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대광숭록대부 용재 이행 행장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좌의정 휘(諱)는 행(荇), 자(字)는 택지(擇之)이고 호는 용재(容齋

아베베1 2011. 6. 21. 17:20

 

   이미지 사진은 불광동 삼각산 입구 6.19일 촬영 

 

용재 이행 선생은 의령현 정진에 집이 있었다 시를 잘쓰시는 분으로 의령현과의 관련이 많으신 분이다  

 

1478~1534.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택지(擇之), 호는 용재(容齋)이다.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尹氏)의 복위를 반대하다가 거제도에 위리안치되었다.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와 다시 홍문관 교리로 등용되고, 대사간과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 사류로부터 배척을 받아 첨지중추부사로 좌천되자 사직하고 충청도 면천으로 내려갔다. 기묘사화로 조광조 일파가 실각하자 대사헌과 예문관 대제학, 그리고 동지의금부사와 세자 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도 겸임하였다.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전횡을 논박하다가 오히려 그 일파의 반격을 받아 판중추부사로 좌천되고, 이어 1532년 평안도 함종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저서에 《용재집》이 있다

 

 

용재집 행장

 행장(行狀)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좌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 세자부(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世子傅) 이공(李公) 행장 [주세붕(周世鵬) 찬(撰)]


공의 휘(諱)는 행(荇), 자(字)는 택지(擇之)이고 호는 용재(容齋)이며 세계(世系)는 덕수현(德水縣)에서 나왔으니, 그 땅이 지금은 경기도 풍덕군(豐德郡)에 속한다.
팔대조(八代祖)인 휘 소(劭)는 고려조에 합문지후(閤門祗候)로서 자금어대(紫金魚帒)를 하사받았고 지삼사사(知三司事)가 되었으며, 칠대조(七代祖)인 휘 윤온(允蒕)은 벼슬이 민부 전서(民部典書)에 이르고 첨의정승(僉議政丞) 덕수부원군(德水府院君)에 추증되었다. 육대조(六代祖)인 휘 천선(千善)은 공민왕(恭愍王) 때에 기씨(奇氏)를 주벌하는 데 공을 세워 벼슬이 수사공주국(守司空柱國) 낙안백(樂安伯)에 이르고 시호는 양간(良簡)이며, 오대조(五代祖)인 휘 인범(仁範)은 벼슬이 정당문학 예문관대제학(政堂文學藝文館大提學)에 이르렀다. 고조인 휘 양(揚)은 벼슬이 공조 참의에 이르고 공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증조인 휘 명신(明晨)은 벼슬이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에 이르렀고 시호는 강평(康平)이다. 조부인 휘 추(抽)는 벼슬이 지온양군사(知溫陽郡事)에 이르렀고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左贊成兼判義禁府事)에 추증되었다.
부친은 휘가 의무(宜茂), 자가 형지(馨之)이고 호가 연헌(蓮軒)으로, 타고난 바탕이 순정(醇正)하여 남을 성심(誠心)으로 대하고 심한 애증(愛憎)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으며 함부로 말하거나 웃지 않고 겉모양을 꾸미지 않아 인품이 그야말로 후련히 틔었다. 정유년 과거에 급제하였고 성묘(成廟)께서 바야흐로 예의(銳意) 문치(文治)에 힘써 대궐 뜰에서 문사(文士)를 시험하실 때 연이어 세 차례나 장원을 차지하여, 특명으로 홍문관 교리에 제수되고 이조 정랑을 역임, 사헌부에 올라 집의가 되고 옥당(玉堂)을 밟아 응교가 되고 미원(薇垣 사간원(司諫院)의 별칭)에 들어가 사간이 되었다. 그러던 차에 연산조(燕山朝)를 만나는 바람에 큰 그릇을 지니고도 크게 베풀지 못하고 말았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가 포부를 펴지 못함을 애석하게 여겼다. 시문(詩文)을 지을 때는 붓을 쥐면 이내 이루었고 문집(文集)을 남겼다. 벼슬이 홍주 목사(洪州牧使)에 이르러 졸(卒)하였고,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에 추증되었다. 지온양군사 이하의 증직(贈職)은 공이 존귀하게 됨으로 해서 은택을 추급(推及)한 것이다. 모친 창녕 성씨(昌寧成氏)는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으니,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 문숙공(文肅公) 휘 석용(石瑢)이 증조이고, 경기 도관찰출척사(京畿都觀察黜陟使) 휘 개(槪)가 조부이며, 교서관 교리 증 예조참판 휘 희(熺)가 부친이다. 이렇게 적선(積善)이 융숭한 내외의 두 덕문(德門)이 만나서 한 집안을 이루었으니, 여경(餘慶)의 조짐에 부합한다 하겠다. 이에 5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 중 맏이는 권(菤)으로 기유년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절도사(節度使)에 이르렀고, 그다음은 기(芑)로 신유년 문과에 급제하여 현재 좌의정이고, 그다음이 공이고, 그다음은 영(苓)으로 경오년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평해 군수(平海郡守)에 이르렀고, 그다음은 미(薇)로 을해년 문과에 급제하여 현재 대사헌이다. 1녀는 곧 찬성(贊成) 조공(曺公) 계상(繼商)의 부인이다.
공은 성화(成化) 무술(戊戌) 5월 임오(壬午)에 출생했는데, 겨우 이를 갈 어린 나이 때부터 총민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밤을 낮 삼아 공부하였으며, 놀이와 장난을 좋아하지 않아 마치 성인(成人)과도 같았다.
홍치(弘治) 을묘년에 공의 나이 열여덟이었는데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권지 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로 뽑혔다.
정사년 겨울,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으로 선임되었고 다시 봉교(奉敎)로 전보되었다. 이때 선배들이 나이가 어리다고 자못 소홀히 여기다가, 공이 초고(草稿)를 작성하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기미년 봄, 성묘 실록(成廟實錄)을 편수하는 일에 참여하였고, 가을에 관례에 따라 성균관전적 겸 남학교수에 제수되었다.
경신년 4월, 하성절질정관(賀聖節質正官)으로 북경(北京)에 갔고, 가을에 홍문관수찬 지제교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을 배수(拜受)하였다.
신유년에는 논사(論事)로 인하여 성균관 전적으로 좌천되었다.
임술년 봄, 예조 좌랑에 제수되었다가 이윽고 세자시강원 사서로 전보되었다.
계해년 여름, 사헌부 지평을 배수하고 9월에는 홍문관 부교리로 승진됨과 동시에 관례에 따라 겸직(兼職)을 띠었으며, 이윽고 교리로 승진되었다.
갑자년 봄, 사간원 헌납에 제수되었고 다시 홍문관 응교가 되었다.
이때 연산주(燕山主)가 황란(荒亂)하여, 모비(母妃) 윤씨(尹氏)가 사약을 받고 죽은 데 깊이 유감을 품고 선조(先朝)의 구신(舊臣)들을 거의 다 죽이고, 또 윤씨를 추숭(追崇)하여 그 휘호(徽號)를 극진히 높이고자 조정에 의논하였다. 이에 신하들이 모두 윤당(允當)하다고 했으나 공만은 동료들과 함께 이의를 제기하여 “추승의 의전(儀典)이 예(禮)에 이미 극진하니, 지금에 와서 다시 더할 수 없습니다.” 하니, 연산주가 크게 노하여 하옥(下獄)하고 국문하여 장차 논의의 주동자를 극형에 처하려 하였다. 그러자 어떤 이들은 죄를 면하고자 극력 변명해 마지않았으나 오직 공만은 순순히 받아들이고 한마디 변명도 없었다. 형제 친척들이 스스로 해명할 것을 다투어 권하자 공은 말하기를 “죽음은 명(命)이다. 어찌 차마 죄를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켜 구차히 삶을 훔치리오.” 하였다. 이때 응교 권공(權公) 달수(達手)가 외지에서 체포되어 아직 도성에 당도하지 않았었는데, 당도하여서는 말하기를 “의론을 주창한 자는 나이지, 이(李) 아무개가 아니다.” 하였다. 이에 권공은 죽고 공은 장형(杖刑)을 받은 다음 충주(忠州)로 유배되니, 사람들은 모두 권공을 칭찬하는 한편 죽음이 임박해도 흔들리지 않는 공의 의연한 모습에 탄복하였다.
