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현 분의 문집/상촌 선생 청창 연담 내용

청창연담 상(晴窓軟談上)

아베베1 2011. 6. 10. 14:52

 

 

 

    ▶ 사진은 도봉산 입구 창포원의 붓꽃 의 모습

 

상촌선생집 제58권
 청창연담 상(晴窓軟談上)
상촌선생집 발문
 발문(跋文)
발문(跋文)

위의 상촌집 약간 권은 처음에 선생이 세상을 하직한 뒤 맏아들 동양공(東陽公 선조의 셋째 딸 정숙옹주(貞淑翁主)에게 장가든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임)이 평소 저술해 둔 시문(詩文)을 모아 세상에 간행했던 것인데, 그 때 문단의 노숙(老宿)들이 각기 서문을 지어 찬양했었다. 그런데 얼마 뒤에 또 활자(活字) 간행본만으로는 널리 전파되지 못할까 여기고서 마침내 그의 종제(從弟) 익량(翊亮)과 함께 계획을 세워 다시 한번 정리한 뒤 호남의 시산(詩山)에서 판각(板刻)을 하고는 나에게 발문을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내가 글을 잘하지 못한다고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선생의 이름은 간책(簡策)에 분명히 실려 있으니 장차 천지와 더불어 수명을 같이 할 것이다. 그런데 선생의 마음은 자연과 혼연일체가 된 경지에 들어갔기 때문에 어떻게 얻어 볼 길이 없다. 선생이 문자로 표현한 것은 단지 그 나머지요 찌꺼기일 뿐인데 또 어떻게 거기에 췌언(贅言)을 하겠는가.” 하였더니, 동양공이 놓아주지 않고 독촉하며 말하기를 “그렇다 하더라도 한 마디 말이 없을 수는 없다.” 하였다.
내 나름대로 생각해 보건대, 이 세상에서 불후(不朽)하다고 하는 것에 세 가지가 있으니, 도덕(道德)과 공업(功業)과 문장(文章)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한 가지만 소유하고 있어도 이름을 세워 후세에 전해지기에 모두 충분하다고 할 것인데, 이 세 가지를 한 몸에 갖추고 있는 경우는 대체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보기 드물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또 모두 일심(一心)에 근본하고 있다. 만약 그 근본이 없게 되면, 문장은 재주를 부려 수식하는 정도로 그치게 되고, 공업은 잡된 패도(霸道) 쪽으로 흘러가게 되고, 이른바 도덕이라는 것 역시 가짜 옥돌을 진짜 옥돌이라고 사기쳐서 팔아먹는 결과로 귀착되고 말 것이니, 어찌 말할 가치가 있는 것이겠는가.
선생은 남보다 월등하게 영특하였고 제자(諸子)의 서적들을 닥치는 대로 모두 섭렵하였으며 소시적에 재앙을 당했으나 허정(虛靜)한 상태에 마음을 머물고 고요히 자연의 이치를 관찰하여 깊이 오묘한 경지에 나아갔는데 이를 문사(文辭)로 드러낼 경우 생각한 대로 줄줄 흘러 나오는 것이 마치 물에 근원이 있고 나무에 뿌리가 있는 것과 같았다. 그리하여 풍부한 어휘를 구사하여 오묘한 시의 세계를 보여주면서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루었는데 이와 함께 고아(高雅)한 선생의 풍도(風度)는 사림(士林)의 숭앙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중간에 불행한 운세를 만나 10년 동안 시골에 내려가 은둔생활을 하면서 정밀하게 연찬하고 깊이 사색을 한 결과 많은 논저를 내놓았는데 그 가언(嘉言)은 구정록(求正錄)에 실려 있고 선생이 밝힌 오묘한 이치는 선천규관(先天窺管) 속에 드러나 있다. 그리고 고난을 당한 뒤로 읊은 시들을 보면 더욱 맑고 깨끗하며 넓게 탁 틔어 있어 그 가치가 한층 격상되고 있는데 거의 도연명(陶淵明)이나 위응물(韋應物)과도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할 것이다.
성상께서 반정(反正)을 하시자 훌륭한 신하들이 모두 나아왔는데, 선생은 선조(先朝) 때부터 명망이 있었기 때문에 가장 은총을 받아 한 세대가 지나기 전에 총재(冢宰 이조판서)를 거쳐 정승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그런데 당시는 국가에 일이 많고 조정의 의논이 분분한 때였다. 시비를 이야기하는 자들은 각각 자기 의견만 고집하고 치도(治道)를 논하는 자들은 대부분 개혁만 하려고 하면서 회오리바람이 불듯 벌떼가 몰려오듯 일어났으므로 위아래에서 취사 선택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는데, 선생이 안정되고 균형잡힌 자세로 담소하면서 재단(裁斷)해 나갔으며 단아한 자태로 의정부에 임하여 백관을 다스려 나갔다. 생각건대 마음 속의 경지가 물결 하나 일지 않는 조용한 상태였기 때문에 외물(外物)에 응할 때 막힘없이 여유있게 나왔던 것인데, 구체적인 일에 잗달게 참견하지 않으면서도 세도(世道)가 이에 힘입게 되었으므로 지금에 와서 중흥(中興)을 이룬 명상(名相)을 논할 때에는 선생을 맨 먼저 일컫고 있는 것이다.
대저 노씨(老氏)는 역(易)의 체를 얻었고 소자(邵子)는 역의 골수를 얻었다. 그런데 선생의 학문은 통하지 않는 곳이 없으면서도 스스로 계오(契悟)한 곳이 있고 덕(德)의 근본을 잡았으면서도 거의 자취가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현묘한 이치를 투철하게 알았으면서도 스스로 높게 여기지 않았고 문장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으면서도 스스로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으며 널리 경국제세(經國濟世)의 공업(功業)을 이루었으면서도 스스로 자신의 공로로 삼지 않았다. 요컨대 결론을 말한다면 아까 이야기한 세 가지 불후(不朽)한 것을 오직 선생만이 거의 가깝게 해내었다고 할 것인데, 이는 대체로 묘한 이 마음이 함양된 데 따라 적재적소에 활용되어 그처럼 헤아릴 수 없이 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어 기억하건대 나는 나이 17세 때 책을 끼고 선생의 문하에 나아가서 학업을 닦았다. 이 때 선생이 친절하게 이끌어 주며 적지 않게 기대하였는데, 하루는 성리(性理)에 관한 서책 1질(帙)을 꺼내 보여 주고 또 절구 한 수를 지어 격려해 주기도 하였다. 어리석음을 깨우쳐 준 은혜와 인정을 받은 감격스러움은 참으로 감히 잊지 못할 점이 있다고 하겠는데, 세상 일에 떠밀려 다니다 보니 벌써 흰 머리가 희끗희끗해지고 말았다. 지금 유고(遺稿)를 살펴보건대 그 드넓은 세계에 그저 탄식만 나올 뿐인데 이 기회에 가슴 속에 품어 왔던 느낌까지 아울러 써서 동양공에게 답하는 바이다.
분충찬모입기명륜정사공신(奮忠贊謨立紀明倫靖社功臣) 숭록대부(崇祿大夫) 행 병조판서 겸 지경연춘추관사 세자우빈객(行兵曹判書兼知經筵春秋館事世子右賓客) 완성군(完城君) 최명길(崔鳴吉)은 삼가 발문을 쓴다.
정밀하게 해야 한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나 정밀하게 하려 하면 크게 되지 못할 근심이 있다. 두루 통해야 한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나 두루 통하게 하려 하면 법도가 없게 될 걱정이 있다. 이것이 바로 문필가들이 늘 벗어나지 못하는 결함인데, 시를 잘 짓는 자라고 해서 문도 잘 한다는 보장이 없고 문에 능한 자라고 해서 꼭 시를 잘 짓는 것도 아니고 보면 이 두 가지를 다 갖춘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알 수 있다. 대저 정밀하면서도 크고 두루 통하면서도 법도가 있어 시이든 문이든 모두 그 묘한 경지를 얻은 결과 아무리 세세히 따져 논하는 자가 있다 할지라도 감히 한 쪽만 잘하고 다른 쪽은 엉망이라는 비평을 가하지 못하는 경우는 오직 신 문정공(申文貞公) 한 분밖에는 없다 할 것이다.
대체로 볼 때 신 문정공은 재주가 높고 학식이 넓다. 재주가 높기 때문에 하나의 예능에만 국한되지 않고 학식이 넓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들을 모두 가져와 요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변두리 나라 쇠퇴해진 세상에 태어나서 문장을 아름답게 다듬고 논리적으로 전개하여 작가의 수풀에 푯대를 세우고 또 덕업(德業) 모두 천고에 환히 드러나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보통으로만 보아 넘길 일이겠는가.
공은 소싯적부터 달리 좋아하는 것이 없이 입만 열면 경지에 나아간 표현들을 문득 구사하곤 하였으며 독서하고 깊이 사색하면서 먹고 자는 일조차 잊어버리곤 하였는데 이런 생활이 백발이 되도록 하루같이 지속되었다. 《맹자(孟子)》에 “사정거리 안에 화살이 이르게 하는 것은 너의 힘이지만 과녁에 맞게 하는 것은 너의 힘이 아니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선천적인 자질과 후천적인 노력이 겸비되어야 함을 이른 말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선묘(宣廟)께서도 공을 옥당(玉堂)과 동관(東觀)에 놔두고는 그 웅대한 문장으로 왕의 모책(謨策)을 떨쳐 드러내게 하였던 것인데 그 글이 그렇게 아름답고 힘이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중간에 비색(否塞)한 운세를 만나 뇌정벽력(雷霆霹靂)이 교차되면서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게 되고 유배를 당하기까지 하였는데, 이는 어쩌면 공을 구덩이 속으로 계속 밀어넣어 빠져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까지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듯 근심스럽고 우울하기 짝이 없는 환경도 공을 털끝만큼이라도 동요시키기에는 부족하였고 보면, 하늘의 뜻이 원래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고달픈 계기를 마련해 줌으로써 공을 뛰어난 인물로 만들어 주려 한 것인지도 모르겠는데, 유배 생활을 하는 등 불우했던 시절에 지은 시부(詩賦)를 보건대 모두가 깊은 사색에서 우러나와 정악(正樂)의 경지를 완성한 것들이었으니, 이 어찌 겉으로는 억누르면서 속으로는 도와준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윽고 하늘의 태양이 다시 밝게 빛나자 공이 맨 먼저 부름을 받고 의정(議政)에 임명되었는데, 훌륭한 정치를 행하려는 임금의 뜻을 받들어 중흥을 이룰 수 있도록 찬조하고 문장으로 실제 사회에 이바지한 공효(功效)가 이에 크게 드러나 공명(功名)은 당시에 빛나고 명성은 후대에까지 이어지게 되었으니, 아까 말한 대로 사람의 궁달(窮達)과 세상의 성쇠(盛衰)에 하늘이 뜻을 갖고 있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공의 문집이 세상에 유행된 지 거의 10년이 되어가는 동안, 공의 시를 본 자들은 시가 글보다 낫다 하고 글을 본 자들은 글이 시보다 낫다고 하는 등 그 높낮이를 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가령 규모가 지극히 크면서도 정밀하기 이를 데가 없고 두루 통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면서도 모두 법도에 맞게 하였다고 하더라도 이는 백대(百代)의 공언(公言)이지 일 개인의 사언(私言)이라고는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처음에 공이 죽었을 때 공의 원사(元嗣) 익성씨(翊聖氏)가 공의 유문(遺文)을 가숙(家塾)에서 간행했었다. 그럼에도 널리 유포되지 못할 것을 걱정한 나머지 지금 공의 조카 익량(翊亮)이 태인현감(泰仁縣監)으로 있는 기회에 중판(重板)을 간행하고는 선대(先代)로부터 교유가 있어 왔다고 하면서 나의 말 한 마디를 받아 장식하고 싶다고 하였다.
아, 옛 사람이 말하기를 “글을 남기면 불후(不朽)하게 되고 자손이 있으면 죽지 않게 된다.” 하였다. 대저 글을 남기지도 못한 자야 원래 논할 것이 없지만 남긴 글이 있는데도 자손이 없거나 혹 자손이 있어도 자손답지 못한 나머지 그 글이 적막하게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사례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얼마나 많겠는가. 그리고 아비가 운명하면서 아들의 손을 잡고 책으로 만들기를 부탁했던 그 뜻만도 이미 서글픈 터에 책이 완성되고 나서도 또 감히 당세(當世)에 드러내놓지 못한 채 명산에 숨겨두고 후대의 지자(知者)를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있을텐데, 공의 문집을 보다 보니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한스러운 감정을 갖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숭정(崇禎 명 의종(明毅宗)의 연호) 9년(1636, 인조14) 4월에 가선대부 강원도 관찰사 겸 순찰사 이민구(李敏求)는 삼가 쓴다.

청창연담 상(晴窓軟談上)

 


문장이란 조그마한 기예에 불과하니 도(道)에 비하면 가당치도 않다. 그런데도 문장을 높이 평가하는 자들은 ‘도를 꿰는 기구[貫道之器]’라고 지목하니,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대체로 아무리 지극한 도가 있다 하더라도 도 혼자서는 드러날 수 없는 관계로 문장이라는 형식을 빌려 그 도를 전하게 되기 때문이니, 그렇다면 서로 상관관계에 있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시(詩)라는 것은 바로 문자를 매체로 하면서도 구(句)의 형식으로 표현을 하는 것이다. 시가 형이상학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글은 형이하학적인 것이라 할 것인데, 형이상학적인 것은 하늘에 속하고 형이하학적인 것은 땅에 속한다 하겠다.
시는 사(詞)를 위주로 하고 글은 이(理)를 위주로 한다. 시에 이(理)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위주로 되면 이미 여운이 없어져버리고, 글에 사(詞)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 위주로 되면 이미 사(史)가 되어버리고 만다. 요컨대 사(詞)와 이(理) 모두 중도에 맞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 풍(風)을 사가 주(主)이고 이가 종(從)인 것[詞而理者]이라고 한다면 아(雅)와 송(頌)은 이가 주이고 사가 종인 것[理而詞者]이며, 육조(六朝) 이후의 작품은 주와 종 모두가 사로 일관된 것[詞而詞者]이고 조ㆍ송(趙宋) 이후의 작품은 주와 종 모두 이를 위주로 한 것[理而理者]이라 하겠다.
세상에서 당(唐) 시대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송(宋) 시대의 것을 배척하고 송 시대의 작품을 추종하는 자들은 당 시대의 것을 그렇게 높이 평가하려 하지 않는데, 이는 모두 한 쪽에만 집착하는 태도에서 나온 것이다. 당 나라가 쇠퇴할 때에는 어찌 속된 악보가 없었을 것이며 송 나라가 융성할 때에는 어찌 단아한 곡조가 없었겠는가. 이러한 태도야말로 구금(鉤金)이나 여신(輿薪) 등의 비유에 흡사하게 해당된다 할 것이다.
당시(唐詩)의 선본(選本)으로는 《품휘(品彙)》ㆍ《당음(唐音)》ㆍ《전당시선(全唐詩選)》ㆍ《만수선(萬首選)》ㆍ《백가시(百家詩)》 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품휘》와 《당음》이 가장 정밀하다.
당시(唐詩)는 한 번 돈오(頓悟)하면 바로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드러난다고 하는 남종(南宗)의 성격과 비슷하고, 송시(宋詩)는 점수(漸修)를 통해 나아가 성문(聲聞)이나 벽지불(辟支佛)이 되기를 지향하는 북종(北宗)의 성격과 비슷하다. 이것이 당과 송의 차이이다.
옛날에 어떤 이는 논하기를 “두자미(杜子美)는 사영운(謝靈運)의 영향을 받아 나왔고 이태백(李太白)은 명원(明遠 포조(鮑照). 포 참군(鮑參軍)으로 더 잘 알려짐)의 영향을 받아 나왔다.”고 하였다. 자미의 경우는 물론 형적을 의탁해 수립한 점이 있다. 그러나 태백과 같은 이는 하늘의 신선으로서 마치 우담발화(優曇鉢花 3천 년에 한 번 꽃이 핀다는 전설 속의 식물)가 하늘 가운데에 변화하여 나타난 것과 같다 할 것인데, 단지 그의 자질이 우연히도 명원과 비슷한 점이 있었을 따름이다.
자미가 이북해(李北海 이옹(李邕))에게 화답한 시를 보면 너무도 북해의 것과 흡사하다.
북해의 웅건한 시풍(詩風)은 자미를 능가한다.
연ㆍ허(燕許 당(唐)의 연국공(燕國公) 장열(張說)과 허국공(許國公) 소정(蘇頲)을 말함)의 작품을 보면 내용을 근본으로 하고 형식은 부차적인 것으로 하였다. 그래서 때때로 다듬어지지 않은 점이 눈에 띄어 얼핏 보면 당 나라의 어투가 아닌 듯이 보이기도 하는데, 이로써 만당(晩唐) 이후로는 점차 정음(正音)과는 거리가 멀어져 갔다는 것을 알겠다.
위현성(魏玄成 위징(魏徵))은 처음 이밀(李密)을 따를 때부터 천하를 도모하겠다는 뜻을 가졌으니 소극적으로 가만히 있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술회시(述懷詩)를 보건대,

중국 땅 또다시 왕위 쟁탈전 벌어짐에 / 中原還逐鹿
학문의 길 제쳐두고 군대의 길로 나섰다오 / 投筆事戎軒
합종 연횡 그 계책은 이루지 못했어도 / 縱橫計不就
비분 강개 그 뜻만은 가슴 속에 여전했지 / 慷慨志猶存
말 채찍 손에 들고 천자를 뵈온 뒤에 / 策杖謁天子
말 타고 치달리며 함곡관(函谷關)을 나왔다오 / 驅馬出關門
밧줄만 주신다면 남월왕도 잡아오고 / 請纓繫南越
수레에 기댄 채로 제(齊) 나라 항복 받자 했네 / 憑軾下東藩
이리 구불 저리 구불 산등성이 올라가고 / 欝紆陟高岫
올라갔다 내려갔다 너른 들판 바라봤네 / 出没望平原
오래된 나뭇가지 겨울철 새 울어대고 / 古木鳴寒鳥
적막한 산 한밤중에 원숭이 울음 들렸었지 / 空山啼夜猿
천리길 고향 생각 마음이 슬퍼지고 / 旣傷千里目
꼬불꼬불 험난한 길 깜짝깜짝 놀랐다오 / 還驚九折魂
힘들고 어려운 일 어찌 싫지 않겠소만 / 豈不憚艱險
국사 대접 받은 은혜 못내 잊지 못하겠소 / 深懷國士恩
계포가 승락하면 다시 두 말 없었었고 / 季布無二諾
후영은 한 마디 말 목숨 바쳐 지켰지요 / 侯嬴重一言
사람이 살면서 의기 느끼면 그뿐인걸 / 人生感意氣
공명이야 또 다시 논할 것 뭐 있겠소 / 功名誰復論

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곧 처음 당 고조(唐高祖)를 만났을 때의 작품으로서 그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전쟁터의 분위기를 묘사한 시가 많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우세남(虞世南)의 시 가운데,

싸늘한 칼에 꽃잎 여전히 붙어 있고 / 劍寒花不落
새벽녘 활 모습 달이 더욱 빛나도다 / 弓曉月逾明

같은 것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미칠 수 없는 표현이라 하겠다.
왕발(王勃)의 산정야연(山亭夜宴)이라는 시에,

계수나무 집 그윽한 회포 쌓이고 / 桂宇幽襟積
언덕 위 정자 내내 서늘한 밤이로다 / 山亭涼夜永
가라앉은 수풀 속 들길은 싸늘하고 / 森沈野逕寒
바위 사이 통로 역시 적요하기 그지 없네 / 肅穆岩扉靜
울창한 대나무 숲 강물 색깔 어둡게 하고 / 竹晦南河色
한들거리는 연꽃 잎새 못 그림자 뒤집누나 / 荷翻北潭影
맑은 흥취 듬뿍 빠져 돌아갈 일 잊다보니 / 淸興殊未歸
어느 새 나무 끝에 비치는 새벽 햇빛 / 林端照初景

하였는데, 이는 세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말들이라 하겠다. 오언율(五言律) 가운데, 가령 우세남의,

석양녘 초록 들판 밝게 빛나고 / 綠野明斜日
저녁 연기 오르는 속 청산이 고요하다 / 靑山澹晩煙

나, 또 그의

오리 떼 짝 지어 보금자리 돌아가고 / 鳧歸初可侶
기러기 떼 줄 지어 길 떠날 준비하네 / 雁起欲分行

이라는 시, 그리고 양사도(楊師道)의

기러기 울음 소리 바람결에 끊어지고 / 雁聲風處斷
나무 숲 그림자들 달빛 받아 더 차구나 / 樹影月中寒

이라는 시, 그리고 양형(楊炯)의,


이나, 또 그의,


라는 시, 그리고 왕발의,


이나, 또 그의,


이라는 시, 그리고 노조린(盧照隣)의,


이나, 또 그의,


이라는 시, 그리고 낙빈왕(駱賓王)의,


이나, 또 그의,


라는 시, 그리고 소미도(蘇味道)의,


라는 시, 그리고 진자앙(陳子昻)의,


이나, 또 그의,


이라는 시, 그리고 두심언(杜審言)의,


이나, 또 그의,


이라는 시, 그리고 심전기(沈佺期)의,

달빛도 밝은 삼협의 새벽이요 / 月明三峽曉
조수가 가득 찬 구강의 봄이로다 / 潮滿九江春

이나, 또 그의,


이라는 시, 그리고 송지문(宋之問)의,


이나, 또 그의,


나, 또 그의,


이라는 시, 그리고 이교(李)의,


나, 또 그의,


라는 시, 그리고 소정(蘇頲)의,


이나, 또 그의,


라는 시, 그리고 장열(張說)의,


이나, 또 그의,


이나, 또 그의,


이라는 시, 그리고 장구령(張九齡)의,


이나, 또 그의,


나, 또 그의,


이라는 시, 그리고 최식(崔湜)의,


이라는 시, 그리고 왕한(王翰)의,


이라는 시, 그리고 하지장(賀知章)의,


라는 시, 그리고 손적(孫逖)의,


라는 시들이야말로 정시음(正始音)이라 하겠다.

칠언율(七言律) 가운데 정시음으로는 심전기(沈佺期)의 〈고의(古意)〉라는 시를 첫째로 꼽아야 할 것이다. 그 시에,

울금초 향기 풍기는 노씨네 젊은 부인 집 / 盧家少婦欝金堂
별갑대(鼈甲瑇) 장식 들보엔 한 쌍의 제비 오손도손 / 海燕雙棲玳瑁樑
싸늘한 가을 바람 다듬이질 소리 낙엽은 자꾸만 지고 / 九月寒砧催木葉
10년에 걸친 수자리 생활 요동의 남편 생각나네 / 十年征戍憶遼陽
백랑하 저 북쪽에선 소식도 이제 끊어지고 / 白狼河北音書斷
단봉성 이 남쪽에는 가을 밤 길기도 하구나 / 丹鳳城南秋夜長
독불견이라는 이 노래 누굴 위해 이렇듯 서글픈가 / 誰爲含愁獨不見
짜고 있는 비단 위에 달빛이 또 비추누나 / 更敎明月照流黃

라 하였는데, 이것이야말로 악부(樂府)에서 유독 보이지 않는 시체(詩體)라 할 것이다.
태백(太白)의 청평조(淸平調)ㆍ행락사(行樂詞)ㆍ황학루(黃鶴樓)는 모두 세간에 있지 않던 표현들을 구사한 작품이다. 그리고 가령,


같은 시를 읽노라면 마음이 훌쩍 고양(高揚)되곤 한다.
이른 아침을 소재로 한 시 가운데 왕유(王維)와 가지(賈至)와 잠참(岑參)의 작품이 모두 절창(絶唱)이지만 소릉(少陵 두보(杜甫))의 시가 가장 우수하다. 후대에 와서 이를 본받아 지은 시들을 보면 모두 여기에 미치지 못한다.
나는 《문장정종(文章正宗)》이 나온 이후로 위응물(韋應物)의 시를 무척 사랑하였는데, 그것을 다 기록할 수는 없으나 우선 평소에 읊어 불렀던 것을 기록해 보기로 한다. 〈상봉행(相逢行)〉이라는 시에,

약관(弱冠)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여 / 二十登漢朝
아름다운 이름을 천하에 떨쳤는데 / 英聲邁今古
그때 마침 동쪽에서 이곳에 와서 / 適從東方來
다시금 천자를 뵙고자 했지 / 又欲謁明主
맛좋은 신풍 술 즐겨 마시고 / 猶酣新豐酒
패릉에 내리는 비 같이 맞고 다녔는데 / 尙帶㶚陵雨
이렇게 우연히 두 사람 만나서는 / 邂逅兩相逢
이별 뒤의 소식들 물어보았네 / 別來問寒暑
대낮이 언제 저문 줄 알았으랴 / 寧知白日晩
기생집에 잠깐 들러 이야기 나눴는데 / 暫向花間語
홀연히 들리는 장락궁 저 종소리 / 忽聞長樂鍾
말들을 집어 타고 급히 서로 헤어졌네 / 走馬東西去

라 하였고, 잡체(雜體)에,

상자 속에 거울 하나 고이 모셔 놓았더니 / 沈沈匣中鏡
조금씩 부식되어 더러워졌네 / 爲此塵垢蝕
빛나던 그 물건이 어떻게 되었는가 / 輝光何所如
구름 속에 달 들어가 껌껌하게 된 것 같네 / 月在雲中黑
순도 높은 황금으로 아로새겨 놓은데다 / 南金旣雕錯
매어달린 큰 띠 역시 휘황하게 꾸몄는데 / 鞶帶共輝飾
공연히 물건들 비추어 주려다간 / 空存鑑物明
아름답고 추한 것을 뒤범벅 만든다네 / 坐使姸蚩惑
아름다운 여인네들 애간장 태워가며 / 美人竭肝膽
티없이 맑은 모습 비춰 보려 해 보지만 / 思照氷玉色
갈아서 빛낼 재주 없는 자기 처지 돌아보고 / 自非磨瑩工
날마다 부질없이 한숨만 내쉰다오 / 日日空嘆息

이라 하였고, 〈기원교서(寄元校書)〉에,

슬프게도 친애하는 사람 곁을 떠나서 / 悽悽去親愛
두둥실 떠 안개 속으로 사라지누나 / 泛泛入煙霧
노 저어 돌아가면 낙양 사람 될텐데 / 歸棹洛陽人
광릉 숲의 아련한 새벽 종소리 / 殘鍾廣陵樹
오늘 이렇게 이별하면 / 今朝此爲別
어디서 다시 만날꺼나 / 何處還相遇
세상 일 모두가 물결 위의 배 같은 것 / 世事波上舟
오락가락 어떻게 한 곳에만 있겠는가 / 沿洄安得住

라 하였고, 〈봉양개부(逢楊開府)〉에,

소싯적에 현종황제(玄宗皇帝) 모시다 보니 / 少事武皇帝
은총만 믿고서 턱없이 까불어대 / 無賴侍恩私
동네에서 못된 짓은 도맡아 하며 / 身作里中橫
집안에 도망온 자 숨겨도 줬지 / 家藏亡命兒
아침엔 주사위 놀음 실컷 즐기고 / 朝持樗蒲局
저녁 땐 이웃집 계집 슬쩍 훔쳐도 / 暮竊東隣姬
법관이 손 하나 까딱 못하고 / 司隷不敢捕
그냥 바로 궁궐에 나가곤 했지 / 立在白玉墀
여산에선 눈 오는 밤 온욕(溫浴) 즐겼고 / 驪山風雪夜
장양에선 천자 따라 짐승 쫓으며 / 長楊羽獵時
문자라곤 하나도 모르는 몸이 / 一字都不識
술 먹고 방자하게 떼도 썼었네 / 飮酒肆頑癡
그러다가 황제께서 승하하신 뒤 / 武皇昇仙去
놀림받는 초라한 신세가 되었는데 / 憔悴被人欺
글 읽기엔 세월 너무 흘러버려서 / 讀書事已久
붓을 잡고 늦게나마 시를 배웠네 / 把筆晩學詩
조정에서 이때 처음 이 몸 받아줘 / 兩府始收跡
황공하게 예부 낭중(禮部郞中) 발탁이 되었으나 / 南宮謬見推
워낙 재주없어 용납받지 못한 채 / 非才果不容
목민관의 직책 받고 지방으로 나갔다오 / 出守撫
그런데 뜻밖에도 양 개부를 만나다니 / 忽逢楊開府
옛날 일 얘기하며 서로 눈물 흘렸는데 / 論舊涕俱垂
다른 손들 어떻게 그 까닭을 알 것인가 / 坐客何由識
그저 우리 옛 친구 두 사람만 알 뿐이지 / 唯有故人知

