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신묘년 산행 /2011.6.12. 도봉산 산행 (금지샘)

2011.6.12. 도봉산 산행 (보문능선 우이암 우이계곡)

아베베1 2011. 6. 12. 19:30

 

   도봉산 능원사 의 모습

  도봉산 도봉사의 모습 고려왕이 거란의  침입을 피해 머물렀던 천년고찰 도봉사   

      고려헌종이 거란의 침입시 피신하여 머물렀다는 사찰

  牛耳巖의 모습

  도봉산 우이암 정상에서 바라본 모습  

  도봉산 우이암의  모습  정상에서 암벽을 하시는 분이

  도봉산 할미바위와 오징어바위가 보이고 기차바위  

  도봉산 우이맘을의 배경으로  

 

 

 

 

 

  金池泉 산악회원님의  모습 ..게시를 원하지 않으시면 즉시 삭제 하갯습니다. 

  樹령  830 년을 자랑하는 서울의 퇴고수 은행나무의 모습 연산군 묘지앞 원당천이 ..   

  도봉산 무수골 주말 농장 의 모습  

 

 

 

 

 

 

 

고전을 인용해본다

 

농암집 제1권

 시(詩)
다음날 자익이 여러 사람들과 함께 오다.


묘봉암 높다랗게 솟아 있다면 / 迢迢妙峯菴
도봉사 정갈하여 엄숙도 하다 / 肅肅道峯祠
산행길은 저마다 길이 달라서 / 山行各異路
골짝서 서로 만날 기약했었지 / 中谷會有期
어제는야 후두둑 내리는 비에 / 冥冥昨日雨
동서를 분간 못할 구름과 안개 / 雲霧東西迷
산길이 서로간에 막히고 끊겨 / 山蹊兩阻絶
오는지 가는지를 알지 못하고 / 去來不可知
지는 해를 서글피 바라보면서 / 悵望日向夕
서성대며 그대들 생각했었지 / 徙倚空相思

두 번째
그대들을 그리다 아침 해 뜨니 / 相思達明發
기대는 끊겼어도 배회하던 차 / 望絶猶徘徊
그 어찌 뜻했으랴 우리 그대들 / 何意二三子
고맙게도 이처럼 다시 올 줄을 / 惠然能復來
얼굴 펴며 봄옷을 걷어 잡고는 / 開顔攬春服
무우대에 모두 다 나란히 앉아 / 並坐舞雩臺
지나온 길 돌아보며 가리키는데 / 還顧指所歷
하늘 닿은 길이라 정말 험난해 / 天路何艱哉
험난한 길 힘들지 않았겠나만 / 躋攀能無疲
그래도 이내 마음 흐뭇하여라 / 且慰我心懷

세 번째
침울하던 마음이 트이고 나니 / 心懷旣已開
산수 풍경 더한층 맑고 새롭다 / 山水復淸新
구름 위로 높은 뫼 솟아 있고요 / 脩岑竦雲表
산안개에 붉은 기운 일어나누나 / 絳氣興氳氤
바위샘 해맑아라 거울 같아서 / 巖潭皎若鏡
가던 길 주저앉아 물고기 구경 / 行坐見游鱗
푸른 부들 저마다 하늘거리고 / 靑蒲相披拂
하얀 자갈 어찌나 반짝이는지 / 素石何磷磷
유별난 즐길 거리 마음 다 맞아 / 殊賞俱造適
흥미롭지 않은 건 하나도 없어 / 何物不宜人
평소에도 이따금 유람했지만 / 平生數游歷
이와 같은 흥취는 지금뿐일레 / 會興惟今辰