6월에 또 수찬 박은(朴誾)의 사안(事案)에 연좌되어 재차 장형을 받고 다시 유배되었으며 관례에 따라 부역에 충원(充員)되었다.
가을 9월, 다시 조정이 전의 사안을 논의하여 뒤미처 포박하여 고문하는 통에 거의 죽음에 이를 뻔한 것이 여러 차례였고, 겨울 12월에 이르러 사형에서 감면(減免)되어 장형을 받고 영남 함안군(咸安郡)의 관노(官奴)로 귀양가게 되었다.
을축년 봄 정월에야 비로소 배소(配所)에 당도하였고, 가을 8월에 또 익명서(匿名書)의 옥사로 인하여 포박되어 고문을 받으면서 겨울을 지냈다.
이듬해인 병인년 봄 정월에 이르러 거제도로 귀양을 떠나 2월에야 배소에 당도, 고절령(高絶嶺) 아래에서 가시 담을 두르고 살았다. 이해 가을 또 포박하여 죽을 때까지 곤장을 치라는 명이 떨어져 거의 압송 길에 오르려던 차에 중종반정(中宗反正)을 만나 사면되었다.
당초 연산군이 조정의 선비를 주륙(誅戮)하여 그냥 무사히 보낸 날이 없었다. 공이 전후로 체포되어 장형을 받고 유배됨에 그 형벌이 너무도 참혹하여 친척들이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공은 한마디도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았으며, 사람들이 모두 “필시 극형을 면치 못하리라.” 하였지만 공은 역시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책 읽기를 쉬지 않았다. 사람들이 책을 읽지 말라고 만류하면 공은 말하기를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은들 무슨 유감이 있으리오.” 하였다.
병인년 9월, 중묘(中廟)가 즉위하여 공을 홍문관 교리로 소환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은 승진하여 부응교가 되었으며, 또 어명을 받고 정업원(淨業院)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정묘년 가을, 어명을 받고 강원도 향시(鄕試)의 고시관(考試官)이 되어 강릉(江陵)으로 갔고, 9월에는 응교로 승진하였으며, 12월에는 모친상(母親喪)을 당하였다.
경오년 2월, 상기(喪期)가 끝나 성균관 사예에 제수되었고 4월에는 홍문관부응교 겸 예문관응교를 배수(拜受)하였으며, 이윽고 의정부검상 지제교 겸 춘추관기주관에 제수되었다. 7월에는 승진하여 사인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이 되었다. 구례(舊例)에 사인(舍人)은 도당 낭청(都堂郞廳)을 맡아서 반드시 당시의 이름난 미색(美色)을 뽑아 연정회(蓮亭會)를 만들게 되어 있었는데, 공이 사인이 되자 어떤 사람이 벽에 글을 써 붙이기를 “도리(桃李)가 꽃이 없나니, 이(李) 아무개가 중서당(中書堂)에 들어왔다네.” 하였으니, 이는 공이 여색(女色)을 멀리함을 말한 것이다. 사림(士林)은 이 사실을 입에서 입으로 옮기며 비웃었지만 공은 종신토록 성색(聲色)을 가까이하지 않았으니, 자기를 다스림에 엄격함이 대개 이와 같았다.
신미년 5월, 봉상시 부정 지제교 겸 승문원참교에 제수되었고, 9월에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였다.
계유년 11월, 상기(喪期)가 끝나 성균관 사예 지제교에 제수되었는데, 이후로는 늘 지제교를 겸임하였다.
갑술년 3월에 사성(司成)으로 승진되었고, 11월에 사섬시 정(司贍寺正)이 되었다.
을해년 2월에 사간원사간 겸 춘추관편수관에 제수되었고, 6월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특별히 제수되고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다. 공은 오래도록 하급 관료에 묶여 있었던 터라, 이러한 조명(朝命)이 내렸다는 소문이 들리자 사림이 서로 경하하였다.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세상을 떠났을 때 담양 부사(潭陽府使) 박상(朴祥)과 순창 군수(淳昌郡守) 김정(金淨)이 상소하여, 폐빈(廢嬪) 신씨(愼氏)로 왕비의 자리를 잇기를 청하니, 외간의 의론이 흉흉하여 모두 이에 찬동하였다. 이때 공이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홀로 분연(奮然)히 말하기를 “이는 안 될 일이니, 응당 죽음으로써 반대하겠다.” 하고 힘써 간쟁(諫爭)하니, 그 주장이 마침내 그치게 되었다. 이에 상께서 지금의 우리 대비(大妃)를 친영(親迎)하셨던 것이다. 당시 사리를 알지 못하는 자가 공을 두고 말하기를,
“박상 등을 국문(鞫問)하자고 청하였으니, 이는 사림을 모해(謀害)하려는 것이다.”
하니, 공은 말하기를,
“연산주(燕山主)가 모비(母妃)를 위하다가 도리어 우리 선왕(先王)을 원수로 삼아 조정 신료들을 도륙하여 종묘사직이 거의 위태한 지경에 빠졌었다. 신수근(愼守勤)이 이미 죄를 받았으니, 그 아비를 죽이고 그 딸을 왕비로 세워 패망의 전철을 밟는다면, 이 나라 사직은 어찌되겠는가. 참으로 국가 대사(大事)를 위해 그 불가함을 극언한 것일 뿐이니, 어찌 이들을 사지(死地)에 몰아넣고 싶어서이겠는가. 차라리 이러한 구설(口舌)을 내가 달게 받을지언정 종묘사직을 차마 저버릴 수 없다.”
하였다. 이해 겨울 10월에 언사(言事)로 인하여 첨지중추부사로 좌천되었고, 12월에 홍문관 부제학을 배수하였다.
병자년 겨울, 칭병(稱病)하여 사직하고 조정에 나가지 않으니, 체직되어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정축년 봄에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되었고, 여름에 다시 조정에 들어와 부제학이 되었으며, 6월에 다시 대사성이 되었다. 사은(謝恩)하던 날 상께서 공에게 전지(傳旨)를 내리시기를 “부제학으로 있다가 대사성이 되는 것은 예전에는 이러한 예(例)가 없었는데, 다만 인재를 육성하는 일이 중요하기에 특별히 제수한다.” 하였다. 7월에 승정원좌승지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에 제수되었고, 8월에 도승지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예문관직제학으로 승진되었으며, 이달에 가선대부(嘉善大夫) 사헌부 대사헌에 특별히 배수되었다.
당초에 신진(新進)들이 제도를 개혁하고 자기네 주장만 내세우기를 좋아하였는데 공이 이에 구차히 영합하려 하지 않자 이로 말미암아 이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과연 이들이 대간에게 글을 보내어, 국사(國事)를 그르쳤다고 공을 논죄(論罪)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9월에 첨지중추부사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공은 태연히 웃으며 말하기를 “일신의 진퇴에 어찌 구차할 수 있겠는가. 고향으로 돌아가 살면서 여생을 마치는 것이 나의 뜻이다.” 하고는, 이튿날 필마(匹馬)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 면천(沔川)의 창택촌(滄澤村)에 우거하면서 자호(自號)를 창택어수(滄澤漁叟)라 하였다. 공은 생업을 일삼지 않았는데, 처음 면천에 우거할 때 백형(伯兄)인 절도공(節度公)이 공의 군핍함을 듣고 곡식 2백 섬을 주자 공이 말하기를 “제가 만약 굶주린다면 형의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곡식을 가져다 먹겠습니다.” 하고는, 끝내 한 섬도 가져가지 않았다.
이때 수원 부사(水原府使) 이성언(李誠彦)이 상소하여 공의 억울함을 변론하였으나 비답이 내리지 않았으며, 성균관의 유생들 역시 소장을 올려 변론을 진달하려 하였으나 안처겸(安處謙)에 의해 저지되니, 식자(識者)들이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공이 떠남을 애석하게 여긴 나머지 심지어 눈물을 흘리는 이조차 있었다.
무인년 정월, 병조 참지에 제수되어 애써 명에 따라 부임하였다가 곧 병으로 사직하고 면천으로 돌아왔으며, 또 호조 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기묘년 겨울, 조정 여론이 다소 진정되어, 12월에 홍문관 부제학에 제수됨에 소환하라는 어지(御旨)가 있었다.
경진년 정월, 가선대부 공조참판 겸 동지경연춘추관사 수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에 특별히 제수되었다.
공은 당초에 기묘년 신진 사류(新進士類)들의 배척을 받았으나 조정에 소환되어서는 말하기를 “기묘년의 과오는 재상의 허물이다. 세상일에 경험이 없는 연소한 이들에게 갑작스레 높은 자리를 주어 마음대로 분란(紛亂)을 피우도록 방임하고서 재제(裁制)를 가하지 않았으니, 그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도리어 재상이 그렇게 하도록 만든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2월에는 동지의금부사를 겸임하였고, 10월에는 세자 우부빈객을 겸임하였으며, 가을에는 증고사(證考使)가 되어 호남과 영남으로 갔다.
