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초의 의병 곽재우 /홍의장군전(紅衣將軍傳)

조선최초 의병 홍의장군전(紅衣將軍傳) 곽재우 (장군 )

아베베1 2011. 5. 26. 10:42
    조선최초의 의병

 

     조선 최초의 의병장인 망우당 곽재우 장군 휘하의 18 장수의 뜻을 기리며 추모하는 의병의날이

 금년 부터 6월 1일 의병의날 국가지정일로 선포되어 매년 행사를 같게 되었다

  忠義의 고장인 의령에서는 1972년 부터 의병제전 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현풍인 홍의장군 곽재우 장군 휘하의 18장수의 업적을 기리고 추모 하는 장을 ...

 의병제전은 의령인의 긍지와 자주심이었다 충의의 고장인 의령 ...    

 소싸움의 고장인 의령에서는 소싸움  (소싸움의 전설 범이는 이미운명을 달리하였지만 전설적인 승부소),

 세계기네스북에 등재된  줄달리기 행사등 다양한 행사가 이루에 진다 ... 어릴적 저곳에서 달리고 운동하고 놀던 곳이   아련한 추억으로 ....

 의령이 낳은  전설적 인물인 망우당 곽재우 장군의 업적을 기리며 ...

 의병탑의 자료를 올려봅니다 (작년에 촬영한 자료임)

 경남의령군 의령읍 중동 충익사 경내에 .

   의병탑 (義兵塔) 비문은

    글은  故 한뫼 안호상(대한민국 초대 문교부장관) 박사께서 짓고 의령 부림면 출신

            故 노산 이은상 선생이 쓰셨다          

 

 

 의병탑에는 원통모양의 모습이 18개가 있다 ...임진왜란시 1592년 곽재우 장군 휘하의 18장수를 뜻하는 것이다   임진왜란 (호국영령  18위)  

간본 아정유고 제3권
 문(文) - 전(傳)
홍의장군전(紅衣將軍傳)


곽재우(郭再祐)의 자는 계수(季綏)이고 본관은 현풍(玄風)이며 황해 감사(黃海監司) 월(越)의 아들이다. 월이 일찍이 의주 목사(義州牧使)로 있었는데 재우가 곁에서 3년 동안을 모시고 있으면서 한 번도 여색(女色)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이때 나이가 20여 세로, 사람들은 모두 그의 확고한 지조에 탄복하였다.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들어가니, 관상을 잘 보는 사람이 특이하게 여기며 ‘천하에 이름이 가득할 것이다.’ 하였다. 《춘추(春秋)》를 통달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으며, 여러 가지 사무에 관하여 두루 알고 병가(兵家)의 서적을 널리 읽었다. 아버지가 별세하자 집상(執喪 부모상에 예절을 다하는 것)에 슬픔을 다하였다. 이때 애첩(愛妾)이 병이 심하여 곧 죽게 되었는데 울면서 한 번 만나 보기를 청하니 재우는 사람을 시켜 영결(永訣)하기를,
“죽은 후의 부고는 받을 수 있지만 만나볼 수는 없다.”
하였다. 아버지의 복(服)을 마치자 과거 공부를 버리고 의령(宜寧)의 기강(岐江)에 정자를 짓고는 농사꾼 차림으로 한가히 노닐면서 고기잡이와 낚시질로 스스로 즐거워하여 장차 그대로 살다가 늙을 듯이 하였다.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20년(1592) 여름 4월에 왜놈들이 대거 침략해 오니 여러 고을들이 모두 지키지 못하고 패하였다. 재우는 이에 슬퍼하여 집의 사당(祠堂)에 고하고 가산(家産)을 털어 의병(義兵)을 일으켰다. 중국에 갔을 때에 명 나라 황제가 붉은 비단을 하사하였는데, 이 비단을 재단하여 전포(戰袍)를 만들어 입고 흰 말을 타고 스스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 하늘에서 내려 온 붉은 옷을 입은 장군이라는 뜻)이라고 호하였다. 왜장 안국사(安國司)가 전라도(全羅道)로 향한다고 선언하고 곧바로 정진(鼎津)에 이르렀으나 진창 때문에 행군할 수가 없었다. 이에 먼저 포로들을 시켜 높고 건조한 곳에 기를 세우게 하고 다음날 아침에 건너려 하였다. 재우는 이것을 염탐하여 알고는 한밤중에 왜놈들의 기를 뽑아다가 바꾸어 진창 속에 꽂아 놓은 다음에 복병(伏兵)하고 기다렸더니, 과연 적이 진창 속에 빠졌다. 이때 복병이 나와서 거의 전멸시켰다. 이윽고 적이 크게 쳐들어오니 재우는 우리 편 군사가 적어 맞설 수 없음을 헤아리고는 힘이 세고 키가 큰 사람 10여 명을 뽑아서 모두 흰 말을 타고 붉은 전포를 입히고는 기에다 ‘천강홍의장군’이라고 쓴 다음 나누어 산골짜기 깊은 곳에 지키고 있게 하고는 재우가 먼저 적진(敵陣)을 습격하여 유인하니, 적은 온 무리를 총동원하여 추격하는데 납으로 만든 총알이 비오듯 쏟아졌지만 끝내 맞히지 못하였다. 재우가 수목(樹木) 사이 이곳저곳에서 나타나니 적이 바야흐로 놀라고 의심하던 차에 다시 보니 붉은 전포를 입고 흰 말을 탄 사람이 높은 봉우리와 깎아지른 절벽 사이에서 나와 빙 둘러서서 어지럽게 돌아가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적은 더욱 놀라고 의심하여 천신(天神)이라고 생각하여 감히 가까이하지 못하니 재우가 드디어 숲 속에서 나와 어지럽게 활을 쏘아 곧 전멸시켰다.
이때 순찰사(巡察使) 김수(金睟)가 왕을 호가하려고 용인(龍仁)에 당도하였다가 패하여 산음(山陰)으로 돌아오니 민심이 울분하였다. 재우는 격문(檄文)을 전하여 김수의 8가지 죄를 말하고 장차 군사를 이동하여 공격하려 하니, 김수가 크게 노하여 반역죄(叛逆罪)로서 행조(行朝 임금이 순행 중에 임시 머무는 곳, 즉 행재소(行在所))에 논계(論啓)하였다.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이 처음 거창(居昌)에 도착하여 재우의 격문을 보고는 한동안 놀라다가 학유(學諭) 박사제(朴思齊)에게 묻기를,
“순찰사는 조정에서 명한 관리인데 재우는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이렇게까지 욕한단 말인가?”
하였다. 사제는,
“재우는 나의 벗입니다. 사람이 충성스럽고 효도하며, 《사기(史記)》를 읽다가 세상이 어지럽고 시기가 위태로운 때에 의사(義士)가 절의를 지킨 것을 보면 반드시 목메어 눈물을 흘리며 언제나 말하기를 ‘우리 집은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었으니 나라에 만일 환난(患難)이 있게 되면 나는 마땅히 목숨을 바쳐 보답하겠다.’ 하였습니다. 오늘의 사건은 비록 자세히 알지는 못하나, 순찰사가 경내(境內)를 탈출한 지 오래며 지금 갑자기 군사를 패하고 돌아오므로 대중의 마음이 화합치 못하니, 어쩔 수가 없어서 부득이 이런 일을 했을 것이요, 결코 딴 마음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성일은 낯빛을 변하면서 말하기를,
“조정의 조처에 대해서는 꼭 알 수 없으나 나는 시험삼아 재우를 위하여 조정(調整)해 보겠다.”
하고는, 김수와 재우에게 편지를 보내어 두 편을 말리고 급히 계(啓)를 올려 재우를 구원하면서 그가 장수의 재질이 있음을 극구 칭찬하였으며, 재우도 상소하여 스스로 사실을 밝히니 상이 가상히 여겨 유곡찰방 겸형조정랑(幽谷察訪兼刑曹正郞)을 제수하였다.
창원(昌原)에 있는 왜적이 진해(鎭海)에 있는 왜적들과 고성(固城)ㆍ사천(泗川)에 진영(陣營)을 연하고는 진주성(晉州城)을 대거 침략하는데, 군대의 기세가 대단하였다. 왜적들이 촉석루(矗石樓) 아래에 주둔하고 있으니 성일이 모든 장수들을 지휘하여 갑자기 쳐들어가 적을 무수히 살상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수만 명의 왜적이 다시 진주를 10겹으로 포위하고는 7주야 동안을 공격하니 재우가 선봉장(先鋒將) 심대승(沈大承)에게 밤을 틈타 진주의 북쪽에 있는 산에 올라가 횃불을 죽 늘어 놓고 북을 치며 떠들면서 큰 소리로 ‘홍의장군이 호남(湖南)의 의병들과 함께 내일 왜적을 무찌를 것이다.’ 하게 하였는데, 그 다음날 호남의 의병장(義兵將) 최경회(崔慶會)가 살천(薩川)에서 약속하지 않았는데도 오니 적들은 이것을 바라보고는 놀라 주둔하고 있던 막사를 불사르고 도망쳤다. 상은 재우가 공을 자처하지 않음을 가상히 여겨 절충장군 조방장(折衝將軍助防將)을 제수하였다.
21년 왜의 관백(關白) 평수길(平秀吉)이 진주의 지도를 보고 임진년(1592, 선조 25)에 두 번이나 패한 것을 분히 여겨 대장 행장(行長)ㆍ청정(淸正)에게 편지를 보내어 꾸짖기를,
“진주를 무찌르지 못하면 바다를 건너오지 말라.”
하니, 이에 왜적들은 다시 진주를 포위하였다. 순찰사 권율(權慄)이 행주(幸州)에서 이긴 것을 믿고 기강(岐江)을 건너 맞아 공격하려 하니, 재우가
“적세(敵勢)가 한창 강하고 우리의 군사는 훈련이 되지 못했으니 가벼이 진격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순변사(巡邊使) 이빈(李薲)과 종사(從事) 성호선(成好善)은 여러 장수들이 지체하는 것을 꾸짖고 권율과 함께 강을 건너 함안(咸安)으로 진격하다가 적의 대포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는 것을 듣고는 되돌아와 정진(鼎津)을 건넜다.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은 권율ㆍ이빈과 함께 전라도로 향하였으며, 흠차 총병(欽差總兵) 유정(劉綎)은 팔거(八莒)에 주둔하고, 흠차 유격(欽差游擊) 오유충(吳惟忠)은 봉계(鳳溪)에 주둔하고 있으면서도 바라보기만 하고 구원해 주지 않았다. 적이 진주성을 1백 겹으로 포위하여 8일 만에 함락하니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ㆍ병사 최경회(崔慶會)ㆍ충청 병사 황진(黃進)ㆍ복수장(復讐將) 고종후(高從厚)가 모두 죽었으며, 군사와 민간인으로 죽은 자가 6만 명이었다. 재우가 두 번이나 진주를 구원했었는데 이때에는 가지 않았으니 적을 잘 헤아림이 이와 같았다.
성주목사(星州牧使)를 제수하니,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이 재우로 하여금 삼가(三嘉)에다 악견산성(嶽堅山城)을 쌓고 현풍(玄風)에다 석문산성(石門山城)을 쌓도록 하였다. 이때 흠차 총병 양원(楊元)이 남원(南原)에 군사를 주둔하고 있었다. 원익은 양원에게 군사를 옮겨 영남(嶺南)에 주둔해 줄 것을 청하려 하니, 재우가 원익에게,
“산성을 보수하고 무기를 수선하여 때를 기다렸다가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계책입니다. 만일 양 총병(楊總兵 양원을 가리킨다)이 영남으로 옮겨 주둔하게 하는 것은 마치 범이 산의 숲에서 나오고 용이 깊은 못에서 떠나는 것과 같으니 여우와 삵이나 수달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원익이 사례하면서,
“이같이 훌륭한 장군이 있으니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하였다. 재우는 얼마 있다가 벼슬을 버리고는 의병을 거느리고 의령(宜寧)의 가력(嘉力)에 주둔하여 이광악(李光岳)을 부장(副將)으로 삼고 김덕령(金德齡)ㆍ홍계남(洪季男)을 좌우협(左右協)으로 삼아 곧바로 동래(東萊)에 도착하여 연해(沿海)에 있는 왜적들을 공격하였다. 덕령과 계남은 뛰어나게 날래고 민첩하여 말을 달리며 칼을 휘두르고 용맹을 자랑하면서 진격하니 적은 굳게 지키고 나오지 않았다. 재우는 주사(舟師 수군(水軍)을 말한다)를 재촉하여 적진 가까이까지 다가가서 광악과 함께 마주앉아 술을 마시는데 사발만한 적의 대포알이 두 사람이 있는 뱃전을 지나 물속에 떨어져 한참 동안이나 소리가 울리고 물이 끓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담소(談笑)하니 적이 더욱 두려워하여 감히 맞아 싸우지 못하였다. 재우는 드디어 군사를 정돈하여 돌아왔다.
25년, 방어사(防禦使)에 제수되어 창녕(昌寧)의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지키고 있었는데 청정이 다시 대거 침략해 오자, 재우는 창녕ㆍ밀양(密陽)ㆍ영산(靈山)ㆍ현풍의 군사를 거느리고 대오(隊伍)를 엄히 하여 명령을 위반하는 자를 목 베며, 관사(館舍)에 땔나무를 쌓아놓아 사수(死守)할 뜻을 보이니, 온 군사가 두려워하여 재우를 벼락이나 귀신처럼 여겼다. 적은 이미 성 밑까지 쳐들어왔는데도 재우는 여유만만하게 이야기하고 웃으면서 ‘굳게 지키라.’ 명령하고 이르기를,
“왜놈들 자신이 병법(兵法)을 알고 있는데 어찌 쉽게 진격해 오겠는가?”
하였는데, 1주야를 경과하자 과연 싸우지 않고 물러가 서쪽으로 황석(黃石)을 무찌르고 남원을 함락하니 여러 고을이 모두 패하였다. 원익은 걱정하여 재우에게 군사를 해체하도록 하니 재우는 즉시 편지를 써서 답하기를,
하고는 거절하고 따르지 않았다. 그 후 얼마 있다가 어머니 상(喪)으로 인하여 집으로 돌아가니 상이 특별히 3번이나 기복(起復 상중(喪中)에 벼슬에 나아가는 것)을 명하였으나 모두 상소하여 진정(陳情)하고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울진(蔚珍)으로 이사하여 살면서 손수 패랭이[蔽陽子]를 만들어 팔아서 자급(自給)하니 사람들은 그의 여막(廬幕)을 방어점(防禦店)이라 이름하였다.
복(服)을 마치고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에 제수되어 섬에 있는 산성(山城)을 수리할 것을 청하여 2번이나 계(啓)를 올렸으나 들어주지 않으므로 드디어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고는 벼슬을 버리고 돌아오니 대신(臺臣) 홍여순(洪汝諄)이 ‘직무를 유기하고 태만하였다.’고 탄핵하여 영암(靈巖)으로 귀양갔었는데, 뒤에 풀려 돌아와서 비파산(琵琶山)에 들어가 솔잎을 먹고 벽곡(辟穀 곡식을 먹지 않고 곡식 이외의 것을 조금씩 먹는 것)하였다. 얼마 안 되어 찰리사(察理使)에 임명되니 순행하여 산성의 형세를 살피고 인동(仁同)의 천생산성(天生山城)을 보수하였으며, 여러 번 승진되어 한성 우윤(漢城右尹)을 지냈다.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자 상소하여 임해군 진(臨海君珒)을 벨 것을 청하였다. 여러 번 통제사(統制使)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상소하여 중흥(中興)에 대한 세 가지 계책을 말하였으며 부름을 받고 부총관(副摠管)에 임명되었다. 이때 김수(金睟)가 도총관(都摠管)이었는데 재우에게,
“영공(令公)이 몇 년 동안 벽곡하였으니 어떻게 운검(雲劍 의장(儀仗)에 쓰는 큰 칼)을 메겠는가?”
하고는 언제나 자기가 메었다. 한성 좌윤(漢城左尹)에 임명되어서는 상소하여 ‘전하(殿下)의 나라가 반드시 은(銀) 때문에 망할 것입니다.’라고 직언하였다. 함경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을 때에 조사(詔使) 염등(冉登)이 탐욕스럽고 독직(瀆職)하며 횡포가 심하니, 재우가 상소하여 통역관과 원접사(遠接使)를 극히 비난하고 드디어 벼슬을 버리고 남쪽으로 돌아왔는데 다시 전라 병사를 제수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조정의 신하가 영창대군 의(永昌大君㼁)를 죽일 것을 청하였는데도 사람들은 감히 말하지 못하였는데 재우가 상소를 올려 말하기를,
“이제 겨우 8세인 아이로서 모역(謀逆)이 무엇인지도 모를 터인데, 그대로 처형하였다가 자전(慈殿)께서 슬픔을 견디지 못하여 혹시라도 자결(自決)하신다면 전하께서 장차 천하에 무슨 구실로 변명하시겠습니까? 신(臣)은 오늘날 여러 신하들이 전하를 큰 불의(不義)에 빠뜨릴까 두려워합니다.”
하고는 드디어 창암(滄岩)에 집을 짓고 스스로 망우당(忘憂堂)이라 하고, 거문고와 배 1척으로 세속을 떠나 한가로이 지내면서도 언제나 변보(邊報 일선 지대의 전쟁 소식)를 들으면 곧 초연(愀然)히 기뻐하지 않으면서,
“내가 비록 늙었으나 국난(國難)이 있으면 마땅히 싸움터에 나가야한다.”
하였다.
나이 66에 졸하였다.
재우는 군사를 행함에 있어 상벌(賞罰)이 엄하고 분명하였으며 기율(紀律)이 정제(整齊)하였다. 군사들을 집안 식구처럼 사랑하여 모든 군사들의 환심을 얻었으며, 법을 행할 때에는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하더라도 조금도 용서해 주지 않았다. 말 위에서 손수 북을 치고 사람들에게 젓대와 피리를 불면서 천천히 걷는 것으로 절도(節度)를 삼아 한가한 것이 마치 싸우지 않을 듯이 하고는 곳곳에 군사를 매복(埋伏)시켰다가 왜적들이 오면 곧 활을 쏘며, 왜선을 쫓느라 언덕에 임하여 활을 쏘아 싸우지 않는 날이 없었다. 일찍이 이르기를,
“나라를 위하여 적을 토벌하는데, 적의 머리를 베어다 바쳐서 공을 요구하는 것은 의(義)에 맞지 않으며 공을 탐하여 목 베기를 좋아하면 반드시 해를 당할 것이다.”
하고는,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적의 귀를 베어 오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이에 대해 이노(李魯)는,
“공의 본의는 참으로 좋지만 모든 사람이 공(公)을 따라 힘을 다하여 싸우는데 누구인들 공명에 대한 욕심이 없겠습니까? 만일 이렇게 한다면 끝내는 반드시 싸움에 게을러질 것이오.”
하였다. 왜적을 지산(砥山 현재의 의령(宜寧) 지방)에서 무찔러 무수히 사살하였는데, 이때 비로소 목 베는 것을 허락하니 군사들이 다투어 물에 뛰어들어 70여 급(級)을 베었는데도 공에 참여시키지 않았다. 군관(軍官) 조사남(曹士男)이 앞장서서 적선에 올라 칼을 휘두르며 이리저리 찌르다가 마침내 거짓 죽은 체하는 왜적에게 찔림을 당하였다. 재우는 크게 슬퍼하여 통곡하면서,
“내가 목 베는 것을 금지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하였다. 처사(處士) 조식(曹植)은 사람을 보는 안목이 있었는데, 일찍이 재우를 간택하여 외손서(外孫婿)로 삼고는 자제들이 매우 많았는데도 재우에게만 병서(兵書)를 가르쳤다. 재우는 이미 벽곡(辟穀)을 하고는 술을 마셔 크게 취할 때에 문득 문밖에다 귀를 기울이면 귓구멍에서 술이 콸콸 샘물처럼 쏟아져나오니, 대개 한갓 병서만을 안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로 기이한 술법(術法)을 통한 것이 이와 같았다 한다.
나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홍의장군은 성품이 뛰어나고 정직 순박하여 다른 사람과 서로 어울리지 않았으니, 조정에 있으면 마땅히 화가 미칠 것이며 싸움터에 있으면 마땅히 패할 것이다. 그러나 공리(功利)에 담박하여 물욕에 벗어났으며 형세를 살펴 승리를 취하였고, 기이한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능히 세상의 재화를 면하여 일찍이 한 번도 패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공리에 담박한 떄문이었다. 선무 공신록(宣武功臣錄 임진왜란을 평정한 공신록)에 조그마한 공로도 모두 기록하였는데, 홍의장군은 도리어 참여되지 않았다. 그러나 홍의장군의 공에 무슨 손상이 되겠는가?”


 

[주D-001]제(齊) 나라 …… 온전하였으며 : 전국 시대 제 나라는 연(燕)에게 크게 패하여 70여 성을 다 빼앗겼는데 오직 거(莒) 땅과 즉묵만이 항복하지 않았다. 이때 즉묵 사람들은 전단(田單)을 장군으로 삼고 결사적으로 항거하여 결국 제 나라를 회복하였다.《史記 卷82 單田列傳》
[주D-002]당(唐) 나라 …… 막아냈다 : 당 태종(唐太宗)이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에 쳐들어왔을 때 안시성주(安市城主) 양만춘(楊萬春)은 치열한 싸움을 벌여 당군(唐軍)을 물리쳤다.
[주D-003]임해군 진(臨海君珒) : 선조(宣祖)의 서장자(庶長子)였는데 성품이 사나워서 세자(世子)에 책봉되지 못하고 아우 광해군(光海君)이 세자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가등 청정(加藤淸正)에게 포로가 되기도 하였다.
[주D-004]은(銀) 때문에 망할 것 : 광해군 5년(1613)에 일어난 계축화옥(癸丑禍獄)을 말한다. 서양갑(徐羊甲) 등의 서류(庶類)들이 은상인(銀商人)을 죽이고 금품을 강탈한 죄로 체포되었다. 정인홍(鄭仁弘) 등 대북파들이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을 모함하려고 하던 차에, 서양갑 등이 김제남도 역모에 가담하였다고 허위 진술하여 사화(士禍)가 일어나 영창대군 등 많은 사람들이 참변을 당하였다.
[주D-005]조정의 …… 죽일 것 : 영창대군은 인목대비 소생으로 선조(宣祖)의 적자(嫡子)이다. 선조는 세자로 책봉한 광해군을 싫어하여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는데, 이를 안 이이첨(李爾瞻)과 정인홍(鄭仁弘) 등이 광해군을 옹위하였다. 이들이 계축화옥(癸丑禍獄) 때에 영창대군이 역모(逆謀)에 가담했다고 무고하여 서인(庶人)으로 폐하였으며, 뒤에 마침내 강화부사(江華府使) 정항(鄭沆)의 손에 참혹하게 죽었는데 그때 겨우 14세였다.
[주D-006]적의 …… 일 : 옛날 전쟁 때에 적의 시체의 왼쪽 귀를 베어 이것으로 공(功)의 신표로 삼았다.

 

  

난중잡록 1(亂中雜錄一)
임진년 상만력 20년, 선조 25년(1592년)


왜인 귤광련(橘光連)이 의(義)를 위해 죽다. 귤광련은 일명 강광(康光)이라고도 하는데, 일본 대마도(對馬島)의 작은 두목[小酋]이다. 경인년(1590, 선조 23) 이전에도 누차 왜의 사신이 되어 우리나라에 내빙(來聘)하였는데, 우리 조정에서는 후한 상과 높은 작위로 특별히 회유하였다. 경인년에 이르러, 그가 현소(玄蘇) 등과 함께 정탐하러 왔을 때, 귤광련이 은밀히 우리 조정에 고하여, “일본의 사람들은 변덕스럽고 간사하기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여러 해 동안 모략을 쌓은 끝에 상국(上國 명 나라를 말함)을 침범할 계획을 결정하였으니, 지금 온 두목들을 죽여서 큰 화를 막도록 하십시오.” 하였는데도, 우리나라에서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이번에는 수길(秀吉)이 귤광련이 우리나라를 자세히 안다고 해서 그로 하여금 의지(義智) 등과 함께 선봉을 갈라 맡아 가지고 날짜를 정해 바다를 건너가게 하였지만, 귤광련이 그 명령을 거부하고 말하기를, “이번 출병(出兵)은 무슨 명목에서인가. 조선으로 말하면 일본의 좋은 이웃이다. 2백 년 동안 조금도 틈이 없이 우호 관계를 유지하며 최대한의 성심을 다해 왔는데, 어찌하여 맹약을 어기고 군사를 일으켜 상국의 땅을 범하려고 한단 말인가. 하물며 나는 상국의 후한 은혜를 받았으니 죽을 것을 산 것도 뼈에 살을 붙여 준 것도 모두 그 은덕이 아닌 게 없다. 내 비록 보잘것없는 존재이지만 그래도 사람의 마음만은 지니고 있다. 머리 위에 하늘의 해를 이고 있으면서 어떻게 차마 은덕을 잊고 감히 조선을 짓밟고 지나가겠는가. 한 번 죽기는 마찬가지다. 군사를 몰고 바다를 건너가는 짓은 결코 하지 않겠다.” 하다. 의지가 이 말을 수길에게 전하여 알리자, 수길이 대노하여 곧 귤광련을 잡아다 목 베어 대중에게 보이게 하고 또 구족(九族)을 멸하게 했다. 귤광련의 한 아들은 요행히 상인으로 먼 섬에 나가서 머물러 있었는데, 이 변고를 들어 알게 되자 곧 행장을 버리고 성명을 바꾸고는 도망가 숨어서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다. 그 후 만력 34년 병오년(1606, 선조 39) 일본 국왕 원가강(源家康)이 평성(平姓)을 다 없애고, 서신을 써서 사신을 보내고는 다시 통신하기를 청해 왔다. 예조(禮曹)에서는 무과첨지(武科僉知) 전계신(全繼信)과 역관(譯官) 박희근(朴希根)을 회답사(回答使)로 하여 일본에 보냈다. 이들이 대마도에 당도하여 귤광련의 아들을 만나 보기를 원했더니, 성이 귤과 다른 한 왜인이 와서 그 이유를 캐는 것이었다. 전계신 등이 그가 귤광련의 아들임을 알아채고 백방으로 그를 위로하면서 극진한 은의를 베풀었다. 귤광련의 아들은 눈물을 흘리며 전에 있었던 일을 다 말했다. 회답사가 돌아와서 경상 감사에게 자세히 보고하였고, 감사 유영순(柳永詢)이 이 일을 조정에 갖추어 상주(上奏)하니, 조정에서 의론한 끝에 귤광련의 사당을 부산(釜山)에 건립했다. 그 후 신해년(1611, 광해군 3)에 유상(柳相)이 나한테 이 일을 자세히 전해 주기에, 내가 기특하게 여겨 그 일을 기록하고 이어 시를 짓기를,
천부의 양성이란 구해서 오는 것이 아니련만 / 秉彝良性非求至
난에 임해서는 어찌하여 신의 적단 말고 / 臨亂胡爲少信義
의관 갖춘 사람마저 나라 저버리고 부끄러움 모릅디다만 / 衣冠負國尙不恥
이적 땅의 사람으로 이럴 수 있었고야 / 夷狄之人乃如此
하였다.

