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 외손 /전주최공 절충장군 휘 진주 사위

전주최공 절충장군 사위 통덕랑(通德郞) 강공(姜公) 묘표 무인년

아베베1 2011. 5. 31. 11:05

약천집 제21권
 묘표(墓表)
통덕랑(通德郞) 강공(姜公) 묘표 무인년(1698, 숙종 24)


공은 휘가 수급(秀岌)이고 자가 숙고(叔高)이니, 진주(晉州) 사람이다. 진주 강씨(晉州姜氏)는 고려 때부터 현달하였으니, 먼 선조는 국자박사 휘 계용(啓庸)이다. 5세를 지나 휘 시(蓍)가 있었으니,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에 봉해졌으나 우리 조선조가 혁명을 하자 벼슬하지 않고 별세하였는바, 공목(恭穆)이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공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문과에 올라 한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었다. 둘째 아들 휘 회중(淮仲)은 형조참판 겸 보문각직제학(刑曹參判兼寶文閣直提學)을 역임하였는바 공의 7대조이다.
고조 휘 지(漬)는 정국 공신(靖國功臣)에 포함되어 영선군(永善君)에 봉해졌으며 병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증조 휘 세침(世琛)은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이고, 조고 휘 질(礩)은 생원으로 사헌부 집의에 추증되었으며, 선고 휘 응명(應明)은 선대의 공훈으로 선략장군(宣略將軍) 용양위 부사과(龍驤衛副司果)를 지냈으며, 선비 완산 이씨(完山李氏)는 창선대부(彰善大夫) 재양정(載陽正) 급(級)의 따님이요 세종 대왕의 현손이다. 융경(隆慶) 임신년(1572, 선조 5)에 서울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지극한 성품이 있어서 어버이를 섬기고 어른을 공경함에 저절로 법도에 부합하였다. 겨우 스물이 되었을 때에 왜구를 만나 부모를 받들고 피난하였는데, 비록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고 곤궁하였으나 반드시 몸소 쌀을 져오고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여 올렸다.
난리가 진정되자 청양(靑陽)으로 돌아왔는데, 어버이를 모시고 음식을 먹을 적에 어버이가 미처 드시지 않았으면 자신의 입에 넣은 적이 없으며, 어버이의 병환을 간호할 적에 어버이가 평상으로 회복하지 않으면 옷을 벗은 적이 없었다. 어버이의 뜻을 잘 받들고 음식과 의복을 극진히 봉양하여 지극한 효도라는 칭찬이 있었다.
나이가 노쇠하여 연달아 부모 상을 당하였으나 오히려 예를 지키고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제사 지낼 적에 정성을 다하여 일생을 마쳤다. 나이 85세에 홍주(洪州)의 우거하는 집에서 별세하여 부귀동(富貴洞) 임좌(壬坐)의 산에 장례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독서할 줄을 알아 대의(大義)를 통달하였으나 과거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오직 조용히 한 방에 거처하며 효도와 우애로 집안을 다스렸다. 친구들을 따라 향당(鄕黨)에서 즐겁게 놀지 않았으며, 명함을 가지고 관청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었다. 식구를 헤아려 적당히 농사지어 먹고살았는데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으면 그때마다 가난한 친척과 이웃들에게 나누어주고 일찍이 가산을 경영하는 수고로움과 돈을 들여 집을 수리하는 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마음이 한가롭고 몸이 편안하였으며 천명을 즐기고 바람이 없어서 크게 장수를 누리는 데에 이르고 후손들이 창성하게 하였다.
배위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절충장군(折衝將軍) 행 용양위 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 진주(鎭宙)의 따님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름다운 자질이 있었는데, 공에게 시집오자 부인의 도리를 매우 잘하여 훌륭한 덕과 아름다운 명성이 시종 변함이 없었다. 만력(萬曆) 을유년에 출생하여 83세에 별세하니, 공의 묘소와 같은 무덤의 오른쪽에 장례하였다.
장남 선홍(善弘)은 어모장군(禦侮將軍)이고 차남은 선익(善益), 선민(善敏)이며, 장녀는 통정대부 조시화(趙時華)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신사문(愼思文)에게 출가하였다. 선홍은 1남 원상(元祥)을 두었으니 선무랑(宣務郞)이며, 선익은 4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원정(元禎), 원조(元祚), 원규(元), 원약(元禴)이고, 딸은 방만적(方萬績)에게 출가하였다. 선민(善敏)은 서출이 3남 3녀이니, 아들은 원영(元英), 원준(元俊), 원숙(元俶)이고 세 딸은 안단(安端), 전만균(田萬囷), 유성규(柳星奎)에게 출가하였다. 조시화는 2남 2녀를 두었으니, 원형(元亨)은 무과에 급제하였고 세형(世亨)은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주부이며, 두 딸은 이제두(李齊斗)와 최천운(崔天運)에게 출가하였다. 신사문은 4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휘창(徽昌), 석창(碩昌), 중창(重昌), 유창(愈昌)이고, 두 딸은 윤신항(尹愼恒)과 이윤주(李允柱)에게 출가하였다. 원상은 1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 성복(聖復)은 생원으로 형조 정랑이고 딸은 오수광(吳遂光)에게 출가하였다. 내외의 증손과 현손이 수십여 명이다.
성복은 집안을 이어 훌륭한 명성이 있는데, 공의 행실을 기록하여 나에게 주고 비문을 청해서 돌에 새겨 후세에 보여서 숨겨진 빛을 드러내려 하니, 효성스럽다고 이를 만하다. 이것으로 표문을 짓노라.

