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 참판공 휘 세영/감찰공 휘 세영 의장인(서효적)

문성공 13세손 사헌부 감찰 (휘 세영 )장인 호조 좌랑에 추증된 서공(徐公) 묘갈명

아베베1 2011. 6. 5. 10:40


 

 

 

 

 

약천집 제26권

 가승(家乘)
호조 좌랑에 추증된 서공(徐公) 묘갈명



연산 서씨(連山徐氏)는 《여지승람(輿地勝覽)》에 기재되어 있는바, 관향(貫鄕)을 받은 지가 오래이며 이제 가까이 기억할 수 있는 바로는 생원 보(寶)가 있다. 이분이 교위(校尉) 의민(義敏)을 낳아 현감 종수(宗秀), 판관 연(憐), 현감 천령(千齡)에게 전하고 현감 천령이 다시 휘 주(澍)에게 전하였는데, 임진왜란에 가산(家産)을 다 털어 군량(軍糧)을 도우니, 선조(宣祖)는 가상히 여기고 사헌부 감찰을 제수하여 그 공로를 표창하였다. 그러나 공은 말하기를, “국가가 위태롭고 어려울 때를 만나 재물이 있어 군대에 바친 것이니, 어찌 감히 상을 바라겠는가.” 하고는 사양하고 사은숙배하지 않았다. 얼마 안 되어 세상을 떠났는데, 유명(遺命)으로 관직의 명칭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이때 이러한 사실을 조정에 아뢴 자가 있어 특별히 통정대부 장례원 판결사에 추증하여 그 뜻을 표창하였다. 동래 정씨(東萊鄭氏)에게 장가드니, 목사 정순우(鄭純佑)의 따님으로 2남을 낳았는데, 장자는 현감으로 승지에 추증된 후적(後積)이고 막내는 바로 공이다.

 

공은 휘가 효적(效積)이고 자가 계진(季眞)인데, 어려서 부모를 여의었으나 경계하고 힘써서 자립하였다. 글에 있어 대의를 통달하였으며 강직하고 담론을 잘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심취하게 하였다. 집안이 대대로 영락(零落)했다 하여 과거 공부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또 광해군의 혼란한 때를 당하여 세상에 진출하려는 뜻이 없었다. 인조가 반정하자, 반정하는 대열을 따라 원종공신 1등으로 기록되었으나 얼마 후 공이 서거하였다. 이 때문에 몸이 끝내 조정에 오르지 못하고 재주가 끝내 세상에 쓰이지 못하였다. 공이 공신에 기록됨으로 인해 선고(先考)인 판결사공(判決事公)에게 병조 참판을 추증하였고, 공은 별세한 뒤에 또한 승의랑(承議郞) 호조 좌랑에 추증되었다.

