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현 분의 문집/성현 선생님의 용재총화

성현 선생님의 용재총화 내용

아베베1 2011. 6. 18. 16:27

 

 

 

 

 

용재총화 제1권
용재총화 제1권


성현(成俔) 찬(撰)

○ 경술(經術)과 문장(文章)은 원래 두 가지가 아니다. 육경(六經)은 모두 성인(聖人)의 문장으로 모든 사업(事業)에 나타나는 것인데, 지금 글을 짓는 자는 경술에 근본할 줄을 모르고, 경술에 밝다는 자는 문장을 모르니, 이는 편벽된 기습(氣習)일 뿐만이 아니라 이것을 하는 사람들이 힘을 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 고려의 모든 문사(文士)는 시소(詩騷)로 업을 삼았으나, 포은(圃隱)이 성리학(性理學)을 비로소 제창하였고, 본조에 이르러서는 양촌(陽村 권근(權近))과 매헌(梅軒 권우(權遇)) 두 형제가 경학에도 밝고 글도 능하였다. 양촌은 사서(四書)ㆍ오경(五經)의 구결(口訣 한문에 다는 토(吐))을 정하였고, 또 《천견록(淺見錄)》ㆍ《입학도설(入學圖說)》 등의 글을 지었으니, 도(道)에 우익(羽翼)이 된 공이 적지 않다. 그 뒤로는 함장(函丈 스승)이 될 만한 사람으로 황현(黃鉉)ㆍ윤상(尹祥)ㆍ김구(金鉤)ㆍ김말(金末)ㆍ김반(金泮)이 있는데, 황현의 학문은 세상에 알려진 바가 없고, 윤상은 가장 정밀하였으며, 글도 대략 할 줄 알았다. 김구와 김말은 모두 정밀하였으나 김말은 고루하여 막힘을 면치 못하여 항상 서로 상하를 다투었기 때문에 수업하는 사람들도 두 갈래로 나누어졌다. 두 사람은 모두 세조(世祖)에게 알려진 바 되어 관직이 일품에 이르렀다. 김반은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가 연로하여 치사(致仕)하고는 고향에서 굶주리다가 죽었다. 또 그 다음가는 사람으로 공석(孔頎)ㆍ정자영(鄭自英)ㆍ구종직(丘從直)ㆍ유희익(兪希益)ㆍ유진(兪鎭)이 있는데, 공석은 익살스러워서 이야기를 잘하였으나, 글짓는 것은 사소한 편지 한 마디도 짓지 못하였다. 일찍이 남의 편지를 받았으나 답장을 쓰지 못하고 있었는데, 마침 옆에 있던 생원(生員) 김순명(金順命)이 이것을 보고 그가 말하는 대로 받아 써보니, 사어(辭語)가 훌륭하였다. 공석이 감탄하여, “자네의 학문은 나에게서 배운 것인데, 자네는 잘 이용하고 나는 이용할 줄 모르니, 참으로 ‘남(藍) 풀에서 나온 청색(靑色)이 남색보다 진하다.’ 하겠다.” 하였다. 정자영은 오경(五經)뿐만 아니라 여러 사적(史籍)을 널리 보아 관직이 판서(判書)에 이르렀다. 구종직은 용모가 기이하기 때문에 세조에게 발탁되어 관직이 마침내 일품에 이르렀다. 유희익은 현달하지는 못하였고, 유진은 가장 고집이 세어서 이치에 통하지 못하였다. 근래에는 노자형(盧自亨)ㆍ이문흥(李文興)이 오랫동안 학관(學官)에 있었는데, 성종(成宗)이 연로하다고 우대하여 마침내 당상(堂上)에 오르더니 모두 고향으로 물러가 죽었다.

 

○ 우리나라 문장은 최치원(崔致遠)에서부터 처음으로 발휘되었다. 최치원이 당 나라에 들어가 급제하니 문명(文名)이 크게 떨쳐 지금은 문묘(文廟)에 배향되어 있다. 이제 그의 저서를 통하여 보면, 시구에는 능숙하나 뜻이 정밀하지 못하고, 사륙문체(四六文體)에는 재주가 있으나 말이 단정하지 못하였다. 김부식(金富軾)과 같은 이의 글은 풍부하나 화려하지 않고, 정지상(鄭知常)의 글은 화려하나 드날리지 않았고, 이규보(李奎報)는 눌러[押] 다듬을 줄 알았으나 거두지 못하였으며, 이인로(李仁老)는 단련(鍛鍊)되었으나 펴지 못했고, 임춘(林椿)은 진밀(縝密)하나 통하지 못하였으며, 가정(稼亭 이곡(李穀))은 적실(的實)하나 슬기롭지 못하였고,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는 노건(老健)하나 아름답지 못하였고,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은 온자(醞藉)하나 길지 못하였으며,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은 순수하나 종요롭지 못하였고,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은 장대(張大)하나 검속(檢束)하지 못하였다. 세상에서 칭하기를,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시와 글에 모두 뛰어나 집대성하였다.” 하나 비루하고 소략한 태(態)가 많아서 원(元) 나라 사람의 규율(規律)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당(唐)ㆍ송(宋)의 영역에 비길 수 있겠는가. 양촌(陽村 권근(權近))ㆍ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이 문병(文柄)을 잡기는 하였으나 목은(牧隱)에게 미치지 못하였으며, 춘정은 더욱 비약(卑弱)하였다. 세종(世宗)께서 처음으로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문학하는 선비들을 맞아들였는데, 고령(高靈) 신숙주(申叔舟)ㆍ영성(寧城) 최항(崔恒)ㆍ연성(延城) 이석형(李石亨)ㆍ인수(仁叟) 박팽년(朴彭年)ㆍ근보(謹甫) 성삼문(成三問)ㆍ태초(太初) 유성원(柳誠源)ㆍ백고(伯高) 이개(李塏)ㆍ중장(仲章) 하위지(河緯地)와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모두 한때에 이름을 떨쳤다. 근보의 문장은 호종(豪縱)하나 시(詩)에는 짧고, 중장도 대책문(對策文)이나 소장(疏章)에는 능하나 시를 알지 못했으며, 태초는 천재로 숙성(夙成)하였으나 견문이 넓지 못하였다. 백고(伯高)는 맑고 뛰어나 영발(英發)하고 시도 정절(精絶)하였으나, 선비들이 모두 박인수를 집대성(集大成)이라고 추대하였으니, 그는 경술(經術)ㆍ문장ㆍ필법(筆法)을 모두 잘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두 주살(誅殺)을 당하여서 저술한 것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는다. 영성(寧城)은 사륙문체(四六文體)에 능하고, 연성(延城)은 과거(科擧)의 글에 능하였다. 그러나 고령(高靈)의 문장과 도덕만이 일대(一代)의 존경을 받았고, 그 뒤를 따를 사람은 서달성(徐達城)ㆍ김영산(金永山)ㆍ강진산(姜晉山)ㆍ이양성(李陽城)ㆍ김복창(金福昌)과 나의 백씨(伯氏)뿐이다. 달성의 문장은 화려하고 아름다우며 시는 퇴지(退之 한유(韓愈))의 체(體)를 본받아 손의 움직임에 따라 아름답기 짝이 없는 글이 되었고, 오랫동안 문형(文衡)을 맡았다. 영산은 책을 읽으면 반드시 외기 때문에 문장의 체(體)를 얻어서 그 글이 웅방호건(雄放豪健)하여 그와 문봉(文鋒)을 다툴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성품이 검속하지를 못하여 시의 압운(押韻)에 착오가 많았다. 진산의 시와 글은 전아(典雅)하여 천기(天機)가 절로 무르익어 여러 선비들 가운데서도 가장 정밀하고 빼어났다. 양성의 시와 글은 모두 아름다워 정교한 장인이 다듬고 새긴 것과 같아서 다듬은 흔적이 없었다. 나의 백씨(伯氏)의 시는 만당(晩唐)의 체를 얻어서 떠가는 구름이나 흐르는 물처럼 막히는 데가 없었다. 복창은 타고난 자질이 일찍 성숙되어 반고(班固)를 따랐으니, 문장이 노건(老健)하였다. 일찍이 《세조실록(世祖實錄)》을 엮었는데, 일을 서술한 것이 대개 그의 손에서 많이 나왔다. 이상의 사람들은 모두 일대(一代)에 이름을 떨쳐서 문학이 빛나고 성하였다.

 

○ 우리나라에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 많다고 하지만,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은 적다. 김생(金生)이 글씨를 잘 써서 세자(細字)에 있어서 아무리 작아도 모두 정밀하였다. 행촌(杏村)은 자앙(子昻)과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 필세(筆勢)는 서로 적수였으나, 행서(行書)와 초서(草書)를 써내려 가는 것은 마땅히 자앙에게 양보하여야 한다. 유항(柳巷)도 또한 유명하다. 진(晉) 나라 필법을 많이 체득하여 그의 글씨는 굳센데 그가 쓴 〈현릉비(玄陵碑)〉는 지금도 남아 있다. 독곡(獨谷) 성석린(成石璘)의 글씨는 진밀(縝密)할 뿐인데, 나이 80세에 〈건원릉비(健元陵碑)〉를 썼는데도 조금도 필력(筆力)이 쇠하지 않았다. 안평(安平)의 글씨는 오로지 자앙(子昻)의 글씨를 본받았는데, 호매(豪邁)함은 서로 상하를 다투며 늠름하여 날아 움직이는 것 같다. 일찍이 예시강(倪侍講)이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왔다가 편제(篇題) 2자를 보고, “이것은 범수(凡手)가 쓴 것이 아니니 내가 꼭 만나 보았으면 좋겠다.” 하여, 왕이 안평에게 가서 보도록 명하였다. 시강이 그의 필적을 좋아하여, “지금 중국에서는 진학사(陳學士)가 글씨를 잘 써 이름을 떨치고 있으나 왕자에게 견준다면 미치지 못한다.” 하고, 더욱 예모(禮貌)를 갖추고 마침내는 글씨를 받아 가지고 갔다. 그 뒤에 우리나라 사람이 중국에서 글씨를 사왔는데, 바로 그의 글씨이므로 안평이 크게 기뻐하여 능한 것으로 자처하였다. 당시 최흥효(崔興孝)란 선비가 있었는데, 유익(庾翼)의 법을 본받아 글씨를 잘 쓴다고 자칭하면서 항상 붓주머니를 가지고 여러 관청이나 대가(大家)를 찾아다니면서 글씨를 써 주었는데, 안평이 맞아들여 글씨를 청하였으나, 자체(字體)가 거칠고 비루하였으므로 마침내 찢어서 벽을 발라버렸다. 백씨(伯氏 성임(成任))는 인재(仁齋) 강희안(姜希顔)ㆍ동래(東萊) 정난종(鄭蘭宗)과 더불어 당시에 글씨를 잘 쓰는 사람으로 불렸다. 인재는 성품이 글씨 쓰기를 꺼렸으므로 세상에 전하는 수적(手跡)이 드물고, 나의 백씨는 병풍ㆍ족자를 많이 썼는데 〈원각사비(圓覺寺碑)〉는 더욱 묘하여, 성종(成宗)이 그 필적을 보고, “잘 썼다. 명성은 헛된 것이 아니었구나.” 하였다. 동래는 많은 힘과 공을 들여서 글씨를 썼는데, 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거리낌없이 써 주어서 세상에 유포된 것이 많으나 유약(柔弱)하여 볼 만한 것이 못 된다.

 

○ 물상(物像)을 묘사함에는 하늘이 준 재주[天機]를 얻은 자가 아니면 정밀하게 할 수 없고, 한 물건에 정밀하더라도 모든 물건에 정밀하기는 더욱 어렵다. 우리나라에는 훌륭한 화가가 매우 적다. 근대로부터 이것을 보면 공민왕(恭愍王)의 화격(畫格)이 매우 높다 지금 도화서(圖畫署)에 소장된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의 진영(眞影)과 흥덕사(興德寺)에 있는 〈석가출산상(釋迦出山像)〉은 모두 공민왕의 수적(手跡)이며, 간혹 갑제(甲第)에 산수를 그린 것이 있는데, 매우 기절(奇絶)하다. 윤평(尹泙)이란 사람도 산수화를 잘 그려 지금 사대부들이 이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으나 필적이 평범하여 기취(奇趣)가 없다. 본조(本朝)에 이르러서는 고인(顧仁)이라는 사람이 중국에서 왔는데, 인물을 잘 그렸다. 그 뒤에 안견(安堅)ㆍ최경(崔涇)이 이름을 가지런히 하였는데, 안견의 산수화와 최경의 인물화는 모두 신묘한 경지에 들었다. 요새 사람들이 안견의 그림을 금옥(金玉)처럼 사랑하여 보관하고 있다. 내가 승지가 되었을 때에 궁중에 감수된 〈청산백운도(靑山白雲圖)〉를 보았는데 참으로 훌륭한 보배였다. 안견은 항상 “평생의 정력이 여기에 있다.” 하였다. 최경도 또한 만년에 산수와 고목(古木)을 그렸으나 마땅히 안견에게는 양보하여야 한다. 그 밖에 홍천기(洪天起)ㆍ최저(崔渚)ㆍ안귀생(安貴生)의 무리가 산수화에 이름이 있으나 모두 용품(庸品)이다. 다만 사인(士人) 김서(金瑞)의 말 그림과 남급(南汲)의 산수화는 제법 아름다웠다. 강인재(姜仁齋)는 타고난 자질이 고묘(高妙)하여 옛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개척하였는데, 산수화와 인물화가 모두 뛰어났다. 일찍이 그가 그린 〈여인도(麗人圖)〉를 보니 실물과 조금도 어긋남이 없고, 〈청학동(靑鶴洞)〉ㆍ〈청천강(菁川江)〉의 두 족자와 〈경운도(耕雲圖)〉는 모두 기보(奇寶)였다. 배련(裵連)이란 사람이 있어 산수화와 인물화를 모두 잘 그렸는데, 평생토록 최경을 알아주지 아니하였다. 이 때문에 안견과도 서로 미워하였는데, 인재(仁齋)는 배련에게 더 아취(雅取)가 있다고 하였다. 이장손(李長孫)ㆍ오신손(吳信孫)ㆍ진사산(秦四山)ㆍ김효남(金孝男)ㆍ최숙창(崔叔昌)ㆍ석령(石齡)은 오늘날 이름은 있을지라도 아직은 모두 그림을 논할 만한 경지에 이르지 못하였다.

 

○ 음악은 여러 기술 가운데서도 가장 배우기 어려운 것이니, 타고난 자질이 있지 아니하면 그 진취(眞趣)를 얻을 수 없다. 삼국 시대(三國時代)에도 각기 음률과 악기가 있었으나 세대가 오래되어서 상고할 수 없다. 다만 지금의 현금(玄琴)은 신라에서 나왔고, 가야금은 금관(金官 가락국(駕洛國))에서 나왔다. 대금(大笒)은 당 나라의 피리를 모방하여 만들었는데, 그 소리가 가장 웅장해서 음악의 근본이 되었다. 향비파(鄕琵琶)도 역시 당 나라 비파를 모방한 것으로, 그 설괘(設掛)에 있어서 현금과 같은데 배우는 사람이 줄을 고르고 채를 퉁기는 것을 어렵게 여기니, 잘 타지 못하면 들을 수가 없다. 전악(典樂) 송태평(宋太平)이 잘 탔는데, 그 타는 법을 배운 아들 송전수(宋田守)는 더욱 절묘하였다. 내가 어렸을 때 백씨(伯氏) 댁에서 그 소리를 들었는데, 마고(麻姑)가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것 같아 연이어 듣고 싶고 싫증이 나지 않았으나, 도선길(都善吉)에 비하여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송전수 이후로는 오직 도선길이 송태평에 가까웠을 뿐 그 밖의 사람은 미치지 못하였고, 지금은 이것을 능히 하는 사람이 없다. 당 나라의 비파에는 역시 송전수가 제일수(第一手)인데, 도선길이 그와 더불어 이름을 나란히 하였다. 요즘은 능숙한 영인(伶人 악공)이 많이 있는데 사서인(士庶人)은 악(樂)을 배울 때에 반드시 비파를 먼저 한다. 그러나 아주 뛰어난 사람은 없고 다만 김신번(金臣番)이라는 사람이 도선길의 지법(指法)을 모두 배워 호방함에 있어서는 도선길보다 나으니, 역시 지금의 제1수라 할 것이다. 악에 있어서 현금은 가장 좋은 것이며 악을 배우는 문호(門戶)이다. 맹인인 악공 이반(李班)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세종(世宗)에게 알려져 궁중에 출입하였다. 김자려(金自麗)라는 사람도 또한 거문고를 잘 탔는데, 내가 어렸을 때 이것을 듣고 그 소리를 흠모하였으나 지법(指法)을 배우지 못하였다. 지금 영인들의 악을 비율(比律)한다면 고태(古態)를 면치 못하였다. 영인 김대정(金大丁)ㆍ이마지(李亇知)ㆍ권미(權美)ㆍ장춘(張春)은 모두 한시대의 사람인데, 당시에 논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김대정의 간엄(簡嚴)한 것과 이마지의 요묘(要妙)한 것은 각각 극에 이르렀다.” 하였는데, 김대정은 일찍 주살(誅殺)당하여 그 소리를 듣지 못하였다. 권미ㆍ장춘은 모두 범수였고, 다만 이마지만이 사림(士林)의 귀여움을 받고 임금의 사랑을 입어 두 번이나 전악(典樂)이 되었다. 내가 일찍이 희량(希亮)ㆍ백인(伯仁)ㆍ자안(子安)ㆍ침진(琛珍)ㆍ이의(而毅)ㆍ기채(耆蔡)ㆍ주지(籌之)와 함께 마지(亇知)에게 가서 배웠으므로 날마다 맞아오고 어떤 때는 같이 자기도 하여 듣기를 매우 익숙히 하였다. 그의 소리는 채를 퉁긴 자취가 없이 거문고 밑바닥에서 나온 것 같아서 심신(心神)이 경송(驚悚)하여지니 참으로 절예(絶藝)였다. 이마지가 죽은 뒤에도 그의 음악은 세상에 성행하여 지금은 사대부집 계집종이라도 이에 능한 사람이 있는데, 모두 이마지의 유법(遺法)을 배운 것이고 고몽(瞽矇)의 누습은 남아 있지 않았다. 전악 김복(金福)과 악공(樂工) 정옥경(鄭玉京)이 더욱 북[鼓]를 잘 쳐서 당시 제일수가 되었고, 기생 상림춘(上林春)이 또한 거의 이에 가까웠다. 가야금은 황귀존(黃貴存)이란 사람이 잘 탄다고는 하나 나는 아직 듣지 못했으며, 또 김복산(金卜山)이 타는 것을 듣고 그 당시 탄복하였는데, 이제 와서 보니 역시 매우 질박(質樸)하다. 요즘 노녀(老女)ㆍ조이[召史]가 공후(公侯)의 집에서 쫓겨나와 비로소 그 소리를 퍼뜨렸는데, 그 소리가 요묘(要妙)하여 사람들이 대적하지 못하였고, 이마지도 옷섶을 여미고 자기도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지금은 정범(鄭凡)이 장님 가운데서 가장 잘 탄다고 세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세종조(世宗朝)에 허오계(許吾繼)란 사람이 있었고, 이승련(李勝連)ㆍ서익성(徐益成)이 있었다. 이승련은 세조(世祖)에게 알려져 군직(軍職)을 배수하였고, 서익성은 일본에 가서 죽었다. 지금 김도치(金都致)란 사람이 있는데, 나이가 80을 넘었는데도 소리가 약하지 아니하여 거벽(巨擘) 아쟁(牙箏)으로 추대하였다. 옛날에 김소재(金小材)란 사람이 이것을 잘하였는데, 역시 일본에서 죽었다. 그 뒤로는 오랫동안 폐절(廢絶)되었었는데, 금상(今上)께서 풍류에 뜻을 두어 이를 가르치시므로 잘하는 사람들이 연달아 나오고 있다.

 

○ 대개 악(樂)을 하는 데는 세 가지가 있다. 5음 12율의 근본을 알아서 이것을 활용하는 경우가 있고, 절주(節奏)의 완급(緩急)을 알아서 악보를 만드는 경우가 있고, 타고난 자질이 요묘(要妙)하고 손끝이 정밀한 경우가 있다. 황효성(黃孝誠)은 근본을 깨닫고 잘 활용할 뿐만 아니라, 완급을 알고 악보를 많이 지어 세조(世祖)에게 알려져 관직이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이르렀다. 지금 박곤(朴)은 금천군(錦川君)의 서자인데, 어려서부터 악(樂)을 배워서 영인(伶人)은 아니라 하더라도 악사(樂事)의 일을 잘 맡아 했는데, 그 재주는 황효성보다 나아 한때 선사(善師)가 되었고, 배우는 사람이 그 문하에 모여들어 많은 선수(善手)들을 배출하였으니, 역시 지금의 제1품이다.

 

○ 우리나라는 도읍을 설치하였던 곳이 하나가 아니다. 김해(金海)는 금관국(金官國), 상주(尙州)는 사벌국(沙伐國), 남원(南原)은 대방국(帶方國), 강릉(江陵)은 임영국(臨瀛國), 춘천(春川)은 예맥국(穢貊國)의 도읍지이다. 모두 좁은 땅에 웅거하여 분계(分界)하였으니, 지금의 소읍(小邑)과 같은 것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경주(慶州)는 동경(東京)인데 신라의 천년 도읍지이다. 산천이 둘러 있고 땅은 기름지나, 교천(蛟川) 한 굽이가 놀 만하고 다른 빼어난 경관이 없다. 평양(平壤)은 기자(箕子)가 도읍한 곳으로 8조(條)로 다스린 정전(井田)의 제도가 지금도 역력히 남아 있는데, 오늘날의 외성(外城)이 그것이다. 그 후로 연인(燕人) 위만(衛滿)이 차지하였고, 또 고구려의 도읍지로 되었는데, 국경의 남쪽은 한강(漢江)에 이르고, 북쪽은 요하(遼河)에 이르러, 수십 만의 병력을 가진 가장 강성(强盛)한 나라였다. 고려는 이곳에 서경(西京)을 두고 춘추로 왕래하며 순유(巡遊)하는 곳으로 삼았다. 지금까지도 인물(人物)이 풍성한 것은 모두 그때의 유풍(遺風)이다. 영명사(永明寺)는 동명왕(東明王)의 구제궁(九梯宮)인데, 기린굴(麒麟窟)과 조천석(朝天石)이 있다. 영숭전(永崇殿)은 고려의 장락궁(長樂宮) 터이다. 평양의 진산(鎭山)은 금수산(錦繡山)이며, 가장 높은 봉우리는 모란봉(牧丹峯)인데, 모두 조그마한 산으로 송도(松都)ㆍ한도(漢都)의 주악(主嶽)처럼 장엄하지 않다. 북쪽에는 물이 없어 몽고병이 거침없이 달려왔고, 남쪽은 강을 띠고 있어 묘청(妙淸)이 성을 차지하여 반역을 하였으니 한스런 일이다. 성문은 크고 누각은 높으며 동쪽에는 대동문(大同門)ㆍ장경문(長慶門)의 두 문이 있고, 남쪽에는 함구문(含毬門)ㆍ정양문(正陽門)의 두 문이 있으며, 서쪽에는 보통문(普通門)이 있고, 북쪽에는 칠성문(七星門)이 있다. 8도(都) 중에서 오직 이곳만이 한양과 서로 갑을을 겨룰 만하다. 동으로 10리 떨어진 구룡산(九龍山) 밑에 안하궁(安下宮) 터가 있으나 어느 시대에 만들어진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데, 아마 이것은 별궁(別宮)인 것 같다. 성천(成川)은 송양국(松壤國)이라 하고, 옛 강동(江東)을 양국(壤國)이라고 한다. 지세(地勢)는 좁으나 볼 만한 산수(山水)가 있는데, 용강산성(龍岡山城)이 가장 장엄하여 지금도 높아서 무너지지 않고 있다. 모두들 이것을 용관국(龍官國)이라고 칭하는데, 무엇에 의거하여 그렇게 부르는지 알 수 없다. 부여(扶餘)는 백제가 도읍했던 곳이다. 탄현(炭峴) 안에 반월성(半月城)의 옛터가 지금도 완연하다. 백마강(白馬江)을 참(塹)으로 삼았으나 좁고 얕아서 왕자(王者)가 살 만한 곳이 못 되어 소정방(蘇定方)이 이것을 멸하게 되었던 것이다. 전주(全州)는 견훤(甄萱)이 차지하였던 곳이나 오래되지 않아 고려에 항복하였는데, 지금도 고도(古都)의 유풍(遺風)이 남아 있다. 철원(鐵原)은 궁예(弓裔)가 차지하여 태봉국(泰封國)을 세웠던 곳인데, 지금도 중성(重城)의 옛터와 궁궐의 층계가 남아 있어 봄이면 화초가 만발한다. 지세(地勢)가 막혀 강하(江河)는 조운(漕運)이 어렵다. 오직 송도(松都)만은 왕씨(王氏)가 왕업을 일으킨 땅으로 5백년 기업(基業)이 굳혀진 곳이다. 곡봉(鵠峯)이 주악(主嶽)이 되고 지맥(支脈)이 나누어져 뻗어 나간다. 산세(山勢)가 둘러 있어 조그마한 산이라도 모두 구역(區域)을 지었으며 수천(水泉)이 깨끗하여 방방곡곡에 놀 만한 곳이 있다. 고종(高宗) 이후에 강화(江華)로 옮겼는데, 이는 바다 가운데 있는 조그마한 섬이므로 도읍이라고 칭할 것이 못 된다. 우리 태조(太祖)께서 개국(開國)한 뒤에 도읍을 옮길 뜻이 있어, 먼저 계룡산(鷄龍山) 남쪽의 지세를 보고 이미 경읍(京邑)의 규모를 살폈으나 얼마 있지 않아 이를 중지하고 다시 한양에다 정도(定都)하였다. 술자(術者)가 말하기를, “예전부터 공암(孔岩)이 앞에 있단 말이 있는데, 삼각산(三角山) 서쪽 영서역(迎曙驛)들이 바로 좋은 곳이 될 것이다.” 하였으나 뒤에 다시 이를 살펴보니, “산이 모두 등지고 밖을 향해 달아나는 형세이므로, 백악산(白岳山)의 남쪽과 목멱산(木覓山)의 북쪽이 제왕 만승(萬乘)의 땅으로 하늘과 더불어 끝이 없을 것이다.” 하여 이곳으로 정하였다. 전하는 말에, “송경(松京)은 산과 골짜기가 둘러싸고 있는 형세이므로 권신(權臣)의 발호(跋扈)가 많았고, 한도(漢都)는 서북쪽이 높고 동남쪽이 얕으므로, 장자(長子)가 잘 되지 못하고 지자(支子)가 잘되어 오늘날까지 왕위의 상승(相承)과 명공(名公)ㆍ거경(鉅卿)은 지자 출신이 많았다.” 한다.
○ 한성 도중(都中)에 좋은 경치가 적기는 하나 그 중에서 놀 만한 곳은 삼청동(三淸洞)이 가장 좋고, 인왕동(仁王洞)이 다음이며, 쌍계동(雙溪洞)ㆍ백운동(白雲洞)ㆍ청학동(靑鶴洞)이 또 그 다음이다.

 

○ 삼청동은 소격서(昭格署) 동쪽에 있다. 계림제(鷄林第) 북쪽의 어지러이 서 있는 소나무 사이에서 맑은 샘물이 쏟아져 나온다. 물줄기를 따라 올라가면 산은 높고 나무들은 조밀한데, 깊숙한 바위 골짜기를 몇 리를 못 가서 바위가 끊어지고 낭떠러지가 된다. 물이 벼랑 사이로 쏟아져 흰 무지개를 드리운 듯한데, 흩어지는 물방울은 구슬과 같다. 그 밑은 물이 괴어 깊은 웅덩이를 이루고, 그 언저리는 평평하고 넓어서 수십 명이 앉을 만한데, 장송(長松)이 엉기어 그늘을 이룬다. 그 위쪽의 바위를 에워싸고 있는 것은 모두 두견(杜鵑)과 단풍잎이니 봄과 가을에는 붉은 그림자가 비쳐 진신(縉紳)들이 많이 와서 논다. 그 위로 몇 걸음을 옮기면 넓은 굴이 있다.

 

○ 인왕동은 인왕산 밑에 있는데, 굽이쳐 도는 깊은 골짜기가 있다. 복세암(福世庵)은 골짜기 물이 합쳐서 시내를 이루는 곳이며, 서울 사람들이 다투어 와서 활쏘기를 한다.

 

○ 쌍계동은 반궁(泮宮 성균관)의 위쪽 골짜기에 있는데, 두 개의 샘이 시내를 이루며, 김자고(金子固)가 시내를 끼고 집을 지어 복숭아나무를 심고 무릉(武陵)을 모방하니 강진산(姜晉山)이 부(賦)를 지었다. 김자고가 문아(文雅)로 당시에 이름을 떨쳤으므로 호준(豪俊)한 사람들이 많이 따르며 놀았다.

 

○ 백운동은 장의문(藏義門) 안에 있는데, 중추(中樞) 이염의(李念義)가 여기서 살았다. 시인들이 제영(題咏)한 것이 있으나 이염의는 글을 볼 줄 몰랐으므로 명류가 아니었다.

 

○ 청학동은 남학(南學 사학(四學)의 하나)의 남쪽 골에 있는데, 골이 깊고 푸른 내가 있어 놀 만한 곳이기는 하나 산에 나무가 없으니 이것이 한스러운 일이다.
○ 성 밖의 놀 만한 곳으로는 장의사(藏義寺) 앞 시내가 가장 아름답다. 시내물이 삼각산(三角山) 여러 골짜기에서 흘러 나오고 골짜기 속에 여제단(厲祭壇)이 있으며, 그 남쪽에 무이정사(武夷精舍)의 옛터가 있다. 절 앞에 돌을 쌓은 것이 수십 길이나 되어 수각(水閣)을 이루고 절 앞 수십 보 떨어진 곳에 차일암(遮日岩)이 있는데, 바위가 절벽을 이루어 시내를 베고 있는 것 같으며, 바위 위에 장막을 둘렀던 우묵한 곳이 있다. 바위가 층층으로 포개져 계단과 같으며, 흐르는 물이 어지러이 쏟아지는데, 맑은 날의 우레처럼 귀를 시끄럽게 한다. 물은 맑고 돌은 희어 선경(仙境)이 완연(宛然)하니, 와서 노는 사대부들이 그치지 않는다. 물줄기를 따라 몇 리를 내려가면 불암(佛岩)이 있는데, 바위에 불상을 새겼고, 시냇물이 꺾여 돌아 북쪽으로 가다가 또 곧장 서쪽으로 흐른다. 그 사이에다 옛날에는 물방아를 놓았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거기서 얼마를 더 내려가면 홍제원(洪濟院)이다. 홍제원 남쪽에는 조그만 언덕이 있어 큰 소나무가 가득하다. 옛적에는 이곳에 정자가 있어 중국 사신이 옷을 갈아 입던 곳이었는데, 정자가 없어진 지 이미 오래다. 사현(沙峴) 남쪽 모화관(慕華館) 사이에는 좌우에 큰 소나무와 밤나무 숲이 서로 짙은 그늘을 이루었으므로 사회(射會)하러 오는 도인(都人)이 여기에 많이 모여들었으나 흐르는 시내가 맑지 못하다. 목멱산(木覓山) 남쪽 이태원(李泰院)의 들에는 높은 산에서 샘물이 솟아나고 절 동쪽에는 큰 소나무가 골에 가득 차 빨래하는 성중(城中) 부녀자들은 많이 이곳으로 간다. 우리 백씨 집 뒤뜰 높은 언덕은 종약산(種藥山)이라고 하는데, 북쪽으로는 도성 안의 많은 부락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강을 바라다볼 수 있어 안계(眼界)가 넓으나 물과 골짜기가 없는 것일 한이다. 서쪽의 진관(津寬)ㆍ중흥(中興)ㆍ서산(西山) 등의 골짜기와 북쪽의 청량(淸凉)ㆍ속개(俗開) 등의 골짜기와, 동쪽 풍양(豐壤)과 남쪽의 안양사(安養寺)와 같은 곳은 모두 높은 산과 큰 시내이므로 놀 만한 곳이 한두 곳이 아니나, 서울에서 거리가 가깝지 않아 놀러가는 사람이 드물다.

 

○ 풍속이 옛날과 같지 않은 것이 많다. 옛적에는 잔치를 베푼 뒤에 악(樂)을 하였으며, 먼저 전두(纏頭 수고비조로 주는 금품)를 갖춘 뒤에 기생을 청하였다. 음식에도 규제가 있으며, 음악은 진작(眞勺)ㆍ만기(慢機)ㆍ자하동(紫霞洞)ㆍ횡살문(橫殺門) 등의 곡을 연주하게 하고, 조그마한 잔을 돌려 수작(酬酢)을 하나 술은 조금씩 따르고, 낮은 소리로 노래를 불렀으되 떠들고 주정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근래에는 잔치가 모두 사치스럽다. 밀과(密果)는 모두 짐승의 모양으로 만들어 사용하고, 이미 찬상을 마련하고도 또 찬반(饌盤)을 마련하니 좋은 안주와 맛있는 음식이 없는 것이 없고, 탕이나 구운 고기는 모두 쌓여서 한 가지가 아니다. 술이 끝나기도 전에 번거롭고 조급한 관현(管絃)을 뒤섞어 날랜 장고와 빠른 춤을 추되 쉴 줄 모른다. 더러는 사회(射會)를 빙자하고, 더러는 영송(迎送)을 빙자하는데, 장막(帳幕)이 성문 밖에까지 이어지기도 하며 종일토록 직사(職事)를 안 보고, 또 저택에 세 사람만 모여도 반드시 기악(妓樂)을 쓴다. 여러 관청의 동복(僮僕)을 남에게서 빌려와 음식을 장만하게 하는데, 조금이라도 맞지 않으면 반드시 매질을 하니 동복이 날로 빈곤해진다. 창기(娼妓)에게도 연폐(宴幣)를 주지 아니하고 아침저녁으로 뛰어 다니게 하여 의복이 해지며, 글을 갖고 청하는 자들이 많이 모여들어 영관(伶官)이 음악을 제대로 연주할 수 없게까지 되었다.

 

○ 옛날에 신입자(新入者 새로 문과에 등과한 사람)를 제재한 것은 호사(豪士)의 기를 꺾고 상하의 구별을 엄격히 하여 규칙에 따르게 하는 것이었다. 바치는 물품이 물고기면 용(龍)이라 하고, 닭이면 봉(鳳)이라 하였으며, 술은 청주이면 성(聖)이라 하며, 탁주이면 현(賢)이라 하여 그 수량도 한이 있었다. 처음으로 관직에 나가는 것을 허참(許參)이라 하고 10여 일을 지나 구관(舊官)과 자리를 같이하는 것을 면신(免新)이라 하여 그 정도가 매우 분명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사관(四館 성균관ㆍ예문관ㆍ승문관ㆍ교서관)뿐만 아니라, 충의위(忠義衛)ㆍ내금위(內禁衛) 등 여러 위(衛)의 군사와 이전(吏典)의 복예(僕隸)들까지도 새로 배속된 사람을 괴롭혀서 여러 가지 귀하고 맛있는 음식을 졸라서 바치게 하는데 한이 없어 조금이라도 마음에 흡족하지 않으면 한 달이 지나도 동좌(同坐)를 불허하고, 사람마다 연회를 베풀게 하되 만약 기악(妓樂)이 없으면 간접으로 관계되는 사람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것이 끝이 없다.
○ 옛날에는 혼가의 납채(納采)에는 옷 몇 가지만을 썼고, 혼례식날 저녁에는 찾아온 종친들이 모여서 한 상의 음식과 술 두세 잔을 대접하는 것으로 그쳤는데, 요즈음은 납채에 모두 채단(采緞)을 사용하는데 많은 것은 수십 필, 적어도 수필에 이르며 납채를 싸는 보도 명주나 비단을 쓴다. 혼례식날 저녁에도 연회를 크게 베풀어 손님들을 위안하며, 신랑이 타는 말 안장도 극히 사치스럽게 꾸미려고 힘쓴다. 또 재물이 든 함을 지고 앞서 가는 자도 있었는데, 나라에서 법을 만들어 이를 금하자 미리 이것을 보내기도 한다.

 

○ 옛날에는 매매(賣買)에 부정이 없어서 값이 오르지 않았는데, 오늘날에는 간교가 날로 심하여 물건에 반은 잡것이 섞여 있고, 한 자[尺] 되는 생선을 겉곡식 한 말과 서로 바꾼다. 한 수레의 값도 여러 가지가 있어 한 바리의 베[輸布]와 바꾸는 데까지 이르렀는데, 염가(染家 염색하는 자)에서 가장 심하여 값이 비싸서 견디기 어려우나 호인(豪人)들은 오히려 사치를 일삼아 값을 다투지 않아서 값만 더할 뿐이다. 성 안에 사는 사람이 점점 많아져 옛날에 비하여 10배나 되니 성 밖에 이르기까지 주택이 즐비하다. 공사의 집을 모두 높고 크게만 지으니 재목이 몹시 귀해져서 깊은 산속이나 후미진 골짜기의 것도 모두 베어내니 강을 따라 뗏목을 띄우는 사람들이 모두 괴로워하고 있다. 비록 세도(世道)가 날로 변했다고는 하나, 태평스러운 세상에 예문(禮文)을 번거롭게 하는 데만 힘쓴 소치이다.
○ 처용놀이[處容戱]는 신라의 헌강왕(憲康王) 때부터 시작되었다. 신인(神人)이 바다에서 나와 처음에는 개운포(開雲浦 경남 울산)에 나타났다가 왕도(王都 경주)로 들어왔는데, 그 사람됨이 기위(奇偉)하고 독특하여 노래와 춤추기를 좋아하였다.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시에,
조개같은 이와 붉은 얼굴이 달밤에 노래하는데 / 具齒頳顔歌夜月
솔개인양 으쓱한 어깨에 붉은 소매가 봄바람에 춤춘다 / 鳶肩紫袖舞春風
한 것이 이것이다.
○ 처음에는 한 사람으로 하여금 검은 베옷에 사모(紗帽)를 쓰고 춤추게 하였는데, 그 뒤에 오방처용(五方處容)이 있게 되었다. 세종(世宗)이 그 곡절을 참작하여 가사(歌辭)를 개찬(改撰)하여 봉황음(鳳凰吟)이라 이름하고, 마침내 묘정(廟廷)의 정악(正樂)으로 삼았으며, 세조(世祖)가 이를 확대하여 크게 악(樂)을 합주(合奏)하게 하였다.
○ 처음에 승도(僧徒)가 불공하는 것을 모방하여 기생들이 일제히 영산회상불보살(靈山會相佛菩薩)을 창(唱)하면서 외정(外廷)에서 돌아 들어오면 영인(伶人)들이 각각 악기를 잡는데, 쌍학인(雙鶴人)ㆍ오처용(五處容)의 가면 10명이 모두 따라가면서 느리게 세 번 노래하고, 자리에 들어가 소리를 점점 돋우다가 큰 북을 두드리고 영인과 기생이 한참 동안 몸을 흔들며 발을 움직이다가 멈추면 이때에 연화대놀이[蓮花臺戱]를 한다.
○ 먼저 향산(香山)과 지당(池塘)을 마련하고 주위에 한 길이 넘는 높이의 채화(彩花)를 꽂는다. 또 좌우에 그림을 그린 등롱(燈籠)이 있는데, 그 사이에서 유소(流蘇 깃털이나 실을 이용해 만든 벼이삭 모양의 꾸미개)가 어른거리며, 연못 앞 동쪽과 서쪽에 큰 연꽃 받침을 놓는데 작은 기생이 그 속에 들어 있다. 보허자(步虛子)를 주악(奏樂)하면 쌍학(雙鶴)이 곡조에 따라 너울너울 춤추면서 연꽃 받침을 쪼면 두 명의 기생이 그 꽃받침을 헤치고 나와 서로 마주 보기도 하고 서로 등지기도 하며 뛰면서 춤을 추는데, 이를 동동(動動)이라고 한다. 이리하여 쌍학은 물러가고 처용이 들어온다. 처음에 만기(縵機)를 연주하면 처용이 열을 지어 서서 때때로 소매를 당겨 춤을 추고, 다음에 중기(中機)를 연주하면 처용 다섯 사람이 각각 오방(五方)으로 나누어 서서 소매를 떨치고 춤을 춘다. 그 다음에 촉기(促機)를 연주하는데, 신방곡(神房曲)에 따라 너울너울 어지러이 춤을 추고, 끝으로 북전(北殿)을 연주하면, 처용이 물러가 자리에 열지어 선다. 이때에 기생 한 사람이 ‘나무아미타불’을 창(唱)하면, 여러 사람이 따라서 화창(和唱)하고, 또 관음찬(觀音贊)을 세 번 창하면서 빙돌아 나간다. 매번 섣달 그믐날 밤이면 창경궁(昌慶宮)과 창덕궁(昌德宮)의 전정(殿庭)으로 나누어 들어가는데, 창경궁에서는 기악(妓樂)을 쓰고, 창덕궁에서는 가동(歌童)을 쓴다. 새벽에 이르도록 주악하고 영인과 기녀에게 각각 포물(布物)을 하사하여 사귀(邪鬼)를 물러가게 한다.
○ 관화(觀火)의 예는 군기시(軍器寺)에서 주관한다. 미리 기구를 뒤뜰에 설치하는데, 대ㆍ중ㆍ소의 예가 있고, 비용이 많이 든다. 그 방법은 두꺼운 종이로 포통(砲筒)을 겹으로 싸고, 그 속에 석류황(石硫黃)ㆍ반묘(班猫)ㆍ유회(柳灰) 등을 넣어 단단히 막고 이를 다진다. 그 끝에 불을 붙이면 조금 있다가 연기가 나고 불이 번쩍하면서 통과하면 종이가 모두 터지는데, 소리가 천지를 흔든다. 시작할 때에 수많은 불화살을 동원산(東遠山)에 묻어놓아 불을 붙이면 수많은 화살이 하늘로 튀어 오른다. 터질 때마다 소리가 나고 그 모양은 마치 유성(流星)과 같아서 온 하늘이 환하다. 또 긴 장대 수십 개를 원중(苑中)에 세우고, 그 장대 끝에 조그만 주머니를 단다. 임금님 앞에는 채색한 채롱[燈籠]을 달아 놓는데, 채롱 밑으로부터 긴 끈으로 여러 장대를 얽어 종횡으로 서로 연결하게 하고, 끈 꼭지마다 화살을 꽂는다. 군기시 정(軍器寺正)이 불을 받들어 채롱 속에 넣으면 잠깐 사이에 불이 일어나고 화염이 끈에 떨어지면 화살이 끈을 따라 달려 장대에 닿는다. 장대에 조그만 주머니가 달려 있는데, 끊어지며 불빛이 빙빙 돌고, 마치 돌아가는 수레바퀴의 모양과 같다. 화살은 또 끈을 따라 달려 다른 장대에 닿는다. 이와 같이 달려 닿기를 서로 계속하여 그치지 않는다. 또 엎드린 거북 모양을 만들어 불이 거북의 입으로부터 나오는데, 연기와 불꽃이 흐르는 불처럼 어지럽게 쏟아져 나온다. 거북 위에다 만수비(萬壽碑)를 세우고 불을 비(碑) 속에 밝혀 비면의 글자를 똑똑히 비치게 한다. 또 장대 위에는 그림 족자(簇子)를 말아서 끈으로 매어 놓으면 불이 끈을 타고 올라가 불이 활활 타 끈이 끊어지고 그림 족자가 떨어지면서 펼쳐져 족자 속의 글자를 똑똑히 분별할 수 있다.
○ 또 긴 수풀을 만들고, 꽃잎과 포도의 모양을 새겨 놓는다. 불이 한구석에서 일어나면 잠깐 사이에 수풀을 불태우고, 불이 다 타고 연기가 없어지면 붉은 꽃봉우리와 푸른 나뭇잎의 모양이 아래로 늘어진 쥐방울 열매[馬乳]처럼 되는데, 진짜인지 가짜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 또 가면을 쓴 광대가 등 위에 목판을 지는데 목판 위에 주머니를 단다. 불이 댕기어 주머니가 터지고 불이 다 타도록 소리치며 춤추되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 이런 것이 그 대략인데, 임금님은 후원의 소나무 언덕에 납시어 문ㆍ무 2품 이상의 재상들을 불러 입시하게 하고, 밤이 깊어서야 파한다.
○ 구나(驅儺)의 일은 관상감(觀象監)이 주관하는 것인데, 섣달 그믐 전날 밤에 창덕궁과 창경궁의 뜰에서 한다. 그 규제(規制)는 붉은 옷에 가면을 쓴 악공(樂工) 한 사람은 창사(唱師)가 되고, 황금빛 네 눈의 곰껍질을 쓴 방상인(方相人) 네 사람은 창을 잡고 서로 친다. 지군(指軍) 5명은 붉은 옷과 가면에 화립(畫笠)을 쓰며 판관(判官) 5명은 푸른 옷과 가면에 화립을 쓴다. 조왕신(竈王神) 4명은 푸른 도포ㆍ박두(幞頭)ㆍ목홀(木笏)에 가면을 쓰고, 소매(小梅) 몇 사람은 여삼(女衫)을 입고 가면을 쓰고 저고리 치마를 모두 홍록(紅綠)으로 하고, 손에 긴 장대[竿幢]를 잡는다. 12신(神)은 모두 귀신의 가면을 쓰는데, 예를 들면 자신(子神)은 쥐 모양의 가면을 쓰고, 축신(丑神)은 소 모양의 가면을 쓴다. 또 악공 10여 명은 복숭아나무 가지를 들고 이를 따른다. 아이들 수십 명을 뽑아서 붉은 옷과 붉은 두건(頭巾)으로 가면을 씌워 진자(侲子)로 삼는다. 창사가 큰 소리로, “갑작(甲作)은 흉()먹고, 불주(佛冑)는 범을 먹으며, 웅백(雄伯)은 매(魅)를 먹고, 등간(騰簡)은 불상(不祥)을 먹고, 남제(攬諸)는 고백(姑伯)을 먹고, 기(奇)는 몽강양조(夢强梁祖)을 먹으며, 명공(明公)은 폐사기생(㱷死寄生)을 먹고, 위함(委陷)은 츤(櫬)을 먹고, 착단(錯斷)은 거궁기등(拒窮奇騰)을 먹으며, 근공(根共)은 충(蠱)을 먹을지니, 오직 너희들 12신은 급히 가되 머무르지 말라. 만약 더 머무르면 네 몸을 으르대고 너의 간절(幹節)을 부글부글 끓여 너의 고기를 헤쳐서 너의 간장을 뽑아 내리니 그때 후회함이 없도록 하라.” 하면 진자(侲子)가, “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복죄(服罪)하는데 여러 사람이, “북과 징을 쳐라.” 하면서 이들을 쫓아낸다.
○ 신라ㆍ고려는 불교를 숭상하여 장례는 오로지 부처를 공양하고 중에게 밥먹이는 것[飯僧]을 상례(常禮)로 하였다. 본조(本朝)에 이르러 태종(太宗)께서 사사(寺社)의 노비까지 개혁했으나, 그 풍습이 아직도 남아 있어 공경(公卿)ㆍ유사(儒士)의 집에서도 빈당(殯堂)에 중을 불러 설경(說經)하는 것을 예사로 하고 이름을 법석(法席)이라 한다. 또 산사(山寺)에서 칠일재(七日齋)를 베푸는데, 부자는 서로 사치스럽게 꾸미는 데에 힘쓰고 가난한 자 역시 예에 따르려고 구차히 마련하니, 그 소모되는 비용과 재곡(財穀)이 대단하고 친척과 붕료(朋僚)들은 모두 포물(布物)을 가져다 시주하는데, 이를 식재(食齋)라 한다. 또 기일(忌日)에는 중을 맞아 먼저 먹인 뒤에 혼을 부르고 제사를 베푸는데 이를 승재(僧齋)라 한다. 성종(成宗)께서 정학(正學)을 숭상하여 이단을 배척하였고, 불사(佛事)에 관해서는 대간(臺諫)이 그 폐단을 극언하니 사대부 집안은 헌장(憲章)과 물의를 두려워하여 상기(喪忌)를 만나더라도 모두 법에 의하여 제사를 행하고 승불(僧佛)을 공양하지 아니하는데, 아직도 그것을 폐지하지 않은 자는 다만 무뢰한 하민(下民)들뿐이며, 이들도 또한 마음대로 하지는 못한다. 또 중의 도첩(度牒)법을 엄하게 하여 주(州)ㆍ군(郡)에서 도첩 없는 자를 찾아 머리를 길러 환속하게 하니 중외에 있는 사찰이 모두 텅 비게 되었다. 사물이 성하면 반드시 쇠한다는 이치는 그런 것이다.
○ 대관(臺官)과 간관(諫官)이 같다고는 하나 실은 같지 않으니 대관은 풍교(風敎)를 규찰(糾察)하고, 간관은 임금의 과실을 바로잡는다. 대관은 각 지위마다 예의가 엄중하여 지평(持平)이 섬돌 밑에서 장령(掌令)을 맞아들이고, 장령은 집의(執義)를 맞으며, 집의 이하는 대사헌(大司憲)을 맞는 것이 상례이다. 평상시에는 다시청(茶時廳)에 앉고 제좌(齊坐) 날에는 제좌청(齊坐廳)에 앉는다. 그날은 새벽에 사대장(四臺長)이 먼저 청에 들어가고 집의는 따로 청에 들어가는데, 만약 하관(下官)이 아직 이르지 않았으면 상관이 먼저 왔더라도 의막(依幕)에서 하관을 기다린 연후에야 들어간다. 대헌(大憲)이 문에 들어서면 사대장은 중문(中門) 밖에서 공손히 맞아들이고, 집의는 중문 안에서 맞아들이며, 다시 청으로 들어간다. 대헌이 대청에 앉으면 도리(都吏)는 대장청(臺長廳)에 나아가, “제좌(齊坐)”라고 네 번 외치고, 집의청(執義廳)에 나아가서 “제좌”라고 한 번 외치며, 또 대헌 앞에 나아가 “제좌”라고 한 번 외친 뒤에 물러난다. 집의가 대청 북쪽 바라지문의 발[簾]을 걷고 들어와서 재배례(再拜禮)를 마치고 사대장이 뜰 아래 있는 북문으로 들어와 섬돌 위에 열을 지어 선 뒤에 청 위로 올라가서 재배례를 끝낸다. 이 예가 끝나면 모든 감찰(監察)이 뜰에 들어와 뵈옵기를 청하는데, 분대(分臺)의 서리(書吏)가 달려와서 고하면 감찰이 차례대로 청 위로 올라가서 절을 하고 물러난다. 그 다음에 서리와 나장(羅將)이 차례대로 들어와 재배한다. 이윽고 각자가 자리에 나아가는데, 대사헌은 의자에 앉고 나머지는 모두 승상(繩床)에 앉는다. 아전 여섯 사람이 각각 탕약(湯藥) 그릇을 들고 여러 사람 앞에 무릎을 꿇으면 한 아전이 “봉약집종(奉藥執鍾 약을 받들고 잔을 잡으라)”이라고 외치고, 또 “정음(正飮)”이라고 외치면 이를 마시고 “방약(放藥 약을 놓으라)”이라고 외치면 그릇을 물리친다. 또 한 명의 아전이 “정좌 정공사(正坐正公事 바르게 앉아 공사를 바르게 행하라)” 하면 여러 사람이 일어나 읍(揖)하고 다시 자리에 돌아가, 이윽고 둥근 의석(議席)을 당 위에 깔고 모두 자리에 앉는다. 배직(拜職)한 사람이 있으면 서경(署經)하고 탄핵할 일이 있으면 이를 논박한다. 이날의 청사(廳事)가 끝나면 집의 이하는 청으로 다시 나아가는데, 한 하인이 중문 안에서 “신시(申時)”라고 세 번 외치고, 또 한 사람의 아전이 문 안에서 “공청봉궤(公廳封匱 공청의 궤를 봉하라)”라 외치면 대장(臺長)이 나온다. 이리하여 차례로 공손히 전송하며 길을 갈 때에도 역시 각각 차례대로 가는데 이것이 그 대례(臺例)이다.
○ 간관은 그렇지 않으므로 존비의 예가 없다. 상ㆍ하가 기다리지 않고 들어가는데, 만약 상관이 먼저 들어오고 하관이 나중에 들어오면 상관이라 할지라도 북면(北面)하고 서서 하관을 기다려 서로 읍하고 자리에 앉는다. 제좌하는 날에 약을 마시는 것과 공사(公事)를 행하는 것은 한결같이 대부(臺府)와 같이하며, 완의석(完議席)을 베풀고 술상을 차려 아란배(鵞卵杯)로 서로 주작하여 술이 취해야 술자리를 거둔다. 또 뒤뜰의 모정(茅亭)에 나아가 옷도 벗고 누워서 쉬며, 원(院)의 안이 추우나 물건이 없으면 선생의 책상을 가져다 앉기도 하고, 표범과 사슴의 껍질을 깔기도 한다. 혹 정원의 배나 대추를 따서 각 사(司)로 돌려 팔기도 하는데, 포물(布物)을 얻으면 반드시 주식(酒食)의 비용에 충당한다. 평상시에 소요되는 경비는 오로지 헌부(憲府)에 의지한다. 간직(諫職)을 배수한 사람은 술자리를 차려 동료를 청하여 함께 마시고 여러 곳에서 모여 마실 때에도 역시 참석한다.
○ 감찰이라는 것은 옛날의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의 직책인데, 그 중에서 직급이 높은 자가 방주(房主)가 된다. 상ㆍ하의 관원이 함께 내방(內房)에 들어가 정좌하며 그 외방(外房)은 배직한 순위에 따라 좌차(坐次)를 삼는데, 그 중에서 수석에 있는 사람을 비방주(枇房主)라 하고, 새로 들어온 사람을 신귀(新鬼)라 하여, 여러 가지로 욕보인다. 방 가운데서 서까래만한 긴 나무를 귀(鬼)로 하여금 들게 하는데, 이것을 경홀(擎笏)이라 하며 들지 못하면 귀는 선생 앞에 무릎을 내놓으며 선생이 주먹으로 이를 때리고, 윗사람으로부터 아랫사람으로 내려간다. 또 귀로 하여금 물고기 잡는 놀이를 하게 하는데, 귀가 연못에 들어가 사모(紗帽)로 물을 퍼내서 의복이 모두 더러워진다. 또 거미 잡는 놀이를 하게 하는데, 귀로 하여금 손으로 부엌 벽을 문지르게 하여 두 손이 옻칠을 하듯 검어지면 또 손을 씻게 하는데, 그 물이 아주 더러워져도 귀로 하여금 마시게 하니 토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또 귀로 하여금 두꺼운 백지로 자서함(刺書緘)을 만들어 날마다 선생 집에 던져넣게 하고, 또 선생이 수시로 귀의 집에 몰려가면 귀는 사모를 거꾸로 쓰고 나와 맞이하는데, 당중(堂中)에 술자리를 마련하고 선생에게 모두 여자 한 사람씩을 안겨주는데, 이를 안침(安枕)이라 하며, 술이 거나하면 〈상대별곡(霜臺別曲)〉을 노래한다. 대관(臺官)이 제좌(齊坐)하는 날에 이르러서 비로소 자리에 앉는 것을 허용한다. 이튿날 아침 일찍 청에 나아가면 상관인 대리(臺吏)가 함께 뜰 안으로 걸어 들어가 뵙는데, 예가 끝나기도 전에 밤에 숙직한 선생들이 방안에서 목침을 가지고 큰 소리를 지르며 치는 짓이 있으므로, 신귀(新鬼)가 달아나다가 지체하면 그 몽둥이에 얻어맞기도 한다. 이런 풍습의 유래는 이미 오래되었는데, 성종(成宗)이 이를 싫어하여 신래(新來)를 괴롭히는 모든 일을 엄하게 금하니, 그 풍습이 조금 숙어졌으나 아직도 구습 그대로 폐하지 않은 것이 많다.
○ 승정원은 후설(喉舌)에 해당하는 부서로서, 왕명을 출납하니 그 책임이 가장 막중하다. 승지에 임명된 자를 사람들이 모두 신선처럼 우러러보고 흔히 은대학사(銀臺學士)라고도 부른다. 예전에는 성문과 궁문을 모두 파루(罷漏)를 치면 열고, 인정(人定)을 친 뒤에 닫았으므로, 승지들은 4경(更)에 궁궐에 나아가 문 열기를 기다려, 들어갔다가 밤이 깊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그런데 남이(南怡)의 난(亂) 이후로 예종(睿宗)이 궁문은 해뜰 무렵에 열고, 어두어지면 닫도록 명하였으므로, 사람들이 편하게 여겼고, 또 폐단도 없어 지금까지 이를 지킨다. 전에는 승지 한 사람만이 입직하였는데, 세조(世祖) 때에 승지 이호연(李浩然)이 입직하다가 술을 마시고 취하여 누웠는데, 세조가 공사(公事)를 하문해도 이호연이 일어나지 못하였으므로 이로부터 매양 두 사람씩 입직하게 하였다. 이전에는 승정원의 하인들도 모두 은패(銀牌)를 띠고 자의(紫衣)를 입고 별초(別抄)가 이를 따르더니, 세조가 별초를 없애고 다만 몇 사람을 남겨두어 사옹원(司饔院)에 속하게 하고 여러 곳에 술을 하사할 때만 자의를 입고 가게 할 뿐이다.
○ 우리나라에 온 중국 사신들은 모두 중국의 명사들이다. 내가 들은 바에는 주탁(周倬)이 글을 잘하여 《도은집(陶隱集)》의 서문을 지었고, 축맹헌(祝孟獻)은 시와 그림을 잘하였는데, 새나 짐승의 그림을 잘 그려 사람들에게 그려준 것이 많아 지금도 민간에 그의 수적(手跡)이 많다. 경태(景泰) 초년에 시강(侍講) 예겸(倪謙)과 급사중(給事中) 사마순(司馬詢)이 우리나라에 왔다. 사마순은 시 짓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예겸은 비록 시에 능하였지만 처음에는 여행 도중에 시를 읊는 데에 마음을 두지 않다가 알성(謁聖)하는 날에 시를 짓기를,
많은 선비들은 좌우로 갈라섰고 / 濟濟靑襟分左右
울창한 푸른 잣나무는 열을 지어 뻗어 있다 / 森森翠栢列成行
하니 당시 집현전(集賢殿) 유사(儒士) 전성(全盛)이 이 시를 보고, “참으로 어둡고 썩은 교관(敎官)이 지은 것이다. 한쪽 어깨를 걷어 올리고도 이를 누를 수 있다.”고 비웃었다. 예겸이 한강에서 놀 적에 시를 짓기를,
웅걸한 누각에 겨우 올라 기관을 보며 / 纔登傑構縱奇觀,
누선을 노저어 푸른 물에 띄웠다 / 又棹樓船泛碧湍
비단 닷줄을 서서히 당겨 푸른 암벽을 돌며 / 錦纜徐牽緣翠壁,
옥호의 술을 자주 권하니 아롱진 난간이 막히는구나 / 玉壺頻送隔雕欄
강산은 천고에 그 빛을 잃지 않건만 / 江山千古不改色
주객은 일시에 즐거움을 다하네 / 賓主一時能盡歡
먼 훗날을 생각하니, 달은 밝고 사람은 떠난 뒤 / 遙想月明人去後
거울 같은 강물에 날아든 백구(白鷗)만이 차지하겠네 / 白鷗飛占鏡光寒
라고 하였다. 또 〈설제등루부(雪霽登樓賦)〉를 지었는데, 붓을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더욱 좋은 글이 나오니 유사(儒士)들이 이것을 보고 부지중에 무릎을 꿇었으며, 관반사(館伴使)문성공(文成公) 정인지(鄭麟趾)도 대적하지 못했다. 세종께서 범옹(泛翁) 신숙주(申叔舟), 근보(謹甫) 성삼문(成三問)에게 가서 함께 놀면서 한운(漢韻)을 질문하라고 명하였는데, 시강(侍講)이 두 선비를 사랑하여 형제의 의를 맺고 서로 시를 주고받음이 그치지 않고, 일을 마치고 돌아가면서는 눈물을 닦으며 이별하였다. 임신(壬申 1452)년간에 급사중 진둔(陳鈍)이 왔는데, 이때는 문종(文宗)이 승하한 직후여서 진둔이 〈조조선국왕부(弔朝鮮國王賦)〉를 지었다. 세조(世祖) 때에 한림(翰林) 진감(陳鑑)과 태상(太常) 고윤(高閏)이 우리나라에 왔는데, 한림 진감이 연꽃 그림을 보고 시를 짓기를,
쌍쌍의 백로는 서로 친한 것 같고 / 雙雙屬玉似相親
물 위로 나온 연꽃은 더욱 핍진하다 / 出水紅蓮更逼眞
객이 있어 이름이 송성하는 글에까지 퍼지고 / 名播頌聲緣有客
연꽃을 사랑하는 사람이 주염계 뒤엔들 어찌 없겠는가 / 愛從周後豈無人
멀리서 바라봐도 절로 더위를 물리치겠고 / 遠觀自可袪煩暑
나란히 선들 어찌 속진(俗塵)에 물들으리요 / 幷立何曾染俗塵
그림으로도 이런 뜻을 알겠으니 / 料得丹靑知此意
거위와 오리가 이웃을 괴롭히는 것보다 낫구나 / 絶勝鵝鴨惱比隣
하였다. 박연성(朴延城)이 관반사가 되어 차운(次韻)하기를,
수향의 화조는 멀리서 친하기 어려운데 / 水鄕花鳥邈難親
붓으로 옮겨옴이 교묘하게 참[眞]을 빼앗아 왔구나 / 筆下移來巧奪眞
갓 피어 오른 연꽃 봉오리가 말하고자 하고 / 菡蓞初開如欲語
한가롭게 서 있는 백로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네 / 鷺絲閑立不驚人
진흙 속에서 났으나 오히려 깨끗하여 물들지 않았으며 / 淤泥淨色還無染
빙설 같은 고상한 자태 멀리 속진을 벗어났구나 / 氷雪高標逈脫塵
옥서(玉署 홍문관(弘文館))에 노는 신선이 보기를 싫어하지 아니함은 / 玉署遊仙看不厭
맑은 몸매와 향기로운 덕이 닮았기 때문인가 / 淸儀馨德與相隣
하였는데, 그 그림은 종사(從事) 이윤보(李胤保)가 그린 것이다. 또 〈희청부(喜晴賦)〉를 지었는데, 김문량(金文良)이 곧 차운하여 시를 지으니 한림이 크게 칭찬하면서, “동방의 문사(文士)는 중국과 다름이 없다.” 하였다. 태상(太常)은 사람됨이 교만하여 알성하는 날에 고풍(古風 한시의 한 체)을 짓고서 유사(儒士)들로 하여금 차운하게 하였다. 짓지 못하여 붓을 놓은 사람이 있으면, “시를 짓지 못한 자가 5명이다. 뒷날 차운하여 짓고자 하는 자는 천백 편을 지어도 좋다.”고 크게 썼는데, 그의 거만함이 이와 같았다. 그 뒤에 급사중 진가유(陳嘉猷)가 우리나라에 와서 기자묘(箕子廟)를 보고 지은 시에,
포락(炮烙)하는 연기가 날아 왕기가 쇠하니 / 炮烙煙飛王氣衰
미친 체하는 마음을 거문고나 알아줄까 / 佯狂心事有琴知
그의 말씀은 천년을 전하여 〈홍범〉에 남아 있고 / 言垂千載存洪範
이제 사람이 삼한에 와서 구사(舊祠)를 뵙는다 / 人到三韓謁舊祠
하였다. 사람됨이 용모가 아름답고 수염이 그림과 같아서 진실로 인물과 재주가 모두 아름다웠다.
그 뒤에 우리나라에서 야인(野人)을 함부로 죽인 일로 급사중 장녕(張寧)이 와서 문책할 때 홍제원(弘濟院)에 이르러 멈추어 선 채, “왕세자는 무슨 일로 마중 나오지 않느냐.” 하였다. 좌승지 이승감(李承堪)에게 대답하도록 명하니 승지가, “세자는 나이 어리고 병이 있어 오지 못할 따름입니다.” 하였다. 급사가, “옛날에 주공(周公)은 성왕(成王)을 업고 제후들의 조회를 받았는데, 비록 세자의 나이가 어리다 할지라도 업고 오지야 못하겠느냐.” 하니, 승지가 대답하기를, “주공이 성왕을 업은 것은 무왕(武王)이 죽은 뒤에 성왕이 어리고 약하여 조회에 임하지 못하겠으므로 그런 것이요, 만약 무왕이 살아서 왕 위에 있다면 어찌 성왕을 업을 이치가 있겠습니까. 장차 천자의 명을 초야에다 버린 채 포고하지 않으시렵니까.” 하니, 크게 웃고 일어났다. 그의 사람됨은 풍채가 준일(俊逸)하며 의기가 호방하고 굳세었다. 부사(副使) 무충(武忠)이 관(館)에서 연회하는 날 기생 자동선(紫洞仙)을 보고 눈짓하니, 급사가 관반(館伴)에게, “무대인(武大人)은 연(燕) 나라와 조(趙) 나라 사이에서 났고, 노래 부르는 고장에서 자랐는데, 만리나 되는 먼 길을 애써 와서 회포를 풀지 못하고 있으니 위안해 줌이 어떠한가.” 하고, 마침내 아름다운 기생 수명을 불러서 방에 들여 술상을 베풀고 담소하며 즐겼다. 무충은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하였는데 밤이 깊자 급사가 중문(中門)으로 나와 호상에 걸터앉아 일일이 기생의 이름을 점고(點考)하여 보내고 문 빗장을 걸고 돌아오니, 무충은 괴롭고 원망스러워 견디지 못하였다. 무충은 금대(金帶)로 직이 높고, 급사는 각대(角帶)로 직이 낮았으나 아랫사람으로서 윗사람을 다루는 것이 이와 같았다. 〈평양주중시(平壤舟中詩)〉에,
평양 고성(孤城)을 새벽에 떠나가니 / 平壤孤城發曉裝
풍악이 울리는 화려한 뱃전에 봄볕이 아름답다 / 畫舡簫鼓麗春陽
까마귀 날아가고 구름이 다하는 곳에 푸른 산이 솟고 / 烏邊雲盡靑山出
나루터에 조수(潮水)가 드니 푸른 바다가 아득하구나 / 渡口潮通碧海長
황은(皇恩)을 함께 즐기는 같은 땅에 있으니 / 共喜皇恩同大地
내 몸이 타향에 있음을 깨닫지 못하겠구나 / 不知身世是他鄕
푸른 술통은 자주 권하지 말라 / 靑尊且莫頻相勸
사신의 행렬은 동풍(東風)에 갈 길 아득하다 / 四牡東風路渺茫
하였다. 한강에서 놀 적에 시 10수를 지었는데, 그 중 한 수에,
동국에 높은 누가 있으니 / 東國有高樓
누 앞에 한수가 흐른다 / 樓前漢水流
빛은 청작방에 흔들리고 / 光搖靑雀舫
그림자는 백구 있는 물가에 떨어지누나 / 影落白鷗洲
멀리 바라보면 하늘이 다했는가 싶고 / 望遠天疑盡
허공으로 솟아 땅이 또 있는 것만 같다 / 凌虛地欲浮
창문으로 몰려드는 바람과 햇볕이 좋으니 / 入窓風日好
탑(榻)을 내려 거듭 머뭇거리네 / 下榻重淹留
하였는데, 나머지 아홉 수도 모두 절묘하였으며, 또 〈예양론(豫讓論)〉을 지어 옛사람이 말하지 않았던 일을 논하였다. 대개 시와 글이 모두 표표(飄飄)하여 속진을 벗어난 느낌이 있어 다른 속된 무리들은 모방할 수 없었다.
그 뒤에 태복승(太僕丞) 김식(金湜)과 중서사인 장성(張珹)이 우리나라에 왔는데, 시를 잘하되 율시에 더욱 능가하였고, 필법도 절묘하였다. 그림 그리는 것도 신경(神境)에 들었는데, 그림을 얻으려는 자가 있으면 좌우의 손으로 휘둘러 그려 주었다. 또 족자 하나를 그려 세조(世祖)에게 바치니 세조가 화공으로 하여금 그림을 전사(轉寫)하되 채색을 더하게 하여, 또 문사(文士)를 시켜 자성의 글을 본떠서 그 형식을 바꾸어 시를 짓게 하고, 연회하는 날 이것을 벽에 걸어 놓았더니 태복(太僕)이 처음에는 보고도 모르다가 자세히 보고는 크게 웃으며, “이는 대왕(大王)이 호걸에게 장난한 것이다.” 하였다. 중국 사신의 시에,
동번의 흰 세모시 도포를 입고 / 新試東藩雪苧袍
학을 타고 밤 깊은 강 언덕을 지나니 / 夜深騎鶴過江皐
옥소 소리가 푸른 하늘의 달에 사무쳐 / 玉簫聲透靑天月
단산 백학의 털을 불어 떨어뜨리는구나 / 吹落丹山白鶴毛
하였더니, 신 고령(申高靈 신숙주(申叔舟))이 시를 짓기를,
촉 나라 비단 도포를 입고 하늘에 노니는 신선 / 天上遊仙蜀纈袍
붓 끝은 수풀 언덕의 맑은 흥치에 부쳤구나 / 筆端淸興寄林皐
청구(靑邱 우리나라)에서 천년 운수를 만났으니 / 靑邱正値千年運
옥잎 푸른 가지가 푸른 털로 화하는구나 / 玉葉瓊枝化翠毛
하였고, 김괴애(金乖崖 김수온(金守溫))는,
10년 봄바람이 헌 도포를 물들이는데 / 十載春風染舊袍
곧은 자태는 눈서리 내린 아침 언덕에서 보겠구나 / 貞姿會見雪霜皐
뉘라 백질(白質)을 청골(靑骨)로 돌아오게 하였는가 / 誰敎白質還靑骨
중산(中山 붓을 만드는 토끼털의 명산지)의 영모가 변화시켰지 / 變化中山一頴毛
하였고, 이 문간(李文簡 이승소(李承召))은,
눈서리처럼 아름답던 자태는 푸른 도포로 바뀌고 / 霜雪曜姿換翠袍
비바람을 맞은 죽순은 강 언덕에서 변하는구나 / 籜龍風雨變江皐
겨울날 쌀쌀한데 가지 위에 열매 맺으니 / 歲寒結得枝頭實
단산에 오채모(五彩毛 봉(鳳))가 깃드는구나 / 栖集丹山五彩毛
하였고, 서달성(徐達城)은,
차군(此君 대[竹])의 기절은 도포를 같이할 만하고 / 此君奇節可同袍
만 길 언덕에 옥처럼 우뚝 솟아 있네 / 玉立亭亭萬丈皐
용이 날 듯 변화하여 술법이 많은지라 / 龍騰變化應多術
하룻 밤 바람서리에 모골(毛骨)이 바뀌네 / 一夜風霜換骨毛
하였고, 김복창(金福昌)은
고절인들 어찌 헌 도포로 바꾸랴 / 苦節何曾換故袍
부질없이 견백(堅白)한 성질로 소상강 언덕을 분별하게 하네 / 枉敎堅白辨湘皐
맑은 창가에서 비단을 펴보니 / 晴窓披得鵝溪藏
예전처럼 볼 위에 푸르른 털이 있다 / 依舊靑靑頰上毛
하였다. 그러나 태복은 성질이 탐욕하여 뇌물을 많이 받았으며 떠날 때에는 포과(脯果), 잡물(雜物)까지도 모두 손수 꾸려서 묶고 또 철물(鐵物)을 많이 청하여 가니 당시 사람들이 유기장상사(鍮器長商士)라 하였다. 중서(中書)도 또한 시에 능하였으나 창기(倡妓)만 보면 좋아서 반드시 돌아보고 웃으니, 이명헌(李明憲)이 동반에게, “상사(上使)는 재물을 경계해야 하고, 부사(副使)는 색을 경계해야 한다.” 하였다. 성묘(成廟) 초년에 공부 원외랑(工部員外郞) 강호(姜浩)가 환관 김흥(金興)과 함께 우리나라에 왔는데, 원외는 한번도 글을 논하거나 시를 짓는 일이 없이 밤낮으로 술만 마셨으나, 술에 빠지지는 않으니, 장난삼아 한 연(聯)을 짓기를,
백옥 소반 위에 / 白玉盤中
앵두를 가득 담아 사신에게 드린다 / 盈盛櫻桃呈使星
하였더니, 역관 김맹경(金孟敬)이 대답하여 쓰기를,
황금 술잔에 / 黃金杯裏
미주를 가득 부어 중국 사신에게 드린다 / 滿斟美酒勸皇華
하였다. 옛날에 황엄(黃儼)이 연구를 짓기를,
비가 연꽃을 씻으니 / 雨洗荷花
3천 궁녀가 모두 목욕한 것 같고 / 三千宮女皆沐浴
바람이 대 잎에 부니, / 風吹竹葉
10만 장부가 한꺼번에 떠드는 것 같다 / 十萬丈夫共喧嘩
하였는데,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그 뒤에 호부 낭중(戶部郞中) 기순(祈順)이 행인(行人) 장근(張瑾)과 함께 와서 문묘(文廟)에 갔다. 호부는 순근(純謹) 화이(和易)하고 시와 부를 잘하였는데, 임금이 매우 후하게 대접하니 호부가 임금의 의채(儀采)를 흠모하여, “참다운 천인(天人)이다.” 했다. 노선성(盧宣城 노사신(盧思愼))과 서달성(徐達成)이 관반(館伴)이 되고 내가 홍겸선(洪兼善)ㆍ이차공(李次公)과 더불어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대기하고 있을 적에 서달성이 말하기를, “중국 사신이 시를 잘 짓는데 이는 모두 오래 전부터 지어둔 것일 것이다. 내가 먼저 시를 지어 차운하라고 청하면 반드시 그가 크게 낭패할 것이다.” 하였다. 한강에서 놀던 날 제천정(濟川亭)에 오르자 달성이 시 몇 수를 내보이면서, “대인의 뛰어난 운을 제가 도저히 화답할 수 없습니다. 지금 서투른 글을 엮으니 화답을 바랍니다.” 하니, 호부가 미소하면서 한 번 보고 붓을 들어 내리쓰는데, 그 글에 고칠 것이 하나도 없었다.
백제의 지형은 물에 임하여 다하였고 / 百濟地形臨水盡
오대의 천맥은 하늘에서 왔다 / 五臺泉脈自天來
라는 글귀라든가
고루에 기대었으나 정을 다하지 못해 / 倚罷高樓不盡情
다시 춘색을 끌어당겨 밝은 허공에 띄우네 / 又携春色泛空明
사람은 죽엽배 속에서 취하고 / 人從竹葉杯中醉
배는 양화도 어구를 향해 가로지르네 / 舟向楊花渡口橫
라는 글귀 같은 것이다. 또 〈강지수사(江之水辭)〉를 지으면서 배를 타고 잠령(蠶嶺 남산(南山))까지 흘러내려 가도록 글 읊는 것을 그치지 않으니, 달성이 담이 내려 앉아 사모(紗帽)를 젖혀 쓰고 길게 신음할 뿐이요, 김문량(金文良)은 혀를 내민 채 거두지도 못하고서, “노적(老賊)이 너무 심하게 사람을 속였구나. 근래에 내가 침[針灸]를 맞지 않아서 시사(詩思)가 메말라 이와 같은 괴로움을 받을 따름이다.” 하고, 한마디도 말을 못하니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동(董) 시강(侍講)과 왕(王) 급사(給事)가 올 때 나는 평안 감사(平安監司)로서 안주(安州)에서 명을 받들었다. 시강이 평양 문묘(平壤文廟)에 와서 알성할 적에 공자의 토상(土像)을 보고, “중국 것과 같다.” 하니, 관반 허양천(許陽川)이, “토상은 부처의 유와 같으므로 서울에 있는 성균관에서는 상(像)을 만들지 않고 위패를 씁니다.” 하니, 시강이 “그것은 좋은 방법이다.” 하였다. 또 단군묘(檀君廟)에 와서 동명왕(東明王)의 위패를 보고, “이는 한인(漢人)이다.” 했다. 또 기자묘(箕子廟)에 가서는 비갈(碑碣)을 쓰다듬으며 높게 소리내어 읽고, “글을 잘 읽었으나 비를 가릴 만한 누각이 없음이 한스럽다.” 하고, 또 그 묘소에 가서 경내를 순회하더니 마침내 조사(弔辭)를 짓고 강개하여 마지않았다. 또 대동강에 배를 띄우고 양천과 더불어 산천의 아름다움을 논할 때에 마침 부슬비가 내리기에 내가 머물기를 청하니, 시강은, “왕사(王事)에는 여정(旅程)이 있으니 머물지 못하겠다.” 하였다. 낭중(郞中)이 소동파(蘇東坡)의,
가볍게 화장한 것이나 짙게 화장한 것이나 모두 좋다 / 淡粧濃沫摠相宜
라는 시구를 읊조리기에 내가 부벽루(浮碧樓)를 가리키며, “저기도 전현(前賢)이 놀던 곳이니 대인을 모시고 한번 올라갔으면 합니다.” 하니, 시강이 흔연히 따랐다. 누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고, “풍경은 무쌍하나 마침 비가 그치었습니다.” 하니, 시강이, “주인이 손을 머물고자 하니 비가 내렸고, 손이 떠나고자 하여 날이 갰으니, 하늘은 주인과 손의 뜻을 모두 아는가 봅니다.” 하고, 서로 읍하고 떠났다.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에 내가 두 사신을 모시고 물을 따라 내려가니, 어부가 그물을 펴서 고기를 잡는데, 펄펄 뛰는 고기의 지느러미를 치켜 드니 두 사신이 매우 기뻐하더니 마침내 동이 속에 넣어 애완하다가 회(膾)를 치라고 독촉하면서, “신선하고 맛있기는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 하였고, 사냥꾼이 꿩을 잡아오니 시강이 손으로 만져 보기도 하고 냄새를 맡기도 하더니, “나도 자로(子路)의 공(拱)을 본받아 볼까.” 하고 꿩을 수풀 사이에 놓아 주면서, “네 마음대로 날아 가거라.” 하였다. 남호(南湖)에 이르러 조그마한 누각에 올라 쉴 적에 사냥꾼이 노루를 잡아오니, 시강이 노루를 백보(百步)되는 곳의 나무에 묶고 무사들로 하여금 쏘게 하고는 맞으면 손벽을 치고 크게 웃었다. 급사(給事)가, “군자는 포주(庖廚)를 멀리하는 법인데 대인은 어찌 차마 보고 있습니까.” 하니, 시강이, “소나 말과 같은 것은 사람에게 유익한 것이므로 차마 죽이지 못하지만, 노루나 사슴은 사람에게 무익하고 먹기에도 알맞으니 죽인들 무슨 일이 있겠느냐.” 하였다. 평양의 거리를 보고, “여기가 어디냐.” 묻기에, 내가, “이곳은 기자의 유허(遺墟)인데 정전법(井田法)을 시행하던 곳입니다.” 하였다. 내가 몰래 사람을 시켜 마을에서 관현(管絃)을 주악하게 하니, 시강이, “이는 무슨 소리냐.” 묻기에, 내가, “기자가 와서 다스린 뒤로 그 유풍이 아직 없어지지 아니하여 집집마다 현악을 즐기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니, 시강이, “참으로 예의의 나라이다.” 하였다. 그리고 길거리에서 구경하는 부인을 보고, “이들은 주관(州官)의 부인이 아닌가.” 하니, 역관이 “이들은 성중의 창기들입니다. 주관은 모두 사족(士族)이라서 규문에 법이 있는데 처첩이 어찌 길에 나오겠습니까.” 하니, 급사가, “진작 그런 줄 알았으면 마음껏 구경이나 할 것을 그랬다.” 하였다. 풍월루(風月樓)의 못가에 와서는, “여기가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중국이라 할지라도 이와 같은 곳은 드물다.” 하기에, 내가 누기(樓記)를 청하니, 시강이, “주인이 먼 곳까지 따라오면 꼭 지어 드리겠소.” 하기에, 나는 부득이 안주(安州)까지 전송하니 시강이 기문을 지어 내게 주었다. 두 사신은 길을 가다가도 산봉우리를 보면 모두 그 이름을 물었고, 기이한 바위나 이상한 나무가 있으면 말을 멈추고 음상(吟賞)하였으며, 사람을 대하는 것도 온화하고 삼가서 만약 중국의 일을 물으면 모두 숨김없이 이야기하였다. 시강의 시와 글은 모두 맑고 넉넉하였고 필법(筆法)은 진적(晉跡)을 본받았다. 급사의 시와 글씨도 또한 모두 호방하였으니 참으로 쌍벽이었다. 그러나 조칙(詔勅)을 분영(分迎)하는 일이 예(禮)에 어긋나서 우리나라 사람의 비웃음을 사게 되었다. 병부 낭중 예박(艾璞)이 행인 고윤선(高允善)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왔는데 동(董) 시강의 전례에 따라 조칙을 분영하였다. 그러나 낭중은 속히 돌아가려고 종일 서둘러 한가한 때가 없었다. 예를 마치고 관(館)으로 돌아갈 때 임금이 가서 하마연(下馬宴)을 베푸니 낭중은 한 잔만 마시고 들어가버렸다. 이튿날 두 사신은 날이 밝기도 전에 성균관에 나왔는데, 관반과 재상들은 모두 나와 있지 않았다. 장차 세수하고 알성하려 하는데 관인이 미처 수건을 내놓지 못하자 낭중이 크게 노하여 중문(中門)을 보고, “우리가 개구멍으로 들어왔는가.” 하였다. 명륜당(明倫堂)에 오를 때도 유생들이 반쯤 뜰안에 들어오는 중인데도 낭중은 뛰어나가버렸다. 임금이 승지로 하여금 재삼 청하게 하여 두 사신이 궁궐에 들어왔으나 임금과 서로 읍하고 선 채로 한 잔을 마시고 나갔다. 임금이 뒤따라 태평관(太平館)에 가서 전송연을 베풀고자 하여 어실(御室)에 이르렀으나 미처 서로 만나지도 못하고 두 사신은 급히 나가 교자(轎子)에 오르려 하였다. 임금이 나가 이르기를, “대인들의 행동은 왜 이리 급한가.” 하였으나, 낭중은 명에 따르지 않고, “전하께서 먼저 성 밖으로 가서 기다리십시오.” 하니, 임금이 부득이 먼저 갔다. 이때에 문무 백관과 위졸 의장(儀仗), 공급하는 아전과 악관(樂官), 영기(伶妓)는 분주하여 헐떡거렸다.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 이르러 연(輦)에서 내리기도 전에 낭중이 뒤쫓아 왔다. 임금은 안으로 맞아 들이고자 하였는데, 처음에는 명에 따르지 않다가 강청한 뒤에야 들어갔다. 이날은 유달리 뜨거운 볕이 내리쬐었는데 임금이 오랫동안 풍진 속에 서 있으니, 사람들이 모두 통분해 하였다. 낭중이 관반에게, “우리가 사신으로 와서 오랫동안 머무는 폐단이 없었고, 또 예물도 받지 않았으나 황제께서 이런 맑은 덕을 어찌 알겠느냐. 너희 나라에서 이런 사실을 아뢰면 황제께서 반드시 보상할 것이다.” 하니, 듣는 사람으로서 비웃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낭중은 시를 짓지 않다가 필경은 몇 수를 던지고 떠났는데, 시어(詩語)가 유치하고 빡빡하였으며, 부사(副使) 또한 〈노관반전(盧館伴傳)〉을 지었으나 비루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경박하고 이름만 얻으려는 자를 예박(艾璞)이라고 부른다.
임금이 즉위하던 해에 대감 김보(金輔)와 이진(李珍)이 조칙을 받들고 올 적에 행인 왕헌신(王獻臣)도 따라왔다. 왕헌신은 나이 어린 사람이라 먼저 요동(遼東)으로 하여금 우리나라에 자문(咨文)을 보내게 하여 뇌물을 받지 않은 밝은 절의가 있다고 효유하니, 사람들이 모두 이를 비웃어 말하기를, “남에게 청렴하다고 알리고자 하는 것이 어찌 남에게 알리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겠느냐.” 하였다. 우리나라에 와서는 한 연(聯)의 시도 짓지 아니하고, “사람은 마땅히 근본에 힘쓸 것이지, 어찌 말단의 기예에 힘쓸 것이냐.” 하니, 사람들이 모두 웃으며, “자기가 하지 못하는 것을 어찌 큰 소리로 남에게 자랑하느냐.” 하였다. 문아(文雅)에 대한 일은 하나도 유의하지 아니하고, 오직 예(禮)의 말절(末節)만 지켜 간혹 조금이라도 어그러진 데가 있으면 반드시 꾸짖고 노하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를 보고 소인(小人)이라 하였다.


 

[주D-001]남(藍) 풀에서 …… 진하다 : 《순자(荀子)》의 권학편(勸學篇)에서 나온 말인데 스승보다 제자가 나은 것을 비유한 말이다.
[주D-002]사륙문체(四六文體) : 중국 육조(六朝) 때 발달한 문체로 4글자와 6글자로 된 병려문(騈麗文)이다.
[주D-003]기생 상림춘(上林春) : 원전에는 ‘유지상림춘(有枝上林春)’으로 되어 있으나 기(妓) 자의 잘못인 것 같다.
[주D-004]조이[召史] : 신라ㆍ고려 시대에는 양민(良民)의 처의 총칭이었고 조선 시대에는 성(姓) 아래 붙여 홀어머니라는 뜻으로 쓰였다.
[주D-005]알성(謁聖) : 임금이 문묘(文廟)에 참배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중국 사신과 함께 참배할 때를 말한다.
[주D-006]관반사(館伴使) : 서울에 머무르고 있는 외국 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두는 임시직.
[주D-007]연꽃을 …… 주염계 : 송나라 성리학(性理學)의 개조(開祖) 주돈이(周敦頤)가 애련설(愛蓮說)을 지었다.
[주D-008]포락(炮烙)하는 …… 쇠하니 : 포락은 은 나라 마지막 임금. 주(紂)가 썼다는 형벌의 일종이다. 이 혹형(酷刑)을 쓴 뒤로 주가 망했다고 한다.
[주D-009]홍범 : 《서경(書經)》의 편명. 기자(箕子)가 천지(天地)의 대법(大法)을 기술한 것이다.
[주D-010]천년 운수 : 성인이 천년 만에 나온다는 황하천일청(黃河千一淸)에서 나온 말.
[주D-011]전현(前賢) : 원 뜻은 옛 현인이나 여기서는 전에 온 중국 사신을 가리킨다.
[주D-012]자로(子路)의 공(拱) : 《논어(論語)》 자로장(子路章)에 자로가 꿩을 날려 보낸 고사가 있다.
[주D-013]하마연(下馬宴) : 중국 사신이 도착하면 노고를 위로하여 베푸는 주연.