라 하였으며, 또 의고(擬古) 10수(首) 같은 것은 한 편 한 편이 모두 산호(珊瑚) 가지와 같아 온 방안이 환해지는 느낌을 갖게 하는 작품이다.
칠언고시(七言古詩) 가운데 왕발(王勃)의 〈추야장(秋夜長)〉, 임고대(臨高臺)와 노조린(盧照隣)의 〈장안고의(長安古意)〉와 〈낙빈왕(駱賓王)의 제경(帝京)〉 등 편(篇)에 대해서는 이백(李白)과 두보(杜甫)가 미처 손을 대지 못했는데, 가령 태백(太白)에게 짓게 한다면 넉넉하게 해내고도 남음이 있겠지만 자미(子美)는 아마도 한 수 뒤질 듯하다. 이러한 작품들은 모두 제량조(齊梁調)라 할 것이다.
이장길(李長吉 이하(李賀))의 〈호가(浩歌)〉에

바람이 한 번 불면 산도 평평한 땅이 되고 / 南風吹山作平地
천오에게 시킨다면 바다도 장소 옮겨가리 / 帝遣天吳移海水
서왕모(西王母)의 복사꽃은 천 번도 더 붉게 피고 / 王母桃花千遍紅
팽조와 무함 역시 몇 번이나 죽었으리 / 彭祖巫咸幾回死
푸른빛 얼룩말은 털 모양이 돈과 같고 / 靑毛驄馬參差錢
한들거리는 봄 버들 여린 안개 머금었네 / 嬌春楊柳含細煙
가야금 켜는 여인 나에게 술잔 권하지만 / 箏人勸我金屈巵
젊고도 젊은 나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 神血未凝身問誰
정도호가(丁都護歌) 부르면서 마구 마실 필요 있나 / 不須浪飮丁都護
세상의 영웅들은 본래 주인이 없는 것을 / 世上英雄本無主
평원군 같은 이에게는 실을 사서 수 놓겠고 / 買絲繡作平原君
그가 살던 조 나라 땅엔 술잔 부어 뿌리겠네 / 有酒唯澆趙主土
톰방톰방 물시계 물 두꺼비가 받아 먹고 / 漏催水咽玉蟾蜍
술 권하는 아낙네 머리도 다 빠졌구려 / 衛娘髮薄不勝梳
젊은이도 얼마 못가 늙은이가 될 것인데 / 看見秋眉換新綠
한창 나이 남아로서 세상일에 안달하랴 / 二十男兒那剌促

라 하였는데, 따뜻한 바람 불고 맑게 갠 날 온갖 꽃이 만발한 속에서 금릉(金陵)의 봄술 마시고 진(秦) 나라 청신곡(靑新曲) 가락에 맞춰 이 노래를 부른다면 답답한 마음을 날려버리기에 충분할 것이다.
온정균(溫庭筠)의 시는 오로지 아름답게 수식하는 것을 위주로 하는데, ‘위상(渭上)’이라고 제목을 부친 시에서,

여공은 영달하고 자릉은 돌아왔는데 / 呂公榮達子陵歸
운무 낀 그 낚시터 물결 여전히 찰랑대네 / 萬古煙波繞釣磯
명예 이익 좇아가는 다리 위의 저 군상들 / 橋上一通名利迹
물새도 보기 싫다 등 돌리고 날아가네 / 至今江鳥背人飛

라고 하고, 또,

안개 낀 이 물가 언제고 세상의 화제거리 / 煙水何曾息世機
잠시동안 마주 서도 그때 정경 삼삼하네 / 暫時相向亦依依
유감일세 반계에 살던 백발 노인 / 所嗟白首磻溪叟
고깃배를 내린 뒤로 끝내 안 돌아왔네그려 / 一下漁舟竟不歸

라고 한 것은 이치도 그 속에 들어 있거니와 뜻 자체도 고상하다 하겠다.
당언겸(唐彦謙)의 〈제중산(題仲山)〉이라는 시에,

덩굴풀에 덮여 있는 1천 년 전 이 유적지 / 千載遺蹤寄薜蘿
초목 우거진 이 시골도 한 나라의 영토였지 / 沛中鄕里漢山河
장릉도 이제 와선 무덤들 중의 하나일 뿐 / 長陵亦是閑丘壠
고조인지 그 형인지 알아볼 자 얼마 될까 / 異日誰知與仲多

라 하였는데, 절창(絶唱)이라고 할 만하다.
왕건(王建)의 〈과양주(過楊州)〉라는 시에,

불야성 이룬 저자의 등불 푸른 구름 비춰 주고 / 夜市千燈照碧雲
높은 누각에 붉은 소매 손님들이 법석대네 / 高樓紅袖客紛紛
태평 시대는 아닐 듯한 오늘날 상황이나 / 如今不似時平日
그래도 노래 소린 새벽까지 들리누나 / 猶自笙歌徹曉聞

이라 하였는데, 내가 관서(關西) 일로(一路)를 지나갈 때면 번번이 이 시가 생각나곤 하였다. 지난 해 함종(咸從)에 도착했을 때 마침 음률을 익힌 사람이 있기에 절구 한 수를 짓기를,

썰렁한 기생집 먼지만 악기에 내려 앉고 / 妓榭寥寥絃管塵
한창 때 만난 세버들 봄을 이기지 못하누나 / 繁華細柳不勝春
마음 상해 묻고 싶네 승평악곡(昇平樂曲)을 / 傷心欲問昇平樂
제일 잘 부르는 가수 누구인지를 / 誰是梨園第一人

이라 하였는데, 이 역시 그러한 뜻을 담고 있다 하겠다.
무원형(武元衡)의 형수(荊帥)라는 시는 호방하여 읊을 만한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시종(侍從)에서 재차 삼공의 부서 임명받고 / 金貂再領三公府
막부(幕府)에서 잇따라 만호후에 봉해졌네 / 玉帳連封萬戶侯
발을 걷으면 다가오는 청산 무협의 새벽이요 / 簾捲靑山巫峽曉
안개가 개이면 드러나는 수목 저궁의 가을이로다 / 烟開碧樹渚宮秋
유곤이 노래하던 그 요새 바람이 맑고 / 劉琨坐嘯風淸塞
사조가 시를 읊던 그 누각 달빛이 가득 / 謝朓題詩月滿樓
백설가 곡조 어려워서 노래가 되지 않자 / 白雪調高歌不得
남국 미인의 푸른 아미 수심이 가득하네 / 美人南國翠蛾愁

이문요(李文饒 이덕유(李德裕))가 애산(厓山)에 유배가서 시를 짓기를,

10년 동안 조정에서 정승 직책 수행했고 / 十年紫殿掌洪鈞
3조를 출입하며 근신(近臣)으로 봉직했네 / 出入三朝侍從身
문제의 총애 깊어 천자 수레 배행(陪行)했고 / 文帝寵深陪豹尾
무황의 은혜 중해 용진 잔치 벌였었지 / 武皇恩重宴龍津
흑산에선 화친 길이 영원히 끊어졌고 / 黑山永絶和親路
오령에선 발호하는 신하 모두 묻어 버렸었지 / 烏嶺全坑跋扈臣
지위가 높아지면 물러가야 온당한 법 / 自是功高歸盡處
재난을 당한 것이 남의 탓 아니라오 / 禍來名滅不由人

이라고 하였는데, 어휘 구사가 산뜻하여 계속 사람의 가슴에 와 닿는다.
원진(元稹)과 백거이(白居易)의 시는 정(鄭)ㆍ위(衛)의 음이라고나 하겠다.
번천(樊川 두목(杜牧))의 시는 원래 변음(變音)에 속한다. 그러나 그 재지(才智)만큼은 널리 뛰어나 거칠 것 없이 치달리는데 이는 아무나 감당할 수가 없다. 생각건대 그의 사람됨도 필시 그 시와 비슷했으리라 여겨진다. 장편(長篇) 가운데 〈두추랑시(杜秋娘詩)〉나 〈장호호시(張好好詩)〉ㆍ〈군재독작(郡齋獨酌)〉 등에 나오는 말들은 그가 창시한 별곡(別曲)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반남(潘南)의 시는 그렇게 화려하고 고울 수가 없다. 그러나 천재성으로 보면 번천에게는 미치지 못한다.
장우(張祐) 같은 이는 정말로 방랑인이다. 그의 양주시(楊州詩) 가운데,

사람은 그저 양주에서 죽어야 제격이지 / 人生只合楊州死
선지산 앞에 좋은 묘자리 하나 있네 / 禪智山前好墓田

이라는 귀절을 읊노라면 늘 웃음이 나오곤 한다.
두소릉(杜少陵)은,


이라 읊었고, 황산곡(黃山谷)은,


하였는데, 이 말을 들어 부귀에 미혹된 자들을 경계시키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다.
후세에 악부(樂府)를 지은 자들이 많으나 태백(太白)의 〈억진아(憶秦娥)〉나 〈보살만(菩薩蠻)〉 같은 작품과 방불한 것은 하나도 찾을 수 없으니 태백의 경지는 따라가기 어렵다 하겠다.
율시(律詩)만 해도 너무 벌여 놓은 병통이 있는데 또 이를 늘려서 배율(排律)로 하고 있다. 심지어 자미(子美)는 백 운(韻)의 시를 짓기까지 하고 있으니 이는 시를 흠되게 하는 것이라 하겠다.
시란 할 말은 다하면서 뜻은 여운을 남기는 것이다. 그런데 배율(排律)을 짓는 자들은 뜻도 이미 남김없이 드러냈으면서도 오히려 군더더기 말들을 많이 하고 있다. 심한 경우에는 바깥의 온갖 물상(物象)을 건져 올려 마치 밥상에 온갖 음식을 차려놓는 것처럼 너절하게 늘어놓고 있으니 정말 아무 맛이 없다고 하겠다.
백거이(白居易)의 한식시(寒食詩)에,

까마귀 울음 까치 소리 나무 끝에 황혼 깃들고 / 烏啼鵲噪昏喬木
청명이요 한식날에 어디선가 통곡 소리 / 淸明寒食誰家哭
빈 들판에 바람 불어 태워진 지전 날리우고 / 風吹曠野紙錢飛
오래 된 무덤 앞엔 봄 풀만 푸르구나 / 古墓纍纍春草綠
팥배나무 꽃 활짝 피어 무덤길을 비추는데 / 棠梨花映白楊路
이곳이 산 자 죽은 자 이별하는 곳이라오 / 盡是死生離別處
땅 속 깊이 저 황천엔 곡소리 들리지 않을텐데 / 冥漢重泉哭不聞
모두 떠나 돌아가고 저녁비만 쓸쓸히 내리누나 / 蕭蕭暮雨人歸去

라 하였는데 이 시를 읽다 보면 자연히 눈물이 나오니, 어찌 옹문주(雍門周)의 가곡이 필요하겠는가.
왕건(王建)의 〈춘사(春詞)〉에,

붉은 빛 방에 가득 들보에 석양 비추고 / 紅煙滿戶日照梁
흐느적거리는 실버들 벌레 날아 올라가네 / 天絲軟弱蟲飛揚
마름꽃이 번쩍번쩍 주위가 온통 환해지고 / 菱花霍霍繞惟光
미인은 거울 보며 옷매무새 고치누나 / 美人對鏡着衣裳
뜰 앞에 함께 심은 한 그루 상사목(相思木)에 / 庭中幷種相思樹
밤마다 찾아오는 한 쌍의 봉황새여 / 夜夜還棲雙鳳凰

이라고 한 것이나, 장적(張籍)의 기원곡(寄遠曲)에,

미인이 왔다 간 뒤 봄날 강물 풀렸는데 / 美人來去春江暖
강 언덕엔 인적 없이 상수만 출렁거리누나 / 江頭無人湘水滿
빨래하던 그 돌 위엔 물새가 내려 앉고 / 浣紗石上水禽棲
강남 땅 길은 먼데 봄날이 금세 가네 / 江南路長春日短
그녀 태운 나룻배는 늘상 강을 건너는데 / 蘭舟桂楫常渡江
부쳐줄 길 가이없는 한 쌍의 귀고리여 / 無因重寄雙瓊璫

이라고 한 것도 그럴 듯한 울림을 던져 준다 하겠다.
두자미(杜子美)가 엄무(嚴武)의 〈군성조추(軍城早秋)〉에 화답하여 절구(絶句)를 지었는데 엄무의 시도 좋기에 지금 같이 기록하여 구안자(具眼者)에게 자료로 제공할까 한다. 엄무의 시는 다음과 같다.

어젯밤 관소(關所)에는 가을 바람 불어 오고 / 昨夜秋風入漢關
저 멀리 서산에는 눈과 구름 뒤덮였네 / 朔雲邊雪滿西山
날랜 장수 재촉하여 토번(吐蕃)을 추격해서 / 更催飛將追驕虜
전장터 말 한 마리 돌려보내지 않게 하리 / 莫遣沙場匹馬還

이에 화답한 두자미의 시는 다음과 같다.

살랑살랑 가을 바람 정기(旌旗)는 나부끼고 / 秋風嫋嫋動高旌
군막(軍幕)에선 활을 주며 오랑캐 쏘게 하네 / 玉帳分弓射虜營
구름 저쪽 적박령(滴博嶺)을 이미 손에 넣었는데 / 已收滴博雲間戍
이제는 눈에 덮인 봉파성 뺏으려 하는도다 / 更奪蓬婆雪外城

유주(柳州 유종원(柳宗元))의 시 가운데 〈남간(南磵)〉 등의 작품은 월등히 뛰어난데 마치 도(道)의 경지에 들어간 이의 말 같기만 하다.
허혼(許渾)과 유창(劉滄)이 지은 회고(懷古) 주제의 작품 역시 한 시대의 가작(佳作)으로서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것들이다. 한악(韓偓)은 당(唐) 말엽의 사람으로 소종(昭宗)을 따라 봉상현(鳳翔縣)에 갔다가 주전충(朱全忠)에게 미움을 받아 복주 사마(濮州司馬)로 좌천되었다. 그 뒤 당이 망하자 가족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가서 왕심지(王審知)에게 의탁했다가 그곳에서 죽었는데, 호는 옥산초인(玉山樵人)으로서 그의 절조(節操) 역시 사공도(司空圖)와 함께 높이 평가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의 〈피지(避地)〉라는 시를 보면,

계속되는 피난살이 그것만도 서글픈데 / 避地淹留已自悲
한식날을 맞고 보니 더욱 눈물 흐르누나 / 況逢寒食欲沾衣
짙은 봄날 시름에 겨워 홀로 앉아 있노라니 / 濃春孤館人愁坐
석양녘 빈 뜰의 꽃 어지러이 날리도다 / 斜日空園花亂飛
욕된 여정(旅程) 갈수록 더 지기는 적어지고 / 路辱漸憂知己薄
위태로운 시대 경치를 봐도 제대로 즐기지 못한다오 / 時危又與賞心違
한없이 명리(名利)에 끌려다니기보다는 / 一名所繫無窮事
세속의 일 모두 잊고 사는 것만 못하리다 / 爭敢當年便息機

라고 하였고, 또 〈춘진(春盡)〉이라는 시를 보면,

봄날이 아까워서 연일 엉망으로 취했는데 / 惜春連日醉昏昏
깨고 보니 옷자락에 술자국이 범벅일세 / 醒後衣裳見酒痕
가녀린 풀꽃 시냇물로 둥둥 떠 흘러가고 / 細草浮花歸別澗
비 머금은 조각 구름 외로운 마을 들어오네 / 斷雲含雨入孤村
사람이 모자라서 이 좋은 때 늘 한스럽고 / 人間易有芳時恨
경치는 좋다마는 고인 초혼 어려워라 / 地勝難招自古魂
부끄럽네 사이좋은 꾀꼬리 화답 소리 / 慙愧流鶯相厚意
새벽이 다 되도록 서원에 들려오네 / 淸晨猶爲到西園

이라고 하였다. 어렵고 힘든 나그네의 생활 모습이 언외(言外)에 비쳐지고 있는데, 난세(亂世)를 살다 간 사부(士夫)의 자취가 슬픔을 자아낸다.
최로(崔魯)의 〈악양언회(岳陽言懷)〉에,

청명 절기 지나가고 안개 속 꽃들 떨어지니 / 煙花零落過淸明
타향살이 나그네의 마음이 서러워라 / 異國光陰老客情
운몽택(雲夢澤)의 석양빛 우수에 잠겨 있고 / 雲夢夕陽愁裏色
동정호(洞庭湖)의 봄 물결 소리 누각에 들려오네 / 洞庭春浪坐來聲
하늘 끝처럼 아득히 고향과 한 번 떨어진 뒤 / 天涯一與舊山別
몇 번이나 강언덕 풀 나고 또 졌던가 / 江上幾看芳草生
난간에 홀로 기대 회포 풀기 어려운데 / 獨倚䦨干意難寫
흐느끼듯 들려오는 저녁 때 성 안의 피리 소리 / 暮笳嗚咽起孤城

하였는데, 그의 시 중에서 정밀하고 절실한 것이라 하겠다.
죽지가(竹枝歌)는 대대로 작자(作者)가 나왔지만 그 중에서도 유우석(劉禹錫)과 이섭(李涉) 두 사람의 작품이 가장 뛰어나다. 이섭의 시를 보면,

형문산 급한 여울 물소리 울려 오고 / 荊門灘急水潺潺
운무 가득한 산기슭엔 원숭이 울음소리 / 兩岸猿啼煙滿山
뱃머리에 탔던 소년 벼슬하러 떠나더니 / 渡頭年少應官去
해는 서산에 또 지는데 돌아오지 않는구나 / 日落西陵望不還

이라 하고, 또,

무협의 구름 걷히니 나타나는 신녀 사당 / 巫峽雲開神女祠
푸른 연못에 붉은 나무 그림자가 어른어른 / 綠潭紅樹影參差
하뢰수 입구에서 처음 만나 보았는데 / 下牢戍口初相問
무의탄 옆쪽에서 헤어지고 말았다오 / 無義灘頭剩別離

라 하고, 또,

천 겹의 석벽산에 수목은 만겹이라 / 石壁千重樹萬重
흰구름 비껴 걸려 부용봉을 가려주네 / 白雲斜掩碧芙蓉
왕소군(王昭君)이 해마다 보던 시냇가의 저 달이여 / 昭君溪上年年月
혼자만의 고운 자태 오늘 더욱 진하구나 / 獨自嬋娟色最濃

이라 하였으며, 유우석의 시를 보면,

강 언덕 붉은 누각 비가 멎고 쾌청한데 / 江上朱樓新雨晴
양서 지방 봄 물가엔 비단 물결 번지누나 / 瀼西春水穀文生
다리 이쪽 저쪽에는 수양버들 한들한들 / 橋東橋西好楊柳
오고 가는 사람들의 흥겨운 노래 소리 / 人來人去唱歌行

이라 하고, 또,

짙푸른 무협 안에 이슬비 내리는데 / 巫峽蒼蒼煙雨時
나뭇가지 꼭대기의 원숭이 울음 소리 / 淸猿啼在最高枝
수심 어린 사람 듣고 창자가 끊어지나 / 箇裏愁人腸自斷
본래는 그 소리가 슬픈 게 아니라오 / 由來不是此聲悲

라 하고, 또,

성 서쪽 문 앞에 버티고 선 염여퇴 / 城西門前灔澦堆
끊임없이 물결 쳐도 꺾이지를 않는다오 / 年年波浪不能摧
번뇌하는 사람 마음 돌과는 같지 않아 / 懊惱人心不如石
젊었을 땐 동으로 갔다 다시금 서로 오네 / 少時東去復西來

라 하였다.
유우석의 시재(詩才)는 당대에 으뜸이었다. 그런데 논하는 이들은 말하기를 “그의 시는 재주가 넘친 나머지 오히려 탈이 된 것이 많은데, 뒤에 와서 파공(坡公 소식(蘇軾))이 소싯적에 우석의 시를 공부했다.”고 한다.

조하(趙嘏)의 시는 〈의루(倚樓)〉만 좋은 것이 아니다. 가령,


이라는 시도 나름대로 훌륭하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천지간에 맑은 기운[淸氣]이 있는데 그 기운이 흩어져 시인의 몸 속으로 들어갔다.” 하였는데, 이 맑음[淸]의 속성을 갖는 것이 바로 시의 본령으로서 기이하다든가 굳건하다든가 하는 것은 오히려 부차적인 것이요, 험절하다든가 괴기스럽다든가 침착(沈着)하다든가 질실(質實)하다든가 하는 것 따위는 시도(詩道)와 더욱 동떨어진 것이라 할 것이다. 맑음이라고 하는 것은 높은 차원에서 우러나오는 것인데 그 높은 차원의 것은 성색(聲色)으로 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시는 반드시 무성지성(無聲之聲)과 무색지색(無色之色)을 얻어 맑고도 맑으며 밝고도 밝으며 담박하고도 담박하며 투명하고도 투명하게 되면서 외경(外境)이 나의 정신과 혼연 일체가 되고 나의 정신이 붓에 응해 표현될 수 있어야만 야호선(野孤禪)을 닦는 외도(外道)로 떨어지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의 거장(巨匠)들을 두루 살펴 보건대, 시간적인 여유를 갖고 지은 작품이 졸지에 응해 지은 것보다 낫고 초야(草野)에서 지은 시가 관각(館閣)에서 나온 것보다 우수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의도적으로 짓는 것은 자연적으로 우러나와 얻게 되는 것보다 못하기 때문이었다.
“연못가 언덕에 봄풀이 나고[池塘生春草]”라는 표현은 하기 어려운 말이 아니고, “빈 들보에서 제비집 진흙 떨어지네[空梁落燕泥]”라는 말은 눈 앞에 들어오는 정경을 읊은 것인데 마침내는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최고의 경지로 평가받고 있는 것은 이 시구들은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의도적으로 조작해 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시를 배우는 것은 신선술을 배우는 것과 같아 때가 되어야만 저절로 환골탈태(換骨奪胎)가 되는 것인데, 선인(仙人)에 범골(凡骨)이 없는 것처럼 아음(雅音)에도 범곡(凡曲)이 없는 것이다.” 하였는데, 이러한 자세를 견지해 나간다면 시를 지으면서 다른 길로 잘못 빠져들지 않게 될 것이다.


 

