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신묘년 산행 /2011.6.16. 사패산 도봉산

2011.6.16. 사패산 도봉산 산행

아베베1 2011. 6. 17. 22:30

2011.6.16. 최초 계획은 도봉산 둘레길을 걸을려고 계획이 있었으나 여러가지 사정으로 인하여 ...   

 의정부 회룡역 을 출발하여 호암사를 타고 회룡 능선을 따라  사패능선 갈림길 사패능선 산불감시초소  포대정상 와이계곡을 통과 신선대를 거쳐서 마당방위 금강암  광륜사로 하산 하였다 웬종일 산행중 중간에는 저와 세분의 동행 이었지만 결국 은 홀로 산행이었다

중간에 일행은 등반을 포기하고 혼자서 사패능선을 걸어서 와이계곡 신선대에 올라서 시원함에 등줄기의 땀을 날려보내고 뚜벅뚜벅 걸어서 저녁늦게 집에 도착하였던것으로 웬종일 하루의 해가 정말 길었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던 하루 였던 것으로  이제는 반성하고 살아야 할 하루 였다   산행을 통하여 수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생각 하기조치 싫은 하루였다

길을 걸어면서도 생각하고 반성하고 이해할려고 해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머리속에 남는다 .

하루 24시간이 악몽의 하루 였다 ... 이젠 조금 진정이 되는 듯 하다 ..

지나간일 잊어버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남은 생을 살고자 한다 정말 하루의 시간 지루한 시간이었다

남은 인생 도봉의 자연과 함께 ,

멋진인생 즐겁게 살며 내인생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   

      인생사 공수래 공수거라 하지  않았던가

 

        도봉산 사패산 산행을 하고 몇자 적어본다

 

     날씨는 더워서 온몸에  땀이 흐르는

     初夏의 계절이 되었구나

 

     나그네는 무거운 등짐을 메고

     오늘도 산으로 발길을 돌려 좋은곳을 찾아서  헤메는 구나

 

     경기도  의정부 시내를 지나서 회룡역을 거쳐 뙤약볕 아래를 걸어서

     부처님이 모셔져 있는 虎巖寺 입구에  溪谷에 도달 하였네..

 

     아직 불상한 어린중생은 갈 길을 잡지못하고

     계곡에서 쉬면서 한잔술 (酒)의 유혹에 빠져 버렸네요

 

    계곡에서 많은 아쉬운 시간을 보내니 다가올

    불행도 미움도 알지못하고 한잔 또 한잔을 마신다.  

 

     더운날 한잔의 낮술은 취기를 더하니  산행도 하기전 몸을 지체하지 못하고

     산사에 이르러 예도 표하지 못하는 어린 중생의  마음 행동 그리고 정신 ...

 

      아하 그것이 어리석은 자의 행동이 아닌가 (미움, 원망, 배신감, 믿음) 

      수 많은 성찰과 반성을 하게 하는구나

 

     사패 에서 도봉산을 향하여 능선을 지나면서 수 많은 생각과

     사패능선 정상부, 바위위에 올라서 산을 쳐다 보면서  후회를 해본다 ..

 

     오늘에 있었던 일들 모두 머리속에서 지우고,

     행동과 마음의 양식을 쌓아서  내일의 인생사를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시간이 필요할것 같구나   

 

                                              辛卯初夏 사패산,도봉산 산행을 마치고  大巖 書

 

            

 

  ▶ 우리집앞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중

  ▶ 사패선 保壘 삼국시대 부터 전해는 오는 군사 시설물이다  천연적인 요세 

  ▶ 회룡사 위 바위위에서 아하  눈을 감았네...