 

용재총화 제2권
용재총화 제2권


○ 세종(世宗)께서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문사(文士)로서 이름 있는 사람 20명을 뽑아 경연관(經筵官)을 겸하게 하고는 모든 문한(文翰)의 일을 모두 여기에다 맡겼다. 일찍 집무하여 늦게야 파하였고, 일관(日官)이 때를 알려야만 비로소 퇴근하였다. 아침저녁의 식사 때에는 내관(內官)을 대객(對客)으로 삼았으니, 신하를 두텁게 대우하는 뜻이 지극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서로 다투어 권면하여 재주가 크고 훌륭한 선비들이 많이 나왔다. 정하동(鄭河東)ㆍ정봉원(鄭蓬原)ㆍ최영성(崔寧城)ㆍ이연성(李延城)ㆍ신고령(申高靈)ㆍ서달성(徐達城)ㆍ강진산(姜晉山)ㆍ양(兩) 이양성(李陽城)ㆍ양(兩) 성하산(成夏山)ㆍ김복창(金福昌)ㆍ임서하(任西河)ㆍ노선성(盧宣城)ㆍ이광성(李廣城)ㆍ홍익성(洪益城)ㆍ이연안(李延安)ㆍ양남원(梁南原)과 성삼문(成三問)ㆍ박팽년(朴彭年)ㆍ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ㆍ하위지(河緯地) 같은 이는 모두 걸출한 사람들이었고, 그 나머지 문원(文苑)에서 유명한 이들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병자년의 난에 세조(世祖)께서 집현전을 파하시고는 문신 수십 명을 뽑아 겸예문(兼藝文)이라 하여 나날이 만나 생각한 바를 의논하더니 성묘(成廟)께서 즉위하시자 집현전에 의거하여 다시 홍문관(弘文館)을 설치하였고, 또 본관(本官)으로써 경연관을 겸하게 하여 대우하기를 더욱 두텁게 하였다. 매양 궁중에서 빚은 술을 내렸고, 또 승정원(承政院)을 불러모아 승지(承旨)로 하여금 대음(對飮)하게 하였으며, 용산강(龍山江) 가에 당(堂)을 지어놓고 관관(館官)에게 번(番)을 나누어 독서하게 하였다. 또 상사(上巳)ㆍ중추(中秋)ㆍ중양(重陽)의 가절에는 교외에서 놀게 하였고, 후히 주악(酒樂)을 내렸으니, 그 총애와 영광이 지극하였다. 그러나 문명(文名)이 있는 것으로 말하면 이는 세종조의 번성하던 때와는 같지 않았다.
○ 전조(前朝)의 과거에는 다만 지공거(知貢擧) 1명과 동공거(同貢擧) 1명이 있어서 미리 합격자를 차정(差定)하였기 때문에 홍분유취(紅粉乳臭)의 빈축을 면하지 못하였다 국초에도 여전히 이러한 구폐를 이어오다가 세종 때에 이르러 격례(格例)를 고쳐서 모두 옛 제도를 썼다. 이조에서 시관(試官)으로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임시로 입계(入啓)하여 낙점을 받았으며, 시관이 된 자는 명을 받들어 시험 장소에 나누어 가서 삼관(三館)에다 과거 볼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날 새벽에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 과장에 들여보냈다. 이때 수협관(搜挾官)이 문 밖에 나누어 서서 의금(衣襟)과 상자를 조사하였는데, 만약 문서를 가지고 있는 자가 있으면 붙잡아 순탁관(巡綽官)으로 보내 이를 결박하게 하였다. 만약 과거장 밖에서 발견되면 1식년(式年 4년마다 한 번씩 과거를 보이는 해)의 과거를 못 보게 하고, 과거장 안에서 발견되면 2식년의 과거를 못 보게 하였다. 밝기 전에 시관이 대청에 나와 촛불을 켜놓고 앉으면 그 엄숙한 것이 신선(神仙) 속의 사람과 같았었다. 삼관원(三館員)이 뜰로 들어와 과거 볼 사람의 자리를 정해주고 나가는데, 날이 밝으면 방(榜)을 펴서 글제를 내걸었고, 오정(午正)이 되면 시지(試紙)를 걷어 도장을 찍어 삼관에 돌려준다. 그러면 옥상(屋上)에 올라 대종(大鍾)을 들고 선생을 부르고, 뜰에 임하여서는 신래(新來)를 부르며, 또 허방(虛榜)을 써서 창(唱)하였는데, 이는 모두 고풍이었다. 날이 저물면 북을 쳐서 재촉하고 글이 다 이루어지면 수권관(收卷官)에게 바쳤으며, 다시 등록관(謄錄官)에게 넘기되, 자호(子號)를 권의 양쪽 끝에다 쓰고 또 감합(勘合)을 써서 이를 두 개로 자르는데, 하나는 봉명(封名)이고 하나는 지은 글이었다. 봉미관(封彌官)은 봉명을 받아 물러가서 별처에 있고, 등록관이 서사인(書寫人) 등을 모아 주묵(朱墨)으로 문권을 전사(傳寫)하되, 사동관(査同官)은 본초(本草)를 읽고 지동관(枝同官)은 주초(朱草)를 비준하여 시관에게 넘겨 높고 낮은 것을 품제(品題)한 뒤에 봉미관(封彌官)으로 하여금 봉명(封名)을 뜯어 방(榜)을 쓰게 하였다. 강경(講經)하는 법은 자호(字號)를 써 사서오경(四書五經)에 붙이고, 또 자호를 생(栍 종이 쪽지나 대쪽으로 만든 찌)에 써서 통(筒) 속에 넣어둔다. 과거 볼 사람이 강송할 글이름을 써서 바치면 시관이 생을 뽑는데, 만약 천(天) 자를 뽑으면 경서에 붙인 천 자를 찾아서 다만 대문(大文)을 써 준다. 과거 보는 사람은 대문을 읽어서 해석하고 시관은 주소(註疏)를 강론하며, 아전이 통(通)ㆍ약(略)ㆍ조(粗)ㆍ불(不)의 넉 자를 써서 강첨(講籤)을 만들어 각각 시관 앞에 놓는다. 한 책의 강론이 끝나면 아전은 허첩(虛揲)을 가지고 위로 올라가며, 시관이 차례로 강첨을 점고하여 다수에 의하여 취한다. 이때 서로 등(等)이 같으면 아래로부터 초장(初場)에서 강경한 분수(分數)와 중(中)ㆍ종장(終場)에서 제술(製述)한 분수를 통계하는데, 그것을 취하는 사람은 한 사람이 아니었고 점고도 한 사람이 하지는 않았다. 나라의 공도(公道)는 오직 과거에 있는 것이다.
○ 옛적에는 동궁(東宮)이 경복궁(景福宮)에 있었는데, 곧 대내(大內)의 동쪽이었다. 문묘(文廟)께서는 세자가 되시어 20여 년을 항상 이 궁에서 거처하였고, 서연(書筵)과 시강(侍講)을 하는 곳은 자선당(資善堂)이 되었으며, 백관의 조회 받는 곳은 계조당(繼照堂)이 되었다. 세종께서 말년에 몸이 불편하시어 여러 기무(機務)를 친히 보살피지 못하시자, 문묘께서 기무를 대행하였으되, 조정의 관리로서 어질고 유명한 사람을 뽑아 첨사(詹事 동궁의 정3품관)로 삼고 집현전의 10명을 경연관으로 삼으며, 또 10명을 서연관(書筵官)으로 삼았다. 계조당은 동궁의 바깥 뜰에 있었는데, 지금은 철거되어 그 터도 없다. 세조(世祖) 때에는 경연청이 동궁 안에 있었고, 또 책들을 동쪽 별실에 갖추어 홍문관(弘文館)이라 하였다. 자선당은 뒤에 문종의 혼전(魂殿)이 되어 경희궁(景禧宮)이라 하였고, 또 세조의 혼전이 되어 영창궁(永昌宮)이라 하였으며, 또 정희왕후(貞熹王后)의 혼전이 되어 태경궁(泰慶宮)이라 하였고, 성종(成宗)의 혼전이 되어 영사전(永思殿)이라고 하였다. 문묘께서 성학(聖學)이 고명하였고 문장이 화려하고 아름다웠으며, 또 필법이 신묘하였는데, 세상에 전하는, “천홍만자(千紅萬紫)가 봄바람과 다투더니 봄이 다하자 한 점의 홍(紅)도 없구나.” 하는 구절은 바로 문묘께서 지으신 글이다. 동궁으로 계실 때에 황금빛 귤 한 쟁반을 집현전에 보냈더니 귤을 다 먹자 쟁반에 글이 쓰여 있었는데, 이는 문묘께서 반초행서(半草行書)로서 귤에 대하여 쓴 시였다. 그 시에,
전단(단향목(檀香木))은 매우 코에 맞고 / 栴檀偏宜鼻
지고는 매우 입에 맞구나 / 脂膏偏宜口
동정호의 귤을 가장 사랑하노니 / 最愛洞庭橘
코에 향기롭고 입에 달도다 / 香鼻又甘口
하셨는데, 시와 글씨가 모두 절세의 귀한 보배였으므로, 여러 학사(學士)들이 그려서 전사(傳寫)하려고 하였으나 안으로부터 들여보내라는 독촉이 있었으므로 쟁반을 붙들고 차마 놓지 못했었다. 조정에서 극성(棘城)의 전염병을 근심하여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베풀 때 집현전에서 글을 지어 입계(入啓)하므로, 문묘께서 어필(御筆)로 개제(改題)하셨으니, 사의(詞意)가 모두 섬부(贍富)하고 효유하심이 매우 절실하였으며, 문사(文詞)가 매우 좋아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여 마지않았다. 제사를 지낸 뒤에는 병세(病勢)가 점점 숙여져서 지금까지도 백성들이 편안하고 물건들이 넉넉하였다. 또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성상을 섬기시되 반드시 정성을 다하셨다. 세종(世宗)께서는 일찍이 앵두를 좋아하셨으므로 문묘께서는 손수 앵두를 심으셨는데, 지금까지 궁궐에 가득 찬 앵두는 모두 그때 심은 것들이다. 상(喪)을 당해서는 슬퍼하심이 지극하셔서 파리해진 얼굴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의묘(議廟 임금이 승하한 뒤에 묘호(廟號)를 의논하는 것)할 때에는 효(孝) 자를 쓰려고 하였으나, 너무 덕에만 치우친 것이라 하여 문(文) 자로 시호를 삼았다. 내가 어렸을 때 예겸(倪謙)과 사마(司馬) 두 사신이 우리나라에 왔었는데, 세자인 문묘께서 나아가 소명(詔命)을 맞으시는 것을 바라보았더니 그 얼굴이 아름답고 수염이 길어서 웅위(雄偉)하심이 보통이 아니었다.
○ 삼관(三館) 풍속에는 남행원(南行員 조상의 덕으로 하던 벼슬아치)이 그 두목을 상관장(上官長)으로 삼아 공경해서 받들었고, 새로 급제하여 분속된 자는 신래(新來)라 하여 욕을 주어 괴롭혔으며, 또 술과 음식을 요구하되 대중이 없었으니 이는 교만한 것을 꺾으려 함이었다. 처음으로 출사(出仕)하는 것을 허참(許參)이라 하고, 예(禮)를 끝내면 신면(新免)이라 하여 신면을 하여야만 비로소 구관(舊官)과 더불어 연좌(連坐)해서 잔치를 베풀었다. 말관(末官)이 왼손으로 여자를 잡고 오른손으로 큰 종을 잡아 먼저 상관장을 세 번 부르고, 또 작은 소리로 세 번 불러서 상관장이 조금 응하여 아관(亞官)을 부르면, 아관이 또한 큰 소리로 부른다. 하관(下官)이 이기지 못하면 벌이 있었으나, 상관이 이기지 못하면 벌이 없었다. 지위가 높은 대신이라도 상관장의 위에는 앉지 못하고, 세 관원 사이에 끼어 앉아서 부르되, 정일품에는 오대자(五大字), 종일품에는 사대자(四大字), 이품에는 삼대자(三大字), 삼품 당상관에는 이대자(二大字), 당하관은 다만 대선생(大先生)이라 부르고, 사품 이하는 다만 선생이라 부르되, 각각 성(姓)을 들어 이를 칭하였고, 부르고 난 뒤에는 또 신래자를 세 번 부르고, 또 흑신래자(黑新來者)를 세 번 부르는데, 흑(黑)은 여색(女色)이다. 신래자는 사모(紗帽)를 거꾸로 쓰고 두 손은 뒷짐을 하며 머리를 숙여 선생 앞에 나아가서 두 손으로 사모를 받들어 올렸다 내렸다 하였는데, 이것을 예수(禮數)라 하였다. 직명(職名)을 외우되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가면 순함(順銜)이요,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면 역함(逆銜)이며, 또 기뻐하는 모양을 짓게 하여 희색(喜色)이라 하고, 성내는 모양을 짓게 하여 패색(悖色)이라 하였으며, 그 별명(別名)을 말하여 모양을 흉내내게 함을 ‘3천 3백’이라 하였으니 욕을 보이는 방식이 많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방(榜)을 내걸고 경하(慶賀)하는 날에는 반드시 삼관(三館)을 맞이한 뒤에 연석(筵席)을 베풀고 예를 행하였는데, 만약 신은(新恩)이 불공하여 삼관에게 죄를 지으면, 삼관은 가지 아니하고 신은도 또한 유가(遊街 급제자가 풍악을 앞세우고 웃어른이나 친척들을 찾아보는 것)하지 못하였다. 삼관이 처음 문에 이르러 한 사람이 북을 치면서 ‘가관호작(佳官好爵)’이라고 부르면, 아전들이 소리를 같이하여 이에 응하고 손으로 신은을 떠받쳐 올렸다 내렸다 하는데, 이를 경하(慶賀)라 하였고, 또 부모와 친척에게 경하하는 것을 생광(生光)이라 하였으며, 또 최후에 여인(女人)을 받들어 경하하는 것을 유모(乳母)라 하였다. 또 신은(新恩)은 방(榜)이 나는 대로 의정부ㆍ예조ㆍ승정원ㆍ사헌부ㆍ사간원ㆍ성균관ㆍ예문관ㆍ교서관ㆍ홍문관ㆍ승문원 등 여러 관사의 선배를 배알하고, 포물(布物)을 많이 걷어 이것으로 연회를 위한 음식을 만드는데, 봄에는 교서관이 먼저 행하되 홍도음(紅桃飮)이라 하고, 초여름에는 예문관이 행하되 장미음(薔薇飮)이라 하였으며, 여름에는 성균관이 행하되, 이를 벽송음(碧松飮)이라 하였다. 을유년 여름에는 예문관이 삼관(三館)을 모아 삼청동(三淸洞)에서 술을 마셨는데, 학유(學諭) 김근(金根)이 몹시 취하여 집으로 돌아가다가 검상(檢詳) 이극기(李克基)를 길에서 만났는데, “교우(交友)는 어디서 오는 길이길래 이렇게 취하였느냐.”고 묻자, 대답하기를, “장미(薔薇)를 먹고 온다.” 하니, 듣는 이들이 모두 냉소(冷笑)하였다.
○ 성균관은 오로지 교훈(敎訓)을 관장하는 곳으로 국가에서 양현고(養賢庫)를 설치하여 관관(館官)으로서 이를 겸하게 하고, 항상 유생(儒生) 2백 명을 양성하였다.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는 임금께 아뢰어 존경각(尊經閣)을 지어 경적(經籍)을 많이 간행하여 여기에 두었고, 광천군(廣川君) 이극증(李克增)은 임금께 아뢰어 전사청(典祀廳)을 세웠으며, 나도 또한 임금께 아뢰어 향관청(享官廳)을 세웠다. 그 뒤에 성전(聖殿)의 동서무(東西廡)와 식당을 개축하고, 베 5백여 필과 쌀 3백여 석을 내리셨으며, 또 학전(學田)을 내리셔서 이것을 관중(館中)의 수용에 충당하게 하였는데, 이극증이 아뢰기를, “이제 성은을 입사와 미포(米布)를 많이 받았사오나, 비옵건대, 주식(酒食)을 갖추어 조정의 문사와 여러 유생을 모아 사문(斯文)의 성사(盛事)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니, 성묘(成廟)께서 윤허하여서 이때 문사들이 명륜당에 크게 모였었다. 찬거리가 극히 정갈하였고, 승지가 궁중의 좋은 술과 어주(御廚)에 있는 맛있는 음식을 주어, 인마(人馬)의 왕래가 잇닿아 끊이지 않았다. 계축년 가을에는 성균관에 거둥하시어 선성(先聖)과 선사(先師)에게 제사 드리고 하연대(下輦臺)에다 장전(帳殿)을 마련하였다. 문신과 재신(宰臣)ㆍ추신(樞臣)은 장전 내에 입시하고, 당하관인 문신들은 뜰에 줄을 지어 앉았으며, 8도의 유생이 경사(京師)에 운집하니, 무려 수만 명이나 되었다. 상하가 모두 꽃을 꽂고 연회석에 참석하였으며, 새로 지은 악장(樂章)으로 연주하여서 이를 권하였고, 각 관청이 나누어 음식을 장만하였다. 성상께서 자주 내신(內臣)을 보내어 이를 살피시어 사람들이 모두 취하도록 마시게 하고 배불리 먹도록 하였으니, 전고(前古)에는 없던 일이었다.
○ 대저 선생(先生)을 맡은 사람은 그 스승에게서 수업을 하였으나, 한갓 입으로만 익힐 뿐이고, 문리(文理)를 알지 못한 데다가 또 자기 의견만 고집하여 도무지 통하지 않았다. 제학(提學) 유진(兪鎭)은 〈대학서(大學序)〉의 ‘극지참유(極知僭踰)’의 설(設)을 논하여 말하기를, “나의 마음이 대학의 이치를 극진히 안다고 할 것 같으면, 이는 참람한 뜻이 있는 것이다.” 하였고, 사성(司成) 이문흥(李文興)은 말하기를, “한 설(說)은, “내가 지극히 참람하여 죄를 면치 못할 것으로 안다.” 하였고, 한 설은, 유제학의 말과 같으니 이 말을 마땅히 두 가지 면으로 볼 수밖에 없다.” 하였다. 사예(司藝) 번우향(潘佑享)은 말하기를, “《논어(論語)》의 ‘위정 이덕(爲政以德)’에 있어서 만약 덕(德) 자를 먼저 해석하고 이(以) 자를 뒤에 해석한다면 너무 덕(德) 자의 힘이 지나치므로, 먼저 이 자를 해석하고 뒤에 덕 자를 해석한다면 성인의 자연의 공효(功效)에 맞는다.” 하였으니, 이와 같이 집착하는 곳을 다 기록할 수 없으나, 항상 강당(講堂)에 앉아서 서로 시비를 다투어 혹은 노기가 얼굴에까지 나타나는 일이 있었으니, 비록 이치에 통달한 이라도 그 무리들의 세력을 꺾을 수가 없었다.
○ 지금 문벌(門閥)이 번성하기로는 광주 이씨(廣州李氏)가 으뜸이고, 그 다음으로는 우리 성씨(成氏)만한 집안도 없다. 광주 이씨는 둔촌(遁村) 이후로 점점 커졌으니 둔촌의 아들 지직(之直)은 참의(參議)였고, 참의는 아들이 셋인데 장손(長孫)은 사인(舍人)이었고, 인손(仁孫)은 우의정(右議政)이었고, 예손(禮孫)은 관찰사(觀察使)였으며, 사인의 아들인 극규(克圭)는 지금 판결사(判決事)로 있다. 우의정에게도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극배(克培)는 영의정(領議政) 광릉부원군(廣陵府院君), 극감(克堪)은 형조 판서(刑曹判書) 광성군(廣城君), 극증(克增)은 광천군(廣川君), 극돈(克墩)은 이조 판서(吏曹判書) 광원군, 극균(克均)은 지중추(知中樞)였으니, 모두 일품(一品)에 올랐는데, 이 네 아들은 공이 있어 군(君)으로 봉한 것이다. 광성군은 비록 일찍 죽었으나 그 아들 세좌(世佐)는 지금 광양군(廣陽君)이며, 문자(文字)ㆍ문손(文孫)도 높은 반열에 서서 서로 잇따라 끊이지 않았다. 우리 성씨(成氏)는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이후로 점점 커졌다. 부원군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맏아들 석인(石璘)은 좌정승인 창녕부원군이었고, 다음 석용(石瑢)은 유수(留守)였으며, 그 다음은 나의 증조인 예조 판서이다. 정승의 아들인 발도(發道)는 좌참찬이었고, 유수의 아들인 달생(達生)은 판중추였으며 개(槪)는 관찰사가 되었다. 증조께는 세 아들이 있었으니, 맏아들은 곧 나의 조부(祖父)인데 지중추부사였고, 다음인 유(柳)는 우참찬이었으며, 그 다음인 급(扱)은 첨지중추부사였다. 나의 선고께서도 3형제였는데, 아버지는 맏이로서 지중추부사였고, 다음은 우의정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이었으며, 그 다음은 형조 참판이었다. 우리 형제도 셋인데, 큰형은 좌참찬이요, 다음형은 정언(正言)이며, 막내는 나다. 창성부원군의 아들은 참의인 율(慄)이었는데, 율 이후에는 부진하였고, 참판의 아들은 셋이었는데, 맏이인 숙(淑)은 동지중추부사이고, 다음인 준(俊)은 병조 판서이며, 그 다음 건(健)은 형조 판서요, 나 또한 예조 판서이니, 삼형제가 일시에 삼조(三曹)의 판서가 된 것은 고금에 드문 일이다.
○ 남대문 밖에서는 승지(承旨)가 끊이지 않고 많이 나왔는데 나의 조부인 공도공(恭度公)과 선친인 공혜공(恭惠公)과 숙부인 양정공(襄靖公)과 형님인 문안공(文安公)이며, 입성(笠城) 유공(柳公)과, 익성(益城) 홍공(洪公)과, 서평(西平) 한공(韓公)이 모두 승지였고, 근래에는 나와 한서천(韓西川)ㆍ신성지(愼成之)ㆍ강용휴(姜用休)가 모두 이 벼슬을 배수하였다.
○ 신라왕(新羅王)이 정월 15일에 천천정(天泉亭)에 거둥하였더니, 까마귀가 은(銀)으로 만든 함을 왕 앞에 물어다 놓았는데, 함 속에는 글이 쓰여 있되 단단히 봉해져 있었고, 그 겉면에 쓰이기를,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두 사람의 목숨이 끊어지는 것보다는 한 사람의 목숨이 끊어지는 것이 낫다.” 하시자, 대신이 의논하기를, “그렇지 않사옵니다. 한 사람이란 임금을 말하는 것이옵고, 두 사람이란 신하를 말하는 것이옵니다.” 하여, 드디어 열어 보았더니, 그 속에는 “궁중의 거문고 갑(匣)을 쏘라.”고 쓰여 있었다. 왕이 말을 달려 궁으로 들어가 거문고 갑을 보고 활을 힘껏 당겨서 쏘니, 갑 속에 사람이 있었다. 이는 바로 내원(內院)의 번수승(樊脩僧)이 왕비(王妃)와 사통하여 왕을 죽이려고 그 시기를 미리 정하였던 것인데, 왕비는 중과 더불어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왕은 까마귀의 은혜를 생각하여 해마다 이날에는 향반(香飯)을 만들어 까마귀를 먹였는데, 지금까지도 이를 지켜 명절의 아름다운 음식으로 삼고 있다. 그 만드는 법은 찹쌀을 쪄서 밥을 짓고, 곶감ㆍ마른 밤ㆍ대추ㆍ마른 고사리ㆍ오족용(烏足茸)을 가늘게 썰어서 맑은 꿀과 맑은 장(醬)을 섞어 다시 찐 다음 다시 잣과 호도 열매를 넣어 만드는데, 그 맛이 매우 좋아 이를 약밥[藥飯]이라 한다. 속언에는, “약밥은 까마귀가 일어나기 전에 먹어야 한다.” 하였으니 대체로 천천정(天泉亭)의 고사(故事)에서 연유한 것이다.
○ 한 해의 명절에 거행하는 일이 한 가지뿐이 아니나, 섣달 그믐날에 어린애 수십 명을 모아 진자(侲子)로 삼아 붉은 옷에 붉은 두건을 씌워 궁중(宮中)으로 들여보내면 관상감(觀象監)이 북과 피리를 갖추어 소리를 내고 새벽이 되면 방상시(方相氏)가 쫓아낸다. 민간에서도 또한 이 일을 모방하되 진자는 없으나 녹색 죽엽(竹葉)ㆍ붉은 형지(荊枝)ㆍ익모초(益母草) 줄기ㆍ도동지(桃東枝)를 한데 합하여 빗자루를 만들어 대문[欞戶]를 막 두드리고, 북과 방울을 울리면서 문 밖으로 몰아내는 흉내를 내는데, 이를 방매귀(放枚鬼)라 한다. 이른 새벽에는 그림을 대문간과 창문에 붙이는데, 그림에는 처용각귀종구(處容角鬼鍾馗)ㆍ복두관인(僕頭官人 급제하여 홍패(紅牌)를 받을 때 쓰던 관)ㆍ개주장군(介冑將軍)ㆍ경진보부인(擎珍寶婦人) 그림ㆍ닭 그림과 호랑이 그림 따위였다. 섣달 그믐날 서로 인사하는 것을 과세(過歲)라 하고, 정월 초하룻날 서로 인사하는 것을 세배(歲拜)라 하는데, 정월 초하룻날에는 모두 일을 하지 않으며, 모여서 다투어 효로(梟盧) 놀이를 하면서 술을 마시고 즐겨 논다. 새해의 자(子)ㆍ오(午)ㆍ진(辰)ㆍ해(亥) 일에도 이렇게 하였고, 또 어린이들은 다북쑥[蒿]을 모아서 동산에서 불을 지르는데 해일은 훈가훼(薰猳喙)라 하고, 자일은훈서(薰鼠)라 한다. 모든 관청은 3일에 한하여 출사하지 아니하고, 서로 친척이나 동료들 집으로 가서 명함을 던졌는데, 대가집에서는 미리 함(函)을 만들어서 이를 받았다. 근년 이래로 이 풍습이 갑자기 고쳐졌으니, 또한 세상이 변천했음을 알 수 있다. 이달 보름날은 원석(元夕)이므로 약밥을 만들고, 2월 초하룻날은 화조(花朝)라 하여 이른 새벽에 솔잎을 문간에 뿌리는데, 속언으로는, “그 냄새나는 빈대가 미워서 솔잎으로 찔러 사(邪)를 없앤다.” 한다. 3월 3일을 상사(上巳)라 하는데 속언으로는 답청절(踏靑節)이라 한다. 이날에는 사람들이 모두 교외의 들로 나가 놀았는데, 꽃이 있으면 꽃술을 지져서 술을 마시고, 또 새로 난 쑥으로 설고(雪糕)를 만들어 먹는다. 4월 8일을 연등(煙燈)이라 하는데 세상에 전하는 말로는 이날이 석가여래(釋迦如來)가 탄생한 날이라 한다. 봄에는 아이들이 종이를 오려서 기(旗)를 만들고 물고기 껍질을 벗겨 북을 만들어 떼를 지어서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등불 켜는 기구를 구걸하는데, 이를 호기(呼旗)라 한다. 이날이 되면 집집마다 장대를 세워 등불을 걸었으며, 부호들은 크게 채색한 등대(燈台)를 세웠는데, 층층이 달린 그 많은 등불은 마치 하늘에 별이 펼쳐진 것과 같아서 도인(都人)들은 밤새도록 구경하였고, 무뢰한 젊은이들은 이것을 건드리는 것을 낙으로 삼았는데, 지금은 불교를 숭상치 않으므로 혹 연등놀이를 한다 해도 옛날에 번성하던 것과는 같지 않다. 5월 5일은 단오(端午)라 하여 애호(艾虎)를 문에다 걸고 창포(菖蒲)를 술에 띄우며, 아이들은 쑥으로 머리를 감고 창포로 띠를 하며, 또 창포 뿌리를 뽑아 수염처럼 붙였다. 도인(都人)들은 길거리에 큰나무를 세워 그네놀이를 하였고, 계집아이들은 모두 아름다운 옷으로 단장하고 길거리에서 떠들썩하게 채색한 줄을 잡고 서로 다투며, 젊은이들은 몰려와서 이것을 밀고 끌고 하여 음란(淫亂)한 장난이 그치지 않았는데, 조정에서 이것을 금하여 지금은 성행하지 않게 되었다. 6월 15일은 유두(流頭) 날인데 옛날 고려의 환관(宦官)들이 동천(東川)에서 더위를 피하여 머리를 풀고는 물에 떴다가 잠겼다가 하면서 술을 마셨음으로 유두라 하였다. 세속에서는 이로 인하여 이날을 명절로 삼고 수단병(水團餠)을 만들어 먹었으니, 대개 회화나무 잎 가루를 냉수에 일어 먹던 유속인 것이다. 7월 15일은 속칭 백종(百種)이라 하여 승가(僧家)에서 1백 가지 꽃 열매를 모아 우란분(盂蘭盆)을 베풀었는데, 서울에 있는 여승(女僧)의 암자(庵子)에서 더욱 심하였으므로 부녀자들이 많이 모여들어 곡식을 바치고는 돌아가신 어버이의 영혼을 불러 제사지냈다. 왕왕 중들이 탁자(卓子)를 설치하고 제사를 지냈는데 지금은 엄금하여 그 풍속이 없어지게 되었다. 중추(中秋)의 달구경, 중양절의 높은 데 오르기, 동지(冬至)의 팥죽, 경신일(庚申日)의 밤새우기 등 모두가 옛날의 유속이다.
○ 임금의 명을 받들고 사신(使臣)으로 가는 사람이 있으면 동료들이 모두 맞이하여 술자리를 베풀었고, 또 떠나는 날에는 모두 교외로 나가서 전송하였는데, 비록 훈귀(勳貴)한 대신이라도 속태를 면치 못하였다. 오직 홍익성(洪益城)만이 임금의 명을 받들고 궁궐에 나아갔을 뿐이었고, 다른 곳에는 인사를 가지 않았으며, 또 일찍이 마중이나 전송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서울로 오는 사신이나 각 도의 감사가 떠나는 날도 다만 녹사(錄事)를 보내어 한 병의 술을 가지고 가서 전송하게 하였으니, 당시 사람들이 그야말로 재상의 체모를 얻었다 하였다. 홍인산(洪仁山)은 과거에 급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조(世祖)의 정란(靖難)을 도와 성상의 총애를 입어 상사(賞賜)를 많이 받았다. 또한 재물을 모으는 데에 힘써서 돈꾸러미를 모아 둔 것이 거만(鉅萬)이나 되었으며 곡식은 그 배(倍)나 되었다. 향노(鄕奴)로서 물화(物貨)를 가져와서 바치는 자가 그치지 아니하며, 짐을 실은 수레가 문 밖에 가득 차고 늘어선 사람들이 거의 만 명이나 되었다. 대궐 같은 집을 지었는데, 못가에다 당(堂)을 지으니, 세조(世祖)께서 ‘경해(傾海)’라는 두 글자를 써 주셨다. 이름 있는 유생과 큰 선비들을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지 않는 날이 없었으니, 음식이 넉넉하여 비록 하증(何曾)의 만금(萬金)의 음식이라도 이보다 더하지는 않을 것이다. 관현악(管絃樂) 소리가 맑게 울려 밤낮으로 그치지 않으니, 좌객(坐客)들이 그 위엄에 눌려 만취(滿醉)하지 않을 수 없어 말을 거꾸로 타고 집으로 돌아 갈지경이었고, 기생들의 전두(纏頭)에 쓰이는 돈도 또한 헤아릴 수 없었다. 부귀를 누린지 20여 년에 명성과 권세는 더욱 빛났다. 일찍이 길가에서 상기(象棋 장기) 두는 사람을 보고는, “백성이 생업을 일삼지 아니하고 다만 세월만 허비하니 벌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는, 드디어 그 사람으로 하여금 개똥을 먹게 하니, 그 사람이 씹어 먹자 또 그 상자(象子 장기알)를 먹게 하였다. 그러나 그 사람이 깨물어 먹으려고 하여도 먹지 못하자 공(公)은 마침내 이를 용서해 주었다. 그 뒤 공은 상기의 이치를 조금 깨닫고는, “노년의 심심풀이로는 이 놀이만한 것이 없다.” 하고 늘 상기 두는 중을 맞아 그와 더불어 대국하였다. 내가 어렸을 때 보니 진일(眞逸) 선생이 노선성(盧宣城)ㆍ최세원(崔世遠)과 더불어 과장(科場)이 급박하자 겨울밤 산방(山房)에서 책을 읽었는데, 문득 등불이 꺼졌다. 화로 속에는 재만 차 있고 불은 없었으며, 이때에는 달도 없고, 더욱이 눈이 쌓여 정강이가 묻힐 정도였다. 그러나 선생께서는 5리 밖의 촌가까지 걸어가서 불을 구해왔으니, 그 돈독한 의지가 이와 같았다. 또 점치기를 잘하여 항상 말하기를, “자반(子胖)은 지위가 인신(人臣)으로서 가장 높은 곳에 오를 것이고, 최세원도 또한 조단(朝端)에 유명할 것이나, 나는 비록 고생스럽게 공부를 하지마는 목숨이 길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선생이 병상에 눕자 대부인(大夫人)이 눈물을 흘리면서 문병을 하니, 선생은 말하기를, “나는 어머니의 아들이 아니며, 우리 형제는 나중에 모두 재상이 될 것인데, 이들이 어머니께 효도하는 자식이 될 것입니다.” 하더니, 그 뒤에 다 그의 말과 같이 되었다. 최세원은 경서와 사적을 많이 읽었고, 담론을 잘하였다. 심심원(沈深源)과 더불어 개울을 사이에 두고 살았는데, 심의 집에서는 매양 이웃 친구들을 맞이하여 주연을 베풀었고, 항상 장기와 바둑을 일삼았다. 심원이 하루는 친구와 더불어 창기 집에서 술을 마시고 돌아오니, 그 부인이 크게 노하여 다투기를 그치지 않고는 말을 빼앗아 나가지 못하게 하며, 또 문을 닫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이웃 친구인 윤사걸(尹士傑) 등은 개울가에서 나란히 앉아 건너오지 못하였다. 세원은 산보하다가 이를 보고 큰 소리로 말하기를, “저 편에 변(變)이 있어서 너희들이 강을 건너지 못할 뿐이겠지.” 하였는데, 대개 이 말은 양쪽의 일을빗대어 말하였던 것이다.
○ 최세원이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김관(金瓘)과 함께 반궁(泮宮)에 있을 때, 김관은 명성이 자못 높아 동료들이 추장(推獎)하였다. 나 역시 태산같이 우러러보아 그의 뒷자리를 따랐으나 사마시(司馬試)의 방(榜)을 창(唱)하는 날에는 내가 그의 앞열(列)에 서서 윗자리를 배수(拜受)하였고, 김관은 내 뒷열에 서서 나의 다음 자리를 배수하였으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전강(殿講)하는 날에는 옷섶을 정제(整齊)하고 용수석(龍繡席) 위에 앉으니, 시관(試官)이 경(經)의 뜻을 묻기를 마치 도적을 찾아내는 것같이 하였다. 내가 좌우(左右)로 대답하기를 마치 교만한 말[馬]이 다른 말을 무는 것같이 하여 드디어 제1이 되었다.” 하였다. 방을 내어걸고 나서는 유가(遊街)하면서 장통방(長通坊)으로부터 내려오는데, 쌍일산(雙日傘)은 발[簾]을 번쩍이는 것 같았고, 우부(優夫 벼슬아치 집에서 부리는 하인)가 춤을 추기를 나는 참새같이 하였다. 나는 검붉은 말을 타고는 고삐를 잡고 뛰어 초요경(楚腰輕 기생(妓生) 이름)의 집 앞에 이르러 우부에게 말하기를, “잠깐 들을 말이 있으니, 너가 소리를 높여 불러라.” 하였더니, 우부는 어허랑(御許郞)을 부르는데 그 소리가 하늘을 덮을 지경이라, 초요경이 그 소리를 듣고는 검은 머리를 되는 대로 꽂고 동백기름이 흐르는 초록색 겹옷을 입은 채, 붉은 소매를 걷어올리고 문에 기대어 내다보므로, 내가 앞에 있는 나졸(羅卒)에게 명하기를, “네가 항상 교만하여 내 말을 듣지 않더니, 오늘 일은 과연 어찌된 일인가. 내가 예조 좌랑(禮曹佐郞)이 되면 너는 나의 종아리채를 감당해 내겠느냐.” 하게 하였더니 초요경이 화가 나서 입술을 삐죽거리고 종종걸음으로 들어가면서, “이제야 볼기 위에 먼지를 털게 되었구나.” 하였다. 또 말하기를, “내가 과거에 급제하면 모름지기 밀양 부사(密陽府使)가 되어 만리장성(萬里長城)과 같은 허리에 풍모란난발(風牧丹亂髮)의 은대(銀帶)를 띠고, 청천(淸川) 가에서 흰 구름 같은 장막(帳幕)을 석양(夕陽)에 높이 둘러치고는, 흑룡(黑龍)의 알[卵]과 같은 의자에 걸터앉아 팔을 들어 지휘하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 하니, 큰 형이 시(詩)를 지어 말하기를,
만리장성 같은 허리에 은대를 띠니 / 萬里長城銀作腰
바람에 날리는 모란과 같이 어지러이아름답도다 / 隨風牧丹亂嬌嬈
백운의 장막을 석양에 거두고 / 白雲帳捲斜陽裡
높이 호상에 의지한 손기운이 호방하구나 / 高據胡床手勢豪
하였다.
○ 내가 사는 서산(西山) 남쪽에는 여승(女僧)의 암자가 있는데, 갑술(甲戌)년 7월 16일에 암자에서 우란분회(盂蘭盆會)를 베풀어 선비집 부녀자들이 많이 모였었다. 여자들이 뒷 소나무 언덕에 올라가 더위를 피하는데, 소나무 사이에 버섯이 많이 났는데 향기롭고 고와서 먹음직하였다. 여자들이 탐내어 삶아 먹더니, 많이 먹은 이는 엎어져 기절해 버렸고, 조금 먹은 이는 미쳐서 소리를 지르고, 혹은 노래하면서 춤을 추었으며, 혹은 슬피 울고 혹은 노하여 서로 때리기도 하였는데, 국물을 마셨거나 냄새를 맡은 이는 다만 어질어질 하였을 뿐이었다. 자녀들이 듣고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달려와 모였는데, 암자에는 다 들어갈 수 없어 혹은 산기슭에서 혹은 밭가운데서 각각 병자를 구제하니, 길가의 구경꾼이 저자와 같았다. 주문을 잘 외우는 사람이 있으면 다투어 맞이해서 배[腹]에다 주문을 읽었고, 또 은사발에 불결한 것을 담아 옥수(玉手)로 물에 반죽하여 푸닥거리하여 버리니, 상하ㆍ귀천이 한데 섞여 분변할 수 없었다. 오정(午正)이 지나자 비로소 깨어나기는 하였으나, 이 때문에 병이 든 사람도 혹 있었다.
○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安平大君))은 왕자로서 학문을 좋아하고 시문을 잘하였으며, 서법이 기절(奇絶)하여 천하 제일이었다. 또 그림 그리기와 거문고 타는 재주도 훌륭하였다. 성격이 부탄(浮誕)하여 옛것을 좋아하고 경승(景勝)을 즐겨 북문(北門) 밖에다 무이정사(武夷情舍)를 지었으며, 또 남호(南湖)에 임하여 담담정(淡淡亭)을 지어 만 권의 책을 모아두었다. 문사(文士)를 불러모아 12경시(景詩)를 지었으며, 또 48영(詠)을 지어 혹은 등불 밑에서 이야기 하고 혹은 달밤에 배를 띄웠으며, 혹은 연구(聯句)를 짓고 혹은 바둑 장기를 두고 풍류가 끊이지 않았으며, 항상 술마시고 놀았다. 당시의 이름있는 선비로서 교분을 맺지 않은 이가 없었고, 무뢰하고 잡업(雜業)을 하는 이도 많이 모여들었다. 바둑판과 바둑알은 모두 옥(玉)으로 만들었고, 또 금니(金泥)를 글자에 입히고 사람에게 명주와 생초를 짜게 하여, 곧 붓 가는 대로 글씨를 쓰다가 진초(眞草)와 난행(亂行)을 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내주는 일이 많았다. 나의 중씨(仲氏)인 성간(成侃)이 유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을 시켜 부르므로, 중씨가 가서 뵙고는 정자 가운데 있는 여러 시에 화답하니 시구가 뛰어나고 절묘하여 안평대군(安平大君)은 드디어 공경히 대접해 보내면서 뒷날 다시 만나기를 기약하였다. 그런데 대부인께서 중씨에게 일러 말하기를, “왕자의 도(道)는 문을 닫아 손을 멀리하고 근신하는 길밖에 없는 것인데, 어찌 사람을 모아 벗을 삼느냐. 패할 것이 뻔하니 너는 같이 사귀지 말아라.” 하시므로, 그 뒤에 재삼 불렀으나 끝내 가지 않았더니, 얼마 안 가서 패사(敗死)하였다. 온 집안은 모두 대부인의 문장과 감식(鑑識)에 탄복하였다.
○ 유방효(柳方孝)는 태재(泰齋) 선생의 동생인데, 심준(沈濬)ㆍ윤복(尹福)과 더불어 남대문 밖에서 살았다. 아비의 허물로 말미암아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하였으나 집안이 모두 넉넉하여 소리하는 기생까지 집에다 두고 매양 손을 맞아 술을 많이 마시니, 이웃에서 이를 삼로(三老)라 하였다. 혁혁한 재명(才名)은 없었으나 주색(酒色)을 스스로 즐기니, 또한 한때의 호걸이었다. 방효는 음률을 조금 알아 항상 조정의 명사들을 맞이하여 주연을 베풀었고 술과 안주가 풍성하였다. 날마다 그리하여도 가재(家財)가 군색하지 않았으며, 만년에는 벼슬이 사품(四品)에 이르렀다. 참판 김서(金鉏)의 자는 자고(子固)인데, 평양 부원군(平壤府院君) 조준(趙浚)인 문충공(文忠公)의 외손이었다. 명문에서 태어나 젊어서는 방랑하여 검속을 받지 않았으나 학문을 좋아하여 글을 잘 지었고, 또 행서와 초서를 잘하였으며, 거문고의 운치도 절묘하였다. 여러 번 장원급제하여 나이는 비록 젊었으나 사귀는 사람은 모두 당대의 거경(鉅卿)이었다. 술자리 베풀기를 좋아하였고 술 마시는 기구나 모든 일용품이 모두 극히 호사스럽고 문아(文雅)는 한때에 떨쳤다. 남강(南江)에 서재(書齋)를 짓고 또 성균관 북쪽 골에 쌍계당(雙溪堂)을 지어 매양 봄에는 친구를 맞아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면서 자적(自適)하여 사람들이 삼절(三絶)이라 지목하였는데, 시(詩)ㆍ서(書)ㆍ거문고를 잘하였다. 위비(痿痺 중풍)를 앓아 기거하지 못하였으나 담론하고 술 마시며 읊조리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었고, 언제나 만든 가마를 타고 산에 올라 꿩을 사냥하였으며, 만약 친구 집에 이르면 가마를 멈추고 함께 앉아 이야기하니, 채기지(蔡耆之)가 일찍이 희롱하여 말하기를, “매 새끼는 살이 쪘으나 앉아 있는 자고(子固)는 편하지 않으니 취할 것이 없도다.” 하였다. 기지의 집 대문이 자고의 문과 서로 마주보고 있어 손이 올 때마다 술상을 차려 반드시 부르니, 기지는 웃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네 고을의 교관(敎官)이냐.” 하였다.
○ 음식과 남녀는 사람들의 큰 욕망인데도 지금 색(色)을 모르는 사람이 셋 있다. 제안(齊安)은 무한히 아름다운 아내를 두었으되 항상 말하기를, “부녀자는 더러워서 가까이하지 말아야 한다.” 하여, 마침내 부인과 마주앉지 않았고, 생원(生員) 한경기(韓景琦)는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의 손자인데, 마음을 닦고 성품을 다스린다는 구실로서 문을 닫고 홀로 앉아 일찍이 그 아내와 서로 말한 일이 없었으며, 만약 종년의 소리라도 들리면 막대기를 들고 내쫓았다. 김자고(金子固)에게는 외아들이 있었는데 어리석어서 콩과 보리를 분변하지 못하였고, 또한 음양의 일을 알지 못하므로 자고는 그 후사가 끊어질 것을 염려하여 그 일을 아는 여자를 단장시켜 함께 자게 하고 운우(雲雨 남녀의 교정(交情))을 가르치려 하니, 그 아들은 놀라 상 밑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그 뒤에는 붉게 단장하고 족두리한 여자만 보면 울면서 달아났다.
○ 성묘(成廟)께서는 학문이 깊고 문사(文詞)에 고색(古色)이 있어서 문사(文士)에게 명하여 《동문선(東文選)》ㆍ《여지요람(輿地要覽)》ㆍ《동국통감(東國通鑑)》을 편찬하게 하였고, 또 교서관(校書館)에 명하여 인행하지 않는 책이 없었으니, 《사기(史記)》ㆍ《좌전(左傳)》ㆍ《사전춘추(四傳春秋)》ㆍ《전후한서(前後漢書)》ㆍ《진서(晉書)》ㆍ《당서(唐書)》ㆍ《송사(宋史)》ㆍ《원사(元史)》ㆍ《강목(鋼目)》ㆍ《통감(通鑑)》ㆍ《동국통감》ㆍ《대학연의(大學衍義)》ㆍ《고문선(古文選)》ㆍ《문한유선(文翰類選)》ㆍ《사문유취(事文類聚》ㆍ《구소문집(毆蘇文集)》ㆍ《서경강의(書經講義)》ㆍ《천원발미(天元發微》ㆍ《주자성서(朱子成書)》ㆍ《자경편(自警編》ㆍ《두시(杜詩)》ㆍ《왕형공집(王荊公集)》ㆍ《진간재집(陳簡齋集)》과 같은 것은 내가 기억하는 것이며, 그 밖에 인행된 서적도 또한 많았고, 또 서강중(俆剛中)의 《사가집(四佳集》ㆍ김문량(金文良)의《시우집(拭疣集)》ㆍ강경순(姜景醇)의 《사숙재집(私淑齋集)》ㆍ신범옹(申泛翁)의《보한재집(保閑齋集)》을 모았는데, 오직 이윤보(李胤保)와 우리 문안공(文安公)의 시문만 잃어버려서 인간(印刊)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운 일이다.
○ 내가 저술한 것으로는 《시집》15권, 《문집》15권, 《보집(補集)》5권,《풍아록(風雅錄)》2권, 《주의(奏議)》6권, 《부휴자담론(浮休子談論)》6권, 《용재총화(慵齋叢話)》10권,《금낭행적(錦囊行跡)》30권이고, 편찬한 것은 《풍소궤범(風騷軌範)》30권, 《악학궤범(樂學軌範)》6권, 《상유비람(桑楡備覽)》40권인데, 비록 남의 이목(耳目)에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지난 일을 상고하고 심심풀이로 보기에는 족하다.
○ 능실(陵室) 옆에 재사(齋社)가 있는 것은 옛날부터 그러하였는데, 건원릉(建元陵)ㆍ현릉(顯陵)에는 개경사(開慶寺)가 있었고, 제릉(齊陵)에는 연경사(衍慶寺)가 있었으며, 후릉(厚陵)에는 흥교사(興敎寺)가 있었고, 광릉(光陵)에는 봉선사(奉先寺)가 있었으며, 경릉(敬陵)ㆍ창릉(昌陵)에는 정인사(正因寺)가 있었다. 영릉(英陵)을 여주(驪州)로 옮겨 신륵사(神勒寺)를 보은사(報恩寺)로 고쳐 재사(齋社)로 삼았는데, 헌릉(獻陵)만이 사(社)가 없는 것은 태종(太宗)의 유명(遺命)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사대부도 또한 무덤 옆에 재암(齋庵)을 지었는데, 이는 불교를 숭상해서가 아니라 승도(僧徒)로 하여금 묘산(墓山)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 장악원(掌樂院)은 음률을 아는 사람을 관원으로 삼았는데, 박연(朴堧)ㆍ정심(鄭沈)은 모두 낭료(郞僚)로부터 마침내 제조(提調)에 이르렀다. 당시에 박씨(朴氏) 성을 가진 벼슬아치가 있었는데, 나이가 많아 실직하였으므로 《율려신서(律呂新書)》를 대강 배워 상소를 올려 악관(樂官)이 되기를 구하였더니, 조정에서는 잘 모르고 이를 기용하여 드디어 주부(主簿)를 겸하게 하였다가 다시 첨정(僉正)으로 높여 쓰니, 매양 사람들을 대하면 5음 12율(律)의 껍데기만 논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풍류를 아는 줄만 알았으나 실상은 한 가지도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으므로, 이 사람을 아는 어떤 사람이시를 지어 기롱하기를,
도토리로 원숭이를 속이고 스스로 현명한 척 하니 / 苐票欺狙謾自賢
만약 마음속을 논한다면 울지 못하는 매미와 같도다 / 若論心體嘿寒蟬
세상의 귀가 모두 막혔다고 말하지 말라 / 莫言俗耳皆襲裒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고 하늘에 부끄럽지 않은가 / 不愧于人不愧天
하였다.
○ 세조조(世祖朝)에서 전경법(轉經法)을 행하니, 이는 고려(高麗)의 옛 풍습이다. 그 법은 번개(幡蓋 화려한 양산[日傘])를 앞세우고 누런 뚜껑이 있는 여(輿)에 황금으로 만든 작은 불상(佛像)을 안치한 다음, 앞뒤에는 악인(樂人)이 주악(奏樂)하면서 양종(兩宗)의 중 수백 명이 좌우로 나누어서 따르고, 각각 명향(名香)을 받들어 경(經)을 외우며, 소승(小僧)은 수레에 올라 북을 치는데 경을 외우는 것이 그치면 음악을 하고 음악이 그치면 경을 외운다. 부처를 받들고 궁궐에서 나오면 임금께서 광화문까지 배웅하시고, 해가 지도록 시가(市街)를 순행하여 혹은 모화관(慕華館)ㆍ태평관(太平館)에서 낮 공양(供養)을 받들어 각 관청의 관리들이 분주히 물건을 바쳤는데, 오직 견책(譴責)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육법공양(六法供養)을 베풀었고, 피리소리ㆍ북소리ㆍ염불소리가 하늘을 진동하니, 유가(儒家)의 부녀자들이 물밀듯 모여들어 구경하였다. 예조 좌랑 김구영(金九英)은 나이가 많고 몸도 뚱뚱한데다가 종종걸음으로 걸어가니 땀이 물흐르듯 하고 먼지가 얼굴에 가득히 앉아 구경하는 이가 모두 웃었다.
○ 성묘(成廟)께서는 독실하게 학문에 뜻을 두시어 3시(時)로 강서(講書)하시고 밤에는 옥당에 입직(入直)하는 선비를 불러 함께 강론하시며, 강론이 끝나면 술을 내려 조용히 고금의 치란(治亂)과 민간의 이(利)ㆍ폐(弊)를 물으셨는데, 편복(便服)으로 서로 대하고 각중(閣中)에는 다만 촛불 하나만을 켰을 따름이었다. 혹시 밤 늦게 만취되어 나오면 어전(御前)의 촛대를 내려 주시고 원(院)으로 돌려 보내셨으니, 이는 김연거(金蓮炬)가 끼친 풍속이다.
성묘께서는 문소전(文昭殿)이 오래되어 허물어졌다 하시며 드디어 개수(改修)하게 하시고, 5분의 신주(神主)를 옛 동궁(東宮)인 자선당(資善堂)으로 이안(移安)하실 때 친히 거둥하시서 제사를 지냈으며, 또 개수가 끝난 다음 다시 환안(還安)하실 때에도 또한 이와 같이 하시고는 드디어 용봉대막(龍鳳大幕)을 후원(後苑)에다 치시고 크게 풍류와 잔치를 베풀었으며, 안마(鞍馬)ㆍ채단(彩段)ㆍ사라(紗羅)ㆍ포백(布帛)ㆍ호숙(胡椒)ㆍ궁시(弓矢) 등의 물건을 하사하셨으되, 그 공의 높고 낮은 데 따라 각각 차등이 있게 하시니, 대개 수보감역(修補監役)ㆍ제조낭청(提調郞廳)ㆍ승지(承旨)ㆍ배제집사관(陪祭執事官)ㆍ시위재추제장(侍衛宰樞諸將)ㆍ담여환관(擔輿宦官)ㆍ충의위(忠義衛)ㆍ전악(典樂)ㆍ반감(飯監)등이 모두 이에 참여하였다. 내수(內豎)들이 명을 받들어 여러 번 나와서 술을 권하여 사람들이 모두 취하여 나왔다. 내가 그때 예조 판서가 되어 친히 그 일을 당하였는데, 모두가 한때의 성사(盛事)였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여러 위의 신주를 모시고 옛 동궁에서 문소전(文昭殿)까지 왔다가 얼마 안 되어 돌아가셔서 옛 동궁(東宮)을 혼전(魂殿)으로 삼고 상담(祥禫) 후에 문소전에 부(附)하였으니, 그 징조가 이미 나타난 것인가 싶다.
○ 궁중에서 왕자가 탄생하면 권초의 예[捲草之禮]라는 것이 있는데, 탄생한 날 다북쑥으로 꼬은 새끼를 문짝 위에 걸고, 자식이 많고 재화가 없는 대신에게 명하여 3일 동안 소격전(昭格殿)에서 재(齋)를 올리고 초제(醮祭)를 베풀게 하는데, 상의원(尙衣院)에서는 5색 채단을 각각 한 필씩 바쳤고, 남자면 복건[幞頭]ㆍ도포ㆍ홀(笏)ㆍ오화(烏靴)ㆍ금대(金帶)요, 여자면 비녀ㆍ배자(背子 덧옷)ㆍ혜구(鞋屨) 등의 물건을 노군(老君) 앞에 진열하여 장래의 복(福)을 빌었다. 밤중에 제사가 끝나면 헌관이 길복(吉服)을 입고 사람을 시켜 포단(布段)과 관복(冠服)을 메게 하여 앞세우고, 궐내에 가서 방문 밖에 이르러 탁상에다 진열하고는 향불을 피우고 재배하면 내인(內人)이 받아들여 갔으며, 현관은 다북쑥 새끼를 걷어 푸대 속에 넣어 이것을 옻칠한 함에 넣고는 붉은 보자기에 싸서 문 밖으로 나가 조심스럽게 그 함을 봉한 다음, 내자시(內資寺)의 정(正)에게 주면 정하게 이를 받들고 가서 그 사(司)의 창고에 넣어 두는데, 만약 여자면 내섬시(內贍寺)에서 이를 주관하였다. 갑인(1494)년 봄에 원자(元子)가 탄생하실 때 내가헌관이 되어 행사를 맡았다. 대개 소격서(昭格署)는 중국 도가(道家)의 행사를 모방하여 태일전(太一殿)에서 칠성(七星)과 제숙(諸宿)을 제사지내는데, 그 상(像)은 모두 머리를 풀어헤친 여자 모양이었다. 삼청전(三淸殿)에서는 옥황상제(玉皇上帝)ㆍ태상노군(太上老君)ㆍ보화천존(普化天尊)ㆍ재동제군(梓潼帝君) 등 10여 위를 제사지내었는데 모두 남자의 형상이었다. 그 외에 안팎의 여러 단(壇)에는 사해용왕(四海龍王)과 신장(神將)과 명부시왕(冥府十王)과 수부(水府)의 여러 신을 모셔 위패에 이름을 쓴 것이 무려 수백이었다. 헌관과 서원(署員)은 모두 흰옷에 검은 두건으로 재를 올렸고, 또 관(冠)을 쓰고 홀(笏)을 들고 예복을 입고 제사를 지냈으되 제전(祭奠)은 과실ㆍ인절미ㆍ차(茶)ㆍ과자ㆍ술이며 분향백배(焚香百拜)한다. 도사류(道士流)는 머리에 소요관(逍遙冠)을 쓰고 몸에는 얼룩얼룩한 검은 옷을 입으며, 경쇠[磬]를 24통(通) 울리고 난 뒤에, 두 사람이 도경(道經)을 읽고 또 축사(祝辭)를 푸른 종이에 써서 태우는데, 그 하는 일이 어린애 장난과 같았지만 조정의 벼슬아치가 헛되이 발사(祓祀)를 받드니, 한 번 제사지내는 데 드는 비용이 너무도 많았다. 내가 시를 지어 말하기를,
남궁의 학사 머리가 희뜩희뜩한데 / 南宮學士髮星星
흰 옷에 검은 두건 쓰고 부지런히 신령께 비는구나 / 白服烏巾苦乞靈
오히려 동료들이 비웃을까 두렵도다 / 却怕朋僚爭指笑
노군이 와서 노자의 뜰에서 예하도다 / 老君來禮老君庭
하였다.
○ 중추(中樞) 민대생(閔大生)은 나이 90여 세였는데, 정월 초하룻날 조카들이 와서 뵙고는 그 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원하건대 숙부께서는 백 년까지 향수(享壽)하소서.” 하니, 중추가 노하여 말하기를, “내 나이 90여 세인데 내가 만약 백 년을 산다면 다만 수 년 밖에 살지 못할 것이니, 무슨 입이 이렇게 복 없는 소리를 하느냐.” 하고는 드디어 내쫓았다. 또 한 사람이 나아가 말하기를, “원하건대, 숙부께서는 백 년을 향수하시고 또 백 년을 향수하옵소서.” 하였더니, 중추는 “이것은 참으로 송수(頌壽)하는 체모(體貌)로다.” 하고, 잘 먹여 보내었다.
○ 예조(禮曹)는 옛날 주관(周官) 종백(宗伯)의 직인데, 사제(祠祭)ㆍ연향(宴享)ㆍ사대(事大)ㆍ교린(交隣)의 모든 예문(禮文) 등을 맡아보아 그 임무가 실로 가볍지 않았다. 이조는 정사(政事)를 조정하고, 병조는 군기(軍機)를 맡으며, 호조는 재리(財利)를 주관하고, 형조는 징송(徵訟)을 맡으며, 공조는 백공(百工)의 역사(役事)를 관장하였으니, 오직 예조가 가장 아름답다 하겠다. 비록 큰 일을 만나면 몹시 바빠서 틈이 없으나 일이 끝나면 항상 한가로웠다. 일본(日本)ㆍ여진(女眞)의 사신을 접대할 때에는 당상관 세 사람이 모두 무늬 있는 예복을 입었고, 예빈시(禮賓寺)는 연회를 베풀었으며, 악관(樂官)들은 연주를 하였다. 각도의 감사(監司)ㆍ병사(兵使)와 연경(燕京)으로 가는 사신에게 내리는 연회도 이와 같이 하였는데, 공연(公演)을 마친 뒤에 여러 빈객을 거느리고 다시 낭청에서 종일 이야기하고 술 마시며 주악(奏樂)하는 소리가 연속되었으니, 사그락사그락하는 비단 옷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내가 일찍이 사은사로서 연경으로 가니, 예부 상서 주홍모(周洪謨)가 와서 회동관(會同館)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회회(回回)ㆍ라마(剌麻)ㆍ운남(雲南)ㆍ만면(蠻緬) 등 모든 나라 사람들이 상서 앞에 꿇어 앉아서 매매(賣買)할 일을 우러러 호소하면, 상서는 일일이 해설하되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물리칠 것은 물리치므로, 그때에 나는 공경하고 사모하기를 마지않았다. 내가 판서가 되었을 때, 왜와 여진이 매양 연회가 끝나면 다투어 앞에 나와 꿇어 앉아 각각 그 뜻을 진정하였는데, 이는 비록 크고 작은 것은 같지 않으나 그 규모에서는 매한가지라 하겠다.
○ 세종조(世宗朝)에 신상(申商)은 예조 판서가 되고, 허조(許稠)는 이조 판서가 되었는데, 신은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집무하러 나가서 해가 기울면 돌아오고, 허는 이른 아침에 집무하러 나가서 해가 지고 난 뒤에 돌아왔었다. 하루는 허가 먼저 나가서 조(曹)에 앉았는데 신이 이조에 이르렀다가 얼마 안 되어 돌아갔다는 소리를 듣고 사람을 시켜 가서 고하기를, “어찌 늦게 출근하여 일찍 파하시오.” 하니, 신이 크게 웃으면서 말하기를, “대인은 일찍 출근한다 해도 무슨 이익되는 일이 있으며, 내가 비록 늦게 출근한다 하나 무슨 손해를 끼치는 일이 있습니까. 각각 자기의 수완에 달려 있을 따름입니다.” 하였다. 신은 때에 임하여 결단을 잘 하였고, 허는 부지런하되 각박하게 시행하니 성격이 같지 않은 것이다.
○ 최세원(崔勢遠)은 일찍이 말하기를, “내 친구 중에 강진산(姜晉山)ㆍ노선성(盧宣城)ㆍ성하산(成夏山)은 모두 음탕하고 못난 사람이로되, 오직 서평(西平) 한경신(韓敬愼)만은 절조가 있다 하여 나도 또한 당시의 성인(聖人)이라 말했더니, 이제 와서 보니 성인이 아니로다.” 하므로, 사람들이 그 연고를 묻자, 대답하기를, “하루는 새벽에 일어나 울타리 틈으로 가만히 들여다보니, 서평이 문 앞 추녀 끝에 앉아 있는데, 어린 종년이 세숫물을 올리니까, 서평이 세숫물을 움켜서 종년 얼굴에 뿌리면서 희롱하는데 이것이 어찌 성인의 소위이겠는가.” 하니, 사람들이 모두 절도(絶倒)하였다.
○ 진일(眞逸) 선생이 말하기를, “꿈에 제학(提學) 이백고(李伯高)를 만났는데 이백고는 용이 되고 나는 용을 붙잡고 날아서 강을 건널 때, 내가 떨어질까 걱정하니 용이 돌아보고는, ‘내 뿔을 꼭 잡아라.’ 하였다. 드디어 강언덕에 그쳐서 보니, 초목과 인물이 모두 인간 세상의 것이 아니었기로 꿈을 깨어 백씨께 말하였더니, 백씨가 말하기를, ‘백고는 당시의 큰 덕망이 있는데다가 일찍이 중시(重試)에 뽑혔는데, 그대가 그 뿔을 잡았다 하니 반드시 중시에 장원으로 뽑힐 것이다.’ 하였다.” 하더니, 얼마 안 가서 백고는 주살당하였고 진일도 또 병이 들었는데, 병중에 시를 지어 백씨에게 대신 쓰게 하니 그 시에,
서풍이 아름다운 나무를 스치니 / 西風拂嘉樹
떨어지는 이슬이 윤기를 발하도다 / 零露發華滋
내 또한 하나의 천물이니 / 我亦一天物
옥녀에게 기한이 있도다 / 玉汝來有期
하니, 백씨가 말하기를, “이 시가 크게 생기(生氣)가 있으니 그대는 마땅히 병이 나으리라.” 하였으나, 그 이튿날 죽었다. 이는 모두 흉한 징조요, 아름다운 징조가 아니었다.
○ 나는 예조 판서로서 장악원의 제조(提調)가 되었는데, 손에게 베푸는 연향과 사신에게 내리는 연향과 악공을 선발할 때에 음악을 듣지 않는 날이 없었고, 또 태평관(太平館)에 왕래할 때에도 동리의 사면이 모두 악인(樂人)과 기녀의 집이었다. 숭례문 밖의 민보(敏甫)ㆍ여회(如晦)의 두 집 비복(婢僕)들이 모두 선수(善手)임으로 내가 일찍이 지나다가 들어가서 들었고, 또 대가(大家)집 옆에 홍인산(洪仁山)ㆍ안좌윤(安左尹)의 두 큰 집이 있는데, 또한 비복들에게 음악을 가르쳐서 그 소리가 청아하고 밤이 깊도록 그치지 아니하여 매양 누워서 이것을 듣는 것이 또한 즐거움이었다. 내가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빈한한 선비가 부지런히 독서하지만 명성을 차지하지 못하고 죽는 사람이 많거늘, 나는 나이가 어려서 급제하여 벼슬이 육경(六卿)에 이르고, 밤낮으로 노래 부르는 가운데 있으니 어찌 홀로 태평(太平)의 즐거움을 누림이 이와 같은가.” 하였더니, 얼마 안 가서 성묘(成廟)께서 돌아가셨으므로 내가 예관(禮官)으로서 친히 염습(斂襲)을 받들어 통곡하면서 거적자리에서 잤고, 또 임금의 관(棺)을 모시고 산릉(山陵)으로 가니, 그 사이 궁인의 휘장과 백관의 뜰에서 곡성이 밤낮으로 그치지 않았다. 이때 비통한 것을 당하여 머리가 희고 늙은 지경에 또 이와 같은 변을 만나니, 대개 즐거움이 지극하면 괴로움이 오는 것은 자연의 이치다. 내가 어려서 방옹(放翁)과 더불어 서로 정분이 두터워 빈 집에 우거하면서 독서를 하였는데, 이웃 친구인 조회(趙恢)의 집과 서로 몇 리 정도 떨어져 있었다. 그 집에 능금나무가 있었는데 하루는 방옹이 내게 말하기를, “졸다가 병을 얻는 것은 조(趙)의 집에 가서 능금을 먹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므로, 이에 두 사람이 함께 가보니 능금이 나무에 가득하여 찬란하게 붉었으되 문이 닫혀 들어갈 수가 없었고 주인을 불렀으나 또한 대답이 없었으며, 동복(僮僕)들은 문 안에서 술 마시고 웃으면서 떠들썩한데다가 소낙비가 한줄기 쏟아졌다. 문 앞에는 큰 말이 회(槐)나무에 매어 있었고, 작은 말이 또한 서너 마리 있을 뿐 한 사람도 없었다. 방옹이 말하기를, “주인이 손님을 따돌리기를 이같이 심하게 하니 이 말을 훔쳐가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므로,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한 마리씩 타고 시냇가로 내달아 어정거리면서 독서하는 곳에 와서 두 말을 창고 속에 매어 두었는데, 방옹이 말하기를, “잡아먹고 싶다.”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어찌 이런 도리가 있겠느냐. 이러면 도적과 다름 없다.” 하였더니, 방옹은 말하기를, “회(恢)가 비록 이 일을알지라도 관(官)에 고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고는, 드디어 절구공이를 들고 말 머리를 치려고 하므로 내가 붙잡고 이를 제지하였더니, 이튿날 회가 왔는데 눈이 퀭하고 얼굴이 초췌하므로 방옹이, “자네는 어찌 편치 않은 기색(氣色)이 있는가.” 하고 물었더니, 회는 말하기를, “어제 처고모가 금포(金浦) 향야(鄕墅)로 돌아가려 하여 말을 문 밖에 매어 두었더니, 도적이 말을 훔쳐갔으므로 온 집안이 급박히 사람을 나누어 찾고 있으며, 나도 고양(高陽)과 교하(交河) 등지를 순력(巡歷)하였으나 지금까지 찾지를 못하여 이 때문에 근심이 쌓여 있다.” 하였다. 조금 있으니 말이 창고 속에서 울므로 방옹이 웃으니 회가 가서 본즉, 곧 그 말이므로 회는 한편 노하고 또 기뻐하면서 꾸짖기를 마지 아니하니 이때 만당(滿堂)이 크게 웃었다.


[주D-001]홍분유취(紅粉乳臭)의 빈축 : 여말(麗末)에 권문세가(權門勢家)의 자손은 어린아이도 과거를 시켰는데, 이들이 분홍 저고리를 입고, 입에 젖내가 날 정도로 어리다는 뜻.
[주D-002]권초의 예[捲草之禮] : 산실(産室)에 깔았던 거적자리를 걷어 치우는 예(禮).
[주D-003]주관(周官) 종백(宗伯)의 직 : 궁중의 의식 제향ㆍ능침ㆍ종실ㆍ귀족에 관한 일을 맡아 보는 관아.

 

용재총화 제3권
용재총화 제3권


○ 고려 시중(侍中) 강감찬(姜邯贊)이 한양 판관이 되었는데, 그때에 부의 경내에 호랑이가 많아 관리와 백성이 많이 물려 부윤(府尹)이 걱정을 하자, 강감찬이 부윤에게, “이는 매우 쉬운 일입니다. 3, 4일만 기다리면 내가 제거하겠습니다.” 하고는 종이에 글을 써서 첩(貼)을 만들고는 아전에게, “내일 새벽에 북동(北洞)에 가면 늙은 중이 바위 위에 앉아 있을 것이니, 네가 불러서 데리고 오너라.”고 부탁하였다. 아전이 그가 말한 곳에 가보았더니, 과연 남루한 옷에다 흰 베로 만든 두건을 쓴 늙은 중 한 사람이 새벽 서리를 무릅쓰고 바위 위에 있다가 부첩(府貼)을 보고 아전을 따라와서 판관에 배알하고는 머리를 조아릴 뿐이었다. 강감찬이 중을 보고 꾸짖기를, “너는 비록 금수이지만 또한 영(靈)이 있는 물건인데, 어찌 이와 같이 사람을 해치는냐. 너에게 5일간을 약속할 터이니, 추한 무리를 인솔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라. 그렇지 않으면 굳센 화살로 모두 죽이겠다.” 하니, 중은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였다. 부윤이 크게 웃으며, “판관은 잘못 본 것이오, 중이 어찌 호랑이겠소.” 하니, 강감찬이 늙은 중을 보고, “본 모양으로 화하라.” 하니, 중이 크게 소리를 지르고는 한 마리의 큰 호랑이로 변하여 난간과 기둥으로 뛰어오르니, 그 소리가 수리 밖에까지 진동하였으며 부윤은 넋을 잃고 땅에 엎드렸다. 강감찬이, “그만두어라.” 하니, 호랑이는 전 모양으로 홱 돌아가서 공손히 절하고 물러갔다. 이튿날 부윤이 이원(吏員)에게 동쪽 교외에 나가 살펴보라고 명하여 가서 살펴보니 늙은 호랑이가 앞서고 작은 호랑이 수십 마리가 뒤를 따라 강을 건너갔다. 이로부터 한양부에는 호랑이에게 당하는 걱정이 없어졌다. 강감찬의 처음 이름은 은천(殷川)이며, 복시(覆試)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이 수상에 이르렀다. 사람됨이 몸집이 작고 귀도 조그만했다. 용모가 아주 크고 위엄스럽고 가난한 어떤 선비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관대(冠帶)를 단정히 하여 앞줄에 서고, 강감찬은 헌옷을 입고 그 밑에 있었는데, 송나라의 사신이 가난한 선비를 보고, “용모는 비록 크고 위엄이 있으나 귀에 성곽(城郭)이 없으니, 필연코 가난한 선비다.” 하고, 강감찬을 보고는 두 팔을 벌이고 엎드려 절하며, “염정성(廉貞星)이 오랫동안 중국에 나타나지 않더니, 이제 동방(東方)에 있습니다.” 하였다.
○ 고려 장사랑(將仕郞) 영태(永泰)는 광대놀이를 잘하였다. 겨울인데도 용연(龍淵) 가에 뱀이 나타나니, 절의 중이 용의 새끼라고 가져다 길렀다. 하루는 영태가 옷을 벗고 전신에 오색(五色)으로 용의 비늘을 그리고 승방(僧房)의 창을 두드리며, “선사(禪師)는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못 속의 용신(龍神)인데, 선사가 나의 자식을 애호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 은덕에 감동하여 왔다. 어느 날 어느 저녁에 내가 다시 와서 선사를 다시 맞으러 오겠다.”는 말을 마치고는 자취를 감추었다. 약속한 날, 중은 새옷으로 잘 차려 입고 기다리고 있으려니, 이윽고 영태가 와서 중을 업고 연못가로 뛰어와서 말하기를, “꽉 잡지 마시오. 바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오.” 하니, 중은 눈을 감고 손을 놓자, 영태는 중을 물 속으로 던지고 가버렸다. 중의 잘 차려 입은 옷이 모두 더러워지고 몸에 상처를 입고 기어서 돌아와 이불을 덮고 누었다. 다음날 영태가 와서, “스님은 어쩌다가 그렇게 심하게 아픕니까.” 하니, 중은 말하기를, “용연의 신이 늙어서 노망을 하여 무고한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하였다. 또 영태가 충혜왕(忠惠王)을 따라 사냥을 갔을 때도 늘 광대놀이를 하니, 임금은 그를 물 속에 던져버렸다. 영태가 물을 헤치고 나오니, 임금은 크게 웃으며, “너는 어디로 갔다가 지금 어디서 오느냐.” 하니, 영태는 “굴원(屈原)을 보러 갔다가 옵니다.” 하였다. 임금이 “굴원이 뭐라고 하드냐.” 하니, “굴원이, ‘나는 어리석은 임금을 만나 강에 몸을 던져죽었지만, 너는 명군(明君)을 만났는데 어찌되어 왔느냐.’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은 기뻐서 은구(銀甌) 하나를 주었다. 옆에 있던 우인(虞人 사냥하는 하급관리)이 이것을 보고 역시 물에 몸을 던졌다. 임금이 사람을 시켜 머리칼을 붙잡고 끌어내서 그 이유를 물으니, “우인은 굴원을 보러 갔다.” 하였다. 임금이, “굴원이 뭐라고 하드냐.” 하니, 우인이, “그인들 뭐라 말하겠으며, 낸들 무엇이라 말하겠습니까.” 하니, 삼군(三軍)이 크게 웃었다.
○ 고려 원수(元帥) 이방실(李芳實)은 젊었을 때에, 용맹하기 짝이 없었다. 일찍이 서해도(西海道)에서 노닐 적에 노상에서 우연히 훤칠하고 키가 큰 사나이 한 사람을 만났다. 그 사나이는 활과 화살을 손에 들고 말 앞에서, “영공(令公)은 어디로 가십니까. 모시고 가겠습니다.” 하였는데, 이방실은 그 사람이 도적인 줄 알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약 10리 남짓 가니 논 가운데 비둘기 한 쌍이 앉아 있었다. 도적이, “공(公)은 쏠 수 있습니까.” 하니, 이방실이 화살 한 개로 두 마리를 맞혀서 잡았다. 해가 저물어 빈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는데, 차고 있던 활과 화살을 도적에게 주면서, “나는 잠깐 동안 말을 보고 올 터이니 너는 여기 있거라.” 하고는 마굿간으로 가서 웅크리고 앉으니 도적이 힘껏 활을 쏘자, 이방실은 날아오는 화살을 손으로 잡아 마구간에 끼어 두었다. 이렇게 하기를 10여 차례 하니 한 통에 있던 화살이 모두 떨어졌다. 도적이 그 용기에 탄복하여 빌면서 살려 달라고 하였는데, 옆에 높이가 몇 길 되는 상수리 나무가 있었다. 이방실이 몸을 위로 솟구쳐 나무 끝을 휘어잡더니 한 손으로 도적의 머리칼을 붙잡아 나무 끝에다 매고 칼로 머리 가죽을 벗기니 휘었던 나무 끝이 튀겨 일어나는데, 그 기세(氣勢)가 하늘을 뚫을 만큼 세차므로 머리칼은 모두 뽑히고 몸은 땅에 떨어졌으나, 이방실은 돌아보지도 아니하고 가버렸다. 지위가 높아진 만년(晩年)에 다시 그곳을 지나다가 농가에서 하루를 머물게 되었는데, 집안은 매우 큰 부자였다. 지팡이를 짚고 나와 맞이하던 노인이 크게 술상을 차리더니 술이 취하자 노인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나는 어렸을 때 용맹스런 것만 믿고 도적이 되어 무수한 행인을 죽이고 약탈을 하다가 한 소년을 만났는데, 비할 수 없이 용맹스러웠습니다. 내가 그를 해치고자 하였으나 도리어 내가 해를 당하여 하마터면 죽으려다가 살아났습니다. 이로부터 개과하고 농업에 힘써 다시는 사람들의 물건을 빼앗지 않았습니다.” 하고는, 모자를 벗어 보이는데, 머리가 이마처럼 번들번들하여 머리칼이 하나도 없었다. 이방실에게 누이동생이 있었는데, 역시 용맹하기 짝이 없었다. 항상 작은 나뭇가지를 벽에 꽂아두고 형제가 나뭇가지 위를 올라다니는데, 이방실이 올라 가면 가지가 움직였으나, 누이동생이 지나가면 움직이지 않았다. 또 하루는 누이동생이 파리한 사동(使童)과 파리한 말을 타고 강남(江南)으로 건너가는데, 배를 타려는 사람들이 서로 먼저 건너려고 다투다가 누이동생을 들어 내리니, 누이동생이 크게 노하여 배의 노를 들고 배 타려던 사람들을 난타하였는데, 굳세기가 나는 새매와 같았다.
○ 고려의 신우(辛禑)는 성품이 광포하고 어리석었다. 일찍이 산 속에서 놀 때 초동(樵童) 한 사람을 만났는데, 풀덩굴로 짠 삿갓에다 솔방울로 꼭지를 하고 상수리로 갓끈을 하고 있었다. 신우가 이것을 보고 좋아하여 쓰고 있던 정모(頂帽)와 산호로 된 갓끈을 벗어서 이것과 바꾸니, 초동은 길가에 우두커니 서서 황송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신우는 초동의 삿갓을 쓰고 좋아서 말에 채찍질을 하여 날뛰면서 달리는데 동자의 얼굴에는 두려워하는 빛이 있으니, 오히려 바꾼 것을 도로 빼앗아갈까 두려워하는 빛이었다. 우리 집에 나이 90이 넘은 노파가 있는데, 전에 말하기를, “젊었을 때에 송도(松都)에서 살았는데, 신우는 얼굴이 희고 눈이 붉은데, 흰옷을 입고 말을 타고 다녔다. 몽둥이를 가진 군사 수명이 앞을 인도하는데, 크고 작고 간에 들어가 보지 않는 집이 없었으며, 아름다운 여자나 처녀를 만나면 강간하여 더럽히니, 집집마다 나무 궤나 함을 만들어 신우가 놀러 나왔다고 듣기만 하면, 부인들은 다투며 피해 들어갔다. 하루는 신우가 봉원군(蓬原君) 정양생(鄭良生)의 댁에 와서 〈도첨가(搗砧歌 옷감을 다듬는 다듬잇돌 노래)〉를 부르다가 마을 사람들에게 ‘이 집은 누구의 집이냐.’ 물으니, ‘정 대부댁입니다.’ 하니, 신우는 즉시 말을 달려 달아나면서, ‘그 사람은 무섭다. 그 사람은 무섭다.’ 하였는데, 이것은 정양생의 성격이 곧아 범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외조모 정씨(鄭氏)는 봉래군의 딸이므로 내가 이 이야기를 들었다.” 하였다.
○ 신돈(辛旽)이 국정(國政)을 잡은 처음에 기현(奇顯)의 집에 기숙하면서 기현의 처와 사통하였는데, 기현 부처는 늙은 노비처럼 시종하였다. 신돈의 권위가 점차 성해져서 백성의 목숨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으니 죽을 지경에 두고자 한다면 뜻대로 안 됨이 없었다. 만약 자색이 아름다운 사대부의 처첩이 있다고 들으면, 그 남편을 조그마한 죄과로라도 순군옥(巡軍獄)에 보내고는 기현 등을 시켜서, “만약 주부(主婦)가 친히 가서 부탁하면 억울함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전하게 하였다. 그 부인이 신돈 집에 와서 대문을 들어서면 말과 따르는 사람을 돌려보내고, 중문을 들어서면 비복들까지 보내게 하였으며, 신돈 집안 사람이 데리고 안문으로 들어오면 신돈은 서당(書堂 서재)에 혼자 앉아 있었다. 옆에 마련된 이부자리에서 마음대로 간음하는데, 사랑하고 싶은 자가 있으면 수일 동안 머물게 하였다가 보내고서는 그녀의 남편을 놓아 주었다. 만약 불손한 자가 있으면 벌을 주기도 하고 혹은 귀양보내기도 하는데, 이 때문에 죽게 된 자도 있었으므로, 부녀자들은 그 남편이 잡혔다고 들으면 반드시 단장을 하고 먼저 신돈의 집에 가는데, 하루도 빠진 날이 없었다. 신돈은 양도(陽道)가 쇄할까 염려하여 흰 말의 음경을 자르거나 지렁이를 회(膾)쳐 먹는데, 만약 황구(黃狗)나 흰 매를 보면 소스라쳐 놀라고 두려워하니, 그 당시 사람들은 늙은 여우의 정령이라 하였다.
○ 고려 재신(宰臣) 조운흘(趙云仡)은 시대가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 환란을 피하고자 꾀하여 미친 사람 시늉을 하였었다. 그 전에 서해도(西海道) 관찰사가 되었을 적에는 언제나 “아미타불”을 외었다. 공과 서로 친한 수령 한 사람이 있었는데, 창 밖에 와서 “조운흘” 하고 외었다. 공이 “너는 어찌 내 이름을 외우느냐.” 하니, 수령은, “영감의 염불은 성불(成佛)하기 위함이요, 나의 염불은 영감같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고는 서로 마주보고 크게 웃었다. 또 청맹(靑盲 눈은 멀정하나 보지 못한다)병이 들었다고 거짓으로 핑계를 대고 사직하여 집에 있었는데, 그의 첩이 공의 아들과 서로 사통하여 늘 앞에서 수작을 하였으나, 수년 동안 모르는 척하였다. 난리가 진정되자 눈을 부비며, “나의 눈병이 나았다.” 하더니, 그 첩을 데리고 뱃놀이를 가서 그 죄를 다스려 강에 던졌다. 그가 살던 시골집은 지금의 광나루[廣津] 밑에 있다. 공이 자청하여 사평원주(沙平院主)가 되었는데, 마을 사람들과 사귀어 늘 서로 모여 앉아 술마시며 잡담을 하는데, 끝날 줄 몰랐다. 하루는 정자 위에 앉았는데, 조정에서 쫓겨나 귀양가는 자가 여럿이 강을 건넜다. 공이 시를 짓기를,
낮이 되니 사람 불러 사릿문 열게 하고 / 柴門日午喚人開
임정으로 걸어나가 석태 위에 앉는다 / 步出林亭坐石苔
지난밤 산중에 비바람이 거세더니 / 昨夜山中風雨惡
가득 찬 시냇물에 낙화가 흘러온다 / 滿溪流水泛花來
하였다.
○ 고려 정승 한종유(韓宗愈)는 어렸을 때에, 방탕불기(放蕩不羈)하여 수십 명과 무리를 짜고 언제나 무당들이 노래하고 춤추는 데에 가서 음식을 빼앗아 취하도록 포식하고는 손벽을 치며 양화(楊花) 노래를 부르니, 그때 사람들이 양화도(楊花徒)라고 불렀다. 일찍이 공은 양손에 칠을 하고 밤에 남의 집 빈소(殯所)로 들어갔다. 그 집 부인이 빈전(殯前)에 와서 곡을 하는데, “임이여, 임이여, 어디로 가셨습니까.” 하자, 공이 장막 사이로 검은 손을 내밀며 가는 소리로, “내 여기 있소.” 하니, 부인은 놀랍고 무서워 달아나고, 공은 제상(祭床)에 차려놓은 것을 모두 가지고 돌아오는 이런 미친 행동이 많았다. 상국(相國)이 되어 공명과 사업이 당세에 빛나고, 만년에는 물러나 고향에서 노년을 보냈는데 지금의 한강 상류의 저자도(樗子島)이다. 일찍이 시를 짓기를,
10리 평호에 보슬비 지나고 / 十里平湖細雨過
한 줄기 긴 피리소리 갈대꽃 너머로 들린다 / 一聲長笛隔蘆花
금솥에 국 요리하던 손을 가지고 / 却將金鼎調羹手
한가로이 낚싯대 잡고 해저문 모래밭을 내려간다 / 閑把漁竿下晩沙
하고, 또
검은 사모에 짧은 갈옷으로 지당을 돌아서니 / 烏紗短褐遶池塘
버드나무 언덕 시원한 미풍이 얼굴에 스친다 / 柳岸微風酒面凉
천천이 걸어 돌아오니 산 위엔 달이 떴고 / 緩步歸來山月上
장두에선 아직도 연꽃 향기 스며온다 / 杖頭猶襲藕花香
하였다.
○ 철성(鐵城 철성 부원군은 최영을 작봉한 것이다) 최영(崔瑩)은 그의 아버지가 어렸을 때부터 늘 “황금을 보기를 흙같이 하라.[見金如土]”라고 가르쳤으므로, 항상 이 네 글자를 큰 띠[紳]에 써서 종신토록 지니고 다녀 잊지 않았다. 국정(國政)을 잡아 위신이 중외에 떨쳤으나 남의 것을 조금도 취하지 아니하고 겨우 먹고 사는 데 족할 따름이었다. 당시의 재상들은 시로 초대하여 바둑으로 날을 보내면서 다투어 성찬(盛饌)을 차려 호사함에 힘썼으나, 공만은 손님을 초대하여 한낮이 지나도록 찬을 내놓지 않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기장과 쌀을 섞어서 지은 밥에다 잡동사니 나물을 차렸지만, 손님들은 배고픈 참이라 채반(菜飯)이라도 남김없이 먹고는, “철성 집 밥이 맛이 좋다.” 하니, 공은 웃으며, “이것도 용병(用兵)하는 술모(術謀)요.” 하였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시중(侍中)이 되었을 때에 점련(占聯)하기를,
3척 칼머리에 사직이 편하고나 / 三尺劍頭安社稷
하니, 당시의 문사들은 아무도 대구를 짓지 못했는데, 공이 재빨리,
한가닥 채찍 끝으로 천지가 안정된다 / 一條鞭末定乾坤
하니, 모든 사람들이 탄복하였다. 공이 항상 임렴(林廉)의 소행을 분하게 여겨 그의 종족을 모두 죽였는데, 공이 형(刑)을 받으면서, “평생 동안 나쁜 짓 한 일이 없는데, 다만 임렴을 죽인 것이 지나쳤다. 내가 탐욕한 마음이 있었다면, 내 무덤 위에 풀이 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풀도 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그의 무덤은 고양군(高揚郡)에 있는데, 지금까지도 한줌의 잔디도 없는 벌거벗은 무덤이라, 흔히들 홍분(紅墳)이라고 한다.
○ 포은(圃隱)은 학문이 정수(精粹)하고 문장도 호한(浩瀚)하였다. 고려 말에 시중(侍中)이 되어 충성을 다하여 나라를 돕는 것을 자기의 일로 삼았다. 혁명에 즈음하여 천명(天命)과 인심이 모두 추대하는 곳이 있었건만 공만 홀로 의연(毅然)히 범하지 못할 기색을 하고 있었다. 평소에 서로 잘 아는 중이 있었는데, 공에게 말하기를, “시사(時事)를 알만한데, 공은 어찌 고집만 하고 고생하는가.” 하니, 공은 “사직을 맡은 사람이 감히 두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나는 이미 처신할 바가 있다.” 하였다. 하루는 매헌(梅軒 권우(權遇)의 호)이 뵈러 갔는데 마침 공이 나왔다. 공을 따라 동리를 나오는데, 화살통을 짊어진 무사 수명이 말 앞을 가로질러 가니, 아졸(呵卒)이 벽제(辟除) 소리를 질렀으나 무사는 피하지 않았다. 이때 공이 매헌을 보고, “그대는 속히 가라. 나를 따르지 말라.” 하였으나, 매헌이 그대로 따라가니 공이 갑자기 노하여, “어찌 내 말을 듣지 않는가.” 하므로, 매헌이 부득이 작별하고 돌아왔는데 조금 있다가 누가 와서, “정 시중이 살해당했다.” 하였다.
○ 길재(吉再) 선생은 고려가 멸망함을 통탄하여 문하주서(門下注書)의 벼슬을 던지고 선산(善山) 금오산(金鰲山) 밑에 살면서 본조에서는 벼슬하지 않기로 맹서하였는데, 본조에서는 예로써 대하였으나 역시 그 뜻을 빼앗지 못했다. 공은 군(郡)의 여러 생도를 모아 두 재(齋)로 나누었는데, 양반의 후손들을 상재(上齋)로 삼고, 마을의 천한 가문의 아이들을 하재(下齋)로 삼아, 경(經)ㆍ사(史)를 가르치고 근(勤)ㆍ타(惰)를 시험하는데 하루에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 백 수십 명이었다. 공이 일찍이 〈한거시(閑居詩)〉를 지었는데,
차갑고 맑은 샘물에 낮을 씻고 / 盥手淸泉冷
무성한 나무에 몸을 비긴다 / 臨身茂樹高
관자ㆍ동자가 찾아와 글자를 물으니 / 冠童來問字
이럭저럭 더불어 소요함도 좋구나 / 聊可與逍遙
하였고, 또
시냇가 초가에 혼자서 한가로이 / 臨溪茅屋獨閑居
달 밝고 바람 맑아 흥겹고나 / 月白風淸興有餘
바깥 손님 안 오니 산새와 벗하고 / 外客不來山鳥語
대밭 언덕에 평상을 옮겨 놓고 누워서 책을 본다 / 移床竹塢臥看書
하였다. 매헌(梅軒)이 공의 〈화상찬(畫像贊)〉을 지었는데,
사람마다 도가 있으나 / 人固有道
뛰어난 사람은 드물다 / 挺生者稀
오직 우리 길공만은 / 惟我吉公
그와 거의 가깝다 / 其殆庶幾
높은 문관의 벼슬과 / 珪組之榮
장수의 위세를 / 斧鉞之威
뜬구름같이 보고 / 視如浮雲
은거하니 / 高蹈而歸
뽕나무와 재나무 열 이랑에 / 桑梓十畝
초가집과 사릿문이라 / 茅屋柴扉
책 쌓인 방 한 칸에 / 圖書一室
높은 갓과 넓은 옷이로다 / 嵬冠褒衣
아, 주 나라 덕이 하늘과 같아 / 噫周德之如天兮
서산(西山)의 채미(採薇)를 묻지 않았었고 / 不問西山之採薇
한조가 중흥(中興 후한 광무제의 즉위를 말함)함에도 / 曁漢祖之中興兮
역시 양구(羊裘)를 낚싯터에 놓아 두었도다 / 亦放羊裘於釣磯
천여 년을 지난 오늘까지도 / 迄今千餘載兮
이 마음이 이치에는 어긋남이 없도다 / 信此心此理之無違
하였다.
○ 서견(徐甄) 선생은 혁명 때에 장령(掌令)의 벼슬 자리를 사직하고 금천(衿川) 향곡(鄕曲)으로 내려가서 숨어 살았으나 항상 고려 때의 일을 생각하고 강개(慷慨)하여 시를 지었는데,
천년 신도(神都)는 아득하게 막혔구나 / 千載神都隔渺茫
수 많은 충신 양장들 명왕을 돕더니 / 忠良濟濟佐明王
삼국 통일의 공업은 지금 어디메뇨 / 統三爲一功安在
길지 못한 전조의 왕업이 오히려 한스럽구나 / 却恨前朝業不長
하였다.
○ 고려의 왕들은 흔히 원(元) 나라의 공주(公主)를 아내로 삼으니, 원 나라에서도 사신을 보내어 선비의 딸을 요구하여 후궁으로 맞이하거나 후궁으로 들지 못한 자는 대신에게 맡겼다. 조반(趙胖)공의 누이동생도 원 나라로 들어가서 대상(大相)의 부인이 되었는데, 공도 젊었을 때 따라갔었다. 누이동생집에 여동(女僮)이 있었는데, 뛰어나게 아름답고 또 글을 알아서 공이 첩으로 삼았다. 이 때문에 항상 원 나라에 있었는데, 부부의 아기자기한 정은 비익조(比翼鳥)연리지(連理枝)라 할지라도 거기에 비길 수 없었다. 하루는 외사(外舍)에서 함께 자는데, 야반(夜半)에 도란도란 소리가 들렸으나 단잠에 빠져 그 까닭을 묻지 못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 집에는 한 사람도 없고 이웃집 사람이 말하기를, “황제가 병란을 피해 상도(上都)로 들어갔고, 대상과 부인도 어가(御駕)를 배종(陪從)하여 갔습니다. 이미 대병력이 근교에 임박하여 온 도성이 허둥지둥 다투다시피하며 처자를 데리고 남북으로 달아나고 있습니다.” 하였다. 두 사람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대상집 어린 하인이 홀연이 나타나더니 땀을 흘리며 다급히 말하기를, “거가(車駕)가 급하게 가므로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공이, “상도는 멀어서 갈 수 없으나 우리나라는 가까우니 우리들 세 사람은 빨리 갈 수 있을 것이다.” 하며, 집안을 뒤져 쌀 한 말들이 전대를 얻어 종은 혼자서 말을 타고 공과 여자는 한 말에 같이 타고 떠났다. 도중에 종이, “이렇게 병란으로 시끄러울 적에 이런 요물(妖物 여자)을 끼고 있다가 도적을 만나면 살아날 이치가 없으니, 원하건대, 군께서는 정을 끊고서 이 여자를 버리시오.” 하였는데, 여자는 날뛰면서 울부짖으며 생사를 같이하자고 하니, 공도 차마 헤어지지 못하고 옷소매를 꽉 쥔 손을 풀지 못하였고, 두 줄기 눈물은 옷깃을 적시니, 옆의 사람들도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사세(事勢)를 살핀 공은 마침내 여자를 버리고 가니, 여자는 울면서 따라왔다. 해가 저물어 숙소에 들면 여자도 뒤쫓아 왔는데, 무릇 3주야를 쉬지 않고 오니 두 발이 해져 걸을 수 없게 되었는데도 힘을 다하여 따라오다가 시냇가에 있는 높은 다락으로 여자가 문득 앞장서서 오르기에 공은 높은 곳에 올라 먼 곳을 바라보려니 생각하고 다락을 돌아보니 여자는 다락 밑에 있는 못 속으로 몸을 던져 물 속으로 빠져버렸다. 공은 전에는 재주와 외양을 사랑하였으나 이제 와서는 그 절개에 더욱 탄복하여 종복과 더불어 본국에 돌아와 노경에 이르러서도 항시 당시의 비통함을 말하여 마지않았다.
○ 충선왕(忠宣王)은 오랫동안 원 나라에 머물고 있어서 정든 사람이 있었더니, 귀국하게 되자 정인(情人)이 쫓아오므로 임금이 연꽃 한 송이를 꺾어주고 이별의 정표로 하였다. 밤낮으로 임금이 그리움을 견디지 못하여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호)를 시켜 다시 가서 보게 하였다. 이익재가 가보니 여자는 다락 속에 있었는데, 며칠 동안 먹지를 않아 말도 잘 하지 못하였으나 억지로 붓을 들어 절구 한 수를 쓰는데,
보내주신 연꽃 한 송이 / 贈送蓮花片
처음엔 분명하게도 붉더니 / 初來的的紅
가지 떠난 지 이제 며칠 / 辭枝今幾日
사람과 함께 시들었네 / 憔悴與人同
하였다. 익재가 돌아와서, “여자는 술집으로 들어가 젊은 사람들과 술을 마신다는데 찾아도 없습니다.”고 아뢰니, 임금이 크게 뉘우치며 땅에 침을 뱉었다. 다음해의 경수절(慶壽節 왕의 생일)에 이익재가 술잔을 올리고는 뜰아래로 물러나와 엎드리며,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 연유를 물으므로 이익재는 그 시를 올리고 그때 일을 말했다. 임금은 눈물을 흘리며, “만약 그날 이 시를 보았더라면 죽을 힘을 다해서라도 돌아갔을 것인데, 경이 나를 사랑하여 일부러 다른 말을 하였으니, 참으로 충성스러운 일이다.” 하였다.
○ 태조가 개국하자 재상 조반(趙胖)은 중국에서 자랐다 하여 주문사(奏聞使)로 삼아 보냈다. 고황제(高皇帝 명 나라 태조)가 불러보고 혁명을 꾸짖으니, 조반이 대답하기를, “역대의 창업한 임금은 거의가 하늘의 명에 따라 혁명을 하였으니 비단 우리나라뿐만이 아닙니다.” 하고, 은연중 명 나라 일을 빗대었다. 중국 말을 쓰니, 황제가 “너는 어찌 중국 말을 아느냐.” 하니, 조반이, “신은 중국에서 자랐고 전에 탈탈(脫脫)의 군중(軍中)에서 폐하를 뵌 일이 있습니다.” 하니, 황제가 당시의 일을 물었다. 조반이 자세히 말하니, 황제가 어탑에서 내려와 조반의 손을 잡고, “만약 탈탈군이 그대로 있었다면 짐(朕)이 오늘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니, 경은 실로 짐의 친구다.” 하면서, 빈객의 예로써 대접하고 ‘조선’이라는 두 글자를 써서 보냈다.
○ 명나라에서 우리나라가 올린 표문(表文)의 말씨가 공손하지 못하다 하여 표문을 지은 광산군(光山君) 김약항(金若恒)과 서원군(西原君) 정총(鄭摠)을 부르니, 김약항과 정총이 경사(京師 북경)로 떠났다. 광산군이 안주관(安州舘)에 이르러 시를 지었는데,
여관은 어찌 이리 쓸쓸하느냐 / 旅舘何寥落
풍연은 들 밖에서 저물었다 / 風煙野外昏
객지에서 회포는 사납고 / 客中懷抱惡
침상에서 꿈길마저 어지럽다 / 枕上夢魂翻
땅이 궁벽하니 거민도 적은데 / 地僻居民少
해 저무니 새소리만 시끄럽다 / 日斜飛鳥喧
타향의 봄은 쓸쓸하니 / 異鄕春寂寂
온갖 생각에 혼자 난간에 기대었노라 / 百慮獨憑軒
하였다. 남경(南京)에 도착하자 함께 잡혀 먼 곳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서원군이 무엇(원문이 빠진 듯)을 팔아 행량(行糧)을 마련하자고 청하였으나, 정탁(鄭擢)이 빼주지 않으니 사람들이 좋지 않게 여겼다. 나중에 황제가 노여움을 거두어 그들의 집안 사람으로 하여금 시체를 찾아 가게 하였으나, 끝내 찾아오지 못했다. 광산군의 딸은 나의 조모이시다. 늙은 여자종이 있었는데, 스스로 집안 사람이라 하고 남경으로 가서 한 항구에 도착하니, 양쪽 강 언덕에 높은 누각이 솟아 있고 누각 안에는 아름다운 여자들이 자수(刺繡)를 하거나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으며, 바가지만한 귤 껍질이 파도 위에 점점이 떠 있고, 버드나무 그늘이 수십 리나 뻗어 있었다고 한다. 늙은 종은 본시 어리석어 땅 이름을 자세히 묻지 못했으나, 지금 생각해 보니 양자강(楊子江)이 아닌가 싶다.
○ 안성군(安城君) 이숙번(李叔蕃)은 큰 공을 이룬 뒤에 세운 공을 믿고 교만하여 같은 반열의 재상들을 종처럼 볼 뿐 아니라 임금이 불러도 병이라 칭탁하고 가지 않았다. 게다가 병 문안을 하기 위해 중사(中使 왕명을 전하는 내시)가 계속 이르는데도 내실(內室)에서는 음악 소리가 어지러웠다. 혹 어떤 사람에게 관직을 주고자 하면 이름을 작은 종이에 써서 사람을 시켜 천거하게 하니 친한 친구들은 높은 벼슬자리에 두루 나누어 있었다. 돈의문(敦義門) 안에 큰 집을 지었는데, 인마(人馬) 소리가 싫다 하여 아뢰어서 문을 막고 사람의 통행을 금하니 사치스럽고 참담한 행동이 날로 심하더니 마침내 죄를 얻어 멀리 함양(咸陽) 별장으로 유배되었다. 세종(世宗)이 유신들에게 명하여 〈용비어천가〉를 편찬할 적에, 이숙번이 태종 시대의 일을 잘 안다고 해서 급히 불렀다. 이숙번이 흰옷을 입고 궁궐에 나오니 고관들과 재상들이 모두 후배이므로 다투어 나아가 배알하였으나, 이숙번은 다만 손을 흔들어 말리면서, “어렸을 때에 누구는 영매(英邁)하고 누구는 성실하다고 하므로 나도 영장(令長)의 그릇이 되리라 생각하였더니, 과연 그렇구나.” 하고, 그의 헌걸(軒傑)한 의기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이 양촌(陽村)에 이어 문형(文衡)을 맡았으나 문장은 나약하였다. 문사 김구경(金久冏)은 시를 잘 짓기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는데, 항상 춘정이 지은 시를 보고 입을 막고 크게 웃었다. 하루는 춘정이 휴가를 얻어 시골에 있는 별장에서 놀면서 우연히 시 한 구절을 지었는데,
허백한 것이 하늘을 이으니 강가엔 새벽이 되었고 / 虛白連天江渚曉
암황한 것이 이 땅에 서리니 들에는 버들가지 늘어진 봄이 왔구나 / 暗黃浮地柳郊春
하고, 아름다운 연구(聯句)를 얻었다고 자부하며 장차 상경하여 임금께 상주(上奏)하려 하였다. 어떤 사람이 이것을 구경에게 말했더니, 구경은 말하기를, “기가 아주 졸렬한데 만약 이 시를 상주한다면 이는 임금을 속이는 일이 될 것이다. 내가 옛날에 지은 시에,
역정에서 술잔을 잡으니 산이 문 앞에 당(當)해 있고 / 驛亭把酒山當戶
강군에서 시를 읊조리니 비는 배에 가득 차는도다 / 江郡哦詩雨滿船
라고 한 것이 있으니, 이런 것이 상주함직한 시이다.” 하였다. 그 사람이 다시 춘정에게 알리니, 춘정은 말하기를, “당(當) 자가 온당치 못하니 임(臨) 자로 고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였다. 그 사람이 또 이를 구경에게 얘기하니, 구경은, “사람들이 춘정은 시를 알지 못한다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고시(古詩)에,
남산이 문에 당하니 더욱 분명하도다 / 南山當戶轉分明
하지 않았는가.” 하였다. 그 사람이 또 춘정에게 말하니, 춘정은, “고시에,
청산이 황하에 임(臨)하였도다 / 靑山臨黃河
하지 않았는가. 구경 그 자신이 시를 알지 못하면서 오히려 내가 지은 것을 비웃는다.” 하였다. 하루는 춘정이 〈낙천정기(樂天亭記)〉를 짓고 구경을 불러 이를 보게 하니, 구경이 말하기를, “이 기(記) 가운데 성리(性理)를 논한 곳은 《중용》의 서(序)와 흡사하다.” 하였다. 구경의 사람됨이 재주를 믿고 남을 멸시하며 후배로서 선배를 경멸하므로 춘정도 또한 마음에 좋지 않게 여겨 마침내 혐오하고 틈이 생기니 끝내 현달한 관직을 얻지 못하였다.
○ 춘정은 성격이 인색하여 조그마한 물건이라도 남에게 빌려주지 아니하고, 동과(冬瓜)를 쪼갤 때마다 쪼개는 대로 기록하였으며, 손님을 맞아 술을 마실 때에도 마신 잔 수를 짐작하고는 술병을 조심스럽게 봉하여 거둬들이므로 그의 안색을 살피고는 가버리는 손님이 자못 많았다. 흥덕사(興德寺)에 머물러 오랫동안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엮을 때, 세종께서 그의 문장을 존중히 여겨 궁중에서 하사하는 찬(饌)이 끊이지 않았고, 고관과 동료들도 다투어 주식을 보냈는데, 하나하나 여러 방 속에 저장하였다. 날이 오래되어 구더기가 생기고 냄새가 담 밖에까지 나도, 썩으면 언덕에 갔다 버릴지언정 종과 시중들은 한 모금도 얻어 마시지 못하였다.
○ 황익성공(黃翼成公 황희(黃喜))은 도량이 넓어서 조그만한 일에 거리끼지 아니하고 나이가 많고 지위가 높을수록 더욱 스스로 겸손하여, 나이 90여 세인데도 한 방에 앉아서 종일 말 없이 두 눈을 번갈아 뜨면서 책을 읽을 뿐이었다. 방 밖의 서리맞은 복숭아가 잘 익었는데 이웃 아이들이 와서 함부로 따니, 느린 소리로, “나도 맛보고 싶으니 다 따가지는 말라.” 하였으나, 조금 있다가 나가보니 한 나무의 열매가 모두 없어졌었다. 아침저녁 식사를 할 때마다 아이들이 모여들면 밥을 덜어주며, 떠들썩하게 서로 먹으려고 다투더라도 공은 웃을 따름이었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 도량에 탄복하였다. 재상된 지 20년 동안 조정은 공을 의지하고 중히 여겼으니 개국 이후 재상을 논하는 자는 모두 공을 으뜸으로 삼았다.
○ 이맹균(李孟畇) 공은 목은(牧隱)의 장손으로서 벼슬이 이상(貳相 좌우 찬성)에 이르러 세업을 계승하였으며 문명(文名)이 있고, 더욱이 시에 능하였다. 일찍이 〈비송도(悲松都)〉라는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5백년 내려온 왕기가 끊어지니 / 五百年來王氣終
닭을 잡고 오리를 잡았으나 마침내 무슨 공을 이루었냐 / 操鷄摶鴨竟何功
영웅은 이미 가고 산하만 의구한데 / 英雄已逝山河在
인물은 남쪽으로 옮겨갔으니 시정은 비었구나 / 人物南遷市井空
비원의 앵화는 이슬비 뒤에 피었고 / 上苑鶯花微雨後
여러 능의 풀과 나무가 저녁 놀에 비치는구나 / 諸陵草樹夕陽中
내가 이날 와서 보고 자못 느낌이 많으니 / 我來此日偏多感
지난 일은 유유한데 물은 스스로 동쪽으로 흘러가누나 / 往事悠悠水自東
하였다. 또 자식 없음을 근심하여 시를 지었는데,
인도가 인에서 일어남으로부터 / 自從人道起於寅
아비와 자식이 서로 이어져 이 몸에 이르렀도다 / 父子相傳到此身
내 죄 어떠하기에 하늘이 불쌍이 여기지 않아 / 我罪伊何天不弔
아직도 남의 아비가 되지 못하고 살쩍만 새롭도다 / 未爲人父鬢絲新
하였다. 그 뒤에 질투심이 많고 독살스러운 부인 때문에 집 안에 우환이 있었는데 공도 이 일로 인하여 죄를 얻어 마침내 귀양살이를 하다가 죽었다. 동생 맹진(孟畛)은 벼슬이 판중추(判中樞)에 이르렀으나 그 아들이 난을 음모하다가 피살되어 중추도 이에 연좌되여 또한 귀양살이를 하다가 죽었다.
○ 정초(鄭招) 대제학은 총명이 뛰어났으니 무릇 서적을 한 번 보면 암송하였다. 과거볼 시기가 이미 닥쳐왔으나 공은 놀기만 하더니 하루는 육경(六經) 책갑을 뽑아 한 번 슬쩍 보고는 책을 덮고 다시 보지 아니하였는데, 강론할 때는 깊은 뜻을 모두 설명하였고 메아리같이 응답을 하였다. 일찍이 원수(元帥)의 막부에 있을 때 군졸 수백 명을 한 번 보고 모두 그 얼굴을 기억하고 그 이름을 아니, 사람들이 모두 그 신통함을 탄복하였다. 어렸을 때에 중이 《금강경(金剛經)》을 읽는 것을 보고, “ 저 금강경 같은 것은 한 번 보고 외울 수 있다.” 하니, 중이 “그대가 만약 외면 내가 성찬을 낼 것이고, 그대가 만약 외지 못하면 그대가 성찬을 내어라.”하고, 서로 약속을 한 뒤에 공이 북채를 쥐고 북을 치면서 금강경을 물 흐르듯 암송하여 거의 반 권쯤에 이르니 중이 도망해 버렸다.
○ 제학(提學) 이종학(李種學 목은의 둘째 아들)이 무고하게 죄를 입었으나, 목은은 조정(朝廷)이 두려워 그 비통함을 풀지 못하였다. 하루는 일가 서생 하나가 와서 뵈니, “산놀이를 하고 싶으니 같이 가자.” 하고, 서로 말을 나란히 타고 골짜기로 들어갔다. 인적이 없는 곳에 이르자 족생에게, “자식을 잃은 뒤로 가슴속의 울분을 풀지 못하였는데, 이제 여기 온 것은 울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더니, 크게 통곡하였다. 해가 다하도록 울음을 그치지 않다가 어두울 무렵에야 눈물을 거두고, “가슴이 후련하다.” 하더니, 이로부터 그 슬픔이 가시게 되었다. 제학이 죽음에 임하여 여러 자식에게 이르기를, “나는 문명(文名) 때문에 사람들이 시기하여 이렇게 되었으니, 너희들은 다시는 과거를 보지 말아라.” 하였다. 그 뒤에 숙치(叔畤)ㆍ숙묘(叔畝)는 모두 과거를 보지 않았으나 벼슬이 성재(省宰)에 이르렀고 홀로 과거를 본 숙복(叔福)은 끝내 현달치 못하였다.
○ 삼재(三宰) 박석명(朴錫命)은 어려서 공정왕(恭定王)과 함께 한 이불 속에서 잤는데, 석명의 꿈에 황룡이 자기 옆에 있는 것을 보고 깨어서 돌아다 보니 태종(太宗)이었다. 이리하여 기이하게 여겨 서로 더욱 친밀이 지냈다. 임금에 즉위한 후 특별한 은총이 융성하여 10년 간 지신다(知申事)를 했으며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로 승진하여 육조(六曹)의 판서를 겸하였으니 근대의 신하로서는 견줄 자가 없었다. 승지가 되었을 때에 임금이, “누가 그대를 대신하여 승정원을 맡을고.” 하니, 박공이, “조정의 신하 중에는 마땅한 자가 없으나 다만 승추부 도사(承樞府都事) 황희(黃喜)가 적당한 사람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마침내 기용하고 얼마 되지 아니하여 박공을 대신해서 승지가 되었고 마침내 명재상이 되었으니, 세상에서 박공은 사람을 안다고 하였다.
○ 맹좌상(孟左相 맹사성(孟思誠))이 대사헌이 되고 박안신(朴安信) 공이 지평이 되어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을 국문(鞠問)하는데, 임금에게 여쭈지 아니하고 고문하였다. 임금이 크게 노하여 두 사람을 수레에 싣고 저자에서 죽이려고 할 적에 맹상은 실색(失色)하여 말을 못하는데 박공은 침착하여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맹상의 이름을 불러 말하기를, “그대는 상관이요, 나는 하관이나 이제 죽을 죄인이 되었으니, 어찌 존비가 있겠는가. 나는 일찍이 그대를 지조가 있다고 했는데, 어찌 오늘은 이렇게도 겁을 내는가. 그대는 저 수레 구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하였다. 또 나졸에게, “기와조각을 가져 오너라.” 하였으나, 나졸이 듣지 않으니, 공은 눈을 부릅뜨고 꾸짖기를, “네가 만약 듣지 않으면 내가 죽어서 반드시 먼저 너에게 화를 주겠다.” 하고, 말소리와 안색을 더욱 엄하게 하니 나졸이 두려워하여 마침내 기와조각을 가져다 주었다. 공이 시를 지어 기와조각에 쓰기를,
네 직책 다하지 못하였으니 죽음은 달게 받겠으나 / 爾職不供甘守死
임금이 간신을 죽였다는 이름이 남게 될까 두렵소 / 恐君留殺諫臣名
하고 나졸에게 주어, “속히 가서 임금께 보이라.” 하니, 부득이 궐내에 갖다 바쳤다. 이때에 독곡(獨谷 성석린(成石璘))이 좌정승이었는데, 급히 가마를 타고 궐내에 나아가 극간(極諫)하니 임금도 노염이 풀려 마침내 용서하여 죽이지 않았다.
○ 맹상(孟相 맹사성(孟思誠))이 젊어서 향관(享官 제관)으로서 소격전(昭格殿)에 치재(致齋)하는데, 잠깐 조는 사이에 꿈속에서 관하인(官下人)이, “칠성(七星)이 들어오신다.” 전하였다. 잠에서 깬 공이 뜰에 내려가 공손히 맞았는데, 여섯 대부(大夫)는 이미 들어왔고, 일곱 번째는 독곡 성상(成相)이었다. 공이 죄를 얻어 저자에서 죽음을 당하게 되었는데, 독곡이 간해서 구한 힘으로 죽음을 면하였다. 평생에 독곡을 부모와 같이 섬기었으며 독곡이 죽은 뒤에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 사당을 지날 때면 반드시 말에서 내렸다.
○ 우리 외가 안씨는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의 후예다. 거란의 난리 뒤로 학교는 폐허되고 문교는 땅에 떨어졌는데, 문성공이 학교를 수축하고 녹봉과 그 노비 백여 구를 바쳤으니 지금까지도 성균관에서 부리는 자는 모두가 문성공의 노비이다. 공은 이 공로로 문묘에 배향되었다. 공은 우기(于器)를 낳고, 우기는 목(牧)을 낳고, 목은 원숭(元崇)을 낳고, 원숭은 원(瑗)을 낳고, 원은 우리 외조를 낳고, 외조는 구(玖)를 낳고, 구는 지귀(知歸)를 낳고, 지귀는 아들 호침(瑚琛)을 낳았다. 지금까지도 장자(長子)가 서로 이어 과거에 합격하니 사람들이 문성공의 도움이라 한다.
○ 파주(坡州) 서교(西郊)는 황폐하여 사람이 살지 못했는데, 정당(政堂) 안목(安牧)이 처음으로 넓게 밭을 개간하고 큰 집을 짓고 살았다. 정당이 시를 잘하여 한구(句)를 짓기를,
목동의 피리 소리 긴 포서 밖에 들리고 / 牧笛一聲長浦外
고깃배의 두어 점 등불이 낙암 앞에 보이도다 / 漁燈數點洛岩前
하였다. 그 손자 원에 이르러 지극하게 창성하였는데, 안팎으로 차지한 밭이 무려 수만 경(頃)이나 되고 노비도 백여 호나 되었다. 늙은 고목 천여 그루가 10리에 그늘을 이루고 거위와 황새가 그 사이에서 울고 떠들었다. 공은 매를 팔 위에 올려놓고 누런 개를 데리고 매일 왕래함을 낙으로 삼았다. 지금도 남은 땅을 나누어 차지하고 사는 사람이 백여 명이나 되는데 모두 그 자손이다.
○ 유후(留後) 안원(安瑗)은 성품이 매와 개를 좋아하였는데, 글 공부하던 젊을 때부터 이미 이 버릇이 있었다. 처가에 있을 때에 왼팔에 매를 올려놓고 오른손으로 책장을 넘기며 책을 읽으니, 장인(丈人)이, “책을 읽으려면 매를 그만두던지 매를 좋아하려면 책을 그만둘 것이지 어찌 번거롭게 두 가지 일을 다 행하느냐.” 하니, “글은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직업이니, 폐할 수 없고, 성질이 매와 개를 좋아하니, 또한 폐할 수 없습니다. 두 가지를 행하더라도 어긋나지 않으면 어찌 이치에 해가 된다 하겠습니까.” 하였다.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한결같이 이것으로 스스로 즐겼다. 하루는 쌍매당(雙梅堂 이첨(李詹)의 호)이 낙하(洛河 임진강)를 건너 한양으로 향하다가 길 옆 산골짜기에서 책읽는 소리를 듣고, 그 종에게, “이는 반드시 안 노인 일 것이다.” 하였는데, 가서 보니 왼쪽 팔에 매를 올려놓고 오른손으로 《강목(綱目)》책장을 넘기며 나무에 의지하여 책을 읽고 있으므로 서로 보고 크게 웃었다. 공의 사람됨이 너그럽고 느릿느릿하여 평생에 빨리 말하지 않고 바쁜 기색이 없었다. 왜구가 승천부(昇天府)를 함락하였는데도 공은 오히려 집에서 책만 읽고 있으므로 종이, “왜구가 닥쳐 왔습니다.” 하였으나, 공은 “아직은 활쏘는 것을 익히고 황급하게 굴지 말라.” 하더니, 얼마 있지 않아 왜구가 물러갔다.
○ 찬성(贊成) 정구(鄭矩)와 유후(留後) 정부(鄭符)는 모두 대부 정양생(鄭良生)의 아들이다. 형제가 모두 음악에 조예가 있어 찬성은 거문고를 잘 타고 유후는 알지 못한 바가 없었으며 용모도 웅위(雄偉)하였다. 부인이 혹 시골에 내려가면 유후는 홀로 집에서 운산(雲山)을 바라보고 거문고를 타며 때때로 스스로 노래를 불러 이로써 낙을 삼았을 뿐이요, 일찍이 분바르고 눈썹 그린 계집들 사이에서는 취(醉)한 일이 없었다.
○ 이옥(李沃)은 시중 춘부(春富)의 아들이다. 시중이 주살당하자 옥은 강릉부(江陵府)의 병졸로 편입되었다. 이 무렵에 왜구가 동해에 몰려와서 주군(州郡)을 약탈하니, 백성들이 모두 다투어 피하였다. 부의 앞 들에 큰 나무가 많았는데, 옥이 밤 사이에 사람을 시켜 화살 수백 개를 나무에 꽂아 놓았다. 이튿날 상복을 벗고 말을 달려 해구(海口)로 나가 여러 개의 화살을 적에게 쏘고는 거짓 패한 척하면서 나무 사이로 달려 들어가니, 왜적이 구름과 같이 몰려왔다. 혼자서 당해 내는데 꽂혔던 화살을 뽑아 쏘며 종횡으로 달리며 치는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고전하기를 마지않았으나, 시위를 헛되게 당기지 아니하여 쏘기만 하면 반드시 맞으니 죽은 자가 즐비하였다. 이로부터 왜적이 군(郡)의 지경을 범하지 못하여 한 도(道)가 그의 힘으로 편안하니 조정이 가상(嘉賞)히 여겨 벼슬을 내렸다.
○ 재상 하경복(河敬復)이 일찍이 이르기를, “내가 젊었을 때에 용력(勇力)으로 세 번 화를 면하였다. 한 번은 태종이 내란을 평정할 때에 잘 아는 사람이 궐내에서 숙직하였으므로, 서로 얘기하고자 우연히 들어갔다가 마침 문이 닫혀 나오지 못하였다. 사방을 방황하는데 병졸 여러 사람이 달려와 몰고 가서 죽이려고 하기에 내가 힘을 다해 싸우고 달아나니 여러 사람들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곧 어전에 이르러, ‘나 같은 장사를 죽여서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하고, 부르짖으니 태종께서 들으시고 용서하셨다. 이는 용력이 없었던들 틀림없이 죽었을 것이다. 두 번째는 젊었을 때에 깊은 산에 들어가서 사냥하다가 졸지에 맹호를 만났으나 피할 곳이 없어 할 수 없이 범의 목줄을 잡고 땅에 던지니 그 사이에 사람들이 모두 흩어졌다. 구해 주기를 외쳤으나 와주는 사람이 없고 돌아보았으나 한 치 되는 칼조차 없었다. 그래 별 수 없이 맨손으로 막다가 언덕 밑에 물 웅덩이가 있는 것을 보고 밀고 앞으로 조금씩나아가니 사람과 짐승이 모두 지쳐서 땀이 온몸을 적셨다. 마침내 그 범을 물 속에 빠뜨리니 범이 물을 마시고 배가 불러 힘이 빠지기에 나무와 돌을 가지고 때려죽였다. 이는 용력이 없었으면 틀림없이 죽었을 것이다. 세 번째는 변방에서 적을 방어하고 있을 때 적의 기병이 구름같이 모여 드는데 화살이 비오듯 하였다. 앞에 큰 나무 수십 그루가 있었는데, 만약 적이 먼저 차지하면 적이 이기고 내가 먼저 차지하면 내가 이길 것이므로, 마침내 몸을 날쌔게 달려서 먼저 나무를 차지하였는데, 적도 쫓아왔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이로써 싸움에 이기니 이 또한 용력이 없었으면 틀림없이 죽었을 것이다.” 하였다. 공의 벼슬은 판중추(判中樞)에 이르렀고 제일 가는 용장으로서 이름을 당세에 떨쳤다.
○ 나라가 도읍을 한양으로 옮길 때에 우리 증조 상곡(桑谷 성석인(成石珚)의 호) 맏형 독곡(獨谷) 공과 함께 지금의 향교동(鄕校洞)에 집터를 정하였다. 하루는 남대문을 나와 5리쯤 가니 차츰 사람 사는 집이 없어졌다. 서산 기슭을 보고, “이곳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하고, 집을 지으니, 독곡 공이 노하여, “형제가 이웃에 나란히 사는 것이 무엇이 못써서 네 홀로 나를 버리고 멀리 사람이 없는 곳으로 이사가느냐.” 하니, 공은 말하기를, “이곳이 비록 쓸쓸하고 변두리라서 사람이 없으나 중엽에 이르면 반드시 인가가 즐비할 것입니다. 나는 산림의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것이지 우애를 가볍게 여기는 것은 아닙니다.” 하고, 마침내 이곳에 살면서 밤나무 수천 그루를 심고, 많은 꽃나무가 번식하지 않은 것이 없어, 지금도 원림(園林)의 훌륭함을 말하는 자는 백씨집을 제일로 삼는다.
상곡은 기우(騎牛 이행(李行)의 호) 이공(李公)과 서로 좋아하였는데, 이공은 성남쪽에 살고 상곡은 서산(西山)에 살면서, 서로 5리쯤 떨어져 있었으며, 혹 지팡이를 짚고 상종(相從)하기도 하고 혹 서로 시를 수창하기도 하였다. 상곡은 정원 속에 조그만한 집을 지어 위생당(衛生堂)이라 하고 항상 집안 아이종을 모아 매일 약을 조제하는 것으로써 일을 삼았다. 이공이 시를 짓기를,
깨끗한 새 집의 흰 판자 문이 새롭고 / 肅洒新堂白板平
도서와 화죽은 깊은 정이 있도다 / 圖書花竹有深情
머리에 세 그루 느티나무는 연한 초록 빛인데 / 墻頭嫩綠三槐樹
좋구나, 꾀꼬리 한두 마리 우는 소리 / 好箇黃鷫一兩聲
라 하였다. 한번은 이공이 당(堂)에 이르니, 상곡이 공도공(恭度公)을 시켜 창 밖에서 차를 달이게 하였는데, 찻물이 새어 다시 다른 물을 부었더니, 이공이 맛을 보고, “이 차에 네가 두 가지 생수(生水)를 부었구나.” 하였다. 공은 물맛을 분간할 수 있었는데, 충주(忠州) 달천수(達川水)를 제1로 삼고, 금강산에서 나와 한강 가운데로 흐르는 우중수(牛重水)를 제2로 삼고, 속리산의 삼타수(三陀水)를 제3으로 삼았다.
○ 나의 외삼촌 안공은 성질이 엄하고 굳세어 12주 현을 역임하였으나 추호도 남의 것을 범한 일이 없으니, 관리들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따랐다. 또 귀신의 형체를 잘 보았는데 일찍이 임천(林川) 군수가 되었다. 하루는 이웃 관리들과 술마시고 있을 때에, 사냥개가 원중(苑中)의 큰 나무를 향하여 매우 짖어댔다. 공이 돌아다 보니 어떤 괴물이 고관대면(高冠大面)으로 나무에 의지하여 서 있다가 안공이 뚫어지게 바라보니 점점 사라져 버렸다. 또 하루는 하늘이 흐리고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 공이 변소에 가게 되어 아이 종이 촛불을 받들고 앞을 인도하는데, 대숲 속에 한 여자가 붉은 난삼(襴衫)을 입고 머리를 풀고 앉아 있기에 공이 곧장 그 앞으로 가니 여자가 담을 넘어 달아났다. 또 그곳의 풍속이 귀신을 공경했는데, 관아에 입주하는 자가 계속해서 죽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도깨비 숲이라고 버려 두었다. 공이 와서 처음으로 들어가고자 하니 고을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말렸으나 공은 듣지 아니하였고, 민간의 음사(淫祠)도 모두 태워 헐어버렸다. 관청 남쪽에 오래된 우물이 있는데, 고을 사람들은 그 속에 귀신이 있다 하여 앞을 다투어 모여들어 복을 빌므로 공이 명령하여 이를 메우게 하였더니, 우물에서 소가 우는 것 같은 소리가 사흘이나 들려왔다. 고을 사람들이 메우지 말라고 청하니, 공은 말하기를, “우물이 필시 슬퍼서 곡하는 것인데 무슨 괴이한 일이 있겠느냐.” 하자, 이로부터 모든 요해(妖害)가 없어졌다. 공은 마침내 그 공이 최(最)에 올라 다른 데로 영전되었다. 또 공이 서원(瑞原) 별장에 오랫동안 있을 때에 길 옆에 고목 한 그루가 있었는데, 그 크기가 몇 아름 되고 높이가 하늘을 찌를 만했다. 하늘이 흐리면 귀신이 휘파람을 불며 밤이면 불을 켜놓고 시끄럽게 떠들었으며, 공이 매를 놓아 꿩을 쫓다가도 그 숲에 들어가면 찾을 수가 없었다. 마을의 어떤 소년이 용기만 믿고 가서 그 나무를 자르다가 귀신이 붙어 밤낮으로 미쳐 날뛰니 온 동네 사람들이 당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공의 이름만 들으면 빨리 보이지 않는 곳으로 달아나 피하였다. 공이 그 집에 가서 문 밖의 평상에 앉아 사람을 시켜 머리털을 나꾸어 끌어 내도록 하니 소년은 안색이 검어지며 애걸하였다. 공은 꾸짖기를, “너는 마을에 있는 지 2백여 년이 되는데 불을 켜놓고 해괴한 행동을 하며 내가 지나가도 걸터앉아 불경한 짓을 하고 매를 놓으면 숨겨두고 내놓지 않더니, 지금은 또 이웃집을 괴롭히니 무엇을 얻고자 하는 짓이냐.” 하니, 소년이 이마를 땅에 대고 공손히 사죄하였다. 공이 동쪽으로 뻗은 복숭아 나뭇가지를 잘라 장도(長刀)를 만들어 거짓 그 목을 베니, 소년이 몸을 굴러 길게 울부짖고 죽은 것처럼 땅에 엎드려 깊이 잠들었다가 3일 만에 비로소 깨어나더니 광태가 갑자기 사라졌다. 해주 목사까지 하고는 벼슬을 버리고 사방을 두루 돌아다녔는데, 매를 팔뚝에 얹고 누런 개를 끌며 어린 종 수십 명과 함께 물고기 그물과 짐승 그물을 싣고 다니며 들에서는 고기를 잡고 산에서는 짐승을 쫓았다. 공이 또 활쏘기를 잘하여 사슴과 멧돼지를 맞히지 못함이 없고, 항상 튼튼한 말을 타고 천길이나 되는 언덕을 달려 내려가도 빠르기가 나는 새와 같았는데 살촉이 서로 연달아 이어져 보는 사람이 탄복지 않은 이가 없었다. 향년이 70으로 졸하였다.
○ 나의 외숙 안 부윤(安府尹 안향(安珦)의 후예)이 젊어서 파리한 말을 타고 어린 종 한 명을 데리고 서원(瑞原) 별장으로 가다가 별장에서 10리쯤 떨어진 곳에 이르렀는데 날이 어두워지고 말았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사람이라곤 없더니, 동쪽으로 현성(縣城) 쪽을 바라보니 횃불이 비치고 떠들썩하여 유렵(遊獵)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기세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좌우를 삥 두른 것이 5리나 되는데, 빈틈없이 모두 도깨비불이었다. 공이 진퇴유곡(進退維谷)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오직 말을 채찍질하여 앞으로 7, 8리를 나아가니 도깨비불이 모두 흩어졌다. 하늘은 흐려 비가 조금씩 부슬부슬 내리는데, 길은 더욱 험해졌으나 마음속으로 귀신이 도망간 것을 기뻐하여 공포심이 진정되었다. 다시 한 고개를 넘어 산기슭을 돌아 내려가는데 앞서 보던 도깨비불이 겹겹이 앞길을 막았다. 공은 계책도 없이 칼을 뽑아 크게 소리치며 돌입하니, 그 불이 일시에 모두 흩어져서 우거진 풀숲으로 들어가면서 손바닥을 치며 크게 웃었다. 공은 별장에 도착하여서도 마음이 초조하여 창에 의지한 채 어렴풋이 잠이 들었는데, 비복들은 솔불을 켜놓고 앉아서 길쌈을 하고 있었다. 공은 불빛이 켜졌다 꺼졌다 함을 보고 큰 소리로, “이 귀신이 또 왔구나.” 하며 칼을 들고 치니, 좌우에 있던 그릇들이 모두 깨지고 비복은 겨우 위험을 면하였다.
○ 나의 장모 정씨(鄭氏)는 양주에서 생장하였는데, 귀신이 그 집에 내려 한 어린 계집종에게 붙어 수년 동안을 떠나지 않았는데, 화복과 깊흉을 알아맞히지 못한 적이 없었다. 말을 하면 번번이 들어맞으니 사람들이 나쁜 짓을 하여 숨길 뜻이 있어도 못하고 모두 두려워하였으나 집안에는 아무 탈이 없었다. 그 목소리가 굉장히 맑아서 늙은 꾀꼬리 혀와 같은데, 낮이면 공중에 떠 있고 밤이면 대들보 위에 깃들었다. 이웃에 대대로 명문인 한 집이 있었는데, 주부가 보물 비녀를 잃고 항상 계집종을 때렸다. 종이 그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여 귀신에게 와서 물으니, 귀신이, “있는 곳을 알고는 있으나 네게 말하기는 거북하니, 네 주인이 오면 말하겠다.” 하였다. 종이 가서 주부에게 알리니, 주부가 친히 좁쌀을 가지고 와서 문복하였다. 귀신이, “있는 곳을 알고는 있으나 차마 말하지 못하겠다. 내가 한 번 말하면 그대는 매우 무안하리다.” 하였다. 주부가 여러 번 물었으나 끝내 응하지 아니하자 주부가 노하여 꾸짖으니, 귀신이, “그렇다면 할 수 없다. 아무 날 저녁에 그대가 이웃 아무개와 같이 닥나무 밭으로 들어가지 않았느냐. 비녀는 그 나무 가지에 걸려 있다.” 하므로, 종이 가서 찾아오니 주부가 매우 부끄러워하였다. 또 집 종이 물건을 훔쳤는데, 귀신이, “아무개가 이를 훔쳐 아무 방에 감추었다.” 하니, 종이, “어디에 있던 요물이 남의 집에 와서 의지하느냐.”고 꾸짖었다가 땅에 자빠져 한참 있다가 소생하였다. 사람들이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종이 “자색 수염이 난 장부가 내 머리털을 끌어당기니 황홀하여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집안에서 점점 싫어하였는데, 상국(相國) 정구(鄭矩)와 부(符) 형제가 집에 오기만 하면 귀신이 두려워하여 달아나고 상국이 간 뒤에 귀신이 또 돌아오곤 하였다. 상국이 그 일을 알고 하루는 귀신을 불러 말하기를, “너는 숲으로 가라, 인가에 오래 머무는 것이 부당하다.” 하니, 귀신이, “내가 여기 온 뒤로 집안 복을 더하도록 힘썼으며 한번도 재앙을 일으킨 일이 없었고, 이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집을 잘 받들고자 하였는데, 대인의 가르침이 있으니 감히 순종치 않겠사오리까.” 하고, 마침내 통곡하며 떠났는데, 끝내 영향이 없었다 한다. 이 이야기는 내가 대부인에게서 들은 것이다.
○ 지금 공중에서 소리를 내며, 남녀(男女) 무당에게 지피어 지나간 일을 알아맞히는 자를 태자(太子)라 한다. 장님 장득운(張得云)이란 자가 있었는데, 점치기를 잘하여 사람들이 모두 명경수(明鏡數)가 있다고 하였다. 조정에서 이를 가져오라 했으나 장님은 본래부터 없다고 대답하므로, 옥에 가두어 고문하였지만 나오지 않았다. 안효례(安孝禮)가 태자(太子)에게 물으니, 태자가, “장님 장(張)이 그 책을 친척 아무개에게 주어 우봉현(牛峯縣) 민가에 갖다 두었는데, 그 집은 동쪽에 싸립문이 있고, 당(堂) 앞에 큰 나무가 있으며 당 안에 독[瓮]이 있고 독 위에 소반을 덮었으니, 반을 들고 보면 책이 그 속에 있을 것이다. 만약 네가 가서 찾거든 큰 나무를 향하여 나를 부르라. 내가 곧 응하리라.” 하였다. 효례가 장님 집에 가서 물으니, 과연 우봉으로 간 친척이 있다 하므로 효례가 크게 기뻐하여 곧 들어가 임금께 아뢰었다. 임금이 효례에게 역마를 타고 수기(數騎)를 거느려 하룻밤 사이에 그 집에 당도하게 명하였다. 그 집에 가서 보니 과연 싸립문과 큰 나무가 있고, 당에 오르니 독이 있었다. 반을 젖히고 보니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나무를 향하여 태주를 불러 보았으나 응하는 자가 없었다. 효례는 섭섭하게 여기며 돌아와서 태자에게 물으니, 태자는 말하기를, “네가 항상 거짓으로 사람을 속이므로, 나도 또한 거짓으로 너를 속여 보았다.” 하였다.
○ 나의 증조(曾祖) 정평(靖平) 공이 예조 판서가 되자 임금께, “판서는 육부(六部)의 으뜸인데도 관속(官屬) 한 사람을 거느리니 하관(下官)과 다름이 없사옵니다. 청컨대 한 사람을 더해 주시옵소서.”라고 아뢰니, 임금이 이를 윤허하시었다. 판서(判書)가 두 관속을 거느리게 된 것은 정평공 때부터 시작되었다.
○ 삼재(三宰) 안숭선(安崇善)은 뛰어나게 잘나고 호방하였다. 황보인(皇甫仁)이 도승지이고 김종서(金宗瑞)가 좌승지일 때에, 자신에게 세상을 경륜할 수 있는 재주와 학문이 있다고 믿고 도승지를 마치 턱밑의 수염같이 여기었다. 하루는 황보가 체직되고 동부승지인 안공이 도승지에 발탁되어 내전에서 명령을 받들고 승정원에 이르러 중문에 들어가더니 도승지의 자리에 나가 앉으며, “이 자리야말로 앉을 만하다.” 하니, 종서의 안색이 잿빛처럼 검어졌다. 마침내 이로부터 서로 틈이 생겼고 그 뒤에 안공이 병조 판서로서 죄를 얻어 멀리 귀양가게 되니 사람들이 모두 종서가 빚어낸 것이라 하였다.
○ 김처(金處)는 광산군 김약항(金若恒)의 아들이다. 판관 김처(金處)는 그의 아버지가 이국에서 죽은 것을 상심하고 슬퍼한 나머지 광질(狂疾)에 걸렸다. 정신이 혼몽하고 일을 헤아리지 못하니, 어린애나 어리석은 부녀자들이 여러 가지로 속여도 모두 믿고 좇아 의심치 않았다. 또한 항상 집안의 한 종을 두려워하여 그 지휘에 따르는데, 몸을 굽히고 펴는 것도 마음대로 못하며 무엇을 하려 하다가도 만약 종이 꾸짖으면 두려워하여 움직이지 못하였다. 판관은 낮에 대부분 잠을 자고 이따금 깨는데, 깨면 〈관동별곡(關東別曲)〉을 부르며 소매를 떨쳐 춤도 추는데 춤이 끝나면 큰 소리로 울었다. 밤에는 시구를 길게 읊조리며 처량스럽게 혼자 거니는데, 혹은 깊은 산에 들어가기도 하고 혹은 울타리를 뚫기도 하며 잠시도 쉬지 않았다. 하루는 산속에 병자가 누워 있는 것을 보고 판관이 불쌍히 여겨 물을 갖다 먹였는데 마침내 병이 옮아 죽었다.
○ 부정(副正) 김허(金虛)도 또한 광산(光山 김약항)의 아들인데,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어 여막에 있을 적에 《효경》의 상친장(喪親章)을 벽에다 써놓고 날마다 벽을 보고 읽으며 읽고 난 뒤에는 흐느껴 우는데 흐르는 눈물을 가누지 못하고 3년 동안 조금도 쉬지 않았다. 사람됨이 울기를 잘해서 곡하는 소리가 처량하고 슬프고 처참하여서 듣는 사람도 눈물을 닦지 않는 이가 없었다.
○ 이(李)씨 성을 가진 선비가 병에 걸려 신열과 두통이 났었다. 모든 의사들이, “상한병(傷寒病)이니 참소음(蔘蘇飮)을 쓰라.” 하였다. 노중례(盧仲禮)가 나중에 와서 진맥하고는, “이는 떨어져서 다친 병이다.” 하니, 이(李)는, “근래에 그런 일이 없었다.” 하였으나, 노(盧)가, “그렇지만 다시 생각해 보라.” 하니, 이가, “작년에 발을 잘못하여 뜰에서 떨어진 일이 있으나 심하게 다치지도 않았고 아프지도 않았으며 지금까지 아무렇지도 않았다.” 하였다. 노가 상원활혈탕(傷元活血湯)을 복용하기를 권하니, 이가 몇 차례 복용하고 나서 엉긴 핏덩어리를 몇 되 쏟고는 그 병이 나았다.
○ 축구(丑邱)라는 중이 있었는데, 글씨를 잘 써 스스로, “내 글씨는 독곡(獨谷) 성상의 필법과 비슷하다.” 하고는 벽에 붙여놓고 자랑하여 보였다. 하루는 독곡이 방에 와서 벽의 글씨를 보고 “이는 내가 지난날에 쓴 것인데, 그대는 어디서 얻었느냐.” 하니, 중이 크게 기뻐하여 흔연히 스스로 만족하게 여기었다.
○ 이(李)씨 성을 가진 유자(儒者)가 있었는데, 성품이 급하고 편협해서 대체를 알지 못하였다. 또 깨끗한 것을 좋아하여 음식이 조금이라도 거칠고 나쁘면 먹지 못하였다. 하루는 첩의 집에 이르렀더니, 첩이 사부(私夫)와 동침하고 있었다. 이를 힘으로는 제지 못하고 땅에 엎어져 병을 얻더니 말을 못한 채 잠깐 사이에 죽어버렸다.
○ 제학 남간(南簡)은 청검(淸儉)으로 자처하여 평생에 쇠고기를 먹지 않았다. 일가 젊은 사람과 더불어 정승을 뵈러 갔더니, 정승이 쇠고기를 대접하였다. 일가 젊은이가, “제학은 이것을 잡수시지 않는다는 것이 정말입니까.” 하니, 정승이 젓가락으로 고기로 집어 먹으며, “내 동생[제학(提學)]의 고집불통은 가소로운 일이다.” 하였다. 제학이 죽음에 임하여 벤 손톱을 모두 모아가지고 관(棺) 속에 넣어 함께 묻으라고 명하고 나서, “이래야만 예를 다하는 것이다.” 하였다.