[주D-001]문장을 …… 지목하니 : 이한(李漢)의 《韓昌黎集序》에 “문장은 도를 꿰는 기구이다. 이에 깊은 조예가 없이 도에 이른 경우는 있지 않다.” 하였음.
[주D-002]사(史) : 형식이 내용을 앞서는 것. 즉 내용은 없이 겉만 번지르르하게 되는 것을 말함.《論語 雍也》
[주D-003]구금(鉤金)이나 …… 비유 : 구금은 혁대 끝에 달린 갈고리인데, 일반적인 현상을 무시하고 특별한 경우를 들어 우기는 것을 말함. 《孟子 告子下》에, 예(禮)가 식색(食色)보다 본래 중하지만 식색이 예보다 중한 경우로 한 갈고리의 쇠와 한 수레의 깃털의 무게를 비교하는 비유를 들면서 특별한 경우를 예로 들어 잘못된 주장을 펼치는 것을 반박하였음. 여신(輿薪) 즉 한 수레의 땔나무에 관한 비유는, 충분히 알 수 있는데도 일부러 인정하려 하지 않는 태도를 비평한 것임. 《孟子 梁惠王上》에, 터럭 끝을 살필 수 있는 시력을 갖고 있으면서 한 수레의 땔나무를 보지 못하는 것은 그렇게 좋은 시력을 활용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대목이 나옴.
[주D-004]당시(唐詩)의 …… 정밀하다 : 《당시품휘(唐詩品彙)》는 명(明) 나라 고병(高棅)이 편집한 것으로 90권에 습유(拾遺) 10권으로 되어 있으며 모두 6백 20가(家)의 작품 5천 7백 69수를 수록하였음. 《당음》은 14권으로 원(元) 나라 양사굉(楊士宏)이 편찬했는데 엄정하게 선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장진(張震)의 주가 붙어 있음. 이밖에 《당시선》은 명 나라 이반룡(李攀龍)이, 《만수선》은 송(宋) 나라 홍매(洪邁)가, 《백가시》는 송 나라 왕안석(王安石)이 지었음.
[주D-005]한 번 …… 비슷하다 : 남종과 북종은 중국 선종(禪宗) 제 5조(祖) 홍인(弘忍)의 제자인 혜능(慧能)과 신수(神秀)로부터 분립된 두 종파인데, 한 번 깨달아 견성(見性)을 하면 그만이라는 돈오 사상과 조금씩 점진적으로 닦아 나가야 한다는 점수 사상이 여기에서 비롯된다. 성문과 벽지불은 대승(大乘) 측에서 소승(小乘)의 수행 경지를 폄하하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으로서 문자적으로는 각각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듣고 깨우치거나 외연(外緣)을 통해 스승 없이 혼자 깨닫는 이를 말하는데, 우리 나라 선불교는 혜능의 사상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주D-006]밧줄만 …… 잡아오고 : 한(漢) 나라의 종군(終軍)이 남월왕을 결박해 대궐에 바치겠으니 긴 밧줄을 달라고 청한 고사인데, 뒤에는 군대에 투신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의미로 쓰이게 되었음. 《漢書 終軍傳》
[주D-007]수레에 …… 받자 했네 : 전국 시대에 역이기(酈食其)가 편안하게 수레를 타고 유세하면서 제 나라의 70여 성을 항복받았던 고사인데,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목적을 달성한다는 의미로 쓰이게 되었음. 《漢書 食其傳》
[주D-008]계포가 …… 없었었고 : 한(漢) 나라 계포가 한 번 승락하면 반드시 지켰다는 고사로서 초(楚) 나라 속담에 “황금 1백 근을 얻기보다는 차라리 계포의 승락을 한 번 얻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함. 《史記 季布傳》
[주D-009]후영은 …… 지켰지요 : 후영은 전국시대 위(魏) 나라의 은사(隱士)로서 신릉군(信陵君)의 빈객이 되었는데, 신릉군이 조(趙)를 구원할 때 진비(晉鄙)를 죽여 병부(兵符)를 빼앗은 뒤 한단(邯鄲)의 포위를 풀게 하였음. 이때 연로하여 직접 따라가지 못하고 기일을 따져 자결함으로써 전송하겠다고 약속하였는데, 실제로 그 말대로 목을 찔러 자살하였음. 《史記 卷77 侯嬴傳》
[주D-010]싸늘한 …… 빛나도다 : 벌써 꽃이 떨어져 없을 겨울날 칼 표면에 새겨져 있는 꽃잎과, 달빛이 희미해질 새벽녘에 달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활을 소재로 등장시키면서, 칼과 꽃ㆍ활과 달을 묘하게 대비시킴으로써 숨막히는 전쟁터의 이미지를 내밀하게 압축시키고 있음.
[주D-011]칼 한 번 …… 뭉게뭉게 : 〈劉生〉이라는 시의 5~6 구(句)임.
[주D-012]전별하던 …… 적시누나 : 〈送豐城王少府〉라는 시의 3~4 구임.
[주D-013]여라(女蘿)의 …… 염불 소리 : 〈游梵宇三學寺〉라는 시의 5~6 구임.
[주D-014]시냇가의 …… 못하겠네 : 〈麻平晩行〉이라는 시의 5~6 구임.
[주D-015]나뭇가지 …… 노니누나 : 〈春晩山莊率題 二首〉 중 첫번째 시의 3~4 구임.
[주D-016]텅 빈 …… 남아 있네 : 〈文翁講堂〉이라는 시의 3~4 구임.
[주D-017]진으로 …… 춥다 하네 : 〈秋雁〉이라는 시의 3~4 구임.
[주D-018]수풀은 …… 같구나 : 〈玄上人林泉 二首〉 중 첫번째 시의 3~4 구임. 중산대부는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혜강(嵇康)을 말함. 희황상인은 복희씨(伏羲氏) 이전 태고 때의 사람으로서 세상일을 잊고 한가롭게 지내는 사람을 말함.
[주D-019]잿빛 …… 쫓아오네 : 〈正月十五夜〉라는 시의 3~4 구임.
[주D-020]달 비친 …… 현묘해지도다 : 〈同王員外雨後登開元寺南樓因酬暉上人獨坐山亭有贈〉이라는 시의 5~6 구임. 상촌집에는 “煙霞思獨玄”으로 되어 있으나 〈全唐詩〉에 의거, 煙을 雲으로 바로잡았음.
[주D-021]저 늙은 …… 돋는구나 : 〈送東萊王學士無競〉이라는 시의 5~6 구임.〈全唐詩〉의 원문에 의거, 상촌집의 “衆木獨芳春”의 獨을 愛로 바로잡았음.
[주D-022]술 속에 …… 뜬 구름 : 〈秋夜宴臨津鄭明府宅〉이라는 시의 3~4 구임.
[주D-023]새벽 …… 버들개지 : 〈和晉陵陸丞早春遊望〉이라는 시의 3~4 구인데, 혹 위응물(韋應物)의 시라는 설도 있음.
[주D-024]탑파(塔婆)는 …… 드리웠네 : 〈遊少林寺〉라는 시의 3~6 구임.
[주D-025]바람이 …… 재잘재잘 : 〈春日芙容園侍宴應制〉라는 시의 5~6 구임.
[주D-026]새벽 구름 …… 돌아가누나 : 〈扈從登封途中作〉이라는 시의 3~4 구임.
[주D-027]함곡관(函谷關)은 …… 있네 : 〈登禪定寺閣〉이라는 시의 5~6 구임. 상촌집엔 “毘明落日邊”으로 되어 있는데 《全唐詩》에 의거, 明을 池로 바로잡았음.
[주D-028]상제님 …… 멈추었네 : 〈奉和七夕兩儀殿會宴應制〉라는 시의 5~6 구임.
[주D-029]덜렁 …… 놀라네 : 〈城〉이라는 시의 5~6 구인데, 외따로 떨어져 있는 선인관의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묘사한 것임. 선인관은 섬서성(陝西省) 봉현 서남쪽에 있음. 한 성제(漢成帝) 때 어사대 안의 잣나무에 늘 까마귀 수천 마리가 서식하면서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오곤 하였으므로 조석오(朝夕烏)라고 했다는 고사가 있음. 상촌집에 나오는 “群輕御史烏”의 輕은 驚의 잘못임.
[주D-030]돌맹이 …… 퍼지네 : 〈奉和聖製登驪山高頂寓目應制〉라는 시의 3~4 구임. 상촌집에 나오는 “天語半岩聞”의 岩은 空의 잘못임.
[주D-031]따뜻한 …… 비추누나 : 〈扈從溫泉奉和姚令公喜雪〉이라는 시의 5~6 구임.
[주D-032]대나무 …… 노래 소리 : 〈奉和聖製過寧王宅應制〉라는 시의 5~6 구임.
[주D-033]약속한 …… 않다오 : 〈岳州宴別潭州王熊二首〉 중 둘째 시의 3~4 구임. 상촌집에는 “容華歲不同”이라고 하였는데,《全唐詩》에 의거하여 容을 榮으로 바로잡았음.
[주D-034]춤추며 …… 주누나 : 〈鳳樓尋勝地〉라는 시의 5~6 구임.
[주D-035]산천 경개는 …… 같구나 : 〈奉和聖製途次陝州作〉이라는 시의 3~4 구임. 삼진(三晉)은 한(韓)ㆍ위(魏)ㆍ조(趙)를 말하고, 양경(兩京)은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을 말함.
[주D-036]별이 …… 수행하도다 : 〈奉和聖製初出洛城〉이라는 시의 5~6 구임.
[주D-037]외로운 …… 울리는가 : 〈初秋憶金均兩弟〉라는 시의 3~4 구임.
[주D-038]초산은 …… 평온하다 : 〈江樓夕望〉이라는 시의 3~4 구임.
[주D-039]바람 불어 …… 길어나네 : 〈子夜春歌〉의 3~4 구임.
[주D-040]구름 낀 …… 가을 맞네 : 〈送人之車〉라는 시의 5~6 구임.
[주D-041]등불을 …… 다섯 호수 : 〈宿雲門寺閣〉이라는 시의 3~4 구임. 상촌집에 있는 “捲幔五湖秋”의 捲을 〈全唐詩〉에 의거하여 卷으로 바로잡았음.
[주D-042]정시음(正始音) : 정시풍(正始風)과 같은 말로서 중국 삼국(三國) 시대 위(魏) 나라 정시(正始 240~249) 연간에 성행했던 청담풍(淸談風)의 시체(詩體)를 말함.
[주D-043]고의(古意) : 원제(原題)는 〈古意呈補闕喬知之〉인데 혹 〈獨不見〉이라고 하기도 함. 이 시는 〈獨不見〉이라는 고악부(古樂府)의 뜻을 취해서 젊은 아낙네가 규방을 홀로 지키는 애달픈 정을 표현한 것임.
[주D-044]울금초 …… 부인 집 : 노씨네 부인과 관련하여 양 무제(梁武帝)의 《河中之水歌》가 전해 오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하수는 동쪽으로 흐르는데 낙양 소녀의 이름 막수(莫愁)였네. 12세 되자 비단 짜고 14세엔 누에 쳤네. 15세엔 노씨에게 시집을 가 16세에 아후같은 애 낳았네. 계수나무 들보에 깨끗하게 꾸민 방 언제나 울금초 향기 감돌곤 하였다오[河中之水向東流 洛陽女兒名莫愁 年來十二能織綺 十四採桑南陌頭 十五嫁爲盧家婦 十六生兒似阿侯 盧家蘭室桂爲梁 中有欝金蘇合香].” 상촌집에 기재된 “欝金香”의 香 대신에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堂으로 대치시켰는데, 《全唐詩》에 “혹 香으로도 되어 있다.”고 하였음.
[주D-045]변방의 …… 도네 : 《塞下曲 6首》 가운데 첫째 시의 1~2 구임.
[주D-046]《문장정종(文章正宗)》 : 송(宋) 나라 진덕수(眞德秀)가 당(唐) 이전의 글을 사명(辭命)ㆍ의론(議論)ㆍ서사(敍事)ㆍ시가(詩歌)의 넷으로 분류하여 20권으로 편찬한 책임.
[주D-047]구름 속에 …… 같네 : 상촌집에는 “月在雲間黑”으로 되어 있는데, 《全唐詩》에 의거하여 間을 中으로 바로잡았음.
[주D-048]〈기원교서(寄元校書)〉 : 원제(原題)는 《初發揚子寄元大校書》로서 양자(揚子)는 양자강을 말함.
[주D-049]제량조(齊梁調) : 중국 남북조 시대 제(齊)ㆍ양(梁) 양조(兩朝) 사이에 유행했던 시체(詩體)로서 성정(性情)의 표현보다는 성조(聲調)와 수사학(修辭學)적인 기교가 더욱 발달하였음.
[주D-050]천오 : 호랑이 몸에 사람의 얼굴을 하고 팔과 다리가 각각 8개인 바다 귀신임.
[주D-051]서왕모(西王母)의 복사꽃 : 3천 년에 한 번 꽃이 피고 3천 년 만에 열매를 맺는다고 함.
[주D-052]팽조와 무함 : 팽조는 전욱(顓頊)의 후손으로서 순(舜) 때부터 주(周) 나라에 이르기까지 7백여 년을 살았다고 하며, 무함은 약초를 캐어 먹으며 장생했다고 함.
[주D-053]정도호가(丁都護歌) : 악부(樂府)의 노래 이름. 송 고조(宋高祖)의 딸의 남편 서규(徐逵)가 노궤(魯軌)에게 피살되자 고조가 도호인 정우(丁旴)에게 장사지내 주도록 하였는데, 서규의 처가 울부짖으며 찾아와 장례에 관한 일을 물어 볼 때마다 정도호를 애달프게 불렀던 고사로서 그 소리가 애절하였으므로 후대의 사람들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 함. 《昌谷集註》
[주D-054]평원군 같은 …… 뿌리겠네 : 조(趙) 나라의 평원군이 선비를 사랑하였으므로 그와 같은 사람은 중하게 여겨 주겠다는 뜻임.
[주D-055]톰방톰방 …… 받아 먹고 : 물시계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두꺼비 형상의 물통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 것으로 시간이 쉬지 않고 흐르는 것을 뜻함.
[주D-056]여공은 …… 돌아왔는데 : 여공은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이고 자릉은 광무(光武)와 동문 수학했던 엄광(嚴光)임.
[주D-057]반계에 …… 노인 : 태공망 여상을 말함. 문왕(文王)이 반계에 와서 여상을 만났다고 함. 상촌집 원문에는 “所嗟白首磻溪老”로 되어 있는데 《溫飛卿詩集箋注》에 의거하여 老를 叟로 고쳤음.
[주D-058]제중산(題仲山) : 중산은 한 고조(漢高祖)의 형 중(仲)이 살았던 곳임.
[주D-059]장릉 : 한 고조의 능임.
[주D-060]〈승평악곡(昇平樂曲)〉 : 원제는 〈만세승평악곡(萬歲昇平樂曲)〉으로서 송(宋) 나라 이덕승(李德昇)이 지었음.
[주D-061]저궁(渚宮) : 춘추 시대 때 세운 초(楚) 나라의 별궁(別宮).
[주D-062]유곤 : 좌사(左思)ㆍ곽박(郭璞)과 함께 동진(東晉)의 세 시걸(詩傑)로 일컬어지는데, 진이 남도(南渡)한 뒤 사직신(社稷臣)으로 자처하며 복수하기 위해 비통해하면서 피눈물로 시를 썼다고 함.
[주D-063]사조 : 남제(南齊) 사람으로 오언시(五言詩)에 능했으며 글씨도 잘 썼음.
[주D-064]백설가 : 곡조가 고상하여 예로부터 부르기 어려운 곡으로 꼽혀 온 초(楚) 나라의 가곡임.
[주D-065]무황의 …… 벌였었지 : 무황은 당 현종(唐玄宗)이고, 용진은 용지(龍池)로 현종이 태자로 있을 때의 저택에 있었던 못 이름이다.
[주D-066]10년 동안 …… 아니라오 : 원제(原題)는 〈離平泉馬上作〉임. 그런데 《李衛公別集 卷4》에 나와 있는 것과 비교해 보면 상촌집에 수록된 것과 같지 않은 문자가 다수 발견된다. 참고로 소개하면, 제2구에서 상촌집의 侍從身이 一品身으로, 제3구에서 豹가 雉로, 제5구에서 “黑山永絶和親路”가 “黑山永破和親虜”로, 제6구에서 坑이 阬으로, 제7구에서 歸가 ‘臨’자로 되어 있음.
[주D-067]정(鄭)ㆍ위(衛)의 음 : 속되다는 뜻임.
[주D-068]장우(張祐) : 원명은 장호(張祜)인데 《唐詩選》에는 장우(張祐)로 되어 있음.《全唐詩 小傳》
[주D-069]강물 가 …… 누워 있네 : 〈曲江 二首〉에 나옴.
[주D-070]부귀가 …… 관리로다 : 〈四休居士詩〉에 나옴. 상촌집에는 “富貴何曾潤髑髏”로 되어 있는데 《黃山谷詩集》에 의거하여 曾을 時로 바로잡았음.
[주D-071]까마귀 …… 깃들고 : 喬木의 喬 자가 상촌집에는 古로 되어 있으나 《蘇東坡詩集》에 의거하여 바로잡았음.
[주D-072]팥배나무 …… 비추는데 : 상촌집에는 “白楊樹”로 되어 있는데, 樹는 路의 잘못이기에 바로잡았음.
[주D-073]팥배나무 …… 비추는데 : 이 시는 소동파가 백거이의 〈寒食野望吟〉을 일부 고쳐서 지은 〈與郭生遊寒溪〉라는 시인데, 아마도 상촌의 착오인 듯함. 백거이의 시에는 1구와 2구가 각각 “丘墟郭門外 寒食誰家哭”으로 되어 있으며 또 5구의 “白楊路”는 “白楊樹”로 되어 있는데 그 나머지는 모두 같음.
[주D-074]옹문주(雍門周) : 전국 시대 때 가야금과 가곡의 명인으로 일컬어졌는데, 맹상군(孟嘗君)을 한없이 슬프게 하여 눈물을 줄줄 흘리게 하였다 함.《說苑 善說》
[주D-075]붉은 빛 …… 비추고 : 상촌집에 “口照梁”으로 되어 있는데 《王司馬集》에 의거하여 口를 日로 바로잡았음.
[주D-076]그의 절조 …… 것이다 : 두 사람 모두 주전충이 찬위(簒位)한 뒤 불렀어도 그에게 나아가지 않았는데, 특히 사공도는 애제(哀帝)가 시해되었을 때 단식하고 죽었다.
[주D-077]〈피지(避地)〉 : 원제(原題)는 〈피지한식(避地寒食)〉이다. 피지라는 제목의 시가 따로 전해온다. 상촌집과 《韓內翰別集》에 수록된 원문을 비교해 보면 다른 글자가 다수 눈에 띈다. 참고로 소개하면, 상촌집 제3구의 殘이 濃으로, 제5구의 遠이 辱으로, 少가 薄으로, 제 8구의 取는 敢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는 《韓內翰別集》에 따랐다.
[주D-078]〈춘진(春盡)〉 : 이 시 역시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다른 글자가 다수 있는데,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상촌집에는 제3구의 草는 水로, 제5구의 間은 閑으로, 有은 得로, 제6구의 勝은 迵으로 되어 있다.
[주D-079]죽지가(竹枝歌) : 악부(樂府)의 한 체(體)로서 남녀의 정사(情事)나 풍속을 주조(主調)로 삼았다. 당(唐) 나라 유우석(劉禹錫)이 낭주(郞州)로 유배되었을 때 지은 「신사(新詞)」 9수(首)를 효시로 함.
[주D-080]의루(倚樓) : 조하(趙嘏)가 지은 〈長安秋夕〉이라는 칠언율시의 제4구에 나오는 말인데, 두목(杜牧)이 바로 그 귀절을 무척이나 좋아하였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조하를 조의루라고 칭하기까지 하였음. 참고로 그 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雲物凄涼拂曙流 漢家宮闕動高秋 殘星數點雁橫塞 長笛一聲人倚樓 紫艶半開籬菊淨 紅衣落盡渚蓮愁 鱸魚正美不歸去 空戴南冠學楚囚”
[주D-081]연꽃 …… 길구나 : 〈宿楚國寺有懷〉라는 시인데, 제7구의 荒 자가 상촌집에는 黃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음.
[주D-082]야호선(野孤禪)을 …… 외도(外道) : 선학(禪學)을 닦아 증득하지도 못했으면서 아는 체하며 자만심을 내는 자를 말함.
[주D-083]연못가 …… 나고[池塘生春草] : 사영운(謝靈運)의 〈登池上樓〉에 나옴.
[주D-084]빈 들보에서 …… 떨어지네 : 설도형(薛道衡)의 〈昔昔鹽〉과 〈人日思歸〉에 나옴.

 

 

상촌선생집 제59권
 청창연담 중(晴窓軟談中)
청창연담 중(晴窓軟談 中)


《수훤록(樹萱錄)》에 은군자(隱君子) 원찬(元撰)이 꿈 속에서 오왕(吳王) 부차(夫差)와 당(唐) 나라의 여러 시인들이 음영(吟詠)하는 것을 본 일을 기록해 놓았다. 그 가운데 이 한림(李翰林 이백(李白))의 시를 보면,

부용꽃 맺힌 이슬 붉은 가지 휘게 하고 / 芙蓉露冷紅壓枝
산새도 가을이 슬퍼 꽃밭에서 울어대네 / 幽禽感秋花畔啼
그리운 임 한 번 가서 아직 아니 오시는데 / 玉人一去未回馬
들보에 깃든 제비 세 차례나 돌아왔네 / 樑間燕子三見歸

라 하였고, 장 사업(張司業 장적(張籍))의 시를 보면,

초록 머리 오리 새끼 부평초 돌며 헤엄치고 / 綠頭鴨兒匝萍藻
연 따는 아가씨 꽃 꽂은 노인에 웃음짓네 / 採蓮女郞笑花老

라 하였고, 두 사인(杜舍人 두목(杜牧))의 시를 보면,

한밤중 전쟁터 저 북소리 바람결 따라 들려 오고 / 鼓鼙夜戰北窓風
서리 맞은 단풍 잎새 섬돌에 마구 쌓여 있네 / 霜葉沿階貼亂紅

이라 하였고, 두 공부(杜工部 두보(杜甫))의 시를 보면,

보랏빛 동정에 넉넉한 옷차림 술을 걸러 내오나니 / 紫領寬袍漉酒巾
적막한 강 언덕의 한가한 사람이라 / 江頭蕭散作閑人

이라 하였고, 백 소부(白少傅 백거이(白居易))의 시를 보면,

낙엽이 슬퍼서 숲 떠나는게 아니라오 / 不因霜葉辭林去
아마도 저 늙은인 가을 온 줄도 모를게요 / 的當山翁未覺秋

라 하였고, 이하(李賀)의 시를 보면,

고기 비늘 구름 새로 푸른 하늘 언뜻 뵈고 / 魚鱗甃空排嫰碧
이슬 맺힌 나뭇가지 둥근 벽에 걸려 있네 / 露桂梢寒掛團壁

이라 하였는데, 각 구절의 표현들에 모두 재기가 엿보인다.
당자서(唐子西 송(宋) 당경(唐庚))의 어록(語錄)에 “두 사(謝)씨의 시가 묘한 점은 대체로 코에 흰 흙이 없고 눈에 꺼풀이 없다고 하는 면에 있다. 코에 흰 흙이 없으니 자귀를 어디에 쓸 것이며 눈에 꺼풀이 없으니 대칼을 어디에 쓸 것인가. 그야말로 아주 쉽게 저절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가공할 필요가 없는 천구(天球 옹주(雍州)에서 공물로 바치던 하늘색의 옥)라고나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영운의 시에,

이름 날리려 하는 것은 도에 부족한데 / 矜名道不足
분수에 만족하면 외물이야 상관없지 / 適己物可忽

이라 하고, 또

청명한 날 마음이 절로 즐거워져 / 淸暉能娛人
조용히 노닐면서 돌아갈 줄도 모르누나 / 游子澹忘歸

라 하였으며, 현휘(玄暉)의 시에,

봄 풀은 가을 되어 다시금 푸르른데 / 春草秋更綠
한 번 떠난 공자는 돌아올 줄 모르누나 / 公子未西歸

라 하고, 또

저 큰 강 밤낮없이 흘러 가고 / 大江流日夜
나그네의 마음은 하염없이 슬퍼지네 / 客心悲未央

이라 하였는데, 이런 말들은 모두 다른 사람들이 하지 못했던 표현들이다.
이 추관 함용(李推官咸用)은 당(唐) 나라 사람이다. 그의 시를 보면 재기가 무척 번뜩이는데, 가령

만나서 볼 때에는 아무 말도 못하고서 / 見後却無語
헤어지고 난 뒤에야 혼자 고민하는구나 / 別來長獨愁

라고 한 것이나, 또

위태로운 성 삼 면에 모두 물이 출렁 / 危城三面水
오래 된 나무 한 쪽 편엔 봄 기운이 활짝 / 古樹一邊春

이라고 한 것이나, 또

눈 쌓인 산봉우리 달빛이 더욱 밝고 / 月明千嶠雪
한밤중 바람소리 여울 물이 급해지네 / 灘急五更風

이라고 한 것이나, 또

연기는 가셨어도 불꽃은 타오르고 / 煙殘偏有焰
눈이 많이 오는데도 소리 하나 나지 않네 / 雪甚却無聲

이라고 한 것이나, 또

다섯 가지 색깔로 내리는 봄 비 / 春雨有五色
비 뿌리고 난 뒤에 터지는 꽃망울 / 洒來花旋成

이라고 한 것이나, 또

구름에 가린 산 색깔 산뜻했다 고와지고 / 雲藏山色晴還媚
바람에 매인 물 소리 들렸다가 안 들리네 / 風約溪聲靜又回

라고 한 것이나, 또

술 취하기 전에 먼저 깬 뒤 생각 뭔지 아는데 / 未醉已知醒後憶
먼저 꽃 피우려단 먼저 지는 근심 있으리 / 欲開先爲落時愁

라고 한 것 등은 스스로 미칠 수 없는 것들이다.
황도(黃滔)라고 하는 자도 당(唐) 말엽의 사람인데, 그의 〈문안(聞雁)〉이라는 시를 보면,

꿈결에 들리는 기러기 울음 소리 / 一聲初觸夢
아 어느덧 머리는 반백 / 半白已侵頭

이라 하고, 또 〈여박(旅泊)〉이라는 시를 보면,

연등은 벽에 달싹 붙어 있고 / 餘燈依古壁
조각달은 물가로 내려가누나 / 片月下滄洲

라 하고, 또 〈유동림사(遊東林寺)〉라는 시를 보면,

삼복 날씨에 비 내리니 절간에 한기 돌고 / 寺寒三伏雨
세월의 무게에 못이겨서 소나무 가지 늘어졌네 / 松偃數朝枝

라 하고, 또 〈퇴거(退居)〉라는 시를 보면,

푸른 산엔 썰렁하게 비구름 감기우고 / 靑山寒帶雨
한밤중 나무 위엔 원숭이 울음 소리 / 古木夜啼猿

이라 하였다. 이것들은 대체로 한악(韓偓)이나 오융(吳融) 계열의 작품이라 할 것인데,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없기 때문에 기록해 둔다.

산 속이 썰렁하여 이끼도 마르고 / 山寒石髮瘦
물이 다 빠지고 나니 수초도 시들었네 / 水落溪毛凋

라 한 것은 사무일(謝無逸 송(宋) 사일(謝逸))의 시인데, 황노직(黃魯直 황정견(黃庭堅))은 조보지(晁補之)나 장뢰(張耒) 계통의 작품이라고 하였다.
여 형양(呂滎陽 형양군공(滎陽郡公)에 봉해진 송(宋) 여희철(呂希哲))이 부리(符離)에 있을 때 지은 시를 보면,

부귀는 허공 속의 꽃이요 / 富貴空中花
문장은 나무 위의 혹이라 / 文章木上癭
실상의 세계를 알아야 하나니 / 要知眞實地
그러면 화엄의 경지 펼쳐지리라 / 惟有華嚴境

이라 하였는데, 여씨 집안은 대대로 선학(禪學)을 좋아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손들은 일 끝내고 돌아갈 때 흩어지고 / 客從謝事歸時散
시는 아무도 안 좋아해야 훌륭해진다 / 詩到無人愛處工

이라 하고, 또

외물에 안 흔들려야 학문한다 할 것인데 / 外物不移方是學
속인은 좋아는 해도 지을 줄은 모르네 / 俗人猶愛未爲詩

라고 한 것은 육검남(陸劍南 송(宋) 육유(陸游))의 작품인데, 이를 두고 유후촌(劉後村 송 유극장(劉克莊))은 털가죽이 모두 벗겨졌다고 평하였다.

