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신묘년 산행 /2011.6.28. 수락산 금류폭포

2011.6.28. 수락산 금류폭포 (金流洞天) 및 청학동 계곡

아베베1 2011. 6. 29. 09:42

 

 

 

 

 

 

 

 

 

 

 

 

 

 

 

 

 

 

 

 

 

 

 

 

 

 

 

 

 

 

 

 

 

 

 

 

 

 

 

 

다산시문집 제6권
 시(詩) 송파수작(松坡酬酢)
산정에 이르다[到山亭]


병든 몸 지루하게 와상에만 누워 있다가 / 病骨支離著一床
삐걱삐걱 대가마 타고 산당에 이르노니 / 筍輿伊軋到山堂
길가의 묵은 무덤엔 가을 꽃이 푸르고 / 路傍荒塚秋花碧
울타리 밑 못둑에는 올벼가 향기롭네 / 籬下回塘早稻香
근력은 다만 편히 눕기나 바랄 정도인데 / 筋力只堪求穩寢
미친 마음은 매양 놀이마당으로 달리어라 / 狂癡每欲逐歡場
도봉산 수락산엔 절간들도 하 많아서 / 道峯水落多蘭若
서녘 바람 한바탕 꿈에 가을 흥치 도도하네 / 一夢西風引興長


 

속동문선 제9권
 칠언절구(七言絕句)
수락산 성전암(題水落山聖殿庵)


김시습(金時習)

산중에 나무 치는 소리가 정정한데 / 山中伐木響丁丁
곳곳의 그윽한 새는 늦게 갠 날을 희롱한다 / 處處幽禽弄晩晴
바둑을 파하고 개울 늙은이 돌아간 뒤에 / 碁罷溪翁歸去後
푸른 그늘에 책상을 옮겨 놓고 황정을 읽네 / 綠陰移案讀黃庭


명재유고 제3권
 시(詩)
천준 상인(天俊上人)이 수락산(水落山)으로부터 나를 찾아왔기에 서계(西溪)의 소식을 반갑게 듣고 그 시축(詩軸) 안의 시에 차운하여 그에게 주다 2수


늘그막에 맑고 그윽함만 좋아하니 / 衰年一味愛淸幽
중의 시축이 속인의 시처럼 보이네 / 僧軸猶嫌近俗流
초옹이 애써 날 찾도록 하였으니 / 爲被樵翁勤指送
몽당붓 끼적이는 일 그만둘 수 없네 / 試拈枯筆不能休
서계(西溪)가 ‘초수(樵叟)’라고 자호(自號)하였다.

수락산 서쪽에 있는 석림암에서 / 石林庵在水山西
몇 해 전 반달 정도 지낸 적 있지 / 頃歲曾爲半月棲
희미한 늙은이 심회로도 못 잊어 / 黯黯老懷忘不得
이따금 꿈결에 운계를 돌아보네 / 有時魂夢繞雲谿


명재유고 제4권
 시(詩)
약천(藥泉) 남 상국(南相國) 구만(九萬) 에 대한 만사


서계의 풀 묵은 지 몇 년이나 지났던가 / 西溪宿草幾回春
공이 또 바람처럼 저승으로 떠났구려 / 公又飄然去返眞
동갑내기 늙은 몸은 아직도 죽지 않고 / 雌甲殘生猶未死
부러워서 물끄러미 하늘 바라본다오 / 不堪長羨望蒼旻


 

[주C-001]남 상국(南相國) : 남구만(南九萬 : 1629 〜 1711)으로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운로(雲路), 호는 약천 또는 미재(美齋)이다. 송준길(宋浚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나 소론(少論)의 영수로 숙종 대에 환국(換局) 정국에서 정치적 파란을 겪기도 하였다. 영의정을 지냈으며 국정 전반에 걸쳐 경륜을 펼쳤고 문장에도 뛰어났다. 저서로 《약천집(藥泉集)》, 《주역참동계주(周易參同契註)》가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주D-001]서계(西溪)의 …… 지났던가 : 서계의 풀은 박세당(朴世堂) 무덤의 풀을 가리킨다. 박세당이 양주(楊州) 수락산(水落山) 서쪽 골짜기 석천동(石泉洞)으로 물러가 지내면서 자호를 서계초수(西溪醮叟)로 삼은 바 있다. 박세당은 1703년에 세상을 떠났다.

명재유고 제20권
 서(書)
박태보 사원에게 보냄 4월 27일


동봉영당(東峰影堂)은 내 생각에 의심 가는 것이 있습니다. 그를 유자(儒者)라고 주장하자니 명분은 바른데 사적이 뒷받침하기 어렵고, 승려라고 주장하자니 승려들이 그의 마음을 어찌 알겠습니까. 단지 그 허탄한 말을 빙자할 따름일 것이니 절의(節義)와 풍교(風敎)에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이렇기 때문에 이익은 없고 손해만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참으로 옳지만은 않은 내 견해로 남의 다 된 일을 기필코 막으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벌써 건물을 절반 이상 완성하였을 것이므로 조만간 한번 찾아갈 것이니, 한가히 지내는 중에 좋은 감상거리가 하나 더해질 것입니다.
내가 당한 구설에 대해서는 이미 들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내가 일찍 장자(長者)에게 말하지 않고서 사적으로 공의(公議)를 등진 일을 논했다고 하여 그것을 죄로 삼고 있습니다. 전날 장문의 편지를 제때에 보내지 않은 일을 염려했던 그대의 견해 또한 명견(明見)이었으니, 가장 어려운 의리를 정밀히 분석한 공부에 대해 부끄럽고 탄복하였습니다. 기왕의 일은 말할 것이 못되지만 앞으로 또 무슨 낭패를 당할지 알 수 없으니, 이것이 두렵습니다.


 

[주D-001]동봉영당(東峰影堂) : 동봉(東峰)은 김시습(金時習)의 여러 호 가운데 하나이다. 김시습이 거처하던 구지(舊址)가 수락산 동봉에 있었다. 박세당이 동봉의 서쪽에 영당을 짓고, 1686년에 부여 무량사(無量寺)에 있던 김시습의 자화상을 봉안하고 춘추로 제향하였다. 《국역 서계집 4 연보》

명재유고 제34권
 제문(祭文)
서계(西溪)에게 제사 지낼 때의 제문 계미년(1703, 숙종29)


아아, 너무나도 애통하여라 / 嗚呼哀哉
우리 공은 / 惟公
반남공 맥을 이은 후손이시고 / 潘南一脈
선조 야천 유풍을 이어받았지 / 冶川遺風
공의 재덕 밖으로 환히 빛났고 / 英華彪外
진실함과 신의를 맘에 지녔네 / 忠信在躬
나간 때가 시대와 서로 어긋나 / 進與時違
물러나서 곤궁함을 고수하였지
/ 退而固窮
천지에 부끄러움 하나 없도록 / 俯仰無怍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았네 / 一其始終
아아, / 嗚呼
나라의 큰 동량이 될 만하다고 / 人嘗期公
사람들이 공에게 기대했었지 / 可當棟隆
그러나 불러도 안 움직인 건 / 招麾不動
금세엔 오직 공이 유일하다네 / 今世惟公
어째서 높은 자리 마다하고서 / 曷不廊廟
시골집에 파묻혀 은거하였나 / 而沒蒿蓬
탐욕을 청렴하게 만드는 절개 / 廉頑一節
그 어찌 크나큰 공이 아니랴 / 抑豈非功
아아, / 嗚呼
큰아들 직언하다 목숨을 잃고 / 大兒死直
작은아들 충언으로 목숨 잃으니 / 小兒死忠
한집안에 훌륭한 이 다 모인 건 / 一家萃美
고금에 어느 집안 이와 같으랴 / 今古誰同
양주 땅에 위치한 수락산 서쪽 / 水落之西
도봉에서 보자면 동쪽 언덕에 / 道峯之東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묻히니 / 父子同歸
그 정기 더욱더 크다 하겠네 / 正氣彌穹
아아, / 嗚呼
어느새 세도 이미 땅에 떨어져 / 世道旣喪
시비와 흑백이 뒤섞인 세상 / 緇素相蒙
쏙닥쏙닥 참소하는 못된 이들이 / 緝緝翩翩
번번이 임금을 기만하였네 / 儘欺天聰
그러나 사람 마음 쉬이 안 속고 / 人心難誣
천리는 자연스레 공변되나니 / 天理自公
백 년 뒤엔 가렸던 진실 드러나 / 百載之後
어둠을 깨치고서 훤히 밝으리 / 昭如發矇
아아, / 嗚呼
근근이 목숨을 부지하는 나 / 後死殘喘
온갖 감회 마음에 교차한다네 / 百感縈中
의리로는 조문이 당연하지만 / 義當素車
칩거한 벌레와 똑같은 신세 / 身作蟄蟲
술 한 잔에 이 글로 유식하자니 / 緘辭侑觴
마음 다 표현할 길이 없구나 / 言不盡衷
말은 비록 다 하지 못한다 해도 / 言雖不盡
그대와 내 마음 서로 통하리 / 方寸可通
아아, 너무나도 애통하여라 / 嗚呼哀哉

초본(初本)
아아, 지난 경진년(1700, 숙종26) 가을, 마지막으로 선영(先塋)을 찾아 하직을 드리기 위해 떠난 길에 누이의 무덤까지 돌아보고는 공과 함께 하룻밤을 묵었습니다. 그때 공은 나의 얼굴이 속티를 벗지 못하였다고 하였고, 나는 공의 총명이 줄지 않은 것에 대해 감탄하였습니다. 봄추위와 가을더위처럼 사람이 늙어 강건한 것은 결국 오래갈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서로 웃으며 이별하였는데, 이 이별이 실로 영원한 이별이 될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어느덧 무덤에서 공을 장사 지낼 날이 다가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만, 저는 근근이 명을 이어 가는 거의 죽어 가는 목숨이라 장사(葬事)에 가 볼 길이 없습니다. 이에 대략 슬픈 감회를 적어 멀리서나마 술 한 잔을 올려 유식(侑食)하게 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아아, 공은 반남공의 후예이고 야천의 후손입니다. 공은 재덕이 밖으로 환히 드러났고 진실함과 신의를 안에 지녔으며, 그 뜻과 식견은 심원(深遠)하였고 지조는 확실하게 지키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기국과 역량은 사람들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으므로, 다들 공이 정계에 나가서 중요한 지위에 오르면 당연히 임금을 바로잡고 정사를 바르게 하는 공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소명(召命)을 받고도 움직이지 않은 절조를 지녔기에 나라의 위대한 야인(野人)이 되셨습니다. 이미 그 뜻이 시대와 어긋나서 물러나겠다고 일찍 판단한 뒤로는, 명리의 길은 영영 끊어 버렸고 안빈낙도하는 빈한한 선비가 되어 농사짓고 나무하는 것을 생애로 삼았으니, 그 뒤로는 단지 고상한 풍도와 우뚝한 의표가 세상 밖에 초연한 것만 볼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공이 비록 조정에서 뜻을 펼치지는 못하였지만, 탐욕스런 사람을 청렴하게 만들고 나약한 사람이 확고한 뜻을 지니게 만드는 것으로 세도(世道)에 도움을 준 점에서는, 어찌 그 공(功)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공은 본래 예문관과 홍문관에서 활약한 분이므로 경연(經筵) 석상이나 정부의 고위직이 알맞은 자리인데, 나무하는 거친 시골에서 노닐며 산골에서 험난하게 사는 길을 택하였으니, 마음은 비록 형통하였으나 몸은 여의치 못했고 뜻은 비록 펼쳤으나 도(道)는 굴곡졌다고 하겠습니다. 게다가 두 아들이 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영명하였으나 큰아들은 직언을 하다 죽고 작은아들은 충언으로 죽었습니다. 비록 그 맑은 이름과 빼어난 절조가 크게 나라와 집안의 빛이 되기는 하였지만 난초가 꺾이고 구슬이 깨지는 것을 바로 눈앞에서 본 셈이니, 집안사람의 정리(情理)로 볼 때에는 세간에 보기 드문 참혹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아, 그리고 올여름의 일은 또 뜻밖에 벌어진 일인데, 이는 쏙닥거리며 참소하는 무리들이 임금을 기만한 것입니다. 만약 자애로운 성상의 특별 배려가 아니었다면 먼 섬으로 유배 갔다가 유골을 수습해 와야 하는 지경을 거의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어찌 공의 집안처럼 선을 행하는 데에 힘을 기울이며 굽히지 않고 바른 도리를 지켜 가는 집안에 유독 이러한 재앙이 많단 말입니까. 아아, 너무나 애통합니다.
공의 이른바 《사변록(思辨錄)》은 차분히 오랫동안 침잠하여 연구한 것을 기록하여 권질(卷帙)을 이룬 것입니다. 비록 간간이 선현의 뜻을 넘나드는 곳이 있기는 합니다만, 생각해 보면 공의 뜻이 어찌 감히 이설(異說)을 세우려는 데에 있었겠습니까. 요컨대 의심을 질정(質正)하자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회재(晦齋)나 포저(浦渚) 같은 여러 선정(先正)들도 일찍이 했던 것입니다. 현석(玄石)이 이른 바 “한집안 내에서 의견이 비록 다르더라도 집안을 위하는 취지에서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라고 한 것이 적절한 비유라고 할 만합니다. 신미년(1691, 숙종17) 중하(仲夏)에 석림(石林)의 회합에서 형이 상자에서 그 책을 꺼내 보여 주었는데, 나는 그때 누님을 잃은 슬픔이 극심하여 그 책을 차분히 보지 못하고 《논어》와 관련된 설만 대략 보았습니다. 대부분 모두 평이하면서도 절실한 것으로 구이지학(口耳之學)의 공허한 설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이에 마음으로 매우 기뻐하면서 ‘한가한 가운데 얻은 것으로 실로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다만 책을 보는 데 있어 너무 얕게 보고 너무 국한 지어 보려는 병폐가 있는 듯하여 대략 저의 견해를 피력하여 논변하였으나 의견이 일치되지는 않았었습니다. 그 외에 다른 설의 경우에는 미처 두루 연구하지 못하였기에, 돌아온 뒤에 그 책을 빌려 와서 한번 검토할 생각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눈이 침침하고 정신이 혼미한 데다 글을 짚어 가며 읽는 것은 이미 포기한 상태라 다시 생소한 공부를 할 수가 없었기에 끝내는 결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대체로 타고난 능력 면에서 생각이 꽉 막히다 보니 곳곳에서 일을 간과함으로써 친구 간의 직분을 크게 저버리는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그러나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것을 꼭 늦다고만 할 수는 없고 타산지석도 나의 옥을 다듬는 데는 도움이 될 수 있기에, 편지를 써서 대략이나마 저의 견해를 피력하였는데, 그에 대해서는 아직 답장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형의 생각은 과연 어떠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변록》에서 사람을 논한 대목[論人]의 경우에는 작은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사람의 청탁(淸濁) 구분을 한마디로 말하는 것은 실로 사문(斯文)과 세도(世道)에 관계되는 것이지만 곧은 말과 바른 의론을 하기에는 지금은 적당한 때가 아니니, 옛사람의 이른바 《삼보결록(三輔決錄)》처럼 별도로 논저(論著)를 하여 후세에 남기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그런데 이제 다른 사람에게 써 준 글에서 등한하게 말씀하심으로써 일에 도움도 되지 않고 결과적으로 재앙만 초래하게 되어 또다시 성대한 조정에 누를 끼치게 하였는데, 그것은 어째서 그런 것입니까. 이러한 생각들을 고명한 공에게 질정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모두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아아, 나라에 별일이 없을 때에 시골로 돌아가 일생을 마쳤으며, 이제는 땅속으로 편안히 돌아가 부자와 형제가 같은 산에 묻히게 되셨습니다. 살아서는 연연한 것이 없고 죽어서도 부끄러울 것이 없으니, 아아, 공으로서는 다시 무슨 여한이 있겠습니까. 오직 황혼 녘에 홀로 서 있으면서 친척과 친구들을 거의 다 떠나보낸 채 뒤늦게 죽는 저의 괴로운 심정을 누가 다시 알아주겠습니까. 자리를 마련하여 공의 무덤을 향해 곡하고 자식을 대신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는데, 정신이 혼몽하여 속마음을 다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아아, 너무나 애통합니다.


 

[주C-001]서계(西溪) :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의 호이다. 자는 계긍(季肯)이고 호는 잠수(潛叟) 또는 서계이다.
[주D-001]반남공(潘南公) :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의 충신 박상충(朴尙衷)으로, 반남은 그의 호이다. 자는 성부(誠夫)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간신 이인임(李仁任)을 주살할 것을 주장하여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귀양 가다가 도중에 죽었다. 《壄隱逸稿 卷4 附錄 遺事》
[주D-002]야천(冶川) : 박소(朴紹, 1493~1534)의 호이다. 자는 언주(彦胄)이고 시호는 문강(文康)이며,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다.
[주D-003]나간 …… 고수하였지 : 박세당은 1668년(현종9)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뒤로 당쟁에 혐오를 느껴 양주(楊州) 석천동(石泉洞)으로 물러나 학문 연구에만 힘을 쏟은 것을 말한다.
[주D-004]큰아들 …… 잃고 : 큰아들은 박태유(朴泰維, 1648~1686)이다. 1683년(숙종9) 지평으로서 남인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역모를 조작한 김익훈(金益勳)을 탄핵하다가 고산도 찰방(高山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가 그곳의 기후에 적응하지 못하고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와 죽었다.
[주D-005]작은아들 …… 잃으니 : 작은아들은 박태보를 말한다. 자는 사원(士元)이고 호는 정재(定齋)이다. 1689년(숙종15) 기사환국 때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다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로 유배 가는 도중에 죽었다.
[주D-006]아버지와 …… 묻히니 : 박세당과 박태유의 무덤은 양주 수락산 서쪽 장자곡(長者谷)에 있다.
[주D-007]올여름의 일 : 박세당이 이경석(李景奭)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었는데, 그 내용에 이경석을 폄하하는 내용이 있다 하여 결국 관학 유생(館學儒生)의 소척(疏斥)을 받았고 그 결과 삭탈관작(削奪官爵)과 문외출송(門外黜送)의 처분을 받은 것을 말한다.
[주D-008]만약 …… 것입니다 : 이경석의 일로 문외출송의 처분을 받고 박세당은 도성 밖으로 나가 대죄하였는데, 처음에는 대간의 계사로 옥과(玉果)에 원찬(遠竄)하라는 명이 내렸으나 판윤(判尹) 이인엽(李寅燁)의 상소로 원찬의 명이 환수되어 5월에 석천(石泉)으로 돌아갔다.
[주D-009]회재(晦齋)나 …… 것입니다 : 회재는 이언적(李彦迪)의 호이다. 그는 주희의 성리학에 근본을 두면서도 자율적인 학문 자세와 독창적인 견해를 제시하였다. 예를 들면 《대학장구(大學章句)》에서 주희가 역점을 두었던 ‘격치보망장(格致補亡章)’을 인정하지 않고 경(經) 1장에 들어 있는 두 구절을 ‘격물치지장(格物致知章)’으로 옮기려고 한 것이 그 실례이다. 포저(浦渚) 조익(趙翼)도 《곤지록(困知錄)》ㆍ《중용주해(中庸註解)》ㆍ《대학주해(大學註解)》ㆍ《서경천설(書經淺說)》 등을 지었는데, 주희의 장구(章句)와 다른 내용이 많았다고 한다.
[주D-010]한집안 …… 것 :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가 한 말은, 집안 내에 의견이 서로 달라도 결과적으로는 집안을 위한 것이듯이 경전의 글 뜻을 다르게 보더라도 결국은 경전의 근원적 의미를 찾으려는 데로 귀결되므로 문제 될 것이 없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서는 《남계집(南溪集)》 권82 〈의정부좌의정시문효포저선생조공행장(議政府左議政諡文孝浦渚先生趙公行狀)〉에 자세한 내용이 보인다.
[주D-011]신미년 …… 회합 : 명재는 신미년(1691, 숙종17) 3월에 누나의 상을 당하여 4월에 양주(楊州)로 달려가 곡(哭)하고 그곳 석림사(石林寺)에 머물렀는데, 그때 박세당이 사서(四書)에 대한 《사변록(思辨錄)》을 가지고 와서 의의(疑義)를 논한 것을 말한다.
[주D-012]삼보결록(三輔決錄) : 한대(漢代)의 조기(趙岐)가 장안(長安)의 고적(古蹟)과 인물에 대해 기록한 책이다.

백사집 제2권
 서(敍)
태헌집(苔軒集)에 대한 서


세상에서 모두 남중(南中)에는 시인이 많다고 하는데, 그 중에도 고제봉(高霽峯 제봉은 고경명(高敬命)의 호임)이 가장 뛰어났다. 그리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미쳐서는 또 모두들 남중에는 의병이 많다고 하였는데, 또 고제봉이 의병을 맨 처음 일으켰다. 그리하여 왜적이 물러간 뒤에는 조정에서 절의(節義)에 죽은 선비들을 포창하면서 고제봉을 추앙하여 으뜸이라고 칭찬함으로써 전에 일컬어졌던 시에 대한 명성이 잠겨 버리고 드러나지 않았으니, 시를 이전에는 잘했고 뒤에는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대체로 시보다 더 중한 것이 있어 그것에 가려진 것일 뿐이다.
달이 밝으면 별이 드물게 보이는 것은 하나가 성하면 하나가 약해지는 원리이다. 장 수양(張睢陽)의 문장은 천하에 절묘하였으나, 남긴 작품은 오직 문적(聞笛) 한 편뿐으로, 일찍이 시로써 알려지지 않았다. 가령 장 수양이 태평 성대를 만나서 궁굴(窮屈)의 근심 걱정을 품었더라면, 그 천 년을 뛰어넘어 우뚝 선 것이 필시 지금 칭송된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옛날 천하에 절묘했던 그것으로 영예를 누렸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제봉 같은 이는 비색한 운수를 만나서 물러나 있을 적에는 천하에서 그의 시를 애송하였고, 일을 담당하여 나갔을 적에는 원근(遠近)에서 그의 업적을 훌륭하게 여기었으며, 일이 지나가고 죽음에 이르러서는 고금(古今) 사람이 그의 의리를 높이 추앙하여, 그가 만난 곳을 인하여 명성이 따라서 옮겨졌으니, 물(物)에 비유하자면 그는 용(龍)과 같다고 하겠다. 하늘에 오른 용을 보고 ‘용은 본디 하늘에 있는 것이다’라고 하거나, 내려와 있는 용을 보고 ‘용은 본디 밭에 있는 것이다’라고 하거나, 물 속에 숨어 있는 용을 보고 ‘용은 본디 깊은 못에 있는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가 어찌 용을 아는 사람이겠는가.
제봉이 작고한 지 22년이 되었는데, 그의 아들 용후(用厚)가 기조랑(騎曹郞)으로 있으면서 그의 시 약간 편(若干篇)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서 나에게 문집을 간행하게 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선군자(先君子)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시가 아무리 많아도 세상에 행해지는 것은 4,5권을 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였으니, 선군자의 뜻에 따르고 싶습니다.”
하므로, 나는 참망(僣妄)됨을 헤아리지 않고 이미 시를 산정(刪定)하여 일가언(一家言)으로 만들었었다. 그런데 그 다음 해에 또 한 마디 말을 권수(卷首)에 얹어줄 것을 요구하였다. 아, 고군(高君)이 무엇을 취하여 나에게 이토록 애써 요구하는 것일까?
나는 죄를 짓고 버려진 몸으로 노원(蘆原)에 은거해 있노라니, 복정산(覆鼎山 삼각산의 별칭임)과 도봉산(道峯山)은 앞쪽과 왼쪽에 병풍처럼 둘러 있고, 유암산(流巖山)과 수락산(水落山)은 오른쪽과 뒤쪽에 죽 늘어섰는데, 그 한가운데에 반암(盤巖)이 있어 물이 졸졸 흐르고 있다. 그래서 매양 바람이 고요하고 비가 갠 때마다 각건(角巾)을 쓰고 바위에 걸터앉아서 맑은 물, 푸른 산을 이목(耳目)으로 완상하노라면, 마치 조물주(造物主)와 함께 광대한 들판에서 놀이를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삼가 공의 시가 간행되기를 기다려서 나의 청석상(靑石牀)에 올려놓으면 여향(餘響)이 온화하게 울려퍼져서 뭇 골짜기가 다 울릴 것이니, 이 시를 만 번쯤 외고 나면 삼천(三天)을 오른 사람이라도 그리 대단하다고 여길 것이 없을 것이다.


 

[주D-001]장 수양(張睢陽) : 당(唐) 나라 때의 충신(忠臣) 장순(張巡)을 이른다. 안녹산(安祿山)의 난리 때 그가 수양 태수(睢陽太守) 허원(許遠)과 수양성(睢陽城)을 지키면서 적과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되자 장렬하게 절사(節死)하였으므로 이렇게 일컫는다. 《唐書 卷187》
[주D-002]삼천(三天) :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청미천(淸微天)ㆍ우여천(禹餘天)ㆍ대적천(大赤天)을 말한다. 또한 선인(仙人)의 거소(居所)인 옥청(玉淸)ㆍ상청(上淸)ㆍ태청(太淸)을 말하기도 한다.

 

사가시집 제8권
 시류(詩類)
양주(楊州) 수락산(水落山) 도중에서 짓다.


비 갠 강 하늘에 달은 사람 눈썹만 하고 / 雨霽江天月似眉
양성의 돌아가는 길은 실낱보다 가늘지만 / 楊城歸路細於絲
깜깜하고 인가가 먼 걸 걱정하지 않음은 / 不愁昏黑人家遠
눈처럼 환한 해당화가 눈을 비춘 때문일세 / 照眼棠花白雪奇

송산의 산 아래 비가 처음 개고 나니 / 松山山下雨新晴
벼논엔 물 가득코 보리 고랑은 푸르구나 / 稻田水白麥溝靑
작은 둑의 버들은 아무도 관섭할 이 없어 / 小堤楊柳無人管
저물녘 실바람에 개지만 절로 떨어지누나 / 日暯微風絮自零

잔 모래 흰 돌 깔린 조그마한 강 굽이엔 / 細沙白石小回灣
연한 풀 그윽한 꽃에 저문 빛이 차가워라 / 嫩草幽花暮色寒
그 몇 번이나 수락산 앞을 지나다니면서 / 幾番水落山前過
높다랗게 우뚝 선 모습을 쳐다보았던고 / 玉立崔嵬仰面看


 

사가시집보유 제3권
 시류(詩類)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실려 있는 시
수락사(水落寺)


수락산 산중에 수락사가 있으니 / 水落山中水落寺
물 줄어들고 돌 드러나 산중이 저물어 가네 / 水落石出山中暮
황학이 날아가는 곁에 하늘은 나직하고 / 黃鶴去邊近靑天
검은 구름 끄는 곳엔 소낙비가 날리누나 / 黑雲拖處飛白雨
거년에 스님 찾아 이곳에 와서 노닐 땐 / 去年尋僧此來遊
구렁 가득 눈 쌓이고 달빛도 하 밝더니 / 積雪滿壑山月白
금년에 스님 찾아 이곳에 와서 노닐 땐 / 今年尋僧此來遊
바위 곁에 봄꽃들이 피고 지고 하는구려 / 巖畔春花欲開落
거년에도 금년에도 늘상 오고 가는 길인데 / 去年今年自來往
산천은 역력히도 그 옛날과 똑같구나 / 山川歷歷如昨昔
명아주 지팡이 짚어라 이끼 길은 미끄럽고 / 杖藜一枝苔蹤滑
샘물은 세차게 흘러 겨드랑에 바람이 이네 / 石泉激激風生腋
밥 먹고 난 뒤에 예전의 종소리 들리어라 / 飯後鍾聽舊時聲
벽 위에 쓰인 시엔 먼지가 가득 끼었네 / 壁上有詩塵欲撲
붉은 소매가 고금에 어찌 유독 구 내공뿐이리오 / 紅袖古今豈獨寇萊公
왕공의 호기 적음을 내 한번 조소하노라 / 我一笑王公豪氣少
이십 년 만에야 비로소 벽사롱을 보게 되다니
/ 二十年來始得碧紗籠


 

[주D-001]밥 먹고 …… 되다니 : 구 내공(寇萊公)은 송대(宋代)의 명상(名相)으로 내국공(萊國公)에 봉해진 구준(寇準)을 가리키고, 왕공(王公)은 당(唐)나라 왕파(王播)를 가리킨다. 벽사롱(碧紗籠)이란 시구(詩句)를 푸른 깁에 싸 놓은 것을 이르는 말로, 이는 곧 명사(名士)의 시문을 소중히 보호함을 의미한다. 당나라 왕파가 일찍이 미천했을 적에 집이 몹시 가난하여 양주(揚州) 혜소사(惠昭寺)의 목란원(木蘭院)에 한동안 우거(寓居)하면서 중의 재식(齋食)을 얻어먹고 지냈는데, 나중에는 중들이 그를 싫어하여 그가 오기 전에 밥을 먹어 버리곤 했다. 그로부터 20여 년 뒤에 그가 고관(高官)이 되어 그 지방을 진무(鎭撫)하러 내려가서 옛날에 놀았던 그 절을 거듭 찾아가 보니, 자기가 옛날에 제(題)해 놓은 시들을 모두 깁으로 덮어서 보호하고 있으므로, 그가 다시 절구 2수를 지어 “당에 오르면 밥 다 먹고 동서로 각기 흩어졌기에, 스님네들 식사 후에 종 치는 게 부끄럽더니, 이십 년 동안 얼굴에 먼지 그득 분주하다가, 이제 비로소 푸른 깁에 싸인 시를 보게 되었네.[上堂已了各東西 慙愧闍黎飯後鐘 二十年來塵撲面 如今始得碧紗籠]”라고 한 고사와, 또 송대(宋代)의 시인 위야(魏野)가 명상 구준을 수행하여 섬부(陝府)의 승사(僧舍)에 가 노닐면서 각각 시를 유제(留題)한 적이 있었는데, 뒤에 다시 함께 그 승사에 놀러 가서 보니, 구준의 시는 이미 푸른 깁으로 잘 싸서 보호하였으나, 위야의 시는 그대로 방치하여 벽에 가득 먼지가 끼어 있었으므로, 이때 마침 그 일행을 수행하던 총명한 한 관기(官妓)가 즉시 자기의 붉은 옷소매로 그 먼지를 닦아 내자, 위야가 천천히 말하기를 “항상 붉은 소매로 먼지를 닦을 수만 있다면, 응당 푸른 깁으로 싸 놓은 것보다 나으리.[若得常將紅袖拂 也應勝似碧紗籠]”라고 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사가시집보유 제3권
 시류(詩類)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실려 있는 시
〈수락사시(水落寺詩)〉 서(敍)


내가 젊었을 때 여러 산사(山寺)에서 글을 읽을 적에 수락산(水落山)도 두 번이나 왕래하면서 우연히 이 시를 벽상(壁上)에 남겨 두었었는데, 지금 이미 30여 년이 지났다. 그런데 일전에 일암(一庵) 전상인(專上人)이 이 시를 베껴 와서 나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장단(長湍) 백 태수(白太守)가 외우는 것을 적어 왔다.” 하면서, 나에게 잘못된 글자를 바로잡아 주기를 요청하였다. 나는 시를 지어도 짓는 족족 버리기 때문에 편언척자(片言隻字)도 상자 속에 남겨 둔 것이 없다. 더구나 방탕했던 소년 시절에는 남겨 전할 생각이 없었으니, 어찌 기록해 두려고 했겠는가. 32년 전의 일이라 아득하기가 마치 꿈속 같아서 그때 지은 시들은 기억하지도 못하는데, 또 어찌 잘못된 글자를 알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한번 읽어 보매, 운자(韻字)를 단 것이나 글자를 놓은 것이 미진한 데가 있으니, 이는 아마도 내 유치함의 소치이거나 아니면 외워 전한 이가 잘못 전한 게 아닐까도 싶으나, 우선 그대로 두노라. 예전 일을 생각하니 느낌이 없을 수 있겠는가. 마침내 근체시(近體詩) 여섯 수를 지어서 일암 법좌하(法座下)에 기록하여 바치는 바이다. 일암이 지금 불암사(佛巖寺)에 있는데, 수락사와는 겨우 10여 리밖에 되지 않으니, 후일 서로 만나서 한번 놀게 되거든 이에 관한 말을 다하리라.

내 옛날 산중의 고사에 유학하던 시절이 / 山中古寺昔曾遊
손꼽아 헤어 보니 지금 삼십 년이 되었구나 / 屈指如今三十秋
나막신 신고 많은 시간 손과 함께 걸었고 / 步屐多時携客去
한가함 좋아해 스님과도 오래 머물렀었네 / 愛閑長日爲僧留
고운 꽃 빽빽한 대숲은 그윽한 경계 이루고 / 花濃竹細連幽境
고목나무 굽은 절벽은 누각을 옹위했었지 / 木古巖回擁小樓
다시 스님과 손잡고 한번 가 보고 싶어라 / 更欲携師一歸去
소년 시절의 옛일이 꿈같이 아득하구려 / 少年往事夢悠悠

지난 일 아득하여라 일찍이 소년 시절 / 悠悠往事少年曾
취중의 호탕한 기개에 필력이 날뛰었네 / 醉裡豪狂筆勢騰
나는 본디 벽 위에 시 쓸 마음 없었는데 / 我本無心題板壁
스님은 유독 다사하여 종이에 베껴 왔구려 / 僧偏多事寫花藤
벽사니 홍수니 함은 분에 넘쳐 부끄럽고 / 碧紗紅袖慙非分
세속에 찌든 백발은 늙음이 가증스러워라 / 白髮黃塵老可憎
다시 스님과 손잡고 한번 그곳에 가서 / 更欲携師一歸去
높은 봉우리를 유쾌히 거듭 올라 봤으면 / 有峯高處快重登

가장 높은 봉우리에 거듭 올라가고파라 / 重登準擬最高峯
정성 지나 삼성 만지면 가슴을 씻을 만하리 / 歷井捫參可盪胸
태양은 머리 위에 한 마리 새가 지나간 듯 / 白日頭邊過一鳥
푸른 산은 눈 아래 여러 용이 노는 듯하겠지 / 靑山眼底戲群龍
금은으로 장식한 불찰은 삼천대천세계요 / 金銀佛刹三千界
금수 같은 산하는 백이의 겹겹 요해거니 / 錦繡山河百二重
다시 스님과 손잡고 한번 그곳에 가서 / 更欲携師一歸去
차를 달이면서 석양까지 앉아 있어 봤으면 / 煮茶聲裡坐高舂

석양까지 차 끓는 소리 듣고 앉았노라면 / 高舂落日煮茶聲
청산은 거만하여 세정을 아랑곳 않을 텐데 / 偃蹇靑山不世情
굽어보면 조각구름은 평지에서 일어나고 / 俯視片雲平地起
쳐다보면 폭포가 반공중에 환히 쏟아지리 / 仰看飛瀑半空明
누각 가득 내린 꽃비는 옷을 다 적실 게고 / 滿樓花雨沾衣濕
베개맡의 솔바람은 뼛속까지 서늘하겠지 / 欹枕松濤徹骨淸
다시 스님과 손잡고 한번 그곳에 가서 / 更欲携師一歸去
청련사 결성하여 노년을 보내고 싶구려 / 靑蓮結社送殘生

노년의 청련사 결성은 처음 먹은 마음인데 / 殘生結社是初心
서글퍼라 연래에 비녀 가득해진 백발이 / 惆悵年來雪滿簪
소원 맺음이 미미하지 않음을 누가 알리오 / 結願誰知非淺淺
산에 듦은 마냥 깊지 못할까 염려했는걸 / 入山長恐不深深
고관대작은 연연하지 않은 지 오래거니와 / 蟬貂久矣無心戀
원숭이 학은 여전히 꿈마다 서로 찾는다오 / 猿鶴依然有夢尋
다시 스님과 손잡고 한번 가고 싶어라 / 更欲携師一歸去
불암산 밑 시골집이 총림에 가깝거니 / 佛巖村墅近叢林

총림이 가까이 불암산에 자리했는데 / 叢林近在佛巖山
불암산 밑에는 두어 칸 내 집이 있으니 / 山下吾廬屋數間
도잠의 삼경은 비록 적막할 뿐이지만 / 三徑陶潛雖寂寞
양로의 일구 집은 배회할 만하고말고 / 一區揚老可盤桓
순채 찾고 죽순 삶는 건 평범한 일이요 / 討蓴燒筍尋常事
국화 보내고 매화 맞음은 절로 한가롭지 / 送菊迎梅自在閑
다시 스님과 손잡고 한번 그곳에 가서 / 更欲携師一歸去
만년 신세를 스님과 함께 지내고 싶구려 / 暮年身世共追攀


 

[주D-001]고목나무 …… 옹위했었지 : 두목(杜牧)의 〈염석유(念昔遊)〉 시에 “이백이 일찍이 시를 제한 수서사에는, 고목나무 굽은 절벽에 누각 바람이로다.[李白題詩水西寺 古木回巖樓閣風]”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2]벽사(碧紗)니 …… 부끄럽고 : 벽사와 홍수(紅袖)는 다음의 고사에서 온 말이다. 당(唐)나라 왕파(王播)가 일찍이 미천했을 적에 집이 몹시 가난하여 양주(揚州) 혜소사(惠昭寺)의 목란원(木蘭院)에 한동안 우거(寓居)하면서 중의 재식(齋食)을 얻어먹고 지냈는데, 나중에는 중들이 그를 싫어하여 그가 오기 전에 밥을 먹어 버리곤 했다. 그로부터 20여 년 뒤에 그가 고관(高官)이 되어 그 지방을 진무(鎭撫)하러 내려가서 옛날에 놀았던 그 절을 거듭 찾아가 보니, 자기가 옛날에 제(題)해 놓은 시들을 모두 깁으로 덮어서 보호하고 있으므로, 그가 다시 절구 2수를 지어 “당에 오르면 밥 다 먹고 동서로 각기 흩어졌기에, 스님네들 식사 후에 종 치는 게 부끄럽더니, 이십 년 동안 얼굴에 먼지 그득 분주하다가, 이제 비로소 푸른 깁에 싸인 시를 보게 되었네.[上堂已了各東西 慙愧闍黎飯後鐘 二十年來塵撲面 如今始得碧紗籠]”라고 하였다. 또 송대(宋代)의 시인 위야(魏野)가 명상(名相) 구준(寇準)을 수행하여 섬부(陝府)의 승사(僧舍)에 가 노닐면서 각각 시를 유제(留題)한 적이 있었는데, 뒤에 다시 함께 그 승사에 놀러 가서 보니, 구준의 시는 이미 푸른 깁으로 잘 싸서 보호하였으나, 위야의 시는 그대로 방치하여 벽에 가득 먼지가 끼어 있었으므로, 이때 마침 그 일행을 수행했던 총명한 한 관기(官妓)가 즉시 자기의 붉은 옷소매로 그 먼지를 닦아 내자, 위야가 천천히 말하기를 “항상 붉은 소매로 먼지를 닦을 수만 있다면, 응당 푸른 깁으로 싸 놓은 것보다 나으리.[若得常將紅袖拂 也應勝似碧紗籠]”라고 하였다.
[주D-003]정성(井星) …… 만하리 : 이백(李白)의 〈촉도난(蜀道難)〉에 “삼성 만지고 정성 지나 우러러 숨 헐떡거리고, 손으로 가슴 쓸며 앉아서 길이 탄식하네.[捫參歷井仰脅息 以手拊膺坐長歎]”라고 하였다. 《李太白集 卷2》 여기서는 단지 높은 데 오른 뜻만 취하였다.
[주D-004]금은(金銀)으로 ……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요 : 불교의 천문학(天文學)에서 수미산(須彌山)을 중심으로 하여 사방에 사대주(四大洲)가 있고, 그 밖의 주위는 철위산(鐵圍山)으로 둘러쌌다고 하는바, 이것을 하나의 세계 또는 하나의 사천하(四天下)라 하는데, 이 사천하를 천 개 합한 것이 하나의 소천세계(小千世界)요, 소천세계를 천 개 합한 것이 하나의 중천세계(中千世界)요, 중천세계를 천 개 합한 것이 하나의 대천세계(大千世界)라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삼천대천세계는 천지 사방(天地四方), 즉 온 세상을 의미한다.
[주D-005]금수(錦繡) …… 요해(要害)거니 : 《사기(史記)》 권8 〈고조본기(高祖本紀)〉에 “진(秦)나라는 지세(地勢)가 뛰어난 나라로, 산하의 험고(險固)함을 띠고 천리 멀리 떨어져 있어, 제후의 창 가진 군사 백만을 대적함에 있어 진나라는 백분의 이로 당할 수 있다.[秦形勝之國 帶河山之險 縣隔千里 持戟百萬 秦得百二焉]”라는 말이 있다. 백이(百二)는 곧 100분의 2를 나타내는 말로, 전국 시대에 진나라의 지세가 매우 험고하여 진나라 군사 2만 명으로 제후의 군사 100만 명을 당해 내기에 충분하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또 일설에 의하면 “제후의 창 가진 군사 백만에 대하여, 진나라 지세의 험고함이 천하의 갑절이 되므로, 백만의 두 배를 얻었다는 것이다.[諸侯持戟百萬 秦地險固 一倍於天下 故云得百二焉]”라고도 한다.
[주D-006]꽃비[花雨] : 흔히 꽃 피는 계절에 내리는 비를 말한다. 또는 부처의 설법의 공덕을 찬미하여 ‘꽃을 비처럼 쏟아 내린다.[散花如雨]’라고 하는 데서, 전하여 고승(高僧)의 설법에 비유하기도 한다.
[주D-007]청련사(靑蓮社) …… 싶구려 : 동진(東晉) 때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의 고승 혜원 법사(慧遠法師)가 일찍이 당대의 명유(名儒)인 도잠(陶潛), 육수정(陸修靜) 등을 초청하여 승속(僧俗)이 함께 염불 수행할 목적으로 백련사(白蓮社)를 결성하고 서로 왕래하며 친밀하게 지냈던 고사에 빗대서 한 말이다.
[주D-008]원숭이 …… 찾는다오 : 남제(南齊) 때 공치규(孔稚圭)가 일찍이 북산(北山)에 은거하다가 변절하여 벼슬길에 나간 주옹(周顒)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긴 나머지, 북산 신령(神靈)의 이름을 가탁하여 관청의 이문(移文)을 본떠서 〈북산이문(北山移文)〉을 지어 그로 하여금 다시는 북산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하는 뜻을 서술했다. 그 대략에 “종산의 영령과 초당의 신령이 연기로 하여금 역로를 달려가서 산정에 이문을 새기게 하였다.……혜초 장막은 텅 비어 밤 학이 원망하고, 산중 사람이 떠나가니 새벽 원숭이가 놀란다.[鍾山之英 草堂之靈 馳煙驛路 勒移山庭……蕙帳空兮夜鶴怨 山人去兮曉猿驚]”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원숭이와 학은 곧 깊은 산중의 은자의 처소를 의미한다. 《古文眞寶 後集 卷2》
[주D-009]총림(叢林) : 승려들이 함께 모여서 거처하는 곳을 말한 것으로, 승사(僧舍)를 가리킨다.
[주D-010]도잠(陶潛)의 …… 뿐이지만 : 삼경(三徑)은 세 오솔길이란 뜻으로, 본디 한(漢)나라 때 은사(隱士) 장후(蔣詡)가 자기 집 대나무 밑에 세 오솔길을 내고 구중(求仲)과 양중(羊仲) 두 사람하고만 종유했던 데서, 전하여 은자의 처소를 가리킨다. 《三輔決錄》 동진(東晉)의 처사(處士) 도잠 또한 일찍이 팽택 영(彭澤令)을 그만두고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세 오솔길은 묵었으나,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 남아 있도다.[三徑就荒 松菊猶存]”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陶淵明集 卷5》
[주D-011]양로(揚老)의 일구(一區) : 양로는 한(漢)나라 양웅(揚雄)의 자이고, 일구는 주택 한 채를 지을 만한 땅을 말한다. 《한서(漢書)》 권87 〈양웅전(揚雄傳)〉에, 그가 민산(崏山)의 남쪽에 살았는데 “토지 일전이 있고, 집 일구가 있었다.[有田一廛 有宅一區]”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12]순채 …… 일이요 : 순채를 찾고 죽순을 삶는다는 것은 곧 아주 평범한 야인(野人)의 생활을 뜻한다. 두보(杜甫)의 〈여이십이백동심범십은거(與李十二白同尋范十隱居)〉 시에 “종래에 귤송만 읊조려 왔거니, 누구와 함께 순챗국은 찾을거나.[向來吟橘頌 誰與討蓴羹]”라고 하였고, 소식(蘇軾)의 〈화채준낭중견요유서호(和蔡準郎中見邀遊西湖)〉 시에 “서로 이끌고 죽순 삶아 먹으러 고죽사에 가고, 다시 연꽃 물가에 내려와 연뿌리를 밟노라.[相携燒筍苦竹寺 却下踏藕荷花洲]”라고 하였다. 《杜少陵詩集 卷1》 《蘇東坡詩集 卷7》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남효온(南孝溫) 찬(撰)