 

[주D-001]공이 항상 …… 모두 죽였는데 : 고려 말년에 임견미(林堅味)와 염흥방(廉興邦)이 같은 소인으로 임금을 속이고 정권을 농락하다가 최영(崔瑩)에게 몰려 죽었다.
[주D-002]뽕나무와 재나무 : 고향땅을 ‘상재향(桑梓鄕)’이라 한다.
[주D-003]서산(西山)의 채미(採薇) : 서산은 수양산(首陽山). 주 무왕이 은 주왕을 무찌르고 주 나라를 세울 때 백이(伯夷)ㆍ숙제(叔齊)는 주 나라 곡식을 마다하고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뜯어 먹다 죽었다는 고사.
[주D-004]양구(羊裘) : 양 갖옷을 이름이니, 엄광(嚴光 자릉(子陵))이 한 나라의 간의대부를 마다하고 양 갖옷을 입고 성명을 고치고 숨어 산 고사.
[주D-005]비익조(比翼鳥) : 암컷과 수컷이 눈과 날개가 하나씩이어서 짝을 짓지 못한다는 전설상의 새. 남녀의 지극한 정을 비유함.
[주D-006]연리지(連理枝) : 한 나무의 가지가 다른 나무의 가지와 맞닿아서 서로 통한 것. 화목한 남녀 또는 부부 사이를 이르는 말.
[주D-007]탈탈(脫脫) : 탈탈은 원 나라 말년의 정승이었는데, 역사상의 비평은 그를 좋은 편이라고도 하고 악한 편이라고도 하여서 그 사람이 어떤지는 지금 알 수 없으나 그때 전 중국에 반란이 일어나서 그것을 토벌하려고 고심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주D-008]닭을 잡고 오리를 잡았으나[操鷄搏鴨] : 이 말은 원래 왕창근(王昌瑾)의 거울 속 비기(祕記)에 나온 말인데, “먼저 닭(계림(鷄林)을 가리킨 말)을 잡고 뒤에 오리[鴨綠江]를 잡으라.”고 하였다. 그래서 고려의 왕건(王建) 태조는 그 말대로 실행하여 반도를 통일하였다.
[주D-009]공도공(恭度公) : 공도공은 시호인데, 여기의 글 문세(文勢)로 본다면 그때의 성씨(成氏)집 젊은 사람이었을 것인데 아직 누구인지는 모른다.
[주D-010]최(最) : 성적을 고사할 때 상을 최, 하를 전(殿)이라 함.
[주D-011]안숭선(安崇善) : 호는 옹제(雍齊). 세종 2년에 장원 급제, 병조 판서 지춘관사로서 《고려사》를 편수하였다.
[주D-012]황보인(皇甫仁) : 호는 지봉(芝峯). 태종 갑오년에 문과에 등제, 세종 때 북도 체찰사가 되고, 문종 때 영의정이 되어 고명을 받아 단종을 보익하다가 죽음.
[주D-013]김종서(金宗瑞) : 호는 절제(節齊). 태종 을유년에 문과에 급제 육진관찰사, 단종을 보익하다가 죽음.
[주D-014]참소음(蔘蘇飮) : 상한, 두통, 발열, 고뿔, 기침 같은 병에 쓰는 인삼과 순엽이 주재인 탕약.
[주D-015]남간(南簡) : 세종 정미년에 문과에 급제 예문직제학이 됨. 청렴으로써 이름이 있었다.
[주D-016]내 동생 : 여기 정승이란 사람은 남은(南誾)을 가리킨다. 남간(南簡)은 남은의 아우인데, 남은이 정도전과 같이 태종(太宗)을 죽이려다가 그 손에 도리어 죽었으므로 단지 정승이라고만 말하고 성명을 밝히지 않은 것이다.

 용재총화 제4권
용재총화 제4권


○ 하정(夏亭) 유 정승(柳政丞 유관)은 청렴하고 검소하여 두어 칸의 초가에서 지내면서도 태평이었으나 관위(官位)가 신하로서는 최고에 이르렀다. 몸가짐을 필부와 같이하고 사람이 찾아오면 겨울에도 맨발로 짚신을 끌고 나가 보며, 때로는 호미를 가지고 채마밭을 돌아다니면서도 전혀 수고롭게 여기지 않았다.
○ 고령공(高令公) 득종(得宗)은 탐라인(耽羅人)인데, 문학(文學)으로 벼슬이 2품에 이르렀다. 젊어서 어머니를 뵈러 제주도로 가는데, 바다 가운데서 큰 바람을 만나 뱃전이 산산이 부서져 고령공과 어린 종이 한 개의 뱃조각에 의지하여 심한 파도 사이를 들락날락하였다. 종이, “두 사람이 같이 살 수는 없으니 소인은 이대로 하직하겠나이다.” 하고는, 고령공을 뱃조각에 묶어놓고 스스로 바다 속으로 빠져버렸다. 파도를 따라 떴다 가라앉았다 하는 사이에 기운은 지칠대로 지쳤는데, 3일 만에야 해안에 닿아 바로 사람의 도움을 받아 회생했다.
○ 정절공(貞節公) 정갑손(鄭甲孫)은 용모가 웅위(雄偉)하여 키가 크고 수염이 아름다우며, 기량이 넓고 너그러웠다. 비록 여러 대에 걸쳐 재상을 지냈으나, 청빈하여 집에는 모아둔 재물이 없어 베이불을 덮고 베 포단(蒲團)을 깔고 거처하면서도 오히려 편안하고 즐겁기만 하였다. 늘 강개직언(慷慨直言)하여 권력 있고 세력 있는 자를 피하지 아니하니, 그에게 감화되어 탐욕(貪欲)한 사람도 결백하여지고, 나약한 사람은 뜻을 세우게 되었는데, 조정에서도 믿고 중히 여겼다. 일찍이 대사헌이 되어 이조에서 사람을 잘못 추천하여 벼슬을 주었다고 논핵하였다.
○ 임금이 사정전(思政殿)에 납시어 상참(常參)을 받으실 제 상국(相國) 하연(河演)이 겸판서(兼判書)가 되고, 최부(崔府)가 판서가 되어 함께 입시하였는데, 공이 상계하기를, “최부는 말할 것도 없고 하연은 사리는 조금 안다고 하나 인재를 등용할 줄 모르니, 청하옵건대, 국문(鞠問)하옵소서.” 하였으나, 임금은 웃는 얼굴로 두 사람을 풀어 주었다. 조회가 끝나 궁궐 밖으로 나가자 두 공이 땀이 비오듯 하므로 공은 천연스럽게 빙그레 웃으며 말하기를, “서로 각각 직책을 다하자 함이지, 해하고자 함이 아니오.” 하며, 녹사(綠事)를 불러, “두 공께서 몹시 더운 모양이시니 부채를 가져다 부쳐 드려라.” 하였다. 이처럼 조용하고 화락한 마음가짐으로 조금도 두려워하고 후회하는 빛이 없었다.
○ 양녕(讓寧)이 세자 때에 성색(聲色)에 빠져서 학업을 힘쓰지 않았다. 일찍이 뜰에 새 잡는 틀을 만들어 놓았는데 서연(書筵)에서 빈객과 마주앉아 있으면서도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학문에 뜻이 없고, 새가 틀에 걸리면 달려가서 잡았다. 계성군(雞城君) 이래(李來)가 빈객이 되어 하루는 궁문 밖에 이르렀다가 안에서 매 부르는 소리를 듣고 마음속으로 세자가 하는 짓인 줄로 알았다. 세자가 서연에 앉아 있거늘 이래가, “전하께서 매 부르는 소리를 하시는데 이는 차마 하실 바가 아닙니다. 원하건대, 뜻을 학문에 두시고 다시는 이런 소리를 하지 마시옵소서.” 하니, 세자는 거짓으로 놀라면서 말하기를, “평생에 매를 보지 못했거늘 어찌 매 소리를 할 수 있겠느뇨.” 하였다. 이래가 말하기를, “사냥할 때에 팔뚝에 올려놓고 토끼를 쫓게 하는 것이 매이온데 전하께서 어찌 보지 못했나이까.” 하였다. 무릇 과실이 있으면 이래는 반드시 반복하여 극간(極諫)하니 세자가 이래를 보기를 원수와 같이하여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계성을 보면, 머리가 아프고 마음이 괴로워지며 꿈속에라도 보면 그날에는 반드시 오한(惡寒)이 난다.” 하였다. 태종(太宗)께서 궁중에 감나무를 심고 그 열매를 무척 사랑하였는데, 새가 쪼아 먹으므로 태종께서 활 잘 쏘는 사람을 구하여 새를 쏘게 하자, 좌우에 모신 사람들이 모두, “조정 가운데 무사로서는 합당한 자가 없고, 오직 세자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태종이 곧 세자에게 명하니, 번번이 맞추었다. 좌우 사람들이 모두 경하하고 태종도 항상 세자의 행실을 미워하여 오래 보지 않다가 이날 비로소 마음이 흐뭇해 웃었다.
○ 김호생(金好生)이란 자는 본시 유생으로써 젊어서부터 서울에서 살았는데 붓을 잘 만들었다. 양녕(讓寧)이 세자가 되어 궁중에 잡객을 많이 끌어들여 그 덕을 잃자, 객으로서 세자와 더불어 노는 자가 있으면 죽이기도 하고 혹 귀양보내기도 하였다. 그런데 호생이 하루는 붓을 가지고 그 문에 이르렀다가 아전에게 결박되어 어전(御前)에서 심문하자, 호생은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태종이, “너는 외인(外人)으로서 청금(靑禁 세자 있는 궁중)에 드나들며 세자의 붓을 만들 수 있다면 또한 내 붓도 만들 수 있겠다.” 하고, 드디어 공조(工曹)에 속하게 하여 필장(筆匠)으로 삼았다. 호생이 연구(聯句)를 조금 지을 줄 알아 문사들 가운데 그를 후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호생이 문사에게 재명(齋名)을 짓고자 물었더니 문사들이 말하기를, “목은(牧隱)ㆍ포은(圃隱)ㆍ도은(陶隱)ㆍ농은(農隱)은 모두 자기가 좋아하는 바로서 호하였으니, 지금 그대는 붓을 만들어 이름이 있으니 호은(毫隱)이라 호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하였다. 호생은 좋아서 스스로 호은이라 하였다. 나중에 어떤 문사가 집에 이르러 말하기를, “그대는 호은의 뜻이라도 아느냐. 은(隱) 자는 은둔(隱遯)이라는 은이 아니라, 그대가 사람들에게서 호모(毫毛)를 받아 매양 절취하므로 은 자로 호한 것이니, 이 말은 바로 절취한다는 은 자이다.” 하니, 그는 다시 칭하지 아니했다.
○ 참판 박이창(朴以昌)은 재상 박안신(朴安身)의 아들이다. 젊어서 기개가 있고 담변(談辯)이 익살스러웠다. 강개하고 곧은 말을 하는 것은 제 아버지의 기풍이 있었다. 어렸을 적에는 상주(尙州)에서 살았는데 게을러 학업에 힘쓰지 아니하여 부모가 나무라도 따르지 않았다. 과거를 치를 때가 임박하여 과부(寡婦)의 아들이 공을 따라 놀았는데, 과부가 공에게, “내 아들이 향시(鄕試)에 나가려 하나 혼자 가지 못하니 자네가 꼭 데리고 가주게.” 하며, 부탁하였다. 공은 부득이 시험장에 들어가니 응시자들이 모두 글을 짓느라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공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조교(曹交)같이 큰 키로 백지를 내고 나오면 반드시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겠지.” 하고는, 할 수 없이 붓을 잡고 글을 지었다. 방이 나붙었는데 공이 장원이 되었다. 곧 부친에게 편지 올리기를, “온 고장의 선비들이 많이 모였으나 제가 으뜸을 차지하였으니, 영광스런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그 뒤로는 마음을 가다듬어 마침내 과거에 합격하였다. 처음에 한림(翰林)에 들어가니, 한림의 풍속이 처음 들어오는 자는 신래(新來)라 하여 혹은 주찬을 내게 하기도 하고 혹은 여러 가지로 수고롭게 괴롭히다가 만 50일 만에야 자리에 앉기를 허락하고 이를 면신(免新)이라 하였다. 공은 행동이 조심스럽지 않아서 여러 번 선배에게 실수하여 기한이 지나도 자리에 앉기를 허락하지 않으므로 공은 분노를 참지 못하여 스스로 그 자이에 올라 앉아 옆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이하니 그때 사람들이 자허면신(自許免新 스스로 면신을 허락하다.)이라 하였다. 일찍이 승지(承旨)가 되어 임금을 모시고 가는데, 길가에서 막을 치고 구경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으며, 어떤 여자가 옥 같은 손으로 발[簾]을 걷어올리고 몸이 반쯤 보이거늘, 공이 큰 소리로, “저 섬섬옥수를 이 손으로 끌어냈으면 좋겠다.” 하였다. 동료들이, “저 여자는 분명 양가집 처녀 같은데 그대는 그런 말을 하느뇨.” 하자, 공은, “저 여자만 양가집의 처자고 나는 양가집의 자제가 아니란 말인가.” 하자, 좌우에 있던 동료들이 크게 웃고 말았다. 그 뛰어난 말솜씨가 이와 같았다. 대개 재상으로서 경사(京師 북경)에 가는 사람에게는 평안도 주(州)ㆍ군(郡)에서 마른 양식을 많이 주어 이것으로 부자가 되는 사람이 많았다. 공은 일찍이 주사(奏事)할 때 이런 폐해를 말하였는데, 공이 북경에 가게 되자, 먼 길을 생각하여 부득이 많은 양식을 갖추고 가다가 발각되어 심문을 당하게 되었었다. 공이 돌아와 신안관(新安館)에 도착하여 말하기를, “무슨 낯으로 우리 전하를 뵙겠는가.” 하고는 자살해 버렸다.
○ 홍 재상(洪宰相)이 아직 현달하지 못한 때였다. 길을 가다 비를 만나 조그만 굴 속으로 달려 들어갔더니 그 굴 속에는 집이 있고 17, 8세의 태도가 어여쁜 여승이 엄연히 홀로 앉아 있었다. 공이. “어째서 홀로 앉아 있느냐.” 물으니, 여승은, “세 여승과 같이 있사온데 두 여승은 양식을 빌리러 마을로 내려갔습니다.” 하였다. 공은 마침내 그 여승과 정을 통하고 약속하기를, “아무 달 아무 날에 그대를 맞아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였다. 여승은 이 말만 믿고 매양 그날이 오기를 기다렸으나 그날이 지나가도 나타나지 않자 마음에 병이 되어 죽었다. 공이 나중에 남방절도사가 되어 진영(鎭營)에 있을 때, 하루는 도마뱀[蜥蝪]과 같은 조그만 물건이 공의 이불을 지나가거늘 공은 아전에게 명하여 밖으로 내던지게 하자 아전은 죽여버렸는데, 다음날에도 조그만 뱀이 들어오거늘 아전은 또 죽여버렸다. 또 다음날에도 뱀이 다시 방에 들어오므로 비로소 전에 약속했던 여승의 빌미[神禍]인가 의심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위세를 믿고 아주 없애버리려고 또 명하여 죽여버리게 하였더니 이 뒤로는 매일 오지 않은 날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나올 때마다 몸뚱이가 점점 커져서 마침내 큰 구렁이가 되었다. 공은 영중(營中)에 있는 모든 군졸을 모아 모두 칼을 들고 사방을 둘러싸게 하였으나 구렁이는 여전히 포위를 뚫고 들어오므로 군졸도 들어오는 대로 다투어 찍어버리거나 장작불을 사면에 질러놓고 보기만 하면 다투어 불 속엘 집어던졌다. 하지만 그래도 없어지지 않았다. 이에 공은 밤이면 구렁이를 함 속에 넣어 방 안에 두고 낮에는 함 속에 넣어 변방을 순행할 때도 사람을 시켜 함을 짊어지고 앞서가게 하였다. 그러나 공의 정신이 점점 쇠약해지고 얼굴빛도 파리해지더니 마침내 병들어 죽었다.
○ 칠원부원군(漆原府院君) 윤자당(尹子當)의 어머니 남씨(南氏)는 젊어서 과부가 되어 함양(咸陽)에서 살았는데, 윤자당의 나이 7살 때에 남씨를 따라 무당집에 가서 점을 쳤더니 무당은, “부인은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 아이는 참으로 귀하게 될 상이 있소이다. 그러나 반드시 아우의 힘을 입어 귀히 될 것입니다.” 하므로, 남씨가, “과부의 자식이 어찌 동생이 있으리오.” 하였더니, 뒤에 남씨가 이(李)씨 집에 개가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들이 재상 이숙번(李叔蕃)이었다. 태종의 정사(定社)를 도와 공이 제일이 되어 권세가 일국에 떨치고 윤공도 또한 이의 힘으로 훈열(勳列)에 끼어 군(君)에 봉해졌다.
○ 배후문(裴珝文)ㆍ이석정(李石貞)이 활 잘 쏘기로 한때 이름을 떨쳤는데, 활쏘기를 일과로 삼아 추우나 더우나 피하지 않고 달밤에도 활쏘기를 하였다. 두 사람이 사포(射布 무명 따위로 만든 과녁)를 쏘면 종일 쏘아도 빗나가지 않아 마침내 승부가 없었다. 혹 바위 위에 조그마한 표적을 세우고 쏘면 살이 똑바로 표적에 맞아 한번이라도 돌은 건드리지도 않으니 살이 끊어지는 일이 없었다. 여진(女眞)의 추장으로 활 잘 쏘는 자가 배후문의 이름을 듣고 서로 재능을 겨루고자 50보 밖에다 두 기둥을 세우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 옆으로 색칠한 노끈을 매고 그 중간에 조그만 고리를 매달았다. 배후문이 세 번 쏘아 세 번 다 맞히거늘 추장이 탄복하여 마지않았다. 배후문이 일찍이 말하기를, “하루는 이석정과 활을 쏘려고 먼저 그곳에 갔더니 사포는 아직 치지 않았고 그때 마침 꿩 두 마리가 옆에서 먹이를 쪼고 있는데, 겨우 백 보쯤 되는 거리이므로 가는 화살을 뽑아 한 마리를 맞혔더니 남은 한 마리가 날아가려 하여 또 쏘아 잡았다. 이런 일도 극히 요행한 일로써 보통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하였다. 이석정은 또 힘이 뛰어나게 세어 강궁(强弓)을 당기고 아침밥을 먹고는 말을 타고 활을 메고 화살 몇 개만 가지고도 대낮이 채 못 되어 돌아올 때는 꿩이나 기러기를 화살 수대로 잡아왔다. 이석정은 벼슬이 첨추(僉樞)에 이르렀다가 죄로 주륙을 당하였고, 배후문은 당상관에 오르지 못하고 팔이 부러져서 시골에서 묻혀 늙었는데, 병들어 활을 쏘지 못하므로 여린 나무활[軟弧]과 조그만 살을 만들어 적은 사포를 수십 보 앞에 세우고 쏘아도 백발백중 한번도 실수가 없었으니, 바로 명궁이라고 이름있는 자도 미치지 못하였다.
○ 세조(世祖)께서 발영시(拔英試)를 베풀자 명신ㆍ재상이 모두 참여하였다. 이튿날 사은(謝恩) 할 때 임금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접견하시고 술자리를 마련하여 위로하시되 친히 시를 지어 군신들로 하여금 화답하게 하였다. 백씨(伯氏)가 또한 입시하였다가 문질공(文質公) 이예(李芮)에게 귓속말로, “항상 임금께서 족하가 물정에 어둡다고 하시니, 그대가 희시(戱詩)를 지어 바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니, 이공이 화답하기를,
성덕을 노래하며 일어나 춤추고자 하니 / 歌詠聖德欲起舞
천풍이 소매에 불어 선회함을 돕는구나 / 天風吹䄂助回旋
하니, 임금이 크게 웃으며, “내가 예(芮)를 오활한 선비라고만 하였더니, 이 시를 보니 호기(豪氣)가 넘치는 사람이구나.” 하시고, 곧 궁녀에게 명하여 비파를 타게 하시고 문질의 시를 노래하게 하시며, 문질공으로 하여금 일어나 춤을 추게 하여 마음껏 즐기고 나서 파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가정대부(嘉靖大夫)에 가자되었다. 중추(中樞) 홍일휴(洪日休)는 용모가 웅위하고 조그마한 일이라도 거리끼지 않으며 성질이 또한 깨끗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 항상 얼굴을 씻지 아니하고 머리를 빗지 아니하며 음식도 좋고 나쁜 것을 가리지 않았다. 벗들과 강가에서 낚시질을 할 때 지렁이로 미끼를 하는데 칼이 없어 자를 수 없으면 이빨로 물어 끊었다. 또한 종일토록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는 누원(樓院)에 올라 옷을 벗고 다락에 올라 기왓장을 떠들어 참새나 비둘기를 찾아 털이 난 놈은 버리고 오로지 빨간 새끼만 가져다 싸리나무에 꿰어 구워서 여러 꿰미를 먹고 병을 기울여 술을 마신 뒤, “이것도 또한 맛이 좋은데 하필 자잘한 물고기만 취할까보냐.” 하였다. 세조를 따라 명 나라의 경사(京師)에 갈 때 매양 말똥을 주워 만두를 구워 먹었다. 그 후에 세조께서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말씀하시면 늘 홍일휴를 놀려, “이 사람은 깨끗하지 못하니 향관(享官 제관)을 시키지 말라.” 하였다. 공은 시를 잘 짓고 시사가 호건하며 또 중국말에 능통하여 여러 번 경사를 왕래하였는데, 일찍이 사신이 되어 남방으로 갔다가 하루저녁에 여러 말[斗]의 술을 마시고 그만 죽었다. 괴애(乖崖 김수온(金守溫))가 만사를 지었는데,
실컷 마실 제는 천 잔의 술을 중히 여기고 / 痛飮千杯重
뜬 인생은 한 털만큼 가볍게 여기도다 / 浮生一羽輕
하였다.
○ 백귀린(白貴麟)은 의술을 잘하였는데, 사람이 병이 나서 데리러 오면 반드시 가서 성심껏 치료하여 주되 약값은 한 푼도 받지 아니하였으므로 집안이 아주 빈한하여 겨우 의식을 갖출 지경이었으나 깨끗한 절조에 더욱 힘썼다. 중국 사신이 우리나라에 와서 백귀린을 보고 말하기를, “저 늙은 관원은 누구이기에 의관이 저렇게 초라한가.” 하자, 통역은, “사람에게 받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주지 아니하고 입고 있는 의관은 항상 술집에 있는 까닭으로 이와 같이 해어졌소이다.” 하니, 사신도 안색을 바꿔 공경하였다.
○ 중추(中樞) 정자영(鄭自英)이 어떤 날 입시하였는데 예(例)에 따라 매를 재상들에게 하사하여 모두들 팔뚝에 얹고 나왔다. 중추는 팔뚝에 얹을 줄을 모르고 두 손으로 붙잡다가 매가 날개를 쳐 할켜 두 손이 모두 찢어졌다. 좌우를 돌아보고, “이 새는 무엇을 먹고 사느냐.” 물으니, “날고기를 먹인다.” 하니, 중추는, “우리 집에서는 날고기는 얻기 어렵고 다만 사슴 고기포가 몇 조각 있는데, 이를 물에 담가서 연하게 해서 먹이면 되지 않겠소.” 하니, 좌우가 배를 안고 웃었다.
○ 세종께서 처음으로 집현전을 설치하여 문학하는 선비들을 불러놓고, 조석으로 불러 물으시면서도 오히려 문학이 진작되지 못할까 걱정하였다. 그래서 다시 그 중에서도 나이 젊고 총민한 자를 골라 절에 들어가 책을 읽게 하시고 뒷바라지하기를 심히 풍성하게 하였다. 정통(正統) 임술(壬戌)에, 평양(平壤) 박인수(朴仁叟 팽년)ㆍ고령(高靈) 신범옹(申泛翁 숙주)ㆍ한산(韓山) 이청보(李淸甫 개)ㆍ창녕(昌寧) 성근보(成謹甫 삼문)ㆍ적촌(赤村) 하중장(河仲章 위지)ㆍ연안(延安) 이백옥(李白玉 석형)이 명을 받들어 삼각산 진관사(津寬寺)에서 독서할 때, 학업을 매우 부지런히 하여 시문을 지어 서로 주고받기를 쉬지 않았다. 그 〈삼각산〉 연구(聯句)에,
누가 혼돈의 바탕을 나누었는고 / 誰分混沌穀
너는 아주 태고 적에 생겼도다 인수 / 爾生最太古
세 봉우리 가파르고 우뚝 솟아 / 三峯高崒嵂
만인이 우러러 바라보도다 범옹 / 萬目聳瞻睼
가득히 천지를 덮고 / 磅礡蔽天地
불끈 솟아 운우를 만들도다 근보 / 崇高作雲雨
그윽히 단혈봉이 깃들이고 / 幽捿丹穴鳳
백액호가 자취를 숨기도다 청보 / 屛跡白額虎
쪼개어져 탁 트인 것은 거대한 신령의 힘에 말미암았고 / 劈開由巨靈
높이 솟은 것은 신우의 힘이로다 인수 / 奠高賴神禹
이것으로써 하늘을 지탱하니 / 以玆盤持天
어찌 부루와 더불어 짝이 될쏜가 범옹 / 寧與培塿伍
험준한 것을 베풀어 왕공을 호위하고 / 設險衛王公
신을 내려보내 신보를 낳게 하였도다 근보 / 降神生申甫
대종이 어찌 제 나라에만 있겠으며 / 岱宗豈惟齊
동산도 유독 노 나라에만 있겠느냐 청보 / 東山非獨魯
천지가 정영을 쏟아내었고 / 乾坤費精英
해와 달이 번갈아 뜨고 지도다 인수 / 日月相呑吐
학을 타고 생황소리 들으며 / 鶴駕聆笙韵
신선 자취를 동부에서 찾는도다 범옹 / 仙蹤尋洞府
남산 시를 본받아 시를 짓고자 하나 / 賦欲效南山
재주가 한유만 못함을 부끄러워 하도다 근보 / 才慚非韓愈
가운데엔 단구를 몇이나 감추었는가 / 中藏幾丹邱
위에는 참으로 현포가 있도다 청보 / 上有眞玄圃
창안을 바라보매 어찌 그리 높은고 / 蒼顔望何尊
백두산이 그의 조상임을 알겠도다 인수 / 白頭知乃祖
사슴과 사자는 그물을 찢고 / 鹿猊羅網
소나무와 전나무는 도끼를 분잡하게 하도다 범옹 / 松檜雜斤斧
끊어진 것은 지맥이 갈라진 것을 근심하고 / 載愁斷地脈
유구하기는 천주를 찾는듯 근보 / 悠若尋天柱
공을 새긴 것은 연연산을 더럽게 여기고 / 銘功鄙燕然
봉선은 양부산을 그르게 여기도다 청보 / 封禪非染父
진을 만드니 황도의 머리요 / 作鎭黃圖首
형상이 흐르니 적현의 다리로다 인수 / 流形赤縣股
바라다보면 기울어지고 위태한 것이 장대함을 기뻐하며 / 望喜欹危壯
올라가 보면 구부려져 곱사 같은 괴로움을 근심하도다 범옹 / 登憂傴樓若
높고 가파르게 언덕의 돌이 벌여 있고 / 岩岩列崖石
번성하게 개암나무와 싸리나무가 많도다 근보 / 濟濟多榛楛
솥의 발처럼 가지런하여 높고 낮은 것이 없고 / 鼎立無尊卑
사람이 읍하니 누가 손이고 누가 주인인고 청보 / 人揖孰賓主
하늘에 높이 솟아 오르지 못하겠고 / 參天絶躋攀
나라에서 교제를 지내니 도끼를 쓰도다 인수 / 郊國用斤斧
봉우리가 위태하니 서미가 근심하고 / 峯危胥靡愁
골이 편안하매 선녀가 모이도다 범옹 / 壑穩仙女聚
양지 같은 박옥을 감추어 두었고 / 羊脂藏璞玉
아영은 종유가 난 것 같다 근보 / 鵝營生鍾乳
겨울에 눈이 오니 요대(신선 있는 곳)가 많고 / 冬雪多瑤臺
봄에 바람이 불어 꽃핀 언덕을 어지럽히도다 청보 / 春風亂花塢
구인산을 쌓으매 공이 한 삼태기로 부족됨이 비루하고 / 仞九陋虧簣
하늘에 가기가 5척 되는 것은 위두를 희롱하도다 인수 / 尺五欺韋杜
벌여 있는 봉우리는 모극을 빽빽이 세워 놓은 듯하고 / 攢峯森矛㦸
신령스런 소리는 소무를 연주하는 듯 근보 / 靈籟奏音召武
바위 위엔 샘물소리 졸졸하고 / 淙淙石上泉
연기 속엔 나무가 울창하도다 청보 / 鬱鬱煙中樹
진실로 주먹만한 돌이라도 높은 것을 알았으니 / 固知拳石崇
미진이 붙어 있는 것을 사양하지 말을 것이 인수 / 莫讓微塵寓
진에 임하여 치돌하는 것을 경계하는 듯 / 對陣嚴馳突
상황에 따라 당부를 나눈 듯하도다 범옹 / 臨機分黨部
온 산의 돌은 향배가 다르고 / 萬石紛向背
온 산의 숲은 희로를 달리한다 근보 / 千林紛喜怒
큰 운이 스스로 일어나니 / 泰運自興起
신공으로 지주가 되었도다 청보 / 神功爲支柱
연기가 일어나서 산면이 희고 / 煙生肌上白
눈이 쌓여 산등성이가 희도다 인수 / 雪積腦邊醢
찬 바람이 급하게 부니 / 寒風吹正急
여윈 뼈에 병이 새로 나은 듯 범옹 / 瘦骨病新愈
기이하고 굳건한 것은 진실로 형용하기 어렵고 / 奇建固難形
괴이하고 특이한 것 헤아리기 어렵네 근보 / 怪特不可數
만학은 생황과 북소리에 침취했고 / 萬壑酣笙鏞
온 숲이 일제히 연주하며 춤을 추도다 청보 / 千林齊鼓舞
수풀은 꾸불꾸불 놀라 달아나는 듯 / 林轉訝驚趨
바위도 꼬부라져 사람을 조롱하는지 범옹 / 岩回看嬉侮
변성엔 병진도 일지 않은 듯 / 邊城不動塵
효자도 등성이에 오를 일 없는 듯 근보 / 孝子無陟岵
용은 도사리고 운기를 뿜으며 / 龍蟄噓雲氣
신은 숨어서 연기를 일으키도다 청보 / 神藏起煙注
돌길은 이리 꾸불 저리 꾸불 / 石磴互盤廻
절간이 도처에 늘어서 있다 인수 / 招提相旁午
골짜기엔 응당 차가운 종소리 들릴 것이며 / 谷應聞寒鍾
아득한 시냇가 묵은 풀이 무성해 범옹 / 溪杳知宿莽
태항산이 진 나라를 가린 듯 / 如太行蔽秦
종남산이 호를 진압한 것 같도다 근보 / 若終南鎭鄠
혹은 소와 말이 달리는 것 같고 / 或如牛馬奔
정기가 세워진 것 같기도 하다 청보 / 有似旌旗竪
처음에는 배와 밤을 쌓은 것인가 의심하다가 / 初疑飣梨栗
문득 노적을 쌓았는가 의심하도다 인수 / 却訝積倉庾
안개가 걷히매 입을 벌린 듯 / 霧捲猶唅呀
구름이 깊으매 눈이 먼 것 같도다 범옹 / 雲深若盲瞽
높은 것은 교만한 장수 선 듯하고 / 仰者立驕將
낮은 것은 항복한 오랑캐가 엎드린 듯하도다 근보 / 低則伏降虜
소나무, 전나무는 수명이 매우 오래되었고 / 松檜年深老
바위와 언덕은 해가 오랠수록 병들도다 청보 / 岩崖歲久蠱
양춘의 기운은 화창하고 / 陽春氣融融
초목의 빛은 훈훈하도다 인수 / 草木光喣喣
주명이 새로운 음률을 연주하니 / 朱明布新律
무성한 숲은 푸르른 담장처럼 깊어만 가네 범옹 / 茂林增翠堵
백제가 금풍을 불게 하니 / 白帝扇金風
홍수는 옥우에 비쳤도다 근보 / 紅樹照玉宇
나뭇잎이 떨어지니 초췌함을 더하고 / 木落增憔悴
형용이 마르니 곱고 아리따움을 잃었도다 청보 / 形枯失媚嫵
온 산을 진실로 다 보기 어렵고 / 一山儘難窮
사계절의 경치는 취할 만하도다 인수 / 四時景可取
저녁 때 초동이 부는 젓대 소리와 / 樵聽橫晩笛
밤중에 중이 치는 요란한 북소리 듣겠도다 범옹 / 僧聞喧夜鼔
주정의 위태로움을 편안하게 하고 / 貼安周鼎危
높다랗게 은우를 쓴 듯하도다 근보 / 峩然戴殷冔
엄연하게 임금이 선 듯하고 / 儼然大帝立
무리지어 여러 신하가 호종하는 듯 청보 / 簇苦群臣扈
서쪽으로는 진관사를 숲으로 가리게 하였고 / 西林津寬寺
남쪽으로는 한강물을 눌렀도다 인수 / 南壓漢江滸
작은 것은 발을 돋움질하여 미칠 만한 것이 안타깝고 / 小憐跂而及
큰 것은 우러러보기만 하고 굽어보지는 못하는 것이 싫도다 범옹 / 大厭仰不俯
위로는 반짝이는 별빛에 부딪히고 / 上磨明星熒
아래로는 넓은 평야 풍성함을 굽어보네 근보 / 下瞰周原膴
선사에 차는 어찌 그리 시원한가 / 禪社茶何冷
시골의 술은 모름지기 살 만하다 청보 / 村墟酒須酤
경문을 궁구하려니 산절을 찾겠고 / 窮經尋山室
정신을 기르니 하늘의 도움을 받도다 인수 / 頤神受天祐
아침저녁으로 푸른 숲을 대하여 / 朝夕對蒼翠
앉았다 누었다 옛서적을 보도다 범옹 / 坐臥看訓詁
시를 짓고 읊조리는 것을 비록 몹시 좋아하나 / 賦詠雖酷好
학술은 거칠고 추하도다 근보 / 學術則麤粗
산의 영령에게 비노니 / 願乞山英靈
이럭저럭 내 패부를 넉넉하게 하소서 청보 / 聊益我肺腑
이로써 원대한 일을 기약하여 / 用以期遠大
몸을 이루어 상보가 될 만하기를 바라네 범옹 / 致身可相輔
하였다. 〈지등(紙燈)〉 연구(聯句)에,
수륜의 모양을 모방해 얻어서 / 倣得水輪樣
일실의 광명이 되게 하도다. 중장 / 藏爲一室光
위의 모습은 하늘이 구르는 것 같고 / 上軆如天轉
아래의 모양은 땅의 모진 것을 본받았도다 인수 / 下形象地方
바탕을 이룬 것은 가벼운 닥나무에 힘입었고 / 成質資輕楮
빛을 드날릴 제 태양을 피하도다. 백옥 / 揚輝避大陽.伯
알이 붉은 도롱뇽 구멍에서 솟은 듯하고 / 卵迸赬虬穴
차가움이 서리 같은 흰 비단에 엉긴 듯하네 범옹 / 寒凝素練霜
외면은 십분 깨끗한 것을 띠었고 / 面帶十分潔
중심은 한 점 불꽃에 합하였도다. 중장 / 心合一點芒
바람이 쏘지만 어찌 꺼질 것을 근심하랴 / 風射寧憂滅
밤이 밝으니 밤 깊음을 깨닫지 못하겠다 인수 / 夜明不覺央
겨울날에 어찌 눈을 기다리며 / 冬日何須雪
가을밤에 주머니를 허비할 것이랴 / 秋宵不費囊
연꽃이 새로 고운 것을 받들어서 / 菡萏擎新艶
가볍고 포근한 것 늦은 연당에 의지했도다 범옹 / 輕盈倚晩塘
눈 속에 신통한 불꽃이 밝고 / 雪裏明神焰
밤이 깊어서는 단장을 비치도다 인수 / 更深照短墻
순수한 구슬은 극진히도 이지러진 것이 없고 / 粹玉亢無缺
찬란하게 붉은 것은 다만 향기 없어 흠이로다 중장 / 爛紅只欠香
얇고 뚫린 것은 외면을 메워 있고 / 薄穿嗔外面
밝고 흰 것은 속 내장 취하였도다 인수 / 明白取中膓
밤에 중요하게 사용됨을 자랑 말라 / 莫誇宵切用
응당 새벽 되면 도로 감출 것을 백옥 / 應見曉歸藏,伯
연꽃 같은 횃불은 불이 이글이글함을 취하고 / 蓮炬取煒燁
은촛대에 켠 촛불은 밝고 휘황함을 피하였도다 범옹 / 銀燭避熒煌
꽃다운 마음은 짙게 아름다운 것을 본받았고 / 芳心樣濃艶
흰 바탕은 새로 단장한 것을 비웃는도다 중장 / 皓質笑新粧
요희가 눈에 술기운을 띤 듯하고 / 妖姬眼帶酒
용감한 장사 눈을 두리번거리는 듯하도다 / 死士目回瞠
빛을 훔쳤기에 달보기를 부끄러이 여기고 / 偸光慚見月
종이를 붙였으나 가리지 않는 듯하도다 백옥 / 粘紙認無障
등롱이 가벼우니 월 나라 비단이 경쾌하고 / 籠輕鉞羅快
바람이 급하니 제 나라 소가 미친 것 같도다 범옹 / 風急齊牛狂
일 점 밝은것은 별이 기울어진 듯 / 一點明星倒
십분 맑은 것은 거울을 펴놓은 것 같도다 인수 / 十分淸鏡張
강론하는 자리에는 유교와 불교가 서로 짝이 되고 / 講榻伴儒釋
먼지 묻은 책에는 제왕이 비치도다 중장 / 塵編照帝王
한씨의 잔걸이가 짧은 것이 아니요 / 非是韓檠短
도리어 두씨의 불꽃이 긴 것과 같도다 인수 / 還如杜焰長
사람에 있어서는 지나치게 필요한 것이나 / 在人偏需索
들고 가는 손에 따라 펄렁거리는 것을 일임하도다 백옥 / 隨手任翶翔
밝게 비친다고 어찌 스스로 기뻐하며 / 放明寧自喜
잠깐 어둡다고 상심할 것일까 범옹 / 暫晦不須傷
그윽한 곳을 비쳐 주니 일월과 같고 / 燭幽同日月
옥을 불사르는 것이 어찌 곤강뿐이겠느냐 중장 / 焚玉豈崑岡
낮을 계속하게 하니 공업을 부지런히 하고 / 繼晷勤功業
꽃을 봐서 상서로움을 점치리로다 인수 / 看花占志祥
친할 만도 하며 두려워할 만도 하고 / 可親兼可畏
착한 것을 주기도 하며, 또 재앙을 주기도 하는도다 백옥 / 貽善又貽殃
늙은 중이 뜻이 있음을 알겠고 / 老僧知有意
주린 쥐가 서로 방비함을 요구하도다 / 飢鼠要相防
가지고 다니는 것이 오래지 못할 것을 슬퍼하노니 / 提携憐不久
아침 해가 부상에 떴도다. 범용 / 朝日在扶桑
하였다. 〈고산방석(高山放石)〉 연구(聯句)에,
높은 산 천만 길 위에서 / 高山千萬仞
암석을 굴리도다 근보 / 自上放岩石
잠깐 뇌정 소리 진동하는가 의심스럽더니 / 乍訝響雷霆
빠른 것은 벽력이 나는 듯 청보 / 倏如飛霹靂
나무를 치니 놀라 푸른 가지 흔들리고 / 擊木驚搖翠
바위를 기울어 뜨리니 부딪혀 흰 가루를 내뿜네 범옹 / 傾岩觸噴白
구름을 뚫고 솟았다 잠겼다 하고 / 穿雲出復沒
물건을 만나면 순하게 내려가다가도 다시 거꾸로 튀도다 근보 / 遇物順還逆
맹수도 모두 옆으로 달아나고 / 猛獸盡橫奔
장부도 다 물러나 피하는도다 인수 / 丈夫皆辟易
깃들었던 학이 홀연히 잠을 깨고 / 捷鶴忽破眠
웅크려 있던 용은 응당 넋을 빼앗기리로다 청보 / 蟄龍應褫魄
가파른 곳을 피하느라 기세는 차차 느려지고 / 避峻勢漸緩
위태한 곳에서는 달리는 것이 다시 급박해지도다 범옹 / 臨危走更迫
날고 달리며 높고 낮은 데 임하고 / 飛走任高低
동쪽 서쪽으로 가는 곳마다 부딪히도다 백옥 / 東西隨觸激
목야의 군사가 뿔이 무너지고 / 牧野士崩角
요대의 미희가 비단옷이 찢어지도다 근보 / 瑤臺姬裂帛
깎아지르고 솟아오른 것이 어찌 언덕 뿐이겠느뇨 / 崩騰豈崖岸
기울어진 골짜기에 종적이 없도다 청보 / 傾洞無蹤跡
처음부터 누가 감히 당하리오 / 初來誰敢當
마침내는 더불어 막을 이 없도다 범옹 / 畢竟莫與格
나는 것이 송 나라에 떨어질 때 보다 빠르고 / 飛疾隕宋時
기세가 급한 것 양 나라의 돌 무너지는 것 같도다 백옥 / 勢急崩梁石
긴 창 빼앗기를 잠깐 동안에 세 번이나 하고 / 奪矟俄至三
창을 빗겨들어 하나가 백을 당하도다 근보 / 橫戈一當百
수레가 달리매 여러 진터 평정된 듯하고 / 車馳萬壘平
북이 울리니 천 군사가 추격하는듯하도다 청보 / 鼓動千軍擊
장부가 천리마를 타고 / 壯夫騎驥騏
가파른 산비탈에 채찍을 더하는 듯하도다 범옹 / 峻坂加鞭策
굴릴 만하니 시를 짓는 것이 합당하고 / 可轉合編詩
나는 데 능하니 활로 쏘는 것이 마땅하도다 백옥 / 能飛宜見射
빠른 물이 구렁에 쏟는 것 같고 / 駛水如注壑
놀란 망아지가 문틈을 지나가는 것과 같도다 근보 / 驚駒似過隙
차례로 하늘 소리가 크게 울리고 / 取次閧天籟
용이하게 지맥을 움직이도다 청보 / 容易勤地脈
귀에 떠들썩하니 달리는 수레가 지나가는 것 같고 / 聒耳奔車過
눈에 번득어리니 놀란 범이 몸을 던지는 것 같도다 범옹 / 閃眼駭虎擲
멀리까지 달아나니 말굽을 빌릴 것이 없고 / 致遠不暇蹄
공중을 나니 어찌 날개를 기다리리오 근보 / 飛空豈須翮
그물을 뛰어넘어 달아나는 토끼가 미친 듯하고 / 超置逸兎狂
새끼를 잃어 성낸 수캐가 으르렁대는 것 같도다 백옥 / 喪子怒獀嚇
몸이 가벼워 한 마리 새가 빠른 것 같고 / 身經一鳥疾
메아리가 크니 공산도 좁은 듯하도다 청보 / 響大空山窄
한 술 밥으로 배를 채우고 / 一飯漲胸腹
석 잔 호박주를 기울이도다 / 三杯傾琥珀
한가로움을 타서 높은 산을 업신여기니 / 乘閑陵崪嵂
연한 다리가 어찌 피곤하리오 / 軟脚何跛躄
적적하게 소일하는데 방법이 없으므로 / 送寂諒無由
너를 굴려서 애오라지 기뻐하도다 범옹 / 放爾聊怡燡
하였다. 〈문적(聞笛)〉 연구에,
한 가락 피리 소리는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고 / 一聲何處笛
밤중에 푸른 산에서 들리는도다 근보 / 中夜聞翠巘
달을 흔드니 그 소리는 어째서 높은고 / 撼月響何高
바람을 따라 날리어 다시 멀어지도다 청보 / 隨風飄更遠
청활한 것은 꾀꼬리가 목구멍을 굴리는 듯하고 / 淸濶鶯轉喉
둥글게 흐르는 것은 구슬이 비탈을 달리는 듯하도다 범옹 / 圓流丸走阪
귀를 기울이니 애달픈 소리가 흔들리고 / 側耳撼哀音
마음을 기울이니 답답함을 물리치도다 인수 / 傾心排忿懣
유유자적하는 거울 속의 심정이요 / 悠悠鏡裏情
하늘하늘은 산중의 저녁이로다 백옥 / 嫋嫋山中晩
돌을 찢는 듯하니 맑은 소리가 웅장하고 / 裂石淸韻壯
버들가지를 꺾으니 상사의 한이로다 근보 / 折柳相思恨
청탁은 스스로 차례를 이루고 / 淸濁自成倫
궁상은 서로 섞이지 않도다 청보 / 宮商不相混
놓아 보내니 스스로 묘하고 걷어오니 / 放去自要妙
마침내 부드럽고 곱도다 범옹 / 收來竟婉晩
평상에 걸터앉아 희롱하기를 오래했는데 / 據床弄已久
누에 의지한 흥치는 완상하기 어렵도다 인수 / 倚樓興難玩
채열의 기이한 운을 지금에 와서 듣거니와 / 奇韻今聞蔡
누가 완적의 맑은 휘파람 소리를 기억하려나 백옥 / 淸嘯誰記院
뜰 가에는 매화가 떨어지고 / 庭除梅花落
바다 속에는 어룡이 사납도다 근보 / 海底魚龍狼
처음에는 뽑아진 것에 놀라고 / 初驚引而長
오래돼서는 맑고 또 아름다움을 기뻐하도다 / 久喜淸且婉
어찌 홀로 농의 피리 부는 것만이 / 豈獨隴笳吹
장사하는 오랑캐를 도망하게 할 뿐이겠는가
범옹 / 能令賈胡遁
후산에는 봉의 소리가 맑고 / 猴山鳳聲淸
깊은 못 속에는 용의 읊조리는 것이 아름답도다 인수 / 泓下龍吟婉
슬픈 것은 관산의 나그네를 움직이게 하고 / 哀動旅關山
원한은 과부의 방에 깊었도다 백옥 / 怨深嫠室閫
하늘하늘한 소리는 더욱 슬프고 / 裊裊聲轉哀
유유한 심사는 평온하지 못하도다 근보 / 悠悠意未檼
올 때에는 어찌 귀를 기울였던고 / 來時耳何傾
가는 사람의 손은 붙들기 어렵도다 청보 / 去者手難挽
놀란 바람은 변방의 모래를 거두어 올렸고 / 擎風捲塞沙
찬 눈은 진 나라 동산에 불었도다 범옹 / 寒雪吹秦苑
들을수록 더욱 싫어지지 아니하여 / 聽之殊不厭
춤추는 내가 우쭐우쭐하리로다 인수 / 舞我宜蹲蹲
공교롭게 피리 부는 이 누구이더뇨 / 工吹是誰子
처음으로 알지언정 어찌 근본이 없을쏘냐 백옥 / 創知寧無本
자진은 본시 죽지 않았고 / 子晉元不死
환이는 살아서 돌아왔는가 의심나도다 근보 / 桓伊疑生返
외롭게 부는 것은 학이 홀로 읊조리는 것 같고 / 孤吹獨鶴吟
일제히 일어나는 것은 천 필의 소가 빠르게 뛰는 듯하도다 청보 / 齊作千牛輥
목이 메여 하소연하는 듯하고 / 咽咽如泣訴
소곤소곤 잔소리하고 수군거리는 것 같도다 / 呢呢同
젓대 부는 자에게 말을 부치노니 / 寄語吹笛子
잘 간수하여 삼가 손해하지 말게 하라 백옥 / 珍藏愼勿損
음악을 듣고는 고기의 맛을 몰랐다 하니 / 聞韶不知肉
나도 또한 한 끼 밥을 잊었노라 인수 / 我亦忘一飯
이를 사랑하여 스스로 막지 못하나니 / 愛之不自已
너를 위하여 그리운 마음을 펴도다 근보 / 爲爾攄繾綣
하였다. 일암(一庵)이라는 중이 항상 이들을 따라다니다가 얻어 전한 것이다.
○ 집현전의 여러 학사(學士)들이 상사일(上巳日)에 성남(城南)에서 놀 때 나의 화중(和中)씨도 참여하였다. 화중씨가 새로 급제하여 문명이 있어 맞아 간 것이다. 학사들이 운자(韻字)를 나누어 시를 짓자 화중씨도 남(南) 자 운으로 시를 짓기를,
연참으로 몇해 동안 병이 나서 견딜 수 없었더니 / 鈆槧年來病不堪
춘풍이 흥을 끌어 성남에 이르렀도다 / 春風引興到城南
볕 드는 언덕의 방초는 가늘기가 짠 것과 같으니 / 陽坡芳草細如織
이야말로 춘 3월 3일이로다 / 正是靑春三月三
하니, 여러 학사들이 붓을 놓고 시를 짓지 못했다. 박사(博士)가 되어 제학(提學) 백고(伯高)와 더불어 난파(鑾坡 옥당)에 있을 적에 백고가 연구를 지어 이르기를,
옥당에 봄이 따뜻하여 해가 처음으로 더디가는데 / 玉堂春暖日初遲
남창에 기대어 졸면서 백치를 기르도다 / 睡倚南窓養白癡
우는 새 두어 소리에 낮꿈을 놀라 깨니 / 啼烏數聲驚午夢
행화가 방싯 웃고 새로운 시에 들어가도다 / 杏花嬌笑入新詩
하니, 화중이 차운하기를,
어린 제비 우는 비둘기에 낮 시간이 더딘데 / 乳燕嗚鳩晝刻遲
봄날이 쌀쌀한 태액에 버들가지 어리석은 듯 / 春寒太液柳如癡
난파에서 잠깨어 할 일이 없으므로 / 鑾坡睡破無餘事
때로 만전을 펴놓고 시를 쓰도다 / 時展蠻箋寫小詩
하였다. 또 장의동 조지서(造紙署)에서 잔치를 벌였는데, 기생 수명과 스님 수명이 있었다. 제공이 모두 시를 지을 제, 화중이 또한 글을 짓기를,
꽃이 있고 술이 있고 또 산이 있으며 / 有花有酒仍有山
손도 기뻐하고 주인도 기뻐하며 스님도 또한 기뻐하도다 / 賓歡主歡僧亦歡
취한 뒤에 두 귀가 붉어짐을 사양하지 아니하니 / 不辭醉後兩耳熱
떨어지는 폭포 낯을 스쳐 사람을 차게 하도다 / 飛泉洒面令人寒
하니, 백고가, “‘사람을 차게 하도다[令人寒]’를 ‘소리소리 모두 차도다[聲聲寒]’라고 고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 사성(司成) 최수(崔修)가 시를 잘한다는 명성이 있었는데,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길에서 쥐가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우연히 시구를 얻기를,
언덕에 쥐는 종횡으로 구멍을 뚫는다 / 陌鼠縱橫穴
하고는, 그 대구를 얻지 못하였다가 새가 둥우리를 만들고 있는 것을 보고,
산새는 위곡하게 집을 지었도다 / 山禽委曲巢
하였는데, 이는 모두 자연에서 얻은 것이지 애써 지은 것이 아니다.” 하였다. 〈황려도중(黃驪途中)〉시에,
벽사(신륵사)의 종소리가 한밤중에 울리니 / 甓寺鍾聲半夜鳴
광릉의 귀객이 꿈을 비로소 깨도다 / 廣陵歸客夢初驚
장계로 하여금 만일 이곳을 지나게 한다면 / 若敎張繼來過此
반드시 한산사만이 이름을 독차지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 未必寒山獨擅名
하고, 또 거문고 잘하는 감자려(金自麗)의 시를 지어 이르기를,
내가 일찍이 여강 위에서 읊조릴 때 / 我昔驪江江上吟
이불을 안고 한밤중에 거문고를 울리도다 / 携衾半夜獨鳴琴
처음에는 돌 구멍에서 찬 샘물이 우는가 의심하다가 / 初疑石竇冷泉咽
문득 송창에 상쾌한 솔바람 소리가 침로하는가 여겼노라 / 却訝松窓爽籟侵
백설ㆍ양춘의 끼친 소리가 있는 듯하고 / 白雪陽春遺響在
고산ㆍ유수곡은 옛정이 깊은 듯하도다 / 高山流水古情深
오늘날 상사조를 기쁘게 들으니 / 喜聞今日相思調
몇해 동안 보지 못하던 마음을 풀고야 말았다 / 彈盡年來不見心
하였다.
○ 소자(少子) 세준(世淳)은 호를 죽헌(竹軒)이라 하는데, 백씨의 아들로서 나보다 세 살 아래였으므로 나와 함께 공부했는데, 겨우 시구를 퇴고하는 것을 배우고는 지을 줄 알았으며, 겨우 《맹자》를 읽고는 글을 지을 줄 알아서 생각이 마치 물이 솟듯하여 귀신이 돕는 것 같았다. 〈산거(山居)〉라는 시를 짓기를,
아침에는 흰 구름과 같이 가고 / 朝伴白雲去
저물어서는 밝은 달을 따라온다 / 暮隨明月來
하고, 나무를 베는 소리를 듣고 시를 짓기를,
가을이 구름 낀 산 가운데 깊은데 / 秋深雲山中
나무꾼이 도끼를 메고 가도다 / 櫵人荷斧去
나무 찍는 소리는 정정한데 / 伐木聲丁丁
옷을 벗어 야호를 부르도다 / 袒裼呼耶許
하였다. 어떤 친척이 영남으로 가려 하자 고별하려 왔는데, 친척이, “어린애로 시를 잘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한 구를 청한다.” 하니, 곧 입으로,
보내기를 임하여 버들가지 잡아매니 / 臨送門前綰柳條
천암만학에 길은 멀고 멀도다 / 千巖萬壑路迢迢
남쪽 시골의 다른 날 서로 생각하는 곳은 / 南鄕他日相思處
소쩍새 소리에 푸른 묏부리가 높았도다 / 蜀魄聲中碧嶺高
하였다. 겨울의 눈이 녹고 날씨가 따뜻하자, 문사 수명이 백씨를 찾아와서 어린애를 불러 시를 짓게 하니 즉석에서,
동지에 일양이 생기어 토기가 융해하니 / 冬至陽生土氣融
갠 날을 좋아하는 황새가 공중에 오르도다 / 喜晴鵝鸛上遙空
지관에 눈이 녹아 봄날인가 의심하였더니 / 雪消池館疑春日
바로 이는 산남의 10월 바람이로다 / 正是山南十月風
하였다. 외숙 안공(安公) 부부가 모두 나이 70이었는데, 그 아들 연(輦)이 ‘수춘(壽椿)이라 당호(堂號)를 짓고 동자에게 장난삼아, “네가 기(記)를 짓겠느냐.” 하니, 곧 붓을 잡고, “춘(椿)은 나무 중에서 수(壽)하는 것이니, 부모의 수를 나무의 수와 같게 함은 효자ㆍ인인(仁人)의 하고자 하는 바라.” 하자, 모두들 손뼉을 치며 탄복하였다. 그러나 15살에 요절하니 사람들이 모두 아깝게 여겼다.
○ 나의 중씨(仲氏)에게 세 아들이 있었는데, 맏이 세걸(世傑)이니 영민하고 시에 능하였으나 13살에 죽었다. 일찍이 사람을 따라 수차동(水車洞)에 놀면서 시짓기를,
두 시냇물이 흐름은 뱀이 돌고 있는 것 같고 / 二溪流水回靑虵
아득한 수풀은 그윽한 흥취가 많도다 / 林壑窈窕幽興多
그대에게 권하노니 오늘에 실컷 마시지 않는다면 / 勸君今日不痛飮
이 난만한 산꽃을 어찌 하겠느뇨 / 奈此爛熳山花何
하여, 그 당시 신동이라 하였다. 둘째는 세적(世勣)인데, 자는 무공(茂功)이다. 영민하기가 비할 바 없어 어려서부터 시사(詩思)가 초초(苕草) 이삭에서 나온 것 같고, 서법이 신묘하여 백씨와 분별하기 어려웠는데, 장성하여서는 문장이 또한 웅장하여 준마가 산비탈을 달릴 때 재갈로서도 제어하기 어려운 것과 같았다. 〈승호설경부(蠅虎舌耕賦)〉와 같은 것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으며, 생원시에 응시하여 〈지리불여인화론(地理不如人和論)〉을 지어 여러 작 중에 뛰어나 결국 1등으로 뽑혔다. 일찍이 벗과 더불어 산사(山寺)에서 독서할 제 밤중에 변소에 갔다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아니하더니 이 뒤로부터 심신이 황홀하고 광질(狂疾)을 얻어서 지금 나이 40이 넘었어도 몽매하여 인사를 알지 못한다. 그 아우 세덕(世德)도 진사시에 올랐으나 또한 광질을 얻어 낫지 않았다. 대개 광인은 더운 여름에 두꺼운 갖옷을 입어도 더운 줄 모르고, 추운 겨울에 홑옷을 입어도 추운 줄 몰라 병들지 아니하고, 근심과 즐거움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며, 말이 이랬다 저랬다 하고, 더러운 곳에서 살면서도 오직 음식을 먹을 때만은 짜고 싱거운 것을 적절히 알고, 배고프면 먹을 것을 찾으며 배부르면 곧 쉬니, 하늘이 사람에게 병이 들게 할지언정 죽게는 하지 않았다. 무공은 두 아들이 있으니, 의(誼)와 양(諒)이다. 의는 시를 잘하여 그의 율시는 청영(淸穎)하고 법이 있으며 양은 시부를 잘하고 또 조행이 있었는데, 그가 지은 〈묵매석척(墨梅蜥蜴)〉등의 부는 세상에 잘 알려졌다. 두 사람 모두 30이 못 되어 죽었는데, 양이 죽자 친구들이 모여 초상을 돌봐주었더니, 그가 오래도록 쌓은 덕망이 있었음을 알겠다.
○ 문평공(文平公) 김괴애(金乖崖)는 육경(六經)과 제자백사(諸子百史)에 능통하여 깊이 탐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석전(釋典)에는 더욱 깊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학문의 공은 모름지기 한 책을 숙독함을 요하고, 또 천천히 그 뜻을 생각하여야 하니 급속하면 그 맛을 맛보기 어렵다. 나는 마음을 바로잡고 성(性)을 정(定)하였으므로 대하는 곳마다 통한다.” 하였다. 어려서 늘 남의 책을 빌려 반궁(泮宮)에 내왕할 때 날마다 한 장씩 떼어 이를 소매 속에 감추어 두고 외었는데, 만약 잊어버린 곳이 있으면 꺼내어서 이를 보고 외고는 곧 기억하였다. 그러므로 한 질의 책을 외우면 한 질의 책이 다 없어졌다. 문충공 신상(申相 신숙주)이 《고문선(古文選》을 하사받은 것이 있었는데, 그 장정이 새롭고 훌륭해서 아끼고 손에서 내놓지 않았는데, 공이 찾아가서 빌려 달라고 간절히 청하자 문충공은 할 수 없이 빌려주었다. 한 달이 넘어 그 집에 가보니 이 책을 찢어서 조각조각 벽 위에 발라 연기에 그슬려서 분별하기도 어렵게 되었는지라, 그 연유를 물으니, “내 일찍이 누워서 외었기 때문에 그랬노라.” 하였다. 그 문장의 필세가 호한(浩瀚)하여 장강의 큰 파도가 도도하여 막을 수 없는 것과 같았다. 시문을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손 가는 대로 쓰고 일찍부터 기초(起草)하는 일이 없어 글을 구하는 사람이 심지어는 8, 9명이 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붓을 잡게 하고는 사방을 둘러보며 불렀으나, 그 글은 모두 체에 맞아 점 하나 더할 것이 없었다. 세조 때에 사리(舍利)의 서기(瑞氣)를 진하(陳賀)하는 일이 많이 있었는데, 문병(文柄)을 주관하는 자라도 바로 표를 짓지 못하였지만, 한림(翰林)이 종이를 가지고 바치면 이에 응하기를 메아리같이 하되 그 대우(對偶)가 더욱 정밀스럽고 틀림이 없었다. 일찍이 재상과 더불어 문(文)을 논할 제 중추 구종직(丘從直)이 말하기를, “김괴애의 웅문(雄文) 거필(巨筆)을 감히 바라다볼 수도 없으나 《사서의(四書疑)》와 같은 것에 있어서는 양보하지 않으리라.” 하니, 공도 분명히 말하기를, “그러면 그대와 더불어 자주(自注)를 비교해 봄이 어떠할꼬.” 하였다. 판서 김예몽(金禮蒙)이 이때 한자리에 앉았다가 사서의 의문점을 추려서 물으니, 구공이 먼저 지었으나 모두 묵은 말이나 속된 설이었다. 공은 다음에 지었는데, 6경의 주소(注疏)를 인용하여 증명하지 아니한 것이 없고, 고인도 이르지 못한 곳까지 뛰어넘어 이르니 모두 그 신통함에 감탄하였다. 이날 영순군(永順君)이 공에게 말하기를, “나는 사은(謝恩)할 일이 있어 표를 지어야 하겠는데 지어주기 바란다.” 하니, 공은 허락하고 하연대(下輦臺) 가에 내려가 말하기를, “집에 돌아가면 게을러져서 짓기 어려우니 지금 지어 바치리라.” 하고, 드디어 종이를 찾아 펴고 서서 입으로 부르며 선비로 하여금 쓰게 하여 삽시간에 지었는데, 표사가 간절하고 정밀하였다. 구공(丘公)이 사중(沙中)에 꿇어앉아 말하기를, “평소에 공의 문장이 고묘하다 함을 듣기는 하였으나 이처럼 극에 이르렀음은 몰랐더니, 오늘에야 비로소 하늘처럼 높았음을 알았으니, 다시 공과 글로 다투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황화(皇華 중국 사신) 진한림(陳翰林)이 양화도(楊花渡)에서 놀 때 시를 지었는데, 시에 이(怡) 자가 있어 차운하는 사람들이 모두 부끄러워 우물쭈물하자, 공이 드디어 짓기를,
강이 깊으니, 화가는 물론 뜰 것이요 / 江深畫舸惟須泛
산이 멀어 밝은 구름은 다만 즐거워 하리다 / 山遠晴雲只可怡
하니, 진공이 말하기를, “어떤 시에,
산중에 무엇이 있으리오 / 山中何所有
묏부리 위에 흰구름이 많도다 / 嶺上多白雲
다만 스스로 즐거워 할지언정 / 只可自怡悅
그대에게 갖다 증정하지는 못하리다 / 不堪特贈君
하였는데, 그대야말로 그 뜻을 얻었도다.” 하였다. 기랑중(祈郞中)이 한강(漢江)에서 놀 때 시를 지었는데, 시에 면(眠) 자가 있어 좌중의 문사가 모두 한 편씩 화답하였으나, 공만은 간고(艱苦)히 신음만 하고 오래도록 짓지 못하다가 마침내 한 구를 지었는데,
강구에 해가 기우니 사람들이 스스로 모이고 / 江口日斜人自集
부두에 바람이 자니 백로가 졸도다 / 渡郖風靜鷺絲眠
하니, 이때에 주서(注書) 이창신(李昌臣)이 옆에 있다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자집(自集)과 사면(絲眠)이 대구가 아닌 듯하다.” 하므로, 공은 문득, “그러면 그대가 고쳐보라.” 하였다. 이창신은, “사(絲)를 한(閑)으로 함이 어떠하오.” 하였다. 공은, “그대의 말이 아주 마땅하다. 나는 근래에 시사가 말라붙어서 침이나 뜸으로도 고치지 못할 병이 되어 버렸노라.” 하니, 사람들도 모두 웃었다. 공은 시문에는 비할 데가 없으나 살림에는 졸렬하여 늘 책을 평상에 늘어놓고 자리를 그 위에 깔고 자거늘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평상은 차고 깔 담뇨는 없어 그런다.” 하였다. 문 앞에 큰 회[槐]나무가 있어 연한 녹음을 이루었는데, 공이 종을 시켜 톱으로 베거늘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집안에 땔나무가 없어 밥을 지으려 한다.” 하였다. 하는 일들이 보통 이와 같았다.
○ 영천군(永川君) 정(定)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아들인데, 그 부인은 우리 문중에서 갔으므로 서로 친히 지냈다. 사람됨이 호탕하여 거리낌이 없고 성품이 또한 순진하여 무슨 일이든 생각에 따라 곧장 행하였다. 시사(詩思)가 청신하고 화격(畵格)이 또한 기이하였다. 일생을 주색에 빠져서 향기(鄕妓)가 처음으로 뽑혀서 서울에 오면, 공은 집으로 맞아다가 의복을 잘 차려 입혔으며, 곧 젊은 사람들이 유인하여 도망해도 또한 찾지도 않았다. 이런 까닭으로 평생에 잘되게 해준 사람이 그 수를 모를 정도이고, 집안 계집 종은 모두 악공을 불러 시집을 보냈다. 한 병 술을 얻더라도 풍악이 뜰에 가득하여 매일 취했다. 일찍이 마상(馬上)에서 채찍을 들어 허공에다 글을 쓰거늘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산수도형(山水圖形)을 그렸다.” 하였다. 문사를 몹시 사랑하여 사귀는 사람이 모두 명경(名卿)ㆍ거유(鉅儒)였다. 만약 유생을 보면 마상에서라도 옷소매를 잡고 고금 인물의 문장과 기율(氣律)을 두루 논하였다. 사문 이윤인(李尹仁)ㆍ이유인(李有仁) 형제가 이현(梨峴)을 지나다가 영천군이 술에 취하여 남루한 옷을 입고 길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두 사람이 보통 사람이라 여기고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더니, 영천군이 사람을 시켜 불러오게 하고는 말하기를, “너는 왕손(王孫)을 보고도 어찌 예를 하지 않느냐. 너희들은 누구냐.” 하니, 이유인이, “우리는 문사로소이다.” 하였다. 군이 “누구의 방(榜)에 급제하였느냐.” 하니, 이유인이, “우리의 장원(壯元)은 고태정(高台鼎)입니다.” 하니, 군은 침을 뱉으며, “강자평(姜子平)의 유이니 너는 속히 물러가라.” 하고, 윤인에게 묻기를, “너는 누구뇨.” 하니, “문사올시다.” 하였다. “너는 누구의 방에 급제하였느뇨.” 하니, 대답하기를, “우리의 장원은 이승소(李承召)올시다.” 하였다. 군이, “그러면 〈백두산부(白頭山賦)〉를 아느냐.” 하니, 이윤인이 외우거늘, 군은 머리를 조아리며 절하고 보냈다.
○ 우리나라에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적어서 재상이 죽어도 비갈(碑碣)을 쓰는 일이 적고, 다만 큰 절의 옛터에 비갈이 많이 남아 있으니, 지금 영남의 여러 절에 최고운(崔孤雲)이 찬한 것이 있고, 원주(原州) 자복사(資福寺) 비(碑)는 왕태조(王太祖)가 짓고, 당태종의 글씨를 모아서 쓴 것이니 역시 하나의 특이한 보물이다. 현화사(玄化寺) 비는 현종(顯宗)이 친히 전액(篆額)을 쓰고 주저(周佇)가 글을 지어 채충순(蔡忠順)이 글씨를 썼다. 영통사(靈通寺) 비는 김부식이 짓고, 오언후(吳彦侯)가 써서 모두 기고(奇古)하나 자체(字體)과 다르다. 보현원(普賢院) 뜰에 반이 부러진 비가 있는데, 사어(辭語)가 호건(豪健)하고 자체가 굳세니, 원조(元朝)의 위소(危素)가 글을 짓고 우집(虞集)이 쓴 것이어서 참으로 세상에 드문 보물인데 사람들이 보호하여 아끼지 않아 지금은 이미 깨지고 부서져서 남은 것이 없다. 정릉비(正陵碑)는 목은이 지은 글을 유항(柳巷 한수(韓修))이 쓴 것인데, 또한 정묘함을 극하였다. 아조(我朝)에 이르러서 원각사(圓覺寺) 비는 김괴애(金乖崖)가 지은 글을 백씨(伯氏)가 쓴 것인데, 그 필법이 자앙(子昻)과 더불어 대등하다. 안평대군(安平大君) 용(瑢)이 쓴 영릉비(英陵碑)라도 또한 이보다는 나을 수 없으니, 후세에 보물로 삼는 사람이 반드시 많을 것이다.
○ 동파역(東坡驛)으로부터 송도(松都)로 향하는 어간에 보현원(普賢院)이 있는데 전하기를, “의종조(毅宗朝)의 문신이 조난당한 곳이다.” 한다. 내가 젊었을 때에 그 들을 지나는데, 산기슭에 깊고 검은 못이 있어 그 길이가 수리(里)나 되므로 지난 일을 생각하고 강개함을 이기지 못하였더니, 후에 이곳을 지날 때는 이미 뭍으로 바뀌어 농사를 짓는 땅이 되어 있었다.
○ 새로 급제한 사람으로서 삼관(三館)에 들어가는 자를 먼저 급제한 사람이 괴롭혔는데, 이것은 선후의 차례를 보이기 위함이요, 한편으로는 교만한 기를 꺾고자 함인데, 그 중에서도 예문관(藝文館)이 더욱 심하였다. 새로 들어와서 처음으로 배직(拜職)하여 연석을 베푸는 것을 허참(許參)이라 하고, 50일을 지나서 연석 베푸는 것을 면신(免新)이라 하며, 그 중간에 연석 베푸는 것을 중일연(中日宴)이라 하였다. 매양 연석에는 성찬(盛饌)을 새로 들어온 사람에게 시키는데 혹은 그 집에서 하고, 혹은 다른 곳에서 하되 반드시 어두워져야 왔었다. 춘추관과 그 외의 여러 겸관(兼官)을 청하여 으레 연석을 베풀어 위로하고 밤중에 이르러서 모든 손이 흩어져 가면 다시 선생을 맞아 연석을 베푸는데, 유밀과(油蜜果)를 써서 더욱 성찬을 극진하게 차린다. 상관장(上官長)은 곡좌(曲坐)하고 봉교(奉敎) 이하는 모든 선생과 더불어 사이사이에 끼어 앉아 사람마다 기생 하나를 끼고 상관장은 두 기생을 끼고 앉으니, 이를 ‘좌우보처(左右補處)’라 한다. 아래로부터 위로 각각 차례로 잔에 술을 부어 돌리고 차례대로 일어나 춤추되 혼자 추면 벌주를 먹였다. 새벽이 되어 상관장이 주석에서 일어나면 모든 사람은 박수하며 흔들고 춤추며 〈한림별곡(翰林別曲)〉을 부르니, 맑은 노래와 매미 울음소리 같은 그 틈에 개구리 들끓는 소리를 섞어 시끄럽게 놀다가 날이 새면 헤어진다.
○ 무릇 꿈은 모두 사려(思慮)를 따라 이루어지는 것인데, 일일이 부험(符驗)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일찍이 기이한 꿈을 꾸고 부험이 있었던 것이 네 번이었다. 내가 나이 17, 8세때의 꿈에, 산골짜기에 들어가니 산이 기묘하고 물이 맑은데 시내를 끼고 복숭아꽃이 어지럽게 피었고, 어떤 절에 이르니, 푸른 잣나무 몇 그루가 그림자를 뜰가에 비치고, 당에 오르니 황금부처가 있으며 노승의 염불소리가 숲속을 진동하고, 물러가 별실에 가니 단장한 몇몇 어여쁜 계집이 즐겁게 노는데, 사모 쓴 관원이 술을 권하여 내가 취해 도망치다가 문득 하품하고 기지개를 켜는 바람에 깨었었다. 수년 뒤에 내가 백씨(伯氏)와 함께 대부인을 모시고 해주(海州)에 가서 하루는 신광사(神光寺)에서 놀았는데, 바위 틈에서 흐르는 물이나 수목이나 전당(殿堂)이나 낭무(廊廡)가 꼭 전에 꿈에서 본 것 같았다. 순찰사(巡察使) 한공(韓公)이 또한 가서 대부인을 위하여 재반(齋飯)을 베풀 때, 중 가운데 노승이 염불하는 것이 또한 꿈에서 본 바와 같았고, 목사(牧使) 이공이 나를 맞아 외실에서 술마실 때 고을 기생 수명이 곡에 맞추어 노래하며 목사가 술을 권하여 나는 매우 취하여 돌아왔다. 내가 기축년에 대부인의 상을 받들어 파주(坡州)에 장사지내고, 초려(草廬)에서 지낼 때 밤중에 등불을 켜고 《남화경내편(南華經內篇)》을 읽다가 책상에 기댄 채 잠깐 졸았더니, 문득 선경(仙境)에 이르렀는데, 그 궁실이 장엄하고 화려하여 완연히 인간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었는데, 어떤 사람이 검정 옷을 입고 전(殿) 위에 앉았는데, 얼굴에 수염이 많으므로 나는 뜰 아래에서 엎드려 절하였다. 나중에 백씨를 따라 명경(明京 북경)에 갔더니, 그 궁실은 역력히 꿈에서 본 그대로였고, 황제의 얼굴 또한 꿈속에서 본 것과 같았다. 내가 옥당(玉堂)에 수직(守直)할 때 꿈에 승정원 앞 방에 이르니, 겸선(兼善)이 방에 있다가 나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속히 돌아가라. 내가 이 방을 나간 뒤에는 그대가 이 방에 들어올 것이다.” 하더니, 얼마 안 되어 겸선이 승지를 제배하였고, 갈려간 뒤에 내가 또한 승지에 제배되었다. 또 꿈에 산골짜기 들어갔더니 길이 매우 험하여 혹은 언덕을 따라 오르고 혹은 구렁을 건너서 몹시 어려운 길을 거쳐 겨우 산 중턱에 이르니, 한 높은 누가 있었다. 더위잡고 올라가 보니 기지(耆之)가 먼저 그 가운데 앉아서 나를 맞이하며 말하기를, “어찌 먼 길을 이리저리 둘러왔느뇨. 나는 지름길을 따라 올라왔노라.” 하며, 누 아래 있는 긴 다리를 가리키며, “이것이 곧은 길이다.” 하더니, 얼마 아니 되어 기지는 전한(典翰)으로 승지(承旨)를 특배하고, 나는 다른 직을 역임했다가 후년에 승지를 배하니 그 부험이 꼭 맞았다.
○ 내가 일찍이 원중(園中)에 있을 때 어떤 새 한 마리가 허리 위는 얼룩덜룩하고 허리 아래는 순황색인데, 나는 것이 마치 베틀의 북을 던지는 것 같으므로, 비로소 한 물건이 여름에는 꾀꼬리가 되고 겨울에는 딱따구리가 되는 것임을 알았다. 또 시골에 있을 때에 밭 가운데 물에 새우가 많음을 보고 늘 잡아다 먹었는데, 하루는 돌아와 보니 조그만 새우와 발이 많은 냄새 나는 벌레가 서로 섞여 빙빙 돌기에 자세히 보니, 머리와 꼬리가 절반이나 된 것도 있었다. 이로부터 화생(化生)의 이치가 헛되지 않은 것임을 알았다.
○ 사성(司成) 최지(崔池)가 등제(登第) 이후에 대부분 외직만 역임했는데, 세조 11년에 문사들을 경회루 아래에 모여놓고 재주를 시험할 때, 최지가 깊이 한숨지으며 천천히 걸어 후원에 이르렀다가 마침 임금이 보통 차림으로 원중으로 나오심을 만났으나, 최지는 길게 읍(揖)만 하고 절하지 않았다. 임금이 묻기를, “너는 어떤 사람이길래 마음대로 내지(內地)에 들어와서 나에게 무례하느냐.” 하였다. 최지는, “나는 문사인데 궁중에는 다만 임금이 계실 뿐이니 어찌 감히 따로 자네한테 예하겠느냐.” 하였으나, 최지는 이때 이 분이 범인은 아니고 반드시 왕자일 것이라 여기고 드디어 길가에 꿇어앉았다. 임금이, “네가 원양(原壤)이 아니냐. 어찌하여 꿇어앉아 기다리느냐.” 하시더니, 조금 있다가 시녀와 내시가 잇따라 나오자 최지가 놀라고 두려워서 사죄하니, 임금이 곧 서현정(序賢亭)에 납시어 지를 부르시고 경사(經史)를 강론하는데, 묻는 대로 술술 대답하여 경사의 깊은 뜻을 하나하나 정밀히 이해하였다. 임금이 매우 기뻐하여 손수 술을 하사하시니, 최지가 쾌히 몇 잔을 기울이되 안색이 태연하므로, 임금은 이르기를, “이 유생이 이학(理學)에 정밀하거늘 늦게야 알게 된 것이 한스럽다.” 하시고, 곧 최지를 사예(司藝)로 삼았다.
○ 계성군(雞城君) 이양생(李陽生)은 본래 서자로 미천한 사람이다. 일찍이 신을 만들어 겨우 먹고 살았는데, 장용대(壯勇隊)에 들어가 이시애를 정벌하는 일에 공이 있어서 공신호(功臣號)를 하사받아 가선(嘉善)에 이르고 봉군(封君)되었으나 글을 몰랐다. 그러나 성품이 순진하고 근엄하고 화락하여 조금이라도 거짓이 없었다. 일찍이 옛 장터를 지나다가 이전에 미천하였을 때 사귀었던 친구를 보면 반드시 말에서 내려 얼싸안고 서로 이야기한 뒤에 떠났다. 그 아내는 나의 종년인데, 용모가 추하고 보잘것없는 데다가 나이가 많아도 자식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권하기를, “그대는 큰 공이 있어 벼슬이 재추(宰樞)에 이르렀으나 뒤를 이을 자식이 없으니, 어찌 다시 이름있는 가문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자식을 낳지 않느냐.” 하였으나, 그는, “내가 젊었을 때 빈곤을 같이하였는데, 하루아침에 버리는 것은 옳지 못하며, 천인으로서 양가의 딸을 취함은 의에 해가 되니 옳지 못하다. 내 적형(嫡兄)이 미약하여 떨치지 못하니 그 아들로써 대를 삼아 내 음공에 힘입게 하면 이는 곧 우리 종가를 크게 함이 될 것이다.” 하니, 사람들이 모두, “분수를 아니 장자(長者)의 풍이 있다.” 하였다. 성품과 국량이 넓고 커서 비록 좋은 비단옷을 남에게 벗어 주더라도 조금도 아까워하는 뜻이 없었다. 또 말달리기와 활쏘기를 잘했으며, 그가 호랑이를 잡는 것은 풍부(馮婦)라 할지라도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사람의 안색을 보고서 도적을 분변하여 10에 1이라도 실수가 없었으니 소옹(邵雍)이라도 이만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매양 호랑이를 잡고 도적을 잡을 일이 있으면 조정에서는 이 사람에게 위임하였다.
○ 우리 이웃에 기(奇) 재추(宰樞)가 있었는데, 당대의 명현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에 기의 손자 유(裕)와 더불어 어려서부터 사귀어왔다. 재추가 죽고 내가 유와 함께 벼슬하다가 유는 집안일을 맡아 집에 있더니, 얼마 안 되어 주택이 흉하여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고, 유도 또한 다른 곳으로 떠났다. 내가 그 이웃으로부터 그 얘기를 들으니, 어떤 아이 종이 문 밖에 서 있었는데, 문득 그 등에 무슨 물건이 붙어 무거워 견딜 수 없으므로, 어리둥절하여 들어가서 찾아 보았으나 물건은 볼 수가 없고 꽤 오래되어 풀어지매 온몸에 땀이 흘렀다고 한다. 이 뒤로도 괴상한 일이 많아서 사람이 밥을 짓고자 하면 솥 뚜껑은 그대로 있는데 똥이 그 속에 가득하며, 밥은 뜰에 흩어져 있고 혹 소반과 바리를 집어서 공중에 던지며, 혹은 큰 솥을 들어 공중에 돌리다가 이를 치면 소리가 큰 종소리 같고, 혹은 남새밭 채소를 모두 파서 거꾸로 심어 잠깐 사이에 말라버리게 하고, 혹은 옷장을 자물쇠로 잠갔으나 옷을 모두 꺼내어 대들보 위에 늘어놓고 폭폭이 모두 제자(題字)를 붙여 과두문자(科斗文字)의 전자(篆字)와 같이 하고, 혹은 사람 없는 아궁이에서 불빛이 갑자기 일어나고, 만약 끄는 사람이 있으면 불이 문간방에 옮겨 붙어 다 태워버리니, 이런 까닭으로 집을 버리고 거처하지 않은 지가 이미 여러 해 되었다. 유가 분연히 말하기를, “선조가 살던 집을 오랫동안 수리하지 못하니 어찌 사람된 자로써 선조를 받드는 뜻이겠느냐. 대장부가 어찌 귀신을 두려워할 이가 있겠느냐.” 하고, 곧 들어가 거처하였더니, 괴상한 일이 또 다시 일어나 밥바리를 옮기거나 똥으로 사람의 낯을 칠하기도 하였다. 유가 만약 꾸짖으면 공중에서 외치기를, “기도사가 어찌 이와 같이 하느냐.” 하니, 얼마 아니 되어 유도 병을 얻어 죽었다. 사람들이 모두, “유의 표제(表第) 유계량(柳繼亮)이 난리를 음모하다가 사형당하더니 그 귀신이 집에 의지하여 빌미[崇]를 일으킨다.” 하였다.
○ 또 사문(斯文) 이두(李杜)라는 사람이 호조 정랑이 되었는데, 집안에 문득 귀물이 들어와서 나쁜 짓을 하므로, 그 말소리를 들으니 죽은 지 이미 10년이나 된 고모[叔姑]의 소리였다. 생산하는 작업을 일일이 지휘하여 비록 아침저녁으로 밥을 바칠 뿐 아니라, 무릇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모두 찾으며 조금이라도 뜻을 어기면 몹시 노하였다. 수저를 잡는 것과 밥을 드는 것은 볼 수 없으나 찬음(饌飮)은 자연히 없어졌다. 허리 위는 보이지 않으나 허리 아래는 종이로 치마를 삼았으며, 두 다리는 여위어 마치 칠(漆)과 같아 살은 없고 뼈뿐이었다. 사람들이 묻기를, “다리가 어찌 이와 같으뇨.” 하니, “죽은 지 오랜 지하 사람이 어찌 이와 같지 않겠느뇨.”라고 대답하였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물리치려고 빌었으나 되지 않더니 얼마 안 되어 사문이 병을 얻어 죽었다.


