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 휘 방언/직재 선생 문집에 기록된 양정재공

미백 선조님의 벗인 직제집 (이여구)에 기록 된 양정재공 휘 미백

아베베1 2011. 6. 23. 00:17

 

 여구 이기홍에게서 받은 편지내용  

直齋集卷之十

 [墓碣銘]
墓碣銘 安東權尙夏撰 a_149_497a


往在光海癸丑。賊臣弘,瞻等。倡讎母之論。彝倫斁塞。宗室龜川君睟抗義叫閽。竄逐南荒。洎今上己巳。凶人大運,黯等。構煽大禍。坤殿遜位。時則龜川之曾孫箕疇與吳公斗寅等上章力爭。逮尤庵宋先149_497b生以三朝賓師。不免於及。則又率同門士四十餘人。伏闕丐命。遠謫北塞。人皆嘖嘖嘆曰。是何純綱至正之氣。萃於公祖孫也。箕疇是公初名。後改箕洪。字汝九。我中宗大王別子德陽君諱岐之五代孫也。德陽之孫。卽龜川。諡忠肅。忠肅生蓬山君諱炯信。逢山君生副司果諱塾。寔公之考也。妣礪山宋氏。其考郡守鉉也。公在娠。宋夫人有異夢。以崇禎辛巳丑月四日生。穎悟超群兒。稍長。就師數年間。讀盡四書二經。弱冠。有意爲己之學。從李恥庵之濂。講小學心經近思等書。李公亟稱之。乙巳。始拜同春先生於149_497c懷德。聞爲學之要。又請業於尤庵先生。質近思通書太極圖疑義。仍問丁丑後應擧當否。先生曰。朱夫子當南渡後。亦嘗應擧。蓋志在復讎也。今若以夫子之心爲心。應擧何妨。公服膺不忘。某年。一入試圍中發解。及赴覆試。事有不如意者。折券而出。遂不復就。同春先生聞之謂能知取舍輕重之分。寄書稱道。又答公論性諸說曰。妙年見識已如此。他曰成就。何可量也。庚戌。宋夫人疾谻。公八月不解帶。及喪。致毀幾不全。甲寅。與同門諸人訟尤庵冤。及先生竄北。亦如之。仍入嘉平峽中。杜門謝世。學者頗從之。丁巳。告廟149_497d啓發。公袖疏詣闕。聞上意洞燭。群凶斂縮。遂不上。庚申更化。公卿多薦公學行。聲聞益播。冬。丁外艱。翌年。又居蓬山公憂。哀慕如一。而禮制無憾。服除。大臣又薦經明行修。丁卯。授孝陵參奉。公念宗戚之臣。義與巖穴有別。遂膺命無何。羅良佐上疏。侮辱尤菴。公欲辨之。自齋所卽入京。有掣肘。勢不果。仍呈病遞職。蓋自尹拯背帥之後。人心大異於前。公不勝慨惋。屢以書開曉於士友間。至於玄石朴公。則又責其待羅之不嚴焉。戊辰春。朝廷選經學士。使入筵席。公與焉。己巳。除司圃別檢。不就。時世道又大變。尤菴149_498a栫棘於濟州。已而又請拿鞫蒙允。公涕泣悲憤。不忍含默。時火色彌天。一言出口。家族立碎。親黨交謁更諫。而公不聽曰。今師門禍慘。吾豈忍愛死。疏上。上下備忘極嚴。遂配會寧。人莫不代怖。而公怡然就道。到鏡城。聞尤庵受後命。失聲大慟。如不欲生。到配。端居靜坐。惟以書籍日孜孜焉。士有來學者。隨才而應之。邊俗昧於禮。聞公言而丕變者多矣。辛未疏決。上特擧公名曰。爲師訟冤。其令減等。遂降爲徒。癸酉放還。甲戌。上大覺悟。朝著始淸明。銓長請收用爲儒賢得罪者。上又曰。其謂李箕洪等耶。亟令西149_498b敍。時玄石在朝。欲汲引遺逸。稱公爲宿望。公又被宰臣薦。拜侍講院諮議。屢疏辭。上批隆重。乙亥。陞主宗簿簿。謝恩卽遞。丙子。朝家選世子書筵官。公又與焉。上疏辭。優批不許。且以別諭促召。會以臺言罷之。蓋臺官之意。別有所指。非在於公。而公則以是固辭焉。未幾。除司憲府持平。屢疏辭遞。尋爲通川縣監。公念古人辭內居外之義。遂拜命。時歲大飢。道殣相望。公竭誠煦撫。所全活甚多。又留心敎化。擇子弟之秀者。聚而敎之。如明道晉城之爲。一境風動。丁丑。以方伯親嫌遞歸。士民樹石追思。戊寅。除掌令辭149_498c遞。庚辰。又以掌令遞拜淸風府使。其政敎如通川時。壬午。以掌令承召。因辭疏極陳恤民之要。而以人主之正心術立紀綱爲本。又請蠲民間逋糶。又請大同及軍布。依詳定減升數。又請復良民從母役之法。上嘉納之。公又辭不赴。遂定居于延豐之文山。以爲終老計。又築一小亭于縣東仁智洞。扁以壽樂。徜徉其間。蓋取朋遊之樂。與夫水石之勝也。又以暇日。入華陽洞。拜老先生遺像。又行享事于皇祠。以寓感痛之懷。癸未。陞執義。時有李廈成之疏。誣毀尤庵甚慘。公疏辨被誣本末。上優批。甲申。再爲執義。疏略149_498d曰。臣竊伏聞殿下追思神宗皇帝萬世不忘之盛德。旣下立廟之議。又行壇祀之禮。凡在舍生。孰不感泣。臣妄揣聖上之志。不但在於此而已。將見繼此而以圖尊周之實者。靡不用極。仍節尤菴丁卯疏以進。留疏不下。又疏陳去己私恢公道之意。上亦嘉納。自此至丁亥。凡六爲執義。一爲掌樂正。皆不就。然大諫洪萬朝之疏論及尤菴。語不遜。修撰蔡明胤亦上疏侵辱栗牛兩賢。公因辭疏辨之。上皆優批。戊子冬。感疾頗彌留。臘月初三日。是喪餘。病不能與祭。猶強盥洗。向廟大慟。由是病遂革。以戌時終。壽六149_499a十八。越明年二月。葬于楊州之臺山。其原向未。蓬山墓在其上。淑人潘南朴氏。通德郞世塤之女。治川先生紹之五代孫也。生先公一年。歿先公七年。與公同塋。端重寡言。事舅姑能孝。奉君子無違禮。隨公之兩邑。一毫未嘗累公。婦德咸宜。有四男。蓍顯,蓍先,蓍定生員,蓍聖。二女適進士金有慶,鄭泰河。蓍顯無子。以蓍先次子德濟爲后。二女元一揆,尹。蓍先男達濟。女崔命傑。餘幼。蓍定男弘濟。餘幼。蓍聖男女皆幼。金壻男漢明。女李希益,兪直基。鄭壻男女皆幼。內外曾玄幷幾人。公天資樂易。而處事剛方。早有向裏之工。149_499b又得大賢爲依歸。故立心制行。粹然一出於正。性至孝。常懷風樹之痛。每遇官供。甘旨有餘則必涕下。居家。有隱德至行。實多人所不及處。有庶母難事。能以誠感化。三弟早亡。撫恤孤寡必誠。推以至於黨族。曲有恩意。咸得其懽心。待人。不設畦畛。雖巖師畏友。無有所隱。尙儉約厭芬華。於一切世味泊如也。每淨掃一室。淸坐終日。氣像閑雅。翛然有出塵之想也。其爲學。窮硏實踐。內外交致。於洛閩諸書。用力益專。尤庵先生嘗與公論學而曰。不意臨死之年。乃得吾汝九。與論此事。非少幸也。及在海上。貽書告訣於門人。仍149_499c以箚疑之修。求助於公。其相與之深。可見也。公嘗問終身可行之道。先生曰。天地之所以生萬物。聖人之所以應萬事。直而已矣。此朱夫子易簀時誨門人者也。蓋勉之哉。公尋常體行。在北時。遂名其所居室曰直齋。學者仍以是爲號。有文稿若干。卷自省編,爲學方續等書藏于家。噫。老先生之所以敎人者。如時雨之化。一世之人。孰不霑濡。而至今門下諸人。靡有少承厥志者。獨公能不負直字之訓。其所樹立。若是其炳然。以不墜名祖之家傳而益有光焉。嗚呼賢矣哉。公不鄙余鹵莽。猥以道義相許與。近又密邇從遊。數149_499d相講劘。知公之久而服公之深者。宜莫如余也。今諸孤來乞墓文。顧何忍以不文辭。遂爲之銘。銘曰。
大哉尤翁晦父適。相傳有符一字直。公聞厥旨煞用力。用之伊何明誠學。施於民社人誦蘖。肥遯邱樊介如石。惟彼卓節歲寒柏。令聞長世繼忠肅。


 

直齋集跋

 [跋]
直齋集跋[宋近洙] a_149_501a


 

直齋先生遺藁散在巾衍。五代孫周冕氏始裒粹繕寫。幷附錄爲幾呇。將次第印行而難故未就。胤君敏鉉承其遺志。略有士友中所助。方且悉心經紀。不幸今年。又不起疾。天何嗇於先生後事。一至此也。世代寢邈。門戶替零。恐成千古之恨。興言及此。未嘗不慨然悼惜。一日其長姪承根齎原稿以示余曰。此吾父祖之志。而今日之責。惟不肖在。子盍校讎定本。俾卒其業。以圖壽其傳也。余不覺蹶然而起曰。有是乎子之善繼也。吾雖謏寡。敢不爲先生役。以成子之美也。149_501b 遂就帝虎。略加訂正。又或要删。以俟異時續集之成。嗚呼。今距先生之世殆二百年所。使窮鄕末學。始得見先生書而讀之。不待子雲堯夫而皆知先生之爲先生事若有待。豈非斯文之幸歟。古人云至誠所到。金石可透。今於先生之孫。尤驗其非誣。是又可尙也爾。時崇禎五丁亥南至日。後學恩津宋近洙跋。


 

 

 

直齋集卷之六

 
答崔美伯 邦彥○甲寅 a_149_413d


 

歲改踰念。尙阻拜晤。瞻溯耿結。方切于中。卽者料外。承拜惠帖。得審新年侍彩增慶。仰賀千萬。弟齒進業退。反躬憮然。無足爲故人道也。師門信息。歲後得聞。則氣候近姑康吉。甚慰瞻慕之私也。閔事今十一日。更査入啓。尙未判下。朴丈之久處非地。尤可慮也。示諭五行之生。各一其性云云。此性字似當指氣而言。大抵五行之爲性。各是一氣所稟而性則一也。原註所謂性之無所不在者。亦以是耶。幸乞商量更敎149_414a如何。憒甚草此。

 

直齋集卷之六
 
與美伯 丁巳 a_149_414a


別已久矣。懸想如渴。想一般我思也。霜氣始肅。兄履何如。弟索居窮山。幸免大(蟲+恙)。近看大學或問。到格物章。反復翫索。則師門所謂玲瓏穿穴。無往而不相優者。方覺有味也。吾輩名爲學問。而苦緣些故。聚散無定。講磨無幾。愚嘗以是慨歎。自咎自責曰。如是悠悠泛泛。翫歲而愒日。則與不學之人。相去不遠。豈不取笑於流俗耶。有友如吾兄。志學之篤。高出儕流。則平日所望於吾兄者。實不淺勘。而書尺往來。未見有一149_414b句論學之說。此甚可恨者。雖不能相聚相講。若不廢貽書責勵。則不猶愈於己者乎。以吾兄也。故敢玆覼縷。幸有可復者。仍風垂警幸甚。此意亦傳于洪虞卿,李士允諸賢爲佳。此外千萬。燈暗眼眩。不一一。


直齋集卷之六
 
答美伯 庚申 a_149_414b


瞻戀方深。玆拜覆帖。仰諦道況有相。慰豁倍品。弟家親腹脹之症。日益添重。藥餌無靈。他症隨之。晝夜焦煎。寧容殫喩。程書之役。固當趁速下手。而親癠如許。姑難抽身遠離。幸乞兄先始下功。略成頭緖如何。大槩楊編。以遺書外書。分爲二編。故老先生有此合編149_414c之敎。今將楊編而參証分門。則似頗省力矣。未知楊編來在案下否。親癠如獲回陽。則敢不就造分勞耶。函丈再昨蒙敍。卽付領中樞。昨遣史官傳諭。以一未相見與之偕來爲敎。玄石丈及明齋與李執義則使政院措辭別諭云耳。兄或於數日間入闉否。多少所懷。心擾不一。


直齋集卷之六
 
與美伯 甲子 a_149_414c


師門書中。略及尹事云。尹事莫非藥石。只自警策而已。朱子彈章醜穢狼藉。而猶且一一引伏以爲是皆考核而非誣。矧今無非實有者耶云云。此可149_414d見師門之意也。


直齋集卷之六
 
與美伯 己巳七月 a_149_414d


東門泣別。步步回首。令人至今不能忘也。天乎天乎。此何世也。發行之後。以未能的知師門受命之日。晨夕掩涕。道途怳惚。前月晦日。行到鏡城。本府通判鄭友仲淳苦挽留得一日。將以初二日發程。朝報自兵營來。始知先生受禍。在六月初八日辰時。與仲淳設位痛哭。南向再拜而止。到會寧豐川驛舍。設位成服。此間情事。不可以一毫形喩也。一聲長號。萬事已矣。先生送終凡具。諸友想應盡誠備禮。是則庶幾無憾。149_415a顧此罪累之蹤。落坐窮荒。不得躬視斂襲。此生此恨。曷可勝喩。迷督今念間當還送。其時可詳陳餘懷。姑閣之耳。行到明川。李泰卿所贈馬。一夜間猝然立斃。此亦豈章子厚所能爲耶。諸同門前未有書。當竢兒還時。各修爲計。此意傳致爲妙。金正言載而許。亦未各候。幸以此書轉示。


直齋集卷之六
 
與美伯 a_149_415a


羅將歸。草草寄音。未知趁獲登照否。別後已易朔。悠悠戀想。何日忘之。想兄亦同此懷也。伏問秋涼。侍下起居何似。區區遠溯。實난001我心。弟千里撼頓。百病交149_415b駸。委玆席床。晨夜呻囈。此生良用悶憐。函丈窆禮。占得何山。過行何間耶。自聞受命之報。忽忽無人世意。斯文器矣。孰無安仰之痛。而如弟倀倀者。尤無所依歸。中夜起坐。只有流涕而已。窮荒絶塞。魑魅爲隣。實無遣懷之道。雖與書冊相近。期不負師門惓惓之意。而所恨如兄疆輔相遠。又不能質此疑義。奈何奈何。仄聞李子夏,朴生俱被刑訊。金令兄弟栫棘絶島。株延之禍。胡至此極。政朱子所謂鉤連隅落。如武侯營壘者也。仰屋之外。尙復何言。兒子還送。天涯去留懷難堪。抑都付兒口。惟冀神會。此送二簡。傳子樂而君149_415c晦。如見徐稚章。亦傳此戀想之懷爲妙。
師門服制。弟則欲服朞。蓋聞沙溪之喪。春翁議所服于尤翁。尤翁曰。先師平日視吾輩如仲文。仲文旣服朞。則吾輩之服。當如仲文云云。故準此爲之。在京時。雖有面商。而旣得明證。敢白。 仲文。滄洲金公字。


[난-001]勢 :

直齋集卷之六
 
答美伯 乙亥 a_149_415c


自兄還後。尙未面敍。人事良可歎也。二月初一日惠書。今朝始承拜。備審那時仕履平吉。區區聳喜。有不容言喩。弟分外職名。出於意慮之所不到。自視病劣。豈稱斯選。惶蹙不知所措。不得已猥上辭章。聖批149_415d隆重。益增震越而已。敎意謹悉。而兄非知我者耶。從前所定若門蔭可堪之職。而病又不至於廢錮。則猶或量力而供仕。至若目下非分之職。則決非如弟空疏滅裂者所敢承當也。矧今風病比前益重。左邊自頰至足。痿痛寒酸。將有口喎之慮。言語艱澁。頭疼眼眩。自分爲廢棄之人。則有何餘念。人或不諒而責以分義。是豈知我者耶。可嘅也已。玄翁之器。出於意外。吾道益孤。愴慟奈何。餘病草不究。泰卿楓岳之行。此友能辨此事。可賀可賀。第所謂一名宦果誰耶。似欠快適之示誠是矣。


直齋集卷之六
 
與美伯 戊寅 a_149_416a


至冱。兄攝況何如。重患餘。倍加調護。乃可完復。而井臼想必疏冷。吾道固應如此。而不得不爲老兄獻慮也。弟虛帶職名。已過兩朔。撕捱之際。益增惶懍。而加以時令剝床。方在避寓中。且素患風症。無日不疼痛。未得溫理舊業。撫念身世。爲之茫然。未知兄何以敎我。卒免爲小人歸耶。相望浩渺。盍簪無期。悵忉之私。誠難自裁也。聞鄭司諫仲淳疏論尼尹事云。而未見其疏。雖未知語意之何如。而必大生紛鬧。如或仍此而有辱及先師。則將若之何。此論終不可無者。而極149_416b用憂慮耳。


直齋集卷之六
 
與美伯 a_149_415a


羅將歸。草草寄音。未知趁獲登照否。別後已易朔。悠悠戀想。何日忘之。想兄亦同此懷也。伏問秋涼。侍下起居何似。區區遠溯。實난001我心。弟千里撼頓。百病交149_415b駸。委玆席床。晨夜呻囈。此生良用悶憐。函丈窆禮。占得何山。過行何間耶。自聞受命之報。忽忽無人世意。斯文器矣。孰無安仰之痛。而如弟倀倀者。尤無所依歸。中夜起坐。只有流涕而已。窮荒絶塞。魑魅爲隣。實無遣懷之道。雖與書冊相近。期不負師門惓惓之意。而所恨如兄疆輔相遠。又不能質此疑義。奈何奈何。仄聞李子夏,朴生俱被刑訊。金令兄弟栫棘絶島。株延之禍。胡至此極。政朱子所謂鉤連隅落。如武侯營壘者也。仰屋之外。尙復何言。兒子還送。天涯去留懷難堪。抑都付兒口。惟冀神會。此送二簡。傳子樂而君149_415c晦。如見徐稚章。亦傳此戀想之懷爲妙。
師門服制。弟則欲服朞。蓋聞沙溪之喪。春翁議所服于尤翁。尤翁曰。先師平日視吾輩如仲文。仲文旣服朞。則吾輩之服。當如仲文云云。故準此爲之。在京時。雖有面商。而旣得明證。敢白。 仲文。滄洲金公字。


[난-001]勢 :

直齋集卷之六
 
答美伯 乙亥 a_149_415c


自兄還後。尙未面敍。人事良可歎也。二月初一日惠書。今朝始承拜。備審那時仕履平吉。區區聳喜。有不容言喩。弟分外職名。出於意慮之所不到。自視病劣。豈稱斯選。惶蹙不知所措。不得已猥上辭章。聖批149_415d隆重。益增震越而已。敎意謹悉。而兄非知我者耶。從前所定若門蔭可堪之職。而病又不至於廢錮。則猶或量力而供仕。至若目下非分之職。則決非如弟空疏滅裂者所敢承當也。矧今風病比前益重。左邊自頰至足。痿痛寒酸。將有口喎之慮。言語艱澁。頭疼眼眩。自分爲廢棄之人。則有何餘念。人或不諒而責以分義。是豈知我者耶。可嘅也已。玄翁之器。出於意外。吾道益孤。愴慟奈何。餘病草不究。泰卿楓岳之行。此友能辨此事。可賀可賀。第所謂一名宦果誰耶。似欠快適之示誠是矣。



與美伯 戊寅 a_149_416a


至冱。兄攝況何如。重患餘。倍加調護。乃可完復。而井臼想必疏冷。吾道固應如此。而不得不爲老兄獻慮也。弟虛帶職名。已過兩朔。撕捱之際。益增惶懍。而加以時令剝床。方在避寓中。且素患風症。無日不疼痛。未得溫理舊業。撫念身世。爲之茫然。未知兄何以敎我。卒免爲小人歸耶。相望浩渺。盍簪無期。悵忉之私。誠難自裁也。聞鄭司諫仲淳疏論尼尹事云。而未見其疏。雖未知語意之何如。而必大生紛鬧。如或仍此而有辱及先師。則將若之何。此論終不可無者。而極149_416b用憂慮耳。


直齋集卷之六
 
與美伯 乙酉 a_149_416b


旱炎。兄政履何如。與兄相離。已積年矣。兄若一臨。則可偕往黃江。穩敍多少。而今則烘熱轉甚。勢難遠動。徐待涼生而惠然固好矣。而此亦未辦。則以華陽享祀時期會展討如何。近構小屋於縣之東南所謂仁智洞。蓋其泉石絶勝。而力綿恐不能竣。此爲可慮。兄前書有所云云。此則不敢當。然幸以朋友之義。有所助給。則亦無所嫌。而兄用先發之術。令人捧腹。萬萬非面難悉。不宣。
149_416c
書末所敎抵黃江書云云之說。果有是事。以此不無唇說。然在我無失。付之一笑。但兩先生子弟相背至此。此非細故。謂之何哉。只自慨恨而已。
149_416d直齋集卷之六


사계전서 제47권
 부록(附錄)
문인록(門人錄)


김집(金集)
자는 사강(士剛)이고 호는 신독재(愼獨齋)이며, 갑술년(1574, 선조7)생으로 선생의 둘째 아들이다. 선생이 항상 부자간의 지기(知己)로 칭하였다. 가정에서의 학문을 잘 이어받아 잇달아 유종(儒宗)이 되었다. 선생의 문인들이 대부분 사계 선생을 섬기던 마음으로 선생을 섬겼다. 유일(遺逸)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제수되었으며, 시호(諡號)는 문경공(文敬公)이다. 성균관(成均館)에 종사(從祀)되었고, 효종(孝宗)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저서로는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가 있다.

송시열(宋時烈)
자는 영보(英甫)이고 호는 우암(尤菴)이며, 정미년(1607, 선조40)생이다. 은진인(恩津人)으로 수옹(睡翁) 송갑조(宋甲祚)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종학(從學)하였는데, 선생이 기대하고 허여함이 몹시 중하였다. 마침내 사문(師門)에서 서적(書蹟)을 전수받음에 미쳐서는 세상의 유종이 되었다. 좌상(左相)에 제수되었으며, 문정공(文正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기사년(1689, 숙종15)에 화(禍)를 당하였다. 성균관에 종사되었고 효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송자대전(宋子大全)》이 있다.

송준길(宋浚吉)
자는 명보(明甫)이고 호는 동춘당(同春堂)이며, 병오년(1606, 선조39)생이다. 은진인(恩津人)으로 청좌와(淸坐窩) 송이창(宋爾昌)의 아들이며,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종학하였다. 이에 선생이 장려하면서 말하기를, ‘이 뒷날에 반드시 예가(禮家)의 종장(宗匠)이 될 것이다.’ 하였는데, 뒤에 세상의 유종이 되었다. 유일로 좌참찬(左參贊)에 제수되었다. 시호는 문정공(文正公)이며, 성균관에 종사되었다. 저서로는 《동춘당집(同春堂集)》이 있다.

이유태(李惟泰)
자는 태지(泰之)이고 호는 초려(草廬)이며, 정미년(1607, 선조40)생이다. 경주인(慶州人)으로 봉사(奉事) 이대방(李大邦)의 손자이다. 동춘당 송준길, 우암 송시열과 더불어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는데, 선생이 예의로 우대함이 몹시 두터웠다. 유일로 이조 참판을 지냈고, 시호는 문헌공(文憲公)이다. 저서로는 《초려집(草廬集)》이 있다.

강석기(姜碩期)
자는 복이(復而)이고 호는 월당(月塘)이며, 경진년(1580, 선조13)생이다. 금천인(衿川人)으로 참의(參議) 강찬(姜燦)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여 온 마음을 다해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닦으면서 부지런히 예서(禮書)를 강마하였다. 덕행과 학식이 뛰어나 당세의 명신(名臣)이 되었다. 진사과(進士科)와 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우의정(右議政)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저서로는 《월당집(月塘集)》이 있다. 봉산(鳳山)의 문정서원(文井書院)에 향사되었다.

장유(張維)
자는 지국(持國)이고 호는 계곡(谿谷)이며, 정해년(1587, 선조20)생이다. 덕수인(德水人)으로 판서 장운익(張雲翼)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는데, 선생이 일찍이 총명하면서도 학문에 힘쓴다고 칭찬하였다.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났으며, 진사과와 문과에 급제하였다. 우상(右相)을 지냈고, 문형(文衡)을 맡았다. 정사 공신(靖社功臣)에 녹공되어 신풍부원군(新豐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효종의 국구(國舅)가 되었다.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며, 저서로는 《계곡집(谿谷集)》이 있다. 나주(羅州)에 있는 계간사(溪澗祠)에 향사되었다.

정홍명(鄭弘溟)
자는 자용(子容)이고 호는 기암(畸菴)이며, 임오년(1582, 선조15)생이다. 영일인(迎日人)으로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는데, 선생은 서로 간에 키워 주는 벗으로 허여하였다. 월당 강석기, 계곡 장유와 더불어 선진(先進)의 고제(高弟)가 되었다. 진사과와 문과에 급제하였고, 대사헌(大司憲)을 지냈으며, 문형을 맡았다.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고, 저서로는 《기암집(畸菴集)》이 있다. 창평(昌平)의 지곡사(智谷祠)에 향사되었다.

최명룡(崔命龍)
자는 여윤(汝允)이고 호는 석계(石溪)이며, 정묘년(1567, 명종22)생이다. 완산인(完山人)으로 현감 최위(崔渭)의 아들이다. 선생이 익산 군수(益山郡守)로 있을 적에 나와서 배웠는데, 학식과 행의(行誼)가 한 시대에 출중하였다. 졸함에 미쳐서 선생은 제문(祭文)과 만시(挽詩)를 지었으며, 또 묘갈문(墓碣文)을 찬하여서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일찍 죽은 데 대해 몹시 애통해하는 뜻을 붙였다. 학행(學行)이 특출하다는 이유로 집의(執義)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석계집(石溪集)》이 있다. 전주의 인봉서원(麟峯書院)에 향사되었다.

김경여(金慶餘)
자는 유선(由善)이고 호는 송애(松崖)이며, 병신년(1596, 선조29)생이다. 경주인(慶州人)으로 어려서부터 선생께 수학하였다. 병자호란 때 척화(斥和)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여 부제학을 지냈고,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회덕(懷德)의 정절사(靖節祠)에 향사되었다.

이후원(李厚源)
자는 사심(士深)이고 호는 우재(迂齋)이며, 무술년(1598, 선조31)생이다. 완산인(完山人)으로 선생의 손녀서(孫女壻)이다. 선생에게 수학하자 선생이 몹시 장려하면서 허여하였다. 덕업과 문장으로 성세(聖世)의 명신(名臣)이 되었다. 문과에 급제하고 우상(右相)을 지냈으며, 정사훈(靖社勳)에 참여되어 완남부원군(完南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충정공(忠貞公)이다. 광주(廣州)의 수곡서원(秀谷書院)에 향사되었다.

조익(趙翼)
자는 비경(飛卿)이고 호는 포저(浦渚)이며, 기묘년(1579, 선조12)생이다. 풍양인(豐壤人)으로 학행과 문장이 뛰어나 세상 사람들이 추중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여 좌상을 지냈다. 시호는 문효공(文孝公)이고, 저서로는 《포저집(浦渚集)》이 있다. 개성(開城)의 숭양서원(崧陽書院)에 향사되었다.

이시직(李時稷)
자는 성유(聖兪)이고 호는 죽창(竹牕)이며, 임신년(1572, 선조5)생이다. 연안인(延安人)으로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는데, 선생이 마음속으로 허여하였다. 진사과와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장령(掌令)을 지냈다. 정축년(1637, 인조15)에 강도(江都)에서 순절(殉節)하였다. 시호는 충목공(忠穆公)이다. 강도의 충렬사(忠烈祠)에 향사되었다.

윤순거(尹舜擧)
자는 노직(魯直)이고 호는 동토(童土)이며, 병신년(1596, 선조29)생이다. 파평인(坡平人)으로 팔송(八松) 윤황(尹煌)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여 정이 마치 자제(子弟)와 같았다. 장령에 제수되었으며, 저서로는 《동토집(童土集)》이 있다. 연산(連山)의 구산서원(龜山書院)에 향사되었다.

이목(李楘)
자는 문백(文伯)이고 호는 송교(松郊)이며, 기묘년(1579, 선조12)생이다.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의 후예로,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여 문하에 출입한 지가 가장 오래되었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선생을 따라서 황주(黃州)와 봉산(鳳山) 사이에서 피란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참판을 지냈다. 선생의 유사(遺事)를 찬하였으며, -이것은 잃어버렸다.- 저서로는 《송교유고(松郊遺稿)》가 있다.

윤원거(尹元擧)
자는 백분(伯奮)이고 호는 용서(龍西)이며, 경자년(1600, 선조33)생이다. 파평인(坡平人)으로 후촌(後村) 윤전(尹烇)의 아들이다. 진선(進善)에 제수되었으며, 연산의 구산서원에 향사되었다.

최명길(崔鳴吉)
자는 자겸(子謙)이고 호는 지천(遲川)이며, 병술년(1586, 선조19)생이다. 전주인(全州人)으로 부사(府使) 최기남(崔起男)의 아들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영상(領相)을 지냈고 문형(文衡)을 맡았다. 정사훈(靖社勳)에 참여되어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저서로는 《지천집(遲川集)》이 있다.

이상형(李尙馨)
자는 덕선(德先)이고 호는 천묵재(天默齋)이며, 을유년(1585, 선조18)생이다. 효령대군 이보의 후손으로 일찍이 선생에게 예(禮)를 배웠는데, 선생이 통민(通敏)하다고 칭찬하였으며, 특히 역학(易學)에 정심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여 집의(執義)를 지냈으며,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경공(忠景公)이다. 남원(南原)의 요계서원(蓼溪書院)에 향사되었다.

송시영(宋時榮)
자는 무선(茂先)이고 호는 야은(野隱)이며, 무자년(1588, 선조21)생이다. 은진인(恩津人)으로 어려서부터 선생께 수학하였는데, 선생께서 조정에 천거하여 관직이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에 이르렀다. 정축년(1637, 인조15)에 강도(江都)에서 순절하였다. 시호는 충현공(忠顯公)이다. 강도의 충렬사(忠烈祠)에 향사되었다.

송국택(宋國澤) -거의록(擧義錄)에 나온다.-

이덕수(李德洙)
자는 사로(師魯)이고 호는 이유당(怡愉堂)이며, 정축년(1577, 선조10)생이다. 한산인(韓山人)으로 현감 이준(李浚)의 아들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참의를 지냈다. 청주(淸州)의 국계서원(菊溪書院)에 향사되었다.

이경직(李景稷)
자는 상고(尙古)이고 호는 석문(石門)이며, 정축년(1577, 선조10)생이다. 덕천군(德泉君)의 후손으로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여 판서를 지냈다. 시호는 효민공(孝敏公)이다.

임의백(任義伯)
자는 수방(秀方)이고 호는 금시당(今是堂)이며, 을사년(1605, 선조38)생이다. 풍천인(豐川人)으로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였고, 평안 감사(平安監司)를 지냈다.

황종해(黃宗海)
자는 대진(大進)이고 호는 후천(朽淺)이다. 평해인(平海人)으로 처음에 한강(寒岡) 정구(鄭逑)에게 수학하다가 만년에 선생을 섬기면서 예를 배웠다. 참봉(參奉)에 천거되었고, 저서로는 《후천집(朽淺集)》이 있다. 목천(木川)의 도동서원(道洞書院)에 향사되었다.

임숙영(任叔英)
자는 무숙(茂叔)이고 호는 소암(疎菴)이며, 병자년(1576, 선조9)생이다. 풍천인(豐川人)으로 죽애(竹崖) 임열(任說)의 증손이다.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여 도움을 받은 바가 많았다.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持平)을 지냈다. 광주(廣州)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향사되었다.

황일호(黃一皓)
자는 익취(翼就)이고 호는 지소(芝所)이며, 병자년(1576, 선조9)생이다. 창원인(昌原人)으로 추포(秋浦) 황신(黃愼)의 아들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의주 부윤(義州府尹)을 지냈다. 시호는 충렬공(忠烈公)이다. 부여(扶餘)의 의열사(義烈祠)에 향사되었다.

조상우(趙相禹)
자는 하경(夏卿)이고 호는 시암(時庵)이며, 임오년(1582, 선조15)생이다. 양주인(楊州人)으로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사사받으면서 예학(禮學)을 강론하였는데, 선생이 중하게 여겼다. 정묘년의 난리 때 화의(和議)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참봉(參奉)에 천거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효(孝)로써 정려(旌閭)되었다. 온양(溫陽)의 정퇴서원(靜退書院)에 향사되었다.

이유겸(李有謙)
자는 수익(受益)이고 호는 만회당(晩悔堂)이며, 병술년(1586, 선조19)생이다. 우봉인(牛峯人)으로, 선생을 섬기면서 속학(俗學) 이외에 마음을 써야 할 곳이 있음을 알았다. 광해조 때 어머니를 원수로 삼는 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 극론하였으며, 인조가 반정(反正)한 뒤에는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관직이 참의(參議)에 이르렀다. 고양(高陽)의 문봉서원(文峯書院)에 향사되었다.

박미(朴瀰)
자는 중심(仲深)이고 호는 분서(汾西)이며, 임진년(1592, 선조25)생이다. 나주인(羅州人)으로 선생의 문하에 출입한 햇수가 여러 해였다. 일찍이 계곡 장유(張維), 기암 정홍명(鄭弘溟)과 함께 계상(溪上)에서 선생을 찾아뵈었을 적에 신독재도 선생을 모시고 앉아 있었다. 그때 고금(古今)에 대해 논하여 논리 정연하게 설파하면서 여러 날 있다가 파하였는데, 담론한 자들이 이 세상에 드문 성회(盛會)였다고 하였다. 정안옹주(貞安翁主)에게 장가들어서 금양위(錦陽尉)를 습봉(襲封)하였으며,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김류(金瑬)
자는 관옥(冠玉)이고 호는 북저(北渚)이며, 신미년(1571, 선조4)생이다. 순천인(順天人)으로 문과에 급제하였고, 영상(領相)을 지냈으며 문형(文衡)을 맡았다. 정사원훈(靖社元勳)에 참여되어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인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이시백(李時白)
자는 돈시(敦詩)이고 호는 조암(釣巖)이며, 신사년(1581, 선조14)생이다. 연안인(延安人)으로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는데, 《소학(小學)》을 몸을 검속하는 방도로 삼았다. 음사(蔭仕)로 출사하여 영상을 지냈으며, 정사훈(靖社勳)에 참여되어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충익공(忠翼公)이다.

신경진(申景禛)
자는 군수(君受)이고 평산인(平山人)으로 판윤(判尹) 신립(申砬)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영상을 지냈으며, 정사원훈에 참여되어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충익공(忠翼公)이며, 인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구굉(具宏)
자는 인보(仁甫)이고 호는 군산(羣山)이며, 정축년(1577, 선조10)생이다. 능성인(綾城人)으로 찬성 구사맹(具思孟)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는데, 선생이 몹시 중하게 여겼다. 무과에 급제하여 병조 판서를 지냈다. 정사훈에 참여되어 능성부원군(綾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충목공(忠穆公)이다.

조한영(曺漢英)
자는 수이(守而)이고 호는 회곡(晦谷)이며, 무신년(1608, 선조41)생이다. 창녕인(昌寧人)으로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예를 배웠는데, 선생이 원대한 일을 해낼 인물로 허여하였다. 신사년(1641, 인조19)에 문정공(文正公)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심중(瀋中)으로 잡혀가 구금되었으나 굴하지 않고 있다가 돌아왔다. 문과에 급제하여 참판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유즙(柳楫) -거의록(擧義錄)에 나온다.-

구인후(具仁垕)
자는 중재(仲載)이고 호는 유포(柳浦)이며, 무인년(1578, 선조11)생이다. 능성인으로 군산(羣山) 구굉(具宏)의 조카이다.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제자의 예를 올리고는 책을 짊어지고 와서 선생을 섬겼는데, 전심전력으로 공부하며 교육받으면서도 울연히 뛰어오르려는 뜻이 있었으므로, 선생이 항상 원대한 일을 해낼 인물로 기대하였다.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좌상을 지냈으며, 정사훈(靖社勳)에 참여되어 능천부원군(綾川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충무공(忠武公)이다.

김원량(金元亮)
자는 명숙(明叔)이고 호는 미촌(麋村)이며, 기축년(1589, 선조22)생이다. 월성인(月城人)으로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는데, 문경공(文敬公) 신독재(愼獨齋)와 함께 천거되어 지평(持平)에 제수되었다.

김정망(金廷望)
자는 숙우(叔遇)이고 호는 삼육재(三六齋)이며, 갑오년(1594, 선조27)생이고, 선생의 족친(族親)이다. 광해조 때 선생이 연산(連山)으로 물러나 살 적에 공이 가장 먼저 찾아와서 학업을 강마하니, 선생이 몹시 사랑하였다. 일찍이 효우(孝友)스러우며 근신(謹身)하다는 것으로써 천거되어 관직이 현감에 이르렀다. 연산(連山)의 충곡서원(忠谷書院)에 향사되었다.

이홍연(李弘淵)
자는 정백(靜伯)이고 호는 삼죽(三竹)이며, 갑진년(1604, 선조37)생이다. 한산인(韓山人)으로 이유당(怡愉堂) 이덕수(李德洙)의 아들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참찬을 지냈다.

나만갑(羅萬甲)
자는 몽뢰(夢賚)이고 호는 구포(鷗浦)이며, 안정인(安定人)이다. 어려서부터 무리들 가운데에서 출중하였으며, 선생을 사사(事師)함에 미쳐서는 전심전력으로 수학하였으며, 평생토록 명절(名節)로 스스로를 가다듬었다. 문과에 급제하여 참의를 지냈다.

임위(林㙔)
자는 평중(平仲)이고 호는 동리(東里)이며, 정유년(1597, 선조30)생이다. 나주인(羅州人)으로 판서 임담(林墰)의 종제(從弟)이다.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는데, 선생이 애지중지하였다. 선생이 조정에 천거하여 지평(持平)에 제수되었다. -나주에 살았다.-

신민일(申敏一)
자는 공보(功甫)이고 호는 화당(化堂)이며, 평산인(平山人)이다.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고,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대사성을 지냈다.

정양(鄭瀁)
자는 안숙(晏叔)이고 호는 포옹(抱翁)이며, 경자년(1600, 선조33)생이다. 영일인(迎日人)으로 송강 정철(鄭澈)의 손자이며, 태백오현(太白五賢) 가운데 한 사람이다. 진선(進善)에 제수되었다.

김현(金灦)
자는 지언(止彦)이고 갑술년(1574, 선조7)생이며, 선생의 족친(族親)이다.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는데, 학문에 독실하고 실제에 힘썼으므로 선생이 매번 칭찬하면서 장려하였다. 군수를 지냈다.

김동준(金東準)
자는 이무(而武)이고 호는 봉곡(鳳谷)이며, 광산인(光山人)이다. 학문에 독실하였고 힘써 행하였으므로 종학하는 자들이 많았다. 석계(石溪) 최명룡(崔命龍), 백석(白石) 유즙(柳楫)과 계상(溪上)에서 제자의 예를 올렸다. 광해조에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났을 적에 이의를 제기하였으며, 반정(反正) 뒤에는 선생의 천거로 도사(都事)에 제수되었다가 현감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전주(全州)의 인봉서원(麟峯書院)에 향사되었다. -전주에 살았다.-

김수남(金秀南)
자는 여일(汝一)이고 호는 만치당(萬癡堂)이며, 광산인이다. 선생에게 사사하였는데, 선생이 충신(忠信)과 독행(篤行)에 대해 몹시 칭찬하였다. 광해조 때 두문불출하였으며, 반정 뒤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정랑을 지냈다. 정축년(1637, 인조15) 난리 때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과 더불어 순절(殉節)하여 충(忠)으로써 정려되었다. 문경공 신독재와 더불어 가장 먼저 은진(恩津)의 유허(遺墟)에 사당을 세울 것을 논의하였다.

조경기(趙慶起)
자는 덕휴(德休)이고 갑술년(1574, 선조7)생이다. 양주인(楊州人)으로 별제(別提) 조존신(趙存信)의 아들이다. 광해조 때 유생으로서 폐모를 주장한 자들을 참수하기를 청하였다가 이로 인하여 멀리 유배되었다. 반정 뒤에 석방되어 여산(礪山)에서 살았으며, 이어 책을 싸 들고 선생의 문하로 나왔다. 음사(蔭仕)로 벼슬하여 관직이 군수에 이르렀다.

여이징(呂爾徵)
자는 자구(子久)이고 호는 동강(東江)이며, 무자년(1588, 선조21)생이다. 함양인(咸陽人)으로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여 참판을 지냈다. 아들은 영상을 지낸 여성제(呂聖齊)이다.

김광혁(金光爀)
자는 회경(晦卿)이고 호는 동림(東林)이며, 경인년(1590, 선조23)생이다. 안동인(安東人)으로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의 조카이다.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는데, 효우스럽고 충직함으로써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진사과와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승지(承旨)를 지냈다.

윤이지(尹履之)
자는 중소(仲素)이고 호는 추봉(秋峯)이며, 기묘년(1579, 선조12)생이다. 해평인(海平人)으로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의 손자이다. 문과에 급제하였고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를 지냈으며, 해은군(海恩君)에 봉해졌다.

이항길(李恒吉)
자는 자구(子久)이고 호는 과암(果菴)이며, 무인년(1578, 선조11)생이다. 전의인(全義人)으로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는데, 종제(從弟)인 이복길(李復吉)과 더불어 선생을 부지런히 섬겨 당시 사람들이 주문(朱門)의 이등(二滕)에 비하였다. 천거되어 참봉에 제수되었다. 연산(連山)의 휴정서원(休亭書院)에 향사되었다.

맹세형(孟世衡)
자는 여평(汝平)이고 호는 하곡(霞谷)이며, 무자년(1588, 선조21)생이다. 신창인(新昌人)으로 일찍부터 선생의 문하에서 유학하였는데, 선생이 돌아가시자 마질(麻絰)을 두르고 장례(葬禮)에 참가하여 몹시 비통하게 통곡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여 부사(府使)를 지냈다.

이경석(李景奭)
자는 상보(尙輔)이고 호는 백헌(白軒)이며, 을미년(1595, 선조28)생이다. 석문(石門) 이경직(李景稷)의 동생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영상을 지냈으며, 문형(文衡)을 맡았다.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한덕급(韓德及)
자는 득지(得之)이고 정축년(1577, 선조10)생이다. 청주인(淸州人)으로 우상 한응인(韓應寅)의 아들이며, 선생의 사위이다.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를 지냈고 청녕군(淸寧君)에 봉해졌다.

이정(李淀)
자는 노천(老泉)이고 무자년(1588, 선조21)생이다. 경주인(慶州人)으로 우상 이완(李浣)의 형이며, 선생의 손녀사위이다. 공은 장수(將帥)의 집안에서 생장하였으나 스스로 유학(儒學)을 공부하여 가다듬었으며, 선생의 문하에 출입함에 미쳐서는 더욱더 공경하면서 겸손해하였다. 판결사(判決事)를 지냈으며, 경림군(慶林君)에 봉해졌다.

민후건(閔後騫)
자는 효윤(孝胤)이고 여흥인(驪興人)이다.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업하였으며, 현감을 지냈다. -경성(京城)에 살았다.-

이상일(李尙逸)
자는 여휴(汝休)이고 호는 용암(龍巖)이며, 벽진인(碧珍人)이다. 문과에 급제하였고 감사(監司)를 지냈다.

이중기(李重基)
자는 자위(子威)이고 호는 석강(石江)이며, 전의인(全義人)으로 청강(淸江) 이제신(李濟臣)의 손자이다. 일찍부터 공보(公輔)의 물망(物望)을 지고 있었으나 끝내 낮은 관리로 있었으므로 식자들이 한스럽게 여겼다. 현령을 지냈다.

강흡(姜恰)
자는 정오(正吾)이고 호는 잠은(潛隱)이며, 임인년(1602, 선조35)생이다. 진주인(晉州人)으로 태백오현(太白五賢) 가운데 한 사람이다. 현감을 지냈고,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정민공(貞敏公)이다.

이유택(李惟澤)
자는 택지(澤之)이고 호는 유곡(柳谷)이며, 경주인(慶州人)으로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의 형이다. 현감을 지냈고 효(孝)로써 정려되었으며, 금산(錦山)의 유곡사(柳谷祠)에 향사되었다.

곽현(郭鉉)
자는 공거(公擧)이고 호는 삼안당(三安堂)이며, 을해년(1575, 선조8)생이다. 선산인(善山人)으로 어렸을 적에 선생의 문하에 출입하여 일찌감치 성대한 명성이 있었으므로 이이첨(李爾瞻)이 끌어들이려고 하였으나 끝내 굴하지 않았다. 반정한 뒤에 천거되어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옥천(沃川)에 살았다.-

유식(庾軾)
자는 자경(子敬)이고 병술년(1586, 선조19)생이다. 무송인(茂松人)으로 문장에 능하였고 아울러 성력(星曆)에도 통달하였다. 현감을 지냈다. -옥천에 살았다.-

권극중(權克中)
자는 택보(擇甫)이고 호는 청하자(靑霞子)이며, 경신년(1560, 명종15)생이다. 안동인(安東人)으로 진사과에 급제하였다. 《참동계(參同契)》를 주해(註解)하였다. -김제(金堤)에 살았다.-

박정로(朴廷老)
자는 여헌(汝獻)이고 호는 나학자(懶學子)이며, 계축년(1553, 명종8)생이다. 밀양인(密陽人)으로 읍청(挹淸) 박사종(朴嗣宗)의 조카이다. 예학(禮學)에 정통하였고,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선생이 매번 노우(老友)라고 칭하였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옥천에 살았다.-

유태형(柳泰亨)
자는 응운(應運)이고 문화인(文化人)이다. 찰방(察訪)을 지냈으며, 아들은 자의(諮議) 유즙(柳楫)이다. -김제에 살았다.-

조완제(趙完堤)
자는 덕근(德勤)이고 무자년(1588, 선조21)생이다. 배천인(白川人)으로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아들이며, 봉사(奉事)를 지냈다.

양원(梁榞)
자는 군실(君實)이고 호는 임천(任天)이며, 경인년(1590, 선조23)생이다. 남원인(南原人)으로 서계(西溪) 양홍주(梁弘澍)의 아들이다. 광해조에 정인홍(鄭仁弘)이 폐모론(廢母論)에 찬동하자 상소를 올려 죄를 따졌으며, 이로 인하여 북쪽 변방으로 유배되었는데, 정인홍은 바로 그의 고모부이다. 반정(反正) 뒤에 천거되어 관직이 현감에 이르렀다.

이복길(李復吉) -거의록(擧義錄)에 나온다.-

구영(具瑩) -거의록에 나온다.-

정종명(鄭宗溟)
자는 사조(士朝)이고 영일인(迎日人)으로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아들이며, 부사(府使)를 지냈다.

김곤보(金坤寶)
자는 남중(南重)이고 호는 호봉당(虎峯堂)이며, 병신년(1596, 선조29)생이다. 선생의 족친(族親)으로,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갑자년에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의병으로 종사하였다. 진사과에 급제하였고, 천거되어 참봉에 제수되었다.

홍백순(洪百順)
자는 사길(士吉)이고 정사년(1557, 명종12)생이다. 남양인(南陽人)으로 판서 홍경림(洪景霖)의 증손이다.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는데, 행의(行誼)가 아주 독실하여 선생이 애중(愛重)하였다. 현감을 지냈으며, 효(孝)로써 정려되었다.

이엄(李㤿)
자는 사상(士尙)이고 연안인(延安人)으로 죽창(竹牕) 이시직(李時稷)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는데, 선생이 단아하다고 칭찬하였다. 나이 27세 때 요절하니 사우(士友)들이 모두들 아깝게 여겼다. 진사과에 급제하였다.

최유해(崔有海)
자는 대용(大容)이고 호는 묵수당(默守堂)이다. 해주인(海州人)으로 양포(楊浦) 최전(崔澱)의 아들이다. 문학(文學)으로써 사우들의 추중을 받았으며,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지냈다.

박정(朴炡)
자는 대관(大觀)이고 호는 하석(霞石)이며, 병신년(1596, 선조29)생이다. 나주인(羅州人)으로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였고 참판을 지냈으며, 정사훈(靖社勳)에 참여되었다. 시호는 충숙공(忠肅公)이다.

김해수(金海壽) -거의록에 나온다.-

이시진(李時振)
자는 기부(起夫)이고 임영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의 5세손이다. 지극한 성품과 순수한 행실이 있었는데, 선생의 풍모를 듣고는 곧바로 와서 예경(禮經)과 성리학(性理學) 등의 책을 배웠다. 광해조 때 과거 시험을 보지 않았으며, 효(孝)로써 정려되었는데, 이에 대한 사실은 《삼강행실(三綱行實)》에 실려 있다.

고경리(高敬履)
자는 이척(而惕)이고 호는 창랑(滄浪)이며, 경신년(1560, 명종15)생이다. 장흥인(長興人)으로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의 종제(從弟)이다.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으며, 광해조 무신년(1608, 광해군 즉위년)에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무고를 변론하였다가 상소는 불태워지고 금고(禁錮)되었다. 생원과에 급제하였으며, 지평(持平)에 추증되었다. 광주(光州)의 운암사(雲巖祠)에 향사되었다. -광주에 살았다.-

이도(李䆃) -거의록에 나온다.-

송흥주(宋興周) -거의록에 나온다.-

조평(趙平)
자는 형중(衡仲)이고 호는 운학(雲壑)이며, 기사년(1569, 선조2)생이다. 함안인(咸安人)으로 선생의 문하에 출입한 지가 여러 해여서 모두들 장자(長者)라고 칭하였다. 찰방을 지냈으며, 임실(任實)의 학정사(鶴亭祠)에 향사되었다. -임실에 살았다.-

박추(朴簉)
자는 상지(尙之)이고 계미년(1583, 선조16)생이다. 밀양인(密陽人)으로 좌랑(佐郞) 박효남(朴孝男)의 아들이다. 어렸을 적에 선생에게 수학하였는데, 문행(文行)으로 세상에 칭해졌다. 대성(臺省)의 직을 역임하고 주목(州牧)의 수령을 맡았는데, 모두 아름다운 명성이 있었으나 불행하게도 일찍 졸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관직이 관향사(管餉使)에 이르렀다.

박정(朴筳)
자는 명지(鳴之)이고 임인년(1602, 선조35)생으로, 박추의 종제(從弟)이다. 젊은 시절에 선생에게 수학하였으며,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지냈다.

박환(朴煥)
자는 여술(汝述)이고 호는 수우(守愚)이며, 갑신년(1584, 선조17)생이다. 나주인(羅州人)으로 정사훈(靖社勳)에 참여되었고, 여러 차례 주군(州郡)을 맡았다. 아들 박세성(朴世城)은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지냈다.

박병(朴炳)
자는 소문(少文)이고 나주인으로, 사간(司諫) 박동현(朴東賢)의 아들이다. 젊은 시절에 선생의 문하에 출입하였으며, 광해조 때 과거 공부를 일삼지 않았으므로 선생이 몹시 칭찬하였다. 정사훈에 참여되었고, 여러 차례 주군을 맡았는데, 치적이 있었다. 목사(牧使)를 지냈다.

조완배(趙完培)
자는 덕후(德厚)이고 임진년(1592, 선조25)생이다. 배천인(白川人)으로 조완제(趙完堤)의 동생이다.

윤명은(尹鳴殷)
자는 이원(而遠)이고 호는 사정(思亭)이며, 파평인(坡平人)이다. 젊어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으며, 효로써 정려되었다. 진사과와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감사(監司)를 지냈다.

조송년(趙松年)
한양인(漢陽人)으로 정암(靜菴) 선생의 현손이다. 젊어서부터 선생의 문하에 출입하였으며, 군수(郡守)를 지냈다.

민욱(閔昱)
자는 회수(晦叟)이고 호는 석계(石溪)이며, 기미년(1559, 명종14)생이다. 여흥인(驪興人)으로 선생의 문하에 출입한 지가 여러 해였다. 진사과에 급제하였으며, 효로써 좌랑(佐郞)에 추증되었다. -영동(永同)에 살았다.-

민업(閔嶪)
자는 자앙(子昻)이고 호는 양호(楊湖)이며, 여주인(驪州人)으로 현령 민계량(閔季良)의 증손이다. 선생이 소명(召命)을 받아 서울에 들어갔을 적에 문하에 와서 배움을 청하였으며, 선생을 따라서 남쪽으로 내려와 성리학에 관한 여러 책을 사사받았다. 정축년에 화의(和議)가 성립되자 노련(魯連)처럼 바다에 빠져 죽으려는 뜻을 품었으며, 여러 차례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박휘(朴輝)
나주인으로 젊어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는데, 품성이 어질고 착하였으므로 선생이 매번 장려하면서 허여하였으나, 일찍 졸하였다. -이성(尼城)에 살았다.-

홍정(洪霆)
풍산인(豐山人)으로, 지계(芝溪) 홍방(洪霶)의 동생이다. 여러 차례 주군(州郡)을 맡았는데 모두 치적이 있었다.

정계주(鄭繼冑)
자는 선초(善初)이고 병오년(1606, 선조39)생이다. 영일인(迎日人)으로 찰방 정사현(鄭士賢)의 아들이다. 서울서부터 와서 여러 해 동안 수학하였다. 진사과와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승지를 지냈다.

신희손(辛喜孫)
영월인(寧越人)으로 백록(白麓) 신응시(辛應時)의 손자이다. 젊어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는데, 정의(情誼)가 자제(子弟)와 같았다. 군수를 지냈다.

이원영(李元榮)
자는 응화(應華)이고 호는 한계(寒溪)이며, 하음인(河陰人)이다. 젊어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으며, 광해조 때 이이첨(李爾瞻)과 한찬남(韓纘男)의 무리가 잇달아 천거하여 끌어들이고자 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진사과와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현령을 지냈다. -이성(尼城)에 살았다.-

이문영(李文榮)
자는 경욱(景郁)이고 호는 청계(淸溪)이며, 이원영의 동생이다. 젊어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한찬남과 같은 마을에 살아서 아주 절친하였으나 한찬남이 폐모론을 주장함에 미쳐서는 절교하고서 만나 보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절의(節義)가 있다고 칭하였다. 진사과에 급제하였고, 참봉을 지냈다. -이성에 살았다.-

오달주(吳達周)
해주인(海州人)으로 추탄(楸灘) 오윤겸(吳允謙)의 아들이다. 젊어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으며, 군수를 지냈다.

최신(崔愼)
자는 근보(謹甫)이고 신축년(1601, 선조34)생이다. 선생에게 여러 해 동안 수학하였으며,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 초려 이유태와 더불어 학문을 강마하였다고 한다. -회덕(懷德)에 살았다.-

김장(金樟)
자는 용여(用汝)이고 호는 몽재(蒙齋)이며, 경인년(1590, 선조23)생으로 금릉인(金陵人)인다. 선생이 철원(鐵原)의 수령으로 있을 적에 수학하였으며, 여러 해 동안 계상(溪上)에 와서 머물렀다. 후손인 김상진(金相進)은 호가 탁계(濯溪)이다. -청산(靑山)에 살았다.-

이영인(李榮仁)
자가 시언(時彦)이고 병인년(1566, 명종21)생이다. 용인인(龍仁人)으로 정랑(正郞) 이신충(李藎忠)의 아들이다. 일찍부터 선생에게 종학(從學)하였는데, 성품이 효우(孝友)에 독실하였다. 군수를 지냈다. 증손은 참판 이교악(李喬岳)이다.

장서(張曙)
인동인(仁同人)으로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 장만(張晩)의 종제(從弟)이다. 여러 해 동안 책을 싸 들고 와 수학하여 정의가 자제와 같았다. 봉사(奉事)를 지냈다.

김곤(金滾)
자는 제보(濟甫)이고 호는 성곡(省谷)이며, 영산인(永山人)으로 호군(護軍) 김호덕(金好德)의 아들이다. 행의(行誼)가 순수하고 독실하였으나 일찍 졸하였다. 진사과에 급제하였고 도사(都事)를 지냈다.

황면(黃沔)
자는 종지(宗之)이고 창원인(昌原人)이며, 승지에 추증된 황중립(黃中立)의 아들이다. 일찍이 선생의 문하에서 유학하여 동료들의 추앙을 받았다. 광해조 때 과거 공부를 폐하였으며, 반정 초에 관직에 제수되어 찰방을 지냈다.

오준(吳竣)
자는 여완(汝完)이고 호는 죽남(竹南)이며, 정해년(1587, 선조20)생이다. 동복인(同福人)으로 참판 오백령(吳百齡)의 아들이다. 젊어서부터 선생의 문하에 출입하여 직접 지도를 받았다. 문과에 급제하였고, 판서를 지냈다.

유여(柳袽)
풍산인으로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아들인데, 젊었을 적에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관직은 -원문 빠짐-

윤홍국(尹弘國)
자는 장경(張卿)이고 병자년(1576, 선조9)생이며, 양주인(楊州人)이다. 효우스러웠으며 학문에 부지런하였다. 선생이 생질녀를 아내로 삼아 주었다. 일찌감치 과거에 급제하여 명성이 울연하였으나, 송강(松江) 정철(鄭澈)과 친한 데에 연좌되어서 벼슬길이 막혀 드러나지 못하였다.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조행립(曺行立)
자는 백원(百源)이고 호는 태호(兌湖)이며, 창녕인(昌寧人)이다. 광해조 때 서울에 사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아 드디어 호남으로 이사해 살았다. 반정 뒤에 별제(別提)에 제수되었고, 여러 차례 주군(州郡)을 맡았다. 일찍이 선생의 문하에서 유학하였는데, 문경공(文敬公)과 아주 친하여 만년에는 항상 ‘나의 늙은 벗으로는 오직 조행립뿐이다.’라고 하였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으며, 남평(南平)의 서호원(西湖院)에 향사되었다. -남평에 살았다.-

김헌(金巘)
여러 해 동안 선생에게 수학하여 문변(問辨)한 바가 많았다. 진사과에 급제하였다. -철원(鐵原)에 살았다.-

김백생(金伯生)
자는 여인(汝仁)이고 신사년(1581, 선조14)생이며, 선생의 종제(從弟)이다. 학문과 필법(筆法)에 있어서 사우(士友)들의 추중을 받았다. 진사과에 급제하였다.

민평(閔枰)
자는 형숙(衡叔)이고 호는 언시(言尸)이며, 여흥인(驪興人)이다. 효로써 정랑에 추증되었다.

이득지(李得志)
자는 덕보(德甫)이고 전주인(全州人)이다. 광해조 때에 폐모에 대한 의론이 일어났을 적에 항소(抗疏)하였다. 진사과에 급제하였다.

최탁(崔琢)
자는 사정(士精)이고 전주인이다. 군수를 지냈다. 손자는 참판 최방언(崔邦彦)이다.

김여성(金汝聲)
자는 원이(遠而)이고 광산인(光山人)이다. 광해조 때에 폐모에 대한 의논이 일어났을 적에 항소하였다. 지평에 추증되었다.

허조(許稠)
양천인(陽川人)으로 우상 허종(許琮)의 현손이다. 젊어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여 정이 자제와 같았다. 별천(別薦)으로 남대(南臺)의 명망이 있었으나 일찍 졸하였다. 현감을 지냈다.

권순창(權順昌)
자는 성지(聖之)이고 안동인(安東人)으로 권순장(權順長)의 종제이다. 젊어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으며, 도정(都正)을 지냈다.

신경원(申景瑗)
평산인(平山人)으로 익위(翊衛) 신확(申確)의 아들이다. 젊었을 적에 선생에게 수학하였으며, 무과에 급제하여 부원수(副元帥)를 지냈다.

신경류(申景柳)
평산인으로 형인 신경원과 같은 때에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무과에 급제하여 병사(兵使)를 지냈다.

장차주(張次周)
자는 문재(文哉)이고 병오년(1606, 선조39)생이다. 인동인(仁同人)으로 선생의 손녀사위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수찬(修撰)을 지냈다.

이준성(李畯成)
자는 상로(祥老)이고 한산인(韓山人)으로 명곡(鳴谷) 이산보(李山甫)의 손자이다. 젊었을 적에 선생에게 수학하였으며, 참봉에 천거되었는데, 일찍 졸하였다. -보령(保寧)에 살았다.-

이엽(李曄)
자는 일화(日華)이고 종실(宗室)인 금계정(錦溪正) 이대린(李大麟)의 아들이다. 재주와 행실이 있었으며, 찰방을 지냈다.

임게(林垍)
자는 맹견(孟堅)이고 호는 월창(月牕)이며, 경진년(1580, 선조13)생으로 나주인(羅州人)이다. 젊었을 적에 선생에게 수학하였는데, 재능이 있어서 탁지(度支)를 맡을 만한 명망이 있었다. 좌랑을 지냈다.

김상(金尙)
자는 우고(友古)이고 호는 호은(壺隱)이며, 병술년(1586, 선조19)생이다. 상산인(商山人)으로, 젊어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였고, 감사(監司)를 지냈다.

김율(金霱)
자는 운서(雲瑞)이고 호는 매사(梅沙)이며, 상산인으로 김상의 동생이다. 문과에 급제하였고, 승지를 지냈다.

심핍(沈愊)
호는 석촌(石村)이고 청송인(靑松人)으로 청양군(靑陽君) 심의겸(沈義謙)의 조카이다. 젊었을 적에 문하에 나아가 예학(禮學)을 전수받은 것이 많았다.

권인복(權仁復)
자는 자안(子安)이고 안동인(安東人)으로 동계(桐溪) 권달수(權達手)의 후손이다. 선생의 문하에서 종학하였는데, 모두들 선사(善士)라고 칭하였다. 사는 곳이 이이첨의 집과 아주 가까웠으므로 드디어 서산(瑞山)으로 이사해 살았다.

김곤원(金坤遠)
자는 원보(遠甫)이고 정유년(1597, 선조30)생이다. 광산인(光山人)으로 김곤보(金坤寶)의 종제이다. 젊어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진사과에 급제하였고, 천거되어 참봉에 제수되었다.

구인기(具仁基)
자는 백공(伯鞏)이고 능성인(綾城人)으로 충목공(忠穆公) 구굉(具宏)의 조카이다. 젊었을 때 선생에게 수학하였으며, 도정(都正)을 지냈다. 손자 구문락(具文洛)은 대장(大將)이다.

이갱생(李更生)
자는 숙향(叔向)이고 전주인(全州人)이다. 젊었을 적에 선생에게 수학하였으며, 목사(牧使)를 지냈다.

김수창(金壽昌)
자는 천휴(天休)이고 안동인으로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의 손자이다. 젊었을 적부터 와서 종학하여 정이 자제들과 차이가 없었다. 도정(都正)을 지냈다.

김영후(金榮後)
자는 창세(昌世)이고 광산인으로 현감 김해수(金海壽)의 아들이다. 젊었을 적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진사과에 급제하였고, 참봉을 지냈다.

이희영(李希英)
자는 백실(伯實)이고 병오년(1606, 선조39)생이다. 전의인(全義人)으로 과암(果庵) 이항길(李恒吉)의 아들이다. 젊었을 적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진사과에 급제하였고, 참봉을 지냈다.

박우남(朴䨞男)
젊었을 적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무과에 급제하였고, 부사(府使)를 지냈다.

유면회(兪勉會)
자는 상로(尙魯)이고 기계인(杞溪人)이다. 젊어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현감을 지냈다. -부여(扶餘)에 살았다.-

김자건(金自鍵)
자는 이계(而啓)이고 광산인(光山人)이다. 선생의 문하에서 종학하면서 견해가 특출난 것으로 칭찬을 받았다. 천거되어 별검(別檢)에 제수되었다.

양경우(梁慶遇)
남원인(南原人)으로, 젊어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였고, 첨정(僉正)을 지냈다. -순창(淳昌)에 살았다.-

양형우(梁亨遇)
남원인으로, 젊어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였고, 교리(校理)를 지냈다.

이영선(李榮先)
자는 극가(克家)이고 무자년(1588, 선조21)생으로, 전의인이다. 참봉을 지냈다. 아들 이상진(李尙眞)은 문과에 급제하여 우상(右相)을 지냈다.

이이성(李以省)
자는 성오(省吾)이고 신묘년(1591, 선조24)생이다. 여주인(驪州人)으로 현감 이대준(李大濬)의 아들이며,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의 사위이다. 여러 해 동안 선생에게 수학하였으며, 군수를 지냈다.

한문두(韓文斗)
자는 사앙(士昻)이고 청주인(淸州人)으로 전한 한종주(韓宗冑)의 아들이다. 젊었을 적에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진사과에 급제하였고, 현감을 지냈다.

심관(沈慣)
청송인(靑松人)으로 판관 심제겸(沈悌謙)의 아들이다. 젊었을 적에 선생에게 수학하였으며, 현감을 지냈다.

박동립(朴東立)
자는 여범(汝泛)이고 호는 매포(梅圃)이며, 병인년(1566, 명종21)생이다. 밀양인(密陽人)으로 참봉을 지냈다. -전주(全州)에 살았다.-

이장(李槳)
전주인(全州人)으로 송교(松郊) 이목(李楘)의 동생이다. 찰방(察訪)을 지냈다.

김자빈(金自鑌)
자는 이중(而重)이고 계묘년(1603, 선조36)생이다. 광산인(光山人)으로 김자건(金自鍵)의 동생이다. 정축년의 난리 때 검천(檢川)에서 순절(殉節)하였으며, 판관(判官)에 추증되었는데, 이에 대한 사실은 《연산읍지(連山邑誌)》에 실려 있다.

김남(金欖)
자는 직여(直汝)이고 금릉인(金陵人)으로 김장(金樟)의 동생이다. 젊어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청산(靑山)에 살았다.-

박종(朴琮) -거의록(擧義錄)에 나온다.-

정민구(鄭敏求) -거의록에 나온다.-

김준업(金峻業) -거의록에 나온다.-

유평(柳玶) -거의록에 나온다.-

김태립(金泰立)
자는 형숙(亨叔)이고 고령인(高靈人)으로 신독재의 사위이다. 진사과에 급제하였다.

이률(李㮚)
전주인으로 송교 이목의 동생이다. 현감을 지냈다.

송국귀(宋國龜)
자는 사원(士元)이고 은진인(恩津人)으로 판관 송희건(宋希建)의 아들이다. 군수를 지냈다.

이영원(李榮元)
자는 자선(子善)이고 호는 용계처사(龍溪處士)이며, 함평인(咸平人)으로 구원(九畹) 이춘원(李春元)의 종형이다. 선생이 욕심이 적다는 이유로 유학(儒學)에 종사할 것을 권면하자, 인하여 속세의 분란을 사절한 채 은거해 살면서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만년에 재랑(齋郞)에 제수되었다.

김습(金習)
호는 안식와(安息窩)이고 의성인(義城人)으로 김제현(金齊賢)의 아들이다. 여러 해 동안 책을 싸 들고 와서 종학하였으며, 재주와 행실이 있었다. 선생의 천거로 참봉에 제수되었다. -태인(泰仁)에 살았다.-

성이건(成以健)
자는 자강(子強)이고 창녕인(昌寧人)이다. 여러 해 동안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참봉을 지냈다. -임천(林川)에 살았다.-

정이관(鄭以觀)
자는 국빈(國賓)으로, 여러 해 동안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영동(永同)에 살았다.-

유필창(柳必昌)
자는 덕용(德用)이고 병신년(1596, 선조29)생으로 전주인이다. -함평(咸平)에 살았다.-

정원첨(鄭元瞻)
초계인(草溪人)으로 수몽(守夢) 정엽(鄭曄)의 종손(從孫)이다. 현감을 지냈다.

윤하(尹夏)
양주인(楊州人)으로 윤홍국(尹弘國)의 아들이다. 젊어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진사과에 급제하였으며, 봉사(奉事)를 지냈다.

배승조(裵承祖)
자는 여술(汝述)이고 호는 농와(聾窩)이며, 무인년(1578, 선조11)생으로 성주인(星州人)이다. 감역(監役)을 지냈다.

이적(李績)
거상(居喪)함에 있어서 예법을 잘 지켰는데, 상(喪)을 이기지 못하여 요절하니, 사람들이 모두 안타까워하였다. -이성(尼城)에 살았다.-

한근(韓瑾)
청주인(淸州人)으로 서울서부터 책을 싸 들고 와서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군수를 지냈다.

이항(李恒)
참봉을 지냈다.

이함길(李咸吉)
자는 선재(善哉)이고 병술년(1586, 선조19)생이다. 전의인(全義人)으로 이항길(李恒吉)의 동생이다.

김자련(金自鍊)
자는 이정(而精)이고 광산인으로 김자건(金自鍵)의 형이다.

윤운구(尹雲衢)
자는 치형(致亨)이고 남원인(南原人)으로 사간 윤강원(尹剛元)의 손자이다. 좌랑을 지냈다.

이숭고(李崇古) -일명 이광익(李光翼)이라고도 한다.-
군수를 지냈다.

양대진(楊大振)
자는 백기(伯起)이고 호는 성곡(城谷)이며, 청주인이다. 교관(敎官)을 지냈다.

유지하(柳支廈)
자는 임지(任之)이고 경인년(1590, 선조23)생이다. 문화인(文化人)으로 김현(金灦)의 생질이다. -전주에 살았다.-

유성하(柳成廈)
자는 취지(就之)이고 병술년(1586, 선조19)생이다. 문화인으로 유지하(柳支廈)의 동생이다. 연산(連山)의 외성(外城)에 살았는데, 여러 해 동안 선생에게 수학하였으며, 언론(言論)을 잘하여 호사(豪士)라고 칭해졌다.

김경(金)
젊어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장령을 지냈다.

