 하나도 없다. 지지당 선생의 문집을 신유년에 찬집하였는데, 이 때가 무오년의 천양지화(泉壤之禍)를 당한 지 4년 뒤이고, 또 신유년으로부터 4년째 되던 해에는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있었으므로, 점필 선생의 명호(名號)는 의당 세상에서 크게 꺼리는 바가 되었기에, 그 화답하여 부친 시까지도 감히 편입(編入)하지 못했던 것이니, 그때의 풍색(風色)을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지지당(止止堂)이 거처하는 정사(精舍)에는 한때의 명현(名賢)들이 와 놀면서 제영(題詠)을 남겼는데, 점필 선생의 시문(詩文)도 그 가운데 많이 있었다. 그런데 지지당 선생이 작고한 뒤에 한번은 별실(別室)의 꿈에 누가 와서 말해주기를, “빨리 당상(堂上)의 현판(懸板)들을 걷어 치우라.” 하므로, 별실이 놀라 깨어 그 꿈을 이상하게 여겨 즉시 제현(諸賢)의 제영들을 걷어서 숨겨버렸는데, 이윽고 중사(中使)가 서울에서 내려와 점필재 선생의 제영을 찾다가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는 대체로 유자광(柳子光)이 자기가 함양군(咸陽郡)에 제영해 놓은 현판(懸板)을 점필재가 일찍이 발거(拔去)시킨 데에 원한을 품고 모든 점필재의 시편(詩篇)이 있는 곳은 끝까지 수색하여 극력 발거시킴으로써, 점필재의 현판이 있는 집도 또한 모두 화를 입었는데, 지지당 선생만이 유독 신후(身後)의 화를 면하였으니, 이 또한 이상한 일이다.《지지당집(止止堂集)》에서 나온 말이다.

정여창(鄭汝昌)
정여창(鄭汝昌)의 자는 백욱(伯勖)이고 하동인(河東人)이며 호는 일두(一蠹)이다. 효행(孝行)으로 천거를 받아 참봉(參奉)이 되었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이 되고 벼슬이 안음 현감(安陰縣監)에 이르렀다.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선생에게서 수업(受業)하여 성리학(性理學)을 일삼았다. 무오년에 종성(鍾城)에 유배되어 작고했는데, 이윽고 부관(剖棺)되었다. 중종(中宗) 초에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고, 그 후에 우의정(右議政)이 가증(加贈)되었으며, 선조(宣祖) 때에 문헌(文獻)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김굉필(金宏弼)
김굉필(金宏弼)의 자는 대유(大猷)이고, 호는 한훤당(寒暄堂)이다.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다가 천거를 받아 형조 좌랑(刑曹佐郞)이 되었다. 무오년에 희천(熙川)에 유배되었다가 순천(順天)으로 옮겨졌는데, 갑자년에 극형(極刑)을 당하였다. 중종 초기에 도승지에 추증되었고, 뒤에 우의정이 가증되었으며, 선조 때에 문경(文敬)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조위(曺偉)
조위(曺偉)의 자는 태허(太虛)이고 창산인(昌山人)인데, 선생의 처남(妻男)으로서 선생을 사사하였다. 한훤당과는 동년생(同年生)으로서 정분이 가장 서로 친밀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들이 모두 원대(遠大)한 데에 이를 것으로 기대했었다. 이미 벼슬을 하기 시작하여서는 성종(成宗)의 알아줌을 크게 입어 칭찬과 총애가 특히 대단하였다. 그가 어버이를 위해 군수(郡守)가 되기를 요청했을 적에는 특별히 일급(一級)을 하사하여 사품(四品)으로 올려주었다. 그가 함양 군수(咸陽郡守)로 있을 때에 상(上)이 하서(下書)하여 포유(褒諭)하기를,
“네가 문장(文章)으로 몸을 진취시켜 유악(帷幄)에 배시(陪侍)함으로 인하여 내가 너를 인재로 여겨온 지 오래였다. 그런데 어버이가 늙은 때문에 사직하고 시양(侍養)하기를 요구하여 가까운 군(郡)의 수령(守令)을 제수받아 어버이 봉양에 자뢰하게 되었으니, 이는 대체로 부득이한 형편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나는 네가 시종(侍從)이었던 관계로 감사(監司)에게 하유(下諭)하여 지금 네 어버이에게 희름(餼廩)을 약간 보내게 해서 향리(鄕里) 사람들로 하여금 너의 학문에 관한 힘으로 네 어버이에게까지 영화가 미치게 된 것을 알게 하도록 하는 바이니, 너는 그 뜻을 알라.”
하였다. 그러자 공(公)이 전(箋)을 올려 진사(陳謝)하였다.
이에 앞서 상이 세초(歲抄)에 관하여 응제(應製)하게 한 시(詩)가 상의 뜻에 맞아, 공의 부모에게 미두(米豆)를 하사하도록 명하였고, 함양 군수의 임기가 다 차서는 상(喪)을 당하자, 또 부제(賻祭)의 미두를 하사하였으니, 외관(外官)에 대한 부전(賻典)은 전에 없었던 것이다.
벼슬이 참판(參判)에 이르러 연산조(燕山朝) 때에 수찬 선생(修撰先生)의 시문(詩文) 때문에 죄를 얻어 의주(義州)에 유배되었고, 이어 순천(順天)에 이배(移配)되었다가, 홍치(弘治) 계해년에 질병으로 작고하니, 향년이 50세였다.
공이 사귀었던 사람들은 모두 한때의 명류 거공(名流鉅公)들이었는데, 서로 조전(朝典)을 강론하고 문사(文史)를 절차탁마하면서 힘써 부지런히 공부하였다. 뒤에 비록 문사(文事)로 폐적(廢謫)되었으나, 그래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저술(著述)한 것이 자못 많다. 일찍이 매계총화(梅溪叢話) 10여 가지 일을 초(草)하다가 초고(草稿)를 완성하지 못하고 작고하였다. 한훤당과 함께 순천에 유배되었는데, 한훤당이 공의 병을 다스려주고 공의 상(喪)까지 주선해 주었으며, 반장(返葬)하기에 미쳐서는 제문(祭文)을 지어 조문하였다.

남효온(南孝溫)
남효온(南孝溫)의 자는 백공(伯恭)이고 의령인(宜寧人)인데 추강거사(秋江居士)라 자호하였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섬기면서 효성으로 이름이 높았다. 사람됨이 맑고 깨끗하고 도량이 넓고 의지가 견고하며, 소탈하고 고상하며, 가슴 속이 쇄락(灑落)하여 한 점의 진기(塵氣)도 없었다. 일찍이 선생에게서 수업했는데, 선생은 감히 공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반드시 ‘우리 추강’이라고 하였으니, 그가 경례(敬禮)를 받음이 이러하였다.
김굉필, 정여창, 김시습(金時習) 등 제현(諸賢)과 함께 서로 추중(推重)하며 형제간처럼 지냈었다. 그러나 성종 때에 상소(上疏)하여 소릉(昭陵)을 복구시키기를 청하였으나 듣지 않으므로, 마침내 이 세상에 뜻을 단절하고 구속없이 지내는 삶을 일삼아, 무릇 명승지로 일컬어지는 곳은 그의 발자취가 거의 다 미쳤다. 정통(正統) 갑술년에 태어나서 성화(成化) 임자년에 졸하니, 향년이 39세였다. 연산(燕山) 갑자년에 소릉에 관한 상소 때문에 추죄(追罪)되어 천양(泉壤)의 화를 입었다. 유홍(兪弘)이 《추강집(秋江集)》 의 발문(跋文)을 썼다.

김일손(金馹孫)
김일손(金馹孫)의 자는 계운(季雲)이고 호는 탁영(濯纓)인데, 집의(執義) 맹(孟)의 아들이요, 절효 선생(節孝先生) 극일(克一)의 손자이며, 김해인(金海人)으로 대대로 청도(淸道)에서 살았다. 일찍이 선생에게서 수업하여 문장(文章)을 잘하였고, 성품이 대범하고 고상하여 남을 잘 인정하지 않았다. 벼슬은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이르렀고, 무오년에 사화(史禍)를 당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이극돈(李克墩)이 전라 감사(全羅監司)로 있을 때에 성종(成宗)의 초상이 났는데도 서울에 진향(進香)은 하지 않고 기녀(妓女)를 수레에 싣고 다녔으므로, 탁영이 그 사실을 사초(史草)에 기재하였더니, 극돈이 실록청 당상(實錄廳堂上)이 되어 실로 이 화를 일으킨 것이다.”
고 한다. 현종(顯宗) 때에 도승지에 추증되고 자운서원(紫雲書院)의 편액(扁額)을 내렸다.

권오복(權五福)
권오복(權五福)의 자는 향지(嚮之)이고 호는 수헌(睡軒)인데, 예천인(醴泉人)이다. 성종(成宗) 병오년에 과거 급제하여 한림원(翰林院)에 선보(選補)되었다가 옥당(玉堂)에 전임되어 김탁영 등 제공(諸公)과 막역(莫逆)의 친교를 맺었다. 그러다 무오년의 사화가 일어남에 미쳐 선생의 문도(門徒)라는 이유로 탁영과 함께 극화(極禍)를 당하였다.

유호인(兪好仁)
유호인(兪好仁)의 자는 극기(克己)이고 고령인(高靈人)인데, 정통(正統) 을축년에 태어났다. 임오년에 생원(生員), 진사(進士)가 되고, 갑오년에 과거 급제하여 벼슬이 합천 군수(陜川郡守)에 이르러, 나이 50세로 작고하였다. 어득강(魚得江)이 그의 묘갈문(墓碣文)을 지었는데, 그 서문의 대략에,
“충효(忠孝)하고 청검(淸儉)하며, 침중(沈重)하고 간엄(簡嚴)하였으며, 시문(詩文)은 고고(高古)하고 필력(筆力)은 주경(遒勁)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삼절(三絶)이라 일컬었다. 가세(家世)가 청빈(淸貧)하였으나, 또 산업(産業)을 경영하지 않았다.”
하였다. 선생의 문학(文學)은 한 시대에 으뜸이었는데, 공(公)의 문학이 여기에 손색이 없었다. 아, 그런 덕망(德望)으로 성명(聖明)한 임금을 만났으니 평소에 온축해 놓은 것을 써볼 만했는데도, 누차 부격(府檄)에 굴해 있다가 섭양(攝養) 또한 이루지 못하여 50세에 그쳤으니, 슬프다. 공은 임종(臨終) 때에 아들 환(瑍)에게 이르기를,
“군자(君子)는 모름지기 임금을 속이지 않아야 한다. 너는 만일 조그만 벼슬이라도 얻으면 의당 내 말을 생각해야 한다.”
하였다. 뇌계(㵢溪)에 살면서 인하여 뇌계를 호로 삼았고, 유고(遺稿) 수권(數卷)이 있다.

박한주(朴漢柱)
박한주(朴漢柱)의 자는 천지(天支)이고 밀양인(密陽人)이며, 자호는 우졸자(迂拙子)인데, 선생의 문하에 유학하였다. 성종 을사년에 과거 급제하여 정언(正言), 헌납(獻納)을 역임하면서 국사를 말하는 것이 직절(直截)하였고, 나가서 예천 군수(醴泉郡守)가 되었다. 무오년 사화 때 벽동(碧潼)으로 장류(杖流)되었다가 갑자년 사화 때 피살되었다. 중종 초기에 명하여 도승지를 추증하였다.

이원(李黿)
이원(李黿)의 자는 낭옹(浪翁)이고 경주인(慶州人)으로,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호임)의 후손이다. 성종 기유년에 과거 급제하여 벼슬이 호조 좌랑(戶曹佐郞)에 이르렀다. 무오년 사화 때 원지(遠地)에 장류(杖流)되었다가 갑자년 사화에 죽었다. 그는 사람됨이 당당하여 사절(死節)이 있었으므로, 어린 임금을 맡길 만하였는데, 연산군(燕山君)이 점필재에게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리자고 청했다는 이유로 그를 능지처참하였다. 중종 초기에 명하여 도승지를 추증하였다. 남추강(南秋江)의 《사우록(師友錄)》에 이르기를,
“익재의 후손이요 박팽년(朴彭年)의 외손(外孫)으로서, 두 집안의 현량(賢良)함이 이 한 사람에 모아졌다.”
하였다. 호는 재사당(再思堂)이다.

이주(李胄)
이주(李胄)의 자는 주지(胄之)이고 고성인(固城人)이다. 행촌(杏村 이암(李嵒)의 호임)의 후손으로 문장에 능하고 기절(氣節)이 있었으며, 망헌(忘軒)이라 자호하였다. 성종 무신년에 과거 급제하여 정언(正言)에 제배되었다. 무오년 사화 때 진도(珍島)에 유배되어 피살되었다.

이승언(李承彦)
이승언(李承彦)의 자는 사아(士雅)이고 성주인(星州人)이다. 생원시(生員試)에 장원하였다. 김굉필과 함께 선생의 문하에서 유학하였는데, 도량이 넓고 용맹이 뛰어났다. 경사(經史)에 널리 통하고 호산(湖山)에 마음껏 배회하다가, 유일(遺逸)로 천거를 받아 벼슬이 한성 참군(漢城參軍)에 이르렀다. 아들 장길(長吉), 장곤(長坤)은 김한훤당에게서 배웠다.

원개(元槩)
원개(元槩)의 자는 □□이고 원주인(原州人)인데, 고상한 행실로 천거를 받아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김굉필과 함께 선생의 문하에서 유학하였다.

이철균(李鐵均)
이철균(李鐵均)의 자는 □□이고 성주인(星州人)이다. 경태(景泰) 경오년에 태어나서 을유년에 진사(進士)가 되고, 병진년에 과거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다. 김굉필과 함께 선생의 문하에서 유학하였다.

곽승화(郭承華)
곽승화(郭承華)의 자는 □□이고 현풍인(玄風人)이다. 정유년에 진사가 되었다. 김굉필과 함께 선생의 문하에서 유학하였는데, 청개(淸介)한 인품으로 사우(士友)들의 추앙을 받았다. 그는 사림(士林)의 화(禍)가 있을 줄을 알고 시골 구석에 묻혀 살면서 스스로 보통 사람들과 다르게 보이지 않도록 하였으므로, 한훤당이 간혹 그에게 장난말로 이르기를, “이렇게 하여 화를 피하는 것이 어찌 도리에 합당하겠는가.” 하였다.

강흔(姜訢)
강흔(姜訢)의 자는 시가(時可)이고 진주인(晉州人)으로, 관찰사(觀察使) 자평(子平)의 막내아들이다. 맨 처음 여경(餘慶)을 따라 밀양(密陽)에 가서 선생에게서 두시(杜詩)를 배우고, 다음에는 덕우(德優)에게 종유하여 《시경(詩經)》을 배웠으며, 다음으로는 대유(大猷)에게 종유하여 《소학(小學)》을 전공하고, 다음으로는 시숙(時叔), 공서(公緖)와 종유하면서 유극기(兪克己)에게서 시(詩)를 읽었다. 여묘(廬墓)살이를 하였고, 뒤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사우록(師友錄)》에 나타나 있다.

권경유(權景裕)
권경유(權景裕)의 자는 군요(君饒)이고 또 다른 자는 자범(子汎)인데, 안동인(安東人)이다. 성종 때에 과거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을 거쳐 옥당(玉堂)에 들어가 정자(正字)가 되었고, 누차 전임되어 교리(校理)에 이르렀다. 연산조(燕山朝) 때에 시사(時事)가 점차 변해가는 것을 알고 외직을 요청하여 제천 현감(堤川縣監)이 되었는데, 무오년의 사화가 일어나서 김일손(金馹孫)과 같은 날에 죽었다.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이 말하기를,
“군요는 성품이 강직하여 작위(作爲)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였다.

이목(李穆)
이목(李穆)의 자는 중옹(仲雍)이고 전주인(全州人)인데, 성품이 강직하여 말을 기탄없이 하였다. 일찍이 태학(太學)에 있을 당시, 윤필상(尹弼商)이 대신(大臣)으로서 국정을 담당했었는데, 이목이 가뭄을 인하여 소(疏)를 올려 말하기를,
“필상을 삶아 죽이면 하늘이 비를 내릴 것입니다.”
하였다. 그 뒤 윤필상이 이목을 길에서 만나자 그를 불러서 말하기를,
“군(君)이 꼭 이 늙은이의 고기를 먹고 싶은가?”
하였는데, 이목은 도도한 표정으로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다.
연산군 초기에 문과에 장원하였다. 그 후 사화(史禍)가 일어났을 때, 윤필상이 당상(堂上)으로서 전일의 유감을 품고 이목이 일찍이 점필재에게서 수업(受業)했다는 이유로 죄를 얽어 죽였다.

강경서(姜景敍)
강경서(姜景敍)의 자는 자문(子文)이고 진주인(晉州人)이며, 호는 초당(草堂)이다. 성종 정유년에 과거 급제하였고, 무오년에 선생의 문도(門徒)라는 이유로 회령(會寧)에 장류(杖流)되었다가 뒤에 방환되었다. 중종 때에 벼슬이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이르렀다. 《초당집(草堂集)》 1건(件)이 있다. 뒤에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이수공(李守恭)
이수공(李守恭)의 자는 중평(仲平)이고, 광주인(廣州人)으로 둔촌(遁村)의 후손이며 영의정(領議政) 극배(克培)의 손자이다. 성종 무신년에 과거 급제하여 정언(正言), 장령(掌令)을 역임하면서 쟁신(諍臣)의 풍도가 있었다.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서는 교리(校理), 수찬(修撰), 응교(應敎)를 거쳐 전한(典翰)에 승진되었다. 무오년에 창성(昌城)에 유배되었고 그 후 광양(光陽)으로 이배(移配)되었으며, 갑자년에 사사(賜死)되었는데 그때 나이 41세였다. 중종 초기에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다.

정희량(鄭希良)
정희량(鄭希良)의 자는 순부(淳夫)이고 호는 허암(虛菴)이다. 연산군 초기에 과거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다. 이윽고 무오년의 옥사(獄事)에 연좌되어 의주(義州)에 유배되었다. 그는 점[卜]을 잘 쳐서 길흉(吉凶)을 알았으므로, 일찍이 말하기를,
“갑자년의 화는 무오년보다 심할 것이다.”
하고, 어느날 갑자기 종적(蹤跡)을 끊고 도망가 버려서 그가 죽은 곳도 알 수 없다. 문집(文集)이 세상에 행해지고 있다.

노조동(盧祖同)
노조동(盧祖同)의 자는 공서(公緖)인데, 《소학(小學)》을 읽기 좋아하였고, 엽등(躐等)의 학문, 풍월(風月)의 글귀, 과거(科擧)의 재주 등을 좋아하지 않아서, 몸가짐을 신중히 하여 법도를 지키는 것이 대략 대유(大猷)와 같았다. 부친상을 당해서는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면서 일체 《가례(家禮)》에 따랐다. 시숙(時叔)과 함께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할 적에 한훤당(寒暄堂)이 그를 공경하였다. 김모재(金慕齋)가 노 처사(盧處士)를 방문하여 지은 시의 서문에 이르기를,
“노공(盧公)은 고상한 행실이 있으며 현달하기를 구하지 않고, 젊어서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유학하였다.”
하였고, 그 시에는
인간의 고관 대작은 절로 길이 다른 법이라 / 人間軒冕自殊途
안자처럼 곤궁히 살며 도의 진미 맛보누나 / 顔巷窮居味道腴
눈 밑에는 크나큰 우주를 한데 넣었고 / 眼底牢籠閑宇宙
가슴 속엔 하나의 요순을 온축하였네 / 胸中蘊蓄一唐虞
학문은 염락관민의 바른 연원을 따랐고 / 學追濂洛淵源正
행실은 안자 증자의 실천과 같이 독실하도다 / 行篤顔曾踐履俱
산림 속에 찾아온 건 응당 뜻이 있노니 / 爲訪林丘應有意
높은 의범으로 남쪽 구석 표창하려 함이라오 / 欲將高範表南隅
하였다. 《척언(摭言)》에는 이르기를,
“노 일사 필(盧逸士㻶)은 고성인(固城人)이다.”
하였다.상고하건대, 공(公)이 필(㻶)로 개명(改名)을 하였는데, 어느 때 무슨 연유로 개명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그리고 《기묘보록(己卯補錄)》에는 이르기를,
“유일(遺逸) 노모(盧某)의 별과 천목(別科薦目)에 의하면, 우애(友愛)가 향당(鄕黨)에 드러났고, 학식(學識)이 순정(醇正)하며 또 재행(才行)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낙제(落第)하고, 천거로 누차 전임하여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가 되었다가 정랑(正郞)에 체배(遞拜)되었는데, 뒤에 강자(降資)되었다는 이유로 향리에 돌아갔다. 호는 묵재(墨齋)이다.”
하였다.

강희맹(姜希孟)
강희맹(姜希孟)은 진주인(晉州人)으로 진산군(晉山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임희재(任熙載)
임희재(任熙載)의 자는 경여(敬輿)인데 풍천인(豐川人)이다. 무오년의 문과에 급제했는데, 이윽고 선생의 문도(門徒)라는 이유로 장류(杖流)되었다. 희재는 사홍(士弘)의 아들인데, 세설(世說)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희재는 글씨를 잘 썼는데, 일찍이
요순을 조종으로 삼으면 절로 태평할 것인데 / 祖舜宗堯自太平
진 시황은 무슨 일로 창생을 괴롭히는고 / 秦皇何事苦蒼生
재앙이 소장 안에서 일어날 줄을 알지 못하고 / 不知禍起蕭墻內
오랑캐를 막고자 헛되이 만리장성만 쌓았네 / 虛築防胡萬里城
라는 시(詩) 한 절구(絶句)를 병풍에 써 놓았다. 그런데 연산군(燕山君)이 하루는 갑자기 사홍의 집에 행행하여 그 병풍을 보고 묻기를,
“누가 쓴 것인가?”
하자, 사홍이 사실대로 대답하니, 연산군이 노여운 기색으로 말하기를,
“경(卿)의 아들은 불초한 사람이니, 내가 그를 죽이고 싶은데, 경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자, 사홍이 즉시 무릎을 꿇고 대답하기를,
“이 자식은 성행(性行)의 불순함이 과연 상교(上敎)와 같습니다. 신(臣)이 진작 이 사실을 아뢰려고 하였으나 그리 못하였습니다.”
고 하여, 마침내 화를 입었다. 혹자는 말하기를,
“희재가 항상 자기 아버지를 간(諫)하였기 때문에 그 아비가 이를 싫어하여 그를 참소했다.”
고도 한다.

이계맹(李繼孟)
이계맹(李繼孟)의 자는 희순(希醇)인데 전의인(全義人)이다. 성종 기유년에 과거 급제하였고, 그의 시문(詩文)은 선생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무오년에 선생의 문도라는 이유로 장류(杖流)되었다. 중종 때에 다시 기용되어 벼슬이 찬성(贊成)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평(文平)이다. 그는 성품이 방달(放達)하여 몸을 검속하지 않았으므로, 처음에는 기묘 사류(己卯士類)들에게 흠을 잡혔으나, 사류들이 화를 당함에 미쳐서는 유독 그만이 사류들을 신구(申救)하여 마지않다가, 권간(權奸)의 뜻에 거슬리어 근심과 번민 끝에 죽었다.

강겸(姜謙)
강겸(姜謙)은 진주인(晉州人)이다. 경자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에 뽑혀 들어갔다. 그 후 누차 승천되어 정랑(正郞)에 이르렀다. 무오년의 옥사(獄事)에 연좌되어 장류되었다. 그의 아우 형(詗)은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가 갑자년의 사화에 죽었다.

홍한(洪翰)
홍한(洪翰)은 남양인(南陽人)인데, 을사년의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의(參議)에 이르렀다. 그는 성품이 곧고 남을 잘 인정하지 않아서 권귀(權貴)의 뜻에 거슬렸는데, 무오년의 화에 걸려 장류되던 도중에 죽었다. 중종 때에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무풍부정 총(武豐副正摠)
무풍부정 총(武豐副正摠)의 자는 백원(百源)인데, 태종(太宗)의 증손이다. 시(詩)에 능하였고 거문고를 잘 탔다. 그는 양화도(楊花渡)에 별장을 짓고 살면서 조그마한 배에다 고기잡는 그물을 갖추어 항상 어선(漁船)을 띄우고 노닐었는데, 시인 소객(詩人騷客)들을 맞이하여 날마다 좋은 시를 이루어 시가 무려 천백편(千百篇)에 달하였다. 서호주인(西湖主人)이라 자호하였다. 무오년에 먼 곳으로 장류(杖流)되었다.

정승조(鄭承祖)
정승조(鄭承祖)는 연산군 갑인년의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에 선보(選補)되었다가, 무오년에 먼 곳으로 장류되었다.

강백진(康伯珍)
강백진(康伯珍)의 자는 자온(子韞)이고 신천인(信川人)인데, 선생의 생질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선생에게서 수업하였다. 성종(成宗) 임진년 중춘(仲春)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정유년 봄에는 갑과(甲科) 제삼인(第三人)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사인(舍人), 사간(司諫)에 이르렀다. 흥해(興海)의 수령으로 나가 있을 적에 《이준록(彝尊錄)》을 간행하였다. 무오년에 장류되었다.

강중진(康仲珍)
강중진(康仲珍)의 자는 자도(子韜)이다. 경자년 봄에 생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에 이르렀는데, 바로 백진(伯珍)의 아우이다. 선생에게서 수업하였다. 무오년으로부터 22년 뒤에 중진이 선생의 문집(文集) 7권을 간행하였다.

김흔(金訢)
김흔(金訢)의 자는 군절(君節)이고, 호는 안락(顔樂)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광(文匡)이다. 그는 사문(斯文)을 부식(扶植)한 일이 많았다.

김용석(金用石)
김용석(金用石)의 자는 연숙(鍊叔)이다. 그는 태학(太學)에 유학하면서 한 때의 명사(名士)들과 함께 주 문공(朱文公)의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향약(鄕約)을 만들고, 《소학(小學)》을 강론하였다. 무오년에 사화가 일어나자 망명(亡命)하여 태백산(太白山)으로 들어갔다.

홍유손(洪裕孫)
홍유손(洪裕孫)의 자는 여경(餘慶)이고, 호는 소총(篠叢)이며 또 하나의 호는 광진자(狂眞子)인데, 남양인(南陽人)이다. 그는 경사(經史)를 두루 섭렵하였으나 성품이 방달(放達)하여 몸을 검속(檢束)하지 않았고 또한 과거(科擧)를 좋아하지 않았다. 도보로 영남(嶺南)까지 가서 선생을 배알하고 두시(杜詩)를 배웠는데, 선생이 이르기를,
“이 사람에게는 벌써 안자(顔子)가 도(道)를 즐기던 곳이 보인다.”
고 하였으므로, 학자들이 모두 그를 높이었다. 그는 사람됨이 문(文)은 칠원(漆園 장주(莊周)를 가리킴)과 같고, 시(詩)는 산곡(山谷 황정견(黃庭堅)의 호임)과 비슷하며, 재(才)는 공명(孔明 제갈량(諸葛亮)의 자임)과 같고, 행(行)은 만천(曼倩 동방삭(東方朔)의 자임)과 같았다.

이종준(李宗準)
이종준(李宗準)의 자는 중균(仲鈞)이고 호는 용헌(慵軒)인데, 문장(文章)에 능하고 서화(書畫)를 잘하였다. 성종 을사년에 과거에 급제했는데, 무오년의 옥사(獄事)에 연좌되어 피살되었다.

최부(崔溥)
최부(崔溥)의 자는 연연(淵淵)이고 호는 금남(錦南)인데, 나주인(羅州人)이다. 견문이 넓고 기억력이 좋았으며, 영걸(英傑)하여 세사에 속박을 받지 않았다. 성묘조(成廟朝)에 재차 등제(登第)하여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가 되었는데, 무오년에 유배되었다가 뒤에 끝내 피살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표연말(表沿末)
표연말(表沿末)의 자는 소유(少游)이고 호는 남계(藍溪)인데, 신창인(新昌人)이다. 성종 임진년에 등제하여 문명(文名)이 있었다. 선생에게서 수업(受業)할 적에 서로 교유(交遊)하던 사람은 모두 한때의 명사(名士)들이었다. 일찍이 한림(翰林)이 되었을 때, 동료들과 연음(宴飮)하면서 우육(牛肉)을 베푼 것이 상(上)에게 알려져서 관례에 따라 파면되었다. 그 후로는 금육(禁肉)을 볼 때마다 그것을 물리치며 말하기를,
“차마 다시 법을 범할 수 없다.”
고 하였다. 복상(服喪)하면서 예(禮)를 극진히 한 사실이 알려져 상(上)의 명으로 한 자급(資級)이 더해졌고, 뒤에 벼슬이 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안우(安遇)
안우(安遇)의 자는 시숙(時叔)인데, 효행(孝行)이 있어 거상(居喪)할 적에 일체 《가례(家禮)》를 준행하였다. 노공서(盧公緖)와 함께 선생의 문하에 유학하였는데, 사환(仕宦)에 뜻이 없었고 절조(節操)는 동한(東漢) 시대 고사(高士)들에 견줄 만하였다. 호는 노계(蘆溪)이다. 뒤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안음 현감(安陰縣監)에 임명되었다가, 기묘년에 운봉(雲峯)에 유배되었다.

허반(許磐)
허반(許磐)의 자는 문병(文炳)인데 양천인(陽川人)이다. 계묘년에 진사가 되었고, 음보(蔭補)로 사직 참봉이 되었다. 《추강집》에 이르기를,
“허반은 성리학(性理學)에 뜻을 두어 벼슬하는 데에 생각이 없었고 일마다 옛사람의 인품을 흠모하고자 하였으므로, 대유(大猷)가 그의 단아(端雅)함에 감복했다.”
고 하였다. 일찍이 좌상(左相) 홍응(洪應)에게 말하기를,
“세자(世子)는 나라의 저군(儲君)으로서 만성(萬姓)이 우러러 의뢰하는 바인데, 지금 환시(宦寺)들과 함께 거처하니 옳지 않다. ……”
고 하였다. 무오년에 등제하여 권지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었는데, 마침내 사화(史禍)에 연좌되어 죽었다.

유순정(柳順汀)
유순정(柳順汀)의 자는 지옹(智翁)인데 진양인(晉陽人)이다. 청천군(菁川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정세린(鄭世麟)
정세린(鄭世麟)의 자는 창부(昌符)이다. 그는 학문이 공서(公緖)와 같았고 시재(詩才)가 매우 높았으므로, 선생이 그를 공경히 대하였다. 병오년에 죽었는데 나이 22세였다.

우선언(禹善言)
우선언(禹善言)의 자는 덕부(德夫)이고 호는 풍애(楓崖)인데, 단성군(丹城君) 공(貢)의 아들이다. 사람됨이 뜻이 크고 기개가 있었으므로, 선생이 그의 자를 자용(子容)이라고 지어주었다.

신영희(辛永禧)
신영희(辛永禧)의 자는 덕우(德優)이고, 영산인(靈山人)으로 재상 석조(碩祖)의 손자이다. 그는 기개가 있어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았고, 뜻이 크고 대절(大節)이 많았으며, 과명(科名)을 좋아하지 않았다. 계묘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그 후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성 참의(成參議)는 그의 시를 가리켜 소동파(蘇東坡), 황산곡(黃山谷)의 경지에 드나든다고 여기었다.

손효조(孫孝祖)
손효조(孫孝祖)의 자는 무첨(無忝)인데, 생원시에 합격하고 태학(太學)에 유학하면서, 김연숙(金鍊叔) 등 제인(諸人)과 함께 주 문공(朱文公)의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향약(鄕約)을 만들고 《소학(小學)》을 강론하였다.

김기손(金驥孫)
김기손(金驥孫)의 자는 백운(伯雲)이다.

강혼(姜渾)
강혼(姜渾)의 자는 사호(士浩)이고 호는 목계자(木溪子)인데, 문명(文名)이 탁영(濯纓)에 버금갔다. 중종 때에 벼슬이 판중추(判中樞)에 이르렀다.

주윤창(周允昌)
주윤창(周允昌)의 자는 □□이고, 상주인(尙州人)인데,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유학하였다.

방유녕(方有寧)
방유녕(方有寧)의 자는 태화(太和)인데, 벼슬이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이르렀다.

양준(楊浚)
양준(楊浚)의 자는 징원(澄源)인데, 마음이 침착하고 큰 도량이 있었으며, 곤궁함을 잘 견디고 도(道)를 즐기면서 담박하게 지냈다. 아우인 침(沈)과 함께 유학하였다.


[주D-001]수찬 선생(修撰先生) : 여기서는 일찍이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을 지낸 김맹성(金孟性)을 가리킨다.
[주D-002]소릉(昭陵) : 단종(端宗)의 생모(生母)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陵)으로, 본디 안산(安山)에 있었으나, 단종이 죽은 뒤 세조(世祖)의 꿈에 현덕왕후가 나타나 아들을 죽인 일을 책망하는 것을 보았다 하여, 그 능을 발굴하여 다른 데로 이장(移葬)했었다. 그런데 그 후 영남(嶺南)의 유생(儒生)들을 중심으로 세 차례나 추복(追復)의 논의가 일어났으니, 그 맨 처음 나온 것이 바로 남효온(南孝溫)의 상소(上疏)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연산(燕山) 때에는 김일손(金馹孫) 등이 다시 이 문제를 제기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가, 중종(中宗) 때에 소세양(蘇世讓)의 건의에 의해 추복되어 현릉(顯陵: 문종릉〈文宗陵〉)으로 이장됨으로써 본래의 소릉이란 명칭은 없어지고 말았다.
[주D-003]부격(府檄) : 관부(官府)에서 징소(徵召)하는 격문(檄文)을 이른다. 후한(後漢) 때 효행(孝行)이 뛰어났던 모의(毛義)가 노모(老母)를 봉양할 적에 관부로부터 그를 수령(守令)으로 징소하는 격문이 이르자, 그는 노모의 봉양을 위해 매우 기뻐하며 취임(就任)했다가, 자기 모친이 죽은 뒤에는 벼슬을 그만두고 끝내 은거했던 데서 온 말인데, 여기서는 곧 하찮은 수령직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주D-004]자용(子容) : 공자(孔子)의 제자인 남궁괄(南宮适)의 자인데, 그는 성품이 매우 신중하였고, 또 말을 삼가려는 뜻에서 《시경(詩經)》 대아(大雅) 억(抑)의 “흰 구슬의 티는 닦아낼 수 있거니와, 말의 과오는 어찌할 수 없도다.[白圭之玷 尙可磨也 斯言之玷 不可爲也]”라는 시를 하루에 세 차례씩 반복하여 읽으므로, 공자가 그를 신중한 사람으로 여기어 자기 형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었다. 여기서는 곧 남궁괄처럼 신중하라는 뜻에서 우선언(禹善言)의 자를 남궁괄의 자와 같이 지어준 것이다. 《論語 先進》
청음집 제10권
 청평록(淸平錄)
11일 신유(辛酉)

걸음을 재촉하여 소양정(昭陽亭)에 올라갔다. 정자는 봉의산(鳳儀山) 북쪽에 있었는데, 치소(治所)로부터의 거리가 5리쯤 되었다. 긴 강물이 내려다보이며, 앞에는 널따란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가까이로는 암동(巖洞)에 의지해 있고 멀리로는 뭇 산봉우리를 끌어당겨 청신하고 안온하며 그윽하고 먼 경치를 이루 다 기술할 수가 없었다. 일찍이 강호(江湖)와 누관(樓觀)의 경치가 한 지방에서 으뜸이 되는 곳을 논해 보건데, 내가 둘러본 바로는 연광정(練光亭)은 눈에 꽉 차고 마음에 들어맞아 사람들로 하여금 즐거운 마음이 들어 돌아갈 생각이 나지 않게 하나, 여염집들이 너무 가까이에 있어 초연히 티끌 세상을 벗어난 듯한 점이 부족하였다. 백상루(百祥樓)는 굉대하고 드넓으며 장대하고 화려하여 호호하기가 마치 허공 위에 앉아 있는 것만 같으나, 관새(關塞)의 감개한 생각이 일어나게 하였다. 강선루(降仙樓)는 맑은 시내와 높은 절벽이 있어 난간의 모습이 물에 비치며, 그윽하고 고요하며 아득하고 멀어서 사철의 경치에 모두 마땅하나, 창활하고 드넓은 즐거움이 없었다. 낙민정(樂民亭)은 굉대하고 공활하기는 백상루와 비슷하고 안온하고 상쾌하기는 연광정만 못하며, 여염집이 가까운 것과 관새 지방의 감개가 이는 하자를 모두 겸하고 있었다. 청심루(淸心樓)는 관촌(官村)을 끼고 있으나 그 가까운 것이 싫지 않고 뭇 산들이 둘러쳐져 있으면서도 그 막힌 것을 깨닫지 못하겠는바 드넓어서 통창하고 숙연하여 고요하나, 의논할 만한 점은 하늘이 만들어 내고 땅이 베푼 자연이 위에서 말한 여러 명승지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니 필경에 갑이냐 을이냐 하는 순서를 따짐에 있어서 누가 가장 앞쪽에 거처하겠는가. 신유(神遊)와 몽상(夢想)은 아마도 이 정자에 있을 것이다. 안목을 갖춘 자가 뒷날에 확실하게 논하기를 기다린다.

소양정(昭陽亭)
삼월 달에 소양강 가 있는 정자 올라보니 / 三月昭陽江上樓
정자 앞의 형승 정말 노닐기에 적당하네 / 樓前形勝最堪遊
땅은 멀고 하늘 높아 등왕각과 흡사하고 / 地逈天高擬滕閣
물가 맑고 모래 희어 기주와도 비슷하네 / 渚淸沙白似夔州
살구꽃은 이미 지고 복사꽃도 져 가는데 / 杏花已落桃花老
왕손께선 아니 와서 봄풀들은 시름하네 / 王孫未歸芳草愁
술 취하여 기둥 기대 휘파람을 길게 부니 / 酒酣倚柱發長嘯
서산 마루 지는 해는 우두산에 빛을 쏘네 / 西山落日射牛頭
우두(牛頭)는 산 이름이다.

정자에서 내려와 배를 타고 강을 건넜는데 물이 맑아서 바닥이 다 보여 모래와 자갈을 하나하나 셀 수가 있었다. 우두산(牛頭山)을 지나 부복천(扶服遷) - 사투리에 잔도(棧道)를 천(遷)이라고 한다. - 을 거쳐 청평동(淸平洞)으로 들어갔다. 춘천에서부터 이곳까지의 거리는 40여 리이다. 환희령(歡喜嶺)에 도착하여 말에서 내려 폭포를 보았다. 조카 광환(光煥)과 두 이생(李生) - 이득배(李得培)와 이중경(李重慶)이다. - 과 두 최생(崔生) - 최재형(崔再亨)과 최홍기(崔弘耆)이다. - 이 따라왔다. 송단(松壇)에 앉아서 술 몇 잔을 돌려 마셨다. 맑은 시내와 널따란 반석이 있으며, 낙락장송과 고목이 좌우에 줄지어 서 있었는데, 비가 내린 뒤라서 산꽃이 만개하였고 물살이 더욱 장려하여 맑은 모습을 발하고 있었는바, 역시 일대 장관이었다.

산으로 들어가다
숲을 뚫고 골짝 들자 길은 백 번 굽도는데 / 入洞穿林路百廻
꽃 저편에 멀리 신선 사는 누대 보이누나 / 隔花遙見有仙臺
붉은 단애 푸른 절벽 겹겹으로 겹친 곳에 / 丹崖翠壁重重處
한 줄기의 은빛 시내 눈 뿜으며 흘러오네 / 一道銀川噴雪來

또다시 위로 수백 보를 올라가니 영지(影池)가 있었는데, 물빛이 맑으면서도 푸르렀다. 산 중턱에 있는 견성암(見性菴)이 그 속에 비쳤으므로 영지란 이름을 얻은 것이다. 연못의 양쪽 모퉁이에는 돌을 쌓아 물을 가뒀는데, 물이 새어나가 쉽사리 고갈될 것만 같았는데도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고 비가 와도 넘치지 않으니, 역시 이상한 일이다. 연못의 주위에는 붉은 나무가 서너 그루 심어져 있는데, 그 크기가 두 아름은 되었다. 고려 때의 중인 나옹(懶翁)이 심은 것이라고 한다.

영지(影池)
고인 물은 천 년 동안 한 빛깔로 맑았거니 / 止水千年一色淸
상방 칠한 고운 단청 허공 꽂혀 빛 밝구나 / 上方金碧倒空明
찾아온 객 허연 머리 비치는 게 부끄러워 / 客來羞照星星鬢
애오라지 연못가에 가서 갓끈 씻어 보네 / 聊就池邊試濯纓

청평사(淸平寺)는 본디 경운산(慶雲山)의 보현원(普賢院)이었는데, 고려 때 이자현(李資玄)이 관직을 버리고 이곳에서 37년 동안 은거해 있으면서 이름을 청평사라고 고쳤다. 절 앞에는 두 개의 연못과 두 개의 비석이 있는데, 서쪽에 있는 것은 송(宋)나라 건염(建炎) 4년에 김부철(金富轍)이 이자현의 사실을 기술한 것을 승 탄연(坦然)이 쓴 것이고, 동쪽에 있는 비석은 원(元)나라 태정황후(泰定皇后)가 태자를 위하여 이곳에 불경을 보관해 복리(福利)를 구한 사실을 이익재(李益齋 이제현(李齊賢))가 찬하고 이행촌(李杏村 이암(李嵒))이 쓴 것이다. 문액(門額)에 경운산청평사(慶雲山淸平寺)라고 쓴 것은 승 보우(普雨)의 글씨이다. 전료(殿寮)와 낭서(廊序)가 빙 둘러 있어서 화려한 것이 엄연한 하나의 총림(叢林)이었는데, 근세에는 승도(僧徒)들의 부역이 번거로워 절을 지키면서 사는 자가 수십 명도 안 되어서 장차 폐찰(廢刹)이 되게 생겼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법당의 서북쪽 모퉁이에는 극락전(極樂殿)이 있는데, 이 역시 보우가 세운 것으로 금벽(金碧)과 단칠(丹漆)이 지나치게 사치스러워 보통 절과는 달랐다. 절의 남쪽 골짜기 속에는 세향원(細香院)이 있는데, 청한자(淸寒子)가 머물러 살던 곳으로 지금은 무너졌다.

[주D-001]등왕각(滕王閣) : 강서성(江西省) 남창현(南昌縣)의 강가에 있는 정자로, 당(唐)나라 고조(高祖)의 아들인 원영(元嬰)이 홍주 자사(洪州刺史)로 있을 적에 지은 것인데 원영이 뒤에 등왕(滕王)에 봉해졌으므로 이렇게 이름한 것이며, 왕발(王勃)의 등왕각서(滕王閣序)로 더욱 유명해졌다.
[주D-002]왕손(王孫)께선 …… 시름하네 : 고향을 떠나 있는 사람의 수심을 표현하는 말로, 회남소산(淮南小山)이 지은 초사(楚辭)인 초은사(招隱士)에 “왕손께선 노니느라 돌아가지 않는데, 봄풀은 자라나서 우거졌도다.〔王孫遊兮不歸 春草生兮萋萋〕”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3]상방(上方) : 절의 주지(住持)가 거처하는 방을 말하는데, 전하여 절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주D-004]청한자(淸寒子) :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김시습(金時習)의 호이다. 그는 청한자 이외에도 매월당(梅月堂), 동봉(東峰), 벽산(碧山), 췌세옹(贅世翁)이라는 호가 있다.

 

 

청장관전서 제54권
 앙엽기 1(盎葉記一)
공민왕(恭愍王)의 그림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이 손수 파평군(坡平君) 윤준(尹俊)의 상(像)과 율정(栗亭) 윤택(尹澤)ㆍ행촌(杏村) 이암(李嵒)의 상을 그려서 내려주고 또 추산도(秋山圖)를 그려 밀직(密直) 윤호(尹虎)에게 내려주었으며, 달마절로도해도(達磨折蘆渡海圖)ㆍ동자보현육아백상도(童子普賢六牙白象圖)와 각운귀곡(覺雲龜谷)이란 큰 글씨를 써서 조계종사(曹溪宗師) 운공(雲公)에게 주었다. 내가 일찍이 이낙서(李洛瑞) 이서구(李書九)의 자이다. 의 집에 보관되어 있는 공민왕의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를 보았다. 찢어진 깁이 다 해진 나비의 날개 같은데, 거기에 다만 경가(麖麚 사슴의 일종) 두세 무리만 남았을 뿐이나 우사(藕絲 연꽃 줄기 속에 있는 가느다란 실)와 같이 섬세한 그림이 참으로 천인(天人)의 필치(筆致)였다.

필원잡기 제1권
필원잡기 제1권


서거정(徐居正) 저(著)

○ 일찍이 상고하건대, 당요(唐堯) 원년(元年) 갑진년 으로부터 홍무(洪武 명 태조 연호) 원년 무신년까지가 총 3천 7백 85년이며, 단군(檀君) 원년 무진년으로부터 우리 태조(太祖) 원년 임신년까지가 역시 3천 7백 85년이니, 우리나라 역년(歷年)의 수가 대개 중국과 서로 같다. 제요(帝堯)가 일어나자 단군이 일어났고, 주 무왕(周武王)이 나라를 세우자 기자가 봉해졌으며, 한(漢) 나라가 천하를 평정하자, 위만(衛滿)이 평양으로 왔고, 송 태조(宋太祖)가 장차 일어날 때에 고려 태조가 이미 일어났으며, 우리 태조가 개국(開國)한 것도 명 태조 고황제(明太祖高皇帝)와 같은 시대이다.
○ 옛 기록에 이르기를, “단군이 요(堯)와 같은 날에 즉위하여 우(虞) 나라와 하(夏) 나라를 지나 상(商) 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년에 이르러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서 신(神)이 되었는데, 향년(享年)이 1천 48세이다.” 하였다. 당시의 문적(文籍)이 전하지 않아서 그 참과 거짓을 상고할 수 없으나 지금까지 그대로 전하여서 옛 기록을 적은 것이다.
나는 생각하기를, 요의 시대에는 인류 문화가 밝게 선양(宣揚)되었는데, 하(夏)ㆍ상(商)에 이르러 세상이 점점 나빠져서 임금이 왕위(王位)에 있음이 장구한 자도 40~50년에 지나지 아니하였다. 사람의 수명이 상수(上壽)는 백 년, 중수(中壽)는 60~70년, 하수(下壽)는 40~50년인데, 어찌 단군만이 1천 백 년에 가까운 수를 갖고 한 나라의 왕위에 있었으리오. 그 말이 거짓임을 알겠다.
또 이르기를, “단군이 아들 부루(扶婁)를 낳았으니, 이가 동부여왕(東扶餘王)이 되었다. 우(禹)임금이 제후(諸侯)들을 도산(塗山)에 모을 때에 이르러 단군이 부루를 보내어 조회하였다.” 하였으나, 그 말은 근거가 없다. 만약 단군이 오래도록 왕위에 있었고 부루가 도산의 모임에 갔었다면, 비록 우리나라의 문적에는 기재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중국의 글에 어찌 한마디 말도 이를 기록한 것이 없었을까.
단씨(檀氏)가 서로 대를 전하여 나라를 이은 햇수가 1천 48년인 것은 의심이 없다. 문충공(文忠公) 권근(權近)의 시에 이르기를,
내가 들으니 천지가 아득한 날에 / 聞說鴻荒日
단군이 박달 나무가에 내려왔다 하네 / 檀君降樹邊
몇 대를 전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 世傳不知幾
지내온 햇수는 천 년이 넘네 / 歷年曾過千
하였으니, 이는 그 대를 전함과 역년(歷年)이 오래 되었음을 이른 것이다.
○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封)한 것이 주 무왕(周武王) 기묘년이었으며, 뒤에 임금 준(準)에 이르러, 한고조(漢高祖) 병오년에 위만(衛滿)이 침입하여 배를 타고 남쪽으로 피하였는데, 기씨(箕氏)가 평양에서 도읍한 것이 8백 78년이다. 기준(箕準)이 금마군(金馬郡)에 도읍하여 이를 마한(馬韓)이라 하였다. 한사군(漢四郡)과 이도독부(二都督府)의 시대를 지나서 백제(百濟) 온조왕(溫祚王) 26년 무진년에 망하였으니, 이것이 또 1백 40여 년이다.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백제왕이 마한을 습격해서 점령한 것만을 기록하였고, 기씨의 세계(世系)는 명백히 말하지 않았으니, 당시에도 필시 상고할 만한 것이 없어서일 것이다.
○ 《천운소통(天運紹統)》을 상고해 보니, 함허자(涵虛子)가 말하기를, “조선은 안동국(安東國) 동쪽에 있는데 옛 숙신씨(肅愼氏)의 땅이다. 무왕이 기자를 봉하여 제후를 삼아서 은(殷)은 뒤를 이어 중국의 번방(藩邦 속국)을 삼았는데, 주(周)가 망함으로부터 후한(後漢)까지 천여 년을 지나서 공손강(公孫康)에게 찬탈당하여 기자의 전통이 끊어졌다.” 하였다.
또, “기자가 중국의 5천 명을 거느리고 조선에 들어갈 때에, 시(詩)ㆍ서(書)ㆍ예(禮)ㆍ악(樂)ㆍ의(醫)ㆍ무(巫)ㆍ음양복서(陰陽卜筮) 등속과 온갖 공인(工人)과 기예(技藝)들이 모두 따라갔기 때문에, 반만(半萬)의 은인(殷人)들이 요수(遼水)를 건넜다 한 것이 이것이다.” 하였는데, 지금 상고해 보건대, 공손강의 찬탈이란 것은 근거가 없고, 5천의 은나라 사람들이 요수를 건너갔다는 것은 어느 글에서 나온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 함허자(涵虛子)가 또 말하기를, “기자가 조선에 이르니, 말이 통하지 아니하여 통역으로 말을 알았고, 시서(詩書)를 가르쳐서 중국의 제도를 알게 하였다. 그 결과 부자와 군신의 도리가 비로소 행해지고, 오상(五常)의 예의가 비로소 갖추어졌으며, 백공의 기예를 가르쳐서 의원ㆍ무당ㆍ음양복서의 술법이 비로소 있게 되었다. 예의와 농사짓고 누에치는 일로써 여덟 가지 법을 제정해서 백성을 교화하니, 한 해가 지나자 백성이 스스로 교화되었다. 사람을 죽인 자는 재물로써 속죄(贖罪)하고, 상해(傷害)한 자는 곡식으로 속죄하며, 도둑질한 자는 남자는 노예가 되고, 여자는 계집종이 되게 하니, 3년이 못 되어 사람들이 모두 교화되었다. 그리하여, 신의(信儀)를 숭상하고 유학(儒學)을 독실히 하여 중국의 풍속을 이룩하였으니, 성인의 교화라 이를 만하다. 병기(兵器)로써 싸우지 말기를 가르치기를, ‘하루의 난리는 10년이 지나도 안정되지 못하여 생민이 도탄(塗炭)에 빠져서 생업을 편안히 할 수 없다.’ 하였다. 이리하여 덕으로써 강포(强暴)함을 감복시키니, 이웃 나라에서 그 의(義)를 사모하고 서로 친하였으며 중국의 번방(藩邦)이 될 것을 맹세하였다. 이에 역대(歷代)로 중국을 친히 하고 신임하여 봉작(封爵)을 받고 조공(朝貢)을 끊이지 아니하였으며, 예의의 도(道)가 없어지지 않아서 의관과 제도가 모두 중국 각대(各代)의 제도와 같기 때문에, 시서예악(詩書禮樂)의 나라요, 인의(仁義)의 나라라 말하게 된 것은 기자가 창시한 것이다.” 하였다.
나는 생각하기를, 함허자의 논술이 《한서(漢書)》와 대략 같은데 우리 동국의 풍속에 세밀하였다. 역대의 여러 역사서와 국조의 《혼일지(渾一誌)》에 논술한 바는 그릇되고 근거가 없으니, 모두 잘못 들은 데에서 나온 것이다.
○ 우리나라의 분야(分野)는 옛 사람은 연도(燕都 북경)에 비겼었는데, 기사 연간에 혜성(彗星)이 연경의 분야에서 나오니, 일관(日官 천문을 보는 관리)이 아뢰기를, “이는 우리나라와 관계가 없습니다.” 하였으나, 세종께서 깊이 근심하여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연경과 분야가 같은데 어찌 관계가 없겠는가.” 하더니, 기사년 가을에 정통황제(正統皇帝)가 북정(北庭)에서 함몰되었고, 우리 세종대왕이 승하(昇遐)하였으니 연경과 분야가 같다는 말이 일리가 있을 듯하다.
○ 비류(沸流)와 온조(溫祚)가 부아악(負兒岳)에 올라서 살 만한 땅을 살펴보고, 비류는 미추홀(彌鄒忽)에 도읍하였고, 온조는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하였다가 뒤에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옮겼으니, 곧 지금의 광주(廣州)이며, 또 북한산성(北漢山城)으로 옮겼으니 곧 지금의 한양(漢陽)인데, 그 중 명당(明堂) 터는 어느 곳인지 알지 못하겠다. 한양이 이씨(李氏)의 도읍 터가 된다는 것은 도선(道詵)의 도참(圖讖)에서 나타났는데, 이 때문에 고려에서 한양에 남경(南京)을 세우고 오얏나무[李]를 심었으며, 이성(李姓)을 가려서 부윤(府尹)을 삼고 왕도 해마다 한 번씩 순행하여 용봉장(龍鳳帳)을 묻어서 그 지기를 눌렀었다.
내 일찍이 《고려사(高麗史)》를 상고하건대, 한양 명당(漢陽明堂)은 임좌병향(壬坐丙向)의 자리라고 한 것만 쓰여 있고 그 땅은 분명히 말하지 않았는데, 지금 창덕궁(昌德宮)과 경복궁(景福宮) 두 궁궐의 정전(正殿)을 살펴보면 다 임좌병향이니, 억측하건대 고려에서 잡은 곳도 이 두 궁터에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근래에 술사(術士) 최양선(崔揚善)이라는 이가 있어 승문원(承文院)의 옛 터가 바로 명당자리라 하고, 혹자는 또 종묘 낙천정(宗廟樂天亭) 자리가 대지(大地)라고 한 것은 다 식견이 얕고 근거가 없는 말이다.
○ 도선은 백제(百濟) 사람이다. 일찍이 도선의 어머니가 처녀로서 냇가에 놀다가 아름답고 큰 오이[瓜]를 얻어서 먹었는데 갑자기 아이 밴 것을 깨달았다. 아이를 낳으니 부모가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냇가에 버렸더니 바야흐로 추울 때인데, 갈매기 떼 수천 마리가 날아와서 위아래로 싸고 덮어서 십여 일이 되어도 죽지 않으므로 부모가 이상하게 여겨서 거두어 길렀다. 장성하자 출가하여 입산수도하였는데, 하늘의 신선이 하강하여 천문ㆍ지리ㆍ음양의 비법을 전수하였다. 또 당(唐)에 들어가서 승려인 일행(一行)의 술법을 배웠으니, 세상에 전하는 도참은 모두 도선이 지은 것이다.
근간에 당본(唐本)인 《성요(星曜)》 한 질(秩)을 얻었는데, 그 책에 고려국사부(高麗國師賦)라 한 것이 있으니, 의논이 정미(精微)하여 도선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의논한 야율초재(耶律楚財)와는 시대의 거리가 너무 떨어지니, 이는 의심스러울 만하다. 어쩌면 고려국사라는 이가 도선의 술법을 비밀히 전하여 동방에는 전해 주지 아니하고 중국에 전해 주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영암현 도갑사(靈巖縣道岬寺)에 도선의 비(碑)가 있고 또 구림(鷗林 갈매기가 모였던 숲)이 있다.
○ 우리 동국의 필법(筆法)은 김생(金生)이 제일이고, 요학사 극일(姚學士克一)과 중 탄연(坦然)ㆍ영업(靈業)이 둘째가 되는데 모두 우군(右軍 왕희지(王羲之))를 본받았다. 이규보(李奎報)가 일찍이 평론하기를, 최충헌(崔忠獻)을 신품제일(神品第一)로 삼고, 탄연을 둘째로 삼고, 유신(柳紳)을 셋째로 삼았으니, 이는 권세가에게 아부한 것이요, 공정한 평론은 아니다.
원(元)으로부터 내려오면서 글씨를 배우는 이는 다 조맹부(趙孟頫)의 법을 세웠다. 선생(조맹부)의 수적(手跡)이 온 세상에 퍼져서 그 동국에 유전한 것을 내가 본 것만도 수백 본이 되었는데, 묵적(墨跡)이 새 것 같다. 그 보지 못한 것이 얼마인지 알지 못하겠으며, 온 세상에 흩어진 것이 또 얼마인지 알지 못하겠고, 조맹부로부터 지금까지의 시대가 오히려 멀며, 우리 동국은 한쪽 구석에 있으나 조맹부의 필적을 오히려 많이 얻어 볼 수 있었다. 당(唐)으로부터 진(晉)까지의 시대는 서로 멀지 않은데도 당의 문황(文皇)은 천자의 큰 힘으로써, 왕희지의 진적(眞跡)을 구할 때에 소이(蕭異)를 보내어 많은 고난을 겪은 뒤에 얻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기사년 간에 학사인 예겸(倪謙)이 사신으로 와서 말하기를, “조공(趙公)의 필법을 중국에서는 보기 드물다.” 하였으니, 이는 우리나라에 많이 있는 것을 감탄한 것이다.
내가 생각하건대, 고려 충선왕(忠宣王)이 원 나라 조정에 들어가서 만권당(萬卷堂)을 짓고 날마다 당시의 명유(名儒) 6~7명과 더불어 조용히 논담(論談)하였으니, 조공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우리나라 문유(文儒)로 이제현(李齊賢) 선생 같은 분도 그와 또한 많이 시종했다. 왕이 동으로 돌아올 때에 문적과 서화 만 첨(萬籤)을 싣고 왔으니, 조맹부의 수적이 동국에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 동국에서 조공의 필법과 정신을 얻은 이는 행촌(杏村) 이암(李嵒) 한 사람뿐이다.
○ 김생은 신라 원성왕(元聖王) 때 사람인데, 글씨를 잘쓰기로 유명하였다. 송(宋) 나라 숭녕(崇寧) 때에 고려의 학사 홍관(洪瓘)이 송나라에 들어갔었더니, 한림 대조(翰林待詔) 양구(楊球)와 이혁(李革)이 황제의 칙명을 받고 족자에 글씨를 쓰는데, 홍관이 김생의 행서와 초서 한 권을 보여주니, 두 사람이 크게 놀라며 말하기를, “오늘에 왕우군의 진적(眞跡)을 얻어 볼 줄은 생각지 못하였다.” 하였다. 홍관이 말하기를, “이것은 신라 사람 김생의 글씨이다.” 하니, 두 사람이 웃으며 말하기를, “천하에 왕우군을 빼놓고 어찌 이 같은 신묘한 필적이 있으리오.” 하였다. 관이 항변하였지만 끝내 듣지 않았었다.
근간에 조학사 자앙(趙學士子昻 조맹부)의 창림사비 발문(昌林寺碑跋文)을 보니 이르기를, “위의 글씨는 당 나라 때 신라의 승려 김생이 쓴 신라국의 창림사비인데 자획이 매우 법도가 있으니, 비록 당 나라 사람의 유명한 각본(刻本)이라도 이보다 크게 낫지 못할 것이다. 옛 말에, ‘어느 땅엔들 나무가 나지 않으리오.’ 하였으니, 과연 옳다.” 하였으니, 조학사의 이 발문을 보면 김생의 필법이 고금에 뛰어난 것을 알 수 있다.
○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이 당 나라에 들어가서 과거에 급제하고, 고병(高騈)의 종사관이 되어 황소(黃巢)를 토벌하였다. 그 격문(檄文 편지)에 이르기를, “천하의 사람이 모두 드러내어 죽이기를 원할 뿐만 아니라, 또한 땅속의 귀신들도 이미 은밀히 죽일 것을 의논한다.” 하니, 황소가 격서를 읽다가 이 대문에 이르자, 저도 모르는 사이에 평상에서 내려왔으니, 이로 인하여 이름이 세상에 드러났다. 지금 그 《계원필경(桂苑筆耕)》은 이해하지 못할 곳이 많으니, 당시의 기습(氣習)이 이 같은 것인지, 아니면 동방의 문체가 옛 법식과 같지 못해서인지 의심스럽다. 신라의 글이 지금에 전하는 것은 전혀 없고 다만 원효와 설총이 지은 한두 편이 있을 뿐이다. 내가 일찍이 신라에서 당 나라에 바친, 비단에 수놓은 오언고시(五言古詩)와 고려 을지문덕의 우중문(于仲文)에게 준 오언사구(五言四句)를 보니, 다 정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당시에 글이 능한 선비가 적지 않았으나 지금 만분의 일도 전하는 것이 없으니, 애석하도다.
○ 당 나라 학사 고운(顧雲)이 지은 최치원의 고향에 돌아감을 송별하는 시에
열두 살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서 / 十二乘舟渡海來
문장으로 중화에 이름을 떨쳤다 / 文章感動中華國
한 것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이 준 글에,
무협 중봉의 나이(12세)에 베옷으로 중화에 들어갔다가 / 巫峽重峯之歲絲入中華
은화 열수의 나이(28세)에 비단옷으로 동국에 돌아갔다 / 銀河列宿之年錦還東國
한 것이 있으니, 이는 12살에 당에 들어갔다가 28세에 동국에 돌아갔다는 것이다.
동국에 돌아온 뒤의 이력과 행적은 상고할 바가 없다. 혹은 말하기를, “그때 마침 세상이 어지러워서 가야산 해인사에 숨어 중들과 한가롭게 놀았다.” 하였다. 공이 쌓은 영주(瀛洲) 등 삼산(三山)과 홍류동 봉하석(紅流洞鳳下石)에 그가 쓴 유적이 지금도 완연하나, 그의 세상을 마친 곳을 알지 못하겠으며, 세상에서는 신선이 되어 떠나갔다고 한다. 상고해 보면 당(唐) 희종(僖宗) 12년 을사년은 신라 헌강왕(憲康王) 11년인데, 최치원이 당 나라에서 황제의 조서를 받들고 돌아왔고, 10년이 지난 갑인년 진성왕(眞聖王) 8년에 시무(時務) 10여 조항을 올렸는데 왕이 가상하게 여겨 받아들였다.
이때는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완산(完山)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킨 지가 이미 3년이 되는 해이다. 25년을 지나서 무인년에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나라를 세웠고, 또 10년을 지나 정해년에 견훤이 신라에 들어가서 임금을 시해하였는데, 최치원의 나이 그때 70이 되어 크게 노쇠하지 않았을 것인데도 그 거취(去就)를 상고할 바가 없으니, 의심할 만한 일이다.
○ 사대(事大)의 표문(表文)과 전문(箋文)은 모름지기 정밀하고 간절하여야 한다. 고려 때에 요인(遼人)들이 압록강을 넘어 국경 삼으려 하니, 참정(參政) 박인량(朴寅亮)이 진정표(陳情表)를 지었는데, 이론과 실지가 명백 간절하였으므로 요제(遼帝)가 그 의논을 정지하였다.
명 태조(明太祖) 29년 하정(賀正)할 때에, 청성군(淸城君) 정탁(鄭擢)이 표문을 지었고, 광산군(光山君) 김약항(金若恒)이 전을 지었으며, 서성군(西城君)정총(鄭摠)과 길창군(吉昌君) 권근(權近)이 윤색하였는데, 황제가 보고 표문과 전문의 말이 모멸에 가깝다고 노여워하여 정총ㆍ김약항ㆍ권근 등을 불러 문책하였는데, 권근은 용서를 받아 돌아왔으나, 정총 등은 억류되어 돌아오지 못하였다.
고려의 지제고(知制誥) 최보순(崔甫淳)이 금 나라 황제의 등극(登極)을 하례하는 표문에 이르기를, “오마(五馬)가 강을 건너 진제(晉帝)가 새 임금이 됨을 나타내었고, 육룡(六龍)이 등극하니 주역(周易)의 대인(大人)을 봄과 부합한다.” 하였는데, 그때 금나라 군주는 형제가 나라를 다투었었으므로, 이러한 사실에 저촉된 것을 미워하여 그 칙명에, “진(晉) 원제(元帝)의 일을 인용한 것은 부당하다.” 하였다. 최보순은 이로 인하여 견책을 당하였으니, 최보순의 표사(表辭)가 묘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요의 노여움을 일으킨 것은, 일을 인용함이 적절하지 못한 데에 말미암은 것이다.
○ 세상에 전하기를, “김부식(金富軾)이 정지상(鄭知常)의 재능(才能)을 질투하여 살해하였다.” 하나, 지금 《고려사》를 상고해 보니, 정지상이 묘청(妙淸)의 술책에 빠져서 그 우익(羽翼)이 다 제거되어 스스로 온전하기는 실로 어려웠으므로, 김부식이 사사로이 용서할 바도 아니었다. 또 본전(本傳) 및 여러 책에 한 마디도 억울하게 살해되었다는 기록이 없는데 세상에서 전하는 바가 이와 같음은 무슨 까닭인가. 근래에 김태현(金台鉉)의 《동국문감(東國文鑑)》을 상고해 보니 그 주(註)에 이르기를, “김과 정이 문자(文字) 사이에 감정이 쌓여 있었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당시에 이미 이런 말이 있었던 것이다.
○ 김부식이 송나라에 들어가서 우신관(祐神館)에 가보니, 한 당(堂)에 여선상(女仙像)을 놓았는데, 관반(館伴 사신을 접대하는 사람) 왕보(王黼)가 말하기를, “이는 귀국의 신(神)인데 공 등은 아는가?” 하고 말하기를, “옛날 황제의 딸이 있었는데, 남편이 없이 아이를 배어서 사람들에게 의심을 받았다. 이에 바다를 건너가 진한(辰韓)에 이르러 아들을 낳으니, 해동의 첫 임금이 되고, 그녀는 지선(地仙)이 되어 선도산(仙桃山)에서 영생(永生)하는데, 이것이 그 여신상이다.” 하였다. 지금 상고하건대, 신라ㆍ고구려ㆍ백제의 시초에는 이런 황제의 딸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고, 다만 동명왕(東明王)의 출생에 유화(柳花)의 일이 있었는데, 아마도 중국에서 잘못 알고 이런 말이 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 고려 말기에 인심이 다 우리 태조께 돌아왔으나, 목은 이색(李穡) 선생은 조금 다른 형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환왕(桓王 이성계의 아버지 자춘(子春) 환조로 추존됨)의 비문을 지은 것이 태조의 잠저(潛邸 왕이 되기 전) 때였는데, “주(周) 나라가 비롯 옛 나라이나, 천명이 새롭도다.”는 말을 인용하였으니, 어찌된 일인가. 도통(都統) 최영(崔瑩)이 죽을 때에, “이광평(李廣平 이인임(李仁任)의 봉호)이 항상 말하기를 ‘판삼사(判三司 태조)가 마땅히 나라의 주인이 되리라.’하더라.” 하였으니, 광평과 도통은 다 나라를 담당한 대신으로서 오히려 이런 말이 있었으니, 천명과 인심이 우리 태조에게 돌아간 것은 무진년(태조가 등극한 해)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 우리 태종이 경사(京師)에 갔을 적에 문황제(文皇帝)가 연왕(燕王)으로 있었는데 태종이 찾아가 방문하자 문황제가 말을 해보고 크게 기뻐하여 총애와 대우가 지극하였다. 태종이 환국함에 미쳐 우리 조정 사대부들이 태종께 묻기를, “천하가 크게 평정되겠습니까?” 하였는데, 그때는 고황제(高皇帝 태조)가 정무를 사퇴하고 건문제(建文帝)가 태자로 있을 때이다. 태종이 대답하기를, “내가 연왕을 보니 하늘의 태양 같은 의표와 용봉(龍鳳)의 자품이며 넓고 큰 도량이니, 번왕(藩王)으로 오래 있을 사람이 아니더라. 천하가 안정될 것은 알 수 없다.” 하였다. 얼마 안 되어 문황제가 연왕으로서 천자가 되니, 사람들이 모두 태종의 선견지명(先見之明)에 탄복하였다. 문황이 천자의 위에 오른 뒤에 우리 태종을 특별히 생각하고 매양 우리나라 사람을 보고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너희 나라의 임금을 보니 참으로 하늘이 낸 인물이더라.” 하였다.
○ 우리나라에서 명나라에 진공(進貢)하는 말을 태종이 친히 뽑아 고르는데 하열(下列)에 있는 말을 제 일등으로 하기를 명하니, 마부들이 모두 괴이하게 여겼는데, 말을 진상하자 문황이 보고 말하기를, “조선 국왕이 나를 사랑하는구나. 맨 먼저 올린 말이 참 좋은 말이다.” 하였다. 그런 뒤에야 성신(聖神)의 보는 바가 거의 같다는 것을 알았다. 태종이 근신(近臣)에게 말하기를, “준마(駿馬)를 고르는 것과 인재를 분별하는 것은 내가 옛 사람에게 양보하지 아니한다.” 하였다.
○ 세종은 천성이 학문을 좋아하여 합문(閤門)을 나가기 전에, 언제나 글을 반드시 백 번씩 읽으며, 《좌전(左傳)》과 《초사(楚詞)》는 다시 백 번을 더하였다. 일찍이 몸이 편치 못하면서도 글 읽기를 폐하지 아니하여 병이 점점 심해지니, 태종이 내시에게 명하여 갑자기 그 처소에 가서 책을 모두 거두어 오게 하였다. 이때 오직 구양수(歐陽脩)와 소동파(蘇東坡)가 손수 쓴 간찰문 한 권만이 병풍 사이에 남아 있었는데, 세종은 천 백 번을 읽었다. 왕위에 오르자 날마다 경연(經筵)에 나가서 읽지 않은 책이 없었으니, 밝고 부지런한 공이 백왕(百王)에서 뛰어나셨다. 일찍이 근신(近臣)에게 말하기를, “글을 읽는 것은 유익한 일이나 글씨 쓰고 글 짓는 것과 같은 일은 임금으로 유의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만년에 노쇠하여 정무는 보지 않으면서도, 문학에 대한 일에는 더욱 마음을 두어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부서를 나누어 여러 책을 편찬하게 하였으니, 《고려사(高麗史)》ㆍ《치평요람(治平要覽)》ㆍ《병요(兵要)》ㆍ《언문(諺文)》ㆍ《운서(韻書)》ㆍ《오례의(五禮儀)》ㆍ《사서오경음해(四書五經音解)》 등이 동시에 편찬되었는데, 다 왕의 재결을 거쳐서 이룩되었으며 하루 동안에 열람한 것이 수십 권에 이르렀으니, 가히 하늘의 운행과 같이 정성이 쉬지 않는다 하겠다.
○ 세종이 처음 아악(雅樂)을 제정함에 중추(中樞) 박연(朴煗)이 도와서 이룩하였다. 박연은 앉으나 누우나 매양 가슴에 손을 얹고 악기 치는 시늉을 하며, 입으로는 휘파람을 불어 음률(音律)의 소리를 내어가며 10여 년의 공을 쌓아 비로소 이룩하니, 세종이 매우 중하게 여겼다. 세종은 또 자격루(自擊漏)ㆍ간의대(簡儀臺)ㆍ흠경각(欽敬閣)ㆍ앙부일구(仰釜日晷) 등을 제작하였는데, 만든 것이 극히 정치(精緻)하였으며, 모두가 왕의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비록 여러 공장(工匠)들이 있었으나 임금의 뜻을 맞추는 이가 없었는데, 오직 호군(護軍) 장영실(蔣英實)이 임금의 지혜를 받들어 기묘한 솜씨를 다하여 부합되지 않음이 없었으므로 임금이 매우 소중히 여겼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박연과 장영실은 모두 우리 세종의 훌륭한 제작을 위하여 시대에 응해서 태어난 인물이다.” 하였다.
○ 세종이 일찍이 사마온공(司馬溫公)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유의하였는데, 그 주석이 정밀하지 못하고 구두가 명백하지 못함을 근심하여, 유신(儒臣)에게 명해서 많은 책을 널리 채집하여 일에 따라 소자쌍행(小字雙行)으로 간주(間註)를 달아서 열람하기에 편리하게 하였다. 이에 호삼성(胡三省)의 《음주(音注)》와 《원위(源委)》, 《석문(釋文)》, 《집람(集覽)》 등의 책을 의거해서 깎고 보태었으며, 미진한 곳은 다른 책을 상고하여 보충하였다. 혹 글이 이해하기 곤란한 곳은 본사(本史)의 전구(全句)를 주해하고, 혹은 글 구(句) 밑에 구자(句字)를 써서 구두에 편리하게 하였으며, 글자의 해석과 번음(飜音)에 이르러서도 상세하게 갖추어 있지 않음이 없으니, 모두가 왕의 재량으로 이룩한 것인데, 이를 《사정전훈의(思政殿訓義)》라 이름 하였다. 《강목통감(綱目通鑑)》도 그렇게 하였으니, 그 훈의(訓義)의 정밀함은 고금에 없는 바이다.
근래에 명나라에서 편찬한 《강목통감집람(綱目通鑑集覽)》을 보니, 엉성하고 빠진 부분이 자못 많고, 또 주해를 글 구(句) 밑에 넣지 아니하고 매권(每卷)의 끝에 붙여서 열람하기에 불편하였다. 나의 망령된 생각으로는, 마땅히 우리나라의 《훈의》를 제일로 쳐야 할 듯하다. 또 《훈의》가 이룩된 것은 정통(正統) 병진년 이었고, 《집람》이 이룩된 것은 근일의 일이니, 중국에서 《집람》을 편찬할 때에 우리나라의 《훈의》를 보았더라면 반드시 탄상하여 마지않았을 것이다.
○ 태종이 일찍이 주자(鑄字)를 만들었는데, 모양이 썩 좋지는 못하였다. 경자년에 세종이 이천(李蕆)에게 명하여 중국의 좋은 글자 모양으로 고쳤는데, 이전 것에 비해서 더욱 정교하였으며 이를 경자자(庚子字)라 한다. 갑인년에 세종이 명하여 좋은 음양자(陰陽字)의 모양으로 다시 주조하였는데, 극히 정교하였으며 이를 갑인자(甲寅字)라 한다. 경자자는 작고 갑인자는 컸는데 인쇄한 서책이 매우 아름답다. 세종 말년에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이 쓴 글자 모양과 강희안(姜希顔)의 쓴 글자 모양으로 다시 주조하였는데, 인쇄한 서책이 점차 예전만 못하여졌다. 지금에 동자(銅字)는 다 공장(工匠)들이 훔쳐갔기 때문에 목활자(木活字)를 겸하여 사용하므로 글자의 크고 작은 것과, 새 것과 헌 것이 같지 아니하며 글줄이 고르지 못하니, 옛날 인쇄한 책에 비하여 크게 뒤떨어진다.
○ 세종은 문치(文治)에 힘씀이 만고에 뛰어나서 경자년에 처음으로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여 문사(文士) 열 사람을 뽑아서 채웠으며, 뒤에 30명으로 증원하였다가, 또 20명으로 고쳐서 열 사람은 경연(經筵)의 일을 맡고, 열 사람은 서연(書筵)을 겸직하였다. 오로지 문한(文翰)을 맡아서, 고금의 일을 토론하고 아침저녁으로 연구하니, 문장 하는 선비가 성대히 배출되어 인재를 많이 얻게 되었다.
집현전 남쪽에 큰 버드나무가 있었는데 기사년과 경오년 사이에 흰 까치가 와서 집을 지었는데 새끼가 모두 흰 색이었다. 수년 사이에 요직에 있는 이는 모두 집현전에서 나왔다. 영상 정인지(鄭麟趾), 좌상 이사철(李思哲), 영상 정창손(鄭昌孫),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이계전(李季甸)ㆍ안지(安止), 판서 김조(金銚), 참판 김돈(金墩), 판중추부사 김균(金鈞)ㆍ김말(金末), 영상 신숙주(申叔舟), 좌상 권람(權擥), 참찬 박중손(朴仲孫), 영상 최항(崔恒), 판서 김담(金淡), 판중추부사 이석형(李石亨), 의정 윤자운(尹子雲), 판중추부사 어효첨(魚孝瞻), 참판 노숙동(盧叔仝), 판서 양성지(梁誠之)ㆍ성임(成任)ㆍ이극감(李克堪), 부윤 이명겸(李鳴謙), 판서 김예몽(金禮蒙), 영중추부사 노사신(盧思愼), 서평군(西平君) 한계희(韓繼禧), 찬성 홍응(洪應), 참찬 이승소(李承召), 참판 이파(李坡), 판서 이병(李苪), 부윤 조근(趙瑾)ㆍ강희안(姜希顔), 판서 강희맹(姜希孟), 부윤 최선복(崔善復), 참판 박첩(朴捷) 등이며, 불초하지만 나 또한 그 사이에 참여하였다. 또 박중림(朴仲林)ㆍ박팽년(朴彭年)ㆍ하위지(河緯地)ㆍ성삼문(成三問)ㆍ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 등과 같은 이는 한때 현달하였는데, 계유년과 갑술년에 버드나무가 모두 말라 죽었으므로 어떤 이가 유성원에게 농담하기를, “화(禍)가 반드시 유(柳)로부터 시작할 것이라.” 하였는데, 유성원이 실패하였으니 그 말이 과연 들어맞았고 집현전도 얼마 후 없어지고 말았다.
○ 세종이 집현전을 설치하고 문학하는 선비를 모아서 수십 년 동안을 양성하여 인재가 많이 나왔으나, 오히려 아침에는 관청에 나가고 저녁에는 숙직하여 공부에 전념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나이가 젊고 재주와 덕행(德行)이 있는 몇 사람을 뽑아서 휴가를 주어 산에 들어가 글을 읽게 하고, 관청에서 그 비용을 공급하여 경사(經史)와 백가(百家), 천문(天文)과 지리(地理), 의약(醫藥)과 복서(卜筮) 등을 마음껏 연구하여 학문이 깊고 넓어 통하지 못하는 것이 없게 함으로써 장차 크게 쓰일 기초가 되게 하였다. 앞에는 문희공(文僖公) 신석조(辛碩祖), 승지 권채(權採), 직전(直殿) 남수문(南秀文)이 있었고, 뒤에는 문충공 신숙주가 있었으며, 그 밖의 사람도 모두 명사(名士)들이었다. 문종조(文宗朝)에는 남양군(南陽君) 홍응(洪應)과 한산군(韓山君) 이파(李坡)가 있었고, 보잘것없는 나도 여기에 선발되었으니, 참으로 일세의 거룩한 일이었다.
○ 문종이 세자가 되었을 적에, 희우정(喜雨亭)에 행차하여 동정귤(洞庭橘) 한 소반을 근신(近臣)에게 하사하고 손수 소반 위에 쓰기를
향기로운 향나무는 코에만 좋고 / 旃檀便宜鼻
기름진 고기는 입에만 맞는데 / 脂膏偏宜口
귀여울사 동정귤은 / 最愛洞庭橘
코에도 향기롭고 입에도 달도다 / 香鼻又甘口
하였는데, 자획이 용사(龍蛇)가 꿈툴 거리는 듯하고 광채가 빛났다. 내가 일찍이 그 글자를 임서(臨書)하여 간직하였는데 참으로 천하의 지보(至寶)이다.
○ 문종은 지혜가 밝고 정밀하였다. 집현전에서 일찍이 극성제문(棘城祭文 해주에 여귀(癘鬼)가 심하여 제사한 글)을 지어서 올렸더니, 문종이 보고 주묵(朱墨)으로 고치고 몇 마디 말을 썼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정(精)이 없는 것을 음양(陰陽)이라 이르고, 정이 있는 것을 귀신이라 이른다. 정이 없는 것은 더불어 말할 수 없으나, 정이 있는 것이면 이치로써 깨우칠 수 있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물과 불은 사람을 기르는 것이나 때로는 사람을 죽이는 일도 있으며, 귀신은 사람을 살리는 일도 있지마는 때로는 사람을 해치기도 한다.” 하여, 글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졌으니, 문장 하는 신하와 선비들이 미칠 바 아니었다.
○ 송(宋) 나라 인종(仁宗)이 죽으매, 영종황제(英宗皇帝)가 슬퍼하고 사모하니, 어떤 망녕된 자가 말하기를, “능히 신술(神術)을 부려서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린다.” 하므로 영종이 그 신술을 시험하기를 명하였으니, 효험이 없자 그 자가 말하기를, “태종이 인종과 함께 한가롭게 백옥루(白玉樓) 난간에 다다라서 모란꽃을 감상하시느라 인간에 다시 올 뜻이 없으십니다.” 하니, 영종이 그가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 것임을 알고서도 크게 죄를 주지 않았다. 우리 세종의 초상(初喪) 때에 요망한 중이 와서 이런 술책을 아뢰므로 다른 시체에 시험하였으나 효험이 없었으니, 이치에 없는 거짓말이므로, 문종도 죄를 주지 아니하였다.
○ 세조(世祖)는 천성이 호매(豪邁)하여 평시에 의논이 개연(慨然)히 당 태종(唐太宗)을 흠모하고 한 고조(漢高祖)를 하찮게 여겼는데, 하루는 세조가 조용히 양녕대군(讓寧大君) 제(禔)와 더불어 고금의 제왕(帝王)을 의논하다가, 당 태종에게는 미칠 수 없다고 하니, 양녕이 대답하기를, “전하는 당 태종보다 크게 뛰어납니다.” 하니, 임금이 얼굴을 고쳐 말하기를, “아! 이 무슨 말씀입니까. 숙부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하므로, 양녕이 말하기를, “당 태종은 한 조그만 일로 장온고(張薀古)를 죽였는데, 전하는 반드시 하지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전하의 가법(家法)이 바른 것은 당 태종이 미칠 바가 아닙니다.” 하니, 세조가 빙긋 웃었다. 또 포주강(蒲州江)의 야인(野人)을 정벌하는 일을 언급하자 양녕이 말하기를, “옛 사람이 말하기를, ‘천균(千鈞)의 활[弩 쇠뇌]은 작은 쥐를 보고 발사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원컨대 전하는 유의하옵소서.” 하였으니, 양녕의 소견이 역시 기이하였다.
○ 세조가 일찍이 조용히 나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유자(儒者)이니 예로부터 임금이 부처에게 절을 해야 하는가. 그대는 숨김 없이 말하라.” 하므로, 내가 대답하기를, “옛날 송 태조(宋太祖)가 상국사(相國寺)에 갔을 적에 불상 앞에서 향을 태우면서 마땅히 절을 해야 하는지 아닌지를 물었더니, 중 찬녕(贊寧)이 대답하기를, ‘현재 부처에게는 절하고 과거의 부처에게는 절을 아니 하는 것입니다.’ 하므로, 태조가 웃고 절을 하지 않았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임금이 부처에게 절을 하지 않음은 정도(正道)이고, 절을 하는 것은 권도(權道)라 생각합니다.” 하니, 세조가 크게 웃었다.
내가 또 아뢰기를, “태종조(太宗朝)에 중국 환관 황엄(黃儼)이 제주에서 동불(銅佛)을 가져 왔는데, 그가 태종께 먼저 부처에게 절을 하고 뒤에 예를 행하게 하니, 태종께서 절을 하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하륜(河崙) 등이 청하기를, ‘황엄은 마음이 흉험(凶險)하여 트집하기를 좋아하니 권도를 좇아 부처에게 먼저 절을 하는 것이 마땅할까 합니다.’ 하니, 태종께서 이르기를, ‘저 부처가 만약 중국에서 왔다면 마땅히 황제의 명을 공경하여 절을 할 것이나, 지금 이 부처는 우리나라 제주에서 왔으니 어찌 절할 것이 있겠는가. 여러 신하들은 이를 말하는 사람이 없지만 내 생각에는 절을 하지 않는 것이 옳다.’ 하고, 끝내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황엄이 굴복하고 드디어 예를 행하였으니, 거룩한 임금의 소견은 각기 같은 것입니다.” 하니, 세조가 또 웃었다.
○ 세조는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하였다. 내가 일찍이 내전(內殿)에 들어가 보니, 감색(紺色) 무명에 범을 그린 갖옷을 입고 푸른 짚신을 신었으며, 갓끈은 순 무명으로 하였고 대나무 지팡이를 짚었으니, 비록 한 문제(漢文帝)가 옷을 빨아서 입었다는 일도 이와 같이 검소하지는 못할 것이다.
○ 고령군(高靈君) 신숙주는 영의정으로 있었고, 능성군(綾城君) 구치관(具致寬)은 새로 우의정이 되었는데, 세조가 두 정승을 급히 내전으로 불러들였다. 세조가 이르기를, “오늘 내가 경들에게 물을 것이 있으니 대답을 잘하면 그만이겠지만, 능히 대답하지 못하면 벌을 면치 못할 것인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고.” 하니, 두 정승이 공손히 대답하기를, “삼가 힘을 다하여 벌을 받지 않게 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윽고 세조가, “신 정승” 하고 불렀다. 신숙주가 곧 대답하였더니, 임금이 이르기를, “나는 신 정승(新政丞)을 부른 것인데, 그대는 대답을 잘못하였다.” 하고, 큰 술잔으로 벌주(罰酒) 한 잔을 주었다. 또 “구 정승” 하고 부르자, 구치관이 대답하였더니, 세조가 말하기를, “나는 구(舊) 정승을 불렀는데, 그대가 잘못 대답하였다.” 하고, 벌주 한 잔을 주었다. 임금이 또 부르기를, “구 정승” 하니, 신숙주가 대답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구(具) 정승을 불렀는데 그대가 잘못 대답하였다.” 하고, 또 벌주를 주었다. 또 부르기를 “신 정승” 하니, 구치관이 대답하므로 말하기를, “내가 신(申) 정승을 불렀는데, 그대가 잘못 대답하였다.” 하고 또 벌주를 주었다. 다음에는 “신 정승” 하고 불렀더니, 신과 구가 다 대답하지 않았다. 또“구 정승” 하고 불러도 구와 신이 다 대답하지 않으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임금이 부르는데 신하가 대답하지 않는 것은 예가 아니다.” 하고 또 벌주를 주었다. 종일 이와 같이 하여 두 정승이 벌주를 먹고 극도로 취하니 세조가 크게 웃었다.
○ 판중추부사 어효첨(魚孝瞻)이 입술이 두터웠는데, 세조가 일찍이 희롱하기를, “어효첨은 순후(淳厚 순후(唇厚)와 음이 같다)하다.” 하였는데, 의정 윤사분(尹士芬)은 볼에 험이 있었기 때문에 문헌(文獻) 박원형(朴元亨)이 대답하기를, “윤사분은 시험(猜險 시험(腮險)과 음이 같다)합니다.” 하니, 세조가 크게 웃었다.
○ 세조는 음양지리의 글에도 모두 널리 통하여 그 옳고 그름을 밝게 보고 판단하였다. 일찍이 나에게 이르기를, “녹명서(祿命書 사주책)는 유학자가 궁리(窮理)하는 하나의 일인데 그대는 아는가.” 하므로, 내가 대답하기를, “일찍이 대강 보았습니다.” 하니, 세조가 이르기를, “그대가 가령서(假令書 사주책 풀이) 한 편을 지어보라.” 하므로, 내가 물러 나와서 여러 책을 모아 그 대요(大要)를 뽑아서 분류해 모으되, 범례(凡例)를 먼저하고 길흉신살(吉凶神殺)을 다음으로 하고 길흉론단(吉凶論斷)을 끝으로 하여 바쳤더니, 세조가 이르기를, “내가 녹명서를 숭상해서가 아니라, 가령서를 지어서 궁중 사람으로 하여금 가르쳐주는 수고가 없이 책을 펴보면 스스로 밝게 알도록 하고자 함이다.” 하였다.
또 나에게 이르기를, “경의 뜻에는 녹명이 어떠한가.” 하여, 내가 대답하기를, “갑년(甲年)과 기년(己年)의 정월은 병인(丙寅)이요, 갑일과 기일의 생시(生時)는 갑자(甲子)이니, 육십갑자를 가지고 추산하면 그 수(數)가 7백 20이 되니, 7백 20년을 가지고 7백 20일과 시(時)에 곱하면 사람의 사주(四柱)는 51만 8천 4백에서 다하고 다시 더할 수 없습니다. 천하의 인구가 성할 때에는 1천 5백~6백만에 이르니, 억조 중생이 어찌 51만 8천 4백에만 그치리이까. 지금 항간에서 사주는 꼭 같아도 화복(禍福)은 전연 같지 않은 자가 있으니, 직접 보고 들은 것으로 일찍이 한두 명이 있는데, 직접 보고 듣지 못한 자가 어찌 천백 명뿐이겠습니까. 또 거리가 천 리가 되면 풍(風)이 같지 아니하고 백 리가 되면 속(俗)이 같지 않은데, 사주는 중국과 사해(四海) 민족이 다름이 없으며, 중국은 공(公)ㆍ후(侯)ㆍ백(伯)ㆍ자(子)ㆍ남(男)ㆍ경(卿)ㆍ대부(大夫)ㆍ사(士)ㆍ이서(吏胥)ㆍ서인(庶人)의 구분이 있어서 작위와 품계의 높고 낮음을 일일이 다 구별할 수 있으나, 사해 민족의 풍속은 혹 금수와 같아서 귀천의 분별이 없으니, 이것이 어찌 51만 8천 4백 명의 녹명(祿命)에 매어서 그 같지 않음이 이같이 분분하겠습니까. 녹명의 글을 족히 믿을 것이 못 됩니다. 혹은 말하기를, ‘이순풍(李淳風)ㆍ이허중(李虛中)ㆍ소요부(邵堯夫)ㆍ서자평(徐子平) 등은 백발백중으로 맞았는데, 어찌 그 모두가 그르다 할 수 있겠는가.’ 하나 신의 생각으로는, 밝은 거울이 여기 있어서 물건이 와서 비추면 좋고 나쁜 것이 스스로 나타나는 것과 같이, 이순풍ㆍ소요부의 무리는 마음이 본래 허령(虛靈)해서 밝기가 거울과 같기 때문에, 사물(事物)이 그 앞에 이르면 길흉화복(吉凶禍福)이 저절로 나타나 속이지 못하니, 후세 술사들이 한갓 옛 사람의 글로써만 51만 8천 4백 명의 명수로써 천하 억조의 인명을 판단하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신은 녹명서는 믿을 수 없다 하겠습니다.” 하니, 세조가 웃고 이르기를, “자네 말이 옳다.” 하였다.
○ 예종(睿宗)이 처음 집정하여 대단한 각오로 훌륭한 정치를 이룩하려 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옥체(玉體)가 점점 위태하였다. 일찍이 손수 책 등에 쓰기를, 모두 예종이라 하였고, 또 이르기를, “죽어서 이 시호(諡號)를 얻으면 만족하겠다.” 하였는데, 몇 달이 못 되어서 승하하니, 군신들이 시호를 예종으로 올려 과연 성상의 뜻에 부합하였다. 아! 슬프도다.
○ 국재(菊齋) 문정공(文正公) 권부(權溥)는 임술년 임자월 기미일 기사시에 났는데, 점(占)을 치는 이가 보고, “수명이 길지 못하겠다.” 하였다. 그 아버지 문청공(文淸公) 탄(坦)이 말하기를, “만약 덕을 쌓으면 조금 연장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일찍이 천보산(天寶山)의 중에게 들었는데, 덕을 쌓는 조목이 세 가지가 있는바, 길 가운데로 다니지 말고, 흘러가는 물에 목욕하지 말고, 음식을 먹을 때 좋은 것을 가리지 않는다 하니, 너는 마땅히 힘쓸지어다.” 하였다. 국재가 종신토록 이 일에 명심하고 힘써서 잠시 동안이라도 어기지 않았는데 마침내 85세의 수(壽)를 누렸고, 지위가 일품에 이르렀으며, 한 가문(家門)에서 봉군(封君)한 이가 아홉 사람이나 되어, 복록(福祿)의 융성함이 고금에 거의 없었으니,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덕을 쌓은 효험이다.” 하였다. 그러나 익재(益齋) 선생이 지은 국재의 비문(碑文)을 보니, “무자(戊子)와 기미(己未)가 임사(壬巳)의 녹(祿)과 만나 서로 맞아 발복하였으니, 이는 천지조화의 묘함이다.” 하였으니, 점치는 이가 수명이 길지 못하다 한 것은 또한 무슨 이유에서인지 알 수 없다.
○ 포은(圃隱) 정문충공(鄭文忠公)은 평생에 지절(志節)이 있고 남을 이간(離間)하는 말이 없었는데, 어떤 이가 농담하기를, “자네는 세 가지 과실이 있는데 알겠는가.” 하였다. 문충공이 대답하기를, “말을 해 보라.” 하니, 말하기를, “남이 말하기를, ‘자네 친구들과 모여서 술을 먹을 적에 남보다 먼저 들어가서 맨 나중에 자리를 파하니, 술 마시는 것을 너무 오래한다.’ 하더라.” 했다. 문충공이 대답하기를, “진실로 그런 일이 있다. 젊어서 시골에 있을 적에 한 동이 술을 얻으면 친척과 친구들과 더불어 한 번 실컷 마시고 즐기고 싶었는데, 지금은 부귀(富貴)하여 자리에는 손님이 항상 가득하고 술통에는 술이 떨어지지 아니하니, 내가 어찌 조급하게 하겠는가.” 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자네가 여색에 있어 담담하지 못하다고 남이 말을 하더라.” 하니, 문충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여색을 좋아함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공자께서도 말하기를, ‘아름다운 여색을 좋아하는 것과 같이 하라.’ 하셨으니, 공자도 여색이 좋음을 알지 못하였던 것이 아니다.” 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자네가 중국산 물건을 무역(貿易)하는 데에 무심하지 못하다고 남이 말을 하더라.” 하니, 문충공이 낯빛을 변하여 말하기를, “내가 집이 가난하고 자녀가 많은데, 혼인의 예식에 으레 중국의 물건을 사용하니, 나도 시속을 면할 수 없다. 하물며 있고 없는 것을 교역함은 성인의 제도인데, 내가 무엇을 혐의하겠는가.” 하니, 그가 말하기를, “앞에 한 말은 농담일세.” 하였다.
○ 문충공(文忠公) 권근(權近)이 일찍이 경사(京師 남경)에 갔었는데, 길에서 비를 만나 역리(驛吏)의 삿갓을 빌렸다가 돌려주었는데도, 돌려주지 않았다고 트집하고 그 값을 요구하므로, 공이 다투지 아니하고 값을 주었다. 뒤에 어떤 역리가 전삼(氈衫)을 잃은 것을 공에게 씌워서 그 값을 요구하니, 공이 또 주려고 하였는데, 사신(使臣) 발라(孛羅)가 그 속임을 알고 우리를 국문하였다. 그제야 말하기를, “이분이 전에 다투지 아니하고 값을 주었기 때문에 감히 그렇게 한 것이요, 잃은 것이 아닙니다.” 하여, 발라가 그에게 벌을 주었다.
○ 권문충공이 일찍이 충주에 귀양가 있었는데, 계유년 봄에 태조가 계룡산에 행차하였을 적에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밖에 나갔을 때 임시로 머무는 곳)로 불려서 나갔었다. 하루는 태조가 호종하는 여러 신하들에게 은쟁반 하나를 주고 활을 쏘아 내기를 하게 하였다. 무신(武臣)들은 차례로 쏘았으나 모두 과녘을 명중시키지 못하였는데, 문충공은 평생에 한 번도 활을 잡아 보지 않았으나, 이날에는 한 화살에 명중시켜 은쟁반을 차지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활 쏘는 법으로써 그 덕(德)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이를 두고 이른 것이다.” 하였다.
○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이 일찍이 새벽에 관아(官衙)에 나갔는데, 한 짝은 희고 한 짝은 검은 신을 신었다. 공석에 앉자 서리(胥吏)가 이를 고하였는데, 공이 내려다보며 한 번 웃고는 끝내 바꾸어 신지 않았다. 일을 마치고 말을 타고 갈 적에 웃으며 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 신이 한 짝은 검고 한 짝은 흰 것을 괴상하게 여기지 말아라. 왼쪽에서는 흰 것만 볼 것이요, 검은 것은 보지 못할 것이며, 오른쪽에서는 검은 것만 볼 것이고 흰 것은 보지 못할 것이니, 또한 어찌 해가 있겠느냐.” 하였으니, 그가 겉치레를 꾸미지 아니하는 것이 이러하였다.
○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이 경사(京師)에 갔을 적에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가 불러 보고 이르기를, “그대의 한어(漢語)는 나합출(納哈出)과 같구나.” 하였고, 이색의 외모가 훤출하지 못하다고 황제가 이르기를, “이 늙은이는 그림 그릴 만하구나.” 하였다. 색이 환국하게 되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지금 황제는 속에 주장이 없는 사람이다.” 하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이색의 말을 실언이라 하였다. 지금 대명(大明)이 천하를 통치한 지 백여 년인데 여러 군주가 대(代)를 이어 나라를 지켜서 고황제가 남긴 제도를 한결같이 따르고 변경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 규모와 제도가 한(漢)ㆍ당(唐)보다 크게 뛰어나니, 어찌 속이 없는 임금이라 할 것인가. 그러나 이색은 큰 유학자이니, 고황제의 큰 인물됨을 알지 못하였으면 어찌 지혜롭다 할 것인가.
억측하건대, 고황제는 처음 천하를 평정하고 영웅들을 통어하며 변강(邊疆)을 개척하여 대업(大業)을 창조하는 데에 정신을 두었으니, 그가 이색 같은 늙은 선비 보기를, 어린애가 곁에서 울고 웃는 것 같이 마음에 두지 않았을 것이며, 이색을 뜻도 고황제가 천자가 된 지 오래되지 않아 세상일을 알 수 없는데 외국 사람대접하기를 이와 같이 거만하고 업신여기는가 하여 이러한 말이 있었을 것이다. 한 광무(漢光武)가 마원(馬援)을 대접하듯 고황제가 이색을 대접하였다면, 반드시 이런 말이 없었을 것이다.
○ 문정공 조용(趙庸)은 학문이 정밀하고 깊었으며, 특히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었다.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으로 20여 년을 있었는데, 사람 가르치기를 게을리 아니하여 인재 양성에 공이 있었다. 대개 문장은 종이를 잡고 즉시 글을 썼는데 문장과 논리가 정밀하고 지극하였으며, 성품이 총민(聰敏)하여 한 번 보면 곧 기억하였다. 젊을 때에 한 서생(書生)이 원 나라의 책문(策問) 가려 뽑은 것을 구해 비장(祕藏)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 문정공이 보기를 청하였으나, 서생이 허락하지 않았다. 다른 날 다시 가서 청하니 서생이 사흘 동안만 빌려주었는데, 문정공이 한 번 보고 모두 기억하고는 약속한 날짜에 돌려주었다. 하루는 문정공이 그 서생과 같이 글방에 있으면서 책문(策問) 서너 편을 외웠는데 한 자의 착오도 없으니, 서생이 이를 우연히 익힌 것이라 하고, 여려 책문을 닥치는 대로 뽑아서 외우게 하여도 역시 이와 같이 하니, 서생이 말하기를, “공과 같은 분은 비록 장순(張巡)이라도 미칠 수 없다.” 하였다.
○ 문정공 맹사성(孟思誠)은 성품이 청백하고 소탈하며 단정하고 중후하여 의정부에 있으면서 대체(大體)를 지켰다. 공은 경자생(庚子生)인데 일찍이 장난으로 계묘계(癸卯契)에 들었었다. 어느 날 임금 앞에 있을 적에 임금이 공의 나이 몇인가를 물으므로 문정공이 경자생 이라고 대답하였더니, 조정에서 물러나오자 계중(契中)에서 동갑이 아니라고 제명되어 한때 웃음거리가 되었었다.
공이 천성으로 음률을 깨쳐서 항상 피리를 잡고 날마다 서너 곡조를 불고 문을 닫고 손님을 맞이하지 않았다. 공사(公事)를 아뢰러 오는 이가 있으면 사람을 시켜 문을 열고 맞이하였다. 여름에는 소나무 그늘에 앉아 있고 겨울에는 방 안 부들자리에 앉아 있었으며 좌우에는 다른 물건이 없었다. 일을 아뢰는 이가 가면 곧 문을 닫았다. 일을 아뢰러 오는 이들은 동구에 이르러서 피리 소리가 들리면 공이 반드시 있음을 알았다.
○ 문순공(文順公) 권홍(權弘)은 일찍이 문한(文翰)으로 이름이 드러났었고, 더욱 전서(篆書)와 예서(隸書)에 묘하였으며, 지위는 일품에 이르고 향년은 87세이다. 일찍이 남산 모퉁이에 집을 정하고 두개의 못을 파서 연꽃을 심었었는데, 복건(幅巾) 쓰고 여장(藜杖 명아주로 만든 지팡이)을 끌며 한가롭게 거니는 모양은 깨끗하여 신선과 같았다. 그가 해서로 쓴 헌릉비(獻陵碑)와 전서로 쓴 성균관 비의 글씨는 매우 좋다. 일찍이 세종조(世宗朝)에 상서하여 기자(箕子)의 사당에 비를 세우기를 청하였으니, 말이 자못 대체(大體)를 얻었다.
○ 정숙공(貞肅公) 박안신(朴安信)은 기국이 크고 도량이 넓은 인물이었다. 일찍이 문정공 맹사성과 대간(臺諫)에서 같이 일을 의논하다가 임금의 뜻에 거슬려서 사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문정공은 낯빛이 흙빛이 되고 경황이 없이 어쩔 줄을 몰라 하였으나, 정숙공은 낯빛이 태연자약하였다. 절구 한 수를 지었는데,
우리 임금이 간관을 죽인 이름을 얻을까 두렵 도다 / 恐君留殺諫臣名
하였다. 이 시를 종이와 붓이 없어서 사금파리로 땅에 그어서 글자를 쓰고, 눈을 부릅뜨며 옥리(獄吏)에게 말하기를, “마땅히 이 시를 상감께 아뢰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여귀(癘鬼)가 되어 너희들을 씨가 없게 할 것이다.” 하였더니, 태종이 듣고 노여움을 풀고 석방하였다.
그 뒤에 공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올 적에 해적을 만났는데, 해적이 칼을 빼어 들고 배 위로 뛰어들어서 행구(行具)를 약탈하니, 사람들은 손도 놀리지 못하였으나, 공은 걸상에 걸터앉아서 움직이지 아니하고 찬찬히 지휘하니, 해적이 두려워하여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고 일행은 이에 힘입어 안전하였다.
○ 문정공 유관(柳寬)은 공정하고 청렴하여 비록 최상의 지위에 있었으나, 초가집 한 칸에 베옷과 짚신으로 생애가 담박하였다. 공무를 마친 여가에는 후생을 가르치기에 부지런하니,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와서 뵈려는 이가 있으면 고개만 끄덕일 뿐이요 성명은 묻지 않았다.
공의 집이 흥인문(興仁門) 밖에 있었는데, 그때 사국(史局)을 금륜사(金輪寺)에 개설하였으니, 그 절은 성 안에 있었다. 공이 역사를 편수하는 책임자가 되었는데, 일찍이 연모(軟帽)에 지팡이와 신을 갖추고 걸어서 다니며 수레와 말을 타지 아니하였다. 어떤 때는 청소년들을 데리고 시를 읊으며 오고가니, 사람들이 그 아량(雅量)에 탄복하였다. 그 절이 지금은 없어졌다. 일찍이 달이 넘도록 장마가 졌는데, 삼대처럼 집에 비가 줄줄 새었다. 공은 우산을 잡고 비를 가리며 부인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우산이 없는 집은 어떻게 견딜꼬.” 하니, 부인이 대꾸하기를, “우산 없는 집에는 반드시 미리 방비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공이 껄껄 웃었다.
○ 문경공(文敬公) 성석린(成石磷)은 젊어서부터 뜻이 드높아 큰 절개가 있었다. 일찍이 양백안(楊伯顔)의 막하(幕下)가 되어 왜적을 방어하다가 군율(軍律)을 어기어 형(刑)을 당하게 되었다. 이때 공이 졸고 있었는데 꿈결에 어떤 사람이 고하기를, “공은 쑥대 관[蒿冠]을 쓸 것이니 근심할 것이 없다.” 하였다. 공이 스스로 풀이하기를, “쑥대 관은 쑥으로 머리를 싼다는 것이니 매우 상서롭지 못한 것이다.” 하였는데, 죽음을 면하고 제명(除名)되는 데 그쳤다. 그 뒤에 수상(首相)이 되어서 말하기를, “내 꿈에 호관(蒿冠)은 고관(高官)의 뜻이다.” 하였다.
소년 시절 4~5명의 동료들과 더불어 정방(政房)에 있었는데, 신돈(辛旽)이 뒷짐을 지고 곁에서 보다가 공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나중에 반드시 크게 현달할 것이니, 그 복록은 제군들이 미칠 바 아니다.” 하였는데, 마침내 그 말과 같았으니, 늙은 역적(신돈을 가리킴)도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갖추었다 하겠다.
공의 나이가 60이었을 적에 그 어머니는 나이가 70이 넘었는데 병이 위독하여 눈을 감고 말을 못한 지가 며칠이 되었고, 약도 효험이 없어서 공이 향을 태우고 기도하며 슬피 부르짖다가 거의 기절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조금 뒤 어머니가 깨어나 말하기를, “이게 무슨 소리냐.” 하니, 모시고 있던 사람이 놀라고 기뻐하며 대답하기를, “기도하는 소립니다.” 하니, 어머니가 말하기를, “하늘에서 사람을 보내어 궤장(几杖 안석과 지팡이)을 주며 말하기를, ‘아들의 정성이 이같이 지극하니, 이것을 붙들고 일어나라.’고 하더라.” 하고는 병이 곧 나으니, 사람들이 문경공의 효성이 지극함을 감탄하였다.
○ 양정공(襄靖公) 하경복(河敬復)은 본관이 진주다. 그 어머니가 꿈에 자라가 품속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임신하여 그를 낳았으므로 어릴 때 이름이 왕팔(王八)이었다. 어려서부터 기운이 남보다 뛰어났었고, 갑사(甲士)로 숙위(宿衛)에 보임되어 궁문에 숙직하였는데 때마침 동짓날이었다. 상림원(上林苑 비원) 온실에서 가꾼 매화 몇 분(盆)을 궁문 곁에 옮겨 두려 할 적에, 공이 긴 가지 하나를 꺾어서 투구 위에 꽂았다. 이 책임을 맡은 이가 크게 놀라 꾸짖자, 공이 말하기를, “우리 집 울타리 가에 마소[馬牛]를 매는 것이 이 나무요, 꺾어서 땔나무도 하는 것인데 무엇이 귀할 게 있으리오.” 하고, 조금도 굽히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의 거칠고 사나움을 비웃으면서도 그의 기개를 훌륭하게 여겼다. 무(武)에 능함으로써 발탁(拔擢)되어 크게 현달하였다. 일찍이 동북면(東北面)을 지킬 적에 야인(野人)이 3백 근이나 되는 강력한 활을 공에게 당겨보도록 청하는 자가 있었다. 공이 그들을 위하여 술상을 놓고 즐겁게 마시면서 또 말하기를, “이 활은 매우 잘 만들었다.” 하고는, 급히 궁수(弓手)를 불러서 그 모양과 같이 만들게 한 다음 몰래 사람을 시켜서 그 활을 불에 구워 힘이 조금 풀어지게 한 뒤에, 여유만만하게 활을 가득히 당기니, 야인들이 탄복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뜰 아래로 내려가 절하였다.
○ 문숙공(文肅公) 변계량(卞季良)은 고집스런 성품이었다. 선덕(宣德) 연간에 흰 꿩을 하례하는 표(表)에 ‘유자백치(惟玆白雉)’라는 어구가 있었는데, 문숙공이 말하기를, “자(玆)는 중행(中行 글자를 가운데 줄에 씀)으로 써야 한다.” 하니, 제공(諸公)들은, “성상(聖上)에 속(屬)한 것이 아닌데, 왜 중행이라 이르는가.” 하였으나, 문숙공은 자기 의견을 고집하였다. 제공들은 취품(取稟 임금에게 문의함)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는데, 세종(世宗)께서는 제공(諸公)들의 의견을 옳다고 하니, 공이 다시 아뢰기를, “농사짓는 일은 남종[奴]에게 물을 것이요, 길쌈하는 일은 여종[婢]에게 물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나라를 다스릴 때에 매와 개를 데리고 사냥하는 일이라면 문효종(文孝宗)의 무리에게 묻는 것이 마땅하오나, 사명(詞命)에 이르러서는 노신(老臣)에게 위임하는 것이 마땅하오니, 다른 사람의 의견을 가볍게 따라서는 안 됩니다.” 하여, 세종이 부득이 그의 의견을 좇았다.
○ 정렬공 최윤덕(崔潤德)은 태어나자 곧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 운해(雲海)는 변방(邊方)을 지켰기 때문에 그를 양육할 수 없었으므로 이웃에 있는 양수척(楊水尺)의 집에 부탁하여 키우게 하였다. 조금 장성하자 기운이 남보다 뛰어나고 굳센 활을 당겨서 단단한 물건을 쏘아 맞추었으며, 때로는 양수척을 따라 사냥하러 나가서 짐승을 많이 잡아오곤 하였다. 하루는 산중에서 가축을 먹이는데 큰 범이 별안간 숲 속에서 나와서 여러 짐승들이 놀라 달아났다. 공은 급히 말을 타고 활을 쏘아 한 발에 죽이고, 집에 와서 양수척에게 알리기를, “어떤 짐승이 무늬가 얼룩지고 그 크기가 엄청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이미 쏘아 죽였습니다.” 하였다. 양수척이 가보니, 한 마리의 큰 범이었다. 이에 양수척은 그를 기이하게 여겼다.
가군(家君 필자인 사가(四佳)의 아버지 곧 서미성(徐彌性))께서 합포(合浦)를 지킬 적에 양수척이 최 공을 데리고 가서 뵙고 공을 칭찬해 마지않으니, 가군께서 이르기를, “마땅히 시험해 보겠다.” 하고, 같이 사냥하여 재주를 시험하니, 공이 좌우로 달리며 쏘아 맞히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보는 이가 못내 칭찬하였으나, 가군께서는 웃으며 말하기를, “이 아이의 솜씨가 비록 빠르나 아직 무예(武藝)의 법을 알지 못한다. 지금 하는 것은 곧 사냥꾼의 기술이요, 무예의 좋은 재주라고는 할 수 없다.” 하시고, 곧 활을 쏘고 적을 막는 방법을 가르쳐서 마침내 명장이 되었다.
○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는 도량이 넓고 커서 대신의 체통이 있었다. 정승의 자리에 30년이나 있었고, 향년(享年)이 90이었다. 국사(國事)를 의논하고 결정하는 데는 관대(寬大)하기에 힘쓰고, 평상시에 마음이 담박하여 비록 아들, 손자, 종의 자식들이 좌우에 늘어서서 울부짖고 장난을 하고 떠들어도 조금도 꾸짖어 금하지를 아니하며, 어떤 때는 수염을 잡아 뽑고 뺨을 쳐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일찍이 보좌관을 불러 일을 의논하면서 막 책에 글씨를 쓰려 하였는데, 종의 아이가 그 위에 오줌을 누었으나, 공이 노여워하는 기색이 없이 손으로 닦아낼 뿐이었으니, 그 덕스러운 도량이 이와 같았다. 일찍이 남원(南原)에서 7년 동안을 귀양살이 하였는데, 문을 닫고 단정히 앉아서 손님을 맞이하지 아니하고, 손에는 운서(韻書 자전(字典)) 한 질(秩)을 갖고는 정신을 집중하여 볼 뿐이었다. 그 뒤에 비록 나이가 많았으나, 자서(字書)의 음과 뜻, 편방(偏傍)과 점획(點劃)에 대해서 백에 하나라도 틀리는 것이 없었다.
○ 문효공(文孝公) 하연(河演)이 한가히 있을 적에는 항상 오사모(烏紗帽)에 뿔을 뺀 것을 쓰고, 향을 피우고 고요히 앉아서 종일토록 시를 읊었는데, 시품(詩品)이 기이하고 궁벽하여 고시(古詩)에 가까웠으며, 필법(筆法)이 굳세어 서법에 부합하였다. 소년 때 춘방(春坊)에 있으면서 시를 지어서 손수 썼더니, 하호정(河浩亭 하륜(河崙))이 감탄하기를, “하문학(河文學 하연을 가리킴)이 시를 짓고 하문학이 직접 쓰니, 역시 한 세상의 보배이다.” 하였다. 문효공이 경상도안찰사(按察使)로 있을 때, 정승 남지(南智)가 아사(亞使 도사(都事))가 되었는데, 공은 매우 중히 여겨 보좌관이라 하여 낮게 대우하지 않았다. 어느 때는 진주(晉州)에 가서, 문효공이 산천과 경물의 아름다움을 감탄하니, 공의 본관이 진주였기 때문이다. 이에 남공(南公)이 낯빛을 변하며 말하기를, “산수는 비록 좋지마는, 품관(品官 안찰사를 가리킴)은 매우 못났다.” 하였으나, 문효공이 크게 웃으니, 사람들이 그 아량(雅量)에 탄복하였다. 뒤에 남공과 같이 정승에 올랐다.
○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는 엄숙하고 방정하며 청렴하고 근신하여 언제나 성현(聖賢)을 사모하였다. 매일 닭이 울 때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머리 빗고 갓과 띠를 갖추고 단정히 앉아서, 날이 다하도록 게으른 빛이 보이지 않았으며, 항상 나라 일을 근심하고 사사로운 일은 언급하지 않았다. 국정(國政)을 논의할 적에는 자기의 신념을 스스로 지키고 남을 쫓아서 이리저리 아니하니, 당시 사람들은 어진 재상이라 칭찬하였다. 가법(家法)은 역시 엄하여 자제들에게 과실이 있으면 반드시 사당(祠堂)에 고하고 벌을 주며, 노비(奴婢)들에게 죄가 있으면 법에 의하여 다스렸다. 공이 어려서부터 몸이 야위어 비쩍 말랐으며 어깨와 등이 굽었다. 일찍이 예조 판서가 되어 상하(上下)의 복색(服色) 제도를 정하여 엄격하게 구별하니, 시정의 경박한 무리들이 심히 미워하여 이름 하기를 수응(瘦鷹 여윈 매라는 뜻) 재상이라 하였는데, 이는 매는 살찌면 날아가고 여위면 새 잡기를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 효양공(孝襄公) 김효성(金孝誠)은 장양공(莊襄公) 남수(南秀)의 아들이다. 장양은 그 아내 길(吉)씨와 따로 살고 있었는데, 효양공의 나이 4ㆍ5세 때에 종이 안고 뽕나무 밑에 서 있었는데, 갑자기 한 쌍의 비둘기가 날아와서 함께 앉는 것을 공이 보고 말하기를, “저 비둘기를 보니 쌍쌍이 짝을 지어 다니는데, 우리 부모는 동서(東西)에 따로 떨어져 있으니 무엇 때문인가.” 하고, 슬피 우니 종이 기이하게 여겨 길씨에게 아뢰니 이 말을 들은 길씨도 눈물을 흘렸으며, 마을 사람들이 모두 기특하게 여겼다. 공이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섬겼고 공의 나이가 57세에 어머니 길씨가 죽자 시묘 살이를 하고 상례와 제례를 한결같이 지성으로 하니, 칭찬하는 말이 많았다.
○ 대민공(戴敏公) 강석덕(姜碩德)은 성품이 예스러움을 좋아하여, 풍류(風流)와 문아(文雅)함은 근대에 비길 데가 없으며, 시품(詩品)이 매우 고고(高古)하고 서화도 절묘하였으니, 그 시호(諡號)를 민(敏)으로 한 것은 적당한 칭호라 할 것이다. 시법(諡法)에, “옛 것을 좋아하고 게으르지 않음을 민(敏)이라 한다.” 하였으니, 이는 원 나라 학사 조문민(趙文敏)의 민(敏)과 같은 것이다. 세상 사람이 공이 과거에 오르지 못한 것으로 그를 가볍게 여김은 아주 잘못이다. 아들 부윤(府尹) 희안(希顔)의 자(字)는 경우(景愚)인데, 그림ㆍ시ㆍ글씨 세 가지에 절묘하여 당대에 독보적인 존재였다. 시는 위응물(韋應物)ㆍ유종원(柳宗元)과 같고 그림은 유송로(劉松老)ㆍ곽희(郭熙)와 같으며 글씨는 왕희지ㆍ조맹부를 겸하여 재주와 덕을 구비하였으니, 참으로 대인군자(大人君子)이다. 그러나 그것을 크게 쓰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 판중추부사 조오(趙吾)가 합천(陜川) 수령이 되었을 적에, 여름에 농어가 많이 쌓여서 썩는 일이 있어도, 자기 집에는 조금도 맛보지 못하게 하니, 사람들이 그 청렴함에 탄복하였다. 혹은 말하기를, “그것을 썩혀서 땅에 버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집에서 조금이라도 먹게 하는 것이 낫겠는데, 이런 데서까지 청렴함을 더럽히지 않으려 하는구나.” 하였다. 조공의 집이 지극히 가난하여 그가 예조 정랑이 되었을 적에 이리저리 셋집을 전전하였으며 양식과 땔나무를 이어가지 못하였는데, 동료(同僚) 중에 쌀 3말을 주는 이가 있어도 받지 아니하였고, 뒤에 공석(公席)에서 이 일을 자랑하니, 사람들이 그 자랑하는 것을 기롱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평상시에 남의 청탁을 일체 들어주지 않았으며, 뒤에 늙어서 시골집에 물러 나와서도 살림살이가 아무것도 없었으나, 털끝만큼이라도 남에게 요구함이 없었으니, 참으로 청렴하고 독실한 군자라 할 것이다.
○ 안숙공(安肅公) 권준(權蹲)은 총명(聰明)함이 남보다 뛰어나서 관리의 체통을 잘 알았다. 일찍이 형조의 관리가 되어 옥사를 귀신같이 판결하였다. 어떤 두 강도가 한 가족 세 사람을 죽인 일이 있었는데, 심증은 다소 있었으나 물증이 분명하지 못하여 전후(前後) 관리가 의심하고 결단하지 못한 것이 거의 4ㆍ5년이었다. 하루는 안숙공이 두 도둑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이 강도짓을 한 증거가 분명한데 감히 불복하느냐. 내가 한 마디 할 터이니 너희들은 숨기지 말아라. 너희들이 처음 일을 의논할 때는 이러이러하게 했고, 중간에 일을 꾸미기는 이러이러하게 한 것이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의 경위가 이러이러한 것인데, 너희가 감히 숨기겠느냐.” 하니, 도둑이 서로 돌아보고 혀를 빼물며 말하기를, “이분이 일찍이 도둑이 되었던 것이 아닌가. 어떻게 우리가 한 일을 이같이 자세히 아는가.” 하고, 마침내 자복하였다.
○ 갑오년 봄에, 문경공(文景公) 권제(權踶), 판서 조극관(趙克寬), 참판 권극화(權克和), 참판 김돈(金墩) 등이 모두 문과에 실패하고 수원(水原) 연정(蓮亭)에 이르렀다. 문경공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실의에 빠져 번뇌함이 이에 이르렀으니, 후일에 성공한다면 이슬비 자욱하고, 함박눈 펄펄 내리며, 밝은 달빛은 주렴으로 들어오고 연꽃 향기는 자리에 가득할 적에, 그대들과 더불어 술잔을 들고 시를 읊으면 족히 오늘의 일을 보상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제공들이 손뼉을 치며 말하기를, “비가 자욱하다면 눈이 펄펄 내리지 못할 것이고, 눈이 펄펄 내린다면 달이 밝지 못할 것이며, 또 연꽃 향기를 어찌 눈 가운데서 얻을 수 있으리오. 어찌 말이 서로 들어맞지 않는가.” 하였더니, 문경공은 응답이 없었다. 그해 가을 과거에 문경공은 장원이 되고, 제공들도 연달아 과거에 뽑혔다. 임자년에 문경공이 경기 감사(京畿監司)가 되자 제공들이 모여서 전별(餞別)하는데, 조(趙) 판서가 술잔을 들고 말하기를, “수원 눈 속의 연꽃을 이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니, 문경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자네들과 함께 보려고 하였네.” 하였다. 몇 달이 안 되어 조공이 수원 부사(水原府使)가 되었을 때, 문경공이 그 고을에 순행하니, 조공이 예를 행하고 자리에 나갔는데 때마침 연꽃이 한창 이었으므로 서로 보고 웃었다. 문경공이 시를 지었는데,
비와 눈 흩날리는데 달빛은 밝고 / 雨雪霏霏月政明
연꽃의 맑은 향기 정자에 가득하네 / 荷香荏苒滿亭淸
당시의 이런 말 신비로워라 / 當時此說神應秘
20년 전에 이 일이 이미 이루어졌도다 / 二十年前事已成
하였다.
○ 문장공(文長公) 김균(金鈞), 문장공 김말(金末), 대사성(大司成) 김반(金泮)은 모두 경사(經史)에 널리 통하고, 더욱 성리학(性理學)에 연구가 깊어서 동시에 성균관에 제수되어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인재양성에 공이 있었으니, 사람들이 삼김(三金)이라 일컬었는데, 김반은 먼저 죽었고, 남은 두 김공은 모두 80이 넘도록 살아 벼슬은 1품에 올랐으며, 시호(諡號)를 모두 문장(文長)이라 하였다. 시호를 짓는 법에, ‘널리 듣고 많이 본 것을 문(文)이라 하고, 사람 가르치기를 게을리 아니함을 장(長)이라 한다.’ 하였으니, 이 시호를 받음이 마땅하다. 제학(提學) 윤상(尹祥)이 그때 성균관의 대사성이 되었는데, 학문이 더욱 정밀하여 제생(諸生)들이 앞을 다투어 찾아가 물으니, 공이 문리(文理)를 세밀하게 분석하고, 자상하게 가르쳐 주며 종일토록 쉬지 아니하고 지칠 줄을 몰랐다. 지금 유명한 사람들은 모두 공의 제자이니, 국조 이래로 사범(師範)의 으뜸이다.
○ 문장공 김말(金末)은 딸 하나만 있고 아들이 없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들으니, ‘천 사람의 눈[眼 지식을 이름]을 열어주는 이는 음덕의 보답을 받는다.’ 하였는데, 내가 벼슬한 뒤로부터 50여 년간 학관(學館)의 직책을 맡아 사람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도 마침내 자식이 없으니, 이는 나의 학문이 거칠고 거짓되어 남에게 은덕을 끼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죽을 무렵에 목욕하고 의관을 갖추고 홀(笏)을 잡고 단정하게 앉았는데, 가족들이 통곡하니 공이 울음을 그치게 하고는 “내가 벼슬이 1품에 이르렀으니 벼슬이 부족함이 없고, 나이가 80이 넘었으니 수(壽)가 높지 않음이 아니다. 나고 죽는 것은 사람의 상리(常理)이니 바름을 얻고 죽으면 어찌 다행하지 않는가.” 하고, 곧 죽었다.
○ 최만리(崔萬理) 선생이 집현전(集賢殿) 부제학(副提學)이 되고 나서 글을 올려, 환관(宦官)들의 연각건(軟脚巾)을 쓰고 오사모(烏紗帽)를 씀이 옛 제도에 맞지 않으니, 중국의 예(例)에 의해 일반 관을 쓰게 할 것을 극론하였다. 그 말에, “예로부터 역대 임금이 환관을 사랑하고 신임하여, 그 권세가 천하를 기울이는 자가 심히 많았으나, 그 갓을 바꾸지 않은 것은 환관의 무리를 사대부들과 혼동하여 사람의 이목을 놀라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였으니, 말은 매우 적절하였으나, 여러 환관들이 눈을 흘겼기 때문에 의논이 드디어 정지되었다.
○ 유의손(柳義孫) 선생, 권채(權採) 선생, 문희공(文僖公) 신석조(辛碩祖)와 남수문(南秀文) 선생 등이, 함께 집현전에 있으면서 그 문장이 다 같이 일세에 유명하였는데, 남(南) 선생을 더욱 세상에서 중하게 추대하였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초고는 대부분 남선생의 손에서 나왔다. 제공(諸公)들이 모두 크게 현달하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 기건(奇虔)공이 일찍이 연안부(延安府)에 부임하였는데, 그 고을에는 붕어가 많이 나서 공사(公私)로 청탁이 많아 폐단이 백성에게도 미쳤다. 그 전에 김씨 성을 가진 부사가 있었는데 붕어 먹기를 좋아하므로, 고을 사람들이 조롱하여 관사(館舍)의 벽에 크게 쓰기를,
6년 동안 무슨 사업을 하였는가 / 六年何事業
한 못의 고기만 다 먹었도다 / 喫盡一池魚
하였다. 기공(奇公)이 이런 평을 면하려고 6년 동안 붕어를 먹지 않았고, 또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나가서는 제주의 복어(鰒魚)가 연안의 붕어와 같이 많았으나 3년을 역시 먹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그 고집은 탄복하였으나 고의로 그런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 판서 김조(金銚)는 일찍이 문학으로 유명하였다. 세종(世宗)께서 여러 신하들과 연회를 하였는데 모두가 술이 취하였다. 세종께서, “오늘 제군(諸君)들은 각기 평소의 소원을 말하라.” 하니, 김조가 아뢰기를, “신의 소원은 백 년 동안 날마다 어탑(御搨 임금의 자리)을 모시고, 금규화(金葵花 해바라기꽃인데, 신하의 자리를 뜻함) 밑에서 진퇴부복(進退俯伏)하는 것뿐입니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아뢰기를, “신등의 소원도 김조와 같습니다.” 하여, 임금이 웃었다.
○ 문절공(文節公) 김담(金淡)은 성품이 온아(溫雅)하고 담박 하며 소탈하여, 기뻐하고 노여워함을 얼굴에 드러내지 아니하였으나, 도둑을 잘 다스렸다. 일찍이 충주(忠州)ㆍ안동(安東)ㆍ경주(慶州) 세 고을의 수령이 되었는데, 도둑질한 죄를 범한 증거가 있으면, 조금 의심할 만한 점이 있더라도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으니, 도둑이 경내에 들어오지 못하여 백성들이 편안하였으나, 잘못 죽인 자도 많아서 공의 향년(享年)이 길지 못하였으니, 남에게 형벌을 베푸는 것은 참으로 두려울 만한 일이다.
○ 문안공(文安公) 이사철(李思哲)은 몸집이 커서 음식을 남보다 유달리 많이 먹었는데, 항상 큰 그릇의 밥 한 그릇과 찐 닭 두 마리와 술 한 병을 먹었다. 등에 종기가 나서 거의 죽게 되었는데, 의원이 불고기와 독주(毒酒)를 금해야 한다고 말하니, 공이 말하기를, “먹지 아니하고 사는 것보다 차라리 먹고 죽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면서 여전히 술을 마시고 불고기를 먹어도 마침내 병이 나으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부귀를 누리는 사람은 음식 먹는 것도 보통사람과 다르다.” 하였다.
공이 젊어서 여러 벗들과 삼각산의 절에서 놀 때에 각각 술 한 병씩을 가졌으나 술잔이 없었다. 그때 권지(權枝) 선생이 새로 만든 말 가죽신을 신었었는데, 문안공이 먼저 그 신에 술을 따라 마시니 제공(諸公)들도 차례로 마셨는데, 서로 보며 크게 웃고 말하기를, “가죽신을 술잔으로 삼은 것이 우리들로부터 고사(故事)가 되었으니, 이 또한 좋지 않은가.” 하였다. 뒤에 문안공이 귀하게 되어 권지에게 말하기를, “오늘 금 술잔의 술맛이 산놀이 할 때의 가죽신 술잔보다 못하구려.” 하였다.
○ 정절공(貞節公) 정갑손(鄭甲孫)은 성품이 청렴하고 정직하며 엄준하여, 자제들이 감히 사사로운 일로써 간청하지 못하였다. 일찍이 함길도(咸吉道) 감사가 되었을 적에, 소명(召命)을 받고 서울에 갔다가 돌아오는데, 방(榜 시험 발표)이 나왔기에 보니, 그 아들 오(烏)도 합격되었다. 공은 수염을 꼿꼿이 세우고 성을 내어 시관(試官)을 꾸짓기를, “늙은 놈이 감히 내게 여우같이 아첨하는가. 우리 아이 오(烏)는 학업이 아직 정밀하지 못한데, 어찌 요행으로 임금을 속일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드디어 아들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결국 시관을 내쫓았다.
정절공이 대사헌(大司憲)이 되자 탁한 것은 물리치고 맑은 것은 드날리게 하여 조정의 기강을 크게 떨쳤다. 그러나 너그럽고 후하여 대체는 잃지 않았다. 전례(前例)에 공청(公廳)에서 모일 적이면 대간(臺諫 사헌부와 사간원)이 반드시 함께 막차(幕次)를 연접시키고, 혹 술을 마실 적에는 장막을 걷고 이름을 권장음(捲帳飮)이라 서로 붙였다. 만약 금주령(禁酒令)이 있을 적에는 대관(臺官)들은 법을 철저히 지켜 술을 마시지 않았으나, 간원(諫院)에서는 술 마시기를 예사로 하였다. 하루는 간관(諫官)이 술을 잔에 가득히 부어 가지고 장난으로 장막 틈으로 대장(臺長 사헌부의 장령과 지평)에게 보이니, 대장도 장난으로 소매로 뿌리쳤는데 술잔이 장막 틈으로 떨어져서, 대사헌인 정절공의 책상 앞에 굴러갔었다. 여러 대장(臺長)들은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대리(臺吏)들도 서로 바라만 볼 뿐 감히 그 술잔을 치우지 못하여 이 술잔이 종일토록 대사헌의 앞에 있었다. 사헌부에서는 일이 날까 두려워하였는데, 사무를 마칠 적에 정절공이 관리에게 말하기를, “저기 거위 알 같은 것은 무엇인가. 수정(水精) 구슬이 몇 알이나 들어갈 수 있겠는가?” 하니, 아전들이 대답하기를, “백 개는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정절공이 이르기를, “굴러 나온 틈으로 던져주라.” 하니, 자리에 있는 사람이 모두 그 아량에 탄복하였다. 간원(諫院)에서 전해 오는 술잔의 모양이 거위 알 같은 것이 있었는데, 수정 구슬이 한 되 가량 들어갈 만하였으니, 이는 금주령을 당하면 술잔을 숨기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 문도공(文度公) 윤회(尹淮)와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 남수문(南秀文)은 모두 문장에 능하였는데, 술을 좋아하여 항상 정도에 지나쳤다. 세종께서 그 재주를 아껴서 술을 마실 적에 석 잔을 넘지 못하도록 명하였더니, 그 뒤로부터 두 공(公)은 반드시 큰 그릇으로 석 잔을 마시니, 이름은 비록 석 잔이라도 실은 다른 사람보다 곱을 마신 것이다. 세종께서 듣고 웃기를, “내가 술을 조심시킨 것이 도리어 술을 많이 먹도록 권한 것이 되고 말았구나.” 하였다.
○ 문성공(文成公) 정인지(鄭麟趾)는 천성이 호매 하고 마음이 활달하였다. 일찍이 술이 취하여 옛 사람을 평론하여 말하기를, “나 같은 사람이 만약 공자의 문하에서 놀았으면, 순수한 안자(顔子)나 독실한 증자(曾子) 같은 분에게는 진실로 미칠 수 없으나, 자유(子游)와 자하(子夏) 같은 무리와는 어떨지 모르겠다.” 하였다.
경오년에 한림 시강(翰林侍講) 예겸(倪謙)이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왔었는데, 문성공이 접대관이 되어서 일을 주선하고 교제하여 빈사(儐使)의 체모를 지켰으며, 또 같이 고금을 의논하고 시를 서로 주고받았으니, 예겸이 매우 공경하고 중히 여겼다. 어느 날 밤에 같이 앉아서 시강(侍講)이 말하기를, “달이 어느 분야(分野)에 있는고.”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동정(東井)에 있습니다.” 하자, 시강이 탄복하였다. 작별할 적에 시강이 말하기를, “밤이 깊은데 어떻게 갈 것인가.” 하니, 공이 “이금오(李金吾)가 두렵소.” 하자, 예겸은, “왕옥여(王玉汝) 는 만나지 마시오.” 하고는, 서로 웃으며 말하기를, “천하에 대구(對句) 없는 것이 없다.” 하였다.
병인년에 소헌왕후(昭憲王后 세종비 김씨) 장례 때에 큰 비가 와서 강물이 불어 재궁(梓宮 임금이나 왕비의 관)을 건널 수가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 낙천정(樂天亭)에 임시로 모셔두었는데, 혹은 남쪽으로 머리를 두어야 한다 하고, 혹은 북쪽으로 머리를 두어야 한다 하여 의논이 결정되지 못하였다. 문성공이 뒤에 이르러서 말하기를, “예문(禮文)에, 빈소(殯所)에서 남쪽으로 머리 두는 것은 그 어버이를 죽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 뜻이며, 광중(壙中)에서 북쪽으로 머리 두는 것은 죽은 것으로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역시 빈궁(殯宮)이니 남쪽으로 머리를 두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 제공(諸公)들이 말하기를, “재상은 마땅히 독서한 사람을 써야 한다.” 하였다.
○ 시종신(侍從臣)으로서 상소하는 것은 문열공(文烈公) 이계전(李季甸)으로부터 비로소 성행하였다. 문열공이 집현전에 있을 적에 여러 번 상소하여 정사를 논하려 하니, 동렬(同列)로서 벼슬이 문열공의 위에 있는 한두 사람이 매양 말리기를, “예로부터 정사를 논하기 좋아하는 이는 마침내 화를 받는 것인데, 하물며 우리 시종들은 덕의(德義)를 강론하여 임금의 마음을 밝히고 도울 뿐이요, 간쟁(諫諍)하는 일은 그 직책이 아니니 그대는 일 만들기를 좋아하지 말게.” 하였다. 문열공이 말하기를, “사람의 마음은 각각 다름이 있으니, 국사를 논하다가 실패하는 영광이 침묵하다가 당하는 수치만 못하다.” 하고, 마침내 하관(下官)들을 거느리고 글을 올려 극간(極諫)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상관이 끝내 여기에 서명하지 아니하였으니, 여론이 그 상관을 기롱하였다. 상소를 올릴 적마다 세종(世宗)께서 이르기를, “계전(季甸)의 상소가 또 왔구나.” 하고, 마침내 크게 쓸 뜻을 두어 곧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뽑았다.
○ 익평공(翼平公) 권람(權擥)은 어려서 큰 뜻을 두었고 책을 널리 보고 많이 기억하여 재주와 명성이 남보다 크게 뛰어났다. 여러 번 과거에 실패하고도 태연히 처하여 가슴속에 연연하지 않았다. 내가 맹교(孟郊)의 시에,
문 밖을 나가면 곧 막힘이 있으니 / 出門卽有礙
그 누가 천지를 넓다고 했던가 / 誰謂天地寬
한 것을 외우며, “맹교가 낙방하여 슬퍼하고 곤궁한 것은 그 몸을 용납할 곳이 없어서였는데, 지금 자네가 그렇지 않은가.” 하였더니, 익평공은 웃으며, “과거에 급제하고 급제하지 못함이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내가 큰 그릇이 될 것을 알았는데, 뒤에 익평공이 35세에 선비로서 장원에 뽑히고, 46세에 정승에 올라 한때 원훈(元勳)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대개 과거에 실패하면 슬퍼하고 상심하는 것이 선비의 상정(常情)인데, 공의 큰 도량이 이와 같으니, 맹교의 불우(不遇)함은 어찌 국량(局量)이 작아서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 문충공 신숙주가 일찍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데, 우리 국경에 몇 리(里) 남짓하게 왔을 때, 홀연 폭풍을 만나 배를 미처 언덕에 대지 못하였다. 여러 사람이 모두 놀라서 어쩔 줄을 몰랐으나 공은 정신과 안색이 태연자약하여 말씀하기를, “대장부는 마땅히 사방에 유람하여 흉금을 넓혀야 한다. 지금 큰 물결을 건너서 해 뜨는 나라를 보았으니, 족히 장관(壯觀)이 될 만하다. 만약 이 바람을 타고 금릉(金陵 남경)에 닿게 되어 산하(山河)의 아름다운 경치를 실컷 본다면 이 또한 하나의 장쾌한 일이다.” 하였다.
그때 왜적에게 포로가 되었던 백성을 데리고 오는 중인데 임산부가 배 안에 있었다.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임산부는 예로부터 뱃길에는 크게 금기시하는 바이니, 마땅히 바다에 던져서 액을 막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사람을 죽여서 살기를 구함은 덕(德)에 상서롭지 못한 일이다.” 하고, 굳이 만류하였는데 잠시 후에 바람이 진정되었다.
문충공이 처음 과거에 올라 집현전에 뽑혔는데, 하루는 당직이 되어 장서각(藏書閣)에 들어가서 평소에 보지 못한 책을 보고 있었는데 어느덧 시간이 삼경이 지났다. 세종(世宗)께서 낮은 환관을 보내어 엿보게 하였더니, 단정히 앉아서 글을 읽고 있었으며, 사경이 되었을 때 또 보내어 엿보게 하였는데, 이와 같이 하고 있었다. 이에 어의(御衣)를 주어서 장려하였다.
○ 충렬공(忠烈公) 구치관(具致寬)은 성품이 엄격하고 공정하였다. 일찍이 이조 판서가 되어 뇌물이나 청탁을 행하지 아니하였다. 그 전에는 이조 판서가 되면 관리를 제수할 적에 으레 친히 선발하는 명부를 잡고 자기 멋대로 행하였고, 참판 이하는 팔짱만 끼고 옆에서 볼 뿐이었는데, 공이 이를 분하게 여기고 그 폐단을 바로잡기 위하여, 대체로 사람을 올리고 내리는 데는 여러 사람의 의논을 널리 취하였고, 비록 작고 낮은 관직이라도 단독으로 추천하지 않았고, 사사 은혜로써 친구를 용서하지 않았으며, 남이 청탁하는 것을 미워하여 혹 청탁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올릴 것도 올려주지 않았다. 그때 내가 참의(參議)가 되어 하루는 정방(政房)에 있다가 마침 술이 취하여 잠이 들었는데, 공이 거친 목소리로, “참의는 내가 인물 등용을 마음대로 행한다 하여 참견하지 않으려고 하는가. 후일에 사람을 잘못 쓴 일이 있으면, 참의는 집에 있어서 알지 못하였다고 할 것인가.” 하였다.
일찍이 이름이 알려진 한 문사(文士)를 추천하여 대관(臺官)으로 삼으려 하니, 반박하는 자가 말하기를, “이 사람은 익살이 심하니 불가하다.” 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만약 그러면 한 무제(漢武帝)는 어찌 동방삭(東方朔) 을 취하여 썼겠는가.” 하고, 마침내 대관으로 추천하였다. 또 한 문사가 외군 교관(外郡敎官)으로 있으면서 10년 동안 승진하지 못하였다. 공이 현감(縣監)으로 추천하려 하니, 반대하는 이가 말하기를, “이 사람은 실정에 어두워서 불가하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천도(天道)도 10년이면 변하는 법인데, 어찌 사람을 이와 같이 오래도록 굽혀둘 것인가.” 하고, 마침내 현감으로 천거하였는데, 그는 과연 훌륭한 치적이 있었다. 공이 사람을 쓰고 버릴 적에 한결같이 공정하게 함이 이와 같았다.
○ 문정공(文靖公) 최항(崔恒)은 성품이 겸손하고 단정하고 간결하여 겉치레를 아니 하며, 평생토록 남과 말할 적에는 먼저 양보함을 보이고 스스로 드러내지 않았으며 또 별다른 이론(異論)을 세우지 않았다. 글을 짓는 데에도 옛 사람의 규범을 따르지 아니하고 스스로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 크게 펼쳐놓으니, 웅장하고 풍부함이 장강대하(長江大河)와 같이 물결이 뛰고 넘치고 솟구치고 구비 치듯 형세가 그치지 않았으며, 더욱 변려문(騈驪文)에 공교하여 무릇 조정에서 중국에 올리는 표문(表文)과 전문(牋文)이 다 그 손에서 나왔었다. 중국 사람이 매양 우리나라 표문(表文)이 정밀하고 적절하다고 칭찬한 것은 모두 공이 지은 것이다. 평상시에는 비록 추운 겨울이나 더운 여름이라도 의관을 정제하고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서 태만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빠른 말이나 급한 표정을 하지 않았으니, 천성이 그러하였다.
○ 세조(世祖)께서 일찍이 우리나라의 학자들은 어음(語音)이 바르지 못하고, 구두(句讀)가 분명치 못하며, 비록 선유(先儒)인 권근(權近)ㆍ정몽주(鄭夢周) 등의 구결(口訣 한문의 토)이 있으나 아직도 오류가 많은데 진부한 세속의 선비들이 오류를 그대로 이어받음을 염려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노숙한 신하와 경험 있는 유학자에게 명하여 사서 오경(四書五經)을 …… 주어 고금(古今)의 책을 고증(考證)하여 구결을 정하였고, 또 글하는 선비를 모아서 같고 다름을 강론(講論)하게하고 상감이 직접 결정하였다. 이때 문정공(최항)이 항상 좌우에 있으면서 매양 질문을 받으면 정밀하게 분석하여 민첩하게 응대하니, 상감이 듣고 싫증을 내지 않았다. 좌우에 있는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영성(寧城 최항이 뒤에 영성부원군이 됨)이 참으로 천재이다.” 하였다.
○ 문헌공(文憲公) 박원형(朴元亨)은 사체(事體)에 통달하고 전고(典故)에 익숙하였다. 중국 사신 진감(陳鑑)ㆍ고윤(高閏)ㆍ장녕(張寧)ㆍ진가유(陳嘉猶) 등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에, 공이 매번 빈관(儐官 접대관)이 되어 주선하고 교제하기를 모두 마땅하게 하였다. 사신 장녕이 일찍이 문헌공에게 말하기를, “그대 같은 재주는 춘추시대(春秋時代)에 났으면 마땅히 진(晉) 나라 숙향(叔向)이나 정(鄭) 나라 자산(子産)의 밑에는 있지 않았을 것이다.” 하였다.
○ 문헌공(文憲公) 윤자운(尹子雲)이 함길도(咸吉道) 체찰사(體察使)가 되어 안변(安邊)에 이르렀을 적에, 이시애(李施愛)가 절도사(節度使) 강효문(康孝文)과 길주 목사(吉州牧使) 설정신(薛丁新)을 죽이고는 그 고을을 점거하고 반역을 일으켜서 여러 고을에 심복을 보내어 수령들을 거의 다 죽이니 흉한 무리들이 간 곳마다 서로 합세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공은 밤낮으로 빨리 달려 함흥(咸興)에 이르니, 그날 밤에 역적들이 또 난을 일으켜서 감사 신면(申㴐)을 죽이고는 병력을 이동하여 공의 처소에 이르러 문을 박차고 칼을 뽑아 들고 뜰에 담같이 둘러섰으나, 공은 의관을 정제하고 단정히 앉아서 웃으며 말하기를 태연하게 하니 도적들이 두려워서 물러갔다. 도적의 무리들이 제 마음대로 날뛰고 간사함을 예측할 수 없었는데, 공이 7일 동안이나 포위되어 있었지만 태연하게 대처하고 마음을 동요하지 않으니, 도적들 중에 혹 뉘우쳐서 공을 위하여 주선하고 돕는 자가 있어 마침내 무사히 돌아왔다.
○ 동원공(東原公) 함우치(咸禹治)가 일찍이 전라도 감사가 되었는데, 어떤 양반의 집 형제가 서로 큰 가마솥을 가지려고 관청에 소송하는 자가 있었다. 함공이 노하여 아전에게 명하여 급히 크고 작은 두 가마솥을 가져오게 하고 말하기를, “마땅히 깨뜨려서 고르게 …… 주겠다.” 하니, 두 형제가 복종하고 분쟁을 마침내 중지하였다.
○ 지중추(知中樞) 홍일동(洪逸童)은 인격이 우뚝하게 뛰어나고 성품이 천진(天眞)하며 겉치레를 꾸미지 아니하였다 사부(詞賦)에 능하고 술을 많이 마셨는데 정신없이 취하면 풀잎으로 피리 소리를 내었는데, 소리가 비장(悲壯)하고 위엄이 있었다. 평상시에 혼자 오래된 거문고를 어루만졌는데, 줄은 있어도 악보(樂譜)는 없었다. 말하기를, “나의 거문고는 천고(千古)에 전하지 않는 도연명(陶淵明)의 지취(志趣)를 얻었다. 옛날에 백아(伯牙)가 거문고를 타자 오직 종자기(鍾子期)만이 그 뜻을 알았는데, 나의 거문고는 도연명이 나오지 않으면 세상에서 알 사람이 없다.” 하였으니, 천지간의 기이한 남자라 할 것이다. 일찍이 상감 앞에서, 부처의 일을 논박하자 세조(世祖)가 거짓으로 성내기를, “이놈을 죽여서 부처에게 사례하겠다.” 하고, 좌우에 있는 사람에게 명하여 칼을 가져오라 하여도 홍일동은 태연하게 변론했으며, 좌우가 거짓으로 칼로 정수리를 두 번이나 문질렀지만 돌아보지 아니하고 두려운 빛이 없었다. 세조가 장하게 여겨, “네가 술을 먹겠느냐.” 하니, 일동이 대답하기를, “번쾌(樊噲)는 한(漢) 나라 무사(武士)이며, 항왕(項王 항우)은 다른 나라의 군주였는데도 항왕이 주는 한 동이 술과 돼지다리 하나를 사양치 않았는데, 하물며 성상께서 주시는 것이겠습니까.” 하였다. 은 항아리에 술을 가득히 담아 내려주었는데 그는 힘차게 마셨다. 상감이 이르기를, “죽음을 두려워하느냐.” 하니, 홍일동이 대답하기를, “죽는 것이 마땅하면 죽고, 사는 것이 마땅하면 사는 것인데, 감히 죽고 사는 것으로써 그 마음을 바꾸겠습니까.” 하니, 상감이 기뻐하여 초구(貂裘) 한 벌을 주어서 위로하였다.
홍일동이 일찍이 진관사(眞寬寺)에서 놀 적에, 떡 한 그릇, 국수 세 주발, 밥 세 바릿대, 두부 국 아홉 주발을 먹었는데, 산 밑에 이르니 대접하는 이가 있어, 또 찐 닭 두 마리, 물고기국 세 주발, 생선회 한 쟁반, 술 마흔 잔을 먹으니, 보는 이들이 대단하게 여겼다. 세조(世祖)가 듣고 홍일동을 불러 묻기를, “참으로 이와 같이 먹었느냐.” 하니, 홍일동이 그렇다고 사과하자, 상감은 장사(壯士)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평상시 출입할 적에는 다만 미숫가루와 전술[醇酒]을 먹을 뿐이요, 밥을 먹지 않았다. 뒤에 홍주(洪州)에 가서 폭음(暴飮)을 하고 곧 죽었는데, 사람들이 그가 배가 터져 죽은 것이라 의심하였다. 뜻이 있어도 시행치 못하였고 벼슬이 그 능력에 차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 당(唐) 나라 말기에 정곡(鄭谷)이 시를 잘 지어 세상에서 유명하였는데 그때 사람이 그 관직에 따라 정도관(鄭都官)이라 하였다. 송(宋) 나라 매성유(梅聖兪)가 만년(晩年)에 도관(都官)이 되었다. 어느 날 구양영숙(毆陽永叔)의 집에 모였는데, 유원보(劉元父)가 농담하기를, “매성유의 벼슬이 반드시 여기에 그칠 것이다. 예전에는 정도관(鄭都官)이 있었고 지금은 매도관(梅都官)이 있다.” 하였다. 자리에 있는 손님들이 다 놀라고 매성유도 기뻐하지 않았는데 얼마 아니 되어 매성유가 병들어 죽었다. 내가 젊어서 윤서(尹恕)와 같이 유학하였는데, 윤서가 일찍이 말하기를, “만일 과거에 올라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만 되면, 반드시 벼슬을 그만 두겠다. 남자가 명정(銘旌 상여 앞에 들고 가는 기) 위에 정언(正言) 두 글자를 쓰면 만족하다. 제군(諸君)들은 의심치 말라.” 하였는데, 윤서와 내가 갑자년 과거에 올라서 경오년과 신미년 사이에 비로소 정언에 임명되었다. 내가 농담하기를, “벼슬을 그만 둘만하다.” 하니, 윤서가 웃으며, “두고 보라.” 하더니, 얼마 안 되어 병들어 죽었다. 유원보가 매성유에게 농담한 것과 윤서가 스스로 기약한 말이 과연 그대로 부합하였으니, 이는 무슨 이치인가.
○ 문충공(文忠公) 권양촌(權陽村)이 일찍이 《입학도설(入學圖說)》을 지었는데, 주자(周子)의 〈태극도설(太極圖說)〉과 주자(朱子)의 《중용장구(中庸章句)》의 말에 의거하여 〈천인심성합일도(天人心性合一圖)〉를 만들었는데, 이는 내용이 광대하여 모든 이치를 포함하였으며, 정묘하고 심오하여 옛 성인이 미처 발명하지 못한 것을 확충하여 후학(後學)에게 무궁한 이치를 열어주었다. ‘군자는 마음을 닦으므로 길하고 소인은 이치를 거스르므로 흉(凶)하다.’ 한 말은, 그 대강만 들어서 배우는 사람에게 보인 것인데 그 뜻이 깊다. 그 조카인 권채(權採) 선생이 또 이 《입학도설》과 주자(朱子)의 《중용장구》와 《대학장구》 및 《혹문(或問)》의 해설에 의거하여, 천리가 유행발육(流行發育)하는 형상과, 학자(學者)가 기질을 변화하여 성인이 되는 방법을 서술하였는데, 그 덕으로 나아가는 선후의 조목은, 공자ㆍ증자ㆍ자사(子思)ㆍ맹자 등의 말을 인용하였고, 그 공부하는 방법의 깊고 얕은 의미는 정자(程子)ㆍ주자(朱子)의 논설로써 단정하였으며, 그 천인심성(天人心性)의 논설은 양촌(陽村)의 뜻을 발명하여 작성도(作聖圖)를 지었다.
근세에 일을 만들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만든 성불도(成佛圖)가 있고, 종정도(從政圖)가 있는데, 모두 투자(骰子 주사위)를 사용한다. 권채(權採) 선생이 작성도를 만들었는데, 그 종목이 열세 가지가 있으니, 도상론(圖象論)ㆍ성리론(性理論)ㆍ음양론(陰陽論)ㆍ조화론(造化論)ㆍ기질론(氣質論)ㆍ성경론(誠敬論)ㆍ자질론(資質論)ㆍ공부천심론(功夫淺深論)ㆍ용공작철론(用工作輟論)ㆍ현지론(賢智論)ㆍ우불초론(愚不肖論)ㆍ진덕선후론(進德先後論)ㆍ총론(總論) 등인데, 13논(論) 중에 또 다소의 절목(節目)이 있으며, 역시 주사위를 사용한다. 주사위 6면(面)에 성(誠)ㆍ경(敬)ㆍ사(肆)ㆍ위(僞) 4자를 썼는데, 성ㆍ경은 두 번씩 썼으며, 그 글자는 다 수(數)로 나누어서, 주사위를 던지면 그 수로써 나아가는 순서를 삼는다.
무릇 사람의 성품은 학문하기는 싫어하고 놀음하기를 좋아하니, 성불도(成佛圖)와 종정도(從政圖)와 같은 것은 역시 장기와 바둑의 한 종류이다. 한갓 시일만 허비하고 마음 쓸 바는 없는데, 선생이 이 도(圖)를 만든 것은 당초에 놀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학문하는 이가 그것을 즐겨 하여 그 지혜의 문을 열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알지 못하는 이는 주사위 쓰는 것을 장기나 바둑에 가깝다 하여 그 뜻을 깊이 연구하지 않으니, 생각지 못함이 심하다. 무릇 주사위를 쓰는 것은 뜻이 주사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ㆍ경ㆍ사ㆍ위의 등분을 보이기 때문이다. 성ㆍ경ㆍ사ㆍ위는 곧 학자의 마음 쓰는 경지이다. 주사위로 인하여, 처음 배우는 이에게 도(道)를 지시함이 더욱 친절한 것이다. 이 도(圖)로써 성인의 도(道)를 구하면 비록 어리석고 어린이들이라도 방향을 알게 할 수 있으며, 덕에 나아가는 순서가 조리가 있고 문란하지 않아서, 성현(聖賢)의 경지에 이를 것이다. 도(圖)가 세상에 행하여지지 못하고 선생이 죽었으니, 지금 아는 이는 대개 드물다. 선생의 문장은 중부(仲父) 양촌의 풍모가 있다.
○ 문강공(文康公) 이석형(李石亨)은 일찍이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가지고 번거로운 것을 깎고 간략한 것을 취하고, 《고려사(高麗史)》에서 권선징악이 될 만한 것을 더 넣어서 책을 만들어 이름을 《대학연의집략(大學衍義輯略)》이라 하고, 경연(經筵)에 진강(進講)하기를 청하니, 상감이 기꺼이 받아들였다. 공의 뜻은, ‘경서(經書)는 바야흐로 진강하는 중이요, 고려의 일은 전해들은 것이므로 거울삼아 경계하기에 가장 간절하다.’고 여긴 것이었다. 그러므로 삭제하기도 하고 요약하기도 하고 첨가하기도 하였으니, 보기에 유익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를 평하는 이는 이르기를, “경서는 도(道)를 실은 것이니 전부 성인의 말씀이다. 진덕수의 편찬이 모두 구차한 것이 아닌데, 지금 다 깎아버리면 의리에 온당치 못하니, 옛 《대학연의》에 《고려사》를 보태 넣으면 근사할 것이다.” 하였다.
○ 고려 문종조(文宗朝)에 예부 상서(禮部尙書) 정유산(鄭惟産)이 과거에 이름을 봉하고 선비를 뽑는 법을 세웠다. 응시하는 여러 선비들이 시권(試券 시험지) 머리에 성명ㆍ본관ㆍ부ㆍ조ㆍ증조ㆍ외조의 이름을 써서 풀로 봉하고 시험 보기 며칠 전에 시원(試院)에 올리도록 하였다. 과장(科場)을 개시하는 하루 전날 오후에, 주문관(主文官 시관(試官))이 글의 제목 몇 개를 적어 가지고 궁궐 문에 나아가 봉하여 올리면, 임금이 친히 뜯어보고 각각 글제 위에 낙점(落點)하고는 봉하여 도장을 찍어서 내어주면, 주문관이 받아서 시원(試院)에 가지고 간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봉함을 뜯고 글제를 내면 당직한 승선(承宣)이 금인(金印 어보(御寶))을 받들어 시원에 가서 주문관과 같이 앉아서 거자(擧子 과거 보는 사람)의 권봉(券封)에 하나하나 도장을 찍는다. 임금이 또 내시(內侍) 두 사람을 보내어 술과 과일을 주고 주문관 또한 잔치를 베풀어 위로한다.
하루가 지난 다음 당직한 승지가 시원에 이르러 권봉을 뜯고 급제자를 발표한다. 제2장(第二場)도 이와 같다. 제3장(第三場)에서는 이경(二更)에 이르러서 글제를 내고 다른 것은 같다. 이틀 사이를 두고 주문관이 각각 합격된 시권(試券)의 표면에다가 등급의 차례를 적은 황지(黃紙)를 붙이고 함에 봉하여 궁궐로 올린다. 임금이 편전(便殿)에 앉고 승선(承宣) 두 사람이 그 함을 받들어 임금 앞에서 봉함을 뜯고 문신(文臣)과 승선이 그 과거의 등급을 읽되, 상하의 등급은 모두 주문의 의망에 의하여 방(榜)을 붙인다. 그 에도 대개 이와 같이 해 왔었다.
국조(國朝)에 이르러 과거의 법이 점점 갖추어졌는데, 시권에 이름을 봉하는 것은 고려와 같고 나머지는 모두 같지 않다. 그 수권관(收卷官)ㆍ봉미관(封䌤官)ㆍ사동관(査同官)ㆍ지동관(枝同官)ㆍ역서(易書) 등의 일은 다 원(元)의 제도를 따랐고, 양쪽에 시장(試場)을 설치함은 세종조(世宗朝)에서 시작되었는데, 혹은 강경(講經)으로, 혹은 제술(製述)로 하여 때에 따라 달랐다.
○ 예전에는 무과(武科)가 없었는데, 태종조(太宗朝)에 처음으로 설치하였다. 고사(故事)에 문무과(文武科)의 방(榜)을 내는 날에는 홍패(紅牌)를 하사하고 어사화(御史花)와 어사주(御史酒)를 내렸으며 문무과 1등 3명에게는 별도로 검은 일산[皁盖]을 주었으니, 당시에 큰 영광으로 여겼다. 세조(世祖) 때에 문과는 일산을 주고 무과는 기(旗)를 주어, 유가(遊街)하는 날에는 어린아이와 어리석은 아낙네들도 모두 문과와 무과의 구별을 알게 되니, 무반(武班)들이 자못 기뻐하지 않으므로, 곧 파하고 예전 제도를 회복하였다.
○ 구례(舊例)에는, 벼슬이 정3품에 이르면 문과 시험에 나가지 아니하였고, 6품에 이르면 생원(生員) 진사과(進士科)에 나가지 않았는데, 당상관으로서 문과에 응시한 것은 화산군(花山君) 권반(權攀)에서 시작되었고, 종친(宗親)의 극품(極品 정일품)으로서 시험에 나간 것은 영순군(永順君)에서 시작되었으며, 부마(駙馬) 극품으로서 시험에 나간 것은 세조 때에 시작되었으나 이내 없어졌다.
○ 근일에 과장(科場)에서 부의 제목을 내었는데, 해동청(海東靑 매(鷹))이라 한 것이 있었다. 《운부군옥(韻府群玉)》의 주(註)에 보면 옛 사람의 시구(詩句) 중에
아름다운 글귀는 천하의 이백보다 묘하고 / 麗句妙於天下白
높은 재주는 뛰어남이 해동청과 같도다 / 高才駿似海東靑
한 것이 있는데, 어떤 과거에 온 선비가 잘못 해석하기를, “아름다운 글귀가 천하에 묘한 이는 오직 백고(白高) 한 사람이니, 그 재주의 뛰어남이 해동청과 같도다.” 하였다. 이에 온 과장이 덩달아 따라서 백고(白高)를 부(賦)의 제목으로 삼아 심지어 시를 짓기를
해동청의 보라매여 / 繫海東之爲靑
백고의 높은 재주와 같도다 / 同白高之駿才
하였는데, 시관도 이것을 모르고 선발하여 과거에 오른 이가 많았으니, 이 말을 듣는 이는 심히 목을 움츠리고 웃었다.
○ 국조 이래로 과장(科場)의 문체가 평온하였는데, 계유년과 갑술년 이후로 한두 사람의 문사(文士)가 괴이하고 까다로운 문장으로 과거에 장원으로 뽑히니, 4, 5 ,6년 사이에 문체가 모두 변하여 서곤(西崑 오대(五代) 및 송초(宋初)의 시풍)의 문체가 되고 말았다. 지금 국학(國學 성균관)과 과장에서는 구양공(歐陽公)이 유기(劉幾)를 내친 고사(故事)를 들어서, 그 중에 심한 자를 내치니, 문체가 조금씩 예전과 같아지나 완전히 변하지는 못하였다. 근래 전시 책문(殿試策文)의 기두(起頭)에 한 유생은
모래를 헤치고 금을 가려내니 큰 대장장이의 정밀함이 있고 / 披沙揀金有太冶之精
채찍을 잡고 말에 임하니 백락(말을 잘 아는 사람)의 밝음이 있도다 / 執策臨馬有伯樂之明
하였고, 한 유생은
하늘은 자시에 열리고 / 天開於子
땅은 축시에 열리고 / 地闢於丑
사람은 인시에 열린다 / 人生於寅
하였으니, 그것은 부화(浮華)하여 절실하지 못함이 이와 같다.
○ 구례(舊例)에는 여러 과거의 회시(會試)에는 매번 삼장(三場 초장ㆍ중장ㆍ종장의 세 시험)을 보는 날에 예조에서 잔치를 베풀고, 또 별도로 궁내에서 술과 과일을 내려서 여러 시관(試官)들이 즐겁게 마시는 것을 영광으로 삼았다. 제생(諸生)들에게도 묽은 죽과 청주(淸酒) 수십 동이를 주어 목마름을 풀어주었는데, 식례(式例)가 나오면서 모두 폐지되었다. 근래에 시원(試院)에서 한 참시관(參試官)이 희롱으로 한 구(句)를 지었는데
좌주(시관)는 약주 한 잔도 안 먹었는데 / 座主下飮香醪一盞
어찌하여 얼굴이 붉어지는가 / 何烘其頭
제생들은 먹물 몇 되를 달게 마시니 / 諸生甘吸墨水數升
모두 그 입술이 검어졌도다 / 皆黔其吻
하였다. 나도 한 구를 남겼는데
차주발은 오늘로부터 비로소 커지고 / 茶椀始從今日大
술잔은 지난해에 가득하였음을 기억한다 / 酒杯仍憶去年深
하였더니, 자리에 많은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 정인지(鄭麟趾)는 갑오년 초시(初試)에서 장원하였고, 정미년 복시(覆試)에서도 장원하였으니, 국조 이후로 한 사람뿐이다.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이석형(李石亨)은 신유년에 생원진사시에 장원하고 문과에 세 번째로 급제하였으니, 삼한(三韓) 이후로 듣지 못한 일이다. 사성(司成) 남계영(南季英)은 생원시에 장원하고 문과에 두 번째로 급제하였으니, 역시 그 다음이다.
○ 아버지와 아들이 연달아 장원한 이는 문경공(文景公) 권제(權踶)와 익평공(翼平公) 권람(權擥)이고, 형과 동생이 연달아 장원한 이는 정언(正言) 유자빈(柳自濱)과 교리(校理) 유자한(柳自漢)이다.
○ 아버지와 아들이 잇달아 정승에 오른 이는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와 성렬공(成烈公) 황수신(黃守身)과 영의정 심온(沈溫)과 좌의정 심회(沈澮)이다.
○ 조선조에 장원으로서 정승에 오른 이는 하동부원군 정인지(鄭麟趾)ㆍ길창(吉昌)부원군 권람(權擥)ㆍ영성(寧城)부원군 최항(崔恒)ㆍ남양(南陽)부원군 홍응(洪應)이며, 고려에 장원하고 조선조에 정승이 된 이는 유량(柳亮)과 맹사성(孟思誠)이다.
○ 갑인년 별시(別試)에 영성부원군 최항은 장원이 되었고, 창녕(昌寧)부원군 조석문(曺錫文)은 방안(榜眼 2등)이 되었고, 연성부원군 박원형(朴元亨)은 탐화(探花 3등)가 되었으며, 능성(綾城)부원군 구치관(具致寬)은 병과(兵科 3등)가 되었는데, 세조(世祖) 때에 네 사람이 잇달아 정승으로 올랐으니, 고금에 없던 일이다.
○ 갑오년(1414) 가을 친시(親試 임금이 직접 과장에 나와서 보이는 과거) 때에 독권관(讀券官) 하륜(河崙) 등이 과거 본 세 사람의 시권(試券)을 뽑아서 올리니, 태종(太宗)께서 이르기를, “마땅히 향을 피우고 기도하며 장원을 뽑던 옛 일을 따를 것이다.” 하고, 손가는 대로 뽑아보니, 곧 문경공(文景公) 권도(權蹈)였다. 임금이 기뻐하여 이르기를, “내가 일찍이 도(蹈)의 아버지 근(近)이 일찍 죽은 것을 슬퍼하였더니, 지금 그 아들이 장원이 되었으니 적이 위안이 된다.” 하고, 하륜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이번 과거는 나의 문생(門生)이니, 경등은 자기 문생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하였으므로, 하륜 등이 끝내 좌주(座主)의 예(禮)를 받지 않았다. 경오년 전시(殿試) 때에 독권관이 익평공(翼平公) 권람(權擥)을 제4등으로 추천하였다. 방이 나오자 문종(文宗)께서 이르기를, “권람은 몇 째가 되었는고.” 하니, 좌우에서 아뢰기를, “넷째입니다.” 하니, 임금이 좌우의 신하들로 하여금 시권을 읽어보게 하시고는 네 번 째에 이르러 “이 글이 진실로 장원이라.” 하고, 친히 제1등으로 뽑았다. 도(蹈)는 뒤에 이름을 제(踶)로 바꾸었는데, 제(踶)의 부자가 장원이 된 것은 모두 임금이 내린 것이다.


