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 시조공에 대한 기록/상호군 춘헌선생 최양경공 묘지명

유원 고려국 광정대부 도첨의 참리 상호군 춘헌선생 최양경공 묘지명 (문정공파 휘 문도 )

아베베1 2011. 6. 18. 19:44

동문선 제124권
 묘지(墓誌)

(有元高麗國匡靖大夫都僉議參理上護君春軒先生崔良敬公墓誌銘)


이제현(李齊賢)

춘헌(春軒) 최양경공(崔良敬公)의 휘는 문도(文度)이며 자는 희민(羲民)이다. 나이 54세로 지정(至正) 5년(충무왕 원년) 6월 계축일에 죽었다. 8월 임신일에 날을 받아 옥금산록(玉金山麓)에 장례를 치르고 선영(先塋)에 부장(祔葬)하니 예이다. 아들은 사검(思儉)이니 공보다 먼저 죽었고, 손자는 모두 어리다. 맏사위는 좌간의 대부 정포(鄭誧)이니 경사(京師)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둘째 사위는 판도정랑(版圖正郞) 민선(閔璿)이니, 나부인(羅夫人)의 명으로 나에게 글을 빌어다가 장차 돌에 새겨 광중에 넣으려고 하였다.

 

내가 늙은지라 기록하고 적는 데에 게으르지만 스스로 생각건대 평생을 서로 가 되었으니, 의리상 사양할 수 없어 붓을 잡고 그 끝에 제목하기를, “춘헌 선생 묘명(春軒先生墓銘)이라.” 하였다. 어떤 이가 힐책하여 말하기를, “춘헌 선생은 장관(將官)에서부터 기용되었고, 또 그 나이가 자네보다 6년 아래인데 자내가 선생이라 하니 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춘헌은 광양군(光陽君) 휘 성지(誠之)의 아들이요, 찬성사 대제학(贊成事大提學)으로 치사한 휘 비일(毗一)은 그 조부이며, 호부상서 한림학사(戶部尙書翰林學士)로 치사한 휘 우(佑)는 그의 증조부이며, 찬성사 대사학(贊成事大司學)으로 치사한 김씨 휘 훤(晅)은 그의 외조부이니, 진실로 덕망이 있고 벼슬하는 자손이다. 그런데 광양군은 덕릉(德陵)에게 신임을 받아 기밀(機密)과 선거(選擧)를 전담한 지 20여 년에 명성과 세력이 대단하였다. 춘헌은 원 나라 조정[中朝]에서 숙위(宿衛)하는데 몽고(蒙古)의 글과 말을 익혀 부귀한 집 사람들과 같이 처하였고, 무장한 장수들과 같이 놀았으니, 이만하면 부귀하고 교만할 만하거늘 격물치지와 몸을 닦고 남을 다스리는 도에 대해, 그 문을 찾아 들어가지 않음이 없었다. 그런데 나가면 활과 칼을 손에 잡고, 들어오면 눈을 책서에 붙여 주렴계ㆍ정명도ㆍ정이천ㆍ주회암의 서적을 모두 모아서 보았다. 밤이 깊어서야 잠자고 닭이 울면 일어나며, 반드시 절목(節目)에 자세하고 깊이 연구하여 마음에 체득하고 몸소 행한 연후에 그쳤다. 온화하기는 봄볕과 같고 맑기는 가을 물결과 같아, 비록 종과 첩들이라도 일찍이 그가 갑자기 성내고 크게 기뻐하는 것을 한번도 보지 못하였다. 덕릉이 서번(西藩)으로 피하여 갈 적에 춘헌이 광양군을 모시고 조(洮)와 농(隴)으로 가서 문안하였는데, 왕복 만리 길에 화열한 얼굴빛으로 게을리하지 않고 더욱 공경히 하니, 광양군은 편안하기가 마치 집에 있는 듯하였다. 충숙왕이 심부(瀋部)에 들어가서 조회할 때 세력을 잡은 자들이 형제간의 싸움을 선동하여 일으키니, 참소하는 말이 비등하여 모두 온전한 사람이 없었으나, 춘헌의 몸은 그 거처하는 데 있고 뜻은 그 의리를 따라 정직하면서도 능히 공경하여 피차간에 유감이 없게 하였다. 양친을 여의고 3년만에 가묘(家廟)를 세우되, 죽은 부모 섬기기를 생존시와 같이 하였다. 아들 여러 남매가 모두 선부인(先夫人) 김씨 소생이었지만 나부인(羅夫人)을 잘 섬겨 계모되는 줄을 또한 알 수 없었다. 그가 판서 전법사(判書典法司)로 있을 적에는 측근에 있는 자들이 그 간사한 짓을 하지 못하였고, 봉명사신(奉命使臣)으로 평양(平壤)과 쌍성(雙城)에 있을 적에는 완악하고 사나운 무리들이 마음대로 속여 넘기지 못하였다. 밀직(密直)에 들어와 첨의(僉議)에 오르게 되니 온 나라의 선비들이 중직에 등용됨을 기뻐하였고 백성들은 그 은혜를 입었는데, 하늘이 수를 주지 않아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 모두 세월이 빠름을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고 혹은 눈물까지 흘렸다. 아, 춘헌의 도는 자기에게 극진하고 남에게 미더웠으며, 집에서 행하여 나라에 미쳤도다. 살아서는 만백성의 기대에 관계되었고, 죽어서는 진췌(疹瘁)의 슬픔을 일으켰으니 지금 세상에 구한다면 절대로 없을 것이며, 세상에 어쩌다 있는 사람이라 하겠다. 그런데 내가 늙은이로 자처하고 선비로 자부하면서 춘헌을 선생이라 하지 않으면 그것이 옳을 것인가 옳지 않을 것인가.” 하였다. 그 명문에 이르기를,


선비로서 선비답지 못한 자는     / 儒而匪儒
세상에 흔한 일일데                 / 世則是繁
선비 아니면서 선비인 사람은  / 匪儒而儒
홀로 우리 춘헌뿐이로다        / 獨吾春軒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