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 정월 갑인일에 혜성이 규성(奎星)에 나타났다.
○ 첨의찬성사로 치사한 오윤부(伍允孚)가 졸하였다. 윤부는 대대로 태사국(太史局)의 관원을 지냈다. 천문을 보고 점치기를 잘하여 밤새도록 잠자지 않았으며, 비록 몹시 춥고 혹독한 더위에도 앓지 않는 한 보지 않는 적이 없었다. 하룻 저녁에는 별이 천준원(天樽垣)을 침범하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반드시 술 잘 먹는 사람이 사신으로 올 것이다.”하고, 어떤 날에는 별이 여림원(女林垣)을 침범하는 것을 보고, “반드시 사신이 와서 처녀를 선발할 것이다.”하였는데, 모두 맞혔다. 또 점을 잘 쳤는데, 원 나라 세조가 불러서 시험한 후에 더욱 이름이 났다. 세조가 직접 내안(乃顔)을 정벌할 적에 왕이 군사를 인솔하고 정벌을 도우려 하여 행군하여 평양에 이르러 먼저 유비(柳庇)를 보냈다. 보내고 나서 이내 윤부에게 이를 점치게 하니, 대답하기를,“아무 날에는 유비가 반드시 돌아올 것이며, 전하께서도 여기서 되돌아 가시겠습니다.”하였다. 그 시기에 이르러 왕이 성용전(聖容殿) 뒷산에 올라 북쪽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윤부에게 농담으로 이르기를,“네 점이 잘못되지 않았느냐?”하고, 좌우로 하여금 결박지으라 하니, 윤부가 나와서 아뢰기를,“오늘 해가 아직 저물지 않았으니 조금만 더 기다리소서.”하였다. 조금 있더니 역말이 먼지를 날리며 오는데, 과연 유비였다. 비가 와서 왕을 뵙고,“황제께서 환군하라는 조서를 내렸습니다.”하니, 왕이 더욱 그를 믿었다. 윤부는 성품이 매우 정직하였고, 나랏일을 자기의 걱정처럼 생각하여 재변이 있을 적마다 들어가 고하였는데, 말이 매우 간절하고 지극하였다. 시국 문제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으면 곧 들어가 간하고, 듣지 않으면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굳세게 간하여 반드시 관철되기를 꾀하였다. 일찍이 봉은사(奉恩寺)에 있는 태조 진전(太組眞殿)에 초하루를 보고하는 제사를 지냈는데, 잔을 올리고 절한 후 울며 고하기를,“태조이시어, 태조이시어, 당신의 나랏일이 그릇되고 있습니다.”하고, 이내 흐느껴 울며 스스로를 억제하지 못하였으니, 그의 정성이 이와 같았다. 사람됨이 얼굴이 못생기고 말과 웃음이 적었다. 안평공주가 일찍이 왕에게 말하기를,“어째서 이 사람을 자주 불러들입니까?”하니, 왕이 이르기를,“윤부는 나의
최호(崔浩)요, 얼굴은 비록 못생겼으나 버릴 수 없는 사람이요.”하였다. 뒤에는 공주가 자못 태도를 고쳐 예우하였다. 일찍이 스스로 천문(天文)을 그려 바쳤는데, 천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 이것으로 공부하였다.
○ 주와 군을 합병했던 것을 다시 분리시켰다.
○ 탑찰아 등이 오연(吳演)ㆍ김원계(金元桂)등 10명을 섬으로 귀양보내고, 송인(宋璘)은 석방했다.
○ 김심(金深)을 원 나라에 보내어, 사신을 보내어 와서 오기의 일당을 처리한 것에 대하여 표문을 올려 사례하고, 또 전왕의 환국을 요청하였다.
○ 이지저(李之氐)를 도첨의찬성사로, 민훤(閔萱)을 자의 도첨의찬성사(咨議都僉議贊成事)로, 정해(鄭瑎)를 판삼사사로, 이혼(李混)을 판밀직사사로, 권영(權永)을 밀직사사로, 김심을 지밀직사사로, 고세(高世)를 동지밀직사사로, 박전(朴顓)을 밀직부사로 삼았다.
○ 2월에 중찬 송분(宋玢)의 아들 유(瑈)를 순군옥에 가두었다. 과거에 송분이 전왕을 폐위하고, 또 공주를 개가시킬 것을 획책하다가 일을 이루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막내딸을 황제의 유모의 아들에게 시집보내어 후원을 얻으려 하였다. 사위가 원 나라에서 돈을 보내어 왕에게 향연을 베푸는데, 재신과 추신이 다 모였다. 유가 술을 따라서 돌리는데, 중찬 홍자번(洪子藩)이 취했다 하여 사양하고 마시지 않으니, 유가 노하여 불손한 말을 하였다. 자번도 역시 노하여 그만 자리에서 일어서니, 유가 큰 소리로 말하기를, “자번이 복상(復相 정승자리에 복귀하는 것)한 것을 황제께서 어찌 아시겠는가." 하였다. 재상이 왕에게 고하여 그를 가두고, 자번도 노여워하여 수일 동안 정사를 보지 않았다.
○ 황제가 도고달(都古達)과 야선첩목아(也先帖木兒)를 보내어 감형하는 조서를 반포하였다.
○ 다시 황포(黃袍)와 황산(黃傘)을 사용하였다. 탑찰아(塔察兒)와 왕약(王約)이 돌아갈 때에, 왕에게 말하기를, “황포와 황산에 대하여 활리길사는 비록 다른 의견을 말했으나 조정에서 분명히 금한 바 없으니, 그래도 다시 사용할 수 있다." 하니, 왕이 드디어 다시 사용하였다.
○ 내료 전 호군 송균(宋均)을 순군옥에 가두었다. 과거에 왕이 홍자번의 말을 따라 표문을 올려 전왕을 환국하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전 밀직부사 송방영(宋邦英)과 전 승지 송인(宋璘) 등이 전왕을 미워하여 왕을 설득하여 외오문자(畏吾文字)로 글을 써서 황제에게 바쳐 이를 저지하게 하고, 드디어 흰 종이 12폭(幅)에다 금보(金寶 옥쇄)를 찍어 송균에게 주고, 왕이 황제에게 조회하러 들어가기를 요청하는 것을 핑계대고 연경에 가서 전왕을 헐뜯을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적당히 써서 황제에게 바치게 하였다. 그런데 마침 황제가 왕이 들어오겠다는 청을 허락하지 않아 균이 그 계책을 실행하지 못하고, 드디어 그 종이를 환관 복수(福壽)의 집에 간직해 두고 돌아왔었다. 뒤에 낭장 이승우(李承雨)가 그 종이를 싸가지고 돌아오는데, 마침 탑찰아가 돌아가다가 도중에서 그를 만나 이것을 빼앗고 승우에게 두 폭을 도로 주며 말하기를, “네가 돌아가거든 이것을 너희 나라 재상에게 보이라." 하였다. 그리고 즉시 나머지를 중서성(中書省)에 바치며 또 송균의 모략을 말하니, 중서성의 관원이 말하기를, “오기(吳祁)와 석천보(石天補) 이외에도 이런 협잡질을 하는 자가 있느냐?" 하였다. 승우가 돌아와 이 사실을 재신과 추신에게 고하고, 재신과 추신이 다시 왕에게 아뢰어 이들을 가둔 것이다.
○ 3월에 이현(梨峴)의 새 궁궐이 준공되었다. 왕이 행차하여 이를 관람한 후 연회를 베풀고, 호작관(護作官)에게는 각각 백금 1근씩을 주며, 공인(工人)들에게는 술과 음식을 주었다.
○ 왕이 송균의 석방을 명하였으나 재신과 추신이 듣지 아니하므로, 위사(衛士)를 시켜 균을 불러 궁문에 이르게 하여 석방하였다.
○ 원 나라에서 병부상서 백백(伯伯)과 유학사(儒學士)를 보내왔다. 왕이 행성에서 맞아들이니, 백백이 황제의 유지(諭旨)를 전달하고 묻기를, “왕은 일찍이 표문을 올려 전왕의 귀환을 청한 일이 있는가?" 하였다. 왕이 "그렇다." 하니, 백백은 "또 외오문자로 저지하기를 청한 사실이 있는가?" 하고 물었다. 왕이 "모른다." 하니, 백백이 재상들을 돌아보며 보증을 서라고 부탁하고, 왕이 말한 것을 글로 써서 자문(咨文)을 만들었다. 드디어 송균을 잡아다가 묻기를, “너는 금보를 찍은 종이를 사용해서 무슨 짓을 하려 했느냐?"고 물으니, 균이 말하기를, “왕이 균을 시켜 들어가 황제를 뵙기를 청하셨으니, 오직 이 한 가지 일뿐입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누가 외오문자를 썼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호군 전혜(田惠)입니다." 하였다. 이것을 전혜에게 물으니, 혜는 감히 숨기지 못했다. 백백이 곧 말하기를, “중서성에서 전왕을 돌려 보내 달라는 표를 올리려 하는데 마침 외오문자가 나왔다. 그런데 서명도 없고 인장도 없으므로 중서성 관원이 이를 의심하여 중지하고 아뢰지 않았다." 하였다. 왕이 궁으로 돌아오자, 송방영과 송인 등이 등이 들어와 왕을 설득하니, 왕이 승지 김자흥(金子興)으로 하여금 외오문자의 초본을 가지고 가서 사신에게 보이게 하고, 말하기를, “내가 갑자기 질문을 받고 그만 모른다고 대답하였으나, 돌아와서 이 글을 상자에서 찾고보니 다만 잊었을 뿐이요 사실은 내가 알고 있었던 일이오."라고 하라 했다. 방영 등은 자흥이 혹 제대로 전달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그의 일당인 한신(韓愼)을 보내어 같이 가게 하였다. 백백이 노하여 자흥에게 묻기를, “왕이 내게 초본을 줄 때에, 왕의 곁에 누가 있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송방영과 송인과 한신이 좌우에 있었습니다." 하였다. 백백이 자흥으로 하여금 그 말을 쓰게 해서 증거물로 만들고, 또 재상들에게 묻기를, “왕이 행성에서 나와 말한 것이 있지 않았느냐?" 하니, 재상들이 전에 말한 대로 대답하였는데 백백이 또 써서 증거물로 삼았다. 왕이 연회를 베풀고 사신들을 청하니, 사양하고 마침내 왕과 함께 방영 등을 행성에서 국문하였다. 왕이 말을 하여 그들을 두둔하려 하니, 백백이 말하기를, “이런 신하를 두고 그 간사함을 다스리지 않으면 뒤에는 장차 더 심할 것이다." 하였다. 드디어 외오문자의 초본을 내놓고 송인에게 묻기를, “이것을 쓴 자가 누구냐?" 하니, “방영입니다." 하였다. 방영을 국문하였으나, 불복하더니, 결박을 지은 다음에야 마침내 자복하였다. 방영은 인의 종형이다. 혜(惠)는 본국 사람으로 선대부터 요양(遼陽)에 들어가 살았는데, 내료 석천경(石天卿)이 유인하여 심복으로 만들었다. 출세하여 호군까지 되었는데 일을 꾸며 국사를 그르치니, 그 간악함이 김천석(金天錫)보다 더하였다.
○ 여름 4월에 가물었다.
○ 백백이 돌아가려 하니 배관들이 글을 주며 이르기를, “방영 등은 자기들의 지위를 잃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생각으로 임금을 속이고 신하의 의리가 없으니, 돌아가서 천자에게 아뢰어 속히 그 죄를 다스리소서. 그리고 전왕과 공주로 하여금 고국으로 돌아오시게 하는 것이 온 국인의 소망입니다." 하였다. 이리하여 백백과 유학사는 마침내 왕과 함께 상의하고, 대호군 야선단(夜先旦)과 중랑장 김장(金章)으로 하여금 방영 등을 원 나라로 압송하게 하였다.
○ 왕이 수녕궁에서 잔치를 베풀고 꽃을 완상하였다.
○ 한희유와 최유엄과 유비가 원 나라에서 돌아왔는데, 최유엄과 유비가 중서성에 나아가 전왕을 돌려 보낼 것을 청하는 표를 요구하였으나 얻지 못하고 돌아왔다.
○ 한희유를 자의도첨의중찬(咨議都僉議中贊)으로 삼았다.
○ 원 나라에서 참지정사 홀련(忽憐)과 한림직학사 임원(林元)을 보내왔다. 이때 오기(吳祁)와 석천보(石天輔)가 원 나라의 옥에 갇혀 있었는데, 또 권세를 좌지우지 하는자가 간사와 기망을 자행하며 두려워하고 기탄하는 바가 없었기 때문에 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누르고 막게 했던 것이다.
○ 5월 1일 임자일에 일식이 있었다.
○ 왕이 사신들을 초대하여 양루(涼樓)에서 잔치를 베풀고 위사(衛士)들의 격구를 관람하였다.
○ 국학의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였다. 과거에 찬성사
안향(
安珦)이 학교 교육이 크게 무너지고 유학이 날로 쇠퇴하는 것을 우려하여 양부(兩府)와 의논하기를, “재상의 직책은 인재를 양성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없는데, 이제 양현고가 탕진되어 교육에 쓸 자금이 없으니, 청컨대, 6품 이상은 각기 은(銀) 한 근씩을 내고 7품 이하는 등급에 따라 베를 내게 하여 양현고에 귀속시켜서 본전은 그대로 두고 이식을 받아서 영구히 교육 자금으로 만들자." 하니, 양부에서 이를 좇았다. 그 사실이 보고되니, 왕이 내고(內庫)의 금전과 양곡을 내어 보조하였다. 이때 밀직 고세(高世)라는 사람이 자기는 무인(武人)이라 하며 돈을 내려하지 않으니,
안향이 여러 재상에게 이르기를, “공자의 도가 만세에 법을 내려주었다, 신하가 임금에게 충성하고, 아들이 어버지에게 효도하며, 아우가 형에게 공경하는 것이 누구의 가르침인가. 만일 '나는 무인인데 무엇 때문에 애써 돈을 내어 저 생도들을 양성하겠느냐'고 한다면, 이 사람은 공자를 위하지 않는 것이니, 되겠는가" 하니, 고세가 듣고 매우 부끄러워 즉시 돈을 냈다. 향은 또 남은 돈을 박사 김문정(金文鼎)에게 주고는 강남에 보내어 공자와 70제자의 화상을 그리고, 또 제기ㆍ악기ㆍ육경ㆍ제자ㆍ사서(史書)들을 사오게 하였다. 이때에 와서 향이 밀직부사로 치사한 이산(李㦃)과 전법판서 이진(李瑱)을 경사교수도감사(經史敎授都監使)로 삼기를 청하였다. 이리하여 금내학관(禁內學官 대궐 안에 있는 학관)과 내시(內侍)ㆍ삼도감(三都監)ㆍ오고(五庫)에서 수학을 원하는 선비와
칠관(七館)ㆍ
십이도(十二徒)의 여러 생도들이 책을 끼고 와서 수업하는 자가 수백 명에 달하였다.
○ 6월에 국학의 대성전(大成殿)이 준공되었다. 과거에 원 나라의 야율희일(耶律希逸)이 건물이 협소하고 누추하여 반궁(泮宮)의 제도를 잃었다 하여 왕에게 신축할 것을 말하였는데, 이때에 비로소 이루어졌다. 왕이 국학에 나아가자 홀련(忽憐)과 임원(林元)이 뒤를 따르고, 칠관(七館)의 생도들이 관복을 갖추고 길에 나와 맞이하며 가요를 올렸다. 왕이 대성전에 들어가 선성인 공자를 배알하고, 밀직사 이혼(李混)에게 명하여 입학송(入學頌)을 짓게 하고, 임원(林元)에게는
애일잠(愛日箴)을 짓게 하여 여러 생도에게 보였다.
○ 안서왕(安西王) 아난달(阿難達)이 사신을 보내어 환관을 구하였다.
○ 가을 7월에 송균(宋均)이 금강산도(金剛山圖)를 가지고 원 나라에 가니, 재신과 추신들이 사람을 시켜 쫓아가서 이를 중지시켰는데, 균이 말하기를, “왕명이 있어서 돌아갈 수 없다." 하고, 드디어 가버렸다.
○ 내고(內庫)에서 왕에게 향연을 베풀었다.
○ 한희유(韓希愈)를 첨의우중찬으로, 송인(宋璘)을 지신사(知申事)로 삼았다.
○ 8월에 한희유를 원 나라에 보내어 천수절(天壽節)을 하례하였다.
○ 강남(江南)의 중 소경(紹瓊)이 왔다. 승지 안우기(安于器)를 보내어 교외에 나아가 영접하게 하고 왕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예복을 갖추어 수녕궁으로 맞아 들여 선(禪)을 설하는 것을 들었다.
○ 송방영(宋邦英)ㆍ송인(宋璘)과 상호군 이굉(李宏)이 원 나라에서 돌아오니, 왕이 각각 의복을 하사하였다. 이때 황제가 병중에 있어 정권이 중궁(中宮)에게 있었는데, 굉의 형 환관 복수(福壽)가 중궁의 고임을 받아 권세를 부리고, 또 황제의 유모가 송인을 위하여 손을 써서 구제하였기 때문에 방영 등이 이 덕으로 죄를 면하게 된 것이다. 과거에 한희유가 최숭(崔崇)ㆍ오연(吳演) 등과 함께 대내에 들어가 일을 논의하고 이를 '별청(別廳)' 이라고 불렀는데, 이때부터는 송방영과 송인도 참여하게 되었다.
○ 교서를 내려 금년의 과거를 정지하게 하였다.
○ 밀직사사 고세(高世)를 원 나라의 심양(瀋陽)에 보내어 인물(人物)을 찾아왔다. 내료 대호군 김유(金儒)와 호군 고여주(高汝舟)가 전왕에게 몰래 서신을 전달하다가 발각되었는데, 왕이 노하여 이들에게 장형을 행하고 순군옥에 가두었다.
○ 겨울 10월에 원 나라에서 오기(吳祁)와 석천보(石天補) 형제에게 곤장을 치고 안서(安西)로 귀양보냈다.
○ 11월에 원 나라에서 환관 이숙(李淑)을 보내 왔다. 숙은 곧 복수(福壽)인데, 본래 평창군(平昌郡) 사람으로 그의 어머니는 태백산(太白山)의 무당이었다. 왕이 사신을 보내어 황제에게 일을 아뢰어 청했을 때, 숙이 일찍이 공로가 있었기 때문에 왕이 특별히 그를 후대하였다.
○ 을해일에 혜성이 허성(虛星)과 위성(危星) 사이에 나타났다.
○ 12월에 동지밀직사사 송방영(宋邦英)을 원 나라에 보내어 신정을 하례하였다.
○ 봄 2월에 첨의중찬으로 치사한 한강(韓康)이 졸하였다. 한강은 일찍이 금주방어부사(金州防禦副使)가 되었는데, 금주는 조세[田賦]가 항상 액수에 차지 못하여 수령이 이로 말미암아 파면된 적이 많았다. 그런데 강이 와서는 둔전(屯田)하다가 폐기된 것을 다시 정리하여 민곡 2천여 석을 얻으니, 아전들이 화목하고 백성이 편안하게 되었다. 그러나 성질이 불교를 좋아하여 왕이 일찍이 나라를 오래도록 누릴 수 있는 방법을 묻자, 모두 불가의 말로 대답하였다.
○ 원 나라에서 겁리(怯里)ㆍ마적(馬赤)ㆍ월아(月兒)ㆍ홀도(忽都)를 보내어 장경(藏經)을 읽었다.
○ 여름 5월 정미일에 왕이 원 나라에서 돌아왔다.
○ 재신과 추신들이 수녕궁에서 왕에게 향연을 베풀었다.
○ 윤달 1일 무오에 일식이 있었다.
○ 왕이 양루(凉樓) 뒷봉우리에 거둥하여 격구놀이를 구경하였다.
○ 경오일에 큰비가 와서 인가가 떠내려가고 농작물이 피해를 입었다.
○ 한희유(韓希愈)를 첨의우중찬으로, 송분(宋玢)을 좌중찬으로 삼았다.
○ 6월에 행성에서 왕에게 향연을 베풀었다.
○ 도첨의찬성사로 치사한 김부윤(金富允)이 졸하였다. 부윤은 군졸 출신으로 소박하고 겉치레가 없으며 성품이 공정하였다. 일찍이 왕을 따라 원 나라에 들어갔었는데, 비록 험난한 국면을 당하여도 절조를 지켜 굽히지 않았다. 세조가 그의 명망을 알고서 정동성 관원에 제수하였고, 왕은 철권(鐵券)을 주었다.
○ 전후의 전시(殿試)에서 급제한 사람들이 왕에게 향연을 베풀었다.
○ 흥안도호부 부사(興安都護府副使) 김서지(金瑞芝)를 파면시켰다. 왕이 사랑하는 봉지련(鳳池蓮)이란 여자는 본부(本府)의 기생이었다. 고을 아전인 배도(裵度)가 일찍이 서지와 감정이 있어 봉지련에게 부탁하여 왕에게 참소하니, 왕이 드디어 서지를 파면하고 그 가산을 적몰한 것이다.
○ 계축일에 서북면 안집사(西北面安集使) 김견(金堅)이 벼락맞았다.
○ 왕이 좌우에게 이르기를,“신하의 절조가 점점 전과 같지 못하다. 전에 이혼(李混)과 윤보(尹珤)가 전형(銓衡)을 맡았을 때, 과인이 혼의 아우 자화(子和)를 행수(行首)로 삼으려 하니, 혼이 사양하여 아뢰기를,‘전하께서는 신을 불초(不肖)하게 생각하지 않으셔서 전조(銓曹)에서 있게 하셨는데, 신의 아우가 행수가 된다면 사람들이 신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하였고, 또 윤보의 아들 안비(安庇)를 권무로 삼았더니, 보 역시 아뢰기를,‘신의 자식은 나이가 어리고 신은 또 전형을 맡고 있으니,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하고, 모두 재삼 굳이 사양하였다. 그런데 지금 전형을 맡은 자는 먼저 좋은 벼슬을 저의 친척에게 주고는 과인은 알지도 못하게 하니, 하물며 감히 사양하겠느냐? 이것은 염치가 날로 없어지고 세상의 도의가 날로 무너지기 때문이다.”하였다.
○ 가을 7월 1일에 대호군 민보(閔甫)를 원 나라에 보내어 매를 바쳤다.
○ 중찬 송분(宋玢)에게 낙랑공(樂浪公)의 작호를 주었다.
