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 18현 두문 72현 /해동18현 한훤당 김굉필

해동 18현 한훤당 김굉필 관련자료

아베베1 2011. 6. 24. 11:16

해동잡록 2 본조(本朝)
김굉필(金宏弼)


○ 본관은 서흥(瑞興), 자는 대유(大猷)이며, 호는 한훤당(寒暄堂)이다.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으며, 일찍이 점필재를 종사하여 《소학》을 배웠는데 평생을 《소학》으로써 몸을 단속하였다. 성리학에 정통하여 사문(斯文)을 일으키고 후생을 가르쳐 인도하는 일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갑인년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참봉에 임명되었고, 다시 형조 좌랑으로 발탁되었다. 연산조에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점필재(佔畢齋)의 문인이라 하여 희천(熙川)에 유배되고, 다시 순천(順天)으로 옮겼으며, 갑자년에 죄를 더하였다. 중종 초에 도승지를 예증(例贈)하고, 13년에 특별히 우의정을 더 추증(追贈)하였으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선생이 희천에 귀양갔을 때 조정암(趙靜庵 조광조(趙光祖))이 따라 가서 노닐면서 학문하는 큰 법칙을 배웠다. 오래 있다 돌아올 제 멀리 갈 때까지 바라보면서 말하기를, “우리 도가 동쪽으로 간다.” 하였다. 〈비서(碑序)〉
○ 동방의 선비들이 모두 문장을 업으로 삼고 성리학에 잠심하여 염락관민(溓洛關閩)의 실마리를 구하는 것은 선생으로부터 비롯하였다. 《무오사적(戊午事蹟)》
○ 선생은 성리학에 연원(淵源)이 있어 몸가짐을 삼가고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다. 일찍이 영희(永禧) 신덕우(辛德優)에게 이르기를, “그대와 교분을 끊으려 했으나 정리상 차마 그러지 못한다.” 하기에, 물으니, 말하기를, “백공(伯恭 남효온(南孝溫))과 백원(伯源 무풍정(茂豐正))은 모두 진(晉) 나라 선비의 풍도를 지니고 있다. 진 나라는 청담(淸談)으로 폐해를 입었으니 10년이 못 가서 화가 이 무리들에게 미칠 것이다. 나는 맹세코 지금부터 자네들과 다시 내왕하지 않을 것이다.” 하더니 과연 그들이 뒤에 모두 몸을 보전하지 못하였다. 《사우명행록》
○ 선생은 특출한 행실이 비길 데가 없었다. 평상시에도 반드시 갓을 쓰고 띠를 띠고 있었으며, 인정(人定 밤에 통행을 금하기 위하여 종을 치던 일)이 지난 뒤에야 잠을 자고 첫닭이 울면 일어났다. 동상
○ 선생은 늘 초립(草笠)을 쓰고 연자(蓮子) 갓끈을 드리웠다. 만년에는 단칸방에 고요히 앉아 책상을 마주 대하여 책을 보고 밤이 깊도록 자지 아니하였다. 다만 연자 갓끈이 책상에 닿아 자그락거리는 소리가 나, 그 소리로 그가 아직도 책을 보고 있음을 알았다. 《유선록(儒先錄)》
○ 선생의 학문하는 방법이 꾸준히 힘써 정밀하게 쌓았으므로 확실하면서도 정체(停滯)하지 않았고, 융통성이 있으면서도 범속(凡俗)에 흐르지 않았으며, 평소 서당에 나아가서는 마치 소상(塑像)처럼 단정히 앉아 있었다. 〈행장(行狀)〉
○ 선생은 닭이 울 때 일어나 종일 똑바로 앉아 학문을 닦고 익히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집안 사람들도 일찍이 그의 게으른 모습을 보지 못하였다.
○ 선생의 《가범(家範)》에 〈거가의(居家儀)〉가 있는데, 안팎이 첫닭이 울면 모두 일어나 머리빗고 세수하고 관을 쓰고 띠를 띠고 나서, 남자는 바깥 일을 하고 여자는 집안 일을 하되 남자는 안에 들어가지 않고 여자는 밖에 나가지 않는다. 본집(本集)
○ 1, 사춘(司春)이라 하는데 가례(家禮)를 맡고, 2, 사하(司夏)라 하는데 집안의 재화(財貨)를 맡고, 3, 사추(司秋)라 하여 집안의 형벌을 맡아 보고, 4, 사동(司冬)이라 하여 집안의 음식 범절을 맡아본다. 또 상형사생(賞刑赦眚 상벌 규정 같은 것)이란 것이 있다. 동상
○ 계집종은 안 일을 맡아보는데, 1은 주포(主庖)라 하여 음식 잘 만드는 자에게 맡기고 남자로서 또한 그러한 자는 전포(典庖)라 부른다. 사내 종으로서 음식 범절을 맡아 보는 자를 사동(司冬)이라 하였다. 선생이 내칙(內則)을 본떠서 《가범(家範)》을 짓고 의절(儀節)을 마련하여, 자손들에게 보이되 훈계하는 방법은 인륜(人倫)을 더욱 중하게 여겼다. 아래로는 남녀 종들에게까지도 안팎으로 직책을 분별하여 모두 명칭이 있었으니, 안의 일은 계집으로 주관하게 하고 그 명칭을 도주(都主)ㆍ주적(主績)ㆍ주사(主辭)ㆍ주포(主庖)라 하였으며, 바깥 일은 사내 종으로 주관하게 하고 그 명칭은 도전(都典)ㆍ전사(典辭)ㆍ전시(典廝)라고 하였다. 능력을 헤아려 임무를 맡기되 절하고 꿇어 앉고 작업하는 것에 모두 일정한 규칙이 있었다. 한 번 승급하고 한 번 내리는데 상벌의 제도가 있었으며, 길흉에 대비하는 저축도 빈부에 따라 더하고 덜하였다. 매양 초하루 보름마다 친히 독서(讀書)의 예를 제정하였으나, 시행하지 못하고 화가 일어났다. 〈경현록(景賢錄)〉
○ 선생은 점필재에게 《소학》을 배웠다. 〈독소학(讀小學)〉이라는 시를 지었는데,
글을 읽어도 아직 천기(天機)를 알지 못하였더니 / 業文猶未識天機
《소학》책 속에서 어제의 잘못을 깨달았다 / 小學書中悟昨非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하여 자식의 직분을 하려 하노니 / 從此盡心供子職
어찌 구차스레 부귀를 부러워하리오 / 區區何用羨輕肥
하였는데, 점필재가 이를 평하기를, “이말은 곧 성인(聖人)이 되는 기초이다.” 하였다. 동상
○ 선생이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와 뜻이 같고 도(道)가 합하여 특별히 서로 사이가 좋았다. 서로 만날 적마다 도의를 연마하고 고금 일을 토론하여 때로는 밤을 새우기까지 하였다. 동상
○ 일두(一蠹)가 안음현(安陰縣)의 원으로 있을 때 한훤(寒暄 김굉필)이 찾아 갔더니 일두가 금잔 하나를 만들어 두었으므로 한훤이 책망하기를, “자네가 이런 소용없는 일을 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네, 뒷날 반드시 이것으로써 사람을 그르칠 것이네.” 하였다. 그 뒤에 고을원이 과연 이 일로써 장물죄(臟物罪)를 지었다고 하였다. 동상
○ 선생은 화가 적소(謫所)에 미치매, 명을 듣고 목욕하고 관대(冠帶)를 갖추고 낯빛을 변하지 아니하였으며, 벗겨진 한 쪽 신을 도로 신고 손으로 그 수염을 손질하여 입에 물면서, “신체발부(身體髮膚)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인데 이것까지 해를 받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이내 죽음을 받았다. 동상
○ 일찍이 옛말을 인용하여 자제들을 훈계하기를, “남의 악한 것을 말하는 것은 마치 피를 머금어 남에게 뿜는 것 같으니 먼저 제 입을 더럽히는 것이다.” 하였다. 동상
○ 일찍이 딸들을 가르치면서 말하기를, “훗날 너희들의 집에 가서 동서들을 만나거든 반드시 공경하고 언행을 삼가야 하며, 형제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마음을 저버릴까 두려워하라.” 하였다. 동상
○ 전하지 않는 새로운 학설을 얻어서 의연(毅然)이 남달리 뛰어났으므로 당시의 학자들이 태산북두(泰山北斗)와 같이 그를 존경하였으며, 비록 그의 문하에 나아가 배우지 못하였으나 사숙(私淑)하여 착하게 된 이가 또한 많았다. 동상
○ 어린아이 두서넛을 데리고 성남 별장에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성광자(醒狂子 주계군(朱溪君) 심원(深源))과 남추강(南秋江 남효온(南孝溫))이 함께 찾아 갔더니, 시를 지어 주기를,
세상길은 갈래도 많은데 / 世路自多岐
후진들이 서로 가기를 다투네 / 後進爭長往
번거로운 말이 다시 요란스럽고 / 繁辭更啁啾
이설이 분분하게 시끄럽구나 / 異說紛擾攘
용문의 여운이 끊어지니 / 龍門餘韻絶
내 마음 누가 씻어 줄꼬 / 我懷誰滌蕩
그대 진실로 스스로 즐거워하며 / 吾子固囂囂
요금을 숭상하도다 / 瑤琴性所尙
석달 동안 맛을 잊어버릴 줄 알아 / 三月觧忘味
향기를 혼자 상상하는구나 / 暗香徒像想
하였다. 동상
○ 선생은 후배를 가르쳐 인도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먼데 가까운데서 소문을 듣고 모여 온 학도들이 집안에 차고, 날마다 경서를 가지고 당(堂)에 오르므로 자리가 좁아 다 수용할 수가 없었다. 동상
○ 선생이 벗들과 같이 거처할 제 첫닭이 울면 일어나 함께 앉아 호흡을 세는데 남들은 겨우 밥 지을 동안도 못 되어 다 잊어 버렸으나 홀로 선생만은 또렷이 세어서 밝을 때까지 잊어버리지를 않았다. 동상
○《소학》을 점필재에게서 배울 때에 점필재가 말하기를, “광풍제월(光風霽月)이라는 것도 결국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였는데, 선생은 이 말을 명심하고 지켜서 잊어버리지 아니하였다. 동상
○ 선생은 평소에 아침에 일어나 머리 빗고 세수하고 의관을 정제하고는 먼저 가묘(家廟)에 참배하였다. 무오년의 옥사를 만나 희천(熙川)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내 순천(順天)으로 이배(移配)되었는데, 그때 화가 어떻게 번질지 그 형세를 헤아릴 수가 없었으나 그는 태연자약하게 처하여 몸가짐이 평상시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동상
○ 선생은 조상의 산소가 오래되어 헐었으므로 여러 친족들에게 말하기를, “조상의 산소가 이렇게 되었으니 자손들이 마땅히 보호하고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명절에는 음식을 장만하여 제사지내고 또 친목을 도모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에 기꺼이 따르지 않는 이가 없었으므로 그것이 길이길이 고정된 격식이 되었다. 동상
○ 선생은 한창려(韓昌黎)의 글을 즐겨 읽었는데, 매양 〈장중승전(張中承傳)〉 후서(後敍)의 장순(張巡)이 남제운(南霽雲)을 부르며 말하기를, “남팔(南八)아, 남아(男兒)는 죽을지언정 불의에 굴해서는 안 된다.” 하는 구절에 이르러서는 세 번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동상
○ 현풍현(玄風縣)에 세상 사람들이 태리산(台離山)이라고 부르는 산이 있는데, 선생이 이 산 밑에 살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선생 때문에 대니(戴尼)라고 불렀다. 그가 성인의 도(道)를 높이 받듬이 마치 머리에 이는 것 같음을 말한 것이다. 동상
○ 선생의 처음 호는 사옹(蓑翁)이었는데 비록 큰 비를 만나 겉은 젖어도 속은 젖지 않음을 뜻한다고 하였다. 얼마 후에 고치면서 이름이 너무 드러난 것 같아 혼연(渾然)히 처세하는 도가 아니라고 하여 마침내 고쳤다. 동상
○ 선생은 순천(順天)에 귀양갔다가 마침내 죽음을 당하였는데, 순천 고을 사람이 경현당(景賢堂)을 세워 제사지냈고 이구암(李龜岩)이 《경현록(景賢錄)》을 지었다. 본집(本集)
○ 가야산(伽倻山) 서쪽에 말곡촌(末谷村)이 있는데 말곡향(末谷鄕)이라고도 한다. 선생이 일찍이 거기에 서재를 짓고 학문을 닦았다. 김모재(金慕齋 김안국(金安國))가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제 이 골짜기를 지나면서 시를 지었는데,
듣건대, 김 공이 거처하는 곳이 있다하니 / 聞有金公棲築處
가야산이 곧 무이산(武夷山)이로다 / 倻山應是武夷山
하였다. 동상
○ 함께 귀양살고 같이 승평(昇平)으로 이배(移配)되었다. 〈제매계문(祭梅溪文)〉 무오년에 희천(熙川)으로 귀양갔을 때에 매계(梅溪 조위(曺偉))는 의주(義州)로 귀양갔으며 경신년에 같이 승평부(昇平府)로 이배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 김대유(金大猶)는 《소학》으로 자신의 몸을 닦아, 옛 성현으로 법도를 삼아 후학을 불러다가 성심껏 쇄소(洒掃)의 예를 가르쳤으므로 육예(六藝)의 학문을 닦은 이가 전후에 가득하여 비방하는 의론이 일어나려 하였으나 그래도 그만두지 아니하였다. 《추강냉화》
○ 선생이 지은 〈노방송(路傍松)〉이라는 시가 있는데,
한 그루 늙은 소나무 길가에 서 있으며 / 一老蒼髥任路塵
오가는 길손 영송하느라 수고롭구나 / 勞勞迎送往來賓
겨울철에 너와 마음 같이하는 이를 / 歲寒興爾同心事
지나는 사람 중에 몇 사람이나 보았는가 / 經過人中見幾人
하였다. 《경현록(景賢錄)》