고려사절요 제3권
 현종 원문대왕(顯宗元文大王)
경술 원년(1010), 송 대중상부 3년ㆍ거란 통화 28년


○ 봄 윤 2월에 연등회(燃燈會)를 부활시켰다. 나라의 풍속에, 왕궁과 국도에서 시골까지 1월 15일부터 이틀 밤 연등회를 베풀었는데, 성종 때부터 폐지하고 베풀지 않았으므로 이때에 이를 부활시켰다.
○ 여름 4월에 왕이 친히 태묘(太廟)에 제사지내었다.
○ 서숭(徐崧) 등 8명과 명경(明經) 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지공거(知貢擧) 손몽주(孫夢周)가 아뢰어 시(詩)ㆍ부(賦)를 시험하고 시무책(時務策)은 시험하지 않았다.
○ 5월에 상서좌사낭중(尙書左司郞中) 하공진(河拱辰)과 화주방어낭중(和州防禦郞中) 유종(柳宗)을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 귀양보내었다. 이보다 먼저 공신이 일찍이 동서 양계(東西兩界)에 종사하였는데, 함부로 군사를 내어 동여진(東女眞)의 부락에 침입하였다가 패하니, 유종이 이 소식을 듣고 여진을 깊이 원망하였다. 때마침 여진 사람 95명이 고려에 와서 조회하려고 화주관(和州館)에 이르니 유종이 이를 다 죽였다. 그 때문에 이들을 모두 귀양보내었다. 여진이 또한 거란에 호소하니 거란주가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고려의 강조(康兆)가 임금 송(誦)을 시해하고 순(詢)을 임금으로 세웠으니 대역이다. 마땅히 군사를 일으켜서 죄를 물어야 하겠다." 하였다.
○ 가을 7월에 거란이 급사중(給事中) 양병(梁炳)과 대장군(大將軍) 야율윤(耶律允)을 보내와서 전왕(목종(穆宗))에 대한 일을 물었다.
○ 덕주(德州)에 성을 쌓았다.
○ 8월에 내사시랑(內史侍郞) 진적(陣頔)과 상서우승(尙書右丞) 윤여(尹餘)를 거란에 보내었다.
○ 승니(僧尼)가 술을 빚어 담그는 것을 금지하였다.
○ 9월에 좌사원외랑(左司員外郞) 김연보(金延保)를 거란에 보내어 추계 문후(秋季問候)를 하고 좌사낭중(左司郞中) 왕좌섬(王佐暹)과 장작승(將作丞) 백일승(白日昇)을 거란의 동경(東京 요양(遼陽))에 보내어 우호를 닦았다.
○ 겨울 10월 초하루 병오일에 이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參知政事) 강조(康兆)를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로, 이부시랑(吏部侍郞) 이현운(李鉉雲)과 병부시랑(兵部侍郞) 장연우(張延祐)를 부사(副使)로, 검교상서 우복야 상장군(檢校尙書右僕射上將軍) 안소광(安紹光)을 행영도병마사(行營都兵馬使)로, 어사중승(御史中丞) 노정(盧頲)을 부사(副使)로, 소부감(少府監) 최현민(崔賢敏)을 좌군병마사로, 형부시랑 이방(李昉)을 우군병마사로, 예빈경(禮賓卿) 박충숙(朴忠淑)을 중군병마사로, 형부상서 최사위(崔士威)를 통군사(統軍使)로 삼아 군사 30만 명을 거느리고 통주(通州 평북 선천군(宣川郡))에 주둔하여 거란에 대비하게 하였다.
○ 계축일에 거란이 급사중(給事中) 고정(高正)과 합문인진사(閤門引進使) 한기(韓杞)를 보내와서 군사를 일으키겠다고 알리었다. 참지정사 이예균(李禮鈞)과 우복야 왕동영(王同穎)을 거란에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다.
○ 11월에 기거랑(起居郞) 강주재(姜周載)를 거란에 보내어 동지를 하례하였다.
○ 거란주가 장군 소응(蕭凝)을 보내와서 친정(親征)함을 알리었다.
○ 팔관회를 부활시키고 왕이 위봉루(威鳳樓)에 거둥하여 풍악을 관람하였다. 예전에 성종이 팔관회 시행에 따르는 잡기가 정도(正道)에 어긋나는 데다가 번거롭고 요란스럽다 하여 이를 모두 폐지하고, 다만 그날 왕이 법왕사(法王寺)에 행차하여 향불을 피우고 구정(毬庭)으로 돌아와서 문무관의 조하(朝賀)만 받았다. 이것을 폐지한 지가 거의 30년이나 되었는데, 이때에 와서 정당문학 최항(崔沆)이 청하여 이를 부활시켰다.
○ 신묘일에 거란주가 친히 보병과 기병 40만 명을 거느리고 의군 천병(義軍天兵)이라 칭하고 압록강을 건너와서 흥화진(興化鎭 평북 의주군(義州郡))을 포위하니, 순검사(巡檢使) 형부낭중 양규(楊規)가 진사(鎭使) 호부낭중 정성(鄭成)ㆍ부사(副使) 장작주부(將作注簿) 이수화(李守和)ㆍ판관(判官) 늠희령(廩犧令) 장호(張顥)와 함께 농성하여 굳게 지켰다.
○ 임진일에 최사위 등이 군사를 나누어 귀주(龜州 평북 귀성군(龜城郡)) 북쪽 뉴돈(恧頓)ㆍ탕정(湯井)ㆍ서성(曙星)의 세 길로 나가서 거란과 싸우다가 패전하였다.
○ 거란주가 통주성 밖에서 벼를 거두던 남녀를 잡아서 각기 비단옷을 주고 종이로 봉한 화살 하나씩을 주며, 군사 3백여 명을 거느리고 그들을 압령하여 홍화진에 보내어 항복을 권유하게 하였다. 그 봉한 화살에 글이 있었는데, 그 글에, “짐은, 전왕 송(誦 목종(穆宗))이 우리 조정에 복종하여 섬긴 지가 오래되었는데 지금 역신 강조가 임금을 시해하고 어린 임금을 세웠으므로 친히 정병을 거느리고 이미 국경에 다다랐으니, 너희들이 강조를 사로잡아 어가 앞에 보내면 곧 군사를 돌이킬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바로 개경으로 들어가서 너의 처자들을 죽일 것이다." 하였다.
계사일에 또 칙서를 화살에 매어 성문에 쏘아 꽂혔는데, 그 칙서에, “흥화진의 성주와 군인ㆍ백성들에게 신칙하노라. 짐은, 전왕 송이 그 조업(祖業)을 계승하여 나의 번신(藩臣)이 되어 우리 국경을 지키다가 갑자기 간흉에게 살해되었으므로 정병을 거느리고 와서 죄인을 토벌하는 것이다. 간흉에게 위협당하여 따른 자는 모두 사면해 줄 것이다. 하물며 너희들은 전왕이 어루만져준 은혜를 받았고, 역대 역순(逆順)의 유래를 알고 있으니, 마땅히 짐의 마음을 알아서 후회를 끼침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이 날에 이수화 등이 표문을 올렸는데, 그 표문에,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사는 자는 마땅히 간흉을 제거해야 될 것이요, 아버지를 섬기고 임금을 섬기는 자는 모름지기 절조를 굳게 지켜야 하니, 만약 이 이치를 어긴다면 반드시 그 앙화를 받을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민정을 굽어살피어 마음을 돌리소서. 크게 하늘의 그물을 열어 주시면서 하필 조작(鳥雀)이 먼저 품안에 들어오기를 구하십니까. 병거를 돌리셔야 우리 용사들의 복종을 얻으실 것입니다." 하였다.
갑오일에 거란주가 비단옷과 은그릇 등의 물품을 진장(鎭將)에게 차등 있게 내려주고 이어서 칙서에, “올린 표문은 자세히 살폈다. 짐이 오성(五聖)을 계승하여 만방을 다스림에 있어 충량에게는 반드시 정포(旌褒)하고 흉역은 모름지기 주벌하였다. 강조는 그 옛 임금을 죽이고 저 어린 임금을 끼고 점점 방자하게 간악한 짓을 하여 위세를 부렸다. 그러므로 친히 주벌을 행하여 특히 형명을 바루고자 하였다. 바야흐로 전군(全軍)을 거느리고 근경(近境)에 다다라서 특별히 윤음을 내렸으니, 이는 대개 회유하는 뜻을 보인 것인데, 문득 아뢴 글을 보건대 항복한다는 말은 없으니 진술이 성심에서 나오지 않았으며 수식된 문장은 겉으로만 공순할 뿐이다. 더구나 너희들은 일찍이 조정에 벼슬하였으니 반드시 역(逆)과 순(順)을 알 것인데, 어찌 역당에게 협조하여 전왕의 원수를 갚으려고 생각지 않느냐. 마땅히 안위를 돌아보고 미리 화복을 분별하라." 하였다.
을미일에 이수화가 또 회답하는 표문을 보냈다. 그 표문에, “신들이 어제 조서를 받들고 문득 마음속의 말을 진술하니, 죄수를 보고 우는 은혜를 내리시고 그물을 풀어주는 인자함을 베푸소서. 송죽처럼 눈과 서리를 견뎌내 백성의 마음을 더 편안하게 하겠으며 분골쇄신하여 길이 천년 만에 나타나는 성인을 받들겠습니다." 하였다. 거란주가 표문을 보고는 그들이 항복하지 않을 줄 알고 정유일에 포위를 풀었다. 다시 칙서에, “너희들은 백성을 위안하고 기다리라. 20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인주(麟州 평북 의주군(義州郡)) 남쪽 무로대(無老代 평북 의주군)에 주둔하고, 20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진군하여 통주에 이르겠다." 하고는 거란주가 군사를 동산(銅山) 아래로 옮겼다.