참판공의 계배(繼配)인 이 부인(李夫人)은 성품이 엄하고 법도가 있었는데, 공은 형과 함께 계모를 받들어 섬김에 뜻을 어김이 없었다. 이 부인은 4녀를 낳았는데, 형제간에 우애가 지극하여 규문(閨門) 안이 화기애애하였다. 부인은 일찍이 전실 소생의 두 아들을 자신의 소생이 아니라고 말한 적이 없으며, 누이들도 어머니가 다른 줄을 알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순수하고 돈독한 행실이 비록 옛날의 훌륭한 분에게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기미년과 경신년 사이에 큰 흉년이 들자,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사민(士民)들은 공이 남의 위급함을 잘 구제해 준다는 것을 알고는 먹여 주기를 바랐는데 온 고을 사람들이 다 그러하였다. 이에 공은 창고의 곡식을 털어 사람들을 구휼하였으며, 곡식이 부족하자 또다시 환자곡 수십 섬을 꾸어 계속 구휼하다가 가을이 되자 환자곡을 숫자대로 다 갚았다. 이에 고을의 원인 윤보벽(尹寶璧)은 공의 행실을 의롭게 여겨 환자곡을 다시 수레에 실어 돌려보내며 말하기를, “고을의 백성들이 굶주리다가 공의 도움으로 살아나게 되었으니, 나는 이곳의 성주(城主)로서 공에게 너무나도 부끄럽다. 또 무슨 마음으로 국가에 상환하는 곡식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공은 만력 기묘년(1579, 선조 12)에 출생하여 천계 병인년(1626, 인조 4)에 별세하였다.
의인(宜人) 무주 김씨(茂朱金氏)는 동지(同知) 김언유(金彦瑜)의 따님인데, 시어머니를 섬기고 남편을 받드는 것이 모두 예의와 법도에 맞았다. 공의 여동생을 시집보낼 적에 의인이 이 부인(李夫人)을 모시고 혼수를 장만하며 음식을 준비함에 있어 신중하고 정갈하게 마련하였다. 일이 끝나자 의인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직하자, 이 부인은 웃으며 말하기를, “내 들으니 며느님이 집에 있을 적에 손끝에서 하루에 소 한 마리가 생긴다고 하던데, 지금 내 딸을 시집보내느라 집에 돌아가지 못한 지가 여러 날이니, 내 며느님의 소를 손해 보게 한 것이 많다.” 하였다. 의인이 사양하고 하직한 다음 문을 나오는데, 갑자기 소 한 마리가 길을 막고 있으므로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바로 부인이 내려 준 것이었다.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순종하고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사랑함이 이와 같았다.