 

[주D-001]염락관민(濂洛關閩) : 염계(濂溪)의 주돈이(周敦頤), 낙양(洛陽)의 정호(程顥)와 정이(程頤)의 형제, 관중(關中)의 장재(張載), 민중(閩中)의 주희(朱熹) 등 성리학(性理學)의 원조를 가리킨다.
[주D-002]내칙(內則) : 《예기(禮記)》의 편명으로 여자의 행실에 관한 교훈이 담겨 있다.
[주D-003]광풍제월(光風霽月) : 맑은 바람과 비갠 뒤의 달이라는 뜻인데 마음이 상쾌하고 깨끗함을 형용하는 말이다. 《송사(宋史) 주돈이전(周敦頤傳)》에, “그의 마음이 쇄락(洒落)함이 광풍제월과 같다.” 하였다.
[주D-004]무이산 : 중국 복건성(福建省)에 있는 산 이름인데, 주자(朱子)가 서원(書院)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친 곳이다. 주자의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가 있다.

退溪先生續集卷之八
 雜著
回示詔使書 a_031_207c


031_207c吾東。自箕子來封。九疇設敎。八條爲治。仁賢之031_207d 化。自應神明。士之得心學明疇數。必有名世者矣。四郡,二府,三國分爭。干戈靡爛。文籍散逸。不惟傳道之無人。其前人姓名。亦不得而聞矣。新羅統三爲一。高麗五百餘年間。世道向隆。文風漸開。士多遊學中原。經籍興行。易亂爲治。慕華變夷。詩書之澤。禮義之風。箕疇遺俗。猶可漸復。故吾東見稱爲文獻之邦。君子之國。有由然矣。然二代之儒。其歸重終在於言語文章之間。逮于麗末。程朱之書。稍稍東來。故如禹倬,鄭夢周之徒。得以參究性理之說。至于國朝。獲蒙031_208a 皇朝頒賜四書,五經,大全,性理大全等書。國朝設科取士。又以通四書三經者。得與其選。由是。士之誦習。無非孔孟程朱之言。然而或習俗因循。而不著不察。或狂簡斐然。而不知所裁。其中超然獨見。慨然發憤。而從事於聖賢之學者。往往有之。而亦不多得。今所擧若干人。皆已往者耳。其見存者。非所敢言也。且是數子者。生千載之後。處窮海之中。不得親授受薰灸於聖賢之門。謂之能傳心學。固難矣。然其一生用力於此。則豈不得爲心學者之徒也歟。若箕子洪範。031_208b 朱,蔡之說。發明義理無餘蘊。學而知之者。固亦有焉。其爲數則九峯內篇圖說見存。苑洛子發明亦在。而吾東未聞有能明之者。近世有李純者。自謂能通其說。而至著爲註解。亦未知其果無謬否也。
崔致遠,薛聰,崔冲,安裕,李穡,權近,以玉堂議論。抹去。吉再,金宗直,金安國。已上。禮曹所錄。
禹倬,鄭夢周,金宏弼,鄭汝昌,趙光祖,尹祥,李彦迪,徐敬德。已上。滉加錄。

