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능창대군(綾昌大君)의 비(碑)

능창대군(綾昌大君)의 비(碑) 능창대군(綾昌大君)은 휘(諱)는 전(佺)

아베베1 2011. 6. 25. 18:36

 

 

 

 

기언 별집 제22권
 구묘문(丘墓文)

능창대군(綾昌大君)의 비(碑)


능창대군(綾昌大君)은 휘(諱)는 전(佺)인데, 선조(宣祖)의 친손이요, 원종(元宗)의 셋째 아들이며, 인조(仁祖)의 아우이다. 15세에 처음으로 봉작을 받아 능창군이 되었다. 나면서부터 아름다운 바탕이 있어 은혜롭고 미더우며, 정성스럽고 순박하여 효도와 우애에 돈독하였으며, 공경스럽고 검약하여 존귀함을 내세워 남을 대하지 않았다. 독서를 좋아하며 겸손한 자세로 남을 섬기며 행실을 닦아, 어진 공자라 칭찬받았다.

 

광해군이 골육(骨肉)을 시기하여 스스로 임금이 된 처음부터, 모든 왕자들을 반역으로 몰아 임해군과 영창대군도 모두 절도(絶島)에 두었다가 남몰래 사람을 시켜 죽였으며, 태후(太后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幽閉)시켰는데, 공자도 무고를 당하여 해도(海島)의 고림(高林)에 가두고, 남몰래 수직하는 자를 시켜 밥에 독약을 넣어 죽게 몰아붙였으니, 이는 골육을 죽였다는 말을 숨기려 한 것이다. 공자는 피할 수 없음을 알고, 곧 옷을 갈아입고 북향하여 약을 받아먹고 죽으면서 사사로이 부모에게 편지를 써서 영결했는데, 옥사(獄事)가 엄중하여 비록 친척이라도 서로 알지 못하다가 편지를 받은 뒤에야 아무날[某日] 죽은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나라 사람들이 불쌍히 여겨 노래를 지어,

“바닷가 모래 굽이에 해마다 봄은 와도 소식이 없고 봄풀만 다북한데, 왕손은 한번 가고 다시 돌아오지 않네.”
하였다. 집안에서 법이 두려워 감히 예를 갖추지 못하고 서울 동교(東郊) 밖에 장사했는데, 이때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 인심이 속으로 배반했었다.

 

계해년(1623, 인조1)에 인조(仁祖)가 정의로 큰 난을 극복하여 태후가 복위되고 광해군이 폐위되었다. 이때 예묘(禰廟 아버지의 사당을 말함)를 추존하고, 공자를 나라 법제대로 대군(大君)에 추봉했으며 시호를 효민(孝愍)이라 하고, 왕자의 예로 옛 광주(廣州) 서쪽에 개장(改葬)했다. 효종(孝宗)이 큰 아우 인평대군(麟坪大君) 이요(李㴭)로 후사(後嗣)를 삼아 제사가 끊기지 않도록 하였다.

 

공자는 만력(萬曆) 31년(1603, 선조36) 7월 16일에 태어나, 47년(1619, 광해군11) 11월 15일에 몰(歿)하니 17세였다. 딸 하나를 두니 외부(外婦 첩(妾)) 출생인데 사위는 영월 군수(寧越郡守) 허서(許舒)이다. 인평대군은 아들 넷, 딸 둘인데, 아들은 복녕군(福寧君) 이유(李栯),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柟), 복평군(福平君) 이연(李㮒)이요, 두 사위는 조기수(趙祺壽), 정중만(鄭重萬)인데, 정중만은 진사이다. 허서는 아들 넷, 딸 둘로, 아들은 허공(許羾), 허충(許翀), 허호(許䎁), 허숙(許䎘)인데, 허공은 무과로 우후(虞候)이고, 허호는 공릉 참봉(恭陵參奉)이며, 두 사위는 심근(沈根), 조태윤(趙泰胤)이다. 복녕군은 일찍 죽고, 아들 둘이 봉작을 받았으니, 양원군(陽原君) 이환(李煥), 의원군(義原君) 이혁(李爀)이고, 사위는 김석달(金錫達), 심좌한(沈佐漢), 최현제(崔賢齊)이며, 두 딸은 출가하지 않았다. 복창군의 사위는 심중량(沈仲良)이요, 복평군은 첩에게서 두 아들과 두 딸을 두었는데, 넷 모두 어리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깊은 원한 풀어 주어 천지신명을 감동시킴은 / 雪幽冤感神祗
백대의 교화요 / 百代之敎
만국의 정사라 / 萬國之治
천도가 매우 밝아 / 天道孔昭
좋은 상서 내렸네 / 吉祥綏之
아, 황천길 깊고 어두우니 / 嗚呼九原幽昧
아는지 모르는지 / 其有知耶其無知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