[주D-001]신보 : 주(周) 나라 때 사람인데, 큰 산의 정기를 타고났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주D-002]대종 : 중국 산동성에 있는 태산(泰山)을 대종이라고도 한다.
[주D-003]동산 : 노(魯) 나라의 동쪽산을 말하는 것인데, 공자가 그 산에 올라 사면을 바라보고 노 나라가 적다고 탄식하였다 한다.
[주D-004]현포 : 모두 신선들이 놀고 있는 곳이다.
[주D-005]연연산 : 중국 북방 내몽고 지방에 있는 산 이름인데, 한(漢) 나라의 명장 곽거병(霍去病)이 흉노족(匈奴族)을 토벌하고서 그 산에 그런 사유를 기록한 비를 세웠다.
[주D-006]양부산 : 역시 태산의 별칭인데, 봉선(封禪)은 그 태산에서 하늘에 제사지내어, 국가 통치의 성공을 고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그것은 반드시 태산에서라야 한다.
[주D-007]황도 : 국가의 수도(首都)를 말하는 것이다.
[주D-008]적현 : 국내의 모든 주현(州縣)을 말하는 것이다.
[주D-009]서미 : 노예(奴隸)란 말과 같은 말이다.
[주D-010]위두 : 당 나라 서울 근처에 위씨(韋氏)와 두씨(杜氏)는 대대로 귀족이어서 세상 사람들이, “성남(城南)에 있는 위두는 하늘에서 척촌밖에 안 떨어져 있다.” 하였으니, 곧 고귀하다는 말인데 여기에 그 말을 인용한 것은 산이 역시 그렇게 높다는 말이다.
[주D-011]주명(朱明) : 여름을 말하는 것이다. 오색(五色)에 붉은 빛[朱]은 여름의 빛이라 한다.
[주D-012]백제(白帝) : 가을을 말하는 것이다. 백색은 가을 빛이라 한다.
[주D-013]은우(殷冔) : 우(冔)는 면류관이니 높은 벼슬한 사람이나 쓸 수 있는 관(冠)이다. 은(殷) 나라 때 것이 더욱 높다 한다.
[주D-014]제나라 …… 같도다 : 옛날 전국 시대에 연(燕) 나라가 제 나라를 정복하고 남은 것은 단지 즉묵(卽墨)성과 거(苦)성뿐이었는데, 즉묵성에 있는 제 나라 대장 전단(田單)이 소[牛] 5천여 필에다가 모두 꽁지에 마른 나무를 달고, 몸에 오색옷을 해 입히고 밤에 그 소 꽁지에 마른 나무에다 불을 다려서 앞으로 내몰았다. 소가 꽁지가 뜨거움으로 앞으로 뛰어나가면서 연 나라의 군사 있는 곳으로 달려들어서 충돌하였다. 연 나라 군사들은 어두운 밤에 모두 놀라 당황하여 이리저리 피하는 중에 제나라의 군사가 뒤이어서 연나라 군사를 습격하여, 크게 승리함으로써 제 나라를 완전 회복하였다. 여기에 그 말을 인용한 것이다.
[주D-015]한씨의 …… 아니요 : 한유(韓愈)의 시에 등잔걸이를 노래한 시가 있다.
[주D-016]곤강 : 중국 서북에 있는 곤륜산(崑崙山)을 말하는 것인데, 그 산에 옥(玉)이 많이 생산된다고 한다. 그래서 곤륜산에 불이 나면 옥이고 돌이고 모두 다 탄다고 하는 말이 있으니, 나라에 난리가 나면 착한 사람이고 악한 사람이고 모두 화를 당한다는 데에 비유하는 말이다.
[주D-017]꽃을 …… 점치리로다 : 불꽃을 보아서 상서로움을 점친다. 등잔에 벌불이 져서 불꽃이 커다랗게 되면 그것을 본 사람에게 좋은 일이 있다고 한다.
[주D-018]나는 …… 빠르고 : 춘추 시대 송 나라에 공중에서 돌 다섯 개가 떨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주D-019]기세가 …… 같도다 : 예전에 기량(杞梁)이라는 사람의 아내가 남편이 전쟁에서 전사하였으므로 울기를 섧게 하여서 돌로 쌓은 성이 무너졌다고 한다. 그 성이 무너질 때 돌이 급히 굴러 떨어진 것을 말함이다.
[주D-020]궁상(宮商) : 중국 사람은 음(音)을 다섯 가지로 구별하는데, 궁성(宮聲)은 평화스러운 음색을 말하는 것이요, 상성(商聲)은 높고 격한 음색을 말하는 것이다.
[주D-021]평상에 걸터 앉아 : 예전 진(晉) 나라에 환이(桓伊)라는 사람이 피리를 잘 불기로 유명하였다. 왕자유(王子猷)라는 사람이 서로 알지도 못하였으나 길에서 만나 한 곡조 들려줄 것을 청하니, 그리하라고 허락하고, 길가에 걸상을 놓고 그 위에 앉아 한 곡조 불고 갔다는 고사.
[주D-022]누에 …… 흥치 : 당 나라 사람 조하(趙)라는 시인의 시에, “긴 피리 한 곡조 사람은 누에 기대있고.[長笛一聲人倚棲]”라는 시에서 나온 말이다.
[주D-023]완적(阮籍) : 진 나라의 사람인데, 휘파람 잘 불기로도 유명하다.
[주D-024]매화가 떨어지고 : 낙매화(落梅花)라는 곡조가 있는데, 여기서 기인한 말이다.
[주D-025]바다 …… 사납도다 : 물 속의 어류들도 음악을 들으면 모두 나와서 듣는다 한다.
[주D-026]어찌 …… 이뿐이겠는가 : 농(隴) 지방은 지금의 감숙성인데, 중앙 아시아와 가깝다. 그 중앙 아시아의 장사꾼들은 서양과 동양 물건의 교역으로 큰 장사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들이 감숙에서 피리 소리를 듣고 고향 생각이 나서 돌아갔다는 고사가 있다.
[주D-027]자진(子晉) : 춘추시대 주(周) 나라 왕의 아들인데, 그는 피리를 잘 불었고, 뒤에 신선이 되어 갔다 한다.
[주D-028]소(韶) : 순(舜) 임금이 창작한 합주악(合奏樂)이라 한다. 공자가 그것을 듣고서 정신을 잃다시피 하여 석 달 동안 고기맛을 잊어버렸다고 한다.
[주D-029]화중(和仲) : 이 글의 필자 용재의 다음형 성간(成侃)의 자인데, 일찍 죽었다.
[주D-030]장계(張繼) : 당 나라의 시인. 그에게 〈풍교야박(楓橋夜泊)〉이라는 시가 있는데, 거기에 ‘한산사(寒山寺)의 종소리’란 말이 있었다.
[주D-031]문병(文柄)을 주관하는 자 : 국가적으로 소용되는 문장(文章)을 제술하는 책임자.
[주D-032]원양(原壤) : 공자의 동리사람인데, 공자에게 불손하게 굴고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았다 하여 공자가 지팡이로 그의 정강이를 때렸다 한다.
[주D-033]풍부(馮婦) : 예전에 용력(勇力)이 있어서 범을 때려 잡았다는 사람.
[주D-034]소옹(邵雍) : 세상에서는 소강절(邵康節) 선생이라 한다. 점 잘 치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용재총화 제5권
용재총화 제5권


○ 옛날에 청주인(靑州人)ㆍ죽림호(竹林胡)ㆍ동경귀(東京鬼) 등 3명이 아울러 말 한 마리를 샀었는데, 청주인은 천성이 민첩하여 먼저 허리를 사고, 죽림호는 그 머리를, 동경귀는 꼬리를 샀었다. 청주인이 의논하기를, “허리를 산 사람이 마땅히 타야 한다.” 하고, 말을 달려서 마음대로 가는데, 죽림호는 먹일 풀을 가지고 말의 머리를 끌고, 동경귀는 진(蜄)을 가지고 말똥을 쓸면서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괴로움을 참지 못하여 서로 말하기를, “이제부터는 높고 먼 곳에서 놀았던 사람이 말을 타기로 하자.” 하였다. 죽림호는, “내가 전에 하늘 위에 이른 일이 있다.” 하니, 동경귀가, “나는 네가 갔던 하늘 위의 그 위에 갔던 일이 있다.” 하자, 청주인은, “네 손이 닿는 곳에 무슨 물건이 없더냐. 긴 허리뼈가 없던가.” 하였다. 동경귀가, “있었다.” 하니, 청주인이 “그 긴 허리뼈는 바로 내 다리였네. 내 다리를 만지고 왔으니 반드시 내 아래에 있었을 것이다.” 하여, 두 사람이 다시는 상대하지 못하고 오래도록 청주인의 종이 되었었다.
○ 옛날에 어떤 사람이 집에서 기르는 비둘기를 남몰래 가지고 시골로 내려가다가 어떤 집에서 유숙하고 새벽에 나왔는데, 그 집에서는 손님이 가지고 온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시골에 이르러서 집비둘기는 다시 서울로 날아갔는데, 가다가는 반드시 전에 묵었던 집에 들려서 빙빙 돌고 나왔다. 그 집에서는 비둘기를 보고 모두 놀라 장님[經師]에게 묻기를, “비둘기도 참새도 아닌 것이 방울 소리처럼 울고, 집을 세 번 돌다가 가는데 이 무슨 상서로운 징조입니까.” 하니, 장님이 말하기를, “반드시 큰 화(禍)가 있을 것이니 내가 가서 빌어서 물리치리다.” 하였다. 이튿날 장님을 집으로 맞아왔는데, 그가 말하기를, “반드시 내가 하는 대로 따라 하라. 만약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화가 도리어 중해지리라. 내가 말해 볼 터이니 당신들은 그 말에 따르라.” 하고 부르기를, “명미(命米 송경(誦經)하는 데 놓는 쌀)를 내놔라.” 하니, 모두, “명미를 내놔라.” 하고, 또 장님이, “명포(命布)를 내놔라.” 하니 모두들, “명포를 내놔라.” 하였다. 장님이 또, “아니 어째서 내가 말하는 대로만 하는가.” 하니, 모두들, “아니 어째서 내가 말하는 대로만 하는가.” 하였다. 장님이 그만 성이 나서 나가다가 머리가 문설주에 부딪치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좇아 나오며 다투어 머리를 문설주에 부딪치고, 사다리를 놓고 부딪치는 어린이들도 있었다. 또 장님이 문 밖으로 나오다가 마침 진흙처럼 미끄러운 쇠똥이 있어서 발이 미끄러져 넘어지니, 사람들이 모두 미끌어 넘어지고, 쇠똥이 없어지니 혹은 그 위에 더 얹어 놓고서 미끌어져 넘어지기도 하였다. 장님이 급해서 동과(冬瓜) 덩굴 밑으로 도망쳐 들어가니, 사람들이 또 따라 들어가서 산처럼 겹겹이 되었다. 어린이들은 미처 들어가지 못하고 울부짖으며, “아빠, 엄마 나는 어디로 들어가요.” 하니, 부모들이 대답하기를, “동과 덩굴로 들어올 수 없거든 남쪽 기슭에 있는 칡잎 밑으로 들어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 옛날에 두 형제가 있었는데 형은 어리석고 동생은 민첩하였다. 아버지 제삿날이 되어 제사를 올리려 하였으나 집이 가난하여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형제가 밤중에 몰래 이웃집 벽을 뚫고 들어갔다. 마침 주인 늙은이가 나와서 두리번거리니 형제가 숨을 죽이고 섬돌 밑에 엎드려 있는데 늙은이가 마침 섬돌에다 오줌을 누니, 형이 동생에게, “따뜻한 비가 내 등을 적시니 웬일이냐.” 하다가, 결국 늙은이에게 잡히게 되었다. 늙은이가 말하기를, “너희들에게 무슨 벌을 줄까.” 하고 물으니, 동생은, “썩은 새끼로 묶으시고 겨릅대로 치시기를 원합니다.” 하고, 형은, “칡끈으로 묶으시고 수정목(水精木)으로 치십시오.” 하였다. 늙은이가 그들의 말대로 벌을 주고 난 뒤에, “어디에 쓰려고 도둑질하려 했느냐.” 하고 물으니, 동생이, “제삿날에 아버지의 제사를 지내려고 그랬습니다.” 하였다. 늙은이가 불쌍히 여겨 곡식을 주면서 마음대로 가져 가게 하니, 동생은 팥 한 섬을 얻어 힘을 다하여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형은 팥 몇 알을 얻어서 새끼줄에 끼어 끌면서, “야허, 야허.” 하면서 돌아왔다. 이튿날에 동생이 팥죽을 쑤고 형을 시켜 중을 청하여 재(齋)를 올리게 하였더니, 형이 말하기를, “중이란 어떻게 생긴 물건이냐.” 하므로, 동생이, “산중에 들어가서 검은 옷을 입은 것이 있으면 청해 오시오.” 하였다. 형이 가다가 나무 끝에 까마귀가 있는 것을 보고, “선사(禪師)님, 저희 집에 오셔서 재를 올려 주소서.” 하니, 까마귀는 울면서 날아갔다. 형이 돌아와서, “중을 청했더니 울면서 가버리더라.” 하였다. 동생이, “그것은 까마귀요 중이 아니니, 다시 가서 누런 옷을 입었거든 청해 오시오.” 하였다. 형이 다시 산중에 들어가서 나무 끝에 꾀꼬리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선사님, 저희 집에 오셔서 재를 올려 주소서.” 하니 꾀꼬리도 울면서 날아가 버렸다. 형이 돌아와서, “중을 청했더니 예쁜 모습으로 물끄러미 보면서 가더라.” 했다. 동생이, “그것은 꾀꼬리요 중이 아니니, 내가 가서 중을 청해 오리다. 형님은 여기 계시다가 만약 솥 안의 죽이 넘치거든 구기로 떠서 오목한 그릇에 담아 놓으시오.” 하였더니, 형은, 처마물이 떨어져서 움푹 패인 섬돌을 보고 죽을 그 속에 모두 부었으므로 동생이 중을 청하여 돌아오니 한 솥의 죽이 모두 없어졌었다.
○ 상좌(上座)가 사승(師僧)을 속이는 것은 옛날부터 흔히 있는 일이었다. 옛날에 어떤 상좌가 있었는데 그의 사승에게 말하기를, “까치가 은수저를 입에 물고 문 앞에 있는 가시나무에 올라 앉아 있습니다.” 하니, 중이 이를 믿고 나무를 타고 올라가니 상좌가 크게 소리질러 말하기를, “우리 스승이 까치새끼를 잡아 구워 먹으려 한다.” 하였다. 중이 어쩔 줄을 몰라 내려 오다가 가시에 찔려 온몸에 상처를 입고 노하여 상좌의 종아리를 때렸더니, 상좌가 밤중에 중이 드나드는 문 위에 큰 솥을 매달아 놓고, 큰 소리로, “불이야.” 하였다. 중이 놀라서 급히 일어나 뛰어나오다가 솥에 머리를 부딪혀서 까무러쳐 땅에 엎어졌다가 오래된 뒤에 나와보니 불은 없었다. 중이 노하여 꾸짖으니 상좌는, “먼 산에 불이 났기에 알린 것뿐입니다.” 하였다. 중이 말하기를, “이제부터는 다만 가까운 데 불만 알리고 반드시 먼데서 난 불은 알리지 말라.” 하였다.
○ 또, 어떤 상좌가 사승을 속이기를, “우리 집 이웃에 젊고 예쁜 과부가 있는데 항상 내게 말하기를, ‘절의 정원에 있는 감은 너의 스승이 혼자 먹느냐.’ 하기에, 나는, ‘스승이 어찌 혼자만 먹겠습니까. 매양 사람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하였더니, 그 과부는, ‘네가 내 말을 하고 좀 얻어 오너라. 나도 감이 먹고 싶다.’ 했습니다.” 하니, 중이 말하기를, “만약 그렇다면 네가 따서 갖다 주어라.” 하였다. 상좌가 모두 따다가 제 부모에게 갖다 주고는 중에게 가서, “여자가 매우 기뻐하며 맛있게 먹고는 다시 말하기를, ‘옥당(玉堂)에 차려놓은 흰 떡은 너의 스승이 혼자 먹느냐.’ 하기에, 내가, ‘스승이 어찌 혼자 먹겠습니까. 매양 사람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하였더니, 과부는, ‘네가 내 말을 하고 좀 얻어 오너라. 나도 먹고 싶다.’ 했습니다.” 하니, 중은, “만약 그렇다면 네가 거두어서 갖다 주어라.” 하므로, 상좌가 모두 거두어 제 부모에게 주고는 중에게 가서, “과부가 매우 기뻐하며 맛나게 먹고 나서 하는 말이, ‘무엇으로써 네 스승의 은혜를 보답하겠느냐.’ 하기에 내가, ‘우리 스승이 서로 만나보고 싶어합니다.’ 하니, 과부는 흔연히 허락하며 말하기를, ‘우리 집에는 친척과 종들이 많으니 스승이 오시는 것은 불가하고 내가 몸을 빼어 나가서 절에 가서 한 번 뵈옵겠다.’ 하므로, 내가 아무 날로 기약했습니다.” 하니, 중은 기쁨을 견디지 못하였다. 그 날짜가 되자 상좌를 보내어 가서 맞아 오게 하였더니, 상좌가 과부에게 가서 말하기를, “우리 스승이 폐(肺)를 앓는데 의사의 말이 부인의 신을 따뜻하게 하여 배를 다림질하면 낫는다 하니 한 짝만 얻어 갑시다.” 하니, 과부가 드디어 주었다. 상좌가 돌아와서 문 뒤에 숨어서 엿보니 중이 깨끗이 선실(禪室)을 쓸고 자리를 펴놓고 중얼거려 웃으며 하는 말이, “내가 여기에 앉고 여자는 여기 앉게 하고, 내가 밥을 권하고 여자가 먹으면 여자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가서 서로 함께 즐기지.” 하였다. 상좌가 들어가서 신을 중 앞에 던지면서 말하기를, “모든 일이 끝장났습니다. 내가 과부를 청하여 문까지 이르렀다가 스승의 하는 소행을 보고 크게 노하여 하는 말이, ‘네가 나를 속였구나. 네 스승은 미친 사람이구나.’ 하고, 달아나므로 내가 쫓아갔으나 따르지 못하고, 다만 벗어 버리고 간 신 한 짝만 가지고 왔습니다.” 하니, 중이 머리를 숙이고 후회하며 하는 말이, “네가 내 입을 쳐라.” 하니, 상좌가 목침(木枕)으로 힘껏 쳐서 이빨이 다 부러졌다.
○ 어떤 중이 과부를 꾀어 장가들러 가는 날 저녁에 상좌가 속여 말하기를, “가루 양념과 생콩을 물에 타서 마시면 매우 양기(陽氣)가 좋아집니다.” 하니, 중이 그 말을 믿고 그대로 하였다. 그런데 과부집에 갔더니, 배가 불러 간신히 기어서 들어가 휘장을 내리고 앉아 발로 항문을 괴고 꼼짝하지 못하였다. 조금 있다가 과부가 들어왔으나 중이 꿇어앉아서 움직이지 못하였다. 과부가 말하기를, “어찌 이처럼 목우(木偶 나무로 만든 인형) 모양을 하고 있습니까.” 하며 손으로 잡아 끄니, 중이 땅에 엎어지면서 설사를 하여 구린내가 가득 찼으므로 과부는 매를 때려 내쫓았다. 밤중에 혼자 가다가 길을 잃었는데 흰 기운이 길을 가로질러 있었다. 중이 시냇물로 생각하고 옷을 걷어올리고 들어가니 가을 보리꽃이었으므로 중은 성이 났다. 또 흰 기운이 길을 가로질러 있는 것을 보고, “보리밭이 나를 속이더니 또 보리밭이 있구나.” 하고, 옷을 걷어올리지 않고 들어가니 그것은 물이었다. 중은 옷이 모두 젖은 채 다리 하나를 지나가는데 아낙네 두어 명이 시냇가에서 쌀을 일고 있었다. 중이, “시큼시큼하구나.” 하였는데, 대개 이 말은 오는 길에 낭패하고 수고함을 형용함이다. 아낙네들은 그 까닭을 모르고 모두 와서 길을 막으며, “술 담글 쌀을 이는데 어찌 시큼시큼하다는 말을 해요.” 하고, 옷을 다 찢고 중을 때려 주었다. 해가 높이 뜨도록 얻어 먹지 못하고 중은 배가 고파 참을 수 없어서 마를 캐어 씹고 있으니, 갑작스레 웃고 외치는 소리가 났는데 그것은 수령의 행차였다. 중은 다리 밑에 엎드려 피하고 있으면서 가만히 생각하기를, “이 마가 매우 맛이 있으니 이것을 수령에게 바치면 밥을 얻을 수 있겠는데.” 하고, 수령이 다리에 이르자 중이 갑자기 나타나니 말이 놀라 수령이 땅에 떨어졌으므로 크게 노하여 매를 때리고 가버렸다. 중이 다리 옆에 누워 있었더니, 순찰관 두어 명이 다리를 지나가다가 보고, “다리 옆에 죽은 중이 있으니 몽둥이질하는 연습을 하자.” 하고, 다투어 몽둥이를 가지고 연달아 매질하였다. 중은 무서워서 숨도 쉬지 못하다가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들고 다가오며 말하기를, “죽은 중의 양근(陽根)이 약에 쓰일 것이니 잘라서 쓰자.” 하므로 크게 소리 지르며 달아나서 저물녘에야 절에 도착하니 문이 잠겨 들어갈 수가 없었다. 소리를 높여 상좌를 불러, “문 열어라.” 하니 상좌가, “우리 스승은 과부집에 갔는데 너는 누구이기에 밤중에 왔느냐.” 하고, 나와 보지 않았다. 중이 개구멍으로 들어가니 상좌가, “뉘 집 개냐. 간밤에 공양할 기름을 다 핥아 먹더니 이제 또 왔느냐.” 하고, 몽둥이로 때렸다. 지금도 낭패하여 고생한 사람을, “물 건넌 중”[渡水僧]이라고 한다.
○ 옛날에 어떤 선비가 사위를 맞이하였는데, 그 사위는 매우 어리석은 숙맥이었다. 사흘 동안 신부와 함께 앉았더니 소반 위에 있는 송편을 가리키며, “이것이 무엇인고.” 하므로 신부가, “쉬쉬[休休]” 하였다. 또 사위가 떡을 쪼개니 그 속에 잣이 들어 있었다. “이것은 또 무엇인고.” 하고 물으니, 신부가 또, “말 말아요[莫說].” 하였다. 사위가 그의 집에 돌아가니 부모가, “무엇을 먹었느냐.” 물었더니, 그는, “한 ‘쉬쉬’ 속에 세 개의 ‘말 말아요’가 있었습니다.” 하였다. 신부집에서는 근심과 후회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느 날 처가에서 50휘[斛]들이나 되는 노목(盧木) 궤짝을 사서 서로 약속하기를, “사위가 만약 이것을 알면 내쫓지 않으리라.” 하였다. 그래서 신부가 밤새도록 가르쳐 주었더니, 이튿날 장인이 사위를 불러내 보이자 사위가 몽둥이로 그것을 두드리며 말하기를, “노목 궤짝이 50휘들이나 되겠습니다.” 하니, 장인이 매우 기뻐하였다. 또 나무통을 사서 보이니 그는 몽둥이로 두드리며, “노목통이 50휘들이나 되겠습니다.” 하였으며, 또 장인이 방광염[腎膀]을 앓으므로 사위가 병문안을 갔다. 장인이 나와서 보니 역시 몽둥이로 장인을 두드리며, “노목 방광이 50휘들이나 되겠습니다.” 하였다.
○ 이장군(李將軍)이 있었는데, 젊고 훤칠하여 풍채가 옥과 같았다. 그가 하루는 말을 타고 큰길을 지나가는데 길거리에 22, 3세쯤 되어 보이는 매우 아름다운 여자가 계집종 두어 명을 거느리고 장님에게 점을 치고 있었다. 장군이 눈짓을 하니 그녀 또한 장군의 풍모를 사모하는 듯이 서로 눈을 떼지 않았다. 장군이 졸병에게 그녀의 가는 곳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그녀는 점치기를 마치더니 말을 타고 계집종을 거느리고 남문으로 들어가 사제동(沙堤洞)으로 향하였다. 그 집은 동네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큰 집이었다. 이튿날 장군이 사제동에 들어가서 여염집에 출입하다가, 마침 그 동네에 사는 활공장이[弓匠]를 만났다. 장군은 무인(武人)이라 이내 서로 사귀어 나날이 이야기하고 놀면서 동네의 모든 집에 관하여 물으니 활공장이는 일일이 말하여 주었다. 장군은 또 묻기를, “저 산 기슭에 있는 큰 집은 무슨 성씨(姓氏)요.” 하니, 활공장이는, “재상 모공(某公)의 딸인데, 요사이 과부가 된 집이 올시다.” 하였다. 그 뒤부터는 장군이 오가는 사람을 보면 반드시 과부가 사는 집을 물었다. 하루는 한 소녀가 와서 불을 얻어 갔는데, 활공장이가, “지금 온 소녀가 과부댁 사람이니 장군은 그리 아십시오.” 하였다. 이튿날 장군은 다시 활공장이를 찾아와서 사정을 말하고, “내가 그 여자를 사랑하여 잊을 수 없으니, 만약 그대로 인하여 성사하게 되면 사생(死生)을 그대의 명령대로 하겠소이다.” 하였다. 활공장이가 그 소녀를 불러 장군의 말을 전하고 돈과 옷감을 주었더니 소녀가 드디어 승낙하였다. 장군이 소녀에게 말하기를, “너를 매우 사랑하지만 일단 정회(情懷)가 있으니, 네가 내 청원을 들어주면 후하게 사례할 뿐만 아니라 너의 살림을 맡아 주겠다.” 하니, 소녀가, “말씀해 보십시오.” 하였다. 장군이, “요전에 내가 네 주인을 길에서 본 뒤로는 마음이 황홀하여 입맛을 잃었다.” 하니, 소녀가, “그것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하였다. 장군이, “어떻게 하느냐.” 하니, 소녀는 “내일 저물녘에 우리집 문 밖으로 오시면 제가 나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하였다. 장군이 약속한 대로 가니 소녀는 반가이 나와 맞이하여 제 방에 들이고 경계하기를, “서두르지 마시고 참고 기다리십시오.” 하며, 문을 닫고 잠가 버렸다. 장군이 두려워서 그 소녀에게 속지나 않았나 의심하였더니, 조금 있다가 안채에서 등불이 켜지고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주인 여자가 변소에 가는 모양이었다. 이때 그 소녀가 내려와서 장군을 끼고 들어가 안방에 있게 하고 다시 경계하기를, “참고 참으십시오. 참지 않으면 계획이 깨어질 것입니다.” 하므로, 장군은 캄캄한 방에 들어가 있었다. 얼마 안 되어 등불이 켜지고 떠드는 소리가 나더니 주인 여자가 들어왔는데, 계집종이 물러가자 주인 여자는 적삼을 벗고 낯을 씻고 분(粉)을 바르니 얼굴이 옥(玉)처럼 깨끗하였다. 장군은 생각하기를, “나를 맞으려나보다.” 하였더니, 세수하고 머리를 빗은 뒤 동(銅)화로에 불을 피우고 고기를 구우며 술을 은주전자에 덥히기에 장군은, “내게 먹이려나보다.” 생각하고, 나가려 하다가 문득 그 소녀의 참으라고 한 말을 생각하여 적이 앉아 기다렸다. 그러자 조금 있다가 창문에 모래를 끼얹는 소리가 나더니 주인 여자가 일어나서 창문을 열고 한 거만한 사나이를 맞아들였다. 그 사나이는 들어서자마자 선뜻 주인 여자를 껴안고 희롱하므로, 장군은 섬찟하여 나가려고 하였으나 도리가 없어 그냥 있으니, 조금 후에 그 사나이는 주인 여자와 나란히 앉아서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다가 모자를 벗었는데, 늠름한 까까중이었다. 장군은 그를 제지하리라 생각하고 방 속을 더듬어 긴 노끈 한 움큼을 쥐고 있다가, 중이 주인 여자와 함께 누울 때 장군이 돌출하여 노끈으로 중을 기둥에 묶어놓고 몽둥이로 마구 치니 중은 한없이 슬프게 부르짖었다. 그런 뒤 장군은 주인 여자와 한 번 즐기고 중에게 말하기를, “군중(軍中)의 신례(新禮)를 행하려 하니 네가 장만할 수 있겠느냐.” 하니, 중이, “명령대로 거행하겠습니다.” 하고, 신례(新禮)의 잔치 도구를 마련해 주었다. 그 뒤로 장군은 과부집에 자주 왕래하고 과부 역시 장군을 사랑하여 여러 해가 되어도 변하지 않았었다.
○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민공(閔公)이 조회(朝會)에서 물러나오면 매양 이웃집에 가서 바둑을 두었다. 하루는 공이 미복(微服)하고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이 나오지 않으므로 공은 홀로 누각 위에 올라 앉았었다. 어떤 녹사(綠事)가 모시러 공의 집에 왔다가 공의 간 곳을 물으니 문동(門童)이, “공께서 외출하셨는데 가신 곳을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녹사도 새로 온 사람이라 역시 공의 얼굴을 몰랐다. 그는 이웃집에 가서 누각에 올라가 신을 벗고 다리를 문에다 걸치고 공에게 말하기를, “노인은 뉘십니까.” 하니, 공이, “이웃집에 사는 사람이오.” 하였다. 녹사가, “노인의 얼굴에 주름살이 많은데 어찌된 일입니까. 실로 가죽을 꿰매어 쪼그린 것이 아닌가요.” 하니, 공이, “타고난 바탕이 그런걸 어찌하겠소.” 하였다. 녹사가 또, “노인은 글을 아십니까.” 하니 공이, “다만 성명을 기록할 정도요.” 하였다. 또 옆에 바둑판이 있기에 녹사가, “노인은 바둑을 둘 줄 아십니까.” 하니, 공이, “다만 행마(行馬)할 정도요.” 하였다. 녹사가, “그러면 한 판 두어 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고, 드디어 바둑을 시작하여 상대하자, 공이 바둑을 들며 말하기를, “어디서 온 손님이오.” 하니 녹사는, “부원군을 뵈러 왔습니다.” 하였다. 공이, “나도 부원(府院)이 될 수 없겠소?” 하니, 녹사가, “암탉이 아직 울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이러는 중에 조금 있다가 주인 영감이 나와서 꿇어앉아, “제가 영공(令公)께서 여기 오래 계신 줄 몰랐습니다.” 하고, 대죄(待罪)하여 마지않았다. 이에 녹사는 놀라 신을 쥐고 도망치니 공이, “이 사람은 비록 새로 들어온 향인(鄕人)이지만, 의기가 뛰어나서 보통 인물이 아니다.” 하고, 이로부터 그를 극히 후히 대접하였다.
○ 나의 장인 안공(安公)이 임천(林川 부여(扶餘)) 군수가 되었을 때, 보광사(普光寺)에 대선사(大禪師) 아무개란 중이 있어 자주 와 뵈었다. 그 사람됨이 더불어 이야기할 만하므로 서로 친숙하였다. 그 중은 시골 여자를 데려다 아내로 삼고 몰래 왕래하였다. 어느 날 그 중이 죽어서 뱀으로 변해 아내의 방에 들어와서, 낮에는 항아리 속에 들어 있고 밤이면 아내의 품에 들어가 그녀의 허리를 감고 머리는 가슴에 기대었는데, 꼬리 사이에 음경과 같은 혹이 있어서 그 곡진하고 정다움이 마치 전날과 같았다. 나의 장인이 이 얘기를 듣고 그 여인에게 뱀이 든 항아리를 가져 오게 하여 중의 이름을 부르니 뱀이 머리를 내밀었다. 장인이 꾸짖기를, “아내를 그리워하여 뱀이 되었으니 중의 도(道)가 과연 이와 같으냐.” 하니, 뱀이 머리를 움츠리고 들어갔다. 나의 장인은 몰래 사람을 시켜 조그만 함을 만들게 하고 그 아내에게 뱀을 꾀어 말하게 하기를, “군수님이 그대에게 새 함을 주어 몸을 편안하게 하여 줄 것이니 빨리 나와요.” 하며, 치마를 함 속에 펴주니 뱀이 항아리에서 나와 함 속에 옮겨 누우므로, 건강한 아전 두어 명이 뚜껑을 덮고 못을 박으니, 뱀이 날뛰고 뒹굴며 나오려 했으나 나오지 못하였다. 또 명정(名旌)에 중의 이름을 써서 앞을 인도하고, 중의 무리 수십 명이 북과 바리때를 울리고 불경을 외며 따라가서 강물에 띄워 보냈는데, 그 후 그 아내는 아무 탈이 없었다.
○ 윤(尹) 수령이 슬하에 여러 딸을 두었는데, 어느 날 문무 백관들이 위의(威儀)를 갖추고 조서(詔書)를 맞이하게 되자, 남녀들이 물밀듯이 모여들어 구경하는데, 윤공의 딸들도 역시 화장을 하고 가보려 했다. 공은 딸들을 불러세우고 가르쳐 달래기를, “너희들이 구경하는 것은 좋으나 내가 한마디 할말이 있으니 들어봐라. 옛날에 어떤 임금이 8척이나 되는 나무를 뜰에 심어놓고 이것을 뽑을 사람을 모집하기를, ‘이 나무를 뽑으면 천금을 주겠노라.’ 하였더니, 조정의 모든 벼슬아치 중 힘센 사람들도 모두 뽑지 못하였다. 술사(術師)가 말하기를, ‘정녀(貞女)는 뽑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여, 이때에 성중의 부녀자들을 뜰에 모았는데, 어떤 사람은 바라다보고 달아나고 어떤 사람은 만져보고 물러가곤 하였다. 그런데 이때 한 여자가 스스로, ‘정절(貞節)이 있습니다.’ 하고, 그 나무를 어루만졌는데 움직이기는 하였으나 넘어뜨리지는 못하였다. 여자가 하늘을 우러러 맹세하여 말하기를, ‘평생의 절조를 하늘이 아는 바인데 이제 이미 이와 같으니 죽는 것보다 못합니다.’ 하더니,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술사가, ‘비록 숨길 행실은 없으나 반드시 그 외모를 사모하여 잊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오.’ 하니, 여자는 문득 깨닫고 말하기를, ‘그러합니다. 어느 날 문에 기대어 서 있을 때 한 선비가 화살을 허리에 차고 말을 타고 지나갔었는데, 눈은 가늘고 눈썹은 길어 아름다운 모습이 뛰어났기에, 저 선비의 아내되는 사람은 참으로 복있는 사람이리라고 생각한 일이 있을 뿐, 이 밖에는 조금도 사사로운 정이라곤 없습니다.’ 하였다. 그때 술사가, ‘이것으로도 넉넉히 이 나무를 뽑지 못하는 연유에 해당합니다.’ 하므로 그 여자는 다시 경건한 마음으로 맹세하고 나아가 드디어 나무를 뽑아낸 일이 있었다는데, 이제 너희들이 만약 훤칠한 선비를 보고도 잠자리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니, 딸들이 결국 가지 못하였다.
○ 안생(安生)이란 사람은 경화거족(京華巨族)이었다. 이름은 학궁(學宮 성균관)에 걸어 두었으나, 살찐 말을 타고 가벼운 복장으로 장안을 돌아다녔다. 일찍 상처하고 혼자 살았는데, 당시 정승의 계집종으로 돈이 많은 미인이 동성(東城)에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재물로써 빙폐(聘幣)를 들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침 안생이 병이 났으므로 중매하는 사람이 상사병이라 하여 그 여자의 마음을 움직여 마침내 혼인하였다. 여자는 17, 8세쯤 되었는데 얼굴과 태도가 매우 아름다워 서로 간곡한 정다움이 날로 깊어갔다. 한편 안생의 나이가 젊고 풍채가 아름다운 것을 이웃이 사모하고, 그 여인의 집에서도 또 좋은 사위를 얻었음을 기뻐하여 아침저녁으로 반드시 성찬(盛饌)을 차리고 집안 재산도 태반이 안씨에게로 돌아갔다. 여러 사위들이 샘을 내어 정승에게 가서 호소하기를, “우리 장인이 새 사위를 얻은 이래로 집안이 기울어지고 파산하여 점점 어려워집니다.” 하니 정승은 노하여 말하기를, “내 뜻을 기다리지 않고 갑자기 양가(良家)의 사위를 얻었으니, 내가 크게 징계하여 이로써 후인(後人)을 경계하리라.” 하고, 곧 미치광이 종놈 몇 명을 시켜서, 가서 안생의 장인과 아내를 잡아오게 하였다. 이때 안생은 아내와 함께 밥상을 대하였다가 황겁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로 붙들고 통곡하며 두 손을 꼭 잡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아내는 한 번 붙들려 간 후로는 깊은 궁(宮)에 갇히어 겹문과 높은 담으로 인하여 안팎이 서로 떨어지니, 안생도 어찌할 수가 없어서 오직 처가의 사람들과 더불어 돈과 베를 내어 궁중(宮中)의 종들과 문지기 졸병에게 후하게 뇌물을 주고, 밤을 틈타서 담을 넘어 상종(相從)하고 조그마한 점방[小店]을 궁 옆에 사서 왕래하는 곳으로 삼았다. 하루는 여자 집에서 붉은 신 한켤레를 보내오니 아내가 늘 갖고 놀기에, 안생이 희롱하기를, “이런 좋은 신을 신고 장차 다른 사람과 즐기려 하오.” 하니, 여자는 얼굴빛을 변하여 말하기를, “서로 약속한 말이 똑똑히 눈앞에 있는데, 임자는 어찌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십니까.” 하고, 곧 차고 있던 칼을 풀어 신 한짝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또 어느 날 흰 적삼을 바느질하기에, 안생이 역시 전날처럼 희롱하니 여자는 낯을 가리고 울며 말하기를, “내가 임자를 배반한 것이 아니라 임자가 나를 배반하였습니다.” 하고, 적삼을 더러운 개천에 던지니, 안생은 그 절조에 심복(心服)하여 사랑함이 더욱 깊었다. 이로부터 저녁에 가서 새벽에 돌아오곤 하여 이런 생활이 여러 달 계속되었는데, 정승이 이 소문을 듣고 크게 노하여 여자를 아내가 없는 하인에게 시집가라 하니, 여자는 곧 흔연히 말하기를,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는데 내가 어찌 수절(守節)하겠는가.” 하고, 시집갈 도구를 친히 준비하며 궁인(宮人)을 모두 불러서 성찬을 만들어 먹이니, 사람마다 모두 그가 개가(改嫁)한다고 생각하고, 혹은 그의 이랬다 저랬다 하여 믿음성이 없음을 미워하였는데, 그 여자는 이날 저녁에 가만히 딴 방에 들어가 목매어 죽었으나 안생은 몰랐었다. 이튿날 안생은 본가에 있었는데 예쁜 젊은 여자가 들어와 “낭자가 왔소이다.” 하기에 안생은, 신을 거꾸로 신고 문 밖에 나가니 예쁜 여자가 급히 말하기를, “낭자가 어젯밤에 죽었소이다.” 하였다. 안생은 웃으며 믿지 않았다. 그 까닭도 묻지 않고 점방에 이르니, 당중(堂中)에 평상을 놓고 옷과 이불로 시체를 덮었거늘, 안생은 목놓아 통곡하며 주저앉아 가슴을 치니 온 이웃에서 이 소리를 듣고 흐느껴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에 큰 비가 오고 물이 넘쳐서 사람이 동성집에 통행하지 못하여, 안생이 몸소 상구(喪具)를 갖추어 빈소를 차려 두고 아침저녁으로 전(奠)을 배설하며 눈을 붙이지 아니하다가 밤이 깊어서 옷을 입은 채 잠깐 자는데, 여자가 평소의 모습으로 밖에서 들어왔다. 안생이 나아가 더불어 이야기하려 하다가 갑자기 깨어 방 안을 둘러보니, 창문은 적적하고 바람은 문풍지를 걷어올렸는데, 외로운 등불만 명멸(明滅)할 뿐이었다. 생은 울부짖고 기절하였다가 소생하였더니, 사흘이 지난 뒤에 구름이 흩어지고 비가 개므로 안생은 달빛을 받으며 본가로 향하여 홀로 발 가는 대로 걸어 수강궁(壽康宮) 동문에 이르니, 밤은 이미 이경(二更)인데 화장하고 머리를 크게 쪽지어 올린 여자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안생을 따라오므로 그가 따라가 보니, 기침하고 탄식하는 것이 모두 전날에 듣던 소리와 같았다. 그는 크게 부르며 달려가서 한 도랑에 이르니 여자가 또 그 옆에 앉았다. 안생은 돌아보지 않고 그의 집에 이르렀더니 여자는 또 문 밖에 섰기에 그가 큰 소리로 종을 부르니, 여자는 모탕(나무를 쪼개거나 쇠를 단련할 때 밑에 받히는 받침)에 몸을 감추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안생은 심신이 흐리멍텅하여 바보 같기도 하고 미치광이 같기도 하더니, 달포가 지난 뒤에 정중한 예(禮)로 아내의 장사를 지낸 다음 얼마 안 가서 그도 역시 죽었다.
○ 도성 안에 명통사(明通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장님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장님들은 초하루와 보름날에 한 번씩 모여 경(經)을 외며 축수(祝壽)하는 것을 일삼았다. 높은 사람은 불당에 들어가고 낮은 사람은 문을 지키는데 문을 겹겹이 잠그고 창을 들고 지키므로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였다. 그런데 한 서생(書生)이 몸을 솟구쳐 바로 들어가 대들보에 올라가 있다가 장님이 작은 종(鍾)을 치기에 서생이 종을 끌어 올려 버렸으므로 장님은 북채를 휘둘러 허공을 쳤다. 그런 뒤에 다시 종을 내려주자 장님이 손으로 만져보니 종은 여전히 있었다. 이와 같이 하기를 서너 번 하다가 장님은 말하기를, “불당 안의 작은 종이 무엇인가에 끌려 올라간다.” 하였다. 그러자 모든 장님들이 둘러 앉아 점을 쳤는데, 그 중 한 장님이, “이것은 틀림없이 벽 사이에 박쥐가 붙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하니, 모두 일어나 벽을 만져보았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또, 어느 장님이, “이것은 틀림없이 저녁 닭이 들보 위에 앉아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하여, 서로 다투어 장대로 들보 위를 때렸으므로 서생이 고통을 못 견디어 땅에 떨어지니, 서생을 묶고 종아리를 쳤으므로 그는 엉금엉금 기어서 돌아왔다. 이튿날 그는 삼 노끈 두어 발을 얻어 가지고 절 변소에 숨어 있다가, 주인 장님이 변소에 와서 웅크리고 앉자 서생이 갑자기 노끈으로 그의 음경을 매어 당기니, 장님은 크게 소리치며 구원을 청하였다. 여러 장님들이 다투어 와서 주문을 외기를, “주인 장님이 변소 귀신에게 화를 입게 되었다.” 하며, 혹은 이웃을 불러 약을 구하고 혹은 북을 울려 명(命)을 비는 자도 있었다.
○ 옛날에 개성(開城)에 한 장님이 살았었는데, 성품이 어리석고 비뚤어져서 기괴한 것을 잘 믿었다. 매양 소년을 만나면 갑자기, “무슨 기이한 일이 없느냐.” 하였다. 하루는 소년이 말하기를, “요즈음 매우 기이한 일이 있습니다. 동쪽 거리에 땅이 천 길이나 벌어져서 땅 밑으로 오가는 사람을 훤히 볼 수 있고, 닭의 울음소리와 다듬이질하는 소리도 똑똑히 들을 수 있는데, 내가 방금 그곳에서 오는 길입니다.” 하니, 장님은, “과연 네 말과 같다면 그야말로 매우 기이한 일이다. 내가 두 눈이 어두워서 마음대로 보지는 못하지만 그 곁에 쫓아가서 한 번 그 소리라도 들으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 하고, 소년을 따라갔다. 온종일 도성 안을 두루 어정거리며 돌아다니다가 그의 집 뒤 언덕에 와서 소년이, “여기가 그곳입니다.” 하니, 장님은 자기 집 닭 울음소리와 다듬이질하는 소리를 듣고 손뼉을 치고 웃으며 말하기를, “참으로 즐겁도다.” 하니, 소년이 장님을 밀어 땅에 떨어뜨렸다. 아이종이 와서 그 까닭을 물으니 장님은 머리를 조아리고 합장을 하며 말하기를, “나는 천상(天上)의 장님이로다.” 하였다. 또 그의 아내의 웃는 소리를 듣고, “당신은 또 언제 여기 왔소.” 하였다.
○ 또 한 장님이 있었는데 이웃 사람에게 부탁하여 미녀에게 장가들려 하였다. 하루는 이웃 사람이 그에게 말하기를, “우리 이웃에 체격이 알맞은 진짜 절세 미녀가 있는데, 그대의 말을 그 여자에게 들려주면 흔연히 응할 것 같으나, 다만 재물을 매우 많이 달라고 할 것 같소.” 하니, 장님은, “만약 그렇다면 재산을 기울여 파산(破産)에 이를지언정 어찌 인색하게 하리요.” 하고 그의 아내가 나가고 없는 틈을 타서, 주머니와 상자를 찾아 재물을 모두 꺼내주고 만나기를 약속하였다. 만날 날이 되어 장님은 옷을 잘 차려 입고 나가고, 아내 역시 화장을 고치고 그의 뒤를 따라가서 먼저 방에 들어가 있으니, 장님은 아무것도 모르고 재배(再拜) 성례(成禮)하였다. 이날 밤에 자기 아내와 함께 동침하는데, 그 아기자기한 인정과 태도가 평상시와 달랐다. 장님은 아내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오늘밤이 무슨 밤이기에 이처럼 좋은 사람을 만났는고. 만약에 음식에 비유하면, 그대는 웅번(熊膰 곰의 발바닥. 팔진미(八珍味)의 하나)이나 표태(豹胎 표범의 태(胎))와 같고, 우리 집사람은 명아주국이나 현미 밥과 같구나.” 하고 재물을 많이 주었다. 새벽이 되어 아내가 먼저 그의 집에 가서 이불을 안고 앉아 졸다가 장님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묻기를, “어젯밤에는 어디서 주무셨소.” 하니 장님은, “아무 정승집에서 경(經)을 외다가 밤추위로 인하여 배탈이 났으니, 술을 걸러 약으로 쓰게 하오.” 하였다. 아내가 매우 꾸짖기를, “웅번ㆍ표태를 많이 먹고 명아국과 현미 밥으로 오장육부를 요란하게 하였으니 어찌 앓지 않을 수 있겠소.” 하니 장님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그제야 아내에게 속은 줄을 알았다.
○ 서울에 또 한 장님이 있었는데, 젊은이와 벗하여 사이 좋게 지냈다. 젊은이가 하루는 와서 말하기를, “길에서 나이 어린 예쁜 여자를 만났는데 그와 잠깐 이야기를 하고 싶으니, 주인께서 잠시 별실(別室)을 빌려줄 수 없겠습니까.” 하니, 장님은 허락하여 주었다. 젊은이는 장님의 아내와 별실에 들어가 곡진하고 애틋한 정을 서로 나누는데, 장님이 창 밖을 돌면서 말하기를, “어째서 이렇게 오래 걸리느냐. 빨리 가거라. 집사람이 와서 보면 이야말로 큰일이니 반드시 욕을 먹을 것이다.” 하였다. 조금 뒤 아내가 밖에서 들어오면서, “그 새 어떤 손님 왔었소.” 하며 일부러 성낸 듯이 하니, 장님은, “잠깐 내 말을 들으시오. 정오쯤에 동쪽 마을의 신생(辛生)이 나를 찾아왔을 뿐이었소.” 하였다.
○ 효령대군(孝寧大君)이 불교에 혹하여 매양 절에 도량을 베풀고, 온종일 경건한 마음으로 정성껏 머리를 조아려 절하는데, 양녕(讓寧)대군이 뒤를 따라 첩 두어 명을 거느리고 매를 팔 위에 얹고 개를 끌고 와서, 잡은 꿩과 토끼를 섬돌 위에 쌓아놓고, 고기를 구워 술을 데워 마시고는 대취하여 당(堂)에 올라가서 함부로 행동하였다. 효령이 얼굴빛을 변하고 말하기를, “형님은 이제 이런 나쁜 업(業)을 하시면서 후생(後生)의 지옥이 두렵지 않습니까.” 하니, 양녕은, “착한 일을 행한 사람은 구족(九族)이 도리천(忉利天)에 태어난다 하거늘, 하물며 동기간(同氣間)에 있어서랴. 나는 살아서는 임금의 형으로서 마음껏 방랑하고, 죽어서는 보살(菩薩)의 형이 되어 반드시 천당(天堂)에 오를 것인데, 어찌 지옥에 떨어질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 종실(宗室) 풍산(豐山) 군수는 매우 어리석은 숙맥이었다. 집에서 오리를 길렀는데 계산을 할 줄 몰라 오직 쌍쌍으로만 세었다. 하루는 집의 아이 종이 오리 한 마리를 삶아 먹었더니 그는 쌍쌍으로 세다가 한 마리만 남으므로 크게 노하여 종을 때리며, “네가 내 오리를 훔쳤으니 반드시 다른 오리로 변상하여라.” 하였다. 이튿날 종이 또 한 마리를 삶아 먹었더니, 그는 쌍쌍으로 세어 보아도 남는 짝이 없으므로 매우 기뻐하며 하는 말이, “형벌이 없지 않을 수 없도다. 어제 저녁에 종을 때렸더니 변상해 바쳤구나.” 하였다.
○ 청파(靑坡 지금의 서울 청파동)에 부호한 사족(士族)인 심생(沈生)과 유생(柳生) 두 사람이 살았는데, 날마다 기생들 속에서 술에 빠져 살았다. 하루는 친한 벗 두어 명이 심생의 집에 모여 술을 마셨다. 심생에게는 노래와 춤을 잘하는 접연화(蝶戀花)라는 첩과 가야금 솜씨가 당시에 일인자였던 김복산(金卜山)이란 장님이 있었다. 그래서 이들을 불러 고아한 거문고와 청아한 노래로 무릎을 맞대어 서로 부르고 받고 하여 정회가 사무치고 흡족하였다. 밤중이 되어 좌중에서 누가 말하기를 “지난 일을 얘기하며 한바탕 웃어보자.” 하니, 모두, “그것 참 좋다.” 하고 손님들이 서로 우스운 얘기를 기탄 없이 하였다. 이때, 복산이, “나도 한마디 하리다. 요즈음 내가 어떤 집에 갔더니, 부잣집 자제라 또한 이름난 기생 두어 명이 있었는데, 자리가 파하자 모두 기생을 이끌고 방으로 갔는데, 그 중에 심방(心方)이란 계집이 노래를 잘하고 또 모(某)와 함께 잤소이다.” 하였다. 심생은, “그것 참 재미있는 일이다. 다시 얘기해 보아라.” 하였다. 그 자리 손님들이 모두, “가야금을 타고 노래를 부르고 밤을 새울 것이지 하필 얘기만 할 것이냐.” 하였으나 기생도 또한 노래를 그쳐 모두 흥이 깨어져서 파하고 말았다. 문을 나와서 유생이 복산에게, “주인의 기생 이름이 심방인데 자네는 어찌 그런 미친 말을 했느냐. 사람의 표정을 볼 수 없으니 눈먼 사람은 참으로 불쌍하다.” 하니, 복산은 실색하며, “다만 관명(官名)만 알고 아명(兒名)을 몰랐던 탓입니다. 무슨 낯으로 주인을 다시 보겠습니까.” 하였다. 이것이 이웃에 전파되어 웃음거리가 되었다.
○ 세조(世祖)가 늘그막에 병들어 잠을 자지 못하다 문사(文士)들을 많이 모아 놓고 경사(經史)를 강론하게 하고, 혹은 익살맞고 농담 잘하는 사람을 불러들여 웃음거리로 삼았다. 최호원(崔灝元)과 안효례(安孝禮)가 모두 음양ㆍ지리의 술(術)을 알되 각각 자기 의견을 고집하여 서로 비방하였고, 그들은 성품이 또한 거세고 사나워서 서로 어금버금하였다. 하루는 효례가, “우리나라는 일본과 땅이 서로 이어져 있다.” 하니, 호원이 팔을 밀치고 꾸짖기를, “푸른 바다가 아득하기 끝이 없는데, 어찌 서로 이어져 있다 하겠느냐.” 하였다. 효례가, “물을 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물 밑에 흙이 있으니 어찌 서로 이어져 있지 않다고 하겠느냐.” 하니, 호원은 아무 말도 못했다. 두 사람은 이렇게 터무니없이 큰소리만 했는데 효례가 더욱 심하였으며, 또 그들은 불교 서적을 골고루 읽어서 글짓는 중을 만나면 더불어 논박하였는데, 중이 대답하지 못한 적이 많았다.
○ 우리 이웃에 동계(東界)에서 온 함북간(咸北間)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피리도 좀 불 줄 알고 농담과 광대 놀이를 잘하여, 매양 사람의 행동거지를 보면 문득 그 하는 짓을 흉내내기를 진짜ㆍ가짜를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비파와 거문고 소리 같은 것도 쟁쟁하게 내었으며, 또한 음절[節奏]에 능해서 매양 궁궐에 들어가 상(賞)을 많이 받았다. 또 대모지(大毛知)란 사람은 거위ㆍ오리ㆍ닭ㆍ꿩 등의 소리를 흉내내어, 소리를 내기만 하면 이웃 닭들이 날개를 치며 몰려들어 왔다. 또 기지(耆之)에게는 불만(佛萬)이 라는 종이 있었는데, 개 짖는 소리를 잘하여 영동(嶺東) 지방에 유람했을 때 어느 마을에서 밤중에 소리를 내니 이웃 개가 모두 모여들었다.
○ 김속시(金束時)는 여진(女眞) 사람이었다. 그는 젊었을 때 그의 아비를 따라왔었는데, 무예(武藝)가 뛰어나고 자못 경사(經史)에 밝았다. 집이 조종현(朝宗縣 경기도 가평(加平)) 산골에 있어서 날마다 사냥을 일삼았다. 일찍이 그는 나에게 사슴을 잡는 요령을 얘기하기를, “여름이 되어 풀이 우거질 때에는 노루와 사슴이 새벽에 나와서 풀을 먹고 배가 부르면 숲속에 들어가 누워 있소. 내가 사냥꾼 몇 명을 데리고 짐승의 자취를 찾아내어 사방에 그물을 치고, 또 한두 사람을 산 위에 올려 보내어 혹은 노래하고, 혹은 소리를 질러 밭 갈고 소 모는 시늉을 하게 한다오. 짐승이 이 소리를 들으면 별일이 아닌 줄 알고 달아나지 않고 기(氣)를 죽이고 엎드려 있는데, 이 틈을 타서 나는 활 시위를 당기고 나아가서 화살 한 개로 적중시킨다오. 만약 이때 맞지 않으면 달아나다가 그물에 걸리므로 백에 한 번도 놓치지 않으며, 또 초목이 시들고 잎들이 떨어진 뒤에는 가만히 짐승이 다니는 길목을 지키고 섰다가 오는 것을 기다려 쏜다.” 하였다. 또 곰을 잡는 요령을 얘기하기를, “대개 곰은 용감하고 힘이 세어 호랑이를 만나면 한 쪽 앞발로 큰 돌을 들고, 한 쪽 앞발로는 호랑이의 목줄기를 움켜쥐고 치며, 또 나뭇가지를 꺾어 때린 뒤에는 다시 다른 나무를 꺾어서 친다오. 한참 있다가 호랑이가 힘이 빠지면 돌을 밀치고 다시 싸운다오. 곰은 또 큰 나무를 잘 타서 사람처럼 웅크리고 있기도 하고, 두 앞발로 가지를 잡아 당겨 도토리 열매를 따먹으며, 혹은 골짜기의 시냇물을 따라 조그마한 가재를 잡아먹는데, 겨울이 되면 바위굴에 들어가서 아무 것도 먹지 아니하고 발바닥만 핥는다네. 10월에 천둥소리가 나면 굴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만 나뭇잎으로 몸뚱이를 싸고 앉아 있는다네. 나는 여름에 풀이 우거질 때 곰이 나무에 올라가는 것을 보면, 옷을 벗고 활을 가지고 들어가서 곰의 뒤편에 앉은 다음, 곰이 다리를 펴 나뭇가지에 오르면 드디어 활시위를 당겨 이를 쏘고, 물러가 풀속에 누워 숨을 죽이고 시체처럼 하고 있는데, 곰이 살을 맞으면 어쩔 줄을 모르고 내려와서 사방을 더듬어 찾다가 내가 있는 곳까지 와도 모르고 해치지 못하며, 그러다가 괴로움을 못 견디어 사람이 슬피 부르짖는 소리처럼 외치다가 시냇물에 엎어져서 죽고 만다.” 하였다. 그는 또 호랑이를 잡는 요령을 얘기하기를, “평생에 호랑이를 쏜 일은 그 수효를 셀 수 없다. 옛날에 세조(世祖)께서 온양(溫陽)에 머무르셨는데, 한 선비가 와서 아뢰기를, ‘열여섯 살쯤 된 여자가 어젯밤에 안방에 있다가 마침 창문이 열려서 호랑이가 물어갔사오니, 성덕(聖德)은 이 원통하고 억울함을 풀어주시옵소서.’ 하여 세조께서 장수들에게 명하시어 잡으라 하셨는데, 역시 나를 따라가게 하셨다네. 그 여자의 집에 도착하여 그 상황을 물어 보고서 산 중턱에 이르니, 붉은 적삼이 반쯤 찢어져서 나무 끝에 걸려 있고, 또 몇 걸음 가니 시체가 산골짜기 시냇가에 있었는데 반은 이미 먹혀 있었다네. 조금 있다가 나무 사이에서 으르릉거리는 소리가 들리기에 돌아다보니, 큰 호랑이가 탐탐(耽耽)히 노려보고 있었다네. 나는 분함을 못 참아 말을 달려 나아가 한 살로 맞히고 물러나다가 말이 소나무 가지에 걸려 쓰러지니, 호랑이가 달려들어 내 팔을 끌어당겨 물므로 호랑이와 함께 서로 싸우는데, 우인(虞人)이 와서 쏘아 죽여 마침내 위험을 면했다. 옷을 벗어 보니 팔에 상처난 자리가 있었다.” 하였다.
○ 봉석주(奉石柱)는 날래고 용감한 데다가 활을 잘 쏘며 그의 격구(擊毬)는 당시에 제일이었는데, 정란공신(靖難功臣)으로서 정이품에 오르고 군(君)에 봉해졌다. 그는 사람됨이 탐욕스럽고 포학하여 날로 재물 불리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침공(針工)을 청하여 술을 먹이고 바늘 수십 매를 만들게 하였다. 종들을 다른 지방으로 나누어 보내면서 사람마다 바늘 한 개씩을 주었는데 이 바늘로 각각 달걀 하나를 사도록 한 뒤에 다시 그 사람에게 돌려주고, 가을이 되면 큰 닭을 변상하게 하였다. 만약 순종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매질을 하고 독촉하는 등 못하는 짓이 없었다. 또 사람을 시켜 무수한 쇠못을 가지고 강의 상류에 보내어 사람들이 나무를 잘라서 산골짜기에 이리저리 해놓은 것이 있으면, 몰래 못을 나무 머리에 박아 두었다. 벌목한 것이 남강(南江)으로 흘러 내려오면, “이것들은 모두 내 나무이다.” 하여 본주인과 서로 승강이하다가, “네 나무에 무슨 표가 있느냐. 내 나무에는 모두 머리에 못이 박혀 있다.” 하여, 그 벌목을 보면 과연 그러하므로 본주인은 항의할 말이 없었다. 이런 것으로 빼앗은 것이 셀 수 없이 많았다. 조정에서는 여름이 되면 얼음을 재추(宰樞)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관례(慣例)로 되어 있었는데, 종이 없으면 재추로서도 얼음을 얻지 못하는 이가 역시 많았다. 석주는 일일이 찾아가서 이를 달라 하여 저자에서 팔아 이익을 보았다. 또 전라수사(全羅水使)가 되었을 때 군졸(軍卒)을 거느리고 섬에 들어가서, 두루 밭을 일구어 깨ㆍ면화(棉花) 등을 심었다가 만기가 되어 돌아갈 때에는 배에다 깨ㆍ면화 등을 가득 싣고 왔다. 이런 까닭으로 돈 꾸러미가 거만(巨萬)이요, 저장한 곡식이 국고(國庫)와 같았다. 조정에서 난신(亂臣)의 처첩을 공신집에 노비로 주었는데, 석주는 자색이 있는 자를 구하여 첩으로 삼고 밤낮으로 마음껏 마시며 지내더니, 나중에 모반죄로 죽음을 당하였다.
○ 어우동(於于同)은 지승문(知承文) 박 선생의 딸이다. 그녀는 집에 돈이 많고 자색이 있었으나, 성품이 방탕하고 바르지 못하여 종실(宗室) 태강(泰江) 군수의 아내가 된 뒤에도 군수가 막지 못하였다. 어느 날 나이 젊고 훤칠한 장인을 불러 은그릇을 만들었다. 그녀는 이를 기뻐하여 매양 남편이 나가고 나면 계집종의 옷을 입고 장인의 옆에 앉아서 그릇 만드는 정묘한 솜씨를 칭찬하더니, 드디어 내실로 이끌어 들여 날마다 마음대로 음탕한 짓을 하다가, 남편이 돌아오면 몰래 숨기곤 하였다. 그의 남편은 자세한 사정을 알고 마침내 어우동을 내쫓아 버렸다. 그 여자는 이로부터 방자한 행동을 거리낌없이 하였다. 그의 계집종이 역시 예뻐서 매양 저녁이면 옷을 단장하고 거리에 나가서, 이쁜 소년을 이끌어 들여 여주인의 방에 들여 주고, 저는 또 다른 소년을 끌어들여 함께 자기를 매일처럼 하였다. 꽃피고 달밝은 저녁엔 정욕을 참지 못해 둘이서 도성 안을 돌아다니다가 사람에게 끌리게 되면, 제 집에서는 어디 갔는지도 몰랐으며 새벽이 되어야 돌아왔다. 길가에 집을 얻어서 오가는 사람을 점찍었는데, 계집종이 말하기를, “모(某)는 나이가 젊고 모는 코가 커서 주인께 바칠 만합니다.” 하면 그는 또 말하기를, “모는 내가 맡고 모는 네게 주리라.” 하며 실없는 말로 희롱하여 지껄이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는 또 방산(方山) 군수와 더불어 사통하였는데, 군수는 나이 젊고 호탕하여 시(詩)를 지을 줄 알므로, 그녀가 이를 사랑하여 자기 집에 맞아들여 부부처럼 지냈었다. 하루는 군수가 그녀의 집에 가니 그녀는 마침 봄놀이를 나가고 돌아오지 않았는데, 다만 소매 붉은 적삼만이 벽 위에 걸렸기에, 그는 시를 지어 쓰기를,
물시계는 또옥또옥 야기가 맑은데 / 玉漏丁東夜氣淸
흰 구름 높은 달빛이 분명하도다 / 白雲高捲月分明
한가로운 방은 조용한데 향기가 남아 있어 / 間房寂謐餘香在
이런 듯 꿈속의 정을 그리겠구나 / 可寫如今夢裏情
하였다. 그 외에 조관(朝官)ㆍ유생(儒生)으로서 나이 젊고 무뢰한 자를 맞아 음행하지 않음이 없으니, 조정에서 이를 알고 국문하여, 혹은 고문을 받고, 혹은 폄직되고, 먼 곳으로 귀양간 사람이 수십 명이었고, 죄상이 드러나지 않아서 면한 자들도 또한 많았다. 의금부에서 그녀의 죄를 아뢰어 재추(宰樞)에게 명하여 의논하게 하니, 모두 말하기를, “법으로서 죽일 수는 없고 먼 곳으로 귀양보냄이 합당하다.” 하였다. 그러나 임금이 풍속을 바로잡자 하여 형(刑)에 처하게 하였는데, 옥에서 나오자 계집종이 수레에 올라와 그녀의 허리를 껴안고 하는 말이, “주인께서는 넋을 잃지 마소서. 이번 일이 없었더라도 어찌 다시 이 일보다 더 큰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란 법이 있겠습니까.” 하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여자가 행실이 더러워 풍속을 더럽혔으나 양가(良家)의 딸로서 극형을 받게 되니 길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 김 사문(金斯文 사문(斯文)은 유학자의 존칭)이 영남에 사신(使臣)으로 내려가 경주(慶州)에 도착하니, 고을 사람들이 기생 하나를 바치기에, 김이 데리고 불국사로 갔었는데, 기생은 나이가 어려서 남자와의 관계함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극력(極力) 김의 요청을 거절하다가 밤중에 도망쳐 나왔는데, 그녀의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여러 하인(下人)들이 그녀가 짐승에게 잡혀 간것이나 아닌가 하여 이튿날 찾아보니 그녀는 맨발로 고을에 돌아가 있었다. 김은 뜻을 이루지 못함을 실망하고 밀양(密陽)에 도착하자 평사(評事) 김계온(金季昷)을 보고 그 사정을 말하니, 평사는, “내 기생의 동생으로 대중래(待重來)라는 애가 예쁜 모습에 성품이 그윽하고 조용하니, 내가 그대를 위하여 중매해 주겠소.” 하였다. 하루는 부사(府使)가 영남루(嶺南樓) 위에서 잔치를 베풀어 기생들이 자리에 가득하였는데, 그 중에 하나가 좀 예쁘기에 김 사문이 물으니, 그녀가 바로 평사가 중매한다던 기생이었다. 김은 겉으로는 눈도 돌리지 않았으나 마음은 늘 이 기생에게 있어서 상에 가득 찬 맛있는 안주도 먹기는 하여도 달지 않았다. 주인과 시객(侍客)이 모두 술잔을 바치기에 김이 일어나 잔을 권하자 평사가 그 기생을 시켜 잔을 받들어 바치게 하니, 김은 흔연히 웃으면서 의기양양한 기색이 있는 것 같았다. 이날 밤 그녀와 함께 망호대(望湖臺)에서 자고부터는 서로 정이 깊이 들어서 잠시도 떠나지 못하여, 대낮에도 문을 닫고 휘장을 치고서 이불을 쓰고 일어나지 않으니, 주인이 밥상을 가지고 와서 뵙고자 해도 서로 만나지 못한 지 여러 날이었다. 평사가 창문을 밀치고 들어가니 두 사람은 안고 누워 손발을 서로 꼬고 있을 뿐, 다른 말은 않고 오직, “나는 너를 원망한다.”고만 하였으며, 온몸에 써 있는 글자를 모두 서로 사랑을 맹세한 말이었다. 그 후 그는 여러 읍을 순력(巡歷)하였으나 마음은 항상 대중래에게 있었다. 하루는 사문(斯文) 윤담수(尹淡叟)와 김해(金海)에서 밀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말고삐를 나란히 하여 이야기하다가 장생(長栍)을 보면 반드시 하인으로 하여금 이수(里數)의 원근(遠近)을 자세히 보게 하고,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도 오히려 더디감을 의심하더니, 갑자기 펀펀한 들판이 아득한데, 어렴풋이 공간에 누각의 모습이 보였다 없어졌다 하니, 하인에게 묻기를, “이곳이 어딘가.” 하니, 하인은, “영남루입니다.” 하여 김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웃으니, 사문이 연구(聯句)를 짓기를,
들녘은 넓은데 푸른 봉우리 가로질렀고 / 野闊橫靑峯
누각은 높아 흰 구름이 기대었네 / 樓高倚白雲
길가에 장승이 있으니 / 路傍長表在
응당 관문에 가까움을 기뻐하리로다 / 應喜近關門
하였다. 밀양에 도착하여 수십 일을 머무르니, 주인이 오래 있을 것을 염려하여 송별연을 누상(樓上)에서 베풀어 위로하니, 김은 부득이 행차하기로 하여 기생과 더불어 교외(郊外)에서 이별하였는데, 그는 기생의 손을 꼭 붙들고 흐느껴 울 뿐이었다. 어느 역(驛)에 이르러 밤은 깊은데, 잠을 이루지 못하여 그는 뜰을 거닐다가 눈물을 흘리며 역졸(驛卒)에게, “내가 차라리 여기서 죽을지언정 이대로 서울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 네가 다시 한 번 대중래를 만나게 해주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 하니 역졸이 불쌍히 여겨 그의 말을 따랐다. 밤중에 수십 리를 달려 날이 샐 무렵에 밀양에 도착했으나 부끄러워 부(府)에 들어가지 못하고, 은띠를 역졸에게 주고 흰옷 차림으로 울타리 길을 걸어가니, 우물에서 물긷는 노파가 있기에 김이, “동비(桐非 대중래의 아명)의 집이 어디 있소.” 하고 물으니, 노파는 “저 다섯 번째 집이 그 집입니다.” 하였다. 김은 다시, “네가 나를 알겠느냐.” 하니 노파는 한참 쳐다보다가, “알겠소이다, 지난 가을에 방납(防納)의 일로 오셨던 어른이 아니십니까.” 하였다. 김이 돈주머니를 풀어 노파에게 주면서, “나는 방납수(防納叟)가 아니라 경차관(敬差官)이니, 나를 위하여 동비에게 가서 내가 온 것을 말하여라.” 하니 노파는, “동비는 지금쯤 본남편 박생(朴生)과 더불어 같이 자고 있을 것이니 갈 수 없습니다.” 하였다. 김이, “내가 만나볼 수는 없더라도 소식만 들을 수 있다면 족하니, 네가 가서 내 뜻만 말해 주면 후히 보답하리라.” 하니 노파가 그 집에 이르러 분부대로 말하였다. 기생은 머리를 긁으며 말하기를, “딱한 일이다. 어찌 이렇게까지 할까.” 하니 박생이, “내가 그를 욕보일 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는 선생이요 나는 한갓 유생이니, 후진으로서 선배를 욕보이는 것은 옳지 않으므로 잠깐 피하리다.” 하고 숨어 버렸다. 김이 기생집에 들어가니 관사(官司)에서 이 일을 알고 몰래 찬과 쌀을 보내었다. 수일을 유숙하자 기생의 부모가 미워하여 내쫓으니, 두 사람은 대밭 속에 들어가서 서로 붙들고 울부짖었다. 그 소리를 들은 이웃 사람들이 다투어 술을 가지고 와서 주었다. 기생을 데리고 가려 하는데 다만 말이 세 필뿐이므로 한 마리는 그가 타고 또 한 마리에는 이부자리와 농을 싣고, 나머지 한 마리에는 수종(隨從)하는 사람이 탔었는데, 결국 수종인의 말을 빼앗아 기생에게 화살을 메고 말을 타게 하고 수종인은 뒤로 따라 걷게 하니, 신이 무거워서 걸을 수가 없어 끈으로 신을 묶어서 말 목에다 걸었다. 역에 돌아와서는, 역졸이 모자와 띠를 섬돌에다 내동댕이치면서, “내가 많은 사람을 겪어 보았으나 이처럼 탐욕스런 사람은 보지 못하였다.” 하였다. 서울로 돌아온 지 몇 달 만에 그의 아내가 죽으니, 김은 관을 실어 중모(中牟)에 장사지내고 장차 밀양으로 향하려고 유천역(楡川驛 경북 청도역원(淸道驛院)에 이르러 시를 짓기를,
향기로운 바람이 산 위 매화에 부니 / 香風吹入嶺頭梅
꽃다운 소식은 이러하되 돌아오지 않음을 괴로워하도다 / 芳信如今苦未回
달빛이 희어 시냇물 20리에 어리었는데 / 月白凝川二十里
옥인은 어디서 다시 오기를 기다리는가 / 玉人何處待重來
하였다. 당시에 감사 김 상국(金相國)이 마침 그 기생을 사랑하다가 김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내주니 김이 서울로 데리고 갔다. 뒤에 김은 승지가 되어 벼슬이 높아지고 녹봉이 후해졌으며, 기생은 두 아들을 낳고 마침내 정실부인이 되었다.
○ 사문(斯文) 윤통(尹統)은 익살맞고 농담을 좋아하여 항상 사람을 속이기를 일삼았다. 그의 집이 영남에 있어 매양 고을을 돌아다니다가 한 읍(邑)에 이르러 기생과 함께 방에 앉아 있었는데, 한 아전이 왕래하면서 여러 번 기생을 쳐다보기를 그치지 않았다. 선생은 다른 뜻이 있음을 알고 밤중에 자는 척하고 코를 고니, 기생은 그가 깊이 잠든 줄 알고 몸을 빼어 나갔다. 선생이 몰래 그 뒤를 따라가니 아전이 마침 창 밖에 와 있다가 기생의 손을 잡고 가는데, 기생이, “달빛이 물빛처럼 밝고 방에 사람도 없으니, 우리 춤이나 춥시다.” 하고 맞서서 너풀거리며 춤을 추었다. 선생은 다른 아전이 처마 밑에서 누워 자는 것을 보고 옆에 놓인 밀짚모자를 집어쓰고 가서 그들이 춤추는 옆에서 춤을 추니, 아전이, “두 사람이 즐기는데 너는 도대체 누구인가.” 하였다. 선생은, “나는 동쪽 윗방에 있는 손인데 양공(兩公)이 춤추는 것을 보고 부러워서 이처럼 두 분의 즐거움을 도울 뿐이다.” 하니, 아전이 황공하여 사죄하였다. 선생이, “너는 관중(官中)에서 무슨 물건을 관장하는고.” 하니, 아전은, “공방(工房)으로서 피물(皮物)을 주관하나이다.” 하였다. 선생이, “피물이 몇 장이나 있는고.” 하니 아전은, “사슴 가죽 일곱 장과 여우 가죽 수십 장이 있습니다.” 하였다. 선생이, “내가 관사(官司)를 만나보고 피물을 구할 테니, 너는 그 숫자를 숨기지 말고 모두 내놓아라. 그렇지 아니하면 지금의 이 일을 모두 말하겠다.” 하니 아전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물러갔다. 이튿날 주관(主官)과 더불어 청(廳)에 앉아 말하기를, “신을 만들려 해도 사슴 가죽이 없고 갖옷을 만들려 해도 여우 가죽이 없으니 좀 찾아 보시요.” 하니 주관이, “그대는 어디에서 들었는고. 있기는 하나 그 수가 적을 것이외다.” 하고 아전에게 명하여 내오게 하니, 모두 내다놓기에 선생은 다 가지고 돌아가 버렸다. 또한 고을에 이르러 객사에 있었는데, 어떤 기생이 흰 옷을 입고 배회하며 왕래하였는데, 얼굴이 자못 예뻤다. 물어보았더니 그 어미의 상을 당한 기생이라 하기에, 선생은 종이 한 권을 얻어 가지고 의롱(衣籠)에다 끼어 창 밖에 두고는 창을 닫고 앉았다가, 기생이 오는 것을 보고, “주(州)ㆍ군(郡)을 순력(巡歷)하여도 좋은 물건이라곤 구하지 못하고 겨우 종이 한 궤짝을 구했으나, 말이 약해서 짐이 무거우니 어떻게 가져 갔으면 좋을까.” 하니, 종이 그 뜻을 넌지시 동료에게 말하기를, “우리 상전은 기생을 사랑하면 물건을 구하여 반드시 내어 주시는데, 또 이 종이를 누구에게 주려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였다. 기생은 당장 초상을 치르기는 해야겠는데 종이는 없고, 이 말을 듣고 보니 매우 마음이 당겨 밤중에 선생의 방으로 들어갔다. 들어온 기생이 오래 머물러 가지 아니하자 선생은 애초에 거짓말로써 꾀었으니 사실은 줄 물건이 없으므로, 큰 소리를 질러, “상을 당한 여자가 내 방에 들어왔다.” 하니 기생은 부끄러워 도망쳐 버렸다. 선생은 또 아저씨와 함께 서울에 내왕하였는데, 아저씨의 말은 검은 빛에 이마가 희고 선생의 말은 온통 검은 빛이었다. 아저씨는 매일 밤, 선생의 말은 기둥에 매어두고 자기 말만 먹이므로 선생은 그 까닭을 알고 백지를 검은 말 이마에 붙이고 검은 종이를 이마가 흰 말에 붙여두니, 어두운 밤에 그 진위를 분별하지 못하여 아저씨는 반대로 자기 말을 기둥에 매어놓고 선생의 말만 먹여서 아저씨의 말은 비루먹고 피어나지 않았다. 그런 뒤에 비로소 속은 줄을 알았다. 또 선생은 집이 없음을 걱정하던 끝에, 연화(緣化)를 좋아하는 중과 서로 사귀어 친하게 되었는데 하루는 선생이 중에게, “내가 절을 한 채 지어 세상에서 지은 악업을 씻어볼까 하오.” 하니, 중은 흔연히 이 말을 좇아, “그대가 전세(前世)에 보살이었던 까닭으로 이러한 맹세와 소원을 발할 따름이로다.” 하므로, 선생은, “계림(鷄林 경주)에 옛 절터가 있는데, 산에 의지하고 물을 베개 삼아 참으로 경치 좋은 곳이라 절을 지을 만하오.” 하고 권문(勸文)을 써서 주니, 중은 성심껏 물건을 장만하고 선생도 역시 힘을 도와 재목을 갖추어 터를 닦고 집을 세웠다. 그 규모는 절의 제도와 조금 달라서 온돌이 많고 또 문 앞 황무지를 개간하여 채소 심을 밭을 만들었다. 단청을 칠하고 불상을 모신 뒤에 중이 경사스러운 일을 찬양하기 위하여 법연(法筵)을 열어 마침내 낙성하였는데, 선생이, “내 아내가 와서 부처를 참배하려 하오.” 하니 중이 이를 허락하였다. 선생이 그의 아내와 함께 가족과 종들을 거느리고 절에 와 있다가, 병을 핑계하고 수일을 머무른 후 세간을 모두 옮기어 거주하니, 중의 무리가 들어올 수 없어서 관(官)에 소송했으나 관에서 역시 오래 끌면서 듣지 않자 결국 선생의 집이 되었는데, 집안에 아무런 병도 없이 80세가 되도록 살다가 죽었다.
○ 대개 연품(宴品 연회하고 활쏠 때 쓰는 물건)의 차림차림은 처음 거안(擧案 밥상을 드는 것)할 때가 볼 만하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있어서의 차림차림을 거안이라 한다. 목생(睦生)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처음으로 충순위(忠順衛 오위(五衛)의 하나)에 들어와서 하루는 그 무리가 모여서 활을 쏘았는데, 그가 늦게 도착하였다. 그는 차림새가 깨끗하고 갖고 있는 활과 살은 모두 정묘하므로, 주위 사람들이 모두, “목생은 우리 편에 들어라.” 하며 다투어 마지않았다. 그러다가 활터에 나아가자 시위를 당기기도 전에 화살이 앞에 떨어지곤 하였다. 종일 쏘아도 목생의 살이 과녁에 미치지 못하니 사람들은 모두 실망하여, “목 서방 거안(睦書房擧案)”이라 하였다. 지금까지도, 허황하고 과장스러워 실속이 없는 사람을, “목 서방 거안”이라 한다.


[주D-001]도리천(忉利天) : 육욕천(六慾天)의 둘째 하늘. 수미산(須彌山)의 맨 꼭대기에 있으며 제석천(帝釋天)이 가운데 있음.
[주D-002]장생(長栍) : 옛날에 이수(里數)를 표하기 위하여 나무에다 사람의 얼굴 모양을 새겨 세웠던 푯말.
[주D-003]방납(防納) : 공물(貢物)을 돈으로 대신 바치던 일.
[주D-004]경차관(敬差官) : 이조 때 지방에 임시로 보내던 벼슬. 전곡과 민정을 살피는 일을 맡았음.
[주D-005]연화(緣化) : 불사(佛事)를 경영하여 시연(施緣)을 구하고 사업을 설계함.

 