○ 김굉필(金宏弼)은 자(字)가 대유(大猷)이며, 점필재(佔畢齋)에게 수업하여 경자년에 생원이 되었다. 나와 동갑인데 생일이 나보다 뒤이다. 현풍(玄風)에 살았는데, 그의 독특한 행실은 비할 데가 없어서 평상시에도 반드시 의관을 갖추고 있었으며, 집밖에는 일찍이 읍(邑) 근처에도 나가지 않았다. 손에서 《소학(小學)》을 놓아본 적이 없었고, 파루를 친 뒤에야 침소에 들었으며, 닭이 울면 일어났다. 사람들이 국가 일을 물으면 그는 반드시, “《소학》읽는 아이가 어찌 대의(大義)를 알겠는가.” 하였다. 일찍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글공부가 아직 천기를 알지 못하나 / 業文猶未識天機
《소학》글 가운데서 어제의 잘못을 깨달았도다 / 小學書中悟昨非
하였다. 점필재 선생이 평하기를, “이는 곧 성인될 바탕이 됨직하니 노재(魯齋) 이후에 어찌 사람이 없다고 하리오.” 하였으니, 그를 추중(推重)함이 이와 같았다.
그는 나이 30이 넘은 후에야 비로소 다른 책을 읽었으며 후진을 가르침에도 게을리하지 아니하였으니, 이현손(李賢孫)ㆍ이장길(李長吉)ㆍ이적(李勣)ㆍ최충성(崔忠成)ㆍ박한공(朴漢恭)ㆍ윤신(尹信)과 같은 이는 다 그의 문하에서 나온 이들로, 그들의 무성한 재질과 독실한 행실은 그의 스승과 같았다. 그는 나이가 많아질수록 도(道)가 더욱 높아졌는데, 세도의 만회하지 못할 것과 도가 행해지지 못할 것을 잘 알고 나서는 빛을 감추고 종적을 흐려버렸으나, 사람들은 또한 이러한 것을 알아주었다.
점필재 선생이 이조 참판이 되어 바른 일을 건의함이 없으매, 대유가 시를 지어 올리기를,
도는 겨울에 갖옷을 입고 여름에 시원한 것을 마시는 데 있거늘 / 道在冬裘夏飮氷
비를 걷고 홍수를 멈추게 함을 어찌 다 잘할 수 있으리오 / 霽行潦止豈全能
난초도 세속에 심으면 결국은 변질되니 / 蘭加從俗終當變
뉘라서 소는 밭을 갈고 말은 타고 다니는 짐승임을 믿어주리까 / 誰信牛耕馬可乘
하였는데, 선생이 시로써 이에 화답하기를,
분수 밖에 벼슬을 하게 되어 경대부 자리에 이르렀으나 / 分外官聯到伐氷
임금을 바르게 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것 내 어찌 할 수 있겠는가 / 匡君救俗我豈能
교육에 종사하는 후배가 우졸하다고 조롱하지만 / 從敎後輩嘲迂拙
세도와 권리가 구구한 벼슬길은 탈 만한 것이 못 되는구나 / 勢利區區不足乘
하였다. 이는 유쾌하게 여기지 않은 것이다. 그는 이로부터 점필재와 사이가 좋지 못하게 되었다. 정미년에 부친 상(喪)을 당하여서는 죽만 먹고 너무 슬피 울던 나머지 졸도하였다가 깨어난 일도 있었다.
○ 안우(安遇)는 자(字)가 시숙(時叔)이다. 효행이 그 고을에서 으뜸이었다. 아버지 상중에는 한결같이 《주자가례》를 따랐다. 점필재에게 학업을 닦았으나 얼마 안 되어 벼슬할 마음이 없어져 비로소 점필재와 틈이 났다. 일찍이 향시(鄕試)에 뽑혀 서울로 와서 회시(會試)에 응하려 하였는데, 사관소(四館所)의 연소한 자들이 오만하여, 나이든 지방 학생들을 때리려 하니, 시숙이 말하기를, “어찌 부모께서 물려준 몸을 죄없이 스스로 훼상시키면서까지 명예와 이익을 구할 것이 있겠는가.” 하고, 장중에 들어가지도 않고 가버렸다. 그 지조와 절개는 가히 동한(東漢)의 절의에 비할 만하다고 하겠다.
○ 권안(權晏)은 본관이 안동(安東)으로 자는 화청(和淸)이니, 나이는 나보다 20여 세나 위이다.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다행히 죽지 아니하고 말년에 세 익우(益友)를 만났다.” 하였는데, 이는 나와 정중(正中)과 극창(克昌)을 지칭한 것이다. 젊어서 무술에 능하여 별시위(別侍衛)에 소속된 일도 있었다. 사람됨이 청백하여 오능중자(於陵仲子)와 같았고, 산수를 좋아하고 도학과 진리를 좋아하며, 효제충신에 있어서는 그 이상 갈 만한 사람이 없었다. 집이 헐어도 비바람을 가리지 않았고 혹 양식이 떨어져도 그 즐거움은 여전하였으며 짧은 베옷에도 소연하였다. 말년에는 불도(佛道)를 좋아하였다.
○ 정여창(鄭汝昌)은 자가 자욱(自勗)이다. 지리산(智異山)에 들어가 3년 동안이나 나오지 않고 오경을 닦아 그 깊은 진리를 다 터득하여 체(體)와 용(用)의 근원은 한 가지이지만 갈린 끝이 다른 것을 알았고, 선(善)과 악(惡)의 성(性)은 같으나 기질이 다른 것을 알았고, 유(儒)와 불(佛)의 도(道)는 같으나, 자취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성리학은 성광(醒狂 이심원(李深源)의 호)이 존경하였다. 경자년에 왕이 성균관(成均館)에 하교하여 경전에 밝고 행실을 닦은 유생을 구하였는데, 성균관에서는 자욱이 제일이라 하여 천거하였고, 지관사(知館事) 서거정(徐居正)은 자욱을 경연에 추천하려고 하였으나 자욱이 이를 사양하였다. 계묘년에는 진사가 되었다. 그의 아버지 육을(六乙)이 이시애(李施愛)의 반란에 나라를 위하여 죽었는데, 이때 자욱의 나이가 적었으나 거상하는 데 결함이 없었고, 모상(母喪)에도 전례(典禮)의 수(數)나 죽을 먹는 일등을 일체 《가례》에 따랐다. 경술년에 참의 윤긍(尹兢)이 그의 효행과 학문은 사림 중에 으뜸이라고 천거하여 특별히 소격서(昭格署) 참봉을 시켜서 불렀으나 자욱은 글을 올려 면직을 청하였다. 상이 하교하여 그를 포상하니, 명성이 더욱 높았다. 자욱은 성품이 단아하고 정중하며 술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냄새나는 채소를 먹지 않고 소와 말고기를 먹지 아니하였다. 겉으로는 항상 담담하였으나, 내면으로는 대단히 영리하였다. 젊을 때 성균관에 유생으로 있으면서 사람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는데, 코를 골며 졸았으나 누워 자지는 않았다. 남들이 이것을 모르다가 어느 날 밤 최진국(崔鎭國)의 눈에 띄어서 성균관에 파다하게 소문이 나기를, “정모(鄭某)는 참선을 하고 자지 않는다.” 하였다.
○ 이정은(李貞恩)은 자가 정중(正中)이요, 호는 월호(月湖), 또는 남곡(嵐谷), 혹은 설창(雪窓)이라고도 하였다. 수천 부정(秀川副正)에 배수되었으며, 음를이 세상에 으뜸이어서 슬프게 연주하면 지나가던 행인도 꼭 눈물지을 정도였다. 사람됨이 독실하고 돈후하며 스스로 겸손하고 식견과 도량이 있고 총명하여 학문을 하는 데도 그 이치를 먼저 터득한 후에 문사를 다루어 스승을 수고롭히지 않았고, 시를 지을 때도 그 격식을 먼저 다룬 후에 수사를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싫어하지 않았고, 덕을 닦는 데 있어서도 마음을 먼저하고 외모를 다음에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알지 못하였고, 행실에 있어서는 그 지위가 높다고 남을 위압하지 아니하고 가장 가난한 선비와 같은 태도를 취하였다.
○ 이분(李坌)은 자가 자야(子野)며, 장안(長安)에 살았다. 어진이와 착한 이를 좋아하고 세력과 이욕에 담백하였으며 시를 잘하였다. 그의 심원한 기틀에 대해서 대유(大猷 김굉필)도 탄복하였다.
○ 노조동(盧祖同)은 자가 공서(公緖)이다. 《소학》 읽기를 좋아하였고, 순서를 밟지 않은 공부나 조롱하는 글이나 과거의 재능 등은 좋아하지 않았다. 법도에 맞는 몸가짐은 거의 대유와 같았으며,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서는 시묘살이 3년 동안 한결같이 《가례》에 의하여 행하였다. 시숙(時叔 안우(安遇))과 함께 점필재(佔畢齋)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는데, 선생도 그를 공경하였다.
○ 정세린(鄭世麟)은 자가 창부(昌符) 이며, 영남에 살았다. 점필재에게 수업하였는데 그 학문은 공서(公緖 노조동)와 같으나, 시에 대한 재주가 월등하였다. 선생도 그를 공경하였는데, 병오년에 죽었으니, 나이 22세였다.
○ 양준(楊浚)은 자가 징원(澄源)이다. 점필재에게 수업하였는데, 속이 깊고 침착하며 도량이 커서 가난하여도 걱정이 없이 도를 즐기기를 담담히 하였다. 또 국량이 웅장하고 깊었으며 외형에 나타나지 않도록 수양을 닦아 총명이 날로 진전하였다. 유림들은 그를 가장 낮게 보았으나 오직 여경(餘慶 홍유손(洪裕孫))만이 그의 인품을 잘 알았다.
○ 김시습(金時習)은 본관이 강릉(江陵)으로, 신라(新羅) 왕족의 후예이다. 나이는 나보다 20세 위로, 자는 열경(悅卿)이며, 호를 동봉(東峯), 또는 벽산청은(碧山淸隱), 또는 청한자(淸寒子)라고 했다. 세종 을묘에 태어났는데, 나이 5세에 문장을 엮을 줄 알았다. 세종이 승정원에 불러들여 시를 짓게 하시고 크게 기특하게 여겨 그 아버지를 불러 이르기를, “이 아이를 잘 기르라. 내가 장차 크게 쓰리라.” 하였다.
을해년에 세조(世祖)가 정권을 잡게 되자, 불문(佛門)에 들어가 이름을 설잠(雪岑)이라 하고, 수락산(水落山)의 절에 들어가서 불도를 닦고 몸을 수련하였으나, 유생을 보면 말마다 공맹을 칭송하고 불법에 대하여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도 닦는 것을 물으면 그는 또한 말하려 하지 아니하였으며, 어떤 사람이 괴애(乖崖) 김수온(金守溫)이 앉아 죽은 일을 들어 말한 일이 있었는데, 그는 대답하기를, “앉아 죽는다는 것은 예(禮)에서 귀히 여기지 않는다. 나는 단지 증자(曾子)의 역책(易簀)자로(子路)가 결영(結纓)하고 죽은 것을 귀한 것으로 알 뿐이요, 그 외는 알지 못한다.” 하였다.
신축(1481, 성종 12) 연간에는 육식을 하고 머리를 길렀다. 글을 지어 조부에 제사하며 말하기를, “삼가 아뢰옵건대, 순제(舜帝)는 오교(五敎)를 펴는 데 유친(有親)을 첫머리에 두었고, 죄를 3천으로 나열하되 불효함을 가장 큰 죄로 여겼습니다. 무릇 하늘과 땅 사이에 살면서 누가 양육의 은혜를 저버리겠나이까. 그러므로 악독한 짐승에는 범과 늑대보다 더함이 없고, 미물의 충성으로는 승냥이와 수달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다 능히 제 어버이를 사랑하는 품성을 온전히 가졌으며 또한 근본에 보답하려는 정성을 삼가 행하였으니, 이는 모두 천리의 원래 그러한 것이요, 물욕이 이를 덮기 어려운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이 미련한 소자도 근본과 지염의 계통을 이어받았으되 젊을 때 이단에 빠져 어리석게도 배우지 아니하였음을 슬퍼하여 장차 도(道)를 닦아 뛰어나보려고 하였으나, 윤회설과 같이 황당함이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장년(壯年)에는 하는 일 없이 세월만 보내다가 늙어서야 비로소 뉘우쳐 예전(禮典)을 상고하고, 성경(聖經)을 찾으며 먼 조상을 추모하는 넓은 의례를 정하고, 가난한 생활을 참작하여 간소하고 깨끗함에 힘쓰고 제수를 차림에 정성으로서 하였나이다. 한무제(漢武帝)는 70세 때에 비로소 전 승상(田丞相)의 말을 깨달았다고 하오며, 원(元) 나라 덕공(德公)은 백 세가 되어서야 허노재(許魯齋)의 풍도에 감화했다고 하나이다. 서리와 이슬이 내리는 것을 느끼고 세월의 지나감을 근심하니, 놀라웁고 황공함이 끝이 없어, 한탄함이 자못 많사옵니다. 만일 지난 허물을 씻어서 하늘과 땅 사이에서 용납된다면 행여 면목을 세워서 구천에서 조종을 뵙기를 바라옵니다.” 하였다.
임인년 이후부터는 세상이 쇠하여감을 보고 인간의 일은 하지 아니하고, 여염간에 버려진 사람이 되어 날마다 남과 더불어 장예원(掌隷院)에서 송사를 한 일도 있었고, 어느 날에는 술을 먹고 시가를 자나다가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을 보고 말하기를, “너 같은 놈은 그만두어야 마땅하다.” 하니, 정은 못 들은 척하였다. 사람들은 이것을 위험하게 여겨 전에 서로 사귀어 놀던 사람들도 다 절교하고 왕래하지 않았다. 홀로 시정배의 미치광이 같은 아이나 만나 놀며 취하여 길가에 쓰러지고 늘 어리석은 척하며 늘 웃고 지냈다. 뒤에 설악산(雪嶽山)에 들어가기도 하고, 혹 춘천산(春川山)에서 살기도 하여 드나듦이 무상하니, 사람들은 그의 정처를 알지 못하였다. 그가 좋아한 사람은 정중(正中)ㆍ자용(子容)ㆍ자정(子挺)과 나였다. 그가 지은 시문은 수만여 편이나 되었는데,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사이에 거의 다 흩어져 없어졌다. 조정의 신하들과 선배들이 혹 그의 글을 절취하여 마치 자기의 작품인양 하기도 하였다.
○ 홍유손(洪裕孫)은 자가 여경(餘慶)이요, 호는 조총(篠叢), 또 광진자(狂眞子)라고도 하였다. 남양(南陽) 아전 순치(順致)의 아들로 집안이 대대로 청빈하여 겨우 몸만 감싸고 혹 속옷도 입지 못하고 다녔다. 경전(經典)과 《사기(史記)》를 탐독하면서 기탄없는 행동을 하였으며, 과거에 응시하기를 좋아하지 아니하였으며 향리를 면할 계획도 하지 않았다. 신축년에 남양 부사 채신보(蔡申甫)가 여경이 글 잘하는 것을 이유로 그 향역(鄕役)을 면제해 주었더니, 그는 곧 걸어서 영남(嶺南)으로 가 점필재(佔畢齋)를 뵙고, 두시(杜詩)를 배웠다. 그때 점필재 선생은, “이 사람은 벌써 안자(顔子)의 즐겨한 바를 본 사람이다.” 하였고, 학자들도 다 그를 존경하였다.
두류산(頭流山 지리산에 들어가 학업을 닦고 서울에 올라와 점필재 선생이 시사(時事)를 건의하지 못함을 간하여, “무엇 때문에 남의 벼슬과 녹을 헛되이 받고 계십니까. 그리고 지금 학자들은 불교나 노장학을 미워하지 않은 바 없으나, 실행에 있어서 불노학을 벗어난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행동을 둥글게 하고 모난 것을 싫어하는 것이 노자학이며, 혼자만 행하고 남을 구휼하지 못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하였다. 선생은 여경(餘慶)을 대단히 미워하여 이로부터 항시, “여경은 속이는 자이다.” 하였으니, 여경 역시 그 행동을 감추고 호화스런 가정에서 의식을 하였을 뿐이었다. 사람됨이 문(文)에는 칠원(漆園 장자)과 같고, 시에는 산곡(山谷 황정견(黃庭堅))과 비길 만하고 재주는 공명(孔明)을 지녔으며 행실은 만청(曼倩 동방삭(東方朔))과 같았다.
○ 유종선(柳從善)은 본관이 진주(晉州), 자(字)는 여등(如登)이다. 산에서 살면서 스스로를 감추어서 그 친구와 친척들도 그 얼굴 보기가 드물었었다.
○ 우선언(禹善言)은 처음의 자는 덕부(德父)이고, 호는 풍애(風崖)이다. 단성군(丹城君) 공(貢)의 아들로 사람됨이 뛰어나서 외물에 구애되지 않았다. 신축년에 남으로 영남에 내려가서 점필재(佔畢齋) 선생을 여막(盧幕)에서 뵈었는데, 선생이 그의 자를 자용(子容)이라고 지어주었다.
○ 김물(金勿)은 자가 개중(介重)이다. 강진(康津) 사람으로 감사(監司) 반()의 아들이다. 단정하고 묵중하며 결백함을 좋아했다. 계묘년에 생원이 되어 거듭 과거에 급제하였다.
○ 최하임(崔河臨)은 자가 진국(鎭國)이요, 호는 태허당(太虛堂)이다. 성품이 공명을 좋아하였으며, 경자년에 진사를 하였다. 이해 여름 요승(妖僧) 학조(學祖)가 그의 무리인 설의(雪義)를 시켜서 불상을 몰래 숨겨 돌리며 부처가 저절로 다닌다 하고, 곡식과 비단과 베 등을 매일 천여 건씩 거둬들였다. 태학생들이 임금에게 글을 올려 이 요망한 중을 죽이기를 청하였다. 무려 다섯 번이나 글을 올렸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였지만, 이 상소문은 다 진국의 손에서 된 것이었다. 병오년 7월에 죽으니, 나이 32세였다. 집이 가난하여 장사를 거두지 못하자, 그 친구들이 부의를 보내서 장사를 지내게 하였다. 저술한 책으로는 《안택기(安宅記)》가 있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 이달선(李達善)은 자가 겸지(兼之)이다. 성품이 착한 것을 좋아했다. 병오년에 셋째로 급제하여 종부시(宗簿寺) 직장(直長)을 지냈다.
○ 권경유(權景裕)는 자가 군요(君饒)니,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성질이 굳세고 대체를 알며 꾸밈이 없어서 강공직(姜公直 강응정(姜應貞)의 자)을 심히 미워하여 그이는 인정(人情)에 멀다고 하였으나, 늦게서야 그의 행실을 듣고 매우 사랑하였다. 계묘년에 진사가 되고 병오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 정자(正字)를 지냈다.
○ 이윤종(李尹宗)은 자가 극창(克昌)이요, 호는 차군당(此軍堂), 또는 죽계(竹溪)라고도 했다. 시문(詩文)에 뛰어났고, 사람됨이 어진이를 좋아하며 공직(公直)ㆍ자욱(自勗 정여창의 자)ㆍ백연(伯淵)ㆍ화정(和情 권안(權晏)의 자) 등은 그가 가장 좋아하던 벗들이다.
○ 고순(高淳)은 자가 희지(熙之), 또는 태진(太眞)ㆍ진진(眞眞)이라고도 하였으며, 본관은 제주(濟州)이다. 귀머거리가 되어서 사람들은 땅에 글자를 써서 의사를 통하였다. 무술년에 조명(詔命)에 응하여 시정을 논하는 글월을 올렸는데, 망령된 자라는 이름을 얻었다. 누가 이 소리를 전하니 희지는 듣고 대단히 기뻐하며 스스로 호를 망인(妄人)이라고 하였다. 희지가 처음으로 신덕우(辛德優 신영희(辛永禧)의 자)를 유림들 가운데서 보았을 때, 유림들은 서로 조심스럽게 말들을 하고 있는데, 희지는 한 조각 작은 종이에 절구 한 수를 쓰기를,
조그마한 누각에 봄바람이 고요한데 / 小閣春風靜
담담히 오고가는 말들은 모두 여유 있어 보이도다 / 淡談摠有餘
귀머거리인 이 사람은 아무 느낌이 없어서 / 聾人無一味
머리를 숙이고 홀로 책만 보고 있도다 / 垂首獨看書
하였다. 덕우(德優)는 기꺼워하며 그 글에 화답하기를,
세상 모든 소리는 귀가 시끄럽도록 혼탁하고 / 世聲聒溷濁
더러운 흙의 냄새는 아직도 코에 스쳐 남아 있도다 / 糞壤嗟鼻餘
부럽다. 그대여 방에 있는 누구보다도 나을세라 / 羨君勝房老
낮에도 가만히 천 권 책을 읽을 수가 있으니 / 晝隱千卷書
하였다. 이로부터 마음을 알아주는 교우로 여겼다. 무□년에 생원을 하였다.
○ 신영희(辛永禧)는 자가 덕우(德優)이다. 본관은 영산(靈山)으로, 재상인 석조(碩祖)의 손자이다. 도량이 커서 구애됨이 없고 활달하여 정의심이 많았다. 과거는 좋아하지 않았으며, 시(詩)의 명성은 온 나라에 파다하였다. 참의(參議) 성현(成俔)은, “그의 시는 소(蘇 소식)ㆍ황(黃 황정견)의 경지에 출입하고 있다.” 하였다. 계묘년에 진사를 하였으나, 그후로는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 이종준(李宗準)은 자가 중균(仲鈞), 호는 부휴자(浮休子), 또는 상우당(尙友堂)ㆍ태정일민(太庭逸民)ㆍ장륙거사(藏六居士)ㆍ용헌거사(慵軒居士)라고도 하는데, 시문에 능하였다. 정유년에 진사를 하고 병오년에 제2등으로 급제하여 지금은 평안도 평사(平安道評事)이다. 그는 젊어서 군요(君饒)의 집을 몰라, 나와 정중(正中)과 더불어 달밤을 타고 꽃을 완상하면서 군요의 집에 이르렀다. 나는 거짓말로 군요에게, “호현방(好賢坊) 살구꽃 아래에 이상한 사람이 글을 읊고 있기에 같이 데리고 왔는데, 그 말을 들으니 도량이 넓어 구애됨이 없으며, 그 시를 보니 맑고 차서 세상 티끌을 벗어나 있고 화식(火食)하는 사람들의 말하는 바가 아니니, 세상에 선인(仙人)이 있다 하면 바로 이런 사람이 아닌가.” 하였다. 군요는 황급히 신을 거꾸로 신고 맞아들이며 서로 달 아래 자리잡고 앉았다. 중균이 글을 짓는데, 일부러 청수한 시태로 지어내니 군요는 과연 크게 감복하여 무릎을 꿇고, “누추하고 궁벽한 곳까지 뛰어난 선비가 어떻게 나의 친구와 함께 오셨습니까. 천행이 아니오니까. 하룻밤 묵고 가시기를 바라나이다.” 하니, 중균은 굳이 가려고 하였다. 군요는 꿇고서 옷 뒷자락을 붙잡고 머물기를 청하였다. 담소로서 밤을 지내고, 이튿날 아침에야 비로소 어배동(於背洞)에 사는 진사 이종준(李宗準)임을 알고 서로 손을 붙잡고 크게 웃었다. 중균과 군요는 드디어 마음을 허락하는 친우가 되었다.
○ 김응기(金應箕)는 자가 백봉(伯奉)이다. 정유년에 급제하고 지금은 예조 정랑이다. 신라의 왕족 계통인 방경(方慶)의 아들이다.
○ 김응규(金應奎)는 자가 중성(仲聖)이다. 응기의 아우로서 의분심이 강하고 절개를 중히 여겼는데, 아버지 방경이 이를 매우 사랑했다. 정유년 나이 20세에 평안도의 향공(鄕貢) 시험에 세 번 연거푸 장원을 했다. 진사 회시(會試)에 들어가 시장(試場)에서 죽으니, 그때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아들 하나가 있다.
○ 총(摠) 종실은 자가 백원(百源)이다. 무풍 부정(茂豐副正)을 지냈는다. 태종(太宗)의 증손(曾孫)이니, 거문고의 재주는 정중(正中 정은(貞恩)의 자)과 비슷했으나, 그의 넓은 도량은 정중을 능가했다. 양화진(楊花津) 입구에 집을 짓고 손수 고기잡이 배를 저었으며 자호하여 서호주인(西湖主人)이라고 했다.
○ 현손(賢孫 종실)은 자가 세창(世昌)이요, 신요(神饒)의 아들이다. 벼슬은 명양 부정(鳴陽副正)에 이르렀다. 나이는 나보다 13세나 적다. 매양 법도에 따라 몸을 자제하였으며, 독실한 몸가짐은 대유(大猷 김굉필의 자)의 다음이었다. 일찍이 관례를 행하고자 하였으나, 대유가 이것을 저지시켰다.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한결같이 가례에 의하여 행하였다.
○ 윤신(尹信 종실)은 자가 임지(任之)다. 파주(坡州)에서 대대로 내려온 집으로 문숙공(文肅公)의 후예다. 몸가짐은 세창(世昌 현손(賢孫)의 자)과 비슷하였으나, 침착하고 원만한 것은 세창을 능가할 정도였고, 대유에게 사사(師事)하였다.
○ 이적(李勣)은 자가 중율(仲栗)이다. 시를 공부한 후에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공부하여 그 도(道)를 맛보고서부터는 시를 공부하지 않고 도에 뜻을 두었는데 오히려 시보다 경지가 심원하였다. 형식적인 일을 힘쓰지 않고 오히려 옛 사람을 벗삼았으며, 보통 때도 꼭 관대(冠帶)를 하고 당당한 행동을 하였다. 대유와 백연(伯淵)에게 사사하였다.
○ 허반(許盤)은 자가 문병(文炳)이다. 계묘년에 진사를 하였다. 성리학에 뜻을 두고 출세에 급급하지 않았다. 모든 일을 옛것을 본받으려 하였고, 대유를 사우(師友)로 삼았다. 대유는 그의 단아함이 천성에서 나왔음을 경복하였다. 음직으로 사직 참봉(社稷參奉)에 임명되었는데, 이때에 좌상 홍응(洪應)이 제조(提調)로 있었다. 문병이 그에게 말하기를, “왕세자는 나라의 저군(儲君)입니다. 훗날 동방 백성이 우러러 의지할 몸이온데 지금 내시와 더불어 거처하고, 서연(書筵)에 나갈 때가 적고 잡된 것을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때가 많사오니, 청하건대…….” 하였다.
○ 민구손(閔龜孫)은 자가 서경(瑞卿)이다. 본관이 여주(驪州)로 죽은 첨정 수(粹)의 아들이요, 자정(子挺)의 처남이다. 일찍이 자정에게서 시를 배웠는데, 얼마 아니하여 능하게 되자 또한 정중(正中 이정은(李貞恩)의 자)ㆍ정지(貞之 심정(沈貞)의 자)ㆍ중율(仲栗 이적(李勣)의 자) 등에 종유하였고, 대유에게 사사(師事)하였다. 위인이 단정하고 우아하여 더러움이 없었다.
○ 신용개(申用漑)는 본관이 고령(高靈)으로 자는 개지(漑之)이다. 대단히 침착하고 큰 도량이 있었다. 시와 문에 능하였다. 숙주(叔舟)는 바로 그의 할아버지이다. 그의 아버지 면(沔)은 시애(施愛)의 난에 죽었다.
○ 이주(李冑)는 본관이 고성(固城)으로 자는 주지(冑之)이다. 어질고 문에 능하였다. 용헌선생(容軒先生 이원(李原))의 증손이다.
○ 이원구(李元龜)는 낭옹(浪翁)이다.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이요, 참판 박팽년(朴彭年)은 바로 그의 외조부다. 두 집의 현능함이 이원구 한 사람에게로 모였다.
○ 이계맹(李繼孟)은 자가 희순(希醇)이다. 점필재(佔畢齋)가 그의 시문을 취택하였다. 전주(全州)에 살았는데 청수한 행동이 출중하였다.
○ 이세칙(李世則)은 자가 효옹(效翁)이다. 연안군(延安君) 숙기(叔琦)의 아들로 기개가 있었고 곧은 것을 좋아하였으며, 맑은 지조가 출중하였으며 시문에 능숙하였다.
○ 장세필(張世弼)은 자가 언경(彦卿)이다. 고양(高陽)에서 살았는데, 가난한 살림에도 반드시 술과 고기를 갖추어 어머니를 섬겼다. 젊어서 배우지 못하여 겨우 성명(姓名)을 기록할 정도였다 한다.
○ 최세명(崔世明)은 자가 보광(葆光)이다. 독서를 좋아하였으며 벼슬길에 나아감을 싫어하였다. 정유년에 진사를 하였다.
○ 안계송(安繼宋)은 자가 우윤(于胤)이요, 호는 박전(薄田)이다. 사람됨이 어리석어 시와 술 외에는 다른 것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를 알건 모르건 간에 모두 박전이라 하여 비웃었다. 그러나 박전은 그런 것도 몰랐다. 음직(蔭職)으로 돈녕부 직장(敦寧府直長)을 배명 받은 후 지금까지 17년이 되었으나, 승진을 못하고 있으니, 세리(勢利)에 담담함을 알 수 있다.
○ 신포(申誧)는 자가 지정(持正)이요, 호는 허주(虛舟)이다. 시와 그림에 조예가 있고, 집이 가난하고 술을 좋아하였다. 일찍이 스스로 장륙(莊六)이라 호하였는데, 중균(仲鈞)이 그 호를 좋아하여 술 한 병과 바꾸자고 청하니 지정은 허락하였다.
○ 구영안(丘永安)은 본관이 강릉으로 자가 중인(仲仁)이요, 호는 호은(壺隱)이니, 문장의 명성이 있었고 기축년에 생원 시험에 제2등으로 합격하였다. 벼슬과 공리를 싫어하였다. 또한 음양ㆍ추보(推步)ㆍ풍수ㆍ의술ㆍ선도ㆍ불도ㆍ승제(乘除 산술)의 법까지 섭렵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 심원(深源 종실)은 자가 백연(伯淵)이요, 호는 성광(醒狂) 또는 묵재(黙齋), 혹은 태평진일(太平眞逸)이라 하기도 하였다. 태종(太宗)의 현손(玄孫)으로 나와 동년생이나, 달과 날이 나보다 늦다. 경학에 밝고 조행(操行)이 있으며 겸하여 의술에도 통하였다. 사람됨이 충효하고 무술(巫術)이나 불도를 좋아하지 않았다. 평상시에도 관대를 하였으며 손에서는 책을 놓지 않았다. 전강(殿講) 때는 사서와 오경에 통달하여 명선대부(明善大夫)에서 주계 부정(朱溪副正)으로 진급하였다. 나이 25세에 전후 다섯 번이나 상소를 올려 다스리는 도를 논하였는데, 혹은 윤허를 받기도 하고 혹은 윤허를 얻지 못하기도 하였다. 또한 조정에서 숙모부(叔母夫) 임사홍(任士洪)이 무도하여 다른 마음을 품고 있음을 논난하다가 조부의 눈밖에 나서 장단(長湍)으로 귀양갔다. 또 이천(伊川)에서 임금께 글을 올려 병중의 부모를 가뵙기를 청하였는데, 그 말들이 간곡하고 지극하여 윤허를 얻었다. 정미년에 종친들만 보는 과거[宗親科]에서 경(經)ㆍ사(史)ㆍ강독에 제1등으로 뽑히어서, 임금께서는 약과 술을 내리셨고 계급은 2품으로 높아졌으나, 군(君)은 봉하지 않았으니 이전에 조부(祖父)에게 거스른 허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 강응정(姜應貞)은 자가 공직(公直)이며, 호는 중화재(中和齋)이다. 나보다 10여 세 위이다. 은진(恩津)에서 살았으며 효행으로 칭송을 받았다. 일찍이 어머니의 병에 3년 동안이나 띠를 풀지 않았으며, 약은 반드시 몸소 맛보고 바쳤다. 하루는 꿈에 천신(天神)이 마당에 내려와 공직에게 이르기를, “내일 오는 손님은 반드시 의술가이니, 너의 어머니 병을 그에게 물어라.” 하였다. 이튿날 아침 과연 한 소년이 왔는데, 이름은 원(元)이라 하며 스스로 윤왕동(輪王洞)에서 산다고 하며, 공직에게서 숙박하기를 청하므로 머무르게 하였다. 어머니의 병에 대하여 물어보니, 한 마디 말에 과연 의약자(醫藥者)임을 알게 되어 소년의 말대로 시험해 본 결과 15일 만에 병이 나았다고 한다. 뒤에 부모상에 있어 한결같이 가례를 좇아 행하여서 겨울에도 맨발로 지내니, 온 몸이 성한 곳이 없었다. 이 사실이 조정에까지 들리어 그 문에 효자의 정표(旌表)를 달았었고 집안의 병역을 면제해 주었다.
공직의 사람됨은 경서를 잘 외우며 사주ㆍ관상 등으로 인명(人命)을 예언하며, 또한 의술서를 섭렵하고 겸하여 지리 서적까지도 보았다. 젊어서는 태학에 노닐면서 장안의 준걸한 재사들과 더불어 주문공(朱文公)의 고사에 의거하여 향약(鄕約)을 짓기도 하고, 혹 월삭(月朔)에는 《소학》도 강론하였다. 그때 뽑힌 이는 다 한때의 명사들로서 김용석(金用石)은 자가 연숙(鍊叔)이요, 신종호(申從護)는 자가 차소(次韶)요, 박연(朴演)은 자가 문숙(文叔)이요, 손효조(孫孝祖)는 자가 무첨(無忝)이요, 정경조(鄭敬祖)는 자가 효곤(孝昆)이요, 권주(權柱)는 자가 지경(支卿)이요, 정석형(丁碩亨)은 자가 가회(嘉會)요, 강백진(康伯珍)은 자가 자온(子韞)이요, 김윤제(金允濟)는 자가 자주(子舟)인데 이들은 그 중에서 뛰어난 자이고, 그 나머지 사람은 다 기록하지 못한다. 세상에서 그들을 좋아하지 않는 자는 그들을 비방하여 혹은 소학계(小學契)라고 지목하기도 하고, 혹은 효자계(孝子契)로 지목하기도 하였으며, 공자(孔子)ㆍ사성(四聖)ㆍ십철(十哲)이라는 기롱도 있었다. 시골서 불우하게 지내며 늙도록 과거 시험을 보지 않다가 계묘년에 생원이 되어 훈도(訓導)가 되었다.
○ 안응세(安應世)는 본관이 죽산(竹山)으로, 자는 자정(子挺)이요, 호는 월창(月窓)인데, 또는 구로지인(鷗鷺至人) 또는 연파조도(煙波釣徒), 여곽야인(藜藿野人)이라고도 하였다. 나보다 한 살 아래다. 사람됨이 청수하고 담담하고 상쾌하며 가난한 생활에도 태연자약하여 분수를 달게 여겼으며, 명예와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선불(仙佛)의 도(道)를 배우지 않고 장기와 바둑을 즐겨하고, 시를 잘하는데 악부(樂府)에 더욱 뛰어났다. 일찍이 그는, “의롭지 못한 재물을 집안에 보태두는 것이라든지, 의롭지 못한 음식으로 오장(五臟)을 보(補)한다는 것은 더욱 범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였다. 자정의 마음가짐이 대체로 이와 같았는데, 흰 옥에 흠이 있는 격으로, 그는 주색(酒色)을 좋아하였다. 경자년에 진사를 하였는데 그해 9월에 죽으니, 나이가 26세였다. 그를 알고 모르고 간에 마음 아프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 채순(蔡恂)은 자가 숙부(叔孚)니, 양천(陽川)에 살았다. 경자년에 진사를 하였다. 사람됨이 과거를 중시하였다.
○ 한훈(韓訓)은 자가 사고(師古)요, 아명은 학이(學而)이다. 본관은 청주(淸州)로 서울에 살았으며, 시에 조예가 있고 병오년에 진사를 하였다.
○ 강흔(姜訢)은 자가 시가(時可)이다. 본관은 진주(晉州)로 관찰사(觀察使) 자평(子平)의 막내아들이다. 처음에는 밀양(密陽)에서 여경(餘慶)에게서 배웠고, 점필재(佔畢齋)에게서 두시(杜詩)를 배웠으며, 다음에는 덕우(德優)에게서 시를 배웠으며, 다음에 대유(大猷)에게서 《소학》을 공부하였고, 그 다음에는 시숙(時叔)과 공서(公緖)에게서 배웠으며 유극기(兪克己)의 여막에까지 가서 글을 읽었다.
○ 조자지(趙自知)는 본관이 평양(平壤)으로 자는 성지(性之)이다. 은혜 베풀기를 좋아하고 어진이를 좋아하며, 산수를 좋아하고 유희를 좋아하였으며, 공명을 좋아하지 않고 침울하여 말이 적었다. 여경에게서 배웠는데, 시에 능하였다.
○ 강백진(康伯珍)은 자가 우온(于韞)이다.
○ 김용석(金用石)은 자가 연숙(鍊叔)이다.
○ 이장길(李長吉)
○ 최충성(崔忠誠)은 자가 필경(弼卿)이다.
○ 노섭(盧燮)
○ 유방(劉房)
○ 조원기(趙元紀)
○ 조광림(趙廣臨)
○ 정붕(鄭鵬)


 

[주D-001]증자(曾子)의 역책(易簀) : 증자는 임종시에 대부의 대자리를 거두고 딴 자리를 바꾸어 깔고 죽었다.
[주D-002]자로(子路)가 결영(結纓) : 위(衛) 나라의 싸움에서 자로가 창에 맞아 관끈이 끊어졌는데, 자로는 “군자는 죽더라도 관을 벗어서는 안 된다.” 하고, 관끈을 매고 죽었다.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남효온(南孝溫) 찬(撰)