권이급(權以汲)
여러 해 동안 선생에게 수업하여 예서(禮書)를 많이 배웠다. 찰방을 지냈다. -함창(咸昌)에 살았다.-

김인흡(金仁洽)
연안인(延安人)으로 젊어서부터 책을 싸 들고 와서 선생에게 수학하여 예경(禮經)을 많이 배웠다. 현감을 지냈다. -영광(靈光)에 살았다.-

이빙(李憑)
문학(文學)의 재주가 있었으나, 일찍 졸하였다. -연산(連山)에 살았다.-

이설(李渫)
자는 여청(汝淸)이고 호는 청계(淸溪)이며, 경자년(1600, 선조33)생이다. 가평인(加平人)으로 직장 이제(李悌)의 손자이다. 원종훈(原從勳)에 참여되었고, 장사랑(將仕郞)이었다.

민영달(閔榮達)
자는 백인(伯仁)이고 여흥인(驪興人)으로 좌랑 민척(閔惕)의 아들이다. 여러 해 동안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진사과에 급제하였다.

오국헌(吳國獻)
자는 중현(仲賢)이고 호는 어은(漁隱)이며, 해주인(海州人)이다.

김자중(金自重)
자는 여실(汝實)이고 정해년(1587, 선조20)생으로 광산인(光山人)이다. 진사과에 급제하였다.

박유동(朴惟棟)
자는 시보(時甫)이고 호는 일석(一石)이며, 충주인(忠州人)으로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생질이다. 참봉을 지냈다.

박황(朴潢)
자는 덕우(德雨)이고 호는 나헌(懦軒)으로, 나주인(羅州人)이다.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대사헌을 지냈다.

홍수일(洪壽一)
남양인(南陽人)으로 서울에서 부여(扶餘)로 이사해 살았으며, 여러 해 동안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좌랑을 지냈다.

이흘(李屹)
자는 자준(子峻)이고 호는 노파(蘆坡)이며, 무자년(1588, 선조21)생이다. 벽진인(碧珍人)으로 세마(洗馬)를 지냈다.

이이순(李以恂)
자는 희지(煕之)이고 호는 동림(東林)이다. 경주인(慶州人)으로 재사당(再思堂) 이원(李黿)의 후손이다. -남원(南原)에 살았다.-

김자남(金自南)
자는 여찬(汝贊)이고 계묘년(1603, 선조36)생이며, 광산인이다. 예빈시 정(禮賓寺正)을 지냈다.

송희진(宋希進)
자는 퇴지(退之)이고 호는 덕성(德城)이며, 경진년(1580, 선조13)생이다. 은진인(恩津人)으로 동지중추부사 송남수(宋枏壽)의 아들이다. 진사과와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장령을 지냈다. 병자년 난리 뒤에는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이성신(李省身)
자는 경삼(景三)이고 호는 입암(笠巖)이며, 전의인(全義人)이다. 광해조 때 폐모(廢母)를 시행할 적에 항소(抗疏)를 올렸다. 문과에 급제하였고, 승지를 지냈다.

안응로(安應魯)
자는 몽여(夢與)이고 병술년(1586, 선조19)생이다. 광주인(廣州人)으로 정랑 안묵지(安默智)의 아들이다. 젊어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지평을 지냈다. -부여(扶餘)에 살았다.-

최거(崔勮)
자는 이민(而敏)이고 무자년(1588, 선조21)생이다. 전주인으로 석계(石溪) 최명룡(崔命龍)의 아들이다.

이희창(李希昌)
전의인으로 과암(果菴) 이항길(李恒吉)의 아들이다.

김정태(金廷泰)
자는 종여(宗汝)이고 광산인으로 삼육재(三六齋) 김정망(金廷望)의 종제이다.

김정헌(金廷憲)
자는 숙도(叔度)이고 호는 야광처사(野狂處士)이며, 광산인으로 삼육재 김정망의 동생이다. 광해조 때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이창길(李昌吉)
전의인으로 이항길(李恒吉)의 동생이다. 첨정(僉正)을 지냈다.

이경(李絅)
자는 자문(子文)이고 갑오년(1594, 선조27)생으로, 하음인(河陰人)이다. 문과에 급제하였고, 현감을 지냈다. -이성(尼城)에 살았다.-

최필(崔泌)
자는 이헌(而獻)으로, 여러 해 동안 선생에게 수업하였다. -연산(連山)에 살았다.-

김사립(金斯立)
자는 입지(立之)이고 호는 도암(道庵)이며, 병술년(1586, 선조19)생이다. 광산인으로 군수 김현(金灦)의 조카이다. 생원과에 급제하였다. -연산에 살았다.-

전색(田穡)
자는 영숙(穎叔)이다. -석성(石城)에 살았다.-

이공회(李公誨)
자는 회지(誨之)이고 기사년(1569, 선조2)생으로, 전주인이다. 교수를 지냈다. -연산에 살았다.-

민흥기(閔興基)
자는 언립(彦立)이고 여흥인(驪興人)으로, 참봉 민개(閔愷)의 아들이다.

김계(金桂)
자는 수여(秀汝)이고 금릉인(金陵人)으로, 김남(金欖)의 동생이다. 여러 해 동안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유시발(柳時發)
자는 양숙(養叔)이고 정유년(1597, 선조30)생으로, 고창인(高敞人)이다. 시에 능한 것으로 이름이 났다. -여산(礪山)에 살았다.-

최정연(崔挺然)
자는 군립(君立)이고 신미년(1571, 선조4)생으로, 탐진인(耽津人)이다. 진사과에 급제하였다. -부여에 살았다.-

이수(李琇)
자는 백헌(伯獻)이고 고성인(固城人)이다. 여러 해 동안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김대기(金大器)
자는 옥성(玉成)이고 호는 만덕재(晩德齋)이며, 정사년(1557, 명종12)생으로, 광산인이다. 혼조(昏朝) 때 과거 공부를 폐하였다. 반정 뒤에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담양(潭陽)의 구산사(龜山祠)에 향사되었다. -담양에 살았다.-

강종효(姜宗孝)
자는 행원(行源)이고 신축년(1601, 선조34)생으로, 진주인(晉州人)이다. -은진(恩津)에 살았다.-

한성업(韓成業)
자는 취이(就而)이고 무자년(1588, 선조21)생으로, 청주인(淸州人)이다. -연산에 살았다.-

김덕창(金德昌)
문장에 능하고 효행이 있었으나, 일찍 졸하였다. -공주(公州)에 살았다.-

김덕상(金德尙)
김덕창의 동생이다.

최이립(崔爾立)
자는 군앙(君仰)으로, 여러 해 동안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이성에 살았다.-

나문욱(羅文郁)
자는 질부(質夫)이고 기해년(1599, 선조32)생으로, 나주인(羅州人)이다. 지평 임위(林㙔)와 같은 때에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나주에 살았다.-

변이호(卞以皓)
자는 백원(伯元)이다. -공주에 살았다.-

채몽정(蔡夢井)
인천인(仁川人)으로 대사헌 채수(蔡壽)의 후손이다. 사과(司果)를 지냈다.

유정민(柳定民)
자는 안지(安之)이고 문화인(文化人)으로, 진사과에 급제하였다. -연산에 살았다.-

이현(李峴)
자는 사첨(士瞻)이고 병오년(1606, 선조39)생으로, 종실(宗室) 옥계도정(玉溪都正) 이현동(李賢童)의 후손이다. 진사과에 급제하였다.

이후(李垕)
자는 재이(載而)이고 기축년(1589, 선조22)생으로, 전의인이다. -연산에 살았다.-

김원립(金爰立)
자는 상지(相之)이고 신축년(1601, 선조34)생으로, 광산인이다. -연산에 살았다.-

김후(金垕)
자는 사후(士厚)이다. 젊어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나주에 살았다.-

이타(李柁)
자는 제숙(濟叔)이고 을사년(1605, 선조38)생이며, 전주인이다. -전주에 살았다.-

안눌(安訥)
자는 민보(敏甫)이고 계묘년(1603, 선조36)생이다. -김제(金堤)에 살았다.-

정광원(鄭廣源)
자는 성보(誠溥)이고 정미년(1607, 선조40)생이며, 광주인(光州人)이다. 신독재의 사위이다.

양진행(楊震行)
자는 보여(普汝)이고 호는 계촌(溪村)이다. 정미년(1607, 선조40)생이며, 청주인이다.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현감을 지냈다. -이성에 살았다.-

유제민(柳濟民)
자는 원지(援之)이고 계묘년(1603, 선조36)생이며, 문화인이다. 사마 양시(司馬兩試)에 급제하였다.

이대하(李大河)
현감을 지냈다.

이대숙(李大淑)
정랑을 지냈다.

임찬(林巑)
현감을 지냈다.

이희방(李希芳)
자는 시우(時遇)이고 계묘년(1603, 선조36)생이다. 전의인으로 이항길(李恒吉)의 조카이다.

양점(梁漸)
자는 회원(會源)이고 갑술년(1574, 선조7)생이며, 남원인(南原人)이다. 훈도(訓導)를 지냈다.

이정상(李廷祥)
호는 월강(月岡)이다.

김감(金鑑)
자는 자허(子虛)이고 호는 침강(枕江)이며, 임진년(1592, 선조25)생이고 개성인(開城人)이다. -영동(永同)에 살았다.-

홍사도(洪思道)
자는 공묵(恭默)이고 무술년(1598, 선조31)생이다. 남양인(南陽人)으로 현감 홍연기(洪衍期)의 아들이다. 여러 해 동안 선생에게 수업하였는데, 학문에 힘쓰면서 행실을 가다듬었다. -연산에 살았다.-

안언길(安彦吉)
서울에서 내려와서 수학하였으며, 명의(名醫)로 칭해졌다. 군수를 지냈다.

김호신(金好臣)
자는 성백(誠伯)이다. -공주에 살았다.-

박대형(朴大亨)
자는 규부(逵夫)이고 나주인이다. 여러 해 동안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금산(錦山)에 살았다.-

도호민(都皥民)
성주인(星州人)으로 현감 도응서(都應瑞)의 손자이다. 젊어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연산에 살았다.-

이효원(李孝源)
숙부가 연산의 수령으로 있을 적에 와서 머물면서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수원(水原)에 살았다.-

이성원(李性源)
자는 복초(復初)이고 한산인(韓山人)으로 한흥군(韓興君) 이덕연(李德演)의 아들이다. 진사과와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지평을 지냈다. 아들 이제항(李齊沆)은 교관(敎官)이다.

김치림(金致霖)
자는 군망(君望)이고 기묘년(1579, 선조12)생이며, 순천인(順天人)이다. -은진(恩津)에 살았다.-

이탑(李塔)
전주인으로, 여러 해 동안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전주에 살았다.-

민귀달(閔貴達)
진사과에 급제하였다.

임헌(林巘)

민대윤(閔大胤)
여흥인(驪興人)이다.

이상건(李尙健) -진잠(鎭岑)에 살았다.-

오삼성(吳三省) -연산에 살았다.-

남설(南契) -일명 남설(南薛)이라고도 한다.-
자는 자앙(子仰)이다. -여산(礪山)에 살았다.-

이추(李樞) -옥구(沃溝)에 살았다.-

김적(金迪)
연안인(延安人)이다. 젊어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으며, 군수를 지냈다.

안제민(安濟民) -은진에 살았다.-

백홍규(白弘規)
자는 자원(子圓)이고 을사년(1605, 선조38)생이며, 수원인이다. -용안(龍安)에 살았다.-

송정길(宋貞吉)
은진인(恩津人)이다. -회덕(懷德)에 살았다.-

유동휘(柳東輝)
자는 사명(士明)이고 을해년(1575, 선조8)생이며, 도사(都事)를 지냈다. -고창(高敞)에 살았다.-

송국귀(宋國龜)
자는 사원(士元)이고 은진인으로 판관(判官) 송희건(宋希建)의 아들이다. 군수를 지냈다.

민응건(閔應騫)

이명(李蓂)
자는 응요(應堯)이고 무술년(1598, 선조31)생이며, 덕수인(德水人)이다. -여산(礪山)에 살았다.-

이배창(李培昌)

임대로(任大老)

김헌(金憲)

구계(具棨)

이석린(李碩鱗)

임억(林嶷)

김자회(金自晦)
자는 여휘(汝輝)이고 갑오년(1594, 선조27)생이며, 광산인으로 김자중(金自重)의 동생이다. 군수를 지냈다.

김종길(金宗吉)
자는 입보(立甫)이고 광산인이다.

정회(鄭晦)
온양인(溫陽人)으로 좌랑을 지냈다. 아들은 동명(東溟) 정두경(鄭斗卿)이다.

정운(鄭沄)
자는 달원(達源)이고 영일인(迎日人)이며, 선생의 생질이다. 현감을 지냈다.

송국시(宋國蓍)
자는 사징(士徵)이고 호는 백류헌(百柳軒)이다. 은진인으로 경자년(1600, 선조33)생이며, 판관(判官) 송희건(宋希建)의 아들이다. 병자년 난리 때 의병을 일으켰으며, 인하여 출사하지 않았다. 진사과에 급제하였으며, 승지에 추증되었다.

송국보(宋國輔)
자는 사필(士弼)이다. 은진인으로 임인년(1602, 선조35)생이며, 판관 송희건의 아들이다. 현감을 지냈다.

윤빈(尹彬)
자는 자화(子華)이고 정축년(1577, 선조10)생이다. 진사과에 급제하였다. -공주(公州)에 살았다.-

윤시용(尹是勇)
군수를 지냈다.

임뇌지(任賚之)
현감을 지냈다.

이률(李㮚)
전주인으로 송교(松郊) 이목(李楘)의 동생이다. 현감을 지냈다.

민여기(閔汝耆)
자는 인수(仁叟)이고 병술년(1586, 선조19)생으로 여흥인이다. 진사과에 급제하였다.

민여로(閔汝老)
자는 태수(台叟)이고 무술년(1598, 선조31)생으로, 여흥인이다. 진사과와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장령을 지냈다.

이정빈(李廷賓)
자는 자관(子寬)이고 호는 오헌(梧軒)이며, 병오년(1606, 선조39)생이다. 흥양인(興陽人)으로 참봉 이동영(李東榮)의 아들이다. 젊어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거의록(擧義錄)의 이용빈(李用賓) 조항에 상세하게 나온다.- 담양(潭陽)의 지동사(池洞祠)에 향사되었다. -광주에 살았다.-

전석규(田錫圭)
자는 사수(士受)이고 호는 한호(閒湖)이며, 정축년(1577, 선조10)생이다. 남양인(南陽人)으로 주부(主簿) 전탄(田坦)의 아들이다. 진사과에 급제하였고,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에 올랐다. 석성(石城)의 봉호사(蓬湖祠)에 향사되었다. -석성에 살았다.-

정유한(鄭維翰)
자는 인보(仁輔)이고 무진년(1568, 선조1)생이며, 영일인(迎日人)이다. -금산(金山)에 살았다.-

정원승(鄭元升)
자는 여선(汝善)이고 호는 석실(石室)이며, 무술년(1598, 선조31)생이다. 영일인으로 정유한의 조카이다. 진사과에 급제하였다.

송국사(宋國士)
자는 일경(一卿)이고 임자년(1612, 광해군4)생이다. 은진인(恩津人)으로 장령 송희진(宋希進)의 아들이다. 현감을 지냈다.

송국헌(宋國憲)
자는 군식(君式)이고 호는 안소당(安素堂)이며, 을묘년(1615, 광해군7)생이다. 은진인으로 송국사의 동생이다. 병자년 난리 때 칼을 빼들고 전쟁터로 달려갔다. 찰방을 지냈으며,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청주의 충효사(忠孝祠)에 향사되었다.

송석규(宋錫圭)
자는 자결(子潔)이고 을유년(1585, 선조18)생이며, 은진인이다. 진사과에 급제하였다. -회덕에 살았다.-

한윤(韓贇)
자는 미숙(美叔)이고 호는 수구당(守邱堂)이다. 청주인으로 을유년(1585, 선조18)생이며, 시직(侍直) 한응록(韓應祿)의 아들이다. 정축년(1637, 인조15)에 세자(世子)가 심양(瀋陽)에 볼모로 잡혀갈 적에 따라갔으며, 돌아와서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첨정(僉正)을 지냈다. -남원(南原)에 살았다.-

송시승(宋時昇)
자는 자유(子猷)이고 계미년(1583, 선조16)생이다. 은진인으로 현령 송계록(宋啓祿)의 아들이다. 효로써 정려(旌閭)되었으며, 지평에 추증되었다.

이봉주(李鳳柱)
무오년(1618, 광해군10)생으로 전주인이다. 참봉을 지냈다. -연산에 살았다.-

유극해(兪克諧)
금산인(金山人)이다. 손자인 유진병(兪震炳)은 천거되어 관직에 제수되었다.

정이도(鄭以道)
자는 거원(巨源)이고 호는 판곡(板谷)이며, 병신년(1596, 선조29)생이다. 초계인(草溪人)으로 동지중추부사 정흔(鄭昕)의 아들이다. 진사과에 급제하였다. -삼가(三嘉)에 살았다.-

조부(曺溥)
자는 도연(道淵)이고 호는 삼청당(三淸堂)이다. 계사년(1593, 선조26)생이며 창녕인(昌寧人)이다. 효로써 정려되었으며, 참봉을 지냈다. 창평(昌平)의 죽림사(竹林祠)에 향사되었다. -창평에 살았다.-

송시행(宋時行)
자는 자건(子健)이며, 임인년(1602, 선조35)생이다. 호는 송창(松窓)이다. 은진인으로 송시승(宋時昇)의 동생이다.

김정(金濎)
자는 여심(汝尋)이고 호는 췌세(贅世)이며, 정해년(1587, 선조20)생이다. 강진인(康津人)으로 판관 김응길(金應吉)의 아들이다. 광해조 때 과거 공부를 폐하고서 자신의 지조를 지켰다. 학행(學行)으로 승지에 추증되었다. 태인(泰仁)의 송산사(松山祠)에 향사되었다. -태인에 살았다.-

정제원(丁濟元)
자는 백인(伯仁)이고 호는 취우당(醉愚堂)이며, 경인년(1590, 선조23)생이다. 영성인(靈城人)으로 정건(鄭鍵)의 아들이다. 지평에 추증되었다. 정묘년의 오랑캐 난리 때 의병을 일으켰다. -영광(靈光)에 살았다.-

홍남립(洪南立)
자는 탁이(卓爾)이고 호는 화곡(華谷)이며, 병오년(1606, 선조39)생이다. 남양인(南陽人)이며, 문과에 급제하였고 대사간을 지냈다. 전주(全州)의 학천사(鶴川祠)에 향사되었다. -전주에 살았다.-

이만업(李萬業)
금산인(金山人)이다. 손자인 이진병(李震炳)은 천거되어 관직에 제수되었다.


 

[주D-001]정축년 : 원문에는 빠져 있는데, 다른 자료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주D-002]문충공(文忠公) : 원문에는 빠져 있는데, 다른 자료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주D-003]주문(朱門)의 이등(二滕) : 주자(朱子) 문하의 뛰어난 제자인 등린(滕璘)과 등공(滕珙) 형제를 가리킨다. 등린은 자가 덕수(德粹)이고 호가 계재(溪齋)이며, 저서로는 《계재유고(溪齋遺稿)》가 있다. 등공은 자가 덕장(德章)이고 호가 몽재(蒙齋)이며, 저서로는 《경제문형(經濟文衡)》이 있다. 《宋元學案 卷69》
[주D-004]임인년 : 원문에는 기묘(己卯)로 되어 있는데, 기묘년은 선조 12년(1579)으로, 박정(朴筳)이 박추(朴簉)의 형이 되어서 맞지 않으므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거하여 임인(壬寅)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5]노련(魯連) : 노중련(魯仲連)으로, 제(齊)나라의 장수이다. 일찍이 조(趙)나라에 머물러 있을 적에 위(衛)나라에서 진(秦)나라 왕을 황제(皇帝)로 추대하여 군대를 철수시키게 하려고 하자, 노중련은 진나라가 무도한 나라임을 역설하면서, 진나라가 칭제(稱帝)한다면 자신은 동해(東海)에 빠져 죽을 것이라고 하여 중지시켰다. 《史記 卷83 魯仲連列傳》
[주D-006]남대(南臺) : 학행(學行)이 뛰어나 사헌부의 장령(掌令)이나 지평(持平)으로 추천된 사람을 말한다.
[주D-007]금산인(金山人)이다 …… 제수되었다 : 이 기사는 잘못되었다. 유씨(兪氏) 중에는 금산(金山)을 본관(本貫)으로 하는 데가 없으며, 유진병(兪震炳)이라는 인물은 찾을 수가 없다. 이는 아래에 나오는 이만업(李萬業)에 대한 기사를 잘못 삽입해 놓은 것이다.

 

산당집 ( 山堂集 )
형태서지 | 저 자 | 가계도 | 행 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형태서지
권수제  山堂集
판심제  山堂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  1866年刊
권책  5권 2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0.9×14.7(㎝)
어미  上花紋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도서번호  奎4040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16
 저자
성명  최충성(崔忠成)
생년  1458년(세조 4)
몰년  1491년(성종 22)
 弼卿
 山堂
본관  全州
특기사항  金宏弼의 문인. 南孝溫 등과 교유
 가계도
 崔德之
 直提學
 崔
 司勇
 密陽朴氏
 
 崔大成
 
 崔忠成
 
 全義李氏
 參議 李若水의 女
 崔演文
 萬戶
 女
 
 薛俊
 忠順衛

기사전거 : 家狀 및 萬姓大同譜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의 문집은 후손 崔邦彥이 소장하고 있던 草稿를 朴世采에게 校勘하여 1685년 원집 2권 1책으로 편집하였다. 그러나 오래도록 간행되지 못하고 稿本으로 남아 있던 것을 1805년에 9대손 崔爀이 宋煥箕의 序文을 받아 목판으로 간행하였다.《초간본》
그 후 후손 崔秉潤 등이 그의 부친이 轉寫하여 보관하고 있던 것에 부록을 덧붙여 別集ㆍ附錄 합 3권 1책을 편차하고 1866년 원집과 함께 5권 2책으로 간행하였다.《중간본》 현재 국립중앙도서관과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866년에 간행된 중간본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장본이다.
 구성과 내용
본 문집은 原集 2권ㆍ別集 1권ㆍ附錄 2권 합 2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1의 雜著는 〈續原人〉ㆍ〈讀小學文〉 외에 「小學」에 관한 글 3편, 〈讀進學解〉ㆍ〈正名論〉ㆍ〈天堂地獄辨〉 등이 실려 있다. 이 중 「小學」에 관한 글이 많은 것은 저자가 金宏弼의 제자로 「小學」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을 생활의 기본으로 삼은 데 연유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正名論〉은 군신과 부자의 名分을 바르게 함으로써 인륜을 밝히는 것이 중요함을 논하였으며, 〈藥戒〉는 병자가 藥으로 치유하는 이야기를 中心으로 국가 다스리는 것을 身體를 調理하는 데 비유하여 설명한 글이다.
권2의 書는 〈上佔畢齋先生書〉와 〈上湖南方伯求藥書〉로, 전자는 1487년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 점필재에게 佛巫의 폐해를 물리칠 것을 청하는 상서이며, 후자는 1490년 中風을 앓을 때 전라도 관찰사에게 약을 구하기 위해 올린 글이다. 記는 〈蒸室記〉와 〈警慮焚刻記〉로 中風을 치유하려고 힘쓰던 때의 기록이다. 傳은 〈山堂書客傳〉으로 1488년 과거에 응시하여 낙방한 후에 지은 自傳的인 글이다. 그 밖에 〈擬送張舍人歸江東序〉ㆍ〈擬齊王田橫墓誌〉ㆍ〈擬褚遂良諫立武氏爲后疏〉는 모두 擬作으로 義理ㆍ三綱을 강조한 내용들이다. 권미에는 1491년 盧伯玉이 쓴 〈上山堂書〉가 부록되어 있고, 1685년에 쓴 朴世采의 識가 있다.
권3은 別集으로 招宦遊子文, 雜說, 慶會樓記, 送韓侍郞謫湖州序, 題明道先生墓碑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招宦遊子文은 1488년 과거에 응시하여 낙방한 뒤에 지은 것으로 富貴에 집착하지 않고 江湖에서 自適하는 생활을 권하는 내용이다. 雜說은 두 편인데, 하나는 養材에 관한 글이고, 다른 하나는 仁을 통한 成材에 관한 글로 그 긴요함을 잘 나타낸 글이다.
권4는 附錄으로 家狀(후손 崔鍾翼 撰), 行狀(宋來熙 撰), 墓表(宋穉圭 撰)와 저자가 享祀된 鹿洞書院에 관한 기록 등을 모은 것이다. 그중 鹿洞書院에 관한 기록은 配享通文, 祝文, 金昌協과 宋相琦 등의 請賜額疏, 1713년 延額時 賜祭文과 후손 崔鍾翼이 이 事蹟 뒤에 썼던 글 등을 모은 것인데, 金昌協 등의 請賜額疏와 墓表 등은 편집상태 및 版型으로 보아 1866년 重刊시에 追刻한 것으로 보인다.
권5는 附錄으로 擅勝樓題詠과 저자의 손자 崔彥潾의 詩, 증손 崔福男의 行狀 2편(崔尙重ㆍ尹濟弘 撰)ㆍ墓表(李肇源 撰)를 모은 것이다. 그중 擅勝樓題詠은 저자의 아들인 崔演文의 別墅에 대해 읊은 金麟厚와 林億齡의 詩를 收錄한 것이다. 끝에 1866년에 쓴 후손 崔秉潤의 附錄後識가 있다.

필자 : 鄭弼

사계전서 제47권
 부록(附錄)
원향록(院享錄)

돈암서원(遯巖書院)
○ 선생이 살던 임리(林里)에 있다. 숭정(崇禎) 갑술년(1634, 인조12) -선생이 졸한 뒤 3년째 되는 해이다.- 에 사림에서 비로소 사우(祠宇)를 건립하여 향사하기를 예법대로 하였다. 효묘(孝廟) 무술년(1658, 효종9)에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을 추가로 배향(配享)하였다. 숙묘(肅廟) 무진년(1688, 숙종14)에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을 추가로 배향하고, 을해년(1695, 숙종21)에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 현묘(顯廟) 경자년(1660, 현종1)에 사액(賜額)하였다. 홍묘(洪廟) 경진년(1880, 고종17)에 임리에서 남쪽으로 1리쯤 떨어진 호계(虎溪)로 옮겨서 세웠다.

죽림서원(竹林書院)
○ 여산(礪山)의 황산(黃山)에 있다. 숭정(崇禎 천계(天啓)의 오류이다) 병인년(1626, 인조4)에 선생이 사림들을 선도하여 서원을 창립하고서 율곡(栗谷) 이이(李珥), 우계(牛溪) 성혼(成渾) 두 분 선생을 모셨다. 인묘(仁廟) 무자년(1648, 인조26)에 선생을 추가로 향사하였으며, 현묘(顯廟) 계묘년(1663, 현종4)에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퇴계(退溪) 이황(李滉) 두 분 선생을 추가로 향사하였다. 숙묘 을해년(1695, 숙종21)에 우암 송시열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 현묘 을사년(1665, 현종6)에 사액하였다.

소현서원(紹賢書院)
○ 해주(海州) 석담(石潭)에 있다. 만력(萬曆) 병술년(1586, 선조19)에 제생(諸生)들이 율곡의 유지(遺志)를 이어받아서 비로소 사우(祠宇)를 건립하고는 주자(朱子)를 모시고 정암과 퇴계 두 분 선생을 배향하였다. 병신년(1596, 선조29)에 율곡과 우계 두 분 선생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숙묘 정축년(1697, 숙종23)에 선생 및 우암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 만력 경술년(1610)에 사액하였다. -광해군 2년이다.-

자운서원(紫雲書院)
○ 파주(坡州) 자운산(紫雲山) 아래에 있으니, 바로 율곡 선생의 묘 아래에 있다. 만력 을묘년(1615, 광해군7)에 창건하고서 율곡 선생을 모셨다. 숙묘 계사년(1713, 숙종39)에 선생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 효묘 경인년(1650, 효종1)에 사액하였다.

문정서원(文井書院)
○ 봉산(鳳山)에 있다. 현묘(顯廟) 임자년(1672, 현종13)에 창건하고서 율곡 선생을 모셨으며, 선생 및 신독재 두 분을 배향하였다. 숙묘 무술년(1718, 숙종44)에 월당(月塘) 강석기(姜碩期)를 추가로 배향하였다.
○ 숙묘 계미년(1703, 숙종29)에 사액하였다.

병암서원(屛巖書院)
○ 청송(靑松)에 있다. 숙묘 무인년(1698, 숙종24)에 창건하고서 율곡 선생을 모셨으며, 선생을 배향하였다.
○ 숙묘 임오년(1702, 숙종28)에 사액하였다.

충현서원(忠賢書院)
○ 공주(公州)에 있다. 만력 신사년(1581, 선조14)에 창건하고서 주자를 모셨다. 숙묘 병인년(1686, 숙종12)에 선생 및 중봉(重峯) 조헌(趙憲), 동춘당 송준길, 우암 송시열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 석탄(石灘) 이존오(李存吾), 평사(評事) 이목(李穆), 동주(東洲) 성제원(成悌元), 고청(孤靑) 서기(徐起)를 함께 향사하였다. 인묘 을축년(1625, 인조3)에 사액하였다.

월봉서원(月峯書院)
○ 광주(光州)에 있으니, 바로 선생의 성향(姓鄕)이다. 인묘 병술년(1646, 인조24)에 창건하여 선생을 모셨으며, 뒤에 신독재를 추가로 배향하였다.
○ 눌재(訥齋) 박상(朴祥), 사암(思菴) 박순(朴淳),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을 함께 향사하였다.
○ 효묘 을미년(1655, 효종6)에 사액하였다.

화산서원(華山書院)
○ 익산(益山)에 있으니, 선생이 일찍이 이 고을의 수령으로 있었다. 효묘 갑오년(1654, 효종5)에 창건하여 선생을 모셨다. 숙묘 을해년(1695, 숙종21)에 우암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 숙묘 임진년(1712, 숙종38)에 사액하였다.

도기서원(道基書院)
○ 안성(安城)에 있으니, 선생이 일찍이 이 고을의 수령으로 있었다. 현묘 무신년(1668, 현종9)에 창건하여 위판(位版)을 봉안하였다.
○ 현묘 기유년(1669, 현종10)에 사액하였다.

봉암서원(鳳巖書院)
○ 연기(燕岐)의 동진강(東津江) 가에 있다. 효묘 신묘년(1651, 효종2)에 창건하여 선생을 모셨으며, 뒤에 동춘당과 우암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 송재(松齋) 한충(韓忠)을 함께 향사하였다.
○ 현묘 을사년(1665, 현종6)에 사액하였다.

숭현서원(崇賢書院)
○ 회덕(懷德)에 있다. 만력 을유년(1585, 선조18)에 창건하였으며, 인묘 병술년(1646, 인조24)에 선생을 향사하였다. 숙묘 을해년(1695, 숙종21)에 동춘당, 우암, 죽창(竹牕) 이시직(李時稷), 야은(野隱) 송시영(宋時榮)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 충암(沖菴) 김정(金淨), 규암(圭菴) 송인수(宋麟壽)를 함께 향사하였다.
○ 만력 을유년에 사액하였다.

[주D-001]신사년(辛巳年) : 원문에는 신미(辛未)로 되어 있는데, 만력 연간에는 신미년이 없기에 다른 자료를 참고해서 신사년으로 바로잡았다.

 

사계전서 제47권
 부록(附錄)
봉안문(奉安文)



돈암서원(遯巖書院) 봉안문(奉安文) [문인(門人) 정홍명(鄭弘溟)]

생각건대 우리 사계 선생께서는 / 惟我先生
천부적인 자질 아주 순수하였네 / 天賦粹美
바른 학문 말미암아 일어나시매 / 發軔正路
세속의 때 말끔하게 없어졌다네 / 遺落俗累
남의 착함 보고서는 본을 받았고 / 善取於人
자기 자신 바르게 할 학문 닦았네 / 學以爲己
가지런히 맘 모두어 도 닦으면서 / 竱心求道
자나 깨나 터득할 뜻 발하였다네 / 發於寤寐
성인들의 경전 속에 푹 빠져서는 / 沈潛經籍
은미하고 오묘한 뜻 밝혀내었네 / 揚扢微奧
예가의 설 특히 깊이 파고들어서 / 硏究禮家
털끝만 한 것까지도 다 분석했네 / 剖析毫縷
제가의 설 옳고 그름 변별하였고 / 辨別醇疵
고금의 설 두루두루 상고하였네 / 參證今古
스스로 몸 삼가면서 행실 닦으매 / 飭躬修業
행하는 일 법도에 딱 들어맞았네 / 動循規矩
참 알음과 몸소 행해 실천하는 공 / 眞知實踐
날로 더욱 새로웁고 많아졌다네 / 日新富有
떠맡은 짐 무거운데 갈 길 멀으매 / 任重致遠
평생토록 종사하길 기약하였네 / 期以悠久
어린아이 행할 예법 익힐 때부터 / 自習幼儀
백발노인 될 때까지 힘써 행했네 / 輥到白首
순수할사 그 정성은 끊어짐 없어 / 純誠無間
확고하게 자신의 뜻 잘 지키었네 / 確然自守
세상 온통 혼탁스런 때를 만나매 / 遭逢溷濁
자취 모두 이 세상과 어그러졌네 / 跡與世左
처한 처지 따라 마음 편히 지내며 / 素位而安
품은 지조 바꾸지를 아니하였네 / 不易吾介
온 방 안에 서책 잔뜩 쌓아 놓으매 / 一室圖書
성현들이 한방 안에 있는 듯했네 / 聖賢在座
남에게 덕 미쳐 감을 즐기었나니 / 樂於及人
선과 허물 추켜 주고 줄여 주었네 / 揚善裁過
온화하고 조용하게 사석 앉으매 / 雍容函丈
덕 물들어 화락함을 느끼게 했네 / 薰德飮和
나약한 자 굳건한 뜻 지니게 됐고 / 懶者有立
병든 자가 마치 차도 있는 듯했네 / 病若獲差
금과 옥 이를 비유하여 본다면 / 譬諸金玉
매일처럼 갈고 닦고 함과 같았네 / 日加礱磨
이와 같이 맘 편하게 내내 지내며 / 優游卒歲
그 이외의 다른 생각 아예 안 했네 / 遑恤其他
반정 나서 조정 다시 깨끗해지매 / 朝廷再肅
거듭거듭 예물 보내 불러올렸네 / 玉帛交辟
한 번 서울 올라와서 대궐에 나가 / 一入脩門
우악스런 성상의 뜻 보답하였네 / 庸答殊渥
시대 구할 어려운 일 채근하면서 / 匡時責難
한 말 모두 옛 성현이 한 말이었네 / 言則古昔
뭇사람들 비방하는 말이 싫어서 / 慍于多口
이에 다시 시골로다 내려오셨네 / 爰反初服
요순 시대 군민되게 하려는 생각 / 君民一念
어느 때고 해이하게 한 적 없었네 / 食息靡懈
그렇지만 상유 이미 박두해 오매 / 桑楡已迫
거취 속에 경계하는 뜻 붙이었네 / 去就存戒
이에 방문 닫아걸고 뜻을 기르매 / 杜門頤養
나이 따라 덕은 더욱 높아만 갔네 / 德隨年邁
어느 누가 알았으랴 하루저녁에 / 何知一夕
붉은 장막 아름다운 빛 흐려질 줄 / 絳帳晦彩

조야 사람 모두 서로 조상하면서 / 朝野相弔
거북 봉새 떠나감을 슬퍼하였네 / 龜亡鳳去
사림들 맘 이제부터 쓸쓸할 거니 / 士林牢落
어느 누굴 따르면서 본받을 건가 / 誰放誰與
그렇지만 남겨 놓은 풍모 있으니 / 猶有流風
아름다운 명예 어찌 사라지리요 / 曷泯終譽
이곳 사계 시냇가의 물굽이 보니 / 睠玆溪曲
선생께서 오가시며 노닐던 데네 / 杖屨之所
구름과 숲 옛날 모습 그대로인데 / 雲林如昨
사계의 물 비통스런 기색 띠었네 / 沙水帶愴
우러르고 굽어보며 생각노라니 / 俛仰觀感
그 음성과 모습 곁에 있는 듯하네 / 左右響像
이에 선생 길이 모실 사당 지어서 / 載營祠廟
존모하며 기리는 뜻 붙이었다네 / 以寓尊尙
봄가을로 공경스레 향화 올리니 / 春秋香火
아름다운 모습 위에 서려 계시네 / 競爽在上
부드럽고 화평스런 그 기상에다 / 沖和之氣
단단하고 묵중스런 그 자질이네 / 堅重之質
모습 마치 뭔가 생각 잠긴 듯했고 / 有儼其容
품은 학문 깊어 아주 심오하였네 / 有邃其識
지금 와선 이제 모두 다 끝났으나 / 今其已矣
나의 맘과 눈에 항상 남아 있구나 / 常在心目
아아 뜻을 같이하는 우리 동지들 / 嗟我同志
고루고루 가르쳐 준 은혜 입었네 / 均蒙敎迪
선생의 뜻 받들고서 행하여야지 / 奉持周旋
어찌 감히 실추시킬 수가 있으랴 / 寧敢失墜
그리하면 아름다운 선생의 이름 / 庶俾徽懿
천년토록 길이길이 밝을 것이리 / 不昧千禩

돈암서원 축문(祝文) [정홍명]

몸소 행함 순수하고 익숙하여서 / 躬行純熟
우뚝하니 크나큰 덕 이루시었네 / 蔚然成德
전 시대의 어진 이들 뒤 이어받고 / 紹述前脩
뒷 시대의 후학들을 틔워 주셨네 / 啓迪來學
일정한 법 달라지지 아니하나니 / 典刑未渝
존모하는 마음 더욱 도타워지네 / 尊尙彌篤
나란하게 제기 차려 놓았거니와 / 籩豆有楚
공경스런 마음 필시 흠향하시리 / 庶其昭假

죽림서원(竹林書院) 봉안문 [문인 송시열(宋時烈)]

생각건대 이곳 양호 논산 지방은 / 維玆兩湖
사대부들 많이 모여 사는 곳이네 / 士夫之林
전에 사당 여기에다 건립했나니 / 舊建明宮
그 자리는 바로 여기 강가로구나 / 于此江潯
율곡 우계 두 분 선생 향사하였고 / 享以栗牛
다시 우리 문원공을 향사하였네 / 曁我文元
생각건대 이 세 분의 현인들께선 / 惟玆三賢
실로 연원 서로 주고받으시었네 / 實承淵源
지난날 일 생각하매 율곡옹께선 / 念昔栗翁
석담에다 은병정사 세우시었네 / 建祠隱屛
주향으로 이에 고정 한 분 모시고 / 專祀考亭
두 분 선생 나란하게 배향하였네 / 配二先生
천년 지나 똑같았던 그분들 마음 / 千載一心
가을 달에 차디찬 물 그와 같았네 / 秋月寒水
저희들이 연원 찾아 거슬러 가매 / 我其沿溯
어찌 감히 그 처음을 모르오리요 / 敢昧其始

소현서원(紹賢書院) 봉안문 [송시열]

이민 시대 까마득히 멀고도 멀어 / 伊閩世遠
도와 말이 상실되고 없어졌다네 / 道喪言堙
율곡옹이 뒤를 이어 도학 열어서 / 栗翁繼開
못난 우리 후인들을 인도해 줬네 / 式牖我人
그 뒤 이어 탁월한 분 계시었나니 / 有卓其緖
바로 우리 선생께서 뒤를 이었네 / 先生是承
선생께서 지닌 자질 말해 본다면 / 先生之質
노둔하여 증자 같은 자질이었네 / 其魯如曾
선생께서 이룬 학문 말해 본다면 / 先生之學
첨엔 마치 하지 못할 것만 같았네 / 始如不能
다른 사람 한 번 하고 열 번 할 적에 / 人一人十
선생께선 백 번 하고 천 번 하였네 / 己百己千

어려움에 처해서도 형통했나니 / 習坎而亨
마음으로 기뻐하고 편히 여겼네 / 沛然怡然
온갖 이치 서로 간에 엉켜 있으매 / 萬理糾紛
천명인 양 분변하지 않음 없었네 / 莫不順俟
스승님과 부형에게 배우면서는 / 其於父師
들어간 바 비록 서로 달랐지만 / 所入雖異
들어가고 난 뒤에는 같게 되었네 / 旣入而同
이에 종묘 백관처럼 좋고 많아져 / 宗廟百官
두터웁고 우뚝하며 아주 깊어서 / 厚重崇深
공손하고 편안한 데 다다랐다네 / 幾乎恭安
율곡옹이 하신 학문 살펴보면은 / 蓋栗谷學
한결같이 고정의 뜻 위주로 했네 / 一主考亭
분석함이 어지럽지 아니하여서 / 析之不亂
정미로운 경지에 다 도달하였네 / 旣極其精
그러고서 모든 것을 종합하여서 / 亦旣合之
더할 나위 없이 크게 이룩하였네 / 其大無外
백대 뒤에 현인 나길 기다리어도 / 百世以俟
부절처럼 서로 맞아 계합될 거네 / 猶當符契
그런 데다 직접 친히 훈도 받으며 / 矧是親灸
분명하게 서로 주고받은 데이랴 / 授受端的
공력 쏟아 연구함이 아주 깊어서 / 最所用功
남은 단서 확연히 다 깨우치었네 / 通解遺緖
의심스런 예문에다 각종 변례를 / 疑文變節
만년 들어 더욱 깊이 연구하였네 / 晩益梳洗
선현들 뜻 이어받아 완성시키매 / 旣克遂紹
제대로 안 갖추어진 것이 없었네 / 罔有不備
우리 사문 우익되어 도운 공치고 / 羽翼之功
어느 것이 이보다 더 큰 게 있으랴 / 孰大於是
생각건대 이곳의 이 소현서원은 / 惟玆院宇
아득하니 오래전에 세워졌다네 / 逖焉刱始
우뚝하니 주인 자리 앉아 있는 건 / 巍然當座
바로 우리 자양 부자 그분이시네 / 紫陽夫子

조 문정공 우리 정암 선생께서는 / 惟趙文正
요순 시대 군민 만들 뜻 품었네 / 君民其志
그 뒤 우리 이 문순공 퇴계께서는 / 洎李文純
성리학의 이치 깊이 궁구하셨네 / 沈潛性理
그분들의 연원 찾아 올라가 보면 / 其所淵源
그 모두가 말미암아 온 바가 있네 / 皆來有自
율옹께서 이미 죽어 돌아가신 뒤 / 栗翁旣沒
곧장 바로 배향하잔 의논 있었네 / 旋有醊議
성 문간공 우계께서 말씀하시길 / 文簡曰玆
이 일은 쉽게 하기 어렵다 했네 / 似難輕易
그 뒤에 올리어서 향사를 하매 / 其後陞饗
조 문정공 다음 자리 앉으시었네 / 文正之次
가장 늦게 의논된 이 누구였던가 / 最後議者
바로 우리 성 문간공 그분이었네 / 曰惟文簡
문간공과 조 문정공 두 분 사이는 / 其於文正
한 꿰미로 꿴 듯 서로 이어받았네 / 承繼一貫
이에 동과 서로 각각 나눠 모시매 / 一東一西
문성공과 마주 대해 앉으시었네 / 對文成座
그 모습을 보면 마치 살아 생전에 / 有如平生
한자리서 학문 강마하는 듯했네 / 合席磨磋
이제 우리 사계 선생 봉안하나니 / 今奉先生
모신 자리 성 문간공 바로 아래네 / 位文簡下
이상에서 말한 다섯 선생들께선 / 凡五先生
비록 연원 서로 이어받은 듯하나 / 雖相襲沿
모두들 다 주 부자와 견주어 보면 / 皆於夫子
우러르고 뚫을수록 불가능했네 / 仰鑽高堅
나아간 바 그 조예에 대해 논하면 / 論其造詣
비록 얕고 깊은 차이 있긴 하지만 / 雖有淺深
그 요결을 깊이 따져 상고해 보면 / 考厥要訣
마음으로 마음에다 전한 것이네 / 以心傳心
한 당 안에 배향되어 향사받음이 / 一堂配侑
어느 누가 마땅하지 않다고 하랴 / 疇曰不宜
공경스레 제수 차려 진설해 놓고 / 敬陳牲幣
예의 갖춰 정성스레 제사 올리네 / 式薦禮儀
부디 와서 우리 후인 도와주시어 / 庶幾啓佑
영원토록 은혜 주길 기원합니다 / 以垂無期

도기서원(道基書院) 봉안문 [송시열]

자질 아주 순후하고 순수하였고 / 姿醇質粹
뜻과 업적 독실하고 독실하였네 / 志篤業專
일찌감치 모실 만한 스승 얻어서 / 早自得師
크나큰 도 제대로 잘 전수받았네 / 大道是傳
예와 의식 따져 보면 많고 많아서 / 禮儀纖微
삼백 가지 경례에다 삼천 곡례네 / 三百三千

이들 모두 털끝조차 다 분석하여 / 毫分縷析
강습하며 익히어서 다 통달했네 / 講貫羅穿
사문들은 이에 많은 힘을 입었고 / 斯文有賴
후학들은 그 은혜를 크게 입었네 / 後學受賜
그 예전에 약관 나이 되었을 적엔 / 昔在弱冠
학문하고 힘이 남아 벼슬 나갔네 / 學優登仕
주나라에 가서 시를 분변해 보고 / 觀周辨詩
제나라에 있으면서 소를 들으매 / 在齊聞韶
주나라의 예가 노에 있게 되었고 / 周禮在魯
하나라의 풍습 좋게 변하여졌네 / 夏變遷喬

문과 질이 양쪽이 다 아름다워서 / 文質彬彬
펼치이매 대성 음악 이루어졌네 / 展也大成
원근에다 두루두루 가르침 펴서 / 設敎遐邇
귀머거리 눈먼 봉사 틔워 주었네 / 幾牖聾盲
어쩜 그리 다행히도 이곳 안성은 / 何幸吾邦
남은 교화 펴신 은덕 입게 되었나 / 餘敎是蒙
무성에서 현가 소리 울린 것 같고 / 絃歌武城
문옹이 편 유교 교화 같았다네 / 儒化文翁
백성들은 착한 정사 그리워했고 / 民懷善政
선비들은 남은 풍모 우러렀다네 / 士仰遺風
그런 교화 어찌 잊혀지게 하리요 / 俾也可忘
성대한 덕 잘 형용해 전해야 하리 / 盛德形容
생각건대 아름다운 이 한 구역은 / 惟玆一區
형승 모습 완전하게 갖추어졌네 / 形勝都俱
사민들이 모두 함께 마음 모아서 / 士民齊心
보답하는 제사 올릴 생각하였네 / 報享斯圖
뜨락과 집 모습 아주 반듯도 하고 / 庭宇有覺
제수 물품 두루두루 다 갖춰졌네 / 籩豆孔皆
날짜 보니 길하고도 아주 좋으매 / 日吉辰良
뜻을 같이하는 이들 모여들었네 / 同好鼎來
생각건대 이로부터 시작된 이 일 / 維玆爰始
성대하게 일어나서 계속되리니 / 肹蠁無隳
영원토록 가르침의 비를 내려서 / 永濡雨敎
어긋나지 않도록 잘 끌어 주소서 / 勿替引之

도기서원 축문 [송시열]

예와 의식 따져 보면 많고 많아서 / 禮儀纖微
삼백 가지 경례에다 삼천 곡례네 / 三百三千
이들 모두 털끝조차 다 분석하여 / 毫分縷析
강습하며 익히어서 다 통달했네 / 講貫羅穿

도기서원 축문 [문인 송준길(宋浚吉)]

덕과 도는 성대하고 우뚝 높았고 / 德盛道尊
인과 예는 깊은 데다 아득 높았네 / 仁深禮崇
유풍 속에 남아 있는 교화 흡족해 / 遺風餘化
어리석은 우리에게 큰 은택 주리 / 惠我群蒙

화산서원(華山書院) 봉안문 [송시열]

황강에게 이어받은 문헌에다가 / 黃岡文獻
자운에게 공부 배운 연원이었네 / 紫雲淵源
품은 기운 두터웁고 완전하였고 / 氣厚而完
행한 행실 순후하고 돈독하였네 / 行醇而惇
학문함엔 노둔함을 위주로 했고 / 學以魯專
공 이룸엔 근면으로 이루었다네 / 功以勤成
경과 의를 두 가지 다 견지하였고 / 夾持敬義
명과 성을 양쪽 모두 진전시켰네 / 兩進明誠

지닌 덕이 높아짐에 미치어서는 / 迨其德尊
펼치이매 헤아리기 어려웠다네 / 展矣難量
높고 깊고 장엄하고 굳센 데다가 / 崇深莊毅
화평하고 자애롭고 착하였네 / 和易慈良
한쪽 구석 놓여 있는 우리 동방에 / 懿我東偏
이와 같이 정학하신 분이 있었네 / 有此正學
풍성 교화 두루두루 널리 퍼지매 / 風聲普被
원근 사람 모두들 다 심복하였네 / 遐邇思服
더군다나 여기 이곳 금마 지역은 / 矧玆金馬
전에 봉새 머물러서 있던 곳이네 / 于曾鳳棲

여기 와서 다스리고 교화 펴면서 / 旣治旣敎
덕과 예로 인도하고 바르게 했네 / 以導以齊
동안현과 같은 정사 이루어졌고 / 同安政成
호읍과도 같이 백성 순박해졌네 / 鄠邑民淳
이미 문옹 교화에 푹 젖어든 데다 / 旣濡翁化
진주 땅의 감화조차 이루어졌네 / 仍成晉薰
가이없이 크나크게 끼치신 은혜 / 罔極之恩
우리들만 유독히도 많이 입었네 / 於我有偏
높은 태산 무너진 지 몇몇 해던가 / 山頹幾年
그리우는 생각 이에 길고도 기네 / 敎思纏綿
선비들은 전수받은 심법 외우고 / 士誦心法
백성들은 칭송하여 구비 세웠네 / 民有口碑
그 어디에 우리 정성 붙이오리요 / 曷寓我誠
새로 세운 사당 이에 우뚝도 하네 / 新廟孔宜
반듯할사 지붕에다 담장이고요 / 持持屋墻
깨끗할사 섬돌에다 뜨락이라네 / 滌滌階庭
혼령께서 편히 쉬게 하길 꾀하매 / 諏日妥靈
희생과 술 자욱하게 향기 풍기네 / 腥醴
품은 생각 바람과 달같이 맑았고 / 風月襟懷
의형 모습 산악처럼 우뚝하였네 / 山岳儀形
오르내리시는 혼령 있는 듯하여 / 陟降如在
다시금 또 밝은 빛을 비추어 주네 / 復惠光明
이때 마침 새로운 명 내려졌나니 / 適玆新命
대궐 계신 임금께서 내리신 거네 / 降自九重
아름다운 시호 새로 내려졌거니 / 易爾嘉名
주염계가 그 옛날에 받았던 바네 / 濂翁所膺
시호 실로 선생 덕과 잘 어울리어 / 實稱斯德
찬란한 빛 번쩍번쩍 환히 빛나네 / 于光有耀
공경스런 마음으로 비문 써서는 / 敬題碑顔
경건스런 마음으로 이를 고하네 / 幷伸虔告

화산서원 축문 [송시열]

학문함엔 노둔함을 위주로 했고 / 學以魯專
공 이룸엔 근면으로 이루었다네 / 功以勤成
경과 의를 두 가지 다 견지하였고 / 夾持敬義
명과 성을 양쪽 모두 진전시켰네 / 兩進明誠
지닌 덕이 높아짐에 미치어서는 / 迨其德尊
펼치이매 헤아리기 어려웠다네 / 展矣難量
높고 깊고 장엄하고 굳센 데다가 / 崇深莊毅
화평하고 자애롭고 착하였다네 / 和易慈良

봉암서원(鳳巖書院) 봉안문 [송시열]

해동 나라 천년 세월 지나는 동안 / 海東千載
하늘에서 이 문성공 내시었다네 / 天挺文成
그 연원을 찾아보면 추로에 닿고 / 淵源鄒魯
주자 정자 그분들을 법받으셨네 / 準則朱程
어느 누가 이분 뒤를 이어받았나 / 誰嗣爲宗
바로 우리 탁월하신 문원공이네 / 有卓文元
일찌감치 과거 공부 뜻 안 두고서 / 早厭科場
먼저 근본 잘 세우길 도모하였네 / 先立本根
힘 남아서 학문 공부 힘을 써서는 / 餘力學文
이에 옛날 경전 깊이 탐구했나니 / 乃究典墳
요사 서로 주고받은 정일이었고 / 姚姒精一
낙건 힘써 행하였던 성경이었네 / 洛建誠敬
그 규모를 보매 이미 크고도 커서 / 規模旣大
나가는 길 이에 능히 바르게 됐네 / 門路克正
자신 자질 노둔하다 말하면서는 / 自謂質魯
남들보다 백배 천배 노력하였네 / 千百其功
깊이깊이 생각하고 실천했나니 / 精思實踐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한결같았네 / 惟一初終
그 공부가 완성됨에 미치어서는 / 及底其成
도와 덕이 온전하게 구비되었네 / 道全德備
혼후하고 우뚝 높고 아주 깊어서 / 渾厚崇深
끝 간 데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네 / 莫可涯涘
원근 사람 모두 다 교화받아서 / 遠邇承化
어리석고 몽매한 자 변화되었네 / 愚蒙式訛
내가 사는 여기 이곳 마을 역시도 / 厥亦吾鄕
서로 간에 거리 아주 멀지 않았네 / 地不甚遐
풍모 듣고 흠모하는 나의 마음은 / 聞風慕義
실로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달랐네 / 實異于他
더군다나 예 갖추어 제자 됐나니 / 況有摳衣
서하처럼 될 걸 전혀 의심 안 했네 / 罔疑西河
지난날에 화에 걸려들었을 적에 / 維昔罹亂
내가 사는 이곳으로 찾아오셨네 / 杖屨臨辱
초목들은 듬뿍 광채 머금었고 / 草木含光
못난 나는 본을 받을 바가 있었네 / 矧我有則
서로서로 앞다투어 대인 봤나니 / 爭相利見
기린이나 봉과 같은 덕이었네 / 麟瑞鳳德
지나가는 곳마다 다 교화됐나니 / 惟過有化
바라보매 어찌 감화 안 되었으랴 / 豈觀無感
대들보가 꺾여진 지 오래됐으나 / 梁壞已久
사모하는 맘은 더욱 깊어만 지네 / 羹慕彌深
이 사당에 향사되신 분이 있으니 / 彼侐有享
기묘년의 이름났던 분이로구나 / 己卯聞人

이에 여기 배향하길 꾀하여서는 / 諏玆腏食
경연 신하 임금에게 진달하였네 / 筵臣上陳
이에 끝내 은혜로운 편액 내려져 / 遂頒恩額
모든 일이 새로웁게 일신되었네 / 事面增新
이에 이제 좋은 날짜 가려 뽑고서 / 今涓吉辰
아름다운 이 의식을 올려 바치네 / 薦此縟儀
덕 있는 자 외로웁지 않은 법이니 / 德隣不孤
아름다운 명성 함께 드리울 거네 / 芳聲幷垂
영령이여 영원토록 편히 계시어 / 庶幾永寧
사모하는 저희 마음 위로하소서 / 以慰歆思

숭현서원(崇賢書院) 봉안문 [송시열]

지닌 자질 순후하고 완전하였고 / 質醇氣完
뜻과 학문 확고하고 전일하였네 / 志確學專
어렸을 때 바른 스승 아래 배워서 / 早自得師
전현들을 뒤따르길 힘쓰시었네 / 勉追前賢
이루어진 공 있음에 미치어서는 / 迨其有成
덕과 도가 갖추어져 완전하였네 / 德備道全
그 처음과 끝 찬찬히 살피어보면 / 究厥始終
모두 글로 서술하고 전할 만했네 / 具可言傳
선생께서 이룩하신 학문을 보면 / 先生之學
존성 거경 거기에다 근본을 두어 / 本諸誠敬
그것으로 사물 이치 통달하였고 / 以致其知
그것으로 조존하고 성찰했으며 / 以存以省
그것으로 인간 윤리 살피시었고 / 以察倫理
그것으로 성명 이치 통달하였네 / 以達性命
긴긴 해에 산림 속에 머물면서는 / 日長山林
오랫동안 참된 학문 힘써 닦았네 / 眞積力久
깊숙한 곳 탐색하고 두루 고증해 / 幽探旁訂
멀리 성현 소급하고 자신 지켰네 / 遠遡近守
이에 멀리 요와 순의 흠공서부터 / 粤自欽恭
중의 절사 인의 사물 모두 행했고 / 中仁絶勿
염의 기와 관의 예를 두루 거치고 / 濂幾關豫
민이 행한 박약까지 다 미치었네 / 逮閩博約
그리하여 한 꿰미로 꿴 듯했나니 / 一以貫之
정말 바른 도의 명맥 이은 것이네 / 允矣正脈
만년 들어 흥성하던 시기 만나매 / 晩際昌辰
예물 보내 부르는 명 거듭 내렸네 / 束帛鼎至
조정에서 예에 관해 의논을 하매 / 議禮朝端
백료들이 모두들 다 중히 여겼네 / 百僚是倚
물러 나와 집안에서 예 강론하매 / 退講於家
선비들이 바람에 풀 쓸리듯 했네 / 多士風靡
행장 오직 만난 처지 따라 했나니 / 行藏惟遇
몸이 이제 이미 늙어 쇠하여졌네 / 吾亦已衰
이에 오직 좋아하는 바 따르는 걸 / 惟其所好
자기 자신 맘속에서 결정하였네 / 尙屬自己
날로 더욱 새로웁게 하는 공부를 / 日新之功
늙어서도 그만두지 아니하였네 / 老而不已
꿋꿋하고 독실하게 실천하면서 / 強健篤實
자신 광채 드러내지 아니하였네 / 不顯其光
혼자만이 그 진보한 걸 깨달았나니 / 獨覺其進
어느 누가 깊숙한 속 엿보았으랴 / 孰窺宮墻
넓어지고 펴졌으며 온화했나니 / 廣胖溫文
볼 수 있는 것은 단지 그뿐이었네 / 可見者是
아득 높고 깊은 데다 순수했나니 / 崇深和粹
펼치어서 정말 크게 이룩하였네 / 展其成矣
예에 관해 말해 놓은 글들을 보면 / 惟是禮書
은미하고 미묘하여 뜻 무궁했네 / 密微無窮
두루두루 널리 찾아 정리하여서 / 探羅梳洗
어리석은 우리에게 은혜 끼쳤네 / 惠我羣蒙
이에 광채 찬란하게 빛이 났나니 / 于光有曜
어느 누가 황양과 함께 더불랴 / 孰與黃楊
선생께서 이룩하신 크나큰 덕업 / 惟玆德業
영원토록 어찌 잊을 수가 있으랴 / 沒世可忘
즐겁구나 여기 이곳 회덕 땅에는 / 於樂懷鄕
아름다운 물도 있고 언덕도 있네 / 有水有丘
사는 고장 서로 아주 가깝거니와 / 鄕邦密邇
우리들이 장수유식 하는 곳이네 / 於我藏修
선생께서 직접 이곳 찾아오시매 / 杖屨攸曁
수목조차 듬뿍 향기 머금었다네 / 樹草含香
덕행 비록 드러내지 아니했지만 / 不顯德行
오는 모습 걸음걸이 위풍 있었네 / 有來蹌蹌
낙하에서 뭇사람들 물 마시었고 / 洛河羣飮
진주 땅의 야인들 다 물이 들었네 / 晉鄙多薰
대들보가 꺾여진 지 십 년이건만 / 梁壞十年
추모하는 정은 더욱 깊어만 지네 / 追慕邇纏
예전부터 이곳에는 사당 있어서 / 維昔有廟
우리 세 분 현인들을 제사 지냈네 / 祀我三賢

오래되면 새로웁게 하는 법이니 / 故則當新
사당의 집 이에 새로 고치었다네 / 棟宇斯易
잣나무와 소나무로 집을 지으매 / 柏板松楹
뜨락 모습 반듯하고 반듯하다네 / 其庭有殖
이제 좋은 날짜를 잘 가려 뽑아서 / 今涓穀朝
동쪽 실에 합하여서 향사하였네 / 合享東室
학문이야 비록 서로 길 달랐지만 / 學雖殊塗
이룬 도는 모두가 다 똑같았다네 / 道則同轍
차린 제수 깨끗하고 아름다웁고 / 蘋藻淨嘉
진설하여 놓은 제기 많고도 많네 / 俎豆莘莘
영령이여 부디 밝게 이르러 와서 / 尙冀昭格
우리 후세 사람들을 틔워 주소서 / 啓佑後人

숭현서원 축문 [송시열]

지닌 자질 순후하고 완전하였고 / 質醇氣完
뜻과 학문 확고하고 전일하였네 / 志確學專
이루어진 공 있음에 미치어서는 / 迨其有成
덕과 도가 갖추어져 완전하였네 / 德備道全

충현서원(忠賢書院) 봉안문 [문인 이유태(李惟泰)]

우리 사계 선생께서 하신 학문은 / 先生之學
그 근원이 율곡에게 나온 거라네 / 出於栗翁
다시 위로 소급하여 올라가 보면 / 溯而上之
그 연원은 회암 문공 주 부자라네 / 晦菴文公
문공께서 지으셨던 가례 한 책을 / 文公家禮
선생께선 깊이 믿어 떠받들었네 / 先生是崇
하늘 이치 아름답게 꾸며 내었고 / 天理節文
자기 사욕 이겨 내어 예 회복했네 / 克己乃復
공 부자가 후세에게 전수한 거를 / 孔氏之傳
증자께서 끝내 모두 얻으셨다네 / 曾子卒得
우리 동방 조선에서 도 주창하매 / 倡道東方
많은 선비 줄을 이어 몰려들었네 / 多士莘莘
이에 문하 추로의 풍 이루어지고 / 門成鄒魯
세속 풍습 일신되어 확 바뀌었네 / 俗化一新
우리 동방 살고 있는 사람들치고 / 凡在我東
어느 누가 어버이를 아니 받들랴 / 孰不尊親
돌아보매 여기 이곳 공주 지역은 / 顧惟是邦
선생께서 전에 임해 오셨던 데네 / 杖屨攸曁

예전부터 여기에는 사당 있어서 / 舊有廟宇
문공 한 분 모시고서 제사 지냈네 / 文公是祀

선생께서 이곳 사당 배향이 되매 / 先生且配
묘우 더욱 아름다운 광채가 나네 / 于廟有光
전 올리어 경건하게 고하옵나니 / 奠以告虔
부디 밝게 임하여서 오시어서는 / 尙其昭明
우리 못난 후학에게 은혜 끼치되 / 惠我後學
영원토록 싫어하지 마시옵소서 / 永永無斁

문정서원(文井書院) 축문 [좌의정 이단하(李端夏)]

우리 도학 적전 이어받은 분이고 / 道學嫡傳
우리 예교 종사되는 분이었네 / 禮敎宗師
선생 전에 임하셨던 곳이거니와 / 杖屨所及
제사 올려 받드는 게 마땅하도다 / 俎豆攸宜


[주D-001]생각건대 …… 선생께서는 : 이 부분이 원문에는 없는데, 운자(韻字)가 맞지 않기에 정홍명(鄭弘溟)의 《기암집(畸菴集)》 제10권 〈사계서원봉안제문(沙溪書院奉安祭文)〉에 의거하여 보충해서 번역하였다. 원문은 ‘惟我先生’이다.
[주D-002]요순(堯舜) …… 생각 : 지극한 치세(治世)를 이루어서 당대의 임금과 백성을 요순 시대의 임금과 백성처럼 만들려는 생각을 말한다.
[주D-003]상유(桑楡) : 인생의 말년이 된 것을 말한다. 상유는 해가 질 때 햇빛이 뽕나무와 느릅나무의 꼭대기에 비치는 것으로, 《태평어람(太平御覽)》 제3권에 이르기를, “해가 서산으로 떨어질 때 햇빛이 나무의 꼭대기에 비치는 것을 상유라고 한다.” 하였다.
[주D-004]어느 …… 줄 : 스승이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는 뜻이다. 붉은 장막은 사문(師門)이나 강석(講席)을 가리키는 말로, 한(漢)나라 때 마융(馬融)이 붉은 장막을 치고서 선비들을 강학하였다. 《後漢書 卷60上 馬融列傳》
[주D-005]은병정사(隱屛精舍) : 선조 11년(1578)에 황해도 벽성군(碧城郡) 석담리(石潭里)에 세웠던 정사로, 주자를 주향(主享)으로 하고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와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배향으로 하였던 정사인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그 뒤 선조 37년(1604)에 복원하였으며, 광해군 2년(1610)에 소현서원(紹賢書院)이라는 편액을 하사받았다.
[주D-006]이민(伊閩) : 이수(伊水)와 민(閩)으로, 송나라 때의 학자로서 여기에 살았던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등의 유학자를 가리킨다.
[주D-007]노둔하여 …… 자질이었네 : 정명도(程明道)가 말하기를, “증삼(曾參)은 노둔(魯屯)함으로써 도를 얻었다.” 하였다. 《近思錄 爲學》
[주D-008]다른 …… 하였네 : 남들보다 부지런히 힘썼다는 뜻이다. 《중용장구(中庸章句)》에 이르기를, “남이 한 번에 능하거든 나는 백 번을 하며, 남이 열 번에 능하거든 나는 천 번을 하여야 한다.[人一能之 己百之 人十能之 己千之]” 하였다.
[주D-009]이에 …… 많아져 : 덕이 높고 커서 다른 사람들이 헤아려서 알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숙손무숙(叔孫武叔)이 중니(仲尼)보다 자공(子貢)이 더 낫다고 하자, 자공이 말하기를, “대궐의 담장에 비유하면 나의 담장은 어깨에 미쳐 집 안의 좋은 것들을 들여다 볼 수 있지만, 부자(夫子)의 담장은 여러 길이나 되어 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종묘의 아름다움과 백관의 많음을 볼 수가 없다.” 하였다. 《論語 子張》
[주D-010]생각건대 …… 그분이시네 : 해주(海州)의 석담(石潭)에 있는 소현서원(紹賢書院)은 선조 19년(1586)에 제생(諸生)들이 율곡의 유지(遺志)를 이어받아서 건립하였는데, 주자(朱子)를 주향(主享)으로 모시고 정암(靜菴)과 퇴계(退溪) 두 분 선생을 배향하였으며, 선조 29년(1596)에 율곡과 우계(牛溪) 두 분 선생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주D-011]우러르고 …… 불가능했네 : 도저히 미칠 수 없었다는 뜻이다. 안연(顔淵)이 공자의 도에 대해서 탄식하기를,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고 뚫을수록 더욱 견고하며, 바라보매 앞에 있더니 홀연히 뒤에 있도다.[仰之彌高 鑽之彌堅 瞻之在前 忽焉在後]” 하였다. 《論語 子罕》
[주D-012]예와 …… 곡례네 : 예의 조목이 많음을 형용하는 말로, 《예기(禮記)》 예기(禮器)에 “경례가 삼백 가지이고 곡례가 삼천 가지인데, 그 근본을 따져 보면 성경 한 가지일 뿐이다.[經禮三百 曲禮三千 其致一也]” 하였다.
[주D-013]주(周)나라에 …… 보고 : 중국에 가서 풍습을 살펴보았다는 뜻이다. 춘추(春秋) 시대 때 오(吳)나라의 계찰(季札)이 상국(上國)에 두루 조빙하면서 당시의 어진 사대부들과 사귀었으며, 노(魯)나라에 가서 주나라의 음악을 보고는 열국(列國)의 치란과 흥망을 알았다. 《史記 卷31 吳太伯世家》 여기서는 사계가 34세 때 주청사(奏請使)로 가는 아버지 황강(黃岡) 김계휘(金繼輝)를 따라 중국에 가서 문물을 살펴본 것을 말한다.
[주D-014]제(齊)나라에 …… 들으매 : 역시 중국에 가서 문물을 살펴보았다는 뜻이다. 소(韶)는 순 임금의 음악이다. 공자가 제(齊)나라에 있으면서 음악을 들어보고는 3개월 동안 고기 맛을 모르면서 말하기를, “음악이 이처럼 즐거운지는 미처 몰랐다.” 하였다. 《論語 述而》
[주D-015]주(周)나라의 …… 변하여졌네 : 중국의 옛 예법이 우리나라로 옮겨져 와서 우리나라의 풍습이 좋게 변하였다는 뜻이다.
[주D-016]무성(武城)에서 …… 것 : 수령이 정사를 하는 데에 법도가 있어 백성들이 안락하게 지내는 것을 말한다. 노(魯)나라의 자유(子遊)가 무성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예악(禮樂)으로 가르쳤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모두 현(絃)을 뜯으면서 노래하였다고 한다. 《論語 陽貨》
[주D-017]문옹(文翁)이 …… 교화 : 학교(學校)를 세워 학문을 가르치는 것을 말한다. 문옹이 한(漢)나라 경제(景帝) 때 촉군(蜀郡)의 태수(太守)가 되어 학교를 세워 문풍(文風)을 크게 떨치게 하니, 조정에서 각 고을마다 학교를 세우게 하였다.
[주D-018]황강(黃岡)에게 …… 문헌에다가 : 황강은 사계의 아버지인 김계휘(金繼輝)의 호이다. 여기서는 가학(家學)을 전수받은 것을 뜻한다.
[주D-019]자운(紫雲)에게 …… 연원이었네 : 자운은 율곡(栗谷)을 모신 자운서원을 가리킨다. 사계는 송익필(宋翼弼)에게서 배운 뒤 율곡에게도 사사(事師)하였다.
[주D-020]경(敬)과 …… 진전시켰네 : 경(敬)은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고, 의(義)는 행실을 바르게 하는 것이며, 명은 명철(明哲)이고, 성(誠)은 진성(眞誠)으로, 이 네 가지는 성리학자들의 중요한 수행 방법에 속하는 것들이다. 주자(朱子)의 백록동부(白鹿洞賦)에 이르기를, “명과 성 두 가지를 병진해야만 하고, 경과 의 두 가지를 함께 세워야 하네.[曰明誠其兩進 抑敬義其偕立]” 하였다.
[주D-021]더군다나 …… 곳이네 : 금마(金馬)는 익산(益山)의 별칭으로, 사계가 익산 군수(益山郡守)를 지냈으므로 한 말이다. 봉새가 와서 머물렀다는 것은, 봉새나 난새는 본디 가시나무나 탱자나무에는 앉지 않는 법인데 잘못 거기에 앉았다는 뜻으로, 뛰어난 재주를 가진 인재가 제자리를 얻지 못하고 익산같이 작은 고을의 수령으로 있었다는 뜻이다.
[주D-022]덕(德)과 …… 했네 : 공자가 말하기를, “백성들을 인도하기를 덕으로 하고 가지런하게 하기를 예로써 하면 백성들이 부끄러워함이 있게 되고 또 선(善)에 이를 것이다.[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하였다. 《論語 爲政》
[주D-023]동안현(同安縣)과 …… 이루어졌고 : 동안현은 천주(泉州)에 있는 현 이름으로, 주자가 일찍이 이곳의 주부(主簿)로 있으면서 백성들의 자제를 뽑아 날마다 성현의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를 강설하고 여자들이 승려(僧侶)나 도사(道士)가 되는 것을 금하면서 교화를 폈다. 《宋史 卷429 朱熹傳》
[주D-024]호읍(鄠邑)과도 …… 순박해졌네 : 호읍은 섬서성(陝西省)에 있는 지명이다. 송나라 때 정명도(程明道)가 이곳의 주부(主簿)로 있을 적에, 이곳의 백성 가운데 형의 집을 빌려서 살고 있던 자가 땅을 파다가 숨겨진 돈을 발견하였다. 그러자 형의 아들이 그 돈을 차지하고자 자기 아버지가 숨겨 놓은 돈이라고 우기면서 소송을 걸었는데, 정명도가 그것이 거짓임을 밝혀내니, 이를 본 호읍 사람들이 모두들 거짓으로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순박해졌다. 《宋史 卷427 程顥傳》
[주D-025]문옹(文翁) 교화 : 학교를 세워 학문을 가르치는 것을 말한다. 문옹이 한(漢)나라 경제(景帝) 때 촉군(蜀郡)의 태수(太守)가 되어 학교를 세워 문풍(文風)을 크게 떨치게 하니, 조정에서 각 고을마다 학교를 세우게 하였다.
[주D-026]진주(晉州) 땅의 감화 : 일부러 가르치지 않아도 사람들이 그 덕에 감화되어 착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당나라 때의 명신(名臣)인 양성(陽城)이 벼슬에 나가기 전에 옛사람의 도를 행하면서 진주의 들판에서 거주하였는데, 진주 사람들이 그 덕에 감화되어 선량해진 자가 몇천 명이었다고 한다. 《古文眞寶 爭臣論》
[주D-027]구비(口碑) : 여러 사람들이 모두들 다 칭송하는 소리를 하여 마치 송덕비(頌德碑)를 세운 것 같다는 뜻이다.
[주D-028]주염계가 …… 바네 : 염계 주돈이(周敦頤)의 시호가 원공(元公)으로, 사계의 시호인 문원공(文元公)과 ‘원(元)’ 자가 같으므로 한 말이다.
[주D-029]추로(鄒魯) : 맹자(孟子)와 공자(孔子)를 가리킨다. 맹자는 추(鄒)나라 사람이고 공자는 노(魯)나라 사람이다.
[주D-030]요사(姚姒) …… 정일(精一)이었고 : 요사는 우순(虞舜)과 하우(夏禹)로, 순 임금과 우 임금이 서로 주고받았다는 심법(心法)인 유정유일(惟精惟一)을 말한다.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에,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니, 정하게 하고 한결같이 하여야만 진실로 그 중도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하였다.
[주D-031]낙건(洛建) …… 성경(誠敬)이었네 : 낙건은 송나라의 학자로 낙양에 살았던 정명도(程明道)와 정이천(程伊川) 및 건명(建明)에 살았던 주자(朱子)를 가리키고, 성경은 정주학(程朱學)의 중요한 수행 방법인 존성(存誠)과 거경(居敬)을 말한다.
[주D-032]서하(西河)처럼 …… 했네 : 많은 제자들이 몰려들 것으로 생각한다는 뜻이다. 서하는 서하 교수(西河敎授)로 있었던 자하(子夏)를 가리키는데, 자하는 학교를 일으켜 제자들을 가르쳤다.
[주D-033]지나가는 …… 교화됐나니 : 군자다운 덕을 지니고 있어서 가만히 있어도 교화가 되었다는 뜻이다. 맹자가 말하기를, “군자는 지나는 곳마다 다 교화가 되며, 마음에 두고 있으면 신묘해진다.[夫君子 所過者化 所存者神]” 하였다. 《孟子 盡心上》
[주D-034]이 …… 분이로구나 : 봉암서원(鳳巖書院)은 연기(燕岐)의 동진강(東津江) 가에 있는 서원으로, 효종 2년(1651)에 창건되었는데, 중종 때의 문신인 조광조(趙光祖)와 교분이 있다는 이유로 거제도(巨濟島)로 귀양 갔다가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연루되어 장살(杖殺)된 한충(韓忠)을 향사하였다.
[주D-035]요(堯)와 순(舜)의 흠공(欽恭) : 흠공은 공경스럽고 공손하다는 뜻으로, 모두 요 임금과 순 임금의 덕을 형용하는 말이다.
[주D-036]중(中)의 …… 사물(四勿) : 중(中)은 성인 가운데에서 시중(時中)인 공자(孔子)를 가리키고, 절사(絶四)는 공자에게 절대로 없었다고 하는 네 가지 마음으로, 사사로운 뜻이 없는 무의(毋意), 기필하는 마음이 없는 무필(毋必), 집착하는 마음이 없는 무고(毋固), 이기심이 없는 무아(毋我)를 말한다. 인(仁)은 공자의 제자로 인(仁)을 행한 안자(顔子)를 가리키며, 사물(四勿)은 예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非禮勿視], 예가 아니면 듣지도 말고[非禮勿聽], 예가 아니면 말하지도 말고[非禮勿言], 예가 아니면 동하지도 말라[非禮勿動]는 네 가지를 가리킨다.
[주D-037]염(濂)의 …… 예(豫) : 염(濂)은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를 가리키고, 관(關)은 관중(關中)에 살았던 장재(張載)를 가리키며, 기(幾)와 예(豫)는 미상(未詳)이다.
[주D-038]민(閩)이 행한 박약(博約) : 민(閩)은 주자(朱子)를 가리키고, 박약은 널리 학문을 닦고 이를 예(禮)로써 요약한다는 뜻인 박문약례(博文約禮)를 가리킨다.
[주D-039]행장(行藏) : 행은 관직에 나아가는 것이고, 장은 물러나 은거하는 것으로, 《논어》 술이(述而)에, “등용되면 나가 행하고 버려지면 물러나 은거한다.[用之則行 舍之則藏]” 하였다.
[주D-040]넓어지고 …… 온화했나니 :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부(富)는 집을 윤택하게 하고, 덕은 몸을 윤택하게 하니, 덕이 있으면 마음이 넓어지고 몸이 펴진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뜻을 반드시 성실하게 하는 것이다.[富潤屋 德潤身 心廣體胖 故君子 必誠其意]” 하였다. 《大學章句 傳6章》
[주D-041]황양(黃楊) : 주자의 제자로 예설(禮說)을 지었던 황간(黃榦)과 양복(楊復)을 가리킨다.
[주D-042]장수유식(藏修遊息) : 장수는 항상 학문을 닦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을 말하며, 유식은 정해진 과정에 의해 학문을 닦는 이외의 쉬는 시간에도 학문에 마음을 두는 것을 말한다.
[주D-043]낙하(洛河)에서 …… 마시었고 : 모든 사람들이 와서 마음껏 배웠다는 뜻이다. 낙하는 낙수(洛水)와 하수(河水)를 가리킨다. 주자가 정이천(程伊川)과 정명도(程明道)에 대해서 말하기를, “선생의 말씀은 까다롭지 않고 쉬워서 어진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모두 그 이익을 받았으며, 뭇사람들이 하수에서 물을 마시는 것과 같이 모두들 마음껏 마실 수가 있었다.” 하였다. 《近思錄 卷14》
[주D-044]진주(晉州) …… 들었네 : 일부러 가르치지 않아도 사람들이 그 덕에 감화되어 착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당나라 때의 명신(名臣)인 양성(陽城)이 벼슬에 나가기 전에 옛사람의 도를 행하면서 진주의 들판에서 거주하였는데, 진주 사람들이 그 덕에 감화되어 선량해진 자가 몇천 명이었다고 한다. 《古文眞寶 爭臣論》
[주D-045]예전부터 …… 지냈네 : 숭현서원은 회덕(懷德)에 있는 서원으로, 선조 13년(1580)에 지방 유림(儒林)의 발의로 세워졌다. 처음에는 정광필(鄭光弼), 김정(金淨), 송인수(宋麟壽) 세 분을 향사하였다.
[주D-046]추로(鄒魯)의 풍(風) : 바른 학문을 하는 풍조를 말한다. 추로는 맹자(孟子)와 공자(孔子)를 가리킨다. 맹자는 추(鄒)나라 사람이고 공자는 노(魯)나라 사람이다.
[주D-047]돌아보매 …… 데네 : 사계는 갑자년에 이괄의 난이 일어나 인조(仁祖)가 공주(公州)로 내려왔을 때 공주에서 인조를 알현하였으며, 정묘호란이 일어나 세자가 내려왔을 때에도 공주에서 세자를 호위하였다.
[주D-048]예전부터 …… 지냈네 : 충현서원(忠賢書院)은 공주에 있는 서원으로, 선조 14년(1581)에 창건되었으며, 주자(朱子)를 모셨다.