○ 박이(朴理) 등 3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병과(丙科)의 수석 허관(許冠)은 공(珙)의 아들이며, 송분의 사위였다. 나라 제도에 6품 이상의 관원은 과거에 응시함을 허용하지 않았고, 비록 6품 벼슬에 제수했더라도 사은(謝恩)하지 않았으면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 관은 낭장에 제수된 지 4년이 되어도 사은하지 않았다. 송분이 말하기를,“벼슬길이 여러 길이 있는데, 하필 과거에 올라야만 되겠느냐?”하니, 관이 말하기를,“선인(先人)이 저에게 종이를 주면서 이것을 가지고 과거에 응시하도록 하라 하셨는데, 제가 비록 과거에 누차 실패하였으나 종이가 그대로 있으니, 어찌 감히 빨리 벼슬에 나아가기 위하여 아버지의 명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왕이 평소에 그 이름을 듣고는 발[簾]앞까지 불러서 특별히 서각띠를 주었다.
○ 원 나라에서 단사관(斷事官) 첨목아불화(帖木兒不花)와 한림 이 학사(李學士) 등을 보내어 왔는데, 최유엄(崔有渰)ㆍ한희유(韓希愈)ㆍ유비(柳庇)에게 명하여 석주(石冑)와 그의 아들 천보(天輔)ㆍ천경(天卿)ㆍ천기(天琪)를 연경으로 압송하도록 하고, 또 각 관사의 관리가 국왕에게 품의할 공무가 있으면 반드시 먼저 홍자번(洪子藩)과 상의하게 하고 직접 가지 못하게 하였으며, 왕도 반드시 자번의 말을 듣도록 하였다. 첩목아불화가 그의 부하를 안남부(安南府)에 보내어 김세(金世) 등 4명을 체포하였다. 과거에 김세가 중서성에 밀고하기를,“석주의 도당이 전왕이 자기를 해칠까 염려하여 국왕을 모시고 장차 섬 속으로 도망하기를 도모하여 몰래 제주(濟州) 등 지방에다 배를 만들며 양곡을 저축하고 있다.”하였으므로, 이제 석주와 김세로 하여금 대질시키기 위하여 체포한 것이다.
○ 행성에서 호군 이한(李翰)을 원 나라에 보내어 성절을 하례하였다.
○ 과거에 오기(吳祁)가 참소와 아첨으로 왕의 사랑을 받아 왕의 부자간을 이간하고 충성스럽고 선량한 자를 모함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이를 갈았으나 화가 두려워 말하는 자가 없었다. 전 호군 원충갑(元冲甲) 등 50명이 사신에게 고발하고자 하여 먼저 왕에게 얘기했더니 왕이 이를 말렸다. 나간 뒤에 왕이 또 호군 조적(曹頔)을 시켜 타일렀으나 충갑 등은 듣지 않았다. 드디어 글로 첩목아불화 등에게 고하기를,“대덕 5년 4월에 황제께서 탑찰아(塔察兒)와 왕태형(王泰亨)을 보내시어 왕에게 유시하기를,‘상주고 벌주는 것과 주고 빼앗는 권한이 모두 왕으로부터 나오게 할 것이니, 사체에 불편한 것이 있거나 백성의 실정에 맞지 않는 일이 있거든 잘 생각하여 처리하라’하셨고, 또 신료들에게 경계하시기를,‘마음을 다하여 바르게 봉행하여 각기 자기들의 직분을 닦을 것이니, 감히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여 불법한 짓을 함부로 행하는 일이 있다면 왕은 비록 너희를 용서해줄지라도 짐은 반드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하셨습니다. 신료들은 황제의 명령을 공손히 받들고 밤낮으로 경계하며 근신하여도 오히려 그대로 따르지 못할까 두려워하던 바입니다. 이제 오기(吳祁)란 신하는 사실상 큰 악인입니다. 재능도 없고 공로도 없으면서 다만 간사하고 아첨하는 것으로 출세하였는데, 과거에 전왕에게 죄를 짓고 후환을 면하기 위하여 밤낮으로 모략과 중상을 일삼아, 우리 왕 부자간을 이간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스스로 큰 공을 세웠다고 생각하여, 권력을 잡고 마음대로 농락하며 여러 형제를 끌어 들여 모두 기밀의 직책에 참여하게 하여, 수년 사이에 모두 장군과 재상의 지위에 이르렀습니다. 모든 본국의 신료에 대하여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조금이라도 혐의나 감정이 있으면 곧 죄에 빠뜨려 허물없이 파면되고 추방된 자가 전국에 가득하며, 각 도의 안렴사와 수령까지도 자기 한 사람이 좋아하고 미워하는 데에 따라서 들이고 물리치며 주고 뺏고 하니, 이는 황제의 명령을 배반하고 저버린 것이어서, 죽어도 그 죄를 다 씻을 수 없습니다. 이제 황제의 유지가 있는데도 또한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저지하기를 꾀하고 있으니, 상국의 사신이 돌아간 뒤에는 필시 딴 짓을 꾸밀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널리 국인에게 물어보셔서 어지러운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 견제해 주소서.”하였다. 첩목아불화 등이 그 글을 받고, 왕에게 말하기를, 충갑이 말한 것에 대해 비록 우리들이 결정을 내릴 것은 아니나 또한 묻지 않을 수 없으니, 마땅히 충갑과 오기를 데리고 서울에 가서 대질하겠습니다.”하였다.윤만비(尹萬庇)ㆍ정선(鄭僐)ㆍ김희(金禧)ㆍ윤해(尹諧)ㆍ오영구(吳永丘)ㆍ이주(李舟)ㆍ이설(李偰)ㆍ선종계(宣宗桂)ㆍ고연(高延)ㆍ홍승서(洪承緖) 등이 또 글로 사신에게 고하고, 홍자번(洪子藩)ㆍ김혼(金琿)ㆍ민훤(閔萱)ㆍ민지(閔漬)ㆍ정해(鄭瑎)ㆍ권영(權永)ㆍ김태현(金台鉉)ㆍ고세(高世)ㆍ김문연(金文衍)ㆍ이혼(李混)ㆍ원진(元璡)ㆍ허평(許評)ㆍ신형(申珩)ㆍ김연수(金延壽)ㆍ조문간(趙文簡)ㆍ김원상(金元祥)ㆍ박광정(朴光廷)ㆍ윤길손(尹吉孫)ㆍ오현량(吳玄良)ㆍ김유지(金由祉) 등도 또한 오기의 죄악을 말하였다. 홍자번이 또 말하기를, “왕명을 출납하는 데에 안에는 중귀(中貴) 3,4명이 있는데 이를 사(辭)라 이르고, 밖에는 근신(近臣) 4명이 있는데 이를 승선(承宣)이라 하니, 이들이 아니면 비록 재상일지라도 감히 참여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오기는 이제 이미 정 승에 제수되었으면서도 오히려 왕궁에 출입하여 승선과 다름이 없고, 그가 건의하거나 보고하는 것이 모두 부정한 계책들입니다." 하니, 사신이 아무 말이 없었다.
○ 8월에 우중찬 한희유(韓希愈)와 전 찬성사 최유엄(崔有渰)을 보내어 석주(石冑)와 그의 세 아들을 원 나라에 데리고 갔다.
○ 치사한 재상 채인규(蔡仁揆) 등 28명과 전 밀직부사 만호(密直副使萬戶) 김심(金深) 등 군관 1백 50명이 또 사신에게 나아가 오기에게 죄주기를 요청하였다.
○ 밀직부사 송방영(宋邦英) 등을 원 나라에 보내어 성절을 하례하였다.
○ 왕이 판도판서로 치사한 최양(崔諹)을 불러 이르기를, “듣건대, 경들도 오기를 사신에게 고소하려 한다니 그런 사실이 있는가. 당분간 보류하라." 하였으나, 최양은 듣지 않고 마침내 박전지(朴全之) 등 37명과 함께 또 사신에게 나아가 오기에게 죄주기를 요청하였다. 첩목아불화와 이학사가 돌아갈 때에 찬성사 유비(柳庇)가 같이 갔는데,
안향(
安珦) 등이 교외에서 전송하였다. 이학사가 시 한 구절을 읊기를, “흰 술은 사람의 얼굴을 붉게 한다." 하고,
안향에게 대구를 지으라 청하였다. 향이 머뭇거리고 있자 이(李)가 스스로 대구를 짓기를, “황금은 관리의 마음을 검게 한다." 하였다. 이것은 첨목아불화가 오기의 뇌물을 받고 그 죄에 너그러운 것을 풍자한 것이다.
○ 왕이 동지밀직사사 김태현(金台鉉), 승지 송인(宋璘)과 행성의 좌우사관(左右司官) 등에 명하여 지신사(知申事) 김원상(金元祥)을 잡아들이게 하였다. 오기의 계책에 의한 것이었는데 원상이 숨었기 때문에 잡지 못하였다. 김심(金深)이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대궐로 나아가 숙위하여 내란을 막을 것을 청하니,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 왕도 오기가 많은 사람에게 원망을 사고 있음을 알고, 전지를 내리기를, “김심과 군관 등의 직위를 복직 시켜야 한다." 하니, 홍자번은 오기가 자기를 해칠까 의심하여 매우 엄밀하게 방비하였고, 오기 또한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왕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 홍자번이 재신과 추신 및 만호 김심과 함께 삼군의 장사와 원충갑(元冲甲) 등을 거느리고 왕궁을 포위하고는 오기를 내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두세 번 요청하자 왕이 마지못하여 내주려 하니, 오기는 사세가 절박한 것을 알고 머리를 조아리며 오직 머물러 두기만을 청하였다. 그러나 호군(護軍) 오현량(吳賢良)이 곧바로 왕이 있는 곳에 들어가 오기를 잡아 가지고 나왔다. 왕이 내인(內人)을 시켜 전지를 내려 기를 머물러 두게 하기를 청하니, 여러 재상들이 결정을 짓지 못하였다. 홍자번이 큰 소리로 말하기를, “왕께서 이미 허락하셨는데 무엇을 의심하느냐?" 하고, 호군 최숙천(崔淑千)을 독촉하여 오기를 구속하여 원 나라에 보냈다. 과거에 자번이 왕궁을 포위할 것을 의논할 때에, 참리(參理) 정해(鄭瑎)가 옳지 않게 여기며 말하기를, “한 간신을 물리치려면 무사 한 사람의 힘이면 될 것인데, 군사를 동원할 것이 무엇이냐?" 하였으나, 자번이 듣지 않았는데, 뒤에 상국에서 이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고 비로소 후회하였다.
○ 내료 김유(金儒)가 고발하기를, “호군 박규(朴圭)와 낭장 오인찬(吳仁贊)이 지방에 사신으로 가서 몰래 배와 물자와 식량을 준비하고 있으니, 필시 딴 계획이 있는 것입니다." 하니 왕이 재신과 추신에게 명하여 이들을 국문하게 하였다. 9월에 재신과 추신들이 규와 인찬이 내란을 음모한 사실을 문초하여 보고하니, 왕이 크게 노하여 손으로 그 소(疏)를 찢고는 곧 뉘우쳤다.
○ 홍자번을 첨의좌중찬(僉議左中贊)으로 삼았다. 다시 좌를 높게 친 것이다.
○ 경오일에 왕이 원 나라로 떠났다. 이번 행차는 전왕의 환국을 저지하고, 또 공주를 서흥후(瑞興侯) 전(琠)에게 개가시킬 것을 요청하려는 것이었는데, 사람들은 말하기를, 승지 송인(宋璘)의 계책에 미혹된 것이라 하였다. 왕이 서경까지 이르렀으나, 황제가 왕이 들어와 뵙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서 곧 되돌아 왔다.
○ 숙주(肅州)에 가뭄이 심하여 들판이 저절로 타버렸다.
○ 겨울 10월에 원 나라에서 병부상서 탈탈첩목아(脫脫帖木兒)를 보내어 오기(吳祁)를 잡아들이게 하였다. 이는 오기가 벌써 연경으로 간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 탈탈첩목아가 왕을 보고 좌우를 물리치며 말하기를,“황제께서 명하시기를,‘왕이 비록 출발했더라도 반드시 돌아가게 할 것이다.’하셨는데, 이제 이미 환국하였으니 잘했습니다. 그러나 좀 묻겠는데, 왕이 상국에 들어가는 것을 여러 재상들은 옳다고 생각했습니까?”하니, 왕이,“그렇다”하였다. 이때 홍자번이 곁에 있었으나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사신이 또 말하기를,“황제께서 명하시기를,‘왕이 들어와서 말하려는 것이 무슨 일이냐?’하셨습니다.”하니, 왕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사신이 말하기를,“재상과 함께 상의하여도 좋습니다.”하니, 자번이 무어라 진언하였다. 왕이 마침내 답하기를,“오기와 석주 부자가 불법한 일을 많이 행해서 소문이 상국에까지 퍼졌으나, 나는 실상 몰랐었다. 그러나 누가 과인이 몰랐다고 생각하겠는가. 이 때문에 두려워서 직접 황제 앞에 나아가서 아뢰려 했던 것이다.”하였다.
○ 중찬으로 치사한 채인규(蔡仁揆)가 졸하였다.
○ 11월에 원 나라에서 형부상서 탑찰아(塔察兒)와 한림직학사 왕약(王約)을 보내어 왔는데, 왕약이 왕에게 말하기를,“천지 사이에 지극히 가까운 것이 부자요, 지극히 중한 것이 군신이다. 저 소인들이란 자기의 이익만 알뿐이니, 어찌 왕의 국가를 생각하려 하겠는가”하니, 왕이 울며 사례하기를,“신이 늙고 망령들어 간사한 소인들의 말을 듣고 믿었기 때문에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제 명을 들었으니 표문을 올려 스스로 허물을 씻고 또 전왕의 환국을 청하겠으며, 소인들의 일당은 모두 사신이 직접 다스리게 하겠습니다.”하였다. 이리하여 사신은 송인(宋璘)을 잡아 정동성에 가두고, 그 죄를 지적하여 말하기를,“네가 왕에게 상국에 가라고 권고하여 백성을 소요하게 한 것이 첫 번째 죄요, 네 아비 분(玢)이 일찍이 금고(禁錮)를 겪은 것은 황제께서 아시는 바이거늘 마침내 감히 이것을 속이고 함부로 조정의 명을 받은 것이 두 번째 죄다.”하였다. 이어서 왕에게 이르기를,“사람이 병이 났을 때 약을 얻으면 반드시 낫는 법입니다. 이번에 내가 온 것은 정말 왕에게 좋은 약이 될 것이요.?”하였다. 드디어 왕과 함께 수녕궁에 이르러 향각(香閣)에 들어가서 재신(宰臣) 김연수(金延壽)에게 이르기를,“사랑을 받는 신하 김원계(金元桂)란 자가 있다는데 누구냐.?”하니, 이때 원계가 왕의 곁에 있다가 무릎을 꿇고 뵈었다. 사신이 말하기를,“국경에 들어서자 어떤 사람이 고하기를,‘원계가 남에게 이미 중매한 아내를 빼앗고, 또 군관의 호부(虎符)를 빼앗아 아내의 형제에게 주었으니, 그 죄를 다스려 주소서.’했다.”하고, 잡아서 가두었다. 또 호군 최연(崔涓)과 중랑장 황윤손(黃允孫) 등을 가두었으니, 이들은 일찍이 전왕을 수종하던 신하로 오랫동안 원 나라 서울에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 탑찰아 등이 오기(吳祁)의 형제인 삼사우윤(三司右尹) 천(蕆), 승지 연(演), 정랑(正郞) 형(珩), 소윤(少尹) 연(連)과 매부인 중랑장 조심(趙深)을 가두었다.
○ 탑찰아 등이 행성 좌우사(行省左右司)로 하여금 박규(朴圭) 등을 국문하게 하니, 모두 자복하였다.
○ 한희유를 도첨의 우중찬 판전리사사(都僉議右中贊判典理司事)로, 김혼(金琿)을 시랑찬성사 판군부사사(侍郞贊成事判軍簿司事)로,
안향(
安珦)을 시랑찬성사 판판도사사(侍郞贊成事判版圖司事)로, 최유엄(崔有渰)ㆍ유비(柳庇)를 모두 찬성사로, 민훤(閔萱)을 참리(參理)로, 민지(閔漬)를 판밀직사사로, 정해(鄭瑎)를 밀직사사로, 이혼(李混)ㆍ권영(權永)을 모두 지밀직사사로, 김태현(金台鉉)ㆍ김심(金深)을 동지밀직사사로, 김연수(金延壽)ㆍ김문연(金文衍)을 밀직사 부사로, 곽응(郭膺)을 감찰대부로 삼았다.
○ 밀직부사 김연수(金延壽)와 대호군 야선단(夜先旦)을 원 나라에 보내어 신정을 하례하고, 또 제안공(齊安公) 숙(淑)을 보내어 전왕의 환국을 청하였다.
○ 12월 경술일에 혜성이 서방에 나타났다.
〇 본국(本國) 아무 도(道)의 벼슬아치나 선비 혹은 백성 가운데 이미 죽었거나 또는 살아 있는 사람들로서 어떠한 이행(異行)과 효제(孝悌)와 절의(節義)가 있는지, 또 공맹(孔孟)의 심학(心學)을 잘 알거나 기자(箕子)의
주수(疇數)를 아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 거주지와 성명과 사실을 하나하나 기록하라.
본국은 바다 밖에 궁벽하게 위치해 있고 땅덩이는 작지만, 백성들의 성품이 어질고 유순하여 선(善)에 잘 흥기하기에 이행과 효제와 절의가 있었던 사람들이 사서(史書)에 끊이지 않으니, 지금 그 수를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우선 그중 한두 가지만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이자현(李資賢)은 고려 때 사람인데, 용모가 훌륭하고 성품이 총민하였습니다. 문과에 급제하여 대악서 승(大樂署丞)이 되었는데, 갑자기 벼슬을 버리고 춘주(春州)의 청평산(淸平山)에 들어가 거친 밥을 먹고 베옷을 입고 살면서 유유자적하며 스스로 즐겼습니다. 고려 예왕(睿王)이 누차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표(表)를 올렸는데, 그 표에 “
새의 본성대로 새를 길러서 종고(鐘鼓)의 걱정이 없게 하시고, 물고기를 관찰하여 물고기를 알아서 강호(江湖)를 좋아하는 물고기의 본성을 이루게 하소서.”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왕은 그를 불러올 수 없음을 알고 특별히 남경(南京
한양(漢陽))에 행차하여 그의 아우 자덕(資德)을 파견하여 가서 효유하게 하니, 그제야 부름에 응하여 왔습니다. 왕은 이에 그를 삼각산(三角山)에 머물도록 명하였습니다. 그 후 재차 만났을 적에 왕이 심성을 기르는〔養性〕 요법을 물으니, 그는 “욕심을 줄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왕은 그를 특별히 후하게 대우하였으나, 그는 굳이 청하여 산으로 돌아갔습니다.
한성한(韓性漢)
-‘성(性)’ 자는 ‘유(惟)’ 자일 듯하다.-은 고려 신왕(神王) 때 사람입니다. 그는
최충헌(崔忠獻)이 국정을 제멋대로 하는 것을 보고는 “난(難)이 곧 일어날 것이다.” 하고, 마침내 처자(妻子)를 거느리고 지리산에 들어가 은거한 채 고절(苦節)을 맑게 닦고 세상 사람들과 사귀지 않았으니, 세상에서 그의 인품을 높게 여겼습니다. 조정에서 그를 불러 서대비원 녹사(西大悲院錄事)로 삼았으나 취임하지 않고, 더 깊은 골짜기로 옮겨가 살면서 종신토록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김시습(金時習)은 경기 남양부(南陽府) 사람입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총명하였고 3세 때에 능히 글을 지을 줄 알았습니다. 5세 때는 우리 장헌왕(莊憲王
세종(世宗))께서 그를 인견(引見)하였는데, 응대하는 것이 마치 신과 같았으므로 당시에 오세동자(五歲童子)라 칭하였습니다. 장성해서는 경적(經籍)을 널리 통하고, 제자(諸子)와 사서(史書)까지도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집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승도(僧徒)로 행세하면서 스스로 세속의 법도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매양 높은 데 올라 먼 곳을 바라보고는 문득 통곡을 하고 돌아오곤 하였는데, 사람들은 그를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청한자(淸寒子)라 자호하였고, 그가 지은 시문은 청수(淸邃)하고 호탕(豪宕)하였습니다.
손순(孫順)은 신라 흥덕왕(興德王) 때 사람입니다. 아버지는 죽고 집이 가난했으므로 아내와 더불어 남의 집에 품팔이를 하여 어머니를 봉양하였습니다. 그런데 손순에게 어린 자식이 있어 늘 자기 어머니의 밥을 빼앗아 먹었습니다. 손순은 아내에게 “아이가 어머니의 밥을 빼앗아 먹는데, 아이는 다시 얻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구하기 어렵다.”라고 하고는 곧 아이를 등에 업고 갔습니다. 땅을 파고 아이를 산 채로 묻으려고 할 때 갑자기 땅속에서 매우 신기한 석종(石鐘)이 나왔습니다. 두 부부는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시험 삼아 그것을 두드려 보았더니 소리가 은은하여 듣기 좋았습니다. 아내가 말하기를 “이런 기이한 물건을 얻은 것은 곧 아이의 복이니 아이를 묻을 수 없습니다.” 하니, 손순도 그렇게 여겨 아이와 그 종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돌아온 뒤 종을 들보에 달아 놓고 두드리니 그 소리가 왕궁까지 들렸습니다. 왕이 그 소리를 듣고 좌우에게 이르기를 “서교(西郊)에서 종소리가 들려오는데 소리가 맑고 멀어서 이상스럽다.” 하고는 곧 찾아보게 하여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왕이 이르기를 “옛날에
곽거(郭巨)가 자식을 묻으려 할 적에 하늘이 금부(金釜)를 주었는데, 지금 손순이 아이를 묻으려 할 적에 땅에서 석종이 나왔으니 전후의 일이 똑같다.” 하고는 곧 가옥 한 채를 내려 주고 매년 쌀 50석을 주었습니다.
최누백(崔婁伯)은 수원(水原) 사람입니다. 나이 15세 때 그의 아버지가 사냥을 하다가 호랑이에게 물려 죽자 누백은 그 호랑이를 잡으려 하였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만류하자 누백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는 즉시 도끼를 메고서 호랑이를 추적하였습니다.
