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좌의정 월사 이공 행장(左議政月沙李

좌의정 월사 이공 행장(左議政月沙李公行狀) 이하 속고(續稿)임

아베베1 2011. 6. 23. 15:42

 

 연안이씨 월사 이정구 선생님은 연안이씨로 조선의 명문가 집안으로 알려져 있다

 대문장가인 월사 선생님의 행장을 옮겨 보았

 

계곡선생집 제16권

 행장(行狀) 2수(首)
좌의정 월사 이공 행장(左議政月沙李公行狀) 이하 속고(續稿)임


공의 휘(諱)는 정귀(廷龜)요, 자(字)는 성징(聖徵)이요, 호는 월사(月沙)이다.
연안 이씨(延安李氏)의 계보는 당(唐) 나라 중랑장(中郞將) 이무(李茂)로부터 비롯된다. 소정방(蘇定方)을 따라 백제(百濟)를 평정한 뒤 그대로 신라(新羅)에 남아 벼슬하면서 연안을 관적(貫籍)으로 하사받았기 때문에 자손들이 마침내 연안인이 된 것이었다.

 

고조 석형(石亨)은 3차례나 장원급제한 분으로서 공신에 책훈(策勳)되고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문강(文康)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증조 혼(渾)은 사헌부 장령으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조부 순장(順長)은 벼슬하지 않다가 오래 살아 노인에 대한 은전을 받고 가선대부의 품계에 올랐으며, 영의정을 증직받았다. 부친 계(
)는 문장으로 한 시대에 이름을 떨쳤는데, 누차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한 채 삼등현령(三登縣令)으로 관직을 마쳤으며, 영의정을 증직받았다. 모친은 광주 김씨(光州金氏)로 정경부인을 증직받았다.

 