용재총화 제6권
용재총화 제6권


고려 재신(宰臣) 지□배(池□陪)는 살림을 꾸리는데, 설날과 한식(寒食)날마다 묘지에 사람을 보내어 지전(紙錢)을 주워 오게 하여 도로 종이를 만들었고, 또 버린 짚신을 주워서 땅에 묻고 동과(冬瓜) 씨를 심었는데 동과가 매우 잘 되어 많은 이익을 얻었다. 또 도문(都門) 밖에서 친구를 전송하는 잔치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술과 안주를 갖고 와서 늘어놓는데, 지□배만은 아무 것도 가지고 오지 않고 단지 소매 속에 작은 술잔을 감추어 갖고 와서는, 떠나는 친구에게 술잔을 올릴 때에 그 술잔에 남의 술을 얻어서 드리고 술상 앞에 엎드려, “변변치 못한 음식이라 드릴 수 없습니다.” 하였다.
또 남의 제삿날에 먹으러 가는데 부조로 쌀 1말을 가지고 가면서 하인은 10명이나 데리고 가서 절에서 포식하였다. 돌아올 때에는 언제나 반쯤 와서 하인들에게서 수저 한 개씩을 거두는데 하인 한 사람이 우물우물하며 내놓지 않자 그 까닭을 물으니, 하인이 사죄하여 말하기를, “쇤네는 수저를 얻지 못하고 바리때를 얻었습니다.” 하니, 지□배는 웃으며, “내가 욕심내던 것은 사발이었다.” 하였다.
한봉련(韓奉連)은 본래 우인(虞人)인데 활을 잘 쏘아 세조(世祖)의 지우(知遇)를 받았다. 그 활쏘는 힘은 매우 약했으나 맹호(猛虎)를 보면 가까이 걸어가 힘껏 당겨 반드시 한 화살로 맞혀 죽였는데, 평생 동안에 죽인 수를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일찍이 궁궐 안에서 나회(儺會)를 하는데 광대들이 호랑이 가죽을 쓰고 앞으로 달리니, 한봉련에게 호랑이를 쏘는 시늉을 하라고 명하였다. 한봉련이 작은 활과 쑥대로 만든 화살을 가지고 뛰어 나오다가 발을 잘못 디뎌 계단에서 떨어지면서 팔이 부러지자 사람들은 모두 진짜 호랑이에게는 용감한데 가짜 호랑이에게 겁을 낸다 하였다. 영순군(永順君) 댁의 잔치에 조정의 문사(文士)들이 모두 참석하였는데, 세조의 명으로 한봉련이 선온(宣醞 궁중에서 쓰는 술)을 싸 가져가니 좌중이 모두, “너는 천사(賤士)지만 어명으로 왔으니 천사(天使)이다.”하면서, 상좌에 앉혔다. 곱게 단장한 미인이 온 사방에서 하늘을 찌르듯 노래를 불렀으나, 한봉련은 부끄러워 말 한 마디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사람들이 다투어 술을 권하니 나중에는 크게 취해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팔을 휘두르며, 눈을 부릅뜨고 호랑이 쏘는 시늉을 하면서 큰 소리로 고함을 치니,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우스워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반궁(泮宮)이 비록 예법 있는 곳이라고 한지만, 유생은 대부분이 명문가의 자제들이라 호탕하여 제약을 받지 않았다. 동지사(同知事) 홍경손(洪敬孫)과 임수겸(林守謙)은 모두 나이가 들어 늙어서 백마를 타고 다녔는데, 어느 유생이 지은 시에,
손이여 손이여 / 有客有客
그 말이 백마로다 / 亦白其馬
백마의 흰색이나 / 白馬之白
흰 머리의 흰색이나 다를 것이 없구나 / 無以異於白人之白
하였다. 그 후에 어느 유생이 지은 시에,
태학이 현관이라 누가 말했던가 / 誰云太學是賢關
진부하고 용렬한 이들이 높은 벼슬만 차지했네 / 陳腐庸流尸厥官
홍가는 이미 죽고 임가만 남았고 / 洪同已逝林同在
이학이 겨우 가니 조학이 돌아오네 / 李學纔歸趙學還
하였는데, 이는 홍경손은 이미 죽었고 임수겸만 남았으며, 학관(學官) 이병규(李丙奎)가 체직(遞職)되니, 조원경(趙元卿)이 다시 학관이 되었다는 뜻이다.
궁한 누이 돌보지 않으니 얼굴은 어이 그리 두터우며 / 窮妹不恤顔何厚
어버이 안 섬기니 행실 또한 잔악하구나 / 將父未遑行亦殘
하였는데, 이는 동지중추부사 유진(兪鎭)의 누이가 과부가 되었으나 돌보지 않았고, 또 직강(直講)으로 있는 자가 고향에 계신 늙은 아비를 찾아가 뵙지 않았다는 말이다.
추량(방강(方綱)) 송적(송원창(宋元昌))은 어찌 따질 것이 있겠는가 / 鶖梁宋籍何須數
첩이 많으니 보잘것없다 / 衣綠方盛不足觀
하였는데, 이는 전적(典籍) 송원창(宋元昌)과 사성(司成) 방강(方綱)이 모두 첩을 두고 본처를 돌보지 않았다는 말이다. 조정에서 이 사건을 국문하였는데 삼관(三館) 및 여러 유생까지 연루되어 옥에 갇힌 자가 수십 명이었고, 더러는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진상을 알아내지 못하고 모두 석방하였다.
○ 사문(斯文) 안(安)ㆍ권(權) 두 선비가 충주(忠州)로 향하려 할 때 안(安)은 노(盧)의 집에서 푸른 구슬로 만든 갓끈을 빌리고, 권은 박(朴)의 집에서 자줏빛 띠[帶]를 빌렸는데, 안의 별명은 연취(鳶鷲)라 하고 권의 별명은 봉시관(奉時官)이라 했다. 권은 항상 수염을 쓰다듬었는데 충주에 이르러 안은 기생 죽간매(竹間梅)를 사랑하고, 권은 기생 월하봉(月下逢)을 사랑하였다. 4군(郡)을 두루 다니며 수십 일을 지내다가 달천(獺川)가에서 이별하며 서로 붙들고 통곡하니, 사문(斯文) 금생(琴生)도 옆에 있다가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울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그들이 앉아 있던 돌을 교리석(校理石)이라고 한다. 사문(斯文) 유공(柳公)이 시를 짓기를,
고삐를 나란히 하고 재갈을 연하여 화산을 떠나는데 / 竝轡聯鏕發華山
예성을 동쪽으로 바라보니 길은 멀도다 / 蕊城東指路漫漫
자줏빛 박의 띠(朴帶 박씨 집에서 빌린 띠)는 허리를 두른 것이 가늘고 / 紫芝朴帶圍腰細
푸른 구슬 노의 갓끈(盧纓 노씨 집에서 빌린 갓끈)은 얼굴에 비쳐 싸늘하도다 / 靑玉盧纓照臉寒
대나무 사이에 날개를 펴니 목마른 독수리가 다다른 듯하고 / 張翅竹間臨渴鷲
달빛 아래 수염을 내미니 봉시관이로다 / 掀髥月下奉時官
수십 일 동안 운우(남녀간의 사랑)로 남의 웃음거리요 / 數旬雲雨供人笑
4군의 풍류는 빼어난 구경거리라네 / 四郡風流絶勝觀
배 위에서 두 낭군 눈물을 뿌리며 헤어지고 / 船上兩郞揮淚別
밭 두둑 길에 두 기생은 노래부르며 돌아가도다 / 陌頭雙妓放歌還
우습도다 금공은 어떤 손이길래 / 堪笑琴公何許客
병신처럼 이별을 함께 서러워하는고 / 籧篨同作別離難
하였다.
강인재(姜仁齋)는 모습이 비대하여 돼지고기를 좋아하고 의복을 화려하게 입으며, 성품은 유약하여 월과(月課 다달이 보이는 시험)의 시문을 짓지 아니하였다. 성근보(成謹甫)가 시를 지어 희롱하기를,
돼지고기는 성성이가 술을 좋아하듯이 하고 / 猪肉猩嗜酒
월과는 여우가 화살을 피하듯 하도다 / 月課狐避箭
거완은 공연히 옷만 화려하게 입고 / 去頑空媚衣
경항은 헛되이 밥만 배불리 먹는구나 / 景恒徒飽飯
하였다. 선비 박거완(朴去頑)은 집안이 넉넉하여 옷을 화려하게 입고, 중 경항은 밥을 많이 먹어서, 두 사람의 비대함이 강인재와 서로 같음을 말한 것이다.
동지(同知) 홍경손(洪敬孫)이 젊었을 때 성균관에서 발원시(發願詩)를 짓기를,
이석형의 글씨 조계의 활쏘기 이인견의 젊음과 / 亨書棨射少仁堅
신숙주의 눈 이문형의 얼굴 손차면의 음(양기)을 한 몸에 지니고 / 舟目炯顔鳥次綿
등과하기를 항상 정인지와 같게 하리라 / 登科每似鄭鱗趾
하고, 미처 아래 구절을 잇지 못하자 중추(中樞) 이계전(李季專)이 이때 옆에 있다가 말하기를, “내 이름으로 협운(協韻)하면 그대가 이을 수 있으리라.” 하여, 홍경손이 드디어 아래 구절을 이어 말하기를,
위장병은 이계전과 같지 말 것이다 / 傷食毋如李季專
하니, 모두 포복절도하였다. 이 시의 뜻은 대개, 이석형은 글씨를 잘 쓰고, 조계는 활을 잘 쏘며, 이인견은 나이가 어리고 이문형은 얼굴이 아름다우며, 신숙주는 눈이 아름답고, 손차면은 성욕(性欲)이 강하고, 정인지는 두 번 장원 급제하였으나, 이계전은 위장병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유생 김윤량(金允良)이란 사람은 성품이 화합하지 못하고 용모가 보잘것없으며, 의복이 거칠고 헤진데다 밤낮으로 다만 성균관의 밥만 기다리자, 김복창(金福昌)이 찬(贊)을 지어 희롱하기를, “식모가 하는 일에 항상 머리를 흔들며 □밥을 덜고 좌우를 돌보며 딴 이야기를 하도다. 일강(日講)ㆍ월강(月講)에는 조(粗)와 불(不)이 서로 연속하니, 귀신을 쫓는다고 복숭아나무 가지 위에서 뛰고, 의(疑)ㆍ의(義)ㆍ시(詩)ㆍ부(賦)는 재시험을 면치 못하니 괴정(槐庭) 밑에서 분주하도다.” 하였다. 김윤량은 점치는 법을 조금 알아서 김복창의 명을 점치기를, “반드시 일찍 죽으리라.” 하니, 복창이 크게 노하여 불붙은 숯을 입속에다 집어넣고 가버렸다.
○ 옛날에 한 처녀가 있었는데 중매하는 사람이 많았다. 어떤 이는 문장에 능하다 하고, 어떤 이는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한다 하고, 어떤 이는 못가에 좋은 밭 수십 이랑이 있다 하고, 어떤 이는 양기가 왕성하여 돌이 든 주머니를 거기에 매달고 휘두르면 머리를 넘긴다 하였다. 처녀가 시를 지어 그 뜻을 보이며 말하기를,
문장이 활발하면 노고가 많고 / 文章闊發多勞苦
활을 쏘고 말을 타는 재능은 싸우다가 죽을 것이요 / 射御材能戰死亡
못가에 밭이 있으면 물로 손해를 볼 것이니 / 池下有田逢水損
돌이 든 주머니를 휘둘러 머리 위로 넘기는 것이 내 마음에 들도다 / 石囊踰首我心當
하였다.
○ 전목(全穆)이 충주 기생 금란(金蘭)을 사랑하였는데, 그가 서울로 떠나려 할 때 금란을 불러 타이르기를, “경솔히 남에게 몸을 허락하지 말라.” 하니, 금란의 말이, “월악산(月嶽山)은 무너질지라도 내 마음은 변치 않으리라.” 하였으나, 뒤에 단월역(斷月驛)의 승(丞 관명)을 사랑하게 되었다. 전목이 이 소문을 듣고 시를 지어 보내기를,
듣자니 네가 문득 단월역 승을 사랑하여 / 聞汝便憐斷月丞
깊은 밤 항상 역을 향해 달려간다 하니 / 夜深常向驛奔騰
언제나 삼릉장(세모진 형장)을 잡고 / 何時手執三稜杖
돌아가 월악산 무너져도 마음은 변치 않는다던 맹세를 물어볼고 / 歸問心期月嶽崩
하니, 금란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북쪽에 전군이 있고 남쪽에는 승이 있으니 / 北有全君南有丞
첩의 마음 정할 수 없어 뜬구름 같도다 / 妾心無定似雲騰
만약 맹세한 바와 같이 산이 변할진대 / 若將盟誓山如變
월악이 지금까지 몇 번이나 무너졌는고 / 月嶽于今幾度崩
하였다. 이것은 모두 사문(斯文) 양여공(梁汝恭)이 지은 것이었다.
○ 어떤 경사(經師)의 아내가 그의 남편이 외출한 사이에 이웃집 남자를 방에 맞아들여, 이제 막 서로 흥을 즐기는 찰나에 그 남편 때마침 돌아왔다. 아내가 어찌할 바를 몰라 두 손으로 치마를 쥐고 남편의 눈을 가리려 뛰면서 앞으로 나아가 말하기를, “경사는 어디에서 오시는 길입니까.” 하니, 남편은 아내가 자기에게 장난을 치는 줄로만 알고 자기도 뛰면서 나아가 말하기를, “북택재신(北宅宰臣)의 장사를 치르고 오는 길이다.” 하였다. 아내가 치마로 남편의 머리를 싸안고 눕자 이웃 사람은 마침내 도망갔다.
낙산사(洛山寺) 중 해초(海超)가 우리 문중에 출입한 지가 오래되었는데, 하루는 와서 부처에게 공양할 것을 요구하였다. 유본(有本)이 방에 있다가 말하기를, “높은 집에다 단청을 칠하고 나무에다 진흙을 칠하여 부처를 만들어, 밤낮으로 정성을 다하여 음식을 올린들 무슨 이익이 있는고.” 하니, 중이 즉석에서 대답하기를, “높은 집에 단청을 칠하고 밤나무를 깎아 신주를 만들고, 사철의 중월(仲月)에 정성을 다하여 음식을 올린들 무슨 이익이 있는고.” 하니, 유본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참판(參判) 안초(安超)가 일찍이 전라도 관찰사가 되어 나주(羅州)에 이르러 순찰사 김상국(金相國)과 서로 만났는데, 그때 제주 목사가 푸른 귤 한 상자를 보내왔다. 안공은 그 빛이 푸르고 껍질이 쭈굴쭈굴한 것을 보고 못쓰겠다 싶어, 그 자리에서, “목사는 어찌하여 먼 길에 수고롭게 익지도 않은 작은 감을 보냈는고.”하고, 기생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한 기생이 순찰사 방에 가지고 갔다. 순찰사가, “어디서 났느냐.” 하여, 기생이 사실대로 고하자, 순찰사는 나누어주지 않은 나머지를 찾아가지고 안공 앞에서 먹으며 말하기를 “감사께서는 싫어서 버렸지만 나는 이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하였다. 그러자 안공도 한 개를 달라 하여 맛보고는 그제서야 그 맛을 알았다.
손님을 거절하였다는 이유로 볼기를 맞은 수원 기생이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어우동(於宇同)은 음란한 것을 좋아하여 죄를 얻었는데, 나는 음란하지 않다 하여 죄를 얻었으니, 조정의 법이 어찌 이처럼 같지 아니한가.” 하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옳은 말이라 하였다.
김복창(金福昌)은 성품이 소탈하고 호탕하여 살림을 꾸리지 않고 항상 남의 집을 빌려 거주하였다. 송려성(宋礪城)은 말하기를, “재상 못지 않은 사람이 어찌 남의 집을 내 집으로 삼는가.” 하니, 김복창은 그 자리에서 대답하기를, “재상 못지 않은 사람이 어찌 남의 자식을 제 자식으로 삼는가.” 하였다. 이 말은 송려성이 자식이 없어 조카를 후사로 삼았음을 기롱한 것이다.
나의 백씨(伯氏)는 세 번째 황주(黃州) 선위사(宣慰使)가 되었는데, 안악(安岳) 기생과 서로 용천관(龍泉館 외국 사신을 묵게 하는 집) 앞의 못가에서 이별하고, 그 뒤에 또 주(州)의 기생과 함께 못가에서 작별하였는데, 임서하(任西河)도 또한 평양 선위사로서 기생을 거느리고 와서 이곳에서 이별하였다. 그때 어떤 사람 이 희롱하여 시를 짓기를,
시냇물의 오열함이여 / 川嗚咽而如泣兮
떠오르는 아침 햇살 처량하도다 / 旭朝暾之淒涼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그 못을 오열탄(嗚咽灘)이라 하였다. 상국(相國) 서강중(徐剛中 강중은 서거정의 자)이 시를 지어 희롱하기를,
황공탄 앞에 황공한 마음이요 / 皇恐灘前皇恐意
희환산 밑에 희환한 정 이로다 / 喜懽山下喜懽情
어찌하여 오열하는 용천수는 / 如何嗚咽龍泉水
문득 정인들이 울며 헤어지는 소리 같은고 / 却似情人哭別聲
황주관 속에 꽃이 만발하였는데 / 黃州館裏花滿開
전번에 왔던 유랑(당의 시인 유우석(劉禹錫))이 세 번째 왔도다 / 前度劉郞三度來
오열하는 여울 소리는 어느 날에나 다할고 / 嗚咽灘聲何日歇
아침마다 이별하며 우는 소리 우레와 같도다 / 朝朝送別哭如雷
하였다. 상국 노반자(盧胖子 반자는 노사신의 자)의 시에 이르기를,
이 여울이 본래 장광설을 알아서 / 此灘元解廣長舌
당시의 이별하는 소리를 근심하게 하도다 / 愁殺當年送別聲
본디 인심이야 미오함이 다르거니와 / 自是人心迷悟異
흐르는 물은 두 가지 소리가 있는가 / 流溪那有兩般聲
누 밑의 청강은 거울처럼 잔잔하며 / 樓下淸江鏡面開
용이 보옥을 끼고 돌아오는 것 같도다 / 龍應抱寶每歸來
그리하여 무한한 상사의 눈물로 / 故知無限相思淚
앞 여울의 물을 넘치게 하여 흐르는 것이 우레 소리와 같도다 / 漲起前灘流似雷
하였고, 상국 신범옹(申泛翁 범옹은 신숙주의 자)의 시에는,
고관이 쓸쓸하고 적막한 물가에 / 古館蕭條寂寞濱
정인은 한 번 이별하고 소식이 막혔도다 / 情人一別隔音塵
낭군의 한을 부칠 곳이 없는데 / 郞君寓恨眞無處
문밖에 여울이 흘러 사람을 비웃는구나 / 門外灘流笑殺人
맛좋은 술과 명화(아리따운 기생)에 돈을 쓸 필요가 없고 / 美酒名花不用錢
청가와 호무에 술통 앞에서 취하도다 / 淸歌胡舞醉樽前
사람을 만남에 다정하여 괴로움을 면하지 못하니 / 逢人不免多情惱
한번 당시를 생각하니 이미 망연하도다 / 一念當時已惘然
시판 위에 쓴 제공은 모두 젊은 나이인데 / 板上諸公摠妙齡
청시가 눈에 가득하여 다정함을 위로하도다 / 淸詩滿眼慰多情
그 속의 객지 신세야 응당 같은 가락이요 / 箇中旅況應同調
만물의 무성함이 유성함을 막았도다 / 萬物無聲隔有聲
얼마나 많은 인생들이 입을 열었던고 / 人生有口幾多開
비락이 순환하여 서로 따르도다 / 悲樂循環相逐來
헤어지고 또 새로 만나는 일은 예로부터 있는 일인데 / 生別新知從古事
제공이 여기에 부화뇌동하였도다 / 諸公於此墮同雷
하였고, 진산(晉山) 강경순(姜景醇)의 시에 이르기를,
용천의 여울가에 와서 / 訪到龍泉灘水濱
시판을 보고 청진을 하나하나 살펴보도다 / 看題一一訪淸塵
처량하게 해뜰 때 시냇물은 느껴 울기만 하니 / 凄涼旭日川嗚咽
눈에 보이는 것 모두가 사람을 애가 타게 하는구나 / 滿目無非惱殺人
지난 해의 느릅나뭇잎이 비로소 돈 모양을 이루었는데 / 去年楡葉始成錢
그대가 명화 앞에서 쓸쓸한 것을 보겠도다 / 看君落拓名花前
오늘 내가 와서 또 적적하여 / 今日我來且寂寞
시를 지으며 날을 보내니 응당 망연하리라 / 作詩送我應茫然
산양의 피리는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을 느끼게 하는데 / 山陽笛感懷人意
사곡의 방울 소리는 섭섭한 심정을 슬프게 하였도다 / 斜谷鈴悲愴悵情
지금이나 옛날이나 정든 여울은 변함이 없을 것이니 / 今古情灘應不變
누구를 위하여 또다시 작별하는 소리를 내겠는가 / 爲誰飜作別般聲
푸른 물은 맑고 깨끗하여 거울처럼 열렸는데 / 碧水溶溶一鑑開
여울에 와서는 패옥의 소리가 되어 흘러오도다 / 到灘聲作佩環來
부질없이 근심하고 사람의 귀에 들어감으로써 / 自從枉入愁人耳
슬픈 울음소리 은은하여 우레인 줄 잘못 알겠도다 / 錯認悲鳴殷似雷
하였고, 서하(西河) 임자심(任子深)의 시에 이르기를,
선녀가 귀고리를 울리면서 이 낙수가로 내려오니 / 仙子鳴鐺下洛濱
가볍게 걸어가는 비단 버선엔 티끌이 일지 않도다 / 凌波羅襪不生塵
별안간 하직하고 다시 안개를 타니 / 瞥然辭去還乘霧
문득 유유히 꿈속 사람을 한하도다 / 却恨悠悠夢裏人
하늘과 땅이 장구하듯이 한을 다할 길이 없고 / 地久天長無盡恨
청산과 녹수 모두 깊은 감상을 느끼게 하도다 / 山靑水綠摠傷情
옛날에 흐느껴 울던 여울 앞 물은 여울 앞에 흘러서도 소리나지 않도다 / 流到灘前不作聲
인생의 즐거운 것에 좋은 마음이 열리어 / 人生樂處好懷開
드디어 청루를 향하여 갔다가 또 오도다 / 故向靑樓去又來
늙은 사람은 그 속에서도 흥이 얕지 않으니 / 老子於中興不淺
때를 만나매 와부로도 또한 우레 소리 같도다 / 逢時瓦釜亦鳴雷
하였다. 백씨(伯氏)가 이에 답하기를,
깨끗한 고루가 물가에 있는데 / 瀟灑高樓近水濱
바람이 잔 경면 수면에는 저절로 티끌이 없도다 / 風恬鏡面自無塵
정중히 우정리에게 말하노니 / 丁寧爲向郵亭吏
몇 번이나 서쪽에서 석별하는 사람을 보았는고 / 幾見西來惜別人
한 번 웃는 웃음이 만 냥짜리인 줄 알겠으니 / 一笑須知直萬錢
어찌 화루 앞에서 차마 헤어지겠는고 / 可堪分手畫樓前
이 세상에서 마침내 만날 날이 있다면 / 此生會有相逢日
파경이 다시 둥글어져 다시 찬연하리로다 / 破鏡重圓更粲然
죽은 재처럼 쓸쓸해서 살 마음이 없으니 / 死灰索爾無生意
사람이 진실로 은혜 없으면 정에 가깝지 않도다 / 人苟無恩不近情
느껴 우는 여울물 속에 마음이 어지러운데 / 鳴咽灘頭心緖亂
어찌 이별하여 애끊는 소리를 가볍게 들어 넘기게 하겠는가 / 豈容輕聽斷腸聲
제공이여 웃는 입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 諸公笑口莫輕開
은수에 보답하는 것이 한 번은 왔다 가리라 / 報答恩讐一往來
대동강과 압록강도 원망스러운 이별을 다같이 지녔으니 / 浿水龍灣同怨別
여울이 있는 어느 곳엔들 우레 소리가 있지 않겠는가 / 有灘何處不成雷
하였으니 이것은 강경순이 의주(義州) 선위사(宣慰使)가 되고 임자심이 평양(平壤) 선위사가 되어 모두 관서 지방에 마음을 두어 읊은 것이다. 조대허(曺大虛)의 시에는,
10리 강산 적적한 물가에 / 十里江山寂寞濱
소루가 깨끗하여 티끌을 밟지 않도다 / 小樓淸絶不踏塵
누 앞에서 획획 흐르는 차가운 물은 / 樓前㶁㶁寒流水
마치 당년의 흐느껴 울던 사람 소리 같도다 / 正似當年嗚咽人
만 냥을 들여서 아름답게 단장하고 / 珠翠粧成費萬錢
동풍에 뽐내며 난간 앞에 섰도다 / 東風脈脈小欄前
해마다 자주 낭군을 보내니 / 年年慣送郞君去
여울물 속에 눈물 뿌려 한으로 정신이 아득하도다 / 淚灑灘頭恨黯然
처량하게 뜨는 해는 고루에 밝은데 / 凄涼旭日明高樓
어찌 동풍에 이별한 뒤의 정을 견디리오 / 可耐東風別後情
그리하여 인심이 곳에 따라 달라지니 / 自是人心隨處異
여울 소리가 치우치게 애끊는 소리를 이룩하였도다 / 灘聲偏作斷腸聲
눈썹은 한에 잠겨 펼 수가 없는데 / 眉峯鎖恨不能開
느릿느릿 쌍만은 땅에 붙어서 오도다 / 緩緩雙彎襯地來
문득 이별한 넋이 느낌에 동하여 발작할까 하노니 / 却怕離魂易髑撥
모름지기 여울가에서 시끄러운 우레 소리를 듣지 말지니라 / 不須灘上聽奔雷
하였다.
옛날에 유생 세 사람이 시장(試場)으로 나아가려 할 때, 한 사람은 거울이 땅에 떨어지는 꿈을 꾸었고, 한 사람은 허수아비가 문 위에 걸린 꿈을 꾸었으며, 또 한 사람은 바람이 불어 꽃이 떨어지는 꿈을 꾸어, 모두들 해몽하는 사람의 집으로 갔더니, 해몽하는 사람은 없고 그의 아들이 혼자 있으므로, 세 사람이 나아가 물으니 그 아들이 점을 쳐 말하기를, “모두 상서롭지 못한 것이니, 소원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하였는데 조금 있다가 해몽하는 사람이 와서 그 아들을 꾸짖고 시를 지어주면서 말하기를,
허수아비는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바요 / 艾夫人所望
거울이 떨어지면 어찌 소리가 없겠는가 / 鏡落豈無聲
꽃이 떨어지면 응당 열매가 있을 것이니 / 花落應有實
세 분이 함께 이름을 이루리라 / 三人共成名
하였는데, 세 사람이 과연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
나옹(懶翁 이름은 혜근(惠勤), 고려 말의 승려)이 회암사(檜巖寺)에 머물 때에, 남녀가 물결처럼 모여들었다. 어떤 유생 세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저 머리 깎은 것이 무슨 요술을 부리기에 사람을 이와 같이 놀라게 하는고. 우리가 가서 보고 이를 눌러버리리라.”하고 마침내 방장(方丈 높은 중이 있는 절)에 갔다. 옹은 평상에 걸터앉아 있는데, 용모가 웅위(雄偉)하고 눈빛이 밝아서 바라보니 근엄하였다. 이런 찰나에 별안간 큰 소리로 외치면서, “세 사람이 같이 왔으니 그 중에는 반드시 지혜로운 사람이 하나는 있을 것인데, 지혜로써 이르지 못하는 곳의 한 구절을 가지고 오너라.”하자, 세 사람은 정신이 나가 정례(頂禮)하고 돌아갔다.
중 혼수(混修 고려말의 승려. 본성은 조(趙), 자는 무작(無作)의 호는 환암(幻庵)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겨우 나이 13세에 아저씨 영(鴒)을 따라 요외에 사냥을 나갔는데, 사슴 한 마리가 달아나다가 돌아다보며 무엇을 기다리는 듯하더니, 조금 있다가 새끼 사슴 한 마리가 좇아왔다. 이것을 보고 크게 느껴, “짐승이 그 새끼를 생각하는 것이 사람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하고 곧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여 사냥을 그만두고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불경을 배우니, 명성이 자자하여 같은 무리들이 감히 그를 능가하지 못하였다. 금강산에 들어가서 나무 열매를 먹고 베옷을 입고 자리에 눕지도 않으면서 장차 생을 마칠 것 같더니, 그의 어머니가 문에 서서 자기가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을 것을 생각하여, 드디어 돌아가면서 게(偈 불가의 시사〈詩詞〉를 지어 이르기를,
바위 앞의 송백에게 말을 하노니 / 寄語巖前松栢樹
다시 와서 너와 더불어 일생을 마치리라 / 重來與爾終天年
하였다. 그 뒤에 식영암(息影庵)에게 사사(師事)하여, 능가경(楞伽經)을 배우니, 다른 중들은 그저 거죽은 훑었으나 혼수만이 홀로 깊이 오묘한 도를 깨달았다. 현릉(玄陵 공민왕께서 광명사(廣明寺)에 도량(道場)을 세우고 나옹(懶翁)으로 주관하게 하니 당시의 중[衲子]으로서 당에 오를 만한 사람이 없었다. 임금이 체후(體候)가 편치 않으시어 저물녘에 파장(罷場)하려 하는데, 장사(場師)가 나중에 오니 임금이 매우 기뻐하여 맞아들였다. 사(師)가 문 밖에 서 있을 때 나옹이 “어떤 것이 당문구(當門句)가 되겠는가.”하고 물으니, 사가 대답하기를, “좌로도 우로도 떨어지지 아니하고 중간에 섰습니다,” 하였다. 그러면, “어떤 것이 입문구(入門句)가 되겠는가” 하니, 사가 곧 문 안으로 들어서며 대답하기를, “들어왔지만 들어오지 않았을 때와 같습니다.” 하였다. 또, “문내구(門內句)는 무엇인고.” 하니 대답하기를, 안팎이 본래 공중이거늘 무엇을 일러 섰다 하리오.” 하였다. 다시 묻기를, “산이 어찌하여 봉우리의 기슭에서 끝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높은 것을 만나면 곧 낮아지고 낮은 것을 만나면 곧 끝납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물이 어디로부터 와서 개천을 이루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대해(大海)가 스며 흘러 도처에 개천을 이루었습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밥은 어찌하여 흰 쌀로 만드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모래나 돌을 찧을 것 같으면 어찌 좋은 밥이 되겠습니까.” 하니, 깊이 인정하였고 신우(辛禑)가 드디어 국사(國師)로 삼았으나 사(師)는 소문을 듣고도 기뻐하지 아니하며, 게(偈)를 짓기를,
30년 동안 속세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 三十年來不入塵
물가와 수풀 밑에서 참된 성정을 길렀는데 / 水邊林下養情眞
누가 시끄러운 인간사를 가지고 소요하며 / 誰將擾擾人間事
자재(구속과 방해가 없음)하는 몸을 속박하고자 하는고 / 係縛逍遙自在身
하였다. 하루는 청룡사(靑龍寺)에 있을 때에 병이 들자 문인을 불러 뒷일을 부탁하기를, “내가 저녁 때 가야겠구나.”하고 저녁이 되자 담[墻]에 기대어 게를 지어 이르기를,
천운에다 맡기고 마음대로 일생을 보냈는데 / 任運騰騰度一生
병중의 소식이 또한 분명하도다 / 病中消息更惺惺
뉘라서 나 돌아가는 곳을 알리오 / 無人識得吾歸處
창 밖에 흰 구름이 푸른 병풍에 비꼈도다 / 窓外白雲橫翠屛
하고 엄연히 서거하였다. 사가 일찍이 윤평(尹評)에게 청하여 산수화 12폭을 그리게 하고, 또 윤소종(尹紹宗)에게 청하여 시를 짓게 하니, 윤소종은 눈을 들어 그림을 바라보고 붓을 휘둘러 시를 지었다. 윤소종이 나가자 사가 문인에게 말하기를, “이 시가 좋긴 하나 병풍에 쓰기는 어려우니, 목로(牧老 이색)를 맞아 온 것만 같지 못하다.”하고, 드디어 목은(牧隱)을 맞아오니 목은이 방에 와서 병풍을 펴고 그 속에 앉아 오래도록 생각하다가 먼저 제목을 쓰기를, “이것은 황학루(黃鶴樓)요, 이것은 등왕각(滕王閣)이다.” 하여 하나하나 이름을 붙인 뒤에 붓을 들어 시를 지으니, 시사(詩思)가 신묘한 경지에 이른 듯하였다. 드디어 손수 병풍에 쓰고 가니, 사가 말하기를,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노련한 솜씨다.”하고 보배로 여겨 완상하였는데 그 뒤에 광평 부원군(廣平府院君) 이인임(李仁任)의 소유가 되었다. 내가 젊어서 유생 가요청(儒生歌謠廳)에서 이 글씨를 보았는데, 필적이 소탈하면서도 힘이 넘쳤으니, 바로 목은의 수필(手筆)이었다.
중 둔우(屯雨)는 환암(幻庵 혼수(混修))의 고제(高弟)이다. 어려서부터 학업에 힘써 경전(經傳)을 탐독하지 않은 것이 없고, 그 뜻을 정밀하게 연구하였다. 또 시에도 능하여 시사(詩思)가 청절하여 목은(牧隱)ㆍ도은(陶隱) 등 선생과 더불어 서로 시를 주고 받았다. 아조(我朝)에서는 불교를 숭상하지 않아 명가의 자제는 머리를 깎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승려로서 글을 아는 자가 없어 사(師)의 이름이 더욱 나타났으며 사방의 학자가 구름과 같이 모여들고, 집현전의 선비들도 모두 탑하(榻下)에 나아가 글을 물으니, 성대하게 유석 사림(儒釋士林)의 사표가 되어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였다. 나의 백형과 중형이 일찍 회암사(檜巖寺)에서 글을 읽을 때, 사의 나이가 90여 세였는데 용모가 맑고 파리하며, 기체가 여전히 강하여 혹은 이틀쯤 밥을 먹지 않아도 그다지 배고파하지 아니하고, 사람이 밥을 올리면 혹은 몇 그릇을 다 먹되, 또한 배부른 빛이 없고 며칠이 지나도록 변소에 가지 아니하며, 항상 빈 방에 우뚝 앉아서 옥등을 달고 깨끗한 책상을 놓고, 밤새도록 책을 보아 작은 글자까지 하나하나 연구하며 졸거나 드러눕는 일이 없으며, 사람을 물리쳐 옆에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고, 부를 일이 있으면 손으로 소쟁(小錚)을 쳐서 제자들이 수응하도록 하였으며, 큰소리를 지르지 아니하였다. 일본 국사인 중 문계(文溪)가 시를 구하여 진신(縉紳) 중에서 시를 지은 사람이 수십 명이나 되었는데, 사도 또한 명을 받들어 시를 지었다. 그 시에,
수국고정 / 水國古精
상쾌한 무위의 사람이로다 / 灑然無位人
빨리 달리는 것도 응당 스스로 그칠 것이요 / 火馳應自息
고목처럼 섰으니 다시 누구와 친하리오 / 柴立更誰親
풍악에는 구름이 발 아래에서 일고 / 楓岳雲生屨
분성에는 달빛이 성문에 가득하도다 / 盆城月滿闉
바람 맞은 돛은 해천이 넓고 / 風帆海天闊
매류는 고원의 봄이로구나 / 梅柳故園春
하였다. 당시에 춘정(春亭 변계량)이 문형(文衡)을 주관(主管)하였는데, 쇄연무위(灑然無位)의 글귀를 고쳐서 “소연절세인(蕭然絶世人 쓸쓸히 세상과 인연을 끊은 사람)이라 하니, 스승이 말하기를, “변공(卞公)은 참으로 시를 모르는 사람이로다. 소연(蕭然)이 어찌 쇄연(灑然)만 하며, 절세(絶世)가 어찌 무위(無位)만 하겠는가. 이것은 자연무위(自然無爲)의 뜻을 깎아 없앨 뿐이로다.”하고, 항상 문사를 보면 섭섭해 마지않았다. 지금 천봉집(千峯集)이 세상에 전해진다.
국초(國初)에 중 장원심(長遠心)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키가 커서 길을 가면 우뚝히 무리중에 눈에 띄고 손으로 장랑(長廊)에 걸린 현판을 만질 수 있을 정도였다. 또 그 사람됨이 익살스럽고 사심도 없고 욕심도 없으며, 사는 곳이 일정하지 않았으며 그 사는 지경 밖을 벗어나지 않고, 밤이면 담에 의지한 채 새벽을 맞고 병이 나서 시중에 드러누우면 시인(市人)이 다투어 와서 밥을 주었고 공후(公侯)ㆍ재추(宰樞)의 집에서 합(榼)을 가지고 와서 먹을 것을 보내는 사람도 또한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나라에 수해나 가뭄이나 요사한 재해가 있으면, 제자를 모아 정성껏 기도를 드렸는데 혹 응답하는 바도 있었다. 천금을 받더라도 기뻐하지 아니하고 모든 것을 잃더라도 성내지 아니하며, 사람이 주면 남녀의 의복을 가리지 않고 모두 몸에 걸쳤다가 누가 혹 달라고 하면 모두 벗어주어, 옷이 있으면 몸을 가리고 옷이 없으면 벗으며, 혹 풀을 엮어 옷을 삼고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혹 비단옷을 입어도 영화롭게 여기지 않으며, 남에게서 받은 물건이 한이 없으나 남에게 준 것도 또한 셀 수 없었다.
공경(公卿)을 보았다고 해서 반드시 공경을 표하지 않았으며, 우부(愚婦)를 보아도 또한 서로 말을 나누었으며, 시체를 보면 짊어지고 가서 묻어주었다. 하루는 구렁 속에 있는 시체를 보고 통곡하여 몹시 슬퍼하고 일으켜 업었는데, 시체가 등에 붙어서 3일 동안이나 떨어지지 아니하여, 그 제자들이 부처에게 기도하여 겨우 면하였는데 이후로는 시체를 업지 않았다.
일찍이 그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뼈를 불에 태워 화신(化身)하고자 한다.” 하니, 그 무리가 땔나무를 쌓아 대(臺)를 만들었는데, 장원심이 그 위에 꿇어앉아 있다가 불빛이 점점 다가오는 것을 보고, 그 괴로움을 참지 못하여 몰래 연기를 따라가 빠져나와 방장(方丈)에 돌아와 있었다. 그 무리가 스승이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여, 서로 울면서 절에 왔는데, 장원심이 엄연히 선실(禪室)에 않아 있는 것을 보고 절을 하고 그 연고를 물으니, 장원심이 말하기를, “내가 서천(西天)으로부터 왔으니 사대(四大 불가에서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을 말함. 즉 몸을 말한다)는 이미 화해서 사라졌으나, 법신(法身)은 상주하여 멸하지 않는다.”하고,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어떤 중이 있었는데 몸이 작고 한쪽 발을 좀 절었다. 항상 장안에 살면서 날마다 성중을 두루 돌아다니며, 부잣집과 지체 높은 댁을 찾아다니지 않는 곳이 없었다. 항상 손뼉을 쳐서 닭의 날개치는 시늉을 하며 입을 움츠리고 소리를 내어 혹 수탉이 우는 소리를 하고, 혹 두 닭이 서로 싸우는 소리를 내며, 혹은 닭이 알을 낳는 소리를 내어 그 흉내내는 소리와 모양이 그럴듯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혹 촌닭이 응하여 우는 것이 있으면 또 노래를 지어 몸을 흔들며 부르기를, “인생이여. 인생이여. 한 칸 초가라도 마음에 즐겁도다. 인생이여. 인생이여. 옷이 헤져 백번을 기워 입어도 또한 싫지 않도다. 염라대왕의 사자(使者)가 잡으러 오면 아무리 세상에 살고자 한들 어찌 그리 되겠는가.”하고 또 부르기를, “관음제석(觀音帝釋)이여, 제석관음(帝釋觀音)이여, 이 몸이 만약 죽으면 완전히 지옥에 떨어지리라.” 하니, 그 노래가 대부분 이런 것이었다. 곡조가 농가(農歌)와 비슷하여 수많은 어린이들이 떼를 지어 따라다니니 중이 항상 말하기를, “내 하인배가 많은 것은 삼공(三公)이라 할지라도 미치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루에 얻는 것이 많게는 섬 곡식에 이르러 이것으로 먹고 입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닭중[鷄僧]이라 불렀다.
신수(信修)라고 하는 중은 나의 향리 파주(坡州)에서 생장하여 낙수(洛水)의 남쪽에 초가를 짓고 살았다. 성품이 방탕하고 익살맞아서 말만 하면 포복절도(抱腹絶倒)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또 재물을 쓰는 데 인색하고 물건을 아끼는 법이 없어서 가산(家産)과 전지(田地)를 모두 여러 조카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보습과 호미로 밭갈지 아니하고도 여름에 항상 쌀밥을 먹었다. 중이 늙어서 얼굴이 탈바가지[假面] 같았는데, 머리를 흔들고 눈을 굴리며 16나한(羅漢 부처의 제자들)의 형상을 하되, 하나하나가 모두 다르고, 또 다른 사람의 행동거지를 보면 문득 그 모양을 시늉하며, 비록 평소 알지 못하던 높은 벼슬아치도 한번 보면 구면인 것같이 이름을 부르며 서로 너, 나 하였다. 절 앞에 사는 늙은이에게 젊은 아내가 있어 중이 그 여자와 더불어 서로 정을 통하였다. 늙은이가 집안이 어려워서 중의 덕을 입고자 하여 아내를 데리고 절 속에 와서 붙여 살았는데, 중도 또한 늙은이를 사랑하여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많이 주었다. 세 사람이 한 이불을 덮고 함께 자되 서로 시기하지 아니하여 사내아이 하나와 계집애 하나를 낳았는데 중은, “노인의 자식이다.”하고 “노인은 또한 화상(和尙)의 자식이다.” 하였다. 중이 절에 있으면 노인은 산에 가서 나무를 하거나 밭에서 채소를 가꾸었으며, 중이 만약 길을 떠나면 노인이 짐을 지고 그의 종이 되곤 하였다. 절에서 산 지 몇 해 만에 아내가 죽었는데, 여전히 중을 따라 살았으니 그 의(義)가 형제와 같았다. 노인이 죽자 중이 업고 가서 장사를 지내주었다. 중이 술마시기를 좋아하여 엄청난 양의 술을 고래가 물마시듯 하였다. 사람들이 혹 속여서 심지어 쇠 오줌이나 흙탕물 같은 다른 것을 갖다주어도 한번에 쾌히 마시고 나선, “이 술은 아주 쓰다.” 하였다. 또 밥을 잘 먹어 마른 밥이나 단단한 떡이라도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잠깐 동안에 먹어 치웠다. 여러 사람이 모인 가운데서도 공공연히 어육(魚肉)을 먹었으므로 사람들이 보고 비웃으면, “이것은 토(土 오자(誤字)인 듯하다)이다. 내가 죽인 것이 아닌데 먹는다고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하였다. 경인(庚寅) 연간에 내가 상(喪)을 당해 파주에 있을 때 중이 항상 왕래하였는데, 나이가 70을 넘었는데도 기운은 여전히 정정하였다. 혹 어떤 사람이, “무슨 까닭으로 아내를 두고 고기를 먹느냐.”라고 물으면 중은 말하기를, “이 세상 사람은 망령되이 사념을 일으켜서 이욕(利慾)으로 서로 싸우며, 혹은 마음속에 포악함을 감추고 혹은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저 이름난 출가자(出家者)들도 또한 모두 이와 같아, 향기로운 고기 냄새를 맡고서도 억지로 침을 삼키며,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도 흔들리는 마음을 힘써 바로잡는다. 나는 이와 달라 맛있는 것이 있으면 먹고 여색(女色)을 보면 취하기를 물이 쏟아지듯이 하며, 흙이 구덩이를 메우듯이 하여 물건에 마음이 없고 작은 사심도 모두 없앴으니, 내가 내세(來世)에 여래(如來)가 되지 못하면 반드시 나한(羅漢)이 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제 재물을 아껴서 축적하는 데 힘쓰는데, 이 몸이 한번 죽으면 곧 다른 사람의 것이 될 것이니, 생전에 맛있는 음식 먹고 즐김만 같지 못하다. 대개 남의 자식이 되어 그 아비를 섬김에 있어서 모름지기 큰 떡을 만들고, 맑은 꿀 한 되와 빚은 술과, 썬 고기로 아침 저녁으로 올릴지니, 죽은 뒤에 마른 것과 마른 과일, 남은 술잔과 식은 불고기를 관 앞에 놓고 울며 제사지낸들 죽은 사람이 이를 먹겠느냐. 자네는 미처 이렇게 어버이를 섬기지 못했을지라도, 자네 자식에게는 이와 같이 하여 자네를 섬기도록 함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때로 밥을 앞에다 놓고 방울을 흔들어 경(經)을 외면서 스스로 혼을 부르기를, “신수(信修) 신수여, 죽어서 정토(淨土)에 태어나거라. 살아서는 비록 도리를 어기고 날뛰었으나 죽어선 마땅히 진실하여라.”하고, 곧 소리내어 크게 울었는데 그 소리가 매우 처량하였다. 그후 손뼉을 치며 크게 웃고는 주인에게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바랑을 메고 사라져버렸다.
박거경(朴巨卿)이 홍문관 전적(典籍)으로서 어사(御史)를 겸하고 호남 과장(科場)에 가서 감독할 때, 고와남양(高臥南陽) 시(詩)로 선비를 시험하고 수원부(水原府)에 돌아왔는데, 부사가 나와 맞이하지 않으므로 박거경이 동헌(東軒)에 나아가 크게 노하여 아전을 불러 죄를 주려 하다가, 바깥 문 사이에서 따르는 자들이 서로 대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의심스러워 물어보니, 바로 서울에서 온 정비초(政批草 관직 발령장)로 박거경을 남양 부사(南陽府使)에 제수한 것이었다. 박거경이 얼굴빛이 달라지며 누워버리니 당시 사람들이 시(詩)를 지은 것이 예언이 되어버린 소치라 하였다.
세종이 종학(宗學)을 신설하여 종족(宗族)을 모아 글을 읽게 하였는데, 순평군(順平君)은 나이 40이 넘도록 한 자도 알지 못하였다. 처음으로 《효경(孝經)》을 읽을 때, 학관이 ‘개종명의장 제일(開宗明義章第一)’이란 일곱 자를 가르쳤으나, 순평군은 도무지 읽지 못하고, “내가 지금 늙고 둔하니 다만‘개종(開宗)’두 자만 알면 족하다.”하고는 드디어 말 위에서도 읽기를 그치지 않았다. 또 종에게 말하기를, “너희들도 또한 ‘개종’두 자를 잊지 않고 있다가 내가 막힐 때 가르쳐다오.” 하였다. 죽을 때 처자를 모아놓고 유언하기를, “사생(死生)이 지대하니 어찌 마음이 쓰이지 않으리오마는, 다만 영구히 종학을 이별하는 것이 대단히 통쾌하다.” 하였다.
우리 이웃에 박가(朴家) 성을 가진 유생이 유가(柳家)의 사위가 되어 그 집에 함께 살았는데, 항상 두 종년을 사랑하였으나 사람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였다. 어느 날 한밤중에 종년의 방에 들어가는 것을 집안에 있는 어린 마부가 보고 도둑이라 의심하여, “도둑이 아무개 방에 들었다.”하고 일러바쳤다. 장인이 크게 노하여 나오니 사방의 이웃이 이를 보고 다투어 활과 몽둥이를 가지고 잠깐 사이에 구름과 같이 몰려들었다. 사위가 문을 밀고 보니 바깥으로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고, 발로 벽을 박찼으나 단단하여 깨뜨릴 수가 없어 나가려 해도 나갈 수 없고 손발이 모두 상하고 땀이 온몸에 흘렀다. 창 틈으로 내다보니 불빛 속에 평소 알고 지내는 이웃 사람이 서 있으므로, 사위는 몰래 불러서 구해 달라고 불러보았으나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에 듣지 못하다가, 잠시 후에 그 소리를 듣고는 그가 사위인 것을 알고 말하기를, “도둑은 큰 도둑이 아니니 잡을 필요가 없다.”하자, 이때 장인도 웃으며 들어가고 이웃 사람들도 흩어졌다. 사위는 매우 부끄러워하여 몇 달 동안을 문 밖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 선비 정 모(鄭某)가 상처(喪妻)를 한 뒤, 남원에 부잣집 과부가 산다는 말을 듣고 배우자로 삼으려고 날을 가려 정혼하고, 정(鄭)이 먼저 군청에 이르러 예물을 갖추었는데, 과부가 계집종을 보내어 그 행동거지를 보게 하였다. 계집종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수염이 많은데다가 털모자까지 썼으니 늙은 병자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였다. 과부가 말하기를, “내가 나이 젊은 장부(丈夫)를 얻어서 늘그막을 즐기고자 하였는데, 이런 늙은이를 어디다 쓰리오.” 하였다. 군청 관리들은 휘황하게 촛불을 켜들고 둘러싸서 과부 집으로 갔으나, 과부는 문을 닫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정은 들어가지 못하고 할 수 없이 되돌아갔다. 또 악관(樂官) 정 모가 만년에 또한 배우자를 잃은 뒤, 부잣집 여자를 첩으로 삼고자 하여 어느날 부잣집에 가보니, 그림 병풍을 치고 만당(滿堂)에 붉은 털요를 깔고 당중에다 비단요를 펴놓았다. 정이 자리에 나아가 스스로 계략을 잘했다고 생각하였는데, 여자가 들여다보고 말하기를, “70살이 아니면 60살은 넘었으리라.”하고, 탄식하면서 좋지 않은 기색이 있었다. 밤을 틈타 여자의 방에 뛰어들어가니 여자가 정을 꾸짖기를, “어느 곳에 사는 늙은이가 내 방에 들어오는가. 용모가 복이 없을 뿐 아니라 말소리까지도 복이 없구나.”하고 밤중에 창을 열고 나가버리니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그뒤 어떤 유생이 희롱하여 시를 짓기를,
어지럽게 욕탁(정교하는 것)하여 얼마나 기쁘게 날뛰었던고 / 粉粉浴啄幾騰讙
두 정의 풍류가 일반이로다 / 二鄭風流是一般
호연을 맺으려다가 도리어 악연을 맺었으니 / 欲作好緣還作惡
이렇게 되느니 홀아비 신세가 더 나은 것을 / 早知如此不如鰥
하였다.
○ 사문(斯文) 최세원(崔勢遠)은 익살맞고 말주변이 좋았다. 항상 매 한 마리를 길렀는데, 꿩은 잘 잡지 못하고 아침저녁으로 닭을 잡아먹었다. 배불리 먹고는 구름 속으로 날아가버리자 최세원이 불러보았으나 돌아오지 않으므로, 이웃 사람들에게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이것 좀 보소. 이것 좀 보소. 닭도둑이 달아납니다.” 하였다. 그의 동생 최윤(崔奫)도 또한 말을 잘하였는데, 소갈질(消渴疾 당뇨병)에 걸려 오미자탕(五味子湯)을 즐겨 마셨다. 이로 말미암아 이가 모두 빠졌으나 정신은 쇠하지 아니하여 만년에 한 고을을 맡고자 하였다. 이웃 친구가 말하기를, “이가 없어 어찌 하겠느냐.” 하니, 취윤은 말하기를, “나에게 입으로 개암을 깨라 하면 이것은 못하겠거니와, 조정(朝廷)이 이를 가지고 군(郡)을 다스리게 하겠는가.” 하여, 사람들이 모두 포복절도하였다.
세조가 내경청(內經廳)을 설치하여 조정 선비를 모아 경서를 쓰게 하여, 나의 백형(伯兄)과 홍익성(洪益城)ㆍ강인제(姜仁齊)ㆍ정동래(鄭東萊)ㆍ조치규(趙稚圭)ㆍ이기수(李期叟)의 무리가, 항상 궁에 갇혀 밖에 나와 놀지 못하였다. 백형이 장난 삼아 시를 짓기를,
손에 붓을 들고 / 手執毛錐子
따분하게 한 봄을 보내었도다 / 辛勤過一春
자욱한 꽃 그림자 속에서 / 濛濛花影裡
술 취한 사람은 그 누구인고 / 爛醉是何人
하였다. 화사(畫史 도화서의 종6품) 홍천기(洪天起)는 여자인데 그 얼굴이 당세절색이었다. 마침 일을 저질러 사헌부에 나가 추국(推鞫)을 받을 때, 서달성(徐達城)이 젊었을 적에 여러 연소한 패들과 같이 활를 쏘고 술을 마시다가 또한 잡혀 와 있었다. 서달성이 홍천기의 옆에 앉아서 눈을 떼지 않으니, 이때 상공(相公) 남지(南智)가 대사헌이었는데, 보다 못해 말하기를, “유생이 무슨 죄가 있느냐. 속히 놓아주어라.” 하였다. 서달성은 나와서 친구들에게 말하기를, “무슨 공사(公事)가 이처럼 빠르냐. 공사는 마땅히 범인의 말을 묻고 또 고소장을 받아서, 곡직(曲直)을 분별해서 천천히 해야지, 어찌 이렇게 급하게 하는가.” 하였다. 이것은 다 홍천기의 옆에 오래 있지 못한 것이 한스러워 한 말이므로, 친구들이 듣고 모두 웃어 마지 않았다.
○ 내 친구 손영숙(孫永叔)은 벼슬하지 않은 선비 시절에 장난삼아 10여 명이 떼를 지어 절에 돌아다니며, 몽둥이로 중을 때리고 물건을 빼앗는 짓을 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모두 의금부에 갇혀서 국문(鞫問)을 받았다. 이때 금법(禁法)이 엄하지 못하여 조정의 선비들이 모두 들어가 볼 수 있었으므로, 아침저녁으로 주찬(酒饌)이 많이 쌓이게 되었다. 손영숙이 말하기를, “구복(口腹)을 채우기에는 이곳만한 데가 없으니, 만약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가면 무엇을 먹을꼬.” 하니,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그뒤에 대간(大諫)이 되어 경연(經筵)에 입시(入侍)하였을 때 마침 형옥의 폐단에 대해 논하자, 손영숙이 아뢰기를, “젊어서 옥(獄)에 있어 보니 옥은 죄인을 가두어두고 괴롭게 하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영화로운 곳이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옛 사람의 말에, ‘땅에 금을 그어놓고 옥이라 하여도 들어가지 않았다.’ 하였으니, 옥이 아름답다고 한들 사람이 어찌 영화롭게 생각하겠느냐.” 하니, 좌우가 모두 놀랐다. 손영숙은 진실하고 다른 뜻은 없었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말을 실수한 것이었다.
○ 이차공(李次公)은 우스개 소리를 잘하여 잠시도 말을 그치지 않았다. 좌랑(佐郞) 신건(辛鍵)이 유장(儒將)에 뽑혀 어전(御前)에서 말을 타고 활을 쏠 때, 쏜 화살이 그의 발에 잘못 맞아 피가 신바닥에 흘렀다. 이차공이 말하기를, “1등 재주로다. 오발오중(吾發誤中 ‘내 발에 잘못 맞았구나’라는 말을 오발오중(吾發誤中)의 음만 빌어 비꼬아 쓴 것임)을 하였구나.” 하였다. 속어에 족(足)을 발이라 하고 말타고 활쏘기에서 오발오중(五發五中)을 상(上)으로 삼았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영릉(英陵 세종왕릉)의 사토(莎土)가 허물어졌으므로, 김은경(金殷卿)이 예조 참판이 되어 영의정과 재추(宰樞)로 하여금 여주(驪州)에 가서 새로 사토를 하게하고, 돌아오는 길에 김은경이 형조판서에 배수 되었는데, 재추가 배 안에서 술자리를 마련하고 위로할 때, 김은경이 마침 이질(痢疾) 증세가 있어 갑자기 설사를 하여 온 자리에 배설물이 가득 찼는데 이차공이 이 말을 듣고, “이것은 진(秦) 나라 목공(穆公)이 패왕(覇王)이 된 때와 같다.” 하였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이차공은 말하기를, “목공이 강을 건너고는 배를 불살라 버리지 않았소[濟河焚舟]”.” 하였다. 분(焚)과 분(糞)의 음이 같음을 두고 한 말이다. 어떤 벼슬아치가 향실(香室 대소 제사에 쓰는 향과 제문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곳)에 앉아서 장기를 두는데, 마(馬)와 장(將)의 두 장기말이 없었으므로, 단향(檀香) 조각으로 마를 만들고 사기 조각을 장으로 삼았다. 저쪽 마가 마침 이쪽 장궁(將宮)에 들어오므로, 장이 나아가 이를 치니 이차공이 이를 보고 말하기를, “이 전옥(典獄)의 사장(沙將)이 도둑의 향군(鄕君)을 사로잡았다.” 하였다. 그가 하는 말들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생원(生員) 최탁(崔倬)은 성질이 고고하여 사람들에게 굽실거리지 아니하였는데, 일찍이 태학생(太學生)이 되어 삼공 육경(三公六卿)에 뜻을 두었다. 하루는 학궁(學宮)에서 도보로 집에 돌아오다가 길에서 이조 정랑 이휘(李徽)를 만나서 말하기를, “자네가 전부 낭관(銓部郞官)이 되었으니 벼슬이 비록 화려하나, 나도 오늘 관중(館中)에서 또한 이조 판서가 되었으니, 그 맡은 바는 다르지만 종잇장 위의 허명(虛名)이긴 마찬가지이다.” 하였다. 생원 이시번(李時蕃)은 일찍이 말하기를, “어렸을 때 망령되이 높은 뜻을 품고 김구(金鉤) 선생에게 《주역(周易)》을 배워, 깊이 역(易)의 이치를 깨닫고 스스로 가슴속이 찬연하다 생각하여 다른 사람은 나에게 미치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루는 이시번이 숭례문(崇禮門 남대문)을 나올 때, 파평군(坡平君) 윤암(尹巖)이 의금부 제조(提調)가 되어 관청 하인이 쌍쌍이 앞을 인도하고 여러 구종(驅從)들이 뒤를 옹위하여 오거늘, 마음으로 생각하기를, “저 사람이 비록 벼슬은 높지만 어찌 역(易)의 이치를 알리오.”하고, 하루살이 보듯 하였다. 그뒤에 이휘는 죽임을 당하고 윤암은 일찍 죽었으며, 최탁과 이시번은 모두 늙어서 죽었으니, 세상의 성쇠란 헛된 것이 아니다.
손영숙(孫永叔)이 이조 정랑이 되어 사신으로 호남(湖南)에 가서 옥사(獄事)를 추국할 때 나주(羅州) 기생 자운(紫雲)을 사랑하였는데, 그는 서울에서 자라 이원(梨園 기방) 제일부(第一部)에 있다가 죄를 지어 나주에 귀양온 것이었다. 손영숙은 세상 사정에 어두운 학자요, 자운은 명기(名妓)라, 비록 관(官)의 위엄이 두려워서 수청을 들기는 하지만, 항상 마음에 차지 않게 여겼다. 하루는 유생이 그가 지은 시문을 가지고 와서 품제(品題)를 해줄 것을 청하니, 기생이 말하기를, “어떻게 우열을 판별하오리까.” 하니, 손영숙은, “가장 좋은 것이 상상(上上), 상중(上中), 상하(上下)요, 그 다음은 이상(二上), 이중(二中), 이하(二下)요, 또 그 다음은 삼상(三上), 삼중(三中), 삼하(三下)이며, 품(品)에 들지 못하는 것은 차상(次上), 차중(次中), 차하(次下)요, 가장 떨어지는 것은 경지경(更之更)이다.”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영숙이 일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고, 조치규(趙稚圭)가 전주 부윤(全州府尹)이 되어 나주에 이르러 또한 자운을 사랑하였다. 잠자리에 들어 서로 즐길 때 조치규가 묻기를, “너는 사람을 많이 겪었는데 나와 같은 자는 몇 등에 들겠는가.” 하니, 기생이 말하기를, “영공(令公)은 겨우 삼하에 들 뿐입니다.” 하였다. 조치규가 또, “어디에서 이렇게 말하는 법을 배웠느냐.” 하니, 기생은, “손영숙이 나에게 가르쳐주었소이다.” 하였다. 조치규가 다시, “손영숙은 몇 등의 사람인가.” 하니 기생은, “그야말로 진실로 경지경이요, 오직 군수 정문창(鄭文昌)이 충분히 이등(二等)에 들 만합니다.” 하였다. 노희량(盧希亮)이 시를 지어 희롱하기를,
호남 사신 중에 그 누가 당황하였던고 / 湖南奉使孰荒唐
이부 낭중 사북량이라 / 吏部郞中絲北良
3년 풍류를 사람들이 회자하더니 / 三載風流人膾炙
정문창이 있는 줄을 알지 못했노라 / 不知時有鄭文昌
하였는데, 이는 대개 당시(唐詩)를 본받은 것이었다. 병신년 중시(重試) 때 손영숙의 대책 (對策)이 처음으로 장원을 했을 때 겸선(兼善 홍귀달(洪貴達)의 자)이 시관이었는데, 편지를 보내어 축하하며 말하기를, “그대가 지금 지은 사책(射策)이 일지일(一之一)이 되었으니, 다시는 옛날의 경지경이 되지 않으리라.” 하였다. 그 뒤에 임금이 학궁(學宮)에 행행(行幸)하여 존사(尊師)의 예를 행하고자 할 때, 손영숙이 예방 승지(禮房承旨)가 되어 길에서 기지(耆之) 채수(蔡壽)를 만났는데, 손영숙이 근심하는 빛이 있으므로 기지가 말하기를, “자네는 어디가 몹시 불편한가?” 하니, 손영숙이 말하기를, “영산(永山 영산 부원군 김수온(金守溫))은 부처를 좋아하고, 하동(河東 하동 부원군 정인지)도 또한 논의가 있는 사람인데, 이와 같이 성대한 일에 기일이 이미 닥쳤으나, 지금까지도 시관(試官)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이렇게 걱정하고 있는 것이네.” 하였다. 기지가 말하기를, “임금이 대신과 논의하여 정할 일이니, 그대가 혼자 근심할 일이 아니네. 부득이한 경우엔 뽑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는가.” 하였다. 손영숙이 안색을 고치고 적임자를 물으니 기지가 말하기를, “파주 부원군 집 앞에 사는 첨정(僉正) 이삼경(李三更)은 그야말로 삼로(三老)이다. 족하(足下)가 자운의 평을 받아 이미 이경(二更)이 되었으니, 만약 또 3명에게 평을 받게 되면 곧 오경(五更)이 되리라.” 하니, 모든 사람이 포복절도하였다. 사북량이란 것은 손영숙이 젊었을 때에 생원시(生員試)에 응시했는데, 방(榜)이 나붙은 것을 보니 성명을 흘려 써놓았다. 손영숙이 겁을 먹고 안색이 변해서 말하기를, “방에 내 이름이 없다.”하자, 그의 친구가 방을 가리키며, “저 몇째 줄에 있는 것이 자네 이름이다.” 하니, 손영숙이, “저것은 손비장이 아니라 사북량이다.”하여, 지금까지도 그 말을 듣는 사람이 모두 웃는다.
어함종(魚咸從)이 젊었을 때 힘이 뛰어나게 세어, 그의 동생 아성(牙城)과 함께 무리를 모아 동네를 횡행하면서 날마다 닭을 잡아 손으로 쳐죽이는 것으로 일삼았는데, 광천(廣川)ㆍ광원(廣原)ㆍ청릉(淸陵)ㆍ현보(賢甫) 등은 모두 이름난 선비이지만, 그 위세를 두려워하여 감히 저항하지 못하였다. 일찍이 관(館)에 있을 때 대개 먹을 것이 생기면 반드시 빼앗아 혼자 먹어버리고, 관방이 차가우면 무리로 하여금 먼저 자리를 깔고 차례로 이불을 따뜻하게 한 뒤에 알몸으로 들어가 잤다. 온몸에 부스럼이나 옴이 난 사람을 보면, 어함종은 한 사람을 시켜 부스럼 딱지를 떼어내어 떡에 싸서 먹게 하니, 부스럼 딱지를 뜯기는 사람은 아파서 울고 먹은 사람은 토하고 재채기를 하니, 어함종은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모든 무리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저 사람이 힘을 믿고 우리를 못살게 구는데 우리는 끌려다니고만 있으니, 어찌 괴로움을 참겠느냐. 그가 예상치 못한 틈을 타서 꾀로써 제지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하루는 함종이 창부(窓阜)에 와서 걸터앉아 있을 때, 한 사람이 뒤에서 머리칼을 잡아 흔들고 다른 사람들은 각각 손발을 잡아 넘어뜨렸다. 어함종이 몸을 뿌리치고 일어나자 사람들이 모두 흩어져 도망갔는데, 광원이 잡히자 광천이 기둥 뒤에 숨어서 말하기를, “내 동생이 죽는다.” 하였다. 어함종이 여러 가지로 괴롭히고 욕을 보여서, 흙을 먹게 하면 흙을 먹고, 자부(姊夫)라 하라 하면 자부라 불렀다. 그런데 또 아버지라고 부르라 하자 광천이 듣고 있다가 멀리서 말하기를, “조금만 더 괴로움을 참고 부디 아버지라고는 부르지 말라.” 하였다. 병자년에 과시(科試)가 다가오자 어함종은 다섯 사람과 더불어 관방에서 글을 읽었다. 상사(上舍 진사 생원) 유조(兪造)가 잠에서 깨어 말하기를, “간밤의 꿈이 반은 길하고 반은 흉하다.” 하니, 어함종이 그 까닭을 물었다. 유조가 대답하기를, “뱀 다섯 마리가 방 속에서 하늘로 날아 올라가다가 뱀 한 마리는 공중에서 떨어졌다.” 하니, 어함종이 말하기를, “우리 다섯 사람 모두가 학업에 힘써 게을리 하지 않은 것은 급제하고자 한 것인데, 그대는 어찌 상서롭지 못한 말을 하느냐. 그대는 마땅히 ‘땅에 떨어진 것은 나다.’라고 크게 소리지르라.” 하니, 유조가 드디어 그렇게 외쳤다. 어함종이 말하기를, “어찌 범연(泛然)히 나라고만 부르느냐.” 하니, 유조가, “땅에 떨어진 것은 조(造)다.”하고 외쳤다. 이듬해 네 사람은 급제하여 그뒤에 모두 대신이 되고 빛나는 공적이 겸하여 나타났으나, 유조만 홀로 만년까지 어렵게 살았으며 명관을 차지하는 데도 나아가지 못하였다.
사문(斯文) 변구상(卞九祥)은 문학은 넉넉하였으나 관리(官吏)로서 재간이 부족하였다. 한성 참군(漢城參軍)이 되었을 때 공문서가 산더미처럼 쌓이고 소송이 모여드는데 갑(甲)이 호소해도, “네 말이 옳다.”하고, 을(乙)이 호소해도, “네 말도 옳다.” 하여, 끝내 그 가부를 가리지 못하니, 조정에서 이 소문을 듣고 이 사람을 갈아버렸다. 당시 사람들이 세상의 시비를 분별하지 못하는 것을 가리켜 ‘변구상 공사(卞九祥公事)’라 하였다.
또 사문(斯文) 조백규(趙伯珪)는 다년간 유학 교수로 지냈는데, 하루는 헌납을 제수받고는 사문이 매우 기뻐하며 제자 김(金)을 불러 말하기를, “하손씨(賀孫氏 송((宋) 섭미도(葉味道), 처음 이름은 하손(賀孫), 시호는 문수(文修))야말로 정사를 제대로 한다.”하더니, 얼마 안 되어 다시 교수가 되자 사문이 또 김을 불러 말하기를, “하손씨 이 사람이 어찌 정사를 한다 하겠느냐.” 하여, 사림(士林)에서 웃음거리로 전해진다.
조사(朝士) 가운데 신(辛)이란 성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데, 성품이 허황되어 항상 부자(富者)임을 자랑하고자 하였다. 하루는 쌀 한 주먹을 가지고 문 밖에 뿌린 뒤, 손님을 맞아들이면서 땅을 내려다보고 종을 꾸짖기를, “어찌해서 하늘에서 내린 물건을 함부로 하느냐. 그저께 충청도 사람이 쌀 2백 곡(斛)을 보내왔고, 어제 전라도 사람이 쌀 3백 곡을 보내왔다고 이와 같이 어지럽혔단 말이냐.” 하였다. 또 희첩(姬妾)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자 하여 항상 지분(脂粉)을 뿌려 방 벽에 바르고, 손님을 맞아들일 때 종을 꾸짖기를, “어째서 창 벽을 더럽혔느냐. 어제 아무 기생이 이 방에 와서 자더니, 새벽에 화장할 때 낯을 씻으며 이렇게 해놓았구나.” 하였다. 또 헝겊 조각을 종에게 주었다가 손님이 와서 당에 앉았을 때, 종이 뜰 아래 꿇어앉아 말하기를, “아무 아가씨가 비단신에 수놓은 것을 화아(花兒)에게 쓸까요, 운아(雲兒)에게 쓸까요?”하면, 선비는 말하기를, “대운아(大雲兒)에게 쓰는 것이 좋겠다.”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한때의 명기(名妓)였다.
또 교우(交友)를 자랑하고자 하여 미리 권세 있는 재추(宰樞)의 명함을 써서 종에게 주고는, 손님이 와서 앉았을 때 종이 명함을 가지고 와서 바치면, 선비는 그것을 옆에 놓고 일부러 오래 보지 않다가, 손님이 이것을 보니 노상(盧相)의 이름이라, 놀라 달아나려 하면 선비는 말리면서 말하기를, “이 사람은 나의 친한 친구이니 동요하지 말라.” 하였다. 조금 있다가 종이, “노상이 그냥 돌아갔습니다.” 하니, 선비는 웃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오랫동안 이 사람을 보지 못하다가 지금 보고자 했는데, 어찌 그리 급하게도 갔느냐.” 하였다. 이런 줄을 아는 사람은 모두 그 비루함을 비웃었다.
신재추(辛宰樞)는 성품이 매우 급하였다. 파리가 밥그릇에 어지럽게 몰려들어 들어 날려 보내도 다시 모여들자, 재추는 크게 노하여 그릇을 땅에 던져버렸다. 부인이, “무지한 미충(微蟲)을 놓고 어찌 이다지도 화를 내시오.” 하니, 재추는 눈을 똑바로 뜨고 꾸짖기를, “파리가 네 서방이냐. 어째서 두둔하느냐.” 하였다.
진일(眞逸 성간(成侃)) 선생이 일찍이 서후산(徐后山 서강(徐岡))과 더불어 한림원에 들어갔었다. 서후산은 왕비의 조카뻘이 되는 사람으로 글로 이름이 나 있었으며, 세조가 장차 크게 발탁해서 등용하려 하여 은총이 비할 데 없었는데, 선생이 조정에서 물러나와 문득 백씨(伯氏)에게 말하기를, “서후산은 제 명(命)에 죽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백씨가 놀라면서 그 까닭을 물으니, 선생이 말하기를, “사람됨이 너무 강하고 사나워서 할 말을 다하기를 좋아하니, 그가 어찌 죽음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하였는데, 얼마 안 가서 피살되자, 사람들이 모두 그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주D-001]강인재(姜仁齋) : 강희안(姜希顔)의 호. 자(字)는 경우(景愚). 세종 신유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집현전 직제학에 이르렀다.
[주D-002]성성이[猩] : 상상 속의 동물로 머리가 길고 붉으며 소리가 어린애 우는 것과 같으며 술을 좋아한다.
[주D-003]조(粗)와 불(不) : 강론의 성적을 조(粗)ㆍ불(不)ㆍ통(通)ㆍ약(略)의 네 자로 표하는데, 조ㆍ불은 그 최하의 성적이다.
[주D-004]괴정(槐庭) …… 분주하도다 : 주중세시기(奏中歲時記)에 괴화황 거자망(槐花黃 擧子忙)이라는 글이 있는데, 음력 7월경 괴화꽃이 필 때 과거보는 사람이 바쁜 것을 두고 이른 말이다.
[주D-005]산양(山陽)의 피리 : 《진서》 〈향수전(向秀傳)〉에 진(晉) 나라 향수가 산양(山陽)의 구거를 지나며 피리 소리를 듣고 회구심을 일으켰다고 한다.
[주D-006]사곡(斜谷) : 중국 섬서성에 있는 골짜기 이름인데, 〈촉지(蜀志)〉 제갈량전(傳)에 이르기를, 건흥(建興) 12년에 제갈량이 대중을 거느리고 사곡에서 나왔다고 되어있다.
[주D-007]와부(瓦釜) : 현지(賢智)한 자가 때를 만나지 못했을 때 어리석은 자가 높은 지위에 있음을 비유한 말이다. 〈초사(楚辭)〉에 나온다.
[주D-008]돌아가신 …… 생각하여 : 원문(原文)에 죽은 아비를 생각하였다 하였으나, 이것은 저자 성현(成俔)이 혼수 아비의 휘(諱)가 숙령(叔鴒)인 것을 아재비[叔]라고 잘못 풀이한 데서 온 착오인 듯하다. 혼수가 열세 살 때 사냥간 것은 그 아비와 같이 갔었던 것으로 아비는 그 뒤에 죽었다.
[주D-009]수국고정(水國古精) : 한 글자가 빠져 내용이 자세치 않다.
[주D-010]목공이 …… 않았소[濟河焚舟] : 진(秦) 나라 목공(穆公)이 진(晉) 나라를 칠 때 퇴로를 막아서, 군사들로 하여금 싸움에 진력하게 하느라고 타고 온 배를 불지른 고사를 두고 이른 말이다. 여기서는 분(焚)과 분(糞)의 음이 같으므로 강을 건너다가 배 안에서 똥을 쌌다는 것을 이렇게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주D-011]삼로(三老) : 삼로오경(三老五更)에서 나온 말로 임금이 부형(父兄)의 예로 대우하던, 삼공(三公)의 벼슬에서 물러난 노인을 이른다.
[주D-012]저것은 …… 사북량이다 : 손영숙의 이름은 손비장(孫比長)으로, 방에 이름이 흘려 써져서 사북량(絲北良)으로 보인 것을 말한다.

 

용재총화 제7권
용재총화 제7권


전조(前朝) 때의 과거는 시관이 지공거(知貢擧)와 동지공거(同知貢擧) 두 사람뿐이었다. 미리 명망이 있는 문신으로 이를 삼았는데, 은문(恩門 등과자가 그때의 시관을 일컫는 말)은 문생(門生)을 자제와 같이 보고 문생은 은문을 부모와 같이 보아 데릴사위도 못 들어가는 내실에서 문생은 특별히 상견함을 허락하니, 이는 중히 여기는 까닭이다. 같이 급제한 사람들이 은문의 집에 모여 연회할 때에는 장수를 빌며 술잔을 올리고 더러는 유숙하기도 하였다.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는 부호(富豪) 집안이어서 새로 과거에 급제한 사람 30명에게 모두 담비털 이불을 주고 또 각각 만루은잔(萬縷銀盞)을 주었다는데, 이는 나의 외가가 안씨이므로 전해들은 것이다. 아조(我朝)에서는 지공거의 제도를 없앴으나 아직 문주(門主) 좌주(座主)의 이름이 있어 더러는 술자리를 베풀어 찾아보고, 죽으면 그 집에서나 혹은 장삿길에서 모두 전(奠)을 배설하여 제사지냈는데, 지금은 문생과 좌주가 호월(胡越)과 같이 보고 도리어 서로 배척하니, 여기에서 또한 세상 풍속의 변화를 볼 수 있다. 태종께서 젊어서 과거 공부를 하더니 신우(辛禑) 임술년에 진사 제2등에 뽑혔고, 또 이듬해 계해년에는 문과에 뽑혔는데, 김한로(金漢老)가 장원을 하고 심효생(沈孝生)은 2등이 되고 태종은 10등이었는데, 이내(李來)ㆍ성부(成傅)ㆍ윤규(尹珪)ㆍ윤사수(尹思修)ㆍ박습(朴習)ㆍ현맹인(玄孟仁) 등은 모두 동방(同榜)이었다. 보위(寶位)에 오르자 김한로의 딸이 세자 이지(李禔)의 부인이 되었는데, 진퇴할 때 마다 항상 장원이라 부르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태종이 일찍이 선시(扇詩)를 지어 이르기를,
풍탑에 의지했을 때는 밝은 달을 생각하고 / 風榻依時思朗月
월헌에서 읆조리면서는 맑은 바람을 생각하도다 / 月軒吟處想淸風
대를 깎아 단선을 이루고 보니 / 自從削竹成團扇
명월 청풍이 손바닥 안에 있도다 / 朗月淸風在掌中
하였다. 옛날부터 일찍이 문사(文士)로써 대업을 이룬 자는 있지 아니하였고, 문장이 또한 이와 같이 기교(奇巧)한 제왕도 있지 아니하였다. 그 사물을 인용하여 비유한 것과 함축된 의취(意趣)는 성인이 아니면 할 수 없을 것이다.
양양(襄陽)에서 남쪽으로 몇 리 떨어진 곳 길가에 입석(立石)이 있는데 항간에 전하는 말로는, “옛날에 한 안렴사(按廉使) 주기(州妓)를 몹시 사랑하다가 체직(遞職)이 되어 이별하게 되자 시를 지어 돌에 쓰기를,
너는 어느 때 돌이냐 / 汝石何時石
나는 금세의 사람이로다 / 吾人今世人
이별의 괴로움도 모르는 채 / 不知難別苦
홀로 서서 몇 번이나 봄을 지내었던고 / 獨立幾經春
하였다.”하는데, 어떤 사람은 함부림(咸傅霖)이 지은 것이라고도 말한다.
양녕군(讓寧君) 이지(李禔)는 비록 덕을 잃어 세자가 되지 못하였으나 만년(晩年)에 증히 때를 따라 스스로를 감추었다. 세조께서 이지에게 묻기를, “나의 위무(威武)가 한고조(漢高祖)에 비해 어떠하냐?” 하니, “전하께서는 위무가 있으시지만 반드시 선비의 관에다가 오줌을 누지는 않으실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또 “내가 부처를 좋아하는데 양무제(梁武帝)에 비해선 어떠하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전하께서는 부처를 좋아하시지만 밀가루[麪]로 희생(犧牲)을 삼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또, “내가 간언을 물리침이 당태종(唐太宗)에 비해선 어떠하냐?” 하니, 대답하기를, “전하께서는 간언(諫言)을 물리친다 하더라도 반드시 장온고(張蘊古)를 죽이는 것과 같은 일은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였다. 이지가 항상 우스운 말로 풍자를 하였고 세조께서도 역시 그 거침없음을 좋아하며 즐거워하시었다.
현맹인(玄孟仁) 선생이 일찍이 사간(司諫)으로서 대축(大祝 축문을 읽던 벼슬)이 되어 친행제(親幸祭)를 지낼 때 손에 축문을 들고는 망연(茫然)히 한 마디도 읽지 못하자 태종께서 크게 노하시어, “현맹인이 문신으로서 축문도 읽지 못하니 장차 무엇에 쓰겠는가.”말하시고, 드디어 만호(萬戶)로 차임(差任)하였다.
첨지(僉知) 임숙(任淑)이 건원릉(健元陵)의 향사(香使)사 되고, 이유한(李維翰)은 대축이 되고, 또한 첨지 이장손(李長孫)이 현릉(顯陵)의 향사가 되고, 강참(姜參)이 대축이 되었는데, 모두 재실(齋室)에 유숙(留宿)하면서도 이유한은 사람들에게 자세히 묻지 아니하여, 이장손을 임숙으로 잘못 알고 이장손의 이름을 축판(祝版)에 써놓았다. 임숙이 술잔을 올리고 엎드린 후 조금 물러나서 꿇어 앉을 때 이유한이 이장손의 이름을 읽자 임숙이 신좌(神座) 앞에 나아가 높은 소리로, “이장손이 아니라 임숙입니다.” 하고, 제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강유한이 일을 그르쳐 큰 실수를 저질렀으니, 이참(李參)은 어떻게 읽을 것인가.”하였는데 이는 이유한도 임숙을 잘못 알았거니와 임숙도 또한 잘못 불렀던 것이다.
판원(判院) 손순효(孫舜孝)가 고인의 삼휴(三休)사휴(四休)의 설을 모아서 칠휴거사(七休居士)라 칭하였다. 성품이 순박하고 성실하며 흠이 없어 모든 일을 사실대로 올바르게 처리하며, 풍속과 삼강(三綱) 오상(五常)에 관한 일 이면 먼저 반드시 뜻을 극진히 하였고, 취하면 호탕한 말을 그치지 않았다. 그가 일찍이 강원 사가 되었을 때, 때마침 큰 가뭄이 들어 비오기를 빌었으나 효과가 없자, 공이 말하기를, “비가 오기를 빌어도 비가 내리지 않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수령이 정성을 다하지 않은 까닭이다. 마음을 정성스럽게 하면 하늘도 반드시 이에 감응할 것이다.” 하고, 드디어 재계(齋戒)하고 친히 나아가 비를 빌었다. 밤중에 비가 내리자 빗소리를 듣고 기뻐 일어나, “내가 마땅히 하늘에 감사하리라.” 하고, 조복을 입고 뜰 가운데 서서 무수히 하늘에다 절을 하였다. 비가 억세게 내리자, 아전이 우산을 가지고 와서 뒤에 서니, 공이 이르기를, 압존(壓尊 어른 앞에서 그 위엄에 눌려 언행이 자유롭지 못함)한 곳에 어찌 우산을 사용하겠는가.” 하고, 물리쳐 의복이 모두 젖었다. 또 경상 감사가 되었을 때 효자 열녀의 문을 지날 마다 반드시 말에서 내려 재배하였으며, 비가 도 피하지 않았다. 도사(都事) 이즙(李緝) 도롱이를 입고 밭에 앉아 있거늘 공이 예를 마치고는 도사에게, “족하(足下)는 무엇을 하고 있는거요?” 하니, 이즙이 말하기를, “내가 영감보다 먼저 절하였습니다.” 하니, 모두 입을 막고 웃었다. 또 일찍이 평양에 이르러 기자묘(箕子墓)를 보고 말에서 내려 손을 이마에 대고 꿇어앉아 절하며, “동인(東人)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예의(禮義)의 땅에 살게 된 것은 오로지 태사(太師)의 가르치심 때문입니다.” 하였다. 또 일찍이 임금을 모시고 천령(穿嶺)에 사냥 나갔다가 맹호에게 둘러싸였다. 공이 취김에 나무살[木箭]을 뽑아 활을 당기고 말을 달려 들어가 쏘려 하다가 여러 사람이 말려서 그만 두었으니, 매사에 이와 같은 일이 많았다. 매양 임금님 앞에서 충서(忠恕) 두 자를 써놓고 간절히 아뢰니, 성종(成宗)이 충직한 사람이라 여겨 드디어 높은 벼슬을 주었다. 공은 벼슬이 높아질수록 더욱 조심하고 검약해서 손님을 맞을 때마다 술자리를 베풀어도 오직 검정콩과 쓴 나물, 솔싹으로 나물을 만들 뿐,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것을 아주 싫어했다.
세종이 내불당(內佛堂)을 새로 지으니, 공경대부와 대간(臺諫)의 유생과 삼관(三館)의 여러 생도들이 모두 글을 올려 극력히 간하고 판원사(判院事) 이순몽(李順蒙)이 또한 정원(政院)에 나아가 논계하자,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문사(文士)야 불교(佛敎)를 배척함이 마땅하지마는 재신(宰臣)이 어찌 불교의 옳고 그름을 알아서 반대하느냐.” 하였다. 이순몽이 대답하기를, “사람들이 모두 그르다 하므로 신도 또한 그르게 여기오며, 사람들이 모두 간하므로 신도 또한 간하는 것입니다. 온 나라가 다 그르다고 하는 일을 전하께서는 어찌 홀로 이것을 하시겠습니까.” 하였다.
성종이 장차 덕종(德宗)을 태묘(太廟)에 부제(祔祭)하려 하여 정원(政院), 육조(六曹), 대간(臺諫), 홍문관을 모아 이를 의논하였는데 논의가 어지러워 통일되지 못하였다. 여성군(驪城君) 민발(閔發)이 또한 공식으로 참여하였다가 좌우(左右)에게 묻기를, “덕종은 어떤 사람이며, 종묘는 누구의 집인고.” 하니, 좌우가 대답하기를, “덕종은 금상(今上)의 돌아가신 아버지요, 종묘는 금상의 조상을 제사지내는 곳이다.” 하니, 또한 민발이 말하기를, “그러면 이는 아주 쉬운 일이로다. 자식으로서 아버지를 제사지냄이 사리에 맞거늘, 어찌 다른 논의가 있으리요.” 하니, 뒤에 마침내 종묘에 제사를 모셨다. 대개 이순몽과 민발은 모두 무지한 무사로되 그 발언이 이치에 맞으니, 이는 본연의 착한 성품이 일찍이 없어지지 않은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참판 이자야(李子野)가 일찍이 명경(明京)에 갔을 때, 어떤 서장관(書狀官)이 마침 시가(市街)에 나갔다가 사창(紗窓) 속에서, 미인이 수를 놓고 있는 것을 보고 서장관이 눈을 떼지 못했더니, 미인이 창문을 열고 물을 뿌려서 옷이 모두 젖었다. 참판이 이 소문을 듣고 시를 짓기를,
하수의 다리 가에 버들개지 나는데 / 何水橋頭柳絮飛
춘색을 몹시 탐하다가 돌아가기를 잊었도다 / 酷探春色却忘歸
다정하도다 창 사이에서 홀연히 비가 내리니 / 多情忽有窓間雨
날려 분사의 어사 옷에 뿌리도다 / 飛酒分司御史衣
하였다. 그뒤에 다시 명경에 갈 때에 통주(通州)에 이르러서 앓지도 않다가 갑자기 죽어, 사람들이 모두 애석히 여겼다.
사문(斯文) 이(李)라는 사람이 은산(殷山) 현감이 되었다. 서울 친구가 찾아가 만나기를 청하고 오래 서 있었는데도 아무런 기척이 없고, 배는 고파 견딜 수 가 없었다. 이미 해가 높이 떠올라서야 문득 관청 안에서 퉁소 부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을 지키는 아전이, “세숫물을 올리라.” 하고, 해가 거의 중천에 뜨자 또 퉁소 소리가 들리며 아전이, “안장을 갖추어라.” 하고, 해가 정중에 뜨자 또 퉁소 소리가 들리면서, 현감이 나왔다. 그의 친구가 나가 봤더니, 현감은 선 채로 한 마디 하고는 곧 관청으로 돌아가고 마침내 친구를 부르지 않았다. 친구가 크게 실망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현감의 성적이 하등이 되어 체직되었다.
또 사문 백(白)이라는 사람이 우성(牛城) 현령이 되었는데, 감사 성공(成公)이 순행(巡行)하다가 이 현(縣)의 북계(北界)를 지날 때 도사(都事)를 돌아보고, “오늘은 이미 늦어서 저절로 시장기가 난다.” 하니, 도사가, “앞으로 5리를 못 가서 주정(晝停 점심 참 하는 곳)하는 곳이 있으니, 현에서 마땅히 예대로 음식을 갖추어 올 것입니다.” 하고, 아뢰어, 말을 달려 그곳에 가 보았으나 적적하고 인기척이 없었다. 이때 돌연 보릿대 갓을 쓴 늙은 아전이 어깨에 망태를 메고 나와, 길가에 꿇어앉아 말하기를, “마중을 나왔소이다.” 하고, 망태를 끌러 질그릇병 하나와 조그만 봉지 하나를 내놓았는데 병에 든 것은 술이고 봉지에 든 것은 닭이었다. 감사가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내가 비록 배가 고프고 피곤하나 어찌 이것을 먹겠는가.”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문도 또한 체직되었다. 당시 사람들이 시를 지어 희롱하기를
현관은 세 번 퉁소를 불어야 출입하고 / 縣官出入三吹角
사또는 질그릇병 한 개를 만났도다 / 使道迎逢一瓦甁
하였다.
자비(慈悲)라는 중이 있었는데, 성품이 곧이곧대로이고 절차가 없어, 비록 공경(公卿) 대상(大相)이라 해도 모두 이름을 부르고, 남이 주면 비록 귀중한 물건이라도 사양 없이 받고 달라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주어버리며, 다만 헌 삿갓과 해어진 옷을 입을 뿐이었다. 날마다 서울 거리를 다니며 입에 풀칠을 하였는데, 먹을 것을 주면 먹고, 주지 않으면 굶었으며, 진수성찬도 좋게 여기지 않고 찬 없는 밥도 싫어하지 않았다. 무릇 물건을 부를 때는 반드시 ‘님’자를 붙였는데, 돌에는 돌님이라 하고 나무에는 나무님이라 하며, 그 밖의 물건도 또한 모두 이와 같이 불렀다. 유생이 저물녘에 총총히 가는 중을 보고, “어디를 가오.” 하니, 중이 말하기를, “여승의 암자에 가서 그것님[鳥主]의 집을 찾으려 하네.” 하였다. 이 말은 바지를 찾는 것을 두고 한 말이므로,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중의 얼굴에 상처가 있어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중이 말하기를, “일찍이 산에 들어가 땔나무를 할 때 호랑이와 곰이 서로 싸우는지라 내가 앞으로 나아가서, ‘무슨 까닭으로 서로 싸우느냐. 서로 화해해라.’하니, 호랑이님은 훈계를 듣고 물러가고 곰님은 나의 훈계를 듣지 않고 달려들어 내 얼굴을 물었는데, 때마침 산사람의 구원을 받아 위급을 모면하였다.” 하였다. 내가 일찍이 여러 재추(宰樞)와 더불어 한곳에 모인 적이 있는데, 그 중도 또한 와 있었다. 좌중 사람들이 중에게 묻기를, “산에 들어가 수도(修道)하지 아니하고 어찌 고생스럽게 항상 인간 세상에서 다리나 길가의 우물을 고치는 자질구레한 일만 합니까.” 하니, 중은 말하기를, “젊었을 때에 사승(師僧)이 경계하여 말씀하기를, ‘산에 들어가서 10년 동안 고행(苦行)하면 도를 깨달을 수 있으리라.’하여, 금강산에서 5년, 오대산에서 5년을 부지런히 고행하여 도를 닦았으나, 끝내 그 효험이 없었고, 사승이 또 말씀하기를, ‘연화경(蓮華經)을 백 번 읽으면 도를 깨달으리다.’하여 내가 그의 가르침대로 백 번 읽었는데 효험이 없어, 이에 비로소 불씨(佛氏)의 허망하고 믿기 어려움을 알았다. 그러나 나는 달리 나라에 보탬될 만한 일이 없고 다만 교량이나 길가의 우물을 고쳐 이로써 사람들에게 공덕(功德)을 쌓고자 함이로다.” 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 솔직함을 기쁘게 여겼다.
진(陳)과 고(高) 두 중국 사신이 남기고 간 시집을 《황화집(皇華集)》이라 하였다. 성균관 유생들이 모여 앉아서 이를 읊조리고 칭찬하니, 상사(上舍) 유정손(柳正孫)이 옆에 있다가 말하기를, “이 시가 이와 같이 아름다우므로 우리 할아버지 참판공(參判公)이 좋아하여 보시었다.”하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껄걸 웃으며, “지금의 중국 사신이 지은 시를 너의 할아버지가 어찌 보았겠느냐.” 하였다. 유사(儒士)가 또 찬물(饌物)을 논하다가 우연히 큰 만두의 맛에 대해 논했는데 상사 최팔준(崔八俊)은 말하기를, “우리 할머니가 늘 이것을 만들어 먹었다.” 하니, 자리에 앉았던 사람들이 모두 껄걸 웃으며, “큰 만두는 오직 중국 사신을 대접하는 대향(大饗)의 예에만 배설하는 것인데, 아무리 너의 할머니가 호부(豪富)라고 해도 어찌 항상 이것을 먹을 수 있겠는가.” 하여, 당시 사람들이 모두 두 사람의 어리석고 망령됨을 비웃었다.
내가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이 되었을 때, 홍문관 관원이 명을 받들어 남원에 사신으로 가서 광주 기생을 사랑하다가 실수를 하고 돌아오니, 동료들이 비웃었다. 내가 희롱하여 시를 짓기를,
중은 성색에 있어선 본래 무정하지만 / 僧於聲色本無情
기생집에서는 오히려 정을 발하는도다 / 娼妓齋中尙發情
만약 호남의 역마 타는 객이 된다면 / 若作湖南乘馹客
옥당(玉堂) 학사도 모두 다 다정하리로다 / 玉堂學士摠多情
하였다. 옛날에 한 기생이 어버이를 여의고 절에 가서 재(齋)를 올리었는데 여러 기생들이 모두 같이 갔었다. 한 중이 야채를 썰다가 문득 칼을 가지고 벽에 기대어 섰기에, 주지승이 그 까닭을 물으니, 중이 말하기를, “아름답게 단장한 기생들을 보니 마음이 산란하고, 정이 동하여 참을 수 없어 그러하옵니다.”하자, 주지승이 말하기를, “네 그 쓸데 없는 소리 좀 마라. 오늘 창기의 재에 누군들 정이 움직이지 않겠느냐.”하였으니, 앞의 시구는 이 사실을 빌려다가 비유한 것이다.
내가 같이 급제한 원수(元壽 원보륜(元甫崙)) 옹(翁)과 더불어 서울에 갔었는데 그는 코가 아가위나무 열매처럼 붉었다. 평양에 이르렀을 때 마침 시방(侍房)하는 기생의 코도 붉은지라, 내가 시를 지어 희롱하기를,
평양 성내에 북풍이 차가운데 / 箕都城內朔風寒
어찌하여 춘풍이 코 끝에 불었느냐 / 春色如何上鼻端
취한 뒤에 한 쌍의 금귤이 익었고 / 醉後一雙金橘爛
술통 앞의 두 잎은 늦게 단풍졌도다 / 樽前兩葉晩楓丹
휘장 속에 빛이 두루 비치고 / 帳中光影徧相照
객지의 풍정은 쓸쓸해서 기쁘지 않도다 / 客裏風情慘不懽
나는 입바른 말을 잘하는 오가립이니 / 我是直言吳可立
성예를 전하여 장안에 가득 차게 하리라 / 爲傳聲譽滿長安
하였다. 이것은 증산(甑山)에 노관(老官) 오가립이란 자가 있었는데, 행객(行客)으로서 기생과 친해지는 일을 보면, 매양 사람들에게 잘 이야기하였으므로 이와 같이 말한 것이다.
내가 신미년에 파주(坡州)의 별장에 있었는데, 하루는 나의 백형(伯兄 성임(成任))이 어머니를 모시고 진암(珍巖)에 올라갔었다. 바위는 임진강[洛河]을 베개로 삼고 그 높이가 천 길이나 되는데, 그 위에는 백여 명이나 앉을 만하였다. 서쪽은 해문(海門)에 닿아 있고, 북쪽은 송도(松都)와 더불어 서로 마주보아 송악산, 관악산, 성거산(聖居山) 등 여러 산이 마치 지척에 있는 것 같고, 풍경은 잠령(蠶領)보다도 좋았다. 이때 해가 기울어지면서 문득 비가 몰려오고, 무지개가 바위 위에 있는 조그마한 우물에서 강 속으로 들어가니, 빛이 비치는 곳마다 사람의 얼굴이 모두 노랗게 되고, 비릿한 기(氣)가 있어 사람이 감히 가까이 할 수 없으니 참으로 천지의 부기(浮氣)이니, 옛 사람의 말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 백형은 시를 짓기를,
출렁이는 강물은 아득히 허공과 같고 / 江波渺渺水如空
둥둥 뜬 고깃배는 하나하나가 다 같구나 / 泛泛漁舟箇箇同
저물녘 바람 불고 무지개 비 지나더니 / 日暮顚風虹雨過
늦은 무지개가 때마침 떠올라 강동을 끊는구나 / 晩虹時起斷崗東
하였다. 이해에 내 나이 13살이고, 조카 성세순(成世淳)의 나이는 10살이었다. 백형은 아침저녁으로 나와 조카를 부지런히 가르쳐, 책을 읽기도 하고 시를 짓기도 하면서 매일 밤 한 방에서 같이 자며, 글을 짓고 회포를 논하였는데, 중형(仲兄 성간(成侃))이 장난삼아 말하기를, “두 아이가 문장을 잘하니 우리들은 나중에 문을 닫고 스스로 오그라지리라.”하였는데, 불행히도 성세순은 일찍 죽었다. 내가 성장하여 오늘날에 이른 것은 모두 백형의 힘이였다.
조수(潮水)의 왕래에도 법칙이 있어 아침에는 밀물이라 하고 저녁에는 썰물이라 하니, 이른바 신(信 밀물 썰물의 별칭)이라고 하는 것은 그 시기를 잃지 않기 때문이다. 월민(越閩), 제동(齊東), 요심(遼瀋)의 경계로부터 우리 나라 서남해에 이르기까지 조수가 모두 한가지요, 오직 동해만이 조수가 없는데, 중국에서 이것을 알지 못하므로 선유(先儒)로서 논의한 사람이 없었다. 어떤 이는 이르기를, “남방은 체(體)가 부드럽고 용(用)이 강한 까닭으로 조수가 있고, 북방은 체가 강하고 용이 부드러우므로 조수가 없다.” 하고, 어떤 이는 이르기를, “조수의 근원이 중국으로부터 나오니, 우리 서해는 중국에 가깝기 때문에 조수가 미치고, 동해는 멀기 때문에 조수가 미치지 않는다.”하며, 어떤 이는 이르기를, “동쪽 여진(女眞) 지역으로부터 질펀하게 육지에 연결해서 동쪽 왜(倭)에 달하고, 조수의 근원이 부상(扶桑)으로부터 나와서 왜국을 지나 서쪽으로 가서 조수가 육지와 잇닿은 곳에 이르러 돌아서 남으로 가는데, 우리 나라 동해는 그 속에 있기 때문에 조수가 미치지 않는다.” 하니, 이 세 가지 설 중 어떤 것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다.
꿩이 아름답기로는 북쪽의 것이 최고이다. 지금은 평안도 강변(江邊)의 꿩을 진상(進上)한다. 그 크기가 집오리 만하고 기름 엉긴 것이 호박(琥珀)과 같아서, 겨울이 되면 이것을 잡아서 진상하니, 이를 고치(膏雉)라 하는데 그 맛이 아주 좋다. 북쪽으로부터 남으로 가면서 꿩이 점점 마르다가 호남ㆍ영남의 남쪽 변방에 이르면 고기 비린내가 나서 먹을 수가 없는데 사람들은 말하기를, “북방에 초수(草樹)가 많아서 제마음대로 먹고 마실 수 있기 때문에 살찐다.” 하였다.
물건에는 서로 비슷한 것이 아주 많다. 닭과 꿩이 서로 비슷하고, 오리와 기러기가 비슷하고, 거위와 따오기[鵠]가 비슷하고, 말과 나귀가 비슷하고, 개와 이리가 비슷하고, 양과 양양(羚羊)이 비슷하고, 멧돼지와 돼지가 비슷하고, 쥐와 죽서(竹鼠)가 비슷하고, 고양이와 살쾡이가 비슷하고, 할미새와 따오기가 비슷하고, 호랑이와 표범이 비슷하고, 노루와 사슴이 비슷하고, 매와 솔개가 비슷하고, 붕어와 잉어가 비슷하고, 큰 미꾸라지[鮧]와 뱀장어가 비슷하고, 게[蟹]와 거미가 비슷하고, 파리와 등에[蝱]가 비슷하고, 도롱뇽[蛟]과 해계(醢鷄)가 비슷하고, 개구리와 두꺼비가 비슷하고, 파와 마늘이 비슷하고, 생강과 심황이 비슷하고, 앵무새와 딱따구리가 비슷하고, 노야기[香薷]와 갓[荊芥]이 비슷하고, 모란과 작약이 비슷하고, 배와 돌배가 비슷하고, 개암과 밤이 비슷하고, 오얏과 사과가 비슷하고, 가지와 오이가 비슷하고, 감과 귤이 비슷하고, 복숭아와 살구가 비슷하고, 소나무와 잣나무 전나무가 비슷하고, 예지(荔支)와 용안육(龍眼肉)이 비슷하고, 해당화와 모과꽃이 비슷하고, 불구슬[玟瑰]과 사계(四季)가 비슷하고, 금전화(金錢花)와 패랭이꽃이 비슷하고, 고비와 고사리가 비슷하고, 도라지와 인삼이 비슷하고, 부들과 창포가 비슷하고, 주사(朱砂)와 웅황(雄黃)이 비슷하고, 소뇌(消腦)와 용뇌(龍腦)가 비슷하니, 그 밖의 물건으로 대소와 장단이 비록 다르나 형체가 서로 비슷한 것은 한이 없다.
기우제를 지내는 절차는 먼저 오부(五部)로 하여금 개천을 수리하고 밭두둑 길을 깨끗이 하게 한 다음 종묘사직에 제사를 지내고, 다음에 사대문에 제사를 지내며, 다음에 오방(五方) 용신(龍身)에 제사를 베푸나니 동쪽 교외에는 청룡, 남쪽 교외에는 적룡, 서쪽 교외에는 백룡, 북쪽 교외에는 흑룡이요, 중앙 종루(鐘樓) 거리에는 황룡을 만들어놓고, 관리에게 명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되 3일만에 끝낸다. 또 저자도(楮子島)에다 용제(龍祭)를 베풀어 도가자류(道家者流)로 하여금 용왕경(龍王經)을 외우게 하고 또 호두(虎頭)를 박연(朴淵)과 양진(楊津) 등지에 던지며, 또 창덕궁 후원과 경회루ㆍ모화관(慕華館) 연못가 세 곳에 도마뱀을 물동이 속에 띄우고, 푸른 옷 입은 동자 수십 명이 버들가지로 동이를 두드리며 소라를 울리면서 크게 소리 지르기를, “도마뱀아, 도마뱀아, 구름을 일으키고 안개를 토하여 비를 퍼붓게 하면 너를 놓아 돌아가게 하리라.” 하고, 헌관과 감찰이 관과 홀(笏)을 정제하고 서서 제를 지내되 3일만에 끝낸다. 또 성내 모든 부락에 물병을 놓고 버들가지를 꽂아 향을 피우고 방방곡곡에 누각을 만들어서 여러 아이들이 모여 비를 부르며, 또 저자[市]를 남쪽 길로 옮기어 남문을 닫고 북문을 열며, 가뭄이 심하면 왕이 대궐을 피하고 반찬을 줄이고 북을 울리지 않으며 억울하게 갇힌 죄인을 심사하고 중외(中外)의 죄인에게 사[赦]를 내린다.
원각사(圓覺寺)는 본시 큰 절인데 처음에는 대전(大殿)과 동서의 선당(禪堂)이 있을 뿐이었다. 관습도감(慣習都監 세종대왕 때 음악을 맡아보던 곳)은 대전 서선당에 살고, 예장도감(禮葬都監 국장을 맡아보는 곳)은 동선당에 살며, 대전의 북쪽에 있는 중부에는 유생들이 모여 살았다. 그런데 세조께서 하명하시어 모두 헐어 없애고 다시 큰 절을 지으시고 원각이라 이름하여, 은천군(銀川君)ㆍ옥산군(玉山君)으로 제조를 삼고, 대사헌을 겸하게 하여 항상 길 위에서 헌관의 의(儀)를 쓰니, 이로써 두 사람이 가벽(呵辟)하고 또 기사(騎士)로 하여금 퉁소를 불고 앞을 인도케 하니 남녀가 많이 모여 구경하였다. 절이 다 지어져서 경찬회(慶讚會)를 베풀고 임금이 여러 번 거둥하시었다는데, 이때 하늘에서 사화(四花)비가 내리고 사리(舍利)를 분매(分枚)하는 이적(異蹟)이 있어 여러번 백관의 급(級)을 가하였다. 그뒤에 중부를 가각고(架閣庫)의 터로 옮기고 예장도감은 송현 행랑에 두어 귀후서(歸厚署)에 속하게 하고, 관습도감은 봉상시(奉常寺) 악학(樂學)에 합쳐서 악학도감(樂學都監)이라 이름하였다가 얼마 안 되어 장악원(掌樂院)이라 개칭하고, 홍인산(洪仁山)으로 제조를 삼았다. 그 땅이 좁고 사람이 많으므로 지금 있는 자리로 옮기어 크게 창설하니, 그 큰 집과 뛰어난 규모가 모든 관청 중에서 제일이 되어 백관의 습의(習儀)하는 곳이 되고, 또 과장(科場)으로서 선비를 뽑는 곳이 되었다.
세종께서 언문청(諺文廳)을 설치하여 신숙주, 성삼문(成三問) 등에게 명하여 한글을 짓게 하니, 처음에 초종성(初終聲)이 8자(八字), 초성이 8자, 중성이 12자였다. 그 글씨체는 범자(梵字)를 본받아 만들어졌으며, 우리 나라와 다른 나라의 어문 문자(語文文字)로써 표기치 못하는 것도 모두 막힘없이 기록할 수 있었다. 《홍무정운(洪武正韻)》의 모든 글자를 또한 모두 한글로 쓰고 드디어 오음(五音)으로 나누어 분별하니, 이를 아음(牙音)ㆍ설음(舌音)ㆍ순음(脣音)ㆍ치음(齒音)ㆍ후음(喉音)이라 하는데, 순음에는 경중(輕重)의 다름이 있고 설음에는 정반(正反)의 구별이 있고, 글자에도 또한 전청(全淸)ㆍ차청(次淸)ㆍ전탁(全濁)ㆍ불청(不淸). 불탁(不濁)의 차이가 있어서 비록 무지한 부인이라도 똑똑하게 깨닫지 못함이 없게 하시었으니, 성인(聖人)이 물건을 창조하시는 슬기로움이야말로 범인의 힘으로 미칠 바가 아니다.
정유년에 유구국왕(琉球國王)의 사신이 우리 나라에 왔을 때 성종께서 경회루 밑에서 접견하였는데, 사신이 퇴관(退館)하여 통사(通事)에게 말하기를, “내가 귀국에 와서 세 가지 장관(壯觀)을 보았소.” 하였다. 통사가 그 까닭을 물으니, 사신이 말하기를, “경회루 돌기둥에 종횡으로 그림을 새겨서 나는 용의 그림자가 푸른 물결 붉은 연꽃 사이에 보였다 안 보였다 하니, 이것이 한 가지 장관이요, 영의정 정공(鄭公)이 풍채가 뛰어나고 흰 수염이 늘어져 배에까지 내려와서 조복을 빛나게 하니, 이것이 두 번째 장관이요, 예빈 부정(禮賓副正)이 항상 낮에 술마시는 연석에 참여하여 쾌히 큰 잔으로 무수히 술을 마시되 일찍이 취한 빛을 보이지 않으니, 이것이 세 번째 장관이오.” 하니, 당시 이숙문(李淑文)이 예빈 부정(禮賓副正)이라 친구들이 이 말을 듣고 모두 절도(絶倒)하였다.
태종께서 영락(永樂) 원년(元年)에 좌우에게 이르기를, “무릇 정치는 반드시 전적(典籍)을 널리 보아야 하거늘, 우리 동방이 해외에 있어서 중국의 책이 드물게 오고 판각(板刻)은 또 쉽게 깎여져 없어질 뿐 아니라, 천하의 책을 다 새기기 어려우므로 내가 구리를 부어 글자를 만들어 임의로 서적을 찍어내고자 하니 그것을 널리 퍼뜨리면 진실로 무궁한 이익이 될 것이니라.”하시고, 드디어 고주(古註), 《시경(詩經)》, 《서경(書經)》,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글자를 써서 이를 주조(鑄造)하시니, 이것이 주자(鑄字)를 만들게 된 연유이며, 이를 정해자(丁亥字)라 하였다. 또 세종께서 주조한 글자가 크고 바르지 못하므로 경자년에 다시 주조하니, 그 모양이 작고 바르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인쇄하지 않은 책이 없으니 이것을 경자자(庚子字)라 이름하였다. 또 위선(爲善) 음즐자(陰騭字)를 써서 주조하니 경자자에 비하면 조금 크고 자체가 아주 좋았다. 또 세조에게 명하여 강목(綱目)의 큰 글자를 쓰게 하시니, 세조는 당시 수양대군이었는데, 드디어 구리를 부어 글자를 만들어 이로써 강목을 인쇄하니, 곧 지금의 이른바 훈의(訓義)이다. 임신년에 문종께서 안평대군에게 다시 경자자를 녹여서 쓰게 하시니, 이것이 임자자(壬子字)이다. 을해년에 세조께서 강희안(姜希顔)에게 명하여 임신자를 개주하여 쓰게 하시니, 이것이 을해자(乙亥字)인데, 지금까지도 이를 쓰고 있다. 그뒤 을유년(乙酉年)에 원각경(圓覺經)을 인쇄하고자 하여 정난종(鄭蘭宗)에게 명하여 쓰게 하시었는데, 자체가 고르지 못하였으며 이를 을유자라 하였다. 성종께서 신묘년에 형공(荊公) 왕안석(王安石)의 구양공집(歐陽公集)의 글자를 사용하여 글자를 주조하니 그 체가 경자자보다 적되 더욱 정묘하여 신묘자(辛卯字)라 이름하고, 또 중국의 신판 강목자(綱目字)를 얻어 글자를 주조하여 이를 계축자(癸丑字)라 하였다. 대개 글자를 주조하는 법은 먼저 황양목(黃楊木)을 써서 글자를 새기고, 해포(海蒲)의 부드러운 진흙을 평평하게 인판(印版)에다 폈다가 목각자(木刻字)를 진흙 속에 찍으면 찍힌 곳이 패여 글자가 되니, 이때에 두 인판을 합하고 녹은 구리를 한 구멍으로 쏟아부어 흐르는 구리액이 패인 곳에 들어가서 하나하나 글자가 되면 이를 깎고 또 깎아서 정제한다. 나무에 새기는 사람을 각자(刻字)라 하고 주조하는 사람을 주장(鑄匠)이라 하고, 드디어 여러 글자를 나누어서 궤에 저장하였는데, 그 글자를 지키는 사람을 수장(守藏)이라 하여 나이 어린 공노(公奴)가 이 일을 하였다. 그 서초(書草)를 부르는 사람을 창준(唱準)이라 하였으며 모두 글을 아는 사람들이 이 일을 하였다. 수장이 글자를 서초 뒤에 벌여놓고 판에 옮기는 것을 상판(上板)이라 하고, 대나무 조각으로 빈 데를 메워 단단하게 하여 움직이지 않게 하는 사람을 균자장(均字匠)이라 하고, 주자를 받아서 이를 찍어내는 사람을 인출장(印出匠)이라 하였다. 그 감인관(監印官)은 교서관(校書館) 관원이 되었으며, 감교관(監校官)은 따로 문신에게 명하여 하게 하였는데, 처음에는 글자를 벌여놓는 법을 몰라서 납(蠟)을 판에 녹여서 글자를 붙였다. 이런 까닭으로 경자자는 끝이 모두 송곳 같았는데, 그뒤에 비로소 대나무로 빈 데를 메우는 재주를 써서 납을 녹이는 비용을 없앴으니, 비로소 사람의 재주 부리는 것이 무궁함을 알았다.
사문 유휴복(柳休復)은 그 종제(從弟) 유윤겸(柳允謙) 형수(亨叟)와 더불어 두보(杜甫)의 시를 숙독하여 한때 비할 사람이 없었는데, 모두 태재(泰齋) 선생에게 공부를 배웠다. 비록 선생이 문장으로 이름이 났으나, 아버지의 죄에 연좌되어 종신토록 금고(禁錮)되니 사문도 또한 과거에 나가지 못하였다. 일찍이 세종께서 집현전 학자들에게 명하여 두시에 주(註)를 달 때 사문도 또한 백의(白衣)로써 참석하여 사람들이 모두 영광으로 여겼다. 그뒤에 모두 다 벼슬길이 트이어 사문은 경진년의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교리에 이르렀고, 형수는 나와 더불어 동년 진사였으나 임오년의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이르고 또한 문학으로서 이름이 났었다. 나의 중형(仲兄) 진일(眞逸) 선생이 두시를 배울 때 사문이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아니하고 읽기를 백 번이나 하니, 이로 말미암아 문리를 크게 깨달아 통달하였다. 나의 백형(伯兄) 문안공(文安公)이 항상 중형과 더불어 두보를 논하고 시를 지어 두시의 체를 많이 얻었다. 나도 또한 어린 시절에 백형에게 두시를 배우다가 과거 공부에 얽매여 중도에서 폐하고 말았는데, 지금까지도 그것을 온전히 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
윤담수(尹淡叟 윤자영(尹子榮)) 선생은 성품이 우직하였는데 시표(詩表)에는 정묘하되 과장의 규범만 전용(專用)하더니, 사람에게 말하기를, “최세원(崔勢遠)은 번천(樊川)의 글을 읽어 다북쑥으로 진흙을 싼 것과 같고, 노자반(盧子伴)은 동파(東坡)의 글을 읽어 문사(文辭)가 딱딱하고 굳어서 무딘 톱으로 나무를 자르는 것 같으니, 이 어찌 쓸 수가 있겠는가. 양촌(陽村)ㆍ도은(陶隱)의 글이 부드럽고 아름다워 삼키기 쉬운 것만 같지 못하다.” 하였다. 일찍이 이방옹(李放翁)과 더불어 문장을 강론할 때 윤담수가 말하기를, “족하(足下)의 문은 양촌과 같다.” 하니, 이방옹이, “선생의 시는 도은보다 낫다.” 하여, 서로 사양하여 마지 않았다. 그 뒤에 윤담수가 선위사(宣慰使)가 되어 영남으로 내려가다가 길가에서 상경하는 옛 친구를 만나 말하기를, “서울 친구들이 만약 나의 행동거지를 묻거든 반드시, ‘석가여래가 남방에서 놀더라.’하여라.” 하였다. 서달성(徐達城)이 이 이야기를 듣고 시를 지어 말하기를, “문장은 도은보다 낫고 복덕은 석가가 남방에 온 것 같도다.” 하였다. 윤담수가 젊었을 때 유생으로서 전강(殿講)할 때, 덧버선을 벗지 아니하고 들어가니 최세원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늙은 방헌(厖軒 윤자영)이 참으로 겁내는 것을 알고자 하였더니, 백화(白靴) 흑막(黑幕)으로 군주를 배알하는구나.” 하였다. 윤담수가 항상 사람들에게 자랑하기를, “우리 집 아이의 이학(理學)은 주자(朱子)와 같고, 내 사위의 문장은 창려(昌黎 한유(韓愈))와 같다.” 하니, 최세원이 문짝에다 크게 써붙이기를, “늙은 윤담수여, 아들과 사위를 자랑 말라. 아들과 사위뿐만 아니라 한 가문이 모두 영특하지 않도다.” 하였다. 하루는 노선성(盧宣城)과 서달성(徐達城)이 윤담수의 집에 갔었는데 당시 선성은 겸이조판서요, 윤담수는 군직 사용(司勇)이었다. 윤담수가 한 시구를 짓기를, “부사용(副司勇) 댁 세 정승이 모였도다.” 하니, 서달성이 이에 응해 대꾸하기를, “겸판서 이웃에 9품 벼슬아치가 있도다.” 하였다. 세조께서 원영시(援英試)를 베풀어 김수온(金守溫) 등 20여 인을 뽑으니, 노선성, 서달성, 이한산(李韓山), 홍익성(洪益城), 양남원(梁南原), 임서하(任西河)가 모두 뽑혔고, 그 나머지도 모두 한때의 이름난 선비였으나 그날에 미처 시험을 보지 못한 사람이 또한 많았다. 그래서 다시 노선성, 임서하, 홍익성 등으로 시관(試官)을 삼고, 또 강진산(姜晋山), 성하산(成夏山), 이양성(李陽城), 이예(李芮), 김세번(金世蕃), 윤담수 등 몇 사람을 뽑았는데, 이날에 과장을 사정전(思政殿) 뜰에서 베풀고 종이는 향실에서 빌려오게 되는데, 윤담수가 승지 박자계(朴子啓 박건(朴楗))에게 부탁하기를, “내 시지(試紙)를 자네가 사람을 시켜 맡아서 갖다주게.” 하고, 드디어 과장(科場)에 앉아 고심하며 읊조리다가 돌아다보고 말하기를, “시지는 다 준비되었는가.” 하니, 박지계가 말하기를, “안심하고 글만 짓게. 종이는 응당 가지고 올 것이네.” 하였다. 날이 저물고 시편이 다 완성되어 종이를 찾으니, 박지계가 말하기를, “내 것도 다 못 챙기는데 어느 사이에 남의 일을 근심하겠는가. 내가 이미 썼네.” 하였다. 윤담수가 크게 노하여 드디어 고기를 싼 조그마한 종이에다 써서 바쳤다. 이때에 날이 더워 윤담수가 신을 벗고 앞에다 서책을 어지럽게 펴놓고 앉아 있으므로 노선성이 사람을 시켜 몰래 신과 서책을 빼앗아 가버렸다. 윤담수가 아무리 달라고 애걸해도 주지 않아 맨발로 궁문을 걸어 나오니, 보는 사람들이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방이 나서 보니, 윤담수가 맨 끝에 있는지라, 유가(遊街)하지 않으려고 하거늘 노선성ㆍ강진산ㆍ성하산이 모두 그 집에 가서 윤담수를 위협하기를, “군이 만약 나오지 않으면 우리가 임금께 아뢸 것이다.” 하고는, 복두(幞頭)를 머리에 씌우고 도포를 몸에 입히어 붙들어 끌어내니 담수가 부득이 응하였다. 동년례회(同年禮會) 때마다 담수를 불러 말좌에 앉혀놓고 그를 괴롭히는 것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사문 김종연(金宗蓮)은 성품이 우직하고 서사(書史)를 널리 보았다. 젊어서 청계산(淸溪山) 밑에 살았는데, 하루는 돌연 도적 여러 사람이 그 집에 침입하므로, 활에 시위를 매겨 문에 의지하여 섰으니까 도적이 의심이 나고 두려워서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다가 사문이 활을 쏘는 것을 보고 도적이 날뛰면서 말하기를, “용감합니다. 선배의 활 솜씨야말로 감히 당치 못하겠습니다.” 하고, 비웃으며 드디어 방에 들어가 재물을 모두 훔쳐가니 사문은 겨우 위험을 면하였다. 또 세조께서 산천에서 제사를 지내고자 할 때 제물로 쓸 짐승이 몹시 말랐으므로 제물을 맡아 기른 직원을 파면시키고, 다시 헌부에 명하여 기르는 것을 보살피게 하였다. 사문이 감찰이 되어 임무를 받고 가서 밤낮으로 외양간 옆에 앉아 있었는데, 소가 배가 불러 풀을 먹지 않자, 사문이 소를 보고, “소야, 소야, 어찌하여 풀을 먹지 않느냐. 이미 너의 관원을 먹고, 또 나를 먹으려 하느냐. 소야, 소야, 부지런히 풀을 먹어서 나의 죄를 면하게 하여다오.” 하였다. 또 사문이 뽑혀 통감찬집청(通鑑撰集廳)에 참여하였는데, 여러 선생이 음식 맛을 논하다가 우연히 복어[河豚]가 사람을 죽이는 일에 이야기가 미쳤다. 이때 같이 청 안에 앉았는데 점심 밥상에 새로 한 조기탕이 있는지라, 동료가 사문을 돌아보고, “이 고기 맛이 참으로 좋으니, 한번 맛을 보라.” 하니, 사문이 탕그릇을 밥상 밑에 놓으며, “선생이 나를 속여 사람을 죽이고자 하느뇨.” 하여, 자리에 있던 사람이 모두 크게 웃었다.
성종께서 승하(升遐)하시는 날에 성 안의 사대부 거족(巨族)들이 혼인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더러는 아침을 타서 가고, 또 정오에 가고, 또 모르는 척하고 가더니, 그뒤에 일이 발각되어 모두 죄를 받았다. 죽성군(竹城君) 박지번(朴之蕃)은 무인이라 문자를 알지 못하였다. 승하하시는 전날이 아들 혼인날이라 손님들이 모여 왔는데, 돌연 상감의 병환이 위급하다는 소문을 듣고 말하기를, “군부가 편치 않으신데 신하된 자가 어찌 사사로이 혼례를 행하리오.” 하고, 드디어 손님들을 물리쳐 돌아가게 하니, 당시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유림(儒林)이 도리어 무사(武士)만 못하니, 한탄할 일이로다.” 하였다.
산나물이 아닌 것이 없는데도 삽주싹[朮芽]을 산채(山菜)라 이름하고, 수족(水族)이 아닌 것이 없는데도, 숭어만을 수어(水魚)라 이름하는 것은 우리 속어(俗語)가 그러하였다. 중국 사신이 우리 나라에 와서 숭어를 먹고 맛이 좋으므로, “이 물고기 이름이 무엇인고?” 하니, 통사(通使)가 대답하기를, “수어(秀魚)라 합니다.” 하였다. 중국 사신이 웃으며 말하기를, “비늘 있는 것이 수만 종이거늘 어찌하여 이 고기만 수어(水魚)라 하느냐. 물 속에 있는 고기를 모두 수어(水魚)라 해야 하지 않느냐?” 하였다. 이는 수(秀)와 수(水)가 발음이 서로 같아 통사가 이를 분별하지 못한 까닭이다.
옛날에 한 수령이 읍 호장과 더불어 시를 지을 때 수령은 배가 불룩하고 호장은 안질(眼疾)이 있었다. 수령이 먼저 불러 말하기를,
호장의 눈이 비록 습하다지만 / 戶長之眼雖濕
어찌 개천을 만들어 흐르게 할 수 있겠는가 / 能作渠而導之乎
옷소매에는 재앙이 되나 / 衫袖之厄而
파리에게는 좋은 음식이로다 / 蒼蠅之宴食
하니, 호장은 다만 엎드려 있기만 하므로 수령이 말하기를, “상존(上尊)도 또한 대구를 지어 보시지요.”하였더니, 호장이 불러 말하기를,
대인의 배가 비록 크다지만 / 大人之腹雖大
세미야 실을 수 있겠느냐 / 能載貢稅之米耶
역마에게는 재앙이 되나 / 馹騎之厄而
맹호에게는 좋은 밥이로다 / 猛虎之宴食
하였다.
내가 일암(一庵)과 더불어 백형(伯兄)을 모시고 관동(關東)에서 놀 때에 일암이 항상 제자를 불러 밤에 나가 똥을 누는지라. 백형이 글을 지어,
일암이 아무리 자주 대매를 보러 가나 / 一庵雖屢見馬
말에게 꼴을 줄 수야 있겠는가 / 能給馬蒭乎
제자에게는 재앙이 되나 / 弟子之厄而
개한테는 좋은 밥이로다 / 厖狗之宴食
하였다.
내가 또 백형을 모시고 서울에 갔을 때, 의원 김원근(金原謹)이 일찍이 독각(獨脚 음경)을 앓는지라, 내가 글을 짓기를,
김판사의 다리가 아무리 크다 해도 / 金判事之脚雖大
큰 호로만이야 하겠는가 / 能作大葫蘆乎
방기에게는 재앙이 되겠지만 / 房妓之厄而
진드기에게는 좋은 밥이로다 / 眞豆之宴食
하였으니, 진드기는 벌레 이름으로 개 다리에 붙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무릇 채소와 과실은 알맞은 흙에 따라서 모두 심어야 그 이익을 거둘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의 동대문 밖 왕십리는 무, 순무, 배추 따위를 심고 있으며, 청파(靑坡)ㆍ노원(蘆原) 두 역(驛)은 토란이 잘 되고, 남산의 남쪽 이태원(李泰院) 사람들은 다료(茶蓼)를 잘 심어 홍아(紅芽)를 만들고, 경기 삭령(朔寧) 사람들은 파를 잘 심고, 충청도 사람은 마늘을 잘 심으며, 전라도 사람들은 생강을 잘 심는다. 정선(旌善)의 배와 영춘(永春)의 대추와 밀양의 밤과 순흥(順興)의 잣과 함양(咸陽), 진양(晉陽)의 감은 다른 곳에도 이것들이 있긴 하지만, 이 고을 것처럼 많은 맛도 좋지 못하다.
학전상인(學專上人)의 호는 일암(一庵)이니, 그 사람됨이 순근(純謹)하여 다른 뜻이 없고 겉과 속이 같았다. 비록 시를 지을 줄 아나, 그가 지은 시에는 놀랄 만한 구절이 없고, 비록 유가(儒家) 경전을 알기는 하나 근본을 깊이 궁구하지 않고, 비록 산에 들어가 도를 닦지는 않았으나 또한 자취를 감춘 적도 없었다. 바둑 두기를 좋아하나 항상 이기지 못하여도 또한 서운한 마음을 품지 않았다. 사람과 사귐에 귀천(貴賤)을 두지 않고 한번만 이야기하면 곧 서로 마음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신고령(申高靈)ㆍ이연성(李延城)ㆍ박평양(朴平陽)ㆍ성근보(成謹甫)ㆍ유태초(柳太初)ㆍ강진산(姜晉山)ㆍ서달성(徐達城)ㆍ홍익성(洪益城)ㆍ이양성(李陽城)ㆍ성하산(成夏山) 형제ㆍ임서하(任西河)ㆍ이평중(李平仲)ㆍ김복창(金福昌) 같은 이들도 모두 가까운 사이였는데, 신고령이 특히나 애호하였다. 하루는 성하산이 연회석을 베풀어 신고령을 위로할 때, 좋은 손님이 자리에 가득차고 노래하는 기생이 뒤에 둘러쌌으나 신고령이 쓸쓸해하며 즐기지 않고 말하기를, “일암이 여기에 있으면 내가 기쁨을 다할 텐데.” 하여, 성하산이 사람을 시켜 일암을 맞아오게 하였다. 조금 있다가 일암이 흔연히 방에 들어서며 소매를 늘어뜨리며 춤을 추니, 신고령과 좌객이 모두 웃음을 터뜨리고 종일 맘껏 즐기다가 헤어졌다. 선당(禪堂) 판사(判事)가 되어 입원(入院)하는 날에 문에 귀한 사람들이 가득차서 사람들이 모두 영광스럽게 여기었다. 비록 이름난 글재주가 없는 사람이라도 일암이 또한 모두 더불어 사귀었으며, 늙어서 황해도 문화현(文化縣)의 패엽사(貝葉寺)에 물러가 있을 때에는 사신의 방문이 끊어지지 않았다. 나이가 90이 넘도록까지 몸은 여전히 강건하였다. 내가 일찍이 시구를 짓기를,
장기에는 앞에 둔 상을 잃으면 마침내 이기기 어렵고 / 棋無面象終難勝
시는 선련을 잃으면 자유롭지 못하도다 / 詩失先聯不自由
하였더니, 신고령이 듣고 말하기를, “이야말로 사실을 잘 기록한 것이다.” 하였다. 성근보가 일찍이 일암에 대하여 시를 짓기를,
상인은 부처를 배운 자인데도 / 上人學佛者
일을 들어 그 암을 이름하였는데 / 揭一名其庵
우리는 공자를 배웠는데도 / 吾徒學孔子
오히려 덕이 이삼임을 부끄러워하도다 / 還慙德二三
하니, 그때 사람들이 모두 잘 형용한 글이라 하였다. 일암이 높은 벼슬한 분들에게 시를 청하여 그가 가지고 있던 시권(詩卷)이 책상과 상자에 가득 찼으니, 당시의 정묘한 시가 모두 여기에 모이었다. 사람의 기호가 같지 않은 것은 성품상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다. 재추(宰樞) 김순(金淳)은 □실(實)을 잘 먹고 일암은 국수를 잘 먹으며, 서후산(徐后山)은 대구탕(大口湯)을 잘 먹고 나의 백형은 노태(蘆苔)를 좋아하니, 이 네 가지는 모두 아주 맛있는 것이 아니었으나 몹시 좋아하였다. 배재지(裵載之)는 국수를 싫어하여 국수를 보기만 하면 반드시 상 밑에 내려놓는지라,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었더니, “사람들이 국수를 먹을 때 입속에 가득히 넣고 쭉쭉 빠는 것을 보면 심신이 떨리고 흔들린다.”고 대답하였다. 손계성(孫鷄城)은 수박을 싫어하여, “한 조각이라도 입에 들어가면 속이 받지 않는다.” 하고, 최제학(崔提學)은 대구탕을 싫어하여, “이 고기의 냄새만 맡아도 머리가 아파서 찢어질 것 같다.” 하고, 신정랑(申正郞)은 순채를 싫어하여, “만약 엉기어 미끈미끈한 것만 없으면 먹겠다.” 하니, 이 네 가지는 모두 맛있는 것인데도 이와 같이 싫어하니, 사람이 음식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본시 정해진 것이라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사문 정자급(丁子伋)은 두 아들이 있었는데, 기찬(奇襸)이 정자급(丁子伋)의 아들 정수곤(丁壽崑)과 같이 승문원(承文院)에서 벼슬하였다. 기찬이 말하기를, “자네 엄군(嚴君)이 4형제라는데 사실인가.” 하니, 정수곤이 놀라서, “오직 아버지 한 분뿐이신데 어찌 4형제라 하는가.” 하였다. 또한 기찬이, “자네 엄군이 장자이시고 그 다음은 정자강(丁子舡), 그 다음은 정자각(丁子閣), 그 다음은 정자약(丁子藥)인데, 정자급이 두 아들이 있으니 정수곤ㆍ정수강(丁壽崗)이요, 정자강은 후사가 없고, 정자각은 아들이 하나 있으니 정분(丁粉)이요, 정자약은 아들 하나 딸 하나가 있으니, 아들은 정종(丁腫)이라 하고 딸을 정향(丁香)이라 한다.” 하니, 정수곤이 대답하기를, “자네는 네 아들이 있다는데 참말인가.”하므로,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정수곤이 말하기를, “자네 장자는 기특(奇特)이요, 다음은 기이(奇異), 다음은 기범(奇凡), 다음은 기구(奇求)이다.” 하여, 좌중이 모두 크게 웃었다.
무관 양(梁) 아무개가 공주 목사가 되었는데 더운 철 파리가 많은지라, 양이 이를 싫어하여 주중(州中)의 아전에서부터 밑으로 기생과 종들에 이르기까지 매일 아침 파리 한 되를 잡아 바치게 하고, 엄하게 법을 정하여 이를 독촉하니 상하가 다투어 파리를 잡느라고 쉴 겨를이 없었다. 이리하여 심지어 주머니를 가지고 다니면서 파리를 사는 사람까지 있게 되어 당시 사람들이, “승목사(蠅牧使)라 이름하고 고을 다스리기를 파리 잡듯이 하면 명령이 어찌 행해지지 않으리오.” 하였다.
을사년에 박생(朴生)이 나를 따라 명경(明京)에 갔었는데, 사람들이 착실하고 단정하나 용모가 추하고 촌스러웠다. 처음 평양에 이르렀을 때, 감사가 여러 기생들을 거느리고 배[舟]에서 맞이하니, 박생이 눈이 부셔서 보지 못하다가 모자 밑으로 가만히 엿보니 자태가 이상한 한 기생이 뱃머리에 앉아 있으므로 박생이 같이 간 성생(成生)에게 기생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네가 서윤(庶尹)의 삼촌이 되니 내 일을 이루어주기만 하면 반드시 후히 은혜를 갚겠네.” 하고, 관에 돌아와 방에 들고 누가 오는 줄도 모르고 정신을 모아 공손히 생각하고 있었더니, 얼마 있다가 휘장을 걷어올리고 사람이 들어오는데 바로 아까 뱃머리에 앉아 있던 그 여자였다. 생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며 혼자 중얼거리기를, “만약 성용(成龍)의 힘이 아니면 어찌 이렇게 되었겠는가.” 하였다. 정의가 깊고 두터워 잠깐 사이도 옆을 떠나지 못하여 변소에도 또한 서로 같이 갔었다. 무심히 주머니 속을 만지다가 편지 조각을 꺼내보니 기생의 사부(私夫)가 보낸 것이었다. 그러나 박생은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더욱 사랑하였다. 매일 새벽에 기생의 짧은 웃옷을 벗겨 가지고 입혀주면서, “이것도 객중의 재미다.” 하였다. 떠나는 날 말에 태워 함께 데리고 가려고 이미 안장과 말을 준비하였는데 기생은 틈을 타서 도망쳐버렸다. 순안(順安)에 이르러 망연자실(茫然自失)해 있다가 또 예쁜 술집 계집을 보고 온갖 계교를 써서 방 속으로 끌어들였으나 박생이 취한 틈을 타서 그 계집도 도망가 버렸다. 박생이 술에서 깨었을 때 한 여자가 방문 앞을 지나가는데, 그 계집인 줄 알고 데리고 들어와 밤새도록 서로 즐겼었는데 새벽이 되어 보니, 코가 쟁반만하고 처음에 본 그 여자와 다르므로 생이 급한 소리로, “다른 사람이잖아.” 하였다. 숙영관(肅寧館)에 도착하니 고을 중에 인물들이 번화하고, 수십 명의 기생들이 술통을 들고 벌여 앉아 있었다. 박생은 부사(府使)의 족제(族弟)라는 위세를 타고 미녀를 얻어 몹시도 사랑하였다. 날이 흐린 어느 날 박생이 계집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내일 비가 오면 일행이 머물게 될 것이니, 하늘도 내 마음을 알아주시어 주룩주룩 비를 내려주소서.” 하고는, 크게 한숨을 지었다. 빈주(賓主)가 아침에 동헌(東軒)에서 밥을 먹는데, 박생이 종이 쪽지를 부사에게 주면서, “원하건대 여자에게 옷을 빨게 할 시간을 주십시오.” 하였다. 부사가 며칠을 주었더니 박생이 말하기를, “사촌간에 어찌 이다지도 인색한가.” 하니, 부사가 마지 못해 몇 달을 주었다. 박생이 말을 빌려 여자를 태우고 안주(安州)로 떠나는데, 숙천(肅川) 사람들이 이를 보고 말하기를, “중국 가는 사신의 행차가 1년에 세 차례 있는데, 무수한 자제 군관(子弟軍官)을 우리가 많이 보아왔는데 이 사람같이 음란하고 색을 밝히는 사람은 보지 못하였다. 그 분주하게 다니는 모양이 마치 미친 개와 같다.” 하였다. 안주에 도착하여 하루를 머무는 동안 사랑은 더욱 두터웠는데, 출발할 때가 임박하여 여자를 숙천으로 돌려보내려고 하였는데, 여자가 데리고 온 종이 마침 안장을 잃어버렸다. 그러자 여자가 소리 지르며 울면서 말하기를, “당신을 따라온 것은 당신의 덕을 입으려 하였던 것인데, 이제 덕을 입기는 커녕 도리어 이런 걱정이 생겼습니다.” 하고, 욕하기를 그치지 않으니 박생이 멍하니 어찌할 바를 몰랐다. 가평관(嘉平館)에 이르자 박생이 예쁜 관노를 보고는 관인(館人)에게 말하기를, “내가 임신년에 파병 군관으로 있을 때, 일찍이 이 종을 사랑했으니 곧 불러오너라.” 하였다. 여자가 그 말을 믿고 앞으로 와서 자세히 보고 말하기를, “임신년에 누구를 따라왔사옵니까? 나는 당신의 얼굴을 본 적이 없습니다.” 하고, 소매를 뿌리치고 나가니 박생이 하는 수 없이 다른 여자를 데리고 잤다. 정주(定州) 달천교(獺川橋)에 이르니 목사가 나와서 술 자리를 베풀었다. 박생이 한 기생을 보고 부르면서 다가앉아 말하기를, “네가 이륙(李陸) 영공(令公)을 아느냐.” 하니, “모릅니다” 하였다. “노공필(盧公弼) 영공을 아느냐.” 역시, “모릅니다.” 하니, 박생이 갑자기 손을 잡고 말하되, “두 공〔二公〕을 모른다면 내 방으로 오도록 하여라.” 하였다. 이 말을 듣고 동반(同伴)이 박생을 속여 말하기를, “이곳 목사와 관계 있는 여자요.”하였더니, 박생이 드디어 놓아주었다. 또 기생 벽동선(碧洞仙)이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온갖 계교를 써서 이 여자를 얻으니, 일행이 생의 음란함을 미워하여 속이려고 하였다. 마침 고을 유생에 명효(明孝)란 사람이 있었는데, 나이가 젊고 매우 아름다웠는데 분을 바르고 옷을 잘 입혀서 동헌의 기생들 가운데 앉히니, 눈매와 옷깃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분간하기 어려웠다. 박생이 한번 보고는, “천하에 둘도 없는 사람이다.” 하고, 갑자기 앞으로 나가 손을 잡고 서쪽에 있는 방으로 데리고 돌아가므로 명효가 일부러 뿌리치니 박생이 꾸짖기도 하고 달래보기도 하였다. 이때 마침 늙은 기생이 촛불을 들고 앞을 인도하면서 박생에게 말하기를, “이 계집아이는 아직 남자를 상대해 보지 않았으니 서서히 길들이시고 너무 급히 서둘러서 욕보이지 않도록 하십시오.” 하였다. 박생이 방으로 들어와 허리를 껴안고 귀에 입을 대고 속삭이기를, “네가 만약 내 말을 들어주면, 너의 살림은 내가 돌보아주겠다.” 하고 수작하는데, 마침 성생이 와서, “목사가 술자리를 베풀고 우리를 위안하고자 하니 그대로 일찍 쉴 것이 아니라 기생을 데리고 가서 참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박생이 손을 잡고 같이 갔더니 목사가 명효를 보고 꾸짖기를, “네가 관청 소속으로서 객에게 불순하니, 죄가 대태(大笞)에 처함니 마땅하다.” 하고, 아전이 북나무[栲] 몽둥이를 가지고 가서 끌어내리니 박생이 뛰어나와 무릎을 꿇고 손을 모으고 애걸하기를, “이 아이에게는 불순한 일이 없었는데, 전하는 사람이 잘못한 듯하오니 나로 인하여 죄를 얻는다면 도리어 나를 허물하는 것이 더욱 심합니다.” 하였다. 목사가 용서하여주니 명효가 술잔을 받들고 노래를 불러,
오늘 처음 만났다가 / 今日始相見
내일이면 다시 떠나가리로다 / 明日還相離
처음부터 만나지 않았으면 / 厥初若不逢
누구인지나 몰랐을 것을 / 不知是何誰
하니, 박생이 등을 어루만지며 흔연히 웃으며 말하되, “어찌 이다지 불손하면서도 이 같은 노래를 부르느냐. 내가 본 여러 기생 중에 네 얼굴만한 것이 없었는데, 내가 너를 버리고 누구를 구하겠는가.”말하고, 자리가 파한 뒤에 방으로 와서 서로 붙잡고 희롱하며 포옹함이 천태만상이었다. 이때 벽동선(碧洞仙)이 옆에 있으므로, 박생이 성생(成生)에게 이르기를, “내가 미인을 얻어 이 기생은 돌보지 못하였으니 자네가 빨리 데리고 가거라.” 하였다. 박생의 종이 밖에 서서 말하기를, “이것이 기생인 줄 아십니까. 어찌 이렇게도 미혹하여 깨닫지 못하시나이까.” 하니, 박생이 도리어 “네가 어찌 내 일을 아느냐.” 하고 꾸짖었다. 조금 있다가 옷을 벗고 같이 누워서야 비로소 남자임을 알고 놀라 일어나 한 마디 말도 하지 못하였다. 이튿날 행차가 이정(離亭)에 이르니 명효가 남자 복색으로 생을 따라 술잔을 전하고, 생이 말에 오르려 할 때 명효가 옷깃을 부여잡고 만류하면서, “밤새 재미있게 지낸 것은 오직 내 살림을 차리기 위함이었는데, 이제 어찌 이다지도 쉽게 떠나십니까. 너무도 무정하옵니다.” 하니,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의주(義州)에 도착하였다. 의주에는 본래 인물이 많아 평양과 서로 비슷한 고을이었는데, 말비(末非)라고 하는 한 나이 어린 계집종이 있어 박생이 이를 보고 어여쁘게 여겨 욕심을 내보았으나, 이루지 못하여 배관(裵官)에게 말하기를, “자네가 이 고을에 가서 내 일을 이루어주면 죽음으로써 은혜를 갚으리다.” 하니, 배관이, “이들은 각각 주인이 있어 내가 제어할 수 없으니 주관(州官)에게 고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였다. 생이 곧 나아가 판관(判官)을 보고 청하니, 판관이 말비를 불러 달래어도 말비가 오히려 들어주지 아니하고 상방(上房) 앞에 있으므로, 생이 옥호로(玉葫蘆)를 풀어 말비의 옷에 매어주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내 물건을 얻었으니, 내 말에 복종하여야 할 것이다.” 하고, 이날 밤 같이 잤다. 말비는 비록 박생을 사랑하는 뜻이 없지만 뒷날 이익을 얻을까 해서 온갖 애교를 부리니, 박생이 여기에 홀딱 녹아 스스로 아름다운 짝을 얻었다 여겼다. 이튿날 말비가 박생에게 말하기를, “관가가 번잡하고 시끄러우니 우리 집에 가서 채소와 변변치 못한 음식으로라도 모시는 것만 같지 못하겠소이다.” 하여, 박생이 이 여자를 데리고 집에 갔는데, 이른 아침에 조밥과 아욱국을 올리니 박생이 달게 먹고 남기지 않았다. 생이 집을 떠난 지 오래되어 머리가 덥수룩하고 얼굴에 때가 끼었으므로 말비가 따뜻한 물로 직접 얼굴을 씻겨주고 머리를 빗질해 주니 박생이 더욱 기뻐하였다. 생이 돌아와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그 집이 넉넉하고 사람이 슬기롭고도 꾀가 많아서 내 평생에 아직 이런 것은 보지 못하였다.” 하였다. 강가에 이르러 이별할 때, 박생이 말비를 안고 모래 위에 누워 울면서 조그마한 돌을 쪼개어 서로서로 이름을 나누어 가졌는데, 생은 옷소매에 이를 매어 보물처럼 여겨 잃어버리지 않았다. 연경에 머문 여러 달 동안 말할 때마다 항상 말비를 불러 입에서 그 이름이 떠나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요동에 들렀을 때 말비가 조카 말산(末山)이 영봉군(迎逢軍)을 따라가는 길에 박생에게 따뜻한 옷옷을 보냈으므로, 박생이 곧 어깨에 걸치고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내 아이가 보낸 물건이요.” 하였다. 의주에 이르렀을 때 말비가 중국 물건을 얻으려고 더욱 애교를 부리니, 박생의 사랑은 먼저보다 더했고 많은 물건을 주었다. 말비의 집에서 제사를 지내는 동안 말비가 박생에게 이르기를, “집에 어물(魚物)이 없으니 당신이 좀 얻어 오십시요.” 하니, 생이 판관(判官)을 보고 건어(乾魚) 속(束)을 얻어 친히 가지고 돌아와서 무릎을 꿇고 신사주(神賜酒)를 받아 쾌히 술잔을 기울이며 말하기를, “나는 이 집 대주(大主) 늙은이니 불가불 마셔야겠다.” 하였다. 임반관(林畔館)에 이르러 이별하려 할 때, 박생이 말비의 손을 잡고 상방(上房)에 들어와서 술잔을 찾아 서로서로 한 잔씩 마시고, 말비는 생의 옷을 부여잡고 박생은 말비의 손을 잡아 서로 붙들고 통곡하니, 해가 이미 중천에 떴다 한 사람이 두 사람을 떼어 놓았더니, 생은 말비가 쫓아올까 걱정하여 급히 달려 나와 잘못 알고 다른 사람의 말을 거꾸로 타니, 보는 자들이 모두 손뼉을 쳤으나 말 위에 있는 박생의 눈에서는 눈물이 비오듯 하였다. 한 시냇가에 이르러 아침밥을 먹을 때 동반한 사람이 음식을 권하여도 생은 돌아보지 않고 그저 머리를 숙이고 시내만 보고 있으므로 동반한 사람이 말하기를, “자네 우는 게 아닌가.” 하니, 박생이 대답하기를, “우는 게 아니라 물 속에 있는 고기를 구경하고 있는 것일세.”하였으나, 모자를 벗기고 보니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주D-001]호월(胡越)과 같이 보고 : 호(胡)는 북에 있고 월(越)은 남에 있어 거리가 극히 멀다. 따라서 소원함에 비유한다.
[주D-002]선비의 …… 것입니다 : 한고조가 유생(儒生)을 싫어하여 유생을 보면 그 관(冠)을 벗겨 오줌을 누었다는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주D-003]양무제(梁武帝)에 …… 어떠하냐 : 양무제는 불교를 숭상하여 많은 절을 세우고 세 번이나 동태사(同泰寺)에 들어가 고행을 한 일이 있다.
[주D-004]장온고(張蘊古)를 죽이는 것 : 장온고는 세상사에 밝고 문명(文名)을 떨쳤는데, 태종이 즉위했을 때에 대보잠(大寶箴)을 올려 황제에게 간하다가 죽었다.
[주D-005]삼휴(三休) : 한말(韓末)의 김상(金尙)은 자(字)가 원휴(元休)이고, 제오순(第五巡)은 자가 문휴(文休),이고 위서(韋瑞)는 자가 보휴(甫休)인데 이 세 사람을 가리켜 이른 말이다.
[주D-006]사휴(四休) : 네 가지 만족하는 일로, 첫째, 소박한 음식에 만족하는 일, 둘째, 해진 것을 깁고 찬 것을 막아서 따뜻하면 쉬는 일, 셋째, 과하면 쉬는 일, 넷째, 탐내지 아니하고 샘내지 아니하며 늙으면 쉬는 일을 말한다.
[주D-007]사화(四花) : 석사가 법화경을 말할 때 하늘에서 내려온 백연화(白蓮華), 대백연화(大白蓮華), 홍연화(紅蓮華), 대홍연화(大紅蓮華)를 가리킨다.
[주D-008]귀후서(歸厚署) : 나라의 관곽(棺槨)를 만들고 장례에 관한 사무를 맡아 보던 관청이다.
[주D-009]봉상시(奉常寺) : 제사와 시호(諡號)에 관한 사무를 맡아본 관청이다.
[주D-010]유가(遊街) : 과거의 급제자가 좌주(座主), 선진자, 친척들을 찾아보는 일을 말한다.
[주D-011]옷소매에는 …… 되나 : 눈이 아프면 소매에 눈을 닦으므로 안질이 소매에 재앙이 된다고 말한 것이다.
[주D-012]대매[大馬] : 속어(俗語)에, “오줌을 소매, 똥을 대매라 하여, 소매 보러 간다 또는 대매 보러 간다.” 한다.
[주D-013]제자에게는 …… 되나 : 똥 누러 갈 때마다 데리고 가므로 제자가 귀찮다는 말이다.
[주D-014]방기(房妓) …… 되겠지만 : 남자(男子)의 음경(陰莖)이 크면 기생에게는 고통스럽다는 말이다.