○ 김굉필(金宏弼)은 자(字)가 대유(大猷)이며, 점필재(佔畢齋)에게 수업하여 경자년에 생원이 되었다. 나와 동갑인데 생일이 나보다 뒤이다. 현풍(玄風)에 살았는데, 그의 독특한 행실은 비할 데가 없어서 평상시에도 반드시 의관을 갖추고 있었으며, 집밖에는 일찍이 읍(邑) 근처에도 나가지 않았다. 손에서 《소학(小學)》을 놓아본 적이 없었고, 파루를 친 뒤에야 침소에 들었으며, 닭이 울면 일어났다. 사람들이 국가 일을 물으면 그는 반드시, “《소학》읽는 아이가 어찌 대의(大義)를 알겠는가.” 하였다. 일찍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글공부가 아직 천기를 알지 못하나 / 業文猶未識天機
《소학》글 가운데서 어제의 잘못을 깨달았도다 / 小學書中悟昨非
하였다. 점필재 선생이 평하기를, “이는 곧 성인될 바탕이 됨직하니 노재(魯齋) 이후에 어찌 사람이 없다고 하리오.” 하였으니, 그를 추중(推重)함이 이와 같았다.
그는 나이 30이 넘은 후에야 비로소 다른 책을 읽었으며 후진을 가르침에도 게을리하지 아니하였으니, 이현손(李賢孫)ㆍ이장길(李長吉)ㆍ이적(李勣)ㆍ최충성(崔忠成)ㆍ박한공(朴漢恭)ㆍ윤신(尹信)과 같은 이는 다 그의 문하에서 나온 이들로, 그들의 무성한 재질과 독실한 행실은 그의 스승과 같았다. 그는 나이가 많아질수록 도(道)가 더욱 높아졌는데, 세도의 만회하지 못할 것과 도가 행해지지 못할 것을 잘 알고 나서는 빛을 감추고 종적을 흐려버렸으나, 사람들은 또한 이러한 것을 알아주었다.
점필재 선생이 이조 참판이 되어 바른 일을 건의함이 없으매, 대유가 시를 지어 올리기를,
도는 겨울에 갖옷을 입고 여름에 시원한 것을 마시는 데 있거늘 / 道在冬裘夏飮氷
비를 걷고 홍수를 멈추게 함을 어찌 다 잘할 수 있으리오 / 霽行潦止豈全能
난초도 세속에 심으면 결국은 변질되니 / 蘭加從俗終當變
뉘라서 소는 밭을 갈고 말은 타고 다니는 짐승임을 믿어주리까 / 誰信牛耕馬可乘
하였는데, 선생이 시로써 이에 화답하기를,
분수 밖에 벼슬을 하게 되어 경대부 자리에 이르렀으나 / 分外官聯到伐氷
임금을 바르게 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것 내 어찌 할 수 있겠는가 / 匡君救俗我豈能
교육에 종사하는 후배가 우졸하다고 조롱하지만 / 從敎後輩嘲迂拙
세도와 권리가 구구한 벼슬길은 탈 만한 것이 못 되는구나 / 勢利區區不足乘
하였다. 이는 유쾌하게 여기지 않은 것이다. 그는 이로부터 점필재와 사이가 좋지 못하게 되었다. 정미년에 부친 상(喪)을 당하여서는 죽만 먹고 너무 슬피 울던 나머지 졸도하였다가 깨어난 일도 있었다.
○ 안우(安遇)는 자(字)가 시숙(時叔)이다. 효행이 그 고을에서 으뜸이었다. 아버지 상중에는 한결같이 《주자가례》를 따랐다. 점필재에게 학업을 닦았으나 얼마 안 되어 벼슬할 마음이 없어져 비로소 점필재와 틈이 났다. 일찍이 향시(鄕試)에 뽑혀 서울로 와서 회시(會試)에 응하려 하였는데, 사관소(四館所)의 연소한 자들이 오만하여, 나이든 지방 학생들을 때리려 하니, 시숙이 말하기를, “어찌 부모께서 물려준 몸을 죄없이 스스로 훼상시키면서까지 명예와 이익을 구할 것이 있겠는가.” 하고, 장중에 들어가지도 않고 가버렸다. 그 지조와 절개는 가히 동한(東漢)의 절의에 비할 만하다고 하겠다.
○ 권안(權晏)은 본관이 안동(安東)으로 자는 화청(和淸)이니, 나이는 나보다 20여 세나 위이다.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다행히 죽지 아니하고 말년에 세 익우(益友)를 만났다.” 하였는데, 이는 나와 정중(正中)과 극창(克昌)을 지칭한 것이다. 젊어서 무술에 능하여 별시위(別侍衛)에 소속된 일도 있었다. 사람됨이 청백하여 오능중자(於陵仲子)와 같았고, 산수를 좋아하고 도학과 진리를 좋아하며, 효제충신에 있어서는 그 이상 갈 만한 사람이 없었다. 집이 헐어도 비바람을 가리지 않았고 혹 양식이 떨어져도 그 즐거움은 여전하였으며 짧은 베옷에도 소연하였다. 말년에는 불도(佛道)를 좋아하였다.
○ 정여창(鄭汝昌)은 자가 자욱(自勗)이다. 지리산(智異山)에 들어가 3년 동안이나 나오지 않고 오경을 닦아 그 깊은 진리를 다 터득하여 체(體)와 용(用)의 근원은 한 가지이지만 갈린 끝이 다른 것을 알았고, 선(善)과 악(惡)의 성(性)은 같으나 기질이 다른 것을 알았고, 유(儒)와 불(佛)의 도(道)는 같으나, 자취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성리학은 성광(醒狂 이심원(李深源)의 호)이 존경하였다. 경자년에 왕이 성균관(成均館)에 하교하여 경전에 밝고 행실을 닦은 유생을 구하였는데, 성균관에서는 자욱이 제일이라 하여 천거하였고, 지관사(知館事) 서거정(徐居正)은 자욱을 경연에 추천하려고 하였으나 자욱이 이를 사양하였다. 계묘년에는 진사가 되었다. 그의 아버지 육을(六乙)이 이시애(李施愛)의 반란에 나라를 위하여 죽었는데, 이때 자욱의 나이가 적었으나 거상하는 데 결함이 없었고, 모상(母喪)에도 전례(典禮)의 수(數)나 죽을 먹는 일등을 일체 《가례》에 따랐다. 경술년에 참의 윤긍(尹兢)이 그의 효행과 학문은 사림 중에 으뜸이라고 천거하여 특별히 소격서(昭格署) 참봉을 시켜서 불렀으나 자욱은 글을 올려 면직을 청하였다. 상이 하교하여 그를 포상하니, 명성이 더욱 높았다. 자욱은 성품이 단아하고 정중하며 술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냄새나는 채소를 먹지 않고 소와 말고기를 먹지 아니하였다. 겉으로는 항상 담담하였으나, 내면으로는 대단히 영리하였다. 젊을 때 성균관에 유생으로 있으면서 사람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는데, 코를 골며 졸았으나 누워 자지는 않았다. 남들이 이것을 모르다가 어느 날 밤 최진국(崔鎭國)의 눈에 띄어서 성균관에 파다하게 소문이 나기를, “정모(鄭某)는 참선을 하고 자지 않는다.” 하였다.
○ 이정은(李貞恩)은 자가 정중(正中)이요, 호는 월호(月湖), 또는 남곡(嵐谷), 혹은 설창(雪窓)이라고도 하였다. 수천 부정(秀川副正)에 배수되었으며, 음를이 세상에 으뜸이어서 슬프게 연주하면 지나가던 행인도 꼭 눈물지을 정도였다. 사람됨이 독실하고 돈후하며 스스로 겸손하고 식견과 도량이 있고 총명하여 학문을 하는 데도 그 이치를 먼저 터득한 후에 문사를 다루어 스승을 수고롭히지 않았고, 시를 지을 때도 그 격식을 먼저 다룬 후에 수사를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싫어하지 않았고, 덕을 닦는 데 있어서도 마음을 먼저하고 외모를 다음에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알지 못하였고, 행실에 있어서는 그 지위가 높다고 남을 위압하지 아니하고 가장 가난한 선비와 같은 태도를 취하였다.
○ 이분(李坌)은 자가 자야(子野)며, 장안(長安)에 살았다. 어진이와 착한 이를 좋아하고 세력과 이욕에 담백하였으며 시를 잘하였다. 그의 심원한 기틀에 대해서 대유(大猷 김굉필)도 탄복하였다.
○ 노조동(盧祖同)은 자가 공서(公緖)이다. 《소학》 읽기를 좋아하였고, 순서를 밟지 않은 공부나 조롱하는 글이나 과거의 재능 등은 좋아하지 않았다. 법도에 맞는 몸가짐은 거의 대유와 같았으며,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서는 시묘살이 3년 동안 한결같이 《가례》에 의하여 행하였다. 시숙(時叔 안우(安遇))과 함께 점필재(佔畢齋)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는데, 선생도 그를 공경하였다.
○ 정세린(鄭世麟)은 자가 창부(昌符) 이며, 영남에 살았다. 점필재에게 수업하였는데 그 학문은 공서(公緖 노조동)와 같으나, 시에 대한 재주가 월등하였다. 선생도 그를 공경하였는데, 병오년에 죽었으니, 나이 22세였다.
○ 양준(楊浚)은 자가 징원(澄源)이다. 점필재에게 수업하였는데, 속이 깊고 침착하며 도량이 커서 가난하여도 걱정이 없이 도를 즐기기를 담담히 하였다. 또 국량이 웅장하고 깊었으며 외형에 나타나지 않도록 수양을 닦아 총명이 날로 진전하였다. 유림들은 그를 가장 낮게 보았으나 오직 여경(餘慶 홍유손(洪裕孫))만이 그의 인품을 잘 알았다.
○ 김시습(金時習)은 본관이 강릉(江陵)으로, 신라(新羅) 왕족의 후예이다. 나이는 나보다 20세 위로, 자는 열경(悅卿)이며, 호를 동봉(東峯), 또는 벽산청은(碧山淸隱), 또는 청한자(淸寒子)라고 했다. 세종 을묘에 태어났는데, 나이 5세에 문장을 엮을 줄 알았다. 세종이 승정원에 불러들여 시를 짓게 하시고 크게 기특하게 여겨 그 아버지를 불러 이르기를, “이 아이를 잘 기르라. 내가 장차 크게 쓰리라.” 하였다.
을해년에 세조(世祖)가 정권을 잡게 되자, 불문(佛門)에 들어가 이름을 설잠(雪岑)이라 하고, 수락산(水落山)의 절에 들어가서 불도를 닦고 몸을 수련하였으나, 유생을 보면 말마다 공맹을 칭송하고 불법에 대하여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도 닦는 것을 물으면 그는 또한 말하려 하지 아니하였으며, 어떤 사람이 괴애(乖崖) 김수온(金守溫)이 앉아 죽은 일을 들어 말한 일이 있었는데, 그는 대답하기를, “앉아 죽는다는 것은 예(禮)에서 귀히 여기지 않는다. 나는 단지 증자(曾子)의 역책(易簀)자로(子路)가 결영(結纓)하고 죽은 것을 귀한 것으로 알 뿐이요, 그 외는 알지 못한다.” 하였다.
신축(1481, 성종 12) 연간에는 육식을 하고 머리를 길렀다. 글을 지어 조부에 제사하며 말하기를, “삼가 아뢰옵건대, 순제(舜帝)는 오교(五敎)를 펴는 데 유친(有親)을 첫머리에 두었고, 죄를 3천으로 나열하되 불효함을 가장 큰 죄로 여겼습니다. 무릇 하늘과 땅 사이에 살면서 누가 양육의 은혜를 저버리겠나이까. 그러므로 악독한 짐승에는 범과 늑대보다 더함이 없고, 미물의 충성으로는 승냥이와 수달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다 능히 제 어버이를 사랑하는 품성을 온전히 가졌으며 또한 근본에 보답하려는 정성을 삼가 행하였으니, 이는 모두 천리의 원래 그러한 것이요, 물욕이 이를 덮기 어려운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이 미련한 소자도 근본과 지염의 계통을 이어받았으되 젊을 때 이단에 빠져 어리석게도 배우지 아니하였음을 슬퍼하여 장차 도(道)를 닦아 뛰어나보려고 하였으나, 윤회설과 같이 황당함이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장년(壯年)에는 하는 일 없이 세월만 보내다가 늙어서야 비로소 뉘우쳐 예전(禮典)을 상고하고, 성경(聖經)을 찾으며 먼 조상을 추모하는 넓은 의례를 정하고, 가난한 생활을 참작하여 간소하고 깨끗함에 힘쓰고 제수를 차림에 정성으로서 하였나이다. 한무제(漢武帝)는 70세 때에 비로소 전 승상(田丞相)의 말을 깨달았다고 하오며, 원(元) 나라 덕공(德公)은 백 세가 되어서야 허노재(許魯齋)의 풍도에 감화했다고 하나이다. 서리와 이슬이 내리는 것을 느끼고 세월의 지나감을 근심하니, 놀라웁고 황공함이 끝이 없어, 한탄함이 자못 많사옵니다. 만일 지난 허물을 씻어서 하늘과 땅 사이에서 용납된다면 행여 면목을 세워서 구천에서 조종을 뵙기를 바라옵니다.” 하였다.
임인년 이후부터는 세상이 쇠하여감을 보고 인간의 일은 하지 아니하고, 여염간에 버려진 사람이 되어 날마다 남과 더불어 장예원(掌隷院)에서 송사를 한 일도 있었고, 어느 날에는 술을 먹고 시가를 자나다가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을 보고 말하기를, “너 같은 놈은 그만두어야 마땅하다.” 하니, 정은 못 들은 척하였다. 사람들은 이것을 위험하게 여겨 전에 서로 사귀어 놀던 사람들도 다 절교하고 왕래하지 않았다. 홀로 시정배의 미치광이 같은 아이나 만나 놀며 취하여 길가에 쓰러지고 늘 어리석은 척하며 늘 웃고 지냈다. 뒤에 설악산(雪嶽山)에 들어가기도 하고, 혹 춘천산(春川山)에서 살기도 하여 드나듦이 무상하니, 사람들은 그의 정처를 알지 못하였다. 그가 좋아한 사람은 정중(正中)ㆍ자용(子容)ㆍ자정(子挺)과 나였다. 그가 지은 시문은 수만여 편이나 되었는데,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사이에 거의 다 흩어져 없어졌다. 조정의 신하들과 선배들이 혹 그의 글을 절취하여 마치 자기의 작품인양 하기도 하였다.
○ 홍유손(洪裕孫)은 자가 여경(餘慶)이요, 호는 조총(篠叢), 또 광진자(狂眞子)라고도 하였다. 남양(南陽) 아전 순치(順致)의 아들로 집안이 대대로 청빈하여 겨우 몸만 감싸고 혹 속옷도 입지 못하고 다녔다. 경전(經典)과 《사기(史記)》를 탐독하면서 기탄없는 행동을 하였으며, 과거에 응시하기를 좋아하지 아니하였으며 향리를 면할 계획도 하지 않았다. 신축년에 남양 부사 채신보(蔡申甫)가 여경이 글 잘하는 것을 이유로 그 향역(鄕役)을 면제해 주었더니, 그는 곧 걸어서 영남(嶺南)으로 가 점필재(佔畢齋)를 뵙고, 두시(杜詩)를 배웠다. 그때 점필재 선생은, “이 사람은 벌써 안자(顔子)의 즐겨한 바를 본 사람이다.” 하였고, 학자들도 다 그를 존경하였다.
두류산(頭流山 지리산에 들어가 학업을 닦고 서울에 올라와 점필재 선생이 시사(時事)를 건의하지 못함을 간하여, “무엇 때문에 남의 벼슬과 녹을 헛되이 받고 계십니까. 그리고 지금 학자들은 불교나 노장학을 미워하지 않은 바 없으나, 실행에 있어서 불노학을 벗어난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행동을 둥글게 하고 모난 것을 싫어하는 것이 노자학이며, 혼자만 행하고 남을 구휼하지 못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하였다. 선생은 여경(餘慶)을 대단히 미워하여 이로부터 항시, “여경은 속이는 자이다.” 하였으니, 여경 역시 그 행동을 감추고 호화스런 가정에서 의식을 하였을 뿐이었다. 사람됨이 문(文)에는 칠원(漆園 장자)과 같고, 시에는 산곡(山谷 황정견(黃庭堅))과 비길 만하고 재주는 공명(孔明)을 지녔으며 행실은 만청(曼倩 동방삭(東方朔))과 같았다.
○ 유종선(柳從善)은 본관이 진주(晉州), 자(字)는 여등(如登)이다. 산에서 살면서 스스로를 감추어서 그 친구와 친척들도 그 얼굴 보기가 드물었었다.
○ 우선언(禹善言)은 처음의 자는 덕부(德父)이고, 호는 풍애(風崖)이다. 단성군(丹城君) 공(貢)의 아들로 사람됨이 뛰어나서 외물에 구애되지 않았다. 신축년에 남으로 영남에 내려가서 점필재(佔畢齋) 선생을 여막(盧幕)에서 뵈었는데, 선생이 그의 자를 자용(子容)이라고 지어주었다.
○ 김물(金勿)은 자가 개중(介重)이다. 강진(康津) 사람으로 감사(監司) 반()의 아들이다. 단정하고 묵중하며 결백함을 좋아했다. 계묘년에 생원이 되어 거듭 과거에 급제하였다.
○ 최하임(崔河臨)은 자가 진국(鎭國)이요, 호는 태허당(太虛堂)이다. 성품이 공명을 좋아하였으며, 경자년에 진사를 하였다. 이해 여름 요승(妖僧) 학조(學祖)가 그의 무리인 설의(雪義)를 시켜서 불상을 몰래 숨겨 돌리며 부처가 저절로 다닌다 하고, 곡식과 비단과 베 등을 매일 천여 건씩 거둬들였다. 태학생들이 임금에게 글을 올려 이 요망한 중을 죽이기를 청하였다. 무려 다섯 번이나 글을 올렸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였지만, 이 상소문은 다 진국의 손에서 된 것이었다. 병오년 7월에 죽으니, 나이 32세였다. 집이 가난하여 장사를 거두지 못하자, 그 친구들이 부의를 보내서 장사를 지내게 하였다. 저술한 책으로는 《안택기(安宅記)》가 있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 이달선(李達善)은 자가 겸지(兼之)이다. 성품이 착한 것을 좋아했다. 병오년에 셋째로 급제하여 종부시(宗簿寺) 직장(直長)을 지냈다.
○ 권경유(權景裕)는 자가 군요(君饒)니,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성질이 굳세고 대체를 알며 꾸밈이 없어서 강공직(姜公直 강응정(姜應貞)의 자)을 심히 미워하여 그이는 인정(人情)에 멀다고 하였으나, 늦게서야 그의 행실을 듣고 매우 사랑하였다. 계묘년에 진사가 되고 병오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 정자(正字)를 지냈다.
○ 이윤종(李尹宗)은 자가 극창(克昌)이요, 호는 차군당(此軍堂), 또는 죽계(竹溪)라고도 했다. 시문(詩文)에 뛰어났고, 사람됨이 어진이를 좋아하며 공직(公直)ㆍ자욱(自勗 정여창의 자)ㆍ백연(伯淵)ㆍ화정(和情 권안(權晏)의 자) 등은 그가 가장 좋아하던 벗들이다.
○ 고순(高淳)은 자가 희지(熙之), 또는 태진(太眞)ㆍ진진(眞眞)이라고도 하였으며, 본관은 제주(濟州)이다. 귀머거리가 되어서 사람들은 땅에 글자를 써서 의사를 통하였다. 무술년에 조명(詔命)에 응하여 시정을 논하는 글월을 올렸는데, 망령된 자라는 이름을 얻었다. 누가 이 소리를 전하니 희지는 듣고 대단히 기뻐하며 스스로 호를 망인(妄人)이라고 하였다. 희지가 처음으로 신덕우(辛德優 신영희(辛永禧)의 자)를 유림들 가운데서 보았을 때, 유림들은 서로 조심스럽게 말들을 하고 있는데, 희지는 한 조각 작은 종이에 절구 한 수를 쓰기를,
조그마한 누각에 봄바람이 고요한데 / 小閣春風靜
담담히 오고가는 말들은 모두 여유 있어 보이도다 / 淡談摠有餘
귀머거리인 이 사람은 아무 느낌이 없어서 / 聾人無一味
머리를 숙이고 홀로 책만 보고 있도다 / 垂首獨看書
하였다. 덕우(德優)는 기꺼워하며 그 글에 화답하기를,
세상 모든 소리는 귀가 시끄럽도록 혼탁하고 / 世聲聒溷濁
더러운 흙의 냄새는 아직도 코에 스쳐 남아 있도다 / 糞壤嗟鼻餘
부럽다. 그대여 방에 있는 누구보다도 나을세라 / 羨君勝房老
낮에도 가만히 천 권 책을 읽을 수가 있으니 / 晝隱千卷書
하였다. 이로부터 마음을 알아주는 교우로 여겼다. 무□년에 생원을 하였다.
○ 신영희(辛永禧)는 자가 덕우(德優)이다. 본관은 영산(靈山)으로, 재상인 석조(碩祖)의 손자이다. 도량이 커서 구애됨이 없고 활달하여 정의심이 많았다. 과거는 좋아하지 않았으며, 시(詩)의 명성은 온 나라에 파다하였다. 참의(參議) 성현(成俔)은, “그의 시는 소(蘇 소식)ㆍ황(黃 황정견)의 경지에 출입하고 있다.” 하였다. 계묘년에 진사를 하였으나, 그후로는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 이종준(李宗準)은 자가 중균(仲鈞), 호는 부휴자(浮休子), 또는 상우당(尙友堂)ㆍ태정일민(太庭逸民)ㆍ장륙거사(藏六居士)ㆍ용헌거사(慵軒居士)라고도 하는데, 시문에 능하였다. 정유년에 진사를 하고 병오년에 제2등으로 급제하여 지금은 평안도 평사(平安道評事)이다. 그는 젊어서 군요(君饒)의 집을 몰라, 나와 정중(正中)과 더불어 달밤을 타고 꽃을 완상하면서 군요의 집에 이르렀다. 나는 거짓말로 군요에게, “호현방(好賢坊) 살구꽃 아래에 이상한 사람이 글을 읊고 있기에 같이 데리고 왔는데, 그 말을 들으니 도량이 넓어 구애됨이 없으며, 그 시를 보니 맑고 차서 세상 티끌을 벗어나 있고 화식(火食)하는 사람들의 말하는 바가 아니니, 세상에 선인(仙人)이 있다 하면 바로 이런 사람이 아닌가.” 하였다. 군요는 황급히 신을 거꾸로 신고 맞아들이며 서로 달 아래 자리잡고 앉았다. 중균이 글을 짓는데, 일부러 청수한 시태로 지어내니 군요는 과연 크게 감복하여 무릎을 꿇고, “누추하고 궁벽한 곳까지 뛰어난 선비가 어떻게 나의 친구와 함께 오셨습니까. 천행이 아니오니까. 하룻밤 묵고 가시기를 바라나이다.” 하니, 중균은 굳이 가려고 하였다. 군요는 꿇고서 옷 뒷자락을 붙잡고 머물기를 청하였다. 담소로서 밤을 지내고, 이튿날 아침에야 비로소 어배동(於背洞)에 사는 진사 이종준(李宗準)임을 알고 서로 손을 붙잡고 크게 웃었다. 중균과 군요는 드디어 마음을 허락하는 친우가 되었다.
○ 김응기(金應箕)는 자가 백봉(伯奉)이다. 정유년에 급제하고 지금은 예조 정랑이다. 신라의 왕족 계통인 방경(方慶)의 아들이다.
○ 김응규(金應奎)는 자가 중성(仲聖)이다. 응기의 아우로서 의분심이 강하고 절개를 중히 여겼는데, 아버지 방경이 이를 매우 사랑했다. 정유년 나이 20세에 평안도의 향공(鄕貢) 시험에 세 번 연거푸 장원을 했다. 진사 회시(會試)에 들어가 시장(試場)에서 죽으니, 그때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아들 하나가 있다.
○ 총(摠) 종실은 자가 백원(百源)이다. 무풍 부정(茂豐副正)을 지냈는다. 태종(太宗)의 증손(曾孫)이니, 거문고의 재주는 정중(正中 정은(貞恩)의 자)과 비슷했으나, 그의 넓은 도량은 정중을 능가했다. 양화진(楊花津) 입구에 집을 짓고 손수 고기잡이 배를 저었으며 자호하여 서호주인(西湖主人)이라고 했다.
○ 현손(賢孫 종실)은 자가 세창(世昌)이요, 신요(神饒)의 아들이다. 벼슬은 명양 부정(鳴陽副正)에 이르렀다. 나이는 나보다 13세나 적다. 매양 법도에 따라 몸을 자제하였으며, 독실한 몸가짐은 대유(大猷 김굉필의 자)의 다음이었다. 일찍이 관례를 행하고자 하였으나, 대유가 이것을 저지시켰다.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한결같이 가례에 의하여 행하였다.
○ 윤신(尹信 종실)은 자가 임지(任之)다. 파주(坡州)에서 대대로 내려온 집으로 문숙공(文肅公)의 후예다. 몸가짐은 세창(世昌 현손(賢孫)의 자)과 비슷하였으나, 침착하고 원만한 것은 세창을 능가할 정도였고, 대유에게 사사(師事)하였다.
○ 이적(李勣)은 자가 중율(仲栗)이다. 시를 공부한 후에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공부하여 그 도(道)를 맛보고서부터는 시를 공부하지 않고 도에 뜻을 두었는데 오히려 시보다 경지가 심원하였다. 형식적인 일을 힘쓰지 않고 오히려 옛 사람을 벗삼았으며, 보통 때도 꼭 관대(冠帶)를 하고 당당한 행동을 하였다. 대유와 백연(伯淵)에게 사사하였다.
○ 허반(許盤)은 자가 문병(文炳)이다. 계묘년에 진사를 하였다. 성리학에 뜻을 두고 출세에 급급하지 않았다. 모든 일을 옛것을 본받으려 하였고, 대유를 사우(師友)로 삼았다. 대유는 그의 단아함이 천성에서 나왔음을 경복하였다. 음직으로 사직 참봉(社稷參奉)에 임명되었는데, 이때에 좌상 홍응(洪應)이 제조(提調)로 있었다. 문병이 그에게 말하기를, “왕세자는 나라의 저군(儲君)입니다. 훗날 동방 백성이 우러러 의지할 몸이온데 지금 내시와 더불어 거처하고, 서연(書筵)에 나갈 때가 적고 잡된 것을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때가 많사오니, 청하건대…….” 하였다.
○ 민구손(閔龜孫)은 자가 서경(瑞卿)이다. 본관이 여주(驪州)로 죽은 첨정 수(粹)의 아들이요, 자정(子挺)의 처남이다. 일찍이 자정에게서 시를 배웠는데, 얼마 아니하여 능하게 되자 또한 정중(正中 이정은(李貞恩)의 자)ㆍ정지(貞之 심정(沈貞)의 자)ㆍ중율(仲栗 이적(李勣)의 자) 등에 종유하였고, 대유에게 사사(師事)하였다. 위인이 단정하고 우아하여 더러움이 없었다.
○ 신용개(申用漑)는 본관이 고령(高靈)으로 자는 개지(漑之)이다. 대단히 침착하고 큰 도량이 있었다. 시와 문에 능하였다. 숙주(叔舟)는 바로 그의 할아버지이다. 그의 아버지 면(沔)은 시애(施愛)의 난에 죽었다.
○ 이주(李冑)는 본관이 고성(固城)으로 자는 주지(冑之)이다. 어질고 문에 능하였다. 용헌선생(容軒先生 이원(李原))의 증손이다.
○ 이원구(李元龜)는 낭옹(浪翁)이다.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이요, 참판 박팽년(朴彭年)은 바로 그의 외조부다. 두 집의 현능함이 이원구 한 사람에게로 모였다.
○ 이계맹(李繼孟)은 자가 희순(希醇)이다. 점필재(佔畢齋)가 그의 시문을 취택하였다. 전주(全州)에 살았는데 청수한 행동이 출중하였다.
○ 이세칙(李世則)은 자가 효옹(效翁)이다. 연안군(延安君) 숙기(叔琦)의 아들로 기개가 있었고 곧은 것을 좋아하였으며, 맑은 지조가 출중하였으며 시문에 능숙하였다.
○ 장세필(張世弼)은 자가 언경(彦卿)이다. 고양(高陽)에서 살았는데, 가난한 살림에도 반드시 술과 고기를 갖추어 어머니를 섬겼다. 젊어서 배우지 못하여 겨우 성명(姓名)을 기록할 정도였다 한다.
○ 최세명(崔世明)은 자가 보광(葆光)이다. 독서를 좋아하였으며 벼슬길에 나아감을 싫어하였다. 정유년에 진사를 하였다.
○ 안계송(安繼宋)은 자가 우윤(于胤)이요, 호는 박전(薄田)이다. 사람됨이 어리석어 시와 술 외에는 다른 것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를 알건 모르건 간에 모두 박전이라 하여 비웃었다. 그러나 박전은 그런 것도 몰랐다. 음직(蔭職)으로 돈녕부 직장(敦寧府直長)을 배명 받은 후 지금까지 17년이 되었으나, 승진을 못하고 있으니, 세리(勢利)에 담담함을 알 수 있다.
○ 신포(申誧)는 자가 지정(持正)이요, 호는 허주(虛舟)이다. 시와 그림에 조예가 있고, 집이 가난하고 술을 좋아하였다. 일찍이 스스로 장륙(莊六)이라 호하였는데, 중균(仲鈞)이 그 호를 좋아하여 술 한 병과 바꾸자고 청하니 지정은 허락하였다.
○ 구영안(丘永安)은 본관이 강릉으로 자가 중인(仲仁)이요, 호는 호은(壺隱)이니, 문장의 명성이 있었고 기축년에 생원 시험에 제2등으로 합격하였다. 벼슬과 공리를 싫어하였다. 또한 음양ㆍ추보(推步)ㆍ풍수ㆍ의술ㆍ선도ㆍ불도ㆍ승제(乘除 산술)의 법까지 섭렵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 심원(深源 종실)은 자가 백연(伯淵)이요, 호는 성광(醒狂) 또는 묵재(黙齋), 혹은 태평진일(太平眞逸)이라 하기도 하였다. 태종(太宗)의 현손(玄孫)으로 나와 동년생이나, 달과 날이 나보다 늦다. 경학에 밝고 조행(操行)이 있으며 겸하여 의술에도 통하였다. 사람됨이 충효하고 무술(巫術)이나 불도를 좋아하지 않았다. 평상시에도 관대를 하였으며 손에서는 책을 놓지 않았다. 전강(殿講) 때는 사서와 오경에 통달하여 명선대부(明善大夫)에서 주계 부정(朱溪副正)으로 진급하였다. 나이 25세에 전후 다섯 번이나 상소를 올려 다스리는 도를 논하였는데, 혹은 윤허를 받기도 하고 혹은 윤허를 얻지 못하기도 하였다. 또한 조정에서 숙모부(叔母夫) 임사홍(任士洪)이 무도하여 다른 마음을 품고 있음을 논난하다가 조부의 눈밖에 나서 장단(長湍)으로 귀양갔다. 또 이천(伊川)에서 임금께 글을 올려 병중의 부모를 가뵙기를 청하였는데, 그 말들이 간곡하고 지극하여 윤허를 얻었다. 정미년에 종친들만 보는 과거[宗親科]에서 경(經)ㆍ사(史)ㆍ강독에 제1등으로 뽑히어서, 임금께서는 약과 술을 내리셨고 계급은 2품으로 높아졌으나, 군(君)은 봉하지 않았으니 이전에 조부(祖父)에게 거스른 허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 강응정(姜應貞)은 자가 공직(公直)이며, 호는 중화재(中和齋)이다. 나보다 10여 세 위이다. 은진(恩津)에서 살았으며 효행으로 칭송을 받았다. 일찍이 어머니의 병에 3년 동안이나 띠를 풀지 않았으며, 약은 반드시 몸소 맛보고 바쳤다. 하루는 꿈에 천신(天神)이 마당에 내려와 공직에게 이르기를, “내일 오는 손님은 반드시 의술가이니, 너의 어머니 병을 그에게 물어라.” 하였다. 이튿날 아침 과연 한 소년이 왔는데, 이름은 원(元)이라 하며 스스로 윤왕동(輪王洞)에서 산다고 하며, 공직에게서 숙박하기를 청하므로 머무르게 하였다. 어머니의 병에 대하여 물어보니, 한 마디 말에 과연 의약자(醫藥者)임을 알게 되어 소년의 말대로 시험해 본 결과 15일 만에 병이 나았다고 한다. 뒤에 부모상에 있어 한결같이 가례를 좇아 행하여서 겨울에도 맨발로 지내니, 온 몸이 성한 곳이 없었다. 이 사실이 조정에까지 들리어 그 문에 효자의 정표(旌表)를 달았었고 집안의 병역을 면제해 주었다.
공직의 사람됨은 경서를 잘 외우며 사주ㆍ관상 등으로 인명(人命)을 예언하며, 또한 의술서를 섭렵하고 겸하여 지리 서적까지도 보았다. 젊어서는 태학에 노닐면서 장안의 준걸한 재사들과 더불어 주문공(朱文公)의 고사에 의거하여 향약(鄕約)을 짓기도 하고, 혹 월삭(月朔)에는 《소학》도 강론하였다. 그때 뽑힌 이는 다 한때의 명사들로서 김용석(金用石)은 자가 연숙(鍊叔)이요, 신종호(申從護)는 자가 차소(次韶)요, 박연(朴演)은 자가 문숙(文叔)이요, 손효조(孫孝祖)는 자가 무첨(無忝)이요, 정경조(鄭敬祖)는 자가 효곤(孝昆)이요, 권주(權柱)는 자가 지경(支卿)이요, 정석형(丁碩亨)은 자가 가회(嘉會)요, 강백진(康伯珍)은 자가 자온(子韞)이요, 김윤제(金允濟)는 자가 자주(子舟)인데 이들은 그 중에서 뛰어난 자이고, 그 나머지 사람은 다 기록하지 못한다. 세상에서 그들을 좋아하지 않는 자는 그들을 비방하여 혹은 소학계(小學契)라고 지목하기도 하고, 혹은 효자계(孝子契)로 지목하기도 하였으며, 공자(孔子)ㆍ사성(四聖)ㆍ십철(十哲)이라는 기롱도 있었다. 시골서 불우하게 지내며 늙도록 과거 시험을 보지 않다가 계묘년에 생원이 되어 훈도(訓導)가 되었다.
○ 안응세(安應世)는 본관이 죽산(竹山)으로, 자는 자정(子挺)이요, 호는 월창(月窓)인데, 또는 구로지인(鷗鷺至人) 또는 연파조도(煙波釣徒), 여곽야인(藜藿野人)이라고도 하였다. 나보다 한 살 아래다. 사람됨이 청수하고 담담하고 상쾌하며 가난한 생활에도 태연자약하여 분수를 달게 여겼으며, 명예와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선불(仙佛)의 도(道)를 배우지 않고 장기와 바둑을 즐겨하고, 시를 잘하는데 악부(樂府)에 더욱 뛰어났다. 일찍이 그는, “의롭지 못한 재물을 집안에 보태두는 것이라든지, 의롭지 못한 음식으로 오장(五臟)을 보(補)한다는 것은 더욱 범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였다. 자정의 마음가짐이 대체로 이와 같았는데, 흰 옥에 흠이 있는 격으로, 그는 주색(酒色)을 좋아하였다. 경자년에 진사를 하였는데 그해 9월에 죽으니, 나이가 26세였다. 그를 알고 모르고 간에 마음 아프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 채순(蔡恂)은 자가 숙부(叔孚)니, 양천(陽川)에 살았다. 경자년에 진사를 하였다. 사람됨이 과거를 중시하였다.
○ 한훈(韓訓)은 자가 사고(師古)요, 아명은 학이(學而)이다. 본관은 청주(淸州)로 서울에 살았으며, 시에 조예가 있고 병오년에 진사를 하였다.
○ 강흔(姜訢)은 자가 시가(時可)이다. 본관은 진주(晉州)로 관찰사(觀察使) 자평(子平)의 막내아들이다. 처음에는 밀양(密陽)에서 여경(餘慶)에게서 배웠고, 점필재(佔畢齋)에게서 두시(杜詩)를 배웠으며, 다음에는 덕우(德優)에게서 시를 배웠으며, 다음에 대유(大猷)에게서 《소학》을 공부하였고, 그 다음에는 시숙(時叔)과 공서(公緖)에게서 배웠으며 유극기(兪克己)의 여막에까지 가서 글을 읽었다.
○ 조자지(趙自知)는 본관이 평양(平壤)으로 자는 성지(性之)이다. 은혜 베풀기를 좋아하고 어진이를 좋아하며, 산수를 좋아하고 유희를 좋아하였으며, 공명을 좋아하지 않고 침울하여 말이 적었다. 여경에게서 배웠는데, 시에 능하였다.
○ 강백진(康伯珍)은 자가 우온(于韞)이다.
○ 김용석(金用石)은 자가 연숙(鍊叔)이다.
○ 이장길(李長吉)
○ 최충성(崔忠誠)은 자가 필경(弼卿)이다.
○ 노섭(盧燮)
○ 유방(劉房)
○ 조원기(趙元紀)
○ 조광림(趙廣臨)
○ 정붕(鄭鵬)


 

[주D-001]증자(曾子)의 역책(易簀) : 증자는 임종시에 대부의 대자리를 거두고 딴 자리를 바꾸어 깔고 죽었다.
[주D-002]자로(子路)가 결영(結纓) : 위(衛) 나라의 싸움에서 자로가 창에 맞아 관끈이 끊어졌는데, 자로는 “군자는 죽더라도 관을 벗어서는 안 된다.” 하고, 관끈을 매고 죽었다.

 

 

서계집 제8권
 잡저(雜著) 6수(六首)
석림암(石林庵) 상량문(上梁文)


누대가 신선의 거처와 비슷하니, 화려한 것은 한갓 업(業)만 지을 뿐이다. 쑥대가 족제비의 길을 막고 서 있으니, 고고(枯槁)함은 의당 인연을 따르기 마련이다. 한 줌의 띠풀을 덮는 것으로도 이미 충분하니, 오장기(五丈旗)를 세울 일이 뭐가 있으리오. 이에 암자를 짓기를 도모하니, 애오라지 여기에서 편히 쉬려 하노라. 여러 도인(道人)들은 인세(人世)를 떠나 물외(物外)에 노닐도다. 청산(靑山)과 녹수(綠水)는 가는 곳마다 고향이 아님이 없고, 곡방(曲房)과 동궁(洞宮)은 일평생 꿈속에서도 생각한 적이 없어라. 우연히 석천(石泉)의 빼어난 경치를 사랑하노니, 금사(金沙)의 기이한 경치보다 못하지 않도다. 세계는 무궁한데 서천(西天)의 영취산(靈鷲山)을 늘 제일로 꼽고, 방역(方域)은 구별이 있는데 동토(東土)의 선부봉(仙鳧峯)은 지금 짝을 찾기 드물도다. 비록 탁석(卓錫)의 옛 자취에 부끄럽긴 하지만 결사(結社)의 고사를 따를 만하도다. 300척이나 높게 세운 징관(澄觀)의 경영이 참으로 우습고, 어이하면 천만 칸을 얻을까 한 자미(子美)의 돌올(突兀)이 부러울 것 없도다. 시내의 구름은 방문으로 들어가고 산속의 아지랑이는 뜰에 가득하도다. 선지(禪枝)에는 뱁새가 잠시 편안히 깃듦을 기뻐하고, 기수(祗樹)에는 녹원(鹿苑)의 법륜(法輪)을 빨리 굴림에 놀라도다. 문득 파인(巴人)의 속된 노래에도 불구하고 부지런히 일하는 영장(郢匠)을 돕노라.

아랑위 들보를 동쪽으로 드니 / 兒郞偉抛梁東
선부봉 연못에 햇살이 붉은 노을을 쏜다 / 鳧池日射霞紅
나는 듯한 폭포가 산허리에서 쏟아지니 / 飛流直下半嶺
그 누가 한 가닥 무지개를 맑은 허공에 걸었는가 / 斷霓誰挂晴空

아랑위 들보를 서쪽으로 드니 / 兒郞偉抛梁西
관로가 앞 시내 저편에 있도다 / 官路只隔前溪
분주히 남북으로 오가는 사람들 / 擾擾南來北去
모두 보니 얼굴에는 먼지요 발에는 진흙이로다 / 摠看面埃脚泥

아랑위 들보를 남쪽으로 드니 / 兒郞偉抛梁南
푸른 못에 작은 바위의 그림자가 비췄구나 / 小巖倒影碧潭
늦봄이라 두견새는 바위 위에서 우는데 / 巖上杜鵑春暮
꽃비는 흩날려 선실로 들어가네 / 雨花飛入禪龕

아랑위 들보를 북쪽으로 드니 / 兒郞偉抛梁北
가로놓인 묏부리 천 길 우뚝 솟았도다 / 橫岡千仞峻仄
한송은 사철 내내 푸름을 변치 않으니 / 寒松不改四時
곧바로 쌍수와 함께 일색이로다 / 直共雙樹一色

아랑위 들보를 위로 드니 / 兒郞偉抛梁上
다만 하늘이 공활하도다 / 但覺天宇空曠
진종일 흐렸다 갰다 기약을 한 듯하니 / 鎭日陰晴如期
선성이 현신한 것보다 외려 낫다오 / 勝似仙聖現相

아랑위 들보를 아래로 드니 / 兒郞偉抛梁下
정원의 소쇄함이 더욱 좋도다 / 更喜庭院蕭洒
한가하여 포단에 앉아 편안히 조노니 / 無事蒲團穩眠
공연한 길손이 귀찮게 하는 일 어찌 있으랴 / 何曾閑客攪惹

삼가 바라건대, 상량(上梁)한 뒤에 산 빛은 더욱 푸르고 물빛은 더욱 맑으리라. 소나무 사립문이 늘 닫혀 있으매 곧 상천축(上天竺) 하천축(下天竺)으로 옮겨 가고, 초동의 노래가 서로 화답하매 문득 대승경(大乘經) 소승경(小乘經)을 읽으리라. 맹수와 독충은 모두 멀리 사라지고, 백족(白足)과 적자(赤髭)는 늘 탈이 없으리라. 두 재(齋)만으로도 거처하기 넉넉하리니, 천불(千佛)이 이곳을 보호하리라.