공이 별세하자, 의인은 소식(素食)을 하여 몸을 훼손한 것이 6년 동안에 이르렀다. 아들 필성(必成)이 다섯 번 고을 수령이 되어 고을살이하면서 봉양하였으며, 수(壽)가 구십을 넘어 온갖 영화를 다 누렸으나 의인은 오히려 부지런히 누에치고 길쌈하여 밤에도 계속하였다. 자손들이 “연세가 높으시니 부디 스스로 쉬어 자손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소서.” 하고 아뢰면 의인은 허락하지 않고 이르기를, “내 스스로 이것을 좋아서 하는 것이다.” 하였다. 공보다 46년 뒤에 별세하였다. 공은 처음 결성현(結城縣) 지석리(支石里)에 있는 선영의 아래에 장례하였는데, 풍수지리(風水地理)가 좋지 못하다 하여 다시 결성현의 은화봉(銀華峰) 아래 곤좌(坤坐)의 산에 이장하고 의인을 부장하였다.
5남을 두었는데, 장남인 부호군(副護軍) 필형(必亨)은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에 올랐고, 다음은 필원(必遠)과 필후(必厚)이며, 그 다음 필성(必成)은 문학을 공부하여 진사에 입격하고 내외의 관직을 맡은 지가 30여 년인데 부임하는 곳마다 명성이 있는바 현재 영천 군수(榮川郡守)로 있으며, 그 다음 필행(必行)은 통덕랑(通德郞)이다. 장녀는 구익(具翊)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최세영(崔世榮)에게 출가하였는데 지금 삼가 현감(三嘉縣監)이며, 그 다음은 홍완(洪完)에게 출가하였다. 내외 손과 증손, 현손의 아들딸들이 무려 수십백 명에 이르니, 후손의 번창함이 세상에 드문 바이다. 필형의 손자 인세(麟世), 필원의 아들 직(㮨), 필후의 아들 환(桓), 필행의 아들 속(梀)ㆍ박(樸), 홍완의 아들 홍일신(洪日新)은 무과에 급제하였고, 손자들 중에 행실을 닦고 문학을 익혀 장차 반드시 훌륭한 명성을 이룰 자가 또 많이 있으니, 아, 훌륭하다.
구만(九萬)의 조모는 바로 공의 둘째 매씨(妹氏)인데, 공은 구만이 태어나기 전에 별세하였다. 그러므로 미처 공의 얼굴을 뵙고 공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였으나 드러나지 않은 덕과 은미한 행실을 조모에게서 얻어들은 것이 많다. 영천장(榮川丈 영천 군수 필성(必成))이 이제 산소에 비석을 세우려 하면서 구만에게 명문을 짓도록 명하니, 구만이 비록 문장을 잘하지 못하나 의리상 사양할 수가 없으므로 이에 감히 그 대략을 서술하고 명문을 붙인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아, 서공이여 / 嗚呼徐公
이미 풍부하나 부족하였으니 / 旣豐而嗇
부족한 것은 수명이요 / 所嗇者年
풍부한 것은 덕이었네 / 所豐者德
아, 서공이여 / 嗚呼徐公
비록 굽혔으나 펴졌으니 / 雖詘而申
펴진 것은 하늘이요 / 所申者天
굽힌 것은 사람이네 / 所詘者人
덕이 이미 온전하니 / 德之旣全
복록을 누리지 못함 어찌 서글퍼하랴 / 不贏何傷
하늘이 이미 정해지니 / 天之旣定
보답을 받음이 매우 크도다 / 食報甚長
그 덕을 알려고 하거든 / 欲知其德
그 집안을 살펴볼지어다 / 觀于厥家
공손하고 공손한 의인이여 / 婉婉宜人
자손의 경사 많도다 / 胤慶則多
아름다운 은화산에 / 樂哉銀華
노나라 예로 부장하였네 / 魯祔有藏
나의 명문 매우 아름다워 / 我銘孔好
그윽한 빛을 찬양하노라 / 用贊幽光


