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 18현 두문 72현 /해동18현 회헌 안향

해동 18현 회헌 안향(安珦)

아베베1 2011. 5. 29. 20:01

 

 

 

 

 

           사진은 퇴계 이황선 생의 추모 서원인 의령의 德谷書院 의전경

 

성씨와 본관

순흥안씨(順興安氏)

[요약정보]

본관명 순흥(順興)
성씨명 안씨(安氏)
본관소재지 경상북도(慶尙北道) 영주시(榮州市)
본관이칭
시조명 안자미(安子美)

[상세내용]

본관 연혁

순흥(順興)은 경상북도 영주시(榮州市)에 속해 있는 지명이다. 본래 고구려의 급벌산군(及伐山郡)이었다. 신라 경덕왕 때 급산군(及山郡)으로 고쳤고, 940년(고려 태조 23)에 흥주(興州)라 하였다가, 1018년(현종 9)에 안동부(安東府)에 속하였다가 순안현(順安縣)으로 이속되었다. 1172년(명종 2)에 감무가 설치되었다. 그 후 충렬왕이 태(胎)를 봉안하여 지흥주사(知興州事)로 승격되었으며, 충목왕이 태를 봉안하여 순흥부(順興府)로 승격되었다. 1413년(태종 13) 도호부로 바뀌었다가, 1457년(세조 3)에 부사 이보흠(李甫欽)이 역모를 꾀하였다고 하여 풍기(豊基), 영천(榮川)에 나누어 편입시켰다. 1683년(숙종 9)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로 복구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안동부 순흥군이 되었다가 1896년 경상북도로 이관하였다. 1914년에 군면 폐합으로 군을 없애고 봉화(奉化)와 영주(榮州)에 각각 편입시켜 영주시에 속한 순흥면으로 남아 있다. 1980년 영주시가 생기면서 영풍군의 관할이 되었다가, 1995년에 영풍군이 영주시에 통합되었다.

성씨의 역사

시조 안자미(安子美)는 고려시대 흥위위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 신호위상호군(神號衛上護軍)에 추봉되었다. 따라서 시조 이전의 세계(世系)는 알 수 없으나, 그 후대로 순흥현(順興縣)에 세거했기 때문에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안자미의 아들 안영유(安永儒), 안영린(安永麟), 안영화(安永和)를 기준으로 1,2,3파로 구분된다.

주요 세거지

경상남도 진양군 대평면 상촌리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면 신음리
경상북도 상주군 공검면 중소리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월오리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척산리  전라북도 남원군 이백면
평안남도 안주군 신안주면         황해도 연백군 금산면 석천리
황해도 연백군 운산면 호산리     황해도 연백군 화성면 송천리
황해도 황주군 수풍면 영풍리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순흥안씨는 145,254가구 총 468,827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참고문헌]

《韓國人의 姓譜》(삼안문화사, 1986) 
《姓氏의 고향》(중앙일보사, 2002)
뿌리를 찾아서(http://www.rootsinfo.co.kr)
傳統族譜文化社(http://www.genealogy.co.kr)
성씨정보(http://www.surname.info)

[순흥안씨(順興安氏)의 인물들]

안건(安健) 안건영(安健榮) 안겸제(安兼濟) 안경(安璥){2} 안경공(安景恭){2}
안경근(安敬根) 안경달(安景達) 안경덕(安敬德) 안경량(安景良) 안경온(安景溫)
안경지(安敬智) 안경직(安慶稷) 안경창(安景昌) 안공근(安恭根) 안관(安灌)
안광벽(安光璧) 안광석(安光碩) 안광수(安光洙) 안광업(安光業) 안광욱(安光郁)
안광진(安光鎭) 안국린(安國麟) 안국장(安國章) 안국필(安國弼) 안귀행(安貴行)
안극관(安克觀) 안극권(安克權) 안극함(安克諴) 안기(安璣){1} 안기영(安驥泳){1}
안당(安瑭) 안덕린(安德麟) 안덕수(安德秀) 안도징(安道徵) 안만리(安萬里)
안명근(安明根) 안명로(安命老) 안명세(安名世) 안명열(安命說) 안목(安牧)
안몽윤(安夢尹) 안몽징(安夢徵) 안무(安武) 안문개(安文凱) 안민수(安敏修)
안병두(安炳斗) 안병범(安秉範) 안병찬(安炳瓚){1} 안병찬(安秉瓚){2} 안병탁(安秉鐸)
안병휘(安秉輝) 안보(安輔) 안복준(安復駿) 안봉려관(安蓬廬觀) 안봉생(安鳳生)
안봉순(安奉舜) 안사인(安士仁) 안상(安瑺){2} 안상길(安相吉) 안상윤(安相潤)
안상정(安商正) 안상호(安商浩) 안석경(安錫儆) 안선(安璿) 안성빈(安聖彬)
안성섭(安成燮) 안세갑(安世甲) 안수(安琇) 안수(安璲) 안수산(安壽山)
안숙(安塾){2} 안순(安純) 안숭선(安崇善) 안숭직(安崇直) 안숭효(安崇孝)
안승우(安承禹) 안승채(安承采) 안시상(安時相) 안신휘(安愼徽) 안여석(安如石)
안여악(安如岳) 안여지(安汝止) 안연석(安鍊石) 안영(安瑛) 안영남(安穎男)
안영수(安永綏) 안영호(安永鎬) 안요경(安堯卿) 안요묵(安堯默) 안우기(安于器)
안우삼(安友參) 안우하(安友夏) 안원(安瑗) 안원숭(安元崇) 안위(安瑋){1}
안위(安衛){2} 안유상(安有商) 안응준(安應俊) 안응창(安應昌) 안의(安誼)
안인석(安寅錫) 안일리(安日履) 안자유(安自裕){2} 안재건(安載健) 안재도(安載道)
안재복(安載福) 안재철(安栽轍) 안재호(安在濩) 안재홍(安在鴻) 안재희(安載熙)
안절(安節) 안정(安珽){2} 안정근(安定根) 안정려(安鼎呂) 안정모(安貞模)
안정선(安廷善) 안정한(安鼎漢) 안정현(安鼎鉉) 안종도(安宗道) 안종원(安宗源){1}
안종원(安鍾元){2} 안준(安俊) 안중관(安重觀) 안중근(安重根) 안중식(安中植)
안중필(安重弼) 안중현(安重鉉) 안증(安增) 안지귀(安知歸) 안지호(安智鎬)
안질(安耋) 안집(安?) 안징(安徵) 안찬(安瓚) 안창국(安昌國)
안창렬(安昌烈) 안창호(安昌浩) 안처(安處) 안처건(安處健) 안처겸(安處謙)
안처경(安處經) 안처권(安處權) 안처근(安處謹) 안처상(安處常) 안처성(安處誠)
안처순(安處順) 안처택(安處宅) 안처함(安處諴) 안천보(安天保) 안축(安軸)
안춘근(安春根) 안치권(安致權) 안치묵(安致默) 안침(安琛) 안태국(安泰國)
안한(安瀚) 안항식(安恒植) 안향(安珦) 안현(安玹) 안형(安珩)
안호(安瑚) 안호덕(安好德) 안호상(安浩相) 안호연(安浩淵) 안홍국(安弘國)
안홍업(安弘業) 안희(安熹) 안희제(安熙濟)

[순흥안씨(順興安氏)의 과거 및 취재 합격자]

고려문과
안경공(安景恭) 안경량(安景良) 안경온(安景溫) 안목(安牧) 안문개(安文凱)
안보(安輔) 안석(安碩) 안성계(安成桂) 안수(安垂) 안순(安純)
안우기(安于器) 안원(安瑗) 안원숭(安元崇) 안전(安甸) 안조동(安祖同)
안종약(安從約) 안종원(安宗源) 안집(安輯) 안축(安軸) 안향(安珦)
무과
안경국(安擎國) 안경남(安京男) 안경득(安敬得) 안경우(安景祐) 안경인(安景仁)
안경철(安景哲) 안계남(安戒男) 안계부(安戒富) 안계운(安繼雲) 안계적(安啓績)
안계회(安繼晦) 안계흥(安戒興) 안광국(安光國) 안광근(安光近) 안광련(安光連)
안광렬(安光烈) 안광록(安光祿) 안광택(安光宅) 안국민(安國民) 안국신(安國信)
안국재(安國材) 안국철(安國哲) 안국형(安國衡) 안국화(安國華) 안귀남(安貴男)
안귀빈(安貴賓) 안귀생(安貴生) 안극가(安克家) 안근(安根) 안기(安己)
안기량(安驥良) 안기성(安起成) 안기영(安起英) 안기응(安起應) 안끝남(安唜男)
안남(安男) 안노미(安老味) 안늣봄(安唜春) 안담(安潭) 안대기(安大器)
안대수(安大秀) 안대적(安大績) 안대진(安大進) 안대철(安大哲) 안덕량(安德良)
안덕룡(安德龍) 안덕함(安德涵) 안덕흥(安德興) 안돈(安惇) 안동량(安東良)
안동후(安東垕) 안리(安履) 안막난(安莫難) 안만석(安萬碩) 안만필(安萬弼)
안만형(安萬亨) 안명복(安命福) 안명신(安明信) 안몽길(安夢吉) 안몽석(安夢錫)
안몽정(安夢井) 안무생(安武生) 안무응(安無應) 안문흠(安文欽) 안백한(安百漢)
안복명(安復明) 안복삼(安福三) 안복재(安福才) 안복주(安復周) 안붕경(安鵬慶)
안사구(安思榘) 안사도(安師道) 안사복(安士福) 안사윤(安士允) 안사현(安士賢)
안상규(安象奎) 안상득(安尙得) 안상우(安祥禹) 안상운(安祥雲) 안상의(安尚儀)
안상택(安尚宅) 안생(安生) 안서령(安瑞齡) 안석기(安錫基) 안석도(安碩道)
안석주(安碩柱) 안석흥(安碩興) 안석흥(安碩興) 안선생(安善生) 안성눌(安性訥)
안성도(安聖道) 안성립(安成立) 안성택(安成宅) 안성필(安聖弼) 안성희(安成希)
안세겸(安世謙) 안세망(安世望) 안세방(安世方) 안세봉(安世奉) 안세신(安世信)
안세영(安世英) 안세온(安世溫) 안세정(安世貞) 안세주(安世宙) 안세징(安世澄)
안세칭(安世稱) 안세태(安世泰) 안세택(安世宅) 안세한(安世翰) 안세호(安世瑚)
안세훈(安世勲) 안세희(安世熙) 안수(安洙) 안수(安璲) 안수덕(安受德)
안수장(安壽長) 안수팽(安壽彭) 안수해(安壽海) 안숙(安塾) 안술룡(安述龍)
안승길(安承吉) 안승일(安昇逸) 안시대(安時大) 안시진(安時震) 안시태(安始泰)
안시형(安時亨) 안시형(安時亨) 안식(安湜) 안신욱(安信郁) 안애생(安愛生)
안애성(安愛成) 안억(安億) 안억(安檍) 안여눌(安汝訥) 안여록(安汝祿)
안여옥(安麗玉) 안여익(安汝翊) 안여주(安汝周) 안여행(安汝行) 안오륜(安五倫)
안용(安瑢) 안용학(安龍鶴) 안우(安佑) 안우채(安宇彩) 안원(安源)
안유인(安有仁) 안유훈(安有勳) 안윤광(安光) 안윤방(安潤邦) 안윤서(安允瑞)
안은록(安銀祿) 안응남(安應男) 안응립(安應立) 안응선(安應善) 안응운(安應雲)
안응의(安應義) 안의(安欹) 안의흘(安義屹) 안이룡(安以龍) 안이택(安以宅)
안익제(安翼濟) 안익후(安益垕) 안익훈(安益勲) 안익휘(安翊徽) 안인(安仁)
안인건(安仁健) 안인국(安仁國) 안인명(安仁明) 안인무(安仁武) 안인손(安仁孫)
안인적(安仁迪) 안인택(安仁宅) 안일남(安一男) 안입(安立) 안입신(安立身)
안재관(安在寬) 안정(安情) 안정(安楨) 안정립(安廷立) 안정식(安鼎植)
안정연(安廷衍) 안정우(安廷佑) 안정택(安正宅) 안정택(安禎宅) 안종계(安宗繼)
안종덕(安宗德) 안종백(安宗伯) 안종원(安宗遠) 안종일(安宗日) 안종택(安宗宅)
안종혁(安宗爀) 안준건(安俊建) 안준도(安遵道) 안중우(安重右) 안중유(安重維)
안중필(安重弼) 안중현(安仲賢) 안중호(安重皓) 안중휘(安仲徽) 안중흥(安仲興)
안지운(安之雲) 안진운(安進雲) 안진휘(安震暉) 안집(安㙫) 안차정(安次廷)
안차징(安次徵) 안창주(安昌柱) 안처봉(安處鳳) 안처인(安處仁) 안처인(安處仁)
안처주(安處宙) 안처훈(安處勲) 안처희(安處禧) 안천갑(安天甲) 안천길(安天吉)
안철(安澈) 안춘길(安春吉) 안충건(安忠建) 안충달(安忠達) 안충립(安忠立)
안충선(安忠善) 안취일(安就一) 안치인(安致仁) 안치택(安致宅) 안태수(安太守)
안태우(安泰遇) 안태웅(安太雄) 안태웅(安泰雄) 안태훈(安泰薰) 안태흥(安泰興)
안택인(安宅仁) 안필(安泌) 안필휘(安必徽) 안한강(安漢綱) 안한중(安漢重)
안함(安㴠) 안항(安恒) 안형대(安亨大) 안형덕(安衡德) 안혜룡(安惠龍)
안호(安琥) 안홍국(安弘國) 안홍기(安弘器) 안홍남(安弘男) 안홍엽(安弘燁)
안홍은(安弘殷) 안황(安) 안효격(安孝格) 안후길(安厚吉) 안후선(安厚善)
안후영(安厚英) 안흘(安仡) 안흥해(安興海) 안희(安熹) 안희(安禧)
안희민(安希敏)
무보
안경국(安敬國) 안성연(安性淵) 안숙(安塾)
문과
안건지(安健之) 안겸제(安兼濟) 안경(安璥) 안경묵(安敬默) 안경빈(安敬賓)
안경심(安經心) 안경운(安慶運) 안공신(安公信) 안공신(安公信) 안관(安寬)
안관제(安寬濟) 안관후(安寬厚) 안교희(安敎喜) 안구(安玖) 안국진(安國鎭)
안국태(安國泰) 안귀행(安貴行) 안규(安圭) 안규식(安圭植) 안극효(安克孝)
안근후(安謹厚) 안급인(安?仁) 안기(安璣) 안기영(安驥泳) 안기원(安基元)
안담수(安聃壽) 안당(安瑭) 안대제(安大濟) 안도겸(安道謙) 안돈후(安敦厚)
안림(安琳) 안만철(安萬哲) 안매권(安邁權) 안명로(安命老) 안명세(安名世)
안명학(安鳴鶴) 안병건(安炳乾) 안병탁(安秉鐸) 안복준(安復駿) 안봉래(安鳳來)
안상묵(安尙默) 안석윤(安錫胤) 안성(安晟) 안성빈(安聖彬) 안성시(安聖時)
안세갑(安世甲) 안수(安琇) 안수(安璲) 안수기(安脩己) 안수량(安秀良)
안수량(安秀良) 안숙(安塾) 안숭선(安崇善) 안시상(安時相) 안시협(安時協)
안식(安烒) 안여석(安如石) 안여악(安如岳) 안연석(安鍊石) 안염신(安念信)
안염진(安念鎭) 안영풍(安永豊) 안욱(安頊) 안위(安瑋) 안유(安裕)
안윤경(安允璟) 안윤승(安允昇) 안윤시(安潤蓍) 안윤정(安允錠) 안윤중(安允中)
안윤항(安允沆) 안이권(安以權) 안이정(安以鼎) 안익겸(安益謙) 안익량(安翊良)
안익풍(安翊豊) 안익희(安益熙) 안임권(安任權) 안자유(安自裕) 안재린(安在麟)
안전(安佺) 안정(安珽) 안정간(安廷侃) 안정선(安廷善) 안정순(安正淳)
안정인(安正仁) 안정택(安正宅) 안정현(安廷玹) 안제(安霽) 안제원(安濟元)
안종도(安宗道) 안종면(安鍾冕) 안종원(安鍾元) 안중권(安中權) 안중묵(安重默)
안중필(安重弼) 안중후(安重厚) 안지(安祉) 안지귀(安知歸) 안질(安質)
안집(安?) 안집(安?) 안창범(安昌範) 안처겸(安處謙) 안처근(安處謹)
안처선(安處善) 안처성(安處誠) 안처순(安處順) 안처함(安處諴) 안치묵(安致默)
안침(安琛) 안택중(安宅重) 안필호(安弼鎬) 안한규(安漢珪) 안함(安馠)
안해(安海) 안헌민(安獻民) 안현(安玹) 안형진(安亨鎭) 안형진(安衡鎭)
안호(安瑚) 안후(安垕) 안희(安熹)
생원진사시
안격(安綌) 안견(安堅) 안겸제(安兼濟) 안겸제(安兼濟) 안경(安坰)   
안경(安璥) 안경(安璥) 안경교(安景敎) 안경기(安景祺) 안경로(安景老)
안경상(安景祥) 안경시(安敬時) 안경운(安慶運) 안경위(安景褘) 안경흠(安慶欽)
안계(安係) 안공신(安公信) 안공저(安公箸) 안공필(安公弼) 안관(安寬)
안관(安寬) 안관(安瓘) 안관수(安筦秀) 안괄(安适) 안광벽(安光璧)
안광욱(安光郁) 안광종(安光宗) 안광협(安光恊) 안괵(安漍) 안교신(安敎臣)
안교정(安敎晶) 안교협(安敎浹) 안교형(安敎亨) 안구(安玖) 안구(安衢)
안구석(安龜石) 안구택(安龜澤) 안구홍(安龜洪) 안국현(安國顯) 안귀수(安貴壽)
안규(安圭) 안규(安珪) 안극권(安克權) 안극성(安克誠) 안극순(安克順)
안극인(安克仁) 안극전(安克詮) 안긍호(安肯鎬) 안기(安基) 안기(安玘)
안기룡(安麒龍) 안기수(安基洙) 안기정(安琪禎) 안기진(安基珍) 안기홍(安基洪)
안노(安輅) 안노석(安老石) 안담(安儋) 안담수(安聃壽) 안당(安瑭)
안대유(安大有) 안대제(安大濟) 안대제(安大濟) 안덕린(安德麟) 안덕봉(安德鳳)
안덕소(安德昭) 안덕인(安德仁) 안도준(安道濬) 안돈(安墩) 안동승(安東昇)
안두원(安斗元) 안두징(安斗徵) 안만철(安萬哲) 안명국(安鳴國) 안명술(安明述)
안명옥(安命玉) 안명윤(安明允) 안명일(安明逸) 안명후(安命厚) 안몽백(安夢伯)
안몽옥(安夢玉) 안몽익(安夢益) 안몽징(安夢徵) 안민(安琝) 안민제(安民濟)
안박(安鎛) 안방언(安邦彦) 안백겸(安伯謙) 안백영(安百榮) 안범위(安範圍)
안병량(安秉良) 안병민(安秉民) 안병연(安?淵) 안병택(安秉澤) 안병호(安秉鎬)
안병희(安炳熙) 안봉령(安鳳齡) 안봉희(安鳳熙) 안사겸(安思謙) 안사범(安思範)
안사열(安士說) 안사직(安思稷) 안사흠(安思欽) 안상(安祥) 안상경(安相經)
안상묵(安尙默) 안상보(安相普) 안상빈(安象彬) 안상위(安相韙) 안상집(安相緝)
안상집(安相鏶) 안서국(安瑞國) 안석규(安錫奎) 안석량(安錫良) 안석룡(安錫龍)
안석룡(安錫龍) 안석리(安碩履) 안석민(安碩民) 안석윤(安錫胤) 안석전(安錫佺)
안석종(安錫鍾) 안석중(安錫中) 안선국(安善國) 안선모(安善模) 안선무(安善武)
안성(安) 안성교(安聖敎) 안성길(安聖吉) 안성대(安聖大) 안성리(安省履)
안성일(安聖一) 안성좌(安聖佐) 안성직(安聖稷) 안성휘(安聖徽) 안성희(安聖希)
안세관(安世寬) 안세구(安世耉) 안세로(安世老) 안세복(安世復) 안세영(安世英)
안세형(安世亨) 안수(安琇) 안수겸(安洙謙) 안수경(安守敬) 안수곤(安壽坤)
안수기(安修己) 안수량(安秀良) 안수신(安秀臣) 안수함(安壽咸) 안수항(安守恒)
안숙(安塾) 안숙(安潚) 안숙(安琡) 안숙(安璹) 안순(安珣)
안순(安錞) 안순좌(安舜佐) 안술(安述) 안습제(安習濟) 안승묵(安昇默)
안승종(安承宗) 안시상(安時相) 안식(安湜) 안식(安烒) 안신(安信)
안신언(安愼言) 안심(安審) 안양로(安養魯) 안양증(安養曾) 안엄(安儼)
안여(安慮) 안여대(安如岱) 안여명(安汝明) 안여백(安汝?) 안여석(安如石)
안여악(安如岳) 안여지(安汝止) 안여진(安汝晋) 안여태(安汝泰) 안연석(安鍊石)
안연석(安鍊石) 안엽(安熀) 안영(安瑛) 안영수(安永綏) 안영탁(安泳倬)
안오(安悟) 안오(安鼇) 안온(安溫) 안용(安溶) 안용식(安龍植)
안우(安佑) 안우(安瑀) 안우(安祐) 안우도(安又圖) 안우량(安友良)
안우리(安羽鯉) 안우제(安羽濟) 안욱(安頊) 안유상(安有相) 안윤직(安允直)
안윤희(安潤羲) 안응계(安應溪) 안응계(安應溪) 안응기(安應基) 안응기(安應箕)
안응망(安應望) 안응서(安應瑞) 안의(安懿) 안의(安誼) 안의권(安義權)
안의묵(安義默) 안이룡(安爾龍) 안이진(安爾鎭) 안익채(安翊采) 안익홍(安翼弘)
안익희(安益熙) 안인택(安仁宅) 안인희(安仁禧) 안일리(安日履) 안일민(安逸民)
안일민(安逸民) 안자복(安自福) 안자유(安自裕) 안재덕(安在德) 안재묵(安在默)
안재승(安在升) 안재열(安在烈) 안재진(安再軫) 안적(安籍) 안적(安籍)
안전(安佺) 안전(安佺) 안절(安節) 안점(安坫) 안정(安瀞)
안정(安珽) 안정국(安鼎國) 안정로(安正魯) 안정모(安正模) 안정선(安廷善)
안정순(安正純) 안정좌(安廷佐) 안정찬(安廷瓚) 안정철(安廷哲) 안정현(安廷玹)
안정호(安廷鎬) 안정환(安廷瓛) 안정희(安廷喜) 안정희(安禎熙) 안제(安霽)
안제(安霽) 안제만(安濟萬) 안종우(安宗遇) 안종웅(安宗雄) 안종정(安鍾正)
안종헌(安鍾憲) 안종혁(安宗㷜) 안주빈(安周彬) 안주완(安柱完) 안준(安儁)
안중(安重) 안중계(安重溪) 안중관(安重觀) 안중섭(安重燮) 안중소(安重紹)
안중인(安重仁) 안중필(安重弼) 안중하(安重厦) 안중항(安重恒) 안중현(安重鉉)
안중형(安重衡) 안중환(安中煥) 안중희(安重熙) 안즙(安濈) 안지(安祉)
안진구(安鎭龜) 안진권(安鎭權) 안진옥(安晋玉) 안진화(安鎭華) 안징(安澂)
안찬(安燦) 안창(安昶) 안처겸(安處謙) 안처경(安處經) 안처권(安處權)
안처근(安處謹) 안처상(安處常) 안처성(安處誠) 안처순(安處順) 안처행(安處行)
안척(安惕) 안첨(安) 안초(安初) 안총(安寵) 안총(安璁)
안춘국(安春國) 안취인(安就仁) 안탄(安坦) 안태건(安泰健) 안태정(安台鼎)
안택중(安宅重) 안필영(安必榮) 안학순(安學淳) 안학승(安學承) 안한(安瀚)
안한경(安漢卿) 안한익(安漢翼) 안해(安海) 안해로(安海老) 안행(安行)
안행준(安行準) 안헌국(安憲國) 안헌민(安獻民) 안현룡(安見龍) 안형(安瀅)
안형(安衡) 안형(安逈) 안형(安浻) 안형우(安亨祐) 안호(安濩)
안호(安祜) 안호(安祜) 안호(安鎬) 안호중(安鎬重) 안혼(安琿)
안홍구(安鴻逑) 안홍묵(安弘默) 안홍영(安洪永) 안홍정(安弘靖) 안황(安璜)
안효묵(安斅默) 안효선(安孝善) 안효식(安孝植) 안효인(安孝仁) 안후(安厚)
안흘(安忔) 안흠(安欽) 안희(安憙)
역과
안경(安境) 안계영(安桂榮) 안광호(安光鎬) 안국균(安國均) 안국빈(安國彬)
안국용(安國鏞) 안기태(安基泰) 안덕민(安德民) 안도영(安道榮) 안동규(安東奎)
안동석(安東晳) 안동욱(安東旭) 안동준(安東晙) 안동진(安東晋) 안동화(安東華)
안두환(安斗桓) 안명열(安命說) 안명우(安命禹) 안명익(安命益) 안명호(安命鎬)
안병륜(安秉倫) 안상준(安相俊) 안상호(安祥浩) 안상홍(安祥鴻) 안서익(安瑞翼)
안선영(安善榮) 안세영(安世榮) 안승현(安承顯) 안시엽(安時曄) 안신휘(安愼徽)
안영희(安永禧) 안용호(安用鎬) 안일신(安日新) 안자신(安自新) 안재건(安載健)
안종득(安宗得) 안종민(安宗敏) 안종선(安宗善) 안종유(安宗鍒) 안준건(安俊建)
안택선(安宅善) 안형중(安衡中)
율과
안경선(安慶善) 안근(安根) 안봉린(安鳳麟) 안봉상(安鳳祥) 안수완(安壽完)
안증득(安曾得) 안천문(安天文) 안치검(安致儉) 안택주(安宅周)
음관
안교희(安敎熙) 안국진(安國鎭) 안기영(安驥泳) 안문기(安汶基) 안병탁(安秉鐸)
안수록(安壽祿) 안시협(安時恊) 안염진(安念鎭) 안영풍(安永豊) 안윤시(安潤蓍)
안윤정(安允錠) 안윤중(安允中) 안윤항(安允沆) 안익량(安翊良) 안익풍(安翊豊)
안익희(安益熙) 안재린(安在麟) 안재묵(安在默) 안정순(安正淳) 안정희(安廷喜)
안치묵(安致默) 안치원(安致元)
음양과
안경신(安擎臣) 안국린(安國麟) 안국빈(安國賓) 안국헌(安國憲) 안규상(安圭祥)
안기상(安基祥) 안덕기(安德基) 안동근(安同根) 안동묵(安東默) 안득신(安得臣)
안병립(安秉立) 안사덕(安思德) 안사언(安思彦) 안사일(安思一) 안사행(安思行)
안성신(安聖臣) 안영기(安永基) 안우선(安禹善) 안유(安愉) 안재흥(安載興)
안정호(安定浩) 안준(安浚) 안지선(安志善) 안철신(安喆臣) 안최선(安㝡善)
안침(安忱)
의과
안경창(安景昌) 안국신(安國信) 안국원(安國元) 안국윤(安國尹) 안국전(安國銓)
안동언(安東彦) 안동헌(安東獻) 안득현(安得顯) 안명호(安命浩) 안병의(安秉宜)
안병익(安秉益) 안상윤(安祥潤) 안선경(安善慶) 안성보(安聖輔) 안세연(安世淵)
안숙(安淑) 안여선(安與善) 안욱(安頊) 안응상(安膺祥) 안정국(安正國)
안종석(安宗錫) 안종탁(安宗鐸) 안진영(安進榮) 안효남(安孝男)
취재
안구(安榘)

 

 

인물 사전

안향(安珦)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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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온(士蘊)
회헌(晦軒)
시호 문성(文成)
생졸년 1243 (고종 30) - 1306 (충렬왕 32)
시대 고려 후기
본관 순흥(順興)
활동분야 관료 > 명신

[상세내용]

안향(安珦)에 대하여
1243년(고종 30)∼1306년(충렬왕 32). 고려시대의 명신(名臣)·학자. 초명은 유(裕)였으나 뒤에 향(珦)으로 고쳤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문종의 이름이 같은 자였으므로, 이를 피하여 초명인 로 다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인데, 이는 그가 만년에 송나라주자(朱子)를 추모하여 그의 호인 회암(晦庵)을 모방한 것이다.
1. 가계
밀직부사 부(孚)의 아들로 흥주(興州: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군 풍기)죽계(竹溪) 상평리(上坪里)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강주우씨(剛州禹氏)이다.
2. 관직
1260년(원종 1)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이 되고, 이어 직한림원(直翰林院)으로 자리를 옮겼다. 1270년 삼별초의 난 때 강화에 억류되었다가 탈출, 1272년 감찰어사가 되었다. 강화탈출로 인하여 그는 새삼 원종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1275년(충렬왕 1) 상주판관(尙州判官)으로 나갔을 때에는 백성들을 현혹시키는 무당을 엄중히 다스려 미신을 타파, 민풍(民風)을 쇄신시키려 노력하였고, 판도사좌랑(版圖司左郞)·감찰시어사(監察侍御史)를 거쳐 국자사업(國子司業)에 올랐다.
1288년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를 거쳐 좌부승지로 옮기고, 다시 좌승지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다. 고려충렬왕대에 와서는 원나라의 완전한 속국이 되어 관제도 고쳤을 뿐만 아니라, 원나라정동행성(征東行省)고려에 두었는데, 1289년 2월에 그는 이 정동행성원외랑(員外郞)을 제수받았다. 얼마 뒤 좌우사낭중(左右司郞中)이 되고, 또 고려유학제거(高麗儒學提擧)가 되었다.
3. 주자학 수입
같은해 11월에 왕과 공주(원나라 공주로서 당시 고려의 왕후)를 호종하고, 원나라에 가서 주자서(朱子書)를 손수 베끼고 공자주자의 화상(畵像)을 그려가지고 이듬해 돌아왔으며, 3월에 부지밀직사사가 되었다.
1294년 동남도병마사(東南道兵馬使)를 제수받아 합포(合浦)에 출진하였고, 이어 지공거(知貢擧)가 되고, 같은해 12월에 지밀직사사, 다시 이듬해 밀직사사로 승진하였다.
1296년 삼사좌사(三司左使)로 옮기고, 왕과 공주를 호종하여 다시 원나라에 들어갔으며, 이듬해에는 첨의참리세자이보(僉議參理世子貳保)가 되었다. 12월 집 뒤에 정사(精舍)를 짓고, 공자주자의 화상을 모셨다.
1298년 당시 원나라의 간섭에 의하여 충렬왕이 물러나고 세자를 세우니, 그가 바로 충선왕인데, 즉위하자 관제를 개혁하여 그는 집현전태학사 겸 참지기무동경유수계림부윤(集賢殿太學士兼參知機務東京留守鷄林府尹)이 되고, 다시 첨의참리수문전태학사감수국사(僉議參理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가 되었다.
같은해 8월 충선왕을 따라 또다시 원나라에 들어갔다. 바로 이해에 충렬왕이 다시 복위되었는데, 이듬해 수국사가 되고, 이어 1300년 광정대부찬성사(匡靖大夫贊成事)에 오르고, 얼마 뒤에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이 되었다.
4. 유교적 제도정비
1303년 국학학정(國學學正) 김문정(金文鼎)중국 강남(江南: 난징)에 보내어 공자와 70제자의 화상, 그리고 문묘에서 사용할 제기(祭器)·악기(樂器) 및 육경(六經)·제자(諸子)·사서(史書)·주자서 등을 구해오게 하였다.
또 왕에게 청하여 문무백관으로 하여금 6품 이상은 은 1근, 7품 이하는 포(布)를 내게 하여 이것을 양현고(養賢庫)에 귀속시키고, 그 이식으로 인재양성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같은해 12월에 첨의시랑찬성사판판도사사감찰사사(僉議侍郞贊成事判版圖司事監察司事)가 되었다.
이듬해 5월에는 섬학전(贍學錢)을 마련하여 박사(博士)를 두어 그 출납을 관장하게 하였는데, 이는 오늘날의 육영재단과 성격이 같은 것으로서 당시에 국자감 운영의 재정적 원활을 가져왔다.
그리고 같은해 6월에 대성전(大成殿)이 완성되자, 중국에서 구해온 공자를 비롯한 선성(先聖)들의 화상을 모시고 이산(李㦃)·이진(李瑱)을 천거하여 경사교수도감사(經史敎授都監使)로 임명하게 하였다. 이해에 판밀직사사도첨의중찬(判密直司事都僉議中贊)으로 치사(致仕)하였다. 1306년 9월 12일 64세로 죽었다. 왕이 장지(葬地)를 장단 대덕산에 내렸다.
5. 화상 제작과 서원배향
1318년(충숙왕 5) 왕이 그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궁중의 원나라 화공에게 명하여 그의 화상을 그리게 하였다. 현재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는 그의 화상은 이것을 모사한 것을 조선 명종 때 다시 고쳐 그린 것이다. 이듬해 문묘에 배향되었다.
1542년(중종 37)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영주군 순흥면 내죽리(內竹里)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이듬해 8월에는 송나라 주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모방하여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그곳에 세웠는데, 1549년(명종 4) 풍기군수 이황(李滉)의 요청에 따라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명종 친필의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1643년(인조 21) 장단의 유생들이 봉잠산(鳳岑山) 아래에 서원을 세웠는데, 이것이 임강서원(臨江書院)이다. 이 두 서원과 곡성의 회헌영당(晦軒影堂)에 제향되었다.
6. 업적
당시 원나라에서의 주자학의 보편화와 주자서의 유포 등에 따른 영향도 있었지만, 그가 여러 차례에 걸쳐 원나라에 왕래하여 그곳의 학풍을 견학하고, 또 직접 주자서를 베껴오고, 주자학의 국내보급을 위하여 섬학전을 설치하는 등 제반 노력을 경주하였다.
한번은 그가 원나라에 들어가 그곳의 문묘에 참배할 때에, 그곳의 학관(學官)이 “동국(東國)에도 성묘(聖廟: 文廟)가 있소?” 하고 묻자 그는 “우리나라도 중국과 똑같은 성묘가 있소.” 하고 답하였다 하며, 또 그들과 문답하는 가운데 그가 주자학에 밝은 것을 안 그곳의 학관들이 ‘동방의 주자’라는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고 전하여진다.
주자학이 성행한 당시 남송(南宋)의 사정이 원나라라는 이민족의 침입 앞에 민족적 저항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국가적 위기를 맞고 있었던 때라면, 당시 고려 후기의 시대상황 역시 이와 비슷하게 무신집권에 의한 정치적 불안정, 불교의 부패와 무속의 성행, 몽고의 침탈 등으로 국내외적으로 위기가 가중되고 있을 때였다.
이러한 때에 민족주의 및 춘추대의(春秋大義)에 의한 명분주의의 정신, 그리고 불교보다 한층 주지적인 수양론(修養論) 등의 특성을 지닌 주자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것이 바로 그의 이상이었다. 이러한 이상을 그는 학교 재건과 인재양성을 통하여 이룩하려 하였다. 그가 당시 고려의 시대상황을 자각하고 주자학이 가진 이념이나 주자학 성립의 사회·역사적 배경을 의식하고 고려의 위기를 구하려는 적극적인 활동으로 제반 교육적 활동을 전개하였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晦軒先生實記(安克權編, 1909)
安珦(李丙燾, 朝鮮名人傳)
安珦(閔丙河, 韓國의 人間像 4, 新丘文化社, 1973)
晦軒思想硏究(金柄九, 學文社, 1983)

[이미지]

 

東溟先生集卷之八 一善金世濂道源著
 碑誌碣銘
高麗門下侍中致仕贈諡文成公晦軒安先生神道碑銘 幷序○撰書幷篆 a_095_252a


以學問道德。從祀文宣王廟庭。上自國庠。下至八路 三百州縣。莫不尊敬而俎豆之者。獨有薛弘儒,崔文095_252b昌,安文成,鄭圃隱。本朝五先生。而若其倡學之功。實 自文成公始。王氏之興。士未知學。崔文憲設九齋導 後生。世稱海東夫子。其於務本抑邪之實。則未之聞 也。降及季葉。滅裂陵夷。學校頹廢。無復有振迪導率 之方。士之學者。率皆逃於釋氏。公倡明正道。斥詆異 敎。慨然以興學育才爲己任。篤學力踐。模範一世。誨 人必先以孝弟忠信。關閩之學。於是始行。一洗三韓 舊染。天理之晦而復明。文風之熄而再作。其誰之力 也。若公者。誠可謂東方道學之祖。有非薛弘儒,崔文 昌所能顏行。而史臣乃曰公之從祀。以置贍學錢。何095_252c其陋也。公諱珦。初名裕。至本朝避顯廟御諱。以初 名行。密直副使版圖判書贈太師門下侍中孚之子。 祖永儒。贈樞密院副使。曾祖子美。保勝別將贈神虎 衛上將軍。世爲順興人。太師娶禮賓丞同正禹成允 女生公。登第元宗朝。歷敭中外。官至門下侍中致仕。 卒年六十四。贈諡文成。初置贍學錢也。卿大夫出銀 幣有差。密直高世。自以武人獨不肯。公曰夫子之道。 垂憲萬世。臣忠於君。子孝於父。弟恭於兄。是誰敎也。 若曰我武人。何必出錢。以養爾生徒。是無孔子也。其 可乎。世聞之慙屈。公出私財。繕修黌舍。又納其土田095_252d藏獲。以供學徒。購畫先聖七十二子像于中國。幷求 祭器樂器六經諸子史以來。且請置經史敎授都監 使。以誨後學。於是禁內學館內侍三都監五庫願學 之士。以至七管十二徒諸生。橫經受業。動以數百計。 元皇帝特授征東行省員外海東儒學提擧以褒之。 雖謝事家居。至於興學育才。未嘗不惓惓。公少好學。 硏究義理。克治旣正。表裏一致。莊重和溫。人皆畏敬。 及晩年造詣益深。推尊晦菴。以爲功足以配仲尼。欲 學仲尼。莫如先學晦菴。常掛遺像。以致景慕。遂自號晦軒。其樂道力學如此。至葬也。七管十二徒諸生。莫095_253a不素服路祭。忠肅王命寫眞置文廟。特令從祀。及至 我獻陵。以公爲有功斯文。命其後於軍籍無所與。明廟朝豐基郡守周愼齋世鵬。卽公平日讀書之地。 爲創書院。及退溪李先生莅郡。上書方伯。以聞于朝。 賜額紹修。仍命太學士申光漢記之。又賜經籍。以示 敦崇。卽東國書院之始也。公先娶右司諫金祿延女。 後娶禮賓卿廉守藏女。生一子五女。子曰于器。贊成 事順平君。順平生政堂文學順興君文淑公牧。文淑 生政堂文學順成君文惠公元崇。文惠生開城留守景質公瑗。奕葉冠冤。爲世大族。公墓在長湍府松林095_253b縣大德山北癸坐丁向之原。墓前舊有碣。殘泐不可 讀。順陽君夢尹。卽公十三代孫也。懼其久而湮滅莫 識。與其子應昌及其十代孫左通禮璥,十二代孫典 籍頊,十三代孫察訪斗元諸宗人。攻石封植。士林遠 近。莫不樂爲之助。遂以麗牲之刻屬世濂。世濂頓首 曰。小子何敢焉。卽公之學問道德。奕奕若列星麗太 空。庭享百世。直與文宣王之敎相終始。何用文爲。遂 略序其梗槩如左。若公之立朝事業。則有信史存。銘 曰。
昔在麗代。異敎是崇。不有先覺。孰開群蒙。允矣先生。095_253c服膺晦翁。敎爲己任。學主敬忠。橫經發難。多士攸同。 各資墳典。上自王公。學校再新。大闡儒風。充養有素。 克篤始終。鏗鏘鍾鼓。思樂泮宮。從享于庭。百世所宗。 大德之原。麗水奇峯。於億萬年。香火靡窮。石可使泐。 名則益隆。行者必式。若堂之封。 皇明崇禎十二年己卯九月日


 

 

 

 

고려사절요 제24권

 충숙왕(忠肅王)
기미 6년, 원 연우 6년


○ 봄 정월에 첨의 찬성사 김사원(金士元)이 졸하였다. ○ 영왕과 편비가 왕과 공주를 위해 연경궁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우리나라에서 두어 달을 머무르고 돌아갔다. ○ 원 나라에서 단사관(斷事官) 중란합리합적(中欒哈里哈赤) 등을 보내어 순정군(順正君) 숙(璹)을 압송해 왔다. 숙이 일찍이 황제의 제서(制書)라고 속이고 역마를 많이 징발하였으며, 요양(遼陽)ㆍ망해령(望海嶺) 등지에서 민호 2백여 구를 속임수로 점유하였다. 왕이 원 나라의 사자와 더불어 행성(行省)에서 국문하고 장형(杖刑)을 가하였다.
○ 2월 정해일에 일식이 있었다. ○ 찬성사 권한공을 원 나라에 보내어 성절(聖節)을 축하하게 하였다.
○ 이설(李偰)을 첨의찬성사로, 박여(朴侶)를 평리로, 원충(元忠)을 밀직사사로, 조연수(趙延壽)ㆍ조운경(趙雲卿)을 지밀직사사로, 윤신걸ㆍ민적(閔頔)ㆍ이관봉을 동지밀직사사로 임명하였다. ○ 왕이 양광도에서 10여 일 동안 사냥하였다.
○ 3월에 상왕이 황제에게 청해서 어향(御香)을 내려 주게 하여, 그것을 받들고 남으로 강절(江浙 강소성(江蘇省)과 절강성(浙江省)) 지방을 유람하고 보타산(寶陁山)에 이르렀다가 돌아왔다. 권한공ㆍ이제현 등이 호종하였는데 호종하는 신하들에게 명해서 산천의 좋은 경치를 기록하여 행록(行錄) 한 권을 만들었다.
○ 여름 4월에 정신부주(貞信府主) 왕씨(王氏)가 졸하였는데, 충렬왕의 원비 정화원비(貞和院妃)이며, 강양군(江陽君) 자(滋)를 낳았다. 제국공주(齊國公主)가 하가한 뒤부터 40여 년을 별궁(別宮)에서 살았다.
○ 6월에 대호군 정윤흥(鄭允興)을 원 나라에 보내어 매를 바치게 하였다. ○ 문성공 안향(安珦)을 문묘에 종사(從祀)하게 하였다. 세간에서 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향이 비록 국자감의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여 인재를 양성한 공적이 있으나 어찌 이것을 가지고 종사할 수 있겠는가." 하였으나, 향의 문생(門生) 총랑(摠郞) 신천(辛蕆)이 극력 주청했으므로 이 명령이 있었다.
○ 가을 8월에 원 나라에서 사자를 보내어 왕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 왕이 용천사(龍泉寺)의 들에서 사냥하였다.
○ 수강궁(壽康宮)에 거둥하였다가 철원(鐵原)에서 사냥하고 고석정(孤石亭)에 이르렀다.
○ 왕이 덕수현(德水縣)에서 사냥하다가 성황신사(城隍神祠)를 불태우라고 명령하였는데 해동청(海東靑)과 내구마(內廐馬)가 폐사한 것에 대한 화풀이였다. ○윤달에 평리 치사 오양(吳良)이 졸하였다.
○ 9월에 주(州)ㆍ현(縣)의 사심관(事審官)이 관할하고 있는 노비ㆍ전토를 회수하였다. ○ 보안군(保安君) 신형(申珩)이 졸하였다. ○ 정미일에 공주가 훙하였다. 시호를 정화(靖和)라고 하였다. ○ 내원당(內願堂)에 이어(移御)하였다. 이 뒤로 자주 사원에 이어하였다. ○ 원유(元尹) 임자송(任子松)을 원 나라에 보내어 공주의 상을 고하고, 낭장 이인기(李麟起)는 영왕(營王)에게 부고(訃告)하게 하였다.
○ 겨울 10월에 첨의 찬성사 치사 최비일(崔毗一)이 졸하였다.
○ 11월에 영왕(營王)이 사자를 보내와서 공주의 상사를 조문하였다.
○ 12월에 원 나라 황태후가 중사(中使) 어신불화(於侁不花)를 보내 와서 공주의 상사를 조문하였다. ○호군 최안도에게 장형을 가하여 섬에 귀양보냈다. 정안군(定安君) 허경(許慶)은 염승익(廉承益)의 외손이고, 밀직 조적(曹頔)은 승익의 첩사위인데, 적이 경과 재산 싸움을 벌여 왕에게 호소하였다. 안도는 이의풍(李宜風)과 아첨하여 함께 총애를 받는 신하였다. 경을 위하여 서로 적을 참소하는데, 왕은 적이 상왕에게 총애를 얻었으므로, 그 편을 들었다. 적이 만호(萬戶) 홍유(洪綏)와 더불어 안도를 참소하니, 안도를 순군옥에 가두었다가 장형을 가하여 귀양보냈다. 얼마 안 가서 안도가 다시 왕에게 총애를 받으니, 적이 내심으로 고립되고 위태롭게 여겨 비밀히 호군 고자영(高子英)과 모의하여 원 나라에 도망쳐 들어가서 호군 채하중(蔡河中) 등과 심왕(瀋王) 고(暠)에게 아첨하여 섬기면서 나라의 틈을 엿보았다. 안도와 의풍은 항상 왕을 측근에서 모시고 있으면서 오로지 복수(復讎)에만 힘썼다. 윤석(尹碩)ㆍ손기(孫琦) 등 왕의 잠저(潛邸) 때의 옛 신하들은 일이 일어나기만을 관망(觀望)하였다.