 

 

 

사계전서 제48권
 부록(附錄)
가장(家狀) [김)]


선군자(先君子)는 휘(諱)가 장생(長生)이고 자(字)가 희원(希元)인데, 학자들은 사계 선생(沙溪先生)이라고 칭하였으며, 본관(本貫)은 광주(光州)이다. 광주 김씨(光州金氏)는 우리나라의 명족(名族)으로, 대개 그 계파(系派)가 신라(新羅)에서 시작되어 천여 년을 내려오면서 점점 더 두드러졌다. 신라 말기에 왕자(王子) 휘 흥광(興光)이란 분이 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미리 알고는 스스로 서민이 되어 광주로 피하여 숨어 살았으므로, 그 자손들이 그대로 광주를 본관으로 삼게 된 것이다. 고려(高麗) 시대에 이르러서 크게 두드러진 성씨가 되었으니, 8대가 연이어 평장사(平章事)를 지냈으며, 이 때문에 그 거주지의 이름을 평장동(平章洞)이라고 하였다. 그 이후로는 자손들이 서로 뒤를 이어 대대로 대관(大官)이 되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도관찰사(都觀察使) 휘 약채(若采)라는 분이 당대에 이름을 드날렸다. 이분이 휘 문(問)을 낳았는데, 이분은 약관(弱冠)에 급제하였으나 관직이 검열(檢閱)에 이르렀을 때 일찍 돌아가시고 말았으며, 뒤에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찬성공의 배위(配位)인 허씨(許氏)는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는데, 대사헌 휘 허응(許應)의 따님이다. 이분은 절행(節行)으로 인해 정려(旌閭)되었다. 그로부터 1세를 건너뛰어서 휘 국광(國光)이란 분이 좌의정을 지냈으며, 두 가지의 공신(功臣)에 녹훈(錄勳)되고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해졌는데, 이분이 바로 선군자의 5대조이다.
고조는 휘가 극뉵(克忸)으로 사간원 대사간을 지냈으며, 예조 참판에 추증되고 광원군(光原君)에 봉해졌다. 증조는 휘가 종윤(宗胤)인데, 진산 군수(珍山郡守)를 지내고 병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조부는 휘가 호(鎬)인데, 지례 현감(知禮縣監)을 지내고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고(考)는 휘가 계휘(繼輝)인데, 사헌부 대사헌을 지내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판서공은 총명하고 박문달식(博文達識)하여 경사(經史)에 훤히 통하였고,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재주를 갖고 있었으므로, 그 당시의 명현(名賢)인 사암(思菴) 박순(朴淳)이나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같은 분들이 모두 큰일을 해낼 인물로 여겨 중시하면서 기꺼이 벗으로 삼을 정도였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은 조정에서 늘상 말하기를, “진짜 재상감을 구하고자 하면 김계휘가 바로 그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미처 자신의 역량을 다 펴 보이기도 전에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므로, 조야(朝野)의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애석하게 여기고 있다.
비(妣)는 정부인(貞夫人) 신씨(申氏)인데, 평산(平山)의 이름난 성씨로서 고려조에 태사(太師)를 지낸 장절공(壯節公) 휘 신숭겸(申崇謙)의 후손이며, 의정부 우참찬을 지내고 시호(諡號)가 이간공(夷簡公)인 휘 신영(申瑛)의 따님이다. 그 조부는 휘가 신세경(申世卿)으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는데, 행 사직서 영(行社稷署令)을 지냈다. 증조는 휘가 신자계(申自繼)로,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행 전생서 주부(行典牲署主簿)를 지냈다. 고조는 휘가 신효(申曉)인데, 사간원 우정언을 지냈으며, 강직한 것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그리고 외조(外祖)는 학생(學生) 우석규(禹錫圭)인데 관향(貫鄕)이 단양(丹陽)이다.
선군(先君)은 가정(嘉靖) 무신년(1548, 명종3) 7월 8일 신시(申時)에 한성(漢城)의 정릉동(貞陵洞) 집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몸가짐이 장중하여 함부로 말하지 않고 장난질도 하지 않아 식자들이 이미 덕기(德器)가 될 인물임을 알아보았다. 11세 때 어머니를 여의었는데, 마침 왕부(王父)가 관직에서 내쫓김을 당하였을 때였으므로 왕대부(王大父)인 찬성공(贊成公)에게 가서 자랐다. 부형들이 선군의 외롭고 고생스러운 처지를 가엾게 여긴 나머지 차마 밖으로 내보내어 공부를 시키지 못하였다. 그러나 조금 더 자라서는 본인 스스로가 분발하여 곧바로 바른길을 찾았으며, 모든 시속(時俗)의 풍조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을 두지 않았다.
처음에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에게 나아가 종학(從學)하여 사서(四書)와 《근사록(近思錄)》 등을 배웠는데, 성심으로 좋아하고 기뻐하여 마치 맛있는 고기를 즐기듯이 하였다. 그로부터 학업(學業)이 점점 성취되자 왕부가 기뻐하면서 “우리 아이가 이미 학문을 할 줄 아니, 이제부터는 내가 걱정이 없다.”고 하였다. 장성함에 미쳐서는 율곡 선생에게 나아가 수업하였는데, 여러 차례 해서(海西)에 가서 그 문하(門下)에 머물면서 옛날에 배웠던 내용을 되씹어 보고 새로운 내용을 익히기도 하면서 한결같이 내면적인 자기 완성의 공부에 주력하였다. 그러면서 도학(道學)의 요체에 관해 자세히 들었으며 특히 예학(禮學)에 대해서 더욱더 깊이 연구하였다. 그리하여 갖가지 절목(節目)에 관해 환히 알고 크고 작은 모든 예절에 관해 다 파악하였으므로, 율곡 선생이 늘 우리 선군에게 마음을 쏟으면서 크게 기대하였다.
그 당시에 왕부(王父)가 관서(關西) 지방을 맡아 나가 있었는데, 선군은 문안하기 위해 그곳으로 가 머물러 있는 때가 많았다. 관서 지방은 본디 번화하다고 칭해지는 곳으로, 대소 유랑객들이 날마다 놀고 즐기기를 일삼는 곳이었다. 그런데도 선군은 다른 사람들과 휩쓸려 노는 시늉을 하면서 겉으로는 아무런 간격을 두지 않은 듯이 하였으나, 몸가짐만은 항상 정제되고 엄숙하게 하여 끝까지 성색(聲色)을 몸에 가까이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당시의 사우(師友)들이 모두들 칭찬하고 감탄하면서 다른 사람은 따라 하기 어려운 일이라고들 하였다.
만력(萬曆) 무인년(1578, 선조11)에 조정에서 학행(學行)이 있는 선비를 골라 등용할 때, 선군은 ‘성인의 경전에 조예가 깊고 옛날의 교훈을 돈독히 믿는다.[沈潛聖經 篤信古訓]’는 천목(薦目)으로 추천되어 처음으로 창릉 참봉(昌陵參奉)에 제수되었다. 그로부터 3년 후인 신사년(1581)에는 왕부를 따라 중국(中國)에 가게 되었는데, 이조에서 ‘재랑(齋郞)의 자리를 오래 비워 둘 수 없다.’고 아뢰어 돈녕부 참봉(敦寧府參奉)과 자리를 서로 바꾸었다. 일만 리가 넘는 먼 길을 왕복하는 동안에는 왕부의 곁에서 봉양하면서 성효(誠孝)를 극진하게 하였는데, 주위에서 보고 듣는 사람들이 감동할 정도였다. 아침이나 저녁 식사 때가 되면 반드시 곁에 앉아서 몇 수저나 드시는가를 마음속으로 세어서 왕부의 건강 상태를 살펴보기를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임오년(1582, 선조15)에는 또 재행(才行)이 남다르다고 하여 승서(陞敍)하라는 명이 있었다. 그러나 그해 여름에 왕부의 상을 당해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며 상제(喪制)를 마쳤다. 갑신년(1584)에 순릉 참봉(順陵參奉)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후 병으로 인해 체차되었으며, 조금 있다가 또 평시서 봉사(平市署奉事)로 승진되었는데, 그것은 전번의 명에 의한 것이었다.
병술년(1586)에는 관직을 그만두고 몇 년 동안 집에 있었는데, 그동안에도 활인서 별제(活人署別提)와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 사옹원 봉사(司甕院奉事) 등의 관직에 제수하는 명이 내렸지만 모두 병 때문에 사양하였다. 무자년(1588)에는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고, 경인년(1590) 겨울에는 임기가 만료되어 규례에 따라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에 승진되었다. 신묘년(1591) 봄에는 정산 현감(定山縣監)으로 나가 인자하고도 간솔한 정치를 하면서 잔폐된 백성들에게 되살아날 길을 터 주고 폐단을 바로잡는 데 주력하였다.
이듬해인 임진년(1592)에 왜적(倭賊)이 대거 침입하여 팔도 전역이 모두 큰 상처를 입었다. 이에 왕은 서쪽으로 파천(播遷)의 길을 떠났고 큰길은 다 막혔는가 하면 삼남(三南)에서는 군대의 왕래가 그칠 사이가 없었으며, 중앙이나 지방이나를 막론하고 떠도는 백성들이 줄을 이었다. 그때 선군은 온몸과 마음을 다 바쳐 책응(策應)함으로써 위로는 국가의 기무를 어긋나지 않게 하였고 아래로는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하는 일을 폐하지 않았으므로, 온 경내의 백성들이 감격하고 우러르면서 모두들 선군을 의지하였다. 이에 방백(方伯)이 ‘온 정성을 다하면서 거짓이 없었고, 정사를 함에 있어서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고 계문하여 포상을 받았다.
병신년(1596) 여름에 임기를 마치고 체직되자 연산(連山)으로 돌아와 있다가 그해 겨울에 호조 정랑에 제수되었다. 정유년(1597) 여름에는 호남(湖南)으로 내려가 중국 군대의 군량미(軍糧米)를 지원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그 뒤 조정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어떤 일로 인하여 파면되어 해서(海西)로 가서 우거(寓居)하였다. 그 당시는 너무나도 어수선한 때였으므로 모두들 학업(學業)을 전폐하다시피 한 상태였지만, 선군은 날마다 그곳의 자제(子弟) 및 학도(學徒)들과 더불어 학문에 종사하면서 글 읽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비록 끼니가 자주 떨어질 지경이 되었어도 그저 태연하기만 하였다. 얼마 후에 다시 단양 군수(丹陽郡守)에 제수되었다.
무술년(1598) 여름에는 군자감 첨정(軍資監僉正)과 호조 정랑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가을에 남양 부사(南陽府使)에 제수되었으나, 승진이 너무 빠르다는 언관(言官)의 지적으로 인하여 체직되었다. 기해년(1599) 봄에는 양근 군수(楊根郡守)와 익위사 익위(翊衛司翊衛)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임하여 체차되었다. 곧이어 또 군자감 첨정에 제수되었는데, 거듭 사양하는 것을 온편치 않게 여겨 억지로 나아가 숙배(肅拜)하였다. 가을에 안성 군수(安城郡守)에 제수되었는데, 큰 난리의 뒤끝이라서 공사(公私)를 막론하고 재정이 바닥난 상태였으므로, 마을마다 쓸쓸하기 그지없었고 백성들도 편안히 살 수가 없었다. 이에 선군은 피로에 지친 백성들을 돌보아 주고 불필요한 비용들을 줄인 결과, 몇 해 안 가서 고을이 점차 예전처럼 복구되었다.
신축년(1601) 겨울에는 《주역(周易)》의 구결(口訣)을 교정(校正)하는 일에 선발되었는데, 유지(有旨)를 내려 부르는 명을 받고 들어가서는 종친부 전부(宗親府典簿)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때마침 황달(黃疸)을 앓고 있어서 나아가 일하지는 못하였다. 임인년(1602) 봄에는 역적 정인홍(鄭仁弘)이 국가의 권한을 손아귀에 틀어쥐고 흉악한 기세를 멋대로 부리는 바람에 전후의 사류(士類)들이 모두 그에게 해침을 당하였다. 이에 선군은 서울에 있는 것을 싫어하여 곧바로 연산으로 내려가 한가로이 세월을 보내면서 병을 치료하였다. 계묘년(1603) 여름에 익산 군수(益山郡守)에 제수되었다가 을사년(1605) 겨울에야 그만두고 돌아왔다.
기유년(1609, 광해군1) 여름에는 익위사 익위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가을에 회양 부사(淮陽府使)에 제수되었는데, 경술년(1610) 겨울에 조정의 공론이 ‘회양(淮陽)은 북관(北關)의 들머리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무관(武官)에게 맡기고서 방어사(防禦使)의 직임까지 겸임하게 해 절제(節制)하기에 편하도록 해야 한다.’고 아뢰는 바람에 철원 부사(鐵原府使)로 바뀌어졌다.
광해군 계축년(1613)에 와서 역적 이이첨(李爾瞻)이 광해군의 뜻에 영합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 의(㼁)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적당한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소인배인 박응서(朴應犀) 등이 몇 명의 무뢰배들과 결탁한 다음 행상(行商)을 찔러 죽이고 재물을 탈취하다가 일이 들통나서 체포된 일이 있었다. 그러자 이이첨이 이를 구실로 자신의 심복 몇 사람과 함께 박응서를 사주하여 역옥(逆獄)을 꾸미고는 영창대군을 걸고넘어지게 한 나머지 장차 예측할 수조차 없는 화가 터지게 되었다. 이때 선군의 서제(庶弟)인 김경손(金慶孫)과 김평손(金平孫)이 일찍이 박응서의 무리들과 서로 알고 지내던 터라서 역시 체포되어서 구금되었는데, 그들의 속셈은 대개 이를 구실로 우리 선군과 지금 우상(右相)으로 있는 김상용(金尙容)까지 연루시켜서 함정 속에 끌어넣으려는 것이었다.
그 사건에 서제들은 참혹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모두 다른 말을 하지 않고 죽어 갔지만, 끝내 추형(追刑)까지 당하게 된 탓에 온 집안이 모두 그 사건에 연좌(緣坐)되어 아침저녁으로 명이 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이에 친구와 주위 사람들이 모두들 위태롭게 여기면서 무서워 떨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어떤 사람은 화를 모면할 방법을 꾀해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군은 태연히 지내면서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운명에 달린 것이고, 화와 복도 미리 정해진 것이어서 요행수로 구차스럽게 면할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때 마침 어느 법관(法官) 한 사람이 연좌시키는 것은 법례(法例)가 아니라고 앞장서서 주장한 데다가 대신 가운데 헌의(獻議)한 자가 있음으로 해서 일이 거기에서 그치게 되었다.
옥사(獄事)가 처음 터졌을 때 광해군이 직접 박응서에게 묻기를, “김장생도 이 사실을 알고 있는가?”라고 묻자, 박응서가 대답하기를, “김장생은 어진 사람이라서 저희들이 모사를 할 때에는 오히려 그가 알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습니다.” 하였다. 그후 정협(鄭浹)이 또 이이첨의 사주를 받아 당시의 명재(名宰)들을 마구 걸고넘어지는 바람에 잡혀간 사람들로 옥이 꽉 찼다. 광해군이 박응서에게 물은 것처럼 또다시 정협에게 물었으나, 정협 역시 그런 일이 없었다고 극구 부인하였으므로 우리 선군은 다행히 참혹한 화를 면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관로(官路)가 막혀 시골에서 지내면서 환난(患難)에 처하는 자세로 지냈는데, 문을 닫아건 채 종적을 끊고는 바깥 사람들과 편지 내왕조차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좌우에 경서(經書)를 두고 매일 열심히 읽으면서 유유자적하게 지냈다.
계해년(1623)의 인조반정(仁祖反正) 초기에 상이 ‘김장생은 내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부터 그 명성을 익히 들어 왔다.’고 하면서 즉시 사헌부 장령을 제수하고는 소명(召命)을 내려 불렀는데, 선군은 늙고 병들었음을 이유로 상소를 올려 사양하였다. 그러고는 이어 그 일에 앞장섰던 김류(金瑬), 이귀(李貴), 최명길(崔鳴吉), 장유(張維) 등 여러 사람들에게 긴 편지를 보내어 규계하고 권면하였는데, 그 편지에 대략 이르기를,
“저는 일찍이 경천욕일(擎天浴日)의 큰 공로가 갑작스럽게 그대들의 손에 의해 세워질 줄은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땅에 떨어진 인간 윤리를 바로 세우고 거의 망해 가는 국가를 다시 붙잡아 세운 것인바, 이는 참으로 이 세상에 다시 없을 크나큰 의거로, 비록 옛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염려되는 것은, 모든 일이 시작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유종의 미를 거두기가 어렵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만약에 선후책(善後策)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뒷날에 말하는 자들은 틀림없이 ‘당초에 의거를 일으킨 것은 나라를 위해 도적을 토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의 부귀공명을 위해 한 짓이다.’라고 할 것이니, 어찌 크게 두려워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서경(書經)》에도 이르기를, ‘끝없이 좋은 일이기도 하지만 끝없이 걱정되는 일이기도 하다.’ 하였습니다. 오늘날의 책임은 전적으로 여러분에게 있으니, 몹시 걱정됩니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임금이 처음 즉위했을 때는 그 임금을 어떻게 보도(輔導)하느냐가 아주 중요합니다. 더구나 새로 즉위한 우리의 임금께서는 춘추가 젊어서 한창때이고 자질도 어려서부터 빛났으니, 지금이야말로 바로 흥성할지 쇠할지, 형통할지 막힐지가 결정되는 중대한 고비입니다. 따라서 극진한 말과 지극한 의론을 가지고 날마다 앞에서 진달하고 동정(動靜) 하나하나에 있어서도 반드시 옳은 길로 인도하면서 좌우에서 잘 보도함으로써 기어이 삼대(三代) 이전의 정치를 구현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어려서 이루는 것은 마치 천성(天性)과 같아서 자연스럽게 습관처럼 된다.’고 하였고, 《서경》에도 이르기를, ‘끝이 좋으려면 시작부터 삼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힘써서 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지금의 형세는 마치 거꾸로 매달린 사람을 풀어 놓아주는 것과 같은바, 몹시 배고프고 목마른 자에게는 먹을 것 되기가 쉽고 마실 것 되기가 쉬운 법입니다. 《맹자(孟子)》에 이르기를, ‘일을 하는 수고로움은 옛사람의 절반밖에 안 되어도 그에 따른 성과는 틀림없이 배는 될 것이다.’라고 한 말은, 바로 이러한 경우를 두고 한 말입니다. 만약 그럭저럭 임시변통만 하면서 백성들을 급히 구제해 주지 않는다면, 간절하게 바라고 있던 백성들의 여망은 틀림없이 꺾이고 말 것입니다. 난리 이후로 백성들을 병들게 한 정책과 과외로 걷는 세금 등을 모두 없애 주거나 감해 주어야 할 것이고, 공안(貢案)도 개정해서 되도록 간략하게 마련하여 방납(防納)의 폐단을 막아야만 합니다. 그러니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것을 조금이라도 느슨히 해서야 되겠습니까.”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역적들이 나라의 정권을 맡고 난 뒤로 그 무리들이 번성하여 모후(母后)를 유폐(幽廢)시키고 강상(綱常)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들의 죄악을 따져 보면 법에 있어서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옥사(獄事)를 헤아려서 결정하는 데 있어서 차등을 두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형(五刑)과 오류(五流)의 법에 대한 경중과 대소는 방책(方策)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바, 언제나 공평한 마음가짐으로 형벌의 잣대를 신중히 재야 할 것이고, 혹시라도 마음을 시원하게 하기 위하여 함부로 휘두르는 폐단이 없어야만 할 것입니다. 혹자는 오왕(五王)이 화(禍)의 불씨를 남긴 일은 후세 사람들이 경계해야 할 것이라고 하나, 그것은 군자의 말이 아닙니다. 왕자(王者)가 법을 씀에 있어서는 오직 그 실정(實情)과 죄가 어떠한가를 살펴볼 뿐이지, 그 밖에 다른 것을 어찌 따지겠습니까.”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오늘날을 위한 계책으로는 먼저 조정부터 바로잡고 인재를 널리 수용하며, 편파적인 것을 없애고 공도(公道)를 활짝 열어야 합니다. 그러니 이쪽 편이냐 저쪽 편이냐를 따질 것 없이 어진 인재면 등용해야 하고, 길고 짧음을 재어 보아서 적합한 인물이면 써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백료(百僚)들이 서로 조심하고 협력해서 지난날의 잘못된 습성을 완전히 바꾸어서 태평성대의 다스림을 이룩한다면, 그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그 밖에 외척(外戚)의 무리들이나 정청(廷請)한 무리들의 경우에 이르러서는, 그중에 비록 쓸 만한 인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우선적으로 등용함으로써 임금으로 하여금 사사로운 마음이 생기게 하고 사방의 백성들을 실망시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서경》에 이르기를, ‘관직은 어질고 재능 있는 자에게만 맡겨야 한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서관(庶官)이라도 가까운 자라고 해서 주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신중을 기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지난날 탐욕스러운 마음으로 이끗을 좋아하여 이익을 독차지한 일들 가운데 입에 올릴 만한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중에서도 전선(銓選)과 과거(科擧)와 형옥(刑獄)에 관련된 일들은 사안의 옳고 그름은 따지지 않은 채 오직 돈을 얼마나 바쳤느냐만을 따져서 처리하였습니다. 조정이 어지러워지고 민생이 고달픔을 겪었던 것은 실로 여기에서 말미암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바르게 시작하는 초기를 당하여서는 우선 먼저 임금이 검약(儉約)으로 솔선수범하여 신하들에게 본보기를 보임으로써 염치를 숭상하도록 해 나쁜 풍습을 완전히 개혁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께서도 청백(淸白)과 근신(謹愼)을 지켜 조정의 모든 사람들을 격려해야 할 것이요, 정국 공신(靖國功臣)의 세 대장(大將)이 하던 짓을 답습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공사(公私) 간이 다 좋을 것입니다.”
하였다. 제공(諸公)이 이 서신을 받고는 몹시 기뻐하면서 주상에게 올리기까지 하였으며, 당시의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하면서 모두들 격언(格言)이라고 하였다. 이에 사직 상소가 들어가자 상이 체직을 허락하지 않고 따스한 내용의 유지(有旨)를 내려 타이르기를, “그대는 늙고 병이 많으니 가교(駕轎)를 타고 올라오도록 하시오.” 하였다. 선군은 그 명을 받고 황공스럽고 감격스러워 병을 무릅쓰고 길을 떠났는데, 올라오는 도중에도 “빨리 올라와서 애타게 기다리는 나의 마음을 위로해 주라.”고 하는 내용의 성지(聖旨)를 받았다. 이에 마침내 서울에 들어가 글월을 올려 체직시켜 주기를 요청했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다.
얼마 뒤에 상이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의 사묘(私廟)에 친히 제사를 올리려 하자, 예조 판서 이정귀(李廷龜)와 부제학 정경세(鄭經世)가 삼공(三公)들과 논의한 끝에, ‘주상은 친손자로서 선조(宣祖)의 대통(大統)을 이은 것이므로, 본생친(本生親)에 대해서는 고(考)가 둘이 되는 혐의로움이 없으니, 축문(祝文)에 고(考)라고 쓰고 자(子)라고 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선군이 즉시 상소하기를,
“예(禮)를 보면, 다른 사람의 후계자가 되면 바로 그 사람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임금의 경우에 이르러서는 비록 형이 아우의 뒤를 이었거나 숙부가 조카의 뒤를 이었다 하더라도, 모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춘추(春秋)》의 경문(經文)에 이르기를, ‘희공(僖公)을 태묘(太廟)에 올렸다.’고 쓴 것을 보면, 공자(孔子)의 깊은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춘추》 4전(傳)의 뜻도 모두 희공을 민공(閔公)의 아버지로 보았습니다. 이는 대개 동생인 민공이 형인 희공의 뒤를 이었지만 부자 사이가 된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한(漢)나라의 선제(宣帝)가 소제(昭帝)의 뒤를 잇고서 자기를 낳아 준 아버지를 높여 황고(皇考)라고 했는데, 이에 대해서 범씨(范氏)는, ‘선제는 소제에게 손자가 되므로 선제가 자기 아버지를 황고라 칭한 것은 옳은 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의논하는 자들은 끝내 이에 대해서 옳다고 하지 않았으니, 그 이유는 소종(小宗)을 대종(大宗)의 종통에 합쳤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정자(程子)는 또 이에 대해서 ‘윤리를 어지럽히고 예의에 벗어난 것이 참으로 너무 심하다. 선제가 손자의 항렬로서 소제의 뒤를 이어 대통(大統)을 이어받았으니, 자기의 사친(私親)을 올려 위로 할아버지의 뒤를 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 분명하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성상께서도 대원군에 대해서 ‘고(考)’라고 칭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상께서는 이미 들어와서 대통을 이어받아 선조의 뒤를 이으셨습니다. 그런데 성상의 사친을 또 선조(宣祖)의 아래에 끼워 넣어 위로 선조(先祖)와 계통을 잇게 한다면, 이것이 바로 이른바 소종을 대종의 종통에 합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지금 사친을 ‘고’로 칭하는 것은 대통을 이어받은 입장에서 너무나도 크게 의(義)를 해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미 아버지와 아들 사이로 정한다면 상복(喪服)도 반드시 삼년복을 입어야 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어찌 들어와서 대통을 이어받고서도 자기의 사친을 위하여 삼년복을 입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예관(禮官)은 정자가 말한 본래의 뜻을 잘 살피지 못하고서 이에 말하기를, ‘선제가 사황손(史皇孫)을 고라고 칭하고 또다시 그 위에 황(皇) 자를 보태어 명위(名位)가 너무나도 높으므로 정자가 예의를 잃었다고 한 것이지, 고라고 칭한 것을 가지고 그르다고 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황(皇) 자는 바로 크다는 뜻의 글자로서, 허자(虛字)인 것입니다. 정자의 뜻은 단지 방친(旁親)에게 고 자를 써서는 안 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한 것입니다. 송(宋)나라의 여러 유학자들도 복왕(濮王)에 관한 논의에서 역시 고 자를 쓰지 않아야 한다고 하면서 구양수(歐陽脩) 등의 무리들과 다투었는데, 그후 정자의 말이 나오자 그 말이 천만세를 두고 확실한 정론(定論)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어찌하여 별스러운 의견을 내놓아 성대한 때의 대례(大禮)를 미진한 점이 있게 한단 말입니까.
예관은 또 그렇게 하면 고위(考位)가 없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원래 제왕의 집안에서는 단지 대통(大統)을 계승하는 것을 위주로 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숙부가 조카의 뒤를 잇고 형이 아우의 뒤를 잇더라도 역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성립되는 법입니다. 그러니 어찌 고위가 없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예관은 이런 점을 모르고서 가면 갈수록 자꾸만 틀린 말만 하고 있으니, 신으로서는 몹시 의혹스럽습니다. 오늘날의 일에 대해서는 마땅히 정자가 말한 대로 숙부라 칭하고 조카라고 칭하는 것이 명분상으로나 의리상으로나 분명한 전거가 있어서 조금도 의심할 바가 없는 것이 될 듯합니다.”
하였다. 그 뒤에 입시하자, 상이 이르기를,
“일찍이 내가 잠저(潛邸)에 있을 적에 그대의 학문이 대단히 높고 숙덕(宿德)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늘상 한번 만나 보기를 원하였다. 그러니 그대가 올라온 뒤에 즉시 불러 만나 보아야만 했는데, 마침 나라에 제사가 있어서 그렇게 하지 못하였는바, 당초에 지성으로 기다리던 뜻과 크게 어그러지고 말았다. 지금이라도 이렇게 만나 보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하였다. 이에 선군이 감사의 뜻을 표하고, 이어 아뢰기를,
“사묘(私廟)에 제사 지내는 예에 대해서는 소신이 감히 함부로 논의할 일이 아닌 줄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헌부(憲府)의 직을 맡고 있는 몸이기에 망녕되이 시비(是非)를 논하였는바, 너무나도 외람되고 참람된 일이었습니다. 지금 다행히도 이렇게 성안(聖顔)을 우러러뵙게는 되었으나, 이가 다 빠지고 귀까지 먹었으므로 아뢰는 과정에서 혹시라도 뜻을 제대로 다 전달하지 못할까 염려되어 미리 바깥에서 대충 적어 보았습니다.”
하였다. 그러고는 품 안에서 그것을 꺼내어 무릎 꿇고 올렸는데, 거기에 대략 이르기를,
“제왕들이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는 학문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습니다. 학문의 도는 다름이 아니라, 성현의 말씀을 토론하여 그 의리를 정밀하게 추구해서 반드시 이를 몸에 체득하고 마음에 증험하여, 일이 없을 때에는 이 마음이 혼연(渾然)하여 밝고 밝아서 어둡지 않고 담담함이 고요한 물과 같다가, 한 생각이 일어남에 미쳐서는 공사(公事)와 사사(私事),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의 구분을 살펴서 사욕을 극복하는 것이 맹렬하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선(善)을 확충하는 것이 폭넓지 못할까 두려워한다면, 일상생활의 모든 행동거지에서 스스로 천리의 정도(正道)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요순(堯舜)이 말한 ‘정밀하게 선택하고 한결같이 지킨다.[惟精惟一]’는 것이며, 공자가 말한 ‘자기의 사욕을 극복하여 천리의 예를 회복한다.[克己復禮]’는 것이며, 자사(子思)가 말한 ‘보고 듣지 못하는 데에서도 두려워하고 혼자만이 아는 마음을 삼간다.[戒懼謹獨]’는 것이며, 맹자(孟子)가 말한 ‘흐트러진 마음을 거두고 사단을 확충한다.[收放心 擴充四端]’는 것이며, 주자(周子)가 말한 ‘성(誠)은 인위가 없고 기(幾)는 선하기도 하며 악하기도 하다.[誠無爲 幾善惡]’는 것입니다. 옛날 성현이 전수한 뜻은 이와 같은 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더구나 임금의 한 생각은 국가의 치란과 흥망이 달려 있으니, 두려워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가상히 여기면서 받아들였다. 그러고는 인하여 상이 이르기를, “전번의 상소 내용은 매우 좋기는 했으나 일이 이미 정해진 뒤여서 그대로 따르지 못하였는바, 몹시 미안하다.” 하였다. 얼마 뒤에 선군을 체차하고는 사재감 첨정(司宰監僉正)으로 삼았다.
6월에 경연 신하의 아룀에 따라 성균관 사업(成均館司業)의 직책을 특별히 설치하고는 선군을 그 자리에 제수하여 유생들을 가르치게 하였고, 또 원자(元子)까지 보양(輔養)하도록 명하였는데, 간절하게 사양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그 당시의 사부(師傅)들은 모두가 노성하여 명망이 중한 학자들이었는데 선군이 숙유(宿儒)의 신분으로 그 강석(講席)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원자에게 진강(進講)할 때마다 글 뜻만을 논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보도(輔導)하는 데에도 부지런히 하여 일에 따라서 잠규(箴規)를 올렸으므로, 원자가 깊이 존경하면서 심복하였다. 뒤에 경연에 입시하여서 늙고 병든 몸으로 직임을 감당하기 어려운 형세를 극력 진달하고, 이어 아뢰기를,
“비상한 일은 반드시 비상한 사람이 맡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신은 결코 그러한 인물이 못 됩니다.”
하자, 상이 답하기를,
“요즘 선비들의 풍습은 옛날과 다르므로, 반드시 장자(長者)가 그 일을 맡아야만 많은 선비들이 보고 느낄 것이다.”
하였다. 8월에 다시 입시해서 아뢰기를,
“신은 나이가 많아 병들고 귀먹었는데도 결단을 내려 물러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늘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에 요즈음에는 시골로 돌아가게 해 주기를 청하여 향리로 돌아가 죽었으면 싶습니다.”
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다시 되풀이하여 청하자, 상이 비답하기를,
“그렇다면 가서 너무 오래 있지는 말고, 잘 다녀오라.”
하였다. 하직 인사를 하던 날 대궐 안에서 술을 내려 위로하는 뜻을 보였고, 원자 역시 직접 면대하여 간곡한 말로 오랫동안 머물러 있지 말기를 청하였다. 선군은 선산(先山)에 성묘를 마치고 상소를 올려 사은(謝恩)하였으며, 겸하여 내려오는 길에 연로(沿路)에서 본 흉년의 상황과 그 밖의 크고 작은 백성들의 폐막에 대해 조목조목 아뢰었다. 그러자 상이 가상히 여기면서 받아들였고, 이어 ‘되도록 빨리 올라와 나의 기대에 부응하라.’는 내용으로 유시하였다. 선군은 그 성은에 감격하였으나 근력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올라가는 대신 짤막한 내용의 상소를 올려 규잠(規箴)의 뜻을 붙였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신은 듣건대 장자(張子)가 이르기를, ‘자기의 마음을 엄한 스승으로 삼으라.’고 했습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모든 일상생활에서 행동을 할 때 마음의 명령을 듣고 거기에서 옳고 그름을 살핀 다음에 행동한다면, 비록 딱 들어맞지는 않더라도 거의 들어맞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또 사마 온공(司馬溫公)이 이르기를, ‘내가 남보다 나은 것이야 없지만, 한평생 한 일을 돌아보면, 남에게 말하지 못할 짓을 한 적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도 이 점에 관심을 두시어 한 호령을 내리고 한 정사를 행함에 있어서도 모두 마음에서 돌이켜 살펴보아 한 점 거리낌이 없도록 하소서. 그리고 어두운 밤에 홀로 계실 때에 이르러서는 마치 제사를 모시듯이 경건한 자세를 지니시어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소서. 그럴 경우 성상의 학문이 성취되는 것을 어찌 이루 헤아릴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이 말을 받아들였다.
갑자년(1624, 인조2) 2월에 역적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관서(關西)에서 곧바로 서울을 향하여 쳐들어오자, 상이 남쪽으로 파천하였는데, 선군은 상이 공주(公州)로 향해 가는 도중에 맞아 뵈었다. 역적이 처단됨에 미쳐서 환도(還都)하게 되었을 때 상께서
“이 길로 곧장 서울로 올라가서 원자를 가르치는 것이 좋겠다.”
고 하였으므로, 선군은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대가(大駕)를 따라 서울로 와서 상의원 정(尙衣院正)에 제수되었다. 얼마 뒤에 사헌부 집의에 발탁되었는데, 세 번 사양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그해 5월에 말미를 받아 시골로 돌아왔으며, 6월에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소회를 다 말하였는데, 대략 아뢰기를,
“신은 너무나 깊은 은총을 받았는데도 털끝만큼의 보탬도 되어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몸은 전야에 있지만 마음과 넋은 모두 전하에게로 달려간 나머지 대궐을 우러러볼 때마다 무엇인가 보답해야겠다는 마음이 절실해집니다. 이에 삼가 다음의 13개 사항을 조목별로 진달함으로써 전폐(殿陛)에서 직접 아뢰는 일에 대신할까 합니다. 첫 번째는 대본(大本)을 세우실 것이고, 두 번째는 구업(舊業)을 회복하실 것이고, 세 번째는 홍범(洪範)을 높이 받드실 것이고, 네 번째는 소학(小學)을 강하실 것이고, 다섯 번째는 성효(聖孝)를 다하실 것이고, 여섯 번째는 사전(祀典)을 공경히 하실 것이고, 일곱 번째는 구족(九族)을 가까이하실 것이고, 여덟 번째는 군신(群臣)들의 뜻을 체득하실 것이고, 아홉 번째는 정무(政務)를 친히 처리하실 것이고, 열 번째는 민폐(民弊)를 제거하실 것이고, 열한 번째는 대동법(大同法)을 혁파하실 것이고, 열두 번째는 군정(軍政)을 잘 닦으실 것이고, 열세 번째는 금위(禁衛)를 엄히 단속하실 것 등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아뢴 열세 조항을 보니, 참으로 자신을 수양하고 폐단을 바로잡는 대책들이다. 그러니 내가 감히 이것들을 가슴속에 새겨 힘써 실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9월에 특별히 공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당시에 사헌부가 말썽을 부린 내수사(內需司)의 노비(奴婢)를 잡아 가두고서 죄를 다스리는 중이었는데, 상이 엄한 전지를 내리자, 정원이 그 전지를 다시 봉환(封還)하였으므로 정원의 관원을 추고(推考)하라는 명이 내려지기까지 하였다. 선군은 사직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그에 대한 일을 자세하게 진달하였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왕의 말이 한번 떨어지고 나면 중외(中外)가 다 놀라는 법입니다. 폐조(廢朝) 때 인심을 잃은 일이 이루 다 셀 수 없이 많았으나, 그중 내수사의 노비로 인한 폐단이 절반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사헌부가 나서서 그들을 단속하고 다스린 일이 있었다고 들어보셨습니까? 오늘에 와서는 위에 밝고 거룩하신 전하가 계시기 때문에 아래에 법을 제대로 집행하는 담당자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도리어 담당자를 엄하게 질책하셨습니다.
신은 참으로 그렇게 하신 것이 자전(慈殿)의 전교를 받들기 위해 하신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설사 자전의 전교를 금방은 되돌릴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일로 인해 정원이나 법관(法官)을 질책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약에 승지가 주상의 뜻을 받들어 따르는 것만을 직임으로 여기고 복역(覆逆)하는 바가 없다고 한다면, 사알(司謁) 하나만 두면 충분하지 무엇 때문에 반드시 승지를 둔단 말입니까. 그리고 대간도 오직 입 다물고 있는 것만을 직임으로 삼으면서 아무런 규정하는 일이 없다면, 이는 단지 울지 못하는 일개 의장마(儀仗馬)에 불과할 뿐입니다. 장차 그런 법관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이 두 가지 사항을 자세히 음미해 보면 비록 별 것 아닌 듯하지만, 그 병의 뿌리를 캐 보면 전적으로 사의(私意)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작은 문제라고 하여 소홀히 하게 되면, 끝에 가서는 틀림없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나온 것이 결국 정사로 나타나고, 그 정사가 일을 해치게 되어 사(私)가 공(公)을 멸하는 결과를 낳고 말 것이니, 그 해로움은 이루 다 말할 수조차 없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그 병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정밀하게 살피소서. 그리하여 거기에 털끝만큼이라도 사사로움이 끼어 있다면 반드시 단호하게 징계하여 끊어 없앰으로써 다시는 그런 마음이 자라나는 일이 없게 하소서.”
하니, 상이 너그러운 내용으로 비답을 내렸다.
10월에 소명(召命)을 받고 사은(謝恩)하기 위하여 직임에 나아갔는데, 경연 신하가 아뢰기를,
“김장생은 아주 늙은 사람으로서 여러 차례 소명을 받고 병을 무릅쓰고 올라왔는데, 본직은 한가하여 새벽이나 밤늦도록까지 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규례 이외에도 수시로 경악(經幄)에 출입하게 하소서. 그리고 전번에는 원자(元子)의 요속(僚屬)으로 계하(啓下)하셨는데, 지금은 이미 그 작질(爵秩)이 승진되었으니, 규례를 무시하고 강석(講席)에 참가할 수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그로 하여금 서연(書筵)에 참석하게 한다면 경전(經典)의 글 뜻을 풀이하는 이외에 규계(規戒)를 하는 데 있어서도 어찌 도움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의 호칭을 바꾸어 강석에 참여하게 하라. 그리고 나 역시 수시로 접견하고 싶은 생각이 있으나, 요즘 경연(經筵)을 여는 일이 드물어서 지금까지 지체되고 있는 것이다.”
하였다. 그러고는 호칭을 강학관(講學官)으로 고쳤다.
을축년(1625) 2월에 왕세자를 책봉(冊封)하고는 은혜를 널리 베풀어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품계를 승진시켰는데, 이는 그동안에 왕세자를 교도(敎導)한 공로를 생각해서였다. 얼마 있다가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며, 말미를 받아 시골로 돌아갔는데, 떠나면서 상소를 올려 아뢰기를,
“신이 지금 한번 서울을 떠나고 나면 영원히 전하를 다시 뵈올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성학(聖學)에 더욱 힘쓰시고 성덕(聖德)을 더욱 높이소서. 마음을 정대하게 가져서 한쪽으로 치우치는 사사로움이 없게 하시고, 일 처리를 함에 있어서 확고한 단언을 내려서 우유부단한 잘못이 없도록 하소서.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서는 거짓된 것에 현혹되지 마시고 실지 그대로를 취하시며, 아랫사람을 접함에 있어서는 성심을 다하기를 힘쓰고 겉치레로 꾸미기를 일삼지 마소서. 귀에 거슬리는 말을 싫어하지 마시고, 조용하게 살아가는 선비를 홀대하지 마시며, 받아들이는 일은 되도록 넓게 하시고, 채택하는 일은 되도록 정밀하게 하소서. 그리고 선입견을 고집하여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막지 마시고, 일반적인 규례에 얽매여 사기(事機)를 놓치지도 마소서. 그리하여 큰 뜻을 분발하시어 지극한 치세를 이루신다면, 신은 비록 초야에서 여생을 마치더라도 다시는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가상하게 여기면서 장려하고, 이어 이르기를,
“내 마음이 몹시 서운하다. 사직하지 말고 돌아가서 선영에 성묘한 다음 즉시 올라오도록 하라.”
하였다. 선군은 이미 향리로 내려온 뒤에 여름부터 가을까지 계속 상소를 올려 체직시켜 주기를 청하였으나, 끝내 윤허받지 못하였다.
병인년(1626) 봄에 나라에 계운궁(啓運宮)의 상(喪)이 있었으므로 서울로 올라와서 진위(進慰)하고 10여 일을 머물러 있다가, 향리로 돌아가겠다는 뜻을 고하였다. 그러자 정원이 아뢰기를,
“김장생이 오늘 내려간다고 합니다. 오늘날의 덕이 높고 노성한 사람으로는 이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가 산림(山林)에 있다고 하더라도 참으로 불러와야 마땅합니다. 지금 이미 올라왔다가 갑작스럽게 돌아간다고 하니, 성상의 현인을 탐내고 덕 있는 이를 좋아하는 도에 있어서 그가 임의대로 떠나가게 두어 없어진 것조차 몰라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정원으로 하여금 못 가게 붙잡도록 명하였으나, 이미 길을 떠난 뒤였다. 선군은 집에 도착한 즉시 진정(陳情)하는 상소를 올려 사죄하였는데, 그 상소의 끝 부분에 이르기를,
“슬픈 생각을 되도록 억제하시고 정해진 의식(儀式)을 따르실 것이며, 신료들을 자주 접견하여 인정(人情)과 예문(禮文)을 강구하소서.”
하고, 또 이르기를,
“그 절차나 의식에 관해 논열(論列)하고 싶은 점이 없지는 않으나, 처음에 올린 상소에서 대강 소견을 개진한 바가 있으므로 전하께서 슬픔 속에 계시는 지금 감히 다시금 번거롭게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대개 그 당시에 계운궁에 대한 전하의 복제(服制)를 의논하면서, 혹자는 ‘당연히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하고, 혹자는 ‘자최장기(齊衰杖期)를 입어야 한다.’고 하고, 혹자는 ‘부장기(不杖期)를 입어야 한다.’고도 하는 등 의논이 분분하여 어느 것을 따라야 좋을지 모르다가 결국 자최장기(齊衰杖期)를 입는 것으로 정하였다. 선군은 그에 대해 고례(古禮)에서 찾아보아도 근거가 없는 일이라고 여겨서 진정하는 상소의 끝에 살짝 언급한 것이다.
이보다 앞서 영월 군수(寧越郡守) 박지계(朴知誡)가 상소를 올려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을 예묘(禰廟)로 삼고 그에 따라서 계운궁에 대해 삼년복을 입으며, 백관들은 종복(從服)을 입어 기년복(朞年服)을 입게 하라.’고 청하였으며, 그를 추종하는 무리인 이의길(李義吉) 등도 잇달아 상소를 올려 정원대원군을 추숭할 것을 극력 주장하였다. 그러나 선군은 ‘이렇게 하는 것은 고금(古今)의 변례(變禮)로, 한번 잘못되면 후세에 반드시 기롱하는 의논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여겼다. 이에 경전(經傳)을 참고하고 깊이 생각하면서 연구한 다음 글을 지어서 조정에 있는 사람들에게 보냈다. 그 글에 대략 이르기를,
“《의례(儀禮)》와 《의례도(儀禮圖)》의 뜻을 살펴보면, ‘정통(正統)으로 대를 이을 아들이 일찍 죽거나 몹쓸 병으로 뒤를 이어 즉위하지 못하고 그 아들이 할아버지의 뒤를 잇거나 증조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을 경우에는, 자기 아버지나 할아버지를 위해서는 참최복(斬衰服)을 입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현(鄭玄)의 주(注)에는 ‘사위(嗣位)한 사람에 해당한다.’고 하였고, 가공언(賈公彦)의 소(疏)에도 이르기를, ‘자기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당연히 즉위해야 하는데도 폐질로 인하여 즉위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자기가 즉위하게 된 경우라면, 이는 자기 증조에게서 나라의 대통(大統)을 전해 받은 것이 된다.’ 하였습니다. 이는 마치 명(明)나라의 건문제(建文帝)가 태조(太祖)의 뒤를 이었을 때 자기 아버지가 살아 있으면서도 폐질로 후계자가 되지 못하였다가 건문제가 즉위한 후에 죽어서 삼년상을 치른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당연히 대통을 이어 갈 사람과 방계(傍系)에서 들어와 정통을 이은 사람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대원군(大院君)의 경우는 당연히 후계자가 되어 즉위해야 할 신분이지만 폐질로 인해 즉위하지 못한 사람과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성상도 자신이 당연한 후계자 신분으로서 대통을 증조에게서 물려받은 사람과는 같지 않습니다. 《의례》에서 한 말은 대통을 이어 당연히 즉위할 사람을 가리켜서 말한 것으로서, 지금의 경우와는 다릅니다. 그런데도 박지계가 상소문에서는 이 조항을 인용하여 도리어 대원군을 위해 참최복을 입어야 한다는 증거로 삼고 있으니, 그것은 예경의 근본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그가 상소문에서 말한 ‘달의 빛을 가리켜 해의 빛이라고 한다.’라고 한 비유는 바로 자기 자신을 두고 한 말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 박지계의 상소에 이르기를, ‘자식으로서는 아버지의 귀천(貴賤)을 가지고 취사선택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는데, 예경(禮經)의 뜻은 아버지의 귀천을 가지고 취사선택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대통을 계승할 신분과 방계에서 들어온 신분은 그에 관한 예제(禮制)와 사세(事勢)가 각자 달라서 자기 자신이 어떻게 더하고 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의례》와 《가례》를 보면, ‘방계에서 들어와 대통을 이은 자는 본생부모(本生父母)를 위해서 자최기년(齊衰期年)의 복을 입는다.’고 되어 있는바, 오늘날에는 마땅히 이것을 근거로 삼아야만 합니다.
박지계의 상소에서는 또 《근사록》에 나오는 ‘천자는 나라를 세우고 제후는 종통(宗統)을 빼앗는다.’고 하는 설을 인용하여 대원군을 위해 입묘(立廟)할 수 있는 증거로 제시하였습니다. 무릇 ‘제후는 종통을 빼앗는다’라고 한 말은, 한(漢)나라의 소하(蕭何)나 조참(曹參)의 경우에 비록 적자(嫡子)가 아니기는 하지만, 이미 제후가 된 이상 적자의 종통을 빼앗아 자기에게로 옮겨 간 것과 같은 경우를 두고 한 말입니다. 그리고 《통전(通典)》의 탈종의(奪宗議)를 보면, 한(漢)나라 매복(梅福)이 한 말을 인용하여 이르기를, ‘제후는 종통을 빼앗는다는 것은, 아버지가 사서인(士庶人)인데 장자가 아닌 아들이 제후가 되었을 경우, 장자의 종적(宗嫡)을 빼앗아 자기가 그 제사를 맡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임금이 자기 사친(私親)을 위하여 입묘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령 선묘(宣廟)께서 이 세상에 살아 계실 때 지금의 주상을 뽑아서 세손(世孫)으로 삼으셨다면, 주상께서는 선묘의 후계자가 되신 것입니까? 아니면 대원군의 후계자가 되신 것입니까?
박지계와 이의길은 또 ‘손자가 할아버지를 아버지로 삼을 수는 없다.’고 말하면서 공자(孔子)가 ‘위(衛)나라의 첩(輒)이 자기 아버지를 아버지로 삼지 않고 자기 할아버지를 아버지로 삼은 일’에 대하여 논한 말을 인용하여 자기들의 주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자의 말은 실로 위나라의 임금인 첩이 자기 아버지를 아버지로 여기지 않은 점을 지적하여 죄준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한때에 첩을 꾸짖기 위해 한 말을 가지고 할아버지를 아버지로 삼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에 상(商)나라 탕(湯)의 손자인 태갑(太甲)과 주(周)나라 평왕(平王)의 손자인 환왕(桓王)이 모두 할아버지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지만, 자기 아버지를 추숭(追崇)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또 한(漢)나라 소제(昭帝)의 종손(從孫)인 선제(宣帝)도 자기 아버지인 사황손(史皇孫)을 묘(廟)에 들이지 않고서 단지 황고(皇考)라고만 칭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정자(程子)와 범씨(范氏)호씨(胡氏)는 오히려 인간의 윤리를 어지럽힌 일이라고 배척하였고, 주자(朱子)는 그 사실을 《강목(綱目)》에 쓰기까지 하였습니다. 만약 혹자의 말대로라면 선제가 소제를 아버지로 삼은 일 역시 위나라의 임금인 첩이 하였던 짓과 같은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정자와 주자의 말이 틀린 것이란 말입니까?
진(晉)나라 간문제(簡文帝)는 존귀한 조부(祖父)의 신분으로 종손(從孫)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고, 제(齊)나라 울림왕(鬱林王)은 손자의 신분으로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며, 원위(元魏)의 고양왕(高陽王)도 손자로서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는데, 비록 자기 아버지를 높여 황제로 삼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묘(廟)에 들이지는 않았습니다. 수(隋)나라 공제(恭帝)는 손자로서 할아버지의 뒤를 이었고, 당(唐)나라 선종(宣宗)은 숙부(叔父)로서 조카의 뒤를 이었으며, 금(金)나라 장종(章宗)은 손자로서 할아버지의 뒤를 이었는데, 모두 자기 아버지를 높여서 황제로 삼기는 하였지만, 역시 묘에 들이지는 않았습니다. 또 명(明)나라 세종(世宗)은 장총(張璁)과 계악(桂萼)의 말에 현혹되어 자기의 생부(生父)를 흥헌제(興獻帝)라고 높이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묘에 들이지는 않았습니다. 유독 건문제(建文帝)만이 맏손자로서 태조(太祖)의 뒤를 잇고는 자기 아버지인 의문태자(懿文太子)를 추숭(追崇)하여 흥종(興宗)이라 하고 묘에 들이기까지 하였는데, 그것은 《의례》의 ‘맏손자는 자기 조부나 또는 아버지를 위해서 참최복(斬衰服)을 3년 동안 입는다.’고 한 설에 비추어 보면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상(商)나라와 주(周)나라 이후로 손자로서 할아버지의 뒤를 이은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고, 더구나 할아버지로서 손자의 뒤를 잇거나 숙부로서 조카의 뒤를 이은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물론 소목(昭穆)이 도치되고 윤서(倫序)가 착란된 것이기는 하지만, 왕가의 경우는 사대부가와는 달라서 일률적으로 논할 수는 없습니다. 대체로 나가서 남의 양자가 되는 것과 들어와서 대통을 잇는 것은, 그 사안이 비록 다르기는 하지만 자기의 사친(私親)을 돌아볼 수 없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와 자식 간의 천륜(天倫)이 비록 중하기는 하지만, 입계(入繼)의 뜻도 지극히 엄하기 때문에 범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또 《의례》를 보면 ‘임금 어머니가 정부인이 아닐 경우에는 신하들은 복(服)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어찌 백관들이 종복(從服)을 입을 리가 있겠습니까. 《의례도》는 양복(楊復)이 황면재(黃勉齋)에게 《의례》를 배우면서 서로 상의해서 만든 것으로서, 가공언(賈公彦)의 소(疏)와 뜻이 다르지 않으니, 후학들로서는 당연히 존중하고 믿어야 할 책입니다.”
하였다. 이에 대해 최명길(崔鳴吉)이 선군에게 수만 자에 달하는 장문의 편지를 보내왔는데, 주된 뜻은 ‘주상은 다른 사람이 후사(後嗣)로 간 경우와는 다르다.’는 것과 ‘자기 본생의 어버이를 위해서는 삼년상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선군이 답서(答書)를 쓰면서 각 조목에 따라 논변하였는데, 그 편지에 대략 이르기를,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와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가 삼년복(三年服)을 주장하지 않은 것은 그래도 처음에는 실수하였지만 뒤에는 잘한 것입니다. 그런데 공께서는 기필코 그들의 주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삼년상을 입게 하고자 하시니, 혹 자신을 너무 과신한 나머지 고금의 공론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까.
영공(令公)의 차자 내에, ‘정경세가 끝까지 고라고 칭해야 옳다고 하는데, 남의 후사가 되어 자기 생부에 대해서 고라고 칭한 경우가 어느 경전에 나와 있으며, 또 고라고 칭하면서 삼년복을 강복(降服)하는 경우가 어느 경전에 나와 있는가? 앞서서 고라고 칭해야 한다고 한 말이 옳다면, 지금 와서 강복해야 한다는 말은 틀린 것이고, 지금의 강복하는 것이 옳은 말이라면 앞서 주장하였던 고라고 칭해야 한다는 말은 틀린 것이니, 둘 중의 하나는 잘못된 것이다.’ 하셨는데, 그 말은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를 가지고 월사와 우복을 책망하신다면 옳겠지만, 그것을 가지고 도리어 저를 책망하려 드는 것은 너무나도 깊이 생각하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까.
삼가 생각건대, 진(晉)나라 원제(元帝)의 아들인 간문제(簡文帝)가 종손(從孫)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는데, 지금 고명(高明)의 생각을 가지고 미루어 본다면 틀림없이 원제를 고라고 칭해야 함이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자기에게 자리를 물려준 임금을 황종손(皇從孫)이라고 칭하고, 자기 자신을 효조부(孝祖父)라고 칭해야 한단 말입니까? 당(唐)나라 선종(宣宗)이 무종(武宗)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조부나 숙부라는 말은 항렬이 높은 사람에 대한 칭호이고, 손자나 조카라는 말은 항렬이 낮은 사람에 대한 칭호입니다. 그런데 자기에게는 높은 항렬의 말을 쓰고 선제(先帝)에게는 낮은 호칭의 말을 쓴단 말입니까.
제 생각에는 별도의 칭호를 만들되 두씨(杜氏)의 《통전》에 의거해서 자기 자신의 칭호는 ‘사황제 신 아무[嗣皇帝 臣某]’라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선황제(先皇帝)에 대해서도 별다른 칭호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에 대한 선유(先儒)들의 정론이 없습니다. 그러니 어찌 감히 억설(臆說)을 만들어 낼 수 있겠습니까. 월사(月沙)의 주대(奏對)에 이르기를, ‘부자(父子)의 의리가 있으면서도 부자의 명분은 없다.’고 한 말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조상우(趙相禹)의 견해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비록 호 문정공(胡文定公)의 주장에 근본을 둔 것이기는 하지만, 역시 온당치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항렬이 높은 조부나 숙부가 손자나 조카에 대해 아버지와 아들 사이로 칭한다는 것은, 아마도 그런 이치가 없을 듯하기 때문입니다. 이상의 말들은 모두 저의 사견(私見)이 아니라 《춘추》 4전(傳) 및 《통전》에 있는 말들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바로 이 논의를 판가름하는 큰 관건입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의논이 정해지면 나머지는 다 통하게 될 것입니다.
살펴보건대 《부록춘추(附錄春秋)》를 보면, 고항(高閌)이 이르기를,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계승하는 것이 예에 있어서 정상적인 것이다. 그런데 형제 사이에서 서로 전수(傳受)하는 것은 형편상 어쩔 수 없어서 한 일이다. 이미 나라를 물려주었다면, 전해 받은 자는 비록 아들이 아니더라도 역시 아들이 되는 도가 있는 것이고, 전해 준 자가 비록 아버지가 아니더라도 역시 아버지가 되는 도가 있는 것이다. 한(漢)나라의 혜제(惠帝)와 문제(文帝) 역시 형제 사이에 서로 전수한 경우인데, 그 당시에 의논하는 자들이 문제를 추승(推陞)하여 고조(高祖)의 뒤를 이은 임금으로 삼았기 때문에 직접 고조에게서 천하를 전수받은 혜제는 도리어 소목(昭穆)의 정위치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또 광무제(光武帝)의 경우에는 당연히 평제(平帝)의 뒤를 이었어야 했는데, 또다시 스스로 세차(世次) 때문에 원제(元帝)의 후계자가 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모두 예경(禮經)을 등지고 예법(禮法)을 어긴 일들로서, 후세에 전해서는 안 되는 사례들이다. 무릇 임금으로서 형제를 후사로 삼은 경우, 후사가 된 사람은 앞의 임금에 대해 신하나 자식과 똑같다. 그런데 뒤를 이은 자가 도리어 형제관계라는 이유로 뒤를 잇지 않는다. 나라를 전수받은 임금이 앞의 임금에 대해서 살아서는 신하나 자식으로 자처하다가 죽어서는 다시 형제 사이로 친다거나, 토지와 인민은 자기가 차지하고서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예의는 부끄럽게 여겨서 행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그것이 어찌 나라를 전수하는 것을 중히 여기는 뜻이겠는가.’ 하였습니다. 저는 고씨(高氏)의 이 말을 상세히 음미해 보고서 소목의 차서를 어지럽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일찍이 《주자대전(朱子大全)》에 있는 주(周)나라의 대협도(大祫圖)를 보니, 의왕(懿王)의 아우인 효왕(孝王)이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의왕은 소(昭)가 되어 있고 효왕은 목(穆)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주자가 정해 놓은 송조(宋朝)의 협제도(祫祭圖)를 살펴보니, 거기에도 태조(太祖)가 목이 되어 있고 태종(太宗)이 소가 되어 있으며, 흠종(欽宗)은 목이 되어 있고 고종(高宗)은 소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형제 사이인데도 소와 목을 달리하고 있기에 늘 의아스럽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춘추》 4전(傳)에 나오는 ‘민공(閔公)과 희공(僖公), 소공(昭公)과 정공(定公)은 서로 통서(統緖)를 이어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되었다.’는 설과 앞에서 말한 고씨(高氏)의 말이 모두 주자의 뜻과 서로 부합하는 것임을 보고 나서야, 선유(先儒)들의 견해가 전후(前後)로 모두 똑같은바, 우리들로서는 좀 더 자세하게 강구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다는 것을 더욱더 믿게 되었습니다.
명(明)나라의 양정화(楊廷和)는, 세종(世宗)은 무종(武宗)과 형제의 항렬이라 하여 무종을 제쳐 두고 위로 숙부인 효종(孝宗)의 뒤를 이은 것으로 하였는데, 세종과 무종이 비록 형제 사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계통을 이어 부자 관계가 성립된 이상, 그 사이를 끊어 버린데서야 말이 되겠습니까. 이제 고씨의 설을 가지고 본다면, 그것은 한나라에서 혜제(惠帝)를 제쳐 두고 문제를 추승하여 고조의 후계자로 삼은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입니다. 양정화가 예가(禮家)의 말을 깊이 강구해 보지 않고서 그렇게 한 것이 몹시 한스럽습니다.
영공께서는 차자에서 또 이르기를, ‘신이 한 말은 마디마디 다 고증을 거쳐서 한 말이고, 양정화가 한 말은 단 한 글자도 참고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성상께서는 선묘(宣廟)에 대해 비록 친손자이기는 해도, 이미 방계의 혈족(血族)으로서 들어와 대통을 이은 이상, 이은 자리에는 이미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성립된 것이고, 본생부모는 바로 사친(私親)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의리상에 있어서 너무나도 분명한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다는 것을 꼭 아느냐 하면, 《의례》에 ‘맏손자가 자기 조부나 증조부의 뒤를 이었을 경우에는 자기의 조부나 혹은 아버지를 위해서는 참최복을 3년 동안 입는다.’ 하였고, 그 나머지의 여러 손자들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삼년상을 입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현재 의논하는 이들이 맏손자 이외의 여러 손자들은 삼년상을 입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서는 이에 말하기를, ‘성상께서는 맏손자이니 순서에 따라서 뒤를 이은 임금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고 하고 있는데, 이 말이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정자와 주자의 정론(定論)과 다른 유학자들이 말한 바에는 모두 분명한 근거가 있거니와, 들어와서 대통을 이은 그 자체가 중대하고, 사친을 높이 받드는 것은 틀린 일임을 직접 면전에서 귀에 대고 일러 주는 것보다도 더 친절하게 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말들을 죄다 내버리고 별도의 다른 의견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러고서도 어떻게 ‘마디마디 다 고증을 거쳐서 한 말이다.’라고 한단 말입니까.
지난번에 보니, 공께서는 상께서 삼년복을 입는 것으로 정하고, 또 친히 상주(喪主)가 되어 조석(朝夕)의 궤전(饋奠)을 주관하도록 하려 하면서, 위(衛)나라 임금이 계씨(季氏)를 조문할 때에 노(魯)나라 임금이 상주가 되었던 것을 증거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예경(禮經)의 본뜻은 노나라와 위나라의 임금은 서로 대등한 신분이기 때문에 위나라 임금이 계씨에게 조문하러 갔을 때 노나라 임금이 자연 상주가 된 것으로, 이는 바로 손님을 접대하는 예절이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만약 유구(琉球)와 같은 이웃 나라의 임금이 성상의 동생인 능원군(綾原君)을 조상(弔喪)하기 위해 온다면, 성상께서 당연히 손님을 접대하는 주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공께서 인용하신 고례(古禮)는 대부분 현재의 상황과 딱 들어맞지 않은데, 혹시 다른 데서 든 증거들도 대부분 이와 비슷한 것이 아닙니까.
영공의 차자에서 이른바 ‘친제(親祭)할 경우에는 축문(祝文)을 쓰기가 매우 어렵다.’고 하신 것은 참으로 저의 생각과 같습니다. 이미 능원군을 효자(孝子)라고 썼는데, 또다시 전하를 아들이라고 쓴다면, 명분이 과연 문란해질 것입니다. 또 이른바 ‘고(考)로 칭하지 않을 경우에는 오늘날의 예에 있어서 일마다 모두 순조롭게 될 것이고, 이미 고로 칭하고 나면 하나하나가 다 껄끄럽게 될 것이다.’라고 하신 것은, 바로 지금 조정이 처해 있는 난처한 일에 꼭 들어맞는 말입니다.
박지계의 상소에 이르기를, ‘임해군(臨海君)은 아들이 없고, 광해군(光海君)은 종묘사직의 죄인이고, 대원군(大院君)은 세 번째이니, 성상께서 적통(嫡統)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종래에 의논하던 자들이 해 오던 말로서, 애석하게도 해서는 안 될 말을 한 것입니다. 여러 대군 중에서 의안군(義安君)과 신성군(信城君)은 일찍 죽었고 대원군은 서열상으로 다섯 번째인데, 의안군은 능원군을 후사로 삼았습니다. 그러니 이른바 적통이라는 것이 과연 맞는 말이겠습니까. 성상께서는 지손(支孫)으로서 선묘(宣廟)의 대통을 이었으니, 명분도 바르고 순리에도 맞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처럼 구차한 논리를 끌어다 붙여 세상을 속이고 후세를 속인단 말입니까.
박지계는 또 말하기를, ‘대원군이 만약 거의(擧義)한 초기에 생존해 계셨더라면 성상께서는 틀림없이 왕위를 양보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와서 유명(幽明)이 다르다고 하여 차이를 두어서는 안 된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공자 같은 이도 지위(地位)를 얻지 못하였던 것은 하늘의 뜻인 것입니다. 후세에 와서 아무리 공자를 존경해도 감히 요순(堯舜)의 자리에 앉힐 수 없는 것은, 바로 명분이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주공(周公)은 대성인(大聖人)으로서 섭정(攝政)하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후세에 의논하는 자들이 노(魯)나라에서 천자의 예악(禮樂)을 쓰는 것을 참람하다고 한 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명분과 자리는 거짓으로 할 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의길(李義吉)도 그의 상소에서, ‘대원군께서 세상에 살아 계셨더라면 틀림없이 성상께서 임금의 자리를 사양하였을 것이다. 살아 계실 때에는 봉양하고 죽으면 제사 지내는 것은 차이가 있게 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그러니 종묘(宗廟)에 모시는 것에 대해 무슨 의심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드러내 놓고 추숭하자고 주장한 것입니다. 무릇 자기의 사친(私親)을 추숭한 일이 역대로 혹 있기는 하였으나, 그 공(公)과 사(私), 득(得)과 실(失)에 대해 어찌 많은 말로 따지고 말고 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병인년(1626, 인조4) 겨울에도 선군이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의 차자 내용에 관해서 글을 올려 대략 따진 일이 있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신과 이귀는 예론에 관한 한 본디 서로 같지가 않습니다. 지난번에 이귀가 남쪽으로 내려와서 신을 찾아보고 논변을 하기에, 신이 그때 대충 앞에서 말한 견해를 가지고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차자 내용을 보니, 그때 신이 했던 말 중에서 위아래는 다 떼어 버리고 중간에 있었던 한 토막의 가설만을 뽑아 내어 거기에 자신의 소견을 덧붙여 놓았으니, 이 얼마나 가소로운 일입니까. 신이 비록 몸이 병들고 정신이 혼미하다고 해도 어찌 감히 다른 말을 하겠습니까.”
하였다.
정묘년(1627) 봄에 오랑캐들이 승승장구로 평산(平山)으로 육박하여 왔으므로, 대가(大駕)가 강도(江都)로 이주(移駐)하면서 유지(有旨)를 내려 선군을 호소사(號召使)로 삼고는 동지들을 규합하여 적의 침입을 막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선군은 감히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사양하지 못하고 곧바로 인근 경내로 나가 병력과 군량을 모집한 다음 배로 행재소(行在所)까지 운반하였으며, 전주(全州)에서 동궁(東宮)을 호위하면서 양호(兩湖)의 민심을 수습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랑캐들이 이미 임진강(臨津江)을 건너왔다는 헛소문이 나돌자, 동궁은 행장을 꾸려 영해(嶺海) 방면으로 옮겨 가려고 하였고, 사람들도 두려움에 떨면서 흩어져 도망할 기미가 뚜렷했다. 이에 선군은 일을 담당하고 있던 재신(宰臣)들에게 강력히 말하기를,
“지금 국가가 차지하고 있는 땅이라고는 다만 양호의 땅 한 조각뿐이다. 그런데 지금 갑작스럽게 이곳을 떠나간다면 양호마저도 우리 차지가 되지 못할 것이다. 형세를 보아가며 움직여도 늦지 않을 것이다. 난리가 닥치기도 전에 먼저 흩어져 도망해 버린다면, 그것은 바로 적을 안으로 끌어들이는 일이다.”
하였다. 그러고는 이어 세자와의 면대를 청하여 사세를 갖추어 진달하자, 세자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였는데, 얼마 후에 안정을 되찾았다. 그해 3월에 몇 명의 사자(士子)들과 강도(江都)에서 근왕(勤王)하고 있었는데, 오랑캐와의 화의(和議)가 이미 이루어져 적들이 물러가려고 하였다. 그때 상이 선군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경이 늙고 병든 몸으로 이 어려운 시기를 당해 나랏일에 마음을 다하였으니, 내가 몹시 가상하게 여기는 바이다.”
하였다. 이에 선군은 사례하고 이어 아뢰기를,
“적들의 기세가 이제 조금 누그러졌으므로, 직명(職名)을 벗고 고향으로 돌아가 죽었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적병(賊兵)이 아직도 국경 안에 머물러 있다. 그러니 직명을 띤 채로 돌아갔다가 또다시 위급한 일이 생기게 되면 끝까지 마음을 다해 주어야 할 것이다.”
하자, 선군이 또 아뢰기를,
“이번에 화친한 것이 비록 종묘사직과 민생을 위한 계책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동안 척화(斥和)를 주장했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너그럽게 포용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참으로 옳다. 혹자는 당치도 않은 말을 떠들어 대고 있는데, 이는 매우 잘못된 일이다.”
하니, 선군이 대답하기를,
“언자(言者)를 꺾어 버려서는 안 됩니다. 전부터 언자들을 혹 파직하거나 혹 외직에 보임한 경우가 있었는데, 그럴 경우 이 뒤에 누가 감히 말하겠습니까.”
하였다. 선군은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 지난번에 모집하였던 병력과 군량을 적절하게 처리한 다음 직명에서 벗어나 한가로이 몇 해를 지냈다.
숭정 무진년(1628) 9월에 형조 참판을 제수하고 소명을 내려 불렀으나, 두 번이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기사년(1629) 여름에 상이 경연 석상에서 시신(侍臣)들에게 이르기를,
“김장생과 장현광은 다 숙덕(宿德)이 있는 인물들인데, 서울에 잘 올라오려 하지 않고 있으며, 비록 올라왔더라도 금방 돌아가 버리고 마니, 이것은 나의 성의가 부족하고 예우가 허술하였던 소치이다. 어떻게 하면 그들을 서울로 올라오게 하여 오래도록 머물게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우상 이정귀(李廷龜)가 아뢰기를,
“김장생은 나이가 비록 많지만 원래 서울에서 생장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상께서 만약 통상적인 격식대로만 대하지 말고 온 정성을 다해 예우하신다면, 그를 올라오게 하는 것이 뭐가 그리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하자, 상이 즉석에서 따스한 내용의 전지를 내리고, 또 가마를 타고 올라오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선군은 상소를 올려 굳게 사양하였다. 그러자 상이 손수 비답을 내리기를,
“경은 국가의 대로(大老)로서 덕행(德行)이 남들보다 월등히 뛰어나다. 지금 만약 올라와서 서울에 머물러 있는다면, 사대부들에게 본보기가 될 뿐만 아니라, 틀림없이 나를 일깨워 주는 도움도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 곁자리를 비워 두고 기다리고 있으니, 경은 다시 사양하지 말라.”
하고는, 소명을 계속해서 내렸으며, 그 내용 또한 몹시 간절하였다. 그러나 선군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나이도 죽을 때가 다 되었고 정력도 이미 쇠약해진 터에 끝까지 성상의 총애에만 연연해하면서 거취를 결정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그러고는 잇달아 상소를 올리면서 더욱 강력히 은퇴하게 해 주기를 청하였다.
경오년(1630)에 선군은 83세가 되었는데, 이때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恩典)이 있어서 규례에 따라 품계가 가의대부로 올라갔다. 신미년(1631, 인조9) 5월 이후로 약간의 풍습증(風濕症)을 앓았으나, 잠자고 먹는 데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고 학문도 계속하여 강론하였다. 그런데 8월 초에 이르러서 증세가 갑자기 위중해져 결국 3일 저녁에 여러 자식들을 내버려 둔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발버둥치고 울부짖어도 소용이 없었는데, 길러 주신 은혜는 참으로 하늘처럼 끝이 없는 것이었다. 향년은 84세였다.
부음(訃音)을 아뢰자, 상은 놀라 슬퍼하고 관원을 보내 치제(致祭)하였으며 부의(賻儀)도 보통의 경우보다 더 많이 내렸다. 왕세자는 며칠 동안 폐강(廢講)을 하고 소식(素食)을 하였으며, 사적으로 요속(僚屬)들에게 이르기를, “예전에 내가 학문을 몰라 꽉 막혀 있을 적에 김 동지(金同知)가 잘 가르쳐 준 은혜를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그러고는 역시 궁관(宮官)을 보내어 치제하였다. 그 밖에 조정이나 재야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슬퍼하면서 서로 조상(弔喪)하였으며, 문인(門人)으로서 건질(巾絰)을 착용하여 스승에 대한 복(服)을 입은 사람도 수십 명에 달하였다. 참찬 장유(張維)가 경연 석상에서 건의하기를, “김장생의 숙덕(宿德)에 대해서는 작위(爵位)를 더 추증하고 장례도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므로, 상이 본도(本道)에 명해 묘(墓)를 쓰는 데 필요한 역군(役軍)을 내주게 하였다.
장사를 지냄에 미쳐서는 원근에 사는 선비들과 방백(方伯)과 수령 및 벼슬을 버리고 시골에서 지내는 진신(搢紳)들이 모두 앞다투어 와서 전(奠)을 올리고 부의를 하였는데, 상여 줄을 잡고 장례에 따라간 자가 천 명 정도에 달하였다. 그해 10월 19일 오시(午時)에 진잠현(鎭岑縣) 성북리(城北里)에 있는 해좌사향(亥坐巳向)의 언덕에 장례를 지냈는데, 선산(先山)에 묘를 쓸 만한 적당한 곳이 없어 새로 잡은 곳이었다.
불초한 이 자식들은 아는 것이 없어서 선군의 훌륭한 덕에 대해 만분의 일조차도 형용할 수가 없다. 그러나 삼가 생각건대, 선군은 타고난 바탕이 돈후하셨고 효성과 우애도 하늘로부터 타고났다. 화락하고 평이한 기상과 방정하고 확실한 지조는 저절로 이미 도(道)에 가까웠는데, 거기에다가 일찍부터 시례(詩禮)의 가르침을 이어받고 개연한 마음으로 도를 구하겠다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
선군은 사우(士友)들과 서로 강론함에 미쳐서는 성리서(性理書)에 푹 빠져 들어서 온 마음을 다 쏟으면서 두고두고 해야 할 사업으로 삼았다. 독서할 때마다 반드시 의관을 정제한 다음 무릎을 꿇고 단정하게 앉아서 한 문장마다 구절의 뜻을 풀어 보고 한 글자마다 글자의 뜻을 생각하였는데, 마치 마음에 무언가 흡족하지 못한 것이 있는 듯이 하였다. 그러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구하였는데, 밥 먹고 잠자는 것조차 거의 잊을 정도였다.
선군은 날마다 《중용(中庸)》, 《대학(大學)》, 《심경(心經)》 및 염락(濂洛)의 여러 유현들이 지은 책들을 보았는데, 그것들을 돌려 가면서 충분하게 읽었으며, 세월이 지나갈수록 더욱더 열심히 읽었다. 그러면서 한밤중에야 잠자리에 들었고 잠만 깨면 암송하였는데, 심한 병을 앓지 않는 이상 몹시 춥거나 아주 더운 때일지라도 어떤 순간 어떤 상황에서도 일찍이 조금이라도 해이해지거나 그만두는 법이 없었다. 이렇듯이 학문을 좋아하는 정성과 도를 즐기는 마음은 젊은 시절부터 세상을 뜰 때까지 조금도 변함이 없이 하루같이 하였다.
예설(禮說)은 번거롭고 방만한 것이어서 사람들이 모두들 배우기 어려운 학문으로 여겼다. 그런데도 선군은 그 번거로움을 참으면서 하나하나를 실타래를 풀 듯이 찾아내고 이리저리 고증도 하여 보면서 깊이 생각하고 조용히 이해하여 마음으로 그 이치를 통달하였는데, 귀로 한 번 듣거나 눈으로 한 번 본 것이면 또렷이 기억하여 잊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경전(經傳)의 주석(註釋)에도 옳고 그른 것이 뒤섞여 있어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는데, 그것들에 대해서는 반드시 차분한 마음으로 풀어 보고 털끝만 한 것까지도 정밀히 연구하여, 속속들이 다 알아내고 뿌리와 곁가지까지 다 파악하여 가슴속에 티끌만 한 의심조차 남아 있지 않도록 하였다.
선군은 학문을 하는 데 있어서 항상 차례를 뛰어넘는 것을 경계하였거니와, 《소학(小學)》을 도(道)로 들어가는 발판으로 삼아 탐독하고 존신하여 일생의 준칙(準則)으로 삼았다. 또한 알기 위하여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였고 그 이치를 터득하고는 그것을 실천으로 옮겼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거경(居敬)으로 일관하였다. 공부하는 순서는 한결같이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를 표본으로 삼으면서 다른 길에 현혹된 일이 없었고, 작은 성취가 있는 데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항시 부족한 듯이 여기면서 마음을 가다듬어 스스로를 독려하였으며, 혹시라도 잃어버릴 듯이 급급해하면서도 느긋한 마음으로 하고 급박하게 하지 않았다.
선군은 늘 학자들에게 말하기를, “성인(聖人)의 마음은 밝은 거울이나 잔잔한 물과 같은바, 순일(純一)하고 허정(虛靜)하므로 외물이 침범하여 어지럽힐 수가 없어 참으로 더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의 마음은 대부분이 흔들리고 내달리기 때문에 고요할 때가 적고 흔들리는 때가 많다. 그러니 반드시 먼저 그 본체를 세워서 그 쓰임을 살펴본 다음에야만 비로소 무언가 잡히는 것이 있는 것이다.” 하였다.
선군은 반드시 안과 밖을 겸하여 수양을 쌓고 경(敬)과 의(義)를 다 지키면서 각각 그에 상응하는 공부를 하여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게 하거나 어느 한쪽이 폐해지게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마음속에 보존한 것은 항상 고요하고 깊어 뿌리가 든든하였고, 사물을 대하는 즈음에는 망녕됨이 없이 진실하였다. 선군은 또한 겸양하고 공순하고 인자하고 후덕하며, 기량이 크고 견해가 명철하며, 덕성이 굳고 일정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갖가지 궁액(窮阨)을 다 당하고 여러 가지 변고를 두루 겪었으면서도 끝내 이와 같은 외부적인 조건들에 의하여 자신의 지조를 바꾸지 않았다.
선군의 행동과 일에 나타난 것으로 말하자면, 걸음걸이 하나에도 일정한 법도를 잃지 않았고, 일상의 기거(起居)에도 일정한 절도가 있었다. 날마다 일찍 일어나서 세수하고 머리를 빗은 다음 띠를 두르고서 가묘(家廟)를 전알(展謁)하였으며, 물러나서는 서실(書室)로 가 조용히 책상에 앉아서 책을 읽되, 성현의 글이 아닌 것은 아예 눈에 접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문도들이나 제자들과는 종일토록 쉬지 않고 강론하였는데, 그저 마냥 즐거워하며 걱정을 잊으셨다. 또한 혼자서 한가로이 있을 때에는 엄숙하기가 마치 큰 손님을 대하고 있는 듯하였으며, 도리에 어긋나는 말을 한 번도 입 밖에 낸 적이 없었고, 태만한 기운이라고는 몸에서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에 기뻐하거나 성난 표정을 한집안 식구들조차도 별로 본 적이 없었다.
선군은 어버이가 계실 때는 좌우에서 봉양함에 있어 온 힘을 다 했고, 어린이를 돌봄에 있어서는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골고루 베풀었으며, 가정에는 엄격한 법도가 있어 어느 누구도 이간질하는 말을 하는 자가 없었다. 또한 상을 당하여서는 슬픔을 다하였고, 제사 때면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으며, 무슨 일에나 신중을 기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챙겨야 할 것을 챙기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기사년(1569)에 찬성공(贊成公)의 부인이 돌아가셨을 때 선군은 해서(海西)에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슬픈 생각이 들고 눈물이 저절로 쏟아지더니 그로부터 며칠 안 가서 부음이 이르렀다. 임진년(1592)에 나의 형님인 은(檃)이 왜적에게 화를 당했을 때에도, 종일토록 슬픈 생각이 드는 것을 깨닫고는 혹시라도 나쁜 일이 있지 않을까 의심하였는데 뒤에 과연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어찌 지극한 정성을 지니고 있어서 미리 예감할 수 있었던 증거가 아니겠는가.
선군은 어버이가 돌아가신 후에는 제부(諸父) 섬기기를 어버이 섬기듯이 하였고, 제매(弟妹) 사이의 우애도 시종 돈독히 하여 재물을 나눌 적에도 자신은 적게 차지하고 상대에게는 많이 주었다. 두 서제(庶弟)가 비명에 죽은 것에 대해 10년을 하루같이 마음 아파하였는데, 평상시에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말과 얼굴빛에는 물론 꿈속에서조차도 슬픈 기색이 나타났으므로, 주위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였다. 또한 일상생활의 동정(動靜)과 어묵(語默)이 모두 예절에 들어맞았고, 난처한 변례(變禮)와 같은 것에 대해서도 경의(經義)에 부합되게 해 절충하였다. 이에 모든 의문에 대해 시원스레 대답하였으므로 묻는 사람들이 다 만족해하며 돌아갔다.
선군은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는 한결같이 성신(誠信)을 위주로 하였고, 종족(宗族) 사이에는 반드시 사랑을 다 바쳤으며, 향당(鄕黨)에서는 반드시 공경을 다하였다. 또한 길사(吉事)와 흉사(凶事)에 있어서 인정(人情)과 예절(禮節)을 다하였으므로 신분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로부터 환심을 샀다. 그러나 일을 논하면서 시비(是非)를 가리고 사람을 판별하면서 잘잘못을 논할 때에는 말을 엄정하게 하고 안색을 바로 하고는 한결같이 의(義)로써 결단을 내렸으며, 조금도 시속의 경박한 의론에 동요되는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당시의 사류(士流)들이 모두 존경하고 믿고 따랐으며, 시속(時俗)을 따라 이리저리 휩쓸리는 무리들 중에는 혹 꺼리는 자도 많았다.
선군은 또한 사우(師友) 사이의 의리에 있어서도 각별하였다. 송구봉(宋龜峯)이 집안 전체가 화를 당해 의지할 곳이 없게 되었는데, 선군은 이리저리 주선하면서 끝까지 잘 돌보아 주어 그가 세상을 마칠 때까지 한집에서 지내게 하였다. 그리고 금상(今上)이 즉위한 초기에는 동문(同門)의 여러 벗들과 상소를 올려 그의 억울함을 호소하였고, 그의 자식들까지 친자식과 다름없이 보살펴 주었다. 또 정송강(鄭松江)이 사감(私感)을 품은 무리들의 모함에 빠져, 그를 헐뜯는 말들이 세상에 들끓어 화기(禍機)를 예측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간당(奸黨)이라고 지목하고는 사람들을 빠뜨리는 하나의 큰 함정을 만들어 놓아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한목소리로 그를 배척하면서 남들보다 뒤질까 걱정하였으므로, 평소에 서로 알고 지내던 자들조차도 대부분 틈만 있으면 그에게 돌을 던졌으며, 조정 사람들 사이에서 그의 성명을 말하기조차 꺼린 지가 30년이나 되었다. 그런데도 선군은 항상 그의 충직(忠直)함을 사모하며 무함을 당하였음을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남들의 손가락질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등대(登對)하게 되어서는 그가 화를 당하게 된 까닭을 낱낱이 아뢰고 그의 관작을 원래대로 회복해 줄 것을 청하였다. 율곡(栗谷) 선생의 상사(喪事) 때는 선군도 역시 상중이었지만 멀리 그곳까지 가서 상사에 임하여 슬픔을 다하고 의복(義服)을 입었으며, 매달 초하루와 보름이 되면 그 복(服)을 입고서 곡하였고, 기일(忌日)이 되면 재계(齋戒)하며 소식(素食)하였는데, 이러한 일은 늙어서까지도 폐하지 않았으며, 구봉(龜峯)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하셨다.
선군은 후진(後進)들을 대해서는 마음을 활짝 열고 열성을 보여, 독서할 때는 반드시 그 내용을 파악하고 조용히 사색하면서 음미하여 그에 대한 득실을 증험하게 하였고, 의문스러운 점에 대해서 환하게 깨우치지 못할 경우에는 되풀이하여 깨우쳐 주면서 귀찮게 여기지 않았으며, 상대의 물음이 절실하지 않을 경우에는 간곡하게 타일러서 반드시 상세히 살피도록 하였다. 또한 공부하는 요체는 뜻을 세우는 것을 우선으로 삼았고, 직접 실천하는 것을 힘쓰도록 하였으며, 배우는 사람의 자품(資稟)에 맞추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지도하였다. 배우는 이의 학문하는 태도가 독실하면 마치 자신이 그러한 것처럼 기뻐하는 빛을 얼굴에 나타냈고, 상대를 인정할 때는 그 사람의 나이와 지위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선군은 관직 생활을 함에 있어서 지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마음을 다해 봉직하였는데, 중년에는 대부분 주현(州縣)의 수령 자리에 머물러 있었던 탓에 품은 포부를 펼쳐 볼 수가 없었다. 계해년의 인조반정 이후에도 조정에 있은 날이 별로 많지 않았던 탓에 끝내 속에 쌓여 있는 재주를 다 펴 보일 수 없었다. 그러나 알고서는 말을 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또 말을 하였다 하면 다 사리에 맞았는데, 그때그때의 일에 따라서 폐단을 바로잡아 정사에 도움을 준 바가 많았으며,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물러난 뒤에도 조금도 차이가 없었다.
선군이 평상시 한 말 중에는 정미한 의리에 대해 변석(辨析)해 놓은 것들이 자못 많은데, 지금은 그것을 다 열거할 수가 없다. 일찍이 이르기를,
“이(理)와 기(氣)는 원래 둥글둥글 뭉쳐 있어서 서로 떨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양촌(陽村) 권근(權近)은 이와 기를 나누어 보아 두 군데서 나온다고 하였으며, 퇴계 선생은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은 호발(互發)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모두 이와 기를 둘로 갈라놓는 실수를 범한 것으로서, 통투(通透)한 견해라고 볼 수가 없다. 율곡 선생이 말씀하신 ‘발한 것은 기(氣)이고, 발하게 하는 것은 이(理)이다. 그것이 만약 떨어지고 합해짐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동정(動靜)에 끝이 있고 음양(陰陽)에 시작이 있다는 말이 된다. 이라는 것은 태극(太極)이고 기라는 것은 음양(陰陽)이다. 이제 태극과 음양이 서로 간에 동한다고 한다면, 그건 말이 안 되는 것이다. 태극과 음양은 서로 간에 동하게 할 수 없는 것인즉, 이와 기가 서로 간에 발한다고 한 것이 어찌 틀린 말이 아니겠는가.’라는 말은 격언(格言)이다.”
하셨다. 또 물격(物格)과 지지(知至)에 대해 논하면서는 말하기를,
“물격이란 것은 바로 물리(物理)의 극처(極處)에 도달하였다는 것이다. 만약 나의 앎이 극처에 도달하였다면, 그것은 지지이지 물격이 아니다. 물격과 지지는 다만 한 가지 일일 뿐이다. 사물의 이치로 말하였을 때는 그것을 물격이라고 하고, 내 마음으로 말하였을 때는 그것을 지지라고 하는 것이니, 이는 두 가지 일이 아니다. 세상에는 한 가지 말이 떠돌고 있는데, ‘주자(朱子)가 이른바 물리의 극처에 이르지 아니함이 없다고 한 것은, 내 마음이 거기까지 도달하였다는 말이다. 대개 물(物)을 격(格)하면 물(物)이 격(格)하는 것으로, 비유하자면 손님을 초청하니까 손님이 왔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은 주자가 말한 뜻과는 다르다.
주자의 말은 ‘물격이란 사물의 이치가 각각 그 극처에 나아가서 남은 것이 없다.’는 것으로서, 사물에 들어 있는 이치에 대해 이미 그 극처에 도달하였을 경우에는 나에게 있는 앎 역시 내가 나아간 바에 따라서 다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정자(程子)의 이른바 ‘상대와 나는 본디 한 가지 이치여서, 저것을 알자마자 바로 이것도 알게 된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사물의 이치가 본디 내 마음속에 갖추어져 있는 것이니, 어찌 그것이 내 마음속으로 다시 올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그리고 계구(戒懼)와 신독(愼獨)에 관해 논하면서는 말하기를,
“계구는 동(動)과 정(靜)을 겸해서 한 말이고, 신독은 동 한쪽 면만을 두고 한 말이다. 대개 집주(集註)에서 ‘항상 경외하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常存敬畏]’라고 한 말은, 동과 정에 관계없이 늘 경외해야 한다는 뜻이며, ‘비록 보고 듣지 아니할 때라도 역시 경외하는 마음을 감히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雖不見聞 亦不敢忽]’라고 한 말은, 비록 남이 보고 듣지 아니할 때라도 역시 경외하는 마음을 조금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는 ‘항상[常]’이나 ‘비록[雖]’이나 ‘역시[亦]’라고 한 글자를 자세히 음미해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미 항상 계구한다.[旣常戒懼]’라고 한 말은 동과 정에 관계없이 늘 계구해야 한다는 말이며, ‘여기에 대해 더더욱 삼가야 한다.[於此尤加謹]’라고 한 말은 동의 초기에 더더욱 삼가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이미 항상[旣常]’이나 ‘더더욱[尤加]’이라고 한 글자들을 자세히 음미해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것이 주자의 본지(本旨)이고 또 《중용》의 뜻에도 들어맞는 것이다. 호계수(胡季隨)가 물은 바에 대해 계구(戒懼)와 성찰(省察)을 미발(未發)과 이발(已發)에 나누어서 소속시켜 놓은 것과 같은 것은, 이는 주자가 초년에 그렇게 생각했던 것으로서, 집주(集註)의 뜻과는 내용이 실로 다르다. 그런데도 학자들이 호씨(胡氏)의 설에 구애되어 집주의 뜻을 살펴보지 않고 있으니,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혹자는 또 《중용혹문(中庸或問)》 가운데 ‘보지도 않고 듣지도 않은 그 이전에 계신(戒愼)하고 공구(恐懼)하는 것을 더욱더 엄하고 공경스럽게 해야 한다.[不睹不聞之前 所以戒愼恐懼者 愈嚴愈敬]’라고 한 몇 마디를 들어 계구가 오로지 정에 속하는 것이라는 말의 증거로 삼고 있다. 그러나 《중용혹문》에서는 중(中)과 화(和)를 상대적으로 말한 것이기 때문에 말을 하면서 오로지 정(靜)을 위주로 하여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신독(愼獨)’이라고 하였으니, 신(愼) 자는 피차간에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른바 ‘계구(戒懼)’라는 것이 동과 정을 겸해서 한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였다. 또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을 논함에 있어서는 나흠순(羅欽順)의 성정설(性情說)을 배척했고, 심성(心性)과 정의(情意)를 논함에 있어서는 호굉(胡宏)이 두 갈래로 나눈 잘못을 분변하였는데, 한결같이 주자의 가르침을 바른 것으로 삼았다.
선군은 또 도학(道學)의 연원(淵源)을 논함에 있어서는 말하기를,
“우리 동방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가 고려 말기에 끊어진 도학의 연원을 일으켰고, 한훤(寒暄) 김굉필(金宏弼)이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서 끊어진 계통을 이었으나, 은미한 뜻은 밝혀내지 못하였고 지극한 도는 창달시키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문정공(文正公)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가 성명(誠明)의 학(學)을 가지고 임금을 바로 보필하고 백성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책임을 떠맡아서 조정에서 실시함에 따라 울연히 볼 만한 것이 있었다. 그 뒤에 정암이 비록 혹독한 화를 당하여 사림(士林)들이 영원토록 애통한 마음을 품게는 되었지만, 그 유풍(遺風)과 여운(餘韻)은 족히 백대를 고무시켜 후세 사람들의 모범이 될 만하였다. 이로부터 그 뒤에 간간이 한두 분의 뛰어난 유현(儒賢)이 나와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
그러다가 문순공(文純公) 퇴계 선생이 뭇 현인들이 죽임을 당한 뒤끝에 나와 사문(斯文)을 일으키는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고는, 경전을 깊이 연구하고 의리를 규명하여, 자신 한 몸의 겸손한 덕을 지키고 후학들의 길을 열어 놓았는바, 그 공이 크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명백하여 순수하고 찌꺼기 하나 없이 맑으며, 참으로 알고 참으로 실천하여 종지(宗旨)를 얻음으로써, 말과 행동에 모두 하자가 없고 베풀어 놓은 사업도 모두 시의에 맞았을 뿐만 아니라, 출처(出處)가 다 올바르고 진퇴(進退)가 다 의리에 맞았으며, 몸소 계왕개래(繼往開來)의 책임을 지고 도맥(道脈)을 바로 세운 이는 오직 우리 율곡 선생 한 분뿐이시다.”
하였다. 선군이 의리의 뿌리를 밝히시고, 선철(先哲)들의 득실을 따지고, 도학(道學)을 논하면서 취사(取捨)를 살핀 것은 대략 이상과 같았다.
선군은 평소 저술을 일삼지는 않았으나 강독하는 여가에 그때그때 기록해 둔 것들로는 《경서변의(經書辨疑)》 8권,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 1권, 《의례문해(疑禮問解)》 8권 및 서(書), 소(疏), 잡록(雜錄)이 몇 편 있다. 이 밖에 신의경(申義慶)의 《가례집람(家禮輯覽)》에 주석을 가한 3권이 집에 보관되어 있고, 또 신공(申公)의 《상례비요(喪禮備要)》에 대해 첨삭한 1책이 간행되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선비(先妣)는 조씨(曺氏)로, 창녕(昌寧)의 이름난 가문에서 태어났으니, 영흥 판관(永興判官)을 지내고 의정부 좌찬성을 추증받은 휘 조구서(曺九敍)의 현손녀이고, 우찬성을 지내고 창녕군(昌寧君)에 봉해졌으며 의정부 영의정을 추증받은 휘 조계상(曺繼商)의 증손녀이며, 판돈녕부사를 지내고 창양군(昌陽君)에 봉해졌으며 의정부 영의정을 추증받은 휘 조광원(曺光遠)의 손녀이고,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휘 조대건(曺大乾)의 따님이다. 외조부는 성균관 생원 윤관(尹瓘)으로, 무송(茂松)의 대성(大姓)이다.
선비는 가정 신해년(1551, 명종6)에 태어나 16세 때 선군에게로 시집왔다. 정숙하고 유순하여 남편을 받드는 데 있어서 도리를 어김이 없었고, 시부모의 봉양에서부터 동서들과 화합하거나 집안의 종들을 거느리는 데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로부터 환심을 샀다. 20년 동안 기쁘고 슬픈 기색을 얼굴에 드러낸 일이 없이 지내다가, 만력 병술년(1586, 선조19) 4월 25일에 겨우 36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셨다. 그해 6월 어느 날에 연산현(連山縣) 우두리(牛頭里)에 있는 선산 곁에 장사 지냈다가, 숭정(崇禎) 임신년(1632) 4월 18일에 선군의 묘로 천장(遷葬)하여 합부(合祔)하였다. 선비는 생전에 영화를 누리지 못하였다가, 돌아가신 지 40년 후인 을축년(1625)에야 정부인(貞夫人)에 추봉(追封)되었다.
선비는 3남 3녀를 두었다. 아들 중 맏이인 은(檃)은 일찍 죽었고, 다음인 집(集)은 지평(持平)이고, 다음인 반(槃)은 전한(典翰)이다. 딸들 중 맏이는 감찰(監察) 서경휼(徐景霱)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일찍 죽었고, 다음은 군수 한덕급(韓德及)에게 시집갔다. 측실(側室)에서는 6남 2녀를 두었다. 아들 중 맏이는 영(榮)으로 생원(生員)이고, 다음인 경(檠)은 일찍 죽었고, 그다음은 고(杲), 구(榘), 규(槼), 비(棐)이다. 딸 중 맏이는 이유(李梄)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이명진(李名鎭)에게 시집갔다.
집은 정실의 자녀가 없고, 측실의 자식으로 익형(益炯)과 생원인 익련(益煉) 및 생원 김태립(金泰立)에게 시집간 맏딸과 정광원(鄭廣源)에게 시집간 둘째 딸이 있다. 반의 아들인 익렬(益烈)은 별제(別提)이고, 익희(益煕)는 검열(檢閱)이며, 익겸(益兼)은 지금 학업에 종사하고 있는데 명성이 있다. 나머지 세 아들들은 모두 어리다. 딸들은 군수 이호(李滈), 군수 이후원(李厚源), 진사 장차주(張次周), 이해관(李海寬)에게 각각 시집갔고, 나머지는 어리다.
서경휼의 맏딸은 사과(司果) 신경(愼暻)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성숙(成璹)에게 시집갔다. 한덕급의 아들 한수원(韓壽遠)은 진사이고, 그다음은 한지원(韓智遠)이고, 그다음은 어리며, 딸들 중 맏이는 이여홍(李汝洪)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김민성(金敏成)에게 시집갔는데 일찍 죽었으며, 다음은 이시정(李時挺)에게 시집갔다.
영은 아들이 넷인데 맏이는 익황(益熀)이고 나머지는 다 어리다. 딸은 신미(申渼)에게 시집갔다. 경은 아들이 둘인데 맏이는 익습(益熠)이고, 다음은 어리다. 고는 1남 2녀를, 구는 2남을, 규는 1녀를 각각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이유의 딸은 이분(李蕡)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어리다. 이명진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어리다.
익형은 1남 2녀를, 익련은 1남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김태립은 3남을 두었는데, 맏이는 김정원(金鼎元)이고, 둘째는 김정창(金鼎昌)이고, 다음은 어리며, 두 딸을 두었는데, 어리다. 정광원은 1남 3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익희는 1남 1녀를 두었고, 익겸은 1남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이호는 2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이인석(李仁碩)이고, 다음은 어리며, 딸 하나도 어리다. 이후원은 4남을 두었고, 장차주는 2남 2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신경은 1녀를, 성숙은 6녀를, 한수원은 3남 2녀를 각각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불초고(不肖孤) 집(集)은 피눈물을 흘리면서 삼가 이 가장을 쓴다.