닭도 개도 안 울 때에 조수는 반쯤 빠지고 / 雞犬未鳴潮半落
두화촌에 들려 오는 풀벌레 울음 소리 / 草蟲聲在豆花村

이라 한 것은 송(宋) 나라 말엽 유응시(劉應時)의 작품인데 대체로 반산 노인(半山老人 왕안석(王安石))의 계열이라 하겠다.
송(宋) 나라 구백위(歐伯威)는 여릉(盧陵) 사람으로 주익공(周益公)과 친했는데 과거 시험에 실패한 뒤 시작(詩作)에 전념하였다. 그의 시 가운데 가령

가을바람 타고서 한밤중에 내리는 비 / 西風五更雨
남쪽의 기러기떼 전해 준 몇 줄 소식 / 南雁數行書

이라고 한 것이나, 또

기자국에서 시 한 수 이루고서 / 詩成夔子國
중선루에서 한 사람 소요하도다 / 人在仲宣樓

라고 한 것이나, 또

가랑비 오는데 짝지어 백로 날고 / 細雨雙飛鷺
썰렁한 배 도롱이 쓰고 혼자서 낚시하네 / 寒蓑獨釣船

라고 한 것이나, 또

천 리 밖 꿈 속을 치달리다가 / 夢回千里外
등불 돌려 창을 보니 어느새 밤이 깊네 / 燈轉一窓深

라고 한 것이나, 또

그 누가 알았으랴 반 넘어 꽃 질 적에 / 誰知花過半
술 한 병 달랑 들고 찾아오게 될 줄을 / 纔與酒相尋

이라고 한 것이나, 또

놀라워라 옛 친구 얼굴 보다니 / 故人驚會面
자초지종 얘기함에 원통한 생각 새로 드네 / 新恨說從頭

라고 한 것이나, 또

흰 달빛 맞으며 검은 원숭이 통곡하고 / 月白玄猿哭
귀뚜리 울음소리 갈수록 슬프구나 / 更殘絡緯悲

라고 한 것이나, 또

느닷없이 이렇게 이별하게 될 줄이야 / 語離遽如許
어느 때 또 다시 옛 이야기 나눠볼까 / 話舊復何時

라고 한 것이나, 또

이 마을 저 마을 사람 불러 술 마시고 / 巷南巷北人招飮
비 왔다 개었다 꽃 보기 정말 좋네 / 一雨一晴花耐看

이라고 한 것이나, 또

찾아온 손님 하나 호걸풍의 재야인사 / 有客過門湖海士
이웃 사람 불러내어 순식간에 어울렸네 / 隔籬呼取咄嗟間

이라고 한 것이나, 또

꿈결 속에 한림원(翰林院)을 돌아보고 나왔는데 / 夢回金馬玉堂上
얼음 단지 눈 접시에 글이 가득 쌓였더라 / 文在氷甌雪椀中

이라고 한 것이나, 또

산은 옛 산인데 인정은 옛 정 아니구나 / 靑山如故情非故
풀만 봐도 우울해져 시 한 수로 시름 쫓네 / 芳草喚愁詩遣愁

라고 한 것이나, 또

연인들 사이좋게 사랑 얘기 나누는데 / 擾擾情人相顧語
쓸쓸히 낙엽지는 이 가을을 어찌 하나 / 蕭蕭落木不勝秋

라고 한 것이나, 또

풍경을 보니 꽃 소식이 올라 오는 듯 / 風色似傳花信到
가늘게 내쏘는 석양 빛에 버들 끝이 푸르구나 / 夕陽微放柳梢靑

라고 한 것이나, 또

천리 길 돌아오니 인간 세상 변했는데 / 千里歸來人事改
이 몸뚱이 십 년 동안 보존된 것 다행이네 / 十年猶幸此身存

라고 한 것이나, 또 그의 절구(絶句) 4수(首)에

못내 그리워 붙어 있는 꽃송이 물기에 젖어 날리지 않고 / 戀樹殘紅濕不飛
눈처럼 떨어진 버들꽃 옷에 물이 배이누나 / 楊花雪落水生衣
그 동안의 온갖 생각 싸늘히 재로 변했는데 / 年來百念成灰冷
말 없이 봄 보내니 봄 혼자서 돌아가네 / 無語送春春自歸

라 하고

뽕나무며 삼나무 비 맞고는 더 푸르고 / 桑麻得雨更靑葱
작약도 봄 붙잡아 늦 꽃잎을 피웠구나 / 芍藥留春結晩紅
괴이하다 이렇듯 좋은 새 소리가 들리다니 / 怪得鳥聲如許好
첩첩 산중에 있는 듯 착각에 빠지누나 / 此身如在亂山中

이라 하고

가련타 빨간 살구 가지가 늘어지고 / 爲憐紅杏亞枝斜
석양 빛은 어디론가 까마귀떼 전송하네 / 看到斜陽送亂鴉
봄철이 또 왔는데 모질게도 살려두어 / 又是一春窮不死
한스러움 속에 품고 봄 경치 보게 한단 말가 / 天敎留恨看鶯花

라 하고

배 안에 드러누워 빗방울 소리 듣자하니 / 蓬窓臥聽疏疏雨
한밤중 파초 잎에 떨어지는 소리 같네 / 却似芭蕉半夜聲
물 안개 하늘을 덮고 하늘은 우산 위에 붙어 있는데 / 煙浪蔽天天倚蓋
그 속을 날아가는 갈매기 흰 점 하나 / 略容一點白鷗明

이라 한 것 등은 모두가 기발한 표현들인데, 양성재(楊誠齋 송(宋) 양만리(楊萬里))는 일찍이 말하기를 “새 울고 꽃 지는 계절 완전히 심기(心氣)에 들어맞는 곳에서 큰 술잔을 기울이고 백위의 시를 음미하면서 바람 기운을 타고 노닐고 싶다.” 하였다.
문여가(文與可)는 이름은 동(同)이고 촉(蜀) 나라 사람으로서 진사시(進士試)에 우등으로 합격했는데 시의 품격이 고결하다. 동파(東坡)는 여가에게 4절(絶)이 있다고 하면서 첫째로 초사(楚辭) 둘째로 초서(草書) 셋째로 시(詩) 넷째로 화(畫)를 꼽았으며, 온공(溫公 사마광(司馬光))도 그의 운격(韻格)이 맑고 깨끗하다고 하면서 마치 맑게 갠 하늘의 가을 달과 같다고 하였다. 진왕권의(秦王卷衣)라는 시편이 세상에 회자(膾炙)되고 있는데, 그 시를 보면,

 함양에 있는 진 나라 왕실이여 / 咸陽秦王家
 아침 노을에 궁궐 밝아오도다 / 宮闕明曉霞
 푸르게 새긴 장식에 단청 무늬 아른거리고 / 丹文映碧鏤
 서로들 광채 받아 영롱함 더하누나 / 光彩相鉤加
 청동으로 된 용은 은 사자를 쫓아가고 / 銅螭逐銀猊
 짓누르는 건물 지붕 뭇 생령 위에 군림하네 / 壓屋矜蟠挐
 대궐 안 그 속에 해와 달도 갇혔나니 / 洞戶鎖日月
 온갖 광경 그야말로 으리으리하였다오 / 其中光景賖
 봄 바람 건듯 불어 구슬 발이 흔들리니 / 春風動珠箔
 난새 액자 황금 자리 살짝 비껴 엿보이네 / 鸞額金窠斜
 부채도 놔둔 채 미인 홀로 앉아서는 / 美人却扇坐
 뜰 아래 떨어진 꽃 부끄럽게 만드누나 / 羞落庭下花
 옥가락지 낀 손 한가롭게 놀리면서 / 閑弄玉指環
 엷은 얼음 부서지듯 홍아 악기 탄주하네 / 輕氷扼紅牙
 군왕이 돌아보고 미소를 지으면서 / 君王顧之笑
 칠보 장식 수레를 멈추라 명령했네 / 爲駐七寶車
 황금으로 새긴 의복 스스로 말아 드니 / 自卷金鏤衣
 용과 난새 꽃들 무늬 휘황하게 어울렸네 / 龍鸞蔚紛葩
 사랑하는 여인에게 선물로 갖다 주며 / 持以贈所愛
 이로써 끝없이 가연(佳緣)을 맺자 했네 / 結歡其無涯

라고 하였다
. 세상에서는 이를 잘 알지 못하기에 그 사람의 이력과 함께 기록해둔다.
송 나라 왕종 정부(王從正夫)는 호를 삼근재(三近齋)라 하는데, 그의 시 가운데 가령

낙엽은 다 졌어도 나무들 힘 있게 서 있고 / 落木森猶力
썰렁한 산 아무 생각없이 담담하기만 하구나 / 寒山淡欲無

라든가, 또

높은 누각 올라 와 먼 곳을 바라보니 / 地逈高樓目
차가운 날씨 고향 생각 간절하네 / 天寒故國心

이라든가, 또

산들바람 타고서 먼 데 피리 소리 들려 오고 / 涼風回遠笛
어스름 저녁 빛 띠고 고깃배 돌아오네 / 瞑色帶歸舟

라든가, 또

먼지 낀 마음 물로 인해 깨끗해지고 / 塵心依水淨
돌아가는 귀밑머리 산과 더불어 푸르구나 / 歸鬢與山靑

같은 것은 만당(晩唐)의 시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고, 또 가령

떨어진 꽃술 모두 제비 새끼 몫일텐데 / 墮蘂盡應輸燕子
게으른 추위는 여전히 배 꽃 위에 앉아 있네 / 懶寒猶及占梨花

라든가, 또

한 번 비 바람 몰아치니 한식이 성큼 다가오고 / 一番風雨催寒食
꽃은 만발 꾀꼬리 울음 고향 생각이 절로 나네 / 千里鸎花想故園

이라든가, 또

몸이 한가하여 술타령하고 지내는데 / 身閑更得憑陵酒
일찍 핀 꽃이어니 애석한 봄은 아니로다 / 花早殊非愛惜春

이라든가, 또

가을 기운 산봉우리 감도는데 구름은 엷고 / 秋生列岫雲猶薄
절벽 타고 흐르는 물 길을 좁게 만드네 / 泉瀨懸崖路更慳

같은 것은 강서시파(江西詩派 송 황정견(黃庭堅)을 종주로 하는 시의 일파) 가운데 놔두어도 차이를 발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당 나라 왕적(王績)은 바로 문중자(文中子 수(隋) 왕통(王通))의 아우로서 당 초기 시인 중에서 제1류로 꼽히는 인물인데 선집(選集) 가운데 나와 있는 시가 몇 수 되지 않는다. 가령

목동은 송아지 끌고 돌아 오고 / 牧人驅犢返
사냥말은 새 잡아 돌아오네 / 獵馬帶禽歸

라든가, 또

거문고 곡조는 오직 옛스러움을 남기고 / 琴曲唯留古
수많은 서책이 절반은 경이로다 / 書多半是經

이라든가, 또 〈독좌(獨坐)〉라고 하는 시에서

그대에 묻노니 한 동이 술 외에 / 問君樽酒外
혼자 앉아서 뭐가 더 필요한가 / 獨坐更何須
철리를 논하는 손만 있을 뿐 / 有客談名理
세금 내라 요구하는 사람은 오지 않네 / 無人索地租
아들 삼 형제 괜찮은 집 장가 갔고 / 三男婚令族
딸년 다섯도 좋은 남편 만났다오 / 五女嫁賢夫
한 평생 분수따라 그런대로 살았거니 / 百年隨分了
신선되고 싶은 마음 품어본 적 아예 없소 / 未羨陟方壺

라고 한 것들이 그것이다. 왕적은 대대로 특권을 누린 훌륭한 집안 출신으로 사우(師友) 사이에서도 은덕을 많이 입었으며 생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처지에서 한결같이 뜻을 세상 밖에 두며 절개를 굽혀 사람들을 찾아 다니지 않아도 되었으니 이른바 복덕(福德)과 지혜 모두를 소유한 자라고 하겠다.
일찍이 왕마힐(王摩詰 왕유(王維))이 배적(裴迪)에게 준 글을 보건대, 그 대략에 “밤에 화자강(華子岡)을 올라갔더니, 망천(輞川)에 잔 물결이 일면서 달과 함께 오르락내리락하고, 썰렁한 산의 먼 불빛이 숲 저쪽으로 보일락말락하고, 동네 안에서 추위에 떨며 짖는 개 소리가 표범처럼 들리고, 마을 어디선가 밤에 방아 찧는 소리가 다시 한참만에 들리는 종소리와 뒤섞여 간간이 들려 오더군. 이러한 때 혼자 앉아 있노라면 동복(童僕)도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있는데 그럴 때면 늘 손을 잡고 올라 가 시를 짓던 옛날 생각이 나곤 한다. 2월쯤 화초가 만발하고 송사리가 튀어 오르고 흰 갈매기가 날개를 떨치고 푸른 물가에 이슬이 젖고 보리밭에서 꿩이 아침에 울 때 나와 어울려 노닐 수 없겠나.” 하였는데, 이 글을 읽다 보면 미상불 상념에 잠기곤 한다. 망천(輞川)이야 본래부터 명승지로 꼽히는 곳이니 쉽게 얻을 수는 없다 할지라도 진정 자리잡은 곳이 있기만 하다면 각각 그곳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초막은 송추(松楸) 아래에 있다. 그 지역이 보잘 것은 없다 할지라도 강호(江湖)의 즐거움은 있고 집을 잘 꾸미지는 못했어도 한 몸 거처할 만한 공간은 있으며 곡식을 가꾸면 입에 풀칠은 할 수 있고 삼을 심으면 몸을 가리기에 충분하니 내가 자유스럽게 생활할 수만 있다면 안분지족(安分知足)하는 낙을 어찌 마힐에게 양보하겠는가. 그런데 뜻밖의 재변으로 말미암아 유배지에 갇히는 몸이 되고 말았다. 아, 마힐은 안록산(安祿山)의 변을 만났어도 다행히 관대한 은전을 입었었으니, 확실히 선비가 그러한 은전을 입고 못입는 것도 운명이라 하겠다.

수련하여 얻은 몸매 학 모양 비슷하고 / 鍊得身形似鶴形
천 그루 솔 아래엔 두 궤짝 불경이라 / 千株松下兩函經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를 물어보려 하였더니 / 我來欲問西來意
구름은 푸른 하늘에 있고 물은 병속에 있더라 / 雲在靑天水在甁

이라 한 시는 이고(李翶)가 승려에게 지어 준 것이다. 이고의 문집 중에는 시가 없기 때문에 써서 기록해 둔다.

조용한 화원에 바둑 돌 놓는 소리 / 棋聲花院靜
높다란 석단 위에 펄럭이는 기 그림자 / 旙影石壇高

라고 한 것이나, 또

푸른 나무 그림자엔 마을이 이어지고 / 綠樹連村暗
국화는 꿈 속에도 드물게 나타나네 / 黃花入夢稀

라고 한 것이나, 또

집집마다 한식 절기 찾아 왔는데 / 人家寒食月
꽃 그림자 대낮에 어른거리네 / 花影午時天

이라고 한 것이나, 또

보슬비에 시 읊으며 사념에 젖어들고 / 雨微吟足思
꽃 지는 계절 꿈 속에도 생각이 맑지 않네 / 花落夢無憀

라고 한 것이나, 또

둑길이 따뜻하니 겨울에 죽순 솟아나고 / 坡暖冬生笋
소나무 그늘 시원하니 여름에 사람들 씩씩하네 / 松涼夏健人

이라고 한 것이나, 또

달이 밝아 무지개가 비를 비추고 / 月明虹照雨
수목이 빽빽하여 새가 사람과 부딪치네 / 樹密鳥衝人

이라고 한 것이나, 또

밤이 짧으니 원숭이 슬픔이 줄어들고 / 夜短猿悲減
바람이 온화하니 까치의 기쁨 영묘하네 / 風和鵲喜靈

이라고 한 것이나, 또

말의 기색 추위 겪어 참담하고 / 馬色經寒慘
독수리 소리 저녁이 되니 배고파하네 / 鵰聲帶晩飢

라고 한 것이나, 또

손이 옴에 저절로 의기가 투합하고 / 客來當意愜
꽃이 핌에 우연히 노래 한 수 이뤄지네 / 花發遇歌成

이라고 한 것이나, 또

외딴 섬 옛날 연못 봄비로 넘쳐나고 / 孤嶼池痕春漲雨
난간 가 꽃의 운치 비 갠 한낮 더 하구나 / 小欄花韻午晴初

라고 한 것이나, 또

한밤중 실망과 탄식으로 베갯머리 뒤척이는데 / 五更惆悵回孤枕
가물가물 등불만은 떨어진 꽃 비춰주네 / 猶自殘燈照落花

라고 한 것 등은 사공도 표성(司空圖表聖)의 작품인데, 만당(晩唐)의 유향(遺響)임을 알 수 있다.
소자미(蘇子美)는 송 나라 시인 가운데 으뜸으로 꼽히는데 이름은 순흠(舜欽)으로서 두 기공 연(杜祁公衍)의 사위이다. 집현 교리(集賢校理)와 감진주원(監進奏院)이 되었다가 고지(故紙) 공전(公錢)을 팔아 빈객에게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는 이유로 죄에 걸려 제명(除名)되었다. 그 뒤 소주(蘇州)에 폐고(廢固)되어 있을 때 수석(水石)을 사다가 창랑정(滄浪亭)을 짓고 더욱 문사(文辭)에 힘을 기울였는데 나이 41세에 죽었다. 그의 시 가운데 가령


이라고 한 것이나, 또


이라고 한 것들을 보면 바로 위응물(韋應物)의 혼백이 돌아 온 것만 같다. 이런 재주를 지니고도 사람에게 무함을 당해 끝내 폐고된 채 거두어 쓰여지지 않았으니, 애석하도다, 세도(世道)는 고금(古今)의 다름이 없는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태백(太白)은 선인(仙人)이다. 그의 시집에 수록된 것 가운데 흠 잡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으니 아무리 후대에 흠을 잘 잡아내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세 치의 혀를 놀리기가 어려울 것이다. 가령 〈상운락(上雲樂)〉ㆍ〈보살만(菩薩蠻)〉ㆍ〈독록편(獨漉篇)〉ㆍ〈천노음(天姥吟)〉 등 작품들은 모두가 천상에서 연주하는 상제의 음악과 같다 할 것이니, 어찌 세상에서 잠꼬대나 하는 자들이 비슷하게라도 따라갈 수 있는 것이겠는가.
명 나라 초엽에 구우 종길(瞿佑宗吉)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 시가 너무 유치하게 어리광을 피우는 면은 있지만 그래도 아름답고 고운 점은 아껴줄 만하다. 가령

열흘 이상 풀이 죽어 번화한 서울 있었는데 / 兼旬蹭蹬在京華
동풍이 또 건듯 불어 대궐 앞 버들 날리누나 / 又見東風御柳斜
좋은 계절 지나는 것 나그네 참지 못해 / 客裏不堪佳節過
남의 정자 빌려 앉아 배나무 꽃 쳐다보네 / 借人亭館看梨花

라는 시나, 또

나팔꽃은 푸르고 콩꽃 향기 은은한데 / 牽牛花碧豆花香
새빨간 잠자리떼 물에 점 찍기 바쁘구나 / 血色蜻蜒點水忙
저녁 햇살 받으며 어촌에 있다 보니 / 人在漁村斜照裏
수양버들 저 너머 들려 오는 피리 소리 / 數聲籚笛隔垂陽

이라는 시나, 또

파초 잎새 무성한데 쑥잎 향기 은은하고 / 蕉葉陰陰艾葉香
창포 모는 짧은데 국화 싹은 길었구나 / 菖蒲苗短菊苗長
간밤에 달팽이가 지나간 것 알겠나니 / 夜來知有蝸牛過
하얀 담에 은빛 길 외줄기로 나 있구나 / 一道銀光在粉墻

이라는 시나, 또

둥지 나온 제비 새끼 발 휘장 옆에 앉아 있고 / 出巢新燕傍簾帷
넘실대는 방죽 물에 오리 새끼 미역 감네 / 乳鴨浮沈水滿陂
나뭇잎의 푸른 벌레 시절이 가까우니 / 葉底靑蟲時節近
호랑나비로 변신하여 꽃 가지에 올라 가리 / 化爲胡蝶上花枝

라는 시 등을 보면 너무도 아름답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동파(東坡)는 시(詩)나 문(文)이나 모두 신의 경지에 들어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세상에서 당대(唐代)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는 자들은 늘 동파를 헐뜯는데, 만약 아름답고 고운 작품을 추려내어 대략 몇 권의 책으로 만든 다음 세상에 유행시킨다면, 동파가 어찌 당대의 시인들이 그 시대에 화려하게 꾸몄던 것보다 못할 리가 있겠는가. 단지 동파의 시 세계가 엄청나게 크다 보니 우물 안 개구리의 소견으로 가없는 바다를 바라보는 탄식을 금할 수 없게 되는 것일 따름이다. 가령 사시사(四時詞)를 당대의 선집 가운데에 넣는다면 온정균(溫庭筠)이나 이장길(李長吉)이 꼭 선구가 된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매번 그가 지은 바


이라는 절구를 읊노라면, 부앙(俯仰)하는 사이에 세월이 흘러가 버리는 뜻을 바람 꽃과 안개처럼 퍼지는 버들 사이에 붙여 놓은 것을 알 수 있는데, 정말 완전한 경지에 올라 선 시라고 할 것이다. 그가 무산(巫山)을 지나며 두자미(杜子美)의 운(韻)을 써서 지은 시를 보면,

파촉 땅 풍속 손님 못가게 붙드는데 / 巴俗深留客
오 나라 사람은 돌아갈 생각만 하네그려 / 吳儂但憶歸
같이 얘기하기 어려운 것은 알겠네만 / 直知難共語
고의로 어긋나려 해서는 아니라네 / 不是故相違
동현에 도착하면 구리 냄새 물씬 나고 / 東縣聞銅臭
강릉에 이르르면 겹옷 바꿔 입는다오
/ 江陵換裌衣
간절히 바라노니 무협에 오는 비여 / 丁寧巫峽雨
제발 맑은 하늘 어둡게 하지 마소 / 愼莫暗朝暉

라고 하였는데, 너무도 두자미의 시풍과 비슷하기 때문에 역아(易牙)의 입이 아니면 치(淄)인지 면(澠)인지를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동파의 흠을 잡는 사람들은 그가 고사(古事)를 너무 많이 쓴 것을 먹지도 않는 음식을 죽 늘어놓은 것에 비유하는데 이 주장 또한 타당한 면이 있긴 하다. 그러나 동파가 고사를 활용한 것과 관련하여, 그가 너무도 재주가 많은 나머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적으로 그러한 표현을 하게 된 것을 안타깝게 여기기만 하면 됐지, 어찌 이것을 가지고 그를 흠잡을 트집거리로 삼아서야 되겠는가. 그의 시 가운데 가령


라고 한 것이나, 또


라고 한 것이나, 또

흐린 달 성긴 별빛 건장궁(建章宮)을 두르고 / 淡月疏星繞建章
하늘에서 바람 불어 어로의 향기 내려보내네 / 仙風吹下御爐香
입시한 신하들 고니처럼 통명전에 서 있는데 / 侍臣鵠立通明殿
한 줄기 붉은 구름 어좌를 받들어 모시누나
/ 一朶紅雲捧玉皇

이라고 한 것이나, 또


이라고 한 것이나, 또


이라고 한 것이나, 또


이라고 한 것이나, 또


이라고 한 것 등을 어찌 다 기록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허혼(許渾)이나 유창(劉滄) 같은 사람들을 동파의 속관(屬官)으로 삼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고려조(高麗朝)와 아조(我朝)에서는 모두 동파를 숭상했다. 그래서 고려 때에는 대비과(大比科)를 보일 때 삼십삼 동파(三十三東坡)라는 말이 나오기까지 할 정도였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 점차 그를 좋아하지 않게 된 결과 시를 짓는 자들 모두가 당(唐) 나라 사람들의 작품만을 따르고 있는데, 그들의 조예를 살펴 보면 수릉(壽陵)의 걸음에 불과할 뿐이다. 어찌 듣지 못했는가. “시란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곳에 이르러야 훌륭해진다.”고 하는 말을.
두보(杜甫)의 시를 옛 사람은 주공(周公)이 예악 문물을 제정한 것에 비유하였는데 참으로 적실(的實)한 논이라 하겠다. 그런데 후대에 두보를 배우는 자들을 보건대, 자칫 잘못하면 속된 데에 빠지거나 졸렬한 쪽으로 흘러가 버리고 심한 경우에는 억세기만 하여 읽어볼 수 없고 한퇴지(韓退之)의 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 하겠다.
회암선생(晦菴先生 주희(朱熹))의 시가 매우 좋아 간혹 선시(選詩)의 경지에 육박하기도 하므로 읽어 가노라면 여운이 남곤 하는데 실로 삼백편(三百篇 시경(詩經))의 정음(正音)의 지위를 얻었다 할 것이다. 그런데 근세에 왕감주(王弇州 명(明) 왕세정(王世貞)) 같은 사람은 비아냥거리며 꾸짖기까지 하니 이것은 어찌 된 일인가. 도잠(陶潛)이나 위응물(韋應物)을 본받아 지은 회암선생의 작품을 가령 왕감주로 하여금 한 번 지어보게 한다면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이런 점에 대해서는 안목을 갖춘 자라면 스스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연간에 왕세정(王世貞)은 당대의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로 일컬어졌으며 스스로도 대개 양웅(揚雄)이나 사마천(司馬遷)의 반열에 속하는 것으로 자처하였다. 그런데 늘그막에 이르러서는 소동파의 시를 주로 하면서 아주 비슷한 작품을 가끔 만들어내곤 하였는데, 만약 〈감주속고(弇州續稿)〉를 읽어 본다면 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잡스럽지 않은 자는 오직 이우린(李于鱗 명 이반룡(李攀龍))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대복(大復 명 하경명(何景明))의 시 같은 것은 당체(唐體)와 비슷하다고 할 것이다. 우린의 시 가운데


라고 한 것이나, 대복의 시 가운데


라고 한 것들은 아무리 당 나라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어찌 쉽게 따라 갈 수 있는 것이겠는가.

공동(空同 명 이몽양(李夢陽))의 시 가운데


라 한 것은 사람을 격앙시키면서 의기를 급격히 저상케 하는 것으로서 음영하노라면 눈물이 저절로 흐르는데, 그러나 두소릉(杜少陵)의 시에 비하면 뒤떨어진다 하겠다.
안원헌(晏元獻 송 안수(晏殊))은 가사(歌詞)에 능한데 시 역시 아름답다. 그의


이라는 시를 읊을 때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번남(樊南 당(唐) 이상은(李商隱))이 송 나라 시대에 다시 출현한 것 같은 느낌을 갖곤 한다.
감주(弇州 명 왕세정(王世貞))의 시 세계는 방대한데 음영할 만한 것을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그 중에서 가령

아가씨 사는 집 양자강(揚子江) 가에 있는데 / 細娘家在大江頭
모두 좋아하는 그 이름 막수였다오 / 摠爲工歡字莫愁
달 밝은 밤 고개 숙여 관산월(關山月) 곡조 타면 / 月明低按關山曲
어디서 온 누구라도 눈물을 흘렸다오 / 何處行人不淚流

라고한 것이나, 또


이라고 한 것이나, 또


라고 한 것이나, 또


이라고 한 것이나, 또


이라고 한 것이나, 또


이라고 한 것들은 모두 악부(樂府)의 영향을 받은 것들로서 원래 타인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라 하겠다.
공동(空同 명 이몽양(李夢陽))의 시 가운데


라고 한 것이나, 또


라고 한 것들은 한림(翰林 이백(李白))과 습유(拾遺 두보(杜甫)) 가운데에 놔두더라도 무슨 손색이 있겠는가.
유장경(劉長卿)이 가생(賈生)을 읊은 시에서

한 문제(漢文帝)는 도는 있어도 은혜는 박했네 / 漢文有道恩猶薄
상수가 무정하니 조곡한들 어찌 알까 / 湘水無情弔豈知

라고 한 것은 완곡하게 하면서 몰아세우지 않았다 할 것이고, 한릉(漢陵)을 읊은 시에서

허물어진 옛 무덤 가을 풀에 덮였는데 / 一種毁原秋草裏
그래도 행인들 문제 능에 참배하네 / 路人猶拜漢文陵

이라고 한 것은 새로운 뜻을 표출해 낸 것이라고 할 것이다.
송(宋) 나라의 절구로는 개보(介甫 왕안석(王安石))를 첫 손에 꼽아야 할 것이다. 그의 〈야직(夜直)〉이라는 시를 보면,

향로 연기 다 그치고 물시계 소리 드문드문 / 金爐香盡漏聲殘
산들바람 솔솔 부니 슬며시 오한 드네 / 剪剪輕風陳陳寒
봄 경치에 번뇌 많아 잠 청해도 오지 않고 / 春色惱人眠不得
꽃 그림자에 옮긴 달빛 난간 위로 올라오네 / 月移花影上䦨干

이라고 하였는데 이 이상 정절(精絶)할 수가 없다고 하겠다.
조송설(趙松雪 원(元) 조맹부(趙孟頫))의 시에


라고 하였는데, 개보의 〈야직〉이라는 시와 같은 수준의 작품이라 할 것이다.
구양공(歐陽公 송 구양수(歐陽修))에 대해 세상에서는 그가 통유(通儒)였다는 사실만 알 뿐 그에게 얼마나 호기(豪氣)가 있었는지는 모르고 있는데, 한 번 그의 가사(歌詞)를 보면 하늘을 치솟는 듯한 그의 기상을 충분히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가령

가득가득 채워서 술 사발 들이켜게 / 勸君滿滿酌金甌
꽃 피는 때 늘상 취해 지낸다손 치더라도 / 縱使花時常病酒
그것 역시 또 하나의 풍류라 할 것일세 / 也是風流

라고 한 시를 꽃 속에서 노니는 제자(諸子)들에게 지어보라고 해도 꼭 이 수준에 이른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산곡(山谷 송 황정견(黃庭堅))과 간재(簡齋 송 진여의(陳與義))의 가사(歌詞) 역시 좋은데, 여기 몇 사람들은 문장과 격운(格韻)에 모두 넉넉한 실력을 갖추고 있으니 이들을 추중(推重)하여 시를 짓는다면 모두 좋게 될 것이다.
송 나라 정위(丁謂)에게 방외(方外)의 친구 유둔(劉遁)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런데 그가 일찍이 정위에게 시 한 수를 지어 주었는데, 그 중에

어느 땐가 학을 타고 푸른 바다 노닐면서 / 他時駕鶴遊滄海
봉래 섬의 봄 기운을 같이 한 번 즐겨보세 / 同看蓬萊島上春

이라는 내용이 있었다. 정위가 그 시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남쪽으로 좌천되었을 때 유둔이 애주(涯州)로 찾아오자 그때에야 비로소 그 시의 뜻이 한상(韓湘)의 고사와 대략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인생의 영고성쇠가 본디 미리부터 정해져 있어 인위적으로 뒤바꿀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하다 하겠다.
감주(弇州)의 시 가운데 가령


라고 한 것이나, 또


이라고 한 것이나, 또


이라고 한 것이나, 또

눈동자는 가을 물처럼 맑디 맑은데 / 秋水剪明眸
곤만 남겨두고 촛불 모두 꺼졌는데 / 留髠燭盡滅
이제 다시 한 번 이주가(伊州歌)즐겨볼까 / 更與按伊州