 

[주D-001]쑥대가 …… 있으니 : 《장자》 서무귀(徐无鬼)에 “더구나 인적도 없이 명아주 잎이나 콩잎이 족제비의 길을 막고 있는 먼 골짜기로 도망가 있는 사람은, 사람의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기뻐할 것이다.”라고 한 말이 보인다.
[주D-002]오장기(五丈旗) : 진(秦)나라의 아방궁(阿房宮)은 크기가 동서는 500보나 되고 남북은 50장이나 되어서 위로는 1만 명이 앉을 수 있고 아래로는 5장(丈)의 깃발을 세울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史記 卷6 秦始皇本紀》
[주D-003]금사(金沙) : 금사는 인도(印度)에 있는 아뇩달지(阿耨達池)를 가리키는데, 금빛 모래가 가득하다고 한다.
[주D-004]영취산(靈鷲山) : 불교의 성지(聖地)로 불리는 인도에 있는 산인데, 부처가 이곳에서 다년간 설법을 하였다고 한다.
[주D-005]선부봉(仙鳧峯) : 수락산에 있는 봉우리 이름이다.
[주D-006]탁석(卓錫)의 옛 자취 : 탁석은 석장(錫杖)을 꽂는다는 뜻으로, 곧 석장을 날려 터를 잡은 양(梁)나라 보지 선사(寶志禪師)의 고사를 가리킨다. 서주(舒州)에 있는 잠산(潛山)은 풍광이 매우 뛰어난 곳이다. 보지 선사와 백학도사(白鶴道士)가 잠산의 가장 빼어난 산기슭에 서로 터를 잡으려고 다투다가, 양 무제(梁武帝)의 주선으로 백학도사는 학(鶴)을 날려 그 자리로 보내고, 보지 선사는 석장을 날려 보내어 먼저 그 자리에 도착시키는 자가 터를 차지하기로 약속하였다. 그 결과 보지 선사의 석장이 백학도사의 학보다 먼저 산기슭에 날아가 꽂혔다고 한다. 《神僧傳》
[주D-007]결사(結社)의 고사 : 결사는 원래 승려들이 단체로 모여서 수행하는 것이다. 혜원법사는 동진(東晉)의 명승(名僧)이다. 혜원이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에 흰 연꽃을 심고 혜영(慧永)ㆍ유유민(劉遺民)ㆍ뇌차종(雷次宗) 등 18명과 백련사(白蓮社)라는 단체를 결성하였는데, 사영운(謝靈運)ㆍ도잠(陶潛)ㆍ육수정(陸修靜) 등도 참여하였다. 호계(虎溪)는 동림사 앞에 있는 시내로, 혜원법사가 손님을 전송할 때 이 시내를 건너지 않았는데 여기를 지나기만 하면 호랑이가 울었다 한다. 하루는 도잠ㆍ육수정과 함께 이야기를 하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호계를 지나 호랑이가 울자, 세 사람은 크게 웃고 헤어졌다는 고사가 있다.
[주D-008]300척이나 …… 우습고 : 한유(韓愈)의 송승징관(送僧澄觀) 시에 “불에 타고 물에 휩쓸려 아무것도 없는 터에 우뚝이 삼백 척이나 높게 솟았도다.〔火燒水轉掃地空 突兀便高三百尺〕”라고 한 구절이 보인다. 《韓昌黎集 卷7》
[주D-009]어이하면 …… 없도다 : 자미는 두보(杜甫)의 자(字)이다. 두보의 모옥위추풍소파가(茅屋爲秋風所破歌) 시에 “어이하면 너른 집 천만 칸을 얻어 천하에 가난한 선비들 크게 비호하여 모두 즐거운 얼굴로 풍우에도 움직이지 않고 산처럼 편안히 있을런가.〔安得廣厦千萬間 大庇天下寒士俱歡顔 風雨不動安如山〕”라고 한 구절이 보인다. 《杜少陵詩集 卷10》
[주D-010]선지(禪枝)에는 …… 기뻐하고 : 선지는 절에 있는 나뭇가지라는 뜻이다. 《장자》 소요유(逍遙遊)에 “뱁새가 깊은 숲 속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데 필요한 것은 나무 한 가지에 불과하다.〔鷦鷯巢於深林 不過一枝〕”라고 한 말이 보이는데, 이는 곧 석림암이 승려들이 잠시 머물 수 있는 곳이라는 말이다.
[주D-011]기수(祗樹)에는 …… 놀라도다 : 기수는 기원정사(祇園精舍)를 말하는데, 인도 중부 마가다국 사위성(舍衛城) 남쪽의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에 있는 절로, 부처와 그 제자들이 설법하고 수도할 수 있도록 수달장자(須達長者)가 세웠다고 한다. 녹원(鹿苑)은 녹야원(鹿野苑)을 말하는데, 석가가 성도한 지 삼칠일(三七日) 만에 처음으로 법륜(法輪)을 굴려 아야교진여(阿若憍陳如) 등 다섯 비구(比丘)를 제도한 곳이라고 한다. 이는 석림암이 설법을 할 수 있는 곳이라는 말이다.
[주D-012]파인(巴人)의 …… 불구하고 : 파인은 수준이 낮은 시를 가리킨다. 송옥(宋玉)의 대초왕문(對楚王問)이란 글에 고사가 보이는데, 어떤 사람이 영중(郢中)에서 처음에 하리파인(下里巴人)이란 노래를 부르자 그 소리를 알아듣고 화답하는 사람이 수천 명이었는데, 양아해로(陽阿薤露)를 부르자 화답하는 사람이 수백 명으로 줄었으며, 양춘백설가(陽春百雪歌)를 부르자 화답하는 사람이 수십 명으로 줄었다. 이와 같이 곡조가 높을수록 그에 화답하는 사람이 더욱 적었다고 한다. 여기서는 서계가 하찮은 재주에도 불구하고 상량문을 지음을 말한다. 《文選 卷45》
[주D-013]영장(郢匠) : 영장은 기량이 훌륭한 목공을 가리킨다. 《장자》 서무귀(徐无鬼)에 “영(郢) 땅의 사람이 코끝에 백토(白土)를 파리 날개처럼 묻혀 놓고 장석(匠石)을 시켜 깎아 내게 하였다. 장석이 바람을 일으키며 도끼를 휘둘러 마음대로 깎아 냈는데도 코를 조금도 다치지 않았고 영 땅의 사람도 전혀 동요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라고 하였다.
[주D-014]아랑위(兒郞偉) : 아랑위는 대들보를 여러 사람들이 ‘어영차’ 하고 힘을 모아 들 때 나는 의성어이다. 상하(上下) 사방(四方)의 여섯 방향으로 들보를 들기 때문에 육위(六偉)라 하기도 한다.
[주D-015]쌍수(雙樹) : 사라쌍수(沙羅雙樹)의 준말로, 학수(鶴樹)라고도 한다. 석가모니가 입멸(入滅)한 장소에 서 있었던 나무 이름으로, 사찰 경내에 있는 나무를 가리킨다.
[주D-016]백족(白足)과 적자(赤髭) : 모두 고승(高僧)을 가리키는 말이다. 백족은 위(魏)나라의 승려 담시(曇始)로, 발이 얼굴보다 깨끗하였다고 한다. 비록 흙탕물 속에 맨발로 다녀도 발이 전혀 더러워지지 않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백족화상(白足和尙)’이라고 불렀다. 《神異下 釋曇始》 적자는 천축(天竺)의 불타야사(佛陀耶舍)로 수염이 붉었다고 한다. 《비파사(毗婆沙)》를 잘 해설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적자비파사(赤髭毗婆沙)’라고 불렀다. 《高僧傳 譯經中 佛陀耶舍》

 

서계집 제8권
 잡저(雜著) 6수(六首)
매월당(梅月堂) 영당(影堂) 권연문(勸緣文)


옛날 우중(虞仲)은 머리를 깎고 문신(文身)을 한 채 만이(蠻夷)에 거처하였고, 백이(伯夷)는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首陽山)에서 굶어 죽었는데, 공자가 백이에 대해서는 ‘인(仁)을 구하여 인을 얻었다.’고 허여하고, 우중에 대해서는 ‘청(淸)에 맞았고 권(權)에 맞았다.’고 칭찬하였다. 이 두 분은 모두 인륜의 지극한 변고를 만나고 천하의 극심한 어려움에 처해 마음속으로 잘 헤아려 각각 편안한 바대로 행하고 세속의 이목을 놀라게 하는 것을 돌아보지 않은 분들이다. 혹 백이의 마음을 가지고 우중의 행동을 하여 인(仁)을 얻은 데다 청과 권에 맞아 두 분의 극치를 하나로 합할 것 같으면 세상에 무엇이 이보다 더할 수 있겠는가. 청한자(淸寒子)로 말하면, 태어난 지 다섯 살에 신동으로 세종(世宗)에게 인정을 받았다. 세조(世祖)가 즉위함에 미쳐 홀로 세상에 뜻이 없어 산속으로 도망가 절에 은둔하여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으니, 청한자야말로 이른바 백이의 마음을 가지고 우중의 행동을 한 분이 아니겠는가.
일찍이 논해 보건대, 길 주서(吉注書 길재(吉再))는 고려(高麗)에 대한 절개를 지켜 본조(本朝)에 벼슬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이제(夷齊)의 지조에 견주고 있다. 그러나 그 우뚝하고 빼어난 행실과 문채 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말하면 청한자보다 오히려 조금 못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길 주서를 남달리 표장(表章)하고 그의 사당을 크게 지어서 금오산(金烏山) 아래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반드시 예를 표하는데, 더구나 청한자와 같은 분은 참으로 옛날의 이른바 “특립독행(特立獨行)하여 천지를 다하고 만고에 뻗치도록 돌아보지 않을 사람”임에 있어서이겠는가. 그 유풍(遺風)과 여열(餘烈)이 지금까지도 쇠퇴하지 아니하여 여자나 어린아이, 어리석은 하인들조차도 그 사실을 다 알고 있다. 그런데 도리어 200여 년 동안 적적하여 그분을 표장하여 특별히 대우한 일이 있었다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으니, 시대가 먼 사람에 대해서는 잘 알고 시대가 가까운 사람은 소홀히 여기는 것인가, 아니면 혹 꺼리는 점이 있어 돌아볼 겨를이 없어서란 말인가. 앞의 말대로라면 아, 반드시 이럴 리가 없고, 뒤의 말대로라면 세조(世祖)와 태조(太祖)는 천명에 순응하고 민심에 순응한 것이 똑같으니, 두 분이 스스로 자신의 지조를 깨끗이 한 것이 또 두 임금의 성덕(盛德)에 무슨 해가 되기에 꺼린단 말인가. 더구나 이미 앞사람에 대해서는 꺼리지 않았으면서 유독 뒷사람에 대해서만 꺼린단 말인가. 청한자가 세속을 떠나 은거하였을 당시 세조가 맞이하여 불렀고, 측간에 빠져 도망치자 마침내 내버려 두고 묻지 않았다. 이는 거짓으로 미치고 병을 핑계하여 세상을 조롱하고 자기 뜻대로 행동한 태도가 진실로 이미 세조의 큰 도량 속에 포용을 받은 것인데, 오늘날에 와서 꺼릴 필요가 뭐가 있단 말인가.
선생은 만년에 홍산현(鴻山縣) 무량사(無量寺)에 살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선생이 손수 그린 진영(眞影)이 아직까지 절에 있었다. 근래에야 비로소 현청(縣廳) 곁에 영당(影堂)을 세우고 절에서 옮겨 와 이곳에 봉안(奉安)하였다. 이에 조금이나마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할 만하고 앞서 몹시 개탄하며 아쉬워하던 점이 거의 풀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무량사는 곧 선생이 살다가 세상을 떠난 곳인데 마침내 유상(遺像)을 이곳에서 옮겨 갔으니, 그 자취가 없어지고 말았다. 따라서 유인(幽人) 일사(逸士)가 이 산속에 오면 선생의 모습을 볼 수 없어 후세 사람으로서 사모하는 정성을 드릴 수 없을 것이니, 깊이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선생이 처음 수락산(水落山)에 은거하였을 때 매월당(梅月堂)을 세우고 거처하였는데, 동봉자(東峯子)라고 자호(自號)한 것이 역시 이 때문이며, 혹 서산(西山) 채미(採薇)의 유풍에 은미한 뜻을 깊이 담은 것일 수도 있다. 당(堂)이 무너진 지는 이미 오래이며 당을 세웠던 터만 아직까지 깎아지른 벼랑 사이에 남아 있는데, 돌을 포개 섬돌을 만들어 견고하기가 어제 쌓은 듯하고, 늙은 등나무와 우거진 가시나무가 그 위에 덮여 있으니, 그곳을 찾는 자들은 모두 감개와 슬픔을 억누르지 못할 것이다. 다만 그곳이 몹시 험하기 때문에 벽곡(辟穀)하면서 고행(苦行)할 사람이 아니라면 실로 살 수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후대에 그 옛 모습을 복원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정절(靖節 도잠(陶潛))은 일세(一世)의 고사(高士)요, 혜원(惠遠)은 방외(方外)의 일인(逸人)이다. 그러나 서로 형해(形骸)를 벗어난 교유를 하였으니, 그 경모(傾慕)한 뜻이 치의(緇衣)와 소의(素衣)라고 해서 혹시라도 틈이 있지 않았다. 하물며 빈도(貧道)는 선생보다 수백 년 늦게 태어났지만 옷 색깔도 다르지 않고 성정(性情) 또한 같다. 비록 선생의 취향은 문제 삼을 점이 있겠으나, 선생이 지킨 천지의 떳떳한 도리는 끝내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선생을 보면 그 풍모에 감동하여 망연자실할 사람이 어찌 없겠는가. 이 때문에 앙모해 마지않은 나머지 이 일에 힘을 다할 것을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방외를 유람하여 이 산에 오는 사람들로 하여금 유석(儒釋)에 상관없이 모두 배회하고 우러러보면서 만분의 일이나마 선생의 맑은 기상을 얻어 나약한 사람은 이를 통해 뜻을 세우고 완악한 사람은 이를 통해 청렴해질 수 있도록 하는 바이다. 장차 산의 서쪽 기슭에 작은 영당(影堂)을 세우고 홍산(鴻山)의 진영(眞影)을 전사(傳寫)하여 그 속에 봉안하려고 한다. 그렇게 되면 거의 선생의 유풍이 영원토록 이 산에서 끝끝내 사라지지 아니하여, 유람차 이곳에 오는 유인 일사들이 무량사의 경우처럼 사모하는 정성을 드릴 곳이 없어 서글퍼하며 어찌할 줄 모르는 데에까지는 이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나는 성품이 비루하고 재력이 부족하여 주머니를 돌아봐도 씻은 듯 비었으며 사람을 감동시킬 기개마저 없는 터라, 끝내 미천한 뜻을 이루지 못할까 두렵다. 그렇다고 현혹하고 우롱하여 어리석은 중생들을 유혹함으로써 구차하게 이 일을 이루고자 한다면 이는 선생에게 수치만 끼칠 것이요, 또한 빈도가 달가워하는 일이 아니다. 이에 번다함을 꺼리지 않고 이처럼 정중하게 말씀을 드리는 바이다.
삼가 상하 식자(識者) 여러분들은 주선하는 사람이 비루하다 해서 그 의리마저 하찮게 보지 말고 돈이나 곡식을 출연(出捐)하되, 적으면 적은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한결같이 재량껏 도와주기를 바란다. 그렇게 해 준다면 날아갈 듯한 당우(堂宇)가 불일간에 완성되어 그 엄연하고 단아한 모습에 보는 이들이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될 것이요, 억만년 후대까지 청풍(淸風)을 떨치고 덕을 좋아하는 한 가지 일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매우 바라 마지않는 바이다.


[주D-001]우중(虞仲)은 …… 칭찬하였다 : 우중은 곧 태백(泰伯)과 함께 형만(荊蠻)으로 도망한 중옹(仲雍)을 말한다. 오(吳)나라에서 머리를 깎고 문신을 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살았는데, 공자(孔子)가 평하기를, “숨어 살면서 말을 함부로 하였으나, 몸은 깨끗함에 맞았고 벼슬하지 않음은 권도(權道)에 맞았다.” 하였다. 《論語 微子》 백이는 고죽군(孤竹君)의 아들로,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멸망시키자 주나라의 녹을 먹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주나라를 떠나 수양산에 숨어 살다가 끝내 굶어 죽었다. 자공(子貢)이 “백이와 숙제(叔齊)는 어떠한 사람입니까?” 하고 묻자, 공자는 “옛날의 현인이시다.” 하였다. 자공이 “후회하였습니까?” 하자, “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또 어찌 후회하였겠는가.”라고 하였다. 《論語 述而》
[주D-002]특립독행(特立獨行)하여 …… 사람 : 한유(韓愈)의 백이송(伯夷頌)에 “백이로 말하면 우뚝이 서고 홀로 행하여〔特立獨行〕 천지를 다하고 만고에 뻗치도록 그르다 할지라도 돌아보지 않을 자이다.”라고 한 말이 보인다.
[주D-003]서산(西山) 채미(採薇) : 서산은 수양산을 가리키고, 채미는 백이 숙제가 수양산에 은둔하여 고사리를 캐 먹을 당시 지었다고 하는 ‘채미가(採薇歌)’를 말한다. 《史記 卷61 伯夷列傳》
[주D-004]치의(緇衣)와 소의(素衣) : 치의는 검은 옷으로 승복(僧服)을 말하고, 소의는 흰옷으로 속인의 복장을 말하는데, 혜원은 승려이고 도잠은 속인이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D-005]나약한 …… 바이다 :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백이는 성인(聖人)의 맑은〔淸〕 자이다.” 하였고, 또 “백이의 이러한 풍도를 들으면 완악한 자는 청렴해지고 나약한 자는 입지(立志)를 갖게 된다.” 하였다.

 

서계집 제8권
 기(記) 4수(四首)
석림암기(石林庵記)


수락산(水落山) 석림암(石林庵)은 승려 석현(錫賢)과 그 문도 치흠(致欽)이 세운 암자로, 이름은 내가 지었다. 수락산은 경성(京城)에서 30리 동쪽에 자리하여 삼각산(三角山), 도봉산(道峯山)과 더불어 솥발처럼 솟아 있다. 비록 깎아지른 형세는 두 산보다 조금 못하지만 수석(水石)의 경치는 수락산이 으뜸이니, 이 산의 명칭은 이 때문에 얻어진 듯하다. 그러나 이름이 도리어 두 산에 가려져 세상에서 이 산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 요즘 사람들이 또한 이 산에 유람하러 오지 않는다.
수락산 동쪽에는 예전에 매월당(梅月堂)과 흥국사(興國寺), 은선암(隱仙庵) 등 몇 개의 절이 있었다. 매월당은 곧 김열경(金悅卿 김시습(金時習))이 거처하던 곳인데, 세월이 오래되어 이미 없어졌다. 열경은 이 산을 매우 좋아하여 ‘동봉(東峯)’이라 자호(自號)하였을 정도이다. 흥국사가 아주 컸으나 지금은 역시 없어지고, 단지 ‘성전(聖殿)’이란 곳만 무너지지 아니하여 승려 두셋이 살고 있을 뿐이다. 은선암은 후대에 세워졌기 때문에 그런대로 온전하여 지금 16, 7명의 승려가 살고 있다. 그러나 산 서쪽에는 유독 하나의 절도 없다. 서북쪽 봉우리 아래에 절터가 남아 있기는 하나 또 언제 세워졌는지는 모르며 지금은 절이 없다.
내가 석천(石泉)에 거처를 잡고 보니, 산 서쪽에 해당된다. 바위와 골짝이 그윽하고 시내와 폭포가 기이하여 경성으로부터 3, 4십 리 사이 삼각산과 도봉산 안팎에 있으면서, 세상에 명성을 독차지하여 사람들이 사모하고 구경하는 여러 샘과 골짝도 이곳에는 견줄 수 없으니, 이는 수락산만의 가장 빼어난 경치가 될 뿐만이 아니다. 내가 홀로 이곳의 경치가 몹시 빼어나다고 여겨 왔지만, 아쉽게도 아직까지 산을 빛내는 이름나고 아름다운 가람이 없다. 그리하여 일찍이 은선암에 이르러 노승(老僧)들과 얘기를 나누며 이를 매우 한스럽게 여겼는데, 그때 마침 석현이 곁에 있다가 묵묵히 생각하는 바가 있는 듯하였으니, 이미 마음속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던 듯하다.
오래 뒤에 그 문도 치흠이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지난날 선생의 말씀에서 석현 스님도 느낀 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평소에 병이 많아 몸소 할 수 없어서 저로 하여금 절을 짓도록 하였습니다. 지금은 단지 절을 지을 만한 터를 찾지 못했을 따름입니다.” 하였다. 몇 달 뒤 치흠이 또 와서 말하기를, “절터를 찾았습니다. 채운봉(彩雲峯) 서남쪽 산속으로, 직소봉(直小峯)과 향로봉(香爐峯)의 북쪽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명년에 재목(材木)을 모아 일을 시작할 터이니, 선생께서는 기다려 주십시오.” 하였다.
그해 가을 내가 통진 현감(通津縣監)을 사직하고 떠날 때 남은 녹봉으로 그 비용을 조금 보태 주었는데, 한 해 뒤에 돌아오니 암자가 완성되었다. 두세 칸 띳집이 바위를 등지고 골짝을 향해 있어 한적하게 진속(塵俗)을 벗어난 정취를 자아내니,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다. 그리하여 즉시 이름하기를 ‘석림암’이라 하였다.
아, 이 산은 천지와 더불어 영원히 존재하니, 그 승경이 애당초 옛날이라 해서 더 낫고 지금이라 해서 더 못하지 않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이 산을 사랑할 줄 모르고 이 산을 좋아한 자는 오직 열경 한 사람일 뿐이었는데, 열경이 죽은 지가 또 300년이나 되니 열경을 이어 다시 이 산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이 암자를 지은 것이 열경과 비교하여 그 뜻이 어떠한가. 석현과 치흠은 혹 알 수 있을 것이기에 나는 한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또 옛날 혜원법사(惠遠法師)가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에 머물 때, 종유(從遊)한 이가 도연명(陶淵明)이었다. 혜원이 결사(結社)할 때 연명이 그 모임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는데, 혜원이 계율을 지키느라 객을 만날 적에 술상을 차린 적이 없었으나 유독 연명을 위해서만은 술상을 차렸으며, 전송할 적에 자신도 모르게 함께 호계(虎溪)를 넘었으니, 그 행적이 또한 몹시 기이하다 하겠다. 형해(形骸)의 굴레를 벗어나 서로 교유한 사이가 아니라면 이러할 수 있었겠는가. 석현의 청담(淸談)과 운치(韻致)는 비록 혜원에 훨씬 미치지 못하지만, 진실무위하여 속진에 물들지 않은 점에 있어서는 유사하다. 비루한 나로 말하면 어찌 감히 망녕되이 고인(古人)에 견주겠는가. 다만 석현과 서로 기약하는 것이 또한 연명과 혜원 사이의 교유와 같기를 바랄 뿐이다.


[주D-001]혜원법사(惠遠法師)가 …… 넘었으니 : 혜원법사는 동진(東晉)의 명승(名僧)이다. 혜원이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에 흰 연꽃을 심고 혜영(慧永)ㆍ유유민(劉遺民)ㆍ뇌차종(雷次宗) 등 18명과 백련사(白蓮社)라는 단체를 결성하였는데, 사영운(謝靈運)ㆍ도잠(陶潛)ㆍ육수정(陸修靜) 등도 참여하였다. 호계(虎溪)는 동림사 앞에 있는 시내로, 혜원법사가 손님을 전송할 때 이 시내를 건너지 않았는데 여기를 지나기만 하면 호랑이가 울었다 한다. 하루는 도잠ㆍ육수정과 함께 이야기를 하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호계를 지나 호랑이가 울자, 세 사람은 크게 웃고 헤어졌다는 고사가 있다.

서계집 제8권
 기(記) 4수(四首)
석천동기(石泉洞記)


석천동(石泉洞)은 잠수(潛叟)가 사는 곳이다. 잠수가 조정에서 시종(侍從)으로 벼슬한 지 10년이었는데, 어느 날 병으로 물러나 선부봉(仙鳧峯) 아래에 은거하고는 사는 곳의 샘물을 ‘석천(石泉)’이라 이름하고 이어 그 골짜기를 ‘석천동(石泉洞)’이라 이름하였다. 이 지역이 도성의 동쪽에 해당되기 때문에 또 그 산등성이를 ‘동강(東岡)’이라 하고, 시내를 ‘동계(東溪)’라 하였으며, 또 이곳에 잠수가 산다고 하여 그 물을 ‘잠수(潛水)’라 하고 언덕을 ‘잠구(潛丘)’라 하였다.
‘석천’이라 이름한 까닭은 산속의 뭇 샘물이 모여 이 시내가 되었고, 온 산이 모두 바위인데 시냇물이 구불구불 흘러서 바위를 따라 오르내리며 담(潭)이 되기도 하고 폭포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석천’이라 이름한 것이다. 맑은 샘물이 바위 위로 흐르고 하얀 바위가 샘물에 씻겨 샘물은 바위 때문에 더욱 맑고 바위는 샘물 때문에 더욱 희니, 아름답고 즐겁도다. 잠수가 사는 곳이여. 잠수는 날마다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끌며 아침저녁으로 수석(水石) 사이를 소요(逍遙)하는데, 질병과 우환이 있지 않으면 이곳에 거닐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그야말로 즐거워 늙음이 닥쳐오는 줄도 모르는 자라 하겠다.
시내에서 북쪽으로 8, 9보 떨어진 곳에 집이 있으니 곧 잠수가 거처하는 집이요, 집에서 동쪽으로 수백 보 떨어진 곳에 언덕이 있으니 곧 잠수의 무덤자리이다. 이 언덕을 ‘낙구(樂丘)’라 하고, 이 집을 ‘정사(精舍)’라 하였으니, 잠수가 살아서는 여기에 거처하고 죽으면 이곳에 묻힐 것이다. 비록 삽을 메고 따라다니게 한 유령(劉伶)과는 다를 법하지만, 잠수의 경우 또한 자신을 위한 도모를 잘 하였다고 할 만할 것이다.
그 회일(回日)ㆍ영월(迎月)ㆍ백학(白鶴)ㆍ채운(彩雲)ㆍ선부(仙鳧) 등 봉우리들의 기이함과, 선유(仙游)ㆍ도장(道藏)ㆍ토운(吐雲)ㆍ서하(栖霞) 등 계곡들의 빼어남과, 취선대(聚仙臺)ㆍ초학대(招鶴臺)와 수옥정(漱玉亭)ㆍ난가정(爛柯亭)과, 객성기(客星磯)와 음우담(飮牛潭)과 크고 작은 폭포와 샘물의 빼어난 경치로 말하면 도성 근교에서 보기 드문 경치인데, 잠수가 골라서 이름을 붙인 곳까지 합하면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리하여 지금 우선 그중에 한두 곳을 기록하여 후인(後人)들로 하여금 잠수가 이곳에서 즐거워한 바를 알게 하노라.


 

[주D-001]잠수(潛叟) : 잠수는 박세당의 호이다. 무신년(1668, 현종 9) 1월 40세에 벼슬을 버리고 양주 수락산(水落山) 석천동(石泉洞)에 은거하였다

 

서계집 제7권
 서(序) 9수(九首)
수락산(水落山)을 유람하며 지은 시의 후서


삼각산(三角山)과 도봉산(道峯山)은 도성 근교의 우뚝한 산으로 수락산(水落山)과 더불어 솥발처럼 높이 솟아 있다. 그리하여 사방의 여러 산이 옷깃을 여미고 빙 둘러 향하고 있으니, 크고 작은 산들이 모인 형상이 마치 아들 손자들이 모여 있는 것과 같다. 우뚝 솟은 형세로는 삼각산과 도봉산이 갑을(甲乙)을 다투고 유심(幽深)하고 기이(奇異)함으로는 동봉(東峯)이 으뜸이다. 비록 함양(咸陽)을 누르고 있는 저 종남산(終南山)과 태화산(太華山)이나 낙양(洛陽)에 짝하고 있는 숭산(嵩山)과 소실산(少室山)인들 그 장엄하고 수려함으로 말하면 수락산만 못할 것이다.
일찍이 몇몇 사람들과 수락산 정상에 올랐었는데, 초입에서는 구불구불 깊숙이 들어가 마치 우물 속에 앉아 있거나 무덤 속에 떨어진 듯하고, 정상에 오르자 온 사방이 훤하게 트여 마치 바람을 타고 신선이 된 듯하였으니, 그야말로 인간사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성곽은 아련하고 집집마다 저녁연기 피어나며 강물은 구불구불 천 리를 달려 바다로 흐르며, 서남쪽으로는 운해가 자욱하고 동북쪽으로는 이내가 아득하여, 눈앞에 펼쳐지는 기묘하고 아름다운 경광이 발길을 따라 다른 것으로 말하면, 심목(心目)으로 그 요체를 잡을 수 없고 그림으로 그 절경을 그려 낼 수 없으니, 또 어찌 우내(宇內)의 아름다운 볼거리가 아니겠는가.
때는 마침 가을 경치가 저물어 강산(江山)이 맑고 쓸쓸한데 벼랑에는 붉은 단풍 시들고 연못에는 누런 국화 떨어지니, 오싹하여 감회를 자아내고 처량하여 감상(感傷)에 젖어든다. 더구나 청한자(淸寒子 김시습(金時習))의 구서(舊棲)에는 등나무가 늙고 수목이 시들며 사람은 가서 자취가 없는데, 서글프게 홀로 와 만 길 푸른 절벽을 마주하고 천고(千古)에 남긴 자취를 생각하노라니, 더욱 사람으로 하여금 개연히 서글픈 감회에 젖어들게 한다. 밤에 선원(禪院)에서 묵은 다음 아침에 부지(鳧池)에서 물을 마시고 아쉬운 마음에 서성이며 차마 떠나지 못하는 듯이 하는 것은 인정(人情)이 그러한 것인가. 아니면 산천(山川)이 그렇게 만드는 것인가. 하산하여 시 약간 수를 지었다.
정사년(1677, 숙종 3) 9월 그믐에 후서(後序)를 쓰노라. 서계초수(西溪樵叟).

 

 서계집 제3권
 시(詩)○석천록 중(石泉錄中)
지난해부터 여기에 동봉(東峯)의 영당(影堂)을 경영하였다. 호남의 서 처사(徐處士 서봉령(徐鳳翎))가 듣고서 기뻐하며 선배들이 동봉의 일을 읊은 시 및 내가 지은 장단(長短)의 절구시ㆍ율시ㆍ고시에 차운한 것이 총 7수인데, 깊은 감동을 편 데다 아울러 장려하는 뜻을 담았다. 그 시를 반복하여 읊음에 고무가 되고, 이어서 부끄러워져 문득 이제 화운을 한다. 처사께서 본디 나를 알지 못하는데도 나의 시에 화운해 지어 준 것이 이번이 두 번째이니, 스스로 분에 넘치는 복이라고 생각한다. 8수


고사리가 정말 영약이라고 내가 그리 말하노니 / 薇眞靈藥我云然
서산에 불사의 신선이 계심을 보았기 때문이지 / 見有西山不死仙
동봉에게 복련법을 전수하여서 / 傳授東峯服煉法
함께 벽운 창공에 노닐고 있구나 / 相携游戲碧雲天

기상이 신위처럼 유난히 특출하니 / 氣高莘渭獨超然
그대는 백이 숙제와 같은 수준의 신선일레 / 君與夷齊一等仙
유상을 와서 본 이 그 몇이런가마는 / 遺像來瞻人幾許
도리어 저마다 촌심의 충정을 알리라 / 還須各認寸心天
고옥(古玉) 선생 시에 화운하다.

미친 체하며 터뜨린 통곡을 성상이 받아 주셨으니 / 佯狂痛哭聖能容
재단을 더럽힘은 마치 공경치 않은 듯하였지 / 沾汚齋壇似不恭
내가 백년 뒤에 이 사당을 짓는 것은 / 我作祠堂百歲後
명주께서 이 옹 알아주심 드러내고자 함이지 / 擬彰明主識斯翁

세인들은 도연명이 시상에 누운 걸 부러워하는데 / 世憐陶令臥柴桑
더구나 그대는 산사의 승방에 종적을 숨겼네 / 況子逃蹤竺老房
《이소경》을 이어 은거의 뜻 펴야 마땅하지만 / 合續離騷發幽隱
애석하게도 반양에 필적할 문장 솜씨 없구나 / 惜無辭理似班揚
상촌(象村) 상국(相國) 시에 화운하다.

오월 지역은 강산이 훌륭하여 / 吴越江山勝
삼고에다 또한 정자까지 있다네 / 三高亦有亭
그대 위해 누가 뜻을 세워 / 爲君誰刱意
이 푸른 몇 봉우리를 대하게 하나 / 對此數峯靑
현곡(玄谷) 사장(詞丈) 시에 화운하다.

동봉 아래 살면서부터 / 自住東峯下
수석의 빼어남을 더욱 사랑했지 / 尤憐水石奇
이로 인해 청은의 노옹이 / 因懷淸隱老
성명한 시대에 고결하게 은둔함을 사모했노라 / 高遯聖明時
진영엔 남기신 필적이 전하고 / 眞像傳遺筆
새로운 사당은 옛터에 세우네 / 新祠傍故基
못난 내가 품고 있는 이 뜻이 / 區區抱此意
멀리 과분한 시에 부끄럽다오 / 遙愧過情詩
청계도인(淸溪道人) 시에 화운하다.

옛날 현자가 수양산에서 굶주림은 / 昔賢餓首陽
오직 인을 구하기 위해서이지 / 只爲求仁也
청은께서 그 정신 계승하시니 / 淸隱復繼之
천고에 짝할 이 드물어라 / 千載少似者
탕 임금 마음이 스스로 부끄러우니 / 湯心猶自慙
뒷사람에게 빌미를 줄까 해서이지 / 恐爲後人藉
이런 까닭에 세 분의 뜻 중에서도 / 所以三子意
이 일이 유독 확고하지 / 此事獨牢把
백호(白湖)의 〈압구정(狎鷗亭)〉에 화답하여 차운하다.

골짜기에 사당이 새로이 지어지니 / 祠屋新成寄谷中
누군들 그대의 높은 풍모 우러르지 않으랴 / 何人不仰子高風
와룡의 유상에서 전대의 일을 헤아리나니 / 臥龍遺像推前事
중론이 떠들썩한 오늘 동봉 어른을 기다리지 / 衆口紛紜待一翁
〈송유상수찬(誦遺像手贊)〉에 화운하다.


[주C-001]동봉(東峯) :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호이다. 서계는 동봉을 존경하여 영당(影堂)을 세웠는데, 이에 대해서는 《서계집》 권8 〈석림암기(石林庵記)〉와 〈매월당(梅月堂) 영당(影堂) 권연문(勸緣文)〉 등에 자세한 전말이 소개되어 있다.
[주D-001]불사(不死)의 신선 : 은(殷)나라 말기 고죽군(孤竹君)의 두 아들인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말한다. 처음 주 무왕(周武王)이 은나라를 칠 적에는 무왕의 말고삐를 끌어당기며 간하였고, 무왕이 끝내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차지한 뒤에는 의리상 주나라의 곡식을 먹을 수 없다 하여 수양산(首陽山)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으며 은거하였다. 그때 “저 서산에 올라가서, 고사리를 캐도다.[登彼西山兮 采其薇矣]”라는 노래를 불렀다. 《史記 卷61 伯夷列傳》 여기서는 두 현자가 비록 죽기는 하였으나 그 명성은 천고에 남아 영원하므로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주D-002]복련법(服煉法) : 신선술의 하나로, 연단을 복용하여 불로장생을 꾀하는 방술이다.
[주D-003]신위(莘渭) : 신야(莘野)에서 농사짓다가 탕(湯) 임금의 재상이 되었던 이윤(伊尹)과 위수(渭水)에서 낚시질하다 문왕(文王)의 재상이 된 강 태공(姜太公)을 가리킨다.
[주D-004]고옥(古玉) : 정작(鄭碏, 1533~1603)으로,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군경(君敬), 호는 고옥이다. 술과 시를 즐겨 주선(酒仙)의 호칭을 얻었고, 특히 초서와 예서를 잘 썼다. 의술에 뛰어나서 1596년(선조29)에는 《동의보감》 편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벼슬은 좌랑(佐郞)에 이르렀다.
[주D-005]반양(班揚) : 한(漢)나라 때 사부(辭賦)로써 매우 명성이 높았던 반고(班固)와 양웅(揚雄)을 합칭한 말이다.
[주D-006]상촌(象村) : 신흠(申欽, 1566~1628)으로,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경숙(敬叔), 호는 상촌ㆍ현옹(玄翁)ㆍ방옹(放翁)이다.
[주D-007]삼고(三高) : 오강삼고(吳江三高)를 말한다. 즉 오강 지역에 살았던 세 사람의 고사(高士)를 가리키는 말인데, 전국 시대의 범려(范蠡), 진(晉)나라의 장한(張翰), 당(唐)나라의 육귀몽(陸龜蒙)을 말한다. 뒤에 삼고사(三高祠)를 세워 이들을 기렸다.
[주D-008]정자 : 수홍정(垂虹亭)을 말한다. 오강현(呉江縣) 장교(長橋)에 있는 정자로, 송나라 경력(慶曆) 중엽에 현령 이문(李問)이 건립하였다.
[주D-009]현곡(玄谷) : 조위한(趙緯韓, 1567~1649)으로,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지세(持世), 호는 현곡이다. 벼슬이 공조 참판에 이르렀으며, 80세에 자헌대부에 오르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냈다. 글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해학(諧謔)에도 능하였다.
[주D-010]청은(淸隱) : 김시습(金時習)의 별호가 벽산청은(碧山淸隱)이라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주D-011]청계도인(淸溪道人) : 양대박(梁大樸, 1544~1592)으로, 자는 사진(士眞), 호는 송암(松巖)ㆍ죽암(竹巖)ㆍ하곡(荷谷)과 청계도인이다.
[주D-012]백호(白湖) : 임제(林悌, 1549~1587)로,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자순(子順), 호는 백호이다.
[주D-013]와룡(臥龍)의 유상(遺像) : 여산(廬山) 와룡담(臥龍潭) 곁에 와룡암(臥龍庵)이라는 암자가 터만 남아 있었다. 주자가 사재(私財) 10만 전(錢)을 덜어서 서원은자(西原隱者) 최가언(崔嘉彦)을 시켜 중수하게 한 뒤, ‘와룡’이라는 이름이 제갈량의 호와 같다 하여 이곳에 제갈량의 화상을 안치하게 했던 고사가 있다. 《晦庵集 卷79 臥龍庵記》 여기서는 수락산 동봉 자락에 동봉(東峯)의 영당을 경영하여 김시습의 화상을 안치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서계집 제4권
 시(詩)○석천록 하(石泉錄下)
약천(藥泉)의 시에 차운하여 신 상인(信上人)에게 주다


회운동은 따로 하나의 별천지니 / 晦雲也自一乾坤
솔바람 서늘하고 꽃기운 따뜻하다오 / 松籟涼爭花氣溫
고승이 늘 석장을 걸어 두기에 알맞으니 / 只合高僧常掛錫
속사들 멀리서 수레를 돌리게 해야 하리 / 須敎俗士遠回轅


연려실기술 제23권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광해군을 안치하다. 세자를 폐하고 사사하다. 붙임


3월 19일에 부원군들이 합계하기를, “폐주ㆍ폐비ㆍ폐동궁ㆍ폐빈 세자의 처 를, 마땅히 대비의 하교대로 각 곳에 위리안치해야 할 것이지마는, 신들이 거듭 생각해 보건대 먼 지방 외딴 섬에는 뜻밖의 환이 없지 않겠으니, 가까운 교동(喬桐) 등지에 안치하여 엄하게 수직하여 허수로운 폐단이 없도록 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따르겠다.” 하였다. 《정사록》
○ 18일에 대장이 아뢰기를, “임 소원(任昭媛)을 잡아서 금부로 이송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폐주가 있는 곳에 시녀가 없다고 하니 이 사람을 보내라.” 하였다. 《정사록》
○ 20일에 대비가 하교하기를, “역괴 혼(琿)이 아직도 대궐에 있으니, 하늘과 땅 사이에 한 시각도 용납 못할 대역을 어찌 편히 앉혀놓고 있느냐. 경들은 위로 종묘사직을 위하여 빨리 안치시키도록 하라. 그런 후에야 내가 대궐로 옮겨갈 것이니, 경들은 나를 위하여 소홀하게 처리하지 말 것이다. 내 경들에게 두 번 절하며 청하노라.” 하였다.
○ 광해군과 비 유씨(柳氏)와 폐세자 질(祬)과 그 빈 박씨 등을 강화에 안치하되, 각각 동문ㆍ서문 안에 두도록 명하였다. 《속잡록(續雜錄)》
○ 21일에 판윤 이괄이 폐주와 폐세자를 압송하여 강화부(江華府)로 나갔다. 《속잡록》 《정사록》
○ 광해를 강화로 옮기려고 하는데 김류가 아뢰기를, “뱃길이 험악하니 청컨대 육로로 편히 가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고 전교하기를, “대비께서는 폐비를 다른 섬에 따로 있게 하셨으나 나는 차마 그렇게 하지를 못하겠으니, 차라리 이것으로 대비에게 책망을 받겠노라.” 하였다. <승평 묘비>
○ 정엽이 광해가 옮겨간다는 말을 듣고는 대신들에게 말하기를, “폐주가 비록 자신의 죄로 하늘에 버림받았으나, 군신이 일찍이 섬기던 분이니, 그가 나갈 때에 울면서 보내야 할 것이다.” 하니, 여러 사람이 안색이 변하며 대답이 없었다. 정엽이 혼자 그리하려 하였는데, 벌써 나갔다는 말을 듣고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정수몽 묘비>
○ 4월 10일에 임금이 이르기를, “폐주의 죄악이 비록 중하나 선왕의 혈육이니, 그가 그곳에서 고생하는 것을 생각할 때 눈물이 절로 흘러내린다. 이제 겨울옷을 입을 때가 되었으니 베와 솜을 넉넉히 내려보내라.” 하였다. 《공사견문》
○ 대비가 광해를 꼭 죽이려고 하니, 공신들도 모두 “죽이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이원익(李元翼)이 울면서 말하기를, “광해가 스스로 하늘에 버림받았으니, 폐출하는 것은 마땅하나 죽이는 것에 대해서라면 일찍이 그를 섬긴 노신으로서는 차마 들을 말이 아니니 마땅히 지금 떠나가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나도 이런 생각이 있었는데 경의 말을 듣고 보니 감히 목숨을 보전해 주길 힘쓰지 않겠소.” 하였다. <완평년보(完平年譜)>
○ 임금이 이미 광해를 강화부에 옮긴 후에 이중로(李重老)를 특별히 부윤으로 임명하고 이르기를, “경은 경의 조상이 우리 태조를 섬기던 일을 아는가? 경은 마땅히 그 일을 생각하여 폐인을 잘 대우하라.” 하였다. 중로가 절하며 사례하고 강화에 부임하여서는 각별한 정성으로 대접하고 조금도 실례함이 없었다. 광해가 처음에는 의심하여 끼니를 잘 들지 않다가 뒤에는 다른 일이 없을 것을 믿었다. 이성구(李聖求)와 김기종(金起宗)이 후임이 되어 한결같이 모범이 되었는데, 사람들이 임금의 사람 알아보는 밝음에 탄복하였다. 《강화지(江華誌)》
○ 광해가 일찍이 병이 들었는데, 정엽이 중종이 연산군 대우하던 전례를 인용하여 아뢰기를, “신이 광해군을 섬긴 것이 10년이 넘습니다. 견마(犬馬)가 주인 생각하는 옛 정이 어찌 없겠습니까.” 하며 말끝에 눈물이 떨어졌다. 임금이 안색이 변하여 의복과 쓰일 물건을 보내도록 명하였다. <수몽 묘비>
○ 5월 22일에 강화 부윤 이중로가 장계하기를, “이달 21일 삼경에 폐동궁이 담 안에서 흙을 파내어 70척(尺) 정도의 구멍을 뚫어 도망쳐 나가는 것을 잡았습니다.” 하였다. 《정사록》
○ 양사에서 합계하기를, “강화에서 땅을 파고 도망치려던 사건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관리된 자는 마땅히 자주 돌아다니고 상세하게 살펴서 뜻밖의 변을 막아야 할 것인데, 땅을 그만큼 파려면 괭이와 가래를 쓴 것이 반드시 여러 날 걸렸을 것인데도 전연 알지 못하고 있다가 탈출한 뒤에 발자국 소리로 요행히 깨달았다고 하니, 청컨대 부윤 이중로를 잡아 국문하소서.” 하였다. 6월 25일에 중로를 다시 부윤으로 임명하였다.
○ 폐동궁이 봉서(封書)와 은(銀)과 쌀밥을 손에 지니고 있었는데, 피봉(皮封)에 쓰기를, “해서 방백(海西方伯) 앞……” 이라 하였기 때문에 황해 감사 이명(李溟)과 그 아들 민수(敏樹)를 체포하였다.
○ 강화 별장 권채(權綵)ㆍ내관 박수홍ㆍ나인 막덕(幕德)ㆍ황대익(黃大翼)ㆍ이응성(李應星)ㆍ신차룡(申車龍) 등을 잡아다 국문하였는데, 권채는 매를 맞아 죽었다.
○ 25일에 금부도사가 장계하기를, “폐동궁을 도로 위리안치시켰습니다.” 하였다.
○ 강화 부윤이 24일 미시(未時)에 폐빈 박씨가 목을 매어 자살한 것을 장계하였다.
○ 처음에 폐빈 박씨와 같이 있는 나인이 인두를 가지고 땅에 구멍을 내고 폐동궁을 밀어 내보내었는데, 나온 뒤에 방향을 몰라 방황하는 동안에 지키던 군사가 알고서 잡아넣으니, 박씨가 나무에 올라 바라보다가 그 잡히는 것을 보고는 땅에 떨어져 3일 간 음식을 전폐하다가 목을 매어 죽었으니, 나이가 26세였다. 《공사견문》 《속잡록》
○ 전교하기를, “폐빈의 의금(衣衾)과 관을 갖추어 내려보낼 일을 해조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 26일에 양사가 합계하기를, “전하께서 폐동궁에게 극진하게 해주었는데도, 폐동궁이 은혜를 저버리고 도망하여 스스로 하늘에 버림을 받았으니, 전하께서 끝내 보전해 주려 하셨지마는 되지 않을 듯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대의로서 결단하여 묘당(廟堂)의 의논을 따라주소서.” 하였다. 답하기를, “아뢴 것을 들으니 놀라고 괴이한 생각을 이기지 못하겠다. 대의로서 결단하라는 말은 이 무슨 말이냐? 질(祬)이 구멍을 판 것은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한 소치이니 무슨 죄가 있겠느냐. 그 정상을 생각하면 어찌 가련하지 않느냐. 폐조 때에 골육간의 참변이 거의 없는 해가 없었으니, 그것이 좋은 일이던가. 내가 오늘날 다시 이런 일을 당할 줄 생각하지 못하였다. 이같은 의논을 하지 말 것이며, 폐동궁의 생명을 보전하여 나의 지극한 뜻을 어기지 말라.” 하였다. 《정사록》
○ 이때 우의정 윤방(尹昉)이 아뢰기를, “폐동궁의 일은 대신과 삼사, 그리고 2품 이상에게 의논을 수렴하겠습니다.” 하니, 이에 양사에서 발계(發啓)하였다.
○ 27일에 사간 정온(鄭蘊)이 아뢰기를, “폐동궁이 도망쳐 나간 변은 말만 하여도 마음이 섬뜩합니다. 독부(獨夫)의 몸으로 생명을 보전하기 어려운 위치에 처하여 비록 제 도리를 다한다 하여도 용서될 수가 없는데, 스스로 죄를 지어 종전에 없던 변을 내었으니, 종묘사직을 위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기에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임금의 덕을 이끌어 처음부터 끝까지 훌륭한 명성이 나도록 하는 것이 또한 신하의 직분입니다. 폐조(廢朝) 때 있었던 골육간의 참변은 진실로 전하의 하교와 같습니다. 인심이 이반하고 천명이 끊어진 것이 끝내 이로 말미암았던 것이니, 오늘의 일이 비록 그때와는 다르나 성덕에 어찌 손익되는 점이 없겠습니까. 신이 어제 수의(收議)하라는 명을 받들고 신의 의견을 대략 아뢰고자 하였더니, 양사의 여러 관원들이 수의해서는 안 되고 양사가 합계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또 다른 의견을 고집하였으나 날은 저물고 황급하여 따라가 참여하게 된 것인데, 지금 전하의 말씀을 들으니 어리석은 마음이 스스로 격발됩니다. 폐세자 처단에 반대하던 처음 생각을 굳게 지키지 못하여 자칫 전하의 성덕(聖德)을 그르치게 할 뻔한 죄가 크오니, 청컨대 신을 파직하소서.” 하였다. 《정사록》
○ 이에 대사헌 오윤겸(吳允謙)과 대사간 박동선(朴東善)이 피혐하여 아뢰기를, “신들이 깊이 염려하여 변고에 처리할 방법을 경솔하게 아뢰었더니, 어제 전하의 비답을 받고 감격하던 중에 정온의 말을 들으니 자신도 모르는 두려움과 후회가 밀려옵니다. ……” 하였다. 헌납 이목(李楘)과 정언 신천익(愼天翊)이 피혐하여 아뢰기를, “당초의 의견은 정온과 같았습니다. ……” 하였고 집의 조희일(趙希逸)은 피혐하여 아뢰기를, “임금의 미덕을 받들어드리는 데에 신이 어찌 감히 남의 뒤에 처져서 잘못된 의견을 지키려고 하겠습니까. ……” 하였다. 옥당에서 차자를 올려 그들을 모두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아뢴대로 하라 하였다.
○ 6월 2일에 대사헌 이귀와 지평 심기원ㆍ김자점이 아뢰기를, “폐인(廢人) 질(祬)이 구멍을 뚫고 도망쳐 나간 것은 형적을 측량하기 어려우니, 나라 사람이 함께 놀랄 일이요, 국법으로 반드시 죽여야 할 죄입니다. 대비께서 말씀이 계시었고 정부의 의논이 모두 같았으니, 삼사가 합계하여 대의로 결단할 것을 청한 것은 실로 한 나라의 공통된 공론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 사이에 갑자기 그 말을 번복하여 앞뒤가 모순되게 피혐으로 떠들썩하며, 서로 잇달아 병을 핑계로 휴가를 청하여 이미 연계(連啓)하지도 않고 또 정계(停啓)하지도 아니 하니, 대간의 일을 의논하는 채통을 크게 잃었습니다. 청컨대 양사를 모두 바꾸소서.” 하였다.
○ 3일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청컨대 죄인 질(祬)을 빨리 처단하시어 종묘사직을 안정시키소서.” 하였다.
○ 이때 이귀ㆍ김자점ㆍ심기원은 폐세자를 법대로 처단하기를 청하고 윤황(尹煌)ㆍ이준(李埈)ㆍ김상(金尙)은 전은(全恩)을 주장하였더니, 그날로 이준을 철원 부사(鐵原府使)로, 윤황을 삭녕 군수(朔寧郡守)로, 김상을 은계 찰방(銀溪察訪)으로 내보내었다. 7일 정사
○ 부제학 정경세(鄭經世)ㆍ부응교 이민구(李敏求)ㆍ교리 심액(沈詻)ㆍ수찬 이경여(李敬輿) 등이 상소하기를, “신등이 합사(合司)한 공론에 대해 그 처음 설을 번복할 수 없으니, 청컨대 체직하소서.” 하였다. 이에 대사헌 이귀ㆍ대사간 이현영(李顯英)ㆍ집의 정종명(鄭宗溟)ㆍ사간 정온ㆍ장령 이상급(李尙伋)ㆍ지평 김자점ㆍ헌납 김세렴(金世濂)이 아뢰어 그 피혐하는 것이 그릇된 일이라고 공격하였다. 옥당에서 차자를 올려서 양사가 출사하기를 청하고, 18일에 또 양사의 청을 쾌히 따르기를 청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나는 그대들에게서 이런 의논이 나올 줄 생각 못하였는데, 지금 차자의 내용을 보니 놀랍고 괴이함을 금치 못하겠다. 이러한 의논을 하지 않도록 하여 내 마음을 평안하게 하라.” 하였다.
○ 21일 조강(朝講)에 삼사에서 합하여 아뢰니, 임금이 이르기를, “부득이 그대로 따르겠다.” 하였다.
○ 부제학 정경세가 병이 심하여 삼사에서 합계할 때 참여하지 못한 것을 이유로 체직을 청하였다.
○ 22일에 금부에서 아뢰기를, “폐인 질에 대한 삼사의 계사에 대의로 결단하라는 말만 있고 정한 형률이 없으니, 대신들과 의논하여 결정하소서.” 하였다. 대신에게 의논하니 영의정 이원익ㆍ원임 기자헌(奇自獻)ㆍ정창연(鄭昌衍)은 병으로 의견을 아뢰지 못하였고, 우의정 윤방(尹昉)이 의논하기를,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하되, 또한 이것도 임금의 명에서 나와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 금부도사 이유형(李惟馨)을 보내어 폐세자에게 죽음을 내리니, 25일에 스스로 목을 매었다. 전교하기를, “의금(衣衾)과 관은 폐빈(廢嬪)의 전례에 따라 내려보내라.” 하였다. 무덤은 양주(楊州) 수락산(水落山) 옥류동(玉流洞) 동쪽 기슭 끊어진 둔덕에 있다. 《일월록》과 《공사견문》의 합록
○ 이때 대간이 법대로 처단하기를 청하였는데, 영의정 이원익이 말하기를, “이 일에 대해 비록 위에서 죄를 준다 하더라도 신하들이 오히려 다투어야 할 것인데, 이제 아래 사람들이 죽이기를 청하니 도리상 차마 하지 못할 일일 뿐만 아니라 또한 후세 자손에게 보여주는 도리도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이 하문하였을 때 원익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은(全恩)을 주장하였다.
○ 이때 인열왕후(仁烈王后)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질(祬)이 범한 죄에 대해 살려야 옳을지 죽여야 옳을지는 부인이 알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덕을 닦았느냐 닦지 않았느냐에 달려 있으며 덕을 닦고 닦지 않음은 마음을 조심하고 방심하는 데에 달려 있으며 마음을 조심하고 방심함은 잠깐 동안에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예부터 아침에 천자가 되면 저녁에 일개 평민이 되고자 하여도 되지 못하는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오늘처럼 조심하지 않으신다면 전하보다 어진 이가 다시 없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앞사람이 한 일을 뒷사람이 본받는 것이오니, 원컨대 질을 죽이지 마시어 그것으로 뒷날 내 자손을 보전할 계책으로 삼으소서.” 하였다.
○ 폐세자에게 죽음을 내리니, 영의정 이원익ㆍ집의 이준(李埈)ㆍ장령 윤황(尹煌) 등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사헌부에서 그들을 공격하려 하였는데, 조익(趙翼)이 불가함을 힘써 말하여 마침내 그만두었다. <조포저(趙浦渚) 시장>
○ 폐세자의 일이 발각되자 나졸이 옷 속에 든 편지를 찾아내었는데 편지는 황해 감영(黃海監營)으로 부치는 것이었다. 이에 감사 이명(李溟)을 잡아서 문초하였다. 이명이 명을 받고는 부고(府庫)를 봉하고 문서를 정리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비록 죽더라도 국가에서 여러 해 저축한 것을 손실시킬 수는 없다.” 하고, 일을 마친 뒤에 잡혀왔다. 임금이 그를 늦게 잡아온 것에 화를 내자, 금오랑(金吾郞)이 사실대로 대답하였더니, 임금이 좋게 여기었고, 이귀가 그의 억울한 사정에 대해 매우 힘써 말했으므로 임금이 즉시 그를 풀어주었다. 《염헌집(恬軒集)》
○ 이때 이명(李溟)이 잡혀오자, 형벌로 문초하기를 청하여 추안(推案)이 내려졌는데, 이귀가 아뢰기를, “이명의 사람됨이라면 폐모론이 한창 일어나던 때에 이항복을 구원하다가 탄핵을 심하게 받았으며, 또 정온을 사주하였다고 흉적에게 거슬려서 삭출되기까지 하였습니다. 최기(崔沂)가 억울하게 죽은 뒤에 그의 형 이충(李冲)이 첩에게 최기의 전답을 사주었는데, 이명은 형이 죽은 뒤에 다시 최기의 아내에게 그 전답을 돌려주어 살아갈 수 있게 해주었으니, 이명의 마음가짐이 이와 같은데도 불행하게 지금 강화 옥사에 연루되었습니다. 폐인의 계집 종 막덕이 가진 편지의 봉투에 “해서 순상(海西巡相 황해 감사)”이라 쓰고, 그 편지의 끝에 “서경병로(西坰病老 유근(柳根))라 쓴 것은 가짜가 분명합니다. 폐인이 이름 있는 이의 별호[西坰]에 가탁하여 흉계를 꾸민 것은 의심할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이명이 오랫동안 폐조(廢朝 광해의 조정)에서 버림받다가 10년 만에 겨우 황해 감사를 얻었고 우리 성조(聖朝)에서도 다시 그 직을 맡게 되었으니 별다른 원한과 억울한 일이 없을 것인 만큼 폐인과 함께 모반한다는 것은 사람의 본성으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였다. 《연평일기》
○ 처음 폐세자 질이 태어나던 무술년 12월 4일에 태어났다. 날 아침에 대궐 뜰 마당 웅덩이에서 연(蓮)이 나서 갑자기 꽃을 피우더니 금방 떨어졌다. 궁중에서 모두 기이한 상서라고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폐위되어 강화에 안치되니 나이 26세였다. 배를 타고 가면서 시를 읊기를,