고려사절요 제23권
 충렬왕 5(忠烈王五)
병오 32년(1306), 원 대덕 10년


○ 봄 3월 1일 신미에 일식이 있었다.
○ 가을 7월에 행성에서 총랑(摠郞) 곽원진(郭元振)을 원 나라로 보내어 성절(聖節)을 축하하게 하였다.
○ 첨의중찬 한희유(韓希愈)가 원 나라에서 졸하였다. 한희유는 성품이 소박하고 도량이 넓으며 활쏘고 말달리는 것을 잘하고 담력이 있었다. 김방경(金方慶)을 따라 진도(珍島)ㆍ탐라(耽羅)ㆍ일본을 토벌하였는데 매번 전공이 있었다. 집에는 모아놓은 재산이 없어서 자주 남에게 빌리고 꾸었다. 일찍이 왕을 수행하여 사냥을 나갔는데 쏠 때마다 반드시 맞추니 왕이 말을 하사하였더니, 그것도 집에서 기르지 아니하고 남에게 주었다. 그는 평상시에도 전진(戰陣)에 있을 때와 같이 활과 화살을 다루고 갑옷과 투구를 손질하였다. 나이는 비록 늙었으나 달밤에는 매양 긴 창을 잡고 달리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말하기를, “나의 힘은 아직 쓸 만하다."하였었다.
○ 8월에 지도첨의 김태현(金台鉉)을 원 나라에 보내어 성절(聖節)을 축하하게 하였다. 그때 이를 탐내는 무리들이 서로 당파로 갈라져서 왕의 부자간을 이간시켜서 부자간에 정이 통하지 못하였는데 김태현이 그 사이를 한결같이 지극히 공정하게 주선하니, 사람들이 흠잡는 말이 없었다.
○ 찬성사로 치사한 조윤통(曹允通)이 졸하였다.
○ 9월에 첨의중찬으로 치사한 안향(安珦)이 졸하였다. 안향은 흥주(興州 경북 순흥(順興)) 사람이다. 사람됨이 장중(莊重)하며 조용하고 자세하여, 재상으로 있을 때에 계획을 잘 세우고 결단을 잘 내리니, 동료들은 다만 순순히 좇고 삼갈 뿐이며, 감히 다투지 못하였다. 항상 인재를 양성하고 유학(儒學)을 부흥시키는 것을 자기의 임무하고 생각하였다. 또 사람을 알아보는 식견이 있었다. 김이(金怡)ㆍ백원항(白元恒)을 처음 보고 말하기를, “뒤에 반드시 귀하게 될 것이다."하였고, 또 이제현(李齊賢)과 이이(李異)는 모두 젊을 때 유명하였는데 불러서 시를 짓게 하여 보고 말하기를, “제현은 반드시 귀하게 되고 또 장수할 것이나, 이(異)는 수명이 짧을 것이다."하더니, 뒤에 모두 맞았다. 만년에는 항상 회암선생(晦庵先生)의 화상을 걸어 놓고 경모의 뜻을 극진히 하더니 마침내 호를 회헌(晦軒)이라고 하였다. 그는 또한 문장이 맑고 힘이 있어 볼 만하였다. 장사 때에는 칠관(七館)ㆍ십이도(十二徒)가 모두 소복차림으로 길에서 제사를 지냈다. 시호를 문성(文成)이라 하였다.
○ 경흥군(慶興君) 홍자번이 원 나라에서 졸하였다. 홍자번은 복야 홍관(洪瓘)의 후손이다. 성품이 총명하고 사리에 통달하였으며 크고 훤칠하였고 재간이 남보다 뛰어났으므로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이 모두 재상의 그릇으로 기대하였다. 김인준(金仁俊)은 자번의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자번이 인준에게 가서 힘써 변명하니, 인준이 말하기를, “기특하다, 이 소년이여. 세상에 이러한 아들을 낳은 자가 또 있는가." 하였다. 그가 재상으로 있을 때에는 밤낮으로 게을리함이 없었으며, 일이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면 고집하고 끝까지 자기의 의견을 옳다고 주장하였는데, 비록 지위가 그보다 높은 자라도 감히 굽히게 하지 못하니, 당리(堂吏)들이 일을 품의할 때마다 모두 두려워하여 움츠리고 감히 농간을 부리지 못하였다. 자번의 서명이 끝나면 물러나와 기뻐하며 말하기를, “홍공(洪公)이 이미 승인하였으니 나머지 재상들은 쉬울 것이다." 하였다. 세 번 수상이 되었는데, 논의가 정당하여 대신의 풍도가 있었다. 그러나 왕이 참소를 믿어 임용함이 전일하지 못해서, 정승을 파직시키고 군(君)에 봉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원 나라 조정에 들어가 승상을 뵙고, 왕유소의 폐적(廢嫡) 음모를 자세히 말하고 또 두 왕을 모시고 우리 나라에 돌아오려고 하였으나, 성사하지 못하고 졸하였다. 승상이 황제에게 아뢰어 그의 영구를 역전(驛傳)으로 돌려 보냈고, 전왕은 사람을 보내어 조제(弔祭)하였다. 홍자번은 어머니를 먼저 여의고 아버지를 섬기는 데 효도하여 비록 공무에 바쁠 때라도 정성(定省)을 폐한 일이 없었다. 또 성질이 깨끗한 것을 좋아하여 옷을 갈아 입을 때는 반드시 손을 씻었으며, 날마다 목욕하고 밤에는 반드시 의관을 갖추고 하늘에 절하였다.
○ 과거에 왕이 전왕의 저택에 있으니, 좌우들이 왕이 전왕과 함께 우리 나라로 돌아가고자 한다고 말을 하였다. 왕유소ㆍ송방영ㆍ한신ㆍ송인 등이 그의 도당 송균(宋均)과 김충의(金忠義)를 시켜 왕에게 아뢰기를, “전왕은 아직 마음을 풀지 않고 전하를 원망한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전하께서 비록 자애롭게 대한다 하더라도 다만 원망을 사기에 알맞을 뿐입니다. 또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홀로 정유년의 일을 생각지 않으십니까." 하였다. 그때 하루는 왕이 변소에 가다가 우연히 땅에 넘어져 이를 부러뜨려 수일 동안 음식을 먹지 못하였는데, 왕유소 등이 또 이 틈을 타서 왕에게 거처를 옮길 것을 권하였다. 그때 보탑공주(寶塔公主)가 전왕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고 지후사(祗候司)에 옮겨 거처하고 있었는데, 왕도 여기로 옮겼다. 유소 등은 자기들의 계책이 잘 돌아간다 생각하고 유모(乳母)와 환자(宦者) 이복수(李福壽)를 통하여 황후에게 전왕을 참소하고, 또 좌승상 아홀태(阿忽台)와 평장 팔도마신(八都馬辛)에게 참소하기를, “전왕은 평소에 아들된 도리를 다하지 못하였고 공주와도 화합하지 못하므로 우리 왕이 미워하여 독로화 서흥후(禿魯花瑞興侯) 전(琠)을 후계로 삼으려 한 지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전왕의 도리는 진심으로 허물를 뉘우치고 스스로 마음을 새롭게 하여 아들된 직분을 다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전번에 우리 왕이 그의 저택에 거처하였을 때, 조심스럽게 시봉(侍奉)하지 아니하여 땅에 엎어져 이를 부러뜨리게 되었으니, 우리 왕이 비록 성내지 않으려고 한들 될 수 있겠습니까. 전에 전왕이 스스로 중이 되기를 원하였으나 성관(省官)이 들어주지 않았는데, 만약 이제부터라도 중이 되게 하고 전(琠)을 공주와 결혼시킨다면, 우리 왕의 뜻에 맞을 것입니다." 하여, 아홀태와 팔도마신이 모두 허락하였다. 전은 얼굴이 아름다웠는데 왕이 그에게 좋은 옷을 입고 자주 왕래시켜 공주가 보게 하였다. 공주는 본래 행실이 근신하지 못해서 매양 내료의 여러 사람과 난행을 하니, 전왕이 더욱 좋지 않게 여겼으므로 공주가 드디어 전(琠)에게 뜻을 두게 되었다. 최유엄(崔有渰)이 왕에게 아뢰기를, “전하께서 본국에 계실 때 일찍이 경령전(景靈殿)에 참배하지 않았습니까. 성조(聖祖)와 친묘(親廟)의 신주가 그 영정과 함께 모두 남아 있습니다. 만약 서흥후(瑞興侯)를 왕으로 세운다면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인 서원후(西原侯)와 시양후(始陽侯)를 왕으로 추존하여 종묘에 부사(祔祀)하게 될 것이니, 전하의 친묘의 신주는 옮기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전하가 돌아가신 뒤에 어찌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고종(高宗)과 원종(元宗)은 모두 신이 섬기면서 이제 늙었는데 하루 아침에 갑자기 두 왕이 제사를 받지 못하게 되는 일을 차마 할 수 없습니다. 신이 만약 간하지 않는다면 지하에서 선왕을 뵐 수 없습니다." 하니, 왕은 오랫동안 슬픈 얼굴빛이었다. 하루는 왕유소 등이 우승상 탑라한(塔剌罕)을 보고 왕의 말이라고 하여 전왕을 참소하니, 탑라한이 말하기를, “익지례보화왕(益知禮普化王)은 세조(世祖)의 생질이고 보탑공주(寶塔公主)도 종실의 딸인데, 계가하고 폐적하는 것이 도리에 온당한가." 하였다. 유소가 다시 아홀태(阿忽台)에게 말하던 것과 같은 참소를 하니, 탑라한이 말하기를, “서흥후(瑞興侯)도 왕의 아들인가." 하였다. "아닙니다." 하니, “그러면 누구의 아들인가." 하였다. 왕유소가 대답하지 못하고 물러나와 최유엄에게 물으니, 유엄이 말하기를, “자네도 임금의 친족인 것을 의당 스스로 알 것이다." 하였다. 유소 등의 음모가 새어나가니, 홍자번 등 5명이 중서성에 나아가 말하기를, “왕유소 등이 왕의 부자 사이를 이간하고, 이치를 거스르며 윤상을 문란하게 하였으니, 이보다 더 큰 죄가 없습니다." 하였다. 성관(省官)이 왕의 부자를 같이 성(省)에 오게 하여 물어본 뒤에 왕유소 등 4명을 잡아 가두었다. 얼마 안되어 고세(高世)ㆍ김문연(金文衍)ㆍ진양필(秦良弼)이 왕에게 아뢰기를, “신 등이 왕을 따라와 여기에서 섬긴 지 이미 오래 되었으나 아무 보람도 없었으니, 이제는 다만 전하를 모시고 동쪽 제화문(齊化門)을 나가기를 원할 뿐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내가 듣건대, 전왕이 사람을 물가의 역으로 보내어 내가 하수 건너는 것을 기다렸다가 강에 빠뜨리려 한다 하니, 내가 비록 늙었으나 난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겠느냐." 하였다. 고세 등이 호종한 신하 70명과 함께 중서성에 글을 올려 왕유소 등의 죄상을 극론(極論)하고 또 왕을 모시고 돌아갈 것을 청하니, 성관이 황제에게 아뢰었다. 이에 연회를 베풀어 왕을 전별하고, 또 여러번 역마를 드리며 가기를 제촉하니, 왕이 어찌할 계책이 없어서 드디어 약을 마시고 이질에 걸려 여름에서 가을까지 일어나지 아니하면서, 몰래 사람을 행재로 보내어 공주에게 함께 돌아가기를 청하였다. 아홀태(阿忽台)가 아뢰니, 황후가 이르기를,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같이 가는 것이 옳은가. 부득이 꼭 가야 한다면 내가 장차 수도(首都)로 돌아가서 수레와 장막을 준비하여 보내더라도 늦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공주가 왕유소 등이 피소된 것을 듣고 몹시 성내어 김문연(金文衍)을 불러서 곤장을 치고, 또 사람을 시켜서 문을 지키게 하여 왕유소 등을 고소한 소장에 서명한 모든 사람들이 왕의 처소에 출입하는 것을 금하였다. 이미 호종한 여러 신하들이 흩어졌는데 조적(曺頔)이 가장 먼저 돌아갔고, 오직 비서승 이조년(李兆年)과 환관 최진(崔晉)이 모시고 있을 뿐이었다.

고려사절요 제22권
 충렬왕 4(忠烈王四)
갑진 30년,(1304), 원 대덕 8년


○ 봄 정월 갑인일에 혜성이 규성(奎星)에 나타났다.
○ 첨의찬성사로 치사한 오윤부(伍允孚)가 졸하였다. 윤부는 대대로 태사국(太史局)의 관원을 지냈다. 천문을 보고 점치기를 잘하여 밤새도록 잠자지 않았으며, 비록 몹시 춥고 혹독한 더위에도 앓지 않는 한 보지 않는 적이 없었다. 하룻 저녁에는 별이 천준원(天樽垣)을 침범하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반드시 술 잘 먹는 사람이 사신으로 올 것이다.”하고, 어떤 날에는 별이 여림원(女林垣)을 침범하는 것을 보고, “반드시 사신이 와서 처녀를 선발할 것이다.”하였는데, 모두 맞혔다. 또 점을 잘 쳤는데, 원 나라 세조가 불러서 시험한 후에 더욱 이름이 났다. 세조가 직접 내안(乃顔)을 정벌할 적에 왕이 군사를 인솔하고 정벌을 도우려 하여 행군하여 평양에 이르러 먼저 유비(柳庇)를 보냈다. 보내고 나서 이내 윤부에게 이를 점치게 하니, 대답하기를,“아무 날에는 유비가 반드시 돌아올 것이며, 전하께서도 여기서 되돌아 가시겠습니다.”하였다. 그 시기에 이르러 왕이 성용전(聖容殿) 뒷산에 올라 북쪽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윤부에게 농담으로 이르기를,“네 점이 잘못되지 않았느냐?”하고, 좌우로 하여금 결박지으라 하니, 윤부가 나와서 아뢰기를,“오늘 해가 아직 저물지 않았으니 조금만 더 기다리소서.”하였다. 조금 있더니 역말이 먼지를 날리며 오는데, 과연 유비였다. 비가 와서 왕을 뵙고,“황제께서 환군하라는 조서를 내렸습니다.”하니, 왕이 더욱 그를 믿었다. 윤부는 성품이 매우 정직하였고, 나랏일을 자기의 걱정처럼 생각하여 재변이 있을 적마다 들어가 고하였는데, 말이 매우 간절하고 지극하였다. 시국 문제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으면 곧 들어가 간하고, 듣지 않으면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굳세게 간하여 반드시 관철되기를 꾀하였다. 일찍이 봉은사(奉恩寺)에 있는 태조 진전(太組眞殿)에 초하루를 보고하는 제사를 지냈는데, 잔을 올리고 절한 후 울며 고하기를,“태조이시어, 태조이시어, 당신의 나랏일이 그릇되고 있습니다.”하고, 이내 흐느껴 울며 스스로를 억제하지 못하였으니, 그의 정성이 이와 같았다. 사람됨이 얼굴이 못생기고 말과 웃음이 적었다. 안평공주가 일찍이 왕에게 말하기를,“어째서 이 사람을 자주 불러들입니까?”하니, 왕이 이르기를,“윤부는 나의 최호(崔浩)요, 얼굴은 비록 못생겼으나 버릴 수 없는 사람이요.”하였다. 뒤에는 공주가 자못 태도를 고쳐 예우하였다. 일찍이 스스로 천문(天文)을 그려 바쳤는데, 천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 이것으로 공부하였다.
○ 주와 군을 합병했던 것을 다시 분리시켰다.
○ 탑찰아 등이 오연(吳演)ㆍ김원계(金元桂)등 10명을 섬으로 귀양보내고, 송인(宋璘)은 석방했다.
○ 김심(金深)을 원 나라에 보내어, 사신을 보내어 와서 오기의 일당을 처리한 것에 대하여 표문을 올려 사례하고, 또 전왕의 환국을 요청하였다.
○ 이지저(李之氐)를 도첨의찬성사로, 민훤(閔萱)을 자의 도첨의찬성사(咨議都僉議贊成事)로, 정해(鄭瑎)를 판삼사사로, 이혼(李混)을 판밀직사사로, 권영(權永)을 밀직사사로, 김심을 지밀직사사로, 고세(高世)를 동지밀직사사로, 박전(朴顓)을 밀직부사로 삼았다.
○ 2월에 중찬 송분(宋玢)의 아들 유(瑈)를 순군옥에 가두었다. 과거에 송분이 전왕을 폐위하고, 또 공주를 개가시킬 것을 획책하다가 일을 이루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막내딸을 황제의 유모의 아들에게 시집보내어 후원을 얻으려 하였다. 사위가 원 나라에서 돈을 보내어 왕에게 향연을 베푸는데, 재신과 추신이 다 모였다. 유가 술을 따라서 돌리는데, 중찬 홍자번(洪子藩)이 취했다 하여 사양하고 마시지 않으니, 유가 노하여 불손한 말을 하였다. 자번도 역시 노하여 그만 자리에서 일어서니, 유가 큰 소리로 말하기를, “자번이 복상(復相 정승자리에 복귀하는 것)한 것을 황제께서 어찌 아시겠는가." 하였다. 재상이 왕에게 고하여 그를 가두고, 자번도 노여워하여 수일 동안 정사를 보지 않았다.
○ 황제가 도고달(都古達)과 야선첩목아(也先帖木兒)를 보내어 감형하는 조서를 반포하였다.
○ 다시 황포(黃袍)와 황산(黃傘)을 사용하였다. 탑찰아(塔察兒)와 왕약(王約)이 돌아갈 때에, 왕에게 말하기를, “황포와 황산에 대하여 활리길사는 비록 다른 의견을 말했으나 조정에서 분명히 금한 바 없으니, 그래도 다시 사용할 수 있다." 하니, 왕이 드디어 다시 사용하였다.
○ 내료 전 호군 송균(宋均)을 순군옥에 가두었다. 과거에 왕이 홍자번의 말을 따라 표문을 올려 전왕을 환국하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전 밀직부사 송방영(宋邦英)과 전 승지 송인(宋璘) 등이 전왕을 미워하여 왕을 설득하여 외오문자(畏吾文字)로 글을 써서 황제에게 바쳐 이를 저지하게 하고, 드디어 흰 종이 12폭(幅)에다 금보(金寶 옥쇄)를 찍어 송균에게 주고, 왕이 황제에게 조회하러 들어가기를 요청하는 것을 핑계대고 연경에 가서 전왕을 헐뜯을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적당히 써서 황제에게 바치게 하였다. 그런데 마침 황제가 왕이 들어오겠다는 청을 허락하지 않아 균이 그 계책을 실행하지 못하고, 드디어 그 종이를 환관 복수(福壽)의 집에 간직해 두고 돌아왔었다. 뒤에 낭장 이승우(李承雨)가 그 종이를 싸가지고 돌아오는데, 마침 탑찰아가 돌아가다가 도중에서 그를 만나 이것을 빼앗고 승우에게 두 폭을 도로 주며 말하기를, “네가 돌아가거든 이것을 너희 나라 재상에게 보이라." 하였다. 그리고 즉시 나머지를 중서성(中書省)에 바치며 또 송균의 모략을 말하니, 중서성의 관원이 말하기를, “오기(吳祁)와 석천보(石天補) 이외에도 이런 협잡질을 하는 자가 있느냐?" 하였다. 승우가 돌아와 이 사실을 재신과 추신에게 고하고, 재신과 추신이 다시 왕에게 아뢰어 이들을 가둔 것이다.
○ 3월에 이현(梨峴)의 새 궁궐이 준공되었다. 왕이 행차하여 이를 관람한 후 연회를 베풀고, 호작관(護作官)에게는 각각 백금 1근씩을 주며, 공인(工人)들에게는 술과 음식을 주었다.
○ 왕이 송균의 석방을 명하였으나 재신과 추신이 듣지 아니하므로, 위사(衛士)를 시켜 균을 불러 궁문에 이르게 하여 석방하였다.
○ 원 나라에서 병부상서 백백(伯伯)과 유학사(儒學士)를 보내왔다. 왕이 행성에서 맞아들이니, 백백이 황제의 유지(諭旨)를 전달하고 묻기를, “왕은 일찍이 표문을 올려 전왕의 귀환을 청한 일이 있는가?" 하였다. 왕이 "그렇다." 하니, 백백은 "또 외오문자로 저지하기를 청한 사실이 있는가?" 하고 물었다. 왕이 "모른다." 하니, 백백이 재상들을 돌아보며 보증을 서라고 부탁하고, 왕이 말한 것을 글로 써서 자문(咨文)을 만들었다. 드디어 송균을 잡아다가 묻기를, “너는 금보를 찍은 종이를 사용해서 무슨 짓을 하려 했느냐?"고 물으니, 균이 말하기를, “왕이 균을 시켜 들어가 황제를 뵙기를 청하셨으니, 오직 이 한 가지 일뿐입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누가 외오문자를 썼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호군 전혜(田惠)입니다." 하였다. 이것을 전혜에게 물으니, 혜는 감히 숨기지 못했다. 백백이 곧 말하기를, “중서성에서 전왕을 돌려 보내 달라는 표를 올리려 하는데 마침 외오문자가 나왔다. 그런데 서명도 없고 인장도 없으므로 중서성 관원이 이를 의심하여 중지하고 아뢰지 않았다." 하였다. 왕이 궁으로 돌아오자, 송방영과 송인 등이 등이 들어와 왕을 설득하니, 왕이 승지 김자흥(金子興)으로 하여금 외오문자의 초본을 가지고 가서 사신에게 보이게 하고, 말하기를, “내가 갑자기 질문을 받고 그만 모른다고 대답하였으나, 돌아와서 이 글을 상자에서 찾고보니 다만 잊었을 뿐이요 사실은 내가 알고 있었던 일이오."라고 하라 했다. 방영 등은 자흥이 혹 제대로 전달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그의 일당인 한신(韓愼)을 보내어 같이 가게 하였다. 백백이 노하여 자흥에게 묻기를, “왕이 내게 초본을 줄 때에, 왕의 곁에 누가 있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송방영과 송인과 한신이 좌우에 있었습니다." 하였다. 백백이 자흥으로 하여금 그 말을 쓰게 해서 증거물로 만들고, 또 재상들에게 묻기를, “왕이 행성에서 나와 말한 것이 있지 않았느냐?" 하니, 재상들이 전에 말한 대로 대답하였는데 백백이 또 써서 증거물로 삼았다. 왕이 연회를 베풀고 사신들을 청하니, 사양하고 마침내 왕과 함께 방영 등을 행성에서 국문하였다. 왕이 말을 하여 그들을 두둔하려 하니, 백백이 말하기를, “이런 신하를 두고 그 간사함을 다스리지 않으면 뒤에는 장차 더 심할 것이다." 하였다. 드디어 외오문자의 초본을 내놓고 송인에게 묻기를, “이것을 쓴 자가 누구냐?" 하니, “방영입니다." 하였다. 방영을 국문하였으나, 불복하더니, 결박을 지은 다음에야 마침내 자복하였다. 방영은 인의 종형이다. 혜(惠)는 본국 사람으로 선대부터 요양(遼陽)에 들어가 살았는데, 내료 석천경(石天卿)이 유인하여 심복으로 만들었다. 출세하여 호군까지 되었는데 일을 꾸며 국사를 그르치니, 그 간악함이 김천석(金天錫)보다 더하였다.
○ 여름 4월에 가물었다.
○ 백백이 돌아가려 하니 배관들이 글을 주며 이르기를, “방영 등은 자기들의 지위를 잃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생각으로 임금을 속이고 신하의 의리가 없으니, 돌아가서 천자에게 아뢰어 속히 그 죄를 다스리소서. 그리고 전왕과 공주로 하여금 고국으로 돌아오시게 하는 것이 온 국인의 소망입니다." 하였다. 이리하여 백백과 유학사는 마침내 왕과 함께 상의하고, 대호군 야선단(夜先旦)과 중랑장 김장(金章)으로 하여금 방영 등을 원 나라로 압송하게 하였다.
○ 왕이 수녕궁에서 잔치를 베풀고 꽃을 완상하였다.
○ 한희유와 최유엄과 유비가 원 나라에서 돌아왔는데, 최유엄과 유비가 중서성에 나아가 전왕을 돌려 보낼 것을 청하는 표를 요구하였으나 얻지 못하고 돌아왔다.
○ 한희유를 자의도첨의중찬(咨議都僉議中贊)으로 삼았다.
○ 원 나라에서 참지정사 홀련(忽憐)과 한림직학사 임원(林元)을 보내왔다. 이때 오기(吳祁)와 석천보(石天輔)가 원 나라의 옥에 갇혀 있었는데, 또 권세를 좌지우지 하는자가 간사와 기망을 자행하며 두려워하고 기탄하는 바가 없었기 때문에 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누르고 막게 했던 것이다.
○ 5월 1일 임자일에 일식이 있었다.
○ 왕이 사신들을 초대하여 양루(涼樓)에서 잔치를 베풀고 위사(衛士)들의 격구를 관람하였다.
○ 국학의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였다. 과거에 찬성사 안향(安珦)이 학교 교육이 크게 무너지고 유학이 날로 쇠퇴하는 것을 우려하여 양부(兩府)와 의논하기를, “재상의 직책은 인재를 양성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없는데, 이제 양현고가 탕진되어 교육에 쓸 자금이 없으니, 청컨대, 6품 이상은 각기 은(銀) 한 근씩을 내고 7품 이하는 등급에 따라 베를 내게 하여 양현고에 귀속시켜서 본전은 그대로 두고 이식을 받아서 영구히 교육 자금으로 만들자." 하니, 양부에서 이를 좇았다. 그 사실이 보고되니, 왕이 내고(內庫)의 금전과 양곡을 내어 보조하였다. 이때 밀직 고세(高世)라는 사람이 자기는 무인(武人)이라 하며 돈을 내려하지 않으니, 안향이 여러 재상에게 이르기를, “공자의 도가 만세에 법을 내려주었다, 신하가 임금에게 충성하고, 아들이 어버지에게 효도하며, 아우가 형에게 공경하는 것이 누구의 가르침인가. 만일 '나는 무인인데 무엇 때문에 애써 돈을 내어 저 생도들을 양성하겠느냐'고 한다면, 이 사람은 공자를 위하지 않는 것이니, 되겠는가" 하니, 고세가 듣고 매우 부끄러워 즉시 돈을 냈다. 향은 또 남은 돈을 박사 김문정(金文鼎)에게 주고는 강남에 보내어 공자와 70제자의 화상을 그리고, 또 제기ㆍ악기ㆍ육경ㆍ제자ㆍ사서(史書)들을 사오게 하였다. 이때에 와서 향이 밀직부사로 치사한 이산(李㦃)과 전법판서 이진(李瑱)을 경사교수도감사(經史敎授都監使)로 삼기를 청하였다. 이리하여 금내학관(禁內學官 대궐 안에 있는 학관)과 내시(內侍)ㆍ삼도감(三都監)ㆍ오고(五庫)에서 수학을 원하는 선비와 칠관(七館)십이도(十二徒)의 여러 생도들이 책을 끼고 와서 수업하는 자가 수백 명에 달하였다.
○ 6월에 국학의 대성전(大成殿)이 준공되었다. 과거에 원 나라의 야율희일(耶律希逸)이 건물이 협소하고 누추하여 반궁(泮宮)의 제도를 잃었다 하여 왕에게 신축할 것을 말하였는데, 이때에 비로소 이루어졌다. 왕이 국학에 나아가자 홀련(忽憐)과 임원(林元)이 뒤를 따르고, 칠관(七館)의 생도들이 관복을 갖추고 길에 나와 맞이하며 가요를 올렸다. 왕이 대성전에 들어가 선성인 공자를 배알하고, 밀직사 이혼(李混)에게 명하여 입학송(入學頌)을 짓게 하고, 임원(林元)에게는 애일잠(愛日箴)을 짓게 하여 여러 생도에게 보였다.
○ 안서왕(安西王) 아난달(阿難達)이 사신을 보내어 환관을 구하였다.
○ 가을 7월에 송균(宋均)이 금강산도(金剛山圖)를 가지고 원 나라에 가니, 재신과 추신들이 사람을 시켜 쫓아가서 이를 중지시켰는데, 균이 말하기를, “왕명이 있어서 돌아갈 수 없다." 하고, 드디어 가버렸다.
○ 내고(內庫)에서 왕에게 향연을 베풀었다.
○ 한희유(韓希愈)를 첨의우중찬으로, 송인(宋璘)을 지신사(知申事)로 삼았다.
○ 8월에 한희유를 원 나라에 보내어 천수절(天壽節)을 하례하였다.
○ 강남(江南)의 중 소경(紹瓊)이 왔다. 승지 안우기(安于器)를 보내어 교외에 나아가 영접하게 하고 왕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예복을 갖추어 수녕궁으로 맞아 들여 선(禪)을 설하는 것을 들었다.
○ 송방영(宋邦英)ㆍ송인(宋璘)과 상호군 이굉(李宏)이 원 나라에서 돌아오니, 왕이 각각 의복을 하사하였다. 이때 황제가 병중에 있어 정권이 중궁(中宮)에게 있었는데, 굉의 형 환관 복수(福壽)가 중궁의 고임을 받아 권세를 부리고, 또 황제의 유모가 송인을 위하여 손을 써서 구제하였기 때문에 방영 등이 이 덕으로 죄를 면하게 된 것이다. 과거에 한희유가 최숭(崔崇)ㆍ오연(吳演) 등과 함께 대내에 들어가 일을 논의하고 이를 '별청(別廳)' 이라고 불렀는데, 이때부터는 송방영과 송인도 참여하게 되었다.
○ 교서를 내려 금년의 과거를 정지하게 하였다.
○ 밀직사사 고세(高世)를 원 나라의 심양(瀋陽)에 보내어 인물(人物)을 찾아왔다. 내료 대호군 김유(金儒)와 호군 고여주(高汝舟)가 전왕에게 몰래 서신을 전달하다가 발각되었는데, 왕이 노하여 이들에게 장형을 행하고 순군옥에 가두었다.
○ 겨울 10월에 원 나라에서 오기(吳祁)와 석천보(石天補) 형제에게 곤장을 치고 안서(安西)로 귀양보냈다.
○ 11월에 원 나라에서 환관 이숙(李淑)을 보내 왔다. 숙은 곧 복수(福壽)인데, 본래 평창군(平昌郡) 사람으로 그의 어머니는 태백산(太白山)의 무당이었다. 왕이 사신을 보내어 황제에게 일을 아뢰어 청했을 때, 숙이 일찍이 공로가 있었기 때문에 왕이 특별히 그를 후대하였다.
○ 을해일에 혜성이 허성(虛星)과 위성(危星) 사이에 나타났다.
○ 12월에 동지밀직사사 송방영(宋邦英)을 원 나라에 보내어 신정을 하례하였다.


 

[주D-001]최호(崔浩) : 북제(北齊) 세조(世祖)의 명신으로 벼슬이 시중(侍中) 특진무진대장군(特進撫軍大將軍)에 이르렀는데, 지모(智謀)가 많아서 군국대사(軍國大事)가 있을 적마다 반드시 그에게 물었다.
[주D-002]칠관(七館) : 고려 때 국학에 설치한 일곱 개의 분과. 즉 《주역》을 전문으로 강의하는 이택관(麗澤館) , 《상서》의 대빙관(待聘館), 《시경》의 경덕관(經德館), 《주례》의 구인관(求仁館), 《대례(戴禮 : 禮記)》의 복응관(服膺館), 《춘추》의 양정관(養正館), 병학을 전문으로 강의하는 강예관(講藝館)을 말하는데, 칠재(七齋)라고도 한다.
[주D-003]십이도(十二徒) : 개인의 교육 기관인 12개소의 문도(門徒). 즉 최충(崔冲)의 문헌공도(文憲公徒), 정배걸(鄭倍傑)의 홍문공도(弘文公徒), 노단(盧旦)의 광헌공도(匡憲公徒), 김상빈(金尙賓)의 남산도(南山徒), 김무체(金無滯)의 서원도(西園徒), 은정(殷鼎)의 문충공도(文忠公徒), 김의진(金義珍)의 양신공도(良愼公徒), 황영(黃瑩)의 정경공도(貞敬公徒), 유감(柳監)의 충평공도(忠平公徒), 문정(文正)의 정헌공도(貞憲公徒), 서석(徐碩)의 서시랑도(徐侍郞徒), 실명씨(失名氏)의 귀산도(龜山徒)이다.
[주D-004]애일잠(愛日箴) : 문장의 명칭. 애일(愛日)은 시간을 아낀다는 뜻이니, 학생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지은 글이다.

 

고려사절요 제22권
 충렬왕 4(忠烈王四)
계묘 29년(1303), 원 대덕 7년


○ 봄 2월에 첨의중찬으로 치사한 한강(韓康)이 졸하였다. 한강은 일찍이 금주방어부사(金州防禦副使)가 되었는데, 금주는 조세[田賦]가 항상 액수에 차지 못하여 수령이 이로 말미암아 파면된 적이 많았다. 그런데 강이 와서는 둔전(屯田)하다가 폐기된 것을 다시 정리하여 민곡 2천여 석을 얻으니, 아전들이 화목하고 백성이 편안하게 되었다. 그러나 성질이 불교를 좋아하여 왕이 일찍이 나라를 오래도록 누릴 수 있는 방법을 묻자, 모두 불가의 말로 대답하였다.
○ 원 나라에서 겁리(怯里)ㆍ마적(馬赤)ㆍ월아(月兒)ㆍ홀도(忽都)를 보내어 장경(藏經)을 읽었다.
○ 여름 5월 정미일에 왕이 원 나라에서 돌아왔다.
○ 재신과 추신들이 수녕궁에서 왕에게 향연을 베풀었다.
○ 윤달 1일 무오에 일식이 있었다.
○ 왕이 양루(凉樓) 뒷봉우리에 거둥하여 격구놀이를 구경하였다.
○ 경오일에 큰비가 와서 인가가 떠내려가고 농작물이 피해를 입었다.
○ 한희유(韓希愈)를 첨의우중찬으로, 송분(宋玢)을 좌중찬으로 삼았다.
○ 6월에 행성에서 왕에게 향연을 베풀었다.
○ 도첨의찬성사로 치사한 김부윤(金富允)이 졸하였다. 부윤은 군졸 출신으로 소박하고 겉치레가 없으며 성품이 공정하였다. 일찍이 왕을 따라 원 나라에 들어갔었는데, 비록 험난한 국면을 당하여도 절조를 지켜 굽히지 않았다. 세조가 그의 명망을 알고서 정동성 관원에 제수하였고, 왕은 철권(鐵券)을 주었다.
○ 전후의 전시(殿試)에서 급제한 사람들이 왕에게 향연을 베풀었다.
○ 흥안도호부 부사(興安都護府副使) 김서지(金瑞芝)를 파면시켰다. 왕이 사랑하는 봉지련(鳳池蓮)이란 여자는 본부(本府)의 기생이었다. 고을 아전인 배도(裵度)가 일찍이 서지와 감정이 있어 봉지련에게 부탁하여 왕에게 참소하니, 왕이 드디어 서지를 파면하고 그 가산을 적몰한 것이다.
○ 계축일에 서북면 안집사(西北面安集使) 김견(金堅)이 벼락맞았다.
○ 왕이 좌우에게 이르기를,“신하의 절조가 점점 전과 같지 못하다. 전에 이혼(李混)과 윤보(尹珤)가 전형(銓衡)을 맡았을 때, 과인이 혼의 아우 자화(子和)를 행수(行首)로 삼으려 하니, 혼이 사양하여 아뢰기를,‘전하께서는 신을 불초(不肖)하게 생각하지 않으셔서 전조(銓曹)에서 있게 하셨는데, 신의 아우가 행수가 된다면 사람들이 신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하였고, 또 윤보의 아들 안비(安庇)를 권무로 삼았더니, 보 역시 아뢰기를,‘신의 자식은 나이가 어리고 신은 또 전형을 맡고 있으니,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하고, 모두 재삼 굳이 사양하였다. 그런데 지금 전형을 맡은 자는 먼저 좋은 벼슬을 저의 친척에게 주고는 과인은 알지도 못하게 하니, 하물며 감히 사양하겠느냐? 이것은 염치가 날로 없어지고 세상의 도의가 날로 무너지기 때문이다.”하였다.
○ 가을 7월 1일에 대호군 민보(閔甫)를 원 나라에 보내어 매를 바쳤다.
○ 중찬 송분(宋玢)에게 낙랑공(樂浪公)의 작호를 주었다.
○ 박이(朴理) 등 3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병과(丙科)의 수석 허관(許冠)은 공(珙)의 아들이며, 송분의 사위였다. 나라 제도에 6품 이상의 관원은 과거에 응시함을 허용하지 않았고, 비록 6품 벼슬에 제수했더라도 사은(謝恩)하지 않았으면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 관은 낭장에 제수된 지 4년이 되어도 사은하지 않았다. 송분이 말하기를,“벼슬길이 여러 길이 있는데, 하필 과거에 올라야만 되겠느냐?”하니, 관이 말하기를,“선인(先人)이 저에게 종이를 주면서 이것을 가지고 과거에 응시하도록 하라 하셨는데, 제가 비록 과거에 누차 실패하였으나 종이가 그대로 있으니, 어찌 감히 빨리 벼슬에 나아가기 위하여 아버지의 명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왕이 평소에 그 이름을 듣고는 발[簾]앞까지 불러서 특별히 서각띠를 주었다.
○ 원 나라에서 단사관(斷事官) 첨목아불화(帖木兒不花)와 한림 이 학사(李學士) 등을 보내어 왔는데, 최유엄(崔有渰)ㆍ한희유(韓希愈)ㆍ유비(柳庇)에게 명하여 석주(石冑)와 그의 아들 천보(天輔)ㆍ천경(天卿)ㆍ천기(天琪)를 연경으로 압송하도록 하고, 또 각 관사의 관리가 국왕에게 품의할 공무가 있으면 반드시 먼저 홍자번(洪子藩)과 상의하게 하고 직접 가지 못하게 하였으며, 왕도 반드시 자번의 말을 듣도록 하였다. 첩목아불화가 그의 부하를 안남부(安南府)에 보내어 김세(金世) 등 4명을 체포하였다. 과거에 김세가 중서성에 밀고하기를,“석주의 도당이 전왕이 자기를 해칠까 염려하여 국왕을 모시고 장차 섬 속으로 도망하기를 도모하여 몰래 제주(濟州) 등 지방에다 배를 만들며 양곡을 저축하고 있다.”하였으므로, 이제 석주와 김세로 하여금 대질시키기 위하여 체포한 것이다.
○ 행성에서 호군 이한(李翰)을 원 나라에 보내어 성절을 하례하였다.
○ 과거에 오기(吳祁)가 참소와 아첨으로 왕의 사랑을 받아 왕의 부자간을 이간하고 충성스럽고 선량한 자를 모함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이를 갈았으나 화가 두려워 말하는 자가 없었다. 전 호군 원충갑(元冲甲) 등 50명이 사신에게 고발하고자 하여 먼저 왕에게 얘기했더니 왕이 이를 말렸다. 나간 뒤에 왕이 또 호군 조적(曹頔)을 시켜 타일렀으나 충갑 등은 듣지 않았다. 드디어 글로 첩목아불화 등에게 고하기를,“대덕 5년 4월에 황제께서 탑찰아(塔察兒)와 왕태형(王泰亨)을 보내시어 왕에게 유시하기를,‘상주고 벌주는 것과 주고 빼앗는 권한이 모두 왕으로부터 나오게 할 것이니, 사체에 불편한 것이 있거나 백성의 실정에 맞지 않는 일이 있거든 잘 생각하여 처리하라’하셨고, 또 신료들에게 경계하시기를,‘마음을 다하여 바르게 봉행하여 각기 자기들의 직분을 닦을 것이니, 감히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여 불법한 짓을 함부로 행하는 일이 있다면 왕은 비록 너희를 용서해줄지라도 짐은 반드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하셨습니다. 신료들은 황제의 명령을 공손히 받들고 밤낮으로 경계하며 근신하여도 오히려 그대로 따르지 못할까 두려워하던 바입니다. 이제 오기(吳祁)란 신하는 사실상 큰 악인입니다. 재능도 없고 공로도 없으면서 다만 간사하고 아첨하는 것으로 출세하였는데, 과거에 전왕에게 죄를 짓고 후환을 면하기 위하여 밤낮으로 모략과 중상을 일삼아, 우리 왕 부자간을 이간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스스로 큰 공을 세웠다고 생각하여, 권력을 잡고 마음대로 농락하며 여러 형제를 끌어 들여 모두 기밀의 직책에 참여하게 하여, 수년 사이에 모두 장군과 재상의 지위에 이르렀습니다. 모든 본국의 신료에 대하여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조금이라도 혐의나 감정이 있으면 곧 죄에 빠뜨려 허물없이 파면되고 추방된 자가 전국에 가득하며, 각 도의 안렴사와 수령까지도 자기 한 사람이 좋아하고 미워하는 데에 따라서 들이고 물리치며 주고 뺏고 하니, 이는 황제의 명령을 배반하고 저버린 것이어서, 죽어도 그 죄를 다 씻을 수 없습니다. 이제 황제의 유지가 있는데도 또한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저지하기를 꾀하고 있으니, 상국의 사신이 돌아간 뒤에는 필시 딴 짓을 꾸밀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널리 국인에게 물어보셔서 어지러운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 견제해 주소서.”하였다. 첩목아불화 등이 그 글을 받고, 왕에게 말하기를, 충갑이 말한 것에 대해 비록 우리들이 결정을 내릴 것은 아니나 또한 묻지 않을 수 없으니, 마땅히 충갑과 오기를 데리고 서울에 가서 대질하겠습니다.”하였다.윤만비(尹萬庇)ㆍ정선(鄭僐)ㆍ김희(金禧)ㆍ윤해(尹諧)ㆍ오영구(吳永丘)ㆍ이주(李舟)ㆍ이설(李偰)ㆍ선종계(宣宗桂)ㆍ고연(高延)ㆍ홍승서(洪承緖) 등이 또 글로 사신에게 고하고, 홍자번(洪子藩)ㆍ김혼(金琿)ㆍ민훤(閔萱)ㆍ민지(閔漬)ㆍ정해(鄭瑎)ㆍ권영(權永)ㆍ김태현(金台鉉)ㆍ고세(高世)ㆍ김문연(金文衍)ㆍ이혼(李混)ㆍ원진(元璡)ㆍ허평(許評)ㆍ신형(申珩)ㆍ김연수(金延壽)ㆍ조문간(趙文簡)ㆍ김원상(金元祥)ㆍ박광정(朴光廷)ㆍ윤길손(尹吉孫)ㆍ오현량(吳玄良)ㆍ김유지(金由祉) 등도 또한 오기의 죄악을 말하였다. 홍자번이 또 말하기를, “왕명을 출납하는 데에 안에는 중귀(中貴) 3,4명이 있는데 이를 사(辭)라 이르고, 밖에는 근신(近臣) 4명이 있는데 이를 승선(承宣)이라 하니, 이들이 아니면 비록 재상일지라도 감히 참여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오기는 이제 이미 정 승에 제수되었으면서도 오히려 왕궁에 출입하여 승선과 다름이 없고, 그가 건의하거나 보고하는 것이 모두 부정한 계책들입니다." 하니, 사신이 아무 말이 없었다.
○ 8월에 우중찬 한희유(韓希愈)와 전 찬성사 최유엄(崔有渰)을 보내어 석주(石冑)와 그의 세 아들을 원 나라에 데리고 갔다.
○ 치사한 재상 채인규(蔡仁揆) 등 28명과 전 밀직부사 만호(密直副使萬戶) 김심(金深) 등 군관 1백 50명이 또 사신에게 나아가 오기에게 죄주기를 요청하였다.
○ 밀직부사 송방영(宋邦英) 등을 원 나라에 보내어 성절을 하례하였다.
○ 왕이 판도판서로 치사한 최양(崔諹)을 불러 이르기를, “듣건대, 경들도 오기를 사신에게 고소하려 한다니 그런 사실이 있는가. 당분간 보류하라." 하였으나, 최양은 듣지 않고 마침내 박전지(朴全之) 등 37명과 함께 또 사신에게 나아가 오기에게 죄주기를 요청하였다. 첩목아불화와 이학사가 돌아갈 때에 찬성사 유비(柳庇)가 같이 갔는데, 안향(安珦) 등이 교외에서 전송하였다. 이학사가 시 한 구절을 읊기를, “흰 술은 사람의 얼굴을 붉게 한다." 하고, 안향에게 대구를 지으라 청하였다. 향이 머뭇거리고 있자 이(李)가 스스로 대구를 짓기를, “황금은 관리의 마음을 검게 한다." 하였다. 이것은 첨목아불화가 오기의 뇌물을 받고 그 죄에 너그러운 것을 풍자한 것이다.
○ 왕이 동지밀직사사 김태현(金台鉉), 승지 송인(宋璘)과 행성의 좌우사관(左右司官) 등에 명하여 지신사(知申事) 김원상(金元祥)을 잡아들이게 하였다. 오기의 계책에 의한 것이었는데 원상이 숨었기 때문에 잡지 못하였다. 김심(金深)이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대궐로 나아가 숙위하여 내란을 막을 것을 청하니,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 왕도 오기가 많은 사람에게 원망을 사고 있음을 알고, 전지를 내리기를, “김심과 군관 등의 직위를 복직 시켜야 한다." 하니, 홍자번은 오기가 자기를 해칠까 의심하여 매우 엄밀하게 방비하였고, 오기 또한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왕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 홍자번이 재신과 추신 및 만호 김심과 함께 삼군의 장사와 원충갑(元冲甲) 등을 거느리고 왕궁을 포위하고는 오기를 내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두세 번 요청하자 왕이 마지못하여 내주려 하니, 오기는 사세가 절박한 것을 알고 머리를 조아리며 오직 머물러 두기만을 청하였다. 그러나 호군(護軍) 오현량(吳賢良)이 곧바로 왕이 있는 곳에 들어가 오기를 잡아 가지고 나왔다. 왕이 내인(內人)을 시켜 전지를 내려 기를 머물러 두게 하기를 청하니, 여러 재상들이 결정을 짓지 못하였다. 홍자번이 큰 소리로 말하기를, “왕께서 이미 허락하셨는데 무엇을 의심하느냐?" 하고, 호군 최숙천(崔淑千)을 독촉하여 오기를 구속하여 원 나라에 보냈다. 과거에 자번이 왕궁을 포위할 것을 의논할 때에, 참리(參理) 정해(鄭瑎)가 옳지 않게 여기며 말하기를, “한 간신을 물리치려면 무사 한 사람의 힘이면 될 것인데, 군사를 동원할 것이 무엇이냐?" 하였으나, 자번이 듣지 않았는데, 뒤에 상국에서 이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고 비로소 후회하였다.
○ 내료 김유(金儒)가 고발하기를, “호군 박규(朴圭)와 낭장 오인찬(吳仁贊)이 지방에 사신으로 가서 몰래 배와 물자와 식량을 준비하고 있으니, 필시 딴 계획이 있는 것입니다." 하니 왕이 재신과 추신에게 명하여 이들을 국문하게 하였다. 9월에 재신과 추신들이 규와 인찬이 내란을 음모한 사실을 문초하여 보고하니, 왕이 크게 노하여 손으로 그 소(疏)를 찢고는 곧 뉘우쳤다.
○ 홍자번을 첨의좌중찬(僉議左中贊)으로 삼았다. 다시 좌를 높게 친 것이다.
○ 경오일에 왕이 원 나라로 떠났다. 이번 행차는 전왕의 환국을 저지하고, 또 공주를 서흥후(瑞興侯) 전(琠)에게 개가시킬 것을 요청하려는 것이었는데, 사람들은 말하기를, 승지 송인(宋璘)의 계책에 미혹된 것이라 하였다. 왕이 서경까지 이르렀으나, 황제가 왕이 들어와 뵙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서 곧 되돌아 왔다.
○ 숙주(肅州)에 가뭄이 심하여 들판이 저절로 타버렸다.
○ 겨울 10월에 원 나라에서 병부상서 탈탈첩목아(脫脫帖木兒)를 보내어 오기(吳祁)를 잡아들이게 하였다. 이는 오기가 벌써 연경으로 간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 탈탈첩목아가 왕을 보고 좌우를 물리치며 말하기를,“황제께서 명하시기를,‘왕이 비록 출발했더라도 반드시 돌아가게 할 것이다.’하셨는데, 이제 이미 환국하였으니 잘했습니다. 그러나 좀 묻겠는데, 왕이 상국에 들어가는 것을 여러 재상들은 옳다고 생각했습니까?”하니, 왕이,“그렇다”하였다. 이때 홍자번이 곁에 있었으나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사신이 또 말하기를,“황제께서 명하시기를,‘왕이 들어와서 말하려는 것이 무슨 일이냐?’하셨습니다.”하니, 왕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사신이 말하기를,“재상과 함께 상의하여도 좋습니다.”하니, 자번이 무어라 진언하였다. 왕이 마침내 답하기를,“오기와 석주 부자가 불법한 일을 많이 행해서 소문이 상국에까지 퍼졌으나, 나는 실상 몰랐었다. 그러나 누가 과인이 몰랐다고 생각하겠는가. 이 때문에 두려워서 직접 황제 앞에 나아가서 아뢰려 했던 것이다.”하였다.
○ 중찬으로 치사한 채인규(蔡仁揆)가 졸하였다.
○ 11월에 원 나라에서 형부상서 탑찰아(塔察兒)와 한림직학사 왕약(王約)을 보내어 왔는데, 왕약이 왕에게 말하기를,“천지 사이에 지극히 가까운 것이 부자요, 지극히 중한 것이 군신이다. 저 소인들이란 자기의 이익만 알뿐이니, 어찌 왕의 국가를 생각하려 하겠는가”하니, 왕이 울며 사례하기를,“신이 늙고 망령들어 간사한 소인들의 말을 듣고 믿었기 때문에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제 명을 들었으니 표문을 올려 스스로 허물을 씻고 또 전왕의 환국을 청하겠으며, 소인들의 일당은 모두 사신이 직접 다스리게 하겠습니다.”하였다. 이리하여 사신은 송인(宋璘)을 잡아 정동성에 가두고, 그 죄를 지적하여 말하기를,“네가 왕에게 상국에 가라고 권고하여 백성을 소요하게 한 것이 첫 번째 죄요, 네 아비 분(玢)이 일찍이 금고(禁錮)를 겪은 것은 황제께서 아시는 바이거늘 마침내 감히 이것을 속이고 함부로 조정의 명을 받은 것이 두 번째 죄다.”하였다. 이어서 왕에게 이르기를,“사람이 병이 났을 때 약을 얻으면 반드시 낫는 법입니다. 이번에 내가 온 것은 정말 왕에게 좋은 약이 될 것이요.?”하였다. 드디어 왕과 함께 수녕궁에 이르러 향각(香閣)에 들어가서 재신(宰臣) 김연수(金延壽)에게 이르기를,“사랑을 받는 신하 김원계(金元桂)란 자가 있다는데 누구냐.?”하니, 이때 원계가 왕의 곁에 있다가 무릎을 꿇고 뵈었다. 사신이 말하기를,“국경에 들어서자 어떤 사람이 고하기를,‘원계가 남에게 이미 중매한 아내를 빼앗고, 또 군관의 호부(虎符)를 빼앗아 아내의 형제에게 주었으니, 그 죄를 다스려 주소서.’했다.”하고, 잡아서 가두었다. 또 호군 최연(崔涓)과 중랑장 황윤손(黃允孫) 등을 가두었으니, 이들은 일찍이 전왕을 수종하던 신하로 오랫동안 원 나라 서울에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 탑찰아 등이 오기(吳祁)의 형제인 삼사우윤(三司右尹) 천(蕆), 승지 연(演), 정랑(正郞) 형(珩), 소윤(少尹) 연(連)과 매부인 중랑장 조심(趙深)을 가두었다.
○ 탑찰아 등이 행성 좌우사(行省左右司)로 하여금 박규(朴圭) 등을 국문하게 하니, 모두 자복하였다.
○ 한희유를 도첨의 우중찬 판전리사사(都僉議右中贊判典理司事)로, 김혼(金琿)을 시랑찬성사 판군부사사(侍郞贊成事判軍簿司事)로, 안향(安珦)을 시랑찬성사 판판도사사(侍郞贊成事判版圖司事)로, 최유엄(崔有渰)ㆍ유비(柳庇)를 모두 찬성사로, 민훤(閔萱)을 참리(參理)로, 민지(閔漬)를 판밀직사사로, 정해(鄭瑎)를 밀직사사로, 이혼(李混)ㆍ권영(權永)을 모두 지밀직사사로, 김태현(金台鉉)ㆍ김심(金深)을 동지밀직사사로, 김연수(金延壽)ㆍ김문연(金文衍)을 밀직사 부사로, 곽응(郭膺)을 감찰대부로 삼았다.
○ 밀직부사 김연수(金延壽)와 대호군 야선단(夜先旦)을 원 나라에 보내어 신정을 하례하고, 또 제안공(齊安公) 숙(淑)을 보내어 전왕의 환국을 청하였다.
○ 12월 경술일에 혜성이 서방에 나타났다.


