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신묘년 산행 /2011.6. 8. 도봉산 둘레길

2011.6.8. 도봉산 둘레길

아베베1 2011. 6. 10. 17:31

 

 

 

 

 

연산군
 총서
연산군일기 총서

연산군, 휘(諱) 융(㦕)은 성종 강정 대왕(成宗康靖大王)의 맏아들이며, 어머니 폐비(廢妃) 윤씨(尹氏),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윤기무(尹起畝)의 딸이 성화(成化) 병신년 11월 7일(정미)에 낳았다. 계묘년 2월 6일(기사)에 세자(世子)로 책봉(冊封)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한명회(韓明澮) 등을 북경(北京)에 보내어 고명(誥命)을 청하니, 5월 6일(정유)에 황제가 태감(太監) 정동(鄭同) 등을 보내어 칙봉(勅封)을 내렸다. 소시(少時)에, 학문을 좋아하지 않아서 동궁(東宮)에 딸린 벼슬아치로서 공부하기를 권계(勸戒)하는 이가 있으매,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즉위하여서는, 궁안에서의 행실이 흔히 좋지 못했으나, 외정(外庭)에서는 오히려 몰랐다. 만년(晩年)에는, 주색에 빠지고 도리에 어긋나며, 포학한 정치를 극도로 하여, 대신(大臣)·대간(臺諫)·시종(侍從)을 거의 다 주살(誅殺)하되 불로 지지고 가슴을 쪼개고 마디마디 끊고 백골을 부수어 바람에 날리는 형벌까지도 있었다. 드디어 폐위하고 교동(喬桐)에 옮기고 연산군으로 봉하였는데, 두어 달 살다가 병으로 죽으니, 나이 31세이며, 재위 12년이었다.
【원전】 12 집 623 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주D-001]휘(諱) : 죽은 이의 이름.
[주D-002]성종 강정 대왕(成宗康靖大王) : 조선조 제9대 임금. 성종은 그 묘호(廟號), 곧 사당의 칭호. 강정은 그 시호(諡號), 곧 생전의 공덕을 기린 칭호인데, 이 시호는 명나라에서 준 것이다. 대왕은 죽은 왕을 일컫는 칭호이며, 왕의 미망인을 대비(大妃)라 하고, 죽은 왕비를 왕후(王后)라 일컫는 것과 같다.
[주D-003]윤기무(尹起畝) : 무(畝)자가 실록 원문에는 ‘畎’와 ‘畝’자로 되어 있는데 《국조방목(國朝榜目)》에는 ‘畝’자로, 만성보(萬姓譜:사본)에는 ‘畝’로 되어 있고, 윤씨 후손들은 ‘畝’자라 말한다.
[주D-004]병신년 : 1476 성종 7년.
[주D-005]계묘년 : 1483 성종 14년.
[주D-006]태감(太監) : 관직명. 명나라에서는 궁내의 각감(各監)에 태감을 두었다. 뒤에 내시를 가리키는 속칭으로 쓰임.
[주D-007]교동(喬桐) : 강화도 서북에 있는 섬.

 

 

 