 

[주D-001]경천욕일(擎天浴日)의 큰 공로 : 위태로운 시국을 만회하여 나라를 지탱시키는 크나큰 공로를 말한다. 경천은 하늘을 떠받치는 것을 말하며, 욕일은 희화(羲和)가 해를 나오게 해서 감천(甘泉)에 목욕시킨 것을 말한다.
[주D-002]오형(五刑)과 오류(五流)의 법 : 오형은 묵(墨), 의(劓), 비(剕), 궁(宮), 대벽(大辟)의 형벌을 말하고, 오류는 사형죄에 해당되는 다섯 가지 형벌을 범한 자에 대해서 너그럽게 용서하여 유배하는 형벌을 시행하는 것을 말한다. 《서경(書經)》 순전(舜典)에, “오형에 복죄하게 하되, 오형에 복죄한 자들을 세 곳으로 나누어 행형(行刑)하며, 다섯 가지 유형(流刑)에 머무는 곳이 있게 하되, 다섯 가지 유형에 해당하는 자들을 세 곳으로 나누어 거처하게 할 것이다.[五刑有服 五服三就 五流有宅 五宅三居]” 하였다.
[주D-003]오왕(五王)이 …… 일 : 오왕은 당(唐)나라 무후(武后) 때 평양군왕(平陽郡王)에 봉해진 경휘(敬暉), 부양군왕(扶陽郡王)에 봉해진 환언범(桓彦範), 한양군왕(漢陽郡王)에 봉해진 장간지(張柬之), 남양군왕(南陽郡王)에 봉해진 원서기(袁恕己), 박릉군왕(博陵郡王)에 봉해진 최원위(崔元暐)를 가리킨다. 이들은 측천무후가 몸이 아프자 몰래 반역을 도모하고자 하였던 장이지(張易之)와 창종(昌宗) 등의 역모를 미리 알아채고 진압하였으나, 무삼사(武三思) 등을 처형하지 않아 끝내 이들에게 모함을 받아 귀양 갔다가 처형되었다. 《舊唐書 卷91 桓彦範傳》
[주D-004]정국 공신(靖國功臣)의 세 대장(大將) : 중종반정 때 공을 세워 정국 공신에 책훈된 뒤 차례로 정승을 역임한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유순정(柳順汀)을 가리킨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중흥의 원훈(元勳)으로서 임금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으면서도 세상에 남을 만한 공적은 하나도 세우지 못한 채 자만심에 빠져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하면서 자신들의 욕심만 채우다 일생을 마쳤다. 《燃藜室記述 卷9 中宗朝相臣》
[주D-005]한(漢)나라의 …… 했는데 : 한나라 선제(宣帝)의 생부는 사황손(史皇孫)이다. 무제(武帝)의 장자인 여 태자(戾太子) 거(據)가 무고로 인해 자살하자, 무제의 손자인 소제(昭帝)가 무제의 뒤를 이었다. 그런데 소제의 뒤를 이은 선제는 여 태자의 아들인 사황손의 아들이었으므로, 소제와 선제는 항렬상 조손(祖孫)의 관계에 있다. 이에 선제가 사황손을 사당에 들이면서 황고(皇考)라고 칭하였다. 《漢書 卷63 武五子傳》
[주D-006]복역(覆逆) : 승정원이 임금의 명령에 대해 옳지 않다고 생각될 경우 재고(再考)하라는 뜻으로 되돌려 보내는 것을 말한다.
[주D-007]울지 못하는 의장마(儀仗馬) : 화를 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직간하지 못하는 언관을 비웃는 말이다. 당(唐)나라 때 권신(權臣) 이임보(李林甫)가 간관들이 말하는 것을 막기 위해 협박하기를, “그대들은 의장마를 보지 못하였는가. 소리만 지르면 쫓겨나는 법이다. 그대들도 내가 하는 일에 말썽을 부려서는 안 된다.” 하였다. 《新唐書 卷223 李林甫傳》
[주D-008]계운궁(啓運宮) : 인조의 생모인 인헌왕후(仁獻王后)를 가리킨다. 인헌왕후는 구사맹(具思孟)의 딸로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에게 시집와서 연주군부인(連珠郡夫人)에 봉해졌다가 인조가 왕위에 오른 뒤에 연주부부인(連珠府夫人)으로 올려졌으며, 궁호(宮號)를 계운궁(啓運宮)이라고 하였다. 인조 4년 1월 14일에 경희궁(慶煕宮)의 회상전(會祥殿)에서 승하하였다. 이때 상제(喪制)를 상례(常禮)에 따라 할 것이냐 변례(變禮)에 따라 할 것이냐에 대한 논의가 제기되었는데, 김장생(金長生)과 정경세(鄭經世) 등은 인조의 동생인 능원군(綾原君)을 상주(喪主)로 삼고 인조는 부장기복(不杖期服)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이귀(李貴)와 최명길(崔鳴吉) 등은 인조가 상주가 되어 삼년복(三年服)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니, 인조가 처음에는 삼년복을 입으려고 하다가 조정에서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함에 따라 기년복(朞年服)을 입었다.
[주D-009]범씨(范氏) : 범진(范鎭)을 말한다. 송(宋)나라 인종(仁宗) 때 사람으로, 화양(華陽) 출신이며, 자가 경인(景仁)이고,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저서로는 문집 및 《동재기사(東齋記事)》 등이 있다.
[주D-010]호씨(胡氏) : 송나라 사람인 호인(胡寅)을 말한다. 호인은 호안국(胡安國)의 양자(養子)로 자가 명중(明仲)이며, 시호가 문충(文忠)이다. 양시(楊時)에게 종학(從學)하였으며, 학자들이 치당 선생(致堂先生)이라고 불렀다. 저서로는 《논어상설(論語詳說)》, 《독사관견(讀史管見)》 등이 있다.
[주D-011]원위(元魏) : 북위(北魏)를 말한다. 위(魏)나라 효문제(孝文帝)가 낙양(洛陽)으로 천도한 뒤에 성(姓)을 척발씨(拓跋氏)에서 원씨(元氏)로 바꾸었으므로 원위라고 하는 것이다.
[주D-012]의복(義服) : 상복을 입지 않을 관계에 있는 사람이 친척이나 스승 등 아는 사람에 대해 의리로 입는 복을 말한다.

 

 우암선생이 권치도에게 보낸 편지내용

송자대전 제88권
 서(書)
권치도(權致道)에게 답함 - 병인년(1686) 11월 28일


이달 20일에 보낸 편지는 3일 전에 받아 보고 말해 준 뜻을 자세히 알았네.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는 의당 우리끼리 서로 수정하여 안목을 갖춘 후세 사람의 취사(取舍)를 기다리는 것이 온당한 도리였는데, 뜻밖에 김상(金相)이 경솔하게 진계(陳啓)하여 주상까지 번거롭게 하고 말았네. 이미 벌어진 일이라 다시 수습할 수도 없으니 이보다 더 한탄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화숙(和叔)의 소(疏)가 비록 순전히 이 일만을 지적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 또한 그 가운데 미세한 내막이었네.
방백(方伯)이 필사(筆寫)할 사람들을 한곳에 뽑아 보내려고 하지 않는 것은 마치 책을 만드는 기관을 설치하는 것과 같게 되는 것을 혐의해서이니, 그 생각이 또한 좋네. 모름지기 감영에 사람을 속히 보내서 편의에 따라 베끼게 하는 것이 옳겠네. 또 방백이 원망과 비방을 많이 듣고 있으니, 아마도 그곳에 오래 있지 못할 것 같네. 그렇다면 이 일을 끝내는 것도 기필하지 못할 일이네. 만일 새로 부임해 온 감사가 다른 쪽 사람일 경우에는 그 일을 저지시키지나 않으면 다행일 걸세.
또 문원(文元) 노선생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자는 소(疏)가 파주(坡州)와 적성(積城) 등지에서 일어나려고 한다고 들었네. 그런데 누가 이를 주장하는지 모르겠네. 그 사람들 중에 자네가 아는 사람이 있으면 극력 저지시켜 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번 일이 아무리 성심으로 존모하는 마음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지금의 시의(時宜)에는 타당하다고 말할 수 없네. 더구나 혹시라도 일 만들기를 좋아하는 경박한 무리가 이런 사단을 일으켜 놓고서 실패되어 가는 꼴을 보려고 하였다면 관계되는 바가 더욱 적지 않네. 천만 유의하게. 벌써 손자 주석에게 편지를 보내 빨리 정지시키게 하였으나 그의 역량으로는 하지 못할 것 같아서 이렇게 알리는 바이네.
여러 해 전에 이 같은 논의가 그 지역에서 일어났으나 내가 힘껏 저지시키지 못했던 것은 까닭이 있네. 대체로 이전 수십 년 사이에 번번히 이러한 논의가 있을 때마다 나는 힘껏 그것을 저지시켰으나 동춘 형은 권하려 하지도 않고 저지하려 하지도 않았네. 내가 일찍이 이것이 옳은 도리인가 싶었기 때문에 그 일이 재차 발의되었을 때에는 부득이 그와 같이 하면서 다만 소(疏)의 문장이 중도에 잘 맞지 않아 거듭 사람들에게 조소를 받는다면 관계되는 바가 적지 않을 것 같기에 대강 주의만 시켰던 것일세.
그런데 뜻밖에 한쪽 곁에서 새로운 의논이 갑자기 충주(忠州)에서 일어났네. 나 같은 사람에게는 이쪽 사람이라 하여 알리지도 않고, 자기들끼리도 형체를 숨기고 겉으로 나서지 않아서 시비 총중에 들어가지 않으려 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뒤따라 자세히 알아보니 이 논의는 또 다른 곳에서 일어났고 충주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었네. 아, 그들의 사리를 알지 못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오늘날의 일은 비록 그 당시의 일과는 다르나 정작 자중지란이 일어나고 있는 이때에 또 이것으로 불난 데 부채질을 가한다면 이 어찌 더욱 세도의 해가 되지 않겠는가.
이 말을 듣고부터는 이러한 생각 때문에 침식이 편치 못하여 급히 이 편지를 써서 간절한 마음을 펴네. 대체로 나 혼자서 이러한 곧음과 억울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으나 누구에게 말할 곳이 없었는데, 오직 그대는 나를 알 만한 사람이기 때문에 감히 이렇게 모두 털어놓았네. 모두 헤아려 살펴 주기 바라네.


별지
《율곡별집(栗谷別集)》 중 《태극문답(太極問答)》은 《구봉집(龜峰集)》의 초본 첫머리에서 나온 것이고 그 초본의 제목은 신로(愼老)가 쓴 것이네. 만일 이것이 율곡의 저서였다면 신로가 왜 한마디 말도 없이 그 제목을 썼겠는가. 또 그 논의가 때로는 이치에 잘 계합된 곳도 있으나, 성(性)을 논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곳에서는 변석이 그리 명확하지 못하여 마치 신 신고 발바닥 긁는 격이었으니, 이것은 아마도 율곡의 저서가 아닌 듯하네. 때문에 이것을 가지고 화숙(和叔)과 편지를 왕복하면서 논의해 보았으나 끝내 일치를 보지 못하였네. 또 ‘이것은 이경림(李景臨 이이의 서자(庶子))의 집에서 발견된 것으로 경림이 기록한 것이 있었다.’고 하였네. 나의 생각에는, 당초에 구봉이 율곡에게 질문한 서자(書字)가 그대로 이씨의 집에 간직된 것인데 경림이 이것을 잘못 율곡의 저서로 안 것이 아닌가 여기네.
별집(別集)의 인쇄본을 가져다 보니 그 글의 제목 아래 주(注)를 붙여 누구의 저술인지 의심스럽다는 말을 쓰고 또 《주자대전(朱子大全)》의 옹계록(翁季錄)을 인용하여 증거를 삼았네. 대체로 옹계록은 비록 두 분의 편지를 편집하여 한 책에 묶은 것이기는 하지만, 주자의 말은 주자(朱子)의 말대로 계통(季通)의 말은 계통의 말대로 분류해 놓았으니 이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네. 만일 《주자대전》에서 논한 대로 유정부(游定夫 유조(游酢))의 저술이 《이정전서(二程全書)》에 끼어든 것으로 증거를 삼는다면 그래도 말은 될 걸세.
윤(尹)과 성(成)의 여러 기록들이 별집에 끼어든 것에 대해서는, 어떤 사람에게서 비방하는 의논이 있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알았네. 여기에 대해서는 전혀 내가 참여한 것이 아니네. 뒤에 간행된 책을 가져다 보니 사람들의 비방하는 의논이 과연 빈말이 아니었네. 이러한 기록들은 모두 근거 없이 전해 오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사의(邪議)를 조장하기에 꼭 알맞겠으니, 이는 이 친구[此友 박세채]가 너무 신중하려는 데서 실수를 빚은 것 같네. 설령 율곡에게 참으로 이러한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단지 《우계집(牛溪集)》의 부록에 이를 끼워 넣어서 두 선생 사이에 이런 조그마한 동이(同異)와 득실(得失) 점이 있었음을 밝혀 주는 데 그쳤어야 옳았네. 대체로 책을 편집하는 체제가 그러한 것일세.
기억건대, 명도(明道)가 일찍이 조례사(條例司)에 재직하였으나 이천(伊川)이 그것을 좋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행장(行狀)을 지으면서 그 사실을 빼 버렸으니 그 은미한 뜻을 짐작할 수 있을 걸세. 그런데 지금은 하필 근거도 없는 말들을 책에 실어서 흠을 찾는 사람들에게 구실을 제공하여 이내 피차간의 시끄러운 단서를 만든단 말인가.
선생이 서모 때문에 집을 떠났다는 말은 더욱 이치에 닿지 않네. 내가 선생의 문하에서 들은 바에 의하면, 그 서모가 과연 남달리 패악스럽긴 하였으나 선생께서 더욱 공경하고 효도하여 마침내 화락한 데 이르렀다고 하였네. 이것이 곧 사실일세. 선생께서 일찍이 손님을 맞아 앉았는데 어떤 사람이 홍시 한 소반을 가져와 올렸네. 선생은 손이 시장할 것이라 생각하고 하나를 손님에게 대접하고 또 자기도 하나를 집었네. 그러고서 들여보내자 서모가 두 개의 빈 자국을 발견하고는 큰소리로 꾸짖어 말하길 “이같이 욕심나거든 왜 하필 들여 보냈느냐.”고 하였네. 선생이 급히 두 개를 집어 들고 들어와 잘못을 빌며 “찾아온 손이 시장한 기색이 있었던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대접하였습니다. 제가 과연 잘못하였습니다.” 하자 서모는 마침내 화를 풀고 먹었다고 하였네. 이것이 그중 한 가지 일이네.
《예기(禮記)》에
“부모에게 과실이 있어 세 번 간하여도 들어주지 않으면 울부짖으며 따라 다녀야 한다.”
하였고 또,
“비록 부모에게 매를 맞아 피가 흐르는 지경에 이를지라도 감히 원망하지 말고 더 공경하고 더 효도하여 부모의 낯빛이 화락하여지면 다시 간해야 한다.”
하였네. 선생의 더없이 효성스런 성품으로 어찌 어버이의 마음에 들지 못하고 등져서 집을 떠날 리가 있겠는가.
조중봉(趙重峰)은 율곡 선생에게서 배운 분인데, 그분 역시 이러한 변고(계모 밑에서 자랐던 일)를 만났으나 마침내 그 계모로 하여금 마음을 돌리게 하여 마치 율곡 선생의 이 일처럼 하였네. 이는 내가 중봉의 매부 박장(朴丈 이름은 안정(安定))에게서 세 번이나 들은 일일세. 박장은 이어 말하기를 “성인은 내가 못 보았으나 내 생각에는 중봉이 바로 성인일 것이라고 여긴다.” 하였네. 이때 동춘(同春)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이 말은 진정으로 복종한 데서 나온 것이다.” 하였네. 박장의 아들 유동(惟棟)은 나이 83세로 황간(黃澗)의 산속에 깊이 들어가 글을 읽으며 농사를 짓고 있네.
만일 말하는 사람들의 얘기와 같다면, 율곡 선생이 자신을 나무라는 소(疏)에서,
“마침내 불교(佛敎)를 좋아하여 기름에 빠져 들고 물에 젖어들듯이 거듭거듭 미혹에 빠져서 산사(山寺)로 달려들어 갔습니다.”
는 등의 말들은 모두가 임금을 속이는 말이 되고 마네. 성의(誠意)ㆍ정심(正心)의 학문이 깊은 선생으로서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의 뜻은 이러한 근거 없는 모든 잡설들은 일체 빼 버리는 것이 옳다고 여기네.
이러한 것들을 화숙(和叔)과 상량하지 않으면 끝내 바로잡을 길이 없기 때문에 일찍이 그와 자세한 논의를 하고자 하였네. 그런데 가만히 들으니, 윤증의 집에서 화숙이 나와 절교하지 않은 것을 허물로 삼고 그들 젊은이들이 마구 욕설을 퍼붓는다고 하였네. 그래서 나는 마음이 매우 불안하여 감히 그와 바로 상의할 수 없으므로, 그대를 사이에 세워 편지를 왕복하고자 하네. 그러나 성(成)과 윤(尹)의 기록들을 삭제하는 데에는 반드시 뚜렷한 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니, 이것이 매우 난처한 일이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네. 이 편지는 결코 함부로 남에게 보여서는 안 되네. 모름지기 기회를 보고 형편을 헤아려서 잘 처리해야 할 것이네.
물어 온 회혼례(回婚禮)라는 말은 근래 사대부의 집안에서 나온 것이네. 대체로 부모가 고령(高齡)까지 함께 생존하기란 실로 얻기 어려운 기쁜 일이네. 나는 남의 집에서 이런 일을 치렀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부모를 모두 여윈 때문에 애통한 감회를 금할 수 없었네. 생각해 보면, 삼대(三代)의 융성했던 시절에는 백년의 수를 누린 사람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임금이 백 세된 분에게는 안부를 묻는 예가 있었네. 비록 나이 30에 장가를 든다 해도 90세가 되면 꼭 회혼(回婚)의 해이네. 지금 세속에서 행하는 것이 만일 천도(天道)와 인리(人理)에 꼭 합당한 일이라면 성인이 반드시 예를 제정하여 백성들에게 가르쳤을 것이네. 또 부인의 입장으로 말한다면, 두 번 초례(蘸禮)를 치르는 것이 한 번 초례를 치른 것과 비교할 때 그 명분과 의리가 매우 온당치 못하니, 내 생각에는, 이러한 명분을 사람들의 이목에 익히게 해서는 안 될 것 같네. 그러나 사람의 자식된 마음에 이날을 맞아 잠자코 지나칠 수 없다면 잔치를 마련하여 하례를 올려서 대략 생일날의 의식처럼 하는 것은 혹 무방할 것 같기도 하네.
대체로 이 일은 반드시 먼저 그것을 행해야 하는지의 여부를 결정지은 다음에 복(服)이 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 물어야 할 것이네. 만일 사정상 행할 만하여 그냥 지나칠 수 없다면 의당 《가례(家禮)》의 ‘자신과 주혼자가 기년 이상의 복이 없어야 한다’는 조항을 보아서 처리해야 할 것이네.


 

[주C-001]권치도(權致道) : 권상하(權尙夏)를 말함. 치도(致道)는 그의 자. 송시열의 수제자(首弟子)로 벼슬은 하지 않고 학문에만 정진하였으나 뒤에 우의정에 제수되기까지 하였음. 저서에 《한수재집(寒水齋集)》이 있음.
[주D-001]김상(金相)이 …… 말았네 : 김상은 재상인 김수증(金壽增)을 말함. 김수증이 경연에서 숙종에게, 송시열이 적소(謫所)에서 《주자대전차의》를 만들었다고 아뢰자, 숙종이 이를 간행하여 반포하라 하면서 아울러 박세채(朴世采)의 《주자대전습유(朱子大全拾遺)》도 가져와 간행하게 하라고 하였다. 이때 박세채는 소를 올려 “지금 여름에 눈이 내리고 지진이 일어나는 변괴가 잦은 때에 상하(上下)가 모두 그 재변의 대책에 부심해야 합니다. 책을 간행하는 것은 긴요치 않은 일로 문치(文治)나 꾸미려는 것입니다.” 하였다. 《南溪集 卷14 再辭召命因進朱子大全拾遺疏)》
[주D-002]방백(方伯) : 당시 전라 감사(全羅監司)인 이사명(李師命)을 말함.
[주D-003]새로운 의논 : 1682년 즉 숙종 8년에 김장생(金長生)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자는 소(疏)가 올려졌었는데, 이때 송준길(宋浚吉)까지 함께 종사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주D-004]옹계록(翁季錄) : 옹(翁)은 주희를 말하고 계(季)는 계통(季通 채원정)을 말한 것으로 주희와 채원정 사이에 왕복한 편지를 한데 묶어 이렇게 이름한 것임. 《宋子大全隨箚 卷9》
[주D-005]윤(尹)과 …… 기록들 : 윤은 윤선거, 성은 성지선(成至善)을 말함. 이들이 성혼이 이이보다 낫다는 뜻으로 여러 가지 말들을 《율곡별집》에 삽입하였는데, 예를 들면 “율곡이 계집종과 종일 쉬지 않고 얘기를 하자 우계가 이를 보고 ‘숙헌(叔獻 이이)은 왜 그리 말이 많은가.’ 하자, 율곡이 부끄러워하며 미안하다고 하였다.”는 내용 등이다.

 

 

송자대전 제89권
 서(書)
권치도(權致道)에게 답함 - 정묘년(1687) 2월 20일


겨우 편지 한 장을 돌아가는 영윤(令胤 권상하의 아들 권욱(權煜))에게 부쳐 보내고 나서 갑자기 관가(官家) 편에 은혜스런 편지를 받게 되니 그대를 그리던 마음에 매우 위안이 되네. 부본(副本)은 그대의 의견에는 어떠하던가? 서울의 편지를 받아 보니 모두 재앙의 빌미라고 말하였는데, 오직 수동(壽洞 수동에 살았던 이선(李選))의 편지에서만 백세의 공안(公案)이라고 하였네. 이 사람이 세상 물정에 밝아서 이렇게 말한 것이니 또한 기이하다 하겠네. 내가 서울서 온 편지에 답하면서 ‘만일 주자(朱子)와 율옹(栗翁)의 도가 우리 동방에서 없어지지 않게만 된다면 비록 죽어 없어진다 하여도 전혀 여한이 없겠다.’고 하였네. 이것이 나의 실정일세.
이곳은 수일 전부터 갑자기 소손(小孫 막내 손자 회석)의 병세가 매우 위중해져서 산중에 들어가는 일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네. 서로 만날 기약이 없어 마음이 슬프구려.
영윤이 전해 온 바 ‘몹시 걱정이 된다’는 말은 그 계제가 여기에서 들은 것과 서로 반대되니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네.


별지
근자에 나는 남들과의 대화(對話)에서 지나친 점이 있었음을 스스로 깨달았네. 그러나 동춘(同春)의 서원(書院) 제향 위차는 더할 수 없이 잘못되었네. 황세정(黃世楨) 같은 사람은 단지 스승을 높이는 것이 의리인 줄만 알고 천륜(天倫)을 거스리는 것이 죄가 되는 줄은 모르는 사람일세.
회덕(懷德)에 있는 서원(숭현서원(崇賢書院))에서는 노선생(김장생)과 무릎을 맞대고 나란히 앉게 해 놓고 또 죽창(竹窓 이시직(李時稷))의 향위(享位)를 내려다보게 하였네. 죽창은 바로 동춘이 어렸을 적에 그분에게서 글을 배웠으므로 그분을 마치 아버지처럼 섬겼네. 그러므로 죽창의 묘갈문(墓碣文)에서도 동춘이 문인이라고 자칭하였던 것이네. 그런데 문인은 남향하여 정위(正位)에 앉게 하고 선생은 배향(配享)의 자리로 앉게 하여 제자가 선생을 내려다보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이치와 윤기를 매우 거스르는 일이 아니겠는가. 연기(燕岐)에 있는 서원(봉암서원(鳳巖書院))에서는 또 동춘을 노선생의 오른쪽에 앉혀서 그 폐단이 회덕의 서원보다 심하네.
공주(公州)의 서원(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하려던 때에는 위차(位次)에 대한 말을 누가 묻기에 내가 ‘모름지기 동춘은 노선생과 열(列)을 달리하여 회덕의 서원처럼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네. 그것은 대체로 공주의 서원에는 주자의 신위를 정위에 봉안하고 우리나라의 현인들을 좌우로 배식(配食)하게 한 까닭에서였네. 그런데 윤선거의 문인들이 기필코 회덕의 서원에서처럼 노선생과 나란히 앉히고자 하였네. 공주의 성(成)씨와 민(閔)씨들은 모두 명문대가인데, 그들이 윤씨 문중의 말을 따르지 않고 나의 말을 따르자 동춘 문하의 젊은이들은 크게 화를 내고 병을 핑계로 제향에 참석하지 않았네. 이 모두가 황세정의 작용으로 그렇게 된 것이네.
일전 회덕서원의 제향 때에는 단지 잘못된 점만을 가볍게 말하였던 것이네. 그런데 오늘날 연기(燕岐)의 위차와 공주의 의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극력 말하지 않을 수 없었네. 그리하여,
“너희들이 만일 동춘의 마음이 반드시 이렇게 하는 것을 편안하게 여길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너희들이 동춘을 높이려는 행위가 도리어 동춘을 박하게 대하는 행위가 되고 만다.”
고 하였으나, 황(黃)은 그래도 깨닫지 못하여 계획을 변경하려 하지는 않고 그 책임을 여양(驪陽 민유중(閔惟重))에게 미루었으니, 매우 꽉 막힌 사람이라 하겠네. 내가 부득이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에게 편지를 내어 여양과 상량하여 보라고 하였는데, 견해들이 어떨지 모르겠네. 그 편지의 초본이 지금 주석(疇錫)에게 있으니 바라건대 가져다 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보고서 만일 내가 한 말에 잘못이 없으면 원컨대 숙범 영공(叔範令公 홍득우)과 상량하여 회답해 주게나. 숙범에게도 편지를 보냈으나 이 일은 언급하지 않았네. 그러나 그 편지에 말한 것도 세미한 일이 아니었으니 이를 숙범이 그르다고는 여기지 않을 걸세. 이러한 일로 이곳 젊은이들이 꽤 의심하고 노여워하는 뜻을 가지고서 나더러 동춘을 억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니 아, 어리석고 몽매하기 그지없는 사람들일세.
주 선생이 동래(東萊 여조겸(呂祖謙))의 찬(贊)을 지어,
“마음에는 삼재(三才 하늘ㆍ땅ㆍ사람)의 이치를 간직하였고 몸에는 사시(四時)의 조화(調和)를 간직하였다.”
하였으니, 참으로 훌륭하다 할 만하나, 여동래의 문하에서는 오히려 말썽이 있었네. 동래의 제자들은 참으로 명인들이 많았는데도 이러하였으니, 요사이 젊은이들이야 말할 나위나 있겠는가. 그러나 돌이켜 생각하면 이런 말들을 주고받는 데에서 또한 내가 성정을 지나치게 부렸던 점은 없었겠는가. 그런 일이 있었다면 모름지기 깨우쳐 주어야 하네. 어떻게 생각하는가?


 

[주D-001]부본(副本) : 1687년 즉 숙종 13년에 송시열이 존주(尊周)의 대의를 논하여 윤증 부자의 사건에 관해서 올린 소의 부본을 말함.

 

 

송자대전 제89권
 서(書)
권치도(權致道)에게 보냄 - 무진년(1688) 6월 18일


요즘 하는 일은 어떠한가? 그대를 그리는 마음 말로는 다 표현하지 못하겠네. 나의 병은 거의 말도 못할 지경이 되었다네. 가만히 저장(邸狀 저보(邸報))을 보니 나의 이름이 자주 소장에 올라 마음이 매우 불안하네. 대죄(待罪)하는 소가 없어서는 안 될 것 같네. 겸하여 또 반제(泮題)에 공자를 업신여기는 말로 선비를 시험 보였던 것은 그 근원이 대체로 적휴가 주자를 공격한 데서 나온 것인데 윤가(尹家 윤증의 집안)가 당을 지어 그를 도왔기 때문에 그들 파당이 크게 확대되어 이런 극악한 데 이르게 되었네. 이는 또한 내가 윤(尹)를 배척하여 격동시킨 데 연유된 것이기도 하네.
대체로 요즈음 무리들의 심술은, 윤증과 관계되는 일이면 반드시 가일층 그 형세를 확장시키려 하네. 입산(入山)한 것을 공격할 때는 머리도 깎았다는 거짓말을 끄집어내고, 권순장과 김익겸을 공격할 때는 삼학사(三學士)에게까지 욕을 하였네. 지금은 휴(鑴)를 배척하는 나를 공격하기 위해서 공자에게까지 욕을 하고 있네. 대체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윤증의 세력을 강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네. 그리하여 죽을힘을 다하면서 전혀 기탄이 없는 것이니 그 화가 어찌 홍수나 맹수로 인한 피해 정도일 뿐이겠는가. 지금 내가 만일 죽음을 두렵게 여겨 말하지 않는다면 평생 동안 주자의 글을 읽은 뜻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것은 시사(時事)를 함부로 논하는 일과는 다르니 머리가 잘리고 가슴이 뚫리는 것을 진실로 달게 여기는 바이네. 꼭 중화(仲和)와 상량하여 회답해 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 일은 남에게 연루시키고 싶지 않으니 소홀하게 다루어서는 안 되네.
또 한 가지 일이 있네. 석담(石潭 이이(李珥))이 매몰되어 감은 진정 차마 말 못할 일이네. 예부터 있었던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가 책상에 간직되었던 것을 어제 김계달(金季達 김창직(金昌直))을 인해서 서울과 동교(東郊)에 보냈네. 이는 노선생께서 지으신 것을 김남창(金南窓 김현성(金玄成))이 쓴 것이네. 본을 떠서 판본을 만들려고 하는데, 이어서 구곡도(九曲圖)를 그 아래 그려 붙이고, 또 무이구곡시(武夷九曲詩 주희가 무이산 아홉 경치를 읊은 시)의 운(韻)자를 가지고 각곡 마다에 시를 지어서 써넣는다면 훌륭한 일이 원만하게 이루어졌다고 할 것이네. 이미 여러 노성(老成)한 이들께 자세히 말하였네. 무이구곡시의 첫수 운자는 내가 망녕되이 책임지기로 하고 그 아래 아홉 수의 운자는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 형제와 중화(仲和) 외에 부탁할 만한 사람이 어디 있는지, 역시 중화와 상의하여 회답해 주기 바라네. 지금의 영상(領相)은 어떻겠는가?
저들 중에서 지어낸 말은 나올수록 더욱 신기하네. 그의 뜻이 아마 나를 반드시 무상한 소인으로 만들고 난 다음에야 제 아버지가 군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 듯하네. 그러니 그가 못할 짓이 없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나머지는 이만 줄이네.


별지
윤보(尹譜 윤선거의 연보)에 이르기를,
“희중(希仲)이 어린 나이에 스스로 깨달아 학문에 뜻을 두었는데, 마음을 세우고 행동을 가짐이 고인(古人)에 얽매이지 않았고 글을 읽고 뜻을 강론하는 데에는 주설(註說)에 구애하지 않았다. 언론이나 견식은 참으로 남보다 뛰어난 점이 있으므로 공이, 그의 장점과 단점을 서로 보완하면 세속 선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여겨 깊이 허여하였다. 그러면서도 일찍이 그의 재주를 근심하고 그의 병통을 경계하여 자주 그를 경계하였으나 희중이 끝내 따르지 않아 패망하기에 이르렀다.”
하였네. 이 말을 근거하여 보면 그가 휴를 막 나서부터 이치를 환히 안 사람에 가까운 것으로 여겼다는 데에 의심할 여지가 없고 그가 지성으로 높이 숭상하였던 것도 괴이할 게 없었네. 그 이른바 ‘그의 재주를 근심하고 그의 병통을 경계하였다.’는 말은 다만 그가 죄를 짓고 죽은 뒤라서 부득이 이 말을 강조하여 제 아비에게 선견지명이 있었다는 단서로 삼은 것이네. 비록 자기는 치밀한 사람이라고 말할지라도 종종 낭패되는 것을 간파하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조소하고 침을 뱉도록 하네. 나의 견해는 이러한데 그대의 뜻은 어떤지 모르겠네. 꼭 한벽(寒碧)과 한 번 보고서 회답해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네.


 

[주D-001]반제(泮題)에 …… 시험 보였던 것 : 반제는 성균관에서 유생들에게 내린 시제(試題). 대사성(大司成) 박태손(朴泰遜)이 《장자(莊子)》 어부(漁父)에 나오는 내용을 취하여 ‘행단의 어부가 공자에게 답하다[杏壇漁夫答孔子]’란 제목으로 성균관의 유생들을 시험 보인 것을 가리킴. 《宋子大全隨箚 卷9》
[주D-002]입산(入山)한 …… 하였네 : 윤증의 일파가 대권을 잡게 되자 그의 당여인 홍수주(洪受疇)가 소를 올려 ‘율곡이 입산하여 머리를 깎았다.’고 주장하면서, 아울러 ‘삼학사가 청(淸) 나라에 들어가 벼슬하였다’고 한 것을 말한다. 《宋子大全附錄 年譜》
[주D-003]동교(東郊) : 당시 동대문 밖 금곡에 살고 있던 김수항(金壽恒) 집안을 가리킴.
[주D-004]한벽(寒碧) : 김창협(金昌協)을 말함. 김창협이 당시 청풍 부사(淸風府使)로 있었는데, 청풍군에 한벽정(寒碧亭)이 있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임.