   ▶ 천연적인 요세 보루 건너편에서 본모습 저기에 올라가면 좋은 전망이 좋은곳   

   ▶ 천년고찰 회룡사가 보이고 김구선생님의 독립운동 때 은신처 석굴암도 보이고  水落 과 佛巖의 모습

 

 

 

  ▶ 사패능선에서 바라본 도봉의 정상부 삼각산 인수봉과 오봉의 모습이  

   ▶ 사패능선을 오면서 도봉의 정상부를

   ▶ 사패능선을 타면서 간단하게 릿지를 하면서 쉬기도하고 

 

▶ 자세히 보면 암벽의 정상부가 거북과 흡사하다

   ▶ 멋진모습이 자세히 보면 남근석 바위도 보이고

    ▶ 항상 보아도 멋진 도봉의 최정상 자운봉을 배경으로 신선대에서  힘이되는 날까지 오를 예정이다  

 

정조10년 병오(1786,건륭 51)
윤7월12일(계미)
  묘소도감이 부사군(浮莎軍)과 보토군(補土軍)의 별단으로 아뢰었다.
  ○ 해당 도감이 아뢰기를,
“하교하신 대로 그동안 자원한 보토군과 부사군을 두 조목으로 구별하여 별단을 갖추어 써서 들입니다. 이들에 대해서는 각 해당 영문(營門)과 아문(衙門)에 알려서 쌀을 지급하도록 하였고, 논하지 말라고 한 액속(掖屬) 및 소관 영문과 아문에 대해서는 별단 안에 하나하나 주(註)를 달았습니다. 앞으로는 일절 실어다 바치지 말라는 것도 각사(各司)에 감결(甘結)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강화(江華)의 시민(市民)은 한성부에서 품지(稟旨)하고 이송하였으므로, 하루 동안 부역하도록 허락하고 별단에 첨가하여 기록했습니다.”
하여, 하교하기를,
“그 가운데 글씨를 지워서 내린 자들은 액속과 궁속(宮屬)의 규례대로 물론질(勿論秩)에 놓아 두고, 궁속 중에서 낙점하여 내린 자들은 다른 원역(員役)들의 규례대로 똑같이 쌀을 주며, 원래의 별단은 다시 수정하여 들이라. 서울에 사는 백성, 평양(平壤)과 경주(慶州)의 백성 및 훈련도감의 군사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부역한 자들은 상전(賞典)을 별단으로 써서 들일 때에 별도로 써서 들이고, 쌀은 주지 말라.”
하였다.
○ 별단은 다음과 같다.
자원군 부사질(浮莎秩)은 종묘서(宗廟署) 원역 6명, 사직서(社稷署) 수복(守僕) 이하 원역 9명, 영희전(永禧殿) 수복 이하 원역 7명, 저경궁(儲慶宮) 수복 2명, 육상궁(毓祥宮) 수복 3명, 의열궁(義烈宮) 수복 4명, 경모궁계(景慕宮契)에 사는 백성 82명, 대원군방(大院君房) 원역 22명, 의소묘(懿昭墓) 수복 2명, 대빈궁(大殯宮) 수복 2명, 향실(香室) 원역 5명, 호위 군관 384명, 좌변포도청 군관 30명, 우변포도청 군관 30명, 한강진(漢江津) 별장(別將) 30명, 내의원 원역 40명, 사직동(社稷洞) 무호민(無戶民) 20명, 주전장(鑄錢匠) 31명, 공조의 소로장(小爐匠) 30명, 시장(匙匠) 28명, 정토사(淨土寺) 승려 24명, 신흥사(新興寺) 승려 13명, 봉국사(奉國寺) 승려 12명, 영도사(永導寺) 승려 13명, - 이상은 진휼청이다. - 성균관 전복(典僕) 300명 - 성균관이다. -, 병조 당상 군관 15명, 교련관 14명, 가후 금군(駕後禁軍) 50명, 원내취(元內吹) 50명, 용호영 겸내취(兼內吹) 6명, 금군별장청(禁軍別將廳) 마의(馬醫) 7명, - 이상은 병조이다. - 훈련도감 교련관 35명, 별무사(別武士) 69명, 각소(各所)의 감관(監官) 4명, 별대 마병(別隊馬兵) 114명, 겸내취 30명, 대년군(待年軍) 8명, - 이상은 훈련도감이다. - 금위영 교련관 20명, 기패관(旗牌官) 2명, 별기위(別騎衛) 46명, 겸내취 30명, - 이상은 금위영이다. - 어영청 교련관 23명, 가전별초(駕前別抄) 50명, 겸내취 30명, - 이상은 어영청이다. - 수어청 교련관 11명, 남한산성 승려 133명, - 이상은 수어청이다. - 총융청 교련관 18명, 북한산성 승려 176명, 승가사(僧伽寺) 승려 37명, - 이상은 총융청이다. - 경기 감영 표하군(標下軍) 160명 - 경기 감영이다. -, 경릉(敬陵) 수호군 30명, 창릉(昌陵) 수호군 30명, 명릉(明陵) 수호군 75명, 