호랑이는 이미 사람을 잡아먹고 배가 불러 드러누워 있었습니다. 누백이 그 앞으로 다가가서 호랑이를 꾸짖어 “네가 우리 아버지를 잡아먹었으니 내가 의당 너를 잡아먹어야겠다.” 하니, 호랑이가 꼬리를 흔들며 엎드렸습니다. 누백은 대뜸 도끼로 호랑이를 찍어 죽이고는 배를 갈라 자기 아버지의 뼈와 살을 찾아내고, 호랑이고기는 항아리에 담아 시내 가운데 묻어 두었습니다. 누백은 아버지를 장사 지내고 시묘살이를 하였으며, 삼년상을 마치고 나서는 그 호랑이고기를 가져다가 다 먹었습니다. 그는 뒤에 과거에 급제하여
기거사인(起居舍人)이 되었습니다.
김자강(金自强)은 성주(星州) 사람입니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봉양하면서 뜻을 어김이 없이 잘 받들어 순종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죽자 상(喪)을 치르는 데 있어 부도(浮屠)의 법을 쓰지 않고 일체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예문(禮文)을 따라서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습니다. 복이 끝나자 다시 아버지를 위해 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종족들이 그를 말려 억지로 끌어내서 집으로 돌아가게 하고는 이어 그 여막을 불태워 버렸습니다. 그러나 자강은 힘껏 뿌리치고 다시 돌아와 무덤 아래 엎드린 채 3일 동안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종족들이 그의 효성에 감동하여 다시 그를 위해 여막을 지어 주니, 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습니다. 국초(國初)에 정려(旌閭)를 내려 표창하였습니다.
강렴(姜廉)은 안변(安邊) 사람입니다.
영락(永樂) 연간에 그의 아버지 회조(淮祖)가 대변이 막혀 통하지 않는 병을 앓았습니다. 이에 강렴은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아버지의 병을 간호하였는데, 4년 동안이나 계속해서 손수 변기를 받들었고 심지어 대변을 맛보아 병세의 차도를 증험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또 종기를 앓았는데, 의원이 말하기를 “거머리를 잡아다가 피를 빨리면 종기를 치료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한창 추운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강렴은 연못가에 나아가 울부짖으면서 얼음을 깨고 거머리를 찾았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거머리 두세 마리가 손가락에 붙어 나오기에 이것을 가지고 돌아와 종기를 빨렸더니, 아버지의 병이 곧 나았습니다. 이 일을 조정에 아뢰자 정려를 내려 표창하였습니다.
김덕숭(金德崇)은 진천현(鎭川縣) 사람입니다. 일찍이 한산 군수(韓山郡守)로 있다가 부모를 봉양하는 일이 오랫동안 행해지지 않음을 염려하여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서는 부모의 뜻과 안색을 잘 받들어 봉양하되 지성으로 하여 게으름이 없었습니다. 나이 62세에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였는데,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 조석(朝夕)으로 전(奠)을 마치고 나서는 반드시 아버지에게 가서 문안을 드리되 아무리 비가 오고 눈이 내려도 폐하지 않았습니다. 삼년상을 마친 뒤에는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않고 더욱 독실하게 봉양하였으므로 장헌왕(莊憲王)께서 그의 성효(誠孝)를 가상하게 여겨 특별히 술과 고기와 쌀을 하사하였습니다.
아버지가 죽자 그는 또 시묘살이를 하면서 지나치게 슬퍼하여 몸이 매우 수척해졌는데, 그때 나이가 벌써 72세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그가 늙은 나이에 예제대로 상(喪)을 치르다가는 반드시 생명을 잃게 되리라고 여겨 저지하니, 덕숭이 울면서 말하기를 “아버지는 들판에 묻혀 있는데 자식은 집에 편안히 있는 일을 나는 차마 할 수 없다.” 하고는 새벽이면 일어나 반드시 묘 앞에서 곡을 하여 상을 다 마칠 때까지 슬퍼하며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였습니다. 부모가 평소에 앉던 좌석을 볼 때마다 목이 메어 울었고, 공경하기를 마치 부모가 살아계실 때와 같이 하였습니다. 또 사당(祠堂)에는 새벽과 저녁으로 반드시 배알하고 초하루와 보름에는 반드시 제사를 지냈으며, 시물(時物)은 반드시 사당에 올렸고 무슨 일이 있으면 반드시 사당에 고하고 나서 행하였습니다.
그가 죽은 뒤에 조정에서는 그의 두 아들에게 벼슬을 내리라고 명하고, 그의 묘에 비석을 세워 정표하였습니다.
박운□(朴云□)은 창녕(昌寧) 사람입니다. 나이 14세 때 아우 운산(云山)은 8세였는데, 그의 아버지가 호랑이에게 물려갔습니다. 운□이 조그만 도끼를 들고 아우 운산과 더불어 30여 보쯤 쫓아가면서 통곡을 하니, 호랑이가 그의 아버지 시체를 버리고 갔습니다. 그리하여 운□은 시체를 등에 메고 운산은 도끼를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이 일을 조정에 아뢰자 정려를 내려 표창하였습니다.
김득인(金得仁)은 동래현(東萊縣) 사람입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집이 가난했으나 어머니를 봉양함에 지극히 효성스러웠습니다. 어머니가 죽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마치고 나서는 아버지의 묘를 어머니의 묘 곁으로 옮기고 다시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함으로써 전후 9년 동안 거상(居喪)하였습니다.
흉년이 들었을 때 부산포(釜山浦)의 왜노(倭奴)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노략질을 하다가 갑자기 득인의 여막에 이르렀는데, 그의 효성에 감동하여 감탄을 하고 떠나서는 뒤에 해채(海菜)와 쌀과 향을 보내 주었습니다. 우리 강정왕(康靖王
성종(成宗))께서 그에게 풍저창 부봉사(豐儲倉副奉事)를 특별히 제수하였습니다.
성수침(成守琛)은 경상도 창녕현(昌寧縣) 사람입니다. 그는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려서부터 효아(孝兒)로 일컬어졌습니다.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서는 예에 지나칠 만큼 슬퍼하였고 3년 동안 죽만 먹었으며, 손수 제구(祭具)를 다루었습니다. 새벽이면 일어나 묘역을 쓸고 나서 분향하고 절하고 꿇어앉아 있었는데, 아무리 춥거나 더운 때라도 폐하지 않았습니다. 상을 마치고 나서도 기일(忌日)을 맞이할 때마다 마치 초상 때처럼 애통해하였습니다. 조석으로 반드시 사당에 배알하였고 출입할 때는 반드시 사당에 고하였습니다. 어머니를 모시면서 집은 가난하였으나 매우 좋은 음식으로 봉양하였습니다.
그는 천품이 매우 고상하고 덕행과 기량이 원만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일찍이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그의 학문은 자기 마음에 반성하는 일과 자기 몸에 절실한 것에 힘썼습니다. 파평산(坡平山) 아래 은거하면서 청송거인(聽松居人)이라 자호하였습니다. 신훙왕(新薨王
명종(明宗)) 때에 누차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죽은 뒤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증직되었습니다.
박제상(朴堤上)은 신라 눌지왕(訥祗王) 때 사람입니다. 왕의 아우 미사흔(未斯欣)이 왜국에 볼모로 가 있었으므로 왕은 변사(辯士)를 보내 왜국을 꾀어서 미사흔을 맞아 오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자 제상이 자기가 가겠다고 청하면서 말하기를 “왜인은 말로 설득할 수 없으니 의당 거짓으로 속여야 합니다. 신은 마치 죄를 짓고 도망간 것처럼 꾸미고자 하니, 신이 떠난 뒤에 신의 가속을 옥에 가두소서.” 하고는 드디어 왜국에 들어갔습니다.
왜주(倭主)가 처음에는 그를 의심하였으나, 신라 왕이 제상의 가속들을 가두었다는 말을 듣고는 제상에 대해 참으로 신라를 배반한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왜주는 군대를 동원하여 신라를 습격하러 나오면서 미사흔과 제상을 향도(嚮導)로 삼았습니다. 해도(海道) 가운데 이르렀을 때 제상이 미사흔과 더불어 배를 타고 마치 즐겁게 노니는 것처럼 하니, 왜인들이 그것을 보고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제상이 미사흔에게 몰래 본국으로 돌아가라고 권하니, 미사흔이 “어찌 그대를 두고 나 혼자만 돌아갈 수 있겠는가.” 하자 제상이 말하기를 “만일 두 사람이 함께 가면 계획을 성사시키지 못할 듯합니다.” 하였습니다. 그러자 미사흔은 제상을 붙들고 울면서 하직하고 떠나갔습니다. 이미 멀찍하게 간 뒤에야 왜인들이 미사흔이 도망쳤음을 알고 그를 추적했으나 따라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왜인이 제상을 가두고 국문하기를 “어찌하여 네가 네 나라 왕자를 몰래 보냈는가?” 하니, 제상이 말하기를 “나는 곧 계림국(鷄林國)의 신하이므로 우리 임금의 뜻을 이루고자 한 것일 뿐이다.” 하였습니다. 왜주가 성을 내어 말하기를 “네가 지금 이미 나의 신하가 되었는데도 계림국의 신하라고 칭한다면 반드시 오형(五刑)을 갖추어 처벌할 것이고, 만일 왜국의 신하라고 칭한다면 반드시 중록(重祿)으로 상줄 것이다.” 하니, 제상이 말하기를 “차라리 계림국의 개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자(臣子)는 될 수 없고, 차라리 계림국의 매를 맞을지언정 왜국의 작록(爵祿)은 받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왜주가 노하여 제상의 다리 살가죽을 벗기고 갈대를 베어 낸 다음 그 위를 걷게 하면서 “너는 어느 나라 신하냐?” 하고 다시 물으니, 제상은 “계림국의 신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뜨거운 철판 위에 제상을 세우고서 또 “어느 나라 신하냐?”라고 물으니, 제상은 “계림국의 신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왜주는 그의 뜻을 꺾을 수 없음을 알고 그를 불태워 죽였습니다. 그의 아내는 치술령(鵄述嶺)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고 남편을 기다리며 통곡하다가 죽어서 치술신모(鵄述神母)가 되었는데, 지금도 그 사당이 있습니다.
비령자(丕寧子)는 신라 선덕왕(善德王) 때 사람입니다. 백제가 신라를 침공하자 왕이 김유신(金庾信)을 보내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가서 방어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백제의 군대가 매우 정예하여 유신이 고전을 하였습니다. 힘이 다하자 비령자에게 이르기를 “
계절이 추워진 다음에야 송백(松柏)이 뒤에 시드는 것을 아는 법이다. 오늘 일이 급하게 되었는데, 자네가 아니면 누가 능히 분발하여 기발한 힘을 내어 군중의 마음을 격동시킬 수 있겠는가.” 하니, 비령자가 말하기를 “이 많은 사람 가운데서 유독 나에게 부탁을 하니, 이것은 나를 알아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와서 그의 종 합절(合節)에게 이르기를 “오늘 나는 의당 위로는 국가를 위하고 아래로는 나를 알아준 분을 위해서 죽을 것이다. 그런데 내 자식 거진(擧眞)이 어리지만 장한 뜻이 있으니 반드시 나와 함께 죽으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부자(父子)가 함께 죽는 것은 옳지 않다. 내가 죽거든 네가 거진과 더불어 나의 뼈를 수습하라.” 하고는, 창을 비껴들고 적진에 돌격하여 수인을 쳐 죽이고 전사하였습니다. 그러자 거진도 달려가 싸우다 함께 죽으려고 하므로 합절이 말 재갈을 붙잡고 저지하면서 말하기를 “대인(大人)께서 유명(遺命)을 남기셨는데, 이제 아버지의 명을 저버린다면 효(孝)라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거진이 칼로 합절의 팔을 쳐 버리고 적진에 돌격하여 또한 전사하였다. 이에 합절이 말하기를 “상전이 돌아가셨는데 죽지 않고 어찌하겠는가.” 하고는 역시 적과 싸우다가 죽었습니다. 이로 인해 온 군중이 감격하여 일제히 진격함으로써 향하는 곳마다 승리하여 적의 머리 3000여 급(級)을 베었습니다. 왕은 그들을 애도하여 예로 장사 지내 주었습니다.
성충(成忠)은 백제 사람으로 의자왕(義慈王) 때에 좌평(佐平)이 되었습니다. 왕이 황음(荒淫)하고 탐락(耽樂)하여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자 충이 극력 간(諫)하니, 왕이 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충은 밥을 먹지 않다가 죽었는데, 죽음에 임하여 왕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니 원컨대 한 말씀 올리고 죽겠습니다. 신이 일찍이 시세의 변천을 관찰해 보니 반드시 앞으로 전쟁이 있을 것입니다. 전쟁을 하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지세를 잘 가려서 해야 하니, 상류에 위치하여 적에 대응해야만 보전할 수 있습니다. 적군이 만일 쳐들어오면 육로로는 탄현(炭峴)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로(水路)로는 기벌포(伎伐浦)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험준한 곳에 웅거하여 그들을 방어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왕은 반성하지 않았고, 그는 마침내 옥중에서 죽었습니다. 그 후 수년 만에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신라와 함께 백제를 정벌하여 그들의 군대가 성 밑까지 이르자, 의자왕이 모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탄식하기를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른 것이 후회스럽다.” 하더니, 마침내 나당(羅唐) 군사들에게 멸망당했습니다.
이존오(李存吾)는 경주(慶州) 사람입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학문에 힘썼는데, 강개(慷慨)하여 지절(志節)이 있었고 대범하고 묵중하여 말이 적었습니다. 나이 10여 세 때 〈강창(江漲)〉이란 시를 짓기를 “온 들이 다 묻혔는데, 높은 산만 가라앉지 않았네.〔大野皆爲沒 高山獨不降〕”라고 하니, 식자들이 그를 기이하게 여겼습니다.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에 좌정언(左正言)이 되었는데, 왕이 요승(妖僧) 신돈(辛旽)을 총애하여 정사를 그에게 맡겼습니다. 이존오가 대사간 정추(鄭樞)와 함께 소(疏)를 올려, 신돈이 국정을 제멋대로 하여 임금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있음을 논하였습니다. 그러자 왕이 노하여 존오를 불러 면전에서 책망했습니다. 이때 신돈이 임금과 마주 앉아 있기에 존오가 신돈을 쳐다보고 꾸짖기를 “늙은 중이 어찌 이같이 무례할 수 있단 말인가.” 하니, 신돈이 두려워하고 놀라 자기도 모르게 안석에서 내려왔습니다. 왕은 더욱 노하여 존오를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었습니다.
이색(李穡)의 변호로 죽음을 면하고, 장사 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었으며 공주(公州) 석탄(石灘)에 물러가 살았습니다.
그 후 신돈의 세력이 더욱 치성해지므로 걱정하고 분개함이 병이 되었습니다. 병이 위독해지자 좌우를 시켜 자신을 붙들어 일으키게 하고 말하기를 “신돈의 세력이 아직도 치성한가? 신돈이 망해야 내가 망할 것이다.” 하고는, 자리에 돌아와 편히 눕기도 전에 죽었습니다.
최씨(崔氏)는 영암(靈巖) 사람 인우(仁祐)의 딸로 진주(晉州)의 아전 정만(鄭滿)에게 시집갔습니다.
홍무(洪武) 기미년(1379, 고려 우왕5)에 왜적이 진주를 침범했을 때 최씨는 아이들을 안거나 이끌고서 산중으로 도망가 숨었습니다. 왜적이 칼을 뽑아 들고 협박하자 최씨는 나무를 안고 항거하면서 꾸짖기를 “적에게 욕을 당하고 사느니 차라리 의리에 죽겠다.” 하면서 꾸짖기를 그치지 않으니, 적이 마침내 죽였습니다. 국초(國初)에 정려를 내려 표창하였습니다.
약가(藥哥)는 선산(善山) 사람 조을생(趙乙生)의 아내입니다. 을생이 왜구에게 붙들려 간 후 약가는 남편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름에도 불구하고 고기도 먹지 않고 훈채도 먹지 않고 의복도 벗지 않은 채 잠을 잤습니다. 부모가 그를 다른 데로 시집보내려 하자 그는 죽기로 맹세하고 따르지 않았습니다. 8년 만에 을생이 돌아오자 다시 부부 생활을 처음과 같이 하였습니다.
최씨(崔氏)는 충주(忠州) 사람으로 부사(府使) 한약(韓約)과 정혼(定婚)한 사이였습니다. 한약이 일본으로 정벌을 나갔다가 전사하자, 최씨는 종신토록 절개를 지켰습니다. 그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정려를 내려 표창하였습니다.
서씨(徐氏)는 풍기(豐基) 사람 사달(思達)의 딸입니다. 같은 군 사람 도운봉(都雲峯)에게 시집간 지 겨우 1년 만에 남편이 죽자 예에 지나칠 만큼 슬퍼하였습니다. 그리고 매일 당(堂) 뒤의 대밭에 가서 대를 안고 울부짖었는데 어느 날 홀연히 흰 대 세 그루가 나더니,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에 흰 대가 7, 8그루에 이르렀습니다.
정통(正統) 무오년(1438, 세종20)에 장헌왕(莊憲王)께서 흰 대를 그림으로 그려 올리라고 명하시고는 조세(租稅)를 면제해 주고 정려를 내려 표창하였습니다.
손씨(孫氏)는 밀양부(密陽府) 사람 윤하(胤河)의 딸입니다. 16세에 초계(草溪) 사람 안근(安近)에게 시집갔는데, 시집간 지 겨우 수일 만에 안근이 죽자 3년 동안 슬피 울며 몸소 조석(朝夕)의 전(奠)을 올렸습니다. 삼년상을 마치자 조부모가 나이 어린 것을 불쌍히 여겨 재가(再嫁)시키려고 하니, 손씨가 죽기로 굳게 거절하였습니다. 조부가 노하여 다시 그를 강제로 재가시키려 하니 손씨는 남몰래 동산의 대숲으로 들어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으려 하였습니다. 그의 언니가 발견하여 풀어 주자 즉시 시집으로 돌아가 살았습니다. 시집에 와서는 조석으로 반드시 먼저 남편에게 제사 지낸 다음에 밥을 먹곤 했는데, 32세에 죽었습니다.
양씨(梁氏)는 무주(茂朱) 사람 구길생(具吉生)의 아내입니다. 길생이 죽자 조석으로 친히 전(奠)을 올렸는데, 하루는 전을 올리러 가서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가 괴이하게 여겨 찾아보니, 초빈(草殯)을 열고 관(棺)을 안고서 곡을 하고 있으므로 부모가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그때 마침 집 앞 냇물이 한창 불어 있었는데 양씨가 갑자기 물로 뛰어들자 그의 언니가 건져 내어 구했습니다. 그러나 몇 달 뒤 다시 자기 침실에서 스스로 목을 매어 죽으니, 부모가 그를 슬프게 여겨 그의 남편과 한 묘혈(墓穴)에 장사 지내 주었습니다.
성이(性伊)는 김해부(金海府)의 아전 허후동(許厚同)의 아내입니다. 20세에 남편이 죽으니, 조석으로 전 드리는 도구들을 정결하게 하기 위하여 솥과 도마를 별도로 설치해 두고 제수를 장만하였으며, 초하루와 보름 때마다 시물(時物)을 준비하고 시복(時服)을 지어 입고서 제사를 지내되 제사를 마치고 나서는 시복을 불태워 버렸습니다. 그리고 항상 강포한 자에게 혹 몸을 더럽히게 될까 염려하여 칼과 노끈을 휴대하고서 스스로 맹세하기를 “칼로 자결하지 못하면 노끈으로 목을 매어 죽으리라.” 하였습니다. 3년 동안 몹시 슬피 울었고 남들과 대면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정문을 내려 표창하였습니다.
배씨(裵氏)는 성주(星州) 사람 이동교(李東郊)의 아내입니다. 홍무(洪武) 경신년(1380, 고려 우왕6)에 왜적이 그곳에 침노하여 배씨가 사는 마을에 갑자기 쳐들어오자, 배씨는 젖먹이 아들을 안고 달아났습니다. 적이 그녀를 뒤쫓아 강가에 이르렀을 때 강물이 한창 불어 있었으므로 배씨는 달아날 수 없음을 알고 강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러자 적이 화살을 활시위에 끼우고 겨누면서 말하기를 “이리로 나와라. 너를 살려 주겠다.” 하였으나, 배씨는 욕을 하며 말하기를 “왜 빨리 나를 죽이지 않느냐. 내가 어찌 적에게 몸을 더럽힐 수 있겠느냐.” 하였습니다. 적이 화살을 쏘아 배씨의 어깨를 적중시키니 마침내 강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국초에 정문을 내려 표창하였습니다.
임씨(林氏)는 전주부(全州府) 사람 지낙안군사(知樂安郡事) 최극부(崔克孚)의 아내입니다. 왜적이 그곳에 침노했을 때 임씨가 그들에게 붙잡혔는데, 적이 임씨를 겁탈하려 하였습니다. 임씨가 굳게 항거하자, 적은 임씨의 한쪽 팔을 자르고 또 한쪽 다리까지 잘랐습니다. 그러나 임씨는 끝내 굴하지 않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국초에 정려를 내려 표창하였습니다.