송자대전 제89권
 서(書)
권치도(權致道)에게 답함 - 무진년(1688) 9월 10일


신하와 백성에게 복이 없어 자의성모(慈懿聖母 인조(仁祖)의 계비 조씨(趙氏))가 끝내 승하하시기에 이르렀구려.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슬픔을 견디지 못하겠네. 생각건대 성상께서 여러 달 병을 간호하시다가 상사(喪事)까지 당하셨으니 근심 걱정과 민망한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영윤(令胤)이 서쪽으로 옴으로 인하여 부음을 접하였네. 앞서의 편지에서 자네가 말한 뜻을 갖추어 알았네. 이곳은 손자 회석의 병이 날로 위독해져서 나의 심장이 조금도 남김없이 다 타 버리는 것 같네. 이 일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선현(先賢)을 헐뜯어 업신여긴 것은 사건이 매우 중대하여 죄를 성토하는 일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으니, 비록 국상(國喪) 때문에 잠깐 정지했다 할지라도 끝내 잠잠하지는 못할 것이네. 다만 듣건대 피차가 서로 조치를 취하고 있다 하니 아무리 스스로는 무후(武侯 제갈량(諸葛亮))의 진영처럼 잘 단속하였다고 여길지라도 일을 아는 사람이 곁에서 냉소를 짓고 있는지 누가 알겠는가.
선사(先師 김장생)께서 비록 문간 선생(文簡先生 성혼)에게 경도(經道)와 권도(權道)를 이끌어 논하여 약간의 의심을 두기는 하였으나 문간 선생의 《소학속록(小學續錄)》을 간행 반포해서 후학을 가르치자고 청하였고, 또 사람들이 최옥(崔獄)에 의심을 두자, 그것이 거짓임을 명확하게 변명하였는데 이 사실이 모두 새로 간행된 문집에 실려 있네. 그윽이 생각건대, 문간 선생을 존신하기로는 비록 그분 문하의 제자라 할지라도 여기에 미칠 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네. 어떤 일로 인하여 의심받게 되는 것은 이천(伊川)으로서도 화정(和靖)에게 면치 못하였네. 그러니 지금 의심하고 성내어 선사의 이름을 부르기까지 하면서 마구 외쳐대는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이는 다 윤휴의 여파임이 숨길 수 없음을 볼 수 있네. 그 가운데서도 더욱 미문(美門 미촌(美村)의 집안)에서 무근한 말을 지어내는 것으로 능사를 삼는데, 이는 곧 윤휴에게서 비롯되어 다시 한 번 변화한 것이니, 나로 하여금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리게 하네.
조만간에 올 기약이 있음을 알고 있네. 과연 그렇게 된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감히 바랄 수가 없네. 손자 주석은 다시 새로 부임한 감사와 혐의가 있어 이제 영원히 돌아왔으니, 힘도 그리 들이지 않고 중순(仲淳 정호(鄭澔))과 함께 쾌적함을 누리게 되었네. 누가 우리 집에 이렇듯 편안한 때가 있으리라고 예상했겠는가. 나머지는 모두 유회(幼晦 권욱(權煜))에게 말로 전하라고 부탁하겠네. 누워서 부르다가 이만 줄이네.


 

[주D-001]경도(經道)와 …… 논하여 : 임진왜란이 끝날 무렵 중국의 장수들이 한사코 강화(講和)를 주장하였다. 그러자 성혼이 그들의 말을 받아들일 것을 주청하였다가 선조에게 크게 질책을 들었다. 뒤에 김장생이 권도(權道)와 경도를 제자들과 얘기하다가 성혼의 이 사건에 언급하여 ‘변란은 바꾸어 대처할 수 없고 권도란 성인이 아니면 쓸 수 없다. 만일 율곡 같았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고 하였다.
[주D-002]소학속록(小學續錄) : 이 책은 성혼의 제자인 한교(韓嶠)가, 《소학》을 주희가 편찬했기 때문에 주희의 언행(言行)이 빠졌음을 유감으로 여겨 스승에게 질정하여 주희의 언행을 뽑아 만든 책임. 성혼이 죽은 뒤 이를 김장생에게 교정을 의뢰하자 김장생이 보고 이 책을 세자(世子)에게 읽힐 것을 주청하였음. 《宋子大全 卷20 文元公萬言疏節略一條》
[주D-003]최옥(崔獄)에 …… 실려 있네 : 최옥은 최영경(崔永慶)의 옥사를 말함. 이 옥사를 가지고 정인홍은 ‘정철(鄭澈)이 위관(委官)으로 있으면서 성혼의 사주를 받아 최영경을 죽였다.’ 하였고, 문경호(文景虎)는 소를 올려 ‘성혼이 최영경을 얽어 죽게 하였다.’고 하였는데, 김장생은 황종해(黃宗海)에게 답한 편지에서 성혼에게 이런 사실이 없음을 변명하였다. 《沙溪先生遺稿 卷4 答黃宗海》
[주D-004]이천(伊川)으로도 …… 못하였네 : 화정(和靖)은 윤돈(尹焞)의 호. 송 휘종(宋徽宗) 때 정이(程頤)를 서경 국자감(西京國子監)에 임명하자 정이가 거기에 부임하므로 제자인 윤돈이 이를 잘못이 아닌가 하고 매우 의심하였다. 《二程全書 伊川年譜》
[주D-005]주석은 …… 돌아왔으니 : 송시열의 손자 주석이 용담 현령(龍潭縣令)으로 있었는데 새로 부임해 온 감사가 주석의 처외숙(妻外叔)이 되는 이지익(李之翼)이었기 때문에 피혐(避嫌)의 관례에 따라 벼슬이 낮은 주석이 벼슬에서 물러나 집에 돌아온 것이다. 《宋子大全隨箚 卷9》

 

송자대전 제89권
 서(書)
권치도(權致道)에게 답함 - 무진년(1688) 9월 26일


전후의 편지는 차례로 받았는데, 건강이 좋지 못함을 알고 나니 매우 걱정이 되네. 이곳 손자의 병은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들어간 지가 오래되어 차마 눈으로 보지 못하겠네. 여러 달 동안 애를 태운 나머지 갑자기 설사병을 얻어 그 증세가 아주 심각하네. 원기가 먼저 떨어져 버렸으니 아마 오래 버티어 내지 못할 것 같네.
어제 체원(體元 윤이건(尹以健))의 편지를 보니, 동보(同甫)와의 문답을 가지고 대론(臺論)과 유생들의 소(疏)가 일시에 함께 일어날 것이라고 하였네. 듣건대, 오도일(吳道一)이 파문(坡門)의 자손 만사(挽辭)에서 우옹(牛翁)이 무함을 입은 사실을 들어내 말하여 충동질하고, 이성(尼城)에서는 무근한 거짓말을 하여 자료를 만들었으니 그 형세가 왜 그러지 않겠는가. 대체로 길보(吉甫)에 대해서 비록 신변(伸辨)하였다고는 하지만 단지 바꿀 수 없는 공론(公論)만을 전개했을 뿐이므로, 그 분을 다 풀지 못하자 우옹에게 말썽을 전가시켜 단번에 깨끗이 이기려는 꾀로 삼고자 한 것이네. 내가 만일 죽지 않는다면 의당 그 사건의 자초지종을 모두 털어놓아서 그것이 그렇지 않음을 밝히겠네. 오직 근거 없이 만들어진 말들은 가면 갈수록 더욱 신기하여지지만 그들이 서로 만났을 때는 또한 부끄러운 마음이 없겠는가.
우옹이 비방을 받은 것 중에는 선비를 죽였다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네. 파문(坡門)에서는 정인홍(鄭仁弘)에게 붙어 그 화를 완화시켜 보려 하였으나 노선생은 직접 한강(寒岡)을 배척하여 그 억울함을 밝히었네. 나는 아직 우옹에 대해서 노선생보다 더 정성껏 존중하는 분을 보지 못하였네.
오직 율곡 선생에게만은 조금 더 존숭한 것이 없지 않은데, 대체로 공자의 문인이 공자를 ‘요순(堯舜)보다 훨씬 어질다’ 하였으니, 이는 곧 요순이 공자보다 훨씬 어질지 못하다는 말일세. 그러나 요순의 도를 높이는 사람이 공자의 제자들에게 화를 내어 욕한 말은 듣지 못하였네. 요즘 사람들은 어린아이의 소견으로 남의 얼굴만 쳐다보고 시새워가며 떠들어 대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니 불쌍할 뿐이네. 누워서 남을 시켜 쓰네. 이만 줄이네.


 

[주D-001]노선생은 …… 밝히었네 : 김장생이 황종해(黃宗海)에게 답한 편지에서 김우옹(金宇顒)과 정구(鄭逑 호가 한강(寒岡)임)는 자세한 내용을 모르고 허물을 송강과 우계에게 돌리려 한다고 했던 일을 말한다. 노선생은 김장생을 가리킨다.

 

송자대전 제89권
 서(書)
권치도(權致道)에게 보냄 - 기사년(1689) 3월 7일


지난달 24일에 일행이 강진(江津)의 만덕산(滿德山) 백련사(白蓮寺)에 도착하였네. 배가 준비되지 못하고 또 순풍(順風)도 얻지 못하여 그곳에서 4일 동안 머물렀네. 긴 대는 순이 돋고 동백은 화려하게 꽃을 피워 참으로 별경이었네. 그곳에서 날마다 수행한 선비 박광일(朴光一)ㆍ박중회(朴重繪) 등과 의심난 것들을 강론하였는데, 서로 부합된 것이 많아서 다행스러웠네.
29일 석양에 행장을 꾸려 배에 올랐다가 이달 초하룻날 닻을 올렸으나 저녁에 큰 바람을 만나 사람마다 시달려서 밤중에는 포구의 마을에 들었네. 다음날은 그곳에 머물러 바람이 자기를 기다렸네. 초3일에 배를 띄워 큰 바다로 나왔으나 해가 지면서 풍세(風勢)가 고르지 못하여 간신히 해안에 도착하니 동녘이 벌써 환해졌었네. 일행이 모두 피곤하여 해안 마을에서 하루를 묵고 초5일에는 바람을 무릅쓰고 주성(州城 제주도)에 들어왔네. 그러자 금오랑(金吾郞)은 한창 가시울타리 둘러치는 일을 독려하고 있었네. 언뜻 풍토를 살펴보니 사람이 살 곳은 아니나, 기후가 또한 이상하여 한라산에는 눈이 잔뜩 쌓였고 산 아래는 꽃들이 화려하게 피었으며 상추를 벌써 먹고 있었네. 성은(聖恩)이 관대하여 나 같은 죄인을 이런 곳에서 쉬도록 해 주시니 감사한 마음 어찌 한이 있겠는가.
오직 날조된 욕설이 선인(先人)에게까지 미치니, 나는 빨리 죽어 버리고만 싶으나 되지 않네. 어찌해야 하겠는가. 다만 생각건대 선인께서 세우신 의리는 위로 백일(白日)과 그 광채를 겨룰 만하니 설령 흉악한 무리들에게 무함을 받는다 하더라도 하늘이 내려다보고 계시니 무슨 손상됨이 있겠는가. 이것을 가지고 스스로 달래면 이 목숨 아직까지 붙어 있는 것도 큰 죄는 되지 않을는지?
배 안에서 퇴계(退溪)와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 사이에 왕복한 편지 3책을 보았는데, 그 세밀하고 조심스러움은 참으로 물샐 틈이 없다고 할 만하였네. 그분들이 몸을 온전히 하여 천수를 다 누리고 훌륭한 이름이 무궁하기에 마땅하였네. 창주공(滄州公 김익희(金益煕))이 일찍이 말하기를 ‘그대가 퇴계를 배우지 않고 잘못 주자를 배웠으니 앞으로 화패가 적지 않으리라.’ 하였는데 이 일을 당하고 보니 더욱 그 말을 실감하게 되네. 그러나 참으로 주자를 배워서 털끝만큼이나마 소득이 있다면 비록 죽는다 하여도 절대로 한이 없겠네. 옛날에 이른바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더라도 괜찮다.’는 말이 이를 두고 한 말일세. 그러나 어떻게 그 만분의 하나인들 바랄 수 있겠는가.
또 당시에 비록 주자를 역당(逆黨)의 우두머리라 하여 그를 베죽이자고 청하는 소가 있기까지 하였으나 한탁주(韓侂胄)가 끝내 그를 죽이지 못한 것은, 온 천하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며 친근하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네. 오늘날은 당시와 이미 세대가 멀어졌는데 또 주자를 공격하다가 공자에게까지 미쳐간 시기를 당하였네. 나같이 미미한 사람의 힘으로 그 만분의 하나일망정 구해 볼까 하였으니 모진 재앙을 당하기에 마땅하지 않겠는가. 오늘날의 일은 성상의 어짊과 밝으심이 아니었다면 어찌 여기에만 그치고 말았겠는가. 성은이 이미 이와 같고 내가 존숭하는 분은 주자요 율곡이니, 위로 하늘에 묻더라도 부끄러울 것이 없으며 또한 사문(斯文)에도 할 말이 있을 것이네.
오직 편찬 중인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를 미처 마치지 못하고 이 일을 만나 마음에 걸려 잊혀 지지 않네. 이것은 꼭 주자가 만년에 예서(禮書)에 연연하였던 것과 같네. 이 일은 오직 그대와 중화(仲和)에게 달려 있네. 중화도 재앙의 조짐이 한창 성하니 아마 이 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을 것이네. 그러나 지금 벼슬에서 물러났으니 어버이를 봉양하는 여가에 혹 감정(勘定)하는 일에 전일할 수 있을 것도 같네. 모름지기 그와 상량하여 하기 바라네.
생각건대, 하늘의 마음은 사람을 곤궁하게 하여야만 도(道)가 형통하게 된다고 여기는가 보네. 하고 싶은 말은 많으나 기력이 없어서 다 말하지 못하겠네.
흥농(興農)과 화양(華陽)에서 가지고 온 서책들을 모름지기 기록하여 보여 주기 바라네. 모(某)의 편지를 또 별본(別本)을 만들어 두려고 한다니 뜻은 매우 좋으나 중화(仲和)에게는 알려지지 않도록 하게. 그것이 미안하기는 하나 늘 그의 외삼촌(나양좌)이 염려되어서이네. 이 점을 헤아려 처리하게.


별지
태극도설(太極圖說)에 ‘동(動)하여 양(陽)을 낳고 정(靜)하여 음(陰)을 낳는다’는 것을 일찍이 혼자서 망녕되이 논하기를 ‘태극의 동정이 바로 음양인데 왜 동정이 음양을 낳는다고 말하였는가? 생(生)이란 한 글자를 놓은 것이 더욱 늘어지는 듯하나, 주 부자(周夫子 주돈이(周敦頤))의 글은 매우 간결하면서도 정밀하니 어떻게 감히 나 같은 짧은 견해로 이렇게 딴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하였네.
그러나 생각이 여기에 이를 때마다 자못 시원스럽지 못하였네. 그런데 뒤에 주자가 태극도 아래에 붙인 해설을 보니 바로 두 생(生) 자를 없애 버리고 ‘태극의 동은 양이고 정은 음이다.’ 하였네. 역시 주자도 여기에 흠이 있다고 여겨 원문을 개정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말의 뜻이 뛰어나서 사람으로 하여금 대번에 잠에서 깨어난 듯 환히 깨달을 수 있게 하였네. 여기에서 비로소 ‘선현(先賢)의 글은 뒷사람이 감히 한 글자도 고치거나 바꾸지 못한다.’는 말이 정론이 아니었음을 알았네.
내가 어렸을 때 일찍이 문원 선생(文元先生)을 모시고 앉았다가 외람되이 여쭙기를,
“이 두 생(生) 자를 위(爲) 자의 뜻으로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선생께서는 깊이 생각에 잠기셨다가,
“감히 그렇게 보아서는 안 된다.”
하였네. 이로부터는 감히 다시 의심을 품지 않았었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주자의 설로 선생께 묻지 못한 것이 매우 한스럽네.
전일 그대의 질문에 대답할 때 여기에 언급은 되었으나 자세하게 말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감히 다시 말하여 명석한 가르침을 구하네. 이는 바로 조화(造化)와 성명(性命)의 근원이 되는 곳이니 자세히 끝까지 추구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네.


 

[주D-001]날조된 …… 미치니 : 송시열의 아버지 송갑조(宋甲祚)가 광해군(光海君) 당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을 때,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서궁(西宮)에 유폐되어 있었는데, 으레 사은(謝恩)을 해야 하는 서궁에 사은을 폐지케 해달라는 소(疏)를 한편에서 작성하면서 사마시에 합격한 모든 사람의 서명을 받으려 하였다. 그러자 송갑조는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는 즉시 물러 나와 자기 혼자만 서궁의 인목대비에게 사은하였다. 그러자 소를 작성하던 사람들이 송갑조의 이 행동에 분개하여 송갑조의 이름을 일방적으로 그 소에 써넣음으로써 이것이 화근이 되어 인조가 등극한 뒤 송갑조를 유적(儒籍)에서 삭제하였는데, 이 일을 들어 윤증 일파에서 송시열을 공격하기 때문에 한 말이다.

 

송자대전 제89권
 서(書)
권치도(權致道)에게 보냄 - 기사년(1689) 4월 2일


여기에 온 뒤로는 일체 아무 일이 없어 약간의 서책을 마무리할 수 있을 듯하였네. 그리하여 외람스레 스스로 겸손치 못하고 마음속으로, 우연하지 않은 그 무엇이 바로 여기에 있구나 하였으나 지금은 화의 기미가 이처럼 절박하여 머리 또한 목 위에 붙어 있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제는 이 뜻도 그만이네. 원래 시작하지 않은 것이야 그대로 두고 논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미 시작하고서 끝내지 못한 것이 약간 있다네. 손자 아이들이 앞으로 그대에게 받들어 드릴 것이니 유의하여 일을 마무리 지어 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는 모두 주자가 끼친 교훈이며 스승이 남겨 주신 뜻이었던 까닭에 감히 금방 죽음이 있다고 하여 그만두지 못하는 것이네. 모름지기 중화(仲和 김창협(金昌協))와 협력하고, 또 동보(同甫 이희조(李喜朝))ㆍ여구(汝九 이기홍(李箕洪))ㆍ미백(美伯 최방언(崔邦彦)) 등 여러 벗에게 도움을 구한다면 또한 힘이 될 걸세. 그중에서도 《논맹혹문(論孟或問)》과 《논맹정의(論孟精義)》를 합하여 편차하는 일은 일거리가 크고 복잡하여 마무리 짓기가 쉽지 않을 것이므로 염려가 되네.


별지
《역전(易傳)》은 부주(涪州)에서 힘을 얻었음이 미제(未濟) 괘의 주(注)에서 증험되네. 이는 대체로 조물주의 뜻이 없지 않은 것인데, 오늘날은 화의 기미가 이미 절박하여 아마 잠깐의 여유도 없을 듯하네. 여기에 온 뒤에 《논맹혹문》의 수정을 끝냈네. 이는 《논맹정의》의 주를 나누어 《혹문》의 해당 조목 아래에 편입하여 《혹문》을 읽는 사람에게 주 선생의 변론(辯論)과 취사(取捨)의 가늠을 알게 하였네. 나는 수십 년 전부터 이미 이러한 뜻을 가지고 《논맹정의》를 애써 구하였으나 헛수고만 거듭하다가 지난해 참판 이택지(李擇之 이선(李選))가 연경(燕京)에서 사 들여 왔기에 서둘러 편차를 시작하였으나 곁에서 함께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 이럭저럭 오늘에 이르렀네. 여기 오고서는 별다른 일이 없었으므로 그 일을 마무리 지어 이를 보내니 다시 살피고 바로잡아 잘못이 없도록 함이 어떻겠는가.
흑수(黑水 윤휴)의 도(道)가 다시 성해져서 회옹(晦翁)이 글을 지어 후세에 전한 뜻이 막히고 어두워지며 사라지고 있네. 죽기 전에 나머지 것을 손질하여 동지들에게 잘 전하여 그것을 강론하고 밝히도록 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끝나고 말았네. 자네는 지금 내가 저번 날 부탁한 여러 책들까지 모두 힘써 마무리 지어 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세상의 일이란 비록 급하거나 갑작스럽게 하는 것을 경계하지만 또한 머뭇거리는 것도 꺼리는 것이네. 자네에게는 이 시기가 참으로 귀중한 때이네. 이 사건이 퍼져 가는 것을 보니 자네도 면치 못할 듯하니 만일 성도은자(成都隱者)를 만날 수 있다면 퍽 다행이겠네.
양현(兩賢)을 출향(黜享)한 뒤로 선비들이 무슨 마음으로 과거를 보려하겠는가. 모름지기 현제(賢弟 권상하의 아우 권상유(權尙游))와 재윤(才胤 권상하의 아들 권욱(權煜))을 다른 일은 버려두고서 오로지 이 일만을 돕게 한다면 매우 좋은 일이겠네.
요즈음 선비들이 《퇴계집(退溪集)》을 보는 사람이 많으나 그중에는 생각할 부분도 없지 않으니 이 점은 몰라서는 안 될 것이네. 내가 일찍이 그러한 부분을 적어 모아 하나의 책을 만들었는데 지금 어느 곳에 있는지 모르겠네. 이번에 새로 손질한 두어 건의 문자를 손자가 물어볼 것이니 모름지기 다른 일은 그만두고 감정(勘定)하는 일에만 전념하여 후인에게 은혜를 주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일찍이 《실기(實紀)》에 실린 한 조목을 보니, 주 선생께서 선비의 풍습이 밖으로 치닫는 것을 보시고서 늘 학자들에게 말씀하기를,
“우선 《맹자》의 도성선(道性善)과 구방심(求放心) 두 장(章)을 보아 마음을 수렴하고 응정(凝定)하기를 힘써서 극기구인(克己求仁)의 공을 이루어라.”
하였네. 대체로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주자어록(朱子語錄)》에 이러한 뜻이 여러 번 서로 대화하는 사이에 나타났으나 그것을 긴요하게 간추리고 명백히 나타내어 밝힌 것으론 이 조목 만한 곳이 없네. 이것은 우리들이 오늘날에 의당 가슴에 새겨야 할 점이네. 혹은 이 조목에 치지 공부(致知工夫)가 없다고 의심할 것이나 이는 극기구인(克己求仁)이 치지(致知)를 버리고서는 불가함을 알지 못해서이네. 자하(子夏)가,
“널리 배우되 뜻을 독실히 하고, 간절히 묻되 생각을 가까이하면 인(仁)은 그 속에 있다.”
하였으며, 또 독서를 전일하게 함이 한층 방심(放心)을 구하는 하나의 큰 방법이네. 우연히 《실기》를 보다가 마음에 깨우쳐지는 점이 참으로 깊었기 때문에 애오라지 받들어 알리는 것일세.
젊은 무리들이 나를 견지하는 말들은 하나가 아니나 그중에서 가장 큰일은, 내가 길보(吉甫 윤선거(尹宣擧))에게 일찍이 아무 말도 없었다가 그 아들[윤증]이 나를 헐뜯고 욕을 한 뒤에 내가 비로소 길보의 옳지 못함을 말하였다는 것이네. 이 말은 너무도 괴이한 말일세. 길보가 윤휴와 서로 사귄 시기가 어느 때인지는 모르겠으나 대체로 휴가 권수부(權秀夫 권준(權儁))의 매부가 된 때부터 서로 친해졌을 것이니 권수부는 길보의 매부이네. 내가 숭정(崇禎 명 의종(明毅宗)) 을해년(1635, 인조13) 가을에 휴를 과거장에서 만나,
“장가갈 때 혼례를 고례(古禮)로 행하였습니까?”
고 묻자, 대답하기를,
“처음에 세속의 풍습대로 행하려고 오 상공(吳相公 오윤겸(吳允謙))에게 위요(圍繞 지금의 후행(後行)이나 상객(上客))를 부탁하자 오 상공이 ‘내가 갈 수는 있네. 그러나 위요는 세속의 풍습인데, 왜 고례로 행하려 하지 않는가.’ 하기에 그 말을 따랐습니다.”
하였네. 이에 의거하여 보면 윤휴가 권수부의 집에 장가든 때가 당연히 갑술년(1634, 인조12)에서 을해년(1635, 인조13) 사이였을 것이며, 길보와 윤휴와의 사귐도 어쩌면 이때에 있었을 것이네. 내가 윤휴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배척한 것은 정축년(1637, 인조15)으로 난리(병자호란) 뒤였고, 길보를 난적의 한 무리라며 배척한 것은 또 그 뒤의 일이었으며, 증(拯)이 내 집에 드나든 것은 또 그 뒤였네.
그때에 동춘(同春)이 지금 우리 집안의 어른인 송 고창(宋高敞 고창 군수를 지낸 송국귀(宋國龜))에게,
“윤증의 일은 나로서는 잘 이해할 수 없는 일이네. 우암이 항상 그의 아버지를 이단(異端)이라고 배척하는데 지금 그가 머리를 숙이고 글을 배우니 저들 사제(師弟) 사이가 끝내 무사하게 보전되겠는가?”
하였으니, 이를 근거로 본다면 내가 휴를 배척했던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에 있었네. 어떻게 그 아들을 노여워하여 그 아버지를 배척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강도(江都)의 일에 있어서는 내가 일찍이 많이 용서하였네. 그가 병자년(1636, 인조14) 청참로사소(請斬虜使疏)로 의롭다는 이름을 크게 떨쳤고, 또 강도의 일이 있은 뒤에 스스로 몸을 파묻어 버리고 유현(儒賢 김집(金集))을 따라 받들 때는 허물을 고치고 스스로 새로워지려는 실상이 있었기 때문이었네. 그런데 그 아들에 이르러, 그때 죽지 않은 것을 가지고 도리에 십분 옳다고 하였고, 권(權 권순장(權順長))과 김(金 김익겸(金益兼))을 배척하여 반드시 죽었어야할 의리가 없다 하였으며, 또 그의 아버지가 일찍이 ‘죽을죄를 진 신(臣)’이라고 말했던 것은 강도에서 죽지 못한 연유에서가 아니고 소명(召命)에 나아가지 아니한 허물 때문이었다고 하였으며, 또 그 아버지가 스스로 벼슬을 하지 않았던 것은 옛날 일을 부끄러워해서가 아니며 시세(時勢)와 사람들을 헤아려 보고서 나오지 않은 것이었다고 하였네. 이렇게 되고 보니 옛날 그에게서 취하여 추장하였던 일들은 모두 허사로 돌아가서 사람으로 하여금 속임을 당한 것이 한이 되게 하였네. 또 강도 당시에 선복(宣卜)이라 이름을 고쳤다는 일이 드러났네. 이는 아마 상소한 때의 성명이 오랑캐에게 발각될까 두려워서 이러한 해괴하고 가소로운 짓을 한 것이니 추하기 짝이 없네. 그렇다면 비록 감싸 주고 싶더라도 그럴 수가 있겠는가. 지난날 애석해 함과 오늘날 배척하는 것은 그의 일에 따라서 뜻이 달라진 것이네. 무엇이 의심될 일이겠는가.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이 끝내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으니, 통곡과 베어지는 아픔이 어찌 끝이 있겠으며, ‘온 나라가 시들었다’라는 통곡도 어찌 단지 곽유도(郭有道)에게만 한정되겠는가. 증의 무리가 항상 이 어른을 원수처럼 보더니 오늘날 손을 빌려 살해하였으니, 그 마음에는 어찌 통쾌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사림(士林)들에게는 이제부터 더욱 모시고 받들 분이 사라져 버렸네. 그러나 그는 양현(兩賢)과 육욕(戮辱)을 함께 당하였으니 옛날에 호굉(胡紘)과 심당(沈鏜) 무리가 주자를 죽이자고 청한 때가 공자 사당에 모셨던 공자 소상(塑像)의 허리가 잘려지던 때였고 보면 왜 그토록 세대는 달라졌는데도 사건은 서로 부합될까. 이는 아마 운수가 자연적으로 서로 관련되어 사건이 은연중에 일치되는 것으로서 조금도 괴이할 것이 없는 것이네. 이 연평(李延平 이귀(李貴))이 일찍이 기자헌(奇自獻)을 찾아가 사례하기를,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이 남곤(南袞)ㆍ심정(沈貞)에게 죽임을 당하였던 까닭에 사림(士林)이 참으로 비통하게 여기며,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고자 하는 데에 이르렀었습니다. 이제 우리 스승(이이와 성혼)의 도덕이 더욱 높아지는 것은 아마 앞으로 영공(令公 기자헌)과 같은 분들로 말미암을 것이며, 따라서 정암과 같은 대접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였네. 이 말이 비록 농담으로 한 말인 것 같지만 또한 그러할 만한 이치는 있네.
다만 지금은 선비의 기세가 참벌(斬伐)을 당한 뒤라서 더욱 세도(世道)가 쇠잔하여진 데다가 절개를 바꾸는 것이 마치 순욱(荀彧)이 조조(曹操)에게 가고 진군(陳群)이 한(漢) 나라를 잊어버린 때와 같으며,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는 저들이 더욱 창궐하며 한 세상을 농락하니 매우 곤란한 일일세. 어찌하면 좋겠는가.


 

[주D-001]우연하지 …… 있구나 : 옛사람들이 귀양 가거나 큰 고난을 겪고서 큰 업적을 이루었음을 자신에게 빗대어 한 말. 문왕(文王)이 유리(羑里)에 갇혔을 때 《역단(易彖)》을 지었고, 사마천(司馬遷)이 궁형(宮刑)을 당하고서 《사기(史記)》를 엮었고, 정이천(程伊川)이 부주(涪州)에 귀양 가서 《역전(易傳)》을 지었는데 송시열 자신도 제주도에 귀양 왔으니 여기서 무언가 업적을 이루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주D-002]논맹혹문(論孟或問)과 논맹정의(論孟精義) : 《논맹혹문》은 《논어혹문》과 《맹자혹문》을 합하여 이른 말이며, 《논맹정의》도 마찬가지로 모두 4종의 책인데 주자가 선현들의 주설을 모아 편찬하였다. 《논맹혹문》에 《정의(精義)》의 말을 인용하여 주자가 누구의 설은 좋고 누구의 설은 그르다는 평만을 싣고 그 사람의 말은 싣지 않아 송시열이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여 《정의》의 책을 구하기 40년 만에 얻어 《논맹혹문정의통고(論孟或問精義通考)》를 완성하였다. 《宋子大全附錄 年譜 卷11》
[주D-003]역전(易傳)은 …… 증험되네 : 《역전》은 정이(程頤)의 저서다. 부주(涪州)에 귀양 가 이 책을 저술하던 중 잡괘(雜卦)에서 ‘미제는 남자의 궁함이다[未濟 男之窮也]’라는 말을 잘 깨닫지 못하였는데, 하루는 어떤 사람(바로 성도은자(成都隱者))이 와서 그 대목의 뜻을 물었다. 정이가 머뭇거리며 대답을 못하자, 그 사람이 “세 양효(陽爻)가 제자리에 있지 못하여서이다.”라고 하였다. 곧 미제괘는 이상 감하(離上坎下)로 되어 있어 세 양효가 모두 1ㆍ3ㆍ5의 자리에 있지 못하고 2ㆍ4ㆍ6의 자리에 있으며, 양효는 남자를 상징하기에 이르는 말이다. 《周易 未濟卦 傳》
[주D-004]양현(兩賢)을 출향(黜享) : 양현은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말함. 숙종 8년(1682)에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가 숙종 15년(1689)에 율곡에게는 불교에 들어간 잘못과 우계에게는 최영경(崔永慶)의 옥사와 임진왜란에 주화설(主和說)을 주장한 것들이 화근이 되어 출향되었다. 그후 숙종 20년(1694)에 다시 배향되었다.
[주D-005]《실기(實紀)》 : 《실기》는 대선(戴銑)이 주자 연보(朱子年譜)를 가지고 시호가 내린 전말 등 약간의 내용을 보충하여 만든 책으로 모두 12권임.
[주D-006]그의 …… 것 : 이는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겪고서 윤선거가 효종에게 올린 소로 그가 강도에서 죽지 않았음을 들어 죄인으로 자처한 것을 말한다.
[주D-007]온 나라가 …… 한정되겠는가 : 유도는 후한(後漢) 곽태(郭太)의 자. 태부(太傅) 진번(陳蕃)과 대장군(大將軍) 두무(竇武)가 환관들에 의해 피해를 당하자, 들에 나가 통곡하며 “사람이 죽으니 온 나라가 시들었다[人之云亡邦國殄瘁]”라고 하여 나라의 앞날을 근심하였다. 《後漢書 卷68 郭太傳》
[주D-008]천자를 …… 호령 : 주희(朱熹)가 정순(程洵)에게 한 편지 속에 있는 말로서, 권신(權臣)이 왕의 힘을 빌어 조정 신하들을 제재하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명망을 취하는 것은 왕을 진정으로 높이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朱子大全 卷41》

 

송자대전 제89권
 서(書)
권치도(權致道)에게 보냄 - 기사년(1689) 4월 2일


여기에 온 뒤로는 일체 아무 일이 없어 약간의 서책을 마무리할 수 있을 듯하였네. 그리하여 외람스레 스스로 겸손치 못하고 마음속으로, 우연하지 않은 그 무엇이 바로 여기에 있구나 하였으나 지금은 화의 기미가 이처럼 절박하여 머리 또한 목 위에 붙어 있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제는 이 뜻도 그만이네. 원래 시작하지 않은 것이야 그대로 두고 논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미 시작하고서 끝내지 못한 것이 약간 있다네. 손자 아이들이 앞으로 그대에게 받들어 드릴 것이니 유의하여 일을 마무리 지어 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는 모두 주자가 끼친 교훈이며 스승이 남겨 주신 뜻이었던 까닭에 감히 금방 죽음이 있다고 하여 그만두지 못하는 것이네. 모름지기 중화(仲和 김창협(金昌協))와 협력하고, 또 동보(同甫 이희조(李喜朝))ㆍ여구(汝九 이기홍(李箕洪))ㆍ미백(美伯 최방언(崔邦彦)) 등 여러 벗에게 도움을 구한다면 또한 힘이 될 걸세. 그중에서도 《논맹혹문(論孟或問)》과 《논맹정의(論孟精義)》를 합하여 편차하는 일은 일거리가 크고 복잡하여 마무리 짓기가 쉽지 않을 것이므로 염려가 되네.


별지
《역전(易傳)》은 부주(涪州)에서 힘을 얻었음이 미제(未濟) 괘의 주(注)에서 증험되네. 이는 대체로 조물주의 뜻이 없지 않은 것인데, 오늘날은 화의 기미가 이미 절박하여 아마 잠깐의 여유도 없을 듯하네. 여기에 온 뒤에 《논맹혹문》의 수정을 끝냈네. 이는 《논맹정의》의 주를 나누어 《혹문》의 해당 조목 아래에 편입하여 《혹문》을 읽는 사람에게 주 선생의 변론(辯論)과 취사(取捨)의 가늠을 알게 하였네. 나는 수십 년 전부터 이미 이러한 뜻을 가지고 《논맹정의》를 애써 구하였으나 헛수고만 거듭하다가 지난해 참판 이택지(李擇之 이선(李選))가 연경(燕京)에서 사 들여 왔기에 서둘러 편차를 시작하였으나 곁에서 함께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 이럭저럭 오늘에 이르렀네. 여기 오고서는 별다른 일이 없었으므로 그 일을 마무리 지어 이를 보내니 다시 살피고 바로잡아 잘못이 없도록 함이 어떻겠는가.
흑수(黑水 윤휴)의 도(道)가 다시 성해져서 회옹(晦翁)이 글을 지어 후세에 전한 뜻이 막히고 어두워지며 사라지고 있네. 죽기 전에 나머지 것을 손질하여 동지들에게 잘 전하여 그것을 강론하고 밝히도록 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끝나고 말았네. 자네는 지금 내가 저번 날 부탁한 여러 책들까지 모두 힘써 마무리 지어 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세상의 일이란 비록 급하거나 갑작스럽게 하는 것을 경계하지만 또한 머뭇거리는 것도 꺼리는 것이네. 자네에게는 이 시기가 참으로 귀중한 때이네. 이 사건이 퍼져 가는 것을 보니 자네도 면치 못할 듯하니 만일 성도은자(成都隱者)를 만날 수 있다면 퍽 다행이겠네.
양현(兩賢)을 출향(黜享)한 뒤로 선비들이 무슨 마음으로 과거를 보려하겠는가. 모름지기 현제(賢弟 권상하의 아우 권상유(權尙游))와 재윤(才胤 권상하의 아들 권욱(權煜))을 다른 일은 버려두고서 오로지 이 일만을 돕게 한다면 매우 좋은 일이겠네.
요즈음 선비들이 《퇴계집(退溪集)》을 보는 사람이 많으나 그중에는 생각할 부분도 없지 않으니 이 점은 몰라서는 안 될 것이네. 내가 일찍이 그러한 부분을 적어 모아 하나의 책을 만들었는데 지금 어느 곳에 있는지 모르겠네. 이번에 새로 손질한 두어 건의 문자를 손자가 물어볼 것이니 모름지기 다른 일은 그만두고 감정(勘定)하는 일에만 전념하여 후인에게 은혜를 주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일찍이 《실기(實紀)》에 실린 한 조목을 보니, 주 선생께서 선비의 풍습이 밖으로 치닫는 것을 보시고서 늘 학자들에게 말씀하기를,
“우선 《맹자》의 도성선(道性善)과 구방심(求放心) 두 장(章)을 보아 마음을 수렴하고 응정(凝定)하기를 힘써서 극기구인(克己求仁)의 공을 이루어라.”
하였네. 대체로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주자어록(朱子語錄)》에 이러한 뜻이 여러 번 서로 대화하는 사이에 나타났으나 그것을 긴요하게 간추리고 명백히 나타내어 밝힌 것으론 이 조목 만한 곳이 없네. 이것은 우리들이 오늘날에 의당 가슴에 새겨야 할 점이네. 혹은 이 조목에 치지 공부(致知工夫)가 없다고 의심할 것이나 이는 극기구인(克己求仁)이 치지(致知)를 버리고서는 불가함을 알지 못해서이네. 자하(子夏)가,
“널리 배우되 뜻을 독실히 하고, 간절히 묻되 생각을 가까이하면 인(仁)은 그 속에 있다.”
하였으며, 또 독서를 전일하게 함이 한층 방심(放心)을 구하는 하나의 큰 방법이네. 우연히 《실기》를 보다가 마음에 깨우쳐지는 점이 참으로 깊었기 때문에 애오라지 받들어 알리는 것일세.
젊은 무리들이 나를 견지하는 말들은 하나가 아니나 그중에서 가장 큰일은, 내가 길보(吉甫 윤선거(尹宣擧))에게 일찍이 아무 말도 없었다가 그 아들[윤증]이 나를 헐뜯고 욕을 한 뒤에 내가 비로소 길보의 옳지 못함을 말하였다는 것이네. 이 말은 너무도 괴이한 말일세. 길보가 윤휴와 서로 사귄 시기가 어느 때인지는 모르겠으나 대체로 휴가 권수부(權秀夫 권준(權儁))의 매부가 된 때부터 서로 친해졌을 것이니 권수부는 길보의 매부이네. 내가 숭정(崇禎 명 의종(明毅宗)) 을해년(1635, 인조13) 가을에 휴를 과거장에서 만나,
“장가갈 때 혼례를 고례(古禮)로 행하였습니까?”
고 묻자, 대답하기를,
“처음에 세속의 풍습대로 행하려고 오 상공(吳相公 오윤겸(吳允謙))에게 위요(圍繞 지금의 후행(後行)이나 상객(上客))를 부탁하자 오 상공이 ‘내가 갈 수는 있네. 그러나 위요는 세속의 풍습인데, 왜 고례로 행하려 하지 않는가.’ 하기에 그 말을 따랐습니다.”
하였네. 이에 의거하여 보면 윤휴가 권수부의 집에 장가든 때가 당연히 갑술년(1634, 인조12)에서 을해년(1635, 인조13) 사이였을 것이며, 길보와 윤휴와의 사귐도 어쩌면 이때에 있었을 것이네. 내가 윤휴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배척한 것은 정축년(1637, 인조15)으로 난리(병자호란) 뒤였고, 길보를 난적의 한 무리라며 배척한 것은 또 그 뒤의 일이었으며, 증(拯)이 내 집에 드나든 것은 또 그 뒤였네.
그때에 동춘(同春)이 지금 우리 집안의 어른인 송 고창(宋高敞 고창 군수를 지낸 송국귀(宋國龜))에게,
“윤증의 일은 나로서는 잘 이해할 수 없는 일이네. 우암이 항상 그의 아버지를 이단(異端)이라고 배척하는데 지금 그가 머리를 숙이고 글을 배우니 저들 사제(師弟) 사이가 끝내 무사하게 보전되겠는가?”
하였으니, 이를 근거로 본다면 내가 휴를 배척했던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에 있었네. 어떻게 그 아들을 노여워하여 그 아버지를 배척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강도(江都)의 일에 있어서는 내가 일찍이 많이 용서하였네. 그가 병자년(1636, 인조14) 청참로사소(請斬虜使疏)로 의롭다는 이름을 크게 떨쳤고, 또 강도의 일이 있은 뒤에 스스로 몸을 파묻어 버리고 유현(儒賢 김집(金集))을 따라 받들 때는 허물을 고치고 스스로 새로워지려는 실상이 있었기 때문이었네. 그런데 그 아들에 이르러, 그때 죽지 않은 것을 가지고 도리에 십분 옳다고 하였고, 권(權 권순장(權順長))과 김(金 김익겸(金益兼))을 배척하여 반드시 죽었어야할 의리가 없다 하였으며, 또 그의 아버지가 일찍이 ‘죽을죄를 진 신(臣)’이라고 말했던 것은 강도에서 죽지 못한 연유에서가 아니고 소명(召命)에 나아가지 아니한 허물 때문이었다고 하였으며, 또 그 아버지가 스스로 벼슬을 하지 않았던 것은 옛날 일을 부끄러워해서가 아니며 시세(時勢)와 사람들을 헤아려 보고서 나오지 않은 것이었다고 하였네. 이렇게 되고 보니 옛날 그에게서 취하여 추장하였던 일들은 모두 허사로 돌아가서 사람으로 하여금 속임을 당한 것이 한이 되게 하였네. 또 강도 당시에 선복(宣卜)이라 이름을 고쳤다는 일이 드러났네. 이는 아마 상소한 때의 성명이 오랑캐에게 발각될까 두려워서 이러한 해괴하고 가소로운 짓을 한 것이니 추하기 짝이 없네. 그렇다면 비록 감싸 주고 싶더라도 그럴 수가 있겠는가. 지난날 애석해 함과 오늘날 배척하는 것은 그의 일에 따라서 뜻이 달라진 것이네. 무엇이 의심될 일이겠는가.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이 끝내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으니, 통곡과 베어지는 아픔이 어찌 끝이 있겠으며, ‘온 나라가 시들었다’라는 통곡도 어찌 단지 곽유도(郭有道)에게만 한정되겠는가. 증의 무리가 항상 이 어른을 원수처럼 보더니 오늘날 손을 빌려 살해하였으니, 그 마음에는 어찌 통쾌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사림(士林)들에게는 이제부터 더욱 모시고 받들 분이 사라져 버렸네. 그러나 그는 양현(兩賢)과 육욕(戮辱)을 함께 당하였으니 옛날에 호굉(胡紘)과 심당(沈鏜) 무리가 주자를 죽이자고 청한 때가 공자 사당에 모셨던 공자 소상(塑像)의 허리가 잘려지던 때였고 보면 왜 그토록 세대는 달라졌는데도 사건은 서로 부합될까. 이는 아마 운수가 자연적으로 서로 관련되어 사건이 은연중에 일치되는 것으로서 조금도 괴이할 것이 없는 것이네. 이 연평(李延平 이귀(李貴))이 일찍이 기자헌(奇自獻)을 찾아가 사례하기를,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이 남곤(南袞)ㆍ심정(沈貞)에게 죽임을 당하였던 까닭에 사림(士林)이 참으로 비통하게 여기며,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고자 하는 데에 이르렀었습니다. 이제 우리 스승(이이와 성혼)의 도덕이 더욱 높아지는 것은 아마 앞으로 영공(令公 기자헌)과 같은 분들로 말미암을 것이며, 따라서 정암과 같은 대접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였네. 이 말이 비록 농담으로 한 말인 것 같지만 또한 그러할 만한 이치는 있네.
다만 지금은 선비의 기세가 참벌(斬伐)을 당한 뒤라서 더욱 세도(世道)가 쇠잔하여진 데다가 절개를 바꾸는 것이 마치 순욱(荀彧)이 조조(曹操)에게 가고 진군(陳群)이 한(漢) 나라를 잊어버린 때와 같으며,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는 저들이 더욱 창궐하며 한 세상을 농락하니 매우 곤란한 일일세. 어찌하면 좋겠는가.


 

[주D-001]우연하지 …… 있구나 : 옛사람들이 귀양 가거나 큰 고난을 겪고서 큰 업적을 이루었음을 자신에게 빗대어 한 말. 문왕(文王)이 유리(羑里)에 갇혔을 때 《역단(易彖)》을 지었고, 사마천(司馬遷)이 궁형(宮刑)을 당하고서 《사기(史記)》를 엮었고, 정이천(程伊川)이 부주(涪州)에 귀양 가서 《역전(易傳)》을 지었는데 송시열 자신도 제주도에 귀양 왔으니 여기서 무언가 업적을 이루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주D-002]논맹혹문(論孟或問)과 논맹정의(論孟精義) : 《논맹혹문》은 《논어혹문》과 《맹자혹문》을 합하여 이른 말이며, 《논맹정의》도 마찬가지로 모두 4종의 책인데 주자가 선현들의 주설을 모아 편찬하였다. 《논맹혹문》에 《정의(精義)》의 말을 인용하여 주자가 누구의 설은 좋고 누구의 설은 그르다는 평만을 싣고 그 사람의 말은 싣지 않아 송시열이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여 《정의》의 책을 구하기 40년 만에 얻어 《논맹혹문정의통고(論孟或問精義通考)》를 완성하였다. 《宋子大全附錄 年譜 卷11》
[주D-003]역전(易傳)은 …… 증험되네 : 《역전》은 정이(程頤)의 저서다. 부주(涪州)에 귀양 가 이 책을 저술하던 중 잡괘(雜卦)에서 ‘미제는 남자의 궁함이다[未濟 男之窮也]’라는 말을 잘 깨닫지 못하였는데, 하루는 어떤 사람(바로 성도은자(成都隱者))이 와서 그 대목의 뜻을 물었다. 정이가 머뭇거리며 대답을 못하자, 그 사람이 “세 양효(陽爻)가 제자리에 있지 못하여서이다.”라고 하였다. 곧 미제괘는 이상 감하(離上坎下)로 되어 있어 세 양효가 모두 1ㆍ3ㆍ5의 자리에 있지 못하고 2ㆍ4ㆍ6의 자리에 있으며, 양효는 남자를 상징하기에 이르는 말이다. 《周易 未濟卦 傳》
[주D-004]양현(兩賢)을 출향(黜享) : 양현은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말함. 숙종 8년(1682)에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가 숙종 15년(1689)에 율곡에게는 불교에 들어간 잘못과 우계에게는 최영경(崔永慶)의 옥사와 임진왜란에 주화설(主和說)을 주장한 것들이 화근이 되어 출향되었다. 그후 숙종 20년(1694)에 다시 배향되었다.
[주D-005]《실기(實紀)》 : 《실기》는 대선(戴銑)이 주자 연보(朱子年譜)를 가지고 시호가 내린 전말 등 약간의 내용을 보충하여 만든 책으로 모두 12권임.
[주D-006]그의 …… 것 : 이는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겪고서 윤선거가 효종에게 올린 소로 그가 강도에서 죽지 않았음을 들어 죄인으로 자처한 것을 말한다.
[주D-007]온 나라가 …… 한정되겠는가 : 유도는 후한(後漢) 곽태(郭太)의 자. 태부(太傅) 진번(陳蕃)과 대장군(大將軍) 두무(竇武)가 환관들에 의해 피해를 당하자, 들에 나가 통곡하며 “사람이 죽으니 온 나라가 시들었다[人之云亡邦國殄瘁]”라고 하여 나라의 앞날을 근심하였다. 《後漢書 卷68 郭太傳》
[주D-008]천자를 …… 호령 : 주희(朱熹)가 정순(程洵)에게 한 편지 속에 있는 말로서, 권신(權臣)이 왕의 힘을 빌어 조정 신하들을 제재하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명망을 취하는 것은 왕을 진정으로 높이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朱子大全 卷41》

 

 송자대전 제89권
 서(書)
권치도(權致道)에게 보냄


주 선생이 남헌(南軒 장식(張栻))과 태극도(太極圖)의 중정인의(中正仁義) 설을 논하면서 중(中)과 인(仁)을 동(動)으로 삼고 정(正)과 의(義)를 정(靜)으로 삼아, 주자(周子)의 ‘욕심이 없는 까닭에 고요하다[無欲故靜]’와는 다른 점이 있는 듯하였네. 그것은 주 선생은 인의(仁義)와 중정(中正) 자체가 동(動)과 정(靜)으로 나누임을 말 한 것이고, 주자(周子)는 마음을 두고 말한 것이기 때문에 같지 않은 듯하였던 것이었네. 그런데 내가 일찍이 함부로 그에 대하여 말하기를,
“마음에는 동(動)과 정(靜)이 있으나 오직 성인만은 인욕(人欲)이 없으면서 고요[靜]에 근본을 두었기 때문에 중정인의의 동과 정에 두루 돌며 관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두 선생이 주장하여 말한 것은 비록 다르나 그 체(體)와 용(用)을 논한다면 결국 일치한다.”
하였네. 이 같은 해석은 비록 말은 되었으나 끝내 노력만 낭비했음을 알았네. 그렇다면 내가 함부로 한 해석은 혹시 그 본지(本旨)를 잃은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 다시 주 선생이 해석하신 도설을 보니, 중(中)ㆍ인(仁)ㆍ감(感)ㆍ정(正)ㆍ의(義)ㆍ적(寂)이란 말씀들은 사실 마음을 두고 한 말이었네. 그렇다면 두 선생 말씀은 본디 한 뜻이었던 것을 지난날에 그것을 자세히 읽지 못하여 함부로 딴 구멍을 파고들었으니 이는 나의 잘못이네.
내가 일찍이 앞에 말한 설로 자네에게 말했을 때 자네가 맞는 이야기라고 하였네. 그렇다면 내가 스스로를 그르치고 남까지 그르친 죄가 심한 것일세. 이에 급히 이를 써서 묻는 것이니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송자대전 제89권
 서(書)
권치도(權致道)에게 보냄 - 기사년(1689)


증(拯)은 그들 무리와 항상 대윤(大尹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이 윤휴와 한패였던 자취를 감추고자 하였으나 오늘날 휴의 잔당이 탑전(榻前)에서 천신(賤臣)의 죄를 논할 때 증의 부자(父子)를 극구 칭찬한 다음 휴를 변백(辨白) 신구(伸救)하여 그의 관작을 회복시켰으며, 또 의제(義濟 윤휴의 아들)의 벼슬도 회복시켰고, 또 의제의 아우도 벼슬을 시켰네. 그러면서 증을 대사헌(大司憲)에 의망(擬望)하였으니 그들이 윤휴와 한패였던 사실은 그들이 말하지 않는다 해도 스스로 면하지 못할걸세. 이것이 주자가 말한 ‘자연히 바꾸지 못할 공론’이란 것일세. 그 뒤로도 김두명(金斗明)과 나양좌(羅良佐) 등이 계속 서로 편이 되어 나를 욕하던가.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더욱 하늘의 이치가 지공무사(至公無私)함을 볼 수 있네.
증이 말을 날조하여 선장(先丈 권상하의 아버지 권격(權格))과 이 사람을 무함한 내막을 오늘에야 비로소 샅샅이 알았네. 이는 그가 박상순(朴尙淳)에게,
“권모(권상하)가, 모(송시열)가 그의 아버지 권격이 옥당(玉堂) 벼슬을 구하는 편지를 남에게 보여 주더란 말을 듣고 모에게 찾아가 보여 달라고 하자, 모는 처음에는 보여 주려고 하지 않다가 되풀이 하여 간청을 한 뒤에야 마지못하여 꺼내서 보여 주었는데 권은 ‘분명히 우리 아버지의 필적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그러나 좋지 않은 편지를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남에게 내보이시다니 마음이 매우 편치 못합니다. 오늘부터 절교(絶交)를 고합니다……’ 하고서 떠났다고 하니 권의 의로운 처신이 나보다 낫다.”
했다고 하였네. 박(朴)은 이 말을 서종적(徐宗績)에게 전하였고, 서(徐)는 이 말을 서문환(徐文換)에게 전하였고, 문환은 이를 내 손자 순석(淳錫)에게 말하였네. 그의 흉악한 간교가 이처럼 극악한 데 이를 줄은 미처 생각조차 못하였네. 이는 일거에 휩쓸어 죽여 버리려는 꾀일 것이네.
휴가 이환(李煥)과 밤중에 익명서(匿名書)를 성문에 게시하고서는 몰래 소(疏)를 올려 익명서에 이름이 오른 사람은 모두 죽이라고 청하였는데, 오늘날에 윤증 무리가 그 풍습을 이어받았고, 지난날 나양좌가 회상(檜相)이라 한 편지를 위조하여 마치 하송(夏竦)이 석수도(石守道)의 널[棺]을 열어 보려한 것과 같은 짓을 하였으니 이는 모두 휴의 심법에서 배워 온 것으로서 그의 아버지가 겉으로는 나와 고개를 끄덕이어 친한 척 하면서도 남 모르게는 휴에게 세상의 화거리라고 격동시켜 나를 죽이려 하였던 그러한 계획인 것이네. 증과 양좌가 돌려 가며 본받고 배워 오늘날의 일이 빚어진 것이네.
저번에 어떤 명문가의 자제가 깜짝 놀래 눈을 휘둥글게 해 가지고 들어와 말하기를,
“증과 규(槼 김장생(金長生)의 서자)가 흉악한 꾀를 가지고 제일 먼저 김문(金門 김장생의 집안)의 사람을 죽이고 다음으로 선생님의 집안에 미치려 하고 있습니다. 제가 규 때문에 감히 깊이 묻지 못하였습니다.”
하더니, 수십 일이 지나자 난리가 일어났으니 일체를 모두 증험하겠네. 이는 대체로 내가 처음에 윤휴와 원수가 된 데에서 발단한 것이네. 때때로 회옹(晦翁)의 이른바,
“‘사설(邪說)이 맹수의 피해보다 심하다.’ 하더니 근년에 책을 읽으면서는 다만 이 생각만이 떠올라서 앉거나 서거나 수레를 타거나 늘 그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비록 이러한 연유에서 남들에게 미움을 사 죽게 되리란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참으로 달갑고 즐겁게 생각하며 뉘우치지 않는다.”
한 말씀을 읊조리네. 항상 읽을 때마다 참으로 가을 햇볕을 쬐이는 듯하며 강한(江漢)에 씻어 내는 듯하네.


 

[주D-001]나양좌가 …… 짓 : 나양좌가 송시열과 김수항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기 위하여, 송시열이 김수항을 남송(南宋)의 진회(秦檜)와 같은 사람이라는 내용으로 편지를 위작하였던 일이, 송(宋)의 간신 하송이 자기를 배척한 석수도가 죽자, 그에게 역적의 누명을 씌우고, 또 “그가 죽음을 칭탁하고 사실은 거란(契丹)으로 도망친 것이다.” 하고서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확인하려 했던 일과 같다는 말이다. 《宋子大全隨箚 卷9》 《宋史 卷432 石介列傳》
[주D-002]세상의 화거리 : 윤휴가 윤선거의 제문에, “자네가 나에게 세상의 화거리를 잘못 움켜잡았다고 하였네.[子謂我妄攫世禍]” 하여, 송시열을 화거리라고 표현한 것을 말한다. 《白湖全書 卷18》
[주D-003]어떤 …… 자제 : 김만준(金萬埈)을 가리킨다. 김장생의 증손이며, 김규(金槼)의 종손(從孫)이다.

송자대전 제89권
 서(書)
치도(致道)를 결별(訣別)함 - 기사년(1689) 5월 14일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성인의 명철하신 가르침인데 80여 살의 나이에도 끝내 듣지 못하고 죽게 되었으니 그 소중한 천부(天賦)의 성(性)을 저버리게 된 점이 마음에 부끄럽고 한스러울 뿐이네. 또 마음에 걸리는 것은 일생을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주자어류(朱子語類)》를 읽으면서, 그중에 의심스러운 점이 없지 아니하였고, 또 알기 어려운 곳도 있었네. 그리하여 그 부분을 초록(抄錄)하여 대략 해설을 붙이고 이것을 동지들과도 상량하고, 또 뒷세상 사람들에게도 보여줄까 하였는데 아깝게도 끝내지 못하였네. 돌아보건대 지금 세상에 이 일을 부탁할 만한 사람은 오직 자네와 중화(仲和 김창협(金昌協)) 뿐이네. 모름지기 동보(同甫 이희조(李喜朝))ㆍ여구(汝九 이기홍(李箕洪))ㆍ미백(美伯 최방언(崔邦彦))이나 그 밖에 함께 일할 수 있는 사람과 협동하여 정리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주 선생이 일찍이 절실하고 요긴한 한마디 말로 문인을 가르치기를,
“다만 《맹자(孟子)》의 도성선(道性善)과 구방심(求放心) 두 장(章)으로 노력하는 바탕으로 삼으라.”
하였고, 또 돌아가실 때 문인들에게 직(直)이란 한 글자를 주시며,
“천지가 만물을 생육하는 것과 성인이 만사에 응하는 것은 오직 직(直)일 뿐이다.”
하였네, 대체로 공자는 ‘사람의 생리(生理)는 직이다. 잘못을 저지르고서도 살아 있는 것은 요행으로 면한 것이다.’ 하셨고, 맹자가 앞 세상의 성인이 말하지 않은 것을 드러낸 것은 호연장(浩然章) 한 장인데 역시 이 ‘직(直)’ 한 글자로 호연지기를 기르는 요점을 삼았으며, 주자 또한 큰 영웅이었으면서도 반드시 극히 조심하고 삼가는 면으로부터 실천(實踐)하여 왔으니 성인의 전수하는 심법(心法)을 쉽게 알 수 있을 걸세. 내가 지난날에 이를 난숙하게 읽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행하는 데 힘을 기울이지 못하여 평범한 사람이 됨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뉘우친들 이제 어떻게 하겠는가. 이것이 충분히 경계가 될 것 같아서 감히 말해 주는 것이네. 중화 앞으로도 가까스로 위로의 편지를 마련하였으나 나머지 일들은 차마 언급하지 못하였네. 만나는 기회에 조용히 그에게 말해 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끝으로 천만 노력하길 바라며 서로 만나 영결하지 못하는 한이야 자네와 내가 무엇이 다르겠는가. 너무도 피곤하여 내가 손수 쓰지 못하고 대략 이렇게 입으로 불러 적게 하였네.


별지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와 《정서분류(程書分類)》 외에도 또 적어 놓은 약간의 책들이 있네. 모름지기 손자 아이들로부터 찾아다가 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런 등속의 일들을 꼭 화애(和哀 김창협)와 함께하였으면 하는 것은 내가 일찍이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선생을 뵙자 태극도설(太極圖說)의 주(注)를 가져와 지체를 낮추시어 나와 같은 사람과 상량해 보시고 또 시(詩)를 지어 주시어, ‘무원의 정맥을 좇는다……[婺源追正脈……]’ 하셨고,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대감께서도 《차의》에 기울이신 뜻이 적지 않았었네. 그리하여 계술(繼述)하는 책임이 바로 오늘날의 그에게 있기 때문에 이처럼 부탁하는 것이네.
현종(顯宗) 때 호서(湖西) 천안(天安)인 듯함 의 한 선비가 상소하여 만력황제(萬曆皇帝 만력은 명 신종(明神宗))의 사당을 세울 것을 청하자 그때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핑계하는 말은 ‘높으신 천자를 외진 나라에서 제사할 수 없다’는 것과 ‘그 제사의 의식이 어렵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네. 내가 그때 그 의견이 끝내 행해 지지 못할 줄 알고 다만 ‘이러한 말을 이러한 시국에 꺼냈으니 그 사람이 가상하다. 이 사람을 표창하는 은전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만 말하였으나 이 또한 주위에서는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아서 마음속으로 항상 개탄하여 마지않았네. 그 뒤에 화양동(華陽洞) 바위에 숭정황제(崇禎皇帝 명 의종(明毅宗))의 어필(御筆)을 새기고 또 조각돌에 새겨서 환장암(煥章菴)에도 보관하였고, 또 문곡(文谷)이 지은 애사(哀詞)가 있는데 이것이 이 일의 동기가 되었네.
늘 마음속으로, 한 칸 사우(祠宇)를 환장암의 뒤 왼쪽에 건립하고 조그만 위판(位板)에 ‘만력신종황제(萬曆神宗皇帝), 숭정의종황제(崇禎毅宗皇帝)’라 쓰고서 봄가을로 무이신(武夷神)의 예(禮)에 의거하여 마른 고기로 제사를 드리고 술은 서실(書室)의 기전(基田)에서 나온 쌀로 빚되 아무쪼록 정결하게 하고 오직 축사(祝辭)만은 불가불 성대하게 칭송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네. 이 일에 대하여 그와 같이 마음에 경영하여 온 지는 오래였으나 결행하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으니 무슨 한이 이보다 더 크겠는가.
높은 천자를 외진 나라에 제사 드릴 수 없다는 이 말은 실상 무식한 말이네. 한퇴지(韓退之 한유(韓愈)) 때 초(楚) 나라 소왕(昭王)의 사당이 전하여져 유민(遺民)이 자기네끼리 받들어 제사 드렸던 까닭에 퇴지의 시(詩)에,
그래도 백성이 있어 옛 덕을 기리며 / 猶有國人懷舊德
한 칸 초가집에서 소왕을 제사 모시네 / 一間茅屋祭昭王
하였네. 남헌(南軒 송 나라 장식(張栻))도 일찍이 계림군(桂林郡)의 지주사(知州使)를 지내면서 우제사(虞帝祠)를 세우고 제사를 드리자, 주 선생이 표장(表章)하는 글이 있었네. 이것이 어찌 근거할 만한 법이 아니겠는가. 문곡의 시도 또한 차운(次韻)할 만한 사람으로 하여금 차운하게 하여 연이어 크게 편철(編綴)하여 암자 속에 보관하는 것도 하나의 일일걸세.
‘비례부동(非禮不動)’ 네 글자는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이 받들어 온 것이고 조각돌에 새긴 것은 이택지(李擇之 이선(李選))가 본을 뜬 것이네. 이 일은 마땅히 김(金)ㆍ민(閔)ㆍ이(李) 집안사람들과 의논하여 성사시키면 좋을 걸세. 이 일은 극히 간단하니 이루기가 어렵지 않을 걸세. 비록 그르다는 사람들이 있다 할지라도 주자와 남헌의 고사가 기왕에 있으니 무엇 때문에 스스로 그만두겠는가. 다만 서실의 기전은 서실을 지키는 종의 말을 들으면 후영정(後穎亭 이휘(李徽)의 별장)의 종이 내가 거제(巨濟)로 귀양 간 틈을 타서 그 상전의 물건이라면서 빼앗으려 한다고 하였네. 만일 그렇다면 어려운 일이기는 하네. 만일 본전을 준비하여 암자의 중에게 주는 것도 그에 대한 하나의 방편이 아닐는지. 모름지기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잘 생각하게. 만일 세 집안과 의논한다면 반드시 좋은 꾀가 있을걸세.
처음에는 효종을 배향할까도 생각하였으나 다시 생각해 보니 이는 비단 일 자체가 미안할 뿐 아니라 시속의 사람들이 반드시 큰 죄라고 생각할 것이어서 감히 생각하지 못하였네. 해마다 제관(祭官)은, 충현 송공(忠顯宋公 충현은 송시영(宋時榮). 병자호란에 강화에서 자결하였음) 자손이 본 고을에 살고 있으니, 이를 맡길 만하고, 그 나머지로는 홍(洪)ㆍ변(卞) 제군(諸君)도 합당하네. 일찍이 《이정서(二程書)》의 사역(寫役)을 꾀하였을 때 자네가 모 감사(監司)에게 그 책임을 일임하였는데 그것은 치밀한 생각이었네. 이 일은 더욱 치밀하게 하지 않아서는 아니 될 것이네.
신종황제(神宗皇帝)의 축문(祝文) 내용은 위의와 덕에 치중하되 임진왜란 때에 우리나라 백성이 받은 은혜의 뜻을 덧붙이고, 의종황제(毅宗皇帝)에게는 나라가 망하자 임금이 따라 죽은 정의에 치중하도록 하게.
주자가 일찍이 장자(莊子)가 정도(正道)를 해친 설을 논하시면서, 그중에서도 가장 ‘악을 행하더라도 형벌에 가깝게 하지 말라’고 한 구절을 매우 이치를 거스리는 말이라고 하였네. 일찍이 혼자 생각하여 보니 장자의 그 설은 후세의 이익을 좋아하고 편리를 취하려는 사람들의 심리에 가장 알맞은 말로서 그 해는 홍수나 맹수의 재앙보다 심한 것이니 이는 사설(邪說) 중에서도 더욱 심한 것이네. 근세에 어떤 사람 이성(尼城)의 윤선거 의 처세술은 대중의 의사를 따라 몸을 보전하며 모든 이해에 관계되는 설은 바로 장자의 말과 같았으니 주자가 그 말을 집어내어 통렬하게 배척하신 그 뜻이 깊다 하겠네.
그러면서도 《대학(大學)》을 논하실 때에는 장자가 도체(道體)를 보았다고 극구 칭찬하고, 또 ‘도(道)를 설명하면서 그 순서대로 하지 않으면 도가 아니다.[語道而非其序則非道也]’라는 한 구절을 드러내면서 말씀하기를,
“이는 공자 문파의 원류를 이은 것이니, 증점(曾點) 등이 바로 이와 같다. 사람들이 모름지기 그 말을 이해하여 자신이 그 근본 의미를 관통하게 되면 이런 등속의 의견에 대하여 저절로 그 높낮음이 분명하게 깨우쳐질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불씨(佛氏)의 좋은 점은 모두 장자에게서 나왔다. 다만 식견이 깊지 못하여 세밀한 공부가 없으니 이른바 ‘현자(賢者)는 너무 지나치다’라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 말에서 주자는 세밀이란 말을 장자에게 돌린 것이네.
대체로 주자가 《대학》에서 이를 논한 것은 아마 《대학》의 공부하는 단계가 극히 엄밀하여 털끝만큼도 그 단계를 뛰어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 일 것이니 공자 문파의 가르침을 세운 뜻은 지극하다고 말할 만하네. 후세의 학자들은 그 이치를 알지 못하여 육씨(陸氏 육상산(陸象山)) 같은 사람은 격물(格物) 치지(致知) 공부를 내 던져 버리고 오로지 성의(誠意) 정심(正心) 공부에만 열중하였고, 또 먼저 수기(修己)도 하지 않고 갑자기 제가(齊家)ㆍ치국(治國)ㆍ평천하(平天下)를 하고자 하는 사람도 있었으니 이들은 끝내 성취가 있을 수 없음을 몰라서였네. 그런 까닭에 일찍이 말하기를,
“만일 참으로 단계를 뛰어넘은 사람이 있다면 왜 존경하지 않겠는가.”
하였으니, 그것은 결코 이러할 이치가 없음을 말하신 것이네.
이처럼 장자가 말한 ‘도(道)를 설명하면서 그 순서대로 하지 않으면 도가 아니다’라는 한 구절이 참으로 《대학》의 뜻과 부합됨을 아시고서는 칭찬하심이 이에 이르렀으니 학자를 깨우치는 뜻이 깊네. 대체로 주자는 장자의 본말(本末)과 장단(長短)을 조금도 남김없이 보았던 까닭에 그 이치를 해치는 말을 통렬하게 변박하시면서도 성인의 도(道)와 합치되는 곳에서는 극구 칭찬하였던 것이니 지극히 식견이 높고 마음이 공정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는가.


