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 금석문 등/독수당 휘 숙문 자료 (평도공)

成均館直講贈通政大夫承政院右承旨崔公墓碣銘 (평도공 증 손자)

아베베1 2011. 6. 10. 14:40

인생이란 선택이다

2011. 6. 9. (목)

대체로 높은 직위의 영화를 누리는 사람은 강호의 아취가 없고
화려한 일이 있는 사람은 한적하게 지내는 자태가 없게 마련이다.
어느 한 가지를 얻으면 다른 한 가지를 잃게 되고
작은 것에 뜻을 두면 큰 것을 놓치게 되는 법이다.

   
 

大抵享軒冕之榮者, 無江湖之趣,
대저향헌면지영자, 무강호지취,
有繁華之事者, 無蕭散之態,
유번화지사자, 무소산지태,
得於此而失於彼, 志乎小而遺乎大也.
득어차이실어피, 지호소이유호대야.

- 성현(成俔)  <읍취당기(挹翠堂記)> 《허백당집(虛白堂集)》

[해설]

  허백당(虛白堂) 성현(成俔 1439~1504)은 조선 성종(成宗) 시대의 문신으로, 다양하고 풍부한 문화 예술을 지향하는 오늘의 우리에게 많은 예지를 시사해주는 글을 남긴 분이다. 특히 《장자(莊子)》, 《두시(杜詩)》, 《고문진보(古文眞寶)》, 《문선(文選)》, 《예기(禮記)》 등에 나오는 문자를 자신의 글에 다양하게 변주하고 있어 글이 풍부하고 사고가 유연한 것이 특징이다. 이분은 음악에 조예가 깊고 박학과 지식의 축적, 문화적 향유 등에 관심을 많이 두었는데, 그런 저자의 특장이 글에 자연스럽게 녹아 나고 있다.

  이 글은 1489년(성종20) 음력 8월 17일에, 8세 연하의 조카 성세명(成世明)의 초청을 받아 읍취당에서 노닌 뒤에 지은 기문에 나오는 말이다. 읍취당은 원래 허백당의 백씨(伯氏)인 성임(成任)이 한강 가에 지은 정자이다. 허백당은 이 글에서 읍취당 주변의 12경승에 대하여 서술한 다음, 인생에 있어 일과 휴식이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데, 특히 일에만 급급하지 말고 강호와 산림에서 노니는 즐거움을 향유하는 것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12경승의 묘사 부분은 필치가 자못 세련되어 글을 음미해보는 맛이 깊다.

  허백당은 또 병으로 고향 전주(全州)에 칩거하고 있는 벗, 독수당(獨秀堂) 최숙문(崔淑文)을 위해 기문도 지어주었는데, 그 글의 말미에 동중서(董仲舒)의 ‘치각설(齒角說)’을 인용하여 세상일에 매몰되어 있는 허백당 자신보다 향리로 물러나 있는 벗이 더 풍요롭고 소중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최숙문은 자가 주경(周卿)으로, 허백당과는 30년 심우(心友 마음을 알아주는 벗)이자 아들 성세창(成世昌)의 소싯적 스승이기도 하다. 최숙문은 향리에서 학문에 몰두하고 행의를 닦아 전주의 예산 서원(禮山書院)에 종향(從享)되었고 허백당은 몰후에 사화(士禍)의 여파를 입기도 하였으니, 저자의 말도 그냥 한 번 해본 말은 아니었던 셈이다.

  한 무제 때의 걸출한 유학자 동중서는 3년 동안이나 강석(講席)의 휘장을 내리고 아름다운 정원으로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공부했다는 일화를 남긴 분이다. ‘치각설’은 바로 이 사람의 전기를 기록한 《한서》 <동중서전(董仲舒傳)>에 나오는 말로, 하늘이 동물에게 재능을 나누어 줄 때, 큰 것을 주고 나서 또 작은 것까지 아울러 주지는 않았듯이, 사람도 나라의 녹을 먹는 자는 작은 이득을 취하기 위해 서민과 다투지 말고 절제해야 한다는 의론인데, 이는 요즈음에 더 절실하게 와 닿기도 한다.

 

  하늘은 역시 고루 공평하게 나누어 주었다. 강한 이빨을 준 동물에게는 뿔을 주지 않고 날개를 달아준 새에게는 두 다리만을 주었으니, 그 큰 것을 받은 동물은 다시 작은 것을 가질 수 없는 법이다.[夫天亦有所分予, 予之齒者去其角,傅其翼者兩其足,是所受大者, 不得取小也.]