[주D-001]이금오(李金吾) : 당 나라 두보가 이금오(李金吾)와 함께 술을 먹으며 지은 시에, “취하여 돌아갈 때 통행금지에 걸리지 않겠느냐.” 하니, 금오가, “두렵다.” 했다. 금오는 지금의 검찰청장의 직이므로 이렇게 희롱한 것이다.
[주D-002]왕옥여(王玉汝) : 왕옥여(王玉汝)는 아마도 한옥여(韓玉汝)의 잘못인 듯하다. 송나라 한진(韓縝)의 자가 옥여인데 법을 엄하게 다스리므로 당시 사람들이, “차라리 호랑이를 만날지언정 한옥여를 만나지 말라.” 한 말이 있다.
[주D-003]동방삭(東方朔) : 한(漢) 무제(武帝) 때 사람으로 조정에 미관으로 있으면서 재담과 농담을 잘하였으며 임금 앞에서 괴이한 행동을 하기로 유명하였다.

해동잡록 3 본조(本朝)
이주(李冑)


○본관은 고성(固城)으로 자는 주지(冑之)며 자호는 망헌(忘軒)이고 행촌(杏村 이암(李嵒))의 후손이다. 성종조에 등제하였으며, 문명(文名)이 있어 사람들은 세상을 구제할 재주라 칭찬하였다. 정언(正言)이 되어 말과 행동이 비분 강개하였다. 연산(燕山) 무오년에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도(門徒)로서 해도(海島)에 유배되었다가, 마침내 피살되었다. 일찍이 충주(忠州) 연정(蓮亭)에 도착하여 친우와 이별하며 시를 지은 것이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었는데,
못은 잠잠하여 물 기운 어두운데 / 池面沈沈水氣昏
밤이 깊어오니 고기 뛰는 소리 베갯머리에 들린다 / 夜深魚擲枕邊聞
내일 아침 배대인 곳 여강 달이 가까우리니 / 明朝泊近驪江月
죽령 하늘에 닿아 그대 보지 못하리라 / 竹嶺叅天不見君
하였다.

 

 

학봉집 부록 제4권
 [제문(祭文)]
제문(祭文) [이노(李魯)]


아아, 하늘이 제갈공명(諸葛孔明)을 한(漢) 나라가 망해 가던 즈음에 태어나게 한 것은 그럴 듯하였다. 그러나 군사를 출동하여 승리하기도 전에 장성(長星)이 갑자기 떨어지게 되었으니, 하늘의 뜻은 알 수가 없다. 송(宋) 나라가 국사가 이미 글러진 뒤끝에 붕거(鵬擧)를 얻은 것은 다행이다. 그러나 의로운 군사들이 막 떨쳐일어나던 즈음에 거짓 조서로 인해 갑자기 군사를 돌렸으니, 송 나라 사직이 교체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아, 슬프다.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을 누가 주장하며, 나라가 망하고 보존되는 것은 누가 주도하는가?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은 아마도 운명에 따라 그렇게 되는 것이겠으나, 나라가 망하고 보존되는 것은 하늘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니, 아, 슬프다.
거짓 조서가 내려지지 않고 장성이 떨어지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미워함이 없었을 것이며, 하늘은 징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하늘을 바치고 있던 한쪽 손이 꺾이지 않았고, 강을 건너라는 세 번 외침이 갑자기 끊어졌으니, 이는 사람의 허물인가, 아니면 하늘의 허물인가. 망망하고 아득하여 허물을 돌릴 곳이 없으니, 아, 슬프도다.
아아, 혼령께서는 이 세상에 드문 정기를 타고나 한창 나이에 화려한 요직에 오르셨다. 임금의 면전에서 허물을 따짐에 있어서는 주 어사(朱御史)신 간의(辛諫議)와 같았고, 겁내지 않고 일을 논함에 있어서는 여 시강(呂侍講)이나 진 대제(陳待制)와 같았다. 이에 뭇 관원들이 태도를 바꾸었으니 깃을 치는 조양(朝陽)의 봉새였고, 뭇 간신들이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으니 늠름하기가 전상(殿上)의 호랑이였다.
학문은 연원(淵源)이 있었고, 행실은 돈후함과 소박함이 가지런하였다. 붓을 잡고 문장을 지음에 있어서는 구름 사이의 육사룡(陸士龍)이었고 해 아래의 순명학(荀鳴鶴)이었으며, 왕명을 받고 사신으로 나감에 있어서는 속국(屬國)의 소무(蘇武)였고 태상(太常)의 홍호(洪皓)였다. 온화한 얼굴로 이치를 토론함에는 소범(小范)처럼 정신이 경경(耿耿)하였고, 강개한 마음으로 시대를 상심함은 맹박(孟博)처럼 절조가 열렬하였다. 옛사람이 다다르지 못했던 경지를 홀로 다다랐으며, 당시에 말하기 어려웠던 일을 능히 말하였다. 그러니 그 누가 송 광평(宋廣平)처럼 철석(鐵石) 같은 간장을 가졌던 공의 꿋꿋함을 뽑아 내겠으며, 그 누가 장계통(張季通)처럼 옥설(玉雪)과 같은 정신을 가졌던 공의 맑음을 더럽히겠는가.
세상 사람들은 뒤돌아보면서 길을 가는데 공은 어찌하여 절조를 높이 쳐들었던가. 뭇사람들은 우물거리면서 살아가는데 공은 홀로 말을 하였다.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은 소외당하였다고 해서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복수하고자 하는 울분을 어찌 먹고 자는 사이에 잠시라도 잊었겠는가. 공문서의 내용은 한마디 한 글자가 모두 마음속에서 우러나와서 간절하고 간절하였으며, 격려하는 곧고 바른말들은 성대하게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그런데 당당하여 세속을 뛰어넘는 높은 의표(儀表)와 정성스럽게 나라를 걱정하는 충정을 다시는 이 세상에서 볼 수 없게 되었으니, 아, 하늘은 어찌하여 그렇게 하였는가. 자부(紫府)가 시끄러이 놀라매 공이 상빈(上賓)이 되었다. 기미성(箕尾星)을 타고 육합(六合)을 떠나가니 공의 마음이야 응당 상쾌하기는 하겠지만, 하토(下土)를 굽어보매 황급하고 불안하기가 어떻겠는가. 달 밝은 가을날 밤에 학이 하늘에서 우니, 그 학이 바로 공이 아니겠는가. 아, 애통하고 애통하다.
당시의 사태는 급하고도 위태로웠다. 군신(君臣)간의 의리는 비로 쓴 듯이 없어졌고, 향배(向背)의 기미는 몹시도 급박하였다. 나라가 나라다운 면모를 잃지 않고 오늘날까지 보존된 것은 오로지 영남이 영남다운 면모를 잃지 않은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런데 영남이 영남다운 면모를 잃지 않은 것은 누구의 공이겠는가. 가령 영남이 공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영남이 영남으로 보존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공 역시도 영남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공의 복 없음이 귀신에게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말미암은 것인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공이 평생토록 간직하였던 충의를 천하 후세에 드러내지 못하였을 것이다. 말과 생각이 이에 미치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심장이 쪼개지고 뼈가 떨리는바, 아, 애통하고 애통하다.
나 이노(李魯)는 참으로 어떠한 사람이기에 공과 함께 한 시대에 나란히 나서 일찍이 젊어서는 나란히 과거에 급제하였고, 늙어서는 송백(松柏)처럼 변치 않는 우의를 맺었는가. 학사루(學士樓) 위에서 함께 초유문(招諭文)을 지었고, 환아정(換鵝亭) 가에서 소모장(召募將)의 절부(節符)를 나누었다. 2년 동안 막하(幕下)에 있으면서 터럭만치도 보좌한 것이 없지만, 천 리의 관하(關河)를 떠돌면서 오래도록 전쟁터를 내달리는 데 따라다녔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미쳤다고 하였지만 공만은 나를 버리지 않았고, 사람들은 나를 보고 어리석다 하였지만 공만은 나를 버리지 않았다. 임진년 늦겨울에 베개를 나란히 베고 누워 새벽까지 나눈 대화를 혼령께선 잊었는가. 지리한 공문서를 보면서 허실에 대해 반복하여 논한 것을 혼령께선 잊었는가. 아, 애통하고 애통하다.
촉석루(矗石樓)가 있는 진주성에서 내가 공을 반함(飯含)하였고 내가 공을 염습(殮襲)하였다. 지리산 기슭에다 내가 공을 하관하였고 내가 공을 파묻었다. 임종하면서 하는 말은 어쩜 그리 낭랑하였나. 나라를 걱정하는 일념은 땅속에 들어가서도 없어지지 않았다. 공의 심사(心事)를 내가 실로 알고 있으니, 내가 한 말을 영혼께선 살피리라.
공을 따라가지 못하고서 나만 홀로 남아서 무엇을 하겠는가. 처량한 한 그림자 외로이 어디로 가나. 홀로 서서 슬프게 노래부르니 온 우주가 아득하고 망망하구나. 먼 훗날에 황천에서 서로 만나 악수할 것이지만, 악수하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나. 길게 한번 웃고 말 것이다. 잔약해진 고을에는 무엇이 있는가. 한 단지의 맑은 술 뿐이로구나. 지극한 정이야 글로 다할 수 없는 것이기에, 아무 말도 못한 채 글을 짓지 못하누나. 두 번 절하고 통곡하노라니, 영혼께서 마치 앞에 계신 듯하구나. 아, 애통하고 애통하다.


 

[주D-001]붕거(鵬擧) : 송 나라의 명장인 악비(岳飛)의 자(字)이다. 악비는 금(金) 나라의 군대를 여러 차례 격파해 고종(高宗)으로부터 ‘정충악비(精忠岳飛)’라는 네 글자를 하사 받았으며, 다시 이성(李成), 유예(劉豫) 등을 격파해 태위(太尉)에 올랐다. 그 뒤에 초토사(招討使)가 되어 금 나라 군대를 대파한 뒤 황하를 건너 진격하려고 하였는데,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하고 있던 간신 진회(秦檜)에 의해 갑자기 소환 명령이 내려져서 군사를 돌렸다가 무고에 의해 체포되어 옥사(獄死)하였다. 《宋史 卷365 岳飛列傳》
[주D-002]강을 …… 끊어졌으니 : 갑자기 병이 들어서 죽었다는 뜻이다. 남송(南宋) 때 금(金) 나라에 대항해서 싸운 명장인 종택(宗澤)이 건염(建炎) 연간에 변경(汴京)을 지키고 있으면서 금 나라를 칠 계책을 올렸는데, 조정 대신으로 있던 황잠선(黃潛善) 등의 방해로 인해 저지되자, 분함으로 인해 병이 들어 눕게 되었다. 이에 여러 장수들이 가서 병문안을 하자, “강을 건너라.”고 세 번 외친 다음에 기절하여 죽었다. 《宋史 卷360 宗澤列傳》
[주D-003]주 어사(朱御史) : 한 나라 성제(成帝) 때 사람인 주운(朱雲)을 말한다. 주운이 괴리 영(槐里令)이 되었을 때, 상방검(尙方劍)을 빌려 주어 간사한 장우(張禹)의 목을 칠 수 있게 해 달라고 상소하자 황제가 노하여 주운을 끌어내리게 하였는데, 주운이 어전의 난간을 잡고 버티어 난간이 부러지고 말았다. 《漢書 卷67 朱雲傳》
[주D-004]신 간의(辛諫議) :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사람인 신비(辛毗)를 가리킨다. 황제가 기주(冀州)의 사가(士家) 10만호를 옮겨 하남(河南)을 채우려고 하자, 여러 조신(朝臣)들이 함께 들어가 이에 대해 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황제가 성난 얼굴로 대하자, 다른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서 간하지 못하였는데, 신비가 이에 대해 간하니, 황제가 화를 벌컥 내면서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이에 뒤쫓아가 황제의 옷소매를 잡고서 다시 간하니, 황제가 마침내 반만 옮기었다. 《三國志 卷25 魏書 辛毗傳》
[주D-005]여 시강(呂侍講) : 송 나라 때 시강을 지낸 여희철(呂希哲)을 가리킨다.
[주D-006]진 대제(陳待制) : 송 나라 때 대제를 지낸 동보(同甫) 진량(陳亮)을 가리키는데, 진량은 상소를 올려 시사에 대해 극언(極言)하였다.
[주D-007]조양(朝陽)의 봉새 : 인품과 덕성이 출중하며 정직하고 감언(敢言)하는 선비를 가리킨다. 조양은 아침에 해가 뜨는 언덕이다. 《시경》 대아(大雅) 권아(卷阿)에, “봉황이 우니, 저 높은 산에서 우는도다. 오동나무가 자라니, 저 조양에서 자라는도다.[鳳凰鳴矣 于彼高岡 梧桐生矣 于彼朝陽]” 하였다.
[주D-008]전상(殿上)의 호랑이 : 김성일(金誠一)이 근시(近侍)로 있으면서 임금과 가까운 귀인(貴人)들을 탄핵하자, 당시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전상호(殿上虎)라고 불렀다.
[주D-009]구름 사이의 …… 순명학(荀鳴鶴)이었으며 : 구름 사이란 오군(吳郡) 지방을 가리키고, 해 아래는 경도(京都)를 가리키며, 사룡은 진(晉) 나라 육운(陸雲)의 자이고, 명학은 순은(荀隱)의 자이다. 순명학과 육사룡은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였는데, 어느 날 장화(張華)가 있는 곳에서 함께 모였다. 이에 장화가 두 사람 모두 큰 재주가 있는 사람들이라 여기고는 보통 쓰는 말은 하지 못하게 하니, 육사룡이 손을 들면서 말하기를, “구름 사이의 육사룡입니다.” 하자, 순명학이 답하기를, “해 아래의 순명학입니다.” 하였다. 《世說新語 排調》 이 부분이 원문에는 ‘운간육이일하두(雲間陸而日下杜)’로 되어 있는데, 두목(杜牧)의 아들 이름이 두순학(杜荀鶴)인바, 작자가 이를 착각한 듯하므로, 일하순(日下荀)으로 바로잡아서 번역하였다.
[주D-010]속국(屬國)의 …… 홍호(洪皓)였다 : 소무는 한 나라 무제(武帝) 때 소속국(蘇屬國)의 관원으로 있다가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갔는데, 흉노의 선우(單于)가 갖은 협박을 하는데도 굴하지 않다가 큰 구덩이 속에 갇혀서 눈을 먹고 가죽을 씹으면서 지냈다. 그러다가 다시 북해(北海)로 옮겨져서 양을 치며 지냈는데, 그때에도 한 나라의 부절을 그대로 잡고 있었으며, 갖은 고생을 하면서 19년 동안을 머물러 있다가 소제(昭帝) 때 흉노와 화친하게 되어 비로소 한 나라로 돌아왔다. 《漢書 卷54 蘇建傳 蘇武》 홍호는 건염(建炎) 3년에 대금통문사(大金通問使)가 되어 금 나라로 사신 갔다가 금 나라 점한(粘罕)의 뜻을 거슬러서 냉산(冷山)으로 쫓겨났는데, 냉산은 몹시 추운 곳으로 4월이 되어야 비로소 풀이 나고 8월이면 이미 눈이 내리는 곳이었다. 홍호가 이곳에 머물면서 갖은 고생을 다 겪었는데, 2년 동안 금 나라에서 양식을 대어주지 않기도 하였으며, 큰 눈이 내려 땔감이 다 떨어지자 말똥으로 불을 피워 국수를 끓여 먹기도 하였다. 이렇게 15년을 머물러 있다가 비로소 송 나라로 돌아왔는데, 이 당시에 15명이 금 나라로 사신 갔다가 3명만이 살아서 돌아왔다고 한다. 《宋史 卷373 洪皓列傳》
[주D-011]소범(小范) : 송 나라 범중엄(范仲淹)을 가리킨다. 범중엄은 인종(仁宗) 때의 명재상으로, 여러 가지 어진 정사를 시행하였으며, 문장에 뛰어났다.
[주D-012]맹박(孟博) : 동한(東漢) 때 사람인 범방(范滂)의 자이다. 범방은 어려서부터 청렴한 절개가 있었으며,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었는데, 기주(冀州)에 기근이 들어 도적떼가 일어났을 때 청조사(淸詔使)가 되어 안찰하였다. 그 뒤에 환관(宦官)들의 무고로 죽임을 당하였다. 《後漢書 卷67 黨錮列傳》
[주D-013]송 광평(宋廣平) : 당(唐) 나라 현종(玄宗) 때의 명재상으로 광평군공(廣平郡公)에 봉해진 송경(宋璟)을 가리킨다. 송경은 꿋꿋하여 대절(大節)이 있었고, 강직하여 아부하지 않은 것으로 한 시대에 이름나 철석심장(鐵石心腸)을 가지고 있다고 일컬어졌다.
[주D-014]장계통(張季通) : 계통(季通)을 자로 쓰는 사람 중에 청백(淸白)하고 맑은 지조가 있기로 이름 높은 사람이 없는바, 누구인지 미상이다. 혹 진(晉) 나라 때 맑은 지조로 이름 높았던 장한(張翰)의 자가 계응(季鷹)인바, 이 사람을 가리키는 것인 듯도 하다.
[주D-015]자부(紫府) : 도교(道敎)에서 말하는, 신선이 산다고 하는 곳이다.
[주D-016]기미성(箕尾星)을 …… 떠나가니 : 죽어서 신선이 되어 저 세상으로 날아갔다는 뜻이다. 육합(六合)은 천지 사방으로, 이 세상을 말한다.




학봉일고 부록 제2권
 문수지(文殊誌)
학봉 선생(鶴峯先生)의 용사사적(龍蛇事蹟)


○ 공의 휘(諱)는 성일(誠一)이고, 자(字)는 사순(士純)이며, 성(姓)은 김씨(金氏)이니, 문소(聞韶) 계파(系派)로서 대대로 벼슬살이한 집안이며, 영가부(永嘉府)의 임하현(臨河縣)에서 살았다. 공은 일찍이 퇴계(退溪) 이 선생(李先生)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모나고 날카롭고 굳세고 엄한 성품을 다스려 부드럽게 하였다. 타고난 천분(天分)이 비록 곧았으나, 실천하여 닦은 공부 또한 많았다.
갑자년(1564, 명종 19)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무진년(1568, 선조 1)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내한(內翰)으로 들어갔다가 이조(吏曹)를 거치고, 옥당(玉堂)에 뽑혀 화요직(華要職)을 역임하여 한 시대의 명신(名臣)이 되었다. 다른 사람이 말하기 어려워하는 바를 능히 말하였는바, 강직한 지조와 충의의 표상을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칭송하였다.
○ 신묘년(1591, 선조 24) 겨울에 공이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으로서 차자(箚子)를 올려 시사(時事)를 극론(極論)하였는데, 말이 대단히 간절하였으며, 왕자궁(王子宮)에서 재물을 불리고 이권(利權)을 독차지하는 등의 일에 대해서도 거리낌 없이 곧바로 탄핵하였다. 그러자 상께서 깜짝 놀라면서 허물을 인책하였으며, 조야(朝野)가 모두 두려워하였다. 얼마 뒤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옮겨졌다.
○ 임진년(1592, 선조 25) 봄에 중추부(中樞府)로 전임(轉任)되었다가 얼마 되지 않아 형조 참의(刑曹參議)가 되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남방(南方)의 일을 걱정하여 장수를 바꾸기로 의논하였는데, 상께서 특별히 공에게 대신 맡도록 명하여, 드디어 공을 경상우도 병사(慶尙右道兵使)로 삼았다. 공은 명을 받고서 곧바로 떠났는데, 이는 대개 공이 일찍이 아뢰기를, “두려워할 것은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요, 섬오랑캐는 족히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으므로, 이 명령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조정의 어진 사대부들이 모두들 탄식하고 애석해하면서 공의 앞일을 걱정하였다.
행차가 미처 병영(兵營)에 이르기도 전에 변방의 급보(急報)가 하루에 세 번이나 이르러 서울이 발칵 뒤집혔다. 상께서 크게 노하여 정원(政院)에 글을 내려 이르기를, “김성일이 일찍이 ‘일본은 근심할 것이 없다.’고 말하였는데, 이제 대거 내침(來侵)하였으니, 내가 장차 김성일을 국문(鞫問)하겠다. 의금부(義禁府)로 하여금 잡아오게 하라.” 하였다.
이때 여러 재신(宰臣)과 추신(樞臣)들이 모두 입시해 있었는데,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상공(相公)만이 홀로 자리에서 일어나 아뢰기를, “이처럼 위급하고 절박한 때에 신이 어찌 차마 성상께 거짓을 아뢰겠습니까. 김성일은, 소견은 비록 혹 왜놈들에게 가리워진 바가 있었을지라도, 그의 평소 심지만은 오로지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뿐이었습니다.” 하니, 상께서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다시 전 병사(兵使) 조대곤(曺大坤)에게 그대로 왜적을 막는 일을 맡게 하였다.
○ 공이 상주(尙州)에 와서 변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밤새워 말을 달려 본진(本鎭)으로 가려고 하였는데, 왜적들이 이미 분성(盆城 김해(金海)의 고호(古號))을 격파하고서 좌도(左道)를 치고 있었다. 행차가 의령(宜寧)에 이르러서 장차 정암(鼎巖)을 건너서 곧바로 본진으로 가려고 하였는데, 왜적들이 강우(江右)를 유린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휘하(麾下)의 장사들이 모두 머리를 맞대고 말하기를, “정암 길은 왜적들이 있는 곳과 아주 가까우니 이번에 가는 길이 반드시 위험할 것이다. 그러니 진주(晉州)를 경유하여 함안(咸安)으로 나가 왜적들이 있는 곳을 조금 돌아서 가느니만 못하다. 그런데 병사(兵使)께서는 영(令)이 엄하여 곧장 앞으로 나아가면서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니, 사실대로 말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정암에는 배가 없다는 내용으로 공에게 고하고, 또 공의 아들인 김역(金湙)을 시켜서, 강물이 불어났고 배도 없으니 진주로 가는 것이 편하다는 내용으로 말하게 하였다.
그러자 공이 군관(軍官) 김옥(金玉)을 시켜서 가 보게 하였는데, 김옥 또한 돌아와서 거짓으로 말하기를, “배가 없어서 건널 수가 없습니다. 사또께서는 속히 진주 길로 가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그런데도 공은 듣지 않고 물러가라고 한 다음 말하기를, “내가 이미 왜적들을 토벌하라는 명을 받았는데, 어찌 감히 머뭇거리면서 빙 돌아서 가겠는가. 내가 직접 가서 살펴보겠다.” 하였다.
공이 여러 군사들을 재촉해서 앞으로 나아가 정암에 도착해서 보니, 강가에 배가 있었다. 이에 공이 곧바로 김옥 등을 잡아오게 하고는 자신을 속인 죄를 캐묻고서 장차 처형하려고 하자 김옥이 소리치기를, “저의 죄는 참형(斬刑)에 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다만 공께서는 지금 왜적들과 맞닥뜨리고 있으니, 한 번 죽어서 속죄(贖罪)하고자 합니다.” 하니, 공이 꾸짖어 말하기를, “네가 이미 공을 세워 속죄하겠다고 하였으니, 앞으로 왜적들을 만나 싸울 경우에는 마땅히 앞장서서 돌격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이번의 죄까지 아울러 다스려서 결단코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 하였다. 그리고는 드디어 군령장(軍令狀)을 책임지고 받들도록 하고 군마(軍馬)를 독촉하여 출발하였다.
○ 길을 가다가 해망원(海望原)에 도착하였다. 경상우도 병사 조대곤(曺大坤)이 성을 버리고 퇴각하여 주둔해 있다가 황망히 도망치려고 하였는데, 공이 도착한 것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맞아 읍하고는 곧바로 하직 인사를 하고 떠나가려고 하였다. 공이 준엄한 말로 책망하기를, “장군은 한 지방을 맡은 장수로서 군대를 주둔시킨 채 진격하지 않아 김해성(金海城)을 함락당하게 하였으니, 그 죄는 사형에 해당된다. 더구나 세신(世臣) 숙장(宿將)으로서 이처럼 극심한 사변을 당하여서는 의리상 달아나서는 안 된다.” 하니, 조대곤이 얼굴이 새빨개졌다.
정탐하러 나갔던 군사가 왜적의 선봉이 이미 이르렀다고 급히 보고해 왔다. 잠시 뒤에 백마를 타고 새의 깃으로 만든 옷에 금빛 갑옷을 입고 은빛 투구와 금빛 가면을 쓴 왜적 2명이 칼을 휘두르면서 50여 보 앞까지 다가왔다. 장사들이 처음으로 적의 칼날을 보고는 모두 벌벌 떨면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공이 여러 군사들에게 영을 내려 동요하지 말라고 하고는 호상(胡床)에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조대곤이 일어나서 말을 타고 달아나려고 하자, 공이 꾸짖으면서 그러지 못하게 하였다.
왜적들이 우리측 군사가 동요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괴이하게 여겨 말에서 내려 땅에 앉아 부채질을 해댔다. 이에 공이 용사들을 선발하여 돌격하게 하였는데, 군사들이 모두 서로 돌아보면서 머뭇거렸다. 공이 김옥의 이름을 부르면서 소리치기를, “네가 전에 먼저 앞장서서 돌격해 공을 세우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오늘도 피할 것인가?” 하니, 김옥이 몸을 날려 말에 올라탔다. 그러자 여러 군사들이 그의 뒤를 따라 한꺼번에 돌진하였다. 몇 리를 뒤쫓아가자 매복하고 있던 왜적이 사방에서 일어나 단단하게 포위하였다. 여러 군사들이 해자(垓子) 한복판에서 한바탕 혼전을 벌이면서 목숨을 내놓고 서로 싸웠는데, 왜적의 우두머리를 활로 쏘아 거꾸러뜨리자, 나머지 왜적들이 모두 달아났다. 이에 우리측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추격하여 왜적들의 금 장식을 한 안장, 건장한 말, 보검 등을 노획하고, 수급(首級) 하나를 참(斬)하여 돌아왔다.
이 싸움이, 난이 일어난 처음에 왜적들과 가장 먼저 접전한 싸움인데, 군졸은 1000명도 못 되었고, 무기는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도 능히 왜적들의 예봉을 꺾었으므로, 이로부터 군사들의 사기가 조금은 진작되었다. 이에 즉시 군관(軍官) 이숭인(李崇仁)을 올려보내어 수급을 바치면서 이 사실을 치계(馳啓)하였는데, 장계의 첫머리에 ‘나라를 위해 한 번 죽는 것이 신의 소원입니다.’ 하였다.
공이 먼저 보졸(步卒)들로 하여금 천천히 퇴각하게 하고는 가장 뒤에서 말고삐를 잡고 천천히 내지(內地)로 들어갔다. 성 안에서 흩어졌던 군졸들을 끌어모아 1000여 명의 군졸을 얻었는데, 그 가운데 미련하고 사나워서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자가 있으므로, 도망가려 한 죄를 따져서 본보기로 13명의 목을 베어 군중에 조리돌리니,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 벌벌 떨었다. 군세(軍勢)가 조금 잡히자, 여융 우후(厲戎虞候) 이협(李俠)으로 하여금 감히 동요하지 못하게 하고, 장차 사력을 다해 싸워 지킬 계획을 하였다.
○ 갑자기 공을 잡아오라는 명령이 내렸다는 급한 전갈이 왔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가 오지 않아서 사실 여부를 확인할 만한 문서가 없으며, 큰 도적이 앞에 있는데, 한 방면을 맡은 대장이 어찌 쉽사리 진영을 버리고 갈 수 있겠습니까?” 하니, 공이 말하기를, “내가 이런 명령이 반드시 있을 것임을 알고 있었는데, 피해서야 되겠는가.” 하고는, 그날로 즉시 길을 떠나자, 군사들이 모두 새처럼 흩어져 떠나갔다.
○ 공이 가다가 직산(稷山)에 당도하였을 때 죄를 용서하고 초유사(招諭使)에 제수한다는 왕명을 받았다. 이는 왕이 서쪽으로 파천(播遷)하던 날 세자의 말을 듣고서 한 일이다. 공은 유지(有旨)를 받들어 읽고는 흐느끼면서 북쪽을 향하여 통곡하였다. 직산의 수령인 박의(朴宜)는 군자다운 사람으로, 평소에 공과 서로 친한 터였으므로 크게 기뻐하면서 현리(縣吏) 조순걸(趙舜傑)을 군아(軍牙)로 삼아 그로 하여금 함께 남쪽으로 내려가게 하였다.
공이 완산(完山)과 용성(龍城) 두 개의 큰 부(府)를 거쳐 지나갔는데, 다 지나도록 의기(義氣)를 떨쳐 일어나 나라를 위해 통탄하는 자를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하였다. 운봉(雲峯)에 이르니 어떤 선비가 백의(白衣)를 입고 경계 지점에서 맞이하였는데, 그가 공의 손을 잡고 크게 통곡하고는 은밀히 말하기를, “호남 사람들이 순찰사(巡察使) 이광(李洸)이 근왕(勤王)하는 것을 느슨히 하였다는 이유로 그의 죄를 성토하고자 하니, 영공(令公)께서는 영남(嶺南)으로 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남은 이미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광의 목을 베어 의기가 신장되면 사람들이 용기를 낼 것입니다. 그때 호남의 전 고을을 규합하여 군사를 모아 대대적으로 훈련시키고 근왕병(勤王兵)을 동원하여 서울로 곧장 쳐들어가십시오. 그리하여 한강 가에 웅거해 있는 왜적을 내쫓고 평양성(平壤城)에 머물러 있는 왜적들을 섬멸해, 비린내를 깨끗이 씻어 내고 서쪽으로 간 난여(鑾輿)를 맞이할 경우, 이미 무너져버린 나라를 회복하는 것이 한 번의 거사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요는 공을 이루는 것이 귀한 것입니다. 어찌 영남과 호남을 구분하겠습니까. 필마로 동쪽에 간들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하니, 공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기를, “나는 이해(利害)를 모른다. 왕명을 받들어서 일하는 것만 알 뿐이다. 그리고 순찰사의 목을 베는 것이 의리에 있어서 불가한 점은 없겠는가?” 하였다. 그러자 그 선비가 그 말을 듣고는 납득하여, 드디어 그 일이 중지되었다.
도순찰사(都巡察使) 김수(金晬)가 거창(居昌)에서부터 근왕한다는 핑계를 대고는 호남으로 가다가 운봉(雲峯)에 도착하여 공과 갑작스럽게 맞닥뜨리게 되었는데, 놀라고 무색하여 할 말을 잃었다. 이에 공이 의리로써 책망하여 말하기를, “한 지방을 맡은 신하는 마땅히 임지(任地)에서 죽어야 하는데, 어찌하여 임지를 버리고 여기에 왔단 말이오. 한 도를 모두 잃고서도 구원하지 못하였는데, 단기(單騎)로 멀리 가서 능히 일을 성사시킬 수 있겠소? 영공께서는 빨리 되돌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니, 김수가 말을 타고 망설이다가 마지못해 뻔뻔스러운 얼굴로 되돌아갔다. 영남 사람들이 당초에는 그가 영남을 버리고 간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던 차에, 김수가 다시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는 모두들 얼굴을 찡그리면서 서로 위로하였다.
영암(靈巖)의 무인(武人) 소상진(蘇尙眞)이 공의 말 앞에서 글을 올리고 따라가기를 원하자, 공이 허락하였다. 이때 강우(江右)의 8, 9개 군(郡)이 왜적에게 함락당하지 않고 있었으나, 새로 쌓은 성에는 장수가 없고, 옛 읍(邑)에는 수령이 없는 탓에, 사서(士庶)와 남녀(男女)를 막론하고 모두들 산골짜기에 가득 차 있어서, 평지에는 사람의 그림자조차 볼 수가 없었다.
○ 5월 4일에 공이 함양(咸陽)에 이르렀는데, 함양 군수 이각(李覺)은 공관(空館)에 우두커니 앉아 있고, 늙은 아전 몇 사람만이 뜰 아래에 보일 뿐이었다. 공이 군수를 독려하여 고을 사람들을 불러모았는데, 전 현령(縣令) 조종도(趙宗道)와 전 직장(直長) 이노(李魯)가 기약도 없이 모였다.
공이 그 자리에서 곧바로 초유(招諭)하는 격문(檄文)을 썼는데, 문장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왔기 때문에 붓에 먹을 적실 겨를조차 없었다. 그 격문에 이르기를,
“나라의 운수가 중간에 와서 불운한 탓에 섬오랑캐들이 몰래 군사를 동원하여 우리 강토를 함부로 유린하면서 동쪽과 서쪽 두 방면에서 돌진해 들어왔다. 그런데 큰 성과 큰 진에는 일찍이 방비책(防備策)을 설치하지 않았던 탓에 열흘 남짓한 사이에 험한 관문과 높은 고개를 넘어 곧바로 서울을 공격하게 되었다. 이에 상께서는 서울을 떠나 파천(播遷)하고, 온 나라 사람들은 도망쳐 숨게 되었다. 우리나라가 생긴 이후로 오랑캐의 화란이 오늘날처럼 참혹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여러 곤수(閫帥)들은 국가의 간성(干城)인데도 왜적들이 침입했다는 소문만 듣고서 무너지기도 하였으며, 적병을 겁내어 움츠러들기도 하였다. 수령들은 한 고을의 군장(君長)인데도 모두들 자신의 처자식을 안전한 곳에 피난시키고 무기고(武器庫)를 불태웠다. 그리하여 한 사람도 충의(忠義)를 떨쳐 일어나 앞장서서 왜적을 치는 자가 없었다. 그러니 불쌍한 우리 군사와 백성들이 누구를 믿고 누구를 의지해서 흩어져 도망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거센 물결에 한 번 무너지자 이를 막아낼 도리가 없어 성에는 창을 든 군사가 없었고, 고을에는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신하가 없었다. 이에 왜적들은 도착하는 곳마다 마치 무인지경(無人之境)을 쳐들어오는 것처럼 몰려들어와 마침내 영남 한 도가 왜적들의 소굴이 되어 버렸으니, 형세가 마치 흙더미가 무너지고 기왓장이 깨지는 듯하여 조석간도 보장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것이 얼마나 큰 변고인가.
그러나 이것이 어찌 단지 변장(邊將)이나 수령들만의 잘못이겠는가. 이 지방의 선비와 백성들 또한 그 책임을 면하지는 못할 것이다. 옛날에 큰 난리를 만나서도 나라를 잘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윗사람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뜻이 있었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칠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왜적들이 아직 이르지도 않았는데 선비와 백성들은 앞장서서 먼저 도망쳐 산속으로 숨어들어가 구차스럽게 목숨을 부지하려는 생각만 하였다. 이에 수령은 백성이 없게 되고 장수는 군졸이 없게 되었으니, 장차 누구와 더불어 왜적을 막을 수 있었겠는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옛날에 추(鄒) 나라와 노(魯) 나라가 전쟁을 할 적에 추 나라 관리들은 전사한 자가 30여 명이나 되었는데도 백성들은 한 사람도 죽지 않았다. 이것은 관리들이 평상시에 백성들의 고통을 잘 돌보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선비와 백성들이 흩어져 달아나는 변고가 있는 것이 어찌 맹자(孟子)가 말한, 너에게서 나온 것은 너에게로 되돌아간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다. 아아, 이것이 무슨 말이란 말인가.
근년 이래로 조세(租稅)가 과연 가혹하였고, 부역(賦役)도 과연 과중하였으니, 백성들이 당연히 명령을 감당해 내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성을 쌓고 해자(垓子)를 파고 방비하는 도구를 갖추는 것은 모두가 전쟁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지금에 와서 본다면 성상께서 백성들을 보호하려는 생각이 원대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어찌 백성들을 학대하면서 자신을 이익되게 한 것이겠는가. 더구나 추 나라와 노 나라의 싸움은 비록 한쪽이 이기고 한쪽이 지기는 하였지만, 이는 다 같은 중국의 나라로서,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이익이 되거나 손해될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빨을 검게 물들이는 오랑캐의 풍습을 가진 왜적들은 우리 땅에 한 번 들어오자 즉시 웅거하려는 뜻을 품었다. 그리하여 우리의 부녀자들을 잡아가서 처첩으로 삼고, 우리의 장정들을 마구 죽여 씨를 남기지 않았으며, 즐비한 민가는 모두 불태워 잿더미로 만들고, 공사(公私)의 재물은 모두 빼앗아 차지하였다. 이에 독기는 사방에 가득 차고 죽은 사람의 피는 천 리에 흘렀으니, 백성들이 참혹하게 화를 당한 것을 어찌 차마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지금은 실로 지사(志士)는 창을 베고 자면서 왜적을 쳐 죽일 날이요, 충신은 국난을 구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쳐야 할 시기이다. 그런데 경상도 67개 고을 가운데에 아직까지 의(義)를 주창하여 의병을 일으킨 사람이 없다. 그러면서 오히려 남들보다 먼저 도망치지 못할까 걱정하고, 깊은 산속으로 숨지 못할까만을 걱정하고 있다. 그러니 어찌 탄식을 금할 수 있겠는가.
설령 산속으로 들어가서 왜적을 피하여 마침내 자신과 가족들의 목숨을 보전한다 하더라도, 열사(烈士)는 오히려 수치스럽게 여길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보전할 길이 절대로 없을 것인데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내가 그 이유에 대해서 낱낱이 말하여 사민(士民)들의 의혹을 깨뜨리고자 한다.
지금 왜적들은 서울을 침범하는 일에 급급하여 지체하지 않고 곧장 행군해 올라갔기 때문에 병화(兵禍)가 여러 고을에 두루 미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왜적들이 목적을 달성한 뒤 흉악한 무리들이 국내에 가득 차게 될 경우, 그때에도 산골짜기가 과연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곳이 되겠는가? 이를 비유해 보면 마치 큰 물결이 하늘까지 치솟고, 거센 불길이 들판을 불태우는 것과 같으니, 불쌍한 우리 백성들이 다시 어디에서 몸을 붙이고 살 수 있겠는가.
산골짜기에서 나오지 않을 경우에는 시일이 오래 지나면 식량이 떨어져서 깊은 산속에서 앉은 채로 굶어죽을 것이다. 그리고 산골짜기에서 나올 경우에는 부모와 처자식이 모두 왜적에게 사로잡혀 가서 욕을 당할 것이며, 예의를 지키는 사족(士族)은 짓밟혀 결단이 나게 될 것이다. 왜적에게 항복하면 영원토록 올빼미같이 흉악한 족속이 될 것이고, 항복하지 않으면 모두가 왜적의 칼날 아래 죽은 귀신이 될 것이다. 이것이 어찌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야만 알 수 있는 것이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단지 이해(利害)와 생사(生死)만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아아, 군신(君臣)간의 큰 의리는 천지간에 영원히 변치 않는 큰 도리로서, 이른바 사람이 지켜야 하는 떳떳한 법도인 것이다. 무릇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으로서 임금이 피난하고 종묘사직이 넘어지며, 만백성들이 다 죽어가는 것을 가만히 앉은 채로 보면서도 아무런 관심도 없어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천지간에 영원히 변치 않는 도리로 볼 때 어떻겠는가. 더구나 지금은 부모가 왜적의 칼날에 맞아 죽고 형제와 처자식이 서로 보전하지 못하게 되어, 집안의 화가 위급한 처지이다. 그런데도 자식이나 동생된 자가 머리를 싸 쥐고 쥐새끼처럼 숨기만 하고, 죽을 각오를 하고 싸워 온전하기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자식된 도리로 볼 때 어떻겠는가.
돌아보건대, 우리 영남 지방은 본디 인재가 많이 배출되는 고장이라고 일컬어져 왔다. 1000년의 국운을 유지한 신라(新羅)와 500년의 국운을 지탱한 고려(高麗) 및 우리 조선(朝鮮) 200년 동안에 충신과 효자의 아름다운 명성과 뜨거운 의열이 청사(靑史)에 빛나는바, 아름다운 절의와 순후한 풍습은 우리나라에서 으뜸이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사민들이 모두 다 잘 알고 있는 바이다.
또 근래의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퇴계(退溪)와 남명(南冥) 두 선생이 한 시대에 나란히 나서 도학(道學)을 처음으로 강명(講明)하면서 인심을 순화시키고 윤기(倫紀)를 바로잡는 것을 자신들의 임무로 삼았다. 이에 선비들 가운데에는 두 선생의 교육에 감화되고 흥기하여 본받는 사람이 많았다. 이들은 평소에 많은 성현들의 글을 읽었으니, 이들의 자부심이 어떠하였던가.
그런데 하루아침에 왜변(倭變)을 만나서는 오로지 살기만을 구하고 죽기를 피하는 데 급급하여, 스스로 군주를 버리고 어버이를 뒤로 하는 죄악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니 구차스럽게 한 목숨을 부지한다고 하더라도 장차 어떻게 한 하늘 아래에서 살 수가 있겠으며, 죽어 지하에 들어가서는 또한 무슨 낯으로 우리 선현(先賢)들을 뵐 수 있겠는가.
의관(衣冠)을 갖추고 예악(禮樂)을 배운 몸으로 치욕을 당할 수 있겠으며, 머리를 깎고 문신을 새기는 야만인의 풍습을 따를 수 있겠는가. 200년을 지켜 내려온 종묘사직을 차마 왜적들의 손에 넘겨줄 수 있겠으며, 수천 리의 조국 강산을 차마 왜적들의 소굴이 되도록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 문명한 나라가 변하여 오랑캐의 나라가 되고, 인류가 변하여 금수가 될 것인데, 이것을 참을 수 있겠으며,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
수공(首功)을 으뜸 공으로 삼는 진(秦) 나라는 애당초 순전한 오랑캐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노련(魯連)은 오히려 달가운 마음으로 바다에 빠져 죽으려 하였다. 지금 이 야만인의 풍습을 가진 섬오랑캐들은 얼마나 추잡한 종족인가. 그런데도 우리 강토를 멋대로 훔쳐서 차지하고 우리 백성들을 함부로 죽이고 욕보이도록 내버려 둔 채, 내쫓아 버리고 죽여 버릴 것을 생각하지 않는단 말인가.
설자(說者)는 말하기를, ‘저놈들은 용기가 있고 우리는 겁이 많으며, 저놈들의 무기는 날카롭고 우리 무기는 무디다. 그러니 설령 의병을 일으키더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하고 있다. 아, 어쩌면 이리도 생각이 모자란단 말인가.
옛날의 충신과 열사는 이기고 지는 것 때문에 뜻을 바꾸지 않았고, 강하고 약한 것 때문에 기운이 꺾이지 않았다. 의리에 있어서 마땅히 해야 할 바이면 비록 백 번 싸워 백 번 다 지더라도 맨주먹을 휘두르고 번쩍이는 칼날에 맞서 싸워 만 번 죽어도 후회하지 않았다. 하물며 이 왜적들은 비록 강하다고는 하지만 군사를 이끌고 멀리 들어왔으니, 전쟁에서 꺼리는 것을 범하였다. 그러니 어찌 제대로 살아서 돌아갈 수 있겠는가. 우리 군사가 비록 겁이 많다고는 하지만, 용감하고 겁내는 것이 어찌 일정한 것이겠는가. 충의가 북받치면 약한 자도 강해질 수 있고, 적은 군사로도 많은 군사를 대적할 수 있는 법, 단지 마음 한 번 먹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현재 무너져 도망친 군사가 산골짜기에 가득히 널려 있는데, 이들은 처음에는 비록 빠져나와 살려고 하였으나, 끝내 한 번 죽음을 면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에 모두들 스스로 떨쳐 일어나서 나라를 위하여 온 힘을 다할 것을 생각하고 있는데, 단지 앞에서 주창하는 자가 없어서 가만히 있을 뿐이다. 이런 때를 당하여 한 사람의 의사(義士)가 떨치고 일어나 큰소리로 한 번 외치기만 하면, 원근에서 구름같이 모이고 메아리처럼 호응하여 앉은 자리에서 계책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성상께서 이미 애통해하는 교서(敎書)를 내리셨으며, 또 소신(小臣)을 형편없다고 여기지 않고 백성들을 불러모아 유시하는 책임을 맡기셨다. 당(唐) 나라의 무식한 군사와 사나운 군졸들도 오히려 흥원(興元)의 조서(詔書)를 보고 울었는데, 하물며 예의를 숭상하는 지방에 사는 선비로서 어찌 팔뚝을 걷어붙이고 의분에 넘쳐 군부(君父)의 위급함에 달려나가지 않겠는가.
내가 진실로 원하노니, 이 격문(檄文)이 도착하는 날 수령은 한 고을에 분명하게 효유하고 변장은 사졸들을 격려하라. 그리고 문무(文武)의 조정 관원들과 부로(父老), 유생(儒生) 등 모든 사람들은 서로서로 유시하라. 그리하여 동지를 불러모아 충의로써 서로 맺은 다음 방비책을 세워 스스로 막기도 하고, 군사들을 이끌고 싸움을 거들기도 하라. 부자(富者)들은 유차달(柳車達)처럼 곡식을 날라 군량을 대고, 용사들은 원충갑(元冲甲)처럼 용기를 내어 왜적을 무찌르라.
집집마다 사람마다 각자가 싸우면서 일시에 함께 일어나면, 군사의 위용은 크게 진작되고 용기는 백 배나 솟구쳐서, 괭이나 고무래도 튼튼하고 날카로운 무기로 변할 것이다. 그러니 왜적들이 비록 큰 칼과 긴 창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무엇이 두렵겠는가. 만약에 일이 성공하면 나라의 부끄러움을 완전히 씻을 것이며, 일이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의로운 귀신이 될 것이다. 제군들은 힘쓸지어다.
나는 일개 썩은 선비이므로 비록 전쟁하는 일은 배우지 못하였으나, 임금과 신하의 대의는 대충 들어서 알고 있다. 온 도가 뒤엎어진 뒤끝에 책임을 떠맡았는데, 뜻은 초(楚) 나라를 보전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나 신포서(申包胥)의 충성을 본받을 수 없고, 사당에 통곡하고 군사를 일으킴에 한갓 장순(張巡)의 충렬을 사모하고 있다. 그러면서 오히려 의사(義士)들의 힘을 빌어 기울어진 국가를 다시 회복하는 공을 세우기를 기대하고 있다. 조정에서 내리는 상격(賞格)은 나중에 줄 것이니, 이 모두에 대해 마땅히 잘 알지어다.”
하였다.
○ 함양(咸陽)은 본래 문헌(文獻)의 고장이라고 일컬어져 온 곳으로, 판서 노진(盧禛)의 맏며느리는 현령 조종도(趙宗道)의 누이동생인데, 연줄을 따라 통혼이 있었던 터였다. 이에 현령 조종도가 몸소 산에 들어가서 여러 노씨(盧氏)들을 보고 창의(倡義)하기를 도타이 권면하였다. 그러자 그 뒤에 군내의 선비들도 많이 와서 모였다. 공이 이들을 위하여 의리로써 타이르니,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면서 모두들 말하기를, “영공께서 진심으로 나라를 위하여 일하고자 하면 마땅히 먼저 김수(金睟)와 조대곤(曺大坤)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인심을 고동시켜서 그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다시 김수를 맞이하여 왔단 말입니까. 우리들은 처음에 영공께서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는 마치 어린아이가 젖줄을 물려주기를 바라듯이 하였습니다. 그런데 곧바로 순찰사 김수가 돌아왔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기운이 꺾이고 위축되어 감히 나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순찰사가 본도를 버린 것도 의리가 아니요, 한 도에 원수(元帥)가 없는 것 또한 의리가 아니다. 나는 다만 의리로써 사람을 대하고 의리로써 일을 처리할 줄만 알 뿐이다. 여러분의 말은 좀 지나치지 않은가?” 하자, 그들이 대답하기를, “의리라는 것이 어디에서 생기는 것입니까? 민심을 따르지 않으면 의병을 일으키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하였다. 공은 겉으로는 비록 그들을 억누르는 체하였으나, 마음속으로는 실상 갸륵하게 여겼다.
○ 공이 처음 함양에 이르러서 곽재우(郭再祐)의 일을 듣고는 대단히 기특하게 여겨서 즉시 편지를 보내어 불렀다. 김수가 편지를 보내어 공에게 묻기를, “곽재우가 하는 짓이 어떠합니까?” 하였는데, 공이 극히 칭찬하여 답하였다.
○ 10일에 함양을 떠나서 산음(山陰)으로 향하였는데, 초유사(招諭使)의 깃발을 앞세우고 그 군(郡)에 사는 사인(士人) 황윤(黃潤)과 소상진(蘇尙眞)을 군관(軍官)으로 삼아 둘이 짝을 지어 앞장서 가게 하고, 조종도와 이노(李魯) 두 사람에게 그 뒤를 따르게 하였다. 저녁 때쯤에 산음에 이르니 고을의 수령인 김낙(金洛)이 환아정(換鵝亭)에 관사(館舍)를 설치하고 술과 음식을 풍성하게 마련하여 접대하였다. 공이 얼굴빛을 바꾸면서 김낙을 불러 책망하기를, “이와 같은 성찬은 오늘날 신하된 사람으로서는 마땅히 받아먹을 바가 아니다. 비록 먹는다고 하더라도 어찌 목구멍으로 넘어갈 리가 있겠는가.” 하고는, 두 줄기 눈물을 줄줄 흘리니, 김낙이 사죄하고 황송해하면서 물러갔다.
그 고을 사람 오장(吳長)과 의령(宜寧) 사람 이지(李旨), 단성(丹城) 사람 김경근(金景謹)이 칼을 잡고 와서 맞이하니, 공이 감사해하면서 말하기를, “여러분이 이같이 와서 나를 찾아주니, 반드시 기이한 계책이 있을 것이다. 원컨대 한 말씀 들려주기 바란다.” 하자, 김경근이 언성을 높여 큰소리로 말하기를, “김수와 조대곤을 죽이지 않고서는 대의(大義)를 펴서 나라를 회복시키는 공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와 같은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라. 그렇게 해서는 일을 이룰 수가 없다.” 하였다.
김낙은 어진 관원이라서 평소에 민심을 얻고 있었으므로 갑작스럽게 군사를 모집하였는데도 800여 명이나 되었다. 진주(晉州)의 전 주부(主簿) 손승의(孫承義)가 와서 뜰 아래에서 절하므로, 곧바로 고령 가수(高靈假守)로 차임하여 보냈다. 그리고는 조종도와 이노 두 사람에게 말하기를, “인재가 없어서 쓰기는 하였지만, 눈에 정기가 없으니 오래 살 수 있을까?” 하였는데,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성현(星峴)의 싸움에서 죽었다.
○ 하동 현감(河東縣監)으로부터 보고서가 올라왔는데, 창고의 곡식을 도둑질하는 토적(土賊) 15명을 잡아서 목을 베었다는 내용이었다. 공이 보고서 끝에 써서 회보하기를, “토민(土民)들이 난리를 틈타서 도둑이 되어 관창(官倉)의 곡식을 훔치기까지 하였다면, 그 죄는 목베어 마땅하다. 그러나 만일 죄 없는 백성까지 죽이는 일이 있을까 염려되니, 잘 삼가서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하였다.
○ 이틀 동안 머물고서 진주로 향해 떠나려고 할 때 조종도를 의령 가수(宜寧假守)로 삼고, 이노를 삼가(三嘉)와 단성(丹城)의 소모관(召募官)으로 삼아, 그들로 하여금 가서 군졸을 수합하도록 하였다. 이노가 말하기를, “군사를 일으킨다는 것은 큰일이므로 마땅히 먼저 규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잘못하면 혼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어찌하면 되겠는가?” 하자, 이노가 대답하기를, “초유사의 전령목패(傳令木牌)를 많이 만들어서 먼저 응모한 여러 고을의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만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열읍(列邑)에 호령을 시행할 수가 있어서 명분이 바르고 일이 순할 것입니다.” 하니, 공이 그러겠다고 하였다. 이에 일행이 모두 목패를 찼다.
단성에 이르니 단성 현감 이제(李磾)가 산으로부터 내려와서 머뭇거리면서 들어섰는데, 몹시 떨고 있었다.
○ 곽재우가 공의 서신을 보고 전쟁에 나아가는 관복(冠服) 차림으로 와서 공을 뵈었다. 공이 그를 보고는 이상하게 여겼으며,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서는 더욱 기이하게 여겨, 드디어 서로 국사(國事)에 힘쓰다가 죽기로 약속하고, 동행하여 진주에 이르렀다.
○ 이때 초계(草溪)에는 수령이 없어서 전 군수 곽율(郭)을 가수(假守)로 삼았으며, 의령에도 수령이 없는 데다가 조종도 역시 감당하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사양하자, 전 목사(牧使) 오운(吳澐)을 소모관(召募官)으로 삼아, 그로 하여금 곽재우와 합심하여 의병들을 불러모으게 하였다. 오운은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킨 처음부터 자신의 재물을 희사하여 군량을 공급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더욱 온 마음을 다해 일하였다.
○ 공이 단성에서 바로 진주로 나아갔다. 진주 목사 이경(李璥)과 판관 김시민(金時敏)이 지리산(智異山) 상원동(上院洞)에 숨어 있었다. 김시민은 공이 왔다는 말을 듣고 나와서 기다렸으나, 이경은 병을 핑계하고 나오지 않았다. 공이 전령(傳令)하여 나오도록 하니, 이경이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등창이 나서 죽었다.
판관 김시민을 독촉하여 군사를 모으게 하였는데, 판관이 일찍이 백성들에게 혜택을 베풀었으므로 백성들이 많이 모여들어 군사 수천 명을 얻은 다음, 대오를 나누어 성을 지키게 되었다. 이에 군사를 조련하고 위세를 떨치게 되어 군대의 기율이 자못 정제되었으며, 성이 무너진 곳은 고치고 못이 얕은 곳은 더욱 깊이 팠다. 공이 말하기를, “진양(晉陽)은 호남(湖南)의 보장(保障)이다. 진양이 없으면 호남이 없게 되며, 호남이 없게 되면 국가는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될 것이다. 왜적들이 항상 노리고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니, 방비를 느슨히 해서는 안 된다.” 하고는, 죽을 힘을 다해 싸워 이 성을 나가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 공이 군(軍)에 기율이 없어 모이고 흩어지는 것이 일정하지 않은 것을 보고는 조목(條目)을 정한 다음 열읍(列邑)에 명령을 전하였는데, 그 조목에 이르기를, “흩어져 도망치는 것이 풍조가 되었는바, 도망치는 자들이 스스로 이르기를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뿔뿔이 도망치면 일일이 군법을 시행할 수 없을 것이다.’ 하고 있다. 그러나 항오(行伍)에는 자연 통솔(統率)이 있는 법이다. 10명의 군사 가운데에서 도망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통장(統將)을 참수하고, 통장 가운데에서 도망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도훈도(都訓導)를 참수하며, 전군(全軍)이 모두 도망칠 경우에는 영장(領將)을 참수하라. 그리고 도망친 자를 잡아보내지 않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그들도 같은 죄를 주어라.”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앞서는 충의(忠義)로써 권면하였는데, 이제 와서 형법(刑法)으로써 단속하는 것은 말세의 일이다. 적용하는 것을 당기기도 하고 늦추기도 하여 은혜와 위엄을 아울러 펴라.” 하니, 군정(軍情)이 모두 고무되고 두려워하여 감히 도망치는 자가 없었다.
○ 공이 처음 진양에 이르렀을 때 목사는 산속으로 도망치고 군사와 백성들은 모여들지 않은 탓에 성 안은 적적하여 사람 모습은 보이지 않고, 오직 강물만 출렁이고 있었다. 공이 서글픈 생각으로 이리저리 거닐며 슬픔과 울적함을 견디지 못하고 있던 차에 조종도(趙宗道)가 의령(宜寧)으로부터 와서 공의 손을 부여잡고는 말하기를, “진양은 거진(巨鎭)이고 목사는 명관(名官)인데 왜적들이 이르기도 전에 일이 이미 이와 같으니, 앞으로는 다시 손써 볼 도리가 없을 것인바, 빨리 죽어서 눈으로 안 보느니만 못합니다. 영공과 함께 이 강물에 빠져 죽었으면 합니다. 괜히 왜적들의 칼날에 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고, 공의 손을 잡아당겨 강가로 이끌었는데, 잡은 손이 힘차서 풀리지 않았다. 그러자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한 번 죽는 것이야 머지 않았지만, 헛되이 죽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녀자들이 하는 짓을 나는 하지 않을 것이다. 선왕(先王)께서 남기신 은택이 아직은 다 없어지지 않았고, 주상께서도 이미 자신을 죄책하는 교서를 내려, 하늘이 현재 화를 내린 것을 후회하는 조짐이 싹트고 있다. 다행히도 여러분들이 의병을 일으켜 도우는 데에 힘입어서 열읍에서 많은 선비들이 모집에 응하고 있다고 한다. 선비들이 백성들의 본보기가 된다면 백성들이 어찌 따르지 않겠는가. 그런 뒤에 군사를 나누어 요충지를 지키고 있으면서 왜적들이 쳐들어오는 것을 막는다면, 적은 숫자의 군대로도 하(夏) 나라를 부흥시키기에 충분하였던바, 나라를 회복시키는 공을 이루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불행히도 그렇게 되지 못할 때에는 당(唐) 나라의 장순(張巡)처럼 죽음으로써 지키거나 안호경(顔杲卿)처럼 적을 꾸짖다가 죽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대들은 어찌하여 이처럼 서두르는가. 이 강물이 증명할 것으로,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가 아니다.” 하였다. 그리고는 인하여 서로 마주보며 눈물을 흘리면서 크게 통곡하고 헤어졌다.
○ 의병대장 김면(金沔)이 무계(茂溪)에서 승첩(勝捷)하였을 적에 왜적의 화함(花艦)에서 얻은 보화(寶貨) 몇 바리를 공에게 보내고는 행재소(行在所)에 올려보내라고 하였다. 공이 촉성루(矗城樓)의 누각에 앉아서 수량을 점고하여 살펴보니, 채금(綵錦)과 진보(珍寶) 등의 물품이 몹시 많았다. 그러자 승첩한 것을 몹시 칭찬하기는 하면서도 난처해하는 기색이 있는 듯하였다.
창원 부사(昌原府使) 장의국(張義國)과 도사 김영남(金穎男)이 번갈아 칭탄하면서 말하기를, “주상께서 내탕고(內帑庫)의 재물을 모조리 내버리고서 몸만 빠져 서쪽으로 파천하였는데, 가을이 머지않았습니다. 변방 땅은 추위가 일찍 닥칠 것인데, 상방(尙方)의 어복(御服)을 누가 지어 올리겠습니까? 그리고 왕자와 왕녀가 많고 궁인과 시녀도 많으니, 빨리 보내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공이 아무 말 없이 한참 동안 있다가 말하기를, “제군들이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것은 지극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용만(龍灣)은 한 모퉁이에 있어 변방길이 멀고 험하며, 왜적들이 각처에 꽉 차 있어서 첩보(牒報)조차 전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제군들은 오로지 의기를 분발하여 왜적을 쳐서 나라를 회복하기만을 도모할 것이요, 어복을 마련하여 올리지 못하는 것이나 왕자와 시녀들이 추위에 떨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더구나 명주와 비단은 관서(關西) 지방의 토산물(土産物)로서, 아직은 그 지방이 보전되고 있으니, 어찌 어복을 마련할 옷감이 없음을 걱정하겠는가.” 하였다. 그러자 이노가 말하기를, “지해(志海) - 김면(金沔)의 자(字) - 가 이와 같은 자잘한 일을 할 줄은 몰랐습니다. 어찌하여 이를 다 흩어서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았단 말입니까. 영공께서 하시는 일은 다만 초유(招諭)하는 일입니다. 그 밖의 공사(公事)를 어찌하여 도사에게 맡겨서 처리하게 하지 않으십니까?” 하니, 공이 말하기를, “김면이 이미 나에게 보냈는데, 도사가 이것을 받겠는가?” 하였다. 그리고는 영리(營吏)로 하여금 남원(南原)으로 가져가서 남원의 부고(府庫)에 보관해 두고 왜적이 물러가 길이 뚫리기를 기다리게 하였다.
○ 조종도를 단성(丹城), 산음(山陰), 함안(咸安)에 보내어 군사를 점고하게 하고, 이노를 의령(宜寧), 삼가(三嘉), 합천(陜川)에 보내어 군사를 사열하게 하였다.
○ 함안의 소모관(召募官) 이정(李瀞)이 촉석성(矗石城)에 와서 공을 뵈었다. 이노가 돌아와서 여러 장사들이 충의심을 분발하여 힘써 싸우고 있다는 내용으로 보고하였다. 조종도는 도중에 병이 나 돌아오지 못하고는 서신을 보내어 보고하였다. 공이 이노의 말을 듣고는 크게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어찌 직접 가서 보지 않겠는가. 내 장차 의령, 초계, 합천을 돌아서 거창으로 가겠다.” 하고는 그 이튿날 일찍 출발하였다.
일행이 가다가 수리원(愁離院)에 도착하였을 때 거창에서 보고가 올라왔는데, 지례(知禮), 금산(金山), 개령(開寧)에 있는 왜적이 합세하여 공격해 와 장차 우지(牛旨)를 넘어오려고 한다는 내용으로, 일이 매우 급박하였다. 공이 말을 세우고는 이정과 이노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내가 본래는 여러 고을을 순열(巡閱)하고자 하였으나, 지금 듣건대 거창이 위급하다고 하니, 내가 장차 그곳으로 가겠다.” 하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삼가로 가니, 삼가 현감 장령(張翎)은 그의 어머니가 있는 곳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현에 사는 박사겸(朴思謙) 등 10여 인이 함께 와서 공을 뵙고 분부를 기다렸는데, 지공(支供)하는 것이 창졸간인데도 아주 잘 갖추어져 있었다. 공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이 고을에는 선비가 많다고 하더니, 참으로 그러하구나.” 하였다. 제생(諸生)들이 앞으로 나와서 말하기를, “영공의 충성스럽고 강직함에 대해서는 어리석은 사람들까지도 다 알고 있는바, 공의 소문이 미치는 곳에는 사람들이 모두 감동합니다. 지금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삼면이 모두 왜적들의 공격을 받고 있는데, 우리 현이 그 한가운데 있습니다. 바라건대 영공께서는 거창으로 가지 마시고 이곳에 머물러 있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열읍에 명령을 내려 그들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가 구원하게 하거나, 아니면 용사들을 뽑아 보내어 전진(戰陣)으로 가서 힘껏 싸우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한 나라의 흥망이 매인 몸으로 필마를 타고 맨손으로 왜적들의 칼날을 무릅쓰고 범하여서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 하면서, 번갈아 가면서 찾아와 간하고는 모두 읍하고 물러갔다. 공이 웃으면서 이정과 이노에게 말하기를, “제생들이 나를 가지 못하도록 말리는 것은 내가 싸움터에 나갔다가 죽을까 싶어서 그러는 것이다.” 하였다.
이튿날 새벽에 일찍 떠나려고 하면서 이정을 보내어 고을에 돌아가 군대를 통솔하게 하고, 이노를 의령, 함안, 산음의 사저관(私儲官)으로 삼았다. 이정이 말하기를, “우리 두 사람이 모두 뒤에 남으면 공과 함께 갈 사람이 없는데, 어쩌시렵니까?” 하니, 공이 말하기를, “함안을 유숭인(柳崇仁)에게만 맡겨 둘 수 없으며, 곡식을 마련하는 것이 오늘날의 급선무이다.” 하였다.
○ 공이 거창에 이르자 산음, 함양, 안음(安陰)의 군사들이 일시에 모두 와서 모였다. 공이 뒤에 있으면서 싸움을 독려하였는데, 군사들이 모두 죽을 각오로 싸워 왜적들이 고개를 넘어오지 못하였다.
이번 길에 김면(金沔)을 진중(陣中)에서 만나보고는 이틀 밤을 자면서 위로하였다. 공이 처음으로 박성(朴惺)을 만나보았는데, 일찍이 그의 이름을 들었는지라 함께 가기로 약속하고 막하(幕下)에 두었다.
○ 공이 거창으로부터 돌아와 합천에 이르러서 의병대장 정인홍(鄭仁弘)을 진중에서 만나보았다. 삼가에 이르러서 진주 사람들이 좌랑(佐郞) 박이장(朴而章)을 내쫓았다는 말을 듣고는 크게 노하여, 고을 아전들과 도장(都將)을 묶어 끌고 와서는 곤장을 쳐 보냈다.
○ 이때 영남은 한가운데가 나눠져서 강좌(江左)에는 혈맥(血脈)이 통하지 않아 열읍(列邑)이 텅 빈 탓에 왜적들이 거리낄 것이 없었으므로, 각자 수령이라고 칭하면서 마음대로 나다니며 노략질하였다. 이에 공이 탄식하기를, “상계(上界)의 변경 지방이야 어찌할 수 없지만, 강 건너편 세 고을을 어찌 버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리고는 영산(靈山)은 정로위(定虜衛) 신방주(辛邦柱)를 가장(假將)으로,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 신갑(辛)을 별장(別將)으로, 생원(生員) 신방즙(辛邦楫)을 소모관(召募官)으로 삼고, 창녕(昌寧)은 충순위(忠順衛) 성천희(成天禧)를 가장으로, 보인(保人) 조열(曺悅)을 별장으로, 교서관 정자(校書館正字) 성안의(成安義)를 소모관으로 삼았다.
현풍(玄風)의 경우 사족(士族) 집안사람들이 모두 다 강을 건너서 가야산(伽倻山)으로 들어가고, 남아 있는 이민(吏民)들은 대부분 왜적에게 부역(赴役)하여, 길을 오가면서 짐을 운반하고 있었다. 공이 이 말을 듣고는 이를 미워하여 즉시 격문(檄文)을 지어 유시하였다. 그리고는 명을 내려 전 군수 엄홍(嚴泓)을 의병별장(義兵別將)으로, 곽찬(郭趲)을 소모관으로 삼았다. 그 격문에 이르기를,
“나라의 운수가 지극히 불운하여 이빨을 검게 물들이는 오랑캐들이 몰아쳐 들어왔으므로, 임금께서 도성을 떠나 피난하였으며, 종묘와 사직이 몽진하였다. 아아, 사람은 다 떳떳한 마음을 지니고 있으니, 이 땅에 살고 있는 자치고 그 누가 의리와 충성을 다하여 몸을 바쳐서 나라를 위해 죽으려고 하지 않겠는가.
돌아보건대, 우리 영남 지방은 본래부터 도덕과 학문이 가장 뛰어난 지방이라고 일컬어져 왔는데, 그중에서도 포산(苞山 현풍(玄風)의 고호(古號)) 한 현(縣)은 또 선비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다. 그러니 그동안에 의리와 절개에 죽은 자가 어찌 한이 있겠는가. 지금 왜적들이 성 안에 웅거해 있으면서 사방으로 나가 죽이고 노략질하고 있는데, 그 해를 당한 사람은 우리의 부형이 아니면 처자식이다. 위로는 임금의 원수이니 한 하늘을 함께 이고 살아갈 수 없으며, 아래로는 형제와 처자식의 원수이니 또한 어찌 갚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산골짜기 숲 속에 엎드려 숨어 있는 자들이 창을 베고 자고 쓸개를 핥으면서 원수를 갚고자 하는 마음을 잠시도 잊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한 사람도 의병을 일으켜 강개한 마음으로 왜적을 친 자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이것이 어찌 왜적들이 꽉 차 있음으로 해서 우리 백성들이 싸울 바탕이 없어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충의로운 선비는 죽고 사는 것으로써 뜻을 바꾸지 않으며, 용감한 사람은 강하고 약함으로써 뜻이 꺾이지 않는 법이다. 그러니 비밀히 서로 연락하여 효유하고 의병을 일으키기를 간절히 바라노라. 그리하여 힘이 왜적을 칠 만하면 지방을 지키면서 원충갑(元沖甲)의 군사처럼 떨쳐 일어나도 좋을 것이요, 형세가 자립할 수 없으면 군사를 이끌고 병사(兵使)의 군대로 들어가도 좋을 것이다. 또 나를 버릴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여긴다면 의병이 되어 강을 건너오는 것 또한 안 될 것이 뭐가 있겠는가.
지난번에 합천(陜川) 사람인 의령 군수(宜寧郡守) 정인홍(鄭仁弘)과 고령(高靈) 사람인 좌랑(佐郞) 김면(金沔)이 충성을 드날리고 의기를 드높여 한번 소리치자, 각 주군(州郡)에서 그에 따라 호응하였는데, 근래에 와서는 군사의 위세가 크게 떨쳐져 나라를 회복하는 공을 세울 가망이 있게 되었다. 그러니 본현의 사민(士民)들도 왜노(倭奴)들의 위협에 겁먹지 말고 더더욱 의열(義烈)의 기운을 발휘하여 한결같이 임금의 원수를 갚을 것을 생각하라. 그럴 경우 충분(忠憤)이 솟구치는 바에 용기가 백 배는 날 것으로, 저 왜적들이 어찌 감히 우리를 당해 내겠는가.
하물며 이 왜적들은 군사를 이끌고 멀리 들어왔다가 흉악한 칼날이 이미 꺾여서, 송도(松都)의 청석령(靑石嶺)에서 크게 패하였고, 서경(西京)의 대동강(大同江)에서 빠져 죽었으며, 철령(鐵嶺)을 넘은 자들은 또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에게 섬멸당하였다. 그리고 명(明) 나라 군사 5만 명이 이미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서 조승훈(祖承訓), 곽몽징(郭夢徵), 왕수신(王守臣) 등 세 대장이 각각 정병(精兵) 수만 명씩을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구원하러 내려오고 있다. 또 수군(水軍) 10만 명이 산동(山東)으로부터 곧바로 왜놈들의 소굴로 쳐들어가고 있다.
우리의 형세가 이미 떨쳐져서 왜적이 망할 날이 얼마 안 남았으니, 지금이야말로 바로 뜻있는 선비가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 공을 세울 때인 것이다. 만약 시일을 늦추다가 앉은 채로 기회를 놓치게 되면, 화란을 평정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장차 천하의 대륜(大倫)에 죄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럴 경우 무슨 면목으로 하늘과 땅 사이에 서서 살아갈 수 있겠는가.
생각건대, 백성들 가운데에는 무식하여 임금과 신하의 의리를 알지 못하는 자도 있을 것이니, 이들은 오직 상(賞)과 벌(罰)로써만 권장하고 징계할 수 있다. 그대들은 조정의 사목(事目)을 보지 못하였는가? 거기에 보면 ‘공천(公賤)과 사천(私賤)을 막론하고 적의 수급 1급을 벤 자는 급제(及第)를 주고, 2급을 벤 자는 6품직을 주고, 3급을 벤 자는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주고, 왜장을 벤 자는 녹훈(錄勳)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준다.’ 하였다. 무부(武夫)나 용사(勇士)들은 의병이 있는 곳으로 달려나가 뜻을 가다듬어 힘껏 싸우라. 그럴 경우 위로는 2품의 벼슬까지 할 수 있으며, 아래로는 훈신(勳臣)의 반열에 끼게 되어, 영화는 한 몸에 가득하고 혜택은 후손에게까지 미칠 것이니, 이 또한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줄곧 숲 속에 숨어 엎드려 있을 경우에는, 비록 왜놈의 칼날은 면한다 할지라도, 깊은 산속에서 굶어죽는 것을 면할 수 있겠는가? 설령 만에 하나 구차스럽게 살아났다고 하더라도, 하루아침에 난리가 평정되고 나면 나라에서는 그에 따른 형벌이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처자식들까지도 모두 잡혀 죽는 형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니 힘써 싸워 큰 공을 세우고 중한 상을 받는 것과 비교해 볼 때 그 이해와 화복이 어떻다 하겠는가. 살아서는 열사(烈士)가 되고 죽어서는 충혼(忠魂)이 될 것이니, 그대들은 힘쓸지어다.”
하였다.
○ 김수(金睟)가 용인(龍仁)에서 크게 패하고 돌아와 산음(山陰)에 머물렀는데, 여러 고을에 통문을 돌리고 여러 장수에게 군사를 나누어 붙임으로써, 의병들로 하여금 무너지고 흩어지게 해 아무 일도 못하게 하고 있었다. 이에 민심이 더욱 떠들썩하고 여러 사람들의 노여움이 한꺼번에 폭발하여, 혹은 그의 죄를 성토하고 가서 쳐서 신인(神人)의 분노를 풀자고 하기도 하였으며, 혹은 마땅히 죄를 나열하여 격문을 돌려서 스스로 달아나게 하자고도 하였다. 그러자 곽재우가 드디어 김수의 죄를 나열하여 격문을 돌렸다.
○ 공이 일찍이 김수에 대한 원망이 도민들의 뼛골 깊숙이 사무쳐 있음을 알았으므로, 혹시라도 이로 인해 뜻밖의 변고라도 일어날까 염려하였다. 이에 즉시 곽재우에게 첩문(帖文)을 보내어 역순(逆順)의 이치로써 달래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의병장은 처음 변란이 일어났을 때부터 재산을 있는 대로 다 털어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자신의 몸은 돌아보지 않은 채 한결같이 나라를 위하여 왜적을 칠 마음만 가졌다. 그러니 비록 옛날의 열사(烈士)라고 하더라도 어찌 이보다 더하겠는가. 당직(當職)이 경내에 이르러서 즉시 글을 보내 불렀더니, 의병장은 늙고 졸렬한 나를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고 단성(丹城)으로 와서 나를 만났는데, 나는 한 번 인사하는 사이에 그대가 이미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하여 죽을 뜻이 있음을 알았다.
그 뒤에 외로운 군사를 이끌고 낙동강 가를 횡행하면서 앞장서서 왜적을 쳐 머리를 벤 것이 매우 많았으므로, 왜적들이 함부로 몰아쳐 들어오지 못하여 이 일대의 여러 성들이 지금까지 보전되었다. 이에 아름다운 명성이 사방으로 퍼지매 듣는 사람들마다 모두 고무되어 원근에서 메아리치듯 호응하였으니, 왜적을 섬멸하는 공을 세우는 것을 날짜를 세어가면서 기약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그 영웅다운 풍도와 의열한 마음은 당대에 빛날 뿐만 아니라, 장차 역사에 드리워져서 후세에 전하여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듣건대, 의병장이 순찰사의 영문(營門)에 격문(檄文)을 보내어서 감히 패역스러운 말을 함부로 하였다고 하는데, 방백(方伯)이 어떠한 관원이고 의병장은 어떠한 사람이기에 감히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방백에게 실제로 죄가 있다 하더라도, 그에 대해서는 조정에서 조처가 있을 것인바, 도민(道民)이 손을 쓸 일은 아닌 것이다.
의병장은 충의로운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왜적을 치는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장차 이룰 판인데, 스스로 자신을 죽이고 일족까지 멸망당하는 지경에 빠지는 짓을 할 줄을 내가 어찌 헤아리기나 하였겠는가. 당(唐) 나라의 배반한 졸개가 주수(主帥)를 찬역(簒逆)하여 쫓아냈다가 화를 당한 사람이 무릇 몇 사람이나 되었는가? 그런데도 앞서 실패한 일을 다시 되풀이하려 한단 말인가?
돌아오는 길을 잃은 것은 《주역(周易)》에서 경계한 바이며, 화를 돌이켜서 복으로 삼는 것은 지혜 있는 선비가 취할 바이다. 내 말을 따르면 순하게 되어 복이 많을 것이고,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거스르게 되어 화를 받을 것인데, 그 기미가 털끝만한 사이도 없는 만큼, 의병장은 잘 생각하길 바란다.”
하였다.
○ 곽재우가 진양(晉陽)이 위급하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하러 달려오던 도중 개금원(介金院)에 이르러서 첩문(帖文)을 보고는 그 즉시 답서를 보냈는데, 그 답서에 이르기를, “역순(逆順)의 이치에 대해서는 저 역시 일찍이 대강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저는 합하(閤下)께서 저에 대해 걱정하느라 스스로를 걱정하실 겨를이 없을까 염려스럽습니다. 비록 그러나 합하는 주상께서 보내신 분이니, 어찌 감히 저 자신의 소견만을 고집하여 합하의 명령을 어기겠습니까.” 하였다.
○ 공은 또한 조정에서 김수의 장계를 보고 혹시라도 곽재우를 역적으로 몰아 죽일까 염려하여, 곧바로 사유를 갖추어서 급히 장계를 올려 곽재우에게 다른 뜻이 없음을 밝혔다. 그 계사(啓辭)에 이르기를,
“의령의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켜서 왜적을 친 일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계달하였습니다. 이번에 뜻밖의 변고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일어났는바,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어 지극히 걱정됩니다.
곽재우는 바로 고(故) 통정대부(通政大夫) 곽월(郭越)의 아들이며,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손자 사위로서, 중간에 무학(武學)을 배우다가 이를 버리고 글을 읽었습니다. 그의 사람됨은 단순하고 꾸밈이 없으며, 거상(居喪)함에 있어서 극진히 슬퍼하여 향리(鄕里)에서 자못 효행을 칭송하였습니다.
변란이 처음 일어났을 때 병사(兵使)와 수사(水使)가 서로 잇달아 도주하고, 왜적들이 장차 밀양(密陽)을 범하려고 하였는데, 감사 김수(金睟)는 절제(節制)를 맡은 장수가 포위된 성 안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여기고서 밀양으로부터 영산(靈山)으로 물러나 있다가 곧바로 초계(草溪)로 향하였다고 들었습니다. 그러자 곽재우가 분연히 일어나서 말하기를, ‘병사와 수사가 도망하였는데도 처형을 하지 않았다. 그러고서 지금은 또 왜적이 좌도(左道)에서 나오고 있는데도 초계로 퇴주(退走)하였다. 그러니 감사를 베어 죽이는 것이 옳다.’ 하고는, 칼을 들고 길목에서 김수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향리 사람들이 극력 말리므로 중지하였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뒤에 우병사 조대곤(曺大坤) 및 방어사(防禦使), 조방장(助防將), 수령(守令) 등이 모두 왜적의 소문만 듣고 무너져서 달아난 탓에 열흘 남짓한 사이에 왜적이 서울의 대궐을 범하였습니다. 그러자 곽재우는 팔뚝을 걷어붙이고 의분에 못이겨 말하기를, ‘이런 무리들은 왜적을 호위하여 서울로 들어가 군부(君父)에게 화를 끼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모두 베어 죽여야 한다.’ 하면서,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항상 큰소리쳤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하루아침에 자기 집 재산을 흩어 군사를 모집하니, 그의 첩이 ‘어찌하여 이러한 개죽음을 하려고 하십니까?’ 하면서 말리자, 곽재우는 몹시 노하여 칼을 뽑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처자식의 의복조차도 군졸의 아내들에게 다 내주었으므로 가업(家業)이 이로 인해 탕진되어 굶주림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이에 그의 매부인 허언심(許彦深)의 집에 처자식을 맡긴 다음, 모집한 장사들을 거느리고 가면서 왜적을 치겠다고 큰소리치자, 향리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는 모두들 미쳐서 발광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때는 벌써 의령과 초계 두 고을은 모두 왜적이 휩쓸고 지나가 고을이 텅 비어 있었으며, 의령의 관고(官庫)는 불에 타버린 탓에 곽재우의 군사는 식량이 없었습니다. 이에 초계와 신반현(新反縣)의 창고에 있는 곡식을 내어 군사에게 먹였는데, 합천 군수(陜川郡守) 전현룡(田見龍)이 곽재우를 도둑이라고 논하여 병사에게 보고하니, 병사가 명을 내려 체포하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의병에 응모하였던 자들이 그 말을 듣고는 뿔뿔이 흩어져 떠나려고 하였습니다.
신이 그 지방에 도착하여 즉시 글을 보내어서 곽재우를 불렀으므로 군위(軍威)가 다시 떨쳐지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곽재우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줄곧 왜적을 쳤는데, 왜적의 많고 적음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앞장서서 힘차게 돌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거느린 전사들이 용기백배하여 누구나 할 것 없이 일당백(一當百)의 용사가 되었습니다. 싸울 때에는 반드시 붉은 비단으로 만든 철릭(帖裏)을 입고 당상관의 전립(氈笠) 차림을 하고 싸우면서, 스스로 호하기를 ‘홍의천강장군(紅衣天降將軍)’이라 하였습니다.
곽재우는 말을 달려 적진을 유린하였는데, 오고가는 것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여 왜적들이 철환(鐵丸)을 일제히 쏘아도 맞히지 못하였습니다. 혹은 말 위에서 북을 치면서 천천히 가서 행군하는 절도로 삼기도 하였으며, 혹은 사람을 시켜 피리도 불고 호루라기도 불게 하여 두려워하는 뜻이 없음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때로는 산속에 의병(疑兵)을 많이 풀어놓고 피리도 불고 북도 치고 하면서 떠들어댔으며, 혹은 곳곳에 복병을 숨겨놓아 마치 사람이 없는 듯 고요하다가 왜적이 이르면 갑자기 쏴 죽이기도 하였으며, 혹은 왜적의 배를 뒤쫓아가 해안에서 활을 쏘기도 하여, 어느 하루도 싸우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싸우면 반드시 이겼으므로 왜적의 머리를 벤 것이 모든 장수 중에 가장 많았으며, 쏴 죽인 자는 그 숫자를 알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에 왜적들도 그를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고 부르면서 감히 해안에 올라와 노략질을 못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의령(宜寧), 삼가(三嘉) 두 고을의 백성들은 모두 생업에 편안하여 힘써 농사지어 오곡의 풍성함이 평소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도내의 나머지 성들이 지금까지 보전된 데에는 곽재우의 공이 아주 큽니다.
그런데 갑자기 삼도(三道)의 장수가 수원(水原)에서 무너졌다는 말을 듣고는 마치 미친 사람처럼 위태로운 말과 망녕된 말을 수없이 지껄여댔습니다. 순찰사가 비록 편지를 보내어서 공적을 표창하고 계문하여 공을 아뢰었으나, 역시 뜻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혹 화를 당할지도 모른다고 경계하면 반드시 칼을 움켜잡고 성을 냈습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또 갑자기 두 차례나 순찰사의 영문(營門)에 격서(檄書)를 보내어서 낱낱이 그 죄를 열거하고는 토벌하겠다고 떠들어댔으며, 또 각 고을의 의병장들에게 통문을 돌려 토죄(討罪)하겠다는 뜻을 말하였습니다. 신은 그 말을 듣고는 놀라운 마음에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순찰사가 신에게 공문을 보내어 의령 고을에 명하여 곽재우를 잡아 가두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곽재우가 실제로 역심(逆心)을 품었다고 한다면 현재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있으니 한 사람의 역사(力士)로는 잡을 수가 없을 것이며, 만약 역심을 품고 있지 않다면 편지 한 장으로도 넉넉히 깨우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이에 곧바로 곽재우에게 첩문(帖文)을 보내어 다방면으로 비유해 깨우쳤으며, 김면(金沔)도 글을 보내어서 경계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곽재우가 곧바로 마음을 돌려 신의 말대로 잘 따랐으며, 진주(晉州)가 위급하다는 말을 듣고는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 구원하기로 하여, 3일에 이미 길을 떠났습니다.
곽재우는 일개 도민으로서 감사를 범하려고 하여 죄를 성토하고 격서를 보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것이 비록 스스로는 나라를 위한 마음에서 분통스러워 그렇게까지 한 것이라고는 하나, 행적이 난민(亂民)에 가깝습니다. 그러니 즉시 토죄하여 제거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곽재우는 온 나라가 함몰된 뒤에 능히 외로운 군사로 용감히 왜적을 쳤으므로, 도내의 잔민(殘民)들이 그를 간성(干城)처럼 의지하고 있습니다.
이제 와서 난폭한 말을 하였다고 하여 곧바로 베어 죽이면, 보전되어 있는 남은 성은 왜적을 막을 계책이 없을 것이며, 군민(軍民)들은 그의 죄를 모르고 있어서 한꺼번에 흩어져 무너질 것입니다. 이에 신이 미봉(彌縫)하여 진정시키는 계책을 써서 재삼 계칙(戒飭)하였더니, 이미 신의 말에 순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순찰사(都巡察使)에게 죄를 졌으니, 아마도 서로 용납하기가 어려워서 다른 변고를 야기시킬까 염려스럽습니다.
신이 듣건대, 을묘년(1555, 명종 10)의 왜변(倭變)이 일어났을 때 전라 감사 김주(金澍)가 영암(靈巖)에서 다른 고을로 달아났습니다. 그러자 전 수원 부사(水原府使) 윤기(尹箕)가 당시에 유생(儒生)으로서 포위된 성 안에 있다가 칼을 뽑아 들고 베어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김주는 성조차 내지 않고 웃으면서 이야기하여 잘 처리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논자(論者)들이 지금까지도 윤기의 용기에 대해 칭송하고, 김주가 능히 포용한 것을 아름답게 여기고 있습니다.
지금 곽재우의 일이 비록 몹시 미치광스럽고 망녕되기는 하나, 그의 마음은 실로 다른 뜻이 없습니다. 그러니 감사가 만약 김주가 처리한 바와 같이 대처한다면, 반드시 조용해져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이 김수(金睟)에게 글을 보내어서 선처하도록 부탁한 결과, 걱정될 만한 변은 없게 되었습니다. 다만 김수가 이미 곽재우를 반적(叛賊)이라고 계문하였으며, 또 다른 사람을 사주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만약 이 일로써 조정에서 그를 죄준다면, 그가 죄에 승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 도의 인심을 수습하기가 어려울 것이므로, 몹시 마음 아프고 절박합니다.
곽재우가 충의(忠義)를 일으켜 분발한 상황과 용감히 왜적을 친 공은 온 도에 널리 퍼지고 드러나서 아이들이나 군졸들까지도 모두 곽 장군(郭將軍)이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그리고 듣건대, 그는 용병(用兵)에 뛰어나서 장수가 될 자질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만약 미치광스럽고 망녕된 짓을 한 데 대한 주벌을 조금만 늦추어준다면, 반드시 공을 세워 보답할 것입니다.
신은 불행하게도 명을 받든 이후에 두 번이나 이런 변을 만났습니다. 신이 4월 중에 호남(湖南) 길로 오다가 운봉현(雲峯縣)에 이르렀을 때 호남 사람들이 순찰사 이광(李洸)이 근왕(勤王)하는 데 늦게 달려갔다는 이유로 토죄하고자 하면서, 신에게 비밀히 말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이에 신이 대의(大義)로써 그 말을 꺾었으며, 곧장 김수와 상의하여 이광에게 알려 대비하라고 말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김수가 말하기를, ‘그들이 근왕하는 데 늦게 달려갔다는 이유로 토죄하려고 하니, 의로운 선비라고 이를 만하다. 만약 이 사람들을 베어 죽인다면 한 도의 인심이 더욱 격해질 것이다. 이광에게 알려서는 안 된다.’ 하였습니다. 이에 신은 그의 말에 따라 그만두었습니다.
지금 이 곽재우의 일이 꼭 저번의 그 일과 같습니다. 김수가 진실로 호남 사람들을 조처한 의리로써 곽재우에 대해 조처한다면, 난처한 일이 없을 듯합니다. 신과 김면이 곽재우에게 보내 경계하여 신칙한 글과 곽재우가 보낸 답서를 아울러 등서(謄書)하여 올립니다.”
하였다.
○ 영천(永川)의 진사 정세아(鄭世雅), 생원 조희익(曺希益), 전 현령 곽회근(郭懷瑾) 등 60여 명이 공이 초유(招諭)하면서 의병을 일으킨다는 기별을 듣고는 수천 자로 된 긴 글을 지어 보냈다. 그 내용은, 강좌(江左)의 여러 수장(守將)들이 처음에는 도망쳐 숨었다가 이제서야 기어나와서 의병들을 억누르고 있는 상황을 하나하나 거론하였으며, 또 ‘경주 부윤(慶州府尹) 윤인함(尹仁涵)이 부사(府史), 이서(吏胥), 악사(樂士) 등을 이끌고 기계(杞溪)의 깊은 산속으로 숨어 한 부(府)를 통째로 왜적에게 내주고서는, 왜적이 이미 물러갔는데도 아직 한 번도 산 밖으로 나오지 않고 도리어 의병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과, ‘병사(兵使) 박진(朴晉)이 의병을 호령하고 관군을 억압함으로써 군사들이 모두 흩어져 수습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좌도(左道)에서는 품명(稟命)할 곳이 없으니, 영공의 지휘를 듣고자 한다.’는 것이었는데, 몇 사람을 시켜서 낮에는 숨어 있다가 밤에 와서 공에게 글을 바쳤다.
공이 그 글을 받고는 매우 기뻐하여 그들을 위유(慰諭)한 다음 돌려보내면서 말하기를, “제군들이 호랑이 굴을 무릅쓰고 험난한 길을 지나서 멀리까지 와 문안하니, 참으로 충성스럽고 의로운 마음이 지극하지 않으면 어찌 능히 이럴 수 있겠는가. 사람으로 하여금 감격의 눈물이 흐르게 한다. 내가 명을 받들고 와서 초유하고 있으니, 의리상 이곳과 저곳을 구분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처럼 길이 막혀서 비록 지휘하고자 하더라도 문보(文報)가 통하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하였다. 그리고는 이어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 권응수(權應銖)를 의병대장으로 삼은 다음, 이웃 몇몇 고을에도 다 의병장을 정하여서 권응수의 명령을 받도록 하였다.
처음에 권응수가 향병(鄕兵)을 끌어모아서 왜적들을 많이 참획하였으며, 영천의 사인(士人) 조희익 등과 모의하여 네 고을의 의병들을 거느리고 영양성(永陽城)에 굳게 웅거해 있는 왜적들을 쳐 하나도 남김없이 섬멸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서는 공이 추천해 준 데에 감격하여 더욱 분발하여 싸움터에 부지런히 달려나갔으므로 왜적들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이에 좌도의 민심이 이로 말미암아 조금 떨쳐져 모두들 왜적을 토벌할 마음을 품게 되었다.
공이 이때 거창(居昌)에 오래 머물러 있으니, 왜적들이 진양(晉陽)에 장수가 없다는 것을 탐지하고는 창원(昌原)과 진해(鎭海)에 주둔해 있던 왜적들이 서로 호응하여 고성(固城)을 경유한 다음 사천(泗川)에 집결하여 진양으로 대거 침입해 왔다. 공이 이 소식을 듣고는 급히 달려가 단성(丹城)에 이르러서 함양, 산음, 단성의 군병을 모두 동원하여 진양으로 달려갔다. 그런 다음 김시민(金時敏)을 독려하여 그로 하여금 동요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또 곤양 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을 우익(右翼)으로 삼아 구원하게 하였다.
곽재우가 공의 명령을 기다리지도 않고 먼저 달려가서 진주성에 들어가니, 군세가 자못 성하였다. 왜적들이 촉석루(矗石樓) 앞까지 와서 다만 한 줄기 강물을 사이에 두고 있으면서도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였다. 공 역시 뒤쫓아와서 싸움을 독려하였다. 그러자 여러 장수들이 더욱더 명령에 복종하고 합세하여 추격하니, 왜적들이 낭패하여 달아났는데, 살상한 왜적의 숫자가 몹시 많았다. 드디어 사천, 진해, 고성의 왜적들이 모두 도망쳤다.
○ 남원(南原) 사람인 전 좌랑(佐郞) 이대윤(李大胤)과 유학(幼學) 소혜(蘇徯)가 족인(族人)을 보내 공에게 서한을 올리고 각각 백미 100석씩을 바쳐서 군수(軍需)에 보태어 쓰라고 하였는데, 공이 서한을 받고서는 칭찬하여 말하기를, “이 좌랑은 본래부터 순실(淳實)한 사람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곡식을 이렇게 많이 모아서 쌓아 놓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하였다. 그리고는 즉시 김천 찰방(金泉察訪) 조존선(趙存善)을 남원으로 보내어 곡식을 실어 오게 하였다.
○ 공이 항상 상주(尙州)의 소식을 몰라 궁금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함창(咸昌)의 사인 이홍도(李弘道)와 상주의 사인 조정(趙靖) 등이 와서 이봉(李逢)이 의기를 떨쳐 왜적을 토벌한 일을 말하니, 공이 서한을 보내어 이봉의 공을 기리고 의병장으로 삼은 다음, 상주의 전 한림(翰林) 정경세(鄭經世), 함창의 전 찰방(察訪) 권경호(權景虎), 문경(聞慶)의 유학(幼學) 신담(申譚)을 세 고을의 소모관(召募官)으로 삼아, 각각 향병을 모집하여 이봉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 5월 이후에 네 번이나 장계를 올렸으나 한 번도 회답이 오지 않았다. 간혹 회답이 있긴 하였지만, 그것은 승정원(承政院)에서 받았다고만 하는 내용일 뿐, 가타부타 별다른 말이 없었다. 공이 북쪽을 향하여 바라보면서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면서 길게 탄식하였다.
의병대장 정인홍이 공을 삼가의 정금당(淨襟堂)으로 찾아와 뵙고는 밤중까지 마주앉아 이야기하였는데, 강개하고 격렬한 두 사람의 우국충정은 피차 똑같았다. 정인홍의 아들 정연(鄭沇)도 따라왔는데, 기개가 너무 우뚝하고 날카로웠다. 그가 돌아간 뒤에 공이 말하기를, “아깝다. 싹이 나서 결실을 맺지 못하겠구나.” 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목구멍에 병이 나 죽었다.
정인홍이 보고하는 문서의 말투가 직절(直截)하고 불손하였으며, 혹 공의 지휘를 받지 않고 편의대로 일을 처리하였다. 이에 공이 조금도 용서함이 없이 준엄한 말로 꾸짖기도 하고, 때로는 그의 군관(軍官)을 잡아다가 매질하기도 하였다.
○ 공이 의령에 도착하자 곽재우가 보낸 군졸이 와서 낙동강에 있는 왜적들이 내려온다고 보고하였다. 공이 즉시 고을의 유생(儒生)과 품관(品官)들을 불러모아서 모두 색깔이 있는 옷을 입게 하고, 인근의 남정(男丁)들을 끌어모아 군용(軍容)을 성대하게 하도록 하였다. 그런 다음 이들을 대동하고 신반현(新反縣)으로 향해 가서 곽재우의 군사들을 위로하고 기강(岐江) 가에서 군사들의 위엄을 뽐냈으나, 하루해가 다 가도록 왜적들이 오지 않았다. 이에 다시 곽재우의 집으로 돌아왔다.
○ 선전관(宣傳官) 이극신(李克新)이 유지(有旨)를 가지고 와서 비로소 경상좌도 감사(慶尙左道監司)에 제수된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즉시 분향(焚香)하고는 북쪽을 향하여 네 번 절한 다음 명을 공손히 받들었는데, 평양(平壤)이 함락당하여 대가(大駕)가 용만(龍灣)으로 몽진(蒙塵)하고, 동궁(東宮)이 안협(安峽)으로 돌아가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가슴을 치면서 대성통곡하고 흐느껴 울면서 말하기를, “백발이 다 된 외로운 신하가 왕명을 받들고 남쪽으로 온 지 이미 오래되었건만, 근왕(勤王)하는 군사를 힘써 일으키지도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내의 왜적조차 능히 소탕하지 못하였다. 그러고서는 난여(鑾輿)가 초야를 헤매고 종묘사직이 폐허가 되는 것을 앉은 채로 바라보면서 구차한 목숨을 오늘날까지 보전하고 있다. 임금의 은혜를 잊고 나라를 저버린 부끄러움은 만 번 죽어도 씻기 어려운데, 천벌을 내리지 않고 도리어 한 방면을 맡겨 주시니, 분골쇄신한들 어찌 그 크나큰 은혜를 만분의 일이나마 보답할 수 있겠는가.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보아도 발붙여 돌아갈 곳 없으니, 다만 죽음이 있을 뿐, 그 밖에 다시 무엇을 하겠는가.” 하니,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다.
○ 인하여 선전관과 함께 돌아와서 현(縣) 안에 있는 촌사(村舍)에 이르렀다. 근방에 사는 사우(士友) 박이장(朴而章), 조종도(趙宗道), 곽준(郭䞭), 오운(吳澐), 이정(李瀞), 삼가 현감(三嘉縣監) 장령(張翎) 및 온 고을의 대소 사민(士民)들이 모두 모여서는 다들 혀를 차면서 공이 떠나가는 것을 애석해하였다. 그러자 공이 말하기를, “선전관이 임금이 계신 곳으로부터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등 온갖 고생을 겪으면서 와서 만리 먼 길에 임금의 명을 전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남쪽 사람들로 하여금 비로소 행재소(行在所)의 소식을 듣게 하였으니, 나이 어려서 고향을 잃고 떠돌다가 집으로 돌아가서 부모를 뵐 수 있게 된 것보다도 더 기쁘다. 그러니 모든 성의를 다하여 대접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 이에 마을에 사는 사인들이 앞다투어 술을 가지고 와서 위로하면서 밤새도록 술을 마셨는데, 심지어는 눈물을 흩뿌리면서 목 놓아 울기까지 하면서 송별하였다.
○ 공이 말하기를, “이미 좌도 감사가 되었으니 우도의 일을 이제 관여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 그러나 처음부터 의병을 관섭해 왔는데, 상규(常規)에 따른다는 핑계로 우려스러운 조짐이 있는 것을 눈으로 보고서도 계달하지 않는 것은 실로 신하된 도리가 아니다. 직분을 뛰어넘는다는 혐의를 받는다 하더라도 회피해서야 되겠는가.” 하고는, 드디어 하나하나 조목을 들어 품계하기를,
“당초에 김면(金沔)은 고령(高靈)과 거창(居昌)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정인홍(鄭仁弘)은 합천(陜川)에서 군사를 일으켜, 군대의 성세가 자못 진작되었으며 형세 또한 확장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김면은 성은을 입어 합천 군수에 제수되고, 정인홍은 제용감 정에 제수되었습니다. 이에 세 고을 군사들이 각각 그 장수를 잃고서는 모두들 맥이 풀려 있으니, 이는 실로 작은 염려가 아닙니다. 그러니 일이 평정된 뒤에 부임하도록 하는 것이 기의(機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전 군수 곽율(郭)은 지금 초계(草溪)의 가수(假守)로 있는데, 고을을 잘 다스려서 군사와 백성들이 사랑하여 떠받들면서 모두 진짜 군수로 삼기를 원합니다. 새 군수 곽눌(郭訥)은 현재 있는 곳을 알지 못하니, 곽율을 본군의 군수로 삼는 것이 역시 온당할 듯합니다.
의령(宜寧)은 현감 오응창(吳應昌)이 관직을 버리고 도망친 뒤로 왜구가 분탕질하여 보전할 길이 전혀 없는 형편이었는데, 곽재우(郭再祐)와 권난(權鸞)이 맨 먼저 의병을 일으키고, 전 목사 오운(吳澐)이 또 소모관이 되어 온 고을에 개유(開諭)하여 2000여 명을 끌어모은 다음, 그 가운데 노약자를 떼어내어 보인(保人)으로 주고, 군기(軍器)를 만들어 전투할 도구를 갖추었습니다. 이에 이 한 고을이 한 도의 보장(保障)이 되어 왜적들이 감히 강 서편을 엿보지 못하고 있으니, 이상 몇 사람의 공로는 실로 온 도내 사람들이 다 아는 일입니다.
의령의 새 현감 김충민(金忠敏)은 본현이 그의 외가가 있는 곳일 뿐만 아니라, 작년 10월부터 금년 3월까지 본현의 성 쌓는 감독관이 되어서는 온당치 못하게 일을 처리하여 온 고을을 병들게 하였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호랑이나 독약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현감으로 온다는 소문을 듣고는 백성들이 다들 흩어져 떠나갈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어찌 의령 한 고을만의 해만 되겠습니까. 실로 한 도의 이해가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위급한 때를 당해서는 민심을 수습하는 것이 급한 일이고, 또 의병에 관계되는 일이기에, 감히 이와 같이 직분을 뛰어넘어서 말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황송하여 대죄(待罪)합니다.”
하였다.
○ 그 다음 날 공이 산음(山陰)에서 초계(草溪)로 옮겨가 머물면서 장차 좌도로 향해 가려고 하였다. 그러자 우도 사람들이 어린이는 울고 늙은이는 한숨짓고 어른들은 울부짖으면서 마치 물을 잃은 물고기나 집이 불타는 제비와 같이 어찌할 줄 몰라하였으며, 의병들은 모두 마음이 꺾이고 맥이 풀려서 수습할 수가 없었다. 이에 선비들 수천 명이 떼를 지어 와서 날마다 뜰 아래 서서 머물러 있기를 간청하였다. 초계의 유생 이대기(李大期) 등 30여 인이 머물러 있어 달라고 진정하는 만원서(挽轅書)를 올렸다.
그 대략에,
“지금 병기(兵器)가 잘 들고 날카롭지 않은 것이 아니요, 성지(城池)가 높고 깊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참으로 고을 수령 가운데에 어진 사람이 없고, 진영의 장수에 적합한 사람을 얻지 못하여, 정사(政事)가 맹호보다도 가혹하고 법망(法網)이 가을풀보다도 촘촘한 탓에, 함부로 토색질하고 마구 주구질하여 백성들이 흩어진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급기야 왜적들이 쳐들어오는 변란이 창졸간에 일어나자 장수나 수령으로 있는 자들이 자신들이 평소에 한 일이 민심을 크게 잃어서 비록 수습하려고 하여도 백성들이 따르지 않을 것임을 잘 알았으므로, 숲 속으로 달아나 숨으면서 오히려 깊이 숨지 못할까만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이에 국가의 형세가 이 지경에 이르러서 이제 다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게 되었습니다.
전 장령(掌令) 정인홍(鄭仁弘)과 전 좌랑(佐郞) 김면(金沔)이 합하(閤下)께서 내리신 초유(招諭)하는 격문(檄文)에 응하여 외로운 충성심에 스스로 격동되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떨쳐 일어나, 하늘에 맹세코 나라의 수치를 씻고자 기약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흩어져 도망친 사람들을 끌어모으자 원근에서 의병들이 메아리처럼 호응하여, 군대의 형세가 조금은 진작되고, 의기의 칼날이 자못 예리해졌습니다. 이에 형세를 크게 펼쳐 왜적들을 쳐 죽이자, 돌진해 오던 왜적들의 기세가 많이 꺾였습니다. 그러니 강우(江右)의 8, 9개 군(郡)이 왜적들의 침입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실로 합하께서 잘 절제(節制)하신 데에 힘입은 것입니다.
이번에 교서(敎書)가 서쪽에서 내려와 좌도 감사가 되어 가시게 되자, 여정(輿情)은 이미 맥이 풀리고 사람들은 의구심을 품어, 모여들었던 자들은 흩어져 떠날 생각을 하고 있으며, 의병이 되려고 하던 자들은 도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생각건대, 저 탐악스런 아전들과 백성들을 해치는 감사는 의병들을 질시하여 온갖 방도로 모해하려고 하면서, 심지어는 불궤(不軌)를 도모하였다고까지 말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감히 자신들 멋대로 술수를 부리지 못하였던 것은 상국(相國)께서 이곳에 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상공께서 한 번 낙동강을 건너서 동쪽으로 가시고 나면, 전날에 귀신같이 숨어 있고 물여우처럼 잠복해 있던 자들이 그 기운을 드날리게 될 것이요, 노여움을 품고 미워하던 자들 또한 마음대로 수단을 부릴 것입니다. 그럴 경우 정충(精忠)과 의열(義烈) 두 의병대장과 같은 사람들이 어찌 구차하게 공을 이루기를 바라서 저들에게 견제당하려고 하겠습니까.
이뿐만이 아닙니다. 의령(宜寧)의 의사(義士) 곽재우(郭再祐)는 칼을 차고 창의(倡義)하여 충분(忠憤)이 늠름하지만, 광망스러운 마음을 잘 절제하지 못하여 방백(方伯)의 뜻을 거슬렀습니다. 곽재우가 믿는 바는 오직 합하뿐인데, 합하께서 가시고 나면 형세상 장차 보전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곽재우가 없으면 의령이 없을 것이고, 의령이 없으면 삼가(三嘉) 이서(以西)의 지역이 장차 차례차례 함락당할 것입니다. 이것으로 볼 때 합하께서 가고 머무는 것이 어찌 의병들이 모이느냐 흩어지느냐에 관계되지 않겠으며, 나라가 보존되느냐 망하느냐가 달려 있지 않겠습니까.
일의 성패(成敗)와 이해(利害)가 숨 한 번 들이쉬고 내쉬는 사이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구구하게 임금의 명에 달려나가는 상규(常規)만을 지키려고 하다가, 놓쳐서는 안 될 사기(事機)를 그르친다면, 합하께서 전날에 초유한 공이 허사가 되지 않겠습니까? 삼가 합하께서는 깊이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영남 한 도를 위해서도 다행이고 나라를 위해서도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공이 말하기를, “이미 성상의 명이 있으니 어찌 내 임의대로 하겠는가.” 하였다. 안동(安東)은 공의 고향으로, 그곳에 가면 선롱(先壟)을 돌아볼 수 있고, 가속(家屬)들을 볼 수 있고, 친구들을 만나볼 수 있으며, 부월(斧鉞)을 잡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일상적인 정리로 볼 때 기뻐하는 바이다. 더구나 전쟁으로 어지러운 중이겠는가. 그런데도 좌도로 떠나가 다 이루어져 가던 공이 무너지는 것을 깊이 걱정하였으니, 나랏일을 걱정하느라 집안일을 잊는 것이 이와 같았다.
강우(江右) 여러 고을의 유생들이 앞다투어 공을 머물러 있게 해 달라는 내용으로 상소를 올렸는데, 합천(陜川), 초계, 삼가, 의령, 진주(晉州), 단성(丹城)의 경우에는 진사 박이문(朴而文)이 소두(疏頭)가 되고, 거창(居昌), 안음(安陰), 함양(咸陽)의 경우에는 진사 정유명(鄭惟明)이 소두가 되었다.
박이문이 올린 상소는 아래와 같다.
“감사(監司)는 한 도의 주인이고 절도사(節度使)는 삼군(三軍)의 장수이므로, 병졸과 백성을 훈련시킬 임무를 부여하고, 임기응변하여 적을 제압하는 방략을 책임지웠으니, 군민(軍民)의 이해와 국가의 안위가 모두 이들에게 달려 있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어찌 편벽되어서 자기 멋대로 하는 자나 겁이 많고 혼모한 자가 감당할 수 있는 직임이겠습니까.
왜적과 접전하기도 전에 열읍(列邑)이 파도처럼 무너지고 군사와 백성들이 흩어져 떠났는바, 그 죄는 참으로 용서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들을 그 지경에 이르도록 한 것은 누가 그 허물을 책임져야 하겠습니까? 본도 감사 김수(金睟)는 산과 바다 같은 성상의 은혜는 생각하지 않고 단지 실낱같이 하찮은 자신의 목숨만을 아껴서, 산골 고을로 도망치면서도 오히려 깊이 숨어들지 못할까만을 걱정하였으며, 성을 지키는 좋은 계책을 도리어 오활하다고 하였습니다. 우병사 조대곤(曺大坤)은 원래 나라의 울타리가 될 만한 재능이 없는 데다가 몹시 혼미하기까지 하여, 여러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만을 호위하게 하면서 왜적을 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고서야 사나운 왜적이 휘몰아쳐 오는 것은, 사세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적들의 형세가 더욱더 치성하여 온 도내에 꽉 차 있으므로, 다시는 손을 쓸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좌도 감사 김성일이 왕명을 띠고 남쪽으로 내려와, 나라를 회복시킬 뜻을 간절히 품고 원근에 초유하여 충의(忠義)로써 격려하였습니다. 이에 정인홍, 김면, 곽재우 등 세 사람이 하늘에 맹세코 나라의 수치를 씻고자 기약하고는, 향리(鄕里)에서 분기하여 동지를 불러모았습니다. 그리하여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왜적을 차단하고 성에 웅거해 있는 왜적들을 쳐서, 군대의 위세가 날로 진작되고 병력이 조금은 강해졌습니다. 이에 낙동강 서쪽의 6, 7개 고을이 병화를 면하여 오늘날의 즉묵성(卽墨城)이 되었는바, 나라를 수복할 터전이 이로 인하여 마련되었습니다.
그런데 김수는 몸에 무거운 죄를 지고 세인의 배척을 받게 되자, 자기의 죄를 메꿀 수 있는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다른 사람의 공적이 이루어져가는 것을 시기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사당(私黨)을 심어 의병을 무너뜨리려 하였고, 임금을 속여 사정(私情)을 쓰는 등 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용인(龍仁)에서 패전하였을 때 무슨 포로를 바친 공이 있었습니까? 그런데도 말을 꾸며 거짓으로 주달하여 왜적 한 놈 죽이지 않은 김경로(金敬老)로 하여금 후한 상을 받게 하였습니다. 성주 목사(星州牧使) 이덕열(李德悅)은, 정사가 맹호보다 가혹하고 공사(公私)의 부역이 번다했으며, 성을 버리고 산에 숨어 있으면서도 백성들을 더욱 심하게 들볶았고 의병을 억눌러서 백방으로 모해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부월(鈇鉞)의 참형은 시행하지 않고 도리어 표창하는 주달을 올렸습니다.
성상의 귀를 속이고 당여(黨與)를 만들어 서로 도운 형적이 마침내 드러나게 되니, 김수인들 어찌 한 사람의 손으로 여러 사람의 눈을 가릴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조대곤의 죄는 모두가 죽여야 마땅하다고 하는데도 김수는 그를 족당(族黨)이라는 이유로 사정(私情)을 두어, 구악(舊惡)을 징계하기는커녕 새로운 명령이 또 내려지게 해, 구차스럽게 살아남은 무리들로 하여금 기탄할 바가 없게 하였습니다.
아아, 한 마리의 이리가 길에 나서면 백 마리의 여우가 아첨하고, 한 도깨비가 방 안을 엿보면 온갖 간귀(奸鬼)가 아부하는 법입니다. 김수가 의사(義士)를 질시하여 온갖 계교로 중상모략하고, 자신의 주구(走狗)들을 사주하여 제멋대로 흉계를 펴자, 김경눌(金敬訥)이나 김충민(金忠敏) 같은 자들이 앞을 다투어 그의 뜻에 영합하여, 의병을 원수처럼 배척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아아, 한 사람이 어진 이를 방해하여도 오히려 나라를 결단내기에 충분한 법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부화뇌동하는 자가 여러 고을에 흘러넘치고 있으니, 쇠약해진 운세를 만회하고 어지러운 난리를 평정하는 것은 아예 바랄 수 없을 듯합니다.
아아, 나라를 광복할 터전은 영남에 있고, 영남을 회복할 책임은 김성일에게 달려 있습니다. 김성일이 없으면 의병이 없을 것이고, 그에 따라서 또 영남도 없을 것입니다. 지금 김성일이 왕명을 받들고 강을 건너 동쪽으로 가고 나면, 간사한 무리들은 눈을 부라릴 것이고 의병들은 맥이 풀릴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날의 일이 어찌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는 데에만 그칠 뿐이겠습니까.
신들의 생각으로는, 한 방면을 나누어 맡는 책임은 비록 좌도와 우도로 나뉘어 있으나, 왜적을 토벌하는 사세는 본디 저곳과 이곳을 나눌 수 없을 듯합니다. 이미 내리신 어명을 비록 다시 돌이킬 수 없으나, 김성일로 하여금 좌도와 우도를 아울러 살피면서 의용군을 격려하게 한다면, 이는 실로 양도(兩道)를 전담하는 중책을 맡아 영남 한 도를 총괄해 절제하는 것이니, 위태로움을 되돌릴 기틀이 오로지 여기에 있게 될 것입니다.
아아, 형상(刑賞)의 도는 신상필벌(信賞必罰)에 있는바, 상헌(常憲)을 시행함에 있어서 이동(異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조대곤의 죄는 이각(李珏)과 다름이 없는데, 한 사람은 참수하고 한 사람은 유임되었으며, 김수의 악함은 이광(李洸)보다 더한데, 한 사람은 내쫓고 한 사람은 내쫓지 않았습니다. 이는 마치 배를 삼킨 큰 고기는 그물에서 빠져나오고, 음산한 그늘이 광명을 가린 것과 같은 격이라고 하겠습니다.
조대곤이 비겁하게 물러난 죄는 그에 따른 형률(刑律)이 있을 것이며, 김수와 같이 나라를 저버리고 사정을 따라서 도망쳐 숨은 죄악은 저 송(宋) 나라의 역적인 진회(秦檜)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들을 제거하면 나라의 명맥을 존속시킬 수 있고, 이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나라를 회복하기 어려울 것이니, 흥망의 기틀이 여기에서 결판날 것입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어리석은 사람의 생각이라고 하찮게 여기지 마시고 굽어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정유명이 올린 상소는 아래와 같다.
“오늘날의 일은 모두 의병의 힘에 의지하지 않음이 없고, 의병으로 하여금 종시토록 공을 이루게 한 것은 김성일의 공입니다. 이제 김성일이 좌도 감사로 옮겨 임명되었다는 말을 들으니, 전하께서 사람을 쓰는 것이 제대로 되었다고 할 만하며, 좌도의 생민들은 행복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수복하는 공을 완수하는 데에 있어서는 다 이루어져가는 즈음에 장애가 없을 수 없습니다.
사람을 쓰고 버리는 방도에는 좌도와 우도에 따라 완급(緩急)이 있습니다. 어째서 그런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도 몇 고을의 군사와 백성들은 김성일을 인자한 어머니와 같이 보고 있으며, 김성일을 장성(長城)과 같이 의지하고 있습니다. 이에 만 번 죽을 계책을 내어 왜적들을 쓸어버리고, 한 번 살아남아서 태평 시대를 보기를 기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우도에서 빼앗아다가 좌도에 주는 일이 전혀 뜻밖에 생겼으므로, 충신들은 실망하고 있고 의병들은 맥이 풀려 있습니다.
아아, 김성일이 떠나가고 머무는 것이 어찌 유독 경상우도 의병들의 성패에만 관계가 있겠습니까. 곽재우는 가산을 전부 내놓아 의병을 모집하여 적을 치다가 간악한 사람의 저해를 면치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김성일이 서한을 보내어 장려하니, 이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욱 감격하여 몸소 강회(江淮)의 보장을 책임져서, 공이 남도에서 제일가게 되었습니다. 김성일이 떠나가면 곽재우의 일은 견제받을 염려가 있을 것이며, 구구한 몇 고을마저 보장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조정의 조치가 적당하지 못하여 백성들이 희망을 상실한다면, 중흥의 공은 다시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
○ 공은 좌도로 가자니 길이 막혔고, 그대로 머물러 있자니 사세가 구애되었다. 이에 김수에게 말해서 정병(精兵)을 뽑아 호송해 줄 것을 청하고, 박성(朴惺)을 가도사(假都事)로 삼았다. 김수가 거창으로부터 와서 공을 전송하려고 하자, 공이 맞이하여 합천에서 모였다.
○ 9월 4일에 초계를 경유한 다음 밤을 틈타서 낙동강을 건너고 현풍(玄風), 창녕(昌寧), 밀양(密陽), 청도(淸道)의 지경을 몰래 통과하여 하양(河陽)에 도달하니, 좌도의 백성들이 모두들 말하기를, “어째서 이렇게 늦게 오셨습니까.” 하였다. 수문장(守門將) 신초(辛礎)를 현풍 가수(玄風假守)로 삼고,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 이숙(李潚)을 영산 가수(靈山假守)로 삼았다.
○ 이틀 후 신령(新寧)에 도착하여 다시 우도 감사로 돌아가라는 왕명을 받았다. 공이 박성에게 이르기를, “반드시 본도의 군병이 와서 기다리고 있어야만 위험한 곳을 넘고 강을 건널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안동까지는 불과 이틀 길이니, 가서 성묘하지 않으면 어찌 인정이라고 하겠는가.” 하니, 박성이 말하기를, “본도의 군병을 누가 독려하여 보내겠습니까. 더구나 이곳에는 머무를 곳도 없습니다. 그러니 가서 성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그날로 선산(先山)에 달려가 성묘하고, 하루를 묵은 다음 곧바로 돌아와 대구(大邱)의 동화사(桐華寺)에 도착하니, 좌도 병사 박진(朴晉)이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왜적을 칠 일에 대하여 의논하였다. 이때 대구 부사 윤현(尹晛)이 상사(喪師)의 율(律)을 범하였으므로, 공이 군법으로 다스려 곤장을 치려고 하다가 훈계만 하고서 그만두었다.
상도(上道)의 유생 400여 명이 제각기 의병을 일으키고는 전 한림(翰林) 김해(金垓)를 추대하여 의병장으로 삼고 뜻을 가다듬어 나아가 칠 계획을 세웠고, 생원 임흘(任屹)도 안동 지방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왜적을 치기로 맹세하였으며, 권응수(權應銖)의 군대도 위세가 바야흐로 떨쳐지고 있었다. 그러나 모두 병사 박진에게 견제를 당하여 뚜렷한 공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공이 박진을 보고 곡진하게 타이르면서 그래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였다. - 김해(金垓)는 본디 병골(病骨)로서 의기를 떨쳐 일어나 자신을 잊고 왜적을 막다가 병에 걸려 진중(陣中)에서 죽었다. - 그런데도 박진은 나이 어린 무인(武人)이라서 흔쾌하게 그러겠다고 하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권응수가 경주(慶州)에서 싸울 적에 영천(永川)의 생원 최인제(崔仁濟), 정의번(鄭宜藩) 등 17명이 같은 날 살상당하였고, 관동(關東)에 있던 왜적이 넘어올 때 예안(禮安)에 사는 급제(及第) 유종개(柳宗介)와 안동의 유학(幼學) 윤흠신(尹欽信), 생원 임흘이 외로운 군대를 이끌고 재산(才山)과 소천(小川)의 경계에서 막아 싸웠는데, 유종개와 윤흠신 형제가 진두(陣頭)에서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공이 비로소 그 사실을 듣고는 크게 놀라면서 탄복하여 말하기를, “200년 동안 북돋아 길러낸 남은 교화가 아직은 다 끊어지지 않았구나.” 하였다.
그 뒤에 올린 장계에 이르기를, “박진은 한 도의 병권(兵權)을 혼자서 농단하여 의기를 떨쳐 일어나는 의사(義士)가 있으면 반드시 저지하고 억눌러서 그 군사를 모조리 빼앗습니다. 권응수는 날쌔고 건장하며 슬기로운 지려가 있어 무변(武弁) 중에서는 얻기 어려운 인재로서, 그로 하여금 한쪽 방면을 담당하게 하여 마음대로 하게 한다면 공을 이루기를 바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 병사(兵使)가 있어서 뜻대로 행사하지 못하므로, 식자들이 매우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싸우다가 죽은 유생들의 가상한 충렬은 옛사람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이상의 일들은 본도의 감사가 있으니 신이 아뢰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그러나 신 역시 좌도로부터 체임되어 왔으므로 감히 주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 마중나와 기다리고 있어야 할 강우(江右)의 군사가 오래도록 이르지 않자, 박진에게 말하여 좌도의 정병 100여 명을 거느리고서 어둠 속을 뚫고 100여 리나 걸어와 밤사이에 팔거(八莒), 하빈(河濱)을 지나고, 17일 아침에 아무 탈 없이 고령(高靈)에 이르렀다. 이날 새벽에 대구에 있던 왜적이 동쪽에서 오고, 성주(星州)에 있던 왜적은 서쪽에서 가서 하빈에 모였으니, 공의 행차가 만약 몇 시각만 지체되었더라도 일이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러자 모두들 이것은 신명(神明)이 보호한 바라고 말하였다.
도사(都事) 김영남(金穎男)은 평소부터 공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마중할 군사를 내보내지 않았고, 또 경계까지 와서 맞이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공은 이를 접어두고 문책하지 않았다.
김수와 거창에서 회합하여 관인(官印)과 부절(符節)을 인계받고 곧바로 산음으로 가 머물렀는데, 조종도(趙宗道)는 함양에서 오고, 이노(李魯)는 지리산에서 나오고, 박성(朴惺)은 안음에서 왔다.
○ 김시민(金時敏)이 일찍이 김수에게 붙었는데, 김수가 공이 좌도에 간 틈을 타서 ‘진양은 지킬 수 없으니 성을 지키는 것은 위태롭다. 들판에서 싸우면 살아날 길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김시민에게 급급히 와서 우지(牛旨)의 위급함을 구원하도록 영을 내렸다. 이에 김시민이 본주(本州)를 버리고 와 거창에 이르러 김면(金沔)의 진영으로 들어갔다. 이때 마침 개령(開寧)의 왜적들이 부대를 많이 이끌고 와서 우지를 치려고 하였다. 김시민이 김면의 명에 따라 지례(知禮)에서 왜적들을 맞아 싸우면서 앞장서서 용기를 떨쳐 나아가 싸워 왜적들의 예기를 꺾어 물리치고 왜적들을 많이 쏘아 죽였으나 자신도 왼쪽 발에 총알을 맞아 그의 진중에 머물러 있었다.
공이 진양에 수비가 없다는 것을 듣고는 크게 놀라 군관(軍官)을 보내어 김시민을 잡아오게 하니, 김시민이 죄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발에 입은 부상을 핑계로 교자(轎子)를 타고 왔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에게 업혀서 들어와 공을 뵙고는 신발을 벗은 다음 맨발을 드러내어 공에게 보였다. 그러자 공이 훈계하고 신칙하여 돌려보내고는 여러 사람들에게 웃으면서 말하기를, “김시민의 정신이 어지러우니, 아마도 오래 살지 못하겠다.” 하였다.
공이 다시 오자 강우(江右)의 선비와 백성들이 서로 경하하면서 말하기를, “우리는 되살아났다. 회복을 바랄 수 있겠다.” 하였다.
거제 현령(巨濟縣令) 김준민(金俊民)을 합천(陜川)의 가장(假將)으로 삼았다. 정인홍이 밤에 성주(星州)의 왜적을 습격할 적에 김준민이 선봉이 되어 성 아래까지 바짝 다가갔다. 새벽녘에 왜적들이 모두 쏟아져 나와 마구 돌진하여 총알과 칼날이 번개가 번쩍이듯 빗발쳤으므로, 군사들이 모두 퇴각하였다. 이때 김준민이 앞으로 나아갔다 뒤로 물러섰다하면서 군사들의 뒤를 막아서서 왜적들을 쏘았는데, 쏠 적마다 모두 맞추었으므로 왜적들이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군사들로 하여금 멀리 달아나게 한 뒤에야 말을 몰아 천천히 돌아왔다. 온 군대가 그 덕분에 보전될 수 있었으며, 김준민이 아니었더라면 정인홍도 위태로울 뻔하였다. 교생(校生) 주국신(周國新)은 정인홍의 명령을 두려워하여 파리한 말을 타고 따라갔다가 왜적의 추격을 받아 죽었다.
정인홍이 이번 거사(擧事)를 하면서 공에게 아뢰지 않았으므로 공이 온당치 못하게 여기고 있던 차에 계속해서 싸움에 패하였다는 것을 듣고는 더욱 화를 냈다. 정인홍의 문첩(文牒)이 왔는데, 김준민의 공은 말하지 않고 자신의 참모와 자제(子弟)들의 이름만 공을 세운 자의 명단 윗줄에 기록하였다. 그러자 공이 답하여 보내기를, “공을 과장해서 상을 노리는 것은 무변(武弁)이나 하는 짓이다. 의병장의 휘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마는, 관할 부관(副官)을 엄중하게 신칙하여 거짓으로 보고하는 폐단이 없게 하라.” 하였다. 그리고는 즉시 비장(裨將)을 보내어 정인홍의 행수군관(行首軍官)을 잡아다가, 아뢰지 않고 거사한 죄를 문책하여 볼기를 수십 대 쳤으며, 또 훈계하기를, “김준민은 날랜 장수이니 능멸하거나 모욕해서는 안 된다.” 하자, 정인홍이 불쾌하게 여겼다.
정인홍의 문생들은 항상 ‘우리 선생은 일국의 중망을 걸머지고서 사림(士林)의 영수(領袖)가 되었으므로 선생이 하는 일들을 남들이 다 의표(儀表)로 삼고 있다. 그런데 누가 감히 옳고 그름을 따진단 말인가.’ 하였는데, 이 일이 있고서는 모두들 낙담하여 말하기를, “순찰사 또한 어진 사람인데 어찌하여 우리 스승을 이와 같이 박대하는가.” 하였다.
공이 강한 자를 두려워하지 않음은 천성이었다. 국사에 관한 일에 있어서는 비록 이름 높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조금도 용서하는 법이 없었다. 남들은 다 멈칫멈칫해도 공만은 홀로 꼿꼿하게 대하였으므로, 공을 잘 모르는 사람은 공을 의심하고, 공을 잘 아는 사람은 공을 믿었다.
○ 공은 여러 진영에서 왜적의 수급을 바칠 때마다 반드시 몸소 검사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더러우니 가까이 하지 마십시오.” 하자, 공이 말하기를, “아니다. 잘못하면 우리나라 사람을 죽이는 일이 반드시 많을 것이니, 신중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이때 수령이 많이 비어서 자리를 메꾸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삼가의 전적(典籍) 박사제(朴思濟)는 의병을 일으켜서 공로가 그 본직보다 뛰어나므로 의령 현감(宜寧縣監)에 임명하고, 거창의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 변혼(卞渾)은 힘껏 싸워 왜적을 물리쳐서 일찍이 부장(部將)에 제수되었으므로 문경 현감(聞慶縣監)에 임명하고, 금산(金山)의 성균관 박사(成均館博士) 여대로(呂大老)는 그 고을에서 군사를 일으켜 여러 차례 왜적의 수급을 바쳤으므로 지례 현감(知禮縣監)에 임명하고, 진주(晉州)의 훈련원 봉사 정기룡(鄭起龍)은 날쌔고 용감하여 잘 싸워서 공로가 가장 우수하므로 관계(官階)를 뛰어넘어 상주 판관(尙州判官)에 임명하고, 진주의 부장 강덕룡(姜德龍)은 활을 잘 쏘아서 전투에 쓸 만하므로 함창 현감(咸昌縣監)에 임명하였다.
성주(星州)는 오랫동안 왜적들의 소굴이 되어서 더욱더 참혹하게 탕진된 탓에 왜적을 치고 백성을 구제하는 일을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할 수가 없었으므로, 의병대장인 제용감 정(濟用監正) 정인홍(鄭仁弘)을 그 고을의 목사(牧使)에 임명하였다. 함안(咸安)의 소모관(召募官) 이정(李瀞)은 유숭인(柳崇仁)을 도와서 마침내 큰 승첩을 거두었으나, 스스로 그 공을 차지하지 않아서 다만 별제(別提)에 제수되었으므로 사근 찰방(沙斤察訪)에 임명하였다. 그리고는 이들 모두에 대해 임시로 차임하였다는 장계를 올렸다.
공이 인재를 써서 배치시키는 것이 모두 뭇사람들의 바람에 흡족하였는데, 이는 대개 조정 명령에 따라서 그렇게 한 것이다. - 이보다 앞서 도승지(都承旨)가 보낸 서장(書狀)에, “수령과 변방 장수가 혹 전투에서 죽거나 도망친 곳은, 군무(軍務)가 바야흐로 급한 이러한 때에 왕명이 내려오기를 기다려서 차임한다면 일이 반드시 허술해질 것이다. 그러니 도내에 현재 있는 사람 가운데 감당할 만한 자를 자리가 비는 대로 임시로 메꾼 다음, 일일이 계문하라.” 하였다.
왜적들이 합포(合浦)를 짓밟고 장차 파릉(巴陵)을 침범하려 하므로, 공이 산음, 단성, 삼가, 의령 네 고을의 유생을 거느리고 정호(鼎湖) 가에서 병력을 과시하였는데, 네 고을 수령과 오운, 조종도, 이노 등이 공을 따랐으며, 초계의 가수(假守) 곽율(郭)도 왔다. 깃발을 많이 만들어서 왼편과 오른편의 산 위에 줄지어 꽂았다.
오운과 조종도 두 사람이 강을 건너 함안에 군대를 주둔시켜 방어하려고 하였는데, 곽재우가 말하기를, “왜적이 만약 대거 몰려올 경우에는 강물을 등지고 싸워서는 안 된다. 일이 잘못될 경우 누가 그 허물을 책임질 것인가. 이 강 여울목에서 막으면 된다.” 하였다. 그러자 왜적들이 과연 멀리서 바라보고서는 도망쳤다.
별도로 초계의 정병 10여 명을 추려서 염탐하러 보낼 적에 곽율이 몸소 술병을 들고 가 뱃머리에서 그들을 전송하였다. 그러자 공이 탄복하면서 말하기를, “그는 참으로 훌륭한 수령이다. 자신의 참된 마음을 미루어서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옮겨 놓았다. 사람마다 모두 그와 같이 한다면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겠는가.” 하였다.
○ 호남의 의병장인 전 부사 최경회(崔慶會)가 군사 1000여 명을 거느리고 산음(山陰)에 와서는 어디에 군사를 주둔시킬까를 물었다. 공이 말하기를, “진주의 살천창(薩川倉)이 어떻겠는가?” 하니, 최경회가 그러겠다고 하였다.
오장(吳長)이 공에게 진언하기를, “왜적들의 기세가 바야흐로 치성하여 장차 곧장 쳐들어올 기세이니, 호남의 군사들은 의당 단성에 주둔해 있으면서 왜적들의 예봉을 꺾어야 합니다. 살천창은 지리산 아래에 있어서 본주와의 거리가 너무나 멀어 성원(聲援)이 서로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호남의 군사들로 하여금 스스로 피란하게 하는 것이니,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였으나, 공이 듣지 않았다. 조종도가 또 말하자, 공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단성에 주둔시킬 생각을 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 고을의 수령이 어두워서 창고 곡식을 모조리 잃었으니, 만약 호남의 군사들이 이곳에 머물러 있으면 반드시 이웃 고을들로 하여금 지공을 하게 해야 할 것이다. 살천창에 쌓여 있는 군량이 두어 달은 지탱할 수 있다. 참으로 최경회가 잘 지휘하기만 한다면, 진양(晉陽)의 외원(外援)이 될 수가 있고 단성의 내응(內應)이 될 수도 있을 뿐더러, 또한 흩어져 나와서 산을 뒤지는 왜적들을 막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자, 조종도가 말하기를, “그렇기는 합니다만, 호남의 군사가 능히 공의 말씀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점심때가 되었으므로 점심을 먹었다. 호남의 군사들이 살천창으로 갔다.
○ 김해(金海)에 있던 왜적들이 부산(釜山)의 왜적들과 함께 창원(昌原)에 모였는데, 그 무리가 수만 여 명이나 되었다. 왜적들이 정진(鼎津)을 넘어 건너지 못하고는 합세하여 나와서 곧바로 진양으로 쳐들어왔다. 김시민이 승진되어 목사가 되었는데, 공이 공문을 보내어 면려하기를, “목사는 대대로 충효의 가문에 나서 나라의 은혜를 후히 받았으니, 마땅히 죽음으로써 보답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는 곤양 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嶽), 진주 판관 성수경(成守慶), 전 만호(萬戶) 최덕량(崔德良), 권관(權管) 이찬종(李纘宗) 등으로 하여금 김시민과 협력하여 방어하게 하였다.
왜적들이 열 겹이나 성을 포위하여 밤낮으로 공격하였다. 공은 근처의 고을에 주둔해 있으면서 결사대를 모집하여 그들에게 활과 화살을 많이 준 다음, 밤을 틈타 적진(賊陣) 중에 허술한 곳인 남강(南江)을 통해 진양성 안으로 숨어들어가게 해 장수와 사졸들을 격려하여 죽음으로써 지키게 한 것이 몇 차례나 되었으며, 간첩을 끊임없이 보내어 왜적들의 진퇴와 수비의 허실을 환하게 알았다.
곽재우의 선봉장인 심대승(沈大承)이 밤에 진주의 북쪽 산 위에 이르러서 횃불을 들고 북을 울리며 고함지르고서는 물러나오고, 고성(固城)의 가현령(假縣令) 조응도(趙凝道)는 최강(崔堈), 정유경(鄭惟敬) 등과 더불어 수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남강 건너편에서 병력을 과시하였다. 곽재우가 심대승으로 하여금 진주의 북쪽 산에 올라가서 왜적을 향해 ‘전라도의 의병과 홍의장군(紅衣將軍)이 내일 와서 군사를 합하여 너희들을 무찔러 섬멸시킬 터이니, 그렇게 알라.’고 크게 외치게 하였다. 그런데 마침 전라도의 군사가 단성에서 살천(薩川)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왜적들이 고을 경계에 이르러서 바라보니 과연 곽재우의 말과 부합되었므로, 곧바로 놀라서 달아났다. 이날 왜적들이 살천 가까운 곳까지 분탕질을 하면서 왔으나, 호남의 군사가 이미 웅거하고 있었으므로 침범해 오지는 못하였다.
김시민이 기병(奇兵)을 매복시키고 예기(銳氣)를 쌓은 다음 왜적들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려서 응전하였다. 왜적들이 포위하여 공격한 지 7일이 되도록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였으며, 죽거나 부상당한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에 왜적들이 그들이 묵던 천막과 쌓인 송장을 불태우고는 허둥지둥 도망쳐 버렸다. 합천(陜川)의 가장(假將) 김준민(金俊民)이 단계(丹溪)에 이르러서 왜적을 만나 급히 치니, 왜적들이 곧바로 달아나 돌아갔다. 이에 드디어 단성현에 들어가서 왜적들이 질러놓은 불을 껐다.
한창 왜적들이 쳐들어올 때 병사(兵使) 유숭인(柳崇仁), 사천 현감(泗川縣監) 정득열(鄭得說), 가배량 권관(加背梁權管) 주대청(朱大淸) 등이 같은 날 총에 맞아 죽었다.
○ 진양성의 첩서(捷書)가 한밤중에 이르렀는데, 공은 촛불을 밝히고 앉아서 성을 지키고 왜적을 물리친 상황을 자세히 캐물었다. 그리고는 즉시 아전을 불러 각 고을에 격문을 보내 원근에 사는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게 하였으며, 여러 사람을 불러서 말하기를, “만약 이 성을 지켜내지 못하였다면 성 안에 있던 수만 명이 모두 어육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온 도내의 남은 성도 전혀 보존할 만한 형세가 없어서, 다시는 성에 들어가 지키려는 뜻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이로부터 사람들은 비로소 성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하였다.
휘하의 군교(軍校)들이 들어가 치하하니, 공이 그들을 위로하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목사 김시민의 공로요, 성을 지킨 여러 장수들의 힘이다. 백발이 된 쓸모없는 선비가 무슨 공이 있겠는가. 다만 너희들도 마음을 단단히 먹고 왜적 무찌르기를 능히 김시민이 한 것과 같이 하라. 그렇게 하면 어찌 높은 벼슬만 얻겠는가. 이름이 죽백(竹帛)에 새겨져서 후세에까지 빛날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는 드디어 성을 지킨 상황을 갖추어 기록하고 김시민의 공로를 한껏 기려서 그날로 치계하였다.
사천 현감 정득열이 싸우다가 죽었으므로 전 수문장(守門將) 신갑(申)을 가수(假守)로 삼았다. 단성 현감 이제(李磾)가 도망쳐 숨어 신망을 잃은 탓에 왜적이 성 안에 마음대로 들어왔으므로, 그를 파면하고 대신 첨정(僉正) 조종도를 가수로 삼았다.
공이 장차 진양에 가서 장수와 군사들을 위로하려고 하다가 개령(開寧), 성주(星州)에 왜적들의 변란이 바야흐로 급박하였기 때문에 도사(都事)를 보내어 진주에 들러 군사를 위로하게 하고, 자신은 삼가를 향해 출발하였다.
○ 박성(朴惺)을 무곡차사원(貿穀差使員)으로 삼았다. 대개 공천(公賤)들의 공미(貢米)와 염분(鹽盆)의 세포(稅布)로 밑천을 삼았는데, 박성이 추위와 고생을 꺼리지 않고 힘껏 쫓아다녔다. 공이 또 박성과 이노에게 권하여 강우(江右)의 선비들에게 통문(通文)을 보내 의연곡(義捐穀)을 끌어모아 군수(軍需)를 돕게 하였다.
○ 소촌 찰방(召村察訪) 김수회(金壽恢)를 호남에 보내어 도사(都事) 최철견(崔鐵堅)에게 군량과 구황곡(救荒穀)을 청구하였다.
○ 개령에 있던 왜적이 지례(知禮)를 침범하고, 성주에 있던 왜적이 고령(高靈)에 침입하자, 휘하의 용사들을 나누어 보내 싸움을 돕게 하고, 또 나머지 군사로 성원하여 구원하게 하니, 왜적들이 모두 패하여 달아났다.
공이 정인홍과 김면 두 의병대장에게 공문을 보내고 명령을 전달하는 즈음에 몹시 엄격하게 대하였는데, 언사가 가혹하고 준절하여 조금도 용서함이 없었다. 이에 조종도가 조용히 말하기를, “두 사람은 다 한 시대의 명사(名士)로서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 왜적을 토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와 같이 억누르십니까?” 하니, 공이 말하기를, “내가 두 사람에게 어찌 다른 뜻이야 있겠는가. 조정 안에서 일을 같이 한다면야 비록 체모(體貌)를 모른다거나 기의(機宜)에 합당치 못한 점이 있더라도 오히려 용서하여 그 직절(直截)한 마음씨를 길러주는 것이 옳다. 그러나 지금은 조정이 멀리 서쪽 변두리에 있고 침략을 당한 화란이 예전에 없었던 바이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여러 장수들이 명령을 어기도록 내버려둬서야 되겠는가. 말이 엄준하지 않고서는 그들이 제멋대로 하는 것을 꺾을 수 없다. 이 때문에 내가 그들이 충성을 다하는 것은 기리고 제멋대로 하는 것은 막는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본떠서 말류의 폐단을 방지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어찌 그들에 대해 추호라도 의심하거나 저지하려는 마음이 있어서 그러겠는가.” 하였다.
○ 정인홍과 김면 두 의병대장은 명성과 지위가 비슷하게 높아서 서로 차이가 나지 않았다. 정인홍의 참모들은 모두 그의 문생(門生)들이었는데, 그중에 권양(權瀁)과 같은 자는 경솔하고 괴망(怪妄)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스승을 높이 떠받들어 의병 가운데 제일가는 공을 세운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그런데 김면의 성망과 공적이 자못 정인홍보다 높아지자, 와언을 일으키고 비방을 조작하여 시끄러이 떠들어대면서 많은 말을 해, 두 장수로 하여금 서로 용납되지 못하게 하였다.
정인홍이 김면에게 글을 보내면서 온당치 못한 말을 드러내놓고 하였으며, 김면 또한 불만스러워하여 형세가 정말 화해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에 공이 두 진영에 가서 통렬히 말하기를, “마땅히 합심하여 왜적을 쳐서 함께 국난을 구제할 것이요, 부박한 사람들의 말을 듣고 틈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아첨하기를 좋아하여 이간질하는 자는 내가 마땅히 추궁하여 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하니, 이로부터 부박한 무리들이 말썽부리는 것이 조금 수그러들었다.
○ 어느 날 이정(李瀞)이 심부름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함안(咸安)과 진양(晉陽)의 경계에서 싸우다가 죽은 백골이 무더기로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와서는, 여러 진영의 장수들을 시켜 거두어 묻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그때는 밤이 이미 깊었는데도 공이 영리(營吏)를 불러서 공문을 보내게 한 다음, 말하기를, “착한 말을 듣고는 밤을 묵히지 않는 것이 나의 천성(天性)이다.” 하였다. 그리고는 이정을 시켜서 전란이 일어난 초기에 사절(死節)한 사람의 이름을 모아 기록하게 하였다. 이정이 몇 명의 명단을 기록해 올리면서 말하기를, “여자는 지극히 무식한 사람들인데도 절개를 세운 자가 고을마다 없는 곳이 없건만, 남자는 여러 고을에 한 사람도 없으니, 너무나도 부끄러운 일입니다.” 하니, 공은 손을 내저어 그 말을 막으면서 말하기를, “사람으로 하여금 낯가죽이 두꺼워지게 한다. 차마 들을 수가 없다.” 하였다.
○ 온 도내의 유랑민(流浪民)이 공의 행차가 지나가면 길을 막고, 머무르면 뜰에 가득 찼는데, 공은 반드시 소금과 쌀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거창, 함양, 산음에 진제장(賑濟場)을 설치한 다음, 별도로 유식한 자를 정하여 그 일을 맡아보게 하였으며, 수시로 그 음식물을 가져다가 직접 살피고 맛보았다. 또 솔잎가루를 많이 만들어 죽에 섞어서 먹이도록 하였다.
조금 완전한 지역이라고는 다만 이 세 고을뿐으로서, 각 진영의 군량이 다 여기서 나왔으나, 앞으로 계속해서 댈 수가 없는 형편이었으므로 밤낮으로 걱정하고 탄식하였다. 이에 최철견(崔鐵堅)에게 구제를 요청하여 두 번이나 김천 찰방(金泉察訪) 조존선(趙存善)을 보내고, 그 다음에 사근 찰방(沙斤察訪) 이정(李瀞)을 보내고, 그 다음에 창원 부사(昌原府使) 장의국(張義國)을 보내고, 그 다음에 전 좌랑(佐郞) 박이장(朴而章)을 보내고, 그 다음에 박성(朴惺)을 보냈다. 그런데도 번번이 시원스러운 조처가 없자, 공이 말하기를, “어찌 차마 이렇게 한단 말인가. 호남의 곡식이 제 집 물건이며, 영남 사람은 왕의 신하가 아니란 말인가?” 하였다.
함양은 실상 부유한 집들이 많았지만 군수가 나약해서 사사로이 쌓아둔 것을 봉고(封庫)하지 못하였다. 이에 공이 그것을 뽑아 기록한 다음 굶주린 백성에게 나누어 주도록 명령하였다. 어떤 완고한 자가 흔쾌히 따르려고 하지 않으므로 그자를 잡아다가 볼기를 치려고 하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는 위력을 써서 하게 해서는 안 되고, 마땅히 도리로써 일깨워 주어야만 합니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그렇지가 않다. 함양은 호남 땅에 가까워서 풍속이 사나워서 사람들이 모두 재물에 인색하니, 도리로써 일깨워 주기는 어렵다. 한 사람을 볼기쳐서 만 사람의 생명을 구제하는 것이니, 나는 그만둘 수가 없다.” 하였다. 그리고는 볼기를 수십 대 친 다음 곧바로 축대 위에 끌어다 앉히고 간곡하게 타이르면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니, 그 사람도 볼기 맞은 것을 원망하지 않고 뉘우쳐 깨닫고 돌아갔다. 그 뒤로 이 말을 들은 자들이 모두 마음을 다하지 않는 자가 없어서 목숨을 보전한 자가 매우 많았다.
공은 소소한 관문(關文)이나 통첩(通牒) 등에 대해서도 반드시 친히 지었는데 간혹 한밤이 지나 잠들기도 하였다. 이에 피로가 쌓이고 소갈증이 들어 장차 큰 병이 나게 되었다. 조종도가 번거로이 자질구레한 일까지 한다고 말하자, 공이 한숨을 쉬면서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조정의 관리들이 맑지 못한 탓에 살육을 저지르는 데까지 이르게 되어 인심이 흩어지고 섬오랑캐들이 쳐들어오기에 이르렀으니, 우리들이 만 번 죽는다 하더라도 그 죄를 갚을 길이 없다. 그런데 어찌 감히 번거로이 수고하는 것을 생각해서야 되겠는가. 그리고 큰일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서 작은 일이라고 소홀히 한다면, 어찌 내 마음이 편하겠는가.” 하였다.
공이 산음(山陰)의 지곡사(智谷寺)에서 염초(焰硝)를 굽게 하였다. 또 호남의 숙련공을 시켜서 조총(鳥銃)을 만드는 법을 가르치게 하였는데, 비록 동(銅)은 아니었으나, 정철(正鐵)로는 만들 수 있었다. 이 일은 모두 고을의 수령인 김낙(金洛)으로 하여금 맡아 감독하게 하였다.
○ 상이 김면을 의병도대장(義兵都大將)으로 삼아서 원근의 여러 군대를 모두 관할하게 하였다. 김면은 임금의 명령을 받고 감격스럽고 송구스럽게 여겨 더더 분발하여 흉적을 무찌를 것을 기약하고는 성위(聲威)를 크게 펼쳐서 사람들을 고무시켰다. 그 뒤에 김면이 김시민을 대신하여 병사(兵使)가 되었다. 공이 거창(居昌)에 이르러 서로 모여서는 큰 술잔으로 몇 순배를 대작한 다음, 손을 잡고 심회를 토로하면서 울기도 하고 읊조리기도 하다가 먼동이 틀 무렵에야 자리를 파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공이 김면의 배리(陪吏)를 잡아다가 볼기를 치면서 말하기를, “전날에 의병대장으로서 지휘에 순종하지 않은 것도 잘못인데, 이제는 병사가 되었으니 결코 스스로 편한 대로만 하지는 말라.” 하였다. 이렇게 한 지 오래지 않아서 병사가 병으로 죽었다. 공이 그의 죽음을 듣고는 몹시 애통해하면서 곧바로 장계를 올렸는데, 그 장계에 이르기를,
“병사 김면은 본디 병이 많은 사람으로서, 산림(山林)에서 병을 요양하고 지내면서 세상일에는 뜻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처음 병란이 일어났을 때 분연히 몸을 돌보지 않고 의병을 일으켜, 이 왜적들과는 같은 하늘 아래 살지 않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그리고는 1년이 넘도록 피나게 싸워서 여러 차례 왜적들의 예봉을 꺾었으니, 강우(江右) 일대가 여태까지 보존된 것은 대부분 그의 공로입니다.
의병을 일으킨 뒤에는 그의 처자식들이 가까운 땅에서 유리걸식하고 있는데도 한 번도 찾아보지 않았습니다. 여름이 지나고 겨울에 접어들어서는 사뭇 서리와 눈 속에서 지냈으므로 사람들이 그가 반드시 죽으리라는 것을 알았는데도, 그는 조금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은 채 태연하였으니, 나라를 위하는 정성은 밝고 환하기가 단사(丹砂)와 같았습니다.
은전(恩典)을 입어 병사에 제수된 뒤로는 더욱더 책임의 중대함을 생각해 두렵게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몸소 여러 군대를 통솔하고 나아가 금산(金山)에 주둔하여 선산(善山)에 있는 왜적들과 서로 버티니, 왜적들이 자못 위축되어서 도망치려는 기색이 현저하였습니다. 그런데 몸을 상한 것이 쌓인 나머지 갑자기 큰 병에 걸려서 군중(軍中)에서 목숨을 마쳤습니다.
장성(長城)이 한 번 무너지매 삼군(三軍)이 모두 눈물을 삼킵니다. 하늘이 돕지 않는 것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신은 외로이 홀로 남아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김면이 의병장이 되었을 적부터 비록 공의 절제(節制)를 받기는 하였지만, 호령을 시행하는 사이에 간혹 맞서는 일이 많았다. 공은 김면의 성질이 편협하고 고집스럽다고 하면서 자못 불만스러운 뜻이 있음을 여러 차례 말과 안색에 나타내기도 했으므로, 사람들이 혹 두 사람이 서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의심하였다. 이때에 이르러서 죽음을 슬퍼하고 포양(褒揚)해서 장계함이 이와 같았으므로, 사람들이 더욱더 공의 마음쓰는 것이 공평하고 어진 사람을 좋아함이 성심에서 나온 것에 심복하였다. 공이 만시(挽詩) 3편을 지어서 보내 주었다.
○ 진양 목사(晉陽牧使) 김시민(金時敏)이 병사에 승진되었으나, 죽고 말았다. 이때 세가대족(世家大族)들이 곡식을 지리산(智異山)에 감추어 두었으므로 꿔준 것을 회수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산에서 나올 뜻이 없었다. 공이 진주에 이르러서 조안(糶案)을 가져다 보고는 크게 노하여 판관(判官) 성수경(成守慶)으로 하여금 그들 가운데 우두머리 10여 명을 지적해 뽑아서 산음으로 묶어 보내게 하니, 진주의 백성들이 크게 동요하였다.
이에 박성이 말하기를, “이들을 징계하지 않아서는 안 되니, 마땅히 엄중히 다스려서 나머지 사람들에게 경고해야 합니다.” 하니, 공이 그럴듯하게 여겨 장차 엄하게 캐물어서 형률(刑律)을 쓰려고 하였다. 그러자 이노가 말하기를, “진주 토호(土豪)들의 습관은 갑자기 고치기 어려운 것으로, 그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국초(國初)에 하륜(河崙)이 태종조(太宗朝)의 공신(功臣)으로서 향소(鄕所)나 향교(鄕校)에 모두 전속(專屬)된 동리를 두도록 청한 다음, 사패(賜牌)를 받아서 그 부세(賦稅)와 공물(貢物)을 거두어 썼으며, 정양(鄭驤)이 찬성(贊成)으로서 이곳에 와서 좌수(座首)가 되었습니다. 상신(相臣)과 장신(將臣)이 대대로 향권(鄕權)을 잡은 탓에 비록 잔약해진 후손이라고 할지라도 옛날 습관은 오히려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 뒤 이제신(李濟臣)이 목사가 되었을 적에는 그 사패를 가져다가 불태우고 그 전속 동리를 모두 빼앗은 다음, 토호의 옥사(獄事)를 일으켜서 거실(巨室) 10여 집을 10여 년 동안이나 잡아 가두었습니다. 이에 그들의 재산을 모두 탕진하게 되어 원망하는 소리가 길에 가득하였습니다. 기축년의 변고(變故) 때에는 징사(徵士) 최영경(崔永慶)은 삼봉(三峯)이란 혐의를 받아 원통하게 죽었고, 유종지(柳宗智)는 모의하는 데 연관되었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죽었고, 고을 안의 착한 선비였던 하항(河沆) 같은 무리들도 분통이 터져 목멘 채 죽었습니다. 이에 고을 사람들은 착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모두 원한이 맺혀 인심이 들끓어 흉흉한바, 사태가 어떻게 진전될지 모를 판입니다. 지금 만약 서두른다면 더욱더 소란스럽게만 될 것이니, 부드럽게 어루만지면서 이끌어 주어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교화에 순종하게 하느니만 못합니다. 죽이는 것만으로는 해결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공이 귀 기울여 듣더니만 말하기를, “내가 듣지 못한 내용이다. 태종께서 사패를 내려 주신 것도 옳은 것인가를 모르겠지만, 이제신이 불태운 것은 어쩜 그리 불경하단 말인가. 그대의 말이 진실로 옳으니,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그들을 고문하려다가 중지하고 결박을 풀어준 다음, 의리를 밝혀서 말해 주었다. 그러자 그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리면서 죽여달라고 청하였다.
공이 그 자리에서 곧바로 효유(曉諭)하는 방문(榜文)을 썼는데, 그 방문에 대략 이르기를, “왜적이 온 나라 안에 가득 차서 제멋대로 횡행하는 것은 우리 백성들이 숨어 엎드려 읍과 촌이 텅텅 비고 아무런 방비가 없는 탓이다. 방비는 장수가 있어도 군사가 없으면 될 수 없는 것이요, 군사가 있어도 군량이 없으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 고을은 영남의 큰 고을로서 나라의 보장이 되는 곳이다. 사람마다 예악(禮樂)를 알고 집집마다 시서(詩書)를 외운다는 것은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실려 있고, 인재(人材)의 부고(府庫)이며 장상(將相)들이 대를 이었다는 것은 국론(國論)에 드러났다. 그런데 이제 이런 일이 있을 줄을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지리산을 길이 안착할 땅으로 알고, 감춘 곡식을 오래 갈 물품으로 아는가? 마땅히 빨리 환곡을 바치고 성을 지켜서 너희들의 선조를 더럽힘이 없게 하라.” 하였다.
그리고는 판관에게 영을 내려 가두어 둔 사람들을 모두 석방시키게 하였다. 그런 다음 곡식이 있는 자는 임의대로 곡식을 바치게 하되, 환곡이 있으면 말소시키고, 환곡이 없으면 곡식을 헌납했다고 기재하게 하였는데, 두 달이 못가서 곡식 수만 여 석을 얻었다.
○ 공은 명(明) 나라 군사가 많이 도착한다는 말을 듣고 항상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대대로 독실한 충정(忠貞)으로 대국(大國)을 지성껏 섬긴 것이 지금에 와서야 징험되었다. 중국 군사가 몰아쳐 내려와서 왜적을 압박한다면 왜적들이 물러가기를 기약할 수 있으니, 백성들에게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내년에 씨 뿌릴 종자를 미리 조처하지 않는다면 왜적들이 물러간다 하더라도 백성들이 살아날 수가 없을 것이다.” 하였다. 전후로 곡식을 옮기기를 계청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중간에서 지체되어 전달되지 못하거나, 혹은 밖에서 가로막혀 보고되지 않았다. 공은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걱정하는 정성이 뱃속에 꽉 차고 가슴속에 꽉 차서, 밤을 새워가며 잠을 못 이루고 걱정한 탓에 귀밑머리와 눈썹이 모두 하얗게 세었다.
○ 곽준(郭䞭)은 본디 어진 선비로서 김면(金沔)의 참모가 되어 힘쓴 공이 가장 많았으므로 천거하여 자여 찰방(自如察訪)으로 삼았다.
○ 상주(尙州)와 함창(咸昌)의 유생들이 공에게 서한을 올려 목사 김해(金澥)와 현감 이국필(李國弼)의 죄악을 낱낱이 진술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진정 이 서한대로라면 그들은 백 번 죽여도 아까울 것이 없다. 상주의 풍속은 원래 순박해서 고을 수령의 허물을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데, 지금 이와 같이 말하였으니, 김해와 이국필의 죄상을 잘 알 수가 있다. 어찌 속히 장계하여 파면시켜서 백성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김해는 그 뒤에 보은(報恩)에 있다가 강도에게 살해당하였고, 이국필은 여러 고을에 떠돌아다니면서 걸식하였다.
○ 계사년(1593, 선조 26) 정월 초하룻날 아침에 휘하의 선비 및 종사관 여러 사람이 수령들과 함께 들어와 뵈니, 공이 추연히 슬픈 기색을 띠고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말하기를, “해가 바뀌었는데도 왜적들은 아직도 국내에 가득 차 있고, 서쪽 국경은 아득히 소식이 끊긴 지 이미 오래이다. 외로운 신하가 죽지 않고 헛되이 나이만 또 한 살 더 먹었으니, 장차 무슨 얼굴로 다시 임금을 뵐 수 있겠는가.” 하고, 또 수령들에게 말하기를, “아침밥은 올리지 말라. 내가 어찌 차마 들겠는가.” 하였다.
이노가 아이의 병으로 인해 집에 들어가 있으면서 공에게 긴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이 왜적들의 형세를 보건대 7, 8년 안에는 소탕될 기약이 없는데, 여러 진영의 장수들은 단지 속히 하고자 서두르는 마음만 품어, 오늘 제거되지 않으면 내일 제거되려니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먼 앞날을 헤아리는 생각은 조금도 없고 가까운 성공만을 취하려 하여, 형식적으로 꾸미기만을 힘쓰고 실제적인 성과를 거둘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이에 주옥(珠玉)과도 같은 군량을 마치 흙 쓰듯 마구 낭비하니, 필경에는 군량이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럴 경우 비록 훌륭한 장수가 있다 한들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의 생각으로는, 영공(令公)의 일행 중에도 형식적으로 꾸미는 폐단이 없지 않습니다. 군관(軍官) 수십 명을 감해야 하고, 영리(營吏) 10여 명 또한 도태시켜야 합니다. 이들은 앉아 있으면 식량을 소비하는 걱정이 있고, 쏘다니면 말을 징발하는 원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몇 고을의 백성들 힘이 마르고 말라서 극도에 달했으니, 영공께서 앞서 단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 진영에서 식량만 축내는 자들을 명령하지 않아도 스스로 줄일 것입니다.” 하였다.
공이 이에 대해 회답하기를, “며칠 동안에 잇달아 보낸 글을 받으니, 한없이 감사하고 위로가 돼오. 지면에 가득찬 많은 말들은 긴요한 말 아닌 것이 없으니, 삼가 명심해 마지않겠소. 붕우의 도리가 없어진 지 이미 오래인데, 오늘날에 다시 옛사람이 하듯이 한 일을 볼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소. 항상 깊이 명심할 뿐 아니라, 당장 시행하겠소.” 하였다.
○ 강언룡(姜彦龍)을 유곡 가찰방(幽谷假察訪)으로 삼은 다음, 계청(啓請)하여 정식 찰방으로 삼았다. 강언룡은 곽재우와 함께 일하면서 왜적을 치고 무기를 많이 준비한 공로가 있기 때문이었다.
○ 공이 풍원부원군(豐原府院君 유성룡(柳成龍))이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남쪽 지방에 남은 백성들이 되살아날 수 있게 되었다.” 하였다. 종자(種子)를 운반해 오고 흉년을 구제하는 것 등의 일에 대해서 공문상에서 누누이 진술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차례 보낸 서한에도 이 일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하였는데, 참된 마음이 환하게 밝아서 한결같이 가슴속에 맺힌 듯하여 잠깐 사이라도 잊은 적이 없었다.
○ 함양 군수(咸陽郡守)의 보고서가 올라왔는데, 그 내용은, ‘명 나라 군사가 정월 7일에 평양의 왜적을 섬멸하여 남은 왜적이 없다시피 하며, 그 나머지 도당은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 해서(海西)에 진을 치고 있던 왜적들도 일시에 도망쳤다. 이긴 기세를 타고 추격해 와서 바야흐로 임진(臨津)까지 이르렀으니, 한양(漢陽)은 이미 금세 수복하게 생겼으며, 멀리 추격하여 남쪽으로 내려오는 것도 아침 아니면 저녁일 것이다. 그러니 호남(湖南)에도 통지해 알리라.’는 것이었다.
이에 이웃 고을 수령들이 모두 와서 모이고, 도사(都事) 역시 아림(娥林)으로부터 와서 이르렀는데, 손뼉을 치고 떠들어대면서 기쁨에 날뛰느라 목이 메었다. 모두들 말하기를, “명 나라 군사들은 대나무를 쪼개는 듯한 위세를 가졌고, 섬오랑캐들은 새털에 불이 붙는 듯한 형편이 되었으니, 열흘이 지나지 않아서 새재[鳥嶺]를 넘어올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을 맞이하고 지공(支供)하는 데 대한 조처를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도사를 하동(河東), 곤양(昆陽), 진주(晉州), 의령(宜寧) 등의 관장(官長)과 장수(將帥)에게 보내어 군량과 기타 공급에 필요한 것들을 운반해 오게 하소서.” 하였는데, 이노 혼자서만 큰소리로 말하기를, “이는 모름지기 이와 같이 급히 서두를 것이 없습니다. 명 나라 군사들이 평양을 회복하고 바닷길을 맑게 하였으므로, 그 위풍이 미치는 곳마다 흉적들이 넋을 잃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무릇 전투의 기세는 찰 때와 줄어들 때가 있고, 성할 때와 쇠할 때가 있는 법입니다. 한양에 웅거해 있는 왜적들을 당장은 패배시키기 어려울 것입니다. 왜적들이 반드시 군사와 말을 쉬게 한 다음 다시 덤비려고 꾀할 것이니, 명 나라 군사가 새재를 넘어 남쪽으로 오는 일은 몇 달 뒤에나 가능할 것입니다. 하물며 새재 이하의 여러 성에는 왜적들이 현재 꽉 차 있습니다. 설령 명 나라 군사가 빨리 온다고 한들 우리가 어디에다가 양곡을 쌓아 놓고 기다리겠습니까? 조정에서도 반드시 본도에 이것을 조처하기를 바랄 수 없을 것이며, 양호(兩湖)에 전적으로 책임지울 것입니다. 그러니 아직은 시끄러이 굴지 말고 상황이 변해 가는 것을 보아가면서 잘 조처하는 편이 옳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온 좌중이 크게 놀라 미친 자의 괴상한 말이라고 하면서 너나없이 비난하고 나무랐으나, 공만은 홀로 옳다고 하여 그르게 여기지 않았다.
김낙(金洛)이 앞으로 달려나와 말하기를, “명 나라 군사에 관해 염탐하고자 군관(軍官)과 영리(營吏)를 보냈으나, 모두 떠도는 말만 듣고 중도에 돌아왔기 때문에 늦을지 빠를지 알기 어렵습니다. 이 전적(李典籍)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공이 말하기를, “그가 기꺼이 가려 하겠는가? 물어보기는 하겠다.” 하였다. 이노가 이때 마침 밖에 있었는데, 불러서 물어보니, 그 자리에서 응낙하면서 말하기를, “그러겠습니다. 진실로 공의 명령이라면 어느 곳인들 가지 못하겠습니까.” 하였다. 그리고는 그날로 길을 떠나자, 공이 이노를 보고 말하기를, “명 나라 군사들의 소식을 염탐할 뿐만 아니라, 농사철이 이미 박두했으니 종자곡(種子穀)도 아울러 청해 가지고 오라.” 하였다.
이노가 여산(礪山)에 이르렀으나, 명 나라 군사에 관한 정식 보고가 별반 없으므로, 졸개 한 사람을 보내어 공에게 서한을 올려 보고하기를, “상도(上道)에는 현재 명 나라 군사에 관한 기별이 없습니다. 그러니 소란스럽게 하지 말고 백성들로 하여금 살아갈 길을 생각하게 하소서.” 하였다. 공이 이노의 서한을 보고는 크게 기뻐하여 곧바로 김영남(金穎男)에게 통지하여 서둘지 말고 늦추게 함으로써 백성들이 소요하지 않았다.
이노가 말을 달려 직산(稷山)에 도달하니, 직산의 수령 박의(朴宜)가 동헌(東軒)에 묵고 있었다. 이때 도체찰사 서애 상공(西厓相公)은 임진(臨津)에 머물러 있고, 부사(副使) 김찬(金瓚)은 온양(溫陽)에 머물러 있었다. 직산의 아전 조순걸(趙舜傑)을 직산 수령에게 빌려서 단기(單騎)로 임진을 향해 가려고 하였다. 수원(水原) 경계에 이르자 부사의 군관 2명이 말을 달려와서는 말하기를, “용인(龍仁), 죽산(竹山), 사평(沙平)에 주둔한 왜적이 수원, 금천(衿川) 지역에 출몰하면서 약탈하는데, 날마다 쉴새가 없으므로 저희들도 산길을 타고 간신히 피해서 오는 참이니, 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명 나라 군사의 동정을 살피고 싶다면, 저희들이 도체찰사의 처소에서 오는 길인데, 별다른 얘기는 없습니다.” 하면서, 굳이 같이 돌아가기를 청하였다. 이에 되돌아와 직산에 이르니, 직산 수령이 말하기를, “그대의 하인들은 모두 병을 앓고 있으며 길은 이렇게 막혔으니, 단신으로 뚫고 나아갈 수 없는 형세이다. 종자곡을 운반하는 한 가지 일은 서한으로 품달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그런데 우연히 샛길로 가는 공차인(公差人)이 있기에 딱한 처지를 고하는 서신을 그 편에 부쳐 서애에게 올리게 하였다. 또 아산(牙山)으로 가서 배를 빌려 타고 바닷길로 갈까 했는데, 때마침 호부(戶部)의 낭관(郞官)이 조창(漕倉)에 와 머물면서 호서와 호남의 전세(田稅)를 감독해 운반하느라고 공사(公私)의 선척을 모조리 끌어갔으므로, 배편을 얻을 수가 없었다. 이에 드디어 온양에서 공주(公州)를 거쳐 부사를 알현하고 종자곡을 옮기는 일을 요청하니, 부사가 도체찰사에게 여쭈어서 조처하겠다고만 하였다. 이노가 다시 간곡하게 여러 차례 간청한 뒤에야 겨우 전라 도사에게 500석을 넘겨주게 하였다. 이에 전주에 이르러서 도사를 만나보았다.
공이 함양에 머물러 있으면서 서쪽 소식을 기다리다가 군국(軍國)의 걱정스러운 기미를 눈으로 직접 보고는 울분과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여 군교(軍校)인 수문장(守門將) 박경록(朴慶祿)을 보내어 치계하였는데, 그 치계에 이르기를,
“왜적들은 우리가 평양(平壤)을 수복하였다는 말을 듣고부터 벌과 개미처럼 모여 있던 자들이 모두 도망쳐서 돌아갈 뜻을 품고 있었는데, 중국 군사가 오래도록 머물러 있으면서 진격하지 않고 있자 다시 기운이 살아났습니다. 이에 문경(聞慶), 함창(咸昌), 상주(尙州)에 머물러 있는 왜적들이 멋대로 분탕질하기를 변란이 일어났던 처음보다도 더 심하게 하고 있습니다. 전라도의 수군(水軍)이 패전한 뒤로는 웅천(熊川), 김해(金海), 창원(昌原)에 있는 왜적들이 다시 창궐하는 조짐이 있습니다. 그런데 각 고을의 군량은 이미 다 떨어졌습니다.
곽재우(郭再祐)의 군사는 굶주림으로 인해 다 흩어졌으므로 장차 군사가 없는 장수가 되게 생겼습니다. 그리고 주사(舟師)와 격군(格軍)도 군량을 계속 댈 길이 없으므로 형세상 장차 저절로 무너질 형편이며, 병사(兵使)가 거느린 장사들도 오래 지탱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왜적들과 서로 버티면서 보름이나 한 달만 지체하면 잠깐 사이에 흙더미처럼 무너지고 말 것이니, 신이 비록 만 번 죽는다 하더라도 무슨 보탬이 있겠습니까.
부민(富民)들이 쌓아 놓은 개인의 곡식은 작년부터 다 조사하여 찾아냈는데, 처음에는 상을 줄 것이라 여겨서 바치려는 자가 꽤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래도록 상을 내리지 않으므로 백성들이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에 곡식을 바치라는 영을 여러 번 내렸으나, 한 사람도 응하는 자를 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비록 재물과 곡식이 바닥났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백성들이 국법을 믿지 못한 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군졸들은 한 해가 넘도록 비바람을 무릅쓰고 복무하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백 번을 싸운 끝에 살아남은 자들로서, 비록 군공(軍功)이 없다고 하더라도 마땅히 수고함을 가엾게 여겨서 보살펴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힘써 싸워 공을 세운 자에 대해서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신은 보답할 만한 물품이 없으므로 단지 조정에서 상을 주기만을 기다리면서 격려하고 권장하는 바탕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에 감히 그들의 공로를 덮어 두지 못하고 전후로 계문하면서 번거롭게 아뢰었습니다.
신이 어찌 감히 다른 사람의 공을 훔치고 은혜를 팔아서 군사들에게 환심을 사겠습니까. 대개 백성의 마음은 이미 떠났고 국가의 형세는 이미 글러버렸으므로, 이런 방법이 아니고서는 군사들의 마음을 고무시키고 인심을 모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작년에 전란이 일어나고부터 조정에서는 그래도 사람이 못났다고 하여 그 사람의 말까지 안 듣는 일은 없었습니다. 이에 의병을 일으켜 공이 있는 사람에게는 모두 은상(恩賞)을 내렸으므로, 사람마다 떨치고 일어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이 아직 죽지 않고 이에 이르러서 구차스럽게 한 모퉁이나마 보전하고 있는 것은, 터럭끝만한 것도 다 조정에서 잘 처리하신 까닭입니다.
다만 급보(急報)가 끊임없이 올라오고 군서(軍書)가 많이 쌓였으므로 해당 관서의 하리(下吏)가 미처 다 살펴보지 못한 탓에, 공이 적은데도 녹공(錄功)되거나 공이 큰데도 녹공에 빠진 경우가 있습니다. 이에 심지어는 정군(正軍)으로서 적의 수급 하나도 베지 못하였는데도 판관에 제수된 경우가 있으며, 수문장으로서 한 번 힘써 싸웠다는 이유로 목사로 뛰어오른 경우도 있으며, 종의 자식이 왜놈 중 하나를 목베었다는 이유로 그 주인이 3품의 정직(正職)에 오른 경우가 있는 반면, 장사(將士)가 수십 명의 왜적을 목베었는데도 지금까지 한 등급을 올리는 상도 받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 밖의 온당하지 못한 일들은 낱낱이 들어 말하기조차 어렵습니다.
이 때문에 뜻 있는 선비들은 모르는 체하고 있고, 장졸(將卒)들은 맥이 풀려 있습니다. 그리고는 모두들 말하기를, ‘우리들은 한 해가 넘도록 창을 메고 만 번 죽기를 무릅쓰고 피나는 싸움을 하였는데도 녹공되지 않았으니, 다시 무엇을 하겠는가.’ 하고 있습니다. 군사들의 마음이 이러하므로 장수된 자가 비록 날마다 싸움을 독려하지만, 전혀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서 도망하는 자가 잇따르고 있는데, 이들을 불러모으려고 하여도 계책이 없습니다. 그러니 신도 실로 어찌하면 좋을지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예로부터 신용을 잃고 상주는 것을 아끼면 비록 태평할 때라도 나라를 다스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이렇게 난리가 나서 망하는 때에야 일러 무엇하겠습니까. 믿는 바는 중국의 군사로, 그들이 쏜살같이 내려온다면 회복하는 것이 며칠 안 걸릴 것입니다. 그러나 중도에서 실패할까 두려워하고 있으므로 원근의 사람들이 모두 실망하고 있습니다. 신과 같은 자는 조석간에 죽을 사람이니 무엇이 아까울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조정이 언제쯤이나 편안하게 쉴 수 있게 될는지 알 수 없으니, 생각이 이에 미치면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고 싶으나 길이 없습니다.
본도의 흉년과 굶주림은 옛날에 없던 일로서, 왜적의 칼날 밑에 살아남은 백성이 얼마 안 됩니다. 그런데 요행히 죽지 않은 자들은 서로 모여서 도둑질을 하면서 사람으로써 양식을 삼고 있습니다. 이들을 비록 계속하여 잡아 죽이기는 하지만, 또한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데다가 곡식 종자가 한 톨도 없어 왜적이 비록 물러간다 하더라도 농사지을 만한 형편이 전혀 없으니, 도내 사람들의 목숨은 적병이 오지 않더라도 반드시 남김없이 저절로 다 죽고 말 것입니다.
호남 백성들의 형편은, 비록 꼴과 곡식을 실어 보내는 데 시달리고는 있으나, 창고의 곡식이 아직은 온전합니다. 만약 호남에서 군량과 곡식 종자를 각각 수만 섬씩 옮겨온다면, 신이 비록 직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기는 하지만, 굶주린 자를 진휼하고 왜적을 막으며, 겸하여 농사도 폐하지 않게 함으로써, 호남의 보장(保障)을 완전하게 해 국가를 회복하는 기틀이 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은 죽음이 있을 뿐, 다시는 할 일이 없습니다.
설자들이 말하기를, ‘호남의 재물과 곡식도 다 떨어졌으므로 곡식을 옮길 수 없다.’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생각없이 한 말인 듯합니다. 신이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둔 곳에 있으면서 호남 선비들을 만나지 않는 날이 없는바, 그쪽 창고에 있는 곡식이 다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자세히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또 남원 부사(南原府使) 윤안성(尹安性)을 만나보니, 그가 말하기를, ‘호남과 영남은 입술과 이처럼 서로 의지하면서 도와야 할 처지로, 영남이 망하면 호남이 그 다음에 망할 것이다. 그러니 곡식을 옮기는 일을 속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조정에서 회답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다가는 양곡이 이미 다 떨어질 것이니, 제때에 미쳐서 하지 못할까 염려된다.’ 하였습니다. 호남 수령의 말이 이와 같으니, 공론이 어떻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앞서 계하(啓下)한 쌀과 콩 각 2000섬은 1만 명 군인의 열흘 양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무슨 일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조정에서 이미 중국 군사를 먹이기 위하여 수만 섬을 본도에 운반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이에 그 쌀과 콩이 이미 운봉(雲峯)과 남원(南原) 등지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런데 중국 군사가 끝내 고개를 넘어오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쌓아두고 보내지 않고 있으니, 그 계책이 빈틈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어느 땅인들 왕의 영토가 아니며, 어느 백성인들 왕의 백성이 아니겠습니까. 설령 중국 군사가 넘어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것으로 굶는 사람도 살리고 군량도 계속댄다면, 양쪽 다 편하지 않겠습니까?
공명고신(空名告身), 허통(許通), 면천(免賤) 등의 항목에 대한 차첩(差帖)을 보내 줄 것을 여러 차례 계청한 바 있으니, 속히 시행하여 거꾸로 매달린 듯한 위급함을 구제한다면, 만분의 일이나마 보전할 길이 있을 듯합니다.
이처럼 중국 군사가 경내에 있어서 그들을 먹이기에도 겨를이 없는 때를 당해서 이런 번거로운 청을 하였으니, 신이 너무도 완급(緩急)을 모른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본도의 존망이 국가에 관계됨이 매우 크므로, 이와 같이 죽음을 무릅쓰고 다 말씀 올립니다.”
하였다. 이때는 3월 4일로, 이것이 맨 나중에 올린 장계이다. 전후로 올린 장계의 수만 마디 말들을 다 기록할 수 없으나, 이것만은 맨 마지막 장계이기에 적어둔다.
○ 이노가 돌아와서 상도(上道)에서 보고 들은 바를 빠짐없이 고하자, 공이 말하기를, “그대가 가지 않았더라면 자칫하다가 도내의 처치를 그르칠 뻔하였다. 이 사이에 만약 종자곡을 얻으면 난리에 살아남은 백성들이 다 죽지는 않을 텐데, 농사철이 이미 늦었으니 어떻게 제때 시행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 다음 날 도사와 그 밖의 여러 사람의 일행이 산음(山陰)에 이르렀다.
서애가 공의 첩장(牒狀) 및 서한을 보고는 딱한 생각이 들어서 곧바로 간절하게 주청(奏請)하니, 왕도 또한 측은하게 여겨서 주달한 것을 승락하였다. 그런 다음 풍원부원군(豐原府院君)이 그 자리에서 2만 석을 넘겨주게 하고, 호남 감사에게 공문을 보냈으나, 호남 감사가 1만 석을 감하여 보내 주었다. 이에 공이 또 최철견(崔鐵堅)에게 사람을 보내어 여러 고을에 나누어 매기지 말고 다만 남원(南原)과 순천(順天) 두 대부(大府)에 각각 5000석씩을 매겨서 운반하는 데 편리하게 해 달라고 청했더니, 최철견이 마지못해 이에 따랐다. 이때 전 좌랑(佐郞) 박이장(朴而章)이 또한 종사관(從事官)으로서 막하에 있었으므로, 공이 말하기를, “박 종사(朴從事)는 남원으로 가고, 이 종사(李從事)는 순천으로 가서 잘 살펴보고서 운반해 오라.” 하였다.
묵은 지 5일 만에 진양(晉陽)으로 가니, 사방으로 떠돌아다니는 굶주린 백성들이 쑥대머리에 귀신 얼굴을 해 가지고서 길가로 마중나온 자가 대략 수천 명이나 되었는데, 울면서 절하고 감사해하면서 축수하고는 말하기를, “아버지시여 어머니시여, 우리를 건져 주고 우리를 살려 주셨습니다. 공이시여, 만복을 누리시고 백세토록 장수하소서.” 하였다. 이보다 앞서 진주 목사 서예원(徐禮元)에게 신칙해서 진제장(賑濟場)을 설치하여 굶주린 백성들을 구호하게 하였는데, 고을에 이르러서 다시금 그 영을 신칙하니, 고을 사람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더욱더 일에 힘썼다.
공은 매일같이 성을 순시하고 마루와 성첩을 살펴보면서 수리하였다. 항상 뒤로 물려서 쌓은 새 성이 튼튼하지 못한 것을 걱정하여, 세 곳을 택해 포루(砲樓)를 세우고 사대(射臺)도 많이 설치하였으며, 호(壕)를 파서 성 밑에 돌리고 물을 끌어들여 깊게 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리고는 뒤를 따르는 여러 사람들을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사람의 소견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다. 높은 언덕에 튼튼하게 쌓은 성을 헐고 진흙의 땅에 물려 쌓아서 왜적으로 하여금 시렁을 얽어 굽어보면서 쳐들어오기에 쉽게 하였으니, 이것 또한 운수인 것이다.” 하였다. 날마다 새로 세운 북문(北門)의 누각 위에 앉아서 군사를 사열하고 사격을 연습하게 하였다.
이때 역질(疫疾)이 창궐하기는 곳곳이 다 마찬가지였는 데다가 공에게 굶주림을 구호해 주기를 바라서 사람들이 모두들 성 안으로 모여든 탓에, 신음하는 소리가 귀에서 끊이지 않고, 굶주림에 아우성치는 형상이 항상 눈앞에 가득 찼다. 이에 공이 갈근탕(葛根湯)을 써서 앓는 이를 구제하게 하고, 모든 수단을 다해 죽을 쑤어서 굶주린 사람들을 구제하게 하였다. 막하의 여러 사람들이 공에게 간하기를, “하늘의 운행이 조화를 잃고 괴상한 기운이 가득 차서 이에 부딪치는 자는 죽고 범한 자는 병드는 판국입니다. 비록 깊은 방에 있더라도 호령(號令)을 시행할 수 있을 것이니, 문루(門樓)에 나와 앉아있지 마십시오.” 하자, 공이 사례하면서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천명에 달린 것이다.” 하면서, 듣지 않았다.
진주 판관(晉州判官) 성수경(成守慶)을 시켜서 무기를 전담해 다스리되, 조총(鳥銃)을 많이 만들게 하고, 또 화전(火箭)을 많이 만들라고 명령하였다.
남원의 곡식은 함양(咸陽), 산음(山陰), 삼가(三嘉), 합천(陜川) 등 고을로 하여금 소와 말로 번갈아 가면서 실어다가 지례(知禮), 금산(金山), 개령(開寧), 성주(星州), 고령(高靈)의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고, 순천(順天)의 곡식은 진주(晉州), 하동(河東), 곤양(昆陽), 남해(南海), 사천(泗川), 고성(固城), 거제(巨濟) 등의 고을로 하여금 배에 싣고 바다로 운반해서 사천, 거제, 고성, 함안, 단성, 진주 지방의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였다. 비록 넉넉히 나누어 주지는 못하였으나, 때맞추어서 종자를 뿌리게 하니, 황폐해진 고을의 백성들이 다 죽어 넘어지는 지경에 이르지 않고, 차츰차츰 안집하여 오늘날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이것은 모두가 공의 덕분이었다.
○ 공은 명령을 받들고 온 뒤로 능히 왜적을 소탕해 요기(妖氣)를 맑게 하지 못하여 나라의 은혜를 저버리게 될까 두려워하였다. 이에 밤낮없이 노심초사하느라 심열(心熱)이 몹시 중하였는데, 이때에 와서는 내상(內傷)에 감기 기운이 겹친 데다가 역질 기운마저 이를 틈타 파고들어 4월 19일부터 두통을 앓기 시작하여 점차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이노와 박성이 항상 곁을 떠나지 않고 있으면서 약과 미음을 올렸는데, 공은 그것을 물리치면서 말하기를, “나는 약을 마신다고 해서 살아날 사람이 아니다. 그대들은 그만두라.” 하였다. 박성이 그래도 강권해 마지않았다. 진주 고을의 늙은 의원인 김남(金南)이 와서 진맥한 다음 말하기를, “다시는 약을 드리지 마십시오. 병은 다스릴 수 없습니다. 목숨은 시운(時運)에 관계되는바, 하늘의 뜻이니 어찌하겠습니까.” 하니, 박성이 말하기를, “비록 그런 줄은 알지만 어찌 차마 약을 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때 공의 아들 김역(金湙) 역시 역질에 걸려 서편 방에서 앓고 있었는데, 공은 병세의 더하고 덜함은 묻지 않은 채 항상 두 사람에게 말하기를, “명 나라 군사들이 오래지 않아서 경내에 이를 텐데, 어떻게 지공할 것인가? 그대들은 힘쓰라.” 하였다. 병이 위독할 때에는 혼미해서 의식이 없는 가운데에서도 입을 움직이면서 가냘픈 말로 쉴새없이 말을 하였는데, 하는 말들이 모두 나랏일 아닌 것이 없었다. 때로는 간혹 목을 빼어 큰소리로 말하기를, “명 나라 군사들은 이미 도착하였는가? 주둔해 있는 왜적들은 이미 도망쳤는가?” 할 뿐, 시종 집안일에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공의 측실 부인이 자녀를 거느리고 서울에서 내려와 곤양(昆陽)의 경내에 있는 사위의 집에 와서 살고 있었는데, 여종을 보내어 병문안을 하려고 하자, 공은 손을 내저으면서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였다.
4월 그믐날에 공이 졸(卒)하였다. 이노가 박성 등과 함께 곡하고 염하였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서 김역 또한 죽었다. 박성은 고을에 머물러 있으면서 관 짜는 것을 감독하고, 이노는 두류산(頭流山) 밑에 들어가서 임시로 장례지낼 묘혈을 파는 일을 감독하였다. 3일 뒤에 박성이 단성 현감(丹城縣監) 조종도(趙宗道)와 함께 관을 호송하고 이르러 그날로 장사를 마쳤다. 그리고는 세 사람이 모두 손을 잡고는 사모하는 마음에 머뭇거리면서 차마 떠나지 못하다가 해가 저물어서야 서로 목놓아 오래도록 통곡한 다음 흩어졌다.
○ 온 도내의 선비와 백성들이 공의 초상을 듣고서는 골육지친의 부고를 받은 것처럼 모두들 하나같이 애통해하고 아까워하면서 말하기를, “충신(忠臣)이 갔고, 열사(烈士)가 죽었으니, 절의(節義)는 장차 누구에게 의탁하며, 국가는 장차 누구를 믿을꼬.” 하였다.
성 안과 성 밖에서 구호해 주기를 바라던 유랑민들이 10명, 100명씩 떼를 지어 울고 흐느끼면서 쓰러진 채 슬피 통곡해 목쉰 소리가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였으며, 사방으로 흩어져 떠나가면서 말하기를,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무심해서 우리의 어버이를 빼앗아 가는가. 이미 모두 다 끝났으니, 명이 다 되었다.” 하였다. 길에서 이 소식을 듣는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눈물을 흘리고 서로 상심하였다.
○ 도헌(都憲) 김늑(金玏)이 공을 대신하여 직책을 맡았다. 이해 6월 그믐날에 왜적이 진양을 함락하였다. 명 나라 군사들이 새재[鳥嶺]를 넘어왔다. 총병(總兵) 유정(劉鋌)이 합천(陜川)에 주둔하고, 참장(參將) 낙상지(駱尙志)가 거창(居昌)에 주둔하니, 온 나라 안이 흉흉하고 온 도내가 허둥지둥하여 공을 고향에 반장(返葬)할 겨를이 없었다. 좌도 순찰사(左道巡察使) 한 상국 효순(韓相國孝純)이 좌도와 우도를 합하여 겸직하면서 동지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방백(方伯)으로 있으면서 차마 객사(客死)한 사순(士純)의 관을 고향으로 반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반장하지 않는다면 지하에서 사순을 만나볼 면목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는 본부와 이웃 고을에 명령하여 편의에 따라 묘를 만들게 하고, 또 단성 현감 조종도를 상여 차사원(喪輿差使員)으로, 전 좌랑 이노를 가도사(假都事)로 삼아 그들로 하여금 보살펴서 발인(發靷)해 호상(護喪)하여 가게 하였다. 이는 조종도와 이노 두 사람이 공의 지우(知遇)를 받은 자로서, 공을 위하여 능히 마음을 다할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공의 상여가 지나는 여러 고을에서는 공의 충의에 감복하지 않은 이가 없었으므로, 난리에 분탕되었다는 핑계로 회피하지 않고 모두들 힘을 바쳤다. 그 덕분에 정한 날짜를 어기지 않고 산소에 이르러서 모월 모일에 장사 지냈다.
○ 공의 맏아들인 김집(金潗)이 분상(奔喪)하여 임시로 매장한 곳 곁에서 여묘살이를 하였다. 이때는 바야흐로 왜적들이 한창 겁략할 때였으므로, 서모(庶母)와 서제(庶弟)인 김잠(金潛) 등을 데리고 지리산 골짜기로 피하였는데, 여러 차례 급박한 상황을 만나 거의 벗어날 수가 없었는데도 끝내 왜적들에게 해를 당하지 않았다. 그리고 왜적들이 공의 묘소에 이르러서는 묘소의 용미(龍尾) 부분을 몇 촌 파다가는 그만두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말하기를, “방장산(方丈山)의 신령께서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도와주는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이지, 사람의 힘으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하였다. 그러니 밝고 밝은 복을 그 어찌 속일 수 있겠는가.