 

[주D-001]중화(仲和) …… 편지 : 중화는 김창협(金昌協)의 자. 그의 아버지 김수항(金壽恒)이 진도(珍島)에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는 소식을 이해(1689) 4월에 듣고 그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낸 것을 말함.
[주D-002]호서(湖西) …… 선비 : 《송자대전수차(宋子大全隨箚)》 권9에 천안(天安)에 사는 이중명(李重明)이라고 하였다.
[주D-003]문곡(文谷)이 지은 애사(哀詞) : 김수항이 현종 14년(1673)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 오던 중 요동(遼東)에서 숭정황제의 글씨 두 폭을 구입한 다음, 숭정황제가 명 나라와 운명을 같이한 사실을 회상하며 애사를 지었다. 《文谷集 卷26 崇禎皇帝御筆二障購得始末記》
[주D-004]무이신(武夷神)의 …… 드리고 : 무이신은 중국 복건성(福建省) 숭안현(崇安縣)의 남쪽에 위치한 무이산의 신인(神人)인데 한(漢) 나라 때부터 사당을 세워 마른 고기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史記 卷28 封禪書》
[주D-005]문곡의 시 : 김수항이, 송시열이 숭정황제 어필을 화양 계곡 암벽에 새기고 그것을 환장암에 기거하는 중들에게 수호하게 하였다는 말을 듣고 “우제를 위하여 환장암에 제한다.[爲尤齋寄題煥章菴]”라는 장편시를 지어 보냈다. 《文谷集 卷4》
[주D-006]주자가 …… 하였네 :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에, “선을 행하되 명예에 가깝게 하지 말고 악을 행하더라도 형벌에 가깝게 하지 말며[爲善無近名 爲惡無近刑]……” 하였는데, 주희가 양생주설(養生主說)을 지어서 그 말을 통박하였다. 《朱子大全 卷67 養生主說》

 

우암선생이 이여구 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

 

 송자대전 제90권
 서(書)
이여구(李汝九)에게 답함 - 경술년(1670) 2월 10일


지난해 성 모퉁이에서 헤어지고서 어느새 벌써 1년이 지났구려. 그리운 마음이 어찌 잠시라도 자네에게서 떨어졌겠는가. 지난겨울 인편에 9월 초이틀 편지를 받았네.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설을 언급하였으니 이것은 오늘날 말하는 사람이 흔하지 않은 일로서 두세 번 감상하며 읽노라니 기쁜 마음 그지없었네.
나정암(羅整菴)의 의론은 선현이 벌써 논박하여 바로잡았으니 이제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 걸세. 이일재(李一齋)의 설은 아직 보지 못하다가 지금 보내 준 편지로 인하여 비로소 보고서는 매우 놀랐네. 이는 대체로 주자의 학설을 깊이 연구하지 않고 경솔하게 의견을 세운 소치에서이네. 깊이 후학들에게 경계가 될 수 있을 것이네.
율곡의 학설에 있어서는 한결같이 주자의 뜻만을 따랐으니 다시 의심할 것이 없네. 율곡의 ‘도심(道心)은 절제하는 것이다.’란 말은 바로 도심이 주재(主宰)한다는 뜻을 해석한 것이네. 능히 절제하지 못한다면 어디에 그 주재한다는 의미가 있겠는가. 주자도 역시 일찍이 주재로 말하였으니 주재는 바로 절제를 말한 것이네.
편지에서 의심한 ‘인심(人心)이 도심(道心)에게 명령을 듣는다면 이는 두 가지 모양의 마음이 있는 듯하다.’란 말에서 이른바 ‘인심이 도심에게 명령을 듣는다.’는 말은 주자의 설이네. 만일 의심스럽다면 그 의심은 이내 주자에게 있는 것이고 율곡에게 있는 것은 아니네. 그러니 자네가 또한 주자가 말한 뜻을 깊이 연구하지 않은 때문에 의심을 품게 됨을 면치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대체로 주자의 뜻은 인심과 도심을 모두 이미 발동한 것으로 생각하였네. 이 마음이 식색(食色)을 위해서 발동하였다면 이는 인심이고, 다시 그 발동한 것을 상량하여 도리에 합당하게 하는 것은 도심인데 식색을 위하여 발동하는 것도 이 마음이고 그 발동한 것을 상량하는 것도 이 마음이니, 어떻게 두 가지 마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대개 마음은 살아있는 것이므로 그 발동하는 것이 끝이 없지만 본체는 하나인데 어떻게 절제하는 것이 한 마음이고 명령을 듣는 것이 또 한 마음이라 할 수 있겠는가. 다만 《중용(中庸)》의 서문을 익숙하게 읽으면 저절로 의심이 풀릴 것이네.
선대의 문집은 잘 받아 보물처럼 만지며 더할 수 없는 사례를 드리네. 끝으로 병에 겨워 하나하나 다하지 못하네.
나의 설에 그래도 의심이 있거든 다시 가르침을 준다면 매우 고맙겠네.


 

[주C-001]이여구(李汝九) : 여구는 이기홍(李箕洪)의 자. 처음 이름은 기주(箕疇), 호는 직재(直齋), 이지렴(李之濂)ㆍ송시열의 문인. 1689년 송시열이 제주(濟州)로 귀양 가게 되자 동문 40여 명과 함께 이를 변론, 회령(會寧)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후진을 교육했다. 나중에 장령(掌令)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연풍(延豊)에 내려가 권상하(權尙夏)와 경사(經史)를 강론하고 스승의 유적을 찾아다니며 소일했다.
[주D-001]나정암(羅整菴)의 …… 바로잡았으니 : 정암은 송(宋) 나라 나흠순(羅欽順)의 호. 그가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을 용(用)과 체(體)로 구분하는 말을 하였는데, 이를 김인후(金麟厚)가 잘못이라고 지적하여 반박하였다. 《宋子大全隨箚 卷9》
[주D-002]이일재(李一齋)의 설 : 일재는 이항(李恒)의 호.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주장하였다.

 

송자대전 제90권
 서(書)
이여구(李汝九)에게 보냄 - 임자년(1672) 1월 29일


요즈음 아침저녁으로 부모님 모시는 일은 어떤가? 이 늙은이의 마음에 그대가 생각나지 않은 때가 없네.
저번에 물어 온 조목에 대해서는 빨리 답장을 보내 이내 가르침을 구하는 계기를 만들고자 하는 욕심이 없지 않았네. 그러나 그중 퇴계(退溪)의 말씀에 의심스럽고 분명치 못한 부분이 있었네. 만일 그 내용들에 어름어름 애써 퇴계와 합치되기를 구하려고 한다면 그대가 물어 온 뜻이 아닐 뿐만 아니라 또한 퇴계 선생께서 겸손하게 의심을 남겨서 후학을 기다리신 뜻도 아닐 것이기는 하지만, 만일 나의 우매하고 망녕된 견해를 바로 말한다면 또한 거듭 선현을 존경하지 않는다는 경계를 범하여 군자에게 죄를 얻음도 적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서 주저하며 감히 선뜻 편지를 쓰지 못하였던 것이네. 그런데 이번에 그대의 그 뒷 편지를 얻어 보니, 애써 알고자 하는 정성이 갈수록 더욱 깊어졌으므로 결국 감히 파계(破戒)하고서 대략 별지로 가르침을 청하네. 바라건대 바르게 고쳐 회답을 보내 줄 것이며 절대로 이것을 남에게는 말하지 않는 것이 어떻겠는가?
나는 지난가을 큰 병을 겪은 이후 기혈(氣血)이 모두 탈진되어 위험한 증세가 자주 일어나 깊지 못한 공부마저 접어둔 지가 오래되고 보니 벗들에게 말할 만한 것이 없네.


별지
지난해 기주(箕疇)가 ‘반드시 일을 하되 …… 잊지도 말고 돕지도 말라.[必有事焉 …… 勿忘勿助]’는 말을 가지고 선생님께 물었을 때, 선생께서는 ‘반드시 일을 하되[必有事]라는 일[事]을 경(敬)으로 보면 잘못이 아닐 것이다……’ 하시며, 또 《심경(心經)》 경이직내장(敬而直內章)의 소주(小注) 진씨(陳氏)의 말을 인용하여 정성스럽게 가르쳐 주셨기에 문인들이 이 가르침을 가슴에 담아, 외우고 행하는 바탕을 삼으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뒤 《퇴계집(退溪集)》을 열람하다 한 말씀을 얻었습니다. 그 말은 ‘주자는 잊지도 말고 돕지도 마는 그 사이를 경(敬)으로 하였고 일을 한다는 그 일을 경이라고 하지는 않았으며, 다만 경에 일이 있다는 것은 당연히 잊지도 말면서 돕지도 말라고 말한 뜻일 뿐이다……’ 하였습니다. 이 말을 보면 진씨의 설과 주자의 뜻이 같지 않은 듯하니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맹자가 말한 「일을 하되[有事]」라는 것은 집의(集義)를 가리켜 말한 것이고, 정자가 말한 「일을 하되」라는 것은 지경(持敬)을 가리켜 한 말이다.’란 이 말은 진씨(陳氏)의 설로서 그의 소견이 분명하며 타당하네. 그러나 그 지경의 공은, 혹 잊어버리거나 혹 도와주는 것은 모두 경(敬) 공부에는 해롭네. 그런 까닭에 주자는 잊지 말고 돕지도 마는 그것으로 지경의 한계를 삼은 것이니 주자의 뜻은 아마 경(敬)에는 어떠한 형체나 그림자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하여, 대체로 잊지 말고 돕지도 마는 그것에 경의 본체와 단계를 드러낸 것이네. 그렇다면 진씨는 지경(持敬) 공부를 논한 때문에 당연히 일[事]이란 글자에 붙인 것이고, 주자는 경의 본체와 단계를 논하였던 까닭에 다만 잊지 말고 돕지도 마는 그것에 경을 보이려고 한 것으로 모두 각기 맞는 점이 있는 것일세.
대개 정자(程子)와 주자는 경(敬)을 학문의 첫째 뜻으로 삼았으면서도 또 당시의 배우는 사람들이 모두 경을 형상이 있는 어떤 물건으로 생각하여 이 물건을 보려고 구하는 것을 병통으로 여겼기 때문에 다만 사람들에게 의관(衣冠)을 단정히 하고, 시선을 얌전히 갖고, 잊지도 말고 돕지도 마는 이 같은 것들이 곧 경이라 하고 싶었고 모름지기 별도로 경이란 명목을 세워서 경은 곧 여기에 있다 라고 할 것이 없었던 것이네. 그렇다면 잊지도 말고 돕지도 마는 것이 바로 이른바 ‘일’이라는 것이네. 이렇게 되면 진씨의 설은 주자의 설에 대하여 참으로 이른바 ‘다른 길로 같은 곳에 도착한다.’라는 말과 같은 것이네. 어떻게 생각하는가?
퇴계 선생이,
“‘언뜻 어린아이가 샘에 기어 들어감을 본다.[乍見孺子入井]’란 이 말은 마음의 느낌이고 ‘반드시 움찔 측은해하는 마음이 있다.[必有怵惕惻隱之心]’는 것은 정(情)의 움직임[動]이며 ‘교제를 트며 명예를 바란다거나 나쁜 소문을 두려워한다.[內交要譽惡其聲]’는 것은 마음이 주재(主宰)하지를 못하고 그 바름을 잃은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러한 설은 어떻습니까?
퇴계 이 선생이,
“‘언뜻 어린아이가 샘에 기어 들어감을 본다.’란 이 말은 마음의 느낌이고 ‘반드시 움찔 측은해하는 마음이 있다.’는 말은 정의 움직임이다.”
하였으나, 나의 생각에는 이 선생의 이런 말들은 조금 순탄하지 못한 듯하네. 대체로 ‘어린아이가 샘에 기어 들어 가는 것을 본다’는 것은 외물과 만나는 때이고 ‘움찔 측은해한다’는 것은 마음의 느낌이네. 보는 것은 눈[目]이고 느끼는 것은 마음으로서 외물과 밖에서 만나는 것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속에서 응하여지는 것이니 이것이 비록 한 순간의 일이면서도 또한 그 자체에 한계가 있는 것인데 어떻게 보는 것을 느낌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또 마음의 느낌이란 것은 곧 정(情)이니 곧 이른바 측은지심(惻隱之心)이란 것이네. 위의 마음의 느낌이란 그 마음은 체(體)를 가리켜 한 말이고 아래 측은지심이란 마음은 용(用)을 가리켜 한 말인데 용(用)은 곧 이른바 정(情)이네. 어린아이가 샘에 기어 들어가는 것을 보고 반드시 움찔 측은해하는 마음이 있게 되는 까닭은 바로 마음에 ‘사람을 사랑하는 이치[愛之之理]’가 있어서이네. 그러므로 자연히 이렇게 움찔 측은해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일세.
퇴계가 방금 ‘측은한 마음’이라 하고서, 또 ‘이는 정(情)의 움직임이다’고 말하였는데 위아래의 어세(語勢)로 본다면 정이 움직여 이 측은한 마음이 된 듯하니 퇴계 이 선생의 본뜻은 혹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말의 표현이 잘못된 실수는 면하지 못할 듯하네. 만일 이 설을 고쳐 ‘어린아이가 샘에 기어 들어감을 보는 것은 외물에 느끼는 때이고, 움찔 측은해하는 것은 마음이 발동하여 정(情)이 된 것이며, 반드시 이렇게 움찔 측은해함이 있게 되는 까닭은 사랑의 이치가 마음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다면 순탄하면서도 진실할 듯하네.
온 편지에 ‘교제를 트고 명예를 바라는 것은 정(情)의 격렬함[熾]이다.’ 하였는데 이는 참으로 옳기는 하지만 그러나 ‘격렬하다’는 약간 부합하지 않을 듯하네. 만일 ‘어긋남[差]이다’라고 하면 어떨지 모르겠네.
자네가 말한 ‘움찔 측은해지는 것은 기(氣)에 느껴지는 것이고 그렇게 느껴지게 하는 소이는 느껴지게 하는 이치가 있기 때문이다.’ 한 것은 뜻이 매우 완비되었고 분명하네.
‘소리개가 날고 고기가 뛴다[鳶飛魚躍]’라는 한 구절에서 날고 뛰는 것은 기(氣)가 시키는 것이고, 날게 하고 뛰게 하는 것은 이(理)가 아닐까요? 율곡 선생이 말씀하신 ‘발하는 것은 기이고, 발하게 하는 것은 이(理)이다.’란 설이 바로 이와 같은 말씀인데 구암(久菴) 한백겸(韓百謙)은 율곡의 이 설을 매우 애써 배척하였습니다. 한공의 소견은 어떠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의 학술은 또 어떠합니까?
‘연비어약(鳶飛魚躍)’ 한 구절에서 ‘날고 뛰는 것은 기이고, 날게 하고 뛰게 하는 것은 이이다.’라고 말한 것은 율곡의 소위 ‘발하는 것은 기이고, 발하게 하는 것은 이이다.’란 설과 부합되어 매우 정확하다고 할 수 있네. 한구암은 율곡을 충분히 알지 못하는 사람이네. 그 의론이 옳고 그름을 어찌 족히 운운하겠는가.
퇴계 선생이,
“존양(存養)은 행(行)에 소속되는 것이 옳다. 알지 못하고서는 진실로 행하기 어렵다. 그러나 어찌 이를 인해서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을 지(知)에 소속된다고 하겠으며, 또 어찌 지행(知行)을 겸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였고, 일찍이 《근사록(近思錄)》의 논존양편(論存養篇)의 편제(篇題)를 보니,
“궁격(窮格)이 비록 지극하여도 함양(涵養)이 부족하면 그 앎은 장차 날로 흐려지게 된다. 그러니 어떻게 역행(力行)의 바탕이 되겠는가. 그런 까닭에 존양의 공은 참으로 지행(知行)을 통관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 말이 퇴계의 설과 맞지 않으니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퇴계의 이른바 ‘존양은 행에 소속되는 것이 옳다. 알지 못하고서는 진실로 행하기 어렵다. 그러나 어찌 이를 인해서 성의와 정심을 지에 소속시키겠으며 또 어찌 지행을 겸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신 말씀은 전혀 알 수가 없네. 대체로 《맹자》에서는 ‘마음을 보존하고 성을 기른다.[存其心養其性]’라는 말은 ‘마음을 다하고 성을 안다.[盡心知性]’의 상대로 이른 말이었네. 그러나 그것은 존양(存養)을 행(行)에 붙인 것이 분명하네. 그러나 만일 존양을 역행(力行)과 상대시키게 되면 여기에서는 행(行) 가운데서도 또한 자체에 동(動)과 정(靜)의 나누임이 있게 된 때문에 이 존양 공부는 치지(致知)와 역행의 중간에 처하게 되네.
대체로 존양의 공이 없으면 아는 것은 흐려지고 한만(汗漫)하여져 족히 지(知)가 되지 못하고, 소위 역행이라는 것도 역시 근원을 잡고 귀착될 곳이 없어져 끝내는 사사로운 뜻에 앗겨 버리는 바가 될 것이네. 이것이 주자(周子)가 반드시 ‘성인은 중정인의(中正仁義)에 안정하시고서도 정(靜)에 주장하셨다.’고 말하는 이유이네.
그러나 평암 섭씨(平巖葉氏)는 《근사록》의 편제(篇題)에서 존양과 함양을 서로 번갈아 말하여, 거의 존양은 정(靜)에 속하고 함양은 동정(動靜)을 겸한 것을 모르고 그렇게 말하였네. 그러나 주자(朱子) 또한 이따금 존양을 동정에 붙여 말하였으니 배우는 이들이 마땅히 유동성이 있게 보는 것이 옳을 것이네.
마음[心]과 성(性)을 주자께서 ‘동처(動處)는 마음이고 동저(動底)는 성이다.’ 하였습니다. 처(處)와 저(底) 두 글자를 소상하게 가르쳐 주심이 어떻겠습니까? 성은 마음을 기다려 발하고 마음은 성으로 말미암아 동(動)한다고 하니 마음이 동하고 성이 동하는 것은 선후를 구분하여 말할 수 없는 것입니까? 혹자는 사물에 느끼어 동하는 것이 마음이라고 의심한 때문에 ‘마음이 먼저 동한 것이다.’라고 하고, 혹자는 성이 발하여 정(情)이 된 것이라고 의심한 때문에 ‘성이 먼저 동한 것이다.’라고 합니다. 혹자들의 두 가지 설이 나름대로 소견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주자의 이른바 ‘동처(動處)는 마음이고 동저(動底)는 성(性)이다.’란 처(處)와 저(底) 두 글자는 당시에 두 갈래로 설명하여 내려가는 어세이네. 대체로 동하는 것은 마음이고, 동하게 하는 것은 성(性)이네. 《주자어록(朱子語錄)》에서는 처(處) 자와 자(者) 자가 서로 가깝게 쓰였고, 저(底) 자와 지(之) 자도 서로 가깝게 쓰였기 때문에 ‘처와 자’, ‘저와 지’가 《주자어류(朱子語類)》에 흔히 혼용되었던 것이네.
마음이 먼저 동하느냐 성이 먼저 동하느냐 하는 이 말은 함께 혼합해서 말할 것이 아니네. 마음은 기(氣)이고 성은 이치[理]이며, 기는 곧 음양(陰陽)이고 이치는 곧 태극(太極)이기 때문에 기(氣)로부터 말하면 ‘기가 형체를 이루고 이치 또한 부여되었다.’ 하였고 또 ‘인심(人心)은 감각이 있고 도체(道體)는 무위(無爲)이다.’ 하였으며, 이치로부터 말하면 ‘태극(太極)이 동(動)하여 양(陽)을 낳고 정(靜)하여 음(陰)을 낳는다.’ 하였고, 또 ‘만일 이치에 동정(動靜)이 없다면 기(氣)에 어떻게 동정이 있을 수 있겠느냐.’ 하였네. 성현들의 말씀에는 각기 타당한 바가 있으니 오직 그 소견이 무엇인가를 보아야 할 것일세.
주자의 소위 ‘형기(形氣)의 사사로움[私]에서 난다.’에서 ‘사(私)’ 자는 ‘사욕(私欲)’이라는 사(私) 자가 아닙니까? 진서산(眞西山 진덕수(眞德秀))은 ‘사(私)는 나 혼자만[我之所獨耳]이라는 말과 같다.’ 하였습니다. 서산의 설을 마땅히 따라야 하겠습니까?
주자가 초년에는 인심(人心)을 인욕(人欲)이라 하였다가 만년에는 형기(形氣)의 사사로움[私]이라고 하였네. 이는 식색(食色) 등을 가리켜 한 말이네. 이천(伊川)은 일찍이 진경정(陳經正)에게,
“남이 배불리 밥을 먹을 때에 그대는 배고프지 않던가?”
라고 말하였는데 이는 다만 자기 개인에게만 붙이고 피차에 통하지 못한다는 뜻이네. 서산(西山)의 소위 ‘혼자[獨]’는 바로 주자 만년의 견해이네. 어찌 따르고 따르지 않을 문제가 있겠는가. 그러나 서산도 또한 일찍이 극기(克己)의 기(己) 자를 인심(人心)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이른바 기(己)라는 것은 인욕(人欲)이라고 여겼던 까닭에 반드시 이겨서 버리라고 하여, 이른바 형기(形氣)의 사사로움에서 말하였던 것과는 달랐었네. 그러니 서산의 견해도 역시 초년과 만년이 달랐던 것이네.
구방심(求放心) 한 구절은 모든 배우는 사람의 처음서부터 끝까지의 공부를 두고 한 말입니까? 아니면 방심을 구한다 함은 처음에는 필요하였다가 끝마치는 데와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까?
구방심(求放心) 한 구절을 정임은(程林隱)이 심학도(心學圖)에서 극복(克復)과 심재(心在) 조항의 상위 공부로 배열하자, 율곡은 이를 그르다 하였고, 퇴계는 정설(程說)을 힘써 주장하였네. 그러나 맹자께서 이른바 ‘사람들이 닭이나 개가 달아나면 구해 들일 줄은 알면서도 방심(放心)은 구할 줄 알지 못한다.’라는 말로 관찰한다면 그것이 초학(初學)에서 하는 일임이 분명하여 극복과 심재의 상위 공부에 배열된 것이 부당하다는 것은 의심이 없네. 주자가 ‘안자(顔子)는 극기복례(克己復禮) 하나로 공부가 그 경지에 이르렀다.’ 하였네. 어떻게 안자의 경지를 지나서도 다시 이른바 방심이 있겠는가. 마땅히 율곡의 설을 정당하다고 해야 할 것 같네.
옛말에 ‘덕(德)은 음(陰)이고 도(道)는 양(陽)이다……’ 하였습니다. 도와 덕을 음과 양으로 분배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덕을 음에 소속시키고 도를 양에 소속시키는 것은, 도와 덕에 분명하게 음과 양의 한계가 있어서 이른 말이 아니네. 대개 그것을 구분지어 말하자면 덕에는 온축(蘊蓄)의 뜻이 담겨 있고, 도에는 시행(施行)의 뜻이 담겨져서이네. 그러므로 주자가 ‘덕은 도를 실행하여 마음에 얻어진 것이다.’고 말하였네. 이를 가지고 말한다면 두 가지에 약간의 구분이 없지는 않으나 그 실상은 하나이네.
명도(明道) 선생이 ‘드나듦이 때가 없어 어디로 향하는 곳을 알 수 없다.[出入無時莫知其嚮]는 말은 성인의 말이 아니다…….’ 한 것은 가리킨 뜻의 소재가 자세하지 않습니다.
명도 선생이 ‘드나듦이 때가 없고 향하는 곳을 알 수 없다는 말은 성인의 말이 아니다.’ 한 것은 범순부(范淳夫 범조우(范祖禹)) 딸의 말과 서로 부합하네. 범녀(范女)가 ‘맹자(孟子)는 마음을 알지 못하였구나. 마음이 어떻게 출입(出入)이 있을까 보냐.’ 하자, 이천(伊川) 선생은 ‘이 여자가 비록 맹자는 알지 못하였지만 그래도 마음은 알았다.’ 하였네.
퇴계 선생이 ‘존양(存養)은 오로지 정(靜)으로만 말하고 함양(涵養)은 동정(動靜)을 겸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함양과 존양은 차이가 없을 듯한데 이와 같이 구분지어 말을 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함양은, 글을 읽을 때 책 속의 의리에 깊이 빠져 마음이 다른 데로 쏠리는 일이 없는 것이기도 하며, 일이 없을 때 이 마음이 맑고 밝아 어지러움이 없는 것도 그것이네. 때문에 동정을 겸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네. 그러나 존양은 다만 이 마음을 붙잡아 사물에 흔들리거나 빼앗기는 일이 없도록 하여서 천리(天理)를 항상 간직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로지 정(靜)에 소속되는 것이네.
《중용(中庸)》을 가지고 말한다면 ‘남이 보지 않는 데에서 계신(戒愼)하고, 남이 듣지 않는 데에서 공구(恐懼)한다.’는 것과 ‘혼자 있을 때 삼간다.’는 것들은 모두 함양의 일이고, 존양에 있어서는 오로지 계신(戒愼)과 공구(恐懼)만을 가리켜서 한 말인 까닭에 그 장하주(章下注)에 계신ㆍ공구를 존양이라고 한 것이네.
퇴계 선생이 ‘인심(人心)은 인욕(人欲)의 근원[本]이고 인욕(人欲)은 인심(人心)의 지류[流]이다……’ 하였습니다. 본(本) 자를 쓴 것은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습니다.
퇴계의 이른바 ‘인심은 인욕의 근원’이란 것은 매우 정밀한 말로서 모든 사물에는 반드시 그 근원이 있는 것이네. 일상적으로 말하는 인욕(人欲)으로 큰 것으로는 식색(食色)만 한 것이 없네. 대체로 형의 어깨를 비틀어 가며 빼앗아 먹는 것은 인욕이지만 그 근원을 추구해 보면 어찌 주리면 먹으려 하는 인심(人心)에 연유되지 않았겠으며, 동쪽 집의 담을 넘어가 처녀를 끌어 오는 것이 인욕이지만 그 근원을 추구해 보면 어찌 정력이 왕성하여 아내를 생각하는 인심에 연유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추구하여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인심은 비록 형기(形氣)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그 실상은 또한 성명(性命)에 근원한 것이며, 이른바 먹고자 하고 아내를 생각하는 마음도 실상 사랑하는 이치[愛之理]에서 근원한 것이네. 만일 사랑하는 이치가 없다면 먹을 것을 보거나 색(色)을 대해서도 또한 막연히 마음이 움직이는[動] 바가 없을 것이네. 이 동(動) 자를 마땅히 깊이 살펴야 할 것이네. 주자가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동(動) 자를 해석한 말씀이 매우 많네.
그러므로 근원을 따라 말한다면 성(性)은 인심(人心)의 근원이고 인심은 또 인욕(人欲)의 근원이네. 때문에 ‘선과 악이 모두 천리(天理)다.’ 하였고, 또 ‘흐름이 머지않아 이내 탁(濁)하여진다.’라고 말한 것이며, 끝에서부터 거슬러 말한다면 인욕(人欲)은 인심(人心)에서 생겨나고 인심은 또 성(性)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구더기는 육장(肉醬)에서 생겨나지만 육장을 해롭게 하는 것으로는 구더기만 한 것이 없다.’ 하였고, 또 ‘조금 흐려진 것이나 많이 흐려진 것이나 애초에는 물이었다.’라고 하였네.
이것이 바로 거느리는 데에는 종(宗)이 있고, 모이는 데에는 근본이 있고 하나의 근본에서 일만 가지로 달라지고, 일만 가지 달라짐이 하나에 근본하며, 갖가지 생각이 하나로 모아지고, 다른 길로 같은 곳에 돌아간다고 하는 이치이네. 그러나 배우는 자가 만일 천리(天理)가 지류(支流)로 화하여 인욕(人欲)이 된 것임을 모르고 인욕을 가리켜 천리라고 한다면 이는 참으로 도적놈을 아들로 인정하는 것이네.
그렇기 때문에 성인이 십륙언(十六言)을 주고받을 때에 정(精)과 일(一) 두 글자를 쓴 것이네. 인심(人心)에서도 이와 같았는데, 더군다나 인욕(人欲)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주D-001]반드시 …… 말라 : 《맹자(孟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있는 말이다.
[주D-002]정임은(程林隱)이 심학도(心學圖) : 임은은 주희의 제자 정복(程復)의 호. 심학도는 그가 양심(良心)과 본심(本心)에서 출발하여 사십부동심(四十不動心)과 칠십이종심(七十而從心)까지의 공부하는 과정을 그린 도표이다.
[주D-003]십륙언(十六言) : 이는 요(堯)ㆍ순(舜)ㆍ우(禹)로 내려오며 주고받은 ‘인심은 위태하고 도심은 은미하니 오직 정미롭고 오직 전일하여야 그 중을 잡는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란 열 여섯 글자를 말함.

 송자대전 제90권
 서(書)
이여구(李汝九)에게 답함 - 임자년(1672) 5월 12일


일찍이 답장을 잘 받았네. 그러나 질병 때문만이 아니고 요즘 서울로 보내는 편지는 아주 금했던 까닭에 오랫동안 사례하지 못하였네. 그런데 또 내 아우 편에 보내 준 이달 2일의 편지를 받으니 위로와 고마운 마음이 더욱 간절하였네. 나는 병세가 날로 심하니 참으로 섣달 그믐날의 소식[臘月三十日消息 더 희망이 없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뜻]으로써 헛되이 일생을 보내 버린 것이 한스럽네.
별지에 다시 나의 어리석은 견해를 써 보내니 이치에 합당하지 않은 것은 다시 바로잡아 보여 주기를 간절히 바라네. 지금 세상에서는 비록 주고받는 편지는 많으나 모두 어수선한 이야기들이요, 이런 것을 헤아려 생각한 편지는 없었네. 그런데 죽을 나이에 이르러 여구(汝九)를 만나 이런 일을 논하리라고는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작은 다행이 아니네. 전후로 보냈던 나의 견해들을 스스로 상고해 보고자 하니 꼭 도로 보내 주기를 바라네. 나머지는 병이 심하여 하나하나 말하지 못하네.


별지
‘움직이는 것은 마음이고 움직이게 하는 것은 성(性)이다.’라는 한 조목에 대해 선생께서 논하시기를 ‘움직이는 것은 마음이고 움직이게 하는 물건[能動之物]은 성이다. ……’ 하셨는데, 그 물(物) 자는 군더더기 같습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대체로 이 마음이 있으면 이 성(性)이 있게 마련이니 성은 곧 이(理)로서 이 마음 밖에 또 따로 성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움직임으로 말한다면 움직이는 것은 마음이고 움직이게 하는 것은 성이란 말입니다. 만일 물(物) 자를 이 성의 위에 쓴다면 흡사 이 마음 밖에도 움직이게 하는 물건이 있는 듯한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성이니, 성은 곧 이(理)이네. 주자가 이(理) 자 위에 물(物) 자를 쓴 것은 이루 다 셀 수 없이 많이 있네. 비록 세속의 말로 해석한다 하더라도 또한 매우 분명하니 움직이게 하는 것이란 말로, 세속의 말로는 물(物) 자를 ‘것’이라고 해석하네. 대체로 마음은 기(氣)에 속하고 성은 이(理)이니 이기(理氣)는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이네. 하나인 까닭에 ‘기(器)도 도(道)요 도(道)도 기(器)다.’ 하였으며, 둘인 까닭에 ‘이(理)는 이(理) 대로이고 기(氣)는 기(氣) 대로이다.’라고 한 것인데, 자네의 이번 편지에서는 이(理)와 기(氣)를 하나로 생각한 듯하네. 다시 생각하여 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인심(人心)은 인욕(人欲)의 근본이란 한 조목에 대하여 선생께서 논하시기를,
“먹고 싶어 하고 아내를 생각하는 마음은 참으로 사랑하는 이치에서 근본한 것이니, 만일 사랑하는 이치가 없다면 먹을 것을 보거나 여색(女色)을 보고서도 막연히 동심되는 바가 없다……”
하셨습니다. 대체로 측은지심(惻隱之心)은 곧 사랑의 이치입니다. 먹고 싶어 하고 아내를 생각하는 마음을 사랑하는 이치에서 근본하였다고 말하는 것이 꼭 적절한 것일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먹고 싶어 하고 아내를 생각하는 마음은 진실로 천리에 근본한 것이다. 만일 이러한 이치가 없다면 또한 어떻게 이러한 마음이 있겠는가. 그러나 먹고 싶어 하여 형의 팔을 비틀고 아내를 생각하여 이웃집 처녀를 끌어 오는 데 이른다면 이는 천리가 흘러서 인욕이 된 것이다.”
고 하신 말씀은 과연 그럴는지 모르겠습니다. 애(愛)라는 한 글자는 선유(先儒)들 대부분이 인(仁)을 논한 곳에서 말하였고 식색(食色) 등속을 말한 곳에서는 말한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감히 이러한 말로 가르침을 청하오니 낱낱이 지적하여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천하의 이치는 근본이 없이 생겨난 것은 없네. 그런 까닭에 ‘선(善)과 악(惡)이 모두 천리(天理)다.’ 하였고, 또 ‘악(惡)도 성(性)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으며, 또 ‘이(理)에도 선과 악이 있다.’고 한 것이네. 이제 만일 악을 이의 본연(本然)이라고 한다면 크게 옳지 않네. 그러나 또한 악이 이의 본연이 아니라고 하여 이에 근본하지 않았다고 해서도 안 되네. 대체로 악이라고 하는 것은 그 시초는 비록 이에 근본한 것이나 끝에 생겨난 폐단이 그 본연을 잃게 되어 마침내 악에 이른 것이네. 만일 보내온 말과 같다면 악이라는 것이 어디에서 생겨나는 것인지 모르겠네. 이것은 이치 밖에 있는 물건이란 말인가?
성(性)은 곧 이(理)이며 성 속에는 인(仁)이 있는 까닭에 능히 사랑하는 것이네. 그러니 그 어버이를 사랑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것은 도심(道心)이고, 그 먹고 싶어 하고 색을 생각하는 것은 인심(人心)인데 이것이 모두가 본연의 이치일세. 그러나 먹고 싶어 하고 색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인해 그 마음이 흘러서 형의 팔을 비틀고 동쪽 집의 담을 넘어가기에 이르는 것은 악(惡)이네. 하지만 그 시초를 캐 보면 또한 어찌 이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천하에 이치를 벗어난 물건이 하나도 없다고 하였으니 시험 삼아 이 한 문구를 생각하여 깨닫게 되면 시원해질 걸세.
또 일찍이 생각해 보니 천하에는 성(性)을 벗어난 물건이 없었고 성이란 단지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 뿐이었네. 그리고 맹자가 측은(惻隱)을 인(仁)의 단서로 삼은 것은 사단(四端)을 말한 것이며, 주자가 사랑을 인(仁)의 용(用)으로 삼은 것은 칠정(七情)을 말한 것이네. 그렇다면 칠정과 사단은 그 실상은 하나이니 모든 사람의 성정(性情)은 비록 선하고 악한 것이 동일하지 않은 점은 있으나 이 사단과 칠정에 근본하지 않은 것은 없네. 만일 보내온 편지의 말과 같다면 이른바 먹고 싶어 하고 색을 생각하는 마음이 어디에서 생겨 난단 말인가?
《예기(禮記)》에서는 칠정(七情)에 대해 처음은 비록 희(喜)ㆍ노(怒)ㆍ애(哀)ㆍ구(懼)ㆍ애(愛)ㆍ오(惡)ㆍ욕(欲)을 대칭으로 들어 말하였으나, 그 아래 문구에서는 다시 욕(欲)과 오(惡) 두 글자만으로 모두 합하여 결론지었으니 여기에서 희ㆍ노ㆍ애ㆍ구ㆍ애라는 것 다섯 가지는 모두 오와 욕 두 가지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네.
주자에 이르러서 처음에는 비록 애(愛 사랑함)ㆍ공(恭 공손함)ㆍ의(宜 마땅함)ㆍ별(別 분별함)을 성(性)의 용(用)이라 하고, 또 측은(惻隱)ㆍ수오(羞惡)ㆍ시비(是非)ㆍ사양(辭讓)에 각기 조리(條理)가 있다고 말하였으나, 나중에 가서는 또, 측은의 한 단서를 사단(四端)이 모두 모이는 표준[極]으로 삼았네. 이것은 사단과 칠정이 오(惡)와 욕(欲) 두 가지에 귀착되고 또다시 합치하여 측은의 단서가 됨을 말한 것이네. 이 점은 명도(明道)가 ‘수오지심(羞惡之心)도 측은에서 발로한 것이다.’고 한 말과 똑같은 것일세.
그렇다면 사랑[愛]을 욕심[欲]에 합치시킨 것은 이미 증거가 있었네. 그러하니 사람의 마음이 먹고 싶어 하고 색을 생각하는 것을 사랑에 근본한 것이라는 말이 어찌 분명하여지지 않은가. 보내온 편지의 말에 측은한 마음을 애(愛)의 이치라고 한 것은 어느 책에 나온 말인가? 주자는 ‘인(仁)은 애(愛)의 이치요 측은은 곧 인의 단서이다.’ 하였네. 주자의 뒷세상에 태어난 사람으로는 반드시 이러한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니 바라건대 다시 편지를 보내 주어 이 의혹을 깨뜨려줌이 어떻겠는가?
박공 지계(朴公知誡)는 방촌(方寸 가슴)의 마음을 도심(道心)이라 하고, 귀의 마음ㆍ눈의 마음ㆍ손가락의 마음을 인심(人心)이라 하면서 심지어는 ‘두 가지는 본래 하늘과 땅처럼 동떨어진 것이니 억지로 마음은 하나라고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잘못된 견해가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잠야(潛冶 박지계(朴知誡))의 이 설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노선생께서 일찍이 그르다고 말씀하셨네. 그러나 이분은 선배요 장자(長者)인데 자네가 그 성명을 함부로 부른 것은 생각건대 후학(後學)으로서 온공(溫恭)하고 퇴양(退讓)하는 뜻이 아닐 듯싶네. 바라건대 더욱 징계하여 살핌이 어떻겠는가?


 

[주D-001]수오지심(羞惡之心)도 …… 것 : 송 나라 상채(上蔡) 사람 사양좌(謝良佐)가 정이에게 수학하면서 사서(史書)를 외우자 정이가 “쓸데없는 물건을 가지고 놀다 자기의 뜻을 상실한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사양좌는 등에서 땀이 흐르고 낯이 붉어졌다. 이것을 본 정이는 “이것은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어찌하여 수오지심(羞惡之心)이 아니고 측은지심인가 하면 사람에게 측은지심이 있어야 마음이 움직이게 되며 마음이 움직여야 수오(羞惡)ㆍ공경(恭敬)ㆍ시비(是非)가 있게 된다.” 하였다. 《心經 卷2 失人凾人章 注》

 

송자대전 제90권
 서(書)
이여구(李汝九)에게 답함 - 계축년(1673) 8월 28일


물어 온 편지는 참으로 고맙네. 형이상하(形而上下)의 설은 아직까지도 서로의 뜻이 부합되지 못했으니 어찌 나의 식견이 참되지 못하기 때문에 말이 분명하지 못하여 자네를 이렇게 만든 것이 아니겠는가.
앞에서 ‘기(氣)는 찌끼요 혼탁한[滓濁] 것이다.’고 한 말은 어찌 악취나는 더러운 것을 말한 것이겠는가. 그것은 기를 텅비어 형체가 없는 이(理)에 비교하면 서로 다른 점이 자연히 구별 지어져 있다는 것뿐이네. 주자가 그릇[器]은 형적(形迹)이라고 한 것은 또한 이 그릇이 이 이(理)를 저장하고서 유행(流行)하고 운용(運用)하는 것이, 이의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것과는 같지 않다는 말이며, 사람이나 물건처럼 형체를 이룬 것과 같음을 말한 것이 아니네.
만일 기(器)를 참으로 형적이 있어서 마치 사람이나 만물이 형성됨과 같다고 한다면 계사(繫辭)에서 어찌 형(形)이라 말하고서 또 기(器)란 말을 하였겠는가. 이는 반드시 형과 기가 한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그 말한 것이 이러할 것이니 기(氣)는 이 이를 다 담고 있는 그릇이며 사람과 만물의 형상을 이룬 것임을 말한 것과 같네. 사람과 만물의 형상부터 말한다면 텅비어 능히 소이연(所以然)이 된 것은 이치이니 때문에 형이상(形而上)이라 하고 씨줄과 날줄이 얽히고 설켜 능히 형상을 이루는 것은 기운[氣]이기 때문에 형이하(形而下)라고 말한 것이니, 형이상 또는 형이하로 부른 이치가 뚜렷하여 다시 의심이 없다 하지 않겠는가.
바라건대 급하게 귀일시키려 하지 말고 경전(經傳)의 여러 설들에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연구해 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나머지는 바빠서 이만 줄이네.


 

[주D-001]계사(繫辭)에서 …… 하였겠는가 : 형이상(形而上)은 도(道)로서 무형(無形)인 것이고, 형이하(形而下)는 기(器)로서 유형(有形)인 것을 말한다.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에 “형이상인 것을 도라 하고 형이하인 것을 기라 한다.[形而上者謂之道形而下者謂之器]……” 하고 정자(程子)의 주(注)에 “유형(有形)은 모두 기(器)이고 무형(無形)은 도가 된다.” 하였다. 여기서는 형과 기가 서로 다르다는 말이다.

 송자대전 제90권
 서(書)
이여구(李汝九)에게 답함 - 계축년(1673) 12월 26일


보내온 편지가 정중하기 이를 데 없으니 나를 비루하게 여기지 않은 것이 매우 고맙네. 여강증어(驪江贈語)는 늘 답서를 보내려 하였으나 한겨울을 내내 병 속에서 지내다 보니 붓을 잡는 일에 마음이 내키지 않아 지금까지 이럭저럭 미뤄오며 안타까워할 따름이네.
가만히 생각건대 자네가 논설한 바는 나의 오류를 깨우쳐 줌이 매우 깊었네. 대체로 부귀를 위해 노력하면서 겉치레나 하는 것으로 서로 잘난 체하는 사람들은 진실로 말할 것도 못 되지만 문사(文詞)를 아름답게 꾸미고 언어를 듣기 좋게 하면서 여러 사람을 이기려 하는 자들에 이르러서는 다른 것이 아니요 그 병근은 순전히 이 한 글자[一字]에서 빚어져 나온 것이네. 나같이 잘못된 자는 능히 다스려 고칠 수 없으니 형세로 보아 이렇게 세상을 마칠 것 같네만 지금 자네는 이미 이 글자의 잘못이 이같이 큼을 알았으니 그 알 수 있는 단서는 곧 다스릴 수 있는 약이네. 이를 미루어 간다면 앞으로 병이 다스려지지 않을 것이 없고 허물이 고쳐지지 않을 것이 없게 될 것이니, 그 성취를 어떻게 짐작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람 마음은 물과 같아서 흔들리기는 쉽고 안정되기는 어렵네. 모름지기 함양(涵養)을 깊게 하고 성찰(省察)을 정밀히 한 다음에야 참으로 거의 되었다고 할 것이네. 옛 현인이 이르기를 ‘한때의 뜻이 얼마나 갈 수 있는가.’ 하였는데 이 말을 마땅히 깊이 음미하여야 할 것이네. 자네가 나를 인정해 준 깊은 마음에 감동되어 이같이 가슴속의 말을 다 하고 보니 도리어 매우 부끄럽네.
저번에 《퇴계집》을 즐겨 본다는 말을 편지에서 읽었네. 그 뜻은 비록 좋으나 어찌 먼저 정자(程子)와 주자의 글을 읽는 것만 하겠는가. 이런 책은 늙어 쇠약하여지면 읽기 어렵네. 존왕부(尊王父 남의 할아버지를 높여 부르는 말) 대감께 감히 편지를 드리지 못하니 아침저녁으로 문안드릴 때 이 뜻을 아뢰어 줌이 어떻겠는가?


별지
어렴풋이 들으니 교관(敎官) 민업(閔業)의 아들에게 폐질(廢疾)이 있어 손자를 세우는 일에 대해 선생께서 논하신 말씀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렇습니까? 요즈음 서울 안의 사대부들이 민(閔)의 일로 논의가 분분합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선생께서 단지 주자의 상복차자(喪服箚子)의 뜻에 의거하여 논하신 것입니까, 아니면 예경(禮經)의 분명한 글에 의해서 논하신 것입니까? 아들에게 폐질이 있으면 손자를 세우는 것이 사서인에게 통행하게 된다면 제주(題主)의 한 조항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손자의 이름으로 제주한다면 ‘차마 어버이를 돌아가신 것으로 간주하지 못한다.’는 뜻과 서로 어긋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사람의 집안에 이런 변고를 만나는 일이 또한 혹 있을 것이니, 이 예(禮)는 반드시 자세히 고증하고 널리 증명을 해서 통행할 수 있는 확실한 문구를 얻은 다음에야 길이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 준행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상세히 답장해 주십시오.
모든 초상(初喪)에 아들에게 폐질이 있으면 그 손자가 대신 상(喪)을 주장한다는 분명한 주자의 말씀이 있네. 그 말씀에서 이미,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하셨으니, 그것은 귀천을 통틀어 말씀한 것임을 볼 수 있네. 지금 사람들이 시끄럽게 굴기를 좋아하는 것은 대체 무슨 견해에서인가 모르겠네. 제주(題主) 한 조항에 이르러는 분명하게 증거할 만한 문구가 없는 까닭에 서울과 지방의 의논들이 아직도 여러 갈래이네. 그러나 큰 벼리가 이미 바루어졌으면 그 소소한 것의 서로 틀리는 부분은 후일을 기다려 귀일하게 하여도 늦지 않을 것이네. 보내온 편지에 손자로 제주(題主)를 하는 것은 ‘차마 어버이를 돌아가신 것으로 간주하지 못한다.’는 뜻과 어긋난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대신 상을 주장하는 것은 또한 차마 어버이를 죽었다고 할 수 있어서인가? 다만 체천(遞遷)하는 한 절차가 좀 방애될 듯하네. 그러나 주자가 늙어서 손자에게 전하고 사당에 고한 글을 의거하여 본다면 또한 그에 대한 변명이 될 듯도 하네.
대개 요사이 민씨 집안 얘기를 들으니 사람들의 논의가 서로 틀려서 옳다고 하는 사람은 극히 적고 그르다고 하는 사람들은 극히 많습니다. 이 같은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춘옹(春翁 송준길을 가리킴)의 의견과 선생님의 의견이 합치되지 않는 데에서 초래한 것입니다. 며칠 전 현석(玄石)을 만나 그 말을 들으니 ‘춘옹의 의견이 처음에는 합치하지 않았으나 나중에는 선생의 의견과 같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선비들의 의견이 거의 일치될 길이 있을 듯합니다. 이른바 합치되었다는 말은 모르겠습니다만 문자에 나타낸 것이 있습니까, 아니면 말을 주고받는 사이에서 언급된 것입니까?
민씨 집안 예(禮)는 이미 그르다는 사람이 많은 줄 아네. 동춘(同春)이 상가(喪家)에 답한 편지에도 주자의 설을 감히 그르다 한 것이 아니었네. 그 대의는 ‘당초에는 주자의 설을 반드시 행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그 뒤에 생각하여 보니 막히는 곳이 많이 있었다……’ 하였고 나의 설을 보고는 급히 한 사람을 달려보내 그 답장을 되돌려 오려고 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였다고 말하였네. 대체로 다만 나의 말을 패려되지 않았다고 하였을 뿐 아니라 또한 자기의 편지로 인하여 시끄럽게 될까 염려하더니 오늘날에 과연 이렇게 되었으니 ‘이 문정(李文靖)은 참으로 성인이다.’라고 한 말과 꼭 같네.
내가 문을 닫고 들어앉아 일체 내객(來客)을 받아들이지 않고 다시 이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으며 비록 편지로 물어 오는 사람이 있더라도 한결같이 알지 못한다고만 대답하였네. 그런데 이제 자네가 편지를 보내 물어 오자 갑자기 파계(破戒)하고 말았으니 정력(定力)이 없음을 자조(自嘲)하는 바이네.
무릇 초상에 아버지가 살아 계시면 아버지가 주상(主喪)이 됩니다. 다만 아들과 며느리의 상(喪)뿐이 아니고 손자며 손부(孫婦)의 상까지라도 모두 당연히 주상이 됩니다. 만일 손자의 상에 그 아버지가 주상이 되고 할아버지가 주상을 하지 못했다면 삼년상(三年喪)을 마친 뒤 부묘(祔廟 신주를 사당에 올리는 것) 때 누구로 주상을 삼고 어느 자리에 합부(合祔)하여야 합니까?
예(禮)에 근거한다면 그 할아버지가 당연히 주상이 되어야 하고 그 할아버지 자리에 합부하여야 하니 이른바 ‘중일이부(中一而祔)’라는 것이네. 주(周) 나라 때에는 귀한 사람을 귀하게 여겼으므로 대부는 서자(庶子 맏아들이 아닌 아들들)의 주상이 되지 않았었네. 그런 때문에 서자들은 각기 자기 아들들의 주상이 되었네. 그러나 후세에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장자와 서자의 구별이 없이 모두 그 아버지가 주상을 하는 것이네.
《중용(中庸)》의 예악 형정(禮樂刑政) 주(註)에 대하여.
장계곡(張谿谷 장유(張維))이,
“본 장구에서 말한 계구(戒懼)ㆍ신독(愼獨)ㆍ치중화(致中和)와 같이 아주 가까운 훈(訓)을 놓아두고 멀리 예악 형정(禮樂刑政)을 들어 교(敎)라 하였으니 이것은 내가 의심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하는데, 그 뜻을 모르겠습니다.
예악 형정은 성인이 가르침을 베푸는 기구이며, 계신 공구는 군자가 가르침을 행하는 일이네. 두 가지는 각기 다른 것인데 하나로 합쳐서 보았기 때문에 서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서로 병통이 된 것이네.
계곡(溪谷)이 말하기를,
“잡으면 간직되고 놓으면 없어지며 드나듦이 때가 없어서 그 향하는 곳을 알지 못할 것은 오직 마음이라고 한 것은 공자의 말씀인데 그것을 맹자가 인용하여 마음을 논한 것이다. 범순부(范淳夫 범조우(范祖禹))의 딸이 이 장구(章句)를 읽고서 ‘맹자는 마음을 알지 못했구나. 마음이 어떻게 드나듦이 있단 말인가.’ 하였다. 이천(伊川) 선생은 그 말을 듣고 ‘이 여자가 맹자는 알지 못하였으나 마음은 능히 알았다.’ 하였고, 주자는 ‘순부의 딸이 마음은 알았으나 맹자는 몰랐다. 이 여자가 그때에 참으로 고생이 없었던 까닭에 드나듦이 없다고 말하였고 남들에게 출입이 있음을 알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병 없는 사람이 남의 아픈 사정을 모르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나는 일찍이 이러한 설들을 읽고서 속으로 이천의 말이 정밀하게 꿰뚫고 적실(的實)함에 탄복하였으나 주자설에는 능히 의심이 없지 못하였다. 또 자기에게 고생이 없다 하여 남들이 출입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면 생이지지(生而知之)하고 안이행지(安而行之)하는 성인이 끝내 인심(人心)과 물태(物態)의 진실과 거짓을 두루 알릴 수 없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생각건대 계곡이 주자의 설에 의심을 품은 것은 아마 깊이 생각하지 않고 정밀히 살피지 않아서라 여겨집니다. 범씨의 딸이 맹자를 알지 못한 것은 사람에게는 붙잡고 놓는 방법이 있음을 알지 못한데서 연유한 것인데 주자의 의논이 명료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자의 말씀은 단지 범씨의 딸이 고생이 없어 남들에게 잡고 놓음에 따라 드나듦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를 이끌어 성인의 생이지지와 안이행지까지 미뤄 나갈 수 있겠습니까.
성인의 생이지지와 안이행지도 어찌 한갓 고생이 없을 뿐만이겠습니까. 정밀히 살피고 한결같이 지켜서 진실로 그 중도를 잡은 사람이 오직 성인이고 보면 인심과 물태의 진실과 거짓은 참으로 성인의 밝히 살피는 명감(明鑑)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한 부녀의 고생이 없는 것을 가지고 성인의 극공(極功)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마음에는 진체(眞體)와 실용(實用)이 있는데 체(體)는 거울의 밝음과 같고 용(用)은 능히 비추는 것과 같은 것이니 여기에 어떻게 일찍이 드나듦이 있겠는가. 이는 이천과 범씨의 딸이 동정(動靜)으로 마음을 논한 것이네. 그리고 드나듦[出入] 두 글자에 이르러서는 ‘주자가 선도 있고 악도 있다.’ 한 것인데 바야흐로 놓았을 때는 이 마음이 홀연히 사방 만리 밖에 있게 되니 어떻게 나갔다[出]고 말하지 않을 수 있으며, 이미 나갔다고 말하였다면 붙잡아서 가슴속에 있게 한 것을 어찌 들어왔다[入]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는 공자ㆍ맹자ㆍ주자가 붙잡고 놓는 것으로 마음을 논한 말이네. 두 가지가 각기 지향한 바가 있는데 지금은 두 가지를 합하여 말하려고 하기 때문에 말은 더욱 많아지고 뜻은 더욱 어두워진 것이네.
자네가 논한 계곡의 생이지지니 안이행지니 하는 설은 생각건대 계곡이 말한 본의를 살피지 못하고 성급하게 공격을 가한 듯하네. 계곡은,
“성인의 마음에는 인정(人情)과 물태(物態)에 부정(不正)한 것이 있지 아니한데도 인정과 물태를 알았으니 어찌 범씨의 딸이 자기에게 고생이 없었다고 하여 남에게 고생이 있음을 몰랐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라는 말이네. 그 뜻은 이런 것에 불과하며 범씨의 딸이 또한 생이지지며 안이행지를 성인처럼 했다는 말은 아니었네.


 

[주D-001]여강증어(驪江贈語) : 이기홍(李箕洪)이 송시열에게 지어 준 시. 《직재집(直齋集)》 권1 시(詩)에 ‘벽사배우암선생 …… 증선생운(甓寺陪尤菴先生 …… 贈先生韻)’이란 제목의 칠언율시(七言律詩)가 있는데 이를 가리킨 듯함. 벽사는 여주의 신륵사(神勒寺)를 가리킴.
[주D-002]별지 : 이 별지는 민씨 집안의 주상(主喪)에 대한 변법에 대해 그 전말을 문답하고 있다. 당시에 교관(敎官)을 지낸 민업(閔業)이 죽자 그의 아들 세익(世益)이 미친병 때문에 집상(執喪)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 집안에서 집상을 그 손자에게 대신 시켜도 되는지를 박세채(朴世采)ㆍ송준길(宋浚吉)ㆍ송시열 등에게 물어 왔다. 그러자 송시열과 박세채는 《주자대전(朱子大全)》에 실려 있는 걸토론상복차자(乞討論喪服箚子)의 뜻에 따라 손자인 민신(閔愼)이 아버지 세익을 대신하여 승중복(承重服)을 입어야 할 것이라고 편지하였고 송준길은 그와 다른 의견을 말하였다가 다시 송시열의 뜻에 기울어졌다. 그래서 민신이 승중복을 입었는데 김우명(金佑明)이 이에 반대하여, 설사 약간의 정신병이 있다 해도 살아 계신 아버지를 죽은 것으로 한다는 것은 경전의 ‘차마 돌아가신 아버지일망정 죽었다고 생각지 않는다.’는 뜻과 어긋나며 신주를 쓰는[題主] 데에도 세익이 집상을 한다면 ‘현고(顯考)……’라 할 것이나 민신이 집상하게 되면 ‘현조고(顯祖考)……’라 하여야 하며 또 신주 한 쪽에 집상하는 사람의 이름을 쓰는 것[傍題]도 세익이 아니고 신이어야 하니 그렇게 되면 신에게 5대조는 사당에서 당연히 체천(遞遷)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 것은 모두 예에 어긋난다고 소를 올렸다. 이 일로 인해 박세채는 삭거사판(削去仕版)의 벌을 받기도 하였다. 《燃藜室記述 閔愼代父服斬》
[주D-003]체천(遞遷)하는 …… 글 : 체천은 종손(宗孫) 집 사당에서 봉사(奉祀)하는 대수(代數)가 다 되었을 때 대수가 아직 끝나지 않은 손자의 집으로 신주(神主)를 옮겨 감을 말함. 예를 들면 종손이 5대손이라면 5대조는 친함이 다 되어[親盡] 사당에서 나가야 하므로 그 할아버지와 유친(有親)한 3대손이나 4대손의 집으로 신주를 옮겨 모심을 말함. 주희(朱熹)가 늙어서 손자에게 전하고 고한 글은 《주자대전(朱子大全)》 치사고가묘문(致仕告家廟文)에 아직 어린 손자에게 제사 받드는 일을 넘겨주고 두 아들에게 잘 받들 것을 당부하였다고 사당에 고한 글을 말함.
[주D-004]이 문정(李文靖)은 참으로 성인이다 : 이 문정은 송 진종(宋眞宗) 때 정승인 이항(李沆)을 말함. 문정은 그의 시호. 이항이 정승이 되어 날마다 사방에서 일어나는 수재(水災)와 도적의 피해를 세세히 아뢰자 당시 참정사(參政事)이던 왕단(王旦)이 의아하여 그 이유를 물었다. 이에 이항은 “나이 어린 폐하가 지금 세상의 어려움을 알지 못하고 성장한다면 나중에 여색에 빠지지 않으면 반드시 토목(土木) 공사를 벌일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왕단은 그것을 믿지 않았는데 후일 진종이 과연 이항의 말처럼 되어 버리자 왕단은 이 말로 이항의 선견지명을 탄식한 것이다. 선견지명을 이르는 말로 널리 쓰인다. 《宋史 卷282 李沆列傳》
[주D-005]정력(定力) : 불가(佛家)의 말. 선정(禪定)에 의하여 수양(修養)된 힘.
[주D-006]중일이부(中一而祔) : 사당에 신주(神主)를 합부할 때 소목(昭穆) 법에 의거하여 손자는 아버지 한 대를 건너뛰어 할아버지에게 합부하는 법을 이름. 할아버지가 생존했으면 증조의 자리를 건너뛰어 고조의 자리로 합부됨. 곧 가운데 한 자리를 거름을 이름.
[주D-007]중용(中庸)의 …… 주(註) : 《중용장구》 제1장 솔성지위교(率性之謂敎)의 교(敎) 자 주석을 말함. 주희가 교(敎) 자 주에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품절(品節)하여 천하의 법으로 삼은 것을 일러 교(敎)라 하니 예악과 형정 따위가 그것이다.”고 한 데 대해 장유는 제1장 중의 원문에 있는 “계신 공구(戒愼恐懼)하여 중화(中和)를 이룩한다.”는 것으로 교(敎) 자를 해석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음.

 

송자대전 제90권
 서(書)
이여구(李汝九)에게 답함 - 을묘년(1675) 8월 30일


여구와 헤어진 지가 너무도 오래되어 그리움만 간절할 뿐이 아니라 귓가에 도(道)를 담론하고 이치를 변증하는 자네의 말을 전혀 듣지 못하니 이것이 더욱 목을 빼고 자네의 풍도를 향하여 마지못하게 하는 점이네. 이러던 차에 석실(石室 김상헌(金尙憲)) 인편에 지난달 그믐날에 부친 편지를 받고 자네가 깨우쳐 준 뜻을 모두 잘 알았네. 위로와 다행이란 말이 결코 허튼 말이 아니네.
저번에 보낸 편지는 남쪽 유배지에 도착한 뒤에 보았네. 운어(韻語)가 있어 여러 번 반복하여 읊조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입가에서 청신한 바람이 일었네.
이곳의 괴로운 귀양살이 형상은 참으로 한두 가지가 아니네. 그러나 주자가 받은 사문(師門)의 지결(旨訣)로 말한다면 ‘옛사람이 견디지 못할 환경에 이르렀던 것은 반드시 이것보다 몇 갑절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라.’는 말이 참으로 힘을 얻는 좋은 방법이었네.
위학도(爲學圖)를 받아 보니 매우 고맙네. 다만 조금 맞지 않은 곳이 있어 외람되이 논한 데가 있으니 바라건대 적당한 인편에 다시 편지를 보내어 깨우쳐 준다면 비록 시속의 금기를 범한다손 치더라도 나의 작은 견해를 도(圖) 아래 붙여 부탁한 뜻을 저버리지 않으려 하네. 존왕부(尊王父) 대감께선 요즘 기거가 어떠하신가? 늘 사랑해 주시던 후의를 생각하노라면 이 몸이 마치 항상 그 앞에 서있는 듯하네.


별지



여기에 올리는 위학방도(爲學方圖)는 율곡 선생이 손수 그리신 것입니다. 다만 그 아래 논의하신 말씀이 없는 것이 유감입니다. 혹시 선생께서도 보신 적이 있는지요? 이 도(圖)가 후학에게 유익함이 참으로 많습니다. 바라건대 선생께서 일단의 글을 도(圖) 아래 기록하여 율옹(栗翁)의 뜻을 발휘하시고 친히 베껴 보내 주신다면, 기주(箕疇 이기홍(李箕洪))가 비록 민첩하지는 못하오나 감히 마음에 다짐하고 뼈에 새겨 종신토록 수용하는 바탕으로 삼겠습니다. 천만번 간절히 비옵니다.
이 도표의 강령은 참으로 성학(聖學)의 큰 문호이나 그 분속(分屬)한 조목에는 나의 뜻에 약간 적당치 않은 것이 있네. 대체로 체인체험(體認體驗)이 비록 강학(講學)과 전혀 서로 상관되지 않을 정도까지 이르지는 않으나 성찰(省察)에 소속되는 것만큼 아주 적당하지는 못하고, 폐흥존망(廢興存亡)을 간파(看破)하는 데 이르러는 이는 오로지 강학의 일인데 여기에서 모두 서로 바꾸어 배속시켰으니 그 뜻을 알지 못하겠네.
또 허심평기(虛心平氣)ㆍ숙독정사(熟讀精思)와 시비득실(是非得失)ㆍ폐흥존망(廢興存亡)은 당연히 사물간(事物看)에 소속시켜야 할 것이며, 정좌잠완(靜坐潛玩)ㆍ체인체험(體認體驗)과 공사사정(公私邪正)ㆍ위미조사(危微操舍)는 당연히 신심간(身心看)에 소속시켜야 할 것인데 이 도표에서는 나누어 소속시켰으니 한계를 지음이 그리 정연치 못하네. 다시 원본을 고찰하여 편지를 줌이 어떻겠는가. 나의 견해가 만일 옳지 않거든 아울러 근정(斤正)하여 가르쳐 주길 바라네.


 

[주D-001]남쪽 유배지에 도착 : 1675년 1월에 송시열이 제2차 예송(禮訟)으로 함경도(咸鏡道)의 덕원(德源)에 유배되었다가 6월에 다시 장기(長鬐)로 위리안치되었음.
[주D-002]운어(韻語) : 이기홍(李箕洪)이 보낸 시(詩)를 말함. 《직재집(直齋集)》의 시편(詩篇)에 이기홍이 덕원으로 유배 가는 스승인 송시열을 평구역(平邱驛)에서 작별하며 지은 ‘평구역배별우재선생(平邱驛拜別尤齋先生)’이란 칠언절구(七言絶句) 두 수가 있는데 이 시를 지적한 말인 듯하나 분명하지 않음.

송자대전 제91권
 서(書)
이여구(李汝九)에게 답함 - 갑자년(1684) 6월 1일


여러 번의 애서(哀書 상중에 보낸 편지)를 받고 삼가 상중에 그런대로 견디어 감을 알게 되어 자못 위로가 되네. 다만 병중에 인편이 없어 오랫동안 답장이 지체되어 늘 미안하던 차에 오늘 인편에 또다시 지난달 16일에 부친 편지를 받으니 말뜻이 정중하여 부끄러움이 더욱 깊었네.
윤(尹 윤증을 가리킴)의 일은 모두가 약석(藥石)이니 스스로를 깨우치는 계책으로 삼을 따름이네. 주자를 탄핵하는 소장에 더럽고 추한 것이 낭자하였음에도 주자는 오히려 하나하나 예를 들어 시인하며 옳은 말이라 하였고, 모두 그 핵심을 고증하며 거짓이라고 아니하였는데, 더구나 지금은 모두 참으로 있는 일이 아닌가.
선명(先銘)은 오랫동안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으나 근래에 틈을 타 초고를 완성하여 적당한 인편에 보내겠네.
정서(程書)의 분편(分編) 작업은 최우(崔友 최방언(崔邦彦)을 가리킴)가 아직 일을 마치지 못하여 항상 마음에 잊히지 않네. 이 벗에게서도 편지가 있었으나 병으로 답장을 마련치 못하였으니 보거든 말이나 전해 주기를 바라네.
날씨가 매우 덥네. 슬픔을 절제하고 상례(喪禮)대로 따라서 멀리서 걱정하는 이 정성을 위로해 주게.


별지
별지의 내용은 잘 알았네.
대체로 경계해 주거나 규찰하여 주던 도리가 쇠한 지 오래되어 붕우(朋友)란 이름만 헛되이 남았고 허물이 있어도 그르단 말을 듣지 못하니 아름답지 못한 세태가 더욱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오늘날 상중에 있는 그대에게서 옛사람의 도리를 보게 되니 얼마나 다행한지 모르겠네. ‘너무 박절하게 드러내 혼연(渾然)함이 없다.’고 지적한 말은 참으로 그러함이 있네. 그러나 ‘박절하게 드러낸다.’는 것은 아마 말하는 바가 박절하여 쉽게 드러난다는 뜻이니 그렇다면 바로 ‘깊고 두텁다.’는 말과 서로 반대되는 것이네. 따라서 주자의 말씀이 생각이 나네. 대저 이번 일에는 부득이한 사정이 있었네. 이제 대략 말해 보겠네.
대체로 윤휴가 주자를 공격하여 배척하여도 세상에서는 괴이하게 생각지 않았는데, 나는 내 힘을 스스로 헤아리지 못하고서 망녕되이 배척하였네. 저 주자의 도는 마치 중천의 해와 같으니 휴 같은 무리가 백 명 천 명인들 무슨 손상이 있겠는가마는 온 세상이 풍미하여 주자보다 낫다라는 지경에 이르러선 그 해로움은 홍수나 맹수의 피해보다 심한 것이었네. 나머지 사람들은 족히 말할 것도 없고, 저 대윤(大尹 윤선거를 가리킴)은 파산(坡山 성혼(成渾)을 가리킴)의 여파요 팔송(八松 윤황(尹煌))의 어진 아들로서, 도리어 윤휴를 돌봐 주고 무리짓기에 매우 힘을 기울였네. 내가 근심과 탄식을 이기지 못하여 만나면 반드시 힘을 다하여 다음과 같이 할 수 있는 말은 다하였네.
“왕통(王通)의 학문이 여러 선비들이 따를 수 없이 훌륭하였으나 그가 《춘추》에 비겨 책을 지어 여러 나라를 포폄(褒貶)한 점에 이르러서는 주자는 제왕을 참칭하는 죄라고 배척하였다. 그런데 더구나 휴가 감히 주자의 주설(註說)을 쓸어 버리고 스스로 새로운 책을 만들어 천하를 바꾸어 보려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사문(斯文)의 난적(亂賊)이네. 《춘추》의 법에서는 모든 난적은 반드시 먼저 그와 무리지은 사람부터 다스렸으니 이제 공이 당연히 휴에 앞서 법에 복주될 것이다.”
나의 말이 아프고 간절함이 이 같았는데도, 그는 끝내 머리를 돌리지 않았고 그가 죽자 그의 아들들은 휴의 전의(奠儀 초상난 집에 보내는 돈이나 물건)를 받아들였으니, 그들이 사귄 도리가 끝까지 달라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것이네.
언제나 세도(世道)를 위해서 깊은 근심과 긴 탄식은 자주 말로 나타났고 그럴 때마다 반드시 격하게 입에서 튀어나와 나도 모른 사이에 너무 심한 말이 되었네. 그리하였으니 그 집안 후생들이 성을 내는 것은 괴이할 것이 없네. 이제 그 집안 후생들도 나의 심술과 언행을 배척하는데 온 힘을 다 쏟고 있네.
내가 어려서부터 선생의 문하를 따라 공부하면서 심술(心術)의 은미한 곳에 반드시 그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의 분별을 삼가하란 말을 귀에 익게 들었으면서도 행실에 힘쓰지 못하고 이치를 궁구하여 극기(克己)를 하지 못하였네. 이치를 궁구하지 못한 때문에 혹 인욕을 천리라고 여겼으며 극기를 하지 못한 때문에 인욕을 따라 행동한 것도 많았네. 저들이 하는 말은 참으로 내게는 정문(頂門)의 일침(一針)이니 이제 당연히 깊이 반성하여 빨리 고쳐야 할 따름이지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다만 그의 아버지의 덕(德)을 내세워 협박하려는 꾀를 삼고자 하는 생각은 잘못이네. 그런데도 그들 무리가 팔뚝을 걷어붙이며 분분하는 데에는 더욱 가소롭기만 하네.
지금의 논자들이 ‘그가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편벽한 행위를 막고 음탕한 말을 내치는 것으로 자임하려 든단 말인가.’ 한다면, 내 당연히 말만 나오면 죄에 자복할 것이네. 그러나 맹자가 ‘능히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막자고 말하는 사람은 성인의 무리이다.’고 하였는데, 주자는 주석에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지향하는 바가 옳으니 도를 모른다 하더라도 성인의 무리이다.’고 말씀하셨으니, 마구간이나 치는 천한 사람일지라도 감히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주자의 말씀이 생각이 난다.’고 한 말은 다름이 아니라, 주자가 일찍이 동래(東萊 여조겸(呂祖謙))가 이단을 공격하지 않는 것을 ‘깊고 두터운 뜻이다.’ 하면서도 그 해가 적지 않을 것을 병통으로 여기셨네. 이제 자네가 참으로 동래(東萊)처럼 깊고 두터웁기를 나에게 바라는 것은, 참으로 좋은 뜻이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깊고 두텁다는 것이 내 몸을 도모하기에는 편한 것이나 세도(世道)에는 편한 것이 아니네. 만일 내가 과연 몸이나 편히 하려는 꾀를 하려 하였다면 당초 휴의 주장이 나올 무렵에 당연히 흐릿한 말을 내놓아 스스로 저번의 큰 화를 모면하였을 것이네. 큰 화를 겪었으면서도 고집스럽게 뉘우칠 줄 모르니, 한번 타고난 기질은 변화할 수 없는 것이 이 같음을 알 수 있네. 이제 우러러 선철(先哲)을 생각하여 느끼는 바가 있으니 만일 주자 역량의 만에 하나라도 가졌다면 반드시 오늘 같은 시끄러움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네.
어떤 사람은 ‘남의 자제들을 대하여 그 부형의 잘못을 의논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고 말하나 나는 또 생각건대 주자가 동래(東萊)에게 한 편지에 여 형공(呂滎公 여희철(呂希哲)의 봉호) 가학(家學)의 잘못을 극언하면서도 혐의스럽게 생각하지 않았고, 동래도 성내지 않았었네. 때문에 당초 이 일이 발단되면서 저들과 조용히 헤아려 보려고 공손한 말로 편지를 써 그 실마리를 열어 보려 하였으나 저들은 화를 잔뜩 내 꾸짖는 말이 더욱 더하여졌고 이내 끝없는 갈등이 빚어졌네. 이는 내가 일을 살피는 것이 분명치 못한 소치이니 후회하여도 소용없는 일이네.
이러한 여러 말은 참으로 그대의 규찰하여 주는 성심에 감동되어 감히 그 전말을 털어놓은 것이니 절대로 남에게 보이지 말게. 이런 내용을 모르는 사람들은 풍병이 들어 정신을 잃었다고 하여 또 말썽만 더 일어날 것이네. 절대 깊이 간직하게.


 

[주D-001]선명(先銘) : 이기홍이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연거푸 잃고 연 6년 상을 입으니 이해는 할아버지 상중이었으며, 이 선명은 아버지의 묘지명을 말한 듯함.
[주D-002]박절하게 …… 없다 : 이는 이기홍이 송시열에게 보낸 편지에서 송시열이 윤증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가 ‘박절하게 드러내 혼연함이 없는 듯하다.’면서 대군자의 말하는 절도에 잘못이 아니겠느냐고 한 것을 말한다. 《直齋集 卷5》
[주D-003]동래(東萊)에게 …… 잘못 : 주자가 동래에게 “여 형공은 불로(佛老)에 젖었다”라는 말을 하였다. 여 형공은 정자(程子)의 제자이다.