라고 한 것이나, 또

오 나라 아가씨 하얀 모시 입고서 / 吳中女兒白紵衣
저물녘 연못 가로질러 뱃전에 기대 돌아가네 / 日暮橫塘蕩漿歸
연꽃 핀 뱃길에 사람은 하나 보이지 않고 / 荷花港裡無人見
깜짝 놀란 가마우지 떼 지어 날아가네 / 驚起鸕鶿隊隊飛

라고 한 것들은 진(陳)과 수(隋) 사이의 음(音)이라 할 것이다.
양철애 염부(楊鐵厓廉夫 원(元) 양유정(楊維禎)의 호와 자임)의 〈서호죽지가(西湖竹枝歌)〉는 곡조가 연약한 듯하면서도 맑고 예뻐서 사랑할 만하다. 그러나 쇠퇴한 세상의 음이라고 할 것이니 어쩌면 원(元) 나라가 장차 망할 조짐을 보여준 것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살천석(薩天錫 원 살도라(薩都刺))이 서호(西湖)를 주제로 지은 절구(絶句)는 비길 데 없이 화려하다. 이는 대체로 염체(奩體) 중에서도 우수한 것들이라 하겠는데,

용금문 밖 호수에 떠 있는 배 하나 / 湧金門外上湖船
풍류 즐기며 과거를 회상하는 손에게 / 狂客風流憶往年
열 여덟 살 아가씨 노저어 다가가니 / 十八女兒搖艇子
미소 짓고 꽃 살 돈을 저 배로 던져주네 / 隔船笑擲買花錢

라 하고, 또

취하도록 마신 소년 돌아갈 일 잊었는데 / 少年豪飮醉忘歸
언덕 너머 호수의 배 서서히 이동하네 / 隔岸湖船旋旋移
서늘한 밤 물에 비친 촛불은 가물가물 / 水面夜涼銀燭小
고개 숙여 노래하는 아가씨 미간에 솟아나는 초생달 / 越娘低唱月生眉

이라 하고, 또

절따말은 꽃잎 진 진흙탕을 마구 짓밟고 / 紫騮驕踏落花泥
이월의 강변 마을 비가 금방 거쳐갔네 / 二月江城雨過時
어둑새벽 하천에는 봄물이 가득한데 / 拂曉市河春水滿
많은 배들 반쯤은 여군을 실었구나 / 小船多半載兵姬

라 하고, 또

봄 아까워 호숫가에서 하룻밤 지냈는데 / 惜春曾向湖邊宿
술 다하자 아가씨 밤 술자리 치우누나 / 酒渴吳姬夜破橙
자기 부르는 낭군의 소리 급히 듣고서 / 驀聽郞君呼小字
고개 돌려 미소 머금고 등불을 뒤로 하네 / 轉頭含笑背銀燈

이라 하고, 또

낭군이 반쯤 취하길 기다렸다가 / 待得郞君半醉時
웃음 띄며 부채 들고 시 써달라 조르누나 / 笑將紈扇索題詩
붉은 발 걷고 보니 봄 물결이 급해지고 / 小紅簾捲春波急
물 건너 온 버들꽃 벼루에 떨어지네 / 渡水楊花落硯池

라 하고, 또

수양버들 우거진 소소네 집 안 마당 / 垂柳陰陰蘇小家
호수 가득 제비 날아와 버들꽃을 쫓아가네 / 滿湖飛燕趁楊花
좋은 시절 한번 가니 풍류도 줄어들고 / 繁華一去風流減
오늘은 또 제방 위 나무에서 까마귀가 우짖누나 / 今日橫堤幾樹鴉

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구우(瞿佑)의 〈청명(淸明)〉이라는 시를 보면,

바람에 배꽃 떨어지고 뜰에 눈 가득한데 / 風落梨花雪滿庭
올해도 또 한 번 청명 절기 맞는구나 / 今年又是一淸明
아지랑이 무심하게 땅에 엎드려 누워 있고 / 遊絲倒地終無意
초목들은 뜻 있는 듯 하늘에 닿았구나 / 芳草連天若有情
집에 반쯤 새벽 안개 가끔 제비 소리 들려오고 / 半院曉煙間燕語
작은 창문에 맑은 날씨 누에 실을 뽑는구나 / 小窓晴日撚蠶生
이름 있는 정원 안에 매어 있는 빈 그네틀 / 秋千架在名園裏
수양버들 사이 두고 웃는 소리 들리누나 / 人隔垂楊聽笑聲

이라 하였는데, 참으로 재자(才子)의 작품이라 하겠다.
유태(劉泰)의 〈만흥(漫興)〉이라는 시를 보면,

홑옷 차림 나가 보니 봄 바람이 겁이 나고 / 單羅初試怯春風
향로의 향 다 탔어도 푸른 기운 깔려 있네 / 金鴨香銷翠被空
제비들 낮게 날며 검은 몸을 뒤바꾸고 / 江燕低翻三寸黑
해당화 붉은 색깔 조금 퇴색하였구나 / 海棠微褪一分紅
잠 잘 못자 숙취한 술 깨어나기 어려웁고 / 酒因睡淺酲難解
근심 많아 시 한 구절 이뤄내지 못하누나 / 詩爲愁多句未工
낮 시간 길어지니 아녀자들 게을러지는데 / 晴日漸長兒女懶
구부러진 난간 동쪽 그네가 한가롭네 / 秋千閑在曲欄東

이라 하였는데, 이 역시 구우 계열의 작품이라 하겠다.
요윤언(姚允言)의 〈간매(看梅)〉라는 시를 보면,

눈보라 헤치며 말타고 오느라 모자도 벗겨지고 / 蹇騎衝雪岸烏紗
서호가 술 파는 집에서 밤새 술 취했다오 / 夜醉西湖賣酒家
열여섯 살 아가씨 피리도 잘 부는데 / 十六吳姬吹鳳管
발 걷고 촛불 밝혀 매화꽃을 보았다오 / 捲簾燒燭看梅花

라고 하였는데, 곱게 수식한 것은 사랑할 만하나 너무도 의식적으로 연지 찍고 분 바르려 한 것이 아쉽다.
장방주 영(張方洲寧 방주는 호임)의 시는 당(唐) 나라 때의 작품과 매우 근접해 있다. 가령

오산 길에 들어서니 반은 마을 반은 성곽 / 半村半郭吳山路
삼월 삼질 봄 날씨 따스했다 썰렁했다 / 輕暖輕寒上巳天
성곽 지나 호반의 사찰 매화나무 그림자요 / 梅影過城湖曲寺
포구로 돌아오는 절동의 배 노젓는 소리로다 / 櫓聲歸浦浙東船
옛 벗과 즐기는 시와 술 새 손이 끼었는데 / 舊遊詩酒添新客
오늘의 풍광도 지난 해와 비슷하네 / 今日風光似去年
완상도 채 못해서 그윽한 생각 나오는데 / 淸賞未䦨幽思發
봉우리에 비낀 해 푸른 연기 일으키네 / 亂峯斜日起蒼煙

이라고 한 시는 중당(中唐)의 여러 시인들 가운데에 놔두어도 괜찮을 것이다.


[주D-001]두 사(謝)씨 : 남조송(南朝宋)의 사영운(謝靈運)과 남제(南齊)의 사조(謝朓)를 말함. 본문의 현휘(玄暉)는 사조의 자(字)임.
[주D-002]코에 …… 쓸 것인가 : 운근성풍(運斤成風)과 금비괄목(金鎞括目)의 고사로서 하자가 하나도 없이 완전무결한 것을 말함. 《莊子 徐無鬼》에 “영인(郢人)이 코 끝에 흰 흙을 묻히자 장석(匠石)이 바람 소리가 나게 자귀를 휘둘러 코는 다치지 않고 흰 흙만 떨어뜨렸다.” 하였고, 《涅槃經》에 “소경이 의사를 찾아가자 의사가 즉시 칼로 눈꺼풀을 떼어내어 광명을 찾게 해 주었다.” 하였음.
[주D-003]중선루에서 …… 소요하도다 : 중선루는 호북성(湖北省) 당양현(當陽縣) 동남 쪽에 있는 누각 이름인데, 위(魏) 나라 왕찬(王粲) 즉 중선이 글을 잘 지어 남의 추종을 불허했다고 하는 이른바 ‘중선독보(仲宣獨步)’의 고사와 넌지시 연관시켜 자신이 기발한 시를 지은 것을 암시하고 있음.
[주D-004]그 시를 보면 …… 하였다 : 문동(文同)의 《丹淵集》과 상촌집에 나오는 글자가 약간 틀리는데 모두 《丹淵集》에 의거하여 바로잡았음. 참고로 틀리는 곳을 소개하면, 제6구의 矜이 驚으로, 제14구의 扼이 袍로, 제16구의 駐가 住로, 제18구의 鸞이 蚪로 紛이 葩로 상촌집에 되어 있음.
[주D-005]마힐은 …… 입었었으니 :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갇히는 몸이 되자 약을 먹고 벙어리가 된 척하였으며 강제로 급사중(給事中)에 임명되었어도 절개를 지켰는데, 뒤에 난이 평정되자 특명으로 용서를 받고 태자중윤(太子中允)에 임명되었으며 벼슬이 상서 우승(尙書右丞)에 이르렀다.
[주D-006]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 선불교(禪佛敎)에서 쓰는 화두(話頭)의 하나로서 달마(達磨)가 서쪽에서 온 뜻을 묻는 것인데, 즉 불법(佛法)의 근본 대의가 무엇이냐고 하는 것임.
[주D-007]집현 교리(集賢校理)와 …… 제명(除名)되었다 : 범중엄(范仲淹)의 추천으로 이 직책에 임명되었는데, 두연(杜衍)의 세력을 꺾으려고 노리고 있던 어사중승(御史中丞) 왕공진(王拱辰)에 의해 순흠의 이 일이 이용되어 순흠은 자도죄(自盜罪)로 제명되고 당시 연회에 참석했던 저명 인사 10여 인도 모두 사방으로 쫓겨났다.《宋史 卷442》
[주D-008]깊숙이 …… 노래 소리 : 〈夏意〉라는 제목의 칠언절구임. 《蘇學士集》에 따라 상촌집의 문자를 바로잡아 제 3구의 日卓午를 日當午로 고쳤음.
[주D-009]들판에 …… 듯하네 : 〈淮中晩泊犢頭〉라는 제목의 칠언절구임.
[주D-010]배꽃은 …… 맞을런고 : 〈東欄梨花〉라는 시인데, 제3구의 ‘한 그루 눈꽃’은 제1구에 나온 배꽃을 다시 상기시킨 것임.
[주D-011]무산(巫山)을 …… 시 : 원제(原題)는 〈戲題巫山縣 用杜子美韻〉임.
[주D-012]동현에 …… 입는다오 : 촉 땅 사람들이 철전(鐵錢)을 사용하다가 무산을 지나면 동전(銅錢)을 쓰기 시작한다고 하는데, 이에 연유하여 무산의 강 위에 있는 두 돌이 동전퇴(銅錢堆)와 철전퇴(鐵錢堆)로 명명되었다 함. 그리고 강릉은 더운 지역이기 때문에 겹옷을 벗는다고 하는 말임.
[주D-013]역아(易牙)의 …… 정도이다 : 고도의 전문가가 아니면 차이점을 가려내기 힘들다는 말임. 치수와 면수의 물을 뒤섞어 놓았는데도 역아가 맛을 보고는 정확히 가려내었다는 고사임. 《列子 說符》
[주D-014]연못가엔 …… 위로되네 : 〈秋晩客興〉이라는 제목의 칠언율시임. 상촌집에 나와 있는 원문 가운데 제4구의 廻를 回로, 제6구의 聲을 行으로 각각 《蘇東坡詩集》에 따라 바로잡았음.
[주D-015]물시계 …… 비춰주네 : 〈寒食夜〉라는 제목의 칠언절구임. 상촌집에는 제2구의 鞦韆이 秋千으로 되어 있음.
[주D-016]어로 : 천자의 향로(香爐)임.
[주D-017]흐린 달 …… 모시누나 : 정월 대보름 날 황제를 모시고 누각에서 술 마시며 동료에게 준 3수(首) 가운데 첫 수임.
[주D-018]고깃배 …… 보인다오 : 동파가 39세 때 윤주(潤州)를 지나다 제야(除夜)를 보내며 시를 지었는데, 20년 뒤 혜주(惠州)에 있을 때 그때의 일을 추억하며 지은 시임.
[주D-019]가래나무 …… 가버렸네 : 〈夢中絶句〉라는 시임. 가래나무 꽃은 여름이 되려 할 때 핀다고 함.
[주D-020]봄 밤의 …… 고요하오 : 〈春夜〉라는 제목의 칠언절구임.
[주D-021]언덕 위 …… 서늘쿠나 : 〈同景文詠蓮塘〉이라는 제목의 칠언절구임. 상촌집에는 제3구의 惜 자가 借로 잘못되어 있음.
[주D-022]삼십삼 동파(三十三東坡) : 고려 문사(文士)들이 오로지 동파를 숭상하였기 때문에 매년 과거 합격자를 발표할 때면 사람들이 “올해도 또 33명의 동파가 배출되겠구나.”라고 하였다 함.《大東韻府群玉 第6卷》
[주D-023]수릉(壽陵)의 걸음 : 한단학보(邯鄲學步)의 고사로서 새로운 것을 제대로 익히지도 못한 채 기왕에 자신에게 있었던 기예마저도 잃어버리는 것을 말함. 《莊子 秋水》에 “그대는 듣지 못했는가. 저 수릉 땅의 미성년자가 한단에 와서 걸음걸이를 배우려 했던 일을 말일세. 한단의 걸음도 배우지 못한 채 옛날의 걸음마까지 잃어버렸다네그려.”라고 하였음.
[주D-024]시란 …… 훌륭해진다 : 송(宋) 육유(陸游)의 시어(詩語)임.
[주D-025]술동이 …… 이별하네 : 〈送郭子坤下第還濟南〉이라는 칠언율시 가운데 제3~4구임.
[주D-026]장화대(章華臺) …… 나가누나 : 《華容弔楚宮》이라는 칠언율시의 제3~4구임. 상촌집에 나와 있는 제3구의 暮 자를 〈大復集〉에 의거, 晩 자로 바로잡았음.
[주D-027]십 년 동안 …… 눈물짓네 : 〈限韻贈黃子〉라는 칠언율시의 제5~6구임.
[주D-028]향기나는……마찬가지 : 〈無題〉라는 제목의 칠언율시임. 원문 가운데 상이한 문자는 《元獻遺文》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는데, 상촌집에는 제1구의 香車가 車輕으로, 제5구의 傷이 中으로, 제 6구의 瑟이 索으로 되어 있음.
[주D-029]관산월(關山月) : 한(漢) 나라 횡취곡(橫吹曲)의 이름으로서 이별을 가슴아파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음.
[주D-030]아가씨 …… 흘렸다오 : 〈莫愁樂〉이라는 제목의 칠언절구임. 원문은 《弇州四部稿》에 따랐는데, 상촌집에는 제3구의 曲이 譜로 되어 있음.
[주D-031]잡아둘 …… 불어다오 : 〈西興詞〉라는 제목의 칠언절구임.
[주D-032]석우풍 : 우랑(尤郞)에게 시집간 석씨(石氏)의 딸이 남편이 풍랑으로 죽자 세상 부인들을 위해 죽은 다음 역풍(逆風)이 되어 배가 떠나지 못하게 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임.
[주D-033]미녀 곱게 …… 않는다오 : 〈橫江詞〉라는 칠언절구 4수(首) 가운데 첫 수임.
[주D-034]강 언덕 …… 쳐 주소서 : 바로 앞의 시에 이어지는 두번째 절구임.
[주D-035]열다섯 …… 모르누나 : 〈吳中迎春曲〉 8수 중 첫번째 시임.
[주D-036]기생집 …… 불렀다오 : 〈燕京四時樂〉 4수 중 네번째 시임.
[주D-037]황학루 …… 안 흘러서 : 〈夏口夜泊別友人〉이라는 제목의 칠언절구임. 제2구의 烏자가 상촌집에는 鴉로 되어있는데 《空同集》에 의거하여 바로잡았음.
[주D-038]이월 달 …… 우는구나 : 〈送王呈貢赴縣〉이라는 제목의 칠언절구임.
[주D-039]썰렁한 …… 황혼이네 : 〈絶句〉라는 제목의 칠언절구임. 제2구의 경우 상촌집에는 “金屋無人火尙溫”으로 되어 있는데, 〈松雪齋集〉의 원문에 따라 “金鴨香殘火尙溫”으로 바로잡았음.
[주D-040]한상(韓湘)의 고사 : 한상은 당(唐) 한유(韓愈)의 종손(從孫)으로서 도술(道術)에 심취하여 선인(仙人)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옴. 〈續仙傳〉에 “한상이 도술을 좋아하며 세상 일에 얽매이지 않았는데, 언젠가 흙을 모으고 화분을 뒤짚자 바로 꽃이 피면서 꽃잎 위에 ‘구름은 진 나라 고개를 가로질러 가는데 집은 어디에 있는가. 남관에 눈보라치니 말이 가려 하지 않네.[雲橫秦嶺家何在 雪擁藍關馬不前]’이라는 시구가 나타나게 하였다. 한유가 이 뜻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뒤에 조주(潮州)로 좌천되어 가면서 중도에 눈보라를 만났는데, 이때 한상이 눈을 무릅쓰고 찾아 왔기에 그곳의 지명을 물어보니 바로 남관이었다.” 하였음.
[주D-041]저녁 별……못하나 : 〈夜度娘〉이라는 제목의 의고악부(擬古樂府)인데 창기(倡伎)의 신세를 노래한 것임.
[주D-042]궁중 소녀들 …… 하는구나 : 〈楊白花〉라는 제목의 의고악부(擬古樂府)임. 양백화는 악부 잡곡가사(雜曲歌辭)의 하나인데, 위(魏) 나라 호태후(胡太后)가 양백화라는 건장한 남자와 가까이하며 정을 통하다가 그가 생명의 위협을 느껴 양(梁) 나라로 도망치자 그를 추모하며 노래를 지은 뒤 밤낮으로 궁녀들을 시켜 부르게 하였다는 배경을 갖고 있음.
[주D-043]별당에선 …… 하는가 : 〈小垂手〉라는 제목의 의고악부(擬古樂府)임. 소수수는 대수수(大垂手)와 함께 춤을 출 때 손을 놀리는 동작에서 취해 온 것임. 상촌집에는 제1구가 “小院熨瑤箏”으로 되어 있으나 《弇州四部稿》의 원문에 따라 “小院灸瑤笙”으로 바로잡았음.
[주D-044]곤만 …… 꺼졌는데 : 전국시대 때 제(齊) 나라 순우곤(淳于髡)이 “촛불이 다 꺼진 상태에서 다른 손님은 모두 내보내고 나만 남겨두고서 마음대로 마시게 하면 술 한 섬을 먹을 수 있다.”고 한 고사로서 기루(妓樓)에 머물며 즐기는 것을 말함.
[주D-045]이주가(伊州歌) : 당(唐) 악부(樂府)로서 이천(伊川)의 수령 범중윤(范仲胤)의 처가 지었다는 노래인데 객지로 떠난 남편이 오래 돌아오지 않는 것을 탄식한 것임.
[주D-046]눈동자는 …… 즐겨볼까 : 〈大垂手〉라는 제목의 의고악부(擬古樂府)임.

상촌선생집 제60권
 청창연담 하(晴窓軟談下)
청창연담 하(晴窓軟談 下)

신묘년(1591, 선조24) 여름에 내가 하관(夏官 병조)의 낭관(郞官)으로 대궐에서 입직(入直)하고 있을 때 이 상국(李相國) 백사공(白沙公 이항복(李恒福))이 지신사(知申事 도승지)로서 역시 은대(銀臺 승정원)에 입직하고 있다가 절구 한 수를 보내 오기를,

후덥지근한 방 쳐박혀 기분 울적하였는데 / 深室霾炎氣欝紆
꿈 속에 물새되어 맑은 못에 목욕했네 / 夢爲鷗鷺浴晴湖
겉으로는 허깨비 따른다 할지라도 / 縱然外體從他幻
자연의 정취 즐기는 것 진짜 나는 이거라오 / 煙雨閑情却是吾

라 하였는데 기상이 매우 좋은 시라 하겠다.
신축년(1601, 선조34) 봄에 백사공이 질병을 이유로 정승의 지위를 사직하기에 내가 출사(出仕)하도록 권면했더니, 근체시(近體詩) 한 수를 써서 대답하기를,

중흥을 담당할 자 잘도 계책 꾀하는데 / 中興作者足謀謨
이 늙은이 어찌 감히 태평시대 쓰임 될까 / 老子何堪聖世需
공군은 원래 시대와 안 맞는 것 알고 있지만 / 自識孔君元齟齬
여상이 호도하지 않는다고 그 누가 말했던가
/ 誰言呂相不糊塗
명성 졸렬하게 되는 거야 별로 관심 없는데 / 時名短拙關心少
계획이 차질 생겨 하는 일마다 어긋나네 / 身計差池入手殊
이상하다 어찌하여 진 나라 왕 태부는 / 却怪晉家王太傅
백발의 나이에도 벼슬 마음 없다 했나
/ 白頭猶道宦情無

라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그 당시 형세를 어떻게 해 볼 수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었다.
태헌(苔軒) 고경명(高敬命)은 임진왜란 때 절의(節義)를 세웠는데, 태헌의 아들 종후가 복수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가 또 진양성(晉陽城)이 함락되던 날에 죽었으니, 부자(父子)가 함께 순절(殉節)한 것이야말로 진(晉) 나라의 변문(卞門)과 그 아름다움을 짝한다 하겠다. 종후 역시 문장에 능했는데 그가 순식간에 지은 격문(檄文)의 내용이 너무나 훌륭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그가 제주(濟州)에서 말을 모집할 때 지은 글 중에,

소매를 떨치고 일어날 사람이 / 投袂而起者
바다 밖에도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네 / 吾知海外有人
채찍을 손에 들고 임하였으니 / 執策而臨之
천하에 말이 없다고 말하지 말지어다 / 莫曰天下無馬

라는 내용이 있었는데, 말의 의미가 놀랄만큼 절묘하고 대우(對偶)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으므로 한 때 널리 암송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런 자질을 가지고도 끝내 불우하게 되고 말았으니 애석한 일이다. 신묘년 봄에 지제고(知製誥 한림(翰林))에 선발되었다가 곧바로 대간의 탄핵을 받고 말았는데, 아, 조정의 인사 행정이 이 모양이었으니 어떻게 왜구(倭寇)를 불러들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임진왜란 때 동래 부사(東萊府使) 송상현(宋象賢)이 성을 지키다 죽었는데, 죽기 전에 그의 가친(家親)에게 글을 보내기를,

외로운 성에 달무리 졌는데 / 孤城月暈
여러 진은 높이 베개하고 있구나 / 列鎭高枕
임금과 신하의 의리 중하고 / 君臣義重
아비와 자식의 정은 가볍네 / 父子恩輕

이라고 하였다. 그 말이 늠름하기만 한데 비록 옛날의 열혈 남아라 하더라도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겠는가.
우리 나라 서경(西京 평양)은 풍광과 누각의 경치가 빼어난데다 미녀들과 풍류를 즐길 수가 있어 끊임없이 중국에 가는 사신들이 이곳에 도착하게 되면 갈 길을 잊은 채 오래도록 여기에 머물며 즐기기 일쑤였고 거의 정신을 잃고서 완전히 빠져버리는 경우마저 있곤 하였다. 고려조(高麗朝)의 학사(學士) 정지상(鄭知常)의 시에,

비 갠 뒤의 긴 둑길 풀빛 더욱 푸르른데 / 雨歇長堤草色多
그대 보내는 남포에 구슬픈 노래 울리누나 / 送君南浦動悲歌
어느 때나 대동강 물 마를 날이 있을까 / 大同江水何時盡
이별의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 더하네 / 別淚年年添綠波

라고 하였는데, 온 세상이 다투어 전하면서 지금에 이르도록 절창(絶唱)으로 떠받들고 있다.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경진년(1580, 선조13) 년간에 가운(嘉運) 최경창(崔慶昌)이 대동 찰방(大同察訪)이 되고 군수(君受) 서익(徐益)이 평양서윤(平壤庶尹)이 되었는데 이들은 모두가 시인이었다. 이에 그 운(韻)을 따서 채련곡(採蓮曲)을 지었는데, 최(崔)의 시에,

길고 긴 강 언덕에 수양버들 늘어지고 / 水岸悠悠楊柳多
조각배 저 멀리 들려오는 연 따는 노래소리 / 小船遙唱採菱歌
붉은 꽃잎 모두 지고 가을바람 살랑살랑 / 紅衣落盡西風起
해 저물녘 텅 빈 강에 일어나는 저녁 물결 / 日暮空江生夕波

이라 하였고, 서(徐)의 시에서는,

많이들 연밥 따는 남쪽 호수 아낙네들 / 南湖士女採蓮多
새벽부터 단장하고 서로 노래 부르누나 / 曉日靚粧相應歌
치마 가득 찰 때까지 배도 꼼짝하지 않고 / 不到盈裳不回棹
가끔가다 부서지는 먼 물가의 하얀 물결 / 有時遙渚阻風波

라 하였다. 그 뒤에 이순(而順) 고경명(高敬命)과 익지(益之) 이달(李達)이 뒤미처 화운(和韻)하였는데, 고(高)의 시에,

뱃전에 부딪치는 맑은 물결 복숭아꽃 / 桃花晴浪席邊多
연꽃 속에 일렁이며 뱃노래 울려 퍼지누나 / 搖蕩蓮舟送棹歌
취해 기댄 미인 생각 아마 잊지 못할텐데 / 醉倚紅粧應不忘
산들바람 펄럭펄럭 휘장에 물결 이네 / 小風輕颺幙生波

라 하였고, 이(李)의 시에는,

들쭉날쭉 연잎 속에 연밥도 하 많은데 / 蓮葉參差蓮子多
연꽃 잎새 사이로 여인들 노래 소리 / 蓮花相間女郞歌
돌아올 땐 물목에서 짝과 약속 지키려고 / 來時約伴橫塘浦
고생고생 배 저으며 물 거슬러 올라가네 / 辛苦移舟逆上波