○ 기해일에 강조가 군사를 이끌고 통주성 남쪽으로 나와서 군사를 세 부대로 나누어 물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다. 한 부대는 통주 서쪽에 진을 쳐서 세 곳의 물[三水]이 모이는 곳에 웅거했는데 강조는 그 속에 있고, 또 한 부대는 근처의 산에, 나머지 한 부대는 성에 붙여서 진을 쳤다. 강조는 검차(劍車)로써 진을 배치하여 거란의 군사가 들어오면 검차가 포위하여 공격하니 부서지지 않는 것이 없었다. 거란의 군사가 여러 번 물러가니 강조는 드디어 적을 깔보는 마음이 생겨 다른 사람과 바둑을 두고 있었다. 거란의 야율분노(耶律盆奴)가 상온(詳穩) 야율적로(耶律敵魯)를 거느리고 삼수채(三水砦)를 격파하자 진주(鎭主)가 거란 군사가 이르렀다고 보고하였으나, 강조는 믿지 않고서 말하기를, “입 안의 음식과 같아서 적으면 씹기가 불편하니 마땅히 많이 들어오도록 하라." 하였다. 두 번째 급함을 보고하기를, “거란 군사가 이미 많이 들어왔습니다." 하니, 강조가 놀라 일어나면서, “정말이냐?" 하는데 정신이 황홀한 중에 목종이 보이며 뒤에 서서 꾸짖기를, “네 놈은 끝장이 났다. 천벌을 어찌 도피할 수 있겠느냐." 하는 듯하였다. 강조가 즉시 투구를 벗고 무릎을 꿇으면서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하는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거란 군사가 벌써 이르러 강조를 결박하였다. 이현운(李鉉雲), 도관원외랑(都官員外郞) 노진(盧戩), 감찰어사(監察御史) 노이(盧顗)ㆍ양경(楊景)ㆍ이성좌(李成佐) 등은 모두 잡혔고, 노정(盧頲), 사재승(司宰丞) 서숭(徐崧), 주부(注簿) 노제(盧濟)는 모두 죽었다. 거란 군사가 강조를 모전(毛氈)으로 싸서 수레에 싣고 가버리니 우리 군사가 크게 어지러워졌다. 거란 군사는 이긴 기세를 타서 수십 리를 추격하여 머리를 3만여 급이나 베었고 내버려진 군량과 무기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거란주가 강조의 결박을 풀어주고 묻기를, “네가 나의 신하가 되겠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나는 고려 사람인데 어찌 다시 너의 신하가 되겠느냐." 하였다. 두 번 물었으나 처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또 살을 찢으면서 물었으나 대답은 역시 처음과 같았다. 거란주가 이현운에게 그와 같이 물으니 대답하기를, “두 눈으로 이미 새 일월을 보았는데 한마음을 가지고 어찌 옛 산천을 생각하겠습니까.[兩眼已瞻新日月一心何憶舊山川]" 하였다. 강조가 노하여 현운을 발길로 차면서 말하기를, “너도 고려 사람인데 어찌 이런 말을 할 수 있느냐." 하였다. 이때에 거란 군사가 휘몰아 전진하니 좌우기군장군(左右奇軍將軍) 김훈(金訓)ㆍ김계부(金繼夫)ㆍ이원(李元)ㆍ신녕한(申寧漢)이 완항령(緩項嶺)에서 군사를 매복하고 있다가 모두 짧은 무기를 가지고 갑자기 나와서 패배시키니 거란 군사가 조금 물러갔다.
○ 거란이 강조의 서신을 거짓 꾸며서 흥화진으로 보내어 항복하기를 권유하니, 양규(楊規)가 말하기를, “나는 왕명을 받고 왔다. 강조의 명령을 받을 것이 아니다." 하고 항복하지 않았다. 또 노진(盧戩)과 그 합문사(閤門使) 마수(馬壽)를 시켜 격서를 가지고 통주에 이르러 항복하기를 권유하니, 성 안의 사람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중랑장(中郞將) 최질(崔質)과 홍숙(洪淑)이 소매를 떨치며 일어나서 노진과 마수를 체포하고 이어 방어사(防禦使) 이원귀(李元龜)ㆍ부사(副使) 최탁(崔卓)ㆍ대장군(大將軍) 채온겸(蔡溫謙)ㆍ판관(判官) 시거운(柴巨雲)과 더불어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니 여러 사람의 마음이 그제야 통일이 되었다.
○ 12월 경술일에 거란 군사가 곽주(郭州 평북 정주군(定州郡) 곽산면(郭山面))에 침입하니 방어사 호부원외랑 조성유(趙成裕)는 밤에 도망하고 우습유 승리인(乘里仁), 대장군 대회덕(大懷德), 신녕한(申寧漢), 공부낭중 이용지(李用之), 예부낭중 간영언(簡英彦)은 모두 죽었다. 성이 드디어 함락되니 거란은 군사 6천여 명을 남겨두어 성을 지키게 하였다.
임자일에 거란 군사가 청수강(淸水江 청천강)에 이르니 안북도호부사(安北都護府使) 공부시랑 박섬(朴暹)이 성을 버리고 도망하여 고을 백성이 모두 무너졌다.
○ 이전에 왕이 거란 군사가 이른다는 소식을 듣고 중랑장 지채문(智蔡文)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화주(和州 함남 영흥군(永興郡))를 지켜 동북방을 방비하게 하였다. 강조가 패하자, 채문에게 명하여 군사를 옮겨 서경을 구원하게 하니, 채문이 즉시 군용사(軍容使) 시어사(侍御史) 최창(崔昌)과 더불어 나아가 강덕진(剛德鎭 평남 함천군(咸川郡))에 머물렀다.
○ 계축일에 거란 군사가 서경에 이르러 중흥사(中興寺)의 탑을 불살랐다.
○ 갑인일에 숙주(肅州 평남 평원군(平原郡))가 무너졌다. 이날 노이(盧顗)가 향도(鄕導)가 되어 거란 사람 유경(劉經)과 더불어 격서를 가지고 서경에 이르러 항복하기를 권유하니, 부유수(副留守) 원종석(元宗奭)은 부하 관속 최위(崔緯)ㆍ함질(咸質)ㆍ양택(楊澤)ㆍ문안(文晏) 등과 이미 항복할 표문을 만들었다. 채문 등이 이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서경에 이르니 성문이 닫혀 있었다. 최창이 소리질러 분대어사(分臺御史) 조자기(曹子奇)를 불러 말하기를, “우리들은 임금의 명령을 받들고 걸음을 배로 늘려 왔는데 성문을 닫고 들이지 아니함은 무슨 이유이냐?" 하니, 자기(子奇)가 노이와 유경이 항복하기를 권유한 사실을 자세히 알리고 드디어 성문을 여니 채문이 들어가서 고궁의 남쪽 행랑에 주둔하였다. 최창이 원종석에게 노이 등을 구류하고 성을 굳게 지킬 것을 떠보았는데 종석이 따르지 않자, 최창이 은밀히 채문과 모의하여 군사를 성 북쪽에 보내어 노이 등이 돌아가는 것을 기다려 습격하여 죽이고 표문을 빼앗아 불살랐다. 이때 성 안 사람의 마음이 일치하지 않으므로 채문이 나가서 성 남쪽에 주둔하니 따라간 자는 대장군 정충절(鄭忠節)뿐이었다. 조금 후에 동북계도순검사 탁사정(卓思政)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르러 드디어 함께 군사를 합쳐서 다시 성에 들어갔다. 왕은 삼군(三軍)이 패전하고 주ㆍ군이 모두 함락되었으므로 표문을 올려 조회하기를 청하니, 거란주가 이를 허락하였다. 드디어 거란 군사가 우리나라에서 포로를 사로잡거나 노략질함을 금지하고, 마보우(馬保佑)를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왕팔(王八)을 부유수(副留守)로 삼고는 을름(乙凜)을 보내어 기병 1천 명을 거느리고 보우 등을 호송하게 하였다.