 


증(贈) 영의정(領議政) 행 이조 참판(行吏曹參判) 김공 반(金公槃)의 신도비명 병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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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참판 김공이 졸한 지 10년이 되었는데도 묘비에 아직 문(文)이 없었다. 공의 아들인 승지 익희(益熙)가 나를 찾아와서 말하기를, “선친의 친구 분 중에서 이 세상에 계신 분이 거의 없습니다. 선친에 대해 잘 알기로는 공만 한 분이 없기에 감히 비명을 지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하였다. 이에 그를 만나 보니, 문득 앞서 청했던 것을 거듭 청하면서 말하기를, “지난날에 이미 약속하셨으니 돌아가신 분에게 이미 승낙하신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아, 나의 나이가 이미 81세라서 붓을 잡고 글을 쓰는 일은 나의 소임이 아니었기에 고사하였으나, 끝내 고사할 수가 없었다. 이에 드디어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공(公)의 휘는 반(槃)이고, 자는 사일(士逸)이며, 사계(沙溪) 선생의 막내아들이다. 사계 선생의 휘는 장생(長生)이다. 김씨는 족계가 신라에서 나왔다. 신라 말기에 왕자 흥광(興光)이란 분이 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는 광주(光州)로 도망쳐 숨었으므로, 자손들이 그대로 그곳을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고려조에 들어와서는 8대가 서로 이어 평장사(平章事)가 되었다. 이 때문에 그들이 사는 곳을 평장동(平章洞)이라고 불렀다. 그 이후로도 고관대작이 계속해서 이어져 세상에서 삼한(三韓)의 명문대족을 손꼽음에 있어서 공의 집안보다 앞서는 집안이 없었다.
휘가 약채(若采)라는 분이 있어 본조(本朝)에 들어와서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3세가 지나서 좌의정을 지낸 국광(國光)에 이르는데, 적개 공신(敵愾功臣)과 좌리 공신(佐理功臣) 두 공신에 책훈(策勳)되어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분이 대사간을 지낸 극뉴(克忸)를 낳았는데, 이분은 김일손(金馹孫) 등과 함께 회간(懷簡 덕종(德宗)의 시호 )을 추숭(追崇)하는 것이 올바른 예가 아님을 힘껏 간쟁하였다. 의논이 비록 실행되지 않았으나 곧다는 명성이 조정을 진동시켰다.
고조부는 휘가 종윤(宗胤)으로, 군수(郡守)를 지내고 참의(參議)에 추증되었다. 증조부는 휘가 호(鎬)로, 현감을 지내고 찬성에 추증되었다. 할아버지는 휘가 계휘(繼輝)로, 총명과 재학(才學)이 한때에 으뜸이었으므로 문성공(文成公) 이율곡(李栗谷) 선생이 매번 공보(公輔)의 재주가 있는 사람을 칭할 적에는 반드시 공을 첫 번째로 손꼽았는데, 세상에서는 황강(黃岡) 선생이라고 칭하는 분이다. 어머니는 창녕 조씨(昌寧曺氏)로,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조광원(曺光遠)의 손녀이고, 부사(府使) 조대건(曺大乾)의 따님이다. 만력(萬曆) 경진년(1580, 선조13) 2월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매우 영리하였으므로 황강공(黃岡公)이 항상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이 아이는 반드시 우리 집안의 가업을 이을 것이다.” 하였다. 조금 성장하자 우뚝하게 일찍 성취되어 둘째형인 집(集)과 나란하게 빼어나 쌍벽(雙璧)으로 일컬어졌다. 사계 선생이 대유(大儒)로서 이름이 드러나 문하에 나아와 배우고자 하는 자들이 날로 많아졌는데, 공은 둘째형과 함께 가정에서의 가르침을 받아 화려한 명성이 세상에 널리 퍼졌다. 그러나 일찍이 서둘러서 벼슬자리에 나아가기를 구한 적이 없었다.