신사년 정월에는 자헌대부(資憲大夫)에 특별히 제수되어 공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세자좌부빈객이 되고 나머지 직함은 이전과 같았으며, 이윽고 또 의정부 우참찬에 특별히 제수되었다. 그리고 지금의 황제가 즉위함에 한림원 수찬(翰林院修撰) 당고(唐皐)와 병과 급사중(兵科給事中) 사도(史道)를 보내 등극(登極)의 조서(詔書)를 반포하게 하였는데, 공을 원접사(遠接使)로 삼아 국경에서 이들을 영접하게 하였다. 이때 왕복하는 길에 중국 사신들과 수창(酬唱)하여 깊이 그들의 환심을 얻었다. 당시 현재의 좌상(左相)이 의주 목사(義州牧使)로 있었는데, 두 중국 사신이 공의 형수(荊樹)가 번성하단 말을 듣고 오성(五星)의 설(說)에다 지목해 찬미하였다. 두 중국 사신이 홍제원(弘濟院)에 도착하여, 우리 전하가 조서를 영접한 뒤 연(輦)을 타고 환궁(還宮)하기로 한 것을 비례(非禮)라고 하였다. 이에 공이 사례에 의거하여 말하자 두 중국 사신이 대뜸 노한 기색을 띠고 말하기를,
“우리는 오로지 예(禮)를 숭상하고자 하는데, 참찬(參贊) 또한 이런 말을 하오?”
하였다. 공이 대답하기를,
“우리 전하께서 지금 교외(郊外)에서 조서를 기다려 조정의 예를 공경히 행하고 계시니, 대인(大人)께서도 절로 보게 되실 것입니다.”
하니, 상사(上使)가 기쁜 기색으로 웃으며 말하기를,
“참찬의 정성과 공경으로 인하여 국왕의 정성과 공경을 이미 잘 알았소.”
하였다. 이때 중국의 상사는 천하의 정인(正人)이었는데, 매양 공의 사람됨과 시편(詩篇)에 탄복하여 시단(詩壇)의 노장(老將)이라 칭찬하고는, 경솔히 시를 지어 수작하지 말고 신중하도록 부사(副使)에게 경계하였다.
계미년에 좌참찬으로 승진하였고, 10월 25일에 왕세자가 입학(入學)하자 공을 박사관(博士官)으로 삼았다. 박사관은 곧 사부(師傅)의 직임으로 반드시 일대의 석유(碩儒)를 뽑게 되어 있었는데, 공은 강론할 때 응답하는 말이 모두 남들의 의표(意表)를 뛰어넘었다. 세자가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대해 묻자, 공은 “지금 물으실 바가 아닙니다.”라고 대답하고는 이어 효경(孝敬)의 도를 진달하니, 논자(論者)가 “사체(事體)를 제대로 알았다.”고 탄복하였다. 가을에는 숭정대부(崇政大夫)로 품계가 오르고, 우찬성 겸 판의금부사 세자이사로 승진하였으며, 나머지 직함은 이전과 같았다.
하루는 공이 헌(軒)을 타고 대궐로 가는 길이었는데, 유생 배순(裵珣)이란 사람이 걸어가다가 경복궁 비석 모퉁이에서 공을 만났다. 배순이 몸을 숨기고 엿보니 공이 소매로 눈물을 닦아 양쪽 눈이 모두 붉어져 있기에 몹시 괴이쩍어했는데, 가다가 어떤 사람이 형(刑)을 당하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공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운 것임을 알았다. 이 사실을 들은 사람은 말하기를 “공의 이러한 마음은 곧 살리기를 좋아하는 천지(天地)의 마음이다. 세상에서 공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비록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공을 헐뜯지만, 이 어찌 사실이겠는가.” 하였다.
갑신년 여름, 이조 판서에 특별히 제수됨에 인재 전형이 한결같이 지극히 공정한 기준에서 나와 흠잡는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언자(言者)가 “주상(主上)의 덕화를 크게 펼치는 데 궐위(闕位)가 있다.” 하여, 가을에 다시 좌찬성이 되었다.
정해년 10월,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에 특별히 제수되었다.
무자년 봄, 만포 첨사(滿浦僉使) 심사손(沈思遜)이 야인(野人)에게 살해되었는데, 휘하의 사졸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나고 상관을 구원하지 않은 일이 발생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이러한 자들을 주벌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법을 보이리오.” 하였다. 조정은 끝내 그들의 죽음을 면해 주었으나 논자(論者)들은 모두 공의 말을 옳다고 하였다.
중묘(中廟)께서 바야흐로 불끈 노하여 예의(銳意) 서쪽으로 오랑캐를 토벌하려 하시니, 조정 의론이 대다수 찬동하여 이에 허굉(許硡)을 대장으로 임명하였다. 공은 홀로 이에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하고 극간(極諫)하여 충성에서 우러나온 주장을 반복하기를 마지않았으니, 그 말이 국사(國史)에 실려 있다. 그 대요(大要)를 말하자면, 군사를 일으켜 전쟁하는 것은 흉험(凶險)하고 위태하여 만전(萬全)을 보장하기 어려우며, 설사 허굉을 장수로 삼아 비록 필승에 만전을 기한다 하더라도 이미 승리한 뒤에는 또 허굉을 시켜 지키게 할 수는 없는 일이므로, 이렇게 되면 변방의 우환이 끝이 없으리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끝내 군사를 일으키지 않았으니, 서북쪽 변방의 창생(蒼生)들이 지금껏 어육(魚肉)이 됨을 면한 것은 실로 공의 충간(忠懇) 덕택인 것이다.
9월에 상께서 여주(驪州)로 행행(行幸)하실 때 공은 유도 대장(留都大將)이 되었다.
경인년 겨울, 좌의정 겸 세자부가 되고 나머지 직함은 이전과 같았다.
정현왕후(貞顯王后)의 상(喪)이 났을 때 선릉(宣陵) 남쪽 산기슭에 묘소를 잡았는데 예조가 관례에 따라 다시 살펴서 터를 정하기로 하였다. 당시 풍수(風水)로 이름난 자가 있어, 동료들이 계청(啓請)하여 그를 데리고 가고자 하니, 공이 “불가하다.” 하였다. 동료들이 억지로 계청하려 하자, 공은 의연히 말하기를 “이러한 무리는 자기 재주를 부리고 싶어 하기 마련이니, 만약 그가 지금 잡아 놓은 터를 보고 못 쓴다고 한다면 장차 터를 바꾸어 다른 곳을 잡을 것인가. 그의 말대로 하지 않으면 반드시 뒤에 말이 있을 것이다.” 하여, 마침내 그 풍수를 데리고 가지 않았다. 당시 상국(相國) 홍언필(洪彦弼)이 예조 판서였는데 그 후 중종의 상을 당했을 때 이미 정릉(靖陵)으로 터를 잡아 놓았음에도 윤림(尹霖)이 삿된 말로 조정을 선동하는 바람에 능침을 만드는 큰 역사(役事)가 장차 시작되려다 결정을 보지 못한 것이 여러 날이었다. 이에 홍 상국이 그 일에 이야기가 미치자 탄식하며 말하기를, “용재(容齋)의 일에 대한 요량은 참으로 따를 수 없구나. 이공(李公)이 만약 지금 있다면 필시 이러한 일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복성군(福城君)이 세자에게 이롭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이 노부(老夫)를 죽이지 않고는 어떠한 동요도 일으킬 수 없을 것이다.” 하니, 듣는 이들이 흠칫 두려워하였다.
공은 조정의 형세가 점점 위미(委靡)해 가는 것을 보고 재상의 자리에 올라서는 항상 근심하여 침식을 잊기에 이르렀다. 매양 상께 진언하기를 “위력과 권세가 누구에게 있는지 살피소서.” 하였으니, 대개 지목하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신묘년 10월, 김안로(金安老)를 논죄한 일로 인하여 판중추부사 겸 영경연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로 좌천되었다. 당초에 공이 김안로와 한림원(翰林院)에 함께 있고 독서당(讀書堂)에 함께 들어가 서로 마음을 터놓는 좋은 사이로 지낸 지 오래되었다. 남문경(南文景)이 조정 신료들을 대동하고 김안로를 유배하자고 청할 때 공은 홀로 “명분 없이 재상을 쫓아내면 폐단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하면서 눈물로 전송하였는데, 남문경이 이 사실을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이공(李公)은 관후(寬厚)하여 남을 너그럽게 포용하는지라 이 사람이 간사한 줄을 알지 못하니, 아무래도 필시 그에게 기만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다른 사람이라면 이치상 김안로와 똑같이 문책해야 하겠지만 이공 같은 이는 흉중이 평탄하여 의심할 나위가 없으니, 진실로 이러한 죄목으로 문책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다. 김안로가 다시 조정에 돌아오게 되자, 그 아들 연성위(延城尉) 김희(金禧)가 연거푸 그 아비의 원통함을 상주(上奏)하여 삼공(三公)이 수의(收議)하게 되었다. 당시 공은 재상으로 있으면서 “김안로가 애초에 터무니없는 죄를 뒤집어썼고 지금은 또 세월이 오래 흘렀으니, 응당 상께서 짐작하실 일이다.” 하였으니, 공의 생각은 대개 김안로로 하여금 그저 유배에서 벗어나 편히 살도록 하고자 한 것일 뿐이었다. 그런데 김안로가 유배지에서 풀려나 조정으로 돌아와 연줄을 타고 복직한 뒤 자기편 무리와 체결하고 급속도로 승진하여 사감(私憾)을 풀게 되어서는, 그와 평소 혐원(嫌怨)이 있던 사람들은 거의 다 조정에서 내쫓기었다. 공이 그제야 비로소 그 정상(情狀)을 알아차리고서 김안로를 보면 그 음사(陰私)함을 꾸짖으면서 준엄한 말로 힐책하는 데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이에 김안로가 부끄러운 기색을 띠고 말하기를, “이는 모두 대간(臺諫)이 한 짓이니, 내가 감히 알 바가 아닙니다. 공은 어찌하여 나를 지목해 말하시오?” 하고는, 물러나 자기편 사람들과 함께 은밀히 공을 저해(沮害)할 모책을 꾸미고 자신이 앞장서서 말하기를 “이(李) 아무개가 나를 무고한 것은 그 목적이 나를 죄책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장차 사림(士林)을 모함하려 하고 있다.” 하였다. 이에 김안로 편의 무리들은 공을 모함하고자 획책하여 매양 공과 친하고 미더운 관계에 있는 사람을 보내어 공의 의중(意中)을 탐색하였다. 대사헌 심언경(沈彦慶)이 공에게 말하기를,