연산군 12년 병인 (1506, 정덕1)
 9월 2일(기묘)
중종이 경복궁에서 즉위하고 연산군을 폐하여 교동현에 옮기다

금상(今上)이 경복궁에서 즉위하고 왕을 폐(廢)하여 교동현(喬桐縣)으로 옮겼다.
처음에 왕의 어머니 폐비 윤씨(廢妃尹氏)가 성질이 모질고 질투하였다. 정희(貞喜)·소혜(昭惠)·안순(安順) 세 왕후가, 윤씨의 부도(不道)한 짓이 많음을 보고 매우 걱정하여 밤낮으로 훈계하였으나, 더욱 순종하지 않고 악행(惡行)이 날로 심하므로, 성종(成宗)이 할 수 없이 의지(懿旨)를 품(稟)하여 위로 종묘에 아뢰고 〈왕비를〉 폐하였었다.
왕은 그때 아직 강보(襁褓) 속에 있었는데, 자라남에 미쳐 성종은 그가 어머니 여읜 것을 불쌍히 여기고, 또 적장(嫡長)이기 때문에 왕세자(王世子)로 세웠다. 그런데 시기와 모짐이 그 어미와 같고 성질이 또한 지혜롭지 못하므로 성종은 당시의 단정한 선비들을 골라 뽑아 동궁(東宮)의 관원으로 두어 훈회(訓誨)하고 보도(輔導)함을 특별히 지극하게 하였다.
왕이 오랫동안 스승 곁에 있었고 나이 또한 장성했는데도 문리(文理)를 통하지 못했다. 하루는 성종이 시험삼아 서무(庶務)를 재결(裁決)시켜 보았으나 혼암하여 분간하지 못하므로 성종이 꾸짖기를 ‘생각해 보라. 네가 어떤 몸인가. 어찌 다른 왕자들과 같이 노는 데만 힘을 쓰고 학문에는 뜻이 없어 이같이 어리석고 어둡느냐.’ 하였었는데, 왕이 이 때문에 부왕(父王) 뵙기를 꺼려 불러도 아프다고 핑계하고 가지 않은 적이 많았다.
하루는 성종이 소혜 왕후에게 술을 올리면서 세자를 명소(命召)하였으나, 또한 병을 칭탁하고, 누차 재촉해도 끝내 오지 않으므로, 성종이 나인(內人)을 보내어 살피게 하였더니, 병이 없으면서 이르기를 ‘만약 병이 없다고 아뢰면 뒷날 너를 마땅히 죽이겠다.’ 하매, 나인은 두려워서 돌아와 병이 있다고 아뢰었다. 성종은 속으로 알고 마음에 언짢게 여기며 그만두었었다. 이로부터 〈세자를〉 폐하고 싶은 마음이 많았으나 금상(今上)이 아직 어리고, 다른 적자(嫡子)가 없으며, 또한 왕이 어리고 약하여 의지할 곳이 없음을 불쌍히 여겨 차마 못하였다.
성종이 승하하자 왕은 상중에 있으면서도 서러워하는 빛이 없으며, 후원의 순록(馴鹿)을 쏘아 죽여 그 고기를 먹으며 놀이 즐기기를 평일과 같이 하였고, 심지어 군신(群臣)들을 접견(接見)하고 교명(敎命)을 내리면서도 숨기고 가리며 거짓 꾸미기를 힘썼는데, 외부 사람들은 알지 못했었다. 그러나 그 초년에는 선조(先朝)의 옛 신하들이 많이 남아 있어 아직 조정이 완전하므로 정령(政令)이 문란하지 않았는데, 무오년 주륙(誅戮)이 있는 뒤부터는 왕의 뜻이 점차 방자해져, 엄한 형벌로 아랫사람들을 억제하매, 선비의 기개가 날로 꺾여져 감히 정언(正言) 극론(極論)을 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왕이 더욱 꺼릴 것 없어 멋대로 방탕해졌다.
임술·계해년 무렵에 이르러서는 장녹수(張綠水)에게 빠져 날로 방탕이 심해지고 또한 광포(狂暴)한 짓이 많으므로 소혜 왕후가 걱정이 되어 누차 타일렀지만 도리어 왕의 원망만 사게 되었다. 외부에까지 왕왕 듣고 서로 보여 귓속말을 하며 그윽이 근심하게 되므로, 소혜 왕후가 또 다시 몰래 대신들에게 유시를 내려 간절히 간하게 하니, 왕이 더욱 분해했다. 그리하여 항상 조정에 구애되어 하고 싶은 대로 못하는 것을 불만스럽게 여겼으나 발로할 수 없었다.
이때 임사홍(任士洪)이 음험하고 간사한 자로 선조(先朝) 때부터 내쫓긴 지 거의 30년이나 되므로 항상 이를 갈다가, 그 아들 임숭재(任崇載)가 옹주에게 장가듦을 인하여 금중(禁中)을 출입할 수 있게 되자 왕의 뜻을 짐작하고 마침내 조정을 위협하는 술책으로써 가만히 뜻을 갖추니, 왕이 크게 기뻐하여 급히 숭품(崇品)에 발탁, 아무때나 불러 보았으며, 무릇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묻지 않는 것이 없었는데, 사홍이 부름을 받으면 반드시 미복(微服)으로 어둠을 타 편문(便門)으로 들어 갔고 왕은 항상 내 벗 활치옹(豁齒翁)이 왔다 하였으니, 아마 사홍이 이가 부러져 사이가 넓었기 때문이리라. 