을사년(1605, 선조38)에 사마시에 급제하여 태학에 거주하면서는 벗들에게 추중을 받게 되었다. 계축년(1613, 광해군5)에 무고(誣告)의 옥사가 일어나 얼숙(孼叔) 두 사람이 이에 연좌되어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간인(奸人)들이 평소에 사계 선생을 꺼리고 있었으므로, 이때를 틈타 광해군에게 아첨하면서 이미 죽은 사람들을 뒤늦게 육시(戮屍)하였으며, 장차 공의 집안까지 아울러 화를 끼치고자 하였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올바른 형률을 쓰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자가 있어 드디어 중지될 수 있었다. 공은 이로부터 세로(世路)와는 자취를 끊은 채 외부 사람들과 교제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부형을 따라 10여 년 동안 시골에서 지냈다.
계해년(1623, 인조 원년)에 국가가 반정된 뒤에 전조(銓曹)에서 천거하여 빙고 별제(氷庫別提)에 임명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갑자년(1624)에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상께서 공주(公州)로 행차하였는데, 공은 어가를 따라 공주에 가 있었다. 정시(庭試)에서 3등으로 급제하였다. 호종한 공으로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뒤에 다른 일 때문에 연좌되어 파면되었다. 곧바로 다시 서용되어 형조 좌랑에 제수되었다가 예조로 옮겨졌는데, 사관(史館)의 기사관(記事官)을 겸임하였다. 다시 사간원 정언으로 옮겨졌다가 옥당에 들어가 수찬(修撰)이 되었으며, 승진하여 부교리(副校理)에 차임되었다.
을축년(1625)에 문학(文學), 헌납(獻納), 직강(直講)에 제수되었다가 교리(校理)로 돌아왔다. 당시에 어사의 장(長)에 제수된 자가 본래 혼조(昏朝) 때 외척의 사객(私客)으로 있었던 자여서 청의(淸議)가 비루하게 여겼다. 이에 공이 다른 동료 관원들과 함께 그를 탄핵하였다가 도리어 당시 재신(宰臣)으로 있던 사람의 뜻을 거스르게 되어 자신들과 의견이 다른 자를 공격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러자 상께서 그 말을 옳게 여겨 옥당의 여러 관원들을 모두 내쳤는데, 공 역시 파면당하였다. 오래 지난 뒤에 다시 헌납에 제수되었으나, 사임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로 여러 차례 옥당과 간원의 관원으로 옮겨졌다.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상을 당하여 대신(大臣)과 삼사(三司)가 조정의 의논을 이미 정하였는데, 당시에 권세를 쥐고 있던 신하가 유독 잘못된 견해를 고집하면서 성상의 귀를 현혹시켰다. 이에 공이 통렬히 그 잘못을 배척하였다. 교리에서 옮겨져 이조 좌랑에 제수되어서는 요행으로 진출하는 길을 억누르면서 반드시 공의(公議)에 따라 하였으므로, 당시에 낭관의 체모를 얻은 자를 칭함에 있어서는 공을 첫 번째로 쳤다. 교리와 헌납을 거쳐 다시 전조에 들어가서 정랑(正郞)이 되었다.
어가가 강도(江都)에 행행하였는데, 체부(體府)의 요청에 의하여 막부(幕府)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전라도와 충청도의 군정(軍政)을 순시하였으며, 돌아와서 겸문학(兼文學)으로서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응교, 사간, 집의 및 종부시(宗簿寺)와 상의원(尙衣院) 등 여러 시(寺)의 정(正)을 차례로 역임하고, 천거를 받아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에 제수되어 보덕(輔德)을 겸임하였으며, 누차 전한(典翰)에 제수되었다.
신미년(1631, 인조9)에 사계 선생의 상을 당하여 여묘살이를 하면서 상제(喪制)를 극진히 하였다. 계유년(1633)에 상제를 끝마치고 다시 사인(舍人)과 사간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여 체차되었다. 응교로서 소명을 받아 서울로 들어갔다가 전한에 제수되고, 이어 춘방(春坊)의 장관(長官)이 되었는데, 그 사이에 장악원 정(掌樂院正)이 되었으며, 도감(都監)의 직을 겸임하였다. 일을 끝마치고는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였다. 병조 참지(兵曹參知), 대사간, 동부승지를 역임하고, 순서에 따라 우부승지로 승진하였다가 형조로 옮겨졌다.