(燕山朝)金宏弼


大猷寒暄堂瑞興人司勇紐子少豪逸不羈遊走市衢鞭笞人物人見其至輒避
匿旣長發憤學文天資甚高德器渾厚早從金宗直學平生以小學律身以古聖賢爲準則篤
志力學眞實踐履與一蠹鄭汝昌志同道合倡明性理之學訓迪後生不以謗議而或止毅然
特立一時學者尊如山斗嘗戴草笠垂蓮子纓至晚年猶然靜處一室對案觀書深夜不寐雖

▼원문보기98a  처음으로
家人子弟莫能窺其所爲往往惟聞蓮纓抵案輕輕有聲因知其尙觀書也成宗庚子生員
癸丑擧遺逸授南部參奉轉刑曹佐郞戊午秋史獄起以金宗直門徒杖配煕川甲子加罪宏弼沐浴冠帶而出神色不變徐以鬚銜口曰身體髮膚受之父母不可竝此受傷乃就刑年五
十一中宗朝特贈右議政諡文敬從祀文宣王廟[주:昭代紀年] 


 여헌선생문집 제12권
 비명(碑銘) 묘갈(墓碣) 묘지(墓誌)
한훤당(寒暄堂) 김 선생(金先生)의 신도비명(神道碑銘)병서(幷序)