을묘일에 거란주가 또 한기(韓杞)를 시켜 돌기(突騎) 2백 명을 거느리고 서경 성 북문에 이르러 외치기를, “황제가 어제 유경ㆍ노이 등을 보내어 조서를 가지고 와서 효유하였는데 어찌하여 지금까지 전연 소식이 없느냐. 만약 명령을 거역하지 않는다면 유수와 관료들은 와서 나의 지시를 받으라." 하였다. 탁사정이 한기의 말을 듣고 채문과 모의하여 휘하의 정인(鄭仁) 등을 시켜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갑자기 나가서 한기 등 백여 명을 쳐서 죽이고 나머지는 모두 사로잡아 한 사람도 돌아간 자가 없었다. 사정이 채문을 선봉으로 삼아 나가서 을름과 싸우게 했더니 을름과 보우가 패하여 달아났다. 이에 성안의 인심이 조금 안정되었으므로 사정은 성으로 들어오고 채문과 이원(李元)은 나가서 자혜사(慈惠寺)에 진을 쳤다. 거란주가 다시 을름을 보내어 공격하니 나졸(邏卒)이 보고하기를, “적병이 안정역(安定驛 평북 평원군(平原郡))에 와서 진을 쳤는데 그 형세가 매우 강성하다." 하였다. 채문이 사정에게 빨리 알리고 병진일에 드디어 사정ㆍ중 법언(法言)과 함께 군사 9천 명을 거느리고 임원역(林原驛 평남 대동군(大同郡))에서 적군을 맞아 쳐서 머리 3천여 급(級)을 베고 법언은 전사하였다. 그 이튿날 채문이 다시 나가서 싸우니 거란 군사가 패하여 달아났다. 이에 성 안의 장수와 군사들이 성에 올라 이를 바라보고는 앞다투어 나가 추격하여 마탄(馬灘)에 이르자, 거란이 군사를 되돌려 쳐부수고 마침내는 성을 포위하였으며 거란주는 성 서쪽 절에 머물렀다. 사정은 두려워지자 장군 대도수(大道秀)를 속여 말하기를, “그대는 동문으로 나는 서문으로 나와 앞뒤에서 공격하면 이기지 못할 것이 없다." 하고 드디어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밤에 도망하였다. 도수는 대동문(大東門)을 나와서야 비로소 속임을 당한 줄 알았으나 또한 힘으로 적을 당해낼 수도 없었으므로, 드디어 관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거란에게 항복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무너지고 성 안에서는 흉흉하고 두려워하였다.
기미일에 통군녹사 조원(趙元)과 애수진장(隘守鎭將) 강민첨(姜民瞻), 낭장(郞將) 홍협(洪叶)ㆍ방휴(方休)가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이내 함께 신사(神祠)에 빌고 점을 쳐서 길조를 얻었다. 이에 여럿이 조원을 추대하여 병마사로 삼고, 흩어진 군사를 거두어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었다.
○ 경신일에 양규(楊規)가 흥화진(興化鎭)에서 군사 7백여 명을 거느리고 통주에 이르러 군사 1천 명을 수합하여, 신유일에 곽주에 들어가서 거란의 주둔 군사를 쳐서 모두 베어 죽이고 성 안의 남녀 7천여 명을 통주로 옮겼다. 이날에 거란주가 서경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자, 포위를 풀고 동쪽으로 갔다.
○ 계해일에 서경의 신사(神祠)에서 회오리바람이 갑자기 일어나니 거란의 군사와 말이 모두 넘어졌다.
○ 귀양보냈던 하공진(河拱辰)과 유종(柳宗)을 소환하여 관작을 회복시켰다.
○ 신미일에 지채문(智蔡文)이 도망해 서울로 돌아와서, 임신일에 서경에서 패전한 사실을 아뢰니 여러 신하들이 항복하기를 의논하는데 강감찬만은 아뢰기를, “오늘날의 일은 죄가 강조(康兆)에게 있으니 걱정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적은 수의 군사로 많은 군사를 대적할 수 없으니 마땅히 그 예봉을 피하여 천천히 흥복(興復)을 도모해야 합니다." 하고는 마침내 왕에게 남쪽으로 가기를 권하였다. 채문이 청하기를, “신이 비록 노둔하고 겁쟁이이지마는, 원컨대 좌우에서 견마의 힘을 다하겠습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어제 이원(李元)과 최창(崔昌)이 도망해 돌아와서 스스로 호종하기를 청하였는데, 지금은 다시 보이지 않으니 신하된 도리가 과연 이러할 수 있느냐. 그런데 지금 경은 이미 밖에서 노고했는데 또 나를 호종하고자 하니 그대의 충성을 깊이 가상하게 여긴다." 하고 이내 주식(酒食)과 은으로 장식한 말안장과 고삐를 내려 주었다. 이 밤에 왕이 후비(后妃)와 이부시랑 채충순(蔡忠順) 등과 금군(禁軍) 50여 명과 함께 서울을 나왔다.
계유일에 적성현(積城縣 경기 연천(漣川)) 단조역(丹棗驛)에 이르니 무졸(武卒) 견영(堅英)이 역인(驛人)과 함께 활시위를 당겨 행궁을 범하려 하므로 채문이 말을 달려 이를 쏘았다. 적의 무리가 도망하여 무너졌다가 다시 서남쪽 산에서 갑자기 나와서 길을 막았는데, 채문이 또 쏘아 이를 물리쳤다. 포시(晡時 오후 4시경)에 왕이 창화현(昌化縣 경기 양주(楊州))에 이르니 아전[吏]이 아뢰기를, “왕께서는 나의 이름과 얼굴을 아시겠습니까." 하였으나 왕은 일부러 듣지 못한 척하였다. 그러자 아전이 노하여 장차 난리를 일으키려고 사람을 시켜 외치기를, “하공진이 군사를 거느리고 온다." 하였다. 채문이 말하기를, “무슨 이유로 오느냐?" 하니 아전은, “채충순과 김응인(金應仁)을 사로잡기 위한 것이다." 하자, 응인과 시랑 이정충(李正忠), 낭장 국근(國近) 등이 모두 도망하였다. 밤에 적이 또 이르자 시종하는 신하ㆍ환관ㆍ궁녀들이 모두 도망하여 숨고, 현덕(玄德)ㆍ대명(大明) 두 왕후와 시녀 두 사람ㆍ승지 양협(良叶)ㆍ충필(忠弼) 등만이 왕을 모시었다. 채문이 나갔다 들어왔다 하면서 그때 그때의 시기(時機)에 따라 변고에 대처하니 적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새벽이 되자 채문이 두 왕후에게 먼저 북문으로 탈출하여 나가기를 청하고, 손수 임금의 말을 몰고 사잇길로 가서 도봉사(道峯寺)로 들어가니 적은 이를 알지 못하였고 충순이 뒤따라 왔다. 채문이 아뢰기를, “지난 밤의 적은 공진(拱辰)이 아닌 듯하니 신이 가서 뒤를 밟아보겠습니다." 하였다. 왕은 그가 도망할까 두려워하여 허락하지 않으니 채문이 아뢰기를, “신이 만약 주상을 배반하여 행동이 말과 어긋난다면 하늘이 반드시 신을 죽일 것입니다." 하니, 왕이 그제야 허락하였다. 곧 창화현으로 가다가 길에서 국근을 만났는데 국근이 말하기를, “나의 의복과 행장을 모두 적에게 빼앗겼다." 하였는데, 채문이 말하기를, “네가 신하가 되어 충성하지 못했으니 목숨을 붙이고 산 것만도 다행이다." 하였다. 때마침 하공진과 유종(柳宗)이 행재(行在)로 달려가고 있었는데 채문이 길에서 그들을 만나 적이 침입한 변고를 자세히 말하고 또 그들에게 힐문하니 과연 공진이 한 짓은 아니었다. 공진은 도중에 중군판관(中軍判官) 고영기(高英起)가 패전하여 남쪽으로 달아남을 보고 그를 데리고 함께 왔다. 이때 공진이 거느린 군사가 20여 명이나 되므로 채문이 마침내 그 군사로 창화현을 포위하여 적이 도적질해간 말 15필과 안장 10부(部)를 찾아내 왕께 돌아가려 하였는데, 채문이 공진등에게 말하기를, “내가 여러분과 함께 나아가면 왕께서 반드시 놀라실 것이니 여러분은 조금 뒤에 오기를 바란다." 하고는 마침내 혼자 갔다. 충필(忠弼)이 절문에 있다가 이를 바라보고 들어가서, “지장군(智將軍)이 왔습니다." 하고 아뢰니, 왕이 기뻐하며 문밖에 나와서 그를 맞이하였다. 채문이 아뢰기를, “신들이 적이 빼앗아간 장물(臟物)을 찾았는데 실상 공진(拱辰)이 한 짓은 아니오며, 또 공진과 함께 왔습니다." 하였다. 왕이 공진과 유종(柳宗)을 불러 위로하였다.
○ 갑술일에 왕이 양주(楊州)에 머무르니 하공진이 아뢰기를, “거란이 본디 역적(강조(康兆))를 토벌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았는데 이제 이미 강조를 잡아갔으니, 만약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한다면 그들이 반드시 군사를 돌이킬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점을 쳐서 길한 괘를 얻으니 드디어 공진과 고영기(高英起)를 보내어 표문(表文)을 받들고 거란의 진영으로 가게 하였다. 창화현에 이르러 표문을 낭장(郞將) 장민(張旻)과 별장(別將) 정열(丁悅)에게 주어 먼저 군문 앞에 가서 고하기를, “국왕이 와서 뵙기를 진실로 원하나 다만 군대의 위엄을 두려워하고 또 내란으로 인하여 강(임진강) 남쪽으로 피난하였기 때문에 배신(陪臣) 공진 등을 보내어 사유를 진술하게 하였습니다. 공진 등이 또한 두려워서 감히 앞으로 나아오지 못하니 빨리 군사를 거두소서." 하였다. 장민 등이 다다르기 전에 거란 군사의 선봉이 벌써 창화현에 이르렀다. 공진 등이 앞의 뜻을 자세히 진술하니 거란 군사가 묻기를, “국왕은 어디 있느냐?" 하므로 대답하기를, “지금 강 남쪽을 향하여 가셨으니 계신 곳을 알 수 없다." 하였다. 또 길이 먼가 가까운가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강 남쪽이 너무 멀어서 몇 만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하니, 뒤쫓던 거란의 군사가 그제야 돌아갔다.