여름 4월. 왜적 평수길(平秀吉)이 그의 장수 평수가(平秀家) 등 36명의 두목들을 보내어 상세한 것은 강항(姜沆)의 장계(狀啓)에 있다.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나라에 침입해 들어오다. 평행장(平行長)이 평의지(平義智)ㆍ평조신(平調信) 등과 함께 선봉이 되어 병선 4만여 척과 군사 1백만으로 바다를 덮고 와서는, 13일 새벽 안개가 자욱한 기회를 타서 곧장 부산(釜山)으로 쳐들어 왔다. 그때 첨사(僉使) 정발(鄭撥)은 절영도(絶影島)로 사냥을 나가 있었다. 처음에는 조공(朝貢) 오는 왜인이라고만 생각하고 걱정거리로 여기지도 않았는데, 잠시 후 병선이 무수히 몰려오는 것을 보고야 급히 돌아와 성으로 들어갔다. 성문이 겨우 닫히자 왜적들은 이미 상륙하여 성을 백 겹으로 포위하였으며, 얼마 안 가서 성은 함락되었고 정발은 죽었다. 왜적의 변란이 심히 다급해서 조야(朝野)가 창황하였다. 정 발은 나라를 위해 순절했으나 은명(恩命)을 받지는 못했었는데, 그 후 만력 31년 계묘년(1603, 선조 36)에 정발의 처 임씨(任氏)가 글을 올려 억울함을 호소하기를, “발은 고립된 성을 지키면서 힘을 다해 싸우다 죽었는데도, 어떤 사람은 정발이 성을 버리고 달아나 버렸다고 하니, 지하의 억울한 혼이 눈을 감지 못합니다. 이 억울함을 풀어 주시고 특별히 포상을 내려주시기를 청원합니다.” 하였다. 이에 임금이 본도 순찰사(巡察使)에게 명하여 정발이 전사한 곡절을 탐문해서 아뢰라 하니, 순찰사 이시발(李時發)이 좌수사(左水師) 이영(李英)에게 이첩하였고, 이영이 회보하기를, “그때 토병(土兵) 가은산(加隱山) 등 3명은 탈출할 수가 있어서 죽지 않았는데, 이들이 모두 말하기를, ‘첨사가 사냥을 나갔다가 왜선이 무수함을 보자 급히 부산진에 돌아와서 성 밖의 주민과 군인 등을 독촉하여 빠짐없이 성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는 사람을 시켜 왜관(倭館)에 머물러 있는 왜인을 가보게 했는데, 단지 네 명이 있을 뿐이어서 곧 잡아 가두게 하였습니다. 또 전선(戰船)ㆍ방패선(防牌船)ㆍ중선(中船) 등 도합 세 척을 모두 배 바닥에 구멍을 뚫어 물에 가라앉게 한 뒤에, 첨사는 남문의 성루(城樓)에서 밤을 지냈습니다. 그 이튿날 날이 샐 무렵에 왜적이 성 뒷산을 둘러싸고 진을 치자 첨사는 군중(軍中)에 영을 내려 동요하지 않도록 조심하게 하고는, 마침내 서문으로 옮겨가 수비했습니다. 그런데 왜적이 일시에 함께 진격해 와 높은 곳을 점령하고 고함을 치면서 탄환을 비오듯이 쏘아대는데, 쏘는 탄환치고 맞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첨사는 탄환에 맞아 죽었고 첨사의 첩도 스스로 목 베어 죽었으니, 성은 마침내 함락되었습니다. 가은산 등은 쌓인 시체 속에 숨어 있었는데, 오후에 왜적이 군중에 영을 내려 남은 백성들을 죽이지 말라 하여 다 배 위에 잡혀 있다가 17일에 석방되어 돌아왔습니다. 운운.’ 하였습니다.” 하다. 순찰사가 그 회보에 의하여 자세히 아뢰다.
14일. 왜적이 동래(東萊)를 함락하였는데 부사(府使) 문과(文科) 출신의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평화시의 예에 따라 파견되었다. 송상현(宋象賢)은 죽고, 좌위장(左衛將)인 울산 군수(蔚山郡守) 이언성(李彦誠) 등은 군사를 거느리고 왜적에게 항복하다. 하루 전에 송상현은 왜적이 대거 침입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인접 고을 군사를 불러다 동래성을 지켰다. 이리하여 좌병사(左兵使) 이각(李珏)이 동래성에 달려 들어왔는데, 부산이 이미 함락됐다는 소식을 듣자, “나는 절제장(節制將)이니 본영(本營)을 지켜야지 여기에 있을 게 아니다.”라고 핑계하고, 성을 나가려 했다. 이때 송상현이 큰 소리로 외쳐 말하기를, “고립된 성이 함락되려고 하는데, 주장(主將)이 구원해 주러 왔다가 어찌 차마 버리고 간단 말이오.” 하였으나, 이각은 듣지 않은 채 아병(牙兵) 20명만을 남겨 놓고 가 버렸다. 이날 날샐 무렵 적병이 대거 진격해 와서는 우선 허수아비를 만들어 붉은 옷에 푸른 건을 씌우는 한편, 등에는 붉은 기를 지우고 허리에는 긴 칼을 채워서 그것을 긴 장대 끝에 꽂아 담 사이에 늘어 놓자, 성 안의 사람들이 크게 놀라 도망치며 울부짖었으며, 왜적은 칼을 휘두르면서 마구 성 안으로 쳐들어 왔다. 조방장(助防將) 홍윤관(洪允寬), 중위장(中衛將)인 양산 군수(梁山郡守) 조영규(趙英珪), 대장(代將) 송봉수(宋鳳壽), 교수(敎授) 노개방(盧盖邦) 등이 모두 이 싸움에 죽었다. 송상현은 남문 성루에 올라 갑옷 위에 단령(團領)을 입고 관대를 띠고는 교의에 앉아 있었다. 왜적은 그가 부사임을 알고 생포하려 하였으나, 송상현이 가죽신 신은 발로 두 차례나 차고 왜적을 꾸짖기를, “이웃 나라의 도리가 과연 이러한 것이냐. 우리는 너희를 저버리지 않았는데 너희는 왜 이런 짓을 하기에까지 이른단 말이냐.” 하니, 왜적이 몹시 성내면서 그를 잡아 끌고 목 베려 할 즈음에도 그의 안색은 변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부사가 남문의 성루에 있을 때 왜적이 칼을 휘두르며 돌입하자 부사는 그를 쏘아 죽였으며, 뭇 왜적이 난입하자 부사는 장검으로 두 왜적을 쳐죽이고 죽었다.” 하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그의 첩은 북도의 기생이었는데 역시 굴복하지 않아 왜적이 송상현과 함께 죽였다. 양첩(良妾) 이소사(李召史)는 자녀를 데리고 일본에 잡혀 갔다가 그 후 갑오년(1594, 선조 27)에 평행장(平行長)이 경상 우병사 김응서(金應瑞)와 화평을 의논할 때 석방되어 돌아왔다. 왜적은 그들을 의리 있는 사람이라 여기고는, 두 사람의 시체를 거두어 성 동문 밖에 묻고 나무패를 세워 표적을 해주었다. 부사가 조용히 죽음을 당할 그때 관노(官奴) 급창(及唱)이 소리쳐 울며 달려 들어가 손으로 부사의 옷자락을 잡고 기꺼이 그와 함께 죽으니, 왜적이 더욱 기이하게 여겼다. 애초에 부사가 경내의 대소 부녀들을 모아 모두 성 안에 들어와 있게 하였는데, 성이 함락되자 왜적들이 그들을 모두 문루 위로 몰아 오르게 하고, 기생과 악공에게 풍악을 잡히고 술자리를 벌여 모여 신나게 놀았으며, 창고를 다 털어서 준비했던 배에 싣고 저희 나라로 돌려보내다. 포위를 당하기 전에 송상현은 북쪽을 향해 재배하고 부채에, “외로운 성에 달무리[暈] 서매, 크디큰 진영(鎭營)을 구해 내지 못하누나. 군신의 의리는 무겁고, 부자의 은혜는 가볍다.”라고 손수 써서 그것을 집 종에게 주어 그의 부모한테 가서 알리도록 하다. 그 후 왜적들도 포로된 자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의 충신은 오직 동래부사 한 사람뿐이다.” 하다. 부채면의 16자(字)는 안 상산(顔常山)의 “신(臣)은 무상(無狀)하니, 죽는 것이 마땅합니다.” 한 말과 문신국(文信國)의, “인(仁)을 이룩하고 의(義)를 취한다.” 한 찬(贊)과 더불어 전후로 같은 정신이다. 글을 읽고 비감(悲感)에 젖어 모르는 결에 눈물을 흘렸으니, 천고에 걸쳐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역적들의 마음을 격동시키기에 족하리라. 그때 본도의 감사(監司) 김 수(金睟)가 진주(晉州)에 있었는데, 부산의 급보가 졸지에 도착하자 마침내 좌우 도(道)의 군사들을 독촉 징발해서 계속 구원하러 나가게 하다.
15일. 김수가 진주로부터 달려 반성(班城) 진주의 속현 까지 갔는데, 거기에서 부산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곧 장계를 갖추어 급히 보내고 군대를 정비해 가지고는 함안(咸安)을 거쳐 칠원(漆原)에 이르렀다. 본도의《순영록(巡營錄)》에 나온다. 그때 본도의 우병사 신길(申硈)은 이미 갈리어 조대곤(曹大坤)이 그와 교체되었으나, 조정에서는 조대곤이 노쇠하다는 이유를 들어 그를 경질하고 김성일(金誠一)로 대신하였다.
○ 이일(李鎰)을 순변사(巡邊使)로, 변기(邊璣)와 조경(趙儆)을 경상 좌우 방어사로, 성응길(成應吉)ㆍ양사준(梁士俊)ㆍ박종남(朴宗男)ㆍ변응성(邊應星)을 경상 중좌우 조방장(慶尙中左右助防)으로, 곽영(郭嶸)을 전라 방어사로, 이유의(李由義)ㆍ김종례(金宗禮)ㆍ이지시(李之時)를 전라 중좌우 조방장으로, 이옥(李沃)을 충청 방어사로 하다.
16일. 왜적의 군사가 길을 나누어 전진했는데, 중도(中道)로 오는 왜적이 양산(梁山)을 지나면서 그곳을 깡그리 불태워 버렸다. 김수는 영산(靈山)에 이르러 왜적이 이미 양산을 통과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 밀양(密陽)으로 달려갔는데, 적병이 대거 이르자 바로 영산(靈山)으로 후퇴하였다가 밤중에 초계(草溪)를 건너 전라 감사에게 이첩하였는데, “구원을 계속해 달라는 부산ㆍ동래ㆍ양산이 이미 함락되었고 적이 또 밀양(密陽)에까지 범했는데, 그 병세(兵勢)를 보니 사세가 버티어 나가기 어려워 또 함락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의 일은 정말 말할 수도 없는 형편이고 이 일을 생각하니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이는 개인의 화가 아니고 나라의 일이니, 귀도(貴道)의 군사 3, 4천 명과 도의 군관 3, 4명을 보내 주시오.” 하다. 이 통첩이 도달하자 호남은 겁에 질려 들끓고 다들 적을 피할 마음만을 지니고 있었다.
○ 경상 좌병사 이각(李珏)이 후퇴하여 소산(蘇山) 동래의 속역(屬驛)이다. 에 머물렀다. 이각은 이날 병영으로 달려 돌아가서는 싸우고 지키고 하는 대비에는 뜻이 없었고, 수석 진무(鎭撫)를 독촉해서 사람과 말을 내어 자기 첩과 면포(綿布) 천여 필을 운반해 옮겨 놓으라고 시키다. 진무가 어려운 기색을 보이자 이각이 대노하여 당장에 그를 목 베다. 본도《순영록》에 나온다.
○ 경상 좌수사 박홍(朴泓)은 왜적이 도달했다는 소식을 듣고 양식과 기계를 불태우고는 도망쳐 버리다. 본도《순영록》에 나온다.
17일. 좌우의 왜적이 여러 고을에 가득 찼고 길을 나누어 진격하다. 한 대열은 언양(彦陽)에 함빡 몰려 들었다가 이어 경주(慶州)를 범했고, 중도(中道)로 오는 왜적은 곧장 밀양 가는 길로 해서 바로 들어 갔다. 부사 박진(朴晉)은 양산에서 후퇴하여 돌아와 황산(黃山)의 높은 잔교(棧橋)가 강에 임해 있는 그곳에서 적의 길을 막았다. 적장은 은색 가마를 타고 은색 우산을 펴고서 줄기차게 휘몰아 바싹 뒤쫓았다. 박진은 힘을 내어 싸워 여러 급(級)의 목을 베었고, 박진의 군관 이대수(李大樹)와 김효우(金孝友) 역시 연달아 여러 왜적을 쏘아 죽이고 자신도 탄환에 맞아 죽었다. 그러나 왜적이 이미 재[嶺]를 넘어 그의 귀로를 끊어 앞뒤로 적을 맞이하자 박진이 본부(本府)로 달려 돌아와 창고를 불사르고 성을 나섰는데, 왜적은 이미 성 밖에 가득 차 있었다. 박진은 단기(單騎)로 충돌하여 포위를 허물고 왜적의 목 2급(級)을 벤 다음 달아나니, 이로 말미암아 원근의 사람들은 곧 박진의 이름을 알게 되다.《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18일. 왜적의 배 2백여 척이 부산에서 이동하여 김해(金海)를 함락시키자 부사 서예원(徐禮元)은 성을 버리고 달아나다. 애초에 중위장(中衛將)인 초계군수 이유검(李惟儉)이 서문을 지키고 서예원은 남문을 지키면서 종일 접전했는데, 밤중에 이유검이 야경(夜警)이라 사칭하여 문지기를 찍어 죽이라 하고는 먼저 도망했고 서예원 역시 이유검을 추격한다고 청탁하고는 서문으로 해서 달아나, 김해성이 마침내 함락된 것이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19일. 적병이 밀양에서부터 또 영산(靈山)ㆍ청도(淸道) 등지를 범해 깡그리 불태워 없앴는데, 그 기세가 바람에 불길 같고 진동하는 우레 같아 지나가는 곳이 다 초토(焦土)가 되었다. 김수는 합천(陜川)에 머물러 있으면서 또 전라도에 이첩하였는데, “경상감사가 전달하는 일입니다. 흉악한 왜적이 어제 밀양에서 성을 함락시킨 다음 또 영산에 침범하고 곧장 성주(星州) 길로 향했는데, 이어 대구 길로 올라갈지의 여부는 미리 알 수 없습니다. 현풍(玄風)ㆍ창녕(昌寧) 등지의 공사(公私) 집들은 다 비어 있고, 본도의 각 병영에서는 모두 우관(右關) 운봉현(雲峯縣)에 달려가 보고했습니다.” 하다.
20일. 경상 우병사 김성일(金誠一)이 병영으로 갔다. 애초 김성일이 어명을 받고 잽싼 걸음으로 달려 내려가 의령(宜寧)에 당도하고는, 정진(鼎津)을 거쳐 병영에 직접 가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때 적병이 강의 우안(右岸)에 가득 모여 들자, 김성일의 휘하 장병들이 서로 말하기를, “이 길은 왜적의 소굴에 가장 가까우니 진주로 해서 함안(咸安)에 도달하느니만 못하다. 그렇다면 왜적과도 좀 멀리 떨어지게 되지만, 만약 그렇지 않으면 주장은 군령이 엄하여 곧장 전진하고 두려워하지 않으니, 이 길은 위험하다.” 하고는, “정진에는 배가 없습니다.” 하고 김성일을 속이고 다시 그의 아들 김혁(金湙)에게, “강물이 불고 배가 없으니 진주 길로 가는 것이 편리합니다.” 하고, 힘들여 간하도록 당부했다. 김성일이 군관 김옥(金玉)을 시켜 가보게 했는데, 김옥이 돌아와서는, “배가 없어서 건널 수 없으니 진주 길로 빨리 가야 하겠습니다.” 하고 속여 보고했다. 그때 전 목사(牧使) 오운(吳澐)이 촌락의 집에 있다가 새 장수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가서 배례하고, “영감이 오셔서 군민의 기운이 배가했습니다만 왜 정진으로 바로 건너지 않으시고 진주로 해서 돌아 가시려고 합니까.” 하니, 김성일이 깜짝 놀라면서 말하기를, “나는 이 길을 와 본 일이 없소만, 틀림없이 휘하 장병들이 왜적을 두려워하여 나를 속인 것이오.” 하다. 그리고는 직접 가서 보니 큰 배가 강 언덕에 대어 있었다. 김성일이 대노하여 김옥ㆍ김혁 등을 잡아들여 형을 집행하게 했는데, 김옥이 큰 소리로, “김옥의 죄는 마땅히 참형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공이 전쟁에 임하실 때 한 번 목숨을 바쳐 속죄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고 외치니, 김성일이 말하기를, “네가 속죄를 요구하였으니 앞으로 왜적을 만나거든 반드시 먼저 나서서 싸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의 죄까지 다스리어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하고는, 곧 군사들을 재촉하여 강을 건너 해망원(海望原)에 이르렀다. 전 병사 조대곤(曹大坤)이 이미 이곳에 후퇴하고 있었는데, 김성일을 보자 깜짝 놀라 읍하면서 맞이하고 그에게 직인과 부절을 넘겨 주고는 곧 하직하고 가려 하니, 이에 김성일이 그를 준렬하게 책하여 말하기를, “장군은 곤수(閫帥 병사나 수사를 일컬음) 신분으로 군사를 가지고도 진격하지 않고 우두커니 앉아서 김해(金海)를 함락당했으니, 그 죄는 마땅히 형을 받아야 하오. 더구나 세신(世臣)으로 나라의 후한 은혜를 받았으니, 이 극렬한 변란에 임해서 의리상 도망쳐서는 안 되오.” 하자, 조대곤이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띠면서 두 손으로 얼굴을 움켜쥐었다. 얼마 안 있다가 척후병이 와서 왜적의 선봉이 이미 도착했다고 알리자, 조대곤은 겁에 질려 어쩔 줄을 모르면서 김성일에게 말에 올라 타자고 재촉하는 것이었다. 김성일이 그를 꾸짖어 저지시킨 다음 군사들에게 망동하지 말라고 영을 내리고, 용맹한 군사를 골라 좌우의 복병을 잠복시키고 왜적을 기다렸다. 두 왜적이 흰 말을 타고 새깃으로 만든 옷[羽衣]과 금 갑옷에, 사방에 귀와 눈이 있어 빙글빙글 도는 게 답차(踏車)의 모양과도 같은 금가면(金假面)을 착용하고는 칼을 휘두르면서 말을 달려 앞으로 다가오자 장병들이 겁내어 떨었다. 그러나 김성일은 조대곤과 편안히 걸상에 마주 앉아 있었는데 왜적은 그가 꼼짝하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겨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고, 부채를 휘두르면서 걸어오는 왜적 수십 명이 그 뒤에 있었다. 김성일이 군관 20여 명을 시켜 앞에 가 그들을 쏘게 하고 또 용맹한 군사를 골라 돌격하게 했으나, 다들 서로 돌아보며 먼저 나가라고 미루는 것이었다. 김성일은 특히 김옥을 불러서 말하기를, “네 기왕에 먼저 나서서 공을 세우겠다고 하여 놓고 지금에 와서 회피할 수 있겠느냐.” 하니, 김옥이 곧 앞장 서서 말에 올라 수 리 밖에까지 쫓아가서 그 금가면의 말탄 왜적을 쏘아 거꾸러뜨리고는, 이긴 기세를 타고 추격하여 금안장[金鞍]ㆍ준마(駿馬)ㆍ보검(寶劍) 등을 빼앗아 가지고 돌아왔다. 이 전투는 병졸이 1천 명도 되지 않고 병기도 쓸어낸 듯이 없었건만, 적의 날카로운 칼날을 좌절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군의 사기가 약간 진작되매, 곧 군관 원사립(元士立)과 이숭인(李崇仁)을 시켜 괵수(䤋首)를 바치고 장계(狀啓)를 올리게 했다. 그리고 나서야 보졸들을 앞에 가게 하고 김성일은 맨 뒤에서 고삐를 조여잡고 천천히 갔다. 이날 밤 김성일이 함안으로 진을 옮기고, 내상(內廂)을 수습하려고 하였는데 자기를 체포하라는 어명이 내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충성스런 분기에 격동되어 사졸들이 목숨을 내놓고 죽기를 무릅쓰면서 힘을 내어 싸워 강한 왜적이 부지하지 못했는데 당시의 장병들은 왜 이것을 거울 삼지 않았는가.
○ 김수가 합천에서 지례(知禮) 쪽으로 도망쳤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21일. 우도(右道)의 왜적은 영산(靈山)을 거쳐 창녕(昌寧)ㆍ현풍(玄風) 등지를 지나서 깡그리 태워 없앴고, 중도(中道)의 왜적은 청도(淸道)로부터 경산(慶山)과 대구(大丘)를 지나가 홍수가 밀어닥치듯 산과 들을 메웠으니, 이때부터 강 좌우의 길이 막혀 버렸으며 좌도(左道)의 왜적은 울산(蔚山) 좌병영(左兵營) 등지를 향해 전진했다. 이각(李珏)은 서산(西山)으로 나가서 진을 쳤는데, 그때 열세 읍의 군사들이 모두 도착하여 성에 들어갔다. 안동 판관(安東判官) 윤안성(尹安性)이 동문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각이 성을 비우고 나가서 진을 치려고 하자 윤 안성이 말하기를, “어찌 성을 버리고 나가서 진을 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니 이각이 대답하기를, “공은 우후(虞候) 등 여러 수령(守令)과 성을 지키면 되오. 공이 가지고 있는 석전군(石戰軍)을 나에게 예속시켜 주기를 바라오. 나는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나가 서산에 진을 치고 왜적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안팎에서 협공하겠소.” 하다. 마침내 이각이 서문으로 해서 성을 나가더니 윤안성 등을 돌아보고 태화강(太和江)을 가리키면서, “너희들은 왜적의 선봉이 이미 저곳에 꽉 차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하고는, 곧 서산으로 향해 달려 가니, 윤안성이 흥분하여 꾸짖으며 칼을 잡고 그를 노렸다. 우후(虞候) 원응두(元應斗) 역시 도망칠 생각을 갖자, 윤안성이 성을 내며 힐책하기를, “주장이 까닭없이 성을 나갔으니 그 죄는 마땅히 참형을 받아야 한다. 그나마 너희들을 남겨두고 성을 지키게 했는데, 너희들까지 또 도망가려는 거냐.” 하니, 원응두가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적병의 또 한 패가 언양(彦陽)으로부터 사잇길로 해서 전진하여 경주를 함락시켰다. 그때 부윤(府尹) 윤인함(尹仁涵)은 포망장(捕亡將)으로 서천(西川)에 있었고, 판관(判官) 박의장(朴毅長), 장기 현감(長鬐縣監) 이수일(李守一) 등은 성 안에 있었다. 왜적의 기병(騎兵) 한 명이 동문 밖에까지 달려와서 패문(牌文)을 꽂아 놓고 갔다. 그것을 가져다 보니, “도주(島主)가 군사를 거느리고 왔으니, 판관은 속히 성을 나와 명령을 듣도록 하라.” 하고 씌여 있으매, 박의장 등은 성을 비우고 도망가 버렸다. 용궁 현감(龍宮縣監) 우복룡(禹伏龍)은 계원장(繼援將)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모양(牟陽)까지 달려가고 있었고 하양(河陽)의 대장(代將) 역시 군사 5백여 명을 거느리고 경주로 가고 있었는데, 하양은 본래 방어사의 소속이었으므로, 병사가 하양 대장으로 하여금 물러가 방어사의 지휘를 받게 하다. 우복룡이 막 길가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가 하양의 군사들이 후퇴하여 돌아가는 것을 보자, 그들이 왜적의 선봉이 된 게 아닌가 하고 의심하여 불러다 물어보게 하다. 대장이 사실대로 대답하였으나, 우복룡은 몰래 자기 군중(軍中)에 호령하여, “이들은 왜적의 앞잡이가 아니면 틀림없이 도망하는 군사들이다.” 하고는 자기 군사들을 시켜 하양의 군사들을 포위해 잡아다가 점검을 가장하고 깡그리 죽여버리니, 흘린 피가 개울을 이루다. 하양 한 고을의 군민이 이로 인하여 탕진돼 버리다. 우복룡은 곧 토적(土賊)을 잡아 목베었다고 방어사에게 사후 보고를 내다. 《경상도 순영록》에 나온다. 흉악한 왜적에게는 의기를 떨치지 못한 채 도리어 무고한 군사들에게 독수(毒手)를 옮겨 쓰고도 전혀 후회하지 않고 보고를 작성하여 공(功)을 요구했으니, 그런 못된 꼴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22일. 김성일(金誠一)이 체포 명령에 응하여 길을 떠나다. 앞서 김성일이 일본에서 돌아와 어탑(御榻) 앞에서, “일본은 반드시 군사를 출동시키지 않을 것이니 근심할 일이 없을 것을 보증합니다.” 하고 아뢴 적이 있었는데, 왜적의 변란이 일어나자 임금이 전번에 아뢴 말의 책임을 추궁하여 이 명령을 내린 것이다. 김성일이 체포 명령이 도달하리라는 소식은 들었지만 길이 막혀서 아직 당도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임금의 말씀이 아직 내리지 않았고 큰 적은 앞에 닥쳐 있는데, 병사로서 어떻게 진(鎭)을 쉽사리 버릴 수 있겠습니까.” 하였으나, 김성일은, “군명(君命)을 오래 지체시켜서는 안 된다.” 하고 곧 길을 떠난 것이다. 이날 우후(虞候)와 이협(李俠)이 군기(軍器)를 못물[池水] 속에 가라앉히고 창고를 태우고서 도망갔으며, 창원 부사(昌原府使) 장의국(張義國) 역시 성을 버리고 달아나다. 김성일이 가는 도중에 김수(金晬)가 나와 만나보고 그의 피체(被逮)를 위로하니, 김성일은 말이나 안색에 전연 나타내지 않고 다만,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원컨대 영공(令公)께서는 힘써 왜적을 토벌해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시오.” 하였다. 영리(營吏)들이 서로 말하기를, “체포된 것은 근심하지 않고, 나랏일만 걱정하고 있으니 참으로 충신이다.” 하다. 조대곤(曹大坤)이 용서를 받아 다시 병사가 되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왜적이 좌병영을 함락시키니, 이각(李珏)과 원응두(元應斗)는 이미 먼저 도망가 버렸고, 열세 읍의 군사들은 다 무너지다. 이각은 무예(武藝)가 뛰어났는데, 본직(本職 즉 좌병사)을 제수하자 그는 포를 쏠 때 탄환(彈丸) 대신 탄환 만한 10여 두(斗)의 해마석(海磨石)을 가지고 시험했는데 소리와 힘이 모두 격렬하니, 사람들이 그를 중진으로 여기게 되다. 그러나 한정없이 탐욕을 부렸고 천성은 또 겁이 많아 왜적이 지경을 침범해 왔다는 소리를 듣기만 하면 허둥지둥 어쩔줄을 몰랐으며, 동래(東萊)가 함락되자 몸을 빼어 달아났고, 병영이 포위되었을 때도 성을 비우고 먼저 도망가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당시 장수들은 겁이 많은데다 또 탐욕스러웠다. 자기 몸을 청렴하게 갖고 군사를 사랑하며 적을 막아 나라에 보답하는 자는 거의 없었으니, 이들은 실로 한(漢) 나라의 공명(孔明)이거나 송(宋) 나라 붕거(鵬擧)의 죄인들이다. 이각의 겁은 적을 보기도 전에 드러났고 이각의 탐욕은 국가가 어수선할 때에 나타났으니, 비단 옛 훌륭한 장수에 대한 죄인일 뿐 아니라 실로 당시 장병들의 죄인이기도 한 것이다.
○ 유학(幼學) 곽재우(郭再祐)가 군사를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다. 곽재우는 경상도 의령(宜寧) 사람이다. 처음에 그는 여러 성이 연달아 함락되고 여러 진(鎭)의 주장들과 방백ㆍ수령들이 모두 깊은 산으로 피하여 감히 교전하지 못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무섭게 나무라며 말하기를, “성스러운 조정에서 2백여 년 동안이나 신하들을 길러 왔건만, 갑자기 위급한 사태가 일어나자 모두 자신을 보전할 계책이나 찾고 임금의 난경(難境)은 돌보지 않으니, 지금 만약 초야에 묻힌 몸이라 하여 일어나지 않는다면 전국 3백 주(州)를 통틀어 남자란 하나도 없는 결과가 될 것이다. 어찌 만고의 수치가 아니겠느냐.” 이리하여 자기 가산을 전부 뿌려 흩어진 군졸들을 모으고, 자기가 입은 옷을 벗어선 전사(戰士)에게 입히고, 처자의 옷을 벗겨서는 전사들의 처자에게 입혔으며, 또 충의로써 군사들을 격려하였다. 이때부터 모집된 전사들 중에 심대승(沈大承)ㆍ권란(權鸞)ㆍ장문장(張文章)ㆍ박필(朴弼) 등 10여 인은 다 용감하고 활 잘 쏘는 사람들로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곽재우와 함께 죽기를 원하였다. 이날 서로 같이 의병을 일으킬 것을 약정하고 수하의 용사 50여 명을 시켜 의령(宜寧)ㆍ초계(草溪)에 있는 창고의 곡식을 풀어 내고, 또 기강(岐江)에 거둬들인 배의 조세미(租稅米)를 가져다가 모집한 군사들을 먹이니, 사람들의 말이 자자하여 어떤 사람은 그가 발광한다고 생각하였고, 어떤 사람은 그가 도적질을 한다고 생각하였다. 합천 군수(陜川郡守) 전현룡(田見龍)도 그를 토적(土賊)이라고 순찰사(巡察使)에게 보고하여 군졸들이 다 흩어져 버렸었는데, 그때 마침 초유사(招諭使)가 내려와 그의 이름을 듣고는 그를 불러다 만나 보고야 의병을 일으키라고 격려하니, 이리하여 군졸들이 되돌아왔다. 이에 곽재우는 더욱 힘을 내어 왜적을 토벌하였다. 적이 많고 적은 것을 묻지 않고 곧장 앞으로 나아가고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한 사람으로 열 명을 당해내었다. 그가 싸울 때는 반드시 붉은 생초[紅綃]에 안을 댄 옷을 착용하고 당상관(堂上官)의 입식(笠飾 융복(戎服)의 갓에 갖추던 장식을 말함)을 갖춘 갓을 쓰고,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자호(自號)하고 말을 달려 적진을 빼앗곤 했는데, 그가 내왕하는 동작이란 잽싸게 출몰하는 것이어서 왜적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그런 후에 그는 말을 빙그르 돌리고 북을 치면서 천천히 가는 것을 군사를 움직이는 절차로 삼으니, 왜적들은 그의 군사가 많은지 적은지를 몰라서 감히 바싹 다가오지 못하였다. 그는 진을 친 곳으로부터 왜적이 있는 곳에까지 이르는 길의 2, 3식경(食頃)의 거리마다 잇달아 척후소를 두어 이상(異狀)의 유무를 은밀하게 보고하도록 마련하였으니, 왜적이 1백 리 밖에 도착해도 진 안에서 그를 먼저 알고 미리 준비하고 있는지라 언제나 편하고 힘이 들지 않았으며 언제나 조용하고 시끄럽지 않았다. 만약 왜적이 많이 오면 그들이 바라보이는 산에다 사람들을 시켜 손잡이 하나에 가지가 다섯씩 달린 횃불을 밤새도록 들고서 무서운 함성을 올리며 서로 호응하게 하여 천병 만마(千兵萬馬)가 있는 것같이 하였으니, 왜적들은 바라보다가 곧 달아나 버렸다. 또 정예한 군인을 골라서 요새지에 잠복시키고는 사람이 없는 것같이 잠자코 있다가 왜적이 오면 곧 쏘아 죽이게도 하였으니, 왜적 역시 그를 ‘홍의장군’이라 하고 감히 상륙하여 불사르고 노략질을 하지 못하였다. 곽재우는 또 군사들을 단속하여 말하기를, “요(要)는 왜적을 죽여야 하는 것뿐이다. 목을 베어다 공(功)을 요구해서 무엇하겠느냐. 만약 후일 공의 대가(代價)를 받기 위해서 왜적을 토벌한다면 그것은 성심에서 우러나 하는 일이 아니다.” 하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그 말을 좇아 끝내 수급(首級)을 바치는 일이 없었다. 순찰사의 진에 있던 무사 김경로(金景老)ㆍ김경납(金景納) 등이 곽재우를 모함하자, 곽재우 역시 김수(金睟)가 하는 짓에 분개하여 격문을 돌려 그의 죄를 성토하고 그를 토벌하려 하였지만, 김수가 곽재우를 모반죄로 몰아서 장계를 올리는 바람에 곽재우는 헤아릴 수 없는 죄에 빠져들게 되었는데, 초유사가 양편을 조정해 준 덕으로 마침내 무사하였다. 또 초유사가 삼가(三嘉)의 군사를 곽재우에게 주니, 곽재우는 두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고서 윤탁(尹鐸)을 대장(代將)으로, 박사제(朴思齊)를 도총(都摠)으로, 허자대(許子大)를 군기제조(軍器製造) 책임자로, 정연(鄭演)을 독역사(督役使)로, 권란(權鸞)을 돌격장(突擊將)으로, 이운장(李雲長)을 수병장(收兵將)으로, 심대승(沈大承)과 배맹신(裵孟伸)을 선봉장(先鋒將)으로, 허언심(許彦深)을 군 급량(給糧) 책임자로, 강언룡(姜彦龍)을 무기 수리(武器修理) 책임자로 하였다. 초유사는 또 전 목사 오운(吳澐)을 소모관(召募官)으로 하여 그 수(즉 모집한 군사들의 수효)를 파악하는 일까지 겸임시키고, 성세(聲勢)를 이루어 곽재우를 돕게 하였다. 시골의 넉넉한 집에서는 쌀을 내고 소를 잡아 매일 돌려가며 군사들을 먹이니, 군의 성세가 크게 떨쳤다. 강의 아래 위에 있는 10여 개 소의 얕은 여울목마다 모두 척후를 잠복시켜, 왕래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아 서로 응원하니 왜적이 감히 물을 건너 오지 못하였고, 여러 고을 백성들은 평화시와 다름없이 농사를 지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초야에서 일어나 충의(忠義) 두 글자를 받들고 수륙에서 승리를 거두어 왜적 1백 급(級)을 쏘고 베고 하여 죽였다.
○ 한성 판윤(漢城判尹) 신립(申砬)을 도순변사(都巡邊使)로 하고, 전 목사 김여물(金汝岉)을 종사(從事)로 하여 대군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가게 하였는데, 신립이 출동할 때엔 위의가 엄숙하여 사람들이 감히 우러러보지 못하다. 우리나라의 장수는 비록 이름은 훌륭하지만 위엄과 용맹 하나뿐이다. 다른 나라에서 온 적들이 어찌 너를 살려 주겠는가. 아깝다! 어떻게 이 왜적을 제압할 건가.
23일. 중도(中道)로 오는 대부대의 왜적은 인동(仁同)을 불태워 버리고, 우도(右道)의 왜적은 현풍(玄風)으로 해서 길을 나누어 낙동강(洛東江)을 건너서는 성주(星州)를 불태워 버리니, 성주 판관(星州判官) 고현(高晛)은 도망쳐 달아났고, 목사 이덕렬(李德悅)이 겨우 몸만 살아 남아서 끝까지 고을을 지키다. 토적(土賊)이 성 안에 들어와 점거하고 있으면서 목사를 가칭(假稱)하고 우매한 백성들을 꾀어 모으자, 궁박해진 백성들은 의지할 데가 없어 토적에게 항복하고 부동하는 자들도 많다. 좌도(左道) 왜적의 한 떼는 경주(慶州)로부터 진격하여 영천(永川)을 함락시켰는데 군수 김윤국(金潤國)은 도망쳐 달아났고, 김해(金海)에 머물러 있던 왜적도 이날 진격하여 창원(昌原)을 함락시켜 병영을 모두 불태워 없애고, 이어 칠원(漆原)으로 진격하여 함락시키다. 또 좌도 왜적의 한 떼는 장기(長鬐)로 향해 진격해 왔는데, 현감 이수일(李守一)이 경주로부터 후퇴하여 돌아와서 장기성 밖에 진을 쳤으나, 적병이 사방에서 진격해 와서 이수일은 곧 후퇴하고 말았다. 영천에 머물러 있던 왜적은 신령(新寧)으로 진격하여 함락시키고 이어 안동(安東)으로 향했는데, 부사 정희적(鄭熙績)은 도망쳐 달아났고, 좌방어(左防禦) 성응길(成應吉)과 조방장(助防將) 박종남(朴宗男)은 의흥(義興)에 머물러 있으면서 움츠리고 물러난 채 나아가지 못하였다. 이때 김수(金睟)는 지례(知禮)에 머물러 있으면서 다만 도순찰사의 지휘만 받고 있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24일. 중도(中道)의 대부대 왜적은 인동(仁同)으로 해서 낙동강을 건넌 다음 선산(善山)으로 진격하여 함락시켰고, 신령에 머물러 있던 왜적은 의흥으로 옮겨 함락시키니 현감 노경복(盧景福)은 도망쳐 달아나다. 그때 김수가 박진(朴晉)과 배설(裵楔)에게 선산에 가서 왜적을 정탐하라 했는데, 도중에 죽패(竹牌)를 차고 있는 7명을 만났다. 그런데 그들은 박진 등이 왜적의 무리인가 의심하여, 말 앞에서 살려달라고 애걸하면서 꿇어앉아 왜의 글을 바치는 것이었다. 위쪽에는 크게 영(令) 자 한 자를 썼고, 그 아래에는 잔 글씨로, “군현의 백성들은 속히 옛집으로 돌아가 남자는 모를 심고 보리를 거두며, 여자는 누에를 치고 실을 뽑아 각각 자기 집 일에 힘쓰라. 만약 우리 군사가 법을 범하면 반드시 처벌한다. 천정(天正) 20년 월 일 습유시중(拾遺侍中) 평의지(平義智).” 라고 씌어 있고, 그 아래엔 이름까지 적혀 있다. 박진 등이 그들을 포박해 오다가, 졸지에 왜적을 만나자 버리고 달아났다. 그때 영남 사람으로 왜적에 항복하여 패(牌)를 받은 자가 부지기수라고 한다.
○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이 상주(尙州)에 이르렀는데 척후(斥候)에 밝지 못한지라, 왜적이 이미 선산을 지났다고 고하는 자가 있었는데도 이일은 그가 군중(群衆)을 현혹시킨다고 노하여 그를 목베어 죽인 다음 군중(軍中)에 돌려 보이니, 왜적이 이미 다가왔음을 듣고서도 감히 먼저 고하는 자가 없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어리석은 자라도 천 가지를 생각하면 반드시 한 가지는 아는 게 있기 마련인데, 가소롭다, 차라리 한 가지도 아는 게 없을 망정 척후로 정탐을 하는 것은 병가(兵家)의 요략이요, 사술(詐術)과 궤모(詭謀)는 명장(名將)도 사양하지 않는 것이건만, 정도(正道)만 지켜 패배를 기다린다는 일은 옛날에도 있었단 말을 못 들었다.
25일. 대부대의 왜적이 선산으로부터 상주로 진격하여 함락시키매, 이일(李鎰)이 대패하여 달아났는데, 이날 새벽 안개가 자욱할 무렵 포성이 들려 오자 왜적의 선봉이 이미 죽현(竹峴)에 당도했음을 바로 알아채고 이일이 성 밖 북천(北川)에 나가 진을 치다. 왜적은 혹 칼을 번쩍이고 껑충거리며 들어오기도 하고 쥐새끼같이 엎드려 무릎으로 기어서 전진하기도 하여 순식간에 들판을 덮어버렸다. 아군이 저절로 붕괴되어 북천을 꽉 메우게 되매 왜적이 돌격하는 기병으로 짓밟게 하니 시체 쌓인 것이 산더미 같다. 종사관 박지(朴篪), 이일의 종사관이다. 이경류(李慶流), 변 기(邊璣)의 종사관이다. 윤섬(尹暹)과 판관 권길(權吉) 등은 다 살해되었고, 이일은 겨우 몸만 빠져나와 달려 충주(忠州)로 돌아오다. 박지는 김수의 사위다. 그때 나이는 22세, 홍문관 교리로 조정에 있었는데 이일이 어명을 받았을 때 김수는 막 경상 감사가 되었었다. 박지가 자기 군중에 있으면 김수도 반드시 마음과 힘을 기울여 주리라 생각하여 자기의 종사관으로 해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였고, 임금이 그대로 윤허했었는데 이때에 와서 죽은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박지는 왜적의 손에 죽은 것이 아니고 산골짜기로 피해 들어가 있다가 함양(咸陽) 사람 인언룡(印彦龍)을 만나서, “나는 18세에 장원 급제하여 나라의 은혜를 받았건만 지금 전쟁이 불리해졌으니 무슨 면목으로 다시 용안(龍顔)을 뵙겠나.” 하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한다.
26일. 흉악한 왜적이 상주(尙州)로부터 함창(咸昌)과 문경(聞慶)을 연달아 함락시키다. 문경 현감 신길원(申吉元)은 변란 초기부터 관청의 문을 떠나지 않았다. 이날도 막 대문 앞에 앉아서 관의 창고를 부수어 흩뜨린 토적(土賊)을 처형하고 있었는데, 왜적이 갑자기 방비가 허술한 문으로 해서 들어왔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 흩어졌고, 신길원은 홀로 말을 타고 산 기슭으로 피해 들어갔다. 왜적이 쫓아가서 그를 항복시키려고 하였으나 신길원이 호되게 꾸짖고 굽히지 않자 왜적이 그의 사지를 절단한 후에 죽였는데, 그는 죽을 때까지도 꾸짖는 소리가 입에서 끊어지지 않았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그의 한 줄기 충절을 만고에 누군들 맞설 수 있으랴. 문경(聞慶) 전후로 오직 수양성(睢陽城)에서 순절한 장순(張巡)이 있을 뿐이다.
○ 좌도 왜적의 한 떼가 군위(軍威)를 불태워버리고 연달아 비안(庇安)을 함락시키니 현감 김인갑(金仁甲)이 도망쳐 달아났고, 한 떼는 장기(長鬐)로부터 영일(迎日)과 감포(甘浦)를 불태우고 약탈하다. 안동 판관 윤안성(尹安性)이 단기(單騎)로 부(府)에 돌아왔는데 부사가 도망쳤음을 알고서, 서쪽으로 풍기(豐基)에 가니 군수 윤극임(尹克任) 역시 성을 버리고 도망가다.
○ 김수(金睟)가 지례(知禮)로부터 거창(居昌)에 돌아와 초계 군수(草溪郡守) 이유검(李惟儉)을 목베다.
○ 신립(申砬)이 용인(龍仁)을 지나다가 왜적의 기세가 창궐한다는 소식을 듣고 밀계(密啓)를 올려, “왜적의 기세가 무척 성해서 정말 막아내기 어렵습니다. 오늘날 사세가 답답하고 절박하기가 그지없습니다. 운운.” 하니, 도성에서는 신립을 간성(干城)같이 믿고 있었는데 답답하고 절박하다고 한 밀계의 소식을 듣고, 사민(士民)들이 들끓고 두려워하여 밤낮으로 도망쳐 흩어지다.
○ 신립이 달려 충주(忠州)를 지나서는 조령(鳥嶺)을 막아 적의 길을 끊으려고 하였으나 길이 험하고 막힌 데가 많아서 말타고 활쏘기가 불편하겠기로 후퇴하여 충주로 돌아오고 있었는데 도중에 이일(李鎰)을 만났다. 신립이 왜적의 정세가 어떤가를 물으니, 이일이 대답하기를, “이 적은 경오년(1570, 선조 3)과 을묘년의 그것과는 견줄 게 아니며, 경오년의 왜적은 겨우 웅천(熊川) 두어 고을을 함락시키고는 패하여 돌아갔고, 을묘년의 왜적은 달량(達梁)을 함락시켜 병사(兵使) 원적(元迪)을 죽이고는 잇달아 강진(康津) 등의 고을을 함락하여 영암(靈巖)에까지 왔다가 패하여 돌아갔다. 또 북쪽 오랑캐같이 쉽사리 제압되지도 않습니다. 이제 험준한 데를 점거하여 적의 길을 끊지 못하였으니 만약 넓은 들판에서 교전한다면 당해낼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후퇴하여 서울이나 지키십시오.” 하니, 신립이 성을 내어 말하기를, “너는 패군(敗軍)한 데다 또 군졸들을 경동(驚動)시키니 군법으로는 목베어야 마땅하다마는, 왜적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공을 세워서 속죄하여라.” 하고, 마침내 달천(㺚川)충주의 땅이다. 에 주둔하다.
27일. 전라 방어사 곽영(郭嶸)과 조방장(助防長) 이지시(李之詩)가 군사 5천을 거느리고 남원(南原) 운봉(雲峯)으로부터 함양(咸陽)으로 향하여 영남을 구원하러 가다.
○ 흉악한 왜적이 조령을 넘어 달천으로 달려 들어오니 신립은 패전하여 죽었다. 당초 적병은 두 재[嶺]의 넘기 어려움을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그곳에 당도하자 산길은 고요하고 사람의 발자취도 전연 없는지라 마침내 크게 기뻐하여 날뛰면서 곧장 충주를 범했다. 한편 신립은 여러 도의 정병(精兵)과 무관 2천 명, 종족(宗族) 1백여 명, 내시위(內侍衛)의 군졸 등 도합 6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조령으로부터 다시 충주로 후퇴하였는데, 종사 김여물(金汝岉)이 이일(李鎰)의 말에 따라 산길을 굳게 지키자고 요청하였으나, 신립은 듣지 않고, “바다를 건너온 왜적은 빨리 걷지 못한다.” 하고는, 마침내 달천을 등지고 탄금대(彈琴臺)에 진을 쳤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후 척후장(斥候將) 김효원(金孝元)ㆍ안민(安敏) 등이 달려와서, “왜적의 선봉이 이미 다가왔습니다.” 하고 고하자, 신립은 그들이 군중을 놀라게 한 일에 노하여 당장 그 두 사람을 목 베고 이어 영을 내려 진의 대오를 바꾸게 하였다. 그러나 적병이 이미 아군의 뒤로 나와 천 겹으로 포위하자 장병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모두 달천의 물로 뛰어들었다. 왜적이 풀을 쳐내듯 칼을 휘둘러 마구 찍어대니 흘린 피가 들판에 가득 찼고 물에 뜬 시체가 강을 메웠으며, 신립과 김여물도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정병은 충주와 상주 두 전투에서 다 섬멸되었다고 한다.
○ 경상 우병사 조대곤(曹大坤)이 후퇴하여 회산서원(晦山書院)에 숨다. 때마침 창원(昌原)에 잔류하고 있던 왜적 40여 기(騎)가 피란하는 사람들을 추격하면서 강물을 거슬러 건너와 의령(宜寧)의 신반(新反)을 약탈하고 마침내 빈틈을 타 성으로 들어가서는 관아와 성문을 불사르니, 조대곤이 마침 삼가(三嘉)에 있다가 대부대의 왜적이 닥쳐온 줄로만 생각하고 군기와 북을 버리고 숨었던 것이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비안(庇安)의 왜적이 예천(醴泉)의 다인현(多仁縣)으로 나가 주둔하고 중도(中道)의 대부대 왜적이 인하여 충주를 함락시키니, 목사 이종장(李宗長)은 도망쳐 달아나다. 그때 충주 등지의 사람들은 신립의 대군만을 믿고 집에 있다가 변란을 당한 것인데 뜻밖에 신립의 군대가 패하였다. 적병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죽이고 약탈하고 하는 참상이란 더욱 말할 수 없다. 왜적이 우리나라에 말을 전해오기를, “정탁(鄭琢)과 이덕형(李德馨)을 내보내라. 운운.” 하다.
28일. 성주(星州)의 왜적이 개령(開寧)과 금산(金山)을 연달아 함락시키다. 우도의 방어사 조경(趙儆)과 그의 종사 이수광(李睟光)이 군사들을 거두어 가지고 추풍(秋風) 금산의 역 이름이다. 을 막아 적의 길을 끊었으나 군사들이 무너져 달아나다.
○ 경상 좌도의 조방장(助防將) 박종남(朴宗男)이 의성(義城)으로부터 사잇길로 해서 안동(安東)의 풍산(豐山)으로 후퇴하고는 창고를 깡그리 불사르고 가버리다. 왜적은 다인(多仁)에서 하풍진(河豐津)을 건너 함용(咸龍) 땅으로 전진하여 당교(唐橋)에다 진을 치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경상 감사의 영리(營吏)인 이(李)란 사람이 전라감사에게 고목(告目)을 보내며 말하기를, “지금 도착한 소식통에 의하면 왜적들이 옷 안에 갑옷을 입었는지의 여부는 모르겠으나, 옷 밖에는 모두 갑옷을 입지 않고 병기인즉 단지 철환(鐵丸)을 쏘고 칼을 쓸 뿐입니다. 다른 재주는 없으나 다만 철환을 쏘지 않는 사람은 없고, 그 쏘는 것이 빗발치듯 하여 그 때문에 그들을 제압하기가 어렵습니다. 여러 고을의 군기고 외에 관사 같은 것은 태우지 않고, 읍내와 길가에서는 큰 집과 좋은 마을만을 골라서 불을 지릅니다. 중도(中道)의 왜적은 그 수를 이루 헤아릴 수도 없는 정도라서 그들은 동래(東萊)ㆍ양산(梁山)ㆍ밀양(密陽)ㆍ청도(淸道)ㆍ경산(慶山)ㆍ대구(大丘)ㆍ인동(仁同) 및 선산(善山)을 거쳐 오며 다 태워 버렸습니다. 적들이 상주(尙州)에 이르렀을 때 순변사(巡邊使)가 그들과 접전하였지만 적군은 많고 아군은 적어 패배당했습니다. 왜적의 무리는 상주와 함창(咸昌)도 태우고 이미 조령(鳥嶺)에 이르렀고 불일간 조령을 넘어갈 기세까지 있다고 합니다만, 넘었는지 안 넘었는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우도의 왜적은 겨우 4, 5백 명으로 김해(金海)ㆍ창원(昌原)으로 해서 우병영을 불태웠는데, 이곳에 이르렀을 때 우병사가 그들과 접전했으나 이기지 못했습니다. 왜적은 함안(咸安)ㆍ칠원(漆原)ㆍ영산(靈山)ㆍ창녕(昌寧)ㆍ현풍(玄風)을 거쳐 오면서 모두 불태웠고, 거기서부터 둘 내지 세 대열로 나누어 편성했는데 한 대열은 2백여 명으로 지금 성주(星州)에 도달해서 막 그곳의 여러 마을을 수색하고 있고, 또 한 대열의 1백 5, 60명은 의령(宜寧)ㆍ삼가(三嘉)ㆍ합천(陜川)을 거쳐 고령(高靈)의 뒤로 향했는데 역시 그 후에 간 곳은 모르겠습니다. 또 흩어진 왜적 □3명은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몰래 금산(金山)에 도착하자 우도의 방어사가 접전했는데 아군이 무너져 달아난 후 간 곳은 역시 모르겠습니다. 우도의 왜적이 어느 길로 해서 올라갈 계획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좌도의 경조(慶州) 길로 해서 가는 왜적이 올라갈지의 여부에 관해서도 한 번 변이 일어난 후로는 여러 고을이 텅 비고 도로는 끊기고 막히고 하여, 한 장의 소식도 받아 보지 못했습니다. 한편 왜선 20척이 부산포(釜山浦)를 떠나 이미 거제도(巨濟島)에 도달했는데, 우수사와 전라 좌수사가 지금 그를 공격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왜적이 가는 곳마다 젊은 남자는 모두 목 베고, 늙은이와 어린이 및 여인은 죽이지 않으나 예쁜 여자와 여염집에서 훔친 물건은 소와 말에 실려서 길에 연달아 있습니다. 싣고 가는 소와 말은 모두 우리나라 사람들을 시켜 끌고 가게 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을 사로잡아다가 자기 무리로 삼은 것이 태반이나 됩니다. 이 밖에 소소한 행동을 낱낱이 들어서 말하기 어렵기에 대강 써 보냅니다. 운운.” 하다.
○ 우도의 왜적이 호서(湖西)로 들어가 황간(黃澗)ㆍ청산(靑山) 등의 고을을 불태우다. 이 길의 왜적은 그 수효가 사실 적어서 양호(兩湖)의 군사로 넉넉히 막아낼 수 있었는데, 장병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멀리서 왜적을 바라보고는 먼저 무너졌다. 비록 적군은 정예하고 아군은 둔하다고 하나, 사실은 장병들이 마음을 다하지 않은 데서 그렇게 된 것이다. 아깝다, 양호의 허다한 고을에 한 사람의 의사(義士)도 없었던가.
○ 적병이 충주(忠州)로부터 곧장 경기로 향하다. 임금은 신립(申砬)이 패전하여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다음, 이어 적병이 이미 경기에 다가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드디어 서쪽으로 명 나라에 긴급한 사정을 고하기로 계획을 정하고 우선 이원익(李元翼)과 최흥원(崔興元)을 보내어 평안도ㆍ황해도를 순찰하게 하고, 또 대신에게 명해서 광해군(光海君)을 세자로 책립하여 군사와 국무의 중대한 일을 감무(監撫)하도록 하게 하였다. 대신 유홍(兪泓)이 울며 간하기를, “종묘와 사직이 여기에 있고 신민들이 여기에 있는데, 전하께서 어디로 가십니까. 가벼이 움직여서 사람들의 마음을 놀라 흔들리게 하셔서는 안됩니다.” 하였다. 임금이 곤룡포로 눈물을 닦으면서 긴 한숨을 내쉬고 나서, “내가 어디로 가겠소.” 하고는, 백성들의 협력을 얻기 위해 곧 성을 등지고 한바탕 싸워 볼 계획하에 애통한 교서를 내렸다. 판서 김명원(金命元)을 도원수(都元帥)로 하여 경기의 남은 장정을 있는 대로 거느리고 한강 가에 진을 치게 하고, 병조와 비변사(備邊司)에게는 성을 지키는 기구를 독려해 마련하도록 하였다. 열흘 가까이 되자 백성들이 모두 무너지고 아무도 말을 듣지 않는지라, 급히 명령을 내려 성문을 엄격히 지키고 사람이건 물건이건 출입을 허락하지 말라 하였다. 그러나 성 안의 사람들은 귀천 남녀 할 것 없이 밤낮으로 성에 줄을 걸고 내려가 다 달아났으며, 어떤 사람은 자기의 권속이 뿔뿔이 헤어질까 두려워한 나머지 줄로 서로를 엮어 도망치기도 하였다. 서울 안의 불량한 무리들은 작당하여 고운 여인과 재물을 찾아다니다가 보기만 하면 곧 약탈하고 하였는데, 상대가 고관이라 해도 분별함이 없었다. 그리하여 피해자들이 길에 가득했고 부자(父子)와 부부가 서로 잃어버린 채 도망쳐갔다. 임금은 인심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적을 피하기로 결심하였다. 아깝다! 2백 년 동안 휴양한 끝에 어찌하여 인심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 하늘과 땅에 부끄러움을 느낄 뿐 아니라 또한 흉악한 왜적의 무리에게까지도 부끄럽다.
29일. 전라감사 이광(李洸)이 여러 고을로 하여금 근왕병(勤王兵)을 징발하게 한 것이 10여만 명이 되었고, 경상 감사 김수(金睟) 역시 타고 남은 병력을 수습하여 양호(兩湖)의 군사와 함께 가고자 거창(居昌)에서 함양(咸陽)으로 가다. 그때 영남 60여 고을은 깡그리 함락되었고, 오직 우도의 6, 7읍만이 겨우 병화를 모면했으나 군졸들은 이미 흩어져 없었다.
30일. 거가(車駕)가 서행(西幸)하다. 이보다 수일 앞서, 서울 안이 싹 비어 버렸고 대소의 신료(臣寮)ㆍ근시(近侍)ㆍ위졸(衛卒)들이 일시에 흩어져 가 버리니, 임금은 가슴 아프게 울면서, “2백 년이나 길러온 그 속에 충신과 의사(義士) 없음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구나!” 하고는, 밤중에 중전과 함께 여러 궁인(宮人)들을 거느리고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받들고서 서울을 떠나서 아침에 벽제(碧蹄)에 이르렀다. 도중에 비를 만나 곤룡포는 다 젖었고, 동네가 텅 비어 팔진미(八珍味) 식사도 궐한 채 장단(長湍)으로 달려갔으나, 부사는 이미 도망했고 사방을 둘러 보았으나 사람이라곤 없어 일행이 모두 굶주린 채 잠시 쉬고는 곧 개성부(開城府)로 향하다. 이때에 편히 살며 침식(寢食)하는 백성들은 어찌하여 충의심을 일으키어 왜적을 토벌하지 않고 이날 같은 전례없는 비통을 남겼단 말이냐!
○ 전라 방어사 곽영(郭嶸)이 군사를 거느리고 금산(金山) 땅에 이르자 본도 우방어사 조경(趙儆) 등이 와 합세하여 금천역(金泉驛)에 이르러 왜적 5급(級)을 베었다. 이어 군(郡) 내에 잔류한 왜적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군사를 전진 포위하여 잡아 30여 급을 목 베었으며 아군의 피해는 50여 명이었다. 곽영이 곧 전라도에 돌아와서 막 접전할 때 한 왜적이 긴 칼을 가지고 마구 들어와 조경을 치려 하였는데, 조경이 맨손으로 그 왜적을 껴안고 오랫동안 버티고 있을 무렵 군관 정기룡(鄭起龍)이 돌진하여 그 왜적을 베니 조경이 살아날 수 있었다.
○ 전라 조방장(助防將) 이유의(李由義)가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충청도로 향했다가 곧 전라도로 돌아가다. 애초에 선전관이 서울에서 본진(本陣 즉 전라도에 있는 이유의의 진을 말함)에 와서 교지를 전하기를,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충주(忠州)로 달려가서 신립(申砬)의 지휘를 받아라.” 하였다. 이유의가 어명을 받고 연산(連山)까지 갔었지만 신립이 이미 패하여 왜적이 경기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자, 군사를 끌고 돌아간 것이다.
○ 왜적이 우리나라 장병이 잘 무너짐을 알자, 소수의 군사로 깊이 들어가는 위험성에 대한 의구심도 갖지 않아 혹은 10여 명, 혹은 5, 6명으로 패를 지어 마구 돌아다니며 도적질을 하다.
5월 1일. 흉악한 왜적이 경기도에 가득 들어와 한강 이남이 연기와 화염으로 하늘이 자욱하고 포성이 땅을 뒤흔드니 용인(龍仁)ㆍ수원(水原)ㆍ광주(廣州) 등지가 깡그리 불타버리다.
○ 남원 부사(南原府使) 윤안성(尹安性)이 경내(京內)의 민심이 흉흉하고 두려워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곧 개유첩(開諭帖)을 내리기를, “듣자니, 민간인들이 변란의 소문을 듣고 소요를 일으키며 다들 다른 데로 피해갈 계획을 하고 있다 하나, 호남과 영남 사이에 높은 산과 큰 개울이 있으니 졸지에 닥쳐올 근심은 전연 없다. 더구나 지금 경상 우수사가 왜적을 많이 잡아 승세(勝勢)가 크게 떨치고 있으니, 각기 마음을 놓고 생업에 안정하여 서로 경동(驚動)하지 말고 함께 농사일에나 힘써라.” 하다. 남원은 호남과 영남 사이에 있고 내가 본부, 즉 남원에 있었기 때문에 호남ㆍ영남 및 본부의 일을 기록하는 것이 퍽 상세한 것이다.
2일. 적병이 대거 진격하여 한강변[漢濱]ㆍ광나루[廣津]ㆍ마전(麻田)ㆍ사평(沙平)ㆍ동작(銅雀) 등처에서 일시에 떼[桴]를 타고 마구 건너왔는데, 강을 수비하던 군사들이 모두 흩어졌다. 배리(陪吏)가 원수(元帥)의 교의(轎椅) 밑에 엎드려서 고하기를, “적병이 강을 건너왔는데 군졸들이 다 흩어졌으니 어찌하면 좋습니까?” 하고 재삼 고하여도 전연 대꾸가 없기에 쳐다보았더니, 원수는 이미 간 데 없고 다만 빈 상(床)만 있을 뿐이었다. 왜적이 강을 건너와서는 대단히 기뻐하면서, “고려국엔 사람이 없다 해도 좋다. 험한 고개[嶺]에도 군사가 없고, 긴 강도 수비하지 않는다. 만약에 한 사나이라도 막았던들 우리는 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였는데, 군사를 전진시켜 동ㆍ남대문 밖에 이르자 성 안이 고요하고 전연 사람의 형적이 없는지라, 왜적이 의심하여 밖에 머무른 채 들어오지 못하다. 이것은 선봉으로 온 왜적이었고 대부대의 왜적이 가득 몰려오기까지는 4, 5일의 거리가 된다.
○ 거가(車駕)가 송도(松都)에 이르자 잠시 멈추고 김명원(金命元)에게 명해서 임진강(臨津江)을 차단하게 하고 정철(鄭澈)과 윤두수(尹斗壽)을 방면하여 좌ㆍ우의정을 시켰으며, 동인과 서인의 싸움으로 벌을 받았던 것이다. 교지를 내려 호남과 영남의 군사를 소집하다. 교지는 아래 14일 조에 있다.
3일. 왜적이 장안성(長安城) 안으로 들어오다. 하루 전날, 왜적이 성문 밖에서 머무르고 있을 때 성 안의 반도(叛徒)들이 나와서 맞이하면서, “나라는 비었고 임금이 없으며, 성은 버려져 지키지 않는다.” 하자, 왜적이 그제서야 성 안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이에 앞서 경상도 양산(梁山)의 관노(官奴) 황응정(黃應禎)이 포로가 되었는데, 왜적이 글을 써서 보여주기를, “너의 나라는 방어는 해서 무엇할 거냐. 불과 20일이면 틀림없이 서울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보니 과연 그 말대로였다. 왜적들이 지나가는 여러 고을에는 모두 두목[酋]을 남겨두어 원[宰]이라 칭하고, 우매한 백성들을 꾀어 모아서는 창고의 곡식을 풀어주었으며 겸하여 명패(名牌)를 만들어서 그들이 항복하여 내부(來府)하였음을 표시하게 하니, 이 때문에 백성들이 많이 고식적으로 따랐던 것이다. 부산(釜山)으로부터 서울과 개성(開城)에 이르는 세 길의 상하 30리마다 진(陣) 하나씩을 설치해서, 깊이 들어가다가 길이 막히게 될 우려에 대비하였다. 서울에 입성한 후에는 먼저 궁궐과 종묘를 불태우고 연달아 공사(公私)의 가옥을 태우며, 숨겨 둔 재물을 뒤져내어 매일같이 본토(즉 일본)에 보내고, 군사들을 휴식시켜 관서(關西)와 북쪽 길로 향할 계획을 세우다.
○ 경상 좌병사 이각(李珏)과 좌수사 박홍(朴泓)이 각각 우후(虞候)들을 거느리고 방어사 성응길(成應吉), 조방장(助防將) 박종남(朴宗男)ㆍ변응성(邊應星), 안동 판관(安東判官) 윤안성(尹安性), 풍기 군수(豐基郡守) 윤극임(尹克任), 예천 군수(醴泉郡守) 변양우(邊良祐) 등과 근왕(勤王)을 핑계 삼아 영남을 버리고 죽령(竹嶺)을 넘어갔는데, 그 후 원수(元帥)가 임진강에서 이각을 목 베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칠포만호(漆浦萬戶) 문관도(文貫道)는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순행(巡幸)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서쪽을 향해 재배하고 퍽 오랫동안 통곡하였는데, 호남과 영남에서는 그를 의리있다고 여기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전라 감사 이광(李洸)이 전 부사 고경명(高敬命)에게 보낸 서한에, “대가가 서쪽으로 순행하고 서울은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나라의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통곡하고 또 통곡할 일입니다. 오늘 할 일이 있다면, 오직 애통하고 절박한 취지로 격문을 띄워가지고 사방의 충의있는 동지를 불러 유시하여 지체없이 군사를 일으킴으로써 하늘에 사무치는 통분을 씻기나 바라야겠습니다만, 격문의 말이 만약 간절하지 않으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킬 길이 없으니 격문을 거칠고 엉성하게 지어서는 안 됩니다. 격문을 지으셔서 속히 보여주기를 감히 바랍니다. 오장이 찢어지는 것만 같아 어찌할 바를 모르고 한갓 북쪽을 바라보고 통곡할 따름입니다. 또 이 뜻을 사중(士重)김천일(金千鎰)의 자(字)이다. 등의 제공(諸公)에게 알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다.
○ 고경명이 이광에게 보낸 답서에, “나라의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오직 매일같이 북쪽을 바라보고 통곡할 따름입니다. 방금 온갖 생각으로 어지러이 속태우고 있는 가운데 귀하의 글월을 지금 받았습니다만, 끝까지 다 펴 읽기도 전에 눈물이 마구 쏟아지는군요. 저 경명은 쇠병(衰病)으로 여생을 밭[田] 사이에 묻고 침상에 누워 있으면서, 위로는 행장(行裝)을 갖추고 급히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가서 문안드리지 못하고 또 막부(幕府)로 가서 군사 계획을 곁에서 돕지도 못하니, 근심과 부끄러움에 몸 둘 곳을 모르며, 한 번 죽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따름입니다. 말씀하신 격문은 제가 비록 오랫동안 글 짓는 일에서 손을 떼었지만, 의리상 감히 피하지 못하겠기에 삼가 이에 지어 보내 드립니다. 생각하건대 말의 조리가 엉성하여, 귀하께서 말씀하신 충의지사(忠義之士)를 창도하여 거병(擧兵)하게 하라는 취지를 선양할 길이 없음이 한스럽습니다. 다만 저 경명이 월초(月初)부터 이 고을 동부에 있는 집으로 옮겨와 있는데, 지금 귀하의 글월을 보니, 3일에 낸 것인데 6일에야 군졸이 빈 집에다 전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오래 늦어지기에 이르렀습니다. 늦어서 일에 맞춰 쓰이지 못할까 무척 근심하고 있습니다. 구구한 제 심정을 망령되이 진술할 것이 있어 별지(別紙)에 기록했습니다. 간절히 바라거니와, 귀하는 못난 이 사람이라 해서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을 버리지 마시고, 많은 사람들을 모아 충의의 뜻을 넓히시어 과연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우게 하십시오. 김사중(金士重)이 마침 편지를 보내왔기에 귀하의 뜻을 갖추어 전하였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운운. 나머지는 마음이 어지러워 이만 줄입니다.” 하고, 또 별지에, “오늘의 할 일 중엔 군대를 길러서 근왕(勤王)하는 것이 첫째 가는 충의입니다. 그리고 또 사람들의 마음을 굳게 단결시키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횡포한 왜적의 침범은 물론 그 소요스러움을 견딜 수 없기는 합니다만, 그러나 끝없이 군사를 불러 모은다면 백성들은 더욱 그들의 생업에 안정할 수 없습니다. 옛사람도 이르기를, ‘군사는 정예하기에 힘쓰지, 많기에 힘쓰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만약 잘만 쓴다면 지금 있는 군사로도 넉넉히 승리를 거둘 것이고, 만약 잘 쓰지 못한다면 아무리 많은들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다만 나라의 근본이 날로 흔들리고 나라의 일이 날로 빗나갈 뿐입니다. 대가가 서쪽으로 순행하셨는데, 기성(箕城 평양을 두고 한 말임)이 피폐하여, 백관과 유사(有司)의 수요를 공급해 줄 길이 없을 뿐 아니라 대관들의 식사 공급까지도 한심스럽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군산(君山)이 세미(稅米)를 바치러 강에까지 갔다가 돌아왔고, 법성(法聖)의 창고도 양곡을 실은 배가 아직 떠나지 않고 있다고 하는데,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지금 많은 상을 내걸고 조졸(漕卒)을 후하게 모집하고 서해로 배를 몰아서 대동강의 나루에 도달하게 해서, 가령 그 반만이라도 행재소(行在所)까지 보낼 수 있다면 비단 군대와 국가의 수요가 그 덕으로 충족될 뿐 아니라 사방의 인심까지도 역시 그것이 힘이 되어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왜적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와서 천 리를 전진하며 전투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그들로 하여금 외람되이 서울을 점거하게 하여 육로가 이미 막혔다고는 하지만, 서쪽의 바닷길들은 그래도 아직 막히지 않았으니 이번에 계획하는 일에 있어서는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평상시의 사례처럼 못난 말석의 용렬한 장수 따위나 억지로 시켜서 가지고 가게 한다면 의외의 변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 충성스럽고 용감한 사람으로 배질에 능통한 자를 뽑아가지고 정예한 군졸을 정해 주어 일면으로는 싸우고 일면으론 나아가는 계획을 행하게 한다면 군량이 무사히 도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행도(行都) 군사들의 사기 역시 조금은 진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바야흐로 민심이 소란하여 군사 모으기가 쉽지 않으니, 서둘러 조치해서 조졸(漕卒)만을 시켜서 전례대로 가지고 가게 하는 것도 혹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만약 열흘 정도나 지연되는 경우 저들 왜적이 약탈해 갈 생각을 내지 않으리라는 것도 모를 일입니다. 오늘날 조정의 호령이 군중에 이르지 않고 사방의 소식이 행도에 도달하지 않으니, 이야말로 통곡하며 눈물을 흘릴 일입니다. 만약 중한 값으로 보자기[鮑作]를 후히 모집해서 고기잡이를 하는 척하고 납서(蠟書)를 전달하게 하여 무사히 갔다 오면 관자(官資)에 보직(補職)해 주거나 혹은 미포(米布)를 넉넉하게 주는 두 가지 중에서 그가 원하는 대로 허락해 주고, 또 그 처자를 관□에 데려다 놓고 그가 돌아올 동안을 기한으로 매일 보통 지급하는 양보다 배가 되는 주식(酒食)을 지급해 주어, 밖으로 구휼하고 양육해 주는 은혜를 보이면서 안으로는 붙들어 두는 계획을 시행해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서 사방의 여러 장수들이 힘을 합해 근왕(勤王)하게 되면, 요는 수륙으로 동시에 진격해야 하는 것이니 대군은 곧장 탄탄한 길로 해서 진격하고 기병(奇兵)은 간간이 바닷길로 나아가, 왜적들로 하여금 앞뒤로 적(敵)을 맡게 하여 빠른 우레에 귀를 가릴 사이가 없듯 공격한다면 이는 또한 병가(兵家)에서 쓰는 기정(奇正)의 방법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다. 《정기록(正氣錄)》에 나온다.
○ 전라도 도순찰사를 시켜 도내의 부로(父老)와 군민(軍民)들에게 유시하다. 아! 조그마한 왜적들이 독하기론 벌과 전갈이 모인 듯하고, 천성은 뱀을 타고났도다. 그들은 음흉하게도 중국을 어지럽힐 마음을 품고는, 마구 날뛰는 침략 행위를 감행하여 성을 수십여 군데나 함락시키고 장병을 몇 천만 명이나 도륙하였건만, 겁쟁이인 수비 담당의 신하들은 그 소문을 듣자 쥐같이 도망쳐 버렸고 우매하고 놀란 백성들은 그 모습을 바라보자 굽이치며 달아났다. 영남의 산천은 깡그리 승냥이와 범 같은 왜적의 굴혈이 되었고, 호서의 초목은 반이나 개나 양같이 천한 왜적의 비린내로 물들었다. 석륵(石勒)의 도적들이 곧장 신주(神州)로 향하듯 쳐들어왔으니 종묘 사직의 수치가 한이 없고, 말갈(靺鞨 원문은 몰갈(沒喝))의 군대가 강가에 머무르려 하듯 한강에 임했으니 조정의 근심 또한 한정이 없다. 이 일을 생각하면 차라리 잠이 들어 깨어나지 않았으면 한다. 밤낮으로 애통한 조서(詔書)가 내리고 산과 강에 기도하는 정성을 드리게 되었으니, 온 땅끝까지의 피를 지닌 우리 모든 사람이 마음을 썩히며 팔를 걷고 나서야 할 일인 것이다. 누군들 주먹에 힘을 주고 창을 휘두르지 않겠는가.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린 법, 비록 서로 돕는 힘을 잃었다지만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하는 것이니 마땅히 근왕(勤王)하는 충성을 다할 것이다. 우리가 차마 원수와 더불어 같이할 수 없는 하늘을 이고 살 것인가. 전례 없는 치욕을 씻기 바라는 바이다. 관운장(關雲長)ㆍ장비(張飛)와 같은 맹장들이 범처럼 무섭고, 매가 공격하듯이 날랜 용사들은 숲과 같이 많다. 조사아(祖士雅)가 중원(中原)을 평정하겠다고 맹세할 젠 간담이 말[斗]같이 컸고, 장숙야(張叔夜)가 들어가 경락(京洛)을 구원하였을 땐 눈물이 은하수를 매단 것 같았다. 범을 그리고 용을 그린 기[虎旌 龍旌]로 장막 위에서 제비 둥우리를 쓸어버리듯 하고, 사모(蛇矛)와 월극(月戟)으로 솥 속에서 노는 물고기를 잡듯 하길 기대한다. 너희들 호남은 본래 예의의 지방으로 일컬어져 왔거니와 실로 인재가 많은 고장이다. 모두 질풍(疾風) 앞의 억센 풀[勁草]같이 굳은 절개를 나타내고 함께 변란기의 충신이 되어 다오. 그리고 우리 왕실이 2백 년 동안 길러 준 은덕을 생각하고, 너희들 억만 인의 강개에 찬 뜻을 한결같이 하여라. 윗사람을 친애하고 그를 위해선 죽어도 좋다는 각오를 하며, 대의(大義)를 무기로 앞장서서는 장수를 목 베고 깃발을 뽑아 적의 수레바퀴 한 짝까지도 돌아가지 못하게만 한다면, 그것이 어찌 일대(一代)에 공이 높았던 충갑(冲甲) 성은 원(元)이다. 고려 때 사람인데, 필부로 의병을 일으켜 근왕(勤王)하여 큰 난리를 평정하다. 아니면 후손에까지 은택을 미치게 했던 차달(車達)성은 유(柳)이다. 고려 때의 문화(文化) 사람이다. 난에 임하여 양곡이 모자라자, 차달이 수레를 가지고 개인의 양곡을 운반해다 군에 보급해 주었다. 난이 평정된 후, 차달이라고 이름을 내리고 녹훈(錄勳)하다. 만 못하다 하겠는가. 몸을 국가에 바치도록 권면하여 절조를 지키고 죽을 힘을 다하기를 기약할 것이요, 왜적 때문에 군부(君父)를 버리지 말고 힘을 다하고 목숨 버릴 것을 맹세하라. 격문이 도달하거든, 각각 충의로써 권면하여 장부들을 이끌고 밤낮을 가리지 말고 달려오라.” 하다. 이광(李洸)은 애초에 왜적이 서울 등지에까지 범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반역한 군사들의 유언비어가 아닌가 하고 의심했었다. 방백의 신분으로는 살아나기가 어려울 것으로 생각하고, 즉시 교서(敎書)ㆍ인신(印信)ㆍ절월(節鉞) 및 관대(冠帶)를 전주(全州)의 진전(眞殿)에 모아 두고는 고부(古阜)의 자기 본가로 피해 가다. 대중의 여론이 시끄럽게 일어나 그를 허물하자 그가 하는 수 없이 다시 군대를 맡아 보게 된 것이다. 이번에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로 향할 때 왜적의 소식이 희미하매, 본국의 역적이 왜적과 함께 서울로 올라간 것이 아닌가 하고 말하는 사람도 퍽 많다.
○ 이광이 영남의 장병들에게 아래와 같이 격문을 내다.
우리 국가는 13대에 걸쳐 태만한 일도 없었고 황음(荒淫)한 일도 없어서 도덕을 잃지 않았고, 2백 년 동안 가는 사람 좇지도 오는 사람 막지도 않아서 전쟁을 일삼지 않았으며, 조심스러이 강토를 지키며 세심하게 준비를 해왔다. 근자에 추한 오랑캐[醜虞 왜인을 말함]가 성의를 표해 오기로 성군(聖君)의 포용있는 도량을 약간 보여주었고 조정은 그들을 회유할 셈으로 그들의 말을 경솔하게 신용하였더니, 오랑캐의 마음이란 흉악하기 짝이 없어 마침내 의리를 배반한 음모를 구사하여 독사가 물듯이 악독한 마음을 앞다투어 내고 벌과 전갈 같은 독을 함부로 쏘아 우리 장병을 살해한 것이 만이나 천 이상이었고, 우리 성을 함몰시킨 것도 어찌 수십으로 헤아릴 정도이겠는가. 안진경(顔眞卿)의, “본 적이 없다.” 한 말과 양만석(楊萬石)의, “어찌 그리 많으냐.” 한 말은 이를 두고 한 말이요, 유총(劉聰)이 곧장 신주(神州)로 향하자 진실(晉室)의 위태로움이 다급하여지고, 말갈[沒喝]이 하상(河上)에 들어오자 송조(宋朝)의 치욕이 말할 수 없이 되었던 그 일에나 견줄 수 있겠나. 왜적의 죄는 이미 하늘까지 치닫아 귀신의 음주(陰誅)가 이미 의정(議定)된지라, 그들은 패하여 반드시 그 피를 땅에 칠하리니 우리 군사의 현륙(顯戮)을 가해야 할 것이다. 이제 충의를 무기로 삼는 삼군(三軍)으로 배성의 일전[背城之一戰]을 결행하려는 터에 누가 동창의 계교[東窓之計]를 내세우고, 서촉(西蜀)으로의 피란을 서둘러 권했단 말이냐. 깃발이 보일락 말락 봉천(奉天)으로 향하는 금 가마는 서리와 이슬에 젖었고, 처량하게 봉상(鳳翔)에 머무는 옥 수레에는 바람과 먼지가 날린다. 강(江) 위에 정정당당하던 우리 군사들은 물결처럼 달아나고 새같이 흩어졌으며, 서울 안의 높고 낮은 집들은 연기에 싸이고 구름 속에 잠겼다. 부고(府庫)의 정책은 소연(蕭然)하고 곳집에 저축해 둔 곡식은 몽땅 없어졌다. 이 일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나, 시대의 형편인지라 어찌 하리오. 조사아(祖士雅)가 중원을 평정하겠다고 맹세한 일에서 그 의분을 상상할 수 있거니와 장숙야(張叔夜)가 서울에 들어가 방위하였음은 충의심을 쏟은 것이다. 평탄하건 험악하건 언제든지 함께 힘을 다해 목숨을 바치기를 꾀해야 할 일이건만 위태롭고 모욕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차마 함께 하늘을 이고 구차하게 안일을 구하겠는가. 나 이광(李洸)은 재질이 예악의 고장에 노닐 사람이 못 되지만, 잘못 시서(詩書)의 장수로 임명을 받아, 두 차례나 방면(方面)의 지휘권을 장악하게 되매, 늘 나라만이 있을 뿐이라는 충성심을 품어 왔었다. 이에 이성(李晟 당 나라 때 충용을 겸비한 인물)의 충성을 다해서 정전(鄭畋 당 나라 말년 황소(黃巢)의 난을 수습한 인물)의 격문을 전한다. 심히 애통하고 심히 급히 급하니, 어찌 허수하게 하며 느긋하게 할 일이겠는가. 설경선(薛景仙)은 나룻길로 해서 먼저 공물(貢物)을 상납한 후 의병을 일으켰고, 한세충(韓世忠 송(宋)의 명장(名將))은 바닷길로 해서 행영(行營)으로 가 경기 지방을 회복하고자 바람에 날리는 깃발로 치는 호령에 산악 같은 위엄으로 강남을 번개같이 떠나서는 한강 북안을 무섭게 바라본다. 장군이 비오듯 눈물을 흘리며 우니, 누군들 주먹을 불끈 쥐고 적장의 기를 뽑으려 하지 않겠는가. 병졸은 노숙(露宿)을 하면서 모두 쓸개를 핥듯 복수를 다짐하고 손바닥에 침을 뱉어 적을 쳐부수길 원하고 있다. 만약 선수를 잡는 기회를 잃는다면 뒷수습을 잘하려는 계획은 크게 어긋날 것이다. 공(公)들은 다 임금의 고굉(股肱)이 될 좋은 자질을 가진 몸으로 모두 번진(藩鎭)에 처하고 있고, 함께 문화를 숭상하는 시대에 나서 어찌 나랏일에 이바지하는 정성을 떨치지 않으리오. 임금의 능에 경건히 참배하여 조종의 수치를 시원하게 씻고, 거가(車駕)를 공손히 맞아 부로(父老)들의 소망을 크게 위로하라. 불을 지펴 털을 사르듯 하기를 기약할 것이며, 태산을 들어 새알을 짓누르듯 할 것을 맹세하라. 아울러 천지에 빌어 청룡도(靑龍刀)로 의지(義智)의 머리를 자르고, 함께 산천에 맹세하여 적토마(赤兎馬)로 현소(玄蘇)의 피를 밟아라. 만약 머뭇거리다가 날짜가 늦어져 의병 징발에 기회를 놓친다면 천지의 신(神)에게 부끄럽고, 백 대를 두고 죄를 짓게 될 것이니, 그러고야 무슨 면목으로 다시 천지의 사이에 서겠는가. 아! 서관(西關) 하늘 끝으로 파천하시매, 북극성도 제자릴 옮겼도다. 가슴을 쳐도 그 슬픔 한이 없고, 분연히 날아가려 한들 길이 없다. 우리 호남ㆍ호서와 영동ㆍ영북의 모두는 멀고 가깝고를 물을 것 없이 계속 비휴(豼貅)같은 군사들을 일제히 몰고 가서 저곳 이곳에서 속속 앞뒤로 곧장 두들겨 대어, 천지에 가득찬 요망한 기운을 거두어 버리고 확청(廓淸)의 공을 이룩하게 하라. 왜적 때문에 임금을 버리지 말고 충의심을 떨치고 나아가 왜적 토벌하기를 기할 것이며, 자신을 희생하여 나라에 보답할 것이지 달아나서 목숨을 살려 치욕을 당하는 일 따위는 없기를 바란다.
○ 거가가 송도(松都)를 떠나 해서(海西)를 향하였는데, 관서(關西)의 노상에서 겪은 곤고(困苦)를 신민으로서 차마 들을 수가 없다.
하루는 산골짜기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밤새도록 식사를 올리지 못해 촌 여인이 울면서 조밥을 드렸다. 임금이 그것을 드시고 이르기를, “이 맛은 팔진미보다 낫다. 조의 귀중함이 이와 같구나, 이와 같아.” 하였다. 또 하루는 비가 심해 갈 수가 없어서 길가 촌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임금은 방앗간[杵室]에 들고, 신하들 거가를 호종한 자가 10여 명이었다.은 빗속에 엎드려 종일 굶주렸다. 비통하다. 우리 소중화(小中華)는 동이(東夷)와 북적(北狄) 사이에 끼어 있으니, 변란의 반발이 어느 대엔들 없었으랴. 그러나 함락의 비참과 파천의 치욕이 어찌 이러한 극단에까지 이른 적이 있었겠는가. 애석하다. 농사일을 장려하여 우리를 먹여준 군부(君父)가 여러 차례 궐선(闕膳)하기까지 하는 비참한 지경을 당했고, 세심하게 백성을 다스린 임금이 마침내 궂은 비에 괴로움을 당했으니, 이 적이야말로 만세를 두고도 잊을 수 없거든, 이 몸 한 번 죽는 것이 무엇이 아까우랴. 신민된 자로서 비록 서쪽으로 퇴각하는 데에 달려가서 목숨을 바치지는 못하였더라도, 마땅히 동해에 몸을 던져 목숨을 버렸어야 할 것이다.
4일. 영남 초유사 김 성일(金誠一)이 남원(南原)에 도착하다. 김성일이 애초에 체포한다는 어명에 따라 직산(稷山)까지 갔으나 사면을 받고 도로 초유사의 책임을 받게 되었는데, 그때야 비로소 조정이 서쪽으로 옮겼음을 알고 통곡하면서 돌아오다. 호남과 호서의 길이 막혔기 때문에 충청도의 내로(內路)로 해서 내려오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이광(李洸)이 근왕병(勤王兵)을 거느리고 공주(公州)에 이르러서 왜적이 서울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자, 징을 울려 군대를 퇴각시키니 육군(六軍)이 무너져 돌아오다. 그때 곽영(郭嶸)은 조방장 이지시(李之詩), 종사관 이용순(李用諄) 등을 거느리고 금산(金山)으로부터 돌아와 전주(全州)에 주둔하였다.
○ 곽재우(郭再祐)가 의령(宜寧)ㆍ삼가(三嘉)ㆍ합천(陜川) 등 여러 고을을 수복하니, 우도의 왜적들 중에는 소문을 듣고 철거한 자들이 퍽 많았다. 곽재우가 정진(鼎津)에 진을 치고 낙동강 연변의 왜적을 추적해서 잡았다.
5일. 영남 초유사 김성일은 함양(咸陽)으로 향하고, 본도 도순찰사 김수(金睟)는 함양에서 출발하여 운봉(雲峯)으로 가는데, 도중에 초유사를 만났다. 초유사가 말하기를, “지방을 맡은 신하라면 마땅히 맡은 지방을 사수할 일이지,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왔단 말이오. 온 도를 다 잃으면서도 구하지 못한 주제에 단기(單騎)로 멀리 와봤자 무슨 구제할 길이 있겠소. 원컨대, 영공(令公)은 속히 돌아가시오.” 하매, 김수가 함양으로 돌아갔다가 이어 안음(安陰)으로 갔다. 김성일이 함양에 도달하니, 군수 이각(李覺)이 홀로 빈 관아에 앉아 있는데 다만 늙은 아전 수 명이 있을 뿐이었다. 김성일이 군수를 독려하여 고을 사람들을 불러 모으게 하자, 함안의 전 현감 조종도(趙宗道)와 전 직장(直長) 이노(李魯) 등이 다 모여들었다. 김성일이 그 자리에서 격문을 아래와 같이 기초하다.
초유사는 도내의 수령, 변장(邊將), 문ㆍ무 출신의 부로(父老) 자제와 한량(閑良), 군민(軍民) 등에게 유시(諭示)하노라. 국운이 중도에 비색하여, 섬 오랑캐가 외람되이 발동하여 나라 땅에서 마구 날뛰고 동서로 충돌하면서 웅장한 성과 큰 진(鎭)도 아랑곳없이 함락시켜 버리고, 10일이라는 짧은 시간에 이미 관령(關嶺)을 넘고 곧장 서울로 쳐들어갔다. 그리하여 임금은 파천하고 온 나라 사람이 도망쳐 달아나니, 이 동방의 나라가 생긴 이래로 오랑캐 화(禍)의 참혹하기가 오늘날과 같은 적은 없었다. 여러 병사(兵使)들은 국가의 간성(干城)인데 어떤 자는 풍문만을 듣고도 무너져 달아나고 어떤 자는 겁을 집어 먹고 움츠리기만 하며, 또 수령은 한 고을의 군장(君長)이건만 모두 처자를 이사시키고 무기고를 태워 버려서는, 한 사람도 의를 지켜 굽히지 않고 충성심을 발휘하여 먼저 나서서 왜적을 치는 자가 없으니, 슬프다. 우리 군사와 백성이 또 무엇을 믿고, 흩어져 달아나지 않겠는가. 미친 파도가 마구 몰려오듯 하여 막아낼 수가 없으매, 성마다 창을 멘 병졸이 없고 읍마다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신하가 없다. 그리하여 왜적이 가는 곳마다 무인지경에 들어가듯 하여 마침내 영남 한 도를 왜적의 굴혈로 만들었고, 흙더미가 무너지고 기왓장이 부서지듯 하여 아침 저녁 동안도 지켜내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대체 무슨 변고인가. 그러나 이것이 어찌 한갓 변장과 수령의 허물뿐이겠는가. 군사와 백성도 그 책임을 회피할 수 없는 것이다. 옛날에 큰 변란을 당하고도 나라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윗사람은 목숨을 내놓고 싸울 뜻을 지녔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위해 죽겠다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왜적이 오기도 전에 군사와 백성이 앞장서서 달아나 산림 속에 잠복하고는 구차스럽게 살아남을 계획이나 함으로써 백성이 없는 수령과 군사 없는 장수를 만들었으니, 앞으로 누구와 함께 적을 방어하겠는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추(鄒) 나라와 노(魯) 나라가 싸울 때 유사(有司)로서 죽은 자는 30여 명이나 되었지만 백성은 그들을 위해 죽은 자가 없었으니, 이는 노약(老弱)한 백성들이 구렁에 빠져 죽어도 유사들이 그들의 고난을 구제하여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지금 도망쳐 무너지기만 하는 이 변은 맹자(孟子)가 말한, 「너한테서 나온 것이 너한테로 돌아가는 것이다.」한 그것이 아니냐.’ 하지만, 아! 그것이 무슨 말인가. 최근 몇 년 동안 부세(賦稅)가 중했고 부역이 많아서 백성은 과연 명령을 견뎌내지 못했다. 그러나 성지(城池)의 방비 기구(器具)는 모두 불의의 변에도 대비할 만큼 보전되어 있었으니, 지금 와서 볼 때 성스러운 임금이 백성을 편안하게 해 주려던 생각이 원대했던 것이다. 그것이 어찌 백성을 학대해서 자신의 이(利)나 꾀한 것이었겠는가. 하물며 추 나라와 노 나라의 싸움이 비록 승부는 있었으나, 같은 중국(中國)이었기 때문에 백성에게는 별 이해(利害)가 없다. 그러나 이 이[齒]에 물들인 무리는 우리 땅에 들어오자, 곧 차지하자는 생각을 가지고 부녀자들을 사로잡아 처첩으로 삼고 장정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도륙하였으며, 마을을 습격하여 깡그리 불태웠고 공사(公私)의 소장품(所藏品)을 다 그자들의 소유로 하여, 그 해독이 사방에 두루하였고 피가 천리에 흘렀으니 백성들의 화(禍)는 차마 말할 수도 없다. 지금이야말로 정말 지사(志士)가 창을 베고 잠을 자야 할 때이며, 충신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할 때인 것이다. 그러나 67주(州) 가운데 여지껏 충의를 부르짖으며 팔을 걷고 나서는 사람이라곤 없었고, 오히려 도망쳐 살아나는 데 있어서 혹시 남보다 뒤지지 않을까 하는 일이나 또는 입산(入山)하는 일에 있어서 좀더 깊이 들어가지 못한 것만을 염려하니, 어찌 이루 개탄할 수 있겠는가. 설사 산으로 들어가 왜적을 피해서 끝내 자기 몸과 집안을 보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열사(烈士)는 그리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거든, 하물며 보전할 도리가 만무한 경우에 있어서랴. 본관은 이 점을 철저하게 구명해서 군사와 백성의 잘못된 생각을 깨우쳐 주리라. 이 왜적은 서울을 범하는 데 마음이 급하여 군사를 지체하지 않고 가기 때문에 그 피해가 모든 고을에 두루 미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왜적이 뜻을 이룬 후, 그 흉악한 무리들이 국내에 충만하게 되면 산골짜기가 과연 죽음을 피하는 곳이 되겠는가. 이를테면 홍수의 흐름이 하늘에 치닿고 무서운 불길이 들판을 태우듯 할 터인데, 아! 우리 억만의 생령(生靈)이 또 어느 곳에 몸을 둘 것인가. 산골짜기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시간이 감에 따라 양식이 떨어져 다들 깊은 산 속의 시체가 될 것이고, 나온다 해도 부모 처자는 그자들의 포로가 되는 곤욕을 당할 것이다. 의관을 갖춘 사족(士族)들은 그자들의 어육(魚肉)이 되어서, 항복하면 영원히 효경(梟獍)의 족속이 될 것이고 항복하지 않으면 모두 칼 맞아 죽은 귀신이 될 것이니, 이런 일이야 어찌 지혜로운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일이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단지 이해(利害)와 사생(死生)만을 가지고 말한 것일 뿐이다. 아! 군신 간의 대의(大義)는 하늘의 법도요 땅의 도리니, 이른바 백성의 떳떳한 양성(良性)인 것이다. 무릇 이 땅에서 혈기가 있고 곡식을 먹는 우리들로서, 임금이 몽진(蒙塵)하고 종묘 사직이 전복되려 하며 만백성이 어육으로 문드러지듯 하는 것을 우두커니 보기만 하고 조금도 근심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하늘의 법도와 땅의 도리에는 어찌 되겠는가. 더구나 부모가 왜적의 칼을 맞고 골육이 서로 보전되지 못하여 개인적인 가문의 화(禍) 역시 참혹할 것이니, 자제 된 자가 머리를 움켜쥐고 쥐같이 달아나기나 하고 만 번이라도 죽을 힘을 내어 부모 보전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사람의 자식 된 도리에는 어찌 되겠는가. 다만 영남은 본래부터 인재가 많은 고장으로 1천 년의 신라, 5백 년의 고려, 그리고 우리 조정의 2백 년 동안 충신과 효자의 뛰어난 명성과 의열(義烈)이 청사(靑史)에 빛나고 절조와 의리의 아름다운 습속이 동방에서 첫째가는 것은 사람들이 다 함께 알고 있는 바이다. 근자의 일을 가지고 말한다 해도, 퇴계(退溪)ㆍ남명(南溟 조식(曹植)의 호) 두 선생이 한 시대에 같이 나서 도학(道學)을 제창하여 사람의 마음을 맑히고 사람의 기강(紀綱)을 바로잡는 일을 자기의 책임으로 하자, 선비들도 그 감화에 점점 물들어 사숙(私淑)하는 자들이 많아졌다. 또 평소엔 허다한 성현의 책들을 읽어 그 얼마나 자신만만한 사람들이었더냐. 그런데 하루아침에 변란을 당하자 오직 살 길이나 탐내고 죽음을 회피하는 일만을 서둘러, 임금을 버리고 어버이를 뒤로 돌리는 죄악에 스스로 빠져 버리니 구차스러이 세상에 산다 한들 어떻게 머리로 하늘을 이고 살고, 지하에 죽어 가서도 또한 어떻게 우리 선대(先代)의 현자(賢者)들을 뵈올 것인가. 의관을 차리고 예악을 숭상하던 몸을 욕되게 할 수 있겠으며, 머리를 깎고 몸에 무늬 놓는 습속을 따를 수 있겠는가. 2백 년 동안 지켜온 종묘 사직을 차마 왜적의 손에 넘겨줄 수 있겠으며, 수천 리의 산천을 차마 왜적의 굴혈로 둘 수 있겠는가. 중화(中華)가 변하여 이적(夷狄)이 되고, 사람이 짐승이 되는 그런 일을 참을 수 있으며 또 할 수 있겠는가. 적의 머리를 베어 바치는 것을 으뜸가는 공로로 삼는 진(秦) 나라도 처음에는 순전한 이적(夷狄)은 아니었건만, 노중련(魯仲連)은 오히려 바다에 몸을 던져 죽는 것을 달갑게 여겼다. 풀로 엮은 옷을 입고 꿈틀거리는 섬 오랑캐가 얼마나 추잡한 종자인데, 그자들이 우리 땅을 훔쳐 차지하고 우리 백성들을 죽이고 욕보이는 대로 내버려만 두고, 그자들을 몰아내고 목 베어 죽일 방법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말하기를, “저자들은 용맹스러운데 우리는 겁이 많고, 저자들은 예리한데 우리는 둔하니 비록 군사를 일으켜도 성사할 수 없다.” 하니, 아! 그렇게도 생각하지 못한단 말이냐. 옛날의 충신과 열사는 성패로 인하여 뜻을 바꾸지 않았고 강약 때문에 지기(志氣)가 꺾이지 않아, 의리상 마땅히 해야 할 것이라면 비록 백 번 싸워서 백 번 패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빈 주먹을 버티며 흰 칼날을 무릅쓰고 끝까지 싸워 만 번 죽어도 뉘우치지 않았다. 하물며 이 왜적은 비록 강하다고는 하나 고군(孤軍)으로 깊이 들어왔으니 바로 병법의 금기(禁忌)를 범한 것이다. 어떻게 제대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 우리 군사들이 비록 겁이 많다고는 하나, 용맹하거나 겁많은 것이 어찌 고정된 것이겠는가. 충의에 격동되면 약한 것을 강하게 만들 수도 있고, 적은 수효로 많은 수효를 대적하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니, 단지 마음을 한 번 돌리는 데 달렸을 뿐이다. 지금 보건대, 도망치거나 무너진 졸병들이 산골짜기에 가득 깔려 있는데, 이들도 처음에는 비록 몸을 도망쳐서 살기를 바랐다가도 마침내 한 번 죽는 것을 면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면 모두 스스로 분발하여 나라를 위해 힘을 다 바치려고 생각할 것이나, 다만 솔선하여 부르짖는 사람이 아직 없었을 뿐이다. 이러한 때에 있어서 만약 한 사람의 의사(義士)만이라도 분발하고 일어나 한 번 외치기만 한다면 원근의 장정들이 구름같이 모이고 메아리같이 호응해 올 것은 가만히 앉아서도 획책할 수 있는 일이다. 성상(聖上)께서 이미 애통한 교서(敎書)를 내렸으며, 또 이 소신(小臣)을 못난이로 여기지 않고 초유(招諭)하는 책임까지 맡기셨다. 당(唐) 나라 때의 씩씩한 무부와 표한(剽悍)한 병졸도 흥원(興元 당 덕종(唐德宗)의 제2 연호, 서기784)년에 덕종이 이회광(李懷光)의 반란 때 내린 조서에 울었거늘, 하물며 추로(鄒魯)의 공자와 맹자의 교훈을 받드는 우리 군사들이 어찌 주먹을 불끈 쥐고 의분에 차 임금의 위급을 구하기 위해 나가지 않겠는가. 진실로 원하건대, 이 격문이 도달하는 날에 수령은 온 고을의 사람들에게 똑똑하게 알려주고, 변장(邊將)은 장병들을 격려하여야 할 것이다. 문무(文武)의 조관(朝官)과 부로(父老)ㆍ유생(儒生) 등은 각각 서로 정해서 일러주어 동지들을 불러 모아서 의열(義烈)로 격려하여 혹은 마을을 보호하여 스스로 지키고, 혹은 군사를 끌고 전투를 도와야 할 것이다. 부유한 백성은 차달(車達)의 곡식을 운반해다가 군사들의 식량을 보급해 주고, 용맹한 군사는 충갑(冲甲)의 무기를 휘두르면서 왜적을 죽이도록 하라. 집집마다 사람마다 각자 전투에 임하기 위해 일시에 다 일어나면 아군의 성세가 크게 떨치고 사기가 백 배 되어 호미자루 창자루도 예리한 무기가 될 것이니, 아무리 왜적의 긴 창과 큰 칼인들 또 무엇이 무서울 게 있겠는가. 일이 성공하면 나라의 치욕을 씻는 데 만전을 기할 것이요, 성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의리 있는 귀신이 될 기회를 잃지 않을 것이니 제군들은 힘쓸지어다. 본관은 한 부유(腐儒)인지라 비록 군사에 관한 것은 배우지 못했지만 군신 간의 대의는 그래도 대강 들었다. 한 도가 다 결딴이 난 후에 임명을 받아, 초(楚) 나라를 보존시킬 마음은 간절하면서 아직 포서(包胥)의 충성을 바치지 못하였고, 사당[廟]에 곡하고 군사를 일으킴은 장순(張巡)의 의열(義烈)을 사모한 것일 뿐이니 오히려 의사들의 힘에 의뢰하여 해[日]를 취(取)하는 공을 이루기 바라고 있다. 조정의 포상 제도가 뒤에 있으니, 다들 잘 알지어다. 애초에 김성일이 문사(文士)를 시켜 격문을 기초하게 하였으나 마음에 들지 않아서 자기가 지었는데, 말이 감격에서 우러나 붓을 먹물에 적실 사이도 없이 단숨에 써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김륵(金玏)을 안집사(安集使)로 삼아 전지(傳旨)를 내리기를, “지금 영남의 부(府)ㆍ진(鎭)이 연이어 왜적에게 함락된 것은 한 도의 병력이 적어서가 아니다. 다만 변란이 창졸간에 일어났기 때문에 각 읍의 군민(軍民)들이 소문만 듣고도 무너져 달아나서 와해(瓦解)되기에 이른 것이니, 그들의 본의야 어찌 항복해서 왜적에게 부동(附同)하려고 한 것이었겠느냐. 만약 식견이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똑똑하게 효유(曉諭)하고 충의로써 그들을 격려하여, 그들로 하여금 동지들을 규합하며 또 자제와 노복을 거느리고 관군(官軍)에 협력하여 결사적으로 싸우게 한다면, 지금이라도 구제할 길이 있는 것이다. 고려 시대에 원충갑(元冲甲)은 한낱 필부로서 의병을 일으켜 큰 적을 꺾어 물리쳤으니 그것이 한 가지 좋은 전례다. 행상호군(行上護軍) 김륵을 본도에 내보내어 그로 하여금 원근의 백성들을 두루 효유하고 충의로운 군사들을 격려하고 권면하여 목숨을 바쳐 근왕(勤王)하게 하노라.” 하다. 김륵은 경상도 영천(榮川) 사람이니, 그는 사잇길로 해서 영남에 도달할 수 있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모병통문(募兵通文)하다. 처음에 경상도 함안(咸安) 출신의 문신인 전 현감 조종도(趙宗道)와 전 직장(直長) 이노(李魯) 등이 서울에서 변란의 소식을 듣고는, 곧 본도에 달려 돌아왔다. 조종도가 이노에게 말하기를, “우린 고향 땅에 들어가면 의병을 일으켜야 합니다. 만일 성사하지 못한다면 동지들과 물에 빠져 죽을 망정 의리상 왜적에게 욕을 당할 수는 없습니다.” 하더니, 이번에 여러 읍에 통문(通文)을 내었다. 다음 글은 의병을 모집하는 글이다. 임금의 고통을 급한 일로 여겨서 이적(夷狄)의 화(禍)를 물리치는 것은 충의(忠義) 중에서도 급선무요, 국가의 위기에 관하여 도모하여서 생사(生死)의 근심을 잊음은 정절(貞節) 중에서도 큰 것이다. 만물 중에서 가장 영묘(靈妙)하여 사람이 되고, 다같은 백성 중에서 뛰어나 선비가 된다. 왜 영묘하다 하는가? 사람은 군신과 부자의 윤리를 알기 때문이다. 왜 뛰어나다고 하는가? 선비는 의(義)와 이(利)의 향배(向背)를 분별할 줄 알기 때문이다. 이 땅에 나는 것을 먹고 살았으면 모두 신하이지, 어찌 많은 녹을 먹은 자만이 죽어야 하겠는가. 요량없는 비여(匪茹 자신을 요량하지 않는다는 뜻)로 적이 태원(太原)까지 왔던 일은 옛날에 어쩌다 있었던 일이라 하겠거니와, 곧장 서울에 침범하기론 이번의 일이 가장 극심하다. 임금은 파천하여 어디서 바람과 이슬에 시달리고 계신지 막연하고, 종묘 사직이 진동하여 놀랐으니 신령이 어디에 의지해서 오르내리시는지 슬프구나. 쥐같이 달아나고 새같이 숨어 거의가 다 임익(林翼)같이 창[戈]을 버렸고, 애첩을 죽이고 말을 잡아 먹어 장순(張巡)같이 결사적으로 지킨 사람이 있다 함은 들어보질 못했다. 이것이 어찌 신하로서 차마 할 수 있는 일이냐. 이는 실로 사람의 도리에 견디어 내기 어려운 일이다. 2백 년 동안이나 길러온 보람이 어디에 있는가. 60주(州)의 충의가 쓸은 듯이 없어졌다. 광야에 울어도 돌아갈 곳이 없고, 백일하에 고개를 들자니 낯이 없도다. 부모가 병이 들었는데 어찌 운명에만 맡겨 약을 쓰지 않으리오. 대세가 이미 기울어졌어도 혹 하늘에 힘입어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죽는 것이 비록 싫지만 천지에 그물이 쳐 있으니 도망갈 길 없고, 살 길을 설사 구차하게 얻고 싶어도 개 돼지 틈에서야 차마 살 수 있겠는가. 죽는 것이 같을 바엔 차라리 의에 죽을 것이다. 감히 살기를 바라는가. 인(仁)에 생명을 버려라. 나라를 배반하고 원수를 섬기면 편안할 수 있겠으며, 까까머리 되고 이[齒]에 물들이는 것을 견딜 수 있겠는가. 관군은 도망쳐 형벌을 겁내고 나오지 않으니, 의병이 힘차게 움직여 충의심을 떨치고 앞다투어 와주기를 바란다. 하물며 주상(主上)께서 서쪽으로 행차하시던 날에 애통하고 간절한 교서를 내리고, 따로 목숨을 바치는 신하를 골라서 특히 초유사로 보내셨다. 윤음(綸音)이 내리자 듣는 사람치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고, 성유(星諭 초유사의 격문(檄文))가 이르는 곳마다 그를 본 사람들은 응당 목숨 바칠 생각을 했을 것이다. 진실로 바라거니와, 여러 군자들은 글을 읽어 평소 모두 나라에 보답할 뜻을 품고 있었을 것이니, 위급한 이때에 임하여 의당 임금을 위해 죽는 절개를 세워야 할 것이다. 각기 부형들을 권면하고 자제들을 격려하며, 이웃 마을 사람들을 불러 일으키며 노복들을 격려하여 거느리되, 혹은 활과 화살을 혹은 칼을 차고서 단결하여 부대를 편성하고 세차게 용기를 고무하여 이 초유에 부응하고 나라의 치욕을 씻도록 하라. 그렇게 한다면 이 어찌 나라만의 다행한 일이리오. 각 개인에 있어서도 문 앞의 원수를 없애는 일인 것이다. 한편 군대를 탈영하여 피해 숨은 자들까지도 모두 스스로 나타나 모일 것인즉, 그들에 있어서도 비단 전날의 죄가 다 용서될 뿐더러 회복된 후의 포상도 기대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다시 바라는 바는, 그들을 십분 타일러서 역(逆)과 순(順)에 화복이 매었음을 알게 해 줄 수만 있다면, 천만 다행한 일인가 한다. 정말 이렇게만 한다면 살아서는 씩씩한 사나이가 될 것이고 죽어서도 빛나는 혼이 될 것이며, 장사지낼 땐 포신(鮑信)의 형상을 새기게 될 것이고 능(陵)에는 방덕(龐德)의 형상을 그리게 될 것이니, 연약하게 살기보다는 차라리 강개하게 죽는 것이 어떠한가. 만약 의병의 근왕(勤王)으로 말미암아 하늘 길이 다시 맑아짐을 볼 수 있게 된다면, 의병으로 나섰다고 해서 반드시 다 죽는 것도 아닌 데다가, 장차 함께 중흥(中興)의 즐거움을 누리게 되는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마땅히 각각 힘쓸지어다. 아! 하늘의 이치와 백성의 양성(良性)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니, 사람의 기강(紀綱)인들 어찌 영원히 떨어지겠는가. 이 한 장의 통고문을 보면 반드시 천 번이나 기절하며 통곡하게 될 것이다. 조종도 등이 쓰다. 그 후 정유년(1597, 선조 30)에 조종도는 황석산성(黃石山城)에서 절개를 지키고 죽었으니, 그가, “차라리 의에 죽어야 한다.” 한 처음의 말을 저버리지 않았음을 넉넉히 알 수 있다.
○ 경상도 연해의 왜적이 거제도(巨濟島)로 향하니 원균(元均)은 우후(虞侯)한테 군영을 지키게 하고는 배천사(白川寺)까지 달려갔는데, 우리나라 어선을 보자 왜적의 배인 줄로 생각하고 창황히 달아나 노량(露梁)으로 물러났다. 우후가 그 소식을 듣고 나가길 독촉하니 온 성 안의 늙은이와 어린이들이 어지러이 길을 꽉 메웠다. 그러자 우후는 다함께 피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활을 당겨 마구 쏘아대자, 임신한 두 여인이 한 화살에 맞았는가 하면 그 밖에도 무고하게 죽은 자가 퍽 많았고, 온 섬의 장병들이 모두 소문만을 듣고도 흩어져 버렸다. 남해 현령(南海縣令) 기효근(奇孝謹)은 창고를 불사르고 달아났는데, 왜적은 아직 남해 땅을 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왜적의 장수 평청정(平淸正)ㆍ평행장(平行長) 등이 서울에서부터 길을 나누어 출발하다. 애초엔 왜적의 괴수 수길(秀吉)이 군사를 8부(部)로 나누었는데, 1부의 무리가 거의 10여만 명에 달했고 총대장(總大將)은 각각 4,5 명으로 해서 우리나라 8도를 나누어 맡기로 하였다. 그런데 북방은 군사의 비결에 꺼리는 곳이었기 때문에 그들 장수 가운데서도 가장 용맹스럽고 사나운 자를 택하여 함경도로 보냈던 바 평청정이 그를 맡은 것이었다. 이때에 와서 수길 등은 서울에 머물러 주둔한 채 남별궁(南別宮)에 들어가 있었고 평청정 등은 서울에서 동쪽 길을 잡아 강원도를 지나 함경도로 향했는데, 이들이 지나 가는 곳은 적지(赤地)가 되어 천 리를 가도 사람 사는 연기가 나지 않았다. 평행장ㆍ평의지(平義智) 등은 서울에서 서쪽 길을 잡아 해서(海西)로 향했는데,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이 신길(申硈)을 중군(中軍)의 장군으로 삼고 이빈(李薲)과 이천(李薦)을 좌우의 장군으로 삼아 임진(臨津)에서 방어하다.
14일. 전라 감사 이광(李洸)이 또 근왕병 도합 10여 만을 동원하여 전주(全州)에 주둔하였는데 군량을 수송하는 자가 갑절로 늘어나다.
○ 군사를 징발하는 교지가 있었다. 당초에 조정이 송도(松都)에 머무르고 있을 때 호남과 영남에 교지를 내렸으나, 길이 막혀 전달되지 못하다가 이제와서야 본도에 도착한 것이다. 그 내용의 대략은, “왜적이 경기(京畿)에 가득 밀려 들어와 형편상 부득이 송도에 주차(駐箚)하면서 사방에 명령을 내려 왜적 토벌의 계획을 하게 하는 터이다. 경(卿)은 경상 우도에 은밀히 내통하여 경내(境內)의 군사를 총동원해 가지고 올라와 구원하도록 하라.” 하였다. 내린 교지는, 반 조각의 막종이에 잘게 써서 겨우 글자 모양을 이룬 것으로 시골집의 사사로운 편지 조각과도 같았으니, 백성으로서 그것을 본 사람 치고 눈물을 뿌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 이광이 그를 영남에 전송했다. 김수(金睟)가 안음(安陰)으로부터 함양(咸陽)에 가서, 방어사 조경(趙儆), 종사관 이수광(李睟光), 조방장 양사준(梁士俊) 등을 거느리고 함양으로부터 남원(南原)으로 향하니 그때 전라병사 최원(崔遠)이 군사를 거느리고 남원에 와서 진을 쳤다.
18일. 김수(金睟)가 남원(南原)으로부터 전주(全州)에 갔는데, 이광(李洸)이 이곳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김수를 패군(敗軍)한 장수라 하여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니 김수 일행의 병마는 점점 도망쳐 흩어졌고 장병들은 각자 말을 끌고 가버렸다. 이윽고 김수도 이 광을 만나 약속하고 출발하다.
○ 순창(淳昌)과 옥광(玉果)의 군사들이 먼 곳에 가서 싸우는 것을 싫어한 끝에, 도리어 흉악한 음모를 꾸며 형대원(邢大元)과 조인(趙仁)을 맹주(盟主)로 추대하고는 노령(蘆嶺)을 근거지로 난동을 일으키다. 이윽고 본군(本郡)으로 군사를 돌이키고 향사당(鄕射堂)과 형옥(刑獄)을 불태우매, 군수 김예국(金禮國)이 단신으로 탈출하여 이광에게 달려가서 고하였다. 이광은 병사(兵使)에게 군령을 전달하여 군사를 전진시켜 토벌해서 잡으라 했는데, 그때 마침 담양 부사(潭陽府使) 이경린(李景麟)이 군사를 거느리고 전주로 가다가 반란을 일으킨 백성들한테 추격을 당하여 담양의 군사도 무너져 버리다.
19일. 이광이(李洸)이 전주(全州)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서울로 향하다. 군사 5만여 명은 이광이 통솔하였는데 전주 부윤과 나주 목사(羅州牧使) 등 수령 20여 명을 거느리고 익산(益山)으로 해서 충청도에 있는 내포(內浦)를 지나면서 진군하고, 군사 4만 8천여 명은 방어사 곽영(郭嶸)이 통솔하였는데 조방장 이지시(李之詩)와 김종례(金宗禮) 및 남원 부사(南原府使) 등 20여 명을 거느리고 여산(礪山)을 거쳐 충청도의 대로(大路)로 해서 진군하여서, 모두 진위(振威)에서 만나기로 약속하다. 김수(金睟)도 이광을 따라 내포로 향하다.
○ 본도 군량 수송의 수량은 감사의 분부에 따라 각 관아에서 인부 두 사람에 한 바리, 품관(品官)은 8명에 한 바리, 교생(校生)은 8명에 한 바리씩으로 한 것들과 공(功)을 세우려고 자진해서 군량 수송에 응모한 짐바리, 그리고 각 지방 관아의 수령과 여러 장병들의 개인적인 짐바리 등, 이루 헤아릴수 없이 많아 길에 잇달아 있다.
20일. 남원(南原)ㆍ구례(求禮)ㆍ순천(順天)의 군사 8천여 명이 전주(全州)에 와서 참전하다가 일시에 흩어져 마구 찌르는 창에 죽은 자들이 퍽 많았다. 이광(李洸)의 군관 옥경조(玉景祚) 등이 칼을 뽑아 후퇴하는 자들을 베어 죽이자, 무너져 가던 군사들이 옥경조를 에워싸고 전주까지 와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남원 부사 윤안성(尹安性)은 판관 노종령(盧從岭)에게 영(令)을 전하여, 흩어진 군사들을 타일러 모아 보내라고 했고, 구례 현감 조사겸(趙士謙) 등은 직접 본읍에 돌아가 군사들을 불러 모은 다음, 달려 돌아가서는 은진(恩津)까지 이르렀다. 전주ㆍ광주(光州)ㆍ나주(羅州)의 군사가 용안(龍安)에 도달해서 역시 일시에 흩어지자 수령 등이 길에서 불러 모아 봤지만, 무너진 군사들을 한데 모을 수는 없었다. 이광 역시 길에서 머뭇거리곤 하여 전진하기를 꺼리는 기색이 많았다.
○ 병사(兵使) 최원(崔遠)이 남원(南原)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순창(淳昌)으로 향했는데, 반란을 일으킨 군졸을 토벌하려는 것이다. 그는 우선 남원 판관 노종령을 시켜 달려가 실정을 탐지케 했는데, 김예국(金禮國)이 이미 조인(趙仁) 등을 잡아서 죽여 버렸는지라, 나머지는 다 불문에 부쳤다.
○ 김성일(金城一)이 함양(咸陽)으로부터 산음(山陰)에 도착하니, 현감 김낙(金洛)이 김성일에게 환아정(換鵝亭)에 사관(舍館)을 정해 주고 다반상[茶盤]을 대단스럽게 차려드렸다. 그러나 김성일이 변색을 하고 김낙을 불러 책망하기를, “이 같은 성찬은 신하로서 오늘날 차마 먹을 수 없는 것이다. 먹는다 해도 목구멍에 넘길 수 없다.” 하니, 김낙이 부끄러워하며 사죄하고 물러갔다. 산음현 사람 오장(吳長), 의령(宜寧) 사람 이지(李旨), 단성(丹城) 사람 김경근(金景謹) 등이 모두 칼을 집고 김성일을 찾아뵈니, 김성일이 오장 등에게 말하기를, “제군이 은근하게 찾아왔으니 반드시 기이한 계획이 있을 것이다.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자.” 하였다. 김경근이 말하기를, “김수(金睟)를 목 베지 않으면 대의를 펴고 나라를 회복하는 공을 이룩할 수 없습니다.” 하니, 김성일이 웃으면서, “부질없는 소릴. 일을 성사시키지는 못한다.” 하였다. 김낙이 군사를 모았는데 8백여 명에 달하였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흉악한 왜적이 진해(鎭海)ㆍ고성(固城) 등지를 불태워 재물을 없애버리니, 본도 우수사 원 균(元均)이 퇴각하여 남해(南海)의 노량(露梁)에 진을 치고 전라도의 수군에 구원을 청하다. 적병이 진주(晉州)로 향한다고 떠들썩하자, 목사 이경(李璥)과 판관 김시민(金時敏)은 지리산에 숨어 피하였다. 김성일이 이 소식을 듣고, 본주(本州 즉 진주)에 달려가니, 경내(境內)는 싹 비어 있었다. 판관은 김성일이 진주에 온다는 말을 듣고 나와서 기다렸으나, 이경은 병을 칭탁하고 나오지 않았다. 김성일이 명령을 전하여 나오라 했는데, 이경은 등창이 발작하여 죽었다. 김성일이 김시민에게 영을 내려, 수천 명의 군사를 정돈하여 가지고 부대를 나누어 성을 지키게 하는 한편, 전 군수 김대명(金大鳴)을 소모관(召募官)으로, 손승선(孫承善)을 수성유사(守城有司)로, 허국주(許國柱)와 정유경(鄭惟敬)을 복병장(伏兵將)으로, 하천서(河天瑞)를 군량 책임자로, 강기룡(姜起龍)을 병기 책임자로 하였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적병이 고성으로부터 사천(泗川)에 와 머무르면서 진주를 범하려 하자, 김성일이 군관 중에서 용맹하고 건장한 자 10여 명을 시켜 강을 건너가 쳐서 쫓으니 왜적이 곧 퇴각하였다. 다시 군사를 나누어 사천의 성 밑까지 진격해 들어가서는 그들의 나무하고 물 긷는 길을 끊어버리자, 왜적은 퇴각하여 고성으로 돌아갔다. 또 전 군수 김대명(金大鳴)을 도소모관(都召募官)으로 하여 생원(生員) 한계(韓誡)ㆍ정승훈(鄭承勳)과 함께 군사 6백여 명을 모집하여 고성의 의병장 최강(崔堈) 등과 합병(合兵)해 가지고 혹은 유인하기도 하고 혹은 매복했다가 야습하게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왜적의 무리가 무너져 웅천(熊川)ㆍ김해(金海) 등지로 향하였다. 김대명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창원(昌原)의 마산포(馬山浦)로 들어가서 진을 쳤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각 도 사림(士林)들의 의병을 일으키는 격문이 빈번하게 나돌다. 이때부터 국가의 명맥에 활발한 기세를 얼마간 떨치게 되었다.
○ 경기 감사 권징(權澄)의 통서(通書)에, “평의지(平義智)가 조선에 온 것은 실은 모반한 백성들이 군사를 청한 데서였다. 그런데 수길(秀吉)에게 군공(軍功)을 보고할 때 모반한 백성들이 번번이 억눌리고 깎여 내리게 되자 분한 마음을 품게 되어 평의지를 쳐 죽이고 이때의 거짓 소문이 대부분 이러한 따위다. 모반한 백성들과 왜적이 두 군으로 나뉘었으니, 오래 가지 않아서 틀림없이 자연 무너져 흩어질 것이라 한다. 우리나라 한 대장이 겨우 1백여 명을 거느리고 모화관(慕華館)에서 왜적과 교전하여 꽤 많은 자들을 목베고 사로잡았는가 하면, 왜적은 북쪽으로 퇴각하여 신문(新門)으로 해서 들어가는데 먼저 들어가려고 다투다가 서로 죽인 것이 또한 많았다고 한다. 또 왜적의 장수 한 사람이 임진강을 건너려 하자, 김명원(金命元)이 강의 요지를 지키고 있어 많은 자들이 편전(片箭)에 맞아 왜적들이 건널 수 없었고, 왜적이 배 두 척을 구하여 그 군사들을 가득 실었는데 강 복판에서 뒤집혀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하였다.
○ 서울에 머무르고 있는 대부대의 왜적이 하루는 사람을 죽여서 시위하라는 영을 내리자, 동대문으로부터 남대문에 이르기까지 반식경에 쓰러진 시체가 길에 가득 차고, 왜적에게 항복하고 부동(附同)한 백성이 채 도망가지 못한지라, 피바다와 살더미의 참상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루가 지나서야 중지시켜 다시 살육을 엄금하고 각 문에다 방을 내걸기를, “남자는 농사에 힘써 자기 생업에 안정하고, 여인은 누에고치 길쌈을 일삼아라.” 하고, 또 강원도와 경기도에 글로 고시하기를, “대왕(大王)은 이미 도망갔고 중국도 지금 일본에 예속되었으므로 사자[使价]를 보내 각 도를 다스리려 하니, 나라의 선비들 및 촌 백성들이 일본에 복종하기를 전대(前代)에 복종한 것 같이 함에 어찌 이론(異論)이 없겠는가? 그러나 지금 군현(郡縣)의 관창(官倉)에 있는 미곡ㆍ옥백(玉帛)ㆍ사마(絲麻) 등은 흩어 없애지 말아야 한다. 또 모(某) 목사[牧主]ㆍ모(某) 현감이며, 백성 남녀들도 역시 아무데나 가지말고 사자를 섬기기를 바란다. 이 점 유의하라. 천정(天正 당시의 일본 연호) 임진년 월 일, 풍신수가(豐臣秀家)ㆍ행정(行貞)ㆍ길성(吉城) 등이 양도(兩道)의 이(吏)ㆍ호(戶)ㆍ예(禮)ㆍ형(刑)ㆍ공(工)의 백(伯 즉 그 관계 책임자를 말함) 등에게 부치노라.” 하였다. 흉악하고 해괴한 말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만 대를 두고도 잊을 수 없는 일이다.
○ 삼도(三道)의 해군 함대[舟師]가 가덕도(加德島) 앞바다까지 왜적을 추격하여 크게 이기다. 이에 앞서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은 왜적들이 여러 성을 연달아 함락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해군 함대를 이끌고 가덕도로 향했는데, 왜적의 배가 바다를 덮고 있는 것을 보자 마침내 퇴각하여 돌아오고, 여러 장수들도 점점 흩어져 가버렸다. 원균은 아군의 전함을 다 침몰시키고는 육지에 올라가서 왜적을 피하려 하였으나, 옥포만호(玉浦萬戶) 이운룡(李雲龍)이 안 된다고 하여 마침내 중지하였다. 원균이 이운룡 등의 몇 척의 배와 함께 노량(露梁)에 퇴각해 있는데 적병이 뒤따라 좇아오자, 이운룡이 전라도의 해군에 구원을 청하고자 곧 작은 배 하나를 타고 달려갔다. 그런데 당시 전라 좌수사 이순신(李舜臣)과 우수사 이억기(李億祺)가 해군 함대를 거느리고 좌수영(左水營) 앞바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척후병(斥候兵)이 외쳐 보고하기를, 작은 배 한 척이 와두해(瓦頭海)로부터 달려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급히 척후선을 시켜 물어본즉, “경상도 옥포만호 이 모요. 적병이 가득히 몰려와 여러 진(鎭)이 와해됐소. 우수사 원 모가 힘으로 지탱하지 못해 퇴각하여 노량을 지키고 있는데, 흉악한 왜적이 뒤쫓아 와서 이미 사천(泗川)과 남해(南海) 바다에 가득 차 있소. 전라도의 함대가 그 선봉을 격파하여 주기 바라오. 그렇지 않으면 영남의 바다는 끝장이 나고 화가 호남으로 닥쳐올 날이 멀지 않을 것이오. 장군께서는 이 점을 숙고하시오.” 하였다. 이순신 등이 그 말을 듣고는 다들 놀라서 서로 돌아보는 것이었다. 광양 현감(光陽縣監) 어영담(魚泳湛)이 그때 여러 장수 중의 한 사람으로 진중에 있었는데, 여러 장수들이 서로 미루고 칭탁하는 것을 보자 팔뚝을 걷어올리고 크게 소리치기를, “영남은 왕의 땅이 아닌가. 이 왜놈은 나라의 적이 아닌가. 영남 바다의 여러 진이 이미 다 함몰되고 단지 몇 척의 배만이 우리 경내에 와서 정박해 있으며 저 사나운 왜적이 요량없이[匪茹] 이미 그 뒤에 와 있다는데, 우리가 한 도의 완전한 군대를 가지고 여기서 관망이나 하면서 구원을 청하는 말을 듣고도 걱정 않고, 왜적이 온 것을 보고도 마음이 태연한 채 앉아서 영남 바다의 군사를 오늘 다 없어지게 만든다면, 내일의 일을 어떻게 처리하겠는가. 남의 위급한 것을 구해주지 않고 우두커니 앉아서 왜적을 기다린다면 겁 많고 나약한 게 아니오. 장군께서 헤아려 하시오.” 하니, 여러 장수들은 이 말을 듣고 모두 그를 질시하였지만, 이순신은 대답하지 않고 생각에 잠겨 밤을 지냈다. 이튿날 새벽, 이순신이 장병들을 모아 놓고 어영담을 불러다 말하기를, “광양 현감은 영남을 구원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는데, 나도 생각해 보니 역시 이치가 있는 말이다. 그러나 영남 바다에서의 왜적 토벌은 반드시 노량에서 끝나는 것은 아닐텐데, 깊고 먼 물길을 시험해 본 사람이 없으니 이 점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하니, 어영담이 말하기를, “그것은 내가 맡겠소이다. 나를 선봉으로 삼아 주기 바랍니다.” 하자, 이순신이 기뻐하면서, “광양의 말에 따라 분부하겠다.” 하고, 곧 장군기를 세우고 소라를 불며 대포를 터뜨리고서 어영담을 선봉으로, 방답귀선장(防踏龜船將) 신여량(申汝良)을 척후로, 순천 부사(順天府使) 권준(權俊)과 가리포 첨사(加里浦僉使) 구사직(具思稷) 등을 중위(中衛)의 좌ㆍ우장으로 하고는 이억기(李億祺)의 군함과 합세하여 노량으로 향발(向發)하여 원균과 만나기로 했다. 먼저 떠난 배가 광주(光州)의 바다에 이르자, 왜적의 배 5, 6척이 노를 바삐 저어 퇴각했다. 아군이 이들을 쫓아가자 그 배들에 탔던 왜적은 육지로 올라가서 달아났다. 아군이 그 배들을 다 부숴버리니 아군의 군졸들은 기운이 났다. 날이 저물어 배를 돌려왔다. 이튿날 새벽, 또 영남 바다로 향하여 견내량(見乃梁)에 도착하였는데, 적선들이 바다를 덮고 와서 척후장 신여량은 이미 왜적에게 포위되어 있으면서 부채를 흔들어 뒷 군사들에게 물러가라고 신호했다. 이순신은 바다가 좁은 것을 보고 느릿느릿 퇴각하여 여러 배들이 차례로 나왔고, 이 억기는 이미 주도(柱島) 밖으로 달아나 있었다. 방답첨사(防踏僉使) 이순신(李純信)이 큰 소리로, “사또는 왜 우리 두 배의 장수만을 버리고 갑니까?” 외쳤으나, 이순신(李舜臣)은 대답하지 않았다. 적병은 아군이 후퇴하는 것을 보자 급히 노를 저어 쫓아왔다. 한산도(閑山島) 큰 바다에 이르렀을 때, 이순신은 소라와 나팔[角]을 불게 하여 일시에 기를 흔들고 함성을 지르며 배를 돌려 왜적과 맞붙어 싸웠다. 이억기도 노를 재촉하여 뒤따라 와서, 허다한 배들이 다 천지현전(天地玄箭 화살 가운데 천ㆍ지ㆍ현의 세 종류가 있음)을 발사하여 총소리가 바다를 뒤흔들고 연기와 불길이 하늘에 가득 찼다. 접전한 지 얼마 안 되어 적선은 다 침몰되고 왜적은 불에 타고 물에 빠지고 하여 죽은 자가 부지기수였으며, 목을 벤 것만도 1백여 급이나 되었다. 그 이튿날, 어영담이 계속 선도(先導)가 되어 진해(鎭海) 바다를 거쳐 거제(巨濟)에 이르렀다. 당항포(唐項浦)ㆍ진도(珍島)의 배와 남도포(南桃浦)의 배가 앞서 가다가 왜적의 복병선(伏兵船) 2척을 만나 접전했는데, 왜적이 패배하고 육지로 내려 달아나자 그 배들을 불태워 버렸고, 이어 왜적의 배 25척을 만나 접전했다. 이달 5일, 삼도(三道)의 여러 배들이 합동으로 공격하여 왜적의 함대를 쳐 없애고 술시(戌時 지금의 하오 8~11시 동안의 시간을 말함)에 가서야 끝냈다. 6일, 경상 우수영의 전함이 전라도 보성(寶城)의 배와 합동으로 왜적의 큰 배 2척을 공격하여 불태워 없앴다. 그 이튿날, 왜적의 배들이 율포(栗浦)에서 떠나 일본으로 향하는 것을 삼도의 해군이 가덕도 앞바다까지 쫓아 갔는데, 적병은 우리 배들이 돌진하는 것을 보자 배를 돌려 우리 배들을 맞아 싸웠다. 소라 소리가 한 번 울리자 총통(銃筒)을 일제히 발사하였고 화살과 돌이 뒤섞여 쏟아지며, 섭불[薪火]을 요란하게 던지니 함성이 바다를 진동시키고 연기와 불길은 하늘에 가득 찼다. 왜적의 배가 부서진 것이 1백여 척이고, 불에 타고 물에 빠지고 하여 죽은 자가 무수하였으며, 수백 급의 목을 거두었다. 그 가운데 큰 배가 한 척 있었는데, 층루(層樓)가 마련되어 있고 그 높이는 3, 4장(丈) 가량에 10여 명을 앉힐 수 있었으며, 밖에는 붉은 깁 휘장이 드리워져 있고 안에는 금은으로 장식된 병자(屛子)가 있어 생김새가 퍽 견고하여 쳐부수기 어렵게 만들어진 것으로, 이는 바로 왜적의 주장(主將)이 탔던 배였다. 그 배 안에서 금색의 둥근 부채 한 자루를 얻었는데, 한쪽 면의 중앙엔 ‘6월 8일에 수길이 서명함[六月八日秀吉着署]’이라고 씌어 있었으며, 그 오른편에는 ‘우시 축전수(羽柴筑前守)’의 5자가, 왼편에는 ‘타정류류수전(鼉井流流守殿)’의 6자가 씌어 있었다. 이것은 아마도 수길이 축전수에게 표신으로 준 물건일 것이고, 그 배에서 목 베인 왜장(倭將)은 바로 축전수였을 것이다. 원균의 배들은 비록 그 수효는 적었지만 돌격을 잘했다. 이순신의 배 형상은 거북이 같았으며 위에 지붕 판자를 덮어 씌우고 두루 쇠못을 박았는데, 그것이 뾰족하고 날카로워 범접하기 어려웠고 또 퍽 견고하고 빨라서 전투에 나가기 편리했다. 거기다 어영담의 귀신 같은 지도(指導)를 얻어 전후의 전공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군영에 돌아와 장계를 올려 전후의 전승을 알렸다. 어영담은 경상도 함안(咸安) 사람으로 대담한 군략이 세상에 뛰어나고 유달리 강개하였으며, 과거하기 전에 이미 여도(呂島)의 만호가 되었고 급제 후에는 영남 바다 여러 진의 막하에 있었다. 그리하여 바다의 얕고 깊음과 도서(島嶼)의 험하고 수월함이며, 나무하고 물 긷는 편의와 주둔할 장소 등을 빠짐없이 다 가슴속에 그려 두었기 때문에, 해군 함대가 전후에 걸쳐 영남 바다를 드나들며 수색하거나 토벌할 때면 집안 뜰을 밟고 다니듯이 하여 한 번도 궁박하고 급한 경우를 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대체로 해군 함대의 전공은 어영담이 가장 높았는데도 단지 당상관에 올랐을 뿐, 선무훈(宣武勳)에는 참여하지 못하여 남쪽 사람들은 다들 애석히 여겼다.
○ 경기도 수원(水原)에 주둔한 왜적이 글로 고시하기를, “지난 20일 일본에서 사람을 서울로 보내 이 친구를 보내게 했다. 저 일본 사람이 길에서 조선 사람이 머리를 채취하는 것을 물은즉 그 이튿날 목을 벤 사람을 내놓고 그 수효를 세었다. 이것은 악한 사람이 한 짓이다. 또 조선 사람에게 기식(寄食)하던 5명을 사로잡았는데 그 가운데 4명에게는 사형을 집행했고 남은 한 사람은 명 나라를 다루는 계략에 통해서 사형을 집행하지 않고 지나가게 해준 것이다. 이 자가 양성부(陽城府)에 있는 거처로 돌아가는 것을 물어서 양성의 촌 백성이 그를 집에 돌려보내 주었다. 풍신행정(豐臣行貞)이 서울에서 수원으로 보내졌는데 그가 수원에 체류하는 동안 장군 수종(秀宗)이 지령서를 주어 이르기를, ‘백성 남녀는 집으로 돌아가게 할 것. 수원군을 예로 취하고 단속하라.’ [去二十日日本差人至京城使托差越斯友朋彼日本人於道問朝鮮採首則明日出人數右惡人打果又生擒寄食五人中四人行死罪一人者此通爲明計差過也此者問在陽城府居歸云陽城村氓爲歸家豐臣行貞從京城差越水原滯留之間將軍秀宗任旨書百姓男女令歸宅者水原郡禮取可束] 하였다.” 하다. 글 뜻이 알아보기 힘들어 재록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 역시 왜란 중에 일어난 한 가지 일이기 때문에 써둔다.
○ 서울에 머물러 있는 왜적이 선릉(宣陵)ㆍ정릉(靖陵) 두 능을 파내다. 선릉은 성종(成宗)과 정현왕후(貞顯王后)의 능이고 정릉은 중종(中宗)의 능이다. 진실로 이 왜적은 만세를 두고 잊어서는 안 되겠다.
○ 왜적의 장수 평행장(平行長)과 의홍(義弘) 등이 임진강을 건너고 신힐(申硈)이 이 싸움에 죽었으며, 김명원(金命元)ㆍ이빈(李薲) 등이 패하여 관서(關西)로 달아났다. 애초에 의지(義智) 등이 10여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임진강에 쇄도해서는 강에 방비가 있음을 알자 산골짜기에 군사들을 숨겨 두고 매일같이 약하게만 보였다. 신힐(申硈)은 왜적의 무리들을 엉성하게만 보고서 군사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니, 잠복했던 왜적들이 사방에서 일어나 함성을 지르면서 닥쳐 오는 소리가 하늘에 치닿는 듯하고 그 형세가 바람에 불길 같아서, 손쓸 사이도 없이 혹은 칼에 맞아 죽고 혹은 물에 몸을 던지고 하여 한 사람도 빠져 나가질 못했다. 신 힐 역시 강물에 빠져 죽고 강을 수비하던 군사들도 일시에 놀라 흩어져 버렸다. 전 수사(水使) 유극량(劉克良)은 원수별장(元帥別將)으로 군에 있었는데, 그는 왜적의 모략을 염탐해 알았으므로 신힐에게 건너가지 말기를 청했지만 신힐은 그를 늙은 겁쟁이라고 나무라며 몰아세우고는 강을 건넜던 것이다. 마구 찍어댈 때에도 유극량은 조금도 자기 부서를 떠나지 않고 힘을 다해 싸우다 죽었다. 원수 종사관 홍봉상(洪鳳翔)도 원수에게 관광(觀光)의 일을 고하기 위해 강을 건넜는데 왜적이 마구 몰아댈 때 역시 물에 빠져 죽었다. 애석하다. 홍 종사는 양을 따라 범떼 속으로 들어갔으니 사람들은 쓸데없는 죽음을 당했다고 나무라지마는 소문만 듣고 달아나는 것보다는 나았다.
○ 피난하는 사람들은 각기 가깝고 편리한 대로 피난했다. 영남의 좌도 사람들은 산으로 들어 간 외에는 다 영동(嶺東)으로 들어가고 우도 사람들은 전라도로 넘어 들어갔으며, 호서 사람들 역시 그렇게 하고 경기 사람들은 다 강화(江華)ㆍ아산(牙山) 등지로 들어가다. 계사년(1593, 선조 26)에 왜적이 물러간 후 고향에서 살아갈 길이 없자 있던 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는데, 계사년과 갑오년(1594, 선조 27)에 사람이 서로 잡아먹는 변고를 빚게 됐다.
○ 김해ㆍ동래(東萊) 등지의 사람들은 다 왜적에 붙어서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며 여인을 더럽히고 하였는데 왜적보다 심하였다. 김해의 경우에 도요저(都要渚) 마을은 낙동강 연변의 큰 고장인데, 왜란 초기부터 왜적에 붙어서 도적질을 하고 혹은 지난날의 원수를 갚기도 했다. 한 서원(書員)은 일본에 들어가서 전세(田稅)를 마련하느라고 혹 뱀을 잡아다가 그 세미(稅米)에 충당하기도 했으니, 왜인이 천성으로 뱀 먹기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창원(昌原)의 왜적은 전라 감사를 자칭했고, 향리(鄕吏) 현호준(玄虎俊)은 전라 감사의 배리(倍吏)라 자칭하여 선문(先文 관리 출장의 도착일을 미리 알리는 공문)을 발송하기도 하다. 본도의《순영록》에 나온다.
○ 경상도를 나누어 좌ㆍ우 순찰(巡察)을 두었는데, 이성임(李聖任)을 좌순찰로 했다. 당시 적병이 경상 좌우도에 가득 차 있어서 호령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어명이 내린 것이다.
○ 초유사(招諭使)가 다음과 같은 통유문(通諭文)을 내다.
해적이 도량(跳梁)하여 우리 성지(城池)를 공격하여 함락하고 우리 생령(生靈)을 도륙하였으며, 동서로 충돌하면서 무인지경을 들어오듯 하였으나, 67읍 중에서 한 사람도 충의를 제창하여 군사를 일으켜서 나라의 치욕을 씻은 자가 없었고 우두커니 앉아서 온 고장[道]을 왜적의 손에 넘어가게 하였습니다. 종묘 사직은 깃술[綴旒]보다 위태롭게 되었고 정기(正氣)라곤 쓸은 듯이 없어져 국토[山河]엔 수치만이 안겨 있으니, 무릇 혈기를 가진 자라면 누군들 통분히 여기지 않겠습니까. 본관은 어명을 받들고 이 땅에 와서 눈물을 뿌리고 주먹을 불끈 쥐면서, 이 왜적과 한 하늘을 함께 이고 살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여러 읍이 무너져 달아난 끝에 병력은 이미 꺾여진 터인지라 빈 주먹을 뻗고 흰 칼날을 무릅쓰면서 홀로 서서 분개하는 것입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귀하는 여염에서 분발하고 일어나 의병을 불러모아 가지고 강중(江中)에서 왜적의 배를 섬멸하여 의병의 명성을 한 고장에 날려 사람마다 기운을 돋구었다 하니, 선대부(先大夫)께서 훌륭한 자손을 두었다고 하시겠습니다. 그 뜻을 끝까지 관철하기에 힘쓰고 의병을 더욱 확장하여 역내(域內)에서 돼지 같은 왜적들을 죽이고 백성들을 도탄 속에서 구출하여, 위로는 임금의 원수를 갚고 아래로는 충효의 가문을 빛낸다면 또한 통쾌하지 않겠습니까. 본관이 비록 노둔하고 졸렬하기는 하나 충의가 천성에 뿌리박고 있으니, 한 번 죽어 나라에 보답하는 일에 있어서는 감히 남에게 뒤지지 않습니다. 동지를 규합하여 의열(義烈)로써 그들을 격려한 다음 족하(足下)들과 더불어 좌우로 제휴하여 함께 하늘을 받치고 태양을 맑히는 공을 이룩하기 원하고 있습니다만 귀하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살아서는 충의로운 선비가 되고, 죽어서는 충의로운 귀신이 되는 일이니 귀하께서는 노력하십시오. 의령(宜寧)의 곽 의사(郭義士)께 내림.
○ 평의지가 송도를 함락하고 다시 해서의 여러 고을을 함락해서 깡그리 불타 없어지다.
○ 조정이 서경(西京 평양)에 이르러 행차를 멈추고[駐蹕] 광해군(光海君)을 세자로 책봉한다는 교서를 팔도에 반포하다.
조종이 창업해 놓은 기업(基業)에 자리잡고 편안하게 지내느라 위험이 닥쳐올 일을 잊고 있다가 이미 전쟁의 핍박에 직면해 버린 이때 원량(元良)을 왕세자로 하고 신민들의 기대에 부응하노라. 왕위가 비록 불안하긴 하지만 난시(亂時)라 하여 어찌 경사를 잊겠는가. 이에 파천길을 옮겨야 하는 날에 즈음하여 널리 고유(告諭)하는 글을 선포하노라. 못난 이 몸이 명철하지 못하여 국가의 다난한 때를 만났다. 25년 동안 조심하고 두려워하면서 스스로 내 마음을 다하려 하였으나, 억만의 생령이 나를 떠나 버리니 앞으로 닥쳐올 백성의 원망을 어찌하리오. 다행히 이번에 인지(麟趾 세자를 가리킴)의 노래를 널리 폄은 실로 조종의 가호(加護) 있으심에 힘입은 것이로다. 백성을 무육(撫育)하는 방법에는 비록 부끄러움이 있지마는 왕세자를 세우는 것은 마땅히 일찍 해야 되는 줄로 생각하노라. 책봉의 예(禮)는 근엄하게 해야 한다는 한신(漢臣)의 장주(章奏)가 한갓 잦았거니와 날짜를 오래 늦추면 범진(范鎭)의 머리털이 허옇게 돼버린다. 다만 이 야만 오랑캐의 외침(外侵)이 마침 국내(國內)가 어지러운 틈을 타고 빚어져, 수도를 침범하고는 사방으로 파급되어 여러 성의 장벽이 일제히 무너졌다. 재앙이 내 신변에까지 다가와 칠묘(七廟)의 의관(衣冠)이 옮겨졌으니 나라의 운명은 다급하고 인심은 두려워하기만 한다. 내 어찌 양위(讓位)를 부질없이 고집하겠는가. 이때야말로 세자를 정하는[定本] 일을 서둘러야 할 시기인 것이다. 둘째 아들 광해군 혼(琿)은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명철하며, 학문은 정밀하고 민첩하며, 어질고 효성스러움이 일찍부터 드러나 오랜 동안 억조 백성들의 촉망을 받아 왔고, 그들은 또 그의 덕을 구가(謳歌)하면서 그에게 귀의(歸依)하기를 생각하여 왔으니, 그는 선왕의 왕위를 계승할 만하다. 이에 그를 세자로 진봉(進封)하고 인하여 그로 하여금 군사를 위로하고 나라를 감독하게 하노라. 이 일이 비록 창졸간에 거행되는 것이기는 하나 그 계획은 사실 전에 정해진 것이니 모든 백관(百官)들은 내가 우연히 그렇게 했다고 말하지 말라. 나라의 근본이란 본래 급작스러이 처리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번에 평양에 와서야 비로소 중외(中外)에 반포하게 되었다만, 전에 서울에서 이미 모든 백관의 축하까지 받았던 것이다. 온 나라 안[關中]에 소해(小海)의 은택이 미쳐 있고 길에서는 전성(前星)의 광휘(光輝)가 바라보인다. 황천(皇天)도 우리 조종을 보우하는데 사직(社稷)인들 어찌 한쪽 구석 땅에서 편안하겠는가. 적의 혼이 이미 가 버리자 한강의 바람과 물결이 맑아지기 시작하였고, 관군이 분발하려 마음먹자 우리 진터가 확청(廓淸)되어 간다. 용루(龍樓)에 문침(問寢)하는 예절이 갖추어질 것이고, 학금(鶴禁)은 구도(舊都)의 위의를 회복할 것이다. 아! 신민은 내가 고하는 뜻을 살펴 알아서 태자를 위해 죽음을 바치고 나 한 사람의 수치를 남기지 않게 하기를 원하노라. 성심으로 널리 고하니, 너희들은 다 나와서 들어 보아라. 아! 큰 강을 건너는 데 그 나루터조차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는 것과도 같구나. 어려움을 구출하기 위해 원자(元子 즉 왕세자)를 공경스러이 보호하라. 현명한 계승자를 택하여 세움으로써 사람들의 기대에 따른 것이다. 후일의 승평(昇平)은 실로 오늘의 이 일에 말미 암는 것이다.
○ 경상도 영천(永川) 사람 진사(進士) 정세아(鄭世雅), 신녕(新寧) 사람 봉사(奉事) 권 응수(權應銖), 하양(河陽) 사람 봉사 신해(申海), 고성(固城) 사람 봉사 최강(崔堈)이 다 군사를 모집해서 왜적을 토벌하다. 정세아가 그때 나이 67세였다. 왜적이 막 본성(本城)을 점령하고 있었는데, 정세아가 좌수(座首) 유몽서(柳夢瑞), 생원(生員) 조희익(曹希謚) 등과 더불어 흩어진 군사들을 불러 모아 가지고 왜적을 잡아 목 벤 것이 무척 많았다. 그 후 성을 회복하고 큰 승리를 거둔 것은 다 정세아 등이 먼저 나서서 일한 힘이었다. 권응수는 애초에 수영(水營)의 군관으로 자제와 노복을 거느리고 상도(上道)의 토적(土賊)을 목 베어 죽이기도 하였고, 요로에다 군사를 잠복시켜 흩어져 다니는 왜적들을 목 베어 죽이기도 하였으며, 장정들을 모집하여 혹은 요격(邀擊)하고 혹은 추격하곤 하여 일찍이 두려워하고 피한 적이 없었고, 누차 습격도 당했으나 말[馬]이 씩씩하였기 때문에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초유사가 그를 의병대장으로 하였던 것이다. 최강은 젊어서부터 글을 해득했고 늦게야 무과에 급제하였다. 담(膽)이 커서 무인이 승진 청탁 따위를 하는 짓을 수치스럽게 여겼고, 한편 성질이 강직해서 자기 뜻을 굽혀서 남에게 따르질 못했다. 이때에 와서 군사를 일으켰는데 군사는 비록 적었으나 그들한테서 인심을 얻었으며 전투에 당해서는 자신이 앞장서서 싸워 정기룡(鄭起龍)ㆍ안신갑(安信甲)과 함께 명성을 나란히 하였는데, 많은 사람을 통솔하는 재주에 있어선 이들보다도 나았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운봉 현감(雲峯縣監)이 다음과 같이 치보(馳報)하다.
이번 5월 24일 자시에 도부(到付 문서가 도착한 것)한, 5월 23일 진주(晉州)에서 성첩(成貼 책임자가 문서에 서명하여 그 문서의 효력을 발생하게 하는 것)한 경상 초유사의 비밀 전통(傳通 차례로 서로 전하는 통문)에 말하기를, “당일 창원(昌原)에 사는 황봉찬(黃奉贊)의 종 침향(沉香)이 본 부사(府使)에 현납(現納)한, 퇴로한 호장[戶長] 황중명(黃仲明)이 5월 22일에 성첩하여 고목(告目)한 속에, ‘본부(本府)에 머물러 진수(鎭守)하고 있는 왜인은 2백여 명이나마, 늘 동리에 왜적이 혹 백여 명이 떼를 지어 횡행하고 미포(米布)와 잡물(雜物)을 깡그리 가지고 갈 뿐 아니라, 이달 22일 김해에서 온 왜적의 말에 의하면 당일 부(府)에 들어와 9백여 명을 받아들여 사용하며, 전라감사ㆍ어사ㆍ도사ㆍ찰방 네 행차의 칭호로 그 도에 나갔다 오고 또 부중(府中)에 머물러 있기도 하며, 함안(咸安)ㆍ의령(宜寧)ㆍ삼가(三嘉)ㆍ단성(丹城)ㆍ산음(山陰)ㆍ함양(咸陽)ㆍ운봉(雲峯)ㆍ남원(南原)ㆍ임실(任實)ㆍ전주(全州)에 선문(先文 출발하기 전 먼저 도착 일자를 알리는 글)을 내어 그곳을 향해 갈 것을 차례로 전통하였고, 동 행차의 배리(陪里) 현호준(玄虎俊), 마두(馬頭) 이녹상(李祿祥)이 당일 배행(陪行)할 것을 예정하고 계획하였다가 어제 비가 내려 오늘 떠나는 것이라고 하며, 다른 왜적은 혹은 웅천(熊川)의 길로 해서 혹은 김해의 길로 해서 혹은 백여 명 혹은 50여 인이 잇달아 부에 들어가고 혹은 서울로 올라간다.’ 고 고목이 되어 있으니 참고할 것이며, 왜적의 선성(先聲)은 믿을 수 없다고는 하나 우리나라 노리(老吏)가 방금 왜적 가운데서 왜적이 하는 바를 본 것이 이러하니, 이 고목과 같다면 왜적이 전주로 향해 가는 계획은 거짓이 아닌 것 같은데, 호남의 장병들은 쓸은 듯이 내지(內地)에 근왕하러 갔으니 극히 우려된다. 차례로 전통하여 방비하고 조치하여 날마다 새로이 변란에 대비하되, 본도의 순찰사와 좌우 수사가 있는 곳에 모두 치보하여 앞의 일을 전통할 것이다. 이것 역시 함안의 가장(假將) 이향(李享)이 진고(進告)한 것인데, 왜적으로 전라 감사를 칭호하는 자가 이미 함안ㆍ의령ㆍ정진(鼎津)에 도달하였다고 하였으므로 황중명의 고목이 과연 거짓이 아니니 참고하여 시행할 것이다. 이상 순찰사에 보고함.
○ 세자에게 다음과 같이 하교하다.
큰 물을 건너는 데 나루터 없어 바야흐로 배와 노로 건널 바를 계획하고, 넘어진 나무에 싹이 돋은 것 같아서 오직 나랏일을 부탁하는 데 마땅한 사람 얻은 것을 다행하게 여겨, 이에 군사와 군정의 권한을 맡겨 부흥의 대업을 이룩하기 바란다. 돌아보건대 나는 덕이 엷은 몸으로 외람되이 나라의 큰 기틀을 지켜, 음우(陰雨)가 내리기에 앞서 뽕나무 껍질을 거두는 데 경계함이 있어서 매양 깊은 밤중에 썩은 새끼줄로 말을 모는 것같이 조심하였으니 어찌 백성의 병폐를 소홀하게 하였겠는가. 그러나 어찌 생각하였으리오. 바다 섬의 추악한 오랑캐가 사람과 짐승이 본성을 달리함을 생각지 않고, 처음에는 상국(上國 명(明) 나라)에 유감을 품고 하늘을 향해 활을 당겨 쏘려 하다가 끝내는 우리나라에 앙화를 전가하여 감히 사람을 씹는 입을 움직여서, 모든 백성들을 거의 남김없이 유린하고 서울에까지 급히 충돌해 온 것이다. 칠묘(七廟)가 불타 소진되었으니 폐허가 된 데 개탄함을 견디지 못하겠고 삼궁(三宮)이 별같이 사방으로 흩어져 파천하는 어려움을 함께 하였으니, 이미 사람과 귀신의 분노가 극도에 다다랐고 섶에 누워 쓸개를 핥으면서라도 그 원수를 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비록 나라의 운이 불행해서라고는 하지마는, 진실로 내가 덕이 적고 어리석어 그렇게 된 것이로다. 윤대(輪臺)에서 과오를 뉘우침이 이미 심하나 백성들은 그 덕을 알지 못하고, 봉천(奉天)에서 자기를 허물함이 한갓 간절하나 말이 사람을 감동시키지 못하여, ‘어디로 돌아갈 건가’ 하는 원한은 바야흐로 깊고 깊은 물에 임하는 것 같은 두려움은 점차로 극심해지니, 제사를 주관하여 신주를 받들 중대한 자 아니면 나라를 일으키고자 하는 기대에 부응할 수 없음을 생각하노라. 세자 혼(琿 광해군)은 훤칠하고 숙성하며 그의 인효(仁孝)는 본래부터 알려져 뭇 아래 사람들이 아껴 추대하니 넉넉히 중흥의 운을 족히 찬할 수 있는지라, 사방의 사람들이 그를 구가(謳歌)하여 다들 이르기를, “우리 임금의 아들이시로다.” 한다. 왕위를 물려줄 계획은 오래 전에 결정하였고, 군국의 대권을 총수(總帥)하는 명령을 의논할 수 있도다. 이에 혼으로 하여금 임시로 국사를 섭리하게 하노니, 무릇 관작을 제배(除拜)하고 상벌을 시행하는 등의 일을 편의에 따라 스스로 결단하게 하노라. 아! 영무(靈武)의 의기(義旗)를 돌려와 이 나라의 건곤(乾坤)이 다시 열리는 것을 보게 되기를 바라거니와, 미앙궁(未央宮)의 수주(壽酒)를 놓고 부자가 다시 만나 기뻐할 때가 속히 오기를 목놓아 기다리노라. 나라 사람들은 각각 세자를 돕고 추대하는 마음을 격려하여 함께 평화를 가져오는 일을 이룩하라. 너희들 정부는 중외에 뚜렷이 일러주어 다들 이 일을 들어서 알게 하라. 그 때문으로 이에 교시하노니 마땅히 잘 알리라 생각하노라.
○ 남원 부사(南原府使) 윤안성(尹安性)이 은진(恩津)에 도달하여 본부(本府)의 선비들에게 글을 보내어 이르다.
부관(府官)이 의병을 일으키기를 위하여서로다. 현풍(玄風)에 사는 선비[士子] 곽재우(郭再祐)본래는 현풍 사람인데 지금 의령(宜寧) 처의 고향에 산다 가 왜적에게 완전히 함락된 땅에서 단지 촌락의 군사를 거느리고 재차 적병을 구축(驅逐)하여 왜적의 배가 다시는 낙동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였는 바 그 의로운 명성과 높은 절조를 듣기만 하여도 모르는 결에 탄복하여 멀리서 배례(拜禮)하였다. 본도는 아름다운 풍속의 일컬어지는 것이 여러 도의 으뜸이로되 아직도 의병을 일으키는 사람이 없으므로 극히 수치스러웠는데, 듣자하니 김능성(金綾城)익복(益福)이 그때 본현을 맡고 있었다. 이 뜻을 같이 한 사람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왕업(王業)을 회복하려 한다 하는바 이로서도 족히 이곳에 인물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의관 자제(衣冠子弟)들의 집에 통문(通文)하고 의논하여 나라가 2백 년 동안 휴양해 준 은혜를 생각하고 한 도의 전체가 충의를 느끼는 이름을 이룩하게 된다면, 영광이 한 몸에 가해지고 은택이 만 대에 미치며, 청사에 새겨진 공명(功名)이 사람들의 보고 듣는 가운데 밝게 빛날 것이니, 급속히 거행해서 신민으로서의 도리를 다할 것이다.
○ 대군(大軍)이 서울에 다다른 뒤에 호남의 각 관아에서 남은 장정 및 품관(品官)ㆍ교생(校生)ㆍ팔결(八結)ㆍ연호(煙戶) 등의 군사들을 다 모아서 성의 방어에 대비시키다.
○ 경기도의 문신(文臣) 우성전(禹聖傳)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다.
○ 병마절도사가 통지하는 사연으로 순찰사에게 도부(到付)한 관내(關內)에, 지금 도착한 충청 감사의 관내에 전하기를, “행재소의 도로가 갑자기 막혀 소식이 통하지 않으므로 사람을 모집해서 계본(啓本)을 가지고 상경케 하였더니, 당일로 동인(同人)이 비변사(備邊司)에 가지고 관내에 하교하신 것이 있었소. 5월 9일의 강원 감사의 글에, ‘전문(傳聞)하건대, 성에 들어온 왜적은 발이 붓고 기운이 빠져 밤에는 흩어져서 곤히 잠을 잡니다. 운운.’ 하거늘, 죽기를 무릅쓰고 싸울 군사 50명을 상을 내걸고 모집하여 하늘에 고하고 함께 맹세케 하여 어두운 틈을 타서 왜적을 마구 찍어 죽이려고 8일에 성 안으로 들여보내려 했더니, 5월 8일 도검찰사(都檢察使) 이양원(李陽元)의 서장(書狀)에, ‘군관 유정언(柳廷彦)을 시켜 성 밑에 잠입하여 왜적의 기세를 엿보게 했더니, 왜적의 기세가 급히 쇠해서 낮에는 오로지 약탈을 일삼고 밤에는 흩어져서 곤히 잠자느라 우리들이 왕래하는 것도 모른다 하며, 신의 서울집 종이 왜적 가운데서 빠져 나와 말하기를, 신의 집 역시 왜적에게 약탈당했는데 왜적의 형상을 보니, 단지 단검(短劍)을 가졌을 뿐이라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포로된 자들이 반이나 섞여서 흩어져 나가 도적질을 하고, 어떤 사람이든 총이나 활을 쏘면 검을 풀고 목숨 살려 주기를 요구합니다.’ 하기에, 그 기세가 곤궁한 것이 두려워할게 못 될 듯하여 곧 50명의 군사들과 더불어 많은 상을 걸고 결속하고서 10일을 기해 성에 들어가 왜적들을 마구 찍어 죽이기로 하였더니, 5월 10일의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의 서장에, ‘왜적의 무리들은 욕기(慾氣)가 방자스러워 꺼리는 것이 없는데, 적은 수로 출몰하여 약탈하던 무리 또한 우리나라 사람에게 많이 피살되니, 우리나라 사람 중에 왜적을 보면 다들 쏘아 죽이려고 했던 자들입니다. 당초에 우리나라는 헛된 소식에 두려워 동요하여 겁내지 않는 자가 없었고, 어리석은 백성 중에는 혹 애걸하여 구차스럽게 살아날 계획을 하는 자가 생기고는 했는데, 왜적이 서울을 점거하게 되자 온갖 하는 짓들 치고 해괴하지 않은 게 없어 무릇 혈기가 있는 자는 다 그 해독을 입기에 이르렀고, 우리나라 사람으로 왜적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자들 역시 흩어져 가버렸습니다. 그 시끄럽게 외치고 드나들던 자들 치고 기운이 빠지고 발이 붇지 않은 이가 없어 호통치던 기세는 없어지고 목숨을 내놓은 도둑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전날에 두려워하던 자들은 분격하고, 살아나기를 꾀하던 자는 원망하고 성내어 다들 왜적을 무찌를 것을 생각하여서 제창으로 보복하기를 생각하는데, 서울에서 왜적에 굽혔던 무리들 역시 왜적들을 저격할 계획을 합니다.’ 하였고, 5월 10일 검찰사의 글에, ‘왜적 가운데 포로가 되었던 사람 정인(鄭仁) 등 3인을 잡았는데 그 모두가 말하기를, 「왜적으로 철환(鐵丸)을 가진 자는 4, 5인 중에 겨우 한 사람이고, 한 사람이 가진 철환의 수효는 15, 16알에 불과하다. 왜적 가운데 우리나라 사람으로 앞잡이 노릇을 하던 자가 5분의 1이 남아 있고, 여러 왜적이 동리에 갈라져 있으면서 평상시같이 숙면하면서 전혀 의심을 품지 않아서 아침에 세수를 하고서야 비로소 칼을 찬다. 장수는 대낮이 되어야 일어나고 혹은 10명씩 혹은 20명씩 모여 있으면서 별로 진을 치거나 변고에 대비하자는 생각이 없다.」하였습니다. 대개 왜적의 무리들이 재물을 얻고난 후에 소와 말을 많이 약탈해서 한강으로 보내는 걸 보니, 군사를 퇴각시킬 생각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였소. 이상의 갖가지 서장은 계하한 것이니, 이에 앞서 우리나라 인민들이 왜적의 소식을 잘못 듣고 서로 겁을 내어 싸우지도 않고서 스스로 무너졌으니 모든 것이 다 극히 통분스러운 일이오. 지금 왜적의 기세가 이러하니 무릇 의기(義氣)가 있는 자는 분발하고 일어나서 왜적을 무찌르고 왜적을 잡아야 할 것이오. 각 도의 각 관원에게 급속하게 알려 주도록 하시오. 운운.” 하다.
○ 전 봉교(奉敎) 정경세(鄭經世)경상도 상주(尙州) 사람이다. 가 초유사(招諭使)에게 다음과 같은 계(啓)를 바치다.
작고 추한 것들이 중국을 어지럽히는 해독을 쌓아 수치스럽고 욕됨이 이미 종묘에까지 미쳤습니다. 한낱 필부이기는 하나 목숨을 바치겠다는 마음을 지니고 계획을 감히 사신께 고하고자, 계시는 천막을 바라보며 눈물을 뿌리고 울면서 글월에 부쳐 성심을 피력하는 터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국가가 아름다운 덕을 전해온 것은 실로 고대의 상(商) 나라와 주(周) 나라에 그 성대함을 비길 것입니다. 신령하고 성스러운 임금이 왕위를 계승해 내려온 13대 동안 위대하게 드러나고 위대하게 왕업을 계승하여 물품이 풍부하고 백성은 편안하였습니다. 2백 년 동안 모든 것이 풍부하여 군의 기록은 병란에 익숙하지 않았고 (즉 전쟁이 없었다는 말임) 백성들의 생업은 단지 농경과 양잠을 알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리오. 숨겨진 섬의 흉악한 괴수[凶酋]가 감히 나라를 무시하는 교활한 계교를 마구 부려 자기 임금을 죽이고 나라를 빼앗아 악을 쌓은 것이 이미 궁(窮)과 한(寒)보다 심하였고, 그 군대를 몰아다가 우리 언덕에 버티고 있으니 불공함이 훈육(獯鬻)밀(密) 같은 점이 있습니다. 그 군사를 일으키는 데 핑계로 잡을 만한 말이 없음을 부끄러워하여,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으로 우리나라를 책하였습니다. 연교(燕郊)에서 말을 키우겠다고 소리쳐 말하니, 묵특[冒頓]의 서신이 지나치게 교만한 것이요, 덕진(德鎭)으로 교질(交質)해야 한다고 말하니 포악한 진(秦)의 공갈이 무궁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다 그 끝없는 흉악함에 성내니 하늘의 뜻이 어찌 역적을 돕는 데에 용납하겠습니까. 무릇 군대란 의리로 보아 곧지 못하여 굽으면 기운이 쇠하기 마련이고 소나기는 아침 내 계속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우리 임금께서 진노하여 왜적을 징벌하도록 명령하였으니 태산이 어찌 알을 짓눌러 깨는 일을 힘들다 하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어찌된 국운입니까. 위태로운 때를 당해서 사람의 모의가 좋지 못하여 융성한 때를 빼앗았으니 외적을 막는 성을 구축하였으나 그것이 나라에 무슨 조그마한 이익인들 있겠으며, 거기다 가르치지 않은 백성을 모아다가 그들이 반드시 흩어져 버려 도저히 버텨내지 못할 땅을 준다는 것은 본래 삼척동자조차도 부끄러워하는 일입니다. 조정의 계획이 그 마땅함을 잃은 것이 이미 그러했거니와 변방을 지키는 신하가 군율(軍律)을 범함이 어찌 그다지도 심합니까. 병사(兵使)가 군영의 군사를 옹유하고 있으면서도 머물러 꺽이어 지척에서 부산(釜山)을 구해내지 못했습니다. 방백(方伯)은 왜적의 창끝을 피해서 교령(嶠嶺)에 머뭇거리며 호남ㆍ호서 경계에 있고, 그 아래로 주목(州牧)ㆍ부사(府使)에서 군수ㆍ현감에 이르기까지 칼날을 맞대고 창끝을 겨루어 본 일도 없이 아기(牙旗 상아로 만들어졌다는 대장의 기)는 들판 가운데에 끌리고는 하였으니, 이들은 평소 부절(符節)을 차고 성군의 은덕을 생각하고 살다가 위급한 때에 와서 그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사마의 법[司馬之法 군법(軍法)]이 만약 시행된다면 이런 사람들의 고기를 먹게 될 것입니다.(즉 사형을 가해 주살될 것이라는 말) 이러한 자들의 무책임한 소행 때문에, 마침내 새나 다닐 험준한 요새지가 지켜지지 않아 영남의 생령(生靈)들이 도륙되어 썩어 문드러지게 하였고, 임금이 몽진하니 빈교(邠郊)의 행색이 참담했습니다. 피비린내와 연기가 종묘의 악기를 그을리고 물들였으며, 원한에 찬 귀신들은 가시나무 덤불 속에서 소리쳐 울고 있습니다. 말을 하면 다만 마음 아픈 것을 더할 뿐, 고래로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우리들은 태평세대에 살아남은 좁은 골목길의 지친 백성들로 밭을 갈고 우물을 파서 사는 것도 임금님의 인자하신 은혜가 아닌 것이 없으니, 사방이 흔연히 성군의 교지를 받아 풀 속에 엎드리고 물구렁에서 자며 구차하게 살아남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어찌 생각하였으리오. 난리를 만나게 되어 집이 부서진 것은 잠시 버려둔다 하더라도 나라가 당한 치욕을 어디서 씻을 수 있겠습니까. 병법(兵法)을 모르면 참된 선비가 아닙니다. 설사 건곤을 변하게 할 웅대한 군략이 없다고 하더라도 오직 하늘에서 내려준 진정한 마음은 누구나 다 같이 가지고 있는 것이니, 누구인들 충군 애국하는 본성이 없기야 하겠습니까. 이에 원수와 같이 하늘을 이고 사는 분함이 절박하여 마침내 창을 베고 잠을 잘 각오로 왜적과 싸울 모의를 하여 동지들을 모아 작전 계획을 하고, 흩어져 도망간 군졸을 불러 거두어 요해지를 택해서 복병을 설치해 왜적을 요격하여 흉악한 무리를 쳐 없애기로 한 것입니다. 다만 이 목사나 수령들이 피해서 달아난 끝이라 바로 민심이 극도로 흩어져 있으니, 군기(軍旗)와 군고(軍鼓)를 주관할 자가 없어 군중에 지휘할 사람이 없고 기율을 엄하게 하기 어려워 전진에 임해서 군사들이 달아나 버릴 우려가 있으므로, 세울 만한 좋은 계책이 없는 것이 아닌데도 막대한 근심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외람되이 생각하건대, 우리 주(州)의 지형은 사실 우리나라의 하늘이 내려 준 부고(府庫)입니다. 예의(禮義)가 행해지고 민간의 습속이 돈독하고 후한 것은 신라 1천 년의 여풍이 있음이요, 창고가 차 있고 호구는 많은 것은 진한(辰韓) 70주의 중심되는 요지(要地)인 것입니다. 크게 집중되는 여러 진(鎭)을 모을 수 있고 긴 강의 상류를 둘러 있으니, 하북(河北) 지역이 비록 흩어지고 수복되지 못했다고는 하나, 어찌 한 사람의 의사(義士)가 없겠습니까. 진실로 수양(睢陽)을 포기하고 지키지 아니한다면, 이는 1천 리 되는 강회(江淮)의 땅을 없애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좋은 계략을 헤아려 보건대, 이 성을 굳게 지키는 것 이상이 없습니다. 진실로 좋은 장수를 택해서 진무(鎭撫)케 하고 그로 하여금 의로운 외침을 피력하여 주선합니다. 정병을 골라서 낙동강[洛水]의 나루터를 지켜서 바닷길로 수송해 돌아가는 뱃길을 끊고, 곁 군(郡)에 격문을 내어 용추(龍湫)의 좁은 목을 거점으로 버티게 하여 고개를 넘어 도망해 돌아가는 관문을 막습니다. 가까이는 낙동강 좌안의 여러 주와 연락하고 멀리는 호남의 큰 군영과 호응해서 성세를 합해 멀리 몰고 간다면 군사들의 기세는 절로 배가할 것이요, 충의를 내걸고 곧장 전진한다면 그때에는 뭇 백성들의 마음이 다 돌아올 것입니다. 비록 바다를 건너가서 수길(秀吉)의 머리를 구하지는 못한다 하여도, 어찌 한강에 나아가 인의의 칼로 무도한 왜적의 고기를 저미는 것이 또한 어렵겠습니까. 엎드려 생각건대, 영공(令公)께서는 충신(忠信)이 만맥(蠻貊)의 땅에서도 행해지고 인의(仁義)는 성현으로부터 배운 바입니다. 악비(岳飛)가 갓 금패(金牌)를 받자 3군이 우레같이 통곡하였고, 장준(張浚)이 다시 황하가에 부임해 오자 백성들은 이마에 손을 얹고 좋아하였습니다. 영공의 마음 속은 귀신도 알아 증명하고, 군기[旋旗]는 부로(父老)들의 바람[望]이 매여 있습니다. 돌이켜 생각하건대, 우리 무리가 발돋움하여 기다리는 것은 다른 고장에 비한다면 피나는 정성에서 우러난 것입니다. 1백 년 동안을 두고 이룩해 놓은 문물이 남김없이 없어진 것을 가슴 아프게 여긴다면 대의(大義)를 창도하여 분발하기를 생각하고, 한때 의로운 기운을 의탁할 곳이 없음을 염려하면 외로운 군사를 거느리고, 어디로 돌아갈지를 모르겠습니다. 유명한 장수를 바라나 만나기가 어렵고, 조그만 마음을 안고서 스스로 안타까워 하고 있습니다. 지성이면 사람이 움직이지 않는 예가 없는 것이니 영공의 계극(啓戟 고관을 전도(前導)하는 붉은 칠을 한 창으로, 여기서는 초유사 자신을 두고 한 말임)이 어찌 내임(來臨)하는 것을 꺼리겠으며, 뜻을 지닌 자는 일이 반드시 이룩되는 것이니 비린내 나는 것들을 신속히 쓸어버릴 수 있을까 하나이다. 부디 광야에서 외뿔소도 아닌데 헤매고 있는 우리들을 가련하게 여겨, 저 들판의 당신의 얼룩말을 돌려 우리가 있는 곳으로 빨리 와 주소서. 아! 무릇 이 바다에 둘러싸인 땅 안에 살아있는 백성이면 누구인들 이씨(李氏)이 적자(赤子)가 아니겠습니까. 해바라기 같은 한 조각의 정성스러운 충심은 나라의 녹을 먹거나 먹지 않거나에 따라서 얕고 깊은 차이가 생기는 것이 아니요, 7척의 초개 같은 몸으로 왜적을 제거하느냐 하지 못하느냐를 보고서 사생을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죽백(竹帛 역사)에 이름을 남기느냐를 따질 것 없이, 다만 창과 칼 사이에 목숨을 바쳐야만 할 것입니다. 동해가 바로 눈앞에 있으니 일이 이룩되지 않으면 그때에 가서 그곳에 빠져버려도 늦지 않을 것이고, 북극성이 실로 머리 위에 임해 있으니 의(義)는 마땅히 취해야 하고 사는 것은 구차하게 굴지 않을 것입니다. 사뢸 말씀은 대략 이상과 같으니 나머지 말은 이만 줄입니다. 영공의 안색을 받들게 될 때를 기다리며 마음속을 삼가 진술합니다.
24일. 이광(李洸)의 군대가 온양(溫陽)에 머물다. 충청 순찰사 윤선각(尹先覺)이 방어사 이옥(李沃), 병사 신익(申益)과 더불어 먼저 이미 이곳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있다가, 이때에 와서 두 남도 순찰사와 같이 한때에 서울로 향하였다. 곽영(郭嶸)은 군대를 거느리고 공주(公州)를 지나 천안(天安)으로 향하였다.
26일. 대군이 다 진위평(振威坪)에 모이니 무릇 13만이다. 깃발이 해를 가리고 군량을 운반하는 대열이 1백여 리에 늘어섰다. 경호(京湖)의 피난민이 양떼를 몰고 가는 위세를 잘못 믿고 혹간 돌아와 모이는 자들도 있다.
○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이 또 전라도의 해군[舟師]에게 영남 바다에서 적을 토벌해 주기를 청하다. 6월의 좌수영 영리(營吏)의 고목(告目)에 보인다.
○ 전 장령(掌令) 정인홍(鄭仁弘)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다. 정인홍은 경상도 합천(陜川) 사람이다. 처음에 관군이 무너져 흩어지고 왜적이 멀리 몰아가 곧장 서울을 향하였으므로 대가가 서북으로 몽진하자, 정인홍이 전 좌랑(佐郞) 김면(金沔)ㆍ박성(朴惺)ㆍ곽추(郭趨) 및 그 제자들과 함께 의거를 모의하고 여러 읍의 사민에게 통문을 냈는데, 들은 자치고 분발하기를 생각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제자인 하혼(河渾)ㆍ조응인(曹應仁)ㆍ문경호(文景虎)ㆍ권양(權瀁) 등 막료들로 유사를 갈라 정해서 그들로 하여금 병사를 모으게 하고, 또 박이장(朴而章)과 문홍도(文弘道)에게 군량을 모아 마련하는 임무를 맡기고, 첨사 손인갑(孫仁甲)을 중위장(中衛將)으로 삼아 모집한 군대를 맡겼다. 손인갑이 초계(草溪)의 사막(沙幕)에서 전사하니, 현령 김준민(金浚民)으로 대신하게 했다가 오래지 않아 교체시켰다. 그후 전투에 임해서 장수를 정해 매복하고 습격하고 하는 것이 하나 둘로 계산할 수 없었다. 개산(開山)의 습격ㆍ언안(彦安)의 전승, 성현(星峴)과 정야(井野)의 포위, 단계(丹溪)와 가전(檟田)의 성공(成功) 같은 것들은 그 가운데서도 두드러진 것이다. 그러나 정인홍은 전승을 보고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대부분 보고하지 않아 군공(軍功)은 남의 맨끝에 있었으나 사실인즉 영남에서 의병을 일으킨 가운데에서는 정인홍이 첫째였다. 김수(金睟)는 삼가(三嘉)ㆍ초계(草溪)ㆍ성주(星州) 및 고령(高靈)의 군대를 그에게 맡겼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왜적이 전라 감사를 칭호하여 의령(宜寧)의 정진(鼎津)으로 몰려 닥쳐오니, 곽재우(郭再祐)가 의병(疑兵)을 설치해서 그를 물리치다.
○ 전라 좌우도의 선비들이 의병(義兵)을 일으킬 것을 제창하다. 좌도는 전 부사인 첨지 고 경명(高敬命)을 대장에 모셨고,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와 학관(學官) 양대박(梁大樸)을 종사(從事)로 하고, 정랑(正郞) 이대윤(李大胤)과 정자(正字) 최상중(崔尙重)ㆍ양사형(楊士衡)ㆍ양희적(楊希廸) 등을 모량유사(募糧有司)로 삼았다. 우도는 전 부사인 김천일(金千鎰)을 대장으로 모셨다. 고경명은 광주(光州) 사람으로 전에 동래사(東萊府使)를 지냈고, 김천일은 나주(羅州) 사람으로 전에 수원사(水原府使)를 지냈다. 애초에 유팽로가 서울이 함락되어 거가가 서북으로 봉진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주야로 외쳐 울며 편안히 침식을 하지 못하고, 동지 양대박 및 양희적과 더불어 고경명을 찾아 가서 지방의 병사를 서둘러 일으켜 북으로 향해 근왕(勤王)할 것을 모의하니, 고경명은 그들이 먼저 생각해 낸 것을 기뻐하며 흔연히 그들을 따랐다. 즉일로 여러 읍에 격문을 돌려 추성(秋城)에 모이도록 불러 날을 정하고 깃발을 세웠다. 본도에서 의병을 제창한 것은 유팽로 등이 첫째였으므로, 호남에 삼창의(三倡義)라는 말이 생겼다.
○ 경상도 고령(高靈)의 선비 김응성(金應聖)이 1 천여 명의 군사를 모아 정인홍(鄭仁弘)에 예속하고, 정예한 군사를 골라서 전투에 참가하다. 무계(茂溪)의 싸움, 안언(安彦)의 승리, 성주(星州)에서 성(城) 태운 일 및 사대(沙代)ㆍ가천(伽川)의 전역(戰役)을 모두 도왔다. 또 낙동강의 왜적을 공격하여 온 배를 포획하니, 많게는 5, 6척에 이르렀다. 정인홍은 초유사에게 보고한 바, 소모관(召募官)의 막하에서 왜적을 목 벤 것 역시 30여 급에 이르렀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경상좌도는 감사(監使)와 병사(兵使)ㆍ수사(水使)가 없어 명령이 오랫동안 폐해졌고, 도로가 막혀 여러 읍의 일을 들어 알 수 없었다. 영덕 현감(盈德縣監) 안진(安璡)이 우순찰사에 치보(馳報)하여 이르기를, “좌도의 여러 읍은 다 왜적의 굴혈이 되었고, 오직 영해 부사(寧海府使) 한 효순(韓孝純), 용궁 현감(龍宮縣監) 우복룡(禹伏龍) 및 예안 현감(禮安縣監) 신지제(申之悌)가 각각 외로운 성을 지키고 있습니다. 운운.” 하였다. 세 고을이 성을 각각 지킬 수 있는 것은 세 읍이 왜적에게서 떨어져 있는 거리가 좀 멀기 때문이지, 죽기를 무릅쓰고 수비하며 버티고 싸우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경상도 전 목사 김홍민(金弘敏)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다. 애초에 평의지(平義智)가 충주(忠州)에서 이덕형(李德馨)을 만나기를 청하였는데, 조정에서는 염려하면서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후 6월에 평의지가 대동강 변에 도달하여 또 이덕형을 만나고자 하니, 앞장서서 성을 나가 강 가운데 배를 띄우고 만나 보고서 물러 나왔다.
6월 1일. 절충장군 행부호군 지제교(折衝將軍行副護軍知製敎) 고경명(高敬命)이 도내 여러 고을의 선비와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치고(馳告)하다.
이번에 본도의 근왕군(勤王軍)이 금강(錦江)에서 퇴각하던 날 한 차례 무너지고 다시 여러 군(郡)에서 초유(招諭)할 때에 무너진 것은, 대개 단속하는 방법이 어긋나 기율이 없으므로 와전되는 말이 자주 일어나서 여러 병사들의 마음이 놀라고 의심스러워 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지금 비록 흩어져 없어진 나머지의 병사들을 수습하여도 사기가 꺾여 정예한 기운이 없어졌으니, 어떻게 긴급한 소용에 응하여 후일의 효력을 책할 수 있겠는가. 매번 생각하건대 승여(乘輿 임금이 타는 수레)가 파천했는데 관직 있는 자들이 달려가 문안드리는 일이 오래도록 없었고, 종묘 사직이 재가 되어 버렸는데 왕사(王師 왕의 군사)가 숙청하는 일은 아직도 멀었으니 이런 일에 언급하게 되면 아픔이 마음속까지 사무친다. 생각하면 우리 본도는 본래부터 병사와 말이 정예하고 강력하다고 일컬어져 왔다. ‘성조(聖祖 태조)께서 황산(荒山)에서 승리를 거두신 것은 우리 삼한(三韓)을 다시 이룩하신 공이 있고, 선대(先代 고려)가 낭산(朗山)영암(靈巖) 에서 전투할 때는 한 조각의 돛도 돌아가지 못했다.’ 는 노래가 있어 지금까지 혁혁하게 사람들의 이목에 빛나고 있는데, 그때 용기를 떨쳐 먼저 나서서 장수을 목 베고 적기(敵旗)를 뽑아온 자는 이 도의 사람이 아니었던가. 하물며 근년부터 유도(儒道)가 크게 일어나 사람들이 모두 뜻을 세워 학문을 하게 되었으니, 임금을 섬기는 대의(大義)를 그 누구인들 강론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유독 오늘날에 이르러서 의로운 소리는 없어지고 겁내어 혼란해져 스스로 무너져서 여지껏 한 사람도 기운을 내어 왜적과 창끝을 마주치고 싸우기를 생각하는 자는 없고, 앞다투어 자기 몸과 처자를 보전할 계책을 꾸며 머리를 끌어안고 쥐같이 달아나는 것만 혹시나 남에 뒤질까 두려워하니, 이것은 본도의 사람들이 나라의 은혜를 깊이 저버리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자기 조상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지금인즉 왜적의 기세가 크게 꺾이었고 우리 임금의 위령(威靈)이 날로 뻗어나게 되었으니, 이는 바로 대장부가 공을 세울 기회이고 임금에게 보답할 때인 것이다. 나 고경명은 경전(經典)의 장구(章句)나 따지는 우활한 선비로 학문은 병법에 어두우나 장수를 뽑는 이 자리를 위촉받아 망령되이 대장에 추대되었으니, 이미 흐트러진 사병들 마음을 수습하지 못해 나를 추대한 두세 명 동지들의 수치가 될까 두려워하는 터이다. 다만 신하의 의리로는 마땅히 국난에 죽어야 하는 것이고, 겸해서 군대는 의리상 곧은 것을 세다고 여기니 그 수효의 많고 적은 것에 달려 있지 않다. 오직 담을 크게 갖고 눈물을 뿌리며 전투를 하여 사병들의 앞장이 되기를 생각하여, 임금의 은혜에 약간이나마 보답하기를 바랄 뿐이다. 이달 11일이 군사를 결집하는 기일이다. 무릇 우리 도내의 사람들은 아비가 아들에게 일러 주고 형이 아우에게 권면하여 의로운 군대를 규합해서 함께 일어나, 용맹스럽게 결단을 내려 선(善)에 따를 것을 바라나니 미혹되어 자신을 그르치지 말게 하라.
3일. 삼 도(三道)의 군대가 수원(水原)에 머무르다. 이광(李洸)이 독성(禿城)에 진을 쳤다. 본부의 왜적은 대군이 갑자기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이틀 전에 이미 도망쳐 용인(龍仁)의 왜적과 합세하였다.
○ 좌의병(左義兵)의 진중의 회문(回文)은 다음과 같다.
의병은 오는 11일에 떠난다. 여러 장비는 다 구비되었으나 군량만은 나올 데가 없다. 대장이 이미 모은 여러 사람의 의론으로는 가까운 곳의 각 고을에서 편의에 따라 빌릴 수 있는 것이나, 무릇 토지에서 생산된 식량으로 남아 쌓은 것이 있는 자는 모두 임의대로 양을 정하여 군사들의 식사에 댈 물자를 도와야 할 것이니, 이것이 우리들의 소망이다. 얻은 군량은 그 반이 수송 비용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사람과 말이 천 리를 가는 비용 같은 것이 다 그것에서 나가기 때문이다. 만약 정병(精兵)이나 군마(軍馬)나 짐 싣는 말 중에 자기가 소유하는 것에 따라 내놓아서 도와주면 심히 다행이겠다. 부전운량장(赴戰運糧將) 진사 박천정(朴天挺), 유학 양희적(楊希廸), 재향운량장(在鄕運糧將) 정랑 이대윤(李大胤), 정자 최상중(崔尙重) 등.
○ 적병이 해서로부터 돌려서 관서로 향하니 거가를 호종하는 여러 신하들이 흩어진 병사들을 거두어 모아 기성(箕城 즉 평양)을 수비하고 김억추(金億秋) 등을 대동강에 매복시켜 방어하게 하다.
○ 전 좌랑 김면(金沔)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다. 김면은 경상도 고령(高靈) 사람이다. 처음에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파천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 달려가 대가를 따라 가려고 했으나, 정인홍(鄭仁弘)이 김면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기를 원해서 김면은 고령에서 병사를 모았던 것이다. 김면은 왜적이 강줄기를 따라서 졸지에 고령현의 경내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이를 막았다. 김면은 고령 같은 쇠미한 고을로는 왜적을 막아내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드디어 거창(居昌)으로 달려갔는데, 거창의 선비들이 이미 적인(跡人) 속칭 산척(山尺)이라 한다. 약간을 모았으므로 그것을 김면에게 소속시켰다. 김면은 곧 여러 군사를 뽑아내게 하여 곽준(郭䞭)ㆍ문위(文緯)ㆍ윤경남(尹景男)ㆍ박정번(朴廷璠) 및 유중룡(柳中龍)을 참모와 장서기(掌書記 문서 맡는 사람)로 삼고 박성(朴惺)에게 군량을 모으도록 하였다. 4, 5일 사이에 병사 2천여 명을 모아서 2백여 명을 나누어 보내어 현 북부의 우현(牛峴)ㆍ상암(箱巖)ㆍ목통(木通)ㆍ마령(馬嶺) 등 여러 곳을 수비하게 하고, 대군을 영솔하여 고령으로 나가서 진을 쳤다. 왜적의 배가 강류(江流)를 따라 내려 온다는 소식을 듣고 병사를 독려하여 이를 요격하니, 마침내 성한 배 2척을 노획하고 왜적을 목 벤 것이 80여 급이나 되었다. 이 전투는 실은 박정완(朴廷琬)이 한 것으로 자세한 것은 아래 박정완전에 보인다. 그 노획한 배에 실려있는 물건들은 다 내탕(內帑)의 진귀한 보물이었다. 그중에서 금종이로 꾸민 장지[障子] 한 벌을 얻었는데 광묘(光廟 즉 세조, 휘는 유(瑈))의 어휘(御諱)가 쓰여 있었고, 제복(祭服) 두 벌과 붉은 신[赤舃 임금의 예복에 신는 신을 말함] 두 켤레가 있으므로 초유사에게 보내었다. 지례(知禮)의 적장이 우현을 넘으려고 할 때에 복병장 이형(李亨)이 전사하였다. 김면은 거창이 진주(晉州) 이상 일대 지역의 두뇌같이 중요한 지역이라 거창이 지켜지지 않으면 10여 읍 역시 지켜내기 어렵다고 여겨, 마침내 장수를 정해서 고령을 지키게 하고 스스로 거창의 군사를 거느리고 지례의 왜적을 막았다. 전 부사 서예원(徐禮元)을 중위장(中衛將)으로, 만호(萬戶) 황응남(黃應男)을 부장으로 삼았다. 지례에 웅거해 있던 왜적을 습격하여 종들을 대대적으로 많이 잡았는데, 배설(裵楔)이 명령에 따르지 않아서 다 섬멸하지 못하고 나머지 무리들은 밤중에 도망쳤다. 또 정인홍과 약속하고 성주(星州)의 왜적을 공격하여 양군이 합세해서 포위하였다. 왜적이 개령(開寧)으로부터 와서 지원하자, 배설을 시켜 그 길을 차단하게 하였으나 배설이 가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러 군사들이 왜적의 구원병을 보자 크게 무너졌다. 김면이 마침내 거창으로 돌아왔다가 지례로 옮겨가서 진을 치고 복병을 나누어 보내 금산(金山)의 왜적을 저지하여 거창으로 충돌해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감사가 함양(咸陽)ㆍ안음(安陰)ㆍ산음(山陰)의 군사를 김면에게 예속시켰다. 왜적의 기세가 한창 왕성하여 전투로 쉬는 날이 없자, 감사가 진주 목사 김시민(金時敏)을 시켜 김면을 위해 조방(助防)해 주게 하였다. 하루는 왜적이 또 수없이 밀려와 사랑암(沙郞巖) 지례의 땅이다. 을 지나가자 김면이 말을 달려 검을 휘두르며 김시민에게 이르기를, “국가에서 높은 벼슬자리로 공을 대우한 것은 요컨대 오늘에 쓰기 위한 것이오. 죽음이 있을 따름이지 퇴각해서는 안 되오.” 하니, 김시민이 마침내 말을 돌려서 달려 들어가 계속하여 두 명의 왜적을 쏘아 잡았다. 여러 군사들이 크게 외치며 왜적을 무너뜨리자, 왜적이 그제서야 퇴각하였다. 이때부터 금산과 개령의 왜적들이 뒤이어 약탈을 계속하여 9월부터 12월까지 전투를 하지 않은 날이 없어 장병들이 갑옷을 벗은 일이 없었으니, 혹은 밤중에 찍어 들어오고 혹은 유인해 내어 큰 전투가 10여 차례였고 꺾어 물리친 적이 30여 번이었다. 그 후 합도의병 도대장(合道義兵都大將)으로 승임(陞任)되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김면과 정인홍 두 장수가 곽재우에 이어서 일어나 강회(江淮) 즉 낙동강 일대를 막아 나머지 읍들을 보전하였으니, 만약 그들의 전공을 논한다면 물론 작은 것이 아니다. 다만 한스럽기는 김면이, 박정완(朴廷琬)이 왜적의 배를 노획하고 80여 급을 목 벤 공을 억눌러 나타내 주지 않았고, 손인갑(孫仁甲)이 사원동(蛇院洞)에서 복병을 쓴 작전을 도와 주지 않고 도리어 그가 여러 사람의 모의를 어기고 패군했다는 죄로 몰아넣었으니, 진실로 공(功)을 시기하여 모함한 흔적이 있음을 면할 수 없을까 하는 것이다.
5일. 이광(李洸)이 선봉장 백광언(白光彦)을 시켜 용인(龍仁)에서 왜적을 탐지하게 하다. 왜적이 현의 북쪽인 북두문(北斗文)이라는 작은 산에 진을 쳤는데, 진은 미약하고 군사는 쇠잔하여 그 기세가 외롭고 약한 것 같았다. 백광언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이것은 영세한 왜적이니, 급히 공격하고 때를 놓치지 마십시오.” 하였다.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 율(權慄)이 방어사의 중위장으로 군중(軍中)에 있었는데, 이광에게 강력히 말하기를, “서울이 멀지 않고 큰 왜적이 앞을 막고 있는데, 작은 적과 다투어 교전해서 군사의 위세를 꺽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으나, 이광은 그 말을 듣지 않고 곧 조방장 이지시(李之時) 및 선봉인 수령 등을 백광언에게 주어 전투를 독촉하였다. 백광언 등은 적이 눈앞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육박해 들어가 도전했는데, 묘시부터 사시에 이르기까지 적병이 잠복하고 나오지 않자, 오시에 이르러 아군이 해이해졌다. 이때 왜적이 풀 속에 엎드려 무릎으로 전진해 와 검을 휘두르며 일제히 일어나 아군 가운데로 쳐들어오니, 왼쪽에서 목 베고 오른쪽에서 찍어대고 하여 아군의 전사자가 부지기수였다. 이지시ㆍ백광언, 고부 군수(古阜郡守) 이윤인(李允仁), 함열 현감(咸悅縣監) 정연(鄭淵) 등이 모두 이 전투에서 피살되어 대군의 기세가 꺾였다. 이날 교지가 서해로부터 용인의 진중에 도달하여 경상좌우순찰사와 좌감사 이성임(李聖任)을 도로 합하게 하니, 길이 막혀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6일. 삼도(三道)의 군대가 용인에서 무너지다. 이날 아침 이광(李洸) 등이 점차로 군사를 전진시켜 광교산(廣敎山)에 진을 치고 군에 영을 내려 조반을 먹게 하였는데, 밥 짓는 연기가 일어나자마자 왜적의 기병이 돌격해 왔다. 먼저 왜적 다섯이 왔는데, 금 가면을 쓰고 흰 말을 탔으며 흰 기를 가지고 검을 휘두르며 곧장 전진해 온 것이다. 충청 병사 신익(申益)은 선봉으로 앞에 있다가 왜적의 위세를 바라보기만 하고 먼저 무너져버려 10만의 장병이 일시에 다 흩어졌는데, 왜적이 기병 수 명으로 10여 리나 쫓아가다가 가버렸다. 이광 등 여러 장수들이 교서(敎書)ㆍ인신(印信)ㆍ절월(節鉞)ㆍ기휘(旗麾)와 군기(軍器)ㆍ군량 등 배수(倍數)로 수송해 온 물건들을 다 버려두었는데, 왜적이 횃불 하나로 그것들을 태워버렸다. 이때 서울에 머물러 있던 왜적의 장수 20여 명이 각각 은 가마를 타고 호위병을 대단스럽게 벌여 세우고서 모두 붉은 옷을 입고 모자를 썼으며, 부녀자들은 말을 타고 쌍을지어 나와 길을 가득히 채우고 앞으로 가는 것을 연일 계속하고 멈추지 않았다. 아군은 서울의 왜적이 우리 대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퇴각해 간다고 생각했다. 그 후 왜적에게 포로로 잡혔던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서울의 왜적은 나와서 광주(廣州)에 군사를 잠복시켰다가 아군이 양천(陽川)의 북쪽 포구에 도달하기를 기다려 남쪽으로부터 엄습하여 한강으로 몰아부치려고 하였는데 아군이 피해 달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만두었다.” 하였다. 우리 대군이 무너져 돌아갈 때에 전일 경기와 양호 지방의 피난에서 돌아와 모였던 사람이 많이 짓밟혀 다치고 노약자들이 질겁을 해 달아났으며 곡성이 우레같이 울려났다.
○ 전라도 의병장 행부호군 고경명(高敬命)이 여러 도의 수재(守宰) 및 사민(士民)과 군인 등에게 다음과 같은 격문을 급히 보냈다.
근자에 국운이 중도에 비색한 때문으로 섬 오랑캐가 밖에서 짖어대어, 처음에는 역적 양(亮)이 맹약을 어긴 일을 본받아 하더니 마침내는 오랑캐 오(吳) 나라가 중국을 먹어 들어오던 짓을 자행해서, 우리가 경계하고 있지 않은 틈을 타 허한 데를 짓이겨대고 멀리 몰고 들어와 ‘하늘을 속일 수 있다’고 여기며 마음대로 곧장 올라왔다. 장수의 절월(節鉞)을 가진 자는 기로(岐路)에서 서성대고 한 군(郡)의 인신(印信)을 찬 자는 수풀 깊은 속으로 도망가서 왜적을 군친(君親)에게로 돌려버렸다. 이것을 참을 수 있는가. 지존(至尊)으로 하여금 사직을 근심하게 하고서 네 마음이 편안한가? 어찌 생각하였으랴, 1백 년이나 휴양해 온 백성 가운데 어찌 의기 있는 사나이가 하나도 없으랴. 고군(孤軍)으로 깊이 들어간 것은 여진(女眞)이 본래 병법을 몰랐던 것이요, 중행(中行)을 매질하지 않은 것은 대한(大漢)이 본래 책략이 없었던 것이다. 장강(長江)이 급작스레 그 천연의 요해지를 잃어버려서 흉악한 칼날이 이미 신경(神京)에 육박한 것이니, 남조(南朝)에 인물이 없었다는 조롱은 진실로 가슴 아프거니와, 북군(北軍)이 날아서 건너왔다는 말은 불행하게도 근사하구나. 이제 우리 성상(聖上)께서는 태왕(太王)이 빈(邠) 땅을 떠나던 마음으로 명황(明皇)이 촉(蜀) 땅으로 갔던 일을 하셨으니 이는 대체로 역시 종묘사직을 위한 지극한 계획에서 나온 것이다. 이에 사방의 지방관이 잠시 애쓰는 것은 기탄하지 않거니와 공락(鞏洛)의 놀란 먼지 속에 임금의 안색에 자주 깊은 진념이 나타났고, 민아(岷峨)의 위험한 잔도(棧道)로 푸른 일산[翠華]이 긴 노정을 멀리 갔다.
하늘이 낸 이성(李晟)이 적을 숙청한 것은 바로 원로(元老)에 힘입었고, 조서를 초한 육지(陸贄)의 애통한 말은 또 성조(聖朝)에서 내렸다. 무릇 혈기를 가지고 생명을 지닌 자라면 그 누가 분개하고 죽으려 들지 않겠는가. 어찌하랴! 사람의 모의가 좋지 않아 국보(國步)의 간난(艱難)이 잦았도다. 봉천(奉天)의 거가(車駕)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상주(相州)의 군대가 이미 무너졌으며, 준동하는 저 벌이나 전갈 같은 무리[蜂蠆之醜]에게 고래나 상어 같은 힘으로 목을 베는 것이 아직도 늦어지고 있다. 그러나 성문에 임시로 쉬고 날아도는 것이 어찌 장막의 제비와 다르겠으며, 외람되이 기보(畿輔)에 버티고 있으니 그 날뛰는 것이 울 안의 원숭이와도 같다. 비록 하늘의 군사가 소탕해버릴 때가 있기는 하겠으나 역시 그 흉악한 무리가 뛰어 달아나기는 기대하기 어렵다. 나 고경명은 단심과 만년의 절개를 가지고 머리가 희어지도록 썩은 선비[腐儒]로 살아왔으나, 밤중의 닭소리를 듣고는 국가의 다난함을 견디지 못하여 중류(中流)에 뜬 배의 노를 치면서 스스로 외로운 충성을 허락하였노라. 한갓 개나 말이 주인을 그리는 정성을 품고 모기나 등에[虻]가 산을 지려 드는 것같이 턱없는 힘을 헤아리지 않고, 이에 의병을 규합하여 곧장 서울로 지향하고자 옷소매를 떨치고 단에 올라 눈물을 뿌리며 여럿과 맹세했다. 곰을 치고 표범을 끌어대는 군사들이 우레같이 세차고 바람같이 날며, 수레를 뛰어넘고 관문을 건너뛰는 무리가 구름같이 합치고 비같이 모였으니, 이는 대개 핍박한 후에 응하여 억지로 나가게 한 것이 아니고 오직 신하로서 충의에 찬 마음이 다 함께 지극한 본성에서 우러난 것이니, 존망의 위기에 임하여 감히 미미한 몸을 아끼겠는가. 군사는 의로써 이름 지었으니 본래 벼슬[職守]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군대는 곧은 것으로 말미암아 씩씩해지는 것이지 취약한가 견고한가를 따지는 것은 아니어서, 대소의 군대들이 모의하지 않고도 뜻을 같이하였고, 원근의 장정들이 소식을 듣고서 다 함께 분발했다. 아아! 우리 여러 군[列郡]의 수재(守宰)들과 여러 길[諸路]의 사민(士民)들의 충성이 어찌 임금을 잊었겠는가. 의리상 마땅히 나라를 위해 죽어야 할 것이다. 혹은 병기(兵器)와 의장(儀仗)으로 도와 주고 혹은 양식으로 구제해 주며, 혹은 말을 달려 군사의 행렬 앞을 가고 혹은 쟁기를 놓고 밭에서 분기하여 힘이 미칠 만한 것을 헤아려 오직 의로운 데로 돌아가 임금을 고난으로부터 막아낼 수 있다면, 나는 그대들과 함께 일어나기를 원하는 것이다. 멀리서 생각하건대, 행궁(行宮)은 서쪽 땅에 멀리 있으나 묘당(廟堂)의 대계(大計)가 장차 정해지리니, 왕업(王業)이 어찌 한쪽에 치우쳐 안정할 것이랴! 잘 패[敗宮]하면 망하지 않나니 복덕(福德)이 바야흐로 오(吳) 나라 분야에 임했고, 깊은 근심으로 열어 주니 노래하고 읊조리는 데 더욱 한가(漢家)를 생각하게 된다. 호걸스럽고 준일한 인물이 시세를 바로잡을 제 신정(新亭)에서 마주보고 우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고, 부로(父老)들이 임금을 기다리니 곧 구도(舊都)에 임금이 돌아오는 것을 보리라. 생각하건대 마땅히 힘을 내서 앞서 나가야 할 것이므로 이상 마음속을 털어놓고 고하노라. 《정기록(正氣錄)》에 나온다.
○ 전라도 의병장 행부호군 고경명이 삼가 제주절제사 양공(楊公) 그때 양대수(楊大樹)가 본주의 목사였다. 의 휘하에 치고(馳告)하나이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섬 오랑캐가 침략을 자행하여 임금께서 몽진하였는데, 지존으로 하여금 홀로 근심하게 해 놓고 처자를 보호할 계책만 먼저 생각하여 왼발을 들여다보고 먼저 응하니 그 누가 사직을 지키는 마음을 가졌겠소. 흥원(興元)의 거가는 돌아오지 않았는데 상주(相州)의 군대는 이미 무너져서, 이수(伊水)와 낙수(洛水)의 적을 빨리 소탕하여도 아직 회복할 기약은 멀었고, 군량은 버려져 도리어 원수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다행히 하늘의 뜻이 끊어지지 않았으면 그래도 국사를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 고경명이 이에 의로운 깃발을 들고 요사한 무리를 숙청하러 나서자 소식을 듣고 그림자같이 모여들었는데 대부분 형초(荊楚)의 기특한 인재들이고, 예리한 무기를 들고 먼저 나서는 중에는 또한 연조(燕趙)의 검객도 들어 있습니다. 다만 한스럽기는, 보졸의 발[足]이 될 것이 없어 말을 채찍질하여 양(良)을 찌를 것을 바라기 어려운 것입니다. 멀리 생각건대, 바다 동쪽의 탐라(耽羅) 땅은 중국의 기북(冀北)과 다름이 없어서 골짜기를 뛰어넘어 다니며 사냥을 할 뿐만 아니라 전투 행진에 따라다녀 또한 목숨을 의탁할 만하다 하니, 만약 그곳에서 나는 말을 바닷배에 가득 실어 보내 주신다면 우리 군대의 위용이 크게 드러나는 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귀관께서는 임금의 은혜를 깊이 받아 해역(海域)을 전제(專制)하고 계시니 글로써 호소하면 응당 한 곳의 여론을 일으킬 것이며, 팔뚝을 걷어올리고 외치면 어찌 10실(室)의 마을에 충신(忠信)한 사람이 없기야 하겠습니까. 만약 장사 중에 나가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또 그러한 인간의 상정을 막지 말기를 바랍니다. 《정기록(正氣錄)》에 나온다. 고종후(高從厚)가 대신 지은 것이다.
○ 전라도 의병대장 장하사(張下士), 전 현령 고종후(高從厚)ㆍ권지성균관학유(權知成均館學諭) 유팽로(柳彭老) 등이 충청ㆍ경기ㆍ황해ㆍ평안 4도의 여러 읍의 수재 및 향교(鄕校)ㆍ당장(堂長)ㆍ유사에게 다음과 같이 삼가 재배(再拜)하고 통문(通文)하다.
외람되게 생각하건대, 섬 오랑캐가 불공함으로 임금께서 멀리 파천하고 7묘(七廟)가 재가 되어버렸으며 만백성이 도탄에 빠졌으니, 이는 진실로 고금에 있어 본 일이 없던 변고이고, 충신(忠臣)과 의사(義士)가 몸을 버려 나라에 보답할 때입니다. 그러나 방진(方鎭)의 중신(重臣)들은 관망하면서 머뭇거려, 군사를 징집하는 교지가 한두 차례 내린 것이 아닌데도 한 사람도 머리를 북으로 향하고 적과 싸워서 죽은 자가 없습니다. 오늘날의 사대부는 조정을 저버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외람되이 생각하건대, 호남은 본래 군사가 정예한 것으로 일컬어져 왔었는데, 근왕군이 겨우 금강(錦江)에 도달하자 도성이 함락되고 거짓말이 멀리 퍼졌으며 주장(主將)은 여러 사람의 의론을 널리 물어 볼 겨를도 없이 급히 진을 파하라는 영을 내려 10 만의 무리가 까닭 없이 그냥 돌아가버리고 온 도의 민심이 흉흉하여 흡사 미친 듯한 물결이 마구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 두 번째의 군사 모집에 가서는 하천한 백성과 지극히 우매한 자들이 그 명령에 따르지 않으니 컴컴한 방안의 근심은 차마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사직의 복과 조종의 위령에 힘입어, 무너져 달아났던 병졸들이 매일같이 모여 와 군의 성세가 크게 진작되어 혹시나 궁금(宮禁)을 숙청하여 거가를 맞이할까 바랐더니, 사람의 모의가 좋지 못하였고 하늘이 내리는 앙화가 가시지 않아서 적은 수의 적이 겨우 나타나자 대군이 또 무너지고 군량을 버려 도리어 원수 왜적의 도움이 되었으니, 아아! 우리 역대 성군께서 수백 년 동안 함양한 나머지에 어찌 적개심에 찬 신하가 한 사람도 없습니까! 공론이 아래에 있는 것을 옛사람이 이미 불길하다고 하였으나, 황폐한 풀섶에서 의병을 창도하는 것은 역시 계략상 부득이했음을 알 것입니다. 군부(君父)가 환난 가운데 놓여져 있는데 그 밖의 일을 돌아볼 겨를이 있겠습니까. 거듭 생각하건대, 영남과 양호는 진실로 우리 동쪽 나라의 근저(根柢)입니다. 그런데 영남인즉 의병이 일어나기는 하였으나 중간이 왜적의 굴혈에 막혀 있어서, 곧장 서울에 올라가 근왕(勤王)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호서 1천 리의 땅엔들 어찌 의기 있는 사나이가 없었겠습니까마는, 왜적들이 죽이고 빼앗는 여세에 겁을 집어먹고 역시 자신을 구해낼 겨를조차 없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오늘날 중외에서 믿는 것은 호남 한 도에 있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 막부(幕府 대장 있는 곳)에서 만 번 죽고서라도 기어이 관철해 낼 계획을 세우고 한 지방의 여러 사람을 격려한 결과, 민심은 왕실을 생각하고 열사들이 운집하여 보병과 기병의 수효가 이미 5만 2천에 이르러 바야흐로 북쪽으로의 길을 멀리 몰고 들어가 요사한 왜적의 무리를 소탕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1천 리의 길에 양곡을 운반하는 일은 사사로운 힘으로는 해내기 어렵습니다. 만약 의를 좋아하는 여러 군자들이 힘을 합해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면 비상한 큰 공이 어찌 한 사람의 손에서 다 나올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이 나라의 땅 치고 임금의 땅 아닌 곳이 없습니다. 양호(兩湖)의 군사는 이 나라를 부흥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제공께서는 함께 나라를 위해 따라 죽을 뜻으로 분발하고노적가리를 가리켜 내주던 의기를 다해서 각기 미곡을 내어 군의 식량을 도와 주신다면, 능히 양주(揚朱)와 묵적(墨翟)을 막겠다고 말하는 자 역시 성인(聖人)의 무리일 것입니다. 또 생각하건대, 산골짜기가 험준하고 평탄한 것과 도로가 우회하고 곧고 한 것은 그 고장의 군사가 가리켜 인도하지 않는다면 역시 창졸간에 당하는 곤란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니 그 고장의 사람을 모집해서 우리 군의 기세를 돋구게 해 주신다면, 비단 종묘 사직의 깊은 수치를 한바탕 씻어버릴 수 있게 될 뿐 아니라 부자 형제로 창이나 화살에 죽은 이들 역시 황천 속에서 눈을 감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일은 비록 어리석은 백성이라 할지라도 다 마음 아파하고 걱정하겠거늘, 하물며 여러 고을의 수재(守宰)들은 다 나라의 은혜를 받았는데 어찌 차마 근왕군의 곤란[秦瘠]을 좌시하겠습니까. 반드시 옷소매를 떨치고 일어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남의 밥을 먹으면 남의 일을 위해 죽는다.” 했거니와, 만약 소식을 듣고 강개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오는 자가 있다면, 원하건대 소반의 피를 입에 찍어 바르고 함께 왕의 일에 종사하겠거니와 혹 한 끼 양식과 자재를 군 앞에 수송해 주어도 역시 한 가지 도움이 될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해서와 관서는 비록 도로가 통하지 않는다고는 하지마는 각각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모집해서 사잇길로 해서 나와 차례로 전해서 일각도 지체하지 않는다면 원근에서 그 소문을 듣고 혹 그것을 믿고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 통문이 도착한 날 여러 고을 향교의 당장과 유사는 각각 한 통씩 베껴서 경내의 선비들에게 전해 그들로 하여금 모르는 사람이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 《정기록》에 나온다.
○ 고경명과 김천일(金千鎰), 양산숙(梁山璹)과 곽현(郭玄)을 시켜 출사표(出師表)를 받들고 서해로 해서 행조(行朝)로 보내다. 그때 적병이 5, 6도(道)에 가득 차 있었고 경기와 황해가 더욱 심했기 때문에 서쪽으로 가는 길이 끊겼었는데 이때에 와서 비로소 수로가 통하게 되었다.
○ 각처의 왜적이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항복하고 붙좇는 자들을 나누어 여러 분탕된 고을의 수령으로 정하여 온 경내의 일을 맡아 다스리게 하니, 박무금(朴茂金)이 김해(金海)를, 중[僧] 찬희(贊熙)가 밀양(密陽)을 맡은 따위가 그것이다. 찬희는 성에 들어와 군민(軍民)을 꼬여 모으다가 박진(朴晉)이 몰래 잡아서 죽였고, 박무금은 그 후 도망쳐 나와 용서를 받았다.
○ 왜적이 창녕(昌寧)ㆍ현풍(玄風)으로부터 금산(金山)에 이르는 한 줄기의 큰 길을 닦고 위아래에 가득 차 있었다. 그 중간에 위치한 성주(星州)는 창고는 가득 차고 백성은 많아 왜적이 큰 군사를 주둔시키고 있는데, 현풍에서 좀 멀어서 무계(茂溪) 나루가 두 지점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요해지이므로, 왜적이 나루 서쪽 산 위에 주둔하여 수륙의 길을 통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강의 좌우편 도로가 막혀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다니지 못하였다. 정인홍(鄭仁弘)이 손인갑(孫仁甲)에게 말하기를, “무계의 왜적이 현풍과 성주 사이에 끼어서 왕래하면서 서로 도와 주고 있으니 반드시 이 왜적을 먼저 제거해서 강길을 끊어 놓은 후에야 성주를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손인갑이 옳다 여겼다. 마침내 정인홍을 군의 주장으로 추대하고 지난달 27일에 군사 행동을 시작했다. 초계(草溪)에서 위급을 고해 와 달려가니 왜적의 기병 백여 기가 마을의 집을 태우고 약탈하다가 군사가 온 것을 보고 강길로 향해 달아나므로 추적하였으나 따라가지 못하였다. 29일에 고령(高靈)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거창(居昌)의 군사를 불러 약속하기를, “함께 무계를 공격하자.” 하고 요구하였으나 김면(金沔)이 병장기가 완비되지 못해 5, 6일이 늦어질지 모른다 하니, 정인홍이, “군사는 많은데 양식이 적으니 날짜를 끌어서는 안 된다.” 하고, 군사를 전진시키기로 결의하였다. 손인갑이 먼저 가서 무계의 형세를 살피겠다고 요청하여 정인홍이 허락하니, 손인갑이 곧 두어 사람을 데리고 밀탐하고 돌아와 드디어 세 길로 진군할 계획을 결정하였다.
고령 영병장(高靈領兵將) 김응성(金應成), 성주 기군장(星州起軍將) 이승(李承) 등이 와서 모였다. 이달 4일 밤을 타서 진군하였는데, 군사들이 전투에 익숙하지 않아 여러 사람이 마음속으로 의심하고 두려워하다. 좌돌격(左突擊) 조응형(曹應亨)이 군사를 거느리고 재를 넘어가자 군졸들이 헛되이 놀라 스스로 무너졌다. 대장(大將)이 지휘하는 한 진(陣)만은 움직이지 않아서 그로 말미암아 약간 안정되어 도로 모였으나, 밤중에 쳐서 소굴을 불태우려는 계획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5일. 여명에 정인홍(鄭仁弘)이 우선봉 한여택(韓汝澤)ㆍ좌선봉 하종해(河宗海)를 시켜 군사를 끌고 오른쪽 재로 해서 곧장 무계역(茂溪驛)에 이르게 하고, 고령 대장(高靈代將) 정상례(鄭尙禮)를 시켜 왼쪽 재의 대로로 해서 진군하게 하였다. 또 전 군수 이언성(李彦誠)과 성정국(成定國)으로 하여금 성주의 군사를 거느리고 안언역(安彦驛)의 길에 매복하여 성주(星州)에서 후원해 오는 왜적을 끊게 하고, 정언충(鄭彦忠)을 시켜 노다촌(老多村)에 매복케 하여 강을 내려가는 왜적을 끊게 하였으며, 정인홍은 손인갑(孫仁甲)과 더불어 중위군을 거느리고 곧장 왜적의 군막을 짓이겨 대었다. 왜적이 약탈한 재보(財寶)를 무계의 역사(驛舍)에 가뜩 쌓고 횃불 하나로 태워버리고 소와 말을 빼앗았다. 한여택과 하종해가 몸을 솟구치고 나서서 역전(力戰)했는데, 왜적의 장수가 큰 기를 세우고 나와서 싸우다가 아군이 많고 정예한 것을 보고는 막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여러 군사들이 승전한 기세를 타고 사면으로 육박해 들어가 싸워서 그 양곡을 저장한 외막(外幕)을 불태우고 전진하고 후퇴하며 일제히 활을 쏘니, 왜적의 기세가 매우 군색해져서 자리ㆍ거적ㆍ땔나무 등으로 가리면서 자위(自衛)했는데 죽은 자가 퍽 많았다. 처음 철환(鐵丸)을 쏜 인시부터 사시에 이르자 포성은 끊어지고 곡성만이 났다. 아군이 다가가 불을 질러 태워버리려 했는데, 나머지 왜적이 달아나 강으로 들어가 배를 강물 복판에 끌고 들어갔다. 이때에 의외에도 구원하러 온 왜적 수백 명이 현풍(玄風)으로부터 갑자기 나루터 가로 왔다. 그때가 거사할 시초라 활과 화살이 넉넉하지 못했고 아군은 새벽에 진군해서 군사들이 다들 배부르게 먹지 못하고 힘을 다해 싸워 지쳐 빠져버렸는데, 갑자기 생생한 기운을 가진 적의 공격을 받았고 거기에 화살 또한 이미 다한지라 감히 무리한 전투를 하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막(幕) 안에 있던 왜적은 6, 7명이 쫓아왔을 뿐인데 5리도 못 오고 돌아가버렸다. 수일 후에 합천(陜川)의 군사가 피난하였다. 포로가 되었던 사람을 잡았는데, 공술하기를, “막 안의 왜적은 1백 40여 명이었는데 죽은 자가 반이 넘고 나머지는 다 화살에 다쳐 한 떼의 왜적이 거의 다 이 전투에서 소탕되었으나, 불을 지르지 못하고 퇴각하여서 이로 말미암아 왜적이 군사를 증가시키고 주둔하는 군막을 더욱 넓히고 있습니다.” 하였다. 손인갑이 가리현(加利縣)으로부터 돌아와 고령에다 진을 치고, 정인홍은 하혼(河渾)ㆍ권양(權瀁)ㆍ이승(李承)ㆍ김응성(金應成) 등과 더불어 산 위와 가운데 길로 해서 돌아와 가림(檟林)에다 진을 쳤다가 곧 매촌(梅村)에 진을 합치고 싸운 공을 치보(馳報)하였다. 그때에 김면(金沔)이 거창(居昌)의 군사를 거느리고 비로소 와서 무계의 습격을 단독으로 거사한 것을 자못 불쾌하게 생각하였다. 그때 군졸들은 군법에 익숙하지 못해서 싸움터에서 각각 자기 집으로 돌아가 오래도록 돌아 오지 않고 단지 수백 명만이 뒤따르고 있었다. 손인갑이 이것을 근심하여, “군졸이 모이지 않으니 선생은 가르쳐 주시오.” 하자, 마침내 격문을 돌려 그들을 불러 모았는데 수일 동안에 다 모였다. 흩어져버렸던 끝이라서 사람들의 마음이 확고하지 못했기 때문에, 처벌을 감행하지 못하고 다만 잘 타이르고 엄하게 경계할 따름이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왜적의 배 18척이 쌍산역(雙山驛) 현풍 북쪽 15리에 있다. 으로부터 올라와 정승 안국사(政丞安國寺)의 행차라 자칭하고 가야산(伽倻山)을 탐승하려고 했는데, 이 자가 바로 전날 전라 감사를 칭하고 창원(昌原)에서 선문(先文)을 띄웠던 자이다. 정진(鼎津)에 이르러 곽재우(郭再祐)에 의해 퇴각당하고 영산(靈山)ㆍ창녕(昌寧)으로 해서 기강(岐江)을 건너려 할 때 전라 감사라 칭하고 호남으로 향하면서 또 선문을 보내 맞이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초계(草溪)ㆍ의령(宜寧) 등지의 사민들은 두려워서 혹은 산으로 도망하여 나오지 않기도 하고, 우매한 자는 혹 환영하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 곽재우는 또 왜적 앞에까지 달려가서 도망한 사민(士民)을 끌어내어 의리로 타이르고 창고를 풀어 군사를 먹이며 병졸을 엄격하게 다루어 방비를 갖추었다. 왜적이 곽의 병졸이 부오(部伍)가 엄정(嚴整)함을 보고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이는 틀림없이 정진의 홍의장군이니 도저히 건너갈 수 없다.” 하고 퇴각하여 쌍산(雙山)으로 해서 성주(星州)로 향하였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안국사(安國寺)는 강항(姜沆)의 계문(啓文) 가운데 보인다.
○ 박진(朴晉)을 경상 좌병사로 삼다. 그때 박진은 김수(金睟)의 근왕군을 따라 온양(溫陽)까지 갔다가 명령을 받고 도로 내려와 본도에 도달했는데, 사천(泗川)ㆍ하동(河東)ㆍ곤양(昆陽) 및 진주(晉州)의 왜적의 기세가 막 성하기 때문에 낙동강을 건너지 못하였다. 김성일(金誠一)이 우도에서 글을 보내 이르기를, “장군께서는 포상하는 어명을 받들어 병권을 장악하고 변경에 임해 위엄 있는 명성이 이미 드러나 온 도가 간성(干城)같이 믿고 있는데, 다만 왼쪽 길이 막히고 끊어져 위무(威武)를 나타낼 길이 없습니다. 지금 진주가 적병의 공격을 받게 되어 정세가 심히 위급한데 본관의 수하에 비록 천으로 헤아리는 군사가 있기는 하지마는 저 같은 백발 서생은 군무에 익숙하지 않으니 어찌 일을 성사시킬 수 있겠습니까. 장군께서 만약 단기(單騎)로라도 이곳에 오신다면 의병을 다 장군의 휘하에 드리고자 합니다. 생각건대, 좌우의 병사가 안팎으로 호응하여 사천(泗川)의 소수 왜적을 토벌하여 큰 진(鎭)인 진주를 보전해서 내지(內地)를 지키게 되는 것은 장군께서 발을 한 번 드는 데 달려 있으니, 좌ㆍ우도의 책임이 다르다는 말로 사양하지 마시고 종전에 결심하였듯이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해 따라 죽겠다던 뜻을 실현하도록 하십시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15일. 적병이 평양을 함락시키고 조정은 의주(義州)로 향하다. 몇 일 전에 적병이 대동강에 다가들자 그곳을 수비하던 군사들이 다 무너졌다. 11일에 거가가 숙천(肅川)으로 가서 이덕형(李德馨)을 보내 요동(遼東)에 가서 위급함을 고하고 구원을 청하게 하였다. 중전(中殿)은 강계(江界)로,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은 함경도로 각각 나누어 보내고, 세자에게 명해 종묘 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강원도로 가게 하였다. 거가가 정주(定州)에 이르러 기성(箕城)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요동에 치자(馳咨)하여 내부(內附)하기를 청하고 이어 의주(義州)에 도달했는데 시종하는 관원으로 따라간 자가 단지 수십 명에 불과하였다. 그때 중국 지방에서는, “조선이 왜를 향도한다.”는 헛말까지 나와 수도에까지 전해져서 병부(兵部)에서 차관(差官) 황응향(黃應陽) 등을 보내와 실정을 살펴보게 하였다. 임금이 그들을 용만관(龍灣館) 의주의 객사이다. 에서 접견하였는데, 담화하는 동안에 황응양이 왜적의 중[僧]인 현소(玄蘇) 등이 평양에서 본국의 예조에 보낸 글을 보고는 가슴을 두들기고 눈물을 쏟으면서 말하기를, “중국을 위해 대신 병화를 당하면서도 의롭다는 명성은 드러나지 않고 도리어 이 악명을 받으니 천하에 어찌 이런 억울한 일이 있겠는가.” 하였다. 그래서 황응양이 사정을 퍽 자세하게 회보하여 명 나라 병부에서 강력히 상주(上奏)하여 구원해 주기를 청하였다. 그때 사은사(謝恩使) 신점(申點)이 중국의 수도에서 곡소(哭訴)하고 병ㆍ예부 각 아문(衙門)에서 계속 상주하여 위급을 고하자, 중국 조정에서 부총병(副摠兵) 조승훈(祖承訓), 유격장(遊擊將) 사유(史儒) 등으로 하여금 요동병 3천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가게 하였다. 고사(考事)에 나온다.
○ 종실(宗室) 호성감(湖城監)을 양호(兩湖)로 파견하여 의병을 징집시키다. 호성감은 양호 땅에 도달하여 충의로운 내노(內奴)를 내놓아 군사로 하고 자진하여 근왕군에 나오는 자도 역시 허락하였다.
○ 좌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이 전주(全州)로 나아가 진을 치고 의병을 불러 모았으며, 이어 본도의 여러 고을에 글을 보내 이르다.
대장이 급히 구원을 요청하기 위한 것이다. 국가의 일이 이러한 극단에 이르렀으니 오늘의 소망은 오직 의병을 일으키는 데 있는데, 불러 모인 수효는 수백에 불과하다. 비록 강개(慷慨)에 찬 뜻이 당당하여 범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성세가 떨치지 않으니, 관군이 조력하는 것이 아니면 만전지계가 아닌 것 같다. 조전군(助戰軍)은 다소를 불구하고 단지 정예한 것을 택하고 전일 낙오한 사람을 극력 불러모아 충의로써 타일러 주야를 불문하고 급히 구원하러 보낼 것이다.
○ 전라 감사 이광(李洸)이 김수(金睟)와 더불어 전주로 도망해 돌아오다. 김수는 곧 함양(咸陽)으로 향하여 이어 거창에 도달하니, 그때 김성일(金誠一) 역시 본현에 머물러 있었다.
○ 성주(星州)에 주둔하고 있는 왜적이 사방의 문에 봉명국(奉命國)이라고 써 붙이다.
○ 적장 청정(淸正)이 강원도를 지나 철령(鐵嶺)으로 쇄도하였는데, 철령 이전에는 한 사람도 남지 않았다. 함경 체찰사 김귀영(金貴榮)과 감사 유영립(柳永立)이 남병사(南兵使) 이 영(李榮)과 북병사 한극함(韓克諴)을 거느리고 도내의 기력이 왕성하거나 약한 남정(男丁) 5만여 명을 다 모아 가지고 철령을 지켰다. 선봉의 왜적이 연일 교전하다가 패하고 물러나자, 청정이 대군을 이끌고 뒤따라 도달해서 당장에 선봉장을 목 베고서는 영을 내리기를, “한 번 북이 울리면 개미같이 달라 붙어라. 감히 뒤지는 자는 죽는다.” 하고는 곧 자신이 말에서 내려 검을 휘두르며 독전하니, 적병은 죽음을 무릅쓰고 앞을 다투어 나서서 그 기세가 바람에 타오르는 불과 울려나는 우레 같았다. 아군이 크게 무너지고 김귀영 등은 겨우 몸만 빠져나와 육진(六鎭)으로 향해 달아났다. 청정이 철령에서 이기고 함경도로 들어와 불태워 없애고 도둑질을 하는데, 그 죽이고 노략질하는 것의 참혹함이 다른 도의 몇 갑절이나 되었다.
○ 전라 병사 최원(崔遠)이 군사 2만여 명을 동원하여 본도 우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의 군사 2천과 함께 근왕군으로 서울로 향하다.
○ 도원수(都元帥)가 팔도에 전한 격문은 다음과 같다.
군대를 일으키는 데 있어서는 곧아야 씩씩해진다. 바야흐로 왜적을 토벌하는 계획을 넓히고 의가 병들기 전에 서둘러야 하니, 감히 근왕하는 일을 늦추겠는가. 무릇 우리 동지들은 각기 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 생각건대, 우리 국가는 신성한 임금이 계승하여 거듭 밝아 태평세월이 계속되어 누누이 백성들에게 인정(仁政)의 은택이 젖어 있고, 음우(陰雨 위험한 일)에 앞서 선처하여서 수천 리 땅에 옥촉(玉燭 계절 따른 기후)이 고루 조정되어 2백 년 동안 금사발[金甌 국가의 계승된 왕실]에 흠이 없었으므로 장차 안으로는 태평하고 밖으로는 안정되기를 기대하였더니, 도리어 문관은 안일에 흐르고 무장은 장난으로 여기게 되었다. 준동하는 저 바다섬의 간악한 오랑캐는 사실 천지간의 추악한 종자로, 처음에는 중국에 감정을 품고서 하늘을 쏘는 활을 당기려고 하다가 끝내는 우리나라에 앙화를 전가시키고 감히 사람을 씹는 부리를 놀렸다. 요(堯) 임금을 보고 짖는 개가 진(秦) 나라에 사람이 없다고 하는 격으로, 저녁 봉화가 겨우 한궁(漢宮)에 도달하였는데 요사한 독기는 이미 상령(商嶺)을 둘러쌌다. 장강(長江 양자강)의 험한 요새를 잃어버렸으니 진실로 군대의 율법이 엄하지 않은 때문이었고, 임금이 몽진하였으니 조정의 계획이 길하지 않았음을 넉넉히 볼 수 있다. 종묘와 사직이 재로 타버리고 조정과 저자가 변천하였으며, 심한 독이 여염에 두루 미쳤고 더러운 소문이 원근에 뚜렷이 드러났다. 귀신과 사람의 분노가 이미 극도에 도달하였으니, 군부(君父)의 원수를 잊을 수 있겠는가.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여러 성이 흙같이 무너지는데 오직 성문을 열고 맞이해 절할 줄만 알고 뭇 장수들은 담이 떨어졌으니 누가 용기를 내어 먼저 나설 수 있겠는가. 우리가 고수하겠다는 마음을 잃어버리고 저들이 멀리 몰고 들어오는 위세를 도와 주었으니, 주여숙(柱厲叔)이 이것을 보았다면 어찌 예전에 알던 사람을 기다릴 것인가. 만일 안진경(顔眞卿)이 다시 살아난다면 마땅히 무슨 꼴을 할 것인가. 하물며 지금 저 왜적들은 미쳐 날뛰고 교만하고 게을러져 있으며 들떠 붙어 살고 외로이 매달려 있다. 힘은 이미 싸우고 공격하는 데 지쳐버렸으니 그 기세는 반드시 오래 가기 어려울 것이고, 욕망은 오직 약탈에만 있으니 뜻도 또한 알 수 있는 것이다. 한실(漢室)을 생각하는 이들은 앞다투어 노래를 바치고 적에게 붙었던 자도 또한 대부분 헤어졌으니, 이미 죽을 길에 놓인 도적이 되어버려 구차하게 살아날 꾀도 지니지 못하게 되었음에랴. 세성(歲星 5성의 하나, 목성(木星))이 기(箕 별자리 이름)의 분야를 지키니 복덕(福德)이 내릴 징조가 있음을 알겠고, 큰 하늘이 송(宋)을 도우니 어찌 나라를 회복하는 데 기약이 없으랴. 지금 나는 외람되이 추곡(推轂 대장에 임명하는 의식)하는 은혜를 받들고 흉적을 제거하는 책임을 전적으로 위임 받아 여러 도의 도순찰사를 겸임하여 군사 3천을 거느리고 이달 10일에 행재소를 배사(拜辭)하고 곧장 서울로 향했다. 서울에서 수레를 뛰어 넘던 날랜 사람들은 태반이 장교로 편입되었고, 관서의 장수를 넘어뜨리던 인재가 다 부오에 예속되어 있어 3군의 사기가 점차 진작되고 만민의 마음이 약간 소생했다. 이는 진실로 한 나라의 신자(臣子)가 마음을 합하고 힘을 다해 몸을 잊고 순국할 때인 것이다. 생각건대, 각 도의 관찰사와 절도사들은 혹은 지방의 전권을 장악하고 혹은 병권을 위임 받아 한 도에서 많은 군대를 가지고 있으니, 어찌 막고 보호하는 정성을 잊을 것인가. 서방(西方)에 미인(美人)을 바라볼 때에 드는 생각이 눈물을 뿌리는 아픔에 간절할 것이다. 의당 범이나 사자 같은 군대를 거느리고 뱀이나 돼지 같은 무리를 함께 쓸어내야 할 것이다. 수미(首尾)로 협공하여 번갈아 기각(掎角 두 편에서 서로 잡아당겨 협공으로 포획함)의 태세를 이루고 동서로 함께 진격하여 입술과 이와 같이 지원한다면, 구멍에 든 개미가 된 격이니 도망칠 수 있겠는가. 솥 안에 든 물고기가 된 형편이니 뭉글어뜨릴 것이다. 아래 옷을 찢어 발을 싸매고서라도 어찌 천리길의 수고를 꺼릴 것인가. 머리를 풀어 헤친 채 갓을 매어 쓰고서라도 한 집안을 구하는 데에 서둘러야 할 것이다. 각기 세상에 보기 드문 은혜를 갚고 힘써 비상한 공훈을 세울 것이니, 힘쓸지어다. 시기를 놓치지 말도록 하라. 때는 두 번 얻기 어려우니. 운운.
그때 김명원(金命元)이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흩어진 군사들을 거두어 순안(順安)에서 왜적을 막고 있었다.
○ 요동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가 왜적의 변란에 관한 것으로 준분수도(準分守道)의 자문(咨文)에, “순무(巡撫)가 당보(搪報)를 우연히 본 바에 의하면, 왜왕 관백(關白)은 이미 그 나라 사람에게 사살되었다. 그래서 이 글을 전하는 것으로, 본사는 조선 국왕이 수고스러운 대로 왜의 인심이 흩어진 기회를 이용하여 관원들을 독려하고 통솔해서 힘써 회복을 꾀하도록 바란다. 모름지기 이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하니, 자문을 예조에 내리기를, “수길은 유구(琉球) 사람에게 사살되어서 이것은 다 소문이다. 평양에서 기병 전투를 할 때 행장(行長)ㆍ의지(義智)ㆍ조신(凋信)이 장수가 되었다. 운운.” 하였다.
○ 좌수영 영리(左水營營吏)의 고목(告目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보내는 편지)에,
“수사(水使)는 지난 5월 29일 영을 떠나 곧장 남해(南海) 경내의 노량(露梁)으로 가서 경상 우수사와 만났습니다. 같은 날 사천(泗川) 선창(船滄)의 왜인 4백여 명이 산에 올라 진을 치고 흰 기치(旗幟)를 세웠고, 누각 같은 적선이 13척이었는데 종일 접전하여 그 배들을 다 격파하였습니다. 화살에 맞고 죽은 왜적이 부지기수였고, 1급(級)을 목 베었습니다. 이달 2일에 당포(唐浦) 선창의 왜인 3백여 명이 포구에 들어와 분탕질하고 험준한 곳에 기대서 포를 쏘는데 왜선 9척의 크기가 판자집 같았습니다. 그중 한 척의 큰 배에는 층루(層樓)가 우뚝 솟아 있는데 그 층루 위에는 왜장이 굳게 앉아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화살에 맞아 추락하매 그를 목 베었고, 또 9급을 목 베고 그 배들을 깡그리 격파하였으며, 화살을 맞아 죽은 자들 역시 많았습니다. 5일에는 고성(固城)의 당항포(唐項浦)에 왜의 큰 배가 다수 숨어서 정박하고 있으므로 곧장 그곳으로 향하였고 본도 우수사가 뒤이어 구원하려 달려와서 그와 함께 같이 그 포구로 갔는데, 왜의 큰 배 12척, 작은 배 22척이 바다에 분산되어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한 척의 큰 배에는 층루가 우뚝 솟아 있고 그 누 위에는 왜장이 굳게 앉아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화살에 맞아 추락하매 또 그 자를 목 베었습니다. 그 배에서 얻은 분군(分軍)한 서류 7축(軸)에 기재된 왜인의 수효는 5천여 명인데 각각 자기 이름 밑에 피로 물들인 서명이 있으니, 틀림없이 삽혈동맹(歃血同盟)일 것입니다. 그 배를 다 격파하고 43급을 목 베었습니다. 8일에는 거제 땅 율포(栗浦) 앞 바다에서 왜의 큰 배 6척을 추격 나포하고 또 37급을 목 베었으니 도합 89급을 목 베었습니다. 본도 우수사와 경상 우수사가 합해서 2백여 급을 목 베었고, 가덕(加德)ㆍ천성(天城)ㆍ몰운대(沒雲臺) 등지를 연 이틀 동안 샅샅이 뒤졌으나 전혀 왜적의 종적이 없었습니다. 10일에 영에 돌아왔을 때에야 겨우 아뢰었습니다. ” 하였다.
17일. 손인갑(孫仁甲)이 사원동(蛇院洞)성주(星州) 남쪽 20리에 있다. 에 복병을 매설했다가 불리하여 퇴각하고, 박응성(朴應星)이 용사(勇士) 장호(張浩)와 같이 적군에 달려가 죽다. 처음에 성주(星州)와 현풍(玄風)의 왜적이 강줄기를 따라 연달아 널리 목책(木柵)을 시설해서 짐바리를 운반하다 떠내려보냈다. 그러자 손인갑이 말하기를, “사원동ㆍ안언(安彦) 등지에 복병을 매설하면 되겠다.” 하고, 마침내 사군(射軍) 수백을 골라서 저녁을 이용해 떠났다. 김면(金沔)에게 지원군을 청했으나 김면 휘하의 장병들이 대부분 가려 하지 않자, 김면이 사람을 시켜 복병 작전을 그만두게 하였다. 그러나 손인갑이 듣지 않고 사동(蛇洞) 길에다 복병을 매설하였다. 이날 왜적 3백여 명이 성주에서부터 짐을 운반하다 흘러 내려 왔는데, 손인갑이 약정하기를, “주장이 포 쏘기를 기다려서 발사하라.” 하였다. 유격장 박응성이 약정을 어기고 돌출했는데 왜적의 무리가 많고 정예해서 아군이 패배하였다. 박응성 등은 힘을 내어 싸우다 죽었다. 박응성은 맨 먼저 응모하여 용감하게 힘내어 싸웠고 늘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적을 경시하다가 죽으니 전군이 그를 아까워 하였다. 이 거사에 있어서 손인갑은 매복할 곳은 많은데 사군(射軍)이 적어서 김면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김면이 구원해 주지 않아 일을 그르치게 되었으므로 자못 불만스런 생각을 갖게 되었다.
19일. 김면(金沔)이 군사를 거느리고 거창(居昌)으로 돌아가다. 그때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이 거창에 있었는데, 금산(金山)과 지례(知禮)에 있던 왜적의 기세가 창궐하여 장차 거창으로 마구 들어올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합천(陜川)과 고령(高靈)의 군대에게 영을 내려 우마현(牛馬峴)을 막으러 오게 하였다.
손인갑이 그 영을 듣고 곧 행장을 차리자, 정인홍이 말하기를, “금산의 왜적이 급하기는 하나 무계(茂溪)의 왜적 역시 소홀히 다뤄서는 안 된다. 지금 만약 군사를 철수하여 그곳으로 옮겨 간다면 고령과 합천은 장차 왜적의 소굴이 되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가서 김공의 거동을 탐지해 보는 것만 못하다. 그가 만약 군사를 끌고 돌아오면 우리는 움직여서는 안 된다.” 하였다. 그때 초유사의 전령을 가진 자가 금산의 진에서 나와 그것을 김면에게 내보이자, 김면이 답서를 쓰기를, “거창 현감(居昌縣監)이 문서로 운운한 것은 손인갑이 여러 사람의 의론을 어기고 복병을 매설했다가 패전하여 왜적이 반드시 충돌해 올 것이므로 사세가 돌아가기 어렵소.” 하니, 손인갑이 대노하여 이르기를, “이것은 나를 죽이고 싶어하는 것이다. 군사를 가지고 있으면서 구원해 주지 않고 나한테 허물을 돌리니 이것이 과연 군자의 생각인가. 그가 가지 않는 바에는 나는 불가불 초유사의 명령에 따라야 하겠다.” 하고, 곧 군사를 이끌고 권빈역(勸賓驛)까지 가서 말에 먹이를 먹이는데 그때 김면이 군사를 거느리고 그곳을 달려 지나므로 손인갑이 더욱 그를 의심하였다. 그때 마침 초유사의 전령이 또 와서 영을 내리기를 오지 말라고 하여, 손인갑은 마침내 돌아와 버리고 정인홍이 혼자서 김성일을 가 만나보고 돌아왔다. 김면은 거창으로 간 후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정인홍ㆍ김면 두 사람의 군사가 두 갈래로 갈라져, 김면은 거창을 진수(鎭守)해서 우마현(牛馬峴)을 방어하고 정인홍은 고령을 진수해서 성주와 무계의 왜적을 방어하였다. 전치원(全致遠)과 이대기(李大期)는 초계(草溪)에 진을 치고 곽재우(郭再祐)는 의령(宜寧)에 진을 쳐 강우(江右) 일대가 그 덕분으로 보전되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낙동강에서 왜적의 배가 위에서부터 흘러 내려오다가 두 척은 침몰하고 한 척은 노를 풀어 놓고 내려갔는데, 곽재우가 배를 고스란히 나포하여 27급을 목 베었다. 그 배에 실려있는 것은 다 궁중의 보물들이었는데, 태조가 착용했던 목화[靴]도 들어 있었다. 곧 그 보물들을 초유사에게 보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성주의 주부(主簿) 배설(裵楔)이 본 주의 가장(假將)이 되어 군사 수백 명을 모아 복병을 매설하여 왜적의 통로를 차단하고 목 벤 수효가 퍽 많아 포상되어 합천 군수로 승진하였다. 그의 부친 전 군수 배덕문(裵德文) 역시 왜적에 붙좇은 중[僧] 찬희(贊熙)를 잡아 목 베어 상으로 판사(判事)의 직을 받았다. 그때 찬희는 성주의 왜적에 붙좇아 들어가서 판관(判官)이라 가칭하고 창고를 풀어 백성들을 꾀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곽재우가 왜적 안국사(安國寺)와 정진(鼎津)으로부터 강을 격해서 서로 맞서 있으므로, 왜적이 강을 건너오지 못하고 강줄기를 따라 올라갔다. 곽재우 역시 서로 바라보며 좇아 올라가 성주 안언 역로(安彦驛路)에 이르러 정병을 거느리고 가만히 나가서 교전했으나, 적은 많고 아군은 적어 겨우 몇 급의 목만을 얻어가지고 퇴각하였다.
○ 곽재우는 김수(金睟)가 도(道)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대단히 슬퍼하여 말하기를, “처음에 왜적이 왔을 때는 조금도 방어할 계획이 없었고 근왕하기에 이르러서는 나라를 위해 죽어야 한다는 의리를 몰랐으니, 우리 도에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여 감히 얼굴을 들고 다시 온 것이구나. 나는 군사를 옮겨 먼저 그를 쳐야 하겠다.” 하였는데, 김성일이 준책해서 그만두고 마침내 김수에게 아래와 같이 격문을 보냈다.
가슴 아프다. 우리 온 도를 무너져 흩어지게 만들었고 우리 서울을 함락하게 하였으며, 우리 성상을 파천하게 만들고 우리 온 나라 백성들의 간과 골을 땅바닥에 으깨지게 만든 것은 다 네가 한 것이다. 너의 죄악이 천지에 가득 찼는데도 네가 스스로 모른다면 이것은 우매한 인간이다. 네가 과연 우매한 인간인가. 너는 우매한 인간이 아니라, 재앙과 변란을 양성(釀成)하여 이 같은 극단에까지 이르게 하였으니, 온 천하의 토끼털[필(筆)]을 다 모지라지게 해도 네 죄를 다 써내기에는 부족하고, 온 천하의 대[竹 옛날에는 대를 엮어 종이를 대신하였음]를 다 없앤다 해도 네 악을 다 써내기에는 부족하다. 사람들은 모두들, 기한을 정해서 성을 쌓게 해서 백성들을 학대한 것이 혹심했던 것을 너의 죄라고 하고, 군사를 절제(節制)하는 데 방법이 없어서 왜적으로 하여금 마구 들어오게 한 것을 너의 죄라고 하는데, 이것은 모르는 사람들의 말이다. 내지(內地)에 성을 쌓는 것은 비록 인심을 잃었다고는 하나 마음은 적을 방어하는 데 있었은즉 그것은 네 죄가 아니다. 군사를 절제하는 데 전도(顚倒)한 것은 비록 군사의 기밀을 패하게 하였다고는 하나 재주가 병란을 대응하는 데 모자라서 그랬은즉 역시 너의 죄는 아니다. 이런 것들을 가지고 너를 죄 준다면 어떻게 네 마음을 굴복시키겠느냐. 그러나 네 죄가 하나 있으니, 왜적을 환영한 일이다. 왜적을 환영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너는 온 도의 정병과 용사 5, 6백 명을 뽑아 인솔하고서 동래(東萊)가 함락되자 먼저 밀양(密陽)으로 달아났고, 밀양이 패하게 되자 또 가야(伽倻)로 도망쳤으며, 왜적이 상주(尙州)를 지나가자 거창(居昌)으로 물러나 숨었다. 한 번도 장병을 권면해 일으켜 그들로 하여금 왜적을 치도록 한 적이 없어 마침내 왜적으로 하여금 무인지경에 들어가는 것같이 하여, 종내는 열흘 안에 수도가 함락되게 하였다. 자기 몸 붙일 곳이 없음을 스스로 알고 근왕을 칭탁하고 도망쳐 운봉(雲峯)을 넘어 갔으니, 사람을 속일 수 있겠느냐. 하늘을 속일 수 있겠느냐. 네 죄의 둘째가 있으니, 패전을 기뻐하는 것이다. 패전을 기뻐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늙은 겁장이 조대곤(曹大坤)은 본래 책망할 게 못 된다. 그러나 한 도의 원수(元帥)로 김해(金海)의 함락을 구해내지 못한데다가 왜적을 보기도 전에 먼저 있던 곳[主鎭]을 버리고 정진(鼎津)으로 퇴각해서 진을 쳤고, 정진은 왜적이 있는 곳에서 몇 백 리나 떨어져 있었는데 헛되이 놀라 무너져 회산서원(晦山書院)으로 도망쳐 들어가 마침내 여러 진(陣)과 각 읍들이 풍문만을 듣고 무너져 도망치게 만들었은즉, 조대곤의 죄는 주살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도 너는 그 자를 목 베어 내걸어 사람들의 마음을 경각시키지 않았으니, 너는 과연 성(城)을 버리고 패전한 군율을 모르는가. 네 죄의 셋째가 있으니, 나라의 은혜를 잊은 것이다. 은혜를 잊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듣건대, 네 조상은 10대의 주불(朱紱)이요 7대의 은장(銀章)이라고 하니, 녹도 후했고 은총 또한 융숭하였다. 그러니 의리상 마땅히 나라와 휴척(休戚 기쁨과 슬픔)을 같이하고 사생을 함께해야 할 것이다. 만약 충의의 기운을 분발하고 강개한 마음을 발동하여 자신이 사졸에 앞서 죽겠다는 마음을 가졌다면, 무릇 우리 영남의 2 백여 년을 두고 배양해 온 사람들이 어찌 몸을 잊고 죽음을 무릅써서 나라의 치욕을 씻어버리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너는 군부(君父)의 파천을 기뻐하고 수도의 함락을 달갑게 여겼으니, 너는 과연 군부의 곤란을 서둘러 구해낼 줄 모르는 자인가. 네 죄의 넷째가 있으니, 불효다. 불효란 무엇을 말하는가? 듣건대, 네 아비는 비록 불행하게 일찍 세상을 떠났으나 참으로 강개하고 충의로운 선비이었다. 만약 네 아비로 하여금 지금의 변란을 당하게 했다면, 반드시 의병을 권장하여 나라의 원수를 갚았을 것이다. 땅속에 들어간 영령이 생각건대, 반드시 어두운 가운데에서 너의 한 짓을 가슴 아파하고 너의 불궤(不軌)함을 분해하며, “임금을 무시하고 어버이를 잊은 일이 내 자식한테서 나올 줄이야 어찌 생각했으랴.” 하고 말할 것이다. 네 죄의 다섯째가 있으니, 세상을 속인 것이다. 세상을 속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네가 조정에 출사할 때 조정에서는 강과경직(剛果耿直)하다고 지목하였고, 영남에 절(節)을 갖고 내려왔을 때 영남에서는 너를 총명재예(聰明才藝)하다고 일컬었다. 강과 경직하고 총명 재예한 사람이 정말로 절충(折衝)하고 어모(禦侮)할 마음이 있었다면 험준한 곳에 거점을 두고 견고하게 진지를 지켜서 멀리 몰고 들어오는 적을 막는 것이 고리를 굴리는 것[轉環]같이 쉬웠을 터이다. 그런데 너는 수수방관(袖手傍觀)하면서 한 가지 계책도 획책하지 않고 한 가지 모의도 시행하는 일이 없이 왜적이 도륙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은즉, 전일의 강과와 재예는 좋은 작위를 낚으려는 것이었으나 오늘의 우매한듯 겁내는듯 하는 것은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이냐. 네 죄의 여섯째가 있으니, 무치(無恥)한 것이다. 무치란 무엇을 말하는가? 너는 영남을 왜적에게 버려 두고 운봉을 넘어 전라도로 들어가서 근왕군에 몸을 기탁했다가, 근왕군이 용인(龍仁)에 도달했을 때 왜적 6명을 보고는 군량을 버리고 군기(軍器)를 내던지고 금관자(金貫子)를 잃어버리고 달아났다고 한다. 이것은 미리 금관자를 버리고 군사 중에 섞여 왜적으로 하여금 알아보지 못하게 한 것이다. 구차하게나마 살아 보자는 마음은 평소에 정해졌던 것이고, 구차하게 살아나는 꾀는 못하는 짓이 없었던 것이다. 네 죄의 일곱째가 있으니, 남의 성공을 꺼리는 것이다. 성공을 꺼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네가 도내에 있으면서 네가 왜적을 토벌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군사들의 마음이 저상해서, 앞장서서 적에게 나가는 자가 없게 되었다. 다행히 초유사가 충성심을 격발하고 의기(義氣)를 고무하여 사방에서 의병이 일어나게 만들어 동지들이 목숨을 내놓게 된 덕분으로 사람들의 마음이 좀 가라앉고 성세가 자연 커져서 지역 내의 왜적을 깨끗이 쓸어버리고 거가를 받들어 돌아오는 날을 가리키고 기다릴 수 있게 되었었다. 그런데 너는 부끄러움을 잊고 치욕을 참고서 얼굴을 들고 다시 와서 호령을 하고 지휘권을 발동해서 의병들로 하여금 흩어져 버리려는 마음을 갖게 하고 초유사로 하여금 다 이룩하게 된 공을 망치게 만들었은즉, 전의 악은 이미 지나가 버렸다 하더라도 지금의 죄는 용서할 수 없다. 아아! 북쪽 하늘은 멀고 도로는 막혀서 왕법(王法)이 시행되지 않아 네 목이 아직도 온전한 것이다. 너의 가짜 기운과 떠도는 혼이 비록 천지 사이에서 보고 숨쉬고 있다고는 하지만, 너는 사실 머리 없는 시체다. 네가 만약 신하의 분수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네 군관을 시켜 네 머리를 베어 버리도록 하여 천하와 후세에 사과하라.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내가 네 머리를 베어서 귀신과 사람의 분을 풀도록 할 것이다. 너는 알아 두라.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당초에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켰을 때 군사의 위세가 날로 성해 가고 왜적을 죽인 것이 퍽 많았다. 우병사 조대곤이 그의 성공을 꺼려 계사(啓辭) 안에 의심하는 말을 써 넣었고 감사 김수(金睟) 역시 계문 안에 불측한 말을 꾸며 넣었다. 이에 이르러 곽재우 역시 앞의 격문에 든 김수의 죄목을 들어 상소하였다.