용재총화 제8권
용재총화 제8권


우리 나라에서 불교를 숭상한 지는 오래되었다. 신라의 옛 서울에서는 민간에서 승려를 부르는 일이 많았는데, 또 송도도 그러하였다. 왕궁과 큰 집들이 모두 절과 서로 연결돼 있어 왕이 후궁과 더불어 절에 가서 향을 피우지 않은 달이 없었으며, 팔관회(八關會)와 연등회(燃燈會)와 같은 대례(大禮)를 베풀되 모두 절에서 하였다. 왕의 맏아들은 태자가 되며, 둘째 아들은 머리를 깎아 중이 되게 하였으니, 비록 유림(儒林)의 명사라 할지라도 모두 이를 본받았다. 절에는 모두 종이 있어서 많게는 수천 수백에 이르고, 주지(住持)가 된 자는 더러 비첩(婢妾)을 두기도 하니, 그 호사스러움이 삼공(三公)과 구경(九卿)보다도 나았다. 십이종(十二宗)을 두어 불교를 관장하였으며, 중으로서 봉군(封君)의 관직을 받은 사람이 많았다. 아조(我朝) 태종(太宗) 때에는 십이종을 개혁하여 다만 양종(兩宗)을 두고 사전(寺田)을 모두 혁파했으나, 그래도 유풍(遺風)은 끊기지 않았다. 사대부들이 그 친속을 위하여 모두 재(齋)를 올리고, 또 빈당(殯堂)에다 법연(法筵)을 설치하기도 하였으며, 기제(忌祭)를 행하는 자는 반드시 중을 맞아다가 음식을 먹이었다. 또 시승(詩僧)이 있어 관리들과 더불어 서로 수창(酬唱)하는 일이 자못 많았으며, 독서하는 유생들은 모두 절에 올라가서 하였다. 비록 절을 부수고 벽을 훼손하는 폐단이 있기는 하나 유학자와 중이 서로 의뢰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는데, 세조(世祖) 때에 극도에 달하였다. 중들이 촌락에 섞여 살면서, 비록 제멋대로 행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사람들이 이를 꾸짖지 못하고, 조관(朝官)이나 수령들도 항의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중을 의지하여 뒤에서 이익을 얻는 자까지 있었다. 성균관 유생(儒生)으로서도 부처의 사리를 바치고 은총을 구하여도 사림(士林)들이 해괴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성종 때부터 도첩을 발급하지 못하게 하는 법을 엄하게 세워 도첩의 발급을 허락하지 아니하니, 이로 말미암아 성(城) 안에는 중들이 줄어들고 내외의 절은 모두 비었으며, 재를 올려 중에게 밥먹이는 사족(士族)이 없어졌다. 이는 임금이 숭상하는 바에 따라 습속도 함께 변한 것이다.
일찍이 성 안의 니사(尼社)는 정업원(淨業院)만 남겨두고 헐어버리고 모두 동대문 밖 안암동(安巖洞) 등으로 내쫓았기 때문에 서너 채가 있다. 남대문 밖 종약산(種藥山 약봉, 지금의 서울역 뒤 큰 언덕) 남쪽에 옛날부터 한 채가 있었는데, 그 뒤에 두 여승이 각기 그 곁에 작은 집을 짓고 여기에 거처하더니, 지금은 10여 채가 되었다. 늙은 여승들이 과부를 꾀어서 시주(施主)로 삼아 모두 큰 집을 짓고 비단을 깔고 단청을 올렸다.
4월 8일의 연등회와 7월 보름의 우란분(盂蘭盆)과 12월 8일의 욕불(浴佛 불상을 물로 씻는 관불(灌佛)) 때에는 다투어 다과와 떡 같은 것을 시주하여 부처에게 공양하고 중을 대접하는데, 중들은 범패(梵唄)를 부르고 곱게 차려입은 부녀자들은 산골짜기에 모여들어 추잡한 소문이 밖에까지 들리는 일이 꽤 있었으며, 나이 어린 여승들은 아이를 낳고 도망가는 자가 많았다.
병조 판서 안숭선(安崇善)이 승문원 제조(提調)가 되어 내병조(內兵曹)를 경복궁 광화문 안의 동쪽 구석에 만드는데, 대청(大廳)과 낭료(廊寮)가 모두 갖추어지고 그 규모가 굉장하고 치밀하였다. 여러 낭관이 이에 진력(盡力)하여 오래가지 않아 완성되었다. 판서(判書)가 임금께 여쭙기를, “병조는 이 집이 아니라도 있을 곳이 있지만, 승문원은 사대(事大)의 직무를 맡고 있어서, 관장하는 문서도 많으므로 관청이 좁아서 들어가지 못합니다. 비옵건대 이 집을 승문원에서 쓰도록 하소서.” 하니, 곧 윤허(允許)하여 판하(判下)되어 낭관들이 모두 실색(失色)하였으나 어찌할 수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승문원이 궐내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문서를 조사하는 날에 도제조(都提調)와 제조(提調)가 나란히 앉아 문서를 감사하여 올리면 내자시(內資寺)는 술을 갖다 바치고, 사재감(司宰監)은 포육을 갖다 바쳤다. 이 일이 끝나면 퇴청하는데 낭청은 그대로 앉아 술자리를 벌였다. 교리(校理) 조안정(趙安貞)이 한 구를 지었는데,
문서를 감사하는 날에 / 監進文書日
제조가 각각 모여 오도다 / 提調各散回
마른 노루포는 한 입에 저미고 / 乾獐一口割
임금이 내린 술은 두항아리를 열었도다 / 宣醞兩尊開
대선생(大先生)을 부르면서 마시고 / 呼大先生飮
여러 동료를 불러 오도다 / 請諸僚友來
신고령의 술잔이 오르내리니 / 高靈鍾上下
옥 같은 모습이 취한 줄을 몰랐도다 / 不覺玉山頹
하였다. 원중(院中)에 인원은 많고 음식은 적어서 낮에는 다만 한 그릇 밥과 소름에 절인 나물 한 접시로 점심을 먹었다. 당시에 이를 희롱하는 사람이 있어 말하기를,
소반 위에 깨진 주발은 배보다 큰데 / 盤中破鉢大於舟
거친 밥은 엉성하여 꿩 대가리보다 적도다 / 糲飯參差小雉頭
배가 차지 않아 이내 출출하니 / 腸未果然還自惄
시종하는 종들에게는 먹다 남은 찌꺼기도 돌아오지 않도다 / 騶僮曾不瀝餘休
하였다. 어전(御前) 문사(文士)로서 학관이 되어 이로 인하여 직을 얻은 사람이 매우 많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이를 활인원(活人院)이라 하였다. 신고령이 예조 판서를 겸직하여 오로지 사대(事大)의 예를 관장한지라, 임금께 여쭈어 봉급을 더 주기를 청하니, 이로 인하여 조금 넉넉해졌다.
우리 나라에서 3형제가 과거에 급제한 이는 많았으나, 5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한 이는 적었다. 그러므로 부모가 죽은 사람은 뒤에 증직(贈職)을 하고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 해에 쌀 20석을 하사하였다. 전조(前朝)에 있어서는 홍우수(洪禹壽)ㆍ홍부(洪富)ㆍ홍강(洪康)ㆍ홍덕(洪德)ㆍ홍명(洪命)뿐이요, 아조(我朝)에 들어와서는 이예장(李禮長)ㆍ이지장(李智長)ㆍ이성장(李誠長)ㆍ이효장(李孝長)ㆍ이서장(李恕長) 5형제와 안중후(安重厚)ㆍ안근후(安謹厚)ㆍ안관후(安寬厚)ㆍ안돈후(安敦厚)ㆍ안인후(安仁厚) 5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 우리 문안공(文安公 성임(成任))이 항상 내게 말씀하시기를, “우리 형제가 세 사람뿐이어서 다섯에 미치지 못하나, 내가 초시(初試)ㆍ중시(重試)ㆍ발영시(拔英試)에 급제하고 화중(和仲)이 또한 급제하고, 너도 초시ㆍ발영시ㆍ중시에 급제하였으니, 또한 다섯을 넘는다. 수로 견주어보면 우리 부모가 마땅히 그 영화를 누릴 일인데 국법에 있지 않은 것이 또한 한스러운 일이다.” 하였다.
우리 나라에 부자(父子)가 재상이 된 자로는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와 그 아들 남원부원군(南原府院君) 수신(守身)이 모두 영의정이 되었고, 이인손(李仁孫) 공이 우의정이고, 그 아들 광릉부원군(廣陵府院君) 이극배(李克培)가 영의정이 되었으며,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 정창손(鄭昌孫) 공이 영의정이고, 그 아들 정괄(鄭佸)이 우의정이었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재상이 된 자는 상락(上洛) 김사형(金士衡)과 그 증손 김질(金礩), 서원(西原) 한상경(韓尙敬)과 그 손자 한명회(韓明澮), 좌상 노한(盧閈)과 그 손자 영의정 노사신(盧思愼)이다. 장원 급제하여 재상이 된 사람은 좌상 맹사성(孟思誠), 문성(文城) 유량(柳亮), 하동(河東) 정인지(鄭麟趾), 영성(寧城) 최항(崔恒), 익성(益城) 홍응(洪應), 길창(吉昌) 권람(權擥), 거창(居昌) 신승선(愼承善)이다. 생원시(生員試)ㆍ진사시(進士試)ㆍ초시(初試)ㆍ중시(重試)에 연달아 장원으로 뽑힌 사람은 우홍명(禹洪命)이요, 생원시에 장원하고 문과에 장원한 사람은 남계영(南季瑛)이요, 또 생원시에 장원하고 문과에 장원한 사람은 정하동(鄭河東)이요, 초시에 장원하고 또 중시에 장원한 사람은 연성(延城) 이석형(李石亨)이다. 생원 진사시에 장원하고 문과에 장원한 사람으로 1년에 잇달아 뽑힌 것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데, 배맹후(裵孟厚)는 생원ㆍ진사에 모두 잇달아 장원에 뽑히고, 김흔(金訢)은 진사에 장원하고 문과에 장원하고, 신차소(申次韶)는 진사에 장원, 초시에 장원, 중시에 장원이요, 김천령(金千齡)은 진사에 장원하고 문과에 장원하였다. 일등 세 사람이 한때에 재상이 된 사람은 최영성(崔寧城)ㆍ조창녕(曺昌寧)ㆍ박연성(朴延城)인데 사림(士林)이 우러러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 우리 나라는 문장가가 매우 적고 저서는 더욱 적다. 신라 시대의 최치원(崔致遠)이 《계원필경(桂苑筆耕)》몇 권을 저술하였는데, 모두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이요, 시중 최자(崔滋)가 동인문(東人文) 몇 십 권을 편찬하고, 예산(猊山) 최해(崔瀣)가 《삼한구감(三韓龜監)》한 질(帙)을 편찬하고, 시중(侍中) 김태현(金台鉉)이 《동국문감(東國文鑑)》 몇 십 권을 편찬하고, 서달성(徐達城)이 왕명을 받들어 《동문선(東文選)》몇 십 권을 편찬한 것인데, 모두 전현(前賢)의 시문(詩文)을 모은 것이다. 문순공(文順公) 이규보(李奎報)가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전후집 몇 십 권을 저술하고, 원외랑(員外郞) 김극기(金克己)가 《김거사집(金居士集)》 몇 십 권을 저술하였는데, 고판(古板)은 교서관(校書館)에 있으나 반은 깎여졌다. 《은대집(銀臺集)》은 한 질이 있을 뿐이요, 《쌍명재(雙明齋)》한 질과 《파한집(破閑集)》상ㆍ하질은 모두 이인로(李仁老)가 저술한 것이며, 《보한집(補閑集)》상ㆍ하질은 시중(侍中) 최자(崔滋)가 저술한 것이다. 《서하집(西河集)》은 글이 떨어져 나간 한 질인데 임춘(林椿)이 저술한 것이요, 《익재집(益齋集)》몇 십 권과 《역옹패설(櫟翁稗說)》한 질은 이제현(李齊賢)이 저술한 것이요, 예종(睿宗) 《창화집(唱和集)》두 질은 예종이 곽여(郭輿) 등과 더불어 수창(酬昌)한 것을 저술한 것이요, 《동안거사집(動安居士集)》한 질은 이승휴(李承休)가 저술한 것이요, 《중순당집(中順堂集)》한 질은 나흥유(羅興儒)가 저술한 것이다. 《식영암(息影庵)》한 질은 중이 지었는데, 그 이름은 알 수가 없다. 《죽간집(竹磵集)》한 질은 나옹(懶翁)의 제자 중 굉인(宏寅)이 구양현위(歐陽玄危)와 더불어 사귀어 양학사(兩學士)가 서(序)를 쓴 것인데, 시(詩)가 가장 웅건하다. 관동와주(關東瓦注) 한 질은 안경공(安景恭)이 관동 안렴사(關東按廉使)가 되었을 때 저술한 것이요,《목은시문집(牧隱詩文集)》몇 십 권은 한산백(韓山伯) 이색(李穡)이 저술한 것이니, 동방의 문부(文府)라 할 만하다. 《가정집(稼亭集)》몇 권은 이곡(李穀)이 저술한 것이요, 《초은집(樵隱集)》한 질은 이인복(李仁復)이 지은 것이요, 《포은집(圃隱集)》한 질은 문충공 정몽주(鄭夢周)가 지은 것이요,《도은집(陶隱集)》두 질은 이숭인(李崇仁)이 지은 것이요, 《농은집(農隱集)》한 질은 졸옹(拙翁) 최해(崔瀣)가 지은 것이다. 《제정집(霽亭集)》한 질은 이달충(李達衷)이 지은 것이요, 《설곡집(雪谷集)》한 질은 정포(鄭誧)가 지은 것이요, 《원재집(圓齋集)》한 질은 정추(鄭樞)가 지은 것이요, 《사암집(思庵集)》한 질은 유숙(柳淑)이 지은 것이요, 《복재집(復齋集)》한 질은 정총(鄭摠)이 지은 것이요, 《의곡집(義谷集)》한 질은 이방직(李邦直)이 지은 것이요, 《춘곡집(春谷集)》한 질은 이항구(李亢紌)가 지은 것이요, 《동정집(東亭集)》한 질은 염흥방(廉興邦)이 지은 것이요, 《훤정집(萱庭集)》한 질은 염정수(廉庭秀)가 지은 것이요, 《양촌시문집(陽村詩文集)》몇 십 권은 문충공 권근(權近)이 지은 것이요, 《춘정집(春亭集)》몇 십 권은 변계량(卞季良)이 지은 것이요, 《삼봉집(三峯集)》몇 십 권은 정도전(鄭道傳)이 지은 것이요, 《부재집(負齋集)》한 질은 박의중(朴宜中)이 지은 것이요, 쌍매당(雙梅堂) 몇 십 질은 이첨(李詹)이 지은 것이요, 《교은집(郊隱集)》7권은 정이오(鄭以五)가 지은 것이요, 《척약재집(惕若齋集)》한 질은 김구용(金九容)이 지은 것이요, 《유항집(柳巷集)》한 질은 한수(韓修)가 지은 것이다. 《선탄집(禪坦集)》은 선탄이 지은 것이요, 《독곡집(獨谷集)》두 질은 정승 성석린(成石璘)이 지은 것이요, 《상곡집(桑谷集)》한 질은 우리 증조공(曾祖公)이 지은 것이요, 《매헌집(梅軒集)》두 질은 제학(提學) 권우(權遇)가 지은 것이요, 《둔촌집(遁村集)》한 질은 이집(李集)이 지은 것이다. 《근사재집(近思齋集)》은 설손(偰遜)이 지은 것이요, 《운제집(芸齊集)》한 질은 설장수(偰長壽)가 지은 것이요, 《하정집(夏亭集)》한 질은 정승 유관(柳觀)이 지은 것이다. 《철성연방집(鐵城聯芳集)》은 이암 (李嵓)ㆍ이강(李岡)ㆍ이원(李原) 등이 지은 것이요, 《팔계집(八溪集)》은 정해(鄭偕)가 지은 것이요, 《천봉집(千峯集)》한 질은 중 둔우(屯雨)가 지은 것이요, 《계정집(桂庭集)》한 질은 중 성민(省敏)이 지은 것이요, 《태재집(泰齋集)》한 질은 유방선(柳芳善)이 지은 것이요, 《율정집(栗亭集)》한 질은 윤택(尹澤)이 지은 것이요, 《청경집(淸卿集)》한 질은 윤회(尹淮)가 지은 것이요, 《방헌집(厖軒集)》한 질은 정승 황희(黃喜)가 지은 것이요, 《난계집(蘭溪集)》한 질은 함부림(咸傅霖)이 지은 것이요, 《통정집(通亭集)》한 질은 강회백(姜淮伯)이 지은 것이요, 《완역재집(玩易齋集)》한 질은 강석덕(姜碩德)이 지은 것이요, 《인재집(仁齋集)》한 질과 《양화소록(養花小錄)》한 질은 강희안(姜希顔)이 지은 것이요, 《단활집(短豁集)》한 질은 이혜(李惠)가 지은 것인데, 사람됨이 키가 적고 입이 비뚤어졌기 때문에 이같이 이름하였다. 《보한재집(保閑齋集)》2권은 영의정 신숙주가 지은 것이요, 《소한당집(所閑堂集)》두 질은 좌의정 권람(權擥)이 지은 것이요, 《태허정집(太虛亭集)》두 질은 영의정 최항(崔恒)이 지은 것이요, 《식우집(拭疣集)》두 질은 김수온(金守溫)이 지은 것이요, 《사가정집(四佳亭集)》몇 십 권은 달성군(達城君) 서거정(徐居正)이 지은 것이요, 《사숙재집(私淑齋集)》몇 십 권은 진산군(晉山君) 강희맹(姜希孟)이 지은 것이요, 《안재집(安齋集)》한 질은 곧 우리 백씨(伯氏)가 지은 것이요, 《진일집(眞逸集)》한 질은 우리 중씨(仲氏)가 지은 것이다. 고려로부터 조선에 이르는 사이에 저작자가 무한히 많고, 저술한 것이 비록 많으나 자손이 있으되 미약하여 모으지 못하고 비록 모으고자 하나 흩어져 다 없어졌다. 지금까지 세상에 전하는 것을 모아 위와 같이 기록한다.
옛날에는 문과 전시(殿試)에 3등으로 뽑힌 사람을 담화랑(擔花郞)이라 하였는데, 방을 내걸 때 담화랑은 어전(御前)에서 모화(帽花)를 받아 모든 신은(新恩)에게 나누어 꽂아주었다. 나의 중형이 계유년 봄에 과거에 뽑혀 담화랑이 되어 전농시(典農寺) 직장(直長)의 자리에 임명되었다. 이 때에 사문(斯文) 김자감(金子鑑)이 판사(判事)가 되었는데, 뜰에 있는 배[梨]가 바람 부는 대로 어지럽게 떨어지므로 사문(斯文)이 중형(仲兄)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내가 한 구(句)를 지을 테니, 그대는 대구를 짓겠는가?” 하고,
뜰에 가득한 배와 밤은 청지기가 즐거워하고 / 滿庭梨栗廳直樂
하므로, 중씨가 곧 응답하여 짓기를,
책상에 쌓인 문서는 판사가 근심하는도다 / 堆案文書判事憂
하니, 사문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족하(足下)는 청지기로서 나에게 대항하는 것인가?”하므로, 중형이 겸손하게 사과를 하여 조금 풀렸다. 그 뒤에 전농시를 폐하여 군자대창(軍資大倉)으로 만들었다.
정정절(鄭貞節) 공과 그 아우 정봉원(鄭蓬原) 공은 모두 나의 육촌이다. 나의 큰형이 정정절 공의 집에 가서 뵈니, 정정절이 곧 불러들이었다. 공은 아직 아침이라 누워서 일어나지 않았는데, 무명 이불에 풀로 짠 자리를 깔고 있어 쓸쓸하기가 짝이 없었다. 공이 말하기를, “네가 추위를 무릅쓰고 멀리서 오느라고 수고했다. 내 이불 밑에 손을 넣어라.” 하고, 서로 경사(經史)를 강론하였다. 또 정봉원 공을 뵈러 갔을 때에는 꽤 오래 문밖에 서 있은 뒤에야 공이 관복을 정제하고 나와 큰 손님을 대하듯 하였는데, 형제간이지만 기상이 이같이 서로 같지 않았다.
함동원(咸東原)이 젊었을 때에 화류계에서 방랑하였으나, 직무에 임해서는 신중하였고 일을 잘 처리하여 드디어 명재상이 되고 공훈(功勳)으로 봉군(封君)이 되었다. 호남 감사가 되어 선정(善政)으로 소문이 자자하더니, 그후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항상 전주 기생을 사랑하였는데, 이별하기 어려워서 호패(號牌)를 기생에게 비밀히 주고 밤에 몰래 따라오라 하였다. 여러 날이 지난 후, 기생이 부윤(府尹)에게 이별을 고하니, 당시 부윤으로 있던 이언(李堰)은 성품이 청렴하고 고상하면서도 급하여 기생이 하직하는 것을 보고 크게 노하여, “법관(法官)이 어찌 기생을 데리고 갈 리가 있는가 네 말이 거짓이다.” 하였다. 기생이 대사헌의 호패를 내보이며 말하기를, “공이 ‘관부(官府)에서 만약 믿지 않거든 이것으로써 표를 삼으라.’하셨소이다.” 하니, 이언이 땅에 침을 뱉고 크게 꾸짖기를, “내가 함동원을 지조 있는 선비라 여겼는데, 지금 와서 보니 참으로 하품인(下品人)이로다.”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모두 공의 솔직함을 좋아하고 이언의 빡빡함을 비웃었다. 늙어서는 오랬동안 병중에 있었으며, 딸 하나가 있었으나 그 딸마저 먼저 죽었는데, 또 주색을 싫어하여 첩을 두지 아니하고 집안일을 돌봐줄 사람이 없어 끼니를 자주 거르기도 하였다. 옛날 정분이 있던 여의(女醫)가 이 소문을 듣고, 곧 찾아가 공을 뵈니, 남루한 옷을 입고 거적자리에 길게 누웠는데, 다만 한 하인만이 옆에 모시고 있을 뿐이었다. 여의가 말하기를, “공 같은 호걸(豪傑)이 어찌 이와 같이 되셨습니까.” 하니, 공이 아무 말도 없이 똑바로 쳐다보면서 눈물만 흘렸다.
세조께서 항상 문사(文士)를 근정전(勤政殿) 뜰에 모으고 과장(科場)의 예에 의하여, 도이산융낙역래조(島夷山戎絡繹來朝)라는 전(箋)을 내어 20여 명을 뽑았는데, 큰형이 수석을 차지하였다. 세조께서 친히 일등이란 두 자를 권미(卷尾)에다 써주시었는데, 강진산(姜晉山)이 둘째요, 서달성(徐達城)이 셋째였다. 큰형은 판사재(判司宰)로서 첨지중추(僉知中樞)에 제수하고, 강진산은 판통예(判通禮)로 예조 참의에 제수하고 서달성은 사간(司諫)으로 공조 참의에 제수하였다. 세조께서 명하시어 방을 내걸고 유가(遊街)하려 할 때, 마침 간관(諫官)의 간언(諫言)으로 인하여 그만두었으나, 특별히 주악(酒樂)을 큰형의 집에 하사하고 내종친(內宗親) 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ㆍ익현군(翼峴君) 이운(李運)ㆍ의창군(義昌君) 이공(李玒)ㆍ밀성군(密城君) 이침(李琛)ㆍ영해군(寧海君) 이당(李瑭)ㆍ영천위(玲川尉) 윤사로(尹師璐) 및 명공(名公) 거경(鉅卿)들을 오게 하시어 마음껏 즐기고 파하였다. 이튿날에 동방인(同榜人)이 모두 술병을 가지고 찾아오니, 당시의 사림이 모두 영광으로 여겼다. 큰형의 전사(箋詞)에 이르기를, “천지를 덮어주는 인(仁)을 체득하였으니, 성대한 덕이 나타나지 않겠는가. 성교(聲敎)가 남북에까지 미치게끔 되었으니, 수방(殊方 이(夷)와 융(戎)을 말함)에서 모두 몰려오도다. 공손히 생각건대 전하(殿下)는 하늘과 더불어 한 가지로 크시니, 옛날에도 앞설 사람이 없도다. 종사(宗社)가 다시 편안하니 무공(武功)이 화란(禍亂)을 다스려 평정하고, 인의(仁義)가 이미 효험을 얻어 문치(文治)가 나라를 편안케 하니, 해도만리(海濤萬里)에는 오랑캐들이 분주하고, 구중궁궐에는 오랑캐 풍속이 예를 갖추도다.” 하였고, 박치명(朴致命)의 사(詞)에는, “단간대(單干臺) 위에 상제(上帝)가 친히 임하는 것처럼 수고롭지 아니하고, 간우계(干羽階) 앞에 앉아서 오랑캐가 스스로 찾아옴을 보도다.” 하였다. 윤무송(尹茂松)은 곧 신고령(申高靈)의 처형이니 한때 재상을 제수받은 일이 있다. 동년(同年) 모임에서 신고령이 한 구를 지었는데,
청안의 옛 친구들이 모두 백발이로다 / 靑眼故人俱白髮
하니, 윤무송이 급히 대구하기를,
검은 머리의 현상이 다만 단심이로다 / 黑頭賢相只丹心
하였다. 신고령이 탄복하여 무릎을 꿇고 말하기를, “나는 형만큼 정밀하지 못하다.” 하였다. 신고령이 고부(古阜) 기생 지단심(只丹心)을 사랑한 까닭에 이렇에 말한 것이다.
요즈음은 풍속이 날로 야박해지지만 오직 시골 사람만은 아름다운 풍속이 그대로 있다. 대체로 이웃 천인(賤人)들이 모두 모여서 회합을 하는데, 적으면 혹 7, 8, 9명이요, 많으면 혹 100여 인이나 되어 매월 번갈아가며 술을 마시고, 초상을 당한 자가 있으면 같은 무리들이 상복을 갖추고 관곽(棺槨)을 갖추고, 혹은 횃불도 갖추고 음식을 갖추어, 상여줄을 잡고 무덤을 만들며 사람들이 모두 시마복(緦麻服)을 입으니, 이는 참으로 좋은 풍속이다.
내가 어렸을 때에 남강(南江)에서 손님을 전송하고 돌아오는 길에 전생서(典牲暑) 남쪽 고개에 이르렀을 때에, 마침 부슬비가 내리자 말이 거품만 뿜고 나아가지 못하는데, 문득 따뜻한 기운이 불과 같이 얼굴을 스치고 또 취한 기운이 있어 견딜 수가 없었다. 길가 동쪽 골짜기를 바라보니 어떤 사람이 삿갓을 썼는데, 키가 수십 척이요 낯이 소반 같고 눈이 횃불과 같아 괴이한 현상이 범상치 않았다. 내가 묵묵히 생각하기를, “내가 만약 마음을 놓치면 반드시 저놈의 계략에 떨어지겠다.” 하고, 드디어 말을 멈추어 나아가지 않고 한참을 눈여겨보니 그 사람이 문득 머리를 돌려 하늘을 향하고 점점 소멸하여 하늘로 올라가버렸다. 마음이 안정되면 허깨비가 들어오지 못한다더니, 참으로 그러한가 보다.
중추 김성동(金誠童)은 상낙부원군(上洛府院君)의 아들이다. 집이 남대문 밖 연지(連池) 곁에 있었는데, 키가 아홉 자요 성품이 침착하고 신중한데다가 말이 없고 손님이나 친구들과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항상 방안에 있으면서 다른 사람과 얘기하지 않고 종일토록 책만 읽었다. 적성 현감(縣監)을 지낸 뒤에 과거에 급제하여 드디어 갑과(甲科)에서 3등으로 뽑혀 당상관(堂上官)이 되었다. 부평(富平)에서 수령으로 있을 때 공무를 당하여서는 청렴하고 신중하였고 일은 시원스럽게 처리하였으며 조세를 독촉하는 일이 없어, 백성이 편안하게 살며 부모처럼 섬기었다. 그때 감사가 임금에게 선정(善政)을 아뢰어 특별히 중추원(中樞院) 가선대부(嘉善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그가 공무(公務)에 있어서는 부족함이 있을까 골몰하면서도 집안일은 조금도 경영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 원대함을 보고 기대하기를, “참으로 재상감이다.”하였는데, 얼마 있지 아니하여 부부가 모두 죽었다. 집의(執義) 윤수언(尹粹彦)은 내 친구 윤자방(尹子芳)의 아들인데, 집이 김성동의 집과 이웃해 있었다. 사람됨이 문무(文武)에 뛰어나서 소년으로 등제(等第)하여 사인(舍人)으로부터 나아가 집의(執義)가 되고, 아침저녁으로 은대(銀臺)에 오르기를 지척(咫尺)에 있는 것 같이 여기었다. 평안도에 사신으로 갈 때에 윤자방이 황해 감사라, 집의가 해주(海州)로 아버지를 뵈러 가다가 돌연 병으로 인하여 죽었다. 중추의 관이 발인한 지 며칠이 못되어 집의의 관이 들어와 사림(士林)의 똑똑한 사람들이 한번에 죽으니, 인근 지척의 사이에 흉사(凶事)가 연달아 일어나 사림에서 비통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의 빙고(氷庫)는 옛날의 능음(凌陰)이다. 동빙고는 두모포(豆毛浦)에 있는데, 오직 하나뿐이어서 제사지내는 데만 사용하였다. 얼음을 저장할 때에는 봉상시(奉常寺)가 주관하고, 별제(別提) 두 사람과 함께 검찰(檢察)하였다. 또 감역부장(監役部將)과 벌빙군관(伐氷軍官)이 저자도(楮子島) 사이에서 채취하는 것을 감독하였는데, 이는 개천 하류의 더러움을 피하기 위함이다. 서빙고(西氷庫)는 한강 하류 둔지산(屯知山)의 기슭에 있는데, 무릇 고(庫)가 8경(梗)이나 되므로, 모든 국용 (國用)과 제사(諸司)와 모든 재추(宰樞)가 모두 이 얼음을 썼었다. 군기시(軍器寺)ㆍ군자감(軍資監)ㆍ예빈시(禮賓寺)ㆍ내자시(內資寺)ㆍ내섬시(內贍寺)ㆍ사담시(司贍寺)ㆍ사재감(司宰監)ㆍ제용감(濟用監)이 주관하여 별제 두 사람과 같이 검찰하였고, 또 감역부장과 벌빙군관이 있고 그 나머지 각사(各司)는 8경에 나누어 소속시켰는데, 얼음이 얼어서 4치 가량 된 뒤에 비로소 작업하였다. 그때는 제사(諸司)의 관원들이 서로 다투어 힘쓰므로 군인이 비록 많으나 잘 채취하지 못하고, 촌민들이 얼음을 캐가지고 군인들에게 팔았다. 또 칡끈을 얼음에 동여매어서 넘어지는 것을 방지하고, 강변에는 땔나무를 쌓아놓아 얼어 죽는 사람을 구제하며, 또 의약을 상비(常備)하여 다친 사람을 구제하는 등 그 질환에 대한 조치가 상비되었다. 처음 8월에는 군인을 빙고에 많이 보냈는데, 고원(庫員)이 군인을 인솔하여 고(庫)의 천정을 수리하고 대들보와 서까래가 썩은 것을 바꾸고, 담이 허물어진 것을 수리하였다. 또 고원한 사람은 압도(鴨島)에 가서 갈대를 베어다가 고의 상하 사방을 덮는데, 많이 쌓아 두텁게 덮으면 얼음이 녹지 않는다. 전술한 관인들은 밤낮으로 마음껏 취하도록 마시고 얼음을 저장하는 일은 하리(下吏)들에게 맡기었다. 계축년에 얼음의 저장을 소홀히 하자 왕이 노하여 모두 파직을 시켰고, 갑인년에는 관리가 주의하여 얼음을 저장했기 때문에, 국상(國喪)과 중국 사신을 대접하는 연회에도 얼음이 넉넉하고 가을까지 빙고에 남아 있었으니, 그 검사하는 방법을 치밀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길흉(吉凶)을 점치는 일은 모두 소경이 맡아 하였다. 국초에 복진(卜眞)이란 점쟁이가 있었는데 둔갑술을 하였다. 하루는 복진이 문득 궁궐에 나아가 왕을 뵙자 왕이 묻기를, “대궐의 문단속이 매우 엄한데, 너는 어찌 들어왔는가?” 하니, 복진이 여쭙기를, “신이 둔갑술로 몸을 감추어 들어왔으므로 대궐 문지기가 모두 알지 못하였나이다. 오늘이 신의 명이 다하는 날이오니 원컨대 상께서 구해 주시옵소서.”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네가 비술(祕術)로써 몰래 대궐에 들어왔으니, 네 죄가 아주 무거우므로 용서할 수 없다.” 하고, 곧 명하여 죽였다. 그뒤에 김학루(金鶴樓)란 사람이 점치는 법을 알았고, 또 김숙중(金叔重)이란 사람이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생원 박운손(朴雲孫)이 관비(館婢)와 간통하고 관비의 지아비를 시기하여 살해하였으므로 살인죄로 옥에 갇히었는데, 판결하는 날에 형조의 낭관들이 모두 모이고 김숙중이 또한 그 옆에 있어 차례로 길흉(吉凶)을 이야기하였다. 정랑(正郞) 노회신(盧懷愼)은 호부(豪富)로서 한때에 이름을 떨쳤는데, 김숙중을 돌아보고, “저 죄인의 명이 조석(朝夕)에 달려 있는데 면할 도리가 있을까.” 하니, 김숙중이 꽤 오래 명수를 점쳐보다가. “이 죄인이 형벌을 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벼슬길이 넓게 트여서 해를 당할 일이 없고, 정랑의 명수가 오히려 이 죄인만 못합니다.” 하여,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그 맹랑함을 비웃었다. 박운손이 형벌을 받는 날에 도망하여 죽음을 면하고 뒤에 벼슬이 3품에 이르러 나이 70이 되어 죽었는데, 노회신은 얼마 안 가서 일찍 죽었다. 우리 선군께서 김숙중을 후대하였는데, 내가 나이 다섯 살 때에 역질(疫疾)에 걸려 죽게 되었을 때 김숙중을 불러 길흉을 묻고 또 백형ㆍ중형의 명까지 점치게 하니, 김숙중이 말하기를, “맏아드님은 복록이 장구하여 벼슬이 이조 판서에 이를 것이요, 둘째 아드님은 비록 청귀(淸貴)하나 명이 길지 않고, 막내 아드님은 복록이 맏아드님과 비슷하나 영화는 오히려 더 나으니, 호랑이 굴 속에 두어도 해를 입지 않을 것입니다.”하더니, 과연 말한 바와 같았다. 김효순(金孝順)이란 사람이 또한 점을 잘 쳤기 때문에 백형 선비 시절에 상사(上舍) 이관의(李寬義)와 함께 그 길흉을 점쳤는데, 김효순이 백형의 명수를 점쳐 말하기를, “올해에는 반드시 장원급제하여 나중에 귀현(貴顯)에 이르리라.” 하고, 상사(上舍)의 명수를 점쳐 말하기를, “늙어 죽을 때까지 속된 선비를 면치 못하겠다.” 하였다. 상사가 문명(文名)이 있어서 여러 사람들이 받들어 거벽(巨擘)으로 삼았으며, 과거에 힘들이지 않을 것이라 보았는데, 점친 말을 듣고 통곡하여 흐느껴 울자 김효순이 위로하여 말하기를, “그러나 만년(晩年)에는 군신이 경사롭게 만나는 격입니다.” 하였다. 그 뒤에 상사가 마침내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늙어서 시골에 물러가 있다가, 나이 70에 일민(逸民)으로서 임금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성종(成宗)께서 편전(便殿)에서 인견(引見)하고 치도(治道)를 강론할 때 전교(傳敎)를 내려 “참으로 훌륭한 인재이지만 늙었으므로 쓰기 어렵다.”하시고, 후하게 의복을 하사하시어 돌려보냈다. 김산실(金山實)이 우리 이웃에 살고 있는데, 정미년ㆍ무신년 간에 길흉을 물으니, 김산실이 말하기를, “대명(大明)이 처음 나오는 곳에 만리에 빛을 보리니, 이는 벼슬길에 높이 오를 징조라, 반드시 고관(高官)을 얻을 것입니다.”하더니, 그해에 홍치 황제(弘治皇帝)가 새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시어 사은사(謝恩使)로 명경(明京)에 나아갔으므로 그 일이 바로 맞았다. 김산실이 고관을 얻겠다 한 말은 틀렸으나, 사실 그 징조에 있어서는 헛되지 않았다.
국초(國初) 이후로 법률이 문란해져서 사대부가 이익을 얻는 길이 또한 넓어졌다. 세상에 전하기를, “태종(太宗)이 외방에서 사냥하시다가 날이 저물어 평복 차림으로 시내를 지나니, 10여 이이 말에 식물을 싣고 임금 앞을 지나다가, ‘승정원이 어디 있습니까.’하고 묻자, 태종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물 아래 연기 나는 곳으로 내려가면 그 곳이 곧 승지(承旨)가 있는 곳이다.’하였다.”한다. 세종(世宗) 때에는 여러 창고의 공물(公物)을 단속할 줄 모르고, 궁궐 안의 찬물(饌物)은 승정원이 오로지 관장하였는데 어선(御膳)의 나머지를 다 먹을 수 없어서 나누어 자기 집까지 보내었다. 연회(宴會)가 있을 때면 예빈시(禮賓寺)에서 연석을 베풀고 주관(酒官)이 술을 올리며, 창고의 아전이 기생에게 소요되는 옷감을 주되, 쌀 열 섬 이하는 마음대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게 되므로 하루에 쓰이는 종이가 수백 권이요, 술은 수백 병이며, 다른 물건도 또한 이와 같았다. 관리로서 객지에 있는 사람이 되질을 하는 과정에서 땅에 흘린 곡식을 창관(倉官)에게 빌려 썼는데, 그 수가 적어도 몇 섬이 넘었으니 비록 땅에 흘린 곡식이라고는 하나 실상은 정곡(正穀)이었다. 그릇을 관에서 빌려쓰고 돌려보내지 아니하여도 관에서는 이를 묻지 않았다. 허비가 이렇게 많은데도 공용이 군색하지 아니하니,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세조(世祖)로부터는 육전(六典)을 고쳐 횡간(橫看)의 안(案)을 만들어서 비록 적은 물건이라도 모두 계품(啓稟)한 뒤에 쓰게 하니, 이로부터는 사람들이 남용하는 일이 없었으나, 저축해 둔 것이 또한 없어서 국가에서 항상 그 부족함을 근심하니, 어째서 이렇게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철원(鐵原)은 옛날 동주(東州)의 땅인데, 이곳을 짐승 숲이라 불러왔다. 세종께서 가끔 이곳에서 사냥을 하시어 수많은 짐승을 잡았는데, 예빈시에서 쓰는 고기와 공청(公廳)의 수요 이외에 재추(宰樞)에게 골고루 하사하는 것도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았었다. 이로부터 문소전(文昭殿)의 초하루나 보름 제사 때 쓰는 고기는 오직 철원과 평강(平康)에서만 바쳐도 남음이 있었다. 지금 동주의 들은 태반이 밭이 되고 금수(禽獸)가 줄어들어 양읍(兩邑)에 짐승 잡기가 어려워지니, 잡히지 아니하면 불안해서 침식을 잊을 정도다. 상하의 관리가 수풀을 뒤지며 겨우 벌을 면하고 있는 형편인데도 지금까지 폐하지 않는 것은 그래도 다른 곳보다 낫기 때문이다.
정정절(鄭貞節) 공은 판서 정흠지(鄭欽之)의 아들이다. 아버지는 형조 판서이고 정정절은 대사헌이 되어 부자가 한때에 재추(宰樞)가 되었다. 부자가 모두 용모가 건장하고 수염이 길고 아름다웠다. 하루는 큰 길거리에서 만나 판서는 초헌(軺軒)을 타고 대헌(大憲)은 초헌을 부축하고 가면서 이야기를 주고받으니, 그 풍채가 너무도 훤하여 길가에서 보는 사람이 영화롭게 여기어 흠모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군자가 집을 지으려면 반드시 먼저 사당을 세워서 조상의 신주를 받드니, 이는 주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이다. 삼국ㆍ고려 시대 이후로 오로지 불교를 숭상하여 가묘(家廟)의 제도가 분명하지 못하고, 사대부가 모두 예로써 조상을 제사지내지 않더니, 포은(圃隱) 문충공이 도학을 밝히기를 주창함으로부터 제사지내는 의식을 엄하게 세우니, 그뒤에 집집마다 사당을 세우고 비로소 가사(家舍)를 적사(嫡嗣)에게 전하고 적서(嫡庶)의 분별을 중하게 하므로, 자식 없는 사람은 반드시 친족 자제를 취하여 후사(後嗣)를 삼았다. 국가의 대제(大祭)는 맹월(孟月)에 하고 사대부의 시제(時祭)는 중월(仲月)에 하였으니, 이런 것도 모두 차서가 있었다.
김[苔]은 남해(南海)에서 나는 것을 감태(甘苔)라 하고, 감태와 비슷하나 조금 짧은 것을 매산(莓山)이라 하는데, 구워서 먹는다. 내 친구 상사(上舍) 김간(金澗)이 절에서 독서할 때 밥상에 있는 것을 먹어보니, 아주 맛이 좋으나, 무엇인지 알지 못하다가 중에게 자세히 물어본 뒤에야 비로소 그 이름을 알았다. 하루는 내 집에 와서 말하기를, “그대는 매산 구이를 아는가? 천하의 진미라네.”하기에, 내가, “이것은 임금님이 잡수시는 상에만 올리는 물건이므로 궐 밖 사람이 맛볼 수 없는 것이나 자네를 위하여 구하리다.” 하고, 숭례문 밖으로 나가 연지(蓮池) 속에 태발(苔髮)이 물위에 어지럽게 떠있는 것을 보고 조리로 떠내어 구워놓고 하인을 보내 상사를 불러오게 하니, 상사가 이 말을 듣고 곧 왔다. 두 사람이 마주앉아 술을 마실 때 나는 매산을 먹고 상사는 오로지 김만 먹더니 겨우 두어 꽂이를 먹고 나서 말하기를, “구이 가운데 모래가 있어 먼저 먹던 것 같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점점 가슴속이 메스꺼워 뱃속이 편안치 않다.” 하고, 곧 집으로 돌아가 토하고 설사하여 수일을 앓은 뒤에 일어나서 말하기를, “중이 준 매산은 아주 맛이 있었는데, 그대의 매산은 아주 나쁘다.” 하였다. 내가 뜰안에 있는 나무에 청충(靑虫)이 가득히 있어 잎을 갉아먹는 것을 보고, 이를 주워모아 종이에 꼭 싸서 봉하고 어린 종을 시켜 이를 보내면서, “요행히 매산을 얻었으니 그대는 한 끼 밥 반찬으로 하라.” 하였다. 이때는 이미 황혼이라 상사 부부가 이불을 깔고 같이 앉았다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너의 주인이 먹지 아니하고 내게 보내주니 참으로 벗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고, 마침내 봉한 것을 뜯으니, 벌레들이 마구 쏟아져 나와, 혹은 이불 속으로 들어가고 혹은 치마 속으로 들어가므로, 부부가 놀라 소리를 질렀다. 벌레가 닿은 곳은 모두 탈이 나서 온 집안이 크게 웃었다.
선(善)을 행한 집에는 반드시 뒤따르는 경사가 있는 법인데, 독곡(獨谷)은 평생에 착한 마음을 가지고 몸가짐을 청렴히 하며, 행동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인(仁)으로 하였으니, 그 자손이 번화한 경사를 누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장윤(長胤) 참찬공(參贊公)은 후손이 없고, 차자 참의공(參議公)은 뱃속에서부터 장님이었고, 그 아들 창산군(昌山君) 및 그의 아들이 또한 뱃속에서부터 장님이 되어, 3대가 연달아 이렇게 되었으며, 나의 중씨는 문장과 학문이 사람들이 추앙하는 바가 되었으나 나이 겨우 30에 죽고, 그의 두 아들도 모두 광질(狂疾)을 얻었으니, 참으로 천도(天道)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속담에, “아침에 마신 술은 하루의 근심이요, 맞지 않는 가죽신은 1년의 근심이요, 성질 나쁜 아내는 평생의 근심이다.”라는 말이 있으며, 또, “배가 부른 돌담과 말 많은 아이와 헤픈 주부는 쓸모가 없다.”는, 말이 있는데, 말은 비록 속되나 역시 격언이다.
경 읽는 판수들은 모두 머리를 깎았는데, 세상 사람들은 이를 선사(禪師)라 하였다. 늙은 판수 김을부(金乙富)라는 사람이 광통교(廣通橋) 가에 살았는데, 점치는 것으로 업을 삼았다. 사람이 다투어 점을 쳐보았으나 맞지 않는 것이 너무 많아 부인들이 모두 말하기를, “광통교 선사는 흉하다고 하면 길하다.” 하였다. 참판 김현보(金賢甫)가 그 아들이 과거를 볼 때, 김현보가 그 글 지은 것을 보고 말하기를, “너의 문사(文詞)는 너무 속되어서 선(選)에 들지 못할 것이다.”하였는데, 방이 걸릴 때 그 아들이 높은 점수로 뽑히었다. 동료들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광통교 선사는 흉하다 하면 길하다.” 하였다.
만약 사람들에게 대두(大豆)와 소두(小豆)의 꽃 색깔을 물으면 흔히, “대두의 꽃은 노랗고 소두의 꽃은 붉다.”하는데, 이는 다만 그 열매의 빛을 보고 말한 것으로, 실제로는 소두의 꽃은 노랗고 대두의 꽃은 붉다. 만약 석균(石菌)의 땅에 붙은 뿌리를 물으면 사람은 모두, “털이 난 것은 밖에 있고 거죽이 번지르르한 것은 땅에 붙었다.”하는데, 이는 다만 거죽이 번지르르한 것은 진흙에 섞여 있음을 보고 말함이요, 실제로는 털이 난 것이 땅에 붙어 있고 거죽이 번지르르한 것이 밖에 있는 것이다. 만약 한새[鷴鳥]의 꼬리를 물으면 사람들은 모두 검다고 하는데, 이는 새의 두 날개가 꼬리를 덮고 있어 검게 만든 것으로, 실제로는 희다. 대개 세상 사람이 억측으로 사물을 보는 것이 흔히 이와 같다.
같이 급제한 신생(申生)은 수염이 많으나 누렇고 크기가 작고 등이 굽었다. 그러나 성품이 부지런하고 분명하여 조금도 남에게 신세를 지는 일이 없었다. 일찍이 예조 정랑이 되어 기생들을 검찰(檢察)할 때 너무 각박하여 기생들이 모두 노래를 지어 조롱하였다. 또 순채와 송이버섯을 싫어하며 “이것이 무슨 맛이 있다고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느냐.” 하였다. 친구가 모두 웃으며 말하기를, “신군은 특이한 사람이다.” 하였다. 또 꾀꼬리 소리를 듣고 말하기를, “좋도다. 갹조(噱鳥)의 소리여.”하므로, 친구들이, “이는 꾀꼬리인데 어찌 갹조라 하느냐.” 하니, 신생이 말하기를, “그 울음이 갹갹하니 이는 갹조요, 꾀꼬리가 아니다.”하자, 친구들이 모두 그 고지식함을 웃었다. 이때에 어떤 이가 시를 짓기를,
나뭇가지에는 갹갹하고 우는 꾀꼬리 머물고 / 樹頭黃鳥止
순채와 송이는 내가 좋아하지 않도다 / 蓴菜松菌非我喜
붉은 수염의 등이 굽은 작은 남아는 / 紫髥曲脊小男兒
이원(梨園)의 기생을 검찰할 줄 알도다 / 猶知檢察梨園妓
하였다.
○ 대제학 박연(朴堧)은 영동(永同)의 유생이었다. 어렸을 적에 향교에서 수업할 때, 이웃에 피리 부는 사람이 있었는데 제학이 독서하는 틈에 겸하여 피리를 익히니, 그 지역에서 모두 훌륭하다고 인정하였다. 제학이 과거 보러 서울에 가다가 이원(梨園)의 훌륭한 배우를 보고 교정을 받는데 배우가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음절이 속되어 절주에 맞지 않으며 습관이 이미 굳어져서 틀을 고치기 어렵다.” 하니, 제학이 말하기를, “그렇더라도 가르침을 받겠소이다.” 하고, 나날이 왕래하여 게을리하지 않았다. 수일 만에 배우가 들어보고서, “선배는 가르칠 만하다.” 하고, 또 수일 만에 들어보고는, “규범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장차 대성에 이르리라.”하더니, 또 수일 후에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무릎을 치고 말하기를, “나는 도저히 미치지 못하겠다.” 하였다. 그뒤에 급제하여 또 금슬(琴瑟)과 제악(諸樂)을 익히니, 정묘(精妙)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세종(世宗)의 총애를 얻어 드디어 관습도감(慣習都監) 제조(提調)가 되어 오로지 음악에 관한 일은 관장하였다. 제종이 석경(石磬 돌로 만든 경쇠)을 만들고 제학을 불러 교정케 하니, 제학이 말하기를, “모율(某律)은 1푼이 높고, 모율은 1푼이 낮다.” 하여, 다시 보니, 고율(高律)에 진흙 찌꺼기가 있었다. 세종께서 명하여 진흙 찌꺼기 1푼을 없애게 하고 또 저율(低律)에는 다시 진흙 찌꺼기 1분을 붙이게 하였더니, 제학이 아뢰기를, “이제는 음률이 고릅니다.” 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그 신묘함에 탄복하였다. 그 아들이 계유(癸酉)의 난에 관여되어 제학도 또한 이로 인하여 파직되고 향리로 내려갈 때, 친구들이 강가에서 전송하였는데, 제학이 말 한 필과 종 하나만 데리고 그 행장이 쓸쓸하였다. 배[舟] 안에서 같이 앉아서 술자리를 베풀고 소매를 잡고 이별하려 할 때 제학이 전대 속에서 피리를 꺼내어 세 번 불고서 떠나가니, 듣는 사람들은 모두 처량하게 여기어 눈물은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 내가 백형(伯兄)을 모시고 개성(開城)으로 떠나려 할 때 파산(坡山)의 별장에서 쉬면서 달밤에 이야기하다가 우연히 고도(故都)의 일에 이르러 내가 개연(慨然)히 탄식하며, “개성은 우리 조상이 거처하던 곳이라, 응당 분묘가 있을 것입니다.”하였더니, 백형이 말씀하시기를, “현조(玄祖) 총랑공(摠郞公)은 창녕에다 모시었고, ”고조(高祖) 문정공(文靖公) 양위(兩位)는 포천(抱川)에다 모시었고, 증조(曾祖) 정평공(靖平公) 양위와 조(祖) 공도공(恭度公) 양위는 모두 과천(果川)에다 모시었고, 오직 총랑 부인 오씨(吳氏)만 산소가 개성에 있어, 엄군(嚴君)께서 일찍이 말씀하신 적이 있으나 그때에 나이 어려서 자세히 여쭈어보지 못한 것이 평생의 큰 한이다. 지금 비록 장지가 있다 해도 세월이 이미 오래되어 묘 봉우리가 평평하게 되었을 것이니, 무엇으로 알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 이튿날에 임진강을 건너 호관(壺串)을 지날 때, 길 옆에 옹중(翁仲)이 있는 오래된 무덤을 보기만 하면 비통하게 말하기를, “어찌 이것이 아닌 줄 알겠는가.” 하고, 서로 서글퍼해 마지 않았다. 종이 안장과 농두(籠頭)를 잡고 앞을 인도하여 동쪽으로 10리 남짓 가서 대로(大路)로 나와 다시 산골짜기의 조그만한 길로 접어들 때, 백형이 말하기를, “이 길은 전일에 가던 길과 같지 아니하다.” 하고, 머리를 돌려 바라다 보니 옛날에 가던 길과는 수 리나 떨어져 청교역(靑郊驛)이 아득히 서쪽에 있었다. 비로소 깨닫고, “여기는 천수산(天水山) 동쪽 기슭이다.” 하고, 길을 잃고 정신없이 큰 고갯마루를 타고 오르다가 몸이 피곤하여 말에서 내려 잠깐 쉬면서 깊은 골짜기를 내려다보니, 어지러운 무덤 가운데 석비(石碑)가 우뚝이 서 있는지라, 내가 가보려고 하자, 백형이 날이 저문다고 하며 말렸다. 그러나 내가 말을 달려 가보니 바로 오씨의 무덤이었다. 전면에 삼한국 대부인 동복 오씨지묘(三韓國大夫人同福吳氏之墓)라 쓰여 있고, 후면에 고조 및 증조 3형제분의 이름이 쓰여져 있었다. 내가 백형을 맞아 사배 (四拜)하니 백형이 감탄하여 말하기를, “이는 조고(祖姑)의 신령이 우리들을 이곳에 이끌어온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찌 이런 기이한 일이 있겠는가.” 하고, 오래 흐느껴 울다가 떠났다. 얼마 있지 아니하여 백형이 유수(留守)에 제수되고 시좌(時左 성준(成俊))ㆍ자강(子强 성건(成健)) 형제가 서로 이어 경기 감사 순찰사가 되어 지금까지도 제향을 폐하지 않고 있다.
개구리는 오랫동안 가물면 소리가 없다가 비가 오면 시끄럽게 우는데, 어째서 그런지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다. 주례(周禮)에 진회(蜃灰 조개 재)를 뿌려서 기도[禳]하는 것은 그 소리를 미워해서이고, 공치규(孔稚圭)가 이것을 양부(兩部)의 북을 치고 피리 부는 것에 비한 것은 그 소리를 좋아해서이다. 지금 맹인들이 경을 읽을 때 개구리 소리를 모방하는 것도 또한 일종의 음악이다.
권성(權姓)인 재추(宰樞)가 문관으로서 조정에 현달(顯達)하였다. 아버지가 죽자 남의 무덤을 파헤치고 장사지내려 할 때 무덤 주인이 말하기를, “이 무덤은 우리 아버지의 무덤이다. 우리 아버지는 벼슬은 비록 낮았으나 뜻이 엄하고 굳세어 보통 사람이 아니었으니, 부디 파내지 말라. 반드시 해가 있으리라.”하였으나, 재추가 듣지 아니하고 마침내 그 무덤을 파서 관을 열어 시체를 버리니, 그 아들이 시체를 어루만지며 통곡하기를, “영혼이 만약 있다면 어찌 이 원통함을 보복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날 밤에 풍수(風水) 이관(李官)의 꿈에 수염이 붉은 한 장부가 분노하여 꾸짖기를, “네가 어찌 나의 안택(安宅)을 빼앗아 타인에게 주었는가. 화근은 실로 네게 있다.” 하고,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치니, 이관은 가슴을 앓아 피를 흘리다가 바로 죽고, 얼마 가지 아니하여 재추도 또한 나라의 죽임을 당하고 가문이 멸망하니, 사람들이 모두 무덤을 파낸 까닭이라고 하였다.
신축년에 채기지(蔡耆之)와 성경숙(成磬叔)이 승지로서 죄를 입어 모두 파직을 당하고 관동(關東)에 놀러 갈 때 흰옷과 짧은 도롱이로 각각 한 어린 종을 거느리고 가는데, 무관(武官) 회옹(晦翁)이 따라갔다. 포천(抱川)에 이르러 시내에서 저녁밥을 먹는데, 한 소년이 촌락에서 나와 경숙의 옆에 걸터앉으며, “당신들은 영안도(永安道) 사직(司直)이 아니오, 내가 소를 사고자 하오.” 하니, 경숙이 답하기를, “소가 없소니다.” 하여, 좌우가 모두 웃었다. 금화현(金化縣)에 이르니, 현감이 앞길에 나와서 현(縣)으로 맞아들이고자 하므로, 경숙이 말하기를, “오늘은 이미 날이 저물었고, 금성(金城)까지는 아직도 길이 멀며 사면(四面)에 인가가 없으니, 주인의 말을 따르는 것이 좋겠다.” 하니, 기지가 노하여, “처음에 족하를 믿음직하다고 여겼는데, 어찌 일을 다스림에 착오가 이와 같은가.” 하고, 인색을 붉히면서 길을 떠나 10리 정도 갔을 때,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였다. 회옹이 말하기를, “영안을 왕래하는 사람들은 모두 길가에서 노숙하므로 내가 비록 재주는 없으나 활소기와 말타기로써 업을 삼았으니, 어찌 도적 같은 것을 두려워하겠습니까. 길 위에서 자고 가도록 합시다.” 하니, 경숙이 말하기를, “영안 사람들은 여러 사람들이 모여 무리를 지어 있기 때문에 노상에서 자지만 그래도 흔히 도적을 만나 물건을 잃었는데, 족하가 아무리 용무(勇武)를 믿는다고 하나 어찌 한 몸으로 많은 무리를 당하겠소.” 하였다. 이러는 동안 마침 서쪽 골짜기의 소나무 사이에 좁은 길이 있어, 혹은 인가(人家)가 있을 것이라 하고, 혹은 무덤이 있을 것이라 하였는데, 경숙이 말하기를, “골짜기 깊숙한 곳이 오히려 큰 길 옆보다는 낫다. 집이 있으면 자고 집이 없으면 나무를 베어 목책을 만들어 자면 해될 것이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좁은 길을 찾아갔더니, 소점(小店)이 있어 한 여자가 아이를 안고 문에 나와 말하기를, “집에 주인 어른은 계시지 않고 다만 주부만 있을 뿐이니, 손님을 들일 수 없습니다.”하므로, 모두 집 앞 채소밭에 앉아 저녁을 먹을 때 이미 어두워져서 주위를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조금 후 한 사람이 말을 타고 오는데 개가 그 뒤를 따라왔다. 어린애가, “주인 어른 오신다.” 소리치니, 여자가 나와 맞이하며 말하기를, “손님이 밖에 가득한데 도적인 듯합니다.” 하였다. 늙은이가 말하기를, “누군지는 모르지만 밤늦게 왔으니 황당(荒唐)한 일임에 틀림없다.” 하고, 드디어 말에서 내려 기침을 하며 사방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행장에 곰가죽과 호피(虎皮)가 있으니, 반드시 사족(士族)이리라.” 하였다. 좌중이 모두 갓을 기울여 쓰고 말이 없으므로 늙은이가 성경숙의 갓을 벗기어 보고 갑자기 물러서면서, “이분은 성영공(成令公)이시다.” 하고 또 기지의 갓을 벗기어 보고는, “이분은 채영공(蔡令公)이신데 두 영공께서 어찌하여 이곳에 이르셨습니까.” 하여, 서울의 일을 자세히 물은 다음 비로소 그 까닭을 알고 방으로 맞아들여 병풍을 펴고 자리를 깐 다음, “내 집은 몹시 빈한하여 오직 좁쌀막걸리밖에 없습니다.” 하고, 종을 불러 술을 걸러 동이에 넣고 두 딸을 불러 나와 절하게 하자 모두가 경의(敬意)를 표하였다. 늙은이가 말하기를, “나의 정처(正妻)는 자식이 없고 이것들은 모두 종의 소생입니다.” 하고, 두 사람 옆에 앉히어 각각 차례로 술을 따르게 하고 채기지의 종으로 하여금 피리를 불게 하였다. 술이 거나하게 취했을 때에 채기지가 말하기를, “따님의 손을 잡아보고 싶은데 주인의 뜻이 어떠하실는지요?” 하니, 늙은이가 말하기를, “딸들이 비록 촌티가 나고 못났으나 옆에 모시게 한 까닭은 영공의 기쁨을 돕게 하고자 한 것인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하였다. 채기지가 나아가 그 손을 잡고 여러 가지로 희롱할 때 집이 낮아 일어설 수가 없어 모두들 앉아서 춤을 추면서 새벽까지 놀았다. 늙은이의 성은 진(秦)이니, 당시에 이조 녹사(吏曹錄事)로 있다가 휴가를 얻어 고향에 와 있는 것이었다. 창도역(昌道驛)에 이르러, 회옹이 병이 나서 수일을 머물렀는데, 일행의 말이 풀을 먹고 똥을 많이 누었다. 역졸이 비를 가지고 와서 쓸면서, “누가 우리 감사가 앉는 마루를 더럽히는고.” 하고, 몹시 노한 기색을 보이자 성경숙이 천천히 달래면서 말하기를, “노하지 말게, 우리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만약 찰방(察訪)이 되면 마땅히 자네에게 말미를 주도록 하겠네.” 하니, 역졸이 말하기를, “어찌 흰옷에 가는 실띠를 띤 사람이 찰방이 될 수 있겠소. 만약 그렇다면 영안도(永安道)로 대구(大口)를 싣고 왕래하는 사람들이 모두 찰방이 되겠습니다.” 하여, 사람들이 모두 포복절도하였다. 신안역(新案驛)을 지날 때 길에서 역마를 타고 달려오는 한 관인(官人)과 마주쳤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말에서 내려 풀밭에 숨어 엎드렸는데, 관인이, “이 사람들은 누구인데 방황하고 물러가지 않는가.”물었다. 또 보니, 한 여자가 붉은 저고리와 흰 치마를 입고 역마를 타고 오므로 성경숙이 말하되, “이는 참으로 장부의 행차로다. 내가 일찍이 한림원을 거쳐 은대(銀臺)에서 벼슬하고 기생들이 연주하고 노래하는 자리에서 취해 놀다가 오늘날 불우한 환경에 빠짐이 이와 같으니, 우리들 처지에서 저들을 보니 참으로 천상의 신선과 같도다.” 하였다. 채기지가 말하기를, “그대가 일찍이 관서(關西)에 사신으로 갈 때 두 기생을 데리고 갔었으니, 저 것도 한때, 이것도 한때인데 어찌 저것을 부러워하오?” 하여, 일행이 모두 웃었다. 회양(淮陽)의 속읍인 화천현(和川縣)에 이르렀을 때, 회옹이 입맛이 없어 콩죽을 먹고자 하니, 성경숙이 현(縣)의 아전을 불러 옷을 전당잡히고 죽을 구하니, 아전이 말하기를, “저의 집이 비록 가난하지만, 어찌 죽을 옷과 바꿀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저녁에 콩죽 한 주발과 꿀 한 바리를 가져왔는데, 채기지가 모두 먹어버렸으므로 아전이 또 한 주발을 보내었다. 이번에는 성경숙이 먹어버리고 회옹은 다만 먹다 남은 찌꺼기만 먹었다. 추령(楸嶺)을 넘어 중대원(中臺院)에 이르러 마침 비바람을 만났는데, 그 맹렬한 찬 기운이 마치 가을과 같았다. 앞서 서울을 떠날 때 성경숙은 두터운 저고리를 가져오지 아니하여 이때에 이르러 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였다. 정중(亭中)에 한 역졸이 막걸리를 가져와 권하니 모두 그 더러움을 싫어하며 마시지 않았는데, 성경숙은 한 사발을 기울이고 말하기를, “겹옷 입은 사람은 비바람 속에서는 막걸리를 마셔도 또한 무방하다.” 하였다. 통천(通川)에서 수일을 머물 때 군수 안국진(安國珍)과 더불어 놀고 남으로 고성군(高城郡)에 이르니, 마침 홍자심(洪子深)이 군수가 된지라, 삼일포(三日浦)에서 놀다가 다시 동해의 봉화봉(烽火峯)에서 노니, 그 기이한 경치야말로 비할 데가 없었다. 자심이 그 봉을 승선대(承宣臺)라 이름지었으니, 여기서 양인이 모두 승지를 지냈기 때문이다. 바닷고기를 잡아서 몹시 마셔서 크게 취하니, 군수가 오미자장(五味子漿)을 조제하여 병에 넣어둔 것을 성경숙이 살그머니 훔쳐 마시자 회옹이 이것을 보고 병을 채가지고 도망하였다. 성경숙이 몽둥이를 가지고 쫓아가니, 희옹이 병 속에 침을 뱉어 남이 먹지 못하게 하였다. 채기지가 노하여 병을 거꾸로 하여 땅에 쏟아버리니, 한 병의 장이 모두 없어졌다. 낙산사(洛山寺)에 이르러 중이 말하기를, “행차가 저희 절에 도착할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마침 길 가는 사람이 간성(扞成)으로부터 오므로, ‘승지 일행이 어디쯤 오더냐.’물으니, 답하기를, 승지는 보지 못했고 다만 말 꽁무니에 도롱이와 옷을 매달고 오는 객 두서너 사람을 보았을 뿐인데, 필시 강릉(江陵)의 정병(正兵)일 것입니다.’하더니, 지금 보니 그 대들이 모두 도롱이와 옷을 매달고 왔으니, 길 가는 사람이 잘못 본 것이로다.”하므로, 서로 크게 웃었다. 양양(襄陽)에 이르러 드디어 일행은 서울로 돌아왔다. 이듬해 임인년에 회옹은 회양 부사(淮陽府使)에 제수되었고, 3년 후 계묘년에는 성경숙이 강원 감사에 제수되었다.


 

[주D-001]정업원(淨業院) : 동대문 밖 동망봉(東望峯)에 있는 안양암(安養庵)을 말한다. 단종 비(妃) 정순왕후 송씨(宋氏)가 단종이 사사된 후 이곳에서 보살 할멈 노릇을 하였다 한다.
[주D-002]도이산융낙역래조(島夷山戎絡繹來朝) : 섬과 산의 오랑캐가 연속하여 조회한다는 뜻이다.
[주D-003]계유(癸酉)의 난 : 단종 원년 계유년에 수양대군이 전조(0前朝) 때부터 내려오던 원로 신하를 제거하고 스스로 정권을 잡은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은 사사(賜死)되고, 김종서(金宗瑞)ㆍ황보인(皇甫仁) 등은 피살되었다.