티끌 속의 뒤범벅이 미친 물결같구나 / 塵寰飜覆似狂瀾
걱정한들 무엇하리 마음 스스로 평안하다 / 何必憂愁心自閒
26년은 참으로 한 바탕 꿈이라 / 二十六年眞一夢
흰구름 사이로 돌아가리 / 好須歸去白雲間

하였다. 또 위리(圍籬)되었을 때 지은 시가 있는데 그 시에,

본시는 한 뿌린데 어찌 이다지 박대하는고 / 本是同根何太薄
이치로는 마땅히 서로 아끼고 불쌍히 여겨야 할 것을 / 理宜相愛亦相哀
어떻게 이 조롱(鳥籠) 벗어나 / 緣何脫此樊籠去
녹수 청산 마음대로 왕래하랴 / 綠水靑山任去來

《공사견문》 《속잡록》 《응천일기(凝川日記)》
○ 일찍이 경술년 5월에 폐세자가 인정전(仁政殿)에서 관례와 책봉을 거행하였다. 예를 행하고서 사령(赦令)을 반포할 때 집사 유중룡(柳仲龍)ㆍ이유청(李幼淸)이 교명을 받들고 인정전을 나오다가 넘어져서 땅에 떨어졌다. 《응천일기》
광해가 처음 즉위하여서는 후궁을 많이 두고 아들 많이 두기를 원하였는데, 중년에 꿈을 꾸니 비단 도포를 입은 대관이 하늘에서 내려와 이르기를, “임금이 남의 아들을 많이 죽였으니 임금은 한 아들도 보전하지 못할 것인데, 어찌 많은 아들을 원하느냐.” 하였다. 이후 광해가 우리나라에 와 있는 중국의 술자(術者)에게 단산(斷産)할 방법을 구하여 부적과 주문을 쓰기까지 하였다. 그때 있었던 궁인이 늙어서는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우리가 그때 아들 낳기를 바라면서 그 부적과 주문을 미워하였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우리에게 끝까지 자녀가 없었던 것은 하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신 것이다.” 하였다. 《공사견문》
○ 숙종 임술년에 봉상 판관(奉常判官) 정유제(鄭維悌)가 상소하기를, “청컨대 왕손의 예에 따라 폐세자에게 봉작을 추봉(追封)하소서.” 하였는데, 조정의 의논에 막혀서 시행되지 않았다. 《공사견문》
○ 광해의 딸은 숙의 윤씨가 낳았는데, 윤씨는 사족(士族)의 적출이라 한다. 그 딸이 뒤에 사인(士人) 박징원(朴徵遠)에게 시집가는데, 임금이 그의 혼수를 도와주고 또 전날의 궁인에게 가보라고 명하였다. 《공사견문》
○ 계해년 10월 8일에 폐비 유씨가 죽으니, 나이 48세였다. 《공사견문》
○ 폐비가 강화에서 병으로 죽으니 임금이 이르기를, “염습(斂襲)에 소용되는 의금(衣衾)과 관 등의 물건을 속히 내려보내라.” 하였다. 예조 판서 이정귀가 아뢰기를, “폐비는 폐빈의 상사와는 달라야 할 것입니다. 행하여야 할 상례 절차를 유신들에게 널리 상고하게 하여 사흘 동안 조회와 저자를 정지시키고, 닷새 동안 고기 없는 반찬을 들고, 예조의 당상관과 낭관을 보내어 초상을 살피게 하고 경기 감사에게 상식(上食)과 갖가지 전(奠)을 차려 내려보내게 하고, 일을 아는 나인[解事內人] 두 사람을 내려보내고 친척 한 사람을 호상에 참여시켜야 합니다. 연산은 중종 반정 초에 연산군으로 호를 강등하였는데, 이번에는 애초에 강봉(降封)시킨 절차가 없으니, 먼저 강봉할 일로 전교로 받든 후에, 강봉한 문성군부인(文城郡夫人)이라는 읍호(邑號)를 명정에 쓰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상례는 왕자의 예로 하고 무덤의 한계는 연산 때보다 300보(步)를 더 주었고, 장례에는 특히 수도(隧道)를 만들게 하였으며, 반혼(返魂)은 장흥동(長興洞) 옛 집으로 하게 하였는데, 예조 당상관과 낭관이 성문 밖에 나와서 맞았다. 《조야기문》 《월사집(月抄集》 《남궁록(南宮錄)》
○ 폐비 유씨가 일찍이 불도를 숭상하여 믿었는데, 대궐 안에 금부처를 모셔두고 친히 기도하여 섬기며 복을 구하였다. 또 궁중에 나무로 새기고 흙으로 빚어 만든 불상이 매우 많았는데, 여러 군데 사찰에 내려주었다. 항상 하늘에 빌기를, “후생에서는 다시 왕가의 며느리가 되지 않게 하소서.” 하였다. 《공사견문》
○ 반정하던 날, 폐비 유씨가 수십 명의 궁녀와 함께 밤을 틈타 후원으로 가서 어수당(魚水堂) 속에 숨어 있었다. 이틀 동안 군사가 몇 겹으로 둘러싸고 있었는데, 유씨가 말하기를, “내 어찌 숨어 살기를 꾀할 것인가.” 하고, 궁인을 시켜 “중전이 여기 있다.”고 외치라고 하니, 궁인이 모두 두려워 감히 나서지 못하였다. 한(韓)씨 성을 가진 보향(保香)이라는 여인이 자청하여 계단 위에 서서 “중전이 여기 있다.”고 말하였다. 대장이 그때 교의에 걸터앉아 있다가 곧 일어나서 군사로 하여금 진(陣)을 약간 물러나게 하였다. 보향이 유씨의 뜻을 받아 묻기를, “주상은 이미 나라를 잃었으니, 새로 선 분은 누구요?” 하였다. 대장이 “선조대왕의 손자인데 누구라고는 감히 말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오늘 이 일이 종묘사직을 위한 것이오? 부귀를 위한 것이오?” 하니, 대장이 말하기를, “종묘사직이 거의 망하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들이 새 임금을 받들어 반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어찌 부귀를 위한 것이겠소.” 하였다. 보향이 “이미 의거라고 칭한다면 어찌 전왕의 비를 굶겨 죽이려고 하오.” 하니, 대장이 듣고 즉시 인조에게 아뢰어 조석 음식을 퍽 후하게 하였다. 《공사견문》
○ 갑자년 이괄의 난에 폐주를 강화에서 배로 태안(泰安)으로 옮겼다가 적을 평정한 후에 다시 강화로 돌아왔다. 그때 왕명을 받든 별장과 선전관 등이 임금이 주신 표신을 받들었다 하여 도중에 관사에 들게 되면 저들이 함께 웃방[上房]에 들고 폐주를 서쪽 채에 거처하게 하였다. 그후 양사에서 “그들이 버릇없이 스스로 웃방에 든 것은 매우 부당하다.”고 탄핵하여 연이어 글을 올리기를 그치지 않았는데, 별장 등 여러 사람이 모두 그 벼슬에서 파면되었다. 《야곡삼관기(冶谷三官記)》
○ 병자년 겨울에 폐주가 강화에서 교동(喬洞)으로 옮겨 안치되었다. 정축년에 서울에서 나올 때, 신경진(申景禛)ㆍ구굉(具宏)ㆍ신경원(申景瑗)ㆍ신경인(申景禋)ㆍ홍진도(洪振道) 등이 연명으로 경기 수사(京畿水使) 신경진(申景珍)에게 글을 보내기를, “잘 처리하시오.” 하였다. 이것은 광해주를 몰래 없애라는 뜻이었는데 경진이 따르지 않았다.
○ 정축년 2월 《조야첨재》에는 5월로 되어 있다. 에 교동에서 또 제주로 옮겼다. 그때 호송하는 별장이 되기를 요청하는 무사 한 사람이 있었는데, 공을 세울 계책이었으나 뜻대로 되지 못하였으니, 대개 이것은 경진 등의 뜻이었다. 《병자록(丙子錄)》
○ 광해를 옮겨 안치시킬 때 따라간 궁비 중에 성질이 모질고 교활한 자가 있었는데, 모시는 데 삼가지 않으므로 광해가 꾸짖었다. 계집종이 소리를 지르면서 말하기를, “영감이 일찍이 지극히 높은 자리에 있을 때는 온갖 관청이 다달이 올려 바쳤는데, 무엇이 부족하여 염치없는 더러운 자들에게 반찬을 요구하여 심지어 김치판서[沈菜判書]ㆍ잡채참판(雜菜參判)이란 말까지 있게 하였소? 철에 따라 비단 용포와 털옷을 올리었는데, 무엇이 부족하여 사사로 올리는 길을 크게 열어 심지어는 장사치ㆍ통역관으로 하여금 벼슬길에 통할 수 있게 하였소? 후궁의 의복과 음식은 또 각각 그 맡은 관청에서 올려 바쳤는데, 무엇이 부족하여 벼슬 구하고 송사하는 자들에게 뇌물을 요구하여 민심을 크게 무너지게 하였소? 영감께서 사직을 받들지 못하여 국가가 이 지경까지 이르게 해놓고, 이 섬에 들어와서는 도리어 나에게 모시지 않는다고 책망하니 속으로 부끄럽지 않소? 영감께서 왕위를 잃은 것은 스스로 취한 것이지마는 우리는 무슨 죄로 이 가시덩굴 속에 갇혀 있단 말이오?” 하였다. 이에 광해는 고개를 숙이고 한 마디 말도 없이 다만 탄식할 뿐이었는데, 이것을 본 자는 그 패악하고 교만한 말에 분개하지 않은 이가 없어 이르기를, “반드시 이 계집종에게 하늘의 재앙이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다른 일로 인하여 과연 좋지 못하게 죽었다 한다. 《공사견문》
○ 그때 폐주를 제주로 옮기는데, 호송하는 사람에게 엄중히 분부하여 그 가는 곳을 말하지 못하게 하고, 배 위의 4면은 모두 휘장으로 막았다가 배가 닿은 뒤에야 비로소 알리었다. 이때 무신 이원로(李元老)가 호행 별장(護行別將)이 되었는데, 뱃길이 험난하여 거의 죽을 뻔한 것이 여러 차례였다. 배가 멈춘 다음 휘장을 떼고 내리기를 청하여 제주라고 알리니, 광해가 깜짝 놀라며 크게 슬퍼하여, “내가 어찌 여기 왔느냐. 내가 어찌 여기 왔느냐.” 하며 안정을 찾지 못하였다. 제주 목사가 맞이하여 문안하며 무릎을 꿇고 나아가 말하기를, “공자께서 임금으로 계실 때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를 물리쳐 멀리하고, 환관과 궁첩들로 하여금 조정 정사에 간여하지 못하게 하였더라면 어찌 이런 곳에 오셨겠습니까. 덕을 닦지 않으면 배 안에 탄 사람이 모두 적국(敵國)이라는 옛말을 모르십니까?” 하니, 광해가 눈물만 뚝뚝 흘리고 말을 못하였다.
○ 광해가 제주에 있을 때 이시방(李時昉)이 목사로 있었다. 고을 사람을 단속하여 밥상을 깨끗이 하여 올렸더니, 광해가 대접이 전과 다른 것을 기뻐하여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지난날 나에게 은혜를 받은 자일 것이다.” 하니, 늙은 궁인이 “아닙니다.” 하였다. 광해가 말하기를, “네가 어떻게 아느냐?” 하니, 궁인이 말하기를, “대감이 전일에 신하들을 등용하고 내치는 데 한결같이 후궁의 비방과 칭찬을 따랐습니다. 이 목사가 만약 일찍이 부정한 길을 통하여 은혜를 받았던 자라면 반드시 옛 임금을 박대하여 지난 저의 행적을 덮으려 할 것인데, 어찌 감히 정성을 다하기가 이같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광해가 뒤에 시방(時昉)인 줄 알고는 고개를 숙여 눈물을 흘렸다. 《공사견문》
○ 광해가 섬에 위리안치된 후에 중사(中使)가 방에서 종이 한 장을 찾아서 임금에게 바쳤는데, 그것은 곧 부인의 편지로서 다만 안부뿐이었다. 임금이 안팎이 엄하지 않았다 하여 지킨 자를 처벌하고, 또 한 방에 있던 임소용(任昭容)을 잡아와서 대궐 뜰에서 국문하였으나, 끝내 그 편지가 누구에게서 나온 것임을 몰랐다. 신흠(申欽)이 국청의 여러 재상에게 말하기를, “내가 옛 임금의 총희(寵姬)가 형벌을 받는 것을 보고도 막지 못하고, 또 그 형을 받는 것을 내려다보고 지휘하였으니 후세의 의논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공사견문》
○ 신사년 7월 7일 《병자록》에는 2일이라 하였다. 에 광해가 제주에서 죽으니, 나이는 67세였다. 부고를 듣고 임금은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5일 동안 소찬을 들었으며, 특히 예조 참의 채유후(蔡裕後)를 보내어 낭료(郞僚)들을 거느리고 중사(中使)와 함께 호상(護喪)하여 오게 하고, 각도 감사가 배행하여 제전(祭奠)을 감독하게 하였다. 예조에서 장례를 왕자 군(君) 1등의 예로 치르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특히 명하여 수도(隧道)를 쓰게 하고 장생전(長生殿) 재궁(梓宮 임금의 관)으로 관을 바꾸고 염(斂)을 다시 하게 하였으며, 승지를 보내어 제사 지내게 하고 10월 4일 양주(楊州)에 장사 지냈다. 평일에 신하 노릇한 이는 모두 소찬을 나흘까지 하였다. 《공사견문》
숙종 27년 신사 3월 26일에 승지 이세재(李世載)가 주강(晝講)에 나아가 아뢰기를, “광해의 묘가 양주에 있는데 봉사하는 외손이 가토(加土)를 하려고 하여도 힘이 미치지 못하여 역군을 청하려고 예조와 비국(備局)에 호소하였으나 전하께 아뢰지 않았습니다. 광해를 물리친 후에 인조께서는 그가 아프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약을 내렸고, 광해가 죽자 재상들이 장사를 삼가지 않는다고 소를 올리기까지 하였으니, 지금 무덤에 가토하는 때에 마땅히 역사를 도와주는 길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옳다고 여겨 역군을 내려주라 명하였다. 《공사견문》
○ 광해의 장사에 예조 판서 이현영(李顯英)이 논하기를, “전하께서 대궐에서 한 번 곡을 하고, 백관이 옷을 바꾸고 아문(衙門)에 모여 곡을 하며, 상두꾼은 모두 흰 베두건을 하는 등의 절차를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소서.” 하니, 이시백이 차자를 올려 예관을 잡아 문초하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동춘집(同春集)》
○ 개똥이[介屎]는 전 선조(宣祖) 때의 늙은 궁인이었다. 선조에게 사랑을 입었는데 사람됨이 흉악하고 교활하였다. 선조가 세자를 바꿀 뜻이 있었기 때문에 광해가 스스로 불안한 것을 추측하여 알고는 은밀히 광해와 접촉하여 뒷날의 계획을 세웠다. 약으로 선조를 시(弑)하는 참변도 그 손에서 나왔으나, 광해는 실로 미리 음모에 관계한 사실이 없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전하기를, “당시의 사초에 바로 쓰기를 ‘약밥이 동궁에서 왔는데 얼마 안 되어 승하하였다.’ 하였다. 이 약밥이란 것은 지금 시속에 과일을 섞은 찰밥으로 대개 선조가 오랜 중병 끝에 동궁에서 올린 약밥을 먹고 얼마 안 되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한때 혹 의심하는 말이 있었으나, 소위 당시의 사관이란 반드시 유영경(柳永慶)의 무리일 것이니 기록한 말을 모두 믿을 수는 없다.” 하였다. 또 전하기를, “인조가 일찍이 이 말을 힘써 물리쳐 이르기를, ‘당시 선조께서 위독하실 때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일을 상세히 알고 있다. 선왕께서 병을 앓으신 뒤에 맛있는 음식을 생각할 즈음, 동궁의 약밥이 마침 왔기 때문에 지나치게 잡수시고 기(氣)가 막혀서 이내 돌아갔을 뿐이었다. 중간에 어떤 농간이 있었다는 말을 실로 밝히기 어렵다.’ 하였다. 인조의 말이 이와 같으나 대비가 광해의 죄를 헤아릴 때, 군부를 시해(弑害)했다는 대목을 분명히 들어서 말하였기 때문에 감히 이 사실을 아주 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일월록》
광해가 탐욕스럽고 음란하였으므로 개똥이가 안팎에서 제 마음대로 하며 이첨과 한 마음이 되어 어울렸다. 뇌물을 받고 벼슬을 팔아 기강이 전연 없었으니, 대궐 안의 모든 일이 그의 손에서 한결같이 결정되었다. 궁녀가 광해의 잠자리를 모시는 것도 광해가 개똥이의 허락을 얻어야 되었기 때문에 개똥이가 여러 계집에게서 뇌물을 받았는데, 그 값의 많고 적음에 따라 광해로 하여금 동침하게 하면 광해가 감히 거스르지 못하였다. 하루는 광해가 개똥이를 데리고 잠자리에 들려 하였는데, 박씨라는 옛 상궁이 땅에 꿇어앉아 간하니 광해가 부끄러운 빛이 있었다. 또 개똥이의 말을 어기는 일이 있을 때는 성내어 말하기를, “큰 덕을 감히 잊는단 말이오. 내 입에서 말이 나올 것 같으면, 임금이 자리를 보전하지 못할 것이오.” 하니, 광해가 당황하고 부끄러운 빛이 있었다. 이 때문에 추한 소문이 바깥에 퍼져 나가게 되었다. 개똥이가 음탕하고 교활한 상놈 정몽필(鄭夢弼)이라는 자를 매우 사랑하여 양아들이라 하고 바깥에 따로 거처를 마련하여 두고 몽필을 살게 하였는데, 만금의 재물을 쌓아 두었다. 몽필이 드디어 세력을 크게 행하여 백성들의 전답과 노비를 강제로 빼앗아 문서를 바치게 하였는데, 조금이라도 성에 차지 않으면 제집에 사사로 만든 옥에 가두니, 이름을 □궁(□宮)이라 하였다. 개똥이가 밤과 새벽에 드나들며 몽필과 거리낌 없이 거처하니, 당시 사람들이 모두 그들의 음란한 행실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개똥이가 몽필에게 빠져서 겸하여 윤 소의(尹昭儀)를 중매하여 몽필과 음행하게 하였다는 말까지 있었다. 《일월록》
○ 선조가 승하하니, 중독으로 돌아갔다고 소문이 떠돌았다. 유의(儒醫) 성협(成浹)이 입시하였다가 나와서 사람에게 말하기를, “임금의 몸이 이상하게도 검푸르니 바깥소문이 헛말이 아니다.” 하였는데 그 말을 들은 조익(趙翼) 포저(浦渚)ㆍ권득기(權得己) 만회(晩晦) 같은 이가 끝내 광해조에 벼슬하지 않은 것은 대개 이 때문인 것이다. 반정이 되자 원두표(元斗杓)와 이해(李澥)가 연명으로 소를 올려 광해의 시역(弑逆)을 성토하려고 이해의 조카 의길(義吉)이 그 소를 지었는데, 지금도 그의 문집에 실려 있다. 그러나 끝내 소를 올리지는 않았는데 그 까닭은 알 수 없다. 박세채(朴世采)가 원두표에게 물으니 원두표가 답하기를, “처음 장유가 지은 왕대비의 교서 외에 또 언문으로 된 교서가 있어 광해의 죄상을 주워 모았는데, 작은 사실이라도 다 들추어 내었으나 약밥에 중독되었다는 말은 없었다. 여기에 여러 사람이 모두 말하기를, ‘이 일은 큰일이니, 당시 비록 그러한 소문이 있었으나 지금 언문 교지를 가지고 보더라도 경솔히 들추기는 어렵다.’ 하여 그만둔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조익은 통유문(通諭文)에 이 한 가지 조목을 매우 분명히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다. 《남계집(南溪集)》
○ 이의길이 올리려고 했던 복수를 청하는 소의 대략에, “폐인이 세자가 된 것은 처음에 아예 얻지 못할 것을 얻었던 것인데, 오랜 뒤에 선왕이 자신을 부족하게 여기는 것을 알고는 자신의 위치를 위태롭게 생각하여 두려운 마음이 날로 심해져 속으로 흉악한 생각을 몰래 품었습니다. 선왕이 만년에 이르러는 더욱 짐승 같은 자에게 큰 자리를 맡길 수 없음을 알고 세자를 바꾸려는 뜻이 이미 결정이 되었는데 간인(奸人)들이 그 틈을 엿보아 이간질하였습니다. 선왕의 오랜 병환이 처음 나았을 때 모든 백성들이 좋아하였는데 잠깐 사이에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말이 나왔으니 사람들이 의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약밥에 대한 말이 항간에 돌아다녔기 때문입니다. 선왕이 위독할 때, 의원 성협이 명을 받고 들어가 진찰해 보니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였고 빛깔과 증후가 무원록(無寃錄) 중독조(中毒條)에 있는 대로 맞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성협이 물러나 친한 사람들에게 말하니, 사류(士類)로서 이 말을 들은 이는 벼슬을 버리고 갈 뜻이 있어 국문(國門)에 들어가는 것을 수치로 아는 자가 있기까지 하였습니다. 계축년의 옥사는 이첨이 꾸민 일인데, 소위 서양갑(徐羊甲)의 격문(檄文)이란 것도 이첨 등이 꾸며서 만든 것입니다. 첫머리에 아버지를 죽였다는 말을 한 것을 보면 이첨이 폐인의 흉악한 역모에 대해 모두 알고 있음이 분명하니, 이 격문에 어찌 모르고 썼겠습니까. 당시 죽음을 당한 궁인이나 내시 중에는 죽을 때 거리낌없이 말을 하여 시역의 사실을 언급한 자도 있었습니다. 바깥의 소문이 비록 분명하지 않다 하여도 또한 말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또 들으니 고문을 받던 어떤 자가 꼭 할 말이 있다며 이미 말을 꺼내었지만 그 입을 쳐서 말을 못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장형(張衡)의 입을 막아서 치던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전후의 사실이 양광(楊廣)과 매우 비슷하고 사실의 증거가 더욱 분명합니다.” 하였다. 《양곡집(亮谷集)》
광해가 시역에 직접 간여하였는지는 비록 알 수 없으나 이첨이 시역의 음모를 실행한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한 일이었는데, 반정때 여러 신하들이 역적을 토벌하는 의리를 알지 못하여, 반정하던 날 바로 이첨을 베었기 때문에 끝내 그 시역의 죄를 밝히지 못하였으니 통분을 금할 수 없다. 또 광해가 비록 시역에 간여한 자취가 없다 하더라도 약밥이 이미 동궁에서 나왔으니 장오(張敖)가 어찌 죄가 없다 할 수 있는가. 춘추(春秋)의 법대로 할 것 같으면, 마침내 약을 맛보지 않은 죄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첨은 비록 죽었지마는 그때 궁인 가운데 살아 있는 자가 필시 있을 것인데, 어찌 가볍게 들추기 어렵다고 말하여 마침내 임금의 원수를 갚지 못하는 것인가. 국경에서 돌아와서 역적을 토벌하지 않은 죄를 책하여도 변명할 말이 없을 것이다. 《청야만집》
○ 시역이 어떤 죄명인데, 의심스럽고 전해 들은 말을 가지고 전일 섬기던 임금에게 덮어씌울 수 있단 말인가. 《양곡집(亮谷集)》에 실려 있는 이의길의 복수를 청하는 소[擬請復讐疏]는 의리상 매우 온당치 못하니, 그 당일 여러 사람이 처음에는 그 소를 올리려다가 바로 중지한 것은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이미 그 사실을 끝까지 추궁하여 성토하지 못했고 보면 결정나지 않은 안건을 문집에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여 보이는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심지어 짐승에게 큰 일을 부탁할 수 없다는 등의 말을 어찌 할 수 있는 것인가. 본래 묘당의 통유문(通諭文)에 이런 말을 넣은 것도 역시 어진 사람으로서의 실수이니 수몽(守夢)이나 계곡(谿谷)을 시켜 이 글을 짓게 하였으면 결코 이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D-001]독부(獨夫) : 임금이 정치를 잘못하여 민심을 잃으면, 그것은 임금이 아니라 고립된 독부(獨夫)라 한다.
[주D-002]덕을 …… 적국(敵國) : 오기(吳起)가 위(魏) 나라 무후(武侯)와 배를 타고 가다가 말하기를, “임금이 덕을 닦지 않으면 이 배 안에 탄 사람이 모두 적국(敵國)이 된다.”고 하였다.
[주D-003]장형(張衡) : 수(隋) 나라 양제(煬帝 양광(楊廣))가 아버지인 문제(文帝)를 죽였는데 뒤에 장형(張衡)이 다른 일로 형벌을 받으면서 그 사실을 말하려고 하자 입을 쳐서 죽여 말을 못하게 하였다.
[주D-004]장오(張敖) : 한 나라 고조(高祖)가 그의 사위인 조(趙) 나라 임금 장오(張敖)에게 들리어 유숙하는데, 장오의 신하인 관고(貫高)가 고조를 암살하려다 발각되었다. 장오는 그 음모를 몰랐으나 역시 죄가 없을 수 없다 하여 처벌을 받았다.
[주D-005]약을 …… 죄 : 허(許) 나라의 임금이 병중에 약을 먹다가 중독되어 죽었는데, 춘추(春秋)에, “허 나라의 세자(世子) 지(止)가 그 임금을 시(弑)하였다.”고 썼다. 그것은 세자인 지가 아버지가 먹을 약을 먼저 맛보지 않았다고 죄를 준 것이다.
[주D-006]국경에서 …… 죄 : 진(晉) 나라 조순(趙盾)이 임금에게 미움을 받아 망명의 길을 떠나는 중도에서, 조천(趙穿)이 그 임금을 죽였다는 소문을 듣고 다시 돌아왔다. 춘추(春秋)에 쓰기를, “조순이 임금을 죽였다.” 했으니, 그것은 조순이 망명하다가 임금이 죽은 줄 알고 국경을 넘지 않고 왔으며, 돌아와서는 임금을 죽인 조천의 죄를 다스리지 않았으므로 조순이 임금을 죽인 것과 같다는 뜻이다.

 

연려실기술 제19권
 폐주 광해군 고사본말(廢主光海君故事本末)
광해군


광해군의 휘는 혼(琿)이며, 선조의 둘째 아들이요, 공빈(恭嬪) 김씨가 낳았다. 을해년에 나서 처음에 광해군으로 책봉되었다가 만력(萬曆) 기유년에 왕위에 올랐고 천계(天啓) 계해년에 폐위되니 왕위에 있은 지 15년이었다. 강화에 방치되었다가 갑자년에 이괄의 난리로 인하여 태안(泰安)으로 옮겼고 반적(叛賊)이 평정된 다음 강화에 돌아왔다. 병자년(1636) 겨울에 교동도(喬桐島)에 옮겼다가 정축년 2월에 제주(濟州)로 옮겼다. 신사년에 죽었는데 인조 19년 67세였다. 양주(楊州) 적성동(赤城洞) 해좌(亥坐) 언덕에 장사 지냈는데 공빈의 무덤과는 소 울음 소리가 서로 들릴 만한 거리였다.
○ 신해년에 존호(尊號)를 체천희운준덕홍공(體天熙運峻德弘功)이라고 올렸고 병진년에 존호를 서이입기명성광렬(敍彛立紀明誠光烈)이라고 올렸다.
○ 폐비(廢妃) 문성군 부인(文城郡夫人) 유씨(柳氏)는, 판윤(判尹) 자신(自新)의 딸로 병자년에 나서 계해년 10월에 죽었는데, 향년 48세이며 적성동에 장사 지냈다. 광해의 무덤과 같은 언덕이면서 무덤은 다르다.
○ 폐세자(廢世子) 지(祬)는 무술년에 나서 경술년에 관례(冠禮)를 거행하고 세자로 책봉되었다가 계해년에 폐위되었다. 뒤에 강화에 보냈더니 7월에 땅굴을 파고 몰래 빠져 나왔으므로 사헌부에서 논계(論啓)하여 사사하였는데 나이는 26세였다. 양주 수락산(水落山) 옥류동(玉流洞)에 장사 지냈다.
○ 폐세자 빈(嬪) 박씨는 무술년에 났고 계해년 5월에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연려실기술 제4권
 단종조 고사본말(端宗朝故事本末)
정난(靖難)에 죽은 여러 신하


황보인(皇甫 仁) 《세종조 상신록》
김종서(金宗瑞) 《문종조 상신록》
정분(鄭苯) 《상신록》
이양(李穰)
이양은, 종실 사람이오, 의안대군(義安大君) 화(和)의 아들이다. 무과에 올랐고, 세종의 수릉관(守陵官)이 되어서 정일품(正一品)에 오르고 벼슬이 좌찬성에 이르렀다.


조극관(趙克寬)ㆍ조수량(趙遂良)ㆍ조번(趙藩)

조극관은, 본관이 양주(楊州)인데, 정평공(靖平公) 계생(啓生)의 아들이요, 문강공(文剛公) 말생(末生)의 조카이다. 태종 갑오에 문과에 오르고, 세종조에 경상 감사를 거쳐 이조 판서에 이르렀다. 계유년 10월 10일 밤에 향교동(鄕校洞) 네거리에서 죽었는데, 적몰하고 연좌되었다가 예종(睿宗)조에 해금되었다.조수량은 극관의 아우인데, 세종 경자에 문과에 오르고 계유년에 평안 감사가 되어 미처 부임하지 못하고 난을 만나 영광(靈光)으로 귀양갔다 《해동야언》에는 고성(固城)으로 귀양갔다 하였다 가 조금 뒤에 사사되었다.
조번은 극관의 종제인데, 계유년에 같이 화를 입었다.
번의 아우 이(籬)가 진사로서 연좌되어 청주로 귀양갔었고, 김시습(金時習)ㆍ서거정(徐居正)과 서로 시를 지어 주고 받고 하였다. 성종조에 벼슬이 군수에 이르렀다. 이상은 양주 조씨의 족보


민신(閔伸)

민신은,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문종조에 병조 판서가 되고 곧이어 이조 판서로 옮겼는데, 계유년에 화를 입었다. 뒤에 보관(復官)되었고, 시호는 충정공(忠貞公)이다.
○ 임신에 세조가 연경에 갈 때에 신을 부사(副使)로 삼기를 청하였는데, 민신이 병을 칭탁하고 가지 않았다. 계유년에 정수충(鄭守忠)이 세조께 아뢰기를, “신이 가만히 용(瑢)에게 붙었으니 신뢰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황보인(皇甫麟)의 무리를 베는 시기에 이르러 신이 마침 현릉(顯陵)에 비 세우는 역사를 감독하고 있었는데, 세조가 삼군 진무(三軍鎭撫) 서조(徐遭)를 보내어 역사하는 장소에서 베었다. 신의 아들 보창(甫昌)ㆍ보해(甫諧) 등 다섯 사람도 모두 죽었다.