왕은 이에 크게 형륙(刑戮)을 자행하였는데 언관(言官)들을 추구(追究)하여 대신으로부터 대간(臺諫)·시종들까지 거의 다 죽이거나 귀양 보내어 조정이 텅 비었고, 폐비한 일을 원망하여 성종의 후궁을 장살(杖殺)하고 그 자녀를 귀양 보내거나 죽이고, 그 며느리를 남의 첩으로 시집보내거나 제군(諸君)·부마(駙馬)에게 주어 갖게 하였고, 소혜 왕후를 후욕(詬辱)하여 마침내 근심과 두려움으로 병나 죽게 하고서는 그 상기(喪期)를 단축하되 날을 달로 치는 제도[以日易月制]로써 하였고, 대행(大行)이 아직 빈소에 있는데도 풍악을 그치지 않았다. 폐비하는 의논에 참여한 자와 추숭(追崇)을 불가하다고 의논한 자를 모두 중형(重刑)에 처하되, 죽은 자는 그 시체를 베고 가산을 몰수하며, 그 족속을 연좌하고, 살아 있는 자는 장신(杖訊)하여 멀리 귀양보냈는데, 교리(校理) 권달수(權達手)는 먼저 주창하였다 하여 죽임을 당했다.
드디어 조종(祖宗)들의 옛 제도를 모두 고쳐 혼란케 하였는데, 먼저 홍문관 사간원을 혁파하고 또 사헌부의 지평 2원(員)을 없애므로써 언로(言路)를 막았고, 손바닥 뚫기[穿掌]·당근질하기[烙訊]·가슴빠개기[斮胸]·뼈바르기[剮骨]·마디마디 자르기[寸斬]·배가르기[刳腹]·뼈를 갈아 바람에 날리기[碎骨飄風] 등의 이름이 있었으며, 말이 조금만 뜻에 거슬리면 명령을 거역한다 하고, 말이 내간(內間)에 미치면 촉상(屬上)이라 지적하여, 얽어 죄를 만들되, 기제서(棄制書)를 경률(輕律)로 삼고 족속을 멸하는 것[夷族]을 상전(常典)으로 여겨 한 번만 범하면 부자 형제가 잇달아 잡혀 살륙되고 일가까지도 또한 찬축(竄逐)을 당했고, 익명서(匿名書) 및 다른 죄로 잡힌 자가 사연이 서로 연루되어 옥을 메웠는데, 해를 넘기며 고문하여 독한 고초가 말할 수 없었다.
심지어 옛 당직청(當直廳)이 협소하다 하여 이내 복야청(僕射廳)으로 옮겨 넓히되 밀위청(密威廳)이라 하고 감옥의 관원을 더 두었으며, 죄수를 신문함에 있어서도 반드시 삼공(三公)과 승지·금부 당상이 섞여 다스리게 하였는데, 사대부로서 매를 맞는 자가 빈 날이 없었으나 모두 그 죄가 있어서가 아니었고, 또 비방하는 의논이나 우어(偶語)를 금하는 법을 만들어 감찰로 하여금 날마다 방방곡곡을 사찰하였다가 초하루 보름으로 아뢰게 하였고, 온갖 관사(官司)와 여러 부(府)도 또한 초하루 보름으로 시사(時事)를 비방하는 자가 있나 없나를 적어 아뢰게 하여, 비록 부자간이라도 관에 보고한 뒤에라야 서로 만나도록 하므로, 모두 서로 손을 저어 말을 막았고, 사람마다 스스로 위태롭게 여겨 길에서 눈짓만 했다.
또 도성(都城) 사방에 백 리를 한계로 모두 금표를 세워 그 안의 주현(州縣)과 군읍(郡邑)을 폐지하고 주민을 철거시켜 비운 뒤에 사냥터로 삼고, 만약 여기에 들어가는 자는 당장 베어 조리를 돌리고, 기전(畿甸) 수백 리를 한 없는 풀밭으로 만들어, 금수를 기르는 마당으로 삼았다. 그리고 내수사 종 중 부실(富實)한 자를 가려 들어가 살게 하여 몰이하는 데 편리하게 하니, 본래 살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사망하여 길에 즐비하였고, 능침(陵寢)이 다 금표 안에 들어가 지키는 사람이 없어 향화(香火) 역시 끊겼다.
또 도성 안 대궐에 가까운 인가를 철거하고 동서로 돌성을 쌓아 한계를 정하고 문묘(文廟)의 신판(神版)을 옮긴 뒤 그 안에 짐승을 길렀으며, 수리 도감(修理都監)을 두고 크게 공사를 일으켜 사방의 공장(工匠)을 모으고 민호(民戶)를 징발, 모두 서울에 집중시켜 궁실을 넓히고, 대사(臺榭)를 더 지어 강가나 물구비에 그들먹하게 벌여 놓으며, 높은 곳은 깎고 낮은 곳은 메워 큰 길을 이리 저리 내고, 밤낮으로 시녀들과 오가며 놀았다. 그중에서 가장 큰 것은 삼각산 밑 장의사동(藏義寺洞)에 있는 탕춘정(蕩春亭)인데, 시냇물이 구비쳐 흐르는 위에 위치하여 단청(丹靑)이 수면에 현란하고, 시내를 가로 질러 낭원(廊院)을 벌여 지었는데 규모가 극히 웅장하였다. 일찍이 강물을 끌어 정자 밑에 이르게 하고 또 산을 뚫어 다른 시냇물을 끌어 정자 밑에 합류시키려 했는데, 모두 이루지 못했다.
창덕궁 후원에 있는 것은 서총대(瑞葱臺)라 하는데, 높이가 수십 길이며 넓기도 높이와 걸맞았다. 그 아래 큰 못을 파는데 해가 넘도록 공사를 마치지 못했다. 또 임진강 가 툭 내민 석벽 위에 별관을 지어 유행(遊幸)하는 장소를 만들었는데, 굽이진 원(院)과 빙 두른 방(房)이 강물을 내려다 보아 극히 사치스럽고 교묘하다.