藥泉集第二十一
 墓表
通德郞姜公墓表 戊寅 a_132_318d


公諱秀岌字叔高。晉州人。晉州之姜。著自麗朝。遠祖國子博士諱啓庸。歷五世有諱蓍。門下贊成事封晉山府院君。我朝革命。不仕卒。贈諡恭穆。公有三子132_319a並登文科。著名一世。其仲諱淮仲。刑曹參判兼寶文閣直提學。公之七代祖也。高祖諱漬。參靖國功封永善君贈兵曹判書。曾祖諱世琛。軍器寺僉正。祖諱礸。生員贈司憲府執義。考諱應明。以先勳補宣略將軍龍驤衛副司果。妣完山李氏。彰善大夫載陽正級之女。世宗大王之玄孫也。隆慶壬申生公于京第。幼有至性。事親敬長。自合典則。纔勝冠。遭倭寇。奉父母避兵。雖流離顚沛。必身負米具甘旨。亂定歸于靑陽。侍親食。親不及食。未嘗入口。侍親疾。親不復常。未嘗解衣。志物之養。有純孝之稱。年旣衰。連遭內外艱。猶132_319b服禮不解。享祀盡誠。以終身焉。年八十五。卒于洪州寓舍。葬于富貴洞坐壬之原。公少知讀書。便曉大義。而不屑爲擧業。惟潛居一室。以孝友爲政。未嘗徵逐詡詡於鄕黨。未嘗修剌投足於官府。計口而食。稍有餘裕則輒以周親戚隣里之貧窶者。未嘗有經營之勞修飾之費。心閒身逸。樂命無求。以登于大耋。以裕于後昆焉。配全州崔氏。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鎭宙之女。生有淑質。歸公甚得婦道。令德令聞。終始無間。以萬曆乙酉生。年八十三卒。葬于公墓同兆之右。男長善弘禦侮將軍。次善益次善敏。女長適通政132_319c趙時華。次適愼思文。善弘一男元祥宣務郞。善益四男元禎,元祚,元▼,元禴。一女適方萬績。善敏庶出三男元英,元俊,元俶。三女適安端,田萬囷,柳星奎。趙時華二男元亨武科世亨武科訓鍊院主簿。二女適李齊斗,崔天運。愼思文四男徽昌,碩昌,重昌,愈昌。二女適尹愼恒,李允柱。元祥一男聖復生員刑曹正郞。一女適吳遂光。內外曾玄孫數十餘人。聖復承家有聞。狀公之行。請余爲文。將以刻石視後。以發幽光。可謂孝矣。是爲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