명(明) 나라가 문명(文明)의 운(運)을 열자, 우리 조선의 여러 성왕(聖王)들이 운을 따라 계속하여 나와서 덕을 쌓고 교화를 높였다. 이에 진유(眞儒)가 동방에서 나와 도학(道學)이 전해지니, 바로 선생이 그러한 분이다.
선생은 휘(諱)가 굉필(宏弼)이고 자(字)가 대유(大猷)이며 호(號)가 한훤당(寒暄堂)이다. 《국조유선록(國朝儒先錄)》과 《경현록(景賢錄)》에 기재된 것을 삼가 살펴보면 김씨는 황해도(黃海道) 서흥부(瑞興府)가 본적(本籍)이니, 고려조(高麗朝)에 금오위 정용 중랑장(金吾衛精勇中郞將)을 지낸 휘 보(寶)가 9세조이다.
낭장의 손자인 휘 천록(天祿)은 벼슬이 광정대부(匡靖大夫) 도첨의시랑 찬성사(都僉議侍郞贊成事)에 이르고 서흥군(瑞興君)에 봉해졌는바, 공은 무략(武略)이 뛰어나 일본(日本) 정벌에 종군(從軍)하였다가 공을 세우니, 원(元) 나라 황제는 충현교위 관군총파(忠顯校尉管軍摠把)를 제수하였다. 그 후 3세조 휘 선보(善保)는 봉순대부(奉順大夫)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이니, 바로 선생의 고조(高祖)이다. 증조(曾祖)는 휘가 중곤(中坤)인데 본조(本朝 조선조를 가리킴) 초기에 급제하여 네 조정을 차례로 섬겨 명성이 있었고 관직이 통정대부(通政大夫) 예조 참의(禮曹參議)에 이르렀으며, 현풍 곽씨(玄風郭氏)에게 장가드니, 이로부터 현풍이 거주하는 고을이 되었다. 조고(祖考)는 휘가 소형(小亨)인데 봉훈랑(奉訓郞) 의영고 사(義盈庫使)이며, 선고(先考)는 휘가 유(紐)인데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어모장군(禦侮將軍) 충좌위사용(忠佐衛司勇)이 되었고, 선비(先妣)는 청주 한씨(淸州韓氏)인데 가선대부(嘉善大夫)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로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고 청성군(淸城君)에 봉해진 휘 승순(承舜)의 따님이다.
선생은 경태(景泰) 갑술년(1454,단종2) 5월 을해(乙亥)에 한양(漢陽)의 정릉동(貞陵洞) 집에서 탄생하였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호걸스럽고 뛰어나 얽매이지 않았고 차츰 자라자 분발하여 글을 배웠다. 《창려집(昌黎集)》을 즐겨 읽었는데, 장중승전 후서(張中丞傳後敍)에 “장순(張巡)이 남제운(南霽雲)을 부르며 이르기를, ‘남팔(南八)은 남아(男兒)이니 죽을 뿐이다. 불의(不義)에 굽혀서는 안 된다.’ 하였다.” 한 부분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반복하여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점필재(佔畢齋) 김 선생(金先生)을 찾아가 배울 것을 청하자, 점필재 선생은 《소학(小學)》을 주며 말씀하기를, “만일 학문에 뜻을 둔다면 마땅히 이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광풍제월(光風霽月)의 기상(氣像)이 모두 이 가운데에 있다.” 하니, 선생은 마침내 가슴에 새겨두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선생이 시(詩)를 지었는데 ‘《소학》 가운데에 어제의 잘못을 깨닫는다[小學書中悟昨非]’라는 글귀가 있으니, 점필재는 평론하기를, “이 말은 바로 성인(聖人)이 되는 근기(根基)이다. 노재(魯齋)의 뒤에 어찌 그러한 사람이 없겠는가.” 하였다. 사람들이 세상일을 묻는 자가 있으면 선생은 반드시 말씀하기를, “소학동자(小學童子)가 어찌 대의(大義)를 알겠는가.” 하였으며, 몸을 다스림에 한결같이 이 책을 승묵(繩墨 규칙)으로 삼고 뜻을 세움에 반드시 옛 성인으로 표준을 삼았다.
나이 30이 된 뒤에 비로소 다른 책을 읽어 육경(六經)을 탐구하였는데, 정(精)하게 통달함을 힘썼다. 한 방에 고요히 거처하여 밤이 깊도록 잠을 자지 않으니, 비록 집안 식구와 자제들이라도 그 하는 바를 엿보지 못하고 오직 연자(蓮子)의 갓끈이 책상에 닿아서 작게 소리가 들렸으므로 아직도 책을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체험하고 확충하여 스스로 힘쓰고 쉬지 않았으며, 아래로 인간(人間)의 일을 배우고 위로 천리(天理)를 통달하여 도가 이루어지고 덕이 확립되니, 이는 선생이 학문을 함에 있어 문로(門路)가 바르고 진수(進修)함이 치밀한 것이었다.
성화(成化) 경자년(1480,성종11)은 바로 성종조(成宗朝)였다. 선생이 상상(上庠 성균관)에 들어가니, 이때 간사한 중[僧]이 몰래 불상(佛像)을 돌려 놓아 사람들을 현혹하였다. 이에 선생은 수천 자(字)의 상소(上疏)를 올렸는바, 반복해서 자세히 논하여 명백하고 간절하니, 이단(異端)을 배척한 바름과 군주를 바로잡는 정성이 그러하였다.
정미년(1487,성종18)에 부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廬墓)살이를 하였다. 홍치(弘治) 갑인년(1494,성종25)에 이르러 훌륭한 행실로 천거되어 남부 참봉(南部參奉)에 제수되었으며, 다음 해인 을묘년(1495,연산군1)은 연산군(燕山君) 때인데 전생서 참봉(典牲署參奉)으로 옮겼다. 병진년(1496,연산군2)에 특별히 6품직으로 서용(敍用)되어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에 제수되었다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로 옮겼으며, 정사년(1497,연산군3)에 형조 좌랑(刑曹佐郞)으로 전직하였다.
무오년(1498,연산군4) 사옥(史獄)이 일어나니, 선생은 점필재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하여 희천(熙川)으로 유배(流配)되었다가 경신년(1500,연산군6)에 순천(順天)으로 옮겨지고 갑자년(1504,연산군10) 겨울 사약(死藥)이 내려지니, 이때 나이가 51세였다. 현풍(玄風)의 오설리(烏舌里) 송림(松林) 보로동(甫老洞)으로 돌아가 장례하니, 바로 선영(先塋)의 곁이었다. 집이 적몰(籍沒)되고 여러 아들들이 나누어 유배되었다.
정덕(正德) 병인년(1506,중종1)에 중종(中宗)이 반정(反正)하고 선생의 죄를 씻을 것을 명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 도승지 겸 경연참찬관 상서원정(都承旨兼經筵參贊官尙瑞院正)을 추증하였다.