현대부(賢大夫)의 고사(故事)에 대해서는 태사(太史)의 기록이 있고 태상시(太常寺)의 행장(行狀)이 있어서 매몰되어 없어지지 않게 한다. 그러나 공의 이때의 행적은 태사가 다 기록하지 못하고 태상시에서 행장을 지을 겨를이 없었다. 그런 데다 비석(碑石)에 새기고 지석(誌石)에 기록한 것도 혹 없어져서 증거로 삼을 바가 없게 되니, 학(鶴)을 그리려다가 두루미를 만드는 것이나마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학문(學問)은 연원(淵源)이 있어서 능히 스승을 얻었고, 행실(行實)은 가정에서 드러나 아버님의 뜻을 어기지 않았으며, 절의(節義)가 세상에 동한 것은 빼어난 기운을 타고나서이고, 나라를 위하여 온 힘을 쏟다가 죽은 것은 천성(天性)에서 나온 것이다. 문장(文章)이야 여사(餘事)였지만 한유(韓愈)와 두보(杜甫)에게서 나와 영원토록 썩지 않을 것이고, 아름다운 이름은 산악(山岳)과 나란하여 영원토록 전해질 것이다.
황명(皇明) 만력(萬曆) 25년(1597, 선조 30) 정유년 3월 하한(下澣)에 문수산인(文殊山人)은 삼가 기록한다.


[주C-001]학봉 선생(鶴峯先生)의 용사사적(龍蛇事蹟) : 역문의 ○ 표시는 원문에는 없으나, 독자의 편의를 위하여 《용사일기(龍蛇日記)》에 따라 넣었다. 이하도 같다.
[주D-001]공과 …… 되었는데 : 원문에는 이 부분이 ‘여공홀지(與公忽地)’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용사일기》에 의거하여 ‘여공홀치(與公忽値)’로 바로잡았다.
[주D-002]공사(公私)의 재물은 : 원문에는 ‘공사개장(公私蓋藏)’으로 되어 있으나, 뜻이 통하지 않아 《용사일기》에 의거하여 ‘공사축장(公私蓄藏)’으로 바로잡았다.
[주D-003]수공(首功)을 …… 진(秦) 나라 : 수공은 적병의 목을 베어오는 공을 말한다. 진 나라의 법제(法制)에는 적병의 목을 헤아려서 목 1개당 자급 1등급을 올려 주었다. 뒷날에 적병의 목을 수급(首級)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에서 생긴 말이다. 《사기》 노중련열전(魯仲連列傳)에, “저 진 나라는 예의를 버리고 수공(首功)을 으뜸 공으로 삼는 나라이다.” 하였다.
[주D-004]노련(魯連)은 …… 하였다 : 노련은 노중련(魯仲連)으로, 제(齊) 나라의 장수이다. 일찍이 조(趙) 나라에 머물러 있을 적에 진 나라가 조(趙) 나라를 공격해 와서 정세가 위급하였다. 그때 위(衛) 나라에서 조 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진 나라 왕을 황제(皇帝)로 추대하여 군대를 철수시키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노중련이 진 나라는 예의를 버리고 살인만을 일삼는 무도한 나라임을 역설하면서, 만약 진 나라가 칭제(稱帝)한다면 자신은 동해(東海)에 빠져 죽을 것이라고 하여 그 일을 중지시켰다. 《史記 卷83 魯仲連列傳》
[주D-005]당(唐) 나라의 …… 울었는데 : 흥원(興元)은 당 나라 덕종(德宗)의 연호이다. 덕종 때 반적(叛賊) 요영언(姚令言)과 주자(朱泚)가 황제를 참칭(僭稱)하고 수도 장안(長安)을 침범하였으므로, 덕종이 봉천(奉天)에 피난해 있으면서 흥원 원년에 자신을 죄책(罪責)하는 조서를 반포하여 장사(將士)들을 격려하였다. 그러자 이성(李晟) 등이 그 조서를 보고는 감격하면서 용기를 내어 적병을 쳐 장안을 수복하였다. 《舊唐書 卷133 李晟列傳》
[주D-006]유차달(柳車達) : 고려 태조 때의 공신으로 문화 유씨(文化柳氏)의 시조이다. 태조 때 군량 수송에 공을 세워서 대승(大丞)에 제수되었으며, 삼한공신(三韓功臣)의 호를 받았다. 《高麗史 卷99 列傳 12》
[주D-007]원충갑(元冲甲) :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의 무신이다. 향공진사(鄕貢進士)로 원주(原州)의 별초(別抄)에 소속되어 있다가 충렬왕 17년(1291)에 합단(哈丹)이 쳐들어와 성을 포위하자, 전후 10차례에 걸쳐서 적을 크게 무찔러 성을 지켜 후세에까지 무명(武名)을 남겼다. 《高麗史 卷104 列傳 17》
[주D-008]신포서(申包胥)의 충성 : 신포서는 춘추 시대 초(楚) 나라의 대부(大夫)로, 성은 공손(公孫)인데, 신(申) 땅에 봉작되었으므로 신포서라고 한다. 오자서(伍子胥)와 더불어 친하게 지냈는데, 오자서가 오(吳) 나라로 도망치면서 신포서에게, “내가 초 나라를 전복시킬 것이다.” 하자, 신포서가 “그대가 초 나라를 전복시키면 내가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이다.” 하였다. 그 뒤에 오자서가 오 나라의 군사를 이끌고 초 나라의 수도인 영(郢)에 침입하자, 진(秦) 나라에 가서 구원병을 청하였는데, 7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고 조정의 담에 기대어서 통곡하였다. 그러자 진 나라의 애공(哀公)이 감동하여 구원병을 내어주므로, 그 군사를 거느리고 돌아와서 국난을 평정하였다. 《淮南子 修務訓》
[주D-009]장순(張巡)의 충렬 : 당(唐) 나라 현종(玄宗) 때의 충신이다. 천보(天寶) 연간에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처음에 진원 영(眞源令)으로 있으면서 백성들을 인솔하고 당 나라의 시조인 현원 황제(玄元皇帝)의 묘(廟)에 나아가 통곡한 다음 기병(起兵)하여 반란군을 막았다. 그 뒤에는 강회(江淮)의 보장(保障)인 수양성(睢陽城)을 몇 달 동안 사수하고 있었는데, 구원병이 오지 않아 양식은 다 떨어지고 힘은 다 소진되어 성이 함락되었다. 그러자 태수(太守)로 있던 허원(許遠)과 함께 사절(死節)하였다. 《舊唐書 卷187 張巡列傳》
[주D-010]인재가 …… 하였지만 : 원문에는 ‘승핍취용(承乏取勇)’으로 되어 있는데, 두주(頭註)에, “용(勇)은 용(用)인 듯하다.” 하였다.
[주D-011]은혜와 …… 펴라 : 원문에는 ‘은위병시(恩威並施)’로 되어 있는데, 두주(頭註)에, “시(施)는 행(行)일 듯하다.” 하였다.
[주D-012]장순(張巡) : 당(唐) 나라 현종(玄宗) 때의 충신이다. 천보(天寶) 연간에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처음에 진원 영(眞源令)으로 있으면서 백성들을 인솔하고 당 나라의 시조인 현원 황제(玄元皇帝)의 묘(廟)에 나아가 통곡한 다음 기병(起兵)하여 반란군을 막았다. 그 뒤에는 강회(江淮)의 보장(保障)인 수양성(睢陽城)을 몇 달 동안 사수하고 있었는데, 구원병이 오지 않아 양식은 다 떨어지고 힘은 다 소진되어 성이 함락되었다. 그러자 태수(太守)로 있던 허원(許遠)과 함께 사절(死節)하였다. 《舊唐書 卷187 張巡列傳》
[주D-013]안호경(顔杲卿) : 당 나라 현종(玄宗) 때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을 때 안녹산이 사사명(史思明)으로 하여금 상산군(常山郡)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때 성을 지키고 있던 위위경(衛尉卿) 안호경이 군사가 적어 성이 함락되면서 사사명의 포로가 되었는데, 동도(東都)로 끌려가서는 안녹산을 크게 꾸짖다가 처형당했다. 《舊唐書 卷187 顔杲卿列傳》
[주D-014]원근에서 메아리치듯 호응하였으니 : 원문에는 ‘원근향응(遠近嚮應)’으로 되어 있는데, 두주(頭註)에, “향(嚮)은 향(響)일 것이다.” 하였다.
[주D-015]돌아오는 …… 바 : 《주역(周易)》 복괘(復卦)에, “돌아오는 길을 잃었으니 흉하다.[迷復 凶]” 하였다.
[주D-016]절제(節制)를 …… 여기고서 : 원문에는 ‘내절제지수 부당재위성중(乃節制之帥 不當在圍城中)’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용사일기》에 의거하여 ‘위절제지수 부당재위성중(謂節制之帥 不當在圍城中)’으로 바로잡았다.
[주D-017]윤기의 …… 칭송하고 : 원문에는 ‘칭기용(稱其勇)’으로 되어 있는데, 두주에, “기(其)는 아마도 기(箕)일 것이다.” 하였다.
[주D-018]왜적들이 …… 있으니 : 원문에는 ‘적불감규유강면(賊不敢窺覦江面)’으로 되어 있는데, 《용사일기》에 의거하여 ‘적불감규유강서(賊不敢窺覦江西)’로 바로잡았다.
[주D-019]산음(山陰)에서 : 원문에는 ‘향산음(向山陰)’으로 되어 있는데, 《용사일기》에 의거하여 ‘자산음(自山陰)’으로 바로잡았다.
[주D-020]도리어 …… 올렸습니다 : 원문에는 ‘포장지주반(褒獎之奏反)’으로 되어 있는데, 《용사일기》에 의거하여 ‘포장지주반상(褒獎之奏反上)’으로 바로잡았다.
[주D-021]성상의 귀를 속이고 : 원문에는 ‘기□천청(欺□天聽)’으로 되어 있는데, 《용사일기》에 의거하여 ‘기망천청(欺罔天聽)’으로 바로잡았다.
[주D-022]반드시 저지하고 억눌러서 : 원문에는 ‘필가저억(必加沮抑)’으로 되어 있는데, 두주(頭註)에, “저(沮)는 본디 조(阻)로 되어 있다.” 하였다.
[주D-023]교자(轎子)를 타고 왔다 : 원문에는 ‘승교하래(乘轎下來)’로 되어 있는데, 두주에, “교(轎)는 본디 교(橋)로 되어 있다.” 하였다.
[주D-024]그리고는 …… 뵙고는 : 원문에는 ‘부어입알(負於入謁)’로 되어 있는데, 《용사일기》에 의거하여 ‘부어인입알(負於人入謁)’로 바로잡았다.
[주D-025]선생이 하는 일들을 : 원문에는 ‘범소시장(凡所施張)’으로 되어 있는데, 두주에, “시(施)는 아마도 시(弛)일 듯하다.” 하였다.
[주D-026]누가 …… 것인가 : 원문에는 ‘수제기구(誰濟其咎)’로 되어 있는데, 《용사일기》에 의거하여 ‘수집기구(誰執其咎)’로 바로잡았다.
[주D-027]진주의 살천창(薩川倉)이 어떻겠는가 : 원문에는 ‘진주살천창하여(晉州薩川倉何如)’로 되어 있는데, 두주(頭註)에 “살(薩)은 본디 륙()으로 되어 있다.” 하였다.
[주D-028]목사는 …… 나서 : 원문에는 ‘목사가세충효(牧使家勢忠孝)’로 되어 있는데, 《용사일기》에 의거하여 ‘목사가세충효(牧使家世忠孝)’로 바로잡았다.
[주D-029]아첨하기를 좋아하여 : 원문에는 ‘호생참간(好生讒)’으로 되어 있는데, 《용사일기》에 의거하여 ‘호생참유(好生讒諛)’로 바로잡았다.
[주D-030]지곡사(智谷寺) : 원문에는 ‘지곡사(旨谷寺)’로 되어 있는데, 《용사일기》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지곡사는 산청군 산청면 내리(內里)의 지리산 기슭에 있는 절이다.
[주D-031]이제신(李濟臣)이 …… 잡아 가두었습니다 : 이제신이 선조 11년(1578)에 진주 목사로 있으면서 토호(土豪)들의 폐단을 바로잡으려고 하다가 도리어 토호들의 모함으로 인해 병부(兵符)를 잃고 벼슬을 사임한 뒤에 향리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주D-032]유종지(柳宗智) : 원문에는 ‘유종지(柳宗旨)’로 되어 있는데, 《용사일기》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주D-033]명 나라 …… 도착하였는가 : 원문에는 ‘천병기이호(天兵其已乎)’로 되어 있는데, 《용사일기》에 의거하여 ‘천병기이지호(天兵其已至乎)’로 바로잡았다.

학봉일고 부록 제3권
 학봉김문충공사료초존(鶴峯金文忠公史料鈔存) 하
《난중잡록(亂中雜錄)》 [산서(山西) 조경남(趙慶男)]


○ 선조 23년 경인(1590) 2월에 황윤길(黃允吉)을 통신사(通信使)로 삼고, 김성일(金誠一)을 부사로 삼고, 허성(許筬)과 차천로(車天輅) 등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아 일본에 들여보내기로 하였다. 황윤길 등이 대궐에 들어가서 하직하니, 임금이 술자리를 마련하여 술을 내리면서 명하기를, “조심하고 힘써서 잘 갔다가 잘 돌아오라. 저들의 국경에 들어가서는 행동을 반드시 예로써 해야지 조금이라도 업신여기거나 깔보는 생각이 있게 해서는 안 된다. 나라의 체통이 높아지고 왕의 위광을 멀리 퍼지게 하는 것이 이번에 가는 사신들의 행차에 달려 있으니, 경들은 어김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황윤길 등이 어명을 받고 길을 떠나서 수행원 200여 인을 거느리고 동래(東萊)로 가서 바람이 불기를 기다렸다.
○ 경인년 8월에 통신사 황윤길 등이 바다를 건너 대마도(對馬島)에 도착하여 한 달이 넘도록 머물러 있었다. 학봉(鶴峯) 김성일이 산전(山前) 허성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저 성일은 산전 족하(足下)께 돈수(頓首)하나이다. - 이하 전문(全文)은 본집(本集) 제5권에 실려 있다.” 하였다.
○ 통신사 황윤길 등이 대마도에서 대판(大阪) - 일본의 관백(關白)이 도읍한 곳의 이름이다. - 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평수길(平秀吉)이 거처하는 곳에 이르러 몇 달을 머물러 있었다. 평수길이 왜승(倭僧)인 태 장로(兌長老)와 철 장로(哲長老) 등을 시켜서 답서(答書)를 만들게 하여 황윤길 등에게 보여주었다. - 이하 생략 - 그 글의 내용이 매우 참람하고 오만하였다. 이에 부사 김성일이 크게 노하여 답서를 밀치면서 말하기를, “바다는 안과 밖으로 서로 단절되어 있고, 나라는 화(華)와 이(夷)가 서로 구분이 있다. 그런데 몹시 업신여기고 오만하기가 어찌 이 지경에까지 이를 수 있단 말인가. 우리들은 한 번 죽음이 있을 뿐, 차마 이런 답서를 가지고 살아서 돌아갈 수는 없다.” 하니, 평수길이 그제서야 그 서신을 도로 가져가서 ‘합(閤)’ 자를 ‘전(殿)’ 자로 고치고, ‘봉(奉)’ 자를 ‘배(拜)’ 자로 고쳤다.
말이 충신(忠信)하고 행실이 신중하면 비록 오랑캐의 땅일지라도 통할 수 있는 법이다. 학봉이 전후로 취한 태도는 모두 바른 데에서 나온 것으로, 임진왜란 초기에 이르러서 대개 그 충절(忠節)을 볼 수가 있었다.
○ 경인년 12월에 황윤길, 김성일 등이 대판에서 나와 대마도로 왔다.

○ 선조 24년 신묘(1591) 2월에 황윤길 등이 대마도에서 바다를 건너 돌아와 탑전(榻前)에서 복명(復命)하였는데, 그들이 가지고 온 평수길의 계사(啓辭)에는 군사를 출동시킬 정상이 뚜렷하였다. 상이 왜적들의 정세에 대해 묻자, 김성일이 대답하기를, “일본은 현재 군대를 일으킬 형세가 없습니다.” 하고, 이어 물러나왔다. 일행들이 평수길의 사나운 정상을 퍼뜨리자 조정과 민간이 흉흉해하면서 두려워하였다.

○ 선조 25년 임진(1592) 4월 15일에 김수(金睟)가 진주(晉州)로부터 말을 달려 반성(班城) - 진주의 속현(屬縣)이다. - 까지 갔다가는 부산(釜山)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즉시 장계를 갖추어 치계(馳啓)한 다음, 군대를 정비하여 함안(咸安)을 거쳐 칠원(漆原)에 이르렀다. - 《경상순영록(慶尙巡營錄)》에 나온다.
이때 본도의 우병사 신길(申硈)이 이미 체직되어 조대곤(曺大坤)이 대신 맡고 있었는데, 조정에서는 조대곤이 늙었다는 이유로 김성일에게 대신 맡게 하였다.
○ 임진년 4월 20일에 경상 우병사 김성일이 병영(兵營)으로 갔다. 처음에 김성일이 왕명을 받고는 빠른 걸음으로 내려갔다. 가다가 의령(宜寧)에 도착하여 정암진(鼎巖津)을 경유해 곧바로 병영(兵營)으로 가려고 하였는데, 왜적들이 이미 낙동강 오른쪽 지방에 꽉 차 있었다. 이에 휘하의 장사(將士)들이 서로 모의하기를, “이 길은 왜적들이 있는 소굴과 아주 가까우니, 진주를 경유하여 함안으로 가 왜적들과 조금 멀리 떨어진 곳으로 돌아가느니만 못하다. 그런데 주장(主將)은 군령(軍令)이 엄하여 곧장 앞으로 나아가면서 두려워하지 않으니, 이 걸음은 위태할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는 드디어 속여서 보고하기를, “정암진에는 배가 없습니다.” 하고, 또 김성일의 아들 김역(金湙)에게 부탁하여 힘껏 간하게 하기를, “강물이 불고 배가 없으니 진주 길로 돌아가는 것이 편하겠습니다.” 하였다. 김성일이 군관 김옥(金玉)을 시켜 가서 살펴보고 오게 했는데, 김옥이 돌아와서 거짓으로 보고하기를, “배가 없어서 건너갈 수가 없으니, 진주 길로 빨리 가야겠습니다.” 하였다.
이때 전 목사(牧使) 오운(吳澐)이 촌사(村舍)에 있다가 새 병사(兵使)가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와서 배례(拜禮)하면서 말하기를, “영공(令公)께서 왔으니 군대의 사기가 배나 증가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곧바로 정암진을 건너지 않고 진주로 해서 빙 돌아가려고 하십니까?” 하니, 김성일이 깜짝 놀라면서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이 길을 와보지 않았습니다. 틀림없이 휘하 사람들이 왜적을 두려워하여 나를 속인 것입니다.” 하였다. 그리고는 즉시 직접 가서 보니, 큰 배가 언덕에 매여 있었다.
김성일이 크게 노하여 군관 김옥과 아들 김역 등을 잡아와서 사형을 집행하게 하니, 김옥이 큰소리로 외치기를, “저의 죄는 죽어 마땅합니다만, 공께서는 현재 왜적들과 대치하고 있으니, 한 번 저의 목숨을 바쳐서 속죄(贖罪)하였으면 합니다.” 하자, 김성일이 말하기를, “네가 이미 용서해 주기를 구하였으니, 앞으로 왜적을 만나거든 반드시 먼저 나가서 싸워라.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앞의 죄까지 아울러 다스려 결단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군사를 재촉하여 강을 건너서 해망원(海望原)에 도착하였다.
전 병사 조대곤(曺大坤)이 이미 이곳에 퇴각해 와 있다가 깜짝 놀라면서 맞이해 읍하였다. 그리고는 김성일에게 직인(職印)과 부절(符節)를 넘겨준 다음, 곧바로 하직하고 가려고 하였다. 김성일이 이에 준엄하게 꾸짖으면서 말하기를, “장군은 병사의 신분으로서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하지 않은 채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김해(金海)를 함락당하게 하였으니, 그 죄는 마땅히 사형에 처해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세신(世臣)으로서 나라의 후한 은혜를 받았으니, 이러한 큰 변란을 당하여서는 의리상 도망쳐서는 안 됩니다.” 하자, 조대곤이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띠면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얼마 뒤에 척후병이 와서 왜적의 선봉이 이미 도착하였다고 알리자, 조대곤이 겁에 질려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 김성일을 재촉하여 말을 타고 도망가자고 하니, 김성일이 그를 꾸짖어 저지시켰다. 그런 다음에 군사들에게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영을 내리고, 용맹한 군사를 뽑아 좌우에 복병으로 잠복시키고 왜적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뒤에 2명의 왜적이 흰 말을 타고 새의 깃으로 만든 옷을 입고 금빛 갑옷에 금빛 가면을 쓰고 왔는데, 사방에 모두 눈과 귀가 달려 있었으며, 빙글빙글 도는 답차(踏車)의 형상과도 같았다. 그들이 칼을 빼어 휘두르면서 말을 달려 앞으로 다가오자, 여러 장수와 군사들이 두려워서 벌벌 떨었는데도 김성일은 조대곤과 더불어 태연히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있었다. 왜적들은 김성일이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괴이하게 여겨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였다.
부채를 휘두르는 왜적의 보병 수십 명이 그 뒤를 따라왔는데, 김성일이 군관 20여 명을 시켜 앞으로 나아가서 그들을 쏘게 하고, 또 용맹한 군사를 뽑아 돌격하게 하였으나, 모두들 서로 돌아보면서 미적거렸다. 그러자 김성일이 특별히 김옥을 불러 말하기를, “네가 전에 먼저 진격하는 공을 세우게 해 달라고 해 놓고서는 지금에 와서 회피한단 말인가?” 하니, 김옥이 즉시 앞장서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몇 리 밖에까지 쫓아가서 금빛 가면을 쓴 왜적의 기병을 쏘아 꺼꾸러뜨린 다음, 승세를 타고 뒤쫓아가서 금으로 장식한 안장, 준마, 보검 등을 빼앗아 가지고 돌아왔다.
이 싸움에서 군졸이 1000명도 못되었고 무기도 전혀 없었는데도 능히 왜적들의 예봉을 꺾었으므로, 이로 말미암아서 군대의 사기가 조금 진작되었다. 이에 곧바로 군관 원사립(元士立)과 이숭인(李崇仁)으로 하여금 적의 수급을 바치고 치계하게 하였다. 그리고는 보졸을 앞세우고 김성일이 맨 뒤에서 말고삐를 조여잡고 천천히 갔다.
이날 밤에 함안(咸安)으로 진을 옮겨 내지(內地) 지역을 수습하려고 했는데, 나명(拿命)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 《경상순영록》에 나온다. 충분(忠憤)에 격동되어 사졸들이 목숨을 내놓고 죽기를 각오하고 힘껏 싸우니, 강한 왜적들이 지탱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그 당시의 장수와 군사들은 어찌하여 이를 거울삼지 아니했던가.
○ 임진년 4월 22일에 김성일이 나명(拿命)으로 인해 길을 떠났다. 이보다 앞서 김성일이 일본에서 돌아와 탑전(榻前)에서 아뢰기를, “일본은 현재 군대를 움직일 정세가 없습니다.” 하였다. 그 뒤에 사변이 일어나자, 임금이 앞서 아뢴 말의 책임을 추궁하여 이 나명이 있었던 것이다.
김성일은 나명이 장차 도달할 것이라는 소문은 들었으나, 길이 막혀서 아직 도달되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상의 전지는 아직 내려오지 않았고, 큰 적은 앞에 닥쳐 있는데, 병사가 어찌 쉽사리 진영을 버려서야 되겠습니까?” 하니, 김성일이 말하기를, “임금의 명령을 오래 지체시켜서는 안 된다.” 하고는, 즉시 길을 떠났다. 이날 우후(虞候) 이협(李俠)이 군기(軍器)를 연못 속에 가라앉히고 창고를 불태우고서 도망쳤으며, 창원 부사(昌原府使) 장의국(張義國)도 성을 버리고 달아나버렸다.
김성일이 올라가는 도중에 김수(金睟)가 나와서 체포되어 가는 것을 위로하니, 김성일은 그런 기색을 조금도 보이지 않은 채 단지 말하기를,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영공께서는 힘써 왜적을 토벌해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그러자 영리(營吏)들이 서로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체포되어 가는 것은 근심하지 않고 나랏일만을 걱정하니, 참으로 충신이다.” 하였다. 조대곤이 용서를 받아 다시 병사가 되었다. - 《경상순영록》에 나온다.
○ 임진년 5월 4일에 영남 초유사(嶺南招諭使) 김성일이 남원(南原)에 도착하였다. 김성일이 처음에 나명을 받고 직산(稷山)까지 갔다가 용서를 입어 다시 초유사의 명을 받았는데, 그때서야 조정이 서쪽으로 파천(播遷)했다는 말을 듣고는 통곡하면서 돌아왔다. - 《경상순영록》에 나온다.
○ 임진년 5월 5일에 영남 초유사 김성일이 함양(咸陽)을 향하여 갔다. 본도 순찰사 김수(金睟)가 함양에서 운봉(雲峯)으로 가다가 길에서 초유사를 만났는데, 초유사가 말하기를, “지방을 맡은 신하는 마땅히 죽더라도 지방을 지켜야 하는데, 어찌하여 이곳까지 왔단 말입니까? 온 도를 다 잃는데 구하지 못했으면서 혼자서 말을 타고 멀리 와보았자 능히 구제할 수가 있겠습니까? 영공께서는 빨리 돌아가십시오.” 하니, 김수가 함양으로 돌아갔다가 이어 안음(安陰)으로 갔다.
김성일이 함양에 이르니, 군수 이각(李覺)이 혼자 텅 빈 관아에 앉아 있었으며, 늙은 아전 몇 명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김성일이 군수를 독려하여 고을 사람들을 불러모으게 하자, 함안(咸安)의 전 현감 조종도(趙宗道)와 전 직장(直長) 이노(李魯) 등이 모두 와서 모였다. 김성일이 그 자리에서 곧바로 격문(檄文)을 초(草)하였다. - 이하 격문의 본문은 문집 제3권에 실려 있다.
○ 처음에 김성일이 문사(文士)로 하여금 격문을 초하게 했으나, 마음에 들지 않았으므로 자신이 직접 지었는데, 말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와 붓을 먹물에 적실 겨를도 없었다. - 《경상순영록》에 나온다.
○ 임진년 5월 20일에 김성일이 함양에서 산음에 도착하니, 현감 김낙(金洛)이 김성일을 환아정(換鵝亭)에서 묵게 하고는, 다반(茶盤)을 성대하게 차려서 바쳤다. 그러자 김성일이 낯빛을 달리하면서 김낙을 불러 꾸짖기를, “이런 성찬은 신하로서 오늘날 차마 먹을 수 없다. 비록 먹는다 하더라도 음식이 목구멍에 걸려서 내려가지 않을 것이다.” 하니, 김낙이 부끄러워하면서 사과하고 물러갔다.
그 고을 사람인 오장(吳長)과 의령 사람인 이지(李旨), 단성(丹城) 사람인 김경근(金景謹)이 모두 칼을 잡고 김성일을 맞이해 뵈었는데, 김성일이 오장 등에게 말하기를, “여러 유생들이 은근하게 찾아왔으니 반드시 기이한 계책이 있을 것이다. 한마디 말을 들었으면 한다.” 하니, 김경근이 말하기를, “김수(金睟)를 목베지 않으면 대의(大義)를 펴서 나라를 회복시키는 공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김성일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두라. 그래서는 일을 성공시킬 수 없다.” 하였다. 김낙이 군사 800여 명을 모았다. - 《경상순영록》에 나온다.
○ 흉악한 왜적들이 진해(鎭海), 고성(固城) 등지를 분탕질하니 본도 우수사(右水使) 원균(元均)이 퇴각하여 남해(南海) 노량(露梁)에 진을 치고 전라도 수군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적병들이 진주를 향하여 간다고 큰소리치자, 진주 목사 이경(李璥)과 판관 김시민(金時敏)이 지리산으로 도망쳐서 적병을 피해 숨었다. 김성일이 이 소식을 듣고는 말을 달려가 진주에 도착하니, 온 고을 안이 텅 비어 있었다. 판관은 김성일이 진주로 온다는 기별을 듣고 미리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으나, 이경은 병을 핑계 대고 나오지 않았다. 이에 김성일이 명령을 전하여 그를 나오라고 하였는데, 이경은 등창이 나서 죽어버렸다.
김성일이 김시민으로 하여금 군사 수천 명을 정돈시켜 대오를 나누어 성을 지키게 하는 한편, 전 군수 김대명(金大鳴)을 소모관(召募官)으로 삼고, 손승선(孫承善)을 수성유사(守城有司)로 삼고, 허국주(許國柱)와 정유경(鄭惟敬)을 복병장(伏兵將)으로 삼았으며, 하천서(河天瑞)로 하여금 군량(軍糧)을 맡게 하고, 강기룡(姜起龍)으로 하여금 군기(軍器)를 정돈하게 하였다. - 《경상순영록》에 나온다.
○ 적병이 고성(固城)으로부터 사천(泗川)에 와서 주둔하고는 장차 진주를 침범하려고 하였는데, 김성일이 군관 중에서 용감하고 건장한 사람 10여 명을 시켜 남강(南江)을 건너가 쳐서 쫓게 하니, 왜적들이 이에 물러갔다. 또 군사를 나누어 진격하여 사천성 아래에 가까이 다가가서 왜적들이 나무하고 물 긷는 길을 끊어 버리자, 왜적들이 퇴각하여 고성으로 되돌아갔다.
또 전 군수 김대명(金大鳴)을 도소모관(都召募官)으로 삼아 생원 한성(韓誠)ㆍ정승훈(鄭承勳)과 함께 군사 600여 명을 모집한 다음, 고성의 의병장(義兵將) 최강(崔堈) 등과 군사를 합쳐서 적을 유인하기도 하고 복병을 매복시켜 밤중에 공격하게 하기도 하니, 얼마 안 되어 왜적의 무리가 무너져서 웅천(熊川)과 김해(金海) 등지로 달아났다. 김대명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창원의 마산포(馬山浦)에 들어가서 진을 쳤다. - 《경상순영록》에 나온다.
○ 각도 사림(士林)의 의병을 일으키는 격문이 빈번하게 나돌았다. - 이로부터 국가의 명맥이 점차 활발하게 떨쳐 일어나는 기운이 있었다.
○ 초유사가 통유문(通諭文)을 내기를,
“해적이 함부로 날뛰면서 우리의 성지(城池)를 공격해 함락시키고 우리의 인민을 도륙하였다. 그리고는 동서(東西)로 충돌하면서 무인지경에 들어오듯이 거침없이 쳐들어왔다. 그런데도 우리 경상도의 67개 고을 중에서 일찍이 한 사람의 의사(義士)도 대의(大義)를 선창하여 군사를 일으켜 나라의 치욕을 씻는 자가 없어서, 가만히 앉은 채로 온 도를 왜적들의 손에 넘어가게 하였다. 이에 종사(宗社)가 깃술보다 위태롭게 되었고, 정기(正氣)라고는 씻은 듯이 없어져, 산하(山河)가 수치심을 품게 되었다. 그러니 무릇 혈기가 있는 사람치고 그 누구인들 통분스럽게 여기지 않겠는가.
당직(當職)은 왕명을 받들고 이 지방에 도착하여 눈물을 뿌리면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이 왜적들과는 한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살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그러나 이미 여러 고을이 무너진 데다 병력은 이미 꺾여진 터이니, 맨주먹을 휘두르면서 시퍼런 칼날을 무릅쓴 채 홀로 서서 강개한들 어찌 하겠는가.
어렴풋이 듣건대, 족하께서는 민간에서 떨쳐 일어나 의병을 불러모아 강중(江中)에서 왜적의 선척을 섬멸해 대의의 명성을 한 고장에 퍼지게 함으로써,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들 기운을 돋우었다고 한다. 그러니 선대부(先大夫)께서는 후손다운 후손을 두었다고 하겠다. 그 뜻을 관철하도록 힘쓰면서 더욱더 의병을 많이 일으켜, 역내(域內)에 있는 강포한 왜적들을 도륙하고 도탄에 빠진 생민을 구제하라. 그리하여 위로는 군부의 원수를 갚고, 아래로는 충효의 가문을 빛낸다면, 또한 통쾌하지 않겠는가.
당직은 비록 노둔하고 용렬하기는 하지만, 충의는 천성에 뿌리박고 있어서 한 번 죽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 일에 있어서는 감히 남에게 뒤지지 않는다. 이에 동지를 규합하여 의열(義烈)로써 격려한 다음, 족하 등과 더불어서 손을 맞잡고 서로 도와 나라를 중흥시키는 큰 공로를 함께 이루고자 하는데, 족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살아서는 충의로운 선비가 되고, 죽어서는 충의로운 귀신이 되도록 족하께서는 힘쓰기 바란다.”
하였다. - 이상은 의령의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에게 내린 것이다.
○ 임진년 6월 6일에 박진(朴晉)을 경상 좌병사로 삼았다. 이때 박진이 김수(金睟)의 근왕(勤王)하는 군사를 따라서 온양(溫陽)까지 갔다가 왕명을 받고 다시 내려와서 경상도에 도착하였는데, 사천(泗川), 하동(河東), 곤양(昆陽), 진주(晉州) 등지의 왜적들의 기세가 한창 강성하였기 때문에 낙동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김성일이 우도에 있으면서 공문을 보내어 이르기를,
“장군께서는 삼가 포상하는 어명을 받아 병권(兵權)을 잡고 변방에 내려왔으므로, 위세와 명성이 이미 드러나서 온 도의 사람들이 간성(干城)처럼 믿고 있으나, 현재 좌도의 길이 막히고 끊어져서 위무(威武)를 쓸 길이 없는 상태입니다. 현재 진주는 장차 왜적들의 침공을 당하게 되어 형세가 매우 위급합니다. 당직의 수하에 비록 1000명의 병졸이 있지만, 백발 서생인 저는 군대의 일에 익숙하지 못하니, 어찌 능히 공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장군께서 만약 단기(單騎)로라도 이곳으로 온다면, 의병을 모두 장군의 휘하에 맡길 생각입니다.
좌병사와 우병사가 안팎에서 서로 호응하여 사천에 남아 있는 왜적들을 토멸함으로써 거진(巨鎭)인 진주를 보전하여 내지를 지키는 일이 장군께서 발 한 번 내딛는 사이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장군께서는 좌도와 우도의 책임이 다르다는 이유로 핑계를 삼지 말고, 종전에 품었던 자신을 잊고 국난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겠다던 뜻을 실현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 《경상순영록》에 나온다.
○ 임진년 6월 15일에 전라 감사 이광(李洸)이 김수와 더불어서 전주(全州)로 도망쳐 돌아왔다가 김수는 곧바로 함양(咸陽)으로 향해 가고, 이어 거창(居昌)에 도착하였다. 그때 김성일 역시 본현(本縣)에 머물러 있었다.
임진년 6월 17일에 곽재우가, 김수가 경상도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몹시 통분하면서 말하기를, “당초에 왜적들이 쳐들어왔을 적에는 조금도 방어할 계책이 없었고, 지금 근왕(勤王)함에 이르러서는 나라를 위해 죽어야 한다는 의리를 몰랐다. 그러고서도 우리 도에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고 감히 뻔뻔스럽게 얼굴을 들고 다시 왔다. 내가 군사를 출동시켜 먼저 그를 치겠다.” 하였다. 그러다가 초유사 김성일이 준열하게 꾸짖자, 이에 그쳤다.
○ 임진년 6월 17일에 초유사 김성일이, 곽재우가 충렬한 인물인데도 모함을 당하는 것을 원통하게 여겨, 그의 무죄를 밝히고자 치계하기를,
“의령 사람 곽재우가 군사를 일으켜 왜적을 토벌한 일에 대해서는 이미 누차 계달하였습니다. 지금 의외의 변고가 뜻밖에 나왔는데, 적절히 조처할 방도를 모르겠으니, 몹시 걱정스럽습니다.
곽재우는 바로 고(故) 통정대부(通政大夫) 곽월(郭越)의 아들이며,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손자 사위로서, 중간에 무학(武學)을 배우다가 이를 버리고 글을 읽었습니다. 그의 사람됨은 단순하고 꾸밈이 없으며, 거상(居喪)함에 있어서 극진히 슬퍼하여 향리(鄕里)에서 자못 효행을 칭송하였습니다.
변란이 처음 일어났을 때 병사와 수사가 잇달아 도주하고, 왜적들이 밀양(密陽)을 범하게 되자, 감사 김수는 절제하는 장수가 포위된 성 안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여기고서 영산(靈山)으로 퇴각해 있다가 곧바로 초계(草溪)로 향하였습니다. 그러자 곽재우가 분연히 일어나서 말하기를, ‘병사와 수사가 도망하였는데도 처형을 하지 않았다. 그러고서 지금은 또 왜적들이 좌도(左道)에서 나오고 있는데도 초계로 퇴각해 달아났다. 그러니 감사 역시 베어 죽이는 것이 옳다.’ 하고는, 칼을 잡고 여러 길목에서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향리 사람들이 극력 말리므로 중지하였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뒤에 우병사 조대곤(曺大坤) 및 방어사(防禦使), 조방장(助防將), 수령(守令) 등이 모두 풍문만 듣고 무너져서 달아난 탓에, 열흘 사이에 왜적이 서울의 대궐을 범하였습니다. 그러자 곽재우는 팔뚝을 걷어붙이고 의분에 못 이겨 말하기를, ‘이런 무리들은 왜병을 호위하여 서울로 들어가 군부에게 화를 끼친 것이니, 모두 베어 죽여야 한다.’ 하면서,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항상 큰소리쳤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하루아침에 자기 집 재산을 흩어 장사들을 모집하니, 그의 첩이 ‘어찌하여 이러한 개죽음을 하려고 하십니까.’ 하면서 말리자, 곽재우는 몹시 노하여 칼을 빼어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처자식의 의복조차도 군졸의 처자식들에게 다 내주었으므로, 가업이 이로 인해 탕진되어 굶주림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이에 그의 매부인 허언심(許彦深)의 집에 처자식을 맡긴 다음, 모집한 장사들을 거느리고 가면서 왜적을 치겠다고 큰소리치자, 향리 사람들이 듣고는 모두들 미쳤다고 하였습니다.
그때는 벌써 의령과 초계 두 고을은 모두 왜적들이 휩쓸고 지나가 텅 비어 있었으며, 의령의 관고(官庫)가 불에 타버린 탓에 곽재우의 군사는 식량이 없었습니다. 이에 초계와 신반현(新反縣)의 창고 곡식을 내어 군사에게 먹였는데, 합천 군수(陜川郡守) 전현룡(田見龍)이 도둑이라고 논하여 병사에게 보고하니, 병사가 체포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의병에 응모하였던 자들이 그 말을 듣고는 뿔뿔이 흩어지려고 하였습니다.
신이 그 지방에 도착한 처음에 즉시 글을 보내서 그를 부르자 군위(軍威)가 다시 진작되었습니다. 그로부터 곽재우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줄곧 왜적을 쳤는데, 적의 많고 적음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앞장서서 힘차게 돌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거느린 전사들이 용기백배하여 누구나 할 것 없이 일당백의 용사가 되었습니다. 싸울 때에는 반드시 붉은 비단으로 만든 철릭(帖裏)을 입고 당상관의 전립(氈笠) 차림을 하고서, 스스로를 ‘천강장군(天降將軍)’이라 불렀습니다.
말을 달려 적진을 유린하였는데, 오고가는 것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여 왜적들이 철환(鐵丸)을 일제히 쏘아도 맞히지 못하였습니다. 혹은 말을 타고 천천히 가서 행군하는 절도로 삼기도 하였으며, 혹은 사람을 시켜 피리도 불고 호루라기도 불게 하여 두려워하는 뜻이 없음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때로는 숲 속에 의병(疑兵)을 많이 풀어놓고 피리도 불고 북도 치고 하면서 떠들어대었으며, 혹은 곳곳에 복병을 숨겨놓아 고요하기가 마치 사람이 없는 듯하다가 왜적들이 이르면 갑자기 쏴 죽이기도 하였으며, 혹은 왜적의 배를 뒤쫓아가 해안에서 활을 쏘기도 하여, 어느 하루도 싸우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그는 싸우면 반드시 이겼고 왜적의 머리를 벤 것이 모든 장수 중에 가장 많았으며, 쏴 죽인 자는 그 숫자를 알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에 왜적들도 그를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고 부르면서 감히 해안에 올라와 도둑질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의령(宜寧), 삼가(三嘉) 두 고을의 백성들은 모두 생업에 편안하여 농사에 힘써서 평소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도내의 나머지 백성들이 지금까지 보전된 데에는 곽재우의 공이 아주 큽니다.
그런데 갑자기 삼도(三道)의 군대가 수원(水原)에서 무너졌다는 말을 듣고는 미친 사람과도 같이 위태로운 말과 망녕된 말을 수없이 지껄여대었습니다. 이에 순찰사(巡察使)가 비록 편지를 보내어서 공적을 표창하고 계문하여 공을 아뢰었으나, 역시 뜻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혹 화를 당할지도 모른다고 경계하면 반드시 칼을 움켜잡고 성을 내었습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또 갑자기 두 차례나 순찰사의 영문(營門)에 격서(檄書)를 보내어서 낱낱이 그 죄를 열거하고는 토벌하겠다고 떠들어대었습니다. 그리고 또 각 고을의 의병장들에게 통문을 돌려 토죄(討罪)하겠다는 뜻을 말하였습니다. 신은 그 말을 듣고는 놀라운 마음에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순찰사가 신에게 공문을 보내어 의령 고을에 명하여 곽재우를 잡아 가두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곽재우가 실제로 역심(逆心)을 품었다고 한다면, 현재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있으니 한 사람의 역사(力士)로는 잡을 수가 없을 것이며, 만약 역심을 품고 있지 않다고 한다면, 편지 한 장으로도 넉넉히 깨우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이에 곧바로 곽재우에게 수서(手書)를 보내어 다방면으로 비유해 깨우쳤으며, 김면(金沔)도 글을 보내서 경계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곽재우가 곧바로 마음을 돌이켜 잘 따랐습니다. 진주가 위급하다는 말을 듣고는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 구원하고자 이미 길을 떠났습니다.
곽재우는 일개 도민으로서 감사를 범하려고 하여 죄를 성토하고 격서를 보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것이 비록 스스로는 나라를 위한 마음에서 분통스러워 이렇게까지 한 것이라고는 하나, 행적이 난민(亂民)에 가까운 만큼 즉시 토죄하여 제거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곽재우는 온 나라가 함몰된 뒤에 능히 외로운 군사로 용감히 왜적을 쳤으므로, 도내의 잔민(殘民)들이 그를 간성(干城)처럼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난폭한 말을 하였다고 하여 곧바로 베어 죽인다면, 보전되어 있는 남은 성은 왜적을 막을 계책이 없어지고, 군민(軍民)들은 그의 죄를 모르고서 한꺼번에 흩어져 떠날 것입니다. 이에 신이 사태를 미봉시켜 진정시킬 계획으로 재삼 경계하였던바, 곽재우가 이미 신의 말을 따라 순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순찰사(都巡察使)에게 죄를 얻었으니, 서로 용납하기가 어려워서 다른 변고를 야기시킬까 염려스럽습니다.
신이 듣건대, 을묘년의 왜변(倭變)이 일어났을 때 전라 감사 김주(金澍)가 영암(靈巖)에서 다른 고을로 달아났습니다. 그러자 전 수원 부사(水原府使) 윤기(尹箕)가 당시에 유생으로서 포위된 성 안에 있다가 칼을 뽑아 베어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김주는 성도 내지 않고 웃으면서 이야기하여 잘 처리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논자(論者)들이 지금까지도 윤기의 용기에 대해 칭송하고, 김주가 능히 포용한 것을 아름답게 여기고 있습니다.
지금 곽재우의 일이 비록 미치광스럽고 망녕되기는 하나, 그의 마음은 실로 다른 뜻이 없습니다. 그러니 감사가 만약 김주가 처리한 바와 같이 대처한다면 반드시 조용해져서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이 김수(金睟)에게 글을 보내어 선처하도록 부탁한 결과, 걱정될 만한 변은 없게 되었습니다. 다만 김수가 이미 곽재우를 반적(叛賊)이라고 계문하였으며, 또 다른 사람을 사주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만약 이 일로써 그를 죄준다면 그가 죄에 승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온 도의 인심을 수습하기가 어려울 것이니, 몹시 마음아프고 절박합니다.
곽재우가 충의(忠義)를 일으켜 분발한 상황과 용감히 왜적을 친 공은 온 도에 널리 퍼져서 아이들이나 군졸들까지도 모두 곽 장군(郭將軍)이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그리고 듣건대 그는 용병(用兵)에 뛰어나서 장수가 될 자질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만약 미치광스럽고 망녕스러운 짓을 한 데 대한 주벌을 조금만 늦추어 준다면, 반드시 공을 세워 보답할 것입니다.
신은 불행하게도 명을 받든 이후에 두 번이나 이런 변을 만났습니다. 신이 4월 중에 호남 길로 오다가 운봉현(雲峯縣)에 이르렀을 때 호남 사람들이 순찰사 이광(李洸)이 근왕(勤王)하는 데 늦게 달려갔다는 이유로 토죄하고자 하면서, 신에게 비밀히 말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이에 신이 대의로써 그 말을 꺾었으며, 곧장 김수와 상의하여 이광에게 알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김수가 말하기를, ‘그들이 근왕하는 데 늦게 달려갔다는 이유로 토죄하려고 하니, 의로운 선비라고 이를 만하다. 그런데 만약 이 사람을 베어 죽인다면 온 도의 인심이 더욱 격해질 것이다. 이광에게 알려서는 안 된다.’ 하였습니다. 이에 신은 그의 말에 따라 그만두었습니다.
지금 곽재우의 일이 꼭 저번의 그 일과 같습니다. 김수가 진실로 호남 사람들을 조처한 의리로써 곽재우에 대해 조처한다면, 난처한 일이 없을 듯합니다. 신과 김면이 곽재우에게 보내 경계하여 신칙한 글과 곽재우가 보낸 답서를 아울러 등서(謄書)하여 올려보냅니다.”
하였다. - 이 계사(啓辭)에서 공의 충후(忠厚)한 평소의 마음을 잘 알 수가 있다.
○ 임진년 6월 23일에 경상 초유사 김성일이 전 현풍 군수(玄風郡守) 엄홍(嚴泓)을 본현의 의병장으로 삼고, 곽찬(郭趲)을 소모관(召募官)으로 삼았다. 이때 현풍 등지의 대가거족(大家巨族)들이 모두 낙동강을 건너 가야산(伽倻山)과 덕유산(德裕山) 등으로 들어가 버렸으므로, 김성일이 영을 전하여 엄홍 등을 불러와서 본임(本任)에 임명하는 한편, 격문을 보내어 이민(吏民)들을 효유하였다. - 효유한 본문은 본집 제3권 ‘통유현풍사민문(通諭玄風士民文)’에 실려 있다.
경상도 삼가(三嘉)의 학유(學諭) 박사제(朴思齊) 형제가 군사를 모집하여 900여 명을 얻고, 봉사(奉事) 노흠(盧欽), 유생(儒生) 권양(權瀁)과 단성(丹城) 사람 권세춘(權世春) 등도 군사를 일으켰다. 김성일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그날 즉시 치계하고는 함안(咸安) 사람 이정(李瀞)을 소모관으로 삼았다. 이때 함안 군수 유숭인(柳崇仁)이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가 이때에 와서 임소(任所)로 돌아왔으므로, 그와 더불어 일을 함께 처리하였다. 이정이 군사 1000여 명을 모집하여 이를 군수에게 맡겨서 진해(鎭海), 창원(昌原)에서 충돌해 오는 왜적들을 막았는데, 싸움에 이길 적마다 그 공을 군수에게 돌리고 자신이 차지하지 않았다. 박사제가 봉사(奉事) 윤탁(尹鐸)을 대리 장수로 삼아 그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 곽재우에게 소속되게 해 영산(靈山)과 창녕(昌寧) 사이를 오가는 왜적을 막도록 하였다. - 《경상순영록》에 나온다.
○ 임진년 7월 10일에 보낸 영남 초유사의 관문(關文)에 이르기를, “이달 23일에 창원 부사(昌原府使)의 치보(馳報)에, ‘이달 19일에 성에 항시 머물러 있던 왜적 계병부(桂兵部) 33명이 성 안에 사는 잡인(雜人) 10여 명을 불시에 붙잡아가서 물건을 짊어지게 한 다음, 기관(記官) 박춘정(朴春丁)과 함께 김해(金海) 바다의 선척을 살피러 나갔다가 돌아왔다. 그리고 항상 머물러 있던 왜적들도 본토로 돌아갈 계책을 하고 있다.’ 하였다.
지금 김해에서 나온 사람을 만나서 왜적들의 거취를 물어보았더니, ‘김해 바다 각처에는 적선(賊船)이 즐비하고, 좌우 산기슭에는 가가(假家)가 잇대어 있었으며, 김해와 밀양을 오가는 사람들은 소를 잡고 술을 빚어 서로 함께 마시고 먹으면서 마치 이웃 마을 사람처럼 지냈다. 이렇게 10여 일을 지내는 사이에 왜적 6명이 서울에서 내려와 귀에 대고 말을 전해 주자, 뭇 왜적들이 일시에 통곡하였으며, 두 고을을 오가는 사람은 남녀를 불문하고 모조리 베어 죽였는데, 죽인 숫자가 200여 명에 달하였다. 그리고 각처에 있던 가가들을 모두 불살랐으며, 강에 가득 떠 있던 배도 하룻밤 사이에 다 내려갔다.’고 하였는바, 군사를 거두어 도망갈 계획을 하는 것 같다.
귀도의 금산(錦山)과 무주(茂朱)에 있는 왜적들이 어느 곳으로 향하는지 통지해 달라.” 하였다. - 이상은 전라도에 보낸 관문이다.
○ 임진년 7월 10일에 영남 초유사가 보낸 관문에 이르기를, “본도 우로(右路)의 여러 의병 2만여 명이 날마다 왜적을 쳐서 고령(高靈) 이하의 지역은 이미 회복되었으며, 경성(京城)에서 도망쳐 온 왜적들도 진퇴를 마음대로 하지 못하여 나왔다가는 도로 들어갔다. 그러니 산중에 피난한 사람들에게 급히 이 뜻을 통지하여, 사람마다 떨쳐 일어나 왜적을 토멸하도록 하라.” 하였다. - 《경상순영록》에 나온다.
○ 임진년 8월 4일에 초유사 김성일을 좌순찰사(左巡察使)로 삼았다. 김성일이 아뢰기를, “5월 이후로 신이 네 차례 장계를 올렸습니다.” 하였다. - 이하 본문은 속집(續集) 제3권 ‘좌감사장(左監司狀)’에 실려 있다.
○ 임진년 8월 10일에 경상좌도 감사 김성일이 아뢰었다. - 이하 본문은 속집 제3권 ‘이배좌감사시론우도기의장(移拜左監司時論右道機宜狀)’에 실려 있다.
○ 임진년 8월 27일에 경상 우도의 사민(士民)들이 김성일을 좌도 감사로 옮겨 제수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애처롭기가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 젖을 잃은 듯하여, 통문을 돌려 사람을 모아서는 좌도로 떠나가는 길을 기필코 막으려고 하였다. 그 통문에 이르기를,
“우리 영남 지방은 흉악한 왜적들이 침범해 온 이후로 열읍(列邑)의 성이 토붕와해되어, 왜적들이 마치 무인지경에 들어오듯이 거침없이 쳐들어왔습니다. 이에 병영의 장수는 썰물처럼 퇴각하고, 고을의 수령은 쥐새끼처럼 도망치고, 백성과 군졸은 무너져 숨고, 읍과 촌락이 텅 빈 채 쓸쓸하게 되었는바, 전 지역이 모두 흉악한 왜적들의 소굴이 되어 다시는 손쓸 곳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우리 초유사 김 상공(金相公)께서 애통해하는 성상의 교지를 나라가 어지러워진 뒤에 받들고는, 간담을 키우고 눈물을 뿌리면서 이 왜적과는 한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살 수 없음을 맹세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회복시키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 이 지방에 도착한 즉시 열읍(列邑)에 통문을 보내 효유하여 군신(君臣)의 명분을 밝히고, 복수의 대의를 선창하였습니다. 말이 매우 간절하고 충의가 솟구쳤으므로, 이를 들은 사람치고 두 주먹을 불끈 쥐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이를 본 사람치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같은 소리로 서로 호응하고, 멀고 가까운 데 사람들이 그림자처럼 따라서, 수백 명의 피곤에 지치고 흩어진 군졸로써 돌진해 들어오는 흉악한 왜적에게 대항하여, 요해지를 차단함으로써 왜적들의 기세를 꺾었습니다. 그러니 나라가 회복될 가망이 있게 된 것이 그 누구의 힘이겠습니까.
지금 듣건대, 초유사를 좌도 감사로 옮겨 임명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어찌 단지 우리 몇 고을 사민(士民)들만 복이 없는 것이겠습니까. 아마도 장수와 군사들 역시 마음이 이반되어 반드시 흩어질 기세가 있으니, 한 삼태기의 흙이 부족하여 산을 쌓는 공을 이루지 못해, 또다시 나라를 회복시키는 기회를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처음에 망했다가 다시 보존된 것은 초유사 김 상공께서 왔기 때문이요, 뒤에 거의 성공될 뻔하다가 다시 무너진 것은 초유사 김 상공께서 떠나갔기 때문입니다. 오고가는 것이 똑같이 국사를 위한 것이지만, 일의 급하고 급하지 않은 형세는 피차의 구별이 있는 법입니다. 좌도와 우도가 같이 한 도이니, 왜적을 평정할 기회는 반드시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의 뜻은 여러 유생들과 더불어 구공(寇公)을 1년 동안만 더 빌려 달라는 소(疏)를 만들어 선전관(宣傳官)이 가는 편에 부치는 한편, 초유사께 이곳에 남아서 우리를 살려 달라는 청을 올릴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제군들께서도 반드시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속으로 이해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제군들께서 고을의 자제(子弟)들을 거느리고서 모두 저의 향교에 왕림하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유학(幼學) 강위로(姜渭老) 등이 통문을 돌립니다.”
하였다.
○ 임진년 8월 27일에 경상좌도 감사 김성일이 거창(居昌)에서 초계(草溪)로 옮겨 주둔하기 위하여 장차 낙동강을 건너려고 하였다. 사인(士人) 이대기(李大期) 등이 길을 막고 머물러 있기를 청하니, 김성일이 말하기를, “이미 임금의 명령이 계시니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낙동강을 건너 좌도로 들어가서는 강우(江右)의 여러 사자(士子)들이 왜적을 토벌한 일을 크게 칭찬하면서 낱낱이 논공(論功)하여 아뢰었다. 그러자 뭇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흡족해하여 강좌(江左)의 인심이 흡연해졌다. - 《경상순영록》에 나온다.
○ 임진년 8월 27일에 경상도 합천(陜川)의 진사(進士) 박이문(朴而文)과 안음(安陰)의 진사 정유명(鄭惟明) 등이 상소하여 김성일을 그대로 우도 감사로 삼아 우도를 안무(按撫)하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토포사(討捕使) 한효순(韓孝純)을 경상좌도 순찰사로 삼았다.
이때 여러 사신들이 모두 샛길을 통해 다녀서 큰길에는 오가는 사람이 없었는데, 한효순이 순찰사로 임명된 뒤에 항상 자포(紫袍)를 입고 나각(鑼角)을 울리면서 감사의 위의(威儀)를 성대히 차리고 다녔다. 그러자 각 고을에 주둔해 있던 왜적들이 성 위에 올라가 손으로 가리키면서 바라보았는데도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로부터 도로가 비로소 개통되었으며, 사람들이 그의 행차를 바라보고는 다시금 조정 관원의 위의(威儀)를 보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 《경상순영록》에 나온다.
○ 임진년 9월에 김성일이 좌도로부터 낙동강을 건너 서쪽으로 가서 우도를 안무하였다. - 《경상순영록》에 나온다.
○ 9월 16일에 경상우도 감사 김성일이 정랑(正郞) 박성(朴惺)을 모곡차사원(募穀差使員)으로 삼았다. - 《경상순영록》에 나온다.
○ 임진년 9월 24일에 경상우도 감사 김성일이 왜적들이 함부로 내지를 침입한 일로써 전라 감사 및 좌도와 우도의 의병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 임진년 10월 2일에 왜적들이 소촌(召村) - 진주의 역(驛) 이름이다. - 으로 옮겨 주둔하였다. 경상우도 감사 김성일이 첨정(僉正) 조종도(趙宗道)를 보내어 전라좌도와 우도의 의병 및 여러 장수들에게 구원을 요청하니, 전라우도의 의병장 최경회(崔慶會)가 남원(南原)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운봉(雲峯), 함양(咸陽)으로 향하여 오다가 인하여 산음(山陰)과 단성(丹城)으로 향하였다.
○ 임진년 10월 6일에 경상우도 순찰사 김성일이 또다시 정랑(正郞) 박성(朴惺)을 보내어 전라좌도의 의병에게 구원을 요청하니, 임계영(任啓英)이 남원에서 함양으로 왔다.
○ 임진년 10월 6일에 진양(晉陽)이 왜적에게 포위당한 지 여러 날이 되었는데도 구원병은 이르지 않고 왜적들의 기세는 날로 강성해졌다. 목사 김시민(金時敏)이 온갖 방법으로 계략을 내어 밤낮으로 방어하면서, 항상 한 마음으로 함께 죽을 것으로써 여러 군사들을 권면하고, 몸소 밥과 미음을 가지고 다니면서 배고프고 목마른 자들을 구해 주었으며, 탄환이 빗발치듯 쏟아지는 속에서도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때때로 눈물을 흘리면서 타이르기를, “온 나라가 함락되어 남아 있는 곳이 적은바, 단지 이 한 성에 나라의 명맥이 매여 있다. 이번에 또 싸움에 진다면 우리나라는 끝장나게 될 것이다. 더구나 한 번 패한다면 성 안에 있는 수백 명의 목숨이 모두 칼 끝의 원귀(冤鬼)가 될 것이다. 아아, 너희 장사들은 온 힘을 다하여 용감히 싸우되, 죽을 각오를 하여야만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 하니, 사졸들이 감격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싸움이 오래되어 화살이 다 떨어지자 성 안의 사람들이 몹시 두려워하였다. 이에 김시민이 밤중에 사람을 시켜 성을 넘어가 감사에게 보고하게 하였다. 감사가 무기를 보내 주려고 하였으나, 맡길 만한 사람이 없었다. 이에 중한 상을 내걸고 모집하여 영리(營吏) 하경해(河景海)를 뽑아서 그 일을 맡겼다. 하경해가 밤을 틈타 몰래 빠져나와 성 아래에 도달하자, 성문을 열고 하경해를 맞아들여서 장전(長箭) 100여 개를 얻어 이로써 잇대어 사용하였다. 그렇게 되자 사졸들의 기세가 배나 고조되었다.
○ 임진년 10월 10일에 진주 목사 김시민이 적병을 진주성 아래에서 크게 쳐부수니 남은 적이 도망하여 본진으로 돌아가므로, 추격하여 소촌역(召村驛)까지 갔다가 되돌아왔다. 본도 순찰사 김성일이 이때 거창(居昌)에 있었는데, 승리하였다는 보고가 도착하자 즉시 달려서 본주에 이르러서는 적의 시체가 서로 베고 누웠고 비린 피가 땅에 흥건한 것을 보고는 탄복을 금치 못하였다. 인하여 성 안에 들어가서 목사가 누워 있는 방 안에 - 김시민이 탄환에 맞아 방 안에 누워 있었다. - 나아가서 한참 동안이나 위로하고 감탄하였다. 얼마 뒤에 김해 부사(金海府使) 서예원(徐禮元)을 임시 목사로 삼아 그 군사를 대신 거느리게 하고는 그날로 진주의 전투 상황을 치계하여 운운하기를, “김해와 부산에 머물러 주둔해 있던 왜적들이 …….” 하였다. - 이하의 본문은 본집 제3권 ‘치계진주수성승첩장(馳啓晉州守城勝捷狀)’에 실려 있다.
○ 처음에 진주성의 위급함을 여러 진영에 알리니 정인홍(鄭仁弘)이 가장(假將) 김준민(金俊民)과 중위장(中衛將) 정방준(鄭邦俊) 등으로 하여금 스스로 정예로운 사수(射手) 500여 명을 선발하여 달려가서 구원하도록 하였다. 10월 9일에 단계(丹溪)에 도착하였는데, 해가 이미 돋았다. 어떤 큰 마을이 시내 동쪽에 있고 그 앞에 대숲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피곤하고 말은 병이 났으므로 안장을 풀고 밥을 짓고 있었다. 전라우도 의병대장 최경회(崔慶會)는 군사 2000명을 거느리고 막 단성(丹城)에 주둔하고 있다가 합천(陜川)의 군사와 세력을 합하여 앞으로 나가려고 하였다. 진주와 단성에서 난을 피해 온 사녀(士女)들이 산에 올라가서 바라다보고는 말하기를, “전라도의 대군이 본현에 머물러 있으며, 또 합천의 군사가 잇달아 도착할 것이니, 잠깐 동안이나마 죽음을 면할 수 있겠다.” 하였다.
밥을 먹은 뒤에 장수와 군사들이 길을 떠났는데, 짐을 실은 부대가 앞장섰다. 몇 리쯤 가자 앞서 가던 자가 달려와서 외치기를, “수많은 적병이 이곳에 도착하였다.” 하였다. 김준민이 놀라 일어나서 바라보니, 단성의 청고개(靑古介)로부터 단계의 산야에 이르기까지 촌락을 일시에 분탕질하여 연기와 불꽃이 하늘까지 치솟고 포성이 땅을 진동하였다. 김준민 등은 뜻밖의 상황에 처하자 형세가 매우 다급하게 되어 몸을 날려 말을 타고는 대숲 밖에 나가서 아래위로 말을 달려 돌진하였다.
그런 즈음에 군관(軍官) 윤경남(尹景男) 등도 달려와서 큰소리로 외치기를, “두 장수가 이미 적의 포위 속에 들어가 있는데, 너희들은 와서 구하지 않을 것인가?” 하였다. 그러자 500여 명의 군사가 고함을 지르면서 한꺼번에 진격하니, 왜적들이 우리 군사를 바라다보고는 대숲 속으로부터 점점 빠져나갔는데, 많은 군사가 매복하고 있을까 두려워하여 접전한 지 얼마 안 되어 퇴각하여 시냇물을 건너갔다.
양쪽 진이 대치한 곳에는 화살은 비오듯이 쏟아지고, 포성은 천둥을 울리는 것 같았는데, 왜적들은 오히려 용감하게 싸우면서 물러가지 않았다. 이때 마침 승군(僧軍)의 의병장 신열(信悅)이 군사를 거느리고 잇달아 도착하매 성세(聲勢)가 더욱 장해졌으므로 군사들의 사기가 배가(倍加)되어 한꺼번에 힘을 합하여 공격하니, 적이 마침내 물러가 달아났다. 이에 왜적을 추격하여 청고개까지 이르니, 왜적들이 깃발을 버리고 산으로 달아났다. 또 읍내를 바라보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가리고 포성은 폭죽을 터뜨리는 것 같았다. 정방준이 김준민을 불러 말하기를, “저것은 반드시 전라도 군사가 왜적들과 서로 싸우는 것이니, 구원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는, 즉시 말을 달려서 단성의 길을 향하여 가니, 넘어진 시체가 길바닥에 서로 이어져 있었다.
전라도의 의병은 이미 무너져 퇴각하였으며, 남은 적병이 뒤에 떨어져 분탕질하고 있었는데, 우리 군사가 돌진하는 것을 보고는 형세를 관망하다가 물러가 버렸다. 장수와 군사들이 물을 길어서 창고의 불을 끄고, 타다 남은 쌀 600여 석을 거두어 관인(官人)을 불러 이를 지키게 하였다.
그 다음 날 진양으로 진군하니, 성은 이미 포위가 풀렸다. 성 안의 사람들이 모두들 ‘합천 군사다.’라고 하면서 이르기를, “어제 왜적들이 갑옷을 버리고 무기를 끌고서 달아나는 놈이 많았고 지금은 퇴각해 도망치기에, 모처에서 접전한 군사들이 왜적들의 예기(銳氣)를 꺾어서 그런 것이라고 여겼더니, 필시 그대들일 것이다.” 하였다.
김준민 등이 왜적을 뒤쫓아 함안(咸安)까지 갔으나, 추격하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최강(崔堈)과 이달(李達)도 군사를 거느리고 뒤쫓아 반성(班城)까지 가서 적의 수급 20여 개를 베었다. - 《경상순영록》에 나온다.

○ 선조 26년 계사(1593) 1월 8일에 경상우도 순찰사 김성일이 장계하기를,
“지난해 12월에 진주성이 장차 함락되려고 할 때 신이 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 조종도(趙宗道)와 공조 정랑(工曹正郞) 박성(朴惺)을 나누어 보내어 호남의 좌도와 우도의 의병(義兵)에게 구원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자 임계영(任啓英), 최경회(崔慶會) 두 장수는 호남과 영남은 광대뼈와 잇몸이 서로 의지하는 것과 같은 형세가 있어서 존망(存亡)과 성패(成敗)가 매우 긴밀하다고 하면서 즉시 군사를 거느리고 서로 잇달아 달려와 응원하였습니다.
그리고 전 주부(主簿) 민여운(閔汝雲)도 태인(泰仁)으로부터 와서 비록 진주의 싸움에는 미처 참가하지 못하였지만, 인하여 성주(星州)와 지례(知禮)의 경계에 머물러 있으면서 본도의 의병대장 김면(金沔), 정인홍(鄭仁弘) 등과 힘을 합하여 왜적을 토벌하였는데, 여러 번 접전하여 적병을 죽인 것이 매우 많았습니다. 이에 왜적들의 기세가 자못 꺾여져서 숨어만 있고 나오지 못하고 있는바, 온 도의 사람들이 바야흐로 중하게 의지하여 함께 앞뒤에서 협격하는 형세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지금 호남 사람이 행재소(行在所)에서 돌아와 전하기를, ‘조정의 의논이 두 의병장을 불러와 근왕(勤王)하게 하려고 한다.’ 하였습니다. 두 장수가 이 기별을 듣고는 편히 앉아 쉴 겨를도 없이 즉시 올라가려고 합니다. 본도가 적에게 함몰된 나머지 보존된 곳은 5, 6개의 쇠잔한 고을뿐인데, 흉악한 왜적들이 사방에 가득 차 있으면서 반드시 이를 삼켜버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서는 호남의 군사가 비록 이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서로 응원하더라도 또한 성사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군사를 거두어 물러간다면, 왜적들이 구원군이 없는 것을 알고는 거침없이 휘몰아쳐 올 걱정이 결단코 조석간에 있을 것입니다.
본도가 만약 함몰된다면 호남이 그 다음에 병화를 입게 될 것이며, 호남이 지탱하지 못한다면 나라를 회복하는 터전이 아마도 여지가 없을 듯합니다. 생각이 이에 미치매 심장이 찢어지는 듯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조정에서 충분히 참작하여 헤아리시어 두 장수를 본도에 머무르게 해서 보장(保障)이 견고해질 수 있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체찰사(體察使) 또한 사실을 낱낱이 들어 치계하자, 조정에서 두 의병장을 불러 올리는 일을 정지하였다.
○ 계사년 4월 29일에 영남초유사 겸 우도순찰사 김성일이 졸하니, 안집사(安集使) 김늑(金玏)에게 대신 맡게 하였다.

위의 《난중잡록(亂中雜錄)》은 고(故) 진사(進士) 조공 경남(趙公慶男) 선술(善述)이 지은 것인데, 산서(山西)는 그의 호(號)이다. 그의 선대는 한양인(漢陽人)으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지낸 조혜(趙惠)의 후손이며, 호조 판서(戶曹判書) 조숭진(趙崇進)의 현손(玄孫)이다. 그의 아버지인 사직(司直) 조벽(趙璧)이 남원 양씨(南原梁氏)에게 장가들어서, 인하여 남원부 동쪽의 원천리(元川里)에 살았다.
융경(隆慶) 경오년(1570, 선조 3)에 공이 태어났는데, 천부적인 자질이 매우 총명하고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으며, 독실하게 공부하고 몸소 실행하여 유림(儒林)의 중망(重望)을 짊어지고 있으면서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려는 뜻을 품었으나, 조모가 늙은 나이에 의탁할 데가 없었으므로 참고 견디면서 그러지 못한 채 시(詩)를 지어 자기의 뜻을 나타내었다.
정유년(1597, 선조 30)에 왜적이 재차 침략해 오자 지리산(智異山)으로 들어가 병란을 피하였는데, 왜적들이 수색 토벌하였으나 공을 따른 사람 300여 명이 아무런 부상도 당하지 않은 채 모두 살아났다. 그 뒤 전라 병사(全羅兵使) 이광악(李光岳)의 막하(幕下)로 들어갔다가 뒤에 다시 명(明) 나라 장수인 도독(都督) 유정(劉綎)의 선봉이 되어 왜적을 쏘아 죽인 공로가 많았다.
조공(趙公)은 임오년(1582, 선조 15)에서 무인년(1638, 인조 16)까지 57년간의 사실을 날마다 기록하였는데, 공이 기록한 임진왜란 중의 충신(忠臣)과 절사(節士)의 사적(事跡)은 능히 착한 사람으로 하여금 권장되는 바가 있게 하니, 실로 후세의 한 귀감(龜鑑)이다. 그중에 호남과 영남의 사이에 있으면서 선조(先祖)의 사적을 들은 것을 낱낱이 수록한 것이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본집에 누락되어 있는 글이 있는 듯하기에, 아울러 이를 초록(抄錄)하여 후일의 참고에 대비하게 하였다.