허후(許詡)

허후는, 본관은 하양(河陽)이니, 영상 문경공(文敬公) 조(稠)의 아들이다. 세종 병오에 문과에 오르고, 병진에 중시(重試)에 뽑혔다. 황보인ㆍ김종서 등과 더불어 문종의 고명을 받았는데, 계유년에 좌참찬으로 귀양갔다가 사사되었다. 시호는 정간공(貞簡公)이다.
○ 공의 가문은 충효를 대대로 가풍으로 하였다. 그리하여 아버지를 여의고 상주 노릇함에 극히 애통히 하였으며, 어머니를 섬김에 있어서 마음을 기쁘게 지성으로 봉양하였다. 세종조 20여 년 동안에 몸을 조심하고 입을 삼가 지켰다. 《추강집 본전》
○ 처음에, 허후가 승지에 올랐을 때에 사람들이 모두 와서 축하하는데, 아버지 허조는 홀로 근심하는 안색을 띠고 밤새 자지 않았다. 혹자가 물으니, 조가 말하기를, “천도로 보면 무엇이든지 차면 이지러지기 시작하는 법인데, 내가 세상에 공덕도 없이 관품이 신하로서는 최고인 정승의 자리에 이르렀고, 자식도 승지가 되었으니. 허씨의 화가 얼마 남지 않았다.” 하더니, 과연 그 말이 들어맞았다. 《추강집》


안평대군(安平大君) 용(瑢)

안평대군 용은, 자는 청지(淸之)이며, 호는 비해당(匪懈堂)이요, 세종의 셋째 아들이다. 계유년에 강화(江華)에 안치되었다가 사사되었다. 시호는 장소공(章昭公)이다.
○ 공이 학문을 좋아하였는데, 시와 문에 더욱 능하였으며, 서법이 기이하고 뛰어나, 천하에 제일이었다. 또 그림을 잘 그리고, 거문고와 비파를 잘 탔다. 성품이 호방하여, 옛것을 좋아하고 좋은 경치를 찾아서 북문 밖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지었고, 또 남호(南湖)에는 담담정(淡淡亭)을 짓고, 만 권의 서적을 쌓아놓고 문사들을 불러모아 <십이경시(十二景詩)>를 짓고, 또 <사십팔영>을 지었으며, 밤에 등불을 켜 달고 얘기하기도 하고 달빛 아래 배를 띄우기도 하며, 연구(聯句)를 짓기도 하며, 바둑이나 장기를 두기도 하니, 음악 소리가 끊이지 않고, 진탕 마시고 취하여 우스갯 소리를 하며, 한때의 이름 있는 선비와 모두 사귀었는데, 무뢰배와 잡인들도 많이 따랐다.바둑판과 바둑알을 모두 옥으로 만들었으며, 바둑알에 도금(鍍金)도 하였다. 또 사람을 시켜 얇은 비단을 짜게 해서 진서(眞書)ㆍ초서ㆍ행서를 휘갈겨 써서 요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곧장 내주었다. 하는 처사가 모두 이와 같았다. 《용재총화》
○ 성간(成侃)이 크게 이름이 났으므로, 공이 사람을 시켜 청하니, 간이 가보고 시부로 화답하였다. 공경히 대접하여 보내고 후일에 다시 만나기로 기약하였다. 간의 어머니가 간에게 말하기를, “왕자의 도리로는 마땅히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며 근신하며 다른 일이 없어야 하니, 어찌 사람을 모아 패거리를 만드는 일을 하겠는가.그 실패할 것을 알 수 있으니, 너는 함께 사귀지 말라.” 하였다. 그 뒤에 두세 번 성간을 불렀으나, 끝내 왕래하지 않았다. 얼마 안되어 공이 실패하여 죽었으니, 간의 집안 사람이 모친의 식견에 탄복하였다. 《용재총화》 ○ 성간은 용재의 중형이다.
○ 안평의 필법이 뛰어나고 갸륵하며 재기가 가장 우수하여, 조자앙(趙子昻) 맹부(孟頫)와 서로 견주어야 마땅한데, 공은 조자앙의 필법만을 본받았기 때문에, 속스러운 것을 면치 못하였다. 또한 안평이 귀공자로서 처음으로 이 필법을 주창하여 온 세상을 휩쓸었다. 이 때문에 그 뒤 역대의 어필(御筆)이 우연히 모두 이 필법을 써서,드디어 나라 습속이 되었다. 근년까지 온 세상이 이 필법에 쏠려서 왕우군(王右軍 왕희지)과 자앙을 같은 수준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말하기를, “청지(淸之 안평(安平))가 왕우군의 필획으로 조자앙의 서체를 썼다.” 하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원교필결(圓嶠筆訣)》


박팽년(朴彭年)

박팽년은, 자는 인수(仁叟)이며, 호는 취금헌(醉琴軒)인데, 본관은 순천(順天)이다. 세종 갑인에 문과에 오르고, 정묘에 중시에 뽑혔다. 병자에 형조 참판으로 아버지 판서 중림(仲林)과 아우 네 사람과 아들 헌(憲) 등과 함께 모두 죽었다. 숙종 때에 시호를 충정(忠正)이라 내려 주고, 영조 무인(1758)에 이조 판서로 증직하였다.
○ 공은 성품이 침착하고 말수가 적었으며, 《소학(小學)》책에 나오는 예법으로 몸을 단속하여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의관을 벗지 아니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공경하는 마음이 우러나게 하였다. 문장이 온화하고 맑으며 필법은 종요(鍾繇)와 왕희지(王羲之)를 본받았다. 《추강집본전》
○ 공은 천성적으로 타고난 충성심이 있어 명 나라의 천순(天順) 황제가 오랑캐에게 잡혔을 때에는 정침(正寢)에서 자지 않고 항상 지게문 밖에 짚자리를 깔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물으니 답하기를, “천자가 오랑캐 나라에 있어, 천하가 당황하니, 내가 비록 배신(陪臣)이나, 차마 마음이 편치 못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치재일기(耻齋日記)》 ○ 《무인기문(戊寅記聞)》에는 이것을 하위지의 말이라 하였고, 혹은 두 공이 다 행하였다 한다.
○ 집현전의 문학하는 선비에 신숙주ㆍ최항(崔恒)ㆍ이석형(李石亨)ㆍ정인지 등이 박팽년ㆍ성삼문ㆍ유성원ㆍ이개ㆍ하위지와 함께 모두 한때 이름을 날렸는데, 성삼문은 문란(文瀾)이 호방하나 시에는 재주가 짧고, 하위지는 대책(對策)과 소장(疏章)에는 능하나 시를 알지 못하고,성원은 타고난 재주가 숙성하였으나, 견문이 넓지 못하고, 이개는 맑고 영리하여 발군의 재주가 있으며 시도 뛰어나게 맑았으나 제배들이 모두 팽년을 추앙하여 집대성(集大成)이라 하였으니, 그가 경학ㆍ문장ㆍ필법에서 모두 능함을 이름이다. 그러나, 모두 참화(慘禍)를 입어서 저술이 세상에 남아있지 않다. 《용재총화》
○ 세조가 영의정이 되어서 부중(府中)에서 잔치하는데, 박팽년이 시를 짓기를,

묘당 깊은 곳에 풍악 소리 구슬프니 / 廟堂深處動哀絲
만사가 오늘에는 도무지 모를레라 / 萬事如今摠不知
풍이 솔솔 불고 버들가지 푸르른데 / 柳綠東風吹細細
꽃이 핀 밝은 봄날 길고 기네 / 花明春日正遲遲
선왕이 이룬 대업은 금궤에 있는 책을 찾아 놓고 / 先王大業抽金櫃
성주의 큰 은혜는 옥잔에 취하도다 / 聖主鴻恩倒玉巵
즐기지 아니하고 어이하랴 / 不樂何爲長不樂
취하고 배부르니 태평성대 노래하세 / 賡歌醉飽太平時

하였다. 세조가 그 시를 부중에 현판으로 걸게 하였다.
○ 세조가 육신들에게 형신할 때에 김질(金礩)을 시켜 술을 가지고 옥중에 가서 옛날 태종이 정몽주에게 불러준 노래를 읊어 시험하니, 성삼문은 정포은의 노래로 답하였고, 박팽년과 이개는 모두 스스로 단가(短歌)를 지어서 답하였다 한다.
○ 일찍이 단가(短歌)를 지어 이르되, “금생여수(金生麗水)라 한들 물마다 금이 나며, 옥출곤강(玉出崑崗)이라 한들 뫼마다 옥이 나며, 아무리 여필종부(女必從夫)라 한들 임 마다 좇을소냐.” 하였다.[金生麗水라 들 물마다 金이 나며 玉出崑崗이라 들 뫼마다 玉이 나며 女必從夫라 들 님마다 조츨소냐] 《추강집》
○ 공이 처형에 임하여 사람들을 돌아다보며 말하기를, “너희들은 우리들을 난신(亂臣)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우리들의 죽음은 계유년 때 사람(김종서 등을 말함)과 같지 않다.” 하였다. 금부랑 김명중(金命重)이 사사로이 박팽년에게 말하기를, “공이 어찌 군부(君父)에게 불효를 저질러 이런 화를 당하는가.” 하니, 공이 탄식하되, “마음이 평온하지 않으니 할 수 없다.” 하였다. 《추강집》
○ 공이 죽을 때에 아들 순(珣)의 아내 이씨(李氏)가 임신 중이었다. 대구(大邱)에 사는 교동(喬桐) 현감 이일근(李軼根)의 딸인데, 자청하여 대구로 갔다.
조정에서 명하기를, “아들을 낳거든 죽이라.” 하였다. 박팽년의 여종 또한 임신 중이었는데, 스스로 생각하기를, “주인이 딸을 낳으면 다행이요, 나와 똑같이 아들을 낳더라도 종이 낳은 자식으로 대신 죽게 하리라.” 하였는데, 해산을 하니, 주인은 아들을 낳고 종은 딸을 낳았다. 바꾸어 자기 자식을 삼고, 이름을 박비(朴婢)라 하였다.장성한 뒤 성종조 때에 박순의 동서 이극균(李克均)이 본 도 감사로 와서 불러 보고 눈물을 씻으며 말하기를, “네가 이미 장성하였는데, 왜 자수하지 않고 끝내 조정에 숨기는가.” 하며, 곧 자수시켰다. 임금이 특별히 용서하고 이름을 일산(壹珊)으로 고쳤다. 지금 박 동지(同知) 충후(忠後)가 그 자손이다. ○《장빈호찬(長貧胡撰)》 《노릉지(魯陵誌)》
○ 부인 이씨(李氏)는 관비가 되어서 수절하며 평생을 마쳤다.
○ 공이 그 사위 이공린(李公麟) 평안 감사 윤인(尹仁)의 아들이요, 재사당(再思堂) 원(黿)의 아버지이다. 을 맞던 날에 공청에서 물러 나와 묻기를, “납폐하였는가?” 하니, 부인이 말하기를, “납폐는 하였지만 폐백을 대광주리에 담았으니, 이것이 무슨 무례인가요.”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내가 이 사람을 취한 것이 이 때문이요” 하였다. 《병자록》 ○ 공린이 무과를 하였는데, 장인에게 연좌되어 폐고(廢錮)되었다가 성종조에 서용되어 현령이 되었고 연산조(燕山朝)에 또 아들 원에 연좌되어 청주로 귀양갔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 뒤에 청주에 물러나서 살았다.
○ 공이 성삼문 등과 함께 집현전에서 번드는데, 세종이 친히 나와서 잔에 술을 부어 돌렸다. 공이 취하여 엎어져서 고꾸라지매, 세종이 비단 남빛 옷을 벗어서 덮어 주었다. 죽은 뒤에 공의 자손이 이 옷만을 여러 대 전하였는데, 임진왜란 때에 옷과 신주를 함께 땅에 묻었다가 왜적이 물러간 뒤에 파내어 보니, 신주는 완전하나 옷은 썩었다고 한다. 《병자록(丙子錄)》
○ 공의 후손 충후(忠後)가 대구에 살면서 천역에 들었는데, 부사 박응천(朴應川)이 명부에서 빼어 천역을 면하게 하였고, 선조 초년에 관직을 제수하였다. 《동각잡기》
○ 선조가 하루는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박팽년이 일찍이 친구를 천거하였는데, 그 친구가 밭을 주려 하매, 박팽년이 말하기를, ‘친구간에 주고받는 것은 비록 거마라도 사양하지 않는다는 옛 글이 있지마는 혐의스러우니 받을 수 없다.’ 하고, 거절하였다 하니, 이것이 청렴이라고 이르는 것이다.” 하고 곧 명하여 그 자손을 녹용(錄用)하였다.
○ 공의 현손(玄孫) 계창(繼昌)이 선조 신미에 처음으로 녹용의 은전(恩典)을 입어서 소격서(昭格署) 참봉을 제수 받았다. 일찍이 계창이 공의 기제사날 꿈에 여섯 사람이 사당 문 밖에 와서 서 있는 것을 보고 깨어나서 곧 여섯 분의 제사를 지냈다. 박숭장(朴崇章)이 기록한 것에 “한강(寒崗) 정구(鄭逑)가 말하기를 ‘사대부 집에 훈공이 있어서 군을 봉한 조상은 의례 시조가 되어서 조천(祧遷)하지 않는 것인데, 지금 선생의 사업은 어찌 봉군뿐이겠는가’ 하며, ‘영원히 조천하지 말라’ 하였기 때문에, 정식(定式)삼았다.” 하였다.
○ 대대로 회덕(懷德)에 살다가, 뒤에 전의(全義)로 옮겼는데, 지금도 박동(朴洞)에 유지(遺址)가 있다. 《노릉지(魯陵誌)》


박중림(朴仲林)

박중림은, 호는 한석당(閑碩堂)이며, 본관은 순천(順天)이다. 세종 계묘에 문과에 오르고, 정미에 중시에 뽑혀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다. 병자에 아들 박팽년과 같이 죽었다. 과보(科譜)에는 계유년에 죽었다 하였다. 시호는 문민공(文愍公)이다.
○ 어려서부터 성품이 효성스러웠고, 장성하여서는 경적(經籍)에 정통하였다. 세종이 집현전을 두니, 공이 문장과 덕행이 있다는 이유로 뽑히었다.
○ 병자에 박팽년과 함께 상왕의 복위를 꾀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같이 죽었다. 처형에 임하여 여러 아들이 울며 고하기를, “임금에게 충성하려 하니, 효도에 어긋납니다.” 하였다.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임금을 섬기는 데 충성하지 못한 것은 효가 아니니라.” 하였다. 《장릉지(莊陵誌)》


성승(成勝)

성승은,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무과에 합격하여 벼슬이 도총관(都摠管)에 이르렀다. 병자에 아들 성삼문과 같이 죽었다. 시호는 충숙공(忠肅公)이다.
○ 을해년에 단종이 세조에게 양위할 때에 공이 도총부에서 번들다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여 말하기를, “일은 끝났다.” 하고, 곧 말을 몰아 돌아왔는데 딴 방에 누워서 집 사람들도 볼 수가 없었고, 오직 성삼문이 오면 좌우사람을 물리치고 같이 얘기하였다. 병자년에 성삼문이 상왕의 복위를 꾀하여, 명 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잔치 날에 거사하기로 약속하였다.공과 유응부와 박정(朴崝)이 운검(雲劒)이 되었는데, 이 날 전내(대궐안)가 좁으므로, 운검을 그만 두게 되었다. 공이 칼을 차고 들어가려 하자, 한명회가 말하기를, “이미 전교가 내렸으니, 들어오지 말라.” 하므로 공이 명회 등을 치려 하매 성삼문이 말렸다.


성삼문(成三問)

성삼문은, 자는 근보(謹甫)이며, 호는 매죽헌(梅竹軒)이요,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세종 무오에 문과에 오르고, 정묘년에 중시에 장원으로 뽑혔다. 병자년에 승지로서 아버지 승과 아우 세 사람이 모두 죽었다. 숙종이 충문(忠文)이라는 시호를 주고, 영조 무인년(1758)에 이조 판서로 증직하였다.
○ 공은 홍주(洪州) 노은동(魯隱洞 적동리(赤洞里)) 외가에서 났는데, 날 때에 공중에서 “났느냐.” 소리가 세 번이나 들렸기 때문에 성삼문으로 이름 지었다. 사람됨이 소탈하여 얘기와 농담을 좋아하고 앉고 눕는 것도 절도가 없어 겉으로 보기에는 주장이 없는 것 같으나 속뜻은 단단하고 확고하여 빼앗을 수 없는 뜻이 있었다 한다. 《추강집》
○ 항상 임금을 경연청(經筵廳)에서 모시며, 보좌할 때가 많았다. 세종이 말년에 병이 있어 여러 번 온천에 거둥하였는데, 편복(便服) 차림으로 늘 성삼문과 이개에게 대가(大駕) 앞에서 고문(顧問)에 응하게 하니, 당시에 영광으로 여겼다.
○ 일찍이 북경에 갔었는데 어떤 사람이 백로(白鷺) 그림에 넣을 시를 써 달라고 청하여서, 공이 건성으로 부르기를,

흰 눈으로 옷을 만들고 옥으로 발을 만드니 / 雪作衣裳玉作趾
갈대 숲 물가에서 고기 노리기 몇 번 이런고 / 窺魚蘆渚幾多時

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림을 내 보이는데, 수묵(水墨)으로 그린 그림이었다. 이어 아랫 구절을 채워서 이르기를,

산음 고을 우연히 지나다가 / 偶然飛過山陰野
왕희지가 벼루 씻던 못(池)에 잘못하여 떨어졌네 / 誤落羲之洗硯池

하였다. 패관잡기
○ 북경에 가는 길에 백이(伯夷)ㆍ숙제(叔齊)의 사당에 쓰기를,

말머리를 잡고 두드리며, 그르다고 말한 것은 / 當年叩馬敢言非
대의가 당당하여 일월같이 빛났건만 / 大義堂堂日月輝
풀나무도 주 나라의 비와 이슬에 자랐는데 / 草木亦霑周雨露
부끄럽다, 그대 어찌 수양산 고사리는 먹었는고 / 愧君猶食首陽薇

하였다. 중국 사람들이 보고 충절이 있는 사람인줄 알았다 한다.
○ 일찍이 단가(短歌)를 짓기를, “이 몸이 죽어 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蓬萊山) 제일봉(第一峰)에 낙락(落落) 장송(長松)되어 있어, 백설(白雪)이 만건곤(滿乾坤)할제 독야청청(獨也靑靑)하리라.[이몸이 죽어가서 무어시될고 니 蓬萊山第一峯의 落落張松되여읜셔 白雪이 滿乾坤졔 獨也靑靑 리라]” 하였다.
○ 아들 다섯이 있었는데, 맏아들이 원(元)이다. 그 아내가 관비가 되었으나, 절개를 지켰다. 《추강집》
○ 명 나라 급사(給事) 장녕(張寧)이 시강(侍講) 예겸(倪謙) 문희(文僖) 에게 배웠는데, 예겸보다 십 년 뒤에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나왔다. 그때에 나이 24세였는데, 성삼문 등이 없다는 말을 듣고는 탄식하며 의아하게 여겨 말하기를, “우리 스승 예시강(倪侍講)이 동국에 재사가 많다고 말하였는데,어찌 눈앞에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가.” 하며, 이 때문에 시의 수창(酬唱)에 뜻이 없었다. 장녕이 지은 <예양론(豫讓論)>을 혹자는 의심하기를, “의도가 있어서 지은 것이 아닌가.” 하였다 한다. 《지봉유설(芝峰類說)》
○ 중종조에 박호(朴壕)가 과거에 올라 육품관이 되었다가, 곧 정언을 제수받았는데, 대사간으로 있는 조(趙)라는 성을 가진 자가 반론하기를, “역신의 후손이 간관(諫官)이 될 수 없다.”고 논박하여 체직(遞職)시키자, 조(趙)의 동배(同輩)들이 책하기를, “네가 감히 명신의 후손을 탄핵하고 논박하니,이렇게 무식하고서야 어떻게 그대로 간관의 자리에 있을 수 있는가.” 하였다. 조가 곧 병을 핑계하여 체직되고, 박이 도로 청반(淸班)에 올라 이조 판서까지 되었다 한다. 《월정만필(月汀漫筆)》
○ 현종(顯宗) 임자년(1672)에 호조 아전[戶曹吏] 엄의룡(嚴義龍)이 우연히 인왕산(仁王山) 비탈 무너진 곳에서 자기 그릇을 발견하였는데, 그 속에는 밤나무 신주 세 개가 있었다. 하나는 고(故) 승지 성삼문의 것이요, 둘은 성삼문의 외손 참찬 박호(朴壕) 부부의 것이었다. 성 승지의 신주는, 겉면(面)에는 성삼문(成三問) 무술생이라고 쓰고, 신주의 감중(坎中)에도 또 그와 같았다.엄의룡이 놀랍고 이상하여 달려와 여러 사대부에게 고하더니 이에 벼슬아치와 선비들이 모두 앞을 다투어 몰려가서 배례를 하고 신여(神輿)에 담아 떠메고 와서 임시로 공의 외후손인 진사 박엄찬(朴嚴纘)의 집에 봉안하고, 곧 홍주에 사는 외후손들에게 기별하니 와서 받들고 남쪽으로 돌아갔는데, 홍주 노은골에 아직도 공의 옛 생가가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경기 감사는 김우형(金宇亨)이었는데, 연로(沿路)의 관원을 시켜 호송하게 하였다. 각 고을 수령들이 영송함에 정성을 다하지 않는 이가 없고, 혹은 제수를 갖추어 제사지내는 이도 있었다. 서울과 지방의 선비들이 이로 말미암아 감동하여 구택 옆에 사당을 세우고 거사 당시의 동지였던 다섯 분을 아울러 향사하기로 하고, 병진 여름에 녹운서원(綠雲書院)을 세웠다.공이 순절한 뒤에 부인 김씨가 자기 손으로 신주를 써서 종에게 부탁하여 봉사하다가, 김씨가 죽은 뒤에 신주가 외손 박호에게로 돌아갔었는데, 박호 또한 자손이 없으므로 인왕산 기슭에 자기 집 신주와 함께 묻었다. 이백여 년 뒤에 이런 일이 있었으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장릉지》


이개(李塏)

이개는, 자는 백고(伯高) 또는 청보(淸甫)이며, 본관은 한산(韓山)이니, 목은(牧隱) 색(穡)의 증손이요, 종선(種善)의 손자이다. 나서부터 문장에 능하였다. 세종 병진에 문과에 오르고 정묘 중시(重試)에 뽑혀 직제학까지 지내다가 병자년(1456)에 죽었다. 시호는 충간공(忠簡公)이요, 영조 무인년(1758)에 이조 판서를 추증했다.
○ 시와 문이 맑고 절묘하여 세상에서 중하게 여겼다. 《동각잡기》
○ 세조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개의 숙부 계전(季甸)이 세조와 대단히 친밀하여 출입하므로, 개가 경계하였다. 병자년에 일이 발각되매, 세조가 말하기를, “일찍이 개가 그런 말을 하였다는 것을 듣고, 마음에 바보스럽게 여겼더니, 과연 비상한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이었구나.” 하였다. 《동각잡기》
○ 몸이 여위고 가냘퍼서 옷도 이기지 못할 것같이 보였는데, 엄한 형신에도 얼굴빛이 변하지 않으니, 보는 자가 모두 감탄하였다. 《추강집》
○ 단가를 짓기를, “까마귀 눈비 맞아 희난 듯 검노매라, 야광 명월이 밤인들 어두우랴. 임 향한 일편 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가마귀눈비마자희난듯검노라 夜光明月이 밤인들 어두우랴 님向 一片丹心이야 變줄이잇시랴]” 하였다.
○ 공이 직제학으로 있을 때에, 박사 성 간(成侃)과 집현전에서 연구(聯句)를 지었는데,

옥당에 봄은 따뜻하고 날은 길어지기 시작하였는데 / 玉堂春暖日初遲
졸며 남창에 의지하여 백치(白痴)를 기른다 / 睡倚南窓養白癡
우는 두어 마리 새의 소리는 낮 꿈을 놀래게 하고 / 啼鳥數聲驚午夢
살구꽃의 아리따운 웃음은, 새 시에 들어온다 / 杏花嬌笑入新詩

하였다. 성간이 차운(次韻)하기를,

어린 제비와 우는 비둘기 낮 시간이 더딘데 / 乳燕鳴鳩晝刻遲
봄이 찬 연못에는 버들이 어리석은 것 같구나 / 春寒太液柳如癡
집현전에서 졸음을 파하매, 바쁜 일이 없어서 / 鑾坡睡罷無餘事
때로 종이를 펼치고 작은 시를 쓴다 / 時展蠻牋寫小詩

하였다. 《용재총화》
○ 성간이 일찍이 그 형 성임(成任)에게 말하기를, “꿈에 이백고(李伯高)가 용이 되었다. 내가 붙들고 날아서 강을 건너는데, 떨어질까 두려워하였더니, 용이 돌아보며 말하기를, ‘내 뿔만 굳게 잡으라’하였다.”고 하였다. 임(任)이 말하기를, “백고는 당시 명망이 높고 일찍이 중시(重試)에 뽑혔는데, 자네가 그 뿔을 붙잡았으니, 반드시 중시 장원에 뽑힐 것이라.” 하였다. 얼마 안되어,공이 죽임을 당하고 간도 또한 병으로 죽었다. 《용재총화》 ○ 총화에는 모두 공을 백고로 일컬었는데, 상촌집(象村集)에 끌어서(引用) 변명하기를, “백고는 청보의 또 하나의 자(字)인가보다.” 하였는데, 지금 상고하건대, 《노릉지(魯陵誌)》에 《추강집(秋江集)》에 있는 본전(本傳)을 인용하여 청보라 하지 않고 백고라고 하였으니, 상촌이 《추강집》을 보지 못하고 이런 논란을 한 것이 아닌가.


하위지(河緯地)

하위지는, 자는 천장(天章) 또는 중장(仲章)이며, 호는 단계(丹溪)요,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세종 무오년(1438)에 문과에 자원하였고, 병자년(1456)에 예조참판으로 죽었다. 시호는 충렬공(忠烈公)이다.
○ 공의 사람됨이 침착하고, 조용하고 말수가 적어, 말을 함에 버릴 것이 없으며, 공손하고 예(禮)에 밝아, 대궐을 지날 때에는 반드시 말에서 내리고, 비가 와서 땅이 질더라도 한번도 통행이 금지된 길로 가지 않았다. 항상 집현전에서 임금을 모시고 경연에서 강의하여, 보정(補正)한 사항이 많았다. 《추강집》
○ 천순(天順)황제가 북쪽 오랑캐에게 잡혔을 때에, 공이 일찍이 감개하여 말하기를, “천자가 몽진(蒙塵)한 것은 천하가 다같이 분하게 여기는 바이다. 우리들이 비록 해외의 배신(陪臣)이지만, 어찌 황제의 고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가.” 하고, 매양 바깥 사랑에 거처하고 침실에 들어가지 않았다. 공의 뜻과 행실이 이와 같으니, 능히 충의로 순국할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인기문(戊寅記聞)》
○ 문종이 승하하자,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돌아갔다. 단종이 왕위를 이으니, 인심이 위태롭게 여기고 의심하였다. 박팽년이 일찍이 공에게 도롱이를 빌렸는데, 공이 시로 답하기를,

남아의 득실이 예나 지금이나 같도다 / 男兒得失古猶今
머리 위에는 분명히 백일이 임하여 있네 / 頭上分明白日臨
도롱이를 주는 것이 아마도 뜻이 있으리니 / 持贈蓑衣應有意
오호(五湖)의 연우(煙雨)에 좋게 서로 찾으리 / 五湖煙雨好相尋

하였는데, 대개 시사(時事)를 슬퍼함이었다. 《추강집》 《동각잡기》
○ 세조가 김종서를 죽이고 영의정이 되매, 공이 조복(朝服)을 다 팔아버리고, 전 사간(前司諫)으로 선산(善山)으로 퇴거하였다. 세조가 임금께 아뢰어 좌사간(左司諫)으로 불렀으나, 글을 올려 사양하고 나오지 않았다.을해에 세조가 선위를 받으매, 교서를 내리어 간곡히 불렀다. 공이 부름에 응하매 예조 참판을 제수하였으나, 녹 먹기를 부끄러워하여 을해 이후의 녹은 따로 한방에 쌓아 두고 먹지 않았다. 《추강집》
남 추강(南秋江)의 《육신전》은 전해들은 말을 기록하였기 때문에 오류를 면치 못하였다. 유성룡(柳成龍)이 승지로 승정원에 있을 때에 《노산조일기(魯山朝日記)》를 보았는데, 계유 봄에 《역대병요(歷代兵要)》가 편찬되자, 공에게 편찬에 참가한 공로로 상을 주었더니, 극력 사양하였다. 자세한 사항은 《추강집》에 보인다.집의로 직제학이 되었다가 이어 병으로 휴가를 신청하여, 영산(靈山) 온천에 목욕한다고 하고서 시골로 내려갔다. 그해 10월에, 세조가 정난(靖難)하자 임금께 아뢰기를, “지난번 하위지가 면대를 청하였을 때에 김종서가 못하게 하였으니, 이것도 또한 간신이 임금의 총명을 가린 것과 같습니다. 위지를 다시 불러 쓰기를 청합니다.” 하였다.이에 드디어 좌사간에 임명하자, 공이 상소하였다. 추강이 기록하기를, “계유10월에 공이 조복을 팔고 전 사간으로 선산에 퇴거하였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세조가 선위를 받고, 불러서 나아가니, 예조 참판을 제수하고 심히 총애하였다.” 하였는데, 공이 선산으로 물러갔다는 것은 그럴듯하나, 그가 벼슬에 나왔다는 것은 사실과 다른 듯 하다.아마도 공이 상소한 뒤에 얼마 안되어 조정에 돌아오기는 하였으나, 이때에는 노산이 아직 왕위에 있었던 듯 하다. 《서애집》
○ 단종 즉위 초에 공이 병을 칭탁하고 시골로 내려가 있는 중 김종서 등이 피살되매, 조정에 돌아올 뜻이 없었다가, 세조가 선위를 받고 부르므로 나와 예조 참판이 된 것은, 그 뜻이 다른 데 있었던 것이다. 《여헌집(旅軒集)》 <묘갈(墓碣)>
○ 세조가 그 재주를 사랑하여 공이 형신을 받을 때에 비밀히 달래기를, “네가 만일 음모에 참가한 사실을 숨기면 면할 수 있다.” 하였더니, 공이 웃고 답하지 않았다. 세종이 배양한 인재 중에 공을 으뜸으로 쳤다 한다. 《동각잡기》
○ 공은 선산부 영봉리(迎鳳里)에서 생장하였는데, 어렸을 때에 작은 서재를 짓고 형제와 더불어 문을 닫고 글을 읽어서, 사람들이 그 얼굴을 보지 못하였다. 묘가 선산부 서쪽 고방산(古方山)에 있는데, 부인 김씨와 합장(合葬)하였다. <묘갈(墓碣)>
○ 공의 처자가 일선(一善 선산(善山))에 있었는데, 금부 도사가 그 아들들을 잡으러 왔다. 공은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장자는 호(琥)요, 차자는 박(珀)이었다. 《동학사 초혼기(東鶴寺招魂記)》에는 연(璉)ㆍ반(班)이라 기록되었다. 박은 나이 이십 밖에 되지 않았지만 조금도 두려운 빛이 없이 도사에게 말하기를,“원컨대, 조금만 늦추어 주시오, 어머니에게 고할 말이 있소” 하였다. 도사가 허락하매, 박이 문안에 들어가 꿇어앉아 어머니께 고하기를, “죽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이미 죽었으니, 자식이 어찌 홀로 살겠습니까. 비록 조정의 명령이 없더라도 자결하여야 합니다. 다만 누이동생이 장차 출가할 나이가 되었으니,천한 종이 되더라도 부인의 의리로 마땅히 한 사람을 따를 것이요, 개와 돼지 같은 행실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고 드디어 재배하고 나와서 조용히 죽으니 사람들이 모두 과연 공의 아들이라고 말하였다. 《송와잡기(松窩雜記)》


유성원(柳誠源)

유성원은, 자는 태초(太初)이며, 본관은 문화(文化)요, 사인(舍人) 사근(士根)의 아들이다. 세종 무오년(1438)에 문과에 오르고, 정묘년(1447)에 중시에 뽑혔다. 병자에 사예(司藝)로서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시호는 충경공(忠景公)이다.
○ 세종조에 《송사(宋史)》가 우리나라에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 세종이 여러 번 명 나라에 청하였다. 하루는 집현전의 여러 학사들이 송 나라 조정의 인물을 논하다가 누군가가 말하기를, “왕안석(王安石)이 《송사》의 어느 전(傳)에 들었을까?” 하였다. 여러 사람은 “왕안석이 간신전에 들어야 한다.” 하였다.한두 사람이 반박하기를, “안석이 신법을 만들어서 천하를 어지럽혔으니, 이것이 진실로 소인이다. 그러나, 문장과 절의가 일컬을만한 것이 많고, 그 마음을 캐어 보면 오직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였을 뿐이다. 그가 천하를 그르친 것은, 다만 오활하고 고집이 셌기 때문이니, 진회(秦檜)와 채경(蔡京)의 무리에 넣을 수는 없고, 열전(列傳)에 넣는 것이 합당하다.” 하였더니,공이 이 의논을 힘써 주장하였다. 얼마 안 되어 송사가 나왔는데, 과연 <열전>에 있었다. 공이 기뻐하여 말하기를, “옛적에 《강목(綱目)》이 우리나라에 오지 않았을 때, 익재(益齋) 선생 이제현(李齊賢) 이 《자치통감(資治通鑑)》의 《무후기(武后紀)》를 읽다가 탄식하고 시 한 구를 지었는데,
어쩌면 주의 여분을 가져다가 우리 당 나라의 일월을 이었는고[那將周餘月 續我唐日月]” 하였더니, 뒤에 《강목》을 얻어 오니, 주자가 과연 주(周)를 내치고 당을 높였는지라, 익재가 매우 자부하였는데, 아무개를 감히 익재에게 견줄 수는 없지마는, 마땅히 제군의 항복을 받을 만은 하다.” 하였다. 《필원잡기》 《명신록》
○ 집현전 남쪽에 큰 버드나무가 있는데, 기사 경오년 간에 흰 까치가 와서 깃들고 새끼가 모두 희었으며, 계유년에는 나무가 홀연히 다 말랐으므로, 공을 희롱하여 말하기를, “화가 반드시 유(柳)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하더니, 공이 패하고 조금 뒤에 집현전이 혁파되었으니, 그 말이 과연 맞았다. 《필원잡기》


유응부(兪應孚)

유응부는, 본관이 기계(杞溪)이다. 무과에 올랐고, 키가 남보다 크며 용모가 엄장(嚴莊)하고 날래며 활쏘기를 잘하며, 능히 담장을 뛰어넘었다. 세종과 문종이 모두 아끼고 중하게 여겼다. 벼슬이 2품에 이르렀고 병자년에 화를 입었다. 시호는 충목공(忠穆公)이다.
○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하였다. 아우 응신(應信)과 함께 활쏘기와 사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나서 새와 짐승을 만나면 쏘아서 맞추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집이 가난하여 한 섬 곡식의 저축도 없으나,어머니를 봉양하는 데는 넉넉히 갖추지 않은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일찍이 포천(抱川) 농장에 왕래할 때, 형제가 따라 가다가 말 위에서 몸을 돌려 기러기를 쏘매, 활시위 소리와 동시에 떨어지니, 어머니가 크게 기뻐하였다. 《추강집》
○ 공이 일찍이 북병사(北兵使)가 되어서 시를 짓되,

장군이 절(節)을 가지고 와서 국경을 진정시키니 / 將軍持節縝夷蠻
변방에 티끌이 없어지고 군사들이 조는도다 / 塞外塵淸士卒眠
해 긴 낮 빈 뜰에서 무엇을 구경하는가 / 晝永空庭何所玩
날랜 매 삼 백 마리 누 앞에 앉았다 / 良鷹三百坐樓前

하였다. 가히 그 기상을 알 수 있다. 《추강집》 《명신록(名臣錄)》
○ 일찍이, 단종 복위를 꾀할 때에 공이 여러 사람 가운데에서 주먹을 자랑하며 말하기를, “한명회와 권람을 죽이는 데는 이 주먹이면 족하다. 긴 창과 큰 칼이 필요 없다.” 하였다.
《동각잡기》 《추강집》
○ 공은 벼슬이 재상의 반열에 있으면서도 거적자리로 방문을 가리고, 먹는 데는 고기 한 점 없었으며, 때로 양식이 떨어졌었다. 죽던 날에 그 부인이 울며 말하기를,“살아서는 평안히 산 적이 없고, 죽을 때는 큰 화를 얻었다.” 하니, 길가는 사람이 눈물을 뿌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관에서 그 가산을 몰수하는데, 방안에는 떨어진 짚자리만이 있었다. 아들은 없고 딸이 둘 있었다. 《동각잡기》 《추강집》
태사씨(太史氏)가 말하기를, “누군들 신하가 아니리요마는, 지극하다, 육신(六臣)의 신하 노릇함이여. 누군들 죽지 않으리요마는, 장하다, 육신의 죽음이여. 살아서 임금을 받들 때는 신하된 도리를 다하고, 죽을 때는 임금에게 충성하여 신하의 절개를 세웠다. 충분(忠憤)이 백일을 꿰뚫고, 의기는 가을 서리 보다 늠름하여,백세 후에 신하된 자로 하여금 한마음으로 임금 섬기는 의리를 알게 하였다. 충절은 천금(千金)이요, 한 몸을 터럭같이 여겨서 몸을 죽여 인을 이루고 목숨을 버려 의를 취하였으니, 군자가 말하기를, ‘은 나라의 삼인(三仁)과 동국의 육신(六臣)이 행적은 다르나, 도는 같은지라, 이 또한 장하구나.’ 하였다. 세조가 정승이 되어서는 공을 주공(周公)에 견주고, 왕위에 나가서는 덕이 우순(虞舜)을 짝하여 높고 크고 넓어서 이름할 수 없으니, 육신이 복종하지 않는다고 세조에게 무슨 누(累)가 되겠는가. 백이(伯夷)가 서산(西山)에 고사리를 캐었으나, 주 무왕의 덕이 떨어지지 않았고, 엄자릉(嚴子陵)이 동강(桐江)에서 고기를 낚았어도, 한 광무(漢光武)의 공이 손상되지 않았다. 슬프다. 육신으로 하여금 금석 같은 단심만을 지키고 강호에 물러가게 하였더라면, 상왕(上王)의 수명도 연장할 수 있었고, 세조의 덕이 더욱 빛났을 것인데, 불행히도 분격한 마음으로 큰 화에 빠졌도다. 공경히 조사를 지어 가로되,

사나운 기운이 가득한데 / 厲氣初濟
뭇 구멍이 막혔도다 / 衆窺爲塞
서리와 눈이 희게 덮였는데 / 霜雪皎皎
소나무만이 홀로 푸르도다 / 松獨也碧
신하의 머리는 / 有臣之首
임금 위한 마음으로 희었거니 / 愛君而白
그 머리는 끊을 수 있어도 / 有頭可截
굽힐 수 없는 절개로다 / 節不可屈
다른 사람의 곡식은 / 他人之粟
죽을지언정 먹지 않았으니 / 寧死不食
고죽(孤竹)의 맑은 바람이요 / 孤竹淸風
시상(柴桑)의 밝은 달이로다 / 柴桑明月
흙 가운데 귀신이 있으니 / 土中有鬼
원통한 피가 한 움큼이로다 / 寃血一掬