정축년(1517,중종12)에 공론에 따라 의논을 올리기를, “준례에 따른 추증으로는 표창하여 특별히 대우함에 부족하오니, 청컨대 높은 품계(品階)를 더 추증하고 해마다 그 아내에게 녹봉을 내리며 자손들을 기록하여 등용하소서.” 하였다. 마침내 윤허(允許)를 받아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우의정 겸 영경연사(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에 추증되고 다시 매년 중춘(仲春)과 중추(仲秋)에 관청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였으며, 만력(萬曆) 을해년(1575,선조8)에 선조(宣祖)는 문경공(文敬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광해군(光海君) 경술년(1610,광해군2)에 온 나라의 유생(儒生)들이 일제히 글을 올려 오현(五賢)을 문묘(文廟)에 종사할 것을 청하였는데, 마침내 소청한 대로 윤허를 받아 선생이 첫번째 자리에 올랐으며 선생의 가르침이 남아 있는 지방과 국가의 유현(儒賢)을 높이고 숭상하는 지역에 각각 사당을 세우고 서원(書院)을 설치하였는바, 본현(本縣 현풍현을 가리킴)에는 도동서원(道東書院)이라고 사액(賜額)하여 지금 선영의 아래에 있으니, 이는 선생의 시말(始末)이다.
아! 그 아름다운 말씀과 훌륭한 행실을 어찌 다 들 수 있겠는가마는 불행히 나쁜 때를 만나 화(禍)가 망극하였으니, 그 전하는 것이 얼마 되지 않음은 당연하다. 이제 그 전하는 것을 대략 든다면 평소 닭이 울면 일어나서 어버이가 계신 곳에 문안하기를 의식대로 하고 저녁에 잠자리를 정하는 것도 이와 같이 하여 무릇 어버이를 섬김에 그 도리를 다하였다. 상(喪)을 당해서는 슬퍼하고 훼손하여 시종 예(禮)를 따랐으며 상복(喪服)을 벗은 뒤에는 반드시 새벽에 사당에 참배하고 그 다음에는 모부인(母夫人)에게 나아가 뵈었다.
모부인은 성품이 매우 엄하였는데 혹 뜻에 만족하지 못한 일이 있어 정색(正色)하고 말씀을 하지 않으면 선생은 감히 물러가지 못하고 반드시 공경과 효도를 더하여 모름지기 기뻐함을 얻고야 비로소 물러갔으니, 이는 효행이 백 가지 행실의 근원임을 볼 수 있다.
선생은 여러 아들들을 훈계하여 말씀하기를, “너희들은 항상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두어 감히 게을리 하지 말며, 사람들이 혹 자신을 비판하거든 절대로 따지지 말라.” 하였다. 또 말씀하기를, “남의 악을 말하면 마치 피를 입에 머금고 남에게 뿜는 것과 같아서 먼저 자기 입을 더럽히니, 마땅히 경계하라.” 하였다. 또한 여러 딸들을 가르치되 시부모에게 순종하고 제사를 정성껏 받들며 동서들을 존경하고 부인의 직책을 부지런히 하며 노비들을 구휼하고 말을 많이 하지 말며 재리(財利)를 삼가는 등의 조목으로 권하고 경계하였다.
선생은 또 말씀하기를, “우리 나라 사대부들은 가훈(家訓)을 세운 이가 적기 때문에 교화가 처자식에게 미치지 못하고 가르침과 은택이 노비들에게 내리지 못한다.” 하여 《내칙(內則)》을 따라 의절(儀節)을 만들었으며, 마침내 내외의 노비에 이르러서도 모두 남녀(男女)를 구분하고 장유(長幼)를 차례하였으며, 맡은 일을 게을리 하는가 부지런히 하는가를 살펴보아 올리고 내리며 권면하고 징계하는 규정을 분명히 하였다. 길흉사(吉凶事)에 비용이 있게 되면 풍족하게 하고 검약하게 하는 것을 적절히 가감하여 조절하였으며, 매양 초하루와 보름에는 가법(家法)을 읽어 정돈하였으니, 이는 그 집안에서 행한 법도였다.
증조비(曾祖妣) 곽씨(郭氏)의 선대 분묘가 현풍(玄風)에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 되어 무너졌으며 나무꾼과 목동(牧童)들을 금하지 않았다. 선생은 곽씨 문중의 여러 종족(宗族)들에게 이르기를, “이는 자손이 된 자가 차마 볼 수 없으니 철저히 금하고 보호하라.” 하였고, 또 “명절에 철에 따른 음식을 올려 경건히 고유하고 인하여 서로 화목을 다지면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에 곽씨 문중들은 모두 기꺼이 따라 떳떳한 법식으로 삼았으니, 이는 효도와 화목을 미루어 넓힌 것이었다.
관청에서 사무에 수응하고 세속에 대처함에 있어서는 일반인과 심히 다르게 하려고 하지 않고 한결같이 지성으로 하였다. 형조(刑曹)의 낭관(郞官)이 되어서는 행동거지에 법도가 있어 오르고 내리는 즈음에 둥글게 돌고 네모지게 꺾어 돌아 반드시 법도에 맞아서 일찍이 조금도 어기지 않았으며, 옥사(獄事)와 송사를 분명히 처리하되 너그럽게 용서하여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고 복종하였다. 또 비록 관청의 사무가 급박하더라도 강학(講學)과 전수함을 폐하지 않았으니, 이는 바로 영달하여도 도를 떠나지 않은 것이다.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과 뜻이 같고 도가 합하여 서로 만날 때마다 도의를 연마하고 고금의 일을 상의하여 혹 밤을 새우기도 하였으며, 희천(熙川)에 있을 때에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를 얻어 마침내 원대한 데로 나아가는 기축(機軸)을 전수하였다. 무릇 거주하고 머무는 곳에는 원근의 선비들이 선생의 풍도(風度)를 듣고 사모하여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리하여 학도들이 이웃 마을에까지 가득하고 사람들의 집에 꽉 차서 경서(經書)를 잡고 당(堂)에 오르는 자들이 다 앉을 수도 없었는데, 선생은 가르치고 인도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강론하기를 간곡히 하였다. 비록 비방이 일어난다 하여 중지할 것을 청하는 자가 있었으나 마침내 이치로 타일러 꺾이지 않고 재주에 따라 성취시켰으며 뒤에 유명한 사람이 많았으니, 이는 스승의 도로 자임(自任)하여 영재를 교육함을 낙(樂)으로 삼은 것이다.
점필재(佔畢齋)가 이부(吏部 이조(吏曹))에 있으면서 임금께 건의하여 밝히는 일이 없자 선생은 시(詩)를 올려 풍자하였으니, 이는 스승을 섬김에 숨김이 없는 것이다.