경상도 의령(宜寧)의 유학(幼學) 신 곽재우는 진실로 황공한 마음으로 머리를 조아리고 삼가 백 차례 큰절을 하고 주상전하께 말씀을 드리나이다. 엎드려 듣건대, 수도가 함락되고 거가 파천했다 하니, 북쪽을 바라보며 가슴이 미어지고 통곡을 억제하지 못하나이다. 왜적이 오자 씩씩한 사나이와 건장한 장수가 누구나 다 빠짐없이 소문만 듣고 무너져 달아난 것은 무기가 견고하고 예리하지 않아서가 아니고 성지(城池)가 높고 깊지 않아서가 아니며, 단지 사람들의 마음이 흩어져서 흙같이 무너지는 탈이 있었기 때문이었나이다. 대저 사람들의 마음을 흩어지게 한 자는 바로 김수입니다. 김수는 두 차례에 걸쳐 이 도의 감사를 지냈는데 정치를 하는 것이 맹호보다 더 포학하여 성군의 은택이 막혀서 내려오지 않아 흙같이 무너질 형세가 이미 일이 생기기 전에 나타났습니다. 왜적이 오기에 이르러서는 자신이 먼저 퇴각해 숨어버리고 온 도의 수장(守將)으로 하여금 한 번도 무기를 맞대고 싸우지 않고 성문을 열고 큰 적을 맞아 들여 혹시나 뒤떨어질까 두려워하게 만든 것이 마치 저 왜적이 우리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기뻐하는 것 같았으니, 김수의 죄는 비록 머리털을 잡아쥐고서 주살한다 해도 사람들의 마음을 가라앉히기에 부족합니다. 그래서 신이 김수에게 격문을 보내 이르기를, “가슴 아프다. 운운. 너는 알아 두라.” 하였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혹 도주(道主)의 과오를 말한 것을 잘못한 짓이라고도 합니다. 평상시 무사한 날에 있어서는 물론 자기 도주를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마는, 이같이 위급하여 존망이 우려되는 때에 만약 다들 잠자코 있다면 그것은 단지 도주가 있는 것만 알고 전하가 계신 것은 모르는 것입니다. 경상도 전체의 모든 사람이 전하의 신하라면 어찌 김수의 죄를 용인하고 이 나라가 망해가는 때에 전하를 저버리겠습니까. 송(宋) 나라의 고종(高宗)이 호전(胡銓)의 상소를 들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천하 후세의 원한거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 전하께서 꼴 베고 나무하는 자의 말이라도 채납하여 주신다면 중흥의 공은 곧 이룩할 수 있게 될 것이니, 종묘 사직이 매우 다행할 것이고 신민들이 심히 다행할 것입니다. 신은 진실로 노둔(駑鈍)하여 강호(江湖)에 자취를 감추고 있었으나 이제 왜적의 변을 당해 종료 사직이 위태로우니, 스스로 조상 3대에 조정에서 벼슬 한 일을 생각할 때 신비한 모의와 계략은 비록 자방(子房 한 고조를 도운 군략가인 장량(張良))에 미치지 못하나 복수하겠다는 마음은 신이 정녕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 번 죽을 각오로 4월 22일에 의병을 모집하고 일어나서 왜적을 막아 왔던 것으로, 다행히 전하의 위령(威靈)에 힘입어 오늘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힘을 다해서 죽은 후에야 그만둘 것을 마음으로 맹서하거니와 이 하찮은 신의 심정은 전연 딴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니, 엎드려 원하옵건대 신의 광기와 참람함을 용서하시고 신의 어리석은 충정을 살피소서.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의령의 의병장 곽재우가 온 도의 의병 여러 군자에게 널리 고한다. 김수는 나라를 망하게 한 큰 역적이다. 《춘추(春秋)》의 대의를 가지고 논하자면 사람이면 누구나 다 그를 주살할 수 있다. 따지는 사람은, 혹 도주(道主)의 과오조차도 말할 수 없는 노릇인데 하물며 그 목을 베겠다고 말하는 것이야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할 것이나, 이것은 단지 도주가 있다는 것만 알았지 임금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왜적을 영접하여 서울에 들여놓고 임금으로 하여금 파천하게 한 자를 도주라고 해서 되겠는가. 수수 방관하며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기뻐하는 자를 신하라고 해서 되겠는가. 온 도의 사람들이 다 김수의 신하가 된다면 김수의 죄를 말하거나 김수의 머리를 베어서는 안 되겠지만, 온 도의 사람이 주상 전하의 신하 아닌 자가 없다면 나라를 망하게 한 역적을 사람들이 다 죽일 수 있고 패망을 기뻐하는 간악한 인간을 다들 목 벨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말하는 사람은 혹 김수를 목 베는 것이 일의 체통에 어울리지 않는다고도 한다. 나라의 원수를 갚고 나라의 역적을 치면 그것이 이른바 일의 체통이다. 김수가 일의 체통을 멸실한 지 오래되니 일의 체통이 어울리고 안 어울리는 것은 본래 따져서는 안 될 것이나, 먼저 간악한 인간을 목 베어 군대를 돌아가게 하라는 조서가 없게 만든 연후에 거가를 받들어 돌아와 중흥의 공을 세운다면 그것은 일의 체통에 크게 어울린다. 엎드려 원하건대, 의병으로 나선 여러 군자들은 격문을 자세히 보고 군사들을 거느리고 김수가 있는 곳에 모여 그 목을 베어 행재소에 바치라. 그렇게 하면 공(功)이 수길(秀吉)의 목을 바치는 것보다 갑절이 될 것이니 의사들은 이 점을 알아두라. 혹시 수령들이 나라가 망할 것과 임금에 대한 대의(大義)를 생각하지 않고 도적 김수에 부회(傅會)하여 그 고을 사람들로 하여금 의거를 못하게 한다면 김수와 함께 같이 주살할 것이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그때 김 수는 거창으로부터 산음(山陰)으로 옮겨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홀연히 위의 격문을 보게 되어 분하고 놀라움을 견디지 못했다. 김경근(金景謹)이 또 치고(馳告)하기를, “곽재우가 영공(令公)을 해치려고 대군을 거느리고 오니 속히 피해야 하오,” 하여, 김수가 그날로 밤중에 함양으로 달려가 군수를 시켜 성을 지키고 계엄을 펴고 봉화(烽火)를 늘어놓고 기다리게 하고, 또 막하의 장수와 보좌관들에게 말하기를, “곽재우가 오면 응전하여 이를 방어하고 두려워하지 말라.” 하고, 이어 군관 김경눌(金景訥)을 시켜 곽재우에게 격문을 전하게 하였는데 그 격문에 이르기를,
역적 곽재우에게 격문을 보낸다. 곽재우야, 너는 네가 역적임을 아느냐. 의병을 일으킨다고 가탁(假托)하여 불궤(不軌)한 짓을 음모하다가 흉악한 모략이 실패하고 탄로가 나서 억만 년 후에까지 그 추악한 냄새를 남긴 자가 동탁(董卓)의 역적질이 아니었느냐. 옛 기록에 이르기를, “형벌은 대부에게는 올라가지 않는다.” 하였고, 또, “대부를 독단적으로 죽이지 말라.” 하였은즉, 서열이 높고 지위가 높은 사람은 비록 죽어야 할 법을 범했다 하더라도 그에게 임금의 생살지권(生殺之權)을 함부로 가하지 않는 것은 중신(重臣)을 대우하는 도리인 것이다. 본도의 순찰사는 일찍이 육경(六卿)을 지내고 두 차례나 옥절(玉節)을 잡았으며, 하물며 한 도의 도순찰사의 직책을 받았음에랴. 설사 순찰사가 직접 큰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임금으로부터 그 죄를 물어야 하지 조정에서도 처치할 것이 아닌데 하물며 본도의 사람이 그 어찌 법으로 처치할 수 있겠는가. 너 역적이 난리의 틈을 타서 사람들을 불러모아 죄를 나열하여 격문을 전한 것은 의거를 가탁하여 불궤한 짓을 음모하다가 흉악한 모략이 깨져서 탄로날 때를 위해 미리 자기를 보전하기 위한 계략이었음에 불과하다. 지금 왜적의 기세가 굳세고 거침없어 이미 수도를 함락시키고 거가가 파천하였으며 종묘사직이 폐허가 되었으니 조금이라도 강개한 뜻을 가진 자라면 비록 녹을 먹는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마땅히 창을 베고 자며 적개심으로 나라의 치욕을 씻어야 할 것이어늘 하물며 본도와 같이 병화를 면한 고을 사람들이겠는가. 낙동강 동쪽은 몇 번이나 함락되었는지조차 알지 못하여 근처의 주현(州縣)이 단지 7, 8군데가 남았을 뿐이다. 소수의 왜적이 모여서 주둔하고 있는데 지금 고성ㆍ성주ㆍ금산(金山)에 버티고 있으며, 또 금산(錦山)을 함락시키고 장차 거창을 함락시키려 하고 있으니, 나머지 7, 8개 읍도 마치 죽어가는 사람이 기식(氣息)이 엄엄(奄奄)하여 약이 넘어가지 않고 호흡이 불통하고 혈색이 단지 입술에만 남아 있어 살 길은 10분의 1밖에 없는 것과도 같다. 너 역적의 마음이 만약에 의기에 격동되어 나왔다면 마땅히 순찰사ㆍ초유사와 김송암(金松庵 김면)ㆍ정내암(鄭箂嵒 정인홍) 두 선생과 힘을 다해 왜적을 토벌하느라 여가가 없을 것인데, 오직 반역할 마음만으로 먼저 한 도의 대장을 제거하려고 죄를 늘어놓고 격문을 전해 그로 하여금 정벌하는 책모에 전심하지 못하게 하여, 남아 있는 7, 8개의 읍이 장차 승냥이와 범 같은 왜적이 횡행하는 데 직면하여 자매와 처첩이 깡그리 사로잡혀 가고 부자 형제가 다 어육이 되어 비참하게 도륙되었으니 부모 처자가 있는 자들이 어찌 네 몸뚱아리를 난도질하고 네 살을 씹으려 들지 않겠느냐. 너 역적이 감히 이런 짓을 하는 것은 전후로 낭패(狼狽)하여 진퇴유곡으로 어찌할 수 없어서 그렇게 한 것이다. 왜냐하면, 너 역적이 처음 군사를 일으켰을 때 네 마음속에 작정하기로는, 국가가 공허할 때에 무뢰한 무리들을 많이 모아서 개인적인 은혜로 이들을 묶어 심복을 만들어 작은 왜적을 약탈하여 군의 성세를 크게 떨쳐 불행히 일이 가라앉으면 일대(一代)의 원훈(元勳)이 될 기회를 잃지 않을 것이고, 만약 요행히 나라가 망하면 또 새 왕조를 창립하는 대공을 이룩하게 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화심(禍心)을 품고 의병을 가탁하여 초계(草溪)의 관곡(官穀)을 점취하고 진주(晉州)의 전세(田稅)를 탈취하는 등 공공연히 도적질을 자행했다. 네 도당 정대성(鄭大成)이 주살될 때, 순찰사가 역적인 네가 장수를 무시하는 마음이 있음을 의심하고 막하에 자세히 캐어 물었었는데, 만약 안세희(安世熙)ㆍ김경눌(金景訥) 두 사람이 네가 역적이 아님을 힘써 진술하지 않았더라면 너의 머리와 발은 벌써 각각 따로 떨어졌을 것이고, 너 역적의 혼 역시 동탁과 지하에서 뉘우치고 있게 되었을 것이다. 왜란이 일어나기 전에는 순찰사는 한 도의 방백에 불과했고, 방백이 거느린 것은 5, 6인에 불과하여서, 절제(節制 지휘권)가 병사와 수사에까지 미치지 못했다. 왜란이 일어나 버린 후에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진주로부터 밀양으로 달려갔고, 밀양ㆍ청도(淸道) 등 5, 6개 지방이 2, 3일 내에 연달아 함락되어 왜적이 성주를 범하게 되자 고령으로 달려갔으며, 왜적이 금산(金山)으로 향하자 달려서 지례(知禮)로 향했다. 도중에 성주 가천리(伽川里)를 지나 마을 가에 말을 멈추고 유생 등 4, 5인을 초치하여 의병을 일으킬 뜻을 타일러 주고서는 가야로 들어가지 않고 곧장 지례까지 갔는데, 그때에 비로소 도순찰사(都巡察使)의 임명을 받았으나 거느린 것이 역시 막하의 사람에 불과했을 따름이다. 도주한 패군 이유검(李惟儉)을 초치하여 목 베어 장대에 내걸고 죄를 청했고, 김해의 조대곤이 백의종군하는 것을 구원해 주지 않았으나 조대곤은 금산에서 독전(督戰)하여 수백 급을 목 베었고, 여러 읍에 장수를 정해서 포로와 수급을 많이 올리게 하였으니, 이것들은 다 순찰사의 절제가 탁월했음에 연유한 것이다. 이제 왜적이 이미 고개를 넘어갔고 서울이 이미 함락되어 버리자 군사를 거느리고 근왕하겠다는 뜻을 행재소에 치계(馳啓)하고 겨우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운봉(雲峯)까지 갔는데, 이어 초유사가 전라 순찰사가 공주로부터 돌아 내려오고 전주에서는 아직 군사를 조달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또 초유사의 강력한 만류에 따라 돌아와 안음(安陰)에 머물렀다. 급히 와서 구원하라는 교지를 보자마자 눈물을 흘리고 마음에 맹서하여 홀로 1백 명을 거느리고 수원까지 나가서 머물렀는데, 도중에서 소수의 왜적들을 만났으나 목 베어 죽인 것이 퍽 많아 왜적은 퇴각해 가 버렸다. 그 이튿날에 이르러 왜적의 무리가 진으로 돌격해 왔는데 양호의 순찰사들은 다 이미 달아나 버렸고 본도의 순찰사 막하의 장병은 이미 전투에 나가게 했으므로 단지 수삼 명이 남아 있을 뿐이었으나, 조금도 겁을 내지 않고 차고 있던 검을 뽑아서 퇴각하는 장수를 목 베이려고까지 하며 혼자서 후퇴하는 군대의 뒤를 따라가 우리 군대를 손상 없이 온전히 돌려왔으니 이런 것들이 충분(忠憤)의 분발이 아니겠느냐. 너 역적이 비록 살해하려고 가슴속의 흉악한 모략을 실제로 자행하기는 하나, 조정의 명령이 아직 팔방에 행해지고 대장의 명령 역시 한 도에 행해지고 있다. 한 도와 팔방의 사람들이 다 고개를 숙여 너 역적의 수하에 복종하고 순찰사가 해를 입는 것을 내버려 두겠는가. 극성스러운 왜적이 충돌해 오던 초기에 큰 진(鎭)을 연속하여 함락시키고 분탕하고 도륙하였으므로 태평시대의 백성들이 소문만 듣고 무너져 흩어졌으니 장수된 자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수풀을 찍듯[樧] 무인지경에 들어가듯 곧장 찌르고 유린해 들어와 도성에 마구 들어왔으니 이것은 순찰사가 절제하지 못한 소치는 아니다. 너 역적이 비록 ‘죄를 씌우려면 어찌 말 없는 것을 근심하랴’ 하여 감히 흉악 처참한 일을 하고 이미 막하의 사람들에게 격문을 전해 자객(刺客)의 일을 하도록 위협하였으나, 순찰사는 미치광이의 말로 버려 두고 일소에 부쳤을 따름이다. 너 역적은 또 순찰사에게 격문을 냈는데 거기에 지적한 말을 보니 다 거짓되고 사실이 없으나, 그 가운데 충의기절(忠義氣節)로 순찰사의 선인(先人)에 허락한 것이 있으니 이것은 천리(天理)가 민멸(民滅)하지 않은 곳이라 이를 수 있다. 옛부터 지금까지 충의기절을 지닌 사람은 이러한 때에 의를 제창하고 근왕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하는 바가 한결같이 정대하고 거짓 없는 도리에서 나오기 때문에 남이 이간하지 못하고 행하는 일이 청천백일(靑天白日)과 같다. 송조(宋朝)의 여러 충성스러운 신하에 비길 인물은 당대의 김ㆍ정 두 선생이다. 너 역적은 본래 볼 만한 행실이 없었으면서도 의병을 칭탁하여 불궤(不軌)한 짓을 몰래 꾸몄고, 도당과 우익(羽翼)은 다 음험 무상하고 흉악 무도한 사람들인즉 지금이 흉악하고 참혹한 말은 너 역적만이 한 짓이 아니다. 네가 반역한 상황을 순찰사가 행조(行朝)에 치계하였고, 곰과 범 같은 장수와, 산을 뽑아낼 인재가 다 순찰사의 막하에서 서로 다투어 너를 잡아오겠다고 자청하고, 가슴 아파하지 않는 이가 없어 격문을 내어 여러 장수들을 불러 원문(轅門)에 묶어 오게 하여 불궤한 너를 효시(梟示)하자 한다. 네가 지금 와서 항복하면 멸족하는 화를 면할 수 있으니 길흉 화복 사이에서 너 역적 도당은 각각 거취를 살펴라. 또 너 역적이 평소에 행한 패역 무도한 정상은 말할 수는 있겠으나 말하면 추악해지니 잠시 내버려두고 거론하지 않는다. 잘 알아 두어라.
○ 경상도 순찰사 막하의 김경로(金敬老) 등이 곽 의사의 진중에 격문을 내어 다음과 같이 이르다.
곽재우의 도당에게 격문을 전한다. 무릇 천하의 일 중에 그 기미가 드러나지 않은 것은 지혜로운 자라도 혹 모르지마는, 기미가 이미 드러난 것은 비록 지극히 우매하다 하더라도 모르는 자가 없다. 이제 곽재우의 평소의 패악한 행실과, 기회를 이용하여 흉악한 짓을 자행하는 정상은 명백하여 보기 쉬우니 지혜로운 자를 기다린 연후에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도내의 사람들이 혹 다 알지 못해서 같이 도당에 들어가 함께 무도한 지경에 빠졌으니 남 몰래 제군을 아깝게 생각하는 터이다. 잠시 그중에서 여럿이 다 아는 것을 들어서 말할 터이니 제공(諸公)은 자세히 듣고 그 정상을 알아서 거취를 정하고 향배를 결정하라. 곽재우는 본래 탐욕스럽고 포악한 사람으로 부모의 세도를 믿어 오로지 할경(割耕 남의 밭을 침범해서 자기 농사를 짓는 일)을 일삼고 남의 소와 말을 빼앗으며, 그가 사귀는 것은 다 흉악한 이지(李旨) 같은 도배(徒輩)들인즉 그 마음이 바르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문덕수(文德粹)가 토주(土主)를 모략하여 죽이고 방백을 질책해 욕하며 병사를 고소한 것은 다 곽재우가 도와 주지 않은 것이 없은즉 그 마음의 음흉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왜적의 변란이 생긴 뒤 의병에 가탁하여 무뢰한 무리를 꾀어 모아서 먼저 초계의 창고를 파괴하고 군량ㆍ청밀(淸蜜) 및 군기(軍器)ㆍ잡물을 전부 훔쳐 갔으며, 또 의령현 창고의 곡식을 약탈하고 또 진주의 전세(田稅) 4백여 석을 개인 창고에 옮겨 넣고서, 인근의 무뢰한 무리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은혜를 베푸는 거리로 삼았다. 그리하여 왜적을 쫓아내기 전에 흉계를 꾸며 표면으로는 왜적을 치는 것으로 보이고 속으로는 신하 노릇 하지 않을 모략을 간직하고 있었다. 먼저 방백을 제거하려고 군현(郡縣)에 격문을 전하고 읍재(邑宰)를 모략을 써서 죽여 위아래의 인민들을 공갈하고 말하기를, “방백은 백성을 독촉하여 성을 쌓느라고 생령(生靈)을 못살게 굴었고 방어를 하지 않아 왜적으로 하여금 마구 들어오게 만들었으니, 그 죄가 크다. 이 기회를 이용해서 모해할 것이다.” 하니 멍청하고 우매한 백성들과 강(講)에 낙방한 유생(儒生)들은 날로 흉악하고 패란한 술수 속에 빠져 들어감을 모르고 충의의 고장으로 하여금 난폭한 곳으로 변하게 만들어 장차 온 도를 옥석이 함께 타게[俱焚] 하려고 하니, 천년 후에까지 악명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어찌 제공이 깊이 부끄러워 하는 바가 아니겠는가. 또 곽재우가 애당초 거병한 것이 진정한 의거였던가. 만약 그것이 의거였다면 왜적이 막 성할 때에 직면하여서는 자기의 사적인 유감을 버리고 왜적 토벌에 전심하여 생령을 편안해지도록 구제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한 것에는 힘쓰지 않고 개인의 원한을 보복하고 윗사람을 무시하는 계략을 행했으니, 이 점으로 해서 곽재우의 마음 먹음을 사람들이 다 의심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제공이 유독 그를 의심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또 이노(李魯)가 마음 쓰는 것은 천고에 찾아볼 수 없이 악한데 곽재우는 그의 재물을 탐내 그의 딸을 데려다 첩을 삼았으니, 곽재우의 마음 쓰는 것이 실로 개돼지 같아서 조금이라도 식견이 있는 자라면 멀리서 바라보고는 되돌아 가 버리고 더럽혀질까 겁낼 터인데, 제공은 다 그에게 부동하여 오직 그 명령에만 복종하니 제공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설사 곽재우가 흉계를 실행할 수 있어서 우리 읍재를 죽이고 우리 방백을 해치며 마침내는 불궤한 짓을 꾸미는 날에 이르게 된다면, 제공은 그래 어떻게 처신하겠는가. 곽재우가 하는 일에 따라서 스스로 난동 반역의 죄에 빠지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곽재우가 하는 일에 따르지 않고 충신 열사가 되겠는가. 시비 이해와 길흉 화복은 오늘 하는 일에 판연하게 가름되는 것이다. 바라건대, 제공은 일찍이 반역과 충순의 이치를 분별하여 먼저 곽재우의 머리를 베어서 원문(轅門)에 가지고 와 바치면 모든 백성이 그 사기(士氣)를 기뻐할 것이고, 국가에서는 그 충의를 가상히 여겨서 꽃다운 이름을 영원토록 남기고 작록을 무궁토록 누릴 것이니 어찌 아름답고 좋지 않겠는가. 의를 사모하는 무리들이 그 모함하는 말을 가슴 아파하여 감히 그 거짓됨을 신변하여 이르기를, “초계와 의령에서 양곡을 취한 것 등의 일은 이미 초유사의 계사에 상세하므로 잠시 내버려 두고 변론하지 않겠거니와, 진주의 전세(田稅)에 관한 일인즉 평시 본주의 세미는 남강(南江)으로부터 배가 기강(岐江)으로 해서 가는데 이때에 와서는 배가 기강에 이르자 적병이 돌연히 닥쳐 와서 격군(格軍 : 뱃군 즉 선박의 승무원)이 배를 버리고 흩어져 쌀 실은 배만 빈 강에 홀로 떠 있은 것이 10여 일 되었다. 그러므로 도둑에게 줄 우려가 있어 의사가 거두어서 군량으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앞에 이른바 기강에 버려진 배의 세미라 한 것이 이것이다. 그런데 이런 인간들이 죄를 씌우려고 정당한 물건을 탈취했다고 하였으니 통탄할 일이다.
○ 삼가(三嘉)의 진사 윤언례(尹彦禮), 학유(學諭) 박사제(朴思齊) 등이 위의 격문을 보고는 곧 여러 읍에 통문(通文)을 내어 김경로 등이 의사를 모함한 죄를 폭로하여 다음과 같이 이르다.
요사이 순찰사의 군관배가 곽 의사에게 보낸 글 두 가지를 보니 하나는 “역적 곽재우에게 격문을 보낸다.” 하였고, 하나는 “곽재우의 도당에게 격문을 보낸다.” 하였다. 의사가 과연 역적이고 도당을 가진 자인가. 그 가운데 말한 것은 다 부회하고 날조한 말들로 단지 자기네들의 음흉하고 사특하며 정의를 해치는 마음을 드러내기에 족할 뿐이지, 곽 의사의 병폐를 만들어 내기에는 부족하다. 충의를 가리켜 역적이라 하니 그것은 진회(秦檜)의 흉악하고 교활한 묵은 술수다. 진회 하나로도 악비의 군대를 돌림으로 분을 풀기에 족했거늘, 하물며 여러 진회가 순찰사의 막하에 모였음에랴. 의병에 앞장서 일한 이가 어찌 그 때문에 한심해지지 않겠는가. 곽 의사가 여러 군대가 달아나고 무너질 때를 당해서 백 번 죽어도 돌아보지 않는 계책을 결행하여 충의가 과격하고 절실하며 이름이 올바르고 말이 순리함은 사람들이 이목이 있는 이상 췌언할 필요가 없거니와, 강회(江淮)를 차단하여 군현의 울타리 구실을 하였는데, 아! 충성이 곽 같고 의기가 곽 같은데도 역시 역적의 이름을 면치 못하니, 그 자들이 의사를 해치는 것은 바로 의병을 해치는 것으로 그 자들의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다. 의사가 근자에 낸 격문에는 사실 경솔하게 움직인 점이 있기는 하지마는 그래도 충의에 분격한 지나친 행동에 불과한 것이니, 하필 그것을 깊이 허물해서 무엇하랴. 저 군관배는 한갓 왜적을 환영한 순찰사가 있는 것만 알았지 왜적을 토벌하는 의사가 있는 것은 모르고 곽에게 격문을 전해서 사적인 유감을 마음대로 부리려고 한다. 그 사적인 유감이라는 것은 이러하다. 김경눌(金景訥)과 이노(李魯)는 사이가 나빠진 지가 오래되어 여러 해 동안 이노를 모함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그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가 마침 이 변을 만나 자기 가슴속의 흉계를 실행하게 된 것을 기뻐하고 있던 차에 의사의 격문(檄文)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곽의 첩은 이의 딸이니 이노를 죽일 구실은 여기에 있을 게다.” 하고, 이노를 뒤에서 사주한 괴수로 만들고 곽을 사주당한 사람으로 만든 것이다. 김경눌 역시 사람이니 어찌 곽공이 의사이고 충신임을 모르기야 하랴마는, 자기 원수를 갚으려고 의사를 가리켜 역적이라고 한 것이다. 이 뜻을 임금[宸聽]께 앙달(仰達)하고 싶으나 북쪽 하늘은 아득히 멀어 소리내어 외쳐도 도달하지 않는다. 엎드려 원하건대, 여러 곳의 의병소(義兵所)에서 각각 통문을 내어 의사의 명백한 마음으로 하여금 참소하고 모함하는 자에게 희생되지 않게 한다면 천만 다행한 일이다. 아! 올바른 도리를 지닌 타고난 본성은 사람이면 다 가지고 있고 역순(逆順)과 시비는 본래 공론(公論)이 있는데도 감히 대악 무도한 이름을 충신 의사의 위에 덮어 씌우려고 하니 어찌 가슴 아프지 않은가. 맹자가 이르기를, “정의를 해치는 자를 도적[賊]이라 한다[賊義者謂之賊].” 하였는데, 대의(大義)를 제창한 자를 역적이라고 하겠는가. 무죄한 자를 무고한 자를 역적이라고 하겠는가? 제군은 이 점을 깊이 살피라. 《경상순영록》에 나온다.
○ 김경근(金景謹)이 거창에 갔는데 김성일(金誠一)이 막 자고 있었다. 김경근이 말씀드리기를, “곽재우가 순찰사를 살해하려고 합니다. 저 김경근이 이미 고하여 피하게 하였사오니 영공(令公)께서도 선처하셔야 합니다.” 하였다. 김성일이 병을 핑계하여 면회를 거절하고 사람을 시켜 말하기를, “네가 산음(山陰)에서 나를 만났을 때 팔뚝을 걷어 올리고 큰 소리로 말하기를, ‘김수(金睟)를 목 베지 않으면 천지에 대의를 펼 길이 없다.’ 하였고, 곽재우는 어리석은 사내이니 너희들이 부탁한 게 아닌지 어떻게 알겠느냐?” 하고 전하니, 김경근은 부끄럽고 겁이 나서 물러갔다. 김수는 격문을 전해 곽재우를 크게 꺾어 놓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무척 두려워하는 마음이 들어 비밀리에 김성일에게 내통하여 곽재우를 타이르게 하였다. 김성일 역시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김수를 원망하는 것이 매우 심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로 말미암아 불의의 변고를 초래하게 될까 두려워져 곧 곽재우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다.
의병장은 왜적의 변란이 일어난 시초부터 재산을 탕진해서 맨 먼저 의병을 일으키고 분발하여 자신은 돌보지 않고 한결같이 나라를 위해 왜적을 토벌하는 것만으로 마음을 먹고 살아왔으니 비록 옛날의 열사라 한들 어찌 그보다 더했겠습니까. 본관이 임지에 도착하자 곧 글을 보내 초청하였던 바 의병장은 늙고 졸렬한 본관을 함께 할 자가 못 된다고 생각하지 않고 단성(丹城)으로 와서 만나 주었고, 한 번 읍하는 사이에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해 죽을 뜻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 후 고립 무원한 군사를 이끌고 낙동강 가를 횡행하여 먼저 나서서 왜적을 토벌하여 전후로 목을 베인 것이 퍽 많아, 왜적이 말을 몰고 전진하여 마구 들어오지 못해 그 일대의 여러 성들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보존되었고, 뛰어난 명성이 사방으로 빨리 퍼져 듣는 사람 치고 감동하여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원근에서 호응해 와서 왜적을 토벌해 버릴 공훈을 손꼽아 기대하였으니, 의병장의 영웅적인 풍도와 의열은 비단 한 대에 떨치고 빛날 뿐 아니라 또한 죽백(竹帛)에 기록되어도 부끄러움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홀지(忽地)에 의병장이 순찰사의 영문(營門)에 격문을 보내 감히 패만(悖慢)한 말을 마구 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방백이 어떠한 관직이고 의병장이 어떠한 인물인데 감히 그러한 일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방백이 비록 실제로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본래 조정이 있어 처치할 것이고 도민이 손을 쓸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의사는 충의의 가문에서 태어나 왜적을 토벌하는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이 이룩되려고 하는데, 스스로 함정에 빠져 일족을 멸망시킬 곳으로 빠져 들어가리라고 어찌 생각했겠습니까. 당(唐) 나라의 반역한 병졸이 주장(主將)을 쫓아 내고서 □ 패란을 초래한 것이 무릇 몇 사람이었습니까. 전복한 수레의 전철을 그대로 밟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미혹했다가 되돌아 온다는 경계는 태역(大易)에서 교훈한 바이거니와 앙화를 바꿔 복으로 만드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이 취하는 것이니, 나의 충고를 따른다면 순조로워 복이 많아질 것이고 따르지 않으면 거슬러서 해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 기미는 사이에 머리털도 안 들어갈 정도로 미묘하니 의병장은 이 점을 생각하십시오.
○ 김해에 주둔해 있는 왜적 1천여 명이 고성(固城)으로 옮겨 들어가다. 왜장이 은가마를 타고 감사를 자칭하고 진주를 범하려 하여 진주성 내의 장병이 본도 여러 진(鎭)에 구원을 청하였다. 곽재우 역시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하러 달려갔는데 도중에 초유사의 글을 보고는 말을 세우고 답서를 다음과 같이 썼다.
곽재우는 진실로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삼가 초유사 합하(閤下)께 글을 올리나이다. 지금 타이르시는 글을 보고 극도로 감격하여 눈물을 떨구었습니다. 간곡하신 가르치심과 친절하신 타이르심은 다 저 곽재우로 하여금 장래 닥쳐올 앙화를 모면하고 막대한 공을 이룩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어찌 합하의 지극한 인애로우심으로 저 곽재우를 자식같이 보신 데서 그렇게 하신 것일 뿐이겠습니까. 또한 나라를 위한 마음이 지성에서 발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왜적을 토벌하는 데 자기 몸을 잊게 하시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기는 하나 내리신 말씀은 억양이 너무 지나쳐 그것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뻐하고 두려워하게 할 것이나, 저 곽재우는 그 때문에 기뻐하지도 않고 또 그 때문에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아! 합하가 순찰사를 위하여 꾀하시는 것은 충성스러우십니다. 다만 두렵기는 순찰사가 합하를 위해 꾀하는 것은 그렇지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순찰사 역시 사람입니다. 어찌 자기 죄를 자기가 모르기야 하겠습니까. 순찰사가 말하는 것은 합하께서 고치게 만들 수 있으십니다. 순찰사가 하는 일은 합하께서 고치게 만들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순찰사의 마음을 합하께서 고치실 수 있으시겠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비록 합하의 지성(至誠)과 후덕으로도 끝내 순찰사의 마음을 고치시지 못하신다면, 저 곽재우가 두려운 것은 합하를 모함하는 말이 반드시 순찰사의 입에서 나올 것이라는 점입니다. 합하께서는 저 곽재우가 반드시 헤아릴 수 없는 처지에 빠질 것을 근심하였으나 저 곽 재우는 합하께서도 끝내는 그렇게 되는 것을 면치 못하실까 두려워합니다. 합하께서 저를 아끼시는 마음으로도 저를 비륜(非倫)하고 불궤(不軌)하다고 의심하시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에 있어서야 어떻겠습니까. 하물며 순찰사에 있어서야 어떻겠습니까. 하물며 저 곽재우와 공을 다투는 자에 있어서야 어떻겠습니까. 저 곽재우가 자신을 죽이고 일족을 멸망시키는 앙화가 반드시 닥쳐오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그만두지 않는 것은, 천성에서 우러나 졸지에 고칠 수 없고 울분에 찬 마음을 급히 돌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합하는 임금이 보내신 분인즉 합하의 가르치심은 곧 왕의 말씀과 같으니, 어찌 감히 한낱 자기의 소견을 고집하고 합하의 가르치심을 어기겠습니까. 진주에서 긴급을 고해 와 군사를 거느리고 개금원(介金院)에 왔습니다. 군무가 복잡하여 만의 하나도 사뢰지 못하고 줄입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김수가 의병장 김면(金沔)에게 글을 보내 곽재우를 진정시켜 달라고 하니, 김면 역시 곽재우가 분에 못 견뎌 하는 마음을 알고 있어 의외의 환난이 생길까 두려워하여 곧 곽재우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다.
막부(幕府)의 이름을 듣고 늘 흠앙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더운 날씨에 거느리신 군사들에게 도움이 있고 지휘가 만안하시길 바랍니다. 저 김면은 일개의 썩은 선비로 애써 군에 있으니 어찌 도움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한갓 스스로 두려워하고 염려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다만 사람의 책모가 좋지 않아서 왜적이 고개를 넘어가게 놓아주어 수도를 지키지 못해 어가[大駕]가 몽진(蒙塵)하기에까지 이르렀은즉 그 책임은 돌아갈 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귀하께서는 조정의 명령이 아닌데도 백면서생으로 의병을 일으키셨습니다. 근심할 것은 의기(義氣)가 부족한 데 있지 않고 오직 처사가 마땅함을 잃을까 두려워할 뿐입니다. 지금 행재(行在)가 멀리 떨어져 있어 주청이 통하지 않으니, 우리 민간에서 거사한 사람들은 의뢰할 데가 없어 부득이 왕이 임명한 사람한테서 명령을 받은 연후에야 이름이 바르고 말이 순조로워 왜적을 공격할 수 있게 되고 근왕(勤王)할 수 있게 되며, 체통에 질서가 있게 되고 일을 해가는 데 조리가 있게 됩니다. 만약 일을 그르친 사람을 죄를 주어야 한다고 운운(云云)하는 바가 있다면, 의기가 당당한 점은 있지마는 순리로 공을 이룩하는 방법에는 아마도 미진한 바가 있을 것입니다. 어떠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귀하께서 충성심을 떨쳐 한바탕 외치심에 천백 명이 그림자같이 따라 나서서 물에서 공격하고 뭍에서 전투하여 흉악한 왜적이 도망쳐 흩어졌으니, 낙동강 우안(右岸) 일대를 안도하고 근심없이 지내게 만든 것은 실로 의사의 공입니다. 이른바 강회(江淮)를 차단하여 그 기세를 막은 것은, 지금에도 역시 그 사람이 있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흠모하여 마지않게 합니다. 오직 원컨대 귀하께서 다행히 하찮은 말이라고 버리지 마시고 일에 임해서는 반드시 그것의 순리를 생각하셔서 그 이미 자란 것은 누루시고 그 지극하지 못한 것은 증진시키셔서 의를 모아 멀리 뻗어나가게 하여 결함이 없게 하신다면, 일대에 솟구쳐 나오고 만고에 빛나게 되실 것에 어찌 다름이 있겠습니까. 마침 곽시리(郭是理)가 돌아가는 편을 인해서 구구하나마 사모하는 마음을 대략 적었습니다. 이만 줄이며 삼가 글월을 올립니다. 면배(沔拜).
○ 김수가 다음과 같이 치계하다.
소신(小臣)이 위로 성명(聖明)의 명철하심을 믿고 망령되이 생각하기를, 방비하는 제구를 만약 충분히 조치해 둘 수 있다면 왜적이 충돌해 오는 환난에 대해 막아낼 보탬이 거의 있으리라고 여겨, 임지에 도착한 초기에 방어하는 한 가지 일을 조금도 소홀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내지에 성을 구축하는 데 교생(校生)들을 일시에 많이 징발해다 쓴 것이 신이 원한을 모은 근원이었으니, 사람들의 말을 돌아보지 않고 일을 이룩할 수 있기를 기원하였던 것입니다. 그때 우병사 신할(申硈)이 마침 신과 뜻이 맞아 비록 날쌘 군사에게 지나치게 엄히 한 폐단이 있기는 하나, 그가 나랏일에 마음을 다한 정성은 실로 가상한 것이어서 그와 더불어 일을 같이 하여 무릇 군무에 관련된 일은 다 함께 의논하여 처치하였던 것이 □□□ 물정을 격하게 한 것입니다. 문덕수(文德粹)의 상서(上書)는 온 도의 사람들이 대부분 이성(異姓)의 삼촌질(三寸姪) 전 직장(前直長) 이노(李魯)의 조종이었다고 생각하여, 또 신이 전에 장계(狀啓)에서 약간 그 뜻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므로 이노가 소신을 해치려고 하는 생각을 어찌 잠시라도 잊었겠습니까. 국운이 불행하여 왜적의 기세가 창궐하였으니 이 지경에 이르러서는 신의 죄가 죽어야 마땅하겠으나, 이 기회를 이용하여 백방으로 날조하고 모함하는 일은 더욱 못하는 짓이 없을 만큼 성해졌습니다. 그리고 그의 딸을 첩으로 삼아 사위가 된 의령에 사는 곽재우는 시초에 의병을 일으켰을 때 곽월(郭越)의 아들이라 자칭하고 무뢰한 3백여 명을 거느리고 앞장서서 수종하게 하였으며, 나장(羅將 고을의 장교)들을 엄연히 대동하고 초계(草溪)의 남쪽 대로로부터 행군하여 관청에 돌입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먼저 지키는 자와 관가 사람을 묶고 관의 창고를 쳐부수었으며, 쌀과 밀가루 및 기름ㆍ꿀ㆍ찹쌀가루[眞末] 등 잡물까지 전부 훔쳤습니다. 또 사창(司倉)의 창고 문을 부수고 군량과 곡물을 깡그리 훑어내서 자기의 도당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 고을의 삼공형(三公兄) 등이 문서[文狀]로 보고해 왔으나 신이 생각하기는, 곽월은 세족(世族)인데 세족의 아들이 어찌 도적질을 감행하는 일이 있겠는가. 틀림없이 무뢰한 육지의 도적들이 곽월의 아들을 가칭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다시 듣고 보아서 보고하라 하여 역시 회송한 뒤에 병사 조대곤(曹大坤)이 이미 치계하였고 신 역시 공형의 문서만을 낱낱이 들어 계달(啓達)하였습니다. 오래지 않아 또 듣건대, 의령의 신반현(新反縣)의 창곡(倉穀)을 초계에서 한 것같이 훔쳐 가졌고, 진주의 전세선(田稅船) 4척을 공공연하게 약탈해서 개인 창고에 옮겨 넣어가지고 근방의 못된 도배들에게 나눠 주어 은혜를 갚을 밑천으로 삼았습니다. 곽재우가 정말로 국가의 위급한 난국을 위해 의병을 이끌고 왜적을 공격하려는데 군량이 없었다면 마땅히 수령에게 고하거나 혹은 신이 있는 곳에 보고하여 법에 따라 받아 내다가 먹여야 했을 터인데, 그렇게 하지 않고서 겁탈을 자행하여 극악한 왜적이 하는 짓과 같은 점이 있으므로 신은 그가 패역(悖逆)스러운 마음을 가졌음을 뚜렷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왜적을 토벌하는 데 급했고 또 그가 마음을 고치고 선에 따르게 되기를 바라 각 관원에 통유(通諭)하여 그로 하여금 와서 나타나게 하고 서서히 그 끝장을 보고서 다시 치계할 요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곽재우가 병사(兵使)의 체포령을 신이 시킨 것이라고 잘못 듣고는 흉악하고 참혹한 말을 공공연히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이 있는 곳에서 발설하였고, 신이 보낸 영리(營吏)를 죽이려고까지 하였는데 김성일이 극력 말려서 해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미신(微臣)의 구구한 생각은 그를 진정시키는 데 있으므로 불쾌한 감정을 안색이나 언사에 나타내지 않고 도리어 그를 위해 장계를 올려 그의 군공을 보고하여 그를 가장(嘉獎)하시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분노와 원한이 가시지 않아 시험에 떨어진 유생들을 꼬여내어 도당을 매일같이 많이 모아 이름을 위병이라고 칭해서, 겉으로는 왜적을 토벌하는 흔적을 나타내고 속으로는 불측한 계략을 품고 있으니, 모르는 사람은 의병이라고 생각하지마는 아는 사람은 그가 틀림없이 예측하기 어려운 환난을 빛어낼 것이라고 근심하여, 자제들에게 엄명을 내려 그들 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 사람까지도 있었고 무도한 말을 지껄이는 것을 들은 사람도 많습니다. 신이 일찍 처치해 버리지 않은 것은 사세에 난처한 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에 와서는 먼저 소신 막하의 장병들에게 격문을 보내어 자객의 짓을 하게 강요하였고, 또 신의 죄를 늘어놓아 여러 읍에 통문을 내어 군사를 일으켜 난동을 꾸미라고 권고하였는데, 수령 중에 고을 사람을 그것에 따르지 못하게 하는 자가 있다면 수령까지도 함께 죽이겠다는 뜻도 역시 그 통문 중에 언급하였습니다. 또 소신이 있는 곳에 격문을 보내왔는데 그 흉악한 말은 입으로 말할 수 없으나, 기한을 굳게 작정하여서 성을 구축하는 데 백성들을 못살게 학대하고 절제(節制)에 방법을 어겨 왜적이 마구 들어오게 만들었다는 것이 그가 내세운 신의 죄입니다. 성을 구축한 일은 신이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적이 마구 들어오게 만든 것은 과연 신의 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태평 시절 백 년에 사람들이 전쟁을 알지 못하니, 군졸들이 소문만 듣고 무너져 달아나고, 변방의 장수들은 죽기가 아까워 퇴각한 것이 어찌 다 신의 절제가 올바른 방법을 어겼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겠습니까. 변란이 발생한 후 각 항의 절제의 득실(得失)은 다 어람(御覽)을 거쳤거니와, 한 도의 정병 용사 5, 6백 명을 뽑아서 거느리고 다니면서 동래가 함락되는데 먼저 밀양으로 달아나고 밀양이 함락되는데 또 가야로 도망갔으며, 왜적이 상주를 지나자 거창으로 퇴각해 숨었고 한 번 장병을 권면해 일으켜 그들로 하여금 왜적을 공격하게 하지 않았으므로 그 자신이 몸둘 곳을 몰라 근왕을 칭탁하여 도망쳐 운봉을 넘어갔다고 지적하면서 신의 죄라고 합니다. 당초 신은 순찰사의 임무를 겸하고 있지 않아 원래 거느리고 다니는 군관이 없었습니다. 계청하여 8인을 보탠 가운데 홍윤관(洪允寬)과 김경로(金敬老)는 조방장을 겸했기 때문에 이미 좌ㆍ우도로 각각 파견하였고 이응성(李應星)은 변란이 생기기 전에 당포(唐浦)의 조전장(助戰將)으로 보냈으며, 강만남(姜晩男)과 장처문(張處文)은 변란이 생긴 후에 즉시 동래 등지로 파견하여 그로 하여금 구원하는 일을 맡게 하였고 김해 부사 서예원(徐禮元)이 있는 곳에 전령하여 정병 각 30명씩을 뽑아서 주도록 하였으니, 그것은 신의 수하에는 본래 군사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 구전(口傳)으로 군관 6인과 안세희(安世熙) 등을 특명으로 치송(馳送)한 것을 추가한 것과 도내의 가솔군관(假率軍官) 약간 명 및 가덕 첨사(加德僉使) 최몽성(崔夢聖)ㆍ양산 군수(梁山郡守) 변몽룡(邊夢龍) 등을 다 합해도 단지 50인에도 차지 않았으니, 이른바 5, 6백명의 정병을 거느리고 다닌다고 한 것은 거짓으로 모함하는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지난 4월 15일 아침 신이 진주에서 왜적이 경내를 범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 갖추어 치계하고 오후에 출동하였는데, 도중에서 부산과 동래 두 진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밤낮없이 길을 재촉하여 16일 저녁에 밀양까지 달려갔으니, 이는 동래의 함락을 듣고 서둘러서 밀양으로 달려 들어간 것이지 동래로부터 퇴각해 달아난 것이 아닙니다. 거기서 성을 지키고서 변란을 기다리려고 하였으나, 본부(本府)의 성이 빗물에 태반이 무너졌는데 채 수축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본부의 군사는 부사 박진(朴晉)이 능사창군(能事槍軍) 세 부대와 아울러 남은 군사 전부를 거느리고 동래ㆍ양산 등지를 구원하러 달려갔고, 성을 지키는 나머지의 사람은 노약자 겨우 백여 명뿐이었습니다. 인근에 있던 청도ㆍ영산(靈山)ㆍ창녕(昌寧)의 군사들 역시 가야 할 곳으로 가버렸으므로, 합세하여 함께 지킬 도리가 전연 없었습니다. 신이 만약 그 성에서 포위된다면 동서로 책응할 수 있는 길이 없어지기 때문에, 왜적이 본부의 작원(鵲院)을 범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퇴각하여 영산을 지켰고 밀양을 구해내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또 초계로 퇴각하였으며, 왜적이 또 김해를 함락시키고 초계의 길로 향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합천으로 옮겨가서 주둔하였고 왜적이 성주를 범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고령으로 달려갔으며, 왜적이 금산(金山)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지례로 달려갔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가까이에 있으면서 책응하기 위한 계획이었으며, 각처에 무너져 흩어진 졸병 겨우 4백여 명을 얻어 방어사 조경(趙儆)과 조방장 양사준(梁士俊)에게 나눠주어 그들로 하여금 달려가 금산을 구원하게 하였습니다. 조경ㆍ양사준 등이 한 차례 금산에서 접전한 후부터 군졸들이 다 흩어져 이때부터 비록 각 관원을 독려하여 수령으로 하여금 흩어진 군졸을 수습하여 거느리고 오게 하였으나, 도망간 군졸들이 죄책을 받을까 겁을 내어 깊은 산에 들어가 있으면서 오직 자기가 있는 곳이 깊지 않을까 두려워할 뿐이었습니다. 다시 생원ㆍ진사 및 유식한 품관(品官)을 시켜 흩어진 군졸을 소집하게 하였으나 생원ㆍ진사 역시 깊은 산으로 들어가 버려 급작스레 군졸을 모을 길이 없어졌고 방어사는 이미 군졸이 없는 장수가 되어 버렸습니다. 왜적이 지례의 땅을 범하자 비로소 거창으로 왔는데 그때 왜적이 이미 의령ㆍ삼가(三嘉) 등지를 범했으므로 거창은 사실상 왜적이 침범한 복판에 있는 땅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곳에 주둔하고 있는 것은 위아래로 책응하기 위한 계책에서였고, 변란이 발생한 후에 가야까지는 가보지도 않았습니다. 도망했던 군졸 중에는 신이 직접 전투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자진해서 신이 있는 곳에 나타나는 자가 많았으나, 그들을 혹은 병사에게 보내고 혹은 방어사에게 보내고 하였더니 곧 도망가 버렸고 또 그렇게 나눠서 보냈기 때문에 역시 신이 있는 곳에도 자진해서 나타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병사ㆍ방어사 등은 단지 군관만을 거느리고 있었으나, 신은 그래도 힘을 내어 싸우지 않는다고 누차 글을 보내서 신칙(申飭)하고 군관을 잡아다가 엄하게 교훈을 하였습니다. 곽영(郭嶸)ㆍ이지시(李之詩) 등이 호남에서 정병을 거느리고 지례에 와서 2일 동안 주둔하고 있었는데, 조경 등이 한군데 같이 있으면서 곧 전투하러 나가지 않았으므로 신이 그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신의 군관인 손인갑(孫仁甲)ㆍ강만남(姜晩男)ㆍ장처문(張處文) 등에게 전령을 발급하여 양사준(梁士俊) 등을 형벌 집행차 그곳으로 보내니, 곽영 등이 금산으로 달려가 왜적 20여 급을 목베었습니다. 이른바 밀양이 패전하자 또 가야로 도망갔고 왜적이 상주를 지나자 거창으로 퇴각하여 숨어버리고 한 번도 장병을 권면하여 왜적을 공격하게 한 일이 없다고 한 것이 또 거짓으로 모함한 데 가깝지 않겠습니까. 왜적이 영로(嶺路)를 넘었는데 충청도의 여러 장병 역시 패해 왜적이 곧장 서울로 들어갈 앙화가 조석으로 박두하였으니, 이 일을 생각하면 울음 소리와 눈물이 다같이 나와 다른 일의 계획을 생각할 경황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타고남은 것들을 수습하여 호남 감사 이광(李洸)과 합세하여 근왕할 뜻으로 절차에 따라 장계로 올리고 군사 1천 3백여 명을 거느리고 전라도 운봉까지 갔습니다. 김성일(金誠一)을 통하여 비로소 어가가 서쪽으로 행행(行幸)하시어 서울이 이미 비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광 역시 전주로 군사를 철수해 버리고 정병을 더 뽑느라고 아직 출동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고군(孤軍)을 거느리고 혼자 가기에는 사세가 퍽 어렵고, 김성일이 강력하게 권하기를 군대를 돌리고 흩어진 군졸을 불러 모아 주부(州府)에 웅거하고 있는 왜적을 토멸하여 군현(郡縣)을 수복하고 의병을 규합하여 다시 근왕하는 군대를 일으키도록 하라고 하였는데, 군량이 단지 20일분뿐이어서 도중에 낭패할 근심이 생길까 두려워 잠시 본도를 돌아왔으니, 도망쳐 넘어가지 않은 것이 분명한데 도리어 근왕을 칭탁한 것으로 신의 죄를 삼는 것입니다. 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근왕한 것은 급히 서둘러 경내의 왜적을 소탕하고 구원하러 오라 하신 □ 교지를 삼가 따른 것인데, 왜적에게 영남을 버려 두고 운봉을 넘어 전라도에 들어가 근왕을 칭탁하였다고 죄를 삼는 것은 또한 사실과 다르지 않습니까. 부끄러움을 잊고 치욕을 참으며 얼굴을 들고 다시 와서 호령을 내고 지휘권을 발동하여 의병으로 하여금 풀어져 흩어지려는 마음을 가지게 하고 초유사로 하여금 이룩되어가는 공을 무너뜨리게 하였다는 것으로 신의 죄를 삼았습니다. 대저 정인홍(鄭仁弘)ㆍ김면(金沔) 등이 의병을 일으킬 모의를 할 때에는 열 가지 책략을 조목조목 진술해서 신과 왕복하며 상의하였고, 군량ㆍ군기(軍器)의 준비와 문서류의 처리는 다 신에게 문의해서 시행하였습니다. 합천의 의병장 손인갑은 바로 신이 정해서 보낸 사람이니, 그 처사의 온건함은 진실로 곽재우의 황당함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신이 본도로 돌아온 후 온갖 대소사를 일일이 문서로 보고하였고 다른 곳의 의병 역시 다들 그렇게 하였으니, 만약 의병이 일호(一毫)라도 흩어져 버리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그들이 그렇게 하려 들었겠습니까. 의병들의 일은 다 초유사 김성일과 의논해서 처치하였고 조금도 독자적으로 막은 일은 없었으며, 두 사람 사이(즉 김수와 김성일 사이를 말함)에 장병이 오가는 말은 믿거나 의심하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친절하게 만나서 약속하기까지 하였으니, 이른바 이룩되려 하는 공을 깨뜨렸다고 한 것 역시 거짓입니다. 하물며 현존하는 여러 장수들을 통솔하고 의병을 규합하여 군현을 수복해서 곤경에 빠진 나라를 구하라는 성지(聖旨)가 간절하셨으니, 이른바 의병이라는 것을 신이 어찌 호령하고 지휘할 수 없겠나이까. 그런데 저렇게 운운(云云)하니 그 마음은 알기 어렵지 않습니다. 가령 그가 전해지는 말로 인하여 오해해서 무지하게 망령되이 굴었다 하더라도 반역한 백성이 된 결과를 면치 못하고 그가 왜적을 토벌한 공이 끝내 그 죄를 보상하기 어렵거늘, 하물며 이노(李魯)ㆍ문덕수(文德粹) 등이 다 한 집안에서 연결된 사람으로 세 사람의 유감이 위세를 빙자하고 있습니다. 이노는 매일 곽재우 곁에 있으면서 모해를 가르치고 꾀느라 있는 힘을 다하고 흉계를 실행하기를 바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초유사 김성일이 이러한 해괴한 소식을 듣고는 누차 글을 보내서 화복(禍福)을 진술하여 극력 타일러 진정하기를 바랐고, 김면ㆍ정인홍 및 다른 의병 역시 다들 그를 책하였습니다. 그가 혹시 그의 악한 마음을 뉘우치는 수가 있고 또 종내 진정한다면 그것이 신의 본뜻이니, 그가 정말로 얼굴을 고쳐서 깨닫는다면 신이 어찌 감히 그를 처음같이 대우해서 그의 공을 완성하게 해주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앙화의 기틀이 이미 발동하였으니, 신의 생사는 아마도 열흘 안에 결정될까 염려하나이다. 신의 죄는 본래 조정에서 처치할 것이 있을 터인데 이렇게 진달하는 것은 스스로 변명하는 데 가까우니, 온당하지 못한 줄은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거짓으로 모함하는 정상을 죽기 전에 내내 생각하여 다 진술하면 지하에서 눈을 감을 수 있게 될까 합니다. 초유사 김성일에게 자초지종을 통문하여 그로 하여금 선처토록 하겠습니다만, 이미 변고를 당하고서도 다시 얼굴을 억지로 들고 그대로 머무르며 온 도에 호령할 수 없으니 속히 처치하여서 한 지방을 진정시키도록 하소서.
○ 초유사 김성일이 곽재우가 충열(忠烈)한 인물인데 모함을 당하는 것을 가슴 아파하여 그의 무죄함을 밝혀서 다음과 같이 치계하다.
의령 사람 곽재우가 군사를 일으켜 왜적을 토벌한 일은 이미 누차 계달하였습니다. 지금 의외의 변이 생각지 못한 데서 나와 적절히 처리할 길을 몰라 극히 근심하고 있나이다. 곽재우는 바로 고 통정대부 곽월(郭越)의 아들이고 남명(南溟) 조식(曺植)의 손녀 사위입니다. 중간에 무예를 배우다가 버리고 글을 읽었는데 그 사람됨이 질박하고 문채가 없으며, 부모 상중에 슬픔을 다해 이웃에서는 다들 그를 효자라고 불렀습니다. 왜적의 변란이 발생한 초기에 병사와 수사가 뒤이어 달아나고 왜적이 밀양을 범하게 되자, 감사 김수는 지휘하는 장수가 포위된 성 안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영산으로 퇴각해 돌아왔다가 곧 초계로 향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곽재우가 분연히 말하기를, “병사와 수사가 달아났는데도 형벌을 가하지 않고, 지금은 또 왜적이 좌도에 나왔는데 초계로 퇴각해 달아났으니, 감사 역시 목 베어야 한다.” 하고는, 검을 짚고 길에서 만나 죽이려 하기에 동향 사람들이 강력하게 말려 그만두었습니다. 그 후 우병사 조대곤(曹大坤) 및 방어사ㆍ조방장ㆍ수령 등이 하나같이 다 소문만 듣고 무너져 달아나 열흘지간에 왜적이 서울의 궁궐을 범하자, 곽재우는 팔뚝을 걷어올리며 강개하여 말하기를, “이 무리들이 왜적을 보호해서 서울에 들어가게 하여 임금에게 화를 끼쳤으니 다 목 베어야 한다.” 하면서 많은 사람이 있는 넓은 자리에서 늘 큰 소리로 그렇게 말하다가, 하루아침에 집안의 재물을 풀어서 장병들을 모집하였습니다. 그의 첩이 말하기를, “왜 쓸데없는 죽음을 할 계획을 합니까.” 하였는데, 곽재우가 크게 노하여 검을 뽑아 목 베이려 하였고, 처자의 의복을 전사(戰士)의 처자들에게 풀어 주었습니다. 이로 인해 가산을 탕진하여 굶주림을 면치 못하게 되자, 자기 처자를 매부인 허언심(許彦深)에게 맡기고, 모집한 장병들을 거느리고 왜적을 치겠다고 소리쳐 말했습니다. 고을 사람들이 이 소리를 듣고 다들 곽재우가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의령과 초계 두 읍이 패전하여 관아가 비어 있고 의령의 관고(官庫)는 이미 분탕되었으므로 곽재우의 군사는 가지고 있는 양곡이 없어서 초계 및 신반현(新反縣)의 관고에 있던 양곡을 풀어서 군사들을 먹였는데, 합천 군수 전현룡(田見龍)이 곽재우를 도적으로 몰아 병사에게 보고하였고 병사는 명을 내려 그를 체포하게 하였습니다. 곽재우의 군대에 응모했던 자들은 이 소식을 듣고 다들 흩어져 가 버릴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신이 갓 임지에 도착해서 즉시로 글을 보내서 불렀더니 곽재우 군대의 사기가 다시 진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계속 왜적을 쳤는데, 왜적이 많고 적음을 막론하고 곽재우는 반드시 먼저 나서서 달려가 돌격하기 때문에 그가 거느린 전사들은 용기가 백배하여 일당백(一當百)의 구실을 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곽재우는 전투할 때면 반드시 홍초첩리(紅綃帖裡)를 착용하고 당상관의 갓[堂上笠飾]을 갖추고는 홍의 천강장군(紅衣天降將軍)이라 자호하고, 말을 달려 적진을 스치며 오가는 것이 섬광같이 빨라서 왜적이 비록 일제히 철환(鐵丸)을 쏘아도 맞추지 못합니다. 혹은 말 위에서 북을 치며 천천히 가서 군사를 행진시키는 절도로 삼기도 하고, 혹은 사람을 시켜 피리를 불고 호드기를 불게 하여 겁내지 않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혹은 산 숲 속에 의병(疑兵)을 많이 만들어 놓고 호각을 불고 시끄럽게 북을 치기도 하고, 혹은 곳곳에 복병을 매설해서 사람이 없는 것같이 조용하게 있다가 왜적이 오면 곧 쏘아 죽이기도 합니다. 혹은 왜적의 배를 몰아 강 언덕에까지 가서 추격해 쏘기도 하고 하여 전투를 하지 않는 날이 없고, 전투를 하면 반드시 승리를 거두는데, 왜적의 수급(首級)을 베인 수효가 여러 장수들 중에서 가장 많고 왜적을 쏘아 죽인 것은 부지기수입니다. 왜적들은 그를 ‘홍의장군’ 이라 하고 감히 상륙하여 도적질을 하지 못하니, 의령ㆍ삼가 두 읍의 인민들은 다 생업에 안정하고 농사에 힘써 오곡의 풍성함이 평화시와 다름이 없습니다. 도내의 남은 백성들이 지금까지 보존된 것에는 곽재우의 공이 많습니다. 곽재우는 갑작스레 삼도의 군대가 수원에서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미친 사람같이 위험하고 망령된 말을 무수히 발설하였고, 순찰사가 글을 보내 그를 칭찬하고 장계를 올려 그의 공을 아뢰었어도 여전히 마음을 돌리지 않아 사람들 중에는 혹 그렇게 하면 앙화를 입게 될 것이라고 그를 경계하기도 하였으나, 곽재우는 반드시 검을 거머잡고 성을 내고는 하였습니다. 지금 곽재우는 갑작스레 두 차례나 순찰사의 영문(營門)에 격문을 보내 죄를 차례로 늘어놓고 토죄하겠다고 떠들어대며, 또 여러 읍의 의병장들에게 통문을 내어 토죄할 뜻을 말하였습니다. 신은 그 소식을 듣고 경악하여 모르는 결에 눈이 휘둥그래져 자리에서 떨어졌습니다. 순찰사가 신에게 공문을 보내서 의령의 관원을 시켜 곽재우를 잡아 가두라 하였으나, 신이 가만히 생각하기로는, 곽재우가 실제로 반역할 마음이 있다면 그가 한창 정병을 장악하고 있으니 한 역사(力士)에게 잡힐 상대가 아니고, 만약 반역할 마음이 없다면 글 한 장으로 족히 깨닫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곧 곽재우에게 친서를 내어 여러 가지로 비유를 들어 일깨워 주었고 김면 역시 글을 보내 경계하였던 바, 곽재우는 타이르는 말에 마음을 바꿔 순종하였고, 진주가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 구원하고자 이미 떠나갔다고 합니다. 곽재우가 일개 도민(道民)으로 도주(道主)를 범하려 하고 심지어 도주의 죄를 성토하여 격문을 보내고 하였으니, 비록 나라를 위해 분노하다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는 하지마는 형적이 난동을 부리는 백성이 된 바에는 곧 토죄해야 의당합니다. 그러나 곽재우는 온 나라가 함몰된 후에 고군(孤軍)으로 용기를 떨쳐 왜적을 격파해내어 도내의 남은 백성들이 그를 간성(干城)으로 의지하고 있는데, 지금 난언(亂言) 때문에 곧 주륙(誅戮)을 가한다면, 남은 성을 보존하고 왜적을 방어할 계책이 없어져 군사와 백성들은 그의 죄를 알지 못한 채 일시에 무너져 흩어질 것입니다. 신이 사태를 임시로나마 진정시킬 계획으로 재삼 경계하여 곽재우가 이미 순종하였는데 도순찰사에게 죄를 죄었으니 아마도 서로 용납하기 어려워 다른 변고를 야기시킬까 염려됩니다. 신이 듣기에는 을묘년 왜변 때 전라 감사 김주(金澍)가 영암군(靈嵒郡)으로부터 다른 읍으로 달아났던 바, 전 수원 부사 윤기(尹箕)가 그때 유생의 신분으로 포위된 성 안에서 검을 뽑아 그를 목 베려고 하였는데 김주는 성내지 않고 담소로 대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논자(論者)는 지금까지 윤기의 용기를 칭찬하고, 김주가 능히 용납하였던 것을 장하게 여긴다고 합니다. 이제 곽재우의 일은 비록 심히 광기를 띠고 망령되기는 하나 그의 마음은 사실 다른 생각은 없습니다. 감사 역시 김주가 대처한 것같이 하면 조용하고 아무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김수(金晬)에게 글을 보내 그로 하여금 선처하게 한다면 근심할 만한 변고는 생겨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김수가 곽재우를 반란한 역적으로 장계를 올려 아뢰었고 또 다른 사람이 사주하였다고 말하였으니, 과연 그렇게 죄를 씌운다면 비단 그가 그런 죄목에 불복할 뿐 아니라 온 도의 민심을 아마도 수습하기 어려울 것 같아 극히 가슴 아픕니다. 그가 충의로 분발한 정상과 용기를 떨쳐 왜적을 토벌한 공은 온 도에 널리 알려져 아동과 주졸(走卒)까지도 다 곽 장군을 칭송합니다. 또 듣건대 곽재우는 군사를 잘 쓰고 장수의 재질이 있다고 하니, 만약 광기 띠고 망령된 자에 대한 주벌을 좀 늦춘다면 반드시 좋은 성과가 있을 것입니다. 신이 불행하게도 임명을 받은 후에 두 번이나 이러한 변고를 당했습니다. 신이 4월 중에 호남으로 길을 잡아 운봉현에 도달했었는데 호남 사람이 순찰사 이광이 근왕하는 데 늑장을 부린다고 그를 토죄(討罪)하려 한다고 어떤 사람이 신에게 몰래 말해 왔습니다. 신은 대의(大義)를 가지고 의사를 꺾어 말리고, 곧 이광에게 통지하여 대비하게 하고자 김수에게 의논했더니 김수가 말하기를, “그 사람은 근왕하는 것이 느리다고 해서 토죄하려고 하는 것이니, 의사라고 할 수 있소. 만약 그 사람을 죽인다면 온 도의 민심이 더욱 격해질 것이니 이광이 있는 곳에 통지해서는 안 되오.” 하여, 신은 그의 말에 따라 그만두었습니다. 지금 곽재우의 일이 바로 이와 유사합니다. 김수가 만약 호남의 의(義)에 대처하던 태도로 곽재우에게 대처한다면 난처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신 및 김면이 곽재우를 경계한 글과 그의 답서를 함께 베껴서 올려 보냅니다. 이 계사(啓辭)에서 넉넉히 공의 충후하고 깨끗한 마음을 알 수 있다.
○ 흉악한 왜적이 지례(知禮)에서부터 호남을 범하다. 적인(狄人) 5, 6명이 청학장군(靑鶴將軍)ㆍ백학장군(白鶴將軍)을 자칭하고 매복하여 왜적들을 사살하니 왜적이 좀 물러났다. 《경상순영록》에 나온다. 조금 있다가 대부대의 왜적이 무주현(茂朱縣)으로 마구 들어와 불태워 버리고 도적질을 하였다. 그때 본도 방어사 곽영(郭嶸)은 금산(錦山)에 진을 치고 조방장 이유의(李由儀)는 팔량(八良)에 진을 쳤으며, 이계정(李繼鄭)은 육십현(六十峴)에 진을 치고, 장의현(張義賢)은 부항(釜項)에 진을 쳤으며, 김종례(金宗禮)는 동을거지(冬乙巨旨)에 진을 쳐서 수비하며 왜적의 변란을 대기하였다. 적병이 또 옥천(沃川)으로부터 금산으로 향하자 방어사도 군(郡)의 성 안으로 퇴각해 들어가서 감사에게 구원을 청하니, 이광(李洸)이 군사 8백을 내어 장수를 정해서 금산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23일. 성주(星州)의 왜적 7백여 명이 양정(羊亭)으로 나와 진을 치고 가야산을 탐색하려 하였고, 또 한 떼는 지례(知禮)로부터 무주(茂朱)로 향하면서 순영(順英) 등 마을을 분탕질하다. 순영은 무주의 역 이름이다. 또 고성(固城)의 왜적 1천여 명이 고성의 성 밖에 나와서 주둔하였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서북을 잠식해 들어가는 왜적이 지나온 여러 도에 연속하여 진지를 마련해서 후면을 공격 당하는 데 대비하다.
○ 적병이 금산(錦山)으로 들어가다. 곽영(郭嶸)과 김종례(金宗禮)는 퇴각하여 고산(高山)에 숨었다. 왜적이 무주와 금산을 나누어서 점거하고 용담(龍潭)ㆍ진안(鎭安) 등지를 분탕질하였다. 어떤 사람이 왜적 속에서 나와 말하기를, “이 왜적은 바로 전날 창원(昌原)에서 전라 감사를 자칭하여 선문(先文)을 낸 자이다. 처음에는 이들이 곧장 전주(全州)로 향하려 하였으나 홍의장군에게 저지당하자, 우회해서 성주와 지례를 경유하여 이곳에 온 것이다. 운운.” 하였다. 본도 여러 읍에서 남은 장정을 찾아 모아가지고 길을 나누어 방어했는데, 왜적이 금산으로 막 들어오자 그때의 군수 권종(權悰)이 병으로 죽었다.
○ 이 광(李洸)은 전주에서 본주(本州) 사람 문관(文官) 이정란(李廷鸞)을 주의 수성장(守城將)으로 하여 이웃 읍의 군사를 모아 계엄을 펴고 왜적의 변란에 대비하게 하였고, 또 남원(南原)에 전령하여 군사를 모아 성을 지키게 하였다. 그때 본부(本府)의 선비들이 흩어진 군졸을 모집하여 향병(鄕兵)이라 칭하고 전 목사 정염(丁焰)을 장수로 추대하였다.
○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이 전주로부터 여산(礪山)으로 향발하여 비밀리 장병들과 의논하기를, “금산과 무주의 왜적이 이미 용진(龍鎭)으로 향했으니 이것은 틀림없이 전주와 남원에 뜻이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대군이 본진(本鎭)을 다 떠나가야 할 것이니 노약자만을 남겨서 수비시킬 것이다. 우리 군대가 진산(珍山)으로부터 그 자들이 생각하지 않은 곳으로 나가 나머지 무리들을 다 죽여버리고 뒤쫓아 추격하면, 그 왜적들은 전진해도 거점을 얻지 못하고 후퇴해도 돌아갈 곳이 없어 중도에서 낭패하여 스스로 황산(荒山)의 패전을 초래할 것이다.” 하고, 군사를 이끌고 은진(恩津)의 연산(連山)을 향해서 떠났다. 같은 진의 군량색(軍糧色)을 고목(告目 천한 사람이 높은 이에게 올리는 글)하기를, “가지고 있는 군량은 여산군(礪山郡)에서 수납(輸納)하겠나이다.” 하였다. 색리(色吏)는 남원의 색리이고 군량은 남원의 군량이다. 대체로 의병을 돕는 일은 각 읍이 다 그러했다. 대장의 행차가 22일 전주를 떠나 23일 여산에 머물렀다. 당일 도부(到付)한 금산의 전통(傳通)에, 옥천(沃川)의 양산현(陽山縣)을 분탕질한 왜적이 본군을 지향해 와 진을 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24일 동군(同郡)의 전통에는, 10리 거리에 진을 칠 것이라 했고, 서울의 왜적은 신립(申砬)과 윤두수(尹斗壽)가 각각 좌우 대장이 되어 1천여 명을 잡았다는 것이었으며, 여산군수가 구전(口傳)한 내용은 의병이 은진ㆍ연산ㆍ금산으로 지양한 것과 우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의 행차와 병사(兵使)가 일시에 직산(稷山)으로부터 진위(振威)로 향한 것이었다.
○ 조방장 이유의(李由義)가 남원 판관 노종령(盧從岭) 등을 거느리고 팔량(八良)으로부터 금산의 송현(松峴)으로 진을 옮겨서, 왜적이 남쪽으로 부딪쳐 내려올 우려에 대비하였다.
○ 합천 의병장 손인갑(孫仁甲)은 초계(草溪)의 마진(馬津)에서 큰 전투를 하여 강 연안의 왜적을 깡그리 죽이고, 손인갑은 물에 빠져 죽었다. 이에 앞서 손인갑은 강 연안의 왜적이 물을 따라 내려간다는 초계에서의 치보(馳報)를 듣고, 손인갑이 밤중에 군사를 전진시켰으나 초계의 의병이 이미 강 연안의 왜적을 토멸해 버렸으므로 드디어 군사를 끌고 돌아왔다. 그런데 안장을 채 내려 놓기도 전에 초계의 보고가 오기를, 강 연안의 왜적이 또 많이 닥쳐왔다고 하였다. 손인갑은 시간을 다퉈 달려갔고 또 정인홍에게 보고하였다. 정인홍은 여명에 길을 떠났다. 왜적의 배 12척이 약탈한 물건을 무겁게 싣고 초계를 지나가는데 초계와 고령의 군대는 고립되고 약해 감히 잡지 못해서 손인갑이 그들과 합세하여 왜적과 크게 싸워 깡그리 섬멸하였다. 떠가는 배가 강을 덮었는데 그중 배 한 척이 노를 급히 저으며 도망갔으나 모래 여울의 물이 얕아서 급히 배질할 수 없었다. 손인갑은 승전한 기세를 타고 물에 들어가서 추격했는데 모래턱이 부드러워 사람과 말이 함께 물에 빠졌다. 여러 군사들이 미처 건져내지 못했으므로, 온 전진(戰津)의 군사들이 참담하고 사기가 저상하여 수급(首級)을 벨 생각도 없어지고 크게 통곡하며 돌아왔다. 대체로 이때에는 군사들이 전투에 익숙하지 않아서 주장(主將)이 몸소 사병에 앞서 나가지 않으면 적에게 나가려 들지 않았다. 그래서 손인갑은 전투할 때마다 먼저 자신이 적의 칼날과 맞섰기에, 한 좋은 장수를 잃기에까지 이르른 것이다. 사병들 치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고, 촌락 사람들이 그 소식을 듣고 역시 모두 슬프게 울었다. 정인홍은 김준민(金俊民)을 감사에 □계청하여 손인갑이 거느리던 군대의 가장(假將)으로 삼았다. 김준민은 처음에 거제(巨濟)의 현령으로 있었는데 왜적의 변란이 갓 일어나자 성지(城池)를 수선해 가지고 사수할 계획을 세웠다. 김수(金晬)가 근왕을 칭탁하여 군관을 데리고 다니다가 용인(龍仁)에서 무너져 돌아온 후에도 여전히 감사의 휘하에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정인홍이 권양(權瀁)을 보내 김준민으로 손인갑이 맡았던 자리를 대신 맡도록 해달라고 청해 김수가 허락하고 그를 보냈다. 용감할 수 있고 겁낼 수 있고 하는 것은 병가(兵家)의 기략(奇略)이다. 물에 들어가서 죽은 것은 혹 황하수를 맨몸으로 건너려는 아둔한 짓이라는 나무람을 받을지는 모르지만 목숨을 탐내어 나라를 잊는 도배와 비한다면 이 손인갑은 살기를 잊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인물인 것이다. 슬프도다.
○ 금산(錦山)ㆍ무주(茂朱)에 있는 왜적의 기세가 매우 거세어서 내지(內地)로 쳐들어오므로 백성들이 공포심에 싸여 있었다. 이때에 정염(丁焰)이 남원(南原)의 향병장(鄕兵將)이 되어 남정(南亭)에 머물고 있었는데 부사 윤안성(尹安性)이 정염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나의 추물(醜物 첩(妾)을 말한 것임)이 일가집 사람으로 언어를 좀 알아 들을 만한데, 오늘 아침에 전주(全州)에 윤씨의 첩은 전주 기생이다. 와서 왜적의 동향과 그 밖의 소식을 전하였다. 그 내용에, 방어사(防禦使)와 조방장(助防將)이 금산(錦山)의 왜적과 마주치게 되었는데, 관군(官軍)은 적의 떼가 얼마 되지 않는 것을 보고 덮쳐 공격하려 하였다. 이윽고 왜의 복병이 한꺼번에 일어났는데 관군은 수가 많지 않아서 감히 싸워 보지도 못하고 고산(高山)으로 후퇴하여 전주 감사(全州監司)에게 구원을 청하자, 8백 명을 뽑아 보냈다 하니, 길가에서 패해 무너졌다는 것은 이를 두고 이른 말이다. 서울에 있는 적은 크게 패하여 서울 안에는 남은 적이 없기 때문에 병사(兵使)가 군사를 돌이켜 방금 고산으로 향하는 중이라 하고 후군(後軍)인 의병도 역시 고산으로 향한다 하며, 왜적이 옥천(沃川) 경계에 주둔하고 감히 금산(錦山) 지대를 들어오지 못한다 하니 이것으로써 적의 수효가 얼마 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컨대 각 진영에 선포하여 적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지 말도록 하라. 신립(申砬)ㆍ윤두수(尹斗壽) 제군이 적의 무리를 모조리 무찔렀다고 하니 하느님이 우리 종묘 사직을 도와 주려는 것이라 매우 기쁘다.
○ 전라도 의병장 행 부호군(行副護軍) 고경명(高敬命)이 본도 도순찰사(都巡察使) 절하(節下 순찰사를 말한 것)에 다음과 같이 격문을 발송하다.
섬 오랑캐가 난리를 일으켜 임금의 행차가 멀리 순행길을 떠나시니 중외(中外)에서 믿는 것은 오직 호남(湖南)밖에 없는데, 겨우 군사를 일으키라는 어명(御命)을 받들자 갑자기 근왕(勤王)하는 군대를 해산하라고 하니 절하의 마음 속에는 반드시 어떤 계획이 있어서 그렇겠지만 절하의 실지 행동에 있어서는 납득될 만한 것이 없지 않습니까. 조정의 명령은 비록 막혀 끊어졌다 하더라도 한 도내의 물의도 역시 두려운 것이외다. 지난번 용인(龍仁)에서 무너진 것은 실로 선봉장이 패전한 때문이었으나 절하가 주장(主將)이 되어 있는 이상 그 책임을 모면하기 어려울 것이니, 절하는 오늘의 입장에 있어 어떻게 계획하시렵니까? 행여 지나간 실패를 잘 수습하여 주상전하의 남쪽에 대한 근심을 덜어드림으로써 기왕의 허물이 씻겨지고 새로운 업적이 역사에 찬란하게 된다면, 비단 성조(聖朝)에서 난리를 다스리고 정상으로 돌려놓는 기초일 뿐만 아니라 절하에 있어서도 역시 화가 복이 되는 날일 것이외다. 본도 의병이 당초 북도로 향해서 난리를 평정시키고 전하의 행차를 모셔 오려고 했었는데, 길에서 들으니 윤 정승[尹左相]이 서ㆍ북의 정병을 거느리고 서울에 머물러 있는 적을 토벌한다 한즉, 북방의 일은 염려가 없음이 거의 보증됩니다. 그러나 호서(湖西)의 적이 금산(錦山)으로 들어오는데, 방어할 군사가 아직도 용계(龍溪)에 주둔하고 한 사람도 다짐하며 앞서 나오는 자가 없으니, 절하가 이 시기에 있어 진정 병력을 널리 모집하여 형세를 크게 벌리지 않으시면 가엾은 우리 호남 한 지방 백성들은 모두 적의 칼날에 목숨을 빼앗기고 말 것이외다. 그렇게 되면 절하는 위로 국가를 회복하지 못하고 아래로 강회(江淮)를 보장(保障)하지 못하고 있다가, 하루아침에 적이 다 쓰러지고 전하께서 돌아오시어 교서(敎書) 한 장을 내려 사방에 포고한다면, 비단 호남 사람들만 천지간에 용납되지 못할 뿐 아니요 절하 역시 무엇으로써 충성을 바치고 허물을 보상하겠습니까. 절하가 혹 저 왜적이 워낙 사나워서 맞붙어 싸우기 어렵다고 군사를 나누어 험한 곳을 지켜 쳐들어오는 적을 막고 때로 기병(奇兵)을 내어 그 날카로운 기세를 꺾어 버리면, 적의 성집이 경망하고 조급한지라 지구전은 계속하지 못할 것이니 열흘이 넘지 않아서 큰 공을 이룰 수 있는 것이외다. 다 같이 왕의 신하가 되어 나랏일을 함께 하는지라, 피차의 사이가 있을 수 없고 형세를 서로 의지하는 처지니, 각자 소견을 자세히 참작해야 할 것인즉 부디 계획을 잘하여 후회를 끼침이 없기 바랍니다. 《정기록(正氣錄)》에 나온다. 고종후(高從厚)가 지었다.
임진년 6월 일 만력(萬曆 명(明) 나라 신종(神宗)의 연호) 20년 전라도 의병대장 행 부호군 고경명(高敬命)은 해남(海南)ㆍ강진(康津) 두 고을의 사군(使君)으로 있는 의병장 휘하에 다음과 같은 격문을 보냈다.
나 고경명은 전일 추성(秋城 담양(潭陽))에서 의거(義擧)하던 당시에 가슴속의 끓는 피를 편지 한 장에 쏟아서 각 읍 수령에게 두루 고하여 함께 어려운 고비를 극복해 나가자고 호소했으나, 정성이 사람을 감동하지 못해서 아무리 외쳐도 반응이 없으니 초야의 인생이 다만 빈주먹만 두들길 뿐이어서 무기와 군량의 뒷받침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던 참이었습니다. 이윽고 들은즉 격문을 받아 보고서 정병을 내어 응원해 준 사람은 호남 50주(州) 중에 유독 두 고을의 원님이 있어, 그 소문이 미치는 곳마다 사기가 백배나 더함과 동시에 정의의 군사를 기다려서 적의 무리를 쓸어버리려 했던 것이외다. 그런데 뜻밖에 병사(兵使)가 격문을 띄워 부르고 있으니 앞으로의 거취가 자유스럽지 못할까 깊이 염려됩니다. 지금 금산의 왜적이 청진(淸鎭)의 왜적과 형세가 서로 연접되어 나아가고 물러가는 것이 자유로우므로, 한 부대는 이미 용담(龍潭)을 함락시키고 또 한 부대는 무주(茂朱)를 함락시켜 세 군데 소굴을 만들고서 완산(完山 전주(全州))을 침범하기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완산 고을은 비단 호남 지방의 근본이 될 뿐만 아니라 진전(眞殿)을 모신 곳으로서 실로 우리 성조(聖朝)의 발상지이므로, 나 고경명은 의기(義旗)를 그쪽으로 돌이켜 적의 칼날을 방어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본즉 저 왜적이 본래 잔꾀가 비상한데다 진산(珍山)의 병력은 극히 약하니, 만약 적으로 하여금 진산ㆍ연산(連山) 같은 험하고 좁은 곳을 넘어서서 은진(恩津)ㆍ여산(礪山) 같은 평탄한 길로 돌진하게 한다면 어찌 다만 호남만 앞뒤로 공격을 받을 뿐이겠습니까. 금강(錦江)의 군사마저 장차 동요가 될 것이외다. 그래서 호서(湖西)가 불통되고 적의 세력이 치성하면 호남의 군량을 어떻게 수원(水原)에 수송할 것이며, 이때 본도 병사 최원(崔遠)ㆍ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이 군사를 거느리고 수원에 주둔하였다. 조정의 소식을 어떻게 사방에 전달하겠습니까. 이에 군사를 옮겨 진산으로 들어가서 금산(錦山)에 있는 적의 후방을 공격하여 용담ㆍ무주의 적으로 하여금 뒤를 돌아보는 염려를 버리지 못하게 하고, 서서히 두 고을 군사를 기다려서 곧장 적의 굴혈을 엄습하여 흉악한 무리들로 하여금 나아가나 물러가나 근거가 없게 만들어 놓으면, 국가를 보전하는 상책이 될 뿐만 아니라 이 역시 완산부(完山府)를 구원하는 하나의 좋은 계책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공들이 지금 만약 예전 상도만을 고수하고 변통할 줄을 모른다면 나 고경명 역시 군사는 외롭고 힘은 적어서 선뜻 움직이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호남의 적도 쉽게 전제(剪除)할 수 없고 수원의 아군이 혹시라도 또 시일만 허송하게 될 것입니다. 병사가 거느린 군사는 모두 호남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만약 적의 무리가 오늘에 아무 지대를 통과하고 내일에 아무 현(縣)에 침입한다는 소문을 듣는다면, 식량은 공급되지 않고 군의 정세는 흉흉할 것이니, 이야말로 목전에 닥친 위급이라 비록 지혜있는 자가 아니라도 짐작하고 남음이 있을 것이외다. 그렇다면 두 원님이 합세해서 금산의 적을 치는 것은 다만 호남을 보장하는 계책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병사를 위하여 서로 응원하는 꾀도 될 것입니다. 옛 사람의 말에, “장수가 밖에 있어서는 경우에 따라 임금의 명령도 받지 않을 수 있다.” 하였으니, 이는 일의 기미에 임하여 융통성이 있는 것을 귀하게 여김이요, 마치 교주고슬(膠柱鼓瑟 변통할 줄 모른다는 뜻)하듯이 외곬으로 나가는 것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 병사가 멀리 천리 밖에 있어 이 도리를 알지 못하고 지극히 위급한 처지에 빠졌으니, 어찌 가까운 데 있는 적을 버리고 후회를 남겨서야 되겠습니까. 사사로운 생각으로는, 두 원님이 위로 수원의 기한에도 미치지 못하고 아래로 금산의 약속도 돌아보지 않는다면 뒷날의 공론이, “적의 칼날을 도피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하지 않겠습니까. 원컨대 스스로 계획을 잘해서 남의 비난을 듣지 말도록 하시오. 《정기록(正氣錄)》에 나온다. 고종후(高從厚)가 지었다.
○ 재상(宰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올리다.
양산(梁山)ㆍ밀양(密陽)이 연달아 함락된 뒤로 적의 군사가 승세를 타서 이미 거침없이 몰고 갈 기세가 있다는 것을 듣고, 식자 계급에서는 적들이 우리의 허점을 찔러 곧장 올라갈 것을 근심하여 간담이 써늘하지 않은 자가 없습니다. 순찰사(巡察使)가 나주(羅州)에 있을 적에 사람들이 모두 하루빨리 군사를 이끌고 서울로 들어가서 응원해 줄 것을 바랐고 광주 목사(光州牧使) 정윤우(丁允祐) 역시 순찰사를 보러 가서 빨리 근왕(勤王) 길에 나가야 한다는 것을 역설했으나, 순찰사가 막연히 들으며 염려하지 아니하니 정 공이 민망히 여기며 그저 물러 나오고 온 도내 사람들은 한갓 두 주먹만 움켜쥐며 통분해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징병하라는 교지가 내리자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모르고 온 도내 군사를 모두 일으켜 일제히 여산(礪山)으로 치닫게 하였는데, 집합 일자는 너무 촉박하고 겸하여 장맛비가 열흘에 걸쳐 내렸습니다. 그러자 각 읍의 수령들은 기약에 뒤졌다는 꾸지람들을 받을까 두려워서 길에서 마구 몰아쳐 밤낮 없이 달리는지라 군사들은 배고픔과 목마름이 자심하여 스스로 길가에서 목을 매어 죽는 자까지도 있었으니, 그 괴로운 형상이 이처럼 심했습니다. 그러나 감히 원망하고 배반하지 않는 것은 모두 근왕(勤王)의 일이 시급하여 정의로써 군사를 일으킨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순찰사가 공주(公州)에 당도하여, 서울이 지켜지지 못하고 임금께서 서도(西道)로 떠나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 한 군관(軍官)을 시켜서 손에 전령패(傳令牌)를 가지고 말을 달려와 외치게 하기를, “진을 파하라. 진을 파하라.” 하니, 모든 군사가 아연하지 않는 자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두 수령이 공주로 달려가서 순찰사를 보고 진을 파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말했으나, 순찰사가 듣지 않았습니다. 이에 모든 군사가 한꺼번에 모두 흩어져 함부로 욕하고 길에 가득히 들어차서 모두 하는 말이, “순찰사는 근왕에 전력할 뜻이 없으면서 다만 우리들만 괴롭힌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로부터 군중들이 모두 짜증을 내며 비로소 해산할 생각이 나자 마치 물이 내리 쏟아지듯 하여 억제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 후 두 번째 군사를 징집하게 되자 여러 고을의 군사 중에 도중에서 무너져 흩어진 자가 서로 잇달았으며, 비록 더러 불러서 집합시키기도 했으나 막 집합시켜 놓으면 바로 무너져 그렇게 하기를 두 번 세 번 가도 그치지 않았습니다. 광주로 말하면 박광옥(朴光玉) 군과 더불어 흩어져 도망간 군사를 분주히 개유(開諭)하고 수습해서 천자(賤子)인 고종후(高從厚)와 고인후(高因厚)로 하여금 나누어 거느리고 수원(水原)의 전소(戰所)에 가서 광주 목사에게 교부(交付)하게 하였습니다. 이때에 순찰사는 도중에서 머뭇거리며 모든 군사를 돌려 진위(振威)에 당도하여 4, 5일 동안 유숙하노라니 사람은 모두 비를 맞고 서 있었습니다. 용인(龍仁) 싸움에 이르러 왜적의 군사는 수도 적고 형세도 궁해서 산마루 험한 곳에 진을 치고 울을 막아 스스로 방위하고 있는데, 충청도 순찰사ㆍ절도사의 병력과 전라도 순찰사ㆍ방어사의 병력이 수효가 십만으로 헤일 만하니 그런 조그마한 무리쯤이야 족히 깃발 한 번 휘두르면 박멸할 수 있었을 것이어늘, 불행히도 백광언(白光彦) 등 여러 사람들이 적을 경솔히 여겨 먼저 올라가다가 한꺼번에 진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대부대가 아직 건전한 이상 승리를 거두는 것이 어렵지 않았는데, 갑자기 3명의 왜적이 앞장서서 곧장 전진하는 것을 보고서 충청 절도(忠淸節度)의 군사가 먼저 무너지고 여러 진이 계속 무너져 화약ㆍ총통(銃筒)ㆍ전마(戰馬)를 모두 적에게 버려두었습니다. 나 고경명이 몸소 전사(戰士) 4, 5명을 만나본 바 매우 자상히 말하는데 마치 약속이나 한 것같이 모두 동일하며, 장성 현감(長城縣監) 백수종(白守宗)이 하는 말도 역시 전사들과 서로 같았으니, 고금 천하에 싸우다 패한 자가 퍽 많지만 이와 같이 통분하고 애석한 일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순찰사는 겨우 몸만 빠져 나와서 충청도 내포(內浦)를 경유하여 임피(臨陂)에 당도하자 곧 도내 열읍에 공문을 띄워 정병을 징발하여 바닷길로 임진(臨津)에 도달하려고 하니,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소란하여 선뜻 명령에 응하지 아니하니 비록 억압하여 몰아댄다 해도 마침내는 반드시 전과 같이 분산될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순찰사가 지금 태인(泰仁)에 있으면서 의논할 일이 있다고 칭탁하고 격문(檄文)을 띄워 좌수사(左水使) 이순신(李舜臣)과 무주(茂朱)의 조방장(助防將) 이계정(李繼鄭)을 불러 모두 태인에 모이게 하였는데, 태인은 좌수영(左水營)과의 거리나 무주와의 길이 모두 너무 머니, 오늘날 적병이 국내에 밀어닥쳐 변란이 숨 한 번 쉴 만큼 짧은 시간에 달려 있는데 순찰사가 의논한다는 일이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나 고경명이 이때 전주에 있으면서 이계정이 달려 가는 것을 보고 또 각관(各官)에서 전달한 보고를 얻어 본즉, 왜적이 무주의 속현(屬縣)에 들어와 민가를 불태웠고 적의 배 두 척이 또 순천(順天)에 침범하여 온 경내가 계엄 속에 들었으니, 대개 왜적이 우리나라 사람을 이용하여 간첩으로 삼기 때문에 빈틈을 타서 몰래 들어온 것입니다. 순찰사의 전후 처사를 더듬어 보면, 실로 그 의도가 무엇을 하려고 함인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도사(都事) 최철견(崔鐵堅)ㆍ부윤(府尹) 권수(權燧)를 만나본즉, 이때 최철견은 전라 도사가 되었고, 권수는 전주 부윤이 되었다. 역시 순찰사의 의도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하니 괴이한 일이요, 통분할 일입니다. 당초 병사(兵使) 최공(崔公)이 의병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기쁨을 얼굴에 나타내며, 도울 수 있는 일이면 힘을 다했습니다. 그때 순찰사가 다른 지방으로 나가 있었기 때문에 병사는 순찰사에게 공문을 보내 각 고을의 남은 무기를 의병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청하였습니다. 그래서 의병을 일으킨 후로 약간의 무기를 지나는 여러 고을에서 얻었으나 대개는 묵고 헐어서 쓰지 못할 물건들이며 그나마 수효도 많지 않아서 일행 중에 군관(軍官)까지도 다 갖지 못했는데, 하물며 싸우는 마당에 쓸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 듣자니 순찰사가 용인에서 패전한 후부터는 매양 본도의 인심이 고약하다고 트집을 잡으며 오직 도망친 군사들에게만 허물을 돌리어 뒷날 자신을 합리화할 계책을 하고 있다가, 마침내 의병이 한 번 일어나서 모집에 응하는 자가 구름같이 모이는 것을 보고서 순찰사가 마음이 몹시 달갑지 않아서, “군고(軍庫)를 함부로 열었다.” 하고 명목을 잡는데 까지 이르고 있으니, 참으로 괴이한 일이요 두려운 일입니다. 무릇 수령 가운데 의거에 따르기를 원하는 이도 역시 많으나 순찰사에게 간섭을 받아[掣肘] 끝내 의병 노릇을 할 수 없게 되고 수령들도 또한 순찰사의 행동을 본받은 자가 있어 다방면으로 저해하여 의거에 참여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좌절시켜서 심지어 의병 모집에 응한 자의 처자를 잡아다 가두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래도 다시 종군을 하고 떠나려고 하지 않으니 진실로 슬픈 일입니다. 요즘에 각 도의 근왕군(勤王軍)은 한 번도 왜적과 더불어 싸운 일이 없이 양경(兩京)을 잿더미로 만들었으며, 마침내는 적이 무서워서 임금을 버리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취화(翠華 임금의 수례)가 길을 떠나 멀리 함경도[咸關]로 순행하고 계시니 구구히 기대할 바는 오직 의병을 한 번 일으키는 데 있거늘, 순찰사의 뜻이 이와 같고 조정은 천리 밖에 떨어져 있어 대궐 문앞에 나아가 호소할 길이 없은즉, 원한을 품고 스스로 불칙한 죄망에 걸려 죽을까 심히 두렵습니다. 믿는 바는 먼 데나 가까운 데나 모두 소문을 듣고 호응하여 힘세고 날랜 자들이 발이 부르트도록 쉬지 않고 모여들고 있으니, 오직 벌판에 나아가 눈물을 뿌리며 이 심정을 밝힐 것을 생각할 따름입니다.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는 것은 고금의 정론이니, 성공하고 못할 것은 계산할 바가 아닙니다. 오직 바라건대 상공(相公)은 비생(鄙生)의 일편단심을 통찰하시어 곡단(曲端)과 같이 원통하게 죽지 않도록 하여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태헌(苔軒)의 수초(手草)로 《정기록(正氣錄)》에 나온다.
○ 전주 전 만호(萬戶) 황박(黃璞)이 자원한 군사 2백여 명을 모아 웅현(熊峴)에 복병을 설치하니, 웅현은 바로 전주와 진안(鎭安)의 경계이다. 이때에 이광(李洸)이 나주 판관(羅州判官) 이복남(李福男)과 김제 군수(金堤郡守) 정감(鄭湛) 등을 복병장으로 삼아 웅현을 파수하게 했는데 황박이 가서 조력한 것이다.
○ 경상 초유사(慶尙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이 전 현풍 군수(玄風郡守) 엄홍(嚴泓)을 본군의 병장으로 삼고, 곽찬(郭趲)을 소모관(召募官)으로 삼았다. 이때에 현풍 등지의 유수한 집안들은 모두 낙동강(洛東江)을 건너 가야산(伽倻山)이나 덕유산(德裕山) 등지로 들어갔는데, 김성일이 영지(令旨)를 전달하여 엄홍 등을 불러 본임(本任)으로 정하고, 또 격문을 띄워 이민(吏民)을 다음과 같이 타일렀다.
나라의 운수가 극히 비색하여 칠치(漆齒 왜적을 이름)가 몰아 들어오니 임금은 파천(播遷) 길을 떠나시고 종묘 사직은 먼지를 무릅쓰게 되었다. 슬프다! 사람이면 다 양심이 있는 법이니, 무릇 이 땅에 살며 밥을 먹는 자는 누구나 의리와 충성을 다하여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자 하지 않겠는가. 생각건대 영남(嶺南)은 본시 추로(鄒魯 문명의 나라를 이름)의 고장이라 일컬어져 왔거니와 현풍 한 고을은 더욱이 선비의 집단지가 되어 있으니, 그 사이에 절의를 위해 죽은 이를 어찌 이루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지금 적이 성중을 점령하고 사방으로 나와 불을 지르고 있으니 그 해를 입는 자는 부모가 아니면 곧 처자다. 위로 군부(君父)의 원수와는 한 하늘 밑에 함께 살 수 없는 것이요, 아래로 형제의 원수와는 더불어 하루도 같이 할 수 없는 것이니, 나는 알건대, 산중에 엎드려 있는 자는 창을 베고 자며 와신상담(臥薪嘗膽)하는 뜻이 일찍이 잠시도 마음에 잊혀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아직 한 사람도 의병을 일으켜 분개하며 적을 토벌한다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워낙 극성스러운 적의 무리가 가득 몰려들어 우리 백성이 싸워 볼 만한 여지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충의의 선비는 죽고 사는 것으로 지조를 바꾸지 않고, 용맹 있는 사람은 강하고 약한 것으로 기운이 꺾이지 않는 법이니, 원컨대 긴밀히 서로 연락하여 의병을 일으켜서 그 힘이 능히 적을 막을 수 있다면, 고을에 있으면서 충갑(冲甲)의 군사처럼 떨쳐도 좋고, 형세가 능히 자립할 수 없거들랑 군사를 이끌고 병사의 진영으로 가도 좋다. 혹시 당면한 직책을 버릴 수 없다고 여긴다면 강을 건너 의거에 참여해도 무엇이 불가할 것 있겠느냐. 지난 번에 합천(陜川)과 의령(宜寧)에서 정인홍(鄭仁弘)의 경우와 고령(高靈)에서 좌랑(佐郞) 김면(金沔)의 경우에 충성을 떨치고 의기를 다하여 한 번 외치자 각 고을이 호응하였고, 요즘 와서는 군사의 성세가 크게 떨치니 나라를 회복할 가망이 거의 확실하다. 본군의 백성들이 왜놈의 위력에 겁내지 말고 더욱 의열(義烈)의 기운을 가다듬어 한결같이 임금의 원수를 갚겠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충의로운 분기가 격동하여 용기가 백 배나 솟을 것이니 저 왜적이 어찌 감히 우리를 당적하겠는가. 하물며 지금 왜적이 얼마 안 되는 군사를 끌고 깊이 들어와서 그 흉악한 기운이 이미 개성(開城)의 청석(靑石)에서 꺾이었고 서경(西京 평양)의 대동강에 침몰되었으며, 철령(鐵嶺)을 넘어 또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에게 빼앗기고 명(明) 나라 병사 5만 명이 이미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조(祖)ㆍ곽(郭)ㆍ왕(王) 세 대장이 각기 정병 여러 만 명을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달려와 응원하며, 해군 10만 명이 산동성(山東省)으로부터 곧장 왜놈의 소굴을 공격하고 있으니 우리 세력은 저절로 확장되고 적은 망할 날이 머지 않은즉 이야말로 뜻있는 선비가 옷소매를 떨치며 공을 세울 절호의 시기다. 만약 시일을 끌다가 앉아서 기회를 잃는다면 화란을 안정시킬 수 없을 뿐 아니라, 장차 군신(君臣) 간의 대륜(大倫)에 비추어 죄를 얻게 될 것이니 그렇다면 무슨 면목으로 천지간에 서겠는가. 다만 무식한 서민은 임금을 섬기는 의를 모를 수도 있은즉 그들에게는 오직 상과 벌로 권하고 징계할 수 있으니, 그들은 조정에서 내린 방목을 보지 못했는가. 공천(公賤)이나 사천(私賤)을 막론하고 적의 목 하나나 둘을 베어 바친 자에겐 육품(六品)의 관직을 주고 목 셋을 바친 자에겐 통정(通政 삼품)을 주고, 왜의 장수를 베어 바친 자에겐 가선(嘉善 종이품(從二品))을 주어 공을 기록한다 하였다. 무부(武夫)와 용사가 급히 의병에 참여하여 날랜 기운으로 전쟁에 임한다면, 높게는 통후(通侯)의 인(印)을 받을 수 있고 낮아도 공신의 반열에 서게 되어 영화가 한 세상에 빛나고 덕택이 후손에게까지 미칠 것이니, 또한 아름답지 않겠는가. 만약 혹시 계책이 이에 미치지 못하고 여전히 숲 속에만 숨어 있다면, 비록 왜놈의 칼날은 벗어날지 모르나 깊은 산중에서 굶어 죽는 신세를 면하겠는냐. 가령 만에 하나로 목숨을 유지한다 해도 하루아침에 난리가 평정되면 국가에는 엄연한 형벌이 있으니 비단 제 자신만 목이 달아날 뿐 아니라 그 처자된 사람까지도 사형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몸소 싸워 큰 공을 이루고 중한 상을 받는 것에 비하면 이해(利害)와 화복(禍福)이 어떠하겠느냐. 살아서는 열사(烈士)가 되고 죽어서는 충혼이 될 것이니 너희들은 부디 힘쓸지어다. 비안(庇安) 등 여러 읍에 모두 이 격문을 띄웠다.
○ 중외(中外)의 대소 신민에게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리다.
왕은 아래와 같이 말한다.
내가 이치를 살피는 것이 밝지 못하여 정가가 그 요령을 잃었고, 어진 덕도 실지로 있지 아니하여 은택이 아래로 미치지 못했으며, 토목(土木)의 공사는 연이어 거듭 백성의 힘을 곤하게 했고, 궁중(宮中)을 엄밀히 단속하지 못하여 조그마한 이끗으로 백성을 죄망에 몰아넣었다. 심지어 바깥 지방의 산택(山澤)까지도 세력가에게 점령을 당하여 뭇 백성들의 원망이 자자한데, 나는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었다. 오직 변방의 근심만 생각하여 성을 쌓고 못을 파며 군사를 훈련하고 무기를 수선하여 기어이 민생을 보호해서 적의 칼날을 면하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이로 인하여 백성의 원망은 더욱 쌓이고 이로 인해서 인심은 더욱 이반되어, 적의 군사가 경내에 가까이 오자 형세를 바라보고 먼저 무너지니 백성을 보호하자는 설비가 마침내 도적에게 필요한 물자가 되고 말았다. 말이 이에 미치니, 스스로 용납할 길이 없구나. 나는 생각건대, 영남은 실로 인재의 부고로서 부로들은 충성과 효도를 가르치고 자제들은 시서(詩書)를 익혀서, 저 옛날 김유신(金庾信)은 강개(慷慨)한 결심으로 난리를 평정하고 김춘추(金春秋)는 앞장서서 적진에 달려 들었는데, 이 모두 본 지방 인물들이니 도내 80여 고을에 어찌 충의의 선비가 없겠느냐. 그런데 오직 너희 사서(士庶)는 네 아비와 네 할아비가 국가의 후한 은혜에 젖었는데 하루아침에 난리를 당하자 이내 나를 버리고자 하니, 나는 너희들을 허물하지 않으나 너희가 차마 나를 버린단 말이냐. 윤대(輪臺)에서 내린 한제(漢帝)의 한 장 조서(詔書)는 바로 평시에 지난 일을 후회한 것 뿐인데도 한 나라 백성이 오히려 감격했거늘, 하물며 지금 난리 중에 성상(聖上)께서 애통하심이 이에 이르고 허물을 자책하심이 이에 이르렀음에랴. 이는 실로 초목ㆍ곤충도 모두 감동할 일인데, 더구나 양심을 지니고 윤리를 아는 우리 사람임에랴. 더구나 의리를 알고 충성을 품은 선비들임에랴. 진실로 마땅히 전장에서 목숨을 던져 적개심을 다해야 할 터인데, 한 사람도 북면(北面)하고 근왕(勤王)하여 임금을 위급한 시기에 구출하는 자가 없어 임금으로 하여금 오래도록 용만(龍灣) 천리 밖에 머무르게 하니, 원통도 하다.
○ 명(明) 나라 장수 조승훈(祖承訓)ㆍ사유(史儒)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의주(義州)에 당도하다.
○ 경상도 고령(高靈) 선비 박정완(朴廷琬)이 장사 4백여 명을 모집하여 강 기슭에 복병을 설치하고, 사재를 기울여 군량을 구입하여 활과 화살을 준비하여 창녕(昌寧)ㆍ현풍(玄風)ㆍ성주(星州)에 왕래하며 충돌하는 적들을 많이 잡았다. 그리고 또 배를 수선하고 수장(水杖)을 설치하여 강을 타고 내려 오는 적을 막았다. 김면(金沔)이 무계(茂溪)에서 승첩한 것은 실로 박정완의 힘이 컸는데 공을 나누는 데는 참여하지 못했으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히 여긴다. 《경상 순영록(慶尙巡營錄)》에 나온다.
○ 경상도 초계(草溪)의 전치원(全致遠)ㆍ이대기(李大期)ㆍ전우(全雨) 등이 군사를 모집해 일으켜 정인홍(鄭仁弘)에게 소속되어 무계 및 낙동강에 왕래하는 적을 토벌하는 데 협조하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가을 7월 2일. 적병이 용담(龍潭)으로부터 장수(長水)로 향하자 조방장(助防將) 이유의(李由義) 등은 군사를 버리고 도망가다. 남원 판관(南原判官) 노종령(盧從岭)이 본부로 달려가서, “적의 부대가 이미 장수를 지나갔으니 곧 두 관아(官衙)의 권속을 남산 밖 산동촌(山洞村)으로 보내어 대피시키고 묘봉사(妙峯寺)로 들어가라.” 외치고, 노종령도 단신으로 도망쳐서 이날 밤에 원천촌(原川村)으로 들어가 잤다. 내 집에 유숙하였다. 이튿날 산동(山洞)으로 가본즉 수성원군(守城元軍)ㆍ팔결연호군(八結煙戶軍) 및 향병(鄕兵)은 모두 다 흩어져 달아나고 부사(府使) 윤안성(尹安性) 만이 홀로 부 남쪽 술산(述山)에 남아서 변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은 적병이 오지 않았다.
이유의의 분산된 군사는 모두 중도에 떠도는 자들이라, 성중에 함부로 들어와 창고의 곡식과 군기를 마구 가져가니 교방(敎坊)ㆍ관청이 일시에 탕진되고, 경내 사람들도 역시 성중에 들어와 그 나머지 물건을 훔쳐냈다. 윤안성은 적이 오지 않는 것을 알고 또 난병(亂兵)이 들어와 노략질하는 것이 심하다는 것을 듣자, 말을 돌이켜 달려 들어와 그중 심한 자를 목 베고 임춘루(臨春樓)에 주둔했다. 동문루의 이름이다. 부사는 바로 나의 아버지와 한 마을에 살던 옛친구 분이시라, 때마침 내가 난리를 피해서 용추동(龍湫洞)에 있다가 그 연유를 듣고 달려가 뵈니 부사가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민간을 방문해서 도로 집합하게 하라는 뜻으로 각 방(坊)에 첩지를 내려라. 운운” 하였다.
3일. 적이 들어온다는 소문이 떠도는데 관부의 물건을 옮겨 둘 방법이 없으니, 마침내 왜적의 소득이 될 바에야 백성에게 나누어 주는 것도 무방하다고 여겨 심히 금지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사창(司倉)ㆍ관청 각처의 잡물이 전부 탕진되어 조석의 지공(支供)조차 나올 데가 없었다. 형편이 부득이 하여 팔결군(八結軍)은 따로 지출을 하는데 명분 없는 징수는 역시 심히 미안하므로 각 방(坊)에 관청 물건을 가져간 사람들을 잘 개유하여, “자진해서 다시 바치면 원래 도덕질해 간 것이 아니니 죄를 따질 까닭이 만무하며, 많은 수효를 바친 사람에게는 그 수효 중 삼분의 일을 상으로 줄 터이니 급히 실행하라.” 하였다.
○ 전날 김면(金沔)ㆍ곽재우(郭再祐) 양군(兩軍)에서 노획한 왜놈 장물 가운데 궁중의 물건이 많이 들어 있으므로 김 성일(金誠一)은 남원 고을이 적과 거리가 멀다 여겨 보내어 보관하게 했는데, 3일 난병이 도적질해 가서 전부 없어졌다.
4일. 전 도사(都事)는 조헌(趙憲)이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기로 나서다. 조헌은 충청도 옥천(沃川) 사람인데 처음에 귀양가 있던 곳으로부터 임금의 은혜를 입어 본현(本縣) 마을 집에 와 있으면서 낮에는 농사 짓고 밤에는 글 읽는 것으로 생업을 삼았다. 이윽고 서울이 무너지고 임금께서 서도로 파천했다는 소식을 듣자, 통곡하고 분주히 의병을 모집하여 이날에 공주(公州)에서 깃발을 들었는데 모집에 응한 자가 천여 명이었다. 손수 격문을 초하여 삼도(三道)에 전달했다. 그 격문은 다음과 같다.
하늘과 땅의 큰 덕은 생(生)이니 만물이 각기 제 자리를 얻게 할 것을 생각하라. 귀신과 사람이 미워하는 것은 적(賊)이니 원수를 같이 쳐서 그 고을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자. 모두들 보고 들으면, 거의 분개하고 미워하리라. 저 침략해 오는 왜적을 보면 버릇없는 묘민(苗民)보다 심하구나. 사람 죽이기를 풀 베듯이 하여 원한이 온 나라에 가득찼고, 군장(君長)을 시해하기를 여우와 토끼 사냥하듯 하니 죄가 하늘에 사무쳤다. 저 한착(寒浞 은(殷) 나라의 역적)처럼 스스로 넘어질 줄을 모르고, 역량(逆亮 금(金) 나라 임금)이 멀리 치러 갔던 것을 본떴다. 달콤한 말과 간사한 꾀로 처음에는 이익을 제공하여 사람을 속이더니, 자취를 감추고 군사를 숨기어 마침내 바다를 넘어 땅을 차지하려 드는구나. 태평한 지 오래라, 비록 막아낼 만한 군사가 없다지만 유린해서 깊이 들어오니 이처럼 번질 것은 생각지 않았다. 조령(鳥嶺)이 마침내 무너지니 한강(漢江)에서 무기가 번뜩이는 것이 원통하고, 용여(龍輿 임금의 수레)가 멀리 순행하니 변방에서 북두별 바라보는 것이 슬프도다. 어찌 생각했으랴! 수백 고을에 끝내 한 명의 남아가 없을 줄이야. 남의 자식을 고아로 만들고 남의 아내를 과부로 만들어도 오히려 화기[和光]를 손상하여 재앙을 이룬다 하거늘, 백성의 집안을 도륙하고 백성의 살림을 불태우면 어찌 악이 차서 죄를 부르지 않을까 보냐. 서민의 원한은 날로 쌓이고 의사의 기운은 달로 더하다. 하물며 남의 나라의 죄 짓고 도망간 사람들을 수용하는 것이 탐욕 많은 금수(禽獸)보다 심함에랴. 사람의 꼴을 지녔으면 양심이 있을텐데 측은하고 수치스러운 생각이 전혀 없으니, 하늘의 명령을 받들면 반드시 천벌을 봉행(奉行)하게 되는 것이다. 어찌 힘세고 강포한 자를 무서워하랴. 전쟁을 잘하는 자는 최상의 형(刑)을 받는 것이니, 전에는 백기(白起 진(秦) 나라 장수)가 사형을 받았다. 죽이길 좋아하는 자는 대벽(大辟 목 베어 죽이는 형)을 범하는 것이니, 뒤에는 황소(黃巢 당(唐) 나라 역적)가 패해 처단되었다. 그러므로 문명인이나 야만인이나 모두 이 왜적을 떳떳이 죽일 것을 생각한다 들었고, 또한 반드시 산천 귀신이 이미 추악한 무리를 음주(陰誅)하기로 의논했으리라. 그런데 우리 군사를 이끌어 가는 규율을 생각하면, 대개 《주역(周易)》에 나타난장인(丈人)의 원길(元吉)이 아니다. 누가 황금으로 띠를 두르고 백마(白麻 사장령)의 소중한 선고를 받았는가. 영호(嶺湖)를 돌고 돌면서 군부(君父)의 근심과 급함도 모르고 경기 근처에 머뭇거리면서 단단한 오랑캐를 앉아서 불러들이며, 삼도(三道)를 끼고 있으면서 앞서 출전한 자를 구원하지 않고 한 번 패함으로 인해 영영 뒤에 일어날 기회조차 잃었으니, 그 도적을 기른 큰 죄상을 따진다면 어찌 분곤(分閫 임금의 특명을 받은 대장)의 대권을 맡을 수 있으랴.
묘당(廟堂 조정)은 격리되어 머나먼데, 적진은 빙 둘러서 첩첩하구나. 군사의 기세는 누차 꺾이어 한탄만 하고 민생이 다시 소생할 길은 끊어졌으니, 만약 그대로 내버려두면 반드시 미란(糜爛 죽이 풀어진 것같이 썩어 문드러짐)되고 말 것이다. 장차 기자(箕子)가 끼친 풍화로 하여금 영원히 야만의 지역이 되게 한단 말이냐. 하늘이 이 나라를 도와서 아직도 호남 한 지역이 온전하니, 백성이 주도(周道 조국)를 생각하매 어찌 초호(楚戶)의 세 집이 없을쏜가. 우격(羽檄 징병하는 격문)이 강을 지나는 것을 조목조목 보니, 과연 한 마디 말이 중함을 알겠다. 고 동래(高東萊)는 적을 잘 추적하고 김 수원(金水原)은 군사를 잘 쓰며, 곽 장군(郭將軍)은 영남(嶺南)에서 군사를 이끌어 용감한 기운이 있고 김 진사[上舍]는 바다 고을에서 격문을 날려 열렬한 위엄을 지녔다. 이 분들은 모두 세상을 바로잡을 영재들이라 반드시 사람을 움직일 묘법이 있을 것이니, 머지 않아 비후(豼貅) 같은 용감한 군사가 왕성하게 모여서 개나 쥐 같은 오랑캐를 없앨 것이다. 하물며 호서(湖西)의 선비들 풍습은 진실로 등군(鄧君)의 본뜻에 갑절은 되어 앞다투어 적개심을 품고 있으니 어찌 역사에 남길 공이 없을쏘냐. 청컨대 한 번의 수고를 꺼리지 말고 세 번 이기는 공을 이루도록 기약하세. 의당 뜻이 같으면 서로 호응할 것이니, 응당 온 나라가 멀리 합세하리라. 인헌(仁憲)의 기특한 꾀를 쓰니 단정코 손녕(孫寧)의 낯가죽을 벗기게 될 것이고, 무목(武穆)의 묘한 계산을 생각하니 모름지기 올출(兀朮)이 수염 깎는 꼴을 볼 것이다. 뜻이 해이하지 않으면 귀신이 감동하고 사람이 따르는 것이요, 일을 이루고자 하면 하늘이 돕고 땅이 보호하나니, 어찌 무도한 도적으로 하여금 밝은 나라에 오랫동안 불법을 범하게 할까보냐. 원충갑(元冲甲)이 한 번 북을 울리고 용맹을 떨치자 합단(哈丹)을 계악(鷄嶽)에서 무찌르고 금(金) 원후(元侯)가 한 번 활을 쏘아 적을 죽이자 몽고병(蒙古兵)을 황민(黃岷)에서 물리쳤으니, 이들은 선비와 승려로서 무력이 있는 명장이 아니지만 한 번 생각을 잘함으로써 천추에 꽃다운 이름을 남겼느니라. 이 나라 강산을 돌아보면 실로 인재의 부고(府庫)이다. 전조(前朝) 말엽에 해적이 여러 번 침략했으나 선배들의 힘을 입어 물리쳤고, 을묘년 여름에 갑자기 변방의 난리가 일어났으나 호걸들이 나서서 평정했다. 이제 백 년 동안이나 백성을 잘 길러냈는데, 어찌 만갑(萬甲 만군(萬軍))을 가슴속에 감춘 이가 없으랴. 혹은 백 보 밖에서 쏘아 버들잎도 뚫고 혹은 큰 산에 들어가 맨손으로 범을 잡으니, 문무(文武)를 차별해 보는 것은 정책의 그릇됨이 한탄스럽다. 생각건대 국가를 제 몸같이 여겨 신하된 도리를 다하는 자를 보기 어렵구나. 환란을 당하면 어찌 뒷 조심을 경솔히 하랴. 옛일을 거울 삼는 자는 마땅히 사전에 방비해야 한다. 진실로 천지를 돌려놓을 만한 계략이 있다면 어찌 황하(黃河)가 띠 되고 태산이 숫돌 되도록 영원하자는 맹서를 아끼겠는냐. 삼도의 힘을 합하여 위급을 해결하는 것이 오직 이때요, 일생의 재주를 다하여 어려운 고비를 극복하는 것이 바로 이날이다. 뜻을 같이한 우리 여러 선비는 이 얻기 어려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용감한 무인들과 결속하여 위급한 국맥(國脈)을 이어 나가도록 하자꾸나. 우리의 활을 당기고 우리의 화살을 먹여서 먼저 아지발도(阿止拔都)의 목구멍을 쏘고 그대의 창을 들고 그대의 방패를 나란히 하여 괴자(拐子)의 발을 연이어 찍는다면 적은 저절로 놀라 달아나기에 겨를이 없을 것이며 백성은 응당 도로 모일 가망이 있을 것이다. 밭을 매는 자는 늦은 곡식을 가꾸게 되고 나무 베는 자는 불에 탄 집을 수리하며, 호남과 영남의 한 길을 시원스레 터서 장사꾼들이 사방에 영원히 통할 것이다. 당 나라 현종(玄宗)을 파촉(巴蜀)에서 모셔 왔듯이 우리 성주를 모셔 오면 당연히 애통히 여기는 조서가 내릴 것이고, 순(舜) 임금이 조정의 사목(四目)을 밝혔듯이 우리 이목을 밝혀 약석(藥石) 같은 말을 모아들이면, 옛날의 폐단이 절로 제거되고 좋은 세상의 은택이 미쳐올 것이니, 한 번 싸움에 힘을 다해야만 후손에게 복을 끼치리라.
5일. 적병이 진안(鎭安)으로부터 전주(全州)로 향하니 이광(李洸)이 이정란(李廷鸞)을 시켜 본부의 각종 군사를 거느리고 성을 지키게 하였다. 자신은 각 읍 군졸을 거느리고 만경대(萬頃臺) 산성으로 나가 진을 치고, 영남으로 공문을 발송하여 이르기를, “금산(錦山)의 왜적이 이미 무주(茂朱)ㆍ용담(龍潭)ㆍ진안 등지를 점령하고 또 전주에 침범하여 혹은 감사(監司)ㆍ안무사(安撫使)의 명령이라 칭탁하고 오로지 군사의 모집을 일삼으니, 놈들이 지나가는 열읍에는 우매한 백성들이 앞다투어 서로 따라붙는데 금산ㆍ용담이 더욱 심하다.” 하였다. ‘공문을 발송하여’ 이하는《경상 순영록(慶尙巡營錄)》에 나온다.
○ 경상 좌병사 박진(朴晉)이 고령(高靈)으로부터 밤에 낙동강(洛東江)을 건너 먼저 공문을 발송해 이르기를, “상사(上使)에 관한 것이다. 병사가 감사의 근왕(勤王)하는 군사를 따라 온양(溫陽)에 당도하여, 명을 받고 도로 내려와 각 읍의 군병(軍兵)을 완전히 정돈하여 적을 토벌하고자 당일에 안동(安東) 등지로 떠나는 중이다. 여러 군사와 빠졌던 장정을 수색해 내서 요로에 복병을 설치하여 국가의 치욕을 씻을 것이며, 각종 군량과 잡색 군사는 주장이 인솔하고 아병(牙兵)ㆍ업무(業武)ㆍ무재(武才)ㆍ전마(戰馬)ㆍ쇄마(刷馬)ㆍ수군ㆍ육군은 따로 정하여 상사에게 문서를 작성해 올려서 전령을 기다리도록 하며, 적들이 왕래하는 것을 잇달아 빨리 알리되 함락당한 각 읍에 대해서는 당초 접전한 상황과 함락당한 절차를 장계에 일일이 따져서 보고해야 한다. 용궁(龍宮)ㆍ예천(醴泉)의 적이 깃발을 올리고 물러가기를 서두르고 있으니 각 읍 수령들은 군졸을 집합하고 복병을 설치해 요격해서 큰 원수를 갚도록 할 것이다. 운운.” 하다. 박진이 샛길로 밀양(密陽)ㆍ풍각(豐角)에 당도하여 흩어진 백성을 불러들이는데, 박진이 전에 본군 부사를 지냈기 때문에 종군을 자원하는 자가 5백여 명이었다. 언양 현감(彦陽縣監) 김옥(金玉)과 봉사(奉事) 김대허(金大虛) 등 20여 명을 거느리고 가서 안동을 점령할 양으로 신녕(新寧)에 도착하였는데 안동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신녕 의병장인 봉사 권응수(權應銖)를 조전장(助戰將)으로 삼아 청송(靑松)ㆍ안덕(安德)으로 전향하여 진보(眞寶)에 당도했다. 안동 사람 진사(進士) 신경립(辛敬立)이 찾아와 안동 지세와 적이 주둔한 형상을 자세히 진술하면서, “적병이 만 명이 채 못 되니 오히려 쳐부술 수 있습니다.” 하였는데, 박진이 말하기를, “내 앞에 거느린 군사가 겨우 8백 명밖에 되지 않고 그나마도 모두 하도(下道)의 군사들이라 본부(本府) 도로가 멀고 가까움과 굽고 곧은 상황을 알지 못하니, 반드시 가까운 지역 사람을 더 모집하여 본부 사람을 길잡이로 삼은 연후라야 진격할 수 있소. 그러니 경솔히 행동할 일이 아니오.” 하였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경상도 비안(庇安)에 주둔한 적이 방을 써서 붙이기를, “당도자(當途者) 일본국 재상(宰相)이 어명(御命)을 받든 것은 세상을 교화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목적이니, 군내(郡內)의 사람이 산중이나 혹은 해외로 피난간 자는 집으로 돌아와 전과 같이 편안히 살라. 일본 사람으로 당인(唐人)의 처자를 빼앗은 자는 포박해서 죽이고 있으니, 농업에 종사하는 자는 부지런히 밭을 갈고 물을 대고 풀을 제거하여 가을 수확을 기다리라. 조선(朝鮮)에서 만약 무기를 가지고서 우리 군사의 왕래를 방해한다면 모조리 잡아서 형벌할 것이며, 만약 도망한 백성이 하소연할 일이 있으면 기록해서 개령(開寧) 우리 장군의 진으로 아뢰라. 이상 조목에 대하여 혹시 의심할지 모르나 하느님이 밝게 내려다보니 절대 어기지 않을 것이다. 천정(天正) 20년 7월 일. 안예 재상(安藝宰相) 대리 완호원차 삼보원충(完戶元次三寶元忠).” 하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적의 장수는 휘원유로(輝元留老)이니, 개령ㆍ비안(庇安)의 적은 필시 휘원의 부하일 것이다. 그 사연을 보니 흉악하고 간사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6일. 이광이 막하 군사를 시켜 노종령(盧從岭)을 잡아다 곤장을 때려 사실 무근인 일에 놀라게 한 죄를 다스리다.
○ 경상도 삼가(三嘉)의 학유(學諭) 박사제(朴思齊) 형제가 군사를 모집하여 9백여 명을 얻었고, 봉사(奉事) 노흠(盧欽), 유생(儒生) 권양(權瀁)과 단성(丹城) 사람 권세춘(權世春)ㆍ권제(權濟) 등이 또한 의병을 일으키니, 김성일(金誠一)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당일로 장계를 올려 함안(咸安) 사람 이정(李瀞)을 소모관(召募官)으로 삼았다. 이때 군수 유숭인(柳崇仁)이 성을 버리고 달아났는데 이날에야 임소로 돌아와서 일을 함께 했다. 이정은 군사 천여 명을 모집하여 군수에게 소속시켜 진해(鎭海)ㆍ창원(昌原)에서 충돌하는 적을 대항하였는데, 매번 싸움에 이기면 선뜻 공을 군수에게 돌리고 자신은 참여하지 않았다. 박사제(朴思齊)는 봉사 윤탁(尹鐸)을 대리 장수로 삼아 그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곽재우(郭再祐)에게 부속시켜 영산(靈山)ㆍ창녕(昌寧)을 왕래하는 적을 방어하였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고경명(高敬命)이 연산(連山)에 머물러 진을 치고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에게 영(令)을 전달하여 금산(錦山)에 남아 뒤처진 적을 치자고 약속했는데, 이광이 군관을 시켜 고경명에게 군사를 돌이켜 함께 지키기를 청하였다. 고경명이 허락하지 아니하고 연산에서 떠나 진산(珍山)으로 전진하면서 정예부대를 뽑아서 길을 나누어 정탐하게 했다. 이광이 곽영에게 영을 전달하여, “달려오라.” 했는데, 곽영이 듣지 아니하고 의병을 따라 금산으로 향하였다.
○ 경상도 금산(金山) 소모관인 박사(博士) 여대로(呂大老)가 군사를 모집하여 적을 토벌하면서 권응성(權應星)을 임시 장수로 삼았는데, 김면(金沔)의 지례(知禮)ㆍ금산 싸움에 권응성이 협조해 공격한 공이 있었다. 그 후 권응성은 적에게 습격을 당하여 힘껏 싸우다 죽었다. 《경상순영록》에 나온다.
○ 경상도 창녕(昌寧)의 생원 신방즙(辛邦楫), 충의위(忠義衛) 성천희(成天禧), 정자(正字) 성안의(成安義), 유학(幼學) 곽찬(郭趲) 등이 군사 7백여 명을 모아 복병을 설치하고 적을 쳐서 서로 계속 적의 귀를 베어 바쳤다. 보인(保人) 조열(曹悅)과 성천희 등은 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창녕을 포위하여 종일토록 교전하는데, 적 한 놈이 백마(白馬)를 타고 자칭 고을 원님이라 하므로 마침내 그 놈을 쏘아 당장 죽게 하였다. 그런 지 3일 후에 적은 울을 불태우고 도망갔다. 전 의령 목사(宜寧牧使) 소모관 오운(吳澐)이 한 고을을 개유(開諭)하여 군사 2천여 명을 얻었다. 《경상순영록》에 나온다.
8일. 적이 웅현(熊峴)을 넘으니 복병장(伏兵將) 김제 군수(金堤郡守) 정담(鄭湛)이 싸우다 죽다. 처음에 도복병장인 나주 판관(羅州判官) 이복남(李福男)이 중봉(中峯)에 진을 치고 황박(黃璞)이 그 위에서 지키며 정담은 그 아래서 지키는데. 이광(李洸)이 장병을 더 보내어 군의 위세를 도왔다. 이날 동이 틀 무렵에 거의 수천 명에 달하는 왜적의 선봉 부대가 모두 기(旗)를 등에 꽂고 칼을 휘두르며 곧장 우리 진 앞으로 들어오는데 고함 소리가 하늘에 잇닿고 쏘는 탄환이 비오듯 하였다. 이복남 등이 결사적으로 먼저 나와 활을 쏘아 낱낱이 명중시키며 군사들이 모두 죽음을 걸고 싸우니 적병이 점점 퇴각하였다. 아침 해가 동으로 올라와, 뒤의 적이 산과 골짜기를 덮으며 크게 몰려오는데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었다. 산중턱을 육박하여 여러 부대로 나누어 들어와 싸우는데 흰 칼날이 어울려 번쩍이고 나는 탄환이 우박 쏟듯 하였다. 뒤를 이어 응원하는 적이 얼마 안 있다가 또 와서 합세하여 치열한 싸움을 벌이니, 형세가 바람 앞에 불과 같았다. 황박은 화살도 떨어지고 힘도 다 되어 무너져 나주 진중으로 들어갔다. 적병이 승세를 타고 충돌하여 고갯마루로 오르니 나주의 진 역시 무너졌다. 정담이 말하기를, “차라리 적 한 놈이라도 더 죽이고 죽을지언정, 한 걸음도 후퇴하여 살 수는 없다.” 하고, 용감히 적과 더불어 육박전을 벌이다 죽었다. 이복남 등은 싸우면서 후퇴하여 안덕원(安德院)에 전주 동쪽 10리 길에 있다. 군사를 주둔하였다. 그 후 만력(萬歷) 23년 을미년(1595, 선조 28)에 김제군의 유생(儒生) 조성립(趙誠立) 등이 정담의 덕과 의를 사모한 나머지 그 공적이 드러나지 못한 것을 애석히 여겨 김찬(金瓚)에게 신원장(申寃狀)을 올렸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조성립 등이 검찰사(檢察使) 상공(相公) 합하(閤下)에 글월을 올립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착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포상하고 공이 있으면 반드시 상을 주는 것은 국가의 권면하는 법전입니다. 작고한 군수 정담은 사람됨이 충직하고 강개하며, 난리가 한창 심할 적에 본군 원으로 오게 되자 충성심을 분발하여 적을 토벌하였으며 용맹 있는 장정들을 뽑아들여 소 치고 술 걸러 배부르게 먹이니 병사들이 감격하여 그 밑에서 일하기를 원했습니다. 공산(公山)으로부터 진을 파하던 날에 공산은 곧 공주(公州)이니, 이광(李洸)이 처음 근왕(勤王)한 곳이다. 전 현감 어득준(魚得濬)과 더불어 울며 말하기를, “경성이 이미 함락되었는데 근왕하는 군사를 일으키지 않으니 주장(主將)의 뜻을 알 수 없다. 장차 의병을 이끌고 멀리 전하의 행차를 따를 생각을 하면서, 육지를 거쳐 좇으려고 하는가. 경기의 왜적이 그득히 퍼져서 바다를 건너 고을로 진군하고 있으니, 연해(沿海)가 아니면 본래 배가 없는데 어떻게 우리 전하께서 계신 데까지 이를 것인가.” 하였습니다. 매양 밥상을 대하면 문득 송구하게 여겨 달게 먹지 않으면서 장좌(將佐)들을 돌아보고 하는 말이, “나물 한 가닥 쌀 한 톨이 모두 주상께서 주신 것이다. 지금 우리 주상께서 서도(西道)로 파천하시어 기갈(飢渴)이 매우 심하실텐데 나는 너희들과 더불어 차마 이 밥을 먹고 있으니 이 어찌 신하로서 감히 마음에 편안할 일이겠느냐.” 하였습니다. 또 일찍이 본군 선비들에게 이르기를, “나는 아무 해에 과거에 올라 아무 해에 아무 벼슬이 되었다가 지금 또 급이 올라서 이 고을에 오게 되었으니 임금의 은혜를 이미 후히 입었다. 하물며 아들 하나가 있어 집안 일을 맡길 만하니 목숨을 바쳐 나라에 보답한들 무슨 유감이 있겠느냐. 나의 뜻은 결정되었으니 그대들은 내가 하는 것을 보라.” 하고, 인하여 목이 마르도록 눈물을 흘렸습니다. 또 일찍이 조방장(助防將) 백광언(白光彦)에게 왕래하여 합심해서 적을 토벌하기로 하였으므로, 온 도내가 이 사실을 듣고 모두 국사(國士)의 기풍이 있는 사람이라고 느껴서 용감한 자들이 마음을 의지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가 복병장이 되어 웅현(熊峴)에 방어하러 갈 적에는 주효를 조촐하게 장만하여 고사를 지내고 떠났으며, 그곳에 가서 보고는 험준한 데를 가려서 나무를 베어 울을 막고 군사들과 더불어 맹서하기를, “절대 싸워야 하며 후퇴란 있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적병 만여 명이 고개로 올라오자 군수가 활쏘는 군사를 독려하여 거느리고 진 앞에 서서 활을 쏘는데, 하나도 적중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적의 무리가 쓰러져 여러 번 퇴각하였습니다. 적의 괴수 한 놈이 백마를 타고 붉은 기를 꽂고 그 무리를 독려하여 곧장 진 앞으로 다가오자, 군수가 다시 두어 걸음을 앞으로 나가 화살을 뽑아 활에 먹이며 여러 장령들에게 이르기를, “나는 이 화살로 반드시 저 괴수놈을 떨어뜨릴 것이다.” 했는데, 과연 그 화살에 맞아 넘어지므로 모두가 탄복하였습니다. 혹자가 나가서 그 적의 귀를 베어 오려고 하자 군수가 꾸짖고 말리며 말하기를, “네가 내 진중에 있는데 어찌하여 공을 탐내느냐.” 하고, 중지시켰습니다. 적이 군수의 진은 마침내 침범하지 못할 것을 알고 나주 진의 허술한 곳으로부터 돌격해 들어오니 그 진의 장병이 모두 흩어졌습니다. 비장(裨將) 한 사람이 바삐 와서 말하기를, “저쪽 진이 이미 무너져 적의 선봉이 충돌해 들어오니 조금 후퇴하여 형세를 관망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자, 군수는 눈을 부릅뜨고 크게 꾸짖으며 종사관 이봉(李葑) 및 보좌관 몇 명과 더불어 굳건히 서서 움직이지 아니하고 주먹을 불끈 쥐며 말하기를, “차라리 적 한 놈을 더 죽이고 죽을지언정 차마 이 몸을 끌고 달아나서 적으로 하여금 길게 몰아치게 할 수는 없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더욱 세차게 활을 쏘니 뒤미처 오는 적이 일시에 사방을 포위하여 마침내 힘이 다해 죽었습니다. 아! 슬픈 일입니다. 본군 사람들이 가서 군수의 시체를 찾는데, 쌓인 시체 속에서 옷섶에 성명이 적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정확한 것을 알게 되었으니 그 싸우다 죽을 뜻은 평소부터 정해졌던 것입니다. 살아 돌아온 각 읍 장병들이 오며 가며 서로 말하기를, “아무 고을 군수는 적을 토벌할 적에 활을 쏘면 반드시 맞히고 맞히면 반드시 꿰뚫었다. 그가 단독으로 죽인 것이 수백 명이며 또 그가 죽인 적의 장수는 가장 괴걸한 자인데, 그 적이 바로 전라 감사라 자칭하던 자다. 적은 글월을 만들어 제사하며 통곡하고 돌아갔다. 흉악한 왜적이 마침내 전주에 충돌하지 못한 것도 모두 정담의 힘이니 어찌 난리가 평정된 이날에 힘을 모아 사당을 세워 풍패(豐沛 전주)를 보존한 공을 보답하지 않아서야 되겠느냐.” 하며, 경내에 초빈을 하고 초하루ㆍ보름과 세시(歲時)에 곡하고 제를 지내니 본군 사람들이 의를 사모하는 것은 이에 그칠 따름입니다. 지금 흉적이 물러갔으니 죽은 이의 충렬을 위로하고 장래의 용사를 격려하는 것이 국가에 있어 어찌 조금인들 소홀히 할 수 있는 일입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합하는 조정에 장계하여 이 사적이 없어지지 않게 하여 주소서.
9일. 적병이 양양역(襄陽驛)으로 전진하여 여염집에 불을 질러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가득했다. 이튿날 적의 떼가 거침없이 날뛰어 완산성(完山城) 밖에서 진을 치고 드나들며 도적질을 하니, 이광(李洸)이 금구(金溝)로 도망해 가서 만경대(萬頃臺) 군사들이 일시에 무너져 흩어졌다. 적이 우리 군사가 분주하는 것을 보고 자기의 뒤를 습격할까 의심하여 그날 밤으로 금산(錦山)ㆍ무주(茂朱)로 돌아갔다. 하늘이 우리나라를 도와 전주가 다행히 보전되었으니, 산성이 무너진 것이 도리어 유리하게 되었다. 한창 적병이 성 아래에서 충돌할 적에 경기전 주관(慶基殿主官) 오씨(吳氏)가 어영(御影)을 받들고 옥구(沃溝)로 달아나 뱃길로 서해 바다를 거쳐 임금이 계신 행재소(行在所)에 도달하니, 주상 전하께서 울며 절을 드리시고 친히 제사하신 후 예조(禮曹)에 명령하여 영변(寧邊)에 고이 모시게 하셨다. 그 후 만력 42년 갑인년(1614) 광해군(光海君) 7년 가을 9월 18일에 다시 전주에 모셨다.
○ 경상도 영산(靈山)에 사는 공휘겸(孔撝謙)이란 자가 난리 초반에 적에게 붙어 함께 서울에 와서 자기 집에 편지를 보내기를, “내가 당연히 경주 부윤(慶州府尹)이 될 것이요, 낮아도 밀양 부사(密陽府使) 벼슬은 차지할 것이다.” 하고, 또 주상전하께 범하는 말이 있으므로 곽재우(郭再祐)가 듣고 몹시 분개하였다. 하루는 공휘겸이 제 집에 돌아오는 것을 곽재우가 포박해 다 죽이니 사람들이 모두 쾌하게 여겼다. 이때에 거세고 사나운 남의 집 종들이 많이 주인을 죽이고 횡포를 부려 혹은 칼질을 하며 혹은 간음을 하므로, 곽재우가 들을 적마다 즉시 잡아 죽였다. 《경상 순영록》에 보인다.
○ 지례(知禮)의 적이 거창(居昌)을 범하는데 적의 장수가 은가마를 타고 큰 기 세 개를 세우고 고함을 치며 들어오자, 김면(金沔)이 힘껏 싸워 후퇴시키다. 《경상 순영록》에 보인다.
○ 상주(尙州) 사람 진사(進士) 김각(金覺), 교서관 정자(正字) 이준(李埈)이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는데 그 격문은 다음과 같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임금께서는 서쪽으로 파천하시어 돌아오지 못하시고 세상은 몹시 어지러우니, 적개심을 분발할 책임은 신하된 도리상 당연히 져야 한다. 묻노니, 밤낮으로 와신상담하는 나머지에 가슴속에 계획하는 여러 가지 일이 족히 흉한 적의 심장을 쳐부술 수 있겠는가. 지금 여러분이 다스리고 있는 두어 고을만은 적의 부대가 이미 물러갔으나 그 밖에는 아직도 가득 차 있으니, 국가에 보답하는 의거와 울타리를 굳건히 할 계책을 마련하는 것이 타는 불길을 잡는 것보다 급한데 같은 배에 풍파를 만났으니 어찌 구원을 늦출 수 있겠는가. 함께 협조하고 성의를 다하여 각기 부족한 힘을 합쳐서 방휼(蚌鷸)의 형세를 좌절시킴이 오직 이때이다. 나 이준은 하늘에다 활을 쏘는[射天] 흉적을 없앨 마음이 분발하여 취일(取日 몽진한 임금을 도로 모셔옴)의 공을 이루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일찍이 동지 2, 3사람과 더불어 흩어진 군사 약간 명을 모집하여 서울에 침범한[侵鎬] 적을 무찔러 서쪽으로 파천하신[踰梁] 군색함을 위로해 드릴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불행히 본주가 난리를 겪은 나머지 농작물을 수확하지 못하고 무기창고도 불에 타 없어졌으니, 군량은 반쪽의 콩도 저장된 것이 없고 무기는 한 개의 화살촉도 남은 것이 없어서, 저 옛날 제(齊) 나라 군사가 밥을 배부르게 먹었던 것처럼 먹이기는 어렵고 주(周) 나라 군사가 창을 겨누고 섰듯이 무기를 대주지 못하고 있다. 우레처럼 공격하고 번개처럼 달리는 날랜 군사는 모두 다 빈 보따리뿐이요 구정(九鼎)을 들 수 있고 적의 깃발을 빼앗을 만한 힘센 무리는 태반이 빈 주먹이라, 적을 토벌할 뜻은 있으나 무력을 써볼 수 있는 바탕이 없어 실로 오늘날의 큰 근심이 되는 것이외다. 생각건대, 제공(諸公)들이 다스리는 고을은 난리를 겪은 것이 본 고을같이 심하지는 아니하니 만약 한계를 구별하지 않고 적을 토벌하는 준비에 힘을 같이해 주신다면, 저 허세를 부려 날뛰는 놈들쯤은 바로 한 바다에 거꾸러져 사라져가는 잿더미와 같은 격이니 한 도내의 많은 병력으로 어찌 고슴도치처럼 웅크리고 개미처럼 모여서 그 독을 부리는 것을 걱정하리까. 엎드려 바라건대, 각기 역량이 미치는 대로 혹은 한 바리의 곡식이나 혹은 부스러기 쇠붙이라도 모아서 보내주시면, 제공에게 힘 되는 것은 극히 미세하지만 군수에 소용되는 것은 매우 긴요할 것입니다. 군사는 먹을 양식이 있어 싸 가지고 가는 데 근심이 없고 무기는 마음껏 쓸 수 있어 만족을 느끼게 될 것이니, 이렇게 되면 적은 부뚜막에 걸린 솥 속의 고기라 문드러지게 삶아낼 것이요 우리는 진흙 속과 이슬 속에서 헤매는 부끄러움을 쾌히 씻을 것입니다. 힘을 다하여 서로 구원해주신 공이 중흥하는 즈음에 힘입은 바 클 것입니다. 이에 무기와 군량을 조달하는 책임자 두 사람을 보내어 편지를 올려 속마음을 피력하는 것입니다. 만약 월(越) 나라와 진(秦) 나라가 서로 형편을 상관하지 않듯이 여기고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형세를 무시한다면, 기대했던 본의가 심히 아닐 것이며, 협력하여 일을 같이 하자는 청원을 또 어느 곳에 구하리까. 《경상 순영록》에 보인다.
○ 금산(錦山)에 진을 친 왜적이 다음과 같은 글월을 고시하다.
대일본(大日本) 대왕은 정치의 도를 조선에 베풀어 백성들을 구휼하려 하는데 무슨 까닭으로 바다와 육지의 길을 막아 도리어 원수를 사는가. 이른바 당랑(蟷蜋 사마귀)이 수레바퀴를 항거하고 비부(蚍蜉 하루살이)가 큰 나무를 흔든다는 말이 바로 이것인가. 이로 인해 깊은 여항(閭巷)을 찾아 들어가서 기병ㆍ보병이 깃발을 드날리고 칼날을 비껴 드니, 성문은 소실되고 집집마다 포성이 진동하였다. 역당들을 모조리 잡아 목을 잘라 죽이려고 했으나 죄과의 많고 적음을 구별하기 어렵고, 또 그 부모 처자가 가엾기 때문에 특별히 용서하여 굶주림을 구원해서 생명을 보존하게 했다. 비록 이같이 했으나 싸우려 달겨드는 자는 살해할 것이다. 지난번 무관으로 들[野]에 있었던 사람이 전일의 잘못을 뉘우치고 옛집으로 돌아가서 해를 따라 풍속이 변하기를 바란다면 정리하여 편히 살 수 있을 것이다. 일본 황제가 조선 황제와 더불어 반드시 회합을 갖게 될 것이니 너희들은 어찌 알지 못하느냐. 아무쪼록 이 말을 산중의 무관에게 알리어 활과 칼을 버리고 와서 항복한다면 무슨 죄를 당하겠느냐. 만약 이 뜻을 위반하는 일이 있으면 거듭 이 땅에 주둔하여 수백 명의 병관(兵官)을 거느리고 다시 살륙을 가할 것이다. 장협(長鋏) 오장대왕(吾將大王)이 거듭 안무하여 옛 조정에서 이 나라 천자를 위하니, 또한 천행(天幸)의 은혜가 내리기를. 이만 줄인다. 천정(天正) 20년 부상(扶桑) 신 안국사(安國寺). 이것을 보면 과연 전라 감사라고 칭호한 자이다.
또 투서(投書)를 얻어 보니, ‘야운(野雲)’이라 했다. 고경명(高敬命)이 해석하기를, “넓은 들에 희미한 구름 끊어지고, 빈 산에 조각달이 비끼었구나.” 하였다.
○ 이광이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을 남원(南原)의 수성장(守城將)으로 임명하였는데, 권율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남원을 지키면서 도내 각 읍에 공문을 띄워 이광이 근왕(勤王)하는 데 오지 않은 죄상을 들어 공격하기로 하였다.
○ 합천(陜川)의 의병대장 정인홍(鄭仁弘)이 가장(假將) 김준민(金俊民)과 더불어 군사 2천 8백여 명을 거느리고 안언(安彦)의 적을 공격하여 다 섬멸했다. 이때 김준민은 처음 와서 재주를 시험해 본 바 없었고, 성주(星州) 가리현(加利縣) 이홍우(李弘宇)의 군사는 이부산(伊傅山)에 있었으며, 고령(高靈)ㆍ합천의 군사는 가천(伽川) 성주 서면의 마을 이름이다. 에 있고 문여(文勵)의 군사도 역시 성주에 있어 모두 정인홍의 지휘를 받았다. 정인홍이 군중(軍中)에 명령하기를, “반드시 대부대의 적을 만난 연후에야 나가 싸우되, 무릇 우리 장병은 앞서 나가 적을 공격하여 끝까지 추격해서 많이 죽이는 것을 으뜸가는 공으로 삼는다. 적을 쏘아 죽이는 것이 그 다음이요, 공을 요청하기 위해 적의 머리를 베어 오는 것이 최하이다.” 하였다. 이날 밤에 성주 대교천(大橋川) 위에 머물러 진을 치고 새벽을 기다리는데, 큰 비가 갑자기 쏟아져서 도저히 싸울 수 없으므로 부득이 회군하여 고령 마을 집으로 돌아왔다. 정인홍이 말하기를, “종묘 사직은 빈 터가 되고 적의 세력은 날로 더해가고 있다. 우리들이 이곳에서 의병을 일으킨 것은 본시 힘을 다해 한 번 결전하여 적개심을 분발하기로 한 것인데, 사세가 지연되어 앉아서 시일만 허비했으며 하느님이 돕지 아니하여 오늘도 또 이러하니 이는 실로 내가 국가를 위하는 정성이 박약한 소치이다. 이를 장차 어찌하랴.” 하며, 목이 메어 눈물만 흘리고 말을 못하였다. 김준민이 옆자리에 있다가 감격한 얼굴로 일어나 절하며 말하기를, “오늘의 일은 어쩔 도리 없으나 내일 만약 비가 갠다면 마땅히 마음과 힘을 다하여 죽으나 사나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하였다. 즉시 전령하여 다시 약속을 정하고 밤중에 군사를 내서 사원동(蛇院洞) 안언(安彦) 길 옆에 진을 치고서 군사를 6, 7개소에 매복시키되, 서로 한두 마장 거리를 떨어지게 하였다. 정인홍은 중위(中衛)를 인솔하여 높은 언덕에 진을 치고서 굽어보며 지휘하여 싸움을 독려하였다. 이튿날 적이 무계(茂溪)로부터 떠나서 성주로 향하는데 4백여 명이 왕래하는 적이 날마다 이러하였다. 소ㆍ말 백여 바리에 짐을 싣고 많은 깃발을 벌여 두어 마장에 연이어 뻗쳤다. 그중 혹은 금은의 가면(假面)을 쓰고 금은의 갑옷과 투구를 하였으며, 혹은 닭의 깃으로 만든 옷을 입고 포를 쏘며 칼을 휘두르니 사람마다 간담이 서늘했다. 이윽고 합천의 좌선봉 한 부대가 대응해 포를 쏘며 돌연히 일어나자, 적들이 행군하지 않고 길 왼편에 집결하여 고갯마루를 차단하여 실은 짐들을 중간에 두고 칼 쓰고 총 쏘는 군사를 앞뒤로 배열하였다. 김준민ㆍ정방준(鄭邦俊)이 활 쏘는 군사 천여 명을 거느리고 말을 달려 산을 내려가 일시에 발사하자, 적도 역시 고함을 치며 칼을 휘두르고 나왔다. 맨 앞에 선 왜의 한 장수가 청흑색을 지닌 큰 준마를 탔는데, 말 위에서 닭의 털로 만든 옷을 입고 금으로 된 가면을 썼으며 붉은 자루로 된 큰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칼 쓰는 군사 수백이 그 뒤를 따라서 크게 외치며 돌격해 오니, 우리 군사는 일시에 놀라 퇴각하였다. 청흑색 말이 워낙 빨라서 날듯이 산으로 올라오자, 우리 군사들이 함께 쇠뇌를 쏘아서 그 말의 뒷다리를 맞혔다. 말이 곧 놀라 뛰어 오르는 바람에 왜장이 우리 진 앞에 떨어지자, 곧 그 말을 빼앗고 그 장수를 베니, 남은 적은 화살을 맞아 다리를 끌고 후퇴해 달아났다. 고령 군사는 남쪽에서 기세를 타고 들어오고, 성주 군사는 북쪽에서 기세를 타고 들어왔다. 김준민ㆍ정방준 등은 결사적으로 혼전을 벌이고 복병은 사방에서 일어나, 고함 소리가 골짜기를 진동하며 좌우의 산상에서는 화살이 비오듯 했다. 적은 포위망을 헤치고 달아날 양으로 포수ㆍ검수(劍手)로써 뒤를 막게 하고 성현(星峴)을 향해 달아났는데, 정인홍이 산상에서 깃발을 휘두르며 싸움을 독려하여 적 한 놈도 빠져 달아나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다. 적은 군수품과 깃발들을 모두 버리고 달아났다. 가천 군사가 또 불의에 돌격해 나오니 적은 대항해 싸울 생각조차 못하였다. 여러 군대가 20여 리를 추격하며 죽였으므로, 죽은 시체가 서로 이어지고 흐르는 피가 들판에 가득했다. 남은 적은 화살을 맞은 채 성현을 넘어 들어갔는데, 성현은 성주 읍과 가까운 곳이라 우리 진은 드디어 군사를 정돈해 돌아왔다. 이 싸움에 적의 한 진을 쾌히 무찔러서 여러 군이 활기를 띠었다. 다만 장령이 적의 목을 베어 오는 것을 귀히 여기지 않았으므로 머리 수효는 많지 않고, 빼앗은 것으로는 짐 싣는 말이 백 50여 필, 해와 달이 그려진 큰 기 3개, 그리고 철환(鐵丸)과 화약 등속이 매우 많았다. 빼앗은 준마는 이마 사이에 육각(肉角)이 있어 길이가 한 치 남짓하며 잘 달려 날아가는 것 같아서, 김준민은 매양 그 말을 타고 싸움에 나가 군 앞에 기세를 올렸다. 가장 큰 칼은 버들 판자에 도금한 것이었다. 오래지 않아서 김준민이 또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노다촌(老多村)을 육박하니 바로 무계(茂溪) 진 밖이었다. 적이 문을 굳게 닫고 나오지 않았는데, 돌과 나무토막으로 막은 울이 심히 견고하여 쳐부술 수 없으므로 곧 기세만 올리고 되돌아왔다. 얼마 안 되어 무계의 적은 철거하여 성주의 적과 합하고, 현풍(玄風)의 적은 철거하여 대구(大丘)의 적과 합했다. 《경상 순영록》에 보인다.
○ 곽재우(郭再祐)가 경상 우도 열개의 읍을 수복하니 적병이 모두 좌도로 달아났다. 처음에 현풍ㆍ창녕(昌寧)ㆍ영산(靈山)에 주둔한 적이 매우 성하여 구름과 잇닿을 만큼 진을 높이 치고 오르내리는 길을 만들어 성주와 상통하고 있었다. 그러나 곽재우는 본래 신기한 꾀가 많은지라, 정예 부대 수백 명을 뽑아서 현풍으로 끌고나가 혹은 산상에서 군사를 보고 혹은 성 밖에서 말을 달려 백 가지로 싸움을 거니, 적이 시종 감히 나오지 못했다. 곽재우가 또 한 자루에 다섯 가지가 난 횃불을 만들어 밤중에 고갯마루에 올라 일시에 불을 붙여 들어 불빛이 적진에 비치게 하고,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포를 쏘고 고함을 치며 여럿이 서로 응하여 말하기를, “하늘에서 내려온 홍의장군(紅衣將軍)이 여기 있으니 내일 접전하게 되면 반드시 다 죽이고 말 것이다. 너희들은 후회하지 말라.” 하고, 곧 불을 꺼버리고 몰래 물러났다. 그리고 밝은 새벽에 보니 현풍의 적이 간밤에 이미 도망가 버렸다. 이 거사는 마침 무계의 싸움과 같은 때였기 때문에 적은 더욱 공포심이 생겨서 도망간 것이다. 그 후 5일 만에 창녕의 왜적이 역시 소문을 듣고 철거했는데, 오직 영산의 적이 군사가 많고 강함을 믿고서 오래도록 옮기려 하지 아니하였다. 곽재우가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에게 고하여, 삼가(三嘉)ㆍ의령(宜寧)ㆍ합천(陜川) 등의 군사를 내게 하여, 합천ㆍ삼가의 군사는 윤탁(尹鐸)이 영솔해서 후원을 하게 하고, 의령의 군사는 곽재우가 거느리고 적진과 마주 보는 봉 위에 들어가 진을 쳤다. 3진으로 나누어 곽재우가 중앙에 있었으므로 적의 선봉부대 기병 백여 명이 말을 달려 돌격하여 곧장 중앙으로 범하는데, 곽재우는 조금도 놀라지 아니하고 적의 전봉(前鋒)으로 갑옷 입은 자를 쏘았으며 5, 6명을 연달아 넘어뜨렸다. 적의 탄환이 비오듯 하는데도 곽재우는 태연자약하였다. 군사들이 자기 몸으로 곽재우를 가리며 결사적으로 어울려 싸워 화살과 돌을 마구 던지니, 적의 선봉 말 수십 필이 넘어져 죽고 적도 매우 많이 죽었다. 남은 적이 잠깐 후퇴하자 성 안에 있는 적이 격전하는 것을 바라보고 한꺼번에 나란히 나오니, 윤탁의 군사가 무너져 흩어지므로 적은 승세를 타서 육박했다. 곽재우는 형세가 서로 대적하지 못하게 되어 한편 싸우며 한편 후퇴해서 산으로 올라가 적을 회피하니 적도 역시 감히 끝까지 추격하지 못하였다. 저물녘에 흩어진 군사를 모아보니 하나도 사상을 당한 자 없었다. 곽재우가 윤탁이 구원하지 아니하고 먼저 도망간 죄를 책하여 장차 형에 처하려 하였는데, 윤탁이 다음에 공을 세워 형을 보상하기를 자원하므로 마침내 다시 약속하기를, “명일에 나가 싸워 불리하거든 또 명일에 나가 싸우고 그래도 불리하면 3, 4일을 한하여 기어코 반드시 이기도록 하라. 운운.” 하였다. 이튿날 새벽녘에 곽재우가 군사를 거느리고 다시 들어가 고개 위에 진을 치고 사람을 보내서 정탐하였다. 성문이 활짝 열리고 밥 짓는 연기도 전혀 나지 아니하여 아무런 동정이 없으므로 그들이 무슨 계획이 있는가 의심했는데, 밝은 아침에 사람을 시켜 살펴보니 적은 밤중에 군막을 불태우고 이미 도망하여 까마귀 까치만 성첩에 날고 있을 뿐이었다. 이로부터 창녕 한 길은 적병이 단절되고, 오직 중간 길로 밀양(密陽)ㆍ대구에서 인동(仁同)ㆍ선산(善山)에 이르기까지가 적이 왕래하는 길목이 되었다. 《경상 순영록》에 보인다.
○ 전지(傳旨)로 인하여 군공(軍功)에 내리는 상의 격식을 알게 된 뒤로부터 혹은 굶주린 백성이나 도망갔다 돌아온 사람들의 머리를 베어 적의 머리라 속여 바치고 관작과 상을 요구하는 일이 있었는데, 군공으로 출신(出身)한 자는 흔히 이런 수법에서 나왔다. 경상도 의흥현(義興縣)에서 굶주린 백성 두 사람의 머리를 베어 터럭을 깎아버리고 머리를 바친 자가 있다 하므로 순찰사가 본군 원을 시켜 조사해 보게 하였다. 곧 수령으로서 공을 요청한 자의 행위인 듯한데 확실치 못해서 마침내 덮어 두고 묻지 않았다. 의성현(義城縣)에서 왜놈의 머리를 베어 바치고 출신한 현령인 정희현(鄭希賢)이 관가에 잔치를 베풀어서 축하하니 조정의 한 벼슬아치가 시를 지어 조롱하기를,
주린 백성 머리 위에 계화가 둥실 떴고 / 飢民頭上桂花浮
붉은 첩지 가운데 원망의 피 흘렀구려 / 紅紙群中怨血流
원님의 잔치자리 술이 응당 있을텐데 / 太守慶筵知有酒
어찌 남은 술 나누어 우는 귀신 위로하지 않는가 / 盍分殘瀝慰啾啾
하였다. 《경상 순영록》에 보인다.
○ 경상도 예안(禮安) 고을 선비들이 의병을 일으키는데 진사(進士) 이숙량(李叔樑)이 격문을 지어 열읍을 효유하다. 《경상 순영록》에 보인다.
○ 안집사(安集使) 김늑(金玏)이 영천(榮川)에서 훈련봉사(訓鍊奉事) 권희순(權希舜)을 의성(義城) 수성장으로, 박사(博士) 황서(黃曙)를 풍기(豐基) 수성장으로, 전 현감 이유(李愈)를 예천(醴泉) 수성장으로, 유학 박연(朴淵)을 의흥(義興) 수성장으로 삼아서 한 고을 군무를 각자 담당하게 하였으니 대개 열읍 수령들이 모두 도망간 때문이다. 이유가 안동(安東)의 생원인 김익(金翌), 진사(進士) 김윤사(金允思), 정로위(定虜衛) 안숙(安淑) 등과 더불어 각각 마을 안의 장정들을 모집하여 다인(多仁)의 적을 방어하였다. 다인은 예천의 속현이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안집사 김늑이 안동에 당도하니 선비와 벼슬아치들 50여 명이 찾아왔다. 그래서 전 도사(都事) 안제(安霽), 전 검열(檢閱) 김용(金涌)을 수성장으로, 출신(出身) 권전(權詮)을 영병장(領兵將)으로 삼았다. 인하여 각 읍에 영을 전달하여 도피한 수령들은 관아에 돌아와 일을 보게 하였다. 이때에 적의 군사가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수령들이 제 마음대로 도망갔는데, 유독 예안 현감 신지제(申之悌)만은 관문에 군사를 모으고 말에 재갈을 물리고서 변란을 대비하며 토적(土賊)을 잡아 죽이고 창고를 굳건히 지켰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경상도 안동의 생원 임흘(任屹)이 열읍에 격문을 보내어 충의로써 개유(開諭)하여 군사를 모집하고 양식을 모아서 함께 나라의 적을 토벌하였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경상도 김해(金海)에 진을 친 적의 배 5백여 척이 제포(薺浦)로 옮겨 정박하였다. 창녕(昌寧)ㆍ영산(靈山)의 적이 강가에 나와서 진을 치고는 혹은 의령(宜寧) 원이라 칭하고 혹은 초계(草溪) 원이라 칭하고서 장차 두 고을로 향하려 하는데 곽재우(郭再祐)가 의병(疑兵)을 설치하여 물리쳤다. 《경상 순영록》에 보인다. 이는 직전에 아직 수복하지 못했을 때의 일인 듯하다.
○ 대가(大駕)는 의주(義州)로 행차하시고 학가(鶴駕 세자의 행계(行啓))는 이천(伊川)으로 이주(移駐)했다. 이는 충청 감사가 전하는 통문도 있거니와 영남 순영(巡營) 마도(馬徒) 강만택(姜萬澤)이 행조(行朝)로부터 와서 말한 것이다. 《경상 순영록》에 보인다.
○ 적의 장수 청정(淸正) 등이 북도 20여 고을을 모두 함락시켜 천 리의 주위에 농작물이 하나도 없으니, 봄철의 제비가 집 지을 곳이 없어 숲 속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놈들은 그래도 두만강까지 밀고 나가서 야인(野人)의 마을 6, 7부락을 불태워 없애고 돌아갔다.
10일. 전라좌도 의병대장 고경명(高敬命)이 금산(錦山)에서 적을 토벌하다 패하여 전사하다. 하루 앞서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과 군사를 합하여 좌ㆍ우익을 만들어 금산 성문 밖 10리 지점에 나가 진을 쳤다. 고경명이 먼저 날랜 기병 수백 명을 발동하여 들락날락하며 적을 쏘아대는데, 군관 김정욱(金廷昱)이 말에서 낙상하여 후퇴해 달아나자 적의 군사가 그 기회를 타서 육박하므로 우리 군사가 차츰 퇴각했다.
석양 무렵에 이르러 적병이 성 안으로 들어가므로 고경명이 재주 부리는 사람 30여 명을 시켜 성 밑으로 토성(土城) 들어가게 하고, 성 밖의 관사와 민가를 모두 불태웠다. 또 진천뢰(震天雷 대포(大砲))를 쏘아 성 안의 창고를 불태우니, 적에게 사로잡혀 간 부녀자들이 물을 길어다 불을 껐다. 해가 저물자, 각기 군사를 거두어 진을 치고 지켰다.
이튿날 동틀 무렵에 관군ㆍ의병 여러 진이 적의 처소로 진격하였다. 고경명은 추촌(楸村) 앞산에 웅거하여 진지를 정하고 곽영은 사직당(社稷堂) 뒷산에 머물러 결진하여, 관군은 북문에서 싸우고 의병은 동문에서 싸웠다. 적의 무리가 마침내 진지를 비우고 나와 고함치는 소리가 하늘에 연이어지니, 형세가 바람 앞에 불길과 같았다. 먼저 관군에게 덤벼드니, 선봉장 영암군수(靈嵒郡守) 김성헌(金成憲)이 말을 달려 먼저 달아났다. 적이 인하여 광주(光州)ㆍ흥덕(興德) 등의 진을 육박하니, 곽영이 관망하다 도망해 달아났다. 의병의 진도 따라서 무너지고, 고경명 및 그 아들로 문신인 고인후(高因厚)와 종사관 유팽로(柳彭老), 장서기(掌書記)인 유학 안영(安瑛) 등이 다 죽었다. 고경명의 큰 아들 전 현령 고종후(高從厚)는 무너져 흩어질 적에 아버지와 아우가 죽은 것을 알지 못하고 무너지는 군사 속에 끼어 나왔기 때문에 죽지 않았다.
○ 그 후 고종후가 이적(李適)에게 답장을 냈는데 다음과 같다.
섬 오랑캐가 난리를 꾸며 임금께서 멀리 파천해 계시니 한 집안의 삼 부자가 함께 벼슬에 오른 이상, 재주는 비록 천박하나 차마 앉아서 국가가 전복되는 것을 볼 수 없어 도내 인사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것입니다. 저 고종후는 죽은 아우와 더불어 먼저 본주의 무너진 군사들을 개유시켜 거느리고 가서 수원(水原)의 진에 부속시키고, 장차 평양으로 향하려 하다가 길이 막혀 돌아왔습니다. 죽은 아우는 와서 담양[秋城]에서 의병을 일으키는 날에 참여했고, 저 고종후는 여산(礪山) 중로에서 병이 들어 고생하다가 와서 태인현(泰仁縣)을 거쳐 폐한 금구현(金溝縣)에 당도하여 인원을 모집하는 한편, 바닷길로 격문을 제주도에 전하여 사슴 쫓는 빠른 말을 보내 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죽은 아우는 선친(先親)을 모시고 전주[完山]로 향하여 남원 일대의 군사와 회합하고 저 고종후는 김제(金堤)ㆍ임피(臨陂) 등 고을을 경유하여 군사를 모집하고 군량을 수합해서 여산에 모이기로 기약했습니다. 죽은 아우는 또 전주로부터 휘하(麾下) 용사를 거느리고 진안(鎭安)ㆍ무주(茂朱) 등지에 복병하여 영남에서 침범하는 적의 군사를 막았고, 선친은 여전히 전주에 머물러 변을 대기하였던 것입니다. 얼마 안 되어 무주에 침범했던 적병이 도로 영남으로 향한 연후에야 비로소 군사를 정돈하여 북으로 올라갈 계획을 하고 삼 부자가 여산(礪山)에 모여 호서(湖西)ㆍ경기(京畿)ㆍ해서(海西)에 격문을 띄워 평안도에 전달되게 하고서 길을 떠나 은진(恩津)에서 유숙하고 장차 이산(尼山)으로 향하려 하는데, 황간(黃澗)ㆍ영동(永同)의 적이 금산(錦山)을 넘어왔다는 말을 듣자 휘하 군사들이 모두 돌아가서 본도를 구원하려 하였습니다. 상의한 끝에 연산(連山)으로 나가 주둔하여 험하고 굳건한 지대를 점령함으로써 양호(兩湖)의 군사와 양식을 바탕 삼아 서서히 적의 형세를 관찰하여 남으로 내려가든지 북으로 올라가든지 하자 하고, 마침내 연산으로 향하여 두 길을 보려고 했습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전주부의 형세가 날로 급하므로 부득이 군사를 옮겨 진산군(珍山郡)으로 들어갔다가, 진산에서 금산으로 들어가서 방어사와 군사를 합하여 좌우익을 만들어, 의병이 종일토록 고전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적에게 밀려 10여 리를 후퇴해 달아났다가 도로 적병을 토성(土城)에서 제압하여 성 밖의 객사(客舍)를 불태우고 진천뢰(震天雷)를 써서 성 안의 창고를 연소시키니, 적에게 사로잡혀 간 부녀자들이 힘을 합해 물을 길어다 불을 껐습니다. 관군이 만약 힘을 합하여 격전했다면 싸움이 하루도 다 걸리지 않았을텐데, 관군이 힘을 쓰지 아니하고 또 해가 저물자 싸움을 중지하니 방어사가 진산 군수를 보내 내일의 일을 의논하였습니다. 저 고종후가 부친께 말씀드리기를, “오늘은 우리 군사가 이득을 보았으니 이 이긴 기세를 타서 군사를 온전히 하여 회군했다가 형세를 보아 다시 와서 들락날락하며 적을 곤란하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적과 대치하여 이 밤을 묵는다면 밤중에 적이 쳐 들어올 염려가 있습니다.” 하였더니, 부친께서 말씀하시길, “너는 부자의 정으로써 내가 죽을까 두려워하는 모양이나, 나는 국가를 위하는 일인데 한 번 죽은들 무엇이 유감되랴.” 하시므로, 저 고종후가 감히 더 말씀드리지 못하고 물러났으며, 방어사는 이날 저녁에 여러 장수들 중에서 힘껏 싸우지 아니한 자를 치죄하였습니다. 적들은 이날 밤에 의병의 진영을 침범하기로 모의하고 있었는데 복병해 있던 우리 장교가 듣자니, 사람이 물 건너는 소리가 나므로 한 졸병을 보내 밭 가운데서 기다려 보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먼저 와서 밭 가운데 잠복해 있던 왜적이 이를 보고서 자기들의 계획이 의병에게 발각되었다고 여겨 마침내 후퇴해 달아났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진격하였는데, 적의 떼가 갑자기 자기 진을 비우고 몰려와 우리 방어진(防禦陣)의 여러 장수에게 덤벼드니, 영암 군수(靈嵒郡守) 김성헌(金成憲)이 대번에 말을 채찍질하여 달아나서 한 번도 맞서지 못하고, 광주(光州)ㆍ흥덕(興德) 두 진도 모두 포위를 당하자 방어진은 바라만보고 무너졌습니다. 의병의 큰 진은 방어진과 서로 바라보며 마주 진치고 있었으므로 이미 그들이 후퇴해 달아난 것을 알고, 오히려 단독으로 적을 당할 계획을 하고 있었습니다. 싸움에 나간 의병이 관군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드디어 퇴각해 달아나 중군진으로 들어와서 진중이 소란했으나, 아직도 든든히 마음을 갖고 대기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한 사람이 뒤에 와서 방어진을 바라보고 문득 놀라며 외치기를, “방어가 퇴각해 달아났다.” 하자, 의병의 진이 드디어 무너져 흡사 거센 물결이 가로지르는 듯하여 다시 억제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의병의 진이 무너지지 않았을 때 선친은 맨 가운데 계셨고 저 고종후는 한쪽 가에 있었으며, 죽은 아우는 독전소(督戰所)로부터 와서 한쪽 가에 있었는데, 무너질 때 저 고종후의 말이 가시덤불에 걸려 넘어져서 말을 다시 굴레 지어 가노라니 여러 군은 이미 멀어져서 그 뒤를 따라 달려갔습니다. 그래서 부자 형제를 서로 잃고 홀로 구차히 살아서 오히려 말하고 밥먹으니 천지에 죄를 진 몸이라, 날로 신의 꾸지람을 기다릴 따름입니다. 선친이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말타기가 익숙하지 못하니 불행히 싸우다 패하면 오직 죽는 것밖에 없다. 우리들이 성공하고 못하는 것에 국가의 안위가 매여 있으니 어찌 한 몸의 화와 복에 그칠 따름이랴.” 하셨습니다. 군사가 무너지던 날 말에서 떨어져서 말이 빨리 달아나니 모시고 가던 유생(儒生) 안영(安瑛)은 작고한 판서(判書) 이후백(李後白)의 외손인데 말에서 내려 자기의 말을 바치고 걸어서 따라가다가 안영도 역시 적의 손에 죽었습니다. 종사관(從事官) 유팽로(柳彭老)가 건장한 말을 타고 먼저 나와서 그 종에게 묻기를, “대장이 포위망을 벗어났느냐?” 하니, 종이 답하기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하였습니다. 유팽로가 즉시 고삐를 돌려 말을 채찍질하여 선친을 난군(亂軍) 속에서 시종하니, 선친이 돌아보고 말씀하시기를, “나는 반드시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인데 그대는 어찌하여 먼저 나가지 않는가.” 하자, 유군이 대답하기를, “내 어찌 대장을 버리고 구차히 살려 하겠습니까?” 하고, 여러 번 말해도 선뜻 가지 아니하고 종시 보호했던 것입니다. 아! 통분하외다. 불초한 몸이 능히 전장에서 죽지 못하고 유독 두 열사로 하여금 선친과 같은 날에 죽게 하였으니 천지간에 한 죄인이라, 통곡밖에 무슨 말을 하리까. 아우는 뒤에 떨어져서 이미 무너진 군사를 정돈하려 하다가 진에서 죽었고, 군사들은 모두 먼저 달아나서 다행히 함께 죽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의병과 승군(僧軍)의 조력을 얻어 시체를 수습해 왔으며 선친도 변을 당한 즉시 몰래 산중에 매장했다가 역시 의병과 승군의 주선을 입어 입관(入棺)해 와서 두 상(喪)은 이미 고이 장사지냈으니 불초는 비록 죽어도 유감은 없습니다. 병든 몸이 항상 하루도 보전 못 할까 염려했었는데, 변란이 생긴 후에는 죽음을 기약하고 4월 이후로는 노상 말 위에 있었으며 비를 무릅쓰고 들판에서 잔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며, 끝내 의병을 수행하다가 이 대고(大故 선친의 상(喪)을 말함)를 만나니 친구들이 모두 장사를 치루기 전에 죽지나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완악한 목숨이 조금 연장되어 무사히 장사를 치렀습니다. 이와 같이 구차히 산 것은 병든 어머님과 어린 아우를 위하려는 생각이요, 또 죽은 아우의 4남 1녀를 길러 그들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다만 병의 뿌리가 깊이 박혀 한 번 발작하면 비록 편작(扁鵲 중국 전국 시대의 명의(名醫))이라도 역시 손을 들 수밖에 없습니다. 호남의 의병이 두 번째 일어난 것은 대개 선친이 남긴 서업(緖業 사업)으로 인한 것이며, 용감한 군사와 건장한 말은 바로 선친이 제주도에 격문을 보내어 불러온 것입니다. 저 고종후가 그 군사를 따르려고 하니, 친구들이 모두 말하기를, “슬픔을 머금고 병든 몸을 부지하라. 반드시 죽어서 유익할 것이 없다.” 하며, 또 생각해 보니 이 몸이 한 번 죽으면 아버지의 친상(親喪)과 아우의 시체를 수습하는 일이 아우나 조카로는 외롭고 약하여 해내기가 어려우므로 참고 기다렸습니다. 장사를 지낸 다음날 영위(靈位)에 곡하고 떠나 의병의 도청(都廳)으로 가서 여러 친우와 일을 같이 하여 선친의 소원을 조금이나마 풀어 드릴 생각이며,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의 처분에 맡길 뿐입니다. 어버이 원수를 갚지 못하고 나라의 수치를 씻지 못하면 살아서 무엇하리까. 다만 한 번 분명하게 죽는 것이 원입니다. 운운. 부자 형제가 함께 전진(戰陣)에 있다가 패전을 당하여 서로 잃고 홀로 구차히 목숨을 유지하여 지금까지 천지의 사이에 숨을 쉬고 있으니 신명이 용서하지 못할 바라, 오직 한 번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지금 보내주신 편지를 받들어, 어머니를 모시고 적을 피하여 온 집안이 평안하심을 알았습니다. 저 고종후는 처자에 힘입어 보전하고 있으나 한결같이 비감할 따름입니다. 쇠한 병으로 본시 편한 날이 없었는데 또 이 대고(大故)를 만나니 비록 조금이나마 완악한 목숨을 연장하여 어머니와 아우를 보전하고 또 죽은 아우의 고아들을 기르고 싶으나, 기력이 끝내 지탱하지 못할 것을 스스로 두려워합니다. 부자간의 슬픔이란 남에게 말할 수 없거니와, 죽은 아우는 본시 활 쏘고 말 달리는 기술이 없었는데 한갓 구구한 충의로써 옷소매를 털고 일어나서 노상 건장한 군사를 거느리고 홀로 진의 전면을 담당하며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그는 노상 말하기를, “오늘날 일은 비록 제 몸을 희생하고 가족을 함몰시킬지라도 오히려 후회할 것이 없다.” 하여, 친한 이들은 대개 다 들었습니다. 그는 군사가 무너지자 뒤에 남아 목숨을 바쳤는데 무상한 이 몸은 홀로 몸뚱이를 보전하였으니, 못[池] 가에 봄 풀이 나면 혜련(惠連)의 꿈을 누가 꾸며 비바람 치는 한 밤중에 옛 언약을 어디서 찾으리오.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간장이 무너지나 그 영특한 모습은 눈앞에 완연합니다. 곧장 저승으로 따라 가고 싶으면서도 오히려 말하고 밥 먹으니 무슨 사람이라 하리까.
또 별지(別紙)에,
우리 온 집안이 무예(武藝)를 배우지 않은 것은 여러 사람들이 다 아는 바입니다. 오직 구구한 충의로써 인심을 격동해 일으키려는 것이었는데, 죽은 아우는 본래 의기에 찬 남아라 죽음을 결심하였습니다. 일찍이 적병이 조령(鳥嶺)을 넘은 뒤로 의병을 불러일으키고자 하여 형제가 함께 격문을 지었는데 그 대략에, “조령은 평탄한 길과 다름이 없고 한강(漢江)은 넓이가 허리띠 하나 만하니, 이때를 당하여 국가의 안위는 비록 대신에게 달렸지만 이처럼 방심해서 되겠는가. 모두 싸움터에 나가서 죽어야지.” 하였고, 또 이르기를, “2백 년을 이 땅에서 옷 입고 밥 먹은 것은 모두 여러 선왕이 생성(生成)해주신 은덕인데, 수천 리 예의(禮義)의 나라에 어찌 남자다운 사람 하나가 없단 말인가.” 하였으며, 그 끝 구절은 죽은 아우가 단독으로 지은 것인데 이르기를, “저놈들이 몰려들면 노중련(魯仲連)처럼 동해(東海)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전단(田單)이 제(齊) 나라를 도로 찾듯 하는 일을 바랄 뿐일세.”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보면 역시 그 마음가짐을 징험해 알 수 있습니다. 격문이 완성되었으나 여러 친구들은 응종하지 아니하며 말하기를, “본도 관군이 아직 온전하니 나라를 위해 싸우는 데는 군사가 모자랄 염려가 없으며, 서로 좋아하지 않는 자가 혹시 군사 일으킨 것을 가지고서 모함한다면 어찌하랴.” 하고, 우리 온 가족도 역시 이르기를, “격문을 띄웠으나 호응하지 않으면 유익은 없고 도리어 해가 있을 것이다.” 하여, 마침내 일을 중지하였습니다. 이광(李洸)이 금강(錦江)에서 군사를 후퇴한 뒤로 인심이 흉흉하여 장차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나주(羅州)의 김천일(金千鎰) 영공(令公)이 편지를 보내 다짐하며, 격문을 돌려 그 군사를 혁파한 연유를 들어 죄를 성토한 다음에 의병을 일으키려 한다 하였습니다. 저 고종후의 일가가 답보(答報)하기를, 순찰사가 나랏일에 성실하지 못한 것은 진실로 죄가 있다 하겠으나 이와 같이 처리한다면 사체에 어긋날 염려가 있으며, 더구나 순찰이 방금 다시 거사하는 마당에 있어 도내 선비들이 말을 모아 성토한다면 순찰이 도내를 호령할 수 없게 되는 동시에 군(軍)과 민간이 복종하지 않을 염려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김천일은 이광과 사돈 간이 되므로 절실히 권하여 순찰사로 하여금 최후의 효과를 거두도록 선도하여 과연 순찰사가 군사를 일으켰는데, 각 읍 백성들이 모두 말하기를, “금강(錦江)에서 아무 까닭 없이 진을 파하고서 지금 무엇하자고 다시 군사를 일으켜 백성을 괴롭히려 하는가.” 하며, 곳곳마다 흩어져 도망가 있었습니다. 국가에 대한 근심이 실로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므로 각 읍 관리와 선비들이 함께 설유하여 간신히 떠나 보냈으나, 도중에서 계속 없어져 산중으로 들어가기만 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의병을 일으킬 계획으로 한편으로는 민심을 진정시키고 한편으로는 대군을 계속 원조하려 하였습니다. 삼도(三道)의 군사가 용인(龍仁)에서 무너지고 의병은 격문을 돌려 북으로 올라가면서 근거지인 전주를 구원하려 하다가 금산에서 실패하였으니, 비록 공은 세우지 못했지만 당시에 만약 의병이 없었던들 호남 지방이 어육(魚肉)의 화를 입게 되었을 것은 왜놈이 들어왔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김천일 영공이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로 약속했으나 그 군사는 다만 나주(羅州) 한 고을에서만 징발하였기 때문에 먼저 출발하게 된 것이요, 가친은 몸소 다니며 여러 고을의 군사를 수합했기 때문에 맨 뒤에 출발하였습니다. 가친이 일찍이 편지에 이르기를, “적이 어찌 하루인들 호남을 잊으랴. 대개 반드시 근왕(勤王)하는 의병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기다리는 모양이다.” 하였습니다. 김 영공은 이미 북쪽으로 향하여 지금 강화(江華)로 들어갔고, 선친은 군사를 호서(湖西)에 머무르게 했던 초기에 본도에서 경보가 있어 조정에까지 멀리 가지 못하고 땅속에서 한을 품게 되었으니 아! 원통합니다. 선친께서 일찍이 가족에게 말씀하시기를, “금년에 천문[天象]을 본즉 장성(將星)이 좋지 아니하니 장수에게 반드시 이롭지 못한 일이 있으리라.” 하였으니, 그러고 보면 가친은 의병을 일으킬 때부터 이미 반드시 죽을 것을 각오하셨던 것입니다. 지난 해 7월에 선대에서 손수 심은, 집 앞의 큰 나무 두 그루가 바람에 뽑혔고, 금년 5월에 본 고을 객사(客舍) 향소문(鄕所門) 앞에 선 수백 년 된 고목이 또 바람에 뽑혀 향소문을 눌러서 문이 부서지고 담이 무너졌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괴이히 여겼습니다. 그러나 어찌 알았겠습니까. 본 고을에서 의병을 먼저 일으켜서 내 한 집만 유독 그 화를 받을 것을. 아! 원통합니다. 이광이 두 번째 군사를 일으킬 적에 격문을 우리 집에 부탁하므로 우리 형제가 합작해서 글월을 이루어 보냈는데 도착하기 전에 다른 사람의 격문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집에서는 다만 그가 과오를 인증하고 죄를 보상하여 국가에 충성을 다하기만 원했는데, 그가 도리어 의병에게 감정을 품고 선친이 국사에 몸바친 뒤에 장계를 올리면서 사실과 틀리게 했으며, 함께 죽은 여러 사람의 사적도 또한 자세히 기록하지 아니한 채 조정에 올렸으니, 조정에서 어찌 이 경위를 다 알 수 있으리까. 아! 원통합니다. 또 생각하건대, “태조(太祖)께서 대업을 창건하신 것은 실로 하느님의 뜻을 받드신 것이다. 압록강(鴨綠江)에서 군사를 돌이켜 대의가 천하에 빛났고 황산(荒山)에서 왜적을 무찔러 공덕이 강역을 덮었으니, 신령은 끝내 반드시 힘입을진대 은택을 어찌 잊을쏜가.”라는 이 글월은, 그 당시 격문 가운데 든 것인데 사람들에게 두루 알리고자 하여 아울러 기록해 올립니다. 이상은 모두《정기록》에 나온다.
○ 그 후 3년 만에 동궁(東宮)에서 치제(致祭)하였는데, 그 제문은 다음과 같다.
만력 22년 갑오년(1594, 선조 27) 정월 20일 기해(己亥) 왕세자(王世子)는 삼가 신하 익위사 부솔(翊衛司副率) 이희간(李希幹)을 보내어 증직 판서(判書) 고 공(高公)의 영에 제사를 드립니다. 대략(大略) 취해 읊은 3천 수의 시는 몇몇 곳에 벽사롱(碧紗籠) 있던 예전에 지은 것이요, 편의한 방략(方略) 12조목은 2번이나 고향에 남긴 사랑이로다. 국가의 다난한 때를 당하여 충의를 외치며 전장에 나섰구려. 옷소매를 걷고 일어서니 무부(武夫)들도 입이 닫히고 기가 눌리며, 당상에 올라 맹서하니 3군이 팔목을 내밀며 죽음을 결단했지요. 군중은 공을 맹주로 추대했고 사람들은 공의 의거를 흠모했소. 조정에서 군사를 훈련한 지 30년에 적을 토벌하는 것은 도리어 서생(書生)에게서 나왔고, 국가가 선비를 기른 지 2백 년에 충성을 바친 것을 다행히 이번에야 보았도다. 어찌하여 장성(長城)이 갑자기 무너졌는가. 마침내 일목(一木)이 지탱하기 어려웠구려. 혈전(血戰)을 벌여 천금의 몸을 범의 입에 몰아넣었고, 남아란 죽을 자리에 죽는거라, 7척의 몸을 홍모(鴻毛)보다 가벼이 여겼소. 큰 공을 중도에서 포기하고 장한 뜻을 품은 채 순절하다니, 일의 성패는 운명이니 다시 말해 무엇하리. 하늘이 착한 사람을 보답한다는 것을 누가 과연 측량하리까. 한 집안에서 나랏일에 죽은 자가 세 분이라, 1개월 사이에 화를 받은 것이 가장 혹심했소. 죽어도 썩지 않아서 영령의 상기도 남아 있으리니, 혼이여! 알거든 다 흠양하시라. 《정기록》에 나온다.
○ 그 후 윤근수(尹根壽)가 다음과 같이 서(敍)를 지었다.
아! 이 책은 임진왜란의 초기에 참의(參議) 고 공이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킬 적에 쓴 격문과 통문(通文) 및 왕복한 편지 등을 모아 만든 것이다. 글이 참의의 수필이 아니면 임피(臨陂) 형제의 수필로서, 한 집안 충의의 사연이 모조리 들어 있어 열렬한 기백이 말 밖에 넘치니, 아! 공경할 만한지고. 사라지는 강상(綱常)이 이에 힘입어 보존되었으며 직언(直言)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실천에 옮겼으니, 이야말로 신하가 국난에 임하여 절개를 다하는 행동을 권장한 것이 자못 무궁하다 하겠다. 아! 공이 그 아들과 함께 국가를 위해 싸우다 죽은 것은 실로 변성양(卞成陽 변호(卞壺))과 같은데, 문장으로 말하자면 변성양은 전하는 것이 없이 장원 급제한 몸으로 적의 손에 순절하였다. 공은 또 문신국(文信國 문천상(文天祥))과 같은데, 문신국의 두 아들은 다만 길 가에서 병들어 죽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또 공의 두 아들이 전후로 순절한 것에 비할 것이 아니니, 공의 한 집에서 이루어진 것이 어찌 보기 드물만큼 우뚝 뛰어났다고 이르지 않겠는가. 승명각(承明閣 옥당(玉堂))에 있을 적에는 사가(賜暇)를 받아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고, 노란 인끈을 띠고 큰 고을 맡아서는 청렴 결백으로 소문이 났으며, 가마귀 떼 같은 군사로 날래고 강한 적과 항거하여서는 다만 대의로써 격려했노라.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는지라 뜻과 같이 되지 않았으니, 몸을 던져 순절하여 마침내 충절로써 나타났네. 공이야말로 한 세상의 전인(全人)이 아니겠는가. 세상에서 날마다 문인(文人)더러 실용성이 적다고 헐뜯는 자가 많으나, 이를 보면 어찌 잘못된 생각이었다고 뉘우치지 않겠는가. 옛날 나일봉(羅一峯)이 문문산(文文山)의 첩(帖)에 발(跋)을 쓰면서 스스로 이르기를, “글자 하나에 눈물 한 방울이라.” 하였는데, 이 기록을 읽는 자는 글자 글자마다 울움이 터질 것이니 글자 하나에 눈물 한 방울 정도가 아니다. 을미년(1595, 선조 28)에 내가 영남(嶺南)을 다녀오다 봉성(鳳城)에 머물렀는데, 공의 아들 유후씨(由厚氏)가 나를 공의 지기지우(知己之友)라 하여 객관(客館)으로 찾아와 보고 이 책을 보이면서 책 이름을 지어 달라고 청하므로 나는《정기록(正氣錄)》이라 쓰고 아울러 서문의 청탁마저 허락했다. 그러나 이내 이루지 못하고 여러 해를 지나는 동안에 유후씨도 역시 세상을 떠났으니 슬픈 일이다. 지금 그 아우 용후씨(用厚氏)가 또 예전의 청을 거듭하는데 내 어찌 감히 죽은 이에게 허락했던 것을 이제 와서 그만두겠는가. 더구나 이로 인해 감개 무량한 바 있으니, 《정절집(靖節集 도잠(陶潛))》ㆍ《문산집(文山集 문천상(文天祥))》 등을 간행하게 한 것이 특명에서 나왔으며 바로 병란 직전의 일인즉, 성상의 깊으신 생각으로 오늘날이 있을 것을 짐작하시고 미리 절의를 배양하기 위해 생각한 것같이 되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뜻과 서로 합치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라 하겠는가. 이 《정기록》이 세상의 교화에 관계되는 것이 실로 《문산집》 등과 더불어 나란할 것이니, 어찌 한 집안에만 수장하는 데 그쳐서야 되겠는가. 난리가 평정되고 의논이 문사(文事)에 미친다면 신하를 위해 충성을 권하는 것이 이 책보다 앞설 것이 없으니, 판각해서 세상에 반포하기를 나는 공수(拱手)하고 기다리는 바이다. 만력 기해년(1599, 선조 32) 10월 □일 수충공성 익모수기 광국공신 보국숭록대부 해평부원군 겸지 경연사(輸忠貢誠翼謨修紀光國功臣輔國崇祿大夫海平府院君兼知經筵事) 윤근수(尹根壽)는 서(敍)함. 《정기록》에 나온다.
○ 비문(碑文)은 유명 조선국 증 숭록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판의금부사 지경연 춘추관 성균관사 행 통정대부 공조참의 지제교 겸 초토사 고공 신도비명(有明朝鮮國贈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判義禁府事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行通政大夫工曹參議知製敎兼招討使高公神道碑銘)이라 하다. 만력 임진년(1592, 선조 25)에 나라에 왜난(倭難)이 있자 참의 고공이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온 절개를 나타냈다. 이윽고 십여 년이 지났으나 신도비문이 아직 이루어지지 못했는데, 하루는 공의 자제 용후(用厚)가 나를 찾아보고 청하기를, “선친이 공의 형제와 종유한 바 있으니 선친이 나랏일에 몸을 바친 전말은 공께서 분명히 아는 바이므로, 감히 공의 비문 한 장을 얻어서 이 사적을 묻히지 않게 하는 것이 원입니다.” 하고, 또 그 자당의 명을 말하였다. 아! 공의 사적을 이야기하면 눈물이 나며 슬픔이 그지없으니, 내 비록 글은 잘 못할망정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왜적이 크게 몰려와 침범할 즈음에 공은 광주(光州) 향리에 있었다. 우리 군사가 싸울 적마다 무너져 조령(鳥嶺)의 요새를 잃어버리게 되었는데 호남 순찰사가 왕실(王室)을 호위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공은 홀로 아들 고종후(高從厚)ㆍ고인후(高因厚)와 더불어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했다. 이윽고 또 임금께서 서도로 파천하시고 도성(都城)도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공은 밤낮으로 목을 놓아 통곡하였다. 순찰사가 근왕병(勤王兵)을 영솔하고 금강(錦江)에 당도하자 서울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허둥지둥 진을 파하여 온 도내 인심이 흉흉하였다. 공이 순찰사에게 편지를 보내어 뒤에라도 잘하도록 책망했는데 말이 진지하고 절실했으나 반성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공은 국가가 기울어 가는 것을 통분하게 여기고, 나주 사람 전 부사 김천일(金千鎰)과 함께 흥복(興復)할 것을 계획하며 편지 왕래가 많았다. 공은 맨 먼저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고 5월 무자일에 담양부(潭陽府)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옥과(玉果) 사람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 등이 공을 추대하여 맹주(盟主)로 삼으니, 공은 본시 군사면에 익숙하지 못하지만 개연히 장단(將壇)에 오르며 늙고 병든 것으로써 사양하지 않았다. 그리고 도내에 격문을 발송하여, 모집에 응한 자가 날마다 모여 들었다. 6월 기해일에 공이 담양부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나섰다. 이때 삼도(三道)의 군사가 용인(龍仁)에서 무너져 호서(湖西)ㆍ호남이 더욱 흔들렸는데 유독 공을 의지하여 자중했다. 공은 전주로부터 군사를 정돈하여 북으로 올라가 여산(礪山)에 당도하자 손수 격문을 초하여 여러 도에 고하여 관서(關西)로 도달하게 했다. 공이 장차 이산(尼山)으로 향하려 하는데, 적이 황간(黃澗)으로부터 금산(錦山)으로 넘어올 때 군수가 패전하여 죽었으므로 적의 형세가 더욱 성하다는 소식을 듣자, 부하 군사들이 앞다투어 돌아가 본도를 구원하고자 하였고 공도 역시 그렇게 여겼다. 7월 경신일에 공이 마침내 군사를 진산(珍山)으로 옮겨 금산의 적을 치려 하는데, 날랜 군사로 모집에 응한 자가 갈수록 많아서 군(軍)의 기세가 더욱 떨쳤다. 병인일에 드디어 장병들에게 부서를 정하여 금산으로 들어가서 방어사 곽영(郭嶸)과 더불어 좌ㆍ우익이 되었다. 공이 먼저 정병 수백 기(騎)를 보내어 곧장 적의 소굴로 내닫게 하였는데, 그들이 적에게 눌려 후퇴하게 되었다. 공이 북을 울려 싸움을 독려하니, 군사들이 모두 죽음을 걸고 싸워 도로 적병을 토성(土城)에서 제압했다. 성 밖의 관사(館舍)를 불태우고 또 대포를 쏘아 성 안을 연소시키자 기세가 올랐다. 적이 죽음을 무릅쓰고 돌격해 나오므로 의병이 사면으로 포위 공격하니 적은 사상자가 많아서 감히 더 나오지 못했다. 마침 날이 저물고 관군이 또 싸움에 조력하고자 아니하였으며, 토성이 두텁고 완전하여 졸기에 무너뜨릴 수 없으므로, 마침내 퇴군하여 진으로 돌아왔다. 이날 저녁에 방어사가 사람을 보내어 명일에 협력하여 싸울 것을 약속하니, 공의 맏아들 고종후가 공에게 말하기를, “오늘 우리 군사가 이득을 보았으니 이 승리의 기세를 가지고 군사를 온전히 하여 돌아갔다가 기회를 살펴 다시 나와 적을 곤란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며, 적과 대치하여 들에서 잔다면 혹시 야습(夜襲)을 당할까 염려됩니다.” 하자, 공이 말하기를, “너는 부자의 정으로써 나 죽는 것을 두려워하느냐. 나는 나라를 위해 한 번 죽는 것이 직분이다.” 하다. 이날 밤에 적이 과연 침범하기를 모의하고 몰래 나와 복병을 설치하려 하다가 순라군(巡羅軍)에게 발각되었다. 이튿날 정묘일에 공이 방어사와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하는데, 공은 적과 5리쯤 떨어져서 진을 머물러 방어의 진과 마주 보게 되었다. 공이 8백여 명의 기병을 보내어 싸움을 걸어 미처 어울리지 못했는데, 적이 자기네 진지를 비우고 몰려 나와 먼저 관군에게 범하니 방어사 관하 장수 김성헌(金成憲)이 말을 채찍질하여 먼저 도망갔다. 적이 광주(光州)ㆍ흥덕(興德) 두 진을 덮치니 방어의 진이 그 바람에 따라 무너지므로 공은 단독으로 담당할 계획을 하고 군사로 하여금 모두 자신만만하게 가지고 대기하게 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갑자기 외치기를, “방어의 진이 무너졌다.” 하니, 의병의 진도 따라서 무너졌다. 공은 진작부터 하는 말이, “나는 말타기가 익숙하지 못하니 불행히 싸움에 패하면 오직 한 번 죽음이 있을 뿐이다.”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좌우에서 공더러 말을 타고 뛰라고 청하자, 공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구차히 죽음을 모면하려 하겠는가.” 하였다. 공의 부하가 공을 부축하여 말에 올려 앉혔는데, 공은 이내 말에서 떨어지고 말은 빠져 달아나므로 공의 부하 유생(儒生) 안영(安瑛)이 말에서 내려 공을 태우고 자기는 도보로 시종했다. 공의 종사관(從事官) 유팽로(柳彭老)가 탄 말은 몹시 날래서 먼저 나오게 되어 그 마부에게 묻기를, “대장이 벗어났느냐?” 하자, 마부가 벗어나지 못했다고 대답하였다. 유팽로가 문득 말을 몰고 도로 난병(亂兵) 속으로 들어가 공을 모시니, 공이 돌아보고 말하기를, “나는 반드시 면하지 못할 것이니 너는 빨리 벗어나라.” 하니, 유팽로가 대답하기를, “제가 어찌 차마 대장님을 버리고 살 길을 찾겠습니까.” 하였다. 적의 칼날이 마침내 공에게 미쳐 공이 결국 죽고 유팽로는 제 몸으로 공을 막다가 다 함께 죽었으며, 안영도 죽었다. 공의 둘째 아들 고인후(高因厚)가 무사(武士)를 거느리고 앞 줄에서 화살과 돌 속을 출입하다가 군사가 무너지자 말에서 내려 그 부하들을 정제하고 진에서 전사했다. 근처 고을 백성들은 공이 패했다는 말을 듣자 노소간에 모두 짐을 짊어지고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 “우리들은 이제 다 죽었다.” 하며, 곡성이 들판에 진동하였다. 진은 무너졌으나 군사들이 공의 생사를 모르고 차츰 와 모였는데, 마침내 공이 전사했다는 사실을 알고 모두 울부짖으며 해산했다. 남도 백성들은 알건 모르건 간에 다 서로 조문하며 원통하게 여겼다. 공이 백발 늙은 서생으로 국가가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 정의를 부르짖고 일어서서 호남 의병의 선창이 되자, 비록 어리석고 조급한 군졸이나 산중에 도피한 자들이 모두 소문을 듣고 다투어 모여들어 한 달 이내에 의병의 수효가 수천 명에 달했으니, 대개 공의 의기가 지성에서 우러나서 남을 감동시킬 만했기 때문이다. 공이 임진년(1592, 선조 25) 봄에 천문(天文)을 쳐다보고 집안 사람에게 말하기를, “금년에 장성(將星)이 좋지 않으니 장수에게 반드시 불리한 점이 있을 것이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공은 진실로 생사의 이치에 밝음과 동시에 의거하는 날부터 벌써 목숨을 던질 것을 결정했던 것이다. 마침내 금산에 있는 왜적을 토벌하게 되자 사위 박숙(朴橚)에게 편지를 주어 집안일을 부탁하였으니, 공이 처사한 것을 보면 대개 본래부터 마음을 결정했던 모양이다. 왜적이 금산에 웅거해 있을 적에 병권을 장악한 문신ㆍ무신의 장수들이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방황하고 있는데, 유독 공은 일의 성패를 헤아리지 아니하고 친히 범의 소굴로 들어가서 적과 더불어 혈전(血戰)을 벌여 몸을 나라에 바쳐 순절했다. 비록 승첩을 올려 공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공이 순절한 후로 공이 전장에 나가 죽는 것을 보고서 적을 공격하는 자가 계속해 일어났기 때문에, 적이 비록 여러 번 이겼으나 사상자가 역시 반을 넘었으며 군사를 거두어 가지고 밤에 도망했은즉 국가에서 호남을 보유하여 뒷날 국토를 회복하는 근거지가 된 것에 대하여 그 공이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공의 체백(體魄)이 몰래 금산 산중에 묻혔었는데, 적의 군사가 가로막고 있어 바로 곧 거두어 묻지 못하고 8월 모일에야 그 아들 고종후(高從厚) 등이 의병ㆍ승병(僧兵)을 청하여 공의 시체를 발굴해 내서 무릇 40여 일만에 비로소 염습했다. 성상께서 용만(龍灣)에 계시던 날에 공이 의병을 일으켜 온다는 말을 들으시고 기뻐하는 빛이 얼굴에 가득하여 공에게 공조참의 겸 초토사(工曹參議兼招討使)를 제수하고 글월을 내려 위로했는데 그 글월에, “열읍(列邑)을 지휘하여 모든 것을 조달해서 도성을 회복하게 하라.” 하신 말이 있었다. 이때에 공조 좌랑(工曹佐郞) 양산숙(梁山璹)이 행재소(行在所)로부터 남으로 돌아오게 되자, 성상께서 면대하여 타이르시기를, “돌아가거든 고경명(高敬命)ㆍ김천일(金千鎰)에게 말하라. 그대들이 하루빨리 강토를 회복해서 나로 하여금 그대들의 얼굴을 볼 날이 있게 하라.” 하였는데, 벼슬이 전달되기 전에 공은 이미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이 사실이 보고되자 성상께서는 매우 슬퍼하시고 관작을 위에 있다. 추증하도록 명령했으며, 뒤에 다시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의 증직을 내렸다. 공이 순절하자 순찰사는 예전 혐의로써 심지어, “어두운 밤에 군사를 몰고 가다가 군사가 무너져 죽었다.” 하며, 공을 모함하여 장계를 올렸는데 그 이후 이정엄(李廷馣)이 순찰이 되어 공을 표창하여 나랏일에 죽었다는 장계를 올렸다. 그 글에, “고 모는 맨 먼저 의병을 일으켜 근왕(勤王)에 나섰으며 몸소 적의 진지에 들어가 적과 혈전을 벌이다가 불행히 패하여 부자가 함께 죽었다.” 하여, 비로소 그 실상을 파악했다고 한다. 을미년(1595, 선조 28) 여름에 유사(有司)를 명하여 정문(旌門)을 세우게 했고, 신축년(1601, 선조 34) 가을에 문생 전 현감 박지효(朴之孝) 등의 상소로 인하여 특명으로 광주에다 사우(祠宇)를 건립하게 하여 액호(額號)를 포충사(褒忠祠)라 내리고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고 이어 봄가을로 제향을 받들어 대대로 끊어지지 말게 하라고 했으니, 아! 이로써 군신 간의 의를 볼 수 있다. 공의 휘(諱)는 경명이요, 자(字)는 이순(而順)이며, 파계는 제주(濟州)에서 나왔는데, 그 선세에서 장흥(長興)으로 관향(貫鄕)을 받아 장흥 고씨가 되었다. 가정(嘉靖) 계사년(1533, 중종 28) 11월 30일 무진일에 태어났으며, 아들 6형제를 두었다. 맏아들은 고종후인데 정축년(1577, 선조 10)에 무과(武科)에 급제했으며 상차(喪次)로부터 군사를 일으켜 아비의 원수를 갚기로 맹서하고 영(嶺) 밖에서 전전(轉戰)하여 싸우다가 진주성(晉州城)이 함락되자 강에 빠져 죽었다. 그 후에 도승지(都承旨)의 증직을 내렸다. 그리고 그 다음은 곧 고인후이니 기축년(1589, 선조 22)에 문과에 급제했으며 공을 따라 함께 진중에서 죽어 예조 참의(禮曹參議)의 증직을 내렸다. 운운. 윤근수(尹根壽)는 찬(撰)함.
○ 그 후 또 치제하였는데 그 제문은 다음과 같다.
만력 31년 계묘 8월 모일에 국왕(國王)은 신하 호조 정랑(戶曹正郞) 조엽(趙曄)을 보내 판서 고경명의 영(靈)에 제사한다. 영은 성화(聲華)가 일찍부터 드러나고 재주와 학식이 다 우수하며, 문필은 천 사람보다 뛰어나고 가슴속에 수만 군사가 들었었네. 선(先) 조정에 뽑히어 무오년(1558, 명종 13)에 문과 했다. 여러 번 장솔(張率)의 벼슬에 옲겼고, 중간에 이르러 침체되어 안진경(顔眞卿)의 얼굴을 보지 못했도다. 하루아침에 왜적이 침입하자 여러 고을이 파도처럼 휩쓸려서 곽주영(郭州營) 안에 성유(成裕)처럼 모두 밤에 도망을 치니 수양성(睢陽城) 안에 장순(張巡)마냥 사수할 자 누구던가. 유독 의기를 분발하여 군사를 모아서 목숨을 바쳐 나라에 보답하려고 맹서했네. 성지(城池)나 무기가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으니, 어느 누가 몰아치는 오랑캐를 막아내리오. 먼 데나 가까운 데나 크나 작으나 모두 호응하니, 실로 의열(義烈)을 먼저 외친 때문이로다. 외로운 충성을 스스로 허락하는데 한 번 죽는 것이 어찌 어려우랴. 정의의 군사란 강한지라, 순(順)과 역(逆)이 이미 구별되었다. 곧은 편은 언제나 씩씩한 법이라, 많고 적은 것으로 어찌 따지리오. 피를 마시고 단에 오르며, 주먹을 들고 칼날을 무릅썼네. 싸움을 잘못한 탓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과연 알기 어려운 법이라오. 죽을 곳을 얻었으니 글 읽는 선비더러 담력 없다 이르지 마오. 충효(忠孝)의 대절(大節)은 부자(父子) 세 사람일세. 매양 묘소를 수축할 겨를이 없어 한이더니, 이제 영을 모실 곳이 있음을 기쁘게 여기네. 사당 모양이 매우 엄숙하니 족히 절개 굳은 장부의 기풍을 상상할 만하고, 향화(香火)가 해마다 끊어짐이 없으니 한 고을 선생으로 제사하는 정도가 아니외다. 이는 조정에서 거행한 것이 아니라, 바로 선비들의 주선에서 나왔구려. 절개를 천추(千秋)에 표시하고자 하니 사당이 어찌 편액(扁額)이 없을쏜가. 포충(褒忠)이란 두 글자를 내리니 실상과 이름이 서로 알맞네. 시골 마을이 찬란하여 빛이 나니 어찌 조청헌(趙淸獻 조림(趙林))의 이표(里表)에 비할 뿐이랴. 길손이 손으로 가리키며 눈물을 떨어뜨리니 반드시 현산(峴山)의 귀부(龜趺 양고(羊祜)의 비석돌)만이 아니로세. 제사를 드리기 위해 조관(朝官)을 보내는데 관작을 추가(追加)함에 있어 판서(判書)가 오히려 부족하오. 천운이라 어찌하리, 정충(精忠)은 구천에서 다시 보기 어려우리니, 혼이여! 돌아와서 박한 제물이나마 한 잔 술에 흠양하시라. 모두《정기록》에 나온다.
○ 경기도 수원 충의위(忠義衛) 홍언수(洪彦秀)가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였다. 홍언수가 미천한 몸에서 낳은 아들이 있으니, 이름은 홍계남(洪季男)으로 용맹과 힘이 무리중에서 뛰어났다. 경인년(1590, 선조 23)에 통신사(通信使)의 군관이 되어 황진(黃進)과 더불어 일본을 다녀왔기로 그놈들의 강약을 자세히 알고 있었는데, 이에 이르러 아비의 군사를 따라 적을 쳐서 여러 번 싸워 승첩을 올렸다. 전후로 적의 귀를 베어 온 것이 백여 개에 달했으므로, 인근에 진을 친 적들이 위축되어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곧 군공(軍功)을 들어 본부(本府)의 판관을 제수했다.
○ 충청도 전 찰방(察訪) 박춘무(朴春茂)가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였다.
○ 전라도(全羅道) 전 보성 현감(寶城縣監) 임계영(任啓英)ㆍ박광전(朴光前) 등이 능성 현령(綾城縣令) 김익복(金益福) 등과 더불어 삼가 두 번 절하며 열읍 여러 벗님에게 돌리는 글월은 다음과 같다.
아! 국가가 믿고서 걱정이 없었던 것은 아래 삼도(三道)가 건재하기 때문이었는데, 경상ㆍ충청은 이미 무너져 적의 소굴이 되었고 오직 호남만이 겨우 한 모퉁이를 보전해서 군량의 수송과 군사의 징발이 모두 이 한 도만을 의지하고 있으니, 국가를 부흥할 기틀이 실로 이에 있다. 그런데 이제 서울이 급박하다 하여 순찰(巡察)은 정병을 거느리고 바닷길로 올라갈 계획을 하고 있고, 병사(兵使)는 수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이미 금강(錦江)을 넘었으며, 두 의병장의 진 역시 각기 근왕(勤王)을 위하여 이미 본도를 떠났다. 열읍의 장사(將士)들도 장차 나가기로 결정되어 남은 군사가 몇이 없으므로 적이 들어오는 중요한 길목에 방비가 극히 허술하고 호서(湖西)의 적이 이미 본도 경계선을 범했으니, 석권(席卷)의 형세가 장차 이루어질 터인데 극복할 희망은 무엇을 믿겠는가. 국가의 일이 너무도 위태하니 진실로 통곡할 일인 동시에 이야말로 의사(義士)가 분발할 때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적이 성 밑에 당도할 때, 우리 장정들을 무찔러 죽일 것은 뻔한 일이다. 슬프다! 우리 민생이 몸 둘 곳이 어디며 실가(室家)는 어느 곳에 둔단 말이냐. 영남에서 이미 이렇게 당한 것은 귀로도 들었고 눈으로도 보았으니, 산중으로 도망가 숨을 수도 없고 구차히 목숨을 보전하여 살길도 없어서 결국 죽고 말 것이다. 기왕 죽을진대 어찌 나라를 위해 죽지 않겠는가. 하물며 만에 하나라도 중요한 길을 막아 지켜서 적의 세력을 저지시킨다면 사지(死地)에서 살아나는 것도 이 기회요, 부끄럼을 씻고 나라를 회복하는 것도 이 때인 것이다. 대체로 우리 도내에는 반드시 누락된 장정과 흩어져서 도망간 군사가 있을 것인즉, 만약 식견있는 선비들이 서로 함께 불러 들여 권면하고 격려해서 힘을 모아 일어나 스스로 한 군단을 편성하고 적의 향하는 바를 감시하여 굳건히 요충지대를 지킨다면 위로 관군의 성원이 될 것이요, 아래로 한 지방의 생명을 안보할 것이다. 이 시기에 미처 일을 도모하기는 영남 사람 만한 이가 없는데 영남 사람은 적을 만난 처음에 한 마음으로 단결하여 막아 내려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망치는 것만 일을 삼았다. 이는 비록 허둥지둥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데서 나온 까닭이었으나, 오늘날 생각하면 반드시 후회가 있을 것이다. 나중에 적의 세력이 팽창하여 가옥들이 불에 타고 처자들이 능욕을 당하고서야 의사가 분연히 일어나서 많은 수효의 적들을 목 베거나 사로잡았으니, 비록 사람의 마음을 비교적 강인하게 하였다고 하겠으나 역시 이미 늦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제군들은 모두 이와 같은 일을 징계 삼아 나태한 습성을 버리고 남보다 먼저 출발하여 기약한 날짜에 뒤지지 않도록 하라. 우리들은 본시 활 쏘고 말 달리는 재주가 없고 병법도 알지 못하니 지휘하여 적을 물리치는 데 있어서는 너무도 생소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남보다 먼저 창의한 것은 한편으로 의사의 뜻을 격려하고 한편으로 용사의 기운을 분발하자는 바이니, 인간의 양심이 일찍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반드시 흥기하는 바 있을 것이다. 이 격문이 도착하는 날에 곧 뜻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온 고을을 효유하여 군인들을 기록해 가지고 이달 20일 보성(寶城) 관문으로 와 모이도록 하라. 한번 기회를 놓치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임금이 욕을 당해도 구원할 줄 모른다면 어찌 사람이라 하리오. 모두 전말을 생각하여 창의할 것이니, 여러분은 도모하시라.
○ 송제민(宋濟民)의 격문은 다음과 같다.
삼가 나 송제민(宋濟民)이 지난달 23일에 의병장을 따라 수원산성(水原山城)에 당도하여 5일 동안 머물렀는데, 서울에 있는 적이 아직 치성하고 청주(淸州)ㆍ진천(振川) 등지의 유동하는 적이 역시 날뛰는데 외로운 군사로 깊이 들어가면 군량을 수송하지 못할 염려가 있었으므로, 온 진중이 모두 비생(鄙生)을 추천하여 충청도로 가서 의병을 모집하여 길을 막고 있는 적을 소탕하고, 구원 오는 군사를 통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와서 충청도의 사우(士友)들과 더불어 의병을 모집한 바 20일 사이에 정병 2천여 명을 얻어서 공론에 따라 전 도사(都事) 조헌(趙憲)을 추대하여 좌의대장(左義大將)을 삼아 황간(黃澗)ㆍ영동(永同) 이하의 적을 방어하게 하고, 전 찰방(察訪) 박춘무(朴春茂)를 우의대장(右義大將)으로 삼아 금강(錦江) 이상의 적을 방어하게 하려던 것이었는데, 일을 미처 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금산(錦山)의 패보(敗報)를 들었으니 시운인가, 천명인가, 그렇지 않으면 인사(人事)를 제대로 극진히 하지 않은 탓인가. 말을 돌이켜 남쪽으로 돌아와 의병이 흩어지기 전에 다시 또 소집해 볼 계획이었는데, 은진(恩津)에 당도하자 비로소 대군이 흩어져 어찌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아! 사람이 누군들 죽음이 없으리오만 죽을 자리를 얻어 죽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섬 오랑캐가 한창 극성을 부리던 날을 당하여 강병과 용장들도 역시 모두 관망하지 않으면 달아나서 구차스레 목숨을 유지하는데, 고제봉(高霽峰)은 유아(儒雅)한 문관으로서 본시 군사면에 대한 일을 알지 못했으나 하루아침에 군중의 추대를 받아 문득 장단(將壇)에 올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임금에게 보답했다. 그 아들은 아비를 따라 죽어서 충성과 효도가 아울러 한 집안에 났으니 죽어도 영화가 남아서 열렬한 빛이 있는지라, 사람마다 한 번 죽음은 있는데 고제봉은 유독 그 도리를 다하고 그 자리를 얻었으니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만 깊이 애통할 일은 임금님께서 서도를 순행하시고, 종묘와 사직이 잿더미가 되었으며, 조선 7도가 모두 흉한 왜적에게 유린을 당했는데 오직 호남 한 도만이 아직까지 다행히 보전되었으니 국가를 회복할 기본이 실로 이곳에 있거늘, 장수는 태만하고 군사는 교만하여 걸핏하면 무너져 흩어지고 마는 것이다. 대개 창의한 후부터 인심이 비로소 진정되어 모두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번 싸워 패하자 의기가 꺾여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빠져 도리어 나태한 장수와 교만한 군사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아! 저 완악하고 패역한 군졸들이 공(功)을 좋아하고 이욕을 탐내어 유익하면 나가고 해로우면 피하는 것은 본시 그들의 제 몸을 꾀하는 상투 수단이라, 무엇을 책하며 무엇을 나무라겠는가마는, 일찍이 호남은 예의의 지방으로 선왕이 휴양(休養)해 주신 은혜에 젖은 지가 수백여 년인데 평시에 선비라 자칭하여 인의(仁義)를 자랑하는 자들도 이미 공명만 탐내어 피하기를 꾀하며, 수천의 굳센 졸병들도 일시에 무너져 흩어져서 한 사람도 장수의 죽음을 막아낸 자가 없으니 이 어찌 무식한 무리들의 웃음거리만이랴. 실로 흉한 오랑캐에게 부끄럼이 될 것이다. 아! 피를 입에 바르고 장수에게 다짐하던 추성(秋城 담양)의 부정(府庭)이 저기 있고, 마음으로 천지 신명에게 맹서하여 밝은 해가 내리비침이 저러하니 모르겠도다. 장차 무슨 면목으로 천지간에 용납을 받을 것인가. 아! 인의가 마음에 박힌 것은 실로 하늘에서 받은 바라 다른 사람이나 나나 마찬가지이니 진실로 피차의 다름이 없지만, 물욕에 팔리어 그 본심을 상실한 자가 간혹 있으니 사람의 형상을 하고 짐승의 마음을 지닌 자도 역시 있을 것인 즉, 충성과 효도를 어찌 사람들 모두에게 책할 수 있으랴. 그러나 이 왜적을 토벌하는 일은 역시 불충하고 불효하는 자들도 함께 원하는 바이니, 어찌 충신이나 의사의 사사로운 원수일 뿐이겠는가. 이미 당한 바를 들어 말하면 남의 처자 자매를 잡아다가 열 놈이 다투어 간음하여 죽게 하는 일이 잇달아 일어나고, 부형을 찔러 죽이고 아이들을 삶아 죽이며, 동네 인가를 불태우고 재물을 약탈하며, 남의 소와 말을 몰아가고 남의 노복을 부려먹으며, 좋은 전답을 탈취하고 남의 선산을 헐어 버리어 궁흉 극악(窮兇極惡)이 천지에 가득 차니 무고한 백성들이 난을 피해 도망가다 길가에 넘어지고 구렁창에 빠져 죽어 그 수효가 몇천만 명인지 헤아릴 수 없는 정도다. 요즘 7도(道)가 탕진되고 또 5고을이 함락되었는데, 그 5고을은 실로 호남의 함곡관(函谷關) 같은 존재로 사방이 막혀서 산을 의지해 험하고 굳건하니 이쪽에서는 공격하기 어려운 점이 있고, 저 왜적놈들은 팔을 내뻗는 편리함이 있다. 이 형세를 따지면 이미 쉽고 어려운 차이가 있으며, 우리 군사는 이제 막 꺾이어 사기가 □저상되고 적은 이미 승세를 탔으니 왜의 세력은 저절로 확장될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웅현(熊峴)의 혈전(血戰)에 힘입어 적의 기세가 조금 꺾였고 전주가 방비 태세를 갖추고 있으므로, 놈들이 힘을 요량하여 스스로 물러가니 형세가 몰아 쫓아낼 가망이 있다. 호서(湖西)의 의병이 은진(恩津)ㆍ연산(連山)ㆍ진안(鎭安)ㆍ옥구(沃溝)를 옹위하여 수비하는 품이 질서가 있고, 대장 조헌(趙憲), 참장(參將) 이천준(李天駿)이 시대에 부응하는 인물로서 천심을 측정하고 시국을 관찰하여 적을 요량해서 승리를 결정하여 옛사람에게 못지 않다. 형세상 놈들이 서쪽으로나 북쪽으로 달아나지는 못할 것이며 반드시 무주(茂朱)를 경유하여 동으로 영남을 향해 도망갈 것이나, 김(金)ㆍ곽(郭) 두 장수가 군사를 쓰는 것이 귀신과 같아서 적의 간담을 서늘케 할 것이니 반드시 영(嶺)을 넘어서지 않으려 들 것이며, 중국 군사 5만 명이 우리 근왕(勤王)의 군사와 함께 천지를 뒤흔들며 북으로부터 남으로 내려오면 송도(松都)ㆍ한양(漢陽)에 있는 적의 도망병과 충청도에 있는 적의 남은 부대가 내리 밀려서 돌아갈 길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금산(錦山)의 적과 합세하여 서ㆍ남으로 충돌하되 궁지에 빠진 신세라 죽음을 걸고 달려들 것이니, 후퇴하기 좋아하는 장수로 무너지기 잘하는 군사를 몰아친다면 어찌 반드시 지탱할 것을 보장하랴. 이것이 실로 호남 부로(父老)와 사민(士民)들의 막대한 근심거리인 것이다. 아! 옛사람은 천하의 백성을 나의 동포로 삼았는데 하물며 우리 본도 선비들은 조상 때부터 이 땅에서 태어나고 이 땅에서 살았으니 선인들의 혼백이 깃들여 있는 곳이요, 부모 처자가 편안히 살던 곳이요, 형제 자손들이 생식(生息)한 곳이요, 이웃 친구들과 교유하던 곳이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변을 만나 오랑캐 놈들의 신첩(臣妾)과 노복(奴僕)이 된다면 이 이상의 욕됨이 있겠는가. 한 번 죽는 것이 오히려 영광일 것이다. 더구나 흉한 참변이 계속되어 골육과 친척이 함께 적의 손에 도륙됨에 있어서랴 기왕 죽을 바에야 오히려 적과 싸워서 죽는 것이 낫지 않은가. 이제 만약 한 번 싸움을 피하고 반드시 살 길을 찾고자 할진대 그 살 길을 마침내 얻지 못한다면 오늘날 같은 참화가 있을 뿐이요, 그렇지 않고 한 번 싸움을 결심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꼭 죽을 이치도 없는 것이며 결국 참혹한 화를 면하고 길이 무궁한 복을 받을 것이니, 이는 모두 절박하여 결코 그만둘 수 없는 거사이다. 어찌 반드시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이 우러난 연후에만 그러하겠는가. 아! 배를 함께 타다 물에 빠지면 서로 건져주는 것은 호(胡)와 월(越)도 한 마음이라 했는데, 무릇 한 도(道) 안에서 함께 사는 우리로서는 실로 배를 같이 탄 형세로서 서로 물에 빠질 염려가 조석에 임박했으니, 비록 호ㆍ월의 사람이라도 부득불 마음과 힘을 일치하여 어려움을 면해야 하겠거늘 하물며 산천의 기품(氣稟)이 서로 흡사하고 학문의 취향도 서로 같아서 실로 형제의 의(義)가 있은즉 옛사람이 이른바 막연한 동포라는 말 따위에 그칠 바가 아니다. 무릇 우리 도내 각읍 부로(父老)들은 아비가 그 자식을 권장하고 형이 그 아우를 권면하여 지조와 절개를 가다듬고 다시 의병을 일으켜 흉한 칼날을 막아서, 위로 임금의 원수를 갚고 사람과 귀신의 분을 씻으며 아래로 부모를 봉양하고 처자를 보전하여 길이 그 가업을 편안히 하면 천만다행일 것이다.
○ 호성감(湖城監)이 양호(兩湖)에서 군사를 수합하여 2천여 명을 얻어 아산(牙山)을 경유하여 서해(西海)로 배를 타고 행재소(行在所)로 향하여 근왕(勤王)의 길을 떠나다.
○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이 남원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진안으로 향하다가, 순찰사가 다시 나누어준 군사를 진산(珍山) 이현(梨峴)으로 전진시켜 동복 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 등과 더불어 험한 곳에 웅거하여 복병을 설치하다.
○ 곽영(郭嶸)이 금산(錦山)에서 무너져 전주에 도착하였는데, 영(營)에 머물고 있는 영리(營吏)의 고목(告目)이 있어 그대로 전주에 머물게 하다. 그 종사관(從事官) 한 사람 이용순(李用諄) 이 한산(韓山)에서 집안에 우환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머물러서 아직 영에 돌아오지 않았다. 금산에 돌아와 모인 적이 사방으로 흩어져 불을 놓고 수색하여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여 전보다 배나 참혹했다. 20일에 진산(珍山) 관사를 불태우고 다시 금산으로 들어와 혹은 옥천(沃川)으로 물자를 실어내며, 무주(茂朱)의 적도 역시 물자를 지례(知禮)로 실어내어 모두 후퇴해 도망갈 계획을 하는 것 같다고 동현(同縣)의 현감 장 별장(張別將)과 어 복병장(魚伏兵將) 등이 보고해 왔다. 진산(珍山)과 동원(東院)은 조방장(助防將) 이계정(李繼鄭), 나주 판관(羅州判官) 이복남(李福男), 동복 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 무안 현감(務安縣監)ㆍ해남 현감(海南縣監) 등이, 이현(梨峴)은 강진 현감(康津縣監)이, 저고리(苧古里)는 영광 군수(靈光郡守)가, 추현(杻峴)은 고산 현감(高山縣監)이, 송치(松峙)는 부안 현감(扶安縣監)이, 함평(咸平)은 무장 현감(茂長縣監)이, 조림원(照臨院)은 남평 현감(南平縣監)이, 순찰사 군관 전몽성(全夢星), 별장(別將) 남응길(南應吉)은 장수(長水)로부터 무주(茂朱) 지경을, 순창(淳昌)은 보성 군수(寶城郡守)ㆍ장수 현감이, 탄전(炭田)ㆍ죽치(竹峙) 등지는, 임실현감(任實縣監)ㆍ진안 현감(鎭安縣監) 등이 방어하되 형세를 보아 진격하라는 명령도 역시 전달하여 발송했다. 그리고 임피 현령(臨陂縣令)에게 군사 8백 명을 거느리고 황화정(皇華亭)에서 결진(結陣)하여 성원할 것을 어제 전령(傳令)하여 발송했다. 명(明) 나라 군사가 7일에 평양(平壤)을 포위하니 적의 떼가 이미 도망하여 서울의 적과 함께 모두 노량(露梁)을 건너고 청계산(靑溪山)에서 진위(振威)까지 잇대어 결진하여 아산(牙山)으로 향했다고 한다. 교동(喬桐) 공생(貢生) 고언백(高彦伯)이 밤에 평양에 들어가 적을 놀라게 하여 적의 무리 2백여 명이 저희들끼리 서로 쳐 죽이고 이로 인해 후퇴해 도망갔으므로 곧 그 사람을 등용하여 양주 목사(楊州牧使)로 삼았다고 한다.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의 군관 이충(李冲)이 행재소(行在所)로부터 도총도사(都摠都事)의 직을 제수 받아 옥과(玉果)를 지나가면서 말하기를, “주상께서는 용천(龍川)으로 옮기시고 동궁(東宮)의 행차는 이미 강계(江界)에 도착했으며, 온갖 관원은 나누어 정해지고 두 곳의 비빈(妃嬪)은 다만 칠가(七駕)가 시종하고 있으며, 임해(臨海)는 이미 북도로 파천했다. 대개 인심이 조금 안정되었으며 주상께서도 안녕하시다. 명 나라 군사 3만 명이 이미 용천(龍川)에 도착했으며, 뒤이어 구원병도 와서 강변에 진을 치고 있다. 요동 윤(遼東尹) 이성량(李成樑)요동 자사(遼東刺史)인데 아들 이여송(李如松)ㆍ이여남(李如楠)ㆍ이여백(李如栢)ㆍ이여매(李如梅)ㆍ이여판(李如板)ㆍ이여회(李如檜)ㆍ이여오(李如梧) 8형제를 두어 세상에서 8장군이라 칭한다. 의 후임으로 조승훈(祖承訓)이 대장이 되고 왕(王)ㆍ양(楊)ㆍ곽(郭)ㆍ사(史) 등 여러 장수가 그 부관이 되어,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게 된다는 생각으로 급급히 싸움을 서두르니 그 성의가 지극하다 하겠다. 지난번 대동강 싸움에 적의 진중에서는 평의지(平義智)가 대장이 되고 행장(行長)ㆍ현소(玄蘇)ㆍ평수장(平秀長)이 부장이 되어 삼위(三衛)로 나누어 군사를 거느렸는데, 한 위(衛)의 수효가 많을 적에는 3천여 명에까지 달했다. 그래서 부중(府中)에 머무른 여러 장수들이 여러모로 계획을 세워 일제히 만여 개의 화살을 쏘아 한 위의 적을 모조리 죽였다. 우리 군사가 굳건히 지키고 적이 이미 기운이 꺾였는데, 뜻밖에 간사한 술책을 내어 밤에 얕은 여울물을 건너 어둠을 타서 내려 몰아치니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여 평양을 함락당했다. 적이 주둔하던 날에 관서(關西) 용사 두어 사람이 밤에 적의 진중으로 들어가 4장수 중에 가장 나이 젊은 자 한 놈을 쏘아 죽였는데 실로 이 놈은 의지(義智)였다. 그래서 남은 적은 해서(海西)로 도망해 내려가고 서울에 머물던 적도 그 수가 역시 얼마 되지 않으니, 국토를 회복할 것이 손꼽아 기대된다. 평양 윤(平壤尹) 송언신(宋言愼) 이 싸움에 진 책임으로써 교체되었다.
○ 금산의 적 수천여 명이 진산(珍山)에 들어와 불을 지르고 약탈하니 이현(梨峴)의 복병장(伏兵將)인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 동복 현감 황진 등이 군사를 독려하여 막아 싸웠다. 황진이 탄환에 맞아 조금 퇴각하는 바람에 적병이 진채(陣寨)로 뛰어드니 우리 군사들이 놀라 무저지는지라, 권율이 칼을 뽑아들고 후퇴하는 아군을 베며 죽음을 무릅쓰고 먼저 오르고 황진도 역시 상처를 움켜쥐고 다시 싸워 우리 군사 한 명이 백 명의 적을 당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적병이 크게 패하여 기계를 다 버리고 달아났는데 30여 명을 베었다.
○ 곽영(郭嶸)이 광주 판관ㆍ보성 군수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와 무주의 적을 탐색하고, 조방장(助防將) 이계정(李繼鄭)은 금산에 들어와 적을 탐색하다가 모두 무너져 도망갔다. 이때에 본도 장병이 여러 번 적의 두 소굴을 공격했으나 한 번도 승첩을 거두지 못하고 매양 무너지고 마니 이 어찌 반드시 저 왜적이 용감하고 날래서만이겠는가. 아! 어찌 남자다운 사람 하나가 없단 말이냐.
○ 영남 초유사(招諭使)의 공문 내에, “금월 23일 창원 부사(昌原府使)가 보고해 온 것을 보면 금월 19일에 성중에서 항시 머물러 있는 왜적과 계병부(桂兵部) 도합 33명이 성 안에 사는 잡인(雜人) 10명을 불시에 잡아다가 물건을 짊어지게 하고 기관(記官) 박춘정(朴春丁)과 함께 김해(金海)ㆍ해양(海洋)의 선척(船隻)을 간망(看望)하러 나갔다 돌아왔다고 하며, 항상 머물러 있는 왜적도 역시 본토로 돌아갈 생각이 있다고 했다. 지금 김해에 나갔다 온 사람을 만나서 적의 거취를 물은즉 김해ㆍ해양 각처의 적선이 즐비하고 좌우 산기슭에는 가설된 집들이 잇대어 있으며, 김해ㆍ밀양(密陽)에 교통하는 사람들과는 소를 치고 술을 빚어 서로 함께 마시고 씹어서 이웃 마을 사람과 같이 지냈다. 이렇게 지나는 10여 일 사이에 왜적 6명이 서울로부터 내려와서 귀에 대고 말을 전해주자, 뭇 왜적이 일시에 통곡하며 두 고을을 교통하는 사람을 남녀도 가려내지 않고 모조리 베어 죽여 2백여 명에 달했으며, 각처의 가설된 집들도 수효대로 불을 놓았고 강에 가득하던 배는 하룻밤 사이에 다 내려갔으니 군사를 거두어 도망갈 계획을 하는 것 같다. 귀도(貴道)의 금산ㆍ무주에 있는 왜적은 어느 곳으로 향하는지 통지해 달라.” 하다. 이상은 전라도에 보낸 공문이다.
○ 좌의병(左義兵) 진중의 사자(士子)들이 흩어진 군사 8백여 명을 소집하여 전 화순 부사(和順府事) 최경회(崔慶會)를 추대하여 맹주(盟主)로 삼고 금월 26일 광주에서 기고(旗鼓)를 세웠는데, 골(鶻) 자로 장표(章標)를 만들었다. 우도(右道)로부터 군사를 모아 남원으로 향하면서 우의병(右義兵)이라 일컬었다. 거사하던 날에 여러 군(軍)에 다음과 같이 통시(通示)하였다.
한 사람을 상 줌으로써 천만 사람을 권하는 것이다. 지금 의병의 패전에 유학(幼學) 안 영(安瑛)은 그 주장이 탄 말이 놀라는 것을 보고서 자기가 탄 말을 주장에게 주어 대신 타게 하고 도보로 포복(匍匐)하다가 달갑게 죽음을 당했으며,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는 왜적의 칼날이 어지럽게 번쩍일 때 노복들이 모두 달려나가 적의 칼날을 피하라고 간청하자, 성내어 거절하며 말하기를, “내가 만약 달아난다면 주장을 어느 곳에 두겠느냐.”하고, 그 주장의 노복이 다 흩어져서 말이 전진할 수 없음을 보자 자기 종을 명하여 주장을 보호해서 나가게 함과 동시에 자신이 뒤를 따라 적을 막다가 갑자기 칼에 맞아 죽었다. 아! 인심이 극도로 어지러운 이즈음을 당하여 임금을 배반하고 나라를 잊어버리며 목숨을 탐내어 구차히 살아가는 것이 곳곳마다 다 그러하고, 윗사람에게 친히 하며 어른을 위해 죽는 일은 전혀 들을 수 없는데, 이 두 사람은 이익을 꾀하거나 공을 계산하는 마음이 없어서 마침내 목숨을 버리고 의(義)를 취하여 분연히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으니 만약 급급히 그 절의(節義)를 드러내어 한때의 이목(耳目)을 솟구치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꺾여진 사기를 일으켜 세우며 무너진 강상(綱常)을 붙잡을 수 있으랴. 일이 시급하지 않은 것 같지만 관계되는 바가 지극히 중하니, 바라건대 각 읍 향교(鄕校)ㆍ향소(鄕所)에 각각 부물(賻物)을 거두어 되는 대로 사람을 시켜 그 집에 조문하고, 의거(義擧)한 뒤에 그 해골을 거두어 제사를 드리고 말미를 갖추어 위에 아뢰어 정문을 세워 의기를 고무시키도록 하라.
○ 호남ㆍ영남 수군이 견내량(見乃梁)에 거제(巨濟)ㆍ고성(固城)의 경계이다. 모여 왜적의 큰 배 10척, 중ㆍ소선 70여척을 발견하고 접전하였다. 우리 군사가 두 번째 총통(銃筒)을 쏘았으나 전혀 깨어질 형세가 없으므로, 한산도(閑山島) 큰 바다로 퇴진하여 다시 삼도의 여러 선박과 더불어 약속하고 북채를 두들기며 한꺼번에 나가 거의 다 무찔렀다. 적선 10척이 포위망을 벗어나 달아나니 진도 군수(珍島郡守) 선거이(宣居怡)가 쫓아갔으나 따르지 못했다. 10일 적선 70여 척이 안골포(安骨浦) 선창에 결진하고 있으므로 삼도의 여러 전선 백여 척이 돌진하여 접전을 벌였으나 다 깨뜨리지는 못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전 현감 임계영(任啓英)이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다. 임계영은 전라도 보성(寶城) 사람으로, 처음에 본도 관군과 의병이 함께 근왕(勤王) 길에 나가고 온 도내가 공허하게 되자 흉한 왜적이 틈을 타서 경내에 쳐 들어오니 충돌당할 근심이 조석에 박두하여 내지(內地)의 위태로움이 그릇을 기울여 물을 쏟는 것보다 더하므로, 임계영은 동지 여러 사람과 더불어 격문을 띄워 군사를 모집해서 방어할 계획을 했다. 그래서 본군에서 출발하여 낙안(樂安)ㆍ순천(順天)을 경유하여 남원으로 향해 다니면서 군사를 수합하여 천여 명을 얻어 좌의병(左義兵)이라 칭하고, 호(虎) 자로 장표(章標)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범을 그려 만들었다가 나중에 호 자의 인(印)을 만들었다.
○ 김천일(金千鎰)ㆍ최원(崔遠)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수원(水原)으로부터 인천(仁川)으로 향하면서 본도에다 구원병을 요청하니, 이광(李洸)이 조방장 이유의(李由義)와 진도군수 선거이(宣居怡)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가 구원하게 하다.
○ 영남의 왜적이 몰려 전일에 해인사(海印寺)에서 밥을 빌어먹던 막실(莫失)ㆍ막돌[莫石]을 호남으로 보내어 형세를 엿보게 하다. 초유사의 비밀이다.
○ 경기도 과천 현감(果川縣監)이 전달한 통문 내용에, “적병 한 부대가 개성부(開城府) 청석동(靑石洞)에 진을 치고 있다가 우리 군사에 패하였고, 신립(申砬)이 충주(忠州)에서 패전한 뒤로 왜놈의 의복을 바꾸어 입고 몰래 도성으로 들어와 적 2백여 명을 마구 베었으며, 도원수 윤두수(尹斗壽)의 소속 군사가 또 적 1천여 명을 베어서 서울에 있는 적이 후퇴해 달아났다.” 하다.
○ 영남 초유사(嶺南招諭使)의 공문 내에, “본도 우도(右道) 여러 의병 2만여 기(騎)가 날마다 적을 공격하여 고령(高靈) 이하는 이미 회복되었으며, 서울에서 내려오는 적이 진퇴를 마음대로 못하고 나왔다 도로 들어가는 형편이니, 산중에 피란간 사람들에게 급히 이 기별을 전해서 사람마다 분연히 일어나 적을 치게 할 것이다.” 하다. 《경상 순영록》에 보인다.
○ 도순찰사(都巡察使)가 소식을 알리기 위하여 당일로 병사에게 도부(到付)된 첨지를 보면, “지금 도착한 어지(御旨) 내에, ‘요동(遼東)에서 크게 정병 5만 명을 풀어서 강변에 머물러 성원을 하게 하고, 광녕총병관(廣寧總兵官) 양원(楊元)이 귀순한 오랑캐 5천 명을 친히 거느리고 앞서 와 요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으며, 조 총병(祖總兵)ㆍ곽 유격(郭遊擊)ㆍ왕 유격(王遊擊) 세 대장이 각기 수천의 병마(兵馬)를 거느리고 이미 압록강을 건넜고, 사 유격(史遊擊)은 정예부대 1천 5백 명을 거느리고 선봉이 되었다. 어제 저녁 의주 목사(義州牧使)가 등초해 보낸 관전보(寬奠堡) 표첩(票帖) 내에 중국에서 산동도(山東道) 수군 10만으로 하여금 수로를 경유하여 곧장 왜적의 소혈(巢穴)을 두들길 모양이라 했으니, 경(卿)은 아무쪼록 연해 각 읍에 이 연유를 적어 관문이나 길거리에 방(榜)을 걸어 두루 알리라.’ 하셨다. 어지가 협정에 의거하여 이러하기에, 중국의 구원병이 이미 압록강을 건너와서 군의 형세가 크게 떨쳤으니 왜적을 무찔러 없애고 국토를 회복할 날을 손꼽아 기약한다. 이 역시 민간에 알려 모두 듣게 하라.” 하다. 이상 공문은 각읍에 보낸 것임.
○ 왜적이 평양에 들어온 뒤로 매일 나가 도적질을 하되 부산(斧山) 밖을 벗어나지 않고 돌아오며 마치 무엇이 두려워서 감히 못하는 것이 있는 듯이 보이니 예언[讖記]의 말도 다 거짓은 아닌 듯싶다. 부산(斧山)은 부의 서쪽 30리에 있다. 이때에 참언(讖言)에, “왜적 난리 7년에 부산으로부터 부산까지 오고, 왜놈 난리 10년에는 압록으로부터 압록까지 온다.” 하였다.