고려사절요 제22권
 충렬왕 4(忠烈王四)
기해 25년(1299), 원 대덕 3년


○ 봄 정월에 만호 인후(印侯)ㆍ김흔(金忻)과 밀직 원경(元卿) 등이 마음대로 군사를 동원하여 만호 한희유(韓希愈)를 체포하였다. 과거에 인후가 안평공주(安平公主)에게 참소하기를, “희유가 일찍이 신의 목을 쥐고 신의 배를 타고 앉아 욕을 보였습니다.”하니, 공주가 말하기를, “희유는 공로가 있고 또 나이가 너보다 많으니, 희유가 아니면 누가 감히 너를 모욕하겠느냐. 다시 말하지 말라.”하였다. 그런데도 후 등은 그를 모함하려 하여 서로 반목하고 있었는데, 공주가 죽은 뒤에 왕이 희유를 정승으로 삼으니, 후 등은 두려워서 감히 발설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 중 일영(日英)이 낭낭 이승우(李承祐)에게 무고하기를, “희유 등이 반역을 음모하고 있다.”하니, 승우가 이 말을 후 등에게 고하였다. 이에 후 등이 군사를 동원해서 회유와 상장군 이영주(李英柱), 천호(千戶) 석천보 및 그의 아우 천경(天卿), 장군 이무(李茂)ㆍ박송견(朴松堅)ㆍ원충갑(元冲甲)ㆍ한대장(韓大莊)ㆍ유수대(兪守大), 전 중랑장 백서경(白瑞卿), 별장(別將) 배인검(裵仁儉) 등 10여 명을 체포하였다. 그리고는 곧 좌승 합산(哈散)에게 고하기를, “희유 등이 장차 후와 흔을 죽이고서 왕을 끼고 섬으로 달아나려 하므로, 일이 급박하여 먼저 처치하지 않으면 화가 장차 어찌될지 모르겠기에 이제 그들을 체포하였으니, 좌승(左丞)께서 처리하시오”하였다. 합산이 말하기를,“왕도 알고 있느냐?”하니, 말하기를,“왕이 만일 모르시면 누가 감히 이런 일을 모의할 수 있겠소.”하였다. 합산이 몰래 그의 아들을 왕궁에 보내어 동정을 살피게 하면서 경계하기를,“왕이 만약 그의 모의를 알았다면 반드시 경비를 삼업하게 할 것이니, 너는 왕을 보고 아뢰기를, 저의 아버지가 변이 있음을 듣고 두려운 데다 또 군병의 호위도 없어서 저를 보내어 군사를 빌려 오라 하였습니다’하라”하였다. 날이 밝을 무렵에 그의 아들이 왕궁에 가보니, 궁중은 적적하고 호위병들은 모두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도 않았었다. 올라가서 뵈니, 왕이 급히 불러 보고는 활과 칼을 주었다. 그의 아들이 돌아와 합산에게 고하기를,“먼저 한 말은 거짓이었습니다.”하였다. 그러나 벌써 희유 등을 체포한 후였기 때문에 왕궁에 나아가 이들을 신문할 것을 청하였다. 왕이 합산과 함께 희유 등을 국문하였으나 자복하지 아니하여 순마소에 가두었는데, 일영은 도망쳐 버렸다. 왕이 합산과 함께 흥국사(興國寺)에서 모두 닷새 동안 희유 등을 국문하니, 다만 영주와 인검만이 거짓으로 자복하였으며, 또 희유 등을 사흘동안 국문하였으나 끝내 자복하지 않았다.
○ 인후ㆍ김흔ㆍ원경 및 상장군 강수(姜裋), 대장군 김칠초(金七貂), 장군 환정(桓貞)ㆍ이우(李瑀), 소윤(少尹) 민적(閔頔) 등이, 일영은 도망가고 한희유 등은 자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장차 원 나라에 가서 황제에게 호소하려 하므로, 왕이 우부승지 김심(金深)을 시켜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강수 등은 모두 인호와 김흔의 한 패로서 희유를 모함한 자들이다.
○ 2월에 한희유와 이영주를 섬으로 귀양보내고, 나머지는 모두 장형을 실시하였다. 합산이 원 나라에 돌아가자, 황제가 한희유 사건을 물으니, 대답하기를,“희유는 본래 딴 모의가 없었습니다. 다만 홀라대(忽刺歹)가 익지례보화(益知禮普化 충선왕의 몽고명)왕을 위하여 한 짓일 뿐입니다.”하였다.
○ 왕이 재신과 추신들에게 이르기를,“서북면지휘사 윤보(尹珤)는 인후 등에게 음식을 대접한 것이 첫 번째 죄이고, 인후를 잡아 가두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죄이며, 환정과 민적에게 역마를 준 것이 세 번째 죄이다. 어째서 죄를 다스리지 않느냐?”하니, 중찬 홍자번(洪子藩)은 그대로 수긍하였는데, 지도첨의(知都僉議) 최유엄(崔有渰)만이 홀로 아뢰기를, “인후 등이 갈 때에 전하께서도 만류하지 못하셨는데, 윤보가 어떻게 그만두게 할 수 있겠습니까. 재상이 상국에 들어가는데, 지휘사로서 음식을 대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역마는 정 등이 제 마음대로 탄 것이지, 보가 준 것이 아닙니다. 이는 곧 옳은 재상을 얻지 못해서 있게 된 일인데, 재상은 죄주지 않고 보를 죄준다면 되겠습니까”하여, 드디어 논의가 잠잠해졌다. 그러나 보는 결국 이 일 때문에 파면되고 김부윤(金富允)이 그에 대체되었다.
○ 3월에 지도첨의사사 최유엄을 원 나라에 보내어 황자(皇子) 탄생을 하례하게 하였다.
○ 왕이 동교(東郊)에서 사냥을 하고 드디어 수강궁(壽康宮)에 행차하여 날마다 유흥을 일삼아, 창기(娼妓)에게 은(銀) 8근을 주고, 또 은병(銀甁) 2개로 과녁을 만들어 활로 쏘아 맞힌 자에게 주었다.
○ 여름 4월에 원 나라에서 공부상서 야선첩목아(也先帖木兒)와 한림대제(翰林待制) 가여주(賈汝舟)를 보내어 와 조하기를,“조인규(趙仁規) 등은 소행이 법에 어긋나므로 경중을 헤아려 처결하여 보내도록 이미 중서성에 명하였거니와, 이제부터는 관원이 죄가 있거든 반드시 사건의 전말을 갖추어 보고할 것이요, 곧장 죽이는 일이 없도록 하라, 또 그대 나라의 신민으로서 일찍이 세자에 의하여 섬으로 귀양갔거나 가산을 몰수당한 자는, 국왕의 명에 의하여 이를 분간하여 조사 기록하도록 하라.”하였다. 이때 원 나라에서 조인규는 장형을 실시하여 안서(安西)에 귀양보냈고, 최충소(崔冲紹)는 공창(鞏昌)에 귀양보냈다.
○ 조인규의 처자와 친척으로 구속된 자를 석방하고, 한희유와 이영주를 소환하였다.
○ 판삼사사 정인경(鄭仁卿), 판통례문사 유거(柳琚)를 원 나라에 보내어, 인후가 거짓말로 무고한 것을 밝혔다.
○ 원 나라에서 탑해(塔海)와 활활불화(濶濶不花) 등을 보내와서, 한희유ㆍ이영주ㆍ원경 및 판말직사사 유비(柳庇), 도평의 녹사 송지한(宋之罕)을 잡아서 돌아갔다. 유비는 곧 합산이 희유를 국문할 때 통역한 자였고, 지한은 문서를 작성한 자였다.
○ 조인규의 아내와 아들 서(瑞)ㆍ연(璉)ㆍ후(珝) 및 최충소(崔冲紹)의 아들 직(直)이 원 나라에갔다.
○ 5월에 장군 백효주(白孝珠)를 원 나라에 보내어 요(鷂 새매)를 바쳤다.
○ 인후(印侯)ㆍ이혼(李混)ㆍ원후(元珝)ㆍ정해(鄭瑎)ㆍ원경(元卿)ㆍ허평(許評)이 파면되었다.
○ 판삼사사 정인경을 원 나라에 보내어 사은하였다.
○ 이죄(二罪) 이하를 사면하였다.
○ 수강궁에 행차하였다. 왕이 여러 소인들을 가까이하며 유흥을 즐기니, 행신(倖臣) 오기(吳祁)ㆍ김원상(金元祥)과 내료 석천보(石天補)ㆍ석천경(石天卿) 등이 노래와 여색으로 환심을 사기에 힘썼다. 관현방(管絃坊)의 대악(大樂)과 재인(才人)이 오히려 부족하다 하여 행신들을 각 도에 나누어 보내 관기(官妓)로서 인물과 재예가 있는 자를 뽑고, 또 도성 안의 관비(官婢)나 무당으로서 노래와 춤을 잘 추는 자를 선발하여 적(籍)을 궁중에 두었다. 그리고는 비단옷을 입히고 말총모자를 씌워 따로 한 떼를 만들어‘남장(男粧)’이라 부르고, 새 음악을 가르쳤다. 그 노래(쌍화점곡(雙花店曲))에 이르기를,“삼장사(三藏寺) 안에 등 밝히러 갔더니, 사주(社主)가 내 손목 잡았네. 혹시라도 이 말이 절 밖으로 새어나가면, 상좌여, 이것은 네가 말한 것이리라.”하고, 또 이르기를,“배암이 용의 꼬리 물고 태산 꼭대기를 지나갔다네. 만인이 제각기 한마디씩 하여도 두 사람의 마음엔 짐작이 있다네.”하였는데, 그 높고 낮음과 느리고 빠른 것이 음절에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왕이 수강궁에 행차하면, 천보의 무리들은 그 곁에 장막을 치고 각기 명기(名妓)를 끼고는 밤낮으로 노래하고 춤추며 무례하고 방자하여 군신간의 예의를 다시 찾아볼 수 없었으며, 공궤하고 하사하는 경비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 가을 7월에 장군 김유(金儒)를 경상ㆍ전라ㆍ양광 3도의 채방사(採訪使)로 삼았다. 전왕이 유가 머리 깎은 것을 미워하여 팔전사(八巓寺)에 가 있게 하였는데, 왕이 복위한 뒤에 유는 머리를 기르고 장군에 제수되었다. 탐욕스럽고 교사(巧詐)하여 백성의 이익을 침해하여 빼앗아 욕심을 채우며, 왕의 사랑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 못하는 짓이 없었으므로 그가 왔다는 소문들 듣고 통분히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 밀직사 유욱(柳栯)을 원 나라에 보내어 성절을 하례하게 했다.
○ 8월 1일 기유에 일식이 있었다.
○ 유비(柳庇)가 도망쳤다. 이때 비가 원 나라에서 돌아왔는데, 왕은 인후와 한 통속인 줄 알고 의심하여 죄주려 했기 때문에 도망친 것이다.
○ 9월에 대장군 민보(閔甫)를 원 나라에 보내어 요(鷂)를 바쳤다.
○ 감찰사(監察使) 채우(蔡禑)를 섬에 귀양보냈다. 우가 좌창(左倉)의 녹을 나누어 주는 것을 감시하였는데, 환관이 전지(傳旨)라 하며 쌀 몇 섬을 궁중으로 들여서 궁인에게 주려 하였다. 우가 말하기를,“오늘 나누어 주는 것은 부위(府衛)의 장교의 녹이다. 만약 그들에게 주지 않고 궁인들에게 준다면 성상의 덕이 손상될까 걱정된다.”하고 굳이 저지하였더니, 왕이 노하여 그를 귀양보냈다.
○ 국인들이 흰옷과 흰 모자를 쓰는 것을 금지하였으니, 태사국(太史局)의 건의를 따른 것이다.
○ 중찬 송분(宋玢)을 감수국사(監修國史)로, 안향(安珦)을 수국사로, 민지(閔漬)를 동수국사로 삼고, 첨의 차신(車信)ㆍ최유엄(崔有渰)과 밀직 유비(柳庇)ㆍ오인영(吳仁永)ㆍ유복화(劉福和)와 복야 홍선(洪詵)을 파면했다.
○ 겨울 10월에 원 나라에서 활리길사(濶里吉思)를 보내어 정동행중서성 평장사로, 야율희일(耶律希逸)을 좌승(左丞)으로 삼았다. 이때 합산(哈散)이 돌아가 아뢰기를, “왕이 백관을 복종시키지 못하고 있으니, 조정에서 마땅히 관원을 파견하여 같이 다스리게 하소서." 하여 황제가 따른 것이다.
○왕이 행성의 관원을 더 둔 데 대하여 표문을 올려 실정을 아뢰었다.
○ 11월에 왕이 온천에 행차하였다.
○ 12월에 장군 이백초(李白超)를 원 나라에 보내어 인삼과 고니고기를 바쳤다.
○ 도첨의 찬성사 정인경(鄭仁卿)을 원 나라에 보내어 신정을 하례하게 하였다.
○ 평장사 활리길사가 행성의 관료 및 백과과 함께 신정을 하례하는 의식을 봉은사(奉恩寺)에서 3일 동안 연습하였다. 의식을 연습하는 것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고봉속집 제2권
 잡저(雜著)
천사(天使) 허국(許國)위시량(魏時亮)의 문목(問目)에 대해 조목조목 답함


〇 본국(本國) 아무 도(道)의 벼슬아치나 선비 혹은 백성 가운데 이미 죽었거나 또는 살아 있는 사람들로서 어떠한 이행(異行)과 효제(孝悌)와 절의(節義)가 있는지, 또 공맹(孔孟)의 심학(心學)을 잘 알거나 기자(箕子)의 주수(疇數)를 아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 거주지와 성명과 사실을 하나하나 기록하라.

본국은 바다 밖에 궁벽하게 위치해 있고 땅덩이는 작지만, 백성들의 성품이 어질고 유순하여 선(善)에 잘 흥기하기에 이행과 효제와 절의가 있었던 사람들이 사서(史書)에 끊이지 않으니, 지금 그 수를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우선 그중 한두 가지만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이자현(李資賢)은 고려 때 사람인데, 용모가 훌륭하고 성품이 총민하였습니다. 문과에 급제하여 대악서 승(大樂署丞)이 되었는데, 갑자기 벼슬을 버리고 춘주(春州)의 청평산(淸平山)에 들어가 거친 밥을 먹고 베옷을 입고 살면서 유유자적하며 스스로 즐겼습니다. 고려 예왕(睿王)이 누차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표(表)를 올렸는데, 그 표에 “새의 본성대로 새를 길러서 종고(鐘鼓)의 걱정이 없게 하시고, 물고기를 관찰하여 물고기를 알아서 강호(江湖)를 좋아하는 물고기의 본성을 이루게 하소서.”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왕은 그를 불러올 수 없음을 알고 특별히 남경(南京 한양(漢陽))에 행차하여 그의 아우 자덕(資德)을 파견하여 가서 효유하게 하니, 그제야 부름에 응하여 왔습니다. 왕은 이에 그를 삼각산(三角山)에 머물도록 명하였습니다. 그 후 재차 만났을 적에 왕이 심성을 기르는〔養性〕 요법을 물으니, 그는 “욕심을 줄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왕은 그를 특별히 후하게 대우하였으나, 그는 굳이 청하여 산으로 돌아갔습니다.

한성한(韓性漢)-‘성(性)’ 자는 ‘유(惟)’ 자일 듯하다.-은 고려 신왕(神王) 때 사람입니다. 그는 최충헌(崔忠獻)이 국정을 제멋대로 하는 것을 보고는 “난(難)이 곧 일어날 것이다.” 하고, 마침내 처자(妻子)를 거느리고 지리산에 들어가 은거한 채 고절(苦節)을 맑게 닦고 세상 사람들과 사귀지 않았으니, 세상에서 그의 인품을 높게 여겼습니다. 조정에서 그를 불러 서대비원 녹사(西大悲院錄事)로 삼았으나 취임하지 않고, 더 깊은 골짜기로 옮겨가 살면서 종신토록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김시습(金時習)은 경기 남양부(南陽府) 사람입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총명하였고 3세 때에 능히 글을 지을 줄 알았습니다. 5세 때는 우리 장헌왕(莊憲王 세종(世宗))께서 그를 인견(引見)하였는데, 응대하는 것이 마치 신과 같았으므로 당시에 오세동자(五歲童子)라 칭하였습니다. 장성해서는 경적(經籍)을 널리 통하고, 제자(諸子)와 사서(史書)까지도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집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승도(僧徒)로 행세하면서 스스로 세속의 법도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매양 높은 데 올라 먼 곳을 바라보고는 문득 통곡을 하고 돌아오곤 하였는데, 사람들은 그를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청한자(淸寒子)라 자호하였고, 그가 지은 시문은 청수(淸邃)하고 호탕(豪宕)하였습니다.

손순(孫順)은 신라 흥덕왕(興德王) 때 사람입니다. 아버지는 죽고 집이 가난했으므로 아내와 더불어 남의 집에 품팔이를 하여 어머니를 봉양하였습니다. 그런데 손순에게 어린 자식이 있어 늘 자기 어머니의 밥을 빼앗아 먹었습니다. 손순은 아내에게 “아이가 어머니의 밥을 빼앗아 먹는데, 아이는 다시 얻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구하기 어렵다.”라고 하고는 곧 아이를 등에 업고 갔습니다. 땅을 파고 아이를 산 채로 묻으려고 할 때 갑자기 땅속에서 매우 신기한 석종(石鐘)이 나왔습니다. 두 부부는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시험 삼아 그것을 두드려 보았더니 소리가 은은하여 듣기 좋았습니다. 아내가 말하기를 “이런 기이한 물건을 얻은 것은 곧 아이의 복이니 아이를 묻을 수 없습니다.” 하니, 손순도 그렇게 여겨 아이와 그 종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돌아온 뒤 종을 들보에 달아 놓고 두드리니 그 소리가 왕궁까지 들렸습니다. 왕이 그 소리를 듣고 좌우에게 이르기를 “서교(西郊)에서 종소리가 들려오는데 소리가 맑고 멀어서 이상스럽다.” 하고는 곧 찾아보게 하여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왕이 이르기를 “옛날에 곽거(郭巨)가 자식을 묻으려 할 적에 하늘이 금부(金釜)를 주었는데, 지금 손순이 아이를 묻으려 할 적에 땅에서 석종이 나왔으니 전후의 일이 똑같다.” 하고는 곧 가옥 한 채를 내려 주고 매년 쌀 50석을 주었습니다.

최누백(崔婁伯)은 수원(水原) 사람입니다. 나이 15세 때 그의 아버지가 사냥을 하다가 호랑이에게 물려 죽자 누백은 그 호랑이를 잡으려 하였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만류하자 누백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는 즉시 도끼를 메고서 호랑이를 추적하였습니다.
호랑이는 이미 사람을 잡아먹고 배가 불러 드러누워 있었습니다. 누백이 그 앞으로 다가가서 호랑이를 꾸짖어 “네가 우리 아버지를 잡아먹었으니 내가 의당 너를 잡아먹어야겠다.” 하니, 호랑이가 꼬리를 흔들며 엎드렸습니다. 누백은 대뜸 도끼로 호랑이를 찍어 죽이고는 배를 갈라 자기 아버지의 뼈와 살을 찾아내고, 호랑이고기는 항아리에 담아 시내 가운데 묻어 두었습니다. 누백은 아버지를 장사 지내고 시묘살이를 하였으며, 삼년상을 마치고 나서는 그 호랑이고기를 가져다가 다 먹었습니다. 그는 뒤에 과거에 급제하여 기거사인(起居舍人)이 되었습니다.

김자강(金自强)은 성주(星州) 사람입니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봉양하면서 뜻을 어김이 없이 잘 받들어 순종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죽자 상(喪)을 치르는 데 있어 부도(浮屠)의 법을 쓰지 않고 일체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예문(禮文)을 따라서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습니다. 복이 끝나자 다시 아버지를 위해 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종족들이 그를 말려 억지로 끌어내서 집으로 돌아가게 하고는 이어 그 여막을 불태워 버렸습니다. 그러나 자강은 힘껏 뿌리치고 다시 돌아와 무덤 아래 엎드린 채 3일 동안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종족들이 그의 효성에 감동하여 다시 그를 위해 여막을 지어 주니, 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습니다. 국초(國初)에 정려(旌閭)를 내려 표창하였습니다.

강렴(姜廉)은 안변(安邊) 사람입니다. 영락(永樂) 연간에 그의 아버지 회조(淮祖)가 대변이 막혀 통하지 않는 병을 앓았습니다. 이에 강렴은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아버지의 병을 간호하였는데, 4년 동안이나 계속해서 손수 변기를 받들었고 심지어 대변을 맛보아 병세의 차도를 증험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또 종기를 앓았는데, 의원이 말하기를 “거머리를 잡아다가 피를 빨리면 종기를 치료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한창 추운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강렴은 연못가에 나아가 울부짖으면서 얼음을 깨고 거머리를 찾았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거머리 두세 마리가 손가락에 붙어 나오기에 이것을 가지고 돌아와 종기를 빨렸더니, 아버지의 병이 곧 나았습니다. 이 일을 조정에 아뢰자 정려를 내려 표창하였습니다.

김덕숭(金德崇)은 진천현(鎭川縣) 사람입니다. 일찍이 한산 군수(韓山郡守)로 있다가 부모를 봉양하는 일이 오랫동안 행해지지 않음을 염려하여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서는 부모의 뜻과 안색을 잘 받들어 봉양하되 지성으로 하여 게으름이 없었습니다. 나이 62세에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였는데,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 조석(朝夕)으로 전(奠)을 마치고 나서는 반드시 아버지에게 가서 문안을 드리되 아무리 비가 오고 눈이 내려도 폐하지 않았습니다. 삼년상을 마친 뒤에는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않고 더욱 독실하게 봉양하였으므로 장헌왕(莊憲王)께서 그의 성효(誠孝)를 가상하게 여겨 특별히 술과 고기와 쌀을 하사하였습니다.
아버지가 죽자 그는 또 시묘살이를 하면서 지나치게 슬퍼하여 몸이 매우 수척해졌는데, 그때 나이가 벌써 72세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그가 늙은 나이에 예제대로 상(喪)을 치르다가는 반드시 생명을 잃게 되리라고 여겨 저지하니, 덕숭이 울면서 말하기를 “아버지는 들판에 묻혀 있는데 자식은 집에 편안히 있는 일을 나는 차마 할 수 없다.” 하고는 새벽이면 일어나 반드시 묘 앞에서 곡을 하여 상을 다 마칠 때까지 슬퍼하며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였습니다. 부모가 평소에 앉던 좌석을 볼 때마다 목이 메어 울었고, 공경하기를 마치 부모가 살아계실 때와 같이 하였습니다. 또 사당(祠堂)에는 새벽과 저녁으로 반드시 배알하고 초하루와 보름에는 반드시 제사를 지냈으며, 시물(時物)은 반드시 사당에 올렸고 무슨 일이 있으면 반드시 사당에 고하고 나서 행하였습니다.
그가 죽은 뒤에 조정에서는 그의 두 아들에게 벼슬을 내리라고 명하고, 그의 묘에 비석을 세워 정표하였습니다.

박운□(朴云□)은 창녕(昌寧) 사람입니다. 나이 14세 때 아우 운산(云山)은 8세였는데, 그의 아버지가 호랑이에게 물려갔습니다. 운□이 조그만 도끼를 들고 아우 운산과 더불어 30여 보쯤 쫓아가면서 통곡을 하니, 호랑이가 그의 아버지 시체를 버리고 갔습니다. 그리하여 운□은 시체를 등에 메고 운산은 도끼를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이 일을 조정에 아뢰자 정려를 내려 표창하였습니다.

김득인(金得仁)은 동래현(東萊縣) 사람입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집이 가난했으나 어머니를 봉양함에 지극히 효성스러웠습니다. 어머니가 죽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마치고 나서는 아버지의 묘를 어머니의 묘 곁으로 옮기고 다시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함으로써 전후 9년 동안 거상(居喪)하였습니다.
흉년이 들었을 때 부산포(釜山浦)의 왜노(倭奴)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노략질을 하다가 갑자기 득인의 여막에 이르렀는데, 그의 효성에 감동하여 감탄을 하고 떠나서는 뒤에 해채(海菜)와 쌀과 향을 보내 주었습니다. 우리 강정왕(康靖王 성종(成宗))께서 그에게 풍저창 부봉사(豐儲倉副奉事)를 특별히 제수하였습니다.

성수침(成守琛)은 경상도 창녕현(昌寧縣) 사람입니다. 그는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려서부터 효아(孝兒)로 일컬어졌습니다.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서는 예에 지나칠 만큼 슬퍼하였고 3년 동안 죽만 먹었으며, 손수 제구(祭具)를 다루었습니다. 새벽이면 일어나 묘역을 쓸고 나서 분향하고 절하고 꿇어앉아 있었는데, 아무리 춥거나 더운 때라도 폐하지 않았습니다. 상을 마치고 나서도 기일(忌日)을 맞이할 때마다 마치 초상 때처럼 애통해하였습니다. 조석으로 반드시 사당에 배알하였고 출입할 때는 반드시 사당에 고하였습니다. 어머니를 모시면서 집은 가난하였으나 매우 좋은 음식으로 봉양하였습니다.
그는 천품이 매우 고상하고 덕행과 기량이 원만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일찍이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그의 학문은 자기 마음에 반성하는 일과 자기 몸에 절실한 것에 힘썼습니다. 파평산(坡平山) 아래 은거하면서 청송거인(聽松居人)이라 자호하였습니다. 신훙왕(新薨王 명종(明宗)) 때에 누차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죽은 뒤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증직되었습니다.

박제상(朴堤上)은 신라 눌지왕(訥祗王) 때 사람입니다. 왕의 아우 미사흔(未斯欣)이 왜국에 볼모로 가 있었으므로 왕은 변사(辯士)를 보내 왜국을 꾀어서 미사흔을 맞아 오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자 제상이 자기가 가겠다고 청하면서 말하기를 “왜인은 말로 설득할 수 없으니 의당 거짓으로 속여야 합니다. 신은 마치 죄를 짓고 도망간 것처럼 꾸미고자 하니, 신이 떠난 뒤에 신의 가속을 옥에 가두소서.” 하고는 드디어 왜국에 들어갔습니다.
왜주(倭主)가 처음에는 그를 의심하였으나, 신라 왕이 제상의 가속들을 가두었다는 말을 듣고는 제상에 대해 참으로 신라를 배반한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왜주는 군대를 동원하여 신라를 습격하러 나오면서 미사흔과 제상을 향도(嚮導)로 삼았습니다. 해도(海道) 가운데 이르렀을 때 제상이 미사흔과 더불어 배를 타고 마치 즐겁게 노니는 것처럼 하니, 왜인들이 그것을 보고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제상이 미사흔에게 몰래 본국으로 돌아가라고 권하니, 미사흔이 “어찌 그대를 두고 나 혼자만 돌아갈 수 있겠는가.” 하자 제상이 말하기를 “만일 두 사람이 함께 가면 계획을 성사시키지 못할 듯합니다.” 하였습니다. 그러자 미사흔은 제상을 붙들고 울면서 하직하고 떠나갔습니다. 이미 멀찍하게 간 뒤에야 왜인들이 미사흔이 도망쳤음을 알고 그를 추적했으나 따라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왜인이 제상을 가두고 국문하기를 “어찌하여 네가 네 나라 왕자를 몰래 보냈는가?” 하니, 제상이 말하기를 “나는 곧 계림국(鷄林國)의 신하이므로 우리 임금의 뜻을 이루고자 한 것일 뿐이다.” 하였습니다. 왜주가 성을 내어 말하기를 “네가 지금 이미 나의 신하가 되었는데도 계림국의 신하라고 칭한다면 반드시 오형(五刑)을 갖추어 처벌할 것이고, 만일 왜국의 신하라고 칭한다면 반드시 중록(重祿)으로 상줄 것이다.” 하니, 제상이 말하기를 “차라리 계림국의 개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자(臣子)는 될 수 없고, 차라리 계림국의 매를 맞을지언정 왜국의 작록(爵祿)은 받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왜주가 노하여 제상의 다리 살가죽을 벗기고 갈대를 베어 낸 다음 그 위를 걷게 하면서 “너는 어느 나라 신하냐?” 하고 다시 물으니, 제상은 “계림국의 신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뜨거운 철판 위에 제상을 세우고서 또 “어느 나라 신하냐?”라고 물으니, 제상은 “계림국의 신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왜주는 그의 뜻을 꺾을 수 없음을 알고 그를 불태워 죽였습니다. 그의 아내는 치술령(鵄述嶺)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고 남편을 기다리며 통곡하다가 죽어서 치술신모(鵄述神母)가 되었는데, 지금도 그 사당이 있습니다.

비령자(丕寧子)는 신라 선덕왕(善德王) 때 사람입니다. 백제가 신라를 침공하자 왕이 김유신(金庾信)을 보내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가서 방어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백제의 군대가 매우 정예하여 유신이 고전을 하였습니다. 힘이 다하자 비령자에게 이르기를 “계절이 추워진 다음에야 송백(松柏)이 뒤에 시드는 것을 아는 법이다. 오늘 일이 급하게 되었는데, 자네가 아니면 누가 능히 분발하여 기발한 힘을 내어 군중의 마음을 격동시킬 수 있겠는가.” 하니, 비령자가 말하기를 “이 많은 사람 가운데서 유독 나에게 부탁을 하니, 이것은 나를 알아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와서 그의 종 합절(合節)에게 이르기를 “오늘 나는 의당 위로는 국가를 위하고 아래로는 나를 알아준 분을 위해서 죽을 것이다. 그런데 내 자식 거진(擧眞)이 어리지만 장한 뜻이 있으니 반드시 나와 함께 죽으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부자(父子)가 함께 죽는 것은 옳지 않다. 내가 죽거든 네가 거진과 더불어 나의 뼈를 수습하라.” 하고는, 창을 비껴들고 적진에 돌격하여 수인을 쳐 죽이고 전사하였습니다. 그러자 거진도 달려가 싸우다 함께 죽으려고 하므로 합절이 말 재갈을 붙잡고 저지하면서 말하기를 “대인(大人)께서 유명(遺命)을 남기셨는데, 이제 아버지의 명을 저버린다면 효(孝)라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거진이 칼로 합절의 팔을 쳐 버리고 적진에 돌격하여 또한 전사하였다. 이에 합절이 말하기를 “상전이 돌아가셨는데 죽지 않고 어찌하겠는가.” 하고는 역시 적과 싸우다가 죽었습니다. 이로 인해 온 군중이 감격하여 일제히 진격함으로써 향하는 곳마다 승리하여 적의 머리 3000여 급(級)을 베었습니다. 왕은 그들을 애도하여 예로 장사 지내 주었습니다.

성충(成忠)은 백제 사람으로 의자왕(義慈王) 때에 좌평(佐平)이 되었습니다. 왕이 황음(荒淫)하고 탐락(耽樂)하여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자 충이 극력 간(諫)하니, 왕이 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충은 밥을 먹지 않다가 죽었는데, 죽음에 임하여 왕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니 원컨대 한 말씀 올리고 죽겠습니다. 신이 일찍이 시세의 변천을 관찰해 보니 반드시 앞으로 전쟁이 있을 것입니다. 전쟁을 하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지세를 잘 가려서 해야 하니, 상류에 위치하여 적에 대응해야만 보전할 수 있습니다. 적군이 만일 쳐들어오면 육로로는 탄현(炭峴)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로(水路)로는 기벌포(伎伐浦)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험준한 곳에 웅거하여 그들을 방어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왕은 반성하지 않았고, 그는 마침내 옥중에서 죽었습니다. 그 후 수년 만에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신라와 함께 백제를 정벌하여 그들의 군대가 성 밑까지 이르자, 의자왕이 모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탄식하기를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른 것이 후회스럽다.” 하더니, 마침내 나당(羅唐) 군사들에게 멸망당했습니다.

이존오(李存吾)는 경주(慶州) 사람입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학문에 힘썼는데, 강개(慷慨)하여 지절(志節)이 있었고 대범하고 묵중하여 말이 적었습니다. 나이 10여 세 때 〈강창(江漲)〉이란 시를 짓기를 “온 들이 다 묻혔는데, 높은 산만 가라앉지 않았네.〔大野皆爲沒 高山獨不降〕”라고 하니, 식자들이 그를 기이하게 여겼습니다.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에 좌정언(左正言)이 되었는데, 왕이 요승(妖僧) 신돈(辛旽)을 총애하여 정사를 그에게 맡겼습니다. 이존오가 대사간 정추(鄭樞)와 함께 소(疏)를 올려, 신돈이 국정을 제멋대로 하여 임금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있음을 논하였습니다. 그러자 왕이 노하여 존오를 불러 면전에서 책망했습니다. 이때 신돈이 임금과 마주 앉아 있기에 존오가 신돈을 쳐다보고 꾸짖기를 “늙은 중이 어찌 이같이 무례할 수 있단 말인가.” 하니, 신돈이 두려워하고 놀라 자기도 모르게 안석에서 내려왔습니다. 왕은 더욱 노하여 존오를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었습니다. 이색(李穡)의 변호로 죽음을 면하고, 장사 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었으며 공주(公州) 석탄(石灘)에 물러가 살았습니다.
그 후 신돈의 세력이 더욱 치성해지므로 걱정하고 분개함이 병이 되었습니다. 병이 위독해지자 좌우를 시켜 자신을 붙들어 일으키게 하고 말하기를 “신돈의 세력이 아직도 치성한가? 신돈이 망해야 내가 망할 것이다.” 하고는, 자리에 돌아와 편히 눕기도 전에 죽었습니다.

최씨(崔氏)는 영암(靈巖) 사람 인우(仁祐)의 딸로 진주(晉州)의 아전 정만(鄭滿)에게 시집갔습니다. 홍무(洪武) 기미년(1379, 고려 우왕5)에 왜적이 진주를 침범했을 때 최씨는 아이들을 안거나 이끌고서 산중으로 도망가 숨었습니다. 왜적이 칼을 뽑아 들고 협박하자 최씨는 나무를 안고 항거하면서 꾸짖기를 “적에게 욕을 당하고 사느니 차라리 의리에 죽겠다.” 하면서 꾸짖기를 그치지 않으니, 적이 마침내 죽였습니다. 국초(國初)에 정려를 내려 표창하였습니다.

약가(藥哥)는 선산(善山) 사람 조을생(趙乙生)의 아내입니다. 을생이 왜구에게 붙들려 간 후 약가는 남편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름에도 불구하고 고기도 먹지 않고 훈채도 먹지 않고 의복도 벗지 않은 채 잠을 잤습니다. 부모가 그를 다른 데로 시집보내려 하자 그는 죽기로 맹세하고 따르지 않았습니다. 8년 만에 을생이 돌아오자 다시 부부 생활을 처음과 같이 하였습니다.

최씨(崔氏)는 충주(忠州) 사람으로 부사(府使) 한약(韓約)과 정혼(定婚)한 사이였습니다. 한약이 일본으로 정벌을 나갔다가 전사하자, 최씨는 종신토록 절개를 지켰습니다. 그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정려를 내려 표창하였습니다.

서씨(徐氏)는 풍기(豐基) 사람 사달(思達)의 딸입니다. 같은 군 사람 도운봉(都雲峯)에게 시집간 지 겨우 1년 만에 남편이 죽자 예에 지나칠 만큼 슬퍼하였습니다. 그리고 매일 당(堂) 뒤의 대밭에 가서 대를 안고 울부짖었는데 어느 날 홀연히 흰 대 세 그루가 나더니,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에 흰 대가 7, 8그루에 이르렀습니다. 정통(正統) 무오년(1438, 세종20)에 장헌왕(莊憲王)께서 흰 대를 그림으로 그려 올리라고 명하시고는 조세(租稅)를 면제해 주고 정려를 내려 표창하였습니다.

손씨(孫氏)는 밀양부(密陽府) 사람 윤하(胤河)의 딸입니다. 16세에 초계(草溪) 사람 안근(安近)에게 시집갔는데, 시집간 지 겨우 수일 만에 안근이 죽자 3년 동안 슬피 울며 몸소 조석(朝夕)의 전(奠)을 올렸습니다. 삼년상을 마치자 조부모가 나이 어린 것을 불쌍히 여겨 재가(再嫁)시키려고 하니, 손씨가 죽기로 굳게 거절하였습니다. 조부가 노하여 다시 그를 강제로 재가시키려 하니 손씨는 남몰래 동산의 대숲으로 들어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으려 하였습니다. 그의 언니가 발견하여 풀어 주자 즉시 시집으로 돌아가 살았습니다. 시집에 와서는 조석으로 반드시 먼저 남편에게 제사 지낸 다음에 밥을 먹곤 했는데, 32세에 죽었습니다.

양씨(梁氏)는 무주(茂朱) 사람 구길생(具吉生)의 아내입니다. 길생이 죽자 조석으로 친히 전(奠)을 올렸는데, 하루는 전을 올리러 가서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가 괴이하게 여겨 찾아보니, 초빈(草殯)을 열고 관(棺)을 안고서 곡을 하고 있으므로 부모가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그때 마침 집 앞 냇물이 한창 불어 있었는데 양씨가 갑자기 물로 뛰어들자 그의 언니가 건져 내어 구했습니다. 그러나 몇 달 뒤 다시 자기 침실에서 스스로 목을 매어 죽으니, 부모가 그를 슬프게 여겨 그의 남편과 한 묘혈(墓穴)에 장사 지내 주었습니다.

성이(性伊)는 김해부(金海府)의 아전 허후동(許厚同)의 아내입니다. 20세에 남편이 죽으니, 조석으로 전 드리는 도구들을 정결하게 하기 위하여 솥과 도마를 별도로 설치해 두고 제수를 장만하였으며, 초하루와 보름 때마다 시물(時物)을 준비하고 시복(時服)을 지어 입고서 제사를 지내되 제사를 마치고 나서는 시복을 불태워 버렸습니다. 그리고 항상 강포한 자에게 혹 몸을 더럽히게 될까 염려하여 칼과 노끈을 휴대하고서 스스로 맹세하기를 “칼로 자결하지 못하면 노끈으로 목을 매어 죽으리라.” 하였습니다. 3년 동안 몹시 슬피 울었고 남들과 대면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정문을 내려 표창하였습니다.

배씨(裵氏)는 성주(星州) 사람 이동교(李東郊)의 아내입니다. 홍무(洪武) 경신년(1380, 고려 우왕6)에 왜적이 그곳에 침노하여 배씨가 사는 마을에 갑자기 쳐들어오자, 배씨는 젖먹이 아들을 안고 달아났습니다. 적이 그녀를 뒤쫓아 강가에 이르렀을 때 강물이 한창 불어 있었으므로 배씨는 달아날 수 없음을 알고 강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러자 적이 화살을 활시위에 끼우고 겨누면서 말하기를 “이리로 나와라. 너를 살려 주겠다.” 하였으나, 배씨는 욕을 하며 말하기를 “왜 빨리 나를 죽이지 않느냐. 내가 어찌 적에게 몸을 더럽힐 수 있겠느냐.” 하였습니다. 적이 화살을 쏘아 배씨의 어깨를 적중시키니 마침내 강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국초에 정문을 내려 표창하였습니다.

임씨(林氏)는 전주부(全州府) 사람 지낙안군사(知樂安郡事) 최극부(崔克孚)의 아내입니다. 왜적이 그곳에 침노했을 때 임씨가 그들에게 붙잡혔는데, 적이 임씨를 겁탈하려 하였습니다. 임씨가 굳게 항거하자, 적은 임씨의 한쪽 팔을 자르고 또 한쪽 다리까지 잘랐습니다. 그러나 임씨는 끝내 굴하지 않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국초에 정려를 내려 표창하였습니다.

본국은 기자(箕子)가 와서 봉해짐으로부터 구주(九疇)로 교화를 베풀고 팔조(八條)로 정치를 하여 인현(仁賢)의 교화가 저절로 신명(神明)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공맹의 심학(心學)을 터득하고 기자의 주수(疇數)에 밝은 선비로서 세상에 이름난 이들이 반드시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군(四郡)ㆍ이부(二府) 시대 이후로 삼국(三國)이 갈라져 싸움으로써 전쟁의 분탕 속에 문적(文籍)이 죄다 흩어져 없어져서 공맹의 도를 전할 사람이 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세상에 이름을 떨쳤던 전인(前人)마저도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였습니다. 고려 500여 년간 세도(世道)가 높아지고 문풍(文風)이 점차 열려 중국에 유학하는 선비가 많아지고 경적(經籍)이 널리 퍼짐으로써 중국의 문명을 수용하여 오랑캐의 풍속이 변화하고, 난세가 치세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시서(詩書)의 은택과 예의의 풍속이 점차 기자가 베푼 구주의 옛 풍속을 회복하게 되었으니, 중국으로부터 ‘문헌의 나라〔文獻之邦〕’ 또는 ‘군자의 나라〔君子之國〕’라고 칭찬을 받은 것이 바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라와 고려 두 왕조의 선비들은 학문의 중점이 끝내 언어와 문장 사이에 있었으니, 고려 말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정주(程朱)의 서적이 차차로 우리나라에 들어왔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탁(禹倬), 정몽주(鄭夢周) 같은 이들이 성리학(性理學)의 이론을 참고하여 연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국조(國朝)에 이르러서는 태종문황제(太宗文皇帝)께서 《사서대전(四書大全)》, 《오경대전(五經大全)》, 《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의 서적을 반포하였고, 본국이 과거를 설행하여 선비들을 취할 적에 또 사서(四書)와 삼경(三經)에 통달한 자들도 그 선발에 들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선비들이 외우고 익히는 것이 모두가 공자ㆍ맹자ㆍ정자ㆍ주자의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혹은 구태의연하게 답습함으로써 드러내지 못하고 살피지도 못하며, 혹은 뜻은 크나 일에는 소략하여 찬란히 문장을 이루었을 뿐 그것을 마름질할 줄 몰랐습니다. 그 가운데 능히 홀로 뛰어난 견해를 가지고 개연히 분발하여 성현의 학문에 종사한 사람도 가끔 있었으나 또한 많지는 않습니다. 지금 제가 열거하는 몇 사람은 모두 이미 죽은 사람들이고, 현재 생존한 사람에 대해서는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
이 몇 사람들은 선현의 세대보다 천여 년 뒤에 태어났고 궁벽한 바다 가운데서 살았기 때문에 성현의 문하에서 직접 가르침을 받지 못하였으니, 그들이 성현의 심학(心學)을 잘 알았다고 하기는 어렵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일생 동안 여기에 힘을 썼고 보면 심학을 공부하는 무리야 되지 못하겠습니까. 그리고 기자(箕子)의 홍범(洪範)에 대해서는 주희(朱熹)와 채원정(蔡元定)의 설(說)이 의리를 발명하는 데 조금도 미진함이 없었기 때문에 흐름을 인하여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서 그것을 터득한 사람도 또한 있었습니다. 그 수(數)에 대해서는 구봉(九峯 채침(蔡沈))의 《내편도설(內篇圖說)》이 비록 있고 원락자(苑洛子)의 발명(發明)도 있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수에 밝았다는 사람을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근세에 이순(李純)이라는 사람이 그 설에 능통했다고 자칭하면서 주해(註解)를 짓기까지 하였지만 그것이 과연 오류가 없는지는 또한 모르겠습니다.

설총(薛聰)은 신라 사람입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총명하였으며, 이미 자라서는 널리 배워 능히 방언(方言)으로 구경(九經)의 뜻을 해석하여 후진들을 훈도하였고, 또 글도 잘 지었습니다.

최치원(崔致遠)은 신라 사람입니다. 그는 정민(精敏)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12세에 배를 타고 당나라에 들어가 배움의 길을 찾았습니다. 18세에는 당나라 과거에 급제하여 선주(宣州) 율수현 위(溧水縣尉)가 되었고, 시어사(侍御史), 내공봉(內供奉)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또 고변(高騈)의 종사관이 되었습니다. 그때 그가 지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에 “온 천하 사람이 모두 그를 공개로 처형할 것을 생각할 뿐만 아니라 또한 지하의 귀신들도 이미 은밀히 베어 죽이기를 의논하고 있다.〔不惟天下之人皆思顯戮 抑亦地中之鬼已議陰誅〕”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황소가 그 글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평상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이 천하에 떨쳐졌습니다.
광계(光啓) 원년(885)에 황제의 조칙을 받들고 본국으로 돌아와서는 스스로 중국에 가서 배워 많이 얻은 것을 가지고 가슴속에 품은 경륜을 한번 펴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난세를 만나 스스로 때를 만나지 못한 것에 상심하여 더 이상 벼슬할 뜻을 버리고는 가족을 거느리고 가야산(伽倻山)에 은거하여 일생을 마쳤습니다.
그가 저술한 《사륙집(四六集)》1권, 《계원필경(桂苑筆耕)》20권이 《당서(唐書)》〈예문지(藝文志)〉에 실려 있습니다. 고려 현왕(顯王) 때에 설총과 최치원이 모두 우리나라의 문교(文敎)에 공이 있었다 하여 문묘(文廟) 서무(西廡)의 아래쪽에 배향하였는데, 지금까지도 배향되어 있습니다.

최충(崔冲)은 해주(海州) 사람입니다. 그는 풍모가 뛰어나고 기이하며 지조가 굳고 곧았습니다. 젊어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고 글도 잘 지었습니다. 고려 목왕(穆王) 때 문과에 급제하여 그 후 4대의 왕을 내리 섬겼습니다. 자질이 문무를 겸비하여 나가면 장수가 되고 들어오면 정승이 되었습니다.
현왕(顯王)이 나라를 중흥시키면서부터 전쟁은 겨우 그쳤으나 문교는 아직 펼 겨를이 없었는데, 최충이 후진들을 불러 모아 지성으로 가르치니 생도들이 문에 그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낙성재(樂聖齋)ㆍ대중재(大中齋)ㆍ성명재(誠明齋)ㆍ경업재(敬業齋)ㆍ조도재(造道齋)ㆍ솔성재(率性齋)ㆍ진덕재(進德齋)ㆍ대화재(大和齋)ㆍ대빙재(待聘齋)라는 9개의 재(齋)를 나누어 만들고 생도들을 수용하였습니다. 이를 ‘시중최공도(侍中崔公徒)’라 하였는데, 모든 과거에 응시할 사람들은 반드시 먼저 이 최공도에 예속되어 학업을 닦았습니다. 우리 동방에 학교가 생긴 것은 대개 최충으로부터 시작되었으므로 당시에 그를 ‘해동공자(海東孔子)’라 칭하였습니다. 뒤에 해주 사람들이 서원을 짓고 사우(祠宇)를 건립하여 그를 향사하고 있습니다.