본국은 기자(箕子)가 와서 봉해짐으로부터 구주(九疇)로 교화를 베풀고
팔조(八條)로 정치를 하여 인현(仁賢)의 교화가 저절로 신명(神明)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공맹의 심학(心學)을 터득하고 기자의 주수(疇數)에 밝은 선비로서 세상에 이름난 이들이 반드시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군(四郡)ㆍ이부(二府) 시대 이후로 삼국(三國)이 갈라져 싸움으로써 전쟁의 분탕 속에 문적(文籍)이 죄다 흩어져 없어져서 공맹의 도를 전할 사람이 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세상에 이름을 떨쳤던 전인(前人)마저도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였습니다. 고려 500여 년간 세도(世道)가 높아지고 문풍(文風)이 점차 열려 중국에 유학하는 선비가 많아지고 경적(經籍)이 널리 퍼짐으로써 중국의 문명을 수용하여 오랑캐의 풍속이 변화하고, 난세가 치세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시서(詩書)의 은택과 예의의 풍속이 점차 기자가 베푼 구주의 옛 풍속을 회복하게 되었으니, 중국으로부터 ‘문헌의 나라〔文獻之邦〕’ 또는 ‘군자의 나라〔君子之國〕’라고 칭찬을 받은 것이 바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라와 고려 두 왕조의 선비들은 학문의 중점이 끝내 언어와 문장 사이에 있었으니, 고려 말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정주(程朱)의 서적이 차차로 우리나라에 들어왔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탁(禹倬), 정몽주(鄭夢周) 같은 이들이 성리학(性理學)의 이론을 참고하여 연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국조(國朝)에 이르러서는 태종문황제(太宗文皇帝)께서 《사서대전(四書大全)》, 《오경대전(五經大全)》, 《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의 서적을 반포하였고, 본국이 과거를 설행하여 선비들을 취할 적에 또 사서(四書)와 삼경(三經)에 통달한 자들도 그 선발에 들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선비들이 외우고 익히는 것이 모두가 공자ㆍ맹자ㆍ정자ㆍ주자의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혹은 구태의연하게 답습함으로써 드러내지 못하고 살피지도 못하며, 혹은
뜻은 크나 일에는 소략하여 찬란히 문장을 이루었을 뿐 그것을 마름질할 줄 몰랐습니다. 그 가운데 능히 홀로 뛰어난 견해를 가지고 개연히 분발하여 성현의 학문에 종사한 사람도 가끔 있었으나 또한 많지는 않습니다. 지금 제가 열거하는 몇 사람은 모두 이미 죽은 사람들이고, 현재 생존한 사람에 대해서는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
이 몇 사람들은 선현의 세대보다 천여 년 뒤에 태어났고 궁벽한 바다 가운데서 살았기 때문에 성현의 문하에서 직접 가르침을 받지 못하였으니, 그들이 성현의 심학(心學)을 잘 알았다고 하기는 어렵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일생 동안 여기에 힘을 썼고 보면 심학을 공부하는 무리야 되지 못하겠습니까. 그리고
기자(箕子)의 홍범(洪範)에 대해서는 주희(朱熹)와 채원정(蔡元定)의 설(說)이 의리를 발명하는 데 조금도 미진함이 없었기 때문에 흐름을 인하여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서 그것을 터득한 사람도 또한 있었습니다. 그 수(數)에 대해서는 구봉(九峯
채침(蔡沈))의 《내편도설(內篇圖說)》이 비록 있고
원락자(苑洛子)의 발명(發明)도 있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수에 밝았다는 사람을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근세에
이순(李純)이라는 사람이 그 설에 능통했다고 자칭하면서 주해(註解)를 짓기까지 하였지만 그것이 과연 오류가 없는지는 또한 모르겠습니다.
설총(薛聰)은 신라 사람입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총명하였으며, 이미 자라서는 널리 배워 능히 방언(方言)으로 구경(九經)의 뜻을 해석하여 후진들을 훈도하였고, 또 글도 잘 지었습니다.
최치원(崔致遠)은 신라 사람입니다. 그는 정민(精敏)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12세에 배를 타고 당나라에 들어가 배움의 길을 찾았습니다. 18세에는 당나라 과거에 급제하여 선주(宣州) 율수현 위(溧水縣尉)가 되었고, 시어사(侍御史), 내공봉(內供奉)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또 고변(高騈)의 종사관이 되었습니다. 그때 그가 지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에 “온 천하 사람이 모두 그를 공개로 처형할 것을 생각할 뿐만 아니라 또한 지하의 귀신들도 이미 은밀히 베어 죽이기를 의논하고 있다.〔不惟天下之人皆思顯戮 抑亦地中之鬼已議陰誅〕”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황소가 그 글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평상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이 천하에 떨쳐졌습니다.
광계(光啓) 원년(885)에 황제의 조칙을 받들고 본국으로 돌아와서는 스스로 중국에 가서 배워 많이 얻은 것을 가지고 가슴속에 품은 경륜을 한번 펴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난세를 만나 스스로 때를 만나지 못한 것에 상심하여 더 이상 벼슬할 뜻을 버리고는 가족을 거느리고 가야산(伽倻山)에 은거하여 일생을 마쳤습니다.
그가 저술한 《사륙집(四六集)》1권, 《계원필경(桂苑筆耕)》20권이 《당서(唐書)》〈예문지(藝文志)〉에 실려 있습니다. 고려 현왕(顯王) 때에 설총과 최치원이 모두 우리나라의 문교(文敎)에 공이 있었다 하여 문묘(文廟) 서무(西廡)의 아래쪽에 배향하였는데, 지금까지도 배향되어 있습니다.
최충(崔冲)은 해주(海州) 사람입니다. 그는 풍모가 뛰어나고 기이하며 지조가 굳고 곧았습니다. 젊어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고 글도 잘 지었습니다. 고려 목왕(穆王) 때 문과에 급제하여 그 후 4대의 왕을 내리 섬겼습니다. 자질이 문무를 겸비하여 나가면 장수가 되고 들어오면 정승이 되었습니다.
현왕(顯王)이 나라를 중흥시키면서부터 전쟁은 겨우 그쳤으나 문교는 아직 펼 겨를이 없었는데, 최충이 후진들을 불러 모아 지성으로 가르치니 생도들이 문에 그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낙성재(樂聖齋)ㆍ대중재(大中齋)ㆍ성명재(誠明齋)ㆍ경업재(敬業齋)ㆍ조도재(造道齋)ㆍ솔성재(率性齋)ㆍ진덕재(進德齋)ㆍ대화재(大和齋)ㆍ대빙재(待聘齋)라는 9개의 재(齋)를 나누어 만들고 생도들을 수용하였습니다. 이를 ‘시중최공도(侍中崔公徒)’라 하였는데, 모든 과거에 응시할 사람들은 반드시 먼저 이 최공도에 예속되어 학업을 닦았습니다. 우리 동방에 학교가 생긴 것은 대개 최충으로부터 시작되었으므로 당시에 그를 ‘해동공자(海東孔子)’라 칭하였습니다. 뒤에 해주 사람들이 서원을 짓고 사우(祠宇)를 건립하여 그를 향사하고 있습니다.
안유(安裕)는 흥주(興州) 사람입니다.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첨의중찬(僉議中贊)에 제수되었습니다. 그는 사람됨이 장엄하고 정중하고 안온하고 자상하였으며, 일찍이 인재를 길러서 사문(斯文)을 흥기하여 회복시키는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학교의 제도가 크게 무너지고 유학(儒學)이 날로 쇠퇴해짐을 걱정하여 문교의 진흥을 위해 국학(國學)에다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해서 길이 인재 교양의 자본으로 삼았습니다. 또 남은 돈을 중국 강남(江南)에 보내어 공자 및 그의 제자 70명의 화상(畫像)을 그려 와 모셨고, 또 제기(祭器)ㆍ악기(樂器)와 육경(六經)ㆍ제자(諸子)ㆍ사서(史書) 등의 서적을 구입해 와서 비치하였습니다. 또 이산(李㦃)과 이진(李瑱)을 천거하여 교관(敎官)으로 삼으니, 경서를 펴 놓고 수업을 하는 생도가 수백 명에 이르렀습니다.
만년에는 회암(晦庵
주희) 선생의 진영(眞影)을 벽에 걸어 두고 경모의 뜻을 다하였으며,
회헌(
晦軒)이라 자호하였습니다. 그가 죽자
칠관(七館)ㆍ십이도(十二徒)가 모두 소복을 입고 노제(路祭)를 지냈습니다. ‘문성(文成)’이란 시호를 내리고 문묘 서무(西廡)의 아래쪽에 배향하였으며, 후인들이 또 서원을 건립하였습니다.
우탁(禹倬)은 단산(丹山
단양(丹陽)) 사람입니다. 고려 충선왕(忠宣王) 때에 감찰규정(監察糾正)이 되었는데, 왕이 일찍이 덕망을 잃는 일이 있자 우탁이 흰옷에 도끼를 손에 쥐고 짚을 허리에 묶고 앉아서 왕에게 글을 올려 과감하게 간하였습니다. 뒤에 성균 좨주(成均祭酒)로 치사(致仕)하고 복주(福州
안동(安東))의 예안(禮安)에 물러가 살았습니다. 충숙왕(忠肅王)이 그의 충의(忠義)를 가상하게 여겨 두 번이나 불렀지만 나오지 않았습니다.
우탁은 경사에 통하였고 역학(易學)에는 더욱 깊이 통하였습니다.
정전(程傳)이 맨 처음 동방에 들어왔을 적에 아무도 그것을 아는 이가 없었는데, 우탁이 문을 닫고 한 달 남짓 연구한 끝에 그것을 해득하여 생도들에게 가르쳐 줌으로써 의리(義理)에 관한 학문이 비로소 행해졌습니다.
정몽주(鄭夢周)는 영일현(迎日縣) 사람입니다. 그는 사람됨이 지혜와 용기가 뛰어났고 충효의 큰 절개가 있었습니다. 젊어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열심히 공부하였고, 성리학을 정밀히 연구하여 깊이 터득한 바가 있었습니다. 당시 동방에 들어온 경서(經書)는 주자의 집주(集註)였는데, 몽주의 강설(講說)이 너무 탁월하여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현격하게 뛰어넘었으므로 듣는 이들이 자못 의심하였습니다. 그 후 호운봉(胡雲峯
호병문(胡炳文))의 《사서통해(四書通解)》를 얻어 본 결과 몽주의 강설이 그의 설과 모두 합치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선비들이 다 복종하여 그를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로 추앙하였습니다.
고려 말기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었는데, 이때는 국가에 변고가 많아 기밀(機密)한 정무가 대단히 번잡하였습니다. 그러나 몽주는 큰일에 대처하고 큰 의문을 결단함에 있어 언어와 안색을 조금도 동요함이 없이 좌우로 응답하여 모든 일을 다 타당하게 처리하였고 새로 설치한 것도 많았으므로, 당시에 제왕을 보좌할 만한 재목이라 일컬어졌습니다.
당시의 풍속은 상례와 제례에 있어 오로지 불교의 법을 숭상하였는데, 몽주가 비로소 사서인(士庶人)들로 하여금 주자의 《가례(家禮)》를 본받아 가묘(家廟)를 세워 조상의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습니다. 또 도성 안에 오부학당(五部學堂)을 건립하고, 밖으로는 전국에 걸쳐 향교를 설치하여 유술(儒術)을 진흥시켰습니다. 그 밖에 의창(義倉)을 세워 궁핍한 이들을 진휼하고, 수참(水站)을 설치하여 조운(漕運)에 편리하도록 한 것도 모두 그가 계획한 것입니다.
그가 저술한 시문(詩文)은 호방하고도 준엄하고 개결하였습니다. 문충(文忠)이란 시호가 내려졌고 문묘 서무의 아래쪽에 배향되었습니다. 후인이 또 서원을 세웠습니다.
이색(李穡)은 한주(韓州) 사람입니다. 그는 고려 말기에 원나라에 들어가 제과(制科)에 제2갑(第二甲)으로 입격(入格)하고 본국에 돌아와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천품이 명민하였으며 수많은 서적을 널리 열람하였는데, 시문을 짓는 데 있어서는 붓을 잡으면 즉시 써 내려가서 조금도 막힘이 없었습니다. 힘써 후학들을 진취시켜 사문(斯文)을 진흥시키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았기 때문에 학자들이 모두 우러러 사모하였습니다. 나라의 문한(文翰)을 수십 년 동안 관장하였는데, 누차 중국의 칭송을 받았습니다.
길재(吉再)는 선산(善山) 사람입니다. 고려 말기에 주서(注書)를 지냈는데, 지조가 고결하고 학문이 순정(醇正)하였습니다. 그가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가 있을 적에는 시골 사람들까지 그의 인품에 감화되어, 아무리 못난 사람일지라도 또한 자기 몸을 선으로 신칙(申飭)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국초에 누차 불렀으나 나오지 않고 자기 집에서 죽었습니다.
윤상(尹祥)은 경상도 예천(醴泉)의 군리(郡吏)였는데, 문과에 급제하고
강정왕(康靖王)을 섬겨 벼슬이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학문이 정밀하고 깊었으며, 지성으로 남을 가르쳐 근대 사유(師儒)의 으뜸이 되었습니다.
김종직(金宗直)은 경상도 선산부(善山府) 사람입니다. 강정왕을 섬겨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학문이 정밀하고 깊었으며 문장이 고상하고 고아하여 한 시대의 유종(儒宗)이 되었습니다. 또 후진들을 지성으로 가르쳐 전후의 명사(名士)가 그의 문하에서 많이 나왔으며, 점필재(佔畢齋) 선생이라고 일컬어졌습니다.
김굉필(金宏弼)은 황해도 서흥부(瑞興府) 사람입니다. 그는 뜻을 독실히 하고 행실에 힘썼으며, 예법으로 몸을 단속하되 시종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이학(理學)을 정밀히 연구하였고 지성으로 후진들을 가르쳤습니다. 강정왕 때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벼슬이 좌랑(佐郞)에 이르렀습니다. 공희왕(恭僖王
중종(中宗))께서 그에게 영의정(領議政)을 증직하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습니다.
정여창(鄭汝昌)은 경상도 함양군(咸陽郡) 사람으로, 벼슬은 현감(縣監)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옛 도(道)를 독실히 믿고 의(義)를 좋아하였으며, 학문은 실천하는 것을 위주로 하였습니다. 김굉필과 함께 점필재 선생을 사사(師事)하여 뜻이 서로 같고 도가 서로 합치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김정(金鄭)’이라 일컬었습니다. 일두(一蠹)라 자호하였습니다. 공희왕께서 우의정(右議政)을 증직하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는데, 그 후에 함양군 사람들이 서원을 세워 제사하고 있습니다.
조광조(趙光祖)는 한성부(漢城府) 사람입니다. 공희왕을 섬겨 벼슬은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천품이 순수하고 아름다웠으며, 행실은 옛사람보다 뛰어났습니다. 김굉필을 사사하여 믿음을 돈독히 하고 학문에 힘썼으며, 도술(道術)을 밝히고 인심(人心)을 선하게 하여 온 세상을 태평 시대로 인도하는 데 뜻이 있었으나, 불행하게도 일찍 죽었습니다.
김안국(金安國)은 경상도 의성현(義城縣) 사람입니다. 공희왕을 섬겨 벼슬이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습니다. 학문이 정밀하고 해박하여 선비들의 사범(師範)이 되었습니다. 호는 모재(慕齋) 선생이라 합니다.
이언적(李彦迪)은 경상도 경주(慶州) 사람입니다. 그는 성품이 침착하고 조용하고 단정하고 정성스러웠으며, 효도하고 우애하고 충직하고 신의가 있었습니다. 특히 성리학을 독실하게 좋아하여 조예가 매우 깊었습니다. 그가 공희왕ㆍ영정왕(榮靖王
인종(仁宗))ㆍ신훙왕(新薨王
명종(明宗))을 섬기면서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 나라 다스리는 모책을 진언한 실상은 그가 배운 것에 전혀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그가 논한 〈무극태극서(無極太極書)〉4, 5편은 정자와 주자의 오묘한 뜻에서 깨달은 것이 있다고 합니다.
서경덕(徐敬德)은 개성부(開城府) 사람입니다. 그는 화담(花潭)에 은거하며 성리학을 강론하여 밝혔는데, 수학(數學)에 더욱 정통하였습니다. 공희왕께서 누차 불렀으나 나오지 않고 집에서 일생을 마쳤습니다. 신훙왕께서 그에게 호조 좌랑(戶曹佐郞)을 증직하였습니다.
〇 본국의 8도(道) 중에 어느 도의 백성이 무슨 일을 익히는지, 예를 들면 선비가 많다든가 혹은 농부가 많다든가, 어떤 종류의 공예(工藝)가 많다든가 또는 어떤 종류의 장사꾼이 많다든가, 무슨 화물(貨物)이나 미포(米布)가 많이 난다든가, 또 요즘 백성들은 무슨 고통이 있으며, 혹은 부녀자들은 무슨 일을 익히고 있으며, 풍속과 교화는 어떠한지, 아무 곳과 아무 곳이 서로 다른 점 등을 하나하나 소상하게 기록하라.
본국은 모두 8도입니다. 경기(京畿)가 중앙에 위치해 있고, 동쪽은 강원도, 동남쪽은 경상도, 남쪽은 청홍도(淸洪道
충청도)와 전라도, 서쪽 맨 끝은 황해도, 서북쪽은 평안도, 동북쪽은 함경도입니다.
경(卿)이나 사(士)의 후손은 대대로 그 업을 지키는데, 이를 사족이라 합니다. 그들은 모두 시서(詩書)를 외고 익히는데 그것에 능하지 못한 사람은 무예를 익히기도 합니다. 서인의 자식 역시 글을 배우는 사람이 많고 혹은 무예를 익히기도 하는데, 이 가운데 하나도 능하지 못한 사람은 농사꾼이 되기도 하고 공장(工匠)이 되기도 합니다.
전라도ㆍ경상도ㆍ청홍도는 토지가 비옥하고, 민물(民物)이 번성하며 재부(財賦)가 많고 인재가 배출되는 것이 다른 도의 배나 됩니다. 평안도와 함경도는 기후가 춥고 기질이 강하여 풍속이 활 쏘고 말달리는 것을 숭상합니다. 8도가 대부분 바다를 끼고 있어 백성들은 어염(魚鹽)으로 생활을 영위하고 있고, 내륙 지방에 사는 백성들은 모두 농업에 힘쓰고 다른 업은 일삼지 않습니다.
공장(工匠)이 집기(什器)를 만들고 장사꾼이 재화(財貨)를 유통시키는 일이야 8도가 다 마찬가지이지만 도성 주위에 더욱 성행합니다. 물품을 사는 데 있어서는 금(金)ㆍ은(銀)ㆍ동(銅)ㆍ철(鐵)을 사용하지 않고 다만 사마(紗麻)와 속미(粟米)를 가지고 서로 교역하기 때문에 부녀자들은 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나 다 누에를 치고 베 짜는 것을 일삼으며, 천한 부녀자들은 심지어 농사일과 물 긷고 절구질하는 일 등에 종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조선이 개국한 이후 근 200년 동안 백성들이 생업에 편안히 종사해 왔고 전쟁으로 인한 걱정은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때로 수재나 한재를 만나기 때문에 괴로움이 없지는 않습니다.
도성 안에는 성균관(成均館)을 설치하고 또 사학(四學)을 설치했으며, 주(州)ㆍ부(府)ㆍ군(郡)ㆍ현(縣)에는 모두 향교를 설치하고 각각 사장(師長)을 두어 육행(六行)과 육예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선비들이 모두 예의에 흥기하고 있으니, 이 나라가 비록 작은 나라이기는 하지만 대대로 닦아 온 정사는 실상 황조(皇朝)의 풍속과 교화가 미친 것입니다.
〇 본국은 어떻게 선비를 취하며, 관원(官員)이 출신(出身)하는 길은 몇 가지나 있는가?
본국이 선비를 취함은 으레 자(子)ㆍ오(午)ㆍ묘(卯)ㆍ유(酉)년마다
대비(大比)하여 선비를 뽑는 중국의 예에 의거해서 시험을 실시하되, 문과의 경우는 사서삼경에 통한 자를 취한 다음 또 사장(詞章)을 시험하고, 무과의 경우는 무예를 시험하고 또 글을 강하게 하여 둘 다 3등으로 나눕니다. 그래서 문과는 33인을 취하고 무과는 28인을 취하는데, 이것을 식년출신(式年出身)이라 칭합니다. 또 시부(詩賦)와 경의(經義)로 선비를 취하는 것을 생원ㆍ진사라 하는데, 이들은 모두 200인을 뽑아 국학에 충원합니다. 만일 일시적인 왕의 은명(恩命)이 있어 특별히 문사나 무사를 취하는 경우는 이를 별시출신(別試出身)이라 합니다.
문음직(門蔭職)의 경우는 경대부의 자제로서 그 자질이 관리의 사무를 감당할 만한 자를 취하여 시의 적절하게 서용(敍用)합니다. 경학에 밝거나 행실이 훌륭하거나 효우(孝友)가 뛰어나거나 유일(遺逸)의 선비가 있을 경우에는 특별히 한계를 뛰어넘어 서용하고 있습니다. 기타 의(醫)ㆍ역(譯)ㆍ음양(陰陽) 등 방술(方術)에 대해서도 역시 과시를 설치하여 취하되 다만 본아문(本衙門)에만 서용합니다.
하교하기를, “학문(學問)과 사공(事功)은 두 가지 일이 아니다. 사공으로 자임(自任)했던 옛사람이 어찌 일찍이 궁리(窮理)와 격물(格物) 공부를 버려두고 잡히지도 않는 막연한 일에 힘을 쓴 적이 있었던가. 크건 작건 모든 일에는 이치가 있게 마련이니, 격물 궁리하여 이 이치를 터득하여 사공에 드러내어야만 한다. 그렇게 해야 막히거나 제약받는 병통이 없어서 어떤 일이라도 거침없이 처리할 수 있게 된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마음은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니,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느라고 엉뚱한 대답을 한다’는 것은 주 부자(朱夫子)의 훌륭한 비유이다. 또 내가 장획(長畫)으로 활을 쏠 때의 일을 가지고 증험하건대, 마음이 정일해야만 쏘는 대로 명중시키게 되는 것이다. 활쏘기도 그러한데 더구나 이 학문 공부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학문은 별다른 일이 아니고 일상생활이 모두 이 학문 공부여서, 옷을 입을 때와 밥을 먹을 때도 모두가 이 학문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학문이라는 말만 나오면 아득히 멀어서 행하기 어려운 일로 보아, 걸핏하면 ‘학문 공부는 어떻게 착수해야 하는가’라고 말들을 하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보통 사람들은 독서하는 데 있어서 육경(六經)에 근본하지 않고 단지 외가(外家)의 문자를 표절(剽竊)할 뿐이다. 그래서 젊은 날 기상이 예리한 때라 하더라도 오히려 꽉 막혀서 참된 기운이 없다. 더구나 어느덧 노년에 이르고 나면 속이 더욱 텅 비어 참다운 기상이 전혀 없게 되는 것이다.” 하였다.
검교직제학 신 서유방(徐有防)이 임자년에 기록한 것이다.
상이 이르기를, “일반 선비들에게까지 두루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조목별로 물은 데는 내 나름대로 뜻하는 바가 있었다. 근래 서울의 선비들이 유랑(遊浪)만을 일삼으면서 공부는 전혀 하지 않고, 간혹 사기(史記)를 범범히 본다 하더라도 애당초 어떤 대목을 의심하고 논란해야 하는지를 모른다. 이번의 이 거조는 실제로 권장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으나, 집에 있으면서 조목별로 대답하게 하였으니 사람마다 반드시 스스로 기술(記述)하지는 못할 것인바, 그 부형(父兄)에게 묻고 사우(師友)에게 질정하는 것을 통해서 반드시 보탬이 되는 점이 많을 것이다. 《송사(宋史)》를 선비들에게 베껴 올리도록 한 것은 고례(古例)가 그러해서일 뿐만 아니라, 이것이 바로 권면하고 독려하는 한 가지 방법이기 때문이었으니, 조사해서 베껴 내는 때에 또한 어찌 도움 되는 바가 없겠는가.” 하였다.