익릉(翼陵) 수호군 65명, 홍릉(弘陵) 수호군 65명, - 이상은 고양군(高陽郡)이다. - 영우원(永祐園) 수호군 70명, 조포사(造泡寺) 승려 15명, 호운사(護雲寺) 승려 10명, 진관사(津寬寺) 승려 38명, 화계사(華溪寺) 승려 5명, 불암사(佛巖寺) 승려 5명, 옥천암(玉泉菴) 승려 12명, 회룡사(回龍寺) 승려 16명, 회은암(晦隱菴) 승려 2명, 학림암(鶴林菴) 승려 5명, 흥국사(興國寺) 승려 5명, 원통암(圓通菴) 승려 6명, 망월암(望月菴) 승려 2명, 은석사(銀石寺) 승려 15명, 범굴암(梵窟菴) 승려 6명, 화양사(華陽寺) 승려 21명, - 이상은 양주목(楊州牧)이다. - 파주(坡州) 백성 112명 - 파주목(坡州牧)이다. -, 불성사(佛聖寺) 승려 11명, 관음사(觀音寺) 승려 6명, 자운암(紫雲菴) 승려 6명, 화장사(華藏寺) 승려 11명, - 이상은 과천현(果川縣)이다. - 망해암(望海菴) 승려 11명, 삼막사(三幕寺) 승려 42명, - 이상은 금천현(衿川縣)이다. - 봉은사(奉恩寺) 승려 26명, - 광주부(廣州府)이다. - 영수사(靈水寺) 승려 5명이다. - 진천현(鎭川縣)이다. - 대전(大殿)의 수라간(水刺間) 원역 23명, 등촉색(燈燭色) 4명, 조라치(照羅赤) 2명, 왕대비전의 수라간 원역 8명, 등촉색 2명, 혜경궁(惠慶宮)의 수라간 원역 6명, 등촉색 2명, 중궁전의 수라간 원역 8명, 내반원 직(內班院直) 8명, 육상궁 차지(次知) 이하 원역 100명, 의열궁 차지 이하 원역 100명, 용동궁(龍洞宮)의 차지 이하 종 100명, 어의궁(於義宮) 차지 이하 종 100명, 경수궁(慶壽宮) 원역 30명, 의빈방(宜嬪房) 원역 50명, 영빈방(寧嬪房) 원역 50명, 귀인방(貴人房) 원역 50명, 양제방(良娣房) 원역 25명, 은언군방(恩彦君房) 원역 25명, 은신군방(恩信君房) 원역 100명, 화순옹주방(和順翁主房) 원역 50명, 화평옹주방(和平翁主房) 원역 50명, 화유옹주방(和柔翁主房) 원역 50명, 화녕옹주방(和寧翁主房) 원역 50명, 화길옹주방(和吉翁主房) 원역 50명, 청연군주방(淸衍郡主房) 원역 50명, 청선군주방(淸璿郡主房) 원역 50명, 상고(廂庫) 원역 4명, 내시부 원역 7명, 내농포(內農圃) 원역 9명, 채원 직(菜園直) 36명, 내수사 원역 150명, 내원 직(內苑直) 6명이다. - 이상은 논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자원군 보토질(補土秩)은 종묘서 수복 이하 원역 38명, 경모궁 수복 이하 원역 32명, 경모궁 아래 사는 백성 20명, 관왕묘(關王廟) 수복 2명, 묘소 밖 화소(火巢) 안의 출신(出身) 12명, 봉원사(奉元寺) 승려 20명, - 이상은 진휼청이다. - 금위영 별군관 10명, 별무사 31명, - 이상은 금위영이다. - 승가사 승려 42명, - 총융청이다. - 개성부(開城府) 시민(市民) 50명, - 개성부이다. - 강화부 백성 100명, 시민 34명, - 이상은 강화부이다. - 평양(平壤) 백성 18명, - 평양부이다. - 법성(法聖) 조군(漕軍) 220명, - 영광군(靈光郡)이다. - 제주(濟州) 백성 30명이다. - 제주목이다. - 대전의 사알(司謁) 2명, 사약(司鑰) 13명, 별감(別監) 23명, 중금(中禁) 4명, 무수리간(水賜間) 별감 1명, 무예별감(武藝別監) 142명, 별기군(別技軍) 60명, 왕대비전의 별감 10명, 무수리간 별감 1명, 혜경궁의 별감 8명, 무수리간 별감 1명, 중궁전의 별감 6명, 동산 별감(東山別監) 1명, 액정서 각처의 군사 12명, 명례궁(明禮宮)의 차지 이하 종 100명, 수진궁(壽進宮)의 차지 이하 종 100명, 궁임(宮任) 182명, 배동(陪童) 70명, 내시부 종 172명, 내궁방(內宮房) 궁시인(弓矢人) 26명, 내각(內閣) 원역 52명, 시강원 원역 48명, 익위사(翊衛司) 원역 26명, 별군직청(別軍職廳) 30명, 원역 9명이다. - 이상은 논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1인당 미 1두를 준다. - 넉넉하게 줄 자에게는 2두를 준다.