 

[주D-001]안 상산(顔常山) : 당 현종(唐玄宗) 때의 충신 안고경(顔杲卿)이니, 원문의 안 상산(顔常山)은 안 평원(顔平原)의 잘못인 듯하다. 안평원 열전(列傳)에 ‘신무상죄당사(臣無狀罪當死)’라는 말이 있다.
[주D-002]문 신국(文信國) : 남송(南宋) 말년의 충신인 문천상(文天祥)이니, 위왕(衛王) 때 신국공(信國公)을 봉했다.
[주D-003]내상(內廂) : 여기서는 안쪽 지방[內地] 즉, 함안ㆍ창원ㆍ이령 등지를 말한 듯하다.
[주D-004]한(漢) 나라의 …… 나라 붕거 : 중국 삼국 시대 촉한(蜀漢)의 승상인 제갈공명(諸葛孔明)과 남송 말년의 명장 악비(岳飛)이니, 붕거(鵬擧)는 악비의 자(字)이다. 이 두 사람은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주D-005]장순(張巡) : 당(唐) 나라 때의 사람이다.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 기병(起兵)하여 안녹산을 토벌했는데, 허원(許遠)과 수양을 지키고 있다가 수양성이 함락되매 안녹산을 역적이라 꾸짖고 피살되었다.
[주D-006]납서(蠟書) : 편지를 납덩이 속에 넣어서 물이 새어들지 않게 한 것이다. 《송사(宋史)》
[주D-007]석륵(石勒) : 진(晉) 나라 때 중국을 침범하여 후조(後趙)를 세운 갈인(羯人 : 중국의 변경 민족)이다.
[주D-008]조사아(祖士雅) : 진 나라 때의 명장 조적(祖逖)의 자(字)이다. 조적이 진 원제(晉元帝) 때 군사를 통솔하여 북벌하기를 자청하자, 원제는 그를 분위장군(奮威將軍)으로 하였다. 그가 북벌군을 거느리고 장강을 건너갈 때 노를 치며 맹서하기를, “중원을 깨끗하게 하지 못하고 다시 건너게 된다면, 이 강물에 빠져 죽겠다.” 하였던 바, 조적은 마침내 석륵을 격파하여 황하 이남의 땅을 회복하였다.
[주D-009]장숙야(張叔夜) : 송 나라 때의 사람으로 금(金) 나라 군대와 싸워 용맹을 떨쳤다. 《송사(宋史)》
[주D-010]사모(蛇矛)와 월극(月戟) : 사모는 창의 한 종류로 전장에 쓰는 무기이니, 장팔사모(丈八蛇矛)라고도 한다. 월극도 창의 일종으로, 날이 초생달같이 굽어 그리 칭한 것이다.
[주D-011]안진경(顔眞卿) : 당 나라 때 사람으로 그가 평원 태수(平原太守)로 있을 때 안녹산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진경이 군사를 일으켜 안녹산을 토벌하자 북방의 여러 군에서는 그를 맹주로 추대하여 하북초토사(河北招討使)로 하였다.
[주D-012]유총(劉聰) : 진(晉) 나라 때 흉노의 황제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진 나라를 침략하였다.
[주D-013]동창의 계교 : 송(宋) 나라 진회(秦檜)가 부인 왕씨와 동창에서 귤(橘)을 희롱하면서 악비(岳飛)를 죽이려는 계획을 하였다.
[주D-014]서촉(西蜀)으로의 피란 : 당 현종(唐玄宗)이 서촉으로 피란하였으므로, 선조의 거가가 서행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주D-015]봉천(奉天)으로 향하는 …… 먼지가 날린다 : 당 덕종(唐德宗) 부자가 금(金)의 군사에게 잡혀 봉상현 봉천으로 끌려간 고사가 있는 바, 선조의 파천을 형용한 말이다.
[주D-016]이에 물들인 무리 : 왜적들은 이빨에 칠을 하였으므로 칠치(漆齒)라 부른다.
[주D-017]포서(包胥)의 충성 : 춘추 시대 초 나라의 대부 신포서(申包胥)가 초 나라의 보전을 위해 힘을 다한 바 있다. 《춘추(春秋)》정공(定公) 4년
[주D-018]포신(鮑信) : 중국 후한 말년의 절개가 있던 인물로, 황건적(黃巾賊)과 접전하다 죽었다. 《후한서(後漢書)》
[주D-019]방덕(龐德) : 중국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사람으로, 변경 민족인 저강(氐姜)의 침공을 격파하였다.
[주D-020]범진(范鎭)의 머리털이 허옇게 돼버린다 : 범진은 북송(北宋) 때의 명신이다. 인종(仁宗)이 재위 35년에 후사가 없으매, 범진이 종실의 근속(近屬) 중에서 현량한 자를 골라 황제의 지위를 계승시킬 준비를 하라고 건의하였으나, 집정자의 저지로 실현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범진은 굽히지 않고, 인종에게 여러 차례 되풀이하면서 우니, 인종도 울면서 말하기를, “짐은 경의 충성을 아오. 경의 말이 옳소. 하지만 다시 2, 3년을 기다려야 할 것이오.” 하였다. 범진이 장주를 10여 차례 바치고 1백여 일 동안 어명을 기다린 끝에 수염과 머리가 희어지자, 조정에서 그 뜻을 빼앗을 수 없음을 알았다. 《송사(宋史)》권 337
[주D-021]소해(小海) : 세자를 가리킨다. 《산해경(山海經)》에 “원고(元臯) 위에서 남으로 유해(幼海)를 바라본다.”는 말이 있으니, 유해는 소해(小海)이다. 그러므로 천자(天子)는 대해(大海)에 비하고, 태자(太子)는 소해에 비한 것이다.
[주D-022]전성(前星) : 세자를 가리킨다. 진(晉) 나라 천문지(天文志)에, “심(心)이란 별이 있는데, 중간 별[中星]은 천자(天子)를, 앞 별[前星]은 태자(太子)를, 뒷 별[後星]은 서자(庶子)를 가리킨다.” 하였다.
[주D-023]용루(龍樓) : 한(漢) 나라 성제기(成帝紀)에 있는 말로, 성제가 태자(太子)로 있을 때 계궁(桂宮)에 거처하였는데 임금이 태자를 불러 용루문(龍樓門)으로 나오게 했었다.
[주D-024]학금(鶴禁) : 한 나라 궁궐소(宮闕疏)에 있는 말로, 학궁(鶴宮)은 태자(太子)가 거처하는 궁인데 어느 사람이라도 드나드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학금(鶴禁)이라 하였다.
[주D-025]칠묘(七廟) : 중국의 고제(古制)에 의하면, 천자가 칠묘를 두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서울에 있는 종묘를 그렇게 말한 것이다. 《예기(禮記)》〈王制〉
[주D-026]윤대(輪臺)에서 과오를 뉘우침 : 윤대는 중국 신강성 서남쪽에 있는 지명으로 한 나라 무제(武帝)가 중앙아시아(당시에는 서역(西域)이라 했다)를 정벌하여 군사가 그곳까지 가 있었으나, 무제가 병으로 죽을 때에 윤대에 군사 보낸 것을 후회하는 조서를 내렸다.
[주D-027]봉천(奉天)에서 자기를 허물함 : 봉천은 당 나라 때 섬서성(陝西省)에 있던 현이다. 덕종(德宗)이 주자(朱泚)의 반역을 피하여 그곳으로 파천하였는데, 그곳에서 과거를 뉘우치고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는 조서(詔書)를 내리니 그것을 죄기조(罪己詔)라 한다.
[주D-028]영무(靈武)의 의기(義旗) : 당 나라 때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 현종(顯宗)은 촉(蜀)으로 파천했는데, 그의 아들 숙종(肅宗)이 영무(靈武)에서 즉위하고 안녹산을 물리쳐 당 나라를 수복했다. 그 고사를 가지고 세자 혼(琿 즉 후의 광해군)에게 왜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광복시킬 것을 기대하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주D-029]미앙궁(未央宮)의 수주(壽酒) : 미앙궁(未央宮)은 중국 한(漢) 나라 때 지금의 섬서성 장안현 서북의 장안의 고성(故城) 안에 세웠던 궁전 이름. 새해를 축복하는 뜻으로 마시는 술. 미앙궁의 수주는 서울의 궁전을 회복하기를 고대하는 선조의 마음을 나타낸 말.
[주D-030]중국 : 하(夏)를 옮긴 말이다. 여기서는 글의 서두로 감개를 나타내는 대목에 쓰인 것이므로 반드시 중국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주D-031]궁(窮)과 한(寒) : 궁과 한은 모두 중국 고대 하 나라 시대의 역적으로 궁은 유궁후예(有宮后羿)의 약한 것이니, 그는 하 나라를 역적질하였고 한은 한착(寒浞)이니 후궁유예의 아들로 역적질한 아비를 죽이고 그 아비의 자리를 빼앗았던 역적이다.
[주D-032]훈육(獯鬻) : 중국 고대의 변경 족속인 흉노(匈奴)의 별칭으로, 중국을 자주 침범하여 포악한 짓을 자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D-033]밀(密) : 주 문왕(周文王) 때의 조그마한 나라이다. “밀인이 불공하여 감히 큰 나라를 거역하였다[密人不恭, 敢距大邦].” 하였다. 《시경(詩經)》〈대아(大雅)〉
[주D-034]연교(燕郊)에서 말을 키우겠다 : 연교는 중국 북방의 수도(首都)가 있는 곳의 교외로, 그곳에 말을 치겠다는 것은 중국을 점령하겠다는 말이다.
[주D-035]덕진(德鎭)으로 교질(交質)해야 한다 : 덕진은 주민에게 은덕을 베푸는 산이니, 덕진으로 교질하겠다고 하는 것은 중국의 명산을 내놓으라는 말이 된다.
[주D-036]조정의 계획 : 원문에는 묘(廟) 밑에 한 글자가 탈락되어 있다. 여기서는 묘산(廟算)으로 보고 ‘조정의 계획’으로 옮겼다.
[주D-037]교령(嶠嶺)에 머뭇거리며 : 원문에 교영(喬英)이라 한 말은 ‘교만하게 굴며’라고 해석이 되는데, 나는 교(嶠)와 영(嶺)의 오서라 보므로 모두 영남이라는 뜻이 된다. 그러므로 ‘준순교영(逡巡喬英)’을 영남에서 머뭇거리고 있다는 것으로 번역하였다.
[주D-038]빈교(邠郊) : 빈(邠)은 옛날 주 문왕의 조부인 태왕(太王)이 있던 도읍이었는데, 적(狄)의 침략으로 그곳에서 쫓겨나 기산(岐山)으로 옮겼다 한다.
[주D-039]하북(河北) 지역이 비록 흩어지고 :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황하 이북이 모두 안녹산에게 항복하였다는 말이다.
[주D-040]수양(睢陽) : 지금의 하남성 상구현(商丘縣) 남부에 있던 지명으로, 당 나라 때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키자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이 그곳을 굳게 지켜 장강(長江)과 회하(淮河) 일대의 땅을 막아 안녹산 군이 침입해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주D-041]악비(岳飛)가 갓 …… 우레같이 통곡하였고 : 악비는 중국 남송 초기의 명장이다. 여러 차례의 무공으로 태위소보(太尉少保)에까지 올라 하남북제로초토사(河南北諸路招討使)가 되어 금군(金軍)을 대파하고 수일 내로 황하를 건너가 실지(失地)를 광복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조정에서 실권을 잡고 있던 진회(秦檜)는 금과의 화의(和議)를 주장하여 하루에 12번 금자패(金字牌)를 내려 악비를 소환했다. 삼군이 통곡한 것은 그때의 일이다. 그 후 진회는 만사설(萬俟卨) 등을 시켜 악비를 탄핵해서 체포 투옥하여 처형하여, 39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주D-042]장준(張浚) : 남송 초기 주전파의 거물이다. 송 나라 고종(高宗) 때 천섬경서제로선무사(川陝京西諸路宣撫使)로 금을 제어하고 있다가 주화파인 진회에게 몰려 영주(永州)로 좌천되었다. 효종(孝宗) 때에 가서 추밀사(樞密使)를 제수받고 강회(江淮)의 군사를 도독(都督)하였으니, 주전파로 널리 민간의 환영을 받았다.
[주D-043]해바라기 : 해바라기는 해를 항상 처다본다 하여, 충신이 항상 임금을 향하는 데 비유한다.
[주D-044]동해가 바로 …… 않을 것이고 : 옛날 전국 시대 말기에 진(秦) 나라가 강성하여서 여러 나라를 침략하자 진 나라를 황제로 존칭하고 종주국을 삼자는 의논이 생겼는데 이때 노중련(魯仲連)이라는 선비가, “나는 차라리 동해를 밟고 죽을지언정 진 나라같이 악독한 나라를 황제국으로 섬길 수 없다.” 하고 반대하여 이루어지지 않았다.
[주D-045]의병(疑兵) : 군사가 많은 것처럼 거짓으로 꾸미는 것, 또 그렇게 꾸민 군사를 말한다.
[주D-046]역적 양(亮)이 …… 어긴 일 : 북송 때에 여진족(女眞族)이 금(金) 나라를 건국하고 송(宋) 나라를 침략하여 송 나라가 강남으로 쫓겨 갔으므로 이때부터 남송이라 한다. 남송에서는 금 나라에게 신하가 되겠다는 서약을 올리고 겨우 두 나라의 평화를 유지하였는데 금 나라에서 황족인 완안량(完顔亮)이 임금을 죽이고 자기가 황제가 되었으므로 역적인 양이라 하여 역량(逆亮)이라고 부른다. 그 완안량은 남송과 평화의 약조를 깨뜨리고 남송을 침략하다 남송의 반격을 받아 대패하고 자신까지 부하 군대의 손에 살해되었다.
[주D-047]중행(中行)을 매질하지 않은 것은 : 중행률(中行律)은 원래 한(漢) 나라 사람인데, 흉노족(匈奴族)에 항복하여 흉노의 참모가 되어서 도리어 한 나라를 괴롭혔다.
[주D-048]장강(長江)이 급작스리 …… 날아서 건너왔다 : 중국이 남북조로 갈렸을 때, 양자강(揚子江)을 하늘이 만들어 준 참호[天塹]라 하여 그 강을 건너오려거든 날아서 건너오라 하였으나 그 장강을 건너게 하였다면 남조에는 사람이 없다고 할 것이라는 말이다.
[주D-049]태왕(太王)이 빈(邠) …… 떠나던 마음 : 주(周) 나라의 조상 태왕은 빈(邠 : 豳)에 살았는데 융적(戎狄)의 침입을 받았다. 나라 사람들은 융적과 싸우려고 했으나 태왕은 전쟁에 군사들이 죽는 것을 측은하게 여겨 기산(岐山) 밑으로 옮겨가 살았는데 빈에 살던 사람들이 다 그를 따라와 살았다. 태왕은 그때에 가서 비로소 주라는 국호를 정하고 융적의 습속을 물리치고 성곽과 궁실을 세워 나라를 경영했다. 아들 문왕(文王) 대에 주는 크게 팽창하고 손자 무왕(武王)의 대에 이르러서는 중국 전체를 차지하게 되었다. 태왕은 무왕이 추존한 칭호이고 그 이전에는 고공단보(古公亶父)로 불리웠다.
[주D-050]명황(明皇)이 촉(蜀) …… 갔던 일 : 당 나라 때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켜 장안이 위태로워지자 현종(玄宗)은 몽진하여 촉으로 파천했다.
[주D-051]공락(鞏洛) : 공현(鞏縣)은 지금의 중국 하남성 영양현(榮陽縣) 서부의 낙수(洛水) 동안(東岸)에 있었는데, 안녹산 반란 때에 당 나라 군사가 이곳에서 패했으므로 황제가 서울을 버리고 달아났다.
[주D-052]민아(岷峨)의 위험한 …… 멀리 갔다 : 당 현종이 촉으로 들어갈 때 그러한 험준한 길을 가야 했다. 민아(岷峨)는 촉 땅의 산으로 민은 민산(岷山), 아는 아미산(峨嵋山)이다. 취화(翠華)는 임금이 탄 수례의 장식이니, 그것을 타고 가는 임금을 말하는 뜻으로 쓰인다.
[주D-053]이성(李晟) : 당 나라 때의 사람으로 덕종(德宗) 때 주자(朱泚)의 반란을 평정하여 수도를 수복하였고, 황제가 봉천(奉天)에 포위되어 있을 때 그 포위를 풀어 황제를 구출했다.
[주D-054]육지(陸贄) : 당 덕종의 신하로 덕종이 봉천에 포위되어 있을 때 측근에서 시종하였다. 임금이 매일 백으로 헤아릴 만큼 많은 조서를 내리는데 붓을 휘둘러 그것을 써내리기를 생각이 샘솟듯하여 다 사정을 곡진하게 나타내고 그때 그때의 필요에 잘 맞춰 나갔다고 한다.
[주D-055]상주(相州) : 중국 하남성 안양현(安陽縣)에 있었는데, 당 나라에 안녹산의 난이 일어났을 때 구절도(九節度)의 군대가 반란군에 의해 궤멸되었다.
[주D-056]장막의 제비 : 장막을 버티고 있는 나무에 제비가 집을 짓고도 그 천막이 곧 없어질 것을 모르고 찍찍거린다는 것으로 대단하지 않아 소탕해 버리는 것이 문제가 없다는 말이다.
[주D-057]밤중의 닭소리 : 밤중에 닭이 우는 것은 난리가 날 징조라 한다.
[주D-058]중류(中流)에 뜬 …… 노를 치면서 : 중국에 여러 호족(胡族)이 침략하여 서진(西晉)이 멸망하고 황족 한 사람이 강남으로 쫓겨가서 동진(東晉)을 건국하였는데, 그때에 조적(祖逖)이라는 사람이 군사를 거느리고 양자강을 건너서 호족을 정벌하러 떠날 적에 양자강 중류에서 배의 노를 치면서, “만일 저 오랑캐를 쳐서 평정하지 못한다면 저 강물과 같이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고 맹서하였으나 그는 중간에 병으로 죽고 말았다.
[주D-059]복덕(福德)이 바야흐로 …… 분야에 임했고 : 하늘의 복덕성(福德星)이 비치는 땅을 침략하면 침략하는 나라가 도리어 패한다고 한다.
[주D-060]노래하고 읊조리는 …… 생각하게 된다 : 한(漢) 나라가 중간에 왕망(王莽)에게 역적질을 당한 때가 있었는데 왕망이 정치를 하도 포악하게 하여서 백성들은 노래하는 데도 한 나라 옛적을 생각하였다 한다.
[주D-061]신정(新亭) : 중국 강소성 남경시 남쪽에 있었던 정자로, 동진 때 시세가 혼란하여 명사들이 이곳에 모여 서로 보고 개탄하였다 한다.
[주D-062]흥원(興元) : 흥원은 당 나라 서울 서북쪽에 있는 땅으로 당 나라 희종(僖宗)이 황소(黃巢)의 반란군을 피하여 그곳으로 파천하였었다.
[주D-063]형초(荊楚)의 기특한 인재들 : 옛날 중국 초 나라에는 뛰어나게 용맹한 인물들이 많이 났다는 것을 취해서 쓴 말임.
[주D-064]연조(燕趙)의 검객 : 옛날 중국 연ㆍ조 지방에서는 검술에 비상한 인물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D-065]말을 채찍질하여 …… 찌를 것 : 관우(關羽)가 조조(曺操)에게 있을 때에 원소(袁紹)의 대장 안량(顔良)이 대군을 거느리고 조조를 공격해 왔으므로 조조도 군대를 내어서 응전하게 되었다. 양군이 대진하면서 안량은 수백 명의 부장들에게 옹위되어 진두에 나섰는데 그때에 관우는 조조에게 적토마(赤兎馬)라는 좋은 말을 선사 받았다. 그래서 관우는 그 말을 몰고 달려가서 안량의 진으로 들어가 안량을 단번에 찔러 죽였다. 그것은 그 좋은 말의 힘이 많았던 것이다.
[주D-066]기북(冀北) : 기북은 중국의 북경 근처로 예전부터 좋은 말의 산지로 유명하였다.
[주D-067]노적가리를 가리켜 내주던 의기 : 중국 삼국 시대에, 오(吳) 나라 주유(周瑜)가 수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노숙(魯肅)의 집에 들러 군량을 달라고 청했다. 노숙의 집에는 양곡 노적가리가 둘이 있었는데 각각 3천 곡(斛)씩이 들어 있었다. 노숙이 그 중의 하나를 가리켜 그것을 주유에게 주었다는 고사이다.
[주D-068]양주(揚朱)와 묵적(墨翟) : 유가에서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자 양주의 사상이나 극단적인 박애주의자 묵적의 사상을 이단으로 극력 배척한다. 양주와 묵적을 배척하는 자는 곧 선비를 의미하는 말이다.
[주D-069]곤란 : 중국의 진(秦) 나라는 서북에 위치하여 있고 월(越) 나라는 동남에 위치하여 있으므로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래서 ‘월 나라 사람이 진 나라 사람이 수척한 곤란을 보고도 모른 체한다’는 말이 있다.
[주D-070]봉명국(奉命國 : 천명을 받든 나라라는 뜻으로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입장에서 일본을 그렇게 나타낸 것이라 생각된다.
[주D-071]주여숙(柱厲叔)이 이것을 …… 기다릴 것인가 : 춘추 시대의 사람으로, 거(莒)의 오공(敖公) 밑에서 벼슬을 살다가 그 재능이 알려지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바닷가에서 살면서 극도의 빈곤에 쪼들렸다. 오공이 변란을 당하자 그는 벗들과 하직하고 오공에게 가서 목숨을 바치겠다고 나섰다. 주여숙의 이러한 행동은 후세의 임금 중에 인물을 못 알아 보는 자를 부끄럽게 하는 동시에, 임금의 은총을 받고도 임금의 급난에 자신만을 보전하려 드는 신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여씨춘추(呂氏春秋)》
[주D-072]안진경(顔眞卿)이 다시 …… 할 것인가 : 당 나라 안녹산의 반란 때에 하북 17군(郡)이 모두 붕괴하여 안녹산에게 항복하였는데 오직 평원 태수(平原太守) 안진경만이 성을 지켰으므로, 현종이 “짐은 안진경이 어떻게 생겼는지[作何狀] 모르나 참 장한 사람이다.” 하였다.
[주D-073]세성(歲星)이 기(箕)의 …… 기약이 없으랴 : 이 글에서 한실과 송은 다 중국의 한족이니 변경의 침략적인 족속과 비교해서 나타낸 말이다. 즉 여기서는 곧 조선의 왕실 내지 조선을 말한 것이다. 세성이 기의 분야를 지켜서 복덕이 내릴 징조가 있다고 한 것은, 기를 조선의 분야로 보고서 한 말로 고래의 점성술(占星術)에 기대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주D-074]서방(西方)에 미인 : 미인은 임금을 나타낸 말이다. 《시경(詩經)》〈패풍(邶風)〉
[주D-075]순무(巡撫)가 당보(搪報)를 …… 되었다. 운운. : 이것은 명 나라 때의 자문인데, 형식이 특이하고 원문 전후에 약간의 혼란이 있어 모호한 부분이 없지 않다. 자(咨)는 동등한 기관 사이에 쓰는 공문 형식이다. 원문의‘須至’의 ‘至’는 ‘知’의 와오일 것이고, ‘吉’자 위에는‘秀’자가 오탈했을 것이고, ‘凋信’의 ‘凋’자는 ‘調’의 와오일 것이다.
[주D-076]10대의 주불(朱紱)이요 7대의 은장(銀章)이라 : 주불은 붉은 색의 치마 같은 무릎 덮개로, 고관 대작이 수레에 탈 때 사용하였다. 은장은 은으로 만든 인장으로 고제(古制)에 의하면 2천 석의 녹을 타는 벼슬을 하면 그 관인을 은으로 만들고 ‘모관지장(某官之章)’이라 새겼다 한다.
[주D-077]금관자(金貫子) : 금으로 만든 관자이다. 관자는 망건에 달아 망건 줄을 꿰는 작은 고리로, 금관자는 종2품의 벼슬하는 사람이라야 붙였다.
[주D-078]호전(胡鈿) : 호전은 주화파의 괴수 진회(秦檜)를 목 베고 금에 항전(抗戰)할 것을 상소했다. 곽재우는 호전이 진회를 목 베라고 주장한 것이 정당한 것같이 자기가 김수를 목 베자고 하는 것도 정당하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주D-079]동탁(董卓) : 중국 동한(東漢) 말년의 사람으로, 전공(戰功)이 있어 영제(靈帝) 때 전장군(前將軍)이 되었고 병주목(幷州牧)의 벼슬을 얻었다. 영제가 죽자 하진(何進)의 부름에 호응하여 군사를 이끌고 수도에 들어가 환관을 죽이고 그 일이 평정되자 자기가 상국(相國)이 되어 소제(少帝)를 폐하고 하태후(何太后)를 시해(弑害)하고 헌제(獻帝)를 세웠다. 음란하고 흉폭하여 그 해독이 조야에 퍼져 원소(袁紹) 등이 군사를 일으켜 그를 토벌하였는데, 동탁은 헌제를 끼고 장안으로 천도하여 자기가 태사(太師)가 되어 가지고 제위를 찬탈할 생각을 품었다. 왕윤(王允)이 역사(力士) 여포(呂布)를 꾀어 동탁을 자살(刺殺)시키고 그 족속을 멸했다.
[주D-080]형벌은 대부에게는 올라가지 않는다 : 본래 대부 이상에는 형벌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고, 대부 이상이면 형벌을 받을 행동을 하지 않으므로 형벌을 적용할 필요가 없고 또 형벌을 받을 만한 죄를 대부가 범했다면 형벌을 받기 전에 자결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입장에서 하는 말이다. 이 글에서는 그런 뜻으로 쓴 것은 아니고 곽재우를 공격하기 위한 근거의 하나로 그 말을 내세운 것이라 하겠다. 《예기(禮記)》〈곡례(曲禮)〉
[주D-081]옥절(玉節)을 잡았으며 : 지방 장관이 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주D-082]강회(江淮)를 차단하여 …… 구실을 하였는데 : 낙동강 연안을 지켜 그 일대를 안온하게 만든 것을 말한다.
[주D-083]정의를 해치는 자를 도적이라 한다 : 《맹자(孟子)》 에 나오는 말을 인용한 것이나 약간 혼동을 일으키고 있다. 원문에는 ‘적인자 위지적(賊仁者謂之賊)’이 아니라, ‘적의자 위지잔(賊義者謂之殘)’이라 하였다.
[주D-084]근왕(勤王) : 왕실에 힘을 다한다는 말이다. 《춘추(春秋)》에, 호언(狐偃)이 진후(晉侯)에게 말하기를, “제후(諸侯)를 구하려면 근왕하는 것밖에 없다.” 하였으므로, 후세에 의병을 일으켜 왕실을 구원하는 것을 근왕이라 하였다.
[주D-085]간섭을 받아 : 사람을 시켜 일을 하게 하고 뒤에서 방해한다는 말이다. 복자천(宓子賤)이 선보(單父) 고을의 원님이 되자 글씨 잘 쓰는 사람을 청하여 글씨를 쓰라 하고 뒤에서 팔목을 끌어당기며 글씨가 잘 되지 않으면 성내니, 글씨 쓰는 자가 돌아 가서 노(魯) 나라 임금께 고했다. 노 나라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복자천이 내가 자기 일을 간섭할까 두려워서 한 짓이다.” 하였다. 《설원(說苑)》
[주D-086]곡단(曲端) : 송(宋) 나라 사람으로 금인(金人)과 싸워 공이 있었는데, 뒤에 다른 사람의 참소를 만나 옥중에서 죽었다.
[주D-087]한착(寒浞)처럼 스스로 넘어질 줄 : 한착은 하대(夏代)의 사람으로 유궁후예(有窮后羿)가 제위를 빼앗아 하 나라 대신 유궁씨(有窮氏)로 일컬을 때 그의 재상이 되었다가 후일 예(羿)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후에 소강(小康)에게 멸망되었다.
[주D-088]장인(丈人)의 원길(元吉) : 《주역》의 지수사(地水師) 괘에 보인다.
[주D-089]초호(楚戶)의 세 집 : 초(楚) 나라 남공(南公)이 예언하기를, “초 나라 3집만 남아도 진(秦) 나라를 멸할 수 있다.” 하였다.
[주D-090]혜련(惠連) : 혜련이 10살 때 이미 글을 잘 지으니 그 형 사영운(謝靈運)이 매양 혜련을 대하면 좋은 글구가 저절로 나왔다. 영운이 일찍이 영가(永嘉) 서당(西堂)에서 시를 사색하다 못이루었는데 꿈에 문득 혜련을 보고, “못 가에 봄 풀이 돋아난다 [池塘生春草].” 하는 글귀를 얻었다 한다. 《남사(南史》〈사혜련전(謝惠連傳)〉