[주D-001]임진년 6월 17일 : 《대동야승(大同野乘)》 제26권에 실려 있는 《난중잡록(亂中雜錄)》 제1권에는 임진년 6월 19일로 되어 있다.
[주D-002]경상도 …… 하였다 : 《대동야승》 제26권에 실려 있는 《난중잡록》 제1권에는 7월 6일 기사로 되어 있다.
[주D-003]구공(寇公)을 …… 소(疏) : 김성일을 더 머물러 있게 해 달라는 상소를 올리겠다는 뜻이다. 구공은 구순(寇恂)을 가리킨다. 후한(後漢) 때 구순이 영천 태수(穎川太守)가 되었을 적에 치적을 세우고 이임(離任)되었는데, 그 뒤에 광무제(光武帝)가 남정(南征)할 때 구순이 광무제를 따라가 영천에 이르렀다. 그러자 영천의 백성들이 길을 막고서 광무제에게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다시금 구군(寇君)을 저희에게 1년 동안만 빌려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後漢書 卷16 寇恂列傳》

 

혼정편록 9(混定編錄九)
혼정편록 9(混定編錄九)


○ 상이 즉위한 처음에 해서(海西) 유생 등이 대궐에 나아가 소장을 올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에 종사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두 차례 상소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 해 5월 11일에 관학 유생 생원 송시영(宋時瑩) 등 2백 80여 명이 또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도학은 국가의 원기이고 선유(先儒)는 백 대의 스승입니다. 그러므로 옛날 사문(斯文)에 뜻을 둔 제왕들은 모두 선유를 숭상하고 찬양하여 도학을 일으키는 소지로 삼았으니, 이는 참으로 천하의 공통된 의리이고 모든 임금의 훌륭한 은전(恩典)이었습니다. 선성(先聖)과 선사(先師)를 묘궁(廟宮)에 배향하여 오로지 제사지낸 뒤로부터 사문에 공이 있는 후유(後儒)는 으레 양무(兩廡)에 종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동방으로 말하면, 신라에는 최치원(崔致遠)ㆍ설총(薛聰), 고려에는 안유(安裕)ㆍ정몽주(鄭夢周), 본조(本朝 이조)에는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조광조(趙光祖)ㆍ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 등과 같은 다섯 분의 유신이 모두 그 사람들입니다. 명종과 선조 무렵에 이황을 이어 유림(儒林)의 으뜸이 된 이가 두 사람 있으니, 문성공(文成公) 이이와 문간공(文簡公) 성혼이 곧 그 분입니다.
이이는 타고난 자질이 아주 높고 남보다 훨씬 총명하였습니다. 어릴 적에 이미 도(道)를 구하는 뜻이 있어 세속 학문의 비루함을 싫어하였으며, 제자 백가(諸子百家)를 두루 읽고 불교에 드나들다가, 이윽고 갑자기 반성하여 성인의 도로 아주 변하여 지(知)ㆍ행(行)이 아울러 극진하고 발과 눈이 함께 높은 경지에 이르렀으며, 도체(道體)의 정미함에 이르러서도 진실로 환하게 꿰뚫어 의심이 없으며, 규모가 원대하고 체용(體用)이 완비되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요순 같은 성군으로 만들고 백성에게 은택을 끼치며, 옛날의 성인을 잇고 후학(後學)을 깨우치는 것을 자기 임무로 삼아 차라리 성인을 배우다가 되지 못할지언정 조금 이루어지는 데에 안주하려 하지 않았으니, 정주(程朱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참된 학통을 깊이 깨달음 있는 자입니다. 그 저술에 나타난 것으로는, 《격몽요결(擊蒙要訣)》은 학자들의 일상 공부에 지극히 절실하고, 《성학집요(聖學輯要)》는 제왕의 학문의 요점을 모두 말하여 《대학연의(大學衍義)》에 못지 않고, 《동호문답(東湖問答)》은 체(體)를 밝히고 용(用)을 맞게 한 실상을 볼 수 있고, 사단칠정(四端七情)에 관한 모든 글은 모든 선비들이 정하지 못한 논의를 결단하였다 할 수 있으니, 이 글들이 모두 있으므로 상고하여 알 수 있습니다.
조정에 벼슬한 이래로 물러날 때가 많고 쓰일 때가 적었는데, 늦게 선조(宣祖)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계미년의 변고를 당하여 병조 판서에 위임되었습니다. 계획이 치밀하고 하는 일마다 사리에 맞자 선조의 의지함이 더욱 중해지니, 뭇소인들이 더욱 시기하여 은밀히 모함하고 드러내놓고 배척하여 반드시 불측한 지경에 몰아놓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성상의 통촉하심을 힘입어 간사함과 바름이 절로 분별되었는데, 불행히도 복이 없어 배운 바를 다 펴지 못하게 되자, 뜻있는 선비들이 지금까지도 한스럽게 여깁니다. 성혼은 돈후 장중(敦厚莊重)하고 독학 역행(篤學力行)하여 말과 행동이 한결같이 《소학(小學)》과 《가례(家禮)》를 법으로 삼았습니다. 지조를 엄숙히 지킴은 혼자 있을 때에도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고, 효제(孝悌)의 행실은 신명(神明)도 감동시킬 만하여 인격이 성취되고 안팎이 한결같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이는 매양 그의 독실함을 일컬어 그에게 미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일찍부터 이이와 교분을 맺어 학문을 강론하매 뜻이 같고 도(道)가 합하였습니다. 이이는 나가서 세도(世道)를 담당하였으나 성혼은 초야에 숨어 살았으며, 비록 은지(恩旨 임금의 은혜로운 분부)에 어쩔 수 없어 때로 대궐에 나아가기는 하였으나 그의 뜻은 늘 초야에 있었습니다. 계미년간, 이이가 뭇소인들에게 모함을 받게 되어서는 성혼이 그때 서울에 있으면서 소장을 올려 변명하다가 드디어 다른 쪽 사람의 미움을 샀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홍로(李弘老)의 교묘한 참소에 중상되었고, 마침내는 정인홍(鄭仁弘)의 헐뜯음을 받아 어진이를 좋아하는 선왕의 거룩한 마음으로 하여금 종시 보전하지 못하게 하여 몇 십년 동안 지하에서 억울함을 품고 있다가, 우리 성상 때에 와서야 밝게 신원되게 되었습니다. 아, 이는 실로 사문의 흥망의 기회이옵지, 어찌 사람의 힘이 그 사이에 용납되겠습니까.
신 등이 적이 생각하옵건대, 이 두 신하는 오현(五賢) 뒤에 태어나서 도학을 강론하여 밝히고 오묘(奧妙)한 이치를 밝혔습니다. 모든 이기(理氣)의 떠나고 합함과 사단(四端)ㆍ칠정(七情) 등의 설에 모든 선비들의 논한 바가 서로 득실이 있었으나, 되풀이하여 변론해서 그 귀추(歸趣)를 얻어 어두워진 것은 다시 밝히고 이지러진 것은 다시 보완하며, 그 밝히지 못한 것은 확충하고 그 미치지 못한 것은 바로잡아 동방 이학(理學)의 본말이 여기에 거의 유감이 없게 하였으니, 훌륭하다고 하겠습니다. 저 두 신하가 사도(斯道)에 있어서 그 공과 덕이 이러한데도 은덕을 갚는[崇報 여기서는 문묘에 종사시키는 것] 은전은 아직도 잠잠하니, 이는 신 등의 죄일 뿐만 아니라, 아마 성대한 세상의 흠일까 합니다. 이에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청하오니, 바라옵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사문(斯文)의 지극히 중함을 깊이 생각하시고 많은 선비들의 정성을 굽어 살피시어 빨리 유사에게 명하여 두 유신(儒臣)을 문묘에 종사시키는 은전을 의논하여 정하게 하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이이와 성혼이 비록 착한 사람이라고는 하나 도덕이 높지 않고 잘못이 있어 비방을 받았으니, 종사시키는 막중한 예를 결코 가벼이 의논할 수 없다.”
하였다.
○ 같은 날(5월 11일) 채진후(蔡振後) 등 57명이 송시영 등의 상소에 맞서서 다음과 같이 상서하였다.
“삼가 아뢰옵니다. 아무렇게나 동의할 수 없는 일은 가부(可否)이고, 아무렇게나 맞장구칠 수 없는 것은 시비(是非)입니다. 모든 보통으로 일을 논할 적에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막중 막대한 일을 어찌 그 가부와 시비를 따지지 않고 억지로 아무렇게나 맞장구칠 수 있겠습니까. 신 등은 아무렇게나 동의할 수도 없고 아무렇게나 맞장구칠 수도 없다는 뜻을 가지고 성상께 우러러 아뢰겠사오니, 밝으신 성상께서는 굽어 살펴주소서.
문묘는 얼마나 중대한 곳이며 종사는 얼마나 중대한 일입니까. 많은 선비들이 본받고 사문이 진작하며, 치도(治道)의 융성하고 떨어짐과 인륜의 막히고 펴짐이 모두 여기에 달렸으므로 반드시 옛날의 성인을 잇고 후학을 깨우친 공이 백 대에 사표가 될 만하고, 도덕과 학문의 순수함이 충분히 한 세대의 유종(儒宗)이 되며, 그 출처(出處)를 논하여도 잡됨이 없이 순수하고 언행을 상고해 봐도 조금도 허물이 없는 뒤에야 종사의 예에 합당한 동시에 한 시대의 공론에 거슬림이 없어 후세의 기롱을 면하게 됩니다. 이러므로 네 현신(賢臣)인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ㆍ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ㆍ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ㆍ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은 도학의 순수함이 실로 염락관민(濂洛關閩)의 계통을 이었으나, 선현(先賢)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 같은 분이 《유선록(儒先錄)》을 지어 바친 뒤에야 종사시키는 의논이 비로소 정해졌고, 또한 반드시 팔도가 같은 사연으로 50년 동안 힘껏 논쟁한 뒤에야 윤허를 받은 것은 진실로 그런 사람을 얻기 어렵고 그 일이 중대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즉 순수한 학문이 아니고 옛날 성인을 잇고 후학을 깨우친 공이 없는데도 참람되이 종사시키는 대열에 추천하는 것이 어찌 성묘(聖廟 공자의 사당)에 누가되고 국가의 잘못된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 생원 송시영 등이 죽은 문성공 이이와 문간공 성혼을 종사시키는 일을 가지고 많은 선비들(여기서는 성균관 유생)이 원점(圓點)할 때를 타서 감히 상소를 올릴 계교를 내었는데, 이 말이 한 번 나오자 선비들의 논의가 일제히 분격하여 소견이 모순되고 시비가 대립하였습니다. 신 등은 다만 소견이 얕은 말학(末學)으로 비록 두 신하의 언행과 학술이 어떠한지는 모르겠사오나, 이이의 사직소(辭職疏)와 선조 대왕(宣祖大王)께서 성혼을 죄준 전교를 살펴보면 그들을 종사시키기에 합당하기 않음은 단연코 알 수 있습니다.
이이가 무진년(1568, 선조 1)에, 부교리를 사직하는 상소에, ‘어린나이에 도를 구하였으나 학문은 방향을 알지 못하고, 제자 백가를 두루 보았으나 정해진 바가 없었습니다. 태어날 때가 좋지 못하여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망령되이 슬픔을 잊기 위해 드디어 불교에 탐닉하였습니다. 그래서 기름이 배어들 듯, 물이 번지듯 반복하여 아득하게 젖어들어서 본심을 잃고 깊은 산중으로 도망쳐 들어가 선문(禪門)에 종사한 지 거의 1년이 되었는데, 오장 육부(五臟六腑)를 뽑아내어도 더러움을 씻을 수 없어 더러워진 채 집에 돌아와서는 부끄럽고 분해서 죽으려 하였습니다.’ 하였고, 또, ‘예로부터 지금까지 불교의 해독(害毒)을 신처럼 아주 심하게 맞은 자는 없습니다.’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스스로를 잘 아는 자가 아니겠습니까. 또 듣건대, 그가 처음 상사(上舍 진사)에 뽑혀 알성(謁聖 공자의 사당에 참배하는 것)할 때에, 그가 일찍이 불교에 물들었다 하여 성묘(聖廟)의 뜰에 참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합니다. 성묘에 참배하는 것도 오히려 허락할 수 없는데, 하물며 이 종사시키는 일이겠습니까. 그런즉 이이가 종사시키기에 합당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혼으로 말하면, 선조 대왕께서 임인년(1602, 선조 35) 2월 19일에, 성혼의 삭탈관직에 관한 일을 청한 양사(兩司)의 소에 답하시기를, ‘다만 간흉(奸凶 정철(鄭澈)을 말함)에 붙어 임금을 버려둔 죄로만 죄를 주라.’ 하셨는데, 그 전지(傳旨) 안에, ‘임진년(1592, 선조 25) 왜적이 경성에까지 쳐들어왔을 적에 재상의 반열에 있는 몸으로 하룻길 거리밖에 안되는 경기도에 있으면서 변란을 듣고 나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가(大駕 임금의 수레)가 그가 사는 곳을 지나갈 때에도 나와 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뒤에 왕세자가 이천(伊川)에 머물 때에, 성혼이 멀지 않은 곳에 피난 왔다는 말을 듣고 간절히 불렀으되 타고 갈 말이 없다고 핑계대자, 말을 보내 다시 불렀으나 끝내 오지 않았으며, 성천(成川)에 이주(移駐)하게 되어서야 맨 나중에 비로소 왔다가, 북쪽의 왜적이 장치(獐峙 노루재)를 넘어온다는 말을 듣고 왕세자가 용강(龍岡)으로 옮기자,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배행(陪行)하지 않았고, 용강이 기성(箕城 평양)에 있는 왜적과 가까워지자 지레 의주(義州)로 향하였으니, 나라에 은혜를 갚는 것은 잊어버리고 자신을 위한 계획만 하였다. 고금 천하에 어찌 임금을 버리고 국난에 달려가지 않고서 천벌을 면할 리가 있겠는가.’ 하셨습니다. 그를 삭직한 뒤에 생원 한효상(韓孝祥)이 소를 올려 신원하자는 뜻을 아뢰니, 답하시기를, ‘너희들이 비록 도당이 성혼을 구함으로 인하여 이런 상소를 하나, 그가 간흉과 교분을 맺은 정상은 너희들도 은폐하지 못한다. 그런즉 너희들의 말은 공격하지 않고도 절로 부서지고 감추려 하여도 더욱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심지어 성혼을 위대한 학자라고까지 하니 얼마나 치욕스러우냐. 선비의 명칭이 본디 하나뿐이 아니다. 설사 성혼이 장구(章句)를 대강 익혔으므로 선비로 지목한다 하더라도 이미 간흉과 한패가 되고, 임금을 헌신짝처럼 버렸으니 이는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의 무리이다. 양주와 묵적을 막아야 한다고 말을 하는 자들은 성인의 무리이다. 지금 조정에서의 그의 죄를 성토하는 것은 모두 이미 드러난 정상이 사람의 이목에 환히 있어서 가릴 수 없는 것에 의거한 것이니, 이야말로 시비를 만세(萬世)에 정하는 것이지, 애초에 숨은 죄악을 끄집어 내어 실정 밖의 형벌을 가하는 것이 아니다.’ 하셨습니다. 그런즉 신하를 알기로는 임금만한 이가 없으니, 성혼이 종사시키기에 합당하지 않음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신 등의 개인 생각으로 반드시 두 신하에게 죄를 씌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이의 출처에 대해서는 이이 자신이 스스로 다 말하였고, 성혼의 마음씨에 대해서는 성상의 비답이 엄중하십니다. 그러므로 시비의 분간이 불을 보듯 환하니, 신 등이 논의하는 것은 진실로 이 때문입니다.
대체로 이이의 문장과 재주ㆍ학식이 한 세상의 이름난 신하가 될 만은 하니 훌륭한 대부라고 하는 것은 가하지만, 종사시키는 것에 이르러서는 출처가 바르지 못하다는 의논이 있으며, 성혼은 이이보다도 훨씬 못한데, 더구나 이미 드러난 죄명이 있음에리까. 그 간흉에게 붙은 정상은 한 시대가 논한 바이니 더러 반드시 말잡힐 소지가 있을 것이고, 임금을 버린 행적은 많은 사람들이 본 바이니 그가 어찌 죄를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다행히 성상께서 치욕을 참으시는 덕에 힘입어 관작을 복구하는 은전을 받았으니 그 은혜가 또한 이미 많은데, 도리어 너그럽게 용서한 은혜를 믿고 감히 종사시키자는 의논을 냅니다. 이것이 신등이 아무렇게나 동의할 수 없고 아무렇게나 맞장구칠 수 없어 반드시 임금님 앞에서 변별하려고 하는 까닭입니다.
반궁(泮宮 성균관의 별칭)에서 회의하던 처음에 신등이 어찌 이런 뜻을 가지고 그들의 편벽된 의논을 꺾을 줄 몰랐겠습니까만, 선비의 의논은 반드시 공손함을 앞세워야 하기 때문에 오히려 차마 지적하여 바로잡지 못하고, 다만 ‘공론을 편벽되게 고집할 수 없고 중대한 일을 가벼이 거행할 수 없다.’는 이 두 가지로 논쟁하였더니, 재임(齋任) □유근(□惟謹) 등이 자기네 뜻을 고집하고 공론을 막아서 목청을 높이고 낯빛을 변하며, ‘견해가 다르면 나가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 등이 그들에게 배척되어 협실(夾室)로 피하였더니, 사설(邪說)이라고 지목하고 마음대로 깎고 벌주며, 또 하인을 시켜 나가라고 재촉하여 성균관 안에 발도 붙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신 등이 돌아갈 데가 없어 걸어서 동학(東學)으로 갔더니, 또 학관(學官)에게 단자(單子)를 올려 몰아내게 하였습니다.
아, 관학(館學)은 유생들이 묵는 곳이니 어찌 저들의 독차지하는 곳이겠으며, 문묘는 성현들이 향사받는 곳이니 어찌 사람마다 함부로 들어갈 곳이겠습니까. 그런데 재임 등이 다만 빌붙는 무리들과 망령되이 종사시키자는 청을 올려 선비의 논의를 막을 수 없는데 도리어 막으려 하고 성상을 속일 수 없는데 도리어 속이려 하니, 이러한데도 공론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아, 종사시키자는 논의가 과연 공공의 논의에서 나왔다면 선비라는 이들이 누가 감히 이의를 제기하겠습니까마는, 오늘날의 일은 아무렇게나 맞장구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일이 생기기 전에 먼저 간 자는 교문(橋門)밖에 줄지어 있고, 그 중에 가지 않은 자도 억울한 빛으로 서로 눈을 흘겨 기상이 괴이하였으니, 인재를 기르는 곳이 도리어 배격하는 터전이 되었습니다. 신 등이 말없이 각기 흩어지는 것이 자신을 위하는 계책임을 모르지는 않사오나, 종사시키는 중대한 일을 한 번 그 마땅함을 잃으면 학술의 순자(醇疵 순수하고 흠되는 것)와 사습(士習)의 사정(邪正)이 장차 분변없이 혼동되어 사문에 이루 말할 수 없는 해독이 있을 것이므로 이를 위해 힘껏 변론하다가 모두 내침을 당했으니, 어찌 신들만의 불행이겠습니까. 또한 국가의 불행입니다.
신 등이 어떤 사람은 서울에 있고 어떤 사람은 멀리 영해(嶺海)에 있어 오늘 모두 물러나고 소회가 있어도 아뢰지 않으면 시비가 밝은 세상에 밝혀지지 않고 성묘(聖廟)가 유속의 무리에게 더럽혀지며, 열성(列聖)께서 은덕을 갚는 은전이 마침내 중하지 못한 처지가 될 것이므로 뭇의논이 격동하여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여 하찮은 정성을 감히 밝으신 성상께 아뢰오니,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국가의 종사시키는 일의 중함을 살피시고 신 등의 공정한 의논을 살펴주시면 국가가 매우 다행이고, 사문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문성공 이이 등을 종사시키자는 청은 아주 참람하므로, 나도 그것이 불가함을 안다.”
하였다.
송시영(宋詩瑩) 등이 재차 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신 등이 모두 어리석은 자질로 오랫동안 청아(菁莪)의 교화에 젖었으매 어진이를 사모하는 하찮은 정성을 견디지 못하여 혈성으로 소를 올려 성상께서 선비를 숭상하고 도를 중히 여기시는 성대한 은전을 베풀게 하려 하였는데, 저희들의 정성이 신임을 받지 못해 성상의 비답이 감감하시니, 신 등이 머리를 맞대고 놀라며 성상의 뜻을 모르겠습니다. 이윽고 채진후 등의 상소 초본을 보게 되었는데, 모함하고 편벽된 말이 지극히 많으니, 비록 범치허(范致虛)나 심계조(沈繼祖)가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를 모함하여 헐뜯은 것일지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습니다.
신 등은 항상 성상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의견의 차이를 화합시켜 함께 대도(大道)로 가게 하시므로 반드시 크게 어그러지는 일은 없으리라고 여겼는데, 뜻밖에 인심의 좋지 못함과 사설의 막음이 끝내 이 지경에 이른단 말입니까.
지난날 신등이 소를 올리려고 성균관에서 논의를 꺼냈더니, 생원 권귀중(權貴中)ㆍ박미(朴) 등 수십 명만이 이의를 제기하였습니다. 그러나 선비들의 논의가 일제히 나온 뒤라서 몇몇 사람의 의사와 어긋나는 것으로써 곧 정지할 수 없기 때문에 신 등이 사리에 의거하여 분명히 분변하였더니, 저들이 물러나가서 동학에 모여 감히 바른 사람을 헐뜯는 소를 올려 저격(狙擊)할 계교를 부리려 하였습니다. 신 등이 당초 선유(先儒)를 드러내려 하다가 뜻밖에 도리어 횡역(橫逆)을 당하였으니, 눈을 부릅뜨고 마음을 크게 먹고 다시 전하를 위해 그 말씀을 다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 선유의 도덕이 높고 낮음은 자연 바꾸지 못할 일정한 의논이 있는 것이지만, 억제되기도 하고 드날리기도 하며, 굽힘도 있고 펴짐도 있는 것은 실로 인심의 맑고 사특함과 세도(世道)의 높고 낮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러므로 공자는 일월과 같았는데도 양화(陽貨)나 환퇴(桓魋)의 헐뜯음과 치욕을 당하였고, 서하(西河)의 학자들이 또 자하(子夏)가 공자와 다름없는 것으로 의심하였으니, 성인의 높은 도덕을 사람이 또한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사마광(司馬光)은 글을 써서 맹자(孟子)가 양웅(揚雄)보다 못하다고 헐뜯었으며,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 명 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璋))는 맹자를 문묘 배향에서 내보내려고까지 하다가 유신(儒臣)들이 죽음으로써 간한 뒤에야 그만두었습니다. 정자와 주자가 살아 있을 적에 혹 간사한 자로 지목하고, 혹 요괴로 배척하고, 혹 위학(僞學)으로 금고하여 귀양보내고 욕보이기를 못할 짓 없이 하였습니다. 옛날 성현을 두루 살펴보건대, 한때의 헐뜯음을 면한 이가 드물었고, 죽은 뒤에야 공론이 비로소 정해졌으나, 맹자 같은 분도 오히려 천 년 뒤의 공격을 면치 못하였으니, 아 이상한 일입니다. 이는 세도(世道)를 맡은 이가 거울삼아 살펴야 할 바가 아니겠습니까.
신이 이이화 성혼의 어짊을 어찌 감히 공자ㆍ맹자ㆍ정자ㆍ주자에 견주겠습니까마는, 그들은 공자ㆍ맹자ㆍ정자ㆍ주자의 교훈을 가슴에 새기고, 공자ㆍ맹자ㆍ정자ㆍ주자의 학문을 강론하고 밝혀서 공자ㆍ맹자ㆍ정자ㆍ주자의 한 줄기 도통의 맥락이 이들에게 힘입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였으니, 이 또한 공자ㆍ맹자ㆍ정자ㆍ주자의 도(道)입니다. 공자ㆍ맹자ㆍ정자ㆍ주자도 이미 밖에서 오는 모함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이이와 성혼이 헐뜯음을 당하는 것은 진실로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아, 이이의 어짊은 비록 채진후 같은 무리로도 달리 지적할 만한 흠이 없자, 다만 그가 소시 적에 불교에 종사한 일을 그의 결점으로 삼았고, 세속의 어리석은 소견으로 혹 이것을 논하는 자도 있으니, 신 등이 변명하겠습니다.
불교의 한 가지 법은 비록 이단(異端)이라고는 하나, 그 심성(心性)을 논한 데에는 실로 정묘하여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곳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참다운 선비가 도를 구할 초기에는 으레 그 속으로 흘러들어감이 많았으니, 장횡거(張橫渠 이름은 재(載))나 정명도(程明道 이름은 호(顥))가 두드러진 분이고 주자로 말하면 가장 심한 분입니다. 주자는 나이 15~16세에 도에 뜻을 두었으나 그 방법을 알지 못하자, 불교에서 찾아 고승(高僧) 도겸(道謙)을 스승으로 삼고 불교에 빠져서 돌아오지 못한 지 거의 10년이 되었다가 나이 24세가 되어 비로소 연평(延平) 이 선생(李先生) 이름은 통(侗))을 만나 사사한 뒤에야 선학(禪學)의 그릇됨을 크게 깨달았습니다. 연평이 그의 벗 나박문(羅博文)에게 보내는 편지에, ‘원회(元晦 주자의 자)가 처음에 도겸의 잘 열어주는 곳을 따라서 공부하여 이루어졌으므로 모두 이치에 체득하였다.’ 하였고, 주자의 문집속에도, 스스로 여러 번 소시 적에 선학(禪學)을 배운 일을 말하여 학자를 경계하였습니다.
저 유교와 불교의 사정(邪正)에 대해서는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이나 속된 무리들도 오히려 말할 줄 아는데, 정자나 주자 같은 대현(大賢)들도 잘못 들어감을 면치 못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석씨(釋氏)의 설이 본래 아주 이치에 가까운 점이 있으므로 자질이 고명하고 도를 구함이 매우 간절하며 마음씀이 아주 예리하면 흘러들어가기 쉬운 것은 진실로 당연한 형세입니다. 이이의 일도 이와 같습니다. 이것은 이이가 자신을 책망하는 도리에 있어서 마땅히 뉘우치고 징계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지만, 후학의 입장에서 본다면, 오직 그가 깨달은 뒤에 조예가 높은 것을 취하여 사표로 삼을 뿐인데, 어찌 혼미할 때에 저지른 실수를 지적하여 그의 허물을 의논해서야 되겠습니까. 반드시 이것을 가지고 허물로 삼는다면 또한 주자도 함께 공격하겠습니까.
채진후의 상소에 이른바, ‘이이가 성묘(聖廟)에 참배할 때에 참배를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 것은 실로 터무니없는 말입니다. 이이가 급제하기 전에는 동서(東西)의 분당도 없고 맑은 의논이 한창 성하였습니다. 생원이나 진사의 장원은 유림(儒林)의 극망(極望)이니, 만약 이이의 출처를 미진하게 여겼다면 그를 장원에 뽑으려 했겠습니까. 이미 장원을 허락하고 성묘 참배를 허락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당의(黨議)가 갈라진 뒤부터 남의 허물을 꼬치꼬치 캐서 세상에 완전한 사람이 없었는데, 이이만은 도덕과 문장이 청천 백일(靑天白日)과도 같아서 지적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다만 선학을 배운 한 가지 일을 끄집어내어 말하는 자료로 삼아 헐뜯으니, 듣자니 한 번 웃음거리도 되지 못합니다.
성혼이 죄를 받은 전말은 또한 성상께서도 이미 들으셨으리라 생각되옵니다. 대체로 신묘년(1591, 선조 24)간에 당화(黨禍)가 크게 일어나서 당시 명류(名流)라고 불려지는 사람들은 모두 귀양가는 화를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성혼은 뭇소인들이 가장 미워하였으나, 초야에 살고 본래부터 중망(重望)이 있었으므로 그 죄를 얽어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임진년의 변고에 적의 기세가 점점 가까이 닥치게 되어서는 성혼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초야의 신하가 바야흐로 죄를 논의하는 처지에 들어 있으니, 나라가 어지럽다 하더라도 소명(召命)이 없는데 지레 대궐에 나아가는 것은 의리에 온당치 못하다. 옛날 제(齊) 나라가 병화를 당했을 적에 왕촉(王蠋)은 초야에 물러나 농사지으면서 난리를 구하러 나간 적이 없다가, 연(燕) 나라 군사의 협박을 당하게 되어서야 목숨을 바쳤으니, 이는 초야에 있는 신하는 그 의리가 조정에 있는 이와 같지 않아서일 것이리라. 만약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거둥하시면 길에 나가 뵙고서 진퇴(進退)의 명을 기다리겠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뒤에 왕이 서울을 떠나시는 계획이 하룻저녁에 결정되어 그날로 곧장 임진(臨津)에 당도하셨으므로 성중의 사대부들도 미처 알지 못하였고, 더러는 다음날 새벽에 대귈에 나아갔다가 비로소 안 사람도 있었습니다. 성혼이 사는 곳은 파산(坡山)이어서 큰길과 20리 남짓 떨어졌는데, 대가가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는 바삐 뒤따라 가려 하였는데, 강나루가 막히고 군사들이 길을 막았으며 대가는 이미 멀리 가셨습니다. 드디어 갖은 고생을 하며 산과 강을 건너 광해군(光海君)의 부름에 나아갔다가, 곧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거둥하여 일시 머무는 곳)에 나아갔던 것입니다. 대개 왜적의 경보가 처음 이르렀을 때 감히 대궐에 나아가지 못한 것은 진실로 나아가기 어렵게 여긴 성혼의 본의였지만, 서울을 떠나시던 날 미처 대가를 맞이하지 못한 것은 실로 사세가 어쩔 수 없었던 것이옵지, 성혼의 잘못은 아닙니다.
적신(賊臣) 이홍로(李弘老)는 본래부터 성혼을 미워하였습니다. 선조께서 임진에 이르시어 성혼의 집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시자, 홍로는 가까운 언덕에 있는 촌집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바로 저기입니다.’ 하니, 선조께서는, ‘그렇다면 어째서 보러 오지 않는고?’ 하시매, 홍로는, ‘이런 때에 그가 어찌 뵈러 오려 하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얼마 뒤에 성혼이 광해군이 머물던 곳에서 행재소로 가서 뵙자, 홍로는 또 참소하기를, ‘성혼이 온 것은 광해군을 위해 선위(禪位)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아, 증자(曾子)의 어머니는 자기 아들을 믿으면서도 오히려 북을 던져버리는 의심이 있었는데 하물며 군신 사이에 어찌 여러 번 이르는 교묘한 참소에 동요됨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계속해서 정인홍이 모함으로 죄안을 짜냄이 있었으니, 채진후의 상소에서 거론한 삭탈관직 하라는 전지는 정인홍의 참소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 예로부터 현인 군자(賢人君子)가 밝은 임금을 만났다가 마침내 참소하고 간사한 사람의이간을 당한 자를 어찌 이루 다 말하겠습니까. 전대의 일은 우선 내버려두고 논하지 않고, 본조(本朝 이조)의 일을 말하더라도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은 중종의 알아줌을 받아 요순(堯舜) 같은 정치를 이루기를 기약하다가 이내 불측한 화를 당하였으므로 지금까지도 유림에서 지극히 통탄해 하며,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은 세 대[三朝 중종ㆍ인종ㆍ명종]의 숙덕(宿德 학덕이 높은 노인)으로도 먼 변방에 귀양가서 죽음을 면치 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중종이나 명종 두 성군의 뜻이었겠습니까. 간사한 사람들이 얽어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한때 죄를 받은 까닭으로 곧 백 대 시비의 단안(斷案)으로 삼아, ‘이 사람은 선대 때에 이런 죄명을 입었다. 신하를 알기로는 임금만한 이가 없으니 다시는 그 어짊을 칭찬할 수 없다.’고 한다면 조광조나 이언적이 어떻게 사문(斯文)에 참여하겠습니까.
선대에 5현(五賢)을 종사시키자는 청은 40여 년을 끌었으되 선조께서 고집하여 허락하지 않으시고, 또 온당치 못하다는 엄중한 교지를 내리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고관들과 선비들이 똑같은 말과 한 마음으로 선현(先賢)을 위해 변별하였으니, 어찌 상의 하교가 이러하다 하여 드디어 이미 나온 공론을 그만둔 일이 있습니까. 오직 2현(二賢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을 몰래 헐뜯던 인홍의 무리만 기뻐 날뛰어 팔을 걷어붙이고 구실 삼을 자료로 삼게 하였으니, 이것이 사류(士類)가 함께 분히 여기는 바입니다. 아, 2현을 공격한 자도 인홍이고 성혼을 얽어낸 자도 인홍인데, 모두 임금의 준엄한 전지를 가지고서 구실을 삼았습니다. 지금 채진후의 무리가 인홍의 논의에 그 한 가지는 버리고 그 한 가지는 취했으니, 이것이 과연 공정한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까. 그 속셈이 불을 보듯 분명한데, 성상께서 아직도 통촉하지 못하시고 도리어 너그럽게 대해주는 빛을 보이시니, 이것이 신 등이 황송하고 의심하여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허심탄회하게 살피시어 사정(邪正)을 분변하시고, 빨리 신 등의 청을 들어주시어 도통이 오래가고 사특한 말이 사라지게 하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문묘에 종사시키는 예는 사람마다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너희들은 물러가서 학업을 닦고 다시는 무익한 말을 하지 말라.”
하였다.
3차 상소에 대한 비답은 이와 같다.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5현을 종사시키자는 청을 선왕조에서 끝내 윤허하지 않은 것은 선비를 가벼이 보고 도를 천하게 여겨서 그런 것이 아니라, 사체(事軆)가 매우 중하기 때문이었다.”
하였다.
4차 상소에 대한 비답은 이와 같다.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따르기 어렵다는 뜻을 이미 다 말하였으니, 너희들은 이처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5차 상소에 대한 비답은 이와 같다.
“불가한 일을 너희들이 날마다 굳이 청하니, 일이 지극히 온당치 못하다.”
하였다.
○ 영의정 윤방(尹昉)과 우의정 김상용(金商容)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삼가 아룁니다. 선유들은 한 세상의 사표(師表)이며, 공론은 한 나라의 원기입니다. 선유들이 모함을 받으면 스승의 도가 떨어지고 공론이 막히면 원기가 병들 것이니, 작은 일이 아닙니다. 신등이 적이 보옵건대, 관학 유생들이 선정(先正) 신(臣)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에 배향하자고 청하였는데 이것은 모두 사림들의 논의가 함께 나온 것이며 선현을 높이 받들어서 유학의 기풍을 진작시키려 함이니, 그 뜻이 또한 가상합니다. 삼가 성상께서 전후에 비답하신 것을 보옵건대, ‘잘못이 있어서 비방을 받았으니, 지극히 참람하고 외람된 일이다.’ 라는 분부가 계셨는데, 매우 저희 신하들이 성상께 바라던 바가 아닙니다. 두 현신의 조예의 정도는 신 등이 학식이 얕아서 알 수는 없사오나, 그들이 한평생 성리학(性理學)에 전심하여 일상생활의 모든 행동에 꼭 성현으로 표준을 삼았으며, 벼슬하여 임금을 섬김에는 요순과 주공ㆍ공자의 도(道)가 아니면 임금 앞에서 진달하지 않았습니다. 의리를 강론해서 밝히고 후학들을 깨우치는 것이 대부분 선유들이 밝히지 못했던 것을 확충했으니 비록 한 시대의 진유(眞儒)라고 하여도 가할 것이며, 문묘에 배향된 본조(本朝)의 여러 현인들과 비교하여도 거의 부끄러움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말세에 태어나서 선비들의 논의가 어그러지고 시비가 갈라질 즈음에 세속 사람들의 질시와 시새움을 면치 못하였으니, 만약 이것으로 갑자기 그 사람의 고하를 판단한다면 공통된 논의가 아닐까 합니다. 문묘에 배향하는 일이 중대하기 때문에 만약 경솔하게 논의할 수 없다 하시고 어려워하고 삼가는 뜻을 보이심은 큰 잘못이 되지 않으나, 잘못이 있어 참람하다느니 외람되다느니 분부하심은 많은 선비들의 실망일 뿐 아니오라, 공의가 막혀서 성상께서 현인을 숭상하고 사문을 두둔하시는 성대한 뜻에 이지러짐이 있을 듯합니다.
또 신 등이 걱정하는 것이 있습니다. 당론이 갈라진 뒤부터 사람마다 견해가 달라져서 진실로 애써 같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선비들이 서로 의논해서 어진이를 존숭하려는 소장을 올리려 하면 비록 의견이 같지 않더라도 마땅히 자기 의견만 말하고 그 논의에는 참여하지 않으면 그 뿐인데, 따로 한패를 만들어 맞서 소장을 올려서 선현을 비방하기를 못하는 바가 없기까지 하니, 이것이 어찌 선비들의 아름다운 풍습이겠습니까. 두 현신이 설령 배향시키기에 합당하지 못하다 하더라도 선배가 되는 덕망이 있는 선생이나 장자임에는 틀림이 없다면 선비라고 이름하는 자들이 어찌 경솔하게 꾸짖고 함부로 욕하여 조금도 거리낌이 없음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는 것입니까. 이런 버릇이 자라나면 사류들이 어찌 화합될 수 있으며 공론이 어떻게 밝혀질 수 있겠습니까. 인심과 세도가 날로 어찌해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를까 걱정됩니다. 신 등은 늙어서 거의 죽을 때가 되어 만 가지 생각이 불꺼진 재와 같으니, 젊은 사람들의 하는 일의 득실이나 선악에 대해서는 관심둘 필요가 없사오나, 이 일은 사문에 관계되어 등한시할 시비와 견줄 것이 아니기에 감히 하찮은 말을 올립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깊이 생각하시고 오래 유의하시어 속히 깨달았다는 뜻을 보이시어 사문으로 하여금 기운을 내게 하시면 국가와 유림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재결하여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채진후(蔡振後) 등이 국가의 처치를 기다리지 않고 앞질러 소장을 올렸으니, 아주 경망하다.”
하였다.
○ 좌의정 오윤겸(吳允謙)이 차자를 올리기를,
“삼가 아뢰옵니다. 신이 성밖에 움츠리고 있으면서 병세가 더욱 중해져서 죽을 날이 가까워 듣거나 알려고 하는 바가 없었는데, 일전 저보(邸報) 중에, 성균관 유생 송시영(宋時瑩)의 비답에 이르시기를, ‘잘못이 있어서 비방을 듣게 되었다.’ 하시고 또 채진후(蔡振後)의 비답에 이르시기를, ‘매우 지극히 참람되고 외람되다.’ 하신 것을 보고는 신이 놀라움과 탄식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적이 생각하건대, 전하께서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학문과 도덕의 높음과 선왕께서 끔직하게도 아낀 융성한 대우와 말년에 참소를 만나고 무고(誣告)로 죄를 입은 까닭을 경연의 신하들이 직접 말한 것이나 사실을 기록한 행장의 글이나 그들을 논의하고 변명한 글로써 필시 깊이 양찰하시고 밝게 분간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번에 이러한 온당치 못하신 전교가 계시어 마치 전혀 경모(敬慕)하고 우대하는 마음이 없는 것처럼 말씀하시니, 신은 실로 전하의 의사를 모르겠습니다. 임금의 마음은 온갖 변화의 근본이고 어진 선비는 국가의 원기입니다. 전하께서 착한 이를 좋아하시고 악한 이를 싫어하시는 구분에 진실로 알고 살피시지 못함이 이러하시면 근본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걱정될 뿐만 아니라, 원기가 상처를 입게 되니 국가의 불행이 어떠하겠습니까. 신이 맨 뒤에 채진후 등의 두 어진 신하를 비방하고 무고한 상소를 보니, 이이가 도학으로 돌아온 뒤에 깨닫고 스스로 변명한 소장과 성혼이 무고를 당했을 적에 죄를 논의한 전지(傳旨)를 등사해서 이것을 증거로 삼았습니다. 그 죄를 얽고 성상의 총명을 어지럽힌 소행이 지극히 낭자해서 인심이 착하지 못하고 선비의 버릇이 어그러짐은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신은 성혼의 제자입니다. 성혼의 마음씨를 자세하게 아는 사람은 늙은 소신뿐입니다. 청하옵건대, 성혼이 무고를 당한 곡절을 개진하려 하옵니다.
계미년(1583, 선조 16) 사이에 선조께서 이이를 신임하시어 물과 고기가 서로 만난 듯 친밀하심이 비할 데 없었습니다. 그런데 뭇소인들의 시기와 미움을 크게 받아서 불측한 죄를 얽으려 하자, 그때 성혼이 마침 왕의 부름을 받아 서울에 올라와 이이의 충성과 어짊을 변론해서 구출하고 당시 사람들의 심술을 공격하고 배척하였습니다. 이에 선조께서 관대하게 비답하시기를, ‘어진 사람이 국가에 유익함이 이러하다.’ 하였습니다. 이것이 당론으로 지목된 시초입니다. 그리고 신묘년(1591, 선조 24)에 이르러 사화가 크게 일어나서 한쪽 편은 모두 귀양갔고, 이이는 이미 죽었으며 성혼만이 살아 있었으니, 그 깊이 미워하고 죄주려 하는 자들이 얼마나 극성스러웠겠습니까. 그러나 초야에 살고 있어서 원래 세상 논의에 간여한 일이 없었으므로 비록 험한 귀양길은 면했으나 간당(奸黨)이라는 지목을 받아 죄명이 매우 중했습니다. 임진년의 난을 당해서 적병이 점점 서울에 가까이 오자 스스로 생각하기를, ‘초야에 사는 신하가 조정에 죄를 얻어서 현재 논의 중에 있으니, 비록 나라에 난리가 있으나 왕의 소명(召命)을 받지 않고 함부로 대궐에 나아가는 것은 의리에 온당치 못하다.’고 여겼으므로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고 주저하여 나가려 하다가도 감히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정상과 형편을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또 그 당시에 오가는 말들이 들끓어서 전하는 말에 왕의 행차가 이미 서도로 가시게 되었다는 말을 성혼이 듣고 말하기를, ‘대가가 과연 서도로 행차하시면 마땅히 길가에 나가서 뵙고 진퇴(進退)의 명을 기다리겠다.’ 하였습니다. 대가가 임진강을 건너시던 때에는 성혼의 집이 뱃나루에서 20리 밖이나 되는 산골짜기에 있어서 전혀 소문도 듣지 못했습니다. 성혼의 처형되는 사평(司評) 신식(申拭)이 대가를 따라서 임진강에 이르러 건너지 못하고 뒤떨어져서 성혼의 집에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성혼이 처음으로 소식을 듣고 서로 붙들고 통곡하였습니다. 뒤따라 가려 했으나 나룻길이 막히고 적병들이 길을 막아서 어찌할 수 없었고, 수일 동안에 모두들 피난하게 되어 마을마다 비어서 권솔들에게 부축되어 산골짜기를 헤매었습니다. 원래 허약한 몸으로 근심과 고통이 고질이 되어 거의 몸을 기동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마침 광해군이 이천(伊川)에 머물고 있으면서 편지를 보내 부르므로 병든 몸으로 가마에 떠메어져서 갔습니다. 삭녕(朔寧)에 이르니, 광해군이 성천(成川)으로 가서 또 편지를 보내어 근방에서 의병을 모집하라 하여 드디어 이정형(李廷馨)ㆍ김적(金績) 등과 함께 의병을 소집하였습니다. 그런즉 분조(分朝)에 가지 못한 것은 의병을 모집하라는 명령이 있어서였습니다. 말하는 사람들이 ‘왕의 소명이 간절하였는데도 끝내 나오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거짓이 아니겠습니까. 광해군이 성천에 도착하여 또 소명을 내려서 처음으로 성천에 갔으나 오래 머물지 못하고 광해군에게 청해서 행재소로 곧장 들어갔습니다. 대개 그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이미 먼저 갔으면 다시 대조(大朝)에 가서 문후하지 않는 것은 의리에 온당치 못하다고 여겼으므로 이렇게 곧장 행재소에 가려는 계획을 한 것인데도 말하는 사람들은 또 용강(龍岡)에는 적병이 가까워서 의주(義州)로 바로 갔다고 하니, 이 역시 거짓말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그때 대간에서 논의되었는데, 젊은 후생들이 그때의 사실을 알지 못하고 단지 대론(臺論)의 전지(傳旨)만 가지고 함부로 모함하고 비방한 것이 이 정도에 이르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성혼이 산중에 외따로 산 것은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입니다. 마음가짐이 공평한 사람이 말한다면 대가를 길가에서 맞이하지 못한 것은 사세가 그렇게 되었다고 하는 데에 불과할 것인데, ‘대가가 그의 집 가까이 지나가도 나오지 않았다.’고 하여 임금을 저버렸다고까지 지목하였습니다. 아, 천하에 어찌 임금께서 파천(播遷)하여 집 앞을 지나간다는 말을 듣고 편안히 앉아서 나가 보지 않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인간의 정리로 비추어서 절대로 근사하지 않습니다.
말하는 사람들이 또 ‘간신에게 붙었다.’ 하는데, 여기서 이른바 간신이란 바로 정철(鄭澈)을 말한 것입니다. 정철은 어려서부터 효제(孝悌)하고 청렴해서 친구들에게 추앙을 받았습니다. 성혼과 한 동네에 살면서 서로 친해서 우정이 매우 두터웠습니다. 정철이 말년에 비록 주색에 빠진 실수가 있었으나 그렇게 큰 잘못은 아니었으므로 우정을 그대로 지켰던 것입니다. 기축년(1597, 선조 25)의 변고 때에 정철이 갑자기 옥사를 다스리는 임무를 맡아서 들끓는 의론을 진정시키지 못하였으니, 큰 옥사를 추국(推鞫)할 때에 역시 인심을 잃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때 옥사는 전적으로 정철에게 죄를 돌렸습니다. 그러나 옥사가 일어난 처음에 정철이 성혼에게 보낸 편지에 ‘오로지 사대부들의 화(禍)를 구원하려 한다.’ 하였습니다. 정철과 이발(李潑) 사이에 이미 원수의 틈이 생긴 것은 온 나라 사람들이 다 아는 바이나, 당초 국문할 때에 구출하려 애써서 북도로 귀양보냈는데, 또 역적의 공초로 인하여 잡혀와 죽게 되었습니다. 정언신(鄭彦信)에게 사사(賜死)하라는 분부가 내려질 때에도 정철이 애써 주달해서 두 번이나 진달하여 죽음을 감했습니다. 또 최영경(崔永慶)이 죽은 것도 정철의 죄라고 하나, 성혼은 항상 최영경의 청렴하고 효도와 우애가 있다고 칭찬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정철은 인대(引對)할 때에도 최영경은 효도와 우애가 있는 사람이라고 주달하였으며, 또 추국할 때에도 구출하려 하였습니다. 정철과 최영경은 평생 교분이 없었으되 여러 차례 구출하려 한 것은 성혼이 정철에게 편지를 보내서 최영경의 본심은 의심할 것 없다고 말한 까닭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성혼과 정철 사이에는 절교할 까닭이 없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간신에 붙었다 하는 것은 실정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광장(匡章)은 모두 불효자라고 일컬었으되 맹자께서 예로 대접하였으니, 만일 절교할 만한 사실을 보지도 못하고 한갓 남의 말만 듣고 경솔하게 절교하는 것은 군자가 친구를 대접하는 도리가 아닐 것입니다. 아, 선왕의 총명하시고 거룩하심으로 사랑하시고 우대하심이 융숭하였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보전하지 못함은 당초에는 이홍로(李弘老)의 교묘한 참소로 인하였고, 이어서 정인홍(鄭仁弘)의 사독(邪毒)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채진후 등이 등서한 성상의 교지는 실로 옛날 증삼(曾參)과 이름이 같은 자가 사람을 죽였는데, 세 사람이 와서 말한 뒤에 증삼의 어머니가 베짜던 북을 던진 것과 같습니다.
이이는 도학의 순수함과 조예의 정묘함으로 고명하고 탁월해서 큰 근원을 환히 알아 스스로 중임을 맡아 세도(世道)를 만회하고 백성 구제하기를 자기의 책임으로 삼았으니, 참으로 주자(朱子)의 전통을 이었다 할 수 있고 우리 나라에서는 이황(李滉)의 뒤의 한 사람일 것입니다. 채진후 등이 선문(禪門)에 물들었다고 병통을 삼는데, 그 말의 무식함은 실로 한 번 웃음거리도 되지 못하며 여러 말로 변명할 것도 없습니다. 선학(禪學)은 맑고 조용하며 이치에 가까우므로 기질이 맑고 고상한 사람들이 진리를 알고자 하는 초반에 으레 이것을 많이 배웠습니다. 비록 장횡거(張橫渠 이름은 재(載). 송 나라 성리학의 태두)나 주자(朱子) 같은 대현으로도 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또 성혼의 학문은 가정에서 얻은 것입니다. 그의 부친 성수침(成守琛 자는 중옥(仲玉), 호는 청송(聽松))은 조광조(趙光祖)의 제자로서, 고상한 운치와 거룩한 덕이 한 세상의 추앙을 받았습니다. 파산(坡山)에 숨어 살면서 여러 번 나라에서 불렀으나 나오지 않아서 모두 청송 선생(聽松先生)이라 불렀으니, 전통 있는 학문으로 유래가 있습니다. 방정하고 위엄이 있고 독실하며 장중(莊重)하고 안화(安和)하여 언어와 행동을 한결같이 성인의 가르침을 따르고, 강론하고 실천하는 데에 공부를 지극히 하였으며, 근본을 지키는 데에 더욱 힘을 썼으며, 집을 다스리는 법도와 상례의 절문(節文)은 《소학》과 《가례(家禮)》를 따라서 효제(孝悌)와 성경(誠敬)으로 근본을 삼았습니다. 이이와 도의의 교분을 맺고 일찍이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의 이기설(理氣說)을 논의하여 왕복한 몇 천 마디가 선유들이 밝히지 못했던 말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 이이가 항상 말하기를, ‘돈독하고 명확한 행동을 나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아, 스승의 도가 오랫동안 끊어지고 학문하는 방법이 전통을 잃어버려 세상에서 선비라 하는 자들이 단지 구두(句讀)와 문장에 힘을 쓰고 선유들의 도학과 조예의 정도를 아는 자는 드뭅니다. 채진후 같은 무리들이 제멋대로 거리낌없이 모욕하는 것은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경망스런 후생들이 스스로 어진이를 끊는 것이 슬픈 일이지, 이이나 성혼의 도덕에는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오직 원하옵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좋아하시는 바를 깊이 믿으시고, 다른 논의에 동요되지 마시어 간사하고 편벽된 말을 일월 같이 밝은 성상께서 용납하지 않으시면 유학의 도가 저절로 높아지고 선비들의 버릇이 저절로 바루어질 것이니, 사문(斯文)과 국가의 큰 다행일 것입니다. 재결을 바랍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두 사람의 장단점은 내가 알고 있은 지 오래다. 다른 논의에 동요되어 윤허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 판서 조익(趙翼)이 차자를 올리기를,
“삼가 아뢰옵니다. 관학 유생들이 상소하여 선정(先正) 신(臣)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 배향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다른 의론이 그 사이에 나와서 비방과 배척을 멋대로 하니 전하의 뜻에 혹시나 그 사이에 의심이 없지 않을까 염려되옵니다. 두 신하의 도덕은 진실로 문묘에 배향되고 되지 않는 데서 가벼워지거나 중해지는 것은 아니나, 성인은 사람을 알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였으니, 전하의 총명하고 거룩하심으로 두 신하의 어짊을 다 아시지 못하신다면 어찌 크게 한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같은 시대에 알지 못하는 것도 걱정됨이 진실로 큰데 여러 대에도 알지 못하면 역시 걱정이 되지 않겠습니까. 두 신하는 바로 신이 평생 동안 숭배한 사람들입니다. 어리석고 비루하고 무식한 신이 비록 지혜가 어진 이를 알아보기에 부족하다 하더라도 오직 착한 이를 좋아하고 악한 이를 싫어하는 마음은 남과 똑같은 천성에서 나와 다행히도 잊어버리는 데에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두 신하의 행적은 장로(長老)들에게서 얻어 들은 한두 가지를 감히 전하를 위해서 대략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이 적이 듣자옵건대, 이이는 어릴 때부터 영특하고 범상치 않아서 말을 배우면서 곧바로 글자를 알았습니다. 다섯 살 때에 모친이 병이 들자 남몰래 사당에 들어가서 모친의 병이 낫기를 기도하는 것을 그의 숙모가 보고 기특히 여겨서 안고 돌아온 일이 있었고, 어떤 사람이 물을 건너는데 미끄러져서 빠지려 하는 것을 부르면서 따라간 일이 있었습니다. 일곱 살 때에 이웃에 사는 진복창(陳復昌)의 간사함이 훗날의 걱정이 될 것을 알고 전(傳)을 지어서 밝힌 바가 있습니다. 아홉 살 때에는 옛 사람들의 행실과 의리의 고상함을 흠모해서 혹은 그림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혹은 성명을 벽에 죽 써 두고 그분들을 숭배하는 의사를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열두 살 때에는 부친이 병들자 팔을 찔러 피를 내어 기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슬기롭고 어질고 효성스럽고 정직하고 선을 좋아하는 정성이 어릴 때부터 이미 이러하였으니, 그 타고난 자질의 순수함이 진실로 보통 사람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평생 동안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아 책이라면 보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육경(六經 역경ㆍ시경ㆍ서경ㆍ춘추ㆍ예기ㆍ악기)에 통달해서 상하(上下)를 꿰뚫어 알며, 천인(天人)ㆍ기(理氣)ㆍ성정(性情)의 오묘한 이치와 경전(經傳)의 정밀한 뜻과 성현들의 깊은 뜻에 뛰어나게 투철해서 그것을 변별하고 분석하는 것이 모두 진지한 견해와 실지 체득에서 나왔고, 옛 사람이 한 말이나 근사한 이치를 끌어낸 것이 아닙니다. 그 견해가 이른 경지를 진실로 학식이 얕은 자가 알 바가 못 되오나,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 추측하면 곧바로 정자(程子)나 주자의 뜻과 합치되며 후대의 유학자들이 미칠 바가 아닐 듯합니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서모(庶母) 섬기기를 친어머니 섬기듯이 하여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문안하며, 서모가 술을 좋아하매 꼭 술을 데워서 올렸습니다. 그 서모는 성질이 포악해서 이이가 높은 자리에 있었으되 조금이라도 뜻에 맞지 않으면 당장 몹시 화를 내었는데 반드시 웃는 얼굴로 노여움을 풀고야 말았습니다. 사람이 친어머니에게도 이러하기가 어려운데, 하물며 계모이며, 더구나 서모이겠습니까. 이런 일은 세상에 절대로 다시 없을 것입니다. 형을 섬기기를 부친 섬기듯이 하였고, 그 형도 사정에 어두워서 이이가 존귀하게 된 뒤에도 젊은 자제처럼 심부름을 시켰으나 곧장 대답하고 수고하기를 조금도 어려워함이 없었으며, 가세가 가난해서 형제들이 모두 배고픔과 추위를 면치 못하였고, 그 처가에 조금 재산이 있어 장인되는 노경린(盧慶麟)이 서울에 집을 사서 거처하게 하였으되 형제들의 가난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즉시 그 집을 팔아서 면포를 사가지고 모두 나누어주고 끝내는 한 이랑 되는 집도 서울에 없었습니다. 곤궁하여 견디기 어려운 사람들이 모두 한데 모여서 함께 거처하여 식구가 많으므로 죽을 쑤어서 연명하였고, 그것마저 계속 대지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젊을 때부터 고질병이 있었으되 평생 동안 예의로 공경하기를 극진히 하였고 나고 들때에 서로 읍을 하고 예로 접대하였으며, 매월 초하루나 보름에는 집안 사람들을 모아서 예를 행하고 가법(家法)을 읽었습니다. 그 집안에서 행동한 것이 모두 지극히 착하기가 이러하였으니, 비록 인륜의 도리를 다하였다 하더라도 옳을 것입니다.
문장은 마치 물이 솟아오르고 하수(河水)가 터진 것과도 같아서 일시에 천 마디 말이 쏟아져 나왔으며, 혹은 여러 사람들 속에서도 당장 붓을 잡으면 멈추지 않고 마치 생각하지도 않고 내려쓰듯이 하여도 다시 고치거나 가감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타고난 재주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서 배우지 않고도 능통한 것입니다. 벼슬해서 임금을 섬길 때에도 언제나 옛날 제왕으로 인도하려는 것을 법으로 삼았으며, 임금의 뜻은 반드시 옛날 제왕의 마음으로 마음을 쓰게 하였으며, 임금의 학문은 반드시 제왕의 학문대로 정치를 하시게 하여 후세의 어진 임금의 도리에 조금이라도 미진한 것은 할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정치를 논의할 적에는 옛날 삼대(三代 하(夏)ㆍ상(商)ㆍ주(周))의 도를 반드시 행해야 한다고 하고, 삼대의 정치를 꼭 이루어야 한다고 하여 만물이 모두 제 살 곳을 얻도록 마음을 썼습니다. 일에 따라 진언을 할 적에는 바른 말로 임금의 안색을 거스리면서 간절하게 성심을 다하여 꼭 바로잡고 고치기를 기약하고, 일을 당해서 변론을 할 적에는 고금의 일을 인용해서 명백하게 분석하여 꼭 지당한 데로 돌렸습니다. 사림의 의론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것을 근심해서는 양당을 조정해서 조정을 화합시키려 했으며, 백성들의 곤궁함을 불쌍히 여겨서는 여러 가지 폐단을 개혁해서 백성들을 편안히 살 수 있게 하려 했으니, 그 마음에 실로 세상이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지는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대개 우리 나라 사람들은 비록 어진이라 하더라도 겨우 자기 몸 하나 수양하는 것만으로 능사를 삼았습니다. 옛날 사마광(司馬光 송 나라 사람으로 호는 제물자(齊物子), 왕안석(王安石)의 신법에 반대하여 사직하고, 《자치통감(資治通鑑)》 편찬에 전념하였음)이나 범중엄(范仲淹 송나라 사람으로 정치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함)처럼 천하를 근심한 사람은 실로 매우 드물었으며, 요순 같은 임금을 만들고 백성에게 혜택을 주려고 마음 쓴 사람은 오직 조광조(趙光祖)와 이이가 그럴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조정에 나오고 물러갈 때에도 털끝만큼도 구차한 마음이 없었고, 옳지 못한 일을 보면 초연히 사직하여 용기가 그 뜻을 굽히지 않았으며, 그 나가는 것은 언제나 어렵게 여기고 물러가기는 항상 빨랐습니다. 늦게 선조의 융숭한 대우를 받아서 군신간에 친밀하기가 물이 고기를 만난 듯 천년에 드물게 있는 일이었으되 불행히도 하늘이 빨리 데려가서 마음에 있는 정책을 다 시행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우리 나라의 천고의 한이 아니겠습니까. 그가 죽을 때에는 서울과 지방 백성들, 아이들이나 하인들까지도 슬퍼하고 애석해 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나무꾼들까지도 성안에서 소문을 듣고 모두 서러워서 멍하니 무엇을 잃어버린 듯하였고, 유생ㆍ금군(禁軍)ㆍ의관ㆍ역관ㆍ낮은 품관(品官)들과 각 동리 시민들이며 모든 관청의 아전들까지 모두 와서 곡전(哭奠)을 하고 친척과 같이 슬퍼하였습니다. 발인하던 날에는 성안 백성들이 거의 성을 비운 채 영구를 전송하여 횃불이 수십 리를 이어서 이런 일은 우리 나라가 생긴 이래로 일찍이 없었다하니, 이것이 어찌 누가 시켜서 한 일이겠습니까. 오직 그 지극히 공평한 마음이 남을 신복(信服)시키고, 순수한 덕이 사람의 마음속에 젖어들어 공경하라고 하지 않아도 백성들이 공경하고, 슬퍼하라고 하지 않아도 백성들이 슬퍼한 것입니다. 이로 보면 당시 국내의 대소인들 중에서 몇 명의 벼슬아치들이 자기의 이해와 관련된 사정에 끌려서 미워하고 반대했을 뿐이며, 그 외의 사람들은 모두 기쁘게 복종하지 않은 이가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인이 말씀하신, ‘사욕을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면 천하 사람들이 인자라고 허여할 것이다.’는 말이 어찌 참말이 아니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음으로 헤아려보면 그의 학문과 인의(仁義)가 우리 나가가 생긴 이래로 일찍이 없던 일인가 생각되오며, 비록 삼대(三代) 시대의 인물이라 하여도 옳을 듯합니다. 그리고 맹자가 말한 ‘천하의 인(仁)을 행하며, 천하의 예(禮)를 지키며, 천하의 의(義)를 행한다.’는 것과 주자(周子 송나라 학자로 이름은 돈이(敦頤), 호는 염계(濂溪)임)가 말한 ‘안자(顔子)가 배운 바를 배우며 이윤(伊尹)이 뜻한 바를 뜻삼는다.’ 한 것이 이이가 실로 여기에 거의 가깝습니다. 아, 이와 같은 대현이건만 미워하는 소인들은 여태껏 그 흠을 찾아서 그가 20세 이전 도를 듣지 못했던 때에 이단에 빠졌던 것을 허물로 삼습니다. 예부터 현인들이 도를 구할 때에 이러한 일이 많았습니다. 이것을 버리게 되어서는 도학에만 순수하였으니, 일월과 같이 밝은데에 무엇이 손상되겠습니까. 여기서 더욱 군자의 고상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초년에 도를 구할 때의 실수를 즉시 버린 것을 가지고 뒤에 성취한 백세에 모범이 될 만한 큰 도덕과 큰 공업을 엄폐하려 하니, 이것은 해와 달을 훼손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옛날 한유(韓愈)가 말한, ‘소인들은 의론을 좋아하고 남의 미덕을 도와서 이루어 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이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성혼의 부친 성수침(成守琛)은 젊을 때 조광조 문하에서 수업하고, 은둔하여 뜻을 구하고 나라에서 불러도 나가지 않으니, 세상에서 고상한 사람이라고 탄복하였습니다. 성혼은 이 처사의 가정에서 생장하여 듣고 익힌 것이 모두 청고(淸高)한 일로, 청렴 담백하고 욕심이 적은 점이 그 가풍에서 나왔습니다. 그가 어릴 때에 부친이 중한 병이 들자 병 간호로 옆을 떠나지 않고 허벅지 살을 베어서 약을 만들기까지 했습니다. 열 살 전부터 효성이 이미 소문이 났고, 일찍이 과거 공부를 버리고 옛 사람의 학문에만 오로지 뜻을 두어 초야에서 문을 닫고 경전에만 몰두하여 소년시절부터 늙어서까지 그 생각과 행동을 한결같이 법도대로 따랐고, 가정에 있어서 내외의 분별이나 장유의 차례나 조상 받드는 예절에 모두 정한 제도가 있어서 한결같이 옛 사람의 법도대로 하였습니다. 이이와 젊을 때부터 도의의 벗이 되어 서로 강론하고 연마해서 덕을 이루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그 식견의 고매함과 재주의 뛰어남이 비록 이이만은 못하다 하더라도, 그 지조의 주밀함과 실천의 독실함은 이이도 늘상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그 수양하고 체득하여 공부가 깊고 정력이 도달되어 종일 꼼짝 않고 엄숙하게 마치 소상(塑像)처럼 앉아 있었습니다. 이이는 말하고 웃고 즐겨하는 것이 학자들이 그래도 가까이할 수 있음을 볼 수 있었으되, 성혼은 학자들이 비록 10년을 동거해도 더욱 두려움만 볼 수 있어서 바라보는 사람들이 모두 덕을 이룬 군자로 알고 있습니다.
조헌(趙憲)의 지극한 행동이 뛰어나게 높음은 역시 백세의 사표(師表)라 할 수 있습니다. 나이가 성혼과 그리 차이는 없는데도 평생 동안 삼가 스승으로 섬겼으니, 여기에서도 그의 덕행이 높아서 크게 사람들을 감복시킴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정에 나가서 주달한 말은 성현의 좋은 법이 아님이 없고 당세에 필요한 일 아님이 없었습니다. 선조의 융숭한 돌보심과 대우 또한 세상에 드문 일이었으나, 한결같이 물러가려 해서 그 절개가 돌덩이 같아서 평생에 조정에 있은 지가 1년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이른바 유학자의 고상한 행동과 성세(聖世)의 숨은 백성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불행히도 소인들의 참소가 더할 수 없어 시비를 현란시켜서 벼슬을 삭탈하는 형벌이 죽은 뒤에 미쳤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그 죄를 얽은 말에 간신과 편당짓고 선비를 죽였다는 것은 사람들이 모두 거짓말인 것을 알고 있으니 지금 변명할 것도 없겠으나, 오직 임진년에 임금이 난리를 당하셨는데도 나가 뵙지 않았다는 것은 보통 사람들의 뜻에도 더러 의심이 갈 수 있으니, 신이 이것을 변명하려 하옵니다.
저 성혼은 원래 초야의 학자여서 평생에 삼가는 바가 나아가고 물러나는 데 있었습니다. 이때에 조정에서 용납되지 못하고 동료들이 모두 귀양갔거나 쫓겨나 있어서 막 자취를 감추고 죄를 기다리던 중이었으니, 비록 어지러운 때라 하더라도 나아가고 물러나는 절차를 아무렇게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결코 임금이 부르지 않고는 스스로 나아갈 이치가 없어서 오직 길가에서 뵙고 통곡하려고 미리 계획을 세웠으나 대가가 서도로 파천하심이 갑자기 이루어진 일이라서 미처 듣지도 못하여 형편이 그리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옛날 왕촉(王蠋)은 진언(進言)이 채용되지 못하자 시골에 물러가서 농사지으려 화읍(畫邑)에 이르렀고, 강만리(江萬里)는 송 나라 정승으로 있었으되 가사도(賈似道)와 뜻이 맞지 않아서 물러가 집에 있다가 스스로 지수(止水)에 빠져 죽었습니다. 이로 보건대, 옛날부터 절개를 위해 죽은 신하들은 꼭 모두 난리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성혼은 평생에 옛사람 법도를 배워서 보통의 처사도 모두 의의가 있었는데, 하물며 국가의 큰 변란과 군신간의 큰 의리에 어찌 일정한 주견도 없이 함부로 나가지 않았겠습니까. 우리 나라가 다행히도 중국 문명의 덕화를 입어서 문학하는 선비들이 예부터 있었으나, 고려 시대 이전에는 선비들의 힘쓴 바가 문장에만 치중하였고, 본조에 이르러서는 오현(五賢 김굉필ㆍ정여창ㆍ조광조ㆍ이언적ㆍ이황)이 처음으로 옛날 성현의 학문을 일삼았고, 그 오현 뒤에 성현의 학문을 전한 분은 오직 이이와 성혼 두 신하뿐입니다. 그러나 이 두 신하의 학문과 덕행은 실로 오현보다 못하지 않습니다.
옛부터 성현이 나오면 사람들이 경모하고 좋아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이는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것은 곧 사람의 본성이 똑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시 소인들이 있어서 시기하고 미워하니, 이것은 향기나는 풀과 악취나는 풀, 얼음과 숯이 서로 어울리지 못하는 것으로 이 역시 이치나 형세로 볼 때 꼭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신하의 어짊을 소인은 비록 동시대라도 꼭 싫어하고, 군자는 비록 백세의 뒤라도 꼭 공경하고 추모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이 유생들도 모두 두 신하의 일을 반드시 알지는 못합니다. 사람들이 산이나 북두칠성처럼 우러러봄이 오래 되었으므로 문묘에 배향시키기를 서로 모의하지 않고 동의하는 사람들이 수백 명이 되옵고, 그 중에서 의론을 달리하는 자들은 역시 당시에 이 두 신하를 모함하던 논의를 답습하는 것입니다. 아, 전일의 현인들이 한평생 선을 하는 데에 힘을 썼으니 바로 후생들이 본받아야 할텐데, 도리어 모함하고 해치려는 것이 이러하오니 그 사람됨이 어질고 불초함이 어떠합니까. 또 하늘이 사람을 낳을 때에는 본래 지극히 공평해서 선하고 악하거나 옳거나 그른 것이 당초에는 일정한 구분이 없었습니다. 그 잘못하는 사람은 단지 한때 잘못 생각이 들어서 그런 것이지, 어찌 처음 태어날 때에 국한되게 정함이 있었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잘못을 고치고 착해지는 것을 성현들이 크게 여긴 것입니다. 그렇다면 비록 당시에 모함하던 자들이라도 진실로 뉘우친다면 그들 역시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을 터인데, 더구나 그 자손들이 전날 남은 논의를 고수해서 이전 사람들의 잘못을 거듭하는 데이겠습니까. 적이 생각하건대, 그것은 효도라 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그 자손도 되지 않으면서 그 올바르지 못한 논의를 답습하여 스스로 어진이를 은폐하는 악을 짓는 자는 그 미혹됨이 더욱 심합니다. 신처럼 지극히 용렬하고 비루한 사람은 모든 일에 한 가지도 취할 것이 없으되, 오직 남달리 마음을 세워 언제고 지극히 공평하게 마음을 쓰려 하였으므로 저의 평생에 선을 착하다 하고 악을 미워하며, 옳은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하는 것을 모두 알맞게 하려 하고, 실로 털끝만치라도 당류에 치우치는 사정이 없었으니, 이것은 실로 신명께 맹세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말씀 드린 바가 어찌 털끝만큼인들 두 신하에게 사정을 두었겠습니까. 이 말씀을 아뢰는 이유는 두 신하를 위해서 문묘에 배향하기를 바래서도 아닙니다. 다만 두 신하와 같은 현인을 성상께서 몰라 주시어 사람을 알아보는 총명에 흠이 될까 염려해서입니다. 신이 두 신하를 대강이나마 알고 흠모하였으므로 이럴 때에 한 마디 말씀이라도 아뢰지 않는다면 위로는 성상을 저버리고 아래로는 공론을 저버리며 안으로 제 마음도 저버리게 됩니다. 그런즉 신이 이 말씀을 어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원하옵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유념하시어 밝게 살피소서.”
하였다.
○ 홍문관 부응교 심지원(沈之源)과 수찬 윤구(尹坵)와 조석윤(趙錫胤)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삼가 아뢰옵니다. 신 등이 삼가 관학 유생들이 선정(先正) 신(臣) 문성공 이이와 문간공 성혼을 문묘에 배향하고자 여러 번 상소하여 청한 것을 보니, 이것은 실로 많은 선비들이 같은 소리로 두 어진 신하를 성상께 주달하는 정성으로 성상께서 유학자를 존중하고 도덕을 중히 여기는 훌륭한 은전을 이룩하게 하려 함입니다. 그런데 성상께서는 들어주지 않으시어 끝내 윤허하시지 않으시오니, 이미 사림의 소망이 헛되이 되었고 전후의 비답도 지극히 온당치 못합니다. ‘잘못이 있어서 비방을 받았다.’ ‘너무나 참람하고 외람되다.’는 전교에 이르러서는 더욱 저희 신하들이 성상께 바라던 바가 아닙니다. 문묘에 배향하는 것은 더할 수 없는 중대한 예절이라서 일이 중대하여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다고 하신다면 혹 신중히 여기는 뜻에 잘못이 없겠지만, 깎고 야박하신 말씀을 선현들에게 갑자기 하셨으니 이것이 어찌 전하께서 도덕을 높이고 어진 이를 숭상하는 도리라 하겠습니까.
신 등은 후생 말학으로 어리석고 지식이 없어서 진실로 그분들의 도덕의 정도를 감히 함부로 논의할 수는 없사옵니다. 그러나 그분들의 저술이나 말씀하신 글을 보거나 선생이나 장자들이 전해 주신 논의를 들고서 어찌 한두 가지 좁은 소견이라도 없겠습니까.
신(臣) 이이는 타고난 자질이 지극히 고상하고 총명이 남보다 뛰어나서 그 도체(道體)의 정미(精微)함에 스승의 가르침을 기다리지 않고도 통달하여 의심이 없으며, 실천을 참으로 알아서 뛰어나게 순정(醇正)하여 일찍이 성리(性理)에 대한 학설을 변론한 바가 선현들이 밝히지 못했던 것을 많이 연구하였으며, 선현들이 결정짓지 못했던 바를 판단해서 그 세운 학설이 후세에 끼친 바가 역시 후세 학자들을 계발시키고 세상의 교화를 돕기에 충분합니다. 조정에서 임금을 섬기는 데에 한결같이 옛날 현인과 철인을 표준으로 하고 임금을 선도하고 정치를 계획하는 데에는 전모(典謨) 중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이것을 시행하는 데 드러내서 체(體)를 밝히고 용(用)을 알맞게 한 재질을 징험할 수 있었으며, 벼슬에 나가거나 물러가는 데에도 반드시 예절과 의리에 맞추어서 조금도 구차하게 하지 않았으니, 이야말로 세상에 드문 특이한 재주이며 일대(一代)의 유종(儒宗)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臣) 성혼은 일찍부터 가정에서 훈계를 받아 독실하고 힘써 보존하고 함양시켜 조예가 정심(精深)하고 돈후(敦厚)하고 장중(莊重)하며, 덕성이 성취되어 일상의 언어와 행동에 한결같이 성인의 훈계대로 따랐습니다. 가정 안에서 효제(孝悌)의 행실이 세상에 모범이 될 만하였습니다. 이이와 도의의 벗이 되어 토의하고 논의한 것이 미묘한 것을 드러내고 막힌 것을 해결하는 공이 많았습니다. 이 두 현신이 어찌 뛰어나게 함께 아름다우면서 오현(五賢)의 뒤를 계승하지 못하겠습니까. 여러 선비들의 청한 바가 실상은 공의를 그대로 둘 수 없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참람되고 외람되다고 말씀하시니, 전하께서는 아직도 그 근본 사실을 확실하게 아시지 못하시고 이러한 온당치 못한 분부가 계신 것 같습니다. ‘잘못이 있어서 비방을 받았다.’고 하신 것에 대해서는 성상의 뜻을 더욱 알 수 없사오나, 선문(禪門)에 종사한 일과 선왕께 죄를 얻은 까닭으로 이런 분부가 계신 것 같습니다. 신 등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해명하겠습니다.
불교의 말에 정묘(精妙)하고 이치에 근사한 점이 많으므로 옛부터 고명한 선비들이 도(道)를 구하려는 초두에 흘러들어가기가 쉬워 장횡거(張橫渠)나 주자 같은 대현들도 오히려 면치 못했던 것입니다. 이이는 젊을 때부터 학문에 힘써서 마음 다스리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으므로, 그 법의 돈오(頓悟)와 간첩(簡捷)을 좋아해서 드디어 거기에 탐닉하였다가 곧 깨닫고 정도로 돌아왔으니, 이것으로 그의 기질이 총명하고 투철함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데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 길을 잘못 든 실수가 뒷날 도학의 높음에 무슨 손상이 되겠습니까. 만일 선현이 불교에 물들었으나 일찍이 산문(山門)에 들어가지 않은 것과 다른 점이 있다 한다면 역시 말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을 보는 법은 안을 보지 바깥을 보지 않습니다. 그 마음이 이미 이단에 현혹되었다면 그 도를 본받을 수 있다는 것이니, 그 몸이 입산(入山)하고 하지 않은 것은 중요하지 않은 행적이오니, 무슨 경중의 구별이 있겠습니까. 옛날 현인들이 먼저는 미혹되었다가 뒤에 깨우친 것을 사람들이 모두 그 견식의 명철함과 정의로 옮기는 결단성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독 이이에게만 흠이 있다고 지적하여 말썽이 많고 떠들썩하니, 말세의 습속이 남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하고 마음 가짐이 공정하지 못함을 참으로 개탄하는 바입니다. 전하 같으신 총명하고 거룩하심으로도 만일 이것에 의심을 면치 못하신다면 신 등이 감히 알바가 아니옵니다.
성혼이 죄를 입은 전말은 여러 사람들의 상소에서 이미 다 말하였으니, 다시 자세하게 말씀드릴 것이 없사오나, 대개 성혼은 초야에 산 신하입니다. 그 의리가 조정에 있는 자와 다름이 있고 또 몸이 죄를 논의하는 중에 있었으므로 이치상 명령이 없이 함부로 나아갈 수 없어서 변란을 듣고도 즉시 대궐에 나가지 못한 것은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대가가 집앞을 지나가되 나와서 뵙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모두 참소하는 소인들의 모함에서 나온 것으로, 선대왕의 일월 같이 총명하심으로도 오히려 계속해서 참소하는 말에 의심함을 면치 못하시어 덕을 높이고 도를 좋아하는 훌륭하신 뜻을 끝내 보전하지 못하셨으니, 이것이 실로 사문(斯文)의 위기인데, 무슨 말씀을 하겠습니까. 반정(反正)하던 초두에 맨 먼저 신원해서 벼슬을 다시 내리고 시호를 주어서 은택이 황천에까지 미치었으니, 이것은 전하께서 이미 참소를 만나서 모함을 당한 진상을 아시고, 공론이 백년도 되지 않아서 정해지는 것을 보신 것이온데, 이제와서 도리어 이러한 분부가 계신 것은 무슨 일입니까. 이것이 신 등이 황공하게 여기고 알 수 없는 일이옵니다.
아, 사림의 논의가 두 갈래로 갈린 것은 그 유래가 있는 것이오나 어찌 오늘날과 같이 심하였겠습니까. 일전에 성균관 유생들이 상소하던 날에 생원 채진후(蔡振後) 등이 스스로 한 대열을 만들어서 감히 바른 일을 비방하는 소장을 올리고, 자기의 잘못을 책하는 사직의 상소로 남의 공론을 주달하는 말을 모함해서 비방하고 공격하고 반대하는 자료로 삼으려 하였습니다. 그 계획은 비록 교묘하오나 그 마음씨가 올바르지 못한 것은 마치 폐부(肺腑)를 보는 것 같으며, 그 말이 간사하고 거짓임은 공박하지 않아도 자연 깨질 것입니다. 선유들은 헐뜯을 것이 없는데도 헐뜯고 공론은 반대할 수 없는데도 반대하였으니, 전하께서 좋고 나쁜 것을 시원히 보이시어 통쾌하게 분석하여 배척하셔야 할 터이온데, 도리어 받아들이어 그대로 두시고 마치 그 말이 옳은 것같이 여기시니, 시비가 어찌 현란하지 않으며, 사정(邪正)이 어찌 혼잡되지 않으며, 사림의 버릇이 어찌 어그러지지 않겠습니까. 아, 성리(性理)의 학문이 끊어지고 스승의 도가 없어진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예의와 겸양이 일어나지 않고 염치가 벌써 없어졌으며 교화가 밝혀지지 못하고 명분(名分)이 문란해져서 인심과 세도가 날로 구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때가 바로 유학의 종주(宗主)를 숭상하고 장려하며 선비들의 기풍을 진작시켜야 할 시기입니다. 그런데도 공의는 막혀서 펴지지 않고 사특한 말은 방자하여 거리낌이 없어서 기상이 아름답지 못하고 지향할 길이 정해지지 못한 것은 역시 불행한 일입니다. 두 어진 신하의 도덕이 거룩한 것은 백세 뒤라도 의심할 바가 아니오니, 진실로 한때에 외부에서 들어오는 헐뜯거나 칭찬함으로 더 높아지고 더 훼손될 바가 있는 것은 아니오나, 국가에서 유학을 존숭하고 사림의 논의를 올바르게 하는 도에는 어떠하겠습니까. 이것이 대중이 억울해서 탄식하는 바입니다.
삼가 보오니, 재상들이 서로 계속해서 차자를 올려 주달하오니, 생각하옵건대, 성상께서 이미 다 통찰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비답하신 사연이 아직도 석연치 못하신 것 같사오니, 신등의 의혹이 여기에 이르러 더욱 심합니다. 신 등이 비록 지극히 어리석어 보잘것이 없으나 직책이 논사(論思)이니, 어찌 감히 할 말을 다해서 변명하여 성상께서 쾌히 윤허하심을 바라지 않겠습니까.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유의하시어 밝게 살피시고 명백히 분변하여 깨달으셔서 선유를 존숭하여 우리 유림의 표준이 되게 하시고, 옳고 그른 것을 통찰하시고 구분하여 사림의 공론이 올바르게 되도록 정해주시면 유림과 국가에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자 올린 것은 알았노라.”
하였다.
○ 지관사(知館事) 최명길(崔鳴吉)이 아뢰기를,
“관학 유생들이 상소한 뒤로부터 소란이 크게 일어나서 동학(東學)에서 상소한 유생으로 과거를 정지당한 자가 6인이나 되옵고, 상소에 참여했던 50여 명도 모두 출석을 쳐주지 않았으며, 성균관 재임(齋任 재(齋)에 사는 유생 중의 임원) 6인과 상소에 참여한 3인도 계속해서 과거 자격을 정지당하와, 여러 유생들도 이 때문에 불안해서 점점 흩어져 나가버리고, 몇 사람의 재임만이 동서재에 남아있고, 이외에는 다시 한 사람도 출석하지 못한 지가 벌써 수일을 지나서 식당이 텅 비어 앞으로 있을 대과(大科)가 꼴이 아닐 형편이오니, 매우 불해한 일입니다. 대개 두 신하의 어짊은 원래 유림의 영수(領袖)로서 저쪽이나 이쪽이나를 막론하고 진실로 사대부로 자처하는 사람이라면 존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채진후 등이 만일 이분들을 문묘에 배향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한다면 상소할 때에 피하고 참여하지 않을 따름이온데, 어찌하여 선비의 복장을 하고 걸어 다니면서 스스로 한 대열을 만들어서 별도로 소청(疏廳)을 동학에 설치하고 이런 전례를 어기는 행동을 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그 상소한 사연을 보오니, 유현(儒賢)을 모함하기에 온 힘을 다하여 유림에 죄를 짓는 것을 달가와하니, 이것은 나이 젊은 사람들이 경박해서 사리를 알지 못하는 소치이므로 한두 사람의 주모자 이외에 함께 참여한 사람까지 구태여 심하게 다스릴 것은 없을 것 같습니다. 성균관 유생들에 있어서는 두 신하의 학문을 강론하고 밝혀서 두 신하의 도학이 자연 존중되도록 생각하지 않고 한갓 말로만 갑자기 사론이 분리된 뒤에 공론을 정하려 하였으니, 시기를 헤아리지 못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어진이를 높이려는 데서 나온 것인 만큼 가상한 일로 막을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관(四館)을 한꺼번에 과거를 정지시키는 것은 중대한 거조입니다. 혹은 그 사람 자신에게 패려한 행동이 있어서 한때 버림을 받거나, 혹은 논의를 고집하는 것이 망령되어 사림에 죄를 얻은 뒤에야 사관에서 공론에 따라 과거를 정지시키는 것은 그 실수를 징계하고 착한 데로 돌리려 하는 것이오나, 수백 명 많은 선비들이 어진이를 존숭하려고 항거하는 소장을 올린 것이 무슨 죄를 받아 버림을 받을 일이 있어서 3~4관에서 함께 모이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감히 자기들의 사사 뜻으로 6인이나 되도록 재임을 마음대로 정지시키며, 영남 유생들이 어진이를 높이는 상소에 연명한 것이 무슨 대단히 놀라운 일이라고 골라 뽑아서 과거를 정지시키니, 그 마음가짐이 더욱 좋지 못합니다. 이러한 버릇을 자라게 할 것 같으면 세도(世道)에 대한 걱정을 어떻게 다 말하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사관의 여러 관원들에게 분부하여 전례대로 일제히 모여서 정거(停擧)할 사람과 정거하지 않을 사람을 의논해서 공정하게 처리하고, 이어 여러 유생들을 타일러서 도로 식당에 돌아와서 함께 공부를 하게 하여 서로 화목하게 지내도록 힘쓰게 하고, 서로 소견이 다르다고 배척하거나 반대하지 않도록 하게 한다면 성균관의 많은 선비들의 갈라진 논의를 혹 1분이나마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이로 인하여 분쟁을 일으켜 식당 도기(到記 출석부와 같은 것)가 점점 감소하게 되어 유생들이 출석에서 빠진 것이 벌써 20여 일이나 지나게 되었습니다. 이제와서 비록 출석하려 하더라도 과거 기일이 이미 박두해서 그 형편이 70점을 올리지 못할 것 같으니, 형편에 따라 변통하여 점수를 감해주어 국가의 큰 경사 때에 치르는 과거에 누구나 모두 참여할 수 있는 것처럼 하여 다시 뒷말이 없게 함이 사체에 마땅한 일인가 하며, 또한 해조(該曺)에 분부하시어 참작하여 처리하도록 하심이 의당한 일인 줄 아옵니다. 신이 보잘것도 없이 유생의 장관 자리에 앉아서 이런 난처한 일을 만나서 생각을 감히 진달하지 않을 수 없어서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 생원 권적(權蹟) 등 21인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뢰옵니다. 신 등은 평민의 천한 선비이며 문장의 구두나 아는 변변찮은 유생입니다. 지난날 사세가 부득이하여 분수를 모르고 소장을 올렸는데, 진실로 외람됨이 지나쳤음을 압니다. 그런데 그 뒤에 여러 사람의 노여움이 한꺼번에 일어나 비방하는 말이 몰려들어서 소두(䟽頭) 채진후 등 6인이 유생의 문적에서 삭제를 당하고 사관(四館)에서 정거를 당하였습니다. 신 등은 함께 상소한 사람으로 의리에 있어서 저들 6인에게만 죄를 돌릴 수 없으므로 고루 죄를 받으려는 생각으로 전하께 호소하는 바입니다. 돌이켜 생각하여 보옵건대, 과거를 정지시키는 일은 사관의 한두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으로 조정에서 함께 아는 일이 아니며, 그리고 사관에 남의 잘못을 고자질하는 일 역시 선비의 도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당황하고 위축되어 침묵하고 감히 말하지 못한 지가 여러 날이 되었습니다. 이번에 장관으로 있는 신하가 신 등이 사문(斯文)에 죄를 지었다고 전하께 주달하여 사관으로 하여금 한두 사람의 주동자만 정거시키도록 청한다 하오나, 신 등의 의론이 미리 계획한 것이 아닌데도 같았다면 50여 인이 모두 함께 사문에 죄를 지은 것이 되는데, 유독 채진후 등에게만 그 죄를 입게 하오니, 신 등이 어찌 하늘을 우러러 부르짖어 죽음을 무릅쓰고 성심을 고백하지 않겠습니까.
당초에는 성균관과 동학 두 곳의 유생들이 서로 정거(停擧)를 당하였고, 성균관 유생들의 제목(題目)에는 혹은 여러 선비들을 몰아 축출한 자도 있었고, 혹은 사관의 유생들의 문적을 멋대로 삭제한 자도 있다 하였습니다. 신 등이 이제야 성균관 장관이 아뢴 것을 보니, 이른바, ‘정거할 자와 정거하지 않아도 되는 자’라는 것은 어떤 사람을 지목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번에 성균관 유생은 모두 정거의 벌에서 풀려 나왔으되 채진후 등 3인만은 여태껏 정거의 형벌에 그대로 두고, 혹은 ‘사설(邪說)을 하였다.’하며, 혹은 ‘패설(悖說)을 하였다.’하고, 혹은 ‘그 말한 것이 망령되고 그 마음이 요괴와 같다.’하니, 성균관 장관이 배척한 사람은 실상 채진후 등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채진후 등의 소행이 과연 유생들을 몰아 쫓거나 멋대로 삭제한 일보다 심한 것이 있었습니까. 불측한 죄명으로 다스려서 정거의 벌을 풀어주는 중에 그만을 참여시키지 않을 것입니까. 그 좋아하고 미워함의 공사(公私)와 취하고 버리는 것의 시비는 신 등이 구태여 여러 말로 분간할 바가 못 되오나, 채진후가 올린 소는 바로 신들이 올린 소입니다. 신 등이 채진후 등과 함께 그 죄명을 받아야겠습니까. 그렇지 않고 구차하게 벗어난 것을 요행으로 여겨 의기양양하게 학당에 들어가야 되겠습니까. 성균관 장관의 소임은 진실로 예의 염치의 절조(節操)로 많은 유생들을 지도하여야 할텐데, 오늘 사문에 죄를 지은 나이 젊은 경박한 사람들은 깊이 다스릴 것이 못된다 하고, 또 출석 점수를 따려는 반열에 끌어 넣으려 하니, 이것은 신 등을 의리도 잊어버리고 부끄러움도 모르는 지경에 인도하려는 것입니다.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가 너무나 야박하지 않습니까.
신 등이 비록 보잘것 없으나 교화의 혜택을 입어서 입으로 성현의 글을 외우고 사문에 죄를 지었다는 이름을 지고, 또 명예와 이익을 달갑게 여겨서 여러 사람 앞에서 부끄러워하며 과장에서 의기양양하게 한다면 성상께서 선비들을 배양시킨 보람이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 위협으로도 빼앗을 수 없는 것은 필부(匹夫)의 뜻이오며, 협박으로도 진정시키지 못하는 것은 만세의 공론입니다. 비록 화(禍)로 위협하고 복으로 유인하고, 또 형벌을 가하더라도 겨우 일시적으로는 재갈을 물릴 수 있으되 끝내는 후세에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예로부터 잘 다스리는 세상에서는 여러 사람의 입을 협박해서 공의를 결정지으려는 일이 없었습니다. 신 등은 언제나 옛사람을 흠모하는 뜻이 있어서 세상 사람들과 함께 오르내리는 것을 수치로 알았으므로 소견을 대략 진술하고 아무렇게나 같이할 수 없으므로 선비들 여러 사람이 남학에 모여 두 신하의 문묘 배향이 합당하지 않다는 뜻을 진달하려 하다가, 성상께서 이미 배향하는 것이 참람하고 외람됨을 알고 계시므로 너무 번거로움을 피해서 중지하였습니다. 성균관 유생들이 그런데도 격노하여 유적에서 마음대로 삭제한 사람이 생원과 진사가 8인이나 되며, 유학(幼學)들도 10여 인이나 된다 합니다. 이것뿐만 아니라, 위로는 고관대작으로부터 사관 유신(四館儒臣)들에 이르기까지 같은 소리로 여럿이 공격해서 항소(抗疏)하던 여러 선비들로 하여금 사림들 가운데에서 안심하고 있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더구나 영남의 여러 선비들은 책을 지고 먼 길을 와서 관학(館學)에 모여 교화를 받고 있다가 갑자기 몰려 쫓겨나가는 환(患)을 보고, 또 객지에서 먹고 잠잘 곳도 없어서 천리길에 신을 매고 엎어지듯 자빠지듯 돌아갔습니다. 오늘날의 기상이 아름답다고 하겠습니까. 신 등이 발언하던 처음에 어찌 비참하기가 이렇게 극심할 줄 알았겠습니까. 신 등이 듣자옵건대, 성인의 말씀에, ‘군자는 남의 좋은 점을 칭찬하고 남의 나쁜 점은 덮어 준다.’는 것이 있습니다. 신 등이 이 말을 외우고 적이 흠모하여 비록 동류 사이라도 그 과실을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더구나 이이의 문장과 재식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고, 성혼은 가정의 교훈을 전해받아서 독실하게 독서하였으니, 신 등이 어찌 좋은 점까지 없애 버리려 하겠습니까. 문묘에 배향하는 것은 막중한 거조입니다. 주자의 말씀에, ‘문묘의 배향하는 것은 마땅히 도학을 전승하려는 것을 논의할 뿐이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애써 학문을 하고 뜻을 구하려는 선비들이 만약 지나간 성인을 계승하고 후학들을 계발시켜주는 공이 없으면 배향하는 데에 참여하지 못할 것은 한때의 시비가 달려 있는 것이고, 만세의 공의가 중한 것입니다. 반드시 널리 묻고 여러 번 논의해서 이의가 없는 뒤에라야 조롱을 면할 것입니다. 이점이 신 등이 변명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이이는 입산(入山)할 때에 이미 15세가 넘었으니 나이가 어리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미는 이미 여의어서 없다 하더라도 부친이 살아 있었는데 승복(僧服)을 입고 집을 떠난 것은 부모가 있는 사람은 나가 노는 데도 반드시 가는 곳이 있다는 의리에 어긋났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서 뉘우치고 깨달아서 끝내는 어진 사대부라는 칭호를 잃어버리지 않았으니 그 자질이 남보다 뛰어났음을 알 수는 있으나, 전혀 과실이 없는 군자라 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선대왕의 전지(傳旨) 중에 성혼에게 관계되는 죄명은 신 등의 눈으로 본 바는 아니오나, 송시영(宋時瑩) 등이, ‘당시 임금이 좋아하거나 미워한 것이 꼭 후세의 공의는 될 수 없다.’고 변명한 것에 대해 할 말이 있습니다. 전지 중에, ‘간신들과 당류를 지었다.’고 말한 것은 바로 기축년 정여립의 옥사이며, ‘임금을 버렸다.’고 말한 것은 임진년 대가가 집 앞을 지났으되 나와 본 일이 없었던 일입니다. 신 등이 적이 생각해 보건대, 성혼은 한때 명망이 있어서 조정에서 기대하던 사람이었으므로 만일 그때 조금이라도 변명해주는 말이 있었다면 당연히 선대왕께서 깨우치고 뉘우치시어 원통하게 죽은 사람을 신원하여 주실 적에 반드시 이르시기를, ‘내가 성혼의 말을 듣지 않아서 이런 실수가 있었다.’고 하셨을 터이온데, 그렇지 않고 도리어 꾸중과 노여움을 가하신 유명이 아직도 있으니, 이점이 후인들이 성혼의 임금을 보좌한 데에 의심을 하는 이유입니다. 적병이 서울에 육박해서 대가가 피난을 가는데도 난리에 달려가는 충성을 바치지 못하고, 서도 변방에서 피난 중에 절기가 바뀌었으되 달려가서 문안하는 의리가 오랫동안 없었습니다. 임진년 난리가 기축년 옥사와 어떠하기에 옥사에는 나오고 난리 때에는 물러갔으니, 이점이 후인들이 성혼의 나아가고 물러나는 데에 의혹을 일으키는 이유입니다. 신 등이 비록 두 사람의 도덕이 어떠한지는 모르나, 도학의 실지는 충과 효 두 가지 이외에 벗어나지 못합니다. 출처와 거취가 한 가지라도 부족한 바가 있다면 문묘에 배향하지 못할 것은 환하게 알기 쉬운 것입니다. 또 생각해 보건대, 공자 문하의 제자들의 어짊을 후세 사람들이 미칠 수 없었으되, 오직 증자(曾子)의 학문만이 전해졌으니, 도통의 전승은 진실로 쉽사리 논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번에 논의하는 사람들이 이이와 성혼이 공자ㆍ맹자ㆍ정자ㆍ주자의 도통을 이었다 하니, 신 등의 의혹이 더욱 심합니다. 우리 나라에 있어서 유학의 종주는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만한 사람이 없는데, 이기(理氣)의 학설이 그와는 차이가 있으며, 나정암(羅整庵)이 선학(禪學)에 빠진 잘못은 유교에서 배척하는 바이되, 이이는 그 학문을 자득(自得)함이 높다고 하였으니, 이로 보건대, 이이의 학문이 그 물든 식견을 다 변화시켰다고 할 수는 없는 듯합니다.
성혼은 자질이나 학문은 또 이이의 아래에 있으니, 신 등이 굳이 다 말하지 않겠습니다. 신 등이 본래 어리석어 학문의 공이 두 신하의 조예의 정도를 알 수 없을 것이라 한다면 그래도 가하지만, 만약 이홍로(李弘老)나 정인홍(鄭仁弘)이 하던 말을 되풀이한다 하오면 신 등의 마음에 없는 비방이므로 여러 말로 변명할 것도 없습니다. 돌이켜 보건대, 우리 선조께서 명철하시고 신성하신 군주로서 반드시 정인홍이나 이홍로의 말에 잘못 현혹되시기가 이렇듯 심하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을 추앙하는데 급해서 선대왕께서 좋아하고 싫어하심이 명철하신데 손상함이 있는 줄 깨닫지 못하는 듯합니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사정에 치우치면 그 말이 공정함을 잃어서 마침내는 옳고 그른 것을 뒤엎고 여러 사람의 귀를 현란케 하는 것을 면할 수 없으니, 이것도 두려울 만한 일입니다. 장자ㆍ정자ㆍ주자는 만세의 스승이니, 잘못으로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세 현인이 노자의 도나 석씨(釋氏)의 도에 출입하였다는 것은 대개 경전을 이해하기 위하여 백가서를 고루 보았고, 노자나 석씨의 글에도 그 귀추(歸趨)를 연구해서 그 시비를 증거 삼으려는 것일 것입니다. 주자의 어록(語錄)을 보면 과연 석씨의 교리에 유의하여 유병옹(劉屛翁 주자의 스승 유자휘(劉子翬)를 말함. 호가 병산(屛山)이어서 병옹(屛翁)이라 하였음) 처소에 가서 어떤 중과 이야기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는 주자의 나이 15~16세 시절로 이미 불원복(不遠復 《주역》〈복괘(復卦)〉에 멀지 않아 돌아오니 후회가 없다는 구절이 있음)이란 세 글자의 부적을 얻었습니다. 지금 거기에 빠져서 돌아오지 않아 마치 참으로 승복을 입고 머리를 깎은 것 같이 말하니, 이것도 거짓이 아닙니까. 증자(曾子)는 죽을 때에 손발을 내보이면서 하는 말이, ‘이제야 내가 훼상(毁傷)을 면한 줄 알겠다.’ 하였습니다. 부모께서 온전히 낳아 주었으니 자식이 온전히 죽는 것이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도리를 다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주자 같은 대현의 자질로 비록 나이 어렸을 때에라도 그 머리를 자르고 자애를 끊고 산중에 도망쳐 들어가서 석씨의 가르침을 탐닉(耽溺)하였겠습니까. 그 설명을 하려 해도 할 수가 없어서 억지로 거짓말을 꾸며대어 도리어 대현을 모함하는 데 잘못 빠지는 짓인 줄 깨닫지 못하니, 한심한 일입니다. 이미 한 세상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아 관학 유생들의 상소와 여러 신하들의 차자로 저들을 헐뜯고 더럽게 비방하는 말이 한두 번만이 아니니, 신 등이 일어나서 다 변명하려하오면 이리저리 부딪쳐서 어긋나기가 더욱 심해질 것 같으므로 신 등이 입을 꼭 다물고 손가락을 깨물어 가면서 다시는 서로 다투지 않으려 했습니다. 다만 한두 가지 시비의 큰 것은 변명하지 않을 수가 없으며, 더구나 의리에 있어서 당연히 채진후 등과 똑같이 죄벌을 입어야 하므로 두렵고 박절함을 무릅쓰고 간청하옵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사관(四館)에 일제히 분부하시어 그 처벌을 함께 시행하게 하시어 신 등으로 하여금 이해만 따지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무리가 되게 하지 마시면 더없는 다행이겠사옵니다.”
하였다.
○ 도승지 이민구(李敏求)ㆍ좌승지 홍명구(洪命耈)ㆍ우승지 한필원(韓必遠)ㆍ좌부승지 최연(崔葕)ㆍ우부승지 이경인(李景仁)ㆍ동부승지 구봉서(具鳳瑞) 등이 아뢰기를,
“근일에 유림이 상소한 일을 조정에서 겨우 진정시켰더니, 이번에 유생 등이 또 다시 소장을 올려 채진후 등과 함께 죄벌을 받으려 합니다. 이런 말은 본래 있었사오나 그 격분함을 타서 함부로 분한 말을 해서 못할 말 없이 장황하게 공격하니 지극히 아름답지 못합니다. 그런데 20여 인이나 연명한 상소를 물리치기도 온당치 못한 듯하니, 어찌하오리까.”
하니, 전교하기를,
“받아들이지 말라.”
하였다.
○ 이민구가 뒤따라 아뢰기를,
“근일 유생들의 상소로 분란이 크게 일어나서 잠잠할 때가 없을 듯하므로 이번 유생들의 상소를 본 승정원의 계사에 의거하여 받아들이지 말라고 전교하셨으나, 대개 전에 지관사(知館事)가, 사관에 분부하여 풀어줄 사람은 풀어주고 정거할 사람은 정거케 하라는 아룀으로 인하여 채진후 등 3인은 정거의 벌을 받고, 그 밖의 상소에 참여해서 정거된 사람은 정지하였습니다. 다같이 소장을 올렸는데 어떤 사람은 정거되고 어떤 사람은 풀렸으니, 그 벌을 면한 사람들이 감히 원점(圓點)을 받고 과거에 나가지 않을 것은 이치나 형편상 그러하오며, 50여 인이 과거를 못 보게 되는 것도 과거를 시행해서 널리 인재를 취하는 도리가 아니오며, 지관사의 계사(啓辭)의 뜻에도 어긋나는 일이오니, 다시 지관사에게 분부하여 헤아려 선처하도록 하시어 진정시키는 방향으로 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신이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에 있고 또 욕되게 유생들의 스승의 자리에 있으므로, 황공하게도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 최명길(崔鳴吉)이 차자를 올리기를,
“삼가 아룁니다. 보잘 것 없는 소신이 성균관 장관으로 있으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태학(太學)은 많은 유생들의 모이는 곳이며 국가는 원기(元氣)에 힘입는 바이므로 만일 선비들이 유현(儒賢)을 추모하고 의리를 강론해서 스승과 벗의 도리를 높이고 예의와 겸양하는 풍습을 숭상한다면 선비들의 습관이 저절로 안정되고 세도(世道)가 저절로 착해져서 비록 사람이 하찮고 인망이 가볍다 하더라도 그 속에서 하는 일이 없지 않을 것이다.’ 여겼습니다. 그래서 구구한 마음이 실로 여기에 있었는데, 유림이 불행하게도 소란한 일이 생겨서 사관에서 제 각기 의견을 내어 서로 과거를 정지하게 되어 성균관과 학관들이 모두 빌 지경이므로, 신이 진정시키기를 계청한 것이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정원에서 올린 계사를 보니, 또 별다른 논의를 내어서 다시 선처하기를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신의 마음에 의혹이 없지 않습니다. 모든 처사하는 방법은 시비를 올바르게 판단하여야 인심이 복종되고 뜬 의논이 자연 그치는 법입니다. 만약 시비와 가부를 따지지 않고 한결같이 구제하거나 풀어주기만을 일삼는다면 진정되기를 구하여도 도리어 소란만 더할 것입니다. 조그마한 일도 이러하온데, 하물며 태학에서 공론하는 자리이겠습니까. 저 두 신하가 사문에 공이 있는 것은 자연 속일 수 없는 사실이고 보면 성균관 유생들의 문묘 배향을 청한 것은 비록 급하게 서둔 일이라 할 수 있으나, 이것이 좋은 의사라면 무엇이 죄줄 것이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나이 젊고 의론을 달리하는 무리들의 의견이 같지 않다고 거기에 따라서 참여하지 않으려는 것도 그리 괴이할 것은 없습니다. 다만 옛날 간사한 신하들이 어진이를 모함하고 유림의 종주(宗主)를 헐뜯는 일을 되풀이해서 조금도 거리낌이 없는 것은 합당한 일이 아니옵니다. 이미 썩은 백골에 무슨 은혜나 원한이 있다고 공격하고 배척하기를 이처럼 합니까. 가령 배향하는 것이 과중하다고 말하더라도 두 신하처럼 어진이가 도학이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하겠습니까. 연소한 무리들이 조금이라도 어진이를 높이고 착한이를 좋아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그 말이 꼭 이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 성균관에서 동학(東學)으로 가자면 곧바로 가는 길이 있는데도 이 길로 가지 않고 선비 복장을 하고 도보로 궐문 밖을 통과해 가서 듣고 보는 사람을 놀라게 하오니, 선비들의 행동이 야비하고 수치스러움이 이보다 심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도학이 밝지 못하고 스승의 도가 서지 못한 소치입니다. 제가 유생들의 스승의 자리에 있으면서 어찌 앉아서 보기만 하고 이것을 바른 길로 구출할 방법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이것은 본래 몇몇 사람이 주장하고 충동시켜서 된 일이며 그 외는 풍성(風聲)과 기습(氣習)에 몰려서 따라 참여했을 뿐이니, 심하게 허물할 것이 못 됩니다. 신의 전일 계사에서 이른바, ‘주동자 한두 사람 외에는 깊이 다스릴 것이 없다.’ 한 것이 대개 이런 의미였습니다. 사관의 10여명이 한 곳에 모여서 아주 적당하게 처리하여 동학 유생 중에 정거된 자 6인에서 단지 너무 심한 자 3인만 정거시킨 것이 역시 앞길을 영원히 막은 것도 아니고, 대략 잘못한 것을 깨우쳐 알려서 스스로 그 잘못을 알게 한 것이니, 모두 지도하는 방법입니다. 그 외에 따라 참여했던 사람들에게도 원점을 감해주도록 결정해서 과거에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으니, 벌을 준 뜻은 가볍고 개과(改過)할 길은 매우 넓게 되었습니다. 유생이 된 자들은 당연히 두려워서 뉘우치고 다시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할 것이며, 그 부형이나 친구된 사람들도 서로 경계하여 경박한 버릇은 통렬히 고치고 함께 크게 공정한 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이른바, 곧장 고쳐서 허물을 잘 고친다는 것으로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하지도 않고 다시 다른 의론을 내어서 조정에서 결정지은 일을 아침에 영을 내렸다가 저녁에 고치게 하여 어린애들 장난과 같게 하려 하니, 국시(國是)가 결정되지 못한 것과 다른 논의가 날로 불어나는 것이 신은 실로 옳은 일인 줄 모르겠습니다. 당초 성균관의 계사가 비록 신의 손에서 나온 것이나, 이미 동료들의 논의가 합의되어서 아뢴 것이니, 역시 신 혼자만의 의견은 아닙니다. 그런데 승정원의 계사가 지금 이러하오니, 체면을 따져보면 실로 미안한 일입니다. 이것이 신의 보잘 것 없는 소치 아닌 것이 없으며, 더구나 이이외의 선처할 방법 역시 신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신이 겸직한 대제학과 지성균관사의 소임을 갈아주시고, 덕이 높고 명망이 있는 사람에게 옮겨 주어서 유생의 스승의 선임을 중하게 해 주시면 더없이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잘 알았소. 승지들의 계청(啓請)한 일에 대해 다시 선처할 길이 없으면 그 소견만 말할 뿐인데, 무단히 사직해서 불평하는 기색을 보이는 것은 실로 옳은 일이 아니오. 또 바른 길로 가지 않는 유생들이 더럽지마는, 제 뜻대로 하려고 많은 선비를 내쫓는 유생은 어진 자인가.”
하였다.
○ 두 번째 차자를 올리기를,
“삼가 아뢰옵니다. 신이 전에 차자를 올리면서 말이 경솔하고 소홀하였사오나 하늘 같으신 성은(聖恩)으로 굽어 살피시어 분명하게 일깨워주시어 마치 부형이 자제에게 훈계하듯 하시니, 신이 목석이 아닌 바에야 어찌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신의 본뜻은 다만 시비를 밝히고 체면을 돌아보아서 조정을 높이고 경박한 논의를 진정시키려 하였으니, 그 마음은 공정한 데서 나오지 않은 적이 없으되, 논의하고 변명하는 사이에 혈기에 격동됨을 면치 못해서 군주께 아뢰는 사연이 매우 화평하지 못하였습니다. 삼가 비답을 읽자오니,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신이 이미 제 허물을 알았고, 또 전하께서 굽어 용서하심을 입사오니 반성하고 자책하는 이외에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다만 생각해 보면, 성균관 안의 사체는 재임(齋任)이 주인이 되고 모든 유생들은 객이 됩니다. 논의를 할 때에 혹 여러 사람의 의견이 같지 않을 때에는 그 가부의 많고 적은 것을 보아서 많은 쪽을 따라서 결정짓는 것은 전해 내려오는 옛 법규입니다. 일전에 두 현신을 높이려는 논의가 이미 수백 명 여러 유생들에게서 나왔고, 재임과 색장(色掌 실무를 맡아보는 간사)이 모두 그 말을 주장하였으니, 다른 논의를 한 사람이 다시 용납할 수 없음은 이치나 형편상 진실로 당연한 일이지, 고의로 몰아내려 한 것이 아닙니다. 그 사이에 설사 약간의 과격한 논의가 있었다 하더라도 허다한 나이 젊은 유생들을 일일이 조용히 도리에 맞도록 요구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의 주장하는 공론의 옳은가 옳지 못한가만 볼 뿐입니다.
성상께서 처음에는 난처하게 여기시어 배향하는 전례가 중하다 하시고, 이어서 또 정거한 유생들을 풀어주시어서 선비들의 논의를 유지시켜 주시어 거의 처리하신 것이 정당하게 되었고 뜬 논의가 자연 진정되었는데, 많은 선비들을 쫓아았는 전교를 갑자기 오늘 내리시어 성균관에 있던 여러 유생들이 구비되기를 바라는 뜻은 생각하지 않고 한갓 온당치 못하다는 마음만 품고 말하기를, ‘원점을 그대로 계속하면 과거 보기에만 연연한다는 혐의를 면치 못한다.’ 하고, 서로 데리고 나가 버려서 단지 재임 몇 사람만 그대로 태학을 지키고 있어서 식당(食堂)이 다시 빈지가 이미 며칠이 되었습니다. 비록 달래서 도로 들어오게 하려 하오나 방법이 없습니다. 처리하기 어려움이 가면 갈수록 더해지니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신의 당초의 계사는 본래 의론을 달리한 사람들까지도 용서해 주려 했는데 갈수록 더 심해져서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사오니, 다시 무슨 면목으로 유생들의 스승 자리에 이대로 있겠습니까. 신이 맡고 있는 본직은 조정 선비의 논의에 관계 없는 것이므로 오직 일에 따라서 직책을 다해 성은에 보답하려고 생각한 것이 곧 신의 구구한 마음이었는데, 다만 겸임한 대제학이 아직 이대로 있어서 상당한 낭패가 있게 되었으니, 신이 적이 민망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신의 지극한 실정을 굽어 살피시어 특별히 신의 대제학과 지성균관사의 소임을 갈아주시어 저의 분수에 맞게 하여 주시면 더없이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계(啓) 자(字)를 찍어 내렸다.
○ 이민구(李敏求)가 차자를 올리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이 일전에 병 때문에 감히 사직하는 단자를 올렸는데 뜻밖에 은혜를 베푸시어 조리를 하라고 분부하시옵기로 신이 황공하여 아무 말씀도 올리지 못하고 다시 나왔습니다. 스스로 신의 마음을 헤아려 보면 이미 크게 얼굴이 뜨겁고 마음이 위축되었습니다. 이번에 지관사 최명길이 여러 선비들을 처리할 수 없다고 차자를 올려 직책을 사면하려 하니, 신의 형편이 또 아주 낭패입니다. 이에 감히 존엄(尊嚴)에 범함을 무릅쓰고 한두 가지를 간단히 말씀드릴까 합니다. 삼가 아뢰옵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살펴 주소서.
불행히도 사림에서 스스로 명목을 만들어서 피차간에 갈라짐을 이루어 기상(氣象)이 크게 어긋나게 되었습니다. 문성공 이이(李珥)와 문간공 성혼(成渾)의 일에 있어서는 신이 아득히 먼 후생으로 비록 그들이 남긴 논의는 접해 본 일은 없사오나, 귀로 듣고 눈으로 본 바에 어찌 마음 속에 주장한 것이 없겠습니까. 이이의 경전과 학술에 통달하고 밝은 것과 성혼의 장중한 수양과 돈독한 실행은 모두 후학들이 본받을 만합니다. 비록 조예의 정도가 얼마만큼 되는지는 알지 못하오나, 가령 지금 세상에 태어났다면 어찌 한때의 영수(領袖)와 선비들의 스승이 되지 못하겠습니까. 다만 사림들의 논의가 갈라진 뒤에 의론이 나오게 되어서 숭배하는 사람들은 빨리 문묘에 배향시키기를 청하고, 헐뜯는 사람들은 함부로 비방해서 소란하게 된 것입니다. 신의 이 말씀이 오늘에 처음 하는 것이 아니오라, 수십 년 전 유생으로 있을 때부터 이미 정견(定見)이 되어서 일찍이 유생 친구들 사이에 시비의 논란을 당하게 되었고, 또한 제사를 지낼 때에도 도운 바가 있었습니다. 이번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가 이미 지나친 행동인데 두번째 상소에 있어서는 더욱 격분하여 나오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불미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나이 젊은 후생들이 경솔하게 일을 그르쳐서 마침내 격렬하게 하오니, 어찌 다 말하겠습니까. 비록 그렇지만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성균관의 유적(儒籍)에서 삭제하고 사관에서 정거시킨 것은 공은 아랑곳 없이 벌을 베푼 것이 이미 부족한 바는 없으나, 이번에 큰 경사를 당해서 과거를 베풀어 널리 인재를 뽑으려 하는 때에 50여 인이나 과거에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은 역시 매우 온당치 못한 일이옵니다. 이것을 모두 탕척해서 조정하지 않으면 진정될 기약이 없겠기에 경솔하게 진계(陳啓)한 것은 실상 선처할 방법을 위해서이니, 함부로 말씀드린 잘못은 혀를 깨물어도 미칠 수 없습니다. 저의 본래 생각한 바를 드러내기도 전에 비판하는 논의가 먼저 일어나서 의심하고 막힌 해가 이렇게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한때 같은 조정에서 서로 함께 하던 사람으로 마음이 통하지 않는 것이 마치 딴 세대와 같으니, 이 또한 불행이 심합니다. 성균관 지사가 이미 신의 잘못 아룀으로 인하여 사직하여 갈리게 되었으니, 신이 비록 용렬하고 보잘 것 없으나, 어찌 염치를 잊어버리고 모르는 듯이 측근의 반열과 교화하는 자리에 편안히 있으면서 심한 비방을 듣고 관직을 욕되게 하겠습니까. 또 신이 앓고 있는 조갈증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니, 전혀 벼슬 자리에 나갈 가망이 없습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자애로우신 성상께서는 특별히 신의 본직과 겸직한 동지성균관사의 직임을 갈아서 공사간에 편케 해 주시면 더할 수 없는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잘 알았소. 경은 사직하지 말고 직책을 잘 살피시오.”
하였다.
○ 두 번째 차자를 올리기를,
“삼가 아뢰옵니다. 비천한 신이 열흘 동안에 사직서와 차자를 계속 올렸으니, 진실로 죄를 면할 수 없음을 압니다. 근일의 일은 이쪽이나 저쪽에 대단한 시비 거리가 없는데, 단지 신이 경솔히 진계한 실수로 인해서 최명길이 그 난처한 정상을 변명하고 사직을 청하여 이로 말미암아 되풀이하여 여러 유생들이 성균관에 있기를 불안하게 여깁니다. 사유를 갖추어서 두 번이나 차자를 올림에 미쳐 드디어 지관사와 대제학을 체직시키는 일까지 있어 중외(中外)의 사람들이 의심과 억울함을 면치 못하고, 여러 유생들은 벌써 나가 버려서 다시 모일 기약이 없으며, 앞으로 있을 대과(大科)에도 난처하게 되었으니,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저 혼자 생각해 보니, 지관사가 이미 갈렸으니 신이 당초에 잘못 아뢴 사람으로 결코 혼자만 편안히 있을 도리가 없습니다. 사람의 처신에는 염치가 중하니, 신이 비록 전혀 보잘 것 없는 사람이지만 국가의 관직을 위해서 아낄 줄 모르겠습니까. 이 까닭으로 마음이 불안해서 죽음을 무릅쓰고 분수를 범해서 감히 번거롭히는 혐의를 피하지 않습니다. 신이 오랫동안 신병으로 쇠약해져 예조의 소임도 감당하기 어려우니, 미천한 몸의 하찮은 병으로 더럽힐 수가 없습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자애로우신 성상께서는 신의 심정을 굽어 살피이와 신이 겸임하고 있는 동지 성균관사를 우선 체직시켜서 어리석은 분의(分義)를 편케 해 주시고 사체를 보존해 주시면 더할 수 없이 다행이겠습니다. 재결을 바랍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지관사 최명길은 외람됨으로 체직되었으니, 이민구에게는 별로 온당치 못한 일이 없을 터인데, 이렇게 사직하려 하니 그 뜻을 알 수가 없다. 소임을 살피려 하지 않음이 이와 같으니 꼭 억지로 권할 수는 없다. 겸임한 동지 성균관사를 우선 체차(遞差)하라.”
하였다.
○ 판서 조익(趙翼)이 차자를 올리기를,
“삼가 아뢰옵니다. 유림이 불행하여 소란이 크게 일어났는데 분쟁의 소요는 당초에 성균관과 학관에서 시작되어 서로 갈려서 편을 만드는 걱정이 조정에까지 미치게 되었습니다. 성균관의 장관도 이로 인하여 갈리게 되었으니, 어찌 국가의 불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도 성균관의 직책을 겸임하고 있으니, 이렇게 시비가 엇갈린 때에 어찌 감히 침묵하고만 있겠습니까. 대개 관학 유생의 상소는 당초에 현인을 존숭하려는 성심에서 나왔으니, 이것은 바로 사람들의 천성에 덕을 좋아하는 마음이 천하 고금에 똑같은 것입니다. 그 중에 논의를 달리하는 사람이 있어서 나와서 저지하고 서로들 버티고 있으니, 그 형편이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저쪽이 눌린 뒤에야 이쪽 말이 행해질 것입니다. 그런즉 말로 배척하는 것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말을 배척하여 올바른 길을 해치지 못하도록 할 뿐이니, 어찌 그 사람을 축출해서 학관에 있지 못하게 하였겠습니까. 그 논의를 달리하는 사람들이 제 스스로 나갔으면서 내쫓았다고 합니다. 저 두 신하의 도덕의 정도는 진실로 사람마다 알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이 옛날 도를 배우고 착한 일을 하려 한 것만은 실로 온 나라 사람이 다 함께 아는 바입니다. 저 논의를 달리하는 사람들이 만약에, ‘나는 꼭 문묘에 배향하는 것이 합당할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면 이것은 스스로 그 소견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니, 무엇을 크게 잘못이라 하겠습니까. 모함하고 해치려 한다면 이것은 결코 좋지 못한 일입니다. 사관에서 한꺼번에 일어나서 서로 과거를 정지시켰으니, 그 정지시키는 것도 비록 피차가 모두 하였으나 그 중에는 자연 옳고 그른 것이 있습니다. 한쪽은 어진 이를 높이고 한쪽은 어진 이를 모함하며, 한쪽은 어진 이를 모함하는 사람을 정거시키고 한쪽은 어진 이를 높인 사람을 정거시켜서 이쪽 저쪽의 유생들이 모두 원점을 중지해서 식당이 텅 비게 되었으니, 유생의 스승의 직책에 있는 자가 어찌 대처하는 도리가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전일 성균관의 아룀이 지관사의 손에서 나와 가부를 구분해서 정거시키기도 하고 풀어주기도 하였으니, 그 옳은 사람은 진실로 풀어주어야 하며 그 잘못된 사람도 경중을 구분해서 스스로 반성할 길을 열어주어 함께 과거장에 나올 수 있게 하여 이미 시비를 판단하고 또 용서해 주었으니, 그 처리가 알맞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뒤에 도승지 이민구가 논의를 달리하는 유생들의 두 번 상소로 인해서 지관사를 시켜서 다시 논의해서 처리하도록 전하께 청하였사온데, 그 상소의 사연이 방자해서 욕하고 꾸짖은 것이 극심하고 조금도 뉘우치는 마음이 없었으니, 이러한 자들이 비록 과거에 급제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승지의 뜻은 비록 모든 사람들을 과거에 참여시키려 한 것이오나, 세상을 다스리는 도리에 어찌 선악과 시비를 전혀 구분하지 않고 함께 나아가도록 하겠습니까.
최명길의 이런 뜻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실로 당연한 바입니다. 그러하오나 사연 가운데 화평한 기상을 잃어 옳고 그르다는 말만 하지 않고, 마침내 다시 그 벼슬까지 사직해서 위로 성상의 노여움만 더하게 해서 유생들을 내쫓았다는 전교가 내려지도록 하였으니, 이것은 진실로 최명길의 좁은 마음에서 잘못된 것이오나, 적이 황공스러운 것은 성상께서 전교하신 것도 유생들의 마음을 깊이 감복시키지 못한 것 같습니다.
대개 그 본뜻이 오직 현인을 높이는 데에 있으면 그 일을 행하려 함이 어찌 잘못이겠습니까. 이것은 자기 뜻대로 행하려는 것이 아니오라 어진이를 높이는 도리를 행하려 함이옵니다. 이미 어진이를 높이는 도리를 행하려 하였으니 논의를 달리하여 방해가 되는 자들을 어찌 배척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또한 많은 선비들을 내쫓은 것이 아니라 어진이를 높이려는 것을 방해한 사람을 배척한 것입니다. 이것으로 유생의 죄가 된다 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유생들이 겁을 내어 감히 태학에 있지 못한 것도 당연한 바이니, 태학이 텅 빈 것도 한때의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최명길은 자기로 말미암아 이렇게 되었으니 어찌 감히 안심하고 사직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전하께서 갑자기 체직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저 최명길이 전후에 처리한 것은 모두 잘못은 아닙니다. 그 잘못이란 것은 단지 차자의 사연 중에, 승지가 아뢴 뜻에 노여워하여 자기 마음에 불평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한때의 문사(文事)를 맡아보고(대제학(大提學)) 유림들의 스승 자리에 있었던 것이 어찌 소중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번에 한 작은 실수로 갑자기 체직시키시니, 황공하오나 전하의 처분이 너무 경솔함을 면치 못한 것 같습니다. 신이 관학의 소임을 겸해 당초 처리하는 데에 그와 함께 하였습니다. 그 뒤에 차차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적이 황송하고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하여 저의 보잘 것 없는 소회를 감히 말씀드리오니, 밝으신 성상께서는 굽어 살펴주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근일 유생들의 일은 모두 공정한 마음이 아니어서 함께 잘못이 있다. 재상으로 있는 자는 사사로운 뜻은 없애 버리고 국가를 위해서 진정시켜야 하는데도, 한갓 한때의 격분한 생각만 가지고 젊은 경박한 무리들과 함께 그 시비를 다투려 하였으니, 매우 옳지 못하다. 또 판서 최명길은 두 번이나 소장과 차자를 올리니 실로 외람되며, 국가의 사체상 한결같이 강권만 할 수 없는데도 상호군 조익(趙翼)이 분의의 엄중함은 생각지 않고 도리어 체직시켰다고 나무라니, 실로 괴이한 일이다. 관학 유생들을 두둔하는 것도 매우 부당한 일이니, 마땅히 추고(推考)해서 그 잘못을 꾸짖어야 할 일이나 지금은 우선 이대로 두니, 정원은 그리 알라.”
하였다.
○ 지관사 조익이 아뢰기를,
“태학에 거처하는 유생들과 재임(齋任) 몇 사람이 재(齋)를 지키는 이외에는 전부 흩어져 나간 지 이미 오래된 것은 전 지관사 최명길의 차자에서 이미 진달하였사오나, 지금 유생들이 다시는 도로 들어올 뜻이 없으며, 앞으로 과거 기일이 단지 한 달이 남아서 관학의 시험을 시행할 수 없게 되었으니, 지극히 걱정되는 일입니다. 해조(該曹)에 분부하시어 빨리 처리하심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 6월 그믐날 전지(傳旨)에,
“성균 박사 정호인(鄭好仁)ㆍ학정(學正) 한극술(韓克述)ㆍ교서관 정자 한극창(韓克昌)ㆍ부정자 김호철(金好哲) 등은 관학 유생들이 상소한 뒤로부터 서로 되풀이하여 소란이 크게 일어나서 정거를 당한 선비가 많아서 분분함이 날로 심하여 진정될 기약이 없다. 일찍이 지관사의 정거할 사람과 하지 않을 사람을 조사해서 처리하려는 아룀에 인하여 그대로 하라고 분부한 까닭으로, 사관의 전원이 일제히 모여서 여러 사람의 논의대로 풀어줄 만한 자는 풀어주었다. 이번에 사관에서 그때 같이 참여한 사관과 일제히 모이기를 기다리지 않고 여러 사람의 의견도 물어보지 않고 이미 풀어주었던 유생들을 마음대로 다시 정거시켰다 하니, 지극히 놀라운 일이다. 그 전교를 받들어서 공사(公事)하지도 않고 멋대로 거리낌 없이 한 죄는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기를 이조(吏曹)에 전교하라.”
하였다.
○ 경연 주강(晝講)에서 영의정 윤방(尹昉)이 아뢰기를,
“일전에 유생들이 이이와 성혼의 일로 문묘에 종사(從祀)하기를 청하였는데, 너무 급한 것 같습니다. 백 년이 지난 뒤에야 공론이 비로소 정해지는 법이온데, 이는 겨우 30여 년이며 또 붕당(朋黨)이 각각 생길 걱정도 있으니, 공론이 어찌 설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전하께서 잘못이 있다는 분부를 내리시니 많은 선비들이 실망하지 않음이 없고, 이어서 동학에서 상소하여 갈수록 서로 격렬해져서 이번 과거에 조금 명자(名字)가 있는 사람이면 모두 과거를 보려 하지 않습니다. 당초에 많은 선비들이 곧 내쫓았다는 분부를 온당치 못하다 하고, 그 뒤에 또 관학 시험을 없애라는 명을 내렸으므로 많은 선비들의 생각에, 성상께서 저들로 하여금 과거를 못 보게 하시려는 줄 알고 모두 과거에 나가지 않습니다. 성상의 본의야 어찌 저들이 헤아린 바와 같겠습니까. 동학에서 상소한 유생들도 공의가 잘못이라 한다고 역시 과거에 나가지 않은 것인데, 성상께서는 필시 모르셨을 것입니다. 신은 많은 선비들이 비록 과격한 거조가 있었다 하더라도 특별히 용서하시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 사학(四學) 유생 1백 40여 명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삼가 아뢰옵니다. 신 등이 일전에 많은 선비들이 모이던 날에 선현 문성공(文成公) 이이와 문간공(文簡公) 성혼을 문묘에 배향하려는 일로 같은 소리로 대궐에 엎드려 소장을 진달하였으나, 성상께서는 들어주지 않으시어 조금도 거두어 살펴주시는 뜻이 없었습니다. 신 등이 서로 한탄만 하고 말하기를, ‘많은 선비들의 성심이 미진한 바가 있어서가 아니겠는가. 전하의 거룩하심으로 두 신하의 어짊이 문묘종사 반열에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음을 모르지 않으실 터인데도 즉시 윤허하지 않으심은 필시 신 등이 두 신하의 어짊을 모른다고 여기셔서일 것이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다시 성균관에 들어가랴?’ 하고, 궐하에서 흩어지려 하였사오나, 그래도 적이 생각해 보니, 우리 전하께서 도학을 존중하고 선비를 숭상하시는 덕이 실로 옛날보다 훨씬 뛰어나므로, 이번에 즉시 윤허하시지 않음은 특별히 어려워하고 신중히 하시는 뜻에서 나옴으로 알고, 우선 학관에 돌아가서 성상의 결정을 기다리려 하였습니다. 신 등이 전하께 바라는 바도 다 말씀드렸는데, 뜻밖에도 이번에 지관사 최명길의 차자로 인하여, ‘제뜻대로 행하려고 많은 선비를 내쫓았다.’는 분부가 계셨습니다. 아, 자기 뜻대로 행하려고 선비들을 내쫓았다면 그 마음 쓰는 것과 처사가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선비들을 성균관의 선비로 대접하신 것이 아니오며, 평소에 배양하시는 뜻이 이와 같아서 안 될 듯합니다. 성균관에 있는 선비들이 몸에 그와 같은 죄목을 지고서 성상의 위엄 아래에서 감히 진달하지 못하고 황공하여 흩어져 제 집에 엎드려 대죄한 지가 이제 여러 날이 되었습니다. 신 등이 이미 성균관의 유생들과 함께 실정을 호소하였사오니, 성균관의 여러 선비들의 논의는 바로 신 등의 논의인 것이오니, 신 등이 어찌 그 같은 당치도 않은 죄목을 성균관 유생들에게만 돌리고 입을 다물고서 한 마디도 변명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종사하자는 논의는 지난 계해년(1623, 인조 원년) 초부터 이미 있었사오나, 불행히도 국가에 일이 많고 변란이 연이어 생겨서 성대한 의식을 행하지 못한 채 세월만 지체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공론이 죽지 않고 때를 기다려 나왔사온데, 불평하는 무리들이 숨어서 몰래 엿보다가 끝내 이 지경에 이르도록 방해할 줄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대개 당시 큰 논의를 할 적에 한두 논의를 달리하는 사람이 앞에서 외치자, 부회(附會)하는 무리들이 떠들썩하게 일어나서 눈을 부릅뜨고 기고만장하게 온갖 방법으로 저지하고 언사가 괴팍해서 새벽부터 저녁까지 꼿꼿이 앉아서 물러나지 않고 그들의 뜻은 꼭 허물어뜨리고 소란케 한 뒤에야 그만하려 합니다. 그렇지만 이미 나온 공론이 그 사특한 말로 인해서 그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들이 끝내 나가지 않으면 그 형편이 뜻에 합하지 않은 자는 가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끝내 변론하기 어려운 사사롭고 사특한 소견에 있어서는 단지 그 소회만 말할 뿐인데, 그같이 꼿꼿하게 앉아서 나가지 않음은 무슨 도리입니까. 그런즉 그때 재임(齋任)이 합당하지 않다고 말한 것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듯합니다. 그간 곡절은 불과 이러한 것이온데, 채진후 등이 주워 모으고 끄집어내어서 말을 만들어 죄안을 얽어 가지고 들추어 고하기를 말지 않으니, 아, 이 또한 비참합니다. 이른바 선비란 것은 조심히 향학(向學)하여 도를 높이고 어진 이를 공경해야 하거늘, 채진후 같은 무리들은 타고난 양심을 잃어버리고 착한 이를 미워하는 패려한 말을 해서 감히 선현을 헐뜯고 거리낌없이 비방하니 이는 바로 사문의 좀도둑이니 어찌 선비라 이르겠습니까. 설령 내쫓아냈다 하더라도 자연 이것이 사특한 자를 제거하고 이단을 물리치는 거조이니 깊이 책망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일전에 기관사가 조정하여 힘써 진정시키려 한 것이 지나쳐서 깊이 다스릴 것이 없다는 말로 전하를 번거롭게 하여, 사관으로 하여금 정거할 만한 자는 정거하고 풀어줄 만한 사람은 풀어주도록 하여 박미(朴) 등 3인에게 정거했던 것을 풀어주게 하였으니, 이른바 군자가 소인을 관대하게 다스린 실수입니다. 또 권적(權蹟) 등이 소매를 걷어올리고 모여 의논하여 소장을 올려 똑같이 죄를 입자는 핑계로 감히 그럴 듯한 말을 올렸으나, 성상께서 다행히도 그 간사한 정상을 통촉하시고 소장을 받아들이지 말라는 분부가 계셨습니다. 그 원본은 비록 얻어 보지 못했사오나 전하는 말로는, 소장의 사연이 패려하기가 채진후의 상소보다 더욱 심하다 하옵니다. 그 말한 바는 진실로 손해될 것이 없겠으나 세도의 우환을 어찌 다 말하겠습니까. 아, 옛말에 이르기를, ‘붕당의 화는 도둑보다 심하다.’ 하였으니, 만일 붕당의 사심을 깨뜨리지 않으면 사도와 정도가 섞이고 참과 거짓이 거꾸로 되어 작은 겨를 뿌리다가 눈에 티가 들어가면 큰 천지도 그 방위(方位)가 바뀌어 위치가 바뀌어지듯 되는(《장자(莊子)》 〈천운편(天運篇)〉) 것입니다. 정자와 주자 같은 학문으로도 배척당하고 쫓기고 귀양가고 금고(禁錮)되어 천하가 벌벌 떨면서 그 성명까지 부르지 못하였다가, 천리(天理)가 마침내 없어지지 않고 인심을 끝내 속일 수 없어서 지금껏 천 년이 되었으되 존숭과 추모가 쇠하지 않고, 경돈(京惇 송 나라 채경(蔡京)과 장돈(章惇)으로 원우(元祐)시대에 모든 현신을 배척하였음.)의 무리들이 드디어 만세의 죄인이 되었으니, 이것이 지나간 일의 거울입니다. 어찌 두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두 신하는 조정의 당파가 갈린 뒤에 살아서 살았을 때에도 비방을 받았고 죽어서도 올가미에 걸렸으나, 다행히도 성상의 포양(褒揚)하고 존숭하는 은전에 힘입어 그림자를 쏘는 물여우 같은 무리들이 아직도 진흙과 모래 속에 엎드려 있으니, 매우 통탄할 일입니다. 두 신하의 도덕의 정도는 세상에 환하게 아는 사람이 없으니 공격하고 배척한 사람들만 시험삼아 말한다면 전에는 삼찬(三竄 대사간 송응개(宋應漑)ㆍ도승지 박근원(朴謹元)ㆍ전한 허봉(許篈)이 이이를 서인으로 몰아서 탄핵하다가 귀양간 사실)의 무리들과 뒤에는 홍여순(洪汝諄)ㆍ이홍로(李弘老)ㆍ정인홍(鄭仁弘)ㆍ문경호(文景虎)ㆍ기자헌(奇自獻)이 이들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존앙하고 추모해서 두둔한 사람은 이덕형(李德馨)ㆍ이원익(李元翼)ㆍ이성중(李誠中)ㆍ이정형(李廷馨)ㆍ오억령(吳億齡)ㆍ정홍익(鄭弘翼)입니다. 그 사람됨이 착하고 좋지 못한 것과 논의의 사특하고 공정한 것은 당장에 판단할 수 있습니다.
아, 경당(京鐺) 같은 무리들이 비록 죽었다 하나 이홍로와 정인홍이 살아있으니 이는 경당의 무리가 죽지 않은 것이오며, 이홍로와 정인홍이 비록 죽었다 하더라도 채진후와 권적(權蹟)이 살아있으니 이는 이홍로와 정인홍이 죽지 않은 것입니다. 사특ㆍ공정ㆍ진실ㆍ허위가 이같이 명확한데도 지금 전하께서는 내쫓았다는 분부로 도리어 현인을 존숭하려는 선비들을 나무라시니, 국가의 복이 아닙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마음을 화평하게 가지시고 밝게 살피시와 사특과 공정을 명확하게 구별하시고 뉘우치고 깨달은 분부를 다시 내리시어 많은 선비들의 마음을 위안시켜 주시면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 황해도 유생 윤홍민(尹弘敏) 등 50인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삼가 아룁니다. 큰 현인은 실로 백대에 함께 할 스승이며 천하에서 함께 존숭할 사람으로 세대(世代)와 지역의 멀고 가까운 것에 관계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송 나라 관민(關閩 관은 장횡거가 태어난 곳이고, 민은 주자가 태어난 곳임.)은 변방 지방이었으되 저 장횡거와 주회암의 교화를 입은 뒤에 비루한 습속이 크게 변해서 마침내 군자의 고을이 되었으니 신등이 살고 있는 지방도 즉 송 나라 관민(關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 보고 감화된 효과며 존경하는 성심이 다른 사람들보다 실로 갑절이나 되옵니다. 신 등이 일찍이 전하께서 즉위하신 초기에 발을 싸매고 멀리 가서 궐하에 나아가서 소장을 올려 먼저 문성공 이이와 문간공 성혼 두 선현의 문묘 배향을 청하였습니다. 비록 그 당시에는 윤허를 받지 못하였으나 전하께서 비답하신 분부를 보니, 특히 중대한 거조라고 타이르셨습니다. 신 등은 생각하기를, ‘전하의 거룩하신 학문의 고명(高明)함으로 두 선현의 도덕을 모르시는 것은 아니나, 문묘 배향은 더할 수 없는 중대한 은전이므로 한쪽의 청원으로만 쉽사리 곧 허락하지 않으시리라.’ 하고, 다만 재차 상소만 하고 물러와서 많은 선비들의 공론이 나오기만 기다렸습니다. 다행히도 이번에 관학에 있는 여러 유생들이 성의를 다하여 연달아 상소하여 문묘에 종사하기를 청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성상께서 유학을 존숭하고 도덕을 소중히 여기는 일대 기회이며 신 등의 숙원이옵고, 지극한 소망 역시 이루어지리라 여겼습니다. 신 등이 적이 듣자옵건대, 성상께서 즉시 시원히 윤허하실 뜻이 막연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온당치 못한 분부를 내리셔서 중외의 선비들의 소망이 지극히 섭섭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불행히도 한 가지 사특한 말이 기회를 엿보고 몰래 나와서 채진후가 선현을 추악하게 비방하기를 못할 짓이 없이 하였으니, 나이 젊고 간사하고 망령된 무리들이 무슨 소견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혹 그 선조들과의 묵은 감정이 있거나 혹은 그 부형들에게 들은 말들을 주워 모은 것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제멋대로 질투하기를 조금도 돌아보거나 거리낌없이 하여 한편으로 전하를 현혹시키고 한편으로 공의를 저지하려 하니, 아, 그것이 두 선현에게는 진실로 아무 손실이 없으되 인심과 선비들의 버릇이 이에 이르니, 마침내 세도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저 두 현신의 도덕의 거룩함과 모함을 입은 사실은 관학의 많은 선비들의 전후에 올린 소장과 재상과 선비들이 진계한 차자에 이미 모두 논의되었고 통쾌하게 변명되었으니, 신 등이 구태여 덧붙여서 다시 번거롭게 말씀드릴 것이 못되나, 신 등이 훈자(薰炙 스승에게 교화받는 일)의 끼친 감화를 입어 두 선현의 실제의 행적을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다른 논의가 멋대로 나오는 때를 당해서 어찌 감히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신 등이 전하를 위해서 간단히 그 대강을 말씀드리겠사오니, 삼가 원하옵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유의하소서. 아, 큰 현인을 종사(宗師)로 삼는 까닭은 그 도덕의 고명함과 출처가 정대하기 때문이니, 도덕은 고명하면서 출처가 정대하지 못한 자는 있지 않으며 출처가 정대하면서 도덕이 고명하지 못한 자도 있지 않습니다. 두 선현의 도덕과 출처를 옛날 현인에서 구해보아도 진실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선현을 모함하는 무리들이 두 선현의 학문과 도덕에는 감히 빈정대지 못하고 출처에 대해 가당치도 않는 말을 주워다가 모함하는 자료로 삼았습니다. 그 속으로는 생각하기를, ‘만약 출처의 잘못만 말하게 되면 도덕은 헐뜯으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훼손될 것이다.’고 여긴 것이니, 그 계책이 비록 음흉하고 교활한 듯하나 그 실상을 알고 보면 어리석고도 졸렬합니다.
대개 사문의 소중한 것은 단지 말년에 도덕의 성취가 어떤가에 달려있지, 철 없을 때의 실수는 뒤에 논의할 바가 아닙니다. 만일 한 번 선문에 들어갔다고 해서 비록 덕을 이룬 대현이라도 끝내 유종(儒宗)이 되지 못한다면 젊을 때 선학(禪學)에 탐닉했다 해서 끝내 주자에게 흠이 되겠습니까. 또 이이가 입산(入山)한 한 가지 일이 선현들과 차이가 난다한다면 이것은 더욱 크게 옳지 않습니다. 마음이 이미 거기에 탐닉되었다면 몸이 비록 여기에 있었다 하여도 우리 도학에 있어서 흠이 되지 않을 수 없으며, 몸은 비록 저기에 가 있더라도 마음이 이미 이것을 깨달았다면 실로 우리 유림의 종주(宗主)가 되는 데 해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즉 단지 마음에 깨달았느냐 깨닫지 못했느냐만을 논의할 뿐이고, 몸이 입산했느냐 입산하지 않았느냐는 반드시 논의할 것이 아닙니다. 이이가 선문에 종사한 지 거의 1년 만에 갑자기 깨달아서 마침내 큰 덕을 이루었으니, 그 타고난 자질이 고명함을 알 수 있습니다. 채진후의 소장 가운데 이이가 해직될 때의 사연을 끌어다가 공격하고 배척하는 자료로 삼고자 하였으니, 진실로 한 번 웃음거리도 되지 않으며 또한 통탄할 만합니다. 또 성혼으로 말하면 지난 신묘년(1591, 선조 24)에 바야흐로 죄를 논의하고 있던 중에, 임진년 왜란을 당해서 적병의 총칼이 비록 박두하였으나 몸이 초야에 있으며 조석으로 대죄하고 있었으므로 소명(召命)도 없이 지레 대궐에 나아가는 것은 의리에 옳지 못하였습니다. 만일 대가가 서도로 납신다면 길가에라도 나가서 뵙고 진퇴간에 명이 있으리라고 기다렸는데, 도성을 떠나는 거둥이 갑자기 나왔으므로 집이 큰길 20리 밖에 있어서 대가의 행차를 전혀 듣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이홍로(李弘老)는 망극한 참소를 얽어서 임금과 신하 사이를 이간하였으니, 소인의 교활함과 모함이 아, 참혹합니다. 성혼은 원래 초야에 사는 선비로 나아가고 물러나기를 의리로 하여 그가 평소에도 비록 잦은 소명으로 인하여 하는 수 없이 성 안에 들어갔으나, 일찍이 한 달도 머물지 않았으므로 아무리 위태한 때라도 그 지조를 바꾸지 않고 구학(丘壑)에서 죽는 것이 바로 그의 뜻이었습니다. 대개 초야에 사는 신하들은 조정에 있는 신하들과 의리가 같지 않으므로 비록 모든 사람에게 여러 말을 하지는 않았으나 역시 혼자 입을 다물지는 않고 혹 친구들에게 말한 적도 있습니다. 죽은 이해수(李海壽)의 편지에 답하기를, ‘대체로 보내온 편지의 말은 신하의 큰 법이나, 나의 소견도 한 가지 도리이니, 죽는 것이 마찬가지라면 초야에서 죽어도 그 충성에는 해될 것이 없겠다.’ 하였고, 또 죽은 재상 윤두수(尹斗壽)에게 답하기를, ‘나의 신하된 도리가 잘못되었다는 남들의 책망을 들을 때마다 어찌 황송하고 두려워서 천선 개과할 것을 생각해 보지 않으리요마는, 늙고 혼미하여 죽기만 기다리고 깨닫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또 영의정 윤방(尹昉)에게 답하기를, ‘한줄기 스스로 새롭게 할 길을 열어주어 벼슬을 임명해서 불러들이는 명이 없다면 어찌 감히 스스로 죄없는 사람과 같이 대궐에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망령된 소견이 변통이 없으니, 이로써 죄를 얻어 죽임을 당한다 하더라도 전혀 다시 한이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신 등이 이 석 장의 편지로써 성혼의 뜻은 오로지 나가고 물러남을 소중히 여기고 남의 말이 많다고 해서 그 절개를 변하지 않는 것이 확실함을 알겠습니다. 아, 군신의 의리가 비록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할 수는 없으나, 이른바, 전지(傳旨)라는 것은 실상 정인홍의 무리들이 꾸며낸 사연이온데, 채진후는 전적으로 당초의 두 현신에게 내리신 전지는 빼놓고, 정인홍의 모함한 논의만 베껴내어서 실지로 선조왕의 전교에서 나온 것 같이 하여 성상으로 하여금 감히 그 중간에 시비를 말씀 못하시게 하려 하고, 또 여러 사람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려 하였으니, 그 교활한 태도는 말하기도 더럽습니다. 아, 두 선현이 모함을 받은 시말은 비록 신 등과 같은 어리석음으로도 간사하고 음험한 것을 똑똑히 알아서 실로 근거할 만한 분변이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신 등이 눈을 부릅뜨고 대담하게 숨김없이 통렬히 배척하는 바입니다. 그 도덕의 정도는 신 등과 같은 몽매한 자가 감히 경솔하게 논의할 바가 못 되오나 약간이나마 그분들의 저술과 변론한 글에서 얻어보았고, 혹은 부형과 스승이며 벗들에게 들었으니, 역시 어찌 한두 가지 얕은 소견이나마 없겠습니까. 이이는 타고난 자질이 명민하고 실천이 독실해서 학문을 강론할 때에는 반드시 성(誠)과 경(敬)으로 주장을 삼고, 몸을 다스리는 데는 반드시 성인을 표준으로 삼았으며, 집에 있어서는 효제(孝悌)를 근본으로 삼고, 임금을 섬기는 데는 옛날 요순(堯舜)의 도리가 아니면 말씀드리지 않고, 정치를 논의하는 데는 삼대(三代) 시대의 일이 아니면 말하지 않고, 조정에 벼슬해서는 조금이라도 뜻을 굽히는 것을 부끄럽게 알았습니다. 그가 경연(經筵)에 있을 때에는 할 말을 다하는 것을 책임으로 여겨 하늘과 사람의 도리에 가까운 것에 간절히 하고 왕도(王道)와 패도(覇道)의 차이를 말하였으며, 그가 나라를 다스릴 때는 경장(更張)하기를 힘써서 잘못된 정치를 개혁하는데 서두르고 백성들의 남모르는 걱정을 생각하기에 간절히 하였으며, 국가의 큰 일을 논의할 때에는 문소전(文昭殿)과 연은전(延恩殿)의 제사를 혁파하게 하고, 조정의 간사하고 바름을 변론할 때에는 을사년의 허위 공신록을 삭제하게 하였으며, 미연의 방지책으로 군사를 길러서 미리 방비하자는 계책을 강론하고, 죄를 다스리고 잘못을 바루며 바른 말 하는 기풍이 드러나고, 나아가기는 어렵게 여기고 물러가기는 쉽게 하여 취하고 버리는 것이 밝았으며, 가까이에서 면대하여 효유하여 인재를 양성하기 좋아하여 남을 가르치는 정성이 게으르지 않았으며, 인격을 도야해서 교화시켜 풍속을 변하게 하여 남을 성취시키는 공이 얕지 않았습니다. 성리에는 심오한 경지에 도달하여 정미한 이치를 밝게 보아서 실제로 얻었으며, 의리의 분변에는 낱낱이 분석해서 그 저술에 나타난 것은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의 논의로 이전의 현인들이 밝히지 못한 것을 밝혔습니다. 《자경문(自警文)》과 《격몽요결(擊蒙要訣)》은 학자들의 일상 공부에 적절한 것이며, 《동호문답(東湖問答)》은 치란과 득실의 근원을 궁구(窮究)하였고, 《성학집요(聖學輯要)》는 제왕들의 학문의 요점을 밝혔습니다. 그 밖에도 군왕에게 건의한 소장이며 잡저(雜著)의 글 역시 세상의 교화를 부지하고 우리 도학을 도운 것이 아님이 없으니, 체(體)를 밝히고 용(用)에 맞게 한 실제와 지나간 성현을 계승하고 후학들을 열어 준 학문이 정자와 주자의 정맥(正脈)을 깊이 얻고 이황(李滉)의 도통을 곧장 이었습니다. 특별히 선조왕의 총애를 입어서 장차 크게 쓰일 기회가 있었는데, 여러 소인들의 시기를 받아서 기필코 배척하고야 말려하니, 성상께서는 그 간사하고 바름을 통촉해 보이시와 ‘하늘이 우리 나라를 평안하게 다스리려 하지 않으려는가?’ 라는 분부까지 하시니, 임금과 백성을 요순시대와 같도록 하려는 뜻을 거의 펼 수 있으리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일찍 죽어서 공업을 끝내지 못하였으니, 사문의 슬픔을 이루 다 말하겠습니까. 성혼은 고(故) 징사(徵士 과거를 보지 않고 지방관의 추천으로 왕이 불러 벼슬시킨 선비) 성수침(成守琛)의 아들입니다. 성수침은 선정(先正) 신(臣) 조광조에게 배워서 고상한 기풍과 거룩한 덕이 한 세상에 존경을 받았고, 산림에서 도(道)를 지키고 나라에서 불러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성혼의 학문은 가정에서 얻어 연원에 그 유래가 있습니다. 천성이 엄정해서 무게가 있고 독실하였으며, 일찍부터 과거 공부는 버리고 자신의 인격 완성을 위한 학문에만 전념하여 언어와 행동을 한결같이 성현의 훈계를 따랐으며, 강론과 실천에 힘을 쓰고 마음을 지키며 몸을 살피는 공부를 쉬지 않았습니다. 그가 부모 섬긴 것으로 말하면 부드럽게 얼굴을 대하고 뜻에 순종하였으며, 집에 있는 것으로 말하면 정제하고 엄숙해서 법도가 있고, 자기 수양으로 말하면 소학(小學)에 있는 대로 따랐으며, 그가 초상을 치르거나 제사를 지낸 것으로 말하면 반드시 가례(家禮 주자가 정한 가정의례)대로 지켰으며, 남을 대할 때에는 부드럽고 공경하되 엄정하고 의연하여 범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젊을 때부터 이이와 도의의 벗이 되어 연구하기를 서로 권면하였으며, 강론하고 연구하여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설을 서로 밝혀냈고, 이이가 지은 《격몽요결》ㆍ《소학집주(小學集註)》ㆍ《사서변의(四書辨疑)》와 그 외의 저술한 글을 성혼에게 교정을 구한 뒤에야 완전한 저서로 만들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이이가 항상 말하기를, ‘실천이 독실함은 나도 미치지 못한다.’ 하였고, 절조 있는 행동과 높은 지식이 옛사람보다 훨씬 뛰어나 조헌(趙憲)은 나이가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았으되, 평생에 스승으로 섬겨 오래 될수록 더하였으니, 그 학문과 더행이 사우(士友)들에게 존중받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명성이 자자해서 소명이 여러 번 내려졌으나, 신야(莘野)의 효효(囂囂 효효는 자득한 모습. 은(殷) 나라 이윤(伊尹)이 신야에서 밭을 갈면서 요순(堯舜)의 도를 즐겨 탕(湯)왕이 초빙하여도 효효하게 자득하여 나가지 않았다는 것.《맹자》에 나옴)함을 바꾸지 않고 마침내 빈 골짜기[空谷]의 교교(皎皎 교교는 결백한 모습. 어진 사람이 붙들어도 남지 않고 흰 망아지를 공곡에서 꼴을 먹이고 있었다는 것.《시경(詩經)》 소아(小雅)〈백구편〉에 나옴)함을 지켰습니다. 선조의 총애와 우대가 세상에 드문 은전이었으나, 조정에 벼슬하기는 1년도 되지 않아서 시행한 사업은 비록 한 세상에 드러난 것이 없었지만 요순 같은 임금을 만들고 백성을 구제할 뜻은 이미 경인년 만자나 되는 소장에 나타났으며, 변방을 방비하는 계책도 전후 시국에 힘써야 할 소장에 드러났으니, 참으로 성세(聖世)의 숨은 백성이며 유림의 큰 스승이었습니다. 그런데 필경에는 여러 간신들의 배척을 받아 뜻만 가진 채 죽어서 사림의 비통함이 수십 년에 걸쳐 내려왔습니다. 우리 성상께서 왕위에 오르시고서야 비로소 신원(伸寃)되게 되었으니, 우리 도학의 다행스러움을 어찌 다 헤아리겠습니까. 신 등이 비록 성혼에게 직접 교화받은 일은 없사오나 성혼이 이미 이이와 같은 시대에 살면서, 뜻도 같고 도도 합하였으니, 신 등이 추앙하고 사모하는 성의가 어찌 이이와 다르겠습니까.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특별히 많은 선비들의 청에 따라서 두 어진 이의 문묘 배향의 명을 함께 내리시어 국가의 원기를 부지하고 사도(師道)를 중하게 하시면 사문의 다행이며 국가의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소장을 보고 잘 알았다. 두 사람이 비록 어질다 하나 막중한 전례(典禮)를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다.”
하고, 두 번째 상소에 답하기를,
“그대로 따르기 어렵다는 뜻을 이미 명쾌하게 효유하였으니, 너희들은 번거롭게 떠들지 말고 물러가 학업을 닦으라.”
하였다.
○ 파주 유학(幼學) 유응태(兪應台) 등 38인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삼가 아뢰옵니다. 선현 문성공 이이와 문간공 성혼을 종사(從祀)하자는 청은 관학 유생들이 올린 소장이 여러 번이고, 이어서 묘당(廟堂)에서 가부를 열거해서 논의하였고 유신(儒臣)들이 차자로 진계하였으며, 먼 지방의 선비들까지 발을 싸매고 멀리 궐하에 와서 호소하였으니, 일국의 공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하오나 전하께서는 그 청을 윤허해 주시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도리어 온당치 못하다는 분부를 내리시어 유림으로 하여금 삭막하게 하오며 많은 선비들로 하여금 실망되게 하오니, 신 등이 천지와 같으신 성상께 유감이 없을 수 없습니다. 저 두 현신의 학문의 정수(精粹)와 도덕의 고명함은 신 등과 같은 무식한 사람으로는 알 수 없사오나, 간단히 한두 가지만 들어서 전하를 번거롭게 하겠습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굽어 살피소서. 이이는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서 실지의 경지를 보았으며, 조예(造詣)가 깊고 오묘하며 내외가 일치해서 말을 하거나 글을 지어서 지나간 현인들이 밝히지 못한 것을 확장시켜서 지나간 성현의 도통을 이어 받고 후학들을 열어주어 참으로 전해지지 못했던 도통을 이었습니다. 선조왕을 만나서 배운 것을 저버리지 않고 회포를 간절하게 말씀드린 것은 요순과 같은 임금으로 만들고 백성을 구제하는 방법이 아닌 것이 없으며, 시행(施行)하는 데 부지런히 한 것은 모두 경국제세의 계책이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하늘이 빨리 데려가서 비록 공적과 사업을 끝내지는 못했으나, 세상에 드문 진짜 유학자이며 사림의 표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혼은 가정의 교훈을 받아 실천이 독실하였고, 초야에서 문을 닫아걸고 성인의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집에 있으면서 의를 행한 것이 옛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었고, 마음을 지키고 일을 처리한 것이 신명(神明)에게도 질정할 수 있습니다. 선조왕의 시대를 만나 총애하심이 더욱 융숭하였으되, 나아가기는 어렵게 하고 물러나기는 쉽게 하였으므로 벼슬한 날이 적어서 비록 사업이 크게 드러나지는 못했으나, 이이와 의리를 강론하고 도학을 도와준 것이 백 대의 유림 종장이며 사문(斯文)의 영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간신들이 미워해서 참소한 말이 시끄러웠습니다. 망극한 참소가 모두 허구 날조에서 나와 아들이 살인했다고 세 사람이 와서 전하매 어머니가 곧이 듣고 베짜던 북을 던졌다는 증삼(曾參)의 어머니처럼 되어 황천에서 한을 품고 지극한 원한을 씻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다행히도 성명께서 왕위에 오르시사 모함과 억울함을 통촉하시어 30년 억울하게 여기던 공의가 하루아침에 신원되게 되었으니, 이것이야말로 하늘이 거룩한 우리 조정을 도와주어서 사문을 망하지 않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아, 우리 나라에 있어서 이학(理學)의 조종은 오현(五賢) 만한 분이 없으며, 그분들의 정통을 이은 분은 이 두 신하입니다. 오현은 모두 문묘 배향의 반열에 참여하였는데, 이 두 현신만이 포양하고 존숭하는 은전을 입지 못하였으니, 어찌 사문의 큰 흠이 아니며 국가에서 속히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일전에 관학 유생들이 청한 것은 실상 여러 선비들의 정성과 일국의 공론에서 나온 것입니다. 일종의 삐뚤어진 논의가 그사이에 생겨서 채진후와 권적이 음흉하고 간사한 사람들이 하던 말을 주워 모아서 감히 정대한 군자를 나무라는 패려한 말을 진계해서 이 두 신하를 헐뜯고 배척하기를 못할 말 없이 하되, 전하께서는 크게 꾸짖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두둔하는 기색을 보이시어 그 기세를 올리게 하였으니, 신 등은 적이 전하께서 여러 선비들과 유신들은 모두 제 자신들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첨한다 하고, 채진후등의 말만 공정한 논의에서 나왔다고 하심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아, 공자와 맹자 같은 성현으로도 환퇴(桓魋)와 장창(臧倉)의 모함과 비방을 만났으며, 정자와 주자 같은 정통 학자로도 공문중(孔文仲)과 임율(林栗)의 공격과 배척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모르겠지만, 저 참소하던 자가 스스로 현인을 모욕한 데 빠지게 될 뿐이지 당초에 공자ㆍ맹자ㆍ정자ㆍ주자의 도덕에 무슨 손상이 되었겠습니까. 그러하오나 군주가 진실로 좋아하고 싫어함을 밝히고 옳고 그름을 정하여 그 간사하고 공정함을 결정짓지 못한다면 공론이 어찌 행해질 수 있으며 선비들의 버릇이 어찌 바르게 될 수 있겠습니까. 아, 전하의 고명하신 학문과 정대하신 견해로 반드시 간사한 소인들의 뜬 논의에 동요되지 않으실 터이온데, 간사하고 공정한 길이 뒤섞여서 분간되지 못하고 소란함이 안정되지 못한 지가 여러 달이 되도록 오래 되었으니, 고금 천하에 어찌 시비를 가리지 못하고 하루라도 국가가 되겠습니까. 아, 지난 광해군 시절에 윤기가 끊어지고 종묘 사직이 기울어지려던 때를 당해서 스스로 선비라 하던 자들 역시 시속을 따라 변화해서 모가 난 것을 깎아서 둥글게 하여 함께 악을 따르는 데로 돌아갔으되, 몸은 정도에 따라 강개해서 절개를 지키고 그 본뜻을 변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이 두 신하의 문하에서 나온 사람이고 보면 어진 사람이 국가에 유익한 것이 어찌 매우 분명하지 않겠습니까. 신 등은 즉 두 신하의 고향에 사는 사람으로 서원(書院)에 의탁한 사람입니다. 비록 함장(函丈 스승의 자리)의 사이에 배운 일은 없으나 강의하던 나무가 아직도 남아 있고 끼친 학풍이 없어지지 않았으며, 벌써 사당을 세워서 길이 의지하고 추모할 곳을 만들었으니, 흠모하는 마음은 실로 다른 사람들보다 갑절이나 되옵니다. 시비가 거꾸로 되고 사특하고 공정한 것이 뒤섞인 것을 직접 보니, 적이 사람들이 일정한 견해가 없고 선비들이 지향할 곳을 몰라서 원우(元祐 송철종(宋哲宗)의 연호) 시대의 당간(黨奸)의 화(禍)와 경력(慶曆 송인종(宋仁宗)의 연호)의 위학(僞學)으로 금하던 일이 장차 오늘에 다시 일어날까 염려됩니다. 그러므로 신 등이 외람됨을 마다 하지 않고 죽음을 무릅쓰고 위태로운 말씀을 올립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쾌히 간사하고 공정한 구분을 변별하시고 특별히 도덕을 높이고 공을 보답하는 은전을 거행하게 하시면 국가와 사문의 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소장을 보고 잘 알았다. 신원하고 증직(贈職)한 것은 바로 포양하고 존숭한 은전이니, 이 이외의 막중한 예는 경솔하게 논의할 수 없다.”
하고, 두번째 상소에 답하기를,
“소장을 보고 잘 알았다. 내 뜻은 이미 알렸으니, 너희들은 번거롭게 하지 말고 물러나 학업을 닦으라.”
하였다.
○ 평안도 유생 홍준(洪僎) 등 16인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삼가 아뢰옵니다. 신 등이 지식은 아이들보다도 졸렬하고 학문은 장님이 외는 것보다도 부끄럽사오나, 선현 이이와 성혼의 도학이 고명한 실지를 알고 추앙하기를 태산이나 북두칠성처럼 하여 저희끼리 말하기를, ‘두 현신은 오현의 뒤를 이어 태어나서 학문은 옛사람이 도달하지 못하던 곳에 이르렀고, 선유(先儒)들이 밝히지 못한 단서를 밝혀내서 진실로 문묘에 배향할 만하니, 전하께서 유학을 숭상하고 도덕을 소중히 여기실 때에 종사하기를 건의해서 청원하지 않으면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랴?’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관학 유생들이 다섯 번이나 소장을 올렸으되, 전하께서는 윤허하시지도 않고 또 도학이 높지도 못하고 잘못이 있어서 비방을 들었다는 비답을 내리실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신 등이 천리 더운 길에 발을 싸매고 온 것은 감히 전하께서 꼭 저희들의 말을 받아들여서 빨리 윤허하시라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임금의 마음을 바룬 뒤에 그 일을 바루고자 해서입니다. 아, 전하의 모든 행동은 역사에 꼭 쓰게 되어 있으니 백 년 뒤에 참다운 선비가 나와서 꼭 두 현신의 도덕이 진실함을 높이고 믿게 된다면 후세에서 오늘 성상께서 비답하신 말씀을 볼 때 전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신 등이 이른바 한스러움이라는 것입니다. 신 등은 모두 배움이 없는 자로서 어찌 도덕이 어떠한가를 알겠습니까마는, 대개 이 두 현신의 문집이 세상에 간행된 지 오래 되었으므로 그 언론과 문자를 보면 역시 유학의 종장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 이 두 현신의 학문의 실지와 모함을 입은 정상은 이미 여러 신하들의 소장과 차자에 자세하게 다 말하였으니, 반드시 다시 번거롭게 변론할 것 없사오나, 두 현신의 출처의 큰 절조만 말하겠습니다. 선왕께서 즉위하셨을 때 온 나라의 착한 선비들이 모였는데, 이치에 밝은 이이는 나와서 세도(世道)를 담당하였는데, 임금 좌우에 있으면서 반드시 요순의 도를 말하였고, 정치하는 도리를 논의할 때에는 반드시 삼대(三代)를 본보기로 삼아서 그 배운 바를 행해 보려 하였으나, 불행히도 뜻만 품고 죽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세도를 바로잡는데 책임을 진다는 것입니다. 성혼으로 말하면 성현의 글을 읽고 물러가 초야에 살면서 비록 왕명이 여러 번 내렸으나 조정에 오래 머물러 있지 않고 자신을 수양하며 도학을 즐기고 후학들만 가르쳤는데, 참소하는 사람들이 망극하게도 시비를 날조하여 모함하였으니, 후학들이 누군들 통탄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이른바 세상 교화를 책임진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두 현신이 한 시대에 함께 올바르게 하여 요순 같은 임금을 이룩하고 백성을 구제하려는 큰 뜻과 퇴폐적인 풍속을 바로잡으려 한 높은 절개를 진실로 사람마다 쉽사리 알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도(道)에 향하고 덕을 좋아하시는 거룩한 마음으로도 기어코 많은 선비들의 소망을 어기려 하시니, 전하께서 이홍로와 정인홍 두 간신의 논의에 의심을 품으시어 두 유신을 가볍게 보는 것이 아니십니까. 아, 선유(先儒)가 이미 죽어 성학(聖學)이 거칠어져서 나이 젊고 경박한 무리들이 과거 문구에만 힘써서 붕당을 지어 남을 배격하는 것으로 제 임무로 삼고, 선유를 업신여기고 능멸하는 것만을 잘하는 일인 줄 알아서 선비들의 버릇이 날로 더욱 야박해지고 풍속은 날로 달라지고 해마다 같지 않으니, 지금은 오랑캐에 대한 걱정도 염려할 바가 아니며, 도둑이 침범하는 것도 염려할 바가 아니며 농사의 흉년도 염려할 바가 아닙니다. 전하의 큰 걱정은 오직 선비의 버릇이 경박하고 풍속이 야박해지는 것인데, 전하께서 문학을 숭상하고 도덕을 보호하는 성심이 때로 중단이 생기고, 장려해서 진작시키는 방법에 혹 힘쓰지 않으실까 염려되옵니다. 한(漢) 나라 문제(文帝)와 경제(景帝)의 시대에는 풍속이 돈후해서 남의 잘못을 말하기 부끄러워하였습니다. 우리 조정에도 정도를 부식(扶植)하고 인재를 길러내기를 극진히 하였으니, 선비의 버릇이나 풍속이 의당 삼대 시대의 순수한 성대를 능가할 터인데, 도리어 서한(西漢) 시대의 패도(覇道)를 섞어 하던 정치만도 못합니다. 남의 과실을 말하는 것도 옳은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데 하물며 두 현신의 도덕은 백대의 높은 스승이라 할 수 있는데도, 송응개(宋應漑)와 정인홍(鄭仁弘)의 논의를 되풀이해서 근사하지도 않은 말로 바꾸어서 번거롭게 전하께 올리니, 선비들의 버릇이 여기에 이르러 실로 한심스럽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풍속을 후덕하게 하고 선비의 버릇을 바르게 고치려 하신다면 두 신하의 덕행을 더욱 존숭하여 한 줄기 도통을 북돋아 주십시요. 그렇게 되면 사문을 없애지 않은 하늘이 반드시 거칠어지지 않을 것이오며, 백년 동안의 문명 세상 역시 어두워지지 않아 풍속과 선비들의 버릇은 바루려고 기약하지 않아도 자연 발라질 것입니다. 신 등이 비록 궁벽한 먼 시골에 살고 있으나 역시 기자(箕子)의 정전(井田) 한 구역에 사는 유민(遺民)이기에 하늘이 준 천성이 꼭 신 등에게만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거룩한 덕을 좋아하는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 속에 있는 마음을 속일 수 없어서 감히 와서 전하께 호소합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속히 덕을 높이고 그 공에 보답하는 예식을 행하게 하여 두 현신으로 하여금 오현 종사의 반열에 이어 들어가게 하면 우리의 도와 국가가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소장의 보고 잘 알았다. 몸을 닦고 글 읽는 것이 바로 너희들의 과업이니, 알지도 못하는 일을 강론해서 남의 비웃음과 모멸을 취하지 말도록 하라.”
하고, 두 번째 상소에 답하기를,
“소장을 보고 잘 알았다. 막중한 거조를 경솔하게 논의할 수 없으니, 너희들은 물러가서 학업을 닦으라.”
하였다.
○ 경기(京畿) 유생 신희도(辛喜道)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삼가 아뢰옵니다. 우리 나라의 선유(先儒) 중에 오현을 이어 나신 분은 문성공 이이와 문간공 성혼보다 더 훌륭한 분이 없습니다. 오늘날 종사하자는 거조는 진실로 성상의 조정에서 당연히 행하여야 할 의식입니다. 일전에 관학의 여러 선비들이 성의를 다해서 소장을 계속 올리고 상신과 유신이 서로 이어 가면서 차자를 올려서 두 신하의 도덕을 남김없이 밝혔으니, 성상의 통찰 또한 이미 다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쾌하게 윤허하시는 분부는 없으시고, 도리어 온당치 못하다는 분부만 내리시어 서울이나 지방의 인사들 모두가 실망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세도의 불행이 아니겠습니까. 이이는 가장 뛰어난 자질로 총명과 예지(睿智)가 탁월해서 학문을 널리 배우고 예를 지켜서 성인의 대체를 갖추어 어김이 없고, 왕도와 패도를 깊이 밝히고, 세상을 위해서 걱정하는 뜻을 잊지 않고, 임금의 마음을 바루기에 애를 쓰고, 백성들의 고통을 구제하기에 골몰하여 성의를 쌓아 상하를 감동시켰습니다. 그가 조정에 벼슬해 시행한 일은 반드시 천덕과 왕도에 근본하여 옛날 사마광(司馬光)의 사업보다 못지 않았으니, 이것이 어찌 한 세상의 참다운 선비이며 성대의 임금을 보좌하는 재목이 아니겠습니까. 성혼은 기질이 진중하고 실천이 독실하여 자신의 인격 완성을 위한 학문에만 오로지 힘써 공부가 치밀하고 수양이 완전히 갖추어졌으며, 언어와 응대함이 의리에만 따르고 농사에 힘써서 자급자족하여 담담하게 구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비록 선조왕의 높으신 대우를 입어 마지못해 조정에 들어갔으되 몇 달 동안도 머무르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사업을 시행해서 큰 효과는 거두지 못했으나 요순 같은 임금을 이룩하고 백성을 구제하려 한 뜻은 앞뒤에 올린 소장과 차자에서 볼 수 있으니, 이는 사림의 높은 스승이며 성세에 숨은 백성이라 하겠습니다. 가령 두 신하가 선조왕의 좋은 시기를 만나 서로 조화시키고 보호하여 조정에서 협력하였다면 붕당이 편중되는 걱정을 없앨 수 있었을 터이며 함께 공경하고 서로 공손히 하는 기풍을 조성할 수 있고 임금과 백성을 요순 시대와 같도록 하려 한 뜻을 거의 펼쳤을 터인데, 이이는 먼저 죽었고 죽지 않은 성혼은 끝내 간신의 참소에 무너져 잘 만난 시대를 제대로 끝내지 못하였으니, 이 세상과 이 백성의 불행을 이루 다 말하겠습니까. 비록 그러하오나 그 문하에서 배우고 그 유풍을 추모하는 자는 모두 왕도는 순수하고 패도는 흠이 있다는 것과 의리의 경중을 알며, 큰 이해 관계에 다다르고 큰 변고를 당해서 금수(禽獸)가 됨을 면한 것은 모두 두 신하가 끼친 교화입니다. 그 공이 이러하고 그 덕이 이러하므로 존숭하고 보답하는 것은 예절에 있어서 진실로 마땅한 일이온데, 아직도 종사는 막대한 일이라고만 핑계대시고 뒤로 미루시니, 신 등이 아무리 생각하여도 성상의 뜻을 모르겠습니다.
일전에 채진후와 권적 등이 잇달아 상소하여 두 현신을 추악하게 비방하여 근사하지도 않는 말을 주워다가 매우 모함할 자료로 삼아서 간사하고 음흉한 말이 지극히 낭자하오나, 성주(聖主)의 밝게 살피심이 위에 있고 백대의 공의가 아래에 있으니, 장자(張子)ㆍ정자ㆍ주자 같은 어짊이 처음 선문에 물들인 것이 무슨 해가 되며, 양시(楊時 송 나라 사람으로 호는 귀산(龜山). 정이천(程伊川)의 제자임.)나 호안국(胡安國 송 나라 사람으로 호는 무이선생(武夷先生). 유학을 위해서 저서가 많고 나라에 충성하였음)의 충성이 임금을 따라 말고삐를 잡은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았으니, 간신배들이 비방하고 헐뜯는 것이 비록 지극히 참혹하오나 두 현신의 도덕이 어찌 손상되겠습니까마는, 신 등의 구구한 깊은 걱정과 지나친 염려는 세도와 국가를 위해서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전하께서도 이점을 유념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 만일 여러 선비들의 공의를 쾌히 승낙하시어 유현을 높이고 도덕을 숭상하는 뜻을 보여주지 않으신다면 간사한 말이 그치지 않아서 마침내 인과 의가 막히고 선비들의 버릇이 변치 않아서 마침내 의리가 어둡게 되어 인심이 흐려져서 갈 바를 모르고 세도가 더러워져서 국가가 어지러워질 것입니다. 그런즉 신 등의 요청이 어찌 이 유림과 선현을 위해서만 하는 것뿐이겠습니까. 이것은 실로 세도와 국가를 위해서 나온 것입니다. 비록 그러하오나 지극히 공정한 논의를 전하께서 공정하지 않다고 의심하게 하고 당연히 시행할 거조를 전하께서 시행하기에 어렵도록 현혹되게 하는 것은 전하의 잘못이 아니라 바로 여러 신하들의 허물입니다. 관학 유생들이 한갓 유현을 높이는 것만이 소중한 것임을 알고 시세의 형편과 인심의 헤아리기 어려움을 살피지도 않고 대과(大科)가 앞에 닥쳐 있는 때에, 경솔하게 막대한 논의를 내어 변괴가 백가지로 나와 서로 예리하게 대립해서 식당의 원점을 중도에 철수시키게 하여 저들에게 비방 듣는 것을 면치 못하고 성상께 의심을 하게 하였으니, 그 말은 비록 옳으나 시기를 잃은 것입니다. 신 등은 모두 일반 백성으로 경기 지방에 살고 있어 교화의 혜택을 흠뻑 입어 비록 성취함은 없으나 약간이나마 어진 이를 높이는 의리는 알아서 소장을 품고 궐하에 나와 성상의 마음이 만분의 일이라도 깨달으시기를 바라옵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이 도(道)가 소중함을 깊이 생각하시어 쾌히 두 신하의 종사의 청을 윤허해 주신다면 사문과 국가의 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나의 뜻은 이미 관학 유생들에게 효유하였노라.”
하고, 두 번째 상소에는 비답을 내리지 않았다.
○ 풍덕(豊德) 유학 최시달(崔時達)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삼가 아뢰옵니다. 신 등이 삼가 선현 문성공 이이와 문간공 성혼을 종사(從祀)하자는 청을 보니, 안으로는 관학의 유생들과 밖으로는 초야의 선비들이 상소와 차자를 여러 번 올려서 날마다 궐하에서 호소하되, 전하께서는 즉시 윤허하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온당치 못하다는 분부를 내리시니, 하물며 신등과 같은 사람은 한 고을의 고루한 인물로 비록 혈성으로 간청하는 일이 있다손치더라도 그리하라는 분부를 입지 못할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오나, 마음 속의 정성이 격동되어 경모하는 마음을 견디지 못하여 부르튼 발을 서로 부축하고 궐하에 와서 호소합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조금이라도 굽어 살피시고 들어주소서.
두 현신의 자질의 아름다움과 학술의 순수함과 언론과 덕행의 거룩함과 진퇴와 출처의 정대함은 많은 관학 유생들의 전후의 상소와 상신과 유신들이 진계한 차자에서 이미 자세하게 논의하였으니, 한두 신 등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이미 자세하게 아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 등은 감히 다시 번거롭게 말씀드리지 않고 다만 문묘에 배향해야 할 의리만을 아뢰겠습니다.
송 나라 때 하남(河南)의 정명도ㆍ정이천과 자양부자(紫陽夫子 주자)가 성현들이 남긴 경전(經傳)에서 전해지지 못한 것을 얻고 끊어진 학통을 이미 끊어진 뒤에 이어서 이 도를 붙들어 세우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고 지나간 성인들을 빛나게 하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아 올바른 학문이 한때 크게 제창되었고, 공자와 맹자의 도학이 다시 수천 년 뒤에 행해지게 되었습니다. 그 까닭에 역시 정자와 주자를 문묘에 배향하였으니, 이것이 전대에 이미 이루어진 아름다운 은전이었습니다. 우리 나라에 있어서도 신라나 고려에서도 각각 향사(享祀)의 전례가 없을 때가 없어서 한 시대에 본보기가 된 것과 후세에 감탄한 바가 어떠하였습니까. 이번 이이와 성혼 두 현신은 오현의 도학과 앞뒤가 되었으며, 오현의 깊은 뜻을 드러내서 그 빛나는 행동과 거룩한 도덕이 한 세상에 영수가 되고 끼친 기풍과 남긴 운치가 후학들을 고무(鼓舞)시켜서 풍속의 아름다움과 선비의 풍습이 발라진 것이 이 두 신하에게 힘입은 것이 많습니다. 그 인재를 만들어 낸 실적과 후생들에게 끼쳐준 공이 옛사람보다 못하지 않되, 숭상하고 보답하는 은전이 아직도 깜깜하니, 이 어찌 성대의 흠이 아니며 사림의 깊은 수치가 아니겠습니까. 이러므로 배향하자는 의논이 한 번 나오자 원근에서 같은 소리로 간담을 헤치고 피를 짜내 가면서 호소하는 소장이 계속된 것은 실로 공정한 논의에서 나온 것으로, 또한 배향하는 것이 의심이 없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문이 불행하여 잘못된 의론이 가로막고 간사한 말이 꽉 차서 군자의 도가 사라졌습니다. 채진후와 권적등은 두 현신의 도덕의 한 부분도 엿보지 못하고 간사한 논의를 하는 사람들과 당파를 지어서 속임수로 바꾸어서 이홍로의 교활한 참소를 그대로 따르고 정인홍이 하던 말을 주워 모아서 두 유현을 추하게 비방함이 끝이 없었으니, 그것은 스스로 흉악하고 간사한 것에 아부하여 음흉한 사연으로 공격하는 것을 도운 것입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다시 생각을 많이 하시어 사특함과 정대함을 쾌히 보이시고, 두 현신의 도덕이 사문(師門)에 공이 있고 국가에 깊이 도움이 있음을 잘 살피어 존숭하라는 특별하신 분부를 하루아침에 밝게 내리신다면 온 나라 안에서 누군들 흔쾌히 감격하여, ‘우리 임금께서 어진 이를 높이고 덕을 숭상하며 유림을 흥기시킴이 보통 때보다 만배나 된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 개성부(開城府) 유생 고형(高逈)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삼가 아뢰옵니다. 관학 유생들이 이이와 성혼 두 신하를 문묘에 종사하자는 일로 소장을 연이어 올려 간하였으나, 신 등이 기내(畿內)에 있으면서 아직껏 궐하에 나아가 호소하지 않은 것은 성상께서 필시 관학 유생들의 상소를 윤허하시리라고 믿어서인데, 지금 들으니, 간청한 상소가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도 성상의 비답은 아득하여 끝내 윤허하실 의사가 없다고 합니다. 신 등은 성상의 의사도 알지 못하겠고 미미한 정성도 참을 수 없어서 궐하에 나와서 호소하는 것은 감히 신 등의 청으로 갑자기 윤허의 윤음(綸音)을 얻으리라고 여겨서가 아닙니다. 종사(從祀)의 일은 곧 국가의 큰 예이며 또 유생의 제일의(苐一義)입니다. 그 스승을 높이고 도를 존중하는 의리를 진실로 그대로 내버려 두어서 만세의 공의를 헛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신 등이 생각해 보옵건대, 두 신하의 도덕과 언행은 혹 당시의 저술에 나타나 성상께서 필시 깊이 살피시고 명확하게 판단하셨을 것이고 혹은 후세의 이목에 있어서도 유생들의 상소와 상신들의 차자에 필시 낱낱이 들어서 모두 기재하였을 것이니, 신 등이 말했던 것을 꼭 낱낱이 말씀드릴 것은 없으나, 그 조예의 정미함과 실천의 독실함은 정명도와 주회암의 학통을 깊이 얻음이 있고, 우리 나라 오현에게도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이분들은 실로 한 시대의 유림의 종장이며 백대의 사표이므로, 당연히 오현과 함께 종사해야 할 것을 온 나라가 모두 반드시 그러리라고 알고 있습니다. 고명하신 성상의 학문으로써 두 신하가 어짊으로 반드시 그 덕을 높이고 공에 보답하는 은전을 윤허하시어 많은 선비들의 지향하는 바를 정하시고 국가의 원기를 북돋아 주실 것을 어찌 모르시겠습니까마는, 성상께서 난처하게 여기심은 필시 거조가 중대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 등도 국가의 큰 일이 제사에 있고 제사 중에서도 종사의 예가 더욱 막중한 것임을 압니다. 그러나 그 막중한 이유는 도덕이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람은 항상 나오지 않아서 종사할 만한 사람이 드물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두 신하의 덕행은 실로 오현의 반열을 이을 만해서 한 세상의 높일 만한 스승도 이분들이며 본보기로 삼을 만한 사람도 이분들이니, 두 신하의 어짊은 덕을 높이고 공에 보답하는 은전을 받기에 마땅하고 참으로 종사하기에도 합당합니다. 이 두 신하에게 막중한 거조라 해서 윤허하지 않는다면 소중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신 등은 종사하는 예는 막중하다고 생각하나 당연히 종사할 사람에게 꼭 그 예식을 시행하여야 그 중대한 의의에 맞게 되는 것이니, 만일 막중하다고 해서 당연히 종사해야 할 사람에게 그 예를 거행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도리어 중대한 의의를 그르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 종사의 여부가 이 선현의 도덕에 털끝만한 손익(損益)도 전혀 없겠으나, 포양하고 존숭하는 은전을 오늘에 와서 거행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국가의 잘못된 전례로, 원기가 꺾여져서 다시는 붙들 수 없을까 염려됩니다. 이는 신 등의 타고난 성품의 소치이므로 감히 마음속에 있는 진심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성상께서는 두 신하의 언행과 도덕의 순수하고 아름다움을 살피시고 선왕들의 도덕을 높이고 공에 보답하는 아름다운 전례를 따르시어 종사하는 거조를 윤허해주시면 국가와 사문의 큰 다행이겠습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성상께서는 유념하소서.……”
하였다.
○ 호남 유생 김시길(金時) 등 1백 90인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삼가 아룁니다. 세도(世道)가 날로 떨어지고 인심이 맑지 못하여 덕을 높이고 의리를 좋아하는 풍습이 사그라져서 남음이 없고 당파를 짓고 남을 공격하는 버릇이 갈수록 고질이 되어서 진짜 시비는 알지도 못하고 자기의 좋고 싫은 것으로 시비를 삼으며, 진실한 논의는 알지도 못하고 자기의 사랑하고 미워함을 공론이라 하여 비록 큰 현인과 유명한 선비가 한때 나오더라도 그 도덕과 학술의 정도는 전혀 어떤지는 모르면서 비방하고 공격하기를 미치지 못할 듯이 하여 입으로만 말할 뿐만이 아니라 또 감히 붓으로 써서 근사하지도 않는 비방까지 지어 내어 이미 백골이 된 사람에게까지 가합니다. 그 손해되고 이익되는 것은 이쪽에 있는 것이 아니고 저쪽에 있는 것이고 보면 저들끼리 지껄이는 대로 맡겨 둘 뿐이고 꼭 따질 것은 아니나, 세도의 타락과 융성, 사문(斯文)의 흥망이 실로 여기에 관계되는 것이니, 이 다툼은 한 사람의 사사 일이 아니고 곧 천하의 공론입니다. 그러므로 신 등이 중도와 표준이 되시는 성상께 여쭈어 애써 밝히지 않을 수 없사오니, 성상께서는 굽어 살피소서.
선현 문성공 이이는 천성이 슬기롭고 조예가 고명하였으며, 문간공 성혼은 기질이 굳세고 마음가짐과 행동이 독실했습니다. 두 분이 도의의 벗이 되어 의리의 학문에 종사하여 성인의 교훈을 밝히고 사문을 도운 것이 크게 우리 도학에 공이 있으니, 이른바 호걸스런 선비였습니다. 송시영(宋時瑩) 등의 종사하자는 청은 실로 사림의 공의에서 나온 것이온데, 채진후 등이 감히 다른 생각을 품고서 사사로이 자기의 뜻한 대로 두 현인을 있는 힘을 다하여 비방하였습니다. 그들의 말에, ‘이이는 출처가 바르지 못한 기롱이 있다는 것을 그 자신이 다 말하였고, 성혼에게는 간신들과 당파를 지어 임금을 버린 죄가 있다고 성상의 비답이 엄하였다.’ 하였습니다. 아, 이런 말을 하는 자는 스스로 참소하고 해롭게 하는 자에게 아부하여 음흉한 말을 지어내어서 그들의 공격을 돕는 것입니다. 성균관 여러 유생들과 묘당(廟堂)의 재상들과 지방에 있는 선비들까지도 소장을 올려서 자세하게 변론하지 않음이 없으니 신 등이 다시 번거롭게 말씀드릴 필요가 없으되, 각각 소회가 있으면 꼭 진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니, 어찌 입을 다물고 있겠습니까. 저들이 이른바, ‘출처가 바르지 못하다…’고 한 것은 초년에 불교에 빠졌던 일을 가리킨 것이며, ‘그 자신이 말하였다.’는 것은 사직하는 차자에서 아뢴 말을 가리킨 것입니다. 아, 세상에 무식한 사람들이 혹 이러한 일종의 말을 하기는 하나 유식한 자로서 보면 참으로 한번의 웃음거리도 되지 않습니다. 대개 불교의 학문이 사람을 그르친 것은 비록 장자(張子)나 정자(程子) 같은 현인으로도 면치 못하였으며, 주자 같은 이는 특히 더욱 심하였습니다. 주자가 초년에 중 겸개선(謙開善)을 스승으로 섬긴 지 거의 10년 만에야 비로소 이연평(李延平 주자의 스승. 이름은 통(侗))을 만나서 마침내 불교의 그릇됨을 깨달았으니, 이이가 주자와는 비록 간격이 있다 하나 당초에 현혹되어 빠진 것은 같습니다. 이처럼 말하는 사람들의 말대로 법으로 처단한다면 주자도 말감(末減 죄를 감등하는 것)하는 조문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주자가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그 사람을 스승으로 섬겼고 그 도를 높였다.’ 하였으니, 그 스스로가 말한 것은 이이와 같습니다. 이이가 스스로 말한 것이 과연 우리 유림에게 죄를 얻은 것이라면 주자가 스스로 한 말도 이 무리들에게 비판받아야 할 것입니다. 맹자의 말에, ‘군자의 허물은 일식(日蝕)이나 월식(月蝕)과도 같아서 그가 잘못을 할 때에는 사람들이 다 보고 그가 고칠 때에는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 본다.’ 하였습니다. 만약 지금 말하는 사람들의 말과 같다면 군자가 허물이 있으면 꼭 감추고 가려서 끝내 그 잘못을 숨긴 뒤에야 군자가 될 수 있고, 스스로 그 잘못을 말하고 용감하게 그 잘못을 고치는 사람은 다만 소인이 될 것입니다.
‘성혼은 간신들과 당류를 지었다.…’ 한 것은 필시 고(故) 상신 정철(鄭澈)을 가리킨 것이고, ‘임금을 버렸다’고 말한 한 조목은 또 선조왕께서 도성을 떠날 때의 일을 끌어다 제목을 삼은 것입니다. 아, 이것은 다만 한때 참소하고 헐뜯던 자의 허구 날조인데, 했던 말을 답습해서 어진 이를 모함하는 자료로 삼으니, 이 또한 교활합니다. 이 일의 곡절을 변론한 것은 좌의정 오윤겸(吳允謙)의 차자와 관학 유생들의 소장 속에 자세하게 있으니 구태여 다시 덧붙이지는 않겠으나, 요점만 대강 말씀드릴까 합니다. 정철은 청렴 강직과 효성 우애가 시속 무리들보다 뛰어나고 출처와 행동이 우뚝하여 남들과 섞이지 않았으니, 성혼의 사귐이 처음부터 끝까지 도타왔던 것은 바로 군자의 교분이라는 것입니다. 기축년 정여립의 옥사 때에 되풀이하여 구원하려 한 형적이 소장과 차자에 나타난 것만도 온 나라 사람들이 아는 바이니, 정철의 심사를 이미 의심할 것이 없는데, 더구나 성혼에게까지 누가 미치겠습니까. 임금을 버렸다고 말한 한 가지 일은 자신의 명예를 조금이라도 아낄 줄 아는 자도 차마 할 수 없을 터인데, 성혼 같은 어진 이가 그렇게 했다고 하겠습니까. 처음에는 이홍로의 참소하는 말에서 나왔고 뒤에는 정인홍의 흉악한 말에서 나와서 온갖 방법으로 참소하여 전하의 귀를 요동시키고 현혹되게 하였으니, 그 한때의 성상의 비답이 어찌 선조왕의 본심에서 나왔겠습니까. 만약 군주가 한때 좋아하거나 미워하는 것으로 백대의 어질거나 어질지 못하다는 정론으로 단정한다면 고금 천하에 훌륭한 군주를 만나지 못한 현인 군자들은 모두 이것으로 억눌려서 성현의 반열에 끼지 못할 것입니다. 성혼은 초야의 큰 학자로 소인배들의 질투를 받아 살아서는 기롱하는 화를 입고 죽어서도 모함받는 치욕을 입은 지가 거의 40년이 되어 지금 성상의 조정에 와서야 공의가 크게 밝아져 벼슬을 더하고 시호를 내리시어 전날 모함당한 것을 깨끗이 씻어 주셨으니, 참으로 사문의 다행이며 사림의 복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몇몇 무리들이 당초의 참소해서 해롭게 하려던 논의를 계속 되풀이하고, 또 성상의 비답이 좋아하고 싫어함이 간사한 말에 가려져 나온 것을 핑계삼아 끌어다가 죄안(罪案)을 만들어서 남의 입을 재갈 물려 말도 못하게 하여 선조왕께서 진실된 마음으로 현인을 좋아하는 거룩한 덕이 도리어 깜깜하게 세상에 밝혀지지 못하게 하오니, 이것이 신 등이 적이 통탄하는 바입니다. 또 정인홍은 한평생 유현을 모함하는 것만으로 능사를 삼아서 선현 이언적(李彦迪)까지도 극도로 추하게 비방하여 상소해서 모함하였으니, 이것은 온 나라 선비들이 모두 통분해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비방하고 모함하기에 급급하여 별다른 할 말이 없음을 걱정하여 도리어 정인홍이 하던 말 그대로임을 깨닫지 못하고 자연 제 스스로 바른 사람을 모함하는 죄에 빠짐을 깨닫지 못하였사오니, 이것도 불쌍할 뿐입니다. 권적의 소장은 비록 올려서 아뢰지는 못했으나 그 사연이 패망해서 무리(無理)가 더욱 극심해서 그 중에 불충하였느니 불효하였느니 따위의 말들은 진실로 변명할 것도 없지만, 그 말 중에, ‘우리 나라의 유림 종장으로는 문순공 이황(李滉) 만한 이가 없는데, 이기(理氣)의 논설이 서로 다르고, 나정암(羅整庵)의 선학(禪學)의 논설은 유림 종장이 배척하는 바인데도 이이는 스스로 얻은 것이 있다 하였다.’ 하며 이것으로써 이이의 병통이라고 꾸짖었으니, 이것은 우물 안에 앉아서 하늘을 보고 하늘과 땅이 광대함을 알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이기에 대한 논설은 미묘해서 해설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현인과 군자들이 서로 논란해도 끝을 맺지 못한 것이 한이 없었으니, 이이가 논변한 것이 차이가 남은 마땅히 후세에 주자 같은 이를 기다린 뒤에야 결정될 일이지, 결코 권적 같은 젖내 나는 무리들이 왈가왈부할 것이 못됩니다.
대체로 우리 유가의 학문은 각각 자기 견해에 따라 그 도달하는 바를 구태여 같게 하지 않으므로 예부터 모든 현인들이 혹은 한 시대에 태어났어도 이러쿵저러쿵 논란하였고, 혹은 후세에 태어났어도 이전에 한 말을 뒤따라 변론하였습니다. 이기니 심성(心性)이니 하는 의론은 비록 합치되지 않은 곳이 있어도 각각 격물 궁리(格物窮理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는 것)하는 공정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옛사람들의 말과 같지 않다고 해서 잘못이라고 할 수도 없으며, 또한 우연히 같다고 해서 옳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만약 말하는 자들의 말과 같다면 곧바로 격물치지의 한 구절은 끊어 버리고 자기의 주견도 물리쳐 버리고 오직 옛사람들의 말한 바와 부합되게 한 뒤에야 성현을 잘 배운다 할 터이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학문이 있겠습니까. 정자의 전[程傳]과 주자의 본의(本義 《주역(周易)》주해에 정자는 전을 지었고, 주자는 본의를 지었음.)에 있어서도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만일 말하는 자들의 말과 같다면 역시 정자와 주자의 견해가 같지 않다고 그 사이에 하자(瑕疵)가 있겠습니까. 나정암의 학술의 정도는 신 등이 자세히 알 수 없으되 이이의 말에, ‘정암은 전체는 바라보았지만 투명하지는 못하였으며 또 주자를 깊이 믿어 그 의미를 정확하게 보지 못하였고, 퇴계는 본받은 것이 많아서 주자를 깊이 믿고 그 의미도 깊이 연구하였으니, 주자의 전체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할 수 없다.…’ 하였으니, 선배의 견해에 대하여 나의 생각에 따라서 단점은 버리고 장점은 취하니, 그 마음이 지극히 공정하며 그 논의도 지극히 공평합니다. 저들이 이것으로 비방한 것이 어쩌면 그리도 무리하기가 심합니까. 정암이 오초려(吳草廬 원(元) 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징(澄). 국사를 편찬하였음)에게 이르기를, ‘이포새(伊蒲塞 불경에 있는 우바새(優婆塞)의 한역. 청신사(淸信士)를 뜻함)의 기(氣)가 있다.’ 하였는데, 이황의 말에, ‘정암의 말이 옳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황이 정암에게서도 취한 점이 있었으니, 이황이 정암을 옳다 한 것을 이이와 함께 선학으로 돌리겠습니까. 아, 헐뜯고 칭찬하는 일이 생기고서 천하에 완전한 명예가 없어지고 당론이 나온 뒤에 온 세상에 완전한 사람이 없어져서 비록 공자ㆍ맹자ㆍ정자ㆍ주자의 성현으로도 면할 수가 없으니, 그 외에야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더구나 두 현신의 출생이 또 정자와 주자의 수백 대 뒤인즉 그 세도가 더욱 나빠지고 인심의 야박해짐이 더욱 심함이 있으니, 소인들의 말에 오르내림을 면치 못하는 것이 무엇이 괴이하겠습니까. 비록 다시 꺾고 욕함이 이보다 더 심한 일이 있다손치더라도 그 두 현신의 본분에는 조금도 손상됨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생각해 보면, 이 두 현신의 도덕은 중국에 있었다면 정자나 주자 같은 도학이니, 우리 나라에 있어서는 바로 5현의 도학입니다. 정자와 주자가 간사한 소인들에게 배척되자 송 나라가 따라서 떨치지 못하였고, 이 두 현신이 마침내 참소한 칼날에 모함받자 국운이 이로 인해서 중간에 막혔으니, 그 과거의 일로 보면 유현들이 국가에 도움되는 것과 우리 도학이 세상의 교화에 관계되는 것이 어찌 대단하지 않겠습니까. 그 높이 숭상하며 헐뜯고 배척하기를 이러쿵저러쿵 하는 데에서 인심의 사정(邪正)과 세도의 치란을 모두 점칠 수 있습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성상께서는 좋고 싫은 것의 바름을 밝게 보이시고 쾌히 종사하자는 청을 따르시와 사론이 하나로 돌아가고 공의가 다시 밝혀지게 하신다면 사문과 국가의 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너희들이 말한 종사가 중하고 어렵다는 뜻은 이미 관학 유생들에게 효유하였으니, 너희들은 번거롭게 떠들지 말고 물러가 학업을 닦으라.”
하고, 두 번째 상소에 답하기를,
“나의 뜻은 이미 다 말하였으니, 너희들은 애써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 세 번째로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당세의 현인을 이미 얻을 수 없다면 한 시대에 흠모를 받은 지난 날의 현인이라도 찾아서 표창하고 존숭하여 세도를 유지하고 인심을 맑게 하는 터전으로 삼는 것이 어찌 제왕으로서 당연히 힘써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상께서 현인을 높이는데 뜻이 없으시다면 그만이지만, 만일 높이려 하신다면 이 두 신하를 버리고 누구이겠습니까. 저 두 신하의 학문의 정대함은 이미 주렴계(周濂溪)ㆍ장횡거(張橫渠)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오현의 진정한 도통을 이어서 성하게 일대(一代)의 유학의 종주가 되었습니다. 비록 그러하오나 성대한 명망이 있은 뒤에 시기하는 사람이 많아서 소인배들의 짓밟힘을 면치 못하였으나 그 집에 있거나 자신을 수양하는데는 모두 예법대로 따라서 한 점의 흠도 없었던 사람으로 신명에게도 물어보고 일월에도 증명해 볼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 채진후 등에게 물어보셔도 감히 그렇지 않다고는 하지 못할 것입니다. 남의 허물을 샅샅이 찾는 자도 그 행동의 흠을 찾지 못하고 풍도를 따른 자는 그 학문을 얻지 못한 이가 없으니 훌륭하게 여기면 세도를 유지할 수 있고 억누르면 선비들의 마음을 실망시킬 것입니다. 그 관계되는 바의 중함이 이러하온데도 전하께서 소홀히 여기시어 살피지 않으심은 어째서입니까. 또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옛날의 제왕들이 유생들에게 경의를 보이는 것은 그 사람들이 다 어질다고 해서가 아니라 선비라는 이름 때문입니다. 일찍이 선조 때에 서울과 지방 유생들이 오현을 문묘에 종사하자고 청하는 사람들이 번거롭기가 그지없었으되, 선조왕께서 비록 즉시 윤허하시지는 않았으나 언제나 우대하는 예의로 대하지 않은 일이 없어서 소장이 아침에 들어오면 비답을 저녁에 내리시어 온화하신 말씀으로 위안하기에 힘써서 재빨리 응대해주셨습니다. 왜냐하면 현인을 높이는 풍습을 막을 수 없고 선비들의 마음을 실망시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신 등이 비록 미천하오나 우리 조종(祖宗)께서 2백 년 동안 배양시킨 영향이 없지 않아서 옷자락을 찢어서 발을 싸매고 천리를 와서 소장을 올려 지성으로 성총을 감동시킬까 생각하고 두 차례나 상소하였으되, 매양 하루를 지나서 많은 선비들이 방황하면서 궐문 밖에서 명을 기다리느라 이슬과 바람을 맞게 하시어 한갓 시정배들의 업신여김과 비웃음만 사게 하니, 성상께서 선비를 대접하시는 도리가 비록 정당함을 잃었다 해도 가할 것입니다. 선비가 어진이를 높이고 신하가 충서하기를 원하는 것이 무슨 잘못이 있길래 성상께서 싫어하시고 박대하심이 이러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신 등이 한탄스럽고 실망되는 것은 세도가 마침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입니다. 성상의 마음이 이미 한쪽으로 기울어져서 말로 간하기 어려워서 신 등이 우선은 물러가겠습니다마는, 전하께서 잘못하시는 것을 보고도 말 한 마디 없이 묵묵히 돌아가는 것은 또 천리나 먼 데서 온 본의도 아니고, 또한 시골 이웃 동네에 할 말도 없을까 염려되기에 죽기를 무릅쓰고 아뢰는 것입니다.”
하였다.
○ 좌부승지 조위한(趙緯韓)이 아뢰기를,
“전교에, ‘지방의 유생들이 한 가지 일로 세 번이나 상소한 전례가 있느냐?’ 하시었습니다. 종전에도 비록 여러 번 소장을 올린 사람이 있었사오나 이미 기록해 둔 것이 없어서 상고할 만한 증거는 없습니다. 어제 호남 유생들이 소장을 가지고 와서 올리려 하므로 신 등이 그 지리함에 싫증을 내었고, 또 그 상소 사연에 온당치 못한 점이 있어서 즉시 도로 내어주고 문자에 잘못된 곳이 있음을 설명하였는데, 지금 또 다시 몇 마디 문자만 고쳐 가지고 와서 올렸습니다. 먼 지방에서 올라온 많은 선비들의 상소를 번번이 내어 주는 것은 역시 온당치 못한 일이므로 이에 받아서 올리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받아들인 해당 승지는 추고하고 이 상소는 도로 내어주라”
하였다.
○ 병자년(1636, 인조 14) 11월 24일에 보성(寶城)에 살고 있는 안방준(安邦俊)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뢰옵니다. 신은 벌레같이 미천한 몸으로 궁벽한 여염집에 살고 있어서 젊을 때부터 늙기까지 조보(朝報 조정에서 알리는 관보)를 눈으로 본 일도 없고 시국에 관계되는 논의를 입밖에 내지도 않고, 다만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만 본래부터 쌓여 있었으나 한두 가지 시사에 있어서는 마음 속에 느낀 점이 없지 않습니다. 다만 동서의 당이 갈린 뒤에 서로 알력이 있어 쓸데없는 소장을 분분하게 올리니, 전하께서 듣기 싫어하시고 식자들이 한탄하는 바였습니다. 신이 비록 어리석은 소희나마 아뢰고자 하였지만 사람들의 비웃음과 꾸중을 들을까 머뭇거리고 감히 말씀드리지 못한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근래 듣자옵건대, 선정(先正) 신(臣) 문성공(文成公) 이이와 문간공(文簡公) 성혼 두 현신이 채진후와 권적 등의 모함으로 국시(國是)가 정해지지 못하고 유림들이 놀라서 말류의 화가 불측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하니, 신이 어찌 감히 끝내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아서 위로는 성상을 저버리고 아래로는 스승과 벗을 저버리겠습니까. 신은 청하옵건대, 먼저 송시영 등의 경솔하게 행동한 실수를 말씀드리고, 뒤에는 채진후 등의 어진 이를 모함한 정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한번 굽어 살펴 주옵소서.
우리 나라에 있어서 도학의 융성함은 본조(本朝)만한 때가 없었습니다. 오현이 앞에서 창도하고 이현(二賢)이 뒤를 이었습니다. 오현이 이미 종사(從祀)되었으니 오현을 이어서 종사할 분은 이현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나라는 서쪽에는 오랑캐가 있고 동쪽에는 왜구가 있으니 만일 불행히도 오랑캐나 금수의 지경에 이르러서 어진 이를 높이는 도리를 모른다면 그뿐이지만, 만일 그렇지 않고 백세 뒤에 은혜나 원한을 모두 잊어버리고 공론이 제대로 결정되게 된다면 문묘에 배향할 만한 분은 이현이 아니고 누구이겠습니까. 송시영 등이 어떤 괴물이기에, 시기와 형편을 생각해 보지도 않고 경망한 행동을 하여 논의가 떠들썩하게 해서 이미 백골이 된 선현에게 욕이 미치게 하고 우리 전하로 하여금 잘못된 거조로 빠지게 한단 말입니까. 신은 지극히 통탄스럽습니다. 그러나 이현이 사문에 큰 공이 있었던 것은 실상 속일 수 없는 일이므로 종사하자는 청이 비록 너무 급하다고는 하겠으나 무슨 죄될 것이 있겠습니까. 채진후와 권적 등은 젖내 나는 사람으로 이현의 도학이 어떤지도 모르고 한갓 당류에 기울어져서 질투하는 마음만 가지고 유림의 종장을 비방하고 헐뜯기를 거리낌 없이 하였습니다. 채진후는 이이가 무진년(1568, 선조 2) 사직할 때에 도학으로 돌아와서 뉘우치고 깨달았다는 말을 끄집어 내서 스스로 다 말하였다 하고, 성혼이 임인년(1542, 중종 37)에 무함을 입을 때의 죄목을 논의하던 분부를 등서해서 성상의 비답이 엄중하였다 하고, 이어 말하기를, ‘이것은 신 등이 추측한 견해가 아니다.’ 하여 전하를 현혹시킴이 지극히 낭자하였습니다. 권적의 상소는 승정원에서 비록 받아들이지는 않았사오나 모든 사람들이 지껄이고 전해서 보고 듣는 사람을 놀라게 한 말이 마치 장창(臧倉)이 맹자를 헐뜯던 말과 똑같이 흉악하고 교활합니다. 장창의 말에는, ‘예의는 어진 자에게서 나온다.’ 하였고, 권적의 말에는, ‘도덕은 충성과 효도 두 가지에 벗어나지 않는다.’ 하여 은연중 이이와 성혼을 불효하고 불충한 지경으로 돌렸으니, 이런 일을 차마 한다면 무슨 짓인들 차마 못하겠습니까.
이 두 현신의 학문과 도덕은 여러 신하들의 소장과 차자에 이미 대략 말씀드렸으며, 조익(趙翼)의 상소에 더욱더 자세하게 다 말하였습니다. 신은 흠에 대한 답변이 미진한 것만 하나하나 변명하겠습니다. 이이는 나이 겨우 19세 때에 선문에 종사하였다가 몇 년도 못되어서 확연히 깨닫고 마침내 큰 덕을 이루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이의 가장 뛰어난 점으로 다른 사람들은 미치기 어려운 점입니다. 이이가 절간에서 내려온 뒤에 얼마 되지 않아서 즉시 도산(陶山)에 가서 이황을 만나 보니, 이황의 화답한 싯구는 이러하였습니다.
공이 오니 시원하게 심신이 깨는구나 / 公來披豁醒心神
이제야 이름난 밑에 허무한 선비가 없음을 알았노라 / 始知名下無虛士
그 뒤에도 그와 함께 편지가 오가면서 학문을 논하였으니, 이이의 부정(不正)과 불효가 과연 채진후 등의 말과 같다면, 이황의 인정함이 이와 같았으니 이황도 부정과 불효의 무리입니까. 과거에 급제하게 되자, 온 조정에서는 모두 세도를 만회할 수 있는 군자라 하였습니다. 백인걸(白仁桀)은 일찍이 성혼과 이이를 천거해서 우뚝히 서서 도를 행하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을해년(1575, 선조 8)에 선조왕이 좌의정 노수신(盧守愼)에게 이르기를, ‘경(卿)은 현인을 추천하라.’ 하시니, 노수신이, ‘신이 사람을 알아보는 식견이 없사오니 어찌 감히 경솔하게 천거하겠습니까마는, 신의 소견으로 말씀드리면 이이뿐입니다.’ 하였습니다. 백인걸과 노수신은 모두 네 임금을 걸친 덕망(德望)있는 오래된 대신이고, 을사년(1545, 인종 1) 사화에도 살아남은 정직한 신하들이오니, 어찌 부정하고 불효한 사람을 군주에게 천거하여 기망하는 죄에 스스로 빠지겠습니까. 무인년(1578, 선조 11)에 이이가 대사간에서 사직하고 나갈 때에 여러 이름 있는 선비들이 모였습니다. 그때 이지함(李之菡)이 마침 그 좌석에 있다가 이름난 선비에게 말하기를, ‘오늘날의 일은 마치 사람의 원기가 이미 없어져서 손을 써서 약으로 치료할 길이 없는 것과 같은데, 이 위태롭고 망할 형세를 구제할 계책은 단 한 가지가 있을 뿐이다.’ 하였습니다. 좌중에서 어찌하면 되느냐고 물으니, 이지함의 말이, ‘오늘날 숙헌(叔獻)이 조정에 머물러 있으면 비록 큰 일은 할 수 없다 하더라도 반드시 위태하거나 망하지는 않으리라.’ 하자, 모였던 사람들이 모두 맞는 말이라고 하였으니, 숙헌은 이이의 자(字)입니다. 이것으로 보면 이황 같은 여러 현인들도 초년에 잘못된 길로 들어갔던 것을 이이의 흠으로 보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계미년(1583, 선조 1)에 이르러서 크게 소인배들의 시기를 받아 혹은 옛날 왕안석(王安石) 같다고 하고, 혹은 국가의 권력을 맘대로 한다 하고, 혹은 교만하여 임금을 능멸한다는 등 여러 가지 죄목을 많이 만들어서 꼭 죽이고야 말려 했습니다. 이듬해 이이가 죽은 뒤에 비록 정여립(鄭汝立) 같은 흉악한 역적도 탑전(榻前)에서 팔을 흔들면서 큰 소리로 이이가 국가를 그르치게 한 소인이라 비방하였으나, 감히 부정하거나 불효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우선 피차간의 논의는 버려두시고 단지 계미년 이전에 이이를 추존(推尊)한 사람 중에 누가 현인이며 누가 현인이 아니냐는 것과 누가 옳고 누가 잘못이냐를 보실 뿐입니다. 신이 어찌 감히 많은 말을해서 성상을 번거롭게 하겠습니까. 성혼에 이르러서는 신의 스승입니다. 당시의 문도들이 거의 다 죽고 지금 생존해 있는 자로 조정에는 오윤겸(吳允謙)뿐이었으나 이번에 그도 죽었고, 초야에 있어서는 오직 미천한 신일 뿐입니다. 성혼이 간신과 당류를 지어서 임금을 저버렸다는 모함은 오윤겸의 차자 중에 자세하게 그 시말을 말하여서 성상께서 이미 통촉하고 계시리라고 믿사오나 그래도 미진한 것은 신이 다시 자세히 진술하겠습니다. 성혼을 가리켜서 간신과 당류를 지었다는 것은 정철(鄭澈)이 최영경(崔永慶)을 모함해서 죽였는데, 성혼과 정철의 사이가 서로 친하였기 때문입니다. 정철이 과연 최영경을 모함하여 죽이는데 성혼이 그와 함께 음모한 일이 있었다면 간신과 당류를 지었다 해도 옳지만, 성혼도 최영경을 구제하려는 말을 하였고, 정철도 구원하려는 자취가 있었으니, 간신과 당류를 지었다는 말은 무엇을 근거로 하는 말인지 신은 모르겠습니다.
당초에 최영경의 옥사는 성혼이 파산(坡山)으로 돌아간 지 이미 오래된 뒤에 일어났는데, 성혼은 최영경이 잡혔다는 말을 듣고 즉시 정철에게 편지를 보내서 최영경은 효제(孝悌)하고 청수(淸修)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애써 구제하려 했습니다. 그 까닭에 정철이 탑전에서 아뢰기를, ‘최영경의 옥사는 끝내 단서를 찾아낼 수 없으며, 신이 듣기로는 그가 본래 절개를 숭상하고 또 효도와 우애로 세상에 이름이 나서 영남 선비들도 지극히 추앙한다 하니, 전혀 역적 모의에 참여했을 리가 없습니다. 신이 최영경과는 평생에 알고 지낸 일이 없사오니 감히 사정을 두겠습니까. 다만 들리는 소문이 이러하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선왕께서도 이르기를, ‘내가 최영경이 그 동생에게 보낸 편지를 보니, 과연 우애가 있는 것 같다.’고는 하였으나, 특별히 결정지어 들어준 분부는 없었으므로 정철이 감히 다시는 주달하지 못하고 물러나왔습니다. 그를 국문하게 되어서 최영경의 공초 사연에, ‘일찍이 역적(정여립을 말함)과 잠깐 알고 지내서 서로 편지를 왕래한 일은 있지만, 어느 해 이후로는 다시 서로 왕래한 일이 없습니다.…’ 하였으나, 상께서 역적이 최영경에게 보낸 한 장의 편지를 보였는데 바로 어느 해 이후의 편지였습니다. 그래서 분부하기를, ‘최영경의 책상자 속에 이 편지도 들어 있는데 어째서 속이느냐?’ 하매, 최영경이 진술하기를, ‘늙고 병들어 정신이 없어서 당초에 이런 편지가 있는 줄 몰랐습니다.’ 하니, 정철이 아뢰기를, ‘늙은 사람이 잊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제가 어찌 감히 속이겠습니까?’ 하였습니다. 하루는 선왕께서 또 시 한 수를 내리면서 ‘최영경의 책상자 속에 이런 시가 있는데, 무슨 말인가? 물어서 아뢰라.’ 하셨습니다. 그 시 끝에,
우계 하룻밤에 바람이 호랑이에게서 나오니 / 牛溪一夜風生虎
신선의 오얏 뿌리는 머리털 있는 중에게 흔들린다 / 仙李根搖有髮僧
라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최영경이 진술하기를, ‘신은 원래 시를 지을줄 모르옵고 친구 이노(李魯)라는 자가 세상에서 전해지는 시를 써서 보이기로 아무렇게나 책상자 속에 두었던 것입니다.’ 하니, 정철이 이어서 아뢰기를, ‘이 시는 신도 일찍이 들은 것으로 몇해 전 종루에 익명(匿名)으로 씌어져 있던 것이옵니다. 그가 시를 지을 줄 모르는 것은 남들도 다 알고 있습니다.’ 하자, 상의 뜻도 약간 풀리시고 얼마 되지 않아서 최영경이 석방되었습니다. 그때 사간원에서 즉시 다시 국문하자는 계사를 올려서 최영경이 도로 잡히게 되었습니다. 정철이 크게 놀라서 심희수(沈喜壽)에게 말하기를, ‘최영경을 한번 잡아들인 것도 근거없이 너무 심한 일인데 두 번째 국문하기를 청하니, 후세에서 이들을 어떤 사람이라 하겠는가? 공들은 왜 동료들에게 말해서 힘써 만류하지 않는가?’ 하는데, 이때 정철이 최영경을 위해서 당황하고 민망해 하며 조급히 여기는 뜻이 말씨와 얼굴에 나타났습니다. 갑자기 형추(刑推)하라는 분부가 내리면 구출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문사랑(問事郞) 이항복(李恒福)과 계사(啓辭)를 초안할 것을 상의하고, 또 유성룡(柳成龍)과 연명해서 함께 구제하자고 약속하였는데, 때마침 최영경이 옥중에서 병으로 죽었습니다. 정철이 시종 구제하려고 이처럼 정성스럽게 한 것은 성혼이 편지를 보내서 힘써 구출하기를 부탁한 까닭입니다. 이발(李潑)이 정철과 원수가 된 것에 대해서는 온 나라 사람들이 다 아는 바이지만 국문할 때에 애써 구출해서 북도로 귀양보냈습니다. 이발이 안민학(安敏學)과 길에서 만나 민학에게 말하기를, ‘돌아가거든 계함(季涵)에게, 〈내가 계함을 저버린 일이 많되 계함이 나를 저버리지 않으니 훗날 지하에서 무슨 면목으로 대할까?〉하더라고 말하라.’ 하고는 목이 쉬도록 울었다 합니다. 계함은 정철의 자입니다. 배소에 미처 가기도 전에 또 역적 선홍복(宣弘福)의 공초에 이름이 나와서 중도에 잡혀 돌아와서 마침내 죽음을 면치 못하니, 정철이 성혼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상심하고 한탄하였다 합니다. 원수 사이인 이발에게도 오히려 기회를 타서 모함해 죽이려는 마음이 없었는데, 하물며 안면도 없고 원한이나 은덕도 없는 최영경이겠습니까.
정언신(鄭彦信)을 사사(賜死)하라는 전교가 내리던 날에 온 조정이 서로 돌아보고 놀라서 입이 붙어 감히 말 한 마디 하는 사람이 없었으되, 정철만이 혼자 회계(回啓)하기를 주장해서, ‘조종조에서는 반역죄 이외에는 대신 한 사람도 죽인 적이 없어서 후덕한 풍속이 조송(趙宋 조광윤(趙匡胤)이 세운 송 나라를 일컬음) 때와 다름 없었으니, 지금도 마땅히 조종조의 법을 따라야 하고 감히 다른 의논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며 재계(再啓)까지 하여서 죽음을 감하게 되었습니다. 이러므로 정철이 유배지에 있을 때에 정언신의 형제 집에서 위문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 아들 정협(鄭協)이 한 번은 정철이 지은 현판시(懸板詩)를 보고 말하기를, ‘이 어른이 아니었더라면 우리 집의 화가 어느 지경에 갔을지 모른다.’ 하면서 탄식하였다 합니다. 그러니 정철의 구원은 최영경 한 사람뿐이 아닐 것입니다. 당시에 크고 작은 조정의 신하들이 최영경과 아는 자가 많았는데도 말 한 마디라도 해서 구제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정철이 위관(委官 왕명으로 옥사를 맡아서 다스리는 관원)직에서 갈린 뒤에 이발의 80세 노모와 10세의 어린 자식 역시 곤장을 맞아 죽기까지 하여 그 원통함을 누구나 다 말하였으되 그때 추국하는 관원 역시 법전을 인용해서 구원하지 못하였습니다. 성혼은 심문하는 관원도 아니고, 또 관리도 아니었는데 위관에게 편지를 써서 애써 구원하려고 하였으니, 성혼의 마음씨를 여기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역적의 변고를 처음 고할 때에 벼슬아치들 사이에 내응(內應)하려는 음모가 있었다는 유언비어가 있어서 역적과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벌벌 떨면서 겁내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되, 정철이 서울에 들어와서 즉시 차자를 올리기를, ‘벼슬아치들이 역적과 사귄 것은 좋아해서 그의 악을 모른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천하에 어찌 정여립 같은 이가 또 있겠습니까?’ 하니, 인심이 약간 안정되었습니다. 정철이 왕명으로 옥사를 맡게 되자, 옥사가 번져서 필시 사대부들에게 화가 미칠 것을 근심하여 성혼에게 편지를 여러 번 보내서 서로 합심해서 이런 일이 없도록 하자고 하였습니다. 그 중 한 장의 편지에, ‘형이 오지 않을 수 없다. 한두 나이 젊은 사람들의 분노가 쌓여 논의가 날로 거세어져 내 힘으로 말릴 수 없는 것이 첫째이고, 중 연(衍)과 정약(鄭約) 등 네 명의 진술로 많은 관리들이 연루되어 마치 전날 정집(鄭緝)이라는 자의 말과 같으니, 만일 그렇다면 두 정가(鄭哥) 이하는 모두 머리를 맞대고 죽게 될 터이므로, 나 혼자 힘으로 성상을 움직이기가 어려운 것이 둘째이며, 내 병이 심해져서 수일 내로 들어갈까 하니 이 뒤에 이 일을 맡겨서 이들의 죽음을 구해줄 사람이 없는 것이 셋째 이유이니, 이런 때에 줄곧 물러가 있기만 하고 한 번 와서 사은(謝恩)하지 않는 것이 옳겠는가?…’ 하였습니다. 성혼이 어찌 이 말이 진정이 아니라고 믿지 않겠습니까. 경인년(1590, 선조 23)에 정철이 유성룡과 이산해(李山海) 및 대사헌ㆍ대사간 홍문관의 이성중(李誠中)ㆍ이해수(李海壽) 등과 세자를 세울 의논을 주창하고, 성혼도 상소해서 청하려 하다가, 간사한 사람들이 기회를 타서 불측한 말을 만들어 내어 이성중과 이해수가 일시에 쫓겨나고 정철도 드디어 재상 자리에서 파면되었으니, 성혼과 정철이 선왕에게 죄를 얻게 된 것이 이것이 그 시초였습니다.
정철이 물러나자, 간신들이 은밀히 안덕인(安德仁)과 윤홍(尹宖)등 다섯 사람을 사주해서 소장을 올리게 하여 정철을 헐뜯어서 나라를 그르친 죄를 다스리도록 청하였습니다. 선왕께서 불러 보시고, ‘무슨 일이 나라를 그르치게 하였느냐?’ 물으니, 안덕인 등이 대답하기를, ‘대신으로서 술과 여색에 빠진 자로는 자고로 정철 만한 사람이 없었으니, 그가 국사를 그르친 것이 필시 많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선왕께서 답하시기를, ‘주색이 어째서 국사를 그르친단 말인가?’ 하고, 나가라고 명하셨으니, 정철에게 이 당시에 만분의 일이라도 말할 만한 죄가 있었더라면 인견(引見)할 때에 안덕인 등이 어찌해서 숨기고 진달하지 않고 그저 술과 여색으로만 국사를 그르쳤다 하였겠습니까. 이때에 뭇소인들이 성상의 뜻을 엿보고 서로 있는 말 없는 말을 보태서 성혼과 정철을 모함하여 출세할 밑천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더욱 심한 자는 홍여순(洪汝諄)ㆍ이홍로(李弘老)ㆍ정인홍(鄭仁弘)ㆍ기자헌(奇自獻) 네 적(賊)이 이들입니다. 신이 그들의 행동을 다음과 같이 조목조목 아뢰겠습니다. 전하께서는 특별히 살피소서. 신묘년에 홍여순이 사림의 화를 얽어 만들려고, ‘최영경이니 길삼봉(吉三峯)이니 하는 말은 정철이 비밀히 양천경(梁千頃) 형제와 강해(姜海) 등을 사주해서 거짓말을 해서 죽이게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양천경 등을 잡아 가두고 혹형으로 엄중히 다스려서 그 무복(誣服)을 받은 뒤에 비로소 정철이 간사하고 악독하다 하시어 강계에 안치(安置)시키고, 그 외의 관리들도 뒤를 이어서 귀양보냈습니다. 그 뒤부터 논하는 자들이 모두 양천경의 무복을 일대 명확한 증거로 삼았으나 논의가 공평한 사람들은 여전히 그렇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천경이 처음 국문을 받을 때에 심문관이 말의 출처는 묻지도 않고 오직 자백을 받아내려고만 드니, 양천경이 스스로 필시 죽으리라고 알고 있었는데, 양천경의 처의 사촌형 기효증(奇孝曾)이 양천경을 유혹하기를, ‘삼봉이라는 말을 꼭 정철에게 돌려야 네가 살아날 수 있다.’ 하니, 양천경이 고문을 견디지 못해서 끝내 무복하고 죽었습니다. 지금 만약 진술 내용을 꼭 믿고 모든 일을 그대로 따라 하려고 한다면 전후의 역적들이 끌고 들어간 사대부 중에는 함께 음모하고 내응하였다는 사람들이 매우 많은데, 어찌 모두 진실한 증거라 하여 처단하겠습니까. 임진년 왜변이 일어날 때에 선왕께서 개성에 이르시어 특명으로 정철을 석방하게 하고, 이항복하게 분부하시기를, ‘내가 본래부터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 정철의 충효와 큰 절개를 알고서 경 등과 함께 왕자를 보호하라고 명하였노라.’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선왕께서는 정철을 모르셨다고 할 수 없으며, 성혼이 정철을 알아준 것도 이와 같습니다. 전후에, 간악한 정철이니 악독한 정철이니 하신 분부는 결코 선왕의 본의가 아니며, 실상 이것은 참소한 자들을 본받은 것입니다. 이해 12월에 정철이 체찰사로 공주에 머물 때에 신은 의병의 막하(幕下 대장의 보좌관)로 마침 영남에 있었습니다. 의병대장이 신으로 하여금 체찰부에 가서 군중(軍中)의 여러 가지 일을 문의하라고 해서 갔습니다. 이야기가 행조(行朝 의주로 파천한 임시 조정)에 미치면 술도 마시지 않고 밥도 먹지 않고서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고 혹은 통곡할 때도 있어서 멍하니 마치 미친 사람 같았습니다. 신이 이상히 여겨 그의 측근에게 물어 보았더니, 모두들 말하기를, ‘사변이 일어난 처음부터 오늘날까지 이러하지 않는 날이 없다.’ 하였습니다. 신이 마음속으로 ‘이 노인이 재주가 별로 없어 비록 국사에는 볼 만한 점이 없었으나 임금을 사랑하는 성심은 남들이 따를 수 없구나.’ 하고 이때부터 선왕께서 말씀하신 충효가 있다는 분부가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님을 더욱 믿었습니다.
성혼이 취한 점도 근원이 있어서 그 뒤에도 언제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가령 성혼이 화를 면하려고 시속과 행동을 같이해서 갑자기 충효와 대절이 있는 옛 친구를 버렸다면 어찌 성혼이라 하겠습니까. 갑오년(1594, 선조 27)에 정철이 죽은 뒤에 시속배들이 홍여순이 한 말을 되풀이해서 또 최영경의 옥사를 일으켜서 사간원에서 다시 국문하게 했을 때에는 정철이 전혀 참여하여 알지 못할 리가 없다고 추가로 논의해서 관작을 삭탈하였습니다. 그러나 전후에 최영경을 구원하려 한 정철의 자취는 밝아서 가릴 수 없으므로 이것을 가지고 겉으로는 구제하려 하는 체하면서 속으로는 실상 모함하였다고 말들을 하니, 그렇다면 비록 극도로 공격하고 모함하는 시속배들도 감히 정철이 구원하려 하지 않았다고는 못할 것입니다. 이른바, ‘속으로 실상 모함하였다.’는 것은 정철의 구원함이 성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다만 훗날의 화를 두려워해서 남몰래 사간원에 부탁해서 논죄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화를 두려워해 구원하여 조정에 석방해 주기를 청하면서 자기 집에서는 남에게 말하기를, ‘내가 구원하려 한 것은 나의 본심이 아니니 자네가 나를 위해서 죽이기를 논의하라.’ 한다면 남들이 그것을 따르겠습니까. 자기는 편리한 대로 하면서 화는 남에게 미루는 것은 비록 부자간일지라도 시킬 수 없는 일이온데, 더구나 다른 사람이겠습니까. 이것이 전혀 인정에 가당치도 않는 것은 현명한 사람이 아니라도 알 수 있습니다. 정언신이 임금을 속인 죄를 지어서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죄목을 논계하려 할 때에 성혼이 소장을 올려서 구제하려 했으나 미처 진달하기도 전에 고 연평부원군 이귀(李貴)가 유생으로 있을 때 성혼을 만나보고 말하기를, ‘선생께서 비록 소장을 올려서 진달하려 하나 대간(臺諫)에서 현재 논계하는 중이니, 오늘 내일 사이에 만일 윤허를 내리시면 일이 미처 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위관에게 편지를 보내서 대간에 말하여 주계를 정지시키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성혼이 즉시 편지를 써서 이귀에게 주어 바로 정철에게 보냈습니다. 정철도 말하기를, ‘내 뜻도 이와 같으나 논의를 주장하는 대간 최황(崔滉)이 나와 우정이 그리 친밀하지 못해서 편지로 전하기 어려우니, 그대가 나를 위해서 말을 전해 달라.’ 하였습니다. 이귀가 즉시 최황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 유제(有濟)를 통해서 정철의 의사를 알리니, 최황이 이귀가 대간을 동요시킨다 하고, 동료 구성(具宬) 등과 함께 피혐(避嫌)하여 죄를 청하려 하였습니다. 이귀가 마침 구성을 김장생(金長生)의 집에서 만나 꾸짖기를, ‘내가 정협(정언신의 아들)과 젊을 때부터 절친하여 그 집이 역적과 관계 없음을 분명하게 알고 있으므로 힘껏 주선하는 것이 옳지 않는 일이라 할 수 없으며, 그대도 정협과 친구지간인데 의논을 달리하여 그 부친을 구해 주지 못하고 도리어 내가 대간을 요동시킨다 하여 피혐하여 죄를 청한 다 하니, 친구간의 도리가 과연 이런가?…’ 하였다 합니다. 이 한 가지 일에서도 그때의 대간이 정철의 말에 모두 따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으며, 정언신의 사형을 감한 것도 성혼의 힘이 그 사이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없지 않았으니, 정언신의 자손이 성혼을 모함하는 소장에 연명하는 것도 온당치 못한 듯합니다. 붕당을 짓는 화가 마침내 그 조부가 재생된 은혜마저 잊어버리는 데까지 이르니, 신은 적이 웃음이 나옵니다. 정철이 삭탈을 당하자, 시속배들은 또 이 기회를 노려서 비로소 성혼을 정철의 당류로 만들어서 죄를 씌우려 하며 그 논의를 주장한 자가 유성룡에게 물으니, 유성룡의 말이, ‘성혼은 본래 초야의 사람으로 성상께서 파격적으로 대우하여 당신을 굽히셨으니, 만일 나와서 세상에 쓰였더라면 군자가 되었을지 소인이 되었을지 알 수 없다. 지금 조정에서 시험삼아 써 보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중한 죄를 씌운다면 성혼에게는 조금도 흠될 것이 없으나 국가의 체면을 손상시키고 성덕에 누를 끼치는데 어찌 되겠느냐?’고 하여 그 논의가 마침내 중지되었습니다. 그 뒤 4년 만인 정유년(1597, 선조 3)에 정인홍이 성혼을 모함하려고 먼저 그 당류 박성(朴惺)을 시켜서 상소해서 시폐(時弊)를 진계한다고 핑계대고 끝에는 최영경의 원통함을 함께 변명하고, 최영경의 옥사를 사주한 사람은 성혼이며 허구 날조한 사람은 정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뒤 5년 만인 신축년에 정인홍이 또 그 문객 문경호(文景虎) 등을 시켜서 상소하게 하여 곧장 성혼이 모함해 죽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때 이항복이 차자를 올려서 극구 아뢰기를, ‘최영경이 잡힐 때에 성혼이 파산(坡山)에서 편지를 보내 애써 구하였고, 문경호가 상소로 모함하는 것은 실상이 아닙니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차자를 올리기도 전에, 간신 박이검(朴以儉)이 권신의 뜻에 따라 소장을 올려 이항복이 정철의 당류라 하자, 이항복이 드디어 물러갔습니다. 임인년(1602, 선조 35)에 기자헌 등이 기회를 노려서, ‘성혼이 비록 최영경을 죽이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최영경은 성혼으로 말미암아 죽었다.’고 남을 모함하여 죽인 죄목을 성혼에게 씌우려 하였으나, 그때 한준겸(韓浚謙)이 큰 소리로, ‘당초에는 정철이 최영경을 모함하여 죽였다는 말도 너무 어렵게 만들어 낸 말인데, 이제 와서는 성혼이 모함하여 죽였다 하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시속배들이 처음에는 정철이 겉으로는 구원하는 체하면서 속으로는 사주했다 하였고, 조금 있다가는 또 그 말을 바꾸어서 정철이 모함해서 죽였고 성혼이 사주했다 하였으며, 뒤에 또 세 번째로 말을 바꾸어서 곧장 성혼이 모함해서 죽였다 하여, 일망타진하려는 계획으로 그 간교함을 쓰지 않음이 없음은 유성룡이나 한준겸이 그 진상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말이 이러하오니, 이로 보건대, 정철이 간사한 사람이 아니라 정철이 간사하다고 하는 사람이 참으로 간사한 사람이며, 성혼이 간신과 당류가 아니라 성혼이 간신과 당류가 되었다는 사람이 참으로 간신과 당류가 된것입니다.
신이 정인홍을 더욱 미워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정인홍이 성혼을 모함하고자 하였으되 정당한 말을 찾을 수가 없자, 최영경의 행장을 지어서 길게 늘어놓은 것이 거짓으로 꾸미지 않은 것이 없으며, 그 중에 최영경이 죽을 때에 함께 잡혀 있는 윤광계(尹光啓)에게, ‘나는 아무 죄가 없었으되 성혼과 절교한 까닭으로 이 지경이 되었다.’ 한 것과 같은 구절은 곧 정인홍이 성혼을 모함하는 장본(張本)이었습니다. 정인홍의 계책은 교묘하다 하겠으나 실상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윤광계는 신과는 친구 사이며 하룻길밖에 안 되는 해남(海南)에 살고 있었고 평생 동안 옥에 갇혀 본 일도 없었으니, 전후에 성혼을 모함한 정인홍의 말이 모두 이런 식이었습니다. 그 뒤에 정인홍과 왕래한 호남 사람들이 정인홍에게 이르기를, ‘최사축(崔司畜 최영경의 직함)의 행장 속의 윤광계에 대한 구절은 전혀 근거 없는 것이니, 그 외의 허다한 말도 사람들이 모두 믿지 않을 터이니 어찌 된 것입니까?’ 하니, 정인홍의 말이, ‘당초에 어떤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윤광계는 이발의 가까운 친척으로 갇혔다가 매를 맞아 죽었으며, 그때 사축이 같은 감옥에 있어서 윤광계에게 이렇게 말한 것이다.〉하였는데, 그 뒤에 들으니 사람들이 거짓이라고 말하니, 삭제하겠다.…’ 하더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경호가 소장을 올릴 때에도 윤광계의 성명은 감추고 그 말은 그대로 다 썼습니다. 또 선산(善山) 유생 김종유(金宗儒)의 말로 증명하기를, ‘그때 종유가 영남에서 성혼을 찾아가 보니, 성혼이 비밀히 묻기를,〈자네는 최영경이 길삼봉인 줄 아는가?〉하기에, 종유가 깜짝 놀라면서 하는 말이, 〈왜 이런 말씀을 합니까? 오랫동안 영남에 살아서 단지 그분이 높은 선비라는 명망만 들었고 다른 일은 모릅니다.〉하니, 성혼이 말없이 못마땅해 하면서 종유를 사절했다 하였으니, 정철이 최영경을 길삼봉이라 지목한 것이 과연 성혼에게서 나오지 않았느냐?…’ 하였습니다. 김종유의 말이 이와 같이 진실이라면 최영경의 행장에 어째서 김종유와 윤광계의 말을 모두 들어서 증거로 삼지 않고 문경호의 소장에만 말하였겠습니까. 정인홍이 행장을 지을 때에 김종유는 아직 살아 있었는데, 문경호가 상소할 때에는 김종유가 이미 죽어서 증명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간사하고 음흉함이 끝내 이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이점이 신이 더욱 미워하는 이유입니다.
임금을 저버렸다는 말은 임진년 사변 초기에 미처 상감을 맞이하여 뵙지 못하였고, 또 진작 따라 가지 못한 까닭입니다. 이 두 가지 일은 모두 부득이한 상황에서 나온 것으로 여러 유생들의 상소와 재상들의 차자에 이미 진달하였사오니 신이 구태여 여러 번 번거롭게 말씀드리지 않겠으며, 단지 전후에 참소 당한 사유만을 대략 줄거리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전하께서는 더욱 자세하게 살펴 주소서. 임진년 사변 초기에 어가(御駕)가 서도로 납시는 길에 임진강에 다다라서 주상께서 성혼이 사는 곳을 물으시니, 이홍로가 남쪽 기슭의 촌가를 가리키면서, ‘저곳입니다.’ 하였습니다. 이홍로가 의주(義州)에 있으면서 성혼이 광해군의 소명을 받아 성천(成川)에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또 주상께 진언하기를, ‘성혼이 일시의 중한 명망을 지고서 먼저 성천으로 들어갔으니, 일국의 인심이 모두 소조(小朝 세자 광해군의 분조를 말한 것임)로 돌아갈 것이옵니다. 그렇게 되면 신 등은 죽을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는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하였으며, 성혼이 의주에 들어오자, 이홍로가 또 아뢰기를, ‘성혼이 온 것은 세자를 위해서 선위(禪位)를 도모하려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하고 간사한 말로 선동하여 중외에 전파되게 하였으니, 이홍로의 간사하고 사특함이 심하기도 합니다. 사변 초기에 성혼이 적을 피해서 삭녕(朔寧)에 있다가 개성 유수 이정형(李廷馨)과 의병장 김지(金漬) 등과 함께 일을 하였습니다. 김지가 행조(行朝)에 상소하여 선위하기를 청하였는데, 그 사연이 지극히 광패하고 망령스러웠습니다. 이것은 성혼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성혼이 당시에 그 의병 속에 있었으니, 이홍로의 참소가 맞았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경인년(1590, 선조 25)에 세자를 세우는 일이 아니었다면 홍여순ㆍ이홍로ㆍ정인홍ㆍ기자헌의 무리들이 비록 음흉하고 교활하다 하더라도 성상의 의사를 엿보고 터무니 없는 일을 꾸며서 그 모함할 계책을 함부로 하였겠습니까. 이것이 전후에 성혼이 참소를 입은 대략입니다.
대저 신하가 임금을 사랑하는 진심이 벼슬자리에 있든 벼슬자리에 있지 않든 본래 차이가 없지만, 만일 난리가 났을 때 임금을 따르지 않은 자를 법에 비추어서 죄를 논한다면 마땅히 구분이 있을 것입니다. 성혼은 대신도 아니며 또 전하의 측근도 아닌 상태로 정철의 당류로 연좌되어 시골에서 대죄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대신이나 측근들 중에는 살기 위해서 도피해서 임금을 따르지 않은 자도 있었고, 뒤에 행조(行朝)에 들어온 자도 있었습니다. 선왕께서 영변(寧邊)에 도착해서 여러 신하들과 내부(內附 중국으로의 망명을 뜻함)하기를 의논하자 여러 신하들이 모두 흩어지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선왕께서 앉아서 친히 자원해서 따라갈 사람을 물으니, 여러 신하들 중에 응답하는 자가 없고, 오직 이항복만이 따르기를 청하였습니다. 선왕께서 이르시기를, ‘경도 만약 어려운 일이 있으면 꼭 애써 갈 필요는 없다’ 하고, 오랫동안 슬퍼하고 탄식하시었습니다. 이에 이항복이 계청해서 호종(扈從)할 여러 신하들의 성명을 써서 상의 낙점(落點)을 받아 떠났습니다. 선왕께서는 여전히 강제로 데리고 가기가 미안해서 두 번이나 청원해서야 윤허하시었습니다. 낙점한 뒤에는 여러 신하들이 가지 않을 수가 없어서, 또 서로 말하기를, ‘불행하게 요동을 건너가게 되면 형세가 따라 가기 곤란하다.…’ 하였습니다. 박천(博川)에 행차가 이르자, 평양이 함락되었다는 보고가 와서 어가를 재촉하여 밤에 행차하는 데, 호종하던 신하들이 대부분 도망갔습니다. 정철이 말위에서 이항복과 이덕형을 불러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여기에 계시는데 어찌 차마 버리고 간단 말인가?’ 하면서 서로 함께 통곡하였습니다. 지금 수십 년 뒤에도 그때 광경을 회상하면 늙고 병든 신 같은 자도 목이 쉬도록 길이 통곡을 금할 수 없사온데, 더구나 뜻 있는 선비이겠습니까. 만약 임금을 저버렸다는 죄목으로 성혼을 다스린다면 저 벼슬자리에 있으면서 따르지 않은 자와 상이 친히 물으실 때에 응답하지 않은 자와 요동으로 건너가면 형편이 따르기 난처하다는 자와 중도에 도망쳐 돌아간 자들이 의당 먼저 벌받아야 할 터입니다. 그런데 선왕께서는 그대로 불문에 붙이시고 벼슬자리가 예전과 같았는데, 유독 성혼에게만 법률로 다스린 것이 너무 엄중해서 지금까지도 간사한 사람들의 구실이 되게 하오니, 신이 하늘을 우러러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기를 마지않습니다. 뜻밖에 권적의 무리들이 한술 더 떠서 또 불충(不忠)하다고 지목을 하니, 신은 이 뒤에 권적을 이어서 일어날 자가 또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습니다. 성혼의 불충이 과연 권적 무리들의 말과 같다면 당시의 충렬(忠烈)한 선비들이 어찌 그리도 그의 문하에서 많이 나왔습니까. 고(故) 선현 조헌(趙憲)이 병술년(1581, 선조 21)에 상소하기를, ‘신이 지금 세상에 스승으로 섬기는 이가 세 사람이온데, 이지함ㆍ성혼ㆍ이이입니다. 신은 언제나 이 세 사람이 신을 가르쳤던 것을 가지고 현량한 선비들을 방문합니다.’ 하였습니다. 성혼이 조헌에게 가르친 것이 무엇인지 신은 알지 못하오나, 깨끗한 충성과 장한 절개가 이와 같이 훌륭하였습니다. 고 판서 황신(黃愼)은 천장(天將 중국 장수를 일컬음)의 접반관(接伴官)으로 적의 진중에 3년이나 머물러 있었는데 적이 경외하고 존중하여 정인(正人) 황학사(黃學士)라고 일컬었습니다. 사명(使命)을 받들고 바다를 건너가서 성혼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감히 살기 위해서 왕명을 욕되게 하여 스승과 벗들의 말을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하고, 마침내 오랑캐 뜰에서 굴복하지 않아 중국이나 오랑캐들이 크게 탄복하였습니다. 황신의 이른바, 스승과 벗의 말을 저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과연 무슨 일이겠습니까. 죽은 참판 김권(金權)이 귀양갈 때에 그 친구에게 이르기를, ‘70세 나이에 먼 지방에서 죽는 것이 어찌 즐거운 일이겠는가마는, 이렇게 하는 까닭은 죽은 스승을 지하에서 뵈오려 해서이다.’ 하였습니다. 유배지에서 선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꼭 눈물을 흘렸는데 일찍이 2월 1일에 그 고을 수령이 술과 소찬을 가지고 가서 혼자 지내고 있음을 위로하니, 김권이 흰 의관 차림으로 거적을 깔고 앉아서 수령을 보고, 말하기를, ‘오늘은 바로 선왕의 국기일(國忌日)이다.’ 하고는 눈물을 비오듯 흘려 수령이 감히 입을 열지도 못하고 물러났다 합니다. 뒤에 사람들이, 대비(인목대비를 말함)가 해(害)를 만났다고 잘못 전하매 김권이 목을 매어 자진(自盡)하였는데, 그 고을 사람들이 그 절의를 가상히 여겨서 사당을 세우고 향사하였다 합니다. 김권의 이른바, 죽은 스승을 지하에서 뵙는다는 것이 역시 무슨 일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성혼의 불충이 국가에 공이 크다 하겠습니다.
대저 성혼의 원통함을 송사하려는 자는 반드시 정철의 옥사를 다스린 시말과 성혼이 모함당한 곡절을 갖추어서 말한 뒤에야 성혼의 원통함이 애쓰지 않아도 변명이 될 것입니다. 임인년 이후 수십 년 동안에 안으로는 관학의 여러 유생들과 밖으로는 주군(州郡)의 많은 선비들과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계속해서 상소하여 원통함을 송사한다고 이름하였으되, 한 글자라도 정철의 사건과 관련만 되면 몸에 화가 금방 닥치게 되므로 한 사람도 거리낌없이 다 말한 사람이 없는 것이 신이 마음 아파하는 바입니다. 이제 어찌 감히 죽음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정철의 마음과 행적을 일일이 드러내서 나의 죽은 스승의 지극히 원통함을 변명하지 않겠습니까.
아, 옛날부터 비방을 듣지 않은 군자는 없었습니다. 공자ㆍ맹자ㆍ정자ㆍ주자도 오히려 면치 못하였으며, 우리 나라 오현 중에도 온전했던 분은 오직 이황 한 분이었으나 끝내는 그 역시 정인홍의 비방을 면치 못하였으니, 비방을 듣지 않는 이는 약간 청렴하고 조금 근신해서 시속에 따라 부화뇌동하는 무리에 지나지 않는 사람인 줄 알겠습니다. 이런 무리들은 비록 날마다 경악(經幄 임금을 모시고 강론하는 경연)에서 모시고 있다 하더라도 이 거룩한 다스림에 만분의 일도 도움이 없을 것이니, 높은 시렁에 묶어 두었다가 태평의 날만 기다리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이 점을 깨달음이 있으실까 바랬는데, 도리어 한때의 비방으로 두 현신을 의심하셨습니다. 송시영(宋時瑩)의 상소에 답하기를, ‘도덕이 고명하지 못하고 흠이 있어 비방을 받았다.’ 하시고, 채진후의 상소에 답하기를, ‘종사하자는 청은 지극히 참람하고 외람되어 간사한 사람의 기세가 전보다 백 배나 되게 하고 많은 선비들의 기백을 날로 사그라지게 한다.’ 하시니, 신은 성상의 의사를 모르겠습니다. 광해군 때에 정인홍이, 이언적과 이황은 종사하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상소해서 비방하고 배척하여 관학 유생들의 소란을 불러 일으키매, 유식한 사람들은 모두 나라를 망하게 하는 거조라 한 것을 전하께서는 생각하지 못하십니까. 신이 이런 말을 하면 화가 따르게 되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분함이 마음에 복받쳐 말을 억제할 줄 모르겠습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공평하게 들으시고 고루 보시고 사리에 맞는 점을 구해 보시어 즉시 신의 소장을 내려 대신들에게 물으셔서 만일 털끝만치라도 기망한 죄가 있거든 여러 사람이 보는 곳에서 베어 죽여 다음 사람들을 격려하시면 신은 달갑게 죽어 원망하거나 뉘우침이 없겠습니다. 신이 작년 겨울에 벌써 이 소장을 지었습니다만, 불행히도 나라에 큰 상사가 있어서 부음을 듣고 중지하였으며, 졸곡(卒哭) 뒤에 즉시 올리려 하였으나 봄ㆍ여름 사이에 마침 중병에 걸려서 여러 달 신음하여 1년이 거의 다 되었습니다. 때가 지난 일이 되어서 그만두려 하였으나, 신이 금년에 64세여서 하루아침에 갑자기 목숨이 끊어져, 죽은 스승의 원통함을 한번도 펴보지 못하고 죽게 되면 눈을 감을 수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부득이 현(縣)과 도(道)의 편으로 전달하기를 보통의 예와 같이 하오니, 방자한 죄는 스스로 피하기 어려움을 알며 신이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하였다.