“바깥세상에 떠도는, 대간이 상공(相公)을 논죄하려 한다는 말은 대간의 논의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대간이 자기 입장을 해명하려 합니다.”
하니,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만세(萬世)의 권신(權臣)이 되는 셈이군. 대간이 어찌 이 일로 자기 입장을 해명한단 말인가.”
하였다.
한번은 친족 모임 중에 김안로 편인 사람이 와서 공에게 이르기를,
“동궁이 외로운 터에 이숙(頤叔 김안로의 자(字))이 우익(羽翼)이 되고 있으니, 그를 흔들어서는 안 됩니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나라의 세자 자리가 이미 정해졌으니, 조정의 신하가 누군들 동궁을 위해 죽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조정에 김안로 한 사람만 있단 말인가.”
하였다. 그리고 김안로가 지은 ‘견우문(遣愚文)’이란 글을 보고는 공이 탄식하기를 “소인의 정상이 모두 여기에 드러나 있구나.” 하고 결연한 뜻으로 배척하니, 자제들이 두려워 다투어 간(諫)하기를 “병을 칭탁(稱託)하고 사직(辭職)하여 문호를 보전하소서.” 하였다. 이에 공은 말하기를 “내가 선견지명의 지혜가 없어 이러한 사태를 미연에 막지 못하였는데, 또 화(禍)를 피하여 성명(聖明)을 저버린단 말인가. 이 한 몸 죽고 삶은 걱정할 것이 없으나 단지 간사한 자가 뜻을 펴서 나랏일이 날로 그릇되어 갈까 두렵다.” 하고는, 드디어 영의정 정광필(鄭光弼)과 함께 김안로의 간사한 정상을 진달하고 조정에서 쫓아낼 것을 청하니, 정언 허항(許沆)이 말하기를 “이(李) 아무개가 탄핵을 받을까 겁이 나서 김안로를 탄핵한다는 명목을 빌어 사림을 모해하려 한다.” 하였다. 이에 김안로에게 빌붙은 대간과 시종(侍從)들이 무더기로 들고 일어나 도리어 공을 공격하였으나 공의 덕망이 평소 드러난 터라 감히 대뜸 죄명을 뒤집어씌우지는 못하고 단지 정부(政府)의 직함만 체탈(遞奪)하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혹은 파직되고 혹은 유배되었다.
공론은 이미 막히고 사의(邪議)가 무더기로 일어나게 되자 “공이 아직도 죄를 받지 못했다.”고 말하는 자가 있었는데, 이듬해인 임진년 3월에 생원 이종익(李宗翼)이 상소하여 시정(時政)의 득실을 말하다가 이야기가 공이 무죄하다는 데 미치는 바람에 다시 김안로의 노여움을 격발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공은 마침내 평안도 함종현(咸從縣)에 유배되어 갑오년 10월 25일 적소(謫所)에서 숨을 거두니, 향년이 57세였다.
을미년 봄 3월 13일, 면천(沔川) 장자동(長者洞) 선영의 남쪽 산기슭에 안장하였다.
정유년 겨울 10월에 김안로 및 그 무리들이 죄를 받았고, 11월에 공의 옛 직함을 회복하라는 명이 내렸다.
공은 10척(尺) 남짓한 신장에 얼굴은 네모지고 수염은 무성하며 거북의 등이요 기린의 이마였다. 그 기상으로 말하자면, 형옥(荊玉)을 품은 양 순박하고 화기(和氣)로 뭉쳐진 소상(塑像)과도 같았으며, 그 걸괴(傑魁)한 모습은 용호(龍虎)와도 같고 비상하는 자태는 난봉(鸞鳳)과도 같아,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대인군자(大人君子)임을 알 수 있었다. 일찍부터 큰 뜻을 품고 학문에 매우 부지런하였는데, 부친 연헌(蓮軒)이 공에게 이르기를 “내가 사가(四佳) 서공(徐公)을 보았더니 평생토록 신고(辛苦)를 겪더구나. 그런데 너 역시 신고를 겪으려 하는구나.” 하였으니, 대개 공의 소싯적에 연헌은 이미 장차 문병(文柄)을 잡으리란 것을 알았던 것이다.
비록 만년에도 언제나 닭이 울면 일어나 책상에 앉아 책을 읽었으니, 그 학문을 좋아함이 참으로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음식을 탐내는 것과 같았다. 평상시 거처할 때는 나태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고, 한번도 급박한 말투나 조급한 기색을 나타낸 적이 없었으며, 아무리 심하게 노하더라도 모진 말로 사람을 욕한 적이 없었다. 음식은 육류(肉類)를 좋아하지 않았고, 옷은 겨우 몸을 가릴 정도면 그만이었다. 벼슬살이 30년 동안 살림을 돌보지 않은 탓에 집안이 흡사 빈한한 집 같아, 슬하에 가득한 자녀들이 근근이 의식(衣食)을 이어갈 뿐이었다. 혹자가 전장(田莊)을 두라고 권하자 공은 말하기를 “조정의 녹을 먹는 집이 전답을 차지하려 애쓴다면 녹이 없는 자들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나의 녹이 경작(耕作)을 대신할 만하니, 장래 자손들을 위한답시고 전장을 두는 것이 또한 수고롭지 않겠는가.” 하였다. 자제들의 복식(服飾)이 사치스러우면 공은 당(堂)에 오르지 못하게 하고, 또 말하기를 “너희들이 진실로 선(善)에 뜻을 두기만 한다면 비록 과거에 오르지 못한다 할지라도 나는 전혀 여한이 없다.” 하였다.
평소 타고 다니는 말이 남들은 타지 못할 정도로 노쇠하여도 공은 개의치 않고 그 말이 죽은 뒤에야 다른 말로 바꾸었으며, 재상이 되었을 때 외사촌 형이 초헌(軺軒)을 하나 선물하였는데 그 한 대의 초헌을 십 년 동안이나 탔다. 대저 자신을 위한 것에는 이와 같이 지극히 검박하여 남들은 견딜 수 없는 정도인데도 공은 언제나 여유로웠다. 일찍이 말하기를 “녹이 친우(親友)에 미치지 못하면서 자신을 위해 사치를 부리는 짓은, 나는 차마 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친척을 대할 적에는, 촌수의 원근(遠近)을 따지지 않고 반드시 급박한 자를 구휼하고 곤궁한 자를 위무하기를 흡사 힘이 미치지 못할까 걱정하듯 정성을 다했으며, 그리하여 집안 살림이 자주 바닥이 나도 돌볼 겨를이 없었다. 사람을 대할 적에는,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않고 한결같이 지성을 다하여 안배(安排)하는 마음이 없었기에 어진 이나 어리석은 이를 막론하고 누구나 신복(信服)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포의(布衣)의 벗 한 사람이 녹사(祿仕)할 길을 구하러 찾아왔기에 공이 반갑게 맞아 매우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하루는 뇌물을 가지고 찾아오자 공은 말하기를, “내가 자네를 반겨 대우한 것은 친구의 의리를 생각해서였네. 그런데 이제 자네가 곤궁해서 벼슬을 구하러 왔으면서 나에게 뇌물을 주니, 그렇다면 그대는 곤궁한 것이 아니로세. 굳이 벼슬을 구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벼슬자리를 뇌물로 얻을 수 있단 말인가.” 하고는 마침내 사절하고 만나 주지 않으니, 그 사람이 크게 부끄러워하며 떠났다.
공은 언제나 자식들에게 훈계하기를 “내 평생 소득이 ‘속이지 않음[不欺]’에 있다.” 하였으니,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이 천성(天性)에서 나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남의 불선(不善)을 보면 반드시 면전에서 책망하여 사람들이 감히 사사로운 청탁을 넣을 수 없었으니, 이에 조정이 무거운 신임을 주고 의지하여, ‘뇌물이 통하지 않는다[關節不到]’는 말로 공을 지목하기까지 하였다.
또 이르기를,