기언 별집 제15권
 기행(記行)
갑인 기행(甲寅記行)



15년(1674, 현종15) 중하(仲夏 음력 5월을 말함) 임진일(29일). 도성 문을 나가 은관(銀關) 동북 석록소동(石麓小洞)에 있는 대흥불우(大興佛宇)에서 묵었는데, 상의 숙부(叔父) 인평대군(獜坪大君) 조계별업(曹溪別業)이다. 대흥불우는 석계(石溪)를 굽어보고 있으며, 계당(溪堂)이 있고 당(堂) 앞에는 포개 놓은 돌다리가 있는데, 그중에 최고인 것은 비홍지교(飛虹之橋)라 한다. 무지개다리를 건너면 석정(石亭)이 아득히 있어 더욱 아름답다. 다리 위에 폭포가 아주 멀리 있는데, 바라보면 물이 구천(九天) 위에서 떨어지는 것 같아 ‘구천은폭(九天銀瀑)’이라고 새겼다.
폭포 옆에 송계별업(松溪別業)이라 새겨져 있고, 돌다리 아래위에 또 창벽(蒼壁), 한담(寒潭)이라고 크게 둘을 새겨 놓은 것이 있다.
산 밖을 바라보면, 넓은 들판과 질펀한 냇물이 절경(絶景)을 이룬다.
손님으로 상종하는 사람이 몇 사람인데, 완산(完山) 이운태 대래(李云泰大來), 한양(漢陽) 조함 국보(趙瑊國寶), 광릉(廣陵) 이담명 이로(李聃命耳老)였고, 또 나를 따르는 자는 조카 허고(許䎁)인데, 자(字)는 자여(子如)이다.
80세 노인 미수(眉叟)는 제(題)한다.

4월부터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든 지 오늘에 이르기까지 50여 일이나 되어 냇물의 근원은 마르고, 못자리도 말랐다. 조계(曹溪)를 나와 30리를 가면 회룡사(回龍寺)인데, 지난밤에 비로소 비가 왔다. 냇가 돌 사이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빗속에서 그윽한 새는 서로 부르며, 시내 폭포 아래 물은 맑고 돌은 희어 놀 만하였다.
그 위 회룡사(回龍寺)는 산수(山水)가 아름다운 절로, 절은 오래되어 불전(佛殿) 정문 옆에 석조(石槽)가 있는데, ‘홍치(弘治) 14년(1501, 연산군7)’이라고 새겨져 있다.
조계(曹溪)를 나오니, 이 학록(李學錄 학록은 벼슬 이름으로 이담명을 말함)이 먼저 돌아가므로, 조군(趙君 조함(趙瑊)을 말함)을 회룡까지 와서 전송하고 이야기를 하다가 헤어졌다.
6월 1일(갑오). 한산(寒山)에서 묵었는데, 아침에 비가 왔다. 마차 협구(磨嵯峽口)를 지나, 대래(大來)는 나의 남계(楠溪) 초려(草廬)에 묵고, 다음날 빗속을 뚫고 집에 돌아가 대장구행(大葬匶行) 수백 언을 지었다.