또 이궁(離宮)을 장의사동(藏義寺洞)과 소격서동(昭格署洞)에 짓게 하여 바야흐로 재목을 모아 역사를 하는데, 모든 역사를 감독하는 벼슬아치들이 독촉하기를 가혹하고 급하게 하여 때리는 매가 삼단과 같으며, 조금만 일정에 미치지 못하면 또한 반드시 물건을 징수하므로, 원망과 신음이 길에 잇달았다.
축장군(築墻軍)·축성군(築城軍)·서총정군(瑞葱亭軍)·착지군(鑿地軍)·이궁 조성군(離宮造成軍)·인양전 조성군(仁陽殿造成軍)·재목 작벌군(材木斫伐軍)·유하군(流下軍)이라고 부르는 따위의 징발하는 명목을 다 셀 수가 없다. 그러므로 중외(中外)가 모두 지치고 공사(公私)가 탄갈(殫竭)하여 유리 멸망이 서로 잇달아 온 고을이 거의 비게 되었으며 서울에서 역사하는 자는 주리고 헐벗고 병들어서 죽는 자가 태반이었다. 마을과 거리에 시체가 쌓여 악취를 감당할 수 없는데, 더러는 굶주리고 지친 나머지 길가에 병들어 쓸어진 자가 아직 숨이 붙어 있지만, 그 근방에 사는 사람들이 시체를 버려 두었다는 죄를 입을까 겁내어 서로 끌어다 버리므로 죽지 않는 자가 없었다.
구수영(具壽永)은 영응 대군(永膺大君)의 사위이고, 그 아들은 또 왕의 딸 휘순 공주(徽順公主)에게 장가들어, 아첨과 간사로 왕에게 굄을 받았는데, 그는 미녀(美女)를 사방으로 구하여 바치니, 왕이 매혹되어 수영을 발탁, 팔도 도관찰사(八道都觀察使)를 삼으니 권세가 중외를 기울였다.
이때부터 내총(內寵)이 점차 성하였는데, 그중에서 가장 굄을 받은 것이 전 숙원(田淑媛)과 장 소용(張昭容)이다. 왕이 두 후궁에게는 하는 말을 따르지 않음이 없고, 하려는 것을 해주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옥사(獄事)를 농간하고 벼슬을 팔며 남의 재물·장획(臧獲)·가사(家舍)를 빼앗는 등 못하는 짓이 없었고, 조금이라도 자기 뜻에 거슬리면 반드시 화로써 갚으므로 종척(宗戚)이나 경대부(卿大夫)들이 그들의 침해와 모욕을 받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주인을 배반하고 이익을 노리는 무뢰배로서 일가라 일컫고 투탁(投托)하는 자가 다 셀 수 없었다. 두 집의 도서(圖書)나 서찰을 가진 자가 사방에 널려 이르는 곳마다 소란을 피우며 수령을 업신여기고, 백성들에게 못살게 굴어 기세가 넘쳤으나 아무도 감히 범접하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빌며 사양하고 움츠려 피할 뿐이었다.
왕이 이들을 위하여 큰 집을 짓되, 대관(臺官)에게 감독하게 하여 지어 주었는데, 그들이 만약 부모를 뵈러 출입할 때면, 중관(中官) 및 승지·주서(注書)·재상들이 모두 따라가며 앞에서 인도하고 뒤를 감싸 마치 왕비의 행차와 같았다. 또 시녀 및 공·사천(公私賤)과 양가(良家)의 딸을 널리 뽑아 들이되, 사자(使者)를 팔도에 보내어 빠짐없이 찾아내어 그 수효가 거의 만 명에 이르렀으며, 그들의 급사(給使)·수종(隨從)과 방비(房婢)라고 일컫는 자도 그 수와 같았으며, 7원(院) 3각(閣)을 설치하여 거처하게 했는데, 운평(運平)·계평(繼平)·채홍(採紅)·속홍(續紅)·부화(赴和)·흡려(洽黎) 따위의 호칭이 있었으며, 따로 뽑은 자를 흥청악(興淸樂)이라 하고 악에는 세 과(科)가 있었는데, 굄을 거치지 못한 자는 지과(地科)라 하고 굄을 거친 자는 천과(天科)라 하며, 굄을 받았으되 흡족하지 못한 자는 ‘반천과(半天科)라 하고, 그중에서 가장 굄을 받은 자는 작호를 썼는데, 숙화(淑華)·여원(麗媛)·한아(閑娥) 따위의 이름이 있으며, 그 기세와 굄이 전 숙원이나 장 소용과 더불어 등등한 자도 또한 많았다.
왕이 그 속에 빠져 오직 날이 부족하게 여기며 흥청 등을 거느리고 금표 안에 달려 나가 혹은 사냥, 혹은 술마시며 가무(歌舞)하고 황망(荒亡)하였다. 성질이 광조(狂躁)하여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내달려 동쪽에 있다 서쪽에 있다 하므로 비록 가까이 모시는 나인이라도 그 행방을 헤아리지 못했다. 또 자전(慈殿)을 효도로 받든다 하고 날마다 연회를 베풀되 때로는 밤중에 달려가 연회를 베풀기도 하고 때로는 시종들을 핍박하여 험한 곳에 놀이를 나가기도 하였는데, 대비(大妃) 또한 능히 감당치 못하면서도 두려워 감히 어기지 못하였으며, 언제나 내연(內宴)을 베풀되 반드시 종재(宗宰)·사대부의 아내를 입참(入參)하도록 하였는데, 연달아 밤낮으로 나오지 못하는 자가 있으므로 추문(醜聞)이 파다하였다.