 

 

장하다 의병장 곽재우 본관은 현풍인으로서 의령의 유생으로 국난극복을 위하여 거병을 하셨서 풍전등화의 국난을 극복하는데

   일조를 하신 그대는 정녕 임진왜란 의병으로서 후대에 길이 빛나리라 ...

 

  그래서 30여년의 세월등안 의령인은 사당에 제를 올리며 의병제전을 해마다 개최하여 업적을 기리고 추모하는 것입니다.. 

 

기재사초 하(寄齋史草下)
임진일록 1(壬辰日錄一) 만력 20년 4월 13일부터 5월 29일까지 쓰고 그쳤는데, 1개월 남짓이 된다.



4월

13일 일본 국왕 수길(秀吉)은 그의 장수 평수가(平秀嘉)와 평행장(平行長)ㆍ정성(政成)ㆍ청정(淸正) 등을 보내 대거 침범하여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키고, 첨사 정발(鄭撥)과 부사 송상현(宋象賢) 등을 죽이며 성중의 사람들을 도륙(屠戮)하였다. 수사 박홍(朴泓)과 병사 이각(李珏)은 변란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진(鎭)을 버리고 도망하였으며, 각 고을의 수령들도 소문을 듣고 흩어져 달아났다. 그리하여 4ㆍ5일도 못 되어 여러 군이 함락당하였다.
별록(別錄) : 이때에 부산 첨사 정발은 수군을 거느리고 마침 절양도(絶洋島)에서 수렵을 크게 벌였는데, 전날의 취기(醉氣)가 아직도 풀리지 않았다. 13일 사시(巳時)에 어떤 사람이 와서 해종도(海宗島)에 정체 불명의 배가 나타났다고 하자 정발은 말하기를,
“세견선(歲遣船)이 오랫 동안 오지 않더니, 이제 오는 모양이다.”
하고, 개의하지 않았다. 배가 가까워짐에 따라 왜선에서는 연달아 총을 쏘아댔다. 정발은 비로소 적임을 알고 정신 없이 진(陣)으로 돌아왔다. 성에 들어오자마자 적은 이미 상륙하여 여러 겹으로 성을 포위하였다. 정발은 한 발의 화살도 쏘지 못하고 계책도 내놓은 것이 없었는데 적은 벌써 배에 올라 정발의 목을 베어 매어 달고, 노소 가릴 것 없이 성 안의 사람들을 전부 죽여버렸다. 앞에는 정발이 성에 들어 왔다고 했으나 뒤에는 적이 배에 올라 정발의 목을 베었다고 하여 전후의 문의(文義)가 모순됨.
14일(계묘) 동래가 함락되니, 부사 송상현(宋象賢)과 별장 홍윤관(洪允寬)은 모두 전사하였으며, 절도사 이각(李珏)과 수사(水使) 박홍(朴泓)은 진을 버리고 도망갔다. 적은 부산으로부터 동래성 밑에 들이닥쳐서 곧장 저돌적으로 대들어 형세가 극히 창궐하니, 성중 사람들은 겁에 질려 어떤 대비책도 마련하지 못하였다. 송상현은 원래 선비인데 장수의 재질이 있어 현관(縣官)에서 뛰어올라 본직(本職)을 맡게 되었다. 성(城)과 기계의 수리가 대략 끝나고 군사를 훈련시키는데도 날이 부족하게 여겼다. 일찍이 성 밖의 사면에 극히 견고히 참호(塹壕)를 파고 목책을 설치하였으며, 그 주위에 잡목을 많이 심었다. 이 날에도 성을 순시하여 부하들을 독려하고 스스로 남문을 지켰는데 적이 침범하여 성 밖의 잡목 숲속으로 들어 와서는 화살과 돌을 막아내다가 묘시(卯時)에서 사시(巳時)말까지 대거 쳐들어왔다. 별장 홍윤관은 사태가 급박함을 알고 송상현을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사태가 이토록 험악하게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습니까? 부(府) 뒤에 소산(蘇山)이 있는데 견고하고 험준하여 방어에 유리하오니, 나와 함께 나가서 그곳을 지키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니, 송상현은 대답하기를,
“성을 사수하지 않으면 비록 다른 곳을 확보하더라도 조정에서 나를 살려 주지 않을 것이고, 그곳에 가 보았자 또 무슨 방도가 있겠느냐?”
하였다. 홍윤관은 말하기를,
“그렇다면 나도 공과 함께 죽겠습니다.”
하였다. 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적이 그들을 칼로 치니, 몸이 두 동강이 났다. 성중 사람 만여 명도 빠져 도망갈 수 없었다.
수사(水使)를 설치한 목적은 수군을 거느리고 적으로 하여금 해안에 침범해 오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수사 박홍은 정발의 보고를 듣고 동래로 달려와 알리고는 그 역시 성으로 들어오지 않고 도망가 버렸다. 병사 이각은 원래 품행이 불량한 자로 윗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알랑거리기를 잘하여 죄가 있었는데도 방면된 일이 있었다. 적에 관한 보고를 듣고 동래로 달려왔다가 또 송상현이 성을 지키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겁이 나서 들어가지 못하고,
“소산(蘇山)을 지키겠다.”
하였다.
15일(갑진) 병사 이각은 소산을 버리고 도망갔으며, 밀양 부사(密陽府使) 박진(朴晉)은 패주하였다. 박진은 젊었을 때 글을 배워 성공하지 못하고 곧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번 관직을 옮기다가 마침내 뛰어 올라 본부의 부사(府使)로 오게 되었다. 부임할 적에 사람들은 그가 연소하여 큰 부의 소임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 여겼다. 그는 부산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는 도중에, 동래도 함락되자 이각에게 말하기를,
“소산을 지키지 못하면 영남은 우리 것이 아니오. 내가 앞에서 적을 견제할 터이니, 공은 뒤에서 점거하였다가 내가 패하면 공이 나를 구원하고 내가 이기면 공은 협공해 주시오. 부디 약속을 저버리지 마시오.”
하니, 이각이 동의하였다. 박진은 5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적의 전면에 포진하였다. 적은 그의 형세가 약한 것을 보고 마구 진격해 오는데 그 기세가 매우 예리하였다. 이각은 박진의 군사가 당해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도망가 버렸다. 박진은 후퇴하여도 후원군이 없으므로 역시 달아났다.
16일 박진은 밀양 앞 강에서 대패하였다. 당시 감사 김수(金睟)는 각 고을 수령들에게 분부하여 잇달아 싸움터로 들어가게 하였으나 도중에 도망가기도 하고 문 밖에 나가자마자 도망가기도 했다. 초계 군수(草溪郡守) 이유검(李惟儉)은 군사를 놓아 흩어지게 하고, 이어 도망가 버렸다. 울산 군수 이언함(李彥諴)은 동래에서 적에게 붙들렸다가 이틀 후에 탈출해 왔다. 병사와 수사가 잇달아 진을 버리니, 그 나머지 첨사ㆍ만호까지 다 기록하기는 어렵다. 부산에서 이곳까지 오도록 맞붙어 싸운 자는 하나도 없었는데, 오직 박진이 거느린 3백여 명은 소산에서 패하고 돌아와 밀양으로 달려 와서 앞 강을 지키기 위해 또 흩어진 병졸을 불러 모으고자 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여 응하는 자가 없었으며, 병력을 정돈하기 전에 적은 이미 다가왔다. 이 날은 안개가 크게 끼어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박진도 오지 못해 군사들을 흩어져 가게 놓아 주고 마침내 성중으로 달려 들어갔다.
17일(병오) 적은 밀양 앞 강에 도착하여 장차 성을 육박할 기세였다. 박진은 동래에서 성으로 돌아온 이후, 군민을 모집하여 원병이 올 때까지 지키려 하였으나 성 안팎의 주민들이 거의 다 분산되었다. 박진은 어떻게 할 수 없는 형세임을 알고 드디어 창고를 불태우고, 김수가 주둔한 곳으로 달려갔다.
17일 이 보고가 이르자, 중외가 크게 진동하여 마침내 8도의 좌ㆍ우방어사(左右防禦使) 등을 나누어 보내고 이일(李鎰)을 경상도 순변사(慶尙道巡邊使)로 삼아 그날로 선발하여 보냈다.
별록 : 이 날 변방의 보고가 처음 들어오자, 서울의 조야(朝野)는 크게 놀라서 문무 백관이 궐내에 모였다. 모두 말하기를,
“적이 침략한 의도는 하루에 정해진 것이 아니여서 사방으로 들어올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급속히 영ㆍ호남의 좌ㆍ우방어사와 조방장(助防將)을 우선 출동시키소서.”
하였다. 그래서 이일을 경상도 순변사로 임명하여 보내니, 밤 4경에야 조정을 하직하였다.
또한 의금부 도사를 보내어 경상 병사 김성일(金誠一)을 잡아오게 하였다. 대개 왜군이 침입해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진술한 말에 대한 죄를 다스리기 위한 것이다.
18일 변방의 급보가 하루에도 10여 차례나 들어오는데, 모두 적의 세력이 막대하여 방어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도읍내의 인민들은 겁에 질려서 어쩔 줄을 몰라 모두가 붕괴할 기색이었다.
19일 비망기를 내리기를,
“전란이 급박한 이때 평상시의 규칙만을 지킬 수 없으니, 무릇 사대부로 죄를 짓고 파면되었던 자는 대소(大小)와 구근(久近)을 불문하고 모두 등용하여 소임을 맡겨 보내고, 무사로 상을 당하여 집에 있는 자는 모두 기복(起復)시킨다.”
하였다.
20일 신립(申砬)을 삼도 순변사(三道巡邊使)로 삼고, 유성룡(柳成龍)을 도체창사(都體察使)로 삼고, 김응남(金應南)을 부사(副使)로 삼아 그날로 부임하게 하였다.
21일 이일(李鎰)이 문경(聞慶)에 도착하여 치계하기를,
“오늘날의 적은 신병(神兵)과 같아서 감당해 낼 자가 없습니다. 신은 오직 죽을 따름이옵니다.”
하였다. 이에 궁중(宮中)도 결코 견고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여 마침내 미투리 등 멀리 가는 도구를 구입하고, 또 사복시에 명하여 즉시 사용할 수 있는 말을 정돈케 하여 비상시의 사용에 대비하게 하였다.
22일 신립(申砬)이 출발에 앞서 면대하기를 청해 아뢰기를,
“병조 홍여순(洪汝諄)은 제대로 일처리를 하지 못하여 군중에게 큰 실망을 주었으니, 벌을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상이 크게 노하여 김응남(金應南)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 또 경림군(慶林君) 김명원(金命元)을 기복시켜 도원수로 임명하여 한강에서 군대를 훈련하게 하였다.
23일 상은 내수사 별좌 김공량(金公諒)에게 내수사 노복(奴僕)으로 활쏘기를 잘하는 자 2백 여명을 거느리고 대내(大內)를 숙직하게 하였다.
○ 그때 남쪽에서 점차 긴박해지는 상황을 보고하자 장안의 일반 백성 중에는 외부로 피난하는 자가 많았고, 각사(各司)의 관원 중에도 숨고 출사하지 않는 자들이 있었다. 기성부원군(杞城府院君) 유홍(兪泓)과 좌찬성 최황(崔滉)은 맨 먼저 가족을 시골로 내려보냈다. 상은 윤두수를 한 번 쓸 만한 인물이라 하여 석방을 명하니, 대간이 석방해서는 안 된다고 아뢰었으나, 상은 따르지 않았다. 양사가 합계하기를,
“도성을 굳게 닫고 관민에게 함부로 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또 미투리 등의 물건을 돌려보내어 서울을 죽음으로 지켜 버리고 가지 않는다는 뜻을 표시하소서.”
하였다.
24일 부원군 유홍이 아뢰기를,
“미투리는 적을 방어하는 도구가 아니오며, 마필(馬匹)을 대기시키는 것은 인심을 진정시키는 길이 아닙니다. 하물며 우리가 가는 곳에는 적도 올 수 있는 것이오니, 군신 상하가 함께 사직을 위하여 죽어야 합니다.”
하였다.
○ 상이 의금부에 유시하여 김성일을 체포하여 오지 말게 하였다. 김성일은 직산(稷山)까지 왔다가 되돌아갔다.
25일 종실로 총관(摠管)과 위장(衛將)의 칭호를 채워 번을 나누어 궐내에 입직하게 하여 숙위를 갖추었다.
26일 양사에서 합동으로 아뢰기를,
“영의정 이산해(李山海)는 직책이 수상(首相)인데도 인심을 안정시키지 못하여 나라를 흙처럼 와르르 무너지는 형세에 놓이게 하였으니, 도당(都堂)을 물러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 이조 판서 이원익(李元翼)이 스스로 말하기를,
“결사대 10여 명이 죽고 살기를 같이 하기로 약속하였으니, 이들과 함께 적진에 뛰어 들어가서 적장의 목을 베고 긴박한 국란을 조금이라도 완화시킨다면 비록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오활(迂闊)하다 하여 채용하지 아니하였다.
27일 생원 구용(具容)과 권필(權韠)이 상소하기를,
“유성룡(柳成龍)의 강화 주장과 이산해(李山海)의 나라 그르침은 실로 오늘날의 진회(秦檜)와 양국충(楊國忠)이오니, 참수하여 백성에게 사죄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응답하지 아니하였다.
○ 이일(李鎰)이 상주에 도착하여 미처 진(陣)을 펴기도 전에 전군이 모두 패망하였다. 이날 보고를 접하자 거리가 텅 비어서 성을 지키려 하여도 이미 지킬 사람이 없었다.
○ 적이 밀양에 도착하여 사람을 보내어 이덕형(李德馨)을 만나기를 원한다 말하므로 마침내 그를 보냈다.
28일 광해군(光海君)을 책봉하여 세자로 삼았다. 백관이 입조(入朝)하여 하례하였는데 허둥지둥하여 동ㆍ서반(東西班)도 구분하지 못하고 인장(印章)도 교서(敎書)도 없었으며, 궁료(宮僚)들도 오지 않았다.
○ 백사(百司)가 각각 상소하여 도성을 굳게 지킬 것을 요청하였는데, 답하지 아니하였다.
29일 좌의정 유성룡과 도승지 이항복(李恒福)이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옛날부터 국가에 대란이 있을 때에는 제왕(諸王)을 각처에 나누어 보내 군사를 모집하여 적의 방어를 도모하였으니, 모든 왕자(王子)를 각 도에 나누어 보내어 재기를 모색하시기 바라옵니다.”
하니, 드디어 김귀영(金貴榮)ㆍ윤탁연(尹卓然)을 명하여 임해군(臨海君)을 모시고 함경도로 가게 하고, 한준(韓準)으로 순화군(順和君)을 모시고 강원도로 가게 하고, 또한 이원익을 평안도로, 최흥원(崔興源)을 황해도로 각각 보냈다. 이들은 예전에 본도의 수령 또는 감사로 있을 적에 대체로 은혜로운 정치를 베풀었기 때문이었다.
○ 이때에 임금께서 서울을 떠나고자 하여 이미 행장을 마련하였는데, 대간과 백사가 모두 가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궁중에서는 몰래 짐을 꾸리면서 외부 사람은 알지 못하게 하였다. 서울 사람들 중에는 임금이 평복을 착용하고 선인문(宣仁門)으로 빠져 나와 북도(北道)로 향했다는 낭설을 유포하는 자도 있어 떠들썩하다가 한참 만에야 진정되었다. 이런 일이 하루에도 서너 차례 있었다.
30일 신립이 군사를 중추에 주둔시키고 일처리가 초조하여 아침에 명령한 것이 저녁에 바뀌고, 주야로 잠에 빠져 조령(鳥嶺)을 막을 계획을 수립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적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풀이 우거진 저습한 지대에 포진하여 적에게 포위되어 한 사람도 빠져 나간 자가 없게 되었다. 이 날 패전보가 이르자 위로는 조관(朝官)으로부터 아래로는 군교(軍校)에 이르기까지 서로들 도망가서 성문이 닫히지 않았고 인경도 치지 않았으며, 인마(人馬)가 인정전(仁政殿)의 마당을 메웠다.
○ 하루 전날 상은 유성룡을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삼고, 이성중(李誠中)ㆍ정윤복(丁允福)을 좌우통어사(左右統禦使)로 삼으니, 도승지 이항복이 아뢰기를,
“이제 국사가 끝장났는데 만약 중국에 구원을 청하는 일이라도 있게 된다면 그 사이를 주선하고 응대하는 데에 유성룡이 없어서는 안되오니, 서울에 머물러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니, 마침내 이양원(李陽元)으로 대신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상은 표신(標信)을 병조 판서 김응남에게 주어 임의로 일을 처리하게 하였다. 김응남은 목에 표신을 걸고 지휘하려 하였으나 누구도 응하는 자가 없었다. 이미 밤은 삼경이 되어 대가가 출발하려 하였지만 호위군이 갖추어지지 않았다. 병조 정랑 이홍로(李弘老)는 표신을 가지고 주위를 두루 돌아다녔으나 오직 위장(衛將) 성수익(成壽益) 한 사람 뿐이었다. 하늘에선 비가 세차게 내리고 밤은 칠흙같이 어두웠다. 임금은 단지 두서너 명의 젊은 내시와 함께 마루 방에 앉았는데, 무뢰한들이 대내로 난입하여 조금도 거리낌없이 보화를 약탈하였다. 시녀들은 맨발에다가 옷을 벗고, 혹은 눈물을 흘리고 혹은 통곡하면서 궁문을 흩어져 나오니 곡성이 하늘에 사무쳤다. 이홍로는 동강난 초로 불을 밝혀 들고 상을 인도해 나왔다. 곤전(坤殿)에서 비빈(妃嬪)에 이르기까지 모두 옥교(屋轎))를 탔는데, 메는 인원은 혹은 7ㆍ8명, 혹은 5ㆍ6명이 되었다. 4경에야 비로소 궁문을 나와 상은 말을 탔고, 따르며 수행 관원은 순서를 이루지 못하였다. 그들의 거취에 대하여 모두 기록할 수 없으므로 우선 아문(衙門) 별로 다음과 같이 열기(列記)하였다.
영의정 이산해(李山海)ㆍ좌의정 유성룡(柳成龍)ㆍ우의정 이양원(李陽元) 서울에 잔류 ㆍ좌찬성 최황(崔滉)ㆍ우찬성 정탁(鄭琢)ㆍ좌참찬 최흥원(崔興源) 순찰(巡察)로 황해도로 갔음 ㆍ사인 윤승훈(尹承勳) 나머지 사람은 모두 빠졌음 ㆍ이조 판서 이원익(李元翼) 순찰로 평안도로 갔음ㆍ참판 정창연(鄭昌衍)ㆍ참의 이정암(李廷馣)ㆍ정랑 조정(趙挺)ㆍ정랑 유영경(柳永慶) 최흥원(崔興源)의 종사관으로 갔음 ㆍ정랑 정광적(鄭光績) 어사로 강원도에 가서 돌아오지 못하였음 ㆍ좌랑 이호민(李好閔)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으로 갔음 ㆍ좌랑 김시헌(金時獻) 나머지 사람은 빠졌음 ㆍ호조 판서 한준(韓準) 참판 이하의 사람은 기록 못했음 ㆍ예조 판서 권극지(權克智) 죽은 지 2일이 됨ㆍ참판 박응복(朴應福) 참의 이하는 기록하지 아니하였음 ㆍ좌랑 이경류(李慶流) 상주(尙州)에서 죽었음 ㆍ병조 판서 김응남(金應南)ㆍ참판 심충겸(沈忠謙)ㆍ참의 정사위(鄭士偉)ㆍ참지 황섬(黃暹)ㆍ정랑 이홍로(李弘老) 개성에서 뒤처졌음 ㆍ정랑 구성(具宬) 개성에서 파직됨 ㆍ정랑 송순(宋淳) 파주(坡州) ㆍ정랑 유희서(柳熙緖) 김명원(金命元)의 종사관으로 감 ㆍ좌랑 서성(徐渻) 파주에서 뒤로 처졌음 ㆍ좌랑 박동량(朴東亮)ㆍ이영(李覮) 영변에 와서 세자를 수행해 갔음ㆍ좌랑 최관(崔瓘) 평양에서 병으로 갔음 ㆍ형조 판서 이하는 기록하지 못했음. ㆍ공조 참판 이덕형(李德馨) 적중에서 돌아오지 아니했음. 판서 이하는 기록하지 못했음 ㆍ한성 판윤 홍여순(洪汝淳) 좌윤 이하는 기록하지 못했음 ㆍ대사헌 이헌국(李憲國)ㆍ집의 권협(權悏)ㆍ장령 정희번(鄭姬藩)과 이유중(李惟中)ㆍ지평 이경기(李慶祺) 박천(博川)에서 하직하지 않고 가버림 ㆍ지평 남근(南瑾) 처음부터 오지 아니함ㆍ대사간 김찬(金瓚) 평양에 와서 상소하고 갔음 ㆍ사간 이국(李)ㆍ헌납 이정신(李廷臣) 영변에서 하직하지 않고 갔음 ㆍ정언 정사신(鄭士信) 처음부터 오지 않음 ㆍ정언 황붕(黃鵬) 평양에서 뒤처짐 ㆍ홍문관 교리 이유징(李幼徵)ㆍ교리 심대(沈垈)ㆍ수찬 박동현(朴東賢)ㆍ수찬 임의정(任義正) 처음부터 오지 않음 ㆍ부수찬 윤섬(尹暹) 박지(朴箎) 모두 상주(尙州)에서 죽었음
별록 : 부제학 정창연(鄭昌衍) 잡사(雜事)와 합한 것이다. ㆍ도승지 이항복(李恒福)ㆍ좌승지 이충원(李忠元)ㆍ우승지 이정형(李廷馨)ㆍ좌부승지 노(盧) 평양에서 뒤로 처졌음. ㆍ우부승지 신잡(申磼)ㆍ동부승지 민여경(閔汝慶) 평양에서 뒤처졌음. ㆍ주서 박정현(朴鼎賢) 안주에서 하직하지 않고 돌아갔음. ㆍ주서 임취정(任就正) 안주에서 하직하지 않고 돌아갔음. ㆍ봉교 기자헌(奇自獻) 평양까지 뒤쫓아 따라왔음. ㆍ대교 윤경립(尹敬立) 상소하고 아버지 임지로 갔음. ㆍ대교 조존세(趙存世) 안주에서 하직하지 않고 가버렸음. ㆍ검열 강수준(姜秀峻) 평양에서 상소하고 갔음. ㆍ검열 김의원(金義元) 나머지는 빠졌음.
한산관(閑散官)으로 수행한 자는 다음과 같다.
기성군(杞城君) 유홍(兪泓)ㆍ해평군(海平君) 윤근수(尹根壽)ㆍ해원군(海原君) 윤두수(尹斗壽)ㆍ호군 이산보(李山甫)ㆍ유근(柳根)ㆍ홍진(洪進)ㆍ홍인상(洪麟祥)ㆍ민준(閔濬)ㆍ윤자신(尹自新)ㆍ황정욱(黃廷彧)ㆍ이정립(李廷立)ㆍ이관(李瓘)ㆍ성수익(成壽益) 등이다. 나머지는 모두 다 기록할 수 없음.
각사의 관원으로 수행한 자. 이하는 단지 종행자만 기록하였음.
대사성 임국로(任國老) 평양에서 상소하고 갔음. ㆍ직강 심우승(沈友勝)ㆍ박사 이효원(李效元)ㆍ사복첨정 박응인(朴應寅)ㆍ내승(內乘) 박동언(朴東彥)ㆍ내승 안황(安滉)ㆍ종부첨정 민선(閔善) 파주에서 뒤처졌음. ㆍ장악직장 이경전(李慶全) 평양에서 뒤처졌음. ㆍ사섬봉사 이신성(李愼誠) 파주에서 뒤처졌음. ㆍ봉상봉사 홍봉상(洪鳳祥)
세자종관(世子從官)으로서는 보덕 심대(沈垈)ㆍ필선 심우정(沈友正)ㆍ문학 이상의(李尙毅)ㆍ사서 기록하지 못했음. ㆍ설서 이광정(李光庭) 익위사(翊衛司)의 관원은 모두 오지 않았으나 부솔(副率) 강인(姜絪)만이 왔음.
근시(近侍)의 신하들은 대개 임금의 수레를 따라 왔으되, 지평 남근(南瑾)과 정언 정사신(鄭士信)은 겨우 반송정(盤松亭)까지 따라 왔다가 곧 어디로 가버렸는지 알지 못하였다. 처음부터 따라오지 않은 자는 임몽정(任蒙正) 한 사람 뿐이고, 그 나머지 소관(小官)과 산질인(散秩人)은 혹은 파주(坡州)와 개성(開城)에서 자기 임의로 행동을 취하여 기록하지 못한 자가 많다.
○ 이날 낮에 대가는 큰 비를 무릅쓰고 벽제(碧蹄)에 도착하여 잠시 휴식한 후, 어둠을 타서 임진강을 건너려 하니, 강물이 불어 범람하고 길은 진흙이며 나룻배는 겨우 5ㆍ6척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관계로 대소 인원들이 서로 먼저 건너려고 다투어 상하가 문란하고 마부와 말이 분산되어 혹은 걷기도 하고 혹은 말을 탔지만 밤새도록 건너가지 못했다. 후궁 민빈(閔嬪)은 가마 멀미로 계속 파주에 남아 있었다. 임금은 배를 타고 기다렸다. 이미 이경(二更)이 되었으나 임금은 저녁 식사를 들지 못해서 내시에게 술을 가져오라 하니 술을 서울서 가져오지 않았다고 대답하고, 차를 가져오라 하니 차도 오지 않았다고 대답하므로, 왕은 갈증을 참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내의원의 용운(龍雲)이란 사람이 상투 속에서 사탕 반 덩어리를 끄집어 내어 강물에 타서 드리었다. 밤중에 동파관(東坡館)에 도착하여 사경(四更)에야 비로소 궂은 진지를 들고, 세자 이하는 모두 밥을 굶었다. 좌의정 유성룡(柳成龍)이 백미 3승(升)을 올리니, 다음 날 아침에 밥을 지어 드렸다.