 

[주D-001]죄수를 보고 우는 : 우 임금이 길을 가다가 죄수를 보고는 타고 있던 수레에서 내려서 울었다 한다.
[주D-002]그물을 풀어주는 : 탕 임금이 그물을 벌려놓고 빌기를, “하늘에서 내려오고 땅에서 나오는 놈은 다 내 그물에 걸려라." 하였다. 탕이 그 그물의 3면을 풀어 놓으면서 빌기를, “왼편으로 갈 놈은 왼편으로 가고, 오른편으로 가려거던 오른편으로 가며, 명령을 듣지 않을 자는 그물에 걸려라." 하였다.

 

 

동국이상국전집 제35권
 비명(碑銘)ㆍ묘지(墓誌)
고(故) 화장사 주지 왕사 정인대선사 추봉 정각국사(華藏寺住持王師定印大禪師追封靜覺國師)의 비명(碑銘) 봉선술(奉宣述)


대저 도(道)란 본래 자연한 것인데 누가 누르거나 올리거나 하겠는가. 이것은 세상과 사람을 요할 뿐이다. 대개 사람이 능히 도(道)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란 진실로 얻기 어려운 것이어서, 천백 년 만에 혹 만나게 되기도 하니, 곧 세상과 사람이 둘이 서로 만난 뒤에야 도가 행해지는 것이다. 하물며 도의 최상인 선(禪)임에랴. 선이란 문구(文句)에 얽매인 것이 아니고 자신이 가진 한 신령한 마음을 곧바로 깨닫는 그것일 뿐이다.
말세에 와서는 망령된 법에 집착 고수하여, 불(佛)이 바로 나의 물(物)이란 것은 모르므로 팽개치고 밖에 가서 도적을 자식으로 인식하는 자가 많다. 그러나 도(道)란 끝내 비색하지 않는 것이니, 세상이 장차 옛날로 회복되리라. 그래서 진인(眞人)이 나와 도(道)와 꼭 합하고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얻어 생령(生靈)을 도주(陶鑄)하니, 이는 바로 우리 국사(國師)인 것이다.
국사는 성이 전씨(田氏), 휘(諱)가 지겸(志謙), 자가 양지(讓之)인데, 세계(世系)는 영광군(靈光郡)의 태조 공신(太祖功臣)인 운기장군(雲騎將軍) 종회(宗會)에서 나왔고, 광묘조(光廟朝)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추밀원사(樞密院使)에 이른 휘 공지(拱之)의 6대손이다. 증조부 휘 개(漑)는 검교 태자첨사(檢校太子詹事)요, 조부 덕보(德普)는 대창서 영(大倉署令)이요, 부친 의(毅)는 검교 태자첨사요, 모친은 남궁씨(南宮氏)인데 양온 영(良醞令) 영(榮)의 딸이다.
모친의 꿈에 중이 집에 와서 유숙하기를 청하였다. 그길로 임신하여 낳으니 골상(骨相)이 준상(峻爽)하고 기신(機神)이 영매(英邁)하여 어릴 때에도 희롱을 좋아하지 않고 항상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자처럼 하였다. 홀연히 비범한 중을 만났는데, 그 중이 말하기를,
“이 아이는 진세(塵世)에서는 정착할 곳이 없다.”
하였다. 국사는 이때부터 비린내 나는 음식물을 끊고 나이 겨우 아홉이 되던 해에 출가(出家)하기를 간청하였다. 열한 살 때에 선사(禪師) 사충(嗣忠)에게 나아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으며, 그 이듬해에 금산사(金山寺)의 계단(戒壇)에 나아가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국사는 천품이 영특하였고, 외전(外典 불전 이외의 서적)에 널리 통하여 이것으로 윤색(潤色)을 하였다. 그런 때문에 무릇 문대사변(問對詞辨)에 있어서 민첩하고 빠르기가 마치 기아(機牙)가 화살을 발사시키듯 막을 수가 없었다. 당시의 공경(公卿)ㆍ명유(名儒)ㆍ운사(韻士)들이 그의 풍채를 흠모하여 교제하기를 원하였으니, 젊을 때부터 이처럼 명망이 있었다.
명묘(明廟) 원년에 비로소 승과(僧科)를 거행하였다. 이때 내시 정중호(鄭仲壺)가 고선(考選)을 관장하였는데, 그의 꿈에 신인(神人)이 말하기를,
“명일에 왕자(王者)의 스승을 얻을 것이다.”
하더니, 이날 국사가 과거에 급제하였다.
국사의 예전 휘(諱)는 학돈(學敦)이었다. 이해 삼각산(三角山)에 노닐다가 도봉사(道峯寺)에서 자는데, 꿈에 산신(山神)이 말하기를,
“화상(和尙)의 이름은 지겸(志謙)인데, 왜 지금의 이름을 쓰는가?”
하였다. 그래서 결국 지겸으로 고쳤던 것이다.
대정(大定) 기유년(1189, 명종 19)에 비로소 등고사(登高寺)에 머물렀으며, 명창(明昌) 4년(1193, 명종 23)에는 삼중대사(三重大師)에 임명 되었고, 7년에는 선사(禪師)로 승진되었으며, 태화(泰和) 4년(1204, 신종 7)에는 또 대선사(大禪師)로 승전되었다.
국사의 이름이 이미 사방에 알려지자, 무릇 중앙과 지방에서 선회(禪會)를 열 때에는 곧 국사를 청해다가 주관하게 하였고, 국사도 또한 종승(宗乘)을 부담하고 법을 전하여 사람을 제도하는 일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승안(承安) 4년(1199, 신종 2)에 욱금사(郁錦寺)로 이주하였다. 이 해에 진례군(進禮郡)에서 선회를 베풀고 주관할 사람을 청하니, 임금이 국사에게 명하여 가게 하였다. 이 선회가 있을 때 현령(縣令) 이중민(李中敏)의 꿈에 천인(天人)이 말하기를,
“불법을 펴는 국토에 어찌 감옥이 비지 않는가?”
하였다. 이중민은 꿈을 깨자 온몸에 땀이 흘렀다. 몸소 감옥에 가서 죄의 경중을 가리지 않고 모두 놓아 주었다. 이 소문을 들은 자는 모두 경탄하였다. 태화 무진년에 한발이 심하자, 임금이 국사를 내도장(內道場)으로 받아들여 설법하게 하였다. 5일이 되어도 비가 내리지 않으니, 국사는 분발하여 부처에게 빌기를,
“불법은 저절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고 모름지기 국왕의 힘을 입어서 행해지는 것인데, 이제 만약 비를 내리지 않는다면 영험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자, 얼마 후에 비가 쏟아졌다. 당시 그 비를 화상우(和尙雨)라고 불렀다.
국사는 효성이 지극하였다. 무릇 시주를 얻을 때 기이한 음식이 있으면 먼저 홀어머니에게 보내고 나서 자신이 먹었다. 하루는 모친이 작고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석(帝釋)에게 빌기를,
“만일 어머니의 타고난 수명이 다 되었다면 이 자식의 수명으로 대신하게 하소서.”
하였더니, 얼마 후에 가동(家僮)이 달려와서,
“마님이 이미 일어났습니다.”
하였는데, 당시 효성으로 감격시킨 소치라고 하였다.
태안(泰安) 신미년에 국청사(國淸寺)로 이주하였다. 숭경(崇慶) 2년에 강왕(康王)이 즉위하자 조종(祖宗)의 구례(舊例)에 따라 석문(釋門)의 중망자(重望者)를 얻어서 스승을 삼으려고 하였다. 이때에 진강공(晉康公 최충헌(崔忠獻))이 국정을 맡고 있어, 임금을 위하여 스승을 간택하게 되었다. 무릇 양종(兩宗) 오교(五敎)를 통하여 큰 임무를 감당할 만한 자를 구하니, 국사보다 나은 이가 없었으므로 드디어 국사를 추천하였다. 임금이 중신(重臣)을 보내어 제자의 예를 행하기를 처하니, 국사는 표를 올려 굳이 사양하였다. 임금이 다시 사자를 보내어 재삼 돈유(敦諭)하니, 국사는 부득이 그 청을 수락하였다. 임금이 특별히 상장군(上將軍) 노원숭(盧元崇) 등 두 사자를 보내어 국사가 우거한 보제사(普濟寺)에 가서 예를 갖추어 높이 책봉하였더니, 국사는 책봉을 받고 나서 드디어 대내(大內)로 들어가서 친히 사례(師禮)를 받았다.
임금이 광명사(廣明寺)가 궁궐에 가까우므로 거기에 머물기를 청하고 따라서 거돈사(居頓寺)를 본사(本寺)로 삼아 향화(香火)의 경비를 충당하게 하였다.
가을 8월에 임금이 편찮고 국사도 등창이 났다. 문인들이 기도하기를 청하자, 국사는 노기를 띠며 말하기를,
“상의 몸이 편찮으신 중에 내가 다행히 병이 났으므로 상의 병을 내 몸에 옮기려 하는 마음 간절한데, 너희는 기도하려 하는가?”
하였다. 임금이 승하하고 지금의 임금이 왕위를 계승하자 영고(寧考)의 스승이므로 다시 사례를 높이니, 은우(恩遇)가 더욱 성대하였다. 진강공도 사랑하는 아들을 그에게 보내어 삭발하고 문인이 되게 하였고, 그 밖의 사대부들 또한 그렇게 하였으니, 제자들의 많음이 근고에 없었던 일이었다.
정우(貞祐) 5년에 갑자기 문인에게 말하기를,
“나는 한미한 집에서 태어나 왕자의 스승까지 되었으니 분에 족한데, 어찌 은총을 탐내어 계속 머무를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글을 올려 물러가기를 매우 간곡하게 비니, 임금은 부득이 윤허하였다. 화장사(花藏寺)가 환경이 깨끗하고 신수(薪水)가 풍족하므로 거기에 가서 편히 지내기를 청하였다. 떠나려 할 때 진강공은 국사를 맞이하여 전별연을 베풀었는데, 공은 나가서 절하고 친히 국사를 부축하여 뜰에 올랐으며, 떠날 때에는 보마(寶馬)를 증정하고 또 문객(門客) 등을 보내어 국사를 호위하게 하였다. 국사가 비록 천리 밖에 있었으나 그를 돌봐 주는 임금의 마음은 간단이 없어, 자주 근신(近臣)을 보내어 문안하였고, 선물을 보내는 일 또한 거르는 달이 없었다.
절에 내려온 지 13년인 기축년 6월 15일에 우레가 사납게 일고 큰 돌이 무너져 떨어졌다. 이날 국사가 병이 났다. 국사가 7월 2일 새벽에 일어나 관세(盥洗)하고 문인 현원(玄遠)을 불러 편지 세 통을 쓰게 하였는데, 즉 국왕 및 지금의 상국 진양공(晉陽公 최우(崔瑀))과 고승(高僧) 송광사 주(松廣社主)에게 영원히 떠난다는 것을 고하는 내용이었다. 쓰는 일을 마치자 한참 후에 국사는 말하기를,
“오늘은 떠나는 것이 온당치 못하니 후일에 떠나겠다.”
하고 드디어 취침하였다. 8일에 국사가 갑자기 일어나서 여러 사람에게 말하기를,
하였다. 어떤 중이 묻기를,
“옛사람이 이르기를 ‘뒷날 밤 달이 처음 밝을 때 내 장차 홀로 가리라’ 하였는데, 어디가 바로 화상이 홀로 갈 곳입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푸른 바다 광활하고 흰 구름 한가로운 데다. 터럭만큼도 그 사이에 덧붙이지 말라.”
하였다. 말을 마치자, 두 손을 마주 잡아 가슴에 대고 홀연히 앉아서 운명하였는데, 낯빛은 분을 바른 것 같고 입술 빛은 붉고 윤택하였다. 국사의 운명 소식을 듣고 먼 곳에서나 가까운 곳에서나 첨례(瞻禮)에 달려가지 않은 자가 없었다. 상은 부고를 받고 매우 슬퍼하며 근신인 장작소감(將作少監) 조광취(趙光就)와 일관(日官) 등에게 명하여 상사를 보살피게 하였다. 드디어 절의 서쪽 언덕에서 화장하여 유골을 주워서 등선산(登禪山)의 기슭에 장사하고, 이어 제서(制書)를 내리어 정각국사(靜覺國師)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향년이 85세이며 승랍(僧臘)이 75년이었다.
국사는 사람됨이 조금도 외면을 꾸미는 일이 없이 천성대로 이치대로 할 뿐이었다. 비록 큰 절의 주지를 차례로 역임하였으나, 매양 재식(齋食)할 때에는 여러 사람보다 먼저 나아가서 손수 바리때를 들고 서서 기다렸으며, 변변치 않은 밥과 멀건 국으로 여러 중들과 똑같이 먹고 별도로 음식을 마련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불사(佛事)에 지성을 다하였다. 비록 몹시 추운 겨울이나 매우 더운 여름이더라도 조금도 몸을 기울이거나 게을리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렇게 하기란 늙은이로서는 어려운 일인데 능히 행하였으니, 아! 참으로 보살의 화신(化身)이로다. 그 감응의 영이(靈異)한 일들은 비록 많으나 모두 도(道)의 경지에 있어서는 미세한 것이요, 또 후인들이 괴탄히 여길까 염려하여 여기에 기재하지 않는다.
문인 대선사(大禪師) 확운(廓雲)등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국사가 작고한 지 오랜데, 비석이 아직 서지 않았으므로 신들은 깊이 한스럽게 여깁니다. 글을 지어 돌에 새겨서 영구히 전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소신에게 명하여 글을 짓게 하고, 이어 모비(某碑)라고 액(額)을 하사하였다. 신은 감히 피하지 못하여 삼가 재배하고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짓는다.
달마(達摩)의 마음을 전하여 영광(靈光)이 동방에 빛나는데, 후학들은 거꾸로 보니 마치 거울을 등지고 비치기를 구한 격이다. 밝고 밝은 국사이시여. 태양처럼 걸으시니, 한 번 연기를 틔우매 몽매함이 모두 사라졌다. 법왕(法王)이 세상에 나오시니 조사의 달이 다시 빛나고, 깨닫는 길이 남쪽을 맡으니 배우는 자 돌아갈 곳을 알리라. 제자들이 수풀처럼 많은데 친히 젖을 먹이고, 또 날개로 새끼를 덮어 주고 내놓아 날개 해 주었네. 복을 심음이 오래니 윤택을 흘려 보냄이 끝이 없고, 천자가 높음을 굽히어 북면하고 배움을 청하였다. 살아서는 임금의 사범이 되고 죽어서는 나라의 스승이 되었는데 귀감이 이제 없어졌으니 어디에서 법칙을 취할 것인가. 임금이 소신에게 명하여 사적을 전하기로 기약하시매, 신은 절하고 비명을 새겨 산과 함께 짝을 짓노라. 오가는 자들이여, 말 타고 가거든 말에서 내릴지어다. 차라리 부처에게는 절하지 않을지언정 오직 이 비에만은 절할진저.