이때 대비는 경복궁으로 옮겨 거처하였는데, 왕은 대비를 위하여 경회루 연못에 관사(官私)의 배[船]들을 가져다가 가로 연결하고 그 위에 판자를 깔아 평지처럼 만들고 채붕(彩棚)을 만들었으며, 바다에 있는 삼신산(三神山)을 상징하여 가운데는 만세산(萬歲山), 왼쪽엔 영충산(迎忠山), 오른쪽엔 진사산(鎭邪山)을 만들고 그 위에 전우(殿宇)·사관(寺觀)·인물(人物)의 모양을 벌여 놓아 기교를 다하였고, 못 가운데 비단을 잘라 꽃을 만들어 줄줄이 심고 용주 화함(龍舟畫艦)을 띄워 서로 휘황하게 비췄는데, 그 왼쪽 산엔 조정에 있는 선비들의 득의 양양한 모양을 만들고 오른쪽엔 귀양간 사람들의 근심되고 괴로운 모양을 만들었다.
왕은 스스로 시(詩)를 지어 걸고 또 문사들도 짓되, 모두 세 산(山)을 명명한 뜻을 서술하게 하고 날마다 즐겁게 마시며 놀되, 화초와 인물의 형상이 비를 맞아 더러워지면 곧 새 것으로 바꾸었다. 대비가 억지로 잔치에 참석은 하였지만 연회가 파하면 늘 한숨쉬며 즐거워하지 않았다.
또 궁내(宮內)에 조준방(調隼坊)을 두어 매와 개를 무수히 기르므로 먹이는 비용이 걸핏하면 1천(千)으로 헤아렸고, 사방의 진기한 새와 기이한 짐승을 모아 들여 역시 그 속에 두되, 따로 응군(鷹軍)이란 것을 두어 내응방(內鷹坊)에 소속시키고 번갈아 바꾸도록 하여 1만 명이나 되는데 두 대장에게 나누어 소속시키고, 또 위장(衛將)이 있어 여러 장수들의 수를 서로 통솔하게 하고, 고완관(考頑官)과 해응관(解鷹官)을 두어 매와 개를 몰아 사냥하는 일을 살피도록 하는데, 모두 미치고 방종한 무뢰한이었다. 왕이 사냥을 하려 하면 대장 이하가 각기 응군을 거느리고 달려 오는데 이것을 내산행(內山行)이라 했다. 또 사방의 준마(駿馬)를 모아 용구(龍廐)·인구(麟廐)·운구(雲廐)·기구(麒廐)·신준방(神駿坊)·덕기방(德驥坊)·봉순사(奉巡司)를 따로 두어 기르되, 사복시의 관원을 더 두어 오로지 감목(監牧)하게 하여, 유행(遊幸)·출엽(出獵)할 때 썼다.
왕은 스스로 자신의 소행이 부도(不道)함을 알고 내심 부끄러워하여 인도(人道)를 혼란시켜 자기와 같게 만들려고 하여, 사대부의 친상(親喪)을 단축하였으며, 효행(孝行)이 있는 사람을 궤이(詭異)하다 하여 죽였고, 형제들을 핍박하여 그 첩을 서로 간범하게 하니, 삼강(三綱)이 끊어지고 이륜(彝倫)이 소멸되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배반하고 친척들이 이탈하여 중외(中外)가 다 원망하는데, 오직 사홍(士洪)·수영(壽永) 및 간사하고 아첨하는 군소(群小) 무리들이 세력을 믿고 스스로 방자하므로, 당시 대신의 반열에 있는 자들은 방관할 뿐 어찌 할 수 없었다. 총애를 탐내며 화를 두려워함이 날로 더하여 사직을 보전할 계책을 도모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왕은 항상 귀양간 사람들이 원한 때문에 일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모두 절도(絶島)에 유배시켜 고역(苦役)을 치르게 하고, 2품(品) 당상을 진유 근리사(鎭幽謹理使)라 칭하여 보내되 각기 종사관 1명씩을 거느리고 가서 검찰하고 구류당한 죄수들을 얽매어 자유롭지 못하게 하니, 사람들이 모두 죽음이 조석간에 있음을 알았다.
왕은 오랠수록 더욱 의심하여 모두 없애려고 하였으며, 이장곤(李長坤)이 가장 용맹한 사람이니 마침내 변을 일으킬까 싶다 하여, 경사(京師)로 잡아 보내게 하여 장차 먼저 죽이려고 하므로 장곤이 듣고 곧 망명하니, 왕은 크게 노하여 상금을 걸고 체포를 서둘되, 경조관(京朝官)을 보내어 모든 도에 있는 관원과 함께 군대를 풀어 찾게 하니, 도하(都下)가 흉흉하여, 혹자는 이장곤이 망명하여 무리들을 모아 거병(擧兵)한다 하였다.