라 하였다. 이들 모두가 일대(一代)의 가작들인데 논하는 자들은 그 중에서도 이(李)의 작품의 가장 우수하다고 평가한다.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신축년(1601, 선조34) 겨울에 내가 옥당(玉堂)으로 있을 때에 선조대왕(宣祖大王)이 우리 나라 사람들의 시부(詩賦)를 초록(抄錄)해 올리라고 명하였다. 내가 일단 자료를 수집해놓고 미처 탈고(脫稿)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 때문에 면직을 청하고 집에 있게 되었으므로 마침내 문형(文衡)의 직책을 반납하였다. 이때 문형을 바로 오봉(五峯) 이공(李公)호민(好閔)이 맡게 되었는데, 그 역시 오래도록 시일을 미루다가 완성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을사년 봄에는 오봉도 문형에서 체직되고 서경(西坰) 유공(柳公)근(根)이 대신하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또 납언(納言 언관(言官))에 임명되었다가 은대(銀臺 승정원)에 들어가자 선조대왕이 다시 국(局)을 설치해 정선(精選)하라고 신명(申命)하면서 오봉과 서경과 나로 하여금 그 일을 관장하게 하였는데, 이때 해평(海平) 윤공(尹公) 근수(根壽), 월사(月沙) 이공(李公) 정귀(廷龜), 유천(柳川) 한공(韓公) 준겸(浚謙), 만취(晩翠) 오공(吳公)억령(億齡), 홍 부학(洪副學) 경신(慶臣), 정 첨추(鄭僉樞) 협(恊), 김 정(金正) 현성(玄成)이 참여하였다. 이렇게 해서 모두 네 종류로 분류하여 책을 만들었는데 서경이 서문을 썼다. 《동문선(東文選)》이 나온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80여 년이 지나는 동안 시문(詩文)의 거장(巨匠)들을 이루 손꼽을 수가 없고 그들의 저술 또한 한우충동(汗牛充棟)이라 할 것이니, 위로 옛 사람들의 풍아(風雅)와 짝할 법도 하건마는 음향(音響)과 격력(格力) 면에서 끝내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는데, 이는 어쩌면 한 쪽에 치우쳐 있는 우리 나라의 풍기(風氣)에 영향을 받아서 그렇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수록할 때에도 역시 각자의 소견대로 하였는데, 그러다 보니 뽑혀야 할 것도 다 뽑히지 못하고 버려야 할 것도 다 버리지 못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시를 짓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좋은 시를 선정하는 것이 어렵다는 말이 정말 그렇다고 하겠다.
선조대왕이 옥당(玉堂)에 명하여 《주역(周易)》 고경(古經)을 교열하게 하고, 《춘추(春秋)》좌씨(左氏)ㆍ정씨(程氏)ㆍ호씨(胡氏)의 전(傳)을 취집한 뒤 《사전춘추(四傳春秋)》의 예를 본받아 잘 정리해서 올리도록 명하였는데, 내가 부학(副學)으로서 실제로 그 일을 관장하였다. 두 경에 대한 일이 끝나자 또 유신(儒臣)들에게 명하여 《주역》을 번역해 풀이하도록 하였는데, 이때 《주역》에 대해 능통한지의 여부를 따지지도 않은 채 한 때의 명관(名官)이 모두 동원되었고 더러 팔괘 방위(八卦方位)를 모르는 자조차 참여하였다. 그리고는 각자 자기의 견해만 고집하면서 의견이 같은 사람끼리 패거리를 지어 의견이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등 그지없이 소란스럽게만 되었을 뿐 끝내 긴요한 곳을 계발(啓發)하지는 못하게 되었다. 어쨌든 몇 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책을 만들어 올렸는데, 일단 완성된 다음 그 책을 보니 고칠 필요가 없는 것을 고치거나 고쳐야 할 것을 고치지 않은 것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주역》이라는 책이 어떤 책인데 지팡이로 땅을 짚어보고 가는 소경으로 하여금 제멋대로 금방 단정을 짓게 한단 말인가. 백호관(白虎觀)과 석거각(石渠閣)에서 제유(諸儒)가 모여 제경(諸經)에 대해 의논한 다음 만들어낸 것들도 오히려 후세의 모범이 되지 못하고 있는데, 하물며 한 쪽에 치우쳐 있는 나라의 후학들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국(局)을 장차 폐지하려 할 즈음 특별히 1등의 선온(宣醞)을 하사받아 그지없이 즐겁게 노닌 다음 자리를 파하였는데,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사전(謝箋)을 올리기도 하고 두루마리 그림책을 만들어 성대했던 일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이때 우연히 나에게 절구 한 수가 떠오르기를,

성인의 마음을 엿보지도 못했는데 / 未見聖人心
성인의 일을 어떻게 알겠는가 / 焉知聖人事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씻어주어 / 安得洗人心
시의를 같이서 논할 수 있을까 / 與之論時義

하였는데, 이는 감히 한 시대를 가볍게 보려 해서가 아니고 내가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생각을 그냥 적어본 것뿐이다.
의주(義州) 통군정(統軍亭)은 세 나라의 경계에 위치하면서 경치가 장관이니 온 세상에서 다 찾아보아도 그 짝을 구하기가 힘들 것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시인들이 이곳을 주제로 읊은 시가 많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그 형세와 기상을 제대로 표현한 경우는 있지 않았다. 그런데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연소한 나이에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절구 한 수를 짓기를,

내가 강을 건너가서는 / 我欲過江去
곧바로 송골산에 오르고 싶네 / 直登松鶻山
서쪽에서 화표주(華表柱)의 학 불러 내다가 / 西招華表鶴
구름 속에서 서로 한 번 놀아보려네 / 相與戲雲間

이라 하였는데, 이 시가 대작(大作)은 아니라 하더라도 스스로 기발하여 뒤에 전할 만하다 하겠다. 그 뒤에 시인 묵객들이 와서 읊은 것 가운데 이런 정도의 수준을 보여주는 시는 아직 보지 못하였다.
송강공(松江公)이 만력(萬曆) 임진년에 삼도체찰사(三道體察使)의 명을 받고 서로(西路)에서 바닷길로 남하(南下)하다가 장연(長淵)을 거치면서 금사사(金沙寺)에 주차(駐箚)하였다. 이때 시를 짓기를,

금사사에 열흘 간 머무는 동안 / 十日金沙寺
고국에 대한 마음 일각(一刻)이 삼추같네 / 三秋故國心
밀려오는 밤 물결 상쾌한 기운 앗아가고 / 夜潮分爽氣
돌아가는 기러기 슬픈 소리 들려오네 / 歸雁有哀音
오랑캐 생각하며 칼을 자주 쳐다보고 / 虜在頻看劍
친구가 죽었으니 거문고 줄 끊고 싶네 / 人亡欲斷琴
당시 태헌(苔軒 고경명(高敬命))이 전사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임
평소 읽던 출사표 글 / 平生出師表
국난(國難)에 임해 다시 읊어보네 / 臨難更長吟

이라 하였는데, 그 시가 청완(淸惋)하면서 사람을 격앙케 한다.
우리 나라에 대단한 문장가들이 많이 배출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자기 식대로 하려고만 힘썼을 뿐 당(唐) 나라 때의 작품에서 모범을 취해보려고 노력한 작품조차 극히 드문 실정이다. 그런데 충암(沖菴 김정(金淨))과 망헌(忘軒 이주(李冑)) 이후로는 최경창(崔慶昌)ㆍ백광훈(白光勳)ㆍ이달(李達) 등 몇 사람이 가장 저명하다. 충암의 시 가운데 사람들의 입으로 전송(傳誦)되어 오는 것이 원래 많은데, 가령

강남 땅 못다 꾼 꿈 고요한 대낮인데 / 江南殘夢晝厭厭
꽃다운 해 날마다 시름만 더해가네 / 愁逐年芳日日添
꾀꼬리 제비 오지 않고 봄날 또 저무는데 / 鶯燕不來春又暮
살구꽃에 이슬비 발을 도로 내려놓네 / 杏花微雨下重簾

이라고 한 것이나, 또

가을 바람 낙엽지는 금강의 가을인데 / 西風木落錦江秋
연무 덮인 모래섬 바라보면 시름겨워 / 煙霧蘋洲一望愁
해 저물녘 술은 깨고 사람은 멀리 떠나는데 / 日暮酒醒人去遠
감당 못할 이별 생각 강 누각에 가득하네 / 不堪離思滿江樓

라고 한 시 등은 당 나라 사람들의 시집 속에 놔두어도 쉽게 분간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망헌의 시 가운데

통주는 천하의 절경이라 / 通州天下勝
누각들 하늘에 솟았구나 / 樓觀出雲霄
저자엔 금릉의 물화(物貨) 가득하고 / 市積金陵貨
물줄기 양자강에 합류하네 / 江通楊子潮
가을이라 까마귀떼 물가에 내려 앉고 / 飢鴉秋落渚
저녁이라 외로운 새 요동으로 돌아간다 / 獨鳥暮歸遼
말 탄 이 내 몸 천리 길 나그네라 / 鞍馬身千里
정자 올라 바라보는 멀고 먼 고국땅 / 登臨故國遙

라고 한 것 역시 충암에 버금가는 시라고 하겠다. 최(崔)의 시에,

지난 해 절 언덕에 배를 갖다 대놓고는 / 去歲維舟蕭寺岸
꽃 꺾어 물가에서 전송을 하였었지 / 折花臨水送行人
이별 슬픔 저 산승은 아는지 모르는지 / 山僧不管傷離別
문을 닫고 무단히 또 봄 한 철을 보내누나 / 閉戶無端又一春

이라고 한 것이나, 백(白)의 시에,

못 속엔 붉은 연꽃 바람이 집에 가득터니 / 紅藕一池風滿院
나무마다 매미 소리 비가 마을로 몰려가네 / 亂蟬千樹雨歸村

이라고 한 것이나, 이(李)의 시에,

병객의 외로운 배 달빛만 밝게 비춰주고 / 病客孤舟明月在
노승의 적막한 절 꽃잎만 많이 져 있구나 / 老僧深院落花多

라고 한 표현들은 한 번 음미하면 그 맛을 알 수가 있다.
신 참판 종호(申參判從濩)는 성묘조(成廟朝)의 사신(詞臣)이었다. 일찍이 상림춘(上林春)이라는 기생을 돌봐주다가 그의 집에 들러 시를 짓기를,

서울 거리 봄 바람에 이슬비 지나감에 / 紫陌東風細雨過
먼지 하나 일지 않고 버들가지 비꼈어라 / 輕塵不動柳絲斜
열두 난간 발 친 곳에 옥같은 미녀 있어 / 緗簾十二人如玉
대궐 안의 시인들 말 가는 대로 찾아드네 / 靑瑣詞臣信馬過

하였는데, 이 시가 한때 전해져 읊어지면서 이에 따라 상림춘의 이름도 배나 값이 뛰었다. 참판공이 일찍 죽고 상림춘이라는 자도 민간에 묻혔는데, 나이가 노년에 접어들자 공의 시로 첩(貼)을 만든 다음 귀족 자제에게 가지고 가서 그 제목대로 시를 지어달라고 청하는 한편 명공(名公)과 거경(巨卿)에게도 모두 애원하며 시를 받아내었다. 그 중에서도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의 시가 으뜸이었는데, 그 시에,

경국지색 그 솜씨 아직 자태에 남았는데 / 容謝尙存傾國手
밤 깊어 부르는 노래 슬피 탄주하는구나 / 哀絃彈出夜深詞
소리마다 인생의 황혼 원망하는 듯도 한데 / 聲聲似怨年華暮
뜬 인생 너에게도 오는 늙음을 어이하랴 / 奈爾浮生與老期

라고 하는 등 슬픔과 원망의 감정을 격렬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 당시 시골에 내려가 있던 모재가 어쩌면 자신의 심정을 은근히 빗대고 싶은 생각이 또한 들어서 그렇게 했는지도 모르겠는데, 깊이 음미해 보면 그가 가탁한 바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봄 꿈은 진 나라 호해(胡亥) 때보다 어지럽고 / 春夢亂於秦二世
나그네 시름 노 나라 삼가 때만큼 몰려오네 / 羈愁强似魯三家

라고 하는 시는 누구의 작품인지는 모르겠으나 말의 뜻이 모두 새롭고 구절 역시 초경(峭勁)하니 심상한 묵객이 지은 것은 아닐텐데 어떤 이는 문관(文官) 박란(朴蘭)의 시라고도 한다.
원천석(元天錫)은 고려 사람으로 공민왕(恭愍王) 때 벼슬하지 않고 원주(原州)에 살면서 목은(牧隱 이색(李穡)) 등 제로(諸老)와 서로 왕래하였다. 그의 유고(遺稿) 중에는 후세에서 알 수 없었던 당시의 사적(事迹)을 직설적으로 기재한 것들이 있는데, 신우(辛禑)를 공민왕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그의 직필(直筆) 가운데에서도 대표적인 것이라 하겠다. 그의 시 가운데 ‘삼가 주상전하가 강화로 옮겨가고 원자가 즉위했다는 말을 듣고 느낀 감상[伏聞主上殿下遷于江華元子卽位有感]’이라고 제(題)한 2수를 보건대,

훌륭한 임금 부자(父子) 꼭 알맞게 나오셨기에 / 聖賢相遇適當時
이제부터 운세가 돌아온다 믿었었다오 / 天運循環自此知
나라 걱정하는 마음 초야라고 어찌 없을까 / 田畝豈無憂國意
간절한 마음 쏟아 안위를 염려하네 / 更殫忠懇念安危

라 하고, 또

새 임금 즉위하고 옛 임금은 강화로 / 新主臨朝舊主遷
쓸쓸한 해변가 운무만 가득하네 / 蕭條海郡但風煙
하늘 문 바른 길을 그 누가 좌우하나 / 天關正路誰開閉
역사의 전철 어떠한지 밝히 살펴 보리라 / 要見明明鑑在前

이라 하였으며, ‘도통사 최영이 형을 당하다[都統使崔瑩被刑]’라는 제목의 시 3수를 보건대,


라 하고, 또

조정에 우뚝 서니 범하는 자 감히 없고 / 獨立朝端無敢干
충의에 입각하여 난리마다 평정했네 / 直將忠義試諸難
나라 안 어디서나 백성들의 소망 되어 / 爲從六道黔首望
삼한의 종묘 사직 편안하게 만들었네 / 能致三韓社稷安
같은 반열 영웅들도 얼굴이 부끄럽고 / 同列英雄顔更厚
죽지 않은 못된 자들 뼈 속이 서늘했지 / 未亡邪侫骨猶寒
다시 당한 난국을 그 누구가 타개할까 / 更逢亂日誰爲計
간교한 일 꾀하는 지금 사람 가소롭네 / 可笑時人用事奸

이라 하고, 또

내가 지금 부음 듣고 애도하며 시 짓나니 / 我今聞訃作哀詩
공을 슬퍼하기보다 나라가 걱정이요 / 不爲公悲爲國悲
하늘 운세 어찌 될지 그 누구가 알까마는 / 天運誰能知否泰
안정시킬 나라 터전 아직도 안 돼 있네 / 邦基未了定安危
잘 드는 칼 부러졌으니 한탄한들 어이하리 / 銛鋒已折嗟何及
외로웠던 그 충성심 안타깝기 그지없네 / 忠膽常孤恨不支
홀로 산하 대하고서 이 노래를 부르는데 / 獨對山河歌此曲
흐르는 물 흰구름 모두가 탄식하네 / 白雲流水摠噫噫

라 하였으며, ‘듣건대 이 달 15일에 국가가 정창군을 왕으로 세우고 전왕 부자는 신돈의 자손이라 하여 서인으로 폐했다고 함[聞今月十五日 國家以定昌君立王位 前王父子以爲辛旽子孫廢爲庶人]’이라는 제목의 시 2수를 보건대,

전 임금 부자지간 서로들 분리되어 / 前王父子各分離
일만 리 동쪽 서쪽 한 구석에 옮겨졌네 / 萬里東西天一涯
몸이야 서인으로 전락된다 할지라도 / 可使一身爲庶類
마음이야 천고토록 변할 리가 있겠는가 / 寸心千古不遷移

라 하고, 또

왕건(王建) 태조 그 맹세 하늘에 응답되어 / 祖王信誓應于天
끼친 은택 수백 년 간 흘러져 전해 왔네 / 餘澤流傳數百年
어찌하여 일찍부터 진위(眞僞)를 분간 못했던가 / 分揀假眞何不早
푸른 하늘 밝게 살펴 비춰보고 있으리 / 彼蒼之鑑照明然

이라 하였으며, ‘국가가 영을 내려 전왕 부자에게 죽음을 내리다[國有令前王父子賜死]’라는 제목의 시 1수에,

높은 지위 부유한 생활 모두 임금 은혜인데 / 位高鍾鼎是君恩
반목하며 복수심에 집안을 죽여 없앴구나 / 反目含讐已滅門
나라에 어찌 큰 복이 내려질 수 있겠는가 / 一國豈能流景祚
말 못할 원한 지하에서 풀기 어렵게 되었구나 / 九原難可雪幽寃
옛날 풍속 없어지고 태평 시대 돌아옴에 / 古風淪喪時還泰
공평한 새 법 시행되고 도는 더욱 높아지리 / 新法淸平道益尊
옥 지대(址臺) 쪽을 향해 부르는 만세 소리 / 且向玉墀呼萬歲
산골까지 넉넉하게 은총 내려 주시기를 / 願施優渥及山村
이라 하였으며, ‘한산군이 참소를 당해 장단으로 유배됨[韓山君被讒謫長湍]’이라는 제목의 시 2수를 보건대,

천보 시대 빛 감추고 가혹한 정치 나왔는데 / 天寶韜光政令苛
누구 있어 옥을 쪼고 다시 갈듯 할 것인가 / 有誰如琢復如磨
그 동안 삼일 밤을 꿈 속에서 만났는데 / 邇來夢謁連三夜
혼령으로 노닐면서 지어준 노래 생각나네 / 記取魂遊作一歌
이 나라 정치 상황 화택 규(睽)로 돌아가고 / 邦國經綸歸火澤
강물에 떠 있는 배 풍파에 시달리나 / 江河舟楫困風波
하늘이 사문을 없애려 않는다면 / 天如未喪斯文也
광 땅 사람 있다 한들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
/ 縱有匡人奈我何

라 하고, 또

옥돌은 원래 완전한데 일이 잘못 틀어졌지 / 玉自無瑕事已訛
두 발 잘린 초인(楚人)의 뜻 정녕 다름 아니었네
/ 荊人兩刖定非侘
바다 동쪽 바람과 달 응당 분을 품을 게고 / 海東風月應含憤
이 세상 영웅들도 서로들 탄식하리 / 天下英雄所共嗟
만 백성 똑같이 새로운 일월 쳐다보나 / 萬姓同瞻新日月
삼한의 옛 산하는 그대로 여전하네 / 三韓自固舊山河
저 푸른 하늘만은 시비 분명 살필 텐데 / 明知枉正蒼蒼在
자나깨나 원하노니 건강 유의하시기를 / 寤寐祈傾體氣和

라고 하였다. 시어(詩語)가 질박하여 제대로 표현되지 못한 곳이 많긴 하지만 일에 대해서만은 숨김없이 곧이곧대로 썼으니 정인지(鄭麟趾)의 《고려사(高麗史)》에 비교해 보면 해ㆍ별과 무지개처럼 현격하게 차이가 날 뿐만이 아닌데 이를 읽다 보면 몇 줄기 눈물이 흘러 떨어지곤 한다. 대저 고려가 망하게 된 것은 무진년(1388, 우왕14)에 임금을 폐위시킨 데에서 유래한다. 그런데 임금을 폐위시킨 뒤에도 목은(牧隱)과 같은 사람들이 아직 남아 있어 한 가닥 공의(公議)는 없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그 때 정도전(鄭道傳)과 윤소종(尹紹宗) 등의 무리가 ‘임금이 왕씨(王氏)가 아니라고 하는 자는 충신이고 왕씨라고 하는 자는 역적이다.’는 주장을 내놓은 뒤 조정을 선동하고 인심을 현혹시켜 마침내 사류(士類)를 결딴내고 사람들의 입에 재갈을 물릴 수 있었던 것인데, 이런 상황에서 겨우 5년을 지탱하다가 나라가 망하고 만 것이었다. 이러한 때에 태어나서 바르고 올곧게 자신을 세우려는 사람들의 삶이야말로 얼마나 고달프고 낭패를 당한 것이었겠는가. 그런데도 인심이 다 현혹되지는 않고 사람의 입을 다 재갈 물릴 수는 없어 초야에서 이렇듯 동호(董狐)의 직필(直筆이 나왔으니, 이 어찌 눌린 바위 틈 사이로 죽순이 나온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백 평사 광홍(白評事光弘)의 호는 기봉(岐峯)으로 광훈(光勲)의 형이다. 서관(西關 평양)에서 주색에 빠져 노닐다가 끝내는 그 길로 죽었는데, 그가 지은 관서곡(關西曲)이 세상에 유행되었다. 그 뒤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이 서로(西路)에서 벼슬살이하면서 백(白)이 돌봐 준 기생에게 시를 지어 주기를,

대동강 가 꽃 경치는 예전과 다름없고 / 浿水煙花依舊色
능라도 무성한 풀 이제껏 봄이로다 / 綾羅芳草至今春
낭군 한 번 가신 뒤로 소식 영영 안 오는데 / 仙郞去後無消息
관서곡 한 가락이 눈물 자아내는구나 / 一曲關西淚滿巾

이라 하였는데 한 때 전송(傳誦)되었다.
홍 상국 섬(洪相國暹)의 자(字)는 퇴지(退之)요 호는 인재(忍齋)로서 의정(議政) 언필(彦弼)의 아들이다. 젊었을 때 김안로(金安老)의 모함에 떨어져 정형(庭刑)을 받고 흥양(興陽)으로 유배되었는데, 안로가 망하자 마침내 크게 현달(顯達)하였다. 그가 형을 받을 때 어떤 사람이 소 찬성 세양(蘇贊成世讓)에게 말하기를 “퇴지가 여기에서 끝나게 되다니 애석하다.”고 하였는데, 찬성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필시 앞길이 유망하게 될 것인데 어찌 갑자기 죽겠는가.” 하자, 그 사람이 어떻게 그것을 아느냐고 물으니, 찬성이 말하기를 “전일 염여퇴(灔澦堆 중국 양자강 구당협(瞿唐峽) 상류의 큰 암석이 있는 곳)라는 제목의 과제시(課製詩) 결구(結句)에서 그가 ‘원숭이 끊임없이 울어대면서 급한 여울 올라가는 나를 전송하누나[淸猿啼不盡送我上危灘].’라고 하였는데, 이런 시구를 지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운명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홍섬이 마침내 의정부에 정승으로 들어가 20년 동안이나 지내다가 나이 82세에 죽었으니, 시를 통해서도 이처럼 사람의 궁달(窮達)을 점칠 수 있는 것인가.
박 상국 순(朴相國淳)은 자(字)가 화숙(和叔)으로서 박우(朴祐)의 아들이요 눌재(訥齋) 박상(朴祥)의 조카이다. 그의 맑은 덕과 꿋꿋한 절개는 남이 따라갈 수 없었으며 정승으로 10년 동안 있으면서 아무 잘못도 없었다. 그런데 계미년(1583, 선조16)에 정인(正人)을 헐뜯는 자가 그를 모함에 빠뜨리면서 그의 죄 열 가지를 들어 배척할 것을 청하였는데, 선조대왕이 그에게 다른 뜻이 없다는 것을 통촉해 준 덕분으로 화를 면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병을 핑계로 물러나와 영평(永平) 땅에서 살았는데, 경치 좋은 그곳에서 유유자적하다가 아무 병 없이 생을 마쳤다. 그가 배척을 받고 서호(西湖)에 있을 때 시를 짓기를,

거문고 책 끼고 낭패당해 용산으로 물러나와 / 琴書顚倒下龍山
목란선(木蘭船)에 의지하고 바람 따라 흘러가네 / 一棹飄然倚木蘭
석양 노을 조각조각 붉기만 하고 / 霞帶夕暉紅片片
비온 뒤의 가을 물결 넘실넘실 푸르구나 / 雨增秋浪碧漫漫
꼬시래기 잎새 다 시들어 소객(騷客)의 마음 슬퍼지고 / 江蘺葉悴騷人怨
물여뀌 꽃 다 졌으니 백로도 밤에 추워하리 / 水蓼花殘宿鷺寒
백발 머리에 강 떠도는 나그네 신세 되어 / 頭白又爲江漢客
서리 이슬 잔뜩 맞고 여울을 거슬러 올라가네 / 滿衣霜露泝危灘

이라 하였는데 한때 널리 읊어졌다. 또 그의 ‘승려의 시축에 제함[題僧軸]’이라는 시에,

아침에 암자 물러나와 한가한 틈을 타서 / 小齋朝退偶乘閑
궤안에 기대고는 쓸쓸히 먼 산 바라보네 / 隱几蕭然看遠山
예로부터 세상 분규 그칠 날이 없었지만 / 終古世紛無盡了
오늘날 처신하기 더욱 더 어렵구나 / 秪今人事轉多艱
하늘 질러 지나간 새 까마득히 안 보이고 / 長空過鳥元超忽
석양녘 외로운 구름 갔다가는 돌아오네 / 落日孤雲自往還
생각나네 그 언젠가 먼 절에서 노닐던 일 / 遙想舊遊天外寺
목련꽃 활짝 피고 물은 졸졸 흘렀었지 / 木蓮花發水潺潺

이라 하였는데, 이것 역시 경절(警絶)하다고 칭해졌다. 그는 호를 사암(思庵)이라 하였다. 사암이 영평에 있을 때 소절(小絶) 한 수를 짓기를,

이따금 들려오는 외마디 산새 소리 / 谷鳥時時聞一箇
책상 머리 적요한데 서책들만 널려 있네 / 匡床寂寂散群書
어떡하나 백학대 앞 흐르는 저 시냇물 / 每憐白鶴臺前水
산문만 나가면은 이내 흙탕물 될 것이니 / 纔出山門便帶淤

라 하였는데, 한가하게 노닐며 자재(自在)하는 뜻과 홀로 높이 속세를 초월한 기상 모두가 이 시에 갖춰져 있다고 할 만하다.
노 상국 수신(盧相國守愼)은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蘇齋)로서 을사사화(乙巳士禍) 때의 명류(名流)이다. 20년 동안 진도(珍島)에 유배되어 있다가 명묘(明廟) 말년에 양이(量移 환경이 나은 곳으로 유배지를 옮기는 것)되었으며, 선조(宣祖)가 즉위하자 곧바로 부름을 받고 관각(館閣)에 몸을 담았는데, 10년이 채 못 되어 단규(端揆 우의정)의 지위에 오르는 등 임금으로부터 지극한 은총을 받았다. 문장 또한 기건(奇健)하여 당대의 으뜸이었는데, 특히 섬에 있을 때 지은 시 가운데 놀랄 만한 절창이 많아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었다. 가령 그의 아우와 작별할 때 지은 시 1구를 보면,

석양 숲속 까마귀들 피 토하듯 울어대고 / 日暮林烏啼有血
썰렁한 하늘 저 기러기 슬프구나 짝도 없네 / 天寒哀雁影無隣

이라 하였고, 효릉(孝陵 인종(仁宗)의 능)을 참배했을 때의 시 1구를 보면,

그런 일 실제 있어 효릉이라 명명했고 / 有實陵名孝
사심이 없었기에 인종이라 시호했네 / 無私諡曰仁

이라 하였고, 이런 일에 대해서 읊은 시 1구를 보면,

논의야 그 당시에 정해질 수 있겠지만 / 物議當年定
인심은 후세에야 공정해지는 법이라오 / 人心後世公

이라 하였는데, 이런 작품들을 통해서 그의 전체(全體)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성수종(成守琮)은 바로 청송 선생(聽松先生 성수침(成守琛))의 아우로서 기묘사화(己卯士禍) 때의 명류이다. 일찍 문과(文科)에 합격했으나 과방(科榜)에서 삭제당한 뒤 한거(閑居)하였는데, 그의 시 가운데

저자 거리 변두리에 뚝 떨어진 몇 겹 청산 / 數疊靑山落市邊
해 저물녘 성안에선 연기가 흩어지는구나 / 層城日暮散風煙
사는 곳이 토굴같아 별로 사람도 안 오는데 / 幽居近壑人來少
혼자서 국화 따다 돌밭에 앉곤 하네 / 獨採黃花坐石田

이라고 한 하나의 소절(小絶)을 읊어 보면 그 사람됨을 상상할 수 있다.
서화담(徐花潭)은 이름은 경덕(敬德)이요 자는 가구(可久)로서 타고 난 자질이 상지(上知)에 가까운데 황폐한 곳에서 일어나 스스로 학문을 할 줄을 알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소역(邵易 소강절(邵康節)의 역)에 조예가 깊었는데 그가 뽑아낸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의 수(數)를 보면 하나도 잘못된 곳을 찾을 수가 없으니 기걸스럽다고 하겠다. 가령 그가 중국에 태어나 대유(大儒)를 직접 스승으로 모시고 배웠더라면 그 고명하고 투철하게 된 경지가 현재 보이는 발전 정도로 그치지만은 않았을 것인데, 하여튼 희역(羲易 복희(伏羲) 선천역(先天易))의 오솔길을 제대로 찾아낸 자는 아조(我朝)에서 화담 한 사람뿐이었다. 그의 시에,