 

서계집 제2권
 시(詩)○석천록 상(石泉錄上) 무신년(1668, 현종9)에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석천에 거처한 이후에 지은 것이다.
회룡사(回龍寺)의 승려 풍열(豐悅)에게 부치다 2수



열공이 나의 안부 물으러 동강 아래로 왔는데 / 悅公問我東岡下
내가 병들어 혼몽히 지내며 죽으려 할 때였지 / 我病昏昏欲死時
지금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앉을 수 있으나 / 今日扶頭能起坐
공을 생각해도 볼 수 없기에 공에게 알게 하노라 / 思公不見遣公知

징공이 떠나자마자 열공이 왔기에 / 澄公纔去悅公來
강석의 먼지를 거듭 쓸어 내었어라 / 講座塵埃再掃開
다시 호계에서 한바탕 웃어 준다면 / 儻復虎溪容一笑
그대와 폭포를 구경하고 돌아오리라 / 與君同賞瀑泉回


 

[주D-001]징공(澄公) : 승려 법징(法澄)을 가리킨다.
[주D-002]호계(虎溪)에서 …… 준다면 : 호계는 중국의 강서성(江西省) 구강현(九江縣)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 앞에 있는 시내이다. 진(晉)나라 혜원 법사(慧遠法師)가 이곳에 있으면서 손님을 보낼 때 이 시내를 건너지 않았는데 여기를 지나기만 하면 문득 호랑이가 울었다. 하루는 도잠(陶潛), 육수정(陸修靜)과 함께 이야기를 하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내를 건너자 호랑이가 우니 세 사람은 크게 웃고 헤어졌다고 한다. 《東林十八高賢傳》

 

 

 서계집 제2권
 시(詩)○석천록 상(石泉錄上) 무신년(1668, 현종9)에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석천에 거처한 이후에 지은 것이다.
회룡사(回龍寺)를 유람하고 산을 나온 뒤에 풍열 상인에게 부쳐 사례하다 상인이 나를 전송하느라 산 중턱까지 이르렀다.



원사는 여산사에 석장을 내려놓고 / 遠師駐錫廬山寺
도령은 벼슬을 버리고 율리촌에 은거하였네 / 陶令投簪栗里村
이미 속세를 벗어나 연사를 맺어 놓고도 / 已出方中結蓮社
다시 세상 밖에서 도원을 생각하네 / 還從世外憶桃源
홍진은 아스라이 관로에 떠 있고 / 紅塵渺渺浮官路
백설은 쓸쓸하게 동문을 덮었네 / 白雪蕭蕭閉洞門
전송하느라 호계 지나 서로 돌아보며 웃으니 / 送過虎溪相顧笑
도정과 한의를 누구를 향해 논할거나 / 道情閑意向誰論