안유(安裕)는 흥주(興州) 사람입니다.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첨의중찬(僉議中贊)에 제수되었습니다. 그는 사람됨이 장엄하고 정중하고 안온하고 자상하였으며, 일찍이 인재를 길러서 사문(斯文)을 흥기하여 회복시키는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학교의 제도가 크게 무너지고 유학(儒學)이 날로 쇠퇴해짐을 걱정하여 문교의 진흥을 위해 국학(國學)에다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해서 길이 인재 교양의 자본으로 삼았습니다. 또 남은 돈을 중국 강남(江南)에 보내어 공자 및 그의 제자 70명의 화상(畫像)을 그려 와 모셨고, 또 제기(祭器)ㆍ악기(樂器)와 육경(六經)ㆍ제자(諸子)ㆍ사서(史書) 등의 서적을 구입해 와서 비치하였습니다. 또 이산(李㦃)과 이진(李瑱)을 천거하여 교관(敎官)으로 삼으니, 경서를 펴 놓고 수업을 하는 생도가 수백 명에 이르렀습니다.
만년에는 회암(晦庵 주희) 선생의 진영(眞影)을 벽에 걸어 두고 경모의 뜻을 다하였으며, 회헌(晦軒)이라 자호하였습니다. 그가 죽자 칠관(七館)ㆍ십이도(十二徒)가 모두 소복을 입고 노제(路祭)를 지냈습니다. ‘문성(文成)’이란 시호를 내리고 문묘 서무(西廡)의 아래쪽에 배향하였으며, 후인들이 또 서원을 건립하였습니다.

우탁(禹倬)은 단산(丹山 단양(丹陽)) 사람입니다. 고려 충선왕(忠宣王) 때에 감찰규정(監察糾正)이 되었는데, 왕이 일찍이 덕망을 잃는 일이 있자 우탁이 흰옷에 도끼를 손에 쥐고 짚을 허리에 묶고 앉아서 왕에게 글을 올려 과감하게 간하였습니다. 뒤에 성균 좨주(成均祭酒)로 치사(致仕)하고 복주(福州 안동(安東))의 예안(禮安)에 물러가 살았습니다. 충숙왕(忠肅王)이 그의 충의(忠義)를 가상하게 여겨 두 번이나 불렀지만 나오지 않았습니다.
우탁은 경사에 통하였고 역학(易學)에는 더욱 깊이 통하였습니다. 정전(程傳)이 맨 처음 동방에 들어왔을 적에 아무도 그것을 아는 이가 없었는데, 우탁이 문을 닫고 한 달 남짓 연구한 끝에 그것을 해득하여 생도들에게 가르쳐 줌으로써 의리(義理)에 관한 학문이 비로소 행해졌습니다.

정몽주(鄭夢周)는 영일현(迎日縣) 사람입니다. 그는 사람됨이 지혜와 용기가 뛰어났고 충효의 큰 절개가 있었습니다. 젊어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열심히 공부하였고, 성리학을 정밀히 연구하여 깊이 터득한 바가 있었습니다. 당시 동방에 들어온 경서(經書)는 주자의 집주(集註)였는데, 몽주의 강설(講說)이 너무 탁월하여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현격하게 뛰어넘었으므로 듣는 이들이 자못 의심하였습니다. 그 후 호운봉(胡雲峯 호병문(胡炳文))의 《사서통해(四書通解)》를 얻어 본 결과 몽주의 강설이 그의 설과 모두 합치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선비들이 다 복종하여 그를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로 추앙하였습니다.
고려 말기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었는데, 이때는 국가에 변고가 많아 기밀(機密)한 정무가 대단히 번잡하였습니다. 그러나 몽주는 큰일에 대처하고 큰 의문을 결단함에 있어 언어와 안색을 조금도 동요함이 없이 좌우로 응답하여 모든 일을 다 타당하게 처리하였고 새로 설치한 것도 많았으므로, 당시에 제왕을 보좌할 만한 재목이라 일컬어졌습니다.
당시의 풍속은 상례와 제례에 있어 오로지 불교의 법을 숭상하였는데, 몽주가 비로소 사서인(士庶人)들로 하여금 주자의 《가례(家禮)》를 본받아 가묘(家廟)를 세워 조상의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습니다. 또 도성 안에 오부학당(五部學堂)을 건립하고, 밖으로는 전국에 걸쳐 향교를 설치하여 유술(儒術)을 진흥시켰습니다. 그 밖에 의창(義倉)을 세워 궁핍한 이들을 진휼하고, 수참(水站)을 설치하여 조운(漕運)에 편리하도록 한 것도 모두 그가 계획한 것입니다.
그가 저술한 시문(詩文)은 호방하고도 준엄하고 개결하였습니다. 문충(文忠)이란 시호가 내려졌고 문묘 서무의 아래쪽에 배향되었습니다. 후인이 또 서원을 세웠습니다.

이색(李穡)은 한주(韓州) 사람입니다. 그는 고려 말기에 원나라에 들어가 제과(制科)에 제2갑(第二甲)으로 입격(入格)하고 본국에 돌아와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천품이 명민하였으며 수많은 서적을 널리 열람하였는데, 시문을 짓는 데 있어서는 붓을 잡으면 즉시 써 내려가서 조금도 막힘이 없었습니다. 힘써 후학들을 진취시켜 사문(斯文)을 진흥시키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았기 때문에 학자들이 모두 우러러 사모하였습니다. 나라의 문한(文翰)을 수십 년 동안 관장하였는데, 누차 중국의 칭송을 받았습니다.

길재(吉再)는 선산(善山) 사람입니다. 고려 말기에 주서(注書)를 지냈는데, 지조가 고결하고 학문이 순정(醇正)하였습니다. 그가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가 있을 적에는 시골 사람들까지 그의 인품에 감화되어, 아무리 못난 사람일지라도 또한 자기 몸을 선으로 신칙(申飭)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국초에 누차 불렀으나 나오지 않고 자기 집에서 죽었습니다.

윤상(尹祥)은 경상도 예천(醴泉)의 군리(郡吏)였는데, 문과에 급제하고 강정왕(康靖王)을 섬겨 벼슬이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학문이 정밀하고 깊었으며, 지성으로 남을 가르쳐 근대 사유(師儒)의 으뜸이 되었습니다.

김종직(金宗直)은 경상도 선산부(善山府) 사람입니다. 강정왕을 섬겨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학문이 정밀하고 깊었으며 문장이 고상하고 고아하여 한 시대의 유종(儒宗)이 되었습니다. 또 후진들을 지성으로 가르쳐 전후의 명사(名士)가 그의 문하에서 많이 나왔으며, 점필재(佔畢齋) 선생이라고 일컬어졌습니다.

김굉필(金宏弼)은 황해도 서흥부(瑞興府) 사람입니다. 그는 뜻을 독실히 하고 행실에 힘썼으며, 예법으로 몸을 단속하되 시종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이학(理學)을 정밀히 연구하였고 지성으로 후진들을 가르쳤습니다. 강정왕 때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벼슬이 좌랑(佐郞)에 이르렀습니다. 공희왕(恭僖王 중종(中宗))께서 그에게 영의정(領議政)을 증직하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습니다.

정여창(鄭汝昌)은 경상도 함양군(咸陽郡) 사람으로, 벼슬은 현감(縣監)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옛 도(道)를 독실히 믿고 의(義)를 좋아하였으며, 학문은 실천하는 것을 위주로 하였습니다. 김굉필과 함께 점필재 선생을 사사(師事)하여 뜻이 서로 같고 도가 서로 합치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김정(金鄭)’이라 일컬었습니다. 일두(一蠹)라 자호하였습니다. 공희왕께서 우의정(右議政)을 증직하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는데, 그 후에 함양군 사람들이 서원을 세워 제사하고 있습니다.

조광조(趙光祖)는 한성부(漢城府) 사람입니다. 공희왕을 섬겨 벼슬은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천품이 순수하고 아름다웠으며, 행실은 옛사람보다 뛰어났습니다. 김굉필을 사사하여 믿음을 돈독히 하고 학문에 힘썼으며, 도술(道術)을 밝히고 인심(人心)을 선하게 하여 온 세상을 태평 시대로 인도하는 데 뜻이 있었으나, 불행하게도 일찍 죽었습니다.

김안국(金安國)은 경상도 의성현(義城縣) 사람입니다. 공희왕을 섬겨 벼슬이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습니다. 학문이 정밀하고 해박하여 선비들의 사범(師範)이 되었습니다. 호는 모재(慕齋) 선생이라 합니다.

이언적(李彦迪)은 경상도 경주(慶州) 사람입니다. 그는 성품이 침착하고 조용하고 단정하고 정성스러웠으며, 효도하고 우애하고 충직하고 신의가 있었습니다. 특히 성리학을 독실하게 좋아하여 조예가 매우 깊었습니다. 그가 공희왕ㆍ영정왕(榮靖王 인종(仁宗))ㆍ신훙왕(新薨王 명종(明宗))을 섬기면서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 나라 다스리는 모책을 진언한 실상은 그가 배운 것에 전혀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그가 논한 〈무극태극서(無極太極書)〉4, 5편은 정자와 주자의 오묘한 뜻에서 깨달은 것이 있다고 합니다.

서경덕(徐敬德)은 개성부(開城府) 사람입니다. 그는 화담(花潭)에 은거하며 성리학을 강론하여 밝혔는데, 수학(數學)에 더욱 정통하였습니다. 공희왕께서 누차 불렀으나 나오지 않고 집에서 일생을 마쳤습니다. 신훙왕께서 그에게 호조 좌랑(戶曹佐郞)을 증직하였습니다.

〇 본국의 8도(道) 중에 어느 도의 백성이 무슨 일을 익히는지, 예를 들면 선비가 많다든가 혹은 농부가 많다든가, 어떤 종류의 공예(工藝)가 많다든가 또는 어떤 종류의 장사꾼이 많다든가, 무슨 화물(貨物)이나 미포(米布)가 많이 난다든가, 또 요즘 백성들은 무슨 고통이 있으며, 혹은 부녀자들은 무슨 일을 익히고 있으며, 풍속과 교화는 어떠한지, 아무 곳과 아무 곳이 서로 다른 점 등을 하나하나 소상하게 기록하라.

본국은 모두 8도입니다. 경기(京畿)가 중앙에 위치해 있고, 동쪽은 강원도, 동남쪽은 경상도, 남쪽은 청홍도(淸洪道 충청도)와 전라도, 서쪽 맨 끝은 황해도, 서북쪽은 평안도, 동북쪽은 함경도입니다.
경(卿)이나 사(士)의 후손은 대대로 그 업을 지키는데, 이를 사족이라 합니다. 그들은 모두 시서(詩書)를 외고 익히는데 그것에 능하지 못한 사람은 무예를 익히기도 합니다. 서인의 자식 역시 글을 배우는 사람이 많고 혹은 무예를 익히기도 하는데, 이 가운데 하나도 능하지 못한 사람은 농사꾼이 되기도 하고 공장(工匠)이 되기도 합니다.
전라도ㆍ경상도ㆍ청홍도는 토지가 비옥하고, 민물(民物)이 번성하며 재부(財賦)가 많고 인재가 배출되는 것이 다른 도의 배나 됩니다. 평안도와 함경도는 기후가 춥고 기질이 강하여 풍속이 활 쏘고 말달리는 것을 숭상합니다. 8도가 대부분 바다를 끼고 있어 백성들은 어염(魚鹽)으로 생활을 영위하고 있고, 내륙 지방에 사는 백성들은 모두 농업에 힘쓰고 다른 업은 일삼지 않습니다.
공장(工匠)이 집기(什器)를 만들고 장사꾼이 재화(財貨)를 유통시키는 일이야 8도가 다 마찬가지이지만 도성 주위에 더욱 성행합니다. 물품을 사는 데 있어서는 금(金)ㆍ은(銀)ㆍ동(銅)ㆍ철(鐵)을 사용하지 않고 다만 사마(紗麻)와 속미(粟米)를 가지고 서로 교역하기 때문에 부녀자들은 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나 다 누에를 치고 베 짜는 것을 일삼으며, 천한 부녀자들은 심지어 농사일과 물 긷고 절구질하는 일 등에 종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조선이 개국한 이후 근 200년 동안 백성들이 생업에 편안히 종사해 왔고 전쟁으로 인한 걱정은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때로 수재나 한재를 만나기 때문에 괴로움이 없지는 않습니다.
도성 안에는 성균관(成均館)을 설치하고 또 사학(四學)을 설치했으며, 주(州)ㆍ부(府)ㆍ군(郡)ㆍ현(縣)에는 모두 향교를 설치하고 각각 사장(師長)을 두어 육행(六行)과 육예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선비들이 모두 예의에 흥기하고 있으니, 이 나라가 비록 작은 나라이기는 하지만 대대로 닦아 온 정사는 실상 황조(皇朝)의 풍속과 교화가 미친 것입니다.

〇 본국은 어떻게 선비를 취하며, 관원(官員)이 출신(出身)하는 길은 몇 가지나 있는가?

본국이 선비를 취함은 으레 자(子)ㆍ오(午)ㆍ묘(卯)ㆍ유(酉)년마다 대비(大比)하여 선비를 뽑는 중국의 예에 의거해서 시험을 실시하되, 문과의 경우는 사서삼경에 통한 자를 취한 다음 또 사장(詞章)을 시험하고, 무과의 경우는 무예를 시험하고 또 글을 강하게 하여 둘 다 3등으로 나눕니다. 그래서 문과는 33인을 취하고 무과는 28인을 취하는데, 이것을 식년출신(式年出身)이라 칭합니다. 또 시부(詩賦)와 경의(經義)로 선비를 취하는 것을 생원ㆍ진사라 하는데, 이들은 모두 200인을 뽑아 국학에 충원합니다. 만일 일시적인 왕의 은명(恩命)이 있어 특별히 문사나 무사를 취하는 경우는 이를 별시출신(別試出身)이라 합니다.
문음직(門蔭職)의 경우는 경대부의 자제로서 그 자질이 관리의 사무를 감당할 만한 자를 취하여 시의 적절하게 서용(敍用)합니다. 경학에 밝거나 행실이 훌륭하거나 효우(孝友)가 뛰어나거나 유일(遺逸)의 선비가 있을 경우에는 특별히 한계를 뛰어넘어 서용하고 있습니다. 기타 의(醫)ㆍ역(譯)ㆍ음양(陰陽) 등 방술(方術)에 대해서도 역시 과시를 설치하여 취하되 다만 본아문(本衙門)에만 서용합니다.


 

[주C-001]허국(許國) : 1527~1596. 명나라 휘주부(徽州府) 흡현(翕縣) 사람이다. 자는 유정(維楨),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예부상서 겸 동각태학사(禮部尙書兼東閣太學士) 등의 벼슬을 지냈다. 저서에 《문목문집》이 있다.
[주C-002]위시량(魏時亮) : 1529~1591. 명나라 남창(南昌) 사람이다. 자는 공보(工甫), 호는 경오(敬吾), 시호는 장정(庄靖)이다. 중서 사인(中書舍人), 남경대리승(南京大理丞) 등의 벼슬을 지냈다. 성리학을 연구하였으며, 저서에 《대유학수(大儒學粹)》가 있다.
[주D-001]주수(疇數) : 천하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 큰 법칙인 홍범구주(洪範九疇)를 말한다. 맨 처음 하우씨(夏禹氏)가 낙수(洛水)에서 나온 신귀(神龜)에게서 얻은 것인데, 이것이 대대로 전해져 기자(箕子)에 이르러 기자가 무왕(武王)의 물음에 대답한 이후로 세상에 알려졌다고 한다.
[주D-002]새의……하시고 : 노나라 때 해조(海鳥)가 노나라 교외(郊外)에 날아와 앉았다. 노나라 임금은 그 새를 모셔다가 종묘에서 잔치를 베풀고 순(舜) 임금의 음악인 구소(九韶)를 연주하고 소ㆍ양ㆍ돼지의 고기로 대접하니, 그 새는 어리둥절하여 근심하고 슬퍼하다가 3일 만에 죽었다고 한다. 《莊子 至樂》
[주D-003]최충헌(崔忠獻) : 1149~1219. 고려 시대 무신 정권기의 집권자이다. 초명은 난(鸞), 시호는 경성(景成)이다. 1196년(명종26)에 동생 최충수(崔忠粹), 생질 박진재(朴晉材) 등과 함께 권신 이의민(李義旼)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폐정 개혁을 위한 봉사십조(封事十條)를 왕에게 올렸다. 이듬해 왕의 측근을 몰아낸 후 최씨 무단 정권을 확립하였다.
[주D-004]곽거(郭巨)가……주었는데 : 후한(後漢)의 효자 곽거가 가난한 형편에도 노모를 극진히 봉양하였다. 마침 아내가 아들을 낳아 세 살이 되었을 때 노모가 항상 자기 밥을 덜어서 손자를 먹이곤 하였다. 그러자 곽거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가난해서 어버이 봉양을 제대로 할 수 없으니, 우리 함께 저 자식을 묻어 버립시다. 자식은 다시 얻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얻을 수 없소.” 하고, 아내와 함께 아이를 안고 가서 땅에 묻으려 하였다. 땅을 2척 남짓 파내려 가자 갑자기 황금이 가득한 가마솥〔金釜〕 하나가 나타났는데, 그 솥 위에 “하늘이 효자 곽거에게 내린 것이니, 관청에서도 빼앗을 수 없고 다른 사람이 취할 수 없다.”라고 쓰여 있었다. 그래서 아이 묻는 일을 중단하고 바로 돌아와서 어버이도 잘 봉양하고 아이도 잘 기를 수 있었다고 한다. 《太平御覽 卷411》
[주D-005]기거사인(起居舍人) : 임금을 시종하면서 임금의 언행을 기록하던 벼슬이다.
[주D-006]영락(永樂) : 1403년(태종3)부터 1424년까지 썼던 명나라 성조(成祖)의 연호이다.
[주D-007]박운□(朴云□) : 《성종실록(成宗實錄)》3년 2월 29일의 기사에는 박운(朴云)으로 되어 있다.
[주D-008]조광조(趙光祖) : 1482~1519.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벼슬은 부제학과 대사헌을 지냈다. 김종직(金宗直)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의 영수로서,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다가 훈구파(勳舊派) 남곤(南袞) 일파가 일으킨 기묘사화 때 죽임을 당하였다. 저서에 《정암집》이 있다.
[주D-009]계절이……법이다 : 《논어》 〈자한(子罕)〉에 나오는 말이다. 여기서는 어지러운 세상이 된 뒤에야 충신과 열사를 알 수 있다는 것을 비유하였다.
[주D-010]이색(李穡) : 1328~1396.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이다. 원나라에 가서 과거에 급제하고 귀국하여 우대언(右代言)과 대사성(大司成) 등의 벼슬을 지냈다.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문하에 권근(權近)과 변계량(卞季良) 등을 배출하여 학문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조선 개국 후 태조가 여러 번 불렀으나 절개를 지키고 나가지 않았다. 저서에 《목은시고(牧隱詩藁)》, 《목은문고(牧隱文藁)》 등이 있다.
[주D-011]홍무(洪武) : 1368년(고려 공민왕17)부터 1398년(조선 태조7)까지 썼던 명나라 태조(太祖)의 연호이다.
[주D-012]정통(正統) : 1436년(세종18)부터 1449년(세종31)까지 썼던 명나라 영종(英宗)의 연호이다.
[주D-013]팔조(八條) : ‘여덟 가지 가르침〔八條之敎〕’의 준말로, 기자(箕子)가 백성들을 가르치기 위해 제정한 법금(法禁)이다. 지금은 살인(殺人), 상해(傷害), 투도(偸盜) 등 세 가지만 전한다.
[주D-014]사군(四郡)ㆍ이부(二府) 시대 : 사군은 한 무제(漢武帝) 원봉(元封) 3년(B.C.108)에 위만조선(衛滿朝鮮)을 없애고 그 옛 땅에 설치한 낙랑ㆍ임둔ㆍ현도ㆍ진번의 네 군을 말하는데, 각 군에는 한나라의 군현제(郡縣制)에 따라 여러 속현(屬縣)이 각각 설치되었다. 이부는 한 소제(漢昭帝) 시원(始元) 5년(B.C.82)에 사군을 다시 합하여 평주(平州)ㆍ동부(東府) 두 도독부(都督府)로 만든 것을 말한다.
[주D-015]뜻은……몰랐습니다 : 공자가 진(陳)나라에 있을 때 말하기를 “우리 고을의 제자들은 뜻은 크나 일에는 소략하여 찬란히 문장을 이루었을 뿐 그것을 마름질할 줄 모르도다.〔吾黨之小子狂簡 斐然成章 不知所以裁之〕” 하였다. 《論語 公冶長》
[주D-016]기자(箕子)의……설(說) : 채원정(蔡元定)은 호는 서산(西山), 자는 계통(季通)으로, 당시 사람들이 잘 모르는 홍범(洪範)의 수(數)에 대하여 홀로 깨닫고 있었으나 미처 논저(論著)를 못하고 이르기를 “내 뒤를 이어 내 학설을 완성시킬 사람은 내 아들 침(沈)일 것이다.” 하였다. 주희 역시 늘그막에 《서경》의 전(傳)을 쓰려다가 쓰지 못하고 제자이자 사위인 채침에게 부탁하였다. 채침은 자는 중묵(仲墨), 호는 구봉(九峯)으로, 아버지와 스승의 뜻을 받들어 《홍범황극내편(洪範皇極內篇)》과 《서경집전(書經集傳)》을 저술하였다.
[주D-017]원락자(苑洛子)의 발명(發明) : 원락자는 명나라 한방기(韓邦奇)의 호이다. 발명은 곧 한방기가 저술한 《홍범도해(洪範圖解)》를 가리킨다. 《欽定續通志 卷165》
[주D-018]이순(李純) :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덕산(德山), 자는 희문(希文)이다. 벼슬은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 봉상시 정(奉常寺正), 여주 목사(麗州牧使) 등을 지냈다.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저서에 《홍범황극내편보해(洪範皇極內篇補解)》, 《서정록(西征錄)》 등이 있다.
[주D-019]광계(光啓) : 885년(신라 헌강왕11)부터 887년까지 썼던 당나라 희종(僖宗)의 연호이다.
[주D-020]칠관(七館)ㆍ십이도(十二徒) : 칠관은 고려 때 국학(國學)에 설치된 이택(麗擇)ㆍ대빙(待聘)ㆍ경덕(經德)ㆍ구인(求仁)ㆍ복응(服膺)ㆍ양정(養正)ㆍ강예(講藝)의 일곱 가지 분과(分科)의 관(館)을 말하고, 십이도는 고려 때 개경(開京)에 있었던 12사학(私學), 즉 문헌공도(文憲公徒)ㆍ홍문공도(弘文公徒)ㆍ광헌공도(匡憲公徒)ㆍ남산도(南山徒)ㆍ서원도(西園徒)ㆍ문충공도(文忠公徒)ㆍ양신공도(良愼公徒)ㆍ정경공도(貞敬公徒)ㆍ충평공도(忠平公徒)ㆍ정헌공도(貞憲公徒)ㆍ서시랑도(徐侍郞徒)ㆍ귀산도(龜山徒)를 가리킨다.
[주D-021]정전(程傳) : 《주역》에 대해 정자가 해석해 놓은 전(傳)을 말한다.
[주D-022]강정왕(康靖王) : 성종(成宗)의 시호이다. 윤상(尹祥 : 1373~1455)은 1396년(태조5) 문과에 급제한 뒤 예조 정랑, 성균관 사예, 대사성, 예문관 제학 등의 벼슬을 지내며, 특히 세종대에 성균관 교육에 종사함으로써 왕조 초기의 중앙 학계에 성리학의 기운을 진작ㆍ유지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윤상의 이런 생애와 연관 지어 본다면 원문의 ‘강정왕’은 세종의 시호인 ‘장헌왕(莊憲王)’이 되어야 할 듯하다.
[주D-023]대비(大比) : 3년마다 현능(賢能)한 사람을 등용하는 시험 방법을 말한다. 《주례(周禮)》 〈지관(地官) 향대부(鄕大夫)〉에 “3년이 되면 크게 과거를 보여 그 덕행과 도예(道藝)를 고사하여 현능한 자를 일으킨다.” 하였다. 3년마다 한 번씩 과거 보이는 것을 대비과(大比科)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자(子)ㆍ오(午)ㆍ묘(卯)ㆍ유(酉)년에 실행하고 식년과(式年科)라 하였다. 《大典會通 禮典 諸科》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5권
 경상도(慶尙道)
풍기군(豐基郡)


동쪽으로 영천군(榮川郡) 경계에 이르기까지 14리, 남쪽으로 예천군(醴泉郡) 경계에 이르기까지 51리, 서쪽으로 충청도 단양군(丹陽郡) 경계에 이르기까지 24리, 북쪽으로 충청도 영춘현(永春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69리, 서울에서의 거리는 4백 10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의 기목진(基木鎭)이다. 고려 초에는 기주(基州)라 부르다가 현종(顯宗)이 길주(吉州)에 귀속시키고, 명종(明宗)이 감무(監務)를 두더니 뒤에 안동부(安東府)에 다시 귀속시키고, 공양왕(恭讓王)이 다시 감무를 두어 안동부의 속현(屬縣) 은풍(殷豐)을 예속시켰다. 본조에서는 기천 현감(基川縣監)으로 고쳤는데, 뒤에 문종(文宗)의 태(胎)를 은풍현(殷豐縣)에 안치하게 되자 마침내 두 현(縣)의 이름을 따서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군(郡)으로 승격시켰다.
【속현】 은풍현(殷豐縣) 본래 신라의 적아현(赤牙縣)이다. 경덕왕(景德王)이 은정(殷正)이라 고치고, 예천군(醴泉郡)의 영현(領縣)으로 하였다. 고려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현종(顯宗)은 안동부에 귀속시켰는데, 공양왕(恭讓王) 때 본군(本郡)에 이속(移屬)시켰다. 별명은 은산(殷山)이다. 군 서남쪽 37리에 있다.
【관원】 군수(郡守)ㆍ훈도(訓導) 각 1인.
【군명】 기목(基木)ㆍ기주ㆍ기천(基川)ㆍ영정(永定)ㆍ안정(安定).
【성씨】 본군 정(鄭)ㆍ안(安)ㆍ피(皮)ㆍ방(邦)ㆍ음(陰)ㆍ진(秦)ㆍ신(辛), 김(金) 영월(寧越)ㆍ삼척(三陟). 이(李) 평창(平昌). 최(崔) 흥해(興海) 배(裵) 성주(星州). 은풍(殷豐) 오(吳)ㆍ박(朴), 전(全) 김(金)이라 하기도 한다. 신(申). 순흥(順興) 안(安)ㆍ신(申)ㆍ이(李)ㆍ윤(尹), 석(石) 촌성(村姓)이다. 김(金)ㆍ정(鄭) 모두 내성(來姓)이다.
【풍속】 풍속은 강하고 사나움을 숭상한다 관풍안(觀風案). 백성은 경상(耕桑)을 즐겨한다. 이선(李宣)의 시.
【형승】 산천이 수려하다 김효정(金孝貞)의 시.
【산천】 죽령(竹嶺) 군 서쪽 24리에 있는데, 신라 아달라왕(阿達羅王) 5년에 처음으로 길을 열었다. 소백산(小白山) 순흥현(順興縣)에 있다. 군에서의 거리는 32리이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소백산이 태백산에 이어져, 서리서리 백 리(百里)나 구름 속에 꽂혀 있네. 분명히 동남계(東南界)를 모두 구획하였으니, 하늘ㆍ땅이 이루어져 귀신은 인색을 깨쳤네.” 하였다. 명봉산(鳴鳳山) 은풍현(殷豐縣) 서쪽 16리에 있으며, 본조 문종(文宗)의 태(胎)를 안치했다. 여현(礪峴) 군 남쪽 14리에 있다. 골리현(骨里峴) 군 서쪽 12리에 있다. 경원봉(慶元峯) 소백산(小白山)에 있다. 군에서 북쪽으로 22리 떨어져 있으며 고려 충숙왕(忠肅王)의 태(胎)를 안치했다. 윤암봉(輪庵峯) 소백산에 있다. 군에서 북쪽으로 32리에 있으며, 본조 소헌왕후(昭憲王后)의 태를 안치했다. 초암동(草庵洞) 소백산에 있다. 군에서 북쪽으로 45리 떨어져 있으며 고려 충렬왕(忠烈王)의 태를 안치했다. 욱금동(郁錦洞) 소백산에 있다. 군에서 북쪽으로 13리 떨어져 있으며, 고려 충목왕(忠穆王)의 태를 안치했다. 양곡동(陽谷洞) 순흥부(順興府)에 있다. 군에서 북쪽으로 15리 떨어져 있다. 죽계(竹溪) 순흥부에 있다. 군에서 북쪽으로 23리 떨어져 있다. ○ 이색(李穡)의 안 시어(安侍御)를 전송하여 지은 시(詩)의 서(序)에, “순흥 안씨(順興安氏)는 세세로 죽계(竹溪) 가에 살았다. 죽계의 근원은 태백산(太白山)에서 나온다. 산이 크고 물이 멀리 흐르듯, 안씨의 흥성함도 끝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남천(南川) 군 남쪽 1리에 있다. 그 근원은 죽령(竹嶺)에서 나온다. 북천(北川) 군 북쪽 3리에 있다. 그 근원은 욱금동(郁錦洞)에서 나온다. ○ 이상 두 물(남천(南川) 북천(北川))은 군 동쪽 3리에 이르러 합류되어 영천군(榮川郡)의 임천(臨川)에 들어간다. 순흥(順興)의 동천(東川) 하나는 부(府)의 동쪽 1리에 있고, 하나는 부의 동쪽 10리에 있으니, 그 근원은 모두 소백산(小白山)에서 나와 부의 동쪽 13리에 이르러 남ㆍ북의 두 개울이 합친다. 은풍(殷豐)의 동천(東川) 현(縣) 동쪽 20보(步)에 있으며, 그 근원은 골리현(骨里峴)에서 나온다. 서천(西川) 현 서쪽 10리에 있으며, 그 근원은 명봉산(鳴鳳山)에서 나오는데, 현 남쪽 8리에 이르러 동천(東川)과 합류되어 예천군(醴泉郡)의 양천(襄川)이 된다. 『신증』 도솔성산(兜率城山) 죽령 아래 있다. 부로성산(夫老城山) 은풍현에 있는데 봉우리 위에 못이 있다.
【토산】 수정석(水精石) 양곡동(陽谷洞)에서 난다 ㆍ인삼(人蔘)ㆍ잣[海松子]ㆍ지치[紫草]ㆍ왕골[莞草]ㆍ꿀[蜂蜜]ㆍ송이[松蕈]ㆍ석이버섯[石蕈]ㆍ닥종이[楮]ㆍ은어[銀口魚].
【봉수】 죽령(竹嶺) 봉수 서쪽으로는 충청도 단양군(丹陽郡) 소이산(所伊山)에 응하고, 동쪽으로는 망전산에 응한다. 망전산(望前山) 봉수 군 남쪽 8리에 있으니, 동쪽으로는 영천군(榮川郡) 성내산(城內山)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죽령에 응한다.
『신증』 【누정】 제운루(齊雲樓) 객관(客館)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鄕校) 군 북쪽 7리에 있다.
【역원】 창락역(昌樂驛) 옛날 순흥(順興)의 땅으로, 군 서쪽 13리에 있다. 승(丞)이 있다. 본도의 속역(屬驛)이 아홉이니 즉 평은(平恩)ㆍ창보(昌保)ㆍ옹천(甕泉)ㆍ유동(幽洞)ㆍ통명(通明)ㆍ안교(安郊)ㆍ도심(道深)ㆍ죽동(竹洞)ㆍ선안(宣安)이다. ○ 승(丞) 1인. 죽동역(竹洞驛) 군 동쪽 19리에 있다. 남원(南院) 군 남쪽 2리에 있다. 산요원(山腰院) 군 서쪽 20리에 있다. 창락역(昌樂驛)의 남원(南院) 군 서쪽 11리에 있다. 순지원(蓴池院) 군 동쪽 10리에 있다. 인빈원(寅賓院) 군 남쪽 27리에 있다.
【불우】 용천사(龍泉寺) 군 북쪽 7리에 있다. ○ 고려 태조(太祖)의 화상[眞]이 문경(聞慶) 가은현(加恩縣) 양산사(陽山寺)에 있었는데, 신우(辛禑 폐왕 우(廢王禑)) 5년에 왜구(倭寇)를 피해서 이곳으로 옮겼다. 성혈사(聖穴寺)ㆍ초암(草庵) 모두 소백산이 있다. 쌍악사(雙岳寺) 은풍현 경청산(警淸山)에 있다. 양지사(陽地寺) 죽령 아래에 있다.
【사묘】 사직단 군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군 서쪽 3리에 있다. 여단 군 북쪽에 있다.
【고적】 순흥폐부(順興廢府) 본래 고구려 급벌산군(及伐山郡)이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급산군(岌山郡)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는 흥주(興州)로 고치고, 성종(成宗) 때에는 순정이라 일컬었으며, 현종(顯宗)은 안동부(安東府)에 귀속시켰다가 뒤에 순안현(順安縣)으로 이속시키고, 명종(明宗)은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충렬왕(忠烈王)의 태(胎)를 안치하여 흥녕 현령(興寧縣令)으로 고치고, 충숙왕(忠肅王)의 태를 또 안치하여 지흥주사(知興州事)로 승격시켰으며, 충목왕(忠穆王)의 태를 또 안치하여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부(府)로 승격시켰다. 본조에 와서, 태종(太宗)은 도호부(都護府)로 고치고, 세조(世祖) 임금 때, 부사(府使) 이보흠(李甫欽)이 수인(囚人)들에게 협박되어 난리를 꾀했다 해서, 본군(本郡)에 혁속(革屬)시키고 마아령(麻兒嶺)의 개울 동쪽의 땅은 이를 잘라 영천(榮川)에 귀속시키고, 문수산(文殊山) 개울 동쪽의 땅은 이를 봉화(奉化)에 귀속시켰다. 읍성(邑城)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19척이며 높이가 6척이다. 군에서의 거리는 북쪽으로 22리이다. 인풍현(隣豐縣) 김부식이 말하기를, “본래 고구려 이벌지현(伊伐支縣)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바꾸고 급산군(岌山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하였는데, 지금은 자세하지 않다. 등항성(登降城) 군 서쪽 5리에 있다. 속담에 전하기를, “고려 태조(太祖)가 남정(南征)했을 때, 이 현(縣)에 7일 동안 머물렀는데, 백제의 항서(降書)가 이르렀으므로 드디어 주필(駐蹕)했던 곳을 등항성(登降城)이라 이름지었다.” 한다. 상을곡성(上乙谷城) 은풍현(殷豐縣) 남쪽 34리에 있다. 둘레 9백 80보(步), 높이 5척인데, 안에 10개의 샘과 1개의 개울이 있다. 소백산고성(小白山古城) 산꼭대기에 옛 석성(石城)이 있다. 둘레 1천 4백 28척이다. 감곡부곡(甘谷部曲)ㆍ대룡산부곡(大龍山部曲)ㆍ임곡소(林谷所) 모두 순흥부(順興府) 조에 있다. 숙수사(宿水寺) 소백산(小白山)에 있다. ○ 노여(魯璵)의 시에, “가벼운 옷차림으로 그윽한 경치 찾았더니, 난초의 뜰은 10년 전의 모습이어라. 벽의 값어치는 몇 년간 시와 함께 비싸고, 절의 이름은 천고에 물과 더불어 흐르누나. 추위가 산 빛을 미니 스님은 문을 닫고, 차가움이 개울 소리를 누르니 손님은 누대에 오르도다. 휘바람 불며 서성거리니 어느덧 날은 저물며, 난간에 기대어 고개 돌리면 고향 생각 나누나.” 하였다. 경원사(慶元寺) 소백산(小白山)에 있다.
봉서루(鳳棲樓) 순흥부(順興府)에 있었는데 지금은 황폐되었다. ○ 안축(安軸)의 기(記)에, “나라의 동남쪽에는 본래 산은 하나인데 고개[嶺]는 세 개이니, 태백(太白)ㆍ소백(小白)ㆍ죽령(竹嶺)이 그것이다. 영남(嶺南)에 뿌리박은 첫째 고을은 바로 우리 흥주(興州)이다. 주(州)에서 동쪽으로 가면 황폐하고 편벽된 부락이 나오고, 주에서 똑바로 북쪽으로 가면 태백이 나오며, 북쪽에서 약간 서쪽으로 꺾여 가면 소백이 나오는데 큰 길은 하나도 없고, 주에서 서쪽으로 가면 죽령이 나오는데 서울로 가는 길이고, 주에서 남쪽으로 가면 길이 갈려서 동남의 여러 읍으로 통하게 된다. 고을의 형세가 이러하기 때문에 나그네들이 출입하는 것은 동ㆍ북쪽으로는 없고 모두 서ㆍ남쪽뿐이다. 옛적에 이곳에 고을을 설치하였을 때 오직 서ㆍ남쪽에만 후정(候亭)을 세운 것은 고을의 형세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서정(西亭)은 다만 서울에서 남쪽으로 가는 이들이 왕왕 지나칠 뿐이지만, 남정(南亭)은 서쪽에서 남쪽으로 가는 이도 이리로 나가고, 남쪽에서 서울 가는 이도 이리로 들어온다. 남쪽의 여러 주에서 임금의 명을 가지고 일을 독려하는 사신은 이리로 들어오지 다른 데로 가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공적인 손님이나 사적인 나그네들을 전송하는 일이 없는 날이 없다. 고을 사람들이 서정을 가벼이 보고 남정을 무겁게 보는 것도 또한 사리가 그러한 것이다. 정자는 주의 남쪽 5ㆍ6리쯤 되는 곳에 있다. 북쪽으로는 영험한 산악을 바라보고, 남쪽으로는 무성한 수림을 마주보며, 동쪽으로는 푸른 개울에 닿고, 서쪽으로는 너른 들을 누르고 있는 것이 이것이다. 우리 주에서는 누대(樓臺)의 이름이 대대로 내려오는 것이 많다. 모두 산에 바짝 붙고 깊은 절벽에 있다. 그것이 이름난 것은 아마 산 높고 물 맑기 때문일 것이다. 저처럼 산에 바짝 붙고 깊은 절벽에 있어 비록 맑고 그윽한 멋이 있다고는 하지만, 바라보이는 산은 한두어 번 겹친 것에 지나지 않고, 바라보이는 물은 한두어 번 굽이진 것에 지나지 않아, 두루 바라보더라도 하나의 동굴, 하나의 구렁에 지나지 않으니, 이것은 한 줌의 산, 한 움큼의 물을 얻은 것일 뿐이다. 만약 남쪽으로 가서 이 누정에 오르면, 높은 것으로는 만층으로 깎아지른 정상을 쳐다볼 수 있고, 먼 것으로는 천 겹으로 겹친 봉우리를 바라볼 수 있다. 이상한 바위들이 우뚝우뚝 하고, 수많은 골짝들이 빙빙 돌고 있으며, 구름의 변화 안개의 엉김이 천태만상이라, 이를 피해서 숨을 수 없다. 게다가 개울 물은 백 갈래로 흐르면서 소용돌이 치고 폭포로 날다가, 산 아래에 모여들면 사납던 형세는 늦추어지고 시끄럽던 소리는 조용해진다. 누정 아래에 이르러서는 깊게 가라앉은 물이 느릿느릿 십여 리나 흐른다. 여울의 조잘거리는 소리가 들을 만하고, 돌맹이의 잘다람이 사랑할 만하니 산수(山水)의 크기[大]가 이에서 완비되는 것이다. 해마다 2월이면 농사를 시작한다. 남쪽 밭에 가는 사람들은 누정 아래를 끼고 다니고, 서쪽 들로 나가는 사람은 누정 밖에 줄짓는다. 도랑을 파면 빗물이 소용 없고, 가래를 매면 구름을 기다릴 것 없다. 이 누정은 오직 산수의 아름다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농사 짓은 풍경을 보는 즐거움도 가졌다. 내가 고을 사람이 되기 때문에 결발(結髮)했을 때 놀던 곳이다. 관직에 있는 동안 언제나 남쪽을 바라보면서 그리워했었다. 작년 봄에 사한(史翰)을 파(罷)하고 한가한 시간을 얻어 어머님을 찾아뵙게 되었다. 고향에서 놀면서 이 누정에 여러 차례 올랐으나 기울어 있는 채 오랫동안 수리되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이가 나에게 말하기를, ‘이 누정은 산수(山水)에서 그 위대함을 얻었거늘 사람들에게 버림당하여 거의 부수어 질 것 같소. 그런데 저 깊은 절벽에 왜소한 것은 오히려 사람들이 받아들이니, 이것이 괴이하지 않소.’ 하였다. 나는 대답하기를, ‘사람의 마음은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오, 마음이 큰 이는 그 위대함을 보고 그 왜소함을 알지만, 마음이 작은 사람은 왜소한 것에 매여서 위대한 것을 잊소. 옛날에 공자는 동산(東山)에 오르고는 노(魯) 나라가 왜소하다고 했고, 태산(泰山)에 오르고는 천하(天下)가 왜소하다고 했소. 세상 사람들은 천 길되는 산은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조그만 석가산은 귀하다 하고, 만경창파는 사랑하지 아니하고 마당의 연못은 사랑하오. 이로써 보건대 사람이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취하는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오. 이 누정은 눈을 들어 멀리 보면 아름다운 산과 물이요, 머리을 숙여 내려다 보면 언덕의 풀과 흙이요, 다락이 버림받은 것은 다락의 죄가 아니요, 이를 보는 사람이 작기 때문이니, 만약 마음이 큰 사람이 이 고을을 맡아 이 누정에 오른다면 또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지 않으리란 것을 어찌 알겠소. 더구나 사물의 이치는 성패에 때가 있는 법이니, 이 누정은 마땅히 다시 새로워질 날이 있을 것인데, 무엇 때문에 다시 부서질 것을 근심하겠소.’ 하였다. 얼마 뒤에 직랑(直郞) 채상(蔡祥)공이 우리 주(州)로 하명되었단 것을 들고, 나는 이 누정에 대해 커다란 바람을 가졌다. 내가 서울로 돌아갔을 때, 채(蔡)공은 고을에 도착했다. 그는 이 누정에 올라보고 과연 산수를 보고 즐거워했으나 누정의 퇴락함을 보고는 탄식했다. 그리하여 장인에게 명하여 다시 지어 새롭게 하였으니, 규모가 크고 채색이 고왔다. 대개 영남에 있는 누대(樓臺) 가운데 이와 훌륭함을 견줄 것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또 백성 한 집을 보내어 지키게 함으로써 장구한 계책을 도모했으니, 저 조잡하고 소홀하게 금방 만들었다가 금방 부서지는 것과 같은 자리에 놓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누정이 완공 된 뒤, 공은 손님이 오면 곧 이 누정에 올라 마중했다. 남쪽 손님으로 탁한 안개에 곤란받던 사람은, 이 누정에 올라 산을 바라보면 높이 들리고 구름이 나는 상상을 맛볼 것이고, 물가에 나가면 무우에서 바람쐬고 기수에서 목욕하는 즐거움이 생길 것이다. 공은 혹 농사철을 당하면 관청의 사무를 일찍이 파하고 이 누정에 올라 매일 농사를 살피며, 일의 빠르고 늦음, 부지럼함과 게으름을 책하고 캐물어 상벌(賞罰)을 내렸으므로 백성들은 모두 스스로 권면하여 서로 앞다투어 늦은 자는 빨리하고 게으른 자는 부지런하게 되었다. 이때로부터 관아에는 예절을 책하는 손님이 없게 되고, 들에는 생업을 잃은 농민이 없게 되었으니, 아전은 이로써 편안하게 되고 연사(年事)는 이로써 풍성하게 되었다. 모두가 공의 선사요 누정의 공덕이다. 나는 이 누정이 다시 새롭게 되었다 함을 듣고, 산수(山水)가 알아주는 사람을 얻은 것을 치하하며, 내 바람이 어긋나지 않았음을 기뻐하는 마음으로 이 기(記)를 부친다.” 하였다.
【명환】 고려 최재(崔宰) 충목왕(忠穆王) 초에 지흥주(知興州)로 나갔다. 백성에게 편리를 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시행하였다. 전적(田籍)이 오래되어 어지러워졌으므로 재(宰)는 이를 개수하면서, 구본(舊本)도 여전히 놓아두고서 대질하였다. 소문을 들은 사람은 탄복했으나 국권(國權)을 담당한 자는 이를 꺼려서 교체시켜버렸다. 최운해(崔雲海) 신우(辛禑) 때 순흥 부사(順興府使)에 제수되었다. 당시 왜적이 객관(客館)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운해는 이와 더불어 싸웠는데, 노획한 마소와 재물들을 곧 사졸(士卒)과 주민(州民)에게 나누어주었다. 싸움에서 크게 이겨 경내가 편안하게 되었다.
【인물】 고려 안유(安裕) 흥주(興州) 사람이다. 뒤의 이름(즉 안향(安珦))은 우리(조선(朝鮮)) 문종(文宗)의 휘(諱)에 저촉되므로 처음 이름을 쓴 것이다. 원종(元宗) 초에 과거에 급제했다. 일찍이 충선왕(忠宣王)을 좇아 원 나라에 갔는데, 원 나라의 승상(丞相)이 전지(傳旨)하기를, “너희 임금은 어찌하여 우리 공주(公主)와 가까이하지 않는가.”하였다. 유가 말하기를, “안방의 일이야 외신(外臣)이 알 수 없는 것이오. 오늘 이것을 가지고 질문하니, 들을 가치가 없지 않겠소.” 하였다. 승상이 이로써 아뢰니, 황제(皇帝 원제(元帝))가 이르기를, “이 사람은 대체(大體)를 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먼 나라 사람으로 볼 것인가.”하고서 다시 묻지 아니하였다. 벼슬은 중찬(中贊)에까지 이르렀다. 학교(學校)가 날로 쇠퇴하는 것을 근심하여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할 것을 건의했고, 또 그의 노비[藏獲]를 들였다. 문장(文章)이 맑고 힘차서 볼 만했으며, 또 감식(鑒識)하는 안목이 있었다. 만년에는 항상 회암(晦菴 주희(朱喜)) 선생의 화상을 걸어 두고 경모(景慕)하다가 드디어 회헌(晦軒)이라는 호(號)를 썼다. 충숙왕(忠肅王) 6년에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으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안우기(安于器) 유(裕)의 아들이며 벼슬은 검교찬성사(檢校贊成事)에 이르렀다. 안목(安牧) 우기(于器)의 아들이며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까지 이르렀다. 안원숭(安元崇) 목(牧)의 아들이며 급제하여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렀다. 안축(安軸) 충숙왕(忠肅王) 11년에 원 나라의 제과(制科)에 급제, 요양로(遼陽路) 개주(蓋州) 판관(判官)에 제수되었다. 당시 충숙왕(忠肅王)은 원 나라에 잡혀 있었다. 동지들에게 말하기를, “임금이 근심하면 신하는 욕을 당하고,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음을 당하는 것이요.”라 하고는 상서(上書)하여 송사하였다. 임금은 이를 가상히 여겨 성균관 악정(成均館樂正)으로 올려 제수하였다. 한때 표전(表箋)ㆍ사명(詞命)이 대부분 그의 손에서 나왔다. 상주(尙州)에 목사(牧使)로 나가 있을 때 어머니는 흥녕(興寧)에 있었는데 왕래하면서 효도를 다했다. 벼슬은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흥녕군(興寧君)에까지 이르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저서로 《관동와주집(關東瓦注集)》이 있다. 안보(安輔) 축(軸)의 아우이다. 충목왕(忠穆王) 원년에 원 나라의 제과(制科)에 급제, 요양행 중서성(遼陽行中書省) 조마(照磨)에 제수되었다. 보는 말하기를, “수명(授命)하고도 공직(供職)하지 않는 것은 불공(不恭)스럽다. 더구나 조마(照磨)란 단지 문서(文書)를 수장(收掌)하는 것이며 다른 일이 없으니, 내 마땅히 성(省)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하였다. 상관(上官)ㆍ성관(省官)은 그의 재주를 중히 여겨 예우하였다. 보가 말하기를, “내가 이제 책무는 다하였다. 어머니가 늙으셨으니 돌아가 봉양하지 않는다면 효가 아니다.” 하고, 이에 벼슬을 버리고 나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늙었다는 이유로 귀향하여 봉양하기를 청하여 뒤에 동경(東京) 유수(留守)가 되었다. 생산(生産 치부(治富))에 마음 쓰지 아니하여, 죽고 나자 집에는 곡식 한 섬의 저축도 없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안종원(安宗源) 축(軸)의 아들이다. 나이 17세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충목왕 때 사한(史翰)으로 선보(選補)되었다, 질(秩)이 차서 옮기게 되었는데 동료 심동로(沈東老)가 나이는 많은데 위계가 아래였으므로 종원이 양보했다. 축(軸)은 이를 듣고 기뻐하면서, “도덕이 앞선 이에게 양보한 것이다. 이쪽에서 남에게 양보했으니 누가 이쪽을 버릴 것인가. 우리 집안에 사람다운 사람이 있으니 번창할 것이다.” 하였다. 신돈(辛旽)이 천권(擅權)할 때, 사대부들이 다투어 붙었다. 집정(執政)에게 붙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자네를 영상(領相)에게 천거하면 간관(諫官)을 얻을 수 있을 것일세.” 하니, 종원은 사양하면서, “내 본래 게을러서 남에게 붙는 일은 내 재주가 아닐세.”라고 말했다. 집정은 이에 대해 부끄럽게 여겼다. 벼슬은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본조 안천보(安天保) 태종(太宗) 때의 사람이다. 벼슬은 영돈녕부사(領頓寧府事)에 이르렀다. 바로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외구(外舅)이다. 안원(安瑗) 원숭(元崇)의 아들이다. 벼슬은 유후(留後)에 이르렀다. 시호는 경질(景質)이다. 안경공(安景恭) 종원(宗源)의 아들이다. 태조(太祖)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이었으며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에 봉하였고, 시호는 양도(良度)이다. 안순(安純) 경공(景恭)의 아들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중추겸 판호조(判中樞兼判戶曹)에 이르렀다. 치사(致仕)하고 물러나서 금천별서(衿川別墅)에 살았다.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그에게 가서 물었다. 시호는 정숙(靖肅)이다. 안숭선(安崇善) 순(純)의 아들이다. 경자과(庚子科)에 장원(壯元)했다. 벼슬은 의정부 좌참찬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신증』 안침(安琛)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判書)에 이르렀다. 아들 처선(處善)ㆍ처성(處誠)은 모두 과거에 급제했으나 일찍 죽었다.
【효자】 본조 권득평(權得平) 임오년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그 아버지가 실명(失明)하였으므로 출입할 때 언제나 부축했으며, 음식은 반드시 몸소 받들었다. 양친이 4일 간격을 두고 모두 죽었는데 3년 동안 여막(廬幕)에 거처하면서 몸소 조석(朝夕)의 전(奠)을 올렸다. 대상(大祥)을 지낸 뒤 다시 어머니를 위해서 재최(齊衰) 3년을 입었으며, 가묘(家廟)를 짓고 조석의 전을 폐하지 않았다. 출입할 때는 항상 인사를 드렸다. 홍치(弘治) 기미년에 이 일이 알려져 정려(旌閭)되었다.
【제영】 한한오묘상(閑閑五畝桑) 정재(鄭載)의 시에, “넘실넘실하는 남쪽 개울의 물, 널찍널찍한 다섯 이랑의 뽕이로다.” 하였다. 황량고루의연재(荒涼古壘依然在) 강희맹의 시에, “사람은 누정에 기대었고 대자리는 비었으니, 달 밝은 밤의 피리 바람을 막지 못하누나. 황량한 옛 보루는 의연히 있는데, 기억하는가. 닭 잡고 오리 잡던 공적을.” 하였다. 방산민십실(傍山民十室) 조원(曹瑗)의 시에, “산 옆에는 민가 열 채, 다만 아는 것은 농사일 뿐.”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본래 신라의 대매(代買)이다.
【방면】 동부(東部) 읍으로부터 끝은 15리이다. 서부(西部) 읍으로부터 끝은 20리이다. 동촌(東村) 읍으로부터 끝이 20리이다. 생고개(生古介) 남쪽으로 처음은 5리이고, 끝은 15리이다. 와룡동(臥龍洞) 서남쪽으로 처음은 5리이고, 끝은 15리이다. 보좌리(普佐里) 남쪽으로 처음은 15리이고, 끝은 50리이다. 상리(上里) 서쪽으로 처음은 15리이고, 끝은 60리이다. 하리(下里) 서남쪽으로 처음은 25리이고, 끝은 50리이다.
【성지】 도솔산고성(兜率山古城) 죽령(竹嶺) 아래에 있다. 부로산고성(夫老山古城) 유지(遺址)가 있다. 등항성(登降城) 서남쪽으로 5리이다. 어름성(於凜城) 빙성(氷城)이라고도 하며 은풍(殷豐) 고현(古縣)에 있는데, 남쪽으로 30리이다. 둘레는 9백 80보이고, 10개의 샘과 한 개의 시내가 있다.
【창고】 읍창(邑倉)ㆍ은풍창(殷豐倉) 고현(古縣)에 있다.