병자년(1636, 인조14)에 대사간, 대사성(大司成), 부제학(副提學) 등에 개차되었으나, 모두 병으로 사양하였다. 겨울에 대사간으로 돌아왔다. 서쪽 오랑캐가 대군을 이끌고 갑자기 쳐들어와 창졸간에 어가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성 안이 위급하였는데 공이 들어와 왕을 대면하고는 아뢰기를, “전하께서 성 위에 올라가 직접 사방의 성벽을 지키는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온 힘을 다해 싸우게 하소서. 만약 천명이 따라 주지 않는다면 군신 상하가 함께 사직을 위해서 죽어 지하에 계신 선왕(先王)들을 뵈어야 합니다.” 하며 청하였다.
공의 아들 익희(益熙)는 이때 독전어사(督戰御史)로서 남한산성을 수비하고 있었는데, 공이 일러 말하기를, “우리들은 직임을 수행하다가 죽어야 할 것이다. 다만 명백하게 의로움으로 나아가 이 마음을 표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 이때 용사(用事)하는 자들이 앞 다투어 상께서 오랑캐의 군영으로 나아가기를 권했는데, 유독 정온(鄭蘊)만이 불가하다고 하면서, 심지어 심장을 찔러 자살하려고까지 하였다. 공은 정온과 같은 견해를 견지하면서 종시토록 바꾸지 않았다. 화친이 성사된 뒤에 공은 부득이 어가를 따라 경성으로 돌아왔다. 전례에 따라 호종한 공로에 대한 상을 내렸는데, 공 역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게 되었다. 다시 대사간에 제수되었다.
당초에 오랑캐들이 맹약을 깨뜨리려는 뜻이 현저하게 드러났으므로 조정에서는 사신을 보내어 지난날의 우호 관계를 회복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젊은 사류(士類)들은 큰소리를 치면서 불가하다고 주장하여 점점 더 과격해졌다. 공은 이를 근심하여 온 힘을 다해 조정하려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일의 형세가 크게 변하자 사람들이 공의 말을 뒤늦게 기억하였다.
시사(時事)가 변하던 처음에 머뭇거리거나 도망을 친 여러 장수들은 모두 훈구(勳舊)나 거실(巨室)의 사람들이었는데, 나중에 처벌을 하면서는 죄가 유배를 보내는 데 그쳤으며, 법대로 처벌해야 한다는 논의 역시 곧바로 그쳤다. 이에 공은 분연히 떨쳐 일어나 사직하고는 인하여 아뢰기를, “국사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은 바로 군율이 엄하지 못한 탓입니다. 당초에 원융(元戎)의 직임을 맡았던 자는 적들을 놓아주고 성상을 버려두었으며, 위급한 사태가 조석 간에 박두하였는데도 군사를 끼고 자신만을 보호하고 있으면서 끝내 구원하러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강도(江都)를 맡은 신하는 변란에 임해 도피하여 종묘사직을 내팽개치고 백성들을 어육(魚肉)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이들의 죄는 머리카락을 뽑아 세더라도 오히려 다 셀 수가 없습니다. 앞에서 말한 몇 사람들은 나라를 저버린 것이 이와 같은데도 오히려 처형을 면하였습니다. 이는 천하 고금에 없었던 일입니다.” 하였다.
대사간에서 체차되고서 대사성, 예조 참판, 부제학에 제수되었으며, 행 이조 참의에 제수되어 동지경연사를 겸임하였다. 또다시 병조 참판과 대사헌으로 개차되었다. 이때 유석(柳碩) 등이 적신(賊臣) 이계(李烓)와 뜻을 합해 사특한 논의를 주장하였는데, 공은 이를 추잡하게 여겨 홀로 죄주기를 청했다가 도리어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이에 체차되고서 병조 참판에 제수되었다가 곧바로 간원(諫院)의 장으로 옮겨졌다. 또다시 대사헌으로 옮겨져서는 진달하기를, “정온(鄭蘊)은 본래 우뚝이 높은 지조를 홀로 행하는 사람으로, 이에 대해서는 전하께서도 평소에 허여하고 장려한 바였습니다. 칼로 가슴을 찔러 자살하려고 하다가 죽지 못한 데에서 그의 뜻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어찌 질박하고 천진난만한 사람이 이리저리 따져 보면서 명성을 탐하는 마음을 내었을 리가 있겠습니까. 현재 사람들이 심각하게 법을 적용하여 반드시 그를 죄주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 신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얼마 뒤에 한성부 우윤, 대사간, 이조 참판에 제수되었으며, 동지성균관사를 겸임하였다. 