“신하가 지위를 차지하고 녹을 먹으면 의당 임금의 은혜를 잊지 않고 국가를 저버리지 않아야지, 자기 일신을 돌보아서는 안 된다. 만약 권세를 빙자하여 사은(私恩)을 심고 재물을 갈취하여 전답을 불림으로써 자기 한 집안을 편안케 하고 자손을 위한 계책을 삼는 따위의 짓은, 나는 하지 않는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나라의 후한 은혜를 입었으면 모름지기 터럭만큼이라도 보답할 길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당시의 정계(政界)에 용납되지 못하여 나의 뜻을 펼 수 없다면 의당 몸을 거두어 물러나야 할 것이다. 저 지위와 녹을 탐내어 시세(時勢)를 따라 부앙(俯仰)하는 짓을 나는 하지 않겠다. 그런데 하물며 자기와 의견이 다른 자를 배척하여 오직 자기 일신만 보전할 길을 도모하는 짓 따위야 말할 나위 있겠는가.”
하였다.
재상을 배수(拜受)하였을 때 공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덕은 없이 지위만 높아졌으니, 어떻게 감당하리오.” 하고는 통렬히 자신을 억제하고 겸손하였다. 자제나 친족들이 벼슬자리를 청탁하면 번번이 거절하고 이르기를 “조정의 관작(官爵)이 어찌 재상의 시은(施恩)의 도구이겠는가.” 하였으며, 늘 왕증(王曾)의 은출원귀(恩出怨歸)라는 말을 재상의 체통에 맞다고 여기니, 이로 말미암아 요행을 노리는 자들이 혹 많이 원망하였다.
말년에는 조정을 근심하여 탄식하기를 “사림이 저마다 붕당을 세우니, 국가의 복(福)이 아니다. 이것이 송(宋)나라가 망한 까닭이다.” 하였으며, 한번은 경연(經筵)에서 시폐(時弊)를 극력 진달하여 “후일에 무궁한 우환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사림을 보면 반드시 간절히 책망하기를 “그대들이 스스로 분란을 일으키니, 이 때문에 간사한 무리들이 눈을 흘기고 있다. 결국에는 그대들이 배척당하고 말 것이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 집에 보배로운 기물(器物)이 있으면 누구나 아낄 줄을 알아서, 그것을 가지고 다닐 때 반드시 신중을 기하여 혹 떨어뜨리지나 않을까 염려하듯이 조심한다. 그러나 국가의 일에 이르러서는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좌지우지하여 실수할까 염려하는 자가 없으니, 이런 까닭에 국가의 대기(大器)가 도리어 그 집안의 소기(小器)만 못하게 되었으니, 어찌 이치에 어긋나지 않겠는가.” 하였다.
공은 일찍이 남산(南山)의 청학동(靑鶴洞)에 작은 서재를 열고, 또 자호(自號)를 청학도인(靑鶴道人)이라 하였다. 그리고 서재로 난 길의 양쪽에 소나무, 회나무, 복숭아나무, 버드나무를 심어 놓았는데, 공이 조정에서 퇴근하여 지팡이를 끌고 소요하면 그 모습이 소연(蕭然)히 마치 야인(野人)과도 같았다.
하루는 날이 어두울 무렵 녹사(錄事)가 공무상 보고하러 공을 찾아가는데, 한 사람이 나막신을 신고 거친 베옷을 입고 작은 동자를 데리고서 동문(洞門)을 나오고 있었다. 녹사가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정승께서는 계시는가?” 하고 묻자, 공이 천천히 돌아보면서 “공무상 보고하러 왔는가? 내가 여기 와 있다네.” 하니, 녹사가 놀라 자기도 모르게 말에서 떨어졌다. 그 충후(忠厚)하고 소박함이 대개 이와 같았다.
공은 무릇 서리(胥吏)들을 대할 때도 반드시 공근(恭謹)하여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그 관인(寬仁)함을 일컫는다.
공이 김안로의 무함(誣陷)을 입고부터 당시의 문사(文士)들이 후생을 위해 출제(出題)할 때면, 그 제목을 대다수 방예(放麑)로 내거나, 그렇지 않으면 철갱(啜羹)으로 내었으니, 대개 방예는 공의 인후(仁厚)함을 가리킨 것이고 철갱은 김안로의 잔인함을 가리킨 것이다.
공이 적소(謫所)에서 숨을 거두자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누구나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반면에 김안로가 패망하게 되자 중외(中外)의 모든 사람들이 노래하고 춤추었으며 아이들도 모두 기뻐 발을 구르며 뛰었다. 이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저 어린아이들이 무엇을 안다고 저렇게 기뻐하는가.” 하자, 또 한 사람이 대뜸 그 말을 받아 말하기를 “저 아이들의 아비가 예전에 김안로의 독해를 입었으니, 그 때문에 비록 어린아이이지만 역시 기뻐할 줄 아는 것이다.” 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군자와 소인이 구분되고 인심(人心)은 속일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공은 종실(宗室)인 장산 부수(璋山副守) 조(稠)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4남 3녀를 낳았다. 아들 중 맏이는 원정(元禎)으로 면천(沔川)에 한거(閑居)하여 벼슬하길 좋아하지 않았고, 그다음은 원상(元祥)으로 현재 흥덕 현감(興德縣監)으로 있고, 그다음은 원복(元福)으로 현재 상의원 직장(尙衣院直長)으로 있고, 그다음은 원록(元祿)으로 경자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신축년 과거에 급제하여 현재 홍문관 교리로 있다. 딸 중 맏이는 돈녕부 참봉 최세룡(崔世龍)에게 출가하고, 그다음은 유학(幼學) 유몽선(柳夢宣)에게 출가하고, 막내는 유학 유자(柳滋)에게 출가하였다.
공의 학문은 《논어》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 시문(詩文)은 사실에 의거하여 곧바로 쓰고 문장 수식을 없애어 궤이(詭異)하고 험벽한 문사(文辭)를 쓰지 않아, 하늘이 이루고 귀신이 만든 듯 다듬고 꾸민 흔적이 없었으나 사람의 감정과 사물의 이치를 남김없이 포괄하여 어김없이 그 극치에 오묘히 나아갔기에, 우뚝이 드높아 남들이 발돋움하여 미칠 수 없었다. 일찍이 〈축야인격문(逐野人檄文)〉을 지었는데, 남지정(南止亭)이 깊이 탄복하였다. 옛날에는 주문연(主文硯)이 없었는데, 지정(止亭)이 큰 벼루를 하나 만들어 공에게 전해 주면서 이르기를 “이것은 사문(斯文)의 심법(心法)을 전하는 물건이다.” 하였다. 그러나 이 벼루를 미처 다른 사람에게 다시 전하지도 못한 채 공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평소의 저술은 초록(草錄)해 둔 적이 없어 수고(手稿)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적거록(謫居錄), 남천록(南遷錄), 해도록(海島錄)과 남유록(南遊錄), 남악창수집(南岳唱酬集)뿐이고, 사방에서 두루 찾아 수집하니 시(詩) 약간 권(卷)과 문(文) 약간 권이 되었다. 그리고 함종(咸從)에 우거할 때에는 다시는 시를 읊지 않고 오직 두문불출하며 책을 읽었으며, 《동국사략(東國史略)》을 산정(刪定)하여 완성하고 손수 베껴서 정서(淨書)하였다.
공은 쌓은 덕이 마치 높은 산과 같았기에, 밖으로 드러나 남들이 볼 수 있는 것이 구름과 비를 머금어 흘려 내는 듯 아득하여 그 끝없이 두터운 근저를 엿볼 수 없었으며, 너른 도량이 마치 큰 바다와 같았기에 밖으로 드러나 남들이 볼 수 있는 것이 고래와 곤어(鯤魚)를 품어서 기르는 듯 드넓어 그 가없이 먼 기슭을 알 수 없었다. 그 말은 어눌하여 마치 입에서 나오지 못할 듯하고, 그 마음은 독실하여 마치 옷을 이겨내지 못할 듯하였으며, 검소하면서도 능히 편안하고 정직하면서도 작은 신의(信義)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형제간에 공경과 우애를 다하고 믿음과 의리가 붕우들 사이에 드러났다. 이렇게 한 생각이라도 삼가고 모든 행실을 갖추었으니, 어찌 천지가 정기(精氣)를 쌓아 중흥에 맞추어 세상에 탄강(誕降)시켜 국가의 상서로 삼은 이가 아니겠는가.
위태한 연산군의 조정에서 직언한 것이며, 극형을 앞두고서도 변명하지 않은 것이며, 국혼(國婚)을 바로잡은 것이며, 중국 사신을 접대하면서 예의(禮儀)를 합당하게 한 것이며, 세자가 입학했을 때 질문에 잘 대답한 것이며, 죄인을 불쌍히 여겨 운 것이며, 서쪽으로 오랑캐를 정벌하자는 주장을 막은 것이며, 뇌물을 일절 받지 않은 것이며, 전답을 소유하지 않은 것 등에 이르러서는, 그 충성은 유향(劉向)과 같고, 그 절개는 공융(孔融)과 같고, 그 덕은 병길(丙吉)과 같고, 그 위의(威儀)는 공서적(公西赤)과 같고, 그 효성은 영고숙(潁考叔)과 같고, 그 인애(仁愛)는 자산(子産)과 같고, 그 충간(忠諫)은 위상(魏相)과 같고, 그 청렴은 양진(楊震)과 같고, 그 용기는 제갈량(諸葛亮)과 같으니, 문장은 그 여사(餘事)일 뿐이다. 백성에게 은택을 끼쳐도 백성이 알지 못하고 공(功)이 사직(社稷)에 있어도 나라에서 녹권(錄券)이 없었으니, 이른바 “세상 사람들은 모두 공이 있는 것이 공인 줄만 알고 공이 없는 것이 공이 있는 것인 줄은 알지 못한다.”는 것이 어찌 빈말이겠는가.
공의 아들 원록(元祿)이 공의 사적을 기록해 가지고 와서 행장을 기술해 주길 청하거늘, 내가 공에게 가장 깊은 지우(知遇)을 입은 터라 감히 글을 잘 못한다는 이유로 사양하지 못하고 이상과 같이 보고 들은 바를 두서없이 기록해 둔다.
삼가 행장을 쓰다.