공은 가정(嘉靖) 갑자년(1564, 명종 19)에 도성 남쪽 청파(靑坡)의 우사(寓舍)에서 태어났다. 공이 태어나던 날, 호랑이가 대낮에 나타나 문밖에 와서 엎드려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놀라 달아났는데, 공이 출생하자 호랑이도 사라졌으므로 이를 듣고서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말을 배울 무렵부터 벌써 문자를 알았으며 말과 행동이 범상치 않았다. 기자헌(奇自獻)이 공과 같은 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공이 7살 때 기(奇)가 비단으로 된 허리띠를 끌러 공에게 주었으나 공이 받지 않았다. 어떤 이가 그 이유를 물어보니, 공이 말하기를,
“기(奇)가 찼던 허리띠를 어떻게 받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8세 때부터 시(詩)를 짓기 시작하였는데 깜짝 놀랄 말들이 튀어나오곤 하였다. 그리고 점점 자라나면서 학식을 넓히는 동시에 비상한 기억력을 과시하였다. 일찍이 창려(昌黎)의 남산시(南山詩)를 읽고서 차운(次韻)했는가 하면 이윽고 그 운(韻)을 차용해서 다시 칠언시(七言詩)를 완성하기도 하였는데, 이를 보고는 사람들이 신동(神童)이라고 일컬었다.
11세 때에 김 부인(金夫人)의 상을 당했는데 성인(成人)처럼 상례(喪禮)를 행하였다.
14세 때에 반궁(泮宮 성균관)의 승보시(陞補試)에서 장원하여 명성을 크게 떨쳤다. 그 뒤 을유년 진사시에 입격하고, 경인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리하여 승문원에 소속되었다가 천거를 받고 한림(翰林)으로 들어갔는데, 당시 홍여순(洪汝諄)이 권세를 휘두르면서, 공이 태학(太學)에 있을 때 성우계(成牛溪 성혼(成渾))의 유임을 청하는 소를 작성했었다는 이유로 한림에 천거된 것을 논삭(論削)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宣祖)가 서쪽으로 피신하자 공이 사잇길을 통해 행재(行在)로 찾아갔는데, 성천(成川)에 이르러서 시강원 설서의 임명을 받았다.
계사년에 광해(光海)를 따라 정주(定州)에서 대가(大駕)를 맞이하고 예문관 검열에 임명되었는데, 상이 이르기를,
“강관(講官)이 사관(史官)보다 중하니, 도로 설서를 제수하라.”
하였다.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이 행조(行朝)에 이자(移咨)하여, 학문의 강론을 도와줄 만한 문학사(文學士)를 뽑아 보내도록 하였는데, 이때 공이 황공신(黃公愼)과 함께 선발되었다. 경략은 본디 육씨(陸氏 송(宋) 나라 육상산(陸象山))의 학문을 위주로 하였기 때문에 《대학(大學)》을 강할 때에도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설을 따르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공이 두 학설을 비교 분석하여 수십 편(篇)의 설(說)을 지으니, 경략이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순안어사(巡按御史)가 도착하자 통군정(統軍亭)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제독(提督) 이하 여러 장수들은 모두 그 자리에 끼지 못하였다. 그런데 경략과 어사가 유독 공과 황공만을 청하여 그지없이 위로하고 장려해 주었으며, 자리가 파할 무렵에는 또 글을 써서 북돋아 주기를,
“동국(東國)의 흥망성쇠는 세자에게 달려 있고, 세자의 현부(賢否)는 바로 공들에게 매여 있다.”
하였다.
뒤이어 사서(司書)로 승진하였다. 경략이 본국으로 귀환하자 공이 의주(義州)에서 돌아와 병조 좌랑과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었다.
중국 사신 사헌(司憲)이 왔을 때 이공 덕형(李公德馨)이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공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지명하였는데, 병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이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중국 사신이 돌아갈 무렵에 원접사가 또 공을 종사관으로 불렀는데, 비국(備局)에서 공이 바야흐로 괴원(槐院 승문원)의 외교 문서를 관장하고 있다는 이유로 위에 아뢰어 그대로 있게 하였다. 그러자 원접사가 뒤이어 또 공을 재차 종사관으로 지명하였는데, 이번에는 정원에서 또 공이 중국어를 잘한다는 이유로 위에 아뢰어 머물러 있게 하였다. 공의 재질이 뛰어나 당시에 급하게 쓰여진 것이 이와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삼등공(三登公 삼등현령을 지낸 부친을 가리킴)의 병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상소를 하고 귀성(歸省) 길을 떠났는데, 부음을 길에서 듣고 말에서 떨어져 거의 혼절(昏絶)할 지경에 이르렀다가 눈 위를 도보(徒步)로 1백리 길을 걸어가서 갑오년 봄에 상구(喪柩)를 모시고 돌아와 장례를 행하였다.
병신년에 상복을 벗었는데, 공이 다시 전조(銓曹)에 들어가는 것을 당로자(當路者)가 꺼린 나머지 예조 정랑으로 좌천시켰다가 동지사(冬至使) 서장관(書狀官)으로 차출하였다. 누차 병조 정랑과 성균관 직강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병 때문에 응하지 못하였다.
정유년에 병이 조금 차도를 보이자 비로소 조정에 나아가 병조 정랑의 임명을 받으면서 승문원 교리와 한학 교수(漢學敎授)의 직책을 겸하였다.
경리(經理) 양호(楊鎬)가 평양(平壤)에 도착한 뒤 우리나라의 군병, 성지(城池), 양장(糧仗) 등이 얼마나 되는지 물으면서 3조(曹)의 판서가 직접 달려와 상황을 설명하라고 요구하였다. 이에 조정이 고민한 끝에 공에게 명하여 가서 답변하도록 하였다.
마 제독(麻提督 마귀(麻貴))이 남정(南征)할 적에 접반사(接伴使)가 몇 번이나 종사관을 지명했어도 모두들 꺼려 피하곤 하였는데, 최후로 공에게 이르자 공이 즉시 그날로 길을 떠났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괴원이 계청(啓請)하여 소환되었는데, 이로부터 크고 작은 문서들 대부분이 공의 손에서 나오게 되었다. 언젠가 양 경리(楊經理)에게 보내는 첩문(帖文)을 지은 적이 있었는데, 선묘(宣廟)가 이를 보고서 하문하기를,
“이 글이 매우 잘 되었다. 누가 작성한 것인가?”
하기도 하였다.
성균관사예 겸 시강원필선에 임명되었다. 공이 일찍이 춘방(春坊)에 입직(入直)하고 있을 때에 양 안찰(梁按察)이 졸지에 대궐로 오자 선묘(宣廟)가 어쩔 줄 모르고 나가서 영접하였다. 그런데 어전통관(御前通官)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므로, 정원이 공을 불러 입시(入侍)케 할 것을 청하였는데, 공이 응대(應對)를 썩 잘해 나가자, 안찰 역시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춘방의 학사(學士)가 어쩌면 이렇게 중국 말을 잘 하는가.”
하였고, 선묘도 승지에게 이르기를,
“이정귀가 이토록 재주가 많을 줄은 생각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이로부터 상이 공을 더욱더 인정하여 3품의 준직(准職)을 제수하도록 명하는 한편 일곱 계단을 뛰어 올려 장악원 정(掌樂院正)으로 삼는 동시에 예전처럼 겸대(兼帶)하게 하였다.
무술년에 사헌부 집의에 임명되었다가 승정원동부승지 겸 승문원부제조에 발탁되었다. 관왕묘(關王廟)가 낙성되자 중국 장수가 상에게 제사를 올리러 함께 가자고 청하였다. 그런데 대가(大駕)의 출발 준비가 다 된 시점에 와서야 비로소 제문(祭文)을 지어 올리도록 명하였다. 이에 유사(有司)가 지제교(知製敎)를 불러올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공에게 그 일을 명하였는데, 공이 그 자리에서 바로 지어 올리자 상이 크게 기뻐하면서 비단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체직되어 병조 참지를 임명받았다. 당시 중국 장수들이 도성 안에 가득하여 자게(咨揭)로 왕복하느라 밤이고 낮이고 눈코 뜰 새 없었다. 이에 공이 이쪽저쪽으로 응수하면서 대부분 입으로 불러 주면서 바로 작성하게 하곤 하였으며, 혹 공이 지어야 할 문서가 아니었어도 특별히 공에게 위촉된 경우가 또한 왕왕 있었다. 그리고 글이 한 편씩 완성될 때마다 번번이 표창과 함께 비단을 하사받곤 하였으며, 더러는 명에 의해 별도로 1본(本)을 베껴 안에 들이기도 하였다.
대신의 계청(啓請)에 따라 비변사 부제조를 겸하게 되었다. 얼마 있다가 정응태(丁應泰)가 우리나라를 무함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선묘(宣廟)가 정전(正殿)을 피하고 정무(政務) 보는 일을 정지한 채 짚자리를 깔고 황제의 명을 기다리게 되었는데, 중외(中外)가 온통 진동하는 가운데 장차 사신을 보내 무함을 해명하기도 의견이 모아졌다. 그리하여 사신(詞臣) 몇 사람을 뽑아 각자 주본(奏本)을 작성해 올리도록 명하였는데, 다 바치고 나자 유독 공이 지은 것만을 채택해서 쓰기로 하였다.
공은 응태가 무함한 것에 대해 조목별로 그지없이 명쾌하게 해명하였는데, 특히 우리나라에서 임금의 호칭을 조(祖)와 종(宗)으로 했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소방(小邦)은 바다 밖에 멀리 외따로 떨어진 나라이기 때문에 삼국 시대(三國時代) 이래로 예의(禮儀)와 명호(名號)를 정할 때에 중국을 사모하고 본받으려 한 나머지 비슷하게 본뜨려 한 것이 많았었는데, 선신(先臣) 강헌왕(康獻王 이태조(李太祖)) 때에 이르러 일체 바로잡아 개혁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독 임금에 대한 칭호만큼은 신라(新羅)와 고려(高麗) 때부터 시작되어 계속 이런 잘못된 오류를 범해 오고 말았는데, 이는 대체로 나라 안의 신민(臣民)들이 예전의 잘못된 습관을 답습한 나머지 그대로 따르기만 할 뿐 미처 고칠 줄을 몰랐던 것이니, 이는 그야말로 무지한 탓으로 망녕되게 행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이런 측면에서 죄를 받는다면 만 번 죽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만, 만약 이를 두고 참절(僭竊)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진정한 마음을 너무도 이해해 주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였다. 이때 유상 성룡(柳相成龍)이 주고(奏稿)를 보고서 말하기를,
“이것은 크게 관계되는 일인데, 지금 무작정 사실대로 털어놓는다면 헤아릴 수 없는 화(禍)를 당할 염려가 있다. 따라서 아예 빼 버리고 거론하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하였는데, 이 문제를 두고 조정의 의논이 잘 귀결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상이 수교(手敎)를 내리기를,
“군신(君臣)은 부자(父子)와 같다. 속여야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이 일 때문에 죄를 준다면, 내가 응당 기꺼이 받겠다.”
하였으므로, 군의(群議)가 비로소 결정되었다.
이상 항복(李相恒福)이 진주상사(陳奏上使)가 된 다음 신공 흠(申公欽)을 서장관(書狀官)으로 데리고 가게 해 줄 것을 청하자,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 사명(詞命)을 훌륭하게 행할 자로는 이모(李某)만한 이가 없다. 그의 문장을 보면 가슴속의 애틋한 마음을 다 쏟아 내면서도 여유가 있고 전중(典重)하며, 사람됨이 또한 상황을 잘 헤아려 처리할 줄을 안다. 그러니 그의 품계를 높여 부사(副使)로 삼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그리하여 이튿날 가선대부로 품계가 오르는 동시에 공조 참판에 임명된 뒤 진주부사(陳奏副使)로 차출되었는데, 공이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듬해 봄에 경사(京師)에 도착해서 상주(上奏)한 다음, 각 아문(衙門)을 두루 찾아다니면서 정문(呈文)을 갖춰 해명하였는데, 그 글 36통이 모두 공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황제가 주문(奏文)을 정신(廷臣)에게 내려 의논하게 하였는데, 제공(諸公)이 주문을 읽어 내려가다가 묘호(廟號)에 대해 설명한 대목에 이르러서 크게 칭찬하고 감탄하면서 말하기를,
“정말 솔직한 말이다. 임금에게 숨김없이 고한 것을 보니 조선은 참으로 예의(禮義)의 나라이다.”
하였으며, 정신(廷臣)이 복의(覆議)를 올린 내용 중에도,
“조선 국왕의 주문이 하도 명백하고 통쾌하여 읽어 내려가는 동안에 눈물이 뚝뚝 떨어지려고까지 하였습니다.”
라는 말이 있었다. 이 의논이 들어가자 천자가 정응태의 관적(官籍)을 회수하고 신문하도록 명하는 한편, 해부(該部)로 하여금 우리나라에 이자(移咨)하여 위유(慰諭)하도록 하였다. 사명(使命)을 마치고 돌아와 보고드리자, 선묘가 인견(引見)하고는 칭찬하고 권장해 주면서, 품계를 올리고 노비와 전결(田結)을 하사하도록 특별히 명하는 한편, 비변사 유사당상(有司堂上)을 겸하게 하였다.
조의(朝儀)가 장차 야인(野人)들을 토벌하려 하면서 서로(西路)와 북로(北路)로 하여금 군대를 뽑게 하였다. 이에 공이 차자(箚子)를 올려 잘못된 계책이라고 아뢰었는데, 이 차자를 보고서 상이 이르기를,
“내가 진작부터 경이 재주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만, 적과의 승부를 헤아리는 과정에서 이토록 지혜를 발휘할 줄은 생각하지 못하였다. 게다가 시대 상황을 제대로 묘사하면서 사람이 듣기 싫어하는 말을 극력 진달하였는데, 이 역시 보통 사람으로서는 해내기 어려운 일이다. 나는 이런 인재가 있다는 것이 스스로 자랑스럽기만 하다.”
하고, 마침내 그 말을 따랐다.
호조 참판에 임명되었다가 뒤이어 예문관 제학에 특별히 제수되었다. 상이 언젠가 양 경리(楊經理 양호(楊鎬))를 접견할 적에 공에게 입시(入侍)하도록 명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다른 날에도 또 공이 입시하자, 상이 이르기를,
“전에 이모(李某)에게 입시하도록 명했던 것은 대개 경리가 무슨 일을 물어볼 때에 혹시라도 대답하기 어려운 점이 있을까 염려해서였다. 그러니 평상적으로 접견할 적에는 꼭 입시하게 할 필요가 없다.”
하고는, 이어 공에게 비단을 하사하였다. 상이 공을 중하게 의지한 것이 이와 같았다.
경자년에 동지의금부사를 겸하였다. 이때 호조 판서의 자리가 비어 있었는데, 상이 묘당(廟堂)에 명하여 자질(資秩)을 따지지 말고 인재를 골라 의망(擬望)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공을 발탁하여 자헌대부로 품계를 올리고 호조 판서에 임명하였는데, 공이 여러 차례에 걸쳐 간절히 사양한 끝에 체직을 허락받았다. 그런데 마침 의인왕후(懿仁王后)가 상승(上昇)하자, 대신이 아뢰기를,
“나라에 큰 상사(喪事)가 있게 되었는데, 이모(李某)가 아니면 탁지(度支 호조)를 관장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하였으므로, 다시 공을 호조 판서에 임명하였다. 공이 이에 감히 사양할 수가 없어 즉시 나아가 숙배(肅拜)하고 국장도감 제조(國葬都監提調)를 겸하였다.
당시 국가의 재정이 고갈된 상황에서 염빈(殮殯)하는 데에 필요한 비단, 포목 등의 물품 숫자가 매우 많았다. 따라서 이들 물품의 충분한 양을 모두 시장에서 구해 와야 할 형편이었는데, 공이 적절하게 조처해 준 덕분에 일도 제대로 진행되면서 백성들 역시 고달픔을 당하지 않게 되었다. 또 방책을 시설하고 금령(禁令)을 내려 이서배(李胥輩)들이 시정(市井)을 침탈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시장 백성들이 대단히 편하게 여겼다.
지경연사(知經筵事)를 겸하였으며, 예조 판서로 이배(移拜)되었다. 대행왕후(大行王后)의 영구가 궁을 나와 장지(葬地)에 도착한 다음 바로 다음 날 하관(下棺)할 예정이었는데, 그날 밤 영악전(靈幄殿)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재궁(梓宮)은 다행히 다른 곳으로 옮겨 모실 수 있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떠들면서 크게 소란스럽게 굴자, 공이 영(令)을 내리기를,
“모든 집역인(執役人)들은 각자 자기가 맡은 물건을 가지고 불을 피해 나온 다음 명령을 기다리도록 하라.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에는 중한 처벌을 내릴 것이다.”
하였는데, 불길이 진화된 다음에 공이 장부를 가지고 점검해 보니 유실(遺失)된 물건이 없었다. 이에 낭관(郞官)을 보내 치계(馳啓)하고 나서 마침내 세자와 총호사(摠護使)에게 보고를 올리니, 총호사가 기뻐하여 말하기를,
“공 같은 사람을 예판(禮判)으로 얻었으니, 걱정할 것이 또 뭐가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위안제(慰安祭)를 먼저 거행한 뒤에, 처음에 잡은 길시(吉時)에 의례(儀禮)대로 하현궁(下玄宮 하관)하는 의식을 행하게 되었다. 이때 공이 또 말하기를,
“오늘 불행히도 큰 변고를 당하게 되었으나 책보(冊寶) 등 여러 기물(器物)은 다행히도 손상되거나 더럽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삼사(三司)와 육경(六卿) 등 관원들로 하여금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게 한 다음에 광중(壙中)을 덮는 것이 좋겠다.”
하자, 모두들 그렇게 하자고 하였다. 이 때문에 일을 마치고 돌아가서 이의(異議)를 제기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게 되었으니, 이 모두가 공이 힘쓴 덕분이었다.
신축년에 세자 우빈객(世子右賓客)을 겸하였다. 일찍이 조강(朝講)에 입시했을 적에 대사간으로 있던 김공 상용(金公尙容)이 진대(進對)하다가 듣기 싫어하는 말을 많이 아뢰자 상이 크게 노하였다. 이에 좌우에 있던 신하들 모두가 감히 한마디도 하지 못하였는데, 공이 나아가 아뢰면서 잘 조정하여 해명을 하니, 상이 조금 노여움을 누그러뜨리면서 이르기를,
“내가 그런 일을 한 적은 없다만, 궁중(宮中)을 거듭 경계시키겠다.”
하였다.
병으로 체직되었다가 얼마 안 있어 다시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때 마침 교정청(校正廳)을 설치하고 경서(經書)의 언해(諺解)를 찬정(撰定)하자 공이 당상으로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 뒤 사직하여 지의금부사로 체직되었으며 뒤이어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성균관사를 겸임하였다.
조사(詔使) 고천준(顧天峻)과 최정건(崔廷楗)이 장차 우리나라에 오려 하자 공이 원접사(遠接使)가 되었는데 조정을 하직하던 날 선묘가 쓰고 있던 초모(貂帽)를 벗어서 공에게 주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당시 원접사의 막료(幕僚)로 뽑힌 이들을 보면 모두가 한 시대의 명망을 지닌 인사들이었다. 그런데 그때 마침 정인홍(鄭仁弘)이 자기 패거리를 시켜 성우계(成牛溪 성혼(成渾))를 무함하며 헐뜯게 하였는데, 이에 반대하여 바른 의논을 견지한 신하들이 서로 잇따라 견책을 받고 파직되었으므로, 공 역시 스스로 편안치 못한 생각이 들어 병을 핑계로 해직시켜 줄 것을 청하였다.
임인년 3월에 체직되어 평양 영위사(平壤迎慰使)가 되었으며, 조정에 돌아오고 나서 문형(文衡) 및 빈객(賓客)과 경연(經筵)의 직책을 극히 사양한 결과 차례로 체직을 허락받았다. 그러다가 곧바로 빈객 및 총관(摠管)과 교정청 당상을 다시금 겸하게 되었으며, 또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때 효경전(孝敬殿)의 제례(祭禮)를 다시 새롭게 정하였다. 또 정몽주(鄭夢周)의 묘소에 치제(致祭)하면서 ‘고려 시중 정공(高麗侍中鄭公)’이라고만 칭하고 이름은 부르지 말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선묘가 처음에는 난색을 보이다가 공이 극력 청하자 들어주었다. 또 노산(魯山 단종(端宗)의 강봉(降封)된 칭호)과 연산(燕山)의 후사(後嗣)를 세우자고 청하였으나, 그 의논은 저지되어 행해지지 못하였다. 병으로 체직되어 서추(西樞 중추부)에 몸담게 되었다.
갑진년 정월에 천변(天變)이 일어나자 상이 구언(求言)을 하였다. 이에 공이 유지(有旨)에 응하여 봉계(封啓)를 올리면서 군정(軍政)을 닦아 무비(武備)를 단속하고, 기강을 진작시켜 국체(國體)를 존엄하게 하고, 인심(人心)을 결속시켜 화기(和氣)를 불러오게 하고, 언로(言路)를 열어 주어 훌륭한 계책들이 모여들게 하고, 공도(公道)를 넓혀 인재를 널리 수습하고, 실덕(實德)을 닦아 하늘의 꾸지람에 응하도록 청하였다.
조정에서 세자의 책봉을 건의하면서 공을 주청사(奏請使)로 삼았다. 공이 중국에 갔다가 돌아온 뒤에, 대관(臺官)이 권신(權臣)의 뜻을 떠받들어 사소한 일들을 주워 모은 뒤 공을 탄핵하였으나, 상이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을사년에 외방으로 나가기를 청하여 경기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그러다가 찬집청(纂集廳)이 설치되자 윤공 근수(尹公根壽)와 이공 호민(李公好閔)이 아뢰기를,
“이모(李某)를 이번의 선발 대상에 포함시키지 않을 수 없으니, 파격적으로 당상에 임명토록 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공은 기전(畿甸)을 다스리면서 풍교(風敎)를 엄하게 하고 방치되었던 일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다. 그리고 포은서원(圃隱書院)을 용인(龍仁)에 세웠는데 그 일이 알려지자 위에서 충렬(忠烈)이라는 편액(扁額)을 하사하였다. 이와 함께 숭의전(崇義殿 고려 태조 이하 8왕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중건한 뒤 후손인 왕곤(王鵾)을 전감(殿監)으로 삼게 해 줄 것을 청하였으며, 수원(水原)과 죽산(竹山) 두 산성(山城)을 보수하여 군량과 기계(機械)를 비축해 둠으로써 급할 때의 대비책이 되도록 하였다.
이듬해 임기가 만료되자 체직되어 지중추부사가 되었고, 실록청, 춘추관, 의금부의 지사(知事)를 겸하였다. 그때 무명씨(無名氏)가 반궁(泮宮)의 복도 벽에 글을 써 붙여 당로자(當路者)의 악행을 폭로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자 권신(權臣)이 마침내 대옥(大獄)을 일으켜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는데 그 와중에서도 공이 구해 준 덕분에 목숨을 보존한 자가 꽤나 많았다. 또 일찍이 삼성회좌(三省會坐 의정부ㆍ사헌부ㆍ의금부의 관원이 모여 신문하는 것)한 자리에서 우스갯소리로 희롱을 하자 권신이 더욱 성을 내었는데, 선묘가 뒤이어 심리(審理)하는 관원들에게 널리 물어보았을 때에 공이 억울한 정상을 극력 말하였으므로, 마침내 모두 놓아준 적도 있었다.
일본 사람이 화의(和議)를 청하면서 사수(死囚)를 묶어 보내고는 임진년 당시에 왕릉(王陵)을 범한 적(賊)이라고 거짓말을 하였는데, 유영경(柳永慶)이 이를 장차 종묘에 고한 뒤 진하(陳賀)하려고 하였다. 이에 공이 상차(上箚)하여 그 불가함을 논하다가 사직소를 올려 금부와 총관에서 체직되었다.
정미년에 지춘추관사를 겸하고 다시 호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무신년 2월에 선조가 승하하자, 공이 규례에 따라 국장도감 제조(國葬都監提調)를 겸하였다. 공이 전후에 걸쳐 2번 호조 판서가 되었는데 그때마다 모두 국상(國喪)을 당하여 모든 물품을 부족하지 않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더욱 공의 통재(通才)에 탄복을 하였다.
그 뒤 병조 판서로 옮겨 임명되었다. 광해(光海)가 처음 임금 자리를 잇고 나서 스스로 위태롭다고 지나치게 생각한 나머지 군대를 동원하여 궁성(宮城)을 에워싸게 하였는데, 오래도록 그 일을 그만두지 않자 장사(將士)들이 야숙(野宿)하는 등 그 고달픔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일을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공이 위에 아뢰어 군대를 해산시키게 하였다.
난리를 치른 뒤에 군공(軍功)을 세운 사람들과 곡식을 바친 사람들에 대해 국가에서 이렇다 할 보답을 해 주기는커녕 강제로 돌려가며 상번(上番)케 하면서 ‘일삭 금군(一朔禁軍)’이라고 불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원통하게 생각하였다. 이에 공이 또 계청하여 이들을 해산시켜 집으로 돌려보내게 하고 일이 발생할 경우 부방(赴防)만 하게 하였다. 그리고 내삼청(內三廳)에 소속된 참하관(參下官)들이 적체(積滯)된 채 천전(遷轉)되지를 못하자, 훈련주부(訓鍊主簿)의 자리를 더 설치하도록 청하여 그들이 승진되어 옮겨 갈 수 있는 기회를 확대해 주었다.
세자 우빈객(世子右賓客), 동지경연사, 동지성균관사를 겸하고, 또 선혜청 당상과 내의원 제조를 겸하였다. 선조(宣祖)의 행장(行狀)을 지어 올리자 공을 가자(加資)하여 정헌대부로 삼았다.
대행 대왕(代行大王)의 발인(發靷) 때에 소요되는 군정(軍丁) 6천여 명은 으레 제도(諸道)에서 징발해 오도록 되어 있었는데, 공이 계청한 결과 5부(部)의 방민(坊民)을 조발(調發)해 쓰도록 하였고, 마침내는 이를 정식(定式)으로 삼게 하였다.
중국 사신 웅화(熊化)가 왔을 때 공이 관반(館伴)이 되었다. 웅공(熊公)이 공의 시를 얻어 보고는 찬탄해 마지않으면서 글로 써서 역관(譯官)에게 보여 주기를,
“글자 하나하나에 당(唐) 나라 시인의 넋이 깃들어 있다.”
하였다. 그리고 매일 공을 초청하고는 편복(便服) 차림으로 들어와 대화를 나누곤 하였으며, 말을 할 때나 글을 써서 보낼 때에 꼭 선생(先生)이라고 일컬었다. 작별한 무렵에는 애틋한 정을 이기지 못해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으며, 그때 공에게 황화집(皇華集) 서문(序文)을 청하여 받아 가지고 가기도 하였다.
태감(太監) 유용(劉用)이 잇따라 우리나라에 왔다. 호조 판서로 있던 김공 수(金公睟)가 관반(館伴)이 되었으나, 대신이 계청한 결과 공이 이를 겸하게 되었다. 유사(劉使)가 도중에 재물을 요구하는 것이 끝이 없었으므로 장차 어떻게 응해야 할지 모를 지경이 되었다. 그러자 더러 말하기를,
“민간에 비축된 것들을 긁어모으고 또 창고를 열어서 그 곡식으로 금(金)을 사서 그를 대접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는데, 공이 홀로 나아가 아뢰기를,
“지금 바야흐로 가뭄의 재앙이 참혹하기 그지없어 백성들이 장차 죽음의 구렁에 빠져 들게 되었으니, 묘당에서는 먼저 황정(荒政)을 강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조사(詔使)를 접대하는 문제는 깊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사람들이 혹 과연 그럴까 하고 의아해하기도 하였으나, 뒤에 지나고 보니 호조의 현은(見銀)을 고갈시키지 않으면서 유사 역시 만족한 상태로 돌아가게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공이 또 계청하여 제주(濟州)에서 마른 복어(鰒魚)를 더 무역해 오게 하는 일을 정지시키도록 하자 섬 백성들이 다시 크게 소생되었는데, 용도 역시 부족한 점이 없었다. 또 양관(兩館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을 겸하였다.
중국 사신이 올 때마다 외방에서 인정(人丁)을 조발(調發)하여 접대도감(接待都監)에 복역케 하는 그 숫자가 수천 명에 이르고 말[馬] 역시 수백 필에 이르는 등 백성에게 폐단을 끼치는 것이 엄청났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공이 병조 판서로 있으면서, 포목을 적당히 거두어 품삯을 주고 일꾼을 모집하자고 건의하였다. 그러자 내외(內外)에서 모두 편하게 여겼음은 물론, 쓰고 남은 포목이 그래도 3천여 필이나 되었으므로 마침내 이것을 가지고 병조의 건물을 중건하기까지 하였다.
병으로 정고(呈告)하여 지중추부사로 체직되었는데, 겸대(兼帶)하는 직책은 예전과 같았다. 겨울에 말미를 청하여 묘제(墓祭)를 행하고 돌아왔다. 이때 경기 백성들이 기아에 허덕이는 고달픈 상황을 진달하고, 또 아뢰기를,
“곡식을 옮겨와 백성에게 대여(貸與)해 주는 것은 본래 굶주림을 구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한번도 실질적인 혜택을 입지 못한 채 그저 이서배(吏胥輩)들이 침탈하는 계기만 되고 있을 따름인데, 내년에 독촉하여 상환하게 하다 보면 더욱 심하게 백성들을 병들게 하고 말 것입니다. 오직 부역(賦役)을 모조리 견감해 주어 힘을 좀 펼 수 있게 해 준다면, 백성들이 비록 풀이나 나무 뿌리를 캐먹고 산다 할지라도 자신들의 생활을 꾸려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진휼용(賑恤用) 미곡은 선혜청(宣惠廳)의 용도로 대신 충당하게 하고, 경기 백성들이 올가을과 내년 봄에 납부해야 할 환수미는 모조리 감면토록 해 주소서. 그러면 백성들이 큰 은혜를 입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실록청 당상을 겸하고, 다시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때 공이 계청하여 중외(中外)에서 보고해 올린 효자(孝子)와 절부(節婦) 모두에 대해 정표(旌表)를 행하도록 하였으며, 또 계청하기를,
“노산군과 부인의 분묘(墳墓)가 있는 곳에 다시 봉식(封植 봉분을 높이 쌓고 나무를 심는 것)을 가하고 묘소를 지키는 인호(人戶)를 더 늘려 배치하는 동시에, 별도로 사우(祠宇)를 세운 뒤 해마다 향축(香祝)을 내리시어 제때에 제사를 지낼 수 있게 해 주소서.”
하였다. 병란을 겪은 뒤로 경중(京中)에 중학(中學)과 서학(西學) 건물만 남아 있었는데, 공이 또 계청한 결과 사학(四學)을 모두 예전의 제도처럼 복구하였다.
경술년에 선조(宣祖)를 제부(躋祔 승부(陞祔) 혹은 부묘(祔廟)와 같은 뜻으로 신주를 종묘에 올려 모시는 것)하였다. 이에 공이 청하여 의인왕후(懿仁王后)의 휘호(徽號)를 고사(故事)에 따라 더 올리게 하였다. 또 아뢰기를,
“부묘(祔廟)한 뒤에는 으레 기로(耆老)와 유생들의 가요 행사가 있곤 하였습니다만, 이는 군더더기에 해당될 뿐더러 아직도 슬픔이 다 가시지 않은 때이니 더욱이나 모두 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는데, 광해가 즐거워하지 않으면서도 축문(軸文)을 올리는 일만 행하고 결채(結綵 색종이 등을 새끼에 꽂아 길 양쪽을 장식하는 것) 등의 일을 정지하도록 하였다. 또 아뢰기를,
“해조(該曹)의 전고(典故)를 기록한 문적(文籍)들이 난리를 치르는 과정에서 모조리 없어졌으므로 변례(變禮)를 당할 때마다 상고하여 근거할 자료가 없습니다. 각조(各朝)의 《실록(實錄)》 가운데에서 수합하게 하되, 길례(吉禮), 흉례(凶禮), 군례(軍禮), 빈례(賓禮)로 분류하여 그 의주(儀注) 절목(節目) 중에서 근거할 만한 사례들을 뽑은 뒤 한 권의 책으로 만들게 하여 고열(考閱)하는 데 편리하게 하소서.”
하니, 모두 따랐다.
광해가 장차 사친(私親 생모인 공빈 김씨(恭嬪金氏)를 말함)을 추존(追尊)하려고 하면서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고전(古典)을 널리 상고하게 하였다. 유신이, 명(明) 나라 효종(孝宗)이 기태후(紀太后)를 추존하면서 별묘(別廟)에 모셨던 일을 인용하여 아뢰니, 그 일을 예관(禮官)에게 내려 의논하게 하였다. 이에 공이 아뢰기를,
중자(仲子)의 사당을 낙성한 것성풍(成風)에게 수의(襚衣)를 보낸 것 모두가 《춘추》에서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한(漢)ㆍ당(唐) 이후로 추존했던 일 역시 성인의 예제(禮制)에 어긋나니 모두 본받을 것이 못 됩니다. 더구나 의인왕후(懿仁王后)께서 아들을 두지 못해 전하를 취해 후사(後嗣)로 삼으셨고 보면, 사친(私親)에 대해서는 강쇄(降殺)하는 절차가 있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명 나라 조정에서 효종이 생모를 추존하여 봉자전(奉慈殿)에서 별도로 제사를 올리게 한 것으로 말하면, 이는 바로 시왕(時王)이 행한 제도이니, 이를 근거로 하여 의논할 수는 있을 듯싶습니다. 다만 그 위호(位號)를 위로 모후(母后)와 같게 한다면 두 분을 똑같이 어미로 높여 모시게 되는 혐의가 분명히 있게 될 것입니다.
본조(本朝)의 경우, 모비(母妃)가 생존해 계실 때에는 비(妃)라고 칭했다가 돌아가신 뒤에는 후(后)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따라서 후와 비 사이에는 조금 등급에 차이가 있으니, 지금 추존하되 비(妃)라고 하고, 별묘(別廟)에서 향사(享祀)를 올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는데, 광해가 이르기를,
“종묘에 옮겨 모시는 일을 가벼이 의논하기 어렵다면, 그 일은 서서히 후일을 기다리기로 하겠다만, 후(后)의 위호를 써서 추존한 다음 별묘를 세워 책보(冊寶)를 올리고 의전(儀典)을 갖추어 봉릉(奉陵)하는 일만은 지금 해야 하겠다.”
하였다. 공이 재차 계사(啓辭)를 올려 대신에게 의논할 것을 청하였는데, 영상(領相) 이공 덕형(李公德馨)이 의논드리기를,
“해조(該曹)의 의논이 정당합니다.”
하였으나, 광해가 이르기를,
“별묘에서 제사드리는 것만도 이미 차별을 두었다고 할 것인데, 비(妃)의 위호만 올린다면 너무나도 흠이 되는 일이다. 후(后)의 위호를 올리는 일은 단연코 그만둘 수 없다. 다시 강정(講定)하도록 하라.”
하였다. 공이 세 번째 계사를 올리면서 여전히 예전의 의논을 견지하였는데, 광해가 들어주지 않자 공이 마침내 사직하였으나 그것도 광해가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공이 네 번째 계사를 올려 또 강력하게 불가한 점을 아뢰니, 광해가 이르기를,
“후세에 준열한 논의가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것은 나 자신이 책임질 일이다. 대신과 유사(有司)가 할 말을 하지 못했다고 그 누가 말하랴. 시급히 의논해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이튿날 조강(朝講)에 공이 입시하여 또 극력 말하였으나, 광해가 끝내 듣지 않고 봉자전(奉慈殿)의 제례(祭禮)를 일체 태묘(太廟)에서 행하는 것처럼 하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공이 또 아뢰기를,
“별묘(別廟)의 제례에는 시선(時膳 그 계절에 맞는 음식 요리)을 써야지 태묘의 생뢰(牲牢)를 써서는 안 됩니다.”
하였는데, 모두 8차례를 아뢰고 나서야 비로소 허락하였다. 광해가 또 사묘(私廟)에 자신이 직접 제사를 올리려 하자, 공이 아뢰기를,
“신주(神主)를 아직 개제(改題)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친제(親祭)를 행한다는 것은 매우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별묘에 봉안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행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광해가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다가 세 차례를 아뢰고 나서야 따랐다.
유생들이 소를 올려 다섯 현신(賢臣)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게 할 것을 청하였으나 오래도록 윤허하지 않았다. 이에 공이 연석(筵席)에서 그들의 요청을 극력 변호하여 그 일이 거행될 수 있도록 하였으므로 사론(士論)이 대단하게 여겼다. 숭정대부의 품계로 오르면서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신해년에 정인홍(鄭仁弘)이 상차(上箚)하여 문원(文元 이언적(李彦迪), 문순(文純) 이황(李滉)) 두 선정(先正)을 헐뜯자 태학(太學)의 제생(諸生)들이 인홍의 이름을 청금록(靑衿錄 유적(儒籍))에서 삭제해 버렸다. 그러자 광해가 크게 노하면서 의논을 주도한 유생을 삭적(削籍)하고 금고(禁錮)시키도록 명하였는데, 태학생들이 그 명을 듣고는 권당(捲堂 동맹 휴학)을 하고 떠나갔다. 이에 공이 대궐에 나아가 설명하여 아뢰자, 광해가 삭적과 금고의 명을 철회하면서 다만 장무관(掌務官)을 파직시키고 대사성을 체직시키도록 하였다. 그러자 공이 또 상소하여 쟁집(爭執)하면서 자신에게도 처벌을 내려 줄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공이 전조(銓曹)에 있으면서 엄체(淹滯)된 인사들을 발탁하고 사적으로 요행히 진출하는 길을 막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런데 광해가 일단 공을 좋아하지 않게 된 상황에서, 낭관(郞官)이 적임자가 못 되는 사람을 이조의 관원으로 의망(擬望)하려 하자 공이 견제하면서 따라 주지 않았으므로 더더욱 시배(時輩)들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극력 사양한 결과 체직을 허락받고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그 뒤 다시 예조 판서가 되었는데, 이때 계청하기를,