공에게 서제(庶弟)가 있었는데 다른 사람이 무고(誣告)하여 끌어들인 탓에 체포되어 의금부에 갇혔다. 이에 공이 석고대죄하였는데, 뭇 소인배들이 그 기회를 틈타 공을 해치고자 하였으므로 여러 벗들에게까지 화가 미치게 되었다. 화의 구덩이가 이미 설치되었는데, 상께서 그것이 무고임을 양찰하고는 하교하여 이르기를, “듣건대 참판 김반이 궁궐 밖에서 명을 기다린다고 하는데, 쇠약하고 병든 사람이라 찬 곳에 오래 머물러 있으면 반드시 몸이 더욱 상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그만 물러가라고 하라.” 하였으며, 이어 옥사를 살피는 여러 신하들에게 속히 오명을 씻어 주라고 하교해 마침내 무사하게 되었다.
부제학에 제수되었다. 대간 중에 “대궐 안에서 하찮은 오락에 빠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아뢴 자가 있었다. 이로 인해 공은 차자를 올려 극간(極諫)하기를, “상께서 만기(萬機)를 살피는 여가에는 반드시 경서와 역사서를 읽기에 마음을 두어 흥망성쇠의 자취를 살펴보고서 근본을 단정히 하고 다스림을 내는 근원으로 삼아야 합니다. 어찌 일찍이 와신상담해야 할 시기에 쓸데없는 물건을 가지고 노는 데 빠져 본심을 잃어버리는 일이 있을 줄을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하였다. 또 가뭄의 재해를 당한 것을 인하여 《시경》의 〈운한장(雲漢章)〉을 강론하다가 이를 인용해 간절하게 비유해 상의 뜻을 감동시키니, 상께서 모두 가납하였다. 대사헌으로 옮겨졌다.
공은 이보다 앞서 다릿병을 앓아 증세가 종종 심해졌는데, 경진년(1640, 인조18)에 이르러 병세가 점점 위독하게 되어 4월 5일에 졸하였다. 세수(歲壽)는 61세였다. 이해 9월 15일에 회덕현(懷德縣)의 치소(治所)에서 서북쪽으로 10리쯤 떨어져 있는 전민촌(田民村) 병향(丙向)의 산등성이에 장사 지냈다.
공의 중형(仲兄)인 판서공(判書公)이 항상 여러 조카들에게 말하기를, “너희 아버지는 타고난 자품이 인자하고 후덕했으며, 마음 씀씀이가 화평하고 평안하였다. 가정에서의 가르침에 물들어 자연스럽게 도에 가깝게 되었다. 일을 생각할 때는 정밀하고 상세히 하였으며, 자신을 검칙함에 있어서는 겸손하고 공손하였다. 털끝만큼도 자랑하는 마음이나 교만한 기색이 없었으며, 한결같이 돈후하고 신중하며 성실하고 정성스러웠다.” 하였는데, 듣는 사람들이 모두 그 말을 믿어 형제간에 한 말에 불과하다고 헐뜯지를 못하였다.
공은 평소에 거처함에 있어서 화기가 충만하였지만, 일을 논하는 데에 이르러서는 시비(是非)와 당부(當否)가 의연히 분발하여 바깥에서 이르러 온 것으로 인해 마음이 동요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얼굴빛을 바르게 하고 말을 꿋꿋하게 해 여러 차례나 참소하는 말과 간특한 말을 꺾었다. 이에 사림(士林)들이 의지하며 중하게 여겼으며, 상께서도 또한 믿게 되어 은례(恩禮)의 넉넉함이 보통보다 훨씬 뛰어났다. 다른 사람들과 교유하기를 좋아하지 않아 왕래한 이가 겨우 가까운 친척이나 친구들 몇 사람뿐이었다. 방 안에는 잡스러운 물품이 없었으며, 주머니에는 남아 있는 명함이 없었다. 그런데도 매양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받은 것을 감사히 생각하면서 시사(時事)가 어려운 것을 걱정하였다. 형과 같이 살지 못한 것을 평생토록 통한으로 여겼다.
공은 정사 공신(靖社功臣)과 영사 공신(寧社功臣)의 종훈(從勳)에 참여되었고, 또 아들 익희가 영국 공신(寧國功臣)의 종훈에 참여되었으므로 여러 차례 추증되어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에까지 이르렀다.
공은 부인이 두 사람 있었는데, 초취인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첨지(僉知) 김진려(金進礪)의 따님이고, 후취인 연산 서씨(連山徐氏)는 참판에 추증된 서주(徐澍)의 따님이다. 두 분은 모두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서씨 부인은 매우 훌륭한 부덕(婦德)이 있어 늙을 때까지 공과 더불어 서로 정중히 대하였는데, 내외의 친족들이 부부가 서로 공경히 대하는 예를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병자호란 때 여러 어린 자식들을 거느리고 강도(江都)로 피난갔다가 적들이 성에 가까이 다가오자 목욕하고 자결하였다. 이때 아들 하나와 딸 하나도 함께 따라 죽어 정려문이 세워졌다. 이에 사람들이 공의 집안의 법도가 평소부터 있었던 것임을 더욱더 믿게 되었다.