 

[주D-001]기씨(奇氏) : 고려 공민왕 때 반란을 꾀하다 주살(誅殺)된 기철(奇轍)을 가리킨다.
[주D-002]여경(餘慶) : 《주역(周易)》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선(善)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남은 경사[餘慶]가 있다.”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3]장경왕후(章敬王后) : 조선 11대 임금인 중종(中宗)의 첫째 계비(繼妃)로 인종(仁宗)을 낳은 지 엿새 만에 세상을 떠났다.
[주D-004]신수근(愼守勤) : 폐빈(廢嬪) 신씨(愼氏)의 아버지로, 자는 근중(勤仲), 호는 소한당(所閒堂)이고 본관은 거창(居昌)이며, 연산군의 처남이고 중종의 장인이다. 벼슬이 좌의정에 올랐으나 중종반정에 동참하지 않아 살해되었다. 시호는 신도(信度)이다.
[주D-005]증고사(證考使) : 왕자나 왕손(王孫)의 태(胎)를 묻을 장소를 찾기 위해 파견하는 임시 관원이다.
[주D-006]형수(荊樹) : 자형화(紫荊花)라는 화초로 형제간의 우애를 상징한다. 남조(南朝) 양(梁)나라 경조(京兆) 사람인 전진(田眞) 삼형제가 각기 재산을 나누어 가지고 마지막으로 뜰에 심은 자형화를 갈라서 나누어 가지려 하니 자형화가 곧 시들었다. 삼형제가 이에 뉘우치고 다시 재산을 합하니, 자형화가 다시 무성하게 자랐다 한다. 《續齊諧記 紫荊樹》
[주D-007]오성(五星)의 설(說) : 금(金), 목(木), 수(水), 화(火), 토(土)의 다섯 별이 동시에 한 방향에 나타나는 것을 매우 상서로운 조짐으로 여겼는데, 여기서는 용재(容齋)의 남자 형제가 다섯이었기에 비유한 듯하다.
[주D-008]복성군(福城君) : 중종의 서자(庶子)로 경빈 박씨(敬嬪朴氏) 소생이며 이름은 미(嵋)이다. 세자를 저주했다는 혐의로 어머니 박씨와 함께 사사(賜死)되었다.
[주D-009]형옥(荊玉) : 춘추 시대 초(楚)나라 변화(卞和)란 사람이 형산(荊山)에서 얻었다는 직경이 한 자나 되는 좋은 옥으로, 전국(傳國)의 옥새로 만들어져 전해졌다. 화씨벽(和氏璧)이라고도 일컫는다.
[주D-010]연헌(蓮軒) : 조선조 문신인 이의무(李宜茂)이다. 그의 자는 형지(馨之)이고 본관은 덕수(德水)이며 시문(詩文)에 능하였다.
[주D-011]사가(四佳) 서공(徐公) : 조선조 문신 서거정(徐居正)이다. 그의 자는 강중(剛中), 호는 사가정(四佳亭), 본관은 달설(達城)이며, 시문에 능하여 오랫동안 문병(文柄)을 잡았다.
[주D-012]왕증(王曾)의 은출원귀(恩出怨歸) : 송(宋)나라 때 재상이었던 왕증이 사류를 등용하거나 퇴출할 때 남들이 모르게 하자 범중엄(范仲淹)이 그에게 “사류를 공공연히 등용하는 것이 재상의 임무인데 공의 성덕(盛德)은 유독 이 점이 부족하다.” 하였다. 이에 왕증이 “대저 집정자는 은혜는 자기에게 돌리려 하기 마련이니, 원망은 누구에게 돌아가게 하겠는가.” 하여, 원망은 자기가 감당하고 은혜는 임금에게 돌아가게 하겠다는 뜻을 말하였다. 《宋史 卷310 王曾列傳》
[주D-013]방예(放麑) : 맹손(孟孫)이 사냥을 하다 새끼 사슴을 잡아 진파서(秦巴西)를 시켜 가지고 돌아가게 하였는데, 그 어미 사슴이 따라오면서 울기에 진파서가 차마 볼 수가 없어 새끼 사슴을 돌려주었다. 《韓非子 說林上》 인덕(仁德)을 지닌 사람에 대한 전고(典故)로 쓰인다.
[주D-014]철갱(啜羹) : 악양(樂羊)이 위(魏)나라 장수가 되어 중산(中山)을 공격하였는데, 그 아들이 당시 중산에 있었기에 중산의 임금이 그 아들을 삶아서 국을 끓여 악양에게 주니 악양이 그 국을 먹었던 고사를 뜻한다. 《戰國策 中山策》 잔인한 사람에 대한 전고로 쓰인다.
[주D-015]남지정(南止亭) : 조선조 문신 남곤(南袞)의 호가 지정(止亭)이다. 그의 자는 사화(士華)이고 지정 외에도 지족당(知足堂)이란 호가 있으며,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문명(文名)을 떨쳤고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으나,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 사류(新進士類)를 숙청한 죄로 명종(明宗) 때 관작과 시호를 삭탈당하였다.
[주D-016]주문연(主文硯) : 조선조 홍문관 대제학이 가지던 벼루인데, 대제학이 바뀔 때 이 벼루를 전수하는 의식이 있었다.
[주D-017]사문(斯文)의 심법(心法) : 불교의 선종(禪宗)에서 이심전심(以心傳心), 즉 진리를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했던 것에서 온 말로, 여기서는 남곤이 당대 문장의 일인자임을 허여한다는 뜻으로 용재(容齋)에게 벼루를 주면서, 이 벼루를 문장의 일인자끼리 전수하는 신표(信標)로 삼는다는 뜻이다.
[주D-018]그 말은 …… 듯하였으며 : 《예기(禮記)》 단궁 하(檀弓下)에, “문자(文子)는 그 마음이 겸손하여 마치 몸이 옷을 이겨내지 못할 듯하고, 그 말이 어눌하여 그 입에서 나오지 못할 듯하였다.” 한 대목을 차용한 것으로 몸가짐과 말투가 매우 겸손하고 진실함을 나타내고 있다.
[주D-019]유향(劉向) : 한(漢)나라 초원왕(楚元王)의 현손(玄孫)으로 초명은 갱생(更生), 자는 자정(子政)이다. 문장에 능통하고 경술(經術)에 조예가 깊었으며, 누차 상소하여 시정(時政)을 논함에 그 말이 매우 통절(痛切)하였고, 외척(外戚) 왕씨(王氏)를 신랄하게 공척(攻斥)하였다.
[주D-020]공융(孔融) :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한 사람으로, 자는 문거(文擧)이다. 문장에 특히 뛰어났으며 성품이 강직하여 당시 권병을 잡았던 환관들 및 동탁(董卓), 조조(曹操) 등의 비위를 거슬렸으나 전혀 거리낌이 없었고, 결국 조조에게 대역부도(大逆不道)라는 터무니없는 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되었다.
[주D-021]병길(丙吉) : 한 무제(漢武帝) 때 노국(魯國) 사람으로 벼슬이 재상에 이르렀고, 특히 인품이 관대하였다.
[주D-022]공서적(公西赤) : 공자의 제자로 자는 자화(子華)이며, 제(齊)나라로 사신을 간 사실이 《논어》에 보인다.
[주D-023]영고숙(潁考叔) : 춘추(春秋) 시대 정(鄭)나라 사람으로 어머니와 결별하고 살던 장공(莊公)을 효성으로 감화시켜 지하의 수도(隧道)를 통해서 만나게 하여, 순효(純孝)란 평판을 받았다. 《春秋左傳 隱公元年》
[주D-024]자산(子産) : 전국(戰國) 시대 정(鄭)나라의 재상으로 인정을 베풀었으며, 자기가 타는 수레로 사람을 태워 물을 건너게 해 준 사실이 《맹자》에 보인다.
[주D-025]위상(魏相) : 전한(前漢) 때 사람으로 자는 약옹(弱翁)이다.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있으면서 권력에 굽히지 않고 직간을 많이 하였으며, 벼슬이 재상에 이르고 고평후(高平侯)에 봉해졌다.
[주D-026]양진(楊震) : 후한(後漢) 때 사람으로 자는 백기(伯起)이며 성품이 매우 청렴하였다. 그가 천거하여 벼슬하게 된 왕밀(王密)이란 사람이 찾아와 금 열 근을 주면서 “밤이라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으니 받으라.”고 하자, 그는 “하늘이 알고 귀신이 알고 내가 알고 그대가 아는데 어찌하여 아는 이가 없다고 하는가.” 하며 물리쳤다고 한다. 《小學 善行》