“평양(平壤)에 숭인전(崇仁殿)을 세워 기자(箕子)에게 제사를 올리게 하고, 그 후손인 선우식(鮮于寔)을 전감(殿監)으로 삼아 제사를 주관하게 하되, 숭의전(崇義殿 고려 태조 이하 8왕을 모신 사당)의 사례에 따르도록 하소서.”
하니, 광해가 그대로 따르면서 공에게 명하여 비문(碑文)을 작성해 새기도록 하였다.
술사(術士) 이의신(李懿信)이 상소하여 교하(交河)로 도읍을 옮길 것을 청하였다. 그 일이 예조에 내려오자 공이 복계(覆啓)하여 반박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정대하였다. 그 글을 보고 광해가 크게 노하였으나 이 때문에 그 일이 결국 행해지지 않게 되었다.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났을 때 공도 무함을 받고 체포되었는데, 대질 신문을 마친 뒤에 광해가 위로하며 풀어 주었다. 공이 옥에서 나온 다음 상소하여 자신을 탄핵하였는데, 6차례나 소장을 올렸는데도 광해가 부드러운 말로 비답을 내리며 허락하지 않았다.
옥사(獄事)를 일단 마무리 지은 다음 공에게 명하여 종묘에 보고하는 글을 지어 올리도록 하였는데, ‘스스로 부귀(富貴)를 꾀할 줄을 어린 동생이 어찌 알기나 하였으랴.’라는 내용이 들어 있자 광해가 그 말을 고치라고 명하였다. 또 저주(咀呪)에 관한 일을 첨가해서 써넣으라고 명하였는데, 공이 또 ‘죄인의 망녕된 공초[亂招]에서 나왔다.’고 작성하자 광해가 다시 난(亂)이라는 글자를 고치라고 명하였다.
연흥(延興 인목대비(仁穆大妃)의 부친 김제남(金悌南)의 봉호(封號))이 일단 사사(賜死)된 다음 조정에서 대비(大妃)의 복상(服喪) 여부를 놓고 의논을 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아비와 자식 관계야말로 인륜 중에 큰 것이요 천지 사이의 떳떳한 법이 되는 것인데, 대비가 어떻게 복상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하자, 대신이 마침내 이 의논을 채택하여 소복(素服)과 소선(素膳)을 올리도록 하였다.
이튿날 공이 내국 제조(內局提調)의 신분으로 입궐하여 부제조인 정공 엽(鄭公曄)에게 말하기를,
“오늘날의 상황에서 어떻게 자전(慈殿)을 위문하는 예(禮)를 행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하고, 마침내 대비전에 나아가 기거(起居)를 문안하였다.
이이첨의 무리가, 공이 전에 지어 올린 고묘문(告廟文)의 내용이 부당했다는 것과 대비의 복상 문제와 내국에서 대비전에 문안 올린 일 등을 트집 잡아 죄안(罪案)으로 삼은 뒤 논계(論啓)하면서 파직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광해가 허락하지 않고 예조 판서의 직책만 체직시켰다. 그러다가 곧이어 다시 겸대한 모든 직책을 체직시켰다.
을묘년에 이르러서는 또 지중추부사와 경연관에서 체직되었으며 변무진주상사(辨誣陳奏上使)로 차출되고,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이에 양사(兩司)가 논핵을 가하며 파직시킬 것을 계청하였으나 광해가 끝내 허락하지 않았는데, 공이 누차 사양한 끝에 비로소 체직될 수 있었다. 또 호조 판서에 임명되자 공이 간절히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헛된 비용을 줄이고 토목 공사를 중지할 것을 계청하였으나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병진년에 관복주청사(冠服奏請使)로 차출되어 경사(京師)에 갔다가 정사년 8월에 복명(復命)하였다. 판중추부사에 임명되고 보국대부(輔國大夫)로 품계가 올랐다.
공이 연경(燕京)에 있을 때 병이 들어 거의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는데, 돌아와서는 마침내 병이 위독하다는 핑계를 대고 문을 닫은 채 찾아오는 사람들을 사절하였다.
계축년 이후로 흉악한 무리들이 대비(大妃)를 폐(廢)할 것을 꾀해 왔는데, 정조(鄭造)와 윤인(尹訒) 등이 맨 먼저 그 의논을 끄집어내어 서궁(西宮)에 유폐(幽閉)시키고 출입문을 봉쇄한 뒤 갖은 위협과 모욕을 가하였다.
그런데 전년(前年)에 크게 가뭄이 들자 고사(故事)에 따라 남문(南門)을 폐쇄한 적이 있었다. 공이 정공 엽(鄭公曄)과 함께 서궁에 가서 중추부에 새로 제수된 것을 사은(謝恩)하려 하였는데, 궁의 출입문에 자물쇠가 굳게 잠기고 뜰 안에 잡초가 가득한 것을 보고는 서로 바라보며 얼굴을 가리고 울면서 말하기를,
“열린 문을 닫을 필요 없이 닫힌 문을 열기만 하면 하늘에서 바로 비가 쏟아질 것이다.”
하였다. 이이첨이 그 말을 듣고는 장차 큰 옥사를 일으키려 하자, 어떤 이가 해명해 주기를,
“이것은 농담으로 한 말이니 꼭 따질 성격의 것이 아니다.”
하였는데, 이첨이 노기를 띠며 말하기를,
“농담하면서 우는 법도 있는가.”
하였으나, 이로 인해 그 일이 또한 무마될 수 있었다.
당시 위태로운 상황이 하루가 다르게 급박하게 전개되고 있었으므로, 화란이 머지않아 일어나리라는 것을 공이 감지하고는, 병든 몸을 부축받으면서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의 봉호(封號)) 이공(李公)을 동쪽 교외로 찾아가 서로 결별(訣別)하였다. 그때의 시 가운데 ‘석양 녘 흐르는 몇 줄기 눈물 목릉 마을 입구에 서 있는 말 한 마리[斜陽數行淚 立馬穆陵村]’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이를 듣고는 사람들이 모두 비애에 잠겼다.
흉악한 무리들이 서로 잇따라 상소를 하여 대비(大妃)를 폐할 것을 청하자 광해가 그 소를 내려 정신(廷臣)들에게 의논하게 하였는데, 공은 병을 이유로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자 광해가 집에 있으면서 헌의(獻議)하게 하였으므로 공이 글을 작성하여 장차 올리려고 하였는데, 그때 마침 불량한 작자가 소를 올려 공이 정의(庭議)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여 먼저 유배보낼 것을 청하였으므로, 공이 마침내 ‘유배보내기를 청하는 유소(儒疏)가 나온 만큼 거적을 깔고 처벌을 기다려야 하는 입장이라서 감히 헌의하지 못하겠다.’고 자신의 입장을 개진하였다.
무오년 봄에 정승 한효순(韓孝純)이 백관을 거느리고 복합(伏閤)하여 모후(母后)를 폐할 것을 청하였는데, 공은 병을 칭탁하고 참여하지 않았다. 이에 양사(兩司)가 합계(合啓)하여 멀리 유배보낼 것을 청하였으므로 공이 강변에 나가 명을 기다렸으나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그 일이 처결되지 않았다.
기미년 겨울에 명 나라 조정에서 우리나라를 의심하여 감호(監護)하자는 의논까지 나왔으므로 광해가 이를 근심한 나머지 장차 사신을 파견하여 스스로 해명하려고 하였다. 그리고는 하교하기를,
“무함당한 일을 해명하려면 반드시 나라를 빛낼 솜씨를 소유한 자가 필요하다. 이모(李某)를 진주 상사(陳奏上使)로 차출하라.”
하고, 마침내 집안에 있던 공을 일으켜 판중추부사로 삼았다. 공이 여러 차례에 걸쳐 상소를 하며 간절하게 사양하였으나, 광해가 허락하지 않고 공을 인견(引見)한 뒤 물품을 하사하는가 하면 그지없이 위로하는 말을 해 주었다.
경신년 여름에 경사(京師)에 도착하여 사신으로서 해야 할 일을 마무리 지었다. 그때 마침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붕어(崩御)하였으므로 공이 예부(禮部)에 정문(呈文)하여 백관의 임곡(臨哭)하는 반열에 참여시켜 줄 것을 청하였는데, 각부(閣部)의 관원들이 그 뜻을 아름답게 여겨 허락하였다. 그런데 공부(工部)에서 만들어 준 최복(衰服) 가운데 법도에 들어맞지 않는 것이 있자 공이 또 정문하여 개정하도록 청한 뒤에 마침내 반열에 따라 들어가 성복례(成服禮)를 행하였다. 또 문화전(文華殿)에 나아가 황태자를 권진(勸進)하는 의식에 참여하는가 하면 진향제(進香祭)에도 참여하였고, 또 새로 황제가 등극할 때 축하하는 반열에도 참여하였는데, 이 모두가 외국 사신으로서는 얻기 힘든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공이 연경(燕京)에 있을 때, 좌유덕(左諭德) 왕휘(汪煇)가 사람을 통해 공의 문집을 보여 달라고 청해 왔다. 공이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조천기행시(朝天紀行詩)’ 1백여 편(篇)을 기록해서 보여 주었더니, 왕공(汪公)이 크게 기뻐하면서 스스로 서문(序文)을 지어 넣은 뒤 서사(書肆)에 맡겨 간행케 하였다.
그런데 급기야 공이 사명을 마치고 돌아오려 할 무렵에 권간(權奸)이 대관(臺官)을 사주하여 공을 탄핵하게 하였는데, 그 내용은 대체로 공이 일찍이 서궁(西宮)을 위하여 정청(庭請)에 불참하였고, 또 사명을 받들고 경사에 간 뒤 사서(私書)를 간행 배포하여 나라의 숨겨야 할 일을 퍼뜨렸으니 나국(拿鞫)하자고 청한 것이었다. 그러자 광해가 준열하게 꾸짖어 물리치고서 공에게 빨리 조칙(詔勅)을 받들고 돌아오도록 하였다.
신유년에 공조 판서의 임명을 받고 예문관 제학을 겸대하였다. 이때 박승종(朴承宗)이 이이첨과 사이가 나빠지자 공의 중한 명당에 기대어 이이첨의 세력을 약화시키려 하였다. 그러자 이첨이 더욱 노한 나머지 다시 양사를 사주하여 전에 있었던 서궁의 일을 가지고 공을 탄핵하게 하면서 절도(絶島)에 안치(安置)시키도록 청하게 하였는데, 계사(啓辭)를 봉입(捧入)했으나 광해가 안에 그냥 놔 두었다.
감군어사(監軍御史) 양지원(梁之垣)이 우리나라에 오게 되자, 비국(備局)이 아뢰기를,
“빈접(儐接)할 인재로는 이모(李某)보다 나은 이가 없는데, 현재 중한 탄핵을 받고 있는 몸이라서 감히 청하지를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광해가 즉시 하교하여 양사를 준열하게 꾸짖으면서 속히 정론(停論)하게 하고 공을 접반사(接伴使)로 삼았다. 공이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자 마침내 그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는데, 감군(監軍)이 공을 예우하며 대접하는 것이 특별하기만 하였다. 그리고 본국으로 돌아갈 즈음에 미쳐서도 안주(安州)에 오래 머물러 있으려고 하면서 공이 나이도 높고 관직도 높은 것을 공경한 나머지, 조정에 글을 보내 공을 먼저 귀환시키도록 청하기까지 하였다. 이에 공이 영변(寧邊)에 머물러 분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당시 손 각로(孫閣老)가 우리나라에 온다는 소식이 있자 공을 손 각로의 접반사로 삼았다가 손 각로가 실제로 오지 않게 된 것을 확인하고는 공을 돌아오게 하였다.
이때 정사(靖社 인조반정을 뜻함)의 은밀한 계책이 이미 정해졌는데 그 일이 꽤나 새어나가고 있었다. 그러자 양사가 다른 일을 칭탁하고는 거사를 주도한 여러 사람들을 논하였으므로 장차 어떤 화가 닥칠지 모를 상황이었는데, 공이 이 일로 유희분(柳希奮)을 만나 보고 점잖은 말로 의심을 풀게 하였으므로 마침내 다른 일이 없게 되었다.
계해년 3월에 금상(今上)이 반정(反正)하였을 때, 공이 이에 대한 소식을 속속들이 듣고 난 연후에 창덕궁(昌德宮)에 입조(入朝)하였다. 상이 공에게 명하여 경운궁(慶運宮)에 가서 대비(大妃)를 모시고 복위(復位)를 청하게 하면서, 공을 예조판서 겸 지경연, 판의금부사에 제수하였다.
공이 일찍이 연석(筵席)에서 무함을 당한 성혼(成渾)의 복관(復官)을 청하고, 또 이이(李珥)에게 포증(褒贈)을 가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모두 따라 주었다.
사묘(私廟)의 전례(典禮)에 관해 의논하게 되자, 공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일단 선조(宣祖)의 대통(大統)을 잇게 되셨는데, 본생(本生) 부모의 봉호(封號)에 대해서는 선조(先朝 선조(宣祖)를 가리킴)의 고사(故事)가 있긴 합니다만, 그대로 따라서 칭한다는 것은 근거가 명확하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대체로 전하께서 손자의 입장에서 할아버지를 계승한 만큼 고위(高位 아버지의 자리)가 비어 있기 때문입니다.
정통(正統)이야 물론 문란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마는, 천륜(天倫)으로 볼 때 역시 고위를 비워 둘 수는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지금 만약 고(考)라고만 칭하면서 황(皇)이라는 글자는 가하지 않고, 자(子)라고만 칭하면서 효(孝)라는 글자는 가하지 않는 동시에, 지자(支子)를 세워 그 제사를 주관하게 하되 사전(祀典)과 봉호(封號)를 일체 덕흥(德興 선조(宣祖)의 부친)의 고사(故事)에 따르도록 한다면, 종통(宗統)을 중하게 하는 것과 본생 부모에게 보답하는 일 두 가지가 모두 극진하게 될 듯싶습니다.”
하였는데, 수상(首相)인 이공 원익(李公元翼) 이하 모두가 공의 의견을 정당하다고 옹호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원자(元子)의 보양관(輔養官)을 뽑도록 명하였는데, 공이 오공 윤겸(吳公允謙), 정공 엽(鄭公曄), 정공 경세(鄭公經世), 김공 장생(金公長生)과 함께 동시에 선발되었다.
대비가 하교하여 광해의 죄악을 하나하나 지적한 다음 천자에게 주달하여 복주(伏誅)시킬 것을 청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이상 원익(李相元翼)이 공에게 문의해 왔는데, 공이 이공 및 신공 흠(申公欽)과 함께 청대(請對)하여 그 불가한 점을 설명드리자, 대비의 뜻이 조금 누그러졌다.
광해의 부인 유씨(柳氏)가 죽자, 예관(禮官)을 보내 치상(治喪)하게 하고 왕자(王子)의 예법을 써서 장사를 치르도록 청하였다. 조식(曺植)의 서원(書院)은 이이첨의 무리들이 세운 것이었는데, 사람들에게 훼손되어 사판(祠版)이 낭자하게 되었으므로, 소재지에 영을 내려 금하게 하라고 청하니, 논하는 이들이 옳게 여겼다. 또 원자(元子)의 나이가 10세를 넘어서자, 일찍 책례(冊禮)를 행할 것을 청하면서 우선 원복(元服 성년 의식)을 가하도록 하였다.
갑자년에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임진(臨津)의 방어선이 무너지자 상이 장차 남쪽으로 피신하려 하였다. 이에 공이 경성을 굳게 지키면서 근왕병(勤王兵)이 오기를 기다리자고 청하였으나, 여러 사람들이 불가하다고 의논드렸으므로 마침내 계책을 결정하고 공산(公山 공주(公州))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공이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하여 수원(水原)에 이르렀을 때, 팔로(八路)에 교서(敎書)를 내려 역순(逆順)의 도리를 가지고 효유(曉諭)할 것을 청하였다. 적(賊)의 머리가 바쳐진 뒤에 상이 도성으로 돌아올 때 공이 먼저 종묘의 신주(神主)를 받들어 모시고 입경(入京)하였다.
을축년에 세자 우빈객(世子右賓客)을 겸하였다. 세자에게 원복(元服)을 가할 때 공이 이와 관련하여 찬(贊)을 지었다. 의정부좌찬성 겸 세자이사(世子貳師)로 승진 발령되었다. 태감(太監) 왕민정(王敏政)과 호양보(胡良輔)가 우리나라에 와서 조칙(詔勅)을 반포하였는데, 그때 공이 관반(館伴)이 되었다. 호패법(號牌法)을 시행하려고 할 때 호패청 당상이 되었다.
계운별궁(啓運別宮 인조(仁祖)의 생모)의 상(喪)을 당했을 때, 공이 또 판중추 겸 예조판서로서 상례(喪禮) 및 장례(葬禮)의 절문(節文)을 의논드렸는데, 높이고 낮춰야 하는 대목을 당할 때마다 반드시 분명히 살펴 신중하게 처리하곤 하였으므로, 상이 준엄하게 분부를 내려 예관(禮官)을 추고(推考)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공이 황공한 심정으로 상소를 하여 사직을 청하였으나 상이 너그럽게 비답을 내리며 윤허하지 않았다.
강(姜 한림원 편수(翰林院編修) 강왈광(姜曰廣)), 왕(王 공과 급사중(工科給事中) 왕몽윤(王夢允)) 두 조사(詔使)가 왔을 때에도 공이 관반의 임무를 수행하였는데, 조사가 보낸 첩문(帖文) 중에는 ‘공의 뛰어난 명성을 실컷 들었다.’는 내용이 들어 있기도 하였다. 다시 예전처럼 좌찬성 겸 예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정묘년에 노적(奴賊 청 나라 누르하치의 군대)이 쳐들어오자 공을 이배(移拜)하면서 병조 판서를 겸하게 하였는데, 공이 사양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경(卿)이 아니면 이 임무를 감당할 수가 없다.”
하였다. 공이 대가를 호종하여 강도(江都)에 들어갔다. 화의(和議)가 성립될 무렵, 오랑캐가 유해(劉海)를 우리나라에 파견하여 맹약(盟約)을 정하게 하였다. 이때 공이 명을 받들어 그를 접대하였는데, 김 호판 신국(金戶判藎國)과 내가 공을 보좌하였다.
유해가 처음에는 명 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해야 한다고 말하였는데, 공이 대의(大義)에 입각하여 통렬하게 물리치자 유해가 자못 빈말로 공갈을 치고 나왔다. 그러다가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홀연히 공손한 태도를 지으면서 말하기를,
“평소 조선이 예의지국(禮儀之國)이라는 소문을 들어왔는데, 지금 제공(諸公)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과연 그렇다. 나라가 이토록 위태롭게 되었는데도 여전히 충신(忠信)의 자세를 고수하면서 변절하려고 하지를 않으니 정말 존경스럽기만 하다.”
하고, 마침내 그 일을 가지고 다시는 핍박하지 않았다.
유해가 세폐(歲幣)로 요구하는 마우(馬牛)의 숫자가 엄청나게 많았는데, 공이 극력 다투어 허락하지 않으면서 단지 약간의 토산물을 가지고 호상(犒賞)할 자료로 삼게 하였다. 유해가 또 회맹(會盟)하는 날에 상이 직접 맹단(盟壇)에 나오게 하려 하였는데, 공이 또 목숨을 걸고 쟁집(爭執)하자 유해 역시 다시는 강요하지 않았다. 뒤에 유해가 명 나라 조정에 귀부(歸附)하고 나서는 매번 우리나라를 충의(忠義)의 국가로 일컫곤 하였다 한다.
공이 행조(行朝)에 있을 때 건의한 결과, 제도(諸道)에 영장(營將)을 두고 그들로 하여금 속오(束伍)를 관장하며 조련케 하다가 일이 발생할 때에는 각자 부대를 이끌고 적과 싸우게 하였다.
유해가 또 오자, 상이 공에게 명하여 유해에게 가서 의주(義州)에 잔류해 있는 병력을 속히 철수시키도록 타이르게 하였는데, 얼마 있다가 과연 오랑캐 군대가 철수해 돌아갔다.
무진년 7월에 의정부 우의정으로 발탁되었다. 공이 여러 차례 사양하였으나 모두 부드럽게 유지(有旨)를 내리며 윤허하지 않았다. 공이 정승의 지위에 있으면서, 명실(名實)을 상세히 고찰하여 실질을 힘쓸 것과 교화를 밝혀 풍속을 바르게 할 것과 유술(儒術)을 숭상하며 현재(賢才)를 양성할 방도에 대해서 여러 차례 진언하였다.
왜사(倭使)인 현방(玄方)과 지광(智廣) 등이 와서 상경(上京)하게 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공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교활한 섬 오랑캐가 말하는 것을 다 들어주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의당 특별히 부른다는 명목을 붙여 현방 등만 올라오게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규례에 따라 부산(釜山)에 머물게 하면서 접대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일찍이 강연(講筵)에 입시했을 적에, 예를 두텁게 하여 김장생(金長生)과 장현광(張顯光) 등을 불러올 것과 성혼(成渾)을 추증(追贈)하여 숭장(崇奬)하는 뜻을 보여 줄 것을 청하고, 또 아뢰기를,
“전하에게는 아랫사람들을 경시하면서 자신의 총명을 과시하기 좋아하는 병통이 상당히 있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가납(嘉納)하였다.
상신(相臣) 중에 어떤 자가, 나만갑(羅萬甲)과 김육(金堉)이 권세를 제멋대로 휘두르며 패거리를 짓고 있다고 말하자, 상이 대신에게 명하여 그 죄를 헌의(獻議)하라고 하였다. 이에 공과 수상(首相)이 아뢰기를,
“오직 진정(鎭定)시키는 것이 마땅하지 무작정 처벌만 내리는 것은 온당하지 못합니다.”
하였으나, 상이 듣지 않고서 만갑은 멀리 유배보내고 김육은 하옥시키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공과 수상이 입궐하여 대죄(待罪)하니, 상이 즉시 인견(引見)하고서 만갑은 유해하는 벌을 감하여 중도부처(中道付處)하고 김육은 문외출송(門外黜送)시키라고 명하였다. 공이 또 수상과 함께 상차하여 사직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경오년 봄에 선묘(先墓)에 분황(焚黃 추증된 자의 무덤 앞에서 고명문(誥命文)의 부본(副本)을 불살라 고하는 것)하려고 말미를 청하자, 상이 전상(奠床)과 식물(食物)을 하사하도록 명하는 등 매우 두터운 은총을 내렸다.
유흥치(劉興治)가 가도(椵島)의 장수 진계성(陳繼盛)을 제멋대로 죽이자 조정에서 병력을 동원해 공격하자고 의논하였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명 나라 조정에 품(稟)하지도 않고서 미리 앞질러 토벌을 행한다는 것은 외번(外藩)의 도리가 아니다.”
하고, 급기야 입대(入對)해서 또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히 진달하였으나, 상이 예전의 주장을 받아들인 터라 따르지 않았다. 그 뒤 군대가 출동하고 보니 흥치는 벌써 떠나고 없었는데, 혹 섬 안에 있는 노약자들까지 모두 소탕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였으나, 공이 또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논하여 결국 군대를 해산시키기에 이르렀다.
추숭(追崇 인조의 부모에 대해 위호(位號)를 높이는 일)에 대한 의논이 일어났을 때, 옥당이 차자를 올려 상의 뜻을 거스르자, 상이 이행원(李行遠) 등을 나문(拿問)하고 조경(趙絅)을 유배보내라고 명하였는데, 공이 차자를 올려 극력 간(諫)하니, 상이 모두 풀어 주었다.
신미년 여름에 가뭄이 크게 들자, 상이 억울하고 원통한 자가 있는지 상세히 살피고 가난한 백성들을 구휼(救恤)하고 어진 이와 능력 있는 자들을 선발하여 하늘의 재앙에 사죄토록 명하는 한편, 옥당의 다섯 유신(儒臣)의 죄를 용서하고 추숭(追崇) 문제로 주청하는 일을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공이 그 기회에 상차하여, 자기를 비우고 남의 말을 들을 것과 기숙(耆宿)들을 우대할 것과 죄수들에게 은전을 베풀 것을 청하였다. 이와 함께 또 쇠약하고 병든 자신의 처지를 개진하면서 정승의 직책을 면하게 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너그럽게 비답을 내리며 윤허하지 않았다.
가을에 바람 불고 천둥 치는 변고가 있자, 공이 수상과 함께 상차하여 자신들을 탄핵하고,아울러 능(陵)을 참배하는 일을 정지하도록 청하니, 상이 즉시로 참배하는 일을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공이 전후에 걸쳐 대례(大禮)를 논하는 과정에서 직접 상의 앞에 나아가 진달드리기도 하고 계차(啓箚)를 올리기도 하였는데, 그 논리가 매우 명쾌하고 적절하였다. 그리고 상이 잘못 책문(責問)하는 일이 있을 때마다 공이 한번도 간(諫)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그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문득 사직을 청하고 그 자리를 떠나곤 하였다.
임신년에 좌의정 겸 세자부(世子傅)로 승진 발령되었다. 상이 유사에게 명하여 속히 추숭(追崇)하는 전례(典禮)를 거행하라고 명하자, 공이 수상과 함께 연명(聯名)으로 상차하여 누차 간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대관(臺官) 박동선(朴東善)과 권도(權濤)가 휘호(徽號)를 증감(增減)하는 문제를 논하였는데, 상이 노하여 권도는 나문(拿問)하고 박동선은 삭탈관직(削奪官職)하라고 명하자, 공이 또 상차하여 간하였다.
6월에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승하하자 공이 총호사(摠護使)가 되었는데, 재궁(梓宮)이 산릉(山陵)에 도착할 무렵 공이 병에 걸려 그 일을 제대로 행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겨울에 이르러 병을 인혐(引嫌)하면서 정고(呈告)를 하였는데, 모두 20차례나 올린 뒤에야 비로소 허락을 받고 판중추부사로 체직되었다.
갑술년에 문강공(文康公 월사의 조부)이 지은 《대학연의집략(大學衍義輯略)》을 위에 올렸다. 그리고 인하여 차자를 올리면서 그 책 속에서 논한 바 경외심(敬畏心)을 높일 것과 일욕(逸欲)을 경계할 것과 내치(內治)를 엄하게 할 것과 민정(民情)을 살필 것 등 4개 조목을 인용하여 경계시키는 내용을 진달드리니, 상이 가납(嘉納)하고 털 담요를 하사하였다.
가을에 원종(元宗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定遠君)을 추존한 위호)을 부묘(祔廟)하라는 명이 내려오자 삼사(三司)가 강력하게 쟁집(爭執)하였다. 이에 상이 진노한 결과 언관(言官) 10여 인이 서로 잇따라 축출되고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그때마다 공이 상차하여 간하곤 하였으나 모두 들어주지 않았다.
을해년 4월에 공의 병세가 위독해졌다. 상이 내의(內醫)을 보내 병을 살피게 하는 한편 약물(藥物)이 끊이지 않도록 하였으며, 왕세자 역시 궁관(宮官)을 보내 문병하였다. 이달 29일에 정침(正寢)에서 눈을 감았다.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상이 애도하며 철조(輟朝)를 하는 한편, 3일 동안 소선(素膳)을 들고, 근신(近臣)을 보내 조문을 하게 하면서 예법대로 제사를 올리고 부의(賻儀)를 전하게 하였다. 왕세자 역시 궁관을 거느리고 거애(擧哀)하였으며, 7일 동안 소선을 들면서 조문과 부의를 특별히 더 가하였고, 8일이 지난 뒤에 직접 가서 곡을 하고 조문하였다. 그리고 관학(館學)의 유생 1백 70여 인이 서로들 와서 조문하였다. 아, 공이야말로 어쩌면 살아서는 영광스럽게 되고 죽어서는 사람들의 애도를 받는 그런 인물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특별히 빼어난 자질을 품부받았는데, 덕성이 온화하고 두터울 뿐더러 풍도(風度)가 맑고 시원스러워 사람들과 말할 때에는 화기(和氣)가 물씬 풍겨 나오는 가운데 털끝만큼도 뻐기는 기색이 없었다. 그러나 시비를 따지고 거취(去就)를 결정할 즈음에는 또 한번도 자기의 소신을 굽힌 적이 없었다. 그래서 정 문숙공 엽(鄭文肅公曄)이 당세의 인물을 논할 때면 문득 공을 칭찬하면서 말하기를,
“화기로운 가운데에서도 그 소신이 확고하기만 하니 세상에서 그런 인물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하곤 하였다.
공은 특히 효우(孝友)에 독실한 면모를 보였다. 임진왜란 때 공이 삼등공(三等公)을 모시고 행재(行在)로 갈 적에 양주(楊州)에 이르러 적병을 만나자 산골짜기에 숨어 있게 되었다. 삼등공이 며칠 동안이나 음식을 들지 못하게 되자 공이 눈물을 흘리면서 산을 나와 먹을 것을 찾아다녔는데, 당시에 적병의 칼날이 번뜩이지 않는 곳이 없어 인적(人跡)이 완전히 끊어졌기 때문에 공이 정처없이 방황하기만 하였다. 그러다가 홀연히 어떤 노인 하나가 바위 위에 앉아 도시락밥을 앞에 놓고 있는 것을 보고는 그 앞으로 나아가 절을 한 뒤 구걸을 하니, 그 사람이 도시락을 모두 내주었다. 이에 공이 반절만 받겠다고 사양하니, 그 사람이 말하기를,
“가지고 돌아가서 며칠 동안 드리도록 하라.”
하고는, 돌아보지도 않고 그 자리를 떠난 일도 있었다. 또 누님이 고양(高陽)에 살고 있었는데 생사를 알지 못해 공이 찾아보러 길을 떠났다가 성산(城山 파주(坡州))에 이르렀을 때 적을 만나 하마터면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총탄이 3번이나 공을 향해 날아왔는데 모두 상처는 입지 않고 의복에 구멍만 뚫고 지나 갔으므로 마침내 누님을 찾아보고 돌아올 수가 있었다.
경기 감사 심대(沈岱)가 징파도(澄波渡)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었는데, 삼등공의 피로가 극심해지자 그곳에서 하룻밤을 머무르려고 하였다. 그런데 공이 심대의 군대가 대비책을 세우지 않은 것을 보고서 분명히 패할 것이라는 것을 감지하고는 그 즉시 재촉하며 길을 떠나 몇 리를 더 갔는데, 적이 과연 심대의 군진(軍陣)을 습격하여 거의 모든 군사를 도륙하고 말았다. 이처럼 위기에 처했다가 다행히 면하게 된 일이 무척 많았다.
선인(先人)의 기신(忌辰)을 만날 때면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몸을 씻고 제사드리는 일을 폐하지 않았는데, 늘그막에 이르러서도 똑같이 하였다. 그리고 삭망(朔望)에 참알(參謁)할 때 비록 병이 들었어도 꼭 직접 그 자리에 나아가곤 하였다.
5대조의 묘소가 누원(樓院)에 있었는데 오래도록 향화(香火)를 올리지 못하였다. 공이 이에 제사의 격식을 정한 뒤 자손들에게 교대로 제례를 행하게 하였다. 문강공(文康公)의 구기(舊基)에 사우(祠宇)가 없자 공이 중건(重建)하여 제사를 주관하는 자에게 주었다.
과부가 된 누님과 옆집에서 살면서 하루도 찾아보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내외의 종족을 거두어 보살피면서 곡진하게 은혜를 베풀었으며 가난에 쪼들리는 이들을 진구(賑救)하면서 늘 부족한 듯이 여겼으므로 멀리 떨어진 시골의 소원한 족속들까지 모두 자기 집처럼 여기고 의지하였다.
공의 충군우국(忠君憂國)하는 정신은 지극한 정성에서 발로된 것이었다. 공은 늘 말하기를,
“내가 집안일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어설프게 처리하면서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나랏일을 당해서는 아무리 미세한 일이라도 감히 소홀히 해 본 적이 없다. 무슨 일을 시행하고 요리할 즈음에 밤에 누워 있으면 눈앞에 그 일들이 꼭 전개되곤 한다.”
하였다. 조가(朝家)의 조치가 잘못되었다는 말을 들으면 근심스러운 빛이 밖으로 드러났고, 훌륭한 정사와 성대한 일을 보게 되거나 등대(登對)하여 이치에 합당한 상의 분부를 듣게 되면 나와서 반드시 기쁜 낯으로 자제들에게 자랑삼아 이야기하곤 하였다. 관직을 수행할 때에는 항상 대체(大體)를 견지하는 가운데, 남의 과오를 보아도 오로지 덮어 주려 노력하였고, 옥사(獄事)에 대해 헌의할 때에도 반드시 평반(平反 관대하게 처리하는 것)을 위주로 하여 살릴 방법을 모색하곤 하였다.
평생토록 집안의 살림살이는 거들떠보지 않았으며, 전원(田園)을 경영하거나 가옥을 증수(增修)하는 일을 한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왕세자가 조상(弔喪)하고 돌아와서 강관(講官)에게 이르기를,
“경상(卿相)의 지위에 수십 년 동안 몸담았으면서도 사는 집이 이처럼 좁고 누추하다니, 그 청렴한 자세와 검소한 생활이야말로 귀하게 여길 만하다.”
고 하였던 것이었다.
공이 선묘(宣廟)의 지우(知遇)를 받은 그 융숭한 은총이야말로 고금을 통해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리고 중도에 비운(否運)을 만나 비록 뭇 소인배들에게 미움을 받는 처지에 놓였어도 그 소신을 확고부동하게 지켜 성예(聲譽)가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그리하여 만년에 성상의 시대를 만나게 되어서는 마침내 정승 자리에 임명되었는데, 공을 그지없이 중하게 여기며 의지하는 성상의 뜻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한 적이 없었다.
공이 조정에 몸담은 46년 동안 육경(六卿)을 두루 역임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춘관(春官 예조 판서)의 직책을 9차례나 수행하고 2번이나 문형(文衡 대제학)을 잡으면서 예악(禮樂)의 의장(儀章)을 상고해 정한 것이 많았다. 그리고 고문대책(高文大冊 교서나 법령처럼 중대한 국가의 문서)이나 사대교린(事大交隣 중국과 일본에 대한 외교 교섭)의 외교 문서들이 대부분 공의 손에서 나왔는데, 모두가 기걸차서 볼 만한 점이 있었다.
공이 경사(京師)에 다녀온 것과 중국 사신을 접대한 것이 각각 4차례나 되었는데,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주선하고 응대하는 과정에서 모든 생각과 정성을 기울이며 나라의 어려움을 해소하고 나라의 무함을 씻어 준 결과 국가가 더욱 빛나게 한 그 공로야말로 사람들이 너무도 분명하게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아온 사실이다. 그래서 비록 혼조(昏朝 광해조(光海朝))를 당하여 간인(奸人)들이 참소하여 물어뜯으면서 기필코 사지(死地)에 떨어뜨리려 하였지만, 나라에 걱정스러운 사태가 발생하여 중국 조정과 관련되는 일이 전개될 때마다 어쩔 수 없이 공을 일으켜 세워 그 일을 해결하게 하곤 하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공이 여러 차례나 낭패를 당했다가 다시 일어서곤 하면서 끝내 기막힌 화를 당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공은 학문하는 과정에서 장구(章句)를 잗달게 강설하는 일에는 몰두해 본 적이 없었으며, 그런 가운데 선(善)을 즐기고 덕(德)을 좋아하는 성의(誠意)가 물씬 풍겨 나오곤 하였다. 그리고 사문(斯文)을 위하는 길이라고 일단 생각되면 문득 자신의 심력(心力)을 모두 기울이곤 하였는데, 이는 공이 지은 문자와 행한 일들을 통해 보면 고찰할 수 있는 일이다.
공의 문장은 천재적인 것으로서 타인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넉넉한 어휘를 민첩하게 구사하여 전편의 뜻이 통창하게 하면서 군색하거나 응체되는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선묘(宣廟)도 공의 문장을 가장 좋아하면서 이르기를,
“당대에 글을 잘 짓는다고 이름난 사람들도 거개가 공보다 한 수 아래이다.”
라고 하였던 것이었다.
처음에 변무(辨誣 정응태(丁應泰)가 우리나라를 무함한 일을 해명한 것)하는 주문(奏文)을 지어 중국 조정에서 칭찬을 받았는데, 그 뒤 동정(東征)하러 온 중국 장수들 가운데 그 주문을 보았던 사람들은 상을 만날 때마다 반드시 좋은 문장이라고 일컫곤 하였다. 노인(魯訒)이라는 자는 우리나라 사람으로 강절(江浙)에 표류했다가 돌아왔는데, 그도 역시 남방의 사자(士子)들이 공의 글을 많이들 전송(傳誦)하고 있다고 전해 주었다. 그런가 하면 금년의 하절(賀節) 사신이 연경(燕京)에서 돌아왔을 때에도, 옥전(玉田)의 유생이 공의 주본(奏本)을 꺼내 보여 준 일과 영원사(寧遠寺)의 승려 역시 공이 기증한 시를 암송하며 월사의 안부를 묻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공이 일찍이 양 어사(楊御史)의 비문을 지어 준 적이 있었는데, 그가 묵본(墨本)을 얻고는 크게 기뻐하여 무리들 속에서 과시하며 말하기를,
“조선 이 상서(李尙書)가 지어 준 글이다.”
라고 하였다. 또 왕 학사 휘(汪學士煇)가 공의 시를 얻어 간행하였는데, 서승(署丞)인 섭세현(葉世賢)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전남(滇南)으로 갈 때에 그 판본(板本)을 가지고 가면서 말하기를,
“강남(江南)에 이를 널리 배포하여 향리의 영예로 삼겠다.”
라고 하였다. 그런가 하면 공이 일찍이 연경으로 갈 적에 진강(鎭江)의 수장(守將) 구탄(丘坦)이 공의 도착 소식을 듣고는 길옆에 나와 기다리면서 채색 비단을 늘이고 장막을 설치하여 영접하기도 하였고, 또 웅 어사 화(熊御史化)는 자기 집에 공을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면서 그지없이 공경스럽게 예우하기도 하였다. 중국 사람들이 공을 경모(敬慕)한 것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공의 저술로는 시문집 25권이 있고, 또 《서연강의(書筵講義)》 1권과 《대학강어(大學講語)》 1권이 집에 소장되어 있다.
부인 권씨(權氏)는 예조 판서 극지(克智)의 딸이다.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명한(明漢)은 성균관 대사성이고, 소한(昭漢)은 병조 참지이다.
공은 일찍부터 중한 명성을 얻었고 그 이름이 중국에까지 벌써 흘러 전해졌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공을 알건 모르건 불문하고 아래로 어린아이들과 부녀자들 그리고 하인과 나무꾼에 이르기까지 늘 공을 일컬으면서 반드시 월사라고 하고 그 이름은 부르지 않았다. 공의 뛰어난 문장과 정술(政術)과 덕망으로 말하면 국사(國史)에 실려 있고 만인의 입으로 전해지고 있는 바이니, 속일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이에 삼가 그중에서 확연히 드러난 것들을 채집하고 공의 가장(家狀)을 참고하여 이상과 같이 논술하는 바이다.