 

  전체적인 문맥을 살펴보면 동중서의 말은 부귀한 자의 절제를 역설한 것이고 허백당은 인생에 있어 보다 현명한 선택을 강조한 것이라 맥락상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양립하는 두 가지를 동시에 다 얻을 수는 없는 것이 세상 사는 이치임을 간파하고 적극적인 절제를 말하고 있는 점은 똑같다. 확실히 살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것 같다. 그렇다면 보다 중요한 것을 잘 선택해야 할 것이다. 그 적극적 절제야말로 자신의 인생을 풍요롭고 충만하게 해 주지 않겠는가? 현명한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백발은 멀리 있지 않다. 어, 어, 어, 하다가 문득 주변을 돌아보면 홍안의 친구가 완연한 중년 신사이고 사랑하는 여인의 머리에 서리가 앉아 있다. 이것이 인생이다. 무엇을 할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잘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

 

글쓴이
김종태(한국고전번역원)

 

    허백당집(虛白堂集)

 

조선 세조(世祖) 때의 문신·학자인 성현(成俔)의 시문집(詩文集). 초간본은 아들 성세창(成世昌)이 중종(中宗)-선조(宣祖) 연간에 간행하였으나 현재 전하지 않음. 

 

 

 

俛宇先生文集卷之百五十九

 墓碣銘
成均館直講贈通政大夫承政院右承旨崔公墓碣銘 並序○壬子 a_344_288a


往在英正晟際。有淸潭崔公。隱居行義於湖之扶安郡。擧遺逸特344_288b除成均舘直講。以學無成。遜避不就。孜孜篤修。六十年如一日而終。葬于高敞之馬洞南山枕坎之麓。其曾孫永植述公遺事。走其子炳鳳于萬山蒼茫之外。丐余以銘其墓者。余病且不文。辭之固而其請愈哀。敬按之。公諱豪仁字仁瑞。淸潭其號也。全州之世也。勝國文烈公純爵爲上祖。我朝有平度公有慶。以勳績淸白著。三傳而有進士淑文號獨秀堂。以文學負時望。屢徵不仕。士林並俎豆祀之。是生壽亨左承旨。至公爲十一世。曾大父龕東大父限文並敦經術。父成佐以孝登薦剡。膺壽典樞職。新昌人進士表善章。外大父也。公以懿陵辛丑生。氣宇俊爽。志節淸厲。凡於聲利淡如也。七歲受小學。至有父母字。輒敬跪而三復焉。曰舜曾之孝。人皆可能。自後承順服勞。滫瀡溫凊。一如節度。不見少懈。及長益肆力于學。登陶庵李文正先生之門。聞爲學旨訣。軆認而躬踐之。文正頗器之。名其堂曰淸潭。盖許其不累於物也。母夫人疾革。甞血指以灌而得甦。居喪甚哀。344_288c六載廬于山。有虎來衛。制闋而猶日拜于墓。當膝成坎。與一兄三弟友悌怡怡。寢處一室。至老白首未甞一日間也。朝廷有直講之除。公惕然若循墻而走。益致力於晦養默修之實。平居不臧否人物。至義利是非之判。亦未甞不凜然直截也。享年六十三而卒。上皇初載贈右承旨。配淑夫人長興馬氏。忠莊公天牧之后。士人成珍女。祔于公兆之左。有二男長昌麗次昌業蔭主簿。昌麗一男聖澈。主簿二男基洙,基澈。曾孫男五人。正植,學植,聖澈出,光植,允植,永植基洙出也。而永植爲基澈嗣。餘可略也。銘曰。
舜曾何人。有爲者同此性也。一命何濟。惟孝友是亦爲政也。淵淵淸潭之水。烟消鏡凈。誰其濬者。曰惟文正。


  

 

     예산사(禮山祠)

소 재 지 : 전북 전주시 효자동 670
향사인물 : 주향(主享) : 최유경(崔有慶)
배향(配享) : 류신로(柳莘老), 최숙문(崔淑文), 이돈형(李惇亨)
향 사 일 :
연     혁 :
  창건시대(1586년?)는 알 수 없고 완주군 이동면(현 전주시 효자동)에 세워져 향사하다가 고종5(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최유경(崔有慶)
조선 개국공신으로 호(號)는 죽정(竹亭), 시호(諡號)는 평도(平度), 본관(本貫)은 전주(全州)이다. 벼슬은 우참찬(右參贊)에 이르렀으며, 태조(太祖)에게 축성을 건의하여 전라도 관찰사에게 축성케 하여 전주의 성곽이 이루어졌다. 청주의 송천서원(松泉書院)에도 향사 되어있다.