 

송자대전 제91권
 서(書)
이여구(李汝九)에게 답함 - 정사년(1677) 1월 29일


지구(知舊 오랜 친구)들의 서신이 한결같이 드물게 오니 이 지방이 멀고 궁벽됨을 알 만하네. 이번에 최우(崔友)가 전하는 지난해 11월에 부친 고마운 편지를 받고 대략 근황을 알게 되니 기쁘고 위로됨을 무어라 말할 길 없네.
이곳은 시의(時議)와 질병을 논할 것 없이 다만 염라국의 사자(使者)가 이르면 즉시 떠날 것이네. 이 밖에는 모두 부질없는 것들이니 붓을 더럽힐 것이 뭐가 있겠는가.
보여 준 도설(圖說)은 내가 지난 편지에 대략 망녕된 견해를 펼쳤었네. 지금 그 현석(玄石)의 설은 병 때문에 아직 세세히는 살피지 못하였으나 언뜻 보니 역시 적당치 못한 곳이 없지 않았네. 대체로 이 도설에서는 다른 것은 논할 것도 없네. 정자(程子)가 ‘치란존망(治亂存亡)의 기틀을 살핌은 격물(格物) 공부이다.’라고 하였는데 치란존망의 기틀을 아는 것이 격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지금 이 도표에서 억지로 성찰조에 배치한 것이 과연 정자의 설과 부합하는가?
또 의관을 바르게 하고[正衣冠] 시선을 정중히 한다[尊瞻視]는 말은 본래 《논어》에서 나온 것으로 처음부터 동정(動靜)을 구분짓지 않고 합치시켜 말한 것이었네. 주자가 그것을 경재잠(敬齋箴)에서 정(靜)에 소속시킨 것은 그 글 아래에 ‘마음을 잠잠하게 하고 상제를 대한다.’는 한 구절을 이어서 썼기 때문이었네. 그런데 지금 이 아래의 한 구절을 빼 버리고 정의관(正衣冠) 세 글자만을 들어 정시(靜時) 공부라고 하게 되면 문구의 대우(對偶)가 파괴되어 뜻이 성립되지 않네.
대체로 그것이 고훈(古訓)에 맞느냐의 여부는 논하지 않고서라도 내가 한마디 할 말이 꼭 있네. 이 선생(李先生)에 이르러는 한결같이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문법(門法)을 따라 글자 하나 말 한마디가 틀린 바가 없으셨네. 때문에 망녕된 생각으로는 이 도표에 끝내 의심이 없지 못한 것이네.
대체로 이 도표가 비록 문집의 초본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우계(牛溪)가 선별하여 기록할 때 정집(正集)에 올리지 않았으니 그 도표가 의심이 되어 버린 것이 아니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 대개 그것이 혹 젊었을 때의 저작이었거나, 혹 처음 기초한 것으로 마무리짓지 못한 것이었거나, 혹 다른 사람이 물으려고 보내온 것이 잘못 초본에 들어간 것이었는지 모두 다 알지 못할 일이네. 현석이 또,
“만일 이 도표를 믿을 수 없다고 한다면 문집(文集) 3본 모두를 들어 거짓이냐 참이냐의 논쟁 속에 파묻히게 하는 것이다.”
하였는데, 이는 또 그렇지 않네. 옛날 《이정전서(二程全書)》에 유 찰원(游察院 유작(游酢)을 말함. 찰원은 벼슬 이름)의 글이 섞여 있고 《여씨중용해(呂氏中庸解)》 또한 그 속에 잘못 들어갔으며 ‘마음은 모두 이발(已發)이다.’는 설이 또한 실렸었으나, 후인들이 이것을 가지고 아무도 《이정전서》가 정자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의심하지는 않았네. 주자의 문인들에 이르러서는 《주자어류(朱子語類)》를 수집할 때에 적당치 않은 것은 기록한 사람의 잘못인가 의심하고 모두 빼 버렸네. 이제 비록 이 도표를 의심스럽다 한들 선생의 문집에 무슨 해가 있겠는가. 이는 아마 현석이 지나친 염려에서 한 말일 것이니 다시 현석에게 물어보아 다시 가르쳐 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베개에 엎드려 입으로 부르노라니 기운이 간간이 끊겨 근근이 이처럼 썼네.
치란존망(治亂存亡)을 격물(格物)이라고 한 것은 《근사록(近思錄)》의 치지편(致知篇)에 나왔네. 바라건대 자세히 상고해 봄이 어떻겠는가?


별지
정자(程子)가 ‘밖을 제어함은 마음[中]을 기르기 위함이다.’ 하고, 또 ‘기거(箕踞 다리를 뻗고 기대어 앉은 것)하고서 마음이 해이되지 않은 사람이 없다.’ 하였네. 그러나 밖을 제어하는 소이(所以)가 또한 어찌 이 마음의 작용이 아니겠으며 천하에 어떻게 마음 밖에 사물이 있겠는가.
찰기(察幾)와 명변(明辨)은, 찰기는 성의(誠意)에 속하고 명변은 격치(格致 격물과 치지)에 속하는 것이니 《중용》과 《대학》의 장구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네. 자네가 명변이 격치에 속하고 성찰(省察)에 속하지 않은 것을 의심하고 있는데 대개 선악(善惡)을 분변하는 것은 치지의 일이요, 그 악을 버리고 선을 하는 것은 역행(力行)의 일이네. 그런데 이제 선을 하고 악을 버리는 것을 억지로 변(辨) 자에 얽어매어 성찰의 경계 안으로 몰고 간다면 이는 참으로 ‘성현의 말씀을 그대로 있지 못하게 한다.’는 것과 같으니 작은 병이 아니네.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른바 감(感)이라는 것은, 밖으로부터 나를 감촉시킴을 말하는 것도 있고, 내 자신이 외물에 감축됨을 말하는 것도 있네. 그런데 주자가 간혹 밖으로부터 나를 감동시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 있으니 퇴계 선생의 설은 여기에서 나왔나 보네. 그 문세를 살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네. 그러나 《예기》에,
“사람이 태어나 고요함은 성(性)이고 사물에 감촉되어 움직이는 것은 성의 욕(欲)이다.”
하였으며, 《주역(周易)》의 함괘(咸卦)에서는 또한 모두 내 자신이 외물에 감촉되는 것으로 말하였네. 때문에 주자의 감(感)에 대한 말씀은 대부분 《예기》와 《주역》의 뜻을 따르셨네.
물격(物格) 설은, 마땅히 율곡의 설을 정설(正說)로 삼아야 할 것이네. 모름지기 율곡설이 《대학》의 보망장(補亡章) 및 《대학혹문(大學或問)》의 해석들과 부합되는가의 여부를 보면 시원히 풀릴 것이네. 오래전에 화숙(和叔)에게 물었더니 그의 말이 매우 정밀하였고, 요즈음에는 광주(廣州) 사근촌(沙斤村)의 김간(金榦)과 김재(金栽) 형제가 논한 것이 또한 매우 통창하였네. 기록하여 보내 주고 싶은 생각 간절하나 너무 많아 엄두가 나지 않네.



구도(舊圖)에는 함양(涵養)과 천리(踐履)가 없고 단지 지경(持敬)에 정의관(正衣冠), 일사려(一思慮), 장정제숙(莊整齊肅), 불기불만(不欺不慢)의 네 조목만 있었네. 이 조목들은 모두 함양 공부인데 아마도 지경으로 총합해서는 안 될 듯하네.
대체로 지경(持敬) 공부는 동정(動靜)에 전일하고 시종(始終)에 관철해야 하며 치우치게 한 조목으로 만들어 강학(講學)ㆍ성찰(省察)과 같은 등위로 나열해서는 안 되네. 그리고 천리(踐履)는 진실로 큰 절목으로서 없앨 수 없는 것인데 이 도표에는 없으니 의심스러운 일이네. 또 체인체험(體認體驗)은 분명히 성찰하는 공부인데도 강학(講學)에 소속시키고 폐흥존망(廢興存亡)은 실상 강학할 때 공을 들여야 하는 곳인데도 지금 성찰(省察)에 소속시켰으니 또한 의심이 없지 않네. 대체로 강학과 성찰 공부는 본디 서로 관련지어진 것이 있네. 그러나 이 두 가지를 이미 상대하여 머리 제목으로 만들었다면 그 조목에서는 각기 관련지어지는 것끼리 상종(相從)시켜야 옳을 것이네.
나의 소견으로 보건대 이 옛날 도표는 소탈(疏脫)하여 정밀하지 못한 병통이 있음을 면치 못한 것이었네. 때문에 나대로 율곡 선생께서 만든 것이 아닐 것이라고 의심한 것인데 여러 벗들은 고집하여 율곡 선생이 아니면 절대로 능히 이렇게 만들지 못했을 것이라고 하니 나도 감히 확실히 말할 수가 없어 당상인(堂上人 식견이 뛰어난 사람)에게 질정(質正)받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도 못하였네. 그래서 시험 삼아 신도(新圖) 하나를 만들어 그 동이(同異)와 득실(得失)의 단서를 질정하려 하네.
또 일찍이 박화숙이 보여 준 구도에는 거꾸로 쓴 조목도 있었는데 자네가 보여 준 도표(圖表)에서는 없으니 그것 또한 괴이한 일로 생각하여 고쳤는가?


 

[주D-001]현석(玄石)의 설 : 박세채(朴世采)가, 위학지방도(爲學之方圖)는 선현(先賢) 설과 부합되고 또 율곡(栗谷)이 지은 것이라고 한 말을 이름. 자세한 내용은 《남계집(南溪集)》 권55 위학지방도설(爲學之方圖說)에 실려 있음.
[주D-002]문집(文集) 3본 : 《율곡집(栗谷集)》이 본집(本集)ㆍ속집(續集)ㆍ별집(別集)으로 엮어졌기 때문에 이르는 말.

 

 송자대전 제91권
 서(書)
이여구(李汝九)에게 답함 - 정사년(1677) 3월 5일


헤어진 지가 벌써 오래됨에 그리는 생각이 쌓이네. 이는 다만 얼굴을 못 보아서 그런 것이 아니네. 허물이 있어도 지적해 주는 사람이 없고 의심이 있어도 물을 곳이 없어 마치 담장 속에 앉아 있는 듯해서 그런 것이네. 그런데 홀연히 석실(石室) 인편에 멀리 안부를 묻는 편지를 받으니 가슴이 시원함을 어찌 이루 헤아릴 수 있겠는가. 나의 병세는 날로 더하여 가니 죽을 날이 가깝기가 창문 하나의 간격도 못 되네.
화숙의 별지 및 물격(物格)에 대해 깨우쳐 준 여러 편지는 정중히 받았네. 일찍이 삼가(三嘉 경상남도 합천군에 딸린 지명) 인편에 보내 준 편지를 받고 곧바로 답장을 부치며 인하여 도설에 대해서도 약간 물었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가? ‘의리는 무궁한데 세월은 한정이 있다.’고 한 것은 주 부자(朱夫子)의 탄식이네. 하물며 후대에 태어난 나와 같이 미련하고 비루한 사람이야 또한 어떠하겠는가.
오늘날 후생 중에서는 광주(廣州) 사근천(沙斤川)의 김직경 간(金直卿榦 직경은 자) 형제가 글을 봄이 매우 자세하네. 참으로 쉽게 얻을 수 없는 사람들이니, 의심나는 것이 있거든 그와 상량하면 어떻겠는가? 그 도표 및 현석의 설, 그리고 나의 설을 아울러 질문하면 반드시 분명하게 분석하는 말이 있을 것이네. 끝으로 누워서 대필시키므로 이만 줄이네.


별지
퇴계가 기고봉(奇高峯 기대승(奇大升))에게 답한 편지에 이른바,
“바야흐로 격물(格物)을 말한다면 참으로 내가 물리(物理)의 극처(極處)를 끝까지 궁구함을 말한 것인데, 물격(物格)을 말하는 데 이르러서는 어찌 나의 궁구하는 바에 따라 물리의 극처에 이르지 않음이 없다고 말할 수 없겠는가?”
라고 한 이 말은 하나같이 주자의 말을 따라 한 말이니 그 의심스러운 점을 보지 못하겠네. 오직 그가 말한,
“묘용이 현행(顯行)함을 알지 못하는 것은 거의 이치 알기를 죽은 물건으로 여기는 것과 같다……”
한 것은 퇴계가 최후로 자기의 그전 견해를 고친 말이기는 하나 또한 후인들이 의심스럽게 여기는 바가 없지 않네. 대체로 이치를 살아 있는 물건으로 생각하여 이치 스스로가 극처(極處)에 이르른 것처럼 말한 것이네. 참으로 이 말과 같다면 공자가 어찌 ‘사람은 능히 도(道)를 넓히나 도(道)가 사람을 넓게 하지는 못한다.’라고 하였겠으며, 주자가 또 어찌 ‘사람 마음은 지각(知覺)이 있으나 도체(道體)는 작용이 없다.’라고 하였겠는가.
그러나 이런 등속의 정미한 곳에서는 스스로 여러 설들을 서서히 연구하여 한데 모아 통해야 할 것이며 급급히 귀일(歸一)하려 서두를 필요는 없네. 일찍이 김직경(金直卿) 형제의 설에서 매우 정미함을 보았네. 시험 삼아 구해 봄이 어떻겠는가?
화숙이 이 도설에 대하여 옛 견해를 모두 떨쳐 버렸다니 그의 생각이 점차 간추려지며 얽히고 설킨 병통이 없어져 감이 기쁘네. 다만 그가 인용한 바의 여러 설은 모두 백세(百世)를 기다릴 수 있는 것들이나 이끌어 도표를 만들려 한다면 오히려 억지로 합치시키려는 뜻이 있음을 면치 못할 것이네. 그러나 몰아쳐 변론을 더하여 착실히 공부하는 그 정신을 갈라지게 할 필요는 없네.
대체로 글을 보는 데에는 무엇보다도 마음을 비우고 기운을 화평히 가짐을 필요로 하며 선입관으로 주장을 삼지 않음이 거의 허물을 적게 하는 방법일 것이네.

송자대전 제91권
 서(書)
이여구(李汝九)에게 답함 - 정사년(1677) 9월 8일


지난달 초아흐렛날의 편지가 석실서원(石室書院)으로부터 이르러 그리던 중에 뜯어보니, 마치 막혔던 세상의 소식을 듣는 것 같았네. 무슨 위로가 이만 하겠는가.
‘가슴에 치밀어 오른다’는 말은 요사이 주자의 글을 읽어 얻은 힘임을 알 수 있겠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심신(心身)상에 독서 궁리하는 것과 조존함양(操存涵養)하는 것 중 무엇이 가깝고 무엇이 멀며 무엇이 급하고 무엇이 늦춰야 할 것이라 하겠는가. 상상해 보건대 문생의 점괘에 천산둔괘(天山遯卦)의 얻음을 기다리지 않고 그쳤던 까닭에 아직 소문이 없는 것이니 다행한 일이라 하겠네.
지난번 편지는 그것이 조문의 편지가 아니었던가. 병중에 정신이 혼미하여 일을 폐하고서는 오랫동안 답을 하지 못하였으니 한스럽고 부끄럽네. 부부간의 정리가 이토록 어그러지니 아픈 마음이 갑절로 간절하여 눈을 감고 아무것도 몰랐으면 싶네.
근래의 세속 일은 ‘죽은 사람은 편안한데 산 사람만이 정을 잊지 못한다.’란 말이 아마 꼭 우리 무리를 두고 한 말인 듯하네. 병치레하는 틈틈이 대략 퇴계의 글을 열람하여 보니 잘 알지 못할 것이 매우 많았네. 삼가 묻고 싶지만 곁에 글씨를 써 줄 사람이 없어 아직도 못하고 있으니 한스럽네.


별지
묘용(妙用)의 현행(顯行)함이 이치이기는 하지만, 이는 기운이 이치를 싣고 유행한 것이네. 만일 ‘사물을 대하였을 때, 이 이치가 살아 움직여 사람이 걸어 다니듯, 이곳저곳 다닌다.’고 한다면 크게 틀린 것이네. 대체로 이치에는 정의(情意)가 없으며 조작(造作)이 없네. 때문에 장자(張子 장재(張載))는 ‘성(性)은 마음을 검속(檢束)할 줄 모른다.’ 하였는데, 이 말이 가장 남김없이 다한 말이네. 다만 사물에 담긴 이치는 한정이 있으며 때문에 사람이 그것을 궁리하여 다하는 곳까지 이르면 이 사물의 이치는 다 궁리되어 다시 남은 것이 없게 되기 때문에 물격(物格)이라 하는 것이네. 지금 많고 많은 말과 글들을 덮어 두고 《대학장구》의 ‘여러 사물의 안과 밖의 정밀하고 거친 것에 도달하지 않음이 없다.’와 《대학혹문》의 ‘사물의 이치마다 그 극처(極處)에 나아가 남김이 없다.’의 두 구절만 보면, 훤하여 의심나는 바가 없을 것이네.
퇴계가 일찍이 ‘물격(物格)이란 사람이 궁구하여 그 극에 이른 것이다.’고 생각하여 오다 말년에 크게 그것이 잘못인 줄을 알고 ‘물격이란 사물의 이치가 그 극처에 이른 것이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그 본문의 뜻을 바르게 깨달은 것이네. 그러면서도 ‘이치는 죽은 것이 아니므로 능히 여기에서 저기까지 이른다.’고 말한 것은 역시 본래의 뜻에서는 차이가 먼 것이니 어찌 털끝만큼의 차이로 천리의 엇갈림이 생긴 것이 아니겠는가.
대체로 사물의 이치란 책자[冊]와 같고 사람이 궁리함은 마치 사람이 책을 보는 것과 같으니 사람이 이 책을 보기 시작하여 끝장에 이르면, 이는 비록 사람이 다 본 것이지만 그 책으로 말한다면, 책이 다 되었다고 하는 것이니, 어떻게 ‘이 책이 산 물건인 까닭에 처음부터 걸어서 그 끝장에 이르렀다.’고 하겠는가. 율곡이 이를 문원(文元 김장생(金長生)의 시호) 노선생에게 자세히 이르신 까닭에 선생께서도 배우는 사람들을 가르칠 때 매우 자세히 갖추어 말씀하셨네.
퇴계가 이평숙(李平叔 이함형(李咸亨))에게 답한 셋째 번 편지에 ‘사람에게 있는 기(氣)를 기질의 성[氣質之性]이라 한다. 그런 까닭에 사람에게 있는 이(理)를 천지의 성(天地之性)이라고 이름 할 수 있다.’ 하였는데 이 한 구절은 수십 번 반복하였으나 끝내 아직 알지 못하겠네. 고명한 자네는 반드시 벌써 깨달음이 있었을 것이니 상세하게 가르쳐 주기를 간절히 바라네.


 

[주D-001]문생의 점괘에 …… 없는 것 : 《주자대전부록(朱子大全附錄)》 연보(年譜) 66세조(六十六歲條)에 주희가 한탁주(韓侂胄)의 잘못과 승상 조여우(趙汝愚)의 원통함을 주(奏)로 올리려 할 때 둔(遯)괘가 가인(家人)으로 변하는 점괘가 나오자 계획을 바꾸어 상주하지 않았다는 고사로서, 이때 이기홍이 편지로 송시열의 원통함을 임금께 한 번 상소해 보고 싶다는 등의 말을 하였는데, 그것을 잘 기억하여 아직 올렸다는 소문이 세상에 없는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라는 말이다.
[주D-002]부부간의 …… 어그러지니 : 송시열이 장기(長鬐)에 유배 중일 때 부인 이씨(李氏)가 회덕(懷德) 본가에서 죽었다. 서로 영결하지도 못하고 장례에도 참석치 못한 아픔을 말한 것이다. 《宋子大全附錄 年譜 丁巳年條》
[주D-003]근래의 …… 한 말인 듯 : 당시 세상의 시비가 모두 지나간 사람의 일에서 빚어진 것으로, 이이에 대한 시비ㆍ성혼에 대한 무고 등이다. 이것을 두고 죽은 분은 모두 지하에서 편안한데 살아 있는 사람들이 시끄럽게 한다고 하였다.

송자대전 제91권
 서(書)
이여구(李汝九)에게 답함 - 무오년(1678) 윤3월 28일


편지에 성명(姓名)을 바로 쓰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고 지난번 편지에 말했는데, 아직도 조심하지 않고 있으니 언짢은 탄식에 마음이 평온치 못하네. 정양(靜養)하는 가운데 요즘 자네의 근황은 어떠한가? 우러러 그리워한다는 나의 말은 빈말이 아니네.
‘사람에게 있는 기(氣)를 기질의 성[氣質之性]이라 한다.’는 말은 나 역시 반복해 연구해 보았으나 끝내 그에 대한 깨우침을 얻지 못하였네. 퇴계의 학문은 자상하고 치밀하여 응당 이 같은 잘못이 없을 것이니 아마 우리들의 식견이 그 요점을 엿보지 못하여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그 의심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고 퇴계 선생에게 있는 것이 아니니 두려워할 일이네.
자네가 말한 천지의 성[天地之性]에 대해서는 나의 뜻에는 그렇지 않은 점이 있네. 대체로 말하는 성(性) 자는 마음심[心] 변에 날 생[生]이 합쳐진 글자이니, 분명 사람이 태어난 뒤에 붙여진 말일 것이네. 또한 하늘과 땅에는 성(性) 자를 쓸 수 없고 명(命)이라고만 말할 수 있네. 장자(張子)가 말한 천지의 성(性)이란 말에 있어서도 천지가 준 바의 성(性)을 이른 말이고, 하늘의 태극(太極)을 가리킨 말이 아니네. 나의 견해는 이와 같으니 다시 연구하여 가르침을 줌이 어떻겠는가?
우리들이 문자상에는 전연 거칠지는 않은데, 함양하고 체험하는 실상에는 분명하지 못하니, 이 점에 참으로 서로 면려하고 서로 규찰하여 크게 소홀하거나 벗어나지 않게 하여야 할 것이네.

송자대전 제91권
 서(書)
이여구(李汝九)에게 답함 - 기미년(1679) 2월 29일


보내온 편지가 친절하고 자상하니 학문하는 공이 절실하였음을 볼 수 있어 흠앙(欽仰)스럽네. 대체로 덕이란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덕을 이루기에 앞서 병통이 생기는 것도 사리의 형세가 그러한 것이네. 그러나 이 같음을 아는 것이 이미 능히 다스릴 수 있는 약이니 이 일은 분명 남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네.
육유(六有)는 장 부자(張夫子)가 진정 배우는 사람들의 일용상 지극히 간절한 공부를 사람들에게 말해 준 것이네. 여기에 착실하게 공부하게 되면 반드시 얼마 안 되어 힘을 얻게 될 것이네. 자네는 그 요점을 얻었다고 할 수 있으나, 만일 참된 공부를 쌓지 않고 한갓 벽에 아름답게 글귀나 써 붙이고 구경하는 자료로만 삼는다면, 참으로 장 부자의 가르침을 저버렸다고 할 것이네.
별지에 망녕되이 깜깜한 나의 의견을 써서 보내니 옳지 않은 곳은 다음 인편에 하나하나 지적하여 보내 주면 매우 고맙겠네. 이 일은 감히 감당할 바가 아니었으나, 가르침을 구함이 간절하여 이렇게 무턱대고 써 본 것이네. 남이 본다면 반드시 미친병이 들었다고 할 것이네.


별지
《심경(心經)》에 ‘왈의왈인(曰義曰仁)……’ 하면서 예(禮)와 지(智)는 말하지 않고 중(中)과 정(正)을 말하고 또 의(義)가 인(仁)에 앞서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인의(仁義)와 중정(中正)은 본디 주자(周子 주돈이(周敦頤)를 가리킴)의 태극도설(太極圖說)에서 나왔고 태극도설은 또 《주역》에 근본한 것이며 《주역》은 중정을 중하게 여겼기 때문에 예(禮)와 지(智)를 말하지 않고 중정을 말하였네. 이 말은 태극도설의 본주에 자세하니 상고할 수 있을 것이네.
퇴계가 이른바 ‘예(禮)도 혹 맞지 않음이 있고 지(智)도 혹 바르지 않음이 있다……’고 한 말은 퇴계의 학설이 아니고 주자의 학설이네. 퇴계가 묻는 사람에게 인용하여 대답한 것을 기록하는 자가 자세히 알지 못하고 퇴계 자신의 말씀으로 생각한 것은 잘못이네.
주자(周子)가 예지(禮智)를 말하지 않고 중정(中正)을 말한 때문에 주자(朱子)가 주자(周子)의 뜻을 해석하면서 중정이 예지에 비기면 꼭 맞고 명백하다 말한 것이네. 이제 이를 인하여 다시 인의(仁義) 두 글자의 그 꼭 맞고 명백한 뜻을 구하려 한다면 또 너무 지리하게 뻗어감이 아니겠는가. 주자는 이 같음을 매우 좋게 보지 않았네. 이를 불가불 알아야 할 것이네.
의(義)를 인(仁)보다 앞세움에는 어떠한 의의가 없을 듯하네. 그러나 반드시 그 뜻을 찾으려 한다면 의심컨대 주자(周子)와 주자(朱子) 모두가 의(義)를 인(仁)의 체(體)로 삼아서였네. 때문에 이 책의 찬(贊 진덕수(眞德秀)가 지은 《심경(心經)》의 찬)에서도 의를 인보다 앞세운 것이네. 그러나 반드시 그러한 것만도 아닐 것이네. 이런 등속에는 긴요한 곳은 없으니 깊이 궁구하여 정력을 허비할 필요는 없네.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은 행하여짐은 같으나 실정이 다른 데 대하여.
주 선생이 ‘입으로 음식을 먹고 눈으로 아름다운 것을 보는 것은 성인이나 보통 사람이 모두 같지만, 성인의 정(情)은 이런 것에 빠지지 않음이 보통 사람들과의 다른 점이다.’고 말하였으니 이 말이 매우 조리가 있고 분명한 것이네.
상제임여장(上帝臨汝章)의 주(註)의 우위(愚謂) 두 글자에 대하여.
이 시(詩)의 아래에 실린 모씨(毛氏)와 주자(朱子)의 설은 모두 본주(本註)이며 우위(愚謂) 조항도 그것들과 같아 서로 비슷하네. 뒤에 우위(愚謂)로 시작하는 조항이 비로소 부주(附註)에 실리기 시작한 때문에 항상 이 한 조목도 진씨(眞氏)가 본주를 해석한 것으로 늘 의심하였네.
한강(寒岡 정구(鄭逑))이 만일 고증한 바가 있어 바로 진씨(眞氏)라고 하였다면 나의 견해가 어긋나지 않은 것이나 다만 진씨의 문집에서 고증할 수 없음이 한스럽네.
곤괘(坤卦) 육이(六二) 효(爻)에서 양씨(楊氏)와 주자(朱子)의 설이 같지 않음에 대하여.
‘마음을 다하여 거짓이 없다.’는 것은 곧 사사로운 뜻이 털끝만큼도 없다는 뜻이네. 이미 마음을 다하여 거짓이 없다면 가슴이 왜 확 트이지 않겠는가. 위와 아래의 구분이 없고 겉과 속이 같다 함은 더욱 거짓이 없는 실상을 보여 준 것이네. 자네가 의심한 것은, 아마 거짓[僞]은 깊고 사사로움[私]은 얕다는 생각 때문에 같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 아닌가 싶네. 그것은 그렇지 않네. 사람 마음의 거짓이 사사로움에서 일어나지 않은 적이 있던가. 천심(淺深)을 논한다면 거짓은 깊고 사사로움은 얕을 것이며 본말(本末)을 논한다면 사사로움은 본(本)이고 거짓은 말(末)일 것이네. 그렇다면 두 선생의 학설은 실상 서로 안과 밖인 셈이네.
오로지 경이직내(敬以直內)만 하게 하는 것은 거의 노불(老佛)의 학문에 빠지는 것이 아닌가에 대하여.
경이직내[敬直]는 근본이네. 때문에 정(程子)ㆍ주(朱子) 두 선생이 모두 경직(敬直)에 중점을 돌리셨네. 그러나 정자는 또 일찍이 ‘경(敬)만을 알고 의(義)를 모을[集] 줄 모른다면 모두가 헛것이다.’ 하였고 주자도 ‘오로지 경을 주장하면서 생각이 일어나는 곳에 나아가 공사(公私)며 의리(義理)의 소재를 분별하여 버리고 취하는 기틀을 결단하지 않으면, 혼매하고 산란하여 뒤범벅이 되니, 결국 경(敬)은 경이라 할 수 없게 된다.’ 하였네. 대체로 정자의 말은 내외본말(內外本末)을 분석한 것이고, 주자의 말은 경이직내와 의이방외(義以方外)가 아울러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뜻이네.
그러나 보내온 편지에서 ‘오로지 경직에만 힘쓰는 것은 불로(佛老)에 빠질까 싶다.’ 하였으나, 이는 그렇지 않네. 정자가 일찍이 ‘석씨(釋氏)에게는 경이직내(敬以直內)는 있으나 의이방외(義以方外)는 있지 않다.’라고 말하였으나 주자는 이 말을 그른 것이라고 하며 ‘석씨가 과연 경이직내를 하였다면, 능히 의이방외하여 모름지기 부자(父子)가 있어야 하며 군신(君臣)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제 능히 경이직내하였다 하나 그들이 의이방외한 것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 어찌 이 두어 가지 일 밖에 따로 말할 수 있는 의(義)가 있겠는가.’ 하였네.
정자도 일찍이 경직(敬直)을 허락하였으나 또 일찍이 ‘의이방외가 없다면 경이직내한 것도 옳지 않다.’ 하였네. 이에 근거하면 편지의 의심스러운 것들은 변명이 필요치 않고 자연 분명하여질 것이네.
증자(曾子)의 삼성(三省)은 욕심을 막는 방법이다.
불충(不忠)ㆍ불신(不信)ㆍ불습(不習)을 욕심이라고 생각하여 이 세 가지를 날로 살핀 때문에 욕심을 막는 것이라고 한 데 대하여.
증자가 이 세 가지를 욕심이라고 여겨서 막은 것이 아니네. 주자는 ‘증자는 이것[不忠不信不習]만이 미숙하였다.’ 하였고, 또 ‘증자가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 부족한 곳이라고 보았다.’고 하였네. 이에 근거하면, 세 가지는 욕심이 아님을 알 수 있네. 또 정자가 욕심을 막는 방법을 논하면서 단지 생각하는 것을 요점으로 삼았고 증자의 성찰은 생각하는 방법이었던 때문에 인용하여 말한 것이었네. 그러니 그 뜻은 세 가지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성찰[省]에 있었을 뿐이었네. 또 증자는 모든 것을 다 살피면서도 이 세 가지가 그중에서도 긴요한 것이었던 때문에 특별히 말한 것이며 반드시 욕심에 빠진 다음에 살핀 것은 아니네.
주자가 일찍이 ‘증자가 다른 것은 딱 끊고 살피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다만 이 세 가지에 약간의 흡족치 못한 점이 있음을 보아서였다……’ 하였네. 대체로 일마다 살펴서 조금이라도 흡족치 못한 것이 있으면 또 살펴 언제 어디서나 살피면 천리(天理)가 유행하여 사사로운 뜻은 있을 곳이 없게 되니 자연히 막아야 할 욕심은 없을 것이네.
대저 글을 볼 때는 그 문세의 주체와 객체가 어느 것인가 만을 보아야 하네. 지금 여기 정자의 설에서는 성찰[省]이 주체이고 세 가지[三]는 객체이네.
이로부터[自是]의 시(是) 자는 과연 물(勿) 자를 가리킨 것이네. 편지에서 이미 말라[勿]하였으면 ‘흐르면 욕심이 된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의심한 것은 아마 자네가 주자의 이 조목을 전연 자세히 보지 못한 탓이 아닌가 하네.
그 위 글에서 ‘그 중요함은 다만 마느냐[勿], 말지 않느냐[不勿]에 있다.’고 하면서 이어 ‘이로부터 돌아서면 천리(天理)가 되고, 이로부터 흐르면 인욕(人欲)이 된다……’ 하였네. 천리에 돌아가는 것은 만[勿] 효험이고 흘러 인욕에 들어간 것은 말지 않은[不勿] 소치이네.
이 설은 원래 의심할 것이 없네. 충(忠)은 체(體)요 서(恕)는 용(用)이니 체와 용은 한 근원이기 때문에 이같이 말을 한 것이네.
온 편지에 ‘서(恕)는 홀로 행하지 못하여 반드시 자기를 다 쏟는 충(忠)이 있은 다음에야 행할 수 있다.’고 한 말은 뜻이 매우 적당치 않네. 충이 거울이라면 서는 비치는 것이며, 충이 물체라면 서는 그림자이네. 때문에 서를 말하면 충은 거기에 내재하여 있네. 만일 편지에서의 말과 같다면 서와 충이 각기 다른 곳에 있어 서가 행하고자 하여도 스스로 행하지 못한 때문에 충을 기다린 뒤에야 마침내 행한다는 것이니 잘못 본 병통이 아니라면 표현상의 병통인 듯싶네.
또 홀로 행한다[單行]의 두 글자가 매우 적당치 않네. 자네는 충과 서가 동반하여 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정자가 말한 겸(兼)한다는 말은 대체적으로 단지 서에는 곧 충이 내재한다고 말한 것이네. 때문에 《대학》에 ‘몸에 서(恕)를 지니지 못하였다.[所藏乎身不恕]’고 한 것이네. 서(恕)는 사물에 시행하는 것이며 ‘몸에 간직한 것’이라 함은 서의 근본을 가리켜 한 말이네. 때문에 주자는 ‘사물과 접하는 때에 나아가 충을 볼 수 있다.’고 말하였네. 이상의 여러 가지 설을 합하여 본다면 의심난 뜻을 분변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네.
계구(戒懼)는 정(靜)에 속하고 신독(愼獨)은 동(動)에 속하나, 계구에 왜 신독이 포용되지 않는가에 대하여.
계구와 신독을 합치시켜 말한 사람이 있네. 황호(黃灝)가 ‘계구(戒懼)는 전체를 들어 하는 공부요, 신독(愼獨)은 그 가운데에서 긴요한 곳에 더 공을 들이는 것이다.’라고 하자 주자가 그렇다고 말씀하신 것이 그것이며 또 나누어 말한 사람이 있으니, 주자가 호계수(胡季隨)의 설을 잘 본 것이라고 한 것이 그것이네. 이 두 말은 이미 《중용》 장구(章句)에 나타나 있네. 그 장구에 ‘항상 계구하며 여기에 더욱 신중을 더한다.’라고 말했는데 황(黃)의 설은 여기서 나온 듯하고 ‘계구로부터 간략히 하여 지정(至靜)한 속에 이르고 신독으로부터 정밀하게 하여 사물과 응하는 데까지 이르른다……’라고 말했는데 호(胡)의 설은 여기서 나온 듯하네. 대체로 두 학설이 서로 번갈아 뜻을 밝힌 것이네.
공구(恐懼)와 우환(憂患)은 다만 헛된 것이라는 데 대하여.
다만 헛된 것이라는 말은 나와는 무관하다는 말이네. 말하자면 ‘족히 나의 우환이나 공구가 되지 못한다.’는 말과 같은 것이네.
지수안씨득심재(只輸顔氏得心齋)의 수(輸) 자를 일찍이 부(負) 자의 뜻으로 말함에 대하여.
운서(韻書)에 ‘세속에서 부족하다[負]를 수(輸)라 말하고, 또 남는다는 영(籯) 자는 장사하여 남은 이익이니 수(輸)의 반대이다.’ 하였네. 이에 의하면 수(輸)는 부족하다는 뜻이네. 때문에 일찍이 이 부족하다[負]는 뜻으로 말하였던 것이네. 그러나 이것은 일종의 설이네.
한번 마시고 한번 쪼음도 정해진 분수가 있기 마련이라는 데 대하여.
새나 짐승의 마시고 먹는 것은 극히 미세한 것인데도 역시 정하여진 운명이 있다면 더구나 인간의 이해(利害)와 화복(禍福)이야 어떻게 망녕되게 제 마음대로 할 수 있겠는가. 그 큰 뜻은 이러한 것에 불과하네.
벗과 금슬(琴瑟)과 책을 얻어 항상 마음이 여기에[此] 머무르게 하고자 한다는 데 대하여.
편지에서 차(此) 자를 도(道) 자의 뜻으로 보고자 한 것은 너무 범연한 듯하네. 그 글에 ‘문득문득 다른 생각에 이끌려 간다.’라고 하였으니, 차(此) 자는 ‘다른 생각에 이끌려 간다.’라는 말과 상대되는 말로서 대개 이끌려 가지 않고 여기[책ㆍ금슬ㆍ벗]에 머물도록 한다는 말이네.
허다(許多)는 ‘이렇게 많음[如許]’이라는 말과 같네.
소유(少游 진관(秦觀))의 낯빛이 불그레해졌다는 데 대하여.
편지에 ‘상채(上蔡)의 땀이 등에 흐르고 얼굴이 달아올랐다.’도 함께 수오지심(羞惡之心)이라 해야 한다는 것은 옳게 해석한 말이네.
경(敬)을 하게 되면 마음이 전일하여지며 주정(主靜)도 역시 그러한 것이네. 때문에 남헌(南軒 장식(張栻))이 그렇게 말한 것이네. 편지에서는, 한편으로는 주정(主靜)을 지경(持敬)의 한 효험으로 생각하는 듯하였고, 한편으로는 또 정(靜)을 경(敬)의 체(體)로 생각하였으나 모두 온당치 않은 듯하네. 또 편지에 말한 ‘경(敬)은 하나를 주장[主一]하는 것이다.’란 말은 병통이 있는 듯하니 이 주장한다는 주(主) 자를 오로지 한다는 전(專) 자로 바꿀 것이며, 이른바 ‘분란(紛亂)의 근심이 없기 때문에 주정(主靜)할 수 있다.’란 말도 역시 병통이 있으니 이 주(主) 자를 영(寧) 자로 고친다면 괜찮을 듯싶네.
정일두(鄭一蠹 정여창(鄭汝昌))가 ‘마음이 천 리 밖에 놀다 잠깐 동안에 몸속[腔裏]으로 거두어 진다.’고 한 말은 모두 선유들의 말이네. 남추강(南秋江 추강은 남효온(南孝溫))의 말은 곧 범순부(范淳夫) 딸의 말인데, 범씨 딸의 뜻이 과연 뜻과 같았는지는 모르겠네. 범씨 딸은 자기 마음이 안정되었기 때문에 ‘마음은 드나듦이 없다.’고 말한 것이고 추강은 중리(衆理)에 정묘하여 한결같은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드나든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니, 그 뜻은 대개 마음에는 내외원근(內外遠近)이 없는 까닭에 출입(出入)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었네. 일찍이 정우복(鄭愚伏 정경세(鄭經世))의 설을 보았더니 모두 이와 같았었는데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네.
편지에 일두(一蠹)의 ‘거두어진다[卷在]’라는 두 글자에 병통이 있다 하였으나 정자가 일찍이 ‘거두면 은밀한 곳에 되돌아와 간직된다.’라고 하였으니 일두의 설도 아마 여기에서 나왔을 것이네.
인심(人心)도 모두 해로움이 있다는 데 대하여.
이 조목에서는 물어 온 것이 모두 틀린 것이었네.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는가. 여기의 인심(人心)은 순(舜)이 말한 인심과는 크게 관계가 먼 것이네. 여기에서 말한 인심은 구복(口腹)에 대하여 한 말이니, 대개 구복만 해롭지 않고 마음도 그것에 해침을 받는다는 말이네. 그러니 여기에서 인(人) 자는 내용이 없는 글자이네. 《맹자》의 본주를 자세히 보면 알 것이네.
온탄난(溫呑煖)에 대하여.
탄(呑)은 포함의 뜻이 있네.
성인에게는 ‘앞서 뜻[意]한다거나 기필[必]한다거나, 굳이[固]하는거나, 남을 상대하여 나[我]라는 것’이 없음은 모두 욕심이 없는 결과이네. ‘주자(周子)가 사람들이 욕심을 적게 가지는 것으로 만족할까 염려한 때문에 반드시 없는 데까지 이른 뒤라야 옳다고 말한 것이다.’는 말은, 부주(附註)에 실린 주 선생의 설(說)이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한 욕심이란 《맹자》의 본의에 근거하면, 이것은 순(舜)이 말한 인심(人心)인 까닭에 맹자는 적게 하라고만 하였고 없어야 한다고는 말하지 않은 것이며, 주자(周子)는 좋지 않은 욕심이라고 생각한 까닭에 반드시 없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고 말한 것이니 이를 불가불 알아야 할 것이네.
일(一)이란 것은 무욕(無欲)이라고 한 데 대하여.
편지에는, 여기에 나오는 욕(欲) 자를 식색(食色)이라고 생각하여, 이단에 빠질까 염려하였으나, 이 욕 자는 좋지 않은 욕심이네. 당연히 양심설(養心說)과 한가지로 보아야 할 것이네.
동한(東漢)의 명분과 절의를 지킨 사람에 대하여.
정자가 ‘동한의 선비들이 명분과 절의를 숭상하였으나 다만 이치에 밝지 못하였다. 만일 이치에 밝을 수 있었다면 모두 대현(大賢)이 되었을 것이다.’ 하였고, 또 ‘후한(後漢)의 명분과 절의를 지킨 사람은 습속화된 데서 이뤄진 것이니 꼭 자기의 생각으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 번 변화하면 도(道)에 이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였네.
주자는 ‘동한의 여러 사람들이 죽는 것을 집에 돌아가는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이는 광무제(光武帝)와 명제(明帝)ㆍ장제(章帝)의 공이다.’ 하였고, 또 ‘일찍이 진중거(陳仲擧)와 서유자(徐孺子)의 높은 풍도를 비장하게 받아들였다.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과정에서 화(禍)와 복(福)은 달랐으나 각기 자기의 뜻을 실행한 것이었으니 이러한 표표한 분들을 끝내 어떻게 봐야 할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하였네.
이 두 선생의 논의를 보면, 억누르고 부추기며 허여하고 무시하여 버리는 기준을 알 수 있을 것이네. 그러나 그들이 도를 알았다고 허여하지 않은 점은 일찍이 같으셨네.
정개청(鄭介淸)의 배절의론(排節義論)은 생각건대 너무도 어긋난 것이었던 까닭에 선조(宣祖)가 학궁(學宮)에 내 붙이게 하였을 것이네.


[주D-001]육유(六有) : 장재(張載)의 《정몽(正蒙)》 유덕(有德)에 “언어에는 가르침이 있고[言有敎], 행동에는 법도가 있게 하며[動有法], 낮으로는 공부함이 있고[晝有爲], 밤으로는 깨달아짐이 있으며[宵有得], 숨 한 번 쉬는데도 함양하고[息有養], 눈깜짝하는 순간에도 마음을 간직하라[瞬有存].” 하였다.
[주D-002]심경(心經) : 이 대문은 《심경》 권수(卷首)의 찬(賛) 중에 나오는 말임.
[주D-003]천리(天理) : 이는 《심경》 권1 인심도심장(人心道心章)의 주설을 논한 것이다.
[주D-004]우위(愚謂) : 상제임여(上帝臨汝)는 《시경(詩經)》 노송편(魯頌篇) 비궁장(閟宮章)의 글로, 그에 대한 주설을 실으며 처음에 모씨, 다음에 주자, 다음으로 우위(愚謂)라고만 하여 정확한 이름을 밝히지 않았음을 가지고 그 우위가 누구인가를 가린 조항이다.
[주D-005]양씨(楊氏)와 주자(朱子)의 설 : 이는 《심경》 권1 경이직내장(敬以直內章)의 주설을 논한 것이다.
[주D-006]증자(曾子)의 삼성(三省) : 이는 《심경》 권1 징분질욕장(懲忿窒慾章)의 주설 중 정이의 말을 가지고 물은 것이다.
[주D-007]이로부터 …… 된다 : 이 조항은 《심경》 권1 안연문인장(顔淵問仁章)의 주설이다.
[주D-008]서(恕) 자에 …… 겸하여졌다 : 이는 《심경》 권1 중궁문인장(仲弓問仁章)의 주설이다.
[주D-009]호계수(胡季隨)의 설 : 호계수는 송(宋) 나라 사람이다. 이 대문은 《중용》 제1장에 있는 내용으로, 계수가 ‘계구(戒懼)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발하기에 앞서 함양(涵養)하는 것이고, 신독(愼獨)은 희로애락이 발한 뒤에 성찰(省察)하는 것이다.’고 하였는데, 주희가 잘 말한 것이라고 하였다.
[주D-010]공구(恐懼)와 우환(憂患) : 이는 《심경》 권2 정심장(正心章) 주설 중 주희의 말이다.
[주D-011]지수안씨득심재(只輸顔氏得心齋) : 이는 《심경》 권2 정심장의 주설로, 정이가 여대림(呂大臨)의 시(詩)를 인용하여 학문의 길을 밝힌 것이다. 여대림의 시에 “……공문에 들었지만 하나도 이룬 것 없어, 마음 맑힌 안회(顔回)를 따르지 못하네.[獨立孔門無一事只輸顔氏得心齋]” 하였다.
[주D-012]운서(韻書) : 《정자통(正字通)》에 이런 해석이 있다
[주D-013]한 번 마시고 한 번 쪼음 : 이는 《심경》 권2 정심장 주설 중 주희의 말이다.
[주D-014]벗과 금슬(琴瑟)과 책 : 이는 《심경》 권2 예악불가사수거신장(禮樂不可斯須去身章) 주설 중 장재(張載)의 말이다.
[주D-015]인하허다시(因何許多時) : 이는 《심경》 권2 군자낙득기도장(君子樂得其道章)의 주설 중에 여대림(呂大臨)의 말이다.
[주D-016]정자(程子)가 …… 주정(主靜)의 뜻 : 이는 《심경》 권3 우산지목장(牛山之木章) 주설 중 장식(張栻)의 말이다.
[주D-017]이미 …… 한다 : 이는 《심경》 권3 인인심야장(仁仁心也章)의 주설 중 정자(程子)의 말이다. 아마 이 글을 물으면서 《추강집(秋江集)》 권5 심론(心論)의 정여창(鄭汝昌)과 남효온(南孝溫)의 문답을 함께 물었던 것 같다.
[주D-018]온탄난(溫呑煖) : 이는 《심경》 권4 계명장(鷄鳴章) 주설 중 주희의 말이다. 어떤 사람이 이(利)와 선(善)의 차이를 묻자 “냉수가 아니면 펄펄 끓는 물이지 중간의 온탄난(溫呑煖)한 것은 없다.” 하였는데, 이 온탄난이 무엇인지를 물은 것이다.
[주D-019]욕심이 …… 못한다 : 이는 《심경》 권4 주자양심설장(周子養心說章) 주설 가운데 주희의 말이다.
[주D-020]일(一)이란 것은 무욕(無欲) : 이는 《심경》 권4 성가학장(聖可學章)을 논한 것이다. 이기홍이 욕(欲)을 식색(食色)으로 생각하여 이단, 곧 승려들이나 도가(道家)에서처럼 완전히 멀리하여야 하는 것에 거의 가깝지 않느냐는 물음에 답한 것이다.
[주D-021]진중거(陳仲擧)와 서유자(徐孺子) : 중거는 진번(陳蕃)의 자이고 유자는 서치(徐穉)의 자. 모두 동한(東漢) 사람들로, 환관(宦官)이 정권을 뒤흔드는 세상을 만나 진중거는 두무(竇武)를 도와 명현을 등용하였고, 다시 환관들을 제거하려다 발각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서유자는 진중거가 가장 높였던 어진 사람으로 벼슬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남주(南州)의 고사(高士)란 칭호를 얻었으면서도 몸을 잘 보전하여 일생을 마쳤다.
[주D-022]배절의론(排節義論) : 정개청이 스승 박순(朴淳)을 배반하고 이를 변명하기 위해 지은 절의청담변(節義淸談辨)을 말함. 정개청이 박순(朴淳)에게 10년간 사사(師事)하여 벼슬에 올랐으나, 당시 서인(西人)으로 영의정(領議政)이던 박순이 파직을 당하자, 화를 입을까 두려워 동인(東人)인 정여립(鄭汝立)ㆍ이발(李潑) 등과 친교를 맺었다. 그리하여 선생을 배반했다는 비판을 서인측으로부터 받게 되자, 절의청담변(節義淸談辨)을 지어 자기의 처지를 변명하였는데, 이 글이 절의를 배척한 내용이라 하여 서인측에서는 ‘배절의론’이라 불렀다. 선조가 이것을 반박하여 각 읍의 향교에 게시하도록 하였다.

송자대전 제91권
 서(書)
이여구(李汝九)에게 답함 - 갑자년(1684) 6월 1일


여러 번의 애서(哀書 상중에 보낸 편지)를 받고 삼가 상중에 그런대로 견디어 감을 알게 되어 자못 위로가 되네. 다만 병중에 인편이 없어 오랫동안 답장이 지체되어 늘 미안하던 차에 오늘 인편에 또다시 지난달 16일에 부친 편지를 받으니 말뜻이 정중하여 부끄러움이 더욱 깊었네.
윤(尹 윤증을 가리킴)의 일은 모두가 약석(藥石)이니 스스로를 깨우치는 계책으로 삼을 따름이네. 주자를 탄핵하는 소장에 더럽고 추한 것이 낭자하였음에도 주자는 오히려 하나하나 예를 들어 시인하며 옳은 말이라 하였고, 모두 그 핵심을 고증하며 거짓이라고 아니하였는데, 더구나 지금은 모두 참으로 있는 일이 아닌가.
선명(先銘)은 오랫동안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으나 근래에 틈을 타 초고를 완성하여 적당한 인편에 보내겠네.
정서(程書)의 분편(分編) 작업은 최우(崔友 최방언(崔邦彦)을 가리킴)가 아직 일을 마치지 못하여 항상 마음에 잊히지 않네. 이 벗에게서도 편지가 있었으나 병으로 답장을 마련치 못하였으니 보거든 말이나 전해 주기를 바라네.
날씨가 매우 덥네. 슬픔을 절제하고 상례(喪禮)대로 따라서 멀리서 걱정하는 이 정성을 위로해 주게.


별지
별지의 내용은 잘 알았네.
대체로 경계해 주거나 규찰하여 주던 도리가 쇠한 지 오래되어 붕우(朋友)란 이름만 헛되이 남았고 허물이 있어도 그르단 말을 듣지 못하니 아름답지 못한 세태가 더욱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오늘날 상중에 있는 그대에게서 옛사람의 도리를 보게 되니 얼마나 다행한지 모르겠네. ‘너무 박절하게 드러내 혼연(渾然)함이 없다.’고 지적한 말은 참으로 그러함이 있네. 그러나 ‘박절하게 드러낸다.’는 것은 아마 말하는 바가 박절하여 쉽게 드러난다는 뜻이니 그렇다면 바로 ‘깊고 두텁다.’는 말과 서로 반대되는 것이네. 따라서 주자의 말씀이 생각이 나네. 대저 이번 일에는 부득이한 사정이 있었네. 이제 대략 말해 보겠네.
대체로 윤휴가 주자를 공격하여 배척하여도 세상에서는 괴이하게 생각지 않았는데, 나는 내 힘을 스스로 헤아리지 못하고서 망녕되이 배척하였네. 저 주자의 도는 마치 중천의 해와 같으니 휴 같은 무리가 백 명 천 명인들 무슨 손상이 있겠는가마는 온 세상이 풍미하여 주자보다 낫다라는 지경에 이르러선 그 해로움은 홍수나 맹수의 피해보다 심한 것이었네. 나머지 사람들은 족히 말할 것도 없고, 저 대윤(大尹 윤선거를 가리킴)은 파산(坡山 성혼(成渾)을 가리킴)의 여파요 팔송(八松 윤황(尹煌))의 어진 아들로서, 도리어 윤휴를 돌봐 주고 무리짓기에 매우 힘을 기울였네. 내가 근심과 탄식을 이기지 못하여 만나면 반드시 힘을 다하여 다음과 같이 할 수 있는 말은 다하였네.
“왕통(王通)의 학문이 여러 선비들이 따를 수 없이 훌륭하였으나 그가 《춘추》에 비겨 책을 지어 여러 나라를 포폄(褒貶)한 점에 이르러서는 주자는 제왕을 참칭하는 죄라고 배척하였다. 그런데 더구나 휴가 감히 주자의 주설(註說)을 쓸어 버리고 스스로 새로운 책을 만들어 천하를 바꾸어 보려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사문(斯文)의 난적(亂賊)이네. 《춘추》의 법에서는 모든 난적은 반드시 먼저 그와 무리지은 사람부터 다스렸으니 이제 공이 당연히 휴에 앞서 법에 복주될 것이다.”
나의 말이 아프고 간절함이 이 같았는데도, 그는 끝내 머리를 돌리지 않았고 그가 죽자 그의 아들들은 휴의 전의(奠儀 초상난 집에 보내는 돈이나 물건)를 받아들였으니, 그들이 사귄 도리가 끝까지 달라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것이네.
언제나 세도(世道)를 위해서 깊은 근심과 긴 탄식은 자주 말로 나타났고 그럴 때마다 반드시 격하게 입에서 튀어나와 나도 모른 사이에 너무 심한 말이 되었네. 그리하였으니 그 집안 후생들이 성을 내는 것은 괴이할 것이 없네. 이제 그 집안 후생들도 나의 심술과 언행을 배척하는데 온 힘을 다 쏟고 있네.
내가 어려서부터 선생의 문하를 따라 공부하면서 심술(心術)의 은미한 곳에 반드시 그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의 분별을 삼가하란 말을 귀에 익게 들었으면서도 행실에 힘쓰지 못하고 이치를 궁구하여 극기(克己)를 하지 못하였네. 이치를 궁구하지 못한 때문에 혹 인욕을 천리라고 여겼으며 극기를 하지 못한 때문에 인욕을 따라 행동한 것도 많았네. 저들이 하는 말은 참으로 내게는 정문(頂門)의 일침(一針)이니 이제 당연히 깊이 반성하여 빨리 고쳐야 할 따름이지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다만 그의 아버지의 덕(德)을 내세워 협박하려는 꾀를 삼고자 하는 생각은 잘못이네. 그런데도 그들 무리가 팔뚝을 걷어붙이며 분분하는 데에는 더욱 가소롭기만 하네.
지금의 논자들이 ‘그가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편벽한 행위를 막고 음탕한 말을 내치는 것으로 자임하려 든단 말인가.’ 한다면, 내 당연히 말만 나오면 죄에 자복할 것이네. 그러나 맹자가 ‘능히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막자고 말하는 사람은 성인의 무리이다.’고 하였는데, 주자는 주석에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지향하는 바가 옳으니 도를 모른다 하더라도 성인의 무리이다.’고 말씀하셨으니, 마구간이나 치는 천한 사람일지라도 감히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주자의 말씀이 생각이 난다.’고 한 말은 다름이 아니라, 주자가 일찍이 동래(東萊 여조겸(呂祖謙))가 이단을 공격하지 않는 것을 ‘깊고 두터운 뜻이다.’ 하면서도 그 해가 적지 않을 것을 병통으로 여기셨네. 이제 자네가 참으로 동래(東萊)처럼 깊고 두터웁기를 나에게 바라는 것은, 참으로 좋은 뜻이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깊고 두텁다는 것이 내 몸을 도모하기에는 편한 것이나 세도(世道)에는 편한 것이 아니네. 만일 내가 과연 몸이나 편히 하려는 꾀를 하려 하였다면 당초 휴의 주장이 나올 무렵에 당연히 흐릿한 말을 내놓아 스스로 저번의 큰 화를 모면하였을 것이네. 큰 화를 겪었으면서도 고집스럽게 뉘우칠 줄 모르니, 한번 타고난 기질은 변화할 수 없는 것이 이 같음을 알 수 있네. 이제 우러러 선철(先哲)을 생각하여 느끼는 바가 있으니 만일 주자 역량의 만에 하나라도 가졌다면 반드시 오늘 같은 시끄러움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네.
어떤 사람은 ‘남의 자제들을 대하여 그 부형의 잘못을 의논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고 말하나 나는 또 생각건대 주자가 동래(東萊)에게 한 편지에 여 형공(呂滎公 여희철(呂希哲)의 봉호) 가학(家學)의 잘못을 극언하면서도 혐의스럽게 생각하지 않았고, 동래도 성내지 않았었네. 때문에 당초 이 일이 발단되면서 저들과 조용히 헤아려 보려고 공손한 말로 편지를 써 그 실마리를 열어 보려 하였으나 저들은 화를 잔뜩 내 꾸짖는 말이 더욱 더하여졌고 이내 끝없는 갈등이 빚어졌네. 이는 내가 일을 살피는 것이 분명치 못한 소치이니 후회하여도 소용없는 일이네.
이러한 여러 말은 참으로 그대의 규찰하여 주는 성심에 감동되어 감히 그 전말을 털어놓은 것이니 절대로 남에게 보이지 말게. 이런 내용을 모르는 사람들은 풍병이 들어 정신을 잃었다고 하여 또 말썽만 더 일어날 것이네. 절대 깊이 간직하게.


[주D-001]선명(先銘) : 이기홍이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연거푸 잃고 연 6년 상을 입으니 이해는 할아버지 상중이었으며, 이 선명은 아버지의 묘지명을 말한 듯함.
[주D-002]박절하게 …… 없다 : 이는 이기홍이 송시열에게 보낸 편지에서 송시열이 윤증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가 ‘박절하게 드러내 혼연함이 없는 듯하다.’면서 대군자의 말하는 절도에 잘못이 아니겠느냐고 한 것을 말한다. 《直齋集 卷5》
[주D-003]동래(東萊)에게 …… 잘못 : 주자가 동래에게 “여 형공은 불로(佛老)에 젖었다”라는 말을 하였다. 여 형공은 정자(程子)의 제자이다.

 송자대전 제91권
 서(書)
이여구(李汝九)에게 답함 - 갑자년(1684) 11월 26일


앞뒤 편지의 정중한 뜻은 잘 알았네. 선명(先銘)은 다시 두 장의 쪽지를 종이 아래 붙였으니 고증하여 다시 편지하여 주게나. 나중 편지에 동봉하여 온 별지는 매우 애쓴 뜻이었네. 참으로 말을 많이 하여 사람들에게 화란을 부르고 싶진 않으나 보내 준 편지가 이미 정성에서 나온 것이었으니 감히 사실을 알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당초 적휴(賊鑴)가 주자를 공격하여 배척하였을 때, 내가 망녕되이 배척하려 하자 대윤(大尹)은 반드시 눈을 부라리며 호기를 내어 도리어 나를 공격하는데 조금의 여유도 두지 않았네. 동학사(東鶴寺)의 모임을, 최신(崔愼)의 상소에 동춘(同春)까지 아울러 거론한 것은 실상을 잃은 것이었네. 그때 대윤(大尹), 참판(參判) 이유태(李惟泰),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함께 모여 다시 휴의 일로 서로 다투다 끝에 가서는 그의 말이 조금 수그러들며, ‘음양(陰陽)과 흑백(黑白)이라면, 저[휴]가 당연히 음(陰)이요 흑(黑)이다.’ 하였네. 대윤이 앞서 떠나고 내가 이(李)에게 ‘길보(吉甫 윤선거)가 오늘에야 졌다고 시인하였네.’ 하자, 이는 ‘길보가 겉으로는 호기지고 근엄하나 속은 실상 허약하고 겁이 많으니 그 말을 믿을 수가 없네.’ 하기에 내가 이를 책망하며 ‘어떻게 사람을 그다지 믿지 못하는가.’ 하였네.
모두 헤어져 돌아간 뒤에 대윤의 편지를 보니 갑자기 전에 한 말을 번복하고 있었네. 나는 편지로 이(李)에게 사과하길 ‘알고 모르는 것은 모름지기 30리의 차이가 있다.’고 하였네.
들으니 대윤이 죽은 뒤에 그 아들들이 내가 이러한 말을 하였다는 것을 듣고서는 그 둘째 아들이 이(李)에게 찾아가 사실 여부를 묻자 이는 ‘모(송시열을 가리킴)는 총명하지만 나는 기력도 쇠하고 둔하여 모두 잊어버렸네. 그때 자네의 아버지가 살았을 때 우리가 질책할 것이 있으면 참으로 꺼리는 것이 없었으며 농담까지도 하였네. 서로 만나는 때에는 또한 「허약하고 겁이 많다.」는 말보다 더 심한 말도 하였네. 그러나 나는 잊어버렸고 저 사람은 잊지 않았네. 잊어버린 사람이 어진 것인가, 잊지 않은 사람이 어진 것인가.’ 하더라네. 그러나 오늘날에 있어서는 저 양쪽 집안에서는 어찌 참으로 이런 일이 있었다고 말하겠는가. 반드시 내가 날조한 근거 없는 말이라고 할 것이기에 남에게 말하고자 아니한 것이네.


[주D-001]알고 모르는 …… 있다 : 조조(曹操)와 양수(楊修)의 고사로, 알아보는 지식의 차이가 있음을 말한다.