 

[주D-001]창려(昌黎)의 남산시(南山詩) : 창려는 당(唐) 나라 한유(韓愈)의 자(字)이다. 남산시는 종남산(終南山)에 올라가 그 경승(景勝)을 표현한 2백 4구(句)의 오언 고시(五言古詩)로서 두보(杜甫)의 북정시(北征詩)와 쌍벽을 이루는 걸작으로 회자되고 있다.
[주D-002]중자(仲子)의 …… 것 : 《춘추(春秋)》 은공(隱公) 5년에 “중자의 사당을 낙성하고 처음으로 육일(六佾)의 춤을 추게 하였다.” 하였는데, 삼전(三傳 좌전ㆍ공양전ㆍ곡량전)의 평가가 각기 다른 가운데, 대체로 별도의 사당을 세운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육일의 춤을 처음으로 그 사당에서 참람되게 추도록 했다는 데에 폄하하는 시각을 맞추고 있다. 중자는 혜공(惠公)의 둘째 부인으로서 환공(桓公)의 어미인데(곡량전에서는 혜공의 어미라고 하였음), 혜공의 서자인 은공이 환공을 대신해서 섭정하며 중자의 별궁(別宮)을 지어 준 것이다.
[주D-003]성풍(成風)에게 …… 것 : 《춘추(春秋)》 문공(文公) 9년에 “진(秦) 나라 사람이 와서 희공(僖公)과 성풍(成風)의 수의를 전하였다.” 하였는데, 삼전 모두 비난하는 뜻이 들어 있다고 보지 않았으며, 특히 《좌전(左傳)》에서는 예(禮)가 있는 행동으로 높이 평가하였다. 성풍은 희공의 부인이다.
[주D-004]《춘추》에서 …… 받았습니다 : 무슨 근거로 월사가 비난을 받았다고 말한 것인지 확실치 않다.
[주D-005]계축옥사(癸丑獄事) : 광해군 5년(1613), 대북파(大北派)의 정인홍(鄭仁弘), 이이첨(李爾瞻) 등이, 소북파(小北派)에서 선조의 적자(嫡子)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려 했다는 구실로, 소북파의 영수인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을 사사(賜死)케 하고 소북을 조정에서 축출한 사화(士禍)이다.
[주D-006]목릉 : 양주(楊州) 구리(九里)에 있는 동구릉(東九陵)의 하나로 선조(宣祖)와 왕비의 능이다.

 

 