평성군(平城君) 박원종(朴元宗)과 전 참판 성희안(成希顔)이 한 마을에 살았는데, 서로 만나 시사를 논할 적마다 ‘이제 정령(政令)이 혼암 가혹하여 백성이 도탄에 빠졌으니 종묘 사직이 장차 전복될 것인데, 나라를 담당한 대신들이 한갓 교령(敎令)을 승순(承順)하기에 겨를이 없을 뿐, 한 사람도 안정시킬 계책을 도모하는 자가 없다. 우리들은 함께 성종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 차마 앉아서 보고만 있겠는가. 천명과 인심을 보건대 이미 촉망된 바 있거늘, 어찌 추대하여 사직을 바로 잡지 않을 수 있으랴.’ 하고, 드디어 큰 계책을 정했는데 모사에 참여할 자가 있지 않았다.
부정(副正) 신윤무(辛允武)는 왕의 총애와 신임을 받는 이로서 평소에 늘 근심하고 두려워하기를 ‘일조에 변이 있게 되면 화가 장차 몸에 미치리라.’ 생각하고, 원종 등에게 가서 말하기를 ‘지금 중외(中外)가 원망하여 배반하고 왕의 좌우에 친신(親信)하는 사람들도 모두 마음이 떠났으니, 환란이 조석간에 반드시 일어날 것이오. 또 이장곤은 무용과 계략을 가진 사람인데, 이제 망명하였으니 결코 헛되이 죽지는 않으리다. 만약 귀양간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군읍(郡邑)에 격문을 보내어 군사를 일으켜 대궐로 쳐 들어온다면, 비단 우리들이 가루가 될 뿐 아니라, 사직이 장차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갈 것이니, 일이 그렇게 된다면 비록 하고자 한들 미칠 수 없게 될 것이오.’ 하니, 원종 등이 뜻을 결정하였다. 이조 판서 유순정(柳順汀)은 함께 일할 수 있다 하고, 그 계획을 말하자 따르므로 이어 장정(張珽)·박영문(朴永文)을 불러 윤무(允武)와 더불어 무사를 모을 것을 언약하였다. 또 용구(龍廐)의 모든 장수들과 각기 응군(鷹軍)을 거느리고 오기로 약속하였다.
이윽고 무인일 저녁에 모두 훈련원에 모여 희안이, 김수동·김감에게 달려가 함께 가자고 하니, 감은 즉시 따랐고 수동은 두려워 망서리다가 결국 따랐다. 또 유자광이 지모가 많고 경력이 많다고 하여, 역시 불러 함께 하는 한편 용사들을 임사홍과 신수근·신수영의 집에 보내어 퇴살(椎殺)하고, 또 사람을 보내어 신수겸(愼守謙)을 개성부에서 베니, 이를 들은 도중(都中)의 대소인들이 기약도 없이 모여 들어 잠깐 동안에 운집하자 즉시 모든 장수들을 편성하고 용구마(龍廐馬)를 내어 주어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궁성을 에워싸고 지키게 하였으며, 또 모든 옥에 있는 죄수들을 놓아 종군하게 하니, 밤이 벌써 3경이었다.
윤형로(尹衡老)를 금상(今上)의 사제(私第)에 보내어 그 사유를 아뢰고 그대로 머물러 모시게 하고, 이어서 운산군 이계(雲山君李誡)와 무사 수십 명을 보내어 시위하여 비상에 대비하게 하였다. 희안 등은 모두 돈화문 밖에 머물러 날새기를 기다리니, 숙위(宿衛)하던 장사와 시종·환관들이 알고 다투어 수채 구멍으로 빠져 나가 잠시 동안에 궁이 텅 비었다.
승지 윤장(尹璋)·조계형(曺繼衡)·이우(李堣)가 변을 듣고 창황히 들어가 왕에게 사뢰니, 왕이 놀라 뛰어 나와 승지의 손을 잡고 턱이 떨려 말을 하지 못하였다. 장(璋) 등은 바깥 동정을 살핀다고 핑계하고 차차 흩어져 모두 수채 구멍으로 달아났는데, 더러는 실족하여 뒷간에 빠지는 자도 있었다.
원종 등은 내시를 시켜 장사 두어 명을 거느리고 왕에게 가 옥세를 내놓고 또 동궁에 옮길 것을 청하였으며, 전동(田同)·심금손(沈金孫)·강응(姜凝)·김효손(金孝孫) 등을 군중(軍中)에서 베었다.
여명(黎明)에 궁문이 열리자 원종 등이 경복궁에 나아가 대비에게 아뢰기를 ‘주상이 크게 군도(君道)를 잃어 종묘를 맡을 수 없고 천명과 인심이 이미 진성 대군 〈이역(李懌)〉에게 돌아갔으므로, 모든 신하들이 의지(懿旨)를 받들어 진성 대군을 맞아 대통(大統)을 잇고자 하오니, 청컨대 성명(成命)을 내리소서.’ 하니, 대비는 전교하기를 ‘나라의 사세가 이에 이르렀으니 사직을 위한 계책이 부득이하다. 경 등이 아뢴 대로 따르리라.’ 하였다.
순정이 전지를 받들고 즉시 금상의 사제로 가 아뢰니, 상이 굳이 사양하기를 ‘조정의 종묘 사직을 위한 대계(大計)가 진실로 이러해야 마땅하나 내가 실로 부덕하니 어떻게 이를 감당하겠는가.’ 하고, 재삼 거절한 뒤에야 비로소 허락하였다. 순정이 호종 시위하여 경복궁에 들어가니, 길에서 첨앙(瞻仰)하는 백성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모두들 ‘성주(聖主)를 만났으니 고화(膏火) 속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하였다.