[주D-001]양무(兩廡) : 동무(東廡)와 서무(西廡)로, 문묘 안에 공자(孔子)를 주벽(主壁)으로 모시고, 양편 행각(行閣)에 유현(儒賢)들을 배향하였는데, 동쪽의 행각을 동무, 서쪽의 행각을 서무라 함.
[주D-002]계미년의 변고 : 선조 16년(1583)에 경원부(慶源府)의 번호(藩胡)가 난을 일으켜 부성(府城)을 함락시킨 일. 즉 니탕개(泥湯介)의 난.
[주D-003]오현(五賢) : 조선 중기 때 문묘에 배향된 다섯 유현(儒賢)으로 즉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조광조(趙光祖)ㆍ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
[주D-004]염락관민(濂洛關閩) : 북송(北宋)에서 남송(南宋)까지의 이학(理學)의 명유(名儒)였던 염계(濂溪)의 주돈이(周敦頤), 낙양(洛陽)의 정호(程顥)ㆍ정이(程頤), 관중(關中)의 장재(張載), 민중(閩中)의 주희(朱熹)를 말함.
[주D-005]원점(圓點) : 조선 시대 성균관(成均館)과 사학(四學) 유생의 출ㆍ결석을 점검하기 위하여, 식당에 들어갈 때 도기(到記)에 찍던 둥근 점으로 아침ㆍ저녁 두 끼를 한 점으로 하고, 50점에 이르면 과거볼 자격을 주었음.
[주D-006]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의 무리 : 《맹자(孟子)》 〈등문공(滕文公)〉상편에, “양씨는 자신만 위하니 이는 임금을 모르는 것이고, 묵씨는 두루 사랑하니 이는 아비를 모르는 것이다. 아비도 임금도 모르는 것은 곧 짐승이다.”라고 하였음.
[주D-007]청아(菁莪)의 교화 : 〈청청자아(菁菁者莪)〉라는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편명에서 따온 것으로, 어진 인재를 즐겨 기른다는 뜻. 여기서는 성균관을 말함.
[주D-008]범치허(范致虛)나 심계조(沈繼祖) : 범치허(范致虛)는 “정이(程頤)는 간사한 말과 비뚤어진 행동으로 여러 사람을 혼란 시켰다.”고 정자를 헐뜯었고, 심계조(沈繼祖)는 감찰어사(監察御史)로 있을 적에 주희(朱憙)는 요괴 같다고 모함하였음.
[주D-009]양화(陽貨)나 환퇴(桓魋)의 헐뜯음과 치욕 : 양화는 춘추(春秋) 시대 노(魯) 나라 계씨(季氏)의 가신(家臣)으로, 공자를 길에서 만나, “도덕을 품고도 나라의 어지러움을 구하지 않는 것이 어질다고 할 수 있는가? 일에 종사하기를 좋아하면서 기회를 놓치는 것이 지혜롭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며, 공자를 헐뜯었다. 《論語》 〈陽貨〉환퇴는 송(宋) 나라 대부로 성은 상씨(向氏)인데, 송환공(宋桓公)의 자손이기 때문에 환씨라고도 한다. 공자가 조(曹) 나라를 떠나 송나라에 가서 제자들과 큰 나무 밑에서 예(禮)를 익히는데, 환퇴가 공자를 죽이려고 그 나무를 뽑아버렸음. 《史記》 〈孔子世家〉
[주D-010]서하(西河)의 …… 의심하였으니 : 자하는 공자 제자 복상(卜商)의 자(字)이며, 서하는 자하가 살던 곳이다. 자하는 공자가 죽은 뒤에 서하에 물러나서 강학(講學)하였는데, 서하의 학자들이 공자가 자하와 다름이 없는 것으로 의심하였음.
[주D-011]정자와 …… 금고하여 : 송나라 철종(哲宗) 때 간의대부(諫議大夫) 공문중(孔文仲)이 정이(程頤)를 간사하고 오귀(五鬼)의 괴수라며 헐뜯었다. 위학(僞學)은 송나라 영종(寧宗) 때 한탁주(韓侂冑)가 집권하자, 자기와 의견이 다른 자를 제거하기 위하여 도학(道學)을 위학이라 하여 주자 같은 이들을 위학이라 지목하여 배척하고 금고시켰음.
[주D-012]증자(曾子)의 …… 의심이 있었는데 : 매우 신임하는 사람도 참소가 잦으면 참소하는 말을 믿는다는 비유. 옛날 증자(曾子 이름은 삼(參))와 성명이 같은 사람이 사람을 죽였다. 한 사람이 증자 어머니에게, ‘증삼이 사람을 죽였다.’고, 알리니, 증자 어머니는 ‘내 아들은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하고, 태연히 베를 짰다. 조금 뒤에 또 한 사람이 또 ‘증삼이 사람을 죽였다.’고 알렸으나, 증자 어머니는 그래도 태연히 베를 짰다. 조금 뒤에 또 한 사람이, ‘증삼이 사람을 죽였다.’고 알리니, 증자 어머니가 두려워서 베짜던 북을 던져버리고 담을 넘어 달려간 것을 말한다.
[주D-013]전모(典謨) : 《서경(書經)》의 〈요전(堯典)〉ㆍ〈순전(舜典)〉과 〈대우모(大禹謨)〉ㆍ〈고요모(皐陶謨)〉를 이름.

 


 

선조 29년 병신(1596,만력 24)
 12월22일 (갑신)
윤인함 등 11명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윤인함(尹仁涵)을 형조 참판으로, 남이공(南以恭)을 홍문관 교리로, 홍경신(洪慶臣)을 홍문관 교리로, 유공량(柳公亮)을 병조 정랑으로, 이필형(李必亨)을 사간원 정언으로, 강항(姜沆)을【호남 사람으로 흉악 무도하여 간적(奸賊)에게 편들어 선량한 사람들을 모해했다. 강해(姜海)의 아우이다.】 형조 좌랑으로, 성대업(成大業)을【경솔하고 무식하여 유언 비어를 그대로 믿고 지키던 땅을 버리고 몸만 빠져 나왔으니, 이런 위인을 어디에 쓰겠는가.】 삭주 부사(朔州府使)로, 성식(成軾)을【재물을 탐내어 천례(賤隷)와 결혼하였으며, 벼슬에 급급하여 어버이 상기(喪期)를 마치지 못한 자이다. 그가 의관(衣冠)의 대열에 끼인 것은 그의 수치가 아니라 오히려 의관의 수치가 된다. 양사(兩司)에서 오래도록 묵인하고 있으니, 시세(時勢)의 변천을 알 수 있다.】 덕원 부사(德源府使)로, 우치적(禹致績)을 순천 부사(順天府使)로, 신현(申晛)을【무식하고 힘만 센 역사인데 어떻게 백성을 다스릴 수가 있겠는가.】 개성부 도사(開城府都事)로, 김제남(金悌男)을 연천 현감(漣川縣監)으로, 이노(李魯)를 경상 도사(慶尙都事)로 삼았다.
【원전】 23 집 137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선조 26년 계사(1593,만력 21)
 11월2일 (임자)
승문원이 글 잘하는 사람이 함께 의논하여 사명을 중하게 하라고 청하다

승문원이 아뢰기를,
“요사이는 사명(辭命)의 중함이 평상시 보다 배나 되어 자문(咨文)·게첩(揭帖)이 날마다 쌓입니다. 주본(奏本)은 위로 천청(天聽)에 주달하여 분쟁을 해소하고 실정을 상달되게 하는 것이 오로지 이에 달렸으니 더욱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글 잘하는 사람들이 함께 의논해서 초계(抄啓), 술작(述作)을 전담케 함으로써 사명을 중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초계한 제술 문관(製述文官)은 신광필(申光弼)·이노(李魯)·정경세(鄭經世)·신흠(申欽)·황신(黃愼)·이정귀(李廷龜)·이준(李埈)·안대진(安大進)·이춘영(李春英)·유몽인(柳夢寅)이다.
【원전】 22 집 118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어문학-문학(文學) / *외교-명(明)


송암집 ( 松巖集 )
형태서지 | 저 자 | 가계도 | 행 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형태서지
권수제  松巖先生文集
판심제  松巖先生文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  1852年刊
권책  6권 3책
행자  10행 19자
규격  20.6×17.4(㎝)
어미  上下二葉花紋魚尾
소장처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도서번호  811. 98-이로-송-판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54
 저자
성명  이로(李魯)
생년  1544년(중종 39)
몰년  1598년(선조 31)
 汝唯
 松巖, 文殊山人
본관  固城
특기사항  曺植의 門人. 矗石樓 三壯士 중의 한 명
 가계도
 李翰
 
 李孝範
 引儀
 南平文氏
 文垠의 女
 李魯
 
 草溪鄭氏
 鄭渭의 女
 李曼勝  
 尙衣院 別提
 側室
 
 女
 
 郭再祐
 망우집(忘憂集)
 李普
 
 李旨
 判官
 李曼勝  
 
 女
 
 孫遇辰
 

기사전거 : 世系圖, 年譜, 孫遇辰墓誌銘(李魯 撰)에 의함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중종 39 1544 갑진 嘉靖 23 1 3월, 宜寧縣 孚谷里에서 태어나다.
명종 14 1559 기미 嘉靖 38 16 草溪鄭氏와 혼인하다.
명종 15 1560 경신 嘉靖 39 17 巨濟에서 游軒 丁熿을 배알하다.
명종 17 1562 임술 嘉靖 41 19 두 동생과 함께 守愚堂 崔永慶을 찾아보다.
명종 18 1563 계해 嘉靖 42 20 두 동생과 함께 晉州의 南冥 曺植에게 수학하다.
명종 19 1564 갑자 嘉靖 43 21 進士 會試에 합격하다.
선조 1 1568 무진 隆慶 2 25 봄, 星州의 東岡 金宇顒, 寒岡 鄭逑를 방문하다.
선조 2 1569 기사 隆慶 3 26 여름, 太學에 유학하다. ○ 상소하여 乙巳忠賢의 雪寃을 청하다.
선조 5 1572 임신 隆慶 6 29 4월, 南冥 曺植의 장례에 참여하다.
선조 6 1573 계유 萬曆 1 30 봄, 德溪 吳健을 배알하다. ○ 6월, 아우 李普의 상을 당하다.
선조 10 1577 정축 萬曆 5 34 8월, 부친상을 당하다.
선조 12 1579 기묘 萬曆 7 36 8월, 모친상을 당하다.
선조 16 1583 계미 萬曆 11 40 丹城 松巖村에 머물다.
선조 17 1584 갑신 萬曆 12 41 奉先殿 參奉이 되다. ○ 別科 初試에 합격하다.
선조 23 1590 경인 萬曆 18 47 10월, 增廣文科에 甲科로 합격하다. ○ 상소하여 守愚堂 崔永慶의 설원을 청하다.
선조 24 1591 신묘 萬曆 19 48 直長이 되다. ○ 3월, 倭書에 답하는 문제로 封事를 올리다. ○ 「四姓綱目」이 완성되다.
선조 25 1592 임진 萬曆 20 49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다. ○ 5월, 招諭使 金誠一과 咸陽에서 만나다. ○ 三嘉와 丹城에서 의병을 일으키다. ○ 晉州의 矗石樓로 가서 金誠一과 합류하다. ○ 7월, 晉州에서 왜적과 싸우다. ○ 成均館 典籍이 되다. ○ 10월, 金誠一과 함께 宜寧에서 왜적과 싸워 크게 이기다.
선조 26 1593 계사 萬曆 21 50 3월, 호남곡 2만 석을 수송하여 列邑에 나누어 주다. ○ 4월, 金誠一의 상에 곡하다. ○ 가을, 刊曹佐郞이 되었다가 곧 居昌 假守가 되다. ○ 倭將 淸正에게 檄文을 보내다. ○ 提督 李如松에게 啓聞하여 和議의 잘못을 논하다. ○ 11월, 申光弼, 鄭經世 , 申欽, 黃愼, 李廷龜, 李埈, 安大進, 李春英, 柳夢寅과 함께 製述文官에 抄啓되다.
선조 27 1594 갑오 萬曆 22 51 3월, 아우 李旨의 상을 당하다. ○ 7월, 比安 縣監으로 재직하다. ○ 11월, 정언이 되었다가 곧 체차되고 다시 比安 縣監이 되다.
선조 28 1595 을미 萬曆 23 52 여름, 陜川의 客舍로 摠兵 劉綎을 방문하다.
선조 29 1596 병신 萬曆 24 53 봄,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다. ○ 12월, 慶尙 都事가 되다.
선조 30 1597 정유 萬曆 25 54 3월, 龍蛇日記를 저술하다. ○ 9월, 都體察使 李元翼의 別將으로서 昌原 등지에서 활약하다.
선조 31 1598 무술 萬曆 26 55 1월, 다시 정언이 되어 서울로 가다가 金山의 客館에서 졸하다. ○ 4월, 宜寧縣 所山에 장사 지내다.
순조 2 1802 임술 嘉慶 7 - 宜寧 景山에 景德祠를 건립하여 위판을 봉안하고, 洛山書院이라 이름하다.
순조 12 1812 임신 嘉慶 17 - 嘉善大夫 吏曹參判에 贈職되다.
순조 17 1817 정축 嘉慶 22 - 資憲大夫 吏曹判書에 贈職되다.
철종 3 1852 임자 咸豐 2 - 後孫 李賢俊 등이 문집을 간행하다. (李彙寧의 跋)

기사전거 : 年譜, 朝鮮王朝實錄 등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의 시문은 兵火를 겪은 끝에 거의 산일되고 겨우 남아 있었던 것은 詩 100여 편, 詞, 賦, 書, 疏, 序, 記, 誌銘 등 약간 편뿐이었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잘 정리되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었으니, 許穆이 찬한 行狀에 의하면, 辛卯封事나 檄倭將文, 上天將書와 같이 議論이 正大한 저작이 있으나 이를 수습할 嗣孫이 없다고 하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8代孫 李賢楫(初名은 觀華)이 이러한 家內에 傳存된 시문을 수집하고 편차하여 간행을 도모하는 한편, 金羲淳에게 諡狀을 부탁하여 諡號 恩典이 내리기를 도모하였지만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난 1852년 李賢楫의 從弟인 李賢俊, 李賢坤 등이 李敦禹에게 부탁하여 지은 墓誌銘, 金羲淳이 지은 諡狀, 許穆이 지은 行狀 등 부록문자를 더하여 6권 3책으로 편차, 木板으로 문집을 간행하였다. 《초간본》 현재 규장각(奎4248)과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811. 98-이로-송-판)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852년에 간행된 초간본으로,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장본이다.

기사전거 : 序(柳致明 撰), 跋(李彙寧, 李亨秀 撰)에 의함
 구성과 내용
본집은 부록을 포함하여 모두 6권으로 되어 있다.
권1은 五言 古詩ㆍ絶句ㆍ律詩ㆍ排律, 七言 古詩ㆍ絶句ㆍ律詩ㆍ排律의 詩 62題를 詩體別로 편차하고, 挽詞 4편과 賦 5편을 함께 실어 韻文끼리 모아 놓았다. 시에는 1593년 昇平(順天) 등지로 가서 湖南穀 2만 석을 실어 보내 巨濟, 晉州 등지로 나누어 주는 일을 관장할 즈음 지은 〈昇平東軒偶吟〉과 〈昇平喚仙亭…〉 등이 있고, 1594년 屛山(比安)의 縣監을 맡은 뒤 지은 〈屛山黌樓謹次柳西厓…〉와 그 和韻詩 6題가 모두 실려 있다.
권2는 上疏, 啓, 檄文이다. 상소는 1569년 乙巳忠賢의 雪寃을 청하는 상소와 崔永慶의 설원을 청하는 소, 그리고 1591년 倭書에 답하는 문제로 올린 〈辛卯封事〉이다. 啓는 1593년에 明將 李如松에게 올린 것 1편이 실려 있고, 격문은 〈通諭列邑倡起義旅文〉, 〈檄倭將淸正文〉 등 3편이 있으니, 모두 임란과 관계된 저작이다.
권3은 書簡과 雜著, 祭文 및 墓道文이다. 書簡은 대부분 임진왜란 때 鶴峯 金誠一에게 보낸 것이고, 李元翼에게 올린 것도 1편 실려 있다. 雜著에는 〈四姓綱目序〉가 있는데, 이는 저자의 祖父와 祖母, 外祖父와 外祖母의 성씨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들의 간단한 譜系와 貫鄕에 관련된 기록을 편찬한 「四姓綱目」의 序文이다. 또 〈四姓贊〉도 이에 부기된 글이다. 이 외에 〈畫記〉는 저자의 외삼촌이 廣州 分院에서 가지고 온 그림을 보고 느낀 점을 기술한 것이다. 제문은 曺植, 金誠一 등에 대한 것 등 8편이 실려 있고, 묘갈명과 묘지명이 9편 있다. 특히 1편이 실린 神道碑銘은 柳景深에 대한 것으로, 저자 나이 27세경에 덕행과 문망을 인정한 西厓가 從叔의 신도비명을 부탁하여 지어진 것이다.
권4는 鶴峯 金誠一, 大笑軒 趙宗道, 忘憂堂 郭再祐, 陶丘 李濟臣 등에 관한 遺事이다. 이 중 金誠一의 유사는 文殊志라고 각주를 한 것으로 보아 文殊志에서 轉載한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문수지라고 한 것은 저자가 龍蛇日記를 저술할 때 文殊山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보이는데, 본집에 수록된 遺事는 용사일기를 축약한 것이라고 각주되어 있다.
권5는 年譜인데, 이 앞에는 저자의 世系圖가 권차에 포함되지 않고 편차되어 있다.
권6은 附錄으로, 許穆이 찬한 行狀 등 저자의 묘도문자와 관련기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맨 뒤에 李彙寧과 李亨秀의 跋文이 붙어 있다.

필자 : 徐廷文
용사일기(龍蛇日記)

 

 

조선 선조(宣祖) 때 임진왜란 당시 경상우도(慶尙右道)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막료였던 이로(李魯)의 일록(日錄). 1책. 활자본. 1762년(영조 38) 간행됨. 김성일의 활약을 중심으로 기술하였으며, 서명서(徐命瑞)의 서문과 이상정(李象靖)의 발문이 실려 있음.

시대: 조선후기
연도: 1762

 

松巖集跋
 
松巖集跋[李彚寧] a_054_122a


此松巖李先生遺集也。先生著述。不幸散佚於兵燹之餘。裒取巾衍者。詩厪百餘。詞賦書疏序記誌銘竝若干篇而已。其辭旨簡古。義理直截。觀於此。亦可得先生制行之剛方。學道之正大焉。顧何必多乎哉。不佞讀是集而竊有所感者。我 朝龍蛇之難。山南忠憤慷慨之士。在在抗義敵愾。而其從也各以氣類相應。先生之自京南還。必以鶴峯金先生爲歸。何也。是不唯忠貞義烈之素所相許。先生嘗從寒岡,東岡兩先生遊。知道學淵源之有所自出。蓋將以請益於鶴054_122b峯先生。則戎籌贊畫之暇。必有所講劘硏究。益聞其所未聞者矣。是以。朴大庵之勸赴倻山參謀也。先生毅然不動。偕我壯士。寧死於晉陽江水。而誓不欲適他。其倉卒危難之際。能審於所從如此。然則所貴乎是集者。豈直爲忠臣烈士咳唾精神之所在哉。吾道之傳不傳。亦將待是而有關焉耳。今其孫賢俊,賢玉甫。方與剞劂氏。謨所以壽其傳。而彊彙寧一言以記其後。顧彙寧非能言者。然屢辭不獲。略敘其所感。以寓托名之幸云。054_122c上之三年壬子四月上瀚。通政大夫東萊都護府使李彙寧。謹跋。

松巖集跋
 
松巖集跋[李亨秀] a_054_122c


亨秀嘗與先生之胄孫上舍觀華氏遊。觀華氏泣謂亨秀曰。吾先祖生平撰述。殆汗牛之多。而家禍澒洞。書籍散亡。蒐輯巾衍。掇拾傳誦者只若干篇。亦未能剞劂而壽之。吾恐吾祖之學行文章精忠偉烈。日就泯沒。翳然於千載之下也。亨秀曰。先生之龍蛇錄。已大行於世。鶴峯先生矗石樓之詩。播在人口。先生之文。雖不多。猶多也。雖不布。猶布之廣也。日。觀華氏之從弟賢俊,054_122d賢坤。奉草藁四冊。以示亨秀。章疏書檄文移。居三之二。詩及雜著幷幾十篇。葢其遭値板蕩。國耳忘軀。慷慨同仇之義。保障江淮之功。宣著發露於行墨之間。而編首之辨論忠奸。尊衛斯文。實先生之學。先立乎其大者也。惟其大者如此。故措之事功者。煒煌震耀。非腐儒纖兒所倚辦一二。則若先生者。眞可謂識世務有體有用之學也。讀先生之文者。此不可不知也。嗚呼。觀華氏之歿。已十有年矣。門戶飄零。宗祀殆而。而先故未遑之擧。適成於是。古家重興之會。此其兆054_123a歟。吾將拱而竢焉。亨秀旣與聞鈆朱之役。敢書所感於心者。以附卷後。門後生亨秀。謹跋。


松巖集序
 [序]
松巖集序 a_179_357a


 

松巖處士李公載亨起北邊。傑然爲學問士。北俗業弓馬。羯羠勁悍。風氣179_357b 之所蔽。耳目之所限。苟非姿性特絶心力精確者。孰能與乎斯文之林哉。公始從農巖金先生學。農巖佐北179_357c 幕。從游者甚衆。而獨以遠大期公。公自是知學問有門路。益自淬厲。蚤夜取聖賢書。俯讀仰思。初若分才躋179_357d 攀。而卒迺左右兼該。存心則體驗罙密。正家則倫理甚篤。聲光不可揜而望實與之高。朝廷旣禮之以徵士。179_358a 寵之以侍從。命方伯爲之勸駕。北士知讀書者。莫不視爲師表。而國中賢士大夫亦皆誦其名不已。詩云179_358b 鶴鳴于九臯。聲聞于天。非是之謂歟。公於著述。本不屑意。今草藁所刪定。堇若干編。而學識之淹洽。言179_358c 議之峻正。略見於一二文字者。有令人掩卷起敬。信乎洛建之遺風。尙可尋於肅愼之舊鄕。而天之降才果無所179_358d 擇矣。世或有不悅公者。謗公爲黨論。公何嘗有是哉。其師友淵源旣如是。而黑白陰陽胷中之所涇渭者。又不可奪179_359a 則公雖平日歛嘿。絶口世事。而可免訾傷之及乎。然程子以論古今人物。別其是非。爲格致之大端。然則彼所以謗公者179_359b 非曰病公。而適足以驗公學力歟。余故序其遺稿。而又特論之如此。乙丑臈後二日。坡平尹鳳朝序。

松巖集卷之一
 䟽狀
辭召旨䟽 戊午○政院以僭越還下送 a_179_364a


伏以臣老病沉深。伏在床簀。而朝暮待盡者久矣。日昨本道監賑御史奉承聖敎。臨門宣諭。驚惶罔措。不知所出。而默數臣罪。殆非一二。臣以遐裔賤陋。一無肖似於人。而盜竊虗名。厚誣天聦。罪一也。往在先朝。三被除命。而一不趍謝。罪二也。及至聖朝。召命絡續。而皆未奉承。罪三也。人臣而有此三大罪。在法難赦。宜伏重律。而聖德包荒。不惟不罪。曲179_364b 加優容。復有今日之命。顧此無狀。何以得此恩眷之出尋常萬萬耶。臣雖冥迷。猶非木石。敢不糜身粉骨。思所以報其萬一者也。自度駑劣。他無所效。惟當一進天陛。百拜仰謝。而退塡溝壑。庶可以粗伸螻蟻之忱。少贖前日之罪。此臣日夜耿耿于心者。而顧臣受氣虗弱。自少嬰疾。種種諸證。更迭作苦。而其中腹痞與脚氣兩證。最屬危道。腹肚脹滿。呼吸難通。脚筋反張。步履艱澀。百端醫治。一無見效。而月加歲增。輾轉成痼。雖州里間。不得任意出入者已過三十年。而從前累違恩命。實由於此。今則犬馬之齒。已179_364c 七十有四。眞元虗脫。氣血俱耗。不惟前證日覺層劇。一身百體。無不受病。而證兆之危惡。筋力之摧敗。視前不啻倍蓰。則其有一分可以自力者耶。欲扶舁上道則必致顚仆。欲偃息在家則又添一罪。持此兩端。進退俱難。而不知所以措躬之所也。君臣大義。人道之所不廢。爵祿恩榮。人情之所同願。臣則一病爲祟。自不得齒比於人。而廢伏田野。罪積違慢。誅罰是俟。乃知病之爲灾。不獨關死生一事而止也。臣以草野寒微。猥不敢干瀆天聦。前日命下。一未上章自陳。而率皆轉聞。中心抑欝。若以煩溷爲嫌。而區區179_364d 賤忱。終不自達於黈纊之下。則一朝溘然。實有難瞑之憾。玆因縣道。敢冒仰籲。伏乞聖明亟命有司。治臣前後負恩違命之罪。臣雖萬死。亦所甘心。無任戰慄危懼。席藁俟罪之至。

松巖集卷之一
 䟽狀
辭持平䟽 庚申○以在外見遆不果呈 a_179_364d


伏以糞土賤臣。猥蒙殊恩。自丁未以後。所被召命。殆非一二。實是分外。而壹皆違慢。罪積如山。惶恐無地。若無所容。曾於戊午恩諭之下。忘分封䟽。敢陳危衷。其時政院以微末僭越。還給本䟽。區區情狀。無以上徹。泯默退伏。惟俟譴罰之下。昨因縣道。伏179_365a 奉去月二十二日有旨。以臣除司憲府持平。乘馹上來者。臣始焉駭惶。繼以愧懼。莫知其所以自措也。此何等重選。而反加於如臣無似之身耶。反覆思惟。萬不近似。不惟在臣微分。縮慄難冒。其於朝廷體貌。亦甚乖宜。日夕引領。顒俟公議之發。而迄未有聞。不知何謂。臣竊伏念㙜閣之職。責任甚大。上而格君心之非。下而正百官之儀。而政令之得失。紀綱之弛張。皆繫焉。苟非其人。國受其弊。可不重其選而愼其擇耶。不獨朝廷之重選愼擇。人之膺是選者。亦當量而後進也。臣雖甚冥迷。自知則明。而量之熟矣。以質則179_365b 至愚極陋。以才則百無一能。以學則空空無聞。而地分又是遐裔賤微。默自點檢。無一齒比於人。雖微官末職。猶不可承當。况敢冒昧以進於㙜端之重耶。且士之由科目而進者。自是例分。而臣則旣無科名。其所寵擢者。顧非以臣賢而特進之耶。昔齊景公招虞人以㫌。而虞人不至。孔子取非其招而不往。今以賢人之招。招不賢無似之臣。而臣敢唐突冒往則其於孔子取虞人之意。爲何如哉。若開此一路則假眞售僞。盜名欺世之徒。競騖於世。而美官淸職。可坐而致。臣雖不肖。猶不忍以身啓此弊。爲一世嗤點也。雖179_365c 然聖恩罔極。如天無涯。臣罪愈大。寵眷愈隆。至有今日之命。臣雖縮忸不敢承當。而刻鏤肝肺。感淚沾襟。敢不糜身粉骨。思所以報其萬一者也。顧此眇末。無以自效。惟當躬詣天陛。以首頓地。百拜仰謝。畢露腷臆。而退塡溝壑。庶可以粗伸螻蟻之忱。少贖前日之罪。而臣自少得脚氣與腹痞兩證。月加歲增。輾轉成痼。全廢出入者三十餘年。而從前累違恩命。實由於此。如許情狀。曾已申狀州家。累次轉聞。更不必縷陳。而今則犬馬之齒七十有六。病與衰甚。筋力精血。皆無餘地。萬無扶舁之路。一進躬謝。亦179_365d 無以自力。撫躬自悼。但切入地難瞑之憾。區區肝膈。不容不披露。玆敢仰首哀籲。伏乞聖明鐫臣所叨職名。無辱名器。且使床簀殘喘。得以安分待盡。千萬幸甚。方今大慶才經。擧國莫不蹈舞相賀。思效嵩呼之悃。而臣獨偃卧窮廬。猥以私懇。敢凂宸聦。情理阻矣。分義蔑矣。而又添一罪。益不勝隕越崩迫之至。

松巖集跋
 [跋]
松巖集 a_179_487a


不佞竊不自揆。旣僣述公狀文矣。文集成。其諸孤門生又責以跋語甚勤。公之道與學。已盡載其書。其精純質愨。深造實得。無一語179_487b 一句不根於考亭之緖餘。百世之下。必當有識其至者。豈待人以爲輕重。而其見於序文若誌碣諸作。又詳矣。何有於吾辭之贅乎。179_487c 無已則有一焉。昔吾從祖三淵公嘗訪公而歸。甚欲公人品之高。而至以爲繩墨之嚴。尤翁後所始見。且評其所著性命人物同異之179_487d 說。爲非近來諸儒所可及。從祖平生未嘗輕以辭許人。而其稱引如此。此可以想見公歟。姑以是書于卷末。以補狀文之缺可乎。是集179_488a 之編。實經泉翁及尹副學心衡之手。洪尙書啓禧又卒其釐次。其剞劂而行于世。李觀察命坤徐觀察命臣之力爲多179_488b 云。
崇禎百三十一年戊寅季冬己未。安東金元行謹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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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朴堧)

○ 본관은 영동(永同)으로 우리 태종조에 급제하였다. 음률(音律)에 정통하여 세종이 아악(雅樂)을 제정하는데, 박연이 실질적으로 이것을 주관하였다. 관직은 대제학에 이르렀고, 효자의 정문(旌門)이 있다. 우리 세종이 일찍이 석경(石磬 돌로 만든 악기(樂器))을 만들어 박연으로 하여금 교정하도록 하였던 바, 박연이 아뢰기를, “어느 소리는 1푼이 높고, 어느 소리는 1푼이 낮습니다.” 하므로, 다시 조사해 보니, 높은 소리 나는 것에 진흙 찌꺼기가 끼었으므로, 세종이 진흙 찌꺼기 1푼을 긁어내게 하고, 또 낮은 소리 나는 것에는 진흙 찌꺼기 1푼을 덧붙이게 하였더니, 박연이 아뢰기를, “이제는 소리가 모두 정해졌사옵니다.” 했다. 사람들이 그 신묘함에 탄복하였다. 《용재총화》
○ 후에 아들의 사고로 말미암아 관직을 파면당하고 향리로 돌아가는데, 한 필의 말에 한 사람의 동자가 딸렸을 뿐, 그 행장이 쓸쓸하였다. 친한 벗들이 강가에서 전송하는데, 공(公)은 어려서부터 피리를 잘 불었기에 피리를 빼어서 3곡을 불고 가니, 듣는 이로서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동상
연화 회문체(蓮花回文體)를 짓고서, “옛사람이 선기회문체(璿璣回文體)를 지었는데, 별도로 오언(五言) 8구를 지어 연꽃 무늬 모양과 같이 하고 이름지어 연화회문(蓮花回文)이라고 했다.” 하였는데,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홀로 처하여 숨는 것을 달게 여기고 / 獨處甘遺逸
몸을 한 작은 동산에 편히 하리라 / 安身一小園
골짜기가 둘렀으니 누추한 집이 적당하고 / 谷盤宜陋室
물굽이가 가느다라니 맑은 술동이와 가깝도다 / 灣細近淸樽
푸른 대에는 밝은 달이 깃들어 있고 / 翠竹栖明月
푸른 산은 흰 구름을 이었도다 / 靑山冠白雲
신선을 배우려는 마음 간절하나 / 學仙心切切
일이 어려운 세상은 분분하도다 / 難事世紛紛
하였다. 《동문선》
○ 우리 세종이 거서(秬黍 곡물의 일종. 악기ㆍ도량형기 제작에 쓰임)를 해주(海州)에서 얻으매, 박연이 밀[蠟]을 녹여서 거서의 모형을 만들었는데, 그 낱알이 좀 컸다. 분(分)을 쌓아서 관(管)을 만드는데, 한 낱알로써 한 푼을 삼고, 열 알을 쌓아 올려 한 치로 삼았으며, 9치[九寸] 황종(黃種 12음율의 하나)의 길이로 법을 삼아, 3푼을 손익(損益)하여 12율을 이루어서 편경(編磬)을 만들었다. 《동국여지승람》
○ 새로 편경을 만들었는데, 이칙(夷則) 한 장이 그 소리가 맞지 않으므로, 박연이 살펴보고 말하기를, “먹줄이 아직 다 깎이지 않았다.” 하고, 곧 갈아 내어, 먹줄이 다 갈리자 소리가 맞게 되었다. 《국조보감》

[주D-001]연화 회문체(蓮花回文體) : 회문체(回文體)란 시편(詩篇)의 글자들을 어떤 물건 모양처럼 배열하여 상하종횡으로 읽어도 문맥이 맞는 갖가지 다른 뜻의 시편들이 되게 짓는 일종의 문자유희이다. 이를테면 위의 연화회문체의 원문은 [獨處甘遺逸 安身一小園 谷盤宜陋室 灣細近淸樽 翠竹栖明月 靑山冠白雲 學仙心切切 難事世紛紛]인데, 이를[逸遺甘處獨 園小一身安]식으로 읽어도 문맥이 통하고 뜻이 다른 시편이 되는 것 따위이다.
 
[간략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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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 서문
 
1397(태조 6)∼1450(세종32). 조선 제4대 왕. 재위 1418∼1450.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도(?), 자는 원정(元正). 태종의 셋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閔氏)이다. 비는 심온(沈溫)의 딸 소헌왕후(昭憲王后)이다.
1408년(태종 8)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지고, 1412년 충녕대군에 진봉(進封)되었으며, 1418년 6월 왕세자에 책봉되었다가 같은 해 8월에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원래 태종의 뒤를 이을 왕세자는 양녕대군(讓寧大君)이었다. 그러나 양녕대군이 개와 매[鷹]에 관계된 사건을 비롯해, 세자로서의 품위를 손상시킨 일련의 행동과 사건들로 인해 태종의 선위에 대한 마음이 동요되었다.
그래서 태종은 자신이 애써 이룩한 정치적 안정과 왕권을 이어받아 훌륭한 정치를 펴기에 양녕대군이 적합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였다. 태종의 마음이 이미 세자 양녕대군에게서 떠난 것을 알게 된 신료(臣僚)들은 그를 폐위할 것을 청하는 소(疏)를 올려 양녕대군을 폐하고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삼기에 이르렀다.
이 때 태종에게는 왕후 민씨 소생으로 양녕·효령(孝寧)·충녕 등 세 대군이 있었고, 양녕대군에게도 두 아들이 있었다. 따라서 그를 폐하고 새로이 세자를 세우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세자 폐립에 관해 의론이 분분하였다.
그러나 태종의 마음은 이미 셋째아들인 충녕대군에게 쏠려 있었다. 1418년 6월에 태종은 “충녕대군은 천성이 총민하고, 또 학문에 독실하며 정치하는 방법 등도 잘 안다.”라고 해 택현(擇賢 : 어진 사람을 고르는 것)의 명분을 주어 그를 세자로 책봉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처럼 충녕대군에 대한 세자책봉은 태종의 뜻에 따라 극적으로 이루어졌다. 물론, 대부분의 신하들도 이를 환영하였다. 두 달 뒤인 1418년 8월 10일 태종의 선위를 이어받아 세자 충녕대군이 왕위에 올랐으니 이 사람이 세종이다.
세종대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유교정치, 찬란한 문화가 이룩된 시대였다. 이 시기에는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전반적인 기틀을 잡은 시기였다.
즉, 집현전을 통해 많은 인재가 양성되었고, 유교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제도가 정비되었으며, 다양하고 방대한 편찬 사업이 이루어졌다. 또한 훈민정음의 창제, 농업과 과학기술의 발전, 의약기술과 음악 및 법제의 정리, 공법(貢法)의 제정, 국토의 확장 등 수많은 사업을 통해 민족국가의 기틀을 확고히 하였다.
이 많은 일들을 주도한 인물이 바로 세종이었다. 세종은 태종이 이룩한 왕권과 정치적 안정 기반을 이어받아 이를 적극적으로 펼쳤다. 그리고 세종 4년까지는 태종이 상왕으로 생존해 영향을 주었다. 태종은 1414년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실시해 의정부 대신의 정치적 권한을 크게 제한하고 왕권의 강화를 이룩하였다.
세종은 이러한 정치체제를 이어받아 태종대에 이룩한 왕권을 계속 유지하면서 소신 있는 정치를 추진할 수 있었다. 세종대는 개국공신 세력은 이미 사라지고 과거를 통해 정계에 진출한 유자적(儒者的) 관료와 유자적 소양을 지닌 국왕이 서로 만나 유교정치를 펼 수 있었던 시기였다.
세종대의 권력구조나 정치적인 분위기는 세종 18년을 전후로 해 양분된다. 즉, 세종 18년에는 육조직계제가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로 바뀌면서 정치체제상의 변혁이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는 세자(世子 : 뒤의 문종)로 하여금 서무(庶務)를 재결(裁決)하도록 하였다. 또한 정치적 분위기는 더욱 안정되고 유연해졌다.
따라서, 언관(言官)과 언론에 대한 왕의 태도도 그 이전과 달리 훨씬 자유롭고 부드러워져서 이들에 대한 탄압이나 징계는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이와 같이 정치적 분위기가 변한 원인은 유교정치의 진전에서 찾을 수도 있다.
즉, 세종 전반기에 집현전을 통해 많은 학자가 양성되었고, 그 학자들이 주축이 되어 유교적 의례·제도의 정리와 수많은 편찬사업을 펼쳤다. 따라서 유교정치 기반이 다져졌다. 세종 18년에 육조직계제에서 의정부서사제로의 이행도 유교정치의 진전으로 볼 수 있다.
세종 후반기에는 왕의 건강이 극히 악화되었으나, 의정부서사제 아래에서 군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룬 가운데 성세를 구가한 시대였다. 황희(黃喜)를 비롯한 최윤덕(崔潤德)·신개(申?)·하연(河演) 등 의정부 대신들은 중후하고 온건한 자세로 왕을 보좌하였다.
그리고 관료들의 정치 기강도 그 전후에 비해 건전했으며, 언관의 언론도 이상적인 유교정치를 구현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 이러한 정치체제와 정치적 분위기도 세종시대를 이룩하는 데 작용한 요소였다. 한편, 집현전은 세종과 세종대를 운위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기관이다.
집현전은 중국과 고려시대에도 있었고, 조선 초 정종대에도 설치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집현전이라고 하면 조선시대의 세종 2년 3월에 설치한 것을 의미한다. 이 때에 집현전을 설치하게 된 목적은 조선이 표방한 유교정치와 대명(對明) 사대관계를 원만히 수행하는 데 필요한 인재의 양성과 학문의 진흥에 있었다.
이에 따라, 집현전에서 유망한 소장학자들을 채용해 여러 가지 특전을 주었다. 특히,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내려 학문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곳에 소속된 관원은 경연관·서연관·시관(試官)·사관(史官)·지제교의 직책을 겸하였다.
그들의 직무는 중국의 옛 제도를 연구하거나 각종 서적의 편찬사업에 동원되는 등 주로 학술적인 것이었다. 왕은 이들이 학술로써 종신할 것을 희망했으므로 다른 관부에는 전직도 시키지 않고 집현전에만 10년에서 20년 가까이 있게 하였다.
그 결과 수많은 쟁쟁한 인재를 배출했는데, 이러한 인적 자원이 바로 세종대의 찬란한 문화와 유교정치의 발전을 이루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유교적인 의례·제도의 정리는 유교정치의 기본이 되는 작업으로서, 이를 위해 중국의 옛 제도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였다.
중국의 옛 제도에 대한 관심은 개국 초부터 있어 왔으나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된 것은 바로 세종이 즉위한 이후부터였다. 그 중심이 된 기관도 예조·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집현전 등이었다.
이러한 기관에서 국가의 유교적 의례인 오례(五禮 : 吉禮·嘉禮·賓禮·軍禮·凶禮)와 사서(士庶)의 유교적 의례인 사례(四禮 : 冠禮·婚禮·喪禮·祭禮) 등 유교적인 제반 제도가 정리되었다. 실제로 조선시대의 유교적인 의례·제도의 틀은 세종대에 짜여져서 유교정치의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그런데 이 때에 정리된 의례·제도의 틀은 중국의 옛 제도에 따른 것이었으나, 왕은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즉, 이를 비판·연구해 조선의 실정에 맞지 않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주체성을 견지하였다.
세종대에 전개된 다양하고 방대한 편찬사업은 이 시대의 문화수준을 높이는 데 기본이 되었다. 이 사업을 통해 문화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정리가 이루어졌고, 정치·제도의 기틀이 잡혀갔다.
이 사업의 주도자는 물론 세종이었고, 이 일을 담당한 것은 집현전과 여기에 소속된 학자들이었다. 또, 이 사업은 집현전 학자들의 학문이 향상되고 일할 수 있는 준비가 이루어진 세종 1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세종대의 편찬물의 중요한 것을 연대순으로 열거하면 [표]와 같다.
[표] 세종대의 주요편찬서
편찬연대 편찬물 내 용
세종 10 孝行錄 유교윤리와 의례
세종 11 農事直說 농서
세종 14 三綱行實 유교윤리와 의례
세종 14 八道地理志 지리서
세종 15 無寃錄註解 중국 법의학서
세종 15 鄕藥集成方 의약서
세종 16 資治通鑑訓義 중국 역사서
세종 20 韓柳文註釋 중국 문학
세종 22 國語補正 중국 역사서
세종 23 明皇誡鑑 정치 귀감서
세종 24 絲綸全集 중국 법률서
세종 25 杜詩諸家註釋 중국 문학
세종 26 韻會諺譯 한글번역서
세종 26 五禮儀註 유교윤리와 의례
세종 26 七政算內外篇 천문
세종 27 治平要覽 정치 귀감서
세종 27 龍飛御天歌 조선개국찬가
세종 27 龍飛御天歌註解 한글 번역서
세종 27 諸家曆象集 曆數
세종 27 醫方類聚 의약서
세종 28 訓民正音創制 훈민정음
세종 29 東國正韻 음운
세종 30 四書諺解 유교경서, 한글 번역서
세종 30∼문종 1 高麗史 역사서
이 편찬물을 내용별로 분류하면 역사서, 유교경서, 유교윤리와 의례, 중국의 법률 및 문학서, 정치귀감서, 훈민정음·음운·언역(諺譯) 관계서, 지리서, 천문·역수서, 농서 등으로 다양하고 방대하였다.
즉, 정치·법률·역사·유교·문학·어학·천문·지리·의약·농업기술 등 각 분야에 걸쳐 종합 정리하는 사업으로, 이 작업을 통해 이 시대의 문화 수준을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또한, 특기할 일은 이러한 많은 편찬사업이 왕의 의도에 따른 것이었고, 왕 자신도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그 예로서 ≪자치통감훈의 資治通鑑訓義≫의 편찬은 집현전의 학자뿐 아니라, 53인이나 되는 거의 모든 학자들이 총동원되어 3년에 걸쳐 이룩한 큰 사업이었다. 그런데 이 사업을 위해 왕은 계속했던 경연까지 중지하고 밤늦게까지 친히 교정을 보았다.
훈민정음의 창제는 세종이 남긴 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빛나는 업적이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유산임에 분명하다.
세종은 집현전을 통해 길러 낸 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이선로(李善老)·이개(李塏) 등 소장 학자들의 협력을 받아 우리 민족의 문자를 창제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이 시대의 문화 의식과 수준이 어떠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 시기는 과학과 기술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크게 발전을 보았다. 천문대와 천문관측기계 방면에서의 발전이 이러한 측면의 하나로 꼽힌다. 조선 초기 서운관에는 천문을 관측하기 위해 두 곳에 간의대(簡儀臺)를 설치한 바 있으나, 이것은 아주 미흡한 것이었다.
세종 14년부터 시작된 대규모의 천문의상(天文儀象)의 제작사업과 함께 경복궁의 경회루 북쪽에 높이 약 6.3m, 세로 약 9.1m, 가로 약 6.6m의 석축간의대가 세종 16년에 준공되었다. 그리고 이 간의대에는 혼천의(渾天儀)·혼상(渾象)·규표(圭表)와 방위(方位) 지정표(指定表)인 정방안(正方案) 등이 설치되었다.
세종 20년 3월부터 이 간의대에서 서운관의 관원들이 매일 밤 천문을 관측하였다. 이러한 간의대와 그 중요한 시설물들은 중국과 이슬람의 영향과 전통적인 요소들이 함께 들어 있었다. 혼천의는 천체관측기계로서 문헌상으로는 세종 15년 6월에 만들어진 것이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이다.
그리고 같은 해 8월에 또 하나가 만들어졌는데, 정초(鄭招)·정인지(鄭麟趾) 등에게 고전(古典)을 조사하게 하는 한편, 장영실(蔣英實) 등 기술자들에게 실제 제작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 혼천의는 천구의(天球儀)와 함께 물레바퀴를 동력으로 해 움직이는 시계장치와 연결되어 천체의 운행과 맞게 돌아가도록 되어서 일종의 천문시계의 성격도 가졌다. 또한, 시간을 측정하는 해시계와 물시계도 제작되었다. 해시계로는 앙부일구(仰釜日晷)·현주일구(懸珠日晷)·천평일구(天平日晷)·정남일구(定南日晷) 등이 있다.
그리고 물시계로는 자격루(自擊漏)와 옥루(玉漏)가 있다. 앙부일구는 우매한 백성들을 위해 혜정교(惠政橋)와 종묘 남쪽의 거리에 설치한 우리 나라 최초의 공중시계(公衆時計)였다. 또한, 현주일구와 천평일구는 휴대용 시계였으며, 정남일구는 매우 정밀한 해시계로 이것으로 관측하면 자연히 남쪽이 정해지면서 시각을 알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해시계는 갠 날과 낮에만 쓸 수 있는 것이므로, 공적인 표준시계로는 물시계가 더 유용했는데 자격루가 그것이다. 자동시보장치가 붙은 물시계인 자격루는 세종이 크게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장영실을 특별히 등용해 이의 제작에 전념하게 해 세종 16년에 완성하였다.
그것은 경복궁 남쪽의 보루각(報漏閣)에 설치되어 조선시대의 표준시계로 이용하였다. 세종 20년에는 장영실에 의해 또 다른 자동물시계이며 천상시계인 옥루가 완성되었다. 세종은 천문·역서(曆書)의 정리와 편찬에도 큰 관심을 가져 ≪칠정산내편 七政算內篇≫·≪칠정산외편 七政算外篇≫·≪제가역상집 諸家曆象集≫ 등이 편찬되었다.
세종 15년에는 정인지·정초·정흠지(鄭欽之)·김담(金淡)·이순지(李純之) 등에게 ≪칠정산내편≫을 편찬하게 했으며, 세종 24년에 완성되어 2년 만에 간행되었다. ≪칠정산외편≫도 이순지·김담에 의해 편찬되었는데, 이것은 당시 가장 완전한 이슬람 천문학서의 번역본이라 하겠다.
≪칠정산내외편≫의 편찬으로 조선의 역법(曆法)은 완전히 정비되었다. 또한, 세종 27년에는 이순지에 의해 ≪제가역상집≫이 편찬되었다. 이 책은 세종대에 이룩한 천문·역법의 총정리 작업과 천문의상 제작의 이론적 근거를 찾기 위한 고문헌(古文獻) 조사사업의 결산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높은 수준의 중국 천문학사라고 평가할 수 있다.
측우기의 발명도 이 시기 과학기술의 발달에서 주목할 만한 업적이다. 농업국가인 조선시대에서 강우량의 과학적 측정은 매우 큰 뜻을 가진다고 하겠다. 측우기는 세종 23년 8월에 발명되어 새로운 강우량의 측정제도가 마련되었고, 그 미흡한 점은 이듬해 5월에 개량·완성되었다.
이 측우기를 발명해 강우량을 측정함으로써 농업기상학의 괄목할 만한 진전을 이룩한 것이다. 또, 조선시대의 도량형 제도도 세종대에 확정되었다. 즉, 세종 13년과 28년에 확정된 도량형제도가 그 뒤 ≪경국대전≫에 그대로 법제화되었다.
이 제도는 12율(律)의 기본음인 황종률(黃鐘律)을 낼 수 있는 황종관(黃鐘管)을 표준기(標準器)로 삼은 것으로서, 황종관의 길이는 자[尺]로 길이의 단위를 삼았고, 그 속에 담기는 물은 무게의 단위로 삼은 것이었다.
인쇄술에서도 세종대는 특기할 만한 발전을 이룩하였다. 1403년에 주조된 청동활자인 계미자(癸未字)의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 세종 2년에 새로운 청동활자인 경자자(庚子字)를 만들었고, 세종 16년에는 더욱 정교한 갑인자(甲寅字)를 주조하였다.
세종은 계미자 인쇄기의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 세종 2년에 새로운 청동활자인 경자자와 인쇄기를 만들게 해 활자의 주조와 인쇄기술상의 큰 발전을 가져 왔다. 세종 16년에는 경자자보다 더 아름다운 자체인 갑인자의 주조사업이 이천(李?)의 감독 아래 이루어져 20여만 자의 크고 작은 활자가 주조되었다.
그 뒤 세종 18년에는 납활자인 병진자(丙辰字)가 주조됨에 따라 조선시대의 금속활자와 인쇄술은 일단 완성을 보게 되었다. 한편, 화약과 화기(火器)의 제조에 있어서도 기술적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세종대는 종래 중국기술의 모방에서 탈피하려는 독자적 경향이 나타나서 화포(火砲)의 개량과 발명이 계속되었다.
완구(碗口)가 개량되고, 소화포(小火砲)·철제탄환·화포전(火砲箭)·화초(火?) 등이 발명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세종에게서 아직 만족할 만한 수준에 도달한 것은 못되었다. 세종 26년에 화포주조소(火砲鑄造所)를 짓게 해 뛰어난 성능을 가진 새로운 규격의 화포를 만들어냈고, 이에 따라 이듬해는 화포의 전면 개주(改鑄)에 착수하였다.
세종 30년에 편찬·간행된 ≪총통등록 銃筒謄錄≫은 그 화포들의 주조법과 화약사용법, 그리고 규격을 그림으로 표시한 책이었다. 이 책의 간행은 조선시대의 화포제조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주목할 만한 업적으로 평가된다. 세종대에는 농사법의 개량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중국의 농서인 ≪농상집요 農桑輯要≫·≪사시찬요 四時纂要≫ 등과 우리 나라 농서인 ≪본국경험방 本國經驗方≫ 등의 농업서적을 통해 농업기술의 계몽과 권장을 했으며, 정초가 지은 ≪농사직설 農事直說≫을 편찬·반포하였다. 이 책의 반포는 조선시대 농업과 농업기술사에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의약발명에도 세종대는 특기할 만한 시대로서 ≪향약채집월령 鄕藥採集月令≫·≪향약집성방 鄕藥集成方≫·≪의방유취 醫方類聚≫ 등의 의약서적이 편찬되었다. ≪향약집성방≫≪의방유취≫의 편찬은 15세기까지의 우리 나라와 중국 의약학의 발전을 결산한 것으로 조선과학사에서 빛나는 업적의 하나이다.
이 시대는 또 음악에 있어 우리 역사상 가장 빛나는 업적을 남긴 시기였고, 그것은 세종의 지휘와 참여로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유교정치에 있어서 중요시되는 것이 유교적 의례인데, 국가의 의례인 오례에는 그에 합당한 음악이 따르게 마련이다. 따라서, 유교적인 의례의 정리와 함께 음악의 정리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세종의 음악적 업적은 크게 아악(雅樂)의 부흥, 악기(樂器)의 제작, 향악(鄕樂)의 창작, 정간보(井間譜)의 창안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업적은 음악에 대한 깊은 관심과 조예를 가진 세종박연(朴堧)과 같은 음악의 전문가를 만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었다.
왕은 종래 미비하고 불완전한 아악을 바로잡기 위해 박연 등을 시켜 중국의 각종 고전을 참고해 아악기를 만들게 하고, 아악보를 새로 만들게 해, 조회아악(朝會雅樂)·회례아악(會禮雅樂) 및 제례아악(祭禮雅樂) 등을 제정하였다.
그 뒤 아악은 국가·궁중의례에 연주되었고, 본고장인 중국보다도 완벽한 상태로 부흥시킬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아악의 부흥은 그 악기의 국내 생산과 직결된 문제로서 종래 중국에서 수입했던 악기들을 국내에서 생산하였다. 특히, 가장 중요한 악기인 편경(編磬)과 편종(編鐘)도 대량으로 생산되었다. 세종은 또한 박연으로 하여금 율관(律管)을 제정하게 해 모든 악기의 음(音)을 조율(調律)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세종은 친히 <정대업 定大業>·<보태평 保太平>·<발상 發祥>·<봉래의 鳳來儀> 등 대곡(大曲)을 작곡하였다. 현재 국립국악원에서 연주되는 여민락(與民樂)도 <봉래의> 일곱 곡 중 한 곡이며, <정대업><보태평>은 현재 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왕은 또한 기보법(記譜法)을 창안했으니, 곧 정간보(井間譜)가 그것이다. 정간보에 음의 시가(時價)와 박자를 표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세종은 이 정간보를 사용해 향악인 <정대업>·<보태평>·<봉래의>·<봉황음 鳳凰吟>·<만전춘 滿殿春> 등을 기보하였다. 정간보는 세조대에 약간 개량된 것을 현재에도 국악에 사용하고 있다.
법제적 측면에서도 세종대는 유교적 민본주의·법치주의가 강화·정비된 시기였다. 세종은 즉위 초부터 법전의 정비에 힘을 기울였다. 세종 4년에는 완벽한 ≪속육전≫의 편찬을 목적으로 육전수찬색(六典修撰色)을 설치하고 법전의 수찬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다.
수찬색은 세종 8년 12월에 완성된 ≪속육전≫ 6책과 ≪등록 謄錄≫ 1책을 세종에게 바쳤다. 그리고 세종 15년에는 ≪신찬경제속육전 新撰經濟續六典≫ 6권과 ≪등록≫ 6권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도 개수를 계속해 세종 17년에 이르러 일단 ≪속육전≫ 편찬사업이 완결되었다.
한편으로는 형벌제도를 정비하고 흠휼정책(欽恤政策)도 시행하였다. 형정(刑政)에 관한 왕의 시책의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율문(律文)에 적합한 조목이 없는 경우에는 법률의 적용을 신중히 할 것, 고문으로 사망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 사죄는 삼복법(三覆法)을 적용할 것 등과 고문에 태배법(笞背法)을 금하며, 의금부삼복법(義禁府三覆法)을 정하였다.
또, 15세 이하와 70세 이상인 자는 살인·강도죄를 제외하고는 수금(囚禁)하지 못하며, 10세 이하 80세 이상인 자는 사죄(死罪)를 범해도 수금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도죄인(徒罪人)의 부모가 70세 이상인 자는 노친(老親)의 소재지에서 복역하도록 정하였다.
또한, 남형(濫刑)을 금할 것, 주인을 살해한 노비는 반드시 관에 고해 시행하게 할 것, 도류(徒流) 죄인의 수속금(收贖金)이 과중하므로 빈민에게는 감면하도록 할 것 등을 정했으며, 옥도(獄圖)를 중외(中外)에 반포하였다. 여러 차례 옥내(獄內)의 위생과 난방을 철저히 관리해 병들어 사망하는 일이 없도록 신칙하였다.
세종 21년에는 양옥(凉獄)·온옥(溫獄)·남옥(男獄)·여옥(女獄)에 관한 구체적인 조옥도(造獄圖)를 각 도에 반포했고, 세종 30년에는 옥수(獄囚)들의 더위와 추위를 막아주고 위생을 유지하기 위한 법을 유시(諭示)하기도 하였다.
세종은 형정에 신형(愼刑)·흠휼정책을 썼으나 절도범에 관해서는 자자(刺字)·단근형(斷筋刑)을 정하였다. 그리고 절도3범은 교형(絞刑)에 처하는 등 사회기강을 확립하기 위한 형벌을 강화하기도 하였다. 또, 공법(貢法)을 제정함으로써 조선의 전세제도(田稅制度) 확립에도 업적을 남겼다.
종래의 세법이었던 답험손실법은 관리의 부정으로 인해 농민에게 주는 폐해가 막심했기 때문에 세종 12년에 이 법을 전폐하고 1결당 10두를 징수한다는 시안을 내놓고 문무백관에서 촌민에 이르는 약 17만 명의 여론을 조사했으나 결론을 얻지 못하였다.
세종 18년에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를 설치해 집현전 학자들도 이 연구에 참여하게 하는 등 연구와 시험을 거듭해 세종 26년에 공법을 확정하였다. 이 공법의 내용은 전분육등법(田分六等法)·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결부법(結負法)의 종합에 의한 것이며 조선시대 세법의 기본이 되었다.
한편, 국토의 개척과 확장도 세종의 업적으로 빼놓을 수 없다. 두만강 방면에는 김종서(金宗瑞)를 보내서 육진을 개척하게 하였다. 그리고 압록강 방면에는 사군을 설치해 두만강과 압록강 이남을 영토로 편입하는 대업을 이루었다.
이와 같은 사업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세종이 문치(文治)만을 힘쓰지 않고 군사훈련, 화기의 제조·개발, 성진(城鎭)의 수축, 병선의 개량, 병서의 간행 등 국방책에도 힘을 기울인 결과인 것이다. 동쪽의 일본에 관해서는 강경책과 회유책을 함께 썼다.
세종 1년에는 이종무(李從茂) 등에게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하게 하는 강경책을 쓰기도 하였다. 그런 한편으로, 세종 8년에 삼포(三浦)를 개항하고, 세종 25년에는 계해약조를 맺어 이들을 회유하기도 하였다.
유교정치를 표방한 조선은 개국 초부터 억불책을 써왔고, 태종대에는 더욱 강화하였다. 세종도 불교에 대한 시책은 선대의 것을 따랐다. 왕실 중심의 기우(祈雨)·구병(救病)·명복(冥福) 등을 위한 불사(佛事)는 세종대에도 계속 이루어졌다.
세종은 유신(儒臣)들의 극단적인 불교전폐론에도 불구하고 조종상전(祖宗相傳)의 불교를 급히 없앨 수는 없다는 태도를 가졌다. 그러나 불교의 세속권을 재정리할 필요를 느껴 세종 1년에는 사사노비(寺社奴婢)를 정리해 국가에 귀속시켰다.
세종 6년에는 불교의 종파를 선교(禪敎) 양종으로 병합했으며, 사사(寺社)·사사전·상주승(常住僧)의 액수를 재정리하였다. 즉, 선교 양종에 각 18사(寺)합 36사를 본사로 인정하고, 사원전은 7,760결(結), 상주승 3,600인으로 삭감·정리하였다.
법석송경(法席誦經)과 도성(都城) 안에서의 경행(經行)도 파했고, 궐내의 연등행사도 없앴다. 그리고 여항(閭巷)에서의 연등도 승사(僧舍) 이외에서는 일체 금하였다. 이처럼 세종의 불교에 대한 시책은 불교의 세속권의 정리·약화와 불교행사의 제한으로 나타났으나 왕실과 세종 개인적인 면에서는 반드시 그렇지 못하였다.
세종 14년에 효령대군이 한강에서 7일간의 수륙재(水陸齋)를 행하는 것을 막지 않았고, 세종 17년부터 24년까지는 흥천사(興天寺)의 사리각(舍利閣)·석탑(石塔)의 중수, 안거회(安居會)·경찬회(慶讚會)의 설행(設行)을 둘러싸고 유신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를 강행하였다.
또, 세종 28년에 왕비 소헌왕후가 죽자 왕은 유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불경(佛經)의 금서(金書)와 전경법회(轉經法會)를 강행하였다. 그리고 세종 30년에는 모든 신하의 반대를 물리치고 내불당(內佛堂)을 세웠다.
세종의 불교에 대한 태도는 말년에 오면서 크게 변하는데, 이는 세종 26년에 광평대군(廣平大君), 그 이듬해에 평원대군(平原大君), 세종 28년에 왕후를 연이어 잃게 됨에 따라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입은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왕 자신의 건강도 악화된 것도 그가 불교로 기우는 데 크게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결과 세종 말년에 오면 세종과 유신간에 불교를 둘러싸고 격렬한 대립과 논란이 계속되었다. 이와 같은 현상이 발생한 것은 개국 초부터 국가의 기본시책이 숭유억불이었으나, 유교는 정치이념·학문·철학·윤리적인 면의 욕구를 채워줄 뿐, 종교적인 욕구가 충족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풀이된다.
이러한 유불(儒佛)의 갈등 가운데에서도 세종대는 유교정치·유교사회의 기반이 다져진 시대였다. 이 밖에도 금속화폐인 조선통보의 주조, 언문청(정음청)을 중심으로 한 불서언해(佛書諺解) 사업 등을 폈고, 단군사당을 따로 세워 봉사하게 하고 신라·고구려·백제의 시조묘를 사전(祀典)에 올려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또한, 종래 춘추관·충주의 두 사고(史庫)였던 것을 성주·전주 두 사고를 추가 설치하게 하였다. 그 덕분에 임란중 전주사고본이 전화를 면하고 오늘날 조선 전기의 실록이 전해질 수 있게 한 사실 등도 기억해야 될 일이다.
세종대가 우리 민족의 역사상 빛나는 시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정치적 안정 기반 위에 그를 보필한 훌륭한 신하와 학자가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들의 보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세종의 사람됨이 그 바탕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유교와 유교정치에 대한 소양, 넓고 깊은 학문적 성취, 역사와 문화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판단력, 중국문화에 경도(傾倒)되지 않은 주체성과 독창성, 의지를 관철하는 신념·고집, 노비에게까지 미칠 수 있었던 인정 등 세종 개인의 사람됨이 당시의 정치적·사회적·문화적·인적 모든 여건과 조화됨으로써 빛나는 민족문화를 건설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시호는 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고, 묘호는 세종(世宗)이며, 능호는 영릉으로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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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종실록(世宗實錄)』
  • 『선원계보(璿源系譜)』
  • 『국조보감(國朝寶鑑)』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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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음청시말(正音廳始末)」(김동욱, 『인문사회과학』 5, 서울대논문집,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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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악」(이혜구, 『한국사』11, 국사편찬위원회, 1974)
  • 「조선초기의정부연구」상·하(한충희, 『한국사연구』 31·32, 1980·1981)
  • 「세종조 정치지배층의 대민의식과 대민정치」(최승희, 『진단학보』 76, 1993)
  • 「세종조의 왕권과 국정운영체제」(최승희, 『한국사연구』 87, 1994)
 