원임 직제학 신 박우원(朴祐源)이 임자년에 기록한 것이다.
상이 이르기를, “《역대명시전집(歷代名詩全集)》에 실을 시를 선별하는 데에, 당(唐) 나라의 맹교(孟郊), 가도(賈島), 피일휴(皮日休), 육귀몽(陸龜蒙)은 음조가 낮고 슬프며 경솔하고 천박하여 성세(盛世)의
희음(希音)이 아니고, 유창(劉滄)은 근체(近體)에 치우치고 원결(元結)은 나무라고 헐뜯는 단점이 있어서 뽑기에 적당치 않다. 송(宋) 나라의 한기(韓琦)는 문장으로 자부하지는 않았지만 옥룡(玉龍)의 구절과 노포(老圃)의 시는 자못 정운(正韻)을 얻었으며, 또 그 사업이 좋았기 때문에 문장도 좋으니, 뽑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도전(鄭道傳)과 권근(權近)은 출처(出處)는 비록 야은(冶隱) 등 제현(諸賢)에 미치지 못했어도 그 문장과 경륜(經綸)은 본디 한 시대의 영웅이었다. 정도전의 《삼봉집(三峯集)》이 세월이 오래된 탓에 판각(板刻)이 마손(磨損)되어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으니, 매우 애석한 일이다. 최립(崔岦)의 《간이집(簡易集)》과 차천로(車天輅)의 《오산집(五山集)》도 모두 간행해서 반포하도록 명하여 영원히 전해지게 하였는데, 더구나 개국 원훈(開國元勳)의 경제 문자(經濟文字)이겠는가. 내부(內府)에 보관되어 있는 본(本)을 꺼내어 영남(嶺南) 감영(監營)으로 싸 보내어서 즉시 교정하여 개판(開板)한 다음 인쇄해서 올려 보내게 하고, 이것을 사고(史庫)에 보관하도록 하라.” 하였다.
원임 직각 신 윤행임(尹行恁)이 임자년에 기록한 것이다.
상이 이르기를, “《시경(詩經)》 삼백편은 읽을수록 더욱 좋아서 오래 읽으면 읽을수록 더욱 그 참맛을 알게 된다. 예컨대
‘문왕의 손자들이 본손과 지손 모두 백세를 전할 것이며, 모든 주 나라의 선비들도 또한 대대로 드러나리로다.[文王孫子 本支百世 凡周之士 不顯亦世]’라는 시는, 이 네 구절을 시험 삼아 읊어 보면 무한한 의미가 담겨 있으니,
‘청묘(淸廟)의 시를 비파로 연주할 때에 한 사람이 창하고 세 사람이 화답한다’는 정도만이 아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젊었을 적에 시를 무척 좋아하여, 《시경》 삼백편으로부터 송(宋)ㆍ명(明)의 제가(諸家)에 이르기까지 그 울타리를 엿보며 아름다운 구절을 주워 모았고, 더러는 작자의 필의(筆意)를 보아 그 오묘한 뜻을 깨닫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곧 이로움은 없고 공부에 해만 끼친다고 생각하여 일체 포기한 지가 이제 20여 년이 되었다. 근래에 심기가 화평(和平)하지 않아서 내 성향에 맞는 여러 문집들을 가져다가 두어 차례 펼쳐 보았는데, 불현듯 생각이 넓어지고 막힘이 없어지는 것을 깨달았으니, 이것이 바로 《시관(詩觀)》을 편찬하게 된 동기이다. 옛사람이 ‘심기가 화평하지 않을 때는 악기(樂記)를 한번 읽으면 마음속의 근심을 쏟아 버릴 수 있다.’고 하였는데, 참으로 옳은 말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시는 세도(世道)와 정치의 수준에 관계된다. 뜻이 깊고 화기(和氣)가 넘치는 것은 잘 다스려진 세상의 중화(中和)한 음이고, 온화하고 전아(典雅)한 것은 관면 패옥(冠冕佩玉)의 바탕이며, 잗달고 예리하고 바르지 못한 것은 어지러운 세상의 번거롭고 촉급한 소리이고, 음험하고 교묘한 것은 고신 얼자(孤臣孽子)의 글이다. 당 나라의 맹교(孟郊)와 가도(賈島), 명 나라의 종성(鍾惺)과 담원춘(譚元春)은 어찌 걸출한 자들이 아니겠는가마는 나는 모두 취하지 않았고, 송 나라의 한기(韓琦)는 시를 평하는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지만 나는 홀로 취하였으니, 이것을 미루어 보면 《시관(詩觀)》에서 취사(取舍)의 기준으로 삼은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명 나라 전겸익(錢謙益)의 시는 그다지 슬프고 낮지 않은데도 수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니, 대개 지지(支持)하고 억누르며 주고 빼앗는 작은 권한을 어디든 붙이지 않는 곳이 없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공자(孔子)가 《춘추(春秋)》를 지을 적에는 사실에 근거하여 곧이곧대로 썼을 뿐이다. 칭찬하고 비난하며 주고 빼앗는 내용은 부자(夫子)가 일찍이 스스로 쓴 적이 없었고, 반드시 뒷사람이 드러내기를 기다린 뒤에야 그 뜻이 비로소 밝혀졌다. 그 뜻을 밝힌 사람으로는 좌씨(左氏)가 있고 공양씨(公羊氏)가 있고 곡량씨(穀梁氏)가 있으며, 아래로 내려오면 한(漢), 당(唐), 송(宋)의 제유(諸儒) 가운데 저술하여 도운 자가 또 수십 명이나 되니, 그런 뒤에야 성인(聖人)께서 필삭(筆削)한 뜻을 대략이나마 엿볼 수 있게 되었다. 《명의록(明義錄)》에서 징토(懲討)한 역적이 모두 다 무진년(1748, 영조24)과 기사년(1749, 영조25) 이래의 흉역(凶逆)이었던 것을 통해서 《명의록》의 책 성격을 알 수 있다. 나는 나름대로 ‘원하는 바는 공자를 배우는 것이다’는 맹자(孟子)의 말에 스스로 붙좇고자 하면서도 그 자취가 너무 드러나지 않을까 두려워했었다. 그런데 세상에 안목을 갖춘 자가 없어서 이러한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니, 소원(疎遠)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이야 또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근래에 어쩔 수 없이 대략 뜻을 펴서 보였으니, 이는 또한 대궐 문에 법을 게시하는 뜻이며, 살 수 있는 도리를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방안인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논어(論語)》를 읽다가 ‘개와 말에게도 길러 줌이 있다[犬馬能養]’는 가르침에 이르러 적이 의심이 들어 반복해서 생각해 보았다. ‘견마능양’의 양(養)은 대개 개가 개를 기르고 말이 말을 기르는 것이지 사람이 개나 말을 기르는 것이 아니다. 그 뜻은 ‘개나 말도 길러 줄 줄을 아는데, 사람이 되어서 그저 부양할 줄만 안다면 개나 말과 무엇으로 구별하겠는가’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 도리어 타당할 듯하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
‘상인호불문마(傷人乎不問馬)’는 ‘사람이 다치지는 않았는가?[傷人乎不]’로 구를 삼으면 그 설이 매우 잘 통한다. 《논어집주(論語集註)》에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가축을 천하게 여기는 것은 도리상 마땅히 이러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먼저 묻느냐 나중에 묻느냐에 따라서 귀천이 나뉘어진다면, 사람을 먼저 묻고 말을 나중에 묻는 것으로 보는 것은 큰 죄안(罪案)이 되지 않을 듯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말하는 학자가 있으면 온 세상이 시끄럽게 공격해 대는데,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우리나라 학자의 독창적인 주장이 아니고 예로부터 그렇게 본 사람이 많았으니, 대개 우리나라 사람들의 안목이 작고 읽은 책이 많지 않아서 그런 것일 뿐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현악기[絲]는 관악기[竹]만 못하고 관악기는 육성[肉]만 못하다’는 것은 맹가(孟嘉)가 음악에 대해서 논한 말인데, 이 학설을 이해하는 사람이 적다. 현악기는 거문고이고, 관악기는 피리이며, 육성은 노랫소리이다. 거문고의 형태는 오동나무를 잘라서 줄을 팽팽하게 매고
휘(徽)와 진(軫)을 설치하는데, 이렇게 한 후에야 팔음(八音)과 어우러져 육률(六律)에 응할 수 있다. 피리는 자연적인 상태를 그대로 사용하여 만들기 때문에 가다듬거나 깎아 내는 공력을 필요로 하지 않아 간단하고 순후(淳厚)한 기상이 있다. 그러므로 현악기는 관악기만 못하다고 한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의 목소리가 어떤 물건의 힘도 빌리지 않고 자연 상태로 울려서
가(歌)와 성(聲)이 사람의 마음에 화응하고 신명을 이르게 하는 것만은 못하다. 그러므로 관악기는 육성만 못하다고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점차 자연에 가까워진다’라고 한 것이다. 《예기(禮記)》에 ‘등가(登歌)가 위에 있는 것은 사람의 음성을 귀하게 여긴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니, 맹가의 학설 역시 여기에 바탕한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시경(詩經)》의 군자해로편(君子偕老篇)은 꾸짖고 비웃는 말인 줄을 알지 못하겠고, 야유만초편(野有蔓草篇)은 현자(賢者)들끼리 증여(贈與)한 말이 아니라고 단정 짓지 못하겠다. 그런데 주자(朱子)는 헐뜯어 비난하는 작품이라고 지목하기도 하고 음분(淫奔)을 주제로 한 시라고도 하여 조금의 의심도 없이 단정 지었으니, 이는 필시 언외(言外)의 뜻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모시(毛詩)》 소서(小序)를 지나치게 배척하느라고 그런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요즈음은 시를 지을 때 심혈을 기울이지 않고 그저 손 가는 대로 써 내려갈 뿐이다. 《춘저록(春邸錄)》을 한번 보았더니 순아(醇雅)하고 풍채(風采)와 정치(情致)를 갖추어서 근래의 작품이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였다.
재계(齋戒)하는 날 각신(閣臣)에게 하교하기를, “요사이 자궁(慈宮)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 《시경》에서 100편(篇)을 발췌하여 《모시백선(毛詩百選)》이라고 이름 짓고 경들로 하여금 분담하여 언해로 번역해서 올리게 하였다. 옛날에 김만중(金萬重)은 하룻밤 사이에 《구운몽(九雲夢)》을 지어 자신의 어머니에게 바쳤는데, 더구나 나의 경우에는 뜻을 봉양할 수 있는 길이 오직 여기에 있으니, 경들은 게을리 말고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과 태허(太虛) 최항(崔恒)은 문장은 그다지 빼어나지 않아도 원기(元氣)가 충만하고 풍류(風流)가 넘쳐흘러 장강(長江)과 대하(大河)가 도도히 흘러 다함이 없는 것과 같으니, 국초(國初)의 광대하고 장구하면서도 아름답던 기상을 볼 수 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주역대전(周易大全)》에서는 이미 정자(程子)의 《역전(易傳)》을 따랐으면서 또 《주역본의(周易本義)》의 편제(篇題)를 책머리에 실어 놓았다. 정자의 《역전》은
비직(費直)의 역(易)이지 조이도(晁以道)와 여조겸(呂祖謙)이 정한 본(本)이 아니다. 지금 그 편제는 ‘모두 12편이다’라고 하고, 또 ‘공씨(孔氏)의 구본(舊本)을 회복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그 경(經)을 살펴보면 여전히 비직의 본이다. 책을 펼쳤을 때의 첫 번째 의리가 이렇게 어긋나고 잘못되었으니, 영락(永樂) 연간의 신하들은 그 책임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주역(周易)》은 고경(古經)을 정본(正本)으로 삼아서 단(彖), 상(象), 문언(文言)도 계사(繫辭)나 설괘(說卦)처럼 각각 하나의 편(篇)을 이루어야 한다. 그런데 비직과 정현(鄭玄)이 찾아보기에 편하게 하고자 전문(全文)을 가르고 찢어서 괘(卦) 속으로 넣어 버림으로써 고경의 면목을 마침내 볼 수 없게 되었다. 주자가 홀로 조이도와 여조겸이 고쳐 정한 본을 취한 데는 참으로 깊은 뜻이 담겨 있다. 근세 사람이 지은 책 중에서는 이광지(李光地)의 《주역절중(周易折中)》이 가장 온당하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패관 소설(稗官小說)은 사람의 심술(心術)을 가장 해치는 것이니, 문장(文章)과 경술(經術)에 뜻을 둔 선비라면 상을 준다고 하더라도 보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음조가 낮고 슬프며 날카롭고 경박한 고신얼자(孤臣孽子)의 슬프고 근심스러운 소리를 무엇 하러 읽겠는가. 처음에는 이러한 문체를 추구하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도 대수롭지 않게 여겨 내버려 두어도 다스려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사이에 와서 보니 시례(詩禮)를 전수해 온 집안의 자제로서 근밀(近密)한 자리에 출입하고 왕명(王命)을 윤색하는 자들까지도 습속에 물드는 것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것이 세도(世道)와 시운(時運)에 관계되는 문제라는 것을 크게 깨달았으니, 하교를 통해서 한번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성대중(成大中)의 문체는 무엇보다 단아하고 숙련되면서도 촉박한 뜻이 없는 것이 가장 좋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송계집(松溪集)》은 문장이 깨끗하고 고아하여 미칠 수 없는 부분이 있으니, 풍류(風流)와 문채(文采)를 지닌 아름다운 공자(公子)라고 할 만하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문장에서는 기(氣)를 가장 중요시하는 법이니, 기가 이르는 곳이면 문장도 그에 따르게 된다. 저 형식과 틀에 얽매이는 자들은 문장을 짓는 데에 있어서도 말단적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명필(名筆)로는 안평대군(安平大君)을 제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안평대군은 낭미필(狼尾筆)로 백추지(白硾紙)에 글씨를 썼는데, 오직 한호(韓濩)만이 그 묘리를 깨달았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서예가(書藝家)들이 모두 비해당(匪懈堂)과 석봉(石峯)의 문호(門戶)를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고 판서 윤순(尹淳)이 나오자 온 나라 사람들이 쏠리듯 그 뒤를 따랐으니, 이에 서도(書道)가 한번 크게 변하여 진기(眞氣)가 없어지고 점차 마르고 껄끄러운 병통을 열어 놓게 되었다. 이제 서풍(書風)을 순박(淳樸)한 쪽으로 돌려놓고자 하는 바이니, 그대들부터 먼저 촉체(蜀體)를 익혀야 할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근고(近古)에는 이서(吏胥)들의 글씨가 대부분 볼만하였다. 일찍이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을 가져다 보았더니, 그 글씨는 오래된 것일수록 더욱 좋았고 더러 필세가 힘차고 뛰어난 곳도 있었다. 요사이에는 눈에 들어오는 여러 관사(官司)의 문서가 대부분 경박하고 조잡한데, 그중에서도 각리(閣吏)는 특히 더 심하여 보고 있자면 저절로 얼굴이 찡그려진다. 이것은 작은 일이기는 하지만 한번 번거롭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는 쌍륙(雙六)이나 바둑 등 잡기(雜技)는 어느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이 역시 성품의 치우친 점이라 하겠으나, 학문에 이만큼이나마 소략하고 지리멸렬하지 않은 것은 뜻을 여러 갈래로 나누어 쓰지 않은 데 힘입은 바가 많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협운(叶韻)은 옛사람이 항상 쓰던 것으로, 《모시(毛詩)》나 《주역(周易)》의 소상(小象) 등 문자에서 아직도 살펴볼 수 있는데, 후세 사람들은 이것을 전혀 모른다. 두 운(韻)을 통용하는 것은 각각 그 부속(部屬)에 따르는데, 입성(入聲), 상성(上聲), 거성(去聲)이 모두 평성에 부속이 있기 때문에 입성 간의 통용도 평성의 부속을 보아야 한다. 다만 현재 읽혀지는 운서(韻書)에 소략하거나 잘못된 곳이 너무 많기 때문에 지금 사람들이 운법(韻法)이 지극히 엄하다는 것을 모르고 자기 마음대로 뒤섞어서 쓰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점을 매우 개탄스럽게 생각하여, 일찍이 음운(音韻)을 아는 신하들로 하여금 별도로 한 권의 책으로 엮도록 하고 때때로 가져다가 감정(鑑定)하였으니, 배우는 자들의 나침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운서를 이미 증보(增補)한 바 있지만, 공령 문자(功令文字)에 쓰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도 없을 것이다.” 하였다.
일찍이 연신(筵臣)에게 원사(爰辭)의 ‘원(爰)’ 자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는데 연신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하교하기를, “원이란 바꾼다는 것이니, 입으로 하는 말을 문자로 바꾸는 것을 이른다. 예컨대
《춘추좌전(春秋左傳)》에 나오는 ‘원전(爰田)’도 3년에 한 번 바꾼다고 하여 원전이라 한 것이니, 여기에서도 이러한 뜻을 볼 수 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연히 일 때문에 비변사의 오래전 《등록(謄錄)》을 보았는데, 여러 도에 알리는 내용이나 편리한 방책을 낱낱이 든 것이 모두 자신의 가슴에서 흘러나오고 자신의 손으로 강구한 것이었으니, 지금 사람들이 차례에 따라 늘어놓고 대구(對句)를 맞추어 외면을 수식하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문장의 기세는 시대가 내려올수록 못해진다.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한 책을 가지고 말해 본다면, 당기(唐紀)의 문장은 육조(六朝)만 못하고, 육조의 문장은 선진(先秦)과 양한(兩漢)만 못하다. 문장이 점차 못해진다는 것은 화려한 문사(文辭)가 옛날만 못하다는 말이 아니라 순후하고 경박함이 다르다는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편년체(編年體)로 된 역사책은 기억하기가 가장 어렵다. 《자치통감강목》과 《자치통감(資治通鑑)》 등 책은 여러 차례 보아도 잊어버릴 염려가 있는데, 전사(全史)는 몇 번만 보아도 열에 일고여덟은 기억할 수 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사는 가장 읽을 만한 것이다. 옛사람이 ‘《남사(南史)》와 《북사(北史)》는 《자치통감》에서 취한 내용을 제외하고 나면 단지 웃기 좋은 한 부(部)의 소설(小說)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는 그렇지 않다. 역사책에서 귀한 점은 사건을 기록하고 말을 기록하여 그 책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직접 눈으로 보고 몸소 경험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끔 하는 것이다. 지금 만약 말과 사건이 매우 선하거나 매우 악한 것을 취하여 적는다면 옛날을 거울삼아 오늘날을 징계하는 데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하겠지만, 산천(山川)과 풍속(風俗), 인정(人情)과 물태(物態)를 아득히 상고할 바가 없는 것은 어쩌겠는가.”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좋은 역사책은 좋은 그림과 같아서 신운(神韻)을 얻는 데 달렸을 뿐이다. 그러므로 귀, 눈, 코, 입이 모두 닮았더라도 반드시
뺨 위의 세 가닥 수염을 그려야만 그 사람이 되는 것이다. 평범한 화공(畫工)이 보기에는 세 가닥 수염이 있건 없건 상관이 없을 듯하지만, 아는 사람은 그것이 정신(精神)이 모인 곳임을 알기 때문에 반드시 공력을 다 들이는 것이다. 역사를 잘 기술하는 사람은 일의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오직 신운이 붙은 곳을 적는 것에 뛰어나다. 그러므로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정신을 그리지 형태를 그리지 않으며, 역사를 잘 기술하는 사람은 상황[情]을 기록하지 일을 기록하지 않는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성인(聖人)을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성인이 능히 안 것을 배워서 알아야 한다. 만약 먼저 성인이 알지 못한 바에 나아가서 알기를 구한다면 잘못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근래에 잡서(雜書)를 좋아하는 자들이 ‘《수호전(水滸傳)》은 《사기(史記)》와 비슷하고 《서상기(西廂記)》는 《모시(毛詩)》와 비슷하다’고들 하는데, 이것은 매우 우스운 말이다. 만약 비슷하다는 것 때문에 좋아한다면 무엇 때문에 곧바로 《사기》와 《모시》를 읽지 않는단 말인가.”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하도(河圖)의 중궁(中宮)은 15인데 반해 낙서(洛書)의 중궁에는 5는 있고 10은 없다. 5라는 수는, 1부터 세어서 5에 이르면 합해서 모두 15가 된다. 그러므로 낙서의 중궁에도 15라는 수가 갖추어져 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낙서의 수는 9에서 그치니, 10이 되면 1로 다시 돌아가기 때문에 10이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9는 1과 서로 대응하고 8은 2와 대응하고 7은 3과 대응하고 6은 4와 대응하여 모두 10이라는 수를 이루니, 중궁의 수와 합쳐서 계산한다면 가로와 세로 모두 15를 이룬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낙서는 오른쪽으로 돌며 상생(相生)하고, 하도는 왼쪽으로 돌며 상극(相剋)한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서전(書傳)》 권수(卷首)에서는 혼천의도(渾天儀圖)를 선기옥형도(璿璣玉衡圖)라고 설명하였는데, 이는 매우 명쾌하지 않은 것이다. 순(舜)임금 때의 선기옥형 제도를 고찰할 수가 없기 때문에 채침(蔡沈)이 혼천(渾天), 주비(周髀), 선야(宣夜) 삼가(三家)의 제도를 하나하나 거론하고서 혼천의가 가장 낫다고 한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혼천의도’라고 해야지 곧장 선기옥형으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황종(黃鐘)으로부터 중려(仲呂)까지는 모두 하생(下生)이고, 유빈(蕤賓)으로부터 응종(應鐘)까지는 모두 상생(上生)이다. 위에서 아래를 낳는 것은 모두 3이 2를 낳고, 아래에서 위를 낳는 것은 모두 3이 4를 낳는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동방(東方)의 음은 치설(齒舌)에 있고, 남방(南方)의 음은 순설(脣舌)에 있고, 서방(西方)의 음은 악설(齶舌)에 있고, 북방(北方)의 음은 후설(喉舌)에 있으니, 이것이 사방의 성음(聲音)이 완급(緩急)이 달라서 언어가 서로 통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목구멍에 편리한 음은 입술로 소리를 내는 데 이롭지 못하고, 치아에 편리한 음은 잇몸으로 소리를 내는 데 이롭지 못하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는 가장 정밀한 것이다. 고염무(顧炎武)가 ‘지리지의 소자(小字)는 모두 맹견(孟堅 반고(班固)의 자(字))의 본문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사실 그러하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유(漢儒)의 주소(註疏)는 말하기가 쉽지 않다. 예컨대,
《시경》의 악불위위(鄂不韡韡)를 주자는 ‘악연(鄂然)히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어찌 빛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이 설은 의심할 만한 점이 없지 않다. 복침(伏琛)의 《삼제기(三齊記)》에는, ‘화부주(華不注)의 부(不)는 음이 부(跗)로 악부(鄂不)의 부와 같으니, 꽃의 꼭지[花蔕]이다’라고 하였다. 명 나라 양신(楊愼)은 주소의 설을 따라서 말하기를, ‘꽃 아래에 꽃받침[萼]이 있고 꽃받침 아래에 꽃꼭지[跗]가 있으니, 꽃과 꽃받침이 서로 받쳐 주고 덮어 주기 때문에 환히 빛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종원(柳宗元)의 봉건론(封建論)과 소식(蘇軾)의 정통론(正統論)은 소견(所見)이 탁월한바, 모두 천고(千古)에 바뀔 수 없는 논의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필법(筆法)의 오묘함은 점획(點畫)과 모양에 있지 않다. 각신 중 서유방(徐有防)의 생동감 넘치는 필법과 남공철(南公轍)의 속되지 않고 고아한 필치는 공졸(工拙)로써 논할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의장(儀仗) 가운데
골타(骨朶)에는 웅골타(熊骨朶)와 표골타(豹骨朶)가 있는데, 지금 사람들은 골타가 무엇인지를 전혀 모른다. 송 나라 당시에는 천자의 거둥 때에 숙위(宿衛)하는 자들이 골타를 잡고 있었다. 관중(關中) 사람들은 배가 불룩하게 나온 사람을 ‘고도(胍
)’라고 하였는데, 독음(讀音)은 고도(孤都)와 같다. 세속에서 그로 인하여 머리 부분이 큰 지팡이를 고도라고 하였던 것이 나중에 와전되어 골타가 되었다. 이것은
송 경문공(宋景文公)의 《필기(筆記)》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우리나라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는 《고려사(高麗史)》 예지(禮志)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고려조의 의물(儀物)이 대부분 송 나라의 것을 모방하였으니, 그 유래가 오래된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태극(太極)은 천지보다 앞서 있어도 먼저가 되지 않고, 천지보다 뒤에 있어도 나중이 되지 않는다. 정(靜)은 동(動)의 뿌리가 되고 유(柔)는 강(剛)의 바탕이 된다. 《주역》에 ‘한 번 음(陰)하고 한 번 양(陽)하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 하고, 또 ‘문을 닫는 것을 곤(坤)이라 한다’ 하고, 또 ‘낳고 낳음[生生]을 역(易)이라 한다’ 하였으니, 음을 먼저 말하고 양을 나중 말한 데서 낳고 낳는 뜻이 드러난다.
