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신묘년 산행 /2011.6.5. 도봉산 산행

2011.6.5. 도봉산 산행

아베베1 2011. 6. 7. 12:54

6월의 한낮 온도는 여름 날씨수준이다 점심을 먹고 오후 1시 집을 출발한다

자전거로 출발하여 도봉산 입구에 매표소에 자전거 시정하고 산행을 시작한다 더운탓으로 대부분의 산행인은 나무그늘에서

오수를 즐기는 분 식사를 하시는분, 쉬고 계시는 분이 많다 산행을 시작하였다 다락으로 숨이 차도록 달린다

더운날 산행을  빨리 오르는 것은 몸이 무리가 올수가 있다  육월의 도봉은 약간흐린 날씨 언제 보아도 좋은 모습이다 다락으로 전망바위 냉장고 바위 흔들바위 사잇길  말바위 공룡정상부에서 부산에서 오신 부부 권 00 위암수술을 예약 하시고 산행을 오셨단다 ..또다른 부부중계동에서 오신분 대부분 3-4세 정도 차이나는 분들이었다

와이계곡을 통과 하여 손가락 바위 신선대 아래는 계단을 설치하는 공사가 진행중이다 신선대에 릿지로 통과한다    

신선대 정상에는 많은 분들이 올라례신다 건너편 자운봉에도 멀리 만장봉 선인봉에도 ....

즐거운 산행의 하루 였던것으로 ... 

     

 

    원도봉 능선의 연꽃바위

  싸리꽃의 모습

  1380여년의 고찰 신라 27대 선덕여왕때 창건한 절 望月寺의 모습

  해골바위 일명 문어바위의 모습

 냉장고 바위옆 전망바위 (두꺼비처럼 생긴바위)

 

 仙人峰 과 萬丈峰 의 멋진 모습

   흔들바위의 모습 중간부분에 올라가면 바위가 흔들린다 하여 흔들바위

   산목련 꽃이 이쁘게 피어서

 

  사패능선의 모습 

 

   선인 만장 자운 신선대의 모습

 

   자운봉옆에서 본모습

  만장봉 선인봉에서 암벽산행이

 

 

   에덴바위 코바위의 멋진모습

     에덴에서 본 신선대 만장봉 뜀바위 정상부

  마당바위에서 도봉의 정상부

 

 

고시 한구절을 인용한다

서계집 제4권 (서계 선생은  반남인 박세당 은 수락산 석천에서 기거 하셨던것으로 추정 되고 석천에서 바라본 도봉의 모습을 ...
 시(詩)○보유록(補遺錄) 여기에 실린 여러 작품들은 모두 원고(原稿)에는 빠진 것으로, 난고(亂藁) 및 지인이 전송하던 것을 뒤미처 얻어 보록(補錄)한 것이다.
도봉산(道峯山)을 바라보며 짓다


조화옹의 기교에 마음 몹시 놀라니 / 奇巧心偏怪化翁
수많은 손놀림이 신묘 막측하구나 / 幾般摶弄妙難窮
온갖 형상이 땅 아래에 조밀한데 / 萬形掩翳黃塵下
한 바위 봉우리가 창공을 찌르네 / 一骨嵯峨碧落中
달을 보매 세상의 어둠 아랑곳없고 / 看月不妨人界黑
꽃을 흩날리매 내내 하늘이 붉어라 / 散花長得佛天紅
벼랑 중턱 노송에 걸린 높다란 둥지 / 半崖松老危巢倒
몇 조각 구름이 학의 뒤를 따르네 / 數片雲隨鶴背風

 

 

제2연이 어떤 본에는 ‘온갖 형상이 웅장한 대지에 낮게 깔려 있는데 하나의 봉우리가 광활한 우주에 우뚝 솟았네.[萬形低壓氛埃壯 一掌高開宇宙空]’로 되어 있다.


 

隱峯全書卷十六
 己卯遺蹟附錄
道峯書院記 [李珥] a_080_568c


書院之建。本爲藏修。而兼擧崇德報功之典。故必求鄕先生可爲後學矜式者。立祠致敬。以興起多士希賢之志焉。靜菴先生趙文正公。寔漢山人。漢山。本楊州之域。而今作都城。楊州治南三十里有山。名曰080_568d山。有洞曰寧國。舊有寧國寺。寺廢而洞仍其名。先生少日酷愛洞中泉石。往來棲息。其立朝也。亦乘公退。命駕遊焉。至今鄕老間有能談者。萬曆癸酉之冬。牧使南侯彥經往觀其洞。慨想遺躅。咨詢鄕士。議作瞻慕之所。衆志克合。乃卽寺址。營建祠宇。因設書院。鄕人聳身。百工勤力。越明年甲戌之夏。祠院告功。祠宇在北。輔以東西齋。書院在南。中設講堂。翼以兩夾室。前廊枕溪。廊側有門。因地形也。木役粗完。凡百未庀。而南侯以疾去官。繼牧是州者。李公齊閔李侯廷馣。踵其緖不替。於是廩士之具。藏書之室。毖祀之廚。080_569a次第訖事。越六年己卯之春。始克斷手。其將落成也。院儒安昹以多士之請。求記于珥。珥竊念當今文衡大手。非止一二。而必欲借海濱枯橋病叟之筆。以狀儒林盛擧者。其意安在。無乃誤以珥爲受先生之恩。粗聞此學之糟粕歟。忸怩不敢當。第寧國之洞。巖淨水淸。爲一區勝境。而賢祠儒院。一時鼎新。章甫輻湊者。有年數矣。惟珥未克一觀。自恨嬰疾不能致身其側。顧以綴名其間爲至榮。故忘其僭妄。贅以一說曰。我東素稱文獻之邦。而由王氏以前。所謂學問者。不過雕琢繡繪。以爭工鬪麗而已。性理之談。蔑蔑無聞。080_569b其季也。有鄭圃隱。始號理學之祖。而言論風旨。未得其詳。後人但知以一身撑柱五百年頹壞之綱常而已。本國文風。可踵聚奎之運。而能以爲己之學名世者。亦未曾輩出。惟我靜菴先生。發端于寒暄文敬公。而篤行益力。自得益深。持身必欲作聖。立朝必欲行道。其所惓惓者。以格君心陳王政闢義路塞利源爲先務。倡道未幾。士風丕變。天不祚宋。陰慝雖作於當時。澤未五世。陽光方發於今日。後之爲士者。能知親不可遺。君不可後。義不可捨。利不可征。祭當思敬。喪當致哀者。皆我先生之敎也。苟論其功。欲報之德。寧080_569c有紀極乎。南侯灼見其然。首此美事。深可尙也已。珥因此竊有感焉。先生平日誨人者。只孜孜於爲己而已。其於習時文干祿位。固浼浼也。後學之居此院者。誠能捐去俗習。一意以居敬窮理力行。爲深造之功程。相觀而善。相責而改。日趨乎居安資深之域。則可謂能報先生之恩者矣。瞻拜廟庭。可無愧矣。若是則先生之道。雖否於前。實行於後。豈非斯文之大幸乎。如使立志不篤。舊習作崇。操觚弄墨。惟決科是希。飢食飽戲。棄寸陰不惜。則其有負於先生大矣。何面目能入廟門乎。如此則先生之道。旣窮於昔。又廢於今080_569d矣。豈不痛哉。嗚呼。後生其亦克念哉。院中規令。則諸生相與稟定于副提學草堂許公曄。是役也。斯文先後輩咸助其費。而許公實主張焉。其餘若右參贊白公仁傑,吏曹參判朴公素立之功。亦表表異衆云。是年暮春旣望。後學德水李珥。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