[주D-001]정법안장(正法眼藏) : 부처가 당시에 말한 무상(無上)한 정법(正法)이다.
[주D-002]구족계(具足戒) : 비구(比丘)와 비구니(比丘尼)가 지켜야 할 일체의 계(戒)로 사미계(沙彌戒)를 받은 자에게 준다.
[주D-003]양종(兩宗) 오교(五敎) : 양종은 교종(敎宗)과 선종(禪宗). 오교는 화엄종(華嚴宗)ㆍ남산율종(南山律宗)ㆍ열반종(涅槃宗)ㆍ법상종(法相宗)ㆍ신인종(神印宗).
[주D-004]정광(定光)은……나타난다 : 공안(公案)으로 한 말인 듯한데, 뜻은 미상(未詳)이다.
[주D-005]첨례(瞻禮) : 우러러 보며 예배하는 일이다.

 

 

동문선 제118권
 비명(碑銘)
고화장사 주지 왕사 정인대선사 추봉 정각국사 비명 봉선술(故華藏寺住持定師正印大禪師追封靜覺國師碑銘奉宣述) 고 화장사 주지 왕사 정인대선사를 정각국사로 추봉하는 비명, 왕명을 받들어 기술한다


이규보(李奎報)

무릇 도(道)란 본래부터 언제나 같은 그대로인 것이다. 무엇이 도를 억제하고 선양(宣揚)하는 것일까. 요약하면 세상 형편과 사람이 그렇게 할 뿐이다. 대체로 사람이 도를 널리 펴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널리 펴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진실로 얻기 어려운 것이어서 몇 천백 세만에 어쩌다가 한 번 만나게 된다. 즉 세상과 사람이 두 가지가 서로 기다린 뒤에라야 비로소 도(道)는 행하여 지는 것이다. 더구나 도중에서도 최선한 것을 선(禪)이라고 하니 문구(文句)에 얽매이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고, 자기가 이미 가지고 있는 한 영감(靈感)을 직관하는 것이다. 말세에 이르러 망집(妄執 허망한 법에 집착함)이 겸고(鉗固)하여 불이라는 것이 곧 나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모르고 이것을 바깥에 내버린 채 도적을 제 아들이라고 믿는 것과 같은 자가 많았다. 그러나 도가 끝까지 비색하지는 않아서 세상은 옛 상태로 돌아가게 되었다. 여기에 진인(眞人)이 나타나서 도와 더불어 바로 합치자, 정법안장(正法眼藏 사람이 본래 갖고 있는 마음의 묘덕(妙德)을 나타냄)을 얻어 생령을 도야한 자가 있으니, 우리 정각국사(靜覺國師)가 그 사람이다.
국사의 성은 전씨(田氏), 휘는 지겸(志謙), 자는 양지(讓之)이다. 그의 세계(世系)는 영광군(靈光郡)의 태조 공신(太祖功臣) 운기장군(雲騎將軍) 휘(諱) 종회(宗會)에서부터 나왔다. 광종조(光宗朝)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추밀원사에 이른 휘 공지(拱之)의 6대손이다. 그의 증조인 휘 개(漑)는 검교 태자첨사요, 조고(祖考)의 휘는 덕보(德普)로서, 대창서 령(大倉署令)이요, 고(考)의 휘는 의(毅)로서 검교 태자첨사이고, 비(妣)는 남궁씨(南宮氏)이니, 양온령(良醞令) 영(榮)의 딸이다.
어머니의 꿈에 중이 집에 와서 기숙하기를 청하더니, 이어 임신하게 되었다. 아이를 낳으니 골상이 준수하고 깨끗하며, 기근(機根)과 정신이 영명(英明)하고 고매(高邁)하여 어릴 때에도 희롱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홀연히 비범한 고승(高僧)을 만나니 그 중이 말하기를, “이 아이는 티끌 세상에서는 정착할 곳이 없다.” 하였다. 국사는 이 때부터 마늘 냄새 나는 것과 비린내 나는 음식물을 끊고 겨우 아홉 살에 출가하기를 간절히 요구하였다. 열한 살 때에 선사 사충(嗣忠)에게 나아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으며, 그 다음해에 금산사(金山寺)의 계단(戒壇)에 나가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국사께서는 천품의 자질이 슬기롭고 영리한 데다가 널리 외전(外典 불교 이외의 서적)에 능통하여 이것으로써 불교의 교리를 더욱 윤색하게 하였다. 그런 까닭에, 모든 문답(問答)에서 말하고 변증하는 것이 민첩하고 빠르기가 기계에서 발사한 화살 같아서 막아낼 도리가 없었다. 한 세상의 고관들과 이름난 선비와 운치 있는 문사(文士)들이 그의 풍채를 우러러 더불어 교제하기를 원하였다. 젊어서부터 이미 명망 있음이 이와 같았다.
광종(光宗) 즉위 원년에, 처음으로 선승(禪僧)의 과거를 거행하였다. 그 때에 내시(內侍) 정중호(鄭仲壺)가 고선(考選)을 관장하였는데, 꿈에 신인(神人)이 이르기를, “내일 왕자의 스승을 얻을 것이다.” 하더니, 이 날 국사가 과거에 급제하였다. 국사의 예전 휘는 학돈(學敦)이었다. 이 해 삼각산에서 노닐다가 도봉사(道峰寺)에서 자는데, 꿈에 산신(山神)이 말하기를, “화상(和尙)의 이름은 지겸(志謙)인데, 왜 지금 이름을 쓰는가.” 하므로, 드디어 지겸으로 고쳤다.
대정(大定) 기유년에, 처음으로 등고사(登高寺)에 머물렀으며, 명창(明昌) 4년에는 삼중대사(三重大師)에 임명되었고, 7년에는 선사(禪師)로 승진되었으며, 태화(泰和) 4년에는 또 대선사(大禪師)로 승진되었다. 국사의 이름이 이미 사방에 알려지니, 모든 중앙과 지방에서 선회(禪會)를 열 때에는 곧 국사를 청하여 주관하게 하였고, 국사께서도 또한 선종(禪宗)의 종승(宗乘)을 부담하고 법을 전하여 사람들을 제도하는 일을 자기의 임무로 하였다.
승안(承安) 4년에 욱금사(郁錦寺)로 이주하였다. 이 해에 진례군(進禮郡)에서 선회를 개설하고 지도할 사람을 청하니, 임금이 국사에게 명령하여 가게 하였다. 이 선회에 현령 이중민(李中敏)이 꿈을 꾸니, 하늘 사람이 이르기를, “깨끗한 부처의 국토에 어째서 감옥이 비지[空] 않는가.” 하였다. 깨어 보니 온 몸에 땀이 흘렀다. 몸소 감옥의 문에 가서 죄의 경중을 가리지 않고 모두 놓아 주었다. 이 소문을 들은 자는 경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태화 무진년에, 한재(旱災)가 극심하여 임금이 국사를 맞아 들여 궁궐 내의 도량에서 설법하게 하였다. 5일이 되어도 비가 오지 아니 하니, 국사가 분노하여 곧 부처에게 빌기를, “불법은 제 스스로 시행하는 것이 아니고, 모름지기 나라 임금의 힘에 의지하는 것인데, 이제 만약 비가 오지 않는다면 신령한 감응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였다. 얼마 안 되서 단 비가 쏟아졌다. 그 때 세상에는 화상(和尙)의 비라고 불렀다.
국사께서는 효성이 지극하여 무릇 공양으로 얻은 것 중에 조금이라도 색다른 반찬이 있으면, 먼저 홀어머니에게 보낸 뒤에라야 비로소 자신도 먹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사망하였다는 말을 듣고 이내 제석(帝釋)에게 빌기를, “만약 어머니의 타고난 수명이 다 되었다면, 원하건대, 이 아들의 목숨으로써 대신하게 하소서.” 하였다. 얼마 안 되어서 집의 하인이 달려와서, “마님께서 이미 일어나셨습니다.”고 보고하였다. 그 때 세상에서는 국사의 효성이 감응한 까닭이라고 말하였다.