박연
[간략정보]
  • 한자
  • 분야
  • 유형
  • 시대
  • 성격
  • 출신지
  • 성별
  • 생년
  • 몰년
  • 대표관직(경력)
  • 집필자

난계유고 / 박연
 
1378(우왕 4)∼1458(세조 4). 조선 전기 세종 때의 음악이론가.
초명은 연(然). 자는 탄부(坦夫), 호는 난계(蘭溪)이다. 충청북도 영동(永同)에서 태어나 81세로 고향의 고당리(高塘里)에서 죽었다.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맏아들 밀성대군(密城大君)을 시조로 하는 밀양박씨(密陽朴氏)로서, 중시조는 고려조의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였던 언인(彦仁)이고, 할아버지 시용(時庸)은 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이었으며, 아버지 천석(天錫)은 이조판서를 지냈다.
어머니는 경주 김씨로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 김오(金珸)의 딸이었으며, 부인은 정경부인 여산 송씨(礪山宋氏)로 판서를 지낸 송빈(宋贇)의 딸이었다. 자녀는 3남4녀를 두었는데 맏아들 맹우(孟愚)는 현령을 지냈고, 둘째아들 중우(仲愚)는 군수를 지냈으며, 막내아들 계우(季愚)는 박팽년 등 사육신들의 단종 복위사건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했다.
막내아들의 행적으로 말미암아 박연도 화를 입을 뻔 하였으나 세 임금에 걸쳐서 봉직한 공으로 연좌의 화를 면했다. 1405년(태종 5)에 생원, 1411년 진사에 등과했으며 그 뒤 집현전교리,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 세자시강원문학, 봉상판관 겸 악학별좌(奉常判官兼樂學別坐)·관습도감사(慣習都監使)·공조참의(工曹參議)·중추원사(中樞院使)·보문각제조(寶文閣提調)·예문관대제학 등을 역임했다.
세종을 도와서 음악을 정비하는 데 크게 공헌했으며, 특히 율관제작을 통해 편경을 제작하여 조선시대 초기의 음악을 완비하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세종 때에 어느 정도 음악이 정비되었던 이유는 위로 임금의 뜻이 확고하고 아래로는 박연같이 악리에 밝은 사람이 있었으며, 더욱이 해주(海州)에서는 거서(秬黍:검은 기장)가 나고 남양(南陽)에서는 경돌(경쇠를 만드는 데 쓰이는 돌)이 나는 등 시운(時運)이 들어맞았다고 표현하는 글들이 있듯이, 박연의 음악적 공헌은 시대 상황과도 적지않게 연결됨을 알 수 있다.
순(舜)임금 시대의 유명한 음률가인 기(夔)에 비견되기도 하는 박연은 편경의 음정을 맞출 정확한 율관(律管)을 제작하기 위하여 수삼 차에 걸쳐서 시험제작을 했는가 하면, 흐트러진 악제를 바로잡기 위하여 수십 회에 걸친 상소문을 올리기도 했다.
정확한 율관을 제작하자는 상소문‘請制律管疏’을 위시해서 제향의 아악을 바로잡자는 글‘請正祀享雅樂疏’, 축의 제도를 개정하자는 주장 ‘請改正柷制疏’, 악현의 제도를 옛 법대로 고치자는 주장 ‘請樂懸復古制疏’, 그리고 악보를 간행하자는 상소문 ‘請印行樂譜疏’에 이르기까지 무려 39편의 상소문이 ≪난계유고≫에 실려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참고문헌]
  • 『난계유고(蘭溪遺藁)』
  • 『세종조음악연구』(장사훈,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2)
 
[관련시청각]

 

국조보감 제6권
확대원래대로축소
 세종조 2
15년(계축, 1433)


○ 조제(朝祭)에 처음으로 아악(雅樂)을 사용하였다. 처음에 고려 예종(睿宗) 때 송 나라 휘종(徽宗)이 제악(祭樂)의 종(鐘)ㆍ경(磬) 각각 1가(架)와 금(琴)ㆍ슬(瑟)ㆍ생(笙)ㆍ우(竽)ㆍ소(簫)ㆍ관(管) 등의 악기를 각각 2부씩 하사하였는데, 홍건적의 난리에 거의 다 없어지고 늙은 악공이 종과 경 두 악기를 연못 속에 던져 놓은 것만 보존되었다.
태조 고황제와 태종 문황제도 다 악기를 하사하였으나 소리가 율격에 맞지 않았다. 제악(祭樂)은 팔음(八音)을 구비하지 못하여 제사를 지낼 때에는 경(磬)은 와경(瓦磬)을 쓰고 종(鐘)도 잡다하게 매달아 쓴데다 그 숫자도 구비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을사년 가을에 검은 기장이 해주(海州)에서 나오고 병오년 봄에 경(磬)을 만들 수 있는 돌이 남양(南陽)에서 생산되니, 상이 옛것을 바꾸어 새로 만들 뜻을 갖게 되었다. 이에 박연(朴堧)에게 명하여 편경(編磬)을 만들게 하니, 박연이 해주의 검은 기장을 가져다가 그 푼과 치수를 쌓아가지고 고설(古說)대로 황종(黃鐘) 1관(管)을 만들어 불어보니 중국의 황종보다도 조금 높은 소리가 났다. 이에 전현(前賢)의 의논을 참고해 보니, “토질에는 비옥하고 척박한 차이가 있고 기장에는 크고 작은 차이가 있어서 소리의 높낮이가 시대마다 같지 않다.” 하고, 진양(陳暘)도 “대를 많이 잘라서 기운을 살피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지역이 동쪽에 치우쳐 있어서 중국의 풍토와는 아주 다르기 때문에 기운을 살피는 것으로도 해결하기 어려웠다. 이에 해주의 검은 기장알 모양으로 밀랍을 녹여 조금 크게 만들어서 푼을 쌓아 관(管)을 만들었다. 한 알을 1푼으로 삼고 열 알을 쌓아 1치[寸]로 하는 법을 삼았다. 9치를 황종(黃鐘)의 길이로 삼은 다음, 3푼을 더하기도 하고 빼기도 하여 12율(律)을 완성하였다. 한 달이 지나서 신경(新磬) 2가(架)를 제작하여 올리면서 아뢰기를,
“지금 만든 경(磬)은, 모양은 한결같이 중국 것과 같게 하였습니다만 소리의 경우는 문제가 있습니다. 우선 중국의 경(磬)이 유빈(蕤賓)은 그 소리가 도리어 임종(林鐘)보다 높고, 이칙(夷則)은 남려(南呂)와 같으며, 응종(應鐘)은 무역(無射)보다 낮아서, 당연히 높아야 할 것은 도리어 낮고 당연히 낮아야 할 것은 도리어 높으니, 아마도 한 시대에 제작된 것이 아닌 듯합니다. 만약 이것대로 제작을 하게 되면 결코 음률에 맞을 이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삼가 중국의 황종(黃鐘)의 소리에 의거하여 황종의 관을 만든 다음, 그것을 기준으로 더하기도 하고 빼기도 하여 12율관(律管)을 만들어 불어서 율을 맞춘 다음 이것으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신경(新磬) 2가와 명 나라에서 하사한 경(磬) 1가, 소(簫)ㆍ관(管)ㆍ방향(方響) 등의 악기를 새로 제작한 율관과 협주해 보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의 경은 과연 음이 맞지 않고 지금 새로 만든 경이 제대로 되어서 소리가 맑고 아름답다. 율을 제정하고 음을 바로잡은 것이 뜻밖에 잘되어서 나는 매우 기쁘다. 단지 이칙만이 음이 맞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하니, 박연이 즉시 살펴보고 아뢰기를,
“한계를 나타내는 먹줄이 아직 있는 것으로 보아 다 갈아내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하고, 즉시 갈아서 먹줄을 다 없애고 나니, 소리가 제대로 났다. 경(磬)이 완성되고 나자, 박연에게 명하여 악기 제작하는 일을 전적으로 담당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조제(朝祭)의 음악이 처음으로 완비되었다.
○ 태조(太祖)와 태종(太宗)의 위판(位版)을 문소전(文昭殿)에 봉안하고 친히 제사를 지냈다. 하교하기를,
“조상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은 예경(禮經)의 보편적인 것이고, 죽은 부모 섬기기를 생전과 같이 하는 것은 효성의 지극한 것이다. 그러므로 역대의 제왕들이 이미 종묘(宗廟)를 건립하고 태고(太古)의 예를 숭상하는 것은 신성시하기 위한 것이며, 또 원묘(原廟)를 설립하여 평소처럼 섬기는 것은 친근하기 위한 것이다.
나는 조종이 물려주신 법을 이어받아 끝없는 복을 누리고 있으므로 선대의 사업을 계승 발전하기에 게을리하지 않고 있으며 추모하는 생각도 그지없다. 매번 사시(四時)의 일로 향천(饗薦)하는 예를 엄숙하게 잘 거행해서 효성을 펼치도록 하겠다. 돌이켜보건대, 원묘를 설치하는 것은 역대마다 같지 않았다. 송 나라가 제관(諸觀)의 신어(神御)를 모두 경령궁(景靈宮)에 봉안한 것이 정리(情理)와 예의(禮儀)에 합당하다.
지금 우리 태조와 태종은 원묘(原廟)가 각기 다르니, 옛 제도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염려되는 것은 후세의 자손들이 제각기 사당을 세우게 되면 백세 후에 신우(神宇)가 한없이 많아져서 계승 발전해 나가기가 어렵지 않겠는가 하는 점이다.
이러한 취지에서 예관에게 명하여 고금의 궁성(宮城) 안을 참작한 다음, 침전(寢殿)을 개량해서 문소전(文昭殿)이라고 이름을 하고, 후대의 봉사(奉祀)는 오실(五室)을 지나지 않게 하였다. 대체로 신어(神御)에 관한 물품과 예악(禮樂)에 관한 도구를 일체 새 것으로 마련하여 한 왕대의 규정을 창설하여 만세의 법전을 제정하였다. 때마침 대례가 이미 이루어졌으니 마땅히 백성들도 함께 경축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 파저강(婆豬江) 야인 이만주(李滿住) 등이 변방에 침입하여 군민(軍民)을 살해하고 재물을 빼앗아 갔다. 상이 최윤덕(崔潤德)을 파견하여 제장(諸將)을 거느리고 가서 정벌을 하게 하였다. 최윤덕이 토벌하고 나서 첩서(捷書)를 올리니, 신하들이 하례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우리 태조는 천운을 받아 개국하면서부터 국내를 정돈하고 외적을 물리치니 당시의 야인들이 위엄을 두려워하고 덕을 사모하였다. 태종의 위엄과 덕은 섬오랑캐들에게 널리 입혀졌고 산융(山戎)도 모두 신하가 되어 복종하였다. 나는 부덕하지만 조종의 모훈(謨訓)을 받들어서 야인들을 불쌍하게 여기고 잘 돌보아 주었다. 그런데 근자에 이만주 등이 우리 강계(江界)와 여연(閭延)에 침입하여 군민을 살해하고 축산을 빼앗아 갔다. 은혜를 저버리고 나쁜 짓을 한 행위를 용서할 수가 없어서 장수에게 명하여 죄를 토벌하게 하였더니 길을 나누어 함께 가서 적의 소굴을 소탕하여 모두 평정하였다.
생각건대, 군사는 비록 난리를 구제하고 포악한 적을 토벌하는 도구라 하더라도 봄 여름은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대중을 충돌시키는 때가 아니다. 그러나 한 번 출동하면 오랫동안 안정을 얻을 수 있는 일이기에 나는 부득이 포고하는 것이니, 신하들은 나의 뜻을 잘 알도록 하라.”
하였다.
○ 하교하기를,
“듣건대, 술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실컷 마시자는 것이 아니라 신명을 받들고, 손님을 접대하고, 나이 많은 사람을 봉양하기 위한 것이라 했다. 그러므로 제사로 인하여 마실 때에는 헌수(獻酬)하는 것으로 절목을 삼고, 활쏘기로 인하여 마실 때에는 읍양(揖讓)하는 것으로 예를 삼는다. 따라서 향음례(鄕飮禮)는 친목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며, 양로례(養老禮)는 나이 많고 덕망이 높은 사람을 존경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손님과 주인이 절을 100번 하는 동안 술은 세 번 돌린다.’ 하였고, 또 ‘온종일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선왕이 술에 대한 예절을 제정하여 술로 인한 화란을 대비한 것이 완벽하다 하겠다.
후세로 오면서부터 풍습이 그전 같지 않고, 마구 술을 마시는 것만 힘쓰기 때문에 금주(禁酒)하는 법을 아무리 엄격하게 하여도 결국 그로 인하여 발생하는 화란을 방지하지 못하였으니 매우 한탄스럽다. 대체로 술로 인한 화란은 매우 크다. 어찌 다만 곡식과 재물을 허비할 뿐이겠는가. 안으로는 심지(心志)를 어지럽히고 밖으로는 위의(威儀)를 잃게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부모의 봉양을 폐기하게 되고 또 남녀의 관계도 문란하게 한다. 크게는 나라와 가정을 망치고, 작게는 자기 본성과 인생을 망치고 만다.
윤리를 더럽히고 풍습을 어지럽게 하는 것을 낱낱이 거론할 수는 없고 우선 한두 가지 법으로 삼고 경계로 삼을 만한 것을 말하기로 하겠다.
상 나라 주왕(紂王)과 주 나라 여왕(厲王)은 이것 때문에 나라를 망쳤고, 동진(東晉)의 풍습은 이것으로 남의 나라를 망쳤다. 정(鄭) 나라 대부 백유(伯有)는 집에다 굴을 파놓고 밤이면 술을 마시다가 결국 자석(子晳)이 놓은 불에 타서 죽었으며, 전한(前漢)의 교위(校尉) 진준(陳遵)은 매번 손님과 크게 술자리를 벌여 놓고 마시면서 문을 걸어 놓고 손님을 붙들더니 흉노(凶奴)에게 사신으로 가서 술에 취하여 살해당하였으며, 후한(後漢) 사예교위(司隷校尉) 정충(丁沖)은 자주 장수들을 찾아다니면서 술을 마시다가 창자가 녹아서 죽었으며, 진(晉) 상서 우복야(尙書右僕射) 주의(周顗)는 한 섬의 술을 마시는데 우연히 친구를 만나자 기뻐서 함께 잔뜩 마시고 취했다가 깨어보니 손님은 이미 늑골이 썩어서 죽었다. 이는 진실로 경계해야 할 일이다.
주 무왕(周武王)은 주고(酒誥)라는 글을 지어서 상(商) 나라 백성을 훈계하였고, 위 무공(衛武公)은 빈지초연(賓之初筵)이라는 시(詩)를 지어서 스스로 경책을 하였으며, 진 원제(晉元帝)는 술 때문에 일을 폐기하고 있었는데 왕도(王導)가 심각하게 말을 하자, 원제가 술잔에 부은 술을 쏟게 하고 드디어 술을 끊었으며, 원 태종(元太宗)은 날마다 대신들과 술을 마셨는데 야율초재(耶律楚材)가 술통의 쇠로 만든 주둥이를 가져다가 올리면서 말하기를, ‘이런 쇠도 술에 닿으면 이렇게 녹아나는데 더구나 사람의 오장(五臟)이야 손상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태종이 깨닫고 좌우 신하들에게 하루에 술을 석 잔만 올리라고 칙령을 내렸다.
진(晉) 나라 도간(陶侃)은 매번 술을 마실 때면 양을 정해 놓고 마셨다. 누가 조금 더 마시기를 권하면 도간은 한동안 슬픈 표정을 짓고 있다가 말하기를, ‘젊어서 술을 마시고 실수를 하여 돌아가신 어버이와 약속을 하였기 때문에 감히 정량을 넘길 수가 없다.’ 하였고, 유곤(庾袞)의 아비가 생전에 항상 술을 조심하라고 유곤을 경계하였다. 그 뒤에 매번 취하면 문득 자책을 하기를, ‘내가 선친의 훈계를 폐기하고서 어찌 남을 가르칠 수 있겠는가.’ 하고, 이어 어버이 묘 앞에서 스스로 20대의 매를 맞았다. 이는 참으로 법으로 삼을 만한 일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일을 가지고 말하면, 옛날 신라(新羅)가 포석정(鮑石亭)에서 패배한 것과 백제(百濟)가 낙화암(落花巖)에서 멸망한 것도 모두 술 때문이었으며, 고려 말기에는 상하가 서로 본받아가며 술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결국 패망에 이르고 말았다. 이 역시 오래지 않은 거울로 삼아야 할 일인데 어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생각건대, 우리 태조께서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태종은 이를 계승하여 정치와 교화를 잘 펴서 그 법을 만세에 전하는 한편, 많은 사람이 모여 술 마시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어 해묵은 구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교화를 펼쳤다. 내가 부덕하지만 외람하게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리고 밤낮없이 염려한 것은 정치를 잘해 보기 위한 것으로, 옛날의 잘못된 일을 거울로 삼고 조종이 제정해 놓은 법을 본보기로 삼아서 예(禮)를 가지고 제시하고 법으로 규제를 가하였다. 그렇다면 나의 마음 씀씀이가 지극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너희 신민들은 술 때문에 자신을 망치는 자가 더러더러 있으니 이는 고려 말기의 몹쓸 기풍이 아직도 근절되지 않은 것이다. 이 점을 나는 매우 민망하게 여긴다.
아, 술이 재앙을 빚어내는 것이 이렇게 참혹한데 오히려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도대체 무슨 마음을 먹고 있는 것인가. 비록 국가를 위한 염려는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유독 자신의 생명마저 돌아보지 않는다는 말인가. 식견이 있는 조정의 신하들이 오히려 이 모양인데 시골의 하찮은 백성들이야 무슨 짓을 못 하겠는가. 따지고 보면 옥송(獄訟)이 발생하는 것도 대부분 여기에서 기인된 것으로 처음에 삼가지 않으면 결국에 가서 그 폐단은 정말 두려운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옛 일을 상고하여 오늘에 증명을 하면서 반복하여 훈계를 하는 이유인 것이다.
아, 너희 중외의 대소 신민들아! 나의 간절한 마음을 체득하여 옛사람의 잘잘못을 보아서 오늘날의 경계로 삼고, 술마시기를 좋아하여 일을 그르치지 말도록 할 것이며, 술을 지나치게 마셔서 병에 걸리지 말도록 하라. 그리고 각각 너의 행동을 주의하여 술을 대놓고 마시지 말라는 교훈에 따라서 술마시는 것을 억제한다면 아마도 새로운 기풍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 황희(黃喜), 맹사성(孟思誠), 권진(權軫)을 불러 영북(寧北)과 경원(慶源) 두 진(鎭)을 옮기는 문제를 논의하게 하고, 병조에 하교하기를,
“예로부터 제왕이 자기 왕조가 처음으로 일어난 지역을 소중하게 여겨서 근본으로 삼지 않는 경우가 없다. 우리나라 북쪽의 경계인 두만강(豆滿江)은 하늘과 땅이 마련해 준 것으로 태조가 처음으로 경원부를 공주(孔州)에 설치한 것과 태종이 경원부를 소다로(蘇多老)로 옮긴 것이 모두 왕조의 기반을 다진 땅을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인년에 이르러 조무라기 도적들이 들어오자, 수신(守臣)이 막아내지 못하고 부거(富居)로 물러나고 말았다.
태종이 일찍이 명하기를, ‘만약 호인(胡人)이 와서 살거든 쫓아버리고 행여 적들의 소굴이 되게 하지 말라.’고 한 일이 있다. 지금 소다로와 공주는 풀이 무성하게 자랐고 오랑캐들이 멋대로 짓밟고 다니면서 사냥터로 삼고 있으니, 매번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가슴이 아플 뿐이다.
그리고 알목하(斡木河)는 바로 두만강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토지가 비옥하여 경작이나 목축도 적당하며 요충지인 만큼 거진(巨鎭)을 설치하여 북문을 방어하기에 적합하다.
태조 당시에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가 귀순해 와서 변방의 울타리가 되겠다고 하자, 태조가 허락해 주었다. 지금 그들이 멸망하고 나니, 변방이 텅 비고 말았다. 그러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이에 선왕의 뜻을 계승하여 다시 경원부를 소다로로 환원시키고 영북진을 알목하로 옮긴 다음, 백성들을 모집하여 그 곳에 살게 함으로써 삼가 조종이 지켜온 천연적으로 험한 국경을 잘 지키고 변방 백성들이 번갈아 가면서 지키는 노고를 덜어주고자 하니, 큰 일을 좋아하고 공 세우기를 좋아하여 변방의 토지를 개척하는 것과는 비할 바가 아니다.”

 

 朴堧


朴堧宻陽人天錫子辛禑戊午生字坦夫蘭溪初名本永同儒生也太宗辛卯以生員登科歴藝提官止資憲中樞院使
世宗朝名臣孝行出天其居廬也山

▼원문보기56b  처음으로
君來衛坐苫之側雉免馴遊堦庭之間事聞旌閭善暁音律世宗制楽堧實主之其子與於癸酉之難堧亦固是罷還致仕入耆社謚文獻永同有書院從弟興生字敬夫菊堂金自粹門人自粹称其英敏十三進士十七生員[주:國初科擧與今異制故也]有擧問操行官止縣令善山之朴即
其苗裔也享永同花巖院後孫嗣宗字公繼號挹淸堂以學行醇正薦拜齋郞一謝而歸誠孝出天儀状動人

▼원문보기57a  처음으로
好善疾惡獎進後學享花巖院嗣宗從子廷老字汝獻懶學子金長生趙憲遊治禮學有治行隔壁聼人念書
記之盡卷不錯一字一閱之後終身不忘



기사메타
敬夫菊堂金自粹金長生懶學蘭溪文獻朴堧善山世宗辛禑汝獻永同天錫坦夫太宗縣令宻陽
 (世宗朝)朴堧


坦夫初名蘭溪密陽人三司左使天錫子以孝行旌閭太宗辛卯生員文科精於律呂世宗乙巳秋海州生秬黍一粒一分九寸爲黃鍾之長三分損益成十二律丙午春磬石產於南陽上慨然有革古更新之志乃命堧造編磬進之上曰新磬聲音淸美但夷則一枚其聲不諧何也堧審視曰限墨尙在未盡磨也卽磨之墨盡而聲乃諧磬成之後命

▼원문보기30a  처음으로
專掌之自此朝祭雅樂始備累官至大提學諡文獻子季愚世宗朝登第選入集賢殿世祖靖難以季愚黨附安平大君瑢被殺堧當坐命從自願安置外方肅宗朝贈吏曹參判配 食莊陵忠臣壇[주:莊陵志]
 

 

 

국조보감 제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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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종조
즉위년(임신, 1452)


○ 문종대왕 2년 임신년 5월 병오(14일)에 문종대왕이 경복궁 천추전(千秋殿)에서 승하하니, 상이 근정문(勤政門)에서 즉위하고 중외에 교서를 반포하였다.
○ 상(上)은 문종의 원자(元子)로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權氏)가 낳았다. 세종 무진년에 왕세손으로 책봉되었다가 문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이때에 즉위하니, 당시의 나이가 12세였다.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남지(南智), 우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이 고명(顧命)을 받아 보좌하고, 집현전(集賢殿) 학사(學士) 성삼문(成三問)ㆍ박팽년(朴彭年)ㆍ하위지(河緯地)ㆍ신숙주(申叔舟)ㆍ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 등은 세종의 부탁을 받아 좌우에서 도왔다.
○ 6월. 사헌부가 아뢰기를,
“금년에 든 흉년이 병진년보다 심합니다. 여러 도에 조신(朝臣)을 파견하여 편의에 따라 창고를 열어 구제해 주고 올 가을에 도로 거두어 들여 의창(義倉)을 충당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 경연관에게 명하여 《가례(家禮)》 상제편(喪制篇)을 진강하게 하였다.
○ 7월, 비가 흡족하게 내리지 않은 것 때문에 도랑을 수리하고, 원옥(冤獄)을 심리하고, 궁핍한 자를 보살펴주고, 백골(白骨)을 묻어주게 하였다. 이는 의정부의 말을 따른 것이다.
○ 평안도에 가뭄이 크게 들었다. 향축(香祝)을 내려주면서 관찰사와 수령에게 명하여 악독(嶽瀆)과 산천(山川)에 기우제를 지내게 하였는데, 이는 예조의 계사를 따른 것이다.
○ 9월, 문종대왕을 현릉(顯陵)에 장사지냈다.
○ 좌찬성 정분(鄭苯)이 해서(海西) 지역에 흉년이 들었다는 이유로 극성(棘城)의 부역과 인정(人丁)을 감해주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올 가을에 사행(使行)이 서로에 줄을 잇게 되어 접대가 만만찮으니 그 역사를 정지하도록 하고, 충청도 지방의 백성들도 능역(陵役)으로 고초를 겪고 있으니, 서산(瑞山)에 성 쌓는 문제를 모두 중지하라.”
하였다.
○ 횡성현(橫城縣)의 강무장(講武場)을 혁파한 것은, 짐승들이 곡식을 망치기 때문이었다.
○ 10월. 박팽년을 발탁하여 부제학으로 삼았다. 상이, 박팽년의 학문이 정밀하고 심오하여 매번 경연에서 진강을 할 때에 발명한 부분이 많았다는 이유로 특별히 통정(通政)의 품계를 가자하고, 이어서 이 명을 내린 것이다.
○ 중추원사 박연(朴堧)에게 자헌(資憲)의 품계를 가자하였다. 박연은 음률(音律)에 정통하여 세종의 인정을 받아 종률(鐘律)을 제작하였다. 한 시대의 음악을 분명히 보고 알 수 있게 한 것은 다 그의 노력 덕분이었기에, 이때에 와서 특명으로 품계를 더해준 것이다.
○ 김반(金泮)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성균 생원 곽기(郭琦) 등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전 대사성 김반은 유생의 스승이 되어 20여 년 동안 교육에 전념하였습니다. 지금 비록 늙기는 하였으나 다시 함장(函丈)의 자리에 있게 하여 선비들의 소망을 들어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다시 명하여 문묘조(文廟朝) 윤상(尹祥)의 예에 의거하여 쌀 20곡(斛)을 하사하게 하였다. 당시에 김반이 가난해서 끼니를 이어가지 못하자, 문인(門人) 신숙주(申叔舟)와 이석형(李石亨) 등이 항상 양식과 술을 보내 드렸다.
○ 전조의 사절신(死節臣)인 정몽주(鄭夢周)를 왕씨(王氏)의 사당에 배식(配食)하였다.

 

 

 

 
國朝雅樂自朴堧以後士族無稱者


國朝雅樂自朴堧以後士族無稱者成化年中有秋
始顯正中百源國聞起而一洗舊習教坊推四人
為冠余未甞曉音律日與四子酣暢聞佮人尙論
熟矣其論曰有秋心平而手下國聞手妙而心酷
百源雄渾而手雜正中調髙而氣偏余惟正中
松都彈琴時親見士人妓女皆泣下聖居山僧不
涕出者無幾還都之日乘馬蹰躇行人立聼伯牙
千載之後非此人為誰乎氣偏之語無乃過當百
源有杖甞備樂器日夜肆習正中家無風物行行
到處偶執樂器而音律恂如也余甞服其手藝甚

▼원문보기16a  처음으로
髙也然知音者或譏正中琴才類伯夷而時中不
及百源豈非濟世經畧之才藴而䢜之於小枝故
發之偏也僕不堪涕泗嗚呼其不展也[주:堧字垣夫號蘭溪蜜
陽人官知樞
正中貞恩宗室秀泉副正號月湖太宗第八男益寧君昭剛么移之庶子興朱溪
同時為德先內而後外為詩先格而後辭為學先理後文雅素如儒生嘉繟琴孫咸川副守億載善
琴崇川都正澺齡善遂咸川之子曰元翼]




기사메타
인명: 이총(李摠)[~1504]아악을 잘하여 교방(敎坊)에서 으뜸으로 삼음UCI 연결
박연(朴堧)[1378~1458]아악에 유명하였음UCI 연결
이정은(李貞恩)아악을 잘하여 교방(敎坊)에서 으뜸으로 삼았으며, 송도에 유람가서 거문고를 탈 때 듣는 이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UCI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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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江冷話

國朝雅樂自朴堧以後士族無稱者成化年中有秋始顯正中百源國聞起而一洗舊習教坊推四人為冠余未甞曉音律日與四子酣暢聞佮人尙論
熟矣其論曰有秋心平而手下國聞手妙而心酷百源雄渾而手雜正中調髙而氣偏余惟正中松都彈琴時親見士人妓女皆泣下聖居山僧不涕出者無幾還都之日乘馬蹰躇行人立聼伯牙
千載之後非此人為誰乎氣偏之語無乃過當百源有杖甞備樂器日夜肆習正中家無風物行行到處偶執樂器而音律恂如也余甞服其手藝甚髙也然知音者或譏正中琴才類伯夷而時中不
百源豈非濟世經畧之才藴而䢜之於小枝故發之偏也僕不堪涕泗嗚呼其不展也堧字垣夫蘭溪蜜陽人官知樞正中貞恩宗室秀泉副正月湖太宗第八男益寧君昭剛么移之庶子興朱溪
同時為德先內而後外為詩先格而後辭為學先理後文雅素如儒生嘉繟琴孫咸川副守億載善琴崇川都正澺齡善遂咸川之子曰元翼

kh2_je_a_vsu_20308_011 011 20308_011_0042 先君晩年友愛崔先生國華 -->

 

 

 

 

 
국조보감 제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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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종조
1년(계유, 1453)

○ 4월. 경회루에서 유생을 직접 시험보였다. 사서(四書)는 추첨으로 하고, 오경(五經)은 자원에 따라 각각 한 책씩을 강하게 하되, 약(略)과 통(通) 이상을 맞은 자는 책시(策試)에 응시하게 하였다.
○ 형조에 하교하기를,
“지금은 농사철인데 비가 충분히 내리지 않고 있으니, 옥사를 지체하여 화기를 손상시키고 재앙을 불러들인 것이 아닌가 염려된다. 유배에 해당하는 죄 이하의 죄수 및 중죄인의 증인에 연루된 자들을 아울러 모두 보방(保放)하도록 하고, 또 파발을 보내 제도(諸道)에 이문(移文)하게 하라.”
하였다.
○ 유구국(琉球國)의 왕이 사신을 보내와 토산물을 진헌하였다.
○ 온성(穩城)과 함흥(咸興)의 두 고을에 성을 쌓고, 나난(羅暖)과 무산(茂山) 두 곳에 보(堡)를 설치하였다.
○ 좌의정 김종서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
○악학제조(樂學提調) 박연(朴堧)이 《세종어제악보(世宗御製樂譜)》를 인쇄 반포하여 널리 전하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가하다고 하였다.
○ 상이 경연에 거둥하였다. 지사(知事) 허후(許詡)가 상주하기를,
“옛날 주공(周公)이 백금(伯禽)에게 이르기를, ‘대신으로 하여금 써주지 않는 것 때문에 원망하는 일이 없게 하라.’ 하였는데, 이는 아마 연소하여 대신의 말을 듣지 않을까 염려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요즘 대신의 말이 비록 성상의 마음에 부합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삼대신(三大臣)과 가부를 논의한 다음에 결정하소서.”
하니, 상이 가상하게 여기고 받아들였다.
○ 7월. 상이 주강(晝講)에 임어하여 《논어》를 강하였다. “한마디 말이 나라를 흥기시키고 한마디 말이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대문에 이르자, 상이 묻기를,
“한마디 말로 어떻게 국가를 흥기시키거나 망하게 하는 지경에 이를 수 있는가?”
하니, 강관 박팽년이 대답하기를,
“한마디 말이 비록 갑자기 흥기시키거나 망하게 하지는 않지만, 흥기시키는 계기와 망하게 하는 계기는 실지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마디 말로 나라를 흥기시키는 것은 그 효과가 더디지만, 한마디 말로 나라를 망치는 것은 그 효과가 빠릅니다. 예로부터 임금이 바른말 듣기를 좋아하면, 과실이 있을 경우 반드시 고치고 언동과 정사도 모두 사리에 부합되게 할 수 있어서 국가를 흥기시키는 데에 이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말한 대로 따르고 조금도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한다면 아첨하는 자들이 날로 진출합니다. 그렇게 되면 정사의 잘못된 점과 인재 등용의 실책에 대해 알 길이 없게 되고 결국 나라를 망치는 데에 이르게 됩니다. 여기에서 국가가 흥하고 망하는 갈림길이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훌륭하다고 하였다.
○ 삼도 체찰사가 아뢰기를,
“강진현(康津縣) 계참곶(界站串), 동래현(東萊縣) 석을포(石乙浦), 남해현(南海縣) 금산곶(錦山串)은 모두 둘레가 90리나 되는데, 토지가 비옥하고 풀이 무성하여 말을 기르기에 마땅합니다. 목장을 개설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따랐다.
○ 상이, 대신 황보인과 김종서와 정분 등을 불러 묻기를,
“누가 대사헌에 적합한가?”
하니, 김종서 등이 대답하기를,
“사려가 깊고 소란스럽지 않은 자를 등용해야 하니, 박중림(朴仲林)이 적합합니다.”
하였다. 상이 그렇다고 하고, 박중림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박중림은 박팽년의 아비이다.
○ 집현전 직제학 원호(元昊)가 병을 핑계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 10월. 정난공신(靖難功臣)을 책훈하였다. 당시에 권람(權擥)과 한명회(韓明澮) 등이,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 등이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과 한편이 되어 종묘 사직을 위태롭게 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노골적으로 말하면서, 수양대군(首陽大君) - 세조대왕 - 에게 아뢰어 이들을 제거하도록 입고(入告)하게 하였다. 이때 이용, 황보인, 김종서 및 우의정 정분(鄭苯), 병조 판서 조극관(趙克寬), 이조 판서 민신(閔伸), 우찬성 이양(李穰) 등이 모두 죽었다. 드디어 책훈(策勳)을 명하였는데, 그 글의 대략에,
“숙부는 주공과 같은 훌륭한 재주를 가진데다 또 주공이 세운 큰 공을 세웠고, 과인은 성왕(成王)처럼 나이가 어린데다 또 성왕 때처럼 많은 어려움을 당하였소. 과인이, 성왕이 주공에게 책임지웠던 것으로 숙부에게 책임지우는 바이니, 숙부도 주공이 성왕을 보좌했던 것처럼 과인을 보좌하기 바라오.”
하고, 이어 수양대군으로 영의정을 삼고 군국(軍國)의 중대사를 총괄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 좌참찬 허후(許詡)를 찬출하였다. 허후는 고 영의정 허조(許稠)의 아들이다. 정난공신(靖難功臣)의 잔치에서, 허후가 홀로 소찬(素饌)을 먹으면서 말하기를, “조정의 원로(元老)가 다 죽었다. 나는 살아 있는 것만 해도 족한데 차마 고기를 먹을 수 있겠는가.”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이에 사람들의 논핵을 받고 찬출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 하위지(河緯地)를 좌사간으로, 성삼문(成三問)을 우사간으로, 이개(李塏)를 집의로, 유응부(兪應孚)를 평안도 도절제사로 삼았다.
○ 함길도 도절제사 이징옥(李澄玉)이 군사를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종성 절제사(鐘城節制使) 정종(鄭種)과 판관 정포(鄭圃)가 이징옥을 참소하여 올리니, 나머지 무리들은 문죄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 11월. 상이 경연에 거둥하였다. 검토관 양성지(梁誠之)가 주달하기를,
“평안도 장성(長城)의 역사를 비록 파하기는 하였지만 여연(閭延)ㆍ무창(茂昌)ㆍ우예(虞芮) 등의 군(郡)이 강변에 닿아 있기 때문에 남도의 군사들이 큰 재를 넘어와서 수역(戍役)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인마(人馬)가 모두 고역을 견디지 못하여 대부분 전토와 재산을 팔고 요동과 심양 등지로 도망해 간다고 합니다. 지금 이 세 고을을 포기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큰 강이 한계로 되어 있으므로 국토는 여전히 그대로 있게 됩니다. 세 고을의 수군(戍軍)을 철수하여 자성(慈城)을 경계로 함으로써 백성들을 쉬게 하여 국가의 기반을 견고하게 하소서.”
하였다. 상이 운성부원군(雲城府院君) 박종우(朴從愚)를 파견하여 형편 여부를 살피게 하였는데, 박종우 역시 양성지의 말과 같았다. 드디어 세 읍을 철수하라고 명하였다.
○ 전 집의 하위지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요즘에 발생한 변고는 역사에도 보기 드문 일입니다. 유언을 받들어 보좌하는 자나 숙부와 같은 의친(懿親)이라 하더라도 모두 국가와 고락을 함께해야 할 것인데 이런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지나간 일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인데 논의해 본들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천하의 걱정거리로는 사람이 알면서도 기탄없이 말해주지 않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알고 있는 자로 하여금 모두 말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주고 나서 그것을 임금이 직접 처리하신다면 사전에 미리 방지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어찌 걱정할 것이 있겠습니까.
새로운 정치를 시작하는 초기에 여러모로 계획을 잘 세워서 조금도 머뭇거리거나 구차하게 하는 일이 없이 하되, 안 될 것이 없다고 하거나 해로울 것이 없다고 말하지 마소서. 또 지나치게 느슨하여 기회를 잃거나 너무 서둘러서 대체를 손상하거나, 너무 지나치게 관대하여 조정의 기강을 잃거나, 지나치게 엄격하여 국맥을 손상되게 하거나, 지난날의 공로에 빠져서 후회를 남기거나 주세(主勢)가 구속을 받아서 기를 펴지 못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항상 미리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는 경계를 거듭 생각하시어 국력을 더욱 강화하고 궁실을 더욱 엄격하게 하며 권문 세가(權門勢家)를 더욱 막고 편당을 결성하는 조짐을 더욱 근절시키소서. 실시하는 모든 일을 사람들의 마음에도 부합하고 법에도 부합하게 하여 장구한 세월이 흘러도 폐단이 발생하지 않게 함으로써 거리나 시골에서 논의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강호(江湖)에서 병들어 있는 신은 저 멀리 성상을 우러러볼 뿐, 단 한 가지 계획이라도 세워서 정치에 도움을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지 밤낮으로 흐느껴 울면서 천지의 귀신을 불러 잠자코 기도하기를, ‘원하건대, 오늘날 정사를 도울 책임을 갖고 있는 자가 보전할 도리를 다하여, 성상의 체후로 하여금 날마다 강녕하게 하고 성상의 학문으로 하여금 날마다 발전하게 하여 하루속히 정무에 익숙해져서 우리나라의 수많은 백성들이 밤낮으로 우러러 기대하고 있는 소망에 부응할 수 있게 하소서. 안으로는 궁중에서부터 밖으로는 사방의 국경에 이르기까지 다 타당하게 여기면서 조금도 동요하는 일이 없게 하고, 태조ㆍ태종ㆍ세종ㆍ문종이 전해오는 대통을 영원히 반석처럼 안정되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전하께서도 총명을 개발하여 당론을 받아들이고 뜻있는 선비들의 기백을 살려서 싹트지 않은 욕심을 엄격히 막도록 하소서. 한 마음을 밝혀서 간악함을 들추어 내고 한 마음을 바르게 하여 간사함을 제어하소서. 정직한 신하를 가까이하고 아첨하는 신하를 멀리하여 어려움에 처해 있는 국가의 운명을 구제함으로써 문종황고(文宗皇考)의 소망을 위로하소서. 스스로 겸손하기만 하면서 ‘어린 내가 어찌 감히 할 수 있겠는가.’ 하셔서는 안 됩니다. 신은 가장 깊은 은혜를 입었는데도 이런 기회를 당하여 병 때문에 힘써 충성을 다하지 못합니다. 마음과 생각이 엇갈려서 무슨 말씀을 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정원에 명하여, 하위지에게 글을 보내서 병이 낫거든 올라오도록 하라고 하였다. 또 경상도 관찰사에게 하유하기를,
“상호군 하위지가 지금 선산(善山)에서 병이 났다고 하니, 경은 의원에게 약을 가지고 가서 구완토록 하고, 또 수시로 주육(酒肉)을 보내서 몸조리를 잘하게 하라.”
하였다.
○ 12월. 앞으로는 재계하는 날에 조계(朝啓)와 조참(朝參)을 중지하도록 하였다.
○ 호조에 명하여, 공신에게 전지를 하사하되 부족한 경우에는 군자전(軍資田)을 지급하게 하였다.

 

국조보감 제1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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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조조 2
5년(경진, 1460)


○ 1월. 올량합(兀良哈)의 대호군 김저비(金這比)가 아비거(阿比車)의 군사와 힘을 합해 1000여 명이 몰래 회령(會寧) 장성(長城) 밖에 주둔하고 있다가 목책(木柵)을 부수고 쳐들어와 노략질하였다. 함길도 도절제사 양정(楊汀)이 군영의 병사 700여 명을 거느리고 나가 크게 격파하고 500여 명의 목을 베자, 적이 대부분 우마와 기장(器仗)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에 양정이 승리의 소식을 올리니, 상이 하유하여 칭찬하고 궁시(弓矢)와 표리(表裏)를 하사하였으며, 장사(將士)들에게는 면포를 상으로 내렸다.
○ 2월. 여러 도의 역(驛)을 거리의 원근에 따라 여러 고을에 나누어 소속시키도록 명하였는데, 병조의 계청을 따른 것이었다.
○ 야인(野人) 니마거(尼麽車), 올적합(兀狄哈), 비사(非舍) 등이 와서 입조(入朝)하였다. 처음에 야인 낭패아한(浪孛兒罕)이 성품이 흉악하고 교활하여 여러 종족들을 꾀어 누차 북변(北邊)에서 소요를 일으켰으므로 상이 사람을 보내어 국문하고 주벌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니마거 등이 이르렀으므로 상이 불러 보고서 패아한의 죄를 말하였는데, 니마거 등이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였고 상의 은혜와 위엄에 깊이 감복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 경조사 함우치(咸禹治)가 회동관(會同館)에 이르자 건주위(建州衛) 동창(童倉)이 술과 안주를 싸가지고 와서 만나보고 동쪽으로 향하여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는 자기가 입은 옷을 가리키면서, ‘이것은 모두 전하께서 하사한 것이다.’ 하고 눈물을 주루룩 흘렸다. 또 말하기를,
“패아한은 반역을 도모하다가 주벌을 당했으니, 나는 나라의 울타리가 될 것이다.”
하였다 한다.
○ 송처관(宋處寬), 양성지(梁誠之) 등에게 명하여 《손자주해(孫子註解)》를 교정하게 하였다.
○ 4월. 보태평(保太平)과 정대업(定大業)을 원구(圓丘)에 제사지내고 종묘(宗廟)에 제사지낼 때 연주하는 음악으로 삼았다. 처음에 세종이 아악(雅樂)을 고증하여 경안(景安), 숙안(肅安), 옹안(雍安), 수안(壽安)의 악장을 종묘에서 연주하는 음악으로 정하고, 또 달에 따라서 율을 쓰는 음악을 제정하여 연향(宴享)과 회례(會禮)에 사용하였다. 최후에 박연(朴堧)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속악(俗樂)은 토속(土俗)에서 일어난 것으로, 아송(雅頌)을 쓰던 때에 국풍(國風)이 있었던 것과 한가지입니다. 완전히 폐지할 필요는 없으니, 바로잡아 상하가 통용하는 음악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세종이 마침내 국초의 고취악(鼓吹樂)에다 아음(雅音)으로 선궁(旋宮)하는 법을 붙여 보태평, 정대업 등 무곡(舞曲)을 지어 연향과 회례의 종장(終章)에 쓰게 하였다. 상이 처음 즉위하여 종묘에 직접 제사지내고 돌아와 경회루에 나아가서 음복연(飮福宴)을 베풀었는데, 이때 보태평, 정대업의 춤을 보고 정인지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이것을 부면 조종(祖宗)의 창업(創業)이 어려웠다는 것과 세종의 제작(制作)이 거룩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서 명하기를,
“악학(樂學)과 관습도감(慣習都監)을 하나의 관사(官司)로 통합하여 악학도감(樂學都監)이라 칭하고, 아악서(雅樂署)와 전악서(典樂署)를 하나의 관사로 통합하여 장악서(掌樂署)라 칭할 것이며, 재랑(齋郞), 무공(舞工), 악생(樂生)은 좌방(左坊)에 소속시키고 악공(樂工)은 우방(右坊)에 소속시키고, 악생을 가성랑 좌방령(嘉成郞左坊令)이라고 부르라.”
하였다. 이에 하교하기를,
“예(禮)를 제정하는 것은 성인(聖人)이 아니면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수천 수만 년이 지나도록 경장(更張)한 경우가 없었던 것은 성인이 세상에 나기 어렵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세종께서 하늘이 내려준 성지(聖智)로 여러 악무(樂舞)를 제작하셨는데도 미처 쓰지 못하였으니, 지금 일으키지 않는다면 나중에는 폐기되고 말 것이다. 이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지금부터 정대업, 보태평, 발상(發祥), 봉래의(鳳來儀) 등 새 악장을 익히고 옛 악장을 모두 폐지하되, 인물과 헌가(軒架)의 수, 익히는 절목에 대해 속히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고 마침내 양성지와 성임(成任)을 악학도감 제조로 삼아 새 악장을 가르치고 익히게 하였다. 상이 별도로 곡보(曲譜)를 지어 상일(上一)에서 상오(上五)까지, 하일(下一)에서 하오(下五)까지를 가지고 만(慢), 중(中), 삭(數) 삼조(三調)의 규정을 정하였는데, 무릇 중에 해당되는 것이 궁(宮)이고 궁 이상은 삭이 되고 궁 이하는 만이 되었다. 그러므로 아악의 청황(淸黃)이 속악의 상이(上二)가 되고, 청림(淸林)이 상오(上五)가 되고, 황종(黃鐘)이 하삼(下三)이 되고, 탁림(濁林)이 하오(下五)가 되었으니, 모두 세종조의 보태평, 정대업의 곡보를 따르지 않은 것이었다. 또 아악의 옛 제도를 없애고 속악의 새 제도로써 대신하였으니, 아악은 당상(堂上)에는 현가(絃歌)가 있고 포죽(匏竹)이 없으며 당하(堂下)에는 포죽이 있고 현가가 없는데 비해 속악은 당상과 당하에 모두 현가가 포죽이 있고 필률(觱篥)과 비파 등의 악기가 섞여 있었다. 또 아악은 영신(迎神)할 때 천(天), 지(地), 인(人)에 따라 그 수를 달리하여 천신(天神)은 6성(成), 지기(地祇)는 8성, 인귀(人鬼)는 9성이며, 그 밖에 관헌(祼獻) 이하는 당상에서는 음려(陰呂)가 오른쪽으로 돌아 곡을 마치고 당하에서는 양률(陽律)이 왼쪽으로 돌아 곡을 마친 다음 음양이 소리를 합해 번갈아가며 연주하되 매 절(節)을 각각 1성으로 한 데 비해, 속악은 천신과 인귀의 구분이 없이 영신부터 삼헌(三獻)까지 모두 각각 9성을 연주하였고, 또 각각 인입(引入)과 인출(引出)이 있어 11성(聲)이 되었다. 그리고 원구에는 당상과 당하 모두 협종(夾鐘) 치음(徵音)을 써서 곡조를 시작하고 마치며, 종묘에는 당상과 당하 모두 황종(黃鐘) 청궁(淸宮)을 써서 곡조를 시작하고 마쳐 양(陽)은 있되 음(陰)은 없고 창(倡)은 있되 화(和)는 없었으므로 왼쪽으로 돌고 오른쪽으로 도는 절차도 없었으니, 한번 제사지내는 때를 통틀면 모두 47성이었다. 이는 모두 예지(叡智)로 재정한 것으로 정대업, 보태평 가사를 지을 때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15장을 모두 사용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제향의 악장 가사가 아니라고 하여 최항(崔恒)에게 명하여 악장을 개찬(改撰)하게 하였다.
○ 원구 속악 악장의 영신(迎神) 음악은 다음과 같다.
천명이 보우하사 큰 경사 누리니 / 佑命荷玄休
하늘을 대신하여 뭇 백성 다스리네 / 代理主群生
그 은덕에 보답코자 크게 제사 올리니 / 崇報筵窮壇
기다리는 나에게 신령은 이르소서 / 翹竚臨雲輧
희문(熙文)의 음악이다.
○ 전폐(奠幣) 음악은 다음과 같다.
서직이 어찌 이리 향기로운가 / 黍稷胡亶馨
온갖 예를 성대히 갖추었도다 / 百禮壬有林
나의 옥백(玉帛)을 받들어 올리며 / 我將我珪幣
하찮은 정성을 밝게 고하나이다./昭事奏微忱
희문의 음악이다.
○ 진찬(進饌)하는 음악은 다음과 같다.
나의 희생과 / 以我繭栗
나의 서직을 / 與我齊明
진설하고 받들어 / 或肆或將
정성껏 바치도다 / 祗薦我誠
신께서는 흠향하시고 / 神其居歆
그 영혼을 드러내소서 / 赫赫厥靈
융안(隆安)의 음악이다.
○ 초헌의 음악은 다음과 같다.
아, 아름다운 상재는 / 於穆玄宰
신명을 헤아릴 수 없도다 / 神明莫測
엄숙하고 경건하게 제사를 올리니 / 禮嚴毖祀
바라건대 신께서는 강림하소서 / 庶幾降格
기명(基命)의 음악이다.
○ 아헌의 음악은 다음과 같다.
위대하신 상제께서 / 皇皇上帝
환히 임하고 계시도다 / 臨下有赫
나 밝은 명에 응하였으니 / 我膺明命
조심하고 조심하도다 / 翼翼欽若
아름다운 열조께서 / 假哉烈祖
하늘과 짝하여 오르내리도다 / 配天禮陟
모든 신께서 차례가 정해지니 / 咸秩百神
제사 일이 어긋나지 않도다 / 祀事不忒
나의 제수가 매우 많고 / 我羞孔庶
나의 희생이 매우 정결하도다 / 我牡孔潔
나의 정성을 돌아보소서 / 顧予精衷
두 번째 잔에 술을 가득 따르나이다 / 再崇我爵
선위(宣威)의 음악이다.
○ 종헌의 음악은 다음과 같다.
예가 이미 갖추어졌고 / 禮旣備
음악이 이미 연주되었도다 / 樂旣奏
거듭하여 술잔을 / 觴之重
정성으로 바치노니 / 誠以侑
나에게 복을 주시고 / 錫我祉
상제께서는 흠향하소서 / 帝其右
탁정(濯征)의 음악이다.
○ 변두(籩豆)를 거두는 음악은 다음과 같다.
정갈하고 맛있는 음식 올리니 / 於薦靜嘉
변두가 가지런히 줄지었도다 / 籩豆有楚
변두를 이미 올리고 나서 / 籩豆旣踐
술도 술잔에 따르었도다 / 獻酌亦擧
신께서 이미 취하셨으니 / 神旣醉止
이제 거두어 치우겠나이다 / 廢徹有且
성안(成安)의 음악이다.
○ 송신(送神)하는 음악은 다음과 같다.
신께서 이제 일어나시어 / 神載起兮
하늘 나라로 돌아가시도다 / 返玄宅兮
회오리바람 치솟아오르더니 / 騰颷輪兮
휑하니 허공만 남아 있도다 / 遡寥廓兮
발돋움하여 바라보아도 / 跂予望兮
푸르디 푸른 하늘뿐이로다 / 杳空碧兮
영안(寧安)의 음악이다.
○ 종묘 속악 악장의 영신하는 음악은 다음과 같다.
세덕으로 후손을 계도하시니 / 世德啓我後
빛나도다 그 모습 그 음성이여 / 於昭想形聲
깨끗한 제사를 엄숙히 받드니 / 肅肅薦明禋
강림하여 우리를 편안하게 하소서 / 綏我賚思成
희문의 음악이다.
○ 전폐하는 음악은 다음과 같다.
검소한 예물로도 교응할 수 있으니 / 菲儀尙可交
광주리를 받들어 폐백을 올리나이다 / 承筐將是帛
선조께서는 돌아보고 흠향하소서 / 先祖其顧歆
예를 차리는 마음이 깨끗하나이다 / 式禮心莫莫
희문의 음악이다.
○ 진찬하는 음악은 다음과 같다.
공경히 음식을 직접 만들어 / 執爨踖踖
나의 제수를 올리도다 / 登我俎豆
제수를 이미 올리고 / 俎豆旣登
음악을 화락하게 연주하도다 / 樂且和奏
향기로운 제사를 효성으로 올리니 / 苾芬孝祀
신께서는 흠향하소서 / 維神其右
풍안(豐安)의 음악이다.
○ 초헌의 음악은 다음과 같다.
열성이 나라의 운을 여시니 / 列聖開熙運
찬란한 문치가 창성하였도다 / 炳蔚文治昌
거룩한 아름다움 기리기 위해 / 願言頌盛美
노래를 진설하나이다 / 維以矢歌章
아, 위대하신 목조께서 / 於皇聖穆
바다 건너 경흥으로 옮기셨도다 / 浮海徙慶
붙좇는 사람 날로 늘어나 / 歸附日衆
영원한 천명을 터잡았도다 / 基我永命
위대하신 상제께서 / 皇矣上帝
백성을 안정시킬 방책 구하여 / 求民之莫
깊숙한 땅을 돌아보시고 / 乃眷奧區
명덕의 임금을 옮기게 하셨도다 / 乃遷明德
어진 사람을 놓칠 수 없어 / 仁不可失
많은 백성들 크게 따르도다 / 于胥景從
따르는 사람 많아 저자와 같으니 / 其從如市
나의 사사로움 때문이 아니로다 / 匪我之私
나의 사사로움 때문이 아니라 / 匪我之私
어진 이에게 귀의함이로다 / 維仁之歸
어진 이에게 귀의하니 / 維仁之歸
큰 터전을 여셨도다 / 誕啓鴻基
위대하신 익조께서 / 於皇聖翼
그 임금을 섬기셨도다 / 祗服厥辟
성스러운 도조께서 그 뜻을 계승하사 / 聖度繼志
돌보고 의지함이 돈독했도다 / 眷倚斯篤
크게 형통하여 사랑을 받으니 / 大亨以嘉
하늘의 명이 따름이로다 / 景命維僕
쌍성이 멀고 멀지만 / 雙城澶漫
천부와 같은 곳이로다 / 曰維天府
관리가 직무를 다하지 못해 / 吏之不職
백성이 안도하지 못하였도다 / 民未安堵
환조께서 편안하게 돌보아주자 / 聖桓輯寧
유민들이 마침내 돌아왔도다 / 流離卒復
총애하는 명을 받으시어 / 寵命是荷
큰 복록을 이룩하셨도다 / 封建厥福
아, 위대하신 태조는 / 於皇聖祖
그 덕이 뛰어나도다 / 遹駿厥德
인으로 위무하고 위로 복종시켜 / 仁綏義服
신령스러운 덕화가 두루 퍼졌도다 / 神化隆洽
사나운 저 섬 오랑캐와 / 憬彼島夷
산 속의 오랑캐가 / 及其山戎
크게 정화되고 회유되어 / 孔淑以懷
따르지 않는 자 없도다 / 莫不率從
배를 타고 산을 넘어 / 航之梯之
끝없이 관문을 두드리도다 / 款我繹繹
아, 위대하신 그 신령으로 / 於赫厥靈
가까운 곳 먼 곳을 다스리도다 / 邇妥遠肅
아, 위대하신 우리 성고시여 / 於皇我聖考
난리를 평정하고 종묘를 지키셨도다 / 戡亂保宗祏
찬양하는 노래와 여망이 높아도 / 謳歌輿望隆
돈독히 사양하여 미덕이 드러났도다 / 敦讓顯美德
천자가 바야흐로 노하시니 / 天子方懠
나라 사람들이 근심하도다 / 邦人憂惶
성고께서 들어가 아뢰시니 / 聖考入奏
그 충성 밝게 드러났도다 / 忠誠以彰
천자에게 사랑을 흠뻑 받으니 / 媚于天子
빛나고 빛나는 그 은총이로다 / 赫哉龍光
단아하고 공경스러운 성모께서 / 思齊聖母
성고의 배필이 되셨도다 / 克配乾剛
난리를 이겨내어 안정시키니 / 戡定厥亂
도우신 계책 실로 훌륭하도다 / 贊謀允臧
거룩도다 곧고 밝으심이여 / 猗歟貞明
무궁히 인도하고 도와주소서 / 啓佑無疆
열성이 광명을 거듭 펴시고 / 列聖宣重光
문교(文敎)로 사방을 위무하도다 / 敷文綏四方
제도가 이미 갖추어지니 / 制作旣明備
큰 정책 너무도 찬란하도다 / 大猷伺煌煌
대대로 닦아온 덕을 이어서 / 世德作求
어루만지는 공을 이루었도다 / 率維敉功
태평 성대가 빛을 떨치고 / 光闡太平
예악이 바야흐로 융성하도다 / 禮藥方隆
약과 적을 들고 춤을 추니 / 左籥右翟
아홉 번 곡조가 변하였도다 / 曰旣九變
빛나는 공적을 크게 밝히니 / 式昭光烈
참으로 아름답고 참으로 선하도다 / 盡美盡善
보태평의 음악이다.
○ 아헌과 종헌의 음악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열성을 돌아보시어 / 天眷我列聖
대대로 무덕(武德)을 밝히셨도다 / 繼世昭聖武
크나큰 공렬을 드날렸으니 / 庶揚無競烈
이에 노래하며 춤추나이다 / 是用歌且舞
아, 위대하신 목조께서 / 於皇聖穆
북방에 깃발을 세우셨도다 / 建牙于朔
돈독토다 그 경사 / 遹篤其慶
우리 왕업을 시작하셨도다 / 肇我王迹
완악한 토호가 / 頑之豪
쌍성에 웅거하거늘 / 據雙城
거룩하신 우리 환조 / 我聖桓
깨끗이 소탕하셨도다 / 于濯征
사납고 모진 적을 없애고 / 狙獷亡
우리 강토를 개척하셨도다 / 拓我疆
고려가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여 / 咨麗失馭
외적이 번갈아 모멸하였도다 / 外侮交熾
섬 오랑캐 함부로 침탈하고 / 島夷縱噬
나하추[納哈出]가 눈을 부릅뜨고 / 納寇恣睢
홍건적이 기세를 떨치고 / 紅巾炰烋
원의 잔당이 핍박하고 / 元餘奰屭
요망한 중이 발호하고 / 孼僧跋扈
호발도(胡拔都)가 날뛰었도다 / 胡魁陸梁
아, 위대하신 태조께서 / 於皇聖祖
신무를 크게 드날리어 / 神武誕揚
하늘의 위엄을 펼치시니 / 載宣天威
빛나고도 당당하도다 / 赫赫堂堂
적개한 우리 군사 / 愾我敵
비호처럼 날쌔도다 / 戎虎貔
그들의 용기를 고무시키니 / 鼓厥勇
하늘을 날아가는 듯 / 若翰飛
구천을 진동시키니 / 動九天
바르고도 뛰어나도다 / 正又奇
당랑처럼 버티어도 / 螗斧亢
곧바로 제풀에 쓰러지도다 / 旋自糜
파죽같은 형세에 / 竹斯破
어느 누가 버티리오 / 孰我支
무공을 정하시니 / 耆定武
신령의 도움이로다 / 神之爲
우리의 굳셈을 우리가 떨치니 / 我雄我奮
우레와 같고 벼락과 같도다 / 如雷如霆
아무리 튼튼한들 꺾지 못하며 / 胡堅莫催
아무리 험한들 평정치 못하랴 / 胡險莫平
줄줄이 포로를 늘어 세우고 / 連連安安
귀와 머리를 베어 바치도다 / 奏我訊馘
신령스러운 창 한번 휘두르니 / 神戈一揮
요망한 기운 사라지도다 / 妖氛倏廓
모멸하고 항거하는 사람 없으니 / 無侮無拂
우리나라의 복이로다 / 祚我東國
고려왕이 간언을 듣지 않고 / 麗主拒諫
감히 난을 일으키려 하였도다 / 敢行稱亂
신령한 결단을 내리시어 / 我運神斷
우리 군사 되돌리니 / 我師我返
하늘과 사람의 협찬이로다 / 天人協贊
의로운 기치를 돌리니 / 義旗載回
순조로워 돕는 이 많았도다 / 順乃多助
하늘의 아름다움 진동하니 / 天休震動
남녀 노소 기뻐하도다 / 士女悅豫
사랑하고 위무할 이 기다렸기에 / 徯我寵綏
호장을 가지고 맞이하도다 / 壺漿用迎
더러운 죄악을 씻어버리니 / 旣滌穢惡
동해가 영원히 밝으리로다 / 東海永淸
배반한 저 신하가 / 彼孤臣
화란을 선동하자 / 煽禍機
위대한 부친께서 / 我皇考
그 기미를 밝히시어 / 克炳幾
신령스러운 계책을 결정하시니 / 神謀定
세상이 안정되도다 / 世以靖
섬 오랑캐가 헤아리지 못하고 / 島夷匪茹
우리 변방을 살육하였도다 / 虔劉我圉
이에 불끈 노하시어 / 爰赫我怒
우리 군대를 정비하여 / 爰整我旅
만 척의 배로 바람을 타고 / 萬艘駕風
나는 듯이 바다를 건너셨도다 / 飛渡溟渤
그 둥지를 뒤엎고 / 乃覆其巢
그 소굴을 쳐부수니 / 乃擣其穴
비유컨대 새털이 / 譬彼鴻毛
세찬 불길에 활활 타는 듯 / 燎于方烈
사나운 물결 잔잔해지니 / 鯨波乃息
우리나라 영원히 안정되도다 / 永奠鰈域
아, 위대한 조종께서 / 於皇列聖
대대로 무공을 세우셨도다 / 世有武功
거룩한 덕과 큰 업적을 / 盛德大業
어찌 다 말로 형용하리오 / 曷可形容
우리의 춤 찬란히 빛나고 / 我武有奕
진퇴에 법도가 있도다 / 進止維程
차분하고 위의가 있으니 / 委委佗佗
길이 이름을 보게 되리라 / 永觀厥成
정대업의 음악이다.
○ 변두를 거두는 음악은 다음과 같다.
그릇에 제수를 담으니 / 卬盛于豆
나무 그릇과 대나무 그릇이로다 / 于豆于籩
향기로운 그 음식을 / 有飶其香
조상님이 오셔서 잡수셨도다 / 來假僾然
우리의 예가 이루어졌기에 / 我禮旣成
상을 거두기를 삼가 고하도다 / 告徹維虔
옹안(雍安)의 음악이다.
○ 송신하는 음악은 다음과 같다.
정결한 제사 마치니 / 禋祀卒度
신령께서 즐거우셨으리 / 神康樂而
떠나시고 얼마 안 되어 / 洋洋未幾
문득 우리를 돌아보시고 / 回我倏而
예정 같은 깃발로 / 霓旌髣髴
구름 타고 아련히 멀어지도다 / 雲馭邈而
흥안(興安)의 음악이다.

○ 5월. 왕세자의 사부(師傅), 빈객(賓客), 대간은 매달 2일에 회강(會講)하고 빈객과 대간은 10일마다 진강(進講)할 것을 명하였다.
○ 예조가 아뢰기를,
“《훈민정음》은 선왕께서 직접 제정하신 책이고, 《동국정운(東國正韻)》과 《홍무정운(洪武正韻)》은 모두 선왕께서 찬정(撰定)하신 책이며, 이문(吏文)은 또 사대(事大)에 긴요한 것입니다. 이제부터 문과 초장(初場)에서 세 책을 시강(試講)하여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의 예에 따라 급분(給分)하고, 종장(終場)에서 이문을 아울러 시험하여 대책(對策)의 예에 따라 급분하소서.”
하니, 따랐다.
○ 6월. 하교하기를,
“허물을 용서해주고 인재를 녹용(錄用)하는 것은 임금의 큰 도량이다. 지금 쓸 만한 인재가 죄적(罪籍)에 구애되어 쓰이지 못하고 있으니, 난신(亂臣)의 친형제나 친자식 이외에 도류(徒流), 부처(付處), 안치(安置), 정역(定役)된 사람 가운데 공을 세워 속죄하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해도로 하여금 재주를 시험하여 이름을 적어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 이조가 아뢰기를,
“수법(數法)은 육예(六藝) 가운데 하나로서, 역대(歷代)에 과거를 설행하여 그 관리를 뽑았으며 위(魏), 당(唐) 때에 가장 중요시 되었습니다. 우리 세종께서는 역법(曆法)이 밝지 못한 것을 개탄하시어 책을 두루 구한 다음 문신 3,4명에게 명하여 역법을 추보(推步)하게 하셨는데, 그 결과 수 년 안에 모두 역법에 통달하게 되었으며, 또 열흘마다 취재(取才)하여 부지런히 하는지 게을리 하는지를 살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학관(學官)이 도목(都目)에서 빠지는 것에 실망하여 면하려고 애쓰고 소속되기를 바라지 않으니, 이렇게 몇 년이 지난다면 폐지하게 되고야 말 것입니다. 바라건대, 다시 권장하고 장려하여 능력에 따라 서용하되, 의서(醫書)를 습독(習讀)하는 예에 따라 근무 개월수를 계산하여 관직에 제수하고, 그 분야에 탁월한 자는 가자하소서.”
하니, 따랐다.
○ 상정소(詳定所)가 아뢰기를,
“소식(蘇軾)이 말하기를, ‘옛날에는 [자리席]에 앉았기 때문에 변두(籩豆)의 길고 짧음과 보궤(簠簋)의 높낮이가 사람의 키와 잘 맞았다. 그런데 지금은 흙과 나무로 만든 상(像)이 위에 우뚝 서 있는데 기명(器皿)을 땅에다 늘어놓으니, 이는 귀신으로 하여금 엎드리고 기어서 나오라는 것이다.’ 하였고, 주자(朱子)도, ‘부자(夫子)의 상을 대(臺) 위에 설치해 놓고서 봄가을 석전(釋奠) 때 변두와 보궤를 땅에다 늘어놓으니, 이는 무슨 의리란 말인가.’ 하였습니다. 신위(神位)를 높이 설치하고 제물을 낮은 곳에 놓는 것을 고인들이 나무랐으니, 지금부터 각 신위를 탁자에다 설치하고 자리를 펴는 제도를 없애소서.”
하니, 따랐다.
○ 상이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대사성 서강(徐岡), 사예 공기(孔頎) 등이 명경과(明經科)를 설치하여 선비를 뽑기를 청하니, 상이 즉시 내일부터 과장을 열라고 명하였다. 원점(圓點)이 70 이상인 자를 초시에 응시하도록 허락하고, 《계몽(啓蒙)》에 약통(略通)한 자, 사서(四書) 중 추첨한 책에 통(通)한 자, 오경(五經) 중 자원한 두 경(經)에 통한 자, 《좌전(左傳)》,《강목(綱目)》,《자치속편(資治續編)》,《송원절요(宋元節要)》중 자원한 한 가지 책에 약통한 자를 전시에 응시하도록 허락하되, 초시는 액수(額數)에 구애되지 말게 하였다.
○ 7월. 새로 정한 《경국대전(經國大典)》의 호전(戶典)을 반포하였다.
○ 신숙주(申叔舟)를 강원함길도 도체찰사 겸 선위사로 삼고 홍윤성(洪允成)을 부사로 삼아 그날로 출발하여 야인(野人)을 정벌하게 하였다. 처음에 야인들이 여러 차례 변방을 침범하였는데, 패아한(孛兒罕)이 주벌을 당하고 나자 그제서야 자못 두려워할 줄 알았다. 마침 명사(明使) 마감(馬鑑)이 이르자 북쪽의 야인들이 패아한의 일을 가지고 마감에게 호소하였는데, 마감이 이들의 말을 옳게 여겼으므로 야인들이 다시 변방을 침범하려 하였다. 상이 신숙주를 교태전(交泰殿)으로 불러 술을 들게 하고는 손을 잡고 남쪽 난간을 산보하면서 북벌(北伐)할 뜻을 말하니, 신숙주가 크게 찬성하였다. 이에 상이 충순당(忠順堂)에 나아가 한명회(韓明澮)와 구치관(具致寬) 등을 불러 일을 논의하고, 전균(田畇)을 강맹경(姜孟卿)과 권람(權擥)에게 보내어 의논하게 하였다. 마침내 비밀리에 신숙주 등에게 방략(方略)을 주어 파견하게 되었는데, 야인이 듣고 놀라 달아날 것을 염려하여 신숙주를 겸선위사로 삼아 마감에게 가서 성 안에 머물러 있기를 청하고 두텁게 위유하여 안심시키도록 하였다. 강원도와 함길도에 명을 내려 군대를 출동시켜 길을 나누어 전진하여 야인을 치도록 하고, 다시 어찰(御札)로 평안도 관찰사 조효문(曺孝門)과 도제절사 황석생(黃石生)에게 하유하기를,
“후문(後門)의 야인들이 자꾸만 몰래 침범해 오므로 신숙주에게 명하여 상황을 봐가며 처치하라고 하였다. 저들이 필시 건주위(建州衛)로 도망가 귀의할 것이니, 함께 계략을 세워 원수를 갚도록 하라. 변경의 경보에 대한 대비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지만, 병기(兵機)는 비밀을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법이니, 경 혼자만 이런 뜻을 알고 형적을 드러내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 팔도 관찰사 및 개성부 유수에게 명하기를,
“고금을 통해 동인(東人)이 지은 시문(詩文)을 찾아내어 잔편(殘篇)이나 단장(短章)일지라도 빠뜨리지 말고 적어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 호조 참판 윤사흔(尹士昕)을 파직시켰는데, 이는 중궁의 동생이다. 제멋대로 정부의 전리(典吏)를 가둔 일로 정부가 아뢰니, 중궁이 듣고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사흔이 내가 경계시킨 말을 듣지 않아 이렇게 되고 말았다.’ 하였다. 상이 먼저 윤사흔을 파직시키고, 다시 헌부로 하여금 국문하게 하였다.
○ 8월. 함길도 도체찰사 신숙주가 야인을 크게 격파하고 그 소굴을 소탕하였다. 신숙주가 육진(六鎭)에 이르러 군사들을 부대별로 배치시키고 길을 나누어 일제히 전진하였다. 번호(藩胡)가 밤을 틈타 진영을 습격하자 진영 안에서 시끄럽게 소리치며 싸우고자 하였는데, 신숙주가 움직이지 않고 누운 채 시를 읊어 한가함을 보여주자 진영의 소란이 가라앉았다. 이에 마침내 추격하여 90여 명의 목을 베었으며, 승세를 타고 곧장 그 소굴까지 밀어붙여 430여 급(級)을 모조리 죽이고, 가옥을 불태우고 소와 말 1000여 마리를 죽이거나 포획하였다. 이에 앞서 한명회 등이 자주 말하기를,
“전쟁을 막으려는 명 나라의 사신이 현재 후문(後門)에 있는 상황에서 군대를 일으켜 토벌하게 되면 끝내 일의 체모가 순조롭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어쩔 수 없이 신숙주에게 글을 내려 기미를 보아 잘 처리하게 하도록 하고, 또 글의 끝에 적기를,
“용병(用兵)함에 있어서는 망설이는 것이 가장 큰 해가 되고, 삼군(三軍)의 재앙은 의심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
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서 승지 이극감(李克堪)에게 이르기를,
“5일 동안 보고가 없으면 반드시 거사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는데, 다음날 첩서(捷書)가 이르렀으므로 상이 매우 기뻐하였다. 북방(北方)을 평정한 일로 종묘에 고하고 근정전에 나아가 백관의 진하(陳賀)를 받았으며, 첨지중추부사 홍일동(洪逸童)을 선위사(宣慰使)로 삼아 어서(御書) 및 법온(法醞)과 표리(表裏)를 가지고 가서 신숙주를 위유하도록 명하고, 신숙주의 아들 면(㴐)으로 하여금 역마를 타고 가서 아버지에게 근친하도록 하였다. 처음에 신숙주가 떠나려 할 때에 상이 편전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담장 아래의 박넝쿨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것이 열매를 맺을 때쯤이면 되겠는가?”
하니, 신숙주가 술에 취하여 대답하기를,
“늦종자는 성(盛)하지 못하니 반드시 열매를 맺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박 하나가 우연히 씨를 맺었는데, 상이 타서 술잔을 만들라고 명하고는 술잔 안에다, ‘경은 비록 날 비웃었지만 내 표주박이 이미 이루어졌기에 타서 술잔을 만들어 지극한 정을 보이노라.[卿雖笑我 我瓢旣成 剖而爲杯 以示至情]’라는 네 구절을 써서 신숙주에게 보내게 하였다. 나중에 또 표주박 모양의 술잔을 만들어 네 구절을 안에다 새기고는 곡연(曲宴) 때마다 사용함으로써 공을 잊지 않는 뜻을 보였다.
○ 상이 함길도를 남북 두 도로 나누어 감사와 병사가 각각 맡아 다스리게 하고자 하여 신숙주에게 의견을 물었다. 신숙주가 아뢰기를,
“경성(鏡城) 이북의 병력은 각각 본진을 지키고, 길주(吉州) 이남의 군대는 나누어 운송하여 병영(兵營)에 들어가 번을 서는데, 이를 조전(助戰)이라고 하며 도절제사가 거느립니다. 남관(南關)은 북진(北鎭)을 의지하여 울타리로 삼고 북진은 남관을 의지하여 구원병으로 삼으니, 그 형세가 서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도로 나누어 장수를 두게 되면 각각 병권을 잡게 됩니다. 권세가 둘로 나뉘면 서로 다투고 세력이 분리되면 괴리감이 생기고 군대가 나뉘면 힘이 약해지는 법이니, 옛 제도를 그대로 두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 그러나 군사들의 시재(試才)만은 도절제사와 관찰사가 단천(端川) 남쪽과 길주 북쪽으로 나누어 각각 시재하면 때를 놓치는 폐단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따랐다.
○ 10월. 상이 왕세자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평양을 순행(巡行)하였다. 영숭전(永崇殿) - 태조의 진전(眞殿)이다. - 에 직접 제사지내고, 또 단군(檀君), 기자(箕子), 동명왕(東明王)의 전(殿)에 제사를 지냈다. 대동관(大同館)에 나아가 양로연(養老宴)을 베풀었는데, 노인이 남녀를 합해 모두 100명이었다. 신숙주가 북쪽으로부터 와서 알현하고 북쪽 정벌에 공을 세운 자들을 적어 올리니, 홍윤성(洪允成) 등을 가자하였다. 신숙주에게 명하여 평안ㆍ황해 두 도의 문사(文士)와 무사(武士)를 시취하게 하였다. 상이 부벽루(浮碧樓)에 나아가자 관찰사 조효문(曺孝門)과 도제절사 황석생(黃石生)이 진연(進宴)하였다. 상이 부벽루 벽에 고려 의종(毅宗)의 시가 있는 것을 보고는 어제시(御製詩)를 내려 대가를 수행한 재추(宰樞)들로 하여금 화운(和韻)하게 하고, 또 신숙주로 하여금 기(記)를 짓게 하였다. 대가가 지나온 여러 고을의 사죄(死罪) 이외 죄수들을 사면하였다. 한명회가 평양에 행궁(行宮)을 짓기를 청하니, 옛날 궁궐 자리에 터를 잡을 것을 명하였다. 함경도 절제사 박형(朴炯)에게 하유하기를,
“오랑캐를 평정한 후에 그들이 반드시 딴 마음을 품을 것이니, 경은 정예병 수천 혹은 수백 명을 뽑아 동서로 치기도 하고 남북으로 침범하기도 하여 적으로 하여금 대비할 방도를 모르게 하라. 용병(用兵)에 대한 지시를 내가 어찌 멀리서 내릴 수 있겠는가. 대개 잘 보전하는 것이 으뜸이고, 공을 이루는 것이 다음이고, 일을 만드는 것이 가장 아래이다.”
하였다.
○ 상이 평양으로부터 돌아와서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연회를 베풀어 북정(北征)한 장사(將士)들을 위로하고, 어제(御製) 악부(樂府) 3장을 내려 관현(管絃)으로 연주하게 하였다.
○ 여러 도의 관찰사에게 하유하기를,
“근래 학교(學校)에서 학문을 권려하는 방도를 보면 느즈러짐이 없지 않다. 내가 직접 성균관에 행행하여 사학(四學)의 유생들을 함께 모아놓고 강경(講經)하고 제술(製述)하여 격려시키고자 한다. 경도 이러한 뜻을 체득하여 순행할 때마다 직접 향교(鄕校)에 이르러 강경하고 제술하며, 교관(敎官)들을 경계하고 주의를 주도록 하라. 행여 게을리 하는 자가 있으면 그 죄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니, 경은 잘 타이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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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조조 2
6년(신사, 1461)

○ 1월. 호조가 아뢰기를,
“둔전법(屯田法)이 육전(六典)에 실려 있으니, 제도 관찰사로 하여금 여러 고을 중 둔전이 설치되지 않은 채 묵고 있는 땅에다가 둔전을 만들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 종묘에 직접 제사를 올렸다. 하교하기를,
“예가 번잡하면 게으른 마음이 생기는 법이니, 여러 집사들로 하여금 민첩하게 거행하도록 유시하라.”
하였다.
○ 구치관(具致寬)을 함길도 도체찰사로 삼았다. 재추(宰樞)에게 명하여 보제원(普濟院)에 가서 전별하게 하고, 다시 어찰(御札)로 하유하기를,
“한번 이기고 한번 지는 것은 병가(兵家)의 상사(常事)이다. 첫째는 만족할 줄 알아 너무 공을 탐내지 않아야 하고, 둘째는 적을 가볍게 보지 않아야 하고, 셋째는 때를 보아서 움직여 경솔하게 행동하지도 말고 반드시 치려 하지도 말고 반드시 치지 않으려 하지도 말며, 깊이는 못과 같고 움직임은 우뢰와 같으며, 거짓도 없고 어리석음도 없이 권도(權道)로써 지혜를 도와야 한다.”
하였다.
○ 상이 충순당에 나아가 성균관과 사학(四學)의 유생 560여 명을 시험하였다. 백성을 서북 지방으로 이주시키는 방법에 대해 책문(策問)하였는데, 상이 진사 성현(成俔)의 책문(策文)을 훌륭하게 여겨 성현에게 급제를 내렸다.
○ 3월. 병이 있는 종친과 재추에게 의관을 보내고 약을 지급하기를 세종조의 예에 따라 하라고 명하였다.
○ 4월. 상이 도승지 김종순(金從舜)에게 이르기를,
“외방의 군사들로 하여금 5일이나 10일간의 노정으로 상호간에 왕래하며 진법(陣法)을 익히게 함으로써 행역(行役)의 노고에 익숙해지게 하고자 하니, 병조로 하여금 마감하게 하라.”
하였다.
○ 최항(崔恒)과 김양경(金良璥)에게 명하여 함께 육전(六典)을 상정(詳定)하게 하였다.
○ 5월. 충훈부가 단오에 풍정연(豐呈宴)을 올리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승상 강맹경(姜孟卿)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 상이 호조 참판 이극감에게 이르기를,
“경이 세자의 사(師)로 있는데, 지금 세자의 서법(書法)이 나보다 낫고 또 문리를 깨쳤으므로 내가 매우 가상하고 기쁘게 여긴다. 대개 학문을 하는 길은 온종일 한 장을 외우느라 지기(志氣)를 소모시키기보다는 책 전체를 두루 섭렵하여 사기(辭氣)를 증가시키는 것이 나은 법이다. 경은 힘써 다독(多讀)하게 하여 널리 배우는 바탕이 되도록 하고, 신중히 해서 수고스럽게 독서하느라고 지기를 손상시켜 끝내 부유(腐儒)가 되지 않게 하라.”
하였다.
○ 7월 성임(成任)과 조효문(曺孝門)을 악학도감 제조로 삼았다. 상이 성임에게 이르기를,
“경은 재주도 많고 기예에도 밝으므로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은 천문(天文), 지리(地理) 등 잡학(雜學) 분야에 밝은 사람은 조금 있으나 음악 분야에는 아는 사람이 적다. 지금 악공(樂工)들이 배우는 것은 모두 음성(淫聲)으로서 음악이라고 할 수 없는 것들이다. 경은 나의 뜻을 깊이 새겨 음악에 마음을 두도록 하라.”
하였다. 또 묻기를,
“배우면 박연(朴堧) 같은 수준에 이를 수 있는가?”
하니, 성임이 답하기를,
“박연 같은 수준에 이를 수 있다고 장담하지 못하겠습니다만, 배우면 그래도 터득함이 있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요컨대, 마음을 전일하게 갖는 데 달렸을 것이다.”
하였다. 이어 황수신(黃守身) 등에게 이르기를,
“오늘날의 음악은 대부분 정밀하지 못하니, 내가 음률에 밝은 사람 몇 명을 골라서 제조로 삼아 음란한 음악을 대대적으로 고치고자 한다. 누가 좋겠는가?”
하니, 황수신 등이 예조 참판 조효문을 추천하였는데, 즉시 성임과 조효문을 제조로 삼았다.
○ 황수신, 이극감 및 병조 판서 김사우(金師禹)를 목장 제조(牧場提調)로 삼았다. 여러 도의 관찰사에게 하유하기를,
“나라의 강약(强弱)이 말에 달려 있다. 그 때문에 국군(國君)의 부유함을 묻는 질문에 말을 세어 대답했던 것이다. 옛날 원 세조(元世祖)는 강남(江南)을 목장으로 삼고자 했었는데, 나 또한 강원도와 황해도 땅을 병합하여 하나의 큰 목장으로 만들고자 하지만 사람을 말과 바꿀 수는 없다. 지금 우선 여러 고을로 하여금 각각 물과 풀이 모두 충분한 산 하나를 정하여 10필 내지 1000필의 말을 나누어 기르게 한다면 어찌 이루지 못할 것을 걱정하겠는가. 경은 속히 어떤 고을 어떤 산이 좋겠는지를 살펴서 9월 그믐까지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 왕세자에게 명하여 희우정(喜雨亭)에서 농사짓는 일을 살펴보게 하였는데, 종친, 대신, 여러 재신(宰臣)들이 수행하였다. 이어 선온(宣醞)할 것을 명하였다.
○ 예조가 아뢰기를,
“인재를 가르치고 양성하는 것은 국가의 중대한 사업입니다. 지금부터 경외의 교수(敎授)와 교도(敎導)와 학장(學長)은 학문이 정밀하고 완숙하여 사표(師表)가 될 만한 사람을 택하여 제수하고, 성균관과 사부(四部)의 근만(勤慢)에 대해서는 본조가 항상 검찰하고, 외방은 관찰사가 직접 강구하고 물어서 본조에 이문하여 아뢰도록 하되, 성과를 거둔 자가 있으면 특별히 포상하여 장려하소서. 경외의 생원, 진사 및 승보시(升補試)를 통해 입학한 사람을 제외하고 나이 40이 넘도록 배우지 않고 한가하게 노니는 자는, 각각 그 교관이 본조에 보고해오면 병조에 이문(移文)해서 군역(軍役)에 충정함으로써 나머지 사람을 징계하게 하소서. 또 학교를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는 수령은 관찰사로 하여금 엄히 다스리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 10월. 상이 직접 병경(兵鏡)을 지어 입직한 위장(衛將)과 부장(部將)을 불러 강(講)하였다. 부장 복승리(卜承利)가 대답을 잘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사(儒士)보다 낫다.”
하고는 승진시켜 상호군에 제수하였다.
○ 신숙주 등에게 명하여 《병가삼설(兵家三說)》을 주해(註解)하게 하였다.
○ 홍윤성(洪允成) 등을 후원으로 불러 여러 장수 및 파적위(破敵衛)와 함께 소형명(小形名)으로 진법(陣法)을 익히게 하였다.
○ 상이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신숙주와 이극배(李克培) 등에게 이르기를,
“장수의 직임은 병법에 정통(精通)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실로 경들이 궁시(弓矢)를 일삼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뽑아서 장수로 삼은 것은, 여러 장수들로 하여금 병법에 힘쓰게 하고자 해서이다.”
하고, 입직한 위장(衛將)을 불러 이극배로 하여금 진법(陣法)을 시험하게 하였는데, 모두 환히 알지 못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만약 무재(武才)만 가지고 사람을 임용한다면 너희와 같은 재주는 다 헤아리지도 못할 것이다. 너희들은 모름지기 발탁하여 등용한 뜻을 생각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 세자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여러 재추들이 모두 너의 아비뻘인데, 훗날 다 너의 신하가 될 것이니 후하게 대우해야 할 것이다. 매가 비록 사납지만 날개가 없으면 도리어 보통의 새보다 못한 법이다.”
하였다.
○ 12월. 상이 이조와 병조의 당상 및 대성(臺省)을 불러 제사(諸司) 낭관의 이름을 추첨하게 헤서 관장한 잡물(雜物)의 출납과 현재 남아 있는 수량에 대해 물었다. 사복시와 제용감 낭관은 대답을 잘하였으므로 가자하라고 명하고, 광흥찬 관원은 잘 대답하지 못하였으므로 파직시켰다.
○ 이조가 여러 관사 관리의 고과(考課)에 대한 절목을 논의하여 아뢰었다. 서연관(書筵官), 대간, 정부의 낭청, 승정원 주서, 제도의 수령관(守領官)은 고과하지 말 것을 청하였는데, 아뢴 대로 하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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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종조 1
6년(을미, 1475)

○ 1월. 처음으로 직접 적전(耤田)을 갈았다. 하루 전에 상이 직접 교단(郊壇)에 나아가 선농(先農)에게 제사지내고 - 제사 의식은 《오례의》에 나온다. - 이튿날 적전을 갈았다. 상이 다섯 번을 밀고, 종신(宗臣)과 재신(宰臣)이 일곱 번을 밀고, 여러 판서와 대사헌과 대사간이 아홉 번을 밀기를 의식대로 하였다. - 의식 절차는 《오례의》에 나온다. -
○ 악장은 다음과 같다. 천하가 대차(大次)에 나왔을 때 연주한 여민악(與民樂)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우리 백성 먹여 살리려 / 天粒我民
좋은 곡식을 내려주셨네 / 誕降嘉穀
가꾸고 거두기가 너무 어려워 / 稼穡惟難
한가롭게 지낼 겨를 없다네 / 不自暇逸
백성들이 농사를 시작하니 / 肇民農功
적전에서 내가 밭을 간다네 / 事我新田
백성에게 도 있음을 보여주노니 / 示民有道
근본에 힘씀이 우선이라네 / 務本爲先
전하가 적전을 갈 때 연주한 여민악은 다음과 같다.
우리 농사일 생각했더니 / 念我穡事
어느새 벌써 봄이로구나 / 日亦旣春
쟁기 메우고 보습을 끼워 / 于耜于耒
몸소 교외에서 밭을 간다네 / 必躬必親
다섯 번 밀고 다섯 번 돌아오니 / 五推五反
옛 가르침을 법삼음일세 / 古訓是式
백성에게 농사를 권면하노니 / 勸我民天
백성들은 이를 법삼을지어다 / 惟民之則
전하가 관경대(觀耕臺)를 오르내릴 때 연주한 여민악은 다음과 같다.
이미 밭을 갈기를 / 日旣耕止
또한 부지런히 하셨도다 / 日亦勤止
위아래가 모두 임하였으니 / 上下臨只
곤룡포와 면류관 찬란하도다 / 袞冕煌只
많은 사람 다 보고 있으니 / 萬目咸覩
아침해가 두둥실 떠오르는 듯 / 如日之昇
이렇게 끝까지 잘해 나가면 / 終善且有
하늘이 복록을 내려주리라 / 福祿是膺
왕세자, 종실, 재신, 판서, 대간이 적전을 갈 때 연주한 역성(繹成)은 다음과 같다.
엄숙한 제단에 / 有儼其壇
향기로운 제물을 차려 놓으니 / 有椒其芬
아, 종실의 신하들이 / 嗟嗟宗公
분주히 달려나왔네 / 日亦駿奔
보습으로 밭을 갈아 / 以耕以耜
우리 임금을 도우니 / 以佑我王
밝은 신은 살피시어 / 明神有賜
풍년을 내려주소서 / 迄用豐康

이어 기민(耆民)의 노주례(勞酒禮)를 행하였다. 예를 마치고 대궐로 돌아와 백관의 진하를 받고 대사령을 반포하였다. 교문(敎文)에,
“먹는 것은 백성의 하늘이고, 농사는 정치의 근본이다. 그러나 추운 때 밭 갈고 더위에 김매어 몸은 땀에 젖고 발은 흙투성이가 된 채로 일년 내내 부지런히 일을 해야 하는 점으로 볼 때, 농사가 가장 고달픈 일이다. 그러니 위에 있는 사람이 실로 몸으로써 권하지 않는다면 누가 밭에 나가 일하고 힘들여 거두는 고생을 하려 하겠는가.
옛날을 상고해 보건대, 성군(聖君)과 철왕(哲王)은 모두 적전에서 밭을 가는 제도를 두어 위에서 인도하였으니, 주(周) 나라 선왕(宣王)이 옛 제도를 회복시키지 않자 괵공(虢公)이 간하였고, 한(漢) 나라 문제(文帝)가 그 제도를 정비한 것을 반고(班固)가 《한서(漢書)》에 특별히 기록하였다.
보잘것없는 내가 큰 사업을 계승하여 자신의 역량을 헤아리지도 않고 옛 뜻을 천명하고자 하였다. 집안을 잇고 나라를 다스리며 사람을 사랑하고 남을 이롭게 할 것을 밤낮으로 생각해 왔으니, 실로 백성에게 편리한 일이라면 어찌 수고로움을 꺼리겠는가. 그래서 유사에게 명하여 옛 법을 밝히게 하고, 금년 상춘(上春) 길일에 직접 선농에게 제사지내고 몸소 쟁기를 잡아 백성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전에 없던 이러한 성전(盛典)을 처음 강구함에 있어서 관대한 은전을 베푸는 교서를 내려야 하겠으니, 모일(某日) 새벽부터 잡범(雜犯) 이하를 모두 용서하도록 하라.
너희 기로 군민들은 각각 나의 뜻을 체득하여 아랫사람들을 이끌고 격려해서 말단을 버리고 근본에 힘써 농사에 힘을 다하도록 하라. 여러 도의 관찰사는 한 지방을 맡아 온갖 책임이 다 쏠리는 자리이지만, 농사를 권면하는 한 가지 일을 실로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한다. 백성의 어른이 되는 관리로 하여금 밤낮으로 신칙하고 타일러 감히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는 일이 없게 하라. 모두 들에 나가 일을 하고 방죽과 못을 정비하여 농기구를 손질하고 논밭에 거름을 내게 할 것이며, 밭은 반드시 깊이 갈고 김매기는 반드시 여러 번 하여 최대한의 노력으로 논밭이 거칠어지지 않게 하라. 건축공사를 일으켜 농사를 폐하게 하지 말고, 변방에 차출하여 농사철을 놓치게 하지 말고, 조세를 마구 거두어 힘이 고갈되게 하지 말아서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농사일에만 마음을 쓸 수 있게 하라. 진실로 관리와 백성들이 서로 신뢰하고 상하의 마음이 서로 부응한다면 자주 풍년을 이루어 나를 지극한 다스림의 경지에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아, 쟁기를 잡고 소를 따르는 것은 형식만을 갖추어 스스로 과시하고자 함이 아니다. 농사에 힘쓰고 곡식을 중하게 여기는 것이 내 뜻임을 알아서 남묘(南畝)의 백성들과 더불어 함께 태평을 누리도록 하라. 그러므로 교시하는 것이니, 잘 알리라 생각한다.”
하였다.
○ 경상도 관찰사 김영유(金永濡)가 《육선공주의(陸宣公奏議)》를 간행해 올리니, 상이 옷을 하사하여 장려하였다.
○ 2월. 어유소(魚有沼)를 우참찬으로 삼고, 그대로 북변(北邊)에 머물러 절제하게 하였다.
○ 3월. 상이 우의정 김질(金礩)에게 이르기를,
“반수(泮水)를 옛날처럼 복구시키도록 명하긴 하였으나, 공사가 매우 큰데다가 선왕께서 하신 일을 가볍게 고쳐서는 안 될 듯하다.”
하니, 김질이 아뢰기를,
“성균관의 경치 좋은 곳에 지금 동반수(東泮水)를 정비하였으나, 서반수(西泮水)가 대궐 담장으로 잘려 들어가 모양이 기울어지고 바르지 않습니다. 만일 중국 사신이 알성(謁聖)이라도 하게 되면 바라보는데 어찌 방해됨이 없겠습니까.”
하고, 노사신이 아뢰기를,
“옛날 중국 사신 김식(金湜)이 풍수를 잘 보았는데, 성균관의 터가 좋다고 극구 칭찬하면서 인재가 배출되는 땅이라고 했었습니다. 지금 서반수가 잘려나간 것은 조롱거리가 될 듯 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 성균관에 존경각(尊經閣)을 세우고, 경적(經籍)을 하사하여 보관하게 하였다.
○ 상이 직접 선성(先聖)에게 제사지내고, 명륜당에서 선비들에게 책문(策問)하였다.
○ 4월. 날이 가물었다. 상이 정전(正殿)을 피하고 반찬 수를 줄였으며, 급하지 않은 토목 공사를 중지시켰다.
○ 전주 부윤(全州府尹) 윤효손(尹孝孫)이 뛰어난 성적을 받자, 글을 내려 기리기를,
“그대가 고을을 맡고부터 구걸하던 자가 목숨을 연명하고 유망(流亡)하던 자가 다시 완전하게 되었다. 정사가 공평무사하고 송사가 잘 처리되어 백성들이 그 혜택을 입으니, 내가 매우 가상히 여긴다. 특별히 표리(表裏)를 하사하여 그대의 남다른 성적을 드러내는 바이다.”
하였다.
○ 7월. 상이 서교(西郊)에 행행하여 농사일을 살펴보고 농민에게 술을 먹였다. 영복정(榮福亭)에 나아가 조운선(漕運船)을 살펴보았다.
○ 성 안팎의 비구니 절을 철거하였는데, 모두 23군데였다.
○ 하교하기를,
“수령은 백성의 본보기이다. 근래에 듣건대 감사나 절도사가 3품 이하를 곧바로 단죄하는 법에 근거하여 작은 잘못 때문에 매를 치기도 한다 하니, 이는 사대부를 대우하는 도리가 아니다. 지금부터 규정을 정하여 수령에게 죄가 있더라도 감사가 사안별로 보고하게 하고, 멋대로 형장을 가하지 못 하게 할 것이며, 절도사는 군무(軍務)에 관계되는 일이 아니면 감히 멋대로 단죄하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 8월. 하교하기를,
“하늘이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으로 만물을 생성하여 봄과 여름에는 키우고 기르며 가을과 겨울에는 싸늘한 기운으로 죽이는데, 성인이 이를 법삼아 덕과 예의로써 백성을 인도하고 형벌과 정령으로 징계를 보이니, 형벌이 어찌 성인이 그만둘 수 있는 것이겠는가. 그러나 사형은 사형을 없애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고 형벌은 형벌을 없애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으니, 또한 모두가 백성에게 선을 권면하여 백성들의 천성을 온전히 하고자 함이다.
우리 태조는 고려의 번거롭고 까다로운 법을 개혁하셨고, 태종은 이를 계승하여 형벌을 쓰지 않아도 되는 경지를 이루셨다. 세종은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이 어떤 왕보다도 뛰어나 일찍이 형벌을 염려하는 교지를 내리셨으며, 고금의 형옥(刑獄) 가운데 거울삼고 경계삼아야 할 10여 가지 조항을 낱낱이 채록하여 간곡히 가르치고 타이름으로써 형옥을 맡은 자로 하여금 체득하여 최선을 다하고 따라 행하게 하였으니, 세종의 마음은 곧 형벌을 삼가고 신중히 하던 순(舜) 임금의 마음이다. 문종은 삼한법(三限法)을 거듭 밝히시어 감옥에 체류되어 있는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셨으니, 대개 대한(大限)은 30일, 중한(中限)은 20일, 소한(小限)은 10일이었다. 《대전》을 참고해 보면, 당(唐) 나라의 기한은 송(宋) 나라보다 너그럽고, 우리나라의 기한은 또 당 나라보다 너그러우니, 이는 바로 세종의 성대한 뜻을 문종이 완성한 것이다. 그렇다면 형벌을 분명히 하고 신중히 하는 것은 바로 우리 조종(祖宗)의 가법(家法)이라 하겠다.
보잘것없는 내가 외람되이 큰 사업을 계승한 이후로 형벌이 맞지 않아 화기(和氣)를 손상시키고 원통한 일을 초래할까봐 밤낮없이 두려워하였다. 그런데 근래에 보건대 옥사를 다루는 관리가 잘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니, 까다롭고 난폭한 자는 항상 얽어넣는 잘못을 저지르고, 어리석고 용렬한 자는 항상 체류시키는 잘못을 저지른다. 얽어넣기를 좋아하는 자는 법을 까다롭게 적용하고 호된 고문을 가하며 억지로 증거를 끌어다대어 일체 죄목을 보태고 꾸며넣어 무고한 사람으로 하여금 억울하게 형벌을 받게 한다. 체류시키기를 좋아하는 자는 잡아 가두어둔 채 판결을 내리지 않아 걸핏하면 삼복 더위나 엄동설한을 넘기는데, 수갑과 차꼬가 몸을 조이고 굶주림과 추위가 살갗을 찔러 슬피 울부짖으며 질병을 앓다가 감옥에서 병사(病死)하게 되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이러한 뜻으로 중외에 분명히 효유하라.”
하였다.
○ 이에 앞서 창덕궁 문에 편액이 없어 출입하는 사람들이 혼동을 일으켰는데, 상이 예문관 대제학 서거정에게 명명(命名)하여 걸도록 명하였다. - 창덕궁 바깥의 동편 담장문은 선인문(宣仁門), 중간의 동쪽 담장문은 경양문(景陽門), 새 대문은 장춘문(長春門), 중간의 대문은 선명문(宣明門), 남쪽 협문(夾門)은 춘흥문(春興門), 안쪽의 동편 담장문은 건양문(建陽門), 북동쪽 담장문은 기화문(綺華門), 광연정(廣延亭) 서쪽 점문(岾門)은 평창문(平昌門), 남쪽 행랑문은 영화문(永和門), 북쪽 행랑문은 영평문(永平門), 내사복시 남문은 운금문(雲錦門), 바깥의 동쪽 산문(山門)은 연양문(延陽門), 왼쪽 협문은 광범문(光範門), 오른쪽 협문은 숭범문(崇範門), 남쪽 담장문은 단봉문(丹鳳門), 안쪽의 서편 담장문은 의추문(宜秋門), 왼쪽의 달문(闥門)은 숙장문(肅章門), 겸사복청의 새 대문은 연복문(延福門), 내사옹(內司饔) 위쪽 동문은 소춘문(小春門), 북문은 소동문(小東門), 중궁 차비문은 연희문(延禧門), 승정원 남문은 연영문(延英門), 서쪽 행랑문은 금호문(金虎門), 바깥의 서쪽 담장문은 진금문(鎭金門), 서쪽 담장문은 요금문(曜金門), 후원(後苑)의 북쪽 담장문은 공신문(拱辰門), 새 북쪽 담장문은 창합문(閶闔門), 동편 담장문은 청양문(靑陽門), 바깥의 북쪽 담장문은 광지문(廣智門)이었다. -
○ 9월. 호조가 여러 도의 곡식이 어느 정도 여물었는데도 조세가 부족하다고 하면서 다시 답험(踏驗)하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백성이 풍족하다면 임금이 누구와 더불어 부족하겠는가. 다시 답험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 10월. 상이 석강(夕講)에 나아갔다. 시독관 이맹현(李孟賢)이 아뢰기를,
“옛날에는 백공(百工)이 자신이 맡은 기예를 가지고 간언을 올렸습니다. 한(漢) 나라가 흥기함에 비로소 간관을 설치하고 모든 간언(諫言)을 간관에게 책임지웠으니, 간관의 말을 듣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즉위한 이래 7년간 어찌 잘못한 일이 없었겠는가. 그런데도 아직 바른말을 듣지 못했다. 그러므로 하루에 세 번 신하들을 접하는 것은 대개 바른 논의를 듣고자 함이니, 만약 할 말이 있으면 다시는 숨기지 말라.”
하였다.
○ 하교하기를,
“국가에 있어서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우리 세종께서 박연(朴堧)에게 명하여 종(鐘)과 경쇠[磬]을 제정하여 율려(律呂)에 맞추도록 하셨는데, 음악이 이로 인해 크게 갖추어지게 되었다. 그러고도 오히려 오랜 시일이 지나면 차질이 생기게 될 것을 염려하여 문신 가운데 자질을 갖춘 자를 선발해서 악학(樂學)에서 벼슬하며 율려를 강구하여 그 업을 정밀히 하게 하였다. 세조께서는 더욱 음악을 중시하여 악과(樂科)를 설행하여 반드시 완성하도록 요구하려 하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악이 풍화(風化)에 크게 관계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 영인(伶人)의 일이라고 하며 천히 여겨 시험에 응시하려 하지 않고 있다.
나는 조종의 아름다운 뜻에 부합하지 않는 바가 있어 성악(聲樂)의 유법(遺法)이 끝내 이즈러지거나 없어지게 될까봐 염려해왔다. 그러므로 조관(朝官) 가운데 음률에 밝은 사람을 가려 뽑고, 아울러 권면하는 조건을 만들었으니, 이대로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박효원(朴孝元), 김지(金漬), 성현(成俔), 채수(蔡壽), 임흥(任興)을 승문원의 예에 따라 장악원 겸관(兼官)으로 차임하여 장악원에 나아가 음악을 익히게 하였다.
○ 상이 전 세상의 명철한 임금과 어리석은 군주가 행한 선악의 사적(事蹟)을 모은 다음, 화공에게 명하여 병풍에 그리게 하고, 사신(詞臣)으로 하여금 시를 지어 그 위에 쓰게 하였다. 그리고는 앉거나 눕거나 항상 보면서 선을 권면하고 악을 경계하였다.
○ 평안ㆍ영안 두 도에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을 하사하여 배우기를 원하는 유생들로 하여금 익히게 하도록 명하였다.

 
국조보감 제2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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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종조 1
6년(신해, 1551)

○ 2월. 하교하기를,
“내가 구황어사(救荒御史)를 팔도에 보내고 싶다만, 지난 무신년에 어사를 보내었으나 백성들이 실질적인 혜택을 입지 못하고 단지 접대하는 폐단만 있었다. 그러니 각도의 도사(都事)로 하여금 하인을 단출히 해서 민간을 출입하며 마음을 다해 구황하도록 하라.”
하였다.
○ 10월. 예조에 하교하기를,
“《소학(小學)》은 바로 인륜을 밝히는 책이다. 사람이 8세가 되면 모두 소학(小學)에 들어가게 되어 있었는데, 얼마 전 기묘년 이후로 선비들이 이 책을 즐겨 보지 않게 되었다. 자제들만 익히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부형들도 가르치지 않는 실정이니,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법이 바르지 않아 사람의 마음이 착하지 않게 되었다. 지금부터 유학(幼學)의 선비로 하여금 먼저 《소학》을 익히게 함으로써 성현이 가르침을 세운 법을 알아서 덕에 나아가고 학업을 닦는 근본으로 삼게 하라. 소학을 가르치는 절목을 상세히 찬정(撰定)하여 중외에 분명히 알리도록 하라.”
하였다.
○ 아악에 쓰여지는 종(鐘)과 경쇠[磬]를 교정하기 위하여 청(廳)을 설치하였다. 우참찬 안현(安玹)으로 하여금 그 일을 관장하게 하고, 생원 조성(趙晟)을 불러 부직(付職)하여 교정하게 하였다. 이때 지경연사 정사룡(鄭士龍)이 상에게 아뢰기를,
“음악은 신명(神明)을 이르게 하는 것이니, 반드시 음악이 잘 조화되어야만 신이 복을 내려주는 법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악에 쓰여지는 종과 경쇠가 대부분 유실되고 남아 있는 것도 새긴 부분이 닳아버렸으니, 이것을 가지고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면 어찌 신이 이르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지금의 종과 경쇠는 모두 세종조에 박연(朴堧)이 만든 것인데, 옛것을 바탕으로 해서 교정한다면 일하기가 수월할 것입니다. 안현은 지혜롭고 사려가 있으며, 조성은 율려(律呂)와 도수(度數)의 학문에 정통한 데다가 의리(醫理)에도 통달하였습니다. 만약 안현으로 하여금 그 일을 주관하게 하고 조성을 불러 함께 교정하게 하며, 또 의사(醫司)의 관원 중 총민한 자를 선발하여 조성에게 의술을 배우게 한다면, 반드시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 말을 따라 안현과 조성에게 바로 잡도록 명하였다.
○ 11월. 염근인(廉謹人)을 초계(抄啓)할 것을 명하였다. 안현(安玹), 홍섬(洪暹), 박수량(朴守良), 이준경(李浚慶), 조사수(趙士秀), 이명(李蓂), 임호신(任虎臣), 주세붕(周世鵬), 김수문(金秀文), 이몽필(李夢弼), 이세장(李世璋), 이영(李榮), 김순(金珣), 전팽령(全彭齡), 홍담(洪曇), 성세장(成世章), 윤부(尹釜), 윤현(尹鉉), 윤춘년(尹春年), 정종영(鄭宗榮), 박영준(朴永俊), 오상(吳祥), 이중경(李重慶), 김개(金鎧), 임보신(任輔臣), 이황(李滉), 안종전(安從㙉), 송익경(宋益璟), 김우(金雨), 변훈남(卞勳男), 신사형(辛士衡), 강윤권(姜允權), 우세겸(禹世謙) 등 모두 33명이었다.

 

 

 

 

東文選卷之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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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五言律詩
雙韻蓮花回文體。幽居作。幷序。 [朴堧]

古人回文詩有十字體,璇璣體,玉連環體,錦纏枝體。各有別㨾體例。今予不襲古轍。別作五言四韻詩二篇。畫作蓮花之狀。寄意於君子。名之두001蓮花回文云。
獨處甘遺逸。安身一小園。谷盤宜陋室。灣細近靑尊。竹翠棲明月。山靑冠白雲。學仙心切切。難事世紛紛。
獨居幽興逸。安分守林園。谷密藏頹室。灣澄映臥尊。竹踈篩淡月。山遠出閑雲。學道勤磨切。難哉解錯紛。


 

 

 

 

海東雜錄[一]○權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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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本朝[一]
朴堧

永同人。我太宗朝登第。精於律呂。英廟制雅樂。堧實主之。官至大提學。有孝行旌門。我英廟嘗作石磬。使堧校正。堧曰。某律高一分。某律低一分。更視之。則高律有渣滓泥。英廟命剔滓泥一分。又於低律。更付渣泥一分。堧啓曰。今則律定矣。人服其神妙。 叢話 後以子之故。罷歸鄕曲。匹馬一僮。行裝蕭索。親朋餞于江上。公自少善吹笛。抽笛三弄而行。聞者莫不悽感。 同上 作蓮花回文軆云。古人有璿璣回文軆。別作五言四韻。如蓮文之狀。名曰蓮花回文云。獨處甘遺逸。安身一小園。谷盤宜陋室。灣細近淸樽。翠竹棲明月。靑山冠白雲。學仙心切切。難事世紛紛。 我英廟得秬黍於海州。朴堧以蠟燃成秬黍。粒形差大。積分成管。以一粒爲一分。累十粒爲一寸。法以九寸黃鍾之長三分損益。以成十二律。作編磬。 勝覽 新造編磬。夷則一枚。其聲不諧。堧審視曰。限墨尙未盡磨也。卽磨之。墨盡而聲乃諧。 寶鑑

 

 여지도서
忠淸道
永同
壇廟 文廟 在縣東一里 원주 社稷壇 在縣西一里 원주 城隍壇 在古邑城南 원주 厲壇 在縣西一里 원주 草江書院 在縣西十五里大草旨以中樞院事大提學 蘭溪 朴堧 挹淸 朴嗣宗 忠顯公 野隱 宋時榮 文正公 尤庵 宋時烈 文正公 八松 尹煌 習靜 宋邦祚 桑村 金自粹竝享爲 원주 花巖書院 在縣西一里以節慶使 栢冶 張弼武 老孝子 朴忍高麗賢臣文顯公 張沆本朝 贈參議 菊堂 朴興生 贈參議 張智賢竝享焉 원주 盧侯祠 在鄕校東永樂乙未盧興來守此邑爲政淸簡務在興學其時鄕校凋弊僮僕零星 廟庭灑掃享時使喚殆甚苟艱興

<020_01_0361-4>

憫之以其藏獲十餘口許屬於校以爲永世儒宮之婢僕邑之章甫追思其尊聖崇儒之功立祠校側春秋以祀焉 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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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계서원

 

 

 

 

 

 

 

 

 

 

 
외집 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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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수각의 기지(籠水閣儀器志)
황종고금이동지의(黃鍾古今異同之疑)

천지는 옛과 같고, 만물(萬物)도 옛과 같다. 그런데 황종(黃鍾)은 유독 옛과 합하지 못하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세상에 여론이 황종(黃鍾)을 구하는 것이 많다. 대개 세 가지의 어려움이 있다. 하나는 심성(審聲) 즉 음성(音聲)을 심사하는 것이고 둘째는 후기(候氣)이며, 셋째는 유서(絫黍) 즉 기장을 싸는 방법의 3가지 난점(難點)이 있다. 정률(定律)로서 관(管)의 장단(長短)이 결정되며 만약 장단(長短)의 기준(基準)이 없으면 후기(候氣)가 없으며 후기(候氣)가 부정(不情)하면 심성(審聲)이 없어진다. 그런데 이 소리[聲]는 진실로 자연적으로 천지의 사이에 있는 것이니, 또 어찌 고금(古今)의 차이가 있을 것인가? 다만 현제의 사람들의 총명(聰明)이 옛과 같지 못할 뿐이다.
대체로 사람 소리는 자연히 5음성(音聲)을 갖추고 있고 주수 비금(走獸飛禽)의 울음 소리도 역시 모두 율(律)에 협화(協和)함으로써 아음(牙音)ㆍ치음(齒音)ㆍ순음(唇音)ㆍ설음(舌音)ㆍ후음(喉音)은 모두 사람 목소리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다. 그리고 소의 울음소리와 꿩의 울음소리는 모두 금수(禽獸)에 의거하여 그들 사이의 말이다.
하필 멀리 태고(太古)에서 구하며 가까이는 가장 쉬운 모든 곳에서 택하면 가히 협화(協和)할 수 있다. 비록 그러하나 사람과 만물이 오직 그 형상(形象)에 국한(局限)할 뿐이다. 원래 자연의 진성(眞聲)이 있다면 어떠한 것인가?
주역(周易)에 ‘지뢰복(地雷復)이라 하고’ 또 ‘뇌출지분(雷出地奮)이 예(豫)니 선왕(先王)이 그것을 본받아 악(樂)을 만들어 …… ’라고 하였다. 양기(陽氣)가 싹터서 은은(殷殷)히 움직이다가 7일 만에 되돌아와서 격팔(隔八)에 협찬(叶贊)하며
[참고] 격팔(隔八)이라고 말함은 임종(林鍾)과 황종(黃鍾)까지가 8개로 간격되어 있음을 말한다.
또 다시 작악(作樂)의 상(象)이 있게 된다. 그러면 황종의 진(眞)을 구하며, 뇌(雷)성에 얻는 것이 가하다. 장자(莊子)가 말하기를 ‘지뢰(地賴)는 중규(衆竅)를 말함이요 인뢰(人籟)는 비죽(比竹)을 말함이다. 저 대지가 트림하는 것을 바람이라 이름한다.’고 했다. 그것이 골짜기에 있으면 골짜기를 채우고, 구덩이에 있으면 구덩이를 채운다면 비죽(比竹)에 인(因)해서 황종(黃鍾)을 구하는 것은 바람에서 얻는 것도 역시 가하다.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음양(陰陽)이 편의(偏倚)한즉 풍(風)이 되고 음양(陰陽)이 구존(俱存)하면 뇌(雷)가 된다.’ 하였다.
대체 황종(黃鍾)의 시(始)는 음이 소진(消盡)하고 양이 일어나는 것인즉 음양의 편의(偏倚)에서 이를 구함이 가할 것인가? 실지로 율려(律呂)의 머리인즉 음양의 구감(俱感)에서 이것을 구함이 가할 것인가? 이것이 소위 심성(審聲)의 가장 어려움이다.
[참고] 심성(審聲)이라고 말함은 황종의 소리를 찾는 것을 말함.
또 기(氣)를 조사하는 법은 지금은 진실로 옛과 같지 않다. 그러나 조사하기는 옛과 지금과 같다. 그러나 지세(地勢)의 고하(高下)가 있고 또 토성(土性)의 소밀(疎密)이 있으므로 조사한 것 또한 경우에 따라 다르다. 대체로 물도 또한 기(氣)다. 물이 미락(未落)하였는데, 기는 이미 소멸(消滅)되며 초목(草木) 역시 기(氣)이다. 이 초목이 아직 시들지 않았는데 저 기(氣)는 이미 기울게 된다. 그 기의 응함이 진실로 조만(早晩)과 선후(先後)가 있으니 건조(乾燥)가 습(濕)함을 논(論)하지 않고 단지 황종(黃鍾) 9촌(寸)을 기준(基準)으로 한다면, 어찌 이것이 미승(未升)하였는데 기(氣)는 벌써 응(應)하는 일이 없겠는가?
[참고] 미승(未升)이라는 말은 기가 아직 상기하지 아니하였다는 뜻. 즉 승기(升氣)하지 아니하였다는 뜻이다.
비록 많이 절죽(截竹)을 하여 동지(冬至) 절(節)에 실험을 하여 살펴본다 하여도 역시 토성(土性)의 알맞음을 기필할 수 없겠거늘 하물며 중국(中國)은 천하의 1/100이며 게다가 적도(赤道)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니, 영천(穎川)ㆍ양성(陽城)이 어찌 천하의 가운데라고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이 지역(영천ㆍ양성)에서 조사한 기가 어찌 호홀도 틀리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
[참고] 영천(穎川), 양성(陽城)은 모두 중국의 지명이다.
하물며 척(尺)이 길면 입지(入地)가 깊으므로 기(氣)가 쉽게 얻어지고 척이 짧으면 입지가 얕으므로 재[灰]가 날리기 어려운 바, 《수지(隋志)》에 ‘위(魏)의 두기(杜虁)가 후한(後漢)의 척(尺)을 써서 율(律)을 만들었다.’고 하였으니, 척(尺)이 긴데도 재가 날리지 않음은 어째서인가? 이것이 이른바, 기를 조사하기란 어렵다는 것이다.
대저 성기(聲氣)의 원(元)을 갑자기 찾을 수 없으니 만큼, 황종의 진(眞)을 한갓 유서(絫黍)에 일임하므로 고금이 맞지 않음이 여기에서 더욱 심함이 된다. 기장은 사실 천지간의 일물(一物)이다. 어찌 고금이 다르리오마는 세월은 흉ㆍ풍이 있고, 땅은 기름짐과 매마름이 있으며 산출은 대소가 있어 경우에 따라 일정치 않으니, 기장으로써 율(律)을 정한 옛사람의 방법이 역시 좋지 못하다. 더구나 천년 뒤에 일정치 못한 낡은 법으로 말미암아 자연의 정성(正聲)을 구하려고 한들 되겠는가? 난계(蘭溪) 박연(朴堧)은 우리 나라에서 음률을 알기로 일컬어졌다. 그의 말에 ‘역대 음률 제정에 있어 기장을 쓰는 것이 일정하지 못하여 그 높이가 서로 어긋난다. 오늘날 중국이나 우리 나라의 기장이 그 어느 것이 표준 기장인 줄을 알 수 없다. 만약 중국에 맞지 않을 경우엔, 우선 임시 방편을 좇아 다른 기장을 쓰고 그 합함[協]을 중국 황종에서 구해야 한다.’고 하였다.
나의 생각으론, 중국이나 우리 나라의 기장 중 어느 것이 옳은 것인 줄 모른다면 하필 억지로 중국의 황종(黃鍾)에 합함을 구할 것인가? 다만 우리 나라의 황종에 말미암아서 율수(律數)를 밝히되 삼분손익(三分損益)에 십분 정심(精審)한다면 또한 일국(一國)의 정음(正音)에도 해로울 것이 없겠다고 여겨진다. 또 ‘한(漢)의 기장이 옛것에 가깝고, 수(隋)의 기장은 맞지 않으며, 송(宋)의 기장 역시 맞지 않는다.’는 설은 아마도 의심스럽다.
대저 고금(古今)의 기장이 일정하지 않다는 것은 진실로 그렇겠거니와 황종이 송(宋)에 이르도록 변치 않고 그대로 존재하였겠는가? 온공(溫公)과 촉공(蜀公)은 어찌하여 여기에서 음률을 구하지 않고 기어이 일정치 못한 기장을 써서 평생토록 시비를 결정짓지 못하고. 마치 송사(訟事)하듯 하려 했겠는가? 우리는 여기에서, 옛 황종의 제도가, 송대에 이르러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또 거문고의 줄로 말해도 그렇다. 궁현(宮絃) 81사(絲)의 올의 굵기가 저 기장의 크기가 일정하지 못함과 무엇이 다르랴? 만약 궁현(宮絃)을 인(因)해서 옛 황종의 협(協)을 구하려면 81사(絲)로써 기준을 삼을 수는 없으며, 부득이 그 수에서 더하거나 빼거나 하여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참 황종을 얻기 어렵고 보니, 설령 사광(師曠)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아마 여기에 말미암아서 삼분손익(三分損益)의 정밀을 구할 수밖에 없으리라. 어떤 이는 말하기를 ‘황종의 정률(正律)은 고사하고, 설사 맨 끝의 중려(仲呂)라도, 진품(眞品)만 얻어서 그것에 좇아 12로써 손익(損益)한다면 어찌 황종(黃鍾)의 정성(正聲)을 얻지 못하리오.’라고 하였으나, 이러한 설이 근사할 듯하지만, 지금 이를 논하건대, 그 손익(損益)이 또한 어렵다. 남려(南呂) 이하를 지분(之分)할 즈음에 능히 차이가 나지 않겠는가?
가사 고율(古律)을 얻을 수 없는 것이고 오직 기장만은 진(眞)을 얻을 수 있다 해도 역시 율(律)을 정하기는 어렵다. 완일(阮逸)은 방적(方積)을 주장했고, 방서(房庶)는 원적(圓積)을 주장하였다. 이조(李照)는 종서 누척(縱黍累尺)을 썼고, 호원(胡瑗)은 횡서누척(橫黍累尺)을 썼다. 종(縱)이면 너무 길고, 횡(橫)이면 너무 짧다. 상고컨대, 정의(精義)에 이르기를 ‘종서(縱黍) 81은 횡서(橫黍) 100에 해당한다. 99개를 쌓으면 곧 율척(律尺)을 내고 10으로써 이루면 곧 척도(尺度)를 낸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종서정률(縱黍定律)이 나은 듯하지마는 불가불 9분으로 촌(寸)을 삼아야 한다. 대개 율분(律分)의 분(分)은 도분(度分)의 분과는 다르거늘 이문리(李文利)ㆍ구구사(瞿九思) 무리가 끝내 십분 촌법에 전념했음은 어째서인가? 만약 90분(分)을 13으로 곱하여 1,170개가 되고 남은 기장이 오히려 30개가 된다면, 1분(分)의 기장 용량은 {13과1/3}개가 된다. 그런데 1/3개라면 벌써 기장의 온전한 낱이 아니니, 어떻게 누적(累積)할 수 있는가? 더구나 공손숭(公孫崇)은 12개의 기장으로써 촌(寸)을 삼았고, 유방(劉芳)은 10개의 기장으로 촌을 삼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것이 이른바, 기장을 쌓아서 길이를 정한다는 것이 어렵다는 점이다.
대저 기장을 쌓는 법은 종이냐 횡이냐를 정하기가 어렵고, 기후[氣]를 조사하는 법은 습도에 따라 달라진다. 기ㆍ수(氣數)가 한번 내려서 대아(大雅)가 이미 되돌아올 수 없다면, 부득이 오늘날의 악기를 가지고 황종(黃鍾)의 정음(正音)을 구할 수밖에 없다.
대저 8음 가운데 금음(金音)이 머리가 되고 12율 가운데 황종이 본(本)이 되니, 당연히 금음(金音)으로써 황종을 구해야 한다. 또 악기 가운데 종(鍾)은 바로 금속이니 12에 기인하여 삼분손익(三分損益)을 엮는다면, 그 진율(眞律)을 구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편종(編鍾)의 제도에 의심할 만한 것이 다섯 가지가 있으니 비록 합률(合律)만을 구한다고는 하지만, 어찌 일정한 제도가 없겠는가? 당향(唐鄕)이 제조한 것을 보면, 혹 큰 것은 동이나 항아리만하고 작은 것은 방울이나 목탁만하니, 옛적에야 어찌 이럴 리가 있었겠는가? 이것이 첫째 의문이다.
살피건대, 문헌통고(文獻通考) 악서(樂書)에 이르기를, ‘종(鍾)의 제도는 길면 〈소리가〉느리면서 멀리 퍼지고, 짧으면 빠르면서 가깝게 울린다.’ 하였다. 이것으로 보면 반드시 옛 제도를 따르지 않고 오직 길거나 짧은 것에만 유의했던 것이니, 이것이 둘째 의문이다.
우리 나라의 종의 제도를 악사(樂師)에게 물었더니, 이르기를, ‘기다란 한 모양의 16매(枚)를 만들어 내놓은 다음 차차로 그 속을 깎아서 율(律)을 구(求)한다.’고 한다. 만약 그렇다면 어찌 꼭 자[尺]로 재고 저울[衡]로 달아야만 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것이 셋째 의문이다.
무릇 종이란 것은 위는 간(干), 중간은 마(劘), 아래는 순(唇)이라 한다. 순(唇)의 제도는 밋밋하거나 [伸直] 밖으로 굽거나[外反] 안으로 굽거나 [內曲]하는데, 어찌 일정한 제도가 없겠는가? 이것이 넷째 의문이다.
삼분손익(三分損益)의 법은 태족(太簇)으로부터 남려(南呂)를 내는데, 촌(寸)은 두고, 나머지 다하지 못할 수는 제외한다. 율려정의(律呂正義)에 이르기를, ‘태족(太簇) 8촌(寸) 삼분손일(三分損一)한 이하에 남려(南呂)를 내는데, 5촌(寸) 3분(分) 3리(釐) 3호(毫) 3사(絲) 3홀(忽) 3미(微) 3섬(纖)하고 조금 더[有奇] 얻는다.’ 하였다. 이미 ‘조금 더’라고 하였고 보면 2사(沙) 이하 나머지는 버렸던 것을 알 수 있으니, 어찌 전율(全律)이라고 할 수 있겠으며, 또한 어찌 차례를 빼앗기는 탄식이 없겠는가? 이것이 다섯째 의문이다.
만약 분법(分法)을 써서 덜거나 보태거나 한다면 원만하게 다하여 남음이 없으리니, 그것이 더욱 오래갈수록 더욱더 정밀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이는 이르기를, ‘종의 제도에 있어서 주조(鑄造)하는 것이 깎아 만드는 것보다 낫다.’고 하는데, 아마 이 말은 동(銅)으로 주성(鑄成)하고 또한 율관(律管)의 장촌푼손익(長寸分損益)에 의하여 제작을 한다면 비록 장단(長短)의 일정하지 못함은 있을지라도 율(律)을 구하는 데는 편리할 듯하다는 것을 일컫는 것이리라.
일찍이 연중(燕中) 사람의 주종(鑄鍾)하는 것을 들으니 ‘장차 황종(黃鍾)을 만드는 자가 다 만들어 짐에 미쳐 실수하여 협종(夾鍾)이 되었다. 주공(鑄工)이 이르기를, 「만약 알맞지 않거든 마땅히 구리쇠[銅]나 주석[錫]을 써서 그 속에 붙이면 그 소리를 고칠 수 있다.」 했으나, 공인(工人)의 말을 따르지 않고 그 꼭지[乳]의 예리(銳利)한 것을 긁어서 꼭지가 무디어지므로 소리가 고쳐졌다.’ 하니, 이것은 종을 마찰하는 법인 것이다. 그렇다면 긁기도 하고 붙이기도 함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인데, 우리 나라의 괄차(刮差)하는 법은 너무 고루(固陋)함에 이르지 않는 것일까?
이제 어긋나지 않는 고준(考準)이 있으니, 서양(西洋)의 거문고[琴]가 이것이다. 서양 거문고의 제도에서 두 괘(棵 현악기의 현(絃)을 괴는 기둥)는 음양(陰陽)을 나누는 것이요, 4사(絲)를 일통(一統)함은 사시(四時)를 합하는 것이요, 12현(絃)은 12월을 상징하는 것이요, 3품(品) 분배(分排)는 삼재(三才 천(天)ㆍ지(地)ㆍ인(人))를 상징하는 것이다. 근래에 2현(絃) 즉 변궁(變宮)ㆍ변치(變徵)를 더하니, 12율(律)과 4청성(淸聲)이 3품에 요연(瞭然)할 뿐더러, 또 조현(調絃)도 매우 편리하고 상생(相生)도 분명하다. 비록 홀미(忽微)의 작은 오착이 있어서 문득 산괴(散乖)하여 불합(不合)하게 된다 하더라도 기장의 크기와 줄의 굵기가 균일(均一)하기 어려운 것에는 비견되지 않는다. 지금 세상에 살며 정률(正律)을 구하려 한다면 이런 거문고를 놓아두고 어떤 것으로써 하겠는가? 대개 원(圓)이란 것은 지율(知率)로 좇아 극히 정(精)해지고, 역(曆)이란 것은 탕법(湯法)으로부터 어긋남이 없었으니, 이는 지율 양력(陽曆)의 창론(創論)이 아닌가? 거문고의 제도 역시 그때에 있었을 것이다. 반드시 평설(評說)할 자가 있으리니, 박아(博雅)의 군자(君子)에게 듣기를 희망한다.
 

 

 

 

 

 

 

 

 

 

 

 

 

 

 

 

 

 

 

 
 

 

 

 

 

 
 
 
 

 

 
 
 
 

 

 

 

 

 

 

 

 

 

 

동문선 제1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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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언율시(五言律詩)
쌍운 연화회문체 유거 작(雙韻蓮花回文體幽居作)


박연(朴堧)

옛사람의 회문시에 십자체ㆍ선기체ㆍ옥련환체ㆍ금전지체 등이 있어 각기 다른 체재가 있다. 지금 내가 옛것을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따로 오언사운시 두 편을 지어 그림으로 연꽃 모양을 그려서 그대에게 부치며 연화회문이라고 이름해 본다.

혼자 거처하여 소일함을 달게 여겨 / 獨處甘遺逸
작은 동산에 몸을 편히 하네 / 安身一小園
골짜기는 오붓하여 누추한 집에 알맞고 / 谷盤宜陋室
물굽이는 가늘게 맑은 술병 가까이 흐르네 / 灣細近青尊
대는 푸른데 밝은 달이 머물고 / 竹翠棲明月
산은 푸른데 항상 흰 구름을 갓 쓰고 있네 / 山青冠白雲
신선을 배우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 學仙心切切
어려운 일은 세상이 분분함이네 / 難事世紛紛
홀로 살아 흥이 그윽한데 / 獨居幽興逸
분수를 편히하여 숲 동산을 지키네 / 安分守林園
골짜기는 은밀하여 낡은 집을 감추고 / 谷密藏頹室
물굽이는 맑아서 누운 술병에 비치네 / 灣澄映臥尊
대밭이 성기매 담담한 달빛을 체질하고 / 竹疏篩淡月
산이 멀어 한가로운 구름을 내네 / 山遠出閑雲
도를 배우고자 간절히 수련하나 어렵구나 / 學道勤磨切
착잡한 것을 풀기가 힘드네 / 難哉解錯紛

 

 

 

 
동문선 제8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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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記)
쌍청당 기(雙淸堂記)

박팽년(朴彭年)

천지의 사이에서 바람과 달이 가장 맑다. 사람의 마음도 또한 그와 더불어 다름이 없으나 다만 형기(形氣)에 얽매이고 물욕에 더럽혀지는 까닭에 능히 그 몸을 오로지 하는 자가 적다. 대개 연기와 구름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천지가 어둑하다가도 맑은 바람이 쓸어내고, 밝은 달이 공중에 뜨면 위와 아래가 통명하여 털끝만한 점철(點綴)도 없으니, 그 기상은 진실로 형용하기 어려우나, 사람이 능히 그 마음을 온전히 하여 더럽힘이 없는 자만이 족히 감당하여 스스로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황노직(黃魯直)이 일찍이 이로써 용릉(舂陵)에 견주었고, 소강절(邵康節)도 또한 청야(淸夜)의 시가 있으니, 그 맛을 아는 자가 적음을 한탄한 것이다. 요즈음 세상에도 또한 그 낙을 아는 이가 있단 말인가.
시택(市澤) 송공(宋公) 유(愉)는 본래 옛날에 벼슬하던 사람인데, 공명을 좋아하지 않아 촌락에 물러가 산 지가 지금 30여 년이 되었다. 그 고을은 충청도 회덕(懷德)이요, 마을은 백달리(白達里)다. 거실의 동쪽에다 사당을 지어 선세(先世)를 받들고, 몇 이랑의 밭을 두어서 제사의 찬수에 이바지하며, 사당의 동쪽에 따로 당(堂)을 세워 모두 7칸인데, 중간을 온돌로 만들어 겨울에 적당하게 하고, 바른편 3칸을 터서 대청을 만들어 여름에 적당하게 하고, 왼편 3칸을 터서 포주(庖廚)와 욕실(浴室)과 제기(祭器)를 저장하는 곳을 따로따로 만들어 단청하고 담장을 둘렀는데, 화려해도 사치하지 않았다. 매번 시사(時祀)나 기일(忌日)이 되면, 공은 반드시 심의(深衣)를 입고 그 당에 들어가 재계하고, 공경과 정성을 다하며, 모든 제사에 대한 범절은 한결같이 예경(禮經)을 준수하고, 또 명절을 만나면 반드시 술을 마련하고 손님을 청하여 혹은 시를 짓고 혹은 노래하여, 향당(鄕黨)의 환심을 흡족히 하였으며, 만년에 선학(禪學)을 좋아하여 그 마음을 담박하게 갖고 사물에 구애되지 아니하였으니, 대개 그 성품이 고명하여 명리(名利)를 무시한 것이다.
중추(中樞) 박연(朴堧)공이 그 당을 쌍청(雙淸)으로 편액하여 시를 짓고, 안평대군(安平大君)이 또한 따라서 화답하였다. 나는 듣고 옷깃을 여미며 말하기를, “쌍청의 설이 이것인가. 백이(伯夷)는 성인의 맑은 자인데, 공은 백이의 바람을 듣고 흥기한 것이었던가. 대개 바람은 귀로 듣고 달은 눈으로 보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마다 두 물건의 맑음을 알면서도, 자기 마음속에 그것을 부러워하지 않을 만한 것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 그 아는 자를 알지 못하는 자와 더불어 견줄 수 없다는 것을 알겠는가. 지금 공의 선영을 받드는 정성과 손님을 즐겁게 하는 흥취를 보건대, 그 스스로 즐기는 취미를 알 수 있다. 그러나 호상(濠上)에서 고기를 구경하는 낙(樂)은 장자(莊子) 자신도 어째서 즐거운지 알지 못하였고, 물고기를 즐김은 혜자(惠子)도 역시 어째서 즐기는지 알지 못하였는데, 내 어찌 감히 그 한구석인들 엿볼 수 있겠는가. 공의 영윤(令胤) 주부(主簿) 계사(繼祀)는, 내가 자기 말속(末屬)에 있다는 것으로써, 졸렬한 문장을 더럽게 여기지 않고 기를 쓰게 하므로, 그 말을 듣고 기록한다.” 하였다.


 

 서(序)
악학궤범 서(樂學軌範序)


성현(成俔)

음악은 하늘에서 나와서 인간에 붙어 있는 것이며, 공허한 데서 출발하여 자연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으로 느껴서 출렁거리며, 혈맥이 유통하고 정신을 기쁘게 만드는 것이다. 느낀 바가 같지 아니하기 때문에 소리도 같지 아니하다. 기쁜 마음으로 느낀 것은 퍼져서 흩어지며, 성난 마음으로 느낀 것은 거칠고 사나우며, 슬픈 마음으로 느낀 것은 오그라지며 낮고, 즐거운 마음으로 느낀 것은 너그러우며 느리다. 그 모든 고르지 못한 소리를 융합하여 하나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임금이 그를 어떻게 지도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다. 지도하는 데는 그르고 바른 것이 다르며, 풍속이 좋아지고 나빠지는 관계가 여기에 매여 있다. 이러므로 음악의 도가 정치와 교화에 크게 관계가 되는 것이다. 오제(五帝)의 음악을 가지고 말한다면 당우(唐虞)보다 더 훌륭한 적이 없으나 오로지 후기(后夔)의 협조에 의존하였고, 삼왕(三王)의 음악을 가지고 말한다면 주대(周代)보다 더 갖추어진 적이 없으나 모두 주공(周公)의 제작에 맡겨두었다. 그 당시에 시설한 방법이 전(典 요전(堯典) 순전(舜典))ㆍ모(謨 대우모(大禹謨) 고요모(皐陶謨))ㆍ주례(周禮)의 책에 모두 나타나 있다. 이것은 모두 예악(禮樂)을 앞세우고 형벌은 뒤로 돌리어 교화를 일으킨 것이다. 그러므로 사방에서 바람이 부는대로 움직이는 효과를 나타낸 것이니, 40년 동안 형벌을 중지한 높은 정치를 이룬 것이다. 세상의 교육이 쇠퇴하면서부터 순함이 흐려지고 질박함이 흩어져서 오로지 형벌을 가지고 정치를 보좌하여, 법을 맡은 관리는 소중히 여기며 예악을 다스리는 학자는 천하게 여기어, 이른바 선왕(先王)의 음악이란 것은 남김없이 없어지고, 숭상하는 것이 모두 음탕하며 경박한 풍조로 흘러서 정(鄭)ㆍ위(衛)ㆍ상간(桑間)ㆍ박상(濮上)의 〈음란한〉 음악이 되고, 흩어져서는 진(陳)ㆍ초(楚)의 무당의 풍속으로 변해 가지고 마침내는 정치를 어지럽히는 전철(前轍)이 서로 계속되다가 타락하여 서로 멸망하게 된다. 비록 장홍(萇弘)이나 사광(師曠)의 밝은 청력(聽力)이나, 계찰(季札)과 공자와 같은 위대함으로도 구제할 수 없게 되었다. 한(漢)이 일어나자 숙손통(叔孫通)이 불에 타고 없어진 나머지에서 수습하여 가까스로 예의(禮儀)를 만들었으나, 음악에 대하여는 곧 진(秦)의 옛 악장(樂章)을 그대로 사용하여 다만 조정에서 사용하는 악장만을 만들었고 아직 그 근본 원칙을 포괄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문제(文帝)는, “미처 손을 대지 못했다.” 한 말이 있었다. 무제(武帝)는 비록 뜻은 가졌지만 협조할 사람이 제대로 갖추어 있지 못하여 연년(延年)은 방중(房中)의 가사를 지었으나 마침내 정중한 음악이 되지 못하였고, 경방(京房)은 60의 율(律)을 창작하였으나, 부회(附會)한 학설임을 면치 못하였다. 진(晉)의 순육(荀勗)ㆍ장화(張華)와 진수(陳隋)의 정(鄭)ㆍ택(澤)ㆍ우홍(牛弘)과, 당(唐)의 조효손(祖孝孫)과 송(宋)의 화현(和峴)ㆍ진양(陳暘)과 같은 사람들이 시대마다 없은 적이 없어서 그 음악을 제정하였으나, 그 하나만을 알고 그 둘은 알지 못하여 다만 지엽 문제를 다루었고, 그 근본 원리는 힘쓰지 아니하였으니, 이것을 가지고 음악의 도의 묘리를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오직 채원정(蔡元定)의 책이 깊이 율려(律呂)의 기본 원리를 얻었으니 그 근본을 알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나, 이것은 손가락에 옮기어 음율에 맞추지 못하였으니 호미만 가졌지 갈고 매는 방법을 모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음악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며, 음악이 저절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없어지는 것이다. 함영(咸英)과 소호(韶濩)의 음악을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는 것은 그 시대가 평화로왔던 것이요 음악의 공이 아니며, 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을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는 것은 당시 임금이 방탕했기 때문이요 음악의 죄가 아니다. 오직 우리 나라는 삼한(三韓)이 나누어 나라를 형성했을 때부터 나라마다 음악이 있었다. 그러나 악기가 갖추어지지 못했고 소리가 부족함이 많은데다가 오랑캐와 말갈족(靺鞨族)의 작품이 섞여 있었으니 누가 이를 바로잡을 사람이 있었으랴. 고려 중기에 이르러 송(宋)의 황제가 태상시(太常寺)의 음악을 보내주었고, 우리 왕조에 이르러 명(明) 나라에서 궁중에 간직한 것을 내려주었다. 이로 말미암아 경(磬)관(管)ㆍ생(笙)ㆍ우(竽)ㆍ금(琴)ㆍ슬(瑟)의 악기가 또 갖추어졌다. 공손히 생각하옵건대 세종대왕께서는 하늘이 내신 성인으로 음률에 정통하였다. 과거의 조속한 습관을 씻으려 하였더니, 거서(巨黍)가 해주에서 산출되고 채석(彩石)이 남양(南陽)에서 나왔으니, 이것은 하늘이 화평한 기운을 우리 나라에 펴서 큰 일을 하실 임금에게 내려주시어 새로운 제작을 이루게 한 것이다. 그리하여 서(黍)를 가지고 음률의 계정(階程)을 측정하고 돌로 경을 만들고, 또 악강(樂腔)을 만들고 악에 인하여 악보(樂譜)를 만들어서 음정의 장단을 살피었다. 당시에 음악을 관장한 사람으로는 박연(朴堧) 한 사람뿐이었다. 그러나 박연이 알고 있는 지식은 겉껍질뿐이니 어찌 임금께서 생각하는 만분의 일이라도 도움이 되었겠는가. 찬조하였음에 지나지 않았을 따름이었다. 세조대왕께서는 더욱 음악에 정통하여 가곡(歌曲)을 많이 지었고 또 능히 예(禮)와 악(樂)을 만들어 이루어서 종묘(宗廟)에 받치었으니, 그의 제작하는 왕성한 방법은 선왕의 뜻을 따를 것인데, 다만 당시에는 이를 찬조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이것이 탄식할 일이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는 성인으로 성인을 계승하시와 우러러 이루어 놓으신 법전을 따르시며, 과거의 성인이 미처 발명하지 못한 것을 발명하였으니, 태평 시대에 예악을 진흥하실 수 있는 시기가 바로 이때이다. 장악원(掌樂院)에 간수된 의궤(儀軌 의식(儀式)의 절차)와 악보가 세월이 오래 지나는 동안에 모두 해어지고 떨어져 나가고, 다행히 남아있는 것도 모두 소략(疏略)하고 잘못되고 절차가 빠진 것이 많았다. 마침내 무령군(武靈君) 유자광(柳子光)과 신 현(俔)에게 명하시고, 주부(主簿) 신말평(申末平)ㆍ전악(典樂)인 신 박곤(朴棍)ㆍ신 김복근(金福根) 등에게 명을 내리어 다시 교정을 더하여 먼저 음률을 만든 원리를 말하고 다음에 음률을 사용하는 법을 말하였으니, 대개 악기와 부속품의 형체와 그것을 제조하는 방법과 춤추는 것과 그 대열과 전진하며 후퇴하는 절차가 구비하여 기록되지 않음이 없다. 책이 완성되어 《악학궤범(樂學軌範)》이라고 이름지었다. 신이 그윽히 생각하옵건대, 대개 오음(五音)과 십이율(十二律)은 음악의 근본이다. 물건이 생기면 감정이 있으며 감정이 발하면 음(音)이 된다. 음은 다섯 가지가 있어서 오행(五行)에 나누어 배정되어 있는데, 관(管)이 길고 짧은데 따라서 소리[聲]의 맑고 흐림이 생긴다. 율(律)은 열둘이 있어 12월에 나누어 배정되어 있는데, 음과 율이 서로 어울려서 오르내리며 줄이고 보태고 하여 그 무궁한 활용을 여덟 가지의 악기에 의탁하는 것이니 어느 것이나 모두 이런 방법에 의한다. 노래는 말을 길게 하여 음률에 조화시키는 것이며, 춤이란 여덟 방향의 바람을 따라서 그 음절을 맞추는 것이니, 이는 모두 하늘에서 법을 받은 것이요, 사람의 지혜에 의하여 마련된 것이 아니다. 하늘과 땅의 중화(中和)를 얻으면 곧 바르게 되어 그의 본체의 모양을 얻게 되며, 혹 그 중화를 잃으면 곧 사람의 마음이 너무 넘치어 간사에 흘러서 이내 두 가지의 변음(變音)은 그 참됨을 소모하게 되며, 네 가지의 맑은음[四淸]은 그 근본을 빼앗기게 되어 임금과 백성, 일과 물건의 구별이 문란하여 진다. 그러나 소리에 변음과 청음(淸音)이 있음은 음식이 짜고 싱거운 것이 있는 것과 같아서, 오로지 큰 국[大羹]과 현주(玄酒)의 맛만을 쓸 수 없고, 다만 바른 소리가 언제나 주(主)가 되어 능히 변음을 견제하여 중화(中和)의 기운에 어그러지지 않게 하면 된다. 우리 나라의 음악은 세 가지가 있으니 아악(雅樂)ㆍ당악(唐樂)ㆍ향악(鄕樂)이다. 제사지낼 때에 사용하는 것도 있으며, 조회와 연회에서 연주하는 것도 있으며, 시골에서 우리 나라의 말로 연습하는 것도 있는데, 그 중요한 것은 일곱 가지의 운(韻)과 열두 가지의 율에 불과하다. 대개 재주의 정도가 고르지 아니하므로 음악을 아는 데도 어렵고 쉬움이 있다. 실기에 능한 사람은 음절에서 서투른 수가 있으며, 음절에 능한 사람이 그 원리를 모르는 수가 있다. 그 한 부분을 아는 사람은 비록 많으나 전체를 다 알아서 환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대개 적으니, 심하도다, 음악의 어려움이여, 좋은 소리가 귀에 지나치면 곧 없어지며, 없어지면 곧 형적이 없는 것이니, 그림자가 형체가 있을 때에는 모여들고 형체가 없어지면 흩어지는 것과 같다. 만일 악보가 있으면 음정의 장단을 알 것이요, 그림이 있으면 악기의 형태를 알 것이요, 문헌이 있으면 처리하는 방법을 알 수 있을 것이니, 이러한 연유로 신의 무리가 비루하고 졸렬함을 헤아리지 않고 이것을 편찬하게 된 것입니다.