5월

1일 임금이 해원군(海原君) 윤두수를 불러 이르기를,
“경은 큰 재주가 있어 위급한 국가를 구할 만하므로 특명으로 석방하였으니, 사생(死生)을 서로 구하여 나의 뜻을 저버리지 마오.”
하고, 차고 있던 푸른 비단으로 짠 주머니를 풀어 주면서 또 이르기를,
“정(情)을 표시할 만한 것이 없소.”
하니 윤두수는 눈물을 흘리면서 사례하고 물러나갔다.
○ 장계부원군(長溪府院君) 황정욱(黃廷彧)과 호군 황혁(黃赫)도 와서 배알하니, 상은 강원도로 가서 순화군(順和君)을 수행하라 명하고, 또한 동지 이기(李墍)와 황혁을 명하여 함께 가게 하고서 곧 군병을 불렀다. 이기는 관동(關東)에서 명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 상이 동파관 청사 뒤에서 홀로 서 계시다가 한 선비가 바깥으로 뛰어나가는 것을 보고 불러서 이르기를,
“너는 누구냐?”
하니, 그는 대답하기를,
“신은 최황(崔滉)의 아들 별좌(別坐) 유원(有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너는 공신의 아들인데, 의리상 마땅히 국가와 더불어 기쁨과 걱정을 같이 하여야 할 것이다.”
하고, 드디어 붉은 가죽 띠를 풀어 주면서 이르기를,
“이것을 띠고 나를 잊지 말라.”
하였다.
○ 정창연(鄭昌衍)을 예조 판서로 삼고, 홍인상(洪麟祥)을 부제학으로 삼았는데, 모두 구두로 제수한 것이다. 그때 대가가 개성을 향하려 할 때 해가 한낮에 가까웠으나 수라를 올리지 못했으며, 군졸과 무부가 모이지 아니하였다. 장단 부사(長湍府使) 구효연(具孝淵)은 도망하여 숨고 나타나지 아니하므로 승지 등이 직접 경기 감사 권징(權徵)을 불러 지휘하게 하니, 집에 누워서 일어나지 아니하였다. 승지 등이 노하여 꾸짖어도 응하지 않았다.
○ 오후에 대가가 출발하여 날이 저물어서야 개성부에 도착하였다. 상은 말을 멈추고 성안의 부로(父老)를 불러 위로하려 하였으나 말이 빨리 달려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 초경(初更)에 군인들이 놀라 떠들며 서쪽에서 동쪽을 향해 오면서 인마가 서로 짓밟기도 하였다. 궁인 이씨는 밖에서 이 소리를 듣고 변이 났다 하여 스스로 자기의 목을 찔렀으나 죽지는 않았다. 이경에 또 놀라서 떠들다가 한식경이 지나서야 가라앉았다.
2일 상이 승지 신잡(申磼)과 정랑 이홍로(李弘老)를 명하여 임금이 친히 쓴 교서를 주어 경성으로 보냈는데 인민을 위로하고 달래려고 한 것이다.
○ 사시(巳時)에 병조 정랑 구성(具宬)이 내문(內門)에서 나오며 말하기를,
“상께서 삼사를 입시하라 한다.”
하니, 대소 관원이 궁문 밖에 늘어 앉아 말하기를,
“상이 만약 소대(召對)하게 하셨다면 정원은 어찌하여 불러들이지 않는가?”
하였다. 판윤 홍여순(洪汝諄)이 헌납 이정신(李廷臣)에게 말하기를,
“입대할 수 없다. 어찌 구성의 부름을 당하겠는가?”
하니, 구성이 노하여 말하기를,
“나는 전교를 직접 받았는데, 네가 어찌 앉아서 일어나지 않는가?”
하고, 대사간 김찬(金瓚)의 손을 잡아 일으키니, 모든 대관(臺官)이 마침내 따라 들어갔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의 사태를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하였다. 말을 마치기도 전에 뭇 관원이 모두 아뢰기를,
“영의정 이산해(李山海)가 김공량(金公諒)과 사귀어 심복으로 삼고, 홍여순(洪汝諄)ㆍ이홍로(李弘老)ㆍ조정(趙挺)ㆍ송언신(宋言愼) 등과 함께 안팎으로 호응하여 마구 기염을 터뜨리면서 사림에 해를 끼치고 국사를 망쳤으며, 서울을 떠나는 날에도 수상의 몸으로서 말리기는커녕 도리어 빨리 서울을 떠나기를 간청하였나이다. 아첨하는 태도가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하니, 오늘날의 일은 이 사람 때문이옵니다. 청하옵건대 국법으로 다스리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산해가 비록 김공량과 사귀었으나 어찌 이로 인해서 국사를 그르치고 적을 불러 들였다 할 수 있겠느냐. 그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이다.”
하였다. 모두 아뢰기를,
“사대부의 거취(去就)에 대하여도 간여하여 주장치 아니함이 없어, 이산해는 밖에서 주장하고 김공량은 안에서 주장하였음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하고, 이헌국(李憲國)이 아뢰기를,
“이산해는 밤을 이용하여 몰래 김공량의 집으로 갔으니, 종적이 이상야릇합니다. 어찌 통분치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꼭 몸소 갔다고 보겠느냐. 그것은 헛된 말일 것이다.”
하였다. 이헌국이 아뢰기를,
“밤에 나귀를 타고 가다가 순라군에게 붙들렸는데, 어찌 거짓말이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서울을 떠나자는 일은 이산해 혼자만이 말한 것이 아니다. 좌상도 말하였고, 찬성 최황도 말하였는데, 오늘날 이산해의 죄만 다스리기를 청하니 나는 참으로 알 수가 없다.”
하였다. 황붕(黃鵬)이 아뢰기를,
“당시의 사태가 너무도 위급하였으니, 누군들 도성을 버리는 것이 옳다 하지 않았겠습니까?”
하니, 구성(具宬)이 황붕의 옷을 잡아 끌어내며 말하기를,
“그대는 이산해의 조카인데, 어찌 감히 입을 연단 말인가.”
하였다. 유성룡이 뜰에 내려가 눈물을 흘리면서 절하며 아뢰기를,
“이산해와 함께 나라를 그르친 죄를 받고자 하옵니다.”
하니, 최황(崔滉)이 또 아뢰기를,
“신은 위급하면 다른 곳으로 잠시 피하였다가 후일을 도모하자는 뜻으로 말했을 따름이오니, 실은 이산해 등과는 다르옵니다.”
하였다. 상이 소리를 높여 이르기를,
“한림(翰林)ㆍ주서(注書)가 모두 여기 있는데, 내가 거짓말을 하겠는가?”
하고서, 이어 사관(士官)을 돌아보면서 이르기를,
“너희들도 듣지 않았는가?”
하니, 사관이 아뢰기를,
“최황 역시 서울을 떠나자고 직접 청하였고, 그 외에 다른 말은 없었습니다.”
하였다. 최황은 그래도 둘러대며 사죄하지 아니하였다. 또한 드디어 이산해를 파직시키고, 최홍원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남도 병사(南道兵使) 신할(申硈)이 임금의 부름을 받고 올라와서 통어사의 자격으로 임진(臨津)에다가 군사를 주둔시켰다.
3일 상은 남문에 나와 부로와 인민을 불러 위로하고 이어서 고충을 물으면서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하니, 선비 10여 명이 대답하여 아뢰기를,
“오늘날의 사태는 이산해와 김공량이 안팎으로 일을 꾸며서 인민이 원한을 품게 되어 외적의 침입을 초래한 것이온데, 이것은 모두 전하께서 숙원 김씨(淑媛金氏)에게 빠졌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 상의 행차가 돌아오려 할 때, 승지 이충원(李忠元)이 아뢰기를,
“성혼(成渾)을 부르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불러서 쓸 사람이 없겠느냐. 내가 구태여 부를 것까지는 없다.”
하고, 마침내 행궁(行宮)으로 돌아갔다.
○ 상이 개성 유수 홍이서(洪二恕)가 병이 있고, 승지 이정형(李廷馨)이 전에 본부의 경력(經歷)으로 치적이 있었다 하여 정형을 유수로 발탁하여 임명하고, 또한 그의 형 이정암(李廷馣)을 명하여 함께 개성을 지키게 하고, 이국(李)을 승지로 임명하였다.
○ 양사가 합계하기를,
“좌의정 유성룡은 나라를 그르치게 한 죄에서 홀로 면하기 어렵사옵고, 병조 정랑 구성은 본래 근시의 신하가 아니오며, 또 명을 받들어 내고 드리는 소임도 아니옵니다. 그런데 여러 신하들이 입대할 적에 함께 종신(從臣)의 반열에 있어 기거(起居)가 전도되어 조정의 예의를 크게 위배하였으니, 파직시키소서.”
하였다. 상이 그 말을 따라 윤두수로 유성룡을 대신케 하였다.
○ 상이 기성부원군 유홍과 도승지 이항복에게 명하여 신성(信城)ㆍ정원(定遠) 두 왕자를 모시고 평양으로 먼저 가게 하고, 이항복을 참판으로 발탁해 제수하여 즉일로 떠나가게 하였다.
○ 또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 정철(鄭澈)을 적소인 강계(江界)에서 불러들여 유홍 등과 함께 왕자를 보호하게 하였다.
○ 예조 판서 정창연(鄭昌衍)이 말하기를,
“태묘(太廟)의 신주를 말 위에 싣는다면 적어도 50여 필은 넘는데, 지금 모든 군(郡)에서 운반할 능력이 없으니, 만약 뜻밖의 변이 생긴다면 낭패입니다. 그러하오니 이미 정결한 곳에 봉안하고 행장을 간편하게 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하니, 많은 관리들은 모두 새로 임명된 정승이 출사(出仕)한 뒤에 논의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4일 상이 종신(從臣)을 시켜 한 사람을 차출하여 양호(兩湖)로 가서 군사를 모집하게 하니, 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보덕(輔德) 심대(沈垈)가 아뢰기를,
“신이 가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그를 불러 말하기를,
“사람들이 모두 피하는 것을 그대만이 자원하니 참으로 흐뭇하다.”
하고, 당상관으로 승진시켜 보내고자 하였다. 심대는 아뢰기를,
“신이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돌아오면 이는 헛되이 상질(賞秩)을 받는 것이 되오니 복명하는 날에 받겠나이다.”
하므로, 상은 그냥 위로해 보냈다. 오후에 신잡(申磼)이 혼자서 말하기를,
“적이 이미 서울에 들어왔습니다.”
하였다. 이는 마산(馬山)에 이르러 길가에 떠도는 유언비어를 듣고 겁이 나서 돌아온 것이었다. 상은 출발 준비를 명하였다.
○ 정창연(鄭昌衍)은 대가가 출발했다는 말을 듣고 여러 대신들과 논의하지 않고, 태묘(太廟)의 신주를 목청전(穆淸殿)의 우측에 안치하였다.
○ 저녁 무렵에 대가가 출발하니, 상하가 소란스러웠는데 임진강을 건널 때보다도 더 심하였다. 밤에 금교(金郊)에 도착하여 재신(宰臣) 이하 모두가 풀밭에서 노숙하였다. 이날 밤 군인들이 놀라서 소동을 피운 것이 4ㆍ5차례였으며 사람들은 잠들지 못하였다. 한응인(韓應寅)을 순경사(巡警使)로 삼아 호위군을 거느리게 하였다.
5일 임금이 금암(金巖)에 도착하여 이조 판서를 시켜 호종 인원의 명단을 보고하게 하였다. 해가 저물어서야 평산(平山)에 도착하였고 보산(寶山)에서 유숙하였다.
6일 대가가 낮에 안성(安城)에 머무르고, 저녁에 용천(龍泉)에서 쉬었는데, 안성과 용천에서 모두 수라를 올리지 못하였으므로 어쩔 수 없이 역참(驛站)을 배로하여 검수(劍水)를 지나 봉산(鳳山)에 이르니 날이 이미 초경이 되었다. 상하가 모두 허기가 져서 갈 수 없었다. 대사헌 이헌국(李憲國)은 노하여 꾸짖기를,
“정승과 승지는 모두 개자식이다. 어찌 군부(君父)로 하여금 밥을 굶고 가시게 하는가.”
하고, 말 위에서 팔을 휘두르고 주먹 다짐을 할 것같이 하니, 모두들 실소(失笑)를 하였다.
7일 임금의 행차가 황주(黃州)에 이르렀다. 병조 참판 심충겸(沈忠謙)이 장연 현감(長淵縣監) 김여율(金汝嵂)을 맞이하여 말하기를,
“공의 형 여물(汝岉)은 비록 문관이지만 적에게 죽었는데, 하물며 연소한 무사로서 어찌 앉아만 있을 수 있겠소. 빨리 나라에 청원하여 복수를 꾀하시오.”
하니, 김여율은 얼굴이 붉어지면서 난색을 표시하였다. 심충겸이 꾸짖기를,
“너같은 겁 많은 무사는 머리를 베어 뭇 사람에게 보여야 한다.”
하니, 김여울은 어쩔 수 없이 조정에 청원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한 지방을 담당하고자 하였다. 상은 충성스럽고 용맹스런 무사라 하여 특별히 표창을 주고 통정대부로 승진시켜 보냈다.”
8일 대가가 평양에 도착하니, 감사 송언신(宋言愼)이 군사 3천 여 기를 거느리고 전후로 어가(御駕)를 영접하였는데, 창과 칼이 햇빛에 번쩍이어 기세가 매우 당당하였다. 성중의 인민들의 가옥은 서울과 같아서 수행한 인원들이 비로소 생기를 띠게 되었다.
○ 이때에 조정의 중의(衆議)는 모두 김명원(金命元)ㆍ신할(申硈)이 비록 임진강을 방어하고 있으나 병력이 대단히 고단하니, 또 다시 문무 장관을 보내어 협동으로 방어해야 한다 하였다. 드디어 한응인을 제도도순어사(諸道都巡御史)로 삼고, 이천(李薦)을 방어사로 삼았다.
9일 이성중(李誠中)이 와서 말하기를,
“3일에 적이 서울로 들어왔으며 도성에 남아있던 이양원(李陽元)은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므로, 유홍(兪泓)을 우의정 겸 도체찰사로 임명하여 군사 3천을 주어 출발하게 하였다.
10일 종묘와 사직의 신주가 왔다. 대가가 보산(寶山)에 당도하던 날 종실 해풍군 기(海豊君耆)가 윤두수의 손을 잡고 통곡하며 말하기를,
“공은 국가의 대신으로서 유사(有司)가 종묘 사직의 신주를 버린 것도 알지 못하니, 어찌된 일이오? 고금에 종묘사직이 없는 나라가 있었습니까?”
하니, 윤두수가 대답하기를,
“유사가 두루 의론을 거치지 않고 지레 봉안하였으니, 비록 나의 소관이 아니라 할지라도 어찌 나의 죄가 아니라 하겠습니까. 공이 말하지 않았다면 나라답지 못한 꼴이 될 뻔하였습니다.”
하였다. 그리고 예관을 보내서 모시고 오게 한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 유홍이 명을 받고 시일이 경과되어도 출발할 기색이 보이지 않는지라, 상이 불러 묻기를,
“그대는 지금까지 출발하지 않았으니, 웬일이오.”
하니, 유홍이 아뢰기를,
“발바닥에 종기가 나서 갈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대사헌 이헌국(李憲國)이 큰 소리로 꾸짖기를,
“공은 재주도 없고 덕도 없는데도 정승의 자리를 받았으니 은혜가 지대한 것인데, 겁이 나서 가지 않고 발바닥에 종기가 났다고 변명하니, 진실로 연석에 나타난 기생이 발병을 핑계로 노래를 부르지 않는 것과 같소. 공이 어찌 감히 이럴 수 있소.”
하면서 마구 때릴 기세를 보였다. 임금도 쓴 웃음을 지으면서 이르기를,
“먼저 한응인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유홍은 끝내 가지 않았다.
11일 한응인(韓應寅)ㆍ이천(李薦)이 군사 5천을 거느리고 출발 인사를 하러 왔다. 떠날 적에 상이 술을 하사하며 위로하고 권면해 보냈다. 비망기에,
“옛날부터 변을 당한 임금은 반드시 스스로를 폄하하는 일이 있었다. 지금부터 내외 신민에게 이르노니, 소장(疏章) 등에 예성(睿聖)이라든가 또는 존호를 일체 사용하지 않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이성중이 아뢰기를,
“이는 훌륭한 처사이시니, 신하된 도리로서 따라서 상감의 아름다움을 완성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윤두수가 아뢰기를,
“오늘날의 사태는 신하의 죄가 아님이 없는데, 어찌 상감 혼자만이 먼저 스스로 폄하하는 이치가 있단 말입니까.”
하고, 마침내 폄하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대답하였다.
12일 이항복(李恒福)을 형조 판서로, 신잡을 이조 참판으로, 유희림(柳希霖)ㆍ홍진(洪進)ㆍ민준(閔濬)을 승지로 삼았다.
○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이 아뢰기를,
“신이 이빈(李薲)ㆍ유극량(劉克良) 이하 여러 장수 20여 인과 군사 1천여 인을 거느리고 임진(臨津)을 고수하고 벽제(碧蹄) 등에 매복을 설치하여 많은 적을 죽였습니다. 이양원(李陽元)도 이일(李鎰)ㆍ신각(申恪) 이하 장수들 10여 인과 군사 5천 여 인을 거느리고 대탄(大灘)에 주둔하여 진격을 도모하고 있는 중입니다.”
하니,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상하가 모두 즐거워하면서 머지 않아 임금이 환궁하게 될 것이라 하였다.
○ 조정에서 이르기를,
“백관들 중 서울을 떠날 때에 뒤떨어진 자를 전부 처벌할 수는 없지만, 도총부 위장(都摠部衛將)ㆍ금부 등의 관원은 다른 한가한 아문과는 비교할 수 없으니, 모두 백의종군하여 공을 세워 각자 힘을 다하도록 하라.”
하였다.
13일 이항복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 경기 감사 권징(權徵)이 치계하기를,
“왜적이 고군(孤軍)으로 깊이 들어와서 발에 종기가 나고 기운이 피로하여 그 세력이 이미 꺾이었으니, 원수에게 명하시어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속히 공격하게 하소서.”
하였다. 그 때에 여러 장관도 모두 말하기를,
“적의 기세가 이미 꺾였으며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합니다.”
하므로, 조정에서는 그 말을 믿어 김명원(金命元)에게 거듭 지시를 내려 적을 보고서도 공격하지 않는 태도를 책망하였다.
○ 이성임(李聖任)을 순찰부사로 삼아 강변의 토병(土兵) 중에 돌아온 자를 거느리고서, 전선으로 가서 참찬 한응인의 군무(軍務)를 돕게 하였다. 이에 앞서 이성임이 왜적의 난리를 듣고는 조정에 자청하여 몸소 영남에 가서 군사를 모집하여 왜적을 토벌하려 하다가 길이 막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조정에 한응인(韓應寅)을 도와 적을 토벌하겠다고 자청하였으므로 보낸 것이다.
14일 상이 한응인에게 타이르기를,
“이제 적의 세력이 꺾이었는데도 도원수 김명원이 여태껏 아무일도 하지 않으니, 경은 하루 속히 적을 토벌해야 할 것이요. 앉아서 김명원의 지시만 기다리다가 승전의 기회를 상실해서는 안 되오.”
하였다.
○ 양사가 합계하기를,
“이산해는 성질이 사악하고 음흉하여 궁궐과 내통하고, 김공량(金公諒)과 표리가 되어 나라를 그르치고 왜적을 불러들였습니다. 또 서울을 떠나던 날에도 임금께 그치기를 청하지 않았습니다. 청하옵건대 외방으로 귀양보내소서.”
하였다. 3일 만에 윤허가 내려서 평해군(平海郡)으로 귀양갔다.
○ 삼사가 또 김공량의 죄를 논의하기를,
“녹이나 축내는 천한 종의 무리로서 궁중의 세력을 빙자, 권세 있는 무리와 결탁하여 조정을 어지럽게 하고 선비들의 진퇴가 그의 수중에서 좌우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원한을 사고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바라건대 참수하여 온 나라에 사죄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라가 망할지언정 어찌 한 사람이라도 그릇되게 죽일 수 있겠느냐.”
하고, 끝내 듣지 아니하였다.
○ 이덕형이 돌아와 아뢰기를,
“명을 받고 죽산(竹山)까지 갔다가 신립이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역관만 왜적의 진영으로 들여보냈더니, 오래도록 돌아오지 아니하므로 부득이 되돌아왔습니다.”
하였다. 또 윤두수(尹斗壽)에게 말하기를,
“이제 인심이 이반되어 공공연히 위를 원망하는 말이 나오고 있으니, 이런 판국에는 아무 일도 되지 않으므로 반드시 별도로 인심을 위로하는 조치가 있어야만 다소라도 희망이 있을 것 같소.”
하니, 윤두수는 눈을 부릅뜨고 대답하지 않으므로 이덕형은 망연히 무엇을 실수한 듯 얼굴이 붉어져 물러 갔다.
○ 대사간 김찬(金瓚), 부제학 홍인상(洪麟祥), 집의 권협(權悏), 종묘영(宗廟令) 권희(權憘), 이조 정랑 박동현(朴東賢), 봉교 강수준(姜秀俊), 대사성 임국로(任國老) 등이 앞뒤로 상소하기를,
“부모들이 계시는 곳에 적이 들어와서 인민을 살해하였으니, 귀성(歸省)하고자 하옵니다.”
하니, 상이 모두 허락하였다. 이로 인하여 상소하여 귀향을 원하는 자가 어지러이 그치지 아니하니, 조정에서는 아뢰기를,
“임금과 어버이는 일체인데, 만일 모두 귀성을 하게 되면 누가 국가를 위하여 일을 하겠습니까. 일체 승낙하지 마시옵소서.”
하였다. 이 일이 있은 뒤부터 하직(下直)을 고하지 아니하고 돌아가는 자가 많았다.
○ 영해 부사(寧海府使) 한효순(韓孝純)이 아뢰기를,
“조정의 소식이 끊어지니 모두들 임의로 거취(去就)를 하오나 신은 본성(本城)을 굳게 지키고 있습니다. 지금 대가가 어디에 계신지 모르기에 감히 이와 같이 아뢰옵니다.”
하였다. 조정에서는 이 글을 보고 한편 슬퍼하고 한편 즐거워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었다. 드디어 한효순을 당상으로 승진시키고 칭찬해 마지 않았다.
○ 정곤수(鄭崑壽)를 대사간으로, 심충겸(沈忠謙)을 부제학으로, 이정립(李廷立)을 병조 참판으로 삼았다.
○ 인성부원군 정철(鄭澈)이 와서 아뢰기를,
“명을 받은 뒤로 즉시 떠나려 하였더니, 부사(府使) 홍세공(洪世恭)이 의금부의 공문이 도착하지 아니하였으니, 임금님의 분부가 계시는 것만으로 갑자기 출발을 허락할 수 없다고 하여 지금에야 도착하였습니다.”
하였다.
○ 조정에서 아뢰기를,
“8도가 전쟁의 도탄에 빠져 있으므로 일일이 관원을 차출하여 보낼 수 없으니, 과거의 예에 따라 시행하소서.”
하여, 드디어 각도의 감사에게 유시하였다.
○ 경상좌도 병사 이각(李珏)이 본도에서 이탈하여 임진강의 진중에 나타나므로, 조정에서는 선전관을 보내어 그의 목을 베어 조리돌렸다.
○ 대가가 평양에 도착한 뒤로 조정에서, 서울을 떠날 때에 위에서 비록 죄 있는 자를 사면하라는 교서가 있었으나 확실한 명령이 없으므로 감히 시행하지 못하고 드디어 명단을 작성하여 아뢰었더니, 역적에 연좌되어 귀양간 자도 모두 석방되었다. 그런데 홍성민(洪聖民)ㆍ이해수(李海壽)ㆍ백유함(白惟咸)ㆍ장운익(張雲翼)ㆍ유공진(柳拱辰)ㆍ이춘영(李春英) 등은 석방되지 않았다. 삭탈관직을 당한 자도 모두 탕척(蕩滌)되었으되, 박점(朴漸)만이 남아 있었다. 수일 후에는 홍성민 이하도 모두 사면되어 다시 서용받게 되었다.
16일 임진강에 포진하고 있던 적이 일시에 진영을 태워버리고 철수해가는 시늉을 하는지라, 경기 감사 권징(權徵)이 치계하기를,
“이들 적은 세력이 고립되고 힘이 피곤하여 진을 태워버리고 도망가려는 형상이 현저하니, 여러 장수들에게 지시하여 추격하도록 하소서.”
하고, 조정에서도 그럴 듯하게 생각하여 마침내 한응인(韓應寅) 등에게 추격하라고 재촉하였다.
17일 한응인이 전체 군사를 거느리고 강을 건넜다. 신할(申硈)이 좌군을 거느리고 먼저 적진을 공격하니, 나무하던 적이 보고는 달아났다. 김명원(金命元) 이하가 멀리 바라보고 모두 아군이 승리하여 나아간다 하고, 검찰사 박충간(朴忠侃)과 독진관(督陣官) 홍봉상(洪鳳祥)은, 우리 군사가 반드시 이긴다 하여 환호하며 날뛰었다. 홍봉상은 즉시 강을 건너 군사를 독려하는데 잠시 후에 7ㆍ8명의 적이 알몸으로 칼을 휘두르면서 나와 아군의 진영으로 뛰어들었다. 이에 좌ㆍ우군이 일시에 크게 무너져 신할 이하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가면서 모두 강에 빠져 죽고, 홍봉상도 죽었다. 이때에 김명원과 한응인ㆍ박충간이 모두 푸른 천의 옷을 입었다. 박충간은 일이 틀린 것을 보고 말을 타고 달아났다. 강 위에 있던 군사가 그가 달아나는 것을 보고 일시에 소리치기를,
“원수가 달아난다.”
하면서, 뿔뿔히 달아났다. 김명원과 한응인은 몸소 나와 외치기를,
“내가 여기에 있다, 내가 여기에 있다.”
하니, 비로소 군사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남은 군사는 겨우 천 명 정도였다.
19일 보고를 접하자 상하가 크게 놀랐다. 재기의 가망이 없어서 드디어 강변 토병(土兵) 중에서 동원되지 않은 자를 징발하여 모두 군에 편입시켰다. 전 첨사 박석명(朴錫命)이 용맹이 있어 명령을 받고 전투에 나갈 때 조정이 적을 사로잡는 방책을 물었다. 박석명이 대답하기를,
“나는 화살 한 발에 적 5ㆍ6명을 사살할 수 있으며, 화살 한 단이면 1백여 명을 죽일 수 있습니다. 단지 마음에 흐뭇한 일이 있은 뒤에야만 나의 용맹을 다할 수 있소.”
하였다.
조정에서는 그 말이 반드시 실효가 없을 줄을 알면서도 당상으로 승진시키려 하다가 마침내 절충장군으로 뛰어올려 제수하여 보냈다.
○ 조정에서는 적의 형세를 알 길이 없을 뿐더러 또한 대응책이 없다 하여, 마침내 선전관 이호의(李好誼)ㆍ김계현(金繼賢)을 시켜 서울에 가서 염탐하고 돌아오게 하였다.
○ 김명원이 아뢰기를,
“신각(申恪)이 주장(主將)의 명령을 어기고 불러도 오지 않는다.”
하니, 조정에서는 베이지 않을 수 없다 하여 선전관을 보냈다. 오후에 신각이 해유령(蟹踰嶺)에서 싸워 70여 명의 적을 죽였다. 승전의 보고를 접하자 상은 그의 사면을 명하였다. 그러나 명령이 도착했을 때에는 머리가 이미 진 앞에 매달려 있었다.
○ 대사헌 이항복이 조정에서 말하기를,
“오늘의 적은 우리 나라만의 적이 아니니, 속히 천조(天朝)에 구원을 요청해야 합니다.”
하였다. 윤두수가 말하기를,
“이제 아군이 임진강을 지키고 있으니 방어를 할 수 있으며, 조정에서는 사람을 하삼도(下三道)에 보냈으니 반드시 군사가 많이 올 것이요, 북도의 병력도 오래잖아 모일 것입니다. 대군이 모이면 대책이 나올 것입니다. 하물며 천조에서 군사를 보내 구원해 준다는 것도 꼭 기약할 수 없으며, 상국(上國)의 군사가 일단 우리 경내에 들어오면 그 후의 난처한 걱정거리가 이보다 만 배나 더할 것이니, 어찌 이 일을 경솔히 할 수 있습니까?”
하니, 이항복이 물러갔다.
○ 관전보(寬奠堡)의 총병(摠兵)이 의주 목사 황진(黃璡)을 불러 말하기를,
“당신 나라가 적의 침범을 당하였으니 상국으로서 구원하지 않을 수 없소. 본인이 며칠 안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강을 건널 터이니, 당신은 그 뜻을 신속히 임금께 아뢰오.”
하니, 황진이 대답하기를,
“우리 나라가 비록 갑자기 병화를 입어 온 나라가 흔들렸다 하더라도 우리 나라의 군사가 능히 적을 당해낼 수 있을 것인데, 어찌 대인(大人)에게 구원을 청하여 괴로움을 끼치게 하겠소.”
하자, 총병은 웃으며 돌아갔다.
황진은 이 일을 자세히 아뢰니, 상은 보고 노하여 이르기를,
“천조에서 구원병을 보내려 하는데, 황진이 무슨 군사가 있어 그런 말을 하여 저지하였단 말이냐?”
하고, 체포하여 국문하고자 하였다. 조정의 의론은 황진이 명령을 듣지 못했으니, 대관(大官) 1명을 보내 상황을 보아 처리하는 것이 좋다고 하여 좌승지 유근(柳根)을 추천하므로, 상은 그를 이조 참판으로 제수하여 보냈다.
○ 남도 병사(南道兵使) 이혼(李渾)이 적병이 서울에 육박했다는 소식을 듣고 근왕병(勤王兵)을 일으켜 연천(漣川)으로 와서 이양원(李陽元)과 군사를 합하고, 그 곡절을 자세히 임금께 아뢰었다. 조정에서는 사람을 보내어 그를 치사하였다. 적이 변방을 침범하던 초기에 조정에서는 공문을 요동(遼東)에 보냈는데, 그 후 정신이 없어 계속 보고를 보내지 못하였다. 대가가 평양에 도착하자, 통역관만 보내 대충 긴박한 사태만을 보고하였더니, 이때에 요동대인(遼東大人 관전보 총병의 존칭)이 의주에 힐책하여 물어 왔던 것이다. 상이 또 유근(柳根)을 명하여 전후 곡절을 자세히 알아보게 하였다.
○ 조정에서는 강계 부사 홍세공(洪世恭)이 쓸 만한 재질이 있다 하여 불러서 승지를 제수하였다.
○ 병조 판서 김응남(金應南)이 자기 어머니가 토적(土賊)에게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이항복으로 대체하고, 이덕형(李德馨)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27일 적이 임진 하류에서 작은 배를 타고 바로 강을 건널 듯이 하면서 아군을 시험하였다. 부원수 이빈(李薲)이 화살 한 발 쏘지 않고 먼저 도망가서 상하 모든 군사가 일시에 크게 무너졌다. 이양원 등은 적이 임진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북도로 달아났다.
29일 보고를 접하자, 상은 구사맹(具思孟)ㆍ신잡(申磼)ㆍ구성(具宬)에게 명하여 신성군(信成君)ㆍ정원군(定遠君)을 배행하여 영월군(寧越郡)으로 가게 하였다.
○ 이때에 조정에서는 임진강의 군사가 능히 적을 방어하리라 생각하여 다시 방비책을 강구하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되니, 평안 감사 송언신(宋言愼)과 병사 이윤덕(李潤德)은 사람의 안색이 없이 모두 정신이 나가서 미투리를 신고 떠났다.
○ 조정에서는, 북도로 들어갔던 적이 양덕(陽德) 등처로 돌아 배후로 나오게 되면, 더욱 적을 대응하기가 어렵다고 하여, 홍여순(洪汝諄)을 순찰사로 삼아 양덕으로 가서 방어하게 하였다. 홍여순은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조정에서 신을 순찰사로 삼고 한 명의 병졸도 주지 않으니,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는 신을 죽이려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일체를 편의대로 종사(從事)하게 해 주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그래서 이윤덕이 거느린 군사 절반을 주고, 또 대동역마(大同驛馬)를 내어주어 전쟁의 용도로 쓰게 하였다. 윤두수가 말하기를,
“홍여순이 이같이 함은 가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하고, 보내지 말라고 청하였다.
○ 성절사(聖節使) 유몽정(柳夢鼎), 서장관 민몽룡(閔夢龍)이 조정을 하직하였다. 서울을 버리고 떠날 적에, 방물(方物)은 모두 버리고 표문(表文)만 가져왔다. 조정에서는 비록 방물은 없더라도 때에 맞추어 중국 서울로 가야 된다 하여 마침내 그들을 보내기로 했던 것이다.


[주D-001]진회(秦檜)와 양국충(楊國忠) : 진회(秦檜)는 송 흠종(宋欽宗) 때의 간신. 양국충(楊國忠)은 당 현종(唐玄宗) 때의 간신.

 

기재사초 하(寄齋史草下)
임진일록 2(壬辰日錄二) 선조 25년, 만력 20년 6월 5일에 시작하였는데, 대체로 한 달간의 기록임.




6월

1일(기축) 이때에 임진강의 방어가 무너져서 사태가 점점 급박하여서 상이 묘당에 명하여 거취를 의론케 하였다. 인성부원군 정철(鄭澈)이 먼저 말하기를,
“이는 서울을 사수하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니, 한 대장에게 명하여 지키게 하고 대가를 받들고 나가야 합니다.”
하였다. 심충겸(沈忠謙)ㆍ이덕형(李德馨)이 또 그 말에 동조하니 여러 의론이 다 옳게 여겼다. 유독 윤두수(尹斗壽)ㆍ이유징(李幼澄)ㆍ박동량(朴東亮) 등이 말하기를,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의 강토는 남북이 수천 리에 불과합니다. 북도로 가면 너무 좁아서 갈 만한 곳이 없고, 압록강을 건너가면 한 번 건너간 뒤에는 다시 어찌해 볼 수가 없습니다. 비록 조석은 구차하게나마 살 수 있다 하더라도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평양은 사면이 매우 험하여 적을 방어하기 쉬울 뿐더러 군사가 만을 넘고 성중의 장사도 수천을 헤아리고, 양식이 또한 많습니다. 이곳을 한 발자국이라도 떠나게 되면 국사는 결단이 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국사를 이미 경들에게 맡겼으니, 잘들 하시오.”
하였다. 이날 저녁에 이빈(李薲)이 오니, 상이 이르기를,
“이 성 이외에는 갈 만한 곳이 없으니 다시 다른 의론을 내지 마오.”
하였다.
○ 상이 여러 신하에게 타이르기를,
“내가 먼저 앞길을 향하여 갈 것이니, 세자는 이 성을 지켜야 한다. 내 부로(父老)들에게 친히 유시하여 그들로 하여금 세자와 함께 이 성을 지키게 하겠다.”
하고, 드디어 대동관(大同館)의 문으로 납시어 유시하였다. 선유관(宣諭官) 심희수(沈喜壽)의 말이 너무도 슬프고 비장하여 성안의 부로와 상하 수종관(隨從官)들이 모두 목놓아 울었다.
○ 윤두수는 이미 천조에 군대를 요청하였으므로 모든 접제(接濟)의 방책을 먼저 강구하지 않을 수 없어서, 심희수를 접대사(接待使)로 삼아 먼저 의주로 보내고, 또 홍종록(洪宗籙)ㆍ홍세공(洪世恭)ㆍ심우승(沈友勝)을 삼로(三路)의 조도사(調度使)로 삼아 군량을 나누어 관장하게 하였다.
○ 이조 좌랑 허성(許筬)은 스스로 말하기를,
“군병을 모집하러 강원도로 가겠습니다.”
하여, 그를 보냈다.
2일 도원수 김명원ㆍ순찰사 한응인이 군관 5ㆍ6천 명만을 인솔하여 왔고, 이성임(李聖任)과 이천(李薦)은 도주하였다. 상이 김명원을 소대(召對)하여 이르기를,
“오늘날 이 지경이 된 것을 다시 어찌하겠소?”
하니, 김명원이 아뢰기를,
“여러 번 패한 장수로 죽음을 면한 것으로 만족하옵니다. 그러나 성패(成敗)는 하늘에 달려 있사오니, 신에게는 죽음만이 있을 뿐이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장수다운 말이로다.”
하였다. 조정에서는 임진강을 지키지 못한 것은 다 한응인의 죄라 하고, 드디어 강동의 여러 곳을 방어하게 하여 그로 하여금 몸 바쳐 공을 세우게 하였다.
○ 상이 여러 신하에게 유시하기를,
“중전이 이 성에 그대로 있어서는 안 되니, 갈 곳을 의론하여 아뢰라.”
하니, 모두 아뢰기를,
“상께서 거취를 정한 뒤에 이 일을 의론함이 옳겠습니다.”
하였다.
○ 이일(李鎰)이 도(道)에 있으면서 아뢰기를,
“신이 군사 3천을 이끌고 행재소(行在所)로 가겠습니다. 부디 조정에서는 평양을 굳게 지키고 다른 계교를 내지 말기를 바라옵니다. 신은 마땅히 힘과 목숨을 다하여 죽음을 바치려 합니다.”
하였다. 이때에 여러 의론이 이러니저러니 하여 거취를 정하지 못하다가 이 장계를 보고 상하가 모두 사수할 생각이 있었다. 임금이 유홍(兪泓)에게 명하여 평양을 지키게 하니 유홍이 어쩔 줄 몰라 하였고, 이성중(李誠中)을 천거하여 부관으로 삼았다. 그는 일을 처리하는 것이 술에 취한 자 같았다.
○ 상이 여러 신하에게 명하여 거취를 의론하게 하였는데, 윤두수가 아뢰기를,
“온 성안 사람들이 다 말하기를, ‘대가를 모시고 이 성을 사수하려 하는데, 대가가 만일 성을 나가면 일시에 모두 흩어져 갈 것이다.’ 합니다. 인심이 이와 같사오니, 만일 협력하여 지키면 적을 막을 수 있을 것이옵니다. 더구나 사세로 말하오면 이 성 이외에 어느 곳이 피할 만한 곳인지 어느 곳이 견고한 지를 알지 못하겠나이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은 대단히 답답도 하오.”
하였다.
○ 상이 또 여러 신하와 거취를 의론할 적에 상의 얼굴빛이 처참하고 말씨가 대단히 비장하니, 신료들이 감히 우러러 보지 못하였다. 정철이 나와 윤두수에게 말하기를,
“좌상의 말씀이 좋기는 합니다만, 임금의 안색을 뵙지 못하였소? 신하된 자로 어찌 차마 만류하여, 억지로 성을 지키고자 하겠습니까.”
하니, 윤두수는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공은 어찌하여 나라를 그르칠 말을 하오. 만일 일찍 서울을 고수할 계획을 세웠던들 어찌 오늘에 이르렀겠소. 공이 이 성을 지키고 싶지 않다면 대가를 받들고 혼자 여기를 떠나는 것이 옳겠소.”
하였다. 이에 정철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 이덕형ㆍ심충겸이 조정에서 말하기를,
“오늘날의 형세를 보건대, 대가가 반드시 머물러 이 성을 지키기를 달게 여기시지 않을 것이니, 만일 하루아침에 대가가 움직이게 된다면 머무를 곳을 미리 강구하여 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국토가 이미 좁아져 함경도 한 도만이 있을 뿐입니다. 함흥부에는 군사가 많고 양식이 풍족하여 방어할 만합니다.”
하니, 여러 사람이 동의하였다. 윤두수가 말하기를,
“함흥의 형세로는 절반도 이 곳만 못하오. 가령 적이 밀려오면 그 뒤에 다시 옮길 만한 곳이 있겠소? 또 적이 북도라고 안 갈 것 같소? 공 등은 어찌하여 함흥이 견고하다고만 하여 이 같은 장구하지 못한 계획만을 내오.”
하니,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이것을 임금을 모신 자리에서 정하는 것이 옳으니, 마땅히 면대를 청하여 가부를 아룀이 좋겠소.”
하였다. 상이 이들을 불러서 이 문제를 물으니, 모두 아뢰기를,
“함흥은 성이 험하고 양식이 넉넉하고 또 북도의 토병(土兵)을 소집하여 그들과 협력하여 지키면 평양과 같이 위태롭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마침 성을 나가려든 참이었는데, 이 주장을 듣고 매우 그럴듯하게 여겼다. 윤두수가 아뢰기를,
“상께서 이미 이 성을 지키고자 않으신다면 물러가 머무를 곳은 세 곳이 있습니다. 첫째 급히 영변(寧邊)으로 가 기계를 수선하고 강변의 토병을 소집하여 지키다가 일이 급하면 바로 의주로 향하여 중국 조정에 나아가 왜적이 침입했다는 말을 분명히 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둘째는 멀리 강계(江界)로 향하여 여러 고을의 군사를 모아 성문을 굳게 닫고 견고히 지키면 한두 달은 지탱할 수 있습니다. 일이 급하게 되면 강계의 하류가 바로 압록강이므로 배를 타고 내려가면 바로 상국(上國)의 관전보(寬奠堡)이니, 이것이 차선책입니다. 셋째는 함흥의 형세는 신이 두루 알고 있는데 성은 크되 낮고 사방이 험하지 않으니, 토병을 부르려고 하면 북쪽 오랑캐가 반드시 빈틈을 타 침입할 것이요, 남도로 향하고자 하면 도로가 매우 험하여 올라가 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적이 그 뒤를 밟아오게 되면 반드시 포위되어 곤욕을 당할 것이오니, 이곳에는 결코 가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여러 사람은, 북도는 길이 험하고 궁벽하여 적이 반드시 가지 않을 것이라 하여, 오히려 함흥이 갈 만한 곳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드디어 함흥으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상이 또 김명원(金命元)을 명하여 먼저 양덕(陽德) 등지로 가서 길을 살펴보게 하였다. 다음 날 또 이희득(李希得)을 보내어 순찰사라 칭하여 북도로 가게 하고, 또 유홍(兪泓)을 명하여 행장을 꾸려 중전을 시위하고 먼저 북도로 향하게 하였다. 윤두수는 나와서 말하기를,
“이일(李鎰)은 노련한 장수니, 반드시 소견이 있을 것이오. 그를 기다려서 마땅히 북도로 가는 것을 결정하는 것이 좋겠소.”
하였다. 이날 낮에 이일이 당도하니, 만조 관료들이 모두 이일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빙 둘러 싸고 앉았다. 윤두수가 묻기를,
“평양을 포기하는 것에 대해 공의 의견은 어떠하오? 어떤 사람은 함경도로 가는 것이 좋겠다 말하는데, 이것 또한 어떠하오?”
하니, 이일이 대답하기를,
“이 적을 당해낼 수 없습니다. 평양은 떠나야 합니다. 함흥은 평양성처럼 맨 먼저 적의 공격을 받는 곳이 아니니 갈 만합니다.”
하였다. 신충겸이 그의 등을 어루만지며,
“참 장수입니다.”
하고, 이덕형도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일답다.”
하니, 윤두수가 말하기를,
“실성한 사람이어서 말할 것이 못된다.”
하였다.
6일 우의정 유홍과 좌찬성 최황(崔滉) 등이 중전을 시위하여 평양을 출발, 함흥으로 향했다.
○ 그때 적이 임진강(臨津江)에 이른 지 열흘이 되었는데도 조정에서는 아직도 초탐(哨探)을 하지 못했다. 그제서야 비로소 용사 김진(金珍)ㆍ임욱경(任旭景) 등 열두 사람을 모집하여 보냈다. 그래서 적을 황주(黃州)에서 만나 머리 둘을 베어가지고 돌아 왔다.
○ 상이 성 위를 순시하고는 부로를 불러 성을 고수하겠다는 뜻을 알리니, 모두 울며 말하기를,
“주상께서 만일 머무르신다면 모두 이 성을 사수하겠습니다.”
하였다.
○ 상이 좌상 윤두수에게 김명원 이하를 인솔하고 머물러 평양성을 지키라고 명하였다. 상이 세자에게 평양을 지키게 하고자 하니, 윤두수ㆍ김명원 등이 인심이 대가의 동향을 보고서 그들의 거취를 결정하려 하는데, 대가가 나가면 비록 세자가 이곳을 지키더라도 무익한 일이라 생각하고 아뢰기를,
“신 등이 힘을 다하여 여기를 지킬 것이오니, 세자께서 꼭 머무를 필요는 없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그리고 중화(中和) 등지의 군대를 평양에 계속 들어가라고 명하였다.
7일 아침에 부제학 심충겸이 삼사를 인솔하고 청대하여 아뢰기를,
“신 등의 생각으로는 이곳은 서울에다 비길 곳이 아니오니, 사수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건대 이곳 이외에는 이 성과 같이 견고한 데도 없으니, 반드시 떠나서는 안 된다고 여겨집니다.”
하였다. 대체로 적의 형세가 약간 완화된 까닭이다. 낮에 중화군(中和郡)에 사는 사람이 와서 적이 이미 본군에 이르렀다고 하니, 심충겸이 또 삼사를 인솔하고 입대하여 아뢰기를,
“적이 이미 가까이 왔으니, 대가가 머물러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였다.
○ 이조 정랑 이유징(李幼澄)이 청대하여 평양을 버리고 떠나가서는 안 된다고 극력 간하니, 상이 이르기를,
“네 말이 옳기는 하나 나는 이 성을 벗어나서 형세 돌아가는 것을 보려는 것이다.”
하였다.
8일 적이 대동강 가에 이르렀다. 상은 적이 이미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떠날 차비를 하라고 명했다.
○ 요동 순안어사가 진장(鎭將) 한 사람을 보내니, 상이 대동관에서 접견하고 당초의 사정을 상세히 말했다. 진장이 연광정(練光亭)에 올라가 적의 기병이 횡행하는 것을 바라보고 말하기를,
“이는 참으로 왜다.”
하고, 드디어 머물지 않고 돌아갔다. 조정에서는, 천조에서 만일 힐문하는 일이 있다면, 응대할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된다 생각하고 윤근수(尹根壽)를 보냈다.
○ 이날 밤, 적이 포로를 시켜 편지를 보내 왔다. 그 사연에,
“한음(漢陰) 이 선생을 만나기를 원한다.”
하였다. 이는 이덕형(李德馨)을 가리킨 것이다. 조정이 논의하기를,
“이덕형이 그들과 말을 나눈 뒤에도 일이 만일 순조롭지 못하면 용사(勇士)를 시켜 조신(調信)을 쳐 죽이는 것이 낫다.”
하니, 윤두수가 말하기를,
“나라의 형세가 비록 이 같으나 어찌 도적이 하는 짓을 본받겠는가. 다만 만나볼 따름이다.”
하고, 어떤 이는 말하기를,
“적을 만난 뒤에 만일 차마 듣지 못할 말이 있다면 욕을 받음이 더욱 클 것이니 보내지 않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이덕형이 말하기를,
“그들을 만나면 혹 군사를 완화시킬 수 있을지 모르니 만나 보겠습니다.”
하니, 조정에서도 만일의 희망을 걸고 드디어 그를 보냈다.
9일 이덕형이 강 위에 이르니, 적장(賊將) 평조신(平調信)ㆍ현소(玄蘇)ㆍ세준(世俊) 등이 와 있었다. 양편이 각각 배를 타고 강 가운데에서 만나 술을 나누며 이야기했다. 이덕형이 말하기를,
“오늘날 군사를 거동함은 무슨 명분에서요?”
하니, 현소가 대답하기를,
“귀국과 서로 통하고자 하나, 동래(東萊)로부터 서울에까지 모두 말을 전할 수가 없어서 드디어 전전하여 여기까지 이르렀소.”
하였다. 이덕형이 말하기를,
“이제 피차간 서로 통한 셈인데, 어찌하여 군사를 후퇴시키지 아니하오? 옛날의 제후는 군사를 벌이고 맹약한 뒤에는 모두 군사를 후퇴시켰으니, 이제 군사를 물리침이 옳겠소. 천천히 의론할 것이 있소.”
하니, 적이 말하기를,
“이제는 다만 전진이 있을 뿐이요, 한 발자국도 물러갈 수 없소.”
하였다. 마침내 자리를 파하고 돌아올 적에 용사 박성경(朴成景) 등이 곁에 있다가 일이 아무 성과가 없음을 알고 그를 죽이려 하니, 이덕형이 눈짓하여 말렸다.
○ 이보다 앞서 승지 민여경(閔汝慶)ㆍ노직(盧稷) 등은 임진강의 방어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병을 칭탁하고 나오지 않다가, 이때에야 국사가 이미 잘못 되 가는 것을 보고 맨 먼저 성을 나갔다. 이것을 본받아 도망가려는 사대부들이 많았다.
10일 대가가 출발하려 할 때 궁인이 이보다 먼저 나간 자가 많았으므로 성중의 인민이 도끼와 막대기를 가지고 길목을 지키다가 마구 두들겨 대니, 판윤 홍여순(洪汝諄)이 부상을 입어 말에서 떨어졌다. 부로와 남녀가 궁문 밖을 메우고 통곡하며 부르짖기를,
“우리들이 성을 나가지 않은 것은 대가를 믿고 사수하고자 함이었소. 적이 문 밖에 이르자 갑자기 우리들을 버리고 가려 하니, 이것은 우리를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오. 차라리 임금의 손에 죽을지언정 적에게 죽기를 원하지 아니하오.”
하고, 궁문을 파괴하고 여러 재상을 쫓아내려 하였다. 병조 좌랑 박동량(朴東亮)이 사세가 급박함을 보고 들어가 승지에게 말하기를,
“백성의 심정이 이와 같아 사세를 예측할 수 없소. 오늘의 행차를 정지하여 백성을 위로하고 안심시킨 뒤에야 떠나갈 수 있습니다.”
하니, 승지 등이 이 뜻을 아뢰어 드디어 행차를 정지케 하였다. 승지가 나와서 백성에게 말하기를,
“오늘의 행차를 정지하였으니 너희들은 물러가도 된다.”
하였으나, 여러 사람은 이것을 믿지 아니하고 오히려 떠들며 난리를 일으키려 하였다. 이유징이 드디어 ‘정행(停行)’ 두 글자를 판대기에 커다랗게 써서 사람을 시켜 지붕 위에 올라가 이것을 두루 보이게 하니, 그제야 차츰차츰 흩어져 갔다.
11일 대가가 평양을 출발하였다. 좌상 윤두수, 도원수 김명원, 순찰사 이원익, 감사 송언신, 병사 이윤덕, 교리 김신원(金信元), 이조 좌랑 이호민(李好閔) 등이 대가를 보통문(普通門)에서 전송하며 하직하였다. 대가가 순안(順安)을 거쳐 저녁에 숙천(肅川)에 이르렀다. 많은 관원이 의논드리기를,
“이제 국사가 급박해졌으니, 대가가 북도로 가는 것도 기필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다면 중전께서만 어찌 홀로 북도에 머물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영변(寧邊)으로 가서 형세를 살펴 거취를 결정하는 것이 옳을 줄 아옵니다.”
하니, 상이 이 말을 따랐다.
○ 조정에서 또 말하기를,
“천조(天朝)에 청병하는 일보다 중요한 것이 없는데, 어찌 단지 역관만을 보내서 구원해 주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하여, 드디어 대사헌 이덕형을 보내되, 청원사(請援使)라 칭하여 급히 요동으로 가게 하였다.
○ 또 홍여순을 파견하여 양덕(陽德) 등지를 순찰하면서 북에서 서쪽으로 향하는 길을 방비하게 하였다.
12일 대가가 안주(安州)의 운암원(雲巖院)에 이르니, 인민이 모두 도망가서 음식을 올리지 못했다. 이양원이 패하여 안변에 이르러서, 종사관 김정목(金廷睦)을 보내어 말로 진달하기를,
“이혼(李渾)이 회양(淮陽)의 적을 다 죽였다.”
하였다. 대체로 길가에 떠도는 말을 들은 것이다. 상이 이것을 친히 묻고자 하여 사관을 불러 입시하게 하니, 주서 임취정(任就正)ㆍ박정현(朴鼎賢)과 한림 김선여(金善餘)ㆍ조존세(趙存世) 등은 벌써 흩어져 갔다. 이로부터 여러 시종관이 모두 뒤로 처지고 대기를 따르는 자는 십여 인에 지나지 않았고, 그들도 모두 제마음대로 행동하여 앞서기도 하고 뒤떨어지기도 하였고, 시위하는 자는 얼마 되지 아니하였다.
○ 저녁에 안주에 이르러, 임금은 길에서 돌아오는 군사를 보고 물어보았더니, 모두 흩어져 도망가는 자였다. 드디어 지평 이경기(李慶祺)를 자산(慈山) 등지로 달려가 도망하는 군사를 불러 모아 전선으로 나가도록 명하였다.
13일 대가가 영변(寧邊)에 이르니, 성안의 사람과 가축이 모두 벌써 흩어져 도망갔다. 판관 황기(黃沂)도 외촌(外村)에서 처음으로 이곳에 왔다. 상하가 모두 밥을 먹지 못했다. 이날 밤에 한응인이 치계하기를,
“적이 이미 강동(江東)의 외탄(外灘)을 건너와서 단지 여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군진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드디어 여러 신하를 불러 이르기를,
“오늘날의 형세는 이미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나와 세자가 함께 한 곳으로 가게 되면 더욱 가망이 없을 것이니, 나누어 가는 것만 못할 것이다. 다만 오늘 향할 곳을 어디로 정할 것인가?”
하니, 승지 이국(李)이 아뢰기를,
“상국(上國)은 부모의 나라입니다. 이제 마땅히 의주로 가시어 천조에 나아가 호소해야 합니다. 그래도 일이 만일 불리하게 되면 임금과 신하가 마땅히 함께 압록강에서 죽어 대의(大義)를 천하에 드러내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고, 유성룡ㆍ이항복 역시 아뢰기를,
“이 말이 대단히 옳으니 의주로 가시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만일 요동으로 건너가게 되면 여러 신하들은 나를 따라갈 자가 있는가?”
하니, 이항복ㆍ이국이 울며 아뢰기를,
“신들이 수행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최흥원(崔興源)ㆍ이헌국(李憲國)ㆍ이성중(李誠中)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경들은 다 늙었으니, 세자를 따라 가야 하오.”
하고, 또 한준에게 이르기를,
“경도 부모가 있으니, 세자를 따르는 것이 옳겠소.”
하니, 여러 신하가 모두 울고, 임금도 눈물을 흘렸다.
14일 운산 군수(雲山郡守) 성대업(成大業), 익위(翊衛) 유희담(柳希聃)을 보내어 중전과 세자빈을 맞이하여 오게 하였다. 유홍(兪泓) 등이 중전을 호종하여 덕천(德川)에 이르러 누차 급히 함흥으로 향할 것을 주청(奏請)하여 날마다 재촉하는 말이 있었다. 중전이 분부하기를,
“당초에는 비록 함흥으로 가라는 명이 있었으나, 지금 대가의 거취를 아직도 확실히 알지 못하오. 한번 이 재를 넘어간 뒤에 창졸간에 일이 있게 되면 반드시 낭패(狼狽)할 것이오.”
하고, 5일을 머물렀다. 이 때문에 성대업 등이 쫓아가서 만나게 되었다.
○ 이 때에 대가와 세자가 길을 나누어 가려 하였는데, 시위하는 관원으로서 친히 임금의 명을 받은 자 이외에는 모두 가는 곳을 알지 못하였다. 영의정 최흥원이 드디어 성명을 열서(列書)하여 아뢰니, 상이 드디어 낙점(落點)하였다. 상이 요동으로 건너가게 되면 사람들이 싫어서 피할 것이고, 더구나 늙고 병든 무리는 따라갈 수가 없기 때문에 병 없고 멀리 갈 만한 자를 선택하여 대가를 따르게 하였다. 지평 이정신(李廷臣)은 그가 대가를 따르게 되었다는 것을 듣고 사양하지 아니하였다. 상이 또 한준이 현재 호조 판서로 있기 때문에 잠시도 떨어져 있을 수가 없다 하여 드디어 수행하도록 명하니, 한준이 낙상하였다고 칭탁하고 성을 나갔다.
○ 상이 또 세자에게 이르기를,
“국사가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시 희망이 없구나. 우리 부자가 함께 한 곳으로 갔다가 일이 만일 갑작스럽게 되면 뒤에는 아무 일도 못하게 된다. 이제 나는 상국에 가서 호소할 것이니, 세자는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급히 강계 등지로 가서 나라를 회복하기를 도모하라.”
하였다. 이어 서로 마주 보고 울었다.
15일 상이 종묘 사직의 신주에 하직하고 통곡하니, 세자도 통곡하였다. 상이 세자의 관속에게 이르기를,
“국가의 일은 세자의 신상에 달려 있으니, 너희들은 각기 마음과 힘을 다하여 잘 보좌하여 다시 나라를 일으킬 것을 도모하라.”
하였다. 대가가 출발하려 할 적에 세자도 양궁(兩宮)에 하직하니, 종관(從官)이 각각 목놓아 울고, 말을 끄는 하인들도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시지 않는 자가 없었다.
○ 대가가 박천(博川)에 이르니, 경내에 사는 백성들이 전과 다름 없이 곳곳에서 김을 매고 있었다. 상이 말을 멈추고 이르기를,
“여러 고을이 다 비었는데, 너희들은 어찌하여 피란가지 않았느냐?”
하니, 모두 대답하기를,
“군수께서 평양에 계시면서 사람을 보내 효유하여 말하기를, ‘사세가 불리하면 나도 피란하겠다. 내가 피란한 뒤에도 오히려 나갈 수 있으리니, 우선 힘을 다하여 농사를 지으라.’ 하였기 때문에, 안심하고 피란하지 아니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백성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은 윗사람이 시키기에 달린 것이니, 이는 처사가 마땅한 것이 아니겠느냐.”
하였다.
○ 낮에 박천군에 이르니, 평양에서 온 사람이 말하기를,
“어제 윤두수ㆍ김명원이 장사 4백여 인을 얻어 밤에 강을 건너 적의 병영을 돌파하여들어가 적을 많이 죽였습니다. 다만 새벽녘에 싸움을 돋워 일진일퇴하면서 정신없이 싸우고 있을 적에 날이 이미 밝았고, 적의 대군이 밀려들어와서 우리 군대는 질서없이 배를 타고 건너는데 적이 추격하여 왔습니다. 그래서 장사 임욱경(任旭景) ㆍ민여호(閔汝虎) 등이 대동강변에 이르러서 적 한 놈을 거꾸로 잡고 좌우로 마구 휘두르니, 적은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습니다. 격살한 적이 10여 명이나 되었는데, 끝내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도원수는 연광정 위에서 이것을 목격하고 통탄하면서 대대적으로 밤을 무릅쓰고 강을 건너가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 지평 이경기가 와서 아뢰기를,
“어지러운 군대가 흩어져 도망가는데 막을 만한 힘이 없어서 부득이 돌아왔습니다.”
하였다. 사간 유영경(柳永慶)이 이경기에게 말하기를,
“이처럼 매우 어려운 시기를 당하여 군병을 모집하는 일보다 더 중한 것이 없는데, 명을 받은 지 이틀 만에 그냥 빈손으로 돌아와 하는 말이‘나는 할 수 없다.’하니, 어찌 어린애 장난과 같이 여겨서야 되겠소. 빨리 그곳으로 가서 다시 모집하도록 도모하시오.”
하니, 이경기는 어쩔 수 없이 다시 갔지만 이 일로 인하여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 중전이 덕천에서 밤을 틈타서 왔다. 우의정 유홍은 백관이 길을 나누어 간다는 말을 듣고나서 아뢰기를,
“신은 이미 늙어서 요동으로 건너갈 수는 없으니, 세자를 따라 가기 원합니다. 나라가 회복된 뒤에 마땅히 대가를 맞이하여 돌아오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 말을 따랐다.
○ 저녁에 이원익이 이호민을 보내와 말하기를,
“어제 저녁에 적이 청은탄(靑銀灘) 등지에서 군사를 나누어 보내 강을 건너는 시늉을 하면서 시험하니, 여울을 지키던 장수 김억추(金億秋)ㆍ허숙(許淑)ㆍ이윤덕(李潤德) 등이 일시에 도망가서 흩어지고 상하에 진을 벌였던 군사도 따라서 흩어지게 되어, 적이 마침내 평양에 들어왔습니다.”
하였다. 임금은 드디어 길 떠날 차비를 하도록 하였다. 중전은 덕천으로부터 박천에 이르니, 산을 넘고 냇물을 건너 하루에 간 것이 거의 1백 60리가 되어도 아직 가마에서 내리지 못하였다. 또 평양의 보고를 듣고 고을 안이 크게 흔들려 식사도 못하고 갔다.
○ 이때에 위장(衛將) 이관(李瓘)ㆍ성수익(成壽益) 등이 서로 잇달아 흩어져가니, 대가를 호종한 사람은 오직 내시 5ㆍ6명 뿐이었다. 박천군 내에서 5리쯤은 수목이 울창하고 빽빽하였는데 하늘에선 또 비가 내렸다. 일행은 겨우 40ㆍ50인 밖에 되지 아니하여서 인심은 매우 두려워하여 마치 보전하지 못할 것같이 여기니, 임진강을 떠나던 저녁보다도 더 심했다.
○ 이때에 세자는 보덕(輔德) 조정(趙挺)을 보내어 상에게 문안드렸다. 조정이 돌아갈 때에, 상이 손수 쓴 글을 세자에게 보내어 이르기를,
“내가 살아서 이미 망국(亡國)의 임금이 되었으니, 죽어서는 장차 다른 지역의 귀신이 될 것이다. 부자가 서로 떨어져 다시 만나 볼 날이 없게 되었으니, 오직 세자는 나라를 다시 일으켜 위로는 조종의 영전을 위로하고 아래로는 부모를 돌아오게 하기 바란다. 종이를 대하니 눈물이 흘러내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하였다. 이때 세자는 개평역(開平驛)에 머물고 있었는데, 조정은 바로 서울로 향한 채 이것을 전하지 않았다.
○ 상이 삼경에 박천을 출발하여 이른 아침에 가산(嘉山)에 당도했다.
16일 대가가 가산에 이르니, 적의 소리가 점점 급박하여 종관이 모두 흩어져 달아나고 남는 자가 거의 없었다. 상이 자문(咨文)을 요동으로 보내어 내부(內附 복종해서 따름)하기를 청하였다. 대가가 정주(定州)에 도착했다.
○ 또 사람을 보내어 적의 형세를 초탐해 오게 하였다. 김명원이 안주에 있으면서 치계하기를,
“신 등이 이곳에서 수시로 적의 형세를 살펴 계속 말을 달려 보고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드디어 정주에 머물렀다.
○ 또 안황(安滉) 등을 보내어 신성(信城)ㆍ정원(定遠) 두 왕자를 영변군에서 모시고 돌아오게 하였다.
○ 대가가 평양에 도착한 뒤로 잇따라 적의 정세를 요동에 보고하였다. 이로부터 자문과 게시(揭示)가 잇따랐으나 회답하는 체제를 아는 자가 없으므로 상은 종관에게 명하여 이것을 쓰게 하니, 형식을 이루지 못한 부분도 있었다.
17일 인성부원군 정철(鄭澈)ㆍ풍원부원군(豐原府院君) 유성룡이 대사간 정곤수(鄭崑壽)를 거느리고 상에게, 세자에게 감국(監國)의 임무를 주게 할 것을 청하려고 드디어 입대(入對)하였다. 상이 묻기를,
“경 등은 무슨 할 말이 있소?”
하니, 정철ㆍ유성룡 등이 단지 말하기를,
“국사가 이와 같이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떻게 하옵니까?”
하고, 드디어 물러나왔다. 어떤 사람은 세자가 이미 감국의 임무를 받았으니, 정철 등의 뜻은 상에게 왕위를 물려줄 것을 청하려 한 것이었기에 차마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18일 대가가 정주를 출발하여 곽산(郭山)으로 향하였다. 상이 유성룡을 불러 이르기를,
“오늘의 행차는 오로지 내부(內附)를 위함이니, 경이 먼저 가는 것이 좋겠소. 만일 천조에서 온 사신을 만나게 되면 먼저 적의 실정을 말하고서 내가 요동으로 건너가려 한다는 뜻을 말하오.”
하였다.
○ 대가가 곽산에 이르러, 요동 순안사가 부총병 조승훈(祖承訓), 참장 곽몽징(郭夢徵), 유격 사유(史儒)를 보내어 3천 기를 영솔하고 운흥관(雲興館)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상이 가서 그를 만나 보았다. 상이 낱낱이 우리 나라의 전후 사정을 말하자, 시종들도 상의 앞에 줄지어 엎드려서 각각의 소견을 말하니, 말들이 대단히 시끄러웠다. 참장 곽몽징이 말하기를,
“귀국의 군신이 한 곳에서 떠들어대는 것이 마치 모여서 송사하는 것과 같으니, 너무도 무례합니다.”
하니, 상이 여러 신하에게 모두 나가라고 명하였다. 총병 이하가 평양이 함락된 것을 알고 돌아갔다.
○ 좌의정 윤두수가 나중에 와서 아뢰기를,
“신이 사수하지 못하여 오늘날이 있게 되었으니, 군률을 받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라의 형세가 이미 글렀는데, 어찌 경의 죄만이겠소.”
하였다. 상이 선천군(宣川郡)에 이르렀다. 저녁에 순안어서(巡安御史)가 또 지휘관 장(張)씨란 사람을 시켜 자문을 보내왔는데, 그 가운데, 너희 나라에서 반역을 도모한다[爾國謀爲不軌]라는 등의 용어가 있었고, 또 말하기를,
“8도의 관찰사는 어찌하여 적에 대해 한 마디의 말도 없으며, 8도의 군현에서는 어찌하여 한 사람도 대의를 제창하는 일이 없소? 어느 날에 그 도가 함락되고, 어느 날에 그 고을이 함락되고, 아무는 절개에 죽고 아무는 적에게 붙었고, 적의 장수는 몇 사람이고, 군사의 숫자는 몇 만 명인지, 순서에 따라 하나하나 계산하여 들려주되, 모두 기록해서 보고하시오. 천조(天朝)에는 개산대포(開山大砲)와 대장군포(大將軍砲)와 신화표창(神火鏢鎗)이 있고, 용맹한 장수와 정련된 병정이 안개처럼 널리고 구름처럼 달리니, 왜병이 백만 명이라 하더라도 따질 것이 못되오. 더구나 문무 지략(文武智略)의 선비들이 간사한 꾀를 뚫어지게 볼 수 있어, 미연에 흉악한 싹을 꺾어 버릴 수 있으니, 비록 소진(蘇秦)ㆍ장의(張儀)ㆍ상앙(商鞅)ㆍ범수(范睢)의 무리가 다시 세상에 태어난다 하더라도 어찌 천조의 얕고 깊음을 엿볼 수 있겠소.”
하였다. 상이 자문을 보고 송구해 하면서 이르기를,
“이는 아마도 우리 나라가 적과 공모하지 않았는가 의심하여,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두렵게 하는 말로 우리 나라의 대답을 시험하려는 것이오.”
하고, 드디어 지휘에게 이르기를,
“이 자문에 대하여는 마땅히 곧 뒤따라 배신(陪臣)에게 맡겨 보내겠소.”
하였다. 지휘가 물러나와 역관에게 말하기를,
“나는 바로 황천사(黃天使)의 수행원이다. 순안어사께서는 내가 일찍이 국왕의 얼굴을 보았다 하여 나로 하여금 그 진위를 와 보게 하였을 뿐이다. 자문 가운데의 말은 다만 가설(假設)하여 말한 것이니, 너희 나라에서는 두려워하지 말라.”
하였다.
○ 이때에 대가의 행색이 여느 때와는 달리 대단히 총총하니, 길 가의 인민이 이것을 보고 왜적이 뒤에서 조만간에 추격해 올 것으로 여겼다. 대가가 지나간 뒤로 양민이 물결처럼 흩어져 산골짜기를 메웠다. 그 중에 호적이 없는 천민들은 혼란을 틈타 무리를 불러 모아 관가의 곡식을 약탈해 갔는데, 영변과 곽산이 더욱 심했다. 선천 군수 이형(李瀅)이 조정에 알리기를,
“선천군에서만도 또한 백여 명이 모여 내일 대가가 출발한 뒤를 기다려 영변의 백성들이 한 짓을 본받으려 하옵니다. 늙은 선비로서는 제재하지 못하겠사오니 이에 대한 조치를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조정에서는 드디어 무신으로 대치하여 방화 약탈에 대한 걱정을 면할 수 있었다.
19일 대가가 거련관(車輦館)에 머물렀는데, 지나가는 곳마다 인민과 가옥이 예전 그대로 있어 박천군과 다르지 않았고 음식 이바지도 매우 풍성하게 하니, 상이 간소히 하고 사치하게 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20일 대가가 용천군에 당도하였다. 윤두수가 아뢰기를,
“오늘의 행차는 오로지 천조에 나아가 호소하기 위함이옵니다. 이 때문에 길을 빨리 달려 이미 그곳에 이르렀습니다. 다만 갑자기 의주에 당도하게 되면 인심이 크게 놀라서 수습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이제 적의 형세가 매우 완화되었으니, 먼저 의주 등의 관원으로 하여금 흩어진 병정을 모으게 하여 바로 요동으로 건너가지 않는다는 뜻으로 회유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믿는 바가 있게 한 뒤에 다시 2ㆍ3일을 보고 나서 천천히 나아간다면 원근이 실망하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 말을 따랐다.
○ 평양이 함락된 후, 송언신ㆍ이윤덕이 모두 희천(熙川) 등처로 가서는 오래도록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김명원은 이원익ㆍ이빈을 인솔하고 정주에 주둔하니, 단지 군관(軍官) 수십 여인 뿐만 있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드디어 이원익에게 압록강변으로 가서 토병을 모집하게 하고, 이빈에게 산군(山郡)으로 가서 군사를 징발하게 했다. 김명원은 혼자서 빈 성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21일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이 거제 앞 바다에서 대첩(大捷)했다는 보고가 왔다. 상이 사자에게 영남의 사세를 물으니, 대답하여 아뢰기를,
“감사 김수(金睟)는 현재 함안 등지에 있어, 소식을 알지 못하옵니다. 대적(大賊)은 다만 직로(直路)를 따라 행군한 까닭에 여러 고을에서 병란을 입은 것은 겨우 도로변일 뿐입니다. 좌우도(左右道)가 두 지역으로 나누어져서 호령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피차가 어떻게 행동하였는지 전혀 듣지 못하였습니다. 단지 병사 김성일(金誠一)의 얘기만을 들었는데, 그는 군관 몇 십명을 인솔하고 졸지에 적을 만나자, 모두들 흩어져 달아나려 하는데 김성일이 말에서 내려 의자에 걸터앉아 길을 막고 있었다고 합니다. 적이 그의 당돌함을 보고 복병이 있는가 의심하여 머뭇거리고 나오지 못하다가 한참 후에야 군사를 이끌고 갔다 하옵니다. 경기에 당도하니, 여러 고을의 백성들이 모두 생각하기를, ‘오늘의 도적은 왜놈이 아니라, 바로 나라를 배반한 무리들이다. 나라를 배반한 무리들은 양민을 죽이지 않는다.’ 하고, 드디어 이들을 피해 나가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다 도살되었으며 나중에야 그들이 왜적임을 알고 비로소 차츰차츰 피란갔다 하옵니다.”
하였다.
○ 조정에서는 여러 고을의 관가 곡식이 다 노략질을 당하고 있어서, 만일 수습하지 않는다면 천병이 나오는 날 반드시 공급할 것이 없으리라 생각하여, 드디어 장령 정희번(鄭熙藩)을 철산(鐵山)으로, 정언 이광정(李光庭)을 용천창(龍川倉)으로 보내어 조사해 보게 하였다. 또 대군이 한번 흩어진 뒤로 산골짜기로 도망가서 오래도록 나타나지 아니하므로 마침내 사간 유영경(柳永慶)을 강계(江界)ㆍ위원(謂原)ㆍ이산(理山) 등의 군으로, 집의 정광적(鄭光績)을 벽동(碧潼)ㆍ창성(昌城) 등의 부(府)로 보내어, 그들로 하여금 급히 군대를 소집하여 김명원이 있는 곳으로 보내게 하였다.
23일 대가가 용만관(龍灣館)에 당도하여, 목사가 거처하던 곳에 행궁(行宮)을 정하고 거처하였다. 이때 성중의 백성은 모두 흩어졌고, 닭ㆍ개 등이 한 마리도 없었고, 새도 날지 아니하여 황량한 산의 폐사(廢寺)와 같았다. 종관(從官) 수십 인이 행궁 근처 인가에 나누어 투숙하였다. 거의가 처량하고 궁핍하여 단지 한두 노복만을 데리고 있었다. 이성중(李誠中) 부자는 단지 종 하나를 데리고 있었는데, 때로는 끼니를 걸러서 남에게 의지하여 날을 보냈다.
24일 비망기를 내려 이르기를,
“당초 서울을 떠나던 날, 백관으로 나를 따라 나온 사람은 다 삶을 잊어버렸다. 평양을 떠나 의주로 향할 적에는 인심이 놀라 이산되어 도피하고 흩어지지 않는 자가 없었는데도, 모두 부모를 떠나고 선영을 버리고는 의주의 멀고 거친 곳에까지 나를 따라와 끝까지 게으름이 없으니, 모두 충신이다. 서울로부터 의주에까지 온 사람들은 별도로 성명을 적어서 아뢰도록 하라. 내가 마땅히 간직해서 후일에 볼 자료로 삼겠다. 대가를 호종하여 여기에 도착한 사람에 있어서는 그 공이 어찌 상하의 구별이 있겠는가. 백관의 벼슬을 각각 한 품질씩 올리겠다.”
하니, 대사간 정곤수(鄭崑壽), 지평 신경진(辛慶晉)이 아뢰기를,
“인신(人臣)으로서 대가를 따라 어려움을 피하지 않는 것은 바로 그 직책이옵니다. 품질을 올려 주라는 명을 거두시기 바라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 등의 말이 참으로 옳지만 인정상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소. 자신의 생사를 헤아리지 않고 극히 곤궁할 때에 상종하였으니, 비록 높은 품질과 아름다운 벼슬이라도 무엇이 아깝겠소. 다시 말하지 마오.”
하였다. 이것을 여러 날 논란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별록 : 서울부터 의주까지 온 사람을 종시호종(終始扈從)이라 하여 전교하니,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 유성룡(柳成龍)ㆍ우의정 윤두수(尹斗壽)ㆍ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윤근수(尹根壽)ㆍ전 병조판서 김응남(金應南)ㆍ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ㆍ판윤 박숭원(朴崇元)ㆍ공조 참판 이충원(李忠元)ㆍ이조판서 이산보(李山甫)ㆍ도승지 유근(柳根)ㆍ부제학 이국(李)ㆍ서천군(西川君) 정곤수(鄭崑壽)ㆍ좌승지 홍진(洪進)ㆍ사예(司藝)ㆍ심우승(沈友勝)ㆍ장령 정희번(鄭熙藩)ㆍ병조좌랑 박동량(朴東亮)ㆍ정언 이광정(李光庭)ㆍ평안 병사(平安兵使) 신잡(申磼) 집의 구성(具宬)ㆍ도정(都正) 안황(安滉)ㆍ응교 이유징(李幼澄), 무신으로는 호조좌랑 한연(韓淵)ㆍ군수 기경복(奇景福)ㆍ도사 여정방(呂定邦)ㆍ판관 최응숙(崔應淑) 등 모두 24인이었다.

기재사초 하(寄齋史草下)
임진일록 3(壬辰日錄三) 선조 25년, 만력 20년 7월부터 8월까지. 다만 날짜는 쓰지 않았음. 아래도 이와 같음. 3개월임.



7월

상이 여러 신하와 의논하기를,
“오늘날의 일은 다만 중국 조정에 구원을 청하는 한 가지 일이 있을 뿐이니, 한 도의 양식을 미리 조치해 두지 않을 수 없소.”
하니, 윤두수(尹斗壽)가 이어서 아뢰기를,
“호조 판서 한준(韓準)이 명을 받고도 오지 않으니, 그를 파직시키는 것이 마땅하옵니다. 또 여기에 있는 사람도 직질(職秩)이 맞지 아니하오니, 상께서 친히 재결하소서.”
하였다. 상이 드디어 예조 참판 이성중(李誠中)을 발탁하여 호조 판서로 삼았다.
○ 김명원(金命元)이 아뢰기를,
“신이 정주(定州)에 있으면서 군병을 소집하여 5백여 명을 얻었습니다. 이원익(李元翼)이 모집하여 보내온 지방 군대도 또한 천 명이 되옵고, 이빈(李薲)이 거느리고 온 병정도 또한 천명이 됩니다. 실은 이 병정들을 영솔하고서 안주로 향하고자 합니다.”
하였다. 상이 유성룡(柳成龍)을 불러 이르기를,
“이제 원수의 장계를 보니, 안주로 향하려 한다 하오. 경도 전선으로 나가서 모든 일을 편의대로 종사하시오.”
하였다.
○ 평안 감사 송언신(宋言愼), 병사 이윤덕(李潤德)이 산협으로 들어가 오래도록 소식이 없으므로 드디어 두 사람을 체차시키고, 이원익을 감사로 삼고, 이빈을 병사로 삼았다.
○ 김명원이 아뢰기를,
“함종 현령(咸從縣令) 이수(李璲), 증산 현령(甑山縣令) 조의(趙誼)가 군사를 일으켜 바로 강서(江西)ㆍ영유(永柔) 등지의 적의 통로를 끊고 있사오니, 신도 순안(順安)으로 진주하여 굳게 지키고자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성룡이 명을 받은 지 여러 날이 되었는데도 떠나가지 아니하니, 어쩐 일인가.”
하니, 윤두수가 아뢰기를,
“성룡이 병이 있어, 곧 떠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신은 지난 번 평양에서 공이 없었는데도 구차하게 형벌을 면하였으니, 성룡을 대신하여 가기를 청하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꼭 갈 것은 없다.”
하였다. 유성룡이 다음 날 떠났다. 이때 유성룡의 병은 더위를 먹은 것에 불과하였다. 전에는 먼저 가서 중국 사람을 접대하라는 명을 받고도 시일을 끌어 뒤로 처졌다가 임금 행차보다 뒤에 가더니, 이제는 진중에 나가서 편의대로 종사하라는 명을 받고도 미적미적하여 빨리 출발하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이 때문에 그가 일을 피한다고 의심하였다.
○ 김신원이 아뢰기를,
“신이 안악 등지에 당도하여 병정 2천여 명을 일으켜, 훈련정(訓鍊正) 이사명(李思命)으로 하여금 영솔하여 김명원의 처소로 나가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당초에 김신원이 윤두수를 따라 평양에 머물렀는데, 평양성을 지키지 못하게 되자, 김신원은 윤두수에게 간청하여 함께 안악(安岳)으로 가서 나중에 충성 바치기를 도모하였다. 윤두수가 웃으며 말하기를,
“나는 대가를 따르고 있으니, 안악이 비록 좋으나 갈 수가 없소.”
하였다. 김신원이 끝내 홀로 안악으로 가 군사를 일으켜서 관군과 호응하니, 조정이 드디어 김신원에게 그대로 머물러 군량을 감독하게 하였다.
○ 대사헌 이덕형(李德馨)이 요동에 있으면서 중국에 내부(內附)하기를 청하고, 이어서 우리 나라의 전후 사정을 말하니, 순안사(巡按使)는 임금이 파천한 상황을 천자에게 전주(轉奏 직접이 아니고 사정을 알아서 소속 관원이 천자에게 아룀)하였다. 천자의 전지로 특별히 은 2만 냥을 마련하여 따로 한 사람의 관원을 파견해서 직접 조선 국왕에게 주어 상하에게 살아갈 방도를 찾도록 하니, 참장(參將) 곽몽징(郭夢徵)이 은을 가지고 오거늘, 상이 친히 용만관(龍灣館)에서 받고 머리를 조아려 다섯 번 절했다.
○ 보호군 이산보(李山甫)를 발탁하여 이조 판서로, 유근(柳根)을 도승지로, 박숭원(朴崇元)을 판윤으로 삼았다.
○ 전라 수사(全羅水使) 이순신(李舜臣)이 거제(巨濟) 앞바다에서 적의 배 4백여 척을 만나, 오랫 동안 대전을 벌였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이순신이 여러 장수에게 말하기를,
“저 적선 위에 3층의 누(樓)를 세우고 금빛과 푸른 빛으로 장식하고서, 한 적이 상(床)에 걸터 앉아 지휘하고 있으니, 그가 반드시 대장일 것이다. 우리의 거북선은 가볍고도 빠르게 가고, 또 총알을 피할 수 있으니, 만일 두세 척의 거북선으로 적선과 바로 충돌시켜 그 적을 목베게 되면 나머지는 반드시 저절로 무너질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는 드디어 장사 백여 인을 뽑아 세 척의 거북선에 나누어 타게 하고, 적의 배 사이로 드나들게 하니, 빠르기가 베짜는 북과 같은지라 적이 감히 가까이하지 못했다. 드디어 3층 누선(樓船)에 접근하여 백여 인이 고함치며 일시에 내달으니, 화살이 비오듯하여 적장은 살을 세 번 피했으나 오히려 피하지 못하고 머리를 맞고서야 비로소 거꾸러졌다. 이순신 등은 싸움이 한창 치열해지는 것을 바라보다가 또한 북을 울리고 고함치며 곧장 전진하니, 적선이 드디어 붕괴하여 물에 빠져 죽은 자가 이루다 기록할 수 없었고, 병장기도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노획했다. 왜적이 이로부터 전라도를 감히 바로 침범하지 못했다. 대체로 원균(元均)과 이순신이 한 곳에서 힘을 합해 싸운 것인데, 원균은 본도의 재물만 모두 탕진하고 있다가 이순신을 만나서 이런 공을 세웠다고 한다.
이때에 와서 이런 보고가 오니, 상이 드디어 이순신을 정헌(正憲)의 품계로 올리고, 또 통제사 제도를 설치하고서 이순신에게 그 직을 맡게 하여 3도의 수군을 통제하게 하고, 진(鎭)을 한산도(閑山島)에 설치하여 바다를 거쳐 전라 등지로 향하는 왜적을 막게 하였다.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 이억기(李億祺)도 전공이 있으므로, 원균과 더불어 가의(嘉義)로 승진시켰다. 조정에서는 전라 등의 도(道)와 소식이 통하지 못해, 그들은 반드시 임금이 요동으로 건너 갔다고 여겨 어찌할 바를 모를 것이라 생각하여, 드디어 대사성 윤승훈(尹承勳)을 보내면서, 선천을 경유하여 배를 타고 가게 하였다.
○ 이때 조정에서는 연달아 사신을 보내 요동에 구원을 청하니, 사신들의 행렬이 길에 잇따랐다. 요동에서 드디어 부총병(副摠兵) 조승훈(祖承訓)을 파견하여 7천의 병마를 거느리고 왔다.
7월 초에 관전보 부총병 동양정(佟養正)이 발아(撥兒)라는 무기를 순안(順安)에 설치하고, 우리 군사와 진퇴를 같이하면서 연일 적의 머리를 벤 것이 천여 급이나 쌓였다. 동 총병(佟摠兵)이 순무(巡撫)와 순안(巡按)의 아문에 알리게 하니, 드디어 기병 7천 명을 뽑아 보냈다. 대체로 적을 가볍게 생각한 것이다. 조 총병(祖摠兵)이 군대를 인솔하고 압록강을 건너오니, 유성룡ㆍ김명원 등이 말하기를,
“비가 내려 길이 질퍽하니 급격히 공격하는 것은 불리하다.”
하니, 조 총병은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3만의 기병으로 10만의 달자(㺚子)를 섬멸했었는데, 왜적을 보니 개미나 모기 같을 뿐이다.”
하고는, 진격하기를 요구하였다. 이때 아군의 척후장(斥候將) 순안 군수(順安郡守) 황원(黃瑗)이 김명원에게 치보(馳報)하기를,
“왜적이 모두 서울로 향하고 머물러 있는 자는 극히 적습니다. 포로가 된 여인이 성 위에서 자주 관군을 부르고 있으니, 이 기회를 타서 성을 공격하면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조 총병은 이 보고를 보자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고 말하기를,
“내 군중에 점 잘치는 사람이 있어, ‘17일이면 성을 격파할 것이다.’ 하더니 바로 이 보고와 부합된다.”
하였다. 그리고는 군중에 영을 내리기를,
“내일 새벽에 평양성으로 나가 적을 격파하고서 아침밥을 먹을 것이다.”
하였다. 영이 이미 선포되어 드디어 평양성 아래로 나가니, 성문은 닫히지 않았고 성 위에는 지키는 적이 하나도 없었다. 이른 아침에 대군이 보통문(普通門)을 경유하여 들어가고 전초군(前哨軍)은 벌써 대동관(大同館) 앞에 이르러 떠들썩하며 앞으로 진격하는데, 적 하나도 나와서 응전하는 자가 없었다. 대군이 큰 거리를 경유하여 몰려 나가자, 적은 좌우 길가로 연한 방에다 벽구멍을 뚫고 일시에 총을 쏘아대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유격(遊擊) 사유(史儒)가 총알에 맞아 죽으니, 조승훈은 그의 죽음을 보고서는 말을 채찍질하여 먼저 도망쳤다. 대군도 따라서 무너져 달아났다. 적이 추격하여 크게 부수니, 요동군으로 살아 돌아온 자는 겨우 3천 명이었고, 조 총병은 하루에 3백 리를 달려 왔다. 유성룡이 그를 맞이하여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그만둔다 치더라도 7천 명의 목숨을 생각하지 아니하오. 이곳에 머물러서, 흩어진 군졸을 수습하여 조용히 퇴군하는 것이 마땅할 터인데, 어찌하여 이와 같이 허둥지둥 떠나가려 하오.”
하니, 조 총병이 대답하기를,
“내가 마땅히 가산(嘉山)으로 가서 강을 가로 막고 지키겠소.”
하였다. 이것은 대개 싸움을 늦추려는 것이었다. 인마가 거의 다 없어지고 무기도 남은 것이 없으니, 적이 만일 다시 일보라도 나오게 되면 여러 군사가 담력을 잃은 뒤라, 반드시 한 시각도 지탱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적 또한 천병의 성세를 보고서 군사를 거두고 피하여 나오지 아니하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밤낮으로 이기기를 기다렸는데, 조 총병이 용맹만 믿다가 패전하여 전쟁을 그만두고 돌아오니, 상하가 낙심하고 서로 모여 발만 구를 뿐이었다.
○ 구사맹(具思孟)ㆍ신잡(申磼)ㆍ구성(具宬) 등이 신성(信城)ㆍ정원(定遠) 두 왕자를 모시고 오니, 상이 특별히 구사맹ㆍ신잡을 자헌(資憲)의 관계(官階)에 올리되, 구사맹은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 조 총병이 전쟁에 패하고 돌아와, 취(揣)ㆍ부(拊)ㆍ안진(安鎭) 등 3아문에 죄를 얻을까 두려워서 말하기를,
“바야흐로 성을 공격하여 이기려는 즈음에, 조선의 한 군영이 왜군에 투항하여 싸움을 도와 살과 돌이 비오듯 날아왔기 때문에 패하였다.”
하였다. 광령 진수(廣寧鎭守)의 총병관은 인(印)을 걸어두고 퇴직하고, 장군 양소훈(楊紹勳)이 군사를 거느리고 구련성(九連城)에 이르러 친히 허실(虛實)을 염탐하였다. 상이 윤두수를 보내어 무리한 상황을 극구 말하니, 총병이 대답하기를,
“순무ㆍ순안 두 어사도 이미 그 말이 거짓임을 알고 있소. 더구나 내가 친히 본국의 사정을 들었으니, 어찌 예전의 의심이 시원하게 풀리지 않겠소. 마음을 놓으시오.”
하였다. 윤두수가 이어 말하기를,
“소방(小邦)의 병력은 이미 다하여 멸망이 조석에 놓여 있습니다. 소방이 망하고 나면 반드시 앞으로 천자의 조정에서는 동쪽을 돌아보는 근심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군사를 이끌고 적을 섬멸하여 이미 멸망한 속국(屬國)을 보존하고, 우리 임금의 밤낮의 근심을 풀어주는 것은 오직 장군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소방의 군신은 얼마 되지 않아 압록강의 귀신이 되어 다시 하늘의 해를 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하고, 울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총병이 말하기를,
“중국의 사체(事體)는 만전을 기하고서야 움직이므로 조정 안에서 이미 여러 관원이 회의한 결과 어떤 사람은, ‘압록강을 한계로 하여 방수하는 것이 옳지, 멀리 외국을 구원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논이 있었고, 우리들도 또한 하나의 의논을 갖추어 올렸으나, 여태까지 결정이 내려지지 않았소. 귀국에서도 더욱 변방의 신하를 단속하여 외적이 오는 길을 단단히 막아 소홀함이 없게 하고서, 우리 조정의 처분을 기다리시오. 귀국의 군신은 이로부터 더욱 상국(上國)을 섬기는 절개를 굳건히 하여 끝까지 변하지 않는다면 성황(聖皇)이 위에 계셔서 마땅히 내려다 보게 될 것이니, 염려하지 마시오.”
하였다.
○ 역관 한윤보(韓潤輔)가 무슨 일이 있어 요동에 당도하니, 순안 어사(順按御史) 이시자(李時孶)가 그를 불러 말하기를,
“너희 나라의 나쁜 장수가 왜적에게 투항하여 천병을 과반수나 없어지게 하였고, 군사가 돌아오는 날에도 군량과 말먹이 콩을 방출하지 아니하여 모두 거꾸러져 죽게 만들었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냐?”
하니, 한윤보가 대답하기를,
“소방(小邦)은 소심한데다 원래 약하고 겁쟁이어서 나쁜 짓을 할 줄 모릅니다. 비록 어쩌다가 난리를 당하여 구차스레 복종한다 하더라도 또한 죽음을 두려워함에 불과합니다. 어찌 까닭 없이 스스로 천자께 죄를 짓겠습니까. 결단코 그랬을 리가 없습니다. 군대가 패전한 뒤로 대군이 하루에 3백 리를 달리게 되었으니, 사람과 말이 어찌 죽고 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소방이 복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간의 곡절은 입으로 감히 말하지 못할 것이 있습니다.”
하니, 순안 어사가 웃으며 말하기를,
“네 말이 옳다.”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조승훈 장군의 무고는 이행되지 못하였고, 조정에서도 관원을 보내어 거짓임을 분변하였다. 순무어사(巡撫御史) 학걸(郝杰)이 또한 말하기를,
“이것은 조승훈이 죄를 벗어나려는 것에 불과하니, 귀국은 별로 염려하지 마시오.”
하였다. 조승훈의 전후 사실은 조정에서도 분명히 말하기 어려워서 대답할 만한 말을 찾지 못하였는데, 한윤보는 역관으로서 다만, ‘입으로 감히 말하지 못할 것이 있다.’란 한 구절의 말로 능히 그 거짓을 분변하고, 또 그가 패하여 겁먹고 정신없이 달아나던 상황을 은연중 드러냈으니, 그때 사람들이 임기응변에 능하다고 하였다.


8월

세자가 영변(寧邊)에서 강계(江界)로 향하려 하는데, 심충겸(沈忠謙) 등이 말하기를,
“강계는 길이 궁벽한 곳이오니 결코 갈 만한 데가 못되옵고, 강원도는 고산준령(高山峻嶺)이 많아서 방어선이 되고 있으니, 이천(伊川)ㆍ춘천(春川) 등지를 경유하여 영남과 서로 통하게 되면 할 만한 일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세자는 마침내 희천(熙川)ㆍ영원(寧遠)의 경계에 머물러서 4ㆍ5일을 풀밭에서 자니, 시종하던 관리가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 어쩔 수 없이 양덕(陽德)을 경유하여 이천에 이르니, 또 춘천에 도달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전후 좌우가 모두 적에게 막혀서 향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이때에야 조정에서 비로소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말하기를,
“어떤 담대한 자가 감히 지존(至尊)을 모시고 지극히 위험한 곳으로 깊숙이 들어갔단 말이냐?”
하였다. 그리고 사람을 보내 중지시키려 하였는데, 오래지 않아 적의 핍박을 받아 성천부(成川府)로 행차를 돌렸다.
○ 이일(李鎰)이 평양성을 지키지 못한 뒤로 황해도 지방을 왕래하며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다가 이때에 와서 군사를 이끌고 성천에 이르니, 드디어 방어사로 삼았다. 그래서 군세가 약간 진작되었다.
○ 비변사가 아뢰기를,
“전 감사 송언신, 병사 이윤덕은 한 도의 주인으로서 깊숙이 산협 속으로 들어가 오래도록 그림자조차 나타내지 않고 있습니다. 홍세공(洪世恭)은 이미 조도(調度)의 명을 받고서도 희천으로 옮겨 들어가 천병이 오가는 것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습니다. 한준(韓準)은 친히 대가를 따르라는 명을 받고도 병을 칭탁하여 뒤에 처지고, 또 말하기를, ‘대가가 요동으로 건너가는 것을 친히 보았노라.’ 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무너뜨렸습니다. 헌납 이정신(李廷臣), 지평 이경기(李慶祺), 주서 임취정(任就正)과 박정현(朴鼎賢), 검열 조존세(趙存世), 김선여(金善餘) 등은 시종하는 신하로서 하직하지 아니하고 도망갔습니다. 모두 신하된 의리를 잃었으니, 경중을 가려 단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송언신ㆍ한준은 파직시키고, 이윤덕은 백의종사(白衣從事)시키고, 홍세공은 한 자급을 강등시키고, 이정신 등 6인은 아울러 그 관직을 삭탈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니, 상이 이것을 윤허하였다.
천자가 선정해 보낸 행인(行人 사신을 이름) 설번(薛藩)이 조칙을 받들고 와서 반포하니, 상이 의순관(義順館) 앞길에 나가 맞이하고, 용만관(龍灣館)에서 조칙을 선포하였다. 조칙 중의 말 뜻이 극히 위로하고 면려하는 것이었고 심지어, 굳게 신하의 절개를 지킨다면 마땅히 조처하겠다는 말까지 있었다. 그것은 절개를 꺾어 왜놈에게 항복할까 염려하여 먼저 위로하고 면려하는 말을 보낸 것이다.
상이 손수 조칙을 받들고 목놓아 통곡하니, 위로는 신료로부터 아래로는 천인과 노복에 이르기까지 대성통곡하지 아니하는 자가 없었다. 설 행인(薛行人)도 눈물을 흘렸다. 얼마 있다가 상이 난리를 당한 상황을 자세히 개진하니, 행인이 말하기를,
“귀국에서 충성으로 순종하는 정성은 천조도 이미 아는 바입니다. 머지 않아서 조치하는 말이 있을 것이니, 마음을 놓고 우려하지 마소서.”
하였다. 다음 날 원접사(遠接使) 이덕형(李德馨), 관반사(館伴使) 이성중(李誠中)이 모두 글을 올려 잘 말해 달라고 하니, 설번이 말하기를,
“내가 복명하는 날 말을 다할 뿐 아니라, 이보다 먼저 글을 갖추어 이 사실을 분명히 써서 상주(上奏)할 터이니, 공 등은 물러가서 직무를 다 하시오.”
하였다.
○ 전라도 관찰사 이광(李洸), 경상도 관찰사 김수(金睟), 충청도 관찰사 윤선각(尹先覺) 등이 군사 8만을 거느리고 바로 서울로 향하였다. 이때에 충청도와 경상도는 모두 잔패(殘敗)를 입었으나, 유독 전라도만은 물력(物力)이 온전하여 병사와 기계와 군대 물자와 짐실은 수레가 40ㆍ50리에 가득 차니, 원근에서 그 말을 듣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조정에서도 전라도가 꼭 성공할 것으로 여겨 손꼽아 승전의 첩보가 오기를 기다렸다. 김수는 패한 나머지 겨우 관군 1백여 명을 인솔하고 이광에게 소속되었다. 이광이 거느린 군대는 모두 정예롭고 용맹스런 병사로 경상도 사람을 얕보았다. 그래서 김수 이하가 업신여김을 받아, 기가 꺾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이광은 또 어리석고 겁이 많아 병법을 알지 못했으니, 행군할 즈음에 군사들을 양(羊)을 몰아 풀 먹이는 것같이 하여 흩어져 통일성이 없었으며, 앞과 뒤를 서로 알지 못하였다. 용인현(龍仁縣)의 남쪽 10리 밖에 진을 치니, 적은 처음에 그 군세가 대단함을 보고 감히 나오지 못했다. 선봉장 백광언(白光彦)ㆍ이지시(李之詩) 등은 바로 적의 진루(陣壘)로 가서 적의 취사병 10여 명의 목을 베니, 여러 군사들이 더욱 적을 가볍게 여겨 교만한 기색까지 있었다. 이보다 앞서 백광언ㆍ이지시가 이광에게 말하기를,
“우리 병사가 비록 많으나 모두 여러 고을에서 질서없이 모여든 오합지졸(烏合之卒)입니다. 그러니 다소를 따지지 말고 모두 본읍의 수령에게 거느리게 하여 아무 읍이 선봉이 되고, 아무 읍이 중군(中軍)이 되며, 전후 좌우도 모두 분담하는 일이 있어 한 곳으로만 모이지 말게 하여 각자가 진을 만들고 십여 곳에 나누어 주둔하게 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한 진(陣)이 비록 패하더라도 옆 진이 계속하여 들어가서 원근의 여러 진이 고기 비늘처럼 줄지어 들어가 서로 구해주게 하고, 한 진이 비록 이기더라도 원근의 여러 진이 순서를 따라 진격하게 하여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면 이기면 반드시 대첩(大捷)할 것이요, 비록 패하더라도 또한 대패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니, 이광이 대답하기를,
“임기 응변할 내 스스로의 계책이 있으니, 어찌 미리 작정할 수 있겠소.”
하였다.
이 날 밤중에 백광언 등에게 바로 적의 진영을 부수고 들어가게 하니, 백광언ㆍ이지시는 적의 옥상(屋上)으로 돌진하여 올라가고, 여러 군사는 목책을 넘어 들어가 칼을 휘두르며 마구 쳐서 적의 머리 10여 급을 베었다. 때마침 짙은 안개가 사방에서 일어나 지척도 분간할 수 없었다. 군영에 머물러 있었던 적은 벌써 다 언덕으로 올라가서 어둠을 이용하여 총을 쏘며 뒤에서 엄습해 오니, 이광언 등이 모두 난병(亂兵)에게 죽음을 당하게 되었고, 여러 군대가 무너져 돌아 왔다. 떠들고 고함치는 동안에 날이 밝고 안개가 걷혔다. 적병 약 4ㆍ5천 명이 서로 마주 대하고 2ㆍ3리쯤 되는 곳에 하영(下營)하였다. 왜적이 총을 한 번 쏘자 대군은 드디어 무너졌다. 이광 등은 이미 군대를 불러 모을 수 없게 되자, 자기 자신도 흰 옷으로 변장을 하고 뒤따라 도망하니, 사람과 말이 서로 밟히어 도로를 가득 채웠다. 8만의 군대가 잠깐 동안에 다 흩어져 갔다. 적은 우리 군사의 형세가 성함을 보고 오히려 감히 추격하지 못하고 군사를 거두어 돌아갔다. 궁시(弓矢)ㆍ도창(刀槍)ㆍ양자(糧資)ㆍ기계(器械)ㆍ의복(衣服)ㆍ장식(裝飾)이 낭자하게 버려져서 개울을 메우고 골짜기에 가득하여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었다. 산골짜기에 숨었던 촌민들이 밤을 틈타 주워 모아 이것으로 생계를 유지하여 산 자가 매우 많았다.
대가가 아직 서울을 나가기 전에 이광이 군사 10만 명을 거느리고 금강(錦江)에 도착했는데 대가가 서울을 떠났다는 말을 듣자, 마침내 스스로 군사를 파하고 돌아왔었다. 그러다가 이때에 이르러 또 패하니, 모두가 사기가 죽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패전의 보고가 행재소(行在所)에 이르니, 조정에서는 상하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길고 짧은 한숨만을 내쉴 뿐이었다.
○ 서리(書吏) 장복중(張福重)이란 자가 북도(北道)로부터 와서 말하기를,
“적은 군사를 나누어 철령(鐵嶺)을 넘어 갑산(甲山)에 이르렀다가 돌아갔습니다. 감사 유영립(柳永立)은 사로잡혔다가 도망하여 북으로 가 회령(會寧)에 이르니, 인민이 모두 배반하여 사대부로 피난한 자 및 수령을 모두 잡아서 적에게 바쳤습니다. 임해군(臨海君)ㆍ순화군(順和君)ㆍ김귀영(金貴榮)ㆍ황정욱(黃廷彧)ㆍ황혁(黃赫)은 모두 그들에게 잡히고 남도(南道)의 병사 이혼(李渾)도 갑산백성에게 살해되었습니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문안드리고, 이어 사람을 보내 그 형세를 탐지해 보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적의 수중에 있는데, 어찌 벗어날 길이 있겠는가.”
하였다.
○ 이때 조정에서 말하기를,
“8도가 적에게 화를 입어 모두 분탕질을 당하였으므로, 천조의 병력이 아니면 도저히 이 도적을 평정할 수 없는데, 우리 나라에 온 요동 사람들은 모두 말하기를, ‘출병하는 시기가 언제일는지 모른다.’ 하니, 지금까지 시간만 끌고 있는 것은 앉아서 멸망하기만을 기다리는 것이다.”
하고, 급히 사신 한 사람을 보내자고 청하였다. 이때 마침 사은사(謝恩使) 신점(申点)이 북경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요동 순무 순안진(巡按鎭)에서 모두, 군사를 동원하여 구원할 것을 제청하여 구경 대신회의(九卿大臣會議)에 붙였더니, 모두 말하기를, ‘조선은 멀리 번복(藩服)의 밖에 있어 갑자기 왜적의 침략을 받아 나라를 잃어버리고 도망하여 숨어다니는 꼴이 되었으니, 반드시 재앙을 자초한 점이 있을 것입니다. 그 나라의 정형에 대하여서도 아직 자세히 알지 못하니, 경솔하게 군사를 움직여 멀리 외이(外夷)에서 싸우게 할 수는 없습니다. 요동의 장령(將領)에게 칙명을 내려 엄하게 그들로 하여금 방비하여 실수가 없게 하라 하옵소서.’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병부 상서 석성(石星)만이 ‘조선은 본래 예의의 나라라 일컬어 중화(中華)와 비슷하옵고, 2백 년 동안을 한결같이 중국을 받들어 왔습니다. 이 까닭으로 우리 조종(祖宗)께서 조선을 예우한 것이 다른 번방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이번에 병란을 당한 곡절은 전에 이미 제주(題奏)에 명확히 차서(次序)가 있어 결코 거짓을 끼고 우리를 넘보려는 계교가 있는 것은 아니옵니다. 만일 그들이 왜적과 부화하게 되면 변경의 근심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옵니다. 그러하오니 빨리 군사를 발동하여 이를 구원하소서.’ 하였습니다. 다만 구원하지 말자는 건의가 나왔기 때문에 아직까지 결정짓지 못하였습니다. 석 상서는 홍순언(洪純彦)을 불러 말하기를, ‘귀국의 일에 나는 힘을 다하고 있지만 여러 사람의 의론이 이와 같으니 이때에 귀국께서 청병하는 사신을 보내오면 내가 마땅히 귀국을 위하여 힘쓰겠소. 황상(皇上)께서도 귀국을 가엾게 여기고 있소. 그러나 영하(寧夏)에서 방금 용병(用兵)하고 있기 때문에 힘이 분산될까 두려울 뿐이오. 귀국은 어찌하여 지금까지 군사를 청하지 아니하오.’ 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드디어 정곤수(鄭崑壽)ㆍ심우승(沈友勝)을 보내어 밤을 가리지 않고 달려가게 하였다. 정곤수가 길을 떠날 적에, 상이 손수 술을 부어 주고 보냈는데 어조가 심히 슬프고 참담하였다. 정곤수는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조정에서는 내가 자기들 의견과 다르다고 하여 멀리 나가게 하니, 이것이 무슨 일이오?”
하니, 이성중이 여러 사람 가운데 있다가 그를 꾸짖어 말하기를,
“종신(從臣)은 10에 5ㆍ6이 대개 네다섯 가지 일을 겸하였소. 공은 이미 한가한 관직을 맡았고, 또 몸이 쇠하여 병든 것도 아니니, 오늘의 사행(使行)에 공이 아니면 누가 가겠소. 더구나 이때를 당하여 비록 적의 진영으로 들어가라 하여도 오히려 감히 사양하지 못할 터인데, 천조는 부모의 나라인데도 오히려 가고자 하지 않고, 사람을 만나 분해하는 안색을 나타내니, 반드시 충신 의사의 말은 아닐 것이오.”
하니, 정곤수는 대단히 부끄러워하였다.
○ 경기 감사 권징(權徵)이 멀리 강화(江華)로 들어가고, 황해 감사 조인득(趙仁得)이 왜적을 피하여 섬으로 들어가 두 사람이 아무 것도 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우부승지 심대(沈岱)를 경기 감사로 삼고, 동부승지 유영경(柳永慶)을 황해 감사로 삼았다. 심대는 떠날 적에 참판 심희수(沈喜壽)에게 말하기를,
“조정의 사람 씀이 이 무슨 짓이오. 나는 사지(死地)로 가고 공은 제 때를 얻었구려.”
하니, 심희수는 대답하기를,
“이게 무슨 말씀이오. 조정에서는 공이 매우 의분심이 많아서 평탄하고 험난한 것을 가리지 않는다 하여 자급을 올려준 지 얼마 안 되었는데도 또 자급을 뛰어 올려서 보내는 것이오. 그런데도 감격하고 분발하는 뜻은 갖지 아니하고 먼저 원망하는 빛을 품는단 말이오. 적이 평양에 와 있어서 아침 아니면 저녁에 떠날 것이어서, 군신 상하가 오히려 죽을 곳을 알지 못하는데, 공은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시오.”
하였으나, 심대는 그래도 탄식해 마지 않았다.
○ 전라도 유생 양산숙(梁山璹)과 곽현(郭賢)이 와서 말하기를,
“김천일(金千鎰)이 의병을 일으켜 전라 병사 최원(崔遠)과 더불어 군사를 합쳐 수원(水原)에 도착하였습니다. 고경명(高敬命)ㆍ조헌(趙憲)도 또한 기병하여 서로 이어 왔고, 경상도에는 김면(金沔)ㆍ정인홍(鄭仁弘)ㆍ박성(朴惺)ㆍ곽재우(郭再祐) 등이 기병하여 적을 토벌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양산숙 등을 불러들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나의 변변치 못한 죄 때문에 너희들이 천리 길을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왜적의 속에서 벗어나 여기에 이르렀으니, 부끄러움을 어찌 말하랴.”
하였다. 양산숙은 아뢰기를,
“김천일의 군중에 정예롭고 용감한 사람이 많사오나 반은 유생으로서 다만 충의만으로 일어났을 뿐이오니, 성패에 있어서는 하늘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니, 상이 울며 이르기를,
“충의로 격동되었는데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랴.”
하였다. 곽현이 아뢰기를,
“신은 평소 조헌과 교의가 두텁습니다. 신이 일을 일으킨 뒤에 조헌(趙憲)이 말하기를, ‘근자에 천문을 보니 우리 나라가 멸망할 운이 없고 왜적도 끝내 뜻을 얻지 못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이 조헌의 말인가?”
하니, 곽현이 아뢰기를,
“기축년(1589, 선조 22)에 조헌이 북도로 귀양갔는데 능히 역변(逆變)이 일어날 것을 알았고, 또 신묘년부터는 ‘나라에 큰 변이 있을 것이니 미리 피해 살 곳을 강구하라.’고 분명하게 말하였으니, 이것은 반드시 천문을 관찰한 징험이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와 같이 잘 맞추는가?”
하면서, 대단히 기뻐하고 위안되는 안색을 띠었다. 드디어 김천일을 승자(陞資)하여 판결사(判決事)로 삼아 창의사(倡義使)라 칭하고, 고경명을 초토사(招討使)라 칭하여, 이들에게 교서를 내렸다. 조헌에게 내린 교서에는 ‘충성된 말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여 오늘의 지경에 이르게 하였음을 뉘우친다.’라는 말이 있었다. 또 김면 등에게도 교서를 내렸다.
상이 이미 자신을 나무라는 교서를 내렸는데, 이르기를,
“용만(龍灣) 한 모퉁이에서 국사가 어렵게 되고, 국토는 이에서 다하니 내 장차 어디로 갈 것인가. 저 강물을 바라보니 또한 동쪽으로 흘러가누나. 돌아가자고 하는 일념이 저 물과 같이 넘실거린다.”
하였다. 이 교서가 내린 것을 원근에서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모두 이호민(李好閔)이 지은 것이다.
○ 충청 감사 윤선각(尹先覺)이 아뢰기를,
“큰 적이 청주(淸州)에 들어와 군사를 나누어 살육을 자행하고 있었습니다. 승명(僧名)이 영규(靈圭)라고 하는 자가 있어, 그 무리를 모아 모두에게 낫을 들리고 호령을 매우 엄히 하여 적을 만나도 피하지 아니합니다. 드디어 청주의 적을 공격하여 연일 서로 대치하였는데, 비록 크게 이긴 일은 없으나, 또한 패배하지도 아니하였습니다. 적은 마침내 성을 버리고 갔습니다. 모두 영규의 공이옵니다.”
하였다. 그를 당상으로 올려서 첨지로 삼고, 옷감 한 벌을 내려 주었다.
○ 양산숙(梁山璹) 등이 돌아갈 때 상이 불러 이르기를,
“너희들은 돌아가 김천일과 조헌에게 힘을 다하여 적을 쳐부수어 나를 서울로 돌아가게 하라고 말하라.”
하고, 흐르는 눈물을 그칠 줄 몰랐다. 양산숙 등이 아뢰기를,
“호남의 의병이 비록 많다 하오나 조정이 멀리 떨어져서, 호령할 즈음에 쉽게 의견을 여쭈고 명령을 받기가 쉽지 않으니, 모름지기 중신(重臣)을 보내시와 이들을 어루만지게 하여야 구애됨이 없겠나이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마땅히 의논하여 처결하겠다.”
하였다. 드디어 정철(鄭澈)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았다. 양산숙 등의 뜻은 신잡(申磼)의 무리를 보내 주었으면 하였는데, 조정에서 갑자기 정철을 보내니 양산숙 등은 대단히 불만스럽게 여겼다.
○ 고경명이 기병하여 북상하다가, 적들이 이미 금산군(錦山君)을 점거하여 돌격해 오려는 기세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고경명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모두 호남을 믿어 그 곳을 근본으로 삼고 있었다. 그런데 도적을 보고도 쫓아가지 아니하고, 북상하는 데에만 뜻을 둔다면 이것은 그 근본을 스스로 끊는 것이니, 군사를 돌려 그들을 쳐서 뒤돌아보는 근심을 제거해야 한다. 그런 뒤에야만 여러 사람의 마음이 편안할 것이다.”
하고, 마침내 돌아가 금산의 경계에 머물렀다. 다음 날 결전을 하고자 하였는데, 이 때에 우리 나라 남녀가 왜적 가운데에서 와서 말하기를,
“우리는 바로 도망쳐 돌아온 사람이오.”
하니, 고경명이 정성을 다하여 위로하고는 군대 안에 두고 그들이 간첩임을 의심하지 아니하였다. 이날 밤, 적은 어둠을 틈타 군영에 들이닥쳤다. 여러 군사들은 고경명이 벌써 죽었다는 말을 듣고 싸우기도 하고 달아나기도 하였다. 고경명의 아들 고인후(高因厚)도 진이 함락하여 죽었다. 정자(正字) 유팽로(柳彭老)는 외진(外陣)에 있다가 고경명의 부자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말하기를,
“군사(軍事)를 꾀하다가 일이 실패하면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내 어찌 홀로 살겠는가.”
하고,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나가 싸우다 죽으니, 모든 군사가 마침내 무너져 돌아갔다.
고경명이 군사를 일으키자, 호남 선비들이 흔쾌히 그를 따랐으나 무릇 충의로 서로 권면했을 뿐, 실제로는 병법을 알지 못하였다. 고경명이 사람을 대하여 말하기를,
“종묘와 사직을 지키지 못하고 지존(至尊)께서 몽진(蒙塵)하시니, 이야말로 우리가 죽음을 바칠 때다.”
하고, 격문을 작성하여 각 도에 회유하니, 본 자는 누구나 분발하여 일어나지 않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군대에 기율이 없어 가는 곳마다 진영을 갖추지 못하였다. 날마다 오직 맨 주먹으로 쳐들어가 죽음을 피하지 않고 싸우면 적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널리 군사를 사랑할줄만 알았지 다른 준비가 없어서 결국은 패하고 만 것이다. 신묘년(1591, 선조 23) 가을에, 고경명이 정탁(鄭琢)에게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경명의 일가가 내년에 큰 화를 당할 것인데, 부자가 다같이 그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오.”
하였으니, 대개 점을 쳐보고서 한 말이다. 조정에서는 예조 판서와 대제학을 증직해 주었다.
○ 금산의 적이 멀리 말을 달려 추격해 와서 웅치(熊峙)에 도착하고, 곧장 전주로 향하니 감사 이광이 말하기를,
“대군이 성안에 들어와 지키고 앉아서 적을 우리 지경에 가까이 오게 한다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다. 내가 군사의 절반을 나누어 성 밖에 외진을 만들 터이니, 너희들은 마땅히 힘을 다하여 성을 지키다가 안팎으로 협공하면 성공할 것이다.”
하였는데, 실제로는 도망가고 싶어서 그런 것이다. 군수 정담(鄭湛)ㆍ현령 변응정(邊應井) 등이 10리 밖에서 적을 맞이하여 싸워서 10여 급을 참수(斬首)하고, 사시(巳時)에서 오시(午時)까지 역전(力戰)하였다. 해가 질 무렵 적의 대병이 밀려오니 군사들은 지탱해내지 못하고, 정담과 변응전은 함께 죽었다. 군사들은 그래도 힘을 합하여 싸우고 물러나지 아니하니, 적은 금산으로 돌아가 주둔하였다.
○ 며칠 앞서 변응전이 상소하기를,
“이제 적이 북으로 함경도에 이르고, 서쪽으로 평안도에 이르고, 동남쪽 수천 리에는 각각 군사를 두어 머물러 지키고 있으니, 그 형세가 30만 명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작고 추악한 왜적이 군대를 30만이나 내보냈다면 그 나라는 반드시 비었을 것이니, 우리가 수군 4ㆍ5만을 얻어 바람을 이용하여 돛을 올리면 순식간에 왜적의 땅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며, 곧장 근거지를 쳐부수면 나머지는 저절로 무너질 것입니다. 이것을 손빈(孫臏)가까운 한(韓) 나라를 구원하지 않고 곧장 위(魏) 나라의 도읍으로 군사를 달린 것과 같습니다왕전(王翦)이 초 나라를 치러 갈 적에 군사 백만을 동원하여 나라를 텅 비워두고 갔는데, 어떤 사람이 연태자(燕太子) 단(丹)을 두고 말하기를, ‘연 태자 단이 만일 군대를 출동하여 습격했다면 진(秦) 나라를 패배시키고 이전의 수치를 씻었을 것이며, 번오기(樊於期)도 죽을 필요가 없고,독항도(督亢圖)도 바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였으니, 원컨대, 이 점을 살피소서.”
하였다. 조정에서 그 말을 기이하게 여기면서 그 계략을 채용하지는 못하였다.
○ 조헌은 고경명이 패하여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금산의 적은 복심(腹心)의 병(病)이다.”
하고, 글을 영규(靈圭)에게 보낸 다음에 드디어 그 경계에 나가 머물면서 다음 날에 같이 공격하기로 약속하였다. 명령은 이미 내렸으나, 비가 오고 진영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다. 영규가 조헌에게 말하기를,
“병법에, 준비가 있어야 근심이 없다 하였습니다. 진영을 만드는 작업을 아직 끝내지 못하였으니, 내일 싸우는 것을 불가합니다.”
하니, 조헌이 속으로 얼마 동안 생각하다가 대답하기를,
“왜적은 본래부터 우리의 적수가 아니지만 내가 빨리 싸우고자 하는 것은 단지 격동된 충의를 따르고 날카로운 사기(士氣)를 타자는 것입니다.”
하였다. 다음 날 새벽에 적은 군대를 끌고 먼저 나왔다. 이 때에 영규는 군영을 대강 갖추었는데, 조헌의 군대는 훤히 보이게 벌판에 나와 섰다. 적이 달려드니, 장군이 큰 소리로 고함치고 짧은 무기로 서로 교전하여 살상이 상당하였다. 적병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많이 오니, 조헌의 군대가 적을 보고 잠시 후퇴하였다가 마침내 영규의 진영으로 옮겨 왔다. 적이 뒤를 밟아 이 기회를 타고 들어가니, 군사가 크게 어지러워졌다. 그런 중에도 맨주먹으로 치며 싸웠는데 오히려 조금도 기가 꺾이지 아니하였다. 오래지 않아 조헌은 난병(亂兵) 속에서 죽었다. 어떤 사람이 영규에게 말하기를,
“조 의병장이 죽었습니다. 적은 더욱 많이 오니, 이곳을 떠나는 것이 낫겠습니다.”
하니, 영규는 크게 호통을 치며 말하기를,
“죽으면 죽었지 어찌 혼자만 살 수 있겠는가.”
하였다. 종일 힘써 싸우다가 영규도 죽고 여러 군사도 모두 죽으니, 감히 후퇴하여 살려는 자가 없었다. 적도 이날 밤에 경상도로 도망갔다. 적은 이때부터 감히 다시 호남을 침범하지 못하였으니, 대체로 그 군세가 크게 꺾였기 때문이다. 조헌이 기병할 즈음 원근에서 모두 말하기를,
“조헌이 기병하였으니, 어찌 적을 평정하지 못할 것을 근심하겠는가.”
하였다. 평안ㆍ황해도의 백성으로 아주 궁벽진 곳에 살면서, 비록 평소 그를 보거나 안 적이 없던 자들도 모두 말하기를,
“이 사람이 일찍이 작도(斫刀)를 들고 대궐 아래 엎드렸던 사람인가? 사람들이 모두 이 사람은 진짜 충신이라 하는데, 충신이 의병을 일으켰으니, 왜적을 평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하더니, 이 때에 패전하여 죽었던 것이다. 조정에서 이조 참판을 증직하였다. 영규는 청주에서 왜적을 격파한 뒤 얼마 안 되어 금산에서 죽으니, 조정에서 내려 주었던 비단 옷감 등의 물건은 그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중도에서 돌아왔다. 이 때 감사 이광은 한 구석에 움츠리고 있으면서, 사람의 공이나 허물을 조정에 보고하지 않았다. 고경명 등의 죽음도 조정에서는 다른 사람을 통해 들었던 것이다.
○ 윤근수(尹根壽)는 명을 받들고 압록강에 이르러, 장차 관전보(寬奠堡)에서 동 총병(佟摠兵)을 만나려고 가다가 길가에서 총병을 만났다. 총병이 말하기를,
“이제 성지(聖旨)를 받들어 보았더니, ‘조선 국왕이 곧 왜적에게 핍박을 받아 내부(內附)하기를 원하므로, 짐은 작은 나라를 불쌍히 여기는 인(仁)을 생각하건대 의리상 거절할 수 없다.’ 하였소. 관전보에 도착하면 먼저 가옥을 마련하고 역원(役員) 10명을 인솔하고 있다가 곧 강을 건너오는 날에는 영접하여 머물게 하고 마음을 다하여 보호하시오. 그리고 하루에 채소, 은 4냥, 돼지ㆍ양 각 한 마리, 면(麵)ㆍ반(飯) 등의 물건은 풍족하게 하여 모자람이 없게 하시오. 종관(從官)과 인역(人役)은 합하여 100명, 부인은 20명만을 데리고 오도록 하고 혼잡하거나 그르침이 없도록 하시오.”
하였다. 윤근수는 돌아와서 이것을 아뢰었다.
○ 김천일과 최원(崔遠)이 아뢰기를,
“신등이 이곳으로 올 때에 처음 고경명ㆍ조헌 등과 군사를 합하여 나아가 싸웠는데 이제 그들은 이미 죽었습니다. 신등이 오랫동안 수원의 들판에 주둔하고 있는 가운데 지원해주는 군대가 없어 단독으로 지탱할 수가 없습니다. 서울 근방의 의병이 다 강화 등지로 모였고 배도 많다고 하오니, 합세하면 유리할 것 같습니다. 이제 군사를 강화로 옮겨서 오래 주둔하는 계책으로 삼을까 합니다.”
하였다.
○ 이 때에 우성전(禹性傳)도 강화ㆍ인천 등지에서 기병하니, 군세가 매우 성하였다. 조정에서는 우성전을 대사성에 승진시키고 적을 힘써 치게 하였다.
○ 적이 해주(海州)에 웅거하면서 장차 연안(延安)을 치려 하니, 인민이 모두 세간을 짊어지고 길가에 서 있었다. 전 참의 이정암(李廷馣)이 개성부에서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맞이하여 말하기를,
“영공(令公 존대하여 일컫는 말)께서 만약 우리들을 위하여 이 성을 지킨다면 우리들도 마땅히 사수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정암이 드디어 무사 4백여 명과 성안 사람을 합하여 약 수천 명을 얻어서 주야로 성을 수리하여 방어할 계책을 세웠다. 그 일이 대충 완성되자, 적이 군사를 이끌고 왔다. 성 안의 사람들이 이정암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이 죽을 힘을 다하는 것은 영공을 위함이요, 영공께서 버리고 가시지 않는 것은 우리들을 위해서 입니다. 이제 적이 이미 가까이 왔으니, 영공의 마음이 만일 털끝만치라도 굳지 못하다면 성 안의 수천의 생명을 다 죽여 보내는 것입니다.”
하니, 이정암이 대답하기를,
“너희들은 아직도 나를 믿지 못하느냐?”
하였다. 마침내 사람을 시켜 초가집 하나를 성 안의 가장 높은 곳에 세우게 하고 사면에 섶을 쌓게 한 다음 영을 내리기를,
“성을 지키지 못하면 너희들은 빨리 여기에다 불을 지르라. 내 마땅히 이곳에서 죽으리라.”
하니, 백성들이 모두 말하기를,
“영공께서 이와 같으시면 우리들도 마땅히 죽겠습니다.”
하였다. 적이 군사를 나누어 성 밑으로 다가와서 죽음을 무릅쓰고 올려다 보며 공격하였다. 성 위에서는 화살과 돌을 비 퍼붓듯 쏘아댔다. 늙은이는 돌을 들어다 던지고, 부인들은 끓는 물을 길어다 부었다. 적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 오기도 하고 혹은 목판을 쓰고, 혹은 시체를 목에 걸고 성에 닿도록 흙을 쌓아 개미처럼 기어서 올라왔다. 성 안에서는 묶은 불다발을 던지니, 연기가 자욱하여 적은 올라오지 못하였다. 적은 또 성 밖에다 3층 집을 지어 그 위에서 내려다 보며 탄환을 쏘아댔다. 성 안에서는 또 판자집을 세우고서 사면으로 마주 일어나서 대항하였다. 적은 밤낮으로 번을 나누어 교대로 침입하면서 온갖 계책으로 공격하였지만 성 안에서는 그때 그때에 따라 대응하였다. 크게 싸우기 5일 만에 적은 포위를 풀고 갔다. 성 안의 사람이 말하기를,
“적은 군사를 나누어 번갈아 싸웠으므로 휴식할 시간이 있었으나 우리 군대는 밤낮으로 고전하면서 한 잠도 자지 못하여 기력이 다하였다. 적어도 하루 밤낮만 늦었더라면 어찌 그들을 막아냈겠는가. 영공에게 감동되지 않았더라면 우리들은 이미 총알을 맞아 귀신이 되었을 것이다.”
하였다. 이때부터 적은 배천[白川]에 의거하였는데, 하루 길 밖에 안 되어도 다시 연안(延安) 지경을 침범하지 못한 것은 꺼리는 바가 있어서였다.
강화를 경유하여 연안으로 건너가, 서쪽으로는 임금의 행재소에 닿고 남쪽으로는 호남과 영남에 통하게 되었으니, 모두 연안이 함락되지 않은 덕분이었다. 조정에서는 특별히 이정암을 가선(嘉善)에 승진시켰다. 세자가 교서를 내려, 초토사라 칭하고 얼마 있다가 순찰사(巡察使)라 칭했다.