청음집 제25권
 비명(碑銘) 2수(二首)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 월사(月沙) 이 문충공 정구(李文忠公廷龜)의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만력(萬曆) 무술년(1598, 선조31)에 섬 오랑캐가 재차 쳐들어와 신종 황제(神宗皇帝)께서 재차 문무(文武)의 대신(大臣)을 보내 정벌하였다. 그러나 전공(戰功)을 반도 채 이루기 전에 참소를 입어 군사들이 놀라 떨고 국가가 멸시를 당하게 되었으니, 이리저리 흩어진 조종(祖宗)의 영령들과 백성들의 마음을 다시금 하나로 모으는 일이 처음 난리가 일어났을 때보다도 더 어려웠다. 이에 우리 선조(宣祖) 임금께서 연안 이공(延安李公)을 발탁해 등용하여 하대부(下大夫)에서 아경(亞卿)으로 승진시켜서 대신을 따라 중국으로 들어가서 상주(上奏)하게 하였는데, 그 상주문은 실로 공이 찬(撰)한 것이었다. 상주문이 들어가자 천자께서 의심이 환하게 풀려 분명한 전지를 내렸다. 그리하여 참소한 사람들이 쫓겨나고 중국 군사들이 안정되었으며, 우리나라의 무고(誣告)가 씻어지게 됨에 따라 나라를 회복하는 일이 더욱더 확고하고 빛나게 되었다. 이에 연안 이공의 이름이 온 천하에 알려져 당대 선비들의 기대를 받고 임금의 특별한 은총을 받게 되니, 대개 공과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게 되었다.
공이 이미 졸한 다음에는 문충(文忠)이라는 시호(諡號)를 하사하였다. 군자들은 말하기를, “지난날에 만약 참소한 설이 그대로 행해졌다면 황조(皇朝)에서는 구원하는 은혜를 끝까지 베풀어 주지 못하였을 것이고, 우리나라에서는 의지할 바가 없었을 것이니, 어찌 오늘날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지난날에 외침을 막기 위해 달려가 상주하여 중국까지 아울러 부흥시켰으니, 문아(文雅)한 문장의 힘이 말을 달리고 적을 참수한 공을 덮을 수가 있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공의 휘(諱)는 정귀(廷龜)이고 자는 성징(聖徵)이며, 자호는 월사(月沙)이다. 공의 선조 가운데 중랑장(中郞將)을 지낸 무(茂)라는 분이 있어 당(唐)나라 고종조(高宗朝)에 소정방(蘇定方)을 따라 백제를 평정하러 왔다가 그대로 남아 신라에서 벼슬하여 염성(鹽城)을 관적(貫籍)으로 삼았다. 염성은 뒤에 연안(延安)으로 고쳐졌다. 이에 그 자손들이 드디어 연안인(延安人)이 되었다. 후세에는 감정(監正)과 판서를 지낸 분들이 줄을 이어 나왔다.
본조(本朝)에 이르러서는 문강공(文康公) 석형(石亨)이 문장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네 조정을 잇달아 섬기면서 관직이 부원군(府院君)에 이르렀다. 세상에서는 이분을 삼괴 이공(三魁李公)이라고 칭하는데, 공에게 고조가 된다. 이분이 혼(渾)을 낳았는데,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지냈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순장(順長)을 낳았는데, 벼슬하지 않았으며, 장수를 누려 수직(壽職)으로 2품의 품계를 받았다. 이분과 공의 아버지인 현령공(縣令公)이 모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부인들도 남편의 품계에 따라 작위를 받았다. 3대가 은혜를 받아 추증된 것은 모두 공이 귀하게 됨으로 말미암아서였다.
현령공의 휘는 계()로, 일찌감치 기예를 닦아서 고문사(古文辭)를 잘하였으므로 공거(公車)에 천거되어 여러 차례 선비들 가운데 으뜸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과거에는 끝내 급제하지 못하고 졸하여 벼슬이 삼등 현령(三登縣令)을 지내는 데 그쳤다. 어진 배필을 두었는데, 현감을 지낸 광주(光州) 김표(金彪)의 따님이며, 가정(嘉靖) 갑자년(1564, 명종19)에 공을 낳았다.
공은 신령스러운 망아지가 지상으로 떨어진 것만 같아 천리마 같은 자태가 있었다. 말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에 문득 글자를 알았다. 6세 때 능히 글을 지었는데, 글 한 편이 나올 적마다 사람들이 놀라 서로 외워 전하면서 신동(神童)이라고 칭하였다. 조금 자라서는 백가(百家)의 서적을 두루 섭렵하였는데, 눈에 한번 스친 것이면 곧바로 외워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재주가 날이 갈수록 익어갔다. 11세 때 김 부인(金夫人)의 상을 당하였는데, 지나치게 슬퍼하여 몸을 보전하지 못할 뻔하였는데도 오히려 글 읽는 일을 폐하지 않았다. 상제(喪制)를 마치고서 국학(國學)으로 올라가 공부하였는데, 시험 볼 때 지은 글들이 혁혁하고 아름다워서 평소에 전장(專場)하던 자들도 공을 만나면 모두 스스로 그만두었다.
을유년(1585, 선조18)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 경인년(1590)에 문과에 급제하니, 의정공(議政公)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결발(結髮)하면서부터 글공부를 하여 스스로 한 번 급제하는 것은 취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고 여겼으나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채 이에 이르게 되었다. 지금 네가 능히 나의 뜻을 폈으니, 내가 다시 무슨 한이 있겠는가. 선대의 업을 크게 빛내는 것이 바로 너의 책임이다.” 하였다. 그리고는 그대로 과거시험에 다시는 응시하지 않았다.
승문원 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에 선발되어 보임되었다가 천거를 받아 사관(史館)에 들어갔다. 공은 앞서 태학에 있을 적에 제생(諸生)들과 더불어 우계(牛溪) 성혼(成渾) 선생을 조정에 머물게 하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 상소문이 공의 손으로 지어진 것이었으므로 권세를 쥐고 있던 자들이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드러내지는 않고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논계해서 천거한 것을 삭제하였는데, 공을 천거한 자까지 아울러 논핵하였다.
임진년(1592) 여름에 일본이 쳐들어왔다. 상께서 공경(公卿)들을 불러 변방의 일에 대해 계획을 세웠는데, 공은 가주서(假注書)로서 입시해 있었다. 공은 아름다운 자태가 무리들 가운데에서 특출하였으므로 상께서 참으로 이미 주목하여 보고 있었는데, 기주(記注)하는 즈음에 붓끝에서 바람소리가 쌩쌩 날 정도로 민첩하게 글을 써 참으로 볼만하였다. 이에 상께서 기이하게 여겨 향안(香案) 위에 앉아서 자주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어연(御硏)을 떨어뜨린 탓에 먹이 공의 옷에 묻었다. 그러자 상께서 급히 중연(中涓)에게 명하여 문질러 닦게 하니, 사람들이 공을 위하여 영광으로 여겼다. 왜적이 안쪽으로 깊숙이 쳐들어오자 상께서 서쪽으로 파천하였다. 공은 그때 마침 상을 당하여 염습(殮襲)을 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뒤늦게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갔다. 성천(成川)에 이르러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에 제수되었다.
다음 해인 계사년(1593, 선조26)에 세자를 따라 대조(大朝)로 들어가 다시 사관(史官)이 되었다. 상께서 주연(冑筵)을 여는 것을 급하게 여겨 다시 세자에게 돌아가라고 명하였다. 얼마 뒤에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이 나와 정주(定州)에 주둔해 있으면서 학문을 강구하는 데 도움을 받고자 하여 문학을 잘하는 선비를 만나게 해 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공이 문민공(文敏公) 황신(黃愼)과 함께 뽑혀 《대학장구(大學章句)》를 강론하게 되었다. 송 경략은 아호(鵝湖)를 추종하면서 낙민(洛閩)의 설을 그대로 따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공은 그에 대한 설을 지어서 차이점에 대해 힘껏 분석하였는데, 드러내 밝힌 바가 많아 큰 칭찬을 받았으며, 목판에 새겨 간행하게 되었다. 얼마 뒤에 송 경략이 여러 장수들을 크게 불러 모은 상황에서 문 밖에 고관대작들이 서로 뒤섞여 있었는데도 감히 문 안을 엿보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순안어사(巡按御史)와 더불어 송 경략이 문민공과 공 둘만 들어오게 하여 위로하고 장려하기를 아주 은근하게 하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들 혀를 내두르면서 부러워하였다.
사서(司書)로 승진하였다가 병조 좌랑으로 개차되었으며, 또다시 이조 좌랑으로 고쳐졌다. 여러 차례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에 뽑혔으나, 상께서 문서를 잘 처리하고 중국말을 잘한다는 이유로 외방으로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해 겨울에 의정공(議政公)이 관소(官所)에서 졸하였다. 공은 의정공의 병세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급한 걸음으로 달려갔는데, 중간쯤 갔을 적에 부음을 전해 듣고는 말에서 떨어져 기절하였다가 다시 깨어나 걸어서 상차(喪次)로 달려갔다.
다음 해에 용인(龍仁)으로 상구(喪柩)를 모시고 와 장사 지냈는데, 삼등현(三登縣)의 아전과 백성들로서 상구를 호송하는 자들이 500여 리나 되는 험난하고 먼 길을 오는 동안에 한 사람도 뒤로 처지는 사람이 없었으며 끝내는 나무를 베어 여막(廬幕)을 세워주고 말하기를, “우리들은 끼친 사랑과 효성에 감동하였다.” 하였다. 상제(喪制)를 마치고는 몸이 수척해져서 여막 주위를 배회하면서 벼슬길에 나아갈 뜻이 없었다. 이에 전후로 여섯 번이나 관직이 옮겨졌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정유년(1597, 선조30)에 비로소 경성(京城)으로 돌아와 다시 병조 정랑에 제수되어 승문원 교리와 한학 교수(漢學敎授)를 겸임하였다. 신종 황제께서 도어사(都御史) 양호(楊鎬)에게 명하여 우리나라를 경리(經理)하게 하였다. 양호가 평양(平壤)에 도착하여 군병과 성지(城池)와 군량과 병기에 대해 물으면서 삼조(三曹)의 판서로 하여금 와서 답하게 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를 걱정하여 공이 재주가 많다는 이유로 자문(咨文)을 주고서 대신 가서 답하게 하였다. 돌아와서 종사관으로서 제독(提督) 마귀(麻貴)를 따라 남쪽으로 갔다. 전주(全州)에 도착하였다가 또다시 문서를 관장해야 한다는 이유로 소환되어 올라와 기의(機宜)에 관계되는 크고 작은 문서들을 모두 도맡아서 처리하였다.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로 개차되었는데 겸직은 예전대로 하였으며, 또 시강원 필선(侍講院弼善)을 겸임하였다. 일찍이 직려(直廬)에 있을 적에 양 안찰(梁按察)이 갑자기 대궐 아래에 이르러, 상께서 나가 접대하려고 하는데 역관이 없었다. 이에 창졸간에 공을 불러들여 통역을 맡게 하니, 공은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나아갔다. 공은 눈빛만 보고도 마음속으로 미리 알아 말하기 전에 뜻을 알아차리면서 접견을 마칠 때까지 주선하였는데 조금도 당황해하는 기색이 없으니 안찰이 몹시 칭찬하였다. 이미 접대를 끝내고서는 상께서 기뻐하며 시신(侍臣)들에게 이르기를, “이정귀의 재주가 이 정도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하였다. 얼마 뒤에 준직(准職)으로 올리라고 명하여 종랑(從郞) 자급에서 하루 사이에 일곱 품계나 뛰어올라 3품에 이르렀으니, 이는 아주 특별한 은혜였다.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로 옮겨졌다가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는데, 상소를 올려 극력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이 격례(格例)를 깨뜨리고서 승문원 부제조(承文院副提調)를 겸임시키기를 청하였다. 관왕묘(關王廟)가 완성되어 중국 장수가 상에게 함께 제사 지내자고 청하였다. 어가(御駕)가 출발 준비를 다 마친 다음에 비로소 제문(祭文)이 갖추어졌는데, 상께서 제문을 담당한 사신(詞臣)의 제문을 쓰지 않고 공에게 명하여 새로 짓게 하였다. 공은 그때 해당 방(房)에서 노부(鹵簿)를 관장하여 신칙하고 있다가 상의 명을 듣고는 그 자리에서 제문을 지어 올렸는데, 글이 매우 성상의 뜻에 맞았다. 이에 곧바로 비단을 하사하였으며, 병조 참지(兵曹參知)로 개차하였다. 이로부터 상의 총애가 날로 융성해졌으며 중국 사람들을 접대하는 일이 있을 때마다 공에게 반드시 어전(御前)에 있게 하였다.
당시에 중국의 사신들이 관소(館所)에 가득 차 있어 응접하는 일이 아주 번거로웠는데, 공이 들어가서는 응대를 주관하고 나와서는 사명(辭命)을 도맡아 지어 몸을 수고롭게 하고 마음을 쏟으면서 밤낮없이 수고하였다. 다른 사람들이 미루면서 사양하던 것조차도 공이 이르러서 처리하면 응대하는 것이 물 흐르듯 하였다. 일찍이 병으로 인해 며칠 동안 다른 곳에 가 있자, 상께서 이정귀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으며, 특별히 내구마(內廐馬)와 말 장식을 하사하여 아름답게 여겨 표창하는 뜻을 보였다. 대신이 또 비변사 부제조(備邊司副提調)를 겸임시켜서 공으로 하여금 기무(機務)에 참여하게 하였다. 대개 비변사를 처음 창설하여 재주 있는 신하들이 모여 있도록 한 것인데, 공까지 합하여 겨우 몇 사람만 참여되었을 뿐이었다.
무술년(1598, 선조31) 가을에 찬획주사(贊劃主事) 정응태(丁應泰)가 도어사(都御史) 양호(楊鎬)를 무고(誣告)하는 내용으로 상주하여 지난날의 원한을 갚으려고 하였는데, 선조(宣祖)께서 상주문을 올려 사실대로 밝혔다. 그러자 정응태가 우리나라에 대해 원한을 품고 원수처럼 여겨 또다시 패악한 말로 상주문을 올려 무함하였는데, 대부분 차마 들을 수 없는 말들이었다. 천자께서 그 글을 내리면서 중국 조정의 관원들로 하여금 모여서 의논하게 해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는 걱정이 있었다. 이에 상께서 정전(正殿)을 피해 거처하고 거적자리를 깔고 앉아 명이 내리기를 기다렸다. 그리고는 사신을 보내어 원통함을 하소연하게 하였는데, 특별히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李恒福)을 우상에 제수하여 상사(上使)에 충원하였다.
전조(銓曹)에서는 처음에 다른 중신(重臣)으로서 이름 있는 사람을 부사(副使)로 삼았는데, 이항복이 문원(文苑)에서 첫째가는 사람을 뽑아 데리고 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적임자를 얻기가 어려워 신흠(申欽)을 서장관(書狀官)으로 데리고 가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상께서 전교를 내려 이르기를, “내가 보니 이정귀가 사명(辭命)을 짓는 데 뛰어나다. 그의 문장은 온자(蘊藉)하고 전중(典重)하며 계려(計慮)가 있으니, 이보다 더 나은 사람이 없다.” 하였다. 이항복은 본디 공을 데리고 가기를 청하려고 하였으나, 공의 관직이 낮았으므로 감히 청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공을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승진시켜 부사에 충원하였다. 공이 상소를 올려 사양하자, 상이 이르기를, “국사가 아주 다급한 처지이니, 경은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경사(京師)에 도착하여 상주문을 올리고, 또 각부(閣部)와 성시(省寺)와 과도(科道) 등에 나아가 모두 아뢴 글이 39편이나 되었는데, 이것들은 모두 공이 지은 것이었다. 중국의 정신(庭臣)이 복주(覆奏)하면서 아뢰기를, “해당 국가에서 올린 상주문이 명백하면서도 시원하여 읽어보매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리려고 합니다.” 하였는데, 성지(聖旨)를 받드니, “정응태는 사사로운 분을 품고서 망녕되이 이간질하여 거의 대사(大事)를 그르칠 뻔하였으니, 관적(官籍)을 회수하고 법대로 처리하라. 해당 부(部)에서는 조선에 위유(慰諭)하여 짐이 종시토록 보살펴주고자 하는 덕스러운 뜻을 알게 하라.” 하였다. 귀국하여 복명(復命)하자 상께서 몹시 기뻐하며 인견하고는 장획(臧獲)과 전조(田租)를 하사하기를 공신(功臣)과 같이 하였으며, 다시금 한 품계를 더 가자(加資)해 주었다.
당초에 상주문을 올려 밝히는 일에 대해 의논할 적에 사신(詞臣) 몇 사람을 뽑아 각각 상주문을 지어 올리게 하였는데, 상께서 마침내 공의 글을 썼다. 정응태가 무고한 점에 대해서는 각 사항에 따라 밝히기를 아주 명백하게 하였으며, 묘호(廟號)에 관한 한 조항에 이르러서는 곧바로 “소방(小邦)은 이전 왕조 이래로 국내의 신민(臣民)들이 잘못하여 사사로이 존호(尊號)를 올렸는데, 이를 그대로 답습해 오면서 고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실로 잘 몰라서 망녕되이 한 것이지, 그 뜻이 간범(干犯)하려는 데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이에 대해 수상(首相)으로 있던 유성룡(柳成龍)이 “이것은 중대한 일로, 주벌을 당하는 책임이 작지 않을 것이니, 사실대로 다 말해서는 안 된다.” 하여 의논이 일치되지 않았다. 그러자 상께서 “군신 사이는 부자와 같은데 어찌 숨기는 것이 있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여, 드디어 고치지 않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중국 조정의 신하들이 회의를 함에 미쳐서는 여러 의논하는 자들이 상주문을 읽다가 이 부분에 이르러 서로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 숨김이 없으니, 참으로 예의의 나라이다.” 하였다. 그 뒤에 중국 장수가 상을 만나볼 때면 모두 주본(奏本)에 대해 거론하면서 문장이 좋았다고 칭찬하였으므로,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서로 다투어 상주문을 전해 외웠다고 한다.
비변사 제조를 겸임하였다. 북쪽 오랑캐들을 정벌하는 것에 대해 간언을 올렸는데, 논한 내용이 아주 정연하여 요체에 딱 들어맞았다. 이에 상께서 어찰(御札)을 내려 “지혜가 일반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나며, 적을 헤아려서 승부를 점치는 것이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보는 것 같다.”고 칭찬하였으며, 대신들에게 내려 의논하게 하여 드디어 정벌하는 일이 정지되었다.
호조 참판에 제수되었다가 특별히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에 제수되었다. 상께서 양 경리(楊經理)를 접견하면서 공을 불러 고문(顧問)에 대비하게 하고는 이어 비단을 하사하였다. 또 동지의금부사를 겸임하였다. 호조의 판서 자리가 결원이 되자 대신들에게 명해 모여서 추천하게 하였는데, 추천을 받은 자가 몇 사람이나 되었으나 상의 뜻은 이미 공에게 쏠려 있었다. 이에 드디어 직질(職秩)을 올려서 호조 판서에 제수하였다. 공이 여러 차례 사양하자 체차하도록 허락하였으나 대임자를 뽑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상을 당하였는데, 대신이 “이러한 시기에는 이정귀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하면서 도로 호조 판서에 제수하기를 청하였다. 국장도감 제조(國葬都監提調)를 겸임하였는데, 나라에 남아 있는 저축이 없어 비용을 대부분 그때그때 마련해야 할 처지였다. 공은 헤아려 조처함에 마땅함을 얻어 대사(大事)에 부족함이 없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시장(市場)의 법도에 일정함이 없어 멋대로 거둬들이고 대금은 박하게 지급하는 탓에 아랫사람들이 명을 감당해 낼 수가 없었다. 이에 공은 제사(諸司)에 있는 공적인 물품을 풀어 먼저 주고 나중에 취하게 해 교활한 아전들이 농간을 부리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친히 검열하면서 한결같이 평준법(平準法)으로 다스리자 일이 집중되어서 비용이 줄어들었으므로,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면서 승복하였다.
지경연사(知經筵事)를 겸임하였으며, 예조 판서로 옮겨졌다. 본디 겸하고 있던 국장도감 제조의 직이 고쳐지지 않았으므로, 상구(喪柩)를 따라 산릉(山陵)에 나아갔는데, 바로 경자년(1600, 선조33) 12월 22일의 일이었다. 장례를 지낼 시기가 다음 날 인시(寅時) 정각으로 정해져 있었는데, 한밤중에 영악전(靈幄殿)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시위(侍衛)하고 있던 장사(壯士) 몇 사람이 죽음을 무릅쓰고 재궁(梓宮)을 받들고 나왔으나, 백관(百官)과 유사(有司)들이 분주하게 오가면서 허둥대어 모두 법도를 잃었다. 이에 공이 먼저 영을 내리기를, “집사(執事)하는 자들은 각각 자신들이 맡은 물품을 가지고 불을 피하라. 불이 꺼진 뒤에 가지고 나오지 못한 자에 대해서는 죄를 물을 것이다.” 하는 한편, 낭관을 보내어 치계(馳啓)하였다. 그런 다음 총호사(摠護使)와 더불어 세자에게 고하여 들어가 임어하게 하고 곧바로 제문을 지어 위안제(慰安祭)를 지냈는데, 여러 가지 행해야 하는 제례(祭禮)를 차례대로 이어서 행하였다.
공은 또 장례를 치른 뒤에 뒷말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대신에게 청해서 육경(六卿)과 삼사(三司)와 중관(衆官)들을 모아서 하나하나 보게 하였는데, 크고 작은 의물(儀物)이 빠뜨려진 것이 없었다. 이에 예를 행하여 현궁(玄宮)에 나아가니 물시계가 아직 인각(寅刻) 아래에 있어 정각을 지나지 않았다. 이 예를 치름에 있어서 비록 신령께서 보우해 주심을 힘입기는 하였으나, 역시 공이 변란을 만나서도 혼미해지지 않아 일에 임하여 민첩하게 대응하였으므로 예를 치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에 조정에서는 더욱더 공을 추중하면서 통달된 재주는 다른 사람이 미칠 수가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상께서 어느 날 경연에 임어하였을 때 공이 입시해 있었는데, 나의 큰형님 선원공(仙源公)이 당시에 간원(諫垣)의 장(長)으로 있으면서 궁금(宮禁)이 엄하지 못한 것과 왕자들이 사치스러운 것 등에 대해 극론하였다. 그러자 상의 얼굴빛이 몹시 굳어지면서 도리어 전에 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말을 꺾으며 질책하였으므로,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목을 움츠렸다. 그때 공이 조용한 말로 비유를 들어 규계함에 따라 상의 뜻이 조금 풀려, 이 때문에 다른 벌이 내려지지 않았다.
세자 우빈객(世子右賓客)을 겸임하였다. 왕명을 받아 여러 유신(儒臣)들과 더불어 경서(經書)의 언해(諺解)를 바로잡았다. 얼마 뒤에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의 대제학과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를 겸임하게 되었는데,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간절하게 사양하였으나 너그러운 내용의 비답을 내리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중국의 조사(詔使) 고천준(顧天埈)과 최정건(崔廷健)이 나오자 공을 원접사(遠接使)로 삼았다. 조정을 하직하던 날 상께서 인견하면서 착용하고 있던 털모자를 벗어서 하사해 주었으며,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으로 옮겨 제수하였다. 용만(龍灣)에 이르렀으나 조사가 오랫동안 나오지 않았다. 공은 병을 이유로 여러 차례 사임하여 평양영위사(平壤迎慰使)로 고쳐졌다.
당시에 올바른 사람들을 헐뜯는 자들이 다른 사람을 사주하여 글을 올리게 하고는 사류(士類)들을 몰아내려고 도모하였으며, 얼신(孼臣) 유영경(柳永慶)이 당시에 권병(權柄)을 훔쳐서 잡고 있어서 조정이 몹시 혼란스러웠다. 공은 이에 조정으로 돌아와서 극력 사양하여 문형(文衡)의 직임에서 해임되었으며, 또 빈객(賓客)과 경연(經筵)의 직임에서 해임되었다.
한참 뒤에 다시 예조 판서에 제수되었으며, 아울러 빈객과 총관(摠管)의 직임을 다시 겸하였다. 사신이 되어 관북(關北)으로 가 원(園)을 살펴보고 돌아오는 길에 풍악(楓岳)에 들렀는데, 부로(父老) 수십 명이 고을 경계를 넘어와 맞이하면서 스스로 말하기를, “흡곡(歙谷) 고을에 사는 백성들인데, 상공(相公)께서 탁지(度支)를 맡고 있을 적에 일찍이 우리 고을을 살아나게 하셨으므로 감히 덕을 잊을 수가 없어서 왔습니다.” 하고는, 각자 술을 싸들고 와 사례한 뒤에 돌아갔다. 돌아와서는 노산군(魯山君)과 연산군(燕山君)의 후사를 세우기를 청하였으나, 의논이 시행되지는 않았다.
상께서 재변(災變)을 만나 구언(求言)함에 따라 공은 봉사(封事)를 올려 변방의 방비를 신칙하고, 기강을 진작시키고, 사람들의 마음을 단결시키고, 뭇 계책을 모으고, 공도(公道)를 넓히고, 실덕(實德)을 닦는 것 등에 대해서 만여 자가 넘는 글을 올렸는데, 당시의 병폐에 적중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세자책례주청사(世子冊禮奏請使)로서 경사(京師)에 갔다가 돌아왔다. 언관들이 권신(權臣)의 지시를 받고 공이 역관들을 정해진 숫자보다 더 데리고 갔다는 내용으로 탄핵하였다. 이에 상께서도 의심하였으나, 공을 중하게 여겨 따라주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해사(該司)에서 계청하여 윤허를 받고서 데려간 것이지, 공이 제멋대로 더 데리고 간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공은 스스로 해명하지 않았다.
외직을 구해 나가 경기 관찰사가 되었다. 경기를 다스린 지 몇 달 만에 적체되어 있던 안건들을 물로 씻은 듯이 처리하였으며, 녹봉을 쪼개서 숭의전(崇義殿)을 수리한 다음 왕씨(王氏)의 후손을 찾아내어 제사를 예전과 같이 다시 받들게 하였다. 또 죽주산성(竹州山城)과 수원산성(水原山城)을 수리하였고, 군수 물품을 저축하여 방비책을 튼튼하게 하였으며, 아울러 기문(記文)을 지어 후대에 폐해짐이 없도록 하였다.
당시에 바야흐로 국(局)을 설치하고서 《동국시문(東國詩文)》을 찬집(纂集)하였는데, 문경공(文敬公) 윤근수(尹根壽)와 연릉부원군(延陵府院君) 이호민(李好閔)이 그 일을 주관하면서 상께 아뢰기를, “이정귀가 비록 한 지방을 맡고 있지만, 이 국에는 그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오가면서 참여하도록 허락하소서.” 하였다. 이 일은 후대에 사원(詞苑)의 성대한 일로 전해졌다. 임기가 만료되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으며,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와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겸임하였다. 가을에 시관(試官)이 되어 책문(策問)을 시험 보여 이경탁(李慶倬)과 최현(崔晛) 등 33인을 뽑았는데, 당시에 뛰어난 선비를 얻었다고 칭해졌다.
일본에서 통신사(通信使)를 보내주기를 요구하면서 어떤 자를 묶어 보내고는 임진년 당시에 왕릉을 파헤친 적(賊)이라고 하며 우리를 속이려고 하였다. 그러자 당시의 권신인 유영경(柳永慶)이 상께 아첨하고자 하여 스스로 이를 자신의 공으로 삼고는 종묘에 고한 뒤 백관(百官)들이 진하(陳賀)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공이 차자를 올려 불가한 점에 대해 논하자, 더욱더 공을 흘겨보면서 헐뜯으려고 하였다. 공은 겸임하고 있던 모든 관직에서 다 해임되고서 문을 닫아건 채 한가롭게 지내다가 한참이 지난 뒤에 조정으로 돌아와서 지춘추관사가 되었으며, 다시 호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다음 해인 무신년(1608, 선조41)에 선조(宣祖)께서 돌아가셨다. 국장도감 제조(國葬都監提調)가 되어 장사 지내는 일을 다스림에 있어 더욱 능숙하게 처리하니, 백성들이 더욱더 편안하게 여겼다. 명을 받들어 대행대왕(大行大王)의 행장(行狀)을 지어 올렸다. 유영경이 실각하고 난 뒤에 병조 판서로 옮겨졌다.
광해(光海)가 처음 즉위하여서는 내심 의심하고 꺼리는 마음이 많아 궁성(宮城)의 호위를 오래도록 풀지 않고 있었는데, 군사들이 밤이슬을 맞는 탓에 원망과 고통이 심하였다. 이에 공이 나아가 아뢰자 그날 바로 군사들을 파하여 돌려보냈다. 다시 세자 빈객(世子賓客)과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와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를 겸임하였다. 산릉의 역사를 마치고 나서는 한 품계가 승진되었다. 중국의 영원백(寧遠伯) 이성량(李成梁)이 몰래 우리나라를 집어삼키고자 하여 옛날에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였던 고사(故事)를 다시 시행하려고 하였는데, 공이 차자를 올려 계책을 진달하고, 이어 변방의 방비를 단단히 하여 서쪽 오랑캐에 대비하기를 청하였는데, 모두 채택되었다.
사제칙사(賜祭勅使) 웅화(熊化)가 나오자 공에게 명하여 관반(館伴)이 되게 하였는데, 웅화가 공과 서로 알게 된 것을 몹시 좋아하여 말을 할 적마다 반드시 ‘선생’이라고 칭하였다. 웅화가 공이 지은 창화시(唱和詩)를 보고는 말하기를, “글자 하나하나에 당나라 시인들의 혼이 깃들어 있다.” 하였으며, 이별을 할 때에는 애틋한 정을 이기지 못하면서 《황화집(皇華集)》의 서문을 지어달라고 청하였다. 뒷날에 공이 경사(京師)에 조회하러 갔을 때 웅화가 어사(御史)로 있었는데, 공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여 깍듯이 예를 갖추어 대하였으며, 사신의 일에 도움을 준 바가 아주 많았다.
태감(太監) 유용(劉用)이 나와서 책례(冊禮)를 선포할 적에 호조 판서 김수(金睟)로 하여금 관반이 되어 접대하게 하였는데, 공이 접대하는 데 익숙하다는 이유로 관반의 임무를 돕도록 명하였다. 중귀(中貴)는 평소에 욕심이 끝이 없다고 알려졌으므로 백성들의 재물을 다 긁어 들이고 태창(太倉)의 곡식을 다 털어 내어 미리 10만 금을 준비해 두자는 의논이 있었다. 그러자 공이 말하기를, “웅화가 사신으로 나왔다가 돌아갈 때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않았으므로 탁지에 남아 있는 금만으로도 수응하기에 충분합니다. 현재 오랫동안 가물어서 백성들이 구렁텅이에 빠져들어 굶어 죽게 생겼으니, 의당 구황(救荒)하는 정책이 급선무입니다. 조사를 접대하는 것은 지나치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니, 사람들이 혹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끝내 공의 말과 같이 되었다.
재차 문형(文衡)의 직을 겸임하게 되었는데, 사양하였으나 허락해 주지 않았다. 또 정병(政柄)을 잡는 병조 판서의 직을 사임하였는데, 전후에 걸쳐서 일곱 차례나 아뢰어서야 비로소 체차되는 것을 허락받고 말미를 받아 성묘(省墓)하였다. 돌아와서 구황(救荒)하는 요체에 대해 진달하였는데, 자세하면서도 곡진하였으므로 해당 관사에 내려 시행하게 해 백성들이 그 은택을 받았다. 부총재(副摠裁)가 되어 《선조실록(宣祖實錄)》을 찬수하였으며, 다시 종백(宗伯)인 예조 판서가 되었다.
광해가 생모인 공빈(恭嬪) 김씨(金氏)를 추존(追尊)하고자 하여 전례(典禮)를 거행할 것을 의논하게 하였는데, 공은 아뢰기를, “중자(仲子)의 사당을 낙성한 것성풍(成風)에게 반함(飯含)과 부의(賻儀)를 보낸 것 등은 모두 《춘추(春秋)》에서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한당(漢唐) 이후로 추존했던 일들은 대개 본받을 것이 못 됩니다. 바라건대 명나라 조정에서 효종(孝宗)이 생모인 기태후(紀太后)를 추존한 고사를 준행하여, 비(妃)라고 칭하고 별묘(別廟)에서 향사(享祀)를 올리소서.” 하였다. 그러자 광해가 반드시 후(后)라고 칭하고자 하여 신하들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게 하였다. 영의정 이덕형(李德馨) 등이 모두 아뢰기를, “의당 예관(禮官)의 의논을 따라야 합니다.” 하였다. 그 뒤 서너 차례나 의논을 거쳤는데도 공은 자신의 의견을 굳게 지키면서 변하지 않았다. 그러자 광해가 공의 의견을 듣지 않고 마침내 후(后)라고 칭하였다.
선묘(宣廟)를 부묘(祔廟)할 때 공이 예의사(禮儀使)가 되어 조천(祧遷)하는 데 대한 의논을 올리면서 아뢰기를, “아직 남은 슬픔이 다 가시지 않았고, 백성들의 생활이 바야흐로 급한 때이니, 바라건대 가요(歌謠)와 결채(結綵) 등 형식에 관계되는 번거로운 일들을 모두 정지하소서.” 하니, 광해가 좋아하지 않으면서 반은 쓰고 반은 쓰지 않았다. 자주 대례(大禮)를 겪으면서 거기에 참여한 공으로 숭정대부(崇政大夫)를 가자하자, 사양하였으나 허락해 주지 않았다. 이조 판서로 옮겨져서는 요행으로 진출하는 길을 억제시켜 전조(銓曹)에서의 선발이 맑아지게 하였다.
정인홍(鄭仁弘)이 차자를 올려서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과 퇴계(退溪) 이황(李滉) 두 선정(先正)을 헐뜯자, 태학(太學)에 있던 제생(諸生)들이 정인홍의 이름을 《청금록(靑衿錄)》에서 삭제하였다. 그러자 광해가 노하여 그 일을 주도한 자를 금고(禁錮)시켰다. 제생들이 그 사실을 듣고는 권당(捲堂)하고서 나가버렸다. 공이 합문(閤門)에 나아가 논계하여 구제하자 명을 정지시키고 쫓아내지는 않고 단지 좨주(祭酒)를 체차하고 관관(館官)을 파직하기만 하였다. 공이 또 자신도 함께 견책을 내려달라고 청하였으나, 광해가 허락하지 않았다.
당시에 이이첨(李爾瞻)이 처음으로 용사(用事)하면서 정인홍과 더불어 표리(表裏)가 되어 죽음을 함께하기로 맹세하는 당파를 결성하였다. 그리고는 가장 먼저 그들의 무리 가운데에서 제일 드세고 사나운 자를 끌어들여 전랑(銓郞)에 의망하려고 하였다. 공이 이에 대해서 견제를 하자, 이에 서로 들고일어나 뒤흔들면서 치려고 하였다. 그러자 공은 극력 사양하여 직위에서 떠나갔다. 다시 종백이 되어 창덕궁(昌德宮)의 역사를 감독하였다. 공사를 마치고 한 품계가 승진되었다.
술자(術者)인 이의신(李懿信)이란 자가 상소를 올려 교하(交河)로 도읍을 옮길 것을 청하자 그 일을 예조에 내려 보내니, 도성 백성들이 놀라고 의혹하여 인심이 흉흉해졌다. 이에 공이 “아무런 까닭도 없이 국도를 옮기고자 하는 것은 바로 묘청(妙淸)이 주장했던 설을 답습하는 것으로, 실로 나라를 망치는 말입니다. 그러니 속히 요사스러운 말을 내침으로써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하면서 극력 논하니, 광해가 크게 노하여 전교를 내려 심하게 질책하였다. 그런데도 공은 재차 아뢰면서 더욱 강력하게 말하였으며, 대신들의 의논 역시 모두 같았으므로 일이 드디어 정지되었다.
계축년(1613, 광해군5)에 간신 이이첨 등이 사형수를 위협하여 큰 옥사를 일으켜서 선조(先朝) 때의 대신(大臣)과 명사(名士)들 가운데 화를 면한 자가 없었다. 공은 신흠(申欽)과 황신(黃愼) 등 10여 인과 함께 체포되었다. 광해가 친히 캐물은 뒤에 일이 밝혀져 곧바로 석방되었다. 나라 사람들이 처음에 공 등이 체포되었다는 소문을 듣고는 모두들 말하기를, “어찌 이런 일이 있단 말인가.” 하였으며, 풀려 나왔다는 말을 듣고는 모두들 말하기를, “하늘은 속일 수가 없다.” 하면서, 만세를 부르고 눈물을 흘리는 자까지 있었다. 공은 대궐에 나아가 엎드려 있으면서 스스로 탄핵하였는데, 상소를 여섯 번이나 올렸으나 광해가 따스한 내용의 전지를 내리고 위로해서 보냈다.
국구(國舅) 김제남(金悌男)이 갑자기 죽자 조정에서는 대비(大妃)가 입을 복상(服喪) 문제에 대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공은 말하기를, “아비와 자식의 관계는 천륜이라서 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복(喪服)을 올릴 때에는 대비가 서궁(西宮)에 거처하고 있는 탓에 신하들이 조알(朝謁)을 행하지 않았는데, 공만 혼자 내의원 제조(內醫院提調)의 자격으로 동료들을 거느리고 들어가 위문하였다. 이에 간당(奸黨)들이 죄주기를 청하였으나, 광해가 허락하지 않고 단지 종백의 직임만 체차하고 중추부(中樞府)의 직에 제수하였다. 공은 사임하여 문형(文衡)의 직에서 해임되었으며, 맡고 있던 본직(本職)과 겸관(兼官)에서 차례대로 면직되기를 바랐다.
얼마 뒤에 변무주청사(辨誣奏請使)에 차임되었다가 이어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며, 다시 형조 판서로 개차되었다. 간당들이 언관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또다시 전의 일을 거론하여 파직시키기를 청하였으나, 광해가 허락하지 않았다. 공은 간절히 사양하여 면직되었다. 얼마 뒤에 대신의 천거로 인해 다시 호조 판서에 제수되었는데, 공은 또다시 사임하였다. 그러나 광해가 허락하지 않으므로 억지로 나가 사은한 다음, 쓸데없는 낭비를 줄이고 토목공사를 중지하기를 청하였는데, 위에 아뢰어졌다.
그때 장차 두 대궐의 부시(罘罳)를 설치하려고 하였는데, 주조(鑄造)하는 공역을 헤아려 보면 한 해가 넘게 걸리고 들어가는 비용이 아주 많았다. 이에 공은 의주(義州)의 경계에 있는 시장에서 사 올 계책을 하였는데, 갔다가 돌아오는 데 겨우 몇 달밖에 안 걸렸으며, 줄인 비용도 천만 금이나 되었다. 또 드러나지 않았던 간사한 짓을 적발해 내어 숨겨 놓은 돈 수백 금을 찾아내 다음 해 조세(租稅)의 반을 그것으로 대신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에 공이 떠나간 탓에 마침내 모두 건몰(乾沒)되고 말았으므로, 듣는 자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또다시 관복주청사(冠服奏請使)에 차임되었다. 길을 가는 도중에 중국의 진강수장(鎭江守將) 구탄(丘坦)이 마음속으로 공을 흠모하여 채붕(綵棚)을 설치하고 공장(供帳)을 성대하게 마련한 다음 길가에서 공을 맞이해 위로하였다. 이르는 곳마다 중국 사람들이 기쁘게 맞이하면서 몰려와 바라보며 말하기를, “조선에서 이 상서(李尙書)가 왔다.” 하였다. 경사(京師)에 도착해서는 요청하는 것을 모두 성사시켰다. 미처 서울로 돌아오기도 전에 미리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제수되었으며,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가자되어 삼공(三公)과 더불어 반열이 나란하게 되었다. 복명(復命)을 하고는 곧바로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는 조정의 반열에서 자취를 끊었다.