태안(泰安) 신미년에 국청사(國淸寺)로 이주하였다. 숭경(崇慶) 2년에 강왕(康王)이 즉위하자, 조종(祖宗)의 구례(舊例)에 따라 불가의 명망이 높은 스님을 얻어서 임금의 스승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 때 진강공(晋康公 최충헌(崔忠獻))이 국정을 담당하고 있으면서 임금을 위하여 임금의 스승을 인선(人選)하였는데, 무릇 양종(兩宗) 오교(五敎)를 통하여 큰 임무를 감당할 만한 자를 찾으니, 사(師)보다 나은 사람이 없어서 결국 국사로 추천하니, 임금이 사에게 중신(重臣)을 보내서 스승으로 섬길 예를 행하기를 청하였다. 사가 표(表)를 올리어 굳이 사양하였으나, 임금이 다시 사자를 보내어 돈독히 유시함을 두세 번 거듭하였다. 국사가 부득이 그 청을 수락하니, 임금이 특별히 상장군(上將軍) 노원숭(盧元崇) 등 2명의 사신을 보내어, 국사가 우거하고 있는 보제사(普濟寺)에 가서 예를 갖추어 높이 봉하였다. 책봉을 받는 일이 끝나자 드디어 대내(大內)에 들어가서 친히 스승으로서 예를 받았다.
임금이 광명사(廣明寺)가 궁에서 가깝다하여 국사가 거기에 머물기를 청하고, 거듭 거돈사(居頓寺)를 본사(本寺 자기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된 절)로 하여 향화(香火)의 경비를 충족하게 하였다. 8월에, 임금이 병이 들고 국사도 또한 등에 종기가 났다. 문인들이 기도하기를 청하니, 국사가 성낸 빛을 보이며 말하기를, “임금의 몸이 편안하지 아니하신데, 내가 다행이 병이 들었으므로 임금의 병을 내 몸에 옮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너는 나를 나으라고 빌겠단 말이냐.” 하였다. 임금이 승하하고 지금 임금이 왕위를 계승하여서는 아버지의 스승으로 편안하게 한다고 하여 다시 스승의 예로 높이니, 은총과 지우가 더욱 아름다웠다. 진강공도 또한 사랑하는 아들을 그에게 보내어서 머리를 깎고 불도에 들어가 그의 문인이 되게 하였으며, 그밖의 사대부들도 또한 그렇게 하니 문하에 제자의 성대함이 근고에 없는 일이었다.
정우(貞祐) 5년에, 갑자기 문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한미한 집안에서 나서 왕자의 스승이 되기에 이르렀으니, 분에 만족한다. 어찌 은총을 탐내 오래도록 임금의 측근에 있어야 되겠는가.” 하고, 드디어 글을 올려 퇴임하기를 매우 간곡하게 비니, 임금이 부득이 윤허하였다. 화장사(花藏寺)가 환경과 지형이 깨끗하고 경치가 좋으며 땔나무와 물이 풍족하다고 하여, 내려가 이 곳에서 편안히 지내기를 청하였다. 떠나려고 하니, 진강공이 맞아다가 전별의 연회를 열었는데, 공이 나와 절하고 친히 국사를 곁에서 부축하여 섬돌을 올라갔다. 떠나는 길에 오르니, 좋은 말을 기증하고 또 문객 등을 보내어 호위하여 가게 하였다. 국사가 비록 천리 밖에 있으나 그를 돌봐 주는 임금의 마음은 그침이 없었다. 자주 측근의 신하를 보내어 안부를 묻고, 선물을 보내며 먹을 것을 내리는 일도 또한 없는 달이 없었다. 절에 내려온 지 13년인 기축년 6월 15일에, 우뢰가 사납게 진동하고 큰 돌이 무너져 떨어지더니, 이 날 국사께서 미미한 병 증세를 보였다. 7월 2일 새벽에 일어나 손발을 씻고 문인 현원(玄源)을 불러 편지 세 통을 쓰게 하였는데, 임금과 지금의 정승 진양공(晋陽公)과 고승(高僧)인 송광사주(松廣社主)에게 영원히 떠나간다는 것을 보고하라는 부탁이었다. 편지 쓰기를 마치고 한참만에 말하기를, “오늘 가는 것은 아직 편치 않으니, 뒷날 작별하기로 하자.” 하고, 드디어 잠들었다. 8일에 급히 일어나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정광은 적적하고 / 定光寂寂
혜일(부처의 지혜를 햇빛에 비유한 것)은 밝고 밝다 / 慧日明明
법계와 진환(속세)이 / 法界塵寰
배꼽 둘레에 갑자기 나타난다 / 臍輪頓現

하였다. 어떤 중이 묻기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뒷날 밤에 달이 처음 밝을 때 / 後夜月初明
내 장차 홀로 스스로 가리라 / 吾將獨自行

하였는데, 어디가 스님의 홀로 갈 곳입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푸른 바다는 광활하고 / 蒼海濶
흰구름은 한가롭다 / 白雲閑
터럭하나라도 가져다가 그 사이에 붙이지 말라 / 莫將毫髮着其間

하였다. 말을 마치자, 두 손을 깍지끼고 마주잡아 가슴에 대고 소연(翛然 빠른 모양)히 앉아서 가시니, 얼굴은 분을 바른 것 같고 입술 빛은 붉고 윤택하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급히 달려가 쳐다보며 예를 드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임금이 부고를 듣고 매우 슬퍼하며 측근의 신하인 장작소감(將作少監) 조광취(趙光就)와 일관(日官) 등에게 명하여 상사(喪事)를 감호(監護)하게 하였다. 드디어 절의 서쪽 언덕에서 화장하고, 유골을 주어서 등선산(登禪山)의 기슭에 장사하였다. 이어 제서(制書)를 내려 정각국사(靜覺國師)라고 시호를 추증하였다. 향년 85세이며 중으로서의 생활은 75년이었다.
국사의 사람됨이 조금도 외면을 꾸미는 일이 없고, 성질대로 이치에 따를 뿐이었다. 비록 차례차례로 큰 절의 주지를 역임하였으나, 매양 식사할 때가 되면 여러 사람들보다 먼저 나가서 손수 바리때(중의 밥그릇)를 받들고 서서 기다렸으며, 변변치 않은 밥과 멀건 국으로 여러 중들과 맛을 같이 하고 일찍이 반찬과 음식을 따로 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불사(佛事)에 정성을 다하여 비록 몹시 추운 때와 혹독하게 더운 때에도 조금도 몸을 기울이거나 게을리 하는 빛이 없었다. 이런 일은 늙은이로서는 어려운 일인데, 능히 실행하였다. 아, 참으로 화신(化身)한 보살이었다. 그의 감응과 영이한 일은 비록 많으나 그 도의 경지에서 보면 모두 미세한 것이요, 또 나머지 혹 후인들이 괴이하고 허황되게 여길 것이 두려우므로 여기에 기재하지 않는다.
문인인 대선사 곽운(廓雲) 등은 임금에게 아뢰기를, “국사가 몰한 지 오래되었으나 아직 비석을 세우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을 신 등은 깊이 한되게 여기고 있습니다. 글 잘하는 자에게 청하여 돌에 새겨서 그 전(傳)함을 영구하게 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소신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게 하고 이어 액(額)을 내려 아무개의 비라고 하였다. 신이 감히 사절하지 못하여 삼가 두 번 절하고 명(銘)을 짓기를,