류신노(柳莘老)
조선 중기 사람으로 호(號)는 춘포(春圃), 본관(本貫)은 전주(全州)이며, 이석계(李石溪)의 문인(門人)이다. 인조2년 이괄(李适)의 난(亂) 때 의병(義兵)을 일으킨 공으로 인조6(1628)년에 소무원종공신(昭武原從功臣)이 되었고 인조5(1627)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부사(府使)에 이르렀다.

최숙문(崔淑文)
조선 전기 학자로 호(號)는 독수당(獨秀堂), 본관(本貫)은 전주(全州)이다. 최유경(崔有慶)의 증손(曾孫)으로 일찍 사마(司馬)에 올랐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향리에 내려와 학문에 전념하였다. 청주의 송천서원(松泉書院)에도 향사 되어있다.

이돈형(李惇亨)
조선 중기 학자로 호(號)는 만오당(晩悟堂), 본관(本貫)은 연안(延安)이다. 이락당(二樂堂)의 후예로서 벼슬은 예참(禮參)에 이르렀다. 일찍이 성리학에 전념하여 학문이 깊었고 학덕이 있는 송시열, 송준길과 사귀었다.

 

성종 6년 을미(1475,성화 11)
 11월5일 (경술)
후원에서 활쏘기를 구경하고 이안 등의 임용을 명하다

후원(後苑)에 나아가 활쏘기를 보았다. 징소(徵召)한 사람 이안(李晏)·이징전(李澄全)·신수무(辛秀武)·이덕원(李德元)·전영수(全永壽)·이효공(李孝恭)·차윤생(車胤生)·최숙문(崔淑文)·김유공(金有恭)·노삼동(魯三同)·진구성(陳九成)·박혁손(朴赫孫)·오흥무(吳興武)·권지(權祉)·신성종(愼成終)·이지번(李之蕃)·박수창(朴壽昌)·이연년(李延年)·홍경순(洪敬淳)·이선동(李善同)·이고(李考) 등에게 명하여 과녁[侯]에 활을 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잘 쏘는 사람이 누군가?”
하니, 윤사흔(尹士昕)이 대답하기를,
“이안(李晏)이 가장 잘 쏩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과연 잘 쏘는구나!”
하였다. 이덕원(李德元)이 시(詩) 한 수를 임금에게 바쳤는데 대단히 졸작이었다. 윤사흔(尹士昕)이 시를 바치는 장소가 아니라 하여 추국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말하기를,
“특별히 그 뜻을 말하려 한 것뿐이니 추국할 것이 없다. 이들 중에도 글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니, 좌우에서 이안(李晏)·신수무(辛秀武)·이덕원(李德元)이라고 대답하였다. 도승지(都承旨) 유지(柳輊)에게 명하여 배운 바를 강(講)하게 하였는데, 유지(柳輊)가 한 고조(漢高祖)와 당 태종(唐太宗)의 우능(優能)함에 대하여 물으니, 이안(李晏)이 능히 물음에 따라 대답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안(李晏)은 쓸만한 사람이다. 빨리 임용하고, 이징전(李澄全)·이효공(李孝恭)·차윤생(車胤生)·노삼동(魯三同)·박수창(朴壽昌)·이연년(李延年) 등도 또한 쓸 만하다. 그러나 오랫동안 서울에 머물기가 진실로 어려우니, 머물 것과 돌아갈 것을 들어보고 자리가 비는대로 채용하라.”
하고, 활을 가장 잘 쏜 이징전(李澄全)·차윤생(車胤生)에게는 생녹비(生鹿皮) 각각 1장(張), 이안(李晏)에게는 각궁(角弓) 1장(張)을 내려 주었다.
【원전】 9 집 284 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왕실-사급(賜給) / *사법-탄핵(彈劾) / *어문학-문학(文學) / *인사-선발(選拔)


성종 1년 경인(1470,성화 6)
 12월3일 (병오)
이시애의 난에 공이 있던 친군위 배흥도 등에게 실직을 제수하다

친군위(親軍衛) 배흥도(裵興道) 등이 상언(上言)하기를,
“역적(逆賊) 이시애(李施愛)를 잡을 때에 신(臣) 등이 최경지(崔敬止) 등과 더불어 함께 의논하여 붙잡았는데, 최경지는 당상관(堂上官)으로 추증(追贈)되고 전지(田地)와 노비(奴婢)도 지급되었지마는, 신 등은 홀로 성상의 은혜를 입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전지(傳旨)하기를,
“배홍도를 당상관으로 승진시켜 실직(實職)을 제수(除授)하고 신옥산(辛玉山)·최숙문(崔淑文)에게 1자급(資級)을 뛰어올려 주도록 하라.”
하였다.
【원전】 8 집 539 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농업-전제(田制) / *신분-천인(賤人) / *변란(變亂)