책 읽으며 당초에는 경륜에 뜻 뒀는데 / 讀書當日志經綸
늙어가며 다시금 안회(顔回)의 가난이 좋아졌네 / 歲暮還甘顔氏貧
다툼의 요소 부와 귀는 손을 대기 곤란하니 / 富貴有爭難下手
막는 이 없는 자연 속에서 몸을 편히 해야 하리 / 林泉無禁可安身
낚시하고 나물 캐면 그런 대로 배 채우고 / 採山釣水堪充腹
바람과 달 시 읊으면 정신도 명랑해진다오 / 咏月吟風足暢神
의심없이 깨우쳐야 이것이 진정 쾌활한 것 / 學到不疑眞快活
일백 년 헛되이 살다 가는 사람은 되지 말아야지 / 免敎虛作百年人

이라 하였는데, 이를 통해 그의 뜻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성대곡(成大谷)의 이름은 운(運)으로서 아름다운 자질을 갖고 태어나 일찍부터 세상의 그물을 빠져 나갔는데, 그의 형이 우연히 을사사화(乙巳士禍)를 당해 비명(非命)에 죽고 말자 이로부터 더욱 출세(出世)에 뜻이 없어져 보은(報恩) 속리산(俗離山) 아래에 숨어 살다가 80여 세의 나이로 죽었다. 시 역시 그의 사람됨을 닮아 충담(沖澹)하고 한아(閑雅)하여 서호처사(西湖處士 송(宋) 임포(林逋))의 유운(遺韻)을 간직하고 있다. 그의 시구(詩句) 가운데 아름다운 것을 예로 들면,

소매 짧은 봄 옷이 몸에 꼭 맞고 / 春服稱身雙袖短
일곱 줄 옛 거문고 손에 익구나 / 古琴便手七絃長
십 년 동안 산중 약초 모조리 맛 보았고 / 十年嘗盡山中藥
이따금 손님 와서 좋은 얘기 들려주네 / 客到時聞口齒香

이라고 한 것이 있고, 남명(南冥) 조식(曹植)을 전송한 시에서,

북명(北冥)의 기러기 홀로 남쪽 바다로 떠나는데 / 冥鴻獨向海南飛
가을 바람에 낙엽지는 계절을 맞았구나 / 正値秋風落木時
땅에 널린 곡식 낱알 오리 닭들 쪼아 먹는데 / 滿地稻梁鷄鶩啄
푸른 하늘 높이 날며 귀찮은 세상일 잊었구나 / 碧雲天外自忘機

라고 하였는데, 이와 같은 것들이 매우 많다.
조남명(曹南冥)의 이름은 식(植)이요 자는 건중(楗中)인데 절의(節義)를 숭상하여 깎아지른 듯한 천 길 벼랑과 같은 기상이 있었으며 벼슬하지 않고 은둔 생활을 하였다. 문장 역시 기위(奇偉)하여 범상치가 않았는데, 가령

천 석들이 종을 보게나 / 請看千石鍾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도 안 난다네 / 非大叩無聲
만고에 변함 없는 천왕봉을 보세나 / 萬古天王峯
하늘이 울어대도 우는 일 전혀 없네 / 天鳴猶不鳴

이라고 한 시를 보면 그 시운(詩韻)이 호장(豪壯)할 뿐만이 아니라 자부하는 것이 얕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괴이한 것은 그로부터 1대(代)를 전해 내려와 정인홍(鄭仁弘)이라는 자가 허다한 옥사(獄事)를 만들어내어 사람을 죽이고 1백 년 동안 내려온 윤기(倫紀)를 무너뜨려버린 점이다. 그러나 귀산(龜山)이 육당(陸棠)에 대해서 어떻게 할 수 있었겠는가.
남명의 시에,

사람들 바른 인물 좋아하는 것 / 人之好正士
호랑이 가죽 좋아함과 비슷하구나 / 好虎皮相似
살았을 땐 어떻게든 죽이려 하고 / 生則欲殺之
죽고 나면 아름답다 일컫네그려 / 死後稱其美

라 하였는데, 세간의 속성을 속속들이 알고서 잘도 형용했다 하겠다.
남추강(南秋江 남효온(南孝溫))의 현금부(玄琴賦)야말로 국조(國朝) 사부(詞賦)의 으뜸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 문재(文才) 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말미에서 오음(五音)에 관해 논한 것을 보면 지극히 은미한 뜻이 들어 있는데, 어쩌면 느낀 바가 있어서 그렇게 나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것을 읽을 때면 미상불 눈물이 흘러내리곤 한다.
근래 규수(閨秀)의 작품으로는 조 승지 원(趙承旨瑗)의 첩인 이씨(李氏)의 것이 제일이다. 경치를 읊은 그녀의 시 중 1구에,

강물에 몸 담근 갈매기 꿈 하나 널찍하고 / 江涵鷗夢濶
하늘에 들어간 기러기 근심도 하 길구나 / 天入雁愁長

이라고 하였는데, 고금의 시인 가운데 이렇게 표현한 자는 아직 없었다. 허초당(許草堂 허엽(許曄))의 딸이자 김 정자 성립(金正字誠立)의 처로서 스스로 경번당(景樊堂)이라고 호를 지은 여류(女流)의 시집이 세상에 간행되었는데 어느 시편을 보아도 놀랄 만큼 예술성이 뛰어나다. 그 중에서도 전해 오는 광한전(廣寒殿) 상량문(上樑文)은 무척 아름답고 청건(淸健)하여 사걸(四傑 초당(初唐)의 왕발(王勃)ㆍ양형(楊炯)ㆍ노조린(盧照隣)ㆍ낙빈왕(駱賓王)을 말함)의 작품과 비슷한 점이 있다. 그런데 다만 시집에 실려 있는 것 가운데 가령 유선시(游仙詩)같은 것은 태반이 옛 사람의 시편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일찍이 그 근체시(近體詩) 2구를 보건대,

금방 얼굴 화장하고 또 거울 쳐다보고 / 新粧滿面猶看鏡
못다 꾼 꿈 마음 걸려 누각에서 서성이네 / 殘夢關心瀨下樓

라 하였는데, 이것은 바로 옛 사람이 지은 시이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그녀의 남동생 허균(許筠)이 세상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시편을 표절(剽竊)하여 슬쩍 끼워넣은 것이다.’고 하는데, 이 말이 그럴 듯하기도 하다
차천로(車天.輅)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 아비 차식(車軾) 때부터 대대로 문재(文才)가 있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천로의 재주가 더욱 절륜하여 장편(長篇) 대작(大作)을 끊임없이 왕성하게 지어내는 등 사단(詞壇)의 우두머리가 되기에 충분하였는데, 그의 시 가운데 가령,

바람 결에 울부짖는 발해의 파도 소리 / 風外怒聲聞渤海
눈 속에 잠긴 수심 음산의 빛이로다 / 雪中愁色見陰山

이라고 한 구절은 널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람됨이 경솔하고 불량하여 과거 응시생으로부터 뇌물을 받아먹고 시험장에서 대신 답안지를 작성해서 합격시켜 준 경우도 매우 많았으며, 만년에는 이재영(李再榮)과 함께 권간(權奸)에 빌붙고는 그의 아들 대신 제술해주는가 하면 상소를 올려 시의(時議)에 억지로 맞추려고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분개하였는데 얼마 있다가 병으로 죽었다. 재주란 이처럼 논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옛 사람이 ‘문장 실력은 하나의 조그마한 기예에 불과하다.’고 한 것이 정말 맞는 말이라 하겠다.
자순(子順) 임제(林悌)는 성격이 호방하고 시도 잘했는데 일찍이 지은 패강곡(浿江曲) 10 수 가운데 하나를 보면,

대동강 가 소녀들 봄볕 밟고 거니는데 / 浿江兒女踏春陽
어느 곳 봄볕인들 애간장이 안 끊기랴 / 何處春陽不斷腸
끝없이 내리는 저 햇살로 베를 짤 수만 있다면 / 無限煙絲若可織
님을 위해 재단해서 춤옷을 만들어 주련마는 / 爲君裁作舞衣裳

이라 하였다. 시어가 매우 염려(艶麗)한데 이는 대체로 번천(樊川 두목(杜牧))을 본받아 지은 작품이라 하겠다.
고려 정지상(鄭知常)의

복사꽃 붉은 비 새들은 재잘재잘 / 桃花紅雨鳥喃喃
청산 속에 파묻힌 집 산봉우린 삐쭉삐쭉 / 繞屋靑山間翠嵐
머리 위에 얹힌 모자 삐딱하게 그냥 둔 채 / 一頂烏紗慵不整
꽃 언덕 길 술에 취해 강남 꿈꾸며 자는구나 / 醉眠花塢夢江南

이라고 한 시는 착상이 기발하고 표현이 아름다운데 우리 나라의 시 가운데에는 여기에 비할 만한 작품이 드물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한 점 군산 위의 석양 빛 붉은 노을 / 一點君山夕照紅
끝도 없는 그 세력 오와 초를 집어 삼키누나 / 濶呑吳楚勢無窮
바람은 초저녁 달에 계속 불어 올라가고 / 長風吹上黃昏月
땅거미 져 오는데 초롱 속의 촛불 하나 / 銀燭紗籠暗淡中

이라고 한 시는 기상이 넓고 커서 다른 사람들을 삼켜버릴 만하다 하겠다.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은 시인이다. 그리고 기위(奇偉)한 기질의 소유자로서 남과 서로 어울리지 않으면서 시속을 따라 행동하지 않았으며, 청련(靑蓮 이백(李白))의 시를 배우려 노력하였고 그 가법(家法)의 규모가 매우 컸다. 언젠가 그의 소절(小絶) 한 수를 읊어보건대,

어떤 사람 물가에 기대어 서 있는데 / 人方憑水檻
해오라기 한 마리도 여울가에 멈춰 섰네 / 鷺亦立沙灘
머리가 흰 것이야 서로 비슷하다마는 / 白髮雖相似
나는 한가한 반면에 해오라긴 여유 없네 / 吾閑鷺未閑

이라 하였는데, 세상을 흘겨보며 자신의 멋대로 살려고 하는 호방한 뜻을 알 수가 있다.
동파(東坡)의 시에,

주공과 관숙(管叔) 그리고 채숙(蔡叔)이여 / 周公與管蔡
유감일세 초가 삼간에서 같이 안 산 것 / 恨不茅三間

이라 하였는데, 내가 이 시를 읊을 때면 문득 길게 탄식을 하곤 한다. 가령 희단(姬旦 주공)이 다시 세상에 나온다면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될 것인가. 옛날에 내가 백이(伯夷) 숙제(叔齊)의 사당을 참배하면서 시를 짓기를,

군신 간의 의리는 은(殷)과 주 때 없어졌고 / 君臣義廢商周際
형제 간의 우애는 관숙(管叔) 채숙(蔡叔)때 무너졌네 / 兄弟恩壞管蔡時
우습구나 소부(巢父) 허유(許由) 무슨 일을 하였는가 / 却笑巢由何事者
일생을 영수(潁水)에서 요만 피하고 다니다니 / 一生淸潁避堯爲

라 하였는데, 이를 보고서 어떤 이는 과격하다고도 했으나 실은 그렇게 과격한 논은 아닌 것이다.
정송강(鄭松江)이 해직되어 남쪽 지방에 있을 때 시를 짓기를,

도성 아래 남쪽 지방 수풀만 울창한데 / 掖垣南畔樹蒼蒼
돌아오는 꿈 속 멀리 옥당에 올랐다오 / 歸夢迢迢上玉堂
두견새 울음 소리 산 대나무 찢어지고 / 杜宇一聲山竹裂
외로운 신하 흰 머리털 이때 더욱 길어지네 / 孤臣白髮此時長

이라 하였는데, 그 표현이 사람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한다.
또 어떤 이에게 준 시의 말구(末句)에,

어떻게 하면 돌로 변해 / 何當化爲石
저무는 강 머리에 우뚝 서 있게 될꼬 / 屹立暮江頭

라 하였는데, 이것 역시 뛰어난 표현으로서 그러한 발상 자체에 호감이 간다.
지천(芝川) 황정욱(黃廷彧)은 문장에 깊은 조예가 있었다. 그의 시구 가운데,

평생토록 귀거래(歸去來)를 노래삼아 불렀는데 / 平生漫說歸田好
반 세상 지나도록 벼슬 길에 매어 있네 / 半世猶歌行路難

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 뜻이 매우 격렬하다.
간이(簡易) 최립(崔岦)은 문장을 지음에 있어 고문(古文)을 추급(追及)하려 힘쓰고 시는 여사(餘事)로 여겼는데 그런 시 역시 남보다 뛰어나게 기건(奇健)한 구절들이 있었다. 내가 그와 함께 경사(京師)로 가는 동안 연로(沿路)에서 서로 주고받은 시들이 매우 많았는데 그 시구들을 한 때 좋아했었다. 가령,

두우(斗牛)를 쏘는 검기(劍氣) 그 누가 보았던가 / 劍能射斗誰看氣
황제도 보기 전에 벌써 옷에 향기 나네 / 衣未朝天已有香

이라고 한 것이나, 또

상림원(上林苑) 맴도는 갈가마귀 나무 앉을 자리 없고 / 烏繞上林無樹着
남포 좇는 저 기러기 옛 모래섬 아니구나 / 雁遵南浦故洲非

라고 한 것이나, 또

종남산과 위수 물 늘상 보듯 친숙한데 / 終南渭水如常見
무덕과 개원 시절 다시 볼 수 있을런가 / 武德開元得再攀

이라고 한 것들은 언어 표현이 정절(精切)하고 교건(矯健)하다 하겠다.
우계(牛溪) 성혼(成渾)이 사암(思庵 박순(朴淳))을 애도한 시에,

세상 밖 구름 산 깊고 또 깊숙한데 / 世外雲山深復深
시냇가 초가집 이젠 찾기 어려워라 / 溪邊草屋已難尋
배견와 위에 떠오른 삼경의 달이여 / 拜鵑窩上三更月
선생의 일편 단심 지금도 비춰주네 / 曾照先生一片心

라 하였는데, 사암을 애도하는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고 하겠다. 배견와는 바로 사암이 거하던 별장의 이름이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중봉(重峯) 조헌(趙憲)을 애도하면서,

아 슬프다 여식이여 / 吁嗟乎汝式
공자(孔子)ㆍ안자(顔子) 배우고 가의(賈誼)ㆍ굴원(屈原) 사모했지 / 學孔顔而慕誼原
곧게 죽으려 하더니 끝내 순절(殉節)하였구나 / 欲死於直而竟死於節
아 슬프다 여식이여 / 吁嗟乎汝式

이라 하였는데, 세상에서 말할 줄 안다고들 하였다.
진간재(陳簡齋 송(宋) 진여의(陳與義))의 시 가운데,

나그네 생활 흘러가네 시권 속에 파묻혀서 / 客子光陰詩卷裏
살구꽃 소식 들려오네 비소리에 뒤섞여서 / 杏花消息雨聲中

이라는 구절이 있고, 우리 나라 김 박사 질충(金博士質冲)의 시 가운데,

삼 년 간의 약 꾸러미 병은 여전히 낫지 않고 / 三年藥裏人猶病
한밤중의 비 소리 꽃이 모두 활짝 피네 / 一夜雨聲花盡開

라는 구절이 있는데, 대체로 볼 때 시어(詩語)가 서로 비슷하다. 그런데 박사의 작품 역시 당시 사람들에 의해 많이 읊어졌다.
최간이(崔簡易)가 백이(伯夷) 숙제(叔齊)의 사당을 주제로 하여 시를 읊기를,

그 당시 삼강의 인륜 중히 여겨서 하였을 뿐 / 只爲三綱當日重
훗날 오등의 영화 바라고 한 일 아니었네 / 非期五等後時榮
청운지사(靑雲之士) 열전(列傳) 지어 문자를 달릴 적에 / 靑雲作傳馳文字
이름만 줄곧 논하다니 견식이 어설프군
/ 一味論名見卽輕

이라 하였는데, 이는 전에 사람들이 내놓지 못한 것으로서 칠언 근체시(近體詩) 가운데 아래 2구에 나오는 것이다.
간이공(簡易公)이 전주부윤(全州府尹)으로 있다가 부름을 받고 서추(西樞)로 들어와 중국과의 외교 문서를 전담하였다. 그런데 괴원(槐院 승문원)에 제조(提調)가 매우 많아 각자 소견을 고집하였기 때문에 문서 하나를 만들어 낼 때마다 짜깁기해야 되는 경우가 태반이었으므로 간이가 무척 고심하였다. 이즈음 어떤 이에게 준 시 1연(聯)을 보면,

난세에 글 쓰는 것 고삐 풀린 망아지요 / 亂世用文方釋馬
구미 맞춰 말 만들 땐 파리떼 윙윙 거리누나 / 從人安字轉成蠅

이라 하였는데, 해학적인 표현을 근사하게 구사하면서도 율려(律侶)가 자연적으로 들어맞았다고 하겠다.
운장(雲長) 송익필(宋翼弼)은 서출(庶出)이라는 신분의 구속을 받았지만 천품이 무척 고매했고 문장 역시 고상하였다. 가령

짙푸른 버들 숲에 연무(煙霧) 뚝뚝 떨어질 듯 / 柳深煙欲滴
고요한 연못 위에 해오라기 나는 것 까먹은 듯 / 池淨鷺忘飛

라고 한 구절을 보면 그 시격(詩格)이 여러 사람들을 뛰어넘고 있는데, 그 청파(淸葩)한 점이 귀하게 여겨질 뿐만 아니라 이치로 따져도 저절로 수긍이 간다.
백사(白沙) 이 상국(李相國)이 무오년(1618, 광해군10) 봄에 대비(大妃)를 폐위한 일을 간하자 시의(時議)가 극전(極典)을 적용하려고 하면서 하수인들을 사주한 결과 참형(斬刑)에 처하라고 요청하는 상소가 하루에도 서너 번씩 올라오곤 하였다. 이때 대사헌 이병(李覮)과 대사간 윤인(尹訒) 등이 절도(絶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시키라고 청하자 상이 멀리 유배보내도록 하여 처음에 관서(關西)로 귀양보내었다. 이에 다시 하수인들을 사주해서 절새(絶塞)에 놔두도록 청하여 육진(六鎭)에 이배(移配)했다가 또 삼수(三水)로 옮겼는데 상이 특별히 북청(北靑)으로 옮기게 하였다. 도성을 떠나던 날 절구(絶句) 한 수를 읊기를,

태양이 빛을 감춰 대낮에도 어두운데 / 白日陰陰晝晦微
북풍이 불어닥쳐 길손 옷깃을 찢는구나 / 朔風吹裂遠征衣
요동 땅 그 성곽은 옛날 그대로 있을텐데 / 遼東城郭應依舊
정령위(丁令威) 한 번 가서 못 돌아올까 염려되네
/ 只恐令威去不歸

라고 하였는데 이를 듣고 모두 눈물을 흘렸다. 이때 영상인 덕양 기공(德陽奇公 기자헌(奇自獻)) 및 정 첨추 홍익(鄭僉樞弘翼),김 정 덕함(金正德諴)이 함께 바른말을 하다가 모두 북쪽 변경으로 유배되어 동시에 떠나갔는데 이들이 가면서 국맥(國脈)도 다하고 말았다. 당시 옥당의 장관은 정조(鄭造)였다.
정군 익지(鄭君翼之 익지는 정홍익의 자(字)임)가 도중에서 시를 짓기를,


이라 하였는데, 그 말 역시 읊어볼 만한 운치가 있다.
왕감주(王弇州 명(明) 왕세정(王世貞))의 열사(閱史)라는 시를 보건대,

책 덮고 사립에 기대 흥망 성쇠 살펴보니 / 掩卷柴門數落暉
옛적부터 성인 정치 모두들 바랐지만 / 古來俱羨聖之威
어찌 알았으랴 이 세상 하 많은 일 / 那知天地長多事
모두가 영웅들 날뛴 탓임을 / 總爲英雄未息機
차마 두 눈 뜬 채 인체를 보게 되고 / 雙眼耐他人彘在
육신은 잘도 제파되어 돌아왔구나 / 一身贏得帝羓歸
건어물도 조룡의 악취 막지 못했고 / 鮑魚不救祖龍臭
제 환공(齊桓公)의 살찐 몸 구더기가 슬었었지 / 螻蟻翻因齊霸肥
대궐에 있다가도 사태가 일변하면 초가로 옮겨지고 / 黃屋事移輸白屋
곤룡포 입다가도 인연이 다하면은 서민 옷 입게 되네 / 衮衣緣盡着靑衣
임금의 자손들도 때때로 운명 뒤바뀌고 / 王孫子姓時時改
한식날 찾아와도 왕릉들 배를 곯는구나 / 寒食園陵箇箇饑
망아지 틈새 지나가듯 세상 목숨 어느새 다 끝나고 / 塵世隙駒俄自了
비평가들 붓 한 번 까딱만 하면 쉽게도 못된 놈되고도 남지 / 竪儒毫免易成非
강남 땅 사슴 돼지 노닐던 그 곳 / 江南鹿豕同遊處
아름드리 거목들만 하늘 찌르네 / 喬木連雲盡百圍

라 하였는데, 가령 제왕들에게 혼이 있다면 이 곡(曲)을 듣고 어찌 기가 막히지 않겠는가.
이공 수광(李公睟光)의 자는 윤경(潤卿)이요 호는 지봉(芝峯)인데 나와 노닌 지 지금 40 년이 된다. 단아한 풍도가 진세(塵世)를 벗어나 세상의 변고를 차례로 다 맛보았으면서도 조금이라도 좌절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이와 함께 기미를 보고 일어나 함정에 떨어지는 화를 면할 수 있었으니, 그야말로 금옥군자(金玉君子)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지금은 경(卿)의 직질(職秩)을 가진 신분으로 외직(外職)에 보임되기를 원하여 밖으로 나가 순천부(順川府)를 맡고 있는데, 병진년(1616, 광해군8)에 조정을 하직할 당시 김포(金浦) 시골 집으로 나를 찾아왔었다. 그리고 금년 여름에는 그의 생질 유생(柳生)이 오는 편에 시권(詩卷)을 부쳐 보냈는데 그 가운데 칠언 근체시 2수가 들어 있었다. 그 시를 보건대,

늘그막에 남쪽 시골 수령으로 내려와서 / 暮年身世宰炎鄕
다스릴 능력 없어 탄식만 하고 앉아 있네 / 治郡無能坐嘯長
한가한 집 뜨락엔 봄 제비도 오지 않고 / 春燕不來閑院落
조그마한 연못가엔 맑은 물결 찰랑이네 / 晴波欲滿小池塘
붉은 매화 그림자 아래 문서 처리할 일도 없고 / 紅梅影下文書靜
귤나무 그늘 가에 자리가 향기롭네 / 綠橘陰邊几席香
퇴근하고 문 닫히자 인적도 끊어지고 / 衙罷閉門人跡少
창 너머 새 소리에 또 기우는 저녁 햇살 / 隔窓啼鳥又斜陽

이라 하였고, 또

난간 밖 연못의 빛 푸른 이끼 물들이고 / 檻外池光梁綠苔
주렴(珠簾)에 비낀 가랑비 노란 매실 익히누나 / 一簾微雨欲黃梅
출근해도 문 닫힌 채 적막하기 그지없고 / 衙居寂寞門長掩
퇴근해도 어제처럼 인 꺼낼 일 하나 없네 / 公退尋常印不開
밀감 향내 맡으면서 산 사슴 잠이 들고 / 盧橘香邊山鹿睡
석류 꽃 그늘 아래 새들 모여 앉아 있네 / 石榴花下怪禽來
창문 밖엔 하루 종일 찾아오는 인적 없어 / 軒窓盡日淸如水
오늘도 시상(詩想)에 젖다 낮잠에 빠져드네 / 輸與騷翁晝夢回

라고 하였는데, 격운(格韻)이 청려(淸麗)하여 스스로 미칠 수가 없다. 지봉은 시를 지을 때 옛 사람들을 추급(追及)하려고 노력하면서 경룡(景龍 당 중종(唐中宗)의 연호) 개원(開元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 년간에 활약했던 제자(諸子)들과 보조를 맞추려 하였고 중당(中唐) 이하는 논하지 않았다. 그의 글 역시 훌륭하게 법도를 갖추고 있다.
아조(我朝)에 들어오면서 시인들이 각 시대마다 나와 그 숫자가 수백 명이 될 뿐만이 아닌데 근대(近代)의 시인들을 말한다면 세 가지 부류로 나뉘어진다. 화평(和平)하고 담아(淡雅)하여 일가(一家)를 이룬 자로는 용재(容齋) 이행(李荇)과 낙봉(駱峯) 신광한(申光漢)이 있는데 신은 비교적 맑고 이는 비교적 원만한 편이다. 대가(大家)를 든다면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이 응당 으뜸을 차지하고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과 허백당(虛白堂) 성현(成俔)이 그 뒤를 따른다. 그리고 눌재(訥齋) 박상(朴祥),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지천(芝川) 황정욱(黃廷彧), 간이(簡易) 최립(崔岦) 같은 이들은 험괴(險瓌)하고 기건(奇健)함을 장기(長技)로 삼는다. 시 세계에 대해 바른 깨달음을 얻은 자는 여전히 많지 않은데, 사암(思庵) 박공순(朴公淳)이 근래 조금 당대(唐代)의 시파(詩派)를 섭렵하여 매우 청소(淸邵)한 시를 지었다
소재(蘇齋)가 유배 중에 지은 시 작품들은 지극히 청건(淸健)하다. 그러나 만년에 들어와 서술한 것은 너무 가라앉았으니 후생들이 본받아서는 안 될 것이다.
호음(湖陰)의 장기(長技)는 근체시에 있다. 장편과 절구는 근체시에 미치지 못한다.

관각체(館閣體)는 대부분 응제(應製 임금의 명으로 시문을 짓는 것)로 주고받은 것이기 때문에 비록 거공(巨公) 홍장(鴻匠)이라 할지라도 임시 변통으로 얽어서 만든 결함이 없지 않지만 그 빛나는 재치만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선조조(宣祖朝)에 문형(文衡)을 담당한 자 약간 명을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홍섬(洪暹). 자는 퇴지(退之), 호는 인재(忍齋)로서 의정(議政)까지 되었으며 82세의 나이로 죽었다. 재임(再任)했다.

박충원(朴忠元). 자는 중초(仲初)로 판서까지 되었으며 75세의 나이로 죽었다.
박순(朴淳).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庵)으로 의정까지 되었으며 67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황(李滉).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로 찬성까지 되었으며 70세의 나이로 죽었다.

노수신(盧守愼).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蘇齋)로서 의정까지 되었으며 76세의 나이로 죽었다.

정유길(鄭惟吉). 자는 길원(吉元), 호는 임당(林塘)으로 의정까지 되었으며 74세의 나이로 죽었다.

김귀영(金貴榮). 자는 현경(顯卿), 호는 동원(東園)으로 의정까지 되었으며 74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이(李珥).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으로 찬성까지 되었으며 49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산해(李山海). 자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로 의정까지 되었으며 71세의 나이로 죽었다.

황정욱(黃廷彧). 자는 경문(景文), 호는 지천(芝川)으로 부원군이며 75세의 나이로 죽었다.

유성룡(柳成龍).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로 의정까지 되었으며 66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양원(李陽元). 자는 백춘(伯春), 호는 노저(鷺渚)로 의정까지 되었으며 66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덕형(李德馨).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으로 의정까지 되었으며 53세의 나이로 죽었다. 재임했다.

홍성민(洪聖民). 자는 시가(時可), 호는 졸옹(拙翁)으로 찬성까지 되었으며 59세의 나이로 죽었다.