일두(一蠹)가 고을의 원이 되어 금잔(金盞) 하나를 장만하자, 선생은 “공(公)이 이처럼 무익(無益)한 것을 만들 줄 몰랐으니 뒤에 반드시 사람을 그르칠 것이다.” 하였으며, 일찍이 매계(梅溪) 조위(曺偉)의 상을 치를 적에 평소에 빠진 이빨과 머리털을 찾았으나 집안 사람들이 없다고 말하니, 선생은 말씀하기를, “오랫동안 태허(太虛 조위의 자(字)임)와 종유(從遊)하였는데 그 엉성함이 이와 같을 줄을 몰랐다.” 하였으니, 이는 붕우간에 사귀는 도를 반드시 성실히 한 것이다.
유배지에 있을 적에 비록 화(禍)의 기미를 측량할 수 없었으나 선생은 태연히 대처하여 떳떳한 행동을 고치지 않았으며, 화가 이르던 날에 목욕한 다음 관(冠)을 쓰고 띠를 매고 나왔으며, 신이 벗겨지자 다시 신고 정신과 안색을 바꾸지 않으며 천천히 수염을 쓰다듬고 입을 다물며 말씀하기를, “신체와 머리털과 피부는 부모에게 받았으니 이것까지 상함을 받아서는 안 된다.” 하고 마침내 조용히 죽음에 나아갔으니, 이는 흉함에 임하여 어지럽지 않은 것이다. 이 한두 가지 일을 든다면 나머지는 미루어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선생은 강유(剛柔)의 자질을 겸하고 건순(健順)의 덕(德)을 겸비하여 몸 갖기를 경(敬)으로써 하고 마음 두기를 성(誠)으로써 하였다. 그리하여 도의를 강구(講究)함이 이미 정하고 함양(涵養)함이 또한 후(厚)하여 확고하면서도 막히지 않고 통하면서도 흐르지 않았으니, 이는 과연 우리 유학(儒學)의 의리(義理)의 학문이요 중정(中正)한 도(道)인바, 송(宋) 나라 염락(濂洛)의 여러 현자(賢者)가 수사(洙泗)를 거슬러 올라가 이은 것이었다.
우리 동방(東方)은 문헌이 있은 이래로 유학(儒學)으로 이름난 자가 어찌 적겠는가마는 숭상하는 바가 사조(詞藻 문장)이고 사모하는 바가 공명(功名)이었다. 간혹 이른바 우뚝하게 선 자가 있었으나 또한 한 절개와 한 행실의 선비가 됨에 불과하였으니, 그 누가 용맹하게 벗어나고 독실하게 실천하여 지엽을 가볍게 여기고 근본과 열매에 나아가며 구이(口耳)의 학문을 외면하고 심신(心身)으로 돌아왔는가.
고려 말기에 포은(圃隱) 정 선생(鄭先生)이 이 도를 알고 이 도를 행하여 해동(海東)의 첫번째 유자(儒者)가 되었으며, 우리 조선조에 이르러는 선생이 실로 그 관건(關鍵)을 창도하여 개발하였다. 비록 지위를 얻어 도를 행하지 못하였고 또 미처 저술하여 가르침을 남기지 못했으나 오히려 한 세상의 유림(儒林)의 종주(宗主)가 되고 사문(斯文)의 적치(赤幟)를 세웠다.
같은 때에 인(仁)을 도운 자로는 일두공(一蠹公)이 있었고 몸소 가르침을 받든 자로는 정암공(靜菴公)이 있었으며, 그 뒤에 발걸음을 이어 일어난 자로는 평실(平實)함이 이회재(李晦齋) 같은 분이 있었고 정순(精純)함이 이퇴계(李退溪) 같은 분이 있었으니, 이는 모두 우리 동방의 진유(眞儒)가 되고 백세(百世)의 사범(師範)이 되는바, 또한 선생의 정맥(正脈) 가운데에서 사숙(私淑)한 자들이다. 지금에 이르러 후학들이 도학이 올바른 학문이 됨을 알아 높이고 숭상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이는 진실로 선생의 공이다.
부인은 순천 박씨(順天朴氏)로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는바,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천상(天祥)의 4대손이고 사맹(司猛)인 예손(禮孫)의 따님인데 거주한 곳이 합천군(陜川郡) 야로현(冶爐縣)에 있었다. 선생이 처음 장가들어 돌아오지 않았을 때에 별도로 우거하는 집을 마련하고 당호(堂號)를 지었었는데 뒤에 마침내 현풍의 옛날 거주하던 곳으로 돌아오니, 바로 현풍현의 서쪽대니산(戴尼山)의 남쪽에 있는 솔례촌(率禮村)이었다. 선생이 처음에는 사옹(簑翁)이라 호하였으니, 비록 비가 와서 밖은 젖으나 안은 젖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선생은 이윽고 말씀하기를, “이름을 지은 것이 너무 드러나니 세상에 처하는 도가 아니다.” 하고는 다시 고쳤다. 부인은 선생보다 36세 뒤에 별세하였다.
아들은 4명이니, 장자인 언숙(彦塾)은 전력부위(展力副尉)이고 차자인 언상(彦庠)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이며, 다음은 언서(彦序)와 언학(彦學)이다. 여서(女壻)는 5명이니, 맏이는 남부 참봉(南部參奉) 하백(河珀)이고 다음은 훈련원 정(訓鍊院正) 이장배(李長培), 사헌부 감찰 정응상(鄭應祥), 사인(士人) 강문숙(姜文叔), 충의위(忠義衛) 정성린(鄭成璘)이다. 손자는 4명인데 동부참봉(東部參奉)인 대(岱), 부정(副正)인 입(立), 익(翊), 욱(昱)이다.
증손은 8명인데 수침(壽忱), 수열(壽悅), 수항(壽恒), 생원(生員)인 수개(壽愷), 찰방(察訪)인 수회(壽恢), 수념(壽恬), 수종(壽悰), 수이(壽怡)이다. 현손은 13명인데 창릉 참봉(昌陵參奉)인 응몽(應夢)과 응길(應吉), 사과(司果)인 응복(應福), 부사(府使)인 응성(應成), 응현(應賢), 응백(應白), 응철(應哲), 응신(應信), 응헌(應憲), 응선(應先), 정(定), 심(審), 사과인 탕(宕)이다. 제 5대손인 전 찰방(前察訪) 대진(大振)이 현재 종손(宗孫)이며 이제 내외손으로 6, 7대에 이른 자가 모두 남녀노소를 합하여 총 2백 40여 명에 이르니, 어찌 선(善)을 쌓은 남은 복이 아니겠는가.
선생의 외증손에 한강(寒岡) 정공 구(鄭公逑)가 있으니, 실로 선생의 뜻과 사업을 계승하여 아름다움을 계승하고 광채를 더한 것이 많다. 일찍이 선생을 위하여 《경현속록(景賢續錄)》을 모은 것이 매우 구비되었으나 불행히 화재로 불타서 전하지 못하니, 어찌 영원한 한(恨)이 되지 않겠는가.
이 재주(再周)의 갑자년에 이르니, 바로 천계(天啓) 4년(1624)이었다. 종손인 대진이 함께 후손이 된 자와 지방의 선비들과 상의하기를, “묘도(墓道)에 아직까지 드러낸 신도비(神道碑)가 없으니 비단 후손의 수치일 뿐만 아니라 또한 사문(斯文)이 함께 그 책임을 맡아야 한다.” 하여 방백(方伯 감사(監司)를 가리킴)에게 아뢰니, 방백인 이공 민구(李公敏求)가 즉시 위하여 조처해서 그 정성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다음 해인 을축년(1625,인조3)에 돌이 갖추어지자, 제공(諸公)들이 나에게 글을 지을 것을 명하였다.
아! 스스로 덕행을 잘 표현하는 자가 아니면 어찌 그 만분의 일인들 방불하게 말할 수 있겠는가. 다만 《유선록(儒先錄)》과 《경현록(景賢錄)》 두 책을 근거하여 서술하고 명(銘)한다. 명은 다음과 같다.