용재집 제1권
 오언 절구(五言絶句)
충재(盅齋) 최숙생(崔淑生) 가 지정(止亭)의 소나무 분재(盆栽)를 얻고 이십 수(首)의 절구(絶句)로 보답했다는 말을 듣고


노년의 절개가 본래 귀한 법 / 老節從來貴
천금인들 널 어이할 수 있으랴 / 千金奈若何
그대의 시는 한 자로 족하니 / 君詩一字足
이십 편이나 될 필요 없어라 / 不用卄篇多

어느 곳인들 복사꽃 오얏꽃이 / 何處無桃李
춘풍에 제 자태 뽐내지 않으랴만 / 春風各自誇
작은 솔의 절개를 오게 하는 건 / 能來小松節
오직 최씨네 한 집 있을 뿐이로세 / 尙有一崔家

장평의 만 줄기 푸른 솔숲 속 / 長坪萬蒼碧
어린 솔을 간난에서 구출하였지 / 保子出艱危
이날 맑은 창에서 마주하노니 / 此日晴窓對
거 땅에 있을 때를 잊지 말게나 / 無忘在莒時

사방 한 치 땅에 뿌리내려도 / 託土才方寸
간난을 또한 사양하지 않나니 / 艱難亦不辭
어찌 이천 척 높을 필요 있으리 / 何須二千尺
그래도 세한 자태 감상할 수 있는데 / 且賞歲寒姿

구름을 찌를 뜻 어이 없으랴만 / 凌雲豈無意
뿌리내리기 어려움을 어이하랴 / 奈此託根難
풍상 이기는 절조 지킬 뿐이니 / 但保風霜操
이제부턴 또 세한이 다가왔구나 / 從今又歲寒

만 마리 소가 끌 거대한 솔도 / 丘山萬牛力
오히려 도끼질에 무참히 넘어지니 / 尙被斧斤殘
화분 속이 비좁다 말하지 말라 / 莫道盆中窄
그래도 늠름한 자태를 볼 수 있다오 / 猶將凜凜看

남방 수령 가서도 날 잊지 않았구려 / 南宰非相棄
보내온 시 맑은 풍격 절로 높아라 / 淸詩價自高
때로 시편을 펼쳐 읊고 나서는 / 時時披咏罷
오솔길 따라 동쪽 비탈을 거니노라 / 尋徑步東臯

동쪽 비탈엔 나무가 얼마나 많은지 / 東臯幾多樹
울창히 우거져 서로 높다 다투누나 / 鬱鬱競相高
고개 돌려 다시금 생각할 테지 / 回首還應憶
나의 솔은 이들과 격이 다르다고 / 吾松異此曹

솔을 나는 몹시도 사랑하나니 / 松吾愛之甚
그 무엇도 이에 비길 바 없어라 / 無物可酬旃
시가 짝이 되는 줄 일찍 알았거니 / 早識詩能當
이십 편쯤 짓는 게 무에 아까우랴 / 寧慳二十篇

그대는 솔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 君非松也愛
솔을 감상하는 시 짓기 즐기는구려 / 愛作賞松篇
나 역시 그대 닮고자 하는 자이니 / 我亦希君者
시편을 일일이 보내올 필요 없다오 / 無煩一一傳

충재 그대는 세한의 사람인데 / 盅齋歲寒人
만년에야 세한의 벗 얻었구려 / 晩得歲寒友
세한의 마음을 시험하고 싶으면 / 欲試歲寒心
모름지기 세한 뒤에 보아야 하리 / 須看歲寒後

아침에 심으면 저녁에 자라기론 / 朝種暮則長
어찌 느릅과 버들 따위 없으리요 / 豈無楡與柳
이 굳고도 곧은 자태 지키나니 / 保玆堅貞姿
천년토록 장구하길 기약하누나 / 期以千歲久

잠시 동안 시인과 이별했더니 / 暫與詩人別
또 시인이 보낸 부탁받았구나 / 又得詩人托
어이하여 이리도 여위었느뇨 / 如何太瘦生
모두가 괴로이 시구 찾은 탓이지 / 摠爲苦語迫

풍대는 진실로 그대가 좋아하지만 / 楓臺固君樂
서리 내린 뒤엔 역시 쓸쓸해지나니 / 霜後亦蕭索
어찌 몇 촌 높이 푸른 솔이 / 何似數寸碧
한서에 그 모습 변치 않음만 하랴 / 寒暑無榮落

그대 집 한 그루 매화는 / 君家一株梅
요즘도 탈 없이 잘 있는가 / 邇來無恙未
크고 작음이야 따질 것 없고 / 大小固莫論
솔이 그대와 기미가 꼭 같구나 / 與爾同氣味

낙양성 안 천만 호 집들은 / 洛陽千萬家
집집마다 모란을 좋아라 심었지 / 家家尙姚魏
그대는 바야흐로 두 벗을 대하니 / 君方對兩友
부귀 따윈 오연히 굽어보겠지 / 傲視富與貴


그대 집은 남산 기슭에 있으니 / 君第南嶽麓
만 그루 솔이 항상 눈에 보이지 / 萬松常在目
게다가 시를 가지고 솔과 바꾸니 / 又將詩換松
이 물건 역시 녹록한 게 아니로세 / 此物非碌碌