상(商) 나라의 역에 곤괘(坤卦)를 먼저 실은 것은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였다.
검교직각 신 서영보(徐榮輔)가 임자년에 기록한 것이다.
상이 이르기를, “유가(儒家), 불가(佛家), 노자(老子)를 세상에서 삼교(三敎)라고 칭한다. 유자(儒者)는 불가나 노자를 허여하지 않지만, 그 조예(造詣)의 깊은 곳을 논한다면 모두가 최고의 경지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학문에는 활법(活法)이 있고 사법(死法)이 있다. 우리나라의 유학자 중에는 성리(性理)를 천명한 자가 많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모방하거나 구속되는 병통이 있다. 그 때문에 진정한 대영웅의 기상이 없는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읍취헌(挹翠軒)의 시는 웅건하면서도 노련하여 본조(本朝)의 명가(名家)로 일컬어지지만, 편질(篇帙)이 열에 여덟아홉은 없어져서 세상 사람들에게 읽히는 시집(詩集)이 1권밖에 되지 않는다. 내가 일찍이 옛 홍문관에 소장되어 있던 ‘천마(天摩)’와 ‘잠두(蠶頭)’ 등 편을 찾아내어 3책(冊)으로 엮고, 몇 마디 말을 책머리에 적어서 간행하여 널리 배포하고자 하였으니, 이 어찌 그 시를 위해서만 그런 것이겠는가.”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명(明) 나라 3백 년 동안 많은 작자(作者)가 나왔어도 훌륭한 문장은 거의 없었다. 그중에서 꼽자면 왕양명(王陽明)이 가장 나을 것이다.” 하였다.
일찍이 여러 각신들에게 하교하기를, “문장에는 도(道)가 있고 술(術)이 있는바, 도는 바르지 않아서는 안 되고 술은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된다. 문장을 배우는 자는 응당 육경(六經)을 종주(宗主)로 하고 자(子)ㆍ사(史)를 우익(羽翼)으로 하여 위아래를 포괄하고 지금과 옛날을 널리 통달하되, 마지막에는 주자(朱子)의 글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 그런 다음이라야 그 내용이 순정(醇正)하여 도술(道術)에 어긋나거나 잘못되는 곳이 없게 된다. 더구나 문장의 도는 큰 것이어서 치교(治敎)의 쇠퇴함과 융성함, 풍속의 순후함과 각박함, 인심의 바름과 거짓됨을 이 문장의 높고 낮음, 오르고 내림을 보아서 대부분 점칠 수 있다. 그런데 유독 이상하게도 근세에 문장을 하는 선비들은 평범한 것을 싫어하고 특별난 것을 좋아하여 품격을 무너뜨려 가며 천박한 글을 지어내곤 한다. 자신의 학식이 옛사람에 미치지 못하고 역량이 옛사람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도리어 바른길을 버려두고 지름길을 찾아 패관 소설의 자구(字句)를 표절하는가 하면 또 명(明)ㆍ청(淸) 제자(諸子)에 나아가 기벽함을 답습한다. 스스로를 드러내고자 하여 ‘나는 선진(先秦)과 양한(兩漢)의 문장을 배웠다’고 하지만 선진과 양한의 글이 아니고, ‘나는 당 나라와 송 나라의 문장을 배웠다’고 하지만 당 나라와 송 나라의 글이 아니니, 모두 진기하다는 이름을 빌리고 법첩(法帖)을 베껴 사람의 감상(鑑賞)을 얽어매는 것들이다. 이 때문에 세도(世道)가 날로 각박해지고 사풍(士風)이 날로 경박해져서 청묘(淸廟)의 거문고 소리는 적막하여 들리지 않고 소품(小品)의 화려함은 날로 만 장의 종이로 전하여지는데, 내 여기에 대해서 깊이 미워하고 애통해하지 않은 적이 없지만 바로잡을 방법을 알지 못하겠다. 나는 정무(政務)를 돌보는 틈틈이 오직 경사(經史)와 한묵(翰墨)으로 즐거움을 삼고, 근래에는 또 역대(歷代)의 시(詩)들을 수집하여 한 질의 전서(全書)를 만들고 있는데, 범례와 규모는 이제 두서가 잡혔다. 《시경》 삼백편에서 시작하여 선진(先秦), 한(漢), 위(魏)를 거쳐 당(唐), 송(宋), 명(明)에 이르기까지 풍요(風謠)와 아송(雅頌)의 정시(正始)와 정변(正變), 대가(大家)와 명가(名家)의 우익(羽翼)과 방류(旁流)로부터
금릉(金陵)의 제자(諸子)와
설루(雪樓)의 칠가(七家)에 이르기까지를 두루 갖추어 수록하여 널리 집성(集成)하여 5백여 권을 이루었다. 그러나 맹교(孟郊), 가도(賈島), 서원(徐袁), 종담(鍾譚) 네 사람은 포함시키지 않았으니, 그것은 그들의 체법(體法)이 냉엄하고 까다로우며 음운(音韻)이 낮고도 구슬퍼 실제로 치세(治世)의 훌륭한 문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겨 두고 빼고 쓰고 삭제하는 즈음에 스스로 까다롭게 저울질하고 포폄(褒貶)하는 재량을 그 속에 붙여 두었으니, 이러한 뜻을 몰라서는 안 된다. 대저 근래의 선비들은 문장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평소 거문고를 연주하고 진기한 물건들을 늘어놓은 채 서화(書畫)를 품평하고 향기로운 차를 마시면서 스스로 맑고 고아한 문채(文采)가 있다고 여기는데, 연소한 후생(後生)들이 더러 흉내를 내어 습속이 되고 말았다. 이 일은 얼마 전 사학(邪學)이 정도(正道)를 해친 것과 크고 작은 차이는 있지만 폐단은 마찬가지이니, 탄식을 이길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일찍이 전교(傳敎)를 부를 적에 승지에게 붓을 잡고 쓰도록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내가 글을 지을 적에 간혹 한껏 생각을 가다듬어 구상하느라고 여러 번 초고(草藁)를 고친 다음에야 내놓기도 하지만, 천기(天機)가 넘치는 곳에는 도리어 미치지 못하곤 한다. 오히려 이처럼 수응(酬應)하는 문자는 문장의 묘미가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짓고 말이 나오는 대로 쓰는 데 있는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진암(晉菴) 이천보(李天輔)의 시는 자못 소탈하고 호탕하여 볼만하니, 그러한 기상(氣象)은 근세 사람들 중에서 으뜸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암(尤庵)의 글은 일을 논한 곳이 많고 성리(性理)를 말한 곳은 적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근래에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식암(息菴) 김석주(金錫胄)와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을 으뜸가는 거장(巨匠)으로 꼽는다. 호방하고 웅건한 식암의 책(策)과 논(論), 명백하고 적절한 약천의 소(疏)와 차(箚)는 응당 관각(館閣)의 나침반이자 지표일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주자(朱子)의 차어(箚語)는 광대(廣大)하고 정대(正大)하며, 육 선공(陸宣公)의 주의(奏議)는 시무(時務)에 절실하다. 나는 늘 이것을 좋아하여 일찍이 배우는 자들에게 권하여 익숙히 읽어 수용(需用)하도록 하였다. 지금 간혹 일종의 사치스럽고 경박한 논의를 주장하면서 천근(淺近)한 것을 싫어하고 고원(高遠)한 것을 구하며 일상적인 것을 천하게 여기고 희귀한 것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다름이 아니라 안목이 낮고 식견이 얕아서 그런 것이다.” 하였다.
천신(賤臣)에게 하교하기를, “진실로 글을 읽는 데 뜻을 둔다면 어찌 벼슬살이하느라 여가가 없는 것을 근심하겠는가.” 하였다.
하루는 천신이 초계문신(抄啓文臣)의 대책(對策)에 응하여 망녕되게 패관잡기(稗官雜記)에 나오는 말을 썼다. 하교하여 준절히 꾸짖기를, “문장이 비록 기예 가운데 한 가지 일이기는 하지만,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위로는 치교(治敎)의 수준을 점칠 수 있고 아래로는 성정(性情)의 사정(邪正)을 엿볼 수 있다. 육경(六經)의 도는 지극히 크면서도 간략하고, 한(漢), 당(唐), 송(宋)의 문장은 가장 바르고 우아하다고 일컬어진다. 오늘날 문장을 하는 자들은 학문이 재주를 받쳐 주지 못하여, 어렵다는 것 때문에 싫증을 내어 도리어 명ㆍ청의 소품(小品)을 배우고, 푹 빠져 들어 스스로 기뻐하는 것들이 대부분 잗달게 조잘거리는 말이니, 이 어찌 세도(世道)의 복이겠는가. 더구나 그대들은 집안에서 시례(詩禮)를 전수받아 대대로 사륜(絲綸)을 관장해 온 자들로서, 젖어 있는 것은 헌면(軒冕)의 작품이요 외우고 익혀 온 것은 사명(詞命)의 문체이니, 너무 앞서는 자는 조금 낮추고 모자라는 자는 좀더 노력해서 각각 자신의 재능을 다해야 할 것이다. 만의 하나라도 바른 도(道)를 버려두고 오랑캐의 패관잡기에 물들어, 지름길을 찾아서 궁색하게 걷고 날아가는 새를 보느라고 엉뚱한 대답을 한다면, 문덕(文德)을 펴는 데 해를 끼치고 선조를 욕되게 하는 것이 어찌 모르고 저지른 작은 잘못에 그치겠는가.” 하였다. 이어 내각(內閣)에 명하여 함사(緘辭)를 내어 추문(推問)하게 하고, 또 자송문(自訟文) 한 편을 지어 올려 앞으로 감히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말하게 한 뒤에야 직무를 보도록 하였다.
동지 정사(冬至正使) 박종악(朴宗岳)에게 하교하기를, “오늘 선비들을 시험 보이면서 ‘위서를 금한다[禁僞書]’는 것으로 책문(策問)을 내었는데, 경이 마침 사신(使臣)의 임무를 띠고 장차 국경을 나가게 되었기에 경을 불러 보게 되었다. 사신의 책임은 막중한 것이고, 서적을 구입해 오는 일로 말하자면 말단적인 일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 흘러들어 온 성현의 경전(經傳)과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서적이 큰 집을 가득 채우고 우마(牛馬)를 동원해서 운반할 정도로 많은데도 모두 묶어서 시렁에 올려 둔 채 보지 않으면서, 오직 명ㆍ청 이래의 패관잡기 등 상리(常理)에 어긋나는 책만을 탐내어 다량으로 구하고자 연경(燕京)의 서점으로 책을 사러 가는 자들이 도로에 늘어섰으니, 나는 매우 잘못된 것이라 생각한다. 또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반드시 책을 많이 가지고 있지는 않고, 책을 많이 가진 사람이 반드시 책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현재 가지고 있는 책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좋은 문장을 지을 수 있는데, 어찌 불경(不經)한 설을 써서 허다한 문로(門路)를 모조리 무너뜨리겠는가. 근래 성경(盛京)의 탑본(搨本)이 대부분 소매에 넣고 다닐 수 있을 정도의 작은 활자본 책자이기 때문에 책을 보는 사람들이 보기에 편리한 점을 자못 높이 산다고 하는데, 이것은 또 그렇지 않다. 서책을 대할 때는 본디 위의(威儀)를 바로잡아 거경 공부(居敬工夫)의 자세를 지녀야 하고, 성현의 경훈(經訓)에 이르면 또 아무렇게나 봐 넘겨서는 안 되니, 한갓 글을 읽지 않는 사자(士子)들로 하여금 게으른 습성만 키우도록 하는 것은 더욱 안 될 일이다. 이번에 부사(副使)와 서장관(書狀官)을 각신(閣臣)으로 차견(差遣)한 것은 생각이 있어서였다. 이제 막 의주부(義州府)에 신칙하여 별도로 수검(搜檢)해서 범한 자는 중률(重律)로 논죄하게 하였으니, 경은 모쪼록 이런 뜻을 잘 알도록 하라.” 하였다.
신(臣) 남공철(南公轍)에게 하교하기를, “청(淸) 나라 사람들의 시문(詩文)은 모두 비속하고 구슬퍼서 쉽게 싫증 나게 한다. 그러나 그 근본을 따져 본다면 명(明) 나라 말엽의 제자(諸子)들이 먼저 선례(先例)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문장을 논하는 것은 음악을 감상하는 것과 같아서 그 시대를 살펴볼 수도 있고 그 사람을 알 수도 있다. 옛 선왕(先王)의 의관(衣冠)과 문물(文物)을 보존해 온 나라가 하루아침에 변하여 오랑캐가 될 지경에 이르렀으니, 기수(氣數)와 시세(時世)가 그렇게 만드는 데야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임금 된 자가 반드시 크게 노력하여 바른 문풍을 흥기시키는 것으로 자임(自任)해야만 한때의 고질적인 문체를 변화시켜서 선비들의 추향(趨向)을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다.” 하였다. 천신이 대답하기를, “청 나라 사람들의 문기(文氣)가 비속한 것은 실로 성상의 가르침과 같습니다만, 그중에서 소장형(邵長蘅)은 문체가 더러 제법 근정(近正)한 곳도 있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소장형의 문장을 사람들이 대부분 칭찬하지만 나는 일찍이 통렬히 배척하였으니, 먼저 근정한 자부터 내쳐야 그 나머지 제가(諸家)가 한갓 분분한 데로 귀결되어 세상의 유자(儒者)들이 청 나라 문장을 배우는 폐단이 끊길 것이기 때문이다.” 하였다.
천신이 각신 서영보(徐榮輔)와 함께 입대(入對)하였을 때 마침 전교를 쓸 것을 명하였다. 신들이 우러러 아뢰기를, “성상께서는 문자에 지나치게 정력을 쏟으시어 비록 등한한 사교(辭敎)라 할지라도 한 글자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삼가 우러러 흠앙하고 찬탄함을 이기지 못하겠으나, 또한 이 때문에 우려가 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작문(作文)은 한때의 정력을 쓰는 데 불과하다. 하루에 만 가지 일을 돌보느라 이리저리 수응하는 것을 어찌 단지 작문에만 비하겠는가. 나도 마음을 맑히고 고심을 줄이는 길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애쓰지 않고는 마음이 편안하지 않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떤 사람의 글을 본다는 것은, 그 시대를 살피기에 좋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을 알 만한 곳도 있으며, 때를 알기에도 좋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선비로서 육경(六經)에 종사하는 자가 있다면 사설(邪說)은 굳이 기약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종식될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고(故) 상신(相臣) 서지수(徐志修)는 한 번도 문장으로 자처한 적이 없으나, 근래에 듣건대 그는 평생 동안 경서(經書)에 가장 주력하였기 때문에 연로하여 벼슬에서 물러난 후에도 틀리지 않고 외울 수 있었다고 한다. 고 상신은 일찍이 아름다운 문장을 세상에 과시한 적이 없었지만 경학에 공력을 들인 것이 이와 같았는데, 지금 세상의 선비들은 사람마다 스스로 백가(百家)를 다 읽었다고 말하는데도 경학이 황폐하여 나날이 못해지고 다달이 쇠퇴하고 있으니, 이것을 통해서 지금 사람들이 옛사람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강한(江漢) 황경원(黃景源)의 문장을 두고 간혹 ‘진부한 말을 답습하였다’고 비평하는 사람이 있지만, 당송 팔가(唐宋八家)의 체단(體段)을 깊이 터득하여 지금 사람들은 미치지 못하는 점이 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의 문장은 순후하면서도 광대하여 얼핏 보아서는 그다지 맛을 느끼지 못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싫증이 나지 않게 한다. 예로부터 문인(文人)은 과장을 일삼아 진실성이 없다고들 말해 왔지만 이 사람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 시를 읊고 그 글을 읽어 보면 그 후손이 반드시 창성하리라는 것을 절로 징험할 수 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국초(國初) 변계량(卞季良)과 최항(崔恒)의 문장은 진실되고 꾸밈이 없기 때문에 후생 소자(後生小子)들이 더러 모여서 비웃곤 한다. 그러나 그 글의 좋은 점은 바로 풍부하면서도 잡되지 않고 질박하면서 화려하지 않은 데 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
회헌집(
悔軒集)》은 비록 평범한 응수 문자(應酬文字)이지만, 시(詩)는 제법 정경(情境)을 곡진히 묘사하였고 문(文)도 사무(事務)에 절실한 것이니, 근세의 명가(名家)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근세 황경원(黃景源)의 문장은 가장 고아(古雅)한 것으로 일컬어지는데, 《배신고(陪臣考)》는 특히 《사기》와 《한서》의 법식을 얻은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문장을 말하는 자들이 걸핏하면 ‘산 호곡 죽은 농암[生壺谷 死農巖]’이라고 하더니, 나중에 그 문집을 가져다 보니 참으로 그러하였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학문이 정도(正道)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면 학문이 없는 것만 못하고, 문장이 실용(實用)에 맞지 않는다면 문장이 없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시와 문 모두 그 사람을 관찰하기에 충분한 것이지만 시가 더욱 근사하니, 그것은 시가 성정(性情)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하였다.
일찍이 신 등에게 하교하기를, “당(唐)ㆍ송(宋)에 팔가(八家)니 십가(十家)니 하는 명목이 있고, 명(明) 나라에도 십가니 십삼가(十三家)니 하는 선발이 있다. 만약 우리나라의 문장가 중에서 그 선발에 들 만한 사람을 뽑는다면 누구를 가장 먼저 꼽겠는가?” 하므로, 신들이 대답하기를, “괴애(乖崖)ㆍ점필재(佔畢齋)의 호준(豪俊)함과 기위(奇偉)함, 간이(簡易)ㆍ계곡(谿谷)의 고아(古雅)함과 풍부함, 농암(農巖)ㆍ삼연(三淵) 형제의 점잖음과 노련함이 모두 선발에 들 만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훌륭한 문장가가 되기도 어렵지만 좋은 문장을 뽑는 것도 어렵다. 호곡(壺谷) 남용익(南龍翼)이 《기아(箕雅)》를 편찬한 당시에도 시끄럽게 많이들 다투었다고 한다. 남겨 두고 빼고 쓰고 삭제하는 것도 또한 우열(優劣)과 장단(長短)을 따지는 일에 관계되니, 내가 일찍이 정무를 보는 틈틈이 여기에 마음을 두었으면서도 오래도록 실행에 옮기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부유한 사람이 농사짓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애써 일하고 난 뒤에야 노력한 만큼 수확할 수 있는 법이다. 독서하는 사람이 귀한 것은 많이 쌓아서 넓게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
검교직각 신 남공철(南公轍)이 임자년에 기록한 것이다.