보제달마(중국 선종의 초조)가 마음을 전하여 / 達磨傳心兮
신령한 빛이 동방에서 빛났는데 / 靈光東曜
후학들이 거꾸로 보아 / 後學倒見兮
거울을 등지고 비치기를 구하였다 / 背鏡求照
밝고 밝게 빛나는 국사이시여 / 焯焯國師兮
태양을 들고 걸으시니 / 揭日以行
한 번 연기 기운이 훤하게 열리자 / 一廓煙氛兮
어둡고 몽매함이 다 사라졌네 / 昏矇皆
법왕이 세상 나오심이여 / 法王出世兮
조사의 달이 다시 빛나도다 / 祖月重暉
깨달음의 길이 남쪽을 맡으니 / 覺路司南兮
배우는 자 돌아갈 데를 알리라 / 學者知歸
문인과 제자들이 수풀처럼 많음이여 / 門弟林林兮
친히 젖을 먹이고 / 親哺以乳
또 날개로써 그 새끼를 덮어 주며 / 又翼其鷇兮
내놓아서 날게 하여 주셨네 / 放之使飛
복을 심음이 많고도 오래이니 / 種福滋久兮
윤택함을 흘러보냄이 끝이 없어라 / 流潤罔極
천자가 존귀함을 굽히어 / 天子屈尊兮
북면하고 유익함을 청하였네 / 北面請益
살아서는 제왕의 사범이 되고 / 生爲帝範兮
죽어서는 나라의 스승이 되었네 / 卒作國師
귀감이 이에 없어졌으니 / 龜鑑斯亡兮
어디에서 법칙을 받을 것인가 / 安所取則
임금께서 소신에게 명령하여 / 上命小臣兮
국사의 사적이 어둠에 묻히지 않기를 기약하시자 / 期以不晦
신이 절하고 비명을 새겨 / 臣拜刻銘兮
산과 더불어 길이 짝을 짓노니 / 與山作配
오는 사람 가는 사람들아 / 來者去者兮
타고 가던 말에서 내릴지어다 / 騎行卽下
차라리 부처에게는 절하지 않을지언정 / 寧不拜佛兮
오직 이 비에만은 절할진저 / 惟碑是拜

하였다.


東國李相國全集卷第三十五
 碑銘
故華藏寺住持王師定印大禪師追封靜覺國師碑銘 奉宣述 a_002_062a


夫道本自如。孰抑揚是。要之世與人而已矣。蓋人能弘道。非道弘人。人固難得。而閱千百世。儻一値焉。則世與人二者相須。而後道行焉。況道之最者曰禪。非若膠於文句者。而直見自家所有一靈印耳。降及叔世。妄執鉗固。不知佛是吾物。捨而之外。認賊爲子者多矣。道不終否。世將002_062b復古。於是乎有眞人出焉。與道吻合。得正法眼藏。陶鑄生靈者。繄我國師是已。國師姓田氏。諱志謙。字讓之。系出靈光郡太祖功臣雲騎將軍諱宗會。而光廟朝。擢第龍頭。官至樞密院使諱拱之之六代孫也。皇曾祖諱漑。檢校大子詹事。皇祖諱德普。大倉署令。皇考諱毅。檢校大子詹事。皇妣南宮氏。良醞令榮之女也。母夢梵僧至家請寄宿。因而有娠。及生。骨相峻爽。機神英邁。弱不好弄。常若有思念者。忽遇異僧曰。此子塵中無着處。師自是斷葷腥。002_062c年甫九歲。懇求出家。十一。就禪師嗣忠祝髮。明年。就金山寺戒壇受具。師天資警悟。淹貫外典。以此潤色。故凡於問對詞辯。捷疾如機發箭激。不可遏已。一時公卿名儒韻士。想望風彩。願與之交焉。自少已有宿望如此。明廟卽祚元年。始擧禪選。時內侍鄭仲壺掌選。夢神人告曰。明日得王者師。是日師中焉。舊諱學敦。是年。遊三角山。宿道峯寺。夢山神告曰。和尙名志謙。何用今名。遂改焉。大定己酉。始住登高寺。明昌四年。批除三重大師。七年。加禪師。泰和四年。又加大002_062d禪師。師旣名聞四方。凡內外有開禪會。輒請師主盟。師亦以荷擔宗乘。傳法度人爲己任。承安四年。移住郁錦寺。是年。進禮郡設禪會。請指南者。上命師赴焉。是會也。縣令李中敏夢。天人告曰。淨佛國土。何囹圄不空耶。及覺。遍體流汗。躬至獄門。罪無輕重。皆原之。聞者莫不驚歎。泰和戊辰。旱甚。上迎入內道場說法。至五日不雨。師憤之。乃禱佛曰。佛法不自行。須憑國主。今若不雨。靈應何存。無幾何。甘澍霶霈。時號和尙雨。師至孝。凡得檀施。苟有異饌。先送孀母。然後敢自002_063a食。一日聞母亡。遂於帝釋前禱曰。母若算窮。願以子壽代之。未幾。家僮馳報夫人已起。時以爲孝感所致。泰安辛未。移住國淸寺。崇慶二年。康王卽祚。循祖宗舊例。欲得釋門重望爲師。時晉康公當國。爲上遴選。凡於兩宗五敎。求可以承當大任者。無出師右。遂以師薦焉。上遣重臣。請行摳衣之禮。師上表固讓。上復遣使。敦諭至再三。師不獲已受請。上特遣上將軍盧元崇等兩使。就所寓普濟寺。備禮封崇。受冊訖。遂入大內。親受師禮。上以廣明寺近帝闕。請住焉。申以居002_063b頓寺爲本寺。充香火之費。秋八月。上不豫。師亦發背疽。門人等請禱。師厲色曰。上體不安。而子幸有疾。切欲移之身。汝將禱耶。上升遐。今上嗣位。以寧考師。復崇師禮。恩遇益縟。晉康公亦割捨愛子。剃度爲門人。其餘士大夫亦爾。門弟之盛。近古未之有也。貞祐五年。忽謂門人曰。吾起寒門。至爲王者師。於分足矣。豈可貪冒恩寵。久留輦轂耶。遂上書乞退甚篤。上不得已允之。以花藏寺境地淸勝。薪水贍足。請下安於此。將行也。晉康公邀餞。公出拜。親扶腋上階。及上道。贈002_063c寶馬。又遣門客等衛行。師雖在千里。上之眷意不已。屢遣近臣問安。其贐餉亦無虛月矣。下寺之十三年己丑六月十五日。震雷暴作。大石崩落。是日。師示微疾。七月二日。晨起盥洗。召門人玄源。裁書三道。囑國王及今相國晉陽公高僧松廣社主。告以長邁。寫訖良久曰。今日行未便。迨後日迺別。遂就寢至八日。忽起告衆曰。定光寂寂。慧日明明。法界塵寰。臍輪頓現。有僧問故人云。後夜月初明。吾將獨自行。作麽生是和尙獨行處。答曰。蒼海闊白雲閑。莫將毫髮着其間。002_063d言訖。叉手當胸。翛然坐逝。顔如傅粉。脣色丹潤。遠近無不奔赴瞻禮。上聞訃震悼。命近臣將作少監趙光就及日官等監護喪事。遂茶毗于寺之西岡。拾靈骨葬于登禪山之麓。仍降制贈諡靜覺國師。享年八十五。僧臘七十五。國師爲人。略無緣飾。因性循理而已。雖歷住大伽藍。每至齋時。先衆而出。手擎鉢立待。麤食淡羹。與衆均味。而未曾別開饌食。其精勤佛事。雖盛寒酷熱。略無欹傾倦怠之色。此皆老境所難而能行之。嗚呼。眞化身菩薩歟。其感應靈異之事。則雖或002_064a多焉。皆道境之細。而又恐後人以爲怪誕。故於此不載。門人大禪師廓雲等聞于上曰。師沒久。碑猶未立。是臣等所深疚。請爲文者鑱諸石。以永其傳。上命小臣文之。仍賜額曰某碑。臣未敢辭避。謹再拜銘之曰。
達摩傳心兮靈光東曜。後學倒見兮背鏡求照。焯焯國師兮揭日以行。一廓煙氛兮昏矇皆。法王出世兮祖月重暉。覺路司南兮學者知歸。門弟林林兮親哺以乳。又翼其鷇兮放之使飛。種福滋久兮流潤罔極。天子屈尊兮北面請益。002_064b生爲帝範兮卒作國師。龜鑑斯亡兮安所取則。上命小臣兮期以不晦。臣拜刻銘兮與山作配。來者去者兮騎行則下。寧不拜佛兮惟碑是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