윤근수(尹根壽). 자는 자고(子固), 호는 월정(月汀)으로 부원군이며 80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항복(李恒福). 자는 자상(子常), 호는 백사(白沙)로 63세의 나이로 죽었다.

심희수(沈喜壽). 자는 백구(伯懼)이고 호는 일송(一松)이다.

이정귀(李廷龜). 자는 성징(聖徵)이고 호는 월사(月沙)인데 재임했다.

이호민(李好閔). 자는 효언(孝彦)이고 호는 오봉(五峯)이다.

유근(柳根). 자는 회부(晦父)이고 호는 서경(西坰)이다.

한사(寒士) 권필(權韠)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자는 여장(汝章)으로 참의 권벽(權擘)의 아들이다. 권벽은 문장을 잘했는데 권필이 어려서부터 가정의 훈도를 받은 결과 약관(弱冠)에 문예(文藝)가 이루어졌다. 소릉(少陵 두보(杜甫))의 시풍을 배우려고 노력하였으며 작품을 보면 매우 맑고 아름다운데 뒤에 와서 시를 짓는 사람들이 그를 으뜸으로 쳤다. 그런데 그의 시가 시휘(時諱)에 저촉되는 바람에 임자년(1612, 광해군4)에 정형(廷刑)을 받고 북쪽 변경으로 유배당하게 되었는데 도성 문을 나가다가 죽고 말았다. 이때 그의 나이 43세였는데, 원근에서 이를 듣고 탄식하며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사람됨 역시 소탈하고 무슨 일이든 겁없이 해치우는 성미였으며 사소한 의절(儀節)에 구애받지 않았는데 과거 공부도 포기한 채 세상을 도외시하고 떠돌아다니면서 시와 술로 스스로 즐겼다. 임진왜란을 당해 강화(江華)로 흘러 들어가 우거(寓居)하고 있을 때는 그를 존경하여 추종하는 자가 날로 문에 나아왔는데 심지어는 식량을 싸들고 천 리 먼 곳에서 미투리를 삼아 신고 와서 따르는 자도 있었다. 그러다가 그가 죽자 문인들이 죄없이 그가 죽게 된 것을 가슴 아파한 나머지 과거를 포기하고 세상과 관계를 끊어버리는 자들도 많이 나왔다. 그의 저술 《석주집(石洲集)》이 세상에 전해진다. 아들 하나가 있었으며 그 문인은 심척(沈惕)이라고 한다.

이춘영(李春英)이라는 자의 자(字)는 실지(實之)이고 호는 체소(體素)인데 백 참찬 인걸(白參贊仁傑)의 외손이다. 소싯적에 성우계(成牛溪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벼슬이 첨정(僉正)에 그친 채 죽었는데 그때의 나이 44세였다. 시의 됨됨이가 순탄하고 넉넉하였으며 소장공(蘇長公 소식(蘇軾))을 끔찍이도 좋아하여 성취된 바가 걸출하였는데 시보다는 글이 우수하였다. 근래 문필에 종사하는 자들 치고 그의 작품을 보고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멀찌감치 물러나지 않는 이가 없는데, 유문(遺文)으로는 겨우 3권(卷)이 집에 소장되어 있다.

김현성(金玄成)이라는 자의 자는 여경(餘慶)이요 호는 남창(南窓)으로서 시가 고아(高雅)한데다 당(唐)의 시체(詩體)를 모범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의 시를 무척 좋아하는 자가 가끔 있었다. 올해 77세의 나이인데도 쇠하지 않았는데, 필법(筆法) 또한 오흥(吳興 왕희지(王羲之))을 사모하여 그 경지에 매우 가까이 갔으므로 한 때 공사(公私) 간에 금석(金石)을 새기는 일은 모두 그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갑자년(1564, 명종19)에 급제하여 직질(職秩)이 아경(亞卿)에 이르렀는데 본래 한미(寒微)한 출신으로서 스스로 문묵(文墨)에 힘써 집안을 일으켰으니 이것도 보기 드문 일이라 하겠다. 사람 됨됨이 역시 소탈하여 세상의 때가 묻지 않았는데, 어려서 뜻한 학문의 열정이 늙어서도 시들지 않았으니 그것 또한 높이 평가할 만하다. 신유년(1621, 광해군13)에 죽었는데 그때의 나이가 80이었다.

아조(我朝) 열성(列聖)의 문장으로는 문묘(文廟)가 으뜸이고 성묘(成廟)와 선묘(宣廟) 역시 선천적으로 문재(文才)를 타고났는데 한 무제(漢武帝)나 당 현종(唐玄宗)에 비교해 보아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문묘가 지은 제극성문(祭棘城文)을 보노라면 그 내용 중에 “무정(無情)의 차원에서 말할 때 음양(陰陽)이라 하고 유정(有情)의 차원에서 말할 때 귀신(鬼神)이라 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비록 노유(老儒) 숙학(宿學)이라 할지라도 이 이상 더 어떻게 말하겠는가. 왕족 가운데 시를 잘했던 자들도 많았는데 풍월정(風月亭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으뜸이고 성광자(醒狂子 이심원(李深源))와 서호주인(西湖主人 이총(李摠))이 그 뒤를 따른다 하겠다.

귀족 자제들 가운데 시에 능했던 자로는 고원위(高原尉)와 여성위(礪城尉)를 들 수 있는데, 고원의 작품은 청조(淸藻)하고 여성의 작품은 전밀(典密)하다. 그런데 고원은 일찍 죽어 그 재능을 다 채우지 못했으니 애석한 일이다.

아조(我朝)에서 문장가들이 성대하게 배출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고려조(高麗朝)와 비교해 보면 조금 뒤떨어진다. 이 문순(李文順 이규보(李奎報))의 굉사(宏肆)함이나 이 문정(李文靖 이색(李穡))의 호한(浩汗)함 같은 것은 아조에서는 찾아 볼 수가 없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시를 으뜸으로 친다 해도 이는 실로 과장된 것이 아니다. 가령 그의 시 가운데,

가랑비 오는데 승려는 옷을 깁고 / 細雨僧縫納
차가운 강물 위에 나그네 배 젓는구나 / 寒江客棹舟

라는 구절을 읊노라면 미상불 그 정세(精細)함에 탄복을 하게 되고, 또

십 년 세월 이 세상 일 홀로 읊으며 / 十年世事孤吟裏
중추 가절 나그네 되어 숲 사이를 서성이네 / 八月秋客亂樹間

이라는 구절을 감상하노라면 미상불 그 상랑(爽朗)함에 탄복을 하게 되며, 또

신라 시대 당간(幢竿)깃발 바람에 펄럭이고 / 風飄羅代蓋
부처 나라 꽃잎 위에 빗방울이 내리치네 / 雨蹴佛天花

라는 구절을 대하노라면 미상불 그 방원(放遠)함에 탄복을 하게 된다.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의 시는 한결같이 소동파(蘇東坡)와 황산곡(黃山谷)을 모방하였는데, 선천적으로 재주가 매우 뛰어나 자연적으로 터득한 것이라고도 하겠다. 끝없이 이어져 내려가는 장편 또한 뜻에 운치가 있는데 이는 작위적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것으로서 정말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따라갈 수 없는 것이라 하겠다.

김식우(金拭疣)의 문장은 《장자(莊子)》에 근본하였는데 그 발원(發源)하는 바가 지극히 커서 짝을 찾을 수 없을 정도이다. 다만 그의 시를 보면 모두가 생각나는 대로 지은 것이라서 아름답기는 하나 정밀하지가 못한데, 대가(大家)에게도 장점과 단점이 모두 있다고는 하지만 문단으로 볼 때에는 흠이 되는 일이 아니라고 할 수가 없다.
강사숙(姜私淑 강희맹(姜希孟))은 시와 문 모두가 정치(精緻)하고 전아(典雅)한데 이 점에서는 본래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에 필적한다고 하겠으나 규모의 호대함으로 본다면 사가를 따라가지 못한다.
이삼탄(李三灘 이승소(李承召))의 작품 역시 사숙(私淑)에 버금간다고 하겠으나 다만 깜짝 놀랄 만한 표현을 구사하는 점에 있어서는 뒤떨어진다.
사가(四佳) 이후로는 허백(虛白 성현(成俔))의 작품 세계가 지극히 크다. 고금의 여러 체(體)를 짓지 않은 것이 없는데, 그 엄청난 저술량은 바로 제공(諸公)들 가운데 비견될 만한 사람을 찾을 수가 없다고 하겠다. 《악학궤범(樂學軌範)》ㆍ《풍소궤범(風騷軌範)》ㆍ《용재총화(慵齋叢話)》ㆍ《상유비람(桑楡備覽)》ㆍ《태평통재(太平洞載)》 모두가 그의 저술인데 한 때 이를 문부(文府)로 높이 평가하기도 하였다. 그 가운데 《상유비람》 60여 권은 모두 국조(國朝)의 고사를 기록해 놓은 것으로서 세도(世道)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난리 통에 잃어버리고 말았는데 다른 간본(刊本)도 없어 마침내 영영 없어지고 말았으니 애석한 일이다. 그 밖에 네 책은 모두 조정에서 판각해 두었으므로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허백(虛白)의 집안에서 문장가 4명이 나왔으니 허백의 백씨(伯氏)인 임(任)과 허백의 중씨(仲氏)인 간(侃)과 허백의 아들인 세창(世昌)이 그들이다. 모두들 글을 잘했으나 그중에서도 간의 재주가 으뜸이었는데 일찍 죽고 말았다. 젊었을 시절에는 간이 허백보다도 나았다고 한다.
김모재(金慕齋 김안국(金安國))는 허백의 문인이다.
홍귀달(洪貴達)은 문장가로서 중하게 여겨질 뿐만이 아니라 사람됨의 측면에서도 승류(勝類)라 할 것인데 연산군(燕山君)이 꺼려 죽이고 말았다. 세상에 전해지는 말로는 김열경(金悅卿 김시습(金時習))이 늘 그를 기롱(譏弄)하여 말하기를 “귀달이 문장을 하다니 세상이 웃을 일이다.”고 하였다 하는데, 어쩌면 김의 이 말은 희롱조로 나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가령 열경이 지금 세상에 태어났다고 한다면 필시 한 번 웃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을 것이요 아마도 포복절도(抱腹絶倒)하고야 말았을 것이 분명하다.
열경은 아조(我朝)의 백이(伯夷)이다.
성로(成輅)라고 하는 자의 자는 중임(重任)으로 시가 청고(淸苦)한데 소시적에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문하에서 배웠다. 송강이 망하고 난 뒤에 그 문하에서 노닐던 자들 모두가 안면을 바꾸고 시속의 취향을 좇으면서 스스로 단장하여 호감을 사려고 하였는데, 성로만은 세상 일을 포기하고 완전히 관계를 끊어버렸다. 그리고는 양화도(楊花渡) 어귀에 자그마한 띳집을 짓고 살면서 최저 생활도 이어가지 못했는데 예전에 서로 알고 지내던 자들 아무도 범접하지를 못하였다. 이렇게 문을 닫고 내객(來客)을 물리친 채 20년을 지내다 죽었는데 그때의 나이 67세였다. 이 사람은 대체로 옛날의 개사(介士)라 할 것이다.
아조(我朝)의 사람들은 시어(詩語)를 잘 안배하지 못하는데, 이에 대해 사람들은 말하기를 “성음(聲音)이 중국과 다른 만큼 아무리 억지로 해보려 해도 비슷하게 되지 않는 것이 필연적이다.”고들 하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성음이란 자연적으로 나오는 것이니, 중국이니 외국이니 하는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언사(言詞)는 달라도 압운(押韻)하는 것은 동일한 만큼 한 귀퉁이를 미루어 나가면 다른 세 귀퉁이도 반증(反證)할 수가 있는 것이다. 다만 우리 나라에서 시를 지을 때 어휘를 구사하는 것이 부족하여 적절한 시어를 배치하지 못할 뿐이지 성음이 다른 것은 걱정할 일이 아닌 것이다.
백낙천(白樂天)의 궁사(宮詞)에,


이라 하였는데, 원망하는 여인과 버려진 재주가 어찌 끝이 있겠는가. 이를 읊노라면 사람으로 하여금 한 번 탄식하게 한다.

지는 별 먼 변방 요새에 멈춰 서 있고 / 落星依遠戍
기우는 달 평평한 숲에 반쯤 걸렸네 / 斜月半平林

이라고 한 것은 양 원제(梁元帝)의 시이고,

고향 땅 강물에 가로막혀 못 가는데 / 故鄕一水隔
바람 연기 이쪽 저쪽 자유로 드나드네 / 風煙兩岸通

이라 하고, 또

해와 달은 하늘의 덕을 빛내 주고 / 日月光天德
산과 물은 제왕의 거처를 장중하게 해 주누나 / 山河壯帝居

라고 한 것은 진(陳) 나라 후주(後主)의 시이고,

겨울철 갈가마귀 천 점 만 점 수를 놓고 / 寒鴉千萬點
물줄기 하나 외로운 마을 돌아 흘러 나가누나 / 流水繞孤村

이라고 한 것은 수 양제(隋煬帝)의 시이다. 그 시들이 어찌 아름답지 않은가. 그런데도 모두 나라를 망하게 한 임금들이 되고 말았으니, 문장은 보잘것 없는 기예라고 한 옛 사람의 말이 확실히 그렇다고 하겠다.
송 휘종(宋徽宗)은 문장이나 서화(書畫) 등 기예 일체에 관해서 경지에 이르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런데 한 가지 능력이 없었던 것은 천하를 다스리는 일이었다.
학사가(學士家)는 이치를 궁구(窮究)하는 것을 제일의(第一義)로 삼아야 한다. 이치를 투철하게 알지도 못했으면서 현묘한 이야기나 아로새겨 자신의 비루함을 아름답게 꾸미고 괜히 책으로 만들어 내어 자신의 위대함을 과시하려 한다면, 이런 저술들은 글을 정당하게 평가하는 자에게 걸릴 경우 모두 도외시되고 말 것이다. 내가 《상촌집》을 펴놓고 읽어 보건대, 옛 일을 논한 것이 진부하지 않고 현재의 일을 묘사한 것이 속되지 않았으며, 온축된 것이 많고 근본이 바르며 해석에 선입견이 없고 말이 진지하며 생각이 치밀하고 운치가 뛰어나 구름 밖에 높이 솟은 듯하고 안개 낀 골짜기처럼 신비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했으니, 멀리 행해질 만하고 오래도록 혜택을 끼쳐 줄 저술이라 여겨진다. 상촌이야말로 이치를 궁구하는 선비라 할 것이고 그 저술이야말로 언행이 일치되어 나온 글이라 할 것이니, 일찍부터 기림을 받는 것이 당연하고 상호(相好)를 빛내게 함이 당연하며 후손은 의당 창성할 것이고 전해지는 것 또한 의당 오래도록 될 것이다. 이에 서(序)한다.
흠차산해이독호부(欽差山海理督戶部) 도화신(刀化神)은 머리를 조아리고 쓴다.

[주D-001]공군은 …… 말했던가 : 공군(孔君)은 후한(後漢) 헌제(獻帝) 때 북해상(北海相)이 되었다가 뒤에 조조(曹操)와 뜻이 맞지 않아 그에게 피살된 공융(孔融)을 말함. 여상(呂相)은 송(宋) 나라 여단(呂端)을 말하는데, 《宋史 呂端傳》에 태종(太宗)이 여단을 정승으로 삼으려 했을 때, 어떤 이가 말하기를 “여단은 호도(糊塗)하는 사람이다.”고 하니, 태종이 “여단은 작은 일은 호도할지 모르지만 큰 일에 대해서는 호도하지 않는다.”고 하였음.
[주D-002]이상하다 …… 없다 했나 : 왕 태부는 왕도(王導)를 말하는데, 가뭄이 크게 들었을 때 상소하여 사직하면서 완강하게 버티다가 황제가 여러 차례에 걸쳐 조서를 내리며 간곡히 요청하자 나와서 일을 보았음.
[주D-003]진(晉) 나라의 변문(卞門) : 부자와 형제들이 모두 국가에 충성을 바치다 순절한 변호(卞壺)의 집안을 말함.
[주D-004]《사전춘추(四傳春秋)》 : 원제(原題)는 《춘추사전(春秋四傳)》으로서 모두 38권으로 되어 있는데 편자(編者)는 미상임. 맨 처음에 두예(杜預)ㆍ하휴(何休)ㆍ범녕(范寗)ㆍ호안국(胡安國)의 4서(序)가 실려 있고 다음으로 강령(綱領)ㆍ제요(提要)ㆍ열국도설(列國圖說)ㆍ이십국년표(二十國年表)ㆍ춘추제국흥폐설(春秋諸國興廢說)이 기재되어 있는데, 경문 아래에 모두 좌씨(左氏)ㆍ공양(公羊)ㆍ곡량(穀梁)의 3전(傳)의 주(注)를 내고 호전(胡傳)은 따로 표출(標出)하였음.
[주D-005]화표주(華表柱)의 학 : 한(漢) 나라 정령위(丁令威)가 죽은 뒤에 학으로 변해 고향인 요동(遼東)으로 돌아와서는 성문의 화표주(華表柱)에 앉았다는 고사임. 화표주는 백성의 불만을 듣기 위해 세워놓은 게시판임.
[주D-006]친구가 …… 끊고 싶네 : 춘추 시대 초(楚) 나라 사람 종자기(鍾子期)가 백아(伯牙)의 거문고 소리를 잘 이해하였는데, 그가 죽자 백아가 거문고 줄을 끊고 종신토록 연주하지 않았다는 고사로서 지기(知己)를 잃은 슬픔을 말한 것임. 《列子 湯問》
[주D-007]명경같은 …… 않으리라 : 《耘谷行錄》에는 제2구의 ‘俗’ 자가 ‘物’로, 제8구의 ‘掛’ 자가 ‘抉’로 되어 있음. 문에 눈알을 걸어 놓는다는 것은 자신이 죽은 뒤에라도 상대가 망하는 것을 끝까지 지켜 보겠다는 뜻인데, 《史記 伍子胥傳》에 “내가 죽거든 내 눈알을 파내어 오(吳) 나라 동쪽 문 위에 걸어놓아라. 월(越) 나라가 오 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보겠노라.” 하였음.
[주D-008]마음이야 …… 있겠는가 : 《耘谷行錄》에는 寸心이 正名으로 되어 있음.
[주D-009]나라에 …… 있겠는가 : 《耘谷行錄》에는 豈能이 必應으로 되어 있음.
[주D-010]천보 시대 : 천보(天寶)는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로서 옛날 성대했던 시절을 의미함. 그런데 《耘谷行錄》에는 天寶가 至寶로 되어 있음.
[주D-011]화택 규(睽) : 주역 64 괘 중의 하나인데, 상리하태(上離下兌) 즉 상괘(上卦)와 하괘(下卦)가 위로 치솟는 불과 아래로 스며드는 늪으로 되어 있어 서로 어긋나는 상황을 상징함.
[주D-012]하늘이 …… 하겠는가 : 《論語 子罕》에 나오는 공자(孔子)의 말을 인용하여 당시의 상황을 비유한 것임.
[주D-013]옥돌은 …… 아니었네 : 유명한 변화읍벽(卞和泣璧)의 고사임. 초 나라 사람 변화가 옥돌을 얻어서 초 여왕(楚厲王)에게 바쳤으나 속임수를 쓴다고 여겨져 왼쪽 발이 잘렸는데, 무왕(武王) 때 또 바쳤다가 같은 이유로 오른쪽 발마저 잘리자 원통한 심정으로 옥돌을 안고 울었다고 함. 《韓非子 和氏》
[주D-014]동호(董狐)의 직필(直筆) : 동호는 춘추 시대 진(晉) 나라의 태사(太史)인데, 조순(趙盾)이 그 임금 영공(靈公)을 시해했다고 곧장 쓴 고사를 말함. 실제로 임금을 시해한 자는 조천(趙穿)이었는데, 이때 조순이 정경(正卿)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그를 토벌하지 않았으므로 죄를 그에게 돌린 것으로서 기록을 하는 자가 거리낌없이 바른 대로 쓰는 것을 말함. 《春秋左氏傳 宣公 2年》
[주D-015]귀산(龜山)이 …… 있었겠는가 : 귀산은 송(宋) 나라 양시(楊時)인데 사후에 그의 제자였던 육당(陸棠)이 스승을 배반하였음. 남명과 정인홍의 관계도 이와 같다고 하는 뜻임.
[주D-016]음산 : 곤륜산(崑崙山)의 북쪽 지맥(支脈)으로서 예로부터 중원(中原)의 병풍이라고 불리워졌음.
[주D-017]두우(斗牛)를 …… 보았던가 : 《晉書 張華傳》에 “오(吳) 나라가 멸망당하기 전에 북두성과 견우성 사이에 늘 보라색 기운이 감돌았으므로 뇌환(雷煥)을 불러 바로보게 했더니 그가 말하기를 ‘보검의 정기가 위로 하늘에 통해서 그렇다.’고 하였다.” 하였음.
[주D-018]무덕과 개원 : 무덕(武德)은 당 고조(唐高祖)의 연호이고 개원(開元)은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인데, 태평시대를 말함.
[주D-019]오등 : 공(公)ㆍ후(侯)ㆍ백(伯)ㆍ자(子)ㆍ남(男) 등 다섯 등급의 작위.
[주D-020]청운지사(靑雲之士) …… 어설프군 : 백이 숙제에 대한 사마천(司馬遷)의 견해를 비평한 것임. 《史記 伯夷列傳》에 “백이 숙제가 비록 훌륭했다 하더라도 공자가 칭찬해 주었기 때문에 그 이름이 더욱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 행실을 닦고 이름을 세우려고 하는 평민들의 경우, 청운지사의 힘을 빌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후세에까지 그 이름이 전해질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여기서 청운지사는 은근히 사마천 자신을 가리킨 것임.
[주D-021]요동 땅 …… 염려되네 : 요동 사람 정령위가 선술(仙術)을 배운 뒤 학으로 변해 요동 성문 게시판에 내려 앉았는데 소년이 활을 쏘려 하자 날아 올라가 공중을 배회하면서 “집 떠난 지 천 년 만에 정령위가 새로 변해 이제 찾아 왔는데, 성곽은 여전하나 사람은 모두 다르구나 ……”라고 한 뒤 공중으로 솟구쳐 사라져 갔다고 함.
[주D-022]준엄한 …… 와 있구나 : 불골(佛骨)은 석가불(釋迦佛)의 뼈로서 불사리(佛舍利)를 말함. 당 헌종(唐憲宗)이 불사리를 대궐 안으로 맞아들여오자 한유(韓愈)가 논불골표(論佛骨表)를 올려 불교를 비판하면서 극간(極諫)하였는데, 이에 황제가 격노하여 한유를 조주 자사(潮州刺史)로 좌천시켰음. 조양은 바로 조주인데, 귀양가는 자신의 심경을 한유에 빗대어 말한 것임.
[주D-023]인체 : 인체는 사람 돼지라는 뜻으로 인시(人豕)라고도 함. 한(漢) 나라 여후(呂后)가 고조(高祖)의 애희(愛姬) 척부인(戚夫人)의 팔다리를 자르고 눈을 뽑고 벙어리와 귀머거리를 만든 뒤 측간에 놔두고는 인체라고 불렀음. 《史記 呂后記》
[주D-024]제파 : 《五代史 四夷附錄 第1》에 “덕광(德光)이 진(晉)을 멸망시킨 뒤에 한 고조(漢高祖)가 태원(太原)에서 군대를 일으키니 덕광이 크게 두려워하여 북쪽으로 돌아가던 중 난성(欒城)에서 병에 걸려 살호림(殺胡林)에서 죽었다. 이에 거란[契丹]이 그의 위장을 꺼낸 다음 소금으로 채워서 수레에 싣고 북쪽으로 돌아갔는데 진(晉) 나라 사람들이 이를 제파(帝羓)라 하였다.” 하였음.
[주D-025]건어물도 …… 막지 못했고 : 조룡의 조(祖)는 시(始), 용(龍)은 인군(人君)의 상으로서 즉 진(秦) 나라 시황제(始皇帝)를 가리키는데, 《史記 秦始皇紀》에 “36년 가을, 사자(使者)가 관동(關東)에서 밤에 화음(華陰) 땅 평서(平舒)의 길을 지나가는데, 어떤 사람이 구슬을 쥐고 길을 막으며 말하기를 ‘내 대신 호지군(滈池君)에게 전해 주어라.’ 하고 이어 말하기를 ‘올해 조룡이 죽는다.’ 하였다.” 하였음. 진시황이 사구(沙丘) 평대(平臺)에서 죽었는데, 마침 무더위가 한창이라서 온량거(轀涼車) 안에 있던 진시황의 시체에서 악취가 풍겨 나오자 시황의 죽음을 눈치채지 못하게 건어물을 잔뜩 실었다고 함.
[주D-026]제 환공 …… 슬었었지 : 《史記 齊太公世家》에 “환공이 병이 들자 다섯 명의 공자(公子)가 왕위 쟁탈전을 벌였다. 그러다가 환공이 죽고 난 뒤에는 서로들 공격하면서 궁궐을 텅 비워둔 채 아무도 장사지내려 하지 않았다. 이렇게 6~7일 동안 환공의 시체가 방치된 결과 구더기가 시체에서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하였음.
[주D-027]망아지 틈새 지나가듯 : 《莊子 知北遊》에 “사람이 하늘과 땅 사이에 태어났다가도 마치 흰 망아지가 틈새를 지나가듯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하였음.
[주D-028]그의 시가 …… 죽고 말았다 : 권필이 광해군의 비(妃) 유씨(柳氏)의 아우 유희분(柳希奮) 등 척족(戚族)들의 방종함을 비난하는 궁류시(宮柳詩)를 지었는데, 광해군이 크게 노하여 시의 출처를 찾던 중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된 조수륜(趙守倫)의 집을 수색하다가 권필의 시를 찾아내었다. 이에 권필이 친국(親鞫)을 받고 귀양길에 올랐는데, 동대문 밖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이 주는 술을 폭음하고 이튿날 죽고 말았다.
[주D-029]공군은 …… 말했던가 : 공군(孔君)은 후한(後漢) 헌제(獻帝) 때 북해상(北海相)이 되었다가 뒤에 조조(曹操)와 뜻이 맞지 않아 그에게 피살된 공융(孔融)을 말함. 여상(呂相)은 송(宋) 나라 여단(呂端)을 말하는데, 《宋史 呂端傳》에 태종(太宗)이 여단을 정승으로 삼으려 했을 때, 어떤 이가 말하기를 “여단은 호도(糊塗)하는 사람이다.”고 하니, 태종이 “여단은 작은 일은 호도할지 모르지만 큰 일에 대해서는 호도하지 않는다.”고 하였음.
[주D-030]제극성문(祭棘城文) : 극성은 황주(黃州) 남쪽에 있던 옛 진영인데, 고려 말 홍건적을 방어하다 관군이 몰살당했는가 하면 누차 병화(兵禍)를 입어 백골이 그대로 널려 있었던 곳이라고 함. 날이 궂으면 귀신의 곡성이 들려오기도 하고 여기(癘氣)가 침습해 백성이 많이 상했으므로 나라에서 단을 쌓고 춘추로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조선 문종 때 이런 현상이 더욱 심했으므로 왕이 직접 제문을 지어 제사를 올렸다고 함.
[주D-031]한 귀퉁이를 …… 것이다 : 기본을 알면 얼마든지 적용해 나갈 수 있다는 말인데, 《論語 述而》의 “한 귀퉁이를 언급해 주었는데 남은 세 귀퉁이를 반증하지 못하면 다시 더 일러주지 말아야 한다.”는 말에서 나온 것임.
[주D-032]은총을 …… 없는 이는 : 원제는 《후궁사(後宮詞)》로서 《白樂天詩集 卷19》에 나오는데, 이에 따르면 제2구의 却이 布로, 제3구의 如花가 胭脂로, 제4구의 風이 來로 되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