 

송자대전 ( 宋子大全 )
형태서지 | 저 자 | 가계도 | 행 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형태서지
권수제  宋子大全
판심제  宋子大全
간종  목판본
간행년  1787年刊
권책  卷首, 目錄 2권, 原集 215권, 附錄 19권 합 102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2.5×17.8(㎝)
어미  上二葉花紋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도서번호  奎3542
총간집수  
권수제  宋書拾遺
판심제  宋書拾遺
간종  목판본
간행년  1927年刊
권책  9권 4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1.5×17.6(㎝)
어미  上二葉花紋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도서번호  古3428-429
총간집수  
권수제  宋書續拾遺
판심제  宋書續拾遺
간종  목판본
간행년  1929年刊
권책  續拾遺 1권, 附錄 2권 합 1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1.8×17.6(㎝)
어미  上二葉花紋魚尾
소장처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도서번호  한92-4
총간집수  
권수제  宋子大全隨箚
판심제  宋子大全隨箚
간종  목판본
간행년  1901年刊
권책  13권 6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3.1×18.2(㎝)
어미  無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도서번호  奎15693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108~116
 저자
성명  송시열(宋時烈)
생년  1607년(선조 40)
몰년  1689년(숙종 15)
아명  聖賚
 英甫
 尤庵, 華陽洞主, 南澗老叟, 橋山老父
본관  恩津
시호  文正
특기사항  金長生, 金集의 門人. 老論의 영수
 가계도
 宋應期
 都事
 宋欽祚
 
 宋承祚
 
 宋天祚
 
 宋邦祚
 
 宋時瑩
 
 宋基泰  
 
 宋甲祚
 奉事, 睡翁
 善山郭氏
 郭自防의 女
 宋時熹
 
 金聲振의 女
 
 宋時默
 縣監
 李蓍生의 女
 
 宋時烈
 
 韓山李氏
 李德泗의 女
 宋基泰  
 都正
 李挺漢의 女
 
 女
 
 權惟
 縣監
 女
 
 尹摶
 
 側室
 
 女
 
 閔周鏡
 
 宋時燾
 縣監
 李復益의 女
 
 宋時杰
 監役
 權의 女
 
 女
 
 尹爓
 郡守
 女
 
 李憬
 監役
 女
 
 朴慶深
 
 女
 


기사전거 : 墓表(權尙夏 撰), 宋甲祚墓誌(宋時烈 撰), 宋應期墓碣銘(崔岦 撰, 簡易集 卷2) 등에 의함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선조 40 1607 정미 萬曆 35 1 11월 21일, 戌時에 沃川 九龍村에서 태어나다.
광해군 6 1614 갑인 萬曆 42 8 宋爾昌에게 나아가 그 아들 宋浚吉과 함께 수학하다.
광해군 9 1617 정사 萬曆 45 11 부친 睡翁公이 진사시 합격 후 홀로 西宮에 배알하여 禁錮되다.
인조 3 1625 을축 天啓 5 19 2월, 韓山李氏와 혼인하다.
인조 5 1627 정묘 天啓 7 21 丁卯胡亂 때 학업에 힘쓰라는 부친의 서신을 받다. ○ 3월, 백형 宋時熹가 殉死하다.
인조 6 1628 무진 崇禎 1 22 4월, 부친상을 당하다. ○ 9월, 沃川 赤登江 가에 장사 지내고 형제들과 시묘살이를 하다.
인조 8 1630 경오 崇禎 3 24 服을 마치고 沙溪 金長生을 찾아가 「近思錄」, 「心經」, 「家禮」 등을 배우다.
인조 9 1631 신미 崇禎 4 25 8월, 沙溪 金長生의 상을 당하다.
인조 10 1632 임신 崇禎 5 26 懷德 宋村으로 이사하다.
인조 11 1633 계유 崇禎 6 27 9월, 생원시에 장원하다. ○ 敬陵 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보름 만에 사직하다.
인조 12 1634 갑술 崇禎 7 28 4월, 宋浚吉과 嶺外를 유람하고 仁同에 가 張顯光을 방문하다.
인조 13 1635 을해 崇禎 8 29 11월, 大君 師傅에 제수되다.
인조 14 1636 병자 崇禎 9 30 겨울, 丙子胡亂이 일어나자 仁祖를 호가하여 南漢山城으로 들어가다.
인조 16 1638 무인 崇禎 11 32 別提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다. 정축년 이후 벼슬할 뜻을 버리고 黃澗에 우거하며 학문에 힘쓰다.
인조 17 1639 기묘 崇禎 12 33 3월, 李惟泰, 尹宣擧와 함께 珍山에 모여 重峯 趙憲의 遺事를 의논하다. ○ 9월, 龍潭 縣令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다.
인조 19 1641 신사 崇禎 14 35 金克亨과 편지로 性情의 體用說을 논하다.
인조 20 1642 임오 崇禎 15 36 尹鑴와 理氣說을 변론하다. ○ 처음에는 윤휴의 영특함을 인정하여 교유하였으나 후에 그가 朱子學을 벗어나 자신의 학설을 주장하자 斯文亂賊으로 공격하다.
인조 22 1644 갑신 崇禎 17 38 6월, 明 崇禎皇帝가 殉國했다는 소식을 듣고 擧哀하다. ○ 11월, 지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다.
인조 23 1645 을유 順治 2 39 5월, 楊州 石室村으로 金尙憲을 방문하여 부친 睡翁公의 묘갈명을 받다.
인조 24 1646 병술 順治 3 40 6월, 李惟泰, 尹宣擧와 遯巖書院에 모여 講하다. ○ 12월, 兪棨와 함께 愼天翊, 安邦俊을 방문하다.
인조 25 1647 정해 順治 4 41 진선에 제수되었으나 상소하여 사직하다. ○ 8월, 飛來庵에서 제생과 학문을 講하다.
인조 27 1649 기축 順治 6 43 5월, 仁祖가 승하하자 擧哀하다. ○ 6월, 孝宗의 소명이 있자 입대하여 〈己丑封事〉를 올리다. ○ 10월, 장령이 되다. ○ 12월, 집의가 되다.
효종 1 1650 경인 順治 7 44 스승 金集이 金堉과의 불화로 내려가자 의리상 홀로 남기 어렵다는 이유로 귀향하다. ○ 4월, 沙溪 金長生의 行狀을 짓다. ○ 11월, 宋浚吉과 함께 栗谷年譜를 교정하다.
효종 3 1652 임진 順治 9 46 金尙憲을 哭하다. ○ 11월, 李惟泰, 尹宣擧와 遯巖書院에서 만나다.
효종 4 1653 계사 順治 10 47 忠州 牧使에 제수되었으나 상소하여 체직되다. ○ 4월, 懷德 宋村에서 鄕飮酒禮를 행하다. ○ 5월, 金慶餘의 喪에 조문하다. ○ 윤7월, 兪棨, 尹宣擧와 黃山書院에 모이다. 尹宣擧에게 尹鑴와 절교할 것을 종용하다.
효종 5 1654 갑오 順治 11 48 2월, 집의가 되었다가 체직된 뒤 副護軍이 되다. ○ 尹宣擧, 李惟泰와 〈疑禮問解〉를 교정하다. ○ 4월, 특지로 동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상소하여 체직되다. ○ 兪棨, 尹宣擧 등을 皐蘭寺에서 만나 虎巖에서 뱃놀이하고 「心經」을 강론하다.
효종 6 1655 을미 順治 12 49 2월, 이조 참의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다. ○ 모친상을 당하다. ○ 沃川 月伊洞에 장사 지내다.
효종 7 1656 병신 順治 13 50 부모의 묘소를 懷德 板橋里로 移葬하다. ○ 윤5월, 金集의 訃告를 듣고 석달복을 입다. ○ 滄洲 金益熙의 부고를 듣다. 후에 神道碑文을 짓다.
효종 8 1657 정유 順治 14 51 5월, 服을 마치고 찬선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다. 상이 「朱子語類」, 「擊壤集」을 하사하다. ○ 8월, 사직소를 올리며 克復과 修攘에 대한 대책인 〈丁酉封事〉를 지어 密封해 올리다. ○ 10월, 상이 密諭를 내리자 마침내 경영에 뜻을 두고 兪棨와 함께 계책을 의논하다.
효종 9 1658 무술 順治 15 52 2월, 이조 참의가 되었다가 곧이어 특지로 예조 참판에 제수되었으나 상소하여 사직하다. ○ 5월, 滄洲書院(表忠祠〉에 金集을 추향하다. ○ 찬선이 되다. ○ 再從兄의 아들 宋基泰를 후사로 삼다. ○ 특지로 이조 판서가 되다. 연일 召對에 입시하여 治道를 논하고 경연에서 「心經」을 강하다. ○ 尹鑴의 등용문제로 尹宣擧와 편지하다.
효종 10 1659 기해 順治 16 53 3월, 熙政堂에서 獨對하여 修攘의 일을 논하니, 효종이 은밀히 手札을 내리다. ○ 孝宗이 승하하자 慈懿大妃의 服制를 의논할 때 朞年服으로 정하였는데 尹鑴가 이에 반대하여 삼년복의 宗統說을 주장하다. ○ 孝宗의 誌文을 짓다. ○ 洪汝河의 상소로 인해 사직하여 체차되다. ○ 판중추부사가 되어 宋浚吉과 함께 山陵의 일을 의논하다. ○ 좌참찬에 제수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리고 도성을 떠나 懷德 蘇堤로 돌아오다.
현종 1 1660 경자 順治 17 54 李厚源의 訃告를 듣다. ○ 3월, 우찬성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다. ○ 이른바 1차 禮訟이 일어나자 練服의 변경 및 許穆의 喪服圖에 반박하는 의논을 올리다. ○ 尹善道가 상소하여 慈懿大妃 服制와 山陵의 일로 공격하자 상소하여 대죄하다. ○ 병조 판서, 이조 판서, 판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직하다.
현종 2 1661 신축 順治 18 55 祧廟의 禮에 대해 헌의하다. ○ 5월, 興政堂에 입대하여 禮訟의 전말을 진달하다. ○ 趙絅이 상소하여 윤선도를 변호하자 곧 도성을 떠나다. ○ 12월, 公州 遠基로 거처를 옮기다.
현종 3 1662 임인 康熙 1 56 1월, 興農書堂에서 族譜를 교감하다. ○ 3월, 金剛山을 유람하다. ○ 明의 멸망을 듣고 애통해 하다. ○ 10월, 礪山 黃山으로 이사하다. ○ 尹宣擧와 栗谷 年譜를 교감하다. 尹鑴의 문제로 尹宣擧를 계속 規戒하다.
현종 4 1663 계묘 康熙 2 57 1월, 宋浚吉과 연명으로 상소하여 陳戒하다. ○ 4월, 延平從祀議를 올리고, 李端相과 永寧殿의 廟制를 의논하다. ○ 8월, 俗離山을 유람하고 竹林書院에서 大享禮를 거행하다.
현종 5 1664 갑진 康熙 3 58 兪棨의 상을 당하다. ○ 趙憲과 숙부 宋邦祚의 묘표를 쓰다. ○ 11월, 俗離山에 들어가다.
현종 6 1665 을사 康熙 4 59 3월, 鄭澈의 遷葬에 참여하다. ○ 顯宗이 온천에 행차하여 부르니 行宮에 입대하다. ○ 元子의 탄생을 하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許穆의 공격을 받다. ○ 9월, 東鶴寺에서 李惟泰, 尹宣擧와 만나 「沙溪遺稿」를 교정하다.
현종 7 1666 병오 康熙 5 60 淸州 枕流亭에 우거하다. ○ 상이 史官을 보내 계속 부르자 行在所에 나가 대죄하다. ○ 俗離山 華陽洞으로 거처를 옮기다. ○ 10월, 同春과 함께 「小學諺解」를 개찬하여 올리다. ○ 12월, 世子貳師가 되었으나 상소하여 사직하다.
현종 8 1667 정미 康熙 6 61 2월, 李䎘이 許積, 鄭太和를 논하다가 귀양가자 상소하여 대죄하다. ○ 6월, 成文濬의 墓碣銘을 지으면서 鄭仁弘에게 붙었던 일을 언급하여 마침내 成氏, 尹氏 일가와 불화가 생기다. ○ 靜庵 趙光祖의 謫廬遺墟碑文을 짓다.
현종 9 1668 무신 康熙 7 62 李端相, 朴世采와 편지로 退溪의 物格說을 논하다. ○ 2월, 우의정에 제수되다. ○ 9월, 상이 溫泉에 행차하여 부르자 行宮에 입조하다. ○ 11월, 상소를 올려 하직하고 廣州로 물러나니 상이 閔鼎重을 보내 머물기를 권하다. ○ 체차된 뒤에 還朝하여 차자로 경계를 아뢰다.
현종 10 1669 기유 康熙 8 63 1월, 貞陵을 복구하기를 청하다. 이후 經筵과 書筵에 입시하다. ○ 2월, 차자를 올리고 都城을 떠나다. ○ 판부사 李景奭의 차자로 인해 상소하여 대죄하다. ○ 4월, 茂朱 赤裳山을 유람하고, 부친의 사당에 焚黃禮를 행하다. ○ 8월, 尹宣擧를 弔哭하다.
현종 11 1670 경술 康熙 9 64 權諰와 甲川에서 만나다. ○ 9월, 李世直의 변이 생기자 京畿에 나가 대죄하다.
현종 12 1671 신해 康熙 10 65 5월, 다시 우의정에 제수되고 특별히 世子師傅를 겸하다. ○ 7월, 〈三學士傳〉을 짓다. ○ 상소하여 사직하고 救荒策을 진달한 책자를 올리다.
현종 13 1672 임자 康熙 11 66 1월, 炭谷에 가서 權諰를 弔哭하다. ○ 3월, 三山을 유람하고 永同, 冷泉을 거쳐 돌아오다. ○ 5월, 좌의정에 제수되다. ○ 7월, 仲兄 宋時默의 상을 당하다. ○ 9월, 許積의 일로 상소하여 사직하다. ○ 10월, 石湖 尹文擧를 곡하다. ○ 11월, 同春 宋浚吉을 곡하다. ○ 紫雲書院의 비문을 짓다.
현종 14 1673 계축 康熙 12 67 6월, 〈陵誌文追刻議〉를 올리다. 寧陵(孝宗陵)의 遷陵都監 誌文製述官이 되어 천릉시의 服制議를 올리다. ○ 寧陵의 表石 문제로 金佑明의 공박을 받고, 또 당시 閔愼 일가의 喪服 문제로 尹鑴의 공격을 받자 陵役이 끝난 뒤 서울을 떠나다. ○ 尹宣擧의 墓文을 짓다. 아들 尹拯이 朴世采의 행장과 己酉擬書를 가지고 와 묘문을 부탁하였는데, 이로 인해 懷尼是非가 일어 결국 老論과 少論의 분쟁이 일어나다. ○ 12월, 영중추부사가 되다.
현종 15 1674 갑인 康熙 13 68 遷陵의 일로 상소하여 대죄하다. ○ 3월, 仁宣王后의 喪으로 상경하였다가 慈懿大妃의 服制를 논하면서 이른바 2차 禮訟이 다시 일어나자 돌아오다. ○ 6월, 李惟泰와 「沙溪遺稿」를 교정하여 마치다. ○ 7월, 都愼徵의 상소가 나오자 水原 萬義에 나가 대죄하다. ○ 8월, 顯宗이 승하하자 도성에 들어갔다가 郭世楗의 상소가 올라오자 萬義로 돌아가다. ○ 12월, 兩司의 논핵을 받아 파직되다.
숙종 1 1675 을묘 康熙 14 69 削奪官職, 遠竄의 명이 내리다. ○ 3월, 金尙憲의 墓誌를 짓다. ○ 6월, 長鬐에 圍籬安置되다. 유배지에서도 문인들과 강학을 그치지 않다. ○ 9월, 尹拯의 편지에 답하여 尹鑴와 일찍 절교하지 않은 것을 꾸짖다. ○ 鄭夢周의 神道碑를 짓다.
숙종 2 1676 병진 康熙 15 70 2월, 尹拯이 長鬐로 찾아오다. ○ 李惟泰가 甲寅禮說을 지어 종래의 禮論을 바꾸었다는 소문이 퍼져 자제들이 분개하고 있었는데, 尹拯이 李惟泰에게 편지를 보내 알리고 〈蓬山語錄〉을 지어 離間하다. ○ 7월, 李惟泰의 편지를 받다. 이후로 양측 자제간의 불화가 더욱 심해지다.
숙종 3 1677 정사 康熙 16 71 3월 22일, 夫人 李氏의 상을 당하다.
숙종 4 1678 무오 康熙 17 72 「朱子大全箚疑」를 완성하다. 또 「二程全書」를 보기 쉽게 類別로 편차한 「程書分類」를 편하고, 退溪의 「經書質疑」와 「記善錄」을 證訂하다.
숙종 5 1679 기미 康熙 18 73 4월, 巨濟島로 이배되다. ○ 「朱子語類小分」을 완성하다. 또 朱子의 年譜와 實紀를 합쳐 「文公先生紀譜通編」을 편차하다.
숙종 6 1680 경신 康熙 19 74 5월, 淸風으로 이배되다. ○ 6월, 陜川에 도착했을 때 庚申換局으로 西人이 재집권하자 석방되어 懷德으로 돌아오다. ○ 10월, 영중추부사에 제수되자 상경하여 입대하다. 당시 仁敬王后가 승하하여 慈懿殿의 服制를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다. ○ 12월, 仁敬王后의 誌文을 짓다.
숙종 7 1681 신유 康熙 20 75 1월, 召對에 입시하여 「心經」을 강하다. ○ 2월, 상소하고 華陽洞으로 돌아오다. ○ 9월, 「心經釋義」를 교정하다. ○ 12월, 상소하여 文廟從祀를 논하다.
숙종 8 1682 임술 康熙 21 76 3월, 珍山에서 李惟泰를 기다렸으나 만나지 못하다. ○ 別諭가 내리자 朴世采와 함께 상경하다.
숙종 9 1683 계해 康熙 22 77 晝講에 입시하고 袖箚를 올려 국사를 논하다. ○ 3월, 상차하여 致仕하고 奉朝賀가 되다. 함께 소명을 받은 朴世采가 尹拯과 논의를 같이하자 다시 板橋로 돌아오다. ○ 6월, 「朱子大全封事奏箚箚疑」를 올리다. ○ 10월, 다시 上京하여 李端夏, 朴世采와 만나다. 이후 朴氏 門下와의 불화가 깊어지다.
숙종 10 1684 갑자 康熙 23 78 明聖王后의 誌文을 짓다. ○ 5월, 尹拯에게 답서를 보내다. 이후 尹拯과 絶交하다.
숙종 11 1685 을축 康熙 24 79 1월, 權尙夏가 찾아와 수학하다. ○ 9월, 상소하여 栗谷, 沙溪 선생과 權順長 등을 伸辨하고 尹宣擧의 毁節과 尹鑴를 편든 죄를 들어 배척하다.
숙종 12 1686 병인 康熙 25 80 權尙夏, 李喜朝, 閔泰重과 「朱書箚疑」를 교감하고 함께 俗離山을 유람하다. ○ 「朱子大全箚疑」를 간행하라는 명을 받다. ○ 10월, 南澗精舍를 짓다. ○ 金萬基에게 편지를 보내 朴世采가 편찬한 「栗谷別集」을 다시 교정하기를 청하다.
숙종 13 1687 정묘 康熙 26 81 1월, 상소하여 陳情하고 겸하여 尹拯 父子의 일을 말하다. ○ 3월, 金萬基의 訃告를 듣다. ○ 9월, 長陵 移葬에 관한 의논을 올리다.
숙종 14 1688 무진 康熙 27 82 1월, 상소하여 羅良佐의 석방을 청하다. ○ 2월, 李端夏에게 답서를 보내 尹宣擧와의 전말을 서술하다. ○ 4월, 權尙夏, 金昌協 등과 屛川을 유람하다.
숙종 15 1689 기사 康熙 28 83 1월, 元子의 책봉이 너무 빠르다고 상소하였다가 濟州로 귀양가다. 己巳換局으로 南人과 少論이 대거 등용되다. ○ 윤3월, 「論孟或問精義通攷」를 편수하다. ○ 4월, 文谷 金壽恒의 訃告를 듣고 墓誌文을 짓다. ○ 拿鞫의 명이 내려 상경하다가 6월 8일, 井邑에서 賜死되다. ○ 7월, 水原 萬義 舞鳳山에 임시로 장사 지내다.
숙종 20 1694 갑술 康熙 33 - 甲戌換局으로 老論이 득세하자 관작이 회복되다. ○ 水原 萬義에 梅谷書院, 井邑에 考巖書院, 忠州에 樓巖書院을 세워 祭享하다.
숙종 21 1695 을해 康熙 34 - 특명으로 諡狀없이 ‘文正’으로 諡號를 내리다. ○ 德源의 龍津書院, 湖西의 華陽書院을 세워 제향하다.
숙종 22 1696 병자 康熙 35 - 趙靜庵의 祭享書院인 道峯書院에 병향하다.
숙종 30 1704 갑신 康熙 43 - 門人 權尙夏가 遺命에 따라 萬東廟를 세우다.
숙종 43 1717 정유 康熙 56 - 왕명으로 芸閣에서 「尤庵集」과 別集을 간행하다.
경종 3 1723 계묘 雍正 1 - 道峯書院에서 位牌가 黜享되다.
영조 1 1725 을사 雍正 3 - 道峯書院에 다시 배향하고 관원을 보내 致祭하다.
영조 6 1730 경술 雍正 8 - 曾孫 宋婺源과 門人들이 「經禮問答」 24권을 활자로 간행하다.
영조 8 1732 임자 雍正 10 - 附錄과 年譜 5책을 활자로 인행하다.
영조 32 1756 병자 乾隆 21 - 文廟에 배향하고 領議政에 추증하다.
영조 33 1757 정축 乾隆 22 - 淸州 靑山으로 移葬되다. 尹鳳九가 墓誌文을 짓다.
영조 52 1776 병신 乾隆 41 - 正祖 즉위 후 孝宗 廟庭에 배향하다.
정조 9 1785 을사 乾隆 50 - 驪江 大老祠에 賜額을 내리고 致祭하다.
정조 11 1787 정미 乾隆 52 - 9월, 平壤 監營에서 李命植이 「宋子大全」 102책을 목판으로 간행하다.
고종 38 1901 신축 光武 5 - 宋秉璿이 「宋子大全隨箚」 13권 6책을 목판으로 간행하다. (李世淵의 序, 宋秉璿의 跋)
- - 1927 정묘 - - - 南澗精舍에서 「宋書拾遺」와 함께 「宋子大全」을 重刊하다. (宋曾憲의 拾遺跋)

기사전거 : 年譜, 墓表(權尙夏 撰) 및 朝鮮王朝實錄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의 유고에 대한 수습과 정리는 저자가 楚山(井邑)에서 賜死된 이후 곧 適傳弟子인 權尙夏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權尙夏가 쓴 墓表(1710년 11월)에 의하면 “「朱子大全箚疑」, 「二程全書分類」는 長鬐에 유배되었을 때 저술한 것이고, 「語類小分」은 巨濟에 있을 때 편차한 것이며, 「問義通攷」는 濟州에서 완성한 것이고, 「心經釋疑」는 退溪講錄을 위해 왕명을 받아 添削한 것이다. 또 文集 백여 책이 장차 간행될 것이다.”라고 하여 朱子學 관계서적 외에 백여 책의 문집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權尙夏는, 1690년부터 崔邦彥, 李喜朝, 李箕洪, 金昌協, 尤庵의 손자인 宋疇錫과 함께 저서의 교정과 유고의 수습에 착수하였으며, 1691년 1월에 李箕洪에게 보낸 편지에서 진척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箚疑는 和哀(金昌協)에게 부탁해 교정을 보고 있는 중이고, 遺稿는 이미 완성된 草本이 40여 책인데 수합하기가 매우 어려우니 걱정스럽습니다. 年譜는 敍九(宋疇錫)가 맡았으나 초본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答李箕洪別紙, 寒水齋集 卷5) 그리하여 1692년 5월 경에는 이미 서찰 15책을 포함해 75책의 유문이 수습되었고, 宋疇錫이 年譜 5책을 정리하였으며, 續集ㆍ後集ㆍ別集으로 나누어 편차하려는 계획이 세워지는 등 작업이 매우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答李喜朝, 同上) 1695년에는 이미 전체의 규모가 잡혀 權尙夏가 정리한 초고본 외에 李喜朝에 의해 仁川에서 1질, 전라관찰사 李秀彥에 의해 湖南에서 1질이 등사되어 모두 3질의 草本이 만들어졌고, 1711년에는 문집의 中草本이 110여 책에 이르렀다.
이렇게 權尙夏가 정리한 문집 草本 40책이 현재 「尤庵遺稿」라는 이름으로 국립중앙도서관(貴425, 한46-가886)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를 黃江本이라고 한다.《黃江本》 이 寫本은 卷次의 구별없이 각 책마다 塗抹한 곳이 많고 문장을 보충할 곳에 附箋을 붙여 표시해 놓는 등 아직 편차 중에 있는 미완성의 稿本으로 보이는데, 1~2책은 詩, 3~20책은 書, 21~25책은 疏箚, 26책은 雜著, 27책은 記, 28~32책은 序跋, 33~35책은 祭文과 祝文, 36~40책은 行狀과 碑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黃江에 머물던 權尙夏와 서울의 李喜朝를 중심으로 추진되던 문집 정리는, 일이 진행되면서 내용을 刪節하여 일부만이라도 조속히 간행하자는 서울 門人의 주장과 全稿를 정밀하게 교정하여 신중하게 간행해야 한다는 權尙夏로 의견이 갈리었다. 당시는 비록 甲戌換局(1694)으로 尹鑴를 비롯한 南人 정국이 실추하여 저자의 관작이 회복되고 시호가 내려졌으며 저자를 奉享하는 書院이 설립되어 賜額을 받는 등 상황이 좋아졌지만, 尹拯으로 대표되는 少論과의 갈등이 표면화되고 있는 시점이었다. 따라서 권상하는 새로운 흔단을 야기할 가능성 때문에 문집의 간행을 미루기를 원하였고, 서울에서 老論을 이끌고 있던 李喜朝, 閔鎭厚 등은 빠른 간행으로 노론의 입지를 공고히 하고자 했던 것이다.
“지금 수집한 글이 비록 여러 권이 되었지만 아직 교정을 보지 못한 것도 많고 이미 교정을 본 것도 정밀하지가 않으니, 몇 달 사이에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간행한다면 어찌 경솔하지 않겠습니까. 「沙溪集」 같은 경우는 6책뿐이었고, 자손과 문하에 長者가 많았으니 校讎하고자 하였다면 어찌 어려운 일이었겠습니까? … 그 간에 時事가 근심할 만한 점이 또한 많았지만 老先生(尤庵)께서는 급급하게 여기지 않으셨으니 그 뜻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정교하면서 늦는 것이 졸렬하지만 속히 하는 것만 못하다고 하니 이처럼 의견이 다릅니다.”(答金昌協 1698년, 寒水齋集 卷5)
“孝廟朝에는 기휘할 문자를 극히 비밀히 하여 세자로 하여금 직접 소매에 넣고 선생의 직소에 전하게 하였습니다… 朱子가 「南軒集」을 修整할 때 疏章을 초록하지 않았으니 깊은 뜻을 알 수 있습니다. 「沙溪集」에 忌諱할 것이 오늘날의 문자(尤庵集)에 비할 바가 아니며, 門下와 子孫이 매우 많아서 힘이 부족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돌아가신 뒤 55년이 지난 을축년(1685)에 상의 명으로 인하여 비로소 간행하였습니다. 그 신중함이 이와 같았는데도 別集 1책은 本家에 간직해두고 간행하지 않았었습니다.”(答閔鎭厚 1717년, 同上 卷7)
위에서 볼 수 있듯이 權尙夏가 문집의 조속한 간행을 반대한 이유는, 첫째, 편차와 교정에 신중을 기하여 잘못되는 일이 없어야 하는데 너무 서두른다는 것, 둘째, 孝宗朝의 北伐과 관계된 忌諱해야 할 내용이 많은데 소홀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 셋째, 尹鑴, 尹拯 등 時事와 관계된 글이 많아 시기적으로 이르다는 점이다. 더구나 「家禮源流」의 편찬주체를 둘러싸고 벌어진 老少論간의 분쟁 속에서, 간행된 지 얼마 안 된 尹宣擧의 문집이 毁板火書의 처분(丙申處分 1716년)을 받는 것을 목격한 그로써는 여전히 망설여지는 일이었다. 따라서 반드시 간행하려고 한다면 尤庵先生疏箚로 제목을 붙여 중요한 疏箚와 啓辭 등만을 뽑아 批答과 함께 활자로 간행하자는 절충안을 내놓았다.(答李喜朝 1717년 5월, 同上 卷6)
결국 1717년 7월 4일 閔鎭厚의 건의로 肅宗이 芸閣에서 活字로 간행하도록 명함으로써 문집의 조속한 간행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權尙夏는 여전히 소극적이고 신중론자였다. “서울의 여러 공들이 간행을 주장하는 자가 매우 많다고 하니, 어찌 감히 한 사람의 의견으로 중론을 저지할 수 있겠습니까… 이왕 간행할 바에는 疏章 뿐만 아니라 序記와 詩文 등 기휘할 필요가 없는 글들도 아울러 간행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대가 연석에서 아뢰어 芸閣으로 하여금 인출하게 하였다 하니, 여러 군자들이 신중하게 精選하여 40~50권으로 만들어서 全集이라 명하고, 기휘해야 할 것들은 別集 또는 續集으로 호칭해서 추후에 인출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答閔鎭厚, 同上 卷7)
이에 저자의 曾孫인 宋婺源과 李喜朝 등이 주축이 되어 교정과 편차를 맡아, 3년 만인 1719년(숙종 45) 原集 158권과 別集 9권 도합 167권 63책의 「尤庵先生文集」을 校書館에서 鐵活字로 인행하였다.《尤庵集初刊本, 芸閣本》 이후 1730년(영조 6)에는 제자들과 편지로 經禮에 대해 문답한 「經禮問答」(經禮義疑라고도 함) 24권 10책이 역시 활자로 간행되었는데, 原集의 권158에 이어서 권159로 시작해 182권까지 卷次가 매겨져 있다. 이는 經禮問答을 일종의 續集으로 간주한 것으로 原集과 經禮問答, 別集 총 191권이 하나의 세트로 여겨져 후에 간행되는 「宋子大全」과 구별하여 모두 ‘舊本’이라고 부른다. 2년 후인 1732년에는 宋疇錫이 편차했던 年譜 5책을 宋婺源이 다시 정리해 역시 활자로 인행하여 구색을 갖추었다. 「尤庵集」초간본은 현재 규장각(奎4069, 6515), 장서각(4-6335),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1572)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이 중 국립중앙도서관본은 원집과 별집, 경례문답, 연보까지 모두 완비된 본이다.
「尤庵集」의 구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原集 권1~4는 賦와 詩가 詩體別로 편차되어 있고, 권5~20은 疏箚가, 권21~25는 書啓와 獻議, 권26~85는 書, 권86~89는 雜著, 권90~96은 序跋과 記文이, 권97은 銘ㆍ箴ㆍ贊ㆍ上樑文 등이 실려 있고, 권98~100은 祝文과 祭文이, 권101~116은 碑文, 권117~125는 墓碣, 권126은 陵誌, 권127~133은 墓誌, 권134~145는 墓表, 권146~148은 諡狀, 권149~154는 行狀, 권155는 遺事와 語錄이, 권156~158은 傳이 실려 있다. 전체적인 편차의 원칙은 權尙夏의 의견대로 「南軒集」을 전범으로 삼았으며, 기휘할 만한 내용은 別集으로 따로 편차하였다. 別集 권1은 詩 4題, 권2는 〈己丑封事〉와 〈丁酉封事〉, 권3은 疏箚 7편으로 내용은 대부분 孝宗과 관계된 大義, 尹拯과 관계된 黨論, 그리고 죽기 전에 올린 己巳遺疏이다. 권4는 書 16편으로 역시 孝宗과 北伐을 의논한 일, 尹鑴와 尹拯에 대한 비난, 淸의 年號를 쓰는 문제 등 時事와 관련되어 忌諱할 만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권5는 〈燕居雜錄〉, 〈自敍文〉 등 雜著 5편과 序跋, 祭文, 告文이고, 권6~7은 碑文 10편, 권8은 寧陵誌文, 권9는 金尙憲과 李浣, 黃璡의 墓誌이다. 그러나 別集의 경우 忌諱하는 내용을 뽑아 실었다고는 하지만 사실 原集에도 비슷한 내용의 글이 워낙 많으며 또 別集을 같은 시기에 함께 인행하여 배포하였다는 면에서 볼 때 숨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尤庵의 사상적 특징, 즉 大義(北伐)를 떨치고 異端(尹鑴)을 배척하였다는 면을 부각시켜 강조한 듯한 인상을 준다.
「尤庵集」의 간행 이후 본집에 수록되지 못한 저자의 유문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제자들에 의해 곧 後集의 준비가 이루어졌다. 이는 현재 몇 종의 寫本으로 남아 있는데, 국립중앙도서관의 「逸書」 40권 20책(貴423-한46-가1424), 규장각의 「大老逸稿」 40권 40책(奎4855), 미국버클리대학소장의 「宋子大全續」 40권 20책(아사미문고본) 등으로 表題는 모두 다르지만 卷首題는 모두 「尤庵先生後集」으로 되어 있다. 冊數에 관계없이 내용은 거의 비슷하여 권1~2는 詩와 疏箚, 書啓, 書이고, 권3~28은 書, 권29~36은 雜著, 序, 記, 跋, 祝文, 祭文 등이며, 권37~40은 墓表와 行狀, 諡狀 등이다. 국립중앙도서관본에는 刊本 「尤庵集」과 중복된 부분에 붉은 줄을 그어 표시하고, 異本과 대교한 附箋이 붙어 있으며 字句의 오류를 교정한 흔적이 많이 보이는데, 규장각본은 罫印寫本으로 비교적 정리된 상태이고, ‘弘齋’, ‘春宮’ 등 正祖의 장서인이 날인되어 있어 두 본의 先後를 짐작할 수 있다. 필사 시기는 대략 「尤庵集」이 간행된 肅宗末부터 英祖朝 사이로 추정된다.《尤庵後集》
正祖는 즉위 직후부터 저자와 老論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린 李明徽에 대해 鞫問과 유배라는 단호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老論의 정치적 위상을 인정해 주었다. 이어 宋時烈을 孝廟에 추향하도록 명하고(1776년 5월), 萬東廟에 御筆額子를 하사(1776년 8월)하는 등 저자에 대한 추숭 사업도 잇달아 거행하였다. 아울러 後孫의 錄用을 명하고 자신이 지은 〈兩賢傳心錄〉과 〈尤庵集御製序文〉을 보여 주면서 누락된 유문과 年譜를 포함해 全書를 간행할 것을 명하였다.(承政院日記 1776年 6月 3日條) 이해 9월부터 5대손 宋煥箕를 중심으로 유문의 수집과 편차가 시작되었는데 林川 郡守 宋宅圭, 宋煥德, 李顯民, 李敏輔, 金熹 등이 참가하여 1780년경 편차 기준을 마련하고 대강 正本의 편성을 완료하였다.
편차 기준을 정할 때 經禮問答과 別集, 附錄을 모두 합편한다는 원칙에는 다같이 일치하였으나 金元行은 일반적인 문집의 원칙대로 精選해서 「尤庵集」과 全書가 함께 행해지도록 하자는 의견이었다.(答李士謙, 漢湖集 卷5) 그리고 宋煥箕가 만든 修正凡例에서도 缺句가 있는 詩는 제외하고, 의례적인 사직소와 사적인 내용의 편지는 산절하며, 잡저와 산문은 事實ㆍ義理ㆍ文章 중 어느 한 가지 기준에 충족되면 채택한다고 하여 어느 정도 刪節을 위주로 하였지만, 결국은 저자의 작품은 片言隻字라도 다 실어야 한다는 분위기에 따라 全文의 收錄이 결정되었다. 이와 같이 새롭게 편차된 「宋子大全」은 1787년 9월 평안 감사 李命植의 주선으로 총 236권 102책이라는 거질이 목판으로 간행되었다.《宋子大全初刊本, 箕營本》 이는 평양 감영에서 간행되었기에 箕營本이라 하며 「尤庵集」 舊本과 구별해 ‘新本’이라고도 한다. 간행은 1786년 평안 감사 趙璥이 자신의 봉록 萬緡을 내놓아 시작하였는데 그가 체직되자 李命植이 이어서 완성한 것이다. 그러나 102책 전부가 平壤에서 간행된 것은 아니고 卷首와 目錄 2책, 年譜 및 附錄 19권 9책은 서울의 校正所에서 간행한 것이다. 箕營本의 표지에는 「宋子大全」이라는 表題와 함께 “崇禎參丁未箕營開刊”이란 刊記가 함께 실려 있다. 현재 완본은 규장각(奎3542), 성균관대학교 중앙도서관(D3B-608),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영남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으며 국립중앙도서관과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등에는 零本이 소장되어 있다.
大全本은 舊本과 구별되는 몇 가지 특징이 보이는데, 첫째는 「宋子大全」이라는 명칭의 특이성이다. 우리나라에서 姓에 ‘子’를 붙여 호칭한 것도 栗谷과 退溪 외에는 없는 이례적인 일인데, 문집에 大全이란 호칭을 붙인 것은 본집이 유일한 예이다. 「宋子大全」이란 題名에 대해 正祖가 賜名하고 판각을 지시한 것처럼 되어 있기도 하나(宋子大全隨箚序) 이는 사실과 다르다. 正祖는 오히려 大全이란 이름이 관례에 맞지 않으며, 또 다른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어 저자에게 욕을 끼칠까 우려하였다.(弘齋全書 162권 日得錄) 사실 ‘宋子大全’이란 명칭은 이미「宋子大全續」(아사미문고본)에서 보이듯이 後集의 편차시부터 쓰여 왔으며, 저자를 東方의 朱子로 숭앙하는 老論界에서는 정론화되어 왔던 이름이다. 따라서 凡例에서도 “선배들이 이미 정한 論이자 士林이 동의한 의논”이라고 한 것이다. 결국 이 題名은 “朱子는 聖學의 集大成이고, 저자는 朱子의 集大成”이라는 당시 尤庵에 대한 숭앙의식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는 舊本이 「南軒集」을 전범으로 삼은데 반해 新本은 「朱子大全」을 편차의 기준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에 「朱子大全」의 양식대로 詩賦가 書札의 제목을 손질하고, 아울러 別集과 附錄, 經禮問答 등을 모두 원집에 합편하였으며, 印本에서 누락되었던 後集의 시문까지 모두 첨가하여 양이 대폭적으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詩 부분은 연도를 상고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編年으로 되어 있는 「朱子大全」을 따르지 않고 舊本을 따라 詩體別로 편차하였으며, 편지의 경우도 내용분류를 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舊本에 따라 인물별로 편차하였다. 셋째는 상세한 교감을 거쳐서 黃江本과 芸閣本을 대교한 결과를 「退溪集」처럼 頭註로 표시해 주었다는 것이다. 舊本에서는 본문 내에 分註의 형태로 기재하였다. 또 年譜는 1732년 간행되었던 舊本의 연보를 바탕으로 宋煥箕가 添削하여 정리하고 英正祖 年間의 사실을 追錄한 것인데, 舊本은 綱은 大字로 細目은 小字雙行로 처리하였으나 新本은 모두 같은 크기의 글자를 써서 單行으로 하였다.
이 箕營本 板木은 후에 華陽洞書院의 大全藏板閣에 옮겨 보관되었다. 그러나 1907년 丁未七條約에 대한 反日義兵 봉기때 藏板閣이 있던 煥章寺가 방화되는 바람에 冊版이 소실되었다. 그 후 1927년 儒林과 후손의 노력으로 大田 興農의 南澗精舍에서 다시 목판으로 중간하였다.《大全重刊本》 중간본은 箕營本을 그대로 覆刻한 것이기 때문에 내용과 구성이 같으며 초간의 간기와 함께 “後百四拾年丙寅(1927) 杞菊亭重刊”이란 刊記가 실려 있다. 현재 규장각(古819.53-So58s-v.1-102), 장서각(4-6201), 국립중앙도서관(무구재古3648-文39-65),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D1-A736) 등에 소장되어 있다.
처음 大全 箕營本의 편찬시 많은 詩文이 추가로 수록되어 卷帙이 너무 많아졌고 또 이미 睿覽을 거쳤다는 이유로 이후에 수집된 유문에 대해서는 더 첨가하지 않고 續集의 간행을 기약하였다. 따라서 유문에 대한 수집과 편찬이 계속 이어졌으며 또 한편으로는 저자의 글에 대한 註解書와 抄錄, 학문과 행적에 대한 글이 끊임없이 편찬 간행되었다.
저자의 9대손인 淵齋 宋秉璿은 1872년에 黃江本 중 大全에서 누락된 詩文과 기타 전적에서 수집한 글을 모아서 朱書拾遺의 예에 따라 宋書拾遺를 편차해 두었는데, 1927년 南澗精舍에서 9권 4책의 목판으로 간행하였다.《宋書拾遺》 여기에는 10대손 宋曾憲의 跋文이 있어 간행의 경위와 南澗精舍 옆에 있는 藏板閣에 大全冊板과 함께 판목이 보관되어 있음을 서술하고 있다. 아울러 2년 뒤인 1929년에는 續拾遺가 附錄과 함께 3권 2책으로 간행되었다.《宋書續拾遺》이는 「宋子大全」의 중간 때 각처에서 보내온 尤庵의 유문과 관계 기록을 9대손 宋秉夔가 편차한 것인데 역시 1929년에 南澗精舍에서 간행하였다. 拾遺는 현재 규장각(古3428-429),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407),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고, 續拾遺는 국립중앙도서관(한92-4)에 소장되어 있다.
隨箚는 「宋子大全」의 註解書이다. 본래 저자의 傍曾孫인 潭谷 宋周相이 「尤庵集」을 대상으로 문집의 내용 중 난해한 구절이나 故事를 인용한 부분에 대해 板別로 註를 내어 「宋書節要集解」를 撰하였는데, 이것은 退溪 李滉이 지은 「朱子書節要記疑」를 모방한 것으로 이를 潭谷隨箚라고 부른다. 그러나 「宋子大全」의 간행 이후 板次가 맞지 않게 되자 8대손인 宋近洙가 「朱子大全箚疑」를 모방하여 전면적으로 재편집하는 동시에 潭谷隨箚의 오류를 수정하고, 時事出處에 관한 주석을 보충하였으며, 권말에 大全에 자주 나오는 인물 중 약 200여 명의 人名錄을 작성하여 붙였다. 총 13권 6책으로 편찬되어 1867년 목활자로 간행되었다. 이것을 宋秉璿이 다시 교정하고 정리하여 1901년 華陽洞書院에서 목판으로 중간하였다. 권말에 “辛丑開刊華陽藏板”이라는 刊記가 실려 있다.《宋子大全隨箚》 隨箚 초간본은 현재 규장각(古1360-6), 장서각(4-6202),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1017), 성균관대학교 중앙도서관(D3B-609) 등에 있으며, 목판본인 중간본은 규장각(奎15693), 국립중앙도서관(무구재古3648-문39-64)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787년 간행된 箕營本 「宋子大全」에, 1901년 重刊된 「宋子大全隨箚」, 1927년 간행된 「宋書拾遺」, 1929년 간행된 「宋書續拾遺」를 합부한 것으로 국립중앙도서관장본인 續拾遺를 제외하고 모두 규장각장본이다.
단 본 영인저본 중 「宋子大全」 권4의 제2판, 권29의 제23판, 권62의 제27판, 권87의 제8판, 권95의 제22판은 落張이고, 권203의 제39판은 상태가 좋지 않아 동일본인 규장각장본(奎3543)에서 보완 대체하였으며, 권204의 제2판과 4판은 落張이므로 동일본인 규장각장본(奎3949)에서 보완하였다. 또 「宋子大全隨箚」 권3의 제19판, 제24판은 落張이고, 제25판은 중복되었으므로 동일본인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장본(812.98-송시열 송-수-판)에서 보완하였다.

기사전거 : 權尙夏年譜(寒水齋集), 宋時烈年譜(宋子大全), 宋煥箕年譜(性潭集), 宋婺源墓誌(李縡 撰, 陶菴集 卷43), 宋時烈墓誌(尹鳳九 撰), 先祖年譜後跋(宋煥箕 撰, 性潭集), 宋子大全解題(辛承云, 國譯宋子大全), 尤庵 宋時烈과 그의 저술(宋俊浩, 尤庵思想硏究論叢) 등에 의함
 구성과 내용
본집은 일단 규모면에서 당시까지 발간되었던 개인 문집 중 가장 巨帙에 속한다. 別著類를 제외한 저자의 모든 詩文을 한곳에 모아 집대성하려는 노력은 저자의 위치가 학계와 정계에서 공고해질수록 더욱 커져 「宋子大全」의 간행 이후에도 宋書拾遺, 宋書續拾遺, 宋子大全隨箚 등 끊임없는 증보를 가져왔다. 전체적인 구성을 일별해 보면, 目錄 2권, 宋子大全 原集 215권, 附錄 19권, 宋書拾遺 9권, 宋書續拾遺 3권, 宋子大全隨箚 13권으로 도합 261권 130책 10258판이다.
먼저 송자대전을 살펴보면, 大全의 편차 원칙을 설명한 〈凡例〉가 있고, 215권의 詩文 제목과 편수를 기록한 總目錄이 上一二, 下一二 2책으로 나뉘어 실려 있다. 이어서 卷首에는 正祖가 저자의 祭享祠宇인 大老祠, 華陽書院, 考巖書院 등에 지은 御製碑銘과 祭文 8편이 연도순으로 수록되어 있다. 卷首가 附錄의 기타 賜祭文과 따로 편차된 것은 본서가 正祖의 命刊이라는 형식으로 간행되었기 때문이다. 내용별로 구성은, 권1~4는 詩賦, 권5~26은 疏箚, 書啓, 獻議 등의 公車文이고, 권27~129는 書簡文이고, 권130~153은 雜著와 記, 序, 跋, 祭文 등의 散文이다. 권154~215는 碑文과 墓碣文, 行狀 등의 傳記文이고, 다음 19권은 附錄이다.
권1~4는 詩賦로 620題 856수가 詩體別로 분류되어 있다. 「朱子大全」의 경우는 詩賦가 연도별로 편차되어 있는 데 반해 여기서 詩體別로 수록된 이유는 원고의 수집 정리 때부터 이미 저작 연도를 구명하기 어려운 작품이 많았기 때문에 舊本의 체제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따라서 본서도 「尤庵集」과 같이 권1은 賦와 五七言古詩, 권2는 五七言絶句, 권3은 五言律詩, 권4는 七言律詩의 순서로 수록되어 있다. 같은 詩體 內에서는 연도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저자의 유일한 賦인 〈次感春賦〉는 朱子의 〈感春賦〉에 차운해 지은 것으로 孝宗이 승하한 뒤 자신의 道를 이룰 수 없는 슬픔과 주자에 대한 敬慕를 읊은 것인데, 저자는 감히 朱子의 시에 次韻하는 것을 참람되게 여겼으나 尹鑴의 권유로 지었다는 설도 있다. 권2의 〈次贈某人〉의 某人은 바로 尹鑴인데 이 시를 지은 1652년까지만 해도 교분이 유지되고 있었으나 그 뒤로는 賊鑴로 호칭이 바뀌어 나타난다. 詩를 주고받은 사람은 朴世采, 尹宣擧, 金壽恒, 金壽增, 李喜朝, 李惟泰 등인데 특히 손자인 宋疇錫에게 준 시가 많아 그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음을 알 수 있다. 내용의 특징적인 점은 〈登鐵嶺吟〉처럼 孝宗과 朱子에 대해 사모하는 마음을 읊은 시가 많다는 것이다. 특히 詩 곳곳에 朱子의 말과 故事를 인용하거나 그의 행적을 따르는 내용이 많아 주자에 대한 저자의 흠모가 종교에 가까웠던 듯하다. 권4의 〈次康節首尾吟韻〉은 134수나 되는 거작인데 이와 같이 邵雍의 시에 차운한 작품도 꽤 있다. 그러나 다른 저작에 비해 시가 점하는 비중이 그리 많지 않으며 그중에서도 挽詩가 많은 편수를 차지하고 있다. 시의 배경을 설명한 詩序와 같은 글이 많으며 저자의 自註와 편자의 註가 고루 있어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기에 편리하다. 頭註는 舊本인 「尤庵集」과의 對校 결과를 적어 놓은 것이다.
권5~26은 封事, 疏箚, 書啓, 獻議 등의 공거문이다. 저자가 老論의 영수로 오랫동안 정국을 주도해왔기 때문에 당시 쟁점이 되었던 사안에 대해서는 거의 빠짐없이 글을 올렸다.
권5는 저자의 정치사상의 結晶이라고 할 수 있는 〈己丑封事〉와 〈丁酉封事〉이다. 〈己丑封事〉는 孝宗 즉위년(1649)에 장령으로 제수되어 처음 올린 것이다. 聖德을 닦고 학문에 힘쓰기를 권하는 내용인데 이 중 9개조는 朱子의 〈己酉封事〉의 條目을 채택한 것으로 자세한 주와 설명이 곁들어져 있다. 〈丁酉封事〉는 효종 8년(1657), 克服과 修攘의 대책을 논하며 北伐을 나라의 義理로 천명한 것인데 朱子의 故事에 따라 책자로 올려 淸 나라에 누설되지 않게 하였다.
권6~21은 疏箚와 啓辭이다. 334편의 소차와 8편의 계사가 각기 연도별로 수록되어 있는데 유배되어 있던 기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해마다 실려 있다. 권6은 1645년 鳳林大君의 보양관에 임명되자 사직한 〈辭輔導東宮之命疏〉부터 1650년 2월 올린 〈辭職疏〉까지 모두 22편이 실려 있다. 당시 大同法 실시를 둘러싼 金堉과의 불화로 스승인 金集이 귀향해버렸으며, 또 金自點 餘黨의 참소로 淸의 査問이 나와 저자가 조정에 있기 힘든 상황이었다. 권7은 1650년 7월~1657년 1월까지 12편의 소차가 실려 있는데, 대부분이 사직소와 하사한 食物을 사양하는 소이다. 권8은 1657년 5월~1659년 4월까지 37편으로 저자가 효종의 知遇를 받아 가장 활발하게 국정에 참여한 기간이다. 이 중 〈辭贊善疏〉의 〈三疏〉는 바로 〈丁酉封事〉로 내용이 권5에 실려 있어 이곳에는 제목만 있다. 〈辭貂帽箚〉와 〈辭貂裘箚〉 등은 저자가 하사품을 거듭 사양하자 孝宗이 遼東 벌판의 추위를 이기기 위해서라는 의미심장한 하교와 함께 내린 것인데 저자의 편지나 시문에 자주 언급되고 있다.
권9는 1659년 5월 효종의 승하 이후 올린 41편인데 대부분 사직소이다. 〈洪汝河疏後乞免疏〉는 李厚源, 宋浚吉 등과 함께 洪汝河의 공격을 받자 사직한 소이며, 〈以山陵事引罪…〉는 寧陵(孝宗陵)을 水原에 쓰는 것을 반대하고 健元陵에 쓸 것을 주장한 소이다. 〈誌文封進箚〉는 李景奭 등이 誌文에서 崇明排淸 등의 내용을 수정하기를 청하자 誌文을 인출하여 발표하지 말 것을 청하고 아울러 湖南의 大同法 실시 반대를 청한 것이다. 권10은 1660년~1661년 3월까지 올린 12편이다. 1660년은 己亥禮訟에 이은 南人들의 반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을 때로 許穆과 尹善道의 상소가 잇달았는데 이에 대한 상소가 〈尹善道疏後待罪疏〉이다. 권11은 1661년 4월~1665년에 올린 22편이 실려 있다. 〈趙絅疏後待罪疏〉는 趙絅이 尹善道를 변호하자 다시 대죄소를 올린 것으로 禮論의 후유증이 가시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顯宗 기간 동안은 저자가 직접 정계에 참여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내용의 대부분이 辭職疏와 乞退疏이다. 권12는 1666년~1668년 11월의 35편이다. 〈陳情待罪疏〉는 李䎘 등이 許積을 논하다가 유배되자 구원한 내용이고, 〈黃壖疏後待罪疏〉는 黃壖이 저자가 山林에서 국정을 조정한다고 비난하자 대죄한 소이다. 권13은 1668년~1670년의 29편이다. 〈留都大臣李景奭…〉은 李景奭이 三田渡碑文을 지었던 일을 가지고 孫覿에 비기어 비난한 것인데 尊周(尊明)의 義理에 위배되는 것은 단호히 배척한다는 저자의 원리주의를 드러낸 글로 당시 논란을 일으킨 상소이다. 이 외에 神德王后의 祔廟를 청한 차자도 저자가 주요한 義理를 세웠다고 자부한 차자이다. 권14는 1671년~1672년의 13편인데 〈陞拜左議政…〉은 南人 재상인 許積에 대한 비난과 아울러 宋浚吉을 구원한 내용이다. 권15는 1673년~1674년 3월의 14편이 실려 있다. 외척인 金佑明과의 대립으로 寧陵 遷葬의 表石 문제, 閔愼의 喪服 문제가 드러난 〈辭寧陵遷葬誌文撰進疏〉와 〈因國舅論斥待罪疏〉가 실려 있다. 권16은 1674년~1681년 2월의 28편이다. 1674년 2차 禮訟이 일어나자 자신의 禮說을 기록하여 진달하려다 郭世楗의 상소로 그만 둔 〈擬疏〉 이후에는 甲寅換局으로 유배 중이었기 때문에 올린 소차가 없다. 庚申換局으로 다시 복귀한 1680년 이후의 소차가 많은데 〈進修堂奏箚〉는 肅宗에게 효종이 세웠던 뜻과 당시의 정책을 계승하도록 아뢴 것이다. 권17은 1681년~1683년 3월까지의 27편이다. 이 기간의 주요 상소로는 스승인 金長生의 문묘종사를 청한 〈論文廟從祀疏〉, 수령의 선발과 水車의 실시 등 13조목을 주달한 〈條陳時政箚〉, 金益勳에 대한 용서를 청하여 少論과의 分黨을 가져온 〈引咎仍乞致仕箚〉 등이 있다. 권18은 1683년~1684년 1월까지의 17편으로 그중에는 저자의 필생의 노력이 깃든 朱子封事와 奏箚에 대한 箚疑를 올린 箚子가 있다. 이는 「朱子大全箚疑」로 확대되어 저자가 죽기 직전까지 수정과 교정을 반복하다가 결국 제자인 金昌協, 權尙夏에 의해 완성되었다. 〈朴泰維疏後待罪疏〉는 저자가 주장하던 太祖 廟號의 追尊을 少論이 반대하자 올린 소이다. 권19는 1684년~1687년 16편인데, 〈進文元公遺稿…〉와 〈論… 陳尹拯事疏〉는 尹宣擧, 尹拯 父子와의 불화의 전말, 그리고 尹鑴의 異端 등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어 매우 주목할만하다. 권20은 모두 1689년에 올린 6편이다. 이 중 〈辨訿毁牛溪…〉는 牛溪와 栗谷 門下의 갈등을 설명하면서 尹宣擧와 成文濬 등을 비난한 내용이고, 이하는 己巳換局으로 유배되기 직전에 孝宗의 手札을 올리려고 했던 疏와 濟州道와 井邑에서 올린 遺疏이다.
권21은 太學生 때 지은 〈擬兩賢辨誣疏〉 등 3편의 疏와 啓辭 8편이다. 권22~25는 書啓이다. 저자가 본격적으로 출사한 1659년부터 1687년 동안에 올린 195편이 연도별로 수록되어 있다. 승지, 사관, 예판 등을 보내 끊임없이 전유하고 하교한 것에 대한 짤막한 답이다.
권26은 獻議로 1659년~1687년 사이에 올린 36편이다. 〈慈懿殿服制議〉에서 〈練服變改及許穆圖說辨破議〉까지는 孝宗의 喪에 대한 慈懿大妃의 服制를 논한 것으로 許穆 등 南人측에서 三年說을 주장하고 나서자 經典을 인용하여 朞年服을 주장한 내용이다. 이 외에 宗廟와 山陵의 문제, 文廟에 대한 獻議 등이 실려 있다.
권27~129는 書이다. 大全에 실려 있는 서간은 모두 5500여 편으로 저자의 저작 중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으며 또한 저자의 학문과 정치적 성향, 당시의 상황과 교유 관계 등을 살필 수 있는 가장 주요한 자료이다. 그러나 그 양이 너무 방대하여 일일이 살펴보기 힘들다. 편지를 주고받은 대상은 약 550명에 달한다. 尤庵이 활동한 기간이 길었고 또 그가 점하고 있던 사회적, 학문적 위치를 반영하듯이 老少論을 막론하고 당시의 명사들은 대부분 다 포함되어 있다. 編次는 수신자별로 모으고 다시 연대순으로 배열되어 있는데 애초 주제별로 모은다는 계획이 있었으나 全稿를 수록하는 쪽으로 편찬 방향이 기울면서 내용에 따라 구별한다는 것이 역부족이었던 듯하다. 대체로 西人의 정치적 대선배인 金尙憲(18), 安邦俊(6)과 스승인 金集(6) 등 비중있는 대상이 권27을 차지하고 있고, 교유가 잦았던 인물인 李厚源(174), 宋浚吉(213), 兪棨(144), 洪命夏(41), 鄭瀁(34), 尹文擧와 尹宣擧(165), 權諰(36), 李惟泰(197) 등이 권28~41에 실려 있다. 권42~111에는 문인 및 후배들로 李廷夔(29), 李翔(80), 李端夏(177), 金壽增(46), 金壽興(115), 金壽恒(126), 閔鼎重(224), 閔維重(238), 朴世采(156), 宋奎濂(74), 李端相(24), 李之濂(26), 金萬均(25), 李選(107), 金萬基(93), 金益廉(38), 趙根(62), 申啓澄(44), 金萬增(102), 金萬埈(81), 尹以健(40), 權尙夏(89), 李箕洪(48), 金昌協(43), 李喜朝(76), 黃世楨(63), 尹拯(50) 등이 실려 있으며, 기타 인물 및 書院과 가족에게 보낸 편지가 권112 이후에 편차되어 있다. 가족 중에는 아우인 宋時燾(82)와 宋時杰(51), 아들인 宋基泰(79), 손자인 宋殷錫(64)과 宋疇錫(63) 등에게 보낸 편지가 많다. 편지의 내용 중에 朱子 등 宋代 유학자의 故事를 인용한 부분과 당시의 政勢나 특별한 사안과 관련되어 알기 힘든 부분은 「宋子大全隨箚」를 이용하면 비교적 이해하기 쉽다.
권130~136은 雜著로 모두 89편이다. 經書에 대한 의론과 禮設, 字說, 時事에 대한 글, 자손에게 전하는 글 등이 실려 있다. 〈栗谷別集訂誤〉는 朴世采가 편찬한 栗谷別集 중 수정해야 할 내용을 근거와 함께 제시한 것인데, 尤庵은 이 별집의 판본을 부수어버려야 한다고까지 말하였다. 〈朱子言論同異攷〉는 「朱子大全」과 「語類」에서 보이는 주자의 상반된 견해들을 뽑은 것인데 1689년 유배지에서 쓴 글로 말년까지 주자에 대한 탐구를 그치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看書雜錄〉과 〈雜錄〉도 朱子의 의리와 출처에 대해 논하고 栗谷의 장점과 退溪 학설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기록한 것이다. 인물에 대한 논평에서는 朱子를 얼마나 배우고 인정했는가 하는 점이 그 기준이 되고 있다. 예컨대 浦渚 趙翼의 경우 朱子學에 의문을 갖고 있었지만 孔子 이후의 第一人으로 추존했다는 점을 들어 인정해주고, 尹鑴는 주자를 배척하였으므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斯文辭賊이며, 尹宣擧는 이런 辭賊과 교유를 끊지 않고 세상을 속였으니 더더욱 용서할 수 없다는 논리이다. 저자는 이러한 異端이 횡행하는 것은 朱子學이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고 자신이 「朱子大全箚疑」를 저술하는 것도 이에 연유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尹鑴와 尹宣擧, 尹拯에 대한 저자의 비난은 이 밖에도 〈燕居雜錄〉, 〈偶記〉, 〈瑣錄〉, 〈雜記〉, 〈蓬山雜記〉, 〈示諸子孫姪孫等〉 등 곳곳에 보이고 있다. 대체로 雜著에는 중복된 내용이 종종 보이는데, 退溪의 「論語」 末則是本說에 대한 저자의 異見도 〈看書雜錄〉과 〈退溪四書質疑疑義〉, 〈論語末則是本說〉에 모두 같은 내용으로 나온다. 권132의 〈華陽洞客位咨目〉은 「朱子大全」의 〈休致後客次咨目〉을 모방해 지은 것으로 세상의 시비에서 벗어나고픈 저자의 심정을 드러낸 것이다. 이 외에 許穆과 尹鑴의 禮論을 반박한 禮說, 그리고 字說과 堂亭 등 건물에 대한 說, 呈文과 策題 등이 수록되어 있다.
권137~150은 序, 記, 跋, 銘, 箴 등이다. 권137~139에 실려 있는 序는 모두 104편으로 詩文集 등 간행 서적에 대한 序, 族譜序가 60여 편이고 30여 편이 送序이며, 나머지는 圖序와 모임에 대한 序 및 詩序이다. 저자는 학계와 정계를 대표하는 인물인데다 長壽한 관계로 당대에 간행되는 문집에 대한 序跋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였다. 또 당시는 사회적으로 丁卯, 丙子亂 이후 많은 典籍이 소실되어 남은 문헌에 대한 간행이 주를 이루었고, 또 宣祖 이후 이른바 ‘穆陵盛世’ 시대 문인 학자들의 文集이 간행되는 시기였으므로 특히 주요한 문집들이 많았다. 「睡隱集」, 「圃隱集」, 「西坰集」, 「葛川集」, 「守夢集」, 「靜觀集」, 「澤堂集」, 「市南集」, 「孤竹集」, 「畸庵集」, 「沙溪遺稿」, 「河西集」, 「泛翁集」, 「月沙集」 등의 序가 실려 있다. 권140~145는 188편의 記文으로 樓亭, 客舍, 祠宇, 書院 등 건물에 대한 기문 및 事實記와 遊記 등 다양한 내용이 실려 있다. 권146~149는 시문집과 저서, 書畫와 詩卷, 筆跡에 대한 跋인데, 특히 白沙 李恒福과 관련된 〈白沙眞蹟跋〉, 〈白沙遺事跋〉, 〈白沙帖跋〉, 〈書白沙文忠公錄卷後〉, 〈書白沙鐵嶺歌後〉, 〈書白沙… 上批後〉 등의 글이 많다. 권148에 있는 〈書宋子愼剖擊許穆儀禮說後〉의 宋子愼은 宋尙敏으로 저자의 門人이다. 1679년 許穆의 의례설을 공격하는 소를 올렸다가 許積의 탄핵을 받고 杖死하였는데 그해 10월에 그를 기리며 쓴 것이다. 권150에는 金壽興, 金壽恒 형제의 知止窩와 坎亨窩에 대한 銘을 비롯한 12편의 銘, 〈主一齋箴〉 1편, 畫像贊 4편, 손자인 宋殷錫, 宋疇錫, 宋晦錫, 宋圭錫의 혼례에 쓴 婚書 7편, 上樑文 5편이 실려 있다.
권151~153은 祝文과 祭文, 哀辭이다. 祝文으로는 金宏弼, 趙光祖, 李珥, 金長生, 金集 등을 書院과 祠宇에 봉안하는 축문과 부형, 사우, 친지의 사당이나 묘소에 고하는 告由祝文 등 78편이 실려 있다. 이 중 〈告沙溪先生墓文〉은 1689년 2월 濟州로 귀양가는 길에 스승의 묘에 들러 전후의 사정을 고하고 朝聞道夕死可矣의 각오를 피력한 글이고, 〈告皇考睡翁…墓文〉은 제주에서 다시 돌아오던 중 죽음을 예감하고 지은 것으로 평생 부친의 가르침을 따랐다는 것과 의리를 수호했다는 것을 자부하고 있다. 당시 저자의 부친인 睡翁 宋甲祚가 光海君朝에 廢母論 疏에 가담했다는 비난을 받았는데 이에 대한 원통함도 아울러 서술하고 있다. 권152~153은 114편의 祭文과 金壽恒의 딸에 대한 哀辭 1편이다. 沙溪先生에 대한 祭文을 비롯하여 宋浚吉, 權諰, 鄭澈, 兪棨, 李惟泰 등과 門人, 친지, 亡子와 亡室에 대한 글인데, 尹宣擧의 제문에서는 역시 尹鑴에 대한 일을 언급하고 있다. 祝文의 경우는 내용의 성격에 따라 분류되어 있지만 祭文은 대체로 저작 연도순으로 수록되어 있다.
권154~171은 神道碑 96편, 遺墟碑와 廟庭碑, 旌閭碑 등 25편이 실려 있다. 神道碑는 법제상 2품 이상의 관직에 대해서만 허용되는 것인데 96명의 신도비문을 지었다는 것은 저자의 학문적, 정치적, 사회적 지위를 짐작케 한다. 尹倬, 白仁傑, 鄭澈, 金集처럼 墓誌나 墓表에서 중복되는 인물도 상당수 있다. 권154~155는 鄭夢周를 비롯하여 睡翁府君까지 중요 인물 순으로 수록되어 있고, 이 뒤로는 대개 저작순으로 실은 듯하다. 이 밖에 紫雲書院, 竹林書院, 滄洲書院 등 서원의 廟庭碑와 趙光祖, 朴彭年, 成三問의 유허비, 효자ㆍ열녀의 旌閭碑가 실려 있다.
권172~180은 成守琛, 成運, 丁熿, 權韠 등의 墓碣文 108편이 실려 있다. 이 중 成文濬의 묘갈문에서는 光海朝 大北과의 관계를 언급하여 牛溪 집안과 불화를 빚게 되었고, 尹拯의 부탁으로 지은 尹宣擧의 묘갈명은 懷尼是非(저자는 懷德에, 尹拯은 尼山에 거주하였음)를 야기시켜 결국 사제지간이 老少論으로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권181은 陵誌 3편이다. 孝宗의 寧陵誌文과 遷陵時 지은 識가 부기되어 있다. 尤庵과 孝宗은 魚水之契로 비유되어 효종은 大業을 이루려는 큰 뜻을 지니었고 우암도 이로써 大義로 삼아 자부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志業을 지문에 명시하였는데 相臣 李景奭이 淸의 눈치를 보아 삭제할 것을 청하여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나머지는 顯宗妃인 明聖王后와 肅宗妃인 仁敬王后의 誌文이다. 특히 명성왕후는 金佑明의 딸로 老論의 입지를 위해 힘썼으며 숙종 초 甲寅換局 때 尤庵을 보호하는 데 공이 있었다. 仁敬王后 또한 노론인 金萬基의 딸로 성격이 엄숙하여 인경왕후 생존시에는 숙종이 후궁을 가까이하지 못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권182~188은 墓誌 73편이다. 金尙憲, 金集, 金壽恒 등의 묘지가 실려 있는데, 특히 文谷 金壽恒의 묘지는 尤庵이 죽기 5일 전인 1689년 6월 3일에 지은 것이다. 자신과 같은 정치적 역정을 걸어온 金壽恒에 대한 애도와 時勢에 대한 울분 등이 나타나 있다. 권187은 貞明公主를 비롯해 여자들의 墓誌만 모았는데, 여기에 나오는 府夫人(정1품 종친), 貞敬夫人(1품), 貞夫人(2품), 淑夫人(3품 堂上官), 淑人(3품), 恭人(5품), 宜人(6품), 孺人(9품) 등은 婦人 官爵의 명칭이다. 권188은 저자의 부친 宋甲祚를 비롯해 宋希命, 宋國澤 등 친척의 墓誌를 모아 놓았다.
권189~201은 墓表 246편이다. 金尙憲, 羅萬甲, 李浣 등으로, 위의 묘갈, 묘지와 중복되는 인물이 많으며, 역시 인물의 중요도순으로 수록하였다. 권200은 부인 등 여자들의 묘표를 수록하였으며, 권201도 墓誌와 마찬가지로 조상과 친척들의 묘표를 실었다.
권202~205는 諡狀 13편으로 宋麟壽, 黃進. 宋象賢, 尹暹, 兪絳, 李廷立 등이며, 권203은 1권 전체가 澤堂 李植의 시장이다. 권206~211은 行狀으로 모두 27편이 실려 있다. 권206은 朴紹, 梁山甫, 辛應時, 李後白 등 선배들이고, 권207은 重峯 趙憲, 권208은 沙溪先生을 비롯해 부친 睡翁公과 尹宣擧의 부친 尹煌, 李時稷의 행장이며, 권211에는 李忔의 妻 全州崔氏, 尹飛卿의 妻 韓山李氏, 鄭元俊의 妻의 行狀이 포함되어 있다.
권212는 遺事와 語錄이다. 遺事는 同春 宋浚吉의 言行에 관한 글이다. 宋浚吉은 저자와 어려서부터 동문수학하며 평생을 학문적, 정치적 동지로 지내온 사이면서도 관후한 성격으로 南人이나 少論에 대해 온건적이었다. 따라서 鄭介淸의 祠宇 毁撤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이 같지 않았음을 언급하고 있다. 語錄은 沙溪 金長生, 愼獨齋 金集, 石室 金尙憲의 어록이다. 聯珠集附錄은 저자가 序跋을 지었던 延安李氏 집안의 문집에 대한 부록으로 李一相, 李殷相, 李有相, 李端相과의 교유를 기록한 것이다.
권213~215는 傳으로 모두 18편이 실려 있다. 권213은 丙子胡亂時 斥和臣으로 지목되어 淸에 끌려가 죽은 洪翼漢, 尹集, 吳達濟 이른바 〈三學士〉를 비롯하여 明에 망명하여 청을 공격한 林慶業 장군, 1683년 淸軍과 함께 명 토벌군으로 가서도 父母之國에 대한 발포를 거부하여 참수당한 砲手 李士龍 등 崇明排淸의 인물에 대한 傳이다. 권214는 임진왜란 때 晉州城전투에서 전사한 張潤, 丁酉再亂 때 모친을 구하려다 죽은 金聲遠, 효자 李榮仁, 부모의 원수를 갚고 자수한 金成一 형제 등, 孝子와 烈士에 대한 傳이며, 권215의 〈恩津宋氏家傳〉은 宋明誼, 宋汝諧, 宋龜壽, 宋應期, 習靜公 宋邦祚 등 저자의 집안 친척에 대한 傳이다.
大全의 附錄은 모두 19권이다. 권1은 敎書와 賜祭文이고, 권2~12는 年譜이다. 年譜는 저자의 손자인 宋疇錫이 5책으로 편차한 뒤 宋婺源이 다시 정리해 활자로 간행한 것을 大全 간행시 宋煥箕가 이후의 기사를 보충하여 체제를 다시 정리하였다. 사후 伸寃과 復爵, 書院의 享祀와 賜額에 대한 기록까지 자세하게 실려 있으며, 正祖 11년(1787) 9월 大全의 간행 기사와 11월 12일 大老祠에 致祭를 명하여 大老祠碑의 글씨와 碑文을 지어준 일이 마지막 기사이다.
권13은 權尙夏가 쓴 墓表와 權尙夏, 鄭澔, 金昌協이 지은 尤庵의 畫像贊이 수록되어 있다.
권14~18은 문인들이 기록한 尤庵의 語錄이다. 기록자는 權尙夏, 鄭澔, 李選, 李箕洪, 金昌協, 李喜朝, 金榦, 李橝, 鄭纘輝, 金鎭玉, 黃世楨, 朴光一, 崔愼, 李敬秀 등이다. 저자의 인품, 학문, 정치적 견해와 일상 생활 등을 제자들의 시각에서 기록한 것이다.
권19는 記述雜錄이다. 문인과 再傳弟子들이 저자에 대한 기록을 여러 자료에서 뽑아 기록자별로 정리한 글이다. 權尙夏, 李端夏, 韓元震, 尹鳳九 등 23명이 참여하였다.
宋書拾遺는 9권 4책으로 모두 大全에서 누락된 저자의 시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권두에 目錄이 있고, 권말에 10대손 宋曾憲의 발문이 실려 있다. 내용 중에는 역시 書簡文이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으며 편차 기준은 大全과 비슷하다.
拾遺 권1~6은 詩와 書啓, 書이다. 詩는 鄭普衍, 宋徵彥, 尹文擧의 外姑李氏, 或人에 대한 挽詩와 七言絶句와 律詩 등 총 13편이다. 書啓는 李選을 보내 傳諭한 것에 대한 서계 등 3편이다. 書는 〈上寧陵〉으로 孝宗에게 보내는 편지와 沙溪 金長生, 愼獨齋 金集 등에게 올린 問目를 비롯해 李厚源, 宋浚吉, 兪棨, 尹宣擧 형제, 李翔, 李端夏, 金壽增 형제와 閔鼎重 형제, 朴世采, 李選, 金萬基 등 130명에게 보내는 편지 448편이 실려 있다. 이 중 권5의 〈答或人〉은 尹宣擧는 이미 毁節하였으니 嘉言善行이 있은들 娼家에서 禮書를 읽고 백정이 禮佛하는 격이라고 비난한 내용이다. 권6은 모두 가족에게 보낸 편지이다. 편지의 편차와 배열 방식은 原集과 같으며 수신자도 원집과 대부분 중복된다.
습유 권7~8은 雜著와 序, 跋, 祝文 등이다. 잡저의 〈時敏堂夜對圖說〉은 孝宗 시에 저자가 宋浚吉, 趙龜錫 등과 夜對에 입시하였던 故事를 그림으로 그리고 글을 붙여 1663년 顯宗에게 올린 것이고, 〈高山九曲歌翻文〉은 한글로 되어 있던 李珥의 〈高山九曲〉을 한문으로 번역한 글인데 「栗谷全書」에도 송시열의 번역문이 실려 있다. 黃赫의 「獨石集」 序文과 〈書明聖大妃誌文後〉, 〈書杞溪兪氏家狀後〉 등이 있으며, 紫雲書院, 坡山書院, 象賢書院, 德山書院, 月峯書院, 百源書院, 筆巖書院의 축문과 고문, 郭文漢, 金光老, 宋炳文에 대한 제문, 趙翼, 李郁, 李晫, 金呂重, 宋世勛 妻의 墓表가 실려 있다. 迂齋 李厚源의 遺事는 저자가 듣고 본 일화를 중심으로 지은 것이다.
습유 권9는 經筵講義이다. 孝宗 연간, 顯宗(1668~1669), 肅宗 초기(1680~1683)의 경연석상에서 강의한 내용이다. 권말에 “丁卯(1927)開刊南澗藏板”이란 刊記와 昭和 2년 인쇄 반포로 기록된 印記가 붙어 있다.
宋書續拾遺는 3권 2책으로 拾遺 이후에 다시 남은 저자의 유문과 부록문자를 모아 간행한 것이다. 저자의 遺文은 詩 7편과 書 56편, 三憂堂 文益漸의 遺事 1편, 具譓의 묘갈명 1편으로 1권 밖에 안 되는 적은 분량이다. 편지의 수신자는 閔光晨 형제, 朴惟棟, 吳得天, 朴尙眞, 宋錫奎, 梁禹及 등 大全에는 잘 보이지 않던 인물이다. 내용도 대부분 안부를 묻는 짤막한 편지이며 묘갈문 등 부탁한 문자에 대해 의논한 것이다. 그중 〈答德川院儒崔絅〉은 曺植의 「南冥集」을 재편차할 때 鄭仁弘이 지은 序와 行狀 등을 모두 빼버리고 또 문집 중 鄭仁弘과 관계된 기사를 모두 삭제하거나 부득이한 경우 或人으로 바꾸도록 하여 정인홍의 흔적을 철저히 없애도록 한 내용인데, 이 修正指針에 따라 나온 것이 「南冥集」 庚戌本이다.
나머지 2권은 부록으로 권1은 英祖(1726년)에서 高宗(1874년)까지의 賜祭文이고, 권2는 楚山日記와 尹鳳九가 지은 墓誌, 宋婺源ㆍ宋煥箕의 墓表後記이다. 楚山은 井邑의 이칭으로 尤庵이 사약을 받은 곳이다. 井邑에 이르러 後命을 받던 상황부터 權尙夏, 黃世楨 등 高弟들이 執事가 되어 遺命에 따라 喪禮를 치르고 水原에 장사를 지내기까지의 기록인데 喪柩가 지나는 각처에서 조문한 사람들과 부주한 물품 등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閔鎭綱, 朴光一, 金道器가 각각 기록하였는데 閔鎭綱의 기록이 가장 자세하다. 宋一源, 宋煥世 등의 追記가 붙어 있고, 권말에는 宋秉夔가 쓴 발문과 昭和 4년(1929)이라고 되어 있는 印記가 붙어 있다.
宋子大全隨箚는 모두 13권 6책으로 송자대전에 대한 註解書이다. 본래 「尤庵集」을 대상으로 했던 宋周相의 「潭谷隨箚」를 宋近洙가 大全本에 맞게 증보, 재편한 것인데, 후에 宋秉璿이 다시 교정하고 정리하였다. 권두에 李世淵의 서(1864)와 凡例, 그리고 宋近洙의 識(1866)가 실려 있다.
체제는 大全의 卷次에 따라 나누고 또 板次를 黑圈으로 표시하여 참조하기 쉽게 구성하였다. 詩와 封事 같은 경우는 故事의 해설을 위주로 하고, 疏箚와 書는 당시의 상황과 인물, 사건 등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였다. 그 밖에 글자의 音과 訓, 출처에 대해서도 주석을 달아 난해한 저자의 글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권13은 目錄으로 大全에 자주 나오는 인물에 대한 인명록이다. 字號와 本貫, 생몰년, 관력과 출처, 저자와의 관계 등을 위주로 간략하게 서술하였는데 대략 200여 명이 실려 있으며 수록 순서는 서간의 배열순과 비슷한 인물의 중요도 순이다. 권말에는 9대손 宋秉璿의 識와 “辛丑(1901)開刊華陽藏板”이란 刊記가 실려 있다.

필자 : 金成愛

 

 

 

으희조 선생님 미백 선생께 보낸 편지

芝村先生文集卷之九
 
答崔君美 邦彦○辛丑 a_170_194a


自哭遂菴。卽擬奉一書於執事以相慰。緣有病故。遷就至此。恒用歉歎。乃蒙先辱書存。辭意特深。至其所以悼遂菴者。則實同此心。而至於山頹以來。惟遂菴與區區爲依云者。則雖荷見待之出尋常萬萬。而抑亦以不敢當爲惧焉。况以不得從游於太極亭下。今日戀昂尤倍爲敎。讀來益不勝感佩也。然其所謂却羨遂菴好奉先生杖屨於泉㙜者。尤使人悲愴哽咽。170_194b 殆無以爲懷也。拜書後。宜卽修敬。而適兒子因渠職事入城。適甚怱卒。未暇修候。令其先往以謁。及歸細詢動靜之狀。無異此身之親承良誨也。信後亦多日。伏惟閑養氣候增福。竊聞顔貌不衰。精力尙健。眞所謂蓍龜益神者。不知行何術。而乃能如此耶。若區區者。居常薾然昏憊。幾於委頓。一日之內。起坐時絶少。只有瞻仰羨歎而已。姑以此昂復。追當更候。不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