[주D-001]달자(㺚子) : 수달의 새끼. 여기서는 중국 서북 지방의 종족인 달단(㺚狚)을 말함.
[주D-002]구경 대신회의(九卿大臣會議) : 아홉 대신의 회의. 명(明) 나라에서는 6부(部)의 상서(尙書)와 도찰원 도어사(都察院都御史), 통정사사(痛政司使), 대리시경(大理寺卿)을 구경(九卿)이라 하였음.
[주D-003]번복(藩服) : 주대(周代)의 토지 행정 구획의 제도인 구복(九服)의 하나. 곧 왕성(王城)에서 5천 리 떨어진 곳의 사방 5백 리의 땅. 중국에서 중원 밖의 제후를 일컬음.
[주D-004]손빈(孫臏) : 전국(戰國) 때 제(齊)의 군사(軍師).
[주D-005]가까운 …… 같습니다 : 위(魏) 나라가 한(韓) 나라를 치자 한 나라에서 제 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손빈은 바로 위 나라 서울인 대량(大梁)으로 달려가서 치니, 위의 대장 방연(龐涓)이 한 나라 공격을 그만 두고 자기 서울로 돌아가, 제 나라가 한 나라를 구원하게 되었음.
[주D-006]독항도(督亢圖) : 전국(戰國) 때 연(燕) 나라 독항(督亢)의 지도. 연태자(燕太子) 단(丹)이 형가(荊軻)를 시켜 독항의 지도를 진왕(秦王)에게 바치면서 그 틈을 타서 진왕을 죽이게 하였으나, 결과는 실패하였음.

기재사초 하(寄齋史草下)
임진일록 4(壬辰日錄四) 선조 25년, 만력 20년 9월에 시작하여 12월까지 씀 대체로 4개월 간의 기록.



9월

밀양 부사 박진(朴晉)은 왜란 초기에 전공(戰功)이 있어, 마침내 승직하여 좌병사(左兵使)가 되었다. 그는 군사를 이끌고 영천(永川)에 나가 공격하다가 적에게 습격을 받아, 겨우 죽음을 면했다.
○ 그 뒤에 신녕(新寧) 사람 권응수(權應銖)가 병정 천여 명을 모집하여 병정마다 한 묶음의 섶을 가지고 밤을 이용하여 영천을 공격하였다. 병정들이 바람을 따라 불을 놓으니, 적이 크게 궁지에 몰려, 불길을 무릅쓰고 포위를 뚫고 나가려고 하는 것을 아군이 어지러이 쏘아대니, 적이 나갈 수 없었다. 수천의 적이 다 불에 타 죽고 남은 자도 혹 벼랑에서 떨어져 물에 빠져 죽으니, 그 수효를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었다. 시체썩는 냄새가 길을 덮어 사람들이 가까이 가지 못했다. 이 일로 권응수를 절충장군 조방장(助防將)으로 발탁했다.
○ 지휘(指揮) 황응양(黃應暘)이 와서 말하기를,
“나는 비로 석 노야(石老爺 중국의 병부 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을 높인 말)가 보낸 사람이오. 직접 적의 진영으로 들어가 적의 형세를 살펴야 하니 반드시 한 분의 대신과 동행해야겠소.”
하였다. 상이 친히 용만관(龍灣館)에서 만나 보니, 황응양이 말하기를,
“귀국은 비록 작으나 평소 부강하다 일러 왔는데, 하루 아침에 파천(播遷)하여 여기에 온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우리 조정에서 어떤 사람은 구원해야 한다 하고, 어떤 사람은 구원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데, 귀국의 형세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석 노야가 저에게 말하기를, ‘네가 곧장 친히 적의 진영에 가서 염탐해 보면 조선의 형세도 알 것이다.’ 하였는데, 내가 온 것은 실은 이것 때문입니다.”
하니, 상이 통곡하며 이르기를,
“연전에 일본이 사람을 보내 함께 상국을 침범하자고 하므로 대의를 들어서 거절하였고, 그 뒤 또 와서 우리에게 길을 빌려주면 요동으로 들어가겠다고 하므로 또 그것을 거절하였소. 그리고는 곧 전후의 왜적 형세를 갖추어 천조에 주달하였소. 이제 왜적이 우리 민생을 도살하고 우리 종묘를 불태우니, 원한이 골수에 사무쳐 결코 의리상 한 하늘 아래서 같이 살 수 없소. 그런데도 어찌 차마 원수를 잊고 원한을 풀고 그놈들과 함께 상국을 침범하는 계책을 세우겠소. 소방(小邦)의 군신이 도망하여 여기에 온 것은 다만 그간의 곡절을 분명히 알려 평소 사대(事大)의 정성을 밝히고자 하였을 뿐이오. 이 미미한 정성을 아직 사뢰지도 못하고서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을 듣게 되니, 마땅히 압록강에 몸을 던져 죽어서 이 마음을 나타내겠소.”
하고, 상하가 다 목놓아 통곡하였다. 황 지휘는 상의 손을 잡고 가슴을 어루만지며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제 말씀하신 것을 들으니, 이것은 바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성실한 말씀입니다. 천조에서 만일 구원하지 아니한다면 충의(忠義)로운 동한(東漢)의 나라를 원통하게도 기회를 잃게 됨을 면치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꼭 적의 진영에 가 보지 않더라도 조선의 사정은 이미 잘 알았습니다.”
하고, 그날로 돌아갔다. 그 뒤에 우리 사신이 병부로 찾아가니, 병부 관리가 말하기를,
“황응양이 당신 나라에서 돌아온 뒤로 날마다 병부에 와서 석 노야를 만나 뵙고서, 석 노야가 나갈 적에는 멍에채를 붙잡고 통곡하며, 극력 구원해야 하는 정상을 말하여, 석 노야도 눈물을 흘렸소. 출병하자는 의론은 비록 석 노야가 처음부터 주장하였다 하더라도 또한 황 지휘의 힘이 적지 않습니다.”
하였다.
○ 조정에서 말하기를,
“이광이 4월에 기병하여 공주에 이르러 대가가 서울을 나갔다는 말을 듣고, 이유 없이 군사를 파하여 가버리고, 얼마 안 되어 용인(龍仁)에서 군사를 파하고 또 전주(全州)를 버리고 자신을 온전히 하려는 계책으로 삼으려 하였습니다. 이것은 크게 신하의 의리를 잃은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를 잡아다 죄주라 명하였다.
○ 윤두수가 입대(入對)하여 아뢰기를,
“광주 목사 권율(權慄)은 기골(氣骨)과 도량이 있어, 참으로 장수감이옵니다. 전라 감사로는 이 사람이 적격이옵니다.”
하니, 마침내 권율로서 순찰사를 삼았다.
○ 전 판서 김응남(金應南)으로 정주(定州) 수성장(守城將)을 삼고, 겸하여 배가 왕래하는 길을 관리하게 하였다. 처음에 김응남이 어머니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상소하여 전장에 나가 복수하겠다고 하였는데, 나중에 비로소 어머니가 생존한 것을 알았다. 조정에서는 드디어 정주를 중도(中道)의 거진(巨鎭)이라 하여 김응남에게 성과 기계를 수선하고 겸하여 관서(關西)의 뱃길을 살피게 하였다. 대체로 천조의 출병이 아직도 기약이 없으니 적의 형세가 만일 급박하면 바다로 항해하여 호남으로 향할 계책이었다.
○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이조 좌랑 허성(許筬)은 처음 소모(召募)의 명을 받았으나, 한 명의 군사도 모집하지 못하고 한 가지 일도 한 적이 없으면서 이제 와서 거만하게 복명(復命)하니, 어찌 신하로서 명을 받아 직책을 다했다 하겠나이까. 직을 파하여 그 죄를 응징하시기를 청하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 세자가 이천(伊川)에 있으면서, 강원 감사 유영길(柳永吉)이 적을 피해 영동에 가 있어서 영접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마침내 강신(姜紳)을 기복(起復)하여 그와 대체하고 명을 조정에 청하니, 조정에서도 이를 따랐다. 처음 조정에서는 사대부의 처자가 산골짜기로 피난하여 굶어 죽은 자가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강원도가 가장 심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진휼(賑恤)하여 목숨을 잃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유시를 내렸다. 이에 유영길이 불가하다고 고집하여 말하기를,
“사람마다 만족하게 해 주자면 한이 없소. 관가의 곡식을 가지고 사사로이 은혜를 베푸는 것은 나로서는 하지 못하겠소.”
하니, 이성중이 대답하기를,
“급암(汲黯)은 조령(詔令)을 고치면서까지 창고를 열었는데, 유영길은 전지(傳旨)를 위배하여 곡식을 나누어 주는 것을 막으니, 저 급암은 진실로 무슨 마음이며, 이 유영길은 진실로 무슨 마음인가.”
하였다. 경상 우병사 조대곤(曺大坤)이 왜란 초에, 늙고 겁이 많아 먼저 도망갔다. 함안 군수(咸安郡守) 유업인(柳業仁)은 전공이 있어 승진되어 병사(兵使)가 되었다. 그는 얼마 안 있어 진주가 포위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구하러 가다가 적을 길에서 만나 싸우다 패하여 죽었다. 이 때에 많은 적이 적이 진주를 포위하니, 목사 이경(李璥)은 병으로 죽고, 판관 김시민(金時敏)과 곤양 군수(昆陽郡守) 이원악(李元岳) 등은 밤낮으로 고전하였다. 그들은 군대를 나누어 여섯 진영으로 만들어 번갈아 나가면서 주야를 쉬지 않았다. 성안에서는 총포와 시석(矢石)으로 갖은 수단을 다하여 7일 동안을 막으며 지켰다. 적은 사상자가 많자 마침내 도망쳤다. 조정에서는 김시민을 승임시켜 병사 겸 진주목사로 삼았는데, 오래지 않아 병으로 죽었다. 처음 김면(金沔)이 의병을 일으킬 적에 먼저 집 하인 7백여 명을 이끌고 창의하니, 원근 사람이 다투어 호응하였다. 김면은 성주(星州)ㆍ초계(草溪)ㆍ합천(陜川)의 사이를 왕래하면서 적을 무수히 베니, 백성들이 의지하여 편안히 살았다. 마침내 김면을 발탁하여 병사로 삼았다.
곽재우(郭再祐)는 의령(宜寧) 사람으로 승지 곽규(郭﨣)의 아들이다. 일찍이 글을 업으로 하였는데, 적이 의령 근처로 온다는 말을 듣고 마을 사람들을 모아 그들을 회유하기를,
“적이 이미 육박해 왔으니, 우리의 부모 처자가 적에게 붙잡히게 될 것이오. 우리 마을에서 젊은 나이로 싸울 만한 자가 수백 명이 됩니다. 만일 마음을 같이하여 정진(鼎津)을 근거지로 삼아 지키면 마을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인데, 어찌 속수무책으로 죽음을 기다리겠소.”
하니, 여러 사람이 호응하였다. 드디어 군대를 나룻가 언덕 위에다 매복케 하였다. 또 호각 부는 자를 많이 구해서 붉은 옷을 입혀서 산 꼭대기로 올라가게 하였다. 그리고는 이들을 사면에 벌여 두고, 적이 이르면 사면에서 일제히 호각 소리를 내고 언덕 뒤의 복병은 또 마구 쏘기로 했다. 적은 이것을 보고 놀라 흩어졌다. 드디어 적의 목 백여 급을 베었고, 이 때문에 적은 감히 다시 가까이 오지 못했다. 조정에서는 드디어 곽재우를 절충장군 조방장으로 발탁하였다. 이 때에 8도에서 의병이 함께 일어났는데 모두 관군의 절제를 받지 아니하였고, 그 행동을 마음대로 하여 관가의 창고를 공공연히 부수고 곡식을 꺼냈다. 전쟁에 이기면 큰 상을 받고 전쟁에 패하더라도 견책이 거의 없자, 관군으로 죄있는 자는 대부분 그 의병 속으로 들어갔다. 김면이 혼자 말하기를,
“우리는 의로써 일을 일으켰으니, 관군의 절제를 받아야 마땅하다. 약탈하지 말고 오직 의로 돌아갈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의병의 의의가 어디 있겠는가.”
하였다. 그가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곽재우는 본래 유식한 사람이 아니니, 그가 행한 일은 깊이 책망할 것이 못된다. 정인홍(鄭仁弘)은 현자(賢者)라 일컬어 왔는데도 이와 같은 행동을 하니,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하였다.
처음에 감사 김수(金睟)는 처사가 조급하고 각박하여 인심을 잃었다. 변란이 일어나자 제대로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전라도 경계로 피하여 갔으므로 지방 사람들의 나무람을 많이 받았다. 곽재우가 이미 뜻을 얻은 뒤에 법도를 따르지 아니함이 많아서, 김수는 그것을 바로잡고자 하였다. 곽재우는 대노하여 드디어 격문을 돌려 그의 죄를 불충 불효라고 나열하여 죽이려 하자, 김면이 극력 이것을 말렸다. 조정에서 드디어 김성일(金誠一)을 감사로 삼고, 김수를 소환하였다. 곽재우는 또 상소하여 김수를 목베도록 청하였다. 상이 이것을 크게 의심하여 비밀히 비변사에 묻기를,
“이 사람이 한 도의 주인을 마음대로 죽이고자 하니, 역적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를 제거하지 아니하면 후회가 있을까 두렵다.”
하니, 윤두수가 아뢰기를,
“그의 행동를 보니, 일개 미친 아이에 불과합니다. 군사를 거느리고 적을 무찔러 마을을 잘 보전하고 동서로 달려가 구원하여 험난을 피하지 아니 한다고 스스로 의사(義士)라 자처합니다. 오늘날 상소함에 있어서도 그는 역시 의기의 격동이라는 것만 생각하고 스스로 큰 죄에 빠진 줄을 알지 못하였지만 전쟁이 어지러운 때에 어찌 사람마다 다 예법으로써 책할 수 있겠나이까.”
하였다. 상이 드디어 답하지 않았다.
○ 애당초 대가가 평양을 출발하지 않았을 적에 함경 감사 유영립(柳永立)이 일처리를 잘못한다 하여 윤탁연(尹卓然)으로 바꾸었는데, 윤탁연이 적에게 핍박되어 삼수(三水) 별해보(別害堡) 산중으로 들어갔다. 남북도의 반란민이 크게 일어나서, 강원도로부터 경흥에 이르기까지 5리마다 표목 하나씩을 세워 글을 써 놓기를,
“이덕형은 왕이 되고, 김성일은 대장이 되었다.”
하였다. 이 때문에 인심이 흉흉하여 모든 백성들이 말하기를,
“항복하면 반드시 죽지 않는다.”
하였다. 그리하여 북도 병사(北道兵使) 한극함(韓克緘), 회령 부사(會寧府使) 이영(李瑛), 온성 부사(穩城府使) 이수(李銖), 경성 판관(鏡城判官) 이홍업(李弘業) 등을 포박하여 적에게 항복하였다. 병조 좌랑 서성(徐渻)은 잡혔다가 적에게 뇌물을 주고 도망하였고, 회령 판관 이염(李琰)은 변을 듣고는 스스로 문루(門樓)에 목매었는데, 그 매달린 줄을 끊은 자가 있어서 마침내 성에서 줄을 타고 도망하였다. 그 나머지 사람은 죽음을 면한 자가 없었다.
종성 부사(鍾城府使) 정현룡(鄭見龍)이 표(表)를 써서 적을 맞이하여 항복하고자 하면서 심지어, ‘나를 사랑하면 임금이고 나를 학대하면 원수다. 누구를 부린들 신하가 아니며,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겠는가.’라는 문구까지 있었다. 판관 임순(林恂)과 함께 그 글을 내던지고 도망가려고 했다.
반란민 국경인(鞠景仁)이 북병사라 자칭하며 군사를 영솔하고 적을 인도하여 호지(胡地)로 들어갔다. 그러나 삼일계(三日界)를 넘어서 여러 호인(胡人)에게 유인되어 크게 패하고 돌아왔다. 적군이 돌아와 길주(吉州)에 의거하였다. 이에 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는 산골로 도망가, 6ㆍ7명의 수령과 협의하여 기병하고자 하였지만, 어느 사람은 호응하고 어느 사람은 호응하지 아니하여 관망하기로 하였다. 이 때 마침 조정에서 한 방문(榜文)을 보내왔는데, 8도의 의병과 관군이 곳곳에서 적을 치고, 천병(天兵) 10만이 조만간 평양에 도착할 것인데, 반은 설한령(薛罕嶺)을 넘었다는 말이 있어, 백성들이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정문부 등은 드디어 명천(明川)과 길주(吉州)의 지경에서 군사를 일으키니, 군사가 천여 명에 달했다. 부대를 편성하여 매우 엄하게 단속하였다. 반란민도 와서 따르는 자가 많았으므로 정문부는 이들을 후하게 대우하자, 사람들이 모두 기꺼이 따랐다. 단천 군수(端川郡守) 강찬(姜璨)이 기병하여 성세(聲勢)를 돋우어 서로 응원하였다. 정문부는 정현룡을 불러 대장으로 삼고 군사를 전진시켜 적을 무찔러 연달아 적을 베었다. 조정에서는 정문부를 절충장군으로 삼고 평사를 겸하게 하였다. 강찬을 판교(判校)로 진급시키고, 갑산 부사(甲山府使) 성윤문(成允文)으로 북병사를 삼고, 이성 현감(利城縣監) 최호(崔胡)로 남병사를 삼았다.
○ 동지사 민준(閔濬), 서장관 이상신(李尙信) 등이 조정을 하직하니, 잣[海松子]과 화연(畫硯)ㆍ붓ㆍ먹 두세 종류로 방물(方物)에 충당했다.


10월

병조 정랑 이홍로(李弘老)가 함경도에서 오니, 대간이 논하기를,
“이홍로는 한 가지도 제대로 된 행실이 없는 사람으로 이산해(李山海)에게서 발신(發身)하여 그 앞잡이가 되고, 김공량(金公諒)과 교제하여 그의 종이 되어서 행한 음사(陰邪)하고 귀역(鬼蜮)같은 작태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가 변란 후에는 거취를 제 마음대로 하여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었으니, 그 직을 삭탈하기 청하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김응남을 불러 부제학으로 삼고, 임국로(任國老)로 대신하게 하였다.
○ 대간이 또 논하기를,
“병조 정랑 임몽정(任蒙正)은 당초부터 시종신으로 대가를 따라 도성을 문을 나갔습니다. 그러나 임몽정은 혼자 먼저 도망갔으니, 직을 파하여 신하의 의리가 없는 죄를 징계하시기를 청하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 유격(遊擊) 심유경(沈惟敬)이 우리 나라에 왔다. 심유경은 절강(浙江) 사람인데, 조선이 왜적의 침략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일개 포의(布衣)로 병부 상서 석성(石星)에게 청하여, 친히 적의 진영으로 들어가 계책을 써서 지원하면서 혹은 군대를 쓰고 혹은 얽어매되 자신이 맡겠다고 자원하니 상서는 이것을 허락하였던 것이다. 이 때에 그가 용만관에 도착하니, 임금이 친히 가서 그를 만났다. 심유경이 말하기를,
“제가 적의 진영으로 직접 들어가 극력 황상(皇上)의 천위(天威)를 말해서 그들을 제 소굴로 돌아가게 하겠습니다. 만약 추장이 어리석게 고집하여 물러가지 아니하면 대군을 일으켜 그들을 토벌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천위는 비록 혁혁할지라도 저 왜적들은 하나의 유별난 독종인데, 어찌 근거없는 말만을 듣고 손을 거두고 물러가겠소.”
하니, 심유경은 말하기를,
“천조(天朝)의 사체(事體)는 심상의 것과는 다릅니다. 다만 보십시오. 제가 마땅히 계교로써 그들의 손발을 옭아매어 마침내는 위엄이 두려워 돌아가게 할 것이오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였다. 다음 날 새벽에 출발하여 3일 밤을 순안(順安)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는 먼저 그의 가정(家丁 제집에서 일부리는 남자. 상일군) 심가왕(沈嘉旺) 등 두 사람을 적의 진영으로 곧장 들어가세 하여 소서행장(小西行長)을 효유하여, 명일에 서로 만나자고 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그는 가정 6명만을 대동하고 곧장 평양성으로 나갔다. 적의 괴수 소서행장은 칠성문(七星門) 밖에다 장막을 치고 음식을 마련하여 놓고 심유경이 오는 것을 보자 길 왼쪽으로 나와 영접하면서 경의를 극진하게 하였다. 그리고 갈 때에도 올 때와 같이 하였다. 단 그들이 말을 주고 받을 적에 우리 나라 사람이 따라가지 않았기 때문에 들을 길이 없었다. 그들은 사시(巳時)부터 미시(未時)까지 대화를 나누고서야 돌아왔다. 적의 괴수는 부산원(釜山院)에서 10리 못 미치는 곳에다 나무 하나를 세워서 경계로 삼았다. 심유경이 나와 김명원에게 말하기를,
“적이 내 분부를 받아 표목을 세워 경계를 긋고 50일 동안 서로 노략질을 않기로 하였다. 귀국에서도 이같이 함이 옳겠소. 군사를 거두고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시오.”
하였다. 이 때에 적의 군세는 성대하여 우리 나라 수천 리에 걸쳐서 한 사람도 적과 싸우는 자가 없었는데, 심유경이 단기(單騎)로 적진에 들어갔고 또 그들이 흉악한 마음을 감춘 채 머리 숙이고 고분고분 명령을 듣게 하였다. 그리하여 연도(沿道)의 선비와 백성들이 곳곳에서 말머리를 모아, 천 사람 백 사람씩 떼를 지어 모두 말하기를,
“오늘에야 우리는 살았다. 노야(老爺)는 끝까지 은혜를 베풀기 바란다.”
하였다. 촌 백성들이 물결처럼 몰려와 어떻게 생긴 남자가 이와 같은 일을 해냈는가 하여 앞을 다투어 바라 보았다. 심유경이 의주에 다투어 돌아오니, 상이 이르기를,
“8도의 여러 장수들이 마침 군사를 합하여 결전하고자 합니다. 오늘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시일을 끌다가 한겨울이 닥치면 군사의 마음이 놀라 흩어져 수습하기 어렵게 될까 염려되오.”
하니, 심유경이 웃으며 말하기를,
“제가 적을 옭아 놓은 것은 귀국이 이 적을 토멸할 수 없음을 염려해서 입니다. 만일 스스로 강토를 편안하게 할 수 있었다면 제가 어찌하여 꼭 적의 진중을 출입했겠으며, 천조에서도 어찌하여 동쪽을 돌아보는 근심이 있었겠습니까.”
하고, 그 날로 강을 건너 갔다.
○ 조정에서는 연이어 윤근수ㆍ한응인을 요동으로 보내 구원병을 청하고, 이어서 의주가 고립하여 위험에 처한 실정을 말하였다. 이에 순찰사는 바로 참장(參將) 낙상지(駱尙志) 더러 군사를 이끌고 의주에 들어가 지키도록 하였다. 낙상지는 용력이 뛰어나서 사람들이 낙 천근장(駱千斤將)이라고 불렀다. 일찍이 우리 나라 사람 12명이 대장의 쇠화살 1좌(座)를 운반하려다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마침내 그는 그것을 왼쪽 겨드랑에 끼고서 한 다발의 섶나무를 드는 듯이 하여 5리쯤 되는 곳에 운반해다 놓고도 조금도 피로해 하지 않았다.
○ 어떤 자가 상소하기를,
“전하께서 이미 인심을 많이 잃으시어 오늘의 화가 있게 된 것인데, 어찌하여 세자에게 보위를 전하지 아니하옵나이까. 온 나라 사람들에게 진작 조금이라도 기쁨과 위안이 있게 하였다면 왜적을 평정하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였다. 또 남이순(南以順)이라는 사람이 상소하여, 전적으로 상을 공격하고 이어 이산해 등의 목을 베라고 청했다. 그가 또 말하기를,
“세자는 한 나라의 저부(儲副 다음 대를 이을 임금)이온데, 어찌하여 갈라져 다른 곳에 계십니까. 빨리 한 곳에 같이 머무시기를 청합니다.”
하였는데, 비록 보위를 전하라고 분명히 말하지는 않았으나, 그 뜻이 은연중 나타났다. 이 모두에 대해 상이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어느 날 여러 신하에게 유시하기를,
“나는 종묘와 사직에 죄를 얻어 파천하여 여기까지 왔고, 전쟁을 겪은 나머지 또 정신을 잃어 온갖 병이 몸에 얽히었으니, 경 등은 나를 애처롭고 가련하게 여겨 빨리 나 같은 죄인을 물러나게 하고 세자를 보필하기 바라오.”
하니, 여러 신하가 아뢰기를,
“오늘의 일은 모두가 신자의 죄이옵니다. 변란이 나서 이미 전하 자신이 감당하게 되었으니 더욱 만회할 것을 도모하시어 조종의 신령을 위로해야 하고, 한갓 구구하게 겸손의 뜻을 가지시와 그대로 물러나서 스스로 옛날 난을 만나 왕위를 전하던 임금에 비하하여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소관(小官)도 상소하여 3일 만에야 비로소 윤허를 받았다.


11월

전라도 관찰사 권율이 군사를 일으키고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여 진영을 수원에 두었다. 이 때에 김천일 등은 오랫동안 강화에 있으면서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고, 우성전(禹性傳) 등은 더욱 감감 무소식이었다. 상이 우성전 등을 불러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건너 곧장 평안도로 가서 김명원과 군사를 합치라고 하였으나, 우성전은 병으로 가지 못했다. 이에 상이 노하여 이르기를,
“우성전은 군사를 끼고 자기를 호위하여 관망하면서 전장에 나가지 아니하고, 김천일 등은 편안히 앉아서 헛된 수작만 하고 있으니 국가에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하니, 윤두수가 아뢰기를,
“김천일은 비록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으나 그가 여러 도를 제창하여 의병을 일으키고 마침내 8도의 인심을 흡족하게 크게 돌려 놓았사오며, 지금은 다만 군대의 세력이 고단(孤單)해서 적절한 기회를 타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우성전은 그가 비록 오지 아니했더라도 장수를 대신 보낼 수 있었사온데, 계교가 여기에 미치지 못하였으니, 죄가 없다 할 수는 없사오나 본래부터 중병이 있었음은 사람들이 모두 아는 일입니다. 어찌 관망만 할 리가 있겠나이까.”
하였다.
이 때 권율은 홀로 고군(孤軍)으로 적의 길을 곧바로 찌르고 대적의 사이에다 진영을 편히 잡으니, 상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위로하였다.
○ 경기 감사 심대(沈岱)는 명을 받자 곧장 삭녕군(朔寧郡)에 이르러 군병을 소집하고, 또 사람을 서울에 보내어 화복의 이치를 들어 효유하게 했다. 서울 백성들이 오래도록 대가가 머무른 곳을 알지 못하다가 이 말을 듣고서야 기뻐하기도 하고 울기도 하였다. 그리고 일시에 모두 군기(軍器)를 가져다가 심대에게 바쳤는데, 연일 뒤를 이은 것이 천백으로 헤아릴 정도였다. 심대가 이끈 몇 천의 병사가 기계를 수습하여 양주 목사 고언백(高彦伯)과 약속하고 서울을 수복할 계책을 세웠다. 적이 이것을 엿보고는 드디어 군사를 일으켜 길을 나누어서 습격하였다. 삭녕 군수 장지성(張志誠)이 군대를 이끌고 길에 매복하였는데, 심대는 이것을 믿고서 대비하지 않은 채 상하가 모두 날이 환히 밝도록 잠을 잤다. 장지성이 적을 보고 도망하니, 적이 드디어 군영을 포위하고는 불을 질렀다. 심대는 일어나지 않고 있다가 적에게 살해를 당했다.
○ 윤두수가 아뢰기를,
“옛날 임금의 치도는 어진 이를 높이고 친한 이를 친히 여기는 데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오늘날 파천의 즈음에 있어 이런 도를 버린다면 무엇으로 치도를 삼겠습니까. 성혼(成渾)은 도덕과 학문이 일대의 표본으로 지금 조정에 나왔으나, 대접하고 존경하는 일이 없사오니, 청컨대 자헌(資憲)으로 품계를 올려 사람들이 분발하고 흠모하게 하소서. 원천군 휘(原川君徽)와 한음 도정 현(漢陰都正俔)도 모두 종실로서 박학다문(博學多聞)하여 효도하고 우애하오니, 각각 한 자급(資級)을 올리시어 어진 이를 높이고 친한 이를 친히 여기는 뜻을 보이시면 진실로 이익이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것을 모두 윤허하였다.
처음에 상이 임진강을 건널 때에 성혼이 대가를 수종하리라 생각했었는데, 마침 성혼이 대가가 출발할 줄을 미리 알지 못하여 호종하지 못했다. 이충원(李忠元)이 개성에서 성혼을 불러 보시라고 청하자, 상이 따르지 아니하니, 대체로 그가 호종하지 않은 것을 불만히 여겼기 때문이다. 윤두수는 어진 이를 우대함에 있어 어찌 한 자급을 아끼겠는가라고 생각하고, 드디어 아뢰어 승임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진이를 높이는 도리가 다만 경의와 예도를 다하는 데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더구나 임금을 몰아 세워 억지로 마음에 없는 일을 강요해서는 안 되거늘 조정의 작록과 포상을 가지고 사람에게 주기를 마치 자기 물건같이 하니, 사람들이 그의 무식함을 기롱하였다. 성혼이 시사(時事)를 논하는 10조(條)의 차자를 올리기를,
“임금의 덕을 진수(進修)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으시고 언로(言路)를 널리 열어 놓는 것을 급선무로 삼으십시오.”
하였다. 또 아뢰기를,
“나라를 그르치는 자에게 엄하게 벌주시고, 아첨하는 자들이 날뛰는 길을 막으소서.”
하니, 상이 비답하기를,
“시국을 근심하여 차자로 진술하니, 진실로 가상하다.”
하였다. 우대하는 비답이 아니었다. 이 때 구성(具宬)이 개성에서부터 연이어 부름을 받게 되어 출입이 무상하였는데, 의주에 이르러서도 오히려 그치지 아니하였다. 성혼이 이것을 듣고 말하기를,
“국가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본래 옆길과 구부러진 길로 가서 음사(陰私)가 성대히 행해지는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런데도 이제 또 이런 일이 있으니, 이러고서야 어떻게 앞사람을 책할 것인가.”
하고는, 드디어 차자를 올려 나라를 그르치고 아첨하는 일을 열거하였던 것이다.
○ 이홍로가 상소하기를,
“오늘날 조정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조정이 서울을 떠난 그 한 가지 일을 가지고 죄를 이산해에게 돌려 나라를 그르친 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약 오늘날 조정에 있는 신하들에게 왜란 초기의 일을 처리케 하였다면 그들이 과연 까맣게 밀려오는 적의 형세를 막고 서울을 떠나는 거둥이 있지 않게 하였겠습니까. 만일 그 형세를 막지 못했을 경우에 우리 임금에게 예측할 수 없는 위험한 곳에 계셔도 관계없다는 말입니까. 심지어 임금을 막다른 곳에 모셔 두고서 느긋하게 좌담이나 하면서 옛날의 원한을 보복하는 것을 일삼으며, 염치없는 무리들은 분주하게 전하의 좌우에 출입하면서 세력을 키우기만 힘쓰고 국가가 조석에 멸망할 형세에 있다는 것을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는다면 전후로 나라를 그르친 적이 되는 데 있어 어느 쪽이 더 심하옵니까.”
하였고,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 실덕(失德)하신 일이 없사옵고 조종께서 경사를 쌓으셨는데도 이처럼 변란이 발생한 것은 운수(運數)가 그렇게 만든 데 불과하옵니다.”
하였고, 또 아뢰기를,
“신은 국사가 날로 위태로워지는 것을 보고 임금 사랑하는 마음을 참지 못하여 전하를 모시고 함께 천명(天命)의 거취를 기다리고자 하옵니다. 그러나 조정에 있는 사람들이 신이 행궁(行宮) 아래 가까이 있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오니, 신의 몸이 너무도 위태로워서 물러가서 죽는 날을 기다릴 수 밖에 없사옵니다. 떠남에 임하니 눈물이 흘러 무슨 말을 올려야 하올지 알지 못하겠나이다.”
하였다. 이 때 윤근수ㆍ구사맹ㆍ홍여순ㆍ유영립ㆍ이홍로 등이 어두운 밤에 서로 모였는데 반드시 자기네들을 엿보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라 하여, 김응남ㆍ이덕형마저 내쫓으려 하였다. 성혼ㆍ윤두수ㆍ이해수(李海壽)가 말하기를,
“부득이한 경우에는 그 중 심한 자만을 제거해야 하겠지만, 김응남ㆍ이덕형은 죄를 줄 만한 명목이 아직 없소.”
하였다. 이홍로는 죄를 면하지 못할 줄을 알고 마침내 이순(李諄)의 무리와 의논하여 목숨을 걸고 상소하였다. 그래서 이성중이 공청(公廳)에 있다가 소리 높여 말하기를,
“군신과 상하가 멀리 떨어진 변방에 모이게 된 것은 누구의 소치오? 그런데도 도리어 우리들을 가리켜 나라를 망친 역적이라 하오? 상소 가운데의 말은 아첨하는 작태가 아님이 없소. 우리는 평일에 임금의 녹을 먹고 높은 자리에 있었어도 여러 음사(陰邪)한 사람을 쓸어 버리자고 한 마디도 건의하지 못하고서 필경 이런 욕을 받게 되니, 모두 우리의 허물일 뿐 누구를 탓하리오.”
하였다.
○ 상이 성혼을 불러서 이르기를,
“경이 왔다는 말을 듣고도 마침 병이 있어 곧장 만날 수 없었음을 내 실로 부끄럽게 여기오.”
하니, 성혼이 아뢰기를,
“제가 4월에 길가는 사람이, 대가가 오늘을 출발하실 것이다라고 전하는 말을 잘못 듣고, 길 가에 나가서 기다렸습니다. 이 같이 3일을 하고서 신은 대가가 반드시 출발하지 않으실 것으로 생각하고 사처로 돌아왔습니다. 그믐 날에는 밤부터 큰 비가 와서 시냇물이 불어 넘실거렸습니다. 이 때 어찌 대가가 이미 임진강을 건너 개성으로 향할 것을 알았겠나이까. 신이 이미 길가에서 하직을 여쭈지 못하옵고, 또 감히 명령 없이 함부로 나올 수도 없어 모진 생명이 산골짜기로 굴러 다니다가 세자의 영지(令旨 왕세자의 명령서)를 받들어 성천(成川)를 받들어 성천(成川)에 이르게 되었으니, 도의상 와 뵈옵지 않을 수 없었나이다. 상감마마 아래에서 얼굴을 들고 다시 덕음(德音)을 접하게 되오니, 신하의 분수나 의리로 헤아리오면 참으로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라를 잘못 지켜서 오늘날과 같은 곤경을 받게 했으니, 경을 보기가 부끄럽소.”
하니, 성혼이 아뢰기를,
“누군들 허물이 없겠습니까마는 허물을 짓고도 능히 고치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더욱 심지(心志)를 격려하시어 힘써 덕업(德業)을 닦으시고 폐습을 경장(更張)하시어 다시 유신(惟新)을 도모하시면 인애(仁愛)로운 하늘이 마땅히 복을 누리게 할 것이옵니다. 그리고 난을 평정하고 예전으로 돌아오게 하는 일은 내게 있는 도리를 다하는 것 뿐입니다. 참으로 군신 상하가 마음과 힘을 합하여 밤낮으로 부지런히 하여 안이 이미 닦아지면 바깥은 물리칠 수 있사옵니다.”
하였다. 승지 이국(李)이 아뢰기를,
“성혼이 말한 군신 상하가 마음과 힘을 합하라는 말은 매우 좋습니다. 성혼이 여기에 있으므로 신이 함부로 말을 못하옵니다만, 근일에 조신(朝臣) 사이에 자못 배척하고 알력하는 버릇이 있고 실로 화합하는 기색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 여기에 있는 자는 다만 한쪽 편의 사람뿐이니, 다시 어떠한 별다른 색당(色黨)이 있어 알력하는 버릇이 있는 지는 모르겠소.”
하니, 이국이 아뢰기를,
“비록 한두 사람이 그 사이에 끼인 적은 없지 아니하오나 모두 한직에 있는 벼슬아치들이온데,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오히려 이 습성이 남아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신이 말하였던 것이옵니다.”
하였다. 성혼이 아뢰기를,
“이국의 말은 신도 이 의논에 참여하여 그 사실을 아는 것으로 의심하여 신의 진언을 지적하여 증거로 삼는 것이옵니다. 알력하는 일에 대해 신은 무슨 일을 가리키는지 모르겠고, 또한 신이 모르는 사실이옵니다. 다만 한두 사람의 형편없는 무리가 분과 원망을 품고 시기를 타서 들고 일어나 저해(沮害)하고 요란한 행위를 도모하고자 한다 하오니, 부득이 별도로 아뢰겠습니다.”
하니, 이국이 아뢰기를,
“이 정도로 하고 논의를 그치면 좋겠사오나, 신은 조정의 기색으로 보아 반드시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였다. 이국은 평소에 성혼을 가볍게 여겼고, 또 그가 윤근수 등과 논의하였는가 의심하여 그의 말을 인용하여 증명하였으며, 말은 비록 이와 같으나 반드시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다. 대체로 이국은 김응남과 지극한 교분이 있어, 항상 김응남까지 내쫓고자 하는 것을 분히 여겨 마침내 임금 앞에서 극력 이것을 말하였던 것이다. 실지로 성혼의 뜻을 알지 못한 것이다.


12월

상이 여러 신하를 불러 입대(入對)케 하니, 사간 이유징(李幼澄)이 나와 아뢰기를,
“근래 1ㆍ2년 전부터 궁궐이 엄하지 않고, 조정의 신하들이 편안하지 않으며, 뇌물이 성행하고 배척하고 모함함이 풍조를 이루었습니다. 왕자로 말하오면 백성의 토지와 노복을 빼앗고, 궁궐로 말하오면 벼슬과 옥사(獄事)를 팔며, 이익을 꾀하고 요행을 노려 인심을 동요시키니, 원망하는 말이 길에 가득 차 있습니다. 소인들이 정사를 어지럽혀 선비들에게 화를 입히니, 어질고 불초함을 논할 것 없이 오직 의론이 자기와 같으냐 다르냐만 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초방(椒房)의 천한 자라도 그 누이에게 세력을 의탁하여 조정의 시비까지도 참여하여 들을 수 있게 되었으니, 상하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붕괴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큰 도적이 연이어 들어오자 배반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북도의 변란 같은 것은 전에 들어보지 못하였던 것이옵니다. 전하께서 변을 만나신 이래 한 마디도 스스로 허물을 인책함이 없이 다만 깊은 방에 앉아 오직 안일함을 일삼으시고 여러 신하를 드물게 접견하심이 평일보다 더 심하옵니다. 이런 형세라면 신은 나라의 형세가 결국 망하지 않을까 염려되옵니다.”
하니, 상이 머리를 숙이고 대답하지 않았다. 여러 신하들이 임금의 얼굴을 우러러 보니 푸르락 붉으락 하여서, 모두 송구하여 한 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서 물러나왔다.
○ 유영립이 함경도에서 오니, 상이 불러 이르기를,
“경도 잡혔었다 하니, 사실이오?”
하니, 유영립이 아뢰기를,
“신이 산속에 피란하고 있었는데 토민(土民)이 적을 인도하여 와서 마침내 잡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떻게 벗어 나왔는가?”
하니, 유영립이 아뢰기를,
“적이 비록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오나 그 마음을 위불(違拂)하지 아니하면 그도 또한 사람인데, 어찌 꼭 죽이겠나이까.”
하였다. 한림 이춘영(李春英)이 물러나와 유영립에게 말하기를,
“임금을 모신 자리에서 위불(違拂)이란 두 글자를 사용함은 좋지 못한 말이 아니오?”
하였다. 대간에서도 실절(失節)한 것을 들어 따졌다.
○ 동지(同知) 유영길이 장계하기를,
“정철이 남중(南中 경기도 이남의 땅)에 있을 때 주색에 빠져 국사를 돌보지 아니하였고, 윤두수가 한 일은 끝내 그 결실이 없어서 주상의 형세를 날로 외롭게 하고, 국사는 날로 급하게 되어 가므로 신은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불러서 그에게 묻기를,
“경의 이 장계에는 무슨 의견이 있어서인가?”
하니, 유영길이 민망하여 아무 말 없이 얼마 있다가 대답하기를,
“단지 소문을 들었을 뿐이옵고, 별다른 의견은 없습니다.”
하고, 물러나왔다. 정철은 가는 곳마다 술에 빠져서 세월을 보내고 맡은 바의 임무는 두서를 이루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크게 인망을 잃었었다. 유영길의 말은 비록 기회를 타서 공격하려는 계책에서 나왔으나, 그의 행실과 일 처리가 실제로 이 말을 나오게 한 것이다. 윤두수는 조정에서 나가 10리쯤 떨어져 있는 곳에 있었는데, 임금이 자주 그를 불렀다. 윤두수가 아뢰기를,
“신은 본래 보잘 것 없고 또 재주나 식견도 없으면서 외람되이 임금의 말고삐를 잡는 반열에 있으면서 비록 밤낮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지상공론(紙上空論)에 불과할 따름이었습니다. 결실이 없다는 말은 바로 오늘의 일에 들어 맞았습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말 고삐를 잡고 따른다 하였으니, 신의 죄가 많습니다. 이것을 신이 알고 있사온데, 임금께서 어찌 알지 못하겠나이까.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빨리 견책을 내려 주시옵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국사의 존망이 경의 몸에 달려 있는데 어찌 남의 말로 인해 혐의할 것이야 있겠소. 빨리 나와 일을 보오.”
하였다.
○ 정곤수가 북경에서 치계하기를,
“신이 북경에 들어온 것은 마침 영하(寧夏)의 도적을 평정한 날이었습니다. 석 상서(石尙書)가 담당하여 힘을 다해서 천관(千官)을 모아 다시 의론한 끝에 병부 시랑 송응창(宋應昌)을 경략(經略)으로 삼고, 도독(都督) 이여송(李如松)을 제독(提督)으로 삼아 대병을 조발하여, 날을 가려 나가 치게 되었습니다. 이 제독(李提督)은 영하에서 돌아온 지 며칠이 되지 않았는데 또 동정(東征)의 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남북의 군사가 지금 연이어 떠나고 있습니다. 경략은 병부 원외(兵部員外) 유황상(劉黃裳), 주사(主事) 원황(袁黃)으로서 찬획(贊畫 임시 보좌관 격)을 삼기를 청하였습니다. 제독은 먼저 출발하고, 경략은 다음에 떠나 12월에 평양에 도착한다 하옵니다.”
하였다. 이 때 심유경(沈惟敬)과 약속한 50일의 기한이 장차 다하니, 행장(行長)이 매양 사람을 시켜 유격이 돌아오는 기한을 심가왕(沈嘉旺) 등에게 물어 왔으나, 확실한 대답을 못하겠다고 회시(回示)했다. 이원익은 중국의 대군이 오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거짓으로 심유겸의 패문(牌文)을 조작하여 사람을 시켜 순안(順安)에 가지고 가니, 심가왕도 거짓임을 알지 못하고 급하게 말 위에서 행장에게 보였다. 행장이 기뻐서 말하기를,
“만일 이 패(牌)가 없었더라면 대사를 반드시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당초에는 4ㆍ5일 안에 한 번 무찌를 것을 결의하였었다.”
하였다.
양사(兩司)가 합동으로 논하기를,
“홍여순ㆍ송언신ㆍ이홍로가 이산해ㆍ김공량과 교분을 맺어 그들의 심복이 되어 조정을 어지럽히고 사림에게 화를 미치게 하며, 인심을 이반시키고 나라를 망하게 만든 것은 이 사람들이 아첨하고 악행을 함께 하였기 때문입니다. 멀리 귀양 보내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보건대, 이 사람들은 일찍이 정철(鄭澈)의 간사함을 탄핵했을 뿐이오.”
하였다. 이 일을 논한 지 사흘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윤허하였다. 다음 날 상이 이르기를,
“근일에 정신이 너무 감퇴되어 말을 함에 착오가 많소. 어제 양사에 내린 비답은 이 사람들이 정철을 간신이라 하였을 뿐이다[此人等頗以鄭澈爲奸而已也]라고 하여야 했소.”
하였다.
○ 상이 여러 신하를 불러 입대하게 하니, 정언 황극중(黃克中)이 나와 아뢰기를,
“오늘의 일은 진실로 종전에 궁궐이 엄하지 않아 아첨이 성행하고, 인심을 잃어서 가는 곳마다 원망과 배반이 있고, 상하가 서로 의심하여 정의가 통하지 않고, 겉만 기쁘게 하는 것으로 풍조를 이루어 언로(言路)가 오래 막히게 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이런 위급한 때를 당하여 모든 것을 혁신하는[改絃易轍] 거조가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하겠사오니, 이러고서야 어찌 감히 회복을 바라겠나이까.”
하니, 최황(崔滉)이 손을 휘저어 말리고 말하기를,
“이 때는 적을 토벌하는 일이 급한데, 이 같은 말은 아무 관계가 없소.”
하였다. 구성(具宬)이 아뢰기를,
“인심이 원망하여 배반하고, 상하가 서로 의심하게 된다면 국사는 가망이 없습니다. 왜적을 토벌하는 계책으로는 이것이 첫 번째인데도 최황은 관계없다고 말하니, 이것은 면전에서 군상(君上)을 업신여기는 말입니다.”
하니, 최황이 크게 노하여 다시 아뢰고자 하자, 상이 말리고 이르기를,
“서로 따지지 마오.”
하였다. 드디어 파해 나왔다.
22일 유격 전세정(錢世禎)이 남병(南兵) 3천을 거느리고 강을 건너오니, 군마와 병기가 매우 정연하였다. 다음 날 군사를 남문 밖에서 사열하였는데 앉고 일어나고 치고 찌르며 종횡과 기정(奇正)으로 천변만화(千變萬化)하니, 사람마다 이것을 보고 비로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겼다.
24일 흠차제독 계요 보정 산동 등처 방해어왜군무 좌군도독부 도독 동지(欽差提督薊遼保定山東等處防海禦倭軍務佐軍都督府都督同知) 이여송(李如松)과 중협 총병관(中協摠兵官) 양원(楊元)과 좌협 총병관(左協摠兵官) 이여백(李如栢)과 우협 총병관(右協摠兵官) 장세작(張世爵) 등이 대군을 이끌고 강을 건너 왔다. 상이 친히 의주관(義州館) 길에서 맞이하였다. 제독은 홍금포(紅錦袍)를 입고, 홍명교(紅明轎)를 타고 왔는데, 상을 용만관에서 회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과인이 나라를 잘못 지킨 죄로 황상께 심려를 끼쳐 드리고 여러 대인이 멀리까지 정벌에 종사하게 하였으니, 비록 심복신장(心腹腎腸)을 쪼갠다 하더라도 어찌 천지와 같은 한없는 은혜를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제독이 웃으며 말하기를,
“황상의 천위(天威)는 국군(國君)의 큰 복으로, 왜적은 스스로 궤멸하게 될 것이니, 무슨 감사할 것까지 있겠나이까.”
하였다. 제독은 키가 크고 예절에 익숙하며, 풍채가 뛰어나고 언어가 유창하였다. 상에게는 경의를 다하기를 지극히 공손하게 하였다.
○ 상이 이 날에 세 총병을 두루 만나보고 돌아왔다. 장관(將官)으로 따라온 자는 총병 이평호(李平胡), 부총병 조승훈(祖承訓)ㆍ고책(高策)ㆍ이방춘(李芳春), 참장 장기공(張奇功)ㆍ방시춘(方時春)ㆍ방시휘(方時輝)ㆍ이영(李寧)ㆍ곽몽징(郭夢徵)ㆍ사대수(査大受), 유격 곡수(谷燧)ㆍ갈봉(葛逢)ㆍ하왕문(夏王問)ㆍ오유충(吳惟忠)ㆍ척금(戚金)ㆍ한종공(韓宗功)ㆍ이여매(李如梅)ㆍ양소선(楊紹先)ㆍ누대수(樓大受)ㆍ이문성(李文成) 등 40여 원(員)이었다. 상이 모두 만나보고자 하니, 도승지 유근이 아뢰기를,
“허다한 장관을 어찌 모두 만나볼 수 있으시겠습니까. 다만 대장만 만나보아도 충분합니다.”
하였다. 윤두수는 여러 번 그들을 만나보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상은 기력이 몹시 피로할 것 같아서 이 말을 따르지 않았는데, 여러 장수들은 모두 노하였고 제독도 의아하게 여겼다. 임금이 늦게서야 그 말을 듣고 그들을 만나보고자 하였으나, 이튿날 새벽에 제독이 떠나서 만나보지 못하고 말았다.
○ 강을 건너는 날 흰 무지개가 해를 꿰었고, 해에는 오른쪽 고리가 있었다. 제독이 여러 장관을 불러 이것을 보게 하고는 매우 기뻐하였다.
26일 제독의 대군이 성 밖으로 지나가면서 호령이 엄숙하여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감히 다치게 하지 않았다.
30일 정주에 이르러 사대수는 초병(哨兵) 1천 명을 거느리고 먼저 떠났다.


[주D-001]초방(椒房) : 후비(后妃)의 궁전을 지칭함. 여기서는 선조의 후궁(後宮) 숙원 김씨(淑媛金氏)를 지적한 것임.
[주D-002]말 고삐를 잡고 따른다 : 임금을 위하여 천역(賤役)에 종사하는 것. 따라다니는 자의 겸사.
기재사초 하(寄齋史草下)
임진잡사(壬辰雜事)

시민이 도성의 안팎 산에 모여 술과 풍악을 갖추어 저물도록 노래하고 춤추다 돌아가는 것이 봄과 가을에 성행하였다. 경인ㆍ신묘 연간에 서울에서 떠도는 말에, 오래지 않아서 세상이 바뀔 터이니, 살아 있을 동안 실컷 먹고 마시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면서 서로 다투어 놀이를 일삼아, 어떤 사람은 파산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다. 이것을 식자들은 상서롭지 못하게 여겼다.
○ 임진년(1592, 선조 25) 4월 13일에 푸른 무지개가 궁중의 우물에서 일어나 상에게로 다가왔다. 상이 이것을 두세 번 피하였지만 곧 따라오므로 문을 닫으니 비로소 멎었다. 이날 왜적이 부산을 함락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 매우 두려워하여 피난할 계책을 세웠다. 이상은 서현기(徐玄紀)가 말한 것이다. 서(徐)의 이름은 성(渻)
임진년 4월에 이일(李鎰)이 충주에 이르러, 적의 형세가 대단하다고 큰 소리로 말하였다. 상은 이 보고를 보고 매우 두려워했다. 하루는 새가 궁중에 날아와 처마 위에서 밤낮을 그치지 않고 울었는데 그 소리가 매우 처절해서 마치 사람을 향해 슬피 부르짖으며 빨리 떠나라고 재촉하는 듯 하였다. 원근에서 이 소리를 듣고 마음이 크게 무너져 내렸다. 상도 괴상하게 여기고 드디어 서도(西道)로 피난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 새의 모양은 뻐꾸기 같은데 작고, 꼬리도 짧았다. 사람들이 일찍이 보지 못한 것으로 어떤 사람은 금강산에 이 새가 있다 하였다. 이 새가 그믐날이 되어서야 어디론지 날아 갔으니, 이 역시 괴이쩍은 일이다.
○ 이자정(李子政)이 말하기를,
“임진년에 한가로이 성문 밖에 살았기로, 일찍이 상이 서울을 떠나려는 뜻이 있음을 듣지 못하였다. 사람이 혹 이런 말을 하면, 곧 그럴 이치가 없다고 대답했다. 하루는 새벽에 남녀가 물밀 듯 쏟아져 나와 길을 메우더니, 이윽고 임금의 행차가 북도로 향했다고 들었다. 이자정은 당황하여 말을 타고 양주(楊州)로 따라 가 길가는 사람에게 두루 물었더니, 모른다고 하기에 돌아왔다.”
하였다. 나는 병조의 낭관으로 밤낮 마영(馬營)에 있었는데, 충주가 무너지게 되자 사람과 말이 궁 안에 뒤섞여 들어오고 상하가 부르짖으며 통곡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나는 드디어 여러 동료와 같이 외병조(外兵曹)에 나가 있으면서 길 떠날 준비를 하는데, 어떤 아전이 와서 전하기를,
“상은 선인문(宣人門)으로 벌써 나가셨다.”
하였다. 우리들이 허둥지둥 대궐에 들어갔더니, 거짓말이었다. 나는 대궐 바로 가까이 있으면서도 오히려 잘못된 전달을 받았는데, 이자정이 따라간 것이 어찌 괴이하랴. 기자헌(奇自獻)의 말에는,
“임금의 뒤를 쫓아 안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전달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 평양으로 돌아왔다.”
하니, 근사치도 않는 말이다. 이(李)의 이름은 정립(廷立)이고, 기(奇)의 이름은 자헌(自獻)이다.
서현기(徐玄紀)는 성질이 굳세어 사람 배척하기를 잘하였다. 임진년 4월에 조정에는 임금의 서행(西行)을 그만 두기를 청하는 상소가 많았다. 어느 날 나는 여러 동료에게 말하기를,
“우리들도 본 병조에 있는데 우리만 서울 떠나는 것이 그르다고 말하지 않는단 말인가?”
하니, 유보(裕甫)가 기뻐하며 대답하기를,
“내가 상소문의 뜻을 일어 줄 터이니, 그대는 이것을 쓰시오.”
하였다. 그 글에,
“산천의 형승으로 말해도 한양보다 나은 데가 없는데, 전하께서는 이곳을 버리고 어디로 가시려 하옵니까? 성과 호(壕)가 험준함도 한양보다 나은데가 없는데, 전하께서는 이곳을 버리고 어디로 가시려 하옵니까? 인구가 많고 축적이 많음을 전하께서는 홀로 생각지 않으십니까? 종묘가 여기에 있고 사직이 여기에 있으며, 또 왕릉이 여기에 있사온데, 전하께서는 차마 떠나실 수 있사옵니까? 서행(西行)하시려는 뜻은 이미 내정해 놓고 경향에다 방을 붙여 설유하기는, ‘마땅히 사수(死守)한다.’ 일렀으니, 전하께서 비록 백성을 속이실지라도 조종의 신령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조종도 속일 수 없는데, 하물며 하늘을 속이겠나이까?”
하였다. 글귀는 많지 않지만 뜻이 잘 반영되어 읽어갈수록 간절하였으니, 한때의 모든 사람들이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상소문이 완성되자, 유보가 말하기를,
“대의가 관계되는 바라서 어쩔 수 없이 이같이 하였으나, 한편으로 말하면 군부(君父)를 포위된 성에 계시게 하는 것도 신자(臣子)로서 차마 할 일이 못된다.”
하니, 서현기가 눈을 부릅뜨고 말하기를,
“이 같다면 맹자도 또한 불충(不忠)이오.”
하였다. 이 날 저녁에 유보는 사사로이 차비문(差備門) 밖으로 나아가 속히 난을 피하기를 청하고, 그믐날 또 이같이 하였다. 이에 서현기가 분개하며 말하기를,
“이홍로는 하나의 외인(外人)으로 감히 이와 같이 하니, 우리들도 차비문 밖에서 극력 간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유보는 이홍로의 자(字)이다. 이자상(李子常)이 말하기를,
“대가를 따라 임진강에 이르러 어떤 여아를 만났는데 나이 열 너댓 살쯤 되어 보였다. 이 여아는 비 속에 길을 잃고 혼자 가다가 강을 건너가지 못하여 눈물을 흘리며 서 있었는데, 얼굴이 범상하지 않았다. 곧 배를 타라 하여 건너 주니, 그 여아는 정면으로 고맙다고 사례를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가지 않는 것이 말하지 못할 사연이 있는 듯하였다. 나는 그 여아가 동행할 뜻이 있어 그러는 줄을 알았지만 데리고 가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한이 된다.”
하였다. 자상은 이항복(李恒福)이다.
○ 왜변이 난 처음에 상이 임진강에 도착하니, 민빈(閔嬪)이 가마에 다쳐 날이 어두워서야 도착했다. 배가 서쪽 언덕에 닿으니, 군인이 사방으로 흩어져가고, 하늘에서 또 비가 와 갈 곳을 몰랐다. 상이 이항복에게 이르기를,
“급히 병조 낭관과 같이 사람을 불러들이는 것이 좋겠다.”
하니, 이항복이 말을 타고 다니면서 외쳤다. 내가 사형(士瑩)과 함께 어떤 배에 가서 불렀더니, 10여 인이 나오므로 데리고 오니, 상이 대단히 기뻐하였다. 이어 어좌(御座)를 보니 오직 유서애(柳西厓)만이 들어와 임금 앞에 엎드려 있었고, 좌우에는 신성(信城)ㆍ정원(定遠) 두 왕자가 엎어져서 잠을 자고 있었다. 상은 여전히 채찍을 들고 앉아 있었는데, 당시 궁색한 행색 중에 이 날이 제일 심하였다. 사형은 이영(李覮)이고, 서애(西厓)는 유성룡이다.
○ 임진강에 당도한 그날 저녁에 상하가 질서없이 강을 건너느라 인마를 많이 잃었다. 나는 사형과 약속하기를,
“그대가 말을 얻으면 나를 불러 같이 타고, 내가 말을 얻어도 그대와 함께 타겠소.”
하고, 진흙 속을 맨발로 가다가, 어떤 때는 무릎까지 빠져서 넘어지기도 했다. 어둡기가 칠흑 같아 지척을 분별할 수 없었는데, 말을 타고 오는 사람이 있기에 누군가 물었더니, 바로 유보(裕甫 이홍로)였다. 유보가 말하기를,
“내가 먼저 가서 밥을 지어 놓고 기다릴 테니, 그대들 두 사람은 잘 살펴 오시오.”
하였다. 조금 후에 병랑(兵郞)을 부르는 자가 있었다. 내가 사형에게 말하기를,
“내가 매우 걸음이 빠르니, 그대는 여기서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오.”
하니, 알았다고 하였다. 나는 상의 앞으로 쫓아가 횃불 하나를 얻어 들고 어마(御馬)를 수행하여 오니, 밤이 이미 깊어서, 또 사형을 만나지 못했다. 10리를 채 못가서 사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급히 대답하기를,
“말을 얻어 그대를 기다려도 오래도록 오지 않아서 이미 가버렸으리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약속을 어기게 될까봐 감히 가지도 못하였소.”
하였다. 그제서야 둘이 함께 말을 타고 갔다. 유보는 찾지 못하였는데, 다음날 유보가 말하기를,
“그대들은 왜 오지 않았는가?”
하였다.
정경진(鄭景眞)이 동파(東坡)에 이르러, 부제학에서 뛰어올라 예조 판서를 제수받고 나서 말하기를,
“나이가 젊은데 갑자기 승급되어 여기에 이르니, 나는 죽을 것입니다.”
하고, 소를 만들어 면직을 빌고자 하였는데, 홍군서(洪君瑞)가 말리며 말하기를,
“나라는 깨어지고 집은 망하고, 지존은 몽진(蒙塵) 길을 떠났으니, 우리들의 생사가 조석에 달렸소. 어찌 유독 갑자기 승진된 것 때문에 죽는다 하오.”
하니, 드디어 면직을 청하지 않았다. 정(鄭)의 이름은 창연(昌衍)이고, 홍(洪)의 이름은 인상(麟祥)인데, 뒤에 이상(履祥)으로 고쳤다.
대가가 개성부(開城府)에 머물렀다. 어느 날 대소의 종신(從臣)들이 함께 한 문 안에 있었는데, 구원유(具元裕)가 문득 내소문(內小門)으로부터 몸을 구부리고 나왔다. 그리고 급히 부르며 말하기를,
“상께서 삼사(三司)는 입시하라 하시오.”
하니, 어떤 사람은 명을 듣지 못했다 하여 머뭇거리며 감히 들어가지 않았다. 구원유는 드디어 대사간 김숙진(金叔珍)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말하기를,
“내가 친히 전교를 받들었는데, 어찌 감히 들어가지 않는가?”
하니, 마침내 모두 일어났다. 이공보(李公輔)도 헌납으로서 홍사신(洪士信)의 곁에 있다가 또한 일어나려 하니, 홍사신이 옷을 잡아 않히며 말하기를,
“누가 명을 전달했다고 자네들이 바로 입시하려 하는가?”
하였다. 대개 그들이 아계(鵝溪)를 논죄하기 위한 일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입시하자, 여러 사람이 아계옹(鵝溪翁)이 적과 내통하여 나라를 그르친 죄를 공격하였다. 또 구원유가 소리 높여 말하기를,
“황붕(黃鵬)은 산해의 조카인데, 그대가 어찌 감히 여기에 함께 참여했는가?”
하였는데, 난잡하여 질서가 없고 말들이 시끄러워 입시하는 때 같지 않았다. 구원유의 이런 행동은 내통했다는 말을 빌어서 아계에게 죄를 입히자는 것이었지만 친히 전교를 받았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구의 이름은 성(宬), 김의 이름은 찬(瓚), 이의 이름은 정신(廷臣), 홍의 이름은 여순(汝諄). 아계는 이산해이다.
○ 심 공망(沈公望)은 언사가 자못 강개하였다. 상이 송경(松京)에 도착하여 호남ㆍ영남 지방에서 징병하고자 하였으나 보낼 사람이 없었다. 심공망이 자청하여 아뢰기를,
“이런 시기에는 죽음도 두렵지 않사오니, 신이 가겠습니다.”
하니, 상이 위로하여 보냈다. 물러 나와서 오음(梧陰)에게 말하기를,
“공은 지금 재상입니다. 공변된 마음을 펴고 사사로운 정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그대의 말이 옳소.”
하였다. 심의 이름은 대(岱), 오음(梧陰)은 윤두수이다.
○ 정경진이 사당의 신주를 묻자고 의논하던 날, 신백준(申伯俊)은 상의 어찰(御札)을 받아 서울로 향하여 남아 있는 백성을 위유하려 하였다. 그가 마산(馬山)에 이르러서, 적이 벌써 도성을 점령했다는 잘못된 소문을 듣고는 겁이 나서 곧장 돌아왔다. 상이 개성을 출발하니, 행색이 황급하여 두서가 없었다. 보산(寶山)에 이르니, 종실 해풍(海豐)이 와서 오음에게 말하기를,
“어찌 종묘 없는 나라가 있겠는가. 공은 알지 못하는가?”
하니, 오음이 깜짝 놀라면서 말하기를,
“아무 날이 내가 재상이 된 날인데, 내가 재상이 되어 나라가 망했소.”
하고, 탄식하며 울었다. 신(申)의 이름은 잡(磼)이다.
거가(車駕)가 지나는 곳마다 아랫 사람들이 저지르는 행폐가 평상시보다 갑절이나 되었는데, 환관의 종들이 백관의 종들에 비하여 더욱 심했다. 금암(金岩)에 도착하던 날에는 떡과 반찬을 빼앗으려고 어소(御所)에까지 함부로 들어왔다. 선전관이나 여러 무관도 모두 금하지 못하였고, 상에게 드리는 물건도 빼앗기게 되었다. 신계 현령(新溪縣令) 정윤지(丁胤祉)는 거짓으로 땅에 쓰러졌다가 눈을 뜨고 똑바로 보면서 마치 기절한 사람같이 하였다. 그리고는 하인에게 돌아다니며 소리쳐, ‘아무 현령이 살해를 당했소.’라고 말하게 하였다. 상이 크게 놀라 급히 그를 움켜잡은 자를 체포하여 베이게 하니, 드디어 어찬(御饌)을 뺏긴 책임을 모면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사람이란 꾀가 있어야 한다. 오늘의 난동은 이 사람이 아니었으면 막을 수 없었으니 말이다.”
하였다.
상이 개성에서 유기성(兪杞城)ㆍ이오성(李鰲城)에게 신성(信城)ㆍ정원(定遠) 두 왕자를 모시고 먼저 평양으로 가도록 명하였다. 또 글을 내려 정인성(鄭寅城)을 불러서 왕자를 보호케 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내 평소에 경의 충절(忠節)이 대사를 부탁할 만한 줄 알고 있소.”
하였다. 글이 강계에 도착하자, 정인성이 곧 길을 떠나려 하니, 부사 홍세공(洪世恭)이 허락하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비록 내리신 교서는 있지만 의금부의 공문이 오지 아니하였으니, 가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그러다가 상이 평양에 왔다는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허락하였다. 홍세공을 대단하게 여기는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난리 때에는 일을 마땅히 조심하고 치밀히 하여야 하는데, 이 사람은 강직하여 취할 만하다.”
하였는데, 내가 그 말을 듣고 말하기를,
“하서(下書)는 임금의 말이요, 공문은 작은 일이다. 대가가 송경에 도착하여 일이 갑작스런 것이 많아 군신의 예절도 다하지 못하는 판국인데, 의금부의 공문을 어디로 보내겠는가. 망령된 행위라 한다면 괜찮지만 강직하다 하는 것은 내가 모를 말이다.”
하였다. 유기성(兪杞城)이 정승이 되고 나서 도체찰사를 겸직하였다. 행장을 꾸리고 떠나려고 할 때 내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그 집에 갔더니 목공(木工) 네 사람이 마침 뜰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허공언(許功彦)ㆍ이징원(李澄源)이 종이와 붓을 잡고 좌우에 앉아 있었다. 나는 이상히 여겨 그 까닭을 물으니, 허와 이가 미소를 지으며 말하기를,
“나무 깎는 것은 가마[馬轎]를 만들려는 것이요, 종이와 붓은 격문을 기초하려는 것인데, 기성 또한 격문 내용을 스스로 구상하고 있다.”
하였다. 대체로 세 사람이 각각 기초하여 그 가운데서 하나를 선택하여 쓰자는 것이다. 내가 돌아가서 윤해평(尹海平)에게 말하니, 해원(海原)이 곁에 있다가 웃으며 말하기를,
“그 애는 오활(迀闊)하여 쓸 수가 없다.”
하였다. 허의 이름은 성(宬), 이의 이름은 유징(幼澄), 해평은 윤근수(尹根壽), 해원은 오음이다.
신립(申砬)이 패한 뒤에 거가(車駕)가 그날로 한성(漢城)을 출발하였다. 신립이 패전한 곡절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고, 또 생사도 알지 못한다. 혹은 그가 산으로 들어가 중이 되었다 하고, 혹은 남중(南中)으로 내려가 다시 거사를 도모한다 하고, 혹은 방금 해서(海西 황해도)에 이르러서도 죄받을까 두려워서 감히 나오지 못한다고 하였다. 하루는 상이 여러 신하를 불러 함께 계획할 일을 의논하는데, 근심스러운 안색으로 이르기를,
“적의 기세는 과연 당하기 어렵구나.”
하였다. 이원부(李元夫)가 도승지로서 일어나 어전에 엎드려 얼굴을 들고 소리를 높여 아뢰기를,
“상감께서는 근심하지 마시옵소서. 신이 믿을 만한 사람에게 들으니 신립은 과연 죽지 않고 해서에 있다고 합니다. 불러 쓰시면, 왜적은 근심거리가 못됩니다.”
하니, 상은 허망한 말이라 생각하면서 비웃으며 이르기를,
“지금 장수감이 없는데, 도승지 같은 사람이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원부가 또 일어나 절하고 아뢰기를,
“신은 진실로 착착(着着 사투리 말이다)하여 장수가 될 수 없습니다.”
하니, 듣는 사람들이 포복절도하였다. 이의 이름은 충언(忠言)이다.
감사 권징(權徵)이 임진(臨津) 군중에 있으면서 치제하기를,
“마전 군수(麻田郡守) 박치홍(朴致弘)이 처음에는 벼슬을 버리고 관동(關東)으로 피했다고 하나, 실은 잘못 전해진 말을 듣고 그렇게 한 것이니, 중한 죄를 줄 필요가 없을 듯하옵니다. 또 이제 그 아버지를 위하여 호조 판서 박충간(朴忠侃)의 종사관이 되어 방금 행장을 꾸리고 있으니, 백의종사(白衣從事)의 형률로써 속죄하게 해 주시기 청합니다.”
하며, 많은 말을 반복하였는데 모두 박치홍을 구해 주려는 것이었다. 해원(海原)이 보고서 낯을 찌푸리며 말하기를,
“큰 도적이 경내에 들어 왔고 고군(孤軍)이 처음으로 모였는데, 자신이 경기 감사로 있으면서 할 일이 그리 없어 이런 일에만 급급(汲汲)합니까. 박치홍이 죄를 면하는 것이 과연 경기 감사에게 관계되는 일입니까? 이 분이 허둥지둥하는 것을 보니, 반드시 실성한 것입니다.”
하니, 내가 말하기를,
“권 감사는 침착하여 서두르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으니, 허둥지둥하는 것은 아니다.”
하였다. 해원이 말하기를,
“그대는 권징을 구원하고자 하는가?”
하니, 내가 대답하기를,
“만일 침착하여 서두르지 않은 것이 아니라면 장계가 어찌 이토록 자세하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온 좌중이 모두 웃으며 아주 좋다고 거듭 말하였다.
○ 송강(松江)이 서애에게 말하기를,
“내가 강계에 있을 때에 애들이 서울에서 글을 보내기를, ‘오늘의 의론은 서애가 대단히 준엄하여 기어이 사지(死地)에 몰아 넣으려 한다 합니다.’ 하였기에, 나는 아니라고 대답하였소. 뒤미처 또 글을 보내기를, ‘지난 번에 알린 말은 잘못 전했습니다. 구해준 분은 서애입니다.’ 하므로, 내 또 아니라고 대답하였소. 이 말이 공의 뜻에는 어떠하시오.”
하니, 서애는 옳다고 하였다. 나는 이 말을 인성(寅城)에게서 들었다. 송강은 곧 인성의 호이다.
기성(箕城)의 비변사 뒤에 방 한 개가 있었는데, 여러 재상이 그곳에 가서 쉬었다. 하루는 홍사신(洪士信)이 그 방에 먼저 오고, 인성이 뒤에 와서 말을 나누는 사이에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둘 다 불편한 기색이 있었다. 조금 후에 인성이 배를 움켜쥐고,
“소합원(蘇合元)이 있는가?”
하니, 좌우가 모두 없다고 하였다. 사신만이 곧 말하기를,
“소인이 마침 가지고 있습니다.”
하고, 드리니, 인성도 아무렇지도 않게 이것을 받았다.
○ 간관(諫官)이 아계 이산해의 죄를 논의하여 법으로 처형하려고 하는데, 서애도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자상(子常)이 나에게 말하기를,
“유(柳)를 만일 함께 논의한다면 국사에 있어서 불미한 처사이니, 그 사이에 또한 어찌 차등이 없을 수 있겠는가. 빨리 아는 사람에게 통지하시오.”
하였다. 나는 대궐 문 밖에서 마침 윤 가회(尹可晦)를 만나, 그를 함께 논의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는 중에, 해평이 오기에 또한 이것을 힘주어 이해시켜 드디어 중지시켰다. 아계옹(鵝溪翁)과 서애를 논의하자는 말은 원유(元裕)가 주장한 것이다. 윤의 이름은 방(昉)이다. 임진강 싸움에서 패한 뒤에 여러 신하가 모두 말하기를, 평양은 서울처럼 꼭 지켜야 할 곳은 아니니, 버리고 떠나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오음만이 평양을 지켜야 한다고 역설하다가 그것을 말리지 못할 것을 알았다. 그래서 또 아뢰기를,
“서쪽 의주로 향하다가 상국(上國)에 달려가 호소하는 것이 대의가 됩니다.”
하고, 상ㆍ중ㆍ하의 세 가지 대책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상은 그것을 채택치 아니하고 드디어 여러 사람의 의론을 따랐다.
장차 북쪽을 향해 함흥(咸興)으로 가려 하는데, 심공직(沈公直)이 부제학이 되어 함흥의 설을 주장하였다. 이윽고 이일(李鎰)이 대탄(大灘)으로부터 왔다는 말을 듣고 모두 말하기를,
“이일은 용렬한 부류가 아니니, 마땅히 이 사람을 기다려서 거취를 정해야 한다.”
하였다. 이일이 당도하자, 상하가 모두 말하기를,
“이일이 무슨 말을 할까”
하였다. 오음이 말하기를,
“평양을 포위하려 하는데, 공의 뜻은 어떠하오?”
하니, 이일이 말하기를,
“적의 기세는 당해낼 수 없소. 함흥은 북쪽에 용감한 토병(土兵)이 있고, 남쪽에는 험준한 산천이 있으니, 믿고서 견고한 곳이 될 만합니다.”
하였다. 심공직이 이일의 뒤에 앉았다가 갑자기 그의 등을 치며 말하기를,
“참으로 장수다운 말이오.”
하니, 징원(澄源)이 분연히 성내어 말하기를,
“모두 용렬한 사람이다.”
하였다. 오음 또한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심의 이름은 충겸(忠謙)이다.
○ 인성은 익살이 섞인 농담을 잘 하였는데, 난리 중에도 여전하였다. 늘 서애ㆍ공언ㆍ징원 부자와 나 그 외 여러 사람이 연광정(練光亭)에 모여 멀리 적의 불이 소나무 사이에 깜박거리는 것을 보았는데 총소리도 끊이질 않았다. 서애가 울며 말하기를,
“우리들의 생사가 조석에 달렸으니, 이 모임이 영결(永訣)이 아닌 지도 모르겠소.”
하니, 인성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소. 결국은 다 함께 죽을 것인데, 어찌 영결이라 하겠소.”
하였다. 서애가 눈물을 닦고 웃으며 말하기를,
신정(新亭)에서 청담(淸談)이 어찌 없을 수 있소.”
하였다.
평양에 홍문관(弘文館)을 설치하고 숙직을 폐하지 아니하였다. 하루는 서애ㆍ공저(公著)ㆍ공직(公直)ㆍ수백(守伯) 형제와 내가 그곳에 모였다. 공저가 말하기를,
“우리는 가마솥 안에 있는 고기라 이를 만하오.”
하니, 내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소. 걸어 다니는 시체요, 달리는 살덩이란 말이 바로 우리를 두고 말한 것이오.”
하였다. 서애가 말하기를,
“그 말은 참 좋은 형용이요.”
하였다. 공저는 이성중(李誠中), 수백은 김신원(金信元)이다.
유지숙(兪止叔)이 평양에 머물며 지키게 되자, 당황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래서 급히 그 아들 대건(大建)을 불러 말하기를,
“내가 앞으로 여기에 머물게 되었으니, 어찌할 것인가?”
하니, 대건이 귀에다 대고 얼마 동안 무슨 말을 속삭였다. 유지속은 상께 청하여 공저(公著)로 부랑(副郞)을 삼고 대동관(大同館)으로 나아가 소매를 빼고 교의(交椅)에 높이 걸터 앉았다. 공저가 하늘을 쳐다보며 말하기를,
“사람이 세상에 나서 이런 난리를 만나고 또 유홍(兪泓)의 부사(副使)가 되었으니, 어찌 치욕이 아닌가.”
하였다. 오음이 나에게 여러 사람의 말을 전하라 하기에 유지숙에게 가서 말하기를,
“이곳에는 이미 감사ㆍ병사가 있고, 또 따로 순찰사가 있으니, 이것으로 족합니다. 호종(扈從)이 너무 적으니, 다시 부사를 둘 필요가 없지 않소.”
하니, 유지숙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나를 죽이겠다는 것인가. 이미 사지(死地)에 빠뜨리고 또 부사마저 빼앗으려고 하니, 이것은 나를 죽이는 것이다.”
하였다. 이를 돌아와 보고하니, 오음이 웃으며 말하기를,
“기성(杞城)이 어찌 노했겠는가. 반드시 대건이 노한 것이리라.”
하였다. 다시 가서 알리니, 유지숙이 그 아들에게 말하기를,
“국사는 자제(子弟)와 논하지 않는 법이나, 너의 뜻은 어떠하냐?”
하였다. 대건이 드디어 교의(交椅) 뒤에서 몸을 숨기고 머리만을 내밀고 허락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이에 유지숙이 곧 말하기를,
“차라리 죽을지언정 따를 수 없소.”
하였다. 다음 날 내가 또 공사(公事)로 찾아 가니, 유지숙이 멀리서 나를 바라보고는 불러 말하기를, 그대는 또 공저 때문에 온 것이 아닌가 하므로, 나는 공사 때문에 왔다고 대답하고, 또 좌상이 공의 임무를 대행하고 있는데, 공이 어째서 여기에 있느냐고 하였다. 유지숙이 기뻐하면서, 해원(海原)도 부사를 두었느냐고 물었다. 내가 아니라고 대답하자, 유지숙이 말하기를,
“해원이 나를 징계하는 건가?”
하였다. 지숙은 곧 기성(杞城)이다.
자상(子常 이항복)이, 임진강의 방위가 결국 적을 막지 못할 것을 알고는 여러 번 조정에 말하여, 중국에 원병을 청하자고 하였는데, 오음이 채택하지 않았다. 하루는 의주 목사 황진(黃璡)이 파발을 보내 아뢰기를,
“관전총병(寬奠摠兵)이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건너와 친히 사정(事情)을 탐지한다 하기에, 왜적이 비록 관서에 다가 왔으나 우리 나라 병력으로도 이것을 대적할 수 있다고 대답했더니, 총병이 웃고 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것을 보고 크게 놀라, 대답을 잘못한 죄인을 잡아다 문초하기 위해 별도로 한 재신을 선택하여 보내려 하였다. 오음은 어쩔 수 없이 유회부(柳晦夫)로써 그 선임에 응하였는데, 유회부의 뜻도 오음과 같아서 청병하려 하지 않았다. 자상이 이 때에 대사헌이 되어 장차 말을 만들어 체차하려 하였다. 마침 유회부가 예조 참판에 승직되니, 자상이 소매에 장계 초본을 가지고 있었으나 꺼내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행하지 아니하면 직도 바뀌게 되니 어렵구나.”
하였다. 유의 이름은 근(根)이다.
○ 오음이 청병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유회부를 보낸 뒤에 국사가 점점 급해지니, 명보(明甫)는 조정에 극력 말하여 급히 천조에 청병하자고 하자, 오음이 마침내 이를 따랐다. 도리어 오음은 처음부터 청병을 주장하던 자와 같이 하였다. 명보는 이덕형(李德馨)이다.
○ 내가 자상(子常)에게 묻기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명보가 관동으로부터 평양으로 따라 가던 날, 마침 어버이 곁에 있으면서 사람들이 길에서 장방창(張邦昌)의 고사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을 듣고서 오히려 빨리 출발하지 않고 엿세 동안 시일을 끌었다.’ 하는데, 나는 명보와 서로 알지는 못하나 이 말이 과연 근사합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명보는 반드시 그 말이 놀랄 만한 것임을 알지 못하고 엿새 동안 시일을 끌었을 것이니, 무엇이 이상하오?”
하였다. 내가 또 어찌 억측으로 사람을 평가하겠느냐고 하자, 대답하기를, 마음에 반분이라도 의심하는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에 안다고 하였다.
명보는 평양으로 뒤쫓아 와서, 인심이 이반되어 일을 할 수 없다고 극력 말하였다. 이어서 그는 인심을 위무(慰撫)할 수 있는 것을 진술하였는데, 끝말은 왕의 양위(讓位)와 그리고 왕의 자책(自責) 등의 일을 지적하는 것 같았으나, 오음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침내 그 말은 내지 못했다.
홍사신은 천성이 호걸스럽고 교만하여, 일찍이 남에게 굽히는 일이 없었다. 대가가 평양을 출발하려 하니, 그는 집으로 가 행장을 꾸려 호위하려 하였다. 그 때 길가의 난민들이 큰 막대로 그의 등을 치며 말하기를,
“금관자(金貫子)ㆍ옥관자(玉貫子)를 단 도적들아! 평시에는 많은 녹봉으로 잘 살고 있다가, 이미 도둑을 막지 못하더니 또 임금에게 우리를 버리고 가게 하느냐.”
하면서, 마구 때렸는데, 말에서 떨어져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그는 다른 이에게 오늘 죽을 뻔 하였다고 말하고는 등을 만지며 아픈 것을 참고 앉았다. 징원이 말하기를,
“이 사람의 마음은 평양 사람에게 이미 죽은 것이네.”
하였다.
○ 평양에 승정원을 설치하고 또 주서방(注書房)을 두었는데, 궁벽하여 일이 없으므로 여러 사관들이 청담이나 농담을 주고 받을 뿐이었다. 하루는 내가 그 방에 가니, 임진초(任晉初)가 슬픈 어조로 격동되어 말하기를,
“연로한 재상들은 부귀를 오래도록 누려서 비록 난리를 만났다 해도 유감이 없겠지만, 그대의 나이 겨우 20이 넘었고, 조정에 벼슬한 지는 1년도 못 되었는데, 어버이와 집을 떠나 우리와 함께 난리에 죽게 되었으니 어찌 원통하지 아니하오.”
하니, 이 말에 백준(伯峻)ㆍ선계(善繼)도 거들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이 말을 하는지 매우 괴이쩍었다. 다음 날 아침에 공저(公著)가 대중 앞에서 소리 높여 말하기를,
“사관으로 나이 어린 두세 무리가 스스로를 생각하기를, 조정에 선 지가 오래지 아니하니, 옛 임금님에게 그다지 큰 의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여 위태로운 발언을 함에 이르렀고, 무사를 유인하여 같이 달아날 계획을 세우려고 하니, 진실로 가슴 아픈 일이다.”
하였다. 어떤 사람은 조공(趙公)이 너무 심하다고 말하였다. 임의 이름은 취정(就正)이고, 백준은 김선여(金善餘), 선계는 조존세(趙存世)이다.
오음이 정승이 된 뒤에 자못 시국을 담당하고 나가니, 최ㆍ유 두 분은 팔장을 끼고 있을 뿐이었다. 어느 날 오음이 상처(喪妻)하여 비변사에 나오지 아니하니, 여러 재상들이 종일토록 머리를 맞대고 있으면서도 한 가지 일도 처리하지 못하였다. 공저가 말하기를,
“오늘에야 비로소 정승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치 병아리 떼가 어미를 잃어버림과 같아서 논의하여도 절충할 곳이 없습니다.”
하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영의정, 우의정은 정승이 아닙니까?”
하니, 공저가 머리를 흔들며 말하기를,
“논의는 할 수 있지만 절충은 해내지 못합니다.”
하였다. 최의 이름은 흥원(興源)이고, 유의 이름은 홍(泓)이다.
김의백(金宜伯)이 어전에서 평안ㆍ함경도에 대한 지리의 원근을 논하였는데 매우 자세하였다. 상이 기재(奇才)라 생각하여 병조의 낭관으로 발탁하고는 북도를 탐지해 오게 하였다. 김의백이 떠날 때 울면서 나에게 말하기를,
“서북의 이해(利害)에 대하여 조정의 의론이 이미 한결같지 않고, 상의 마음 또한 결정한 것이 없으니, 나는 반드시 중도에서 낭패하여 임금과 어버이 둘 다 못 뵙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번 걸음이 영원한 이별인 것 같습니다.”
하였다. 얼마 안 되어 대가가 의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 양덕(陽德)에 도착하니, 사신(士信)이 말하기를,
“주상께서는 벌써 요동으로 건너 가시고 세자는 간 곳을 모르니, 사세가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하니, 김의백이 통곡하고 갔다고 한다. 김의 이름은 의원(義元)이다.
오음이 여러 사람과 인물을 논할 적에 위압함이 있어 감히 떠들지를 못했다. 어느 날 상이 여러 재신(宰臣)에게 일을 의논하게 하자, 좌우 신하들이 각각 소견을 말하고 그것을 옳다고 여겨 꼭 자기의 주장을 실행하고자 하였다. 상도 여러 의론이 한결같지 않음을 들어 난색을 표하였다. 이에 오음이 말하기를,
“옛 사람은 말을 드릴 뿐이옵고 그것이 시행되고 안 되는 것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아니하오면 어떻게 여러 계책을 굽힌다[屈群策]하겠나이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참으로 그렇소.”
하였다. 여러 사람이 드디어 잠잠하였다.
○ 적이 임진강을 건너자 조정에서 생각하기를, 중화(中和)는 평양과 가까우니 수령을 불러들이는 것만 못하다 하고, 바로 군수 김요립(金堯立)을 불렀다. 이 때에 서애는 마침 이 의론에 참여하지 않았다. 김(金)이 와서 뵙자, 서애는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이것도 도주한 것이다.”
하고, 빨리 효수(梟首)하려고 계주(啓奏)하기에 이르렀다. 오음과 여러 재신이 그 곡절을 낱낱이 말하자, 서애가 말하기를,
“수령이 도주를 잘 하는 것은 군률이 엄하지 않기 때문이니, 용서할 수 없소.”
하였다. 여러 사람이 극력 해명했으나 듣지 않더니, 결국은 사형을 감하고 장(杖)을 치기로 결정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사람의 운명은 알 수 없다. 도주하고서 산 자는 무수히 많지만 도주하지 않고 죽을 뻔한 자는 이 사람 뿐이다. 마땅히 도주하는 것이 쌀밥 먹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을 만하다.”
하였다.
이일(李鎰)이 순변사(巡邊使)가 되어 상주(尙州)에 당도하여, 얻은 군사는 1천을 넘지 못하였고, 충주에서 패전한 것도 이일의 죄가 아니었다. 또 해암(蟹岩)에서 승전한 일이 있으므로 조정에서는 특별히 그를 우대하였다. 대탄(大灘)의 군사가 무너지자, 이양원(李陽元) 이하가 혹은 흩어져 도주하고 혹은 북도(北道)로 들어갔는데, 이일만은 수천의 군사를 이끌고 평양으로 향하니, 조정에서 그를 더욱 가상하게 여겼다. 그는 도중에 먼저 사람을 보내어 성을 지키는 방책을 올렸는데, 매우 조리가 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기쁘게 여겼다. 조정에 나오는 날, ‘대가는 함흥으로 피해야 하고 평양은 지킬 수 없다.’고 즉시 말하자, 이명보(李明甫)ㆍ심공직(沈公直)이 뒤편에 있다가 극력 찬성하니, 상하가 실망하였다. 오음이 이일에게 묻기를,
“공은 어째서 평양을 포기하는 것이 성을 지키는 계책이라 말했소.”
하니, 이일이 한참 생각하다가 말하기를,
“종사관이 스스로 한 짓이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오음이 어찌하여 서명하였느냐고 묻자, 이일은 머리를 숙이고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오음이 다른 사람에게 이 사람은 실성했다고 말하였다.
심사진(沈士進)이 나와 함께 비변사에 있을 적에 의론이 시사(時事)에 미쳐서 내가 말하기를,
“이미 어떻게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니, 심사진이 대답하기를,
“근심하지 마오. 중흥(中興)은 멀지 않을 것이오.”
하였다. 내가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심사진이 대답하기를,
“홍연길(洪延吉)의 아들이 어리석고 글자도 모르는데 어느 날 꿈에 글 한 구절을 얻었습니다. 그 글에,
보슬비 오는 날 버들은 푸른 빛을 머금었는데 / 細雨天含柳色靑
샛바람 불어와 말발굽이 가벼웁네 / 東風吹途馬蹄輕
태평해져 명관들이 조정으로 돌아 오는 날 / 太平名官還朝日
승전가를 올리니 기쁜 소리 장안에 가득하구나 / 奏凱歡聲滿洛城
하였습니다. 이것이 신묘년(1591, 선조 24) 겨울의 일입니다. 홍연길의 적소(謫所)로 부쳐 보내며, 오래지 않아서 귀양이 풀릴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에 홍연길이 꾸짖어, 누구에게 속임을 당하여 이런 말을 하느냐 하였으니, 어찌 중흥의 징조가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연길에게 묻기를,
“이 말이 과연 그러했습니까?”
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문리(文理)가 넉넉지 못하여 주개(奏凱)를 내가 석방되어 돌아 가는 징조로 해석한 모양입니다. 천함(天含)이란 또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나는 웃으며 말하기를,
“만일 중흥의 공을 논하게 되면 그대의 아들이 제일이겠습니다.”
하니, 홍연길도 웃었다. 심의 이름은 우승(友勝). 홍의 이름은 종록(宗祿)이다.
유지숙(兪止叔)이 정승이 되니, 도체찰사(都體察使)를 겸했기 때문이다. 유지숙이 하직하고 나간 뒤에 상이 좌우의 신하들에게, 우상이 어떠냐고 말하자, 어떤 이가 기절(氣節)이 있다고 대답했다. 이에 상은, 기절은 어떤지 모르겠거니와 단지 생각하지 않고 말을 한다고 하였다. 그 후에 송강이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신하를 알기는 임금만한 이가 없다. 형용을 잘함이 이 넉 자(불사이언(不思而言))만한 것은 없을 것이다.”
하였다.
유지숙이 비변사에 있을 적에 어떤 사람이 동쪽에서 왔는데 말하기를, 적의 형세가 고단하고 취약하다고 하면 꼭 이 사람은 쓸 만하다 하고, 적의 형세가 성하다고 하면, 꼭 이 사람은 쓸 만한 사람이 못 된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이것을 기롱하여 말하기를,
“공은 사람을 올리고 낮추는 것이 모두 혀끝에서 나오니, 어찌된 일입니까?”
하니, 유지숙이 대답하기를,
“적진의 형태를 자세하게 보아야 외롭고 약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은 쓸 만한 것이요, 단지 적이 횡행하는 것만을 멀리서 바라보고 성하다고 말하는 자는 쓸 만하지 못한 것이오.”
하였다. 듣는 사람들이 웃으며, 정승다운 말씀이라 하였다.
요인(妖人) 이화(李和)가 《논명서(論命書)》를 얻어서 곧잘 사람들의 평생을 점쳤는데 간혹 맞는 것도 있었다. 유지숙이 신묘하게 여겨 꼭 그와 함께 다녔다. 유지숙이 체찰사가 되어 길흉을 물었더니, 이화가 말하기를,
“금년에 반드시 큰 공을 세울 것입니다.”
하였다. 유지숙이 여러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내가 중흥의 제일 공신이 될 것이다 하면서 자못 자부심을 보였다. 뒤에 또 점을 치니, 이화는 본명(本命)은 매우 좋으나 점사(占辭)는 극히 흉하다고 하였다. 이에 유지숙이 멍하니 낙심하여 감히 길을 떠나지 못했다. 이 얘기를 들은 사람들은, 비록 이화의 점사가 극히 길하다 하더라도 왜적이 망하지 아니하면 운이 오지 않을 것이니, 어쩌겠는가고 말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아니꼬와 했다.
서울을 떠나던 날, 상하가 매우 두려워하여 모두, 중도에 반드시 큰 변이 생길 것이라고 말하니, 인심이 서늘해져 조석을 보전하지 못할 것처럼 여기고, 따르던 관리들도 주저하는 기색이 있어, 이미 옷을 바꾸어 입었다. 동파역(東坡驛)에 당도하자 자상(子常 이항복)과 나는 중숙(重叔)의 뒤에 있었는데, 내가 웃으면서 흑각관자(黑角貫子 서인이 사용하는 것)를 가리키니, 중숙이 벌써 자기를 놀린 줄 알았다. 이날 저녁에 다시 금관자로 바꾸었다. 중숙은 김응남(金應南)이다.