홍재전서 제163권
 일득록(日得錄) 3
문학(文學) 3


하교하기를, “학문(學問)과 사공(事功)은 두 가지 일이 아니다. 사공으로 자임(自任)했던 옛사람이 어찌 일찍이 궁리(窮理)와 격물(格物) 공부를 버려두고 잡히지도 않는 막연한 일에 힘을 쓴 적이 있었던가. 크건 작건 모든 일에는 이치가 있게 마련이니, 격물 궁리하여 이 이치를 터득하여 사공에 드러내어야만 한다. 그렇게 해야 막히거나 제약받는 병통이 없어서 어떤 일이라도 거침없이 처리할 수 있게 된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마음은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니,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느라고 엉뚱한 대답을 한다’는 것은 주 부자(朱夫子)의 훌륭한 비유이다. 또 내가 장획(長畫)으로 활을 쏠 때의 일을 가지고 증험하건대, 마음이 정일해야만 쏘는 대로 명중시키게 되는 것이다. 활쏘기도 그러한데 더구나 이 학문 공부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학문은 별다른 일이 아니고 일상생활이 모두 이 학문 공부여서, 옷을 입을 때와 밥을 먹을 때도 모두가 이 학문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학문이라는 말만 나오면 아득히 멀어서 행하기 어려운 일로 보아, 걸핏하면 ‘학문 공부는 어떻게 착수해야 하는가’라고 말들을 하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보통 사람들은 독서하는 데 있어서 육경(六經)에 근본하지 않고 단지 외가(外家)의 문자를 표절(剽竊)할 뿐이다. 그래서 젊은 날 기상이 예리한 때라 하더라도 오히려 꽉 막혀서 참된 기운이 없다. 더구나 어느덧 노년에 이르고 나면 속이 더욱 텅 비어 참다운 기상이 전혀 없게 되는 것이다.” 하였다.

검교직제학 신 서유방(徐有防)이 임자년에 기록한 것이다.

상이 이르기를, “일반 선비들에게까지 두루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조목별로 물은 데는 내 나름대로 뜻하는 바가 있었다. 근래 서울의 선비들이 유랑(遊浪)만을 일삼으면서 공부는 전혀 하지 않고, 간혹 사기(史記)를 범범히 본다 하더라도 애당초 어떤 대목을 의심하고 논란해야 하는지를 모른다. 이번의 이 거조는 실제로 권장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으나, 집에 있으면서 조목별로 대답하게 하였으니 사람마다 반드시 스스로 기술(記述)하지는 못할 것인바, 그 부형(父兄)에게 묻고 사우(師友)에게 질정하는 것을 통해서 반드시 보탬이 되는 점이 많을 것이다. 《송사(宋史)》를 선비들에게 베껴 올리도록 한 것은 고례(古例)가 그러해서일 뿐만 아니라, 이것이 바로 권면하고 독려하는 한 가지 방법이기 때문이었으니, 조사해서 베껴 내는 때에 또한 어찌 도움 되는 바가 없겠는가.” 하였다.

원임 직제학 신 박우원(朴祐源)이 임자년에 기록한 것이다.

상이 이르기를, “《역대명시전집(歷代名詩全集)》에 실을 시를 선별하는 데에, 당(唐) 나라의 맹교(孟郊), 가도(賈島), 피일휴(皮日休), 육귀몽(陸龜蒙)은 음조가 낮고 슬프며 경솔하고 천박하여 성세(盛世)의 희음(希音)이 아니고, 유창(劉滄)은 근체(近體)에 치우치고 원결(元結)은 나무라고 헐뜯는 단점이 있어서 뽑기에 적당치 않다. 송(宋) 나라의 한기(韓琦)는 문장으로 자부하지는 않았지만 옥룡(玉龍)의 구절과 노포(老圃)의 시는 자못 정운(正韻)을 얻었으며, 또 그 사업이 좋았기 때문에 문장도 좋으니, 뽑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도전(鄭道傳)과 권근(權近)은 출처(出處)는 비록 야은(冶隱) 등 제현(諸賢)에 미치지 못했어도 그 문장과 경륜(經綸)은 본디 한 시대의 영웅이었다. 정도전의 《삼봉집(三峯集)》이 세월이 오래된 탓에 판각(板刻)이 마손(磨損)되어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으니, 매우 애석한 일이다. 최립(崔岦)의 《간이집(簡易集)》과 차천로(車天輅)의 《오산집(五山集)》도 모두 간행해서 반포하도록 명하여 영원히 전해지게 하였는데, 더구나 개국 원훈(開國元勳)의 경제 문자(經濟文字)이겠는가. 내부(內府)에 보관되어 있는 본(本)을 꺼내어 영남(嶺南) 감영(監營)으로 싸 보내어서 즉시 교정하여 개판(開板)한 다음 인쇄해서 올려 보내게 하고, 이것을 사고(史庫)에 보관하도록 하라.” 하였다.

원임 직각 신 윤행임(尹行恁)이 임자년에 기록한 것이다.

상이 이르기를, “《시경(詩經)》 삼백편은 읽을수록 더욱 좋아서 오래 읽으면 읽을수록 더욱 그 참맛을 알게 된다. 예컨대 ‘문왕의 손자들이 본손과 지손 모두 백세를 전할 것이며, 모든 주 나라의 선비들도 또한 대대로 드러나리로다.[文王孫子 本支百世 凡周之士 不顯亦世]’라는 시는, 이 네 구절을 시험 삼아 읊어 보면 무한한 의미가 담겨 있으니, ‘청묘(淸廟)의 시를 비파로 연주할 때에 한 사람이 창하고 세 사람이 화답한다’는 정도만이 아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젊었을 적에 시를 무척 좋아하여, 《시경》 삼백편으로부터 송(宋)ㆍ명(明)의 제가(諸家)에 이르기까지 그 울타리를 엿보며 아름다운 구절을 주워 모았고, 더러는 작자의 필의(筆意)를 보아 그 오묘한 뜻을 깨닫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곧 이로움은 없고 공부에 해만 끼친다고 생각하여 일체 포기한 지가 이제 20여 년이 되었다. 근래에 심기가 화평(和平)하지 않아서 내 성향에 맞는 여러 문집들을 가져다가 두어 차례 펼쳐 보았는데, 불현듯 생각이 넓어지고 막힘이 없어지는 것을 깨달았으니, 이것이 바로 《시관(詩觀)》을 편찬하게 된 동기이다. 옛사람이 ‘심기가 화평하지 않을 때는 악기(樂記)를 한번 읽으면 마음속의 근심을 쏟아 버릴 수 있다.’고 하였는데, 참으로 옳은 말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시는 세도(世道)와 정치의 수준에 관계된다. 뜻이 깊고 화기(和氣)가 넘치는 것은 잘 다스려진 세상의 중화(中和)한 음이고, 온화하고 전아(典雅)한 것은 관면 패옥(冠冕佩玉)의 바탕이며, 잗달고 예리하고 바르지 못한 것은 어지러운 세상의 번거롭고 촉급한 소리이고, 음험하고 교묘한 것은 고신 얼자(孤臣孽子)의 글이다. 당 나라의 맹교(孟郊)와 가도(賈島), 명 나라의 종성(鍾惺)과 담원춘(譚元春)은 어찌 걸출한 자들이 아니겠는가마는 나는 모두 취하지 않았고, 송 나라의 한기(韓琦)는 시를 평하는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지만 나는 홀로 취하였으니, 이것을 미루어 보면 《시관(詩觀)》에서 취사(取舍)의 기준으로 삼은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명 나라 전겸익(錢謙益)의 시는 그다지 슬프고 낮지 않은데도 수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니, 대개 지지(支持)하고 억누르며 주고 빼앗는 작은 권한을 어디든 붙이지 않는 곳이 없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공자(孔子)가 《춘추(春秋)》를 지을 적에는 사실에 근거하여 곧이곧대로 썼을 뿐이다. 칭찬하고 비난하며 주고 빼앗는 내용은 부자(夫子)가 일찍이 스스로 쓴 적이 없었고, 반드시 뒷사람이 드러내기를 기다린 뒤에야 그 뜻이 비로소 밝혀졌다. 그 뜻을 밝힌 사람으로는 좌씨(左氏)가 있고 공양씨(公羊氏)가 있고 곡량씨(穀梁氏)가 있으며, 아래로 내려오면 한(漢), 당(唐), 송(宋)의 제유(諸儒) 가운데 저술하여 도운 자가 또 수십 명이나 되니, 그런 뒤에야 성인(聖人)께서 필삭(筆削)한 뜻을 대략이나마 엿볼 수 있게 되었다. 《명의록(明義錄)》에서 징토(懲討)한 역적이 모두 다 무진년(1748, 영조24)과 기사년(1749, 영조25) 이래의 흉역(凶逆)이었던 것을 통해서 《명의록》의 책 성격을 알 수 있다. 나는 나름대로 ‘원하는 바는 공자를 배우는 것이다’는 맹자(孟子)의 말에 스스로 붙좇고자 하면서도 그 자취가 너무 드러나지 않을까 두려워했었다. 그런데 세상에 안목을 갖춘 자가 없어서 이러한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니, 소원(疎遠)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이야 또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근래에 어쩔 수 없이 대략 뜻을 펴서 보였으니, 이는 또한 대궐 문에 법을 게시하는 뜻이며, 살 수 있는 도리를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방안인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논어(論語)》를 읽다가 ‘개와 말에게도 길러 줌이 있다[犬馬能養]’는 가르침에 이르러 적이 의심이 들어 반복해서 생각해 보았다. ‘견마능양’의 양(養)은 대개 개가 개를 기르고 말이 말을 기르는 것이지 사람이 개나 말을 기르는 것이 아니다. 그 뜻은 ‘개나 말도 길러 줄 줄을 아는데, 사람이 되어서 그저 부양할 줄만 안다면 개나 말과 무엇으로 구별하겠는가’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 도리어 타당할 듯하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상인호불문마(傷人乎不問馬)’는 ‘사람이 다치지는 않았는가?[傷人乎不]’로 구를 삼으면 그 설이 매우 잘 통한다. 《논어집주(論語集註)》에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가축을 천하게 여기는 것은 도리상 마땅히 이러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먼저 묻느냐 나중에 묻느냐에 따라서 귀천이 나뉘어진다면, 사람을 먼저 묻고 말을 나중에 묻는 것으로 보는 것은 큰 죄안(罪案)이 되지 않을 듯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말하는 학자가 있으면 온 세상이 시끄럽게 공격해 대는데,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우리나라 학자의 독창적인 주장이 아니고 예로부터 그렇게 본 사람이 많았으니, 대개 우리나라 사람들의 안목이 작고 읽은 책이 많지 않아서 그런 것일 뿐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현악기[絲]는 관악기[竹]만 못하고 관악기는 육성[肉]만 못하다’는 것은 맹가(孟嘉)가 음악에 대해서 논한 말인데, 이 학설을 이해하는 사람이 적다. 현악기는 거문고이고, 관악기는 피리이며, 육성은 노랫소리이다. 거문고의 형태는 오동나무를 잘라서 줄을 팽팽하게 매고 휘(徽)와 진(軫)을 설치하는데, 이렇게 한 후에야 팔음(八音)과 어우러져 육률(六律)에 응할 수 있다. 피리는 자연적인 상태를 그대로 사용하여 만들기 때문에 가다듬거나 깎아 내는 공력을 필요로 하지 않아 간단하고 순후(淳厚)한 기상이 있다. 그러므로 현악기는 관악기만 못하다고 한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의 목소리가 어떤 물건의 힘도 빌리지 않고 자연 상태로 울려서 가(歌)와 성(聲)이 사람의 마음에 화응하고 신명을 이르게 하는 것만은 못하다. 그러므로 관악기는 육성만 못하다고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점차 자연에 가까워진다’라고 한 것이다. 《예기(禮記)》에 ‘등가(登歌)가 위에 있는 것은 사람의 음성을 귀하게 여긴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니, 맹가의 학설 역시 여기에 바탕한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시경(詩經)》의 군자해로편(君子偕老篇)은 꾸짖고 비웃는 말인 줄을 알지 못하겠고, 야유만초편(野有蔓草篇)은 현자(賢者)들끼리 증여(贈與)한 말이 아니라고 단정 짓지 못하겠다. 그런데 주자(朱子)는 헐뜯어 비난하는 작품이라고 지목하기도 하고 음분(淫奔)을 주제로 한 시라고도 하여 조금의 의심도 없이 단정 지었으니, 이는 필시 언외(言外)의 뜻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모시(毛詩)》 소서(小序)를 지나치게 배척하느라고 그런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요즈음은 시를 지을 때 심혈을 기울이지 않고 그저 손 가는 대로 써 내려갈 뿐이다. 《춘저록(春邸錄)》을 한번 보았더니 순아(醇雅)하고 풍채(風采)와 정치(情致)를 갖추어서 근래의 작품이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였다.

재계(齋戒)하는 날 각신(閣臣)에게 하교하기를, “요사이 자궁(慈宮)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 《시경》에서 100편(篇)을 발췌하여 《모시백선(毛詩百選)》이라고 이름 짓고 경들로 하여금 분담하여 언해로 번역해서 올리게 하였다. 옛날에 김만중(金萬重)은 하룻밤 사이에 《구운몽(九雲夢)》을 지어 자신의 어머니에게 바쳤는데, 더구나 나의 경우에는 뜻을 봉양할 수 있는 길이 오직 여기에 있으니, 경들은 게을리 말고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과 태허(太虛) 최항(崔恒)은 문장은 그다지 빼어나지 않아도 원기(元氣)가 충만하고 풍류(風流)가 넘쳐흘러 장강(長江)과 대하(大河)가 도도히 흘러 다함이 없는 것과 같으니, 국초(國初)의 광대하고 장구하면서도 아름답던 기상을 볼 수 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주역대전(周易大全)》에서는 이미 정자(程子)의 《역전(易傳)》을 따랐으면서 또 《주역본의(周易本義)》의 편제(篇題)를 책머리에 실어 놓았다. 정자의 《역전》은 비직(費直)의 역(易)이지 조이도(晁以道)와 여조겸(呂祖謙)이 정한 본(本)이 아니다. 지금 그 편제는 ‘모두 12편이다’라고 하고, 또 ‘공씨(孔氏)의 구본(舊本)을 회복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그 경(經)을 살펴보면 여전히 비직의 본이다. 책을 펼쳤을 때의 첫 번째 의리가 이렇게 어긋나고 잘못되었으니, 영락(永樂) 연간의 신하들은 그 책임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주역(周易)》은 고경(古經)을 정본(正本)으로 삼아서 단(彖), 상(象), 문언(文言)도 계사(繫辭)나 설괘(說卦)처럼 각각 하나의 편(篇)을 이루어야 한다. 그런데 비직과 정현(鄭玄)이 찾아보기에 편하게 하고자 전문(全文)을 가르고 찢어서 괘(卦) 속으로 넣어 버림으로써 고경의 면목을 마침내 볼 수 없게 되었다. 주자가 홀로 조이도와 여조겸이 고쳐 정한 본을 취한 데는 참으로 깊은 뜻이 담겨 있다. 근세 사람이 지은 책 중에서는 이광지(李光地)의 《주역절중(周易折中)》이 가장 온당하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패관 소설(稗官小說)은 사람의 심술(心術)을 가장 해치는 것이니, 문장(文章)과 경술(經術)에 뜻을 둔 선비라면 상을 준다고 하더라도 보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음조가 낮고 슬프며 날카롭고 경박한 고신얼자(孤臣孽子)의 슬프고 근심스러운 소리를 무엇 하러 읽겠는가. 처음에는 이러한 문체를 추구하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도 대수롭지 않게 여겨 내버려 두어도 다스려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사이에 와서 보니 시례(詩禮)를 전수해 온 집안의 자제로서 근밀(近密)한 자리에 출입하고 왕명(王命)을 윤색하는 자들까지도 습속에 물드는 것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것이 세도(世道)와 시운(時運)에 관계되는 문제라는 것을 크게 깨달았으니, 하교를 통해서 한번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성대중(成大中)의 문체는 무엇보다 단아하고 숙련되면서도 촉박한 뜻이 없는 것이 가장 좋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송계집(松溪集)》은 문장이 깨끗하고 고아하여 미칠 수 없는 부분이 있으니, 풍류(風流)와 문채(文采)를 지닌 아름다운 공자(公子)라고 할 만하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문장에서는 기(氣)를 가장 중요시하는 법이니, 기가 이르는 곳이면 문장도 그에 따르게 된다. 저 형식과 틀에 얽매이는 자들은 문장을 짓는 데에 있어서도 말단적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명필(名筆)로는 안평대군(安平大君)을 제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안평대군은 낭미필(狼尾筆)로 백추지(白硾紙)에 글씨를 썼는데, 오직 한호(韓濩)만이 그 묘리를 깨달았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서예가(書藝家)들이 모두 비해당(匪懈堂)과 석봉(石峯)의 문호(門戶)를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고 판서 윤순(尹淳)이 나오자 온 나라 사람들이 쏠리듯 그 뒤를 따랐으니, 이에 서도(書道)가 한번 크게 변하여 진기(眞氣)가 없어지고 점차 마르고 껄끄러운 병통을 열어 놓게 되었다. 이제 서풍(書風)을 순박(淳樸)한 쪽으로 돌려놓고자 하는 바이니, 그대들부터 먼저 촉체(蜀體)를 익혀야 할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근고(近古)에는 이서(吏胥)들의 글씨가 대부분 볼만하였다. 일찍이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을 가져다 보았더니, 그 글씨는 오래된 것일수록 더욱 좋았고 더러 필세가 힘차고 뛰어난 곳도 있었다. 요사이에는 눈에 들어오는 여러 관사(官司)의 문서가 대부분 경박하고 조잡한데, 그중에서도 각리(閣吏)는 특히 더 심하여 보고 있자면 저절로 얼굴이 찡그려진다. 이것은 작은 일이기는 하지만 한번 번거롭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는 쌍륙(雙六)이나 바둑 등 잡기(雜技)는 어느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이 역시 성품의 치우친 점이라 하겠으나, 학문에 이만큼이나마 소략하고 지리멸렬하지 않은 것은 뜻을 여러 갈래로 나누어 쓰지 않은 데 힘입은 바가 많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협운(叶韻)은 옛사람이 항상 쓰던 것으로, 《모시(毛詩)》나 《주역(周易)》의 소상(小象) 등 문자에서 아직도 살펴볼 수 있는데, 후세 사람들은 이것을 전혀 모른다. 두 운(韻)을 통용하는 것은 각각 그 부속(部屬)에 따르는데, 입성(入聲), 상성(上聲), 거성(去聲)이 모두 평성에 부속이 있기 때문에 입성 간의 통용도 평성의 부속을 보아야 한다. 다만 현재 읽혀지는 운서(韻書)에 소략하거나 잘못된 곳이 너무 많기 때문에 지금 사람들이 운법(韻法)이 지극히 엄하다는 것을 모르고 자기 마음대로 뒤섞어서 쓰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점을 매우 개탄스럽게 생각하여, 일찍이 음운(音韻)을 아는 신하들로 하여금 별도로 한 권의 책으로 엮도록 하고 때때로 가져다가 감정(鑑定)하였으니, 배우는 자들의 나침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운서를 이미 증보(增補)한 바 있지만, 공령 문자(功令文字)에 쓰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도 없을 것이다.” 하였다.

일찍이 연신(筵臣)에게 원사(爰辭)의 ‘원(爰)’ 자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는데 연신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하교하기를, “원이란 바꾼다는 것이니, 입으로 하는 말을 문자로 바꾸는 것을 이른다. 예컨대 《춘추좌전(春秋左傳)》에 나오는 ‘원전(爰田)’도 3년에 한 번 바꾼다고 하여 원전이라 한 것이니, 여기에서도 이러한 뜻을 볼 수 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연히 일 때문에 비변사의 오래전 《등록(謄錄)》을 보았는데, 여러 도에 알리는 내용이나 편리한 방책을 낱낱이 든 것이 모두 자신의 가슴에서 흘러나오고 자신의 손으로 강구한 것이었으니, 지금 사람들이 차례에 따라 늘어놓고 대구(對句)를 맞추어 외면을 수식하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문장의 기세는 시대가 내려올수록 못해진다.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한 책을 가지고 말해 본다면, 당기(唐紀)의 문장은 육조(六朝)만 못하고, 육조의 문장은 선진(先秦)과 양한(兩漢)만 못하다. 문장이 점차 못해진다는 것은 화려한 문사(文辭)가 옛날만 못하다는 말이 아니라 순후하고 경박함이 다르다는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편년체(編年體)로 된 역사책은 기억하기가 가장 어렵다. 《자치통감강목》과 《자치통감(資治通鑑)》 등 책은 여러 차례 보아도 잊어버릴 염려가 있는데, 전사(全史)는 몇 번만 보아도 열에 일고여덟은 기억할 수 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사는 가장 읽을 만한 것이다. 옛사람이 ‘《남사(南史)》와 《북사(北史)》는 《자치통감》에서 취한 내용을 제외하고 나면 단지 웃기 좋은 한 부(部)의 소설(小說)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는 그렇지 않다. 역사책에서 귀한 점은 사건을 기록하고 말을 기록하여 그 책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직접 눈으로 보고 몸소 경험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끔 하는 것이다. 지금 만약 말과 사건이 매우 선하거나 매우 악한 것을 취하여 적는다면 옛날을 거울삼아 오늘날을 징계하는 데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하겠지만, 산천(山川)과 풍속(風俗), 인정(人情)과 물태(物態)를 아득히 상고할 바가 없는 것은 어쩌겠는가.”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좋은 역사책은 좋은 그림과 같아서 신운(神韻)을 얻는 데 달렸을 뿐이다. 그러므로 귀, 눈, 코, 입이 모두 닮았더라도 반드시 뺨 위의 세 가닥 수염을 그려야만 그 사람이 되는 것이다. 평범한 화공(畫工)이 보기에는 세 가닥 수염이 있건 없건 상관이 없을 듯하지만, 아는 사람은 그것이 정신(精神)이 모인 곳임을 알기 때문에 반드시 공력을 다 들이는 것이다. 역사를 잘 기술하는 사람은 일의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오직 신운이 붙은 곳을 적는 것에 뛰어나다. 그러므로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정신을 그리지 형태를 그리지 않으며, 역사를 잘 기술하는 사람은 상황[情]을 기록하지 일을 기록하지 않는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성인(聖人)을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성인이 능히 안 것을 배워서 알아야 한다. 만약 먼저 성인이 알지 못한 바에 나아가서 알기를 구한다면 잘못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근래에 잡서(雜書)를 좋아하는 자들이 ‘《수호전(水滸傳)》은 《사기(史記)》와 비슷하고 《서상기(西廂記)》는 《모시(毛詩)》와 비슷하다’고들 하는데, 이것은 매우 우스운 말이다. 만약 비슷하다는 것 때문에 좋아한다면 무엇 때문에 곧바로 《사기》와 《모시》를 읽지 않는단 말인가.”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하도(河圖)의 중궁(中宮)은 15인데 반해 낙서(洛書)의 중궁에는 5는 있고 10은 없다. 5라는 수는, 1부터 세어서 5에 이르면 합해서 모두 15가 된다. 그러므로 낙서의 중궁에도 15라는 수가 갖추어져 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낙서의 수는 9에서 그치니, 10이 되면 1로 다시 돌아가기 때문에 10이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9는 1과 서로 대응하고 8은 2와 대응하고 7은 3과 대응하고 6은 4와 대응하여 모두 10이라는 수를 이루니, 중궁의 수와 합쳐서 계산한다면 가로와 세로 모두 15를 이룬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낙서는 오른쪽으로 돌며 상생(相生)하고, 하도는 왼쪽으로 돌며 상극(相剋)한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서전(書傳)》 권수(卷首)에서는 혼천의도(渾天儀圖)를 선기옥형도(璿璣玉衡圖)라고 설명하였는데, 이는 매우 명쾌하지 않은 것이다. 순(舜)임금 때의 선기옥형 제도를 고찰할 수가 없기 때문에 채침(蔡沈)이 혼천(渾天), 주비(周髀), 선야(宣夜) 삼가(三家)의 제도를 하나하나 거론하고서 혼천의가 가장 낫다고 한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혼천의도’라고 해야지 곧장 선기옥형으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황종(黃鐘)으로부터 중려(仲呂)까지는 모두 하생(下生)이고, 유빈(蕤賓)으로부터 응종(應鐘)까지는 모두 상생(上生)이다. 위에서 아래를 낳는 것은 모두 3이 2를 낳고, 아래에서 위를 낳는 것은 모두 3이 4를 낳는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동방(東方)의 음은 치설(齒舌)에 있고, 남방(南方)의 음은 순설(脣舌)에 있고, 서방(西方)의 음은 악설(齶舌)에 있고, 북방(北方)의 음은 후설(喉舌)에 있으니, 이것이 사방의 성음(聲音)이 완급(緩急)이 달라서 언어가 서로 통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목구멍에 편리한 음은 입술로 소리를 내는 데 이롭지 못하고, 치아에 편리한 음은 잇몸으로 소리를 내는 데 이롭지 못하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는 가장 정밀한 것이다. 고염무(顧炎武)가 ‘지리지의 소자(小字)는 모두 맹견(孟堅 반고(班固)의 자(字))의 본문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사실 그러하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유(漢儒)의 주소(註疏)는 말하기가 쉽지 않다. 예컨대, 《시경》의 악불위위(鄂不韡韡)를 주자는 ‘악연(鄂然)히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어찌 빛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이 설은 의심할 만한 점이 없지 않다. 복침(伏琛)의 《삼제기(三齊記)》에는, ‘화부주(華不注)의 부(不)는 음이 부(跗)로 악부(鄂不)의 부와 같으니, 꽃의 꼭지[花蔕]이다’라고 하였다. 명 나라 양신(楊愼)은 주소의 설을 따라서 말하기를, ‘꽃 아래에 꽃받침[萼]이 있고 꽃받침 아래에 꽃꼭지[跗]가 있으니, 꽃과 꽃받침이 서로 받쳐 주고 덮어 주기 때문에 환히 빛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종원(柳宗元)의 봉건론(封建論)과 소식(蘇軾)의 정통론(正統論)은 소견(所見)이 탁월한바, 모두 천고(千古)에 바뀔 수 없는 논의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필법(筆法)의 오묘함은 점획(點畫)과 모양에 있지 않다. 각신 중 서유방(徐有防)의 생동감 넘치는 필법과 남공철(南公轍)의 속되지 않고 고아한 필치는 공졸(工拙)로써 논할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의장(儀仗) 가운데 골타(骨朶)에는 웅골타(熊骨朶)와 표골타(豹骨朶)가 있는데, 지금 사람들은 골타가 무엇인지를 전혀 모른다. 송 나라 당시에는 천자의 거둥 때에 숙위(宿衛)하는 자들이 골타를 잡고 있었다. 관중(關中) 사람들은 배가 불룩하게 나온 사람을 ‘고도(胍)’라고 하였는데, 독음(讀音)은 고도(孤都)와 같다. 세속에서 그로 인하여 머리 부분이 큰 지팡이를 고도라고 하였던 것이 나중에 와전되어 골타가 되었다. 이것은 송 경문공(宋景文公)의 《필기(筆記)》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우리나라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는 《고려사(高麗史)》 예지(禮志)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고려조의 의물(儀物)이 대부분 송 나라의 것을 모방하였으니, 그 유래가 오래된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태극(太極)은 천지보다 앞서 있어도 먼저가 되지 않고, 천지보다 뒤에 있어도 나중이 되지 않는다. 정(靜)은 동(動)의 뿌리가 되고 유(柔)는 강(剛)의 바탕이 된다. 《주역》에 ‘한 번 음(陰)하고 한 번 양(陽)하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 하고, 또 ‘문을 닫는 것을 곤(坤)이라 한다’ 하고, 또 ‘낳고 낳음[生生]을 역(易)이라 한다’ 하였으니, 음을 먼저 말하고 양을 나중 말한 데서 낳고 낳는 뜻이 드러난다. 상(商) 나라의 역에 곤괘(坤卦)를 먼저 실은 것은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였다.

검교직각 신 서영보(徐榮輔)가 임자년에 기록한 것이다.

상이 이르기를, “유가(儒家), 불가(佛家), 노자(老子)를 세상에서 삼교(三敎)라고 칭한다. 유자(儒者)는 불가나 노자를 허여하지 않지만, 그 조예(造詣)의 깊은 곳을 논한다면 모두가 최고의 경지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학문에는 활법(活法)이 있고 사법(死法)이 있다. 우리나라의 유학자 중에는 성리(性理)를 천명한 자가 많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모방하거나 구속되는 병통이 있다. 그 때문에 진정한 대영웅의 기상이 없는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읍취헌(挹翠軒)의 시는 웅건하면서도 노련하여 본조(本朝)의 명가(名家)로 일컬어지지만, 편질(篇帙)이 열에 여덟아홉은 없어져서 세상 사람들에게 읽히는 시집(詩集)이 1권밖에 되지 않는다. 내가 일찍이 옛 홍문관에 소장되어 있던 ‘천마(天摩)’와 ‘잠두(蠶頭)’ 등 편을 찾아내어 3책(冊)으로 엮고, 몇 마디 말을 책머리에 적어서 간행하여 널리 배포하고자 하였으니, 이 어찌 그 시를 위해서만 그런 것이겠는가.”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명(明) 나라 3백 년 동안 많은 작자(作者)가 나왔어도 훌륭한 문장은 거의 없었다. 그중에서 꼽자면 왕양명(王陽明)이 가장 나을 것이다.” 하였다.

일찍이 여러 각신들에게 하교하기를, “문장에는 도(道)가 있고 술(術)이 있는바, 도는 바르지 않아서는 안 되고 술은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된다. 문장을 배우는 자는 응당 육경(六經)을 종주(宗主)로 하고 자(子)ㆍ사(史)를 우익(羽翼)으로 하여 위아래를 포괄하고 지금과 옛날을 널리 통달하되, 마지막에는 주자(朱子)의 글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 그런 다음이라야 그 내용이 순정(醇正)하여 도술(道術)에 어긋나거나 잘못되는 곳이 없게 된다. 더구나 문장의 도는 큰 것이어서 치교(治敎)의 쇠퇴함과 융성함, 풍속의 순후함과 각박함, 인심의 바름과 거짓됨을 이 문장의 높고 낮음, 오르고 내림을 보아서 대부분 점칠 수 있다. 그런데 유독 이상하게도 근세에 문장을 하는 선비들은 평범한 것을 싫어하고 특별난 것을 좋아하여 품격을 무너뜨려 가며 천박한 글을 지어내곤 한다. 자신의 학식이 옛사람에 미치지 못하고 역량이 옛사람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도리어 바른길을 버려두고 지름길을 찾아 패관 소설의 자구(字句)를 표절하는가 하면 또 명(明)ㆍ청(淸) 제자(諸子)에 나아가 기벽함을 답습한다. 스스로를 드러내고자 하여 ‘나는 선진(先秦)과 양한(兩漢)의 문장을 배웠다’고 하지만 선진과 양한의 글이 아니고, ‘나는 당 나라와 송 나라의 문장을 배웠다’고 하지만 당 나라와 송 나라의 글이 아니니, 모두 진기하다는 이름을 빌리고 법첩(法帖)을 베껴 사람의 감상(鑑賞)을 얽어매는 것들이다. 이 때문에 세도(世道)가 날로 각박해지고 사풍(士風)이 날로 경박해져서 청묘(淸廟)의 거문고 소리는 적막하여 들리지 않고 소품(小品)의 화려함은 날로 만 장의 종이로 전하여지는데, 내 여기에 대해서 깊이 미워하고 애통해하지 않은 적이 없지만 바로잡을 방법을 알지 못하겠다. 나는 정무(政務)를 돌보는 틈틈이 오직 경사(經史)와 한묵(翰墨)으로 즐거움을 삼고, 근래에는 또 역대(歷代)의 시(詩)들을 수집하여 한 질의 전서(全書)를 만들고 있는데, 범례와 규모는 이제 두서가 잡혔다. 《시경》 삼백편에서 시작하여 선진(先秦), 한(漢), 위(魏)를 거쳐 당(唐), 송(宋), 명(明)에 이르기까지 풍요(風謠)와 아송(雅頌)의 정시(正始)와 정변(正變), 대가(大家)와 명가(名家)의 우익(羽翼)과 방류(旁流)로부터 금릉(金陵)의 제자(諸子)설루(雪樓)의 칠가(七家)에 이르기까지를 두루 갖추어 수록하여 널리 집성(集成)하여 5백여 권을 이루었다. 그러나 맹교(孟郊), 가도(賈島), 서원(徐袁), 종담(鍾譚) 네 사람은 포함시키지 않았으니, 그것은 그들의 체법(體法)이 냉엄하고 까다로우며 음운(音韻)이 낮고도 구슬퍼 실제로 치세(治世)의 훌륭한 문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겨 두고 빼고 쓰고 삭제하는 즈음에 스스로 까다롭게 저울질하고 포폄(褒貶)하는 재량을 그 속에 붙여 두었으니, 이러한 뜻을 몰라서는 안 된다. 대저 근래의 선비들은 문장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평소 거문고를 연주하고 진기한 물건들을 늘어놓은 채 서화(書畫)를 품평하고 향기로운 차를 마시면서 스스로 맑고 고아한 문채(文采)가 있다고 여기는데, 연소한 후생(後生)들이 더러 흉내를 내어 습속이 되고 말았다. 이 일은 얼마 전 사학(邪學)이 정도(正道)를 해친 것과 크고 작은 차이는 있지만 폐단은 마찬가지이니, 탄식을 이길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일찍이 전교(傳敎)를 부를 적에 승지에게 붓을 잡고 쓰도록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내가 글을 지을 적에 간혹 한껏 생각을 가다듬어 구상하느라고 여러 번 초고(草藁)를 고친 다음에야 내놓기도 하지만, 천기(天機)가 넘치는 곳에는 도리어 미치지 못하곤 한다. 오히려 이처럼 수응(酬應)하는 문자는 문장의 묘미가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짓고 말이 나오는 대로 쓰는 데 있는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진암(晉菴) 이천보(李天輔)의 시는 자못 소탈하고 호탕하여 볼만하니, 그러한 기상(氣象)은 근세 사람들 중에서 으뜸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암(尤庵)의 글은 일을 논한 곳이 많고 성리(性理)를 말한 곳은 적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근래에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식암(息菴) 김석주(金錫胄)와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을 으뜸가는 거장(巨匠)으로 꼽는다. 호방하고 웅건한 식암의 책(策)과 논(論), 명백하고 적절한 약천의 소(疏)와 차(箚)는 응당 관각(館閣)의 나침반이자 지표일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주자(朱子)의 차어(箚語)는 광대(廣大)하고 정대(正大)하며, 육 선공(陸宣公)의 주의(奏議)는 시무(時務)에 절실하다. 나는 늘 이것을 좋아하여 일찍이 배우는 자들에게 권하여 익숙히 읽어 수용(需用)하도록 하였다. 지금 간혹 일종의 사치스럽고 경박한 논의를 주장하면서 천근(淺近)한 것을 싫어하고 고원(高遠)한 것을 구하며 일상적인 것을 천하게 여기고 희귀한 것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다름이 아니라 안목이 낮고 식견이 얕아서 그런 것이다.” 하였다.

천신(賤臣)에게 하교하기를, “진실로 글을 읽는 데 뜻을 둔다면 어찌 벼슬살이하느라 여가가 없는 것을 근심하겠는가.” 하였다.

하루는 천신이 초계문신(抄啓文臣)의 대책(對策)에 응하여 망녕되게 패관잡기(稗官雜記)에 나오는 말을 썼다. 하교하여 준절히 꾸짖기를, “문장이 비록 기예 가운데 한 가지 일이기는 하지만,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위로는 치교(治敎)의 수준을 점칠 수 있고 아래로는 성정(性情)의 사정(邪正)을 엿볼 수 있다. 육경(六經)의 도는 지극히 크면서도 간략하고, 한(漢), 당(唐), 송(宋)의 문장은 가장 바르고 우아하다고 일컬어진다. 오늘날 문장을 하는 자들은 학문이 재주를 받쳐 주지 못하여, 어렵다는 것 때문에 싫증을 내어 도리어 명ㆍ청의 소품(小品)을 배우고, 푹 빠져 들어 스스로 기뻐하는 것들이 대부분 잗달게 조잘거리는 말이니, 이 어찌 세도(世道)의 복이겠는가. 더구나 그대들은 집안에서 시례(詩禮)를 전수받아 대대로 사륜(絲綸)을 관장해 온 자들로서, 젖어 있는 것은 헌면(軒冕)의 작품이요 외우고 익혀 온 것은 사명(詞命)의 문체이니, 너무 앞서는 자는 조금 낮추고 모자라는 자는 좀더 노력해서 각각 자신의 재능을 다해야 할 것이다. 만의 하나라도 바른 도(道)를 버려두고 오랑캐의 패관잡기에 물들어, 지름길을 찾아서 궁색하게 걷고 날아가는 새를 보느라고 엉뚱한 대답을 한다면, 문덕(文德)을 펴는 데 해를 끼치고 선조를 욕되게 하는 것이 어찌 모르고 저지른 작은 잘못에 그치겠는가.” 하였다. 이어 내각(內閣)에 명하여 함사(緘辭)를 내어 추문(推問)하게 하고, 또 자송문(自訟文) 한 편을 지어 올려 앞으로 감히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말하게 한 뒤에야 직무를 보도록 하였다.

동지 정사(冬至正使) 박종악(朴宗岳)에게 하교하기를, “오늘 선비들을 시험 보이면서 ‘위서를 금한다[禁僞書]’는 것으로 책문(策問)을 내었는데, 경이 마침 사신(使臣)의 임무를 띠고 장차 국경을 나가게 되었기에 경을 불러 보게 되었다. 사신의 책임은 막중한 것이고, 서적을 구입해 오는 일로 말하자면 말단적인 일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 흘러들어 온 성현의 경전(經傳)과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서적이 큰 집을 가득 채우고 우마(牛馬)를 동원해서 운반할 정도로 많은데도 모두 묶어서 시렁에 올려 둔 채 보지 않으면서, 오직 명ㆍ청 이래의 패관잡기 등 상리(常理)에 어긋나는 책만을 탐내어 다량으로 구하고자 연경(燕京)의 서점으로 책을 사러 가는 자들이 도로에 늘어섰으니, 나는 매우 잘못된 것이라 생각한다. 또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반드시 책을 많이 가지고 있지는 않고, 책을 많이 가진 사람이 반드시 책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현재 가지고 있는 책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좋은 문장을 지을 수 있는데, 어찌 불경(不經)한 설을 써서 허다한 문로(門路)를 모조리 무너뜨리겠는가. 근래 성경(盛京)의 탑본(搨本)이 대부분 소매에 넣고 다닐 수 있을 정도의 작은 활자본 책자이기 때문에 책을 보는 사람들이 보기에 편리한 점을 자못 높이 산다고 하는데, 이것은 또 그렇지 않다. 서책을 대할 때는 본디 위의(威儀)를 바로잡아 거경 공부(居敬工夫)의 자세를 지녀야 하고, 성현의 경훈(經訓)에 이르면 또 아무렇게나 봐 넘겨서는 안 되니, 한갓 글을 읽지 않는 사자(士子)들로 하여금 게으른 습성만 키우도록 하는 것은 더욱 안 될 일이다. 이번에 부사(副使)와 서장관(書狀官)을 각신(閣臣)으로 차견(差遣)한 것은 생각이 있어서였다. 이제 막 의주부(義州府)에 신칙하여 별도로 수검(搜檢)해서 범한 자는 중률(重律)로 논죄하게 하였으니, 경은 모쪼록 이런 뜻을 잘 알도록 하라.” 하였다.

신(臣) 남공철(南公轍)에게 하교하기를, “청(淸) 나라 사람들의 시문(詩文)은 모두 비속하고 구슬퍼서 쉽게 싫증 나게 한다. 그러나 그 근본을 따져 본다면 명(明) 나라 말엽의 제자(諸子)들이 먼저 선례(先例)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문장을 논하는 것은 음악을 감상하는 것과 같아서 그 시대를 살펴볼 수도 있고 그 사람을 알 수도 있다. 옛 선왕(先王)의 의관(衣冠)과 문물(文物)을 보존해 온 나라가 하루아침에 변하여 오랑캐가 될 지경에 이르렀으니, 기수(氣數)와 시세(時世)가 그렇게 만드는 데야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임금 된 자가 반드시 크게 노력하여 바른 문풍을 흥기시키는 것으로 자임(自任)해야만 한때의 고질적인 문체를 변화시켜서 선비들의 추향(趨向)을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다.” 하였다. 천신이 대답하기를, “청 나라 사람들의 문기(文氣)가 비속한 것은 실로 성상의 가르침과 같습니다만, 그중에서 소장형(邵長蘅)은 문체가 더러 제법 근정(近正)한 곳도 있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소장형의 문장을 사람들이 대부분 칭찬하지만 나는 일찍이 통렬히 배척하였으니, 먼저 근정한 자부터 내쳐야 그 나머지 제가(諸家)가 한갓 분분한 데로 귀결되어 세상의 유자(儒者)들이 청 나라 문장을 배우는 폐단이 끊길 것이기 때문이다.” 하였다.

천신이 각신 서영보(徐榮輔)와 함께 입대(入對)하였을 때 마침 전교를 쓸 것을 명하였다. 신들이 우러러 아뢰기를, “성상께서는 문자에 지나치게 정력을 쏟으시어 비록 등한한 사교(辭敎)라 할지라도 한 글자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삼가 우러러 흠앙하고 찬탄함을 이기지 못하겠으나, 또한 이 때문에 우려가 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작문(作文)은 한때의 정력을 쓰는 데 불과하다. 하루에 만 가지 일을 돌보느라 이리저리 수응하는 것을 어찌 단지 작문에만 비하겠는가. 나도 마음을 맑히고 고심을 줄이는 길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애쓰지 않고는 마음이 편안하지 않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떤 사람의 글을 본다는 것은, 그 시대를 살피기에 좋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을 알 만한 곳도 있으며, 때를 알기에도 좋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선비로서 육경(六經)에 종사하는 자가 있다면 사설(邪說)은 굳이 기약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종식될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고(故) 상신(相臣) 서지수(徐志修)는 한 번도 문장으로 자처한 적이 없으나, 근래에 듣건대 그는 평생 동안 경서(經書)에 가장 주력하였기 때문에 연로하여 벼슬에서 물러난 후에도 틀리지 않고 외울 수 있었다고 한다. 고 상신은 일찍이 아름다운 문장을 세상에 과시한 적이 없었지만 경학에 공력을 들인 것이 이와 같았는데, 지금 세상의 선비들은 사람마다 스스로 백가(百家)를 다 읽었다고 말하는데도 경학이 황폐하여 나날이 못해지고 다달이 쇠퇴하고 있으니, 이것을 통해서 지금 사람들이 옛사람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강한(江漢) 황경원(黃景源)의 문장을 두고 간혹 ‘진부한 말을 답습하였다’고 비평하는 사람이 있지만, 당송 팔가(唐宋八家)의 체단(體段)을 깊이 터득하여 지금 사람들은 미치지 못하는 점이 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의 문장은 순후하면서도 광대하여 얼핏 보아서는 그다지 맛을 느끼지 못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싫증이 나지 않게 한다. 예로부터 문인(文人)은 과장을 일삼아 진실성이 없다고들 말해 왔지만 이 사람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 시를 읊고 그 글을 읽어 보면 그 후손이 반드시 창성하리라는 것을 절로 징험할 수 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국초(國初) 변계량(卞季良)과 최항(崔恒)의 문장은 진실되고 꾸밈이 없기 때문에 후생 소자(後生小子)들이 더러 모여서 비웃곤 한다. 그러나 그 글의 좋은 점은 바로 풍부하면서도 잡되지 않고 질박하면서 화려하지 않은 데 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회헌집(悔軒集)》은 비록 평범한 응수 문자(應酬文字)이지만, 시(詩)는 제법 정경(情境)을 곡진히 묘사하였고 문(文)도 사무(事務)에 절실한 것이니, 근세의 명가(名家)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근세 황경원(黃景源)의 문장은 가장 고아(古雅)한 것으로 일컬어지는데, 《배신고(陪臣考)》는 특히 《사기》와 《한서》의 법식을 얻은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문장을 말하는 자들이 걸핏하면 ‘산 호곡 죽은 농암[生壺谷 死農巖]’이라고 하더니, 나중에 그 문집을 가져다 보니 참으로 그러하였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학문이 정도(正道)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면 학문이 없는 것만 못하고, 문장이 실용(實用)에 맞지 않는다면 문장이 없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시와 문 모두 그 사람을 관찰하기에 충분한 것이지만 시가 더욱 근사하니, 그것은 시가 성정(性情)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하였다.