덮어줌은 오직 한 하늘이요 / 覆惟一天
실어줌은 오직 한 땅이 / 載惟一地
도가 이 사이에 있어 / 道在其間
없어지지 않고 변하지 않네 / 不亡不二
이미 고금에 차이가 없으니 / 旣無古今
어찌 중국과 오랑캐의 구분이 있겠는가 / 寧有夏夷
사람으로써 찾으면 / 求之以人
곧 스스로 알게 되네 / 便自覺知
도는 무슨 도인가 / 曰道何道
병이를 따르는 것이네 / 率其秉彛
선생은 이것을 아시고 / 先生是契
자임하여 의심하지 않았네 / 自任不疑
성현의 사업이 / 謂聖賢業
내 분수 안의 일이니 / 吾分內事
이는 어려운 일이 아니요 / 事無難事
나의 입지(立志)에 달려 있다 하였네 / 在我植志
먼 곳에 감은 가까움으로부터 시작하고 / 行遠自邇
높은 곳에 오름은 낮음으로부터 하니 / 登高自卑
회옹의 소학(小學)이 / 晦翁有書
성인이 되는 기본이네 / 作聖之基
광풍제월의 기상이 모두 이 책에 있다 하니 / 光風霽月
스승은 나를 속이지 않았네 / 師不我欺
가슴속에 새겨두고 몸소 실천하여 / 服膺身踐
어제의 잘못을 오늘에 깨달았네 / 今悟昨非
일상 생활에 벗어나지 않고 / 不出日用
하늘의 기틀을 묘하게 아니 / 妙會天機
뿌리가 깊음에 가지가 번창하고 / 根深枝暢
근원이 깊음에 샘물이 발달하네 / 源濬泉達
참험하여 꿰뚫고 / 參驗貫穿
연구하여 포괄하니 / 究極包括
학문의 차례와 계급 / 次第階級
규모와 절목이 / 規模節目
완성된 법이 있으므로 / 厥有成法
믿고 행하여 독실히 하였네 / 信行斯篤
잊지 않고 조장하지 않으며 / 勿忘勿助
과와 불급이 없었네 / 無過不及
참을 쌓고 힘쓰기를 오래 하여 / 眞積力久
이것을 이루고 이것을 세우니 / 是成是立
이루면 홀로 이루지 않고 / 成不獨成
서면 반드시 함께 섰네 / 立必俱立
미루어 붕우들과 강론하고 / 推爲麗澤
또한 후진의 교육을 즐거워하였네 / 亦樂敎育
이락을 거슬러 올라가 접하고 / 泝接伊洛
수사를 연원으로 하니 / 淵源洙泗
도가 과연 동방으로 와서 / 道果東矣
널리 베풀어졌네 / 庶普厥施
이미 용납 받지 못하여 / 旣不見容
도리어 화의 빌미가 되니 / 反爲禍祟
시운인가 천명인가 / 時耶命耶
도를 믿을 수 없었네 / 道不可恃
하늘이 정해지기를 기다리니 / 有待天定
이 이치를 속이기 어려워라 / 難誣此理
공로가 백세에 보존되고 / 功存百世
은택이 많은 선비들에게 남아 있으니 / 澤在多士
모두 올바른 학문을 우러러 / 咸仰正學
더욱 오랠수록 더욱 빛나네 / 愈久彌光
송림의 언덕은 / 松林之原
낙동강이 산을 감고 도네 / 洛流縈岡
유택이 이 곳에 있으니 / 幽宅在是
비석을 새겨 무궁한 후세에 남기네 / 鐫賁無疆