하교하기를, “우리 조선의 시학(詩學)은 대대로 맥이 끊어지지 않았으며 더러 탁월하게 뛰어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근세를 논하자면 진암(晉菴 이천보(李天輔))을 으뜸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인바, 기려(奇麗)하고 번화(繁華)하며 청아하고 빼어난 것이 옛날의 명가(名家)에게도 부끄럽지 않다. 일찍이 듣건대 효묘(孝廟)께서 항상 정두경(鄭斗卿)의 시를 사랑하시어 《동명집(東溟集)》을 오래도록 어안(御案) 위에 놓아두었다고 하는데, 나 또한 《진암집(晉菴集)》을 그 정도로 좋아한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나는 경사(經史)에 대해서 ‘이것을 좋아하여 피로한 줄도 모른다’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또 간혹 문장에까지 미치기도 한다. 서늘한 기운이 대지에 스며들어 기무(機務)에 조금 여가가 생길 때면 한 질의 책을 읽는 것을 연례적인 일로 삼았는데, 올겨울에는 《팔자백선(八子百選)》을 일과(日課)로 삼고자 한다. 눈 덮인 밤 글을 읽거나 맑은 새벽 책을 펼치는 때에 조금이라도 싫증이 나면 문득 달빛 아래에서 입김을 불어 꽁꽁 언 붓을 녹이는 한사(寒士)와 궁유(窮儒)를 생각하고는 정신이 번쩍 들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대학(大學)》은 바로 사서(四書)의 요지가 되는 것이다. 경(經) 1장은 또 전(傳) 10장의 강기(綱紀)이다. 만약 경 1장을 잘 읽어서 그 뜻을 두루 잘 이해한다면 전 10장의 뜻이 손바닥처럼 환히 보일 뿐만 아니라, 《논어》, 《맹자》, 《중용》에 미루어 가더라도 대나무가 칼날을 대는 족족 갈라지는 것처럼 쉽게 터득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공령(功令)이나 응제(應製) 문자는 짓는 자의 능력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지만, 또한 글제가 좋은가 좋지 않은가에 영향을 받는 바가 없지 않다. 그 때문에 내가 절제(節製)나 반시(泮試)를 치를 때에 제목이 될 만한 글귀를 찾기 위해 하루 또는 이틀의 시간을 들이곤 하는데, 경들 중 일찍이 대사성(大司成)을 지낸 사람들도 과연 이렇게 하는지 모르겠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근래에 선비들이 어(魚) 자와 노(魯) 자를 구별할 정도만 되면 문득 과장(科場)의 변려체(騈儷體)에 골몰하면서도 경학(經學)에 대해서는 대부분 잘 알지 못한다. 일찍이 선비들을 시취(試取)할 때에 심성 이기(心性理氣)로 문제를 내었더니, 대책(對策)한 글이 대부분 장화를 신은 채 발바닥을 긁고 쇠를 금이라고 말하는 데로 귀착됨을 면치 못하였다. 마음과 몸에 보존하여 언사(言辭)로 드러내는 것을 오늘날의 선비들에게 바라기는 어렵겠지만, 귀와 입으로 전습(傳襲)하는 학문조차도 대개 드문 실정이다. 문장의 도(道)는 본디 세상과 더불어 낮아지고 높아지는 것인데, 더구나 이것은 문장에만 그치는 것이 아님에랴. 이것이 내가 성균관 유생들에게 응제시(應製試)를 보일 때에 누차 개탄하였던 뜻이고, 또 나이 젊은 생원ㆍ진사들로 하여금 사서(四書)를 반복해서 익히게 한 까닭이다. 경들은 모쪼록 이러한 뜻을 알고 먼저 자제(子弟)들부터 교도하여 모두 경학을 독실히 연마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게 함으로써 날로 새로워지는 실질적인 효험이 있게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초록(鈔錄)하는 작업은 학문에 큰 도움이 된다. 장횡거(張橫渠)가 마음속에 깨달은 오묘한 이치를 기록하였던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우리나라의 여러 선정(先正)들도 모두 초록하여 모으는 데서부터 공력을 들였다. 나는 일찍부터 초록하는 공부를 가장 좋아하여 직접 써서 편(編)을 이룬 것이 수십 권에 이르는데,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효과를 거둔 곳이 상당히 많으니, 범범히 읽어 넘어가는 것과는 같은 선상에서 논할 수 없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글은 뜻이 순하고 말이 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근래에 이른바 ‘기이하고 교묘하고 놀랍고 빼어나다’는 글은, 내가 보기에는 음조가 낮고 구슬프며 저속하지 않은 것이 거의 없다. 이것이 패관서(稗官書)의 무역을 금하고 반드시 문체를 변화시키고자 애를 쓰는 까닭이다. 한유(韓愈)나 구양수(歐陽脩)와 같은 자를 어디에서 얻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검교직제학 신 서유방(徐有防)이 계축년에 기록한 것이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의 학자들은 제자(諸子)를 두루 섭렵하려 할 필요가 없다. 《육선공주의(陸宣公奏議)》와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두 책만 익숙히 읽어서 득력(得力)한다면 문장을 지을 수도 있고 사업(事業)을 해낼 수도 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근세의 사대부는 식견(識見)이 높지 않아서 매번 일이 닥쳤을 때 최상(最上)의 도리에 도달하지 못하는데, 이것은 책을 읽지 않아서 그런 것일 뿐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찍이 도종의(陶宗儀)의 삼교일원도(三敎一源圖)를 보았더니, ‘유가(儒家)에서는 이(理)를 으뜸으로 꼽고 불가(佛家)에서는 계(戒)를 으뜸으로 꼽고 도가(道家)에서는 정(精)을 으뜸으로 꼽지만, 건순(健順)을 두 번째로 꼽는 것은 삼교가 똑같다’ 하였는데, 이 주장이 옳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누에가 고치를 짓기도 전에 뽕잎 이미 없어지니, 아름다운 머리 헝클어지고 화장 자국은 말랐어라. 궁중에선 비단을 베처럼 가벼이 여기는데, 어찌하면 왕손들이 이 그림을 보게 될까[蠶未成絲葉已無 鬢雲撩亂粉痕枯 宮中羅綺輕如布 爭得王孫見此圖]’라는 것은 조쌍연(趙雙硯)이 잠부도(蠶婦圖)에 쓴 시이다. 나는 일찍이 이 시를 사랑하여 읊조리면서 두소릉(杜少陵)의 ‘대궐 뜰에서 나누어 주는 비단은, 본래 가난한 여인에게서 나온 것이라네[彤庭所分帛 本自寒女出]’라는 구절에 견주었다.” 하였다. 연신(筵臣)이 조쌍연이 누구인지를 모르자 하교하기를, “명 나라 태조(太祖) 때의 사람으로, 일찍이
중귀(中貴)를 위하여 이 시를 지었는데, 태조가 중귀의 집에 행행했다가 이 시를 보고 즉시 불러 관직에 임명하였다. 성품이 지극히 청렴하였는데, 일찍이 고을 수령이 되었을 적에 벼루 두 개를 가지고 왔기 때문에 조쌍연이라고 부른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송(宋) 나라 태조(太祖)의 ‘해변의 산 떠나지 않았을 땐 천산이 어둡더니, 하늘 위로 뜨자마자 만국이 밝아지네[未離海嶠千山暗 才到天心萬國明]’라는 시에는 첩첩이 닫혀 있는 문을 활짝 열어 주는 뜻이 있으므로, 내가 선비들을 시험 보일 때 이것으로 제목을 내었었다. 얼마 전 진욱(陳郁)이 지은 《장일화유(藏一話腴)》라는 책을 보았더니, ‘잠깐 사이 하늘 위로 달려 올라와, 잔성도 쫓아내고 달마저 쫓아내네.[須臾走向天上來 趕却殘星趕却月]’라는 것이 태조의 시이고, ‘천산만국(千山萬國)’의 구절은 국사(國史)가 윤색한 것으로서 문기(文氣)가 비약(卑弱)하여 원작(原作)만 못하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나는, 기세(氣勢)가 비록 조금 못한 듯하긴 해도 혼후(渾厚)한 점은 본래 더 낫다고 생각한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동파(東坡)가 항주(杭州)에 있을 때 하거비(何去非)를 천거하였는데, 문장이 웅건하여 진(秦)ㆍ한(漢)의 필세(筆勢)를 얻었다고 극구 칭찬하고, 이어 그가 지은 《비론(備論)》 28편을 올렸다. 동파의 높은 안목과 대단한 위치로서 임금에게 그 사람을 칭찬하였을 때는 필시 과장하여 말하지는 않았을 것인데, 애석하게도 《비론》을 지금은 볼 수 없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 문체가 날로 못해져서 수습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른 것은 고증학(考證學)이 그 폐단을 열어 놓은 것이다. 자신이 지은 작품으로는 작자(作者)의 범주 안에 들기 어렵다는 것을 스스로 헤아리기 때문에 옛사람의 저작 중 지리(地理), 인명(人名), 세대(世代), 보계(譜系) 등에 혹 잘못된 부분이 있는 곳을 찾아낸 다음 가지가지 증거를 끌어다 대며 부연 설명하는 것으로 책 전체를 채워 놓았으니, 이렇게 하고도 문장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공력을 많이 들여야 오래도록 명성을 누릴 수 있는데, 애당초 공력을 들이지도 않고 후세에 명성을 거두고자 하는 자가 많으니, 그 비속하고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 가소롭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 종류의 책도 끝까지 파고들지 못하고 한 가지의 일도 끝까지 이루지 못하면서 이쪽에서 몇 구절을 따 오고 저쪽에서 몇 구절을 따 오는 작태를 뜻 있는 선비는 경계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라는 말은 주 부자(朱夫子)가 호대시(胡大時)에게 답한 편지에 들어 있는 내용인데, 요즈음 사람들에게는 바로 이런 병통이 있다. 거칠고 경솔하여 정밀하고 상세한 것을 견뎌 내지 못하고, 소홀하고 데면데면하여 빈틈없이 할 생각을 하지 않으니, 이러고서야 무슨 일인들 해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주자(朱子)가 강병도(康炳道)에게 답한 편지에서 ‘일을 논하면서 이치를 구하지 않아서 마침내 병통이 생겨난다’라고 한 것이니, 실로 의미 있는 말씀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요즈음은 경학(經學)에 공력을 들이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전혀 들어 보지 못했고, 구두(句讀)와 훈고(訓詁)의 학문마저도 아득히 들리지 않으니, 이는 마치 거울을 뒤집어 놓고서 사물을 비춰 보려고 하는 것과 같다. 이른바 경학이란 별다른 일이 아니라, 일상 용품을 사람마다 가지고 있고 음식마다 먹는 것과 같다. 지금은 오로지
과구 문자(科臼文字)만을 일삼아 겉만 번지르르하게 수식한 문사(文辭)를 가지고 한때 과거를 주관하는 시관(試官)의 눈에 들려고 하는데, 비록 과구 문자라고 하더라도 경술(經術)에 근본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합격할 수 있겠는가. 지난날 문청공(文淸公) 남유용(南有容)과 문헌공(文憲公) 박성원(朴聖源)은 모두 과거를 통해서 출신하였지만, 그들이 경전(經傳)을 이야기할 때는 성심을 다한 말이 들을 만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고개를 끄덕이게 하였는바, 나는 이 두 사람을 통해 득력(得力)한 것이 무척 많았다. 문청공(文淸公) 서지수(徐志修)는 경학으로 자임(自任)하지 않았으나 경서의 소주(小註)까지도 모두 외우고 있었으며, 고 제학 황경원(黃景源)의 강설(講說)도 볼만한 것이 많았다. 근래에는 이러한 사람도 보기 어려우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 경의(經義)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일 경우에는 문장의 대가(大家)이거나 문벌이 좋은 사람이라도 일절 청화직(淸華職)이나 문임(文任)에 의망하지 않는다면 권면하는 효과가 있을 듯하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
《설문장전(說文長箋)》이 나오면서 자잘한 지혜로 부회(傅會)하고 천착(穿鑿)하는 습속은 다시 말할 것이 없을 지경이 되었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선비들은 애당초 경서의 뜻을 연구하지도 않고 단지 남의 글귀를 따다가 과거 시험에 사용하는 데만 뛰어나니, 비록 장전(長箋)을 짓고자 하더라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시(詩)의 근원은
강구(康衢)의 노래에서 나왔으며, 그 이전은 상고할 수가 없다. 지극한 다스림의 시대에는 밭 갈아서 먹고 우물을 파서 마시는 노인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읊어 댄 구절이라도 후세의 법이 되었는데, 후세로 내려와서는 높은 벼슬아치나 고귀한 사람이 심혈을 기울여서 지은 작품이라도 볼만한 것이 없다. 한마디 말로 단정하자면 화려함을 없애고 진실된 데로 나아가며 말단을 버리고 근본을 구하는 것이 바로 학문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는 여가 시간에 하는 공부에서 반드시 한 건의 일을 만들어서 세밑에 문서를 마감하듯이 마무리를 하였다. 작년에는 《시관(詩觀)》으로 마감(磨勘)하였고 올해는 《팔자백선(八子百選)》에 현토(懸吐)하였는데, 현토할 때에 보니 종전에 간혹 잘못 알고 있었던 곳이 있었다. 작가(作家)의 문자도 이러한데, 더구나 경서(經書)이겠는가.” 하였다.
원임 직각 신 윤행임(尹行恁)이 계축년에 기록한 것이다.
수원부(水原府)를 행궁(行宮)으로 승격시키고 화성(華城)이라는 고을 이름을 하사하고, 직접 ‘화성행궁(華城行宮)’이라는 네 글자의 대자 편액(大字扁額)을 쓴 다음 총관(摠管) 조윤형(曺允亨)에게 명하여 모각(模刻)하도록 하였다. 조윤형이, 어필(御筆)의 필력(筆力)이 웅건하고 자세(字勢)가 정심(精深)하여 그 신령스러운 운필을 얻기가 쉽지 않다 하여,
쌍구(雙鉤)와 향탑(響搨)으로 십여 본(本)을 바꾸고서야 완성하였다. 하교하기를, “내가 글씨에 의미를 두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다만 ‘여기에 나아가서 배운다’는 선현(先賢)의 경계를 생각해서 일찍이 방과(放過)하지 않은 것일 뿐이다. 내 글씨를 보는 자가 그것이 심획(心畫)이라는 것을 안다면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할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명귀주(貞明貴主)는 부덕(婦德) 이외에 서예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 집안에 전해 오는 ‘화정(華政)’이라는 두 글자의 대자(大字)는 굳건하면서도 아름다워 작가의 풍도(風度)가 있으니, 규방(閨房)에서 그에 맞먹는 솜씨를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옛날 명가(名家)의 대자와 견주더라도 그다지 뒤지지 않는다. 풍성하고 아름다우며 조심스럽고 온후한 기운이 점획(點畫) 밖으로 흘러넘치는 것에서 그 덕성(德性)을 상상해 볼 수 있으니, 그 자손이 번성하고 부귀와 복택(福澤)이 고금에 비할 곳이 드문 것은 실로 까닭이 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나무와 비단에 전사(傳寫)하던 것이 변하여 누판(鏤板)이 되었고 누판이 변하여 활자(活字)가 되었는데, 활자는 송 나라 초엽에 처음 보인다. 필승(畢昇)은 처음에 진흙을 이겨서 활자를 만들었기 때문에 손만 가면 쉽게 부서졌고, 그후에 비릉(毗陵) 사람이 또 납으로 만들었는데, 진흙을 이긴 것보다는 조금 나아도 오래가지 못하였다. 우리 조정의 동자(銅字)는 태종조(太宗朝)에 시작되었는데, 세종(世宗) 갑인년에 다시 주조한 것에 이르면 흠잡을 곳이 없을 정도였다. 나는 일찍이 두 차례 활자 주조를 명하되, 갑인자(甲寅字)만을 본으로 삼고 다른 본은 취하지 않도록 하였다. 한구자(韓構字)에 이르면 글자 모양이 가늘고 어두워서 선본(善本)이 못 되는데, 우연히 관서(關西)에서 주조하였기 때문에 내각(內閣)에 보관해 두었다. 만약 한구자를 다시 주조한 것이 당저(當宁) 때의 일이라 하여 내가 그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서(經書)를 새로 인쇄하는 데 내각에 소장된 정유자(丁酉字)를 쓰고, 이어 임진년과 정유년에 두 차례 활자를 주조한 시말(始末)을 기록하여 매 책의 마지막 편 아래에 엮어 놓았으니, 이는 대개
《대학연의(大學衍義)》의 고사(故事)가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 활자를 써서 책을 간행하는 사람은 모두 이 글을 발문으로 쓸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는 해마다 한 질의 책을 읽는 것을 한 번도 빠뜨린 적이 없었다. 올해는 새로 인쇄한 경서를 읽었는데, 그 자본(字本)이 선명한 것이 마음에 들어서 처음에는 두고두고 읽고자 하였으나, 기무(機務)에 쫓겨 겨우 《상서(尙書)》만 마치고 다른 경서는 보지 못했으며, 그저 《팔자백선》을 현토(懸吐)대로 음독(音讀)했을 뿐이다. 매번 ‘삼동(三冬)에 읽은 문사(文史)만으로도 일상생활에 충분히 쓸 수 있다’고 한 옛사람의 말을 생각하면 크게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 하였다.
원임 직각 신 서영보(徐榮輔)가 계축년에 기록한 것이다.
하루는 하교하기를, “내가 춘궁(春宮)에 있을 적에 교유(交遊)했던 빈료(賓僚) 중에는 경학(經學)으로 이름난 선비가 많았다. 매번 침수(寢睡)를 여쭙고 수라상을 살피는 틈틈이 이들과 아침저녁으로 만나서 토론하였고, 또 일찍이 방 하나를 깨끗이 청소한 다음 차분히 궁리 격물(窮理格物)의 학문을 하였는데, 어떤 때는 종일토록 꿇어앉아 있기도 하였다. 그 때문에 입고 있던 바지가 뚫어지기까지 하였으니, 이 일이 지금까지 궁중에 전해져 오고 있다. 내가 처음에 기대했던 바는 반드시 요순(堯舜)과 같은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었는데, 근래로 오면서 예전에 공부했던 것을 모두 잊어버린 데다 이러한 뜻도 점차 해이해지고 있으니, 시행(施行)과 사업(事業)을 가만히 따져 보면 실로 처음 기대했던 것에 미치지 못한다는 탄식이 많다. 조정의 기상이 마구 무너져도 보합(保合)할 가망이 없고, 선비들의 추향(趨向)이 경박한데도 바로잡았다는 칭찬이 들리지 않고, 민생(民生)이 곤란하고 초췌한데도 생업의 터전을 마련해 줄 방도가 없으니, 당우(唐虞) 시대의 화락(和樂)하고 자적(自適)하는 습속은 그만두고라도, 한당(漢唐) 시절과 같은 소강(小康)의 다스림도 쉽게 할 수가 없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처음 먹었던 마음을 떠올리며 서글퍼하지 않은 적이 없다.” 하였다.
일찍이 후세의 학자들이 경서를 익히지 않는 것을 걱정스러워하고, 또 간행되어 세상에 유포된 경서가 오랜 시일이 지나면서 점차 없어지고 있는 것을 염려하여, 교서관(校書館)에 명하여 경비를 조달하여 간행, 반포하도록 하였다. 또 지방 수령 중에서 인쇄하기를 원하는 자가 있으면 허락하여 널리 유포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글자를 주조한 것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다. 국초(國初) 태종조(太宗朝) 계미년에 일찍이 경연(經筵)에서 쓰던 고주본(古註本) 《시경(詩經)》, 《서경(書經)》, 《춘추좌전(春秋左傳)》을 내주어 자본(字本)으로 삼아서 판사평사(判司平事) 이직(李稷)으로 하여금 수십 만 자를 주조하게 하였다. 세종조(世宗朝) 경자년에는 공조 참판 이천(李蕆)에게 명하여 구본(舊本)을 그대로 써서 고쳐 주조하게 하였고, 또 갑인년에는 경연청에 소장하고 있던 《효순사실(孝順事實)》, 《위선음즐(爲善陰騭)》 등 책을 자본으로 삼아서 집현전 직제학 김돈(金墩)으로 하여금 20만 자를 주조하게 하였다. 나는 임진년에 동궁에 있으면서 대조(大朝)에 우러러 청하여 경비를 마련한 다음 내하(內下)한 갑인자 인쇄본 《심경(心經)》, 《만병회춘(萬病回春)》 두 책을 자본으로 삼아 15만 자를 주조하여 교서관에 보관해 두었고, 즉위한 원년 정유년에는 평안도 관찰사 서명응(徐命膺)에게 명하여 갑인자를 자본으로 삼아 임소(任所)에서 15만 자를 인쇄하게 한 다음 내각(內閣)에 보관해 두었다. 또 임인년에는 평안도 관찰사 서호수(徐浩修)에게 명하여 해당 감영(監營)에서 주자소(鑄字所)를 열게 하되, 본조인(本朝人) 한구(韓構)의 글씨를 자본으로 삼아서 8만여 자를 주조하게 한 다음 역시 내각에 보관해 두었다. 이것을 통해서 활자(活字)의 내력을 상고할 수 있지만, 또한 내가 열성(列聖)을 계술(繼述)하는 한 가지 의미를 붙인 것이라는 것도 몰라서는 안 된다. 또 활자에는 모두 기(記)와 발(跋)이 있는바, 계미자에는 보문각 대제학 권근(權近)의 발문이 있고, 경자자에는 집현전 대제학 변계량(卞季良)의 발문이 있고, 갑인자에는 집현전 직제학 김빈(金鑌)의 발문이 있고, 당저(當宁) 정유자에는 규장각 제학 서명응의 기가 있다. 그러니 이번에 경서를 새로 간행하면서 상세한 시말(始末)을 기록해 놓지 않아서는 안 되겠다.” 하고, 이어 각신(閣臣)에게 명하여 그 뒤에 짧은 발문을 붙이도록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당자서(唐子西)의 시에 ‘산정사태고 일장여소년(山靜似太古日長如少年)’이라 하였는데, 소년(少年)의 소(少) 자를 그대들은 어떻게 보느냐?” 하므로, 신과 윤행임이 함께 대답하기를, “노소(老少)의 소로 해석하기도 하고 대소(大小)의 소로 해석하기도 하여 두 설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소(小) 자로 봐도 뜻이 통하지만 소년의 소로 보면 의미가 더욱 깊어진다.” 하였다.
각신이 연상 첩자(延祥帖子)를 써서 올렸는데, 하교하기를, “글씨는 작은 기예지만 멋대로 써서는 안 된다. 정자(程子)는 ‘글씨를 쓸 때는 경건한 자세를 지녀야 한다’ 하였고, 유공권(柳公權)도 ‘마음이 바르면 붓도 바르게 된다’고 하였다. 글씨를 쓸 때는 잘 쓰려고 할 것이 아니라 고법(古法)을 지니도록 해야 한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문장은 달리 어려운 것이 아니라 좋은 대목[佳處]을 구사하기가 매우 어렵다. 전편(全篇)에다 잠깐 사이에 수천 글자를 쓸 수 있어도 가장 중요한 대목에 이르게 되면 한 글자를 놓는데도 어근버근하여 잘 맞지 않는다. 문장을 짓는 자가 어려운 대목[難處]에 정신을 집중하고 쉬운 곳은 손 가는 대로 쉽게 써 내려간다면, 좋은 문장이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하였다.