[주D-001]원사(遠師)는 …… 내려놓고 : 원사는 혜원 법사(慧遠法師)를, 여산사(廬山寺)는 여산의 동림사(東林寺)를 가리킨다. 혜원 법사가 손님을 보낼 때 동림사 앞에 있는 시내인 호계(虎溪)를 건너지 않았는데 여기를 지나기만 하면 문득 호랑이가 울었다. 하루는 도잠(陶潛), 육수정(陸修靜)과 함께 이야기를 하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호계를 건너자 호랑이가 우니 세 사람은 크게 웃고 헤어졌다고 한다. 《東林十八高賢傳》
[주D-002]도령(陶令)은 …… 은거하였네 : 도령은 팽택 영(彭澤令)을 지낸 진(晉)나라 도잠(陶潛)을 가리킨다. 도잠이 팽택 영으로 있을 때 군(郡)에서 독우(督郵)를 보냈는데, 현리(縣吏)가 의관을 갖추고 만나 뵈라고 하자 “오두미(五斗米)를 위하여 구차히 향리의 소아(小兒)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 하고는 즉시 인끈을 풀고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晉書 卷94 隱逸列傳 陶潛》 율리(栗里)는 도잠이 진나라가 망하고 남조(南朝)의 송(宋)나라가 건국되자 정절(靖節)을 지켜 은거한 곳이다.
[주D-003]연사(蓮社)를 맺어 놓고도 : 혜원 법사가 여산의 동림사에 흰 연꽃을 심고 혜영(慧永)ㆍ유유민(劉遺民)ㆍ뇌차종(雷次宗) 등 18명과 백련사(白蓮社)라는 단체를 결성하였는데, 사영운(謝靈運)ㆍ도잠ㆍ육수정(陸修靜) 등도 참여하였다. 《蓮社高賢傳 慧遠法師》
[주D-004]도원(桃源) : 무릉도원(武陵桃源)을 말한다. 도잠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진(晉)나라 때 무릉(武陵)의 어부가 시내를 따라 가다가 길을 잃고 복사꽃이 물에 떠 있는 것을 보고 물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도화림(桃花林)을 만났는데, 그곳에는 포악한 진(秦)나라 시대에 난리를 피해서 들어온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곳에서 며칠간 머물다가 집에 돌아온 뒤에 다시 찾아갔으나 끝내 무릉도원을 찾지 못했다.” 하였다. 《陶淵明集 卷6》

 

청룡사(靑龍寺)ㆍ망월사(望月寺)ㆍ회룡사(回龍寺)ㆍ원통사(圓通寺)ㆍ영국사(寧國寺) 아울러 도봉산에 있다.

잠곡속고(續稿)
 발(跋)
중간(重刊) 좌전(左傳)의 발문(跋文)



창려자(昌黎子) 한유(韓愈)가 좌구명(左丘明)은 허황되다고 하였는데, 허황되다는 말은 혹 그럴 법도 하지만, 역시 사(史)에 있어서는 조종 격으로서 뛰어난 자이다. 240년간의 실제 자취가 그에 힘입어서 후세에 전해졌는바,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삼전(三傳)이 어찌 성경(聖經)의 요지를 밝힐 수 있었겠는가. 그러니 문장을 배우는 선비들이 또한 어찌 이를 버려 둘 수 있겠는가.
숭정(崇禎) 갑술년(1634, 인조 12)과 을해년(1635) 사이에 교서관(校書館)의 여러 사람들이 임씨(林氏)가 주석(註釋)한 옛 책을 얻어 회룡사(回龍寺)에서 간행하였다. 그 뒤 병자년(1636)의 전란에 판본(板本)이 흩어졌던 것을 사미승 두섬(杜暹) 등이 또 호남에서 보충하여 판각하였다. 그런 다음 내가 만든 유서(類書)의 판(板)과 아울러 완산(完山)으로부터 남한산성으로 가지고 올라와 도중(都中)의 사대부들로 하여금 간행하여 볼 수 있게 해, 우리 성대(聖代)에 문(文)을 숭상하는 교화를 도왔다. 그러니 두섬과 같은 사람은 이름은 중이지만 유자(儒者)의 행실을 하는 자가 아니겠는가. 내가 그의 뜻을 가상하게 여기고 그 공을 중시하여 책 끝에 제하여 기록하는 바이다.


損窩先生遺稿卷之五
 詩 五言
書回龍上人詩 幷引 a_169_422a



余生平愛道峰水落之勝。而未知有回龍寺也。歲辛未夏。因晦雲僧碧虛。始聞其水石之佳而往從之。洞府幽靚。林木環合。一道飛泉。瀉出于層崖之間。隱隱有環珮響。心甚樂之。169_422b 始信前聞之不虛也。遂成長律一首而歸。無何。虛上人訪余於洛西弊廬。偶得三淵詩。持而示余。依韻和之。仍書前所得者。以塞其意。
法界淸凉地。騷人漫浪遊。無山非絶境。有水卽飛流。花落禪初定。雲歸意自幽。秋來留後約。魚鳥記吾不。