[주D-001]신정(新亭) : 중국 강소성(江蘇省)에 있는 정자 이름. 동진(東晉)의 여러 명사들이 피란 와서 매양 휴일이면 이 정자에 모여 놀았다. 그런데 주개(周顗)는 이 곳에서 봄을 맞이하자 조국이 그리워서 눈물을 흘렸다 함.
[주D-002]장방창(張邦昌) : 송(宋)의 동광(東光) 사람. 송 흠종(宋欽宗) 초년에 금인(金人)이 변경(汴京)을 함락하자, 휘종(徽宗)과 흠종을 사로잡아 북으로 가서 초제(楚帝)가 되었음.
기재사초 하(寄齋史草下)
임진잡사(壬辰雜事)

유지숙이 내전(內殿)을 모시고 영변에서부터 박천(博川)에까지 대가를 뒤쫓아 왔다가 세자가 벌써 강계(江界)에 갔다는 말을 듣고 즉시 아뢰기를,
“신은 늙고 몸이 쇠하여 상을 수행할 수 없으므로 세자를 수행하기 바라옵니다.”
하니, 상이 그 말을 들어 주었다. 박천군 안의 5리쯤 되는 곳은 나무가 울창하였는데, 한 가닥 오솔길이 열려 있었다. 임진년 6월 삼경에 대가가 출발하니, 종관 10여 인이 앞에서 길을 인도하였는데, 무사는 겨우 5ㆍ6명에 불과하였다. 자상이 말을 채찍질하면서 나를 불러 말하기를,
“나와 그대는 모두 병관(兵官)이고 또 전위대가 너무 허술하니, 앞서 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는, 곧 어마(御馬)를 매질하며 나갔다. 상이 내관(內官)을 돌아보며 누구냐고 물으니, 아무개 아무개 올시다 하였다. 당시에 시위가 고단하고 취약하며 인심이 매우 두려워하는 것이 임진강(臨津江)에서 보다도 더 심하였다.
한리학관(漢吏學官) 이재영(李再榮)이 사자관(寫字官)을 이끌고 중도에서 도망가니, 종행하던 여러 신하들이 모두 계문(啓文)의 규식(規式)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또 글을 쓸 만한 사람도 없었다. 하루는 내가 자상(子常)ㆍ대년(大年)과 같이 각각 장계 하나씩을 지었는데, 문세(文勢)와 자체(字體)가 제대로 되지 못하였다. 그 뒤에 자상ㆍ대년은 팔에 병이 나 쓰지 못하여 내 혼자 쓴 것이 10여 편이나 되었다. 대년은 오억령(吳億齡)이다.
이공저(李公著)는 매우 농을 좋아했다. 대가를 따르는 신하 가운데 6품은 단지 나 한 사람뿐이었는데, 이미 병조의 낭관으로서 또 이조통부(吏曹通符)를 차고서 예조ㆍ호조의 일을 겸하여 다스리고, 또 내승(內乘)의 수레 모는 사명을 띠었다. 이공저가 말하기를,
“공의 재주는 소 계자(蘇季子 이름은 진(秦))보다 훨씬 낫소. 소 계자는 6국의 재상인(宰相印)만을 찼을 뿐이었는데, 공이 다스리는 것은 6조 이외에도 태복시(太僕司)의 일을 더 맡았으니 말이오.”
하자, 일행이 모두 껄껄 웃었다. 대가가 영변에 머물러 있을 동안 외탄(外灘)이 무너졌다는 말을 듣고, 요동으로 갈 것을 결의하면서 이공저에게 상이 이르기를,
“경은 이미 늙었으니, 세자를 수종하는 것이 마땅하오.”
하였다. 이공저가 이징원과 이별하려 할 때 부자가 대단히 슬피 울었다. 얼마 안 되어, 성중(誠中)에게도 대가를 수종하라는 상의 전교가 내리니, 공저는 그렇게 된 이유를 전혀 알지 못했다. 대가가 정주(定州)에 도착하던 날, 나는 뒤처져 말을 몰아 가니, 정여인(鄭汝仁)ㆍ윤선수(尹善修)ㆍ민중심(閔仲深) 등 세 사람이 말 안장을 부려 놓고 길가에 앉아 있었다. 내가 왜 여기에들 있느냐고 물으니, 모두 병이 들어 갈 수가 없다고 하였다. 나는 그들의 언사를 괴이쩍게 여기고 먼저 갔는데, 조금 뒤에 정여인이 혼자서 왔다. 정의 이름은 희번(姬藩), 윤의 이름은 우신(又新), 민의 이름은 준(濬)이다.
사간 유선여(柳善餘)와 응교 윤자술(尹子述)이 나와 함께 어느 촌가에 모였다. 말이 시사(時事)에 미치자, 유선여가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신묘년에 꿈을 꾼 적이 있었는데, 다시 좋은 때를 볼 것이 아닌가 하오.”
하니, 윤자술이 말하기를,
“내가 소시 적에 운명을 추정한 말[推命辭]이 있었는데, 역시 전혀 틀리지 않았소. 만일 그것이 맞다면 앞길이 역시 원대할 것입니다.”
하였다. 나는 시험삼아 그 얘기를 해보라고 하였다. 유선여가 말하기를,
“꿈에 대궐 안의 인정전(仁政殿) 같은 곳에서 공신을 위해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나도 그 자리에 참여하였으니, 어찌 중흥의 녹훈(錄勳)을 받을 징조가 아니겠소.”
하니, 윤자술이 말하기를,
“운명을 추정한 말에, ‘임진년 7월에 마땅히 이마에 옥을 꽂을 경사가 있겠고, 이후로부터는 이름과 지위가 빛나 벼슬은 정승ㆍ판서에 오르고 편안하게 40년간 부귀를 누린다.’고 하였습니다. 과거에 합격하여 고을 원으로 나간 해도 그 말과 똑같이 맞았으니,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두 분의 꿈이 모두 길하니, 시사(時事)는 근심할 필요 없겠소.”
하니, 유선여가 말하기를,
“이 말을 하게 된 것도 답답한 소망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였다. 윤자술은 그 뒤 7월에 과연 당상에 올랐다. 윤의 이름은 승훈(承勳)이다.
○ 이여진(李汝震)ㆍ심공망(沈公望)과 나는 베개를 나란히 하고 용천군 문루 마루판 위에서 잤다. 심공망이 밤에 갑자기 일어나 탄식하며 말하기를,
“대적(大賊)이 뒤따르는데 한 사람도 막는 자가 없구나. 압수(鴨水)는 단지 한 나부랭이 띠처럼 사이에 두고 있어 갈 곳도 없는데, 인심은 느릿느릿하여 걱정하고 절박해 하는 태도가 없으니, 조용히 죽기란 어렵다고 누가 일렀는가.”
하니, 이여진이 말하기를,
“우리도 장차 옛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게 되겠는가?”
하고, 내가 말하기를,
“왜놈은 금수 가운데서 하나의 별종이어서, 사람을 만나면 곧 모두 잡아 죽입니다. 사람이 잡히면 죽게 되어도 쫓지 아니하지만, 어찌 모두 의를 품은 사람이겠습니까”
하자, 모두 그렇다고 하였다. 이의 이름은 국(國)이다.
○ 수문장 이사공(李士恭)은 무사들이 흩어져 달아나는 때에 홀로 늙은 어머니를 버리고 대가를 인도하여 갔다. 영변에 이르자, 대간과 사관도 많이 뒤처지고, 수행 무관도 10명이 되지 않았는데, 이사공은 한 마음만을 먹고 딴 생각을 하지 아니하였다. 조정이 둘로 나뉘어 가게 되자, 양쪽의 종관(從官)이 모두 낙점되었는데, 이사공은 세자를 따르게 되었다. 이사공이 나에게 묻기를,
“모든 사람들이 요동으로 건너가는 것은 꼭 죽으러 가는 것인 줄 알고, 세자를 따르는 것은 사는 것으로 압니다. 세자 또한 작은 임금이기에 배행(陪行)해야 하겠지만, 내 마음으로 말하오면 간절한 일념은 옛 임금에게 있습니다. 비록 대가를 따르더라도 의리에 해롭지 아니합니까?”
하니, 내가 대답하기를,
“다같이 우리 임금이지만 어찌 정의(情義)의 소재야 없겠소. 하물며 도망가는 유가 아니니, 크게 해로울 것은 없을 것 같소.”
하니, 이사공이 그렇게 알고 갔다. 얼마 후에 돌아와 말하기를,
“동궁과 대가는 의리로 보아 피차를 따질 것이 없지만, 일은 순리대로 받아들여야 하니, 임의로 수행함은 자못 온당한 일이 아니라 생각되기에 강계로 방향을 정했습니다.”
하였다. 그가 사세와 의리의 사이를 저울질하고, 거취의 마당에서는 침착하게 처신하는 것은 사람마다 미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사알(司謁) 최세준(崔世俊)이 나이가 많아서 잘 걷지 못하여 의주(義州)의 뒷 다리 옆에서 땅에 엎드려 크게 울면서 말하기를,
“늙은 놈이 끝까지 떠나가지 않는 것은 옛 임금에 대한 정을 잊지 못해서 입니다. 이제 걸어가자니 숨이 가빠서 여기에서 죽겠습니다.”
하니, 가엾게 여기지 않는 종관이 없었다. 그를 수레에 싣고 오게 하였다.
○ 관서 일대에서 대가가 거처간 곳의 사람들은 모두 말하기를,
“적의 소망은 단지 대가를 따라 잡는 데에 있다.”
하고, 원근에 말을 전하니, 서로 잇달아 도망갔는데, 의주가 더욱 심했다. 목사와 판관은 각각 종 한 사람을 데리고 갈 뿐이었다. 목사 황경미(黃景美)가 빈청(賓廳)에 말하기를,
“백성들은 피난해도 되겠지만, 성안의 새까지 다 바다를 건너 갔으니, 어찌 변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10여 일 뒤에야 차츰차츰 다시 모여 들었다. 황의 이름은 진(璡)이다.
이자상(李子常)ㆍ이명보(李明甫)가 일찍이 등창병을 얻어 연일 방에 누워 신음하였다. 이자상이 이명보에게 시 한 수를 지어 보냈는데, 그 끝구절에,
우리는 마치 서리 맞은 귤 같아서 / 吾儕正似迎霜橘
아직 가을이 깊지 않은데도 반쯤 누렇구려 / 未到深秋一半黃
하였다.
○ 이여진(李汝震)은 일찍이 남의 과실을 말하지 아니하였는데, 어느 날 정사를 의론하는 자리에서 크게 말하기를,
“사람의 마음 씀은 알 수 없다. 임진년 변란 초에 정언 정사신(鄭士信)이 소를 올려, 늙은 어미를 뵙기를 청하니, 이런 때에는 어버이를 돌아볼 수 없다고 비답하여 사신이 모친을 뵈러 가지 못했다. 매양 여러 사람 가운데서 화제가 시사(時事)에 미치면 반드시 통곡하였는데 말이 대단히 강개(慷慨)하였다. 대가가 반송(盤松)에 당도했을 적에 이 사람이 어디로 갔는 지를 몰랐다. 그 사람의 못난 형상이 이와 같았다.”
하였다.
○ 오음은 평양을 지키라는 명을 받고, 서애는 명나라 장수를 영접하라는 명을 받았다. 서애는 망설여서 출발치 않고 있다가 대가보다 나중에 떠났다. 그리고 조승훈(祖承訓)ㆍ사유(史儒) 여러 장수들까지도 영접하지 않았다. 의주에 이르자, 상이 서애에게 먼저 정주(定州) 등지로 가서 군량을 수습하여 천조(天朝) 군사의 양곡을 준비하라고 명하였는데도 병을 핑계삼아 오랜 동안 출발하지 아니하니, 상이 여러 번 가기를 재촉하였다. 오음이 유서애는 병이 들어 길을 떠날 수 없으니, 대신 가겠다고 말하였다. 그런 뒤에야 서애는 비로소 길을 떠났다. 이 일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일을 회피한다고 의심하였다.
어느 날 이자상이 말하기를,
“사변 당초에 상이 서애에게 명하여 서울을 남아서 지키라 하였을 적에 내가 생각건대 만일 상국(上國)과 교접(交接)하게 되면 응대(應對)할 적에 이 사람이 아니고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여러 번 단독으로 아뢰어 끝내는 이백춘(李伯春)으로서 그를 대신케 하였고, 평양에서도 그를 힘써 구원하였습니다. 이제 대절목(大節目)을 보니, 옳지 못한 곳이 있습니다.”
하니, 내가 말하기를,
“중국 장수를 영접하고, 군량을 수습하는 일을 말함이 아닙니까?”
하니, 아니라고 대답하고는 끝내 말하지 아니하였다. 이의 이름은 양원(陽元)이다.
이자상ㆍ이효언(李孝彦)과 내가 일찍이 용만관 바깥에서 달을 구경하며 산책한 적이 있었다. 이자상이 성루에 가 보는 것이 좋겠다 하여 손들을 잡고서 갔다. 돌아 올 때에, 이자상이 어찌 말을 달려서 가지 않겠는가 하고는 채찍질하여 달려갔다. 이효언도 이자상과 같이 가버렸고, 나는 말이 다리에게 거꾸러져서 군색한 걸음으로 돌아 왔더니, 이효언이 심히 조롱하였다. 이튿날 내가 이효언에게 말하기를,
“어제는 말이 쓰러져서 그랬지, 내 잘못이 아니오. 오늘 나와 한 번 시합해 보지 않겠소?”
하였다. 그래서 연달아 채찍질하여 달려서 겨우 큰길에 나오자, 이효언은 풀쩍 말에서 떨어져 말 달리는 길 위에 가로 넘어졌다. 나는 말을 달려서 성루에 이르렀다. 그리고는 이효언에게 되묻기를,
“오늘 말 달리기는 어떠하였소.”
하니, 이효언이 웃으며 대답하기를,
“다친 데는 묻지 않고 말 달리는 것만 물으니, 그대는 이기기를 좋아하는 자라 하겠소,”
하였다. 이자상이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불쌍하다 효언이여, 불쌍하다 효언이여.”
하였다. 효언은 이호민(李好閔)이다.
○ 이이립(李而立)은 유회부(柳晦夫)의 종사관으로서 평양으로 향하다가 대가가 벌써 박천에 당도했다는 말을 듣고 구성(龜城)으로 돌아 들어갔다. 이 때에 평양이 또 무너지니, 원근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부사(府使) 윤자일(尹子一)이 윤자술(尹子述)과 마주 앉아 일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문득 한 아전이 달려와 고하기를,
“황당한 행차 하나가 객헌(客軒)에 들었습니다.”
하였고, 관노가 또 들어와 놀랜 얼굴로 고하기를,
“부내(府內)의 백성들이 모두 왜놈의 장수가 부에 이르렀다고 하고는 벌써 다 흩어져 갔는데, 어찌하여 오래 여기에 앉아 계십니까?”
하였다. 윤자일이 다시 아전에게 묻기를,
“왜놈의 장수란 말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이는 바로 좌랑 이상신(李尙信)이니, 놀라지 말라.”
하니, 아전이 엎드려 말하기를,
“소위 이 좌랑이라는 사람은 말하는 것이 크고 느리며 입과 눈이 찌그러지고 걸음걸이도 매우 수상하여 사람들이 이 때문에 왜장이라 하였습니다.”
하였다. 윤자일이 이이립에게 이 일을 빠짐없이 말하니, 이이립이 크게 부끄러워했다. 이이립의 이름은 상신, 윤자일의 이름은 승길(承吉)이다.
○ 감사 이원익(李元翼)은 몸집이 크지 않았다. 임진년 7월에 강변 여러 고을에서 군사를 모아 가지고 곧 행조(行朝 피난간 조정)에 도착하니, 그가 탄 말은 작고 수행한 사람이라고는 단지 두 명의 작은 동자가 앞서서 올 뿐이고,절월(節鉞)도 또 중간이 부러졌다. 어떤 사람이 이것을 보고 놀려대기를,
“참으로 작은 나라의 감사다.”
하니, 이원익이 말하기를,
“제관(第觀)을 작게도 하고 크게도 하는 것이 내 장점이다.”
하자, 듣는 사람이 모두 웃었다.
○ 이자상이 어느 날 나에게 말하기를,
“근자에 오공(梧公 이원익)이 하는 일을 보니, 일개 무모한 사람에 불과하오.”
하니, 내가 대답하기를,
“무모하다면 온화한 정이 또 많겠습니다.”
하였다. 이자상도 그렇다고 하였다.
인성(寅城)이 일찍이 말하기를,
“내 일생에 꿈과 현실이 많이 부합되었습니다. 신묘년에는 꿈에 강계 부사가 되더니, 얼마 안 되어 강계로 귀양살이를 갔고, 위리안치(圍籬安置) 중에 또 종명(宗溟)이 대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나 거리를 돌아다니는 일이 없는 꿈을 꾸었더니, 얼마 안 되어 용방(龍榜)의 선발에 뽑혔고, 또 이경(李璥)이 종기가 생겨 진주(晉州)에서 죽는 꿈을 꾸었는데, 지금 장계를 보니, 과연 그러하였소.”
하였다. 종명(宗溟)은 곧 인성의 아들이다.
인의(引儀) 이춘간(李春幹)이 일찍이 압마관(押馬官)으로서 요동에 부임하여 공마(貢馬) 8필을 잃어버렸다. 이춘간이 길에서 부르기를,
“말이 어디로 갔소?”
하니, 요인(遼人)이 세모[甚磨 무얼 그러시오]라고 하였다. 이춘간이 즉시 묻기를,
“사마(四馬 네 필의 말)를 알아 들었다면 나머지 사마는 못 알아 듣는가?”
하였다. 대개 세모[甚磨 셈모라고 발음되는데 빨리 말하면 세마, 사마(四馬)로 들린다.]의 음이 사마와 비슷해서이다. 이어 수레를 몰고 오는 자가 있었다. 이춘간이 또 길을 막고 서서 그 바퀴를 붙드니, 요인이 바퀴로 기어 올라 오려나 생각하고, 까오까오[高高 높아요, 높아요. 못 올라 와요.]라고 말했다. 이춘간이 즉시 대답하기를,
“갑오(甲午)생이라니, 바로 나와 동갑이오.”
했다. 대개 까오[高]의 음은 갑오(甲午 까오와 갑오는 음이 비슷하다)와 비슷하다. 그래도 가지 아니 하자, 요인이 크게 노하여 마구 때리고 갔다. 이공저(李公著)가 늘 이 사람은 내 소시적 친구라고 말하였다.
○ 이자상이 농담을 잘 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동인, 서인의 싸움이 결국 왜놈을 불러 들였으니, 매우 가슴 아픈 일이오.”
하니, 이자상이 대답하기를,
“동서의 사람들은 싸움에 익숙한데, 조정에서는 어찌하여 이들더러 왜적을 막으라 하지 않는가.”
하였다. 이공저가 나에게 말하기를,
“내 얼마 전 인성(寅城)을 만나 보았더니, 분당(分黨)하는 마음이 지나쳐 아직도 그치지 아니하니, 민망한 일이다.”
하니, 내가 대답하기를,
“군국(軍國)의 중대사에는 한 마디 말도 하지 아니하니, 도리어 오음(梧陰)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전에 들은 바와는 크게 다르다.”
하였다. 이공저가 말하기를,
“유독 동서의 말만 끌어내면 언론이 바람일 듯하여 모든 사람이 따라가지 못하니, 가위 당론(黨論)을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라 하겠다.”
하였다. 징원(澄源)이 나에게 말하기를,
“인성(寅城)은 청백하고 소탈하나 동서 싸움에 누(累)가 되었고, 서애(西厓)는 주밀하고 자세하나 사정(事情)에 너무 찰찰하고, 오음은 천품은 좋으나 사(私)에 지나쳐서, 모두 씀에는 적당치 못한 데가 있다. 그러나 서애에게 규구(規矩)와 제도를 강론하여 결정하게 하면 오음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
하였다.
○ 유회부(柳晦夫)는 식견이 얕고 좁아서 일을 알지 못했다. 일찍이 도승지가 되어 해조(該曹)의 관리가 옛 법을 따르지 아니하는 것을 보고는 절도없이 꾸짖으니, 사람들이 모두 노했다. 어느 날 징원이 말하기를,
“회부가 일을 처리함은 너무도 신산하여 말할 것이 못된다.”
하니, 이효언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유(柳)를 매(梅 매실(梅實)은 시기 때문에 비꼰 말임)로 고치지 않느냐?”
하자, 여러 낭관들이 듣고 모두 명언이라 말했다.
이공저(李公著)는 남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말하기 좋아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오음은 일에 있어서 사사로운 것이 많고, 또 동서 당론에도 관심이 없지 않는데 유독 상의 비위 맞추는 것만을 좋아하지 않으니, 이것은 취할 만하다.”
하였다.
정충신(鄭忠信)이라는 자가 있어 나이 17세에 징병에 응모하여 최원(崔遠)을 따라 강화에 이르렀다. 일찍이 왜인들의 목을 베고 이어서 서장(書狀)을 가지고 왔다. 그 얼굴이 매우 아름답고 말이 유창하였는데 극히 조리가 있어서 사람들이 모두 사랑하였고, 그 중에서도 이자상이 특히 심하였다. 그래서 그와 같은 이불에서 자고, 길 갈 때에도 꼭 동행하고 앉을 때에도 꼭 붙어 있었다. 그에게 과거 보기를 권하여 마침내 무과에 합격하니, 사람들이 그를 이 판서(李判書)의 별실(別室)이라고 하였다.
○ 징원(澄源)이 어느 날 이자상과 변방의 일을 논쟁하면서 서로 굽히지를 아니하니, 이자상이 변색하고 말하기를,
“근래에 기강이 해이하여 낭청이 당상과 다투려 하니, 놀랄 일이다.”
하니, 내가 말하기를,
“일이 옳지 못하면 임금과 아버지의 과실도 다투는데, 더구나 어수선한 때를 당하여 수수방관만 한다면 당상과 낭관의 체모는 서겠지만, 적의(適宜)치 못한 처사는 끝내 바로잡을 길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오음이 참으로 옳은 말이다 하였다.
○ 이자상이 여러 대신과 일을 의론한 적에 그것이 불가함을 분명히 알면서도 입을 다물고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말하기를,
“이런 때를 당하여 자신이 병조 판서로 있으면서도 일에 임하여 시비를 가리는 것이 없으니, 어찌 공에게 바라는 바라 하겠습니까. 승지에서 몇 품계를 뛰어 올려 정경(正卿)을 제수한 것은 침묵만 지키고 있으라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니, 이자상이 웃으며 대답하기를,
“대소의 일을 오음이 이미 주장하였소. 나의 생각이 꼭 그보다 낫지 않는데, 혹시 간섭하여 일을 방해하게 되면 이것은 침묵하는 것만 못할 것이오.”
하면서, 끝내 그 태도를 고치지 아니하였다.
○ 심백구(沈伯懼)가 말하기를,
“임진년 봄에 사간원에 들어가 사간이 되었습니다. 그때 이미 신립(申砬)이 전라도 순변사가 되어 재인(才人)의 계집을 데려다 기르므로 어쩔 수 없이 그 허물을 다스려야 한다는 의론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심백구가 나와서 말하기를,
“처음 장계를 올려 3일이 지나도록 윤허를 받지 못했는데, 이윽고 서당(書堂)의 관원을 몹시 바쁜 자리에 오래 있게 함은 불가하다 함이 있어, 서당관(書堂官)으로 대간(臺諫)에 있는 자를 모두 체차했습니다.”
하였다. 대개 그 때에 대간으로서 서당에 선임된 자는 홀로 심백구 한 사람뿐이었다. 바로 체차되어 사성이 되자, 그 날로 그 논란이 중지되었다. 사람이 비방을 면하려고 하니, 그 교묘함이 이와 같았다. 이 의논을 주장한 사람은 정사신(鄭士信)이었다.
○ 경연에 입시하는 여섯 승지는 그 순서를 의론하여 정했는데, 차례를 잊어 버리는 자가 없었다. 유회부(柳晦夫)가 도승지가 되어서 인대(引對)가 있으면 대체로 입시하여 다른 승지들은 한 사람도 참여하지 못하였다. 심백구가 승지가 되어 유회부에게 말하기를,
“경연의 입시는 정해진 규례가 있는데, 공은 어찌하여 단독으로 입시하는 것을 좋아하시오. 여러 동료들은 비록 소회가 있더라도 진언(進言)할 기회가 없으니, 매우 온당치 못한 듯합니다.”
하니, 유회부는 부끄러운 빛이 있었다.
○ 설 조사(薛詔使)가 오니, 조정에서는 만일 글로 서로 교접하는 일이 있게 되면 그때에는 반드시 난처한 일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가까운 곳에 있는 문관을 불러 오도록 전교를 청하였지만 상께서는 이것을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유회부가 갑자기 스스로 전지를 받들고 들어 왔다. 상이 노하여 함부로 아룀을 책망하자, 윤회부가 아뢰기를,
“제가 비록 주장하였으나 일은 바로 예방(禮房)의 소관이옵니다. 담당 승지는 마땅히 대죄(待罪)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홍희고(洪希古)가 노하여 말하기를,
“이것이 무슨 죽을 죄나 됩니까? 어째서 억지로 저더러 대죄(待罪)하라 하십니까?”
하고, 오래도록 서로 힐난하니, 동료들은 몰래 웃었다. 홍의 이름은 진(進)이다.
박계길(朴季吉)은 천성이 소탈하여 남에게 속임을 많이 당했다. 하루는 황화보(黃和甫)에게 말하기를,
“내게 술 한 병이 있는데 자네가 만일 간청하면 한 잔을 보내겠소.”
하니, 황화보가 대답하기를,
“비록 술을 못얻어 마시고 죽는다 해도 맹세코 그대에게는 청하지 아니하겠네.”
하였다. 이에 박계길이 뽐내면서 가자, 황화보는 곧 그 뒤를 밟아 갔다. 그리고는 주인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술을 물로 바꾸어 넣고 병마개를 봉하여 원래대로 해 놓았다. 박계길이 손님을 맞아하여 그 술병을 열어 보니, 바로 맹물이어서 분개하면서도 그 까닭을 몰랐다. 얼마 있다가 황화보가 하인을 보내어 박계길에게 전하기를,
“내게 술 한 병이 있으니, 자네가 만일 주기를 애걸한다면 남은 찌꺼기라도 보내겠네.”
하니, 박계길이 하인을 쫓아 보내며 말하기를,
“강도하고는 같이 말할 수 없다고 하여라.”
하자, 듣는 사람이 모두 포복절도하였다. 박의 이름은 경심(慶深), 황의 이름은 광중(光中)이다.
○ 나라 임금의 명은 지제교(知製敎)가 관장하고, 통정 이하는 모두 선발에 참여하게 된다. 김사중(金士重)이 기병하여 수원에 도착하자, 조정에서 특별히 창의사(倡義使)라 칭하고, 이어 교서를 내려 위로하고 교유하였다. 그런데 유회부가 승정원에 있으면서 지제교의 일을 가로채 행하고 크게 절의가 있다고 칭찬하여 사람들에게 과시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지신사(知申事)는 지위와 명망이 높아서 또한 당시 무리에게 칭찬받기를 바라지 않는다.”
하였다. 김의 이름은 천일(千鎰)이다.
이실지(李實之)는 천성이 경솔하여 남의 인품을 잘 형용하였다. 어느 날 나에게 유회부(柳晦夫)는 수염 난 어린애라 말하므로, 내가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유실지가 말하기를,
“남이 어쩌다가 자기의 글을 칭찬하면 비록 원수라 하더라도 감정을 잊어버리고, 어쩌다가 흠을 잡으면 좋지 않게 여겨 무엇을 잃은 것같이 하고 있습니다. 그가 일을 할 때엔 남이 자기 칭찬해 주는 것을 기뻐함이 더욱 심하니, 참으로 수염 난 어린애가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하니, 징원(澄源)이 옆에 있다가 웃으며 말하기를,
“이 사람은 자못 편협하여 여자 같소.”
하였다.
징원이 사간으로 어느 날 상의 부름을 받아 아뢰기를,
“1ㆍ2년 이래로 궁궐이 엄하지 못하고 조정이 편안하지 못하여 매양 사람들의 마음을 거슬려서 원망하는 말이 길에 가득합니다. 사변이 생긴 뒤로 인심이 와르르 무너져내려 수습할 수 없게 되어 심지어 김공량(金公諒) 자매(姊妹)를 지척하는 말도 있사옵니다. 하늘과 사람이 이치는 한 가지라, 떠나고 합하는 것이 여기에 있사옵니다. 게다가 서울을 떠난 뒤로 상감께서 한 번도 당신을 탓하는 교서가 없으시니, 무엇으로써 인심을 위로하겠습니까.”
하고, 반복해서 간곡히 아뢰었으나, 상은 끝내 아무 대답이 없었다. 이공저도 입시하였다가 문을 나와서 말하기를,
“오늘 유징(幼澄) 때문에 여러 대신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회를 파하였으니, 참으로 웃기는 일이다.”
하니, 오음(梧陰)이 말하기를,
“우리가 열 마디 한 것보다 낫다.”
하였다.
○ 최언명(崔彦明)이 의주에 있을 적에 흰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는 것을 보고 일관(日官)에게 무슨 징조냐고 물으니, 마침 대군(大軍)이 강을 건너는 날이니, 이것은 바로 승전할 징조라고 대답했다. 최언명이 이에 소리 높여 꾸짖기를,
“네가 나에게 이산해(李山海)를 본받게 하려고 하는 것인가?”
하였다. 이것은 경인년 겨울에 형혹성(熒惑星)이 남두성(南斗星)에 들었는데, 이산해가 임금께, 화성(火星)이 남두를 가리고 지나갔다고 아뢴 것을 말한 것이다. 최언명은 곧 이산해에게 붙은 사람이라, 사람들이 매우 그를 천박하게 보았었다.
이실지(李實之)가 구원유(具元裕)를 방문하고 나서 나에게 들러, 구원유가 대단히 어리석다고 말하였다. 내가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이실지가 말하기를,
“구원유의 말에, ‘권세를 남의 손에 맡겨 두는 것은 불가하니, 삼사(三司)의 관원도 뜻을 같이 하는 자로 충원함이 옳겠소.’ 하므로, 내가 그에게, ‘그렇게 할 필요는 없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저들에게 틈을 탈 수 없게 하면 그만이오. 기축년에 서인이 꽉차지 않았음은 아니나 일망타진이 되었소. 진실로 공론을 우리에게 있게 하면 저들이 비록 권세를 잡고 있다 하여도 도리어 우리들에게 이용될 것입니다.’ 하였더니, 구원유는 끝내 그렇게 여기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공은 새 교제에 물들었으니, 더불어 말할 수 없소.’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존중(存中)과 헌지(獻之)를 가리킨 것이니, 이 사람이 어찌 대단히 어리석지 아니합니까.”
하니, 내가 말하기를,
“오늘의 구원유가 바로 기축년의 이춘영(李春英)이오.”
하였다. 이실지가 웃으며 대답하기를,
“이것은 참으로 무슨 마음입니까?”
하였다. 존중은 윤영립(尹永立)이다.
임진년 겨울에 대궐 문 바깥에서 상인의 무리가 요동 사람을 꾀어들여 사사로이 서로 무역하므로 대간이 그 중 한 사람을 잡아 가두었다. 이것은 효언(孝彦)이 주동한 것이었다. 마침 사고 팔던 자들은 빠져나가고 잡힌 자는 김공량의 종이었다. 그래서 크게 두려움을 느껴 놓아 주었다.
○ 임진년 겨울에 우계(牛溪 성혼(成渾)이다)가 해서(海西)로부터 행조(行朝)로 왔다. 이튿날 오음이 한 자급(資級)을 더 올리기를 청하여 마침내 자헌(資憲)으로 승진되었다. 나와 이자상(李子常)이 이 일을 이야기할 적에 이자상은,
“어리석은 사람도 하지 않을 짓을 했으니, 오음은 실성한 사람이라 하겠다.”
하였다.
○ 교검(校檢) 허징(許徵)은 사람들이 얼굴이 흉하여 밉살스럽다고 지목하였다. 임진년 8월 어느 날 밤에 이자상ㆍ효언과 내가 용만관의 길가에 모여 있었는데, 허징도 따라 왔었다. 효언이 말하기를,
“때를 잘못 만나 해적이 난리를 일으켰다. 흉한 칼날이 지나가는 곳마다 모두 그 독을 받아서 백성들의 부모 처자가 죽기도 하고 욕을 당하기도 하니, 이런 변은 유사 이래 없었던 것이다.”
하니, 허징이 말하기를,
“남의 나라를 쳐서 생령(生靈)으로 하여금 살던 곳을 잃고 부모를 서로 보지 못하고, 처자를 서로 보전하지 못하게 하니, 이런 견지에서 보면 비록 순(舜)임금 같은 성인이라 할지라도 삼묘(三苗)를 정벌한 것은 나는 역시 온당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오.”
하자, 듣는 자들이 포복절도하였다.
○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이 임진년에 예조 판서가 되어 낮이면 압록강을 건너가 중국 관리와 강설(講說)하고, 밤이면 예조의 일을 처리하여 밤 늦도록 늘 조금의 틈도 없었다. 그러나 거개가 실속없는 일들이어서 역관과 하인들이 이것을 모두 괴로워하였다. 그들이 비록 여럿이 함께 가서 배고프다고 고하여도 한 시각 잠깐 동안도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한 낭관이 있었는데, 집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까닭으로 매양 부름을 받게 되니, 또한 이것을 괴롭게 여겨 마침내 먼 곳으로 옮겨 갔다. 오음이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가련하구나, 자고(子固)여! 나이가 80이 되더라도 반드시 인사(人事)를 깨닫지 못하고 죽을 것이니, 어찌 가련하지 않겠느냐.”
하니, 듣는 사람들이 옳은 말이라고 하였다. 월정(月汀)은 곧 해평(海平)이다.
○ 서울을 떠나는 날, 대가가 벽제(碧蹄)에 도착하여 정원에 전교하기를,
“호종하는 인원으로서 참하면 6품으로, 참상이면 4품으로, 4품이면 준직(準職)으로, 당하면 당상으로 올리도록 하라.”
하니, 대체로 헛된 상(賞)만으로 권장한 것이다. 이홍로(李弘老)는 이 말을 듣고 기뻐서 말하기를,
“대가가 가는 곳마다 이런 전교가 있게 되면 며칠 안 되어 나는 허리에 금띠 띠고 이마에 옥을 붙이는 고관이 될 것이다.”
하였다. 대가가 동파(東坡)를 출발하는 날, 호위하던 병사들이 모두 흩어져 가고, 병조ㆍ도총부(都摠府) 관원도 모두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먼저 앞으로 나가 대가를 인도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효언(孝彦)은 선전관으로서 혼자서 선행 대열에 끼었다. 이홍로가 나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은 병관(兵官)이니, 앞서서 대가를 인도함이 옳겠소.”
하므로, 나도 그렇게 생각하여 말을 몰고 앞서 갔다. 이홍로가 말 위에서 효언에게 말하기를,
“오늘의 선행(先行)에는 깃[羽]을 꽂아야 되겠소.”
하고, 의기가 양양하여 만족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상이 말을 끄는 자에게 묻기를,
“여기에서 바로 평안도를 가는 길이 있느냐?”
하니, 이홍로가 몸을 굽히며 아뢰기를,
“아무 곳으로 해서 아무 군(郡)에 도착하면 바로 샛길이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대답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므로 이홍로라고 아뢰었다. 이홍로는 상이 묻자, 말 위에서 응대하고는 스스로 남들이 모두 하지 못할 말을 했다고 생각하여 기쁨을 참지 못했다. 그 사람의 경망함이 어린애 같아서 사람들이 차마 보지를 못했다.
임진년 6월에 대가가 평양에 머무르고 있을 적에 왜적의 형세는 이미 황주에 이르렀다. 여러 의론은 모두 성을 버리고자 하였는데, 대신들만은 버리고 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성 안의 사대부가 생각하기를,
“이 성을 나가야 살 길이 있을 것이다.”
하며, 다투어 공포심을 불러 일으켰으나 대신들은 고집을 부리며 나가지 아니하였다. 이상홍(李尙弘)이 선유어사(宣諭御史)로서 의주에 갔다가 다시 평양에 도착하여 보통문(普通門)으로 들어 왔다. 그가 처음 대가가 성을 나간다는 말을 듣고 숙천(肅川)으로 달려 돌아가 배회하면서 감히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가 결국은 길 위에서 복명하였다.
평양에서 대가가 출발하던 날, 해원(海原)은 대가를 보통문까지 전송하고 돌아왔다. 내가 성 안에서 따라 나갔더니, 해원이 말 위에서 손을 잡고 울면서 말하기를,
“오늘의 일은 신자(臣子)의 죄입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다만 상감의 뜻을 보건대, 아직도 갈 방향을 정하지 못하였습니다. 영변과 강계는 평양만큼 지킬 만한 곳이 못되지만 함흥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조정의 신하들 중에서 만일 함흥으로 가기를 청하면 공은 죽을 힘을 내어 이것을 막으시오. 나도 이 의론에 대해 상감께 극력 말씀 드렸더니, 상감의 마음이 많이 돌아 왔소. 그러니 공은 과히 힘들지 않을 것이오.”
하였다.
대가가 처음 의주에 도착하여서 조정에서 묻고 의론하는 것은 단지 청병(請兵)하는 한 가지 일 뿐이었다. 하루는 오음이 마침 여러 재상과 모여 앉았다가 역관 한국보(韓國輔)를 불러 말하기를,
“그대는 당상으로 승자하고 싶으냐?”
하니, 한국보는 머리를 숙이고 감히 말을 못할 뿐이었다. 드디어 상께 아뢰어 그를 당상으로 올렸다. 대체로 오음의 뜻은 이렇게 깜짝 놀랄 일을 하여 한편으로는 역관의 마음을 권장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원근의 소망을 불러일으키기도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좌우의 사람들은 그가 조정의 정권을 함부로 희롱하여 자기 물건같이 한다고 비웃었다.
○ 서애와 송강이 안주에서 만났는데, 송강이 묻기를,
“사람들이 ‘대감도 내가 감정을 가지고 최영경(崔永慶)을 죽이려 한다.’고 말하였다는데, 이런 일이 있습니까?”
하니, 서애가 웃으며 대답하기를,
“그 때에 본 형적(形迹)이 비슷했기 때문에 일찍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을 것이오.”
하자, 송강이 깜짝 놀랐다. 내가 이것을 서애(西厓)의 〈양구기(養久記)〉에서 봤다.

[주D-001]이조통부(吏曹通符) : 의금부ㆍ병조ㆍ형조ㆍ한성부의 입직관(入直官) 및 포도청의 종사관ㆍ군관이 차던 부찰(符札). 범인을 잡는 증표(證票)로 찼음.
[주D-002]절월(節鉞) : 조선 시대 지방의 관찰사ㆍ유수ㆍ병사ㆍ수사ㆍ대장ㆍ통제사 등이 부임할 때 임금이 내어주던 절(節)과 부월(斧鉞). 절은 수기(手旗)와 같고 부월은 도끼와 같이 만든 것으로 생살권(生殺權)을 상징함.
[주D-003]삼묘(三苗) : 중국 상고의 나라 이름. 강남(江南)의 형주(荊州)와 양주(揚州)의 사이에 있음. 천연 요새를 믿고 난을 일으키므로 순(舜)임금이 삼위(三危)로 몰아 내었음.

기옹만필(畸翁漫筆)
기옹만필(畸翁漫筆)


정홍명(鄭弘溟) 저

율곡 선생이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학문에 대해 말할 때에는,
“기(氣)를 이(理)로 아는 병폐가 좀 있다.”
하고, 《대학》소주(小註) 중 진북계(陳北溪)의 설명에 대해 반박하여 말하기를,
“이(理)와 기(氣)는 원래 서로 떨어지지 않은 것이나, 합함이 있지는 않다.”
하였다. 또 들으니, 항상 의논하기를,
“〈태극도설(太極圖說)〉의 ‘묘하게 합하여 엉긴다.’는 것은 주자의 ‘한 덩어리가 되어 간격이 없다.’는 설명만 못하다.”
라고 하였는데, 훗날에 반드시 그 뜻을 알 자가 있을 것이다.
율곡의 사서(四書)의 토와 주석 및 소주(小註)의 평정(評訂)이 극히 정밀하고 자세하여, 후학들을 감발하게 할 만하다. 그런데 애석한 것은 그 일을 경전에까지 미치지 못하였으며, 또 당세에 널리 전포하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좋아하지 않는 자가 보면 버리고 거두지 않는 일이 없다고 기필하지 못하겠다.
○ ‘이(理)와 기(氣)는 선후(先後)가 없다.’는 설은 선유(先儒)들이 이미 다 말하였다. 그런데 전에 보니, 여장(汝章) 권필(權鞸)이 우연히 여기에 대하여 말하였는데, 여장(汝章)은,
“정일두(鄭一蠹 여창(汝昌))가 《중용》첫 장 주의 ‘기로써 형체를 이루고 이 또한 부여[賦]한다.’고 한두 글귀를 가지고서, 주자가 선후의 분변을 말하였다 하였으니, 그것은 본뜻을 잘못 안 것이다.”
하였다.
○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선생이 《심경(心經)》중의, ‘마음이란 붙잡으면 있고 버리면 없으며, 출입함에 일정한 시간이 없고 그 방향을 모른다.’는 구절을 강의하고, 또 다시 범순부(范淳夫 범조우(范祖禹))의 딸이 말한 ‘맹자는 마음이라는 것을 모른다. 마음이 어찌 나고 드는 것이 있겠느냐?’ 한 데 대하여 정자(程子)가 ‘이 여인이 맹자를 알지는 못하지만, 마음은 알았다.’고 칭찬한 것을 들어 말하면서, 맹자와 범녀(范女)의 말이 다른 것은 무엇이냐고 자주 여러 생도들에게 물었었다. 그런데 내가 작은 설명문을 지어서 선생에게 여쭈어 의논하기를,
“대저 사람의 마음이란 방 안의 불빛과 같아서 비록 바깥의 바람에 끌려 움직이게 되어 이리저리 흔들려 안정하기 어렵게 되기는 하지만, 원래 일찍이 다른 물건을 따라 밖으로 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끌려 움직일 때에도 그 자리에 있고 안정될 때에도 역시 그 자리에 있는 것으로서, 사람이 말을 타고 문 밖으로 나가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그 존망과 출입이라고 한 것은 다만 감응하여 통하는 묘리를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장자(莊子)가 ‘하루 동안에 두 번씩 사해(四海) 밖을 돌아다닌다.’고 말한 것도, 안에서 밖으로 나가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을 말함이 아닙니다. 어떠합니까?”
하였었다. 그런데 선생께서 나중에 과연 그것을 옳다고 하였는지 아니라고 하였는지는 아직 알지 못하겠다.
○ 사계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
“성인의 마음은 맑은 거울이나 고요한 물과 같아서 학자들이 엿보아 측량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 나머지 중인(衆人)들은 마음이 달리고 뛰어 오르는 병통이 많으니 반드시 먼저 본체(本體)를 세운 뒤에 발동하는 곳에 따라서 성찰하며, 더 공부하여야만 찾아 잡음이 있을 것이다.”
하고, 언제나 경서(經書)와 강해(講解)에 있어서도 반드시 동(動)과 정(靜)을 겸하여 보는 것을 위주하였다. 거기에서 노선생께서 실지 공부에 힘을 쓴 것이 허술하지 않음을 알겠다.
○ 여윤(汝允) 최명룡(崔命龍)이 말하기를,
“지(志)란 견주어 생각하고 헤아림이 정한 방향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발동하게 되면 선도 있고 악도 있다. 때문에 도학에 뜻을 두는 자도 있고, 공명과 부귀에 뜻을 두는 자도 있어서, 사람에 따라 일정하지 않다.”
고 하였다. 여운은 총명이 뛰어나고 경세와 역사를 다 통달하였고, 성품이 온순하고 규모가 문란하지 않았다. 다만 지체가 한미하고 보잘것없기 때문에 지방에 있으면서 나쁜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 위욕(危辱)의 지경에 빠져 있다가 나이 겨우 50에 세상을 떠났다.
○ 젊었을 때 해서(海西) 지방을 왕래하면서 석담(石潭)의 사당을 찾아뵈었다. 사당에서 나와 몇몇 선비들과 못가를 거닐었는데, 시내와 산이 아주 아름답고 솟은 돌이 병풍처럼 둘려 있었다.
그 중 율곡 선생 문하에서 배운 선비들이 모두 말하기를,
“선생께서 이곳 산수 구곡(九曲)이 완연히 중국 무이(武夷)의 경치와 같다고 여겨 드디어 몇 동지들과 힘을 합하여 주자의 사당을 세웠는데, 산수도 그러하지만 또 평생을 두고 항상 주자를 숭상했기 때문이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선생은 풍채가 간결하고 언어가 평탄하여 지방 사람들과 상대하는 데에 있어서도 젊은이나 어른, 어리석은 이나 지혜로운 이 할 것 없이 모두 환심을 가지게 하였다. 때로는 혹 사색하는 것이 있으면, 잠자코 한참 동안을 있다가도 다시 평상시와 같이 하였다.”
한다.
○ 일학(一學) 노숙(老宿)은 불문(佛門)의 종사(宗師)이다. 오대산(五臺山)에서 입정(入定)한 지 근 50년이나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일찍이 말하기를,
“젊어서 율곡을 따라 산놀이를 하였는데, 어떤 곳을 지나다가 돌구멍에서 나오는 작은 샘물이 있어 여러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물을 마셨다. 율곡도 물을 길어오라고 하여 한 모금 마시고는 ‘이 물은 둘도 없는 맛이다.’ 하였으나, 여러 사람들은 조금도 특이한 것을 몰랐다. 율곡이 말하기를 ‘대저 물은 맑은 것이 좋은데, 맑으면 무게가 무겁다. 흐린 물은 비록 모래와 진흙이 섞였더라도 무게는 맑은 물을 따르지 못한다.’ 하니, 같이 가던 사람들이 다투어 시험해 보니, 과연 무게가 다른 물의 두 배나 되었다. 마침내 철인(哲人)은 만물의 이치에 모르는 것이 없음이 다 이런 줄을 알았다.”
하였다.
○ 오래 전에 우연히 늙은 중을 만났는데, 그의 말이 용문산(龍門山)에 있을 때에 우계(牛溪 성혼(成渾))선생과 여러 날을 함께 거처하여 그 분의 일상생활을 잘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선생이 조석으로 무엇을 하던가?”
물으니, 대답하기를,
“새벽에 일어나면 반드시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고 의관을 정제한 다음 단정히 팔짱을 끼고 바로 앉는다. 오정 때쯤 되면 또 세수를 하고는 머리를 빗고 앉으며 때로는 책을 펴 본다. 생각할 것이 있으면 곧 책을 덮고 엄숙히 말하지 않고 있는데, 바라보면 엄숙하여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 없게 된다.”
하였다.
○ 우계는 집에 거처할 때에도 일처리가 세밀하였다. 이른 아침에 그날 일을 시키는데, 비록 농사짓는 사소한 일일지라도 하인들에게 반드시 시간과 노력을 계산하여 분부하는데 조금도 차이가 생기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고향에 거처할 때에도 집안이 가난하고 궁핍한 적이 없었다.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 선생은 평생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제사 드리고 손님 대접하는 준비는 모두 우계가 마련하였다. 혹 서울 객중에 있을 적에도 매양 친구들이 찾아가면 반드시 술과 고기가 있었는데, 청송은 이것을 원래부터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하였다.
○ 율곡ㆍ우계 및 우리 선인이 함께 진사 이희삼(李希參)의 집에 모였을 적에, 주인 집에서 술자리를 마련하였는데, 석개(石介)가 당시의 이름난 기생으로 자리에 참석하였다. 술을 돌리고 노래를 부르려 하자 우계가 갑자기 일어섰으나 좌중에서 감히 만류하는 이가 없었다. 이는 평생에 음탕한 소리를 듣지 않는 것으로 법을 삼았기 때문이라 한다.
○ 퇴계(退溪)는 남명(南溟 조식(曺植))과 시대가 같고 동갑이며 같은 도에 함께 있었지만 끝내 만나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이것은 그들의 의논이 서로 달라서 그런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옛날에 ‘천고의 옛 사람을 벗 삼는다.’ 하였으며 ‘천리 길을 가서 만나본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또 무엇 때문이었던가?
○ 성대곡(成大谷)이 지은 남명의 〈행록(行錄)〉에,
“공이 두류산에 놀 때 한 소년을 만나보고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시기하고 질투하며 착한 사람을 원수처럼 보니, 훗날에 만일 뜻을 얻게 된다면 착한 사람들이 화를 입을 것이다.’고 했다 한다.”
하였다. 후인이 그것은 기고봉(奇高峰)을 지목한 것으로 의심하나,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괴이한 일이다.
○ 김하서(金河西 인후(麟厚))는 풍채가 맑고 빼어나며 골격이 기이하여 세속 사람들보다 특출하였다. 젊을 때에 인종(仁宗)에게 인정을 받아 특별한 대우를 받았는데, 을사년 이후로는 인간사의 생각을 끊어 그 모습이 마른 나무나 식은 재와 같았다.
매년 7월의 기일(忌日)을 당하면 기일에 앞서 술을 가지고 산중으로 들어가서 한없이 통곡하였다. 선인(先人)이 평소 깊이 사모하여 시를 지었는데,
해마다 7월이 되면 / 年年七月日
일만 산중에서 통곡하네 / 痛哭萬山中
이라 하였으니, 그 사실을 읊은 것이다.
○ 토정(土亭)의 소설(小說)에,
“악한 범은 사람의 작은 몸을 엿보고 사특한 생각은 사람의 큰 몸을 먹어 들어가는데, 사람들이 악한 범은 무서워하고 사특한 생각은 무서워하지 않으니 어찌된 일인가?”
하였다.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이 포천 군수로 있을 때에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는데, 그 중 ‘사람을 쓰는 데에는 반드시 그 재주대로 하여야 한다.’는 조목에서는,
“해동청(海東靑)은 천하의 좋은 매이지만 새벽을 알리는 일을 맡게 한다면 늙은 닭만 못하고, 한혈구(汗血駒)는 천하의 좋은 말이지만 쥐를 잡게 한다면 늙은 고양이만 못할 것입니다. 하물며 닭으로 사냥을 할 수 있겠으며, 고양이로 수레를 끌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토정은 행적이 탁월하고 기이하며 구속을 받지 않았으며, 천성은 순수하고 어질며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였다. 선산(先山)이 바다 가까이 있어 백 년 뒤에는 큰 변란이 있을 것이라고 하여 몸소 밭 갈고 소금을 팔면서 노고를 싫어하지 않고 산을 옮겨다 바다를 메울 계획을 하였다.
형이 죽으니 마음으로 3년상을 치르고, 성현의 글을 읽되, 길을 가나 자리에 앉으나 마음으로 생각하고 외웠다. 학도들과 함께 다닐 때마다 이따금 갑자기 경서와 역사에 대해 물어 혹 잘 대답하지 못하면, 반드시 탄식하며 말하기를,
“너희들이 어찌 길 다니는 것이 괴롭다고 여겨 글을 외고 읽기를 중지할 것이냐.”
하였다. 다만 토정이 강해(江海)에 떠돌아다니며 방랑 행각을 한 것은 세상을 싫어해서만이 아니라, 구속받는 것을 피하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그의 아들 산휘(山輝)는 음악을 잘 알기로 세상에 알려졌으며 보고 아는 이들이 신명하다고 말하였다. 상중에 모진 범의 해침을 받아 일찍 죽었다.
○ 조중봉(趙重峰 조헌)은 토정에게 배웠는데, 경서와 역사에 깊이 잠심하여 노력을 남보다 더하였다. 그의 저술한 글을 보면, 앞일을 아는 슬기가 자연히 부합되니, 이것이 이른바 ‘지성(至誠)은 미리 안다.’는 것인가.
중봉이 어느 날 길을 가다가 여관에 들었는데, 밤이 깊고 인정(人定)이 된 뒤에도 관솔을 태워 단정히 앉아 책을 읽었다. 옆집에 마침 어떤 선비가 엿보았는데, 손에 들고 보는 책은 《송조명신언행록(宋朝名臣言行錄)》으로 거의 닭이 울게 되어서야 글 읽기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중봉은 천문학에 밝았는데, 신묘년(1591, 선조 24) 세모에는 매양 왜구를 근심하여 전후 상소를 올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임진년 초봄에 아내가 죽어 장사지내는데, 미처 구덩이를 덮기 전에 문득 매우 놀라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천고(天鼓)가 동하였으니, 반드시 평수길(平秀吉)이 군사를 일으켰다.”
하였다. 그리고 집안 사람과 장례에 참석한 친척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각기 돌아가서 빨리 피난할 준비를 하라. 나는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할 것이다.”
하니, 듣는 사람들이 대부분 믿지 않았는데, 얼마 안 되어서 적의 경보가 이르렀다.
중봉은 젊었을 때부터 이씨 집 형제와 친근하게 교제하여 정분이 형제와 같았는데, 만년에 와서 이씨 집 형제가 정적(鄭賊 정여립(鄭汝立)을 말함)과 서로 친근하니, 중봉이 간절히 절교하라고 주의시켰지만, 이씨는 친구 간에 까닭없이 절교할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중봉은 그들이 끝내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 옥천(沃川)에서 도보로 남평(南平) 이씨의 집으로 가서 수일 동안 유숙하면서 여러 가지로 비유하며 타일렀지만, 이씨가 끝내 듣지 않았다. 중봉은 떠나가면서 칼을 뽑아 앉은 자리를 베어 칠언시(七言詩) 한 절구를 써 주며 작별하였는데, 끝 구에,
나는 가고 그대는 머물러 각자 닦을지어다 / 我去君留各自修
하였는데, 그 후로 그만 절교되었다.
○ 사계가 매양 말 위에서 글을 보며 혹 《중용》과 《대학》 등의 글을 항상 외웠다. 내가 젊을 때부터 그분의 집안에 드나들어 모시고 잘 때도 많았는데, 새벽이나 밤에는 반드시 옛글을 마음속으로 반복하여 외우기를 마지않았다. 늘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중용》과 《대학》은 외워 읽기를 수천 번이나 하였지만 역시 더하는 것이 있는 줄은 모르겠다.”
하였다.
○ 《중용》 첫 장의,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 한다.”
에 대한 훈고에서,
“교(敎)는 예악 형정 교화(禮樂刑政敎化) 같은 등속을 말한 것이다.”
하였는데, 계곡(谿谷 장유(張維))은 온당하지 못하다고 하면서, 의견을 저술하기까지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무릇 성현이 남긴 말이나 문장은 마땅히 먼저 받들고 믿어 바탕을 삼아야 할 것이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더라도 잘 연구하여 그 뜻을 깨달은 뒤에 평해야 할 것인데, 어찌 간단히 자기 생각으로 단정할 수 있으랴. 하물며 주자의 사서집주(四書集註)는 극히 정밀하여 후학들이 가벼이 의논할 것이 아니다.”
하였는데, 계곡은 끝내 수긍하지 않았다.
사계가 일찍이 말하기를,
“선유(先儒)들이 학문을 논한 것은 비록 정자와 주자의 말일지라도 이내 그 가부를 알 수 있는데, 문장의 잘못은 시골 학자에게서 나온 것이라도 잘 알 수 없다.”
하였다. 아마도 공부하는 것이 한 곳에만 치우쳐서 다른 데 미칠 겨를이 없기 때문인가?
율곡이 고봉(高峯)과 같은 때에 벼슬하였고, 비록 나이의 차이는 있지만 원래 도학으로도 서로 통할 만하였는데, 끝내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대학》에 대한 논쟁에서 서로 양보하지 않은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하는데, 어찌 그래서 그렇겠는가?
퇴계는 고봉을 극히 존중하였는데, 이는 왕복한 서신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선인은 고봉보다 아홉 살 아래요, 소시부터 글을 배우며 선생으로 불렀다. 평상시에 고봉ㆍ윤월정(尹月汀 윤근수)과 함께 호당(湖堂)에 숙직할 때에 고봉이 기세를 올려 율곡에 대해 흠을 잡자, 선인이 조용히 말하기를,
“선생은 이미 이모(李某)와 도의(道義)의 교제를 허락하였으니, 매양 헐뜯는 것은 부당합니다.”
하였으나, 고봉은 더욱 분이 풀리지 않았다. 월정의 말임.
월정이 매양 말하기를,
“평상시 고봉 및 황강(黃岡) 김계휘(金繼輝)ㆍ이산해(李山海)와 같은 당번이 되어 호당에 숙직하였는데, 예전부터 〈천하여지도(天下輿地圖)〉가 벽 위에 걸려 있었다. 고봉과 황강이 우연히 서로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산천의 형세와 거리의 원근, 인물의 출처, 주군(州郡)의 연혁을 담론하는데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하는 것이 없으며, 두어 밤이 새도록 쉬지 않았다. 아성(鵝城 이산해)이 나와서 나에게 ‘우리들이 저 사람과 함께 벼슬하는 것이 어찌 크게 부끄럽지 않은가.’ 하였다.”
하였다.
○ 월정은 박식하고 옛일을 좋아하였다. 늘 나에게 말하기를,
“송 태조(宋太祖)가 끝내는 시역을 당하였다.”
하였는데, 어릴 적에는 그 까닭을 알지 못하여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역사책에 범질(范質)의 충후(忠厚)함을 말하는 대목에 ‘범질이 본조를 위하여 시종 한결같았기 때문에 범질의 생전에는 태후나 어린 임금에게 탈이 없게 되었다.’ 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범질이 죽은 뒤에는 마침내 반드시 해를 당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뒤에 〈언행록(言行錄)〉을 상고하여 보니 정말 그러하였다.
○ 월정이 말하기를,
“전에 고봉이 말한 것을 보니, 어릴 적에는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책이 없어 고통이었으며, 역사에 대한 것은 다만 《강목(綱目)》을 본 것으로 만족하게 여기다가, 서울에 와서 남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빌려 보니 생각하는 것이 자연 달라졌다.”
하였다.
○ 《소미통감(少微通鑑)》은 우리 나라에서 숭상하는 책이지만, 자세히 보면 《자치통감》 을 잘라놓았을 뿐만 아니라, 구절의 취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으며, 간혹 문리가 접속되지 않는 것도 있다.
우선 생각나는 대로 들어 본다면, 항우(項羽)의 오강(吳江) 일에 대하여는, 여마동(呂馬童)과 이야기한 근본은 빠뜨렸다가 후에야 잘라 맞추어서 ‘약덕(若德)’이라는 한 구절을 만들었으며, 전천추(田千秋)의 일에 있어서는, 백두옹(白頭翁)의 근본은 전혀 빠뜨리고 다만 ‘고묘(高廟)의 신령이 내게 고하여 주었다.’고만 하였으니, 이는 매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기타 소소한 하자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내용이 정밀하고 자세한 점은 《사략(史略)》만도 훨씬 못하다.
○ 옛날 사람들은 자(字)로 통행하는 이가 많은데, 두 가지 자(字)로 통하는 이는 적었다. 《강목(綱目)》에는 두 가지 자가 번갈아 나오는데, 조적(祖逖)같은 이의 자는 사아(士雅)와 사치(士稚)이니, 어느 것을 따라야 좋을지 몰랐다. 그래서 《세설(世說)》을 찾아보니 사아(士雅)로 와 있었다.
○ 어떤 이가 말하기를,
“소로 밭을 가는 것은 후세에 와서 한 일이다.”
하였는데, 김황강(金黃岡 김계휘)이 말하기를,
“염경(冉耕)의 자가 백우(伯牛)인 것으로 보면 상고 시대에도 역시 소로 밭을 갈았다.”
하니, 세상에서들 모두 명언(名言)이라고 하였다.
○ 역사로 상고해 보면, 주(周) 나라 무왕(武王)이 그의 아버지인 문왕(文王)보다 14세가 아래인데 그에게 형 백읍고(伯邑考)가 있었으니, 문왕이 일찍 자식을 두었음을 알 수 있으며, 무왕이 93세로 세상을 떠났는데,주공(周公)이 무왕의 어린 아들 성왕(成王)을 업고 제후들의 조회를 받았으며, 또 성왕의 아우 당숙우한후(唐叔虞韓侯)도 있었으니, 무왕이 자식을 늦게 두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무왕의 후비 읍강(邑姜)의 나이가 무왕보다 몇 살 적었는데, 부인이 노쇠한 후에도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옛날 사람들이 사용한 통운(通韻)을 지금 사람들은 흔히 깨닫지 못하고 협음(叶音)은 더욱 어려워 억지로 풀이하고 있다. 예를 들면 동(東) 자와 침(侵) 자의 음운은 원래가 서로 유사하지 않은 것인데, 협음ㆍ통운으로 쓴 곳이 많다. 《주역》의 소상(小象)에 이런 것이 자못 많으며, 《시전(詩傳)》에도
길보가 송을 지으니 / 吉甫作頌
화목하기 청풍 같네 / 穆如淸風
중산보가 길이 생각하여 / 仲山甫永懷
그 마음을 위로하노라 / 以慰其心
하였다. 이런 것은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사부(詞賦)에 더욱 많은데, 〈장문부(長門賦)〉같은 것은 오로지 이런 체를 사용한 것으로서, 초혼(招魂)ㆍ담담(湛湛)ㆍ강수(江水)의 세 구도 역시 통운으로 운자(韻字)를 단 것이지만 읽는 이들이 살피지 못한 것이 많다.
○ 옛날 사람들은 네 살 때에 사성(四聲)을 가릴 줄 알며, 너덧 살이면 글을 지었는데, 이런 것은 그 신이(神異)함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서 그런 것이었던가? 지금은 서너 살에 말을 다 할 수 있는 아이도 매우 적다. 근세의 청한(淸寒)ㆍ하서(河西) 같은 이들은 모두 신동으로 불려졌지만 그들이 지은 시문의 꾸밈새는 한때의 작가(作家)만 못한 점도 있으니, 이것은 노력의 적고 많음에 따라서 그런 것인가?
○ 옛 사람들의 글에 대한 의논을 지금 역시 다 믿지 못하겠다. 한 문공(韓文公)은 자운(子雲 양웅(揚雄))의 《태현경(太玄經)》이 《노자(老子)》와 우열을 다툴 것이 못된다고 하고 후파(侯芭)의 이른바 ‘《주역》보다 낫다.’는 것을 지언(知言)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지나친 것 같다. 유자후(柳子厚)의 한퇴지(韓退之)에 대한 말도 역시 그러하다.
소장공(蕭長公 소식)의 〈사마공신도비(司馬公神道碑)〉와 같은 글은 천고의 걸작이라고 할 만한 것인데, 다만 글 중에서 이세적(李世勣)ㆍ모용소종(慕容紹宗)의 일을 들어 비유한 것은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다.
○ 어릴 적에 윤월정(尹月汀 윤근수)의 문하에 나가 뵈었더니, 마침 환갑 날이 되어 술 자리를 베풀었는데, 최동고(崔東皐 최립)가 상좌에 앉았다. 월정이 묻기를,
“들으니, 영공(令公)은 구양수(歐陽修)의 글이 한창려(韓昌黎)보다 낫다고 한다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하니, 동고의 말이,
“진실로 그렇습니다. 천변만화하는 한창려의 글이 자연스럽게 한 가지 문체만을 쓰는 구양공의 글을 따를 수 없소.”
하였다. 또 묻기를,
“명(明) 나라의 글은 누구의 것이 제일 우수하오?”
하니, 동고가 대답하기를,
“일찍이 잘 읽어보지는 못하였지만, 대개가 부화하고 내용이 없소. 그 중에서 황홍헌(黃洪憲)의 글은 과문(科文)에 가까웠소.”
하매, 월정이 아무 말이 없었다.
○ 동고(東皐)가 또 말하기를,
“유문(유종원(柳宗元)의 글)은 평생 펴보지 않았는데, 전일에 어느 재상이 초록하여 달라고 독촉하여 처음으로 뒤져 보았더니, 전혀 의미가 없었고, 소동파의 여러 작품 같은 것은 더욱 보잘것이 없었다.”
하였다. 그의 큰 소리가 대개 이러한 것이다.
○ 동고는 안하무인이었지만 늘 율곡을 칭찬하기를,
“말을 하면 글이 되며,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누구도 따를 수 없다.”
하였다.
○ 주자가 육상산(陸象山)과 더불어 각각 학도들을 데리고 백록 서원(白鹿書院)에 모여 강의하였는데, 그 발문에 극히 존중하였다. 그런데 태극(太極)에 관해 논쟁하면서는 의견이 서로 어긋나서 친교가 드디어 틀어지게 되었다. 심지어 영구가 지날 때에는 큰 소리로 박수치며 아무렇게 지꺼렸다……하니, 만일 육상산이 죽어서 지각이 있다면 어찌 저승에서도 유감을 품지 않겠는가.
주자는 소동파를 여지없이 배척하였다. 그러나 소동파가 그린 석죽(石竹)에 발문 지은 것을 보면,
“이 늙은이의 얽매임 없는 한 자질과 조촐한 지조는 죽군(竹君)ㆍ석우(石友)와 거의 비슷하다.”
하였으니, 주자가 동파를 인정하는 것 역시 보통이 아니었던 것 같다.
○ 왕양명(王陽明)이 처음 선학(禪學)에 물들었고 중간에는 주자의 학문을 배우다가 또 버리고 선학을 좇았다. 그의 문집 중의,
강학엔 매양 중회(仲晦 주자의 자)가 의심스럽고 / 講學每疑朱仲晦
지리한 것은 정강성 되기를 부끄러워했네 / 支離羞作鄭康成
쨍그렁 비파를 던진 봄바람 속에 / 鏗然舍瑟春風裏
광인이나 증점이 마음에 들어 / 點也雖狂我得情
라는 율시 한 수로써 평소 뜻하는 바를 알겠다.
○ 양명(陽明 왕수인)이 산에서 노닐다가 한 승방(僧房)을 보았는데, 앞 문의 빗장이 굳게 잠겼고 먼지가 무릎 위까지 올라왔다. 그 연고를 물으니, 중의 말이,
“선사(先師)가 세상을 떠날 때에 제자들에게 간곡히 부탁하기를 ‘한 번 창문을 닫은 다음에는 함부로 열어보지 말라.’ 하였습니다.”
하였다.
양명이 괴이하게 여기고 바로 앞으로 나가 손으로 방문을 열어보니, 한 늙은 중이 앉은 채로 죽었는데, 얼굴빛이 변함없고 자신의 모습과 다름이 없으며 등에,
삼십 년 전 왕수인 / 三十年前王守仁
문 연 사람이 곧 문 닫을 사람이네 / 開門還是閉門人
이라 쓰여 있어 양명이 깜짝 놀랐다. 그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 성인은 괴이한 것을 말하지 않지만, 괴이한 것 역시 없는 것은 아니다. 불가(佛家)의 요술하는 것을 믿을 수는 없지만, 침갱(針羹)과 세장(洗臟) 같은 일은 만일 혹시라도 그랬다면 어찌 사람들을 미혹하게 하지 않았겠는가.
○ 정해 연간(1587, 선조 20)에 선인께서 세상과 뜻이 맞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노소재(盧蘇齋 노수신(盧守愼))를 찾아 작별 인사를 하였다. 그때 소재는 수상이었는데 마침 병으로 집에 있다가 손을 잡고 안방으로 들어가서 술을 가져오게 하여 같이 들면서 진심으로 위로하고 권면하였다. 공사간의 정으로 보아서 물러갈 수 없다고 하면서 한 절구의 시를 부채에 써 주었다.
언덕 위의 풀은 해마다 늙어지고 / 壟草年年老
뜰 앞의 가시나무 날마다 쇠해지네 / 庭荊日日衰
한 평생 충효로 자임하던 그대 / 平生任忠孝
그걸 가지고 어디로 가려 하시나 / 持此欲何之
평소 책 광우리에 간직해 두었기에 나도 보았다.
○ 퇴계가 남쪽으로 돌아갈 적에 전송하는 사람이 배 위에 가득 찼다. 선인은 공무로 좀 늦어 뒤에 강가로 나갔더니, 배는 벌써 강 가운데로 나갔다. 뱃사람 편에 시 한 절구를 노선생에게 드렸다.
광릉(廣陵)까지 따라 이르렀지만 / 追到廣陵上
타신 그 배 벌써 아득하여라 / 仙舟已杳冥
가을 바람에 수심 가득 안고 / 秋風滿腔思
석양에 홀로 정자에 오르네 / 斜日獨登亭
퇴계가 배 위에서 손을 들어 사례하고 집에 돌아가서는 차운(次韻)하여 붙였었는데, 지금 문집에 실려 있지 않다.
○ 근세 문인들은 선묘조(宣廟朝)에 성대하였다. 시학(詩學)으로는 권석주(權石洲 권필) 같은 이가 있으니, 재주와 생각이 특출한 데 안목이 있는 사람으로서 유고(遺稿)를 보면 알 수 있다. 다만 석주는 술을 마시면 농담이 많아서 글을 논하는 데 자못 일정하지 않았다. 내가 어느 날 우연히 조용한 기회에 시문의 내용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국초(國初)부터 지금까지 저술을 나보다 낫게 한 사람이 있기는 하나 마음과 보는 눈이 모두 열려서 묘한 이치까지 알아낸 것은 나만한 이가 없을 것이다.”
하였으니, 그의 자부심이 작지 않았던 것이다.
○ 석주(石洲)의 시집은 원래 수효가 많지 않고 내용을 너무 정밀하게 선택하였으니, 지금 세상에 통행하는 시집이 그것이다. 그 집에 간직한 사고(私稿) 중에 석주 자신이 비점(批點)을 찍은 것을 전에 한 번 들쳐보니 볼 만한 것이었는데, 이미 전란 통에 잃어버렸다고 하니, 애석하다.
○ 소시에 체소(體素) 이공(李公)춘영(春英)이 해서(海西)의 중씨(仲氏) 처소에 들렀는데, 과거 공부하는 선비들이 그가 왔다는 말을 듣고, 각자 읽던 책을 가지고 와서 앞에 벌여놓고 좌우에서 묻고 논란하였다. 체소가 술잔을 들고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마치 노련한 법관이 송사 처리하듯 척척 대답하였으니, 역시 유쾌한 일이었다.
○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는 백가서(百家書)를 다 통하여 학식이 매우 풍부하였다. 그러나 유쾌한 기분으로 휘둘러 써두고는 고치지를 아니하고 끝내 어지럽게 쓴 초고를 광주리 속에 던져두고 다시 꺼내보지도 않았다고 하니, 이것은 반드시 후세에 전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 기묘 제현(己卯諸賢)이 요순(堯舜) 시대의 임금과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을 자기들의 임무로 삼았는데, 당시 선배들이 대부분 그 장래을 염려하였다. 그리고 큰 일을 하는 것이나 현량과(賢良科)를 설립하는 등의 일은 대부준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에게서 나왔는데, 여러 어진 이들이 실패하게 된 뒤에는 모재만이 큰 화를 면하여 파직을 당하는 데에 그쳤다.
모재는 젊어서 김안로(金安老)와 친절하게 지냈는데, 하루는 김안로가 모재가 서울에 왔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다. 모재가 취한 김에 농담으로 말하기를,
“영공(令公)이 문형을 주관하는 것은 인재가 없어서 그런 것뿐인데 무엇이 귀할 것인가.”
하니, 김안로가 웃고 갔다. 자제들이 근심하고 두려워하면서 실언이라고 여겨 그가 반드시 매우 유감을 품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모재는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안로와 가장 친하여 그 사람됨을 잘 아는데, 반드시 한때의 농담으로 나를 해치지는 않을 것이다.”
하더니, 후에 과연 무사하였다. 김안로가 죽은 뒤에도 모재는 변함없이 철마다 그 집을 돌보아주었다.
○ 기묘년(1519, 중종 14)에 대사성 김식(金湜)이 도망하여 지방으로 나가 있었는데, 밤에 눌재(訥齋) 박상(朴詳)을 광주(光州) 촌가로 찾아가서 함께 자며 여러 간신들이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세도를 마음대로 하는 것을 자세히 말하고 오늘날의 화는 반드시 주상께서 알지 못하는 것이니, 조만간에 자연히 드러날 것이라고 하였다. 눌재가 대답하기를,
“남곤(南袞)과 심정(沈貞)의 간악한 계교는 깊고 세밀하니 그렇게 허술하지 않을 것이며, 또 전대의 권신이나 판관들이 임금을 위협하고 견제하는 것과는 비교할 정도가 아니니, 이승에서는 다시 전하를 보기 어려울 것이다.”
하니, 김식은 비로소 실망하고 뉘우쳤다. 이날 새벽에 작별하고 가다가 길가의 다리 아래에서 목매어 죽었다.
○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이 유배지에 있을 적에, 서울 하인이 밤에 와서 문을 두드리며,
“좋은 소식이 왔습니다. 여러 간신들이 모두 실패하고 어르신께서 소명(召命)을 받게 되었는데, 몇 가지 서신이 여기 있습니다.”
하니, 공이 천천히 말하기를,
“우선 그대로 두라. 밝은 날에 뜯어 보겠다.”
하고, 예전처럼 코를 골며 잠드니 사람들이 그의 넓은 도량에 탄복하였다.
○ 신묘년(1591, 선조 24)에 화가 일어나자, 월정(月汀)은 관직을 삭탈하고 축출하는 데 그쳤다.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평소 이가(李家)의 나쁜 점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당초에 사람을 보내어 자제들을 통하여 말하기를 ‘이때에 한 번만 가서 보면 다른 우려가 없음을 보증하겠다.’ 하였으나, 나는 대답하기를 ‘옛 사람이 사생(死生)과 영욕(榮辱) 때문에 의리를 구차하게 할 수 없다.’ 하였고, 당대의 친구들이 모두 잘못되었는데, 나만 편안한 것이 어찌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는가?”
하였다.
○ 선인은 평생에 꿈이 반드시 맞았다. 신묘년에 화를 당하여 남양(南陽) 구포(鷗浦)로 나가 살았는데, 새벽녘에 곁에 있는 사람을 보고 말하기를,
“꿈에 내가 강계 부사(江界府使)가 되었으니 그곳이 유배지가 될 것이다.”
하였는데, 얼마 있다가 서울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진주로 정배(定配)되었다고 하니, 선인께서 탄식하기를,
“평생에 꿈을 믿었는데, 늙으니 꿈도 맞지 않는다.”
하였다. 그런데 남쪽으로 내려간 지 며칠 만에 대간의 논쟁으로 강계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사람이 천금의 구슬을 깨버릴 수는 있지만 가마[釜]가 깨지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고 한 소공(蘇公)의 이 말을 가지고 세속 사람에게 징험해 보니 거짓말이 아님을 알았다.
○“일이 인정에 가깝지 않은 것은 큰 간특(姦慝)이 되지 않는 것이 드물다.”
하였다. 이것은 노천(老泉)의 변간론(辨姦論)에서 나온 말인데, 선유(先儒)는 공정한 말이 아니라고 반박하였다.
왕씨(王氏)ㆍ소씨(蘇氏)의 시비는 누가 어떤지 알 수 없지만, 그 말을 《대학》가운데에,
“후히 대할 자에게 박하게 대하고, 박하게 대할 자에게 후하게 대한다.”
는 것과 서로 참고하여 사람 보는 법을 삼는다면 백의 하나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 옛 사람의 이른바,
“신(臣)의 아버지의 청백한 것은 사람이 알까 두려워했고, 신의 청백함은 알지 못할까 두려워했다.”
라고 한 것은 공사를 분간하는 데에 정말 격언인 것이다. 말세에 와서 청백하고 좋은 행실이 있다고 하는 자가 흔히 스스로 뽐내고 자랑한 자요, 몸소 실천하는 자는 전혀 형적이 드러나지 않아서 세상이 알 수 없다.
○ 일찍이 옛 사람은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으로 사람을 칭찬하는 말로 쓴다는 것을 보고, 혼자 이것이 사람의 무슨 미덕(美德)이 될 것인가 생각하였는데, 세상의 여러 일을 겪은 지금에 와서 보니 대개 금주(金注)에 현혹됨이 많아 비로소 그 말에 의미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 세도에 아부하고 장사 수단으로 교제하는 자를 누가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는가. 더위와 서늘함의 차례가 바뀌어 영욕(榮辱)이 자리를 바꿀 때에는 평일에 지기(知己)라고 하던 사람들도 문 앞을 지날 때는 목을 움츠리고 한 번도 들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우물에 빠지면 돌을 던지는 자도 많다. 이것이 적공(翟公)이 대문에 글을 써 붙인 까닭이요,창려(昌黎)가 유자후(柳子厚)의 묘지(墓誌)를 적은 이유이다.
○ 말세의 사람들은 원래 의리를 아는 자가 적지만 이해를 아는 자도 적다. 일생을 부귀에 뜻을 두어 온갖 계책을 다 쓰며 시세에 따라 아첨하면서 오히려 못 미칠까 염려하던 자들도 나중에 화란을 기어이 만나고, 간혹 분수를 편하게 여기고 본 뜻을 지켜 일하기를 부끄러워하고, 안색을 바로 하여 조정에서 일하면서 꼿꼿하게 지내던 사람도 반드시 모두 함정에 빠지지는 않으니, 이런 것은 불선한 자들의 경계가 된다.
○ 안정된 자는 조급함을 제어할 수 있기 때문에 일을 이루게 되고, 내실이 없이 과장하는 자는 분쟁만을 일삼기 때문에 끝내는 실효가 없게 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제 자랑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조용히 할 일만 하는 사람을 싫어하기 때문에 사람을 부릴 때에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취하여 나중에는 나라를 그르치고 일을 망치게 되는 것이 전후에 잇달았지만 뉘우칠 줄을 모른다. 지금 보아도 이런 경우가 많다.
○ 고금을 통하여 조심하여 복을 누린 자는 있지만, 교만하고서 끝까지 안전한 자는 적다. 이것은 어찌 사람들의 비방이 모이면 귀신의 책망이 따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내가 일찍이 왕언방(王彦邦)의 시 가운데,
영화와 은총엔 무심하기 쉽지만 / 榮寵無心易
위태로울 때에 절개 지키기는 어렵네 / 臨危抗節難
라는 두 구를 벽 위에 써 붙였는데, 와서 보는 객들이 대부분 위와 아래 구의 난(難)ㆍ가(易) 두 글자를 서로 바꾸어야 한다고 하였다. 여기서도 영예와 명리가 사람의 마음에 깊이 배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 박수암(朴守庵 지화(枝華))은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스스로 글을 읽고 학문에 힘쓰니 세상에서 많이 칭찬하였다. 임진왜란 때 산골로 피난 갔었다. 하루는 집안 사람들이 그가 간 곳을 몰라 뒤를 밟아 어느 큰 물가에 이르렀는데, 물가에 벗어놓은 옷과 신발을 보고 물에 뜬 시체를 찾아왔다. 옷 속에 이러한 두보의 율시 한 편이 있었다.
임 계신 서울은 구름과 산 밖인데 / 京洛雲山外
소식 전하는 글월 전혀 오지 않네 / 音書靜不來
흰 갈매기 원래 물에서 자는 것이니 / 白鷗元水宿
무슨 일로 남은 슬픔 있으리 / 何事有餘哀
이 역시 회사(懷沙)의 남긴 뜻이 아니겠는가.
○ 조정암(趙靜庵)은 8~9세 때 김한훤(金寒暄 김굉필)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하루는 한훤을 모시고 있는데, 한훤이 고양이가 포육을 훔쳐가는 것을 여종이 잘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여겨 성을 내어 꾸지람하여 마지않았다. 그 포육은 어머니에게 반찬으로 드리려던 것이었다.
정암이 천천히 말하기를,
“선생님의 어버이를 위하는 정성은 진실로 지극합니다만, 고양이는 그런 것을 모르고 여종들 역시 일부러 범한 것은 아닌데, 선생님이 이로써 너무 화를 내시니 좀 온당치 못할까 합니다.”
하였다. 한훤이 놀라고 탄복하며 말하기를,
“네가 어린아이로 내게 와서 공부하는데 내가 도리어 너에게 배웠다.”
하면서, 종일토록 데리고 칭찬하였다고 한다
○ 천연(天然)은 남쪽의 중인데, 키가 8척이요 담력이 뛰어났다. 일찍이 길을 가다가 지리산을 지나는데 곁에 소위 천왕봉 음사(天王峰淫祠)가 있었다. 이전부터 괴이한 영험으로 알려졌으며 지나는 사람이 만약 경건하게 기도하지 않으면 몇 걸음을 못 가서 사람과 말이 쓰러져 죽는다 하니, 지나가는 객들이 무서워 공경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천연이 괴이하고 망령된 것이라 하여 팔을 휘두르며 지나갔는데, 별안간 탔던 말이 땅에 넘어졌다. 천연은 매우 성내어 곧 죽은 말을 가져다 사당 가운데에서 도살하여 피로써 사당의 벽을 더럽히고 다시 주먹을 휘둘러 신상(神像)을 쳐부순 다음 불을 놓아 태우고 갔는데, 그 뒤로는 신의 괴이한 영험이 드디어 없어지고 상인이나 길손들이 편안히 지나게 되었다.
퇴계와 고봉이 모두 시를 지었으며, 당시의 명사들이 화답하여 읊은 이가 매우 많았다. 천연은 일찍부터 고봉을 찾아 《주역》을 배워 매우 뜻을 통달하였다. 퇴계와 고봉이 성리(性理)에 대하여 논변하게 되자 천연은 서신을 가지고 왕래하여서 그 사이의 논변하는 내용을 기억할 수 있었다.무신년(1608, 선조 41)에 내가 일이 있어 신천(信川)에 가니, 천연이 듣고서 소를 타고 왔다. 그때 나이 80여 세였는데, 여전히 건강하였다. 옛 일을 말할 때에는 피곤한 기색이 없이 말을 계속하였다. 베개를 가지런히 하고 며칠 밤을 지내며 듣지 못했던 일들을 많이 들었는데, 참으로 방외(方外)의 기걸이었다. 천연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평소 박사암(朴思庵)상공의 알아줌을 받아 항상 영평(永平) 전장(田庄)에 있었는데, 사암은 날마다 대해 주면서 소일하였다. 무자년(1588, 선조 21) 겨울에 역적 정여립(鄭汝立)이 전주에 있으면서 인마(人馬)를 보내어 글로 천연을 오라고 하였는데, 천연이 거절하고 가지 않으니, 사암이 그가 이름있는 사람을 따르지 않는다고 하여 더욱 귀하게 여겼다.기축년 봄에 역적 정여립이 또 인마를 보내었는데, 서신의 사연이 간곡하며, 또 모시 도포 한 벌을 보내어 뜻을 표하기에 천연이 사암에게 하직하니, 사암은 굳이 머무르라고 하지는 않았다. 천연이 곧 도포를 입고 말을 타고 떠나 하루를 갔는데, 여관에서 밤에 앉아 문득 생각하기를, ‘박 상공이 나를 만류하지 않은 것은 저 사람이 나를 두 번씩이나 오라고 하였으므로 혐의쩍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가면 저 사람과 새로 사귀는 즐거움이 어찌 사암과 비교할 수 있으랴. 그러나 옛 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을 따르는 것은 의리가 아니다.’ 하고, 곧 글을 지어 정여립에게 사례하고 도포를 벗어 돌려보낸 다음 지팡이를 짚고 영평의 전장으로 돌아왔다. 사암이 보고서 이상하게 여기다가, 물어서 실정을 알고 더욱 믿고 사랑하였다. 이 해 겨울에, 정여립의 역모가 드러나니 그때에야 그의 간곡하게 청한 뜻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몸이 오싹해짐을 느낀다.”
고 하였다.
○ 권여장(權汝章 권필)이 궁류시(宮柳詩)한 편으로 인하여 임자년(1612, 광해군 4)에 옥에 갇혔다. 옥문을 나와서도 상처가 아파서 곧 귀양길을 떠나지 못하고 흥인문(興仁門) 밖의 민가에 유숙하였다. 하루는 친구들이 와서 문병을 하고 전송하는데 와서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여장이 누워 있는 방안의 벽을 보니 옛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았다.
때는 바야흐로 청춘이요 날은 저물려는데 / 正是靑春日將暮
복사꽃 어지러이 붉은 비처럼 떨어지누나 / 桃花亂落如紅雨
권하노니 그대여 온종일 진하게 취해 보소 / 勸君終日酩酊醉
술이 많다 해도 유령의 무덤 위엔 이르지 못한다네 / 酒不到劉伶墳上土
대개 이것은 어떤 시골 훈장이 아무렇게나 전에 썼던 것인데, 권(勸) 자를 잘못 권(權) 자로 쓰고, 유영(劉伶)을 잘못 유영(柳聆)으로 써놓았으니, 보는 사람들이 서로 돌아다보며 어쩔 줄을 모르고 놀랐다.
좀 있다가 여장이 목마르다고 하면서 술을 찾아서 큰 그릇으로 하나를 마시고는 그만 눈 감고 마니, 이날이 바로 3월 그믐날이었으며, 창 밖의 풍경이 그 시중의 풍경과 같았다. 조물주가 인간의 생사에 대한 처분을 미리 정해 놓았으니, 슬픈 일이다.
○ 고옥(古玉) 정작(鄭碏)과 석전(石田) 성로(成輅)는 모두 나이 40에 상처하였는데, 재취하지 않고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으며 종신토록 홀아비로 지냈는데, 마치 선정(禪定)에 든 중 같았다. 오직 술을 매우 좋아하여 잔뜩 취하여 나날을 보내었다. 고옥은 서울의 친구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취하지 않고는 돌아오지 않았는데, 그의 시에,
산림이나 성곽 둘 다 의지할 데 없으니 / 山林城郭兩無依
아침에 나가면 언제나 저물어서 취해 돌아온다네 / 朝出常常暮醉歸
라는 것은 그의 사실 행적을 말한 것이다.
석전은 평소 인왕산(仁王山) 아래에 문을 닫고 숨어 있으면서 벼슬을 제수해도 나가지 않았다. 임진왜란 후에는 양화도(楊花渡)강가에 임시 거주하면서, 사위 조영(趙嶸)과 함께 서로 의지하여 지냈는데, 술이 있으면 반드시 취해 쓰러지는 것을 한계로 삼았으며, 하루 아침에 병도 없이 죽었다. 이 두 늙은이는 억제하기 어려운 큰 욕심을 끊으면서도 취향(醉鄕) 밖으로는 뛰어나오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정욕(情慾)과 분수가 앝고 깊음이 있어서 그런 것인가?
○ 윤광계(尹光啓)는 자가 경열(景說), 호는 귤옥(橘屋)인데, 남도의 문사이다. 한평생 시와 술로 즐거움을 삼으며 명예나 이욕에는 담담하였다. 일찍이 벼슬을 따라 도성 안으로 들어와서 인왕봉(仁王峰) 아래에 집을 짓고, 꽃을 심고 약초를 기르면서 조금도 풍진 세상의 기운이 없었다. 날마다 그의 외사촌 정봉(鄭韸)과 이웃에 살며 서로 마주 앉아 술을 들면서 세월을 보냈다. 이웃에 술집이 있는데, 날마다 가져다 마시되 값을 묻지 않으며 술집 주인 역시 언제 갚을 것을 묻지 않았다. 그러다가 남쪽에서 오는 배가 미곡을 싣고 강가에 와 닿으면 그때는 쌀을 나누어 술집으로 보내는데 수효를 계산하지 않았다. 세상일과 인연을 끊고 문밖을 나서지 않았는데, 일찍이 나를 대하여 말하기를,
“서울에 들어온 지 3년 동안에, 친척집 조상(弔喪)으로 의관을 갖추고 나간 적이 겨우 두 번이었다.”
하였다.
○ 옛 친구 정봉(鄭韸)은 자(字)가 상고(尙古)로 사람이 조용하고 깨끗하여 사귈 만하였다. 귤옥(橘屋) 윤광계와 외사촌 형제간이며 일생을 서로 추종하며, 세상을 등진 생활에 날마다 술을 취하도록 마셨다. 윤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상고도 더욱 살 맛을 잃고 병과 술에 잠겨 있다가 나이 겨우 60에 세상을 떠났다.
임종시에 사람을 시켜 술을 가져오게 하고, 술을 가져오니 멀건히 보다가 술잔이 작은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이 늙은이가 한평생 이것만을 좋아했는데, 지금 떠나가면서 어찌 한 방울을 마시겠느냐.”
하며, 다시 명하여 큰 술잔을 가져다 둘을 마시고 쓰러져 베개에 누워 가고 말았다.
○ 김영휘(金永暉)는 자는 국서(國舒)요, 집이 광주(光州) 석보촌(石堡村)에 있었는데, 한평생 문을 닫고 양생(養生)하며 매우 수련(修鍊)하는 방법을 좋아하였다. 집 둘레에 구기(枸杞)를 가득 심고, 그 뿌리와 가지로 좁쌀을 쪄서 밥을 지으며, 그 잎과 열매로 나물을 하고 술을 빚어서 항상 먹고 마시며 때로 뜻이 맞는 친구가 오면 문득 내놓고 권하였다. 재주와 학식이 비범하고 언어가 강개하여 사람들을 감동시킬 만하였다.
내가 소시적에 함께 놀게 되었는데, 미목(眉目)이 환하여 산택(山澤) 간의 높은 선비의 골격이었으며, 술자리에는 반드시 마음을 털어놓고 못할 말이 없이 하면서, 서로 알기가 늦었다고 하였다. 나이 60이 못되어 아무 병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영남 사람 곽재우가 일찍이 말하기를, “우연히 난리 중에 김영휘를 만나서 양생법을 알았다.” 하였다.
○ 최연복(崔連福)은 자는 경응(景膺)인데, 김영휘(金永暉)와 같은 마을에서 사이좋게 지냈다. 사람됨이 중후하고 근신하여 일생동안 남의 잘못을 말하지 않았으며, 교제하는 사람은 모두 한 고을의 착한 선비들이었다. 종신토록 《대학》 한 권을 읽었는데, 집주(集註)와 《혹문(或問)》을 아울러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문을 닫고 종적을 숨기다가 이 세상을 떠났다. 이런 사람들은 생전 산골에 거주하여 이름이 알려지지 않으니, 슬픈 일이다.
○ 홍명원(洪命元)은 자는 낙부(樂夫)요, 익녕(益寧) 홍 정승의 종질(從姪)이다. 기국과 도량이 크고 단정하며 재주와 지혜가 민첩하고 문장도 누구에게 못지 않으니, 사람들이 재상감이라고 기대하였다. 여러 번 주부(州府)를 맡았는데, 치적이 매우 드러났으며 계해년(1623, 인조 1) 초에 경기 감사가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죽었다.
○ 송방조(宋邦祚)는 자는 영숙(永叔)이다. 성질이 준엄하고 결백하여 악을 원수처럼 미워하였다. 혼조(昏朝 광해군) 때에 요사한 무리들이 조정에 가득하니, 사람들이 모두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머리를 보전하지 못할 것처럼 여겼다. 일찍이 우리들 몇 명과 함께 모여 이야기하는데, 좌중의 담화가 시사(時事)에 모두 근심되는 듯 두려워하였으나, 영숙이 혼자서 분연히 말하기를,
“하늘이 정해지면 사람을 이길 수도 있는데, 사람의 도리가 저렇게 없어졌으니, 여기에 어찌 천도의 극단이 없겠는가. 제군들은 다만 고요히 기다려 보라. 나의 말이 자연 맞게 될 것이다.”
하였다. 내가 일찍이 그 말을 들었는데, 이때에 와서 깊이 그의 앞일을 아는 지혜를 탄복하였다. 영숙이 서장관으로 북경에 갈 때에 역관을 구속하여 그 수족을 함부로 놀리지 못하게 하니, 역관이 매우 괴로워하였는데, 도중에 갑자기 죽었다. 혹은 그에게 독살을 당하였는가 의심한다고 한다.
○ 양응락(梁應洛)은 자는 심원(深源)인데, 문장과 글씨에 모두 뛰어났으며 장원 급제에 뽑혔지만 벼슬은 낭관에 그치고 세상을 떠났다. 젊었을 때 조인보(趙仁甫)와 서로 친하여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도 서로 떠나는 일이 없었다. 사람됨이 중후하고 말이 더듬거리는 듯하였지만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여, 스스로 꿋꿋하여 흔들리지 않고 섞여도 물들지 않는 지조가 있었다. 계곡(谿谷) 장지국(張持國 장유)이 그 묘도문(墓道文)을 지을 적에 그의 평생을 자세히 서술하였다고 한다.
○ 이경탁(李慶倬)은 자는 덕여(德餘)인데, 나보다 열 살이 위이다. 일찍이 집안 대대로 교분이 있는 관계로 아우처럼 나를 보아 정리가 친형제나 같았다. 풍도가 넓으며 재주가 뛰어나 한때 교제하는 이들이 모두 원대한 지위를 기대하였다. 광해군 때에 관서 감사 막하에 좌관(佐官)으로 나가 있으면서 몸을 많이 축내었는데, 하루아침에 객지에서 세상을 떠나니 나이 겨우 40 남짓 되었다. 나는 외로운 신세로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하여 이 친구만이 기개가 서로 통하여 종시 막역한 심정이었는데, 존망을 달리한 지 이미 수십 년이 되었다. 이를 생각할 때마다 서글프게 가슴이 아프지 않은 적이 없다.
○ 나는 오랫동안 고질병으로 온갖 일을 다 폐하고, 날마다 피곤하고 수척하여 스스로 견디지 못할 형편이었는데, 좀 뜸하여 우연히 당(唐) 나라 사람의 시집을 가져다 베개에 엎드려 뒤져보니, 한가하고 바쁘며 즐거워하고 괴로워하는 정경이 감발할 만한 것이 있었고, 또 옛 사람들이 나보다 먼저 손을 댄 것을 기뻐하면서 부질없게 약간의 경구(警句)를 기록하여, 때로 혼자 읊으면서 소일하기도 하였다.
○ 청련(靑蓮 이태백(李太白))ㆍ소릉(少陵 두자미(杜子美))ㆍ창려(昌黎 한퇴지(韓退之)) 3대가는 그들의 지은 글이 너무 많아서, 따다 쓰기에 합당하지 못하고, 그 밖의 명가(名家)들의 여러 작품은 그 내용이 화려하려 내가 병중에 생각하는 것과는 서로 가깝지 않고, 귀머거리와 장님이 소리와 빛의 진정한 지경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 같기 때문에, 좋고 나쁜 것을 논할 것 없이 모두 버리고 적지 않는다. 대개 이 《만록(漫錄)》은 남에게 보이려는 것이 아니요, 다만 내가 오랫동안 병으로 의지할 데가 없어 때로 혹 들쳐보며 번민한 생각을 씻게 된다면 반드시 청량산(淸凉散)을 한 번 복용하는 것보다 못하지 않을 것이다.
계미년 여름에 기옹(畸翁)이 청정헌(淸靖軒)에서 쓴다.


[주D-001]진북계(陳北溪)의 설명 : 북계는 송대(宋代)의 학자 진순(陳淳). 대학 첫머리 명명덕(明明德) 소주에서 북계 진씨는 “사람은 나면서 천지(天地)의 이(理)를 가지고 또 천지의 기(氣)를 가졌는데, 이가 기와 합하니 이렇게 하여 허영(虛靈)한 것이다.” 하였다.
[주D-002]을사년 : 조선조 인종 원년(1545)을 말함. 이해 7월에 을사사화가 일어나 윤임(尹任) 등 많은 인물들이 사형 또는 유배되었음.
[주D-003]한혈구(汗血駒) : 하루 천리를 간다는 좋은 말의 별칭이다. 옛날 중국 한(漢) 나라 장군 이광리(李廣利)가 대완왕(大宛王)의 머리를 베고 그가 타던 좋은 말을 얻었는데, 땀이 피 흐르듯 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데서 유래함.
[주D-004]천고(天鼓) : 별 이름. 전란이 일어날 것을 예보하여 뇌성 같은 큰 소리가 들린다고 함.
[주D-005]이씨 집 형제 : 이발(李潑) · 이길(李洁)의 형제를 말한다. 이들은 율곡(栗谷)ㆍ우계(牛溪)를 배척하였기 때문에 중봉이 절교한 것이며, 이발은 뒤에 정여립(鄭汝立)의 역모(逆謀) 관계로 사형에 처해졌다.
[주D-006]여마동(呂馬童) : 한(漢) 나라 기사마(騎司馬). 항우의 옛날 친구였는데, 항우가 패하여 달아날 때, 여마동을 보고, “한 나라에서 내 머리를 1천 금과 1만 호의 고을로 상을 걸고 구한다고 하니, 내가 그대를 위하여 덕을 베풀겠다.” 하며, 스스로 목 찔러 죽었다고 한다.
[주D-007]전천추(田千秋) : 한 무제(漢武帝) 때의 사람. 위태자(衛太子)가 모함으로 곤경에 빠진 것을 무제에게 호소하여 구해 주고, 후에 정승까지 되었다. 소제(昭帝) 때에는 노년으로 특명을 얻어 조회 때에 작은 수레를 타고 궁궐에 출입하였으므로 거정승(車政丞)의 칭호를 얻었다.
[주D-008]통운(通韻) : 평(平)ㆍ상(上)ㆍ거(去)ㆍ입(入)의 4성(聲)으로 구별하여 모든 글자를 발음에 따라서 동(東)ㆍ동(冬)ㆍ강(江)ㆍ지(支) 이하 1백여 자의 아래에 나누어 두고 발음이 비슷한 글자는 서로 통용하는 것을 통운 또는 협음이라고 한다. 운서(韻書)에서는 협(叶)ㆍ통(通) 자로 표시하였다.
[주D-009]후파(侯芭) : 중국 한(漢) 나라 양웅(揚雄)의 제자. 양웅이 《법언(法言)》을 지어 《논어(論語)》에 비기고, 태현경을 지어 주역에 비겼는데 후파가 항상 같이 거처하면서 《태현경(太玄經)》과 《법언》을 배웠다.
[주D-010]정강성(鄭康成) : 정강성(鄭康成)은 동한(東漢)시대의 경학가인 정현(鄭玄)인데, 경서 주해를 많이 하였다.
[주D-011]침갱(針羹)과 세장(洗臟) : 요진(姚秦) 때 구마라즙(鳩摩羅什)이란 중이 바늘로서 국을 만든 일이 있다고 하고, 당나라 중 도증(圖證)은 양지수(楊枝水)로서 사람의 장부병(藏腑病)을 씻어 냈다 한다.
[주D-012]사람이 …… 알았다 : 출전(出典)과 의미 미상.
[주D-013]금주(金注) : 《장자(莊子)》에, “도박하는 사람이 기와[瓦] 등속으로 대놓고 하면 지혜가 밝고, 금(金)을 대놓고 하면 지혜가 현혹되어 도리어 어두워진다.” 하였다.
[주D-014]적공(翟公)이 대문에 …… 붙인 까닭이요 : 한 문제(漢文帝) 때 사람. 정위(廷尉)가 되자 사람들이 모여들어 비위를 맞추다가, 벼슬을 그만두니 한 사람도 찾아오는 자가 없었는데, 다시 정위가 되니 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적공은 분개하여 아래와 같은 글귀를 크게 써서 문에 붙였다. “한 번 죽고 한 번 사는 데에서 친구의 정을 알게 되고, 한 번 부(富)하고 한 번 가난한 데에서 친구의 모습을 알게 되고, 한 번 귀하고 한 번 천한 데에서는 친구의 정을 알게 된다.” 하였다.
[주D-015]회사(懷沙) : 전국(戰國) 초(楚) 나라의 굴원(屈原)이 지은 문장의 이름. 굴원이 쫓겨난 뒤에 차라리 물에 빠져 죽어 송장을 모래사장에 드러내기를 생각하였다는 데서 나옴.
[주D-016]유영(劉伶) : 진(晉) 나라 패국(沛國) 사람. 천성이 술을 매우 좋아하여 늘 술 한 병을 가지고 다녔고, 사람에게 삽을 들고 따라다니도록 하면서 말하기를, “죽으면 곧 나를 묻으라.” 하였음.

동계집 제1권
 칠언율시(七言律詩)
감사(監司) 곽재우(郭再祐)를 애도하다.


하늘이 재앙을 내린 그 해에 먼저 의병을 모아서 / 天降當年首義師
우리나라로 하여금 오랑캐 땅이 됨을 면케 했네 / 能令東土免侏離
공을 논하는 것이 분모 한 뒤에 있지 않았고 / 論功不在分茅後
벽곡은 허탄한 것을 사모한 때문만이 아니었네 / 辟穀非因慕誕爲
차자 하나로 임금께 고하여 국시를 밝히고 / 一箚告君昭國是
한마디 말로 세상을 경동하여 윤리를 진작시켰네 / 片言驚世振民彝
이제는 다시 외적을 막아 줄 장성이 있지 않으니 / 如今無復長城在
지식이 있는 자는 속절없이 진췌시만 읊노라 / 識者空吟殄瘁詩


 

[주D-001]분모(分茅) : 토지(土地)를 분할하여 공신(功臣)에게 줄 때 의식적인 절차로 하얀 띠풀[白茅] 속에다 질흙을 붙여서 주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토지와 권력을 나누어 준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주D-002]벽곡(辟穀) : 도교(道敎)에서 말하는 일종의 수련술(修鍊術)이다. 장량(張良)이 한(漢)나라가 평정된 뒤에 고조(高祖)에게, 자신이 세 치밖에 안 되는 혀를 가지고 제왕의 스승이 되어 만호(萬戶)의 봉토(封土)를 받고 제후의 대열에 서게 된 것으로 만족한다고 말하고, 적송자(赤松子)를 따라서 놀기 위하여 오곡을 먹지 않고[辟穀] 도인법(導引法)을 익혀 몸을 가볍게 하였다고 한다. 여기에서 인용한 뜻은 광해군(光海君) 당시에 곽재우에게 영남 절도사(嶺南節度使)와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를 제수하였으나 모두 사퇴한 것을 두고 묘사한 말이다. 《史記 卷55 留侯世家》
[주D-003]진췌시(殄瘁詩) : 이 시는 《시경(詩經)》 대아(大雅) 첨앙장(瞻卬章)을 말하는데, 정치를 제대로 하지 않는 왕을 풍자하는 내용이다. 그 가운데, “선인(善人)이 가고 없으니 나라가 끊기고 병들리라.[人之云亡 邦國殄瘁]”라는 구절이 있으므로 진췌시라고 부르기도 한다.

 

동계집 제1권
 칠언율시(七言律詩)
감사(監司) 곽재우(郭再祐)를 애도하다.


하늘이 재앙을 내린 그 해에 먼저 의병을 모아서 / 天降當年首義師
우리나라로 하여금 오랑캐 땅이 됨을 면케 했네 / 能令東土免侏離
공을 논하는 것이 분모 한 뒤에 있지 않았고 / 論功不在分茅後
벽곡은 허탄한 것을 사모한 때문만이 아니었네 / 辟穀非因慕誕爲
차자 하나로 임금께 고하여 국시를 밝히고 / 一箚告君昭國是
한마디 말로 세상을 경동하여 윤리를 진작시켰네 / 片言驚世振民彝
이제는 다시 외적을 막아 줄 장성이 있지 않으니 / 如今無復長城在
지식이 있는 자는 속절없이 진췌시만 읊노라 / 識者空吟殄瘁詩


[주D-001]분모(分茅) : 토지(土地)를 분할하여 공신(功臣)에게 줄 때 의식적인 절차로 하얀 띠풀[白茅] 속에다 질흙을 붙여서 주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토지와 권력을 나누어 준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주D-002]벽곡(辟穀) : 도교(道敎)에서 말하는 일종의 수련술(修鍊術)이다. 장량(張良)이 한(漢)나라가 평정된 뒤에 고조(高祖)에게, 자신이 세 치밖에 안 되는 혀를 가지고 제왕의 스승이 되어 만호(萬戶)의 봉토(封土)를 받고 제후의 대열에 서게 된 것으로 만족한다고 말하고, 적송자(赤松子)를 따라서 놀기 위하여 오곡을 먹지 않고[辟穀] 도인법(導引法)을 익혀 몸을 가볍게 하였다고 한다. 여기에서 인용한 뜻은 광해군(光海君) 당시에 곽재우에게 영남 절도사(嶺南節度使)와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를 제수하였으나 모두 사퇴한 것을 두고 묘사한 말이다. 《史記 卷55 留侯世家》
[주D-003]진췌시(殄瘁詩) : 이 시는 《시경(詩經)》 대아(大雅) 첨앙장(瞻卬章)을 말하는데, 정치를 제대로 하지 않는 왕을 풍자하는 내용이다. 그 가운데, “선인(善人)이 가고 없으니 나라가 끊기고 병들리라.[人之云亡 邦國殄瘁]”라는 구절이 있으므로 진췌시라고 부르기도 한다.

상촌선생집 제56권
 지(志)
여러 장사들이 왜란 초에 무너져 패한 기록[諸將士難初陷敗志]


적병이 처음 부산에 이르렀을 때 망을 보던 관리가 대략 4백여 척쯤 된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다가 적이 부산을 함락하고 잇따라 그 지역 일대의 진보(鎭堡)를 함락하자 여러 고을에서 멀리 바라만 보고 저절로 무너져 그 뒤로는 망을 보며 정탐하는 일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적의 대군이 후속 부대를 계속 보내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바다를 덮으며 왔는데도 변장(邊將)이 이를 깨닫지 못한 채 그저 처음 보고해 온 것에 의거하여 늘 적의 병력은 단지 4백 척에 불과하다고 말하였다. 우순찰사(右巡察使) 김성일(金誠一)은 말하기를 “적의 배가 4백 척이 채 되지 않는데 한 척에 수십 명밖에 싣지 못하는 실정이고 보면 다 합해도 1만 명을 넘지 않을 것이다.” 하였는데, 성일의 이러한 주장이 조정에 알려지자 조정에서도 그렇게만 여겼다.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이 출정할 때 단지 군관(軍官) 및 사수(射手) 60여 인을 이끌고 가면서 내려가는 도중에 군사 4천여 명을 거두워 모았다. 4월 24일 상주(尙州)에 도착했는데, 이일의 생각에 우리 군사가 오합지졸인 만큼 마땅히 습진(習陣)시켜 기다려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진을 미처 반도 펼치기 전에 적이 갑자기 이르렀으므로 별수없이 대진(對陣)하였으나, 교전하기도 전에 적이 먼저 포를 쏘아대 철환(鐵丸)이 비오듯 쏟아졌으므로 아군이 대적하지 못하였는데, 이에 적이 함성을 지르며 진을 무너뜨리자 우리 군사가 궤멸되면서 사상자가 무더기로 발생하였다. 이 와중에서 이일만 단기(單騎)로 몸을 빼어 달아나고 종사관(從事官) 윤섬(尹暹)ㆍ박지(朴篪) 등은 모두 죽었다.
조정이 이일을 보낸 뒤 얼마 되지 않아 날로 급하게 변보(邊報)가 들어오기를 “적이 이미 내지(內地)로 쳐들어오고 있는데 장차 조령(鳥嶺)을 넘으려 한다.” 하자, 도성 인심이 어수선해지면서 피난갈 준비들을 하느라 부산하였다. 이에 또 신립(申砬)을 도순변사(都巡邊使)로 삼은 뒤, 더욱 도성 내의 무사와 재관(材官)을 동원하고 삼의사(三醫司 내의원(內醫院)ㆍ전의감(典醫監)ㆍ혜민서(惠民署)) 한량인(閑良人) 중에서 활을 쏠 줄 아는 자까지 뽑아 모두 그에게 소속시키는 한편, 조관(朝官)으로 하여금 각각 전마(戰馬) 1필씩을 내어 조력하게 하고, 무고(武庫)의 군기(軍器)를 꺼내 주어 그가 쓰게끔 하였다. 이때 징집된 제도(諸道)의 군사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나 신립이 급히 내려가면서 단지 인근 고을의 군사만 이끌고 갔다.
4월 26일 충주(忠州)에 도착했을 때 병력이 겨우 수천 명밖에 안 되었는데 이 군사로 단월역(丹月驛) 근방의 언덕에 진을 쳤다. 이때 이일을 만났는데 이일로 선봉을 삼아 그로 하여금 공적을 세워 보답하게 하였다. 혹 말하기를 “적의 세력이 지극히 성대하니 그 예봉에 직접 맞서기는 어렵다. 조령에 나아가 협곡 안에 군사를 매복하고 적이 골짜기 입구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우리가 양 쪽 언덕에 의거하여 높은 곳에서 활을 쏘면 승리를 거둘 수 있다.” 하였으나, 신립은 말하기를 “그들은 보병이고 우리는 기병이니 넓은 들판으로 끌어들여 철기(鐵騎)로 짓밟아버리면 성공하지 못할 리가 없다.” 하였다.
그러나 적은 이미 조령의 길을 거쳐 몰래 군사를 잠입시켜 충주 성중에 이르렀는데도 신립은 이를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28일에 적이 민가를 불태운 뒤에야 적이 이미 조령을 넘어왔다는 것을 우리 군사가 알고는 간담이 떨어지도록 모두 경악하며 두려워하였다. 이윽고 바라보니 왜적들이 조령의 큰 길을 통해 산을 뒤덮으며 내려오는데 칼빛이 번쩍번쩍하였다. 신립이 군사들을 지휘하여 차례로 진격시켰으나 마을 길이 비좁은데다 논밭이 많아 말을 치달리기에 불편하여 머뭇거릴 즈음에 적이 우리 군사의 좌측으로 돌아 나와 동쪽과 서쪽에서 끼고 공격해 오는 바람에 우리 군대가 크게 어지러워지면서 적에게 난도질을 당한 결과 시체가 산처럼 쌓였고 군자(軍資)와 군기(軍器)가 일시에 모두 결딴나고 말았다. 신립이 단신으로 말을 타고 강 언덕에 이르렀는데 적이 군대를 풀어 추격하자 신립이 물에 몸을 던져 죽었으며 김여물(金汝岉)도 물 속으로 투신하였다.
신립의 군대가 패하자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파천(播遷)하였는데, 우상 이양원(李陽元)을 남겨두어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삼아 경성을 지키게 하였으며,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과 부원수(副元帥) 신각(申恪)으로 하여금 대군을 이끌고 한강에 나아가 진을 치게 하였다. 5월 2일 적의 선발 부대가 이르자 대군이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졌다. 대가가 성을 빠져 나간 뒤 도성 백성들이 서로들 도적떼로 변해 궁실을 불태우고 재물을 노략질하는 등 도성 안이 크게 어지러워지자 이양원이 지키지 못할 줄을 알고 양주(楊州)로 달아났는데 성문도 폐쇄하지 않은 상태였다. 적이 처음 이르렀을 때 성문이 열려져 있고 사마(士馬)의 흔적이 전연 없이 조용한 것을 보고는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감히 들어오지 못하다가 3일이 되어서야 성이 실제로 텅 빈 것을 알고는 마침내 도성에 들어왔다.
남도 절도사(南道節度使) 신할(申硈)이 변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대가가 머문 곳을 뒤따라 오다가 송경(松京)에서 배알하자, 상이 이를 인하여 신할을 방어사로 삼아 임진(臨津)에 머물러 진을 치게 하였다. 또 한응인(韓應寅)을 제도 도순찰사(諸道都巡察使)로 삼아 김명원을 대신해서 임진에 나아가 주둔하게 하고, 평안도 강변의 토병(土兵) 8백 명을 동원하여 성세(聲勢)를 돕게 하였다. 당시 이양원(李陽元)ㆍ이일(李鎰)ㆍ신각(申恪)ㆍ김우고(金友皐) 등은 대탄(大灘)에 있고, 한응인ㆍ권징(權徵)ㆍ신할ㆍ이천(李薦)ㆍ이빈(李薲)ㆍ유극량(劉克良)ㆍ변기(邊磯) 등은 임진에 있었는데, 5월 18일에 회전(會戰)하기로 약속하였다.
이때 의논하는 이가 말하기를 “우리 군사가 많다고는 하나 거의 대부분이 약졸(弱卒)이고, 믿을 수 있는 것은 강변의 토병뿐인데 토병이 멀리서 오느라고 지쳐 있으니, 며칠쯤 늦추어 그들이 휴식을 취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거사한다면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하였으나, 여러 장수들이 듣지 않았다. 그리하여 17일 야음을 틈타 군사를 도하(渡河)시켰는데, 좌위장(左衛將) 이천이 상류 강 언덕에서 적군을 만나 급히 치다 패배를 당하였으며, 유극량도 죽고 신할도 패몰(敗沒)한 가운데 적이 마침내 임진을 건너오게 되었다.
조정이 제도(諸道)의 군사를 동원하여 들어와 응원토록 하니, 전라 순찰사(全羅巡察使) 이광(李洸)이 그 도의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 및 조방장(助防將) 이지시(李之詩)ㆍ백광언(白光彦) 등과 함께 전라도 군사를 이끌고 오고, 충청 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이 그 도의 방어사 이옥(李沃) 및 절도사(節度使) 신익(申翌) 등과 함께 충청도 군사를 이끌고 왔는데 무리가 수만이었으며, 경상 순찰사 김수(金睟)는 사졸을 잃고 단지 군관 30여 인만 이끌고 왔다. 이에 약속한 대로 6월 4일에 각자 길을 나누어 진격해 양천(陽川) 후포(後浦)에서 집결하였는데, 백광언이 선봉장으로 용인(龍仁)에서 적을 만나 창졸간에 교전하다가 패하여 전사하면서 대군이 한꺼번에 산이 무너지고 바닷물이 빠지듯 저절로 궤멸되어 어떻게 막을 도리가 없었으며, 그 결과 군기(軍器)와 치중(輜重)을 몽땅 적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그런데 뒤에 듣건대 처음에 왔던 적은 3명뿐이었고 그 뒤에 온 적도 겨우 1백 명에 불과했다고 하는데, 양도(兩道)의 수만 군사가 백 명의 적을 보고 혼비백산하여 마치 폭풍에 나뭇잎 떨어지듯 하였으니, 이는 옛날에 보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3도 군사가 모이게 된 것부터가 그러하였다. 김수는 이미 패망한 뒤끝이라서 겨우 자기 몸만 왔고, 윤국형은 원래 장재(將才)가 못 되었다. 그리고 이광은 변란 소식을 듣고서도 난을 구하러 달려갈 뜻이 없었는데, 본도에 있을 때 광주 목사(光州牧使) 정윤우(丁允祐)가 이광을 찾아가서 임금을 위해 충성을 다해야 하는 의리를 극력 말했어도 따르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군대를 동원하는 명이 내려오고 나서야 비로소 급히 서둘러 군사를 모은 뒤 공주(公州)까지 갔다가 경성을 지키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는 곧바로 군대를 해산시켰는데, 이때에 이르러 재차 기병(起兵)했다가 재차 무너졌으므로 조야(朝野)가 모두 이광을 죄인으로 여겼다.
하여튼 이로부터는 나라에 방어하는 자가 없게 되어 적이 위세를 한껏 떨치면서 마치 무인지경을 달리듯 팔로(八路)를 석권하였다. 그리고 각 두목들을 제도(諸道)에 나누어 보내고 수가(秀家) 자신은 경성에 주둔하였는데, 부산에서 평양에 이르기까지 각 사(舍)마다 보루를 쌓아 방벽을 삼았다. 이때 거느린 적의 무리가 대략 25~26만쯤 되었다고 하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정탐을 잘하지 못해 실제로 몇만이 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한편 청정(淸正)은 함경도에 들어가 왕자 임해군(臨海君)ㆍ순화군(順和君) 및 수행한 재신(宰臣) 김귀영(金貴榮)ㆍ황정욱(黃廷彧)ㆍ황혁(黃赫) 등을 사로잡아 구류시켰고, 기보(畿輔)의 적은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을 파헤치는 등 국세가 미약한 탓으로 신인(神人)에게 비통함을 안겨 주었는데, 다행히도 평양으로 진출한 적의 경우만은 순안(順安) 일보 직전에서 멈추고 진격하지 않았다.
이 와중에서 이광(李洸)의 직책이 깎이고 권율(權慄)이 그를 대신한 뒤로 정기(旌旗)가 성벽 위에 힘차게 나부끼고 옛 모습이 일신되었는데, 권율이 군사를 이끌고 북상(北上)하다가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대첩을 거두었다. 초토사(招討使) 이정암(李廷馣)은 연안성(延安城)을 지키면서 성을 포위한 적을 격퇴하였다. 전라 수사(全羅水使) 이순신(李舜臣)ㆍ이억기(李億棋) 등은 여러 차례에 걸쳐 수군으로 적을 꺾으며 전승을 거두었다. 의병 역시 각처에서 다투어 일어나 관군에 호응하였다. 그 중에서도 경상도의 김면(金㴐)ㆍ곽재우(郭再佑)와 전라도의 고경명(高敬命)ㆍ김천일(金千鎰)과 충청도의 조헌(趙憲)ㆍ영규(靈圭)가 더욱 유명하였으며, 기타 각 고을에서 일어난 소규모의 의병들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는데, 나라의 명맥이 이들 덕분에 보존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는 중국 조정에서 원군을 내보냄으로써 위태로운 나라를 구하는 공적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