 

[주D-001]정(鄭)ㆍ위(衛) : 《시경(詩經)》의 국풍(國風) 가운데에 있는 정풍(鄭風)과 위풍(衛風)이니, 여기에는 음란한 시가 많이 있다.
[주D-002]장홍(萇弘) : 주나라 경왕(敬王) 때의 대부이며 공자(孔子)가 그에게 음악을 배웠다 한다. 《孔子家語 觀周篇》
[주D-003]연년(延年) : 한 무제(漢武帝)의 신하인 이연년(李延年)으로 음악을 잘하여 협율도위(協律都尉)가 되었다.
[주D-004]채원정(蔡元定) : 송(宋) 나라의 학자이며 《율려신서(律呂新書)》를 지었다.
[주D-005]함영(咸英)과 소호(韶濩) : 함지(咸池)는 황제(黃帝)의 음악이며, 육영(六英)은 제곡(帝嚳)의 음악이다. 소(韶)는 순(舜)의 음악이며, 호(濩)는 탕(湯)의 음악이다.
[주D-006]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 : 진(陳) 후주(後主)가 궁중 연회에서 부르던 악사로서 곡조가 애절하여 나라를 멸망시킨 음악이라 한다.
[주D-007]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 : 본시 인도의 음악이었는데, 당 현종(唐玄宗)이 이를 받아들여 약간 가미하여 사용하였다.
[주D-008]거서(巨黍) : 수수의 일종으로 옛적에 척도(尺度)를 제정하는 단위로 사용하여 수수알의 직경 1백을 1척으로 하여 악기를 제정하는데 준용하여 황종척(黃鍾尺)이라 하였다.
[주D-009]변음(變音) : 변궁(變宮)과 변치(變徵)를 가리킨다.
[주D-010]네 가지의 맑은 음[四淸] : 궁청(宮淸)ㆍ상청(商淸)ㆍ각청(角淸)ㆍ치청(徵淸)을 가리킨다

 

사가시집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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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류(詩類)
세종대왕(世宗大王)의 만장(挽章) 6수


하의 국운은 구가가 복종하였고 / 夏祚謳歌協
요는 역수가 돌아감을 감탄했네 / 堯咨曆數歸
건룡이 자리에 나아감으로부터 / 乾龍初在位
밝게 살핌이 정히 거듭 빛났기에 / 離照正重輝
국운은 천 년의 태평을 접하였고 / 運接千齡泰
공은 백대의 으뜸으로 추앙되었네 / 功推百代巍
어찌 알았으랴 문득 말명을 듣고 / 何知聞末命
슬피 사모하여 눈물을 뿌릴 줄을 / 哀慕涕交揮

정일함은 천인의 학문이거니와 / 精一天人學
서로 전한 건 옛 성인의 마음이라 / 相傳古聖心

어진 이 구하여 자주로 전석하고 / 求賢屢前席
간언 들이고자 스스로 맘 비웠네 / 納諫自虛襟
노인 공경함은 다 효를 인하였고 / 敬老皆因孝
형법 밝히는 덴 공경뿐이었으니 / 明刑只在欽
우리 삼한 땅 천만세에 이르도록 / 三韓千萬世
그 은택이 인심에 깊이 새겨지리 / 流澤入人深

공검으로 안일치 않은 데 처하고 / 恭儉居無逸
시종여일 근심하고 근로하면서 / 憂勤有始終
향기로운 제수로 엄숙히 제사하고 / 苾芬嚴祀事
농사일을 친히 하기도 하였네 / 稼穡卽田功
하우씨의 공부는 규모가 커졌고 / 夏貢規模大
우순의 소와는 제작이 같았으니 / 虞韶制作同
찬란한 역사의 기록들이 / 煌煌太史筆
모두 전모 속에 들어 있고말고 / 都在典謨中

한 시대에 인문은 찬란해졌고 / 一代人文煥
천 년 만에 아송 또한 밝아졌네 / 千年雅頌明
국가간 교류는 신의를 돈독히 했고 / 交鄰敦信義
대국을 섬김엔 충성을 다했거니와 / 事大盡忠誠
지리는 주 나라 강토를 회복했고 / 地理周疆復
기형은 순 임금 책력을 이루었으니 / 璣衡舜曆成
한갓 십자의 시호 올린 것만으론 / 徒崇十字號
성덕을 끝내 이름하기 어렵고말고 / 盛德竟難名

친목하는 덴 인자한 은혜가 컸고 / 親睦仁恩大
재기한 데서 성효는 우뚝하였네 / 齊虁聖孝巍
종족의 지손은 백세에 융성하고 / 宗支百世盛
하나의 화악루는 서로 빛났도다 / 花萼一樓輝
지극한 정치 삼십 년을 넘어서는 / 至治臨三紀
만기를 싫어하여 신선이 되시니 / 仙游厭萬機
상심되어라 옥좌를 바라보니 / 傷心瞻玉座
다시는 천위를 뵐 수 없게 되었네 / 無復望天威

좋은 계책을 사왕에게 전하시고 / 貽謀傳嗣聖
궤에 기대 정미한 말씀 끊어지니 / 憑几絶微言
금등의 길한 점을 쳐보지 못하고 / 未卜金縢吉
갑자기 옥책의 존호를 올리다니 / 俄崇玉策尊
출발하는 상여에 바람은 처량하고 / 風悲仙馭動
백관의 상복 위에 달빛은 차가워라 / 月冷縞儀奔
오랫동안 시종신으로 있었는데 / 侍從經帷久
이젠 성은에 보답할 길이 없구나 / 無由報聖恩


 

[주D-001]하(夏)의 …… 복종하였고 :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하 나라 우 임금이 현신 익을 하늘에 천거한 지 칠 년 만에 붕하자 삼년상을 마치고는 익이 우 임금의 아들인 계를 피하여 기산의 북쪽에 가서 숨어 있었더니, 조회하고 송옥하는 자들이 익에게 가지 않고 계에게 가면서 말하기를 ‘우리 임금의 아들이다.’ 하고, 덕을 노래하는 자들도 익을 노래하지 않고 계를 노래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임금의 아들이다.’ 했다.〔禹薦益於天七年 禹崩 三年之喪畢 益避禹之子於箕山之陰 朝覲訟獄者不之益而之啓曰 吾君之子也 謳歌者不謳歌益而謳歌啓曰 吾君之子也〕”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직접 부왕(父王)의 자리를 이었음을 의미한다. 《孟子 萬章上》
[주D-002]요(堯)는 …… 감탄했네 : 요 임금이 이르기를, “아, 순아, 천운의 역수가 네 몸에 있게 되었으니, 진실로 중도를 지키거라. 그렇지 못하여 사해가 곤궁해지면 하늘의 복록이 영원히 끊어지리라.〔咨爾舜 天之曆數在爾躬 允執其中 四海困窮 天祿永終〕” 한 데서 온 말로, 이는 곧 전왕(前王)으로부터 선위(禪位)를 받았음을 의미한다. 《論語 堯曰》
[주D-003]건룡(乾龍)이 자리에 나아감으로부터 : 《주역》 건괘(乾卦)에, “구오는 용이 날아서 하늘에 있는 것이다.〔九五 飛龍在天〕”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제왕(帝王)의 자리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주D-004]말명(末命) : 임종(臨終)의 유언(遺言)을 말한다. 《서경》 고명(顧命)에, “위대한 임금님께서 옥궤에 기대어 말명을 말씀하사, 너에게 명하여 문왕과 무왕의 교훈을 잇게 하셨다.〔皇后憑玉几 道揚末命 命汝嗣訓〕” 하였다.
[주D-005]정일(精一)함은 …… 마음이라 : 정일은 요(堯), 순(舜), 우(禹)가 서로 전수한 심법(心法)으로서, 즉 요 임금은 순 임금에게 선위(禪位)할 때에 “진실로 그 중을 잡으라.〔允執其中〕” 하였고, 순 임금은 우 임금에게 선위할 때에 “인심은 오직 위태롭고 도심은 오직 은미하니, 오직 정밀하고 전일하게 하여 진실로 그 중을 잡으라.〔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한 것을 이른 말이다. 여기의 천인(天人)은 곧 제왕(帝王)을 가리킨다.
[주D-006]전석(前席) : 한 문제(漢文帝)가 일찍이 한밤중에 가의(賈誼)를 선실(宣室)로 불러 귀신(鬼神)의 근본에 대하여 묻자, 가의가 그 소이연(所以然)을 갖추 아뢸 적에 문제가 몹시 흥미를 느낀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가의의 앞으로 자꾸만 다가앉았던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임금이 신하의 말을 경청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D-007]공검(恭儉)으로 …… 처하고 :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에게 훈계하기를, “아, 군자는 안일하지 않는 것을 처소로 삼는 것입니다. 먼저 농사일의 어려움을 알고 나서 안일하면 백성들의 의지하는 바를 알 것입니다.〔嗚呼 君子所其無逸 先知稼穡之艱難 乃逸則知小人之依〕” 한 데서 온 말이다. 《書經 無逸》
[주D-008]농사일을 …… 하였네 : 주공이 훈계하기를, “문왕께서는 허름한 옷을 입고 백성을 편히 해 주는 일과 농사일을 하셨습니다.〔文王卑服 卽康功田功〕” 한 데서 온 말이다. 《書經 無逸》
[주D-009]하우씨(夏禹氏)의 …… 커졌고 : 하우씨가 처음으로 중국 천하의 토지(土地)에 공부(貢賦)의 차등을 정했던 데서 온 말로, 여기서는 곧 조선 세종(世宗)이 국토(國土)를 개척하여 넓힌 것을 의미한다. 세종은 일찍이 서북(西北) 방면의 여진족(女眞族)을 막기 위하여 압록강(鴨綠江) 상류에 여연(閭延), 자성(慈城), 무창(茂昌), 우예(虞芮)의 사군(四郡)을 설치하였고, 또한 동북 방면의 여진족 내침에 대비하여 두만강(豆滿江) 하류에 종성(鐘城), 온성(穩城), 회령(會寧), 경원(慶源), 경흥(慶興), 부령(富寧)의 육진(六鎭)을 설치했었다.
[주D-010]우순(虞舜)의 …… 같았으니 : 소(韶)는 순(舜) 임금의 음악 이름으로, 즉 정악(正樂)을 의미하는데, 세종이 일찍이 박연(朴堧)에게 명하여 아악기(雅樂器)를 개조해서 고래(古來)의 아악(雅樂), 당악(唐樂), 향악(鄕樂)의 모든 악기(樂器), 악곡(樂曲), 악보(樂譜) 등을 정리하게 한 것을 이른 말이다.
[주D-011]전모(典謨) : 옛 성현(聖賢)들의 훈계(訓戒)하던 말로, 《서경》 요전(堯典) · 순전(舜典) · 대우모(大禹謨) · 고요모(皐陶謨) · 익직(益稷) 등편의 글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곧 세종의 언행(言行)을 전모에 비유한 것이다.
[주D-012]인문(人文) : 시서 예악(詩書禮樂)의 교화(敎化)를 말한다.
[주D-013]아송(雅頌) : 《시경》의 대아(大雅), 소아(小雅)와 주송(周頌), 노송(魯頌), 상송(商頌)을 가리킨 것으로, 아는 조정(朝廷)의 아악(雅樂)이고, 송은 조선(祖先)의 공덕(功德)을 찬양하는 종묘악(宗廟樂)이므로, 전하여 여기서는 조정과 종묘에 쓰는 정악(正樂)을 의미한다.
[주D-014]지리(地理)는 …… 회복했고 : 세종의 국토(國土) 개척을 두고 한 말이다.
[주D-015]기형(璣衡)은 …… 이루었으니 : 기형은 《서경》 순전(舜典)에 나오는 선기옥형(璿璣玉衡)의 약칭이다. 이는 곧 천체(天體)를 관측하는 데 쓰는 기계로서, 즉 구형(球形)의 표면에 일월성신(日月星辰)을 그려 사각(四脚)의 틀 위에 올려놓고 이를 회전시키면서 천체를 관측했던 것인데, 여기서는 곧 세종이 천체를 관측하는 데 쓰는 혼천의(渾天儀), 혼상(渾象), 앙부일구(仰釜日晷) 등 다수의 기계를 제작한 것과,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 등의 역서(曆書)를 편찬한 것을 가리켜 한 말이다.
[주D-016]십자(十字)의 시호(諡號) : 세종이 죽은 뒤에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란 열 글자의 시호를 올린 것을 말한다.
[주D-017]재기(齊夔) : 순(舜) 임금이 자기 아버지인 고수(瞽瞍)를 뵐 때에 ‘기기하여 공경하고 두려워했다.〔夔夔齊慄〕’는 데서 온 말로, 즉 부왕(父王)께 효성이 지극했음을 의미하는데, 여기의 기기는 곧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모습을 형용한 말이다.
[주D-018]하나의 …… 빛났도다 : 당 현종(唐玄宗)이 일찍이 흥경궁(興慶宮) 서남쪽에 화악상휘지루(花萼相輝之樓)를 세우고 여러 아우들과 함께 이 누각에 올라서 서로 즐기며 우애 깊게 지냈던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여기서는 세종 또한 형제간에 우애가 깊었음을 의미한다.
[주D-019]만기(萬機) : 제왕(帝王)이 매일 처리하는 정사(政事)의 매우 번다하고 바쁜 것을 형용한 말이다. 기(機)는 기(幾)와 통용하는 것으로, 《서경》 고요모(皐陶謨)에, “하루 이틀 사이에도 만 가지나 됩니다. 모든 관직을 비우지 마소서. 하늘의 일을 사람이 대신하는 것입니다.〔一日二日萬幾 無曠庶官 天工人其代之〕”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20]궤(几)에 …… 끊어지니 : 주 성왕(周成王)이 임종(臨終) 무렵에 옥궤(玉几)에 기대어 여러 대신(大臣)들을 불러놓고 유명(遺命)을 내렸던 데서 온 말이다. 《書經 顧命》
[주D-021]금등(金縢)의 …… 못하고 : 금등은 《서경》의 편명인데, 이 편에는 무왕(武王)이 일찍이 병들어 위독했을 때, 주공(周公)이 무왕 대신 자기를 죽게 해 달라고 선왕(先王)께 기도하고, 주공과 태공(太公), 소공(召公) 3인이 함께 거북점을 쳐 본 결과 모두 길(吉)하여 마침내 무왕의 병이 쾌유되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므로 한 말이다.

 

 

성호사설 제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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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물문(萬物門)
박연 악률(朴堧樂律)


세종 대왕은 음악 만드는 데 뜻이 있었다. 그 당시에 거서(秬黍)는 해주(海州)에서 났고 경석(磬石)은 남양(南陽)에서 났는데, 세종이 박연(朴堧)에게 명하여 편경(編磬)을 만들도록 하였다. 박연은 이 거서라는 기장을 가지고 적분(積分)해서 황종(黃鍾)이란 관(管)을 만들었다.
그 소리가 중국 율관(律管)에 비해 조금 높게 된 것은 땅의 비옥하고 척박한 것이 다르고, 기장에도 크고 작은 것이 있기 때문에 밀[蠟]을 녹여 붙여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중국 기장은 우리나라 해주 기장과 비교하면, 조금 크게 생겨서 한 개만 해도 1푼이 되고 열 개만 쌓으면 1촌이 된다. 이러므로 아홉 치로 황종 길이를 만들고 서 푼씩 덜기도 하고 보태기도 해서 12율(律)을 만들었다 하니, 이 말은 아주 웃을 만하다.
옛날 이조(李照)는 종서(縱黍)로 측정했은즉, 구멍 지름이 3푼으로서 기장 1천 7백 30알이 담겨지게 되었고, 호원(胡瑗)은 횡서(橫黍)로 측정했은즉, 기장 1천 2백 알이 담겨지게 되는데 구멍 지름이 3푼 4리(釐) 7호(毫)였었다 하니, 이는 모두 1천 2백 알의 기장이 담겨져야 한다는 법에는 맞지 않는다.
방서(房庶)는, “1천 2백 알의 기장이 담겨져야 9촌이 되는데 90분의 1이다. 이 1이란 것은 1푼이란 말인데, 후유(後儒)들은 이 말을 잘못 알고 기장 한 알로써 1푼이라 한다.” 하였으니, 이 말이 조금 근사한 듯하다. 기장을 담는 것은 기장 자체가 미끄러워서 쌓아올릴 수 없기 때문이다. 밀을 녹여서 만든 기장은 매우 깔끄러워서 여러 개를 쌓을 수 없을 것이다.
참 기장을 쌓는다 해도 오히려 자빠지고 얹히게 되어 허공에 빠질 염려가 있을 것인데, 하물며 밀을 녹여서 만든 기장임에랴? 또 밀을 녹여 만든 기장이 참 기장보다 조금 컸다면 뭐 거서를 꼭 필요로 할 것이 있겠는가?
이는 박연이 자기의 추측으로 만든 데에 불과한 것이다. 세상에 사광(師曠)처럼 귀밝은 이가 없는데, 그것이 음률에 맞는지 안 맞는지를 뉘라서 알겠는가?
해주에서 났다는 기장도 이미 이처럼 믿을 수 없으니, 남양에서 난 옥도 역시 옥과 비슷한 민석(珉石)에 불과했을 것이다. 활석(滑石)이 비교하면 조금 굳기는 하나 사빈(泗濱)에서 나는 부석(浮石)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중에 성현(成俔)이 지은 《악학궤범(樂學軌範)》 서문에, “박연이 얻었다는 경석은 흙부스러기[土苴]였던 것이다.” 하였으니, 그는 이 경석을 보았던 것인가?


 

[주C-001]박연 악률(朴堧樂律) : 박연의 악률. 《類選》 卷4下 人事篇 治道門. 《林下》 卷20 文獻指掌編10 朴堧專掌樂事.
[주D-001]거서(秬黍) : 검은 기장.
[주D-002]경석(磬石) : 경쇠 만드는 옥돌.
[주D-003]박연(朴堧) : 고려 우왕 4년에 태어나 조선조 세조 4년에 죽은 음악가. 자는 탄부(坦夫), 호는 난계(蘭溪).
[주D-004]편경(編磬) : 아악(雅樂)의 하나. 두 층으로 된 걸이가 있는데, 한 층에 여덟 개씩 매어 단 경쇠.
[주D-005]관(管) : 피리.
[주D-006]호원(胡瑗) : 송(宋) 나라 학자. 자는 익지(翼之). 호는 안정(安定).
[주D-007]방서(房庶)는 …… 듯하다 : 이상의 말들을 《송사(宋史)》 율력지(律曆志) 참조.
[주D-008]사광(師曠) : 춘추 시대 진(晉) 나라 악사(樂師). 자는 자야(子野). 귀가 예민하여 소리를 듣고 길흉을 잘 분별했고 새소리까지 구분하여 《금경(禽經)》을 지었음.
[주D-009]활석(滑石) : 광물(礦物)의 한 종류. 겉은 반질반질하고 몸은 무른데 약품으로도 쓰임.
[주D-010]부석(浮石) : 아주 가벼운 돌.
[주D-011]성현(成俔) : 조선조 성종~연산 연간의 학자. 자는 경숙(磬叔), 호는 용재(慵齋) 또는 부휴자(浮休子)ㆍ허백당(虛白堂)ㆍ국오(菊塢).

 

장악원(掌樂院) 서부 여경방에 있으며, 아악(雅樂)ㆍ속악(俗樂)의 교열(敎閱)을 관장한다. ○ 정ㆍ첨정ㆍ주부ㆍ직장이 각 1명씩이다. 『신증』 연산군 을축년에 연방원(聯芳院)이라 이름을 고치고, 정ㆍ부정ㆍ첨정ㆍ판관ㆍ주부 각 2명과 직장 1명을 더 두었다가, 금상 초기에 도로 개혁하였다. ○ 성현(成俔)이 지은 기문(記文)에, “사람은 음악을 몰라서는 안되니, 음악을 모르면 기운이 막히고 답답하여 기운을 펼 수 없는 것이고, 나라는 하루도 음악이 없어서는 안 되니, 음악이 없으면 질서가 없고 비루하여 화평을 이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선왕(先王)이 음악의 방법을 세우고 음악의 관직을 설치하여 인심의 공통점으로 인하여 착한 마음을 감발시키고 나쁜 마음을 징계함이 있는 것이다. 이러므로 노래 부르고 읊음으로써 감발시키고, 종과 북ㆍ피리와 젓대로써 그 뜻을 부치고, 성곡(聲曲)과 음률(音律)로써 바르게 하며, 빠르고 늦게 춤추는 절차로써 조절하였으니, 조정에 쓰게 되면 임금과 신하가 모두 즐거워하고, 교제(郊祭)와 종묘(宗廟)에 쓰면 귀신이 감응하며, 가정에 쓰고 향당(鄕黨)에 쓰면 모두 화락하고 분발하며 고무되고 밝아져서 풍속이 좋은 쪽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옛날에 후기(后蘷)가 음악을 맡아서 당우(唐虞)의 다스림을 일으켰고, 《주례(周禮)》에는 대사악(大司樂)이 성균(成均)의 법을 맡아서 공경대부의 자제들을 교양하였으며, 또 6률(律)ㆍ5성(聲)ㆍ8음(音)으로써 크게 음악을 합하여 귀신을 감동시키고, 만민을 조화롭게 하며 빈객(賓客)을 유쾌하게 하고, 먼 곳에서 온 사람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런데, 진 나라와 한 나라 때에는 악관(樂官)들이 통일되지 않아서 태악서(太樂署)와, 고취서(鼓吹署)가 있었는데, 그 일은 승(丞)과 협률랑(協律郞)으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였다. 당(唐)ㆍ송(宋) 이후에는 관제가 크게 갖추어졌으나, 의식에 관한 글이 너무 번잡하여 옛날부터 내려온 원기(元氣)를 손상시켰다. 신라ㆍ고려에는 시대마다 각기 음악이 있었으나, 지금 전해지고 있는 것은 모두 민간의 남녀가 서로 좋아하는 음란한 노래뿐이어서 혹은 음탕하고 추잡하며, 혹은 슬프고 원망하는 노래로 중국의 정(鄭)ㆍ위(衛)의 음란한 음악과 다를 것이 없어서 마침내 말세에 임금과 신하가 음탕하게 놀아나서 나라를 망치고야 말게 된 것이다. 우리 세종대왕께서 전대(신라 고려)의 음악이 타락하였음을 개탄하여 옛날 음악을 회복하고자 아악(雅樂)을 태상시(太常寺)에 소속시키고, 관습도감(慣習都監)을 설치하여 향악(鄕樂)과 당악(唐樂)을 가르치게 하고, 맹사성(孟思誠)과 박연(朴堧) 등으로 잇달아 제조를 삼아서 음악을 제작하는 일을 위임하였다. 그 중에 아악이라 하는 것은 제사 때에 쓰는 정악(正樂)의 노래이고, 당악이란 것은 조회와 조정에서 쓰는 음악이고, 향악이란 것은 우리나라 민속의 노래이다. 이 음악들이 비록 같지는 않지만, 그 5음과 6률이 돌아가면서 서로 궁(宮)이 되어 내리고 오르고 덜고 더하는 제도는 같지 않음이 없으니, 어찌 생(笙)과 우(竽), 훈(塤)과 지(篪) 등의 악기가 아악에만 해당되고, 향악과 당악에는 해당되지 않겠는가? 진실로 소리로 인하여 합하고, 곡조(曲調)로 인하여 완성한다면 세 가지 음악이 통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세조대왕께서는 그러한 줄을 아셨으므로 이 세 가지 음악을 한 부서에 합치고서 장악서(掌樂署)라고 이름을 지어, 장악(掌樂) 1명, 별제(別提) 1명을 두었으나, 일은 크고 인원은 적어서 그 제도를 맞출 수 없었다. 뒤에 또 장악원(掌樂院)으로 고치고, 정 1명을 두고, 그 밑에 부정ㆍ첨정ㆍ판관ㆍ주부ㆍ직장의 관원은 때에 따라 다만 3명을 두었으니, 모두 4명이었다. 제조(提調)가 된 이가 한 분만이 아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이 일에 전념한 이는 중추(中樞) 정침(鄭沈) 공이다. 일정한 관서가 없어서 처음에는 태시(太寺)에 붙어 있다가, 뒤에는 태상시(太常寺)의 악학(樂學)에 있었는데, 건물이 비좁고 낮아서 있을 수 없었다. 금상께서 특명을 내려 태상시 동쪽 수십 보 떨어진 자리에 민가 여러 집을 철거하고, 크게 관부(官府)를 건축하여 옮겨 갔다. 이리하여 당상관과 낭청들의 일하는 방이 따로 구별이 있고, 아악과 속악의 스승ㆍ생도와 영인(伶人 악공(樂工))ㆍ기생(妓生) 수천 명이 각기 거처할 장소를 가지게 되었고, 또 악기를 보관하는 집을 지어 방을 마련하였으며, 또 동서로 뜰을 넓게 닦아서 신정(新正)과 동지(冬至) 때에 백관의 조하(朝賀)를 받을 때 의식을 연습하는 장소로 삼고, 겸직 관원을 더 두었다. 이리하여 겸직 관원은 기술을 익히게 하며, 실직 관원은 사무를 보게 하였다. 나는 적당한 인재가 아니면서도 거기에 뽑혀서 옥당(玉堂)의 관원으로서 이원(梨園 장악원(掌樂院))에 출입한 지가 수십 년이 되었다. 돌이켜 생각건대, 나의 학술이 보잘것없고, 배워서 익힌 것이 가짜와 찌꺼기뿐으로 음악의 근본 원리를 알지 못하니, 어찌 감히 대성인(大聖人)의 음악을 제작한 거룩한 일을 도울 수 있겠는가? 지금은 또 승정원에 있으면서 맡고 있는 일이 역시 예악(禮樂)에 관한 것이니, 지난날 지내던 곳을 생각하고, 그때 같이 일하던 동관들과 악공(樂工)을 볼 때에 어찌 애착이 없겠는가? 제군들이 내가 장악원에 오래 있던 사람이라 하여, 나에게 기문을 지으라고 촉탁하므로, 대략 처음부터 끝까지의 사적을 서술하여 돌려 보내노라.” 하였다.
관상감(觀象監) 상의원(尙衣院) 남쪽에 있고, 하나는 북부 광화방(廣化坊)에 있는데, 천문(天文)ㆍ지리(地理)ㆍ역수(曆數)ㆍ점산(占算)ㆍ측후(測候)ㆍ각루(刻漏) 등의 일을 관장한다. ○ 영사(領事)가 1명, 정ㆍ부정ㆍ첨정이 각 1명, 판관ㆍ주부가 각 2명이다. 천문ㆍ지리 교수(敎授)가 각 1명인데 종6품이고, 직장ㆍ봉사가 각 2명, 부봉사가 3명, 천문ㆍ지리학 훈도(訓導)가 각 1명인데 종9품이고, 명과학(命課學) 훈도(訓導)가 2명, 참봉이 3명이다. 교수와 훈도의 관품은 다른 관사와 같다. 『신증』 연산군 병인년에 사역서(司曆署)로 개칭(改稱)하고, 영(令) 1명, 주부ㆍ직장ㆍ봉사 각 2명, 참봉 3명을 두었다가, 금상 초기에 모두 복구하였다.
전의감(典醫監) 중부 견평방(堅平坊)에 있으며, 의약(醫藥)을 진공(進供)하는 일을 관장한다. ○ 정ㆍ부정ㆍ첨정ㆍ판관ㆍ주부가 각 1명, 의학 교수ㆍ직장ㆍ봉사가 각 2명, 부봉사가 4명, 의학 훈도가 1명, 참봉이 5명이다. 『신증』 연산군 병인년에 부정ㆍ직장ㆍ봉사 각 1명씩과, 부봉사ㆍ참봉 각 2명씩을 개혁하였다가, 금상 초기에 모두 복구하였다.
사역원(司譯院) 서부 적선방(積善坊)에 있으며, 여러 외국의 말을 통역하는 일을 관장한다. ○ 정ㆍ부정ㆍ첨정이 각 1명, 판관이 2명, 주부가 1명, 한학(漢學)교수가 4명, 직장이 2명, 봉사가 3명, 부봉사가 2명, 한학 훈도가 4명, 몽고학(蒙古學)ㆍ왜학(倭學)ㆍ여진학(女眞學) 훈도가 각 2명, 참봉이 2명이다.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세자에게 경사(經史)를 시강(侍講)하고 도의(道義)를 강설(講說)하는 일을 관장한다. ○ 사(師) 1명, 부(傅) 1명인데 정1품이고, 이사(貳師)가 1명인데 종1품이며, 좌우 빈객(左右賓客)이 각 1명인데 정2품이고, 좌우 부빈객(副賓客)이 각 1명으로 종2품인데, 모두 다른 관직에 있는 이가 겸한다. 보덕(輔德)이 1명인데 종3품이고, 필선(弼善)이 1명인데 정4품이며, 문학(文學)이 1명인데 정5품이고, 사서(司書)가 1명인데 정6품이며, 설서(說書)가 1명인데 정7품이다.
종학(宗學) 북부 관광방(觀光坊)에 있으며, 종실(宗室)을 교육하는 소임을 관장한다. 도선(導善)이 1명인데 정4품이고, 전훈(典訓)이 1명인데 정5품이며, 사회(司誨)가 2명인데 정6품으로 모두 성균관 관원으로 겸하게 한다. 『신증』 연산군 갑자년에 혁파하였다가, 금상 초기에 다시 설치하였다.
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 종루(鐘樓) 동쪽에 있으며, 궁성(宮城)과 도성(都城)의 수축과 궐내(闕內)의 공해(公廨)와 방리(坊里)의 화재를 막는 일들을 관장한다. ○ 제검(提檢)이 4명인데, 그 중 3명은 다른 관직에 있는 자로 겸직하게 하고, 별좌(別坐)가 6명인데, 그 중 4명은 다른 관원이 겸직하며, 별제(別提)가 3명인데, 그 중 1명은 다른 관직으로 겸임하게 한다.
전설사(典設司) 홍례문 동쪽에 있으며 장막(帳幕)을 진공(進供)하는 일을 관장한다. ○ 수(守)가 1명인데 정4품이고, 제검ㆍ별좌ㆍ별제가 5명이다. 수의 관품은 다른 관사와 같다.
풍저창(豐儲倉) 북부 의통방에 있으며 미두(米豆)ㆍ초둔(草芚)ㆍ지지(紙地) 등의 물품에 관한 일을 관장한다. ○ 수ㆍ주부ㆍ직장ㆍ봉사ㆍ부봉사가 각 1명씩이다.
광흥창(廣興倉) 서강(西江) 북쪽에 있으며 백관의 봉록을 관장한다. ○ 수ㆍ주부ㆍ봉사ㆍ부봉사가 각 1씩명이다.
전함사(典艦司) 중부 징청방(澄淸坊)에 있고, 외사(外司)는 서강에 있는데, 서울과 지방의 주함(舟艦)을 관장한다. 경기 좌우도(京畿左右道)의 수참(水站)이 여기에 속한다. ○ 제검ㆍ별좌ㆍ별제가 모두 5명이다. 『신증』 남곤(南袞)이 지은 기문에, “전함사는 배에 관한 일을 맡은 관청으로, 처음에는 아문(衙門)이 없고, 다만 전선빛[典船色]이라고만 하여 거리의 행랑에 붙어 있으면서 녹사(錄事)를 시켜 문서를 임시로 주관하게 할 뿐이었다. 성화(成化) 초년에 처음으로 지금의 명칭으로 고치고, 부서를 설치하고 관원을 두고 또 재상 두사람으로 총괄하게 하였다. 이는 대략 송 나라 전운사(轉運司) 제도를 모방한 것이니, 이렇게 하지 않으면 직책이 전일하지 못하여 일을 잘 처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덕(正德) 경진년에 내가 도제조가 되어 광산(光山) 김자성(金子誠) 공과 영전함사사(領典艦司事)가 되었는데, 그때에 속관(屬官)에 있던 이는 제검 이결(李潔) 군과 별좌 홍사신(洪嗣愼)ㆍ김선(金璿), 별제 한홍택(韓弘澤)ㆍ장세강(張世綱)으로, 모두 선비들 중에서 우수한 인재들이다. 모든 관장하는 일들이 다 질서 있게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어서 우리들은 그저 결재만 할 뿐이었다. 하루는 제군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관청이 있으면 반드시 제명록(題名錄)이 있음은 옛날부터 내려온 관례인데 우리 전함사에만 없으니, 어찌 결함된 일이 아니겠는가?’ 하고, 전에 이 관사에 임명되었던 사람의 성명을 상고해 찾아내어 몇 사람의 것을 수집하여 종이를 사서 책을 만들어 쓰고, 근자에 나에게 와서 그 책머리에 기문을 쓰라고 청하였다. 나는 생각건대, 우리나라에서 한양에 수도를 정하고서 동남 지방의 곡식을 배로 실어다가 서울에 공급하게 되니, 힘입는 이로움이 큰 것이다. 더구나 조운(漕運)에는 강운(江運)과 해운(海運)의 구별이 있고, 배에는 병선(兵船)과 조선(漕船)의 차이가 있는데, 모두 이 전함사에서 총괄하여 관리하게 되어 있으니, 그 소임이 무겁지 않겠는가? 이 관사 중에 옛날부터 내려온 일을 살펴보면, 제검은 4품관인데 반드시 특석(特席)에 앉고, 해운(海運)ㆍ수운(水運)의 판관들은 벼슬이 비록 높다 하나, 모두 그 아랫자리에 앉게 되어 감히 대등한 예로써 하지 못하여 연해(沿海)의 진장(鎭將)들이 임지에 갈 때에는 반드시 본사에 나와서 참알례(參謁禮)를 조심성스레 한다. 배를 만들거나 해안 수비를 감독ㆍ시찰하는 일일 때에는 반드시 본사의 관원을 여러 도에 보내는데, 이들을 경차관(敬差官)이라고 하였으니, 나라에서 본사에 대한 대우가 융숭하다 하겠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는 관원을 각 도에 보내어 감독과 순찰을 폐하고 하지 않으니,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혹시 사명(使命)을 받들고 지방에 갔던 관원이 그 행동을 신중히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사군자(士君子)가 태평한 시대를 만나서 벼슬길에 서서 장차 조정에 일을 하려고 하는 데에는 이런 자리가 처음 출발하는 길이 되는 것이니, 비록 위리(委吏 창고 출납의 관리)나 승전(乘田 가축을 사육하는 관리)같은 미천한 자리라 할지라도 그 맡은 직책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하는데, 하물며 이 자리는 저 위리나 승전에 비할 수 없는 중요한 자리임에랴? 이름을 제명기록에 올려서 오래도록 전해지게 되면 뒤에 그 이름을 지목하면서 비난하는 자가 반드시 없지 않을 것이니, 가히 두려워하고 삼가지 않겠는가?” 하였다.
전연사(典涓司) 홍례문 서쪽에 있으며, 궁궐을 소제하고 정리하는 일을 관장한다. ○ 제검ㆍ별좌ㆍ별제가 5명, 직장ㆍ봉사가 각 2명, 참봉이 6명이다.
내수사(內需司) 서부 인달방(仁達坊)에 있으며, 궐내에서 쓰는 쌀ㆍ베와 잡물 및 노비를 관장한다. ○ 전수(典需)가 1명인데 정5품이고, 별좌ㆍ별제가 2명, 부전수(副典需)가 1명인데 종6품이고, 전회(典會)가 1명인데 종7품이며, 전곡(典穀)이 1명인데 종8품이고, 전화(典貨)가 2명인데 종9품이다.
소격서(昭格署) 북부 진장방(鎭長坊)에 있다. 삼청전(三淸殿)이 있는데, 삼청(三淸)의 성신(星辰)에 대한 초제(醮祭)를 관장한다. ○ 영(令)이 1명인데 종5품이고, 별제ㆍ참봉이 각 2명이다. 영의 관품은 다른 관사와 같다. ○ 이직(李稷)의 시에, “푸르른 송백들이 경궁(瓊宮)을 둘렀는데 우개(羽蓋)와 예정(霓旌)이 이 가운데 머무네. 열 번이나 경(經)을 읽고 도사(道士)들 맞아와서, 사시(四時)로 초제 올려 임금의 정성 다하셨네. 밤에는 달빛 아래 학 소리 들려오고, 새벽에 구름 속에 난새 탄 수레에 절하였다. 옥경(玉境)에 머무르도록 못해 드림이 서러워서, 망연히 홀로 서서 허공만을 바라보네.” 하였다. ○ 권근(權近)의 시에, “땅에는 영천(靈泉)의 맑은 물 솟아나고, 산에는 도경(道境)의 그윽함이 간직되었네. 경영하여 보전(寶殿)을 열었으니, 지척 간에 티끌 세상이 막혔네. 하늘 위의 신선 집은 멀기도 한데, 학을 타고 구름 속에 머무네. 들으니 신선되는 비결(祕訣)이 많다 하니, 천추에 길이 길이 복 내리소서.” 하였다. ○ 최숙정(崔淑精)의 시에, “사면 바위 골짜기 연하였으니, 티끌 세상과 떨어진 곳에 삼청(三淸)이 여기로다. 산 속에 보슬비 촉촉이 적셨는데, 섬돌 위에 떨어진 꽃송이 새롭구나. 어슴푸레 모녀(毛女)도 만날 것 같고, 아슴푸레 우인(羽人)도 만날 것만 같네. 도사(道士)들은 일도 많아 밤중에 또 예배(禮拜)하네.” 하였다. ○ 강희맹(姜希孟)의 시에, “푸른 산 이마에는 옥으로 만든집이 높이 섰고, 제단 가에 늙은 솔은 나이를 알 수 없네. 소매 속에 간직하여 전해온 비결(祕訣)! 신선들을 꿈 속에서 혹 보리. 금장(金章)이나 자수(紫綬)는 나의 본분 아니거니, 백갈(白葛)과 오사(烏紗 도사의 옷차림)가 숙세(宿世 전생(前生)의 인연인가? 속세의 잡념이 이제부터 가시리니, 그대와 같이 학을 타고 지전(芝田)으로 갈까 보다.” 하였다. ○ “만년에 사람들은 미쳤다고 나를 비웃네. 내가 미친 것은 장차 늙지 않으려 하는 것일세. 늙어서야 세상의 과비자(夸毗子)들이 산림(山林) 속의 자유로운 신선(神仙)만 못한 줄 알았네. 때로는 대낮에 도인법(導引法)도 할 수 있고, 푸른 산 어디서나 오르지 못할 곳이 없네. 마침내 신선을 비밀히 만날 묘한 비결 얻었으니, 마치 농가에서 부지런히 밭갈면 추수하는 것처럼.” 하였다.
사직서(社稷署) 사직단(社稷壇) 밖 북쪽에 있으며, 단유(壇壝) 청소하는 일을 관장한다. ○ 영이 1명, 참봉이 2명이다.
종묘서(宗廟署) 종묘의 담 안 동쪽에 있으며, 침묘(寢廟) 수비를 관장한다. ○ 영ㆍ직장ㆍ봉사ㆍ부봉사가 각 1명이다.
평시서(平市署) 중부 견평방에 있으며, 시전(市廛)을 관리하고, 말ㆍ섬ㆍ장(丈)ㆍ자[尺]을 고르게 하며, 물화의 값을 올리고 낮추는 등의 일을 관장한다. ○ 영ㆍ직장ㆍ봉사가 각 1명이다.
사온서(司醞署) 서부 적선방에 있으며, 주례(酒醴)의 진공(進供)을 관장한다. ○ 영ㆍ주부ㆍ직장ㆍ봉사가 각 1명이다.
의영고(義盈庫) 서부 적선방에 있으며, 유밀(油蜜)ㆍ황랍(黃蠟)ㆍ소물(素物)ㆍ후추[胡椒] 등의 물품을 관장한다. ○ 영ㆍ주부ㆍ직장ㆍ봉사가 각 1명이다.
장흥고(長興庫) 남부 호현방(好賢坊)에 있으며, 석자(席子)ㆍ유둔(油芚)ㆍ지지(紙地) 등의 물품을 관장한다. ○ 영ㆍ주부ㆍ직장ㆍ봉사가 각 1명이다.
빙고(氷庫) 얼음을 저장하고 꺼내는 일을 관장한다. 서빙고(西氷庫)는 둔지산(屯智山)에 있는데, 얼음을 어주(御廚)에 진공하고 백관(百官)들에게 나누어 주며, 동빙고(東氷庫)는 두모포(豆毛浦)에 있는데, 얼음을 제사에 진공한다. ○ 별좌ㆍ별제ㆍ별검이 4명이다.
장원서(掌苑署) 북부 진장방에 있는데, 원유(苑囿)와 화과(花果)를 관장한다. ○ 장원(掌苑)이 1명인데 정6품이고, 별제가 3명이다. 『신증』 연산군 병인년에 장원을 혁파하였다가, 금상 초기에 다시 두었다.
사포서(司圃署) 북부 준수방(俊秀坊)에 있으며, 원포(園圃)와 소채를 관장한다. ○ 사포(司圃)가 1명인데 정6품이고, 별좌ㆍ별검이 7명이다.
양현고(養賢庫) 성균관 북쪽에 있으며 성균관의 유생들에게 미두(米豆) 등의 물품을 진공하는 일을 관장한다. ○ 주부ㆍ직장ㆍ봉사가 각 1명인데, 모두 성균관 관원이 겸임한다.
전생서(典牲署) 목멱산(木覓山 남산) 남쪽에 있으며 희생(犧牲)을 기르는 일을 관장한다. ○ 주부ㆍ직장ㆍ봉사ㆍ참봉이 각 1명이다.
사축서(司畜署) 무악(毋岳) 남쪽에 있으며, 잡축(雜畜) 사육(飼育)을 관장한다. ○ 사축이 1명인데 종6품이고, 별제가 2명이다.
조지서(造紙署) 창의문(彰義門) 밖에 있으며, 표전지(表箋紙)ㆍ자문지(咨文紙)와 여러 가지 지지(紙地) 제조에 관한 일을 관장한다. ○ 사지(司紙)가 1명인데 종6품이고, 별제가 4명이다. 『신증』 연산군 병인년에 사지를 없애고 별제 1명을 더 두었다가, 금상 초기에 모두 복구하였다.
혜민서(惠民署) 남부 태평방(太平坊)에 있으며, 서민의 질병을 치료하고 의녀(醫女)를 교습하는 일을 관장한다. ○ 주부가 1명, 의학교수가 2명, 직장ㆍ봉사ㆍ의학 훈도가 각 1명, 참봉이 4명이다.
도화서(圖畫署) 중부 견평방에 있으며, 회화(繪畫)의 일을 관장한다. ○ 별제가 2명이다.
전옥서(典獄署) 중부 서린방(瑞麟坊)에 있으며, 옥수(獄囚)를 관장한다. ○ 주부ㆍ봉사ㆍ참봉이 각 1명이다.
활인서(活人署) 사람들의 질병을 구원하는 일을 관장한다. 하나는 동부 연희방(燕喜坊)에 있고, 하나는 용산에 있는데, 도성 안의 역병(疫病)에 걸린 자는 모두 치료해 준다. 별제가 4명, 참봉이 2명이다.
와서(瓦署) 용산 동쪽에 있으며, 벽돌과 기와의 제조를 관장한다. ○ 별제가 3명이고, 또 별서(別署)가 있는데, 기와를 구워 파는 일을 관장한다. ○ 별제 2명이 있다.
귀후서(歸厚署) 용산강(龍山江)에 있으며, 관곽(棺槨) 제조를 관장한다. 분서(分署)가 남부 호현방에 있는데, 장례에 관한 여러 가지 일을 관장한다. ○ 별제가 6명이다.
○ 정이오(鄭以吾)가 지은 기문에, “영락(永樂) 4년 7월에, 경기 관찰사 우희열(禹希烈) 공이 좌정승 호정(浩亭) 하공(河公)에게 고하기를, ‘옛날에는 사람이 늙어 가면 죽은 뒤에 마지막으로 보낼 준비를 반드시 미리 해두는 것이니, 상사(喪事)를 당해서 쉽게 준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 사람들은 미리 준비하지 못하는데, 더구나 갑자기 상(喪)을 당했을 때에는 어찌하리까? 청컨대, 관청을 세우고 목수들을 독촉하여 관을 만들어 그 값을 싸게 해서 여러 사람에게 파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좌정승이 좋게 여겨서 마침내 도당(都堂)에서 의논하고 임금께 아뢰니, 임금이 매우 아름답게 여기시고, 유사에게 명하여 쌀 30섬과 오종포(五綜布) 백 필을 내주어 관곽소(棺槨所)를 용산강 가에 설치하고서, 자은종 도승통(慈恩宗都僧統) 신 종림(宗林)에게 그 일을 주관하게 하니, 여러 신하들도 각기 쌀과 베를 내어 이 일에 협조하는 이가 매우 많았으니, 양심의 발로는 막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종림이 명에 따라 일하기를 즐거워하여 재목을 사서 널을 만들고, 싼 값으로 팔아서 죽은 자를 전송하는 자들에게 유감이 없게 하였다. 뒤에 종림이 죽고, 그의 제자 해선(海宣)이 그 뜻을 이어받아 그 사업에 더욱 힘쓰자, 전하께서 또 노비 60명과 토지 50결을 내려 주었으니, 거기에 노역하는 사령(使令)을 넉넉히 하고 공급하는 곡식과 재정을 풍부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귀후(歸厚)라고 이름지은 이유는 백성의 덕이 후덕하게 된다는 민덕귀후(民德歸厚)의 뜻을 취한 것이다. 아, 관곽(棺槨)을 처음 만들기는 황제(黃帝)때부터 시작된 것인데, 《예기(禮記)》에 기록된 것을 보면 세제(歲制)ㆍ월제(月制)ㆍ시제(時制)ㆍ일수(日修) 등의 시급히 준비하는 제도가 있다. 맹자는 말하기를, ‘자기 부모의 시체가 흙에 직접 닿지 않게 하면, 자식된 사람의 마음에 만족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런즉 왕도(王道)를 일으키고 백성의 덕을 후덕하게 하려는 자는 이것을 준비하는 것을 소홀히 하여 늦추어서야 되겠는가? 우리 전하께서 백성을 근심하시는 마음이 지극하시고, 보좌하는 대신들이 마음과 덕을 같이하여 인을 하는 방법을 확장시켜 사람마다 마지막으로 가는 길을 전송하는 장사에 유감이 없게 하였으니, 풍속이 어찌 후덕한 데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하였다.

중학(中學) 북부 관광방에 있으며 소학(小學)의 선비를 가르치는 일을 관장한다. ○ 교수ㆍ훈도가 각 2명인데 모두 성균관 관원이 겸직하며, 항상 유생(儒生) 백 명씩 양성한다. 다른 학(學)에서도 같다.
남학(南學) 남부 성명방(誠明坊)에 있다.
서학(西學) 서부 여경방에 있다.
동학(東學) 동부 창선방(彰善坊)에 있다.
중부(中部) 징청방에 있으며, 관내의 불법(不法)의 일과 교량ㆍ도로ㆍ반화(頒火)ㆍ금화(禁火)ㆍ이문(里門)의 경수(警守)ㆍ집터의 측량ㆍ시체검시 등의 일을 관장한다. ○ 주부가 1명, 참봉이 2명으로, 다른 부도 같다. ○ 관할하는 것이 8방(坊)으로, 징청방ㆍ서린방ㆍ수진방ㆍ견평방ㆍ관인방(寬仁坊)ㆍ경행방(慶幸坊)ㆍ정선방(貞善坊)ㆍ장통방(長通坊)이다.
동부(東部) 연화방(蓮花坊)에 있다. 관할하는 것이 12방으로, 숭신방(崇信坊)ㆍ연화방ㆍ서운방(瑞雲坊)ㆍ덕성방(德成坊)ㆍ숭교방ㆍ연희방ㆍ관덕방(觀德坊)ㆍ천달방(泉達坊)ㆍ흥성방(興盛坊)ㆍ창선방ㆍ달덕방(達德坊)ㆍ인창방(仁昌坊)이다.
남부(南部) 명례방(明禮坊)에 있다. 관할하는 것이 11방으로, 광통방(廣通坊)ㆍ호현방(好賢坊)ㆍ명례방(明禮坊)ㆍ태평방(太平坊)ㆍ훈도방(薰陶坊)ㆍ성명방ㆍ낙선방(樂善坊)ㆍ정심방(貞心坊)ㆍ명철방(明哲坊)ㆍ성신방(誠身坊)ㆍ예성방(禮成坊)이다.
서부(西部) 중부 서린방에 있다. 관할하는 것이 8방으로, 인달방(仁達坊)ㆍ적선방ㆍ여경방ㆍ황화방(皇華坊)ㆍ양생방(養生坊)ㆍ신화방(神化坊)ㆍ반송방(盤松坊)ㆍ반석방(盤石坊)이다.
북부(北部) 중부 징청방에 있다. 관할하는 것이 10방으로, 광화방(廣化坊)ㆍ양덕방(陽德坊)ㆍ가회방(嘉會坊)ㆍ안국방(安國坊)ㆍ관광방ㆍ진장방(鎭長坊)ㆍ명통방ㆍ준수방(俊秀坊)ㆍ순화방(順化坊)ㆍ의통방(義通坊)이다.
내시부(內侍府) 북부 준수방에 있으며, 환시(宦寺)의 부(府)이다. 대내(大內)의 감선(監膳)과 전명(傳命)ㆍ수문(守門)ㆍ소제(掃除)의 일을 관장하는데, 모두 1백 40명이다.
『신증』 내반원(內班院) 경회(慶會) 남문(南門) 서쪽에 있고, 하나는 창덕궁 선정문(宣政門) 안 동쪽에 있다. ○ 김종직(金宗直)이 지은 기문에, “궁신(宮臣)의 부서를 둔 것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대개 천문(天文)의 상(象)을 본떠서 임금 곁에서 가까이 모시고 있으면서 궁문에서의 출입을 금하고, 내외의 말을 통하게 하며, 수라에 오르는 음식을 요리하며, 궁궐 안의 뜰을 청소하는 일을 맡는다. 그 소임은 비록 하찮은 일이지만, 그 관계됨이 매우 중대하지 않은가? 궁정(宮正)ㆍ궁백(宮伯)이란 칭호는 주 나라에서 시작되었고, 황문(黃門)ㆍ상시(常侍)는 한 나라에 있었으며, 내시(內侍)ㆍ급사(給事)는 당 나라 제도이고, 내반(內班)ㆍ전두(殿頭)는 송 나라에서 부르던 칭호이다. 비록 관호(官號)가 시대마다 변경되어 일정하지는 않지만, 그 거처하는 곳이 지극히 엄밀하고 직분의 전일(專一)함은 역대에 모두 같은 것이다. 《서경》에 이르기를, ‘복신(僕臣)이 바르면 다른 신하는 감히 바르지 않을 수 없다.’ 하였으니, 버릇없이 친압하는 신하도 그러한데, 하물며 중관(中官 내시(內侍))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옛날부터 충성하고 삼가서 마음을 바르게 가진 자는 모두 복을 받고, 교만하고 은총만 믿는 자는 모두 화(禍)를 입었으며, 그 나라가 흥하고 쇠해지는 것도 여기에 따르던 사례가 많았으니, 매우 두려워할 만하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도읍을 정한 이후로 내시부(內侍府)를 영추문(迎秋門) 밖에 설치하고, 또 액정(掖庭)과 영항(永巷) 옆에 내소방(內小房)을 만들어서 받들어 모시고 심부름하는 자들이 항상 거처하는 곳으로 하였더니, 우리 성상께서 비로소 그것을 내반원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니, 송 나라의 옛 제도에 따른 것이고, 또 외정반(外庭班)과 구별하려는 것이었다. 외정반은 삼공 육경(三公六卿)으로부터 백집사(百執事)에 이르기까지 모두 처소가 따로 있는데, 그들은 대궐 뜰에 모여서 알현하는 것에도 때가 있고, 일을 아뢰는 것에도 정해진 날이 있어, 특별히 면대하라는 명을 내리시어 정책을 논의하는 기회가 아니면 청규(靑規)에 엎드려서 임금의 안색을 바라보는 것이 그다지 기회가 많지 못하므로, 내반원에서 모시고 있는 중관들이 아침저녁으로 임금의 전후ㆍ좌우에서 모시고 둘러 있으면서, 임금의 모든 행동을 친히 익숙히 받들 수 있는 것과는 아주 처지가 다른 것이다. 이같이 미천한 자격으로 대궐 안의 깊고 엄숙한 곳에 있으니, 마음과 몸가짐이 어떠하여야 되겠는가? 충성하고 정직한 이와 아첨하고 간사한 자가 시대마다 각각 그런 사람이 있을 것이니, 그 중에 착한 사람을 가려서 본받고, 착하지 못한 자를 가려서 경계하는 것이 가할 것이다. 그렇다면 옛날 내시로서 부지런히 충성을 바쳐서 도움이 많았던 이는 한 나라 사유(史遊)이고, 청렴하고 검소하며 겸손하고 후덕하여 용맹한 이를 추천하라는 명을 받고서 사양한 이는 후한(後漢)의 양하(良賀)이며, 한 지방의 봉작(封爵)을 고사(固辭)하면서 강개(慷慨)하게 곧은 말로 간한 이는 여강(呂强)이다. 성품이 강하고 충성하여 간사한 무리를 몰아낸 이는 구문진(具文珍)이고, 품성이 단정하고 조심하여 자기의 큰 공로를 주장하지 않은 자는 마존량(馬存亮)이다. 물러가 은퇴하기를 여러 번 청하고, 삼사(三司)의 권(券)을 없애기를 청한 자는 장무칙(張茂則)이며, 궁중에 60년이나 출입하면서 항상 이치를 따르고 삼가서 허물이 없었던 이는 풍세령(馮世寧)이다. 이 사람들은 몸소 은총과 녹을 보전하여 꽃다운 공적이 후세에 전해졌으니, 아, 본받을 표본이 이들에게 있지 않은가? 만약 참소하고 아첨하여 임금을 유혹하고, 아첨하고 간사함으로 은총을 받아서 당파(黨派)를 끌어들이고, 충성스럽고 어진 이를 시기하고 해치며, 음악ㆍ여색과 기교(技巧)로 임금을 위하여 재리(財利)를 긁어 들이는 등, 임금의 모든 욕심을 맞추어 주는 데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임금이 불행히도 한번이라도 그의 마수(魔手)에 빠지게 되면 곧 초당(貂璫)의 위세를 빌려서 추기(樞機)의 중요한 직책을 잡고서 방자하고 거만하여 감히 누구도 금하고 막을 이가 없게 되어, 눈 한 번 흘긴 혐의도 반드시 갚으려 하고, 명령(螟蛉)의 족속까지도 호화롭고 귀한 자리를 도모한다. 이리하여 출척(黜陟)과 형상(刑賞)의 권세가 가만히 그들에게 옮겨져서 마침내는 나라가 위태롭고 혼란하게 되며, 자신의 몸이 칼날에 잘리게 되는 것이니, 제 나라의 수초(豎貂)로부터 한(漢)ㆍ당(唐)ㆍ송(宋)의 여러 환관(宦官)들이 일률적으로 다 같은 것이다. 아, 전인(前人)의 실패의 귀감이 여기에 있지 않은가? 지금 임금의 덕이 해와 달처럼 그 빛이 하늘 가운데 있어 아무리 어두운 곳이라도 비추지 않는 곳이 없으므로, 중앙이나 지방의 신하들의 선악을 반드시 아는데, 하물며 내반(內班)의 친근한 자이랴? 처소가 비록 대궐 안의 은밀한 곳이라 할지라도 실로 모든 사람들이 지적하고 볼 수 있는 곳이니, 진실로 조금이라도 게을리 하고, 소홀히 하는 마음이 있다면 화(禍)가 미치지 않음이 적을 것이다. 비와 이슬같이 적셔 주는 임금의 은택을 어찌 구차히 혼자만 바랄 것이며, 우레와 천둥같은 임금의 위엄을 어찌 자기만 구차히 면할 수 있겠는가? 이러하니, 지금 이 내반원에 있는 자 누가 옛날 어진 내시들을 본받아 복받을 것을 버리고, 옛날 악한 내시를 본받아 재앙 받는 것을 원하겠는가? 그러나 옛날 사람들의 좌우명(座右銘)은 참으로 헛되게 꾸며 놓은 것이 아니므로 삼가 윤지(綸旨 임금의 전지(傳旨))를 받들어서 이렇게 기문을 쓰노라.” 하였다.
기로소(耆老所) 중부 징청방에 있으며, 2품 이상으로 나이 70세가 된 이들이 서로 모이는 곳이다.
【문직공서】 중추부(中樞府) 예조(禮曹) 남쪽에 있으며 문무(文武) 당상관으로서 실직(實職)이 없는 자를 대우하는 부서이다. 그 속사(屬司)로 경력소(經歷所)가 부속되어 있다. ○ 영사 1명, 판사 2명, 지사 6명, 동지사 7명이다. 첨지사가 8명인데 정3품이고, 경력과 도사가 각각 1명이다.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광화문 안 동쪽에 있는데, 하나는 창덕궁 인정전 서쪽에 있으며, 하나는 창경궁 홍화문(弘化門) 안 남쪽에 있으며, 5위(五衛)의 군무(軍務)를 관장한다. 속사로는 경력소가 부속되어 있다. ○ 도총관(都摠管)이 정2품이고, 부총관(副摠管)이 종2품인데, 모두 10명으로 다른 관원으로 겸하게 한다. 경력과 도사가 각 4명이다. ○ 서거정이 지은 제명기에, “우리나라 초기에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를 설치하여 병정(兵政)을 총괄하게 하다가, 뒤에 삼군진무소(三軍鎭撫所)로 고치고서 병조(兵曹)에 예속하게 하였다. 도진무(都鎭撫) 5명을 두고, 요좌(僚佐)에 진무(鎭撫) 10명, 혹 15명, 혹 30명을 두어 때에 따라서 더 두기도 하고 감원하기도 하였는데, 모두 다른 관원으로 겸임시켜 궁궐을 호위하는 군사의 통솔을 관장하여 윤번으로 숙위(宿衛)하게 하였으니, 모두 당시에 명망이 높은 이를 가려서 그 직을 주었던 것이다. 또 그 뒤에 3군을 5위(衛)로 고쳤으니 용양위(龍驤衛)ㆍ호분위(虎賁衛)ㆍ의흥위(義興衛)ㆍ충좌위(忠佐衛)ㆍ충무위(忠武衛)이다. 세조대왕께서 군정에 유의하여 더욱 이 직임을 중히 여겨서 진무소를 오위도총부로 고쳐서 병조에 예속시키지 않고, 전적으로 군무를 위임시켰다. 도총관이 10명인데, 정2품이나 혹 종2품으로 겸대(兼帶)한 자는 부총관이라고 하였다. 요좌에 12명이 있었는데, 진무 2명은 종3품이고, 경력 3명은 종4품이며, 도사 7명은 종5품이다. 도총관은 비록 종친ㆍ외척이나 삼공(三公)의 중요한 자리에 있는 자라도 겸임하게 하였으니, 그 자리를 높게 여기고 직임을 영광스럽게 한 것이다. 이에 병조에서는 병정(兵政)을 총괄하고 도총부에서는 군무를 총괄하여 서로 체통이 유지되면서 군정이 더욱 분명하게 되었다. 아, 임무가 중할수록 책임이 더욱 크고, 책임이 클수록 근심이 더욱 깊어지는 것이니, 모든 군사를 통솔하여 궁궐을 호위하는 소임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가? 진무소에는 옛날부터 제명기가 있었는데, 무술년에 시작되어 을유년에서 마쳤으므로, 병술년 뒤의 일은 속집으로 따로 써서 후세에 전하게 한다. 이 책임을 맡은 자는 성상께서 위임하신 일이 중대한 것과 은총과 대우가 융숭한 것을 생각하여, 충의를 발휘하여 성은에 보답하여 후세에까지 그 이름을 더럽히지 않게 해야 될 것이다. 『신증』 연산군 을축년에 당상관 5명과 낭청 4명을 혁파하였다가, 금상 초기에 다시 설치하였다.
의흥부(義興府) 중위(中衛)로 갑사보충대(甲士補充隊)가 부속되어 있다.
용양위(龍驤衛) 좌위(左衛)로 별시위대졸(別侍衛隊卒)이 부속되어 있다.
호분위(虎賁衛) 우위(右衛)로 족친위(族親衛)ㆍ친군위(親軍衛)ㆍ팽배(彭排)가 부속되어 있다.
충좌위(忠佐衛) 전위(前衛)로 충의위(忠義衛)ㆍ충찬위(忠贊衛)ㆍ파적위(破敵衛)가 부속되어 있다.
충무위(忠武衛) 후위(後衛)로, 충순위(忠順衛)ㆍ정병(正兵)ㆍ장용위(壯勇衛)가 부속되어 있다. ○ 위장(衛將)이 12명인데, 종2품으로 다른 관직에 있는 자가 겸임한다. 부장(部將) 25명은 종6품이다.
선전관(宣傳官) 모두 8명으로, 윤번으로 대궐 안에 입직한다.
내금위(內禁衛) 모두 1백 90명으로, 정전(正殿) 남쪽 행랑에서 숙위(宿衛)한다. 장(將) 3명은 다른 관원이 겸임하고, 겸 사복장(兼司僕將)도 같다. 『신증』 연산군 을축년에 이름을 충철위(衝鐵衛)로 고치고, 예차(預差 예비군)는 소적위(掃狄衛)라 하였는데, 금상 초기에 옛 이름으로 회복하고, 예차는 2백 50명으로 정하였다.
훈련원(訓鍊院) 남부 명철방에 있으며, 무재(武才)를 과거(科擧)로 시험하고, 무경(武經)을 읽고 익히는 일을 관장한다. ○ 지사가 1명인데, 다른 관직에 있는 자로 겸임하게 하고, 도정(都正)이 2명인데 그 중 1명은 다른 관직에 있는 자로 겸임하게 한다. 정(正) 1명, 부정ㆍ첨정ㆍ판관ㆍ주부가 각 2명이다. 참군(參軍)이 2명인데 정7품이고, 봉사가 2명이다.
○ 성간(成侃)이 지은 사청(射廳) 기문에, “청(廳)을 사청이라고 이름지은 것은 무재(武才)를 익히기 위해서 설치하였기 때문이다. 무재를 익히는 도구가 활쏘기뿐만이 아닌데, 어째서 활쏘는 것으로 이름지었는가 하면 활쏘는 것이 오병(五兵)에서 우두머리가 되기 때문이니, 그 이름을 지은 의의가 매우 크다 하겠다. 이러한 기술을 나라에 일이 없을 때에 익혀 두면 백성을 진정시켜 태평을 유지하여, 뒷날 일이 있을 때에 쓸 수 있을 것이고, 나라에 일이 있을 때 쓰게 되면 포악과 혼란을 제거하고 천하에 위력을 보일 것이니, 이것은 군사 훈련을 평소에 하였기 때문이다. 훈련원에 사청(射廳)을 설치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공손히 생각건대, 성상께서 조종(祖宗)의 뜻과 기업을 이어받아 거룩한 사업을 더욱 넓히고 키워서 문교의 풍화를 높이 선양하여 한 시대의 정치를 장식하였고, 편안한 시대이면서도 오히려 위태함을 잊지 않고, 무비(武備)에 마음을 써서 이르기를, ‘이 사청은 조종조에서 설치한 것이다.’ 하고, 드디어 신에게 명하여 그 시말을 기술하여 후세에 전하게 하였다. 신은 생각건대, 천하의 형세는 한창 혼란할 때에 대응하기는 쉬우나, 아직 혼란하기 전에 대응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대개 천하가 소란함이 계속되어 여러 영웅이 서로 싸울 때에는 임금의 마음이 앞을 염려하고 뒤를 돌아보아 마치 곁에 적국이 있는 것처럼 하지 않는 이가 적을 것이나, 천하가 다 평정되어 모두들 편안하게 되면 모두 태평한 생활에 길들어서 태만하고 방종하게 되어, 전쟁을 말하지도 않고 심지어는 무뢰한이나 시정잡배들이 직책을 맡아 궁궐을 지키기도 하고, 더 심한 경우는 칼날과 화살촉을 다 녹여서 다시는 쓸데없음을 표시하기도 한다. 하루아침에 이같이 소홀히 하는 데에서 변이 일어나 필부들이 초야에서 팔을 휘두르며 나서게 되면 산이 무너지고 물이 끓듯이 사방에서 함께 허물어져서 수습할 수 없게 되어 전쟁이 4ㆍ50년 동안이나 계속되다가 겨우 그치게 될 것이니, 이것은 그 이치가 또한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천하가 비록 편하다 할지라도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태롭다.’고 한 것이다. 선왕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비록 인의(仁義)와 예악을 높여서 천하를 교화시키고서도, 활과 화살로 무비를 세우는 것도 감히 폐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주관(周官)〉에서 대사마(大司馬)란 관직을 설치한 이유이고, 대사례(大射禮)와 향사례(鄕射禮)도 이 때문에 설치하여 무예를 익힌 이유이다. 주 나라가 망하자, 육예(六藝)가 모두 허물어져 없어졌다. 한 나라에서는 진 나라에서 불태운 나머지의 서적을 주워모았으나, 큰 강령(綱領)을 세상에서 강구하지 않아 날마다 없어지고 망해 가기만 해서, 세상이 모두 구차하고 간략한 것을 일삼게 되었으니,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 태조께서는 고건(櫜鞬)에서 몸을 일으켜 나라를 경영하고 창업하여, 큰 공업이 완성되자 천명이 돌아왔는데도, ‘비록 군사를 쓸데가 없지만, 무비는 잊어서는 안 된다.’ 하고 맨 먼저 훈련의 일을 더욱 발휘하도록 하였다. 태종대왕은 선대의 공렬을 크게 받고 선왕의 뜻을 따라서 서울 동쪽에 집을 세우고 그 남쪽에 굉장히 통창한 대청을 마련하였으니, 이것이 사청(射廳)이라는 것이다. 그리고서 병조에 명하여 진무소와 훈련원의 관원을 통솔하여 군사들을 크게 모아 놓고 여기에서 활쏘기를 겨루게 하였다. 그 법에는 대략 네 가지가 있으니, 무선(武選)과 도시(都試), 취재(取才), 연재(鍊才)라는 것이다. 이런 방법은 모두 그 잘하고 못하는 것을 상고하여 권장하고 경계하는 것이고, 그들의 노고와 안일을 심사하여 상벌을 시행하는 것이고, 그들의 용감함과 비겁함을 가려서 지도하고 힘쓰게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호피(虎皮)의 과녁을 세우고 활쏘는 기구들을 서로 벌여 놓아서 격려하기도 하고 즐겁게하기도 하며 창ㆍ기ㆍ북ㆍ징 같은 기구들도 모두 설비하였으니, 무예를 익히는 도구가 활쏘기 한가지에 한정한 것이 아니다. 이같이 정치하는 실적과 미리 대비하는 뜻으로 주도면밀하게 생각하고 곡진히 방비함이 지극히 깊고 원대하였다. 지금 전하께서도 그 법에 따르고, 잃지 않으시어 조심스럽게 마음을 다잡아 안락한 궁궐에 계시면서도 조종(祖宗)께서 이 나라를 세울 때에 비바람을 무릅쓰고 고생했던 일을 항상 생각하시어 옛 기업을 잃지 않아 백성을 편히 살게 할 것을 생각하셨다. 그러므로 군사에 대해서도 날로 훈련시키고 달로 가르치며, 해마다 익히게 하고 철마다 강론하므로, 지혜로운 자는 자신의 기술을 다 발휘하고 용감한 자는 자신의 힘을 다 써서 군사들이 노련하고 강해져서 절로 천지에 오르고 바다와 산이라도 뽑아낼 수 있게 되었다. 옛날 한(漢)ㆍ당(唐)의 임금들이 무비를 강구한다고 하면서 각저희(角觝戲 씨름)를 하게 하고서 구경이나 한 따위의 일과는 그 규모가 진실로 아주 다른 것이다. 그러니, 이 사청(射廳)의 설치에 대해서 기문을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동궁(東宮)을 모시는 일을 관장한다. ○ 좌우 익위(左右翊衛)가 각 1명인데 정5품이고, 좌우 사어(司禦)가 각 1명인데 종5품이며, 좌우 익찬(翊贊)이 각 1명인데 정6품이고, 좌우 위졸(衛率)이 각 1명인데 종6품이며, 좌우 부솔(副率)이 각 1명인데 정7품이고, 좌우 시직(侍直)이 각 1명인데 정8품이고, 좌우 세마(洗馬)가 각 1명인데 정9품이다.
『신증』 정로위(定虜衛) 금상 7년에 처음으로 설치하였는데, 겸 사복장(兼司僕將) 1천 5백 명이 소속되어 있다.

[주D-001]제명기(題名記) : 어느 관서(官署)에 재직한 관원의 성명을 수록한 기록이다.
[주D-002]삼사(三師) : 주(周) 나라 관제의 태사(太師)ㆍ태부(太傅)ㆍ태보(太保)이다.
[주D-003]삼소(三少) : 주 나라 관제의 소사(少師)ㆍ소부(少傅)ㆍ소보(少保)이다.
[주D-004]의정부의 서사(署事) : 육조(六曹)의 정무를 먼저 의정부에 보고하여, 토의한 후 임금에게 계주하는 일이다.
[주D-005]태상(太常) : 예의(禮儀)와 종묘를 관장한 관청의 이름이다.
[주D-006]도록(圖籙) : 도첨(圖讖)과 같은 말이데, 예언하는 비결(祕訣)을 말한다.
[주D-007]단서(丹書) : 공신(功臣)에게 주는 공적을 기재한 녹권(錄券).
[주D-008]맹부(盟府) : 공신이 동맹한 관부라는 뜻이니, 여기서는 충훈부(忠勳府)를 말한다.
[주D-009]양부(兩府) : 당(唐) 나라 중서성(中書省)과 추밀원(樞密院)을 말하는 것으로, 국가의 가장 중요한 기관이라는 말이다.
[주D-010]한신(韓信)과 팽월(彭越) : 한 고조(漢高祖)의 부하 공신이었는데, 뒤에 반역죄로 죽었다.
[주D-011]구순(寇恂)과 등우(鄧禹) : 한 나라 광무제(光武帝) 때의 신하로서 공적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끝까지 지위를 잘 보전하였다.
[주D-012]소청(訴請)과 고첩(告牒) : 억울한 사정을 문서로써 고소해 오는 것을 말한다.
[주D-013]조옥(詔獄) : 우리나라에서는 의금부(義禁府)를 말하는데, 주로 국가와 강상(綱常)에 관한 죄인을 다스린다.
[주D-014]사민(四民) : 사(士)ㆍ농(農)ㆍ공(工)ㆍ상(商)의 백성을 말한다.
[주D-015]선생안(先生案) : 한 기관의 전임자(前任者)의 명부(名簿)를 말한다.
[주D-016]용린(龍鱗) : 용의 턱 밑에 거슬려 난 비늘이 있는데, 그것을 건드리면 노하여 그를 죽인다. 곧 임금의 비위를 거스르는 것을 말한다.
[주D-017]치관(豸冠) : 어사(御史)와 사헌부(司憲府)가 관리를 탄핵할 때에 쓰는 관(冠)을 말한다. 해치(獬豸)라는 신수(神獸)는 사람의 곡직(曲直)을 지적한다 한다.
[주D-018]백필(白筆) : 사관(史官)이 가지는 붓으로, 항상 사모(紗帽)에 잠(簪)처럼 꽂고 있다.
[주D-019]개옥(改玉) : 《예기(禮記)》 〈옥조(玉藻)〉편에 의하면, “대부(大夫)는 창옥(蒼玉)을 차고, 제후(諸侯)는 현옥(玄玉)을 찬다.” 하였다. 대부가 왕이 되면 옥을 바꾸어 차게 되므로 개옥이라 한다.
[주D-020]장황(裝潢) : 서책(書冊)에 표지를 붙여서 장철(裝綴)하는 것을 말한다.
[주D-021]어수(魚水)의 기쁨 : 물고기와 물과의 관계처럼 임금과 신하의 뜻이 맞아 관계가 좋은 것을 말한다.
[주D-022]봉소(鳳沼) : 금원(禁苑) 안에 있는 못을 말한다.
[주D-023]붉은 뜰 : 대궐 뜰과 섬돌에 붉은 돌을 깔아 놓은 것을 말한다.
[주D-024]황봉(黃封) : 관(官)에서 만든 술을 말하는데, 누런 종이로 입구를 막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주D-025]하심(荷心) : 옛 사람이 더운 여름에 연잎에다 술을 붓고 줄기를 뚫어서 그 구멍으로 술을 마신 이가 있었다.
[주D-026]희준(犧樽) : 소 형상을 조각한 술그릇으로, 제기(祭器)의 일종이다.
[주D-027]옥찬(玉瓚) : 옥으로 만든 술잔으로, 제기(祭器)이다.
[주D-028]홍몽(鴻濛) : 천지 자연(天地自然)의 원기(元氣)로, 이 우주를 둘러싸고 있는 아득한 기운이다.
[주D-029]천보시(天保詩) : 《시경(詩經)》 〈소아(小雅)〉편의 이름으로, 신하가 임금에게 송축(頌祝)하는 내용의 시(詩)이다.
[주D-030]진자체(眞字體) : 전서(篆書)ㆍ초서(草書)와 대립된 말로, 한자의 해서체(楷書體)를 말한다.
[주D-031]기주(記注) : 매일 조정의 일기를 쓰는 관원을 기주관이라 한다.
[주D-032]사명(辭命) : 국내와 국외에 발표하는 임금의 말이다.
[주D-033]공부자(孔夫子)는……또한 적다 : 《논어》 자공(子貢)의 말에, “나의 담은 겨우 어깨에 닿으므로 그 안을 밖에서 볼 수 있지만, 부자(夫子)의 담은 여러 길이나 되어서 그 문을 찾아 들어가지 못하면 풍부하고 아름다움을 볼 수 없다.” 하였다.
[주D-034]신(申)ㆍ한(韓) : 신불해(申不害)와 한비(韓非)로, 전국 시대에 형법(刑法)을 정치의 제일로 삼은 파이다.
[주D-035]훈고(訓詁) : 경서(經書)등 고문(古文)의 고증(考證)ㆍ해석ㆍ주해의 총칭이다.
[주D-036]어휘(御諱) : 돌아간 임금의 이름을 높여서 말하는 것이다.
[주D-037]정일(精一) : 《서경(書經)》의 '유정유일 윤집궐중(惟精惟一 允執厥中)'이란 말로, 송유(宋儒) 심학(心學)의 중요한 문구이다.
[주D-038]군사(君師)의 책임 : 《서경》에, “하늘이 자신을 대신해서 백성을 다스리고 가르치도록 성인으로 임금과 스승을 만들었다.” 하였는데, 이 말은 정치하는 임금은 가르치는 스승도 겸한다는 뜻이다.
[주D-039]봉액(縫掖) : 《예기(禮記)》〈유행(儒行)〉 편에, “거로의봉액지의(居魯衣縫掖之衣)”라 하였으니, 봉액(縫掖)은 유자(儒子)의 옷을 말한다.
[주D-040]도견(陶甄)의 교화 : 도기(陶器) 만드는 공장(工匠)이, 여러 가지 그릇을 만드는 것처럼 훌륭한 임금이 사회를 교화하는 데에 비유한 말이다.
[주D-041]태뢰(太牢) : 소ㆍ양ㆍ돼지의 세 가지 희생(犧牲)을 갖춘 제수(祭需)이다.
[주D-042]반궁(泮宮) : 태학(太學) 주위에 흐르는 물을 반수(泮水)라 하였으므로 태학을 반궁(冸宮)이라 하였다.
[주D-043]소왕(素王) : 공자(孔子)는 제왕(帝王)의 자리에 오르지는 않았으나, 제왕과 같은 덕을 갖추었다 하여 소왕이라 하였다.
[주D-044]금(金) 소리로……끝마치는 이 : 《맹자》에, ‘집대성야자 금성이옥진지야(集大成也者金聲而玉振之也)'라 말하였으니, 공자의 도(道)는, “음악에 쇠로 시작하고 옥소리로 거두는 것 같아서 처음과 끝을 합쳐서 대성하였다.”는 것이다.
[주D-045]단(壇)의 은행알 : 공자가 살구나무 밑에서 제자들에게 강학하였다. 그러므로 성묘(聖廟)에는 은행나무를 심고 행단이라 하였다.
[주D-046]소강(小康) : 《예기》에 대동(大同)ㆍ소강(小康)ㆍ난세(亂世)의 구별을 말하였으니, 소강은 소란스러운 상태가 조금 안정된 것을 말한다.
[주D-047]단서(丹書) : 공신(功臣)에게 내리는 특권을 기록한 것으로, 붉은 글씨로 썼다.
[주D-048]어두운 방에서도[屋漏] : 《시경》에, “옥루에서도 부끄럽지 않다.[尙不愧于屋漏]”는 말이 있는데, 옥루는 방의 서북쪽 모퉁이로 마음을 바르게 하면 암실이나 옥루에서도 모두 당당하다는 것이다.
[주D-049]자유(子游)와……도왔으리 : 사마천(司馬遷)이 지은 《사기(史記)》〈공자세가(孔子世家)〉에, “공자가 《춘추》를 짓는데, 쓸 것은 쓰고 삭제할 것은 삭제하니, 자하의 무리가 감히 한 구절도 돕지 못하였다.[爲春秋筆削筆削則削子夏之徒不敢贊一辭]”는 말에서 나왔다.
[주D-050]의란(猗蘭) : 공자가 골짜기 속에 난(蘭)이 홀로 피어 있는 것을 보고, 거문고를 타며 그것이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슬퍼했다는 고사(古事)가 있다.
[주D-051]시달(豺獺)도……제사하니 : 《예기(禮記)》에, “1월에는 수달이 고기를 제사지내고, 9월에는 승냥이가 짐승을 제사지낸다.[孟春之月獺祭魚季秋之月豺祭獸]” 하였다. 이런 동물도 자기가 생겨난 근본에 보답할 줄 안다는 말이다.
[주D-052]목탁(木鐸) : 나무와 쇠로 만든 방울로, 흔들어서 군중을 경계시키는 도구이다. 《논어》에 영봉인(潁封人)이 공자를 보고, “하늘이 장차 부자(夫子)를 목탁으로 삼으실 것이다.[天將以夫子爲木鐸]”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주D-053]오성(五星)이 모이니 : 《송사(宋史)》에, “오성(五星)이 규성(奎星)에 모이니, 천하가 저절로 태평해질 것이다.” 하였으니, 즉 문운(文運)을 상징하는 천체의 상서를 말한다.
[주D-054]동평(東平) : 후한(後漢)의 유창(劉蒼)을 말한다. 광무제의 여덟 째 아들로 동평왕(東平王)에 봉해졌다. 문장을 잘하고 선을 하는 것을 가장 큰 낙으로 삼았다 한다.
[주D-055]육경(六經) : 《시(詩)》ㆍ《서(書)》ㆍ《역(易)》ㆍ《춘추(春秋)》ㆍ《예기(禮記)》ㆍ《악기(樂記)》이다.
[주D-056]산등성이에서 우는 봉(鳳) : 《시경》에, “봉황이 울도다. 저 높은 언덕에서.[鳳凰鳴矣于彼高岡]”라고 하였으니, 세상에 드문 아름다운 인재나 문장을 찬미하는 말이다.
[주D-057]동산에 있는 기린(麒麟) : 기린이 동산에 있다는 것은 세상에 상서(祥瑞)가 나타난 것을 비유해서 말한 것이다.
[주D-058]현송(絃誦) : 글 외고 현악기를 타는 것으로, 《예기》〈문황세자〉편에, 봄에는 시를 외고 여름에는 현악기를 탄다.[春誦夏弦]”는 말이 있다.
[주D-059]삼사(三舍) : 태학(太學)에 상사ㆍ중사ㆍ하사가 있는데, 진사와 생원에 합격한 자는 상사에 거처한다.
[주D-060]구재(九齋) : 고려 최충(崔冲)이 창설한 사학(私學)으로 구재를 두고 교육한 것을 말한다.
[주D-061]기순(祁順) : 중국 명(明) 나라의 사람이다.
[주D-062]국자감(國子監) : 중국 역대의 국학 이름이다.
[주D-063]궤도와 문자가…… 다 같으니 : 천하가 통일될 때에는 수레 바퀴의 궤도와 문자를 통일시키는 것이다.
[주D-064]한혈구(汗血駒) : 대원국(大宛國)에서 나던 천리마(千里馬)로, 핏빛 같은 붉은 땀이 났다고 한다.
[주D-065]준사(俊士) : 《예기》에, “선비 가운데서 뛰어난 자를 뽑아서 태학에 올리는 것을 준사(俊士)라 한다.[選士之秀者而升之學曰俊士]” 하였다.
[주D-066]뗏목을 타고……하였으니 : 《논어》〈공야장(公冶長)〉에서 공자가, “도(道)가 행해지지 않으니, 내 뗏목을 타고 바다를 항해하려 한다.”라고 하였다.
[주D-067]구이(九夷) : 동방에 있는 여러 나라를 말한다. 《논어》에, 공자가 “구이(九夷)에 가서 살고 싶다.” 는 말을 하였는데, 여기서는 우리나라를 말한 것이다.
[주D-068]그대의 패물이 푸르구나. : 《시경》에, “푸르고 푸른 그대의 패물이로다.” 한 구절이 있는데, 이 시는 학생을 두고 읊은 시이다.
[주D-069]서곤체(西崑體) : 송 나라 문인(文人)들이 당 나라의 이상은(李商隱)의 시체(詩體)를 본받고, 서곤체라고 하였다.
[주D-070]장구(杖屨) : 지팡이와 신을 말하는 것으로, 덕망이 높은 선생의 뒤를 따라왔다는 말이다.
[주D-071]부상(扶桑) : 동쪽 바다의 해가 돋는 곳에 있다는 신목(神木)이다.
[주D-072]구림(璆琳) : 아름다운 옥(玉)의 이름이다.
[주D-073]노인을……요청 : 《예기》에, “노인을 봉양하는 것은 오제(五帝)의 법이고, 삼왕은 좋은 말을 청한 일이 있었다.[養老五帝憲三王有乞言]” 하였으니, 즉 노인으로 하여금 착한 이를 기르고 좋은 말로써 실행할 것을 비로소 듣게 한다는 뜻이다.
[주D-074]탕왕(湯王)과……중극(中極) : 맹자(孟子)는, “탕은 중도를 지켜서 어진 이를 등용하는 데에 가리지 않았다.[湯執中立賢無方]” 하여, 탕이 과불급(過不及)이 없는 중도를 지킨 것을 말하고, 《서경》에서는 무왕(武王)이 기자(箕子)에게 홍범(洪範)을 들었는데, 거기에 “임금은 그 극진함을 세웠다.[皇建其有極]”라고 하였으니, 두 마디 말에서 나온 중(中)과 극(極)을 말한 것이다.
[주D-075]삼로오경(三老五更) : 《예기(禮記)》에, “옛날에 천자는 삼로오경을 부형 섬기는 예로 봉양했다.” 하였으니, 삼로는 삼덕(三德)이 있는 자이고 오경은 오사(五事)에 능한 자라 한다. 곧 삼덕은 정직(正直)ㆍ강(剛)ㆍ유(柔)이고, 오사는 모(貌)ㆍ언(言)ㆍ사(思)ㆍ청(聽)ㆍ시(視)라 한다.
[주D-076]인의(仁義)를 빌려서 : 《맹자》에, “오패(五覇)는 인ㆍ의를 빌렸다.” 하였으니, 그것은 참다운 마음으로 인ㆍ의를 행한 것이 아니라 인ㆍ의를 빌려다가 자기의 정권을 유지하는 술책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주D-077]환영(桓榮) : 후한(後漢) 명제(明帝)의 스승으로, 태상박사(太常博士)로 있었다.
[주D-078]〈벽옹(辟雍)〉 : 주 나라 천자가 세운 태학(太學)을 말하는데, 여기는 〈벽옹〉시(詩)를 말한 것이다.
[주D-079]자하(子夏)의 뜻 : 자하(子夏)가 《시경》의 서문(序文)을 지은 뜻을 말한다.
[주D-080]상하한(上下澣) : 매월 1일부터 10일까지가 상한이고, 21일부터 30일까지가 하한이니, 당(唐) 나라 때 관리에게 10일씩 목욕하고 옷 빠는 휴가로 정하였으므로 상한ㆍ하한이란 이름이 생겼다.
[주D-081]균천악(鈞天樂) : 하늘 위에 사는 천신의 잔치에서 즐기는 풍류 이름으로, 《사기(史記)》에 나오는 말이다.
[주D-082]청아(菁莪) : 《시경》에 〈청아〉편이 있으니, 국가에서 선비 기르는 것을 읊은 시다.
[주D-083]역박(棫樸) : 《시경(詩經)》 대아(大雅) 〈문왕〉편에 있는 말로 문왕의 덕화를 찬양한 것이다.
[주D-084]주자(周子)ㆍ정자(程子) : 주렴계(珠濂溪)의 이름은 돈이(敦頤)이고 정명도(程明道)의 이름은 호(顥)이며, 정이천(程伊川)의 이름은 이(頤)이니, 다 송 나라 성리학(性理學)의 대유(大儒)이다.
[주D-085]한유(韓愈)ㆍ유종원(柳宗元) : 당 나라 문장가 한유(韓愈)의 호는 창려(昌黎)이고, 유종원(柳宗元)의 자는 자후(子厚)이니, 두 사람은 모두 문장 8대가 중의 중진이다.
[주D-086]이문(吏文) : 우리나라에서 중국과 주고받는 문서에 쓰던 특수한 문체(文體)로서 자문(咨文)ㆍ서계(書契)ㆍ관자(關子)ㆍ감결(甘結)ㆍ보장(報狀)ㆍ제사(題辭) 등에 쓰던 글이다.
[주D-087]오관(五關) : 귀ㆍ눈ㆍ혀ㆍ코ㆍ몸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말한다.
[주D-088]반명(盤銘) : 탕(湯)의 반명(盤銘)에, “진실로 어느날 새로워졌거든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날마다 새롭게 하라.[苟日新日日新又日新]”고 하였다.
[주D-089]강한(江漢)의 물로 씻는 것 : 《맹자》에, 증자(曾子)가 공자를 찬양하는 말에 “양자강이나 한수에서 빨았고, 가을볕에 말렸다.[江漢以濯之秋陽以曝之]”는 말이 있다.
[주D-090]종포(賨布) : 공물(貢物)로 바치는 포백(布帛)이다.
[주D-091]이두(螭頭) : 이(螭)는 황색의 뿔 없는 용(龍)이니, 그 머리를 조각하여 궁전 안의 여러 의장(儀仗)으로 쓰는 것이다.
[주D-092]표미(豹尾) : 임금의 수레에 표범 꼬리로 기(旗)를 만들어 꽂아서 장식한다.
[주D-093]곤월(袞鉞) : 《춘추(春秋)》의 필법이 한 자(字) 표창함은 곤룡포보다 빛나고 한 자 깎아 내림은 도끼보다 무섭다 한다.
[주D-094]자문감(紫門監) : 선공감(繕工監)에 속한 관청으로, 궐내의 영선(營繕)ㆍ공작(工作)을 담당한 곳이다.
[주D-095]오병(五兵) : 다섯 가지 병기로 궁시(弓矢 화살)ㆍ수(殳 몽둥이)ㆍ모(矛)ㆍ과(戈)ㆍ극(戟)을 말한다.
[주D-096]성균(成均) : 성취되지 못한 인재를 성취시키고 통일되지 못한 풍속을 통일되게 한다는 뜻이다.
[주D-097]삼청(三淸) : 도교(道敎)의 삼천(三天)인 옥청(玉淸)ㆍ상청(上淸)ㆍ태청(太淸)을 말한다.
[주D-098]초제(醮祭) : 오성 열수(五星列宿)에 제사하여 소재도액(消災度厄)하는 것이다.
[주D-099]과비자(夸毗子) : 자기를 낮추고 남에게 아첨하는 자를 말한다.
[주D-100]세제(歲制)……일수(日修) : 《예기》왕제(王制)에, “육십세제(六十歲制)ㆍ칠십시제(七十時制)ㆍ팔십월제(八十月制)ㆍ구십일수(九十日修),”라고 하였으니, 나이가 많을수록 관곽 준비를 빨리 하라고 정해져 있다.
[주D-101]액정(掖庭)과 영항(永巷) : 액정(掖庭)은 궁중 옆에 있는 방으로 후궁 비빈(妃嬪)이 있는 곳이고, 영항(永巷)은 궁중에 있는 긴 골방으로 죄가 있는 궁녀를 유폐(幽閉)하는 곳이다.
[주D-102]청규(靑規) : 임금의 자리 앞에 청포석(靑蒲席)을 깔아 놓았다.
[주D-103]초당(貂璫) : 한 나라 때 시중상시(侍中常侍)의 관(冠)에 황금과 옥으로 장식하고 담비 꼬리를 달아서 위세를 보였다 한다.
[주D-104]추기(樞機) : 임금의 말을 출납하는 것이 문을 열고 닫는 지도리와 같다는 뜻이다.
[주D-105]명령(螟蛉)의 족속 : 명령(螟蛉)은 나나니벌이 업고 가서 기른다는 전설에서 양자(養子)를 이르는 것으로, 환관(宦官)이 양자(養子)로 들이는 족속을 말한다.
[주D-106]팽배(彭排) : 방패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본부대의 곁에서 적을 공격하고 방어하는 소부대를 뜻한다.
[주D-107]고건(櫜鞬) : 화살 넣는 집으로, 늘 무기를 가지고 생활한 것을 말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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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청도(忠淸道)
영동현(永同縣)


동쪽으로는 황간현(黃澗縣) 경계까지 16리이고, 남쪽으로는 옥천군(沃川郡) 경계까지 15리이고, 서쪽으로는 같은 군(郡) 경계까지 21리이고, 북쪽으로는 청산현(靑山縣) 경계까지 30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1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 길동군(吉同郡)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고, 고려 성종(成宗) 14년에 승격시켜서 계주 자사(稽州刺史)를 삼았다가 목종(穆宗) 8년에 이를 폐지했고, 현종(顯宗) 9년에 상주(尙州)에 소속시켰으며 명종(明宗) 2년에는 감무(監務)를 두었고, 6년에 현령(縣令)으로 승격시켰다가 뒤에 다시 감무(監務)로 회복시켰고, 얼마 안 되어 폐지했다. 본조 태종(太宗) 13년에 전례에 의하여 현감을 두고, 경상도에서 본도(本道)로 소속시켰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각 1인.
【군명】 길동(吉同)ㆍ계주(稽州)ㆍ영산(永山)ㆍ계산(稽山).
【성씨】 본현ㆍ김(金)ㆍ신(申)ㆍ고(高)ㆍ길(吉)ㆍ임(任)ㆍ장(張). 풍곡 공(公)ㆍ손(孫) 앙암(仰巖)도 같다. 율곡(栗谷) 염(廉).
【형승】 산과 물이 맑고 기이하다. 윤상(尹祥)이 금유(琴柔)에게 보낸 글에, “영동은 산수(山水)가 맑고 기이해서 시(詩) 짓는데 도움을 받을 만한 것이 진실로 많다.” 했다.
【산천】 성황산(城隍山) 고을 북쪽 1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박달산(朴達山) 고을 북쪽 14리에 있다. 마니산(摩尼山) 고을 서쪽 16리에 있다. 또 옥천군조(沃川郡條)에도 보인다.
남각산(南角山) 고을 남쪽 16리에 있다. 어리산(於里山) 고을 서쪽 14리에 있다. 기산(箕山) 고을 남쪽 10리에 있다. 침산(砧山) 고을 남쪽 7리에 있다. 용연(龍淵) 고을 서쪽 16리에 있으니, 마을 어구 두 언덕에 석벽(石壁)이 깎아 세운 듯하고, 2리쯤 들어가면 두 봉우리가 서로 버티고 서서 바위 산이 높고 가파르다. 가운데에 돌 웅덩이가 있어 못물의 하류(下流)가 여기에 모이는데, 물 깊이를 알 수가 없으니 세속에서는 이것을 기연(妓淵)이라고 한다. 물이 넘쳐 폭포가 되어 수백 척을 날라 흘러내리고 그 아래에는 깊은 못이 있다. 고당포(高唐浦) 고을 서쪽 15리에 있다. 송천(松川) 박달산(朴達山) 아래에 있다. 심천(深川) 고을 서쪽 15리에 있으니 고당포(高唐浦)로 흘러 들어간다. 동천(東川) 성 동쪽에 있다.
【토산】 송이[松蕈]ㆍ지치[紫草]ㆍ잣[海松子]ㆍ인삼(人蔘)ㆍ오미자(五味子)ㆍ꿀[蜂蜜].
【성곽】 읍성(邑城) 돌로 쌓았으니, 둘레가 2천 4백 10척이요, 높이가 7척이며, 성안에 우물이 둘 있다.
【봉수】 박달산 봉수(朴達山烽燧) 동쪽으로는 황간현(黃澗縣) 소이산(所伊山)에 호응하고, 서쪽으로는 옥천군(沃川郡) 이산현(利山縣) 월이산(月伊山)에 호응한다.
정사 징청정(澄淸亭) 객관(客館) 동쪽에 있다. ○ 권진(權軫)의 시에, “눈앞의 산과 물이 바로 새로운 병풍인데, 온종일 시를 읊어 들에 심정 풀어보네. 구구한 경국(經國)의 뜻 스스로 우스워라, 귀밑 흰 실 같은 머리털 거울 보고 놀래었네.” 하였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詩)에, “부용산(芙蓉山) 밑 외로운 성(城), 한 줄기 물 잔잔하여 거울처럼 맑네. 교룡(蛟龍)이 못 속에서 들을까 두려워, 시(詩)를 써도 목소리 높여 읊조리지 못하네.” 하였다.

【학교】 향교(鄕校) 고을 동쪽 2리에 있다.
【역원】 회동역(會同驛) 고을 성 남쪽에 있다. 금련원(金連院) 고을 동쪽 6리에 있다. 회덕원(會德院) 고을 서쪽 1리에 있다. 심천원(深川院) 심천(深川) 언덕에 있다. 사읍원(沙邑院) 고을 동쪽 14리에 있다. 미전원(米田院) 고을 북쪽 26리에 있다. 건행원(乾行院) 고을 서쪽 10리에 있다.
【교량】 심천교(深川橋).
【불우】 마니사(摩尼寺) 마니산(摩尼山)에 있다. 적화사(赤化寺) 고을 북쪽 25리에 있다. 박달라사(朴達羅寺) 박달산(朴達山)에 있다. 용화사(龍化寺) 남각산(南角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성안 서쪽에 있다. 여단(厲壇) 고을 서쪽에 있다.
【고적】 풍곡부곡(楓谷部曲) 고을 북쪽 25리에 있다. 앙암부곡(仰巖部曲)ㆍ율곡소(栗谷所) 모두 고을 북쪽 20리에 있다. 낙화대(落花臺) 성 서쪽에 있다. 세속에 전하기를, “계주(稽州) 때 사람들이 서로 전송하고 작별하던 곳으로 기생이 어느 남자와 헤어지기가 서러워서 떨어져 죽었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이로 인하여 이름을 지었다.” 한다. 마니산성(摩尼山城) 또 옥천군(沃州郡)에 보인다.
【명환】 본조 금유(琴柔).
【인물】 고려 장항(張沆)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고 사람됨이 청렴하고 올바랐다. 충숙왕(忠肅王)이 참소를 입어 원(元) 나라에 억류 당하여 5년 동안 돌아오지 못했는데, 장항이 충의로써 자신을 잊고 시종하여 공로가 있었다. 그 공로로 철권(鐵券)을 하사했고, 영산군(永山君)을 봉했으며, 시호를 문현(文顯)이라 했다. 김길원(金吉元) 본래 신라(新羅)의 대성(大姓)으로서 여러 세대를 이 고을에서 살았다. 조정에 공을 세웠으므로 영산군(永山君)에 봉하였는데, 드디어 토성(土姓)이 되었다.
본조 김수온(金守溫) 과거에 급제하여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참여하고, 영산부원군(永山府院君)에 봉했으며, 벼슬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렀다. 문장이 웅장하고 깊고 기이하였다. 《식우집(拭疣集)》이 있어 세상에 전해진다.
【우거】 본조 박연(朴堧)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중추원사(中樞院事)에 이르렀다. 효행이 있고 또 음률(音律)에 정밀했다. 세종(世宗)이 아악(雅樂)을 만들 때, 박연이 실상 일을 주관하였다.
『신증』 【효자】 본조 채형온(蔡亨溫) 나이 11세 때 그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고 집이 가난해서 상수리 열매를 주워다가 조석 끼니를 이었고, 어머니가 죽자, 남에게 빌려서 장사지냈다. 아버지가 일찍이 임질(淋疾)을 앓았는데 입으로 빨아서 고쳤다. 아버지가 죽자 시묘(侍墓)하고 3년 동안 죽을 먹었다. 금상(今上) 13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했다.
【열녀】 본조 정씨(鄭氏) 민보로(閔普老)의 아내다. 남편이 죽자 시묘(侍墓)하고 3년 마친 뒤에도 아침저녁으로 전(奠)을 올려 종신토록 중지하지 않았다. 조정에 알려져 정문을 세워 표창했다.
【제영】 유민상행견승평(遺民徜幸見昇平) 이곡(李穀)의 시(詩)에, “지나는 손 경솔히 희로(喜怒)를 나타내지 말라. 남은 백성들 혹 다행히 태평한 시절 볼 것이다.” 하였다. 계산차일무지기(稽山此日無知己) 이방직(李邦直)의 시(詩)에, “계산 오늘에 나를 아는 이 없으니, 부질없이 당시의 하사명(賀四明)을 생각하네.”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현동(縣東) 처음은 1리, 끝은 18리이다. 남일(南一) 처음은 5리, 끝은 30리이다. 남이(南二) 처음은 20리, 끝은 50리이다. 서일(西一) 처음은 15리, 끝은 30리이다. 서이(西二) 처음은 5리, 끝은 40리이다. 북일(北一) 처음은 10리, 끝은 40리이다. 북이(北二) 처음은 20리, 끝은 35리이다.
【진도】 심천진(深川津) 서쪽으로 15리인 송천(松川) 하류이며, 적등진(赤登津) 대로(大路)와 통하며, 수로(水路)에는 다리를 놓았다.
【토산】 감[柹]ㆍ신감채(辛甘菜)ㆍ누치[訥魚]ㆍ쏘가리[錦鱗魚].


 

[주D-001]하사명(賀四明) : 당 나라 하계진(賀季眞)이 사명광객(四明狂客)이라 자칭하였다. 계산(稽山)은 그의 고향인데 그가 오랫동안 서울에 있다가 고향에 돌아가 지은 시에, “아이들이 보고는 알지 못하고 웃으며 손님 어디서 왔소, 하고 묻네.” 하였다.

 

 

연려실기술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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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조 고사본말(世宗祖故事本末)
세종조의 명신(名臣)




이수(李隨)

이수는 본관이 봉산(鳳山)이다. 태조 병자년(1396)에 생원(生員)에 장원하였고 태종 갑오년(1414)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벼슬이 이조 판서 대제학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정공(文靖公)이고, 종묘에 배향되었다.
○ 세종이 세자로 있을 때에 사부(師傅)였으며, 문장으로 이름이 있었다. 《여지승람》


이변(李邊) 오대손(五代孫)이 순신(舜臣)이다.

이변은 본관이 덕수(德水)이다. 나이 30이 지나서 비로소 글을 읽었으며, 기해년(1419)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벼슬이 대제학 영중추원사에 이르렀다. 계사년(1473)에 죽으니 나이가 83세였고, 시호는 정정공(貞靖公)이다.
○ 공은 성품이 엄하고 곧았으며 남을 경계하는 마음이 없었다. 이조 참의가 되어 매양 사람을 뽑을 때에는 장관(長官)이 한 일을 많이 반박하였으므로 서로간에 조화가 되지 않았다. 어느날 외관(外官) 한 사람이 생선과 맛있는 고기를 선사한 것을 공은 받지 않았으나 장관(판서)은 이미 받았다는 말을 들었다. 마침 그날 장관이 그에게 맛있는 고기로 대접하자 공은 젓가락을 들고, “이것이 이른바 꽥꽥 우는 고기입니까.” 하였으므로 장관이 깊이 원혐(怨嫌)을 가졌다. 《필원잡기》
○ 공은 겉과 속이 한결같았으며 바르고 곧기로 자부하여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평소에 남을 속인 일도 없었거니와 벼슬한 뒤로 한 번도 거짓병으로 결근을 한 적도 없었다.” 하였다.김종직(金宗直)이 말하기를, “실로 이 말씀과 같았다면 옛날 벼슬하는 이로서 임금 앞에서 병을 칭탁한 이가 전후에 많이 있었으니, 상공(相公)의 덕이 진실하고 돈독하긴 하나 이 말씀은 너무 지나친 듯 합니다.” 하였다.
○ 공은 중국말을 잘 하였다.


허척(許倜)

허척은 본관이 하양(河陽)이며, 허조(許稠)의 아우이다. 음관 출신으로 벼슬이 중추원 부사에 이르렀다.
○ 일찍이 지평으로 있을 때, 세종이 만년에 불교를 좋아하여 기일(忌日)을 당하여 절에서 친히 제사하려 하였다. 공이 이를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으므로 곧 아전과 노속을 거느리고 제사에 쓸 물건들을 쳐부수어 그 행차를 막고는 피하여 숨었다가 임금의 노여움이 풀린 뒤에야 나왔다.


허성(許誠)

허성은 자가 맹명(孟明)이니 허주(許周)의 아들이다. 태종 임오년(1402)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 판서 대제학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공간공(恭簡工)이다.
○ 공은 성격이 고집스러웠다. 일찍이 이조 판서가 되었을 때 직무에 충실하고 올바름을 지켰으므로 청탁이 이르지 않았으며, 청탁하는 것을 미워하여 청탁하는 이가 있으면 반드시 그와 반대로 일을 행하였다.어떤 한 조관(朝官)이 예천(例遷)하여 외직을 맡아야 했는데, 남도 벼슬을 청탁해 왔으므로 일부러 평안도의 변방 군수로 제수하였고, 한 문사(文士)가 서울의 벼슬을 청탁했을 때는 반대로 외군의 교수(敎授)로 제수하였다.
흥덕사(興德寺) 중 일운(一雲)이 간사하고 꾀가 많아 단속사(斷俗寺)의 주지가 되고자 하여 공을 속이기를, “듣자오니 평양 영명사(永明寺)는 산수가 매우 좋다 하는데 가서 살고 싶습니다. 만일 단속사라면 내 일은 틀리는 것입니다.” 하였더니, 며칠 뒤에 일운을 단속사의 주지로 삼았다. 일운이 크게 웃으면서, “그가 내 꾀에 넘어갔구나.” 하였다. 《필원잡기》
○ 공이 매양 말하기를, “벼슬을 탐내며 녹에 애착하는 것이 늙을수록 더욱 심해져서 남에게 조소거리가 되어도 반성할 줄을 모르게 된다면 매우 부끄러운 일이리라.” 하였다.이조 판서로 있을 때에 상제가 되어 3년상을 끝내고 복직되었을 때, 어느날 별안간 거울을 보다가 슬픈 기색을 짓더니 이내 거울을 던지면서, “나는 늙음이 이 지경에 이른 줄을 몰랐구나.” 하고 곧 사직하고 나오지 않았으니 나이가 60여세였다. 《청파극담》


정척(鄭陟) 경오생이요, 무자년 사마(司馬)이다.

정척은 자는 명지(明之)이며, 호는 정암(整菴)이고,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태종 갑오년(1414)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공의 조상은 모두 진주의 이속(吏屬)이었는데, 공에 이르러서 크게 현달하여 벼슬이 정헌대부(正憲大夫)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수문전 대제학(修文殿大提學)에 이르렀으며, 을미년(1475)에 죽었으니 시호는 공대공(恭戴公)이다.
○ 교서 정자(校書正字)로서 승문원 박사(承文院博士)를 겸했는데, 세종이 특명을 내려서 태상왕 대비의 인보(印寶)와 일본통신(日本通信) 도서를 전자(篆字)로 새겨서 바치게 하였다.
○ 정통(正統) 기사년(1449)에 야선(也先)이 북경(北京)을 침범하였으므로 광녕(廣寧)ㆍ요동(遼東) 등지를 거쳐서 조공바치러 가는 길이 막혀 사람들이 사신 가기를 꺼렸다. 그런데 공은 지원사(知院事)로서 성절사(聖節使)가 되었으나 어려워하는 빛이 없었다.하직하고 떠나는 날에 임금이 세자로 하여금 전송하게 하였는데, 도중에 황제가 이미 야선에게 사로잡히고 북경이 포위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모두들 두려워하며 머뭇거렸으나 공은 전진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북경에 이르니, 새 황제가 이미 즉위하였으므로 공은 새 황제를 뵌 뒤 다시 북을 향하여 사로잡힌 황제의 성절의 축하례를 의식대로 하였다. 《동각잡기》
○ 계축년(1433)에 의정부 사인이 되었다. 전에는 국상에 쓰는 관곽(棺槨)을 때에 임하여 만들었는데, 공이 청해서 관곽을 미리 만들어 놓기로 하였다. 조정에서는 이 의견을 옳게 여겨 비로소 장생전(長生殿) 국상의 관곽을 준비하는 곳 을 세우고, 이어 그를 시켜 널리 황장목(黃腸木)을 구해서 관곽을 만들게 하니, 국상에 아무런 군색함이 없게 되었다.
○ 공은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일찍이 세조가 그를 불러 보고 이르기를, “부왕께서 일찍이 ‘청직(淸直)’ 두 글자를 경에게 허하시던 말씀이 아직도 나의 귀에 남아 있다.” 하였다.


어변갑(魚變甲) 신유생이며 숙권(叔權)의 고조(高祖)이다.

어변갑은 자는 자선(子先)이며, 본관은 함종(咸從)이다. 태종 무자년(1408)에 문과에 장원하여 벼슬이 집현전 직제학에 이르렀으며, 어머니가 늙자, 벼슬을 버리고 함안(咸安)으로 돌아와 봉양하였다.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을묘년(1435)에 죽으니 나이가 55세였다.
○ 공의 먼 조상 중익(重翼)의 본성은 지씨(池氏)였는데 나면서 얼굴이 기이하고 백 근 무게의 활을 사용하였으며, 겨드랑이 밑에 비늘 셋이 있었다. 자라서 고려 태조를 섬길 때 어떤 이가 비늘이 있다 하니, 태조가 보고 이르기를, “너는 비늘이 있으니 이는 곧 물고기이다.” 하고, 어(魚)씨로 사성(賜姓)하였다. 《동각잡기》
○ 공이 장차 전시(殿試)에 응하려 할 때 대제학 정이오(鄭以吾)가 우연히 꿈에 시를 얻었는데,

삼급의 풍뢰(風雷)에 물고기가 용으로 변하고 / 三級風雷魚變甲
아지랭이 피는 봄날에 말 울음소리가 드물다 / 一春煙景馬希聲
두 이름 대(對)가 되어 서로 겨루나 / 雖云對偶元相敵
용문(龍門)의 상객(上客)에 어찌 미치리요 / 那及龍門上客名

하였더니, 공이 과연 장원에 뽑히고, 마희성(馬希聲)이 무과에 장원이 되었다. 《패관잡기》 《동각잡기》
○ 공이 좌정언(左正言)에서 충주 판관(忠州判官)이 되었다. 그때에 공의 아버지 어연(魚淵)이 전 하양 감무(河陽監務)로서 한산(閑散)한 직에 있었기 때문에 공이 상소하여 자기의 직에 대신하기를 진정하였더니, 태종이 허락하고 어연에게 두 계급을 올려 본직(本職)을 제수하였다. 그뒤 공이 헌납이 되었을 때 동료가 상소하여 계림 부윤(雞林府尹) 윤상(尹祥)을 탄핵하려 하였으나 일이 애매하였다.이에 공은 서명을 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그때에 마침 윤공(尹公)이 있는 곳에 있어서 이 사람이 반드시 이러한 일이 없을 것을 상세히 아는 바인데, 감히 없는 것을 날조하여 남을 모함하겠는가.” 하고, 곧 소매를 떨치며 일어나 좌석이 흩어지고 말았다. 〈행장〉 《동각잡기》
○ 공은 신장(申檣)과 매우 친했는데, 서로 약속하기를, “우리들이 충성을 다하여 임금을 섬겨 명성을 얻게되면 모름지기 돌아가 노친을 봉양하자.” 하였다. 집현전에 들어가자 임금의 은혜가 잇달아 겹쳐서 차마 갑자기 떠나지 못하고는 늘 돌아가 부모 봉양함이 늦어짐을 한하여 매양 탄식하기를,“임금을 섬길 날은 길거니와 어버이를 봉양할 날은 짧다.” 하였다. 이에 허리 밑에 건습증(蹇濕症)이 나자, 곧 사직원(辭職願)을 내고 본가가 있는 고향에 내려가 온천에서 목욕하여 병을 다스리게 해 줄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승정원에 이르기를, “이 사람을 꼭 써야 할 텐데, 병을 다스려야겠다 하니, 어찌 구태여 만류하겠는가. 병이 낫는대로 빨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공이 창녕(昌寧) 고향집에 이르러서 시를 읊기를,

병으로 돌아오니 한 집이 조용한데 / 謝病歸來一室幽
옛 연못가엔 초목들이 황량하기도 하구나 / 荒凉草樹古池頭
나 같은 이 어찌 공명을 피하는 자이겠는가 / 若余豈避功名者
다만 어버이 살아계시니 멀리 놀진 못하겠네 / 只爲慈親不遠遊

하였다.
그뒤 신장은 여러 차례 승진하여 참판에 이르렀는데, 어변갑의 아들 한림(翰林) 효첨(孝瞻)에게 이르기를, “내가 자네 아버지와 함께 돌아가 어버이를 봉양할 것을 남몰래 서로 약속하였는데 자네 아버지는 결단성 있게 돌아갔으나 나 혼자서 언약을 저버렸으니 매우 부끄럽네.” 하였다. 권제(權踶)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벼슬을 사양한 이가 둘이 있었을 뿐이니 판부(判府) 허주(許周)와 어변갑이다.” 하였다.
공이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니 부모가 모두 살아계시고 모든 아우가 무고하였다. 조석으로 입에 맞는 음식을 드리고 날마다 어버이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을 일삼았다. 조정에서 공의 행실을 높이 여겨 김해 부사(金海府使)로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또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로 불렀으나, 끝내 나오지 않고 평생을 마쳤다. 《패관잡기》


강석덕(姜碩德)

강석덕은 자는 자명(子明)이며, 호는 완역재(玩易齋)이고, 본관은 진주(晋州)이니, 회백(淮伯)의 아들이다. 음관 출신으로 벼슬이 지돈녕부사에 이르렀다가 죽으니, 나이가 65세였고, 시호는 대민공(戴敏公)이다.
○ 공은 성격이 드높고 과격하여 한번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하지 못하자 물러나며 탄식하기를, “사내가 세상에 나서 진실로 뇌락(磊落)하게 살 것이어늘 《명신록(名臣錄)》에는 스스로 즐길만한 도의(道義)가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어찌 과거 공부를 하여 하늘 아래서 재주를 다투어 평생 출세할 매개를 삼으리오.” 하고는 다시 응시하지 않았다. 《청파극담》
○ 음관 출신으로서 계성전직(啓聖殿直)에 보(補)했는데 임금이 공의 학문과 행실을 알아 양근 군수(楊根郡守)를 삼았다가 여러 차례 승진시켜 집의와 승지가 되었다. 그때 세종이 문교를 숭상하여 《오례(五禮)》를 편수하는데 특별히 공에게 명하여 예조의 일을 맡겨 모든 길흉에 관한 큰 예식을 한결같이 공에게 위임하였다.
○ 공은 천성이 호탕하고 정직하고 의기가 넘쳤으며, 어머니 섬기기를 지극한 효도로 하고 형제 사이에 처하는 일과 친구에 대한 접대가 한결같이 성심에서 우러나왔다. 항상 두 아들 희안(希顔)과 희맹(希孟)에게 경계하기를,“사람의 부귀와 영달은 하늘에 달려있으니 구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힘써야 할 것은 효제(孝弟)ㆍ충신(忠信)ㆍ예의(禮義)ㆍ염치(廉恥)가 있을 따름이니, 만일 여기에 부끄럼이 있다면 그 나머지는 보잘 것이 없다.” 하였다.


박연(朴堧)

박연은 자는 탄부(坦夫)이며, 호는 난계(蘭溪)이고, 처음 이름은 연(然)이었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니, 삼사 좌사(三司左使) 박천석(朴天錫)의 아들이다. 효행으로 정려되었고, 태종 신묘년(1411)에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벼슬이 지중추원사 제학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헌공(文獻公)이다.
○ 공은 영동(永同)의 유생(儒生)으로 젊었을 때 우연히 피리를 익혔는데, 온 고을 사람들이 그를 선수(善手)라 일컬었다. 그뒤 서울에 왔을 때 어떤 광대가 보고서 웃기를, “음절이 야비하여 가락에 맞지 않는데, 이미 습관이 되어 고치기도 어렵겠다.” 하니, 공이 굳이 배우기를 청하였다. 며칠만에 광대가 말하기를, “선배님은 가르칠 만합니다.” 하였다.또 며칠 지나서 말하기를, “규범(規範)이 이미 이룩되었습니다.” 하고, 또 며칠 지나자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꿇으면서, “나로서는 미칠 수 없습니다.” 하였다. 그 다음 급제한 뒤에 또 거문고와 비파 등 모든 악기를 연습하여 정묘하지 않음이 없었다. 《용재총화》
○ 공의 아들이 계유년 사변에 관계되었으므로 그 역시 이로 인하여 파면되어 향리로 돌아가게 되었다. 친구들이 강가에 나가서 전송할 때, 그는 말 한 필과 종 하나를 데리고 나와 행장이 초라하였다. 친구들이 함께 배 가운데에 앉아서 술잔을 베풀다가 손을 잡고 하직할 때 그가 주머니에서 피리를 뽑아 세 곡조를 분 뒤에 떠나니, 그 소리를 듣고 처량하게 느껴 눈물 흘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 《용재총화》


정갑손(鄭甲孫)

정갑손은 자는 인중(仁仲)이며, 본관은 동래(東萊)이니, 정흠지(鄭欽之)의 아들이다. 태종 정유년(1417)에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였고, 벼슬이 우참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정절공(貞節公)이다.
○ 공은 얼굴이 잘 생기고 키가 크며 수염이 아름다웠고 기량이 넓었다. 공은 비록 여러 대 재상이었으나 집에 저축한 바 없었으며 베 이불과 부들 자리로 만족히 처하였다. 성품이 강개하여 곧은 말을 잘해 권세 있는 이를 피하지 않았으며 그로 인하여 탐하는 자들이 청렴해지고 나약한 자들이 자립할 줄을 알았으므로 조정에서 그를 중하게 여겼다.일찍이 대사헌이 되었을 때, 이조에서 사람을 벼슬에 잘못 제수한 일이 있었다. 세종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와서 상참(常參)을 받을 때, 하연(河演)은 겸판서로서, 최부(崔府)는 이조 판서로서 입시하였는데, 공이 아뢰기를, “최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하연은 다소 사리를 알면서도 알맞지 못한 사람을 등용하였으니, 국문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온화한 얼굴로 양편을 화해시켰다.조회가 끝난 뒤 밖에 나와서 둘 다 땀이 물 흐르듯 할 때, 그가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기를, “각기 제 직분을 다했을 뿐이니, 서로 해침은 아닙니다.” 하였다. 곧 녹사(錄事)를 불러서, “두 분이 매우 더우신 모양이니, 네가 부채를 가지고 와서 부쳐 드려라.” 하고는 조용한 태도로 조금도 후회하거나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다. 《용재총화》
○ 곧은 도리로 흔들리지 않아 풍절이 늠름하니, 사람들이 홀로 치는 새매에 견주었다. 사가집(四佳集)에 실린 그의 아우 창손(昌孫)의 비문
○ 공은 성품이 청렴하고 곧으며 엄준하여 자제가 감히 사사로운 일로 청탁을 하지 못하였다. 일찍이 함길도 감사(咸吉道監司)가 되었을 때 부름을 받고 서울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함길도 향시(鄕試)의 방(榜)이 발표된 것을 보니, 그의 아들 정오(鄭烏)가 방에 들어 있었다.이에 그는 수염이 꼿꼿하여지며 노하여 시관(試官)을 꾸짖기를, “늙은 것이 감히 나에게 아첨을 하느냐. 내 아들 정오는 학업이 정밀하지 못하거늘 어찌 요행으로 합격시켜 임금을 속이려 하느냐.” 하고, 아들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마침내 시관을 파면시켜 버렸다. 《필원잡기》
○ 공이 대사헌이 되었을 때에 악을 제거하고 선을 드날렸기 때문에 조정의 기강이 크게 진작되었다. 그러나 너그럽고 후하여 대체를 지녔다. 전례에 공회(公會)가 열리면 사헌부와 사간원이 반드시 막차(幕次)를 이웃하였으므로 혹 휘장을 걷고 술잔을 서로 주고 받아서 권장음(捲帳飮)이라 하였다. 만일 주금(酒禁)을 만나면 사헌부에서는 법을 집행하였기 때문에 마시지 않으나 사간원에서는 마시고 취함이 전과 다름없었다.
어느 날 간관이 술잔을 가득 부어서 희롱하느라 휘장 틈으로 대장(臺長 장령과 지평)에게 보이니, 대장 역시 희롱하느라 옷소매로 밀어냈는데, 술잔이 휘장틈으로부터 떨어져 굴러서 헌장(憲長 대사헌)의 책상 앞에 가서 멈췄다.모든 대장(臺長)들이 황공하여 어쩔 줄을 모르고 대리(臺吏 사간원과 사헌부의 이속(吏屬)) 역시 서로 쳐다 보면서 감히 얼른 치우지도 못한 채 종일토록 책상 앞에 있었으니, 대중(臺中)에서 혹시나 일이 날까 걱정하였다. 퇴근할 무렵에 공이 아전에게 말하기를, “저 거위알처럼 생긴 것이 무엇인고. 수정구슬이 몇 개나 들어갈 수 있을까.” 하니, 아전이, “백 알은 들어갈 것 같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그가 말하기를, “그 들어왔던 틈으로 던져 버려라.” 하니, 좌중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의 아량에 탄복하였다. 사간원에 아란배(鵝卵杯)가 있는데 수정 구슬이 한 되 들어갔으니, 이는 금령(禁令)을 범하여 만든 것이었다. 《필원잡기》


신석조(辛碩祖)

신석조는 자는 찬지(贊之)이며, 처음 이름은 석견(石堅)이고, 호는 연빙당(淵氷堂)이다. 본관은 영산(靈山)이고, 병조 판서 신인손(辛引孫)의 아들이다. 병오년(1426)에 생원과에서 장원하였고,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벼슬이 이조 참판 개성 유수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희공(文僖公)이다.
○ 공의 조부 신유정(辛有定) 평안도 안무사(平安道按撫使)이고, 시호는 무절공(武節公)이다. 이 일찍이 왜적에게 잡혀서 꿇어 앉히고 베이려 할 때, 유정이 왜적의 두 다리 사이에 신낭(腎囊)이 늘어져 있음을 보고는 갑자기 손으로 잡아당겨서 땅에 넘어뜨리고는 칼을 빼어 벴다.그뒤 변방에 장수로서 무공을 세웠으나 성격이 지나치게 급하여 남의 옳지 않은 일을 보면 반드시 극구 꾸짖은 뒤에야 그쳤다. 공이 매양 말하기를, “할아버지의 급하신 성질을 거울삼아 가죽을 차서 스스로 경계한다.” 하였다.
일찍이 춘추관(春秋館)에서 역사를 편찬할 때 한 하관(下官)과 글씨를 같이 썼는데, 그 사람이 엉겁결에 서리(書吏)를 돌아보며 큰 목소리로, “신석조야, 벼룻물을 가져 오라.” 하고는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숙여 쳐다보지를 못하였다.공이 얼른 앞으로 다가가서 그 사람의 손을 잡으면서 이르기를, “우리들이 젊었을 때 선생이나 어른 앞에서 실언한 것이 어찌 이 정도에 그쳤을 뿐이겠는가.” 하고, 곧 술을 차려오라 하여 잔 가득히 부어 마주 앉아서 마시니, 사람들이 모두 그의 아량에 탄복하였다. 《필원잡기》
○ 공이 유의손(柳義孫)ㆍ권채(權採)ㆍ남수문(南秀文) 등과 함께 집현전(集賢殿)에서 일시에 문장으로 이름이 날렸으나 모두 크게 현달하지 못했으니 애석한 일이었다.


안숭선(安崇善)

안숭선은 자는 중지(仲止)이며, 호는 옹재(雍齋)이고,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경자년(1420)에 문과에 장원하여 벼슬이 찬성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숙공(文肅公)이다.
○ 공은 준수하고 호걸스럽기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 일찍이 동부승지가 되었을 때 스스로 나라를 경륜할 만한 재주와 학문이 있다고 믿고 도승지 자리를, 마치 턱에 있는 수염을 뽑듯이 쉽게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도승지 황보인(皇甫仁)이 갈려 갈 때, 공이 후임으로 발탁되었다.임명을 받고 승정원에 이르러 중문에 들어오자 곧 도승지의 자리에 앉으면서 말하기를, “이 자리에 앉아야지.” 하니, 좌승지 김종서(金宗瑞)가 얼굴빛이 잿빛으로 바뀌었다. 이로부터 둘의 사이에 금이 갔는데, 그뒤 공이 병조 판서로 죄를 얻어서 멀리 귀양살이하게 되니, 사람들이 모두 김종서가 그렇게 만든 것이라 하였다. 《용재총화》


최치운(崔致雲) 경오생이며, 무자년에 사마(司馬)에 올랐다.

최치운은 자는 백경(伯卿)이며, 호는 조은(釣隱)이고, 본관은 강릉(江陵)이다. 태종 정유년(1417)에 문과에 급제하여 최윤덕(崔潤德)의 종사(從事)가 되었으며, 벼슬이 이조 참판에 이르렀고, 다섯 차례 명 나라에 다녀왔다. 경신년(1440)에 죽으니, 나이가 51세였다.
○ 세종이 그를 매우 중히 여겨 가끔 불러 보고는 국정을 의논하고, 큰일이 있을 때엔 반드시 그와 의논하였다. 그의 천성이 술을 즐겼으므로 세종이 걱정하여 매양 친필로 서찰을 내려서 경계하였는데, 결국 그것을 벽 위에다 붙여 두고 출입할 때마다 보면서 반성하였다. 어떤 때에 바깥에서 많이 마시고 크게 취해서 돌아오면 그 부인이 반드시 그의 머리를 들게 하여 벽을 가리켜 보게 하였다.그러면 그는 정신없이 취한 중에도 머리를 책상에 두드리면서 마치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는 시늉을 하였다. 술이 깨면 곧 말하기를, “나는 임금의 은혜에 감동하여 술을 경계할 것을 늘 마음 속에 두었으나, 다만 술을 만나면 전날의 경계를 갑자기 잊어버리고는 취하는 데까지 이른다.” 하였다. 마침내 술 때문에 병이 나 마흔이 겨우 넘어서 죽었다. 《소문쇄록》
○ 세종이 일찍이 그에게 명하여 《무원록(無冤錄)》을 주석하게 하였고, 또 명하여 율문(律文)을 강해(講解)하게 하였으며, 판결하기 어려운 형옥(刑獄)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그를 불러서 의논하여 억울하지 않게 된 것이 많았다.


김담(金淡)

김담은, 자는 거원(巨源)이며, 본관은 예안(禮安)이다. 을묘년(1435)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 판서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절공(文節公)이다.
○ 공은 역수(曆數)와 관상(觀象)에 밝았으므로 일영대(日影臺)와 천문지(天文誌)ㆍ전세(田稅)ㆍ구등(九等)에 관한 법을 모두 어명을 받아 찬정(撰定)하였다. 《영천지(榮川誌)》
○ 공이 기사년(1449)에 아버지의 상사를 당했는데 명하여 기복(起復)시켜 서운부정(書雲副正)을 삼고 천담복(淺淡服)을 내렸다. 공은 여섯 차례나 소를 올려서 사직하였고, 사간원에서도 역시 기복하여 벼슬을 줌이 타당치 않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그 집에 있을 때에는 상복을 입고 조정에 와서는 담복(淡服)을 입는 것이 어찌 자식의 애통한 정을 아주 빼앗아 기복시키는 예와 같으리요. 하물며 김담과 같은 재주는 세상에 드물기 때문에 위에서 쓰는 것이니, 무엇이 불가하리요.” 하였다. 《김문절유고(金文節遺稿)》 《기복전고(起復典故)》에 상세하다.


김조(金銚)

김조는 호는 졸재(拙齋)이며, 처음 이름은 빈(鑌)이고,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태종 신묘년(1411)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예조 판서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공간공(恭簡公)이다.
○ 공은 일찍부터 문학으로 이름이 드러났다. 세종이 어느날 잔치를 베풀었을 때 신하가 모두 취하자 세종이 이르기를, “오늘 제군은 각기 평소의 소원을 진술하라.” 하니, 공이 아뢰기를, “신의 소원은 백년 동안 날마다 어탑(御榻)을 모시고 금규화(金葵花) 앞에 진퇴하고 부복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여러 신하가 모두 이르기를, “신들의 소원도 김조의 것에 넘지 않습니다.” 하여 세종이 웃었다. 《필원잡기》


김돈(金墩)

김돈은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참의 김후(金厚)의 손자이다. 태종 정유년(1417)에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였고, 직제학과 승지를 거쳐 벼슬이 인순 부윤(仁順府尹)에 이르렀다.
○ 공은 젊었을 때부터 학문에 힘을 썼다. 세종이 임금이 되기 전에 그의 명성을 듣고 불렀으나 공이 사양하였다. 문과에 오르니 세종이 불러 보고 이르기를, “내가 경을 보고자 했으나 경이 나를 피하더니, 이젠 나의 신하가 되었구나.” 하였다.
○ 공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외직을 구하였고, 특별히 역말을 내어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로 와서 봉양에 편하게 하니, 선비들이 그를 영광으로 여겼다.
○ 공은 의상(儀象)에 정통하여 세종이 간의대(簡儀臺)와 보루각(報漏閣)을 만들 때 참여하였다.
○ 공은 오랫 동안 근시(近侍)로 있으면서 말로 아뢰는 것이 상세하고 분명하였으므로 승지의 직에 7년이나 있었다.


김하(金何)

김하는 본관이 연안이니, 유후(留後) 김자지(金自知)의 아들이다. 계묘년(1423)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예조판서 대제학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정선공(靖宣公)이다.
○ 공은 중국말 통역을 잘 하였으므로 세종이 특히 사랑하였다. 공은 판사(判事)가 되었을 때 녹명아(鹿鳴兒)라는 기생을 가까이 했는데, 한 종실(宗室)과 도승지 성(姓)이 안(安)이란 자가 모두 그 기생과 가까이 지냈으므로 서로 다투게 되었다. 종실이 자기가 먼저 가까이 하였다고 주장하였는데,세종이 사람을 시켜 종실에게 이르기를, “나라에 너 한 사람 있고 없는 것은 별 관계가 없지만, 김하는 남이 못하는 일을 하여 중국과 교제하려면 이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된다. 또 김하는 아들이 없으니, 마땅히 그 기생을 첩으로 삼게 할 것이다. 네가 만일 다툰다면 죄를 주리라.” 하고는, 도승지로 하여금 그에게 이르기를,“너는 이 기생을 첩으로 삼겠는가.” 하니, 공은 머뭇거리며 대답하였다. 그뒤에 그가 상중에 있으면서 기생의 집에 출입하여 사헌부에서 적발하였으나 세종은 이르기를, “내가 준 것이니 말하지 말라.” 하고 놓아주었으니, 비록 하찮은 기술이라도 애석하게 여겨 정려함이 이러하였다. 《소문쇄록》


이맹균(李孟畇)

이맹균은 자는 사원(士原)이며, 본관은 한산(韓山)이고,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장손이다. 나이 13세에 진사(進士)가 되었고 15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우찬성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혜공(文惠公)이다.
○ 공은 세업(世業)을 이어 받아 문명(文名)이 높았다. 일찍이 송도(松都)를 슬퍼하여 시를 짓기를,

오백년 왕기가 끝나고 말았으니 / 五百年來王氣終
계림(鷄林)을 차지하고 압록강을 차지한 것은 누구의 공이었나 / 操鷄博鴨龍何功
영웅은 간 곳 없고 산천만 의구한데 / 英雄已逝山河在
인물은 옮겨가고 빈 터만 남았구나 / 人物南遷井市空
상원(上苑)엔 가는비 내린 뒤 꽃피고 꾀꼬리 지저귀며 / 上苑鶯花微雨後
여러 능엔 석양 속에 초목이 서 있네 / 諸陵草樹夕陽中
내가 온 이 날에 느낌이 하도 많아 / 我來此日偏多感
지난 일 아득한데 물만 동으로 흐르는구나 / 往事悠悠水自東

하였고, 그는 또 아들이 없음을 슬퍼하여 시를 짓기를

사람이 생긴 때로부터 / 自從人道起於寅
아비 자식대를 전해와 이 몸까지 이르렀네 / 父子相傳到此身
내 무슨 죄로 하늘이 돕지 않아 / 我罪伊何天不弔
아비 소리 못들은 채 귀 밑에 흰털만 새로운가 / 未爲人父鬢絲新

하였다.
그뒤 부인이 질투하고 사나와서 가화(家禍)를 일으키자, 이로 인하여 죄를 얻어 마침내 귀양살이하다가 죽었다. 《용재총화》


정초(鄭招)

정초는 본관은 하동(河東)이다. 태종 을유년(1405)에 문과에 급제하고 정해년(1407)에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벼슬이 이조 판서 대제학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경공(文景公)이다.
○ 공은 총명이 뛰어나서 어떤 서적이고 한 번만 보면 외웠으므로, 과거가 이미 박두했으나 허랑하게 놀기를 조금도 그치지 않았다. 하루는 육경(六經)을 뽑아서 한번 보고는 책을 덮고 다시 읽지 않았으나, 강석(講席)에 이르러서는 오묘한 뜻을 다 설명하여 응답함이 메아리치듯 하였다.일찍이 원수(元帥)의 막부(幕府)에 있을 때 군졸 몇백 명을 한번 보고는 그 얼굴을 다 기억하며 이름까지 알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를 신인양 심복하였다. 젊었을 때에 어떤 중이 《금강경(金剛經)》 읽는 것을 보고 이르기를,“그 경(經)은 한 번 보고 외울 수 있겠노라.” 하니, 중이 말하기를, “그대가 만일 외우면 내 성찬을 차릴 것이요, 그대가 만일 그렇지 못하면 그대가 성찬을 차리시오.” 하였다. 서로 약속한 뒤 공이 북채를 잡고 북을 치면서 외기를 물 흐르듯이 하니, 반질(半帙)을 채 못외어서 중이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신상(申商)

신상은 자는 득지(得止)이며, 본관은 은풍(殷豐)이다. 나이 13세에 진사가 되고, 15세에 생원을 거쳐 20세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벼슬은 숭정대부 예조 판서에 이르렀고, 을묘년(1435)에 죽으니 나이가 64세였고, 시호는 공도공(恭度公)이다.
○ 공이 예조 판서로 있었을 때 허조(許稠)가 이조 판서로 있었다. 공은 해가 중천에 뜬 뒤에 나갔다가 해가 기울면 곧 돌아오는데, 허조는 새벽에 나가서 해가 저물어서야 돌아오곤 하였다. 어느날 허조가 먼저 가서 이조에 앉았다가, 공이 예조에 나왔다가는 얼마 안되어서 도로 돌아간다는 말을 듣고 사람으로 하여금 가서 전갈하기를, “어째서 늦게 왔다가 일찍 나가시오.” 하였더니,공이 크게 웃으면서 말하기를, “대감이 일찍 출근하였으나 무슨 유익한 일이 있으며 내가 비록 늦게 출근하였으나 무슨 해로운 일이 있으리요. 각기 손바닥이나 비빌 뿐이지요.” 하였다. 공은 일을 당하면 그때그때 처리를 잘하였으며, 허조는 부지런하고 충실하였으니 성격이 같지 않았던 것이다. 《용재총화》


권홍(權弘)

권홍은 호는 송설헌(松雪軒)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고려조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조선에 들어와서 벼슬이 영돈녕 부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순공(文順公)이고, 저서에 《쌍당집(雙塘集)》이 있다.
○ 공은 일찍이 문한(文翰)으로 이름이 드러났으며, 전서(篆書)와 예서(隸書)를 매우 잘 썼다. 벼슬이 극품(極品)에 이르고 향년(享年)이 87세였다.일찍이 남산(南山) 기슭에 집을 세우고 못 두 곳을 파서 연꽃을 심고 폭건(幅巾)과 청려장(靑藜杖)으로 소요하며 거닐어 맑은 운치가 마치 신선과 같았다. 공이 쓴 〈헌릉비(獻陵碑)〉와 〈성균관비(成均館碑)〉의 전서는 매우 좋은 글씨였다. 한성 판윤으로 있을 때 글을 올려서 기자(箕子)의 사당에 비를 세울 것을 청했는데, 그 말이 자못 사체에 맞았으므로 세종이 허락하였다.


김문(金汶)

김문은 호는 서헌(西軒)이며, 본관은 언양(彦陽)이다. 경자년(1420)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벼슬이 직제학에 이르렀으며, 일찍 죽었다.
○ 공은 남보다 총명하여 경사(經史)에 널리 통하였으며, 더욱이 사학(史學)에 밝았으므로 역대의 고사를 묻는 자 있으면 곧, “아무 책 몇째 장에 있어.” 하고 대답하였는데, 백에 하나도 틀림이 없었다. 세종이 선비들에게 명하여 《통감훈의(通鑑訓義)》를 편찬했을 때에 그의 공이 가장 많았으므로 총애가 높았으나, 한스럽게도 일찍 죽었다.
공은 천성이 술을 잘 마셨다. 일찍이 집현전에 있을 때 어떤 이가 말하기를, “송조(宋朝)에서 다품(茶品)을 논할 때는 자소탕(紫蘇湯)을 제일로 삼았고, 《사림광기(事林廣記)》에는 궁중의 아름다운 음식으로 찐닭을 제일로 삼았어.” 하니, 공이 미소를 지으면서, “자소탕이 항아리 속의 새로 익은 술에 비해서 어떠하며, 찐닭이 소간적[牛心炙]에 비해서 어떤 것이 나을까.” 하여 좌중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필원잡기》


하경복(河敬復)

하경복은,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무과 출신으로 벼슬이 판 중추 원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양정공(襄靖公)이다.
○ 공은 최고의 용장(勇將)으로 당대에 이름을 드날렸다. 《용재총화》
○ 어머니 꿈에 자라가 품 속으로 들더니 이에 잉태하여 그를 낳았으므로 아명(兒名)이 왕빠[王八]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기운이 남보다 세었다. 갑사(甲士)로 궁문에서 숙직할 때, 마침 동짓날이어서 상림원(上林苑)의 온실에서 기르던 매화 몇 분을 장차 궁문 곁에 두려 할 때 공이 긴 가지 하나를 꺾어서 투구 위에 꽂았다.맡은 자가 크게 놀라서 꾸짖으니, 공이 말하기를, “우리 집 진주에 살고 있었다. 울타리 가에 마소를 맨 것이 이 나무요, 꺾어서 땔나무를 삼는 것도 이 나무이니, 무엇이 귀할 게 있으리요.” 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가 거친 것에 대해 웃었으나 기개는 장하게 여겼다. 《필원잡기》
○ 일찍이 장수가 되어 동북면을 지킬 때 야인이 삼백 근 짜리 센 활을 가지고 와서 공에게 당겨 보라고 청하였다. 공은 그들을 위해서 술을 차려 마시게 한 뒤 말하기를, “이 활의 제도가 매우 묘하다.” 하고, 급히 궁수(弓手)를 불러서 그 모양대로 만들게 하고는 가만히 사람을 시켜서 불에 구어 힘을 풀리게 하였다. 이에 조용히 당기어 한도대로 버티니, 야인들이 머리를 조아려 절하였다. 《필원잡기》
○ 공이 함길도 도절제(咸吉道都節制)가 되어서 변방을 지킬 때, 야인이 그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감히 가까이 하지 못하였다. 세종이 듣고 중히 여겨 공으로 하여금 그 자리를 오래도록 맡아 보게 하고, 후히 그 어머니를 위로하였다. 이어 호군 홍사석(洪師錫)으로 하여금 편지를 주어 칭찬하기를, “내가 경을 믿기를 은연히 장성(長城)처럼 하였는데,어머니의 아들 기다림과 아들의 모친 그리워함이 이미 5년이나 되었다. 이제 경의 후임을 물색해 보았으나 실로 그 사람을 얻기가 어렵다. 이에 특별히 경의 어머니를 위문하고 도와주노니, 경은 스스로 마음을 풀라. 이제 홍사석을 보내어 경에게 연회를 베풀어주고 의관(衣冠)과 말을 내리노라.” 하였다. 《국조보감》
○ 공이 항상 말하기를, “젊었을 때에 힘으로 화를 면한 것이 세 번이었다. 태종이 내란(內亂)을 평정하실 때 우연히 대궐에서 숙직하는 친구에게 들어갔는데, 문이 닫쳐서 나올 수 없어 방황하면서 사방을 돌아보다가 군졸에게 끌려 가서 장차 목이 베어지게 되었을 때,팔을 뿌리치고 달아나서 바로 어전에 이르러서 고함치기를, ‘이 같은 장사를 죽이면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하였더니, 태종께서 듣고 놓아 주셨다. 또 일찍이 깊은 산중에서 사냥하다가 별안간 사나운 범을 만났는데, 사람들은 모두 흩어져 버렸고, 나는 범의 턱밑을 잡아 쥔 채 왔다갔다하며 맨 손으로 싸우다가 굽어 보니, 벼랑 밑에 물이 괸 소(沼)가 있었다.이에 범을 떠밀어서 물 밑에 떨어뜨려 범이 물을 마시고 배가 불러서 힘을 잘 못쓸 때 이를 이용하여 박살하였다. 또 일찍이 국경에서 적을 방어할 때 적의 기병이 구름처럼 모여들고 화살이 비처럼 쏟아지는데, 마침 그 앞 몇십 보쯤 가서 커다란 나무가 있기에 몸을 솟구쳐 재빨리 달아나 먼저 그 나무에 의거하였더니 적이 따라오다가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싸움에 이겼다. 이때에 모두 힘이 없었으면 꼭 죽었을 것이다.” 하였다. 《용재총화》


이종무(李從茂)

이종무는 본관은 장수(長水)이며, 무과에 급제하였고 익대 공신(翊戴功臣)으로 장천부원군(長川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벼슬이 보국대부 우찬성에 이르렀고, 시호는 양후공(襄厚公)이다.
○ 기해년(1419) 5월에 왜적이 비인(庇仁)에 침입하고, 또 절제사(節制使) 이사검(李思儉)을 해주 연평곶(延平串)에서 포위하였다.세종이 유정현(柳廷顯)ㆍ박은(朴訔)ㆍ조말생(趙末生) 등을 불러서 적이 비어 있는 틈을 타 가서 대마도(對馬島)를 무찔러 되돌아오는 적을 맞아 싸울 것을 의논하였으나, 모두들, “불가합니다.” 하였는데, 조말생만이 홀로 아뢰기를, “가능합니다.” 하였다. 이에 이종무를 삼도 도체찰사(三道都體察使)로 삼아서 세 도의 군함 2백 척을 거느리게 하고, 영상 유정현을 도통사(都統使)로 삼았다. 세종이 한강에 거둥하여 그들을 전송하였다.
○ 공이 아홉 절도(節度)의 배 227척과 군사 1만 8천 명을 거느리고 65일 동안 먹을 군량을 싸 가지고 대마도에 이르러서 배 백여 척을 빼앗고 머리 백여 급을 베었으며, 또 적의 집 2천여 호를 불사르고 중국인 백여 명과 왜인 2십여 명을 사로잡아 가지고 돌아왔다.