杞園集卷之三
 
重遊回龍寺 a_183_440d



余於辛未年間。與亡友洪君仁甫。自湘水遊道峰回龍寺。仁甫題詩石上曰。花宮鍾梵翠微間。惆悵中林一宿還。此日石門分手後。夢魂長在道峰山。今余重到寺中。居然二十年183_441a 陳跡矣。徘徊溪上。忽憶此詩。仍次其韻以志感。
流水浮雲廿載間。舊遊眞似夢中還。一春偶到禪房宿。鍾磬依依月滿山。


杞園集卷之三
 
石村金進士與兩子及必亨 金濟謙。待于樓院。同遊寺中。 a_183_442b



我訪回龍寺。君從飮犢橋。雨過山翠潤。水出洞雲遙。倦驂行復歇。幽鳥語還嬌。小酌臨溪石。岩花細細飄。


樊巖先生集卷之三十五
 
回龍寺觀瀑記 a_236_125a



乙巳夏。余借寓楊州之洪氏庄。庄在道峯下。一日。時236_125b雨大至。通宵不止。翌晩有霽色。聞回龍寺前瀑溜甚壯。艱備輿涉川。捫蘿以往。飛沫所射。不可以狎。從瀑左路遠睨之。若棄之然。僊僊而上。遇源流不甚悍激。始乃揭以越。循厓而下右夾瀑。坐巖石上。俯視水發源。道峯行可十許里。至是猝遇石。石戍削高僅五六丈。水不得不爭門束投。有騰而散者。有立而躍者。有跌而傍墜者。有迅而直瀉者。或洄而沸。或擊而碎。其富千斛珠璣也。其喧萬部雷霆也。從遊者無不叫奇。余亦心目頗駭。久乃靜思之。天之生水也。豈使然也哉。水之性。就下而已。虛而實。柔而剛。循其自然。莫之236_125c流而流者。乃其常也。今乃爲石所誤。其勢大奔競也。其狀大顚狂也。人之見之者不知其喪其本性之爲可歎。而乃反拍手稱奇。何其惑也。吾觀今之人不能保有其天賦者多矣。瀑哉瀑哉。吾於汝何咎。遂感慨以書。從遊者。兒子弘遠。庶男弘謹。甥姪子李儒尙。門人權弼銓。傔人金相謙。僧敬聰。


경기도 의정부시 도봉산(道峯山)에 있는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봉선사의 말사이다. 681년(신라 신문왕 1) 의상(義湘:625∼702)이 창건했을 때의 명칭은 법성사(法性寺)였다. 930년(경순왕 4) 경보(慶甫), 1070년(고려 문종 24) 국사(國師) 혜거(慧炬), 1384년(우왕 10) 자초(自超) 등이 각각 중창하였다. 특히 자초는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이 곳에서 3년간 수도하였고, 이성계가 정계로 나간 뒤에는 자초가 홀로 남아 사찰을 중건하고 관세음보살상을 모셨다. 그 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이곳에 찾아와 절 이름을 현재의 회룡사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설에는 이성계가 왕위에서 물러나 함흥(咸興)에 머물다가 1403년(태종 3) 서울로 돌아와 이곳에서 수도하던 자초를 찾아오자 자초는 ‘회란용가(回鸞龍駕)’라 하면서 기뻐하였는데, 절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하였다고도 한다.
1630년(인조 8) 비구니 예순(禮順)이 중건하였으며, 1881년(고종 18)에는 최성(最性)이 중수하였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1938년 비구니 순악(順岳)이 중수하고 칠성각을 지었으며, 1940년에는 석굴 법당과 요사채를 지었다. 이후에도 불사를 거듭하여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약사전·삼성각·선실·요사채가 있다. 사찰 유물로는 신중탱화와 오층석탑·석조(石槽)·노주(露柱) 등이 있다. 이 중 신중탱화는 1883년 수락산 흥국사에서 만든 것이다. 오층석탑에는 의상의 사리 1과가 모셔져 있다고 전하나 탑의 형식으로 보아 조선 전기의 유물로 추정된다. 석조와 노주도 조선 전기의 유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