일찍이 신 등에게 하교하기를, “당(唐)ㆍ송(宋)에 팔가(八家)니 십가(十家)니 하는 명목이 있고, 명(明) 나라에도 십가니 십삼가(十三家)니 하는 선발이 있다. 만약 우리나라의 문장가 중에서 그 선발에 들 만한 사람을 뽑는다면 누구를 가장 먼저 꼽겠는가?” 하므로, 신들이 대답하기를, “괴애(乖崖)ㆍ점필재(佔畢齋)의 호준(豪俊)함과 기위(奇偉)함, 간이(簡易)ㆍ계곡(谿谷)의 고아(古雅)함과 풍부함, 농암(農巖)ㆍ삼연(三淵) 형제의 점잖음과 노련함이 모두 선발에 들 만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훌륭한 문장가가 되기도 어렵지만 좋은 문장을 뽑는 것도 어렵다. 호곡(壺谷) 남용익(南龍翼)이 《기아(箕雅)》를 편찬한 당시에도 시끄럽게 많이들 다투었다고 한다. 남겨 두고 빼고 쓰고 삭제하는 것도 또한 우열(優劣)과 장단(長短)을 따지는 일에 관계되니, 내가 일찍이 정무를 보는 틈틈이 여기에 마음을 두었으면서도 오래도록 실행에 옮기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부유한 사람이 농사짓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애써 일하고 난 뒤에야 노력한 만큼 수확할 수 있는 법이다. 독서하는 사람이 귀한 것은 많이 쌓아서 넓게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

검교직각 신 남공철(南公轍)이 임자년에 기록한 것이다.

하교하기를, “우리 조선의 시학(詩學)은 대대로 맥이 끊어지지 않았으며 더러 탁월하게 뛰어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근세를 논하자면 진암(晉菴 이천보(李天輔))을 으뜸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인바, 기려(奇麗)하고 번화(繁華)하며 청아하고 빼어난 것이 옛날의 명가(名家)에게도 부끄럽지 않다. 일찍이 듣건대 효묘(孝廟)께서 항상 정두경(鄭斗卿)의 시를 사랑하시어 《동명집(東溟集)》을 오래도록 어안(御案) 위에 놓아두었다고 하는데, 나 또한 《진암집(晉菴集)》을 그 정도로 좋아한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나는 경사(經史)에 대해서 ‘이것을 좋아하여 피로한 줄도 모른다’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또 간혹 문장에까지 미치기도 한다. 서늘한 기운이 대지에 스며들어 기무(機務)에 조금 여가가 생길 때면 한 질의 책을 읽는 것을 연례적인 일로 삼았는데, 올겨울에는 《팔자백선(八子百選)》을 일과(日課)로 삼고자 한다. 눈 덮인 밤 글을 읽거나 맑은 새벽 책을 펼치는 때에 조금이라도 싫증이 나면 문득 달빛 아래에서 입김을 불어 꽁꽁 언 붓을 녹이는 한사(寒士)와 궁유(窮儒)를 생각하고는 정신이 번쩍 들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대학(大學)》은 바로 사서(四書)의 요지가 되는 것이다. 경(經) 1장은 또 전(傳) 10장의 강기(綱紀)이다. 만약 경 1장을 잘 읽어서 그 뜻을 두루 잘 이해한다면 전 10장의 뜻이 손바닥처럼 환히 보일 뿐만 아니라, 《논어》, 《맹자》, 《중용》에 미루어 가더라도 대나무가 칼날을 대는 족족 갈라지는 것처럼 쉽게 터득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공령(功令)이나 응제(應製) 문자는 짓는 자의 능력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지만, 또한 글제가 좋은가 좋지 않은가에 영향을 받는 바가 없지 않다. 그 때문에 내가 절제(節製)나 반시(泮試)를 치를 때에 제목이 될 만한 글귀를 찾기 위해 하루 또는 이틀의 시간을 들이곤 하는데, 경들 중 일찍이 대사성(大司成)을 지낸 사람들도 과연 이렇게 하는지 모르겠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근래에 선비들이 어(魚) 자와 노(魯) 자를 구별할 정도만 되면 문득 과장(科場)의 변려체(騈儷體)에 골몰하면서도 경학(經學)에 대해서는 대부분 잘 알지 못한다. 일찍이 선비들을 시취(試取)할 때에 심성 이기(心性理氣)로 문제를 내었더니, 대책(對策)한 글이 대부분 장화를 신은 채 발바닥을 긁고 쇠를 금이라고 말하는 데로 귀착됨을 면치 못하였다. 마음과 몸에 보존하여 언사(言辭)로 드러내는 것을 오늘날의 선비들에게 바라기는 어렵겠지만, 귀와 입으로 전습(傳襲)하는 학문조차도 대개 드문 실정이다. 문장의 도(道)는 본디 세상과 더불어 낮아지고 높아지는 것인데, 더구나 이것은 문장에만 그치는 것이 아님에랴. 이것이 내가 성균관 유생들에게 응제시(應製試)를 보일 때에 누차 개탄하였던 뜻이고, 또 나이 젊은 생원ㆍ진사들로 하여금 사서(四書)를 반복해서 익히게 한 까닭이다. 경들은 모쪼록 이러한 뜻을 알고 먼저 자제(子弟)들부터 교도하여 모두 경학을 독실히 연마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게 함으로써 날로 새로워지는 실질적인 효험이 있게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초록(鈔錄)하는 작업은 학문에 큰 도움이 된다. 장횡거(張橫渠)가 마음속에 깨달은 오묘한 이치를 기록하였던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우리나라의 여러 선정(先正)들도 모두 초록하여 모으는 데서부터 공력을 들였다. 나는 일찍부터 초록하는 공부를 가장 좋아하여 직접 써서 편(編)을 이룬 것이 수십 권에 이르는데,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효과를 거둔 곳이 상당히 많으니, 범범히 읽어 넘어가는 것과는 같은 선상에서 논할 수 없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글은 뜻이 순하고 말이 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근래에 이른바 ‘기이하고 교묘하고 놀랍고 빼어나다’는 글은, 내가 보기에는 음조가 낮고 구슬프며 저속하지 않은 것이 거의 없다. 이것이 패관서(稗官書)의 무역을 금하고 반드시 문체를 변화시키고자 애를 쓰는 까닭이다. 한유(韓愈)나 구양수(歐陽脩)와 같은 자를 어디에서 얻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검교직제학 신 서유방(徐有防)이 계축년에 기록한 것이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의 학자들은 제자(諸子)를 두루 섭렵하려 할 필요가 없다. 《육선공주의(陸宣公奏議)》와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두 책만 익숙히 읽어서 득력(得力)한다면 문장을 지을 수도 있고 사업(事業)을 해낼 수도 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근세의 사대부는 식견(識見)이 높지 않아서 매번 일이 닥쳤을 때 최상(最上)의 도리에 도달하지 못하는데, 이것은 책을 읽지 않아서 그런 것일 뿐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찍이 도종의(陶宗儀)의 삼교일원도(三敎一源圖)를 보았더니, ‘유가(儒家)에서는 이(理)를 으뜸으로 꼽고 불가(佛家)에서는 계(戒)를 으뜸으로 꼽고 도가(道家)에서는 정(精)을 으뜸으로 꼽지만, 건순(健順)을 두 번째로 꼽는 것은 삼교가 똑같다’ 하였는데, 이 주장이 옳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누에가 고치를 짓기도 전에 뽕잎 이미 없어지니, 아름다운 머리 헝클어지고 화장 자국은 말랐어라. 궁중에선 비단을 베처럼 가벼이 여기는데, 어찌하면 왕손들이 이 그림을 보게 될까[蠶未成絲葉已無 鬢雲撩亂粉痕枯 宮中羅綺輕如布 爭得王孫見此圖]’라는 것은 조쌍연(趙雙硯)이 잠부도(蠶婦圖)에 쓴 시이다. 나는 일찍이 이 시를 사랑하여 읊조리면서 두소릉(杜少陵)의 ‘대궐 뜰에서 나누어 주는 비단은, 본래 가난한 여인에게서 나온 것이라네[彤庭所分帛 本自寒女出]’라는 구절에 견주었다.” 하였다. 연신(筵臣)이 조쌍연이 누구인지를 모르자 하교하기를, “명 나라 태조(太祖) 때의 사람으로, 일찍이 중귀(中貴)를 위하여 이 시를 지었는데, 태조가 중귀의 집에 행행했다가 이 시를 보고 즉시 불러 관직에 임명하였다. 성품이 지극히 청렴하였는데, 일찍이 고을 수령이 되었을 적에 벼루 두 개를 가지고 왔기 때문에 조쌍연이라고 부른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송(宋) 나라 태조(太祖)의 ‘해변의 산 떠나지 않았을 땐 천산이 어둡더니, 하늘 위로 뜨자마자 만국이 밝아지네[未離海嶠千山暗 才到天心萬國明]’라는 시에는 첩첩이 닫혀 있는 문을 활짝 열어 주는 뜻이 있으므로, 내가 선비들을 시험 보일 때 이것으로 제목을 내었었다. 얼마 전 진욱(陳郁)이 지은 《장일화유(藏一話腴)》라는 책을 보았더니, ‘잠깐 사이 하늘 위로 달려 올라와, 잔성도 쫓아내고 달마저 쫓아내네.[須臾走向天上來 趕却殘星趕却月]’라는 것이 태조의 시이고, ‘천산만국(千山萬國)’의 구절은 국사(國史)가 윤색한 것으로서 문기(文氣)가 비약(卑弱)하여 원작(原作)만 못하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나는, 기세(氣勢)가 비록 조금 못한 듯하긴 해도 혼후(渾厚)한 점은 본래 더 낫다고 생각한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동파(東坡)가 항주(杭州)에 있을 때 하거비(何去非)를 천거하였는데, 문장이 웅건하여 진(秦)ㆍ한(漢)의 필세(筆勢)를 얻었다고 극구 칭찬하고, 이어 그가 지은 《비론(備論)》 28편을 올렸다. 동파의 높은 안목과 대단한 위치로서 임금에게 그 사람을 칭찬하였을 때는 필시 과장하여 말하지는 않았을 것인데, 애석하게도 《비론》을 지금은 볼 수 없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 문체가 날로 못해져서 수습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른 것은 고증학(考證學)이 그 폐단을 열어 놓은 것이다. 자신이 지은 작품으로는 작자(作者)의 범주 안에 들기 어렵다는 것을 스스로 헤아리기 때문에 옛사람의 저작 중 지리(地理), 인명(人名), 세대(世代), 보계(譜系) 등에 혹 잘못된 부분이 있는 곳을 찾아낸 다음 가지가지 증거를 끌어다 대며 부연 설명하는 것으로 책 전체를 채워 놓았으니, 이렇게 하고도 문장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공력을 많이 들여야 오래도록 명성을 누릴 수 있는데, 애당초 공력을 들이지도 않고 후세에 명성을 거두고자 하는 자가 많으니, 그 비속하고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 가소롭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 종류의 책도 끝까지 파고들지 못하고 한 가지의 일도 끝까지 이루지 못하면서 이쪽에서 몇 구절을 따 오고 저쪽에서 몇 구절을 따 오는 작태를 뜻 있는 선비는 경계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라는 말은 주 부자(朱夫子)가 호대시(胡大時)에게 답한 편지에 들어 있는 내용인데, 요즈음 사람들에게는 바로 이런 병통이 있다. 거칠고 경솔하여 정밀하고 상세한 것을 견뎌 내지 못하고, 소홀하고 데면데면하여 빈틈없이 할 생각을 하지 않으니, 이러고서야 무슨 일인들 해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주자(朱子)가 강병도(康炳道)에게 답한 편지에서 ‘일을 논하면서 이치를 구하지 않아서 마침내 병통이 생겨난다’라고 한 것이니, 실로 의미 있는 말씀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요즈음은 경학(經學)에 공력을 들이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전혀 들어 보지 못했고, 구두(句讀)와 훈고(訓詁)의 학문마저도 아득히 들리지 않으니, 이는 마치 거울을 뒤집어 놓고서 사물을 비춰 보려고 하는 것과 같다. 이른바 경학이란 별다른 일이 아니라, 일상 용품을 사람마다 가지고 있고 음식마다 먹는 것과 같다. 지금은 오로지 과구 문자(科臼文字)만을 일삼아 겉만 번지르르하게 수식한 문사(文辭)를 가지고 한때 과거를 주관하는 시관(試官)의 눈에 들려고 하는데, 비록 과구 문자라고 하더라도 경술(經術)에 근본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합격할 수 있겠는가. 지난날 문청공(文淸公) 남유용(南有容)과 문헌공(文憲公) 박성원(朴聖源)은 모두 과거를 통해서 출신하였지만, 그들이 경전(經傳)을 이야기할 때는 성심을 다한 말이 들을 만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고개를 끄덕이게 하였는바, 나는 이 두 사람을 통해 득력(得力)한 것이 무척 많았다. 문청공(文淸公) 서지수(徐志修)는 경학으로 자임(自任)하지 않았으나 경서의 소주(小註)까지도 모두 외우고 있었으며, 고 제학 황경원(黃景源)의 강설(講說)도 볼만한 것이 많았다. 근래에는 이러한 사람도 보기 어려우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 경의(經義)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일 경우에는 문장의 대가(大家)이거나 문벌이 좋은 사람이라도 일절 청화직(淸華職)이나 문임(文任)에 의망하지 않는다면 권면하는 효과가 있을 듯하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설문장전(說文長箋)》이 나오면서 자잘한 지혜로 부회(傅會)하고 천착(穿鑿)하는 습속은 다시 말할 것이 없을 지경이 되었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선비들은 애당초 경서의 뜻을 연구하지도 않고 단지 남의 글귀를 따다가 과거 시험에 사용하는 데만 뛰어나니, 비록 장전(長箋)을 짓고자 하더라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시(詩)의 근원은 강구(康衢)의 노래에서 나왔으며, 그 이전은 상고할 수가 없다. 지극한 다스림의 시대에는 밭 갈아서 먹고 우물을 파서 마시는 노인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읊어 댄 구절이라도 후세의 법이 되었는데, 후세로 내려와서는 높은 벼슬아치나 고귀한 사람이 심혈을 기울여서 지은 작품이라도 볼만한 것이 없다. 한마디 말로 단정하자면 화려함을 없애고 진실된 데로 나아가며 말단을 버리고 근본을 구하는 것이 바로 학문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는 여가 시간에 하는 공부에서 반드시 한 건의 일을 만들어서 세밑에 문서를 마감하듯이 마무리를 하였다. 작년에는 《시관(詩觀)》으로 마감(磨勘)하였고 올해는 《팔자백선(八子百選)》에 현토(懸吐)하였는데, 현토할 때에 보니 종전에 간혹 잘못 알고 있었던 곳이 있었다. 작가(作家)의 문자도 이러한데, 더구나 경서(經書)이겠는가.” 하였다.

원임 직각 신 윤행임(尹行恁)이 계축년에 기록한 것이다.

수원부(水原府)를 행궁(行宮)으로 승격시키고 화성(華城)이라는 고을 이름을 하사하고, 직접 ‘화성행궁(華城行宮)’이라는 네 글자의 대자 편액(大字扁額)을 쓴 다음 총관(摠管) 조윤형(曺允亨)에게 명하여 모각(模刻)하도록 하였다. 조윤형이, 어필(御筆)의 필력(筆力)이 웅건하고 자세(字勢)가 정심(精深)하여 그 신령스러운 운필을 얻기가 쉽지 않다 하여, 쌍구(雙鉤)와 향탑(響搨)으로 십여 본(本)을 바꾸고서야 완성하였다. 하교하기를, “내가 글씨에 의미를 두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다만 ‘여기에 나아가서 배운다’는 선현(先賢)의 경계를 생각해서 일찍이 방과(放過)하지 않은 것일 뿐이다. 내 글씨를 보는 자가 그것이 심획(心畫)이라는 것을 안다면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할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명귀주(貞明貴主)는 부덕(婦德) 이외에 서예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 집안에 전해 오는 ‘화정(華政)’이라는 두 글자의 대자(大字)는 굳건하면서도 아름다워 작가의 풍도(風度)가 있으니, 규방(閨房)에서 그에 맞먹는 솜씨를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옛날 명가(名家)의 대자와 견주더라도 그다지 뒤지지 않는다. 풍성하고 아름다우며 조심스럽고 온후한 기운이 점획(點畫) 밖으로 흘러넘치는 것에서 그 덕성(德性)을 상상해 볼 수 있으니, 그 자손이 번성하고 부귀와 복택(福澤)이 고금에 비할 곳이 드문 것은 실로 까닭이 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나무와 비단에 전사(傳寫)하던 것이 변하여 누판(鏤板)이 되었고 누판이 변하여 활자(活字)가 되었는데, 활자는 송 나라 초엽에 처음 보인다. 필승(畢昇)은 처음에 진흙을 이겨서 활자를 만들었기 때문에 손만 가면 쉽게 부서졌고, 그후에 비릉(毗陵) 사람이 또 납으로 만들었는데, 진흙을 이긴 것보다는 조금 나아도 오래가지 못하였다. 우리 조정의 동자(銅字)는 태종조(太宗朝)에 시작되었는데, 세종(世宗) 갑인년에 다시 주조한 것에 이르면 흠잡을 곳이 없을 정도였다. 나는 일찍이 두 차례 활자 주조를 명하되, 갑인자(甲寅字)만을 본으로 삼고 다른 본은 취하지 않도록 하였다. 한구자(韓構字)에 이르면 글자 모양이 가늘고 어두워서 선본(善本)이 못 되는데, 우연히 관서(關西)에서 주조하였기 때문에 내각(內閣)에 보관해 두었다. 만약 한구자를 다시 주조한 것이 당저(當宁) 때의 일이라 하여 내가 그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서(經書)를 새로 인쇄하는 데 내각에 소장된 정유자(丁酉字)를 쓰고, 이어 임진년과 정유년에 두 차례 활자를 주조한 시말(始末)을 기록하여 매 책의 마지막 편 아래에 엮어 놓았으니, 이는 대개 《대학연의(大學衍義)》의 고사(故事)가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 활자를 써서 책을 간행하는 사람은 모두 이 글을 발문으로 쓸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는 해마다 한 질의 책을 읽는 것을 한 번도 빠뜨린 적이 없었다. 올해는 새로 인쇄한 경서를 읽었는데, 그 자본(字本)이 선명한 것이 마음에 들어서 처음에는 두고두고 읽고자 하였으나, 기무(機務)에 쫓겨 겨우 《상서(尙書)》만 마치고 다른 경서는 보지 못했으며, 그저 《팔자백선》을 현토(懸吐)대로 음독(音讀)했을 뿐이다. 매번 ‘삼동(三冬)에 읽은 문사(文史)만으로도 일상생활에 충분히 쓸 수 있다’고 한 옛사람의 말을 생각하면 크게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 하였다.

원임 직각 신 서영보(徐榮輔)가 계축년에 기록한 것이다.

하루는 하교하기를, “내가 춘궁(春宮)에 있을 적에 교유(交遊)했던 빈료(賓僚) 중에는 경학(經學)으로 이름난 선비가 많았다. 매번 침수(寢睡)를 여쭙고 수라상을 살피는 틈틈이 이들과 아침저녁으로 만나서 토론하였고, 또 일찍이 방 하나를 깨끗이 청소한 다음 차분히 궁리 격물(窮理格物)의 학문을 하였는데, 어떤 때는 종일토록 꿇어앉아 있기도 하였다. 그 때문에 입고 있던 바지가 뚫어지기까지 하였으니, 이 일이 지금까지 궁중에 전해져 오고 있다. 내가 처음에 기대했던 바는 반드시 요순(堯舜)과 같은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었는데, 근래로 오면서 예전에 공부했던 것을 모두 잊어버린 데다 이러한 뜻도 점차 해이해지고 있으니, 시행(施行)과 사업(事業)을 가만히 따져 보면 실로 처음 기대했던 것에 미치지 못한다는 탄식이 많다. 조정의 기상이 마구 무너져도 보합(保合)할 가망이 없고, 선비들의 추향(趨向)이 경박한데도 바로잡았다는 칭찬이 들리지 않고, 민생(民生)이 곤란하고 초췌한데도 생업의 터전을 마련해 줄 방도가 없으니, 당우(唐虞) 시대의 화락(和樂)하고 자적(自適)하는 습속은 그만두고라도, 한당(漢唐) 시절과 같은 소강(小康)의 다스림도 쉽게 할 수가 없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처음 먹었던 마음을 떠올리며 서글퍼하지 않은 적이 없다.” 하였다.

일찍이 후세의 학자들이 경서를 익히지 않는 것을 걱정스러워하고, 또 간행되어 세상에 유포된 경서가 오랜 시일이 지나면서 점차 없어지고 있는 것을 염려하여, 교서관(校書館)에 명하여 경비를 조달하여 간행, 반포하도록 하였다. 또 지방 수령 중에서 인쇄하기를 원하는 자가 있으면 허락하여 널리 유포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글자를 주조한 것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다. 국초(國初) 태종조(太宗朝) 계미년에 일찍이 경연(經筵)에서 쓰던 고주본(古註本) 《시경(詩經)》, 《서경(書經)》, 《춘추좌전(春秋左傳)》을 내주어 자본(字本)으로 삼아서 판사평사(判司平事) 이직(李稷)으로 하여금 수십 만 자를 주조하게 하였다. 세종조(世宗朝) 경자년에는 공조 참판 이천(李蕆)에게 명하여 구본(舊本)을 그대로 써서 고쳐 주조하게 하였고, 또 갑인년에는 경연청에 소장하고 있던 《효순사실(孝順事實)》, 《위선음즐(爲善陰騭)》 등 책을 자본으로 삼아서 집현전 직제학 김돈(金墩)으로 하여금 20만 자를 주조하게 하였다. 나는 임진년에 동궁에 있으면서 대조(大朝)에 우러러 청하여 경비를 마련한 다음 내하(內下)한 갑인자 인쇄본 《심경(心經)》, 《만병회춘(萬病回春)》 두 책을 자본으로 삼아 15만 자를 주조하여 교서관에 보관해 두었고, 즉위한 원년 정유년에는 평안도 관찰사 서명응(徐命膺)에게 명하여 갑인자를 자본으로 삼아 임소(任所)에서 15만 자를 인쇄하게 한 다음 내각(內閣)에 보관해 두었다. 또 임인년에는 평안도 관찰사 서호수(徐浩修)에게 명하여 해당 감영(監營)에서 주자소(鑄字所)를 열게 하되, 본조인(本朝人) 한구(韓構)의 글씨를 자본으로 삼아서 8만여 자를 주조하게 한 다음 역시 내각에 보관해 두었다. 이것을 통해서 활자(活字)의 내력을 상고할 수 있지만, 또한 내가 열성(列聖)을 계술(繼述)하는 한 가지 의미를 붙인 것이라는 것도 몰라서는 안 된다. 또 활자에는 모두 기(記)와 발(跋)이 있는바, 계미자에는 보문각 대제학 권근(權近)의 발문이 있고, 경자자에는 집현전 대제학 변계량(卞季良)의 발문이 있고, 갑인자에는 집현전 직제학 김빈(金鑌)의 발문이 있고, 당저(當宁) 정유자에는 규장각 제학 서명응의 기가 있다. 그러니 이번에 경서를 새로 간행하면서 상세한 시말(始末)을 기록해 놓지 않아서는 안 되겠다.” 하고, 이어 각신(閣臣)에게 명하여 그 뒤에 짧은 발문을 붙이도록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당자서(唐子西)의 시에 ‘산정사태고 일장여소년(山靜似太古日長如少年)’이라 하였는데, 소년(少年)의 소(少) 자를 그대들은 어떻게 보느냐?” 하므로, 신과 윤행임이 함께 대답하기를, “노소(老少)의 소로 해석하기도 하고 대소(大小)의 소로 해석하기도 하여 두 설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소(小) 자로 봐도 뜻이 통하지만 소년의 소로 보면 의미가 더욱 깊어진다.” 하였다.

각신이 연상 첩자(延祥帖子)를 써서 올렸는데, 하교하기를, “글씨는 작은 기예지만 멋대로 써서는 안 된다. 정자(程子)는 ‘글씨를 쓸 때는 경건한 자세를 지녀야 한다’ 하였고, 유공권(柳公權)도 ‘마음이 바르면 붓도 바르게 된다’고 하였다. 글씨를 쓸 때는 잘 쓰려고 할 것이 아니라 고법(古法)을 지니도록 해야 한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문장은 달리 어려운 것이 아니라 좋은 대목[佳處]을 구사하기가 매우 어렵다. 전편(全篇)에다 잠깐 사이에 수천 글자를 쓸 수 있어도 가장 중요한 대목에 이르게 되면 한 글자를 놓는데도 어근버근하여 잘 맞지 않는다. 문장을 짓는 자가 어려운 대목[難處]에 정신을 집중하고 쉬운 곳은 손 가는 대로 쉽게 써 내려간다면, 좋은 문장이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하였다.

검교직각 신 남공철(南公轍)이 계축년에 기록한 것이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유학(儒學)의 심학(心學)은 불씨(佛氏)의 성학 공부(性學工夫)와 매우 비슷한 것으로, 사(邪)와 정(正)의 나뉨이 털끝만 한 소홀함에서 일어나니, 유학을 공부하는 자는 불교의 이치를 몰라서는 안 된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노불(老佛)을 이단(異端)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말류(末流)의 폐단을 가리키는 것이지 그 시원(始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만법이 하나로 귀결된다[萬法歸一]’는 것은 불교나 유가(儒家)가 애당초 다르지 않았는데 불씨가 ‘일귀하처(一歸何處)’라는 네 글자를 덧붙여 놓은 따위가 이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황제(黃帝)는 활, 화살, 방패, 창을 만들어 사방에 위력을 보였고, 배와 수레를 만들어 길이 통하지 않던 곳을 다닐 수 있게 하였으며, 들을 구획하고 고을을 나누어 만국(萬國)을 만들었다. 또 율려(律呂)를 만들고 글씨[書契]를 만들고 의약(醫藥)을 만들고 갑자(甲子)를 만들고 달력을 만들었다. 무릇 천하만세의 백성들이 일상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있는 토대가 모두 황제의 힘을 빌려 만들어졌으니, 황제의 심적(心的) 노고가 또한 지극하다고 하겠다. 그런데 후세에 와서 청정 무위(淸淨無爲)를 추구하거나 기예(技藝)와 술수(術數)를 일삼는 사람들이 모두 황제를 시조로 삼으면서 황제가 마침내 외도(外道)에 가까워졌으며,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황로(黃老)의 설’이라고 일컫기까지 하니, 너무도 이상하지 않은가. 어찌 하늘을 계승하여 법칙을 세운 성인이면서 외도에 가까운 자가 있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노씨(老氏)의 학문은 명실(名實)을 깊이 따지고 공리(功利)에 절실한 것으로서 애당초 세상을 버리고 신선이 되겠다는 말이 없다. 그런데 단학가(丹學家)에서 선도(仙道)의 원조로 삼고 있으니, 끝내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가(儒家), 불가(佛家), 노자(老子)가 삼교(三敎)인데, 삼교의 가르침은 모두 풍속을 교화하고 세상 사람들을 면려하는 것을 궁극적인 공효(功效)로 삼는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마음[心]으로써 마음을 본 것은 마음을 외면에 있는 것으로 생각한 불씨의 오류이고, 성(性)을 버려둔 채 성을 구한 것은 성을 제대로 몰랐던 고자(告子)의 오류이다. 양쪽 모두 심과 성의 본연을 잃어버린 것이지만 고자가 더욱 거칠고 치밀하지 못하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학(學)이라는 한 글자는 부열(傅說)에게서 처음 보이며, ‘가르침은 배움의 반이다.[惟斅學半]’는 말은 실로 천고(千古)를 통해 학문을 논한 시조가 된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소학(小學)》 하나만 가지면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를 이루고도 남을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전의 뜻은 반드시 익숙히 토론하고 차분히 연마하여 털끝만큼이라도 의심되거나 모르는 부분이 없어야만 남에게 말하고 논란할 수 있는 것이니, 조금 안다고 함부로 아는 척해서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해서는 안 된다. 생이지지(生而知之)에 가까웠던 주자(朱子)도 더러 초년(初年)과 만년(晩年)의 학설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있었는데, 더구나 애당초 주자의 문장(門墻)을 엿보지 못한 후학(後學)과 소유(小儒)이겠는가. 육합(六合)을 어찌 ‘밖이 없다’고 말하겠는가. 말해 봐야 이로울 것이 없기 때문에 성인께서 놔두고 논하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정암(羅整庵)이 두 차례에 걸쳐 왕양명(王陽明)에게 준 ‘변심학서(辨心學書)’는 주문(朱門)에 큰 공이 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재주와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도 학문에 힘을 쓰려 하지 않는다면 도리어 더디고 둔한 사람이 고생스럽게 학업에 힘쓰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전 중에서 가장 깨닫기 어려운 것이 바로 《시경(詩經)》과 《춘추(春秋)》이다. 다른 경전은 비록 오묘한 뜻이 많더라도 곰곰이 연구하고 여러 차례 읽다 보면 자연히 길이 보이게 마련이지만, 이 두 경서의 경우에는 성인이 가르침을 남기고 작자가 감흥을 일으킨 것이 각각 그 당시 나름대로 그럴 만한 까닭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인데, 글을 엮음에 있어서는 은미하기도 하고 완곡하기도 하고 숨기기도 하고 드러내기도 하였으며, 뜻을 취한 형식은 흥(興)이기도 하고 비(比)이기도 하고 풍자이기도 하고 칭찬이기도 하니, 뒷사람이 어떻게 그러한 까닭을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좌씨(左氏)가 공양씨(公羊氏), 곡량씨(穀梁氏)와 《춘추》에 대한 전(傳)을 달리하고 모장(毛萇)이 한영(韓嬰)과 《시경》의 뜻을 달리 해석하였던 것이니, 이는 모두 암중(暗中)에 모색한 데서 연유한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옥(玉)이 쪼고 갈지 않아도 규장(圭璋)을 이루고 사람이 학문을 힘입지 않고도 성현이 되는 것은, 사리로 따져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성인의 책을 읽더라도 하나하나 다 수용(收用)하지는 못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깊은 맛이 있어 ‘마음이 편안하고 몸이 펴지는[心廣體胖]’ 경지를 깨닫게 된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논어(論語)》는 공문(孔門) 제자들이 공자(孔子)의 언행(言行)을 기록한 책이므로 모두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오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순금과 좋은 옥처럼 인위적인 흔적이 없어 마침내 만세(萬世) 학자들의 법식이 되었으니, 여러 제자들의 학업이 성인에게서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는 것을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학》 한 책은 경(經) 1장부터 전(傳) 10장에 이르기까지 맥락이 곧장 접하고 지름길이 곧게 통하여 다시 틈이나 막힌 곳이 없으니, 참으로 이른바 ‘겹겹의 문이 활짝 열려 내 마음을 탁 틔워 준다’는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다른 경서는 주소(註疏)가 집주(集註)보다 못하지만, 《시경》에 있어서만은 주소의 해석이 집주를 능가하는 곳이 더러 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서전(書傳)》은 조금 읽어서는 그다지 맛을 느끼지 못하고, 많이 읽어야 비로소 효과를 볼 수 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세상 사람들은 《시경》을 읽을 때에 춤을 추고 발을 구르게 될 정도의 의미가 있다고 하는데, 나는 《예기(禮記)》를 읽을 때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漢) 나라 이래로 《주역(周易)》을 연구한 자들은 모두 《주역》의 한 단면을 깨달았을 뿐이고 전체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강절(康節)과 이천(伊川)도 모두 이러한 병통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니, 이는 대개 잡을 곳도 없고 형상할 수도 없는 일단(一團)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근래 조정 신하들 중에서 김희(金憙)만큼 경의(經義)를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 일찍이 보건대, 서형수(徐瀅修)가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서 강(講)에 응했을 때 김희가 시관(試官)이 되어 심성(心性)에 관한 설(說)을 가지고 서로 논란하였는데, 두 사람이 모두 굽히려 들지 않아 아침에 시작한 토론이 한낮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므로 내가 너무 시간을 끈다고 저지하고 나서야 두 사람이 중지하였다. 며칠 뒤에 또 강석(講席)에서 마주치게 되자, 두 사람이 이전의 설을 다시 반복하며 당당히 주장하기를 마지않았다. 이는 실로 한때의 미사(美事)이지만, 또한 두 사람의 학문의 수준이 얕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두 설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나는 두 설 모두 각각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마디로 대체를 말하고자 한다면 서형수의 설이 옳다.” 하였다.

직각 신 김조순(金祖淳)이 계축년에 기록한 것이다.

일찍이 새로 간행한 책들을 열람하다가 하교하기를, “《돈효록(敦孝錄)》이나 《예의유집(禮疑類輯)》과 같은 책들은 고(故) 유선(諭善)이 개인적으로 수록(蒐錄)하여 보관해 두었던 것인데, 내가 춘저(春邸)에서 또한 일찍이 그 초본(草本)을 한 번 보았었다. 이 책을 특별히 간행하도록 명한 것은 그 사람을 총애하거나 그 책을 대단하게 여겨서가 아니다. 효(孝)는 민생의 대절(大節)이고 예(禮)는 인사(人事)의 법칙이다. 지금 백성들의 뜻이 날로 각박해지고 습속이 날로 투박해지고 있으니, 이 책을 널리 반포하여 집집마다 비치해 두고 읽게 한다면 풍속을 돈후하게 하는 데 일조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였다.

검교직제학 신 김재찬(金載瓚)이 갑인년에 기록한 것이다.

상이 이르기를, “오직 문장에만 주력하고 경술(經術)에 근본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이단(異端)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큰일을 당하였거나 무척 의심스러운 사안을 결정할 때에 허둥대어 전도 착란(顚倒錯亂)하지 않는 사람이 적은 것은, 그 병통이 학문을 하지 않은 데서부터 나온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대부가 경서에 통달하지 못한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는다면 다른 것은 논할 가치도 없다.” 하였다.

직제학 신 서용보(徐龍輔)가 갑인년에 기록한 것이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사람들은 경학(經學)이라고 하면 그저 성리(性理)에 관한 설(說)이 경학인 줄만 알지 어떠한 사물도 경학을 배제한 상태에서는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모른다. 시험 삼아 근래 화성(華城)의 축성(築城)을 가지고 말해 보면, 일에 임하여 조처할 방도를 모르는 사람은 모두 경학에 어두워서 식견이 밝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만약 경전의 가르침을 마음으로 터득한 바가 있다면 성(城)이나 수레[車]의 제도도 여기에서부터 미루어 갈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직제학 신 정대용(鄭大容)이 갑인년에 기록한 것이다.

《주서백선(朱書百選)》을 편찬하도록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지금의 선비들은 명(明)ㆍ청(淸)의 낮고 구슬픈 학문에 고질적인 병통이 있지 않으면 공령(功令)이나 응수(應酬) 문자에 빠져 있고, 제대로 주자서(朱子書)를 읽은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어 보지 못하였다. 나는 장차 이 책으로 한 시대를 크게 변화시키는 토대를 삼으려 하는데, 굳이 백 편을 뽑은 것은, 지금 사람들의 병통은 넓게 보기는 하되 요점은 알지 못하고 택하기는 하되 정밀하지 못한 데 있기 때문에 먼저 간략한 곳부터 착수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또한 높이 오르려면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하고 멀리 가려면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하는 뜻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주자가 위응중(魏應仲)에게 답한 편지에서 ‘열흘에 한 번씩 휴일을 두고 반복하여 익힌다.[休日溫習]’라고 말한 것은 그야말로 독서의 요법이다. 경연의 온역강(溫繹講)은 이 규례를 따른 것이다.” 하였다.

검교직각 신 이만수(李晩秀)가 갑인년에 기록한 것이다.

상이 이르기를, “삼경(三經)과 사서(四書)의 활인(活印)에 당저(當宁) 정유자(丁酉字)를 썼는데, 이것은 바로 세종조 갑인자 본이다. 작년 계축년에 인쇄를 시작하여 올 갑인년에 일을 끝냈으니, 전후(前後)의 갑인이 서로 부합하는 것이 실로 우연치가 않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각신 이만수가 명을 받들고 영남으로 갈 적에 선정(先正)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서원에 사제(賜祭)하였는데, 옥산서원(玉山書院)에서는 선정이 손수 쓴 《속대학혹문(續大學或問)》을 가져오고 도산서원(陶山書院)에서는 선정이 문인(門人)과 주고받은 친필 서찰을 가져와서 올렸다. 하나는 깊은 생각이 심원한 경지까지 나아가고 신묘한 묘리를 홀로 깨달은 공부였으며, 하나는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정미한 의리와 오묘한 도가 드러난 것이었는데, 침잠(沈潛)하여 반복해서 읽으면 읽을수록 더욱 맛을 느낄 수 있었다. 금년에 비로소 승지가 명을 받들고 가는 때에 각각 발문(跋文)을 지어서 돌려주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관동(關東)의 경공생(經工生)들에게 경의(經義)에 대해 조목조목 물은 것은 진작시키고 흥기시키려는 의도였는데, 안석임(安錫任)과 박사철(朴師轍)의 대답이 가장 마음에 들어서 한밤중까지 읽으면서 시간이 늦은 줄도 몰랐다. 그다음으로는 최창적(崔昌迪)을 들 수 있겠는데, 최창적이 《주역(周易)》에 대해서 답한 것은 또 근거(根據)가 여러 대책(對策)들 중에서 가장 나았다. 일찍이 듣기로 그 아비인 고 정언 최규태(崔逵泰)가 역학(易學)에 조예가 깊어서 문청공(文淸公) 서지수(徐志修)가 탄상(歎賞)했을 정도라고 하니, 그의 학문이 유래가 있는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초계문신(抄啓文臣)을 권면하기 위해서 보이는 경서 시험이 이런 수준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저들은 모두 경학에 깊이 통달한 선비이나, 다만 근래에 연소한 문신들이 공령 문자(功令文字)만 대충 익혀 과거(科擧)에 합격만 하고 나면 책을 묶어서 시렁에 올려놓고 육경(六經)을 읽지 않아 무슨 말인지조차 모르는 지경이기 때문에 면전(面前)의 알기 쉬운 글 뜻을 대충 익히게 하려는 것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이렇게 지극히 쉬운 일까지도 제대로 하지 못하니, 생각하면 걱정스러울 뿐이다.” 하였다.

천신(賤臣)에게 하교하기를, “퇴계(退溪)와 율곡(栗谷) 두 선정(先正)의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은 각각 차이점이 있는데, 어느 쪽의 설이 옳은가?” 하므로, 대답하기를, “신은 일찍부터 문성공(文成公)의 설이 바뀔 수 없는 정론(定論)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지금 그 문집에 실려 있는 내용이 명백하고 통쾌하여 알기 쉬우나, 다만 온 세상이 쏠리듯이 따르게 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김창흡(金昌翕)처럼 문장과 안목을 갖춘 사람도 오히려 퇴계의 설을 취하는 바가 있었으니, 신은 적이 의심스럽게 생각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문성공의 설을 누가 옳지 않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문순공(文純公)이 논한 바도 나름대로 논리가 있으므로 쉽게 말할 수 없다.” 하였다.

검교직각 신 서영보(徐榮輔)가 갑인년에 기록한 것이다.

상이 이르기를, “육 선공(陸宣公)의 문장 중에서는 주의 문자(奏議文字)가 가장 절실하고, 주자(朱子)의 공부는 모두 편지 속에 담겨 있다. 지금 이 두 가지를 추려 뽑아서 한 질의 책자(冊子)로 엮고자 하는데, 사정(事情)에 절실한 곳은 문기(文氣)도 서로 유사한 점이 있으니, 학자들이 가장 많이 읽을 만한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고 상신(相臣) 김육(金堉)은 사업(事業)으로 일컬어졌고 문장(文章)으로는 드러나지 않았다. 지금 그 유집(遺集)을 보건대 참으로 근세에 쉽게 얻지 못할 문자이니, 공업(功業)과 문장이 서로 엄폐(掩蔽)하는 것이 대부분 이와 같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동파(東坡)가 지은 ‘육지(陸贄)의 주의(奏議)를 올리는 차자’는 도리어 육지의 문체와 유사하니, 옛사람도 남을 모방하여 글을 짓는 경우가 없지 않았던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주자의 편지는 짧은 것이 더욱 좋다. 나는 주자가 여백공(呂伯恭)에게 답한 편지 가운데 ‘매미 소리가 날로 맑아진다[蟬聲日淸]’는 말을 가장 좋아한다. 몇 줄짜리 편지는 사실(事實)이나 의논(議論)이 볼만한 곳은 없지만, 반복해서 읊조리노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저절로 풍신(風神)이 유원(悠遠)해지고 기상(氣象)이 편안해진다.” 하였다.

원임 직각 신 남공철(南公轍)이 갑인년에 기록한 것이다.

화성(華城) 향교(鄕校)에 행행하여 알성(謁聖)하려고 하면서 먼저 고유(告由)를 명하고 직접 제문(祭文)을 지어 내렸는데, 대성위(大聖位)로부터 우리나라 유현(儒賢)에 이르기까지 각각 한 통씩의 제문을 지은 것이 모두 수백 구절이었다. 밤 일경(一更)에 천신이 입시하여 받들어 쓰기 시작해서 이고(二鼓)가 되자마자 편(篇)을 다 마쳤는데, 발휘(發揮)하여 형용한 것이 각각 지극히 잘 맞았으되, 글귀를 아름답게 구사하는 것은 성상께서 애당초 그다지 염두에 두지 않으셨다.

초계문신의 과강(課講)을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심(心), 성(性), 이(理), 기(氣)는 실로 학자가 깨닫느냐 깨닫지 못하느냐 하는 것의 관두(關頭)가 되지만, 만약 한바탕의 공허한 설화(說話)에 그친다면 심신에 도리어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 경의(經義)에 있어서는 활법(活法)이 귀한 법이고, 학문은 장차 쓰기 위한 것이다. 여러 문신들은 강론하는 때에 반드시 각각 일상의 생활에 긴요하고 실질적인 일에 적용하는 뜻에 유념해서 책과 내가 하나가 되고 말과 행동이 일치하게 할 것이며, 한갓 심과 성이라는 명목(名目)과 자구(字句)를 말하는 데만 힘쓰지 않도록 하라.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절실히 묻고 가까이 생각하는[切問近思] 학문인 것이다.” 하였다.

직제학 신 이만수(李晩秀)가 을묘년에 기록한 것이다.

문신 제술(文臣製述) 때 ‘본조에서 새로 인쇄한 《주서백선》을 올렸다[本朝進新印朱書百選]’는 것으로 제목을 명하였다. 과차(科次)할 때에 상이 고관(考官)에게 하교하기를, “근래에 신진배들이 주서(朱書)를 전혀 외우고 익히지 않기 때문에 소홀하고 거칢이 특히 심하여 취할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 이시원(李始源)은 지은 글이 조금 우수한 것이 제법 주서에 익숙하고, 연평(延平)과 면재(勉齋)를 언급한 구절도 《주서백선》을 편차(編次)한 본뜻을 제대로 안 것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이 책을 늘 손에서 놓지 않았고, 근래에도 여가 시간을 이용해서 백 번을 읽었지만 아직까지 공부를 마치지 못하였다.” 하였다.

검교직각 신 김면주(金勉柱)가 을묘년에 기록한 것이다.

일찍이 성균관 유생들의 응제문(應製文)을 직접 고시(考試)하면서 이르기를, “이 또한 완물상지(玩物喪志)에 가까운 것이지만 고질적으로 이 일을 좋아하여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하였다.

《근사록(近思錄)》을 과강(課講)할 때에 하교하기를, “옛사람의 강학(講學)은 마음으로 터득하고 일에 행하고자 하는 것이었는데, 지금 사람들은 글을 앞에 놓고 뜻을 말할 뿐 심신(心身)과 일에서 구하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태극(太極)과 이(理)가 같은 것이냐라든가 성(誠)과 인(仁)의 글자 뜻이 다른 것이냐라든가 하는 문제는 피차(彼此)가 논란해 봐야 문득 한바탕의 쓸데없는 말에 지나지 않으니, 이런 강학이 어찌 반푼인들 도움이 되겠는가. 여러 신하들은 이러한 뜻을 생각해서 오로지 평소 마음속에 의심스럽게 생각했던 문제만을 들어 반복하여 토론하고 변론하라. 그리하여 오늘 강학한 효과가 훗날 일을 행하는 데서 드러나 빈말로 귀결되지 않게 하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근래에 학자들이 인물(人物)의 오상(五常)에 대해서 논하기를 좋아하여 이러저러한 주장들을 내어 놓았지만, 학문을 하는 방법이 어찌 여기에 있겠는가. 내가 여기에 대해 일찍이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은 것도 한쪽으로 치우치는 폐단을 바로잡으려는 뜻에서였다.” 하였다.

일찍이 미발(未發)의 뜻에 대해서 논하였는데, 연신(筵臣) 가운데 연평(延平)의 정중체인(靜中體認)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이 있었다. 하교하기를, “꼿꼿이 앉아 적막함을 지키는 것은 끝내 혼매함으로 귀결되고, 조금만 안배(按排)하면 문득 이발(已發)에 속하니, 어떻게 해야 발(發)하여 절도에 맞는 대본(大本)이 되겠는가. 이러한 곳은 참으로 말하기 어렵지만 또한 공부를 하기 좋은 곳이다.” 하였다.

오륜(五倫)의 차서(次序)를 논할 때에 붕우(朋友)가 군신(君臣)이나 부자(父子)보다 가볍다고 하는 연신이 있었다. 하교하기를, “하늘이 정해 놓은 대륜(大倫)에 어찌 경중(輕重)이 있겠는가. 붕우가 비록 오륜의 끝에 놓여 있지만, 임금을 섬기고 어버이를 섬기는 방법을 붕우에게 힘입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오행(五行)이 토(土)가 아니면 이루어지지 못하고 오상(五常)이 신(信)이 아니면 확립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지금 사람들은 붕우 간의 도리가 중하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습속이 옛날만 못한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신 간에는 간격이 없는 것이 귀하지만, 만약 지나치게 친밀하게 지낸다면 이는 좋은 일이 아니다. 군자 간의 교제는 반드시 담담해야 하는 법이다.” 하였다.

《우암집(尤庵集)》 판본을 처음에는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보관해 두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하교하기를, “선정(先正)이 일생 동안 지킨 것이 바로 대의(大義)였는데 어찌 굳이 여기에다 보관해 두겠는가. 다른 곳에 옮겨 두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학문(學問)은 활법(活法)이 귀한 법인데, 근래 학자들은 대부분 이 공부가 부족하다. 송명흠(宋明欽)이나 김양행(金亮行) 같은 사람을 어찌 쉽게 얻을 수 있겠는가. 이 학문이 실오라기처럼 근근이 명맥을 이어 오고 있는데, 사대부 자제들 중에 과연 여기에 뜻을 둔 자가 있는지 모르겠다.” 하였다.

직각 신 이시원(李始源)이 을묘년에 기록한 것이다.

상이 이르기를, “국초(國初)의 문장은 혼후하고 순박한 것이 좋아할 만하였으니, 후대의 작가들은 본래 미칠 수 없다. 인물에 비유컨대, 시조(始祖)는 겉으로 보기에는 질박하고 촌스러워서 취할 만한 재주가 없는 것 같아도 종국적으로는 참된 뜻이 많아 후손이 번창할 수 있는데 반해, 후손(後孫)은 문채가 현란하여 보기에는 훌륭한 듯해도 종국적으로는 참된 뜻이 적어 쇠한 세상의 기상(氣象)을 면치 못하는데, 문장도 대개 이와 유사하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는 우리나라 문장가 중에서 최항(崔恒)과 서거정(徐居正)을 가장 좋아하는데, 문장이 여유 있고 느긋하여 한 사람이 노래하고 세 사람이 화답하여 여음(餘音)이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하였다.

검교대교 신 서유구(徐有榘)가 을묘년에 기록한 것이다.