간신이 광해를 꾀어서 대비(大妃)의 궁궐을 옮겨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는데, 마침 가뭄이 들었으므로 고사(故事)에 따라 남문(南門)을 폐쇄하였다. 공은 서궁에 나아가 숙배하고 사은하려고 하다가 궁궐의 문에 자물쇠가 잠겨 있는 것을 보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동료에게 말하기를, “열린 문을 닫지 말고 닫힌 문을 열기만 하면 곧바로 비가 쏟아질 것이다.” 하였다. 간당들이 그 말을 듣고는 논핵하고서 국문을 하려고 하였는데, 구원해 주는 사람이 있어 중지되었다.
당초에 간신들이 제공(諸公)들을 죄에 얽어 넣고는 스스로 일망타진하였다고 여겼다가 용서받아 풀려나는 것을 보고는 또다시 백방으로 허물을 긁어모아 전의 계책을 성사시키려고 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위태롭고 두렵게 여겨 말이 서궁에 미치기만 하면 손사래를 치면서 달아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도 공은 태연스런 마음으로 자신의 뜻대로 행하면서 끝까지 신하 된 자의 도리를 변치 않았다.
공은 화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감지하고는 병든 몸을 이끌고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李恒福)을 동강(東岡)으로 찾아가 시를 지어주면서 서로 결별(訣別)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폐모론이 터져 나왔다. 광해가 조정 신하들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였는데, 공은 병이 들었다는 핑계로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이이첨 등이 정승으로 있던 한효순(韓孝純)을 위협하여 백관들을 거느리고 복합(伏閤)하게 할 적에 공은 또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자 또다시 집으로 가서 의견을 받아오게 하였는데, 마침 상소를 올려 공을 사형 죄로 다스려야 한다고 말한 자가 있었다. 이에 공은 이를 근거로 해명하면서 끝내 의견을 올리지 않았다. 이에 양사(兩司)에서 합사(合辭)하여 먼 곳으로 유배 보낼 것을 청하였다. 공은 강가로 나가 있으면서 2년 동안 명이 내려지기를 기다렸다.
기미년(1619, 광해군11) 가을에 중국 조정에서 우리나라에 대해 감호(監護)하자는 의논이 있었는데, 실상은 우리나라가 다른 마음을 품고 있지나 않는지 의심한 것이었다. 광해가 그 소식을 듣고는 몹시 근심하여 하교하기를, “이정귀가 평소에 변무(辨誣)를 잘하였으니, 진주사(陳奏使)로 차임하라.” 하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판중추부사에 제수하였다. 공이 여러 차례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는 인견한 다음 위로하며 유시하였다. 다음 해 봄에 경사에 가서 무함당한 것을 신원하고 칙서를 받아 장차 돌아오려고 할 때 신종황제가 붕어(崩御)하였다. 공은 예부(禮部)에 청하여 대정(大庭)에 들어가 곡하는 반열에 임하였다가 홍여시(鴻臚寺)가 반열을 인도하고 공부(工部)에서 상복(喪服)을 지급해 주어 천관(千官)들과 함께 무영전(武英殿)에서 예를 행하였는데, 내각(內閣)의 여러 학사(學士)들이 모두 와서 보고는 예를 아는 사람이라고 인정해 주었다.
귀국한 뒤에는 간당들이, 공이 나라를 위해 재차 큰 무함을 깨끗이 씻어내어 임금의 은총을 받는 것을 보고는 더욱더 속으로 질시하여 대죄(大罪)를 가하고자 하였다. 그러면서 속으로 지난날의 죄안만 가지고는 부족할 것이라고 여겼다. 이에 공이 북경(北京)에 있으면서 사서(私書)를 간행해 숨겨야 할 일을 누설하였다고 말하면서, 정위(廷尉)로 하여금 캐묻게 하기를 청하였다. 광해가 허락하지 않으면서 공에게 표창하고 하사하는 것을 두루 갖추어 하고는, 공이 있는 사람을 배척하여 공격한다고 대간들을 질책하였다. 그러자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자들이 드디어 입을 다물었다.
처음에 공이 북경의 관소(館所)에 머물러 있을 때 중국의 명신(名臣)인 태자유덕(太子諭德) 왕휘(汪輝)가 공의 문집을 보여 달라고 청하기에 사양하고서 응하지 않았다. 그런데 또다시 연도(沿道)에서 지은 여러 편의 시를 보여주기를 청하였으므로, 공은 그의 사람됨을 중히 여겨서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기행시(紀行詩) 수십 편을 써서 보여주었다. 왕휘가 그 시를 보고는 몹시 좋아하면서 그 책의 서문을 짓고는 간행하기를 도모하였는데, 이로 인해 한때 서사(書肆)에 종이가 귀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책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다른 말이 없었음을 볼 수 있다.
조사(詔使) 유홍훈(劉鴻訓)과 양도인(楊道寅)이 나왔다. 당초에 공을 의주영위사(義州迎慰使)를 삼았다가 유홍훈과 양도인이 행차를 나누어서 나온다고 잘못 듣고서 또다시 공을 원접사(遠接使)로 삼았다. 공은 모두 사양하고 가지 않았다. 공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이보다 앞서 이이첨이 공을 대신하여 문형(文衡)을 맡았는데, 당시에 정승으로 있으면서 이이첨과 더불어 서로 악한 짓을 행하고 있던 박승종(朴承宗)이 공의 중한 명망에 기대어 이이첨을 약화시키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광해에게 아뢰기를, “이정귀는 사한(詞翰)에 대한 명망이 있는 자이니, 사명(辭命)을 주관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여, 드디어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에 제수하라는 명이 있었다. 그러자 이이첨이 이를 한스럽게 여겨 그의 도당을 사주해 서궁(西宮)을 도로 세우기를 도모하였다는 명목으로 절도(絶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시키기를 청하였다. 광해가 그 상소를 안에 머물러 두고 내리지 않았는데, 흉측하고 악독한 말로 탄핵하는 상소가 계속해서 올라와 거의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임술년(1622, 광해군14)에 감군어사(監軍御史) 양지원(梁之垣)이 나왔다. 당시에 재상으로 있던 박승종이 또다시 아뢰기를, “오늘날에 사신을 접대할 만한 인재로는 이정귀만 한 사람이 없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광해가 비답을 내리면서 전에 내리지 않고 안에 머물러 두었던 것을 함께 내리면서 대간들을 준엄하게 질책한 다음, 곧바로 명하여 공을 접반사(接伴使)로 삼아 달려가게 하였는데, 광해가 간신이 다른 사람을 모함한 정상을 깨달은 것 같았으므로, 중외의 사람들이 조금은 시원스럽게 여겼다. 공은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는데, 감군어사가 공을 대우함에 있어서 예모를 더해 대우하였다. 돌아갈 적에는 안주(安州)에 도착하여 오래도록 머물러 있으면서 공이 나이도 많고 덕도 높은 것을 중하게 여겨 조정에 글을 보내어 공을 먼저 돌아가게 하고서 부사(副使)를 머물러 두어 접반하게 하였으며, 스스로 잔치 자리를 마련하여 축수(祝壽)하면서 은근한 뜻을 표하였다.
계해년(1623, 인조 원년) 3월에 금상(今上)께서 반정(反正)을 하였다. 이날 밤에 사자(使者) 세 사람이 와서 조정으로 나가기를 재촉하였는데, 집사람이 술을 올리자, 눈물을 흘리며 고기 안주를 물리치고는 말하기를, “내가 옛 임금이 어디 계시는지 모르고 있는데 어찌 이를 먹겠는가.” 하였다. 그리고는 먼저 대장 이귀(李貴)에게 글을 보내어 일을 행함에 있어서 체모를 얻도록 하였으며, 천천히 대궐 아래로 나아갔다. 전지(傳旨)를 받들어 서궁에 나아가 대비께 복위(復位)하기를 청한 다음에 백료(百僚)들을 모아놓고 즉위하게 하고, 대신을 파견하여 태묘(太廟)에 고하게 하였다. 이에 공을 종백(宗伯)으로 삼았다.
얼마 뒤에 지경연사(知經筵事)와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겸임하였다. 또 사묘(私廟)의 사당에 고하는 문제에 대해 의논하였는데, 공의 의논에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는 선조(宣祖)의 뒤를 이어 들어와서 대통(大統)을 잇게 되셨으니, 본생부모의 봉호(封號)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선조(先朝)의 고사(故事)가 있습니다. 생각건대 손자로서 할아버지를 계승한 만큼 고위(考位)가 비어 있습니다. 그런즉 속칭(屬稱)은 송나라 때 복의(濮儀)와는 차이가 있고, 한(漢)나라 선제(宣帝)가 도황고(悼皇考)를 추존한 것이 자못 서로 근사합니다. 그러나 당시에 지나치게 융숭하게 한 잘못을 면치 못하여 후세에 비난을 받았습니다. 이제 의당 고(考)라고 칭하되 황(皇)이라는 글자는 가하지 말고, 자(子)라고 칭하되 효(孝)라는 글자는 가하지 않는 동시에, 별도로 지자(支子)를 세워 그 제사를 주관하게 해야 합니다. 그럴 경우 종통(宗統)을 중하게 하는 것과 본생부모에게 보답하는 두 가지 일이 모두 극진하게 될 듯싶습니다.”
하면서 대신에게 물어보기를 청하였다. 영의정 이원익(李元翼) 등이 모두 해조에서 의논한 것이 옳다고 하니, 상께서 그대로 따랐다.
원자(元子)가 사부(師傅)에게 나아가 공부를 하게 되었으므로 보양관(輔養官)을 선발하여 두게 되었는데, 공이 거기에 참여하였다. 대비(大妃)가 글을 내려 광해의 죄악을 나열한 다음 천자에게 주달하여 복주(伏誅)할 것을 청하게 하였는데, 공이 이원익(李元翼)ㆍ신흠(申欽)과 더불어 청대(請對)하여 불가한 점에 대해서 극력 진달해 마침내 자전(慈殿)의 뜻을 돌렸다. 폐비(廢妃) 유씨(柳氏)가 병으로 인해 졸하자, 예관(禮官) 및 그의 친속(親屬)을 보내어 호상(護喪)하게 하고, 왕자(王子)의 부인(夫人)에 대한 예를 써서 장사 지내기를 청하였다. 반곡(反哭)을 할 때에는 스스로 가서 맞이하니, 사람들이 공이 예를 갖추는 데 대해 훌륭하게 여겼다. 세자를 세워서 민심을 단결시킬 것을 청하고, 먼저 관례(冠禮)를 행하여 일을 행하기에 편하게 하기를 청하였는데, 상께서 모두 따라주었다.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상께서 장차 도성을 떠나게 되었는데, 공이 도성을 지킬 것을 청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극력 간하자, 상께서 감동하였다. 그러나 여러 공신들이 앞 다투어 피해 나갈 것을 권했기 때문에 공이 중지시킬 수가 없었다. 처음에 공에게 명해 삼궁(三宮)을 수행하여 강도(江都)로 가게 하였는데, 공이 스스로 어가를 호종하겠다고 청하니, 상께서 위로하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다음 날 계획을 변경하여 함께 호서(湖西)로 행행하게 되었다. 수원(水原)에 이르렀을 때 교서를 내려 여러 도에 유시하여 역순(逆順)의 이치를 가지고 효유할 것을 청하였다.
천안(天安)에 이르렀을 때 승리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으나, 잠시 뒤에 와언(訛言)이 떠돌아 행재소(行在所)에 계엄령(戒嚴令)이 내려졌다. 공이 나아가 아뢰기를, “망녕되게 떠들어대는 말입니다. 역적들이 이미 패하였는데 어찌 감히 다시 오겠습니까.” 하였는데, 얼마 뒤에 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공에게 명해 먼저 공주(公州)로 가서 살펴보게 한 다음에 진주(進駐)하였다. 상께서 행궁(行宮)에 임어하여 축하를 받았는데, 모든 일들이 창졸간에 일어났던 탓에 고사(故事)에 대해서 잘 아는 관리가 한 사람도 따라오지 않았다. 이에 공이 직접 의주(儀註)를 기초하고 입으로 노포(露布)를 불러대면서 묘례(廟禮)를 도와 행하고 과거시험을 베풀어 선비들을 뽑았는데, 이 모두를 공 덕분에 시행할 수가 있었다. 상께서 환도할 적에는 공이 또 종묘의 신주를 받들고 먼저 도성으로 들어갔다.
세자에게 원복(元服)을 가할 적에 공이 빈객으로서 찬관(贊冠)의 일을 행하였다. 세자가 책봉을 받게 되자 여러 강관(講官)들 모두의 관직과 품계를 승진시켰는데, 공은 이미 극품(極品)이라서 더 올라갈 품계가 없었으므로 가까운 친족 가운데 한 사람을 좋은 직임으로 승진시켰다. 얼마 뒤에 좌찬성(左贊成)에 제수되어 세자이사(世子貳師)를 겸임하였다. 책봉조사(冊封詔使)로 왕민정(王敏政)과 호양보(胡良輔) 두 중귀(中貴)가 나오게 되었는데, 공에게 명하여 관반(館伴)이 되게 하였다. 여러 차례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단지 일이 많은 금오(金吾)의 직위만을 체차하게 하였다.
상께서 대원군부인(大院君夫人)을 모시고 같은 궁에 거처하였는데, 그 뜻은 살아 계실 때 존숭하고자 해서였다. 그러나 정을 펴지 못하고 졸하자, 또다시 삼년상을 행하고자 하였다. 이에 대신 이하가 복을 낮추어 입으라고 극력 간쟁하니, 상께서 공의(公議)에 몰려 억지로 따랐다. 시사(時事)에 변례(變禮)가 많아 상하 간에 의견이 서로 어긋나 예관(禮官)이 그 직에 편안히 있을 수 없었다. 이에 공을 판중추부사에 제수하고는 예조 판서를 겸임하게 하였다. 공이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공은 대신과 더불어 의논해서 상례를 정하였다. 상께서 지나치게 간략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는 곧바로 준엄한 내용의 전교를 내렸다. 공은 황공하여 차자를 갖추어 올리고서 대죄하니, 상의 마음이 조금은 풀렸으므로 부득이하여 다시 출사해서 직임에 종사하였다.
천계(天啓) 병인년(1626, 인조4)에 조사(詔使) 강왈광(姜曰廣)과 왕몽윤(王夢尹)이 나오자 공은 또 관반이 되었다. 조사가 평소에 공의 이름을 듣고 있었으므로 먼저 서신을 보내어 뜻을 전하면서 공을 얻게 된 것을 기뻐하였다. 중국 조정으로 돌아갈 즈음에는 제공들 사이에서 칭찬하였으며, 우리나라로 오는 인편을 만나면 소식을 전해왔는데, 정겨운 말이 서신 속에 가득 들어 있었다. 공은 명을 받들고서 《황화집(皇華集)》의 서문을 지었으며, 문선왕묘비(文宣王廟碑)의 기문(記文)을 지었고, 태묘(太廟)의 악장(樂章)을 정하였다. 얼마 뒤에 찬성에 다시 제수되어 그대로 예조 판서를 겸임하였는데, 이는 모두 특명에서 나온 것이었다.
다음 해인 정묘년(1627) 1월에 서쪽 오랑캐 수만 기(騎)가 쳐들어와 평산(平山)에 이르렀다. 상께서 공에게 명하여 병조 판서로 옮겨서 겸임하게 하였다. 어가(御駕)를 호종하여 강도(江都)로 들어갔다. 오랑캐들이 여러 차례 서신을 보내어 맹약을 맺기를 요청하였다. 상께서 대신들을 불러 계책을 물으니, 모두 아뢰기를, “사태가 급박하니 들어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이에 오랑캐의 사신인 유해(劉海) 등이 와서 강도에 묵었다. 공에게 가서 만나 보라고 명하면서 부사(副使) 이하의 사신들을 스스로 가려 뽑게 하였다.
공이 청하여 김신국(金藎國)과 장유(張維)와 함께 가서 맹약의 내용을 논의하였는데, 유해 등이 명나라와 절교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대명(大明)은 우리의 부모 나라여서 등질 수가 없습니다.” 하고는, 이틀간을 설전을 벌이면서 끝내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유해의 뜻이 꺾이면서 홀연 공수(拱手)를 하고는 말하기를, “나라의 위태로움이 이와 같은데도 오히려 신의를 지키니,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하였다. 유해가 또 세폐(歲幣)로 요구하는 가축의 숫자가 매우 많았는데, 공이 극력 다투면서 허락하지 않고는 단지 군사들에게 호상(犒賞)할 만큼의 숫자만 허락하였다. 맹약의 조항이 정해진 뒤에 청나라 쪽에서 상께 맹약을 맺는 단상(壇上)으로 나오라고 요청하였는데, 상께서 따르고자 하였다. 그러자 공이 그래서는 안 된다고 강력히 진달하고는 단지 두세 명의 대신 및 유해 등만이 참가해서 서교(西郊)에서 맹약을 맺으니, 오랑캐들이 이에 군사를 풀고서 갔다.
공은 전에 병조 판서로 있을 적에 영장(營將)을 신설하고서 그들로 하여금 일이 없을 때에는 군사를 조련하다가 일이 발생하였을 때에는 적과 싸우게 하였는데, 중간에 자못 해이해졌다. 이때에 이르러서 또다시 아뢰기를, “적들이 비록 후퇴해 돌아갔지만 방비책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바라건대 영장의 법을 다시 신명하소서.” 하니, 해당 관사에 내려 시행하게 하였다.
어가를 호종하여 도성으로 돌아왔다. 병을 이유로 여러 차례 사직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어의를 파견하고 내의원(內醫院)에서 조제한 약을 하사하였다. 세자 역시 여러 차례 궁관(宮官)을 보내어 병세를 물어보았다. 유해 등이 또다시 나왔는데, 당시에 의주(義州)에 있는 오랑캐 병사들이 아직 다 철수하지 않고 있었다. 공이 명을 받들고서 가서 유시하자, 곧바로 철수하겠다고 하였다.
다음 해 7월에 우의정에 제수되었는데, 곧바로 동료 재상이 유고가 있어 일의 대부분을 공을 기다려 결정하였다. 공은 가장 먼저 상께 마음을 비우고 간언을 받아들이며 기강을 진작시켜 현재의 병폐를 구하라고 아뢰었다.
대마도(對馬島)의 왜인이 와서 상경하게 해 달라고 줄기차게 요구하였으며, 금(金)나라 한(汗)이 보낸 국서에 오만한 말이 있었다. 공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왜인들은 약속을 위반해서는 안 되는데, 저들의 정세와 우리의 형세를 돌아보건대 실로 지난날과는 다릅니다. 그러니 의당 특별히 부르는 것이라고 명목을 붙여서 재차 전례를 끌어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신을 잘 선발하고 예물을 갖추어서 오랑캐의 임금에게 답서를 보내되, 말을 잘 만들어 엄하게 질책해 그로 하여금 스스로 뉘우칠 줄 알게 해야 합니다.” 하였으며, 이어 논하기를, “적국이 우리를 깔보는 것은 우리에게 방비책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급선무로는 군사를 기르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습니다. 의논하는 자들은 모두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곤폐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곤폐하게 되는 것이 어찌 나라가 망하는 것만 하겠습니까. 적들이 쳐들어오는 것이 어찌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서 쳐들어오겠습니까.” 하였다. 공의 간절한 마음이 이와 같았는바, 모두 뒷날의 시귀(蓍龜)가 되었다.
또 경연 석상에서 교화를 밝히고 풍속을 바로잡으며, 유술(儒術)을 높이고 현재(賢才)를 양성하며, 홍석(鴻碩)을 조정으로 불러들이고 강장(康莊)에서 공을 거두며, 성학(聖學)을 더욱더 진보시키고 병통을 힘써 제거하기를 청하였는데, 상께서 가납(嘉納)하였다. 유흥치(劉興治)가 주장(主將)을 살해하고 가도(椵島)에 웅거해 있으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나라에서는 중국 조정을 위하여 군사를 출동시켜 죄를 물으려고 하였다. 공은 그들 내부에서 서로 도모하는 일이 있을 것임을 헤아려 알고는 먼저 “공격하지 말고 흔단이 일어나는 것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말하였는데, 끝내 그 말이 징험되었다.
목릉(穆陵)의 능 자리를 다시 잡아 천장(遷葬)하게 되자, 상께서 입을 상복(喪服)을 의논하게 되었다. 당시에 추숭(追崇)하는 데 대한 의논이 오랫동안 정해지지 않고 있었는데, 한두 명의 신하가 상의 뜻에 아첨하여 일을 성사시키려고 하였으며, 끝내는 종묘에 들여 소목(昭穆)의 순서에 끼워 넣기까지 하였다. 공은 혹 여럿이 아뢰기도 하고 혹 혼자 아뢰기도 하면서 경전을 인용하고 예경(禮經)에 근거하였는데, 말은 부드러웠지만 이치는 명백하였다. 비록 상의 진노가 가해지더라도 해야 할 말이면 문득 말하였으며,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곧 스스로에 대해 탄핵하고 물러가게 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대사헌 강석기(姜碩期), 대사간 조정호(趙廷虎), 부제학 김광현(金光炫) 등 수십 인이 모두 예에 대해 논하였다가 상의 뜻을 거슬러 견책을 받아 쫓겨났다. 그러자 공은 온 힘을 다해 신구(伸救)하면서 우레와도 같은 임금의 위엄을 범하고 건드려서는 안 될 역린(逆鱗)을 건드리는 것도 돌아보지 않았다.
재이(災異)가 일어난 일로 인하여 면직시켜 주기를 요청하였으나, 상께서 허락하지 않았다. 좌의정으로 승진하여 세자부(世子傅)를 겸임하였다. 인목왕후(仁穆王后)의 상을 당하였을 때 공은 총호사(摠護使)가 되어 산릉에 갔는데, 병이 심해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병세를 살피기 위해 오는 내의원의 의원이 줄을 이었다. 공은 자주 물러가게 해 주기를 요청하면서 스무 차례나 글을 올렸는데, 상께서 근신(近臣)을 파견하여 유시하였으며, 체차한 다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제수하였다.
병세가 조금 호전된 뒤에 인정전(仁政殿)에 벼락이 치는 변고가 있자 공은 등대(登對)하여 극력 진달하기를, “변고에 응해 재변을 늦추는 방도는 임금의 한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본원(本源)이 되는 마음이 깨끗하고 맑아서 일마다 다 성실하게 한다면, 하늘의 뜻을 감동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얼마 뒤에 할아버지인 문강공(文康公)이 지은 《대학연의집략(大學衍義輯略)》을 진상하고는 그 설을 미루어 나가 경외심을 높일 것과 일욕(逸欲)을 경계할 것과 내치(內治)를 엄하게 할 것과 민정(民情)을 살필 것 등 4개 조목을 진달하였는데, 모두 병을 인해 약을 복용하면서도 종시토록 정성스럽게 보익(輔翼)하는 뜻을 두었으므로, 상께서 수찰(手札)을 내려 표창을 하고 털 담요를 하사하였다.
공은 일찍이 송나라 한 위공(韓魏公)의 말을 취하여 정자(亭子)의 이름을 보만정(保晩亭)이라고 하여 경계하는 뜻을 부쳤다. 임신년(1632, 인조10)부터 항상 병을 앓으면서 차도가 있는 때가 드물어 가슴속에 쌓아둔 바를 끝까지 다 펼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라에 의심스러운 일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온 마음을 다해 대답하였으며, 일찍이 병을 핑계로 등한시한 적이 없었다. 조정에서 잘못된 거조를 하였다는 말을 들으면 걱정스러운 기색을 얼굴에 드러냈으며 잠자고 밥 먹는 것이 줄어들었다. 그러다가도 아름다운 계획과 좋은 계책을 하였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기뻐하면서 상께 공을 돌렸다.
을해년(1635, 인조13) 4월 29일에 성동(城東)에 있는 집의 정침에서 졸하니, 춘추가 72세였다. 이날 저녁에 구름이 끼지도 않았는데 번개가 쳤으며, 붉은 기운이 하늘 가득히 끼어 밤까지 이어졌다.
부음을 아뢰자 상께서 몹시 애도하면서 철조(輟朝)하였고, 3일 동안 소선(素膳)을 들었으며, 재차 근신(近臣)과 예관(禮官)을 보내어 조문하고 제사하였다. 또 부의(賻儀) 물품을 규례보다 더 하사하였고, 관가에서 장례 치르는 것을 돕게 하였다. 왕세자 역시 친히 임하여 조상(弔喪)하였다. 그리고 사대부들은 통곡하기를 마치 친상(親喪)을 당한 듯이 하였으며, 종이나 가마꾼 등과 같이 천한 사람들조차도 모두 탄식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관학(館學)의 유생들 역시 서로 이끌고 와서 조문하였으며, 원근의 사람들이 수천 명이나 몰려와서 마을의 길이 막혔다. 그해 모월 모일에 용인(龍仁)에 있는 선영에 장사 지냈다. 몇 년 뒤 모년 모월 모일에 가평군(加平郡) 조종현(朝宗縣)에 있는 모향(某向)의 산등성이로 이장(移葬)하였는데, 이는 풍수가(風水家)의 말을 따른 것이다.
공은 천부적인 자질이 호탕하고 시원스럽고 특출하고 통달하였으며, 엄하고 사나운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거짓으로 꾸미기를 일삼지 않았다. 온화하고 평온한 가운데 정대하게 함으로써 체모를 얻기를 힘썼으며, 착한 사람을 좋아하고 선비들을 좋아함이 지성에서 나와 한 가지 기예나 한 가지 능력만 있어도 오히려 혹시라도 가려질까 걱정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가까이 하기를 마치 봄날의 햇볕과 같이 하였으나, 역시 감히 함부로 구는 자는 없었다. 더불어 교제한 이는 모두 다 이름난 사람들로서 세상에서 모범이 된다고 칭해지는 사람들이었다. 문숙공(文肅公) 정엽(鄭曄)이 당대의 인물을 논할 적마다 공의 이름을 들어 앞쪽에 놓았다.
공은 효성과 우애가 남보다 뛰어났다. 일찍이 어버이를 모시고 가다가 왜적에 의해 길이 막혀 아무도 없는 산골짜기에 갇혀 며칠 동안 굶게 되었다. 공이 산을 나오다가 마침 어떤 노인네가 바위 위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에게 나아가 사연을 고하자, 그 노인이 자신이 가지고 있던 도시락밥을 모두 내주었다. 이에 공이 반만 받겠다고 사양하였으나, 그 노인이 돌아보지도 않고 떠나갔다. 그것을 가지고 돌아와서는 의정공(議政公)에게 드려 굶주림을 면할 수 있었다. 또 아버지의 명으로 누님을 찾아보기 위해 왜적들의 보루가 있는 곳을 지나다가 왜적을 만나 총 세 발을 맞았는데, 모두 옷과 삿갓을 뚫고 지나가고 몸에는 맞지 않아 끝내 누님과 서로 만나 볼 수가 있었다. 돌아와서 이 사실을 말하자, 사람들이 모두들 신명(神明)이 감동하여 도운 것이라고 하였다.
공의 5대조의 묘소에 향화(香火)가 오랫동안 끊어졌었는데, 공이 제식(祭式)을 정하여 자손들이 돌아가면서 지내게 하였다. 문강공(文康公) 묘소의 신도(神道)에 신도비가 없었는데 스스로 신도비명을 지어 비석을 세웠으며, 또 사우(祠宇)가 없었는데 공이 중건(重建)하여 제사를 주관하는 자에게 넘겨주었다. 과부가 된 누님과 집을 나란히 하여 살면서 날마다 반드시 가서 문안하였는데, 바람이 불고 비가 오거나 날씨가 춥고 덥고를 가리지 않았으며, 직사가 몰려들어 한창 바쁠 때에도 폐하지 않았다. 종족(宗族)들에 대해서는 친소(親疎)를 막론하고 대우함에 있어서 곡진히 하면서 은혜로운 뜻이 있었으며, 자제들을 대하고 종들을 거느림에 있어서는 꾸짖거나 욕설을 하지 않으면서 그들로 하여금 각자 법도를 따르게 하였다. 이에 집안이 화락하였다.
역임한 큰 고을에서 공이 펼친 덕과 아름다운 정사는 이미 여러 차례 쓰였다. 그리고 종백(宗伯)이 되어서는 동학(東學)과 남학(南學)을 옛 제도와 같이 건립하여 유학(游學)을 온 선비들을 대접할 것과 기자(箕子)의 후손에게 작위를 주어 세습(世襲)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또 높이 받들어 보답하는 예 가운데 행해야 하는데 행하지 않은 것을 모두 거론하였으며 노산묘(魯山墓)를 수리하고 사우(祠宇)를 세워서 부인까지 아울러 제사 지내게 했다. 또 효경전(孝敬殿)과 봉자전(奉慈殿) 두 전(殿)의 제례(祭禮)가 잘못된 것을 바로잡았고, 충효와 절의를 행한 사람들을 정표(旌表)하는 전례를 널리 거행하였다. 금궤(金匱)의 비사(秘史)를 상고하여 오례(五禮)를 종류별로 찬해 문헌을 고증하였다.
병조 판서로 있을 적에는 무직(武職)을 더 설치하여 적체된 자들을 소통시키고, 일삭금군(一朔禁軍)의 고통을 제거해 줄 것과 국장(國葬)을 지낼 때 상여를 매는 군사들을 경성(京城)의 방리(坊里)에서 조발하고, 중국 사신이 나올 때 심부름을 하는 자들을 포목(布木)을 거두어 삯을 주고 고용해 세워 먼 외방에 사는 백성들을 동원하지 말기를 청하였는데, 이를 법령으로 정해 놓았다. 금오(金吾)에 있으면서 옥사를 결단함에 있어서는 관대하고 공평하게 하기를 힘썼으므로 성균관의 옥사(獄事)가 이에 힘입어 풀렸다. 이러한 것들 역시 드러난 치적이다.
공은 사문(斯文)에 관계되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온 힘을 다해 하였다. 용인에 포은서원(圃隱書院)을 처음 세웠을 적에는 사액(賜額)하기를 청하였고, 치제(致祭)하면서 이름을 칭하지 말기를 청하였으며, 오현(五賢)을 종사(從祀)하라는 요청을 따라주기를 청하였고, 율곡(栗谷)에게 증시(贈諡)를 내려 주기를 청하였고, 우계(牛溪)의 무함(誣陷)을 씻어주고 관작을 회복시켜 주기를 청하였으며, 또 증시를 내려 주기를 청하였다. 또 남명서원(南冥書院)을 훼철하는 것을 금하기를 청하였는데, 모두 시행되었다.
조정에 서서 벼슬한 40년 동안에 전장(田庄)이 불어나지 않았고, 집을 새로 짓지 않았다. 왕세자가 조문하러 왔다가 돌아가서 요속(僚屬)들에게 말하기를, “이부(李傅)는 지위가 삼공(三公)에 이르렀는데도 살고 있는 집이 아주 누추하였으니, 그의 검약(儉約)은 존경할 만하다.” 하였다.
일곱 살 때 같은 마을에 사는 기자헌(奇自獻)이 공과 친하게 지내고자 하여 비단으로 된 띠를 선물로 주었는데, 공은 그의 올바르지 못함을 미워하여 굳이 돌려주었는바, 겨우 젖니를 갈았을 무렵에도 사양하고 받음을 구차스럽게 하지 않음이 이미 이와 같았다.
공이 이미 성년(盛年)이 되고 지위가 높아지게 되어서는 문채(文彩)가 환하게 발하여졌으므로 조정에 출입할 적에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신선과도 같았다. 그러나 재능과 현귀(顯貴)함을 가지고 상대방에게 과시하지 않았으며, 마음을 비우고 상대를 접하면서 고상한 것과 속된 것을 아울러 용납하였다. 술을 마시고 담소를 나누는 즈음에는 더욱더 사람들로 하여금 심취하게 하였는데, 쉼 없이 말하면서 피곤한 줄도 몰랐다.
공은 아홉 번이나 춘관(春官)의 장이 되고, 두 차례나 문형(文衡)을 맡아 예악(禮樂)과 전장(典章)과 의식(儀式)에 있어서 윤색한 바가 많았다. 무릇 문장을 지을 일이 있으면 반드시 공에게 명하여 짓게 하여 임금의 은총을 아주 많이 입었는데, 하사받은 물품을 보면 값비싼 비단과 아주 좋은 말, 두꺼운 초피(貂皮) 갖옷, 진귀한 약재, 아름다운 술잔, 맛좋은 음식 등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사방에서 비지(碑誌), 서기(序記), 경수(慶壽), 애만(哀輓), 송행(送行), 정관(亭館)에 대해 읊어주기를 청탁하러 오는 자들이 문 앞에 줄을 이었는데, 공은 붓을 휘둘러 그 자리에서 써주기를 조금도 생각하지 않은 채 써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화려하고 섬부하며 홍대하고 무성하여 말한 것이 양양하였다. 저술한 유집(遺集) 25권이 세상에 전해진다.
공은 학문을 함에 있어서 육경(六經)을 근본으로 삼았다. 시문을 지음에 있어서는 당송(唐宋)의 기풍이 뒤섞여 있었다. 시(詩)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강좌(江左)와 건안(建安)과 서경(西京)에 이르고, 문(文)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사한(史漢)과 소신(素臣)과 칠원(漆園)에 이르는데, 문장의 묘한 곳을 잘 음미해 가슴속에 간직하고, 주머니 속과 상자 속을 뒤져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은 것이 없었다.
처음에 모부인(母夫人)께서 공을 임신하고서 분만하려고 할 적에 호랑이가 와서 문 밖에 엎드려 있었는데, 사람들이 무서워서 감히 쫓아내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이미 분만하고 난 뒤에 떠나갔으므로, 인근 마을 사람들이 모두들 놀라면서 이상하게 여겼다. 나중에 공이 현귀(顯貴)하게 됨에 이르러서는 모두들 문장(文章)이 울연히 빛날 징조였다고 하였다.
공은 일찌감치 문예(文藝)로써 스스로 드러났다. 그러나 시행하고 조처한 일들이 더욱 드러나자 사람들마다 모두 공의 정술(政術)에 대해 칭찬하였다. 나라의 큰일을 당하여서는 항상 공의(公議)에 따르면서 그 사이에 다른 마음이 없었다. 이에 임금께서도 공의 마음을 깊이 알았으므로, 여러 대의 조정에서 믿어 의지하는 중함이 한결같았다. 또 정성을 가지고 하여 중국 사람들을 감동시켰으므로 일이 다급하거나 곤란할 경우에는 부득불 공이 나서서 처리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끝내는 능히 임금을 위하여 걱정을 풀어주면서 사태가 발생하기 전에 미리 치워 없앴다. 오래도록 그렇게 하여 상하 사람들에게 미더움을 받고 있었으므로 불행한 운수에 걸려들고 혼란한 조정에 처해 있었지만, 간사한 참소를 하여 장난을 칠 수가 없었다.
이에 환히 빛나고 드러나게 밝았으며 수명을 다 누리고 아름답게 끝맺음하였으며, 슬픔과 영광이 극도로 갖추어지게 하고 자손들에게 경사스러움이 흐르게 하였다. 후진들은 공을 존경하여 감히 관직을 가지고 칭하지 않고 월사(月沙) 선생이라고 칭하였는데, 시골 마을의 부녀자나 어린이 및 초야에 사는 인사들까지 모두 이를 본받아 드디어 호로써 칭해지게 되었다. 문학의 재주가 있으면서도 겸하여 복록(福祿)과 공명(功名)까지 성대하게 누렸기에 세상에서는 고려의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에 비하였다.
부인은 안동 권씨(安東權氏)로, 예조 판서 권극지(權克智)의 따님인데, 공보다 다섯 살 아래였다. 판서공은 문채가 있고 단아하여 스스로를 잘 검칙하였는데, 부인을 가르침에 있어서도 예로써 가르쳤다. 여자로서 해야 할 일을 하는 여가에 《내칙(內則)》 등 여러 서책을 모두 익힌 탓에 의리에 통달하고 사행(士行)이 있었다. 이에 딸 노릇을 하고 며느리 노릇을 함에 있어서 모두 도(道)에 맞게 하였다. 성품이 인자하여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였으므로, 친척들 가운데 스스로 생활해 나갈 수 없는 자들이 쳐다보기를 마치 어린아이가 젖을 먹여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하였다. 공이 제사를 지내거나 빈객들을 접대하는 예에 있어서 모두를 자신의 뜻과 같이 하면서도 집안 살림에 대해 걱정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부인이 안에서 잘 도와준 덕분이었다.
임진왜란을 당했을 때 일행들이 왜적이 쳐들어온다고 떠들어대자 부인은 절벽 아래로 스스로 굴러 떨어졌는데, 하늘이 도와서 다행히 살아날 수가 있었다. 그 뒤에 강을 건너다가 배가 전복되어 그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죽었는데, 유독 부인과 큰아들만 함께 살아났다. 그러자 사람들이 착한 일을 한 데 대한 보답을 받은 것이라고 하였다. 병자호란 때에는 자식과 조카들을 데리고 강도(江都)로 들어갔는데, 일이 다급해져 여러 아들들이 모시고 피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부인이 말하기를, “우리 집안은 명문 대족(名門大族)이니 먼저 소란스럽게 굴어서 백성들이 따라 하게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오랑캐들이 이미 바짝 다가옴에 미쳐서는 한집안에서 나랏일을 위하여 죽은 자가 세 사람이나 되었다. 부인은 끝내 이로 인해 상심해서 정축년(1637, 인조15) 2월 10일에 교동(喬桐)의 여사(旅舍)에서 졸하고 말았다. 그 뒤 공을 조종현(朝宗縣)으로 이장(移葬)할 적에 함께 이장하여 합장(合葬)하였다.
공은 2남 2녀를 두었다. 장남 명한(明漢)은 관찰사이고, 차남 소한(昭漢)은 병조 참지(兵曹參知)이며, 장녀는 참판 홍영(洪霙)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사인(士人) 정현원(鄭玄源)에게 시집갔다.
관찰사 명한은 금계군(錦溪君) 박동량(朴東亮)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일상(一相)은 수찬이고, 차남 가상(嘉相)은 급제(及第)이며, 삼남은 만상(萬相)이고, 사남은 단상(端相)이며, 딸은 아직 어리다. 참지 소한은 찬성(贊成) 여흥(驪興) 이상의(李尙毅)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4녀를 두었는데, 장남 원상(元相)과 차남 홍상(弘相)은 진사이고, 삼남은 유상(有相)이고, 사남은 익상(翼相)이며, 딸은 어리다. 참판 홍영은 5남 4녀를 두었는데, 장남 홍주원(洪柱元)은 선조(宣祖)의 정명공주(貞明公主)에게 장가들어 영안위(永安尉)에 봉해졌고, 차남 홍주후(洪柱後)는 진사이고, 그 다음은 홍주신(洪柱臣), 홍주한(洪柱韓), 홍주국(洪柱國)이며, 장녀는 학유(學諭) 이준구(李俊耈)에게, 차녀는 진사 이시술(李時術)에게, 삼녀는 사인 이항진(李恒鎭)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정현원은 3남을 두었는데, 모두 아직 어리다. 내외의 후손은 모두 약간 명이다.
아, 공이 죽고 난 뒤에 세상의 일은 더욱더 많이 변하였다. 공의 동료와 벗들은 이미 이 세상에 남아 있지 않고, 오직 나만이 그들보다 뒤에 죽게 되었다. 관찰군(觀察君)의 형제가 억지로 공의 행장을 나에게 주고는 예전의 친분관계를 말하면서 신도비명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내가 눈병을 핑계로 사양하였는데, 서신을 세 차례 보냈으나, 끝내 사양함을 허락받지 못하였다. 이에 드디어 신도비명을 짓겠다고 승낙하였다. 그러나 공이 스스로 두 차례에 걸쳐 수립한 것이 거의 태상(太上)의 불후(不朽)의 업적에 가깝다. 그러니 참으로 다른 사람이 글을 지어 추켜 줄 필요가 없다. 이 세상에 비록 나보다 열 배는 더 글재주가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찌 능히 글을 가지고 공을 더 중하게 할 수 있겠는가. 이에 단지 사람들이 다 함께 알고 있으면서 세도(世道)에 관계있는 것만을 기록하였다. 이어 시를 지어 명(銘)으로 삼았는데, 그 명은 다음과 같다.