공은 모두 11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아들이 여섯이고 딸이 다섯이다. 현감(縣監)인 아들 익렬(益烈), 부사(府使) 이정(李淀)에게 시집간 딸, 대사헌(大司憲) 이후원(李厚源)에게 시집간 딸, 수찬 장차주(張次周)에게 시집간 딸은 모두 김씨 부인이 낳았으며, 문과에 급제하고 승지로 있는 익희(益熙), 생원시(生員試)에 장원하고 강도에서 순절하여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추증된 익겸(益兼), 금부 도사(禁府都事)인 익훈(益勳),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로 있다가 요절한 익후(益煦), 진사인 익경(益炅), 진사 이해관(李海寬)에게 시집간 딸, 심약제(沈若濟)에게 시집간 딸은 모두 서씨 부인이 낳았다.
익렬은 정자(正字) 황석(黃奭)의 딸에게 장가갔으나 자식이 없다. 익희는 참의(參議) 이덕수(李德洙)의 딸에게 장가가서 딸 하나와 아들 셋을 낳았는데, 아들은 만균(萬均), 만증(萬增), 만준(萬埈)이고, 딸은 이세장(李世長)에게 시집갔다. 익겸은 참판 윤지(尹墀)의 딸에게 장가들어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이름은 만기(萬基), 만중(萬重)이다. 익훈은 부사(府使) 김언(金琂)의 딸에게 장가들어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익후는 청성군(靑城君) 심정화(沈廷和)의 딸에게 장가들어서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어리다. 익경은 현감 윤제(尹隮)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이정은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장남은 이인석(李仁碩)이고 차남은 현감 이인하(李仁夏)이며, 딸은 생원 홍주삼(洪柱三)에게 시집갔다. 이후원은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아들은 이주선(李週選)이고, 딸은 김석주(金錫冑)에게 시집갔다. 장차주는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낳았는데, 아들은 진사 장세명(張世明)이고, 딸은 김원후(金元厚)에게 시집갔다. 이해관은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낳았다. 내외의 증손은 모두 약간 명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목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던 때 / 穆廟御世
뭇 현인들 나와 덕을 천양하였네 / 群賢闡揚
우계 율곡 두 분 선생 도학에다가 / 牛栗道學
황강공의 문장까지 나왔었다네 / 黃岡文章
그 연원이 흘러흘러 전하여져서 / 淵源流通
사계옹에 미치어서 드러났었네 / 乃見沙翁
쌍벽 이에 잇달아서 빛을 발하여 / 雙璧聯輝
집안 가풍 떨어지지 않게 하였네 / 不墜家風
관직 나가 이 세상의 쓰임이 되매 / 出爲世用
다른 이들 더불어서 못 다투었네 / 人莫與爭
어렵고도 힘든 시절 만났을 때는 / 遭時之艱
도를 지켜 더더욱 더 곧게 하였네 / 履道益貞
한강 남쪽 산성에서 호종했거니 / 隨難漢陽
대의 마치 해와 별과 같이 빛났네 / 大義日星
우정처럼 간사함을 밝게 비추어 / 燭奸禹鼎
음흉하고 사특함이 다 드러났네 / 陰邪自呈
임금의 맘 갈수록 더 총애하였고 / 宸情彌眷
선비들의 소망 더욱 쏠리었다네 / 士望愈傾
사간원서 대사간의 자리 있었고 / 霜臺首寮
전조에선 참판 자리 맡아 있었네 / 銓地貳席
중도에서 자취 그만 막혀 버려서 / 中途蹛跡
천리마의 발이 삐끗하고 말았네 / 千里逸足
저 고향 땅 있는 숲을 돌아다보매 / 盻彼故林
울울창창 서린 속에 가성이 있네 / 鬱鬱佳城
청오자가 길한 자리 잡아 주어서 / 靑烏所協
깊이 묻혀 편안하게 지내는 바네 / 玄理攸寧
빗돌 깎고 글을 지어 새기었거니 / 斲石摛藻
소박하여 꾸미지를 않은 글이네 / 素文匪飾
이 뒤로는 천년 세월 흘러가서도 / 有來千年
군자들이 지나가며 예를 올리리 / 君子必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