[주D-001]장중승전 후서(張中丞傳後敍) : 당(唐) 나라의 학자이며 문장가인 한유(韓愈)의 문집 《창려집》에 실린 글. 한유가 죽은 뒤에 창려백(昌黎伯)에 봉해졌으므로 창려라 칭하였다. 장 중승(張中丞)은 어사중승(御史中丞)을 지낸 장순(張巡)을 가리킨다. 현종(玄宗) 때에 안록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 장순과 허원(許遠)은 수양성(睢陽城)을 끝까지 지키다가 부하인 남제운(南霽雲), 뇌만춘(雷萬春) 등과 함께 장렬하게 죽었다. 당시 문인(文人)인 이한(李翰)이 일찍이 장순전(張巡傳)을 지었는데, 한유는 이한이 허원전을 짓지 않고 뇌만춘의 일을 기록하지 않았다 하여 이 글을 지었는바, 뒤의 남팔(南八)은 바로 남제운을 지칭한 것으로 그가 남씨 가문의 형제중 여덟째에 해당하므로 이렇게 칭한 것이다.
[주D-002]노재(魯齋) : 원(元) 나라 초기의 학자이며 정치가인 허형(許衡)의 호. 그는 《소학》을 신봉하여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소학》을 믿기를 신명(神明)처럼 하고 공경하기를 부모처럼 한다.” 하였으며, 자제들을 가르칠 때에도 반드시 《소학》을 위주로 하였다.
[주D-003]무오년 사옥(史獄) : 연산군 4년(1498)에 일어난 무오사화(戊午史禍)를 가리킨다. 김종직(金宗直)이 일찍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어 세조(世祖)를 비판하였는데, 그의 문인인 김일손(金馹孫)이 이 사초(史草)를 《성종실록(成宗實錄)》에 기재하였는바, 이것이 문제가 되어 김종직이 부관참시(剖棺斬屍)되고 김일손 등이 처형되었다.
[주D-004]오현(五賢) :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퇴계(退溪) 이황(李滉) 등 다섯 분을 가리킨다.
[주D-005]염락(濂洛)의……것이었다. : 염락은 염계(濂溪)와 낙양(洛陽)으로 염계는 송학(宋學)의 비조(鼻祖)인 주돈이(周敦頤)가 살던 곳의 시냇물 이름이고 낙양은 명도(明道) 정호(程顥)와 이천(伊川) 정이(程頤) 형제가 살던 곳이며, 수사(洙泗)는 모두 물 이름으로 공자(孔子)가 살던 곳이므로 곧 송(宋) 나라의 유현(儒賢)들을 통하여 공맹(孔孟)에 거슬러 올라감을 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