용재총화 제9권
용재총화 제9권


우리 나라는 중국과 같지 않다. 우리 나라 사람이 글을 읽을 때에는 음(音)과 뜻이 있고 또 구결(口訣)이 있어 쉽게 배울 수 없으나, 중국에서는 모두 문자로 말하고 음과 뜻과 구결이 없기 때문에 학문하기가 쉽다. 우리 나라 사람은 간사하고 편파적이고 의심이 많아 항상 사람을 믿지 않으므로 역시 남도 나를 믿지 않지만, 중국인은 순후(純厚)하고 의심이 없어서 비록 외국인과 상거래를 하더라도 그다지 다투거나 힐난하는 법이 없다. 우리 나라 사람은 비록 조그마한 일에도 경솔하게 떠들기 때문에 사람은 많아도 성취하는 일은 별로 없지만, 중국인은 조용하고 말이 없으므로 사람이 적더라도 쉽게 일을 성취한다. 우리 나라 사람은 많이 마시고 먹는데, 만일 한 끼라도 굶으면 배가 고파 어쩔 줄을 모른다. 가난한 사람은 부잣집에서 벌어다 먹기까지 하면서도 낭비만 하고 아낄 줄을 모르기 때문에 곤경에 이르며, 신분이 높은 자는 주식(酒食)을 많이 벌여놓고도 싫어할 줄 모른다. 만일 군사가 출정하게 되면 군사 식량의 운송이 반 이상을 차지하고, 길 떠나는 사람은 몇 리 안 되는 도정(道程)이라도 말에 실은 짐이 길을 메울 정도이다. 중국인은 많이 먹지 아니하여 한번에 구운 떡 하나면 조석 끼니를 떼울 수 있고 꼭 밥을 먹어야 하는 건 아니다. 군졸(軍卒)은 마른 양식을 말 안장에 걸어놓아 굶주림에 대비하고, 길 떠나는 사람은 비록 천만 리 먼 길이라 할지라도 은전(銀錢)만 가지고 가면 요구하는 대로 밥도 먹을 수 있고, 술도 마실 수 있으며 말도 탈 수 있고, 종도 거느릴 수 있어 머무르는 데는 집이 있고, 자내 데는 계집이 있으므로 가기 어려운 곳이 없다. 우리 나라 사람으로 관에 있는 자는 조반(早飯)ㆍ조반(朝飯)ㆍ주반(晝飯)을 먹으며 아무 때고 술을 마신다. 또 종들을 들볶아 성찬(盛饌)만 가져오라 하고, 이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반드시 매질을 한다. 그러나 중국인으로 관에 있는 자는 공경대부(公卿大夫)라 할지라도 집에서 고기와 밥 한 그릇만을 차려서 관청으로 운반하여다 먹는다. 우리 나라 사람으로 외방에 사신(使臣)가는 자는 관리들이 지경(地境) 내어서 영송(迎送)을 하는데, 먼저 주식을 갖추고 준비하였다가 고을에 들어오면 며칠 동안 머물게 하고, 크게 잔치를 베풀어 흠뻑 취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술이 깨어있는 날이 없으니, 이렇게 하여 병을 얻어 페인이 되는 사람도 헤아릴 수 없다. 송별할 때는 경치 좋은 산수를 골라 장막을 치고 소매를 붙잡아 놓지 아니하며, 종일토록 그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능력이 모자라는 사람은 관의 돈을 다 써 없애서 날로 퇴폐해지고, 능력 있다는 자는 영리를 꾀하여 자기의 사욕을 채우므로 관가(官家)는 날로 쓸쓸해지고, 관리와 백성은 점차 초췌(憔悴)해져서 그 괴로움을 견딜 수 없다. 반면에 중국인으로 사신 나가는 자는 만기(萬騎)가 앞에서 인도(引導)하고, 절월(節鉞)이 휘황(輝煌)하니, 그야말로 성사(盛事)라 할 만하다. 고을에 들어가면 관리들은 당하(堂下)에서 절하고 사신은 방에 들어가 돼지 족발과 변변치 않은 쌀밥 정도를 먹고 따라온 사람과 같이 한 평상에서 자고 이튿날 떠나는데, 관리들이 5리 밖까지 나와서 석 잔 술로 전송한다. 관리가 인정(人情)을 닦고 싶으면 사적으로 술가 음식을 갖추어 길떠남을 이유로 대접하기 때문에 사신은 오래 머물지 아니하고, 관에는 낭비하는 물건이 없게 되어 주현(州縣)은 항상 풍족하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노비(奴婢)가 반을 차지하는 까닭으로 유명한 고을이나 큰 읍이라도 군졸(軍卒)이 적은데, 중국은 모두 나라 사람이고 집집마다. 정병(精兵)이기 때문에 아무리 작은 벽읍(僻邑)이라도 수만의 무리를 급히 갖출 수 있다. 우리 나라 사람은 경솔(輕率)하고 안정되지 못하여 백성은 관리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관리는 선비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선비는 대부(大夫)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대부는 공경(公卿)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여, 상하가 서로 업신여기고 남을 모함할 생각만 한다. 그러나 중국은 백성이 관리 두려워하기를 표범같이 하고, 관리는 공경대부(公卿大夫) 두려워하기를 귀신같이 하며, 공경대부는 임금 두려워하기를 하늘과 같이 하는 까닭으로 일을 맡으면 잘 처리하고, 명령을 내리면 쉽게 복종한다.
당자서(唐子西)의 논탕천기(論湯泉記)에 이르기를, “어떤 설(說)에는 염주(炎州) 땅의 성질이 몹시 더운 까닭으로 산곡(山谷)에 탕천(湯泉)이 많다 하고, 어떤 설에는 물에서 유황(硫黃)이 나오면 땅 속이 따뜻하니 당초부터 남북(南北)을 가리지 않는다.”하였으나, 지금 임동(臨潼) 탕천은 정서(正西)에 있고, 염주의 남은 물도 반드시 뜨겁지 않으니 땅의 성질에 관한 설은 이미 맞지 않은 것이다. 또 유황을 물속에 넣어도 물이 뜨거워지지 않으니 유황의 설도 역시 맞다고 할 수 없다. 내 생각에는 탕천은 하늘과 땅 사이에 자연히 따로 한 종류가 되어 있어 본래 그러한 성질을 받은 것뿐이지, 반드시 땅의 성질이나 유황으로 인하여 따뜻해진 것이 아니다. 지금의 우리 나라는 육도(六道)마다 모두 온정(溫井)이 있으나, 경기(京畿)ㆍ전라도(全羅道)만 없다. 고서(古書)에 이르기를, “수주(樹州)에 온천이 있다.”하였는데, 수주는 곧 지금의 경기도 부평부(富平府)이다. 조정에서 사람을 보내어 답사하였으나 그 근원을 얻지 못하였으니, 고서에 잘못 기재된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싫어하여 그 줄기를 막아버린 것인지 모르겠다. 경상도 영산현(靈山縣)에 온천이 있는데, 샘이 다른 곳보다 조금 차서 목욕하는 사람이 뜨거운 돌을 샘 속에 넣어 따뜻하게 한다. 또 목욕하러 오는 일본인이 연달아 끊이지 않았으므로 현(縣)에서 꺼려하여 임금께 아뢰어 그 샘줄기를 막아버렸다. 동래(東萊) 온천이 가장 좋은데, 마치 비단결 같은 샘물이 땅으로부터 솟아 나오는데, 물을 끌어들여 곡(斛)에다 받아둔다. 따뜻한 것이 끓는 것과 같아서 마실 수도 있고 데울 수도 있다. 일본인으로 우리 나라에 오는 자는 반드시 목욕을 하고 가려 하므로, 얼룩옷[班衣]을 입은 사람들의 왕래가 번번하여 주현(州縣)은 그 괴로움이 많았다. 충청도(忠淸道) 충주(忠州) 안부역(安富驛) 큰 길가에 온천이 있는데, 샘물이 미지근하고 별로 뜨겁지 않다. 온양(溫陽) 온천은 꼭 알맞게 따뜻하여 세종(世宗)과 세조(世祖)께서 친히 여러 번 임행(臨幸)하였고, 그뒤에 정희왕후(貞熹王后)도 갔었는데 행궁(行宮)에서 세상을 떠났다. 청주(淸州)에는 초수(椒水)가 있는데, 물은 따뜻하지 않으나 그 냄새가 후추와 같았는데 사람들은 이 물로 씻으면 안질이 잘 낫는다고 하였다. 세종께서 친히 임행하였고, 그뒤에 세조께서 복천사(福泉寺)에 가면서 이곳을 지나다가 머물렀다. 강원도에는 세 개의 온천이 있는데, 그 하나는 이천현(伊川縣)의 북쪽 깊은 산속에 있다. 세종께서 옛 동주(東州)의 들에서 강무(講武)하시고 온천에 들렀었다. 또 하나는 고성현(高城縣)의 속읍인 환가(豢豭)에 있으니 금강산 동쪽 기슭이다. 샘이 큰 시냇가에 있는데, 세조께서 친히 납시어 지금까지도 어실(御室)과 불당(佛堂)이 있다. 나머지 하나는 평해군(平海君) 서쪽 백암산(白巖山) 밑에 있는데, 샘이 상등성이 높은 언덕에서 솟아 나온다. 샘물이 알맞게 따뜻하고 매우 깨끗하다. 중 신미(信眉)가 큰 집을 짓고 쌀을 꾸어주고 받고 하여 목욕하러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베풀었는데, 지금까지도 옛날과 같이 하고 있다. 황해도(黃海道)에 온천이 가장 많다. 백천(白川) 대교온정(大橋溫井)ㆍ연안(延安) 전성온정(氈城溫井)ㆍ평산온정(平山溫井)ㆍ문화온정(文化溫井)ㆍ안악온정(安岳溫井) 등이 있다. 그중에서도 해주(海州)의 마산온정(馬山溫井)이 가장 기이(奇異)하여 미지근한 것도 있고 몹시 뜨거운 것도 있다. 바로 샘 옆이 바다이기 때문에 그 냄새가 좋지 않고 맛은 짜다. 들 가운데 30여 군데쯤 있는데, 그중에는 괴어서 못을 이룬 곳도 있고, 혹은 조그마하게 물웅덩이를 만든 것도 있으며, 혹은 물밑이 뜨거워서 밟기 어려운 곳도 있다. 또 어떤 것은 넘치는 샘이 물을 뿜어내어 뜨거운 물거품이 용솟음쳐서 주위에 있는 진흙이 뜨거워 열 때문에 엉겨서 돌과 같이 단단하다. 채소(菜蔬) 줄기를 그 속에 던져보면 순식간에 익어버린다. 아침 저녁에 김[蒸]이 서려서 온 들이 연기가 낀 것 같고, 평지는 따뜻하여 마치 토상(土床)에 누운 것과 같다. 평안도(平安道)에는 삭주온정(朔州溫井)과 성천온정(成川溫井)이 있고, 또 양덕현(陽德縣)에 온정이 있는데, 그 물이 끓는 탕(湯)과 같아서 날짐승이 털을 데쳐 뜯어낼 수 있을 정도이다. 용강현(龍岡縣) 온정이 가장 기이한데, 물이 뜨거워서 아주 참을성 있는 사람이 아니면 오래 들어가 있을 수 없고, 물을 이끌어 곡(斛)에다 받아두어야만 목욕할 수 있다. 천정(泉井) 속에 조그마한 구멍이 있는데, 너무 깊어서 바다와 통하지 않는가 의심스럽다. 영안도(永安道 함경도의 옛 이름)에도 온천의 우물이 있다. 전라도(全羅道)에는 다만 무장(茂長)의 염정(鹽井)이 있을 뿐 온천은 없다. 지금 이 사실들을 살펴보면 온천은 북방(北方)의 한랭한 심산 골짜기에 많이 있으며, 염기(炎氣)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이 명백하고, 수성(水性)도 또한 각각 다른 종류가 있어서 그 이치를 미루어 생각할 수 없다.
숙도(叔度)ㆍ방옹(放翁)ㆍ번중(藩仲)ㆍ백승(伯勝) 등은 모두 문명(文名)이 있었다. 어렸을 때 술과 계집에 빠져 난봉을 부려서 당시 사람들이 사이(四李)라 불렀다. 여흥(驪興) 신륵사(神勒寺)에서 글을 읽고 학업을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는데, 서울로 돌아가려 하니 부사(府使)가 연석을 베풀고 이를 위로하였다. 사이가 청하기를, “원하건대 기생을 태우고 배를 중류에 띄워 기쁨을 다하고 싶습니다.” 하니, 부사가 이를 허락하였다. 사이가 다투어 배 안에서 기생을 껴안고 풍악 소리를 내어 하늘에 용솟음치게 하고 술에 취하여 주정하고 장난하니, 뱃사공도 모두 머리 끝까지 취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해 사이(四李)가 스스로 노를 저어 순풍에 돛을 달고 흘러 내려와 하룻밤 사이에 한강(漢江)에 이르렀다. 이튿날은 빗물이 크게 불은데다 사공과 여러 기생이 굶주리고 고단하여 갈 수가 없었다. 배를 조금씩 끌고 올라가서 5일 만에야 비로소 부(府)에 도착하니, 부사(府使)가 크게 노하여 기생과 뱃사공을 벌하고 이들을 심문하니, 뱃사공들이 기생들을 모두 범(犯)하였었다. 방옹(放翁)의 장인(丈人) 박씨(朴氏)는 성품(性品)이 매우 인색하여 고령(高靈)에 노적가리 만석(萬石)이 있으나 쓰지를 않았다. 방옹이 그 벗과 함께 고령에 가서 창곡(倉穀)을 가져다가 날마다 소와 말을 잡아서 향락(享樂)하여, 박 노인이 이 소문을 듣고 급히 가서 몰아내려고 하자, 방옹이 말하기를, “명년(明年)에 만약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맹세코 집에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하고, 진주(晉州)의 단속사(斷俗寺)에 있으면서 독서만 하였는데, 방옹이 기묘년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진주에도 같이 과거에 합격한 자가 10여 명이나 있었는데, 성찬(盛饌)을 갖추고 촉석루(矗石樓) 위에다 크게 잔치를 베풀고는, “큰 손님이 장차 이곳에 이르리라.” 하였다. 여러 기생이 해가 저물도록 기다렸더니, 방옹이 가마를 타고 그 친구 몇 명과 함께 누(樓)에 도착하여 의자에 걸터앉았다. 옷은 누추하고 머리에 쓴 갓은 반이나 찢어진데다가 키가 작고 얼굴이 여위어 풍채가 아주 볼품이 없었으므로 기생들이 놀라 말하기를, “이 사람이 큰 손님이요?” 하고 서서 눈웃음만 쳤다. 방옹이 아랑곳하지 않고 큰 소리로, “명년에는 장원급제(壯元及第)하고, 몇 년 안 가서는 감사(監司)가 되리라.” 하고, 며칠을 머물면서 마음껏 즐겼다. 이듬해 갑신년에 과연 장원급제하고 몇 년 뒤에 당상관에 올라 진주에 오게 되었는데, 고운 비단을 걸친 의상이 선명하니 기생들이 탄복하여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지금은 경기 관찰사가 되었다. 번중(藩仲)은 을유년에 장원급제하여 형조 판서가 된 뒤에 죽었고, 숙도(叔度)는 임오년에 급제하여 벼슬이 지중추부사에 이르렀으며, 백승(伯勝)은 병술년에 급제하여 지금은 첨지중추부사가 되었으니, 모두 당시의 호걸들이다.
김구지(金懼知) 군의 자(字)는 근부(謹夫)인데, 개성(開城)에서 서울로 와서 숭례문(崇禮門) 밖에 있는 남의 집 방을 세내어 살았다. 사서 삼경을 깊이 이해하지는 못하였으나 통하지 않는 바가 없었다. 또한 과거에 역시 여러 번 초시(初試)에만 합격하였을 뿐 마침내 급제하지는 못하였다. 사람됨이 순진하고 근면하였으며 쾌활하고 온화하여 사람들과 사귈 때는 예(禮)에 거슬림이 없었다. 이런 까닭으로 많은 조정 명사(名士)들이 이 사람과 사귀었다. 집안이 어려워서 종이 없었고, 남의 여자종을 얻어 첩으로 삼았으며, 항상 여염집의 어린이 수 십 대(隊)를 모아 긴 행랑을 만들어 거처하게 하였다. 자질이 능하고 능하지 못함에 따라 나누어 가르치되, 아침에 모여들게 하고 저녁에는 흩어지게 하였으며, 그 가운데서 능한 자를 뽑아 유사(有司)를 삼았다. 또 일직(日直) 제도가 있었는데, 그 법은 학궁(學宮)의 의례(儀禮)를 모방하였다. 외지 못하는 자와, 게을러서 읽지 아니하는 자와, 다투어 서로 욕하는 자와, 스승과 연장자에게 무례한 자와, 결석한 자와, 늦게 온 자가 있을 것 같으면 일직이 유사에게 글로써 고하고, 유사는 스승에게 고하여, 그 죄의 경중(輕重)에 따라 벌하였다. 10일마다 또 시를 짓게 하여 고하(高下)의 차례에 따라 이름을 뜰에서 부르니, 사람들이 더더욱 근면하게 힘썼다. 세시(歲時) 명절에는 서로 술병을 가지고 와서 드렸다. 나와 유우후(柳于後)ㆍ이숙도(李叔度)ㆍ방옹(放翁)ㆍ이자범(李子犯)ㆍ유관지(柳貫之)가 모두 그 문하에서 나왔다. 이때에 유사덕(劉師德)ㆍ곽신민(郭信民)ㆍ유여흠(兪汝欽)도 모두 가르쳤으나, 김군이 제일 부지런하고 엄하였다. 조정에서 가상히 여겨 특별히 군직(軍職)을 주고 그 뒤에 환관(宦官)의 사부(師傅)가 되게 하였다. 사부가 맡은 일은 환관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내종친(內宗親)으로서 아직 대궐을 나오지 않은 자가 모두 가르침을 받았다. 세조께서 불러 글을 강독하게 할 때 김군이 그 뜻에 능통하여 묻는 대로 대답하니, 모두 이치에 합당하였다. 전교(傳敎)하기를, “이 사람은 다른 사부(師傅)에 비할 바가 아니다. 참으로 쓸만한 인재다.” 하고, 특별히 은대(銀帶)를 하사하고, 장흥 주부(長興主簿)를 배하였다. 성종(成宗)이 월산대군(月山大君)과 함께 가르침을 받았는데 즉위하여서는, 사랑이 매우 두터워 종묘서영(宗廟署令)에 제수되었다. 조관(朝官)이 된 이후부터는 어린이들을 다시 가르치지 아니하고, 항상 사인(士人)과 놀면서 술 마시고 담회(談會)하여 허송하는 날이 없었다.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였고, 나이 70에 벼슬이 통훈에 이르러 죽었으며 자식이 없었다. 김우신(金友臣)ㆍ조륜(趙崙)ㆍ이사강(李思剛) 등이 또한 환관(宦官)의 사부(師傅)로서 임금을 도운 공이 있어 조륜과 이사강은 문관(文官)의 반열(班列)에 오르고, 김우신은 당상관에 올라 호조 참의에 이르렀다. 첨지(僉知) 최세원(崔勢遠)은 경사(經史)에 박통(博通)하였으나 나이가 40이 지나도록 급제하지 못하였다. 세조(世祖)께서 영의정(領議政)이 되었을 때 덕종(德宗)은 도원군(桃原君)이었는데, 결백하고 정직한 선비로 유명한 자들을 뽑아 스승을 삼으려 하니, 첨지(僉知)가 여러 사람의 추천으로 반독(伴讀)이 되어 아침 저녁으로 도움이 많았다. 세조께서 임금이 되고 덕종(德宗)이 세자가 될 때 첨지는 병자과(丙子科)에 급제하였다. 유가(遊街)하는 날에는 동궁(東宮)으로부터 천동(天童)을 모두 내려주었고, 삼관(三館)에서 연회할 때는 반감(飯監)과 각 색장(色掌)이 모두 찬물(饌物)을 가지고 오니, 그 영화가 지극하였다. 덕종(德宗)께서 일찍 승하하시니, 첨지가 전래대로 승진되어 당상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군직(軍職)을 맡는 어려움에 처하였다. 상서(上書)하여 덕종을 도우면서 많은 사랑을 받은 일 등을 말했으나, 성종(成宗)께서 돌보지 않으시고 총애를 희망하는 것이라 하여 끝내 발탁하지 않았다. 첨지가 한을 품은 채로 죽으니, 이것으로 미루어보면 때를 만나고 만나지 못함과 벼슬하고 벼슬하지 못함이 모두 하늘에 달렸다하겠다.
해마다 여름과 겨울에 성균관 유생이 종이에 궐(闕) 자를 써서 공자(孔子)를 왕(王)으로 존경하여 받들었는데, 동학(東學 서울 사학(四學)의 하나. 동부(東部)에 있었음)을 복성공(復聖公 안자)의 나라로 삼고, 남학(南學)을 술성공(述聖公 자사)의 나라로 삼았으며, 중학(中學)을 종성공(宗聖公 증자)의 나라로 삼고, 서학(西學)을 아성공(亞聖公 맹자)의 나라로 삼아 제후가 천자를 우러러봄과 같이 하였다. 성균관 상사(上舍)ㆍ하사(下舍)의 사람을 백관(百官)의 직에 추천하되, 이조가 인물을 전형하여 선발하는 일을 맡아 현부(賢否)를 변별(辨別)하였다. 후보자 추천에 모두 합격하여 승지에 제수된 자에게는 은대연(銀臺宴)을 베풀며, 사람의 성에 공(孔) 자와 구(丘) 자에 관계됨이 있는 자는 모두 종정(宗正)의 직을 주었다. 만약 불손한 자가 있으면 가느다란 띠로 목을 매어 데리고 와서 방 판자 밑에 가두고, 의금부 제조(提調)에게 명하여 죄를 묻게 하며, 심하게 도리를 어기는 자는 초인(草人)의 형상을 만들어서 목을 벤다. 도읍(都邑)을 옮기게 되면 궐(闕) 자를 처음에는 동재(東齋)에 붙였다가 명륜당(明倫堂)에 올려 특사(特赦)를 내린 뒤에 서재(西齋)에 붙인다. 재추(宰樞)가 되는 자는 종이로 띠를 만들어 맥초(麥草)를 붙여 금빛이 나게 하고, 백지(白紙)를 잘라 망건(網巾)에 붙여서 옥관자(玉貫子)라 부른다. 장수가 된 자는 종이를 잘라 깃[羽]을 만들어 갓 위에 꽂아 융복(戎服)의 모양을 만든다. 사학(四學)에서는 사신을 보내어 조회하는데 닭으로 송골매[海東靑]를 삼아 바치며, 예조에서는 온 사신에게 연회를 베풀되, 술 한 잔을 주며 안주로는 볶은 콩을 쓰고, 재(齋)에서 수직(守直)하는 어린아이에게 명하여 솥 뚜껑을 치고 노래를 하면서 대접하니, 이를 동악(動樂)이라 한다. 성균관에서도 또한 사신을 사학에 보내는데 이를 천사(天使)라 하고, 그 사학에서는 베옷과 이불을 방 기둥에 싸서 이를 결채(結綵)라 하여 맞이하였다. 전에 윤심(尹深) 상사(上舍)가 천사가 되어 겉에는 속이 붉은 옷을 입고, 대나무를 타고 저자 복판을 지나자, 사람들이 다투어 웃었는데 윤심은 손을 휘두르며 중국 말하는 시늉을 하면서 옆에 아무도 없는 양 제멋대로 떠들며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석전제(釋奠祭) 첫날은 이름을 뽑아 삼공(三公)을 삼고, 그 나머지 상사(上舍)는 모두 별명(別名)으로 백(伯)을 봉(封)하며, 하재(下齋)에서도 모든 직을 제수하는 데 차등이 있었다. 사학(四學) 유생(儒生)으로서 와서 제기(祭記)를 돕는 자에게는 장난으로 제(題)를 삼아 제술(製述)하게 하고 그 고하(高下)의 차례를 만들어 천장급제(天場及第)라 하였으며, 방(榜)을 뜰에서 부르고 크게 정초(政草)를 써서 대성전(大成殿) 앞에 펴면, 헌관 선생(獻官先生)이 모두 모여 이를 보니, 조정과 다름이 없었다. 태종(太宗) 때에 내환(內宦)이 천도(遷都)의 일을 보고 달려가 상주(上奏)하기를, “성균관 유생이 모반(謀叛)합니다.” 하니, 태종이 자세히 그 연유를 물어보고 전교하기를, “이는 유생의 고례(古例)이다. 그 유래가 오래되었으니 다시 말하지 말라.” 하였다. 나는 옛날 벼슬하던 젊은 시절에 이것을 하였는데, 기묘년 천도하는 소문(詔文)에 동도(東都)의 나쁜 점을 논하여, “산 우뚝한 것이 땅을 덮어 험하고, 못이 시내에 이르러 무너졌다. 맹지(孟智)는 개ㆍ돼지의 마음을 품고 양근(良謹)은 이리ㆍ승냥이의 횡포(橫暴)를 마음대로 한다.” 하였고, 서도(西都)의 아름다움을 찬(贊)하기를, “암랑(巖廊)의 사이에 큰 인물이 많고 수사(洙泗) 물가에 버들이 무성하도다.”하였으며, 희롱하여 말하기를, “더욱 천령(千齡)의 운수를 북돋우고, 길이 만년의 아름다움을 기른다.” 하였다. 상사(上舍) 임맹지(任孟智)의 별명은 견(犬)이요, 정양근(鄭良謹)의 별명은 여진(女眞)이며, 또 최개지(崔盖地)ㆍ지달하(池達河)ㆍ박암신(朴巖臣)ㆍ정량(鄭良)ㆍ정석(鄭奭)ㆍ최제(崔濟)ㆍ최수(崔洙)ㆍ양수사(楊守泗)ㆍ유종준(柳宗濬)ㆍ권의(權依)ㆍ이익배(李益培)ㆍ전영부(全永孚)ㆍ오만년(吳萬年)ㆍ윤령(尹齡)은 모두 유생(儒生)의 이름을 사용한 것이다.
문무과(文武科)에 동시에 방(榜)을 같이 한 자를 동년(同年)이라 하는데, 잡과(雜科)와 승시(僧試) 선과(禪科)에 합격한 자도 또한 문무(文武)를 동년이라고 하니, 이는 끌어다 문무과와 같게 하기 위함이다. 그 시법(試法)은 선종(禪宗)에서는 《전등록(傳燈錄)》과 《선문염송(禪門拈頌)》을 강(講)하고, 교종(敎宗)에서는 《화엄경(華嚴經)》을 강하여 각각 30명을 뽑는다. 전에는 내시별감(內侍別監)이 명을 받들고 갔고, 지금은 예조 낭청(郞廳)이 간다. 그 종(宗)의 판사(判事) 장무(掌務)와 전법(傳法) 3명과 증의(證義) 10명이 함께 앉아 시취(試取)하는데, 뇌물을 판사와 증의에게 바치면 합격하고, 뇌물을 바치지 않으면 능력이 있고 이름이 있는 자라도 합격하지 못하니, 사사로움을 따르고 욕심이 많은 것은 세상 사람들보다 더 심하다. 합격한 사람은 대선(大禪)이라 한다. 선종에서는 대선에서 중덕(中德)으로, 중덕에서 선사로, 선사에서부터 올라 대선사(大禪師)가 되는데, 판사를 임명한 사람은 도대선사(都大禪師)라 한다. 교종(敎宗)에서는 대선에서 중덕이 되고, 중덕에서 대덕이 되며, 대덕으로부터 올라 대사(大師)가 되는데, 판사에 임명된 자는 도대사(都大師)라 한다. 양종(兩宗)에서는 내외의 절을 각각 15개씩 나누어 관장한다. 중덕에 오른 자는 주지(住持)로 추천하여 임명하고, 선종과 교종은 삼망(三望)을 갖추어 예조에 올리며, 예조는 이조에 옮겨 입계(入啓)하여 임금에게 낙점(落點)을 받는다.
세종(世宗)이 집현전 유신(儒臣) 신고령(申高靈) 등 여러 명을 뽑아 휴가를 주어 진관사(津寬寺)에서 독서하게 하고, 그후에는 홍익성(洪益城 홍응(洪應))ㆍ서달성 (徐達城 서거정(徐居正))ㆍ이명헌(李明憲) 등 여러 명을 장의사(藏義寺)에서 독서하게 하였다. 세조(世祖)가 집현전을 혁파하고 유신으로 유명한 자를 뽑아 겸예문(兼藝文)이라 하였는데, 맡은 일은 없이 다만 궁궐에서 치도를 논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정사(政事)를 의논하였는데, 여기에 뽑힌 사람이 많았다. 성종(成宗)이 다시 홍문관(弘文館)을 설치하였으니, 채기지(蔡耆之)ㆍ허헌지(許獻之)ㆍ조태허(曺太虛 조위(曺偉))ㆍ권숙강(權叔强)ㆍ양사행(楊斯行)ㆍ유극기(兪克己) 등이 명을 받아 장의사에서 독서하였다. 옛날 승사(僧舍)가 남호(南湖) 귀후서(歸厚署 조선 시대 장례에 관한 사무를 보던 관아)뒤 언덕에 있는데, 세상에서 16나한(羅漢)이 영험(靈驗)이 있다 하여 향화(香火)가 끊이지 않았다. 중 상운(尙雲)이 그 사(舍)에 거처할 때 장가를 들어 아들을 낳았는데, 사헌부가 중에게 죄를 신문하여 처벌하고 속인(俗人)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불상은 흥천사(興天寺)로 옮겼다. 그리고 그 집을 홍문관(弘文館)에 주어 번(番)을 나누어 독서하게 하니, 독서당(讀書堂)이라 하였다. 조정 선비로 구경하러 와서 노는 사람들은 술을 많이 가지고 오고, 또 임금께서 가끔 술과 음식을 하사하여 연석을 배풀게 하고 위로하여,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고 있다.
성 밖 3면에 사대원(四大院)이 있는데, 세조(世祖)가 재간 있는 중에게 명하여 이를 수축하게 하였다. 보제원(普濟阮)은 동대문 밖에 있고, 3월 상사(上巳)와 9월 중양(重陽)에는 누(樓) 위에서 기로 (耆老)와 재추(宰樞)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홍제원(洪濟院)은 사현(沙峴) 북쪽 교외에 있는데, 들 가운데 높은 언덕이 있고, 푸른 소나무가 그 위에 가득 찼으며, 위에 조그마한 정자가 있다. 중국 사신이 들어오는 날에는 이 정자에 머물러 옷을 갈아입었다. 그뒤 정자가 허물어지자 지금은 천사가 원(院)에서 쉰다. 제천정(濟川亭)은 한강 북쪽 언덕 위에 있는데 경치가 뛰어났다. 유람하려는 중국 사신은 우선 이 누에 오르며 벼슬아치로서 객을 영송(迎送)하는 사람들이 나날이 모여든다. 사평원(沙平院)은 한강의 남사(南沙) 교외에 있는데 지세가 낮아 오직 날이 저물어서 강을 건너지 못하는 행인만이 자고 가는 곳이다. 양화도(楊花渡) 북쪽 언덕에는 희우정(喜雨亭)이 있는데,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집이었다가 나중에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소유로 되었다. 성종(成宗)이 해마다 농형(農形)을 살필 때와 세곡(稅穀)을 실어나르는 배를 모아 수전(水戰)을 익힐 때면 친히 임행(臨幸)하였는데, 망원정(望遠亭)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어제(御製) 시 몇 수가 있었는데, 문명(文名) 있는 조신에게 명하여 모두 차운(次韻)하게 하여 판(板)을 둘러 정자 위에 걸어두었는데, 대군(大君)이 죽은 뒤로는 성종(成宗)이 정자에 가지 않았으며, 제천정에 자주 행차했으나 정자가 좁은 까닭으로 개영(改營)하게 하였다. 어떤 중이 전천교(箭串橋)를 구축할 때 많은 돌을 채벌하여 대천을 건너는 다리를 만들었는데, 다리가 3백여 보를 넘고 안전하기가 집 안에 있는 것과 같아서 행인이 평지를 밟는 것과 같았었다. 그리하여 성종(成宗)이 그 중을 유능하다고 여겨 구축하도록 명하였다. 관력(官力)을 번거롭게 하지 않으려고 미포(米布)를 많이 급여하였는데, 중은 낭비만 하고 수 년이 되어도 성과가 없이 겨우 동우(棟宇)만을 세워 성종이 끝내 올라가 보지 못하였으므로 백관(百官)이 슬퍼하였다. 그뒤에 천사(天使) 왕헌신(王獻臣)이 올 때 조정에서는 수축을 마치고 단청을 가하였다. 그뒤에 전교(箭郊)에 큰 다리를 만들어 제반교(濟盤橋)라 하고, 또 동대문 밖 왕심평(往尋坪)에 큰 다리를 구축하여 영도교(永渡橋)라 하였는데, 어필(御筆)로 정하였다.
유문양(柳文陽)이 말하기를, “육조(六曹) 가운데 깨끗하고 조용하기가 예조만한 곳이 없다. 내가 지금 판서가 된 지 5년이나 되었지만 아직도 싫증을 느끼지 못하겠다. 다만 어려운 것이 셋 있는데, 예의사(禮儀使)가 그 첫 번째 어려움이요, 왜야인(倭野人)을 접대하는 것이 두 번째 어려움이며, 제학(諸學)의 취재(取才)가 그 세 번째 어려움이다.” 하였다.
고려 공민왕(恭愍王)이 홍건적(紅巾賊)의 난(亂)을 만나 남쪽 청주(淸州)로 행차할 때 원암역(元巖驛)에 이르니, 그때에 행촌(杏村) 시중(侍中) 이암(李嵓), 칠원(漆原) 시중 윤환(尹桓), 서곡(瑞谷) 시중 염제신(廉悌臣), 당성(唐城) 홍원철(洪元哲), 수춘(壽春) 이수산(李壽山), 계성(啓城), 왕재(王梓), 회산(檜山) 황석기(黃石奇)가 있었는데, 모두 나이 많고 덕이 높아 칠로(七老)라 일컬었다. 연집시(宴集詩)에,
벽옥의 술잔은 깊어 맛있는 술이 향기로운데 / 碧玉杯深美酒香
거문고 소리는 늘어지고 피리소리는 길도다 / 嵇琴聲緩笛聲長
그 가운데 또 가느다란 노래 소리 섞이니 / 箇中又有歌喉細
칠로가 서로 기뻐하는데 귀밑털이 서리와 같도다 / 七老相歡鬢似霜
한 것은 황석기(黃石奇)의 사(辭)다. 사가 비록 묘하지는 못하나 그 당시 여러 노인의 가상을 상상해 볼 만하다.
독곡(獨谷 성석린(成石璘)의 호)이 기우(騎牛) 이선생(李先生)과 친하였는데, 하루는 방문하였으나 만나지 못하였다. 문짝에 쓰기를,
덕이는 태평한 해를 보지 못했는데 / 德彝不見太平年
80에 또 봄을 만났으니 다시 하늘에 감사하도다 / 八十逢春更謝天
도리 꽃이 성에 가득하고 향우가 지나갔는데 / 桃李滿城香雨過
적선은 어떤 술집에서 자고 있는가 / 謫仙何處酒家眠
하였다. 또 어렸을 적에 조시중(趙侍中)이 좌주(座主)를 맞아 잔치를 하였다. 독곡이 그 자리에서 축하하는 시를 지었는데,
선비를 보면 바야흐로 좌주의 어짊을 아나니 / 得士方知座主賢
시중이 시중 앞에 헌수하도다 / 侍中獻壽侍中前
하늘이 좋은 비를 내려 가객을 머무르게 하고 / 天敎好雨留佳客
바람은 꽃잎을 날려 춤추며 연석에 떨어지게 하도다 / 風送飛花落舞筵
하여 좌우에 있는 사람이 모두 탄복하였다.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성석용(成石容). 독곡의 형)이 듣고 책망하기를, “선비가 재주를 꺼림은 샘많은 계집을 싫어하는 것보다도 심하거늘 어찌하여 너는 사양하지 않고, 감히 먼저 시를 지어 몸가짐을 생각하지 않는가.” 하였다. 이것은 당시는 말세 사람들이 흔히 재주 있음을 시기하여 서로 해하는 까닭으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김문평(金文平)은 문장이 웅혼(雄渾)하고 종횡무진 누비고 다니며. 오로지 사마자장(司馬子長)의 궤범(軌範)을 모방하였는데, 온 세상에 맞설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 시 또한 기상(氣像)이 높고 깊이 골수(骨髓)를 얻었다. 성품이 검속(檢束)할 줄을 모르고 압운(押韻)이 바르지 못하여 모두들 시(詩)가 문(文)보다 못하다고 하였으나 실상은 시나 문이나 모두 넉넉하였다.격옹도(擊瓮圖) 시에,
독 속에 있는 천지가 갑자기 활짝 열리어 / 瓮中天地忽開豁
산천 품물이 한가지로 밝게 되살아나도다 / 山川品物同昭蘇
하였다. 중추(中樞) 심산재(沈山齋) 시에는,
삐딱한 사립문 시냇가 언덕에 면해 있어 / 紫門不整臨溪岸
산비가 아침마다 내려 물이 불어남을 보겠도다 / 山雨朝朝看水生
하고, 용궁헌(龍宮軒) 제시(題詩)에는,
마음껏 백배를 마시고 누상에 누워 / 痛飮百杯樓上臥
발을 걷으니 남북이 모두 청산이로다 / 捲簾南北是靑山
하였다. 또 산사(山寺)를 두고 시를 지었는데,
창은 비었는데 중은 장삼을 깁고 / 窓虛僧結衲
탑은 조용한데 객이 시를 짓도다 / 塔靜客題詩
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생각 너머의 정취를 얻은 것으로 보통 사람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송사문(宋斯文)은 용모가 못생기고 행동거지가 거칠고 옹졸하며 긴 수염이 더부룩하였고 눈이 어둡고 사팔뜨기였다. 과거에 급제한 뒤부터 장년(長年)에 이르는 동안 외방교수(外方敎授)로 있다가 교체되어 혜민서(惠民署 조선 시대 구차한 백성을 치료 하여 주는 관아) 교수가 되어, 오로지 의녀(醫女)를 가르치는 데 힘썼다. 의녀는 각사(各司)에서 나이 어린 계집종을 뽑아서 쓰는데, 단정하고 교태 있는 계집종들이 다투어 와서 글을 배울 때면, 송사문의 모습은 마치 늙은 곰이 꽃 수풀 속에 꿇어앉는 것 같았다. 악원(樂院) 옆에 살았는데, 나날이 왕래 하면서 동료들을 만나게 되어,“어디를 가느냐.”고 물으면 송사문이 소리를 높여 읊기를,
우거는 장악원에 이웃해 있고 / 居隣掌樂院
직무는 혜민서를 맡았도다 / 職帶惠民署
아침부터 화류지에 있으면서 / 朝從花柳地
또 다시 화류를 향하여 가도다 / 又向花柳去
하여 듣는 사람이 이가 시리도록 웃었다.
조정에서는 3월 상사일(上巳日)과 9월 중양절(重陽節)마다 보제루(普濟樓)에서 기로연(耆老宴)을 베풀고, 훈련원(訓鍊院)에서 기영회(耆英會)를 베풀고 모두 주악(酒樂)을 하사하였다. 기로연에는 전직 당상(堂上)이 가서 참례하고, 기영회에는 70세가 된 2품 이상의 종재(宗宰)와 정일품 이상 및 경연 당상(經筵堂上)이 가서 참례(參禮)하였다. 예조 판서는 모든 일을 고찰하여 연회를 관리하고, 승지(承旨)도 또 명을 받들어 간다. 편을 나누어 투호(投壺)하여 이기지 못한 자는 술잔을 가져다가 이긴 사람에게 주고 읍(揖)하고 서서 마신다. 악장(樂章)을 연주하고 술을 권하여 연회를 열고, 크게 음악을 연주하여 각각 차례로 술잔을 전하여 마시며, 반드시 취한 다음에야 끝낸다. 날이 저물어 서로 부축하여 나오니, 이 회에 참석하게 된 사람들은 모두 영광으로 여겼다.
조정은 문무(文武)의 선비를 대우함이 한결같다. 춘추(春秋) 상정(上丁)에 소왕(素王 공자)에게 석전(釋奠)을 지내고 이튿날 음복연(飮福宴)을 베푸는데, 의정부(議政府)와 육조(六曹)의 당상관과 낭청의 문신으로 있는 자가 모두 가서 참례하고 훈련원 관원도 참여한다. 춘추에 큰 독(纛)에 제사를 지내고 이튿날은 음복연을 베풀어 주악을 하사하니, 의정부 육조(六曹) 당상(堂上)이 가서 참례하고 성균관원(成均館員)도 역시 참여한다. 문무 남행원(南行員 음관)은 선생을 불러가며 서로 술을 권하다가 머리끝까지 취하기도 한다. 매년 상사일과 중양절(重陽節)에는 유생 과시(儒生科試)를 베풀고, 우두머리로 합격한 세 사람은 회시(會試)에 나가는 것을 허가한다. 또 문신 과시(文臣課試)를 의정부(議政府)에서 베풀고 수석인 사람은 가자(加資)하는데, 정부 육조(六曹)ㆍ관각(館閣)ㆍ당상관(堂上官)이 참여한다. 또 춘추(春秋)로 무도시(武都試)를 베풀고 초종장(初終場)에는 주악을 하사하여 정부 육조ㆍ도총부(都摠府) 당상관이 참여하고, 그 나머지 날에는 당상관 각각 한 명이 참여한다. 1등(等) 한 사람은 수에 상관없이 가자하고 그 나머지는 벼슬을 준다. 대개 연품(宴品)이 같고 문무(文武)가 한 가지이나, 훈련원에 나가는 것을 즐겨하고, 성균관에 가는 것을 꺼리는 것은 다름 아니라, 무의 방탕함을 즐기고 문의 예법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성종(成宗)이 듣고 문무 연회(文武宴會)가 있는 날은 정부 육조ㆍ당상관에게 명하여 전원이 가서 참석하게 하였으나, 처음에는 모두 갔으나 그뒤에는 좀 소홀해졌다.
세종(世宗) 갑인년에 별시(別試)를 친 다음 방을 내거는 날 상사(上舍) 박충(朴忠)이 자라처럼 움츠리고 집에 있으면서 심부름하는 종을 시켜 방목(榜目)을 가서 보게 하고 앉지도 못하고 서서 기다렸다. 저녁 때에 그 종이 천천히 돌아와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앉아서 말에게 먹일 여물만을 장만하고 있었다. 상사가 낙담하여 누웠다가 천천히 돌아보면서 묻기를, “방(榜)에 내 이름이 없더냐?” 하니, 종은 “들긴 들었으나 별로 빛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사가, “어찌되었느냐?”물으니, 종이 말하기를, “최항(崔恒)께서는 장원이 되고 어르신은 말좌가 되었나이다.” 하니, 상사가 왈칵 성을 내어 낯빛을 변하고 크게 꾸짖으면서, “아, 야 이놈아, 그것은 내가 바라던 바이다.” 하였다. 최항은 나이 젊은 유학(幼學)이요, 박충은 나이 많은 생원이라 그 종은 말좌라고 부끄럽게 여겼지만 상사는 말좌를 다행으로 생각한 것이다.
성균관의 상하재(上下齋)는 각각 50명이며, 동서(東西)가 모두 2백 명이니, 하재는 사학(四學) 유생 중에 뛰어난 사람으로써 충당하였다. 그 외에 동서학(東西學)에서 각각 3명씩 납미(納米)를 허하고, 찬(饌)은 관(官)에서 급여하면서 사량(私糧)이라 이름하였다. 영성(寧城 최항)이 사량으로 관에 있었으나, 이해 별시(別試)에는 삼관(三館)에서 사량을 거절하여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되었다. 영성이 표(表)를 올려 말하기를, “먹는 데는 비록 공사(公私)의 분별이 있으나 학문에는 너와 나의 구별이 없습니다.” 하고, 시험 장소에 들어가게 되니 시험장 안의 늙은 상사들이 비웃기를, “어디에 있는 가죽 불알이 이같이 날뛰느냐.” 하니, 영성이 답하기를, “당신 애비는 철불알이오?” 하였다. 마침내 장원에 뽑혀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고 훈공과 업적이 한 시대에 으뜸이었다.
태종(太宗) 병신년 중시(重試)에 이조 정랑 김자(金赭)가 병조 정랑 양여공(梁汝恭)과 함께 시험장에 들어갔는데, 양여공은 문장에 능하고 김자는 호걸이었다. 양여공이 해가 질 무렵에야 시편(詩篇)을 작성하였는데, 감자가 양여공에게 말하기를, “너는 향생(鄕生)으로서 병조 낭관이 되었으니 족하다.” 하고는, 시권(詩卷)을 빼앗아 이름을 고쳐 써서 바쳤는데, 김자가 그렇게 해서 장원급제하였다.
세종(世宗) 병진년 별시(別試)에 처음에는 서의(書疑 과제(科題)ㆍ시ㆍ부ㆍ표책(表策)ㆍ의(疑)ㆍ의(義) 중 하나)로써 하다가 갑자기 대책(對策)을 썼다. 윤영평(尹鈴平 윤사균(尹士均))은 어려서부터 과거 공부에는 소질이 없었는데 우연히 서울에 왔다가 친구를 따라 응시하여 친구들의 힘을 입어 선(選)에 들었으나, 전시(殿試) 날에는 친구들이 자기의 답안 작성에만 몰두하여 도움을 얻지 못하였다. 윤영평은 초지(草紙)를 가지고 한 마디도 쓰지 못하고 있는데, 해가 질 무렵에 회오리 바람이 어지럽게 일어나 어떤 서초(書草)가 앞에 날아와 떨어져 윤영평이 드디어 주워서 써 바쳤는데 장원에 뽑혔다. 서초는 강희(姜曦)가 지은 것으로, 강희는 기미년 별시에서 제 일등으로 합격하였다.
숙도(叔度)가 대사헌으로부터 성균관 대사성으로 옮겨 제수되자 길이 먼 것을 꺼려 희롱하기를, “사성(司成)이란 것은 유생의 본보기가 되어야 할 것이니, 마땅히 경서에 밝고 행동을 잘 닦은 자로 삼아야 할 것인데 내가 무슨 재주가 있다고 이 임무를 맡겠는가. 최경례(崔敬禮)는 반궁(泮宮)의 옆에 살고 능히 우공(禹貢) 한 편을 외우니, 이도 역시 대사성이 될 만하다. 재주가 있고 가까운 곳에 거처하니 어찌 불가하겠는가.” 하였다. 최경례는 무인(武人)으로 젊어서 다만 우공을 외울 뿐이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숙도의 말을 듣고 웃지 않는 이가 없었다.
조카 사형(士衡)은 성품이 너그러웠다. 밤에 아내와 함께 누웠을 때 마침 사형은 잠이 깨어 있었는데, 계집종이 방에 들어와 자루를 열고 쌀을 가져갔다. 이튿날 아침에 아내가 자루를 검사하여 이 사실을 알고 계집종과 사내종을 때렸다. 사형은 아직 누워서 일어나지도 않고 그 일을 묻지도 않다가 천천히 말하기를, “쌀을 훔친 자를 내가 아오.” 하고는, 또 말이 없었다. 아내가 말하기를, “만일 알 것 같으면 말해 보십시오.” 하니, 사형이 말하기를, “쌀 훔친 자는 종년 아무개인데 몇 말을 가져갔소.” 하였다. 아내가 큰 소리로, “왜 그때에 말하지 않으셨소.” 하니, 사형이 웃으면서, “당신 잠 깨울까봐 말하지 않았을 뿐이오.” 하였다. 사람들이 그가 비록 말하지 않음은 비웃었으나 그 진실하고 솔직함은 좋아하였다.
글씨 잘 쓰기도 어렵지만 제액(題額 액자에 그림이나 글씨를 그리거나 씀)은 더욱 어렵다. 제액에 있어서는 조자앙(趙子昻)의 필법도 이설암(李雪庵)에게 양보했거늘, 하물며 자앙(子昻)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에 있어서랴. 우리 나라 공민왕(恭愍王)이 쓴 강릉(江陵) 임영관(臨瀛館)과 안동(安東) 영호루(映湖樓)는 참으로 능숙하고 힘차서 보통 사람들이 따를 바가 아니다. 강릉관(江陵館)은 요즈음 화재를 입어 그 액자를 잃었으니 아까운 일이다. 내가 개경(開京) 안화사(安和寺)에 갔을 때 전액(殿額)을 보니, 바로 송(宋) 나라 휘종(徽宗)이 쓴 것이요, 문액(門額)은 채경(蔡京)의 글씨라, 비록 모두 군신(君臣)으로서 도를 잃은 사람이지만, 그 연대가 오래되고 필법이 묘한 것은 보배라 할 만하다. 서인 이용(李瑢 안평대군)이 쓴 대자암(大慈菴)ㆍ해장전(海藏殿)ㆍ백화각(白華閣)의 글자는 울연(蔚然)히 날아 움직이는 느낌이 있으니, 또한 훌륭한 보물이다. 지금 모화관(慕華館)은 제학(提學 신장(申檣))이 쓴 것인데 비록 이용만은 못하나 역시 볼 만하고, 우리 백씨(伯氏)가 쓴 경복궁(景福宮) 문전의 액자는 오로지 이설암을 모방한 것이지만 찬찬하고 법이 있어 사람들이 모두 훌륭하게 여긴다. 정국형(鄭國馨)이 쓴 창덕궁(昌德宮)의 제전(諸殿)ㆍ제문(諸門)의 액자는 자체(字體)가 바르지 못하고 짜이지 못하여 어긋난 데가 많다.
○ 허문경공(許文敬公 허조)은 조심성이 많고 엄격하여 집안을 다스리는 데도 법도가 있었다. 자제의 교육은 모두 소학(小學)의 예를 써서 하였는데, 조그마한 행동에 있어서도 반드시 삼갔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허공(許公)은 평생에 음양(陰陽)의 일을 모른다.” 하니, 공이 웃으면서, “만약 내가 음양의 일을 알지 못하면 후(詡 큰 아들)와 눌(訥 둘째 아들)이 어디에서 나왔겠소.” 하였다. 이때에 주읍(州邑)의 창기(娼妓)를 없애려는 의논이 있어서 정부 대신에게 물었더니, 모두 “없애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공에게 이 말이 미치기 전에 사람들은 모두 그가 맹렬히 반대할 줄 알았는데, 공이 이 말을 듣고 웃으면서, “누가 이 계획을 세웠는가. 남녀 관계는 사람의 본능으로서 금할 수 없는 것이다. 주읍 창기는 모두 공가(公家) 소속이니, 취하여도 무방한데, 만약 이 금법(禁法)을 엄하게 하면 사신으로 나가는 나이 젊은 조정 선비들이 모두 그릇되이 사가(私家)의 여자를 빼앗게 될 터이니, 많은 영웅 준걸이 죄에 빠질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없애는 것이 마땅치 않은 줄로 안다.” 하여, 마침내 공의 뜻을 좇아 전과 다름없이 그냥 두고 없애지 않았다.
○ 둔촌선생(遁村先生 이집(李集))은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나서 사귀는 사람은 모두 당시에 영웅호걸이었다. 세상일을 비방하다가 말이 신돈(辛旽)에게 미쳤다. 신돈이 몰래 해치려고 하자, 선생은 아버지를 모시고 도망갔다. 동년(同年) 최원도(崔元道)가 영천(永川)에 산단 말을 듣고 드디어 그를 찾아가니, 최원도가 매우 두텁게 접대하고 3년을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마침 선생의 아비가 세상을 떠났는데, 최원도는 빈렴(殯斂)의 모든 일을 자기 아비와 똑같이 하여 그 어머니 무덤 옆에 장례를 지내게 하고 시를 지어주면서 말하기를,
세상의 어지러움을 슬퍼하여 눈물로 옷깃을 적시는구나 / 慷慨僞時淚滿襟
나그네의 효도와 정성은 저 세상에까지 이르도다 / 流離孝懇達幽陰
한산은 아득히 멀어 구름과 연기로 가로막히고 / 漢山迢遞雲煙阻
나현은 돌고 돌아 풀과 나무가 무성하도다 / 羅峴盤回草樹深
하늘이 쌍마의 갈기의 선후를 점침과 같으니 / 天占後先雙馬鬛
누가 군과 나 두 사람의 마음을 알리오 / 誰知君我兩人心
원하건대 세세에 길이 이와 같이 하여 / 願焉世世長如此
모름지기 우리 우정 굳게 굳게 하리라 / 湏使交情利斷金
하였으니,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모두 그 신의를 칭송하고 있다. 나현은 어머니를 장례지낸 곳이데, 지세가 도내에서 으뜸이었다. 그뒤에 최씨는 쇠(衰)하고 이씨는 귀성(貴盛)해지자 사람들은, “객이 주기(主氣)를 빼앗았다.” 하였다.
장인(匠人)의 임무는 비록 천하지만 성품이 공교한 사람이 일을 해야 하는 까닭에 세상 적임자가 드물다. 국초(國初)에 환자(宦者) 김사행(金師幸)과 세종조(世宗朝)에 이천과 장영실은 벼슬이 2품에 이르렀다. 그뒤에 김우묘(金雨畝)와 이명민(李命敏)이 있었는데 이명민은 창덕궁(昌德宮)의 인정전(仁政殿) 짓는 것을 감독하였는데 계유(癸酉)의 난에 죽었다. 세조조(世祖朝)에는 김개(金漑)가 제조(提調)가 되었었고, 최근에는 김극련(金克鍊)과 임중(林重)이 감역(監役)이 되었으며, 지금은 김영우(金靈雨)와 이지강(李止堈)이 그 임무에 능숙하다.
노선성(盧宣城 노사신(盧思愼))이 친구와 함께 술을 마실 때 숙도(叔度)가 취하여 주위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호언장담하였다. 차공(次公)이 말하기를, “너의 기상(氣像)이 마치 번쾌(樊噲)와 같다.” 하니, 숙도가, “번쾌는 한(漢) 나라의 명장이니, 너의 비유함이 정당하다.” 하고, 더욱 의기양양하여 번쾌로 자처하였다. 차공이 말하기를, “번쾌를 죽여야 마땅하다.”하니, 숙도가 그때에서야 말이 없는지라 온 좌중(座中)이 모두 웃었다.
중추(中樞) 안율보(安栗甫)는 그 성격이 친구를 사랑하여 술자리에서는 화목하여 취하면 친구 손을 잡고 서로 희롱하였다. 예조 정랑이 되어 공사(公事) 때문에 판서 홍인산(洪仁山 홍윤성(洪允成))을 찾아가자 홍인산이 술자리를 베풀었다. 두 공이 모두 잘 마시는지라 종일토록 술에 빠져 있었다. 사랑하는 첩이 술잔을 권하는데 바로 홍인산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여자였다. 중추(中樞)가 억지로 그 손을 잡으니, 여자가 놀라 일어나다가 적삼 소매가 끊어졌다. 중추가 따라나오다가 엎어져 뜰 가운데 누워 인사불성이 되었는데, 때마침 소나기가 내려 옷이 모두 젖었다. 홍인산이 거두지 말도록 종에게 경계하였는데 날이 저물자 허둥지둥 집으로 돌아갔다. 홍인산이 의상을 보내며 말하기를, “천우(天雨)가 무정하여 귀하의 옷을 더럽혔는데, 이는 실로 내가 술을 권해서 그렇게 된 것이니 옷 한 벌을 갖추어 보내거니와, 여자의 소매를 끊은 것은 그대가 스스로 변상하여 주시오.” 하였다. 중추가 그 연고를 물어서 알고는 크게 놀라면서 말하기를, “당상(堂上)에게 무례했으니 무슨 낯이 있겠는가.” 하고, 벼슬을 내어놓고 떠나려 하니 홍인산이 듣고 굳이 말렸다. 중추가 그 집에 가서 사죄하니 또 술상을 베풀었다. 실컷 마셔 크게 취하여 다시 여자의 손을 잡으니, 홍인산이 껄껄 웃으며 말하기를, “안공(安公)의 풍정(風情)은 당할 자가 없도다.” 하였다. 사림에서 웃음거리로 전한다.
이광성(李廣城 이극배(李克培))은 문장(文章)과 다스림의 재주가 모두 넉넉해서 항상 스스로 국사(國士)라 하고, 인물을 평할 때는 좋게 말하는 경우가 드물었으나, 특별히 백씨(伯氏)와는 아주 절친한 사이였다. 이광성이 도승지이고 백씨가 우승지였는데, 이광성이 어느 기생을 사랑하여 자취를 감추자 백씨가 간 곳을 알아내고 시를 지어 말하기를,
관아가 파하여 돌아옴에 날이 저물려 하는데 / 衙罷歸來日欲低
명화와 국사가 둘이 서로 만났구나 / 名花國士兩相擕
뉘 집 골목 속에 수레를 숨겼는가 / 誰家巷裏藏車駕
사온서의 동쪽이요, 예부의 서쪽일세 / 司醞東邊禮部西
하고는, 몰래 시를 그 벽에 붙여두었는데, 이광성이 보고 찢어서 소매 속에 넣어버렸다. 이로부터 더욱 뜻이 서로 맞았다. 이광성이 체질될 적에 세조(世祖)가, “군(君)에 대신할 자가 누구냐?”고 물으니, 이광성이 아뢰기를, “성(成) 아무개보다 나은 사람이 없습니다.” 하여, 백씨가 도승지에 등급을 뛰어넘어 제배(除拜)되었다.
강자평(姜子平) 공이 노선성(盧宣城)과 서로 우의가 두터웠다. 노선성의 아들 노희량(盧希亮)은 도승지이고, 강공(姜公)은 우승지였는데, 하루는 저녁 때가 되어 노선성이 미복(微服) 차림으로 강자평의 집에 가서 신분을 알리면서, “도승지가 왔다.” 하니, 강공은 관대를 정제하고 달려나와서 절하였다. 노선성이 크게 웃자 강공이 일어나서 곧 관복을 벗고 말하기를, “내가 늙은이에게 속았다.” 하였다. 그때 사람들이, “자식에게 예를 지키고 아비에게 예의를 지키지 않는 것은, 친분과 명위(名位)가 같지 않은 까닭이다.” 하여 옳은 일이라 하였다.
어판원(魚判院 어효첨(魚孝瞻))은 일처리가 확실하였다. 내자시(內資寺) 판사(判事)가 되어 공계(公鷄)를 길렀는데, 동료 부정(副正)이 손님을 맞으면서, 찬이 없자 닭 한 마리를 삶아 먹었다. 공이 이를 알고 매일 아침 사원(司員)이 모든 곳에서 아전에게 명하여, 사(司)의 회계를 읽게 하고 끝에 가서는 반드시, “부정이 암탉 한 마리를 훔쳐 먹어버렸다.” 하고, 날마다 이와 같이 했다. 부정이 나와 꿇어앉아서, “하관(下官)이 틀림없이 갚겠습니다.”하자, 공이 말하기를,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간 곳을 알고자 함이다.” 하였다. 공이 형조 참판이 되어 관아에 나간 날에, 어떤 아전이 부근(附根)의 제수(祭需)를 찾으니, 공이 말하기를, “부근은 무슨 물건이냐. 부근을 가져오너라.” 하였다. 아전은 부득이하여 지전(紙錢)을 거두고 절하면서, “이것은 저의 과실이 아니라 어 참판의 과실입니다.” 하니, 공이 곧 이것을 태워버렸다. 공이 공조 참판이 되었는데, 공조는 일이 없는 한가로운 벼슬이었다. 전에 있던 당상관은 한 달에 한두 차례 관청에 나올 뿐이었지만, 공은 매일 진시에 와서 유시에야 일을 마치니, 공조 낭관이 괴로움을 참지 못하여 원망하였다. 공은 말하기를, “관(官)에 있으면 이치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 만에 하나 예기치 않게 공사(公事)를 물으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하였다. 청명한 날이라도 반드시 우산을 가지고 다녀 사람들이 그의 고집스러움을 비웃었다. 그러나 공은, “하늘의 변화는 알 수 없으니 혹시 오늘 비가 올지 어떻게 알겠는가.” 하였다.
○ 김현보(金賢甫)는 용모가 파리하고 약하였는데, 그의 친구 어자경(魚子敬)이 조롱하기를, “김현보가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燕京)에 갔을 때 중도에 죽었다는 소식이 잘못 전해져서, 온 집안이 통곡하거늘 한 종이 문에서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면서 통곡하여, ‘용모가 아깝다.’하였는데, 그 종이 무슨 마음으로 그 용모를 아깝다 했는지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김현보가 가사옹(假司饔) 제조(提調)가 되자 어자경이 말하기를, “현보가 나라 잔칫날에 사옹원(司饔院) 차비(差備)에 참례(參禮)하고 돌아와 어미를 뵙고, ‘오늘 매우 기쁜 일이 있었습니다.’ 하니, 어미가 ‘어떤 일이냐.’고 물었다. 현보가 대답하기를, ‘사옹원 제조(提調)가 되었습니다.’ 하니, 어미가 ‘무슨 관직이냐?’ 하니, 대답하기를, ‘사옹원 제조가 되었습니다.’ 하니, 어미가 ‘무슨 관직이냐?’ 하니, 대답하기를, ‘그 임무는 어찬(御饌)을 받들어 바치고 연회를 관장하는 일인데, 반드시 풍채가 웅위한 사람을 뽑아서 합니다.’ 하니 어머니가 놀라면서, ‘가문에서 그렇게 시킨 일이로다. 어젯밤에 꿈에 네 아버지가 나타나, 장차 기쁜 경사가 있을 것이므로 꿈에 나타난 것이다.’하였다.” 하였는데, 그 아버지 중추공(中樞公)이 용모가 못생겼기 때문에 어자경이 이와 같이 놀린 것이었다. 김현보가 도승지가 되니 양(羊)뿔과, 금대(金帶)를 하사하였는데, 그 띠가 너무 넓었다. 어자경이 말하기를, “군은 마땅히 잘 싸서 감추어두었다가 자손에게 전하라. 후세의 자손으로서 군의 용모를 알지 못하는 자는 마땅히 ‘우리 선조(先祖)가 이 띠를 띠었으니, 이 띠는 반드시 용모가 봄 채소를 올려 놓은 네모난 넓은 소반과 같았으리라.’ 하리라.” 하였는데, 이것은 풍만함을 말한 것이다.
○ 축산군(竺山君)은 정랑(正郞) 민보익(閔輔翼)과 한 동리에 살았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서로 만나서 반드시 술을 취하도록 마셔서 두건이 벗어져 맨 머리가 되면서도 날마다 술 먹는 것을 약속하였다. 민보익은 황달병에 걸려 얼굴이 먹처럼 시커멓게 되었는데도 오히려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아, 내가 늘 책망하였다. 민보익이 사중에 와서 몰래 술을 찾으면서 판서가 알지 못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죽었다. 축산군은 몹시 슬퍼하다가 민보익이 죽은 지 며칠 안 되어 죽었다. 축산군은 순근(純謹)한 종친(宗親)이요, 민보익 역시 문학(文學) 명유(名儒)이나 술을 삼가지 아니하여, 서로 이어서 세상을 버리니, 술이 사람에게 화(禍)를 끼침이 심각하다.


 

[주D-001]결채(結綵) : 본래는 임금이 지날 때나 중국의 칙사(勅使)가 올 때 색실이나 색종이 헝겊 등을 문이나 길에 내걸어 장식하는 일을 말한다.
[주D-002]적선(謫仙) : 이태백(李太白)을 귀양내려온 신선이라 하였는데, 이 기우자(騎牛子)라는 분이 성이 이씨이므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주D-003]격옹도(擊瓮圖) : 중국 송(宋) 나라의 유명한 정치가 사마광(司馬光)이 어려서 여러 아이들과 같이 놀다가 물이 가득한 큰 물독에 한 아이가 빠졌으므로 여러 아이들은 모두 도망치는데, 사마광은 가서 큰 돌을 가져다가 그 독을 깨어서 물이 쏟아지니 그 아이가 살았다 한다. 후세에 그것을 그림으로 그렸으니 그것을 격옹도라 한다.
[주D-004]계유(癸酉)의 난 : 세조가 수양대군으로서 김종서 등을 죽인 것이 계유년이었다.
[주D-005]번쾌를 …… 마땅하다 : 번쾌는 한(漢) 나라 고조(高祖)를 도와서 천하를 평정한 장수였다. 그후에 고조가 죽은 뒤에 말을 잘못하였다 하여 계포(季布)라는 사람이 임금에게 번쾌가 당치 않은 말을 하니 번쾌를 목베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용재총화 제10권
용재총화 제10권


○ 호정(浩亭) 하륜(河崙)이 예천 군수가 되어 고을 기생을 모두 사사로이 다루고 거리낌 없이 음란하였다.
전최(殿最) 날 도사(都事)가 호정의 허물을 논박하여 곧 하고(下考)하려고 하였더니, 당시 김주(金湊)가 감사로 있었는데 만류하면서 말하기를 “하륜의 기상을 보니 한 고을에 오래 머물러 있을 사람이 아니니 아직 논하지 말라.” 하고 드디어 상등[上第]으로 고과하였다. 그후에 김주가 정사(定社)의 난에 관련되어 기세가 아주 위급할 때 김주의 아내가 호정의 말 머리에 꿇어앉아서, “나는 김 아무개의 아내입니다.” 하고 말하니, 호정이 힘써 구하여 죄를 면하였다.
호정 하륜이 충청도 관찰사가 되자, 그 당시 정안군(靖安君)이던 태종이 집 잔치에 참여하였다. 여러 손님들이 많이 모였는데 태종이 앞에 나아가서 술을 부을 적에 호정은 일부러 취한 척하며 상위의 찬과 탕을 뒤집어 엎어, 왕자의 옷을 더럽히자, 태종이 크게 노하여 일어났다. 호정이 자리에 있는 손님들에게 말하기를, “왕자가 노하여 가니 가서 사죄해야겠다.” 하고 드디어 따라나섰다. 종이 태종에게 고하기를, “감사가 옵니다.”하였으나, 태종은 돌아보지도 않고 대문(大門)에 이르러 말에서 내리므로 호정도 역시 말에서 내렸다. 중문(中門)에 들어가니 호정도 또 중문에 들어가고, 내문(內門)에 들어가니 또한 내문에 따라 들어왔다. 태종이 비로소 이를 의심하여 돌아보고, “웬 일이냐?”고 물었다. 호정은 말하기를, “왕자의 일이 위급합니다. 소반을 뒤집어 엎은 까닭은 장차 나라에 위태로운 환란이 있을 것이기에 이를 미리 알린 것입니다.” 하니, 그제서야 비로소 침실로 불러들여 계책을 물었다. 호정이 말하기를, “신은 왕명을 받았으니 오래 머물 수 없습니다. 안산 군수(安山郡守) 이숙번(李叔蕃)이 정릉 이안군(移安軍)을 거느리고 서울에 올 것이니, 이 사람에게 큰일을 부탁할 만합니다. 신도 또한 진천(鎭川)에 가서 머물러 기다리겠사오니, 만약 일이 이루어지면 신을 급히 부르십시오.” 하고 호정은 드디어 떠났다. 태종이 이숙번을 불러 그 연고를 말했더니, 이숙번은 아뢰기를, “손바닥 뒤집듯이 쉽사온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하고, 드디어 태종을 모시고 궁중의 종과 이안군을 이끌고, 먼저 군기감(軍器監)을 빼앗아 갑옷을 입고 병기를 가지고 나와 경복궁을 둘러쌌다. 태종이 남문 밖에 막차를 쳐서 그 가운데 앉고 또 막차 하나를 그 밑에 치니, 사람들이 누구의 자리인지 알지 못했는데, 호정이 올라와 가운데 자리잡으니 사람들이 모두 머지 않아 재상이 될 줄 알았다. 정사(定社)의 공은 모두 호정과 이숙번의 힘이었다.
임오년 급제의 방문(榜文)을 붙인 뒤 사은(謝恩)하는 날에 세조가 후원(後苑)에서 신은(新恩)을 보려고 원(苑) 안에서 유가(遊街)를 하게 하고, 겸하여 배우와 포물(布物)을 하사하여 미리 구비하고서 기다렸다. 대체로 사은하는 날에는 양방(兩榜)이 모두 문과에 장원한 집에 모여 일시에 궁궐에 나아가고, 또 이튿날에 양방이 무과에 장원한 집에 모여 일시에 임금께 알현하는 것이 예로 되어 있다. 이날 양방이 장원 유자빈(柳自濱)의 집에 모여 술자리를 마련하고, 오랫동안 머문 뒤에 궁궐에 나아갔는데 승지도 제때에 아뢰지 않아 해가 중천에 뜨도록 들어가지 못하였다. 얼마 있다가 임금의 위엄이 진노하여 전교하기를, “그 급제한 자의 홍패(紅牌)를 뺏고 방명(榜名)을 삭제하여 버리라.” 하니 모두 얼굴빛이 검게 되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숙도(叔度)가 말하기를, “그대들은 무엇을 겁내느냐. 어찌 군주가 사람을 취하였다가 다시 빼앗을 리가 있겠느냐. 비록 빼앗긴다 한들 남아에겐 곤충과 현달은 정해진 명(命)이 있으니, 어찌 불안한 마음은 품고 있느냐.” 하고 전연 두려워하지 않아 사람들이 모두 그 도량에 탄복하였다. 궐내에서 신은이 늦게 온 연고를 듣고, 정원이 아뢰기를, “장원한 집에서 모였다가 한번에 궁궐에 들어오는 까닭으로, 이와 같이 늦었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장원한 집에 일찍 간 10명에게는 특별히 유가를 허락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법관에 붙여 추고(推考)하라.” 하였다. 나는 일찍 간 열(列)에 들어 3일 동안 유가하였다.
홍문관에 새로 소속된 서리 김순강(金順江)은 아주 바보 같았다. 직제학 이우포(李佑甫)가 묻기를, “너는 어디 사느냐?” 하니, “강동(江東)에 삽니다.” 하였다. 또 물어보기를, “네가 항우(項羽)를 아느냐?” 하니, 서리는, “제가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어떻게 아느냐?” 하니, “우리 할아버지 뻘입니다.” 하였다. 직제학이 위협하여 말하기를, “항우는 반역을 꾀하여 살해당했고, 그 자손으로 도망한 자가 많아서 조정에서는 그 사람들을 잡지 못하였는데, 네가 항우의 후손이라 하니, 장차 관아에 고하여 죽이게 하리라.” 하니, 서리가 손을 모으고 살려달라고 애원하기를, “제가 만약 죄를 면하지 못하다면 오히려 이곳에서 형벌을 받겠으니, 부디 관아에 고하지 마소서.” 하여 좌우가 크게 웃었다. 그리하여 그 서리를 항손(項孫)이라 이름 하였다.
내가 김세적(金世勣)과 더불어 같이 승지가 되었는데, 활을 뛰어나게 잘 쏘아 당시에 적수가 없었기에 무과 장원에 뽑혀 성종(成宗)에게 지우(知遇)를 받아 드디어 기용되었다. 그가 집에 있을 때 하루도 빠짐없이 활 만드는 장인에게 활을 만들게 하고, 활을 시렁에 꽂아 늘 손에 닿지 않은 것이 수백여 자루가 되며, 관청에서도 역시 그렇게 하였다. 항상 활을 벽에 기대어 세우고 손으로 만져 보배같이 여기고 잠시도 쉬지 않았다. 만약 잠깐의 여가라도 있으면 반드시 나와 사후(射候)를 쏘거나 표적을 쏘며, 비가 내리면 웅크리고 앉아 조그마한 종이를 벽에 붙이고 조그마한 싸리활을 써서 쏘았다. 힘써 부지런히 힘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종일 쏘아도 과녁을 벗어나지 않으며 짐승 쏘기를 더욱 잘하여 쏘아서 맞지 않은 적이 없었다. 성종의 사랑함이 견줄바 없어 경기 감사에게 명하여 날로 고기를 그 부모에게 주게 하고, 이것저것 하사받은 것도 또한 헤아릴 수 없었으니, 비록 척리(戚里 임금의 내척과 외척)나 훈구(勳舊 벼슬이 높고 나이 늙은 자)라도 미칠 수가 없었다. 나이 40이 되기 전에 벼슬이 2품까지 올랐으나, 그 부모가 병이 있어 김세적이 찾아뵙다가 병이 전염되어 죽으니, 독자인데다 자식도 없으므로 사람들이 오두 애석하게 여겼다.
세조가 신하들은 매우 사랑하여 인견(引見)하는 일을 거르는 달이 없었다. 혹은 사정전(思政殿)ㆍ충순당(忠順堂)ㆍ화화당(華韡堂)ㆍ서현정(序賢亭)에 거둥하고, 겨울이면 비현각(丕顯閣)에 거둥하였다. 비록 강녕전(康寧殿)ㆍ자미당(紫薇堂)ㆍ양심당(養心)堂같은 깊고 은밀한 안채라도 외부에 있는 신하들이 때로는 들어가기도 하였다. 영순군(永順君)ㆍ귀성군(龜城君)ㆍ하성위(河城尉)ㆍ□□군을 사종(四宗)으로 삼고, 신종군(新宗君)ㆍ거평정(居平正)ㆍ진례정(進禮正)ㆍ금산정(金山正)ㆍ율원부정(栗元副正)ㆍ제천부정(堤川副正)ㆍ곡성정(鵠城正) 등을 사종(射宗 활을 잘 쏘는 종친)으로 삼았다. 또 문신 수십 명을 뽑아 겸예문(兼藝文)이라 이름하여 경사(經史)를 강론하며 혹은 나라를 다스리는 큰 계책을 묻고, 또 무신(武臣)을 불러 사후와 표적을 쏘게 하여 잘 쏘는 사람은 서열을 가리지 않고 벼슬을 올려주며, 혹은 어찬(御饌)을 하사하여 장려하니, 사람들이 모두 면려되어 반열을 월등히 넘어 뽑히는 자도 있었다. 임금이 흔히 여러 신하와 더불어 희롱을 하여 사종으로 하여금 쥐를 잡게 하고, 혹은 거미를 잡게 하고 혹은 임금이 가리키는 나뭇잎과 채소줄기를 따가지고 맞히는 사람은 물건을 하사하였다. 내가 그때에 사관(史官)으로서 겸예문(兼藝文)이 되어 매일 입시(入侍)하였는데, 임금이 몹시 더운 여름에 창문을 닫고 동옷[襦衣]을 입고 화로불을 방에 피워놓았으며, 예문관(藝文館) 여러 유생들은 뜰 가운데 앉아서 종일 뙤약볕을 쬐게 하여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였는데 전교하기를, “춥고 더운 것을 참은 연후에야 큰 일을 맡을 수 있다.” 하였다. 만년에 옥체가 편치 못하여 잠을 주무시질 못할 때 유신을 불러 글을 강론하게 하고, 혹은 잡류인 최호원(崔灝元), 안효례(安孝禮) 등을 끌어들여 각각 그 술수를 가지고 다투게 하여 입에 거품을 물고 어떤 때는 팔을 걷어올리며 욕을 퍼붓는 등의 일도 있었다. 임금은 역시 밤낮으로 책상에 의지하여 이를 듣고 보기만 하니, 두 사람이 교만하게 은혜가 내리지 않는 것을 원망하여 최호원이 사사로이 안효례에게 말하기를, “내가 승지가 되고 네가 첨지가 되는 것이 어찌 그리 늦느냐.” 하니, 듣는 사람마다 웃었다. 임금이 비록 심심풀이로 부르기는 하였으나 실상은 배우(俳優)로서 기르는 것인데, 두 사람이 크게 기용되기를 바라니, 당시의 의논이 이를 천하게 여겼다.
사람이 사용하는 것 중에 질그릇이 가장 긴요하다. 지금의 마포와 노량진 등은 모두 진흙 굽는 것을 업으로 삼으니, 이는 모두 질그릇ㆍ항아리ㆍ독의 종류이다. 자기(磁器)의 경우 백토(白土)를 써서 정밀하게 구워 만들어야 사용하기가 좋다. 외방 각 도(道)에 만드는 사람이 많이 있으나, 다만 고령(高靈)에서 만드는 것이 가장 정교하다. 그러나 그것도 광주(廣州)에서 만든 것만큼 정묘하진 못하다. 해마다 사옹원(司饔院) 관리를 좌우 편으로 나누어 각각 서리를 인솔하고 봄부터 가을까지 만드는 것을 감독하여 어부(御府)에 보내어 바치게 하였는데 그 공로를 기록하여 등급의 차례를 정하여 뛰어난 사람에겐 물건을 하사하였다. 세종 때에 임금이 사용하는 그릇은 오로지 백자기를 썼는데, 세조 때에 이르러서는 채색한 자기를 섞어서 썼다. 회회청(回回靑 중국의 신강성 회회 지방의 청색 안료)을 중국에서 구하여 술병과 술잔에 그림을 그렸는데, 중국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회청이 드물고 귀하여 중국에서도 많이 얻을 수 없었다.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중국에서는 비록 궁벽한 촌의 조그만 오막살이 술집에서도 모두 그림을 그린 그릇을 사용하는데, 어찌 다 회청으로 그린 것이리오. 응당 다른 물건으로 그릴 만한 것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중국에 가서 물으니, 모두 말하기를, “이는 토청(土靑 청화 자기에 쓰는 푸른 도료)이다.”하였으나, 토청 역시 구할 수가 없었다. 이런 이유로 우리 나라에서는 그림 그린 사기 그릇이 매우 적다.
지금 예조는 바로 예전의 삼군부(三軍府)이다. 정삼봉(鄭三峯)이 군국(軍國)의 중대한 일을 맡았을 때 의정부의 제도를 보고 말하기를, “정부와 군부는 일체이다.” 하고 드디어 그 제도에 의하여 만드니 높다랗게 동서가 상대가 되어 그 청사가 굉장한 것이 다른 관부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뒤에 삼군부를 혁파하고 중추원(中樞院)을 설치하여 군무를 맡기지 않고, 예조로써 오례(五禮)를 맡아보게 하고 또 다른 나라의 사신을 대접하게 하니, 그 임무가 중대하여 그 부(府)를 예조로 삼고, 중추원은 도리어 예조의 남쪽 곁채에 우거(寓居)하였다.
경복궁 서쪽 가에 수맥(水脈)이 많은데, 경회루의 연못 물은 비록 옛날 중국의 곤명지(昆明池)ㆍ태액지(太液池)라도 이보다 좋지 못할 것이다. 서문 밖에 샘이 있어 넘쳐 흐르니, 얼음과 같이 맑고 차가워 사람들이 모두 쪽[藍]을 물들이기 때문에 쪽샘[藍井]이라 불렀다. 예조의 우물도 또한 맑고 깨끗하고 마르지 않아 흘러서 큰 못을 이루니 비록 몹시 가물어도 한결같았다. 못 남쪽에 조그마한 땅이 중추부로 뻗어서, 수초가 우거지고 더럽더니 금상(今上) 기미년에 중추부에서 아뢰기를, “개 이빨처럼 우리 관아에 들어오니, 마땅히 분할하여 우리 못으로 해야겠습니다.” 하니, 예조가 이르기를, “외국 사람을 대접하는 곳을 좁게 해서는 안 된다.” 하여 서로 다투었다. 임금이 승지와 내관 등에게 물어서 쪼개어 나누어주니, 중추부에서 그 땅을 파서 서지(西池)를 만들고, 대청을 개축하고 대청에 연이어 서헌(西軒)을 만들고, 돌기둥을 물 속에 세우니 아로새겨지는 그림자가 물결 위에 떨어지고, 서쪽은 산봉우리가 높고 집들이 좋고 나무가 빽빽하여 풍경이 서울에서 제일이었다. 그 밑에 있는 사헌부와 옛 병조ㆍ형조ㆍ공조ㆍ장예원(掌隸院)에도 모두 못이 있어 연꽃을 심었고, 동쪽 의정부의 이조와 한성부의 호조에는 비록 못이 있으나 서쪽 못보다는 훌륭하지 못하였다.
세종이 조지서(造紙署)를 설치하여 표전지(表箋紙)와 자문지(咨文紙)를 제작하는 것을 감독하게 하고, 또 서적 찍는 여러 색지(色紙)를 만드니 그 품종이 한가지가 아니었다. 고정지(蒿精紙)ㆍ유엽지(柳葉紙)ㆍ유목지(柳木紙)ㆍ의이지(薏苡紙)ㆍ마골지(麻骨紙)ㆍ순왜지(純倭紙)가 그 정묘함이 지극하여 찍어낸 서적도 역시 좋았다. 지금은 다만 고정지와 유목지뿐이요, 자문지ㆍ표전지도 또한 옛날같이 정묘하지 못하다.
성종이 비로소 악원겸관(樂院兼官)을 두었는데, 내가 백인(伯仁)ㆍ기지(耆之)와 더불어 첨정(僉正)을 겸하고, 임흥(任興)은 직장(直長)을 겸하였다. 임흥은 어려서부터 음악을 배워서 관현(管絃)에 조예가 깊고 호방한 기질로 이름을 떨쳤다. 그의 별장이 양천(陽川)과 김포(金浦) 사이에 있는데, 정자를 강 위에 세워두고 달밤에는 배를 타고 위로는 한강으로부터 아래로는 조강(祖江)에까지 혹은 올라가고 혹은 내려올 때 노래 잘하는 기생과 여러 첩이 항상 따라다녔다. 임흥이 직접 거문고를 타고 기생이 노래에 맞추어 화답하니, 보는 사람이 신선과 같은 사람이라고 하였다. 임흥이 직장을 제수받을 때에 나이가 이미 50이 넘었다. 사람들이 모두 나오지 않으리라 생각하였는데, 명령이 내린 날 바로 나와 벼슬하며 여러 해 동안 악원에 있으면서 주부(主簿)로 승진하고, 나이가 많아 머리가 희어져도 오히려 병을 견디며 나갔다. 백인(伯仁)이 묻기를, “자네는 세력 있는 부자로 종신토록 기생들 속에서 늙어 마음대로 노는 것이 무슨 안 될 것이 있다고 어찌 이처럼 힘들게 세상일에 빠졌는가.” 하니, 임흥이 말하기를, “어려서 부형(父兄)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고, 총각 때부터 주색(酒色)으로 업을 삼아, 중년에 이르도록 즐거움이 지극하였고, 오직 뜻하는 대로 되었으나, 늙어가면서 뜻이 점점 게을러지고, 기생들과 노는 것도 오히려 흥미가 없으며 강호(江湖)도 또한 즐길 것이 없었다. 그런데 벼슬에 오름에 이르러서 조정의 높은 벼슬아치들과 더불어 서로 벗하고, 관청일을 마친 뒤에는 서로 찾아 한 술잔으로 서로 모여 화목하게 이야기하니, 그 재미가 끝이 없도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이 말은 진실로 옳다. 조정의 선비가 강호를 즐겨 그리워함은 다름 아니라 인간 세상에 싫증이 나서 그런 것이다. 강호의 선비가 강호에 싫증이 나서 조정 선비를 그리워함도 이와 같으니, 이것으로 저것을 바꾸면 그 뜻이 마찬가지이다.”하였더니, 임흥이 깊이 수긍하였다.
동잠실(東蠶室)은 성동 아차산(峨嵯山) 밑에 있는데 환관이 주관하고, 요즘 또 새로 잠실을 한강 밑 원단동(圓壇洞)에 설치하였는데, 또한 환관으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였다. 서잠실은 성 서쪽 십여 리 되는 곳에 있으니, 곧 옛날의 연희궁(衍禧宮)이다. 별좌(別坐) 두 사람을 두어 맡겼다가 그 뒤에 별좌는 상의원(尙衣院)에 이속시켜 여름에는 누에를 치고 양잠을 마치고는 본원에서 일을 보게 하였다. 동서 잠실에서 각각 고치를 쳐서 승정원에 바쳐 공의 많고 적음을 비교하여 상을 주기도 하고 벌을 주기도 하였다. 남강의 밤섬[栗島]에는 뽕나무를 많이 심어서 해마다 이를 따서 누에를 쳤다. 옛날 서울 성 안 큰 집에서는 다만 서너 집이 누에를 쳤는데, 지금은 큰 집뿐 아니라 비록 일반인의 조그마한 점방이라도 누에를 기르지 않는 집이 없어서 뽕잎이 극히 귀하여 뽕나무를 심어서 이익을 얻는 사람이 많았다.
제단(祭壇)은 사직(社稷)을 귀중히 여겨 성 안에 있고, 성 밖에도 여러 곳 있다. 선농단(先農壇)은 동대문 밖 보제원(普濟院) 동동(東洞)에 있는데, 관경대(觀耕臺)가 있다. 성종이 적전(籍田 임금이 경작하던 밭)을 몸소 갈 때 여러 번 거둥하시었고, 정월에는 풍악을 써서 제사지냈다. 선잠단(先蠶壇)은 동소문 밖에 있는데, 3월에 풍악을 써서 제사지내고, 원단(圓壇)은 한강 서동(西洞)에 있는데 세조가 일찍이 가서 하늘에 제사 지냈다.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은 청파역(靑坡驛) 골짜기 우거진 소나무 사이에 있는데, 2월, 8월에 풍악을 써서 제사지내며, 여제단(厲祭壇)은 장의문(藏義門) 밖 장의사(藏義寺) 골짜기에 있는데, 한성부가 주관하여 제사지내고, 마조단(馬祖壇)은 성동(城東)의 교외에 있고,사한단(司寒壇)은 동빙고에 있는데, 얼음을 저장할 때에 춥기를 빌며 제사지내고, 용단(龍壇)은 한강 가에 있는데, 가물면 호랑이 머리를 물 속에 넣어 제사지내며 비를 빌고,세초(歲抄) 때마다 예조가 봉상시(奉常寺) 제조(提調)와 함께 자세히 살펴보아 보고하고 허물어진 곳이 있으면 수리한다.
세조가 항상 재추(宰樞)와 문무사(文武士)를 불러 매일 치도(治道)를 강론하는 일을 일과로 삼았다. 하루는 임금이 오래 나오지 않아서 여러 신하가 경희루 밑에 나아가 명을 기다리는데 최한량(崔漢良) 군이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며 말하기를, “오랫동안 역마를 타지 못하니, 마음이 답답하도다.” 하니, 정국형(鄭國馨)이 “군이 봉사(奉使)의 즐거움을 아는가.” 하였다. 최한량이 말하기를, “봉사의 즐거움이 많으나 이별하는 괴로움도 또한 깊다. 춘풍의 아름다운 계절을 당하여 준마를 타고 달려 명주(名州)로 들어가면 좌우의 긴 소나무와 높은 전나무는 큰 길에 그늘을 이루게 하여 십여 리를 연하였고, 팔뚝을 반쯤 내놓은 소매 짧은 푸른 옷 입은 나장(羅匠)이 쌍쌍으로 앞을 인도하고, 초금[笳]과 피리 소리가 어울리고, 말이 날뛰어 그치지 않으며 역마꾼이 고삐를 잡아 달리며 대문 밖에 이르러서는 소라처럼 머리 딴 계집[螺鬟] 수십 대(隊)가 길 왼쪽에 엎드려 혹은 머리를 쳐들어 우러러보는 자도 있다. 나는 이때에 보지 않은 체하고 말에서 내려 상방(上房)으로 들어가서 혼자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오늘밤에는 누구하고 짝하여 잘고.’하다가 기생이 과실 소반을 받들고 들어오면 나는 또한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가할까 아니할까.’하여 반신반의하다가 얼마 있다가 주관(主官)이 찾아와서 문안을 드릴 때, 동헌(東軒)에 앉아 술자리를 마련하고 서로 술잔을 주고받고, 내가 일어나 술을 부어 돌리면 기생이 술을 받들고 들어오는데, 그 사람이 보기 싫게 생겨서 마음에 들지 아니하면 답답하고 탐탐치 않아 부끄러워서 읍의 산천이 모두 빛을 잃고 좌우의 사람을 볼 때 모두 몽둥이로 때리고 싶다. 그 사람이 아름다워서 마음에 들 것 같으면 주관의 거동이 모두 공황(龔黃)의 행위와 같아서 지붕 위의 새도 또한 영리한 뜻이 있는 것 같았다. 며칠을 머무는 동안 낮에는 술에 고단하고 밤에는 잠자리에 피곤하여 정신이 흐릿하고 분명하지 아니하여 가만히 스스로 생각하되, ‘이미 편안함이 없으니, 오래 머무르면 병을 얻을 것이다.’하여 이때야 비로소 떠날 마음이 생겨 팔뚝을 베고 흐느껴 울어 눈이 퉁퉁 붓게 된다. 주관이 문 밖에 자리를 펴고 아름다운 노래 몇 가락에 소매를 당겨 술을 권하여 전송할 때, 부득이 말에 올라타고 떠나면서 해를 우러러보면 노랗기만 하고 빛이 없다. 말 위에서 비몽사몽하는 사이에 그 사람이 웃으면서 훌쩍 나타나서 길가에 앉아 있는데, 눈을 문지르고 보면 누런 띠[茅] 숲이요, 그 사람이 또 길가에 앉았거늘 눈을 문지르고 보면 곧 밤나무 숲이요, 귀에 가득찬 바람 소리와 물 소리가 모두 노래하며 풍류 잡는 소리다. 날이 저물어 역(驛)에 투숙하면 연기가 쥐구멍에서 나고, 참새가 소나무 끝에서 지저귄다. 완악한 종이 농을 열어 자리를 펴면 나는 턱을 받치고 앉아서 만단수회(萬端愁懷)를 어찌 다 측량하여 헤아릴 수 있으리오.” 하였다. 정국형이 말하기를, “군이 봉사의 괴로움과 즐거움을 아는구나. 남아가 이르는 곳마다 잘 놀고 즐겁게 지내겠거늘 하필 외방(外方)이겠느냐. 내가 겨울에 검은 돈피 갖옷을 입고, 푸른 모직으로 짠 모자를 쓰고, 훌륭한 말을 타고 은빛 나는 좋은 매를 팔뚝에 얹고, 누런 개 수대(數隊)가 따라오고, 뒤에는 기생을 태우고 가서 산에 올라 꿩을 좇을 때 매가 꿩을 잡아 말 앞에 떨어뜨리면 사람들이 다투어 모인다. 골짜기 시냇가에 앉아서 마른 나무 가지를 태워 꿩을 굽고 계집이 은바가지로 술을 따라 마시기를 권할 때 아래로 종에 이르기까지 남은 것이 돌아가는지라, 날이 저물어 올 적에 날리는 눈[雪]이 얼굴을 치는데, 반은 취하여 고삐를 잡아당겨 돌아오니 이는 참으로 행락(行樂)의 즐거움이니라.” 하였다. 이수남(李壽男)군은 말하기를, “나는 관청 일을 마친 뒤에 친구가 잔치하고 즐기는 곳을 찾아 기생을 끼고 앉아서 실컷 희롱하다가 밤이 깊어서 먼저 나와 기생과 더불어 같이 돌아오되 혹은 기생의 집에 같이 가고, 혹은 아는 사람 집으로 가서 비록 이불과 베개가 없으나 둘이서 옷을 벗고 같이 누우면 그 즐거움이 얼마나 지극한고. 나날이 이와 같이 하되 항상 다른 사람으로 바꾼다. 만약 불법(佛法)으로 말하자면 내생에 호관(壺串) 수말[牡馬]이 되어 수십 마리 암말을 거느리고 마음대로 놀고 희롱하기를 바라니, 이것이 나의 즐거워하는 바이다.” 하였다. 김유(金紐) 자고(子固)는 말하기를, “나는 친구를 역방(歷訪)하려고 하지 않으니 내 집이 족히 손님을 모실 만하고, 나의 재산이 잔치를 차림에 족하여 항상 꽃 피는 아침 달뜨는 저녁에 아름다운 손님과 좋은 친구를 맞아 술통을 열고 술자리를 베풀어 이마지(李亇知)가 타는 거문고와 도선길(都善吉)의 당비파(唐琵琶)와 송전수(宋田守)의 향비파(鄕琵琶)와 허오(許吾)가 부는 피리와 가홍란(駕鴻鑾)과 경천금(輕千金)의 창가로 황효성(黃孝誠)이 옆에서 지휘하고, 독주하기도 하고 합주하기도 하며 이때에 손님과 더불어 술을 부어 서로 주고받으며 마음껏 이야기하고 시 짓는 것이 나의 즐거워하는 바이다.” 하였다. 달성이 옆에서 듣고 말하기를, “최군은 방탕하고, 정군은 호걸이고, 이군은 음특(淫慝)하고 김군은 질탕(跌宕)하다.” 하고, 또 좌우에게 묻기를, “제군도 역시 즐거워하는 바가 있느냐.” 하니, 불기(不器) 권호(權瑚)가 말하기를, “나는 시골에서 생장하여 물고기 잡는 것으로 업을 삼았습니다. 서너 사람 친구와 더불어 시냇가에 가서 긴 그물로 시내의 위아래를 막고 옷을 벗고 짧은 고의만을 입고 손수 조그마한 물고기 그물을 가지고 이리저리 고기를 몰아 들어올릴 때마다 들기만 하면 은빛 비늘이 번득거려 그물 위에 빛납니다. 이때에 보리밭에 난 순무를 캐고 또 여뀌의 열매를 거두어 장을 끓이고, 겨자를 거르며 혹은 회(膾)를 만들고 혹은 끓이고 고기를 가득 차려내 주린 배를 잠깐 사이에 부르게 하는 것이 내가 즐거워하는 바입니다.” 하니, 달성이 말하기를, “한가하고 자적(自適)한 일이로다.” 하였다. 사예(司藝) 유희익(兪希益)이 마지막으로 대답하기를, “내가 즐기는 바는 여러분의 일과는 다릅니다. 해가 긴 여름철을 당하여 밤나무 그늘 밑에 앉아 맑은 바람이 스스로 불어올 때, 그 가운데 자리를 깔고 《주역》ㆍ《중용》ㆍ《대학》을 읽는 것이 내가 즐거워하는 바입니다.” 하였다. 달성이 말하기를, “옳기는 옳은 일입니다만 남아가 세상에 나서 어찌 이와 같이 괴로워야만 되겠느냐.” 하니, 자리에 있던 사람이 모두 웃었다. 이때에 자순(子順) 남제(南悌)가 전자(篆字)를 잘 쓰므로 불려와서 곁에 있다가 바야흐로 도전(圖篆)을 할 때 여성군(驪城君) 민발(閔發)이 칭찬하여 말하기를, “흰 구름과 같은 사후(射帿)를 청산 녹수 사이에 펴고 네 개의 화살을 끼고 들어가서 포장 과녁 쏘기를 갖다대는 것같이 하여, 해가 다하도록 살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나의 능한 바요, 큰 멧돼지가 갈대 숲 사이에서 이빨 소리를 내며 울 것 같으면 말을 달려 들어가서 한 화살로 죽여 넘기는 것도 내가 또한 능한 바요, 몹시 더울 때에 누에 올라서 얼음을 밥에 섞고, 콩가루로 비벼서 한 주발을 거뜬히 다 먹어치우는 것도 내가 또한 능한 바이나, 이와 같이 글자 쓰는 묘한 재주는 백번 죽었다 깨나도 나는 할 수 없다.” 하였다.
파산군(巴山君) 조득림(趙得琳)이 강진산(姜晉山)에게 묻기를, “내가 서재에 이름을 붙이려고 하오니, 대인께서 이름을 지어 주십시오.” 하니, 민발(閔發)이, “재명(齋名)과 헌호(軒號)는 시문을 하는 선비가 하는 것인데, 너도 또한 서재에 이름을 붙이려고 하느냐.” 하고, 강진산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대인께서 만약 재에 이름을 붙여주시려거든 마땅히 괴(槐) 자를 쓰십시오.” 하니, 자리에 앉았던 사람들이 포복절도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재추(宰樞) 기건(奇虔)이 형생에 복어를 먹지 아니하므로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재추가 말하기를, “일찍이 제주 목사가 되었을 때 백성들이 잡는 데 몹시 괴로워함을 보았으므로 먹지 않을 뿐이다.” 하였다. 김현보(金賢甫)가 쇠고기를 먹지 아니하므로 친구가 물어보기를, “옛날에는 먹더니 지금 어찌 먹지 않는고.” 하니, 김현보가 말하기를, “일찍이 봉상 시정(奉常侍正)이 되어 술자리로 인하여 죄를 얻고는 그뒤로부터 이 고기를 먹지 않는다.” 하였다. 이는 비록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이나 잘못된 것을 너무 휘어잡는 폐단이 있음을 면치 못한다.
성근보(成謹甫)가 살아있을 때 우리 나라 사람의 글을 엮어 《동인문보(東人文寶)》라 이름하였는데, 완성하지 못한 채 죽고, 김계온(金季醞)이 뒤를 좇아 완성하여 《동문수(東文粹)》라 하였다. 그러나 김계온은 오로지 글이 번화한 것을 싫어하여 다만 온후(醞厚)한 글만 취하니, 비록 규범에는 뜻을 이루었으나 메마르고 기세가 없어 볼 만한 것이 못 되었다. 그가 엮은 《청구풍아(靑丘風雅)》는 시가 문장만 못하나 시가 조금 호방한 것은 버리고 기록하지 않았으니, 이 무슨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편견인고. 달성이 찬한 《동문선(東文選)》과 같은 것도 이는 류(類)대로 모은 것이요, 선(選)은 아니다.
최세원(崔勢遠)이 어렸을 때 상사(上舍)로서 관에 있을 때, 상사 김항신(金亢信)은 망건이 단정하지 못하였고, 김백형(金伯衡)은 눈이 어둡고 사시(斜視)이므로, 최세원이 희롱하여 말하기를, “이미 머리에 쓰고 또 얼굴에 쓴 것은 김항신의 망건이요, 동쪽을 보는 것 같으나 실은 서쪽을 보는 것은 김백형의 눈동자다.” 하고, 상사 곽승진(郭承振)의 별명이 귀(鬼)인지라 세원이 곽귀부(郭鬼賦)를 지어 꾸짖기를, “자네가 두려워하는 바는 복숭아 동쪽 가지로다. 하물며 관중(館中)에서 종아리 쳐서 기록하리로다. 천리를 빨리 가도 조금도 머무르지 말고 급급하게 히기를 율령과 같게 하라.” 하였다. 최세원이 강진산과 친구로서 사귐이 아주 두터웠는데, 강진산은 장원급제되고 최세원은 낙제하여 무릎을 안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강 아무개는 똑똑한 사람이다. 내가 장원이 되고 강진산으로 하여금 말좌(末坐)가 되게 하여 불러서 이를 부리려고 하였는데, 뜻밖에 나보다 먼저 장원에 뽑히니, 후년에 내가 비록 장원에 뽑힌들 제가 어찌 부러워하리오. 원하건대 하늘은 사흘 동안 똥비를 내리시어 유가(遊街)하지 못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목은(牧隱)이 원(元)에 들어가 황갑(黃甲 장원급제) 셋째 번에 뽑히니, 그 일등 장원은 우계지(牛繼志)요, 이등 장원은 증견(曾堅)이었다. 목은이 본국으로 돌아올 때 우장원이 별시(別詩)를 지어 이르기를,
나는 장부의 눈물이 있어 / 我有丈夫淚
울어도 30년 동안 떨어뜨리지 않았더니 / 泣之不落三十年
오늘날 정자 가에서 이별하므로 / 今日離停畔
그대를 위하여 봄 바람 앞에 한번 뿌리도다 / 爲君一洒春
전하였다.
고려 말에 왜구가 들끓었는데, 이는 연해(沿海) 사면으로 진(鎭)을 두어 방비하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태조가 개국(開國)한 이후로는 항구의 중요한 곳에 모두 만호영(萬戶營)을 두고 수군처치사(水軍處置使)가 거느리게 하니, 이로 말미암아 왜구가 조금 없어졌는데, 그뒤에 왜구가 또 침입하므로 세종이 삼군(三軍)에 명령하여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하여 비록 크게 승리하지는 못하였으나, 왜구도 또한 위세를 두려워하여 감히 방자하게 굴지 못하였다. 왜적 몇 호가 삼포(三浦)에 살고자 하므로 세종이 그 의(義)를 사모함을 가상히 여겨 허락하니, 허조(許稠)가 울며 간하기를, “왜노(倭奴)가 신이라 칭했다가도 반란을 일으키니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어찌 어류나 패류(貝類)와 같은 천한 무리로 하여금 예의를 갖춘 우리 사이에 들게 할 수 있겠습니까. 후일에 백성이 점점 많아지면 응당 나라의 큰 해가 될 것입니다.” 하고, 죽음에 임하여 재삼 상계(上啓)하되, “청하건대 아직 번성해지기 전에 아주 이를 돌려보내십시오.” 하니, 그때를 당하여 사람들이 모두 허조의 말을 예사롭게 여겨 별로 놀라지 않더니, 지금 삼포에 도모하기 어려운 폐해가 만연하게 된 연후에야 그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조정에서 항상 도주(島主)에게 타일러 돌아가게 하였으나 돌아간 것은 3, 4호에 지나지 않고, 갔다가도 다시 돌아와서 점점 우리 땅을 갈아서 밭을 만들어 얼룩옷이 변두리 여러 읍에 가득하여 때로 우리 백성과 더불어 서로 다투며, 몰래 전라도로 가서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는 것은 모두 삼포의 사람이었다. 대마도는 토지가 척박하여 오곡이 생산되지 않아, 다만 구맥(瞿麥)을 심고 사람들은 모두 칡과 고사리 뿌리를 캐어 먹고 도주도 또 한 삼포에서 세를 거두어가지고 이로서 생을 이어나갔다. 대마도에 사는 사람으로서 우리 나라 벼슬을 받아 호군(護軍)에 제수된 자가 해마다 한번씩 조회하러 왔는데, 조회하러 오는 것이 한 해에 무려 50척이나 되었다. 한번 오면 몇 달 동안 머물러 있고 또 일본인에게 주는 양식을 받아 이것으로 그 처자를 먹여 살리니, 경상 하도(慶尙下道)의 미곡은 태반(太半)이 왜의 양식으로 소모되었다.
김사문(金斯文)이 한쪽 눈이 멀었다. 채기지(蔡耆之)가 말하기를, “ 내가 일찍이 옛날 늙은이에게 들으니, 옛날 고려말에 한 선비가 눈이 당신의 눈과 같았는데, 신령한 중이 이르기를, ‘급히 눈동자를 뽑아버리고, 개새끼의 눈알을 뽑아서 넣으면 뜨거운 피가 서로 붙어서 며칠 안 가서 보통 때와 같이 된다.’하였다.” 하니, 좌우(左右)가 모두, “과연 그 이치가 헛되지 않은 것 같다.” 하였다. 그러나 김사문이 크게 의심하자, 채기지가 말하기를, “좋기도 좋으나 다만 꺼리는 바가 있다. 만약 변소 안의 똥을 보면 모두 연석(宴席)의 찬(饌)과 같이 보여서 먹고자 할 것이다.” 하였다. 김사문이 크게 노하여 꾸짖으니, 좌우가 포복절도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조정에서 각사(各司) 각관(各官)의 나이 어린 종년을 뽑아서 혜민서(惠民署)에 속하게 하고 의서(醫書)를 가르쳐 여의(女醫)라 이름하고, 이들로써 부인의 병을 고쳤다. 한 여자가 제주(濟州)에서 왔는데, 의술은 알지 못하나 다만 충치를 뽑았는데, 사대부 집에서 다투어 서로 맞아갔다. 그 여자가 죽자 또 한 여자에게 그 없을 전하여 나도 또한 불러다가 이를 치료했는데, 얼굴을 위로 젖히고 입을 열어, 은으로 만든 숟가락으로 조그마한 흰 벌레를 꺼내는데 숟가락은 이에 들어가지도 않고, 이에서 피도 나지 않아, 그 쉬운 것이 이와 같았다. 또 이 기술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지 아니하여 조정에서 죄를 다스려도 오히려 고하지 아니하니, 이는 반드시 환술(幻術)이요, 정업(正業)이 아닐 것이다.
사인(士人) 권모(權某)가 일찍이 음악을 배우는 까닭을 말하기를, “젊어서 밤중에 친구 집에 갔다가 마침 길 옆에 있는 집에서 등불을 켜고 이야기하며 웃으므로 내가 창 밖에서 틈으로 들여다보니, 한 남자가 한 여자와 더불어 이불을 끼고 앉았는데, 남자는 젊고 잘 생겼으며 계집은 아름답기가 비할 데가 없었다. 여자가 일어나 시렁 위에 조그마한 상자를 가져다 상자를 열어 포(脯)와 밤(栗)을 늘어놓고 드디어 은그릇에 술을 데워 각각 서너 잔씩 마시고 남자가 거문고를 가져다 곡조를 탈 때 여자가 말하기를, ‘풍입송(風入松 고려시대의 노래)을 타십시오.’ 하니, 남자가 줄[絃]을 고르고 기러기발을 옮겨 천천히 탔는데, 소리가 아주 오묘했다. 여자도 따라서 낮게 노래부르니 목소리가 꿰어놓은 구슬처럼 아름다웠다. 나는 마음속으로 부러워하고 그리워하기를 마지 않아, ‘세상에서 어찌 이와 같은 사람이 있으리오. 반드시 신선의 무리로다.’하고, 이로 말미암아 음악을 배우되 먼저 풍입송을 익혀서 드디어 모든 소리에 통하고 또한 첩을 얻어 늙을 때까지 같이 살았다.” 하였다.
백씨(伯氏) 문안공(文安公)은 학문을 좋아하고 싫증을 내지 않아 일찍이 집현전(集賢殿)에 있을 때 《태평광기(太平廣記)》 500권을 뽑아 기록하고, 줄여서 상절(詳節) 50권을 만들어 세상에 간행하고, 또 모든 책과 《태평광기》 상절(詳節)을 모아서 《태평통재(太平通載)》 80권을 만들고, 또 경사(經史)의 글을 뽑아 그 대우(對偶)를 좇아 문(文)과 질(質)과 공(空)으로써 이를 나누니, 문은 행어(行語)요, 질은 착어(着語)요, 공은 조어(助語)이다. 또 동국지도를 찬하여 반도 이루지 못하였을 때 조정에서 국(局)을 설치하고,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을 편찬하니, 모두 문안공이 규모한 것이다.
계유년 겨울에 백씨가 병조 사좌랑(四佐郞)이 되어 매일 밤 들어가 수직(守直)하였다. 10월 10일에 하의정(河議政)의 상여가 발인(發引)할 때 낭조(郞曹)가 모두 문 밖 백씨 집 위에 모였다. 정랑 권개(權愷)가 말하기를, “내가 늙어서 새벽에 일어나기 어렵다.” 하고, 수직하기를 청하였다. 이날 밤에 난(難)을 평정하여 권개는 훈열(勳列)에 참여하였으나 백씨는 참여하지 못했다. 무자년 겨울에 백씨가 이조 판서가 되어 도승지 권감(權瑊)공과 더불어 함께 회암사(檜巖寺)에 가서 세묘의 칠칠재(七七齋 49일 제사)를 감독하였는데, 이날 밤에 난이 일어나서 두 공이 돌아서 동문에 이르니, 문이 닫혀 들어갈 수가 없었다. 백씨가 남산 밑 성밖으로 돌아서 집에 돌아오는데, 얼마 있지 않아 문이 열려서 권감은 좌익(佐翼)에 참여하였으나 백씨는 참여하지 못하였다. 기축년 겨울에 백씨가 도총관(都摠管)으로 상을 만난 지 10여 일에 성종이 즉위하여 재추(宰樞)로서 병권(兵權)을 가진 사람은 모두 좌리(佐理)에 참여하였으나 백씨는 참여하니 못하였으니, 세 번 다 마땅히 참여할 것임에도 참여하지 못한 것은 모두 천명이다.
유생 신린(辛鏻)은 강진산(姜晉山)의 누이의 아들이다. 키가 9척이요, 눈이 횃불과 같으나 겁이 많고 재주와 용기가 없었다. 일찍이 강진산을 따라 명경(明京)에 가는데, 이때에 새로이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하여, 여진(女眞)이 모두 원수로 미워하고 보복하고자 하였는데, 마침 서로 중원 가는 길가에서 만나 돌을 던지기도 하고, 주먹으로 때리기도 하고, 의복과 물품을 빼앗아 일행이 낭패를 당해 두려워하였다. 신린을 돌아다보니 뒤떨어져 혼자 오고 있으므로 일행은 모두 침욕(侵辱)을 당하리라 여겼는데 여진이 신린을 보고 모두 길 옆으로 피하여 갔다.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신린이 말하기를, “ 심신이 떨려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다만 눈을 크게 뜨고 보았을 따름이다.” 하였다. 그들은 신린의 키가 크고 눈이 큰 것을 보고 두려워서 피한 것이었다. 박거경(朴巨卿)이 일찍이 영압사(營押使)로 명경에 갈 때 또 여진과 노상에서 만나 박거경이 말을 달려 나오니, 같이 가던 사람도 역시 말을 달려 뒤를 따라왔다. 박거경은 도둑이 자길르 좇아오는 줄 알고 있는 힘을 다하여 말을 채찍질해서 수십 리를 달아나서야 비로소 진위(眞僞)를 알았다. 그때 사람이 웃으며 말하기를, “신린은 마땅히 겁낼 사람이 겁내지 아니하고, 거경은 겁내지 않아야 할 사람이 겁냈으니, 겁냄도 겁내지 않음도 모두 겁을 낸 것이다.” 하였다.
일본국에는 황제가 있고 국왕이 있으나 황제는 궁중에 깊이 파묻혀 하는 일이 없고, 다만 아침저녁으로 하늘에 절하고 해에 절을 할 따름이어서 세상에서 권력이 없으면서 존귀한 자를 왜황제(倭皇帝)라 부른다. 국왕이 오로지 국가의 정치를 주관하고 쟁송을 청단(聽斷)하였다. 그러나 대신이 있어서 각각 병사를 가지고 지면을 나누어 웅거하여 때로는 반란을 꾀하고 명령에 거역하여도 왕이 이를 제지하지 못하였다. 좌우 무위전(武衛殿)ㆍ경극전(京極殿)ㆍ전산전(畠山殿)ㆍ세천전(細川殿)ㆍ대내전(大內殿)ㆍ소이전(少二殿)과 같은 것이 아주 많으며, 황제와 국왕의 자식은 다만 장자가 아내를 얻어 대를 잇고, 그 나머지는 모두 중이나 여승이 되었는데, 그 존귀함으로 말미암아 하인과 결혼하지 못하였다. 그 나라가 바다에 둘러싸여 있어서 영토가 아주 넓으니 구주(九州)ㆍ일기주(一歧州)ㆍ대마주(對馬州)와 같은 것은 모두 섬이지만 땅이 또한 크다. 그 나라 풍속에는 남녀가 모두 얼룩얼룩한 옷을 입어 그 모양이 분별이 없으나, 여자는 여상제 북상투 쪽진 것[髽] 같은 머리를 하여 어깨를 덮고, 남자로서 중이 된 사람은 머리를 깎았는데, 그 관복이 마치 우리 나라 중의 무리와 같았다. 아직 중이 되지 않은 사람은 머리를 깎지 않고 머리를 엮어 상투를 만들고 상투 위에 조그마한 관을 쓰며 반만 머리와 이마를 깎은 사람이 있고, 반의 반만 깎은 사람이 있어서 이로써 그 벼슬을 분간하였다. 그 옷에 모두 초목과 새와 짐승을 그린 까닭으로 얼룩덜룩하고 상하에 모두 소매가 있어 두 발을 두 가랑이에 넣고 땅에 끌며 다녔다. 서로 싸울 때는 바짓가랑이를 띠[帶] 사이에 끼우고 칼을 가지고 나오며, 존귀한 사람을 보면 발을 벗고 땅에 꿇어앉아 절을 하였다. 그 나라에서는 채찍과 가시나무로 종아리 치는 형벌이 없고, 죄의 가볍고 무거움에 상관없이 다만 목베어 죽일 뿐이지만 아무리 죄가 무거운 죄인이라도 절[寺]로 달려 들어가면 죄를 면하였다. 사람마다 철근을 얻어 어릴 때부터 칼을 만들어 계속 단련하여 거리에 나가 사람과 겨루었는데, 비록 많은 사람이 죽어도 이를 상례(常例)로 여기고 불문에 붙였다. 중이 되면 해를 가할 수 없으므로 중을 귀하게 여겼다. 사람이 죽으면 판자로 관(棺)을 만들어 앉은 자세로 매장하며, 봉분을 하거나 나무를 심지 않아 편지와 다름이 없었다. 그 음악도 역시 별다른 것이 없고 한 손으로 조그마한 북을 잡고, 한 손으로 이것을 쳐서 박자를 맞추며 춤추는 사람은 부채를 잡고 몸을 돌려 춤을 추었다. 만약 국왕의 사신이 오면 상이 정전(正殿)에서 두 번 접견하고, 예조도 또한 두 번 전(殿)에서 잔치하고, 우두머리 추장을 사신 보낼 때와 대마주(對馬州)의 특송(特送)이면 상이 편전(便殿)에서 한번 접견하고 예조가 두 번 잔치하며 보통 왜인이면 예조가 한번 잔치할 뿐이었다. 비록 군신의 분별이 있다 하더라도 우두머리 되는 추장이 국왕의 명령을 거절하면 국왕이 이를 제지하지 못하였다. 또 국왕 사신이ㆍ대마도에 이르면 도주가 반드시 세금으로 뇌물을 받고, 그렇지 아니하면 가두어 두고 놓아 보내지 않았는데, 이는 이른바 머리가 오히려 아래로 가고 발이 반대로 위에 올라온 격이다. 만약 대장경을 청하여 이를 얻으면 사람마다 머리 위에 이고 말하기를, “풍속이 순후(淳厚)하고 아름다우니 태평을 기약하겠다.”하며 또 구하는 바는 《논어(論語)》ㆍ《법화경(法華經)》ㆍ삼체시(三體詩)ㆍ우황(牛黃)ㆍ호피(虎皮)ㆍ요발(鐃鉢 불교에서 쓰는 악기)이요, 전혀 노루ㆍ사슴ㆍ소ㆍ돼지를 먹지 아니하고, 다만 개고기를 좋아한다. 또 잉어를 즐겨 먹고, “이것이 제일 맛있다.” 하였다.
야인(野人)이 우리 평안도와 접경한 곳을 건주위(建州衛)라 하고, 우리 영안도(永安道)와 접경한 곳을 모린위(毛獜衛)라 하였다. 또 우리 성 밑에 의지하여 사는 사람은 여러 부류였다. 매년 겨울에 상경하여 바치는 것은 다만 돈피 몇 벌이며, 조정에서도 또한 붉고 검은 면포로써 보답한다. 그 제수하는 직책은 사맹(司猛)ㆍ사정(司正)ㆍ사과(司果)ㆍ사직(司直)ㆍ호군(護軍)으로부터 통정(通政)ㆍ가정(嘉靖)ㆍ자헌(資憲)까지 오르고, 새로 당상관에 제수된 자는 옥관(玉貫)ㆍ품대(品帶)ㆍ승상(繩床)을 주며, 또 예(例)에 따라 봉록을 주었는데 조금이라도 혹 뜻에 맞지 아니하면 고신(告身)을 찢어 뜰에 던져버리고 벼슬이 비록 높고 낮음이 있으나 상하의 분별이 없고, 취하면 서로 싸우고 헐뜯고 서로 주먹질한다. 그 본토에 있을 때에는 비록 둔사(屯四 병전〈兵典〉)의 장이라 하더라도 역시 서로 공경하지 않고, 다만 원수를 갚는 것만을 일삼아 비록 여러 대가 되어도 잊지 않고, 마음에 새겨두었다가 서로 전하여 군사를 일으키며, 그 군대는 또한 모두 돈을 주어 불러오는 까닭으로 진실로 죽는 자가 있으면 모두 재화로써 상을 주었다. 밖으로는 비록 아주 사모하는 듯하나 안으로는 실로 굳세고 강하여 항상 몰래 훔칠 마음을 품어서 만약 우리 나라 백성으로서 들에서 농사짓는 사람을 보면 잡아가서 서로 돌려가며 팔고 사, 이로써 생업의 밑천으로 하였다. 그 혼인에 있어서는 우마 수십 마리를 바치고 곧 약혼을 정하고, 이웃 사람이 모두 모여서 신부를 잘 단장시켜 나와서 뵙게 하며 또 나이 어린 여자를 단장하여 인속(引屬)이라 하였는데, 인속은 신부에게 예절과 법도를 가르쳐주고, 큰 상자를 가지고 손님의 앞에 나아가 절하면 손님은 얼마건간에 의복 혹은 포물(布物)을 상자에 던져 이것으로 신부의 자산을 도와주었다. 형이 죽으면 반드시 형의 아내를 처로 삼되 아우의 처는 아내로 삼지 못하고, 모두 말하기를, “아우는 내 아들과 같은데 어찌 아들의 아내를 내 아내로 삼을 수 있겠는가. 형은 내 아버지와 같으니 아버지의 물건을 자식이 어찌 이어받지 못하겠는가.” 하였다. 형이 살아있을 때에도 또한 형의 아내를 취하는 자가 있으니, 형이 사냥을 나가서 아우가 그 어머니 및 형의 아내와 더불어 한 방에 있을 때 동생이 욕심이 생기면 형수에게 말하기를, “형수여, 형수여, 원하건대 따뜻하고 부드러움을 빌려주십시오.”하면 형의 아내가 역시 거절하지 아니하고, 청을 들어주었다. 만약 거절하면 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하는데 너는 무엇 때문에 불손하냐.” 하고 아우도 또한 때리고 핍박하여 간통하였다. 혹 진실로 사랑을 두게 되면 그 형을 쏘아 죽였는데 형의 자식이 또 말하기를, “무슨 까닭으로 우리 아버지를 죽이느냐.” 하고 또 그 작은 아버지를 쏘아 죽이니, 이로 말미암아 원수 갚는 것이 그치지 않았다. 사람을 장사지낼 때에는 구멍을 파서 시체를 그 가운데 던지고 돌을 쌓아 무덤을 만들고 술과 밥을 베풀어 제사를 지낸 뒤에 술과 밥을 구멍에 뿌려서 시체와 서로 접하게 하고, 또 평생에 사랑하던 말을 무덤 앞에 매어두며 또 화살통을 그 위에 걸어두어 그것이 다 스러질 때까지 사람이 감히 거두지 못하였다. 깊은 곳에 사는 야인은 아비가 늙어서 걷지 못하면 자식이 성찬(盛饌)을 베풀어 대접하고 묻기를, “아버지 곰이 되고 싶습니까? 호랑이가 되고 싶습니까? 아버지의 원하는 대로 되소서.” 하고 가죽을 꿰매어 주머니를 만들어 아비를 주머니 속에 넣어 나무에 걸어놓고 쏘되 살 한 개로써 죽이는 것이 참된 효자였다.
승가(僧家)에 성불도(成佛圖)가 있으니, 지옥으로부터 대각(大覺)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 제천(諸天) 제계(諸界)가 무려 수십여 처인데, 주사위 육면에 ‘나무아미타불’ 6자를 써서 던지고 옮겨 오르락 내리락하면서 승부를 정한다. 정승 하륜(河崙)이 종정도(從政圖 오락기구의 하나)를 만들었는데, 9품으로부터 1품에 이르기까지 관작의 차례가 있고, 주사의 육면에 덕(德)ㆍ재(才)ㆍ근(勤)ㆍ감(堪)ㆍ연(軟)ㆍ빈(貧) 등 6자를 써서 덕과 재면 올라가고, 연과 빈이면 그만두기를 마치 벼슬길과 같이 하였다. 제학(提學) 권우(權遇)는 작성도(作聖圖)를 만들기를 9분(分)으로부터 1분까지로 하여, 사람의 어질고 어리석음과 마음의 맑고 흐림이 같지 않음에 따라, 1분을 좇으면 올라가기 쉽고, 9분을 좇으면 올라가기 어려웠다. 주사위 육면에 성(誠)ㆍ경(敬)을 두 자씩, 사(肆)ㆍ위(僞)를 한 자씩 써서 던지는 대로 가는 것은 성불도의 규칙과 같았다.
남계영(南季瑛) 선생은 생원 급제와 동시에 장원에 뽑혀서 당시에 문명(文名)이 있었다. 그러나 그 학문이 다만 성리학(性理學)을 궁구하는지라, 구두(句讀)와 뜻을 파악하는 데 문사(文辭)를 몹시도 싫어하였다. 일찍이 두보의 시를 읽고 말하기를, “이 책은 내용이 없고 부실하며, 미혹하게 하고 긴요하지 않아 무슨 뜻인지를 알 수 없다.” 하고 드디어 폐하고 읽지 않았다.
사문(斯文) 이함녕(李咸寧)은 성산부원군 이직(李稷)의 손자이다. 그의 아비 이사후(李師厚)가 병이 들었다. 마침 과거를 볼 시기였으나, 사문이 아비의 병으로 말미암아 시험에 나가지 못하게 되었는데 부윤(府尹)이 억지로 명령하여 응시하게 하여 드디어 장원에 뽑혔다. 과거에 급제한 날 궁문을 나와 말을 타려 할 때 그 말이 목을 돌려 모자에 꽂힌 꽃을 물어 꺾었는데, 며칠 뒤에 부윤이 주고 사문도 또한 죽었다. 당시 사람들이 말이 모자의 꽃을 꺾는 것이 크게 상서롭지 못한 징조라 하였다.
동지(同知) 이정보(李廷甫)가 글자를 잘 쓰지 못하여 글자가 행(行)을 이루지 못하였다. 동부승지에 제수되어 계(啓)를 올릴 적에 끝에 의윤(依允) 두 자와 임금의 이름을 썼는데, 성종이 이것을 보고 전교하기를, “승지가 스스로 쓰지 아니하고 어린 아전을 시켜 쓴 것이냐.” 하였다. 승지 등이 아뢰기를, “이것은 동부승지가 스스로 쓴 것이옵고, 대신 쓴 것이 아니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글하는 집 자손으로 문지(文地)에 출신하였으면서 어찌 이와 같이 졸하냐.” 하고, 드디어 시를 짓고 병서(幷書)하여 바치라고 명하니, 보는 사람이 모두 웃었다.
제학(提學) 최흥효(崔興孝)는 글씨 잘 쓰기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그 필적은 오로지 진(晉) 나라 유익(庾翼)의 체(體)를 본받아 비록 붓을 놀리는 방법이 익숙하나 거칠고 상스러움을 면하지 못하였다. 태종이 친정(親政)하던 날, 제학이 이조 낭청으로 입시하였는데, 남의 고신(告身)을 쓰는데 붓을 놀려 그림을 그리면서 한참이 지나도록 해놓은 게 없었다. 김종서(金宗瑞)가 병조 낭청으로 옆에 있다가 한번 붓을 들어 수십 장을 써내렸다. 다 쓰고 나서 옥새를 찍으니, 자체와 옥새 자국이 모두 단정하므로 태종이 돌아보고 좌우에게 말하기를, “이는 참으로 쓸 만한 인재다.” 하여 김종서가 이로 말미암아 떨쳐 일어났다. 제학이 일찍이 중국에 보내는 표문(表文)을 쓸 때, 날짜를 써넣지 아니하였으나 온 나라가 이것을 알지 못하였다. 영락황제(永樂皇帝)가 이것을 보고 표문을 가만히 우리 나라 사신에게 주며 말하기를, “만약 담당 관리에게 이 표문을 내리면 반드시 너의 임금의 죄를 청할 것이기에 몰래 돌려보내노니, 돌아가 너의 임금에게 말하여 뒤에는 이와 같은 일이 없게 하라.” 하였다. 세종이 크게 노하여 곧 제학을 옥에 가두고 극형을 가하려 할 때, 그의 아내가 상서(上書)하여 살려주기를 청하므로 전교하기를, “이는 내가 알 바 아니니, 그 원통함을 황제에게 호소하라.” 하였다. 그러나 고의가 없이 한것 이므로 귀양보내니, 이로 말미암아 관위(官位)가 부진하였다.
고은(皐隱) 안지(安止) 선생은 벼슬은 비록 높았으나 마음은 더욱 겸손하였다. 집이 인왕동(仁王洞)에 있어 초가집이 쓸쓸했으나 산수가 맑고 기이하여 항상 시가(詩歌) 읊조림을 즐거움으로 삼았으며, 비록 친구와의 편지를 쓸 때에도 모두 시구(詩句)를 사용하였다. 선조께 제사지낼 때에도 반드시 목욕 재계하고 정성을 다하여 일찍이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고, 비록 식량이 자주 떨어져도 마음이 편하고 침착하였다. 벼슬이 1품에 이르고 나이가 80이 되어 늙어서 시골에 물러갈 적에 대궐에 나아가 네 번 절하고 크게 곡하고 떠나니, 지나가는 사람이 듣고 비탄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사문 설장수(偰長壽)는 대원(大元) 사람이다. 그의 아비 설손(偰遜)이 원말(元末)에 피난하여 왔으므로, 조정에서 벼슬을 주었다. 시문(詩文)에 능하여 《근사재집(近思齋集)》이 세상에 나왔고, 사문은 청주(淸州) 임인과(壬寅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2품에 이르고, 공양왕을 도와서 9공신(功臣)의 열에 참여하다가, 그뒤 아조(我朝)에 들어와서 죄를 얻어 귀양갔다가 죽었다. 또한 시문에 능하여 《예재집(藝齋集)》이 세상에 나왔다. 손수《목은집(牧隱集)》을 썼는데 그 필법이 굳세어 규범이 있었다. 사문의 동생 설미수(偰眉壽)와 설경수(敬壽)가 나란히 병진과(丙辰科)에 급제하여 미수는 벼슬이 2품에 이르렀다. 설경수의 아들 설순(偰循)은 무자과(戊子科)에 급제하고, 또 정미년 중시(重試)에 급제하여 벼슬이 2품에 이르고 문명(文名)이 있었다. 설씨가 다른 나라 사람으로서 부(父)ㆍ자(子)ㆍ손(孫)이 서로 이어서 높은 벼슬을 하였으나, 지금은 그 후예가 드물다.
태조(太祖 명 태조) 고황제(高皇帝)가 촉한(蜀漢)을 쳐서 평정할 때, 위주(僞主) 명옥진(明玉珍)의 아들 명승(明昇)과 진우량(陳友諒)의 아들 진리(陳理)가 모두 우리 나라에 유배되었으나, 조서(詔書)를 내려 말하기를, “벼슬을 주지 아니하고 백성으로 삼지 않는다.”하였는데, 우리 나라에서 초가집과 노비를 주어 편안히 대접하게 하였다. 명승이 명옥진의 뒤를 이어 황제라고 칭하다가 나이 9살에 붙잡혀 우리 나라에 왔던 것이다. 명승의 어미는 일찍 황태후가 되었던 사람이다. 매일 밤 축수(祝手)하고 하늘을 향하여 말하기를, “하늘이여, 하늘이여, 나로 하여금 이곳으로 옮겨 오게 한 것은 오로지 촉 대신(蜀大臣)의 죄입니다. 대신과 대명(大明)이 서로 통하여 우리 병사는 오로지 동쪽을 막는 데만 힘쓰게 하고, 병사를 이끌어서 남으로 들어왔으므로 드디어 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였다. 태숭조(太崇朝)에 왕비의 관복을 명(明) 나라에서 가져왔는데 궁중에서 입는 방법을 모르더니 명승의 어미가 궁중에 들어와 가르쳐준 뒤에야 알게 되었다. 명승의 손자로 녹사(錄事)에 속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매우 어리석었다. 사문(斯文) 정공(正公)이 그때에 좌상이 되었다가 녹사에게 말하기를, “자네 할아비는 대촉(大蜀) 황제가 되었다가 불행히도 멸망하였지만, 그때에 망하지 않았더라도 자네 대(代)에는 의당 망했으리라.” 하였다. 지금 명(明)씨의 후손으로 개성에 사는 사람이 있다. 내가 일찍이 명 태조의 화상을 보았더니 용모가 단정하고 수염이 그림과 같으며, 손톱은 깎지 않아서 길었다. 진리(陳理)는 자식이 없고 외손만 있는데, 내가 일찍이 외손 조공(曺公)을 따라서 가지고 있는 자수(刺繡)놓은 비단을 보았는데 그때의 호화로움을 상상하게 하는 유물이었다.
향시(鄕試)의 울타리는 경중(京中)에서처럼 엄중하고 정제되어 있지 못하다. 수령이 시관(試官)이 되고 수령이 과거보는 선비가 되기 때문에 흔히 누설되어 서로 통하는 일이 많았다. 한 수령이 시험에 나아갈 때 시권(試券)을 만들어주고 나와서, 그가 지은 시권의 첫머리 글귀를 써서 소리(小吏)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네가 가서 내 시권의 등급 차례를 보고 오너라.” 하였다. 얼마 있다가 소리가 돌아와서 말하기를, “시권이 고중(高中)이로소이다.” 하였다. 수령이 그 연고를 물으니, 답하기를, “처음 장중(場中)에 들어가서 당호(堂戶)에 의거하여 엿보니, 시관이 시권을 읽어 내려가다가 반쯤 읽고나서 문득 크게 웃고 이방이라 써붙였습니다.” 하였다. 어떻게 된 것이냐 하면 경자(更子)라 쓴 것이 이(吏) 자와 같아서 이방이 그 우두머리이므로 고중이라 한 것이다. 듣는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정묘년 중시(重試)에 대책(對策)을 짓고 또 표전(表箋)을 지어 초시(初試)와 함께 시험보게 하였으나, 초시에는 표전이 없고 같이 한자리에 나아가서 뜰을 나누어 한계를 삼았다. 중시에 참여한 사람은 모두 한때의 거벽이니, 성근보(成謹甫)가 수석이요, 김이판(金吏判)이 둘째요, 이백고(李伯高)가 셋째요, 신고령이 넷째요, 최영성(崔寧城)이 다섯째요, 박인수(朴仁叟)가 여섯째요, 이연성(李延城)이 일곱째요, 송중추(宋中樞)가 여덟째요, 유태초(柳太初)가 아홉째요, 이광성(李廣城)이 열째요, 이양성(李陽城)ㆍ이윤보(李胤保)ㆍ이양성ㆍ이가성(李可成)ㆍ정봉원(鄭蓬原)ㆍ김공판(金工判)은 모두 3등에 뽑히고 이름이 없이 참여한 자는 다만 4사람이었다. 다만 서강중(徐剛中)ㆍ이현노(李賢老)는 명유(名儒)로서 급제에서 빠졌다. 사문 김덕원(金德源)이 초시에 방안(榜眼)에 뽑혔는데, 당시에 그 아버지 공조 판서와 바꾸어 썼다 하여 이후로부터 초시와 중시는 모두 그 날짜를 달리하였다.
옛날 사람들이 모두 거족(巨族)을 귀히 여겼는데, 진(晉) 나라의 왕(王) 사(謝)와 당(唐) 나라의 최(崔)와 노(盧)가 이것이다. 우리 나라 거가대족(巨家大族)은 모두 주(州)ㆍ군(郡)ㆍ토성(土姓)으로부터 나왔으나, 옛날에 번창하다가 지금 쇠잔한 것과 옛날에 한미하다가 지금 번창한 것을 아울러 기록하면 파평(坡平) 윤(尹)씨ㆍ한양 조(趙)씨ㆍ이천(利川) 서씨ㆍ여흥(驪興) 민(閔)씨ㆍ수원 최(崔)씨ㆍ양천(陽川) 허(許)씨ㆍ덕수(德水) 이(李)씨ㆍ행주(幸州) 기(奇)씨ㆍ교하(交河) 노(盧)씨ㆍ인천 이(李)씨ㆍ채(蔡)씨ㆍ남양(南陽) 홍(洪)씨ㆍ용구(龍駒) 이(李)씨ㆍ죽산(竹山) 박(朴)씨ㆍ안(安)씨ㆍ양성(陽城) 이(李)씨ㆍ광주(廣州) 이(李)씨ㆍ강화(江華) 봉(奉)씨ㆍ청주(淸州) 한(韓)씨ㆍ경(慶)씨ㆍ서산(瑞山) 유(柳)씨ㆍ한(韓)씨ㆍ가(李)씨ㆍ전의(全義) 이(李)씨ㆍ단양(丹陽) 우(禹)씨ㆍ진천(鎭川) 송(宋)씨ㆍ신창(新昌) 맹(孟)씨ㆍ옥천(沃川) 육(陸)씨ㆍ경주(慶州) 김(金)씨ㆍ가(李)씨ㆍ김해(金海) 김(金)씨ㆍ가(李)씨ㆍ안동(安東) 김(金)씨ㆍ권(權)씨ㆍ진주(晉州) 강(江)씨ㆍ하(河)씨ㆍ성주(星州) 이(李)씨ㆍ상주(尙州) 김(金)씨ㆍ밀양(密陽) 박(朴)씨ㆍ손(孫)씨ㆍ청송(靑松) 심(沈)씨ㆍ거창(居昌) 신(愼)씨ㆍ창녕(昌寧) 성(成)씨ㆍ조(曺)씨ㆍ영산(靈山) 신(辛)씨ㆍ고령(高靈) 신(申)씨ㆍ동래(東萊) 정(鄭)씨ㆍ하동(河東) 정(鄭)씨ㆍ연일(延日) 정(鄭)씨ㆍ하양(河陽) 허(許)씨ㆍ칠원(漆原) 윤(尹)씨ㆍ순흥(順興) 안(安)씨ㆍ의령(宜寧) 남(南)씨ㆍ선산(善山) 김(金)씨ㆍ완산(完山) 이(李)씨ㆍ광산(光山) 김(金)씨ㆍ나주(羅州) 박(朴)씨ㆍ나(羅)씨ㆍ장수(長水) 황(黃)씨ㆍ순천(順川) 박(朴)씨ㆍ능성(綾城) 구(具)씨ㆍ영광(靈光) 정(丁)씨ㆍ여산(礪山) 송(宋)씨ㆍ제주(濟州) 고(高)씨ㆍ해주(海州) 최(崔)씨ㆍ평산(平山) 신(申)씨ㆍ연산(延安) 이(李)씨ㆍ백천(白川) 조(趙)씨ㆍ문화(文化) 유(柳)씨ㆍ신천(信川) 강(康)씨ㆍ원주(原州) 원(元)씨ㆍ강릉(江陵) 최씨ㆍ함(咸)씨ㆍ평양(平壤) 조(趙)씨ㆍ함종(咸從) 어(魚)씨ㆍ풍천(豐川) 임(任)씨 등이다.