신시(申時)에 근정전에서 즉위하여 백관의 하례를 받고 대사령(大赦令)을 중외해 내렸으며, 대비의 명에 의하여 전왕을 폐위 연산군으로 강봉하여 교동(喬桐)에 옮기고, 왕비 신씨를 폐하여 사제(私第)로 내쳤으며, 세자 이황(李) 및 모든 왕자들을 각 고을에 안치시키고, 전비(田非)·녹수·백견(白犬)을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베니, 도중(都中) 사람들이 다투어 기왓장과 돌멩이를 그들의 국부에 던지면서 ‘일국의 고혈이 여기에서 탕진됐다.’고 하였는데, 잠깐 사이에 돌무더기를 이루었다.
책공(策功)을 의정(議定)하게 하자, 원종 등이 여러 종실·재상들과 공을 나눔으로써 뭇사람의 마음을 안정시키려 하니, 처음부터 모의에 참여하지 않은 유순(柳洵) 등 수십 인이 다 정국 공신에 참여되었다. 당초에 원종 등이 돈화문 밖에 모여 순(洵)에게 사람을 보내어 순(洵)을 부르니, 순이 변이 있는 줄 알고 어찌할 바를 몰라 나와 문틈으로 엿보다가 도로 들어가기를 너덧 차례나 하였으며, 또 문틈으로 말하기를 ‘나는 구항(溝巷)에서 죽고 싶지 않으니, 이번 일이 가하오. 마음대로 하오.’ 하고, 오랫동안 다른 일이 없음을 알고서야 나왔다. 그리고 구수영(具壽永)은 당초 원종 등이 거의(擧義)했다는 말을 듣고, 즉시 훈련원에 달려가 제장들을 보았다. 여러 장수들이 서로 돌아보며 놀랬지만, 벌써 와 몸바치기를 허하였으므로, 마침내 훈적(勳籍)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때 적인(謫人) 유빈(柳濱)·이과(李顆)·김준손(金駿孫) 등은 무리들을 불러 모아 전라도에서 거병하기로 하고, 조숙기(曺淑沂) 등은 또한 경상도에서 거병하기로 의논하여, 모두 금상을 추대하려 하였다가 상이 이미 즉위했다는 말을 듣고 곧 중지하였다.
처음에 왕이 백관에게 충(忠) 자·성(誠) 자를 새겨 사모(紗帽)의 앞뒤에 붙이게 하였으니, 대개 충성으로써 책려(責勵)하려 한 것이요, 모든 유행(遊行)과 출입을 행행(行幸)이라 일컬음을 금하고 거동이라 하게 하였으며, 또 흥청을 선치(選置)하되 기필코 1만 명을 채우려고 했었는데, 교동으로 폐천(廢遷)되어 가시 울타리 안에 거처하게 되자 백성들이 왕을 뒤쫓아 원망하여 이가(俚歌)를 지어 부르기를,
충성이란 사모요
거동은 곧 교동일세
일 만 흥청 어디 두고
석양 하늘에 뉘를 좇아 가는고
두어라 예 또한 가시의 집이니
날 새우기엔 무방하고 또 조용하지요
하였으니, 대개 사모(紗帽)와 사모(詐謀), 거동(擧動)과 교동은 음이 서로 가깝고, 방언에 각시[婦]와 가시[荊棘]는 말이 서로 유사히기 때문에 뜻을 빌어 노래한 것이다.
폐부(廢婦) 신씨(愼氏)는 어진 덕이 있어 화평하고 후중하고 온순하고 근신하여, 아랫사람들을 은혜로써 어루만졌으며, 왕이 총애하는 사람이 있으면 비(妃)가 또한 더 후하게 대하므로, 왕은 비록 미치고 포학하였지만, 매우 소중히 여김을 받았다. 매양 왕이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음난, 방종함이 한없음을 볼 적마다 밤낮으로 근심하였으며, 때론 울며 간하되 말 뜻이 지극히 간곡하고 절실했는데, 왕이 비록 들어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성내지는 않았다. 또 번번이 대군·공주·무보(姆保)·노복들을 계칙(戒勅)하여 함부로 방자한 짓을 못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서는 울부짖으며 기필코 왕을 따라 가려고 했지만 되지 않았다.
【원전】 14 집 67 면
【분류】 *왕실(王室) / *정론(政論) / *행정(行政)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군사(軍事) / *변란(變亂) / *인물(人物) / *재정(財政) / *건설(建設) / *신분(身分) / *풍속(風俗) / *역사(歷史) / *가족(家族) / *호구(戶口)