남방의 그대 시는 나라의 종장 / 南詩國宗匠
단번에 곧잘 천 폭 종이 휘갈겨 / 一寫動千幅
게다가 또 솔로써 시를 청하니 / 又用松請詩
그대 시는 진실로 탄복하겠구려 / 君詩固所服

내가 솔을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니나 / 吾非不愛松
청산이 앞을 막아 보러 가지 못하고 / 而與靑山阻
내가 시를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니나 / 吾非不喜詩
재주가 다 바닥나 좋은 시어 없다오 / 才盡無好語

이 솔을 외려 보낼 수 있다지만 / 此松尙可致
이 말을 어찌 허락할 수 있으리요 / 此語安能許
양쪽 모두 그만 그대로 두고 / 不如兩置之
술 싣고 그대에게 가느니만 못하리 / 載酒向君去


 

[주C-001]충재(盅齋) : 조선 전기의 문신인 최숙생(崔淑生)의 호이다. 그의 자는 자진(子眞),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주D-001]거 땅에 …… 말게나 : 춘추(春秋) 시대(春秋) 제(齊)나라에 내란(內亂)이 일어나서 공자(公子) 소백(小白)이 거(莒) 땅으로 망명하였다가 그 후 본국으로 돌아와 임금의 자리에 오르니, 이 사람이 환공(桓公)이다. 한(漢)나라 유향(劉向)의 《신서(新書)》에, “환공이 관중(管仲), 포숙(鮑叔), 영척(甯戚)과 함께 술을 마셨는데, 포숙이 술잔을 들고 일어나서 ‘바라건대 우리 주군(主君)께선 망명하여 거 땅에 계실 때의 일을 잊지 마소서.’ 하였다.” 하였다. 이 고사는 왕년의 고난을 비유하는 데 쓰이는데, 여기서는 분재로 심어진 소나무가 과거 솔숲 속에 끼어서 고생하며 지낼 때를 비유하고 있다.
[주D-002]이천 척 : 두보(杜甫)의 〈고백행(古栢行)〉에 제갈량(諸葛亮)의 사당 앞에 있는 거대한 잣나무를 두고 “짙푸른 빛 하늘을 찔러 높이 이천 척일세.[黛色參天二千尺]”라고 한 구절을 차용하였다.
[주D-003]세한(歲寒) 자태 : 《논어》 자한(子罕)에, 공자가 “날씨가 추워진[歲寒]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 한 데서 온 말로, 곤궁한 처지나 난세(亂世)에 지조를 잃지 않는 군자(君子)의 자태를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여기서는 역시 소나무 분재의 모습을 의미하고 있다.
[주D-004]만 마리 …… 솔도 : 역시 두보의 〈고백행〉에서 “큰 집이 무너지려면 들보가 필요한 법, 산처럼 무거워 만 마리 소가 고개 돌리누나.[大廈如傾要梁棟 萬牛回首丘山重]”라고 한 구절을 차용하였다.
[주D-005]풍대(楓臺) : 최숙생의 집에 있는 대(臺)로서 이곳에 단풍나무를 심어 놓았기 때문에 이렇게 명명한 듯하다.
[주D-006]그대는 …… 굽어보겠지 : 모란은 부귀를 상징하는 꽃인데, 충재는 군자의 절조를 상징하는 매화와 솔을 대하고 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용재집 제5권
 남천록(南遷錄) 을축년 봄 정월, 함안(咸安)으로 배소(配所)를 옮긴 뒤에 지은 시들이다.
의령(宜寧) 집의 벽에 적다. 5수(五首)


농부의 즐거움은 어떠한고 / 爲問田翁樂
평생에 나는 그만 못하여라 / 平生我不如
애당초 세 이랑 논밭도 없어 / 初無三畝宅
잘못 다섯 수레 책을 읽었네 / 謬讀五車書
남풍이 불면 물결치는 보리밭 / 漲麥南風外
가랑비 온 뒤에 익어가는 매실 / 黃梅小雨餘
북창 아래에 한가로이 누우니 / 北窓高枕臥
이 몸이 빈 줄 비로소 깨닫노라 / 始悟此身虛

자신 뉘우쳐도 이미 늦었는데 / 悔身嗟已晩
머리털은 흰 올이 어지럽구나 / 雙鬢白紛如
땅은 낮아 더운 독기가 많고 / 地墊饒炎瘴
하늘은 길어 편지가 끊기었구나 / 天長闕素書
덧없는 인생 끝내 여기에 이르니 / 浮生終到此
앞으로 살 날이 얼마 안 남았겠군 / 來日恐無餘
홀로 지새는 밤 어이 잠 이룰쏘냐 / 獨夜何曾睡
창을 여니 달빛은 공허히 비추도다 / 開窓月色虛

옛날에 이미 도를 들었던 터 / 夙昔參聞道
간난 속에도 마음은 편안하였지 / 艱難亦晏如
굳센 창자 여전히 술을 받건만 / 石腸猶着酒
흐릿한 눈은 책 보기 겁이 나누나 / 花眼怯看書
늙어 죽어도 진정 유감이 없나니 / 老死眞無憾
관대한 성은 이미 넉넉히 입었어라 / 寬恩已有餘
덧없이 부침한 백 년 인생의 일들 / 升沈百年事
하나하나 공허한 데로 부치노라 / 一一付空虛

건곤이 큰 줄을 못 믿겠노니 / 未信乾坤大
나는 지금 갈 길이 아득하여라 / 吾今茫所如
비록 녹문의 은거엔 부끄럽지만 / 雖慙鹿門隱
자공의 편지야 어찌 보내리요 / 肯遺子公書
술은 가벼이 끊기가 어려운데 / 唯酒難輕絶
쓸데없는 허명만 내게 남았어라 / 之名乃賸餘
평생 문장을 무던히 좋아한 게 / 平生文字癖
부허한 짓이 되지는 않으리라 / 不是爲浮虛

백 년에 아직 반도 못 살았는데 / 百年今未半
나만큼 우환을 겪은 이도 없으리 / 憂患莫吾如
몸은 이미 미천한 관노가 됐어도 / 身已隨厮養
마음은 아직도 관직 임명 두려워라 / 心猶畏簡書
인생살이 속절없이 스스로 괴롭나니 / 有生空自苦
만족할 줄 아는데 무엇을 더 구하랴 / 知足敢求餘
벽에 기댄 채 애오라지 꿈을 꾸니 / 倚壁聊成夢
태허공을 벗어나 한가로이 노니누나 / 浮遊出太虛


 

[주D-001]녹문(鹿門)의 은거 : 후한(後漢) 말엽의 고사(高士) 방덕공(龐德公)은 아내와 함께 농사지으며 서로 손님을 대하듯 공경하였다. 그는 벼슬길에 나오라는 형주 자사(荊州刺史) 유표(劉表)의 청을 거절하고 훗날 처자식을 거느리고 녹문산(鹿門山)에 들어가 약초를 캐며 일생을 마쳤다.
[주D-002]자공(子公)의 편지 : 자공은 한(漢)나라 진탕(陳湯)의 자이다. 권병(權柄)을 잡고 있던 거기장군(車騎將軍) 왕음(王音)의 신임을 받고 있던 그에게, 당시 군수(郡守)로 있던 진함(陳咸)이 여러 차례 뇌물과 함께 편지를 보내 내직(內職)에 종사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기를 청했다 한다. 《漢書 卷70 陳湯傳》

 

용재집 제7권
 영남록(嶺南錄) 경진년, 증고사(證考使)가 되었을 때 지은 것이다.
촉석루(矗石樓)에서 차운하다.


여생에 다행히 명승지 저버리지 않아 / 餘生幸不負名區
영남 제일 누각이라 여기 올라왔도다 / 來倚維南第一樓
타지에서 좋은 이들 반가이 만났으니 / 華蓋異方眞邂逅
밤새 술자리 벌여 풍류를 한껏 누리노라 / 綺筵終夕極風流
봉우리들은 곧바로 긴 강을 에워쌌는데 / 峯巒直爲長江擁
수목 아스라이 이어진 곳 저녁놀 떴구나 / 樹木遙連暮靄浮
평소 익히 들어온 곳 지금 맘껏 보노니 / 平日飽聞今快覩
사람들 만나면 주절주절 청주를 얘기하리 / 逢人吃吃說菁州


[주D-001]사람들 …… 얘기하리 : 청주(菁州)는 경상남도 진주(晉州)의 옛 이름이다. 이제 촉석루의 경치를 구경하고 장차 사람들을 만나면 진주가 좋다고 자랑할 것이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