우리 조선 건국한 지 백 년이 지나 / 國朝百年
문장의 도 더욱 크게 열리었네 / 文道大闢
밝고 밝게 빛이 나는 이공 있으니 / 赫赫李公
아름다움 하늘에서 내려 주었네 / 厥美天錫
문강공이 후손에게 남겨준 업을 / 文康遺業
공이 실로 그분의 뒤 이어받았네 / 公實接之
밝고 밝은 우리 임금 만나게 되어 / 遘我明辟
이에 문장 짓는 일에 천거되었네 / 乃薦厥辭
중국 천자 마음 온통 감동시켜서 / 乃動天子
우리나라 무함 이에 신원되었네 / 國誣乃伸
재주에다 계책 이미 두드러지매 / 才猷旣顯
임금 은총 날로 더욱 새로워졌네 / 眷遇日新
지부 관직 승진하여 올라갔으며 / 晉陟地部
춘관에서 정경 자리 맡아 있었네 / 春官正卿
재변 만나 혼미하지 아니했거니 / 遇災弗迷
정신에다 식견 더욱 드러났다네 / 神識益彰
이에 문원 자리에다 채워 넣어서 / 盛之文苑
문형 잡을 권한 주어 맡기었다네 / 俾提其衡
선비들이 모두들 다 우러렀거니 / 衿紳歸仰
전책에서 찬란하게 빛이 났다네 / 典冊煌煌
사신 오면 공이 가서 접대했거니 / 有客我享
패옥 소리 울리면서 거들었다네 / 鳴玉以相
보불에다 규장 환히 빛났거니와 / 黼黻圭璋
우리나라 빛을 내는 광채 되었네 / 爲國之光
해 넘어가 명이괘가 되었거니와 / 日入明夷
갖가지의 일이 모두 다 일어났네 / 何事不有
군자에게 그 무엇이 손상되리오 / 君子何傷
정도 지켜 허물됨이 하나 없었네 / 履貞無咎
밝은 태양 하늘 위에 붙어 있으매 / 翔陽麗霄
온갖 만물 밝고 밝게 빛이 났다네
/ 品彙昭晳
가장 먼저 옛 신하들 급히 찾아서 / 首急求舊
편안하게 좋은 자리 앉게 하였네 / 踐以煖席
큰 난리가 거센 파도처럼 일어나 / 大訌奔波
나라 운명 실낱같이 위태로웠네 / 國命絲髮
의로운 말 날카롭고 매서웠거니 / 義辯崢嶸
오랑캐의 기운 절로 꺾어졌다네 / 虜氣自折
육관에서 차분하게 직임 돌봤고 / 從容六官
이극 보양하는 곳에 출입하였네 / 出入貳極
가액하게 되길 모두 바랐거니와 / 加額之望
모든 이들 더디다고 여기었다네 / 衆以爲遲
나이 늙어 처음으로 도를 논하매 / 晩始論道
공은 실로 넉넉하게 할 수 있었네 / 公所優爲
뜻 지키며 예를 굳게 잡았거니와 / 守志秉禮
굴릴 수가 있는 돌이 아니었다네 / 匪石可移
지난날에 공이 남조 자리 있을 때 / 昔公南曹
아름다운 모습 환히 빛이 났다네 / 靑陽載華
동합 자리 나아감에 미쳐서는 / 曁公東閤
듬성해진 머리카락 희고 희었네 / 黃髮皤皤
공이 맛본 바를 전부 따지어보매 / 原公所嘗
아홉 번은 달았으며 열 번은 썼네 / 九甛十辛
중국이나 오랑캐나 가릴 것 없이 / 華夏夷人
모두들 다 존경하며 친애하였네 / 罔不尊親
글이 있어 집집마다 가득하였고 / 有書滿家
은혜 있어 백성들이 의지하였네 / 有惠寄民
하늘과 땅 어디에고 퍼져나가서 / 播之穹壤
맺히어져 맑고 맑은 향기 되었네 / 結爲淸芬
금석이야 없어지게 될지 몰라도 / 金石或泐
공의 이름 길이 썩지 않을 것이네 / 公名不朽
내가 명을 지어 모두 서술했거니 / 余銘之託
공과 함께 더불어서 영원하리라 / 與公俱壽