검교직각 신 남공철(南公轍)이 계축년에 기록한 것이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유학(儒學)의 심학(心學)은 불씨(佛氏)의 성학 공부(性學工夫)와 매우 비슷한 것으로, 사(邪)와 정(正)의 나뉨이 털끝만 한 소홀함에서 일어나니, 유학을 공부하는 자는 불교의 이치를 몰라서는 안 된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노불(老佛)을 이단(異端)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말류(末流)의 폐단을 가리키는 것이지 그 시원(始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만법이 하나로 귀결된다[萬法歸一]’는 것은 불교나 유가(儒家)가 애당초 다르지 않았는데 불씨가 ‘일귀하처(一歸何處)’라는 네 글자를 덧붙여 놓은 따위가 이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황제(黃帝)는 활, 화살, 방패, 창을 만들어 사방에 위력을 보였고, 배와 수레를 만들어 길이 통하지 않던 곳을 다닐 수 있게 하였으며, 들을 구획하고 고을을 나누어 만국(萬國)을 만들었다. 또 율려(律呂)를 만들고 글씨[書契]를 만들고 의약(醫藥)을 만들고 갑자(甲子)를 만들고 달력을 만들었다. 무릇 천하만세의 백성들이 일상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있는 토대가 모두 황제의 힘을 빌려 만들어졌으니, 황제의 심적(心的) 노고가 또한 지극하다고 하겠다. 그런데 후세에 와서 청정 무위(淸淨無爲)를 추구하거나 기예(技藝)와 술수(術數)를 일삼는 사람들이 모두 황제를 시조로 삼으면서 황제가 마침내 외도(外道)에 가까워졌으며,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황로(黃老)의 설’이라고 일컫기까지 하니, 너무도 이상하지 않은가. 어찌 하늘을 계승하여 법칙을 세운 성인이면서 외도에 가까운 자가 있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노씨(老氏)의 학문은 명실(名實)을 깊이 따지고 공리(功利)에 절실한 것으로서 애당초 세상을 버리고 신선이 되겠다는 말이 없다. 그런데 단학가(丹學家)에서 선도(仙道)의 원조로 삼고 있으니, 끝내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가(儒家), 불가(佛家), 노자(老子)가 삼교(三敎)인데, 삼교의 가르침은 모두 풍속을 교화하고 세상 사람들을 면려하는 것을 궁극적인 공효(功效)로 삼는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마음[心]으로써 마음을 본 것은 마음을 외면에 있는 것으로 생각한 불씨의 오류이고, 성(性)을 버려둔 채 성을 구한 것은 성을 제대로 몰랐던 고자(告子)의 오류이다. 양쪽 모두 심과 성의 본연을 잃어버린 것이지만 고자가 더욱 거칠고 치밀하지 못하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
학(學)이라는 한 글자는 부열(傅說)에게서 처음 보이며, ‘가르침은 배움의 반이다.[惟斅學半]’는 말은 실로 천고(千古)를 통해 학문을 논한 시조가 된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소학(小學)》 하나만 가지면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를 이루고도 남을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전의 뜻은 반드시 익숙히 토론하고 차분히 연마하여 털끝만큼이라도 의심되거나 모르는 부분이 없어야만 남에게 말하고 논란할 수 있는 것이니, 조금 안다고 함부로 아는 척해서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해서는 안 된다. 생이지지(生而知之)에 가까웠던 주자(朱子)도 더러 초년(初年)과 만년(晩年)의 학설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있었는데, 더구나 애당초 주자의 문장(門墻)을 엿보지 못한 후학(後學)과 소유(小儒)이겠는가. 육합(六合)을 어찌 ‘밖이 없다’고 말하겠는가. 말해 봐야 이로울 것이 없기 때문에 성인께서 놔두고 논하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정암(羅整庵)이 두 차례에 걸쳐 왕양명(王陽明)에게 준 ‘변심학서(辨心學書)’는 주문(朱門)에 큰 공이 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재주와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도 학문에 힘을 쓰려 하지 않는다면 도리어 더디고 둔한 사람이 고생스럽게 학업에 힘쓰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전 중에서 가장 깨닫기 어려운 것이 바로 《시경(詩經)》과 《춘추(春秋)》이다. 다른 경전은 비록 오묘한 뜻이 많더라도 곰곰이 연구하고 여러 차례 읽다 보면 자연히 길이 보이게 마련이지만, 이 두 경서의 경우에는 성인이 가르침을 남기고 작자가 감흥을 일으킨 것이 각각 그 당시 나름대로 그럴 만한 까닭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인데, 글을 엮음에 있어서는 은미하기도 하고 완곡하기도 하고 숨기기도 하고 드러내기도 하였으며, 뜻을 취한 형식은 흥(興)이기도 하고 비(比)이기도 하고 풍자이기도 하고 칭찬이기도 하니, 뒷사람이 어떻게 그러한 까닭을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좌씨(左氏)가 공양씨(公羊氏), 곡량씨(穀梁氏)와 《춘추》에 대한 전(傳)을 달리하고 모장(毛萇)이 한영(韓嬰)과 《시경》의 뜻을 달리 해석하였던 것이니, 이는 모두 암중(暗中)에 모색한 데서 연유한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옥(玉)이 쪼고 갈지 않아도 규장(圭璋)을 이루고 사람이 학문을 힘입지 않고도 성현이 되는 것은, 사리로 따져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성인의 책을 읽더라도 하나하나 다 수용(收用)하지는 못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깊은 맛이 있어 ‘마음이 편안하고 몸이 펴지는[心廣體胖]’ 경지를 깨닫게 된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논어(論語)》는 공문(孔門) 제자들이 공자(孔子)의 언행(言行)을 기록한 책이므로 모두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오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순금과 좋은 옥처럼 인위적인 흔적이 없어 마침내 만세(萬世) 학자들의 법식이 되었으니, 여러 제자들의 학업이 성인에게서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는 것을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학》 한 책은 경(經) 1장부터 전(傳) 10장에 이르기까지 맥락이 곧장 접하고 지름길이 곧게 통하여 다시 틈이나 막힌 곳이 없으니, 참으로 이른바 ‘겹겹의 문이 활짝 열려 내 마음을 탁 틔워 준다’는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다른 경서는 주소(註疏)가 집주(集註)보다 못하지만, 《시경》에 있어서만은 주소의 해석이 집주를 능가하는 곳이 더러 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서전(書傳)》은 조금 읽어서는 그다지 맛을 느끼지 못하고, 많이 읽어야 비로소 효과를 볼 수 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세상 사람들은 《시경》을 읽을 때에 춤을 추고 발을 구르게 될 정도의 의미가 있다고 하는데, 나는 《예기(禮記)》를 읽을 때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漢) 나라 이래로 《주역(周易)》을 연구한 자들은 모두 《주역》의 한 단면을 깨달았을 뿐이고 전체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강절(康節)과 이천(伊川)도 모두 이러한 병통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니, 이는 대개 잡을 곳도 없고 형상할 수도 없는 일단(一團)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근래 조정 신하들 중에서 김희(金憙)만큼 경의(經義)를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 일찍이 보건대, 서형수(徐瀅修)가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서 강(講)에 응했을 때 김희가 시관(試官)이 되어 심성(心性)에 관한 설(說)을 가지고 서로 논란하였는데, 두 사람이 모두 굽히려 들지 않아 아침에 시작한 토론이 한낮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므로 내가 너무 시간을 끈다고 저지하고 나서야 두 사람이 중지하였다. 며칠 뒤에 또 강석(講席)에서 마주치게 되자, 두 사람이 이전의 설을 다시 반복하며 당당히 주장하기를 마지않았다. 이는 실로 한때의 미사(美事)이지만, 또한 두 사람의 학문의 수준이 얕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두 설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나는 두 설 모두 각각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마디로 대체를 말하고자 한다면 서형수의 설이 옳다.” 하였다.
직각 신 김조순(金祖淳)이 계축년에 기록한 것이다.
일찍이 새로 간행한 책들을 열람하다가 하교하기를, “《돈효록(敦孝錄)》이나 《예의유집(禮疑類輯)》과 같은 책들은
고(故) 유선(諭善)이 개인적으로 수록(蒐錄)하여 보관해 두었던 것인데, 내가 춘저(春邸)에서 또한 일찍이 그 초본(草本)을 한 번 보았었다. 이 책을 특별히 간행하도록 명한 것은 그 사람을 총애하거나 그 책을 대단하게 여겨서가 아니다. 효(孝)는 민생의 대절(大節)이고 예(禮)는 인사(人事)의 법칙이다. 지금 백성들의 뜻이 날로 각박해지고 습속이 날로 투박해지고 있으니, 이 책을 널리 반포하여 집집마다 비치해 두고 읽게 한다면 풍속을 돈후하게 하는 데 일조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였다.
검교직제학 신 김재찬(金載瓚)이 갑인년에 기록한 것이다.
상이 이르기를, “오직 문장에만 주력하고 경술(經術)에 근본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이단(異端)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큰일을 당하였거나 무척 의심스러운 사안을 결정할 때에 허둥대어 전도 착란(顚倒錯亂)하지 않는 사람이 적은 것은, 그 병통이 학문을 하지 않은 데서부터 나온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대부가 경서에 통달하지 못한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는다면 다른 것은 논할 가치도 없다.” 하였다.
직제학 신 서용보(徐龍輔)가 갑인년에 기록한 것이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사람들은 경학(經學)이라고 하면 그저 성리(性理)에 관한 설(說)이 경학인 줄만 알지 어떠한 사물도 경학을 배제한 상태에서는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모른다. 시험 삼아 근래 화성(華城)의 축성(築城)을 가지고 말해 보면, 일에 임하여 조처할 방도를 모르는 사람은 모두 경학에 어두워서 식견이 밝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만약 경전의 가르침을 마음으로 터득한 바가 있다면 성(城)이나 수레[車]의 제도도 여기에서부터 미루어 갈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직제학 신 정대용(鄭大容)이 갑인년에 기록한 것이다.
《주서백선(朱書百選)》을 편찬하도록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지금의 선비들은 명(明)ㆍ청(淸)의 낮고 구슬픈 학문에 고질적인 병통이 있지 않으면 공령(功令)이나 응수(應酬) 문자에 빠져 있고, 제대로 주자서(朱子書)를 읽은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어 보지 못하였다. 나는 장차 이 책으로 한 시대를 크게 변화시키는 토대를 삼으려 하는데, 굳이 백 편을 뽑은 것은, 지금 사람들의 병통은 넓게 보기는 하되 요점은 알지 못하고 택하기는 하되 정밀하지 못한 데 있기 때문에 먼저 간략한 곳부터 착수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또한 높이 오르려면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하고 멀리 가려면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하는 뜻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주자가 위응중(魏應仲)에게 답한 편지에서 ‘열흘에 한 번씩 휴일을 두고 반복하여 익힌다.[休日溫習]’라고 말한 것은 그야말로 독서의 요법이다. 경연의 온역강(溫繹講)은 이 규례를 따른 것이다.” 하였다.
검교직각 신 이만수(李晩秀)가 갑인년에 기록한 것이다.
상이 이르기를, “삼경(三經)과 사서(四書)의 활인(活印)에 당저(當宁) 정유자(丁酉字)를 썼는데, 이것은 바로 세종조 갑인자 본이다. 작년 계축년에 인쇄를 시작하여 올 갑인년에 일을 끝냈으니, 전후(前後)의 갑인이 서로 부합하는 것이 실로 우연치가 않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각신 이만수가 명을 받들고 영남으로 갈 적에 선정(先正)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서원에 사제(賜祭)하였는데, 옥산서원(玉山書院)에서는 선정이 손수 쓴 《속대학혹문(續大學或問)》을 가져오고 도산서원(陶山書院)에서는 선정이 문인(門人)과 주고받은 친필 서찰을 가져와서 올렸다. 하나는 깊은 생각이 심원한 경지까지 나아가고 신묘한 묘리를 홀로 깨달은 공부였으며, 하나는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정미한 의리와 오묘한 도가 드러난 것이었는데, 침잠(沈潛)하여 반복해서 읽으면 읽을수록 더욱 맛을 느낄 수 있었다. 금년에 비로소 승지가 명을 받들고 가는 때에 각각 발문(跋文)을 지어서 돌려주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관동(關東)의 경공생(經工生)들에게 경의(經義)에 대해 조목조목 물은 것은 진작시키고 흥기시키려는 의도였는데, 안석임(安錫任)과 박사철(朴師轍)의 대답이 가장 마음에 들어서 한밤중까지 읽으면서 시간이 늦은 줄도 몰랐다. 그다음으로는 최창적(崔昌迪)을 들 수 있겠는데, 최창적이 《주역(周易)》에 대해서 답한 것은 또 근거(根據)가 여러 대책(對策)들 중에서 가장 나았다. 일찍이 듣기로 그 아비인 고 정언 최규태(崔逵泰)가 역학(易學)에 조예가 깊어서 문청공(文淸公) 서지수(徐志修)가 탄상(歎賞)했을 정도라고 하니, 그의 학문이 유래가 있는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초계문신(抄啓文臣)을 권면하기 위해서 보이는 경서 시험이 이런 수준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저들은 모두 경학에 깊이 통달한 선비이나, 다만 근래에 연소한 문신들이 공령 문자(功令文字)만 대충 익혀 과거(科擧)에 합격만 하고 나면 책을 묶어서 시렁에 올려놓고 육경(六經)을 읽지 않아 무슨 말인지조차 모르는 지경이기 때문에 면전(面前)의 알기 쉬운 글 뜻을 대충 익히게 하려는 것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이렇게 지극히 쉬운 일까지도 제대로 하지 못하니, 생각하면 걱정스러울 뿐이다.” 하였다.
천신(賤臣)에게 하교하기를, “퇴계(退溪)와 율곡(栗谷) 두 선정(先正)의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은 각각 차이점이 있는데, 어느 쪽의 설이 옳은가?” 하므로, 대답하기를, “신은 일찍부터 문성공(文成公)의 설이 바뀔 수 없는 정론(定論)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지금 그 문집에 실려 있는 내용이 명백하고 통쾌하여 알기 쉬우나, 다만 온 세상이 쏠리듯이 따르게 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김창흡(金昌翕)처럼 문장과 안목을 갖춘 사람도 오히려 퇴계의 설을 취하는 바가 있었으니, 신은 적이 의심스럽게 생각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문성공의 설을 누가 옳지 않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문순공(文純公)이 논한 바도 나름대로 논리가 있으므로 쉽게 말할 수 없다.” 하였다.
검교직각 신 서영보(徐榮輔)가 갑인년에 기록한 것이다.
상이 이르기를, “육 선공(陸宣公)의 문장 중에서는 주의 문자(奏議文字)가 가장 절실하고, 주자(朱子)의 공부는 모두 편지 속에 담겨 있다. 지금 이 두 가지를 추려 뽑아서 한 질의 책자(冊子)로 엮고자 하는데, 사정(事情)에 절실한 곳은 문기(文氣)도 서로 유사한 점이 있으니, 학자들이 가장 많이 읽을 만한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고 상신(相臣) 김육(金堉)은 사업(事業)으로 일컬어졌고 문장(文章)으로는 드러나지 않았다. 지금 그 유집(遺集)을 보건대 참으로 근세에 쉽게 얻지 못할 문자이니, 공업(功業)과 문장이 서로 엄폐(掩蔽)하는 것이 대부분 이와 같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동파(東坡)가 지은 ‘육지(陸贄)의 주의(奏議)를 올리는 차자’는 도리어 육지의 문체와 유사하니, 옛사람도 남을 모방하여 글을 짓는 경우가 없지 않았던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주자의 편지는 짧은 것이 더욱 좋다. 나는 주자가 여백공(呂伯恭)에게 답한 편지 가운데
‘매미 소리가 날로 맑아진다[蟬聲日淸]’는 말을 가장 좋아한다. 몇 줄짜리 편지는 사실(事實)이나 의논(議論)이 볼만한 곳은 없지만, 반복해서 읊조리노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저절로 풍신(風神)이 유원(悠遠)해지고 기상(氣象)이 편안해진다.” 하였다.
원임 직각 신 남공철(南公轍)이 갑인년에 기록한 것이다.
화성(華城) 향교(鄕校)에 행행하여 알성(謁聖)하려고 하면서 먼저 고유(告由)를 명하고 직접 제문(祭文)을 지어 내렸는데, 대성위(大聖位)로부터 우리나라 유현(儒賢)에 이르기까지 각각 한 통씩의 제문을 지은 것이 모두 수백 구절이었다. 밤 일경(一更)에 천신이 입시하여 받들어 쓰기 시작해서 이고(二鼓)가 되자마자 편(篇)을 다 마쳤는데, 발휘(發揮)하여 형용한 것이 각각 지극히 잘 맞았으되, 글귀를 아름답게 구사하는 것은 성상께서 애당초 그다지 염두에 두지 않으셨다.
초계문신의 과강(課講)을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심(心), 성(性), 이(理), 기(氣)는 실로 학자가 깨닫느냐 깨닫지 못하느냐 하는 것의 관두(關頭)가 되지만, 만약 한바탕의 공허한 설화(說話)에 그친다면 심신에 도리어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 경의(經義)에 있어서는 활법(活法)이 귀한 법이고, 학문은 장차 쓰기 위한 것이다. 여러 문신들은 강론하는 때에 반드시 각각 일상의 생활에 긴요하고 실질적인 일에 적용하는 뜻에 유념해서 책과 내가 하나가 되고 말과 행동이 일치하게 할 것이며, 한갓 심과 성이라는 명목(名目)과 자구(字句)를 말하는 데만 힘쓰지 않도록 하라.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절실히 묻고 가까이 생각하는[切問近思] 학문인 것이다.” 하였다.
직제학 신 이만수(李晩秀)가 을묘년에 기록한 것이다.
문신 제술(文臣製述) 때 ‘본조에서 새로 인쇄한 《주서백선》을 올렸다[本朝進新印朱書百選]’는 것으로 제목을 명하였다. 과차(科次)할 때에 상이 고관(考官)에게 하교하기를, “근래에 신진배들이 주서(朱書)를 전혀 외우고 익히지 않기 때문에 소홀하고 거칢이 특히 심하여 취할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 이시원(李始源)은 지은 글이 조금 우수한 것이 제법 주서에 익숙하고, 연평(延平)과 면재(勉齋)를 언급한 구절도 《주서백선》을 편차(編次)한 본뜻을 제대로 안 것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이 책을 늘 손에서 놓지 않았고, 근래에도 여가 시간을 이용해서 백 번을 읽었지만 아직까지 공부를 마치지 못하였다.” 하였다.
검교직각 신 김면주(金勉柱)가 을묘년에 기록한 것이다.
일찍이 성균관 유생들의 응제문(應製文)을 직접 고시(考試)하면서 이르기를, “이 또한 완물상지(玩物喪志)에 가까운 것이지만 고질적으로 이 일을 좋아하여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하였다.
《근사록(近思錄)》을 과강(課講)할 때에 하교하기를, “옛사람의 강학(講學)은 마음으로 터득하고 일에 행하고자 하는 것이었는데, 지금 사람들은 글을 앞에 놓고 뜻을 말할 뿐 심신(心身)과 일에서 구하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태극(太極)과 이(理)가 같은 것이냐라든가 성(誠)과 인(仁)의 글자 뜻이 다른 것이냐라든가 하는 문제는 피차(彼此)가 논란해 봐야 문득 한바탕의 쓸데없는 말에 지나지 않으니, 이런 강학이 어찌 반푼인들 도움이 되겠는가. 여러 신하들은 이러한 뜻을 생각해서 오로지 평소 마음속에 의심스럽게 생각했던 문제만을 들어 반복하여 토론하고 변론하라. 그리하여 오늘 강학한 효과가 훗날 일을 행하는 데서 드러나 빈말로 귀결되지 않게 하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근래에 학자들이 인물(人物)의 오상(五常)에 대해서 논하기를 좋아하여 이러저러한 주장들을 내어 놓았지만, 학문을 하는 방법이 어찌 여기에 있겠는가. 내가 여기에 대해 일찍이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은 것도 한쪽으로 치우치는 폐단을 바로잡으려는 뜻에서였다.” 하였다.
일찍이 미발(未發)의 뜻에 대해서 논하였는데, 연신(筵臣) 가운데
연평(延平)의 정중체인(靜中體認)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이 있었다. 하교하기를, “꼿꼿이 앉아 적막함을 지키는 것은 끝내 혼매함으로 귀결되고, 조금만 안배(按排)하면 문득 이발(已發)에 속하니, 어떻게 해야 발(發)하여 절도에 맞는 대본(大本)이 되겠는가. 이러한 곳은 참으로 말하기 어렵지만 또한 공부를 하기 좋은 곳이다.” 하였다.
오륜(五倫)의 차서(次序)를 논할 때에 붕우(朋友)가 군신(君臣)이나 부자(父子)보다 가볍다고 하는 연신이 있었다. 하교하기를, “하늘이 정해 놓은 대륜(大倫)에 어찌 경중(輕重)이 있겠는가. 붕우가 비록 오륜의 끝에 놓여 있지만, 임금을 섬기고 어버이를 섬기는 방법을 붕우에게 힘입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오행(五行)이 토(土)가 아니면 이루어지지 못하고 오상(五常)이 신(信)이 아니면 확립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지금 사람들은 붕우 간의 도리가 중하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습속이 옛날만 못한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신 간에는 간격이 없는 것이 귀하지만, 만약 지나치게 친밀하게 지낸다면 이는 좋은 일이 아니다. 군자 간의 교제는 반드시 담담해야 하는 법이다.” 하였다.
《우암집(尤庵集)》 판본을 처음에는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보관해 두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하교하기를, “
선정(先正)이 일생 동안 지킨 것이 바로 대의(大義)였는데 어찌 굳이 여기에다 보관해 두겠는가. 다른 곳에 옮겨 두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학문(學問)은 활법(活法)이 귀한 법인데, 근래 학자들은 대부분 이 공부가 부족하다. 송명흠(宋明欽)이나 김양행(金亮行) 같은 사람을 어찌 쉽게 얻을 수 있겠는가. 이 학문이 실오라기처럼 근근이 명맥을 이어 오고 있는데, 사대부 자제들 중에 과연 여기에 뜻을 둔 자가 있는지 모르겠다.” 하였다.
직각 신 이시원(李始源)이 을묘년에 기록한 것이다.
상이 이르기를, “국초(國初)의 문장은 혼후하고 순박한 것이 좋아할 만하였으니, 후대의 작가들은 본래 미칠 수 없다. 인물에 비유컨대, 시조(始祖)는 겉으로 보기에는 질박하고 촌스러워서 취할 만한 재주가 없는 것 같아도 종국적으로는 참된 뜻이 많아 후손이 번창할 수 있는데 반해, 후손(後孫)은 문채가 현란하여 보기에는 훌륭한 듯해도 종국적으로는 참된 뜻이 적어 쇠한 세상의 기상(氣象)을 면치 못하는데, 문장도 대개 이와 유사하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는 우리나라 문장가 중에서 최항(崔恒)과 서거정(徐居正)을 가장 좋아하는데, 문장이 여유 있고 느긋하여
한 사람이 노래하고 세 사람이 화답하여 여음(餘音)이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하였다.
검교대교 신 서유구(徐有榘)가 을묘년에 기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