하였다. 《추강집》 《육신전》
○ 노량(鷺梁) 남쪽 언덕 길가에 다섯 무덤 세상에서 전하기를 예전에 여기에서 죄인을 죽였다 한다. 이 있는데, 그 앞에 각각 작은 돌을 세워 표지를 하였다. 가장 남쪽은 박씨의 묘라 하고, 다음 북쪽은 유씨(兪氏)의 묘라 하고, 또 다음 북쪽은 이씨의 묘라 하고, 또 다음 북쪽은 성씨의 묘라 하고, 또 성씨의 묘가 그 뒤 십여보 사이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어떤 중이 육신의 시체를 져다가 묻었는데 그 중은 김시습(金時習)이라 한다.” 하였다. 성씨의 두 묘는 세상에서 전하기를, 성씨 부자의 묘인데, 뒤에 있는 것이 성승(成勝)의 묘라 한다. ○ 일설에는 육신 묘가 다섯 무덤만 있고 하나는 없다 하는데, 하위지의 묘가 선산부 서쪽에 부인의 묘와 같이 있다는 것이 장현광(張顯光)의 기록에 보였으니, 하공은 시골에 반장(返葬)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인가.
○ 허봉(許篈)이 말하기를, “부인을 씨(氏)라고 일컫는데, 지금 다섯 묘가 한 곳에 늘어 있으니, 부인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남자는 반드시 관직을 일컫는데, 지금 씨(氏)라고만 일컬었으니, 당시의 의사가 오신(五臣)을 여기에 묻어 놓고는 감히 드러내어 새기지 못하고, 이렇게 일컬은 것이 아닌가.” 하였다. 지봉(芝峰)이 세 묘만을 일컬어 말하기를, “성삼문ㆍ박팽년ㆍ유응부의 묘가 틀림없다.” 하였다. 임진왜란 뒤에 어떤 사람이 가보니, 비석은 그대로 있는데, 자획이 마모되어 거의 분별할 수가 없었다 하였다.
○ 인조조(仁祖朝)에 장릉(章陵)을 발인(發靷)할 때에 길을 닦는 관원이 다섯 신하 묘인 것을 알지 못하고 무너뜨려서 평평하게 하고 그 앞에 세웠던 돌까지 무너뜨렸는데, 효종(孝宗) 경인에 박팽년의 후손 숭고(崇古)가 다시 분묘를 봉축하고, 그 돌을 세웠다. 《지봉유설》 《미수기언》 《노릉지》 《장릉지》 ○ 숭고가 묘를 수축할 때에는 성씨의 한 무덤은 갈(碣)이 없어서 분별할 수 없었다.
영남 일선부(一善府)에 하씨의 묘가 있고, 유씨(柳氏)만은 장사지낸 곳이 없다. 호서(湖西) 홍주(洪州)에 성씨의 묘가 있고, 충주 덕면리(德面里)에 박씨의 묘가 있다. 성씨는 외손이 있는데 전하기를, “성씨 묘라는 것은 그 한 몸의 한 부분을 묻은 것이다.”고 하였다. 《기언》 ○ 숭고는 곧 박팽년의 칠대손이다.
○ 성종조에 김종직(金宗直)이 아뢰기를, “성삼문은 충신입니다.” 하니, 성종의 얼굴빛이 변하였다. 종직이 천천히 말하기를, “만일 변이 있으면, 신은 마땅히 성삼문이 되겠습니다.” 하니, 성종의 얼굴빛이 밝아졌다. 《석담일기(石潭日記)》 《장릉지》
○ 인종조에 경연관 한주(韓澍)가 아뢰기를, “세조가 박팽년 등을 마음으로는 가상히 여기나, 위태롭게 의심하는 시기에 죄를 주지 않을 수 없으므로 일찍이 하교하기를 ‘너희들은 당대에는 난신이요, 후세에는 충신이라.’ 하였으니, 후세에 그 자취가 없어질까 두려워서 이 말씀을 하여서 자손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고 하였다. 《동각잡기》 《노릉지》
○ 선조 병자에 박계현(朴啓賢)이 경연(經筵)에서 박팽년과 성삼문의 충성을 논하여 말하기를, “《육신전》은 남효온(南孝溫)이 저술한 것인데, 전하께서 취하여 보시면, 그 자세한 사항을 아실 것입니다.” 하였다. 선조가 육신전을 가져다 보고 놀랍고 분하여 이르기를, “지금 소위 《육신전》이라는 것을 보니, 극히 해괴하여 춥지 않아도 소름이 끼친다.옛적에 우리 세조께서 천명을 받아 중흥하여, 하늘이 주고 백성이 귀의하였는데, 예부터 천명을 받아 왕위에 오르는 것은 하늘이 명한 것이요, 인력으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저 남효온이란 자는 감히 사사로이 문묵(文墨)을 희롱하고 요망한 혀끝을 놀려서 국사를 폭로하였으니, 심히 패악하고 부도하여 그 죄는 붓으로 이루 다 쓸 수 없다. 이 자는 아조(我朝)의 죄인이다.옛적에 최호(崔浩)가 국사를 폭로한 죄로 처벌을 받았으니, 이 사람이 만일 살아 있다면, 내가 반드시 엄하게 국문하여 치죄할 것이다. 저 육신이 충신이라면, 왜 선위를 받던 날에 쾌히 죽어서 인신의 절개를 바치지 못하였는가. 만일 그리하지 못했다면, 왜 도망하여 서산에서 고사리를 캐지 못하였는가. 이미 세조를 신하로서 섬겨놓고 또 임금을 해치기를 몰래 도모하는 것은 옛날 예양(豫讓)이 깊이 부끄럽게 여긴 것이다. 저 육신이란 자들이 우리 조정에 무릎을 꿇고서 자객의 음모를 하여, 만에 하나 요행을 바라다가 일이 실패한 뒤에 의사로 자처하였니, 마음이나 행동에서 낭패했다고 할 수 있으니 열장부(烈丈夫)가 될 수 있겠는가. 혹자는 말하기를, ‘헛되게 죽는 것이 공을 세우는 것만 못하고, 이름을 없애는 것이 덕으로 갚는 것만 못하다.’ 하는데,성삼문 등의 마음이 잠시라도 그 임금[단종]에게 있지 않음이 없으면서 일부러 세조의 조정에 신하 노릇하여 장차 다른 날에 성공을 기약하였다. 어찌 못난 사람들처럼 스스로 개천에 목매어 죽어서 아는 이가 없게 하리오 했다면 이는 옳지 못한 처사이다. 만일 성공하는 것만 귀하게 여기고, 원수에게 신하 노릇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백이ㆍ숙제(伯夷叔齊)와 삼인(三仁)이 반드시 꾀하여 주 나라에 신하 노릇하면서 은(殷) 나라의 흥복을 도모하였을 것이다. 이것으로 본다면, 이 무리가 그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후세에 모범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이제 그들의 옳지 못함을 드러내어 의논한다. 이 글은 오늘날 신자(臣子)가 볼 것이 못되니, 내가 모두 거둬다가 불사르려 한다.만일, 이 책에 있는 말을 이야기하는 자가 있으면, 또한 엄중히 다스리려 한다.” 하였다. 삼공이 답하기를, “이 책이 민간에도 드물고 연대가 오래되어 없어졌는데 만일 수색하는 거조를 내린다면, 반드시 큰 소란만 일어나고, 이익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영상 홍섬(洪暹)이 입시하여 육신의 충성을 극진히 말하였는데, 언사가 지극히 간절하여 신하들 중에 눈물을 흘리는 이가 많았다. 선조가 이에 감동하여 깨달아서 그만 두었다. 《석담일기》 《장릉지》
삼가 상고하건대, 육신은 참으로 충절의 선비라는 사실은 지금에 와서 말할 바가 아니요, 《춘추(春秋)》에, “나라를 위하여 악한 것을 숨기는 것도 또한 고금을 통한 의리라.” 하였거늘 박계현이 경솔하게 때아닌 의논을 내 놓아 주상께서 잘못된 거조가 있을 뻔 하였으니, 어리석어 일을 알지 못하는 자라 하겠다. 애석하게도 모신 신하들 중에, 김종직이 성종께 대답한 말을 임금 앞에서 아뢴 자가 없었다. 《동각잡기》 《노릉지》
○ 효종 3년 임진년(1652)에 태학생 조경(趙絅)이 구언(求言)에 응하여 상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국가가 정몽주(鄭夢周)의 무리에게는 모두 아름다운 시호를 주고 박팽년ㆍ성삼문 등에게는 정려(旌閭)하는 은전(恩典)이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명 나라 문황(文皇)이 방효유(方孝孺), 연자녕(練子寧)들의 삼족(三族)을 멸하고서도, 마침내 말하기를, ‘자녕이 있으면 짐이 마땅히 쓰겠다.’ 하였고, 만력(萬曆) 초에 이르러 혁제(革除)할 때에 죄를 진 여러 신하들의 분묘에 유사(有司)를 시켜 제사지내고, 후손들을 후하게 구하고 등용하여 충절을 표창하고 장려하였는데, 우리 선조 대왕께서 들으시고 크게 기뻐하여 교서를 내리어 육신의 후손을 등용하였으니, 전에 없는 넓은 은전(恩典)이 신종(神宗)과 일치하였습니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당시의 조정 신하들이 그들의 사당과 분묘에 충절을 표창하여, 선조 대왕의 뜻을 확장시켜 행하지 못한 것입니다. 듣건대, 성삼문의 홍주(洪州) 옛 집이 아직도 무너지지 않았다 하니, 만일 전하께서 은혜를 내리시어 옛날 주 무왕(周武王)이 상용(商容)의 마을을 표(表)한 것같이 하시면 지하의 썩은 뼈를 위로하는 것 뿐 아니라, 실로 선왕이 남겨주신 가르침을 준수하고 드러내어 후세에 신하가 되어서 두 마음을 품는 자를 부끄럽게 할 것입니다.” 하였다. 《조야기문》 《장릉지》
○ 효종(孝宗) 8년 정유년(1657)에 찬선(贊善) 송준길(宋浚吉)이 아뢰기를, “명 나라의 방효유는 실상 일대의 죄인이요, 만고의 충신이라, 수년이 못되어 그 문집을 간행하고 전사(專祠)를 지어 제사 지내는 것을 허락하였으니, 중국 조정의 규모와 기상이 관대하고 심원합니다. 우리나라의 성삼문과 박팽년의 무리는 실로 방효유의 짝입니다.일찍이 성삼문은 연산(連山)에 살았고, 박팽년은 회덕(懷德)에 살았는데, 연산과 회덕에 모두 유현(儒賢)의 사당이 있으므로, 학자들이 두 사람을 함께 향사하기를 원하였는데, 이것이 중국의 전사에 비교할 것은 아닌데, 이것도 감히 못하옵니다. 전하께서 명 나라의 전례에 의거하여 특별히 허락하여 주시어 한 지방사람들의 소원에 맞게 하여 주소서.” 하였다. 효종이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으나, 의논이 일치되지 않아서, 행하지 못하였다. 《육신유고(六臣遺稿)》 《장릉지》
○ 숙종(肅宗) 5년 기미년(1679)에 노량에 행차하여 군사를 사열할 때에, 영부사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이 강 건너편에 성삼문 등 육신의 묘가 있는데, 지금 듣건대, 그 무덤이 모두 무너져서 평토가 되었다 합니다. 세조조에 역률(逆律)로 논하였지마는, 일찍이 선조조에 신하가 각각 제 임금을 위한 행동이라 하여 그 자손을 등용하였으나,이번에 가까운 곳에 행차하신 때를 계기로 만일 그들의 무덤을 봉식(封植)하는 특전을 내리시면, 실로 절의를 포창하고 장려하는 도리가 빛이 날 것입니다.” 하니, 숙종이 이르기를, “선조(先朝)에서 이미 자손을 등용하는 처사가 있었으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특별히 그 무덤을 봉식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장릉지》
○ 숙종 6년 경인에 강화 유수(江華留守) 이선(李選)이 상소하여, 육신 및 황보인, 김종서의 원통함을 논하여 말하기를, “저 여러 신하들은 천명이 이미 구주(舊主 단종 (端宗))에게 끊어지고 운명이 이미 진인(眞人)에게로 돌아간 것을 어찌 알지 못했겠습니까. 그런데도 끝끝내 본래의 뜻을 지키어 죽음에 이르러도 뉘우치지 않는 것은 각각 제 임금을 위하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세조께서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시절을 만나 그들을 베었지마는 실로 그들의 지조를 가상하게 여겼으므로, 당시에 말씀하시기를, ‘삼문 등은 오늘의 난신이요, 후세에는 충신이라.’ 하였고, 또 훈사(訓辭)를 지어 예종(睿宗)에게 보이기를, ‘나는 둔(屯)한 때를 만났고 너는 태(泰)한 때를 만났으니, 일은 때를 따라 변하는 것이다.만일 나의 한 일에 구애되어 변통할 줄을 알지 못하면, 이른 바 둥근 구멍에 네모진 물건을 끼우는 것이다.’ 하였고, 세조가 병환이 있으실 때를 당하여, 예종이 정무에 참여하여 결재하는데, 첫째로 명하여 계유 병자에 죄를 입은 사람에 연좌된 이백여 인을 모두 방면하였으니, 이러한 은전이 이미 세조가 계신 때에 행해졌습니다. 선조의 유신 송준길(宋浚吉)이 성삼문 등의 일을 진달하였는데, 선왕께서 심히 칭찬하시기를, “성삼문 등은 방효유(方孝孺)의 무리라 하셨으니, 열성조의 남겨주신 뜻을 이어서 여러 신하의 죄명을 씻는 것은 전하께서 선대의 뜻을 계술(繼述)하기에 달려 있지 않겠습니까” 하였다.숙종이 답하기를, “육신의 일은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열성조에서 죄를 용서하지 않았으니, 분묘를 봉식하거나 선비들이 존묘(尊墓)하는 것만 금지하지 않을 뿐이요, 이 밖에 따로 은전을 가하기는 어렵다.” 하였다. 《국조보감》
○ 숙종 7년 신유년(1681)에 과천(果川) 유림이 통문(通文)을 내어 관학(館學)에 고하고, 노량강 남쪽 언덕에 육신의 사원(祠院)을 처음으로 세웠다. 구월에 상량하는데, 대제학 이민서(李敏敍)가 상량문을 짓고 영부사 남구만(南九萬)이 봉안하는 제문을 지었다. ○ 《장릉지》
○ 숙종 17년 신미 9월에, 능에 거둥할 때에 노량진을 건너다가 육신 묘를 보고 특별히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였다. 판부사 김덕원(金德遠)이 아뢰기를, “육신묘가 비록 예로부터 전설은 있으나, 아직도 명백한 증거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박팽년의 후손인 고(故) 군수(郡守) 숭고(崇古)가 표석을 고쳐 세워서,의심스러운 그대로 전할 뿐이요, 감히 분명히 조상의 분묘라고 말하지 못하여, 한 번도 제사를 무덤 앞에서 행하지 않았는데, 나라에서 이제 갑자기 행하면 사체가 온당치 못합니다. 노량 가에 육신의 사우(祠宇)가 있으니, 여기에서 치제하는 것이 어떠할까 합니다.” 하였고, 도승지 목창명(睦昌明)은 말하기를, “육신이 일찍이 복관(復官)된 일이 없으니, 나라에서 치제한다면, 제문에 어떻게 써야 합니까” 하였다.숙종이 이르기를, “육신의 절의가 방효유(方孝孺)의 무리와 다름이 없는데, 어찌 지금까지 복관을 하지 않았는가?” 하였으며, 덕원이 아뢰기를, “방효유 등 여러 사람들은 두어 대 후에 모두 증직하고 시호를 내려주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중국과 같이 관대하지 못하여, 밑에 있는 신하들이 감히 청하지 못하였습니다. 위에서 특별히 명하시면, 무엇이 불가 하오리까.” 하였다.숙종이 이르기를, “내 뜻은 다만 그 절의를 가장(嘉獎)하고자 하는 것이니, 육신을 특별히 복관하고, 그 사우도 사액(賜額)하고, 치제하게 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목창명이 아뢰기를, “열성조에서 행하지 않은 일을 경솔히 의논하기 어려우니, 대신과 지방에 있는 유신(儒臣)에게 물어서 처리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였다. 숙종이 그렇게 하는 것이 가하다고 허락하였다. ‘체제는 아직 천천히 하라.’ 하였다.《장릉지》
○ 이에 진사 한종석(韓宗奭) 등이 소를 올렸는데, 경연에 참여하는 신하들이 곧 임금의 뜻을 받들어 행하지 못하여 숭장(崇獎)의 은전을 속히 베풀지 못하게 한 것을 공박하고, 이어서 복관(復官)ㆍ사액ㆍ치제를 빨리 거행하여 육신을 포숭(褒崇)하고 격려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내가 마땅히 헤아려서 분부하겠다.” 하였다.
숙종이 대신들을 인견할 때에 영상 권대운(權大運)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이 일로써 고(故) 상신(相臣) 허목(許穆)에게 물은 사람이 있었는데 허목이 답하기를, “매우 불가하다. 신하는 임금을 위하여 숨기고, 자식은 아비를 위하여 숨기는 것이 만세에 바뀌지 않는 정론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였고, 좌상 목래선(睦來善)은 아뢰기를,“열성조에서 행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뜻한 바가 있는 것 같고, 선배의 의논도 또한 여러 갈래이니, 경솔히 의논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하였고, 우참찬 유명천(柳命天)은 아뢰기를, “그 자손을 등용하고 사우(祠宇) 세우는 것을 금하지 않았으니, 육신을 대접하는 도리가 지극하다 하겠으니, 복관의 일에 이르러서는 실상 거리낄 일이 없습니다.” 하였고, 병판 민종도(閔宗道)는 아뢰기를,“제왕가의 일은 필부(匹夫)와 다르니, 오늘날 만일 포창의 거조가 있으면, 사방이 그 소문을 듣고 반드시 흠앙하여 마지않을 터인데, 어찌 시비가 있겠습니까.” 하였고, 형판 윤이제(尹以濟)는 아뢰기를, “열성조에서 행하지 않은 것을 가벼이 논의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였고, 이판 유명현(柳命賢)은 아뢰기를, “육신의 일은 사람마다 그들의 지조를 슬프고 불쌍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전하의 행차가 지나시는 즈음에 이미 느끼신 바가 있을 것이니, 반드시 한번 치제하시옵소서.” 하였고, 부제학 권해(權瑎)는 아뢰기를, “육신의 충절은 만고에 빛나는데, 세조가 말씀하시기를 당세의 난신이라고 한 것은 후세로 하여금 포창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포창하는 은전이 전하의 마음으로써 결정되었으니, 참으로 거룩하신 일입니다.” 하였고,교리 이동표(李東標)는 아뢰기를, “여러 신하들의 신중한 의논은 육신의 절의를 높일 것이 없다고 여긴 것이 아닙니다. 뜻은 있습니다. 세조께서 난신으로 베고는 충의로 포창하였더라면 어찌 천고의 거룩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때와는 조금 다르나, 전하께서 그 절의를 포창하고자 한다 하였으니, 지금 자기 임금에게 마음을 다한 사람들을 포창하는 일에 대하여 신은 불가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제왕가의 일은 선조(先朝)에 득죄한 자도 후에 추장(追獎)하는 일이 많은데, 오늘 전하의 말씀은 매우 훌륭하니, 신하들이 받들어 거행하는 데에 무엇이 불가하겠습니까.” 하였다. 숙종이 이르기를, “모든 신하들의 갑논을박이 각각 견해가 있어, 그러할 것이나 방효유의 빛나는 충절을 이미 성조가 인정하였고, 그 뒤에 시호를 준 것이 또한 관대한 은전에서 나왔으며, 세조께서 그들에 대하여 당세의 난신이요, 후세의 충신이라.”고 한 말씀은, 그들을 가상히 여기시는 뜻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춘추에 어버이를 위하여 숨기는 의리를 내가 알지 못함이 아니나, 제왕가의 일은 필부와 다르므로, 다만 그 절의를 포창하고 후인을 격려하고자 함이니, 오늘의 이 일이 무엇이 불가하겠는가. 또 제문의 문자에 꺼리고 구애받음이 있다는 논의에 대하여는 지금 포창하려는 것은 오직 절의를 가상히 여기는 데 있으니,제문을 지을 때에 무슨 거리낄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논의가 일치하지 않아 도리에 신중해야 하며 용이하게 처리할 수 없으니, 예랑(禮郞)을 시켜 지방에 있는 유신에게 물으라.” 하였다.
○ 진사 민언심(閔彦諶)이 상소하여 청하기를, “급히 쾌한 결단을 내리시어 거듭 치제ㆍ복관ㆍ사액의 명령을 내리시옵소서.” 하였다. 숙종이 답하여 이르기를, “이 일은 내가 본래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바가 있었으나, 다만 도리(道理)에 신중하게 해야 하기에 널리 물어서 재량하여 처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하였다.
○ 이조 참판 이현일(李玄逸) 지방에 있는 유신 의 논의의 대략에, “세조가 천명과 인심에 핍박되어 부득이 단종에게서 전위를 받았는데, 저 육신들이 자기가 섬기던 임금[端宗]에게 마음을 한결같이 하여 절개를 지켜 항거하고 충성을 다하여 그 마음을 변하지 않았으니, 백이(伯夷)가 무왕(武王)을 그르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 일은, 주의 한통(韓通)ㆍ명의 경청(景淸)ㆍ고려의 정몽주와 같습니다. 대개 백이가 무왕을 그르게 여겼지만 공자가 가로되, ‘백이는 인(仁)을 구하여 인을 얻었다’ 하였으니, 백이를 칭송한 까닭으로 해서 무왕에게 해되는 것이 있겠습니까. 한통이 주(周)에 충성을 바쳐 죽었는데, 송 태조가 후하게 추증하였고, 경청과 정몽주가 섬기던 임금에게 절개를 다하였는데, 명 나라 선종(宣宗)과 우리 태종이 복관도 명하고,포증(褒贈)도 명하였으니, 모두 절의를 숭장하여 후세 신하의 충의를 권한 것입니다. 하물며 세조가 육신을 후세의 충신이라고 한 말씀이 실상 송 태조가 한통을 추증한 뜻과 같고, 또 은미한 뜻을 후세 자손에게 보인 것이니, 지금 이 일은 실로 선왕의 뜻을 잘 이어 받들어 실행하는 것입니다.또 어찌 털끝만한 거리낌이 있겠습니까. 만일 지금 어름어름 선대의 일을 숨기려고 하면 도리어 세조가 천명(天命)에 응하고 인심을 순히 한 거사에 누가 되고, 선조의 너그럽고 넓은 도량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장릉지(莊陵誌)》
12월에 특명으로 육신의 관작을 회복하여, 민절사(愍節祠)라 사액(賜額)하고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였다. 《국조보감》 ○ 또 명하여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의 벼슬을 회복하고 연산(連山)에 있는 성씨의 밭과 노비를 도로 내어 주었다. 전교하기를, “대개 국가가 먼저 힘쓸 것은 절의을 숭장하는 것보다 더 큰 일이 없고,신하로서 가장 어려운 일이 또한 절의에 죽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이것이 옛적 제왕들이 절의를 지키는 선비를 중하게 여기고 포창을 한 이유이다. 생각건대, 저 육신들은 어찌 천명과 인심을 거스를 수 없음을 알지 못하였으리요마는, 자신이 섬기던 임금에게 마음을 두어서, 죽어도 후회하지 않으니,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충절이 수백 년 후에도 늠름하게 떨쳐져서 명 나라의 방효유ㆍ경청과 함께 논할 수 있는 것이다. 하물며 마침 선릉(先陵)에 행차하는 일이 있어 연(輦)이 육신묘 옆을 지나다가 내 마음에 더욱 느낀 바가 있었음에서랴. 슬프다, 어버이를 위하여 숨기는 의리를 모르겠는가. 내가 포창하고자 하는 것은 다만 그들의 절의만이 아니라, 당세의 난신이요,후세의 충신이라 하신 세조의 말씀에 뜻이 있으니, 오늘의 이 일은 세조의 남겨준 뜻을 계승하고 세조의 거룩한 덕을 빛내는 것이다. 어찌 온당치 못한 일이 있으랴. 성삼문 등 육신을 특별히 복관하고 치제하여 백대의 풍성(風聲)을 세우라.” 하였다. 《장릉지》
우승지 강선(姜銑)이 아뢰기를, “육신 중에 박팽년만이 혈족이 있어서 나라에서 써 주었고, 성삼문은 자손이 없고 외손만 있었는데, 연전에 서울 인왕산에서 우연히 매장된 신주를 얻었다 합니다. 지방에 유락(流落)한 외손이 지금 제사를 받들고 있는데, 가난하여 제사를 지낼 수 없다 하오니, 만일 그곳의 감사로 하여금 그 성명을 찾아 아뢰게 하여, 써 주시면 더욱 전하의 거룩한 덕을 빛나게 할 것입니다.” 하였다. 숙종이 그대로 따랐다. 《장릉지》
○ 장릉(莊陵)을 능으로 봉한 뒤에 총리사(摠理使) 최석정(崔錫鼎)이 장계(狀啓)하기를, “지난 을축 연간에 육신의 사당을 단종의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였던 옛 사당 남쪽에 창설하였는데 감사 홍만종(洪萬鍾)ㆍ도사(都事) 유세명(柳世鳴)ㆍ군수 조이한(趙爾翰)이 상의하여 창건하고 엄흥도(嚴興道)를 배향하였다.보통 규정으로 말하면 능침(陵寢)과 화소(火巢) 안에 신하의 사당을 둘 수 없지마는, 능의 멀리 지방의 외진 곳에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육신들이 능침을 모시고 호위하는 것이 이 세상이나 저 세상이 다를 바가 없는데, 지금 만일 능에 봉해졌다고 해서 갑자기 육신의 사당을 헐게 한다면, 신도(神道)에서 보더라도 온당치 못한 바가 있으니, 헐지 말고 그대로 두어 동시에 제사하는 뜻을 보이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였다. 《조야기문(朝野記聞)》
숙종이 대신들을 불러 볼 때에 영상 유상운(柳尙運)이 말하기를, “사당은 분묘와 다르니, 능의 화소 안에 그대로 두는 것이 부당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숙종이 이르기를, “촉한(蜀漢) 무후(武侯 제갈량)의 사당이 소열(昭烈)황제의 사당 근처에 있으므로, 두보(杜甫)의 시에 ‘군신(君臣) 일체로 제사를 같이한다.[一體君臣祭祀同]’ 하였으니, 육신의 사당을 그대로 능 안에 두는 것이 무방할 것 같다.” 하였다. 상운이 아뢰기를, “소열황제의 사당은 촉한 때에는 반드시 백제성(白帝城)에 따로 세우지 않았을 것이요, 뒷사람이 창설한 것 같으니, 오늘 이 일을 증거 삼을 수 없고, 또 봄가을로 선비들이 모여서 왕릉의 정자각(丁字閣)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육신의 제사를 행하는 것이 타당치 않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최석정이 아뢰기를, “단종은 연대가 오래 되었기 때문에 영녕전(永寧殿)에 올려 모시고, 배향(配享)하는 공신이 없었는데, 육신은 다른 사람과는 다르니, 능에 모시어 호위하게 하는 것은 이승이나 저승이 다를 바가 없으므로, 그들의 사당을 화소 밖에 옮겨 세운다면 섭섭하게 여기실 것 같습니다. 모든 일에 경(經)과 권(權)이 있어서, 반드시 전례(前例)에 구애될 것이 없으니, 사당을 그대로 두어서 옮기지 않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호판(戶判) 민진장(閔鎭長)이 아뢰기를, “정자각에서 조금 먼 곳에 옮겨 세우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예판 최규서(崔奎瑞)가 아뢰기를, “조천(祧遷)된 능에는 한식 차례 외에 없는데, 육신의 사당에는 춘추의 제향이 있을 것이니,이것도 또한 장애가 됩니다. 옮겨 세우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우참찬(右叅贊) 서종태(徐宗泰)ㆍ이조 참판 이인환(李寅煥)ㆍ부제학 조상우(趙相愚)ㆍ우부승지 김우항(金宇杭)은 모두, “그대로 두는 것이 무방하다.” 하였다. 숙종이 이르기를, “신리(神理)와 인정이 서로 다르지 않으며, 육신은 다른 신하와 처지가 다르니, 사당을 조금 먼 곳에 옮겨 세운다는 것은 옳은 줄로 모르겠다.” 하였다. 최석정이 아뢰기를, “중국에서도 공신을 능에 모신 예가 있고, 이번에 사릉(思陵) 근처에 정씨(鄭氏) 분묘도 파서 옮기지 않기로 하였으니, 육신의 사당에도 그런 예를 쓸 수 있습니다.” 하였다. 숙종이 이르기를, “육신의 사당은 그대로 두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장릉지》
○ 그 뒤에 화소 밖으로 옮겨 세웠다.


엄흥도(嚴興道)

엄흥도(嚴興道)는 영월(寧越) 호장(戶長)인데, 숙종 조에 공조 참의를 증직하고 영조 무인에 종이품을 증직하고, 뒤에 공조 판서를 증직하고 시호는 충의공(忠毅公)이라 하였다.
○ 선조 을유년(1685)에 군수 김늑이 흥도의 종손(宗孫)인 정병(正兵) 한례(漢禮)의 호역(戶役)을 면제하여 주고, 이어서 그 고을에 있는 노산묘(魯山墓)를 수호하게 하고, 문안(文案)을 만들어 주었다. 《조야기문》
○ 숙종 무인년(1698) 겨울 주강(晝講) 때에 이유(李濡)가 아뢰기를, “엄흥도의 자손을 돌보아 주는 도리가 있어야 마땅한데, 근래에 들으니, 그 7대손 신무(信武) 형제가 청주 땅에 살고, 그 밖의 족속도 많다 하니, 본도(本道)로 하여금 자세히 알아본 뒤에 처분을 내려주심이 어떠합니까?” 하였다. 숙종이 이르기를, “본도로 하여금 알아보게 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최석정이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에게 주는 편지에 말하기를, “엄호장이 국가의 변고를 당하여 의를 붙든 것에 감탄하고 가상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으니, 지금 후손의 등용에 대하여 어찌 인색하게 돌아보지 않을 뜻이 있으리오. 다만 엄신무가 말하기를, ‘그 아비 생존시에 송상(宋相) 시열(時烈)이 화양동(華陽洞)에 있었는데, 그 선조 호장의 사적을 기술하여 주기를 청하니, 송상이 허락하고 이루지 못하였으며, 계축 영릉(寧陵 효종의 능)을 천봉(遷奉)할 때에 송상이 화양동에서 능 아래로 가는데, 그 아비가 따라 갔다.’ 한다. 내가 장릉에 있을 때에 육신 사당에서 기문(記文) 현판을 보았는데, 곧 송상이 지은 것으로서, 그 글에 이르기를, ‘무신 년간에 내가 경연에서 호장의 자손을 등용하자는 뜻을 아뢰고 그 뒤에 여러 곳으로 알아보았으나,찾지 못하였으니 슬프도다.’ 하였다. 이 글은 을축년에 지은 것이어서 엄신무의 아비가 송상을 따라다녔다는 계축년으로부터 십여 년이 되거늘,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신무의 말을 믿을 수 없다. 영월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호장이 늙어 죽은 뒤에 자손이 없으므로 영월에 있는 분묘를 고을 사람들이 제사지내고 폐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였다. 《명곡집(明谷集)》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

금성대군 유는 세종의 여섯째 아들인데, 을해에 삭녕(朔寧)으로 귀양갔다가 병자에 순흥(順興)에 안치되었고, 정축에 화를 입었다. 뒤에 신원하였고, 시호는 정민공(貞愍公)이다.
○ 을해년(1455)에 대신들이 말하기를, “공이 난을 음모하여 한남군(漢南君) 어()ㆍ영풍군(永豊君) 선(瑔)ㆍ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과 더불어 서로 공모하였으니, 급히 그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삭녕으로 귀양보냈다. 병자에 성삼문 등이 죽으매, 공을 순흥에 안치하고 그 가산을 몰수하였다.정축년(1457)에 순흥 부사 이보흠(李甫欽)과 더불어 상왕의 복위를 꾀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안동(安東) 옥에 갇히었다. 하루는 알몸으로 도망하였는데, 부중(府中)을 크게 수색하였으나, 잡지 못하였다. 한참만에 밖에서 들어오면서, 웃으며 말하기를, “너희들이 비록 무리는 많으나, 하잘 것 없구나. 내가 어찌 진실로 도망할 사람이냐. 우리 임금이 영월에 계시다.” 하고 의관을 정제하고 북향하여 사배(四拜)하고 죽음을 받았다. 여러 사람들이 불쌍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장릉지》


이보흠(李甫欽)

이보흠은, 자는 경부(敬夫)이며, 호는 대전(大田)이요,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세종 기유에 문과에 올라 집현전 박사를 지냈다. 정축에 순흥 부사(順興府使)가 되어 금성대군과 더불어 함께 상왕의 복위를 꾀하다가 베임을 당하였다. 시호는 충장공(忠莊公)이다.
○ 공은 문장에 능하고 사무 처리에 재주가 있었으며, 성품이 검소하여 옷이 때묻고 떨어져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해동잡록》
○ 단종이 왕위를 내놓은 뒤에 공은 벼슬하기를 기꺼워하지 않았다. 일찍이, 글을 지어서 길주서(吉注書)의 묘에 제사하였는데, 그 글에 말하기를, “주무왕이 의거를 하매, 백이ㆍ숙제가 고사리를 수양산에서 캤고, 한 광무가 중흥하니, 엄자릉(嚴子陵)이 낚시를 부춘(富春)에 드리웠다.” 하였다. 《병자록》
○ 정축에 순흥 부사가 되었다. 금성대군 유가 순흥으로 귀양와서 매양 공과 더불어 서로 대하여 눈물을 흘리며 가만히 영남 인사들과 연결하여 상왕을 복위시키려다가 일이 발각되니 곤장을 때리고, 박천(博川)으로 귀양 보냈다가 얼마 뒤에 금부 도사를 보내어 베었다.


정종(鄭悰)

본관은 해주(海州)인데, 문종의 부마(駙馬)이다. 경혜공주(敬惠公主)에게 장가들어 영양위에 봉해졌다. 시호는 헌민공(獻愍公)이다.
○ 공이 적소에 있다가 사사된 뒤에, 공주가 순천 관비가 되었다. 부사 여자신(呂自新)은 무인인데, 장차 공주에게 관비의 사역을 시키려 하니, 공주가 곧 대청에 들어가 교의(交椅)를 놓고 앉아서 말하기를, “나는 왕의 딸이다. 죄가 있어 귀양은 왔지마는, 수령이 어찌 감히 나에게 관비의 사역을 시킨단 말이냐.” 하므로 마침내 부리지 못하였다. 여자신은 뒤에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는데, 여유길(呂裕吉)의 방조(旁祖)이다.


정보(鄭保)

호는 설곡(雪谷)이요, 본관은 연일(延日)이니, 포은 정몽주의 손자요, 이조 참의 종성(宗誠)의 아들이다. 벼슬이 감찰ㆍ예안 현감(禮安縣監)에 이르렀다.
○ 공은 세 아들이 있었는데, 맏이는 윤정(允貞)이니, 주부이고, 다음은 윤화(允和)요, 끝은 윤관(允寬)이다. 윤화가 장가들기 전에 문과에 올랐는데, 창방(唱榜)할 때에 잘못해서 좌판(坐板)에서 떨어져 즉사하였다. 공이 슬퍼하여 마침내 홧병을 얻었다. 병자의 변에 공이 말하기를, “우리 아이가 다행히 먼저 죽었다. 안 죽었더라면 반드시 이 난에 참여하였을 것이라.” 하였다. 《월정만필》


권절(權節) 중귀(重貴)의 아들 엄(嚴)이 고려의 집의(執義)로서 조선에 들어와서 성을 권(權)으로 회복하였다. 백 세(百歲)를 살았는데, 집에 있은 지 50 년에 한 번도 서울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는 단조(端操)요, 호는 율정(栗亭)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집의(執義) 엄(嚴)의 손자요, 밀직사(密直司) 왕중귀(王重貴)의 증손이다. 고려말의 정승 왕후(王煦)는 국재(菊齋) 권보(權溥)의 아들이요, 아홉 봉군[九封君]중의 하나이다. 충선왕(忠宣王)이 길러서 아들을 삼고 성을 왕씨로 주었다.아들 중귀(重貴)가 밀직사로 공민왕 때에 화를 입었다. 중귀의 아들 숙(肅)ㆍ엄(嚴)이 이씨 조선에 들어와 성을 권으로 회복하였다. 세종 정묘에 문과에 올라 집현전 교리를 지냈는데, 병자 이후에는 미친 병을 칭탁하여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았다.
○ 어려서 기이한 상모(相貌)가 있고 힘이 남보다 뛰어나 남이(南怡)와 한 때에 함께 이름을 날렸다.
○ 세종조에 과거에 올랐는데 세종이 말하기를, “문무(文武)에 큰 재주가 있으니 활쏘기와 말타기를 연습하여 그 그릇을 성취시키겠다.” 하여 특별히 사복 직장(司僕直長)을 제수하였다가 이어서 집현전 교리를 시켰다. 세조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여러 번 그 집에 가서 술을 마시며, 서로 친밀히 하며 은밀히 대사를 귀띔하였다.공이 귀먹은 체 하며 응하지 않고, 드디어 자취를 감출 생각으로 미친 병을 칭탁하고 일생동안 벼슬하지 않았으니, 절(節)이라는 그 이름을 저버리지 않았다 하겠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매, 그 재주와 그릇을 아끼어 첨추(僉樞)에 제수하고 충청 감사를 제수하였으나, 끝내 나오지 않고 죽은 뒤에 교리(校理)라는 관직명을 묘비에 썼다. 《지봉유설》 《후촌만록》
○ 처신할 방법을 그 조카인 은군자(隱君子) 권안(權晏)과 상의하여 몸가짐과 일에 대응함에 있어 검속을 하지 않고 정신병 든 사람같이 하며 그 몸을 마쳤다. 《율곡집(栗谷集)》 <율정난고서(栗亭亂稿序)>
○ 단종에게 사육신과 생육신이 있는데, 공과 원호(元昊)의 무리가 생육신이 된다. 일찍이 남의 집의 묵은 편지첩을 보니 공의 짧은 편지가 있는데, “근보(謹甫 성삼문의 자)가 멀리 세상을 떠나버리니 같이 의논할 사람이 없다.”라는 말이 있었다. 《후촌만록》
○ 공이 어렸을 때, 친척의 집안 여종이 와서 공의 어머니에게 말을 전하느라고 중문 옆에 섰는데, 공이 지나다가 기둥을 들고 여종의 치마폭을 그 밑에 넣었으나 여종은 알지 못하였다. 갈 때에야 알고 울면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공의 누이가 역시 엄청나게 힘이 세어 기둥을 들고 꺼내주었다. 권씨 옛 집에 맷돌 한 쌍이 있는데 사람들 사이에 전하기를, 공이 평일에 들고 치던 것이라 한다. 《후촌만록》
○ 공이 산에서 놀다가 이상한 중을 만났는데, 일부러 와서 힘자랑을 하였다. 공이 절에 있는 사기그릇을 모으게 하니 열 죽이나 되었다. 중으로 하여금 손가락으로 퉁겨서 깨뜨리게 하였다. 두 죽까지 깨뜨리고 나서는 중이 손톱이 아파서 그만두었다. 공이 이어서 잠깐 사이에 여덟 죽을 다 깼는데 그 손톱 자국이 사기 그릇 죽마다 모양이 달랐다.어떤 것은 열 개의 눈썹같이 되고 어떤 것은 열 개의 화판(花瓣)같이 되었는데, 예리한 칼로 오린 것 같았다. 중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공은 하늘이 내린 분이라.” 하였다. 《후촌만록》. 방언에 그릇 열 개를 한 죽이라 한다.
○ 숙종 임오에 강원도 선비들이 상소하여 육신 사당에 배향(配享)하기를 청하였고, 갑신에 경기도 선비들이 상소하여 선산이 있는 양주(楊州)에 서원을 세우기를 청하였다. 예조에서 아뢰어 정려(旌閭)를 명하고 이조 판서의 증직과 충숙(忠肅)의 시호를 내렸다. 영조 임자에 영월 선비들이 팔현사(八賢祠)를 육신 사당 옆에 세웠는데 팔현은 즉 김시습(金時習)ㆍ남효온(南孝溫)ㆍ원호(元昊)ㆍ권절(權節)ㆍ이맹전(李孟專)ㆍ조려(趙旅)ㆍ정보(鄭保)ㆍ성담수(成聃壽)다. 뒤에 신설한 모든 사당을 헐어 없애라는 명령이 있어서 헐었더니 삼일 뒤에 예조의 공문이 내려왔는데 팔현사는 헐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으나 미처 고쳐 세우지 못하였다. 조공(曺公) 하망(夏望)이 그 때에 부사로 있었는데 그 아들 명후(命後)가 친히 보고 아주 자세히 전하였다.


원호(元昊)

원호는, 본관은 원주(原州)이며 호는 관란(觀瀾)이다. 세종 계묘에 문과에 올라 벼슬이 직제학에 이르고, 시호는 정간공(貞簡公)이다. 숙종조에 특별히 정려(旌閭)를 세우라고 명하였다. 무인에 최석정의 아룀으로 인함.
○ 단종 초기에 공이, 세조의 세력이 날로 커가는 것을 보고, 집현전 직제학을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원주 남송촌(南松村)에 들어가 세상과 등졌다. 단종이 영월로 내쫓기니, 공이 영월 서쪽에 나가 집을 짓고 관란(觀瀾)이라는 호를 짓고, 흐르는 물에 임하여 읊조리기도 하고, 문을 닫고 책도 지으며, 아침저녁으로 단종 있는 쪽을 바라보고 울며 임금을 생각하였다.정축에 단종이 승하한 뒤에, 3년상을 입고 복이 끝나매 다시 원주의 옛집으로 돌아와서 문밖으로 나오지 아니하여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 사촌인 판서 원성군(原城君) 효연(孝然)이 하인들을 대동하지 않고 문에 이르러 뵙기를 청하였으나, 굳건하게 허락하지 않았다. 세조가,특별히 호조 참의를 제수하며 불렀으나, 죽기로 맹세하고 명에 응하지 않았다. 앉으면 반드시 동으로 향하고 누우면 반드시 동으로 머리 두니, 장릉(莊陵)이 동쪽에 있기 때문이다. <명곡집 묘비(明谷集墓碑)>
○ 친지들 가운데 조정에 벼슬하는 자가 많이 와서 만나보기를 청하였으나, 절대로 접하지 않았다. 한 관찰사가 따르는 하인들을 떼어놓고 평복차림으로 찾아갔다. 공이 처음에는 깨닫지 못하고 나와 만나서 대면하니 관찰사였다. 곧 손을 내두르며 달아나 들어가서 장차 몸을 더럽혀질 것 같이 하였다. 관찰이 무안하고 섭섭하여 돌아갔다. 관부(官府)와 가까운 것을 싫어하여 주천현(酒泉縣) 산골 속으로 들어가서 몸을 마쳤다. 묘는 남송에 있다. 《사우언행록(師友言行錄)》
○ 공의 손자 숙강(叔康)이 예종조(睿宗朝)에 사관으로 화를 입으니, 공이 평생의 저술과 소장을 다 태워버렸다. 또 그 자제를 경계하되, “다시는 글을 읽어서 명리를 구하지 말라.” 하였다. <묘비> ○ 숙강의 일은 예종조에 보인다.
○ 군자가 말하기를, “열경(悅卿 김시습의 자)은 지금의 백이(伯夷)요, 육신은 지금의 방효유(方孝孺)ㆍ연자녕(練子寧)이요, 연촌(煙村 최덕지(崔德之))ㆍ무항(霧巷 공의 사는 곳)은 육신보다도 오히려 기상이 높다.” 하였다. <묘비>


최덕지(崔德之)

최덕지는 호는 연촌우수(煙村迂叟)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태종 을유(乙酉)에 문과에 올랐으며,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영암(靈岩)의 영보(永保)에 퇴거하여 그 서실(書室)을 존양(存養)이라 편액하였다. 문종이 불러서 예문 직제학을 제수하였는데, 그 이듬해에 사직하고 돌아가서 나이 72세에 죽었다.
○ 계유년(1453)간에 국가에 사고가 많았으니, 공이 물러간 것은 참으로 기미를 미리 알고 몸을 보전한 것 같았다. 이것으로 인하여 세상에서 일컫기를, “밝은 지혜와 바른 학문과 높은 절개가 견줄 데 없다.” 하였다. 조정에서 그를 선현(先賢)으로 기록하고 그의 자손을 등용하였다. 《명신록》


기건(奇虔)

기건은, 호는 청파(靑坡)이며, 본관은 행주(行州)이다. 세종조에 포의(布衣)로 발탁되어 지평(持平)을 제수받아 벼슬이 판중추(判中樞)에 이르렀다. 시호는 정무공(貞武公)요, 청백리(淸白吏)에 들었다.
○ 공은 타고난 바탕이 영민하고 학업이 정민하고 순수하였다. 집이 청파 만리현(萬里峴)에 있었는데, 항상 걸어서 성균관에 왕래하면서 반드시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외웠다. 《월사집(月沙集)》 <기대헌비(奇大憲碑)>
○ 공은 단종조부터 벼슬을 쉬고, 문을 닫고 인사를 사절하였다. 세조가 잠저에 있을 때에 세 번이나 공을 집으로 찾았는데, 공이 청맹(靑盲)으로 칭탁하였다. 세조가 바늘을 가지고 찌를 것처럼 하여 시험하니, 공이 눈을 딱 뜨고 보면서도 깜짝하지 않았다. 세조는 마침내 공을 등용치 못하였고 공도 화를 면하였다. <묘비>
○ 이씨 조선의 인재가 세종조보다 성한 때가 없었는데, 공이 과거에 응하지 않고도 지평에 뽑혔으니, 공의 무리 중에서 뛰어난 높은 이름이 일세의 중망을 받은 것이 어떠했겠는가. 밝은 임금과 어진 신하가 만나 이미 몸을 바치고서, 시국이 어지럽고 위태로우니 어쩔 수 없는 것을 헤아리고는 벼슬 버리기를 헌신짝 버리듯 하였고,병을 핑계로 자취를 감추어 천년(天年)을 마침으로써 끝내 절개를 변치 않았으니, 명예도 또한 보전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죽음으로 임을 섬기고 선도(善道)로 명철보신한 것’이아닌가. <묘비>
○ 옛날에는 부인이 출입할 때, 머리쓰개가 없었는데, 공이 그것을 속칭으로 소위 너울[羅兀]이라고 하는 것인데 지금 궁녀가 밖에 나갈 때에 쓴다 처음 만들어 바치니 지금도 쓴다.
○ 연안(延安)에 붕어가 나는 큰못이 있는데, 공사간(公私間)에 관에서 붕어를 징수하거나 개인적으로 붕어를 요청하는 폐가 백성에게 미치므로, 사람들이 그 연못을 붕어 무덤이라고 조롱하였다. 공이 부사가 되어 말하기를, “어찌 내 입맛 때문에 염치를 상할 수 있는가.” 하였다. 드디어 끊고 먹지 않으며 잔치가 아니면 그물을 들이지 못하게 하니 고을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필원잡기》 <묘비>
○ 공은 평생 전복을 먹지 않았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으니 답하기를, “일찍이 제주 목사(濟州牧使)가 되어 백성들이 전복 따기에 괴로워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차마 먹지 못한다.” 하였다. 《용재총화》
○ 제주의 예전 풍속에 부모를 장사 지내지 않고 죽으면 곧장 언덕이나 구렁에 버렸다. 공이 부임하기 전에 먼저 고을에 영을 내려 관곽을 갖추고 염습하여 장사지내도록 가르쳤다. 제주 사람이 그 부모를 장사 지내는 것이 공으로부터 시작되고, 교화(敎化)가 크게 행해졌다. 하루는 공이 꿈을 꾸니,삼백여 명이 뜰 아래에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례하기를, “공의 은덕으로 해골이 땅에 드러나는 것을 면하였는데, 은혜를 갚을 것이 없으니, 공이 응당 금년에 어진 손자를 보실 것입니다.” 하였다. 그때까지 공의 세 아들이 다 자식이 없었는데, 과연 이 해에 공의 아들 장령 축(軸)이 아들 찬(禶)을 나아서, 뒤에 벼슬이 응교에 이르렀다. 《월사집(月沙集)》


이맹전(李孟專)

이맹전(李孟專)은, 자는 백순(伯純)이며, 호는 경은(耕隱)이요, 본관은 벽진(碧珍)이니, 병판(兵判) 심지(審之)의 아들이다. 심지가 먼저 선산(善山) 금오산(金烏山) 밑에 살았다. 세종 정미에 문과에 뽑혔고, 한림(翰林)ㆍ정언(正言)을 거쳐 외임으로 나가기를 청하여 거창 현감(居昌縣監)이 되었는데, 청백하기로 소문이 났다.갑술년간에 나라 일이 어지럽고 위태로운 것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집에 돌아와서 선산 강정리(綱正里)에 살면서, 귀먹고 청맹이 되었다고 칭탁하여 전원에 묻혀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며 문 밖에 나가지 않은지 30여 년이었다. 여러 번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응하지 않았고, 대궐을 향하여 앉지 않았다.집이 가난하여 앉을 돗자리가 없었고, 먹을 때에 수저가 없었으나 태연하여 마음에 거리낌이 없었다. 자손이 많았으며 자녀가 아홉 사람 출입하는 데는 탈것이 없어서 걸어 다녔다. 사실이 《청백전》에 실렸다. 이조 판서를 증직하고 시호는 정간공(靖簡公)이다.
○ 김숙자(金叔滋)가 공과 더불어 도의(道義)로 사귄 친구가 되었는데, 만년에는 병을 칭탁하며 만나주지 않았다. 다만 김종직(金宗直)이 들어와 뵈오면 문을 닫고 마음속에 있는 말을 하였고,간혹 시를 지어 창수(唱酬)하기도 하였다. 한집안의 처자라도 청맹이 거짓으로 칭탁한 줄 알지 못하였는데, 죽을 때에 임해서야 비로소 알았다. 부인 김씨와 함께 모두 나이 90세 죽었다. 《일선지(一善志)》 《해동잡록(海東雜錄)》 ○부제학 이준(李埈)의 일선지(一善志) 발문


조상치(曺尙治)

조상치는, 자는 자경(子景)이며, 호는 단고(丹皐)이다. 또는 정재(靜齋)라고도 한다.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문과로 병사(兵使)가 된 신충(信忠)의 아들이다. 기해에 문과에 장원하였고, 벼슬이 부제학에 이르렀다.
○ 공이 세종ㆍ문종 두 조정의 지우(知遇)를 입어 오래도록 관직에 있다가 부모의 공양에 편리하도록 자청하여 합천(陜川)ㆍ함양(咸陽) 두 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그때에 집현전이 창설되었는데, 공이 부제학으로 뽑혔다. 세조가 선위를 받으매 드디어 문을 닫고 병을 일컬어 하례하는 반열에 참여하지 않았고, 나이가 은퇴할 때가 못되었는데,상소하여 은퇴하기를 칭탁하기를, “세 아들이 조정에 올라 복이 너무 과하니 마땅히 물러가야 한다.” 하였다. 세조가 그의 속뜻을 알고 허락하였다. 예조 참판을 제수하였으나 다릿병을 칭탁하고 들어가 사은하지 않았다. 세조가 백관을 시켜 동대문에서 전송하니 사흘만에 비로소 벗어나 돌아갔다.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엄자릉(嚴子陵)의 절조가 아니면 한 광무(漢光武)에게 용납될 수 없고, 한 광무의 성스러운 덕이 아니면 엄자릉의 높은 절조를 이루어 줄 수 없다.” 하였다. 《유사(遺事)》
○ 단종조에 벼슬이 부제학이었는데, 세조가 선위를 받으매, 마단(麻丹) 영천(永川) 창수(滄水)의 마을 이름이다. 에 퇴거하여 종신토록 서쪽을 향하여 앉지 않았다. 일찍이 큰 돌 한개를 얻어서 쪼지 않고, 꾸미지 않고, 그 표면에 써서 새기기를, ‘노산조(魯山朝) 부제학 포인(逋人) 조모(曹某)의 묘’라 하고, 자서(自序)하기를,‘노산조라고 한 것은 오늘의 신하가 아닌 것을 밝힌 것이요, 부제학이라 쓴 것은 사실을 빠뜨리지 않으려는 것이고, 포인이라고 쓴 것은 망명하여 도망한 신하라는 것을 말한 것이라’ 하였다. 여러 아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죽거든 이 돌을 묘 앞에 세워라.” 하였다. 공이 죽으매, 여러 아들이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그 돌을 묻었다.공이 일찍이 자규(子規 두견새)를 읊은 사(詞)에,

접동 접동 접동새 소리 / 子規啼子規啼
그 무엇을 호소하노 / 夜月空山何所訴
돌아가리 돌아가리 / 不如歸不如歸
떠나온 파촉 땅을 날아서 건너고저 / 望裡巴岑飛欲度
뭇 새는 깃을 찾아 고요히 잠드는데 / 看他衆鳥摠安巢
너만 홀로 피 토하여 꽃잎을 물들이니 / 獨向花枝血謾吐
그 얼굴 외로웁고 그 모습 초췌하다 / 形單影孤貌樵悴
존숭(尊崇)도 안 하는데, 뉘라서 널 돌보리 / 不肯尊崇誰爾顧
슬프다 인간 원한, 그 어찌 너뿐이랴 / 嗚呼人間冤恨豈獨爾
의사충신(義士忠臣) 강개불평(慷慨不平)은 / 義士忠臣增慷慨激不平
손꼽아 못 셀 것을 / 屈指難盡數

하였는데, 대개 단종이 영월에서 지은 자규 노래를 듣고, 느낌이 있어 화답한 것이다. 《취원당수록(聚遠堂手錄)》
○ 박팽년이 보내 편지에 말하기를, “행차 뒤에 일어나는 티끌을 멀리서 바라보니 높아서 미치기 어렵도다.” 하였고, 성삼문이 다른 사람에게 준 편지에 말하기를, “영주(永州)의 맑은 바람이 문득 동방의 기산(箕山)ㆍ영수(潁水)가 되었으니, 우리들은 조장(曺丈)의 죄인이라.” 하였다. 《영남가찬(嶺南家撰])》


조변륭(曺變隆)

조변륭은, 본관은 창녕이니, 단고(丹皐) 상치의 아들이다. 세종 갑자에 문과에 오르고, 정묘에 중시(重試)에 뽑혀 벼슬이 예조 참의에 이르렀다.
○ 상치가 영남에 돌아가 숨던 때에 그의 아들인 변륭은 어버이가 영남에 있으므로 벼슬에 종사할 형편이 못되어 드디어 같이 돌아갔다. 뒤에 발탁되어 예조 참의에 이르렀으나, 사양하고 응하지 않았다. 자손에게 유언하여 노릉조(魯陵朝) 부지괴원정자(副知槐院正字)라 묘석에 표하고 참의(叅議)직함은 쓰지 말라 하였다.