이순몽(李順蒙)

이순몽은 본관은 영천(永川)이니 영양군(永陽君) 이응(李膺)의 아들이다. 음관으로 무과에 올라 벼슬이 영중추원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위양공(威襄公)이다.
○ 공은 여주(驪州)와 이천(利川) 사이에 살면서 농사에 힘썼다. 어느날 들에서 김을 맬 때, 별안간 하늘이 어두워지고 비바람이 크게 일면서 커다란 독처럼 생긴 불덩이가 멀리서부터 바퀴처럼 굴러 오는데, 그 소리가 웅장하여 마소가 놀라 뒤로 물러섰다.공이 호미로 그 불덩이를 쳤더니, 작은 아이가 누런 털이 이마를 덮고 파란 눈이 번쩍거리고 손에 칼이 쥐어져 있는데 반이 부러져 마치 짧은 낫과 같았으며, 거꾸로 땅 위에 거꾸러져 있어 오랫동안 움직이지 못하였다. 공이 호미로 흔들어 일으켰더니, 하늘이 또 캄캄해지며 비바람이 치더니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기재잡기》


김효성(金孝誠)

김효성은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정난 공신(靖難功臣)으로 연산군(延山君)에 봉해졌고, 벼슬이 숭정대부 병조 판서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효양공(孝襄公)이다.
○ 공은 김남수(金南秀) 장양공(莊襄公) 의 아들이다. 남수는 아내 길씨(吉氏)와 따로 살았다. 공의 나이가 네댓 살이 되었을 때 종이 안고 뽕나무 밑에 서 있었는데 별안간 쌍 비둘기가 모여드니, 공이 말하기를, “저 쌍 비둘기를 보면 암놈 숫놈이 나란히 다니는데 우리 부모는 각기 동쪽과 서쪽에 계시니 어쩐 일인고.” 하고는 이내 울었다.종이 이상히 여겨서 길씨에게 고하니, 그도 역시 울어 동리 사람들이 모두 이상히 여겼다. 공은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섬겼는데, 그의 나이가 57세에 길씨가 죽자, 시묘살이와 초상과 제사에 한결같이 정성껏하여 여러 사람들이 모두 갸륵하게 여겼다. 《필원잡기》


조수(趙須) 유방선(柳方善)을 붙였다.

조수는 자는 형보(亨父)이며, 호는 송월당(松月堂)이고, 또는 만취정(晩翠亭)이라 하며, 본관은 평양(平壤)이다. 태종 신사년(1401)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예(司藝)에 이르렀으며, 저서에는 《만취정집(晩翠亭集)》이 있는데, 죽을 때에 그 원고를 불살라버렸다.
○ 공이 관동(關東)에서 유랑 생활을 한 지 30여 년에 학문에 크게 힘써서 어느 책이고 읽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자못 시명(詩名)이 있어 세종이 매우 사랑하였다.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일찍이 그에게 《이백집(李白集)》을 선물로 주었는데, 그는 손으로 배를 어루만지면서 굳이 거절하여 받지 않고, “이 속에 《이태백전집(李太白全集)》이 있습니다.” 하였다. 《청파극담》
○ 공이 중간에 가화(家禍)를 만나서 금고(禁錮)를 당한 지 30여 년이나 되자, 세종이 그의 재주를 애석하게 여겨서 만년에 불러 썼다. 《필원잡기》
○ 세종이 내시로 하여금 족자를 싸서 보내어 그에게 시를 쓰기를 명하였더니, 그가 붓을 뽑아 한번 휘두르니 글과 뜻이 아울러 아름다웠다. 한편으로는 읊고, 한편으로는 말면서 말하기를, “늙은이의 서법이 새끼 가진 범의 할퀴는 발톱과 같구나.” 하고 곧 돌려 드리니, 그의 탄솔(坦率)함이 이와 같았다. 《청파극담》
○ 한윤(韓閏)이 당호(堂號)를 공에게 청했더니, 공이 삼외(三畏)라고 편액(扁額)을 써 주었다. 한윤이 묻기를, “선생께서도 세 가지의 두려움이 있습니까.” 하니, 공이 말하기를, “나는 세 가지의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있으니, 돈이 있어 술을 마시고 취하여 곧 길게 누워서 코를 골면 벼락도 두렵지 않는 것이 첫째요, 겨울에는 갖옷을 입고 여름에는 삼베옷을 입으며,아침에는 밥을 먹고 저녁에는 죽을 먹으며, 독에는 남은 식량이 없고 상자에는 남은 옷이 없어 도둑이 두렵지 않은 것이 둘째요, 10년 동안 벼슬길에 있었으나 한 치만큼 전진하면 한 자만큼 물러서서 부귀는 뜬 구름인 듯 공명은 헌 신짝인 듯 하였으니, 재상도 두렵지 않은 것이 그 셋째일세.” 하였다. 《해동잡록(海東雜錄)》
주부(主簿) 유방선(柳方善) 역시 금고를 당하여 등용되지 않았는데, 학문과 문장이 조수(趙須)와 더불어 서로 백중(伯仲)이었다. 세종이 집현전 선비로 하여금 두 공에게 왕복하여 질문하게 하였고, 서거정(徐居正)ㆍ권람(權擥)ㆍ한명회(韓明澮) 등이 모두 그에게 배웠으며, 저서에는 《태재집(泰齋集)》이 있다. 《필원잡기》


조오(趙峿) 《과보(科譜)》에는 오(峿)가 오(珸)로 되어 있다.


조오는, 본관이 횡성(橫城)이다. 계묘년(1423)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예문관 제학에 이르렀다.
○ 공은 성품이 청렴하고 굳세어 맑은 절개가 견줄 자 없었으며, 집이 극도로 가난하였다. 일찍이 예랑(禮郞)이 되었을 때 무슨 금기하는 일로 방위를 피해서 셋집에 거처하였는데 땔나무와 식량이 이어지지 못하여 동료들이 백미 서 말로 위문하였으나 받지 않았다. 그뒤 공석상에서 그것을 자랑하니, 어떤 이가 그를 기롱하였다. 일찍이 합천군(陜川郡)의 원이 되었을 때,그 고을에서 나오는 은어(銀魚)가 여름철이라 흔하여 부패할 지경이었으나 처자들에게 먹지 못하게 하였으며, 아들ㆍ사위나 노복들이 오고 갈 때에도 모두 자기 양식을 싸 가지고 다니게 하였다. 나이가 많아 관직에서 물러나 시골집에 있을 때에 집에 아무 것도 없었으나 조금도 남에게 요구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독실한 군자였다. 《필원잡기》


 

[주D-001]꽥꽥 우는 고기입니까 : 제국(齊國)의 진중자(陳仲子)는 청렴한 선비였는데, 그의 형은 제국의 재상이었다.중자가 어머니를 뵈러 형의 집에 갔을 때 어떤 사람이 거위를 선사했는데 형이 받으니, 중자가 형에게 “꽥꽥우는 것을 왜 받으시오.” 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어머니가 국을 끓였다. 중자는 모르고 먹는데 형이 들어와 “이것은 꽥꽥 우는 고기이다.” 하니, 중자는 씹던 고기를 토하였다.
[주D-002]무원록(無冤錄) : 억울하게 형벌을 받는 사람이 없도록 법례(法例)를 해석한 글.
[주D-003]익대 공신(翊戴功臣) : 예종(睿宗) 때 남이(南怡)를 죽인 공로로 신숙주(申叔舟)ㆍ한명회(韓明澮) 등 38인에게 내린 훈호(勳號).
[주D-004]삼외(三畏) : 《논어》에 “군자(君子)가 두려워하는 것이 세 가지 있으니, 하늘의 명령을 두려워하고, 인품이 훌륭한 사람을 두려워하며, 성인(聖人)의 말씀을 두려워한다.” 하였다.


 

 

분류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1 - 경전류 1(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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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樂)
속악(俗樂)에 대한 변증설(고전간행회본 권 19)


대저 악(樂)이란 바로 사람의 언어(言語)와 성음(聲音)이다. 어째서 그렇게 말하는 것인가 하면 이미 5음(音)ㆍ7성(聲)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악기(樂記)에 이르기를 “무릇 소리는 사람의 마음에 말미암아서 난다.” 했으니, 악이란 스스로 고금(古今)과 아속(雅俗)의 분별이 있을 뿐이다. 송나라 방서(房庶)의 저서에, 고악이 금악과 멀지 않다고 논했으니 그 말이 사리에 맞는 듯하다.
상고에는 질박하여 기구와 소리가 모두 질박했는데, 후세로 내려오면서 차츰 변하였다. 석(石)인 경(磬)이 변하여 방향(方響)이 되고, 사죽(絲竹)인 금(琴)ㆍ소(簫)가 변하여 쟁(箏)ㆍ적(篴)이 되고, 토(土)인 훈(塤)이 변하여 구(甌)가 되고, 목(木)인 축(柷)어(敔)가 꿰어져서 박판(拍板)이 되었는데 이는 세상에서 쓰기에 매우 편리하다. 그런데도 이를 알지 못하는 자는 묘악(廟樂)인 박종(鎛鐘)ㆍ편경(編磬)궁헌(宮軒)을 가리켜 정성(正聲)이라 하고, 대체로 이부(夷部)노부(鹵部) 노는 곧 노(虜)자임를 가리켜 음성(淫聲)이라고 한다.
옛날의 조두(俎豆 제향 때에 음식을 담는 목기(木器)이다)를 후세에서 배우(杯盂 대접ㆍ사발 등 그릇)로 바꾸고 점석(簟席 대자리)을 탑안(榻案 걸상)으로 바꿨으니, 성인이 다시 세상에 난다 하더라도 배우ㆍ탑안을 버리고 조두ㆍ점석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8음(音)의 악기가 어찌 이것과 다르겠는가?
공자의 “정성(鄭聲)이 음란하다.”는 말이 어찌 그 기구가 옛것만 못하다 해서 한 말이겠는가? 역시 그 소리의 변함을 미워했을 뿐이다. 시험삼아 악을 아는 자로 하여금 오늘의 기구에다 옛날의 소리를 붙여서 첨체(惉滯 음조(音調)가 막혀 고르지 못함)ㆍ미만(靡曼 화미(華美)함을 말함)을 버리고 중화(中和)ㆍ아정(雅正)으로 돌아가게 한다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화기를 인도할 것이니, 치세(治世)의 음률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세상에서 이르는 아악이 반드시 옛것과 같다고는 못하겠지만, 교방(敎坊)에서 연주하는 것이 어찌 다 음성(淫聲)뿐이기야 하겠는가? 오제(五帝)ㆍ삼왕(三王)이 다 악을 달리했으니, 그 시대에도 고금과 아속의 분별이 있어서 그러했겠는가? 이미 대(代)가 갈리면 저마다 일대의 제도가 있기 때문에 악도 달라진 것이다.
우리나라의 토악(土樂)으로는 단군ㆍ기자의 시대에는 상고할 길이 없고 삼국 시대의 속악으로는 동경(東京)ㆍ목주(木州)ㆍ여나산(余那山)ㆍ장한성(長漢城)ㆍ이견대(利見臺)ㆍ선운산(禪雲山)ㆍ무등산(無等山)ㆍ정읍(井邑)ㆍ지리산(智異山)ㆍ내원성(來遠城)ㆍ연양(延陽)ㆍ명주(溟州) 등의 이름이 있는데 모두 사적이 있는 가사(歌詞)이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사설(僿說)》에 “속악에 낙시조(樂時調)로 하림(河臨)ㆍ최자(嗺子)ㆍ탁목(啄木) 등 곡조가 있다. 신라사(新羅史)에 ‘왕이 가야(伽倻) 사람 우륵(于勒)을 하림궁(河臨宮)으로 불러보고 하림(河臨)ㆍ수죽(潄竹) 두 곡조를 연주하게 했다.’ 하였으니, 이것이 동방 악조(樂調)의 시초이다. 지금의 《악범(樂範《악학궤범》을 말함)》에는 일명 청풍체(淸風體)라고 하며, 탁목(啄木)을 또한 하림이라고 일컬으니, 모두 우륵의 여류(餘流)이다. 오늘날의 정과정(鄭瓜亭) 계면조(界面調)는 애상에 젖어서 사대부로서 배워 익히지 않는 이가 없다.” 하였다. 계면(界面)이라 함은 그 곡조를 듣는 자가 눈물이 흘러내려 얼굴에 경계를 이룬다 해서 하는 말이다.
동방의 가사에 대엽조(大葉調)라는 것이 있는데, 사방이 모두 마찬가지이다. 대체로 장단(長短)의 분별이 없고 그 안에 또 만(慢)ㆍ중(中)ㆍ삭(數) 세 가지 곡조가 있으니, 본디 칭호는 심방곡(心方曲)이었다. 만은 극히 느려서 사람들이 지루하여 싫어하고, 중은 조금 빠르기는 하나 역시 좋아하는 자가 드물다. 오늘날에 통용되는 것은 대엽 중의 삭조(빠른 조)이다. 그 이사(俚詞) 1편은 세 가지 조(즉, 만ㆍ중ㆍ삭)에 다 통할 수 있으나 이는 본디 비속(鄙俗)해서 족히 말할 것이 못 된다. 《악본》(樂本) 1책은 신라 김대문(金大問)이 지은 것이고, 《삼대목(三代目)》 1책은 신라 진성여왕이 각간(角干) 위홍(魏弘)과 사통하여 위홍이 항상 대내(大內)에 들어가 일을 보았는데, 홍에게 명하여 대구화상(大矩和尙)과 함께 향가(鄕歌)를 편수케 하였으니 이것이 《삼대목》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향악(鄕樂)으로는 현금(玄琴)ㆍ비파ㆍ가야금ㆍ대금(大笒)ㆍ장고(杖鼓)ㆍ아박(牙拍)ㆍ무득(无得)ㆍ무고(舞鼓)ㆍ해금(奚琴)ㆍ필률(觱篥)ㆍ중금(中笒)ㆍ소금(小笒)ㆍ박(拍)ㆍ사경(砂磬)이 있다. 본조(本朝)의 종실(宗室)의 영재(英才)인 수천군(秀川君)의 손자 함천군(咸川君)이 사경을 잘 쳤다. 오늘날 태악(太樂:장악원(掌樂院)을 말함)에 전해오는 사경은 공(公)에서 비롯된 것이다.
가곡(歌曲)으로는 무애(无㝵)ㆍ서경(西京)ㆍ대동강(大同江)ㆍ오관산(五冠山)ㆍ양주(楊州)ㆍ월정화(月精花)ㆍ장단(長湍)ㆍ정산(定山)ㆍ벌곡조(伐谷鳥)ㆍ원흥(元興)ㆍ금강성(金剛城)ㆍ장생포(長生浦)ㆍ총석정(叢石亭)ㆍ거사련(居士戀)ㆍ처용(處容)ㆍ사리화(沙里花)ㆍ장암(長岩)ㆍ제위보(濟危寶)ㆍ안동자청(安東紫淸)ㆍ송산(松山)ㆍ예성강(禮成江)ㆍ동백목(冬柏木)ㆍ한송정(寒松亭)ㆍ정과정(鄭瓜亭)ㆍ풍입송(風入松)ㆍ야심사(夜深詞)ㆍ한림별곡(翰林別曲)ㆍ삼장(三藏)ㆍ사룡(蛇龍)ㆍ자하동(紫霞洞)이 있는데 이는 고려의 속악이다. 본조의 악서로는 《당속악보(唐俗樂譜)》가 있다. 세종이 박연(朴堧) 등에게 명하여 《당속악보》를 만들어서 만(慢)ㆍ삭(數)의 음조(音調)를 고르게 하였다. 《악학궤범》은 성종이 유신(儒臣)ㆍ악리(樂吏)에게 명하여 악보(樂譜)ㆍ합자보(合字譜)를 찬하게 하였는데, 성현(成俔)이 악원 제조(樂院提調)가 되어 전악(典樂) 박곤(朴)ㆍ김복근(金福根) 등과 함께 《사림광기(事林廣記)》ㆍ《대성악보(大成樂譜)》 등 서적에 의거하여 종전의 규식을 준용하면서 자기의 뜻을 참작하여 만든 것이다. 지조(指爪 :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의 법과 현주(絃柱:괘(梩)임)의 차례를 가지고 여러 성자(聲字)를 합쳐서 보(譜)를 만들었는데, 그 울림을 거두어서 소리를 만들고, 그 중요한 대목을 가려 절주(節奏)를 만들고서 《현금합자보(玄琴合字譜)》라고 이름했다. 가야금ㆍ당비파(唐琵琶) 같은 모든 현(絃)이 있는 것은 다 유추(類推)하여 보(譜)를 만들어서 한데 묶고 제목을 합자보(合字譜)라고 붙여 세상에 간행(刊行)했다.
지금의 취탄(吹彈:취는 부는 것, 탄은 타는 것)은 옛날과 다르고, 또 당금(唐琴)ㆍ당비파ㆍ생황(笙簧)ㆍ양금(洋琴)이 우리나라 음(音)으로 번역된 것이 있으나, 손에서 손으로 서로 전할 뿐 자보(字譜)가 없다. 그러므로 내가 일찍이 생황ㆍ양금의 자보를 지었으나 몇 곡(曲)에 불과한데, 상자 속에 깊이 넣어 두었으므로 이를 본 사람이 없다. 생황자보(笙簧字譜)ㆍ동금자보(銅琴字譜)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의 속악은 단지 7조(調)를 쓸 뿐이다. 협종ㆍ고선이 궁음(宮音)으로 되는 것은 일지(一指)가 누르는 것이고, 중려ㆍ유빈이 궁음으로 되는 것은 이지(二指)가 누르는 것이고, 임종이 궁음으로 되는 것은 삼지(三指)가 누르는 것이고, 이칙ㆍ남려가 궁음으로 되는 것은 사지(四指)가 누르는 것이고 속칭 빗가락[橫指]임 무역ㆍ응종이 궁음으로 되는 것은 오지(五指)가 누르는 것이고 속칭 우조(羽調)임 청황종(淸黃鐘)이 궁음으로 되는 것은 육지(六指)가 누르는 것이고 속칭 8조(調)임 청대려(淸大呂)ㆍ청태주(淸太簇)가 궁음으로 되는 것은 칠지(七指)가 누르는 것이다. 속칭 막조(邈調)임 무릇 속악은 소리가 높으므로 협종을 첫소리로 한다. 이것이 대체로 소(簫)ㆍ적(篴)ㆍ필률[觱]ㆍ대금[笒]의 탄주법이다.
생황에 6음(音)이 있으니, 일자관(一字管)의 음은 루(纍), 이(二)자관의 음은 로(盧), 삼(三)자관의 음은 예(芮), 사(四)자관의 음은 라(羅), 오(五)자관의 음은 예(芮), 륙(六)자관의 음은 리(里)이다. 무릇 속악은 일(一)자ㆍ이(二)자ㆍ오(五)자 세 구멍으로 상하성(上下聲)이 되는데, 이것을 또 자모성(字母聲)이라고 한다. 무릇 일(一)자ㆍ이(二)자를 누르면 반드시 오(五)자를 누르게 되는데, 사(四)와 사(四), 삼(三)과 삼(三), 오(五)와 오(五)는 모두 쌍성(雙聲)이고, 륙(六)자는 단성(單聲)이다. 무릇 소리가 짧은 것은 혹 불거나 들이마시는 데에 있어 약간 길어지기도 하나, 소리가 긴 것은 한 번 내불고 한 번 들이마시는 것이 모두 길다. 무릇 속악은 거문고ㆍ생황의 모든 소리가 노래에 반주한다. 3장(章)을 마쳤으면 노래하는 자가 조금 쉬고 악은 여성(餘聲)을 연주하여 사이를 두는데, 이것을 중여음(中餘音)이라 이른다. 4장과 5장을 다시 노래에 반주해서 5장을 마치면 노래하는 자가 또 멈추고 악이 여성을 연주해서 이를 끝내는데, 이것을 대여음(大餘音)이라 이른다. 5장 2여음을 7편(編)이라고 이르니, 이것이 1조(調)인데 속칭 계면대엽(界面大葉)이다.
그리고 농락조(弄樂調)ㆍ낙시조(樂時調)가 있는데 편악(編樂)으로 무릇 4조이니 모두 노래소리와 서로 조화되는 것이고, 영산회상(靈山會相) 1조는 금(琴)ㆍ적(笛)과 서로 조화된다. 무릇 1조에 각기 7편(編)씩 갖추어졌다. 이것이 생황을 부는 것의 대략이며, 생황은 계면ㆍ대엽, 속칭 자지라엽(紫芝羅葉)을 묘(妙)로 삼는다.

현금(玄琴)은 여섯 현(絃)에 다섯 소리[聲]이니 첫째는 문현 상(文絃商), 둘째는 유현 우(游絃羽), 셋째는 대현 궁(大絃宮), 넷째는 괘상청 각(棵上淸角) 우ㆍ궁ㆍ각 3현은 금괘(琴棵) 위에 있음 다섯째는 기괘청 치(歧棵淸徵), 여섯째는 무현(武絃)이다. 괘상(棵上)ㆍ기괘(歧棵) 두 현이 음정이 서로 맞고, 유현ㆍ괘상 두 현이 서로 맞고, 대현ㆍ괘상 두 현이 서로 맞고, 문현ㆍ대현 두 현이 서고 맞고, 무현ㆍ기괘 두 현이 서로 맞아야 하는데, 그 조현(調絃)하는 법은 오른손으로 술대를 잡아서 술대 끝이 안을 향한다. 문현에서부터 술대[匙]로써 차례로 5현을 그어서 무현에 이르러 그치는 것을 도(挑)라고 하는데, 이것이 속칭 사랭(撒冷)이며, 실지로 소리가 나는 것은 두 청[二淸:괘상청과 기괘청]뿐이다. 술대 끝이 밖을 향해서 무현에서부터 5현을 거슬러 그어서 문현에 이르러 그치는 것을 구(勾)라고 하니 속칭 다랭(多冷)이며, 실지로 소리나는 것은 두 청과 누르는 현뿐이다. 두 청이 음정이 서로 맞은 뒤에는 왼손의 장지(長指)로 제2괘(棵)의 유현을 누른 다음 모지(母指)로 뜯으며, 왼손의 식지(食指)로는 괘상청을 뜯어 유현과 음정을 서로 맞추고, 왼손의 장지로 대현 제6괘를 누른 다음 모지로 뜯으며, 왼손의 식지로 괘상청을 뜯어 대현과 맞춘다. 다음은 문현을 고르게 되는데 왼손의 장지로 먼저 제2괘 대현을 누른 다음 오른손으로 술대를 잡아 튕겨서 두 현을 서로 맞추고, 무현과 기괘청도 술대로 튕겨서 서로 맞춘다. 이것을 조현(調絃)이라 이른다.
옥보고(玉寶高) 신라 때 거문고를 잘 타던 사람 거문고 곡조에 상원(上院)ㆍ중원(中院)ㆍ하원(下院)이 있다. 신라 시대에 또 거문고의 일곱 곡(曲)을 만든 것이 있으며, 곡에는 두 조(調)가 있는데 평조(平調)ㆍ우조(羽調)라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나라 향악(鄕樂)의 고조(古調)이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남추강(南秋江) 자는 효온(孝溫)이며 단종(端宗) 때 사람이다. 세조조(世祖朝)에 소릉(昭陵) 복위(復位)를 청한 일로 인해 화를 입었다. 이 현금(玄琴)의 장(壯)ㆍ한(閒)ㆍ화(和)ㆍ원(怨) 4조를 지었는데 그 가사가 속되기는 하나 청아(淸雅)하다. 우조(羽調) 항왕(項王)이 말을 달리매 웅검(雄劍)이 허리에서 울고 대강(大江) 서쪽에 견고한 성지(城池) 없네. 는 장(壯)하고, 만조(慢調) 금리선생(錦里先生)의 초당(草堂)에 해는 긴데, 아내가 발회(撥灰)하니 우율(芋栗)이 향기롭네 는 한(閒)하고, 평조(平調) 낙양(洛陽) 3월에 소자(邵子)가 수레를 타고 꽃밭 속에 수레가는 대로 천천히 가네 는 화(和)하고, 계면조(界面調) 영위(令威)가 나라를 떠났다가 천 년만에 돌아오니, 무덤만 총총하구나 산천은 그대로나 사람은 간데 없네 는 원(怨)이다. 《금보(琴譜)》에서 계면(界面)을 북전(北殿) 《서상기(西廂記)》의 사곡(詞曲)에 북곡(北曲)ㆍ남곡(南曲)이 있는 것과 같은 뜻이다. 이라고도 한다. 이 밖에도 속악의 가곡이 너무 많아서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주D-001]7성(聲) : 궁ㆍ상ㆍ각ㆍ치ㆍ우 5음에다 변치(變徵)ㆍ변궁(變宮)을 더한 것이다.
[주D-002]방향(方響) : 악기 이름. 쇠 또는 구리로 만든 쇠판을 가자(架子 : 악기를 걸어 놓는 틀)의 위아래 두 단에 각각 8장씩 16장을 걸어 놓고 각퇴(角槌)로 친다. 치수는, 길이가 보통 9촌, 넓이가 2촌이며, 모양은 위가 둥글고 밑이 모가 졌다.
[주D-003]훈(壎) : 흙으로 구워 만든 악기. 저울추 모양으로 되고 상단 취구(吹口)까지 합하여 여섯 구멍이 있는데, 이를 불어서 소리를 낸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석전(釋奠) 때면 이를 사용하고 있다.
[주D-004]구(甌) : 부(缶)의 일종임. 12개의 사발에 물을 가득 채우고 저(箸)로 두드려서 12율의 음을 내는 것이다.
[주D-005]축(柷) : 나무로 만든 악기. 사방이 2척 4촌, 길이가 1척 8촌으로 된 나무 통으로 되었는데, 밑바닥 한가운데에 구멍을 뚫어 자루[椎柄]를 집어넣고 이를 흔들어서 소리를 내는 것이다. 음악 연주를 시작하는 신호이다.
[주D-006]어(敔) : 나무로 만든 악기. 모양은 엎드린 범[伏虎] 같으며 등 위에 27개의 톱니 같은 것이 있어 견(籈)으로 긁어 소리를 낸다. 음악 연주를 그치게 할 때에 사용한다.
[주D-007]박판(拍板) : 악기의 하나. 2매 내지 10여 매의 매끄러운 목판(木板)의 한 끝을 끈으로 꿰어 손에 잡고서 음악의 박자를 맞추는 것이다.
[주D-008]묘악(廟樂) : 종묘(宗廟) 제향에 쓰는 음악.
[주D-009]편경(編磬) : 아악기(雅樂器)의 하나. 2층으로 된 걸이가 있고, 한 층에 여덟 개씩 매어단 경쇠.
[주D-010]궁헌(宮軒) : 궁현(宮縣)과 헌현(軒縣)을 말한다. 현(縣)은 즉 종(鐘)ㆍ경(磬) 등 악기를 틀에 단다는 뜻이다. 《주례》 춘관(春官) 소서(小胥)에 “악기 다는 위치를 정하는 데 있어 왕은 궁현(宮縣)이고 제후는 헌현(軒縣)이다 …… ” 하였고 정현(鄭玄)의 주에 의하면, 순거(簨簴 : 악기를 다는 틀)의 4면에 다 악기를 다는 것은 궁현이고 3면에만 다는 것은 헌현이라고 하였다.
[주D-011]이부(夷部) : 《문헌통고》 악지에 이부악(夷部樂)이 보이는데 이는 곧 동이(東夷)ㆍ서융(西戎)ㆍ남만(南蠻)ㆍ북적(北狄) 등의 악을 말한다.
[주D-012]노부(鹵部) : 서양의 음악인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주D-013]8음(音)의 악기 : 옛날에는 금(金)ㆍ석(石)ㆍ토(土)ㆍ혁(革)ㆍ사(絲)ㆍ죽(竹)ㆍ포(匏)ㆍ목(木) 등 여덟 가지 물건이 악기의 재료로 쓰여졌으며, 그 재료에 따라서 소리를 각각 달리했으므로 8음이라 하였다. 《주례》 춘관 대사(大師)에 “播之以八音 金石土革絲木匏竹”이라 했으며, 주에는 ‘金 鎛鐘也 石 磬也 土 壎也 革 鼓鼗也 絲 琴瑟也 木 柷敔也 匏 笙也 竹 管簫也’라 하였다.
[주D-014]왕이 …… 연주하게 했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紀) 진흥왕(眞興王) 12년 조에 “3월에 왕이 순수하다가 낭성(娘城)에 머물러 우륵 및 그 제자 이문(尼文)이 음악을 안다는 말을 듣고 왕이 특별히 이들을 하림궁으로 불러들여 그 악을 연주하게 하자, 두 사람이 각각 새 노래를 지어서 연주했다.” 하였다.
[주D-015]7조(調) : 여기서 말하는 칠조는 한 가락[一指]에서 일곱 가락[七指]까지를 말한다. 네 가락은 빗가락[橫指], 다섯 가락은 우조(羽調), 여섯 가락은 8조(調), 일곱 가락은 막조(邈調) 등 별칭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가락이란 기본음 또는 ‘청’을 말한다.
[주D-016]일자관(一字管) …… 리(里)이다 : 일(一)ㆍ이(二)ㆍ삼(三)ㆍ사(四)ㆍ오(五)ㆍ육(六) 등 숫자는 생황(笙簧) 보(譜)의 기보방법(記譜方法)이고, 루(纍)ㆍ로(盧)ㆍ예(芮)ㆍ라(羅)ㆍ리(里) 등은 육보(肉譜)에 속한 것인데, 이것을 입으로 외며 구음(口音)이라고 한다.
[주D-017]문현 상(文絃商) …… 기괘청 치(岐棵淸徵) : 이는 억지로 궁(宮)ㆍ상(商)ㆍ각(角)ㆍ치(徵)ㆍ우(羽)의 5음에 배비(排比)한 것이고, 실제(文絃 : 濁黃鐘, 游絃 : 仲呂, 大絃 : 無射, 棵上淸 : 林鐘, 岐棵淸 : 林鐘)와는 다른 듯하다. 또 5음을 12율에 맞추어 보면 궁은 황종, 상은 대려, 각은 고선, 치는 임종, 우는 남려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박찬수 송지영 이기석 임정기 윤혁동 양상철 (공역) ┃ 1978

 

 

임하필기 제2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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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율려(律呂)의 제조


세종 7년 가을에는 거서(秬黍)가 해주(海州)에서 나고, 8년 봄에는 경석(磬石)이 남양(南陽)에서 생산되었다. 상이 경연(經筵)에 나아가 채씨(蔡氏 남송(南宋)의 채원정(蔡元定))의 《율려신서(律呂新書)》를 강하다가 그 법도가 매우 정묘하고 높고 낮음에 차서(次序)가 있음을 감탄하여 장차 율려를 만들고자 하였으나 황종(黃鍾)을 갑자기 얻기가 어려웠다. 이에 예문관 대제학 유사눌(柳思訥), 집현전 제학 정인지(鄭麟趾), 봉상시 판관 박연(朴堧), 경시서 주부(京市署主簿) 정양(鄭穰) 등에게 명하여 구악(舊樂)을 개정하게 하였다. 또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를 두고 영의정 황희(黃喜), 우의정 맹사성(孟思誠), 찬성 허조(許稠)를 총제(摠制)로, 정초(鄭招), 신상(申商), 권진(權軫) 등을 제조(提調)로 삼아 음악에 관한 일을 강구하여 의논하도록 하였다.

임하필기 제3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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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악부(海東樂府)
소대악(昭代樂)


문덕의 노래 끝나자 무공을 천명하니 / 文德歌成闡武功
성인의 교화가 민간의 풍속을 변화시켰네 / 聖人敎化變民風
삼십팔 년 성군이 성군을 계승하였으니 / 三十八年聖繼聖
악사가 명을 받들어 악을 바로잡았네 / 樂師承命正和中
태조조(太祖朝)로부터 세종조(世宗朝) 12년에 이르기까지는 38년이 되는데, 박연(朴堧)이 상소하여 악보(樂譜)를 편찬하였다. 문덕(文德)과 무공(武功) 두 곡이 있는데, 뒤에 그대로 종묘 제례악을 삼았다.


종묘의궤 제1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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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의 등가 도설 《오례의(五禮儀)》



○ 등가는 당(堂) 위에 둔다. 가운데 어도(御道)를 열어 놓고, 특종(特鐘)은 동쪽에, 특경(特磬)은 서쪽에 두며, 박(拍) 하나는 그 남쪽 한가운데에 둔다. 다음으로 축(柷)은 동쪽에, 어(敔)는 서쪽에 두고, 아쟁(牙箏) 하나는 축의 서쪽에, 대쟁(大箏) 하나는 어의 동쪽에 두어 첫 번째 줄이 되게 한다. 다음으로 노래하는 사람 6인을 동쪽과 서쪽으로 나누어 두어 두 번째 줄이 되게 한다. 다음으로 방향(方響)을 중앙에 놓고, 현금(玄琴)과 편종(編鍾)은 동쪽에, 가야금과 편경(編磬)은 서쪽에 두어 세 번째 줄이 되게 한다. 다음으로 절고(節鼓)를 중앙에 놓고, 당비파(唐琵琶), 향비파(鄕琵琶), 장고(杖鼓), 화(和)를 각각 하나씩 동쪽에, 당비파, 월금(月琴), 장고, 생(笙)을 각각 하나씩 서쪽에 두어 네 번째 줄이 되게 한다. 다음으로 필률(觱篥), 해금(奚琴), 대금(大笒), 당적(唐笛), 훈(塤)을 각각 하나씩 동쪽에, 필률, 퉁소(洞簫), 대금, 당적, 지(篪)를 각각 하나씩 서쪽에 두어 다섯 번째 줄이 되게 한다. 모두 북쪽을 향한다. - 공인은 모두 개책관, 비난삼(緋鸞衫), 백주중단(白紬中單), 백초대(白綃帶), 백포말, 오피리 차림을 하고, 악사는 복두(幞頭), 녹삼(綠衫), 오정대(烏鞓帶), 흑피화(黑皮靴) 차림을 한다. -


 

[주D-001]비난삼(緋鸞衫) : 붉은색의 난삼으로, 난삼은 난새 문양이 있는 적삼이다. 세종 때 박연(朴堧)은 당시 사용했던 오승포의(五升布衣), 즉 닷새 베옷이 적삼의 제도가 아니라 하여 난삼으로 바꿀 것을 건의한 바 있다. 《世宗實錄 15年 3月 22日》
[주D-002]백주중단(白紬中單) : 흰색 명주로 만든 중단으로, 중단은 조복(朝服)과 제복(祭服) 안에 받쳐 입던 옷이다.
[주D-003]백초대(白綃帶) : 흰색 생사로 만든 띠이다.
[주D-004]녹삼(綠衫) : 녹색 적삼이다.
[주D-005]오정대(烏鞓帶) : 검은색 가죽 띠이다.
[주D-006]흑피화(黑皮靴) : 흑색 가죽으로 만든 신이다.


 

 

 

 

종묘의궤 제3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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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장(樂章) 악기와 용악(用樂)에 관한 기록을 첨부하였다.



속악(俗樂)의 가사(歌詞) 악장 아래의 주설(註說)은 장악원 정 이세필(李世弼)이 모아 기록한 것이다. 《장악원등록(掌樂院謄錄)》에 나온다.
종묘와 영녕전
○ 영신(迎神)
선조의 공덕이 우리 후손 열어 주시니 / 世德啓我後
아 빛나는 그 모습이며 그 음성입니다 / 於昭想形聲
엄숙하고 공경히 깨끗한 제사 올리니 / 肅肅薦明禋
우리의 정성을 편안히 여겨 강림하소서 / 綏我賚思成

○ 전폐(奠幣)
보잘것없는 예물이나 신과 통할 수 있기에 / 菲儀尙可交
광주리를 받들어 폐백을 올립니다 / 承筐將是帛
선조께서는 돌아보고 흠향하시니 / 先祖其顧歆
예를 행하는 마음 맑고 고요하여 공경이 지극합니다 / 式禮心莫莫

○ 진찬(進饌)
제사 음식 만들기에 공경을 다하여 / 執爨踖踖
우리의 조와 두를 올립니다 / 登我俎豆
조와 두를 이미 올렸으니 / 俎豆旣登
음악 또한 조화롭게 연주합니다 / 樂且和奏
향기로운 제사를 효성으로 올리니 / 苾芬孝祀
오직 신께서 그 위에 계실까 / 維神其右

○ 희문(熙文) 초헌(初獻) - 〈보태평(保太平)〉 11성(聲)이다. -
열성께서 부흥하는 국운을 열어 / 列聖開熙運
찬란한 문치가 창성하였습니다 / 炳蔚文治昌
성대한 아름다움 기리기를 원하여 / 願言頌盛美
오직 노래에 얹어 부릅니다 / 維以矢歌章

삼가 살펴보건대, 이 악장은 헌관을 인도하여 들어갈 때의 악장이다.

○ 기명(基命)
아 위대하신 목조께서 / 於皇聖穆
바다 건너 경흥으로 옮기셨도다 / 浮海徙慶
귀부하는 사람 나날이 많아져 / 歸附日衆
우리 영원한 천명의 기틀 정하셨도다 / 基我永命

삼가 살펴보건대, 이 악장은 목조대왕(穆祖大王)의 사적에 대한 것이다. 《용비어천가》에 “처음에 목조가 전주(全州)에 있었는데, 관기(官妓)의 일로 인해 지주(知州)와 틈이 생겼다. 지주가 모해하자 목조가 강원도 삼척현(三陟縣)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백성 중에 따르기를 원하여 옮긴 자가 170여 가호였다. 후에 새로 제수된 안렴사(按廉使)가 목조와 묵은 혐의가 있었는데, 목조는 그가 부임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함길도(咸吉道) 덕원부(德源府)에 이르러 정착하였다. 백성 70가호가 또 모두 따랐다.” 하였다.

○ 귀인(歸仁)
위대하신 상제께서 / 皇矣上帝
백성의 안정을 구하여 / 求民之莫
마침내 깊숙한 땅 돌아보시고 / 乃眷奧區
명덕의 임금 옮겨 살게 하셨네 / 乃遷明德
어진 사람 잃을 수 없다 하여 / 仁不可失
서로 그림자처럼 따랐네 / 于胥景從
따르는 사람 많아 저자와 같으니 / 其從如市
나의 사사로움 때문이 아니로다 / 匪我之私
나의 사사로움 때문이 아니요 / 匪我之私
어진 이에게 귀의함이로다 / 維仁之歸
어진 이에게 귀의하니 / 維仁之歸
위대한 기업을 널리 여셨도다 / 誕啓鴻基

삼가 살펴보건대, 이 악장은 익조대왕(翼祖大王)의 사적에 대한 것이다. 《용비어천가》에 “익조가 알동(斡東)에 있을 때에 여진(女眞)의 여러 천호(千戶)를 피하여 적도(赤島)로 가서 마침내 움집을 짓고 살았는데, 알동 사람들이 익조가 적도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귀의하였다. 후에 덕원부로 돌아와 살았는데, 경흥 백성으로서 따르는 자들이 마치 시장으로 모여드는 것과 같았다.” 하였다.

○ 형가(亨嘉)
위대하신 익조께서 / 於皇聖翼
그 임금을 공경히 섬기셨도다 / 祗服厥辟
성스러운 도조께서 그 뜻을 이으시니 / 聖度繼志
돌아보고 의지함이 돈독하도다 / 眷倚斯篤
크게 형통하여 총애를 받으니 / 大亨以嘉
크나큰 천명이 따르도다 / 景命維僕

삼가 살펴보건대, 이 악장은 익조대왕과 도조대왕(度祖大王)의 사적에 대한 것이다. 《용비어천가》에 “원 세조(元世祖)가 일본을 정벌할 때 천하의 병선(兵船)을 동해로 회합시키자, 익조도 조정의 명으로 와서 회합하였다. - 목조가 원나라에 귀의하자, 원나라에서 오천호(五千戶)로 삼았고 익조가 그 작위를 물려받았는데, 원나라 조정의 명으로 와서 회합한 것이다. - 처음 충렬왕(忠烈王)을 만난 때부터 두세 번에 이르도록 더욱 공손하고 경건하니, 왕이 말하기를, ‘경은 본래 사족(士族)이니 어찌 근본을 잊겠는가. 지금 경의 행동을 보니 마음에 간직한 바를 충분히 알겠다.’ 하였다. 도조가 익조의 뜻을 이어 와서 회합하자 충숙왕(忠肅王)이 선물을 더욱 풍성하게 내려 주었으니, 충성을 권면하기 위함이었다.” 하였다.

○ 집녕(輯寧)
넓고도 먼 쌍성 땅 / 雙城澶漫
천부의 땅이라 이른다네 / 曰維天府
관리가 직무를 다하지 못해 / 吏之不職
백성이 편히 살지 못하였도다 / 民未安堵
성스러운 환조께서 쓰다듬어 안정시키니 / 聖桓輯寧
흩어졌던 유민들 마침내 돌아왔네 / 流離卒復
총애하는 명을 받으시어 / 寵命是荷
복록 크게 세우셨도다 / 封建厥福

삼가 살펴보건대, 이 악장은 환조대왕(桓祖大王)의 사적에 대한 것이다. 《용비어천가》에 “쌍성은 중앙에서 가장 먼 변방으로 제대로 어루만져 안정시키지 못하자 백성들이 점차 살 곳을 잃고 흩어졌다. 곧 환조에게 명하여 다스리게 하였는데, 백성들이 이로 말미암아 자기들의 생업에 안주할 수 있었다. 후에 환조가 와서 조회하자 왕이 맞이하여 말하기를, ‘완악한 백성들을 어루만져 안정시켰으니, 참으로 노고가 많았다.’ 하였다.” 하였다.

○ 융화(隆化)
아 위대하신 성조께서는 / 於皇聖祖
그 덕이 훌륭하고 뛰어나시어 / 遹駿厥德
인으로 편케 하고 의로 복종시키니 / 仁綏義服
신령스러운 덕화가 두루 미쳤도다 / 神化隆洽
깨달은 저 섬오랑캐와 / 憬彼島夷
산속 오랑캐가 / 及其山戎
크게 정화되고 회유되어 / 孔淑以懷
따르지 않는 자 없었으니 / 莫不率從
물 건너고 산을 넘어 / 航之梯之
우리 관문 끊임없이 두드렸도다 / 款我繹繹
아 빛나는 그 영령함으로 / 於赫厥靈
가까이는 편케 하고 멀리는 엄숙게 하였도다 / 邇妥遠肅

삼가 살펴보건대, 이 악장은 태조대왕의 사적에 대한 것이다. 《용비어천가》에 “태조가 천명을 받은 이후로 교화가 멀리 섬나라 왜(倭)에게 미치자 왜가 태도를 고쳐 와서 조회하고 다시 교역을 통하니, 남도(南道)의 백성들이 안심하고 편히 살았다. 동북 한 방면은 본래 나라의 기업을 연 곳이다. 위엄을 경외하고 은덕을 그리워한 세월이 오래이니, 야인(野人) 추장(酋長)이 모두 와서 복종하여 섬겨서 동쪽으로 정벌하고 서쪽으로 정벌함에 따르지 않은 이가 없었다.” 하였다.

○ 현미(顯美)
아 훌륭하신 우리 성고께서는 / 於皇我聖考
난리를 다스려 종묘사직을 보전하셨도다 / 戡亂保宗祏
찬양하는 노래와 여망이 드높으니 / 謳歌輿望隆
왕위 사양하심이 아름다운 덕 드러냈도다 / 敦讓顯美德

삼가 살펴보건대, 이 악장은 태종대왕의 사적에 대한 것이다. 《용비어천가》에 “태종이 정도전의 난을 평정하니, 당시 사람들이 모두 태조에게 세자로 삼을 것을 청하고자 하였다. 태종은 완강하게 사양하고 공정대왕(恭靖大王)을 세자로 삼을 것을 청하였다. 공정대왕이 말하기를, ‘당초에 의리를 세워 나라를 열고 오늘날의 일에 이른 것은 모두 정안(靖安)의 공이니, 내가 세자가 될 수는 없다.’ 하였으나, 태종의 사양은 더욱 완강하였다.” 하였다.

○ 용광(龍光)
천자가 바야흐로 노하시니 / 天子方懠
나라 사람들 근심하도다 / 邦人憂惶
성고께서 들어가 아뢰시니 / 聖考入奏
충성 밝게 드러났도다 / 忠誠以彰
천자를 기쁘게 하니 / 媚于天子
빛나도다 그 덕이여 / 赫哉龍光

삼가 살펴보건대, 이 악장은 태종대왕의 사적에 대한 것이다. 《용비어천가》에 “태조조에 천자가 ‘본국이 사람을 보내 여진(女眞)을 꾀어 압록강(鴨綠江)을 몰래 건너게 하였다.’라는 등의 일로 친필 조서를 내려 꾸짖었다. 표문(表文)을 올려 변명하였으나 천자가 표문의 말이 거만하다고 더욱 노하여 요동(遼東)에 조선의 사신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명하였다. 이에 사신이 요동에 이르러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온 자가 모두 다섯 무리나 되었다. 천자가 사신을 보내 태조에게 친아들을 보내라고 유시하자, 태조가 태종에게 말하기를, ‘천자가 묻는 말이 있을 경우에 네가 아니면 상세하게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하니, 태종이 말하기를, ‘신이 종사의 대계를 위하는 일에 어찌 거절하여 피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전(箋)을 받들어 경사(京師)로 갔다. 천자가 두세 번 인견하였는데, 태종이 아뢰는 말이 상세하면서도 분명하자 천자가 후하게 우대하여 돌려보내고, 마침내 도로를 열어 통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하였다.

○ 정명(貞明)
엄숙한 성모께서 / 思齊聖母
능히 왕의 배필이 되셨도다 / 克配乾剛
난리를 다스려 안정시킴에 / 戡定厥亂
도우신 계책 실로 훌륭하였도다 / 贊謀允臧
아 곧고 밝으심이여 / 猗歟貞明
우리 후손을 계우하심 끝이 없도다 / 啓佑無疆

삼가 살펴보건대, 이 악장은 원경왕후(元敬王后 태종 비)의 사적에 대한 것이다. 《용비어천가》에 “정도전의 난 때 원경왕후가 동생인 대장군 민무구(閔無咎) 및 민무질(閔無疾)과 도모하여 병장기와 안구마(鞍具馬)를 모두 몰래 정비해 놓고 기다렸는데, 급기야 변란이 일어나자 왕후가 준비해 둔 병장기의 도움을 받았다. 후에 태종이 즉위하여 왕비에 봉하였는데, 책문(冊文)에 ‘능히 계책을 결단하여 갑옷을 꺼내 종사의 공을 도와 이루었도다. 이에 대업을 계승할 수 있었던 것 또한 내조에 힘입은 바 많도다.〔能決策而提甲 弼成定社之功 玆獲紹於丕圖 亦多資於內助〕’라는 내용이 있다.” 하였다.

○ 대유(大猷)
열위께서 대대로 이어 온 성대한 덕 펴시고 / 列位宣重光
문교를 펼쳐 사방을 편안히 다스리셨네 / 敷文綏四方
제도가 이미 밝혀지고 갖추어지니 / 制作旣明備
큰 정책 어쩌면 그리도 빛나고 빛나는가 / 大猷何煌煌

삼가 살펴보건대, 이 악장은 열성의 문덕(文德)을 총칭한 것이다.

○ 역성(繹成)
세덕을 지어 구하여 / 世德作求
천하를 안정시킨 공 따르시니 / 率維敉功
빛나게 태평성대 열어 / 光闡太平
예악이 바야흐로 융성하도다 / 禮樂方隆
왼손엔 약 오른손엔 적 잡고 춤추니 / 左籥右翟
구변의 곡조 다하였도다 / 曰旣九變
빛나는 공렬 크게 밝히니 / 昭光烈
참으로 아름답고 참으로 선하도다 / 盡美盡善

삼가 살펴보건대, 이 악장은 헌관을 인도하여 나갈 때의 악장이다.

○ 소무(昭武) 아헌(亞獻) - 〈정대업(定大業)〉 11성이다. -
하늘이 우리 열성 돌아보시어 / 天眷我列聖
대를 이어 성무를 밝히셨도다 / 繼世昭聖武
무쌍한 공렬 선양하셨으니 / 庶揚無競烈
이에 노래와 춤 올리나이다 / 是用歌且舞

삼가 살펴보건대, 이 악장은 헌관을 인도하여 들어갈 때의 악장이다.

○ 독경(篤慶)
아 위대하신 목조께서 / 於皇聖穆
북방에 깃발을 세우셨도다 / 建于朔
그 경사 돈독히 하여 / 遹篤其慶
우리 왕업 시작하셨도다 / 肇我王迹

삼가 살펴보건대, 이 악장은 목조대왕의 사적에 대한 것이다. 《용비어천가》에 “목조가 가솔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함길도 덕원부에 이르러 정착하였고 이윽고 원(元)나라에 귀의하니, 원나라에서 목조를 오천호소 달로화적(五千戶所達魯花赤)으로 삼았다. 동북 지역의 사람들이 모두 귀의하여 심복하니, 왕업(王業)의 흥기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하였다.

○ 탁정(濯征)
완악한 토호가 / 頑之豪
쌍성을 장악하니 / 據雙城
거룩하신 우리 환조 / 我聖桓
깨끗이 소탕하셨네 / 于濯征
사납고 모진 적 없어져 / 狙獷亡
우리 강토 넓혔다네 / 拓我疆

삼가 살펴보건대, 이 악장은 환조대왕의 사적에 대한 것이다. 《용비어천가》에 “원나라 기 황후(奇皇后)의 형 대사도(大司徒) 기철(奇轍)이 쌍성(雙城)의 반란을 일으킨 백성과 몰래 통하여 한패로 결탁하고 반역을 꾀하였다. 왕이 환조에게 유시하기를, ‘경은 마땅히 돌아와 우리 백성들을 진무(鎭撫)하라. 혹시 변고가 있으면 마땅히 내 명대로 하라.’ 하고, 유인우(柳仁雨)와 김원봉(金元鳳) 등에게 명하여 가서 쌍성 등 지역을 수복하라고 하였다. 유인우 등이 망설이며 진격하지 않았는데, 왕이 보고를 받고 환조에게 소부윤(少府尹)과 중현대부(中顯大夫)의 품계를 제수하고는 병마판관(兵馬判官) 정신계(丁臣桂)를 보내 교지(敎旨)를 전하여 내응(內應)하게 하였다. 환조가 명을 듣고 즉각 출발하여 유인우와 함께 군사를 합해 쌍성을 공격하여 쳐부수었다. 총관부 총관(總管府總管) 조소생(趙小生)과 천호(千戶) 탁도경(卓都卿)이 처자를 버리고 밤중에 달아났다. 이에 지도를 살펴 여러 성을 수복하였다.” 하였다.

○ 선위(宣威)
아 고려가 나라 잘못 다스려 / 咨麗失馭
외부의 모멸이 심하였도다 / 外侮交熾
섬오랑캐 함부로 물어뜯고 / 島夷縱噬
나하추(納哈出) 방자히 눈 부라리며 / 納寇恣睢
홍건적 기세 떨치고 / 紅巾炰烋
원의 잔당 횡포 부리며 / 元餘奰屭
요망한 중 발호하고 / 僧跋扈
호발도(胡拔都) 날뛰었도다 / 胡魁陸梁
아 위대하신 태조께서 / 於皇聖祖
신무를 크게 떨치시어 / 神武誕揚
하늘의 위엄을 펴시니 / 載宣天威
빛나고도 당당하도다 / 赫赫堂堂

삼가 살펴보건대, 이 악장은 태조대왕의 사적에 대한 것이다. 《용비어천가》에 “신창(辛昌)이 태조에게 내린 교서문(敎書文)에 이르기를, ‘신축년(1361, 공민왕10)에 관적(關賊) - 홍건적(紅巾賊)이다. - 이 경도(京都)를 침범하여 국가가 파천(播遷)하였는데, 경이 대상(大相)을 도와 흉악한 적을 섬멸하고 경도를 수복하였으며, 호인(胡人) 나하추(納哈出)가 우리나라의 동북 변방을 침범하여 고주(高州)의 경내에 이르니, 경이 군장(軍裝)을 가볍게 하고 행군 속도를 배로 하여 달려와 국경 밖으로 축출하였다. 계묘년(1363, 공민왕12)에 서얼(庶孼) 덕흥군(德興君) - 고려 충선왕(忠宣王)의 얼자(孼子) 탑사첩목아(塔思帖木兒)이다. 일찍이 중이 되었다가 충정왕(忠定王) 3년(1351)에 원나라로 달아났다. - 이 군사를 일으켜 서쪽 변경을 쳐들어오니, 경이 날랜 기마병을 거느리고 가서 그 예봉을 꺾었으며, 정사년(1377, 우왕3)에는 왜노(倭奴)가 해주(海州)를 침략하니 경이 단신으로 사졸을 앞장서 쳐서 거의 모조리 무찔렀고, 경신년(1380)에는 왜노가 진포(鎭浦)에서 해안으로 내려와 양광도(楊廣道), 경상도, 전라도 지경을 제멋대로 다니면서 고을을 분탕하고 사녀(士女)를 살육하여 삼도가 썰렁하였는데, 경이 죽음을 각오하고 살기를 도모하지 않는 계책을 내어 휘하를 거느리고 인월역(引月驛)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여 남김없이 포획하니, 백성이 이에 힘입어 편안해졌다. 군사를 씀에 있어서는 움직일 때 기율을 준수하여 추호도 범하지 못하도록 하니, 백성이 그 위엄을 두려워하고 백성이 그 은덕을 그리워하였으니, 비록 옛날의 명장이라 한들 어찌 더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하였다.

○ 신정(神定)
우리 적에 분개하여 / 愾我敵
호랑이와 비휴 같은 군사 경계하도다 / 戒虎貔
그 용맹 고무하니 / 鼓厥勇
날개 떨쳐 하늘에 이를 듯하도다 / 若翰飛
구천을 진동함이 / 動九天
정의(正義)요 신기(神奇)러니 / 正又奇
버마재비 수레에 맞서는 꼴이라 / 螗斧亢
곧바로 제 풀에 쓰러지도다 / 旋自糜
대나무 쪼개듯 쳐부수는 기세에 / 竹斯破
어느 누가 우릴 버티리오 / 孰我支
무공을 달성함은 / 耆定武
신령이 하심이로다 / 神之爲

○ 분웅(奮雄)
우리 장한 용맹 떨치니 / 我雄我奮
우레 같고 벼락 같도다 / 如雷如霆
어느 견고함 꺾지 못하며 / 胡堅莫催
어느 험난함 평정치 못하랴 / 胡險莫平
줄줄이 이어지고 급하게 하지 않으니 / 連連安安
항복한 자 신문하고 불복한 자 귀 베어 아뢰도다 / 奏我訊
신령스러운 창 한번 휘두르니 / 神戈一揮
요망한 기운 금방 씻기도다 / 妖氛倏廓
업신여기고 거역하는 사람 없으니 / 無侮無拂
우리 동국의 복이로다 / 祚我東國

삼가 살펴보건대, 이 두 악장은 태조가 여러 적을 평정한 위엄과 은덕을 총칭한 것이다.

○ 순응(順應)
고려왕이 간언을 듣지 않고 / 麗主拒諫
감히 난을 일으켰도다 / 敢行稱亂
신명한 결단을 내리시어 / 我運神斷
우리 군사 되돌리니 / 我師我返
하늘과 사람의 협찬이로다 / 天人協贊

삼가 살펴보건대, 이 악장은 태조대왕의 사적에 대한 것이다. 《용비어천가》에 “고려 신우(辛禑)가 해주(海州) 백사정(白沙汀)에서 사냥한다고 칭탁하고 오부(五部)의 장정을 징발하여 군사로 삼고 서해도(西海道)로 출행하였는데, 사실은 요동을 공격하고자 한 것이었다. 태조가 그 불가함을 극도로 간하였으나 좌군(左軍)과 우군(右軍)이 압록강을 건너 위화도에 주둔하였다. 태조가 마침내 여러 장수를 깨우쳐 말하기를, ‘만약 상국(上國)의 국경을 범하면 천자에게 죄를 얻어 종묘사직과 백성에게 화가 당장 닥칠 것이다. 어찌 경들과 함께 왕을 뵈어 직접 화복(禍福)에 대해 진달하고 임금 측근의 악한 사람들을 제거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지 않겠는가.’ 하니, 여러 장수가 모두 말하기를, ‘오직 명을 따르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군사를 돌려 압록강을 건넜다. 이때에 장맛비가 며칠 동안 내렸는데, 물이 불어나지 않고 있다가 군사를 돌려 강을 건너자마자 큰물이 갑자기 밀어닥쳐 섬 전체가 물에 잠기니,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하였다.

○ 총수(寵綏)
의로운 기치를 돌리니 / 義旗載回
천리를 따름이라 돕는 이 많도다 / 順乃多助
하늘의 아름다움 진동하니 / 天休震動
백성들 열광하도다 / 士女悅豫
사랑하고 편안히 해 줄 우리 군주 기다렸기에 / 徯我寵綏
마실 음료 가지고 와 맞이하도다 / 壺漿用迎
더러운 죄악 이미 씻었으니 / 旣滌穢惡
동해 영원히 맑으리로다 / 東海永淸

삼가 살펴보건대, 이 악장은 태조대왕의 사적에 대한 것이다. 《용비어천가》에 “군대가 서쪽으로 가기 전에 ‘서경성 밖 불빛이요, 안주성 밖 연기로세. 그 사이 왕래하는 이 원수여, 백성 구제 소원일세.〔西京城外火色 安州城外煙光 往其間李元帥 願言救濟黔蒼〕’라는 동요(童謠)가 있었는데, 얼마 안 되어 이러한 변이 있었다. 당시에 민간에는 또 ‘목자가 나라를 얻으리.〔木子得國〕’라는 노래가 있었는데, 회군할 때에 군중에서 모두 이 노래를 불렀다. 태조가 매번 군사들을 경계하여 ‘너희들이 만약 어가(御駕)를 범하면 나는 너희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백성들에게서 오이 하나라도 빼앗으면 역시 처벌할 것이다.’ 하였다. 서경(西京)으로부터 경성(京城)에 이르니, 신우를 따르던 신하와 백성으로서 술과 음료를 가지고 대군을 맞이하러 오는 자들이 계속 이어져 끊이지 않았으며, 태조가 숭인문(崇仁門)을 경유하여 도성으로 들어가니, 또 남녀가 다투어 술과 음료수를 가지고 와 군사를 맞이하여 위로하고, 거리의 아이들과 골목의 부녀자들은 다투어 수레를 끌어 길을 열어 주었으며, 노약자들은 성으로 올라가 바라보면서 환호하고 발을 굴렀다. 이튿날 신우가 성을 나가 강화(江華)로 갔다.” 하였다.

○ 정세(靖世)
저 외로운 신하가 / 彼孤臣
화의 기미 선동하자 / 煽禍機
위대한 황고께서 / 我皇考
능히 기미 밝히셨네 / 克炳幾
신기(神機) 책모(策謀) 정해지니 / 神謀定
세상 이로써 안정되도다 / 世以靖

삼가 살펴보건대, 이 악장은 태종대왕의 사적에 대한 것이다. 《용비어천가》에 “봉화군(奉化君) 정도전과 의성군(宜城君) 남은(南誾) 등이 권력을 천단할 양으로 어린 서자를 탐하여 세우고 장차 여러 왕자들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태조가 병환이 들어 눕자 정도전 등이 이어(移御)를 논의한다는 구실로 왕자들을 불러 궁으로 들어오게 하여 이로 인해 난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원경왕후가 동생인 대장군 민무구 및 민무질과 함께 도모하여 무기와 안구마를 모두 몰래 정비해 놓고 변란에 응할 계책을 삼고서 대기하였다. 급기야 변란이 일어나 일이 창졸간에 발생하자 태종이 연추문(延秋門)을 나와 오로지 왕후가 준비해 둔 무기에 의지하였는데, 정도전과 남은 등이 모두 처형되었다.” 하였다. 또 삼가 살펴보건대, 〈태종 신도비명〉에 “태조께서 편찮으시자 권신(權臣)이 제 편을 끌어모아 당을 만들어서 어린 서자를 끼고 정권을 천단하여 자기 뜻대로 하려고 하였다. 화의 발단이 급박하였으나 태종이 기미를 환히 알아 모조리 제거하였다.” 하였다.

○ 혁정(赫整)
섬오랑캐 제 힘 헤아리지 못하고 / 島夷匪茹
우리 변방 침략하니 / 虔劉我圉
이에 불끈 노하시어 / 爰赫我怒
우리 군대 정비하도다 / 爰整我旅
만 척의 배 바람 타고 / 萬艘駕風
나는 듯이 바다 건너 / 飛渡溟渤
그 둥지 뒤엎고 / 乃覆其巢
그 소굴 쳐부수도다 / 乃擣其穴
비유컨대 가벼운 저 기러기 털이 / 譬彼鴻毛
세찬 불길에 활활 타듯 하니 / 燎于方烈
고래 같은 파도 잔잔해져 / 鯨波乃息
우리나라 영원히 안정되도다 / 永奠鰈域

삼가 살펴보건대, 이 악장은 태종대왕의 사적에 대한 것이다. 〈태종 행장〉에 “기해년(1419, 세종1) 7월에 대마도(對馬島) 왜적이 변경을 침범하니, 왕이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수군으로 그 섬을 공격하여 무찌르게 하였다.” 하였다. 또 삼가 살펴보니, 〈혁정〉 1장은 전후로 올린 소장(疏章)과 계사 그리고 수의(收議)에서 ‘세종의 종묘 악장’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모두 조사하여 살핀 것이 자세하지 않다.
삼가 살펴보니, 〈세종 행장(世宗行狀)〉에 “대마도와 일기도(一岐島) 등의 왜적이 상국(上國)의 연해(沿海)를 침략하고, 또 우리나라의 남쪽 변경을 침범하자 변방의 장수가 이들을 사로잡았고, 도망하여 본 섬으로 돌아간 자들은 왕이 사람을 보내 도주(島主)를 타이르자 도주가 감히 숨기지 못하고 모두 다 잡아 보냈다. 왕은, 도적이 상국을 노략질하여 천자의 주벌을 범한 것이라 하여 감히 마음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즉시 실라사야문(失剌沙也門) 등 60명을 묶어 경사(京師)에 바쳤다.”라고 하였는데, 이 일을 제외하고는 세종조 때에 다시 왜를 정벌한 일은 없다. 〈세종 신도비명〉을 조사해 보아도 단지 이와 같을 뿐이다.
대개 태종 때에는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수군으로 도왜(島倭)를 공격하여 무찌르게 한 것이고, 세종 때에는 남쪽 변경을 침범한 왜를 사로잡고 본 섬으로 도망하여 돌아간 자들을 그 도주를 타일러서 잡아 보내게 한 것이다. 두 조정의 왜를 정벌한 사실이 같지 않음이 또한 자연 이와 같은데, 〈혁정〉을 살펴보면 “이에 불끈 노하시어 우리 군대 정비하도다. 만 척의 배 바람 타고 나는 듯이 바다 건너, 그 둥지 뒤엎고 그 소굴 쳐부수도다.” 하였다. 이 악장의 내용을 근거로 살펴보면 태종조 때에 장수를 보내 도왜를 공격하여 무찌른 일을 가리킨 것이지, 애당초 세종조 때에 도주를 타일러 도망한 왜를 잡아 보내게 한 일은 아니다. 하물며 〈현미(顯美)〉, 〈용광(龍光)〉, 〈정세(靖世)〉 세 편의 악장은 모두 태종조에 대한 것으로 혹은 성고(聖考)라고 일컫고 혹은 황고(皇考)라고 일컬었고 보면, 악장이 세종조 때에 처음 이루어진 사실을 이로 미루어 알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희문(熙文)〉, 〈소무(昭武)〉 두 악장은 세종의 공덕을 칭술한 것으로 목조가 바다를 건너간 사적에서 시작하여 태종이 왜를 정벌한 사적에서 그쳤을 것은 다시 의심할 것이 없다. 〈혁정〉이 세종의 종묘 악장이 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은 과연 무엇에 근거한 것인가?
또 국조의 역사 기록 및 〈태종 신도비〉를 살펴보면 무술년(1418, 태종18) 8월에 태종이 세종에게 선위(禪位)하였고, 기해년(1419, 세종1) 5월에 가서 도왜를 정벌하였다. 이것으로 말하면 왜를 정벌한 한 가지 일은 과연 세종조 때의 일이다. 그러나 다만 태종이 비록 이미 선위했더라도 군사의 일에 대해서만은 여전히 직접 총괄하고 있었기 때문에 왜를 정벌하는 문제를 논의할 때에 방책을 결정하고 가서 토벌하는 것은 대개 태종에게서 나왔다. 이 때문에 〈태종 신도비〉에 그 사적을 기록하고 〈세종 행장〉에는 다시 말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왜를 정벌한 것은 비록 세종 때에 있었지만 〈혁정〉은 본래 태종을 위하여 지었다는 것은 의심할 것이 없다.

○ 중광(重光) - 지금은 초헌에서는 〈정명〉 아래에 쓰고, 아헌과 종헌에서는 〈혁정〉 아래에 쓴다. -
아 위대하신 선조의 / 於皇宣祖
거듭 빛낸 큰 덕은 / 峻德重光
천조(天朝)를 감동시켜 무고 밝혀서 / 格天昭誣
우리 종사 바로잡았고 / 正我宗祊
의리를 들어 흉악한 적 제거하여 / 抗義除凶
우리 영토 안정시켰도다 / 奠我封疆
복을 받아 후손을 열어 주니 / 受釐啓後
번창 유구하리라 / 悠久熾昌

삼가 살펴보건대, 이 악장은 선조대왕의 사적에 대한 것이다. 〈선조 행장〉에 “선대의 종계(宗系)가 지금까지 입어 온 무고를 씻어 나라를 빛내는 공렬을 드리웠고, 하늘에 뻗칠 강한 왜적을 물리쳐 다시 나라를 세우는 공적을 이루었으니, 종사에 남을 공이요, 중흥을 빛낸 업적이다.” 하였다.
또 살펴보건대, 이 악장은 병인년(1626, 인조4)에 추가로 지을 때의 예조 계사를 보면 마땅히 〈희문〉의 〈정명〉 아래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원상(院上)의 가사책(歌詞冊)을 가져다 조사해 보니 이곳에 기록되어 있고, 또 현재 사용하는 악보책을 조사해 보니 〈대유〉 아래에 기록되어 있거나 또는 〈혁정〉 아래에 기록되어 있으니, 그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

○ 영관(永觀)
아 위대한 열성께서 / 於皇列聖
대대로 무공이 있으시도다 / 世有武功
거룩한 덕과 큰 업적을 / 盛德大業
어찌 다 형용하리오 / 曷可形容
우리의 춤 질서정연하고 / 我舞有奕
진퇴에 법도 있으니 / 進止維程
차분하고 의젓하여 / 委委佗佗
길이 끝마침을 보도다 / 永觀厥成

삼가 살펴보건대, 이 악장은 헌관을 인도하여 나갈 때의 악장이다.

○ 철변두(徹籩豆)
우러러 제기에 제수를 담아 / 仰盛于豆
두에 담고 변에 담는도다 / 于豆于籩
음식이 향기로우니 / 有飶其香
강림하심 어렴풋하도다 / 來假僾然
우리 제례 이미 마쳤기로 / 我禮旣成
철상 고함 경건히 하도다 / 告徹維虔

○ 송신(送神)
정결한 제사 법도를 다하니 / 禋祀卒度
신령께서 안락하셨으리 / 神康樂而
충만하게 위에 계신 지 오래지 않으니 / 洋洋未幾
우리를 금방 돌아보시리 / 回我倏而
선왕의 모습 아스라한데 / 霓旌髣髴
아득히 멀리 구름 타고 가시리 / 雲馭邈而
부 악기와 용악(用樂)
○ 태종대왕 병술년(1406, 태종6) 10월 을미일(9일)
상이 종묘에 친히 강신제(降神祭)를 지내고, 처음으로 중국 조정에서 하사한 악기를 사용하였다. - 실록에 나온다. -

○ 세종대왕 임자년(1432, 세종14) 1월 계해일(3일)
예조에서 아뢰기를,
“봉상 판관 박연(朴堧)이 상언하기를, ‘무일(舞佾)의 위치를 옛 현인의 〈도설(圖說)〉에서 살펴보니, 바로 종묘 가운데에 있고 악현(樂懸)의 북쪽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왕조는 악현의 북쪽 계단 남쪽에 무일을 진설하여 이미 옛 제도를 잃은 데다 땅이 좁고 자리가 협소하여 진퇴하고 변통할 도리가 없으니 참으로 편치 않습니다. 지금 악무(樂舞)의 진퇴하는 법을 자세히 살펴보면 선유가 말하기를, 「무일에 사표(四表)를 세우는데, 무인(舞人)이 남쪽 표지에서 두 번째 표지에 이르면 1성(成)이 되고, 두 번째 표지에서 세 번째 표지에 이르면 2성이 되고, 세 번째 표지에서 북쪽 표지에 이르면 3성이 되며, 바로 몸을 돌려 남쪽을 향하여 북쪽 표지에서 두 번째 표지에 이르면 4성이 되고, 두 번째 표지에서 세 번째 표지에 이르면 5성이 되고, 세 번째 표지에서 남쪽 표지에 이르면 6성이 되니, 음악 역시 여섯 번 변하여 천신(天神)이 모두 내려온다. 이것이 천신에게 제사 지내는 환종궁(圜鍾宮) 6변(變)의 춤이다. 또 남쪽 표지에서 두 번째 표지에 이르면 7성이 되고, 두 번째 표지에서 세 번째 표지에 이르면 8성이 되니, 음악도 여덟 번 변하여 지기(地祇)가 모두 나온다. 이것이 지기에 제사 지내는 함종궁(函鍾宮) 8변의 춤이다. 또 세 번째 표지에서 북쪽 표지에 이르면 9성이 되니, 음악도 아홉 번 변하여 인귀(人鬼)에게 제사 지낼 수 있다. 이것이 인귀에게 제사 지내는 황종궁(黃鍾宮) 9변의 춤이다.」 하였습니다. 이 말을 살펴보면 사표를 기준으로 진퇴하는 절차는 곧 무무(武舞)의 법입니다. 문무(文舞)는 분명한 설명이 없습니다만, 선유(先儒) 가공언(賈公彦)이 말하기를, 「무무에 사표가 있으니, 문무에도 마땅히 사표가 있을 것이다.」 하였고, 진상도(陳常道)의 《예서(禮書)》에 이르기를, 「가공언의 말이 이치에 혹 그럴 수 있다.」 하였습니다. 또한 우리 왕조는 지난 을해년(1395, 태조4) 겨울에 대제(大祭)를 친행(親行)으로 치를 때 제조 정도전(鄭道傳)ㆍ민제(閔霽)ㆍ권근(權近)ㆍ한상경(韓尙敬) 등이 편수한 의궤(儀軌)에는 문무와 무무에 각각 사표를 만들고 거리를 4보(步)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일이 악현의 북쪽 계단 사이에 있어서 진퇴의 절차를 할 수 없습니다. 원컨대 옛 제도에 따라 무일을 묘정 가운데에 진설하여 여섯 번 변하고, 여덟 번 변하고, 아홉 번 변하는 의식을 다 할 수 있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본 예조에서 상정소(詳定所)와 함께 살펴보니, 위에서 말한 묘정은 사실 협소합니다. 청컨대 남쪽 계단으로부터 9보를 더 넓히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실록에 나온다. -

○ 무진년(1448, 세종30) 8월 임오일(29일)
의주상정관(儀註詳定官)이 아뢰기를,
“종묘의 관창(祼鬯)과 전폐(奠幣)는 일시에 예를 행하는데, 각각 장(章) 8구의 악장이 있습니다. 지금 송나라 제도대로 관창과 전폐를 합하여 1장으로 하고, 장 8구로 고쳐 지으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그 악장에 이르기를,
아 심원한 종묘에 / 於穆淸廟
받드는 제사 어긋남이 없도다 / 祀事不忒
엄숙히 강신례를 올리니 / 有嚴祼將
흠향하여 이르시도다 / 以享以格
공손히 광주리의 폐백을 올려 / 恭奠篚幣
예식과 의식을 다 마치니 / 禮儀旣成
신의 영령 충만히 위에 계시어 / 庶幾洋洋
우리의 효성을 흠향하시도다 / 歆我孝誠
하였다. - 실록에 나온다. -

○ 국상(國喪) 때 종묘에서 음악을 쓰는 문제에 대해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李恒福)이 논의하였다.
“사람의 지식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논의하는 세 가지 조목 가운데 종묘에 음악을 쓰는 문제와 거행의 선후 같은 문제는 신이 한 번도 강론해 보지 못한 것이라서 시종 감히 자신 있는 논의는 하지 못하고 오직 억견(臆見)으로 참작에 대비할 뿐입니다.
《오례의》에 일컬은 바로는 졸곡(卒哭) 뒤로 지내는 대사(大祀)에는 음악을 쓴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아마도 본국은 상기(喪期)를 단축하는 제도를 섞어 쓰는 관계로 장사 지내고 난 뒤에 애례(哀禮)는 이미 줄어들어 이와 관련하여 시행하는 모든 일이 또한 초상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삭제나 망제와 같은 성대한 제사에 부득불 길례(吉禮)로 거행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고례(古禮)를 준행하여 삼년상을 치르는 만큼 크고 작은 절문(節文) 또한 마땅히 이에 따라 변해야 할 것입니다.
옛날에는 경(卿)이 죽었어도 감히 종묘에 역제(繹祭)를 거행하지 못했고 설령 역제를 거행하더라도 피리는 쓰지 않았습니다. 신하의 초상에도 그러하였는데 하물며 임금의 초상이겠습니까. 지금 이미 고례로 상을 치르고 있는 이상, 인종(仁宗)과 명종(明宗) 양묘(兩廟)에 대한 중복(重服)이 오히려 남아 있고, 상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무릇 이러한 곡절은 모두 《오례의》와 같지 않아서 감히 알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것은 옛 제도에 반드시 이미 거행한 성헌(成憲)이 있을 터이나, 신은 견문이 고루하다 보니 보지 못하였습니다. 고서(古書)를 참고하면 반드시 찾기 어려울 리가 없을 것이니, 상세히 조사하여 처리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국가의 대사 중에 오직 제사가 가장 중하고 제사의 예절 가운데서도 악기가 중요합니다. 지금 마땅히 사용해야 하는데 없앤 것은 그만이거니와 마땅히 없애야 하는데 사용하는 것은 거짓이 됩니다. 유사는 이에 대해 자세히 살펴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 이항복의 문집에 나온다. -

○ 인조 을축년(1625, 인조3) 9월 갑술일(29일)
예조에서 아뢰기를,
“지난 7월 20일 조강(朝講) 때 지사 오윤겸(吳允謙)이 아뢰기를, ‘신은 일찍이 예조 판서로서 종묘의 친제에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악장 한 가지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 의심하는 바가 있어 논의하여 정하고자 합니다. 태조의 악장은 〈융화〉를 쓰고, 태종의 악장은 〈현미〉와 〈용광〉을 써야 하는데, 사조(四祖)를 영녕전으로 옮기고 난 뒤에도 사조의 악장을 종묘에 그대로 사용하기 때문에 제1실과 제2실에 쓰는 악장에 이르러서는 제6실과 제7실까지 밀려 옮겨 쓰게 되니, 악장이 문란하여 지극히 미안합니다. 또한 각 신실에는 당연히 모두 악장이 있어야 하는데, 존호가 있는 신위에는 악장이 있고 다른 신실에는 악장이 없는 것도 매우 서운합니다. 또 땅에 강신주를 붓는 한 가지 절차는 돗자리〔地衣〕를 뚫어 작은 구멍을 내고 술을 붓는데, 울창주를 땅에 붓는 의미가 자못 아니니, 이것이 사지(沙地)를 만든 까닭입니다. 모두 예관으로 하여금 널리 예문을 상고하여 고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습니다. 상께서 이르시기를, ‘사안이 중대하니, 대신에게 논의하여 정탈하는 것이 좋겠다.’ 하시자, 우상이 아뢰기를, ‘오윤겸이 악장을 고치자고 한 말은 옳습니다. 예조 판서가 들어오면 논의하여 정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상께서 이르시기를, ‘아뢴 대로 하라.’라고 전교하셨습니다.
신들이 가만히 《악학궤범》에 수록된 종묘에 현재 사용하는 악장을 조사해 보니, 초헌의 경우 〈기명〉은 목조의 악장, 〈귀인〉은 익조의 악장, 〈형가〉는 도조의 악장, 〈집녕〉은 환조의 악장, 〈융화〉는 태조의 악장, 〈현미〉와 〈용광〉은 태종의 악장, 〈정명〉은 원경왕후의 악장, 〈대유〉와 〈역성〉은 세종의 악장이고, 아헌ㆍ종헌의 경우 〈독경〉은 목조의 악장, 〈탁정〉은 환조의 악장, 〈선위〉, 〈신정〉, 〈분웅〉, 〈순응〉, 〈총수〉는 태조의 악장, 〈정세〉는 태종의 악장, 〈혁정〉은 세종의 악장이었습니다. 이 밖에 세조 이하 6실의 악장은 《악학궤범》에 실려 있지 않았습니다.
지금 종묘의 제례에 사조의 악장은 제1실, 제2실, 제3실, 제4실에 사용하고, 〈융화〉 이하의 악장은 차례로 미루어 옮겨서 제5실과 제6실 이하에 사용하고 있으니, 문란하여 순서가 없다는 것은 과연 오윤겸이 아뢴 내용과 같습니다. 세조 이하 열성에게도 평상시에는 반드시 모두 종묘 악장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난리를 겪은 뒤로 서적이 흩어져 없어져서 증거로 삼아 고찰할 만한 데가 없습니다. 현재 춘추관 당상이 실록을 꺼내 조사하는 일로 강화에 내려가 있으니, 광묘(光廟 세조) 이하 6실의 악장이 혹여 실록 안에 기록되어 있으면 모두 베껴 써서 오라고 서둘러 하유하소서. 만약 실록 안에 기록된 데가 없으면 대제학과 제학으로 하여금 속히 지어 올리게 하여 사용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또 땅에 울창주를 붓는 한 가지 절차는 인지상정으로 보더라도 대단히 미안하니, 변경하는 일이 있어야 마땅할 듯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대명집례(大明集禮)》 안에 사지에 대한 제도가 있는데, 사기(沙器)로 네모꼴의 사발을 만들어 땅의 형태를 본뜨고 거기에 흙을 담아 울창주를 붓는 그릇으로 삼는다고 하였으니, 이대로 하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합니다. 다만 신들의 생각은, 당초에 돗자리를 뚫어 작은 구멍을 만들어서 울창주를 부었던 것은 반드시 옛 예법을 살펴 근거해서 한 것일 터이고, 200년을 내려오며 열성조께서 준행하여 사용해 온 데다가 전례(典禮)에 널리 통달한 유신(儒臣) 역시 한두 명이 아닌데도 한 번도 고치자고 청한 자가 없었던 것은 반드시 의미가 있었을 것인 만큼 지금 경솔하게 고치기는 어렵겠다는 것입니다. 여러 대신에게 논의한 결과 대신의 뜻도 역시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감히 성상의 재결을 여쭙니다.”
하니, 전교하였다.
“아뢴 대로 하라. 울창주를 땅에 붓는 한 가지 절차도 논의한 대로 시행하라.” - 《승정원일기》에 나온다. -

○ 10월 병자일(1일)
조강 때 동지사(同知事) 김상용(金尙容)이 아뢰기를,
“종묘 악장에 대한 일을 일찍이 계품(啓稟)하였습니다. 세묘(世廟 세조) 이하는 악장이 없는데, 평상시 각 신실에 반드시 모두 있었을 터이나 어디 고찰할 데가 없습니다. 실록을 고찰하려고 하고 보니 춘추관 당상이 이미 올라왔습니다. 지금 내려보내 즉시 고찰하도록 해야겠습니까? 실록을 열고 닫는 일 역시 중대하고 어려우니, 후일을 기다려 고찰해야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실록에 실려 있지 않을 듯하다.”
하였다. 김상용이 아뢰기를,
“세묘와 중묘(中廟 중종)는 더욱 악장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 없으니, 아마도 난리 중에 없어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악장이 문란한 듯하니, 마땅히 적시에 고쳐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김상용이 아뢰기를,
“악장의 문란한 정도가 각 신실에 뒤섞어 사용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평상시 문소전(文昭殿)과 연은전(延恩殿)에 사용하는 악장 중에 세묘와 예조(睿祖 예종)의 악장이 있습니다. 이 악장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여 대신에게 물었더니, 종묘에서는 아악(雅樂)을 사용하고 문소전과 연은전에서는 향악(鄕樂)을 사용하므로 그 악장을 쓰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이 옳은 듯합니다. 신은 음률을 모르기 때문에 감히 함부로 진달할 수 없습니다.”
하고, 이식(李植)은 아뢰기를,
“의인왕후(懿仁王后 선조 비) 때 허균(許筠), 이안눌(李安訥)이 악장을 지어 올렸는데, 이안눌이 지은 것은 음조에 맞지 않았다고 하니, 당시에 누가 능히 음조를 알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실록을 자주 열고 닫는 것이 과연 미안한 일이나 이 일도 마땅히 적시에 고쳐 바로잡아야 한다. 날을 잡아 고찰하여 마땅히 춘향 대제 때에는 미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 《승정원일기》에 나온다. -

○ 병인년(1626, 인조4) 윤6월 일
예조에서 태묘 악장에 대해 논한 계사이다. 판서 이정귀가 아뢰기를,
“‘태묘 악장을 실록에서 고찰하여 아뢴 뒤로 악장을 어찌하여 지금까지 지어 올리지 않는가? 해조에 물어 아뢰라.’라고 전교하셨습니다. 이 일은 작년 가을 사이에 연신 오윤겸의 계사로 인하여 본 예조에서 복계(覆啓)하기를, ‘세종 이하 열성의 종묘 악장은 난리를 겪은 후로 서적을 잃어버려 증거로 삼아 고찰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실록을 고찰한 뒤에 만약 기록된 데가 없으면 대제학과 제학이 지어 올려 사용하겠습니다.’라고 한 일에 대해 계하하신 뒤에 올 3월에 춘추관 당상이 강화로 내려가 실록을 조사해 보고 서계(書啓)를 올렸습니다.
서계 내용에 ‘다만 익조, 도조, 환조, 태조, 공정대왕, 태종, 세종 모두 7실의 악장만 있는데, 이것은 부묘(祔廟) 때의 악장인 듯합니다. 이 외에는 없습니다.’ 하였는데, 《악학궤범》에 실린 각 신실의 악장과 서로 가감이 있을 뿐만 아니라 악장의 내용도 전혀 서로 같지 않으니,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악학궤범》은 성종 말년에 완성된 것인데도 단지 세종 이상의 종묘 악장만 실려 있고 문종, 세조, 예종 이하의 종묘 악장은 실려 있지 않으며, 이 이후 중종부터 우리 선조에 이르기까지 모두 악장이 없습니다. 어찌 모두 간과하여 빠뜨린 것이겠습니까. 아마도 종묘 악장은 마땅히 가장 높은 분을 따르기 때문에 태조와 태종의 공덕만 찬양하고 그 아래는 별도로 악장을 지어 각 신실에 통용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혁정〉은 바로 세종의 종묘 악장인데, 가사 내용이 전적으로 섬오랑캐를 정벌하여 평정한 공로를 찬양한 것이기 때문에 비록 가장 높은 분은 아니나 역시 종묘 악장을 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종 이상의 종묘 악장을 이미 사용한 뒤에 〈대유〉, 〈역성〉, 〈영관〉 등의 악장이 이어지는데, 그 가사를 보면 ‘열성께서 대대로 이어 온 성대한 덕 펴시고〔列聖宣重光〕’라고 하였고, 또 ‘세덕을 지어 구하여 천하를 안정시킨 공 따르시니〔世德作求 率維敉功〕’라고 하였으며, ‘아 위대한 열성께서 대대로 무공이 있으시도다.〔於皇列聖 世有武功〕’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각 신실의 악장을 통용한 것인 듯합니다. 다만 선묘(宣廟)의 경우는 나라를 빛내고 중흥한 공렬이 있으니 마땅히 별도로 종묘 악장을 만들어야 할 듯한데, 단지 미처 거행하지 못한 것일지요.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종묘 악장에 이르러서는 영녕전으로 신위를 옮긴 이상 종묘에 중첩하여 써서는 안 되나 예전에 해 오던 그대로 중첩하여 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조 및 세 분 신실의 종묘 악장이 차례차례 밀려서 제8실과 제9실까지 이르렀으니, 지극히 미안합니다. 지금 이후로 사조의 악장은 영녕전에만 사용하고 종묘에는 〈희문〉과 〈융화〉부터 시작하여 사용한다면 문란함에 이르지는 않을 듯합니다.
각 신실의 악장을 추가로 지어서 보충하여 사용하는 일은 요즘 조사(詔使)로 인해 일이 많을 뿐만 아니라 신들의 식견이 형편없어서 합당한지 합당하지 않은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쉽게 논의하여 아뢸 수 없으니, 다시 대신에게 논의하여 정탈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라고 전교하였다. 또 아뢰기를,
“연신이 아룀으로 인하여 본조(本朝)의 악장에 대해 대신이 수의하고, 유신이 널리 상고하여 입계(入啓)하니, ‘알았다. 예관으로 하여금 논의하여 정하게 하라.’라고 전교하셨습니다.
각 신실의 악장을 추가로 지어서 보충하여 사용하는 일은 신들의 얕은 식견으로 도달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전일에 올린 계사 내에 ‘종묘 악장은 당연히 가장 높은 분을 따르기 때문에 단지 태조와 태종의 공덕만 찬양하고, 그 이하 〈대유〉, 〈역성〉, 〈소무〉, 〈영관〉 등의 악장은 열성에게 통용한다.’라는 뜻을 대략 아뢰어 여쭈었습니다. 〈기명〉, 〈귀인〉, 〈형가〉, 〈집녕〉에 이르러서는 바로 사조의 악장이니, 인지상정으로 본다면 사조를 이미 영녕전으로 옮긴 이상 마땅히 영녕전에만 사용해야 할 듯한데, 아마도 체천한 뒤에 예전에 해 오던 그대로 하고 고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인 듯합니다.
그러나 지금 다시 반복하여 헤아려 보니, 태묘 악장은 《악학궤범》에도 실려 있을 뿐만 아니라 《오례의》에도 상세히 실려 있는데, 종묘 악장의 〈영신〉, 〈전폐〉, 〈진찬〉, 〈철변두〉, 〈송신〉은 모두 열성에게 통용되는 가사이고, 초헌은 〈희문〉으로 인도하여 들이고 〈기명〉 이하 8장 및 〈대유〉와 〈역성〉으로 인도하여 나가 한 곡무(曲舞)가 되며, 아헌ㆍ종헌은 〈소무〉로 인도하여 들이고 〈독경〉 이하 9장 및 〈영관〉으로 인도하여 나가 한 곡무가 되었습니다. 영녕전에 대해서는 악무(樂舞)가 종묘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보건대, 사조를 조천한 뒤에 태묘에 그대로 사조의 악장을 사용하였고, 영녕전에도 태조와 태종의 악장을 사용했던 것이 분명하니, 반드시 간과하여 지나친 결과는 아닐 것이며 또한 예전에 해 오던 그대로 한 잘못도 아닐 것입니다.
문종부터 성종까지의 신실의 악장은 모두 《악학궤범》 및 《오례의》에 실려 있지 않습니다. 대개 각 신실의 음악은, 악장은 긴데 전헌(奠獻)은 간단하여 음악이 시작되자마자 전헌이 이미 끝납니다. 따라서 형편상 반드시 연주하자마자 바로 그치게 되어 곡무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음악으로 만들어 처음에는 선조의 덕을 찬양하고 끝에는 열성을 찬양하도록 하여 통용하는 음악으로 삼았으니, 그 뜻이 우연은 아닌 듯합니다. 선조의 덕을 찬양한 노래를 열성의 신실에 연주하는 것은 실정이나 형식에 모두 잘 맞으니, 이것이 실로 〈주송(周頌) 집경(執競)〉이 남긴 뜻입니다.
유신이 널리 상고한 내용 중에 ‘서한(西漢)은 공덕이 훌륭한 부분에 대해서만 악장을 제술하였다.’라고 한 것과 하후승(夏侯勝)의 논의 역시 증거로 삼을 만합니다. 송나라 조정과 원나라 조정은 각 신실의 악장이 있었던 듯하나 그 악장을 사용한 제도를 상세히 알 수가 없고, 황조(皇朝 명나라)에 이르러서는 태조와 태종은 각각 악장이 있으나 인묘(仁廟) 이하는 통용합니다. 그러니 아마도 《악학궤범》을 지을 때에 이러한 전례를 참고하여 지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막대한 종묘 악장의 예를 신들이 감히 마음대로 정할 수 없으니, 청컨대 다시 대신에게 논의하여 정탈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라고 전교하였다. - 《승정원일기》에 나온다. -

○ 또 아뢰기를,
“태묘의 악장을 대신에게 논의한 초기에 대해 전교하시기를, ‘논의한 대로 시행하라. 또 선조묘(宣祖廟)에는 마땅히 별도로 악장이 있어야 할 듯하니, 대신에게 논의하여 정탈하라.’ 하셨습니다.
대신에게 논의한 결과 좌의정 윤방(尹昉)은 ‘전대의 제왕은 비록 나라를 세운 군주가 아니더라도 백성에게 공덕이 있으면 종묘 악장도 별도의 악장을 두었습니다. 선조대왕께서는 이미 나라를 빛내고 중흥을 이룩한 위대한 공렬이 있는 만큼 별도로 악장을 지어 사용해야 한다는 뜻을 전날 신이 수의 안에 이미 다 진달하였습니다. 삼가 상께서 재결하소서.’ 하였고, 우의정 신흠(申欽)은 ‘선조대왕의 악장은 상께서 하교하신 대로 지어서 사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악무에 맞을지의 여부는 해조에서 악사들로 하여금 강구하여 시행하게 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삼가 상께서 재결하소서.’ 하였습니다. ‘대신의 뜻이 이와 같으니 상께서 재결하여 시행하실 일’로 입계하니, 논의한 대로 하라고 전교하셨습니다. 각 신실의 악장을 각각 제술하지 않는 뜻은 전날 이미 예제(禮制)를 근거로 살펴 정탈하라고 계하하셨습니다.
선조대왕께서 나라를 빛내고 중흥을 이룩한 공렬이 있으니 별도로 악장을 제술하여 종묘의 제향에 사용하는 것이 신령과 사람의 바람에 흡족히 들어맞습니다. 상께서 하교하신 대로 대제학으로 하여금 짓게 하여 사용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다만 악무에 맞을지의 여부는, 이원(梨園)의 노악사(老樂師)에게 물으니, 자기들은 다만 악보를 익혀 등가에 연주할 뿐이라 새로 짓는 악장을 첨입할 경우 어떤 음률에 어울리고 어떤 춤에 맞을지는 자세히 알지 못하고, 다만 길면 빨리 연주하고 짧으면 느리게 연주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들에게 질정을 받아 의심이 없게 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삼가 《주례(周禮)》를 상고해 보니, ‘구덕(九德)의 노래와 구경(九磬)의 춤을 종묘에서 연주하여, 음악이 아홉 번 변하면 사람과 신령이 모두 예를 얻게 된다.’ 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악학궤범》을 다시 고찰해 보니, 초헌의 〈보태평〉 음악은 〈희문〉으로 인도하여 들어가 〈기명〉 등 9장을 연속으로 연주하여 한 악무를 이룬 다음 〈역성〉으로 인도하여 나가고, 아헌ㆍ종헌의 〈정대업〉 음악은 〈소무〉로 인도하여 들어가 〈독경〉 등 9장을 연속으로 연주하여 한 악무를 이룬 다음 〈영관〉으로 인도하여 나갑니다. 이로 보건대, 《주례》에서 말한 ‘음악이 아홉 번 변한다.’라는 것이 바로 이러한 뜻인 듯합니다. 그러므로 〈역성〉 악장에 ‘왼손엔 약 오른손엔 적 잡고 춤추니, 구변의 곡조 다하였도다.〔左籥右翟 曰旣九變〕’라고 한 것도 역시 이러한 뜻입니다. 그렇다면 초헌 및 아헌ㆍ종헌에 9장이 모두 갖추어진 것이니, 첨입할 악장은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다만 각 악장의 구절 수와 글자 수를 살펴보니, 초헌의 〈보태평〉은 모두 통틀어 72구 308자이고, 아헌ㆍ종헌의 〈정대업〉은 87구 328자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 당시에 사신(詞臣)이 지을 때에 우연히 차이가 났었던 것일지요. 그런 까닭에 악사들은 모두 말하기를, ‘초헌은 악장이 조금 짧기 때문에 다른 성곡(聲曲)을 끌어내 중복하여 연주한다.’ 합니다. 지금 새로 짓는 악장을 초헌의 〈정명〉 아래에 첨입하여 구절 수와 글자 수를 아헌ㆍ종헌과 맞추면 마땅할 듯합니다. 감히 여쭙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라고 전교하였다. - 《승정원일기》에 나온다. -

○ 예조에서 아뢰었다.
“종사(宗社)의 제향에 음악이 없을 수는 없는데, 일찍이 큰 난리로 인하여 임시로 폐지한 것이 지금에 이르렀으니, 재신(宰臣)들이 강경한 상소를 올려 탄식하고 애석해 하는 것은 실로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막중한 종묘의 예를 본 예조에서 감히 마음대로 다시 설정할 수 없으니, 묘당으로 하여금 정탈하게 하소서.” - 《승정원일기》에 나온다. -

○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종묘 악장을 정지하여 폐지한 지가 벌써 6년이나 되었습니다. 앞으로 회복할 날이 아득하여 기약이 없지만, 끝내 다시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안 될 듯하고, 현재 흉년이 들어 온갖 일을 모두 줄이고 있는 만큼 거행하기도 어려운 형편입니다. 천천히 논의하여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라고 윤허하였다. - 《승정원일기》에 나온다. -

○ 병술년(1646, 인조24) 12월 병자일(4일)
예조의 계사에,
“악기도감(樂器都監)의 공역은 수일 안에 마땅히 완전하게 끝마칠 것입니다. 종묘 악장을 정지하여 폐지한 지가 벌써 10년이나 된 만큼 앞으로 춘향 대제부터 다시 사용해야 하는데, 춘향 대제가 6일에 있으니 그 전에 먼저 고하는 의식이 있어야 할 듯합니다. 종묘는 오는 1월 1일 삭제(朔祭) 때에 고하는 제사를 아울러 거행하고, 영녕전은 같은 날 별도로 고하는 제사를 설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라고 전교하였다.

○ 종묘 세실(世室)의 악장에 대해 상신(相臣) 김육(金堉)이 수의하였다.
“옛날 제왕은 모두 종묘 악장이 있어 약제(禴祭), 사제(祠祭), 증제(烝祭), 상제(嘗祭)에 연주하여 제향을 올렸습니다. 그러므로 은(殷)나라는 탕 임금과 고종에게 제사 지낸 시가 있고, 주나라는 태왕, 문왕, 무왕, 성왕, 강왕에게 제사 지낸 시가 있습니다.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의 제도는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선제(宣帝) 때에 무제(武帝)의 악장을 논하였고 보면 한나라 역시 악장이 있었고, 당나라는 고종부터 소종(昭宗)까지 모두 악장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용비어천가》에서 태조의 공덕을 칭송하였고, 《오례의》에 〈희문〉, 〈소무〉 등의 음악이 있으니, 이것으로 〈보태평〉과 〈정대업〉 각각 11성을 삼아 〈보태평〉은 초헌에 연주하고, 〈정대업〉은 아헌과 종헌에 연주합니다. 그 시는 모두 사왕(四王) 및 태조의 공덕을 칭송하여 드러낸 것으로 종묘 및 영녕전에 연주하니, 조종의 공덕을 노래로 읊어 제사를 도움으로써 만세에 전하는 것이 목적인데, 각 묘의 악장은 없습니다. 다만 대왕 및 왕대비께 존호를 올릴 때에 악장이 있으나 이것은 제사에 사용하는 음악이 아닙니다. 선묘조(宣廟朝)의 〈중광〉 악장이 있고, 인목왕후(仁穆王后)께 존호를 올릴 때에도 악장이 있어 등록(謄錄)에 실려 있습니다만, 다른 등록에는 모두 악장이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 아마도 우리 왕조의 예악은 옛것을 따르지 않은 듯합니다.
근대 사신(詞臣)의 문집에 악장이 있는 것을 신이 다 보지는 못했으나, 고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윤근수(尹根壽)의 문집에 선묘조의 악장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중광〉 악장인데, 그 당시에 윤근수와 이호민(李好閔)이 지어 올렸다. 이호민이 지은 것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악장이 〈정대업〉 11성 아래에 실린 것이다.’ 하였습니다. 고 상신(相臣) 이정귀(李廷龜)의 문집에 광해(光海)가 생모를 추존한 악장이 있고, 또 광해와 폐비의 악장이 있는데, 이것은 혼조(昏朝)의 일이니 무슨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선조조에 예조 판서 황정욱(黃廷彧)이 건의하기를, ‘종묘 제향에 연주하는 악장은 국초에 사신이 처음으로 정한 약간의 악장뿐으로 열성의 신위에 나누어 연주합니다. 그 행사와 업적이 각각 달라 서로 맞지 않으니, 영령을 이르게 할 길이 없습니다. 청컨대 한 신실에 한 악장을 각각 지어서 신도(神道)를 편안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선조께서 미처 의견을 물어 논의할 겨를이 없었으니, 이것은 한 문제(漢文帝)가 가의(賈誼)의 말에 겨를이 없었던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은 대례를 어찌 쉽게 바꿀 수 있겠습니까.
우리 왕조는 태조 이하로 덕으로는 세종과 성종보다 더 성대한 분이 없고, 공으로는 세조와 중종보다 더 큰 분이 없는데, 따로 악장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고, 다만 〈보태평〉과 〈정대업〉을 제향에 연주하였습니다. 그렇고 보면 이번 부묘 때에 악장을 지어 사용하는 것에 대해 신은 예에 꼭 합당한 것인지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상께서 재결하소서.” - 《예조등록》에 나온다. -

○ 현종 을사년(1665, 현종6) 8월 경오일(17일)

좌참찬 송준길의 차자에,
“삼가 아룁니다. 신이 가만히 들으니, 태묘의 악장이 뒤바뀌고 어긋난 것이 너무 많아 대단히 미안한 바가 있다고 하는데, 처음에는 의아했고 나중에는 괴이하여 놀랐으니, 참으로 이렇게 된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오례의》와 《악학궤범》 등 서적 및 국조(國朝) 여러 명신의 행장과 묘지에 기록된 것을 가져다 살펴보면, 태묘는 〈보태평〉 9장 11성으로 각 신실의 초헌 때에 통용하고, 〈정대업〉 9장 11성으로 아헌과 종헌 때에 통용하는데, 선왕의 덕을 찬송한 악장은 세종대왕 때의 사적에서 그치고 이하는 빠져 있습니다. 문소전(文昭殿)을 혁파하지 않았을 때, 사용하는 악장은 각 신실마다 각각 제술하였으니, 대저 태묘의 여러 신실은 9장으로 통용하고 문소전은 각각 제술하여 사용한 뜻이 어디에 있는지 참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선조조에 황정욱이 예조 판서가 되어 태묘의 한 신실에 각각 한 악장을 지어 신도(神道)를 편안하게 하자고 청하였고, 인조조에 오윤겸이 연석에서 역시 이렇게 청하였습니다. 황정욱과 오윤겸은 모두 명신인 만큼 그들이 운운한 것은 반드시 소견이 있어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윤겸의 계사를 여러 대신이 여러 방면으로 논의한 결과 모두 채용하지 않고 다만 선묘를 위해 별도로 악장을 지어 사용하였습니다. 효종조 때에는 권우(權堣)가 장악원 정(掌樂院正)이 되어 상소를 올려 종묘 악장을 바로잡을 것을 청하고, 선묘의 악장을 지었던 전례에 따라 별도로 악장을 제술할 것을 청하였고 보면 위로 세조, 성종, 중종 세 분의 세실과 아래로 인조, 효종 두 분의 묘에만 유독 따로 악장을 제술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신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또한 태묘에 사용하는 악장은 비록 말은 하나의 음악으로 통용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각 신실에 각각 한 악장씩 연주하기 때문에 사적과 공로가 각각 달라 서로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9장의 연주도 9실에서 그치게 됩니다. 태묘는 지금 10실이 되는 만큼 효종의 신실인 제10실에는 사용할 수 있는 음악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득이 인도하여 나가는 곡인 〈역성〉 악장을 사용하고, 인도하여 나갈 때에는 다시 그 악장을 중첩해서 사용하며, 아헌과 종헌 때에도 역시 인도하여 나가는 곡인 〈영관〉 악장을 사용하며, 영녕전에 연주하는 것도 이와 같다고 합니다.
아, 이곳이 어떤 자리인데 사용하는 예악이 전도되고 어긋나기가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참으로 놀랍습니다. 또한 제술된 악장은 장단이 일정하지 않아 심하게 짧은 것은 한 신실에 올리는 예가 끝나기도 전에 악장이 먼저 끝나기 때문에 악공들이 혹 그 악장을 두 번 연주하기도 합니다. 게다가 선조묘(宣祖廟)는 지금 제7실이 되는데, 그 악장은 이미 예전에 사용하던 것이 있고 또 새로 제술한 것도 있습니다. 태조실에도 한 악장만 사용하는데 선조실에는 두 악장을 사용하니, 이런 문제가 다 매우 미안합니다. 또한 초헌과 아헌에 사용하는 악절(樂節)은 문무(文武)가 같지 않고 음조도 각각 다릅니다. 그런데 선조실에 추가로 제술한 악장은 삼헌(三獻)에 공통으로 모두 사용하니, 이것도 의에 맞는 규례는 아닙니다.
또 악원(樂院)에 소장된 악장에 대한 주설(註說)은 전도되고 뒤섞여 체계가 잡혀 있지 않으니, 이 역시 마땅히 바로잡은 다음 정갈하게 베껴 써서 간행하여 길이 후인이 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신은 바라건대 전하께서 신의 이 차자를 내려 여러 공경들로 하여금 여러 방면으로 논의하게 해서 좋은 쪽으로 변통하여 한 시대의 예악을 새롭게 정비함으로써 후세에 기롱을 끼침이 없도록 한다면 그지없이 다행이겠습니다. 재결하여 주소서.”
하였는데, 이에 근거한 예조의 계목에,
“계하된 문건을 첨부하였습니다. 일찍이 인조조의 반정(反正) 초기에 신 일상(一相)의 조부인 이정귀가 본 예조의 판서로 있을 때, 연신(筵臣)의 주달로 인하여 태묘의 악장을 바로잡으려고 하였으나 끝내 결론을 얻지 못하고 단지 선조묘 해당 신실의 악장만 지었습니다. 이에 관한 허다한 곡절은 모두 그 당시에 전후로 올린 본 예조의 계사에 실려 아직도 예조의 벽에 걸려 있습니다. 이번에 좌참찬 송준길의 차자 내용을 보면, 종묘 악장의 착오에 대해 개탄하고 반복하여 의견을 진달해서 반드시 변통하고자 하였는데, 이렇게 한 데에는 뜻을 둔 바가 있습니다. 인조조의 예전 규례에 따라 여러 대신에게 논의한 뒤에 품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윤허한다.”라고 계하하였다. 예조 계목에,
“계하된 문건을 첨부하였습니다. 대신에게 논의한 결과 영중추부사 이경석(李景奭)은 ‘삼가 아룁니다. 신은 일찍이 좌참찬 송준길이 종묘 악장이 대부분 잘못되었다고 개탄하는 말을 들었고, 지금 좋은 쪽으로 변통하여 한 시대의 예악을 새롭게 하고자 한다는 그의 차자 내용을 보았습니다. 그 뜻은 매우 훌륭합니다만, 그러나 신이 선배들의 서론(緖論)을 대강 들었는데, 태묘와 영녕전의 악장이 비록 어긋나고 뒤섞인 듯하지만 선뜻 고치지 못한 것은 뜻을 둔 바가 있어서였습니다. 과거 인조조 때 상신 오윤겸이 경연 석상에서 아뢴 말로 인하여 실록을 고찰하고 유신에게 묻고 여러 대신에게 논의하여 재차 삼차 계품하였지만 제대로 절충하지 못하고 단지 선조묘에만 악장을 지어 사용하였습니다. 오직 우리 인조대왕께서는 허물어진 윤리와 기강을 밝히고 종묘사직을 받들어 중흥을 이룩하셨으니, 훌륭한 덕과 위대한 공렬은 천고의 으뜸입니다. 따라서 별도로 악장을 두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우선 여쭈어 정하는 것은 여러 사람들의 마음에 흡족히 들어맞는 것입니다.
태묘의 경우, 초헌에 〈보태평〉 악장인 〈희문〉을 연주하고 아헌과 종헌에 〈정대업〉 악장인 〈소무〉를 연주하여, 인도하여 나가고 인도하여 들어갈 때 사용하는 등의 악장을 열성의 신실에 아울러 연주하고 영녕전에 통용하는 것이 비록 미안하다고는 하나 거기에는 의에 맞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고 상신 이정귀가 예조 판서로 있을 때에 근거를 고찰하여 상세히 아뢴 것이 있고, 또 신묘년(1651, 효종2)에 상신 김육이 논의한 것에서도 상고해 볼 수 있으니, 예조에서 모두 다 성상께 아뢴 다음 널리 묻고 논의하여 좋은 쪽으로 강정(講定)할 바탕으로 삼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신처럼 늙고 어두운 사람이 무슨 정견(定見)이 있겠습니까마는 신은 적이 소회가 또 있습니다. 대개 영언(永言)과 의영(依永)은 반드시 음률에 맞아야만 서로 이루어 조화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이 일찍이 악사들로 하여금 시험해 보게 하였는데, 글자의 음과 가락을 더러 분명하게 알지 못하거나 또는 아예 깜깜한 부분이 있었으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었습니다. 옛날부터 악원(樂院)의 관원 가운데 1원은 반드시 음률을 이해하는 사람으로 삼았으니, 생각건대 우연히 그리된 것은 아닙니다. 만약 예전 규례대로 음악을 아는 자 1원을 악원에 배치한다면 바로잡는 일에 적으나마 보탬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감히 아울러 덧붙여 진달하니, 황송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상께서 재결하소서.’ 하였습니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는 ‘우리 왕조의 태묘 악장이 어긋나고 잘못되었다는 말은 전부터 있었는데, 이어서 듣기를 계해년(1623, 인조1)의 반정 이후에 이미 강정을 거쳤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이 비록 여러 번 헌관으로서 예를 거행하면서 가송(歌頌)의 소리를 들었지만 한 번도 이에 대해 의심이 든 적이 없었고, 근자에 외간의 파다한 말이 계해년 이후에 정한 것이 미진하다 하는데도 신은 오히려 그 까닭을 자세히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지난날 마침 좌참찬 송준길을 만나 직접 그 말을 들었고, 지금 다시 이번 차자의 내용을 보았는데, 악장을 바로잡는 일을 그만두어서는 안 될 듯합니다. 다만 생각건대, 세조 이하 여러 대의 악장을 지금에 와서 추가로 제술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선조묘에 이미 사용하고 있는 악장을 도로 줄이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예전 그대로 답습하여 지금까지 이른 것은 반드시 이 때문일 것입니다. 막중한 종묘 악장의 문제는 신처럼 어둡고 어리석은 자가 감히 논하여 결정할 일이 아니니, 예관으로 하여금 널리 유신에게 물어 충분한 논의를 거친 다음 품처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삼가 상께서 재결하소서.’ 하였습니다.
좌의정 홍명하(洪命夏)는 ‘태묘의 악장은 세종대왕 이상의 종묘 악장으로 열성의 각 신실에 통용해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찍이 선묘조 때에 예관 황정욱이 각 신실에 각각 한 악장씩 지어 신위에 올릴 것을 청하였는데, 선묘께서 뜻은 있으셨으나 미칠 겨를이 없었습니다. 인조조에 이르러 고 상신 이정귀가 대종백(大宗伯 예조 판서)을 지낼 때에 연신 오윤겸의 진달로 인하여 반드시 바로잡으려고 하였으나 열성의 실록을 조사한 결과 익조실부터 세종실까지 7실의 악장만 있는 데다가 《악학궤범》에 실린 것과 같지 않은 바가 있었습니다. 이른바 《악학궤범》은 성묘조 때에 완성되어 길이 준행해 온 것입니다. 그 당시 전후의 계사를 가져다 살펴보니, 종묘 악장의 절주(節奏)의 장단을 갖추 진달하였는데, 각 신실에 통용한 곡절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에 그 당시에 대신의 헌의로 선묘의 악장만 지어 나라를 빛내고 중흥을 이룩한 공렬을 기리다 보니, 유독 세조, 성종, 중종 세 신실만 악장이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후인이 의심하게 된 까닭입니다.
대개 우리 왕조의 종묘 악장은 황조의 종묘 악장이 공통으로 사용하는 제도를 모방해서 그런 듯합니다. 예로부터 제왕이 공덕이 있으면 반드시 종묘 악장이 있었고, 이미 선묘를 위해 따로 악장을 지었고 보면 인조대왕의 종묘 악장이 오히려 지금 빠진 것입니다. 효종대왕의 묘실도 사용할 음악이 없어 인도하여 나가는 악곡인 〈역성〉 악장을 사용하고 있으니, 어찌 대단히 미안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유신이 차자를 진달한 것은 아마도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마땅히 이로 인하여 바로잡는 거사가 있어야 할 듯합니다. 그러나 다만 오늘날 사신이 짓는 가사와 악사가 연주하는 가락이 과연 악무의 절주에 잘 맞아 어긋남이 없을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각 신실에 이미 행하고 있는 막중한 악장을 일시에 쉽게 고칠 수는 없을 듯하니,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인조와 효종 두 묘의 악장을 사신으로 하여금 우선 먼저 지어서 관현에 올리고 음률에 맞춘 뒤에 두 신실에 사용한다면 혹 마땅하리라 여겨집니다. 또한 악원에 소장된 악장의 음과 주석이 잘못된 곳은 역시 예관과 해당 악원으로 하여금 강구하여 바로잡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삼가 상께서 재결하소서.’ 하였습니다.”
하였다. - 《예조등록》에 나온다. -

○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이 차자를 올렸다.
“삼가 아룁니다. 신이 갑술년(1694, 숙종20) 겨울 사이에 한창 사람들의 비난을 받아 황공한 마음으로 움츠려 엎드려 있던 때에 예조에서 전 부제학 이봉징(李鳳徵)이 상소에서 언급한 종묘 악장의 일로 회계하여 대신에게 논의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신은 그때 즉시 헌의했어야 했으나 실상 조심스럽고 두려워 감히 할 수 없는 점이 있었고, 또 나름대로 구구한 소회가 있어 이어 부주(附奏)로 진달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공무로 겨를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병을 앓는 날이 많아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며 미루다가 오늘에 이르렀으니, 황공하기 그지없습니다. 이번에 상께서 태묘에 전알하시고, 악장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을 하향 대제 전까지 바로잡으라고 하교하셨습니다. 신이 세월을 허송하며 즉시 헌의하지 못한 책임을 이에 더욱 피할 수가 없게 되었으니, 더욱 놀라고 두려워 죄를 기다리는 마음 지극하기 그지없습니다. 한편 삼가 생각해 보니, 신은 이 일에 대해 계해년(1683, 숙종9) 연간에 악원 제조를 겸할 때부터 전말을 대강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수의 중에 진달하고자 하였으나 일이 번거로워지고 부풀려질까 두려워 망설이다가 오늘에 이른 점도 있습니다. 이에 감히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하나하나 논술하겠습니다.
신이 삼가 종묘와 영녕전의 등가 악장을 고찰해 보니, 초헌은 〈보태평〉 11성을 쓰는데, 인도하여 들이는 〈희문〉과 인도하여 나가는 〈역성〉 2장을 제외하면 그 사이에 사용하는 음악은 사실 9장이고, 아헌과 종헌은 모두 〈정대업〉 11성을 쓰는데, 인도하여 들이는 〈소무〉와 인도하여 나가는 〈영관〉 2장을 제외하면 그 사이에 사용하는 음악은 역시 9장입니다. 이 외에 또 초헌 전에 〈영신〉, 〈전폐〉, 〈진찬〉 3장이 있고, 종헌 후에 〈철변두〉, 〈송신〉 2장이 있어 한 번도 두 음악의 9장 사이에서 뒤섞이고 어긋난 적이 없었습니다.
대개 우리 왕조의 예악 제도는 세종조 때 처음 제작되어 세조조 때 완성되고 성종조 때 확정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두 악장에서 칭술한 조종의 공덕은 목조께서 바다를 건넌 사적에서 시작하여 세종께서 왜를 정벌한 사적으로 끝납니다. 그 후로는 비록 천명을 받아 중흥을 이룩하신 세조나 몸소 태평을 이룩하신 성종으로도 모두 칭술한 바가 없으니, 진실로 악장이 이미 수가 갖추어져 첨가할 수 없기 때문일 뿐이지 빠진 문장이 있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서경》의 〈상송(商頌)〉과 〈주송(周頌)〉에 성탕(成湯)과 고종(高宗) 및 후직(后稷)과 문왕ㆍ무왕에 대해 각각 종묘 악장을 두어 그 공렬을 묘사했던 것은, 옛날에는 종묘 제도가 도궁(都宮) 안에 7묘, 혹은 9묘로 각각 그만의 묘를 세우고 전적으로 그만의 제사를 올렸기 때문에 역시 각각 그만의 악장을 둘 수 있어서였습니다. 서한(西漢)의 종묘 제도에 이르러서도 비록 도궁과는 차이가 있으나 각각의 묘에 각각 제사를 올리는 것은 일찍이 다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문제(文帝)와 무제(武帝)를 제사 지낼 때에 모두 종묘 악장이 맞지 않은 문제를 말하여 별도로 〈소무무(昭武舞)〉와 〈문시무(文始舞)〉를 지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 명제(漢明帝) 이후에 이르러서 태묘는 모두 한 묘 안에서 서쪽을 상위로 하는 제도를 쓰고 묘를 따로따로 세우지 않았으니, 음악 역시 따로따로 사용할 수 없었던 것이 확실합니다.
오직 우리 조종조에서 9장으로 이루어진 두 음악을 정하고 열성의 제사에 아울러 사용해 온 것도 한 묘 안에서 악장을 따로따로 사용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반드시 9라는 수를 갖춘 것은, 《주례》에 ‘종묘에서 음악을 연주하여 아홉 번 변하면 인귀(人鬼)가 예를 얻을 수 있다.’라고 한 만큼 두 음악이 9장인 것은 실로 이 《주례》의 뜻에 근거를 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보태평〉의 〈역성〉에 ‘구변의 곡조 다하였도다.〔曰旣九變〕’ 하고, ‘참으로 아름답고 참으로 선하도다.〔盡美盡善〕’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고 보면 당초에 음악을 정하고 악장의 수를 갖춘 뒤로 어찌 열성을 올려 부묘할 때에 신위마다 악장을 제술하여 9장 외에 첨가할 수 있었겠습니까. 선조조 때 예조 판서 황정욱이 태묘의 열성에 각각 한 악장씩 짓자고 청하였고, 인조조 때 상신 오윤겸이 또 태묘의 악장을 추가로 제술할 것을 청하였는데, 지금 말하자면 모두 9장의 정해진 수에 대한 의리를 고찰하지 못했던 듯합니다.
인조조 때 사신(詞臣)이 지은 선조조의 종묘 악장인 〈중광〉 1장과 같은 경우는 의리와 규례로 미루어 보면 더욱 미안한 바가 있습니다. 만약 조종의 공덕으로 말할 것 같으면, 악장을 정한 이후 세조, 성종, 중종, 선조가 모두 세실인데 단지 선조묘 한 악장만 지은 것은 세실 중에서 취하고 버린 바가 있는 듯한 점이 있으니, 선조의 영령께서 오르내리실 때에 반드시 두렵고 조심스러워 제향을 편안히 받지 못하실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또 악가의 절주로 말하면, 지금 〈중광〉 1장을 〈정대업〉 9장의 아래에 두어 늘여서 10장을 만든다면 음악이 반드시 아홉 번 변하는 뜻에서 대단히 멀어질 것입니다.
지난번 선대왕 때 선정신 송준길이 장악원 제조가 되자 차자를 올려 이 일을 진달하여 많은 논변을 하고 공경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로 논의하게 하여 좋은 쪽으로 변통할 것을 청하였으나 그 당시 조정에서는 변통하여 바꾸는 것을 어렵게 여겨 그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신 역시 조종조에서 정한 것은 논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침 장악원에 재직하고 있을 때에 인조와 효종 두 묘를 세실로 정하는 명이 있었으니, 이로써 태묘의 세실은 태조부터 효종까지 9라는 수에 맞아 차게 되었습니다. 신이 이에 가만히 생각하기를, ‘〈보태평〉과 〈정대업〉은 모두 9장의 수를 채웠으므로 지금에 와서 진실로 더하거나 감할 수가 없고, 추가로 제술한 선조조의 1장은 비록 남는 수라고는 하나 예전대로 따라 사용하여 네 조정에 이른 만큼 이제 와서 역시 삭제해서도 안 될 것이다. 만약 반드시 그 안에 나아가 변통할 바를 두고자 한다면 초헌과 아헌은 예전대로 〈보태평〉과 〈정대업〉 9장을 사용하고, 종헌에 이르러 전날 〈정대업〉을 중첩하여 사용하던 법을 변통하여 별도로 하나의 음악을 완성하여 9장을 갖춘 다음 그 9장 안에 세실 9위의 공덕을 칭송한다면 예전의 음악에 첨가하여 고치는 혐의가 애당초 없을 것이고, 세조, 성종, 중종 세 신실도 모두 악장을 갖출 수 있게 되는 동시에 추가로 제술한 선조조의 1장도 비록 〈정대업〉에서는 남는 수로서 감해야 하지만 종헌의 음악에서는 갖추어진 수가 되어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조와 효종 두 묘를 한껏 묘사하여 칭송하는 도리에도 부족하다는 탄식이 없을 수 있을 것이다. 예악이란 것이 정밀하고 은미하여 비록 감히 참여하여 논할 수 없으나 사리로 논하면 조금은 타당할 듯도 싶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뜻으로 삼가 상소 한 통을 갖추어 위에 청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천천히 다시 전대의 전장(典章)을 고찰하여 보니, 일반적으로 종묘의 제향은 초헌, 아헌, 종헌에 따로따로 세 음악을 사용한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아헌과 종헌에 한 음악을 아울러 사용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지금 태묘의 종헌에 아헌의 음악을 중첩하여 사용하고 별도로 제술하지 않은 것이, 모르겠습니다만 어쩌면 별도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겠습니까. 지금 세상에 사신과 악사는 모두 음률을 이해하는 자가 없는데, 지금 비록 새로 악장을 제술한다 해도 조종조에서 제술한 악장에 견주어 하자가 있고 어긋난다는 기롱이 없겠습니까. 우리 성조(聖朝)의 끝없는 역수(曆數)로 현재의 세실 9위 외에 대대로 덕이 있어 세실이 되실 분이 또 몇 묘가 있을지 알 수 없으니, 종헌의 9장이 이미 그 수를 갖추고 난 뒤에는 다시 첨가하기 어려운 상황이 반드시 오늘날과 같은 때가 있게 될 것입니다. 대체로 이와 같은 부분에 대해서는 모두 합당한 도리를 얻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상소를 완성해 놓고는 올리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전 부제학 이봉징의 상소에 신실마다 각각 1장씩 더하자는 청이 있었고, 해조의 회계에 또 인조실에만 선조실의 규례에 따라 별도로 악장을 짓자고 청하였습니다. 신의 어리석고 얕은 견해로는 모두 시행하기 어려운 듯합니다. 또한 이 일에 대해서는 반드시 근원을 거슬러서 말하고자 합니다. 곧 지금 우리 사조의 신주를 영녕전으로 옮기고 나서 사조의 시를 여전히 종묘에서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혹 조고(祖考)의 사적으로 자손에게 노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녕전에 또 태조, 태종, 세종의 시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자손의 사적으로 조고에게 노래하는 것으로, 옛날의 의리에서 찾아보아도 이미 같지 않고 상정으로 헤아려 보아도 역시 맞지 않으니, 애당초 제작한 본의는 진실로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만약 우리 왕조의 문소전의 제도를 본떠 각 신실마다 따로 악장을 제술하여 사용하고자 한다면 〈보태평〉과 〈정대업〉 두 음악을 모두 장차 폐기하고 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 일은 지극히 중대하니, 지금 어찌 감히 가볍게 논의에 부칠 바가 있겠습니까.
또한 삼가 가만히 생각건대, 음악의 근본은 본래 종이나 북 같은 악기에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어찌 시장(詩章)을 늘이고 줄이는 사이에 있겠습니까. 현재 위로 조정에서 아래로 백성에 이르기까지 절박하고 급한 근심이 되는 것이 진실로 이루 다 말할 수 없이 많으니, 이와 같은 전례는 천천히 성조의 다스림과 교화가 완성되기를 기다려 가부를 따지는 것이 먼저 할 것과 나중에 할 것, 천천히 할 것과 급하게 할 것의 순서에 합당할 듯합니다.
또 일단 변동하고자 하면 번번이 장애가 되는 점들이 이와 같이 있을 것이니, 갑자기 쉽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옛날 송 인종(宋仁宗) 때에 조정의 신하에게 명하여 완일(阮逸), 호원(胡瑗) 등이 만든 종률(鍾律)을 함께 상정(詳定)하도록 하였는데, 한기(韓琦)가 말하기를, ‘조종의 옛 법을 준용해 온 지가 오래되었으니, 차라리 음악을 제작한 근원을 궁구하여 안정된 정치의 근본으로 삼아서 정치와 명령을 고르고 간단하게 하며 백성과 만물을 청명하고 화락하게 하는 것만 못합니다. 지금 당장 급한 것은 또한 변방의 대비에 있으니, 음악에 대한 구언의 정성을 늦추고 변방을 편안하게 할 논의로 옮겨 물어서 급히 할 바를 서두르는 것이 사리에 있어 낫습니다.’ 하여, 인종이 마침내 논의를 정지하라고 명하고 이어 옛날의 음악을 썼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옛 제도를 두루 보시고 지금의 상황을 살펴 다시 더 깊이 생각하신 다음 이어 해조의 회계를 여러 대신에게 수의하여 사리에 합당한 결론을 찾으라고 명하신다면 더없이 다행이겠습니다. 재결하여 주소서.”
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경의 간절한 뜻을 잘 알았다. 마침 사정이 있어 즉시 헌의하지 못한 것이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차자의 내용은 마땅히 해조로 하여금 대신에게 논의하여 품처하도록 하겠다. 경은 안심하고 대죄하지 말라.”
하였다. 이에 의거하여 예조에서 계목을 올렸다.
“계하된 문건을 첨부하였습니다. 대신에게 논의한 결과 좌의정 유상운(柳尙運)은 ‘〈오황성목(於皇聖穆)〉의 시를 제1실에 노래하고, 〈사제성모(思齊聖母)〉의 시를 제7실에 노래하는 것은 사실을 토대로 칭술한 뜻이 절대로 아니고, 또 〈중광〉 악장을 따로 지은 전례가 있으니, 이것이 해조에서 수의하기를 청한 까닭입니다. 〈보태평〉 11성은 인도하여 들이고 인도하여 나가는 악장 2장을 제외하면 〈기명〉부터 〈대유〉까지 9장을 초헌 때에 부르는데, 각 신실에 차례로 작을 올릴 때에 비록 제 몇 장을 제 몇 실에 연주한다는 사목은 있으나 본래는 한 묘에 통용하는 음악이지 각 신실에 각각 연주한다는 뜻은 아닌 듯합니다. 대개 각 신실이 아홉이라는 수에 아직 차기 전에도 악장은 아홉의 수에서 감하지 않으며, 각 신실이 비록 아홉이라는 수를 넘은 후라 해도 악장은 역시 아홉의 수에 더 보태지 않으니, 음악은 아홉 번 변하는 것을 예로 삼기 때문입니다. 이미 각 신실의 많고 적음으로 악장을 늘리거나 줄이지 않는데, 만약 신실마다 칭술한다면 아홉의 수를 이루지 못할 것이고, 어떤 신실은 짓고 어떤 신실은 짓지 않는다면 취하고 버린 듯한 혐의가 있으니, 이것이 처리하기 어려운 점입니다.
선조묘의 악장을 따로 지을 때에도 해조에서 첨가하여 넣는 것을 어렵게 여겨 글자 수를 계산하여 서로 맞추려고 하였으나 그래도 9장의 뜻과는 한참 차이 나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고 보면 지금에 와서 별도로 짓자는 논의는 더욱 문제가 많아 행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옛날 한 장제(漢章帝) 때에 효명황제(孝明皇帝)의 종묘 악장에 관한 일로 인하여 동평왕(東平王) 유창(劉蒼)이 논의하기를, 「효문묘(孝文廟)의 악장은 〈소덕(昭德)〉이고, 효무묘(孝武廟)의 악장은 〈성덕(盛德)〉인데, 지금 모두 고조묘(高祖廟)에 합사하기 때문에 〈소덕무〉와 〈성덕무〉를 올리지 않고 고조묘의 악장을 같이 쓴다. 지금 효명황제의 신주가 세조묘(世祖廟 광무제)에 있으니, 마땅히 세조묘의 악장을 같이 써야 한다.」 하였습니다. 이른바 〈소덕〉과 〈성덕〉은 바로 각각 제사 지낼 때 사용한 악장으로 비록 음악의 1장과는 차이가 있으나 합사하고 난 뒤에는 중지하고 올리지 않았으며, 효명묘의 악장도 이러한 의리와 규례를 원용하여 세종묘에서 음악을 같이 썼고 보면 각 신실에 칭술한 것은 없고 한 묘 안에서 한 음악을 통용한 것은 한나라 때부터 이미 그러하였습니다. 조종조의 정착된 악장을 준용하는 것 외에 신의 형편없는 견해로 감히 경솔하게 논의할 수 없습니다. 삼가 상께서 재결하소서.’ 하였습니다.” - 《장악원등록(掌樂院謄錄)》에 나온다. -


 

[주D-001]綏我賚思成 : 《시경》 〈나(那)〉의 “綏我思成”과 〈열조(烈祖)〉의 “賚我思成”에서 따온 것으로, ‘綏’는 편안히 여긴다는 뜻이고 ‘賚’는 준다는 뜻이니, 후손들의 제사에 답한다는 의미이다. ‘思成’은 뜻이 자세하지 않으나 주자는 “재계하면서 선조를 생각하고 제사 지내면서 선조의 모습이 보이고 선조의 음성이 들린다면 이 사람을 이룬 것이다.” 하여, 곧 제사 지내는 사람의 정성을 의미하는 말로 보았다.
[주D-002]莫莫 : 《시경》 〈초자(楚茨)〉의 “君婦莫莫”에서 따온 것으로, 주자는 “맑고 고요하여 공경이 지극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주D-003]維神其右 : 《시경》 〈아장(我將)〉의 “維天其右之”에서 따온 것으로, ‘右’는 높인다는 뜻이니, 신이 동향으로 있어 올리는 제수의 오른쪽에 있기 때문이다. 주자는 “천제께서 강림하여 희생의 오른쪽에 계실까?”라고 해석하여 천제의 강림을 감히 기필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주D-004]龍光 : 《시경》 〈육소(蓼蕭)〉의 “爲龍爲光”에서 따온 말로, ‘龍’은 ‘寵’의 뜻이다. 이에 대해 주자가 “그 덕을 기뻐하는 말이다.”라고 해석하였는데, 이에 따라 태종의 덕을 찬미한 말로 보았다.
[주D-005]世德作求 : 《시경》 〈하무(下武)〉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시는 주 무왕(周武王)이 태왕(太王), 왕계(王季), 문왕(文王)의 전통을 이어 천하를 소유함을 찬미한 시로, 이 구절은 선왕의 덕을 계승하였다는 말이다.
[주D-006] : 대본은 ‘武’인데, 《악학궤범》에 수록된 악장 및 《세조실록》에 실린 악장에 의거하여 ‘式’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式’은 발어사이다.
[주D-007] : 대본은 ‘我’인데, 《악학궤범》에 수록된 악장 및 《세조실록》에 실린 악장에 의거하여 ‘牙’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8] : 대본은 ‘薛’인데, 《악학궤범》에 수록된 악장 및 《세조실록》에 실린 악장에 의거하여 ‘孽’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9]連連安安 : 《시경》 〈황의(皇矣)〉의 “執訊連連 攸馘安安”에서 따온 말이다. ‘連連’은 줄줄이 이어지는 모양이고, ‘安安’은 경솔히 갑작스럽게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포로를 잡아 신문함이 계속 이어진다는 것은 항복해 오는 적군이 많음을 뜻하고, 귀 베어 바치기를 천천히 한다는 것은, 군법에 포로로 잡힌 자가 불복할 경우 죽여서 왼쪽 귀를 잘라 바치도록 되어 있는데, 이 일을 신중하게 하고 급하게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주D-010] : 대본은 ‘醎’인데, 《악학궤범》에 수록된 악장 및 《세조실록》에 실린 악장에 의거하여 ‘馘’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1]爰赫我怒 : 세조 때 최항(崔恒)에게 명하여 지은 악장에는 ‘我’ 자가 ‘斯’ 자로 되어 있다. 《世祖實錄 9年 12月 11日》
[주D-012]희문(熙文) …… 것 : 〈희문〉은 〈보태평(保太平)〉 11성(聲)의 첫 곡이고, 〈소무(昭武)〉는 〈정대업(定大業)〉 11성의 첫 곡으로, 여기에서 〈희문〉과 〈소무〉 두 악장이라는 말은 곧 〈보태평〉 11성과 〈정대업〉 11성을 뜻한다. 한국문집총간 86집에 수록된 《잠곡유고(潛谷遺稿)》 권8 〈종묘세실악장의(宗廟世室樂章議)〉에 “《오례의(五禮儀)》에 〈희문〉과 〈소무〉 등의 악장이 있는데, 〈보태평〉과 〈정대업〉 각 11성으로 삼았다. 〈보태평〉은 초헌에 연주하고 〈정대업〉은 아헌과 종헌에 연주한다. 그 내용은 모두 네 분의 왕과 태조의 공덕을 칭송한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네 분의 왕이란 태조의 사대조인 목조(穆祖), 익조(翼祖), 도조(度祖), 환조(桓祖)를 말한다. 이로 보아 여기에서 ‘세종의 공덕’이라고 한 것은 ‘조종(祖宗)의 공덕’의 오류가 아닌가 한다.
[주D-013]重光 : 《서경》 〈고명(顧命)〉에 “문왕과 무왕이 중광을 베풀었다.” 하였는데, 중광에 대해 주에서 “무왕이 문왕과 같기 때문에 중광이라고 한 것이니, 순 임금이 요 임금과 같기 때문에 중화(重華)라고 한 것과 같다.” 하였다. 곧 무왕이 문왕을 이어 거듭 빛냈다는 말이니, 여기에서도 선조(宣祖)가 조종의 덕을 이어 거듭 빛낸 것을 말한다.
[주D-014]선대의 …… 무고 : 《대명회전(大明會典)》에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고려의 권신인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잘못 기록되어 있던 것을 말한다. 1584년(선조17)에 변무 주청사(辨誣奏請使) 황정욱(黃廷彧)이 명나라에 가서 바로잡고, 《대명회전》의 개정된 전문(全文)을 받아 돌아왔다. 《宣祖實錄 17年 11月 1日》
[주D-015]예조 …… 한다 : 《인조실록》 4년 윤6월 25일 기사에 기록된 종묘의 악장에 대해 논의한 내용을 요약해 보면, ‘현재 악장은 인도하여 들어가는 악장인 초헌의 〈희문〉과 아헌ㆍ종헌의 〈소무〉, 인도하여 나가는 악장인 초헌의 〈역성〉과 아헌ㆍ종헌의 〈영관〉을 제외하면 모두 9장으로 구비되어 있는 상태라 첨입할 악장은 없을 듯하다. 그러나 다만 초헌은 72구 308자로 아헌ㆍ종헌이 87구 328자인 데 비해 약간 짧다. 따라서 새로 찬술하는 선조의 악장은 초헌의 악장인 〈정명(貞明)〉 아래에 첨가하면 될 것’이라고 하였으므로 한 말이다.
[주D-016]洋洋 : 《중용장구》 제16장의 “신의 기운 충만하여 위에 있는 듯하다.〔洋洋乎如在其上〕”에서 따온 말로, ‘洋洋’은 신의 기운이 유동(流動)하고 충만(充滿)하다는 뜻이다.
[주D-017]霓旌 : 오색의 우모(羽毛)를 단 깃발로 고대 제왕의 의장(儀仗) 가운데 하나인데, 제왕을 지칭하는 말로도 쓰인다.
[주D-018]위에서 말한 묘정은 : 《세종실록》 14년 3월 4일 기사에는 “위에서 말한 묘정의 헌현을 설치한 곳은〔上項廟庭設軒懸之處〕”이라고 되어 있다.
[주D-019]종묘에 …… 문제 :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던 종묘와 영녕전은 1608년(선조41)에 재건 공사가 착수되어 광해군이 즉위한 그해에 완공되었다. 이 논의는 선조의 국상 중에 열성의 신위를 재건한 종묘와 영녕전으로 이안하는 일을 앞두고 일어난 논의로, 세 가지 조목이란 “첫째, 상중인데 봉안할 때 종묘에 음악을 쓸 수 있는가. 둘째, 봉안은 경사스러운 일인데 하례(賀禮)를 올려야 하는가. 셋째, 영녕전과 종묘에 열성의 신위를 봉안하는 순서를 어떻게 할 것인가.”인데, 이 가운데 첫 번째 문제와 세 번째 문제를 말한다. 《光海君日記 卽位年 6月 28日》
[주D-020]초상의 모습 : 대본은 ‘喪用’인데, 한국문집총간 62집에 수록된 《백사집(白沙集)》 별집 권3 〈국상시종묘용악의(國喪時宗廟用樂議)〉에 의거하여 ‘喪容’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1]역제(繹祭) : 제사 지내는 의식의 하나로, 정제(正祭)를 지낸 다음 날 이어서 지내는 제사이다.
[주D-022]사지(沙地) : 울창주를 붓는 그릇의 이름이다. 이에 대한 설명은 아래에 보인다.
[주D-023]주송(周頌) …… 뜻입니다 : 〈집경(執競)〉은 《시경》 〈주송〉의 편명으로 무왕(武王)에게 제사 지내는 가사인데, 성왕(成王)과 강왕(康王)에게도 통용하기 때문에 한 말이다.
[주D-024]하후승(夏侯勝)의 논의 : 한 선제(漢宣帝)가 무제(武帝)의 종묘 악장이 없는 것에 대해 논의하라는 지시를 내리자 하후승이 “무제가 비록 사이(四夷)를 물리치고 국토를 넓힌 공은 있으나 군사를 많이 죽이고 절도가 없이 사치하였으니, 종묘 악장을 제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라고 한 것을 말한다.
[주D-025]짧으면 …… 뿐 : 대본은 ‘緩之’인데, 《인조실록》 4년 윤6월 25일 기사에 의거하여 ‘短則可以緩之’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6]6일 : 이듬해인 1647년(인조25) 1월 6일을 말한다. 《인조실록》 24년 12월 4일 기사에 “春享在於正月初六日”이라고 되어 있다.
[주D-027]한 문제(漢文帝)가 …… 것 : 가의(賈誼)는 젊은 나이에 제자백가서에 통달하고 문제에게 발탁되어 나이 20세에 박사가 되고 1년 안에 태중대부(太中大夫)에 이른 사람이다. 한나라가 흥기하여 문제에 이르러서 천하가 태평해진 만큼 마땅히 정삭(正朔)을 고치고 복색(服色)을 바꾸며, 제도를 법제화하고 관직명을 정하고 예악을 일으켜야 한다고 여겨 이러한 일의 의식과 법제를 모두 초안하여 올렸으나 문제가 즉위 초기라 겨를이 없다고 겸양한 일을 말한다. 《史記 卷84 賈生列傳》
[주D-028]따로 …… 못했고 : 대본은 ‘未聞樂章’인데, 《효종실록》 2년 6월 22일 기사에 의거하여 ‘未聞別有樂章’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9]이번 부묘 : 이 수의(收議)는 1651년(효종2)에 인조의 부묘를 앞두고 오정일(吳挺一)이 역대 임금의 부묘 때에 악장이 있었다고 아룀으로 인해 올린 것으로, 곧 인조의 부묘를 말한다. 《孝宗實錄 2年 6月 22日》
[주D-030]선묘의 …… 보면 : 대본은 ‘請依宣廟例 別製樂章’인데, 《현종실록》 6년 8월 15일 기사에 실려 있는 송준길의 차자를 보면, 이 다음에 ‘於仁祖之廟 諸大臣皆以爲不可 而夫旣爲宣廟別製樂章’이라는 내용이 더 있다. 이에 의거하여 이 부분을 번역하면 “선묘의 악장을 지었던 전례에 따라 인조의 묘에 별도로 악장을 제술할 것을 청하였으나 여러 대신이 모두 불가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미 선묘를 위해 별도로 악장을 제술하였고 보면”이다.
[주D-031]일상(一相) : 1665년(현종6) 3월 8일에 예조 판서로 제수된 이일상(李一相)을 말한다. 《顯宗實錄》
[주D-032]영언(永言)과 의영(依永) : 가(歌)와 성(聲)을 말한다. 《서경(書經)》 〈순전(舜典)〉에 “시는 뜻을 말한 것이고, 가는 말을 길게 읊은 것이고, 성은 길게 읊은 가를 의지한 것이고, 율은 성을 조화롭게 한 것이다.〔詩言志 歌永言 聲依永 律和聲〕” 하였다.
[주D-033]오황성목(於皇聖穆)의 …… 아니고 : 〈오황성목〉의 시는 〈보태평〉 11성의 〈기명(基命)〉으로 첫 구절이 ‘아, 위대하신 목조께서〔於皇聖穆〕’로 시작하고, 〈사제성모(思齊聖母)〉의 시는 〈정명(貞明)〉으로 첫 구절이 ‘단아하고 공경스러운 성모께서〔思齊聖母〕’로 시작한다. 〈기명〉은 목조가 함길도(咸吉道) 덕원부(德源府)로 거처를 옮겨 정착한 사적을 읊은 내용이고, 〈정명〉은 태종의 비인 원경왕후(元敬王后)가 정도전의 난 때 태종을 내조한 사적을 읊은 내용인데, 제1실은 태조의 신실이고, 제7실은 선조(宣祖)의 신실이기 때문에 한 말이다.

 

 

해동잡록 1 본조(本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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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朴堧)


○ 본관은 영동(永同)으로 우리 태종조에 급제하였다. 음률(音律)에 정통하여 세종이 아악(雅樂)을 제정하는데, 박연이 실질적으로 이것을 주관하였다. 관직은 대제학에 이르렀고, 효자의 정문(旌門)이 있다. 우리 세종이 일찍이 석경(石磬 돌로 만든 악기(樂器))을 만들어 박연으로 하여금 교정하도록 하였던 바, 박연이 아뢰기를, “어느 소리는 1푼이 높고, 어느 소리는 1푼이 낮습니다.” 하므로, 다시 조사해 보니, 높은 소리 나는 것에 진흙 찌꺼기가 끼었으므로, 세종이 진흙 찌꺼기 1푼을 긁어내게 하고, 또 낮은 소리 나는 것에는 진흙 찌꺼기 1푼을 덧붙이게 하였더니, 박연이 아뢰기를, “이제는 소리가 모두 정해졌사옵니다.” 했다. 사람들이 그 신묘함에 탄복하였다. 《용재총화》
○ 후에 아들의 사고로 말미암아 관직을 파면당하고 향리로 돌아가는데, 한 필의 말에 한 사람의 동자가 딸렸을 뿐, 그 행장이 쓸쓸하였다. 친한 벗들이 강가에서 전송하는데, 공(公)은 어려서부터 피리를 잘 불었기에 피리를 빼어서 3곡을 불고 가니, 듣는 이로서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동상
연화 회문체(蓮花回文體)를 짓고서, “옛사람이 선기회문체(璿璣回文體)를 지었는데, 별도로 오언(五言) 8구를 지어 연꽃 무늬 모양과 같이 하고 이름지어 연화회문(蓮花回文)이라고 했다.” 하였는데,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홀로 처하여 숨는 것을 달게 여기고 / 獨處甘遺逸
몸을 한 작은 동산에 편히 하리라 / 安身一小園
골짜기가 둘렀으니 누추한 집이 적당하고 / 谷盤宜陋室
물굽이가 가느다라니 맑은 술동이와 가깝도다 / 灣細近淸樽
푸른 대에는 밝은 달이 깃들어 있고 / 翠竹栖明月
푸른 산은 흰 구름을 이었도다 / 靑山冠白雲
신선을 배우려는 마음 간절하나 / 學仙心切切
일이 어려운 세상은 분분하도다 / 難事世紛紛
하였다. 《동문선》
○ 우리 세종이 거서(秬黍 곡물의 일종. 악기ㆍ도량형기 제작에 쓰임)를 해주(海州)에서 얻으매, 박연이 밀[蠟]을 녹여서 거서의 모형을 만들었는데, 그 낱알이 좀 컸다. 분(分)을 쌓아서 관(管)을 만드는데, 한 낱알로써 한 푼을 삼고, 열 알을 쌓아 올려 한 치로 삼았으며, 9치[九寸] 황종(黃種 12음율의 하나)의 길이로 법을 삼아, 3푼을 손익(損益)하여 12율을 이루어서 편경(編磬)을 만들었다. 《동국여지승람》
○ 새로 편경을 만들었는데, 이칙(夷則) 한 장이 그 소리가 맞지 않으므로, 박연이 살펴보고 말하기를, “먹줄이 아직 다 깎이지 않았다.” 하고, 곧 갈아 내어, 먹줄이 다 갈리자 소리가 맞게 되었다. 《국조보감》


 

[주D-001]연화 회문체(蓮花回文體) : 회문체(回文體)란 시편(詩篇)의 글자들을 어떤 물건 모양처럼 배열하여 상하종횡으로 읽어도 문맥이 맞는 갖가지 다른 뜻의 시편들이 되게 짓는 일종의 문자유희이다. 이를테면 위의 연화회문체의 원문은 [獨處甘遺逸 安身一小園 谷盤宜陋室 灣細近淸樽 翠竹栖明月 靑山冠白雲 學仙心切切 難事世紛紛]인데, 이를[逸遺甘處獨 園小一身安]식으로 읽어도 문맥이 통하고 뜻이 다른 시편이 되는 것 따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