 

[주D-001]날아가는 …… 비유이다 : 두보(杜甫)의 시 ‘만성(漫成)’에 “우러러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고, 고개 돌려 사람에게 엉뚱한 대답 하네.[仰面貪看鳥 回頭錯應人]”라는 구절이 있는데, 주자는 황자경(黃子耕)에게 답한 편지에서, 마음[心]이 일신(一身)을 주장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 구절을 인용하여 비유하였다. 《朱熹集 卷51》
[주D-002]희음(希音) :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는, 인위적으로 꾸미지 않은 자연 상태의 순수한 음을 말한다.
[주D-003]문왕의 …… 시 : 《시경(詩經)》 대아(大雅) 문왕(文王)의 구절이다.
[주D-004]청묘(淸廟)의 …… 화답한다 : 《예기(禮記)》 악기(樂記)에 나오는 내용이다. 청묘는 《시경(詩經)》 주송(周頌)의 편명(篇名)이다.
[주D-005]상인호불문마(傷人乎不問馬) : 《논어(論語)》 향당(鄕黨)에 나오는 내용으로, 앞부분에 ‘마구간에 불이 났었는데, 공자가 조정에서 물러 나와서 말씀하기를[廐焚子退朝曰]’이라는 여섯 글자가 더 있다. 주자(朱子)는 ‘상인호불문마’를 “‘사람이 다쳤느냐?’라고 하시고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셨다.”고 해석했는데, 왕수인(王守仁) 등은 “‘사람이 다치지는 않았는가?’ 하신 다음, 말에 대해서 물었다.”라고 해석하였다.
[주D-006]휘(徽)와 진(軫) : 휘는 거문고 위에 달린 현(弦)을 묶는 끈이고, 진은 현을 고르는 기러기발이다.
[주D-007]가(歌)와 성(聲) : 《서경(書經)》 순전(舜典)에, “시(詩)는 뜻을 말한 것이요, 가(歌)는 말을 길게 읊는 것이요, 성(聲)은 길게 읊음에 의지한 것이요, 율(律)은 읊는 소리를 조화시키는 것이니, 팔음(八音)이 잘 어우러져 서로 차례를 빼앗지 않아야 신(神)과 인(人)이 화합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D-008]비직(費直)의 역(易) : 한(漢) 나라 사람 비직이 전수(傳授)한 비씨역(費氏易)을 말한다. 비직은 특히 괘서(卦筮)에 뛰어나서 단(彖), 상(象), 계사(繫辭), 문언(文言)만으로 《주역(周易)》 상하경(上下經)을 해설하였는데, 글자가 모두 고문(古文)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고문역(古文易)이라고도 하였다. 그의 학설을 여러 학자들이 배웠고, 정현(鄭玄)도 이를 전수(傳受)하여 주(註)를 내었다.
[주D-009]《춘추좌전(春秋左傳)》에 …… 것이니 : 희공(僖公) 15년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러나 공영달(孔穎達)은, 많은 사람들에게 상으로 땅을 주느라고 토지 경계를 재정비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견해를 달리하였다.
[주D-010]뺨 위의 …… 것이다 : 고장강(顧長康)이란 사람이 배해(裴楷)의 모습을 그리면서 뺨 위에 세 가닥의 수염을 그려 넣었다.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묻자 고장강이 대답하기를, “배해는 재주가 출중하고 성품이 시원스러우며 식견이 있는데, 이 수염이 바로 그의 식견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을 그려 넣으면 신명(神明)함이 있는 것처럼 보여서 그려 넣지 않았을 때와는 현격한 차이가 난다.” 하였다. 《世說新語 卷5 巧藝》
[주D-011]《시경》의 악불위위(鄂不韡韡) : 소아(小雅) 상체(常棣)에 나오는 구절이다.
[주D-012]골타(骨朶) : 고대(古代) 병기(兵器)의 일종으로 마늘 모양의 머리가 달려 있는데, 후세에는 천자나 왕의 의장(儀仗)으로 쓰였다.
[주D-013]송 경문공(宋景文公)의 《필기(筆記)》 : 송 경문공은 송(宋) 나라 송기(宋祁)이다. 《필기》는 그가 지은 《송경문필기(宋景文筆記)》를 말한다.
[주D-014]상(商) 나라의 역 : 고대 삼역(三易)의 하나인 귀장(歸藏)을 말한다.
[주D-015]금릉(金陵)의 제자(諸子) : 금릉은 중국의 지명(地名)으로 지금의 남경(南京)인데, 육조(六朝) 이후로 이곳을 수도로 삼았다. 금릉의 제자는 수도에서 활동한 뭇 문인(文人)들을 가리키는 듯하다.
[주D-016]설루(雪樓)의 칠가(七家) : 중국의 호북성(湖北省) 종상현(鍾祥縣) 영주(郢州)에 있는 백설루(白雪樓)를 말한다. 칠가는 누구인지 자세하지 않다.
[주D-017]중귀(中貴) : 황제가 총애하는 근신(近臣)을 말한다.
[주D-018]과구 문자(科臼文字) : 정해진 형식에 따라서 짓는 글인데, 여기에서는 과거 시험에 쓰여지는 문체 등을 말한다.
[주D-019]《설문장전(說文長箋)》 : 명(明) 나라 조환광(趙宦光)이 찬(撰)한 책으로, 《설문》에 관한 제가(諸家)의 설(說)과 자신의 논변(論辨) 등을 잡다하게 실어 놓았는데, 청(淸) 나라 고염무(顧炎武)는 그 내용에 신빙성이 없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 《四庫全書總目提要 卷43 經部 小學類存目1》 장전(長箋)은 여러 가지 설을 채집하고 여기에다 논변이나 재단(裁斷) 등의 훈석을 곁들인 저작(著作)이다.
[주D-020]강구(康衢)의 노래 : 요(堯)임금 시대에 강구의 아이들이 불렀던 동요로, 임금의 덕을 칭송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列子 仲尼》 일반적으로는 성세(盛世)를 칭송하는 노래를 가리킨다.
[주D-021]쌍구(雙鉤)와 향탑(響搨) : 모두 필적(筆跡)을 모사(模寫)하는 방법이다. 점획(點畫)의 가장자리를 돌려가며 선을 그리고 속은 비게 베끼는 것이 쌍구이고, 진본(眞本) 위에 종이를 덮고 창 등에 비치어서 베끼는 것이 향탑이다.
[주D-022]《대학연의(大學衍義)》의 고사(故事) : 1403년(태종3) 계미자(癸未字)를 주조하여 서적을 간행한 후에 권근(權近)이 발문을 써서 그 전말을 기록해 놓았는데, 그후 중종 때 계미자를 써서 《대학연의》를 간행하면서 권근의 발문을 권말(卷末)에 실었던 일을 말한다.
[주D-023]학(學)이라는 …… 보이며 : 부열은 은(殷) 나라 고종(高宗)의 현상(賢相)으로, 《서경(書經)》 열명(說命)에 고종과 부열이 학문에 대해서 주고받은 내용이 실려 있다.
[주D-024]고(故) 유선(諭善) : 영조(英祖) 때 당시 세손(世孫)이었던 정조(正祖)를 가르친 박성원(朴聖源)을 말한다.
[주D-025]매미 소리가 …… 말 :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권4에 실린 편지로, “며칠 사이에 매미 소리가 날로 더 맑아지고 있는데, 들을 때마다 그대를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라는 내용이 편지의 전문(全文)이다.
[주D-026]연평(延平)의 정중체인(靜中體認) : 연평은 송(宋) 나라의 학자 이동(李侗)이다. 《심경(心經)》 권1에, “이 선생(李先生)은 사람을 가르칠 적에 정한 상태에서 대본(大本)이 미발(未發)한 때의 기상을 체인하게 하였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주D-027]선정(先正)이 …… 두겠는가 :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은 효종(孝宗) 때 북벌론(北伐論)을 강력히 주장했던 사람이고, 남한산성은 정묘호란 당시 인조(仁祖)가 청(淸) 나라에 항복하여 무릎을 꿇었던 곳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D-028]한 사람이 …… 때문이다 : 《예기(禮記)》 악기(樂記)에, “성대한 음악은 극도로 아름다운 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훌륭한 향연은 맛의 극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청묘(淸廟)의 악장(樂章)에 사용되는 거문고는 붉은색의 현(弦)을 쓰고 바닥에 성근 구멍을 내었으며, 한 사람이 노래하고 세 사람이 화답하여 드러내어 표현하지 않는 음(音)이 있다.” 하였다.

 

 

태종 9년 기축(1409,영락 7)
 3월19일 (임술)
사헌부에서 세포전·문묘 배향·여자의 의복 제도 등에 관한 시무를 올리다

사헌부에서 시무(時務)에 대해 두어 조목을 올렸다.
“1. 이제 토지의 경계를 바르게 하고 조세(租稅)를 정하여 손실법(損實法)을 밝게 하니, 조세를 적게 거두고 민생(民生)을 후하게 한다고 이를 만합니다. 오로지 세포전(稅布田)만은 이러한 법을 행하지 아니하여, 시절이 풍년이 들거나 흉년이 들어도 거두는 데는 늘이거나 줄이는 것이 없습니다. 가령 10결(結)의 땅에 손재(損災)가 반분(半分)에 이르는데도 세(稅)는 원수(元數)대로 받습니다. 그러므로 법령이 고르게 행해지지 못하고 혜택이 고르게 미치지 못하니,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컨대, 이제부터 세포전을 한결같이 녹전(祿田)의 제도에 따라 수손급손(隨損給損)하여, 전제(田制)가 널리 행해지고 혜택이 골고루 베풀어지게 할 것입니다.
1. 우리 동방(東方)의 예악 형정(禮樂刑政)과 전장 문물(典章文物)이 중국과 견주어 부끄러울 바가 없는 것은, 비록 기자(箕子)의 교화(敎化)에 근본을 두지만, 또한 도덕(道德)과 문장(文章)을 갖춘 신하가 치도(治道)를 널리 펴고 왕화(王化)를 도운 것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동방의 문신 가운데 성교(聖敎)에 공이 있고 치도(治道)에 도움이 있는 이는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하도록 하여 포장(褒奬)하고 존숭(尊崇)하는 은전을 보였으니,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과 설총(薛聰)·안향(安珦)이 바로 그분들입니다. 이후로부터 우리 조정에 이르기까지 문신 가운데 도덕과 공업(功業)이 어찌 안향·설총보다 앞서는 이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한 사람도 배향한 이가 없는 것은 하나의 흠입니다. 원컨대, 도당(都堂)에 명하여 전조(前朝)에서 아조(我朝)에 이르기까지 문신 가운데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할 만한 이를 들추어내어서 배향(配享)하는 예를 행하여 후세에 법을 남기소서.
1. 우리 나라의 전장 문물(典章文物)이 모두 중국의 제도를 따르지만, 여자의 의복 제도만은 아직도 구습(舊習)을 그대로 따르고 있으니, 고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선 구제(舊制)에 따라 적당하게 상정(詳定)하여 그 참람한 것은 없애고, 사치스러운 것은 깎아서 등급(等級)과 상하(上下)의 명분을 분별하게 함이 옳습니다. 우리 나라 여자의 의복 가운데 존귀(尊貴)한 것은 오군(襖裙)과 입모(笠帽)입니다. 그러나 주부(主婦)와 종비(從婢)의 상하(上下)가 모두 흑라모(黑羅帽)와 백초군(白綃裙)을 사용하니, 값이 비싸 재화를 허비하게 될 뿐 아니라. 존귀(尊貴)한 이와 비천(卑賤)한 이가 서로 섞이게 됩니다. 원컨대, 이제부터 대소 부녀(大小婦女)와 종비(從婢)의 의복은 오군(襖裙)을 입지 못하게 하고, 그 입모(笠帽)는 저포(苧布)만 쓰고 나(羅)·초(綃)는 사용하지 못하게 하며, 그 모첨(帽襜)의 장단(長短)도 주부의 입모(笠帽)와 같지 아니하게 하면, 시장의 값도 줄어들고 상하(上下)의 분별도 있을 것입니다.
1. 백성 가운데 토목(土木)의 역사에 죽는 자가 간혹 있는데, 수령(守令)이 감사(監司)와 도당(都堂)에 보고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사역(使役)시키는 자가 그 괴로움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감독하는 자가 그 죽음을 알지 못하여, 도당에서는 계문하지 못하고, 전하께서는 이를 알지 못하십니다. 문왕(文王)이 서민(庶民)을 자식같이 돌보았다는 뜻에 어떠하며, 이윤(伊尹)이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불행함이 있으면 자기가 구렁텅이 속에 밀어 넣은 것처럼 생각하던 마음에 또 어떠하겠습니까? 원컨대, 이제부터 외방(外方)은 감사가, 경중(京中)은 제조(提調)가 명심하고 그 역사(役事)를 고찰하여, 모관(某官) 관하(管下)에 병들어 죽은자가 몇 사람, 굶어 죽은 자가 몇 사람, 나무와 돌에 눌려 죽은 자가 몇 사람, 나루를 건너다가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몇 사람인가를 명백하게 일일이 기록하여 도당(都堂)에 전달 보고하게 하고, 도당(都堂)에서는 곧 계본(啓本)을 올려서, 사망자(死亡者)를 많이 낸 경우에는 그 감독한 관원을 죄주고, 그 사망자의 집을 우대하여 구휼하면, 이것 또한 인정(仁政)의 일단(一端)입니다.
1. 지금 대소 인원(大小人員)과 동량 승도(棟梁僧徒)들이 각도 각 고을의 진성(陳省)을 받아, 각사(各司)에 바치는 공물(貢物)을 스스로 준비해 선납(先納)하고, 체지(帖紙)를 받아 그 고을로 내려가서 값을 배(倍)로 징수하므로, 백성들을 침해함이 심합니다. 원컨대, 이제 부터 위와 같이 스스로 준비하여 선납(先納)하는 자를 일절 금단(禁斷)하여 그 폐단을 없애도록 하소서.”
의정부에 내려 의논하게 하니, 의정부에서 한결같이 장내(狀內)에서 말한 대로 시행할 것을 의결하였으므로, 그대로 따랐다.
【원전】 1 집 477 면
【분류】 *재정-전세(田稅) / *재정-공물(貢物) / *재정-역(役) / *농업-전제(田制) / *사상-유학(儒學) / *의생활(衣生活) / *구휼(救恤)


[주D-001]세포전(稅布田) : 일반 민호(民戶)에 대해서 토지의 결수(結數)에 따라 부과하던 포(布).
[주D-002]체지(帖紙) : 증서(證書).

세종 15년 계축(1433,선덕 8)
 2월9일 (계사)
성균 사예 김반이 문묘의 동·서무와 제례와 반궁 등에 관해 상언하다

성균 사예(成均司藝) 김반(金泮)이 상언하기를,
“신은 용렬하고 어리석음으로써 오랫동안 관직(館職)을 더럽힌 것이 지금 5년이오나, 털끝만한 도움이 없었습니다. 삼가 좁은 소견으로써 뒤에 그 조목을 열거(列擧)하오니, 엎드려 성상의 재결을 바라옵니다.
1. 문묘(文廟)의 동·서무(東西廡)는 선유(先儒)를 제사하는 곳이니 넓히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신이 무신년 겨울에 서장관으로 북경에 갔다가 요동에 이르러 문묘를 배알(拜謁)하니, 동·서무가 각각 11간(間)이였습니다. 지금 우리 문묘는 동·서무 간각(間閣)의 수(數)가 도리어 요동만 못하여, 다만 각각 7간뿐이므로 제사때를 당하면 비좁음이 더욱 심하여 진설(陳設)할 땅이 부족하옵니다. 원컨대 요동의 동·서무 간각의 수에 의하여 각각 4간을 지어 보충할 것입니다.
1. 우리 조정은 예(禮)가 갖추어졌고 악(樂)이 화하여 이미 종묘악과 조회악을 새로 만들어 모두 창고에 두고 간직하였으나, 단지 문묘에는 미처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비록 중사(中祀)이오나 실로 만세의 종사(宗祀)이오니, 원컨대 유사(攸司)로 하여금 새 악기(樂器)를 만들고 창고를 지어 간직하게 하며, 또 문묘의 삭망제(朔望祭)에 기둥밖[楹外]에서 두 번 절하는 예(禮)는 다른 제사와 같지 아니하오니, 원컨대 자세히 참고하여 제례(祭禮)를 새롭게 하옵소서.
1. 예전에 반궁(泮宮)은 삼면(三面)에 물이 있어 구경하는 자를 제어하였는데, 지금은 반궁의 삼면에 물이 없어서 구경하는 사람을 제어할 수 없으므로, 나무꾼들이나 혹은 말을 타고 문묘의 길 남쪽으로 지나가고, 혹은 비를 만나 신문(神門) 섬돌 위에 걸어앉기도 하니 그 불경(不敬)함이 막심하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원묘(原廟)가 이룩된 뒤에는 반수(泮水)를 파고 돌을 쌓아 다리를 만들어서 구경하는 사람을 제어하게 하옵소서.
1. 석전제(釋奠祭)의 성생(省牲)·할생(割牲)하는 곳은 깨끗하게 아니할 수 없습니다. 지금 그곳이 여리(閭里)와 가까우며, 원장(垣檣)도 없고 옥우(屋宇)도 없어서, 항상 닭·개 말·소 등이 더렵혀서 그 부정(不凈)함이 심하옵니다. 원컨대 집을 지어 주소(廚所)를 만들고 담을 둘러서 그곳을 정(凈)하게 할 것입니다.
1. 신의 스승인 선신(先臣) 양촌(陽村) 권근(權近)이 지은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과 《입학도설(入學圖說)》은 모두 성경(聖經)의 우익(羽翼)이며, 학자의 지침(指針)이옵니다. 《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은 신이 김종리(金從理)와 더불어 같이 태종 대왕의 명을 받잡고 쓴 것이온데, 신의 스승이 말하기를, ‘내가 《진씨집설(陳氏集說)》을 먼저 쓴 뒤에 내가 지은 《천견록(淺見錄)》을 쓰고자 하였으나, 다만 나의 병이 위독하여 해가 서산(西山)에 닿은 것 같으니, 만약 《진씨집설》의 수만여 말[言]을 다 쓴 뒤에 천견록을 쓰려고 한다면, 책을 미처 이룩하지 못하고 밝은 세상을 하직할까 두렵다. 이 때문에 《진씨집설》을 간략하게 들어 쓰고 다음에 천견록을 써서 올린다.’고 하였는데, 곧 주자소(鑄字所)에 내려 인쇄하였습니다. 그 뒤에 근(近)의 아들 권도(權蹈)가 그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서 《진씨집설》을 다 쓰고 《천견록》을 붙여 간직한 지가 오래 되었사오니, 원컨대 인쇄하여 널리 전하기를 명하옵소서. 또 《역(易)》·《시(詩)》·《서(書)》·《춘추천견록(春秋淺見錄)》과 《입학도설》, 그리고《예기천견록》에 의해서 문신(文臣)에게 명하여, 각각 여러 경전(經典)의 주각(註脚) 뒤에 붙여서 후학(後學)들이 보기에 편리하게 하옵소서.
1. 《춘추부록(春秋附錄)》은 학자들이 보고자 하는 바이며, 동방에는 드물게 있는 것입니다. 신이 일찍이 사명을 받들고 중국에 가서 구하여도 많이 얻지 못하였습니다. 원컨대 간행(刊行)하기를 명하옵소서.
1. 무릇 성도(聖道)에 공로가 있는 이는 제사하는데, 종사(從祀)하는 법은 한(漢) 나라 영평(永平) 15년에 시작하여 선성(先聖)을 제사하고 72제자를 종사하였고, 당(唐)나라 정관(貞觀) 20년에 이르러 조서(詔書)로써 역대의 명유(名儒)들을 아울러 배향(配享)하게 하였으며, 송(宋) 나라 이종조(理宗朝)에는 정호(程顥)·정이(程頤)·장재(張載)·주희(朱熹) 등을 더하여 종사(從祀)에 들게 하였습니다. 본조(本朝)에서도 최치원(崔致遠)·설총(薛聰)·안향(安珦) 등을 종사(從祀)에 추가한 뒤에 우리 동방의 교화가 숭상되었습니다. 최치원·설총·안향의 뒤에, 오직 익재(益齎) 이제현(李齊賢)이 도학(道學)을 창명(唱鳴)하였고,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실로 그 정통(正統)을 전하였는데, 신의 스승 양촌 권근이 홀로 그 종지(宗旨)를 얻었습니다. 근의 학문의 연원(淵源)은 색에게서 나왔고, 색의 학문의 정통은 제현에게서 나왔으니, 세 분의 학문은 다른 예사 선유(先儒)들에 비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원(元) 나라 탕병룡(湯炳蘢)이 이제현을 찬(讚)하기를, ‘산악(山嶽)의 정기(精氣)가 모여서 유종(儒宗)이 되었도다.’ 하였고, 구양 규제공(歐陽圭齊公)이 색에게 준 시(詩)에는, ‘의발(衣鉢)은 마땅히 해외로 좇아 전하리로다.’ 하였으며, 명나라 고황제(高皇帝)는 권근에게 대제문연각시(待製文淵閣詩)에 글을 짓기를 명하였으니, 세 분이 중국 사람에게 아름답게 여김을 받은 것은 어찌 예전보다 만만 배나 더하지 아니하였습니까. 이는 비록 모두 종사(從祀)하는 반열(班列)에 참예할지라도 반드시 불가하다고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학자들의 지극한 소원이오며, 성조(盛朝)의 아름다운 법이온데, 아직 거행하지 아니하니 식자들이 한탄하옵니다. 논의하는 자들이 이르기를, ‘색은 부처에게 아첨한 비난이 있다.’고 하오나, 신이 일찍이 색의 언지(言志)라는 시를 보니, 이르기를, ‘평생에 석가의 글을 알지 못하였도다.’ 하였고, 또 ‘양도(兩道)에는 스스로 무심히 지나갔건만, 수사(洙泗)에서 오르락내리락 백발이 되었네.’ 하였으니, 어찌 참으로 부처에게 아첨하였겠습니까. 예전 한창려(韓昌黎)는 중 대전(大顚)과 벗하였고, 주문공(朱文公)은 운곡사(雲谷寺)에서 놀았고, 최치원(崔致遠)은 단속사(斷俗寺)에서 놀았으니, 이곳도 과연 모두 부처에게 아첨한 것입니까. 지금 색이 암자(庵子)를 둔 뜻도 이와 같습니다. 논의하는 자의 말을 신은 믿지 않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역대의 종사(從祀)를 증가(增加)하는 법을 상고하여 유사에게 내려 논의하게 하여, 세 분을 묘정(廟庭)에 들이어서 후진(後進)의 선비에게 성도(聖道)를 가히 높일 줄을 알게 하여, 그 학업을 일으키는 마음을 떨치게 하옵소서. 또 《서경(書經)》에 상고하니, 이르기를, ‘상(賞)을 대대로 뻗친다.’[賞延于世]고 하였는데, 이를 해설하는 사람은, ‘착한 사람을 존경하기를 장구히 한다.’[善善長也] 하였으니, 원컨대 무릇 성문(聖門)에 공이 있는 자의 후예(後裔)에게는 비록 죄가 있을지라도 특별히 용서하는 은혜를 더하고, 더욱 상을 연장(延長)하는 아름다운 뜻을 도타이하소서.
1. 우리 조정에서 글을 숭상하고 교화를 일으켜서, 종학(宗學)을 설치하여 종척(宗戚)의 자제들을 가르치고, 국학(國學)이 있어서 일국의 자제들을 가르치니, 교양(敎養)하여 사람을 만드는 도(道)가 지극하고 극진하옵니다. 그러나 일국의 자제들의 배움이 도리어 종척 자제들보다도 부지런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비록 날마다 책을 끼고 배우기는 하나, 물러가서 재(齋)에 있으면 책은 덮어 두고 읽지 아니하며, 유유히 날을 보내면서, 그들의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아무와 아무는 일찍이 부지런히 배우지 아니하여도 과목(科目)으로서 〈벼슬길〉에 나아갔는데, 하필 고심(苦心)하고 애써서 글을 읽고 이치를 연구한 뒤에라야 과거에 합격할 것인가.’ 하면서 모두 글을 읽으려 아니하고 여러가지 방법으로 연고를 칭탁하여 사방으로 흩어지며, 독려하여 학교에 붙어 있게 하여도 겨우 모였다가 다시 흩어지니, 한갖 오고가는 힘만 허비할 뿐, 어느 여가에 글 읽기에 전심하겠습니까. 이것이 이른바, ‘날마다 매질하면서 제(齊)나라 말을 구하여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은 이와 같이 글 읽기를 게을리 한다면 수십 년 뒤에는 장차 반드시 무무(貿貿)하여 진유(眞儒)가 없을까 두렵습니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초집(抄集)을 금하는 명령이 비록 엄하고, 예조의 월강(月講)을 비록 자주 하오나, 《의의초집(疑義抄集)》이 아직도 그 마음의 누(累)가 된 것입니다.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성조(盛朝)에서 강경(講經)을 파하고 의의(疑義)로써 시험하며, 초집을 엄금하는 것은 가히 좋은 법과 아름다운 뜻이라고 이르겠으나, 신은 그윽이 두려워하건대, 이는 곧 《맹자》의 이른바, ‘그 근본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그 끝만 가지런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 생도들이 성현(聖賢)의 도(道)에 어두울 뿐만 아니라, 실로 글을 숭상하고 교화를 일으키는 지극한 덕(德)에도 누(累)가 있습니다. 신은 매양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마음이 아픔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한묵전서(翰墨全書)》에 실린 주자 과거 사의(朱子科擧私議)와 《경제육전(經濟六典)》에 실린 태조 과거 성헌(太祖科擧成憲)을 참작하여 시행하되, 성균관 및 사부 학당(四部學堂)의 생원과 생도는 예조와 대간(臺諫) 각 한 사람으로 하여금 월강(月講)할 때마다 같이 고강(考講)을 가(加)하여, 《대학》을 통(通)한 뒤에야 《논어》·《맹자》를 강하고, 《논어》·《맹자》를 통한 뒤에야 《중용》을 강하며, 오경(五經)에 이르러서도 그렇게 하여, 그 통경(通經)한 것이 많고 적음으로 그 등급의 고하(高下)를 정하여 장부에 기록해 두었다가, 시년(試年)에 이르러 통고(通考)하여 초장(初場)을 삼고, 의의(疑義)는 파해 없애며, 무릇 조사(朝士) 및 외방의 수령과 교도(敎導)들에게는 시년(試年)에 강(講)을 하되, 또한 통경(通經)의 많고 적음으로 초장을 삼을 것입니다. 외방 각도의 생도에게는 특별히 행대 감찰(行臺監察)을 보내어, 감사·경력·수령들과 더불어 매년 춘추(春秋)에 서울 안에서 강경(講經)하는 예에 의하여 함께 고강(考講)을 가(加)하고 장부에 기록해 두었다가, 예조에 보내어 시년(試年)을 기다려서 통고(通考)하여 초장을 삼으며, 그 나머지 외방의 생원(生員) 및 전 교도들은 함께 성균관 월강(月講)에 와서 시험한 뒤에 과거에 나가기를 허락하면, 흩어져 있는 생원 및 전 교도들이 모이기를 기대하지 아니하여도 저절로 성균관에 모일 것이고, 부지런하기를 기대하지 아니하여도 저절로 글 읽기에 부지런할 것이며, 장차 진유(眞儒)가 배출(輩出)함을 볼 것이오니, 가르치고 길러서 사람을 만드는 도리에 거의 합할 것이옵니다.
1. 우리 성조(聖朝)에서는 효도로써 다스림을 이루오니, 부모를 두고 와서 벼슬하는 자에게는 3년만에 한 번씩 귀근(歸覲)하게 하고, 부모가 없이 와서 벼슬하는 자에게는 5년만에 한 번씩 성묘하기를 허락하며, 또 80, 90세의 늙은 어버이가 있는 자는 모두 보내어서 돌아가 봉양(奉養)하게 하오니, 도덕과 교화가 여러 신하들에게 베풀어짐이 지극하고 극진하옵니다. 그러하오나 형제가 있으면서 와서 벼슬하는 자는 5년만에 한 번씩 성묘하는 것은 가하거니와, 독자(獨子)로서 형제가 없는 자는 오히려 불만이 있습니다. 《중용(中庸)》에 이르기를, ‘죽은 이를 섬기기를 산 사람과 같이 하고, 없어진 이를 섬기기를 있는 것처럼 섬기라.’고 하였으니, 원컨대 지금부터 독자로서 형제가 없는 자에게도 귀근(歸覲)하는 예에 의하여 3년만에 한 번씩 성묘하기를 허락하여, 독자로 하여금 죽은 부모를 산 부모같이 섬기는 마음으로 보답하게 하여, 더욱 성조(聖朝)의 효(孝)로서 정치하는 뜻을 두텁게 하옵소서.”
하니, 예조에서 의논하여 정해서 아뢰도록 하였다.
【원전】 3 집 442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왕실-종사(宗社) / *예술-음악(音樂) / *사상-유학(儒學) / *출판-인쇄(印刷) / *출판-서책(書冊) / *역사-고사(故事)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윤리-강상(綱常)


[주D-001]중사(中祀) : 큰 제사에 다음가는 중간 제사.
[주D-002]성생(省牲) : 제사에 쓸 소를 살펴보는 것.
[주D-003]할생(割牲) : 소를 잡는 것.
[주D-004]의발(衣鉢) : 전통(傳統).
[주D-005]양도(兩道) : 노자도(老子道)와 불도(佛道).
[주D-006]수사(洙泗) : 공자의 도.
[주D-007]한창려(韓昌黎) : 한유(韓愈).
[주D-008]주문공(朱文公) : 주자.
[주D-009]시년(試年) : 과거보는 해.

  세종 18년 병진(1436,정통 1)
 5월12일 (정축)
김일자 등이 이제현·이색·권근을 문묘에 배향하기를 청하다

성균 생원(成均生員) 김일자(金日孜) 등이 상언(上言)하기를,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옛 성인(聖人)을 계승하고 후학(後學)을 열어 주는 것은 성현(聖賢)의 대공(大功)이요, 조종(祖宗)을 도타이 하고 예(禮)로써 행하는 것은 제왕(帝王)의 성전(盛典)입니다. 이러므로, 역대 이래로 무릇 도학(道學)에 공이 있는 분을 거의 학궁(學宮)에 모시어 제향하는 소이는 돌아가신 이에게 포숭(褒崇)의 뜻을 보이는 것이며, 앞으로 오는 뒷 사람에게 권려하는 뜻을 드리우는 것입니다. 옛날에 공자(孔子)께서는 하늘이 낳으신 성인으로써 경위(經緯)의 글[文]은 요(堯)·순(舜)의 도를 본받아 서술하여 밝히고, 문왕(文王)·무왕(武王)의 도를 본받아 명백히 하사, 육경(六經)을 편찬 제술[刪述]하여 만대에 훈계를 드리우셨으니, 유도[斯道]가 장차 실추(失墜)되는 것을 붙들어 주고, 해와 달이 중천(中天)에 밝게 있듯이 세워 주신 것이오라, 한(漢)·당(唐)의 왕성한 때에는 우리의 부자(夫子)를 남면(南面)하게 하여 석전제(釋奠祭)를 올리게 하였고, 여러 제자들을 제후(諸侯)로 봉(封)하여 배향(配享)하는 의례(儀禮)가 있게 하였습니다. 송(宋)·원(元) 때에 미쳐 와서는 주자(朱子)·정자(程子) 등의 사현(四賢)과 좌구명(左丘明) 등의 21인을 70제자(弟子)의 뒷자리에 종사(從祀)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유학을 높이고 도덕을 소중히 여긴 까닭이오라, 덕을 높이고 공에 보답하는 뜻이 성(盛)한 것이옵니다. 생각하건대, 우리 나라[我大東]는 기자(箕子)가 교화를 베푼 뒤로부터 세대는 멀어지고 경서는 없어져서, 군자(君子)는 큰 도학의 중요한 것을 얻어듣지 못하고, 소인(小人)은 잘 다스려지는 정치의 혜택을 입지 못한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다행히 그 사이에 최치원(崔致遠)·설총(薛聰)과 같은 이가 밝은 슬기로서 학문을 좋아하매, 문장을 발양(發揚)하여 신라 시대를 울렸고, 고려 시대에 이르러서는 안향(安珦)이 학문을 일으키려는 데에 뜻을 두고 반궁(泮宮)을 증수(增修)하게 하여 일대(一代)의 문풍(文風)을 떨치게 하니, 이 세 분께서 세도(世道)를 유지시키고 동방의 백성을 계도(啓導)해 준 공로는 또한 큰 것입니다. 이러므로, 전조(前朝)의 왕성한 때에는 특별히 포숭(褒崇)하는 법전을 들어 〈위의 세 분을 문묘에〉 종사(從祀)하는 반열에 참예하게 하였으니, 참으로 영원히 전할 불후(不朽)의 큰 모범이었습니다. 이로부터 그 뒤로는 세속의 교화가 능이(陵夷)해지고 풍속이 퇴패(頹敗)하여져서, 성인의 도학이 막히어지고 유학[斯文]이 거의 끊어지려 하였는데, 이때를 당하여 익재(益齋) 문충공 이제현(李齊賢)이 그 사이에 태어나서 훌륭하고 뛰어난 자질과 정대 고명(正大高明)한 학문으로 북쪽으로는 연경(燕京)에 조회하고, 남쪽으로는 오회(吳會)에 유학하면서 중국의 명유(名儒)인 요공(姚公)·염공(閻公)·조자앙(趙子昻)·원복초(元復初)같은 분과 더불어 토론하고 연구하여, 소견이 더욱 높아지고 지식이 더욱 깊어지게 되매, 도학의 바른 것을 미루어 밝히고, 성명(性命)의 이치를 열어 보이었으니, 글은 문장이 되고 행함은 도덕이 되어, 비로소 고문(古文)의 학(學)을 창도하였습니다. 그래서, 시(詩)·서(書)의 혜택이 우리 나라[東方]에 양양하게 넘치고, 예(禮)·악(樂)의 흥성함이 중국을 본받아 우리 나라의 문학(文學)이 이로부터 시작되었으므로, 중국의 명유(名儒)인 탕병룡(湯炳龍)은 익재(益齋)를 찬(贊)하기를, ‘산천 정기를 타고나서 유학에 달통하며, 충성을 마음에 두고 정사를 공정히 한다.’고 하였고, 이색(李穡)도 또한 말하기를, ‘몸은 해동(海東)에 있으나, 이름은 세계에 넘치며, 도덕의 으뜸이요, 문장의 조종이다.’ 하였으니, 지나친 칭찬이 아니옵니다. 또 목은(牧隱) 문정공(文靖公) 이색은 북쪽으로 중국에 가서 배우게 되매, 학문이 정미하며 해박하고, 도학을 밝게 강론하여 남이 모르는 것을 천명하였습니다. 신축년 홍건족의 난(亂)을 치룬 뒤에는 학교가 파괴를 당하여 학문이 해이하였는데, 오직 이색(李穡)만이 성균(成均)을 겸직하면서 경적(經籍)의 깊은 뜻을 토론하고, 정주(程朱)의 뜻을 정미하게 합하여, 학자로 하여금 입으로 외고 귀로 듣는 당시의 사장(詞章)에만 힘쓰던 습성을 버리게 하고, 몸과 마음에 있는 성명(性命)의 근원을 궁구(窮究)하게 하여, 사도(師道)를 높이고 이단(異端)에 유혹되지 않게 하였습니다. 그 의리를 바루어서 공리(功利)에 싹트지 않게끔 하였으니, 동방의 성리학(性理學)이 크게 일어나고 유풍(儒風)의 학술이 새롭게 빛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양현(歐陽玄)은 천하의 유종(儒宗)으로서 이를 찬미하기를, ‘가사(袈娑)와 바릿대[鉢]는 해외(海外)에서 전(傳)하겠다.’ 하였고, 권근(權近)도 또한 말하기를, ‘색(穡)의 학문은 살갗[皮膚]를 버리고 골수(骨髓)를 얻은 것이다.’고 하여, 비록 중국이라 할지라도 이에 견주기를 드물게 여기었으니, 이는 실상이 없는 명예가 아닙니다. 논의하는 자들이 이르기를, ‘색(穡)이 불도에 혹하였다.’고도 하나, 신 등의 생각으로는 말이란 마음의 소리[聲]이요, 시(詩)란 그 뜻을 말하는 것인데, 그의 시를 보게 되면, ‘평생에 석가(釋迦)의 글은 알지 못한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불교(佛敎)·도교(道敎)의 두 길[兩途]은 원래 무심히 지났으나, 공맹[洙泗]의 학에 맴돌면서부터 두 귀밑털이 희어졌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불도에 혹한 사람의 말이겠습니까. 예전에 당나라의 한유(韓愈)는 대전(大顚)과 벗하였었고, 주희(朱熹)는 운곡(雲谷)에서 노닐었으며, 최치원(崔致遠)은 해인사(海印寺)에서 은둔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불도에 혹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양촌(陽村) 문충공 권근(權近)은 원기(元氣)의 모임이 혼연(渾然)하게 자연히 이루어져서 정자(程子)·주자의 학(學)과 자유(子游)·자하(子夏)의 문(文)으로 오래도록 문형(文衡)을 맡으면서 덕이 이 땅[東土]에서 높았고, 경서(經書)의 심오한 것을 궁구(窮究)하였습니다. 깊이 조화의 근원을 더듬어서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을 지었으니, 전현(前賢)이 아직 발명하지 못한 것을 낸 것이며, 《입학도설(入學圖說)》을 지어 낸 것은 뒤에 오는 학자에게 무궁함을 열어 주었습니다. 맹자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취하여 이단(異端)을 배척함에 힘썼고, 춘추의 학문이 추락되는 것을 체험하여 사병(私兵)을 폐지하기를 청하여 다스리는 도를 도와주었으며, 황제의 법전을 밝혀 그 공·맹(孔孟)의 도로부터 정·주(程朱)의 학문에 이르기까지 생민들에게 은택이 스며들게 지극히 하였습니다. 이로써 보건댄, 성명(性命)의 이치가 천하에 밝혀진 것은 공자와 맹자의 공이며, 공자와 맹자의 도학이 우리 나라에 행하게 된 것은 이제현·이색·권근 이 세 분의 공입니다. 그렇다면, 그 공에 보답하는 의식을 거행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지난 기해년에는 사간원에서 권근을 문묘에 배향하기를 청했고, 또 계축년에는 사성(司成) 신(臣) 김반(金泮)이 또한 위의 세 분을 배향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이에 유사(攸司)에 명하여 문신(文臣) 6품 이상으로 하여금 그 가부를 의논케 하여 성상께 계문(啓聞)하게 하였사오매, 신 등은 기쁘게 들으시고 옷깃을 여미시와 윤허하시기를 크게 바란 지 여러 해 되었는데, 오늘날 수년이 되도록 아직도 거행되지 못하와 신 등은 이를 바라지 아니하는 자가 없습니다. 의논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천하에 큰 공이 있는 자는 마땅히 천하를 통해서 제향하여야 하겠지만, 어찌 일국에 공이 있다고 하여 문묘에 종사(從祀)하겠는가? 하오나, 신 등이 그윽이 생각하오니, 한 집에 공이 있는 자는 마땅히 한 집안에 제사하고, 한 고을에 공이 있는 자는 마땅히 한 고을에서 제사하는 것이 고금을 통한 의리이며, 천하를 통한 예식이라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주희(朱熹)는 스승인 연평(延平) 선생을 그의 집에서 제사지냈고, 조주(潮州) 사람들은 한유(韓愈)를 그 고을에서 제사지냈으며, 전조(前朝)의 왕성한 때에는 최치원·설총·안향(安珦) 선생을 학궁(學宮)에서 제사지내도록 하였으니, 이것도 또한 천하에 공이 있어서 제사를 지낸 것이겠습니까. 우리 나라에서 문물과 예악이 갖추어지고, 교화(敎化)를 배양한 근본이 모두 이 세 분에게서 나왔다면 옛 성인을 계승하고 후학을 열어 준 공이 이보다 더 큼이 없습니다. 그러니, 조종(祖宗)을 두텁게 하고 예로써 행하는 정사가 지금껏 궐했으니, 제사를 지내고 아니 지내는 것이 비록 세 분과 관계됨이 없다 하더라도, 참으로 밝은 시대의 성전(盛典)에 결함이 있는 것이오니, 엎디어 바라옵건대, 뭇사람의 진실한 마음을 살피시고 강단(剛斷)하신 밝으심을 돌리시와, 이 세 분으로 하여금 종사하는 반열에 올리게 하여, 최치원 선생 등과 함께 차례를 올리게 된다면, 오직 오도(五道)에 있어서만 크게 다행한 것이 아니라, 또한 만대에 이르도록 〈칭송하는〉 말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원전】 3 집 675 면
【분류】 *사상-유학(儒學) / *사상-불교(佛敎) / *인물(人物) / *역사-고사(故事)


[주D-001]경위(經緯) : 경서(經書)와 위서(緯書).
[주D-002]육경(六經) : 시·서·예·악·역·춘추.
[주D-003]부자(夫子) : 공자.
[주D-004]반궁(泮宮) : 성균관.
[주D-005]오회(吳會) : 오(吳)와 회계(會稽)의 두 군(郡).
[주D-006]요공(姚公) : 원나라의 유학자. 이름은 수(燧).
[주D-007]염공(閻公) : 원나라의 유학자. 이름은 복(復).
[주D-008]조자앙(趙子昻) : 원나라의 학자. 이름은 맹부(孟頫).
[주D-009]원복초(元復初) : 원나라의 학자. 이름은 명선(明善).
[주D-010]정주(程朱) : 정자와 주자.
[주D-011]대전(大顚) : 당나라 때의 도승(道僧).
[주D-012]운곡(雲谷) : 중국 복건현에 있는 주자의 독서당.
[주D-013]문형(文衡) : 대제학.
[주D-014]연평(延平) : 송나라 때 유학자.
[주D-015]오도(五道) : 유도(儒道).