虛白堂補集卷之四 男世昌編輯
 
次崔周卿詩。 四首。時周卿廢病。在全州鄕墅。 a_014_374b


無心宦海苦奔波。歸臥田園樂事多。彭澤雅懷惟愛菊。右軍高趣尙籠鵝。平郊霜露看秋穫。晚徑牛羊聽牧歌。爭席隣翁相對坐。談農不厭語懸河。 新堂韻

千畦䆉稏歲無災。重九良辰又自回。秋氣凌凌人易老。鄕愁衮衮雁初來。籬邊霜重催黃菊。門外風寒擺綠槐。喜見白衣携酒至。相逢一笑擧深杯。 重九韻

014_374c有美此君節。淸標傲衆芳。最宜娛暮境。何必競春光。偃蹇空中翠。蕭森物外香。歲寒相作伴。獨也貫風霜。

辛勤南畝饁。樽酒樂西成。身世閒方倦。襟懷老益淸。捲簾山色近。欹枕月華明。一室塵機息。無憂足保生。獨秀堂

 

虛白堂文集卷之四 男世昌編輯
 
獨秀堂記 a_014_450a


014_450b盈天地間者物也。而物之不齊。物之情也。所謂不齊者何。物之剛柔舒慘不同。而神奇臭腐之時有異也。今夫陽春之嘔呴。薰風之長養。凡物之遂其生者。紅紅紫紫。敷英吐芳。爭奇鬪靡於人之耳目。雖一時穠艶可慕。而柔脆之質。其能久乎。其能耐久而後凋者。惟松與竹而已。當風霜搖落之時。貫一色而獨也靑。則其不與凡卉等夷固矣。人之處世亦如此也。方揚翹聘力於雲路。其聲勢所及。熏灼燀赫。履盛滿而方知止。人爵方隆。而天爵日鑠。能終始保全者鮮矣。惟014_450c抱義之士。卓乎長往。不托跡於繁華之域。而甘心乎寂寞之濱。年高德卲而所守益固。其與松竹之不變者同一規。而芳華盛美。何足慕也。崔氏周卿。余之心友也。有三十年之舊。而交契甚密。其爲人。德周而行方。讀書爲文。其詞鋒銛利。人皆避而莫敢當。余亦常霑膏馥。不幸余先占科策名。而先生竟以疾廢。今則退居完山府之鄕墅。有河經流于西北。有脩竹千竿。挺然滿堂之東南。取松竹不二之操。名其堂曰獨秀。馳寄書詩於余。以求余言。大哉先生之志也。其以功014_450d名爲芻狗也。富貴爲士苴也。功名富貴。皆吾外物。而不能攖吾心。吾心安焉。直與天地造物爲一。而無益損乎其眞。然則松也竹也皆君友于。而同結歲寒之盟宜矣。若余者。以樸樕微材。遭遇盛辰。官六卿。食二品祿。朝夕昵侍帷幄。雖有雲水之思。無由遂而髮已種種矣。困於陸沈而奔走艱辛甚矣。然則子之窮非窮。而余之達未是達也。天下之理。固有乘除。先生與齒奪角之說。眞善諭也。
虛白堂文集卷之四


玄洲集卷之四
 七言絶句 一百四十首○詩集
題沈家茅亭 a_079_252a


小苑新開一草堂。郊圻春日政荒荒。柴門晝閉無人到。獨樹棠花自在香。


東州先生前集卷之四
 嘉林錄
寒雨 a_094_024b


 

 

高秋風雨閉門深。峽口遙岑暮景沈。幽澗自通危石底。浮雲偏傍古城陰。村邊獨樹當寒眼。天際孤舟繫遠心。一臥江潭傷歲安。平生意盡白頭吟

壺谷集卷之一
 七言律詩
靑湖文避謗靑門外。暇日往訪。次無何堂韻。 a_131_017c


蕭瑟東城物色殘。滿郊詩興歲俱闌。孤村欲雪炊煙細。獨樹當風宿鳥寒。眉上肯留浮世恨。夢中猶作少干歡。應知客散樽傾後。閑把陳編秉燭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