 

[주D-001]전최(殿最) : 지방 감사가 각 고을 수령의 치적을 심사하여 중앙에 보고하는 우열 성적을 고사할 때, 상(上)ㆍ취(取)ㆍ하(下)를 전(殿)이라 하여 음력 6월과 섣달에 두 번 시행하였다.
[주D-002]정사(定社)의 난 : 조선 태조 때 일어난 난으로 소위 방석(芳碩)의 난이라 불린다. 이를 평정한 공으로 정종 때 의안대군 등 17명에게 훈호를 내렸는데, 이를 정사의 난이라 한다.
[주D-003]선농단(先農壇) : 중국 상고시대의 신농씨(神農氏)와 후직(后稷)을 제사하던 단으로, 서울 동대문 밖에 있다.
[주D-004]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 : 천신을 제사지내는 단으로, 서울 남교에 있었음.
[주D-005]선농단(先農壇) : 중국 상고시대의 신농씨(神農氏)와 후직(后稷)을 제사하던 단으로, 서울 동대문 밖에 있다.
[주D-006]사한단(司寒壇) : 겨울이 너무 따뜻할 때 또는 눈이 너무 오지 않을 때 제사를 지내는 단이다.
[주D-007]세초(歲抄) : 해마다 6월과 섣달에 이조와 병조에서 죄과 있는 관리를 초록(抄錄) 상주(上奏)하여 왕명으로 감등(減等)하거나 용서하던 일을 말한다.
[주D-008]공황(龔黃) : 한(漢) 나라 때 규칙을 잘 지키며 열심히 근무했던 관리 공수(龔遂)와 황패(黃霸)를 말한다.
[주D-009]삼포(三浦) : 능산(能山)의 제포와 동래의 부산포, 울산의 염포를 가리킨다.
[주D-010]태평광기(太平廣記) : 송나라 이방(李昉) 등이 칙명을 받들어 지은 책. 기문을 종류에 따라 분류ㆍ집성한 설화집
[주D-011]난(難)을 평정 : 조선 세조 때 김종서ㆍ황보인 등을 제거한 사실을 두고 말한 것이다.
[주D-012]좌익(佐翼) : 조선 세조 원년에 성삼문 등의 모계(謀計)를 미리 알린 일을 가리킨다.
[주D-013]좌리(佐理) : 조선 성종 2년에 신숙 이하 보좌의 공신 75명에 준 훈명을 가리킨다.
[주D-014]명옥진(明玉珍) : 명 나라 사람, 촉(蜀)을 평정하고 대하국(大夏國)을 세워 황제라고 자칭했다.
[주D-015]고중(高中) : 화살이 보기좋게 명중하였다는 뜻에서 우등의 성적으로 합격하는 것을 말한다.
[주D-016]방안(榜眼) : 갑과(甲科)에 둘째로 급제한 사람을 일컫는다.

용재총화 제10권
용재총화 발


이상 총화(叢話)는 우리 좌주(座主) 성문대공(成文戴公 성현〈成俔〉) 선생이 저술한 것이다. 선생이 어려서 총명하고 뛰어나서 동서 고금의 책을 많이 읽고 잘 기억하였고, 백씨ㆍ중씨가 함께 문장으로써 사대부 사이에서 일컬어졌고, 보고 들은 것이 또한 많았다. 나이가 들어 문장을 지을 때, 물이 용솟음치고 산이 솟는 것 같았다. 이과(二科)에 뽑혀 항상 시종(侍從)에 벼슬하고 지위가 경(卿)에 열(列)하고, 오랫동안 문병(文柄)을 잡아 평생에 저술이 많았다. 《허백당집(虛白堂集 성현의 시문집)》30권, 《진의비설(秦議稗說)》 12권, 《상유비람(桑楡備覽)》 40권이 있으며, 《경륜대궤(經綸大軌)》 50권은 아직 탈고에 이르지 못했고, 또 《풍소궤범(風騷軌範)》ㆍ《악학궤범(樂學軌範)》ㆍ《부휴자담론(浮休子談論)》은 모두 그 찬술한 바이며, 《용재총화》는 그 하나다. 가정(嘉靖) 갑신년(甲申年) 여름에 공의 아들은 우리 방백(方伯) 상공(相公)인데, 그 휘(諱)는 성세창(成世昌)이다. 공이 《용재총화》두 질을 가지고 나에게 출판해 줄 것을 부탁하여 내가 받아서 일을 마쳤는데, 무릇 우리 나라 문장의 세대에 따른 고하(高下)와 도읍(都邑)의 □□ 풍속이 숭상하는 □□□와 서화(書畫)등 여러 기능을 기리는 것과 조정과 민간의 기쁘고 놀랍고 즐겁고 슬프고, □□의 담소(談笑)가 심신을 화하고 즐겁게 하여 국사에 갖추어지지 못한 것이 모두 실려 있으니, 이는 □일까. 견문의 넉넉함과 학식의 넓음은 다른 문필에 종사하는 사람이 붓을 들어 서화를 그리거나 쓰는 것에 견줄 바가 아니다. 곧 엄연히 한 권을 베낌으로써 그 전(傳)함을 오래하게 하여 좋아하는 사람과 더불어 이를 함께 하고자 함이 나의 뜻이다. 아, 선생의 사업이 빛나고 뚜렷이 드러나서 사람의 눈에 똑똑하게 보여, 모두 국사에 기재되어 있으니, 어찌 이 편(編)을 기다리리오. 그러나 그 사람을 생각하면 반드시 그 즐겨한 바를 생각하는 것인데 하물며 문장이리오. 내가 이에 힘쓴 바는 한 가닥 중상(重相)의 부탁으로써 한 것이기는 하나 선공(先公)이 나를 알아주었음을 저버리지 않으려 함이로다. 가정 을유년 가을 9월 9일[重陽] 며칠 뒤에 경주 부윤 황필(黃)은 발(跋)하노라.


 

[주D-001]숭상하는 □□□ : 탈자(脫字)가 많아서 분명치 않다.

 

용재총화 제10권
용재총화 제10권

○ 호정(浩亭) 하륜(河崙)이 예천 군수가 되어 고을 기생을 모두 사사로이 다루고 거리낌 없이 음란하였다.
전최(殿最) 날 도사(都事)가 호정의 허물을 논박하여 곧 하고(下考)하려고 하였더니, 당시 김주(金湊)가 감사로 있었는데 만류하면서 말하기를 “하륜의 기상을 보니 한 고을에 오래 머물러 있을 사람이 아니니 아직 논하지 말라.” 하고 드디어 상등[上第]으로 고과하였다. 그후에 김주가 정사(定社)의 난에 관련되어 기세가 아주 위급할 때 김주의 아내가 호정의 말 머리에 꿇어앉아서, “나는 김 아무개의 아내입니다.” 하고 말하니, 호정이 힘써 구하여 죄를 면하였다.
호정 하륜이 충청도 관찰사가 되자, 그 당시 정안군(靖安君)이던 태종이 집 잔치에 참여하였다. 여러 손님들이 많이 모였는데 태종이 앞에 나아가서 술을 부을 적에 호정은 일부러 취한 척하며 상위의 찬과 탕을 뒤집어 엎어, 왕자의 옷을 더럽히자, 태종이 크게 노하여 일어났다. 호정이 자리에 있는 손님들에게 말하기를, “왕자가 노하여 가니 가서 사죄해야겠다.” 하고 드디어 따라나섰다. 종이 태종에게 고하기를, “감사가 옵니다.”하였으나, 태종은 돌아보지도 않고 대문(大門)에 이르러 말에서 내리므로 호정도 역시 말에서 내렸다. 중문(中門)에 들어가니 호정도 또 중문에 들어가고, 내문(內門)에 들어가니 또한 내문에 따라 들어왔다. 태종이 비로소 이를 의심하여 돌아보고, “웬 일이냐?”고 물었다. 호정은 말하기를, “왕자의 일이 위급합니다. 소반을 뒤집어 엎은 까닭은 장차 나라에 위태로운 환란이 있을 것이기에 이를 미리 알린 것입니다.” 하니, 그제서야 비로소 침실로 불러들여 계책을 물었다. 호정이 말하기를, “신은 왕명을 받았으니 오래 머물 수 없습니다. 안산 군수(安山郡守) 이숙번(李叔蕃)이 정릉 이안군(移安軍)을 거느리고 서울에 올 것이니, 이 사람에게 큰일을 부탁할 만합니다. 신도 또한 진천(鎭川)에 가서 머물러 기다리겠사오니, 만약 일이 이루어지면 신을 급히 부르십시오.” 하고 호정은 드디어 떠났다. 태종이 이숙번을 불러 그 연고를 말했더니, 이숙번은 아뢰기를, “손바닥 뒤집듯이 쉽사온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하고, 드디어 태종을 모시고 궁중의 종과 이안군을 이끌고, 먼저 군기감(軍器監)을 빼앗아 갑옷을 입고 병기를 가지고 나와 경복궁을 둘러쌌다. 태종이 남문 밖에 막차를 쳐서 그 가운데 앉고 또 막차 하나를 그 밑에 치니, 사람들이 누구의 자리인지 알지 못했는데, 호정이 올라와 가운데 자리잡으니 사람들이 모두 머지 않아 재상이 될 줄 알았다. 정사(定社)의 공은 모두 호정과 이숙번의 힘이었다.
임오년 급제의 방문(榜文)을 붙인 뒤 사은(謝恩)하는 날에 세조가 후원(後苑)에서 신은(新恩)을 보려고 원(苑) 안에서 유가(遊街)를 하게 하고, 겸하여 배우와 포물(布物)을 하사하여 미리 구비하고서 기다렸다. 대체로 사은하는 날에는 양방(兩榜)이 모두 문과에 장원한 집에 모여 일시에 궁궐에 나아가고, 또 이튿날에 양방이 무과에 장원한 집에 모여 일시에 임금께 알현하는 것이 예로 되어 있다. 이날 양방이 장원 유자빈(柳自濱)의 집에 모여 술자리를 마련하고, 오랫동안 머문 뒤에 궁궐에 나아갔는데 승지도 제때에 아뢰지 않아 해가 중천에 뜨도록 들어가지 못하였다. 얼마 있다가 임금의 위엄이 진노하여 전교하기를, “그 급제한 자의 홍패(紅牌)를 뺏고 방명(榜名)을 삭제하여 버리라.” 하니 모두 얼굴빛이 검게 되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숙도(叔度)가 말하기를, “그대들은 무엇을 겁내느냐. 어찌 군주가 사람을 취하였다가 다시 빼앗을 리가 있겠느냐. 비록 빼앗긴다 한들 남아에겐 곤충과 현달은 정해진 명(命)이 있으니, 어찌 불안한 마음은 품고 있느냐.” 하고 전연 두려워하지 않아 사람들이 모두 그 도량에 탄복하였다. 궐내에서 신은이 늦게 온 연고를 듣고, 정원이 아뢰기를, “장원한 집에서 모였다가 한번에 궁궐에 들어오는 까닭으로, 이와 같이 늦었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장원한 집에 일찍 간 10명에게는 특별히 유가를 허락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법관에 붙여 추고(推考)하라.” 하였다. 나는 일찍 간 열(列)에 들어 3일 동안 유가하였다.
홍문관에 새로 소속된 서리 김순강(金順江)은 아주 바보 같았다. 직제학 이우포(李佑甫)가 묻기를, “너는 어디 사느냐?” 하니, “강동(江東)에 삽니다.” 하였다. 또 물어보기를, “네가 항우(項羽)를 아느냐?” 하니, 서리는, “제가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어떻게 아느냐?” 하니, “우리 할아버지 뻘입니다.” 하였다. 직제학이 위협하여 말하기를, “항우는 반역을 꾀하여 살해당했고, 그 자손으로 도망한 자가 많아서 조정에서는 그 사람들을 잡지 못하였는데, 네가 항우의 후손이라 하니, 장차 관아에 고하여 죽이게 하리라.” 하니, 서리가 손을 모으고 살려달라고 애원하기를, “제가 만약 죄를 면하지 못하다면 오히려 이곳에서 형벌을 받겠으니, 부디 관아에 고하지 마소서.” 하여 좌우가 크게 웃었다. 그리하여 그 서리를 항손(項孫)이라 이름 하였다.
내가 김세적(金世勣)과 더불어 같이 승지가 되었는데, 활을 뛰어나게 잘 쏘아 당시에 적수가 없었기에 무과 장원에 뽑혀 성종(成宗)에게 지우(知遇)를 받아 드디어 기용되었다. 그가 집에 있을 때 하루도 빠짐없이 활 만드는 장인에게 활을 만들게 하고, 활을 시렁에 꽂아 늘 손에 닿지 않은 것이 수백여 자루가 되며, 관청에서도 역시 그렇게 하였다. 항상 활을 벽에 기대어 세우고 손으로 만져 보배같이 여기고 잠시도 쉬지 않았다. 만약 잠깐의 여가라도 있으면 반드시 나와 사후(射候)를 쏘거나 표적을 쏘며, 비가 내리면 웅크리고 앉아 조그마한 종이를 벽에 붙이고 조그마한 싸리활을 써서 쏘았다. 힘써 부지런히 힘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종일 쏘아도 과녁을 벗어나지 않으며 짐승 쏘기를 더욱 잘하여 쏘아서 맞지 않은 적이 없었다. 성종의 사랑함이 견줄바 없어 경기 감사에게 명하여 날로 고기를 그 부모에게 주게 하고, 이것저것 하사받은 것도 또한 헤아릴 수 없었으니, 비록 척리(戚里 임금의 내척과 외척)나 훈구(勳舊 벼슬이 높고 나이 늙은 자)라도 미칠 수가 없었다. 나이 40이 되기 전에 벼슬이 2품까지 올랐으나, 그 부모가 병이 있어 김세적이 찾아뵙다가 병이 전염되어 죽으니, 독자인데다 자식도 없으므로 사람들이 오두 애석하게 여겼다.
세조가 신하들은 매우 사랑하여 인견(引見)하는 일을 거르는 달이 없었다. 혹은 사정전(思政殿)ㆍ충순당(忠順堂)ㆍ화화당(華韡堂)ㆍ서현정(序賢亭)에 거둥하고, 겨울이면 비현각(丕顯閣)에 거둥하였다. 비록 강녕전(康寧殿)ㆍ자미당(紫薇堂)ㆍ양심당(養心)堂같은 깊고 은밀한 안채라도 외부에 있는 신하들이 때로는 들어가기도 하였다. 영순군(永順君)ㆍ귀성군(龜城君)ㆍ하성위(河城尉)ㆍ□□군을 사종(四宗)으로 삼고, 신종군(新宗君)ㆍ거평정(居平正)ㆍ진례정(進禮正)ㆍ금산정(金山正)ㆍ율원부정(栗元副正)ㆍ제천부정(堤川副正)ㆍ곡성정(鵠城正) 등을 사종(射宗 활을 잘 쏘는 종친)으로 삼았다. 또 문신 수십 명을 뽑아 겸예문(兼藝文)이라 이름하여 경사(經史)를 강론하며 혹은 나라를 다스리는 큰 계책을 묻고, 또 무신(武臣)을 불러 사후와 표적을 쏘게 하여 잘 쏘는 사람은 서열을 가리지 않고 벼슬을 올려주며, 혹은 어찬(御饌)을 하사하여 장려하니, 사람들이 모두 면려되어 반열을 월등히 넘어 뽑히는 자도 있었다. 임금이 흔히 여러 신하와 더불어 희롱을 하여 사종으로 하여금 쥐를 잡게 하고, 혹은 거미를 잡게 하고 혹은 임금이 가리키는 나뭇잎과 채소줄기를 따가지고 맞히는 사람은 물건을 하사하였다. 내가 그때에 사관(史官)으로서 겸예문(兼藝文)이 되어 매일 입시(入侍)하였는데, 임금이 몹시 더운 여름에 창문을 닫고 동옷[襦衣]을 입고 화로불을 방에 피워놓았으며, 예문관(藝文館) 여러 유생들은 뜰 가운데 앉아서 종일 뙤약볕을 쬐게 하여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였는데 전교하기를, “춥고 더운 것을 참은 연후에야 큰 일을 맡을 수 있다.” 하였다. 만년에 옥체가 편치 못하여 잠을 주무시질 못할 때 유신을 불러 글을 강론하게 하고, 혹은 잡류인 최호원(崔灝元), 안효례(安孝禮) 등을 끌어들여 각각 그 술수를 가지고 다투게 하여 입에 거품을 물고 어떤 때는 팔을 걷어올리며 욕을 퍼붓는 등의 일도 있었다. 임금은 역시 밤낮으로 책상에 의지하여 이를 듣고 보기만 하니, 두 사람이 교만하게 은혜가 내리지 않는 것을 원망하여 최호원이 사사로이 안효례에게 말하기를, “내가 승지가 되고 네가 첨지가 되는 것이 어찌 그리 늦느냐.” 하니, 듣는 사람마다 웃었다. 임금이 비록 심심풀이로 부르기는 하였으나 실상은 배우(俳優)로서 기르는 것인데, 두 사람이 크게 기용되기를 바라니, 당시의 의논이 이를 천하게 여겼다.
사람이 사용하는 것 중에 질그릇이 가장 긴요하다. 지금의 마포와 노량진 등은 모두 진흙 굽는 것을 업으로 삼으니, 이는 모두 질그릇ㆍ항아리ㆍ독의 종류이다. 자기(磁器)의 경우 백토(白土)를 써서 정밀하게 구워 만들어야 사용하기가 좋다. 외방 각 도(道)에 만드는 사람이 많이 있으나, 다만 고령(高靈)에서 만드는 것이 가장 정교하다. 그러나 그것도 광주(廣州)에서 만든 것만큼 정묘하진 못하다. 해마다 사옹원(司饔院) 관리를 좌우 편으로 나누어 각각 서리를 인솔하고 봄부터 가을까지 만드는 것을 감독하여 어부(御府)에 보내어 바치게 하였는데 그 공로를 기록하여 등급의 차례를 정하여 뛰어난 사람에겐 물건을 하사하였다. 세종 때에 임금이 사용하는 그릇은 오로지 백자기를 썼는데, 세조 때에 이르러서는 채색한 자기를 섞어서 썼다. 회회청(回回靑 중국의 신강성 회회 지방의 청색 안료)을 중국에서 구하여 술병과 술잔에 그림을 그렸는데, 중국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회청이 드물고 귀하여 중국에서도 많이 얻을 수 없었다.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중국에서는 비록 궁벽한 촌의 조그만 오막살이 술집에서도 모두 그림을 그린 그릇을 사용하는데, 어찌 다 회청으로 그린 것이리오. 응당 다른 물건으로 그릴 만한 것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중국에 가서 물으니, 모두 말하기를, “이는 토청(土靑 청화 자기에 쓰는 푸른 도료)이다.”하였으나, 토청 역시 구할 수가 없었다. 이런 이유로 우리 나라에서는 그림 그린 사기 그릇이 매우 적다.
지금 예조는 바로 예전의 삼군부(三軍府)이다. 정삼봉(鄭三峯)이 군국(軍國)의 중대한 일을 맡았을 때 의정부의 제도를 보고 말하기를, “정부와 군부는 일체이다.” 하고 드디어 그 제도에 의하여 만드니 높다랗게 동서가 상대가 되어 그 청사가 굉장한 것이 다른 관부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뒤에 삼군부를 혁파하고 중추원(中樞院)을 설치하여 군무를 맡기지 않고, 예조로써 오례(五禮)를 맡아보게 하고 또 다른 나라의 사신을 대접하게 하니, 그 임무가 중대하여 그 부(府)를 예조로 삼고, 중추원은 도리어 예조의 남쪽 곁채에 우거(寓居)하였다.
경복궁 서쪽 가에 수맥(水脈)이 많은데, 경회루의 연못 물은 비록 옛날 중국의 곤명지(昆明池)ㆍ태액지(太液池)라도 이보다 좋지 못할 것이다. 서문 밖에 샘이 있어 넘쳐 흐르니, 얼음과 같이 맑고 차가워 사람들이 모두 쪽[藍]을 물들이기 때문에 쪽샘[藍井]이라 불렀다. 예조의 우물도 또한 맑고 깨끗하고 마르지 않아 흘러서 큰 못을 이루니 비록 몹시 가물어도 한결같았다. 못 남쪽에 조그마한 땅이 중추부로 뻗어서, 수초가 우거지고 더럽더니 금상(今上) 기미년에 중추부에서 아뢰기를, “개 이빨처럼 우리 관아에 들어오니, 마땅히 분할하여 우리 못으로 해야겠습니다.” 하니, 예조가 이르기를, “외국 사람을 대접하는 곳을 좁게 해서는 안 된다.” 하여 서로 다투었다. 임금이 승지와 내관 등에게 물어서 쪼개어 나누어주니, 중추부에서 그 땅을 파서 서지(西池)를 만들고, 대청을 개축하고 대청에 연이어 서헌(西軒)을 만들고, 돌기둥을 물 속에 세우니 아로새겨지는 그림자가 물결 위에 떨어지고, 서쪽은 산봉우리가 높고 집들이 좋고 나무가 빽빽하여 풍경이 서울에서 제일이었다. 그 밑에 있는 사헌부와 옛 병조ㆍ형조ㆍ공조ㆍ장예원(掌隸院)에도 모두 못이 있어 연꽃을 심었고, 동쪽 의정부의 이조와 한성부의 호조에는 비록 못이 있으나 서쪽 못보다는 훌륭하지 못하였다.
세종이 조지서(造紙署)를 설치하여 표전지(表箋紙)와 자문지(咨文紙)를 제작하는 것을 감독하게 하고, 또 서적 찍는 여러 색지(色紙)를 만드니 그 품종이 한가지가 아니었다. 고정지(蒿精紙)ㆍ유엽지(柳葉紙)ㆍ유목지(柳木紙)ㆍ의이지(薏苡紙)ㆍ마골지(麻骨紙)ㆍ순왜지(純倭紙)가 그 정묘함이 지극하여 찍어낸 서적도 역시 좋았다. 지금은 다만 고정지와 유목지뿐이요, 자문지ㆍ표전지도 또한 옛날같이 정묘하지 못하다.
성종이 비로소 악원겸관(樂院兼官)을 두었는데, 내가 백인(伯仁)ㆍ기지(耆之)와 더불어 첨정(僉正)을 겸하고, 임흥(任興)은 직장(直長)을 겸하였다. 임흥은 어려서부터 음악을 배워서 관현(管絃)에 조예가 깊고 호방한 기질로 이름을 떨쳤다. 그의 별장이 양천(陽川)과 김포(金浦) 사이에 있는데, 정자를 강 위에 세워두고 달밤에는 배를 타고 위로는 한강으로부터 아래로는 조강(祖江)에까지 혹은 올라가고 혹은 내려올 때 노래 잘하는 기생과 여러 첩이 항상 따라다녔다. 임흥이 직접 거문고를 타고 기생이 노래에 맞추어 화답하니, 보는 사람이 신선과 같은 사람이라고 하였다. 임흥이 직장을 제수받을 때에 나이가 이미 50이 넘었다. 사람들이 모두 나오지 않으리라 생각하였는데, 명령이 내린 날 바로 나와 벼슬하며 여러 해 동안 악원에 있으면서 주부(主簿)로 승진하고, 나이가 많아 머리가 희어져도 오히려 병을 견디며 나갔다. 백인(伯仁)이 묻기를, “자네는 세력 있는 부자로 종신토록 기생들 속에서 늙어 마음대로 노는 것이 무슨 안 될 것이 있다고 어찌 이처럼 힘들게 세상일에 빠졌는가.” 하니, 임흥이 말하기를, “어려서 부형(父兄)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고, 총각 때부터 주색(酒色)으로 업을 삼아, 중년에 이르도록 즐거움이 지극하였고, 오직 뜻하는 대로 되었으나, 늙어가면서 뜻이 점점 게을러지고, 기생들과 노는 것도 오히려 흥미가 없으며 강호(江湖)도 또한 즐길 것이 없었다. 그런데 벼슬에 오름에 이르러서 조정의 높은 벼슬아치들과 더불어 서로 벗하고, 관청일을 마친 뒤에는 서로 찾아 한 술잔으로 서로 모여 화목하게 이야기하니, 그 재미가 끝이 없도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이 말은 진실로 옳다. 조정의 선비가 강호를 즐겨 그리워함은 다름 아니라 인간 세상에 싫증이 나서 그런 것이다. 강호의 선비가 강호에 싫증이 나서 조정 선비를 그리워함도 이와 같으니, 이것으로 저것을 바꾸면 그 뜻이 마찬가지이다.”하였더니, 임흥이 깊이 수긍하였다.
동잠실(東蠶室)은 성동 아차산(峨嵯山) 밑에 있는데 환관이 주관하고, 요즘 또 새로 잠실을 한강 밑 원단동(圓壇洞)에 설치하였는데, 또한 환관으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였다. 서잠실은 성 서쪽 십여 리 되는 곳에 있으니, 곧 옛날의 연희궁(衍禧宮)이다. 별좌(別坐) 두 사람을 두어 맡겼다가 그 뒤에 별좌는 상의원(尙衣院)에 이속시켜 여름에는 누에를 치고 양잠을 마치고는 본원에서 일을 보게 하였다. 동서 잠실에서 각각 고치를 쳐서 승정원에 바쳐 공의 많고 적음을 비교하여 상을 주기도 하고 벌을 주기도 하였다. 남강의 밤섬[栗島]에는 뽕나무를 많이 심어서 해마다 이를 따서 누에를 쳤다. 옛날 서울 성 안 큰 집에서는 다만 서너 집이 누에를 쳤는데, 지금은 큰 집뿐 아니라 비록 일반인의 조그마한 점방이라도 누에를 기르지 않는 집이 없어서 뽕잎이 극히 귀하여 뽕나무를 심어서 이익을 얻는 사람이 많았다.
제단(祭壇)은 사직(社稷)을 귀중히 여겨 성 안에 있고, 성 밖에도 여러 곳 있다. 선농단(先農壇)은 동대문 밖 보제원(普濟院) 동동(東洞)에 있는데, 관경대(觀耕臺)가 있다. 성종이 적전(籍田 임금이 경작하던 밭)을 몸소 갈 때 여러 번 거둥하시었고, 정월에는 풍악을 써서 제사지냈다. 선잠단(先蠶壇)은 동소문 밖에 있는데, 3월에 풍악을 써서 제사지내고, 원단(圓壇)은 한강 서동(西洞)에 있는데 세조가 일찍이 가서 하늘에 제사 지냈다.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은 청파역(靑坡驛) 골짜기 우거진 소나무 사이에 있는데, 2월, 8월에 풍악을 써서 제사지내며, 여제단(厲祭壇)은 장의문(藏義門) 밖 장의사(藏義寺) 골짜기에 있는데, 한성부가 주관하여 제사지내고, 마조단(馬祖壇)은 성동(城東)의 교외에 있고,사한단(司寒壇)은 동빙고에 있는데, 얼음을 저장할 때에 춥기를 빌며 제사지내고, 용단(龍壇)은 한강 가에 있는데, 가물면 호랑이 머리를 물 속에 넣어 제사지내며 비를 빌고,세초(歲抄) 때마다 예조가 봉상시(奉常寺) 제조(提調)와 함께 자세히 살펴보아 보고하고 허물어진 곳이 있으면 수리한다.
세조가 항상 재추(宰樞)와 문무사(文武士)를 불러 매일 치도(治道)를 강론하는 일을 일과로 삼았다. 하루는 임금이 오래 나오지 않아서 여러 신하가 경희루 밑에 나아가 명을 기다리는데 최한량(崔漢良) 군이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며 말하기를, “오랫동안 역마를 타지 못하니, 마음이 답답하도다.” 하니, 정국형(鄭國馨)이 “군이 봉사(奉使)의 즐거움을 아는가.” 하였다. 최한량이 말하기를, “봉사의 즐거움이 많으나 이별하는 괴로움도 또한 깊다. 춘풍의 아름다운 계절을 당하여 준마를 타고 달려 명주(名州)로 들어가면 좌우의 긴 소나무와 높은 전나무는 큰 길에 그늘을 이루게 하여 십여 리를 연하였고, 팔뚝을 반쯤 내놓은 소매 짧은 푸른 옷 입은 나장(羅匠)이 쌍쌍으로 앞을 인도하고, 초금[笳]과 피리 소리가 어울리고, 말이 날뛰어 그치지 않으며 역마꾼이 고삐를 잡아 달리며 대문 밖에 이르러서는 소라처럼 머리 딴 계집[螺鬟] 수십 대(隊)가 길 왼쪽에 엎드려 혹은 머리를 쳐들어 우러러보는 자도 있다. 나는 이때에 보지 않은 체하고 말에서 내려 상방(上房)으로 들어가서 혼자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오늘밤에는 누구하고 짝하여 잘고.’하다가 기생이 과실 소반을 받들고 들어오면 나는 또한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가할까 아니할까.’하여 반신반의하다가 얼마 있다가 주관(主官)이 찾아와서 문안을 드릴 때, 동헌(東軒)에 앉아 술자리를 마련하고 서로 술잔을 주고받고, 내가 일어나 술을 부어 돌리면 기생이 술을 받들고 들어오는데, 그 사람이 보기 싫게 생겨서 마음에 들지 아니하면 답답하고 탐탐치 않아 부끄러워서 읍의 산천이 모두 빛을 잃고 좌우의 사람을 볼 때 모두 몽둥이로 때리고 싶다. 그 사람이 아름다워서 마음에 들 것 같으면 주관의 거동이 모두 공황(龔黃)의 행위와 같아서 지붕 위의 새도 또한 영리한 뜻이 있는 것 같았다. 며칠을 머무는 동안 낮에는 술에 고단하고 밤에는 잠자리에 피곤하여 정신이 흐릿하고 분명하지 아니하여 가만히 스스로 생각하되, ‘이미 편안함이 없으니, 오래 머무르면 병을 얻을 것이다.’하여 이때야 비로소 떠날 마음이 생겨 팔뚝을 베고 흐느껴 울어 눈이 퉁퉁 붓게 된다. 주관이 문 밖에 자리를 펴고 아름다운 노래 몇 가락에 소매를 당겨 술을 권하여 전송할 때, 부득이 말에 올라타고 떠나면서 해를 우러러보면 노랗기만 하고 빛이 없다. 말 위에서 비몽사몽하는 사이에 그 사람이 웃으면서 훌쩍 나타나서 길가에 앉아 있는데, 눈을 문지르고 보면 누런 띠[茅] 숲이요, 그 사람이 또 길가에 앉았거늘 눈을 문지르고 보면 곧 밤나무 숲이요, 귀에 가득찬 바람 소리와 물 소리가 모두 노래하며 풍류 잡는 소리다. 날이 저물어 역(驛)에 투숙하면 연기가 쥐구멍에서 나고, 참새가 소나무 끝에서 지저귄다. 완악한 종이 농을 열어 자리를 펴면 나는 턱을 받치고 앉아서 만단수회(萬端愁懷)를 어찌 다 측량하여 헤아릴 수 있으리오.” 하였다. 정국형이 말하기를, “군이 봉사의 괴로움과 즐거움을 아는구나. 남아가 이르는 곳마다 잘 놀고 즐겁게 지내겠거늘 하필 외방(外方)이겠느냐. 내가 겨울에 검은 돈피 갖옷을 입고, 푸른 모직으로 짠 모자를 쓰고, 훌륭한 말을 타고 은빛 나는 좋은 매를 팔뚝에 얹고, 누런 개 수대(數隊)가 따라오고, 뒤에는 기생을 태우고 가서 산에 올라 꿩을 좇을 때 매가 꿩을 잡아 말 앞에 떨어뜨리면 사람들이 다투어 모인다. 골짜기 시냇가에 앉아서 마른 나무 가지를 태워 꿩을 굽고 계집이 은바가지로 술을 따라 마시기를 권할 때 아래로 종에 이르기까지 남은 것이 돌아가는지라, 날이 저물어 올 적에 날리는 눈[雪]이 얼굴을 치는데, 반은 취하여 고삐를 잡아당겨 돌아오니 이는 참으로 행락(行樂)의 즐거움이니라.” 하였다. 이수남(李壽男)군은 말하기를, “나는 관청 일을 마친 뒤에 친구가 잔치하고 즐기는 곳을 찾아 기생을 끼고 앉아서 실컷 희롱하다가 밤이 깊어서 먼저 나와 기생과 더불어 같이 돌아오되 혹은 기생의 집에 같이 가고, 혹은 아는 사람 집으로 가서 비록 이불과 베개가 없으나 둘이서 옷을 벗고 같이 누우면 그 즐거움이 얼마나 지극한고. 나날이 이와 같이 하되 항상 다른 사람으로 바꾼다. 만약 불법(佛法)으로 말하자면 내생에 호관(壺串) 수말[牡馬]이 되어 수십 마리 암말을 거느리고 마음대로 놀고 희롱하기를 바라니, 이것이 나의 즐거워하는 바이다.” 하였다. 김유(金紐) 자고(子固)는 말하기를, “나는 친구를 역방(歷訪)하려고 하지 않으니 내 집이 족히 손님을 모실 만하고, 나의 재산이 잔치를 차림에 족하여 항상 꽃 피는 아침 달뜨는 저녁에 아름다운 손님과 좋은 친구를 맞아 술통을 열고 술자리를 베풀어 이마지(李亇知)가 타는 거문고와 도선길(都善吉)의 당비파(唐琵琶)와 송전수(宋田守)의 향비파(鄕琵琶)와 허오(許吾)가 부는 피리와 가홍란(駕鴻鑾)과 경천금(輕千金)의 창가로 황효성(黃孝誠)이 옆에서 지휘하고, 독주하기도 하고 합주하기도 하며 이때에 손님과 더불어 술을 부어 서로 주고받으며 마음껏 이야기하고 시 짓는 것이 나의 즐거워하는 바이다.” 하였다. 달성이 옆에서 듣고 말하기를, “최군은 방탕하고, 정군은 호걸이고, 이군은 음특(淫慝)하고 김군은 질탕(跌宕)하다.” 하고, 또 좌우에게 묻기를, “제군도 역시 즐거워하는 바가 있느냐.” 하니, 불기(不器) 권호(權瑚)가 말하기를, “나는 시골에서 생장하여 물고기 잡는 것으로 업을 삼았습니다. 서너 사람 친구와 더불어 시냇가에 가서 긴 그물로 시내의 위아래를 막고 옷을 벗고 짧은 고의만을 입고 손수 조그마한 물고기 그물을 가지고 이리저리 고기를 몰아 들어올릴 때마다 들기만 하면 은빛 비늘이 번득거려 그물 위에 빛납니다. 이때에 보리밭에 난 순무를 캐고 또 여뀌의 열매를 거두어 장을 끓이고, 겨자를 거르며 혹은 회(膾)를 만들고 혹은 끓이고 고기를 가득 차려내 주린 배를 잠깐 사이에 부르게 하는 것이 내가 즐거워하는 바입니다.” 하니, 달성이 말하기를, “한가하고 자적(自適)한 일이로다.” 하였다. 사예(司藝) 유희익(兪希益)이 마지막으로 대답하기를, “내가 즐기는 바는 여러분의 일과는 다릅니다. 해가 긴 여름철을 당하여 밤나무 그늘 밑에 앉아 맑은 바람이 스스로 불어올 때, 그 가운데 자리를 깔고 《주역》ㆍ《중용》ㆍ《대학》을 읽는 것이 내가 즐거워하는 바입니다.” 하였다. 달성이 말하기를, “옳기는 옳은 일입니다만 남아가 세상에 나서 어찌 이와 같이 괴로워야만 되겠느냐.” 하니, 자리에 있던 사람이 모두 웃었다. 이때에 자순(子順) 남제(南悌)가 전자(篆字)를 잘 쓰므로 불려와서 곁에 있다가 바야흐로 도전(圖篆)을 할 때 여성군(驪城君) 민발(閔發)이 칭찬하여 말하기를, “흰 구름과 같은 사후(射帿)를 청산 녹수 사이에 펴고 네 개의 화살을 끼고 들어가서 포장 과녁 쏘기를 갖다대는 것같이 하여, 해가 다하도록 살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나의 능한 바요, 큰 멧돼지가 갈대 숲 사이에서 이빨 소리를 내며 울 것 같으면 말을 달려 들어가서 한 화살로 죽여 넘기는 것도 내가 또한 능한 바요, 몹시 더울 때에 누에 올라서 얼음을 밥에 섞고, 콩가루로 비벼서 한 주발을 거뜬히 다 먹어치우는 것도 내가 또한 능한 바이나, 이와 같이 글자 쓰는 묘한 재주는 백번 죽었다 깨나도 나는 할 수 없다.” 하였다.
파산군(巴山君) 조득림(趙得琳)이 강진산(姜晉山)에게 묻기를, “내가 서재에 이름을 붙이려고 하오니, 대인께서 이름을 지어 주십시오.” 하니, 민발(閔發)이, “재명(齋名)과 헌호(軒號)는 시문을 하는 선비가 하는 것인데, 너도 또한 서재에 이름을 붙이려고 하느냐.” 하고, 강진산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대인께서 만약 재에 이름을 붙여주시려거든 마땅히 괴(槐) 자를 쓰십시오.” 하니, 자리에 앉았던 사람들이 포복절도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재추(宰樞) 기건(奇虔)이 형생에 복어를 먹지 아니하므로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재추가 말하기를, “일찍이 제주 목사가 되었을 때 백성들이 잡는 데 몹시 괴로워함을 보았으므로 먹지 않을 뿐이다.” 하였다. 김현보(金賢甫)가 쇠고기를 먹지 아니하므로 친구가 물어보기를, “옛날에는 먹더니 지금 어찌 먹지 않는고.” 하니, 김현보가 말하기를, “일찍이 봉상 시정(奉常侍正)이 되어 술자리로 인하여 죄를 얻고는 그뒤로부터 이 고기를 먹지 않는다.” 하였다. 이는 비록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이나 잘못된 것을 너무 휘어잡는 폐단이 있음을 면치 못한다.
성근보(成謹甫)가 살아있을 때 우리 나라 사람의 글을 엮어 《동인문보(東人文寶)》라 이름하였는데, 완성하지 못한 채 죽고, 김계온(金季醞)이 뒤를 좇아 완성하여 《동문수(東文粹)》라 하였다. 그러나 김계온은 오로지 글이 번화한 것을 싫어하여 다만 온후(醞厚)한 글만 취하니, 비록 규범에는 뜻을 이루었으나 메마르고 기세가 없어 볼 만한 것이 못 되었다. 그가 엮은 《청구풍아(靑丘風雅)》는 시가 문장만 못하나 시가 조금 호방한 것은 버리고 기록하지 않았으니, 이 무슨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편견인고. 달성이 찬한 《동문선(東文選)》과 같은 것도 이는 류(類)대로 모은 것이요, 선(選)은 아니다.
최세원(崔勢遠)이 어렸을 때 상사(上舍)로서 관에 있을 때, 상사 김항신(金亢信)은 망건이 단정하지 못하였고, 김백형(金伯衡)은 눈이 어둡고 사시(斜視)이므로, 최세원이 희롱하여 말하기를, “이미 머리에 쓰고 또 얼굴에 쓴 것은 김항신의 망건이요, 동쪽을 보는 것 같으나 실은 서쪽을 보는 것은 김백형의 눈동자다.” 하고, 상사 곽승진(郭承振)의 별명이 귀(鬼)인지라 세원이 곽귀부(郭鬼賦)를 지어 꾸짖기를, “자네가 두려워하는 바는 복숭아 동쪽 가지로다. 하물며 관중(館中)에서 종아리 쳐서 기록하리로다. 천리를 빨리 가도 조금도 머무르지 말고 급급하게 히기를 율령과 같게 하라.” 하였다. 최세원이 강진산과 친구로서 사귐이 아주 두터웠는데, 강진산은 장원급제되고 최세원은 낙제하여 무릎을 안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강 아무개는 똑똑한 사람이다. 내가 장원이 되고 강진산으로 하여금 말좌(末坐)가 되게 하여 불러서 이를 부리려고 하였는데, 뜻밖에 나보다 먼저 장원에 뽑히니, 후년에 내가 비록 장원에 뽑힌들 제가 어찌 부러워하리오. 원하건대 하늘은 사흘 동안 똥비를 내리시어 유가(遊街)하지 못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목은(牧隱)이 원(元)에 들어가 황갑(黃甲 장원급제) 셋째 번에 뽑히니, 그 일등 장원은 우계지(牛繼志)요, 이등 장원은 증견(曾堅)이었다. 목은이 본국으로 돌아올 때 우장원이 별시(別詩)를 지어 이르기를,
나는 장부의 눈물이 있어 / 我有丈夫淚
울어도 30년 동안 떨어뜨리지 않았더니 / 泣之不落三十年
오늘날 정자 가에서 이별하므로 / 今日離停畔
그대를 위하여 봄 바람 앞에 한번 뿌리도다 / 爲君一洒春
전하였다.
고려 말에 왜구가 들끓었는데, 이는 연해(沿海) 사면으로 진(鎭)을 두어 방비하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태조가 개국(開國)한 이후로는 항구의 중요한 곳에 모두 만호영(萬戶營)을 두고 수군처치사(水軍處置使)가 거느리게 하니, 이로 말미암아 왜구가 조금 없어졌는데, 그뒤에 왜구가 또 침입하므로 세종이 삼군(三軍)에 명령하여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하여 비록 크게 승리하지는 못하였으나, 왜구도 또한 위세를 두려워하여 감히 방자하게 굴지 못하였다. 왜적 몇 호가 삼포(三浦)에 살고자 하므로 세종이 그 의(義)를 사모함을 가상히 여겨 허락하니, 허조(許稠)가 울며 간하기를, “왜노(倭奴)가 신이라 칭했다가도 반란을 일으키니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어찌 어류나 패류(貝類)와 같은 천한 무리로 하여금 예의를 갖춘 우리 사이에 들게 할 수 있겠습니까. 후일에 백성이 점점 많아지면 응당 나라의 큰 해가 될 것입니다.” 하고, 죽음에 임하여 재삼 상계(上啓)하되, “청하건대 아직 번성해지기 전에 아주 이를 돌려보내십시오.” 하니, 그때를 당하여 사람들이 모두 허조의 말을 예사롭게 여겨 별로 놀라지 않더니, 지금 삼포에 도모하기 어려운 폐해가 만연하게 된 연후에야 그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조정에서 항상 도주(島主)에게 타일러 돌아가게 하였으나 돌아간 것은 3, 4호에 지나지 않고, 갔다가도 다시 돌아와서 점점 우리 땅을 갈아서 밭을 만들어 얼룩옷이 변두리 여러 읍에 가득하여 때로 우리 백성과 더불어 서로 다투며, 몰래 전라도로 가서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는 것은 모두 삼포의 사람이었다. 대마도는 토지가 척박하여 오곡이 생산되지 않아, 다만 구맥(瞿麥)을 심고 사람들은 모두 칡과 고사리 뿌리를 캐어 먹고 도주도 또 한 삼포에서 세를 거두어가지고 이로서 생을 이어나갔다. 대마도에 사는 사람으로서 우리 나라 벼슬을 받아 호군(護軍)에 제수된 자가 해마다 한번씩 조회하러 왔는데, 조회하러 오는 것이 한 해에 무려 50척이나 되었다. 한번 오면 몇 달 동안 머물러 있고 또 일본인에게 주는 양식을 받아 이것으로 그 처자를 먹여 살리니, 경상 하도(慶尙下道)의 미곡은 태반(太半)이 왜의 양식으로 소모되었다.
김사문(金斯文)이 한쪽 눈이 멀었다. 채기지(蔡耆之)가 말하기를, “ 내가 일찍이 옛날 늙은이에게 들으니, 옛날 고려말에 한 선비가 눈이 당신의 눈과 같았는데, 신령한 중이 이르기를, ‘급히 눈동자를 뽑아버리고, 개새끼의 눈알을 뽑아서 넣으면 뜨거운 피가 서로 붙어서 며칠 안 가서 보통 때와 같이 된다.’하였다.” 하니, 좌우(左右)가 모두, “과연 그 이치가 헛되지 않은 것 같다.” 하였다. 그러나 김사문이 크게 의심하자, 채기지가 말하기를, “좋기도 좋으나 다만 꺼리는 바가 있다. 만약 변소 안의 똥을 보면 모두 연석(宴席)의 찬(饌)과 같이 보여서 먹고자 할 것이다.” 하였다. 김사문이 크게 노하여 꾸짖으니, 좌우가 포복절도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조정에서 각사(各司) 각관(各官)의 나이 어린 종년을 뽑아서 혜민서(惠民署)에 속하게 하고 의서(醫書)를 가르쳐 여의(女醫)라 이름하고, 이들로써 부인의 병을 고쳤다. 한 여자가 제주(濟州)에서 왔는데, 의술은 알지 못하나 다만 충치를 뽑았는데, 사대부 집에서 다투어 서로 맞아갔다. 그 여자가 죽자 또 한 여자에게 그 없을 전하여 나도 또한 불러다가 이를 치료했는데, 얼굴을 위로 젖히고 입을 열어, 은으로 만든 숟가락으로 조그마한 흰 벌레를 꺼내는데 숟가락은 이에 들어가지도 않고, 이에서 피도 나지 않아, 그 쉬운 것이 이와 같았다. 또 이 기술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지 아니하여 조정에서 죄를 다스려도 오히려 고하지 아니하니, 이는 반드시 환술(幻術)이요, 정업(正業)이 아닐 것이다.
사인(士人) 권모(權某)가 일찍이 음악을 배우는 까닭을 말하기를, “젊어서 밤중에 친구 집에 갔다가 마침 길 옆에 있는 집에서 등불을 켜고 이야기하며 웃으므로 내가 창 밖에서 틈으로 들여다보니, 한 남자가 한 여자와 더불어 이불을 끼고 앉았는데, 남자는 젊고 잘 생겼으며 계집은 아름답기가 비할 데가 없었다. 여자가 일어나 시렁 위에 조그마한 상자를 가져다 상자를 열어 포(脯)와 밤(栗)을 늘어놓고 드디어 은그릇에 술을 데워 각각 서너 잔씩 마시고 남자가 거문고를 가져다 곡조를 탈 때 여자가 말하기를, ‘풍입송(風入松 고려시대의 노래)을 타십시오.’ 하니, 남자가 줄[絃]을 고르고 기러기발을 옮겨 천천히 탔는데, 소리가 아주 오묘했다. 여자도 따라서 낮게 노래부르니 목소리가 꿰어놓은 구슬처럼 아름다웠다. 나는 마음속으로 부러워하고 그리워하기를 마지 않아, ‘세상에서 어찌 이와 같은 사람이 있으리오. 반드시 신선의 무리로다.’하고, 이로 말미암아 음악을 배우되 먼저 풍입송을 익혀서 드디어 모든 소리에 통하고 또한 첩을 얻어 늙을 때까지 같이 살았다.” 하였다.
백씨(伯氏) 문안공(文安公)은 학문을 좋아하고 싫증을 내지 않아 일찍이 집현전(集賢殿)에 있을 때 《태평광기(太平廣記)》 500권을 뽑아 기록하고, 줄여서 상절(詳節) 50권을 만들어 세상에 간행하고, 또 모든 책과 《태평광기》 상절(詳節)을 모아서 《태평통재(太平通載)》 80권을 만들고, 또 경사(經史)의 글을 뽑아 그 대우(對偶)를 좇아 문(文)과 질(質)과 공(空)으로써 이를 나누니, 문은 행어(行語)요, 질은 착어(着語)요, 공은 조어(助語)이다. 또 동국지도를 찬하여 반도 이루지 못하였을 때 조정에서 국(局)을 설치하고,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을 편찬하니, 모두 문안공이 규모한 것이다.
계유년 겨울에 백씨가 병조 사좌랑(四佐郞)이 되어 매일 밤 들어가 수직(守直)하였다. 10월 10일에 하의정(河議政)의 상여가 발인(發引)할 때 낭조(郞曹)가 모두 문 밖 백씨 집 위에 모였다. 정랑 권개(權愷)가 말하기를, “내가 늙어서 새벽에 일어나기 어렵다.” 하고, 수직하기를 청하였다. 이날 밤에 난(難)을 평정하여 권개는 훈열(勳列)에 참여하였으나 백씨는 참여하지 못했다. 무자년 겨울에 백씨가 이조 판서가 되어 도승지 권감(權瑊)공과 더불어 함께 회암사(檜巖寺)에 가서 세묘의 칠칠재(七七齋 49일 제사)를 감독하였는데, 이날 밤에 난이 일어나서 두 공이 돌아서 동문에 이르니, 문이 닫혀 들어갈 수가 없었다. 백씨가 남산 밑 성밖으로 돌아서 집에 돌아오는데, 얼마 있지 않아 문이 열려서 권감은 좌익(佐翼)에 참여하였으나 백씨는 참여하지 못하였다. 기축년 겨울에 백씨가 도총관(都摠管)으로 상을 만난 지 10여 일에 성종이 즉위하여 재추(宰樞)로서 병권(兵權)을 가진 사람은 모두 좌리(佐理)에 참여하였으나 백씨는 참여하니 못하였으니, 세 번 다 마땅히 참여할 것임에도 참여하지 못한 것은 모두 천명이다.
유생 신린(辛鏻)은 강진산(姜晉山)의 누이의 아들이다. 키가 9척이요, 눈이 횃불과 같으나 겁이 많고 재주와 용기가 없었다. 일찍이 강진산을 따라 명경(明京)에 가는데, 이때에 새로이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하여, 여진(女眞)이 모두 원수로 미워하고 보복하고자 하였는데, 마침 서로 중원 가는 길가에서 만나 돌을 던지기도 하고, 주먹으로 때리기도 하고, 의복과 물품을 빼앗아 일행이 낭패를 당해 두려워하였다. 신린을 돌아다보니 뒤떨어져 혼자 오고 있으므로 일행은 모두 침욕(侵辱)을 당하리라 여겼는데 여진이 신린을 보고 모두 길 옆으로 피하여 갔다.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신린이 말하기를, “ 심신이 떨려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다만 눈을 크게 뜨고 보았을 따름이다.” 하였다. 그들은 신린의 키가 크고 눈이 큰 것을 보고 두려워서 피한 것이었다. 박거경(朴巨卿)이 일찍이 영압사(營押使)로 명경에 갈 때 또 여진과 노상에서 만나 박거경이 말을 달려 나오니, 같이 가던 사람도 역시 말을 달려 뒤를 따라왔다. 박거경은 도둑이 자길르 좇아오는 줄 알고 있는 힘을 다하여 말을 채찍질해서 수십 리를 달아나서야 비로소 진위(眞僞)를 알았다. 그때 사람이 웃으며 말하기를, “신린은 마땅히 겁낼 사람이 겁내지 아니하고, 거경은 겁내지 않아야 할 사람이 겁냈으니, 겁냄도 겁내지 않음도 모두 겁을 낸 것이다.” 하였다.
일본국에는 황제가 있고 국왕이 있으나 황제는 궁중에 깊이 파묻혀 하는 일이 없고, 다만 아침저녁으로 하늘에 절하고 해에 절을 할 따름이어서 세상에서 권력이 없으면서 존귀한 자를 왜황제(倭皇帝)라 부른다. 국왕이 오로지 국가의 정치를 주관하고 쟁송을 청단(聽斷)하였다. 그러나 대신이 있어서 각각 병사를 가지고 지면을 나누어 웅거하여 때로는 반란을 꾀하고 명령에 거역하여도 왕이 이를 제지하지 못하였다. 좌우 무위전(武衛殿)ㆍ경극전(京極殿)ㆍ전산전(畠山殿)ㆍ세천전(細川殿)ㆍ대내전(大內殿)ㆍ소이전(少二殿)과 같은 것이 아주 많으며, 황제와 국왕의 자식은 다만 장자가 아내를 얻어 대를 잇고, 그 나머지는 모두 중이나 여승이 되었는데, 그 존귀함으로 말미암아 하인과 결혼하지 못하였다. 그 나라가 바다에 둘러싸여 있어서 영토가 아주 넓으니 구주(九州)ㆍ일기주(一歧州)ㆍ대마주(對馬州)와 같은 것은 모두 섬이지만 땅이 또한 크다. 그 나라 풍속에는 남녀가 모두 얼룩얼룩한 옷을 입어 그 모양이 분별이 없으나, 여자는 여상제 북상투 쪽진 것[髽] 같은 머리를 하여 어깨를 덮고, 남자로서 중이 된 사람은 머리를 깎았는데, 그 관복이 마치 우리 나라 중의 무리와 같았다. 아직 중이 되지 않은 사람은 머리를 깎지 않고 머리를 엮어 상투를 만들고 상투 위에 조그마한 관을 쓰며 반만 머리와 이마를 깎은 사람이 있고, 반의 반만 깎은 사람이 있어서 이로써 그 벼슬을 분간하였다. 그 옷에 모두 초목과 새와 짐승을 그린 까닭으로 얼룩덜룩하고 상하에 모두 소매가 있어 두 발을 두 가랑이에 넣고 땅에 끌며 다녔다. 서로 싸울 때는 바짓가랑이를 띠[帶] 사이에 끼우고 칼을 가지고 나오며, 존귀한 사람을 보면 발을 벗고 땅에 꿇어앉아 절을 하였다. 그 나라에서는 채찍과 가시나무로 종아리 치는 형벌이 없고, 죄의 가볍고 무거움에 상관없이 다만 목베어 죽일 뿐이지만 아무리 죄가 무거운 죄인이라도 절[寺]로 달려 들어가면 죄를 면하였다. 사람마다 철근을 얻어 어릴 때부터 칼을 만들어 계속 단련하여 거리에 나가 사람과 겨루었는데, 비록 많은 사람이 죽어도 이를 상례(常例)로 여기고 불문에 붙였다. 중이 되면 해를 가할 수 없으므로 중을 귀하게 여겼다. 사람이 죽으면 판자로 관(棺)을 만들어 앉은 자세로 매장하며, 봉분을 하거나 나무를 심지 않아 편지와 다름이 없었다. 그 음악도 역시 별다른 것이 없고 한 손으로 조그마한 북을 잡고, 한 손으로 이것을 쳐서 박자를 맞추며 춤추는 사람은 부채를 잡고 몸을 돌려 춤을 추었다. 만약 국왕의 사신이 오면 상이 정전(正殿)에서 두 번 접견하고, 예조도 또한 두 번 전(殿)에서 잔치하고, 우두머리 추장을 사신 보낼 때와 대마주(對馬州)의 특송(特送)이면 상이 편전(便殿)에서 한번 접견하고 예조가 두 번 잔치하며 보통 왜인이면 예조가 한번 잔치할 뿐이었다. 비록 군신의 분별이 있다 하더라도 우두머리 되는 추장이 국왕의 명령을 거절하면 국왕이 이를 제지하지 못하였다. 또 국왕 사신이ㆍ대마도에 이르면 도주가 반드시 세금으로 뇌물을 받고, 그렇지 아니하면 가두어 두고 놓아 보내지 않았는데, 이는 이른바 머리가 오히려 아래로 가고 발이 반대로 위에 올라온 격이다. 만약 대장경을 청하여 이를 얻으면 사람마다 머리 위에 이고 말하기를, “풍속이 순후(淳厚)하고 아름다우니 태평을 기약하겠다.”하며 또 구하는 바는 《논어(論語)》ㆍ《법화경(法華經)》ㆍ삼체시(三體詩)ㆍ우황(牛黃)ㆍ호피(虎皮)ㆍ요발(鐃鉢 불교에서 쓰는 악기)이요, 전혀 노루ㆍ사슴ㆍ소ㆍ돼지를 먹지 아니하고, 다만 개고기를 좋아한다. 또 잉어를 즐겨 먹고, “이것이 제일 맛있다.” 하였다.
야인(野人)이 우리 평안도와 접경한 곳을 건주위(建州衛)라 하고, 우리 영안도(永安道)와 접경한 곳을 모린위(毛獜衛)라 하였다. 또 우리 성 밑에 의지하여 사는 사람은 여러 부류였다. 매년 겨울에 상경하여 바치는 것은 다만 돈피 몇 벌이며, 조정에서도 또한 붉고 검은 면포로써 보답한다. 그 제수하는 직책은 사맹(司猛)ㆍ사정(司正)ㆍ사과(司果)ㆍ사직(司直)ㆍ호군(護軍)으로부터 통정(通政)ㆍ가정(嘉靖)ㆍ자헌(資憲)까지 오르고, 새로 당상관에 제수된 자는 옥관(玉貫)ㆍ품대(品帶)ㆍ승상(繩床)을 주며, 또 예(例)에 따라 봉록을 주었는데 조금이라도 혹 뜻에 맞지 아니하면 고신(告身)을 찢어 뜰에 던져버리고 벼슬이 비록 높고 낮음이 있으나 상하의 분별이 없고, 취하면 서로 싸우고 헐뜯고 서로 주먹질한다. 그 본토에 있을 때에는 비록 둔사(屯四 병전〈兵典〉)의 장이라 하더라도 역시 서로 공경하지 않고, 다만 원수를 갚는 것만을 일삼아 비록 여러 대가 되어도 잊지 않고, 마음에 새겨두었다가 서로 전하여 군사를 일으키며, 그 군대는 또한 모두 돈을 주어 불러오는 까닭으로 진실로 죽는 자가 있으면 모두 재화로써 상을 주었다. 밖으로는 비록 아주 사모하는 듯하나 안으로는 실로 굳세고 강하여 항상 몰래 훔칠 마음을 품어서 만약 우리 나라 백성으로서 들에서 농사짓는 사람을 보면 잡아가서 서로 돌려가며 팔고 사, 이로써 생업의 밑천으로 하였다. 그 혼인에 있어서는 우마 수십 마리를 바치고 곧 약혼을 정하고, 이웃 사람이 모두 모여서 신부를 잘 단장시켜 나와서 뵙게 하며 또 나이 어린 여자를 단장하여 인속(引屬)이라 하였는데, 인속은 신부에게 예절과 법도를 가르쳐주고, 큰 상자를 가지고 손님의 앞에 나아가 절하면 손님은 얼마건간에 의복 혹은 포물(布物)을 상자에 던져 이것으로 신부의 자산을 도와주었다. 형이 죽으면 반드시 형의 아내를 처로 삼되 아우의 처는 아내로 삼지 못하고, 모두 말하기를, “아우는 내 아들과 같은데 어찌 아들의 아내를 내 아내로 삼을 수 있겠는가. 형은 내 아버지와 같으니 아버지의 물건을 자식이 어찌 이어받지 못하겠는가.” 하였다. 형이 살아있을 때에도 또한 형의 아내를 취하는 자가 있으니, 형이 사냥을 나가서 아우가 그 어머니 및 형의 아내와 더불어 한 방에 있을 때 동생이 욕심이 생기면 형수에게 말하기를, “형수여, 형수여, 원하건대 따뜻하고 부드러움을 빌려주십시오.”하면 형의 아내가 역시 거절하지 아니하고, 청을 들어주었다. 만약 거절하면 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하는데 너는 무엇 때문에 불손하냐.” 하고 아우도 또한 때리고 핍박하여 간통하였다. 혹 진실로 사랑을 두게 되면 그 형을 쏘아 죽였는데 형의 자식이 또 말하기를, “무슨 까닭으로 우리 아버지를 죽이느냐.” 하고 또 그 작은 아버지를 쏘아 죽이니, 이로 말미암아 원수 갚는 것이 그치지 않았다. 사람을 장사지낼 때에는 구멍을 파서 시체를 그 가운데 던지고 돌을 쌓아 무덤을 만들고 술과 밥을 베풀어 제사를 지낸 뒤에 술과 밥을 구멍에 뿌려서 시체와 서로 접하게 하고, 또 평생에 사랑하던 말을 무덤 앞에 매어두며 또 화살통을 그 위에 걸어두어 그것이 다 스러질 때까지 사람이 감히 거두지 못하였다. 깊은 곳에 사는 야인은 아비가 늙어서 걷지 못하면 자식이 성찬(盛饌)을 베풀어 대접하고 묻기를, “아버지 곰이 되고 싶습니까? 호랑이가 되고 싶습니까? 아버지의 원하는 대로 되소서.” 하고 가죽을 꿰매어 주머니를 만들어 아비를 주머니 속에 넣어 나무에 걸어놓고 쏘되 살 한 개로써 죽이는 것이 참된 효자였다.
승가(僧家)에 성불도(成佛圖)가 있으니, 지옥으로부터 대각(大覺)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 제천(諸天) 제계(諸界)가 무려 수십여 처인데, 주사위 육면에 ‘나무아미타불’ 6자를 써서 던지고 옮겨 오르락 내리락하면서 승부를 정한다. 정승 하륜(河崙)이 종정도(從政圖 오락기구의 하나)를 만들었는데, 9품으로부터 1품에 이르기까지 관작의 차례가 있고, 주사의 육면에 덕(德)ㆍ재(才)ㆍ근(勤)ㆍ감(堪)ㆍ연(軟)ㆍ빈(貧) 등 6자를 써서 덕과 재면 올라가고, 연과 빈이면 그만두기를 마치 벼슬길과 같이 하였다. 제학(提學) 권우(權遇)는 작성도(作聖圖)를 만들기를 9분(分)으로부터 1분까지로 하여, 사람의 어질고 어리석음과 마음의 맑고 흐림이 같지 않음에 따라, 1분을 좇으면 올라가기 쉽고, 9분을 좇으면 올라가기 어려웠다. 주사위 육면에 성(誠)ㆍ경(敬)을 두 자씩, 사(肆)ㆍ위(僞)를 한 자씩 써서 던지는 대로 가는 것은 성불도의 규칙과 같았다.
남계영(南季瑛) 선생은 생원 급제와 동시에 장원에 뽑혀서 당시에 문명(文名)이 있었다. 그러나 그 학문이 다만 성리학(性理學)을 궁구하는지라, 구두(句讀)와 뜻을 파악하는 데 문사(文辭)를 몹시도 싫어하였다. 일찍이 두보의 시를 읽고 말하기를, “이 책은 내용이 없고 부실하며, 미혹하게 하고 긴요하지 않아 무슨 뜻인지를 알 수 없다.” 하고 드디어 폐하고 읽지 않았다.
사문(斯文) 이함녕(李咸寧)은 성산부원군 이직(李稷)의 손자이다. 그의 아비 이사후(李師厚)가 병이 들었다. 마침 과거를 볼 시기였으나, 사문이 아비의 병으로 말미암아 시험에 나가지 못하게 되었는데 부윤(府尹)이 억지로 명령하여 응시하게 하여 드디어 장원에 뽑혔다. 과거에 급제한 날 궁문을 나와 말을 타려 할 때 그 말이 목을 돌려 모자에 꽂힌 꽃을 물어 꺾었는데, 며칠 뒤에 부윤이 주고 사문도 또한 죽었다. 당시 사람들이 말이 모자의 꽃을 꺾는 것이 크게 상서롭지 못한 징조라 하였다.
동지(同知) 이정보(李廷甫)가 글자를 잘 쓰지 못하여 글자가 행(行)을 이루지 못하였다. 동부승지에 제수되어 계(啓)를 올릴 적에 끝에 의윤(依允) 두 자와 임금의 이름을 썼는데, 성종이 이것을 보고 전교하기를, “승지가 스스로 쓰지 아니하고 어린 아전을 시켜 쓴 것이냐.” 하였다. 승지 등이 아뢰기를, “이것은 동부승지가 스스로 쓴 것이옵고, 대신 쓴 것이 아니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글하는 집 자손으로 문지(文地)에 출신하였으면서 어찌 이와 같이 졸하냐.” 하고, 드디어 시를 짓고 병서(幷書)하여 바치라고 명하니, 보는 사람이 모두 웃었다.
제학(提學) 최흥효(崔興孝)는 글씨 잘 쓰기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그 필적은 오로지 진(晉) 나라 유익(庾翼)의 체(體)를 본받아 비록 붓을 놀리는 방법이 익숙하나 거칠고 상스러움을 면하지 못하였다. 태종이 친정(親政)하던 날, 제학이 이조 낭청으로 입시하였는데, 남의 고신(告身)을 쓰는데 붓을 놀려 그림을 그리면서 한참이 지나도록 해놓은 게 없었다. 김종서(金宗瑞)가 병조 낭청으로 옆에 있다가 한번 붓을 들어 수십 장을 써내렸다. 다 쓰고 나서 옥새를 찍으니, 자체와 옥새 자국이 모두 단정하므로 태종이 돌아보고 좌우에게 말하기를, “이는 참으로 쓸 만한 인재다.” 하여 김종서가 이로 말미암아 떨쳐 일어났다. 제학이 일찍이 중국에 보내는 표문(表文)을 쓸 때, 날짜를 써넣지 아니하였으나 온 나라가 이것을 알지 못하였다. 영락황제(永樂皇帝)가 이것을 보고 표문을 가만히 우리 나라 사신에게 주며 말하기를, “만약 담당 관리에게 이 표문을 내리면 반드시 너의 임금의 죄를 청할 것이기에 몰래 돌려보내노니, 돌아가 너의 임금에게 말하여 뒤에는 이와 같은 일이 없게 하라.” 하였다. 세종이 크게 노하여 곧 제학을 옥에 가두고 극형을 가하려 할 때, 그의 아내가 상서(上書)하여 살려주기를 청하므로 전교하기를, “이는 내가 알 바 아니니, 그 원통함을 황제에게 호소하라.” 하였다. 그러나 고의가 없이 한것 이므로 귀양보내니, 이로 말미암아 관위(官位)가 부진하였다.
고은(皐隱) 안지(安止) 선생은 벼슬은 비록 높았으나 마음은 더욱 겸손하였다. 집이 인왕동(仁王洞)에 있어 초가집이 쓸쓸했으나 산수가 맑고 기이하여 항상 시가(詩歌) 읊조림을 즐거움으로 삼았으며, 비록 친구와의 편지를 쓸 때에도 모두 시구(詩句)를 사용하였다. 선조께 제사지낼 때에도 반드시 목욕 재계하고 정성을 다하여 일찍이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고, 비록 식량이 자주 떨어져도 마음이 편하고 침착하였다. 벼슬이 1품에 이르고 나이가 80이 되어 늙어서 시골에 물러갈 적에 대궐에 나아가 네 번 절하고 크게 곡하고 떠나니, 지나가는 사람이 듣고 비탄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사문 설장수(偰長壽)는 대원(大元) 사람이다. 그의 아비 설손(偰遜)이 원말(元末)에 피난하여 왔으므로, 조정에서 벼슬을 주었다. 시문(詩文)에 능하여 《근사재집(近思齋集)》이 세상에 나왔고, 사문은 청주(淸州) 임인과(壬寅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2품에 이르고, 공양왕을 도와서 9공신(功臣)의 열에 참여하다가, 그뒤 아조(我朝)에 들어와서 죄를 얻어 귀양갔다가 죽었다. 또한 시문에 능하여 《예재집(藝齋集)》이 세상에 나왔다. 손수《목은집(牧隱集)》을 썼는데 그 필법이 굳세어 규범이 있었다. 사문의 동생 설미수(偰眉壽)와 설경수(敬壽)가 나란히 병진과(丙辰科)에 급제하여 미수는 벼슬이 2품에 이르렀다. 설경수의 아들 설순(偰循)은 무자과(戊子科)에 급제하고, 또 정미년 중시(重試)에 급제하여 벼슬이 2품에 이르고 문명(文名)이 있었다. 설씨가 다른 나라 사람으로서 부(父)ㆍ자(子)ㆍ손(孫)이 서로 이어서 높은 벼슬을 하였으나, 지금은 그 후예가 드물다.
태조(太祖 명 태조) 고황제(高皇帝)가 촉한(蜀漢)을 쳐서 평정할 때, 위주(僞主) 명옥진(明玉珍)의 아들 명승(明昇)과 진우량(陳友諒)의 아들 진리(陳理)가 모두 우리 나라에 유배되었으나, 조서(詔書)를 내려 말하기를, “벼슬을 주지 아니하고 백성으로 삼지 않는다.”하였는데, 우리 나라에서 초가집과 노비를 주어 편안히 대접하게 하였다. 명승이 명옥진의 뒤를 이어 황제라고 칭하다가 나이 9살에 붙잡혀 우리 나라에 왔던 것이다. 명승의 어미는 일찍 황태후가 되었던 사람이다. 매일 밤 축수(祝手)하고 하늘을 향하여 말하기를, “하늘이여, 하늘이여, 나로 하여금 이곳으로 옮겨 오게 한 것은 오로지 촉 대신(蜀大臣)의 죄입니다. 대신과 대명(大明)이 서로 통하여 우리 병사는 오로지 동쪽을 막는 데만 힘쓰게 하고, 병사를 이끌어서 남으로 들어왔으므로 드디어 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였다. 태숭조(太崇朝)에 왕비의 관복을 명(明) 나라에서 가져왔는데 궁중에서 입는 방법을 모르더니 명승의 어미가 궁중에 들어와 가르쳐준 뒤에야 알게 되었다. 명승의 손자로 녹사(錄事)에 속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매우 어리석었다. 사문(斯文) 정공(正公)이 그때에 좌상이 되었다가 녹사에게 말하기를, “자네 할아비는 대촉(大蜀) 황제가 되었다가 불행히도 멸망하였지만, 그때에 망하지 않았더라도 자네 대(代)에는 의당 망했으리라.” 하였다. 지금 명(明)씨의 후손으로 개성에 사는 사람이 있다. 내가 일찍이 명 태조의 화상을 보았더니 용모가 단정하고 수염이 그림과 같으며, 손톱은 깎지 않아서 길었다. 진리(陳理)는 자식이 없고 외손만 있는데, 내가 일찍이 외손 조공(曺公)을 따라서 가지고 있는 자수(刺繡)놓은 비단을 보았는데 그때의 호화로움을 상상하게 하는 유물이었다.
향시(鄕試)의 울타리는 경중(京中)에서처럼 엄중하고 정제되어 있지 못하다. 수령이 시관(試官)이 되고 수령이 과거보는 선비가 되기 때문에 흔히 누설되어 서로 통하는 일이 많았다. 한 수령이 시험에 나아갈 때 시권(試券)을 만들어주고 나와서, 그가 지은 시권의 첫머리 글귀를 써서 소리(小吏)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네가 가서 내 시권의 등급 차례를 보고 오너라.” 하였다. 얼마 있다가 소리가 돌아와서 말하기를, “시권이 고중(高中)이로소이다.” 하였다. 수령이 그 연고를 물으니, 답하기를, “처음 장중(場中)에 들어가서 당호(堂戶)에 의거하여 엿보니, 시관이 시권을 읽어 내려가다가 반쯤 읽고나서 문득 크게 웃고 이방이라 써붙였습니다.” 하였다. 어떻게 된 것이냐 하면 경자(更子)라 쓴 것이 이(吏) 자와 같아서 이방이 그 우두머리이므로 고중이라 한 것이다. 듣는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정묘년 중시(重試)에 대책(對策)을 짓고 또 표전(表箋)을 지어 초시(初試)와 함께 시험보게 하였으나, 초시에는 표전이 없고 같이 한자리에 나아가서 뜰을 나누어 한계를 삼았다. 중시에 참여한 사람은 모두 한때의 거벽이니, 성근보(成謹甫)가 수석이요, 김이판(金吏判)이 둘째요, 이백고(李伯高)가 셋째요, 신고령이 넷째요, 최영성(崔寧城)이 다섯째요, 박인수(朴仁叟)가 여섯째요, 이연성(李延城)이 일곱째요, 송중추(宋中樞)가 여덟째요, 유태초(柳太初)가 아홉째요, 이광성(李廣城)이 열째요, 이양성(李陽城)ㆍ이윤보(李胤保)ㆍ이양성ㆍ이가성(李可成)ㆍ정봉원(鄭蓬原)ㆍ김공판(金工判)은 모두 3등에 뽑히고 이름이 없이 참여한 자는 다만 4사람이었다. 다만 서강중(徐剛中)ㆍ이현노(李賢老)는 명유(名儒)로서 급제에서 빠졌다. 사문 김덕원(金德源)이 초시에 방안(榜眼)에 뽑혔는데, 당시에 그 아버지 공조 판서와 바꾸어 썼다 하여 이후로부터 초시와 중시는 모두 그 날짜를 달리하였다.

 

옛날 사람들이 모두 거족(巨族)을 귀히 여겼는데, 진(晉) 나라의 왕(王) 사(謝)와 당(唐) 나라의 최(崔)와 노(盧)가 이것이다. 우리 나라 거가대족(巨家大族)은 모두 주(州)ㆍ군(郡)ㆍ토성(土姓)으로부터 나왔으나, 옛날에 번창하다가 지금 쇠잔한 것과 옛날에 한미하다가 지금 번창한 것을 아울러 기록하면 파평(坡平) 윤(尹)씨ㆍ한양 조(趙)씨ㆍ이천(利川) 서씨ㆍ여흥(驪興) 민(閔)씨ㆍ수원 최(崔)씨ㆍ양천(陽川) 허(許)씨ㆍ덕수(德水) 이(李)씨ㆍ행주(幸州) 기(奇)씨ㆍ교하(交河) 노(盧)씨ㆍ인천 이(李)씨ㆍ채(蔡)씨ㆍ남양(南陽) 홍(洪)씨ㆍ용구(龍駒) 이(李)씨ㆍ죽산(竹山) 박(朴)씨ㆍ안(安)씨ㆍ양성(陽城) 이(李)씨ㆍ광주(廣州) 이(李)씨ㆍ강화(江華) 봉(奉)씨ㆍ청주(淸州) 한(韓)씨ㆍ경(慶)씨ㆍ서산(瑞山) 유(柳)씨ㆍ한(韓)씨ㆍ가(李)씨ㆍ전의(全義) 이(李)씨ㆍ단양(丹陽) 우(禹)씨ㆍ진천(鎭川) 송(宋)씨ㆍ신창(新昌) 맹(孟)씨ㆍ옥천(沃川) 육(陸)씨ㆍ경주(慶州) 김(金)씨ㆍ가(李)씨ㆍ김해(金海) 김(金)씨ㆍ가(李)씨ㆍ안동(安東) 김(金)씨ㆍ권(權)씨ㆍ진주(晉州) 강(江)씨ㆍ하(河)씨ㆍ성주(星州) 이(李)씨ㆍ상주(尙州) 김(金)씨ㆍ밀양(密陽) 박(朴)씨ㆍ손(孫)씨ㆍ청송(靑松) 심(沈)씨ㆍ거창(居昌) 신(愼)씨ㆍ창녕(昌寧) 성(成)씨ㆍ조(曺)씨ㆍ영산(靈山) 신(辛)씨ㆍ고령(高靈) 신(申)씨ㆍ동래(東萊) 정(鄭)씨ㆍ하동(河東) 정(鄭)씨ㆍ연일(延日) 정(鄭)씨ㆍ하양(河陽) 허(許)씨ㆍ칠원(漆原) 윤(尹)씨ㆍ순흥(順興) 안(安)씨ㆍ의령(宜寧) 남(南)씨ㆍ선산(善山) 김(金)씨ㆍ완산(完山) 이(李)씨ㆍ광산(光山) 김(金)씨ㆍ나주(羅州) 박(朴)씨ㆍ나(羅)씨ㆍ장수(長水) 황(黃)씨ㆍ순천(順川) 박(朴)씨ㆍ능성(綾城) 구(具)씨ㆍ영광(靈光) 정(丁)씨ㆍ여산(礪山) 송(宋)씨ㆍ제주(濟州) 고(高)씨ㆍ해주(海州) 최(崔)씨ㆍ평산(平山) 신(申)씨ㆍ연산(延安) 이(李)씨ㆍ백천(白川) 조(趙)씨ㆍ문화(文化) 유(柳)씨ㆍ신천(信川) 강(康)씨ㆍ원주(原州) 원(元)씨ㆍ강릉(江陵) 최씨ㆍ함(咸)씨ㆍ평양(平壤) 조(趙)씨ㆍ함종(咸從) 어(魚)씨ㆍ풍천(豐川) 임(任)씨 등이다.

[주D-001]전최(殿最) : 지방 감사가 각 고을 수령의 치적을 심사하여 중앙에 보고하는 우열 성적을 고사할 때, 상(上)ㆍ취(取)ㆍ하(下)를 전(殿)이라 하여 음력 6월과 섣달에 두 번 시행하였다.
[주D-002]정사(定社)의 난 : 조선 태조 때 일어난 난으로 소위 방석(芳碩)의 난이라 불린다. 이를 평정한 공으로 정종 때 의안대군 등 17명에게 훈호를 내렸는데, 이를 정사의 난이라 한다.
[주D-003]선농단(先農壇) : 중국 상고시대의 신농씨(神農氏)와 후직(后稷)을 제사하던 단으로, 서울 동대문 밖에 있다.
[주D-004]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 : 천신을 제사지내는 단으로, 서울 남교에 있었음.
[주D-005]선농단(先農壇) : 중국 상고시대의 신농씨(神農氏)와 후직(后稷)을 제사하던 단으로, 서울 동대문 밖에 있다.
[주D-006]사한단(司寒壇) : 겨울이 너무 따뜻할 때 또는 눈이 너무 오지 않을 때 제사를 지내는 단이다.
[주D-007]세초(歲抄) : 해마다 6월과 섣달에 이조와 병조에서 죄과 있는 관리를 초록(抄錄) 상주(上奏)하여 왕명으로 감등(減等)하거나 용서하던 일을 말한다.
[주D-008]공황(龔黃) : 한(漢) 나라 때 규칙을 잘 지키며 열심히 근무했던 관리 공수(龔遂)와 황패(黃霸)를 말한다.
[주D-009]삼포(三浦) : 능산(能山)의 제포와 동래의 부산포, 울산의 염포를 가리킨다.
[주D-010]태평광기(太平廣記) : 송나라 이방(李昉) 등이 칙명을 받들어 지은 책. 기문을 종류에 따라 분류ㆍ집성한 설화집
[주D-011]난(難)을 평정 : 조선 세조 때 김종서ㆍ황보인 등을 제거한 사실을 두고 말한 것이다.
[주D-012]좌익(佐翼) : 조선 세조 원년에 성삼문 등의 모계(謀計)를 미리 알린 일을 가리킨다.
[주D-013]좌리(佐理) : 조선 성종 2년에 신숙 이하 보좌의 공신 75명에 준 훈명을 가리킨다.
[주D-014]명옥진(明玉珍) : 명 나라 사람, 촉(蜀)을 평정하고 대하국(大夏國)을 세워 황제라고 자칭했다.
[주D-015]고중(高中) : 화살이 보기좋게 명중하였다는 뜻에서 우등의 성적으로 합격하는 것을 말한다.
[주D-016]방안(榜眼) : 갑과(甲科)에 둘째로 급제한 사람을 일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