 

 

  세조 2년 병자(1456,경태 7)
 3월28일 (정유)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의 춘추 대사·오경·문묘 종사·과거·기인 등에 관한 상소①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 양성지(梁誠之)가 상소(上疏)하기를,
“신(臣)이 엎드려 보니, 주상 전하께서는 상성(上聖)의 자질로서 대위(大位)에 영광스럽게 오르시어 고금(古今) 치란(治亂)의 자취와 민속(民俗)의 간난(艱難)한 일을 통찰(洞察)하지 않음이 없으시고 소간(宵旰)으로 부지런히 도치(圖治)하셔서 우리 조선 억만 년 태평 성업의 기틀을 닦으시니, 진실로 삼한(三韓)에서 한 번 번성할 때입니다. 바야흐로 지금 조정의 득실(得失)과 민간의 이병(利病)을, 대신(大臣)은 꾀하고 대간(臺諫)은 이를 논의하며, 기타의 시종(侍從)하는 직사(職事)들도 논사(論思)함에 있는데, 신은 용렬한 자질로써 경악(經幄)을 시종함을 얻어서도 조금의 성효(成効)도 없어 성덕(聖德)에 보답함이 없음을 부끄러워합니다. 무릇 국가의 크고 작은 일은 미충(微衷)이라도 상량하여 확정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만(萬)의 일(一)이라도 비익(裨益)됨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하고 감히 편의(便宜) 24사(事)를 가지고 조목을 기록하여 바치니, 엎드려 바라건대 성감(聖鑑)하여 주시면 다행하겠습니다.
1. 춘추(春秋)의 대사(大射)입니다. 대개 금인(金人)은 요(遼)나라의 풍속을 이어 받아 3월 3일과 9월 9일에 하늘에 절하고 버드나무를 쏩니다. 이것은 비록 중원(中原)의 제도는 아니더라도 또한 번국(藩國)의 성사(盛事)입니다. 우리 동방(東方)은 해동(海東)에 웅거(雄據)하여 삼국(三國)으로부터 전조(前朝)에 이르기까지 교천(郊天)향제(饗帝)를 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이제 진실로 그 옛 것을 다 따르지 못하더라도 요(遼)·금(金)의 고사(故事)를 조금 모방하여 3월 3일과 9월 9일은 친히 교외(郊外)에 거둥하시어 대사례(大射禮)를 행하고, 해마다 상례로 삼게 하소서. 이와 같이 하면 거의 우리의 무위(武威)를 크게 떨치고 사기(士氣)도 또한 증가하여 스스로 일국 일대(一國一代)의 풍속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1. 오경(五京)을 증치(增置)하는 것입니다. 대개 요(遼)·금(金)·발해(渤海)도 아울러 오경(五京)을 세웠고, 전조(前朝)도 사경(四京)을 세웠는데, 본조(本朝)에서는 단지 한성(漢城)·개성(開城)의 양경(兩京)만을 설치했을 뿐이니, 대동 산해(大東山海)의 험함과 주·부(州府)의 성함을 가지고서 단지 양경만을 두었으니 어찌 흠결(欠缺)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원나라 세조(世祖)는 우리에게 의법은 본속(本俗)을 따를 것을 허락하였고, 고황제(高皇帝)도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성교(聲敎)를 하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동교(東郊)의 땅은 진실로 복리(腹裏)에 비할 것이 아닌 때문입니다. 빌건대 경도(京都)인 한성부(漢城府)를 상경(上京)으로 삼고, 개성부(開城府)를 중경(中京)으로 삼고, 경주(慶州)를 동경(東京)으로 삼고, 전주(全州)를 남경(南京)으로 삼고, 평양(平壤)을 서경(西京)으로 삼고, 함흥(咸興)을 북경(北京)으로 삼아, 각각 토관(土官)을 설치하고 군병(軍兵)을 가정(加定)하게 하소서. 이와 같이 하면 거의 형세의 승(勝)함을 얻어 위급(危急)할 때에도 또한 족히 의뢰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악진해독(嶽鎭海瀆)입니다. 대개 일대(一代)의 흥(興)함에는 반드시 일대(一代)의 제도가 있었으며, 본조(本朝)의 악진해독(嶽鎭海瀆), 명산 대천(名山大川)의 제사는 모두 삼국과 전조의 구제를 의방해서 한 것이므로 의논할 만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용흥강(龍興江)은 우리 태조(太祖)께서 흥운(興運)하신 땅이고, 묘향산(妙香山)에 이르러서는 단군(檀君)이 일어난 곳이며, 구월산(九月山)에는 단군사(檀君祠)가 있고, 태백산(太白山)은 신사(神祠)가 있는 곳이며, 금강산(金剛山)은 이름이 천하에 알려졌고, 장백산(長白山)은 선춘령(先春嶺)의 남쪽 갑산(甲山)의 북쪽에 있어 실로 나라의 북악(北岳)이 됩니다. 임진(臨津)은 나라의 서쪽 관문이고, 용진(龍津)은 나라의 동쪽 관문이며, 낙동강(洛東江)은 경상도의 대천(大川)이고, 섬진(蟾津)은 전라도의 대천입니다. 박천강(博川江)은 곧 옛 대령강(大寧江)이며, 보리진(菩提津)·오대산(五臺山)에 이르러서는 모두 사전(祀典)에 있지 아니 합니다. 또 동해·남해·서해의 신사(神祠)는 모두 개성(開城)을 기준하여 정하였기 때문에 또한 방위(方位)가 어긋납니다.
빌건대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고정(考定)을 상세히 더하게 하고, 삼각산(三角山)을 중악(中岳)으로 삼고, 금강산을 동악(東岳)으로 삼고, 구월산(九月山)을 서악(西岳)으로 삼고, 지리산(智異山)을 남악(南岳)으로 삼고, 장백산(長白山)을 북악(北岳)으로 삼고, 백악산(白岳山)을 중진(中鎭)으로 삼고, 태백산(太白山)을 동진(東鎭)으로 삼고, 송악산(松嶽山)을 서진(西鎭)으로 삼고, 금성산(錦城山)을 남진(南鎭)으로 삼고, 묘향산(妙香山)을 북진(北鎭)으로 삼을 것입니다. 또 동해신(東海神)을 강릉(江陵)에, 서해(西海)는 인천(仁川)에, 남해(南海)는 순천(順天)에, 북해(北海)는 갑산(甲山)에 이제(移祭)하고, 용진(龍津)을 동독(東瀆)으로 삼고, 대동강(大同江)을 서독(西瀆)으로 삼을 것입니다. 한강(漢江)을 남독(南瀆)으로 삼고 두만강(豆滿江)을 북독(北瀆)으로 삼고, 또 목멱산(木覓山)·감악산(紺岳山)·오관산(五冠山)·계룡산(鷄龍山)·치악산(雉岳山)·오대산(五臺山)·의관령(義館嶺)·죽령산(竹嶺山)을 명산(名山)으로 삼고, 웅진(熊津)·임진(臨津)·보리진(菩提津)·용흥강(龍興江)·청천강(淸川江)·박천강(博川江)·낙동강(洛東江)·섬진(蟾津)으로 대천(大川)을 삼아 예(例)에 따라 치제(致祭)하여【양진(楊津) 두 곳, 덕진(德津) 두 곳, 가야진(伽耶津)·주흘산(主屹山)·우불산(亐佛山)·우이산(牛耳山)·비백산(鼻白山)·장산곶이[長山串]·아사진(阿斯津)·송곶이[松串]·비류산(沸流山)·구진 익수(九津溺水)는 개혁함이 옳습니다.】 일대의 사전(祀典)을 새롭게 하소서. 이렇게 하면 사전(祀典)에 실린 산천은 고금으로 모두 34인데, 옛 것을 따른 것이 17, 이제(移祭)한 것이 4, 새로 오른 것이 13, 영구히 고칠 만한 것도 또한 13입니다.
1. 번부악(蕃部樂)을 설치하는 것입니다. 대개 중국의 악(樂)은 아악(雅樂)·속악(俗樂)·여악(女樂)·이부(夷部)등의 악이 있는데, 본조(本曹)에서 사용하는 것은 헌가(軒架)·고취(鼓吹)·동남(童男)·기녀(妓女)·가면 잡희(假面雜戲) 등의 제도(制度)가 있으니, 대저 악(樂)이란 형상[象]을 이루는 것입니다. 태조께서 천운을 타고 흥기하심으로부터 태종·세종께서 서로 이으시니 동린(東隣)의 헌침(獻琛)과 북국(北國)의 관색(款塞)으로 예(禮)를 제정하고 악(樂)을 만들어 아악(雅樂)·속악(俗樂)이 모두 바르게 되었으나 홀로 번악(蕃樂)은 아직 의정하지 못하였습니다. 바야흐로 지금 성상께서 용비(龍飛)하여 대위(大位)에 새로 등극하시어 일본(日本)·여진(女眞)의 사자가 와서 즉위를 하례하는 자가 항상 수백 인이 궐정(闕庭)에서 절하고 뵈오니, 해동(海東)의 문물(文物)이 이때보다 성함이 있지 않았습니다.
빌건대 일본의 가무(歌舞)로써 동부악(東部樂)을 삼고, 여진의 가무로써 북부악(北部樂)을 삼아서 일본악(日本樂)은 삼포(三浦)의 왜인에게 익히게 하고, 여진악(女眞樂)은 5진(五鎭)의 야인에게 익히게 하되, 그 의관 제도(衣冠制度)가 괴이(怪異)하고 기초(譏誚)의 형상이라 하지 말고, 동사(東使)에게 잔치하면 겸하여 북악을 쓰되 동악은 쓰지 않고, 북사(北使)에게 잔치하면 겸하여 동악을 쓰되 북악은 쓰지 않으며, 중국 사신[中國使]에게 잔치하면 아울러 동악·북악을 쓰고 나아가 조정에서도 이를 쓰고 종묘(宗廟)에도 주악하게 하여, 태평한 다스림을 분식(賁飾)하고 우리 조종(祖宗)의 업(業)을 빛나게 하면 다행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1. 관례(冠禮)를 의행(議行)함입니다. 대개 예전에 남자는 20세이면 관(冠)을 한 것은 성인(成人)의 도(道)를 일깨우려는 것입니다. 송(宋)나라 말년에 진사(進士) 윤곡(尹穀)은 성중(城中)에 갇혀 있으면서 관례(冠禮)를 행하여 향인(鄕人)이 이를 기롱하자 대답하기를, ‘아이들[兒曹]로 하여금 관대(冠帶)하게 함은 선인(先人)을 지하에서 뵙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으니, 그 관례(冠禮)를 중하게 함이 이와 같았습니다.
동방(東方)은 고려[前朝] 명종(明宗) 때에 원자(元子)가 관례를 행하였고 그 뒤로는 듣지 못하였으니, 빌건대 예관(禮官)에 명하여 고례(古禮)를 전채(傳採)하고 겸하여 시왕(時王)의 제도를 상고하여 위로는 종실(宗室)로부터 아래로는 사대부(士大夫)의 자제(子弟)에 이르기까지 나이 13세이면 관례(冠禮)를 행하게 하여 입자(笠子)·두건(頭巾)·사모(紗帽)로써 삼가(三加)를 하고, 혹은 사모(紗帽)·복두(幞頭)·양관(梁冠)을 사용하며, 그 미관자(未冠者)는 입학(入學)을 불허하게 하고, 혼가(婚嫁)·종사(從仕)에 능히 선왕(先王)의 제도를 회복하여 크게 외국의 누(陋)를 변하게 하소서.
1. 복색(服色)을 정하는 것입니다. 대개 복색의 제정은 상하(上下)를 분별하려는 소이(所以)이니 풍속을 한결같이 하는 것을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나라 사람들은 흰 것[白]을 숭상하고, 명(明)나라 사람은 검은 것[黑]을 숭상하며, 일본에 이르러서는 푸른 것[靑]을 숭상하여 모두 일정한 제도가 있습니다. 우리 동방은 조관(朝冠)과 공복(公服)을 실상은 중국(中國)을 의방하였으되, 상시(常時)에는 백의(白衣)를 입기를 좋아하니 마음대로 잡색(雜色)을 쓰는 것은 심히 비리(鄙俚)합니다.
빌건대 공복(公服)의 제도에 따라 당상관(堂上官) 이상을 한 색으로 하고, 6품 이상을 한 색으로 하고, 유품원(流品員)·성중관(成衆官)·의관 자제(衣冠子弟)를 한 색으로 하고, 제위 군사(諸衛軍士)를 한 색으로 하고, 경중과 외방[京外]의 양인(良人)·이서(吏胥)를 한 색으로 하고, 공사 천구(公私賤口)·공장(工匠)을 한 색으로 하여, 이로써 품질(品秩)을 따라 점차로 입게 하든가, 혹은 한 색을 순용(純用)하게 해서 국속(國俗)을 정제(整齊)하시고 여복(女服)에 이르러서는 또한 모두 상정(詳定)하게 하소서.
1. 복요(服妖)를 금하는 것입니다. 대개 의상(衣裳)의 제도는 남녀(男女)와 귀천(貴賤)을 분별하려는 소이(所以)이니, 하민(下民)이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나라 안의 여자들이 장의(長衣) 입기를 즐겨 남자와 같이 하나, 그러나 장의를 의상(衣裳)의 사이에 입어 3층(層)을 이루게 하고 점점 서로 본따서 온나라가 모두 그러하니, 의심컨대 이것은 곧 사문(史文)에 이른바 ‘복요(服妖)’라는 것입니다. 전일에 중국[中原]의 여자가 많이 좌임(左衽)하는 옷을 입었는데, 보고 듣는 자가 모두 길조(吉兆)가 아니라고 하였으니, 이제 여자가 남복(男服)을 입는 것도 또한 어찌 경사로운 징조라 하겠습니까? 더구나 후세(後世)에 있어서도 여자는 상의(上衣)와 하상(下裳)을 입는 것이 가장 고법(古法)에 가깝게 되는데, 만약 이와같이 마음대로 한다면 남녀의 의복은 스스로 제도를 같이하여 이르지 않은 바가 없을 것이니, 어찌 지금 바꾸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빌건대 유사(攸司)에 명하여 기한을 정하여 금지하게 하고, 그래도 여전히 입는 자는 그 옷을 거두어 동서(東西) 활인원(活人院)에 나누어 두었다가 가난하고 병든 자의 옷으로 쓰소서.
1. 전대(前代)의 임금과 재상(宰相)을 제사하는 것입니다. 신(臣)이 그윽이 명나라 제사(諸司)의 직장(職掌)을 보니, 관원을 보내어 역대(歷代)의 군상(君相)을 제사하는데 대뢰(大牢)로써 쓰니 심히 성거(盛擧)입니다. 본조는 역대의 군왕이 도읍하였던 곳에서 산제(散祭)하는 데도 혹은 당연히 제사지내야 할텐데 제사하지 않는 것이 있고 혹은 배향(配享)한 대신(大臣)이 없어 흠전(欠典)된 것 같으니, 바라건대 매년 봄·가을로 동교(東郊)에서 전 조선왕(前朝鮮王) 단군(檀君), 후 조선왕(後朝鮮王) 기자(箕子), 신라(新羅)의 시조(始祖)·태종왕(太宗王)·문무왕(文武王),【두 왕은 고구려·백제를 통합하였음.】 고구려(高句麗)의 시조(始祖)·영양왕(嬰陽王),【수병(隋兵)을 대패(大敗)시킴.】 백제(百濟)의 시조, 고려(高麗)의 태조(太祖)·성종(成宗)·현종(顯宗)·충렬왕(忠烈王) 이상 12위(位)를 합제(合祭)하고, 신라의 김유신(金庾信)·김인문(金仁問)·고구려의 을지문덕(乙支文德), 백제의 흑치상지(黑齒常之)와 근일에 정한 전조(前朝)의 배향 16신(配享十六臣)과 한희유(韓希愈)·나유(羅裕)【합단(哈丹)을 막는 데 공이 있었음.】·최영(崔瑩)·정지(鄭地)【왜구(倭寇)를 막는 데 공이 있었음.】 등을 배향(配享)하게 하소서.
1. 전대(前代)의 능묘(陵墓)를 수호하는 것입니다. 신(臣)이 《속육전(續六典)》을 보니, 고려(高麗)의 태조·현종(顯宗)·문종(文宗)·원종(元宗) 4능(陵)은 각각 수호(守護)하는 자 2호(戶)를 정하여 초채(樵採)를 금하게 하고, 태조의 능(陵)에는 1호를 더하게 하였으니 심히 성덕(盛德)입니다. 그러나 신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역대 군주(歷代君主)가 비록 모두 공덕(功德)이 백성에게 있지 않았더라도 또한 모두 일국(一國)의 인민이 함께 임금으로 모셨으니, 그 있는 데를 살피지 못한 자는 그만이지만, 그 능묘가 여고(如古)하되 호리(狐狸)로 하여금 능히 곁에 구멍을 뚫게 하고 초채(樵採)하는 자로 위를 다니게 하면 어찌 민망하지 않겠습니까?
빌건대 유사(有司)로 하여금 전 조선(前朝鮮)·후 조선(後朝鮮)·삼국·전조(前朝)가 도읍했던 개성(開城)·강화(江華)·경주(慶州)·평양(平壤)·공주(公州)·부여(扶餘)와 김해(金海)·익산(益山) 등지의 능묘가 있는 곳을 자세하게 심방(尋訪)하게 하여 그 공덕이 있는 자는 수릉(守陵)에 3호(戶)를 두고, 별다른 공덕이 없는 자는 2호를 두되, 정비(正妃)의 능묘에도 역시 1호를 두어, 부세(賦稅)를 견감(蠲減)하고 요역(徭役)을 면제하며 그 초소(樵蘇)함을 금하게 하고, 이어서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춘추(春秋)로 살펴보고 치제(致祭)하게 하소서.
1.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는 것입니다. 대개 동방(東方)은 기자(箕子)가 수봉(受封)한 이후로부터 홍범(洪範)의 유교(遺敎)가 오래도록 떨어지지 아니하여, 당(唐)나라에서는 ‘군자(君子)의 나라’라 하고, 송(宋)나라에서는 ‘예의(禮義)의 나라’라 칭하였으니, 문헌(文獻)의 아름다움은 중국[中華]을 모의(侔擬)하였으되, 문묘(文廟)에 배식(配食)한 자는 오직 신라의 설총(薛聰)·최치원(崔致遠)·고려의 안향(安珦) 3인뿐입니다.
신이 들으니, 학사(學士) 쌍기(雙冀)는 전조(前朝)에 있어서 처음으로 과거(科擧)를 설치하여 문풍(文風)을 진작(振作)하였고, 문헌공(文獻公) 최충(崔沖)은 또 구재(九齋)를 설치하여 재생(諸生)을 교육하였으며, 문충공(文忠公) 이제현(李齊賢),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 본조의 문충공 권근(權近)에 이르러서는 그 문장(文章)과 도덕(道德)이 사람마다 모두 만세(萬世)의 수범(垂範)이 될 만하다고 하였으니, 빌건대 모두 선성(先聖)에 배향(配享)하여 후인(後人)을 권장하게 하소서. 만약 ‘동방의 현자(賢者)가 어찌 옛사람과 같을 수가 있느냐?’고 한다면, 공자·맹자의 뒤에도 또한 정주(程朱)가 있었고, 또 어진 자 되기가 이같이 어려우면 후인이 어찌 성현(聖賢)을 배우겠습니까? 중국의 배향자(配享者)는 과연 모두 공자·맹자, 정주(程朱)와 같으며 동방의 선비는 모두 중국 사람만 같지 못하겠습니까? 대저 임금[人主]은 모름지기 일대 정사를 시행하여 권징(權懲)하는 뜻을 보인 뒤라야 사람이 보고 들으며 동(動)하고, 풍속(風俗)을 옮겨 고칠 것입니다.
1. 무성(武成)을 입묘(立廟)하는 것입니다. 대개 문무(文武)의 도(道)는 천경 지위(天經地緯)와 같으니 편벽되게 폐할 수 없습니다. 당(唐)나라 숙종(肅宗)은 태공(太公)을 높여서 무성왕(武成王)을 삼아 입묘(立廟)하여 향사(享祀)하기를 문선왕(文宣王)과 더불어 비등하게 하여 뒤에는 역대(歷代) 양장(良將) 64인을 배향하였습니다. 우리 동방은 선성(先聖)의 제사를 위로는 국학(國學)으로부터 아래로는 주·군(州郡)에 이르렀으되, 무성왕(武成王)은 사우(祠宇)가 없고 단지 둑신(纛神) 4위(位)만을 제사지내니 어찌 궐전(闕典)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훈련관(訓鍊觀)은 곧 송나라의 무학(武學)이니, 빌건대 둑소(纛所)를 훈련관에 병합하고 무성묘(武成廟)를 세워서 제례(祭禮)와 배식(配食)은 대략 문묘(文廟)의 제도에 따르고, 또 신라의 김유신(金庾信), 고구려의 을지문덕(乙支文德), 고려의 유금필(庾黔弼)·강감찬(姜邯贊)·양규(楊規)·윤관(尹瓘)·조충(趙沖)·김취려(金就礪)·김경손(金慶孫)·박서(朴犀)·김방경(金方慶)·안우(安祐)·김득배(金得培)·이방실(李方實)·최영(崔瑩)·정지(鄭地), 본조(本朝)의 하경복(河敬復)·최윤덕(崔閏德)을 배향하게 하소서.
1. 공신(功臣)을 배향(配享)하는 것입니다. 대개 본조의 전후 5공신(五功臣)은 모두 충의위(忠義衛)에 속(屬)하고, 삼조(三朝)에 원종(原從)한 사람도 또한 모두 유죄(宥罪)하여 뒤에 등록하였으니, 원(元)나라의 사겁설(四怯薛)과 송(宋)의 녹수룡(錄隨龍)과 더불어 은총(恩寵)을 더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이 들으니, 전조(前朝)의 배향 대신(配享大臣)은 공신이라 칭하여 매양 큰 은례(恩禮)로써 반드시 자손을 녹용(錄用)하였습니다. 본조(本朝)의 오묘(五廟)에도 모두 배위(配位)를 두었으니 모두 다 공은 왕실(王室)에 있고 은택(恩澤)은 생민(生民)에게 미치는 것입니다. 빌건대 5공신의 예(例)에 따르든가, 혹은 원종(原從) 제인(諸人)의 사호(賜號)에 따라 배향 공신(配享功臣)은 모두 유후(宥後)하고 세록(世祿)하게 하소서. 또 전조와 본조의 장상(將相)으로서 공덕이 백성에게 있는 자의 자손도 또한 수방(搜訪)하여, 특별히 은명(恩命)을 더하면, 전인(前人)은 명명(冥冥)한 속에서 감격하고 후인(後人)도 또한 능히 만세(萬世)에 권장할 것입니다.
1. 문익점(文益漸)·최무선(崔茂宣)의 사우(祠宇)를 세우는 것입니다. 대개 신이 들으니, 성인(聖人)이 제례(祭禮)를 제정할 제, 백성에게 본받게 〈착함〉을 베풀면 제사하였고, 능히 대환(大患)을 막으면 제사하게 하였습니다. 우리 동방에는 예전에 목면(木綿)의 종자(種子)가 없었는데, 전조의 문익점(文益漸)이 봉사(奉使)로 원(元)나라에 체류하여 비로소 얻어다 심어서 드디어 일국에 널리 퍼져서 지금은 귀천(貴賤)·남녀(男女) 할 것 없이 모두 면포(綿布)를 입게 되었습니다. 또 신라(新羅) 때부터 단지 포석(砲石)의 제조만 있고 역대(歷代)로 화약(火藥)의 법이 없었는데, 전조 말에 최무선(崔茂宣)이 처음으로 화포(火砲)의 법을 원(元)나라에서 배워 가지고 돌아와 그 기술을 전하니, 지금은 군진(軍鎭)에서 사용하여 이로움이 말할 수 없습니다. 최무선(崔茂宣)의 공은 만세(萬世)토록 백성의 해(害)를 제거하였으며, 문익점(文益漸)의 공은 만세토록 백성의 이(利)를 일으켰으니, 그 혜택을 생민(生民)에게 입힘이 어찌 적다고 하겠습니까? 빌건대 2인의 관향(貫鄕)인 고을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봄·가을에 본관(本官)으로 하여금 제사를 행하고, 그 자손은 공신으로 칭하여 유죄(宥罪)하고 녹용(錄用)하게 하소서.
1. 시신(侍臣)의 음자(蔭子)입니다. 대개 본조에서 승음(承蔭)하는 법(法)은 곧 당(唐)나라의 자음(資陰)과 송나라의 임자(任子)의 뜻이니, 그 사대부(士大夫)를 대우하는 은덕이 지극합니다. 그러나 그 법은 3품 이상의 관원 외에는 단지 일찍이 대간(臺諫)과 정조(政曹)를 경유한 자의 아들만을 승음(承蔭)하여 신참(新參)한 지 수일이면 곧 감찰(監察)에 제배(除拜)되어 음덕이 자손에게 미치나, 어떤 이는 수십 년을 시종(侍從)하였어도 음덕이 후손에게 미치지 못한 자가 있으니 참으로 가석(可惜)합니다. 더구나 《송사(宋史)》에서는 재집(宰執)·시종(侍從)·대간(臺諫)을 아울러 말하였으니, 빌건대 4품 이하, 6품 이상의 관각(館閣) 양제(兩制)에 시종한 제신(諸臣)의 아들은 특별히 승음(承蔭)을 허락하소서.
1. 문무(文武)의 과법(科法)입니다. 대개 지금 문과(文科)의 초장(初場)에서 강경(講經)할 때, 《사서(四書)》·《오경(五經)》 외에 《한문(韓文)》·《유문(柳文)》 등의 글 같은 것을 임의(任意)로 시강(試講)하니 참으로 정규(定規)가 없고, 중장(中場)은 아울러 고부(古賦)를 시험하니 본래 급무(急務)가 아닙니다. 또 진사(進士)를 이로써 뽑으며 종장(終場)은 제사(諸史)와 시무(時務)를 비록 참작하여 출제(出題)하나 역대의 일을 논함에 이르러서는 권도(權道)의 말로 대답하기를, ‘한(漢)나라·당(唐)나라의 다스림을 어찌 족히 오늘날에 논할 수 있겠는가?’ 하고, 취하는 자도 또한 뜻[意]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로써 사학(史學)이 불명(不明)하여 심히 불가합니다.
또 무과(武科) 시험에 《사서(四書)》·《오경(五經)》을 아울러 강하게 함도 미편(未便)하니, 빌건대 《무경칠서(武經七書)》 외에는 《장감(將鑑)》·《병감(兵鑑)》·《병요(兵要)》·《진설(陣說)》 만을 강(講)하고, 문과(文科)는 《사서》·《오경》 외에 《좌전(左傳)》·《사기(史記)》·《통감(通鑑)》·《송원절요(宋元節要)》·《삼국사기(三國史記)》·《고려사(高麗史)》 만을 강하며, 중장을 표(表)·전(箋)을 시험하여 신자(臣子)로 임금 섬기는 글을 익히게 하고, 교조(敎詔)를 시험하여 군상(君上)이 영하(令下)하는 글을 익히게 하며, 종장(終場)에는 역대와 시무를 번갈아 출제하되, 만일 금년에 역대(歷代)를 시험하였으면 명년에는 시무(時務)를 시험하여, 이것으로 제도를 정하여 과거(科擧)의 법을 새롭게 하소서.
1. 아들을 보내어 입학(入學)하는 것입니다. 대개 자제(子弟)의 입학은 그 이로움이 여섯 가지 있으니, 어진 사우(師友)를 얻어 의난(疑難)을 질문함이 하나요, 어진 사대부에게 친자(親炙)하여 그 기질(氣質)을 훈도(薰陶)함이 둘이며, 인심(人心)·풍속(風俗)과 피차의 형세를 알지 못하는 것이 없음이 셋이오, 친히 문헌(文獻)의 아름다움과 예악(禮樂)·명물(名物)을 보고 점점 습속(習俗)의 누(陋)를 고침이 넷이요, 혹은 분전(墳典)을 구구(購求)하여 궐유(闕遺)를 보충함이 다섯이요, 인하여 중국의 어음(語音)을 배움으로써 상역(象譯)의 잘못된 것을 바르게 하는 것이 여섯입니다.
이제 비록 주청(奏請)하더라도 윤허(允許)를 받기 어려울 것 같으니, 바라건대 입조(入朝)하는 행리(行吏) 때마다 집현전(集賢殿)·예문관(藝文館)·교서관(校書館)·성균관(成均館)·승문원(承文院) 가운데서 학문이 정숙(精熟)하고 문장이 민섬(敏贍)하며 기국(器局)이 굉원(宏遠)한 자 각 1인을 선택하여 취차(就差)하여 들여 보내 유학(遊學)하게 한다면 거의 소견(所見)이 넓어지고 소득도 또한 많아져서 모두 국가의 유용(有用)한 인재가 될 것입니다.
【원전】 7 집 121 면
【분류】 *풍속-풍속(風俗) / *정론-정론(政論) / *역사-전사(前史) / *왕실-종사(宗社) / *군사-군정(軍政)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과학-지학(地學) / *예술-음악(音樂) / *외교-왜(倭) / *외교-야(野) / *외교-명(明) / *풍속-예속(禮俗) / *의생활(衣生活) / *사상-유학(儒學) / *인물(人物) / *인사(人事) / *농업-면작(綿作) / *교육(敎育) / *군사-군기(軍器) / *역사-고사(故事)


[주D-001]소간(宵旰) : 소의 간식(宵衣旰食). 임금이 정사에 부지런함.
[주D-002]경악(經幄) : 경연.
[주D-003]금인(金人) : 금나라 사람.
[주D-004]전조(前朝) : 고려조.
[주D-005]교천(郊天) : 왕이 천신(天神)에게 제사지내던 일. 동지에 남교(南郊)에서 하늘에 제사하고 하지에 북교의 땅에 제사하였음.
[주D-006]향제(饗帝) : 선왕(先王)께 합제(合祭)하는 것.
[주D-007]북해(北海) : 압록강(鴨綠江) 상류(上流).
[주D-008]이부(夷部) : 오랑캐 음악.
[주D-009]삼가(三加) : 관례 때 세 번 관(冠)을 갈아 씌우던 의식. 초가(初加)에는 입자(笠子)·단령(團領)·조아(條兒), 재가에는 사모(紗帽)·단령·각대(角帶), 삼가에는 복두(幞頭), 공복(公服)을 썼음.
[주D-010]좌임(左衽) : 왼쪽으로 여미는 것.
[주D-011]대뢰(大牢) : 나라 제사에 소·양·돼지를 아울러 제물로 바치는 일.
[주D-012]초소(樵蘇) : 나무를 찍고 풀을 벰.
[주D-013]홍범(洪範) : 중국 《서경(書經)》의 한 편. 기자(箕子)가 천지(天地)의 대법(大法)을 베풀어서 주나라 무왕(武王)에게 준 것.
[주D-014]정주(程朱) :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주D-015]천경 지위(天經地緯) : 만세에 변하지 않는 상리(常理).
[주D-016]문선왕(文宣王) : 공자(孔子)의 존칭.
[주D-017]둑신(纛神) : 군사에 관한 일을 주관하던 무(武)의 신(神).
[주D-018]둑소(纛所) : 둑기(纛旗:대장기)를 세워 놓던 곳.
[주D-019]유후(宥後) : 후대를 사유.
[주D-020]세록(世祿) : 대대로 녹봉을 내림.
[주D-021]음자(蔭子) : 음직(蔭職)을 받아 관직에 임명되던 문무관(文武官)의 후손.
[주D-022]승음(承蔭) : 특별히 음관(蔭官)으로 임용(任用)함.
[주D-023]《무경칠서(武經七書)》 : 중국의 7가지 병법에 관한 책. 《육도(六鞱)》, 《손자(孫子)》, 《오자(吳子)》, 《사마법(司馬法)》, 《황석공삼략(黃石公三略)》, 《위료자(尉繚子)》, 《이위공문대(李偉公問對)》를 말함.
[주D-024]친자(親炙) : 친히 배우는 것.
[주D-025]분전(墳典) : 3황(皇)·5제(帝)의 서(書). 곧 고전(古典)이란 뜻.
[주D-026]상역(象譯) : 번역.
[주D-027]민섬(敏贍) : 빠르고 풍부한 것

 

고종 10년 계유(1873, 동치 12)
  9월13일 (무오)
 자경전에 강관 이승보 등이 입시하여 《시전》을 진강하였다
○ 사시(巳時).
상이 자경전에 나아가 진강하였다. 이때 입시한 강관 이승보(李承輔), 참찬관 심순택(沈舜澤), 검토관 박제성(朴齊晟), 가주서 김홍집, 기사관 김유, 별겸춘추 박용대가 각각 《시전》 제7권을 가지고 차례로 나와 엎드렸다.
상이 이르기를,
“사관은 좌우로 나누어 앉으라.”
하였다. 상이 전번에 배운 부분을 음으로 한 번 외우고 나서 책을 폈다. 이승보가 ‘고종우궁(鼓鍾于宮)’부터 ‘백화팔장(白華八章)’까지 읽고 이어 뜻풀이를 하였다. 상이 서산(書算)을 이승보에게 주도록 명하였다. 상이 새로 배운 내용을 음으로 열 번 읽고 나니, 이승보가 서산을 반납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장(章)으로 보건대, 신후(申后)는 높은 적후(嫡后)로서 도리어 비천(卑賤)하게 되어 존비(尊卑)가 차서를 잃게 되었으니, 그 스스로 슬퍼하는 말들이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천운이 열리지 않아 시세가 험란한 때를 당하여 이러한 일이 있었으니, 유왕(幽王)이 그 나쁜 시호를 얻게 된 것이 마땅하다. 왕이 비록 이와 같았으나 신후는 이와 같이 생각할 수 있었으니, 그 어짊을 알 수 있다.”
하니, 이승보가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지당하십니다. 군자의 도는 부부(夫婦)에게서 그 단서가 만들어지니, 나라를 다스리는 도도 규문(閨門)에서 근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처에게 본보기를 보여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이 실로 이 때문입니다. 비록 민간의 보통 사람이라 하더라도 첩을 사랑하고 처를 소홀히 하면 그 집안을 보전할 수 없는데, 더구나 지존한 천자로서 비(妃)와 첩(妾)이 이처럼 차서를 잃었으니 어찌 그 나라를 보전할 수 있겠습니까. 나쁜 시호는 그래도 몸이 죽은 뒤의 일에 속하지만, 유왕은 생전에 몸소 국난(國亂)으로 욕을 입어 다시는 남은 땅이 없어 만세토록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었으니, 이루 다 탄식할 수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분수를 나누는 것은 엄히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니, 이승보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비와 첩에 있어 등급을 분명히 엄하게 나누어야 하는 것이 어떠한 일인데, 유왕의 처사가 이와 같아 그 외의 정치가 따라서 어그러졌으니, 이 때문에 상난(喪亂)이 없는 날이 없던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유왕이 집안 일을 처리하는 것이 이와 같았으니, 그 정치를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견융(犬戎)의 난이 있게 된 것이다.”
하니, 이승보가 아뢰기를,
“부부의 도는 바로 집안을 바로잡는 일의 시초인데 비와 첩에 대해 이와 같이 일을 처리하였으니 견융의 난이 있게 된 것이 마땅합니다. 이것으로 보아, 견융이 중국을 침범한 것이 아니라 바로 유왕이 불러들인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 당시 군자가 조정에 있었다면 어찌 이러한 지경에까지 이르렀겠는가.”
하니, 이승보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포사(褒姒)가 안에서 멋대로 권력을 부렸으니, 자연 소인이 등용되고 군자가 소원해졌을 것입니다. 군자와 소인이 형세에 있어 서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은 필연적인 이치입니다. 이 때문에 근본이 어지러운데도 말단이 다스려진 경우는 없는 것입니다.”
하고, 박제성이 아뢰기를,
“부부의 도는 비유하자면 천지(天地)와 같습니다. 천지의 기운이 교감하여야 만물이 이루어지듯이 부부의 위치가 바르게 되어야 가도(家道)가 이루어지니, 이것이 떳떳한 이치입니다. 지금 이 신후는 어진데도 지위를 잃고 포사가 농염하게 차지하고 있어 존비의 차서가 정해지지 않고 비첩의 분별이 명확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으니, 나라를 위태롭지 않게 하고자 한들 될 일이겠습니까. 《중용》에, ‘군자의 도는 부부에서 단서가 만들어진다.’ 하였으니, 규문 안에서 항상 경계를 하여 덕행으로 서로 도우면 집안은 반드시 가지런하게 되고 나라는 반드시 다스려져 영장(靈長)의 복이 자연 이르게 될 것입니다.”
하고, 심순택이 아뢰기를,
“강관과 유신들이 이미 갖추어 진달하였습니다만, 이 시의 여덟 장은 모두 비체(比體)입니다. 대개 유왕이 착하지 못하여 그 덕을 이랬다저랬다 하여 진실로 원앙(鴛鴦)만도 못하였는데, 두루미를 기르고 학(鶴)을 버리는 데 비유하였으니, 그 뜻을 볼 수 있습니다.”
하고, 이승보가 아뢰기를,
“예로부터 제왕가에서 훌륭한 정치를 이루고 나라를 일으킨 것은 또한 후비(后妃)의 현성(賢聖)함에 연유하였습니다. 주(周) 나라를 놓고 말한다면, 태임(太任)과 태사(太姒), 읍강(邑姜)이 안에서 정치를 도왔기 때문에 주 나라의 태평성대를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읍강의 아비가 누구였으며, 무왕(武王)이 읍강을 처로 삼은 것이 왕업을 일으키기 전이었는가?”
하니, 이승보가 아뢰기를,
“읍강의 아비가 강태공(姜太公)입니다. 무왕이 배필로 맞은 것은 과연 왕업을 일으키기 전이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태사와 태임, 읍강은 과연 삼세(三世)의 현성한 후비였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주 나라 800년의 기업(基業)이 실로 이에 근본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책을 덮었다. 이승보가 아뢰기를,
“종친부에서 《선원보략(璿源譜略)》 및 《속보(續譜)》를 쓰는 일이 매우 많고 번잡한데 사자관(寫字官)이 매번 부족한 상태입니다. 변통하는 방도가 없을 수 없으니, 내각과 옥당의 예에 의거하여 글씨 잘 쓰는 사람 몇을 골라 종친부 대령(宗親府待令)의 단자(單子)로 거행하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몇 사람으로 숫자를 정해야겠는가?”
하자, 이승보가 아뢰기를,
“액수를 마련해야 할 것인데, 20인으로 정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자관이 본래 40인인데 차비 대령(差備待令)을 하는 자는 실로 내각(內閣)의 소속이 아니다. 이번에도 망단자(望單子)에 차비 대령으로 쓰도록 하라.”
하였다. 이승보가 아뢰기를,
“차비 대령의 숫자가 지금 20원(員)인데, 올봄 취재(取才) 때 20인으로 뽑아 취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종친부에서도 취재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니, 이승보가 아뢰기를,
“취재를 해야 할지의 여부는 아직 의논하여 정하지 않았습니다만, 이미 쓰는 일을 위하여 설치된 것인 이상 잘 쓰는 사람을 골라야 할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종친부에서 의논하여 정하라.”
하였다. 이승보가 아뢰기를,
“지난번에 선파(璿派) 가운데 왕사(王事)에 죽었거나 억울하게 죄명을 입게 된 사람들의 후사(後嗣)를 이어주는 일에 관한 추가 별단(別單) 가운데, 양녕대군(讓寧大君)의 5대 손 원진(元軫)이 후사가 없어 임영대군(臨瀛大君)의 후손 정현(廷賢)으로 후사를 세워주도록 하여 계하받았습니다. 그런데 보책(譜冊)과 종친부에 있는 자손록(子孫錄)을 상고해 보니, 양녕대군 5대 손의 항렬에는 애당초 원진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그의 후손이 없는 것으로 계본을 만들게 되었으니, 너무도 송구스럽습니다.
듣건대, 신과 같은 파(派)의 사람 가운데 한 종인(宗人)이 신의 말이라 가탁하고는 도보소(都譜所)의 유사에게 거짓으로 전함에 유사가 그 말만을 듣고 다시 의심하지 않고 별단을 수정하였다고 합니다. 이미 실상이 없는 이름이었으니, 그냥둘 수 없습니다. 원래의 별단(別單)을 시행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본 보책 가운데 과연 그런 이름이 없는가?”
하자, 이승보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종친부에 과연 예전의 자손록이 있는데 언제부터 만들어진 것인가?”
하자, 이승보가 아뢰기를,
“연조(年條)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숙종조 때 수합한 것인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의 별단 가운데 원진의 후사를 세우는 조항에 부표(付標)하여 들이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런데 어찌 거짓으로 전하는 일까지 있단 말인가. 거짓으로 전한 사람이 과연 어떤 사람인가?”
하자, 이승보가 아뢰기를,
“필시 어리석고 협잡스러운 마음으로 이러한 어그러진 행동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듣건대, 그 사람은 시골에 있는 종인인데 즉시 시골로 내려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방금 불러오도록 하였으니, 조사해 물어본 뒤 종벌(宗罰)을 시행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종벌은 어떻게 실시하는 것인가?”
하자, 이승보가 아뢰기를,
“같은 파의 종인들이 모두 모여 혹 사당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등의 벌로 시행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보첩(譜牒)을 더럽게 어지럽히는 무리이다. 듣건대, 선파의 후예 가운데 상천(常賤)이 많은데 양녕대군의 파 가운데 더욱 많다고 한다. 어찌 이러한 지경에까지 이르른 것인가?”
하자, 이승보가 아뢰기를,
“중엽에 이르러 선파의 후예들이 영락하여 크게 변하고 빈궁해져 배우지 못하여 오랫동안 벼슬을 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상천과 비슷하게 되어버린 자가 그 숫자를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양녕대군 파의 인원이 조금 많아 영락한 바가 더욱 심하였기 때문에 상천을 면치 못한 자가 더욱 많은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제의 전교를 보았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선정의 자손이 영락한 것이 염려스럽기 때문에 이렇게 전교한 것이다. 사손(祀孫)으로서 아직 벼슬하지 않은 자가 몇 사람인가?”
하자, 이승보가 아뢰기를,
“성덕(聖德)이 보기 드물게 훌륭하시니 신은 흠앙해 마지않습니다. 문묘(文廟)에 합사(合祀)한 선정의 사손 가운데 아직 벼슬하지 않은 자는 조금 전 반차(班次)에서 들으니 6, 7가(家)가 된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암(靜菴), 율곡(栗谷), 우계(牛溪), 우암(尤菴)의 사손은 모두 관직이 있는데, 퇴계(退溪), 회재(晦齋), 사계(沙溪), 동춘(同春), 현석(玄石)의 집안에는 없다고 하지 않는가?”
하자, 이승보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사손도 아직 벼슬길에 들지 않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하서(河西)에게 사손이 있는가?”
하자, 이승보가 아뢰기를,
“하서의 자손이 대부분 호남에 살고 있는데, 사손이 누구인지는 자세히 모르겠습니다. 지난해 듣건대, 사손의 일로 서로 다투고 있다고 하였는데, 언제 올바르게 결말이 났는지 또한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종파(宗派)가 어찌하여 서로 다투는 것인가?”
하자, 이승보가 아뢰기를,
“필시 중간의 사단(事端)을 인하여 그렇게 된 것일텐데, 정도전(鄭道傳)의 사손이 서로 다투었던 일과 비슷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도전의 사손은 연전에 과연 새로 정하였으니, 이미 음직(蔭職)으로 보임되었을 듯하다.”
하자, 이승보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포은(圃隱)의 사손은 작년에 송도(松都)로 행행(幸行)하였을 때 거두어 서용하였는데, 안 문성공(安文成公 안향(安珦))의 후손은 바로 안기영(安驥泳)의 집이다. 최 고운(崔孤雲)과 설 홍유(薛弘儒)의 후손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최치원(崔致遠)의 후손은 해주(海州)에 많이 살고 있을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퇴계의 사손은 그 이름을 무엇이라 하는가?”
하니, 이승보가 아뢰기를,
“이중의(李中懿)라 하는데, 자세하지는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암(靜菴)의 사손은 일찍이 전 문형(文衡)이라 알고 있었는데, 지난번 들으니 사손이 아니라고 하였다.”
하니, 이승보가 아뢰기를,
“조성교(趙性敎)의 재종질(再從侄) 조종순(趙鍾純)이 바로 그 사손인데, 이번에 음사(蔭仕)로 보임되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선정(先正)은 12인인가?”
하니, 박제성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세화(李世華), 이동표(李東標), 연최적(延最績)은 충절이 가상한데, 연최적의 자손들은 어디에 있는가? 지난번에 경연에서 물으니, 이계로(李啓魯)는 충청도 땅에 있다고 한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신도 그날 경연 석상에 나와 들었습니다. 청안(淸安) 땅에 연씨(延氏) 성을 가진 사람이 매우 많다고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세 신하 이외에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형제, 호곡(壺谷 남용익(南龍翼)),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는 모두 같은 때 사람인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김만중(金萬重)은 판의금부사로 죄를 입은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우암도 비록 예송(禮訟)으로 화를 입긴 하였지만 그가 죽은 것도 같은 때이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과연 기사년 4월에 화를 받았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남용익(南龍翼)은 찬배(竄配)만 된 것인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끝내 적소(謫所)에서 죽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후손으로서 조정에 있는 자가 누구인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전 승지 남일우(南一祐)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서포의 사손은 누구인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전 현감 김관수(金觀洙)가 있는데, 종손(宗孫)은 아닌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문곡의 사손은 바로 이조 판서의 생가(生家)인데, 퇴우당(退憂堂)의 후손은 누구인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김수흥(金壽興)의 후손이 누구인지는 분명하게 모르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혹 차자(次子)가 제사를 계승하기도 하고 또 출계(出系)한 자도 있기 때문에 상세히 알 수 없을 것이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양곡(暘谷 오두인(吳斗寅))과 정재(定齋 박태보(朴泰輔))의 사손은 모두 외임(外任)이라 하는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박제만(朴齊萬)은 전임 군수이고, 오달선(吳達善)은 이번에 장흥 부사(長興府使)가 되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쌍백당(雙栢堂 이세화(李世華))의 사손은 그 이름이 무엇인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이헌경(李軒卿)인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신하로서 마땅히 죽어야 할 처지에서 죽었으니, 그 충절이 살아 있는 듯 늠름하다. 그 집안에 있어서는 이름있는 조상이 되는데, 조정에서 반드시 그 후손을 거두어 등용한다면 어찌 훌륭하지 않겠는가. 그 당시 소인에게 만세토록 용서받기 어려운 죄악이 있었는데, 그 후손에 대해 세상 사람들은 알고자 하지 않으니, 이는 거울삼아 경계할 만한 것이다. 《시경》에도 이렇게 소인이 군자와 배치(背馳)되어 반드시 사지(死地)로 모함하고자 하는 내용이 많으니, 그 형세가 본래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소인은 비록 한때의 이끗은 있을지라도 만년토록 악취를 남기며, 군자는 비록 당시의 원통함은 있을지라도 백세토록 향기를 발산하니, 그 장단을 비교해 보면 댓 갑절 정도뿐만이 아니다.”
하고, 상이 이르기를,
“소인이 군자를 모함하여 해를 끼치는 것은 정암(靜菴) 때 남곤(南袞)이나 심정(沈貞)의 일과 같으니, 지금 와서 보아도 너무나 통탄스럽다.”
하자, 심순택이 아뢰기를,
“군자와 소인의 일은 백대가 지난 뒤에도 상상해 볼 수 있는데, 그 호오(好惡)의 공변됨은 바로 타고난 떳떳한 양심인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제 《정원일기(政院日記)》를 보니, 기사 환국 때 충성을 지키다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숙묘(肅廟)께서 비록 미처 통촉하지는 못하셨지만 그 후에 다시 새롭게 교화하여 소인을 내쫓고 군자를 등용하였다.”
하자, 이승보가 아뢰기를,
“그 당시 어진 신하들이 과연 배출되었습니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이는 실로 나라에서 배양한 공입니다. 소장(消長)의 이치는 예로부터 그러하였으니, 소인이 비록 잠시 때를 얻는다 하더라도 그 형세는 오래갈 수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치와 형세가 그러한 것이다. 천도(天道)는 양(陽)이 많고 음(陰)이 적어야 세공(歲功)을 이룰 수 있으니, 사람의 몸으로 말하면, 편안할 때가 많고 아플 때가 적어야 천수(天壽)를 누릴 수 있는 것과 같다.”
하니, 박제성이 아뢰기를,
“이것도 기수(氣數)입니다. 군자와 소인이 비록 혹 나란히 나아간다 하더라도 그 충(忠)과 역(逆)의 판별은 백년이 지나기도 전에 정해지는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기수가 그러한데, 충과 역의 판정이 어찌 백년까지 갈 것이 있겠는가. 비유하자면, 물이 혹 때로 막혔다가도 툭 트이게 되면 끊임없이 흘러가게 되는 것과 같다.”
하니, 이승보가 아뢰기를,
“행하게 됨에 미쳐서는 강하(江河)가 트인 것처럼 줄기차게 된다고 한 것이 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자, 심순택이 아뢰기를,
“이는 뜬구름이 하늘을 가렸다가도 이내 구름이 걷히면 예전처럼 청천 백일이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자와 소인의 분별을 엄하고 밝게 한 연후에야 비로소 위정 척사(衛正斥邪)의 공에 보탬이 있을 것이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군자가 정(正)이고, 소인이 사(邪)니, 이것이 바로 사와 정의 구분입니다.”
하자, 이승보가 아뢰기를,
“군자는 참언(讒言)을 만나고 난(亂)을 겪을 때마다 탁월한 충절과 꼿꼿한 절개가 더욱 스스로 드러나니, 그렇다면 소인이 정(正)을 해치는 것은 다만 군자가 성취해 나가는 데 한 단서가 될 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강관의 말이 참으로 그러하다. 소인의 화(禍)가 과연 군자의 이름을 이루게 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군자와 소인을 분별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상이 사관에게 자리로 돌아가라고 명하고 이어 강관에게 먼저 돌아가라고 명하였다. 또 물러가라고 명하니, 신하들이 차례로 물러나왔다.

 

 

 

안향/安珦

인물 자 사온/士蘊
인물 호 회헌/晦軒
인물년도 1243 ~ 1306
프로필
  안향(安珦 ; 1243~1306)의 초명은 유(裕).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인데, 이는 그가 만년에 송나라의 주자(朱子)를 추모하여 그의 호인 회암(晦庵)을 모방한 것이다. 밀직부사 부(孚)의 아들로 지금의 경북 풍기의 죽계(竹溪) 상평리(上坪里)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강주우씨(剛州禹氏)이다. 1260년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이 되고, 이어 직한림원(直翰林院)으로 자리를 옮겼다. 1270년 삼별초의 난 때 강화에 억류되었다가 탈출, 1272년 감찰어사가 되었다. 강화탈출로 인하여 그는 새삼 원종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1275년 상주판관(尙州判官)으로 나갔을 때에는 백성들을 현혹시키는 무당을 엄중히 다스려 미신을 타파, 민풍(民風)을 쇄신시키려 노력하였고, 판도사좌랑(版圖司左郞)·감찰시어사(監察侍御史)를 거쳐 국자사업(國子司業)에 올랐다. 1288년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를 거쳐 좌부승지로 옮기고, 다시 좌승지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다. 고려는 충렬왕대에 와서는 원나라의 완전한 속국이 되어 관제도 고쳤을 뿐만 아니라, 원나라는 정동행성(征東行省)을 고려에 두었는데, 1289년 2월에 그는 이 정동행성의 원외랑(員外郞)을 제수받았다. 얼마 뒤 좌우사낭중(左右司郎中)이 되고, 또 고려유학제거(高麗儒學提擧)가 되었다. 같은 해 11월에 왕과 공주(원나라 공주로서 당시 고려의 왕후)를 호종하고, 원나라에 가서 주자서(朱子書)를 손수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畵像)을 그려가지고 이듬해 돌아왔으며, 3월에 부지밀직사사가되었다. 1294년 동남도병마사(東南道兵馬使)를 제수받아 합포(合浦)에 출진하였고, 이어 지공거(知貢擧)가 되고, 같은 해 12월에 지밀직사사, 다시 이듬해 밀직사사로 승진하였다. 1296년 삼사좌사(三司左使)로 옮기고, 왕과 공주를 호종하여 다시 원나라에 들어갔으며, 이듬해에는 첨의참리세자이보(僉議參理世子貳保)가 되었다. 12월 집 뒤에 정사(精舍)를 짓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모셨다. 1298년 당시 원나라의 간섭에 의하여 충렬왕이 물러나고 세자를 세우니, 그가 바로 충선왕인데, 즉위하자 관제를 개혁하여 그는 집현전태학사겸참지기무동경유수계림부윤(集賢殿太學士兼參知機務東京留守鷄林府尹)이 되고, 다시 첨의참리수문전태학사감수국사(僉議參理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가 되었다. 같은해 8월 충선왕을 따라 또다시 원나라에 들어갔다. 바로 이해에 충렬왕이 다시 복위되었는데, 이듬해 수국사가 되고, 이어 1300년 광정대부찬성사(匡靖大夫贊成事)에 오르고, 얼마 뒤에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이 되었다. 1303년 국학학정(國學學正) 김문정(金文鼎)을 중국 강남(江南:난징)에 보내어 공자와 70제자의 화상, 그리고 문묘에서 사용할 제기(祭器)·악기(樂器) 및 육경(六經)·제자(諸子)·사서(史書)·주자서 등을 구해오게 하였다. 또 왕에게 청하여 문무백관으로 하여금 6품 이상은 은 1근, 7품 이하는 포(布)를 내게 하여 이것을 양현고(養賢庫)에 귀속시키고, 그 이식으로 인재양성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같은 해 12월에 첨의시랑찬성사판판도사사감찰사사(僉議侍郞贊成事判版圖司事監察司事)가 되었다. 이듬해 5월에는 섬학전(贍學錢)을 마련하여 박사(博士)를 두어 그 출납을 관장하게 하였는데, 이는 오늘날의 육영재단과 성격이 같은 것으로서 당시에 국자감 운영의 재정적 원활을 가져왔다. 그리고 같은 해 6월에 대성전(大成殿)이 완성되자, 중국에서 구해 온 공자를 비롯한 선성(先聖)들의 화상을 모시고 이산(李?)·이진(李?)을 천거하여 경사교수도감사(經史敎授都監使)로 임명하게 하였다. 이해에 판밀직사사도첨의중찬(判密直司事都僉議中贊)으로 치사(致仕)하였다. 1306년 9월 12일 64세로 죽었다. 왕이 장지(葬地)를 장단 대덕산에 내렸다. 1318년 왕이 그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궁중의 원나라 화공에게 명하여 그의 화상을 그리게 하였다. 현재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는 그의 화상은 이것을 모사한 것을 조선 명종 때 다시 고쳐 그린 것이다. 이듬해 문묘에 배향되었다. 1542년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영주군 순흥면 내죽리(內竹里)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이듬해 8월에는 송나라 주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모방하여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그곳에 세웠는데, 1549년 풍기군수 이황(李滉)의 요청에 따라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명종 친필의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1643년 장단의 유생들이 봉잠산(鳳岑山) 아래에 서원을 세웠는데, 이것이 임강서원(臨江書院)이다. 이 두 서원과 곡성의 회헌영당(晦軒影堂)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