 

[주D-001]참소를 입어 : 1598년(선조31)에 명나라의 병부주사(兵部主事)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에서 왜병을 끌어들여 중국을 침범하려 한다고 무고(誣告)하였는데, 이때 이정귀(李廷龜)가 진주부사(陳奏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조선국변무주문(朝鮮國辨誣奏文)을 지어 올려 정응태가 무고한 것임을 밝혀 그를 파직하게 하였다.
[주D-002]공거(公車) : 중앙에서 치르는 과거시험에 응시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한(漢)나라 때 지방 사람으로서 과거시험에 응시하는 자를 공가(公家)의 수레에 태워서 서울로 보냈으므로 이렇게 이른다.
[주D-003]전장(專場) : 필적할 사람이 없는 기막힌 솜씨를 소유한 것을 말한다.
[주D-004]중연(中涓) : 금중(禁中)의 소제부(掃除夫)로서 임금의 곁에서 시종하는 사람을 말한다.
[주D-005]아호(鵝湖) : 본래 중국 신주(信州)에 있는 절 이름인데, 여기서는 이곳에 머물렀던 송나라의 학자인 상산(象山) 육구연(陸九淵)을 가리킨다.
[주D-006]낙민(洛閩) : 낙(洛)은 낙양(洛陽)의 정호(程顥)와 정이(程頤)를 가리키고, 민(閩)은 민중(閩中)의 주희(朱熹)를 가리키는데, 이들이 모두 그곳에서 학문을 강론하여 제자를 길렀으므로 정자와 주자의 학문을 낙민학(洛閩學)이라고 한다.
[주D-007]준직(准職) : 당하관으로서 가장 높은 직급인 당하 정3품을 말한다.
[주D-008]관왕묘(關王廟) : 원래 관왕묘는 삼국 시대 촉한(蜀漢)의 무장(武將) 관우(關羽)를 모시기 위해 세운 묘로서, 일명 관제묘(關帝廟)라고도 한다. 관우를 신(神)으로 신봉하면 전시(戰時)에 관우가 나타나 적을 멸해 준다는 전설에서 건립되었으며, 우리나라에는 1598년(선조31)에 성주(星州)와 안동(安東)에 명나라 군사들이 처음 세웠고, 이어 서울에도 동관왕묘(東關王廟)와 남관왕묘(南關王廟)를 세웠다.
[주D-009]노부(鹵簿) : 임금이 거둥할 때 갖추는 의장(儀仗)을 말한다.
[주D-010]숭의전(崇義殿) : 고려 태조 이하 8왕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경기도 연천(漣川)에 있다.
[주D-011]중귀(中貴) : 황제의 총애를 받는 환관의 시신(侍臣)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유용(劉用)을 가리킨다.
[주D-012]중자(仲子)의……것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은공(隱公) 5년 조에 이르기를, “중자의 사당을 낙성하고 처음으로 육일(六佾)의 춤을 추게 하였다.” 하였는데, 《춘추》의 삼전(三傳)에서는 이에 대해 대체로 별도의 사당을 세운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육일의 춤을 처음으로 그 사당에서 참람되게 추도록 했다는 데에 폄하하는 시각을 맞추고 있다. 중자는 혜공(惠公)의 둘째 부인으로서 환공(桓公)의 어머니인데, 혜공의 서자인 은공이 환공을 대신해서 섭정하면서 중자의 별궁(別宮)을 지어주었다.
[주D-013]성풍(成風)에게……것 : 《춘추좌씨전》 문공(文公) 5년 조에 이르기를, “천왕이 영숙(榮叔)을 보내어 반함(飯含)과 부의(賻儀)를 주었다.” 하였다. 천자가 반함과 부의를 보내는 것은 제후와 제후의 비의 상사에 있는 일이므로 장공(莊公)의 첩인 성풍에게는 걸맞지 않은 예이다. 그런데도 희공(僖公)이 사친(私親)의 상사를 천자에게 알려 분수에 맞지 않은 예를 하사받았기 때문에 기록하여 비판의 뜻을 담은 것이다.
[주D-014]가요(歌謠)와 결채(結綵) : 죽은 임금이나 왕비의 신주(神主)를 종묘로 모실 때 행하는 행사로, 성균관의 유생과 기생 등이 각각 색종이로 길 좌우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가요를 올리며 돌아간 임금이나 왕비의 덕을 칭송하는 것을 말한다.
[주D-015]청금록(靑衿錄) : 성균관, 사학(四學), 각 서원 및 향교 등에 비치하는 학적부 또는 유생들의 명부를 말한다. 유안(儒案)이라고도 한다.
[주D-016]권당(捲堂) : 성균관의 유생들이 불평스러운 일이 있을 때, 시위(示威)하는 뜻으로 성균관을 비우고 나가버리는 일을 말한다.
[주D-017]묘청(妙淸)이 주장했던 설 : 고려 인종(仁宗) 6년(1128)에 서경(西京) 사람인 묘청이 개성(開城)은 기업(基業)이 이미 쇠하였고 서경에는 왕기(王氣)가 있다고 하면서 서경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김부식(金富軾) 등의 반대로 천도의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반란을 일으켜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라고 하였다가 부하의 배신으로 죽임을 당하였다.
[주D-018]부시(罘罳) : 궁궐의 문 바깥에 쌓은 담장을 말한다.
[주D-019]건몰(乾沒) : 자기의 소유가 아닌 물품이나 돈을 횡령(橫領)하는 것을 말한다.
[주D-020]채붕(綵棚) : 대나무나 나무를 가지고 탑 모양으로 만든 다음 채색 종이나 채색 천 및 소나무나 잣나무 가지 등으로 장식한 것을 말하는데, 상례(喪禮) 때 쓰기도 하고 결혼식이나 축하하는 의식에 사용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사신을 영접할 때 환영 행사를 하기 위해 쓰는 것을 말한다.
[주D-021]복의(濮儀) : 송 영종(宋英宗)의 생부인 복안의왕(濮安懿王) 조윤양(趙允讓)의 묘호(墓號)를 정하는 데 대한 의(儀)를 말한다. 영종이 인종(仁宗)의 뒤를 이어 즉위한 뒤에 생부인 복안의왕을 추존(追尊)할 것을 의논하였는데, 사마광(司馬光)ㆍ구양수(歐陽脩) 등은 “금상께서는 인종의 양자가 되었으니, 인종을 황고(皇考)라 칭하고 복왕을 황백(皇伯)으로 칭해야 한다.”고 하면서 추존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영종은 이를 따르지 않고 이에 반대한 자들을 대부분 파면하거나 좌천시킨 뒤 추존하고는 묘호를 도원이라 하였다. 《宋史 卷245 僕王列傳》
[주D-022]한(漢)나라……것 : 한나라 선제(宣帝)의 생부는 사황손(史皇孫)이다. 무제(武帝)의 장자인 여태자(戾太子) 거(莒)가 무고로 인해 자살하자, 무제의 막내아들인 소제(昭帝)가 무제의 뒤를 이었다. 그런데 소제의 뒤를 이은 선제는 여태자의 아들인 사황손의 아들이었으므로, 소제와 선제는 항렬상 조손(祖孫)의 관계에 있었다. 이에 선제가 사황손을 사당에 들이면서 황고(皇考)라고 칭하였다. 《漢書 卷63 武五子傳》
[주D-023]노포(露布) : 격문(檄文)이나 승첩(勝捷)의 글을 말한다. 백서(帛書)를 죽간(竹竿)에 매달아서 승리를 보고했는데, 이를 노포라 하였다.
[주D-024]원복(元服) : 남자가 성년, 즉 20세가 되어서 처음으로 입는 어른의 의관(衣冠) 또는 그 의식(儀式)을 말한다.
[주D-025]찬관(贊冠) : 관례(冠禮) 때 관을 씌워 주는 일을 돕는 관원이다.
[주D-026]시귀(蓍龜) : 시초(蓍草)와 귀갑(龜甲)으로, 고대 중국에서 점을 치는 데 사용된 재료이다. 일반적으로 신통하게 잘 들어맞는 것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주D-027]목릉(穆陵) : 선조(宣祖)의 능으로, 본디 태조의 능인 건원릉(健元陵) 서쪽에 있었는데, 물이 차서 불길하다는 설이 있어 1630년(인조8)에 선조의 비 의인왕후(懿仁王后)의 능인 유릉(裕陵) 곁으로 옮겼다.
[주D-028]역린(逆鱗) : 용의 목덜미 아래에 있는 거꾸로 난 비늘을 말하는데, 이것을 건드리면 용이 화를 내어 사람을 해친다고 한다. 전하여 신하가 임금의 위엄을 범하면서 직간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주D-029]한 위공(韓魏公) :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진 송나라 때의 명상(名相)인 한기(韓琦)를 가리킨다.
[주D-030]오현(五賢) : 문경공(文敬公)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문헌공(文獻公)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문정공(文正公)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문원공(文元公)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문순공(文純公)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가리킨다. 이 다섯 사람을 문묘(文廟)에 종사하자는 논의는 1568년(선조 원년)에 태학생 홍인헌(洪仁憲)이 상소를 올려 조광조를 문묘에 종사하기를 청하고 대사간 백인걸(白仁傑)이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등 사현(四賢)을 종사하기를 청한 데서 시작되었으며, 이황이 죽은 뒤에는 이황까지 아울러 오현을 종사하자는 의논이 발론되었는데, 1610년(광해군2)에 삼사(三司)와 경외의 유생들이 상소를 올리자 대신에게 수의(收議)한 다음 종사하였다. 《燃藜室記述 別集 卷3 祀典典故》
[주D-031]시(詩)를……이르고 : 강좌(江左)는 동진 시대를 가리키고, 건안은 후한(後漢) 후기의 이른바 건안칠자(建安七子)로 불리던 공융(孔融), 진림(陳琳), 왕찬(王粲), 서간(徐幹), 완우(阮瑀), 응탕(應瑒), 유정(劉楨)과 조조(曹操), 조비(曹丕) 등을 가리키고, 서경(西京)은 전한(前漢) 시대의 수도인 장안(長安)으로, 전한 시대를 가리킨다.
[주D-032]문(文)을……이르는데 : 사한(史漢)은 《사기》와 《한서(漢書)》의 병칭이고, 소신(素臣)은 공자(孔子)를 소왕(素王)이라고 하는 데 대하여 공자가 지은 《춘추(春秋)》의 전(傳)을 지은 좌구명(左丘明)을 가리키는 말이며, 칠원(漆園)은 칠원 지방의 관리로 있었던 《장자(莊子)》의 저자 장주(莊周)를 가리킨다.
[주D-033]태상(太上)의 불후(不朽)의 업적 : 덕업(德業)을 이루고, 뛰어난 공을 세우고, 훌륭한 말을 남기는 삼불후(三不朽) 가운데 첫 번째인 덕업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춘추좌씨전》 양공(襄公) 24년 조에 이르기를, “최상은 입덕(立德)이요, 그 다음은 입공(立功)이요, 그 다음은 입언(立言)이니,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없어지지 않는 이것을 불후라고 하는 것이다.” 하였다.
[주D-034]보불(黼黻)에다……빛났거니와 : 보불은 임금의 대례복(大禮服)에 놓은 수로, 보는 도끼 모양의 흑백색, 불은 아(亞) 자 모양의 흑청색으로 수를 놓은 것인데, 여기서는 찬란한 문장을 의미하는 말로 쓰였다. 규장(圭璋)은 옥으로 만든 예기(禮器)로, 옛날에 조빙(朝聘)하거나 제사 지낼 적에 사용하던 것인데, 흔히 고상한 인품을 가진 사람이나 뛰어난 재주를 가진 인재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주D-035]해……되었거니와 : 현자(賢者)가 고통을 받는 시기가 되었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광해군이 다스리던 시기를 말한다. 명이괘(明夷卦)는 《주역(周易)》64괘 중의 하나로 밝음을 상징하는 이(離)가 땅을 상징하는 곤(坤) 아래에 위치하여, 현자가 뜻을 얻지 못한 채 참언을 당하며 고달픈 처지에 놓인 것을 보여주는 괘이다.
[주D-036]밝은……났다네 :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 광해군의 시대가 종식된 것을 말한다.
[주D-037]육관(六官) : 주(周)나라의 직관(職官) 제도에 나오는 여섯 부서(部署)인데, 여기서는 우리나라의 육조(六曹)를 가리킨다.
[주D-038]이극(貳極) : 임금의 자리를 극(極)이라 하므로 세자를 이극이라 한다. 이(貳)는 부(副)의 뜻이다. 여기서는 세자를 보양하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을 뜻한다.
[주D-039]가액(加額)하게……바랐거니와 : 사람들이 이정귀가 국정을 총괄하는 정승(政丞)이 되기를 바랐다는 뜻이다. 가액은 두 손을 이마에 대는 것으로 상대방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식의 하나이다. 송나라 사마광(司馬光)이 신종(神宗) 때 재상으로 재직하던 중에 황제가 승하하여 대궐에 들어가 임곡(臨哭)하였는데, 대궐을 경비하는 군사들이 그를 바라보고 모두 두 손을 이마에 갖다 대고 말하기를, “이분이 사마 상공(司馬相公)이시다.” 하였다. 《宋史 卷336 司馬光列傳》
[주D-040]나이……논하매 : 늘그막에 정승이 되었다는 뜻이다. 정무를 총괄하고 치도(治道)를 논하는 것이 정승의 직임이다.
[주D-041]굴릴……아니었다네 : 마음이 단단하게 정해져 바뀌지 않았다는 뜻이다. 《시경》〈패풍(邶風) 백주(柏舟)〉에 이르기를, “나의 이 마음이야 돌이 아니니 굴릴 수가 없네.〔我心匪石 不可轉也〕” 하였다.
[주D-042]남조(南曹) : 예조(禮曹)의 별칭으로, 여기서는 예조 판서를 가리킨다.
[주D-043]동합(東閤) : 동쪽으로 난 작은 문인데, 국사를 총괄하는 정승(政丞)을 가리킨다. 전한(前漢) 때에 승상인 공손홍(公孫弘)이 동합을 열어놓고 어진 선비들을 맞아들인 고사가 있다. 《漢書 卷58 公孫弘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