[주D-001]금상(今上) : 중종(中宗).
[주D-002]정희(貞喜) : 세조비 윤씨(尹氏).
[주D-003]소혜(昭惠) : 덕종(德宗)비 한씨(韓氏).
[주D-004]안순(安順) : 예종(睿宗)비 한씨.
[주D-005]의지(懿旨) : 왕비의 명령. 여기에서는 대비(大妃)의 명령.
[주D-006]촉상(屬上) : 위를 범하는 것.
[주D-007]무인일 : 9월 1일.
[주D-008]고화(膏火) : 화환(禍患).
[주D-009]적인(謫人) : 귀양간 사람.

 

 

 도봉산 둘레길 산책

 오전 10시에 약속을 하고 버스를 기다려도 오지않는다

 문화고등학교 앞에서 기다리다가 10시 10분경에 차량에 승차하여 방학동을 거쳐 우이동 120번 종점에 도착하니 10:25분경 해병대 초소 위에서

친구와 만나서 산행을 시작한다 북한산 둘레길 시작점인 소나무길도 시작하여 연산군 묘지 쪽으로 이동하면서 정부인 贈 정경부인 전주최씨

 지묘에 도착하니 산행하시는분 3분 65세 가량 되시는 분 여성산우님 1분이 산행을 하신다

 그런 저럼 이유로 대화를 하면서 연산군 재실 원당천 은행나무 간단하게 저가알고 있는 상식을 설명해드린다

 그리하여 동행하기로 하였다 친구와 3인 총 다섯분이다

 정의공주 안효공 양위  묘지 신도비를 감상하고 사천목씨 재실 입구를 통과함는데 계단작업이 한창이다 간단하게 고생하신다고 인사를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