조려(趙旅)

조려는, 자는 주옹(主翁)이며, 호는 어계(漁溪)이다. 본관은 함안(咸安)이니, 계유에 진사에 합격하였다. 김종직의 방하(榜下). 시호는 정절공(貞節公)이다.
○ 단종이 내쫓긴 뒤에 다시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고을 서쪽 원북동(院北洞)에는 인가가 하나도 없고 수목이 울창하였는데, 공이 처음으로 집을 짓고 살면서, 스스로 호를 어계(漁溪)라 하였다. <본전(本傳)> 《성창랑집(成滄浪集)》 ○ 《어계집(漁溪集)》이 한 권을 후손 영호(榮祜)가 안음(安陰) 군수로 있을 때에 간행하였다.
○ 낙동(洛東)에 돌아와서 낚시질로 몸을 마치었으니, 세상을 등지고도 번민함이 없는 뜻이 김시습(金時習)과 같았다. 깊이 스스로를 숨겨서 사람들이 일컬을 것이 없었다. 일찍이 구월 구일에 높은 곳에 올라 지은 그 시의 대략에,

머리 돌려 눈을 드니 강산은 저물었고 / 回頭擧目江山暮
땅은 넓고 하늘은 아득하니, 생각 또한 아득하다 / 地闊天張思渺茫
만고풍류 두목지(杜牧之)는 취미수(翠微峀)에 올랐는데 / 杜牧旣上翠微峀
국화 따는 도연명(陶淵明)은 술 오기만 기다림을 / 陶潛悵望白衣郞
복희씨와 헌원씨는 아득하여 슬픔이 한이 없고 / 羲軒遠矣悲何極
요임금과 순임근은 뵐 수 없어 절로 마음 슬프네 / 勛華不見心自傷
시 읊는 붓 밑에는 하늘땅이 넓었는데 / 沈吟筆下乾坤闊
취해서 어지러운 술잔 앞엔 세월마저 더디도다 / 爛醉樽前日月長
슬프다, 늙은 몸이 살아 늦도록 고생하니 / 嗟哉潦倒生苦晩
일편단심 고운 님을 꿈속엔들 잊을 소냐 / 懷佳人兮不能忘

○ 보배로운 구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독 속에 싸서 두고 그 빛을 감추고 초목과 같이 썩어도 뉘우치지 않으니, 그 마음이 어디 있었는지 후인이 측량할 수 없다. 만일 서산(西山)의 백이ㆍ숙제가 당시에 났더라면 반드시 서로 더불어 마음을 터 놓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였을 것이다. 우참찬 이미(李薇)가 지은 <비문>
○ 공이 일찍이 백이산(伯夷山) 밑에 살았는데, 숙종 기묘에 단종이 복위된 뒤에, 영남 선비 신만원(辛萬元) 등이 공의 절개와 행실을 조정에 알리니, 특별히 이조 참판을 증직하고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였다. 산 밑에 사당 서산서원(西山書院)이다. 을 세웠는데, 공과 김시습ㆍ원호ㆍ이맹전ㆍ성담수ㆍ남효온을 향사하였다.


성담수(成聃壽)

성담수(成聃壽)는, 자는 이수(耳壽)이며, 호는 문두(文斗)이다. 본관은 창녕이니, 교리 희(熺)의 아들이다. 진사에 합격하여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벼슬하지 않았다. 뒤에 이조 판서를 증직하였다. 시호는 정숙공(靖肅公)이다.
○ 아버지 희가 성삼문에 연좌되어 폐고(廢錮 벼슬길을 막는 것)되었는데, 공은 지극한 행실과 높은 식견으로 파주의 어버이 묘 밑에 물러가 살면서 한 번도 서울에 이르지 않았다. 그 때 죄인의 자제는 의례히 참봉을 제수하여, 그 거취(去就)를 보는데 머리를 숙이고 취직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나, 공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 공이 높은 가문의 자제로 자처하지 않기 때문에 촌사람들이 보기를 농사꾼같이 하였다. 그 조카 몽정(夢井 교리 담년(聃年)의 아들)이 경기 감사로 순시하던 차, 그 고을을 지나다가 만나보려고 찾았으나, 고을 사람이 그의 있는 곳을 아는 이가 없었다. 물색하여 알아 가지고 그 문에 이르니, 초가집이 엉성하여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고,토상(土床)이 겨우 무릎을 들여놓을 정도요, 손님이 와도 앉을 자리가 없었다. 몽정이 탄식하고 집에 돌아가 방석 열 개를 보냈는데, 공이 손을 저어 돌려보내며 말하기를, “이 물건은 빈천한 집에 적합하지 않다.” 하였다. 《우계집(牛溪集)》


윤혜(尹譓)

윤혜는, 본관은 남원(南原)이요, 관찰사 임(臨)의 손자이다. 세종조에 문과에 올라 벼슬이 이조 좌랑(吏曹佐郞)에 이르렀다.
○ 단종이 내쫓기니, 공이 예조 좌랑으로 벼슬을 버리고 산에 들어갔다. 임종시에 충효(忠孝) 두 글자를 써서 아들에게 주었다. 《대동야승(大東野乘)》
○ 공의 숙부 지정(之定)이 딸이 있어 권완(權完)에게 출가하였는데, 완의 딸이 단종의 후궁(後宮)이 되었다. 완이 형을 받아 죽으니, 공이 밤에 신을 벗고 한강가로 도망하였으며, 이어서 가족을 끌고 호남 장성(長城)으로 돌아가서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본전(本傳)>


김시습(金時習)

김시습(金時習)은, 자는 열경(悅卿)이며, 본관은 강릉(江陵)이요, 고려 시중(侍中) 태현(台鉉)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일성(日省)이요, 어머니는 선사(仙槎) 장씨(張氏)이다. 승명(僧名)은 설잠(雪岑)인데, 여러 번 그 호를 바꾸어 동봉(東峰)ㆍ청한자(淸寒子)ㆍ벽산청은(碧山淸隱)ㆍ췌세옹(贅世翁)ㆍ매월당(梅月堂)이라 하였다. 이조 판서를 증직하고 시호는 청간공(淸簡公)이다.
○ 숙종조에 최석정(崔錫鼎)이 말하기를, “세조가 선위를 받은 뒤에 사인(士人) 김시습이 중이 되어 세상에서 도망하였는데, 그 문장과 절행이 탁월하기 때문에 그 뒤의 명현(名賢)들이 지금 세상의 백이(伯夷)라고 일컬었습니다. 이러한 사람을 특별히 증직하고 치제하면 절의를 격려하는 도리에 합당할까 합니다.” 하였다. 숙종이 이르기를 “특별히 증직하라.” 하니 사헌부 집의를 증직하였다. 《장릉지(莊陵志)》
○ 공이 태어난 지 여덟 달만에 능히 글을 알았다. 일가 할아버지[族祖]인 최치운(崔致雲)이 이름을 시습(時習)이라고 지어 주었다. 말은 늦게 하나 정신은 민첩하여 글에 대하면 입으로 읽지는 못해도 뜻은 다 알았다. 세 살에 능히 시를 지었는데, “복사꽃은 붉고 버들은 푸르니 삼월이 저물었다.[桃紅柳錄三月暮]”는 것과, “구슬을 푸른 바늘로 꿰었으니 솔잎에 맺힌 이슬이라.[珠貫靑針松葉露]”는 것 등이다. 유모가 맷돌에 보리를 가는 것을 보고 읊기를, “비도 안 오는데 우레 소리는 어디에서 울리는고. 누런 구름이 쪼각쪼각 사방으로 흩어지누나.[無雨雷聲何處動 黃雲片片四方分]” 하니,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겼다. 다섯 살에 대학을 통하고 능히 글을 지으니, 신동(神童)이라고 이름이 났다. 허 정승 조(稠)가 찾아보고 말하기를, “내가 늙었으니 노자(老子)로 시구를 지으라.” 하였다.곧 대답하기를, “늙은 나무에 꽃이 피니 마음은 늙지 않았다.[老木開花心不老]” 하매, 허정승이 무릎을 치며 말하기를, “이것이 이른 바 신동이다.” 하였다. 세종이 듣고 명하여 승정원으로 불렀다. 지신사(知申事) 박이창(朴以昌)이 시험하기를, “동자의 공부는 백학(白鶴)이 푸른 하늘 끝에서 춤추는도다.[童子之學 白鶴舞靑空之末]” 하매, 공이 대답하기를, “성주(聖主)의 덕은 황룡(黃龍)이 푸른 바다 가운데에 뒤집는도다.[聖主之德 黃龍飜碧海之中]” 하였다. 이창이 무릎 위에 앉히고 앉아서, 시를 짓게 한 것이 많았다. 이창이 벽에 그린 산수도(山水圖)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네가 이 그림을 두고 시를 지을 수 있는가.” 하매, 곧 대답하기를, “작은 정자와 배 안에는 어떤 사람이 있는가.[小亭舟宅何人在]” 하였다. 세종이 전교하기를 혹은 그 아버지 일성(日省)을 불러서 전교 하였다고 한다 “내가 보고자 하나, 남이 들으면 해괴할까 두려우니 마땅히 드러내지 말고 가르치고 길러,나이 장성하고 학업이 성취되기를 기다려서 내가 장차 크게 쓰겠다.” 하고, 곧 비단 오십 필을 주어서 스스로 가지고 가게 하니 공이 그 끝을 모두 이어서 끌고 나갔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명성이 한 나라에 진동하여 ‘다섯 살’이라고 불렀으며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공이 임금의 포장을 받고서 더욱 원대한 학업에 힘썼다. 단종 을해에 바야흐로 삼각산에서 글을 읽다가 단종이 내쫓겼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하여 중이 되어 절에 의탁하였다. 《율곡집(栗谷集)》 《명신록(名臣錄)》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 공은 사람됨이 호매(豪邁)하고 영발(映發)하며, 간솔(簡率)하고 경직(勁直)하였다. 시사를 슬퍼하고, 세속에 분개하여, 울적한 기운을 펴지 못하고 시속을 따라 처세하지 못하여, 드디어 물외에 방랑하였다. 국내 산천을 두루 돌아다니며, 경치 좋은 곳을 만나면 머물렀다. 고도(故都)에 유람하여 머뭇거리며 슬피 노래하며 여러 날을 보냈다.남보다 뛰어나게 총명하여 가르침을 기다리지 않고, 온갖 서적에 빠짐없이 통달하여 사람이 거론하여 묻는 이가 있으면 곧장 말하여 막힘이 없었다. 고상하고 강개한 마음을 풀 데가 없어서, 세상 풍운ㆍ천석ㆍ화과(花果)ㆍ조수ㆍ인사의 시비ㆍ득실과 귀천ㆍ사생으로부터 성명ㆍ이기ㆍ음양에 이르기까지 일체를 문장에 붙였기 때문에 그 글이 물이 솟구치고 산이 일어나듯 하며,산이 온갖 물상을 간직하듯이, 바다가 모든 생물을 감추듯이, 신(神)처럼 부르고 귀(鬼)처럼 화답함이 번갈아 나타나고, 단계별로 나와서 성률과 격조에 그리 유념하지 않아도 생각과 운치가 높고 원대해서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났다. 도리에 정밀하여 연구하고 수양하는 공부는 적으나, 재주와 지혜가 탁월하여 자연스럽게 해득함이 있어서 의논이 유가(儒家)의 종지를 잃지 않았고,선교(禪敎)ㆍ도교에 이르러서는 깊이 그 병폐의 근원을 연구하였으며, 선어(禪語)를 하기를 좋아하여 미묘한 이치를 드러내므로, 늙은 중으로서 그 학문에 조예가 깊은 자라도 감히 대항하여 변론할 이가 없었다. 명성이 일찍 드러 났다가 하루아침에 세상을 피하여 마음은 유(儒)이면서 행적은 불(佛)이었는데,세상 사람들이 해괴히 여길까 하여 짐짓 미친 태도를 취하여 실상을 숨기려 한 것이다. 선비가 글을 배우고자 찾아오면 나무나 돌로 때리거나 활을 쏘려 하면서 그의 성의를 시험하였다. 산전을 개척하기를 좋아하여 귀한 집 자제에게도 반드시 밭일을 시키니 끝까지 수업하는 자가 적었다.
○ 수락정사(水落精舍)에 들어가 살면서 도를 닦았다. 유생을 보면 말할 적마다 공맹(孔孟)을 일컫고, 입으로는 불법을 말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수련법에 대하여 묻는 이가 있으면 또한 말하여 주지 않았다. 《사우명행록》
○ 미친 듯이 읊조리고 방랑하면서 한 세상을 조롱하였다. 비록 불가에 들어가 세상을 피하였으나 그 법을 받들지 않으므로 세상에서 미친 중으로 지목하였다. 거리에 자나다가 눈으로 한 군데를 응시하면서 돌아가기를 잊고 한참 동안 박힌 듯이 서 있기도 하고,간혹 거리에서 소변을 보면서 뭇 사람들이 보는 것을 피하려 하지 않았다. 여러 아이들이 손가락질하면서 웃고, 서로 다투어 기와조각과 조약돌을 던지면서 쫓아다녔다. 《명신록》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 세조가 내전(內殿)에 중을 불러들여 법회(法會)를 벌였을 때, 공도 또한 뽑혀서 참여하였는데, 홀연 이른 새벽에 도망하여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사람을 시켜서 뒤를 밟으니,일부러 거리의 거름구덩이에 빠져서 얼굴만 내놓고 있었다. 거느리고 다니는 상좌 중이 있었는데 목소리가 맑아서 능히 상성(商聲 비장한 음조(音調))을 낼 줄 알아서 길게 소리를 내어 읊으면, 여운이 공중에 감돌았다. 매양 달 밝은 때를 만나면 밤중에 홀로 앉아 상좌 중으로 하여금 《이소경(離騷經)》을 한번 읊게 하고는 문득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시었다. 성품이 술을 즐기어 취하면 반드시 말하기를, “우리 세종 대왕을 뵈올 수가 없구나.” 하고 눈물을 흘리며 매우 슬퍼하였다. 여러 중들이 추앙하여 신사(神師)라 하며 지성껏 섬겼다. 하루는 함께 청하기를, “저희들이 대사를 받든 지가 오래나, 아직도 한번 설법을 들려주지 아니하니 대사의 청정(淸淨)하신 법안(法眼)을 마침내 누구에게 전하시렵니까.저희들이 방향을 잘 알지 못하니, 금 집게로 눈에 가린 것을 벗겨 주소서”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크게 법연(法筵)을 열라.” 하고, 공이 가사(袈裟)를 갖춰 입고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앉았다. 중들이 가득 모여서 합장하고 꿇어 앉아 듣고 있었다. 공이 말하기를, “소 한 마리를 몰고 오라.”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그 영문을 모르고 소를 끌어다가 뜰 아래에 매었다.공이 또 말하기를, “소 먹일 꼴을 가져 오라.” 하여 소 엉덩이 뒤에 놓게 하고,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너희들이 법을 듣고자 하는 것이 이와 같다.” 하니, 사람의 희미하고 어둡고 무식한 자를 속담에 말하기를 소 뒤에 꼴이라 한다. 여러 중들이 얼굴을 붉히고 물러갔다. 금오산(金鰲山)에 들어가 책《금오신화(金鰲神話)》을 저술하여 석실(石室)에 감추고 말하기를,“후세에 반드시 설잠(雪岑)을 아는 자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 책은 대개 기이한 이야기를 기술한 것으로 《전등신화(剪燈神話)》를 모방한 것이었다.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 평소의 심회를 세상 사람이 엿볼 수 없었다. 시집(詩集)에 미자(薇字)ㆍ궐자(蕨字)를 쓰기를 좋아하였다. 중흥사(中興寺)에 있을 때에 비가 내린 뒤에 시냇물이 불어서 넘쳐 흐르는 때를 만나면 종이를 썰어 100여 조각을 만들고 사람을 시켜 붓과 벼루를 가지고 뒤에 따르게 하고 시내를 따라 내려가다가 반드시 물살이 급한 곳을 택해 앉아서 읊조렸다.율시(律詩)나 오언고풍(五言古風)을 지어 종이에 써서 물에 띄워 보내고, 멀리 떠내려간 것을 보고, 또 써서 띄워 보내기를 밤이 늦도록 계속하여 종이가 다하면 돌아왔다. 어떤 때는 하루에 지은 시가 거의 100여 수나 되었는데, 여기서도 그 생각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사재척언(思齋摭言)》
○ 서 있는 나무껍질을 벗기고 시를 쓰기를 좋아하였다. 한참 읊고 나서 문득 곡하며 그 부분을 깎아버렸다. 어떤 때는 종이에 시를 써서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물에다 던져 버렸다. 어떤 때는 나무로 농부의 모양을 조각하여 만들어서 책상 옆에 두고 하루종일 들여다 보다가 곡하고 불태워 버렸다.어떤 때에는 자신이 심은 벼가 심히 무성하여 이삭이 탐스러워 볼 만한데도, 술이 취한 때에 낫을 내둘러 한 이랑을 다 베어 땅에 버리고는 목을 놓아 울었다. 달밤에 만나면 《이소경(離騷經)》 외기를 좋아하였는데, 외우고 나면 반드시 울었다. 제목(除目)이 발표되는 것을 보고 대관이 된 자가 혹시라도 인망이 없으면 반드시 울며 말하기를, “이 백성이 무슨 죄를 졌는가.” 하였다. 《장릉지》
○ 김수온(金守溫)과 서거정(徐居正) 등이 공을 국사(國士)로 칭찬하였다. 거정이 막 대궐에 들어가느라고 사람을벽제(辟除)하고 있는데, 공이 헤진 옷을 입고 새끼로 만든 띠를 띠고 패랭이를 쓰고 거리에서 거정을 만났다. 비켜서지 않고 머리를 제치고 쳐다보며 부르기를, “강중(剛中) 거정의 자 이 평안한가.” 하였다. 거정이 웃고 대답하며 초헌(招軒)을 멈추고 얘기하니, 온 거리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모두 놀랐다.그때에 조정 벼슬아치 중에 공에게 모욕을 당한 자가 있어서 서거정을 보고 조정에 아뢰게 하여 죄를 다스리려 하였다. 거정이 머리를 흔들며 말하기를, “그만 두게 그만 두게, 미친 사람을 상관할 것 있나. 지금 이 사람을 죄 주면 후세에 반드시 자네의 이름에 누가 될 것이네” 하였다. 《명신록》
○ 지관사(知館事) 김수온(金守溫)이, “맹자가 양(梁) 나라 혜왕(惠王)을 만나본 일을 논함”이라는 문제로 성균관 유생들에게 시험 보였다. 유생 한 사람이 삼각산에 가서 공을 보고 말하기를, “괴애(乖崖) 수온의 호 가 장난을 좋아하도다. 이것이 논제(論題)에 합당한가.” 하였다.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이 늙은이가 아니면 이런 제목을 못 낼 것이다.” 하고 붓을 달려 한 편을 지어주며 말하기를, “생원이 스스로 지은 것처럼 하여 그 늙은이를 속여 보게.” 하였다. 그 말대로 하였더니, 수온이 읽다가 끝마치기 전에 갑자기 묻기를, “열경(悅卿)이 지금 서울 어느 절에 있는고” 하였으니, 그를 알아봄이 이와 같았다. 그 논(論)에 대략 말하기를 “양혜왕은 본시 제후(諸侯)로서 왕을 참칭(僭稱)한 자이니, 맹자가 가히 볼 것이 아니라.” 하였다. 《율곡집》 《명신록》
○ 도성에 들어오면 매양 향교동(鄕校洞) 남의 집에 붙어 있었다. 서거정(徐居正)이 찾아오면 공이 예(禮)를 갖추지 않고, 누워서 두 발을 거꾸로 하여 벽에 대고 발장난을 하면서 하루 종일 얘기하였다. 이웃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김모가 서대감에게 예를 갖추지 않고 소홀히 하는 것이 저와 같으니, 뒤에 반드시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수일 뒤에 서거정이 매양 다시 찾아와 보았다. 《월정만필(月汀漫筆)》
○ 신숙주가 소시에 친한 친구로서, 공이 서울에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그 주인을 시켜 술을 권하여 취하게 하여 눕게 한 뒤에 가마에 태워 신숙주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술이 깨어 속은 줄 알고 놀라 일어나서 가려 하였다. 신숙주가 그 손을 잡으며 말하기를, “열경이 어째서 말 한마디도 않는가.” 하였다. 공이 입을 다물고 옷자락을 뿌리치고 가버리고 그 뒤에는 종적을 더욱 비밀히 하였다.
○ 엄자릉(嚴子陵)의 조어도(釣魚圖)에 시를 지어 쓰기를,

부춘산(富春山) 동강(桐江) 위에서 연파(烟波) 낚는 저 늙은이 / 桐江江上釣煙波
생계는 소연(蕭然)하여, 도롱이 하나뿐이로다 / 生計蕭然一箇蓑
한(漢) 나라 천문대에 객성(客星) 아니 비쳤던들 / 漢殿若無星象動
깨끗한 몸 천추 뒤에 누명은 없을 것을 / 千秋定不婁名侯

하였다. 《노릉지》 ○ 세속에서 전하기를 “신숙주가 태공(太公)ㆍ자릉(子陵) 두 노인의 조어도(釣魚圖)를 내놓으매, 공이 시를 지어서 조롱하였다.” 하고 《후정쇄어(候鯖瑣語)》에는 태공의 조어도 시는 서거정이 지은 것이라 하였으므로 서거정의 아래에 기록되었다.
○ 어떤 사람이 김수온이 좌정하고 일을 전하매, 공이 말하기를, “괴애(乖崖)가 평생에 욕심이 많았으니, 반드시 이런 일이 없을 것이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좌화(坐化)하는 것이 예(禮)에서는 귀한 것이 아니다. 나는 증자(曾子)의 역책(易簀)자로(子路)가 결영(結纓)하고 죽은 것만 귀히 여기고, 그 밖의 것은 알지 못한다.” 하였다. 《추강냉화(秋江冷話)》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 조우(祖雨)라는 중이 일찍이 노사신(盧思愼)에게 《장자(莊子)》를 배웠다. 그 중이 어떤 종실(宗室)의 집에 이르렀는데 공이 뒤늦게 도착하여 짐짓 모르는 체하고 말하기를, “조우가 노(盧)에게 수학하였다 하니 그게 사람 축에 드는 자인가, 만일 여기 오면 내가 꼭 죽이겠다.” 하였다. 조우가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툭 뛰어 나오며 말하기를,“공이 감히 정승에게 공공연히 욕을 하니 나를 죽이고 싶거든 죽여 보라.” 하였다. 공이 조우의 멱살을 잡고 때리려 하니, 앉았던 손님들이 모두 싸움을 뜯어 말려서 조우가 간신히 빠져 나와 달아났다. 그 뒤에 조우가 공을 수락산(水落山)에서 만났는데 공이 반가운 안색으로 말하기를, “네가 나를 찾아 왔는가?” 하고 밥을 지어먹게 하였다.밥이 들어와서 조우가 밥을 떠서 먹으려 할 때, 숟갈을 입에 이르려 할 때마다 공이 미리 발로써 땅 위의 먼지를 밥숟가락에 묻혀서 한 술도 떠먹지 못하게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네가 노모(盧某)에게 수학하였으니, 네가 어찌 사람이냐.” 하였다. 《월정만필》
○ 학조(學祖)는 공의 일가로서 중이 된 자인데, 공에게 승복하지 않고 매양 더불어 항거하였다. 하루는 산중에서 동행하는데, 그 때에 날이 비로소 갰는데 길 옆에 산돼지가 칡뿌리를 파내서 깊은 웅덩이가 생긴 곳에 흙탕물이 가득 차 있었다. 공이 말하기를, “내가 이 웅덩이 속에 들어가서 한번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나오려 하는데,네가 나를 따를 테냐?” 하고, 곧 둘이 흙탕물에 들어가서 철벅거리다가 나왔다. 공은 몸과 의복에 한 군데에도 젖은 곳이 없는데, 학조는 흙탕물이 얼굴에 가득하고 의복이 다 젖었다.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네가 어떻게 나를 본받을 수 있는가.” 하였다. 《월정만필》
○ 신축 연간에 공이 고기를 먹고 머리를 기르고 나이 43세 글을 지어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제사 지내었는데, 그 대강에 말하기를, “순(舜) 임금이 펴신 오륜에 부자유친(父子有親)이 첫머리요, 삼천 가지 죄 가운데 불효가 가장 크옵거늘, 어리석은 불효자가 가계를 이어받고도 이단(異端 불교)에 미혹타가 늦게 서야 후회하노라.[帝敷五敎 有親居先 罪列三千 不孝爲大 愚騃小子 似續本支 沈滯異端 末路方悔]” 하고, 드디어 안씨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사람들이 벼슬하기를 권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고 방광(放曠)하기를, 전처럼 하다가 얼마 후에 아내가 죽으니 다시 산으로 돌아가서 중이 되었다. 《명신록》 《추강냉화》
○ 임인 이후에 세상이 장차 쇠락할 것을 알고 여염간에 버린 사람으로 처신하며 날마다 장예원(掌隸院)에서 노비에 관련된 문제로 송사하였다. 하루는 술을 마시고 거리를 지나다가 영상 정창손(鄭昌孫)을 만나 말하기를, “너 그만 두어라.” 하였다. 정이 못 들은 체 하였으나,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위태롭게 여겨서 예전에 교유(交遊)하던 사람들이 모두 발길을 끊고 왕래하지 않았다.공이 혼자 거리의 불량한 자들과 같이 놀며 취하여 길가에 쓰러져서 늘 바보처럼 웃었다. 뒤에 혹은 설악산(雪岳山)에도 들어가기도 하고, 춘천(春川)산에도 살기도 하여 출입이 일정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그가 좋아하는 사람은 수천 부정(秀泉副正) 정은(貞恩) 자는 정중(正中)ㆍ홍유손(洪裕孫) 자는 자용(子容)ㆍ안응세(安應世) 자는 자정(子挺)ㆍ남효온(南孝溫)이었다.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 그의 노비(奴婢)와 전택(田宅)을 사람들이 마음대로 빼앗아가도 개의하지 않았는데, 다시 홀연히 그 사람에게 반환을 청구하니, 그 사람이 주려하지 않았다. 공이 송정(訟庭)에 나가 대면하여 떠들썩하게 다투는데 무식한 장돌뱅이들 같았다. 마침내 승소하여 문서가 완성되니 품속에 넣고 문밖에 나와서 하늘을 쳐다보며 크게 웃고는 갑자기 문서를 꺼내어 발기발기 찢어서 개천 속에 던졌다. 사람을 희롱하고 속세를 무시함이 이와 같았다. 《명신록》 《용천담적기》
○ 공이 풍악(楓岳)에 놀러가려 하는데 전날에 여러 명사 남효온의 무리가 용산(龍山) 수정(水亭)으로 찾아왔다. 서로 대하여 담소하다가 홀연 몸을 창 바깥 두어 길 되는 곳으로 떨어뜨려 매우 다치고 숨도 못 쉬니 여러 손님들이 분주히 구환하여 깨어났다. 손님들이 말하기를, “이렇게 중상을 입었으니, 내일 어떻게 떠날 수 있는가.” 하니 공은,“자네들은 다락원에 가서 나를 기다리기나 하게. 내가 마땅히 병을 무릅쓰고 출발하리라.” 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여러 손이 같이 다락원으로 가보니 공은 먼저 와 있었는데 조금도 떨어져 다친 기색이 없었다. 효온이 말하기를, “자네가 어찌하여 환술(幻術)로 우리들을 공갈하고 속이는가.” 하였다.
○ 계축에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죽었는데, 나이 59세였다. 유언하기를, “화장하지 말고 절 옆에 임시로 매장하라.” 하였다. 3년만에 사람들이 열어보니 얼굴이 산 것 같았다. 이분은 부처라 하면서 마침내 화장(火葬)을 하고, 그를 위하여 부도(浮圖)를 세웠다. 《명신록)》
○ 손수 늙었을 때와 젊었을 때의 화상 두 본을 그리고, 스스로 찬(讚)을 짓기를, “네 형상이 지극히 작고 네 말이 혹은 심(心) 매우 어리석으니, 너를 산골짝 가운데 두는 것이 마땅하다.[爾形至藐 爾言(一作心)大侗 宜爾置之 丘壑之中]” 하였다. 《율곡집》 《미수기언(眉叟記言)》
○ 화상은 여러 해가 지나도록 절간에 두었다가 홍산 현감 곽시(郭翅)가 그 유적을 찾아서 절 옆에 사당을 세우고 그 화상을 모시고 제사지냈는데, 그 제문에 이르기를, “백이(伯夷)의 마음이요, 태백(泰伯)의 행적이라.” 하였다. 《영남야언(嶺南野言)》
○ 저술한 시가 수만여 편이나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사이에 거의 다 흩어져 없어졌다. 조신(朝臣)과 유사(儒士)들이 간혹 표절하여 자기가 지은 것으로 삼았다. 《사우행록》
○ 《사방지(四方志)》 1600, 《기산기지(紀山紀志)》 2백이 있고, 시권(詩卷)이 있는데 이자(李耔)가 그 글을 읽고 말하기를, “행색은 불가요, 행실은 유가라.” 하였다. 《미수기언》
○ 강릉(江陵)과 양양(襄陽) 사이에서 노닐기 좋아하였는데 유자한(柳自漢)이 양양 군수로 있으면서 공을 예로 대접하고, 다시 세속 살림을 회복하기를 권하니, 공이 편지로 사절하여 말하기를 “장차 긴 삽을 만들어서 복령(茯苓)과 백출(白朮)을 캐고, 일만(一萬) 나무에 서리가 맺힐 때에 중유(仲由)의 무명옷을 기워 입고, 일천(一千) 산에 눈이 쌓일 때 왕공(王恭)의 학창의(鶴氅衣)를 떨쳐입으려 한다. 낙백(落魄)하여 세속에 사는 것보다는 소요하며 여생을 보내는 것이 낫지 않은가. 천년 뒤에 나의 본 마음을 아는 이 있기를 바라노라” 하였다. 《율곡집》
○ 사람이 천지의 기운을 받아서 맑고 흐리고 후하고 박함의 다름이 있어서 나면서부터 아는 것과 배워서 아는 차이가 있는데, 이것은 의리(義理)로 말한 것이다. 김시습 같은 이는 글에 있어서는 천성적으로 얻었으니 문자(文字)에도 생지(生知)가 있는 것이다. 미친 척하며 세상을 피하는 것이 은미한 뜻은 숭상할 만 하나,꼭 명교(名敎)를 포기하고 멋대로 방자하게 처신하는 것은 무슨 연유에서 그리하였는가. 빛을 감추고 그림자를 숨기어 후세에 김시습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하였으니, 무엇을 근심하랴. 그러나 절의(節義)를 표하고 윤기(倫紀)를 붙든 것이 일월과 빛을 다툴 수 있어서 그 풍도를 듣고 나약한 사람도 태도를 확립할 수가 있었으니, 백세의 스승이라고 할 것이다. 《율곡집》
○ 명 나라의 천연(天淵)이란 사람은 원 나라 말의 한림학사(翰林學士)인데 원 나라가 망하니,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이름은 내복(來復), 자는 견심(見心)이라 하였다. 수염은 깎지 않고 길렀다. 고황제가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대답하기를, “머리를 깎은 것은 번뇌를 없앤 것이요, 수염을 기른 것은 장부를 표시한 것이라.” 하였다.뒤에 시를 지었는데 기롱하고 풍자하는 뜻을 머금고 있음으로 죽임을 당하였다. 아조의 매월당도 중이 되어서 수염을 기르고 말하기를, “머리를 깍은 것은 당세를 피한 것이요, 수염을 기른 것은 장부를 표시한 것이라.” 하였는데 모르겠다. 내복의 기상을 사모함이 있어서 본받은 것인가. 아니면 우연히 부합한 것인가. 두 공의 절개가 대강같으니, 기이한 일이라 하겠다. 《계곡만필(溪谷漫筆)》
○ 허 하곡(許荷谷) 봉(篈)이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에게 묻기를, “세상 사람들은 매월당이 중이 되었으니 족히 볼 것이 없다 하는데, 저의 생각으로는 매월당이 세상을 도피한 일절(一節)이 실로 중용(中庸)의 도에는 부합하지 않으나, 처신은 청(淸)에 맞고 폐인 노릇한 것은 권도(權)에 맞다[身中淸廢中權]는 것으로 보는 것은 어떠합니까.” 하였다.대답하기를, “매월(梅月)은 일종의 이상한 사람이다. 색은(索隱)ㆍ행괴(行怪)에 가까운 사람인데, 만난 시대가 마침 그러하여서 그 높은 절개를 이룬 것뿐이다. 유양양(柳襄陽)에게 준 편지와 《금오신화(金鰲新話)》 같은 것을 보면 높고 원대한 식견이 있다고 할 수는 없는 듯 하다.” 하였다.


 

[주D-001]주의 …… 있었는고 : 당(唐) 나라 무후(武后)가 여주(女主)가 되어 당 나라의 국호를 없애고 주(周)라 하였다가 그가 죽은 뒤에 당 나라가 다시 회복되었다.그러므로 사마광(司馬光)이 지음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무후의 집권시대에는 주의 연호를 썼는데 주자(朱子)가 강목을 지으면서 주의 연호를 빼고 대신 당의 연호를 썼다.
[주D-002]삼인(三仁) : 《논어》에 말하기를, “은 나라에 세 인인(仁人)이 있는데 미자(微子)와 기자(箕子)와 비간(比干)이라” 하였다. 이 세 사람은 은 나라의 충신이다.
[주D-003]엄자릉(嚴子陵) : 후한 광무제(光武帝)가 그의 친구 엄자릉(嚴子陵)을 불러 벼슬을 주었으나 받지 않고 돌아갔다.
[주D-004]고죽(孤竹) : 백이(伯夷)ㆍ숙제(叔齊)가 고죽군(孤竹君)의 아들임.
[주D-005]시상(柴桑) : 도연명(陶淵明)이 살던 동리.
[주D-006]장릉(章陵) : 인조(仁祖)의 생부인 원종(元宗)의 능호.
[주D-007]예양(豫讓) : 전국(戰國)시대 진(秦) 나라의 예양이 그의 주군인 지백(智伯)을 위하여 조양자(趙襄子)에게 원수를 갚으려고 온갖 고생을 겪으므로 그의 친구가 권하기를, “조양자 곁에 붙어서 신하 노릇을 하다가 기회를 노려 암살하면 쉽지 않겠는가.” 한 즉 그는 답하기를, “나도 그렇게 하면 일이 쉬울 줄 알지만 내가 이렇게 고생을 하는 것은 남의 신하되어서 두 마음 갖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주D-008]구언(求言) : 나라에 위급한 일이나 재변이 있을 때에 정치에 관한 좋은 의견을 해줄 것을 국중(國中)에 널리 구하는 것.
[주D-009]방효유(方孝孺) : 명(明) 나라 성조(成祖)가 건문제(建文帝)의 왕위를 빼앗을 때 죽은 충신.
[주D-010]혁제(革除) : 명 나라 성조가 건문제를 제거한 것을 혁제(革除)라 함.
[주D-011]계유ㆍ병자 : 계유년(癸酉年)은 김종서가 죽은 해이고 병자(丙子)는 성삼문(成三問)이 죽은 때이다.
[주D-012]춘추에 …… 의리 : 《춘추(春秋)》의 필법(筆法)이 지극히 엄하나 친(親)을 위하여 어버이에 관련된 나쁜 사실을 숨긴다 하였다.
[주D-013]한통(韓通) : 송 태조(宋太祖)가 임금이 되는 날에 후주(後主)의 신하 한통(韓通)이 대항하다가 죽었다.
[주D-014]경(經)과 권(權) : 경(經)은 정상적인 도리이고, 권(權)은 임시로 변통한 도리를 말한다.
[주D-015]사릉(思陵) : 단종(端宗) 왕비 송씨의 능.
[주D-016]정려(旌閭) : 충신ㆍ효자ㆍ열녀가 살던 마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는 것.
[주D-017]존숭(尊崇)도 안 하는데 : 두견새는 임금이 죽은 혼이므로 존숭(尊崇) 한다는 말을 썼다.
[주D-018]기산(箕山)ㆍ영수(潁水) : 옛날 소부(巢父) 허유(許由)가 세상의 영화를 마다하고 숨어 살던 곳.
[주D-019]국화 따는 …… 기다림을 : 도연명(陶淵明)이 9월 9일에 국화를 따고 있는데, 마침 흰옷을 입은 사람이 술을 가져 왔으니, 그것은 강주자사(江州刺史) 왕홍(王弘)이 술을 보낸 것이었다.
[주D-020]《이소경(離騷經)》 : 초(楚) 나라 굴원(屈源)이 임금에게 쫒겨나서 애국심과 울분을 참지 못하여 이소를 지었다. 이소는 장편의 운문(韻文)으로서 중국 사부(辭賦)의 조(祖)가 되었다.
[주D-021]미자(薇字)ㆍ궐자(蕨字) : 미(微)자ㆍ궐(蕨)자를 많이 쓴 것은 백이(伯夷)ㆍ숙제(叔齊)가 수양산(首陽山)에서 고사리를 꺾은 것을 의미한 것임.
[주D-022]제목(除目) : 관리(官吏) 임명(任命)의 명부.
[주D-023]벽제(辟除) : 재상이 출입할 때에 앞에 잡인이 다니는 것을 금하는 것.
[주D-024]역책(易簀) : 죽을 때에 임하여 깔고 있던 자리를 바꾼다는 말.
[주D-025]자로(子路)가 결영(結纓)하고 : 자로(子路)가 죽을 때에 갓끈을 똑바로 매고 죽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
[주D-026]중유(仲由)의 무명 옷 : 중유(仲由)는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인데 무명옷을 입고 좋은 옷을 입은 자와 같이 서 있어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말이 《논어(論語)》에 있다.
[주D-027]왕공(王恭)의 학창의(鶴氅衣) : 진(晋) 나라 명사인 왕공(王恭)이 학창의(鶴氅衣)를 입고 눈 속에 걸어다니니 사람들이 보고 신선이라 했다.
완당전집 제9권
 시(詩)
수락산 절[水落山寺]

나는 저 해와 달을 쳐다볼 적에 / 我見日與月
광경이 늘 새로움을 깨닫는다오 / 光景覺常新
만 가지 상이 각각 다 그대로라 / 萬象各自在
헤일 수조차 없는 이 나라 이 땅 / 刹刹及塵塵
뉘라 알리 가물가물 텅빈 저곳에 / 誰知玄廓處
이 눈이 이 사람과 함께 한 것을 / 此雪同此人
빈 소리는 착각하면 비가 되는데 / 虛籟錯爲雨
환화란 끝내 봄을 못 이루누나 / 幻華不成春
손 가운데 백이라 억의 보물은 / 手中百億寶
이웃에서 빌리는 게 아니랍니다 / 曾非乞之隣

[주D-001]헤일 수 …… 이 땅[刹刹塵塵] : 불가의 용어로 무수한 국토(國土)의 뜻임.

 

완당전집 제9권
 시(詩)
수락산사(水落山寺)


세상 도는 바람 바퀴 뭇 미흑의 길잡인데 / 轉世風輪導衆迷
표말을 앞에 두고 동쪽 서쪽 긴가민가 / 却將表所眩東西
말 잊은 지 오래라 사방 산이 고요한데 / 久忘言說千山寂
기연을 뉘 보내어 새 한 마리 우짖느냐 / 誰遣機緣一鳥啼
열관이랑 정계는 밝게 보면 평등이라 / 平等熱關仍淨界
황벽이랑 조계를 거침없이 오간다네 / 朅來黃蘗與曹溪
토산 수화 이를세라 꽃을 들고 해리하듯 / 土山水火如拈解
이 일에는 수가 낮아 그대에게 양보하네 / 且讓輸君此着低


[주D-001]황벽이랑 조계 : 황벽은 산 이름인데 당 나라 단제선사(斷際禪師) 희운(希運)의 별칭임. 황벽종(黃蘗宗)ㆍ조계종이 있음.

 

월정만필(月汀漫筆)
월정만필(月汀漫筆)


윤근수(尹根壽) 저

○ 삼대(三代 하ㆍ은ㆍ주) 이전의 시대는 공공(公共)의 임금이 천자가 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영토는 모두 제후에 봉해 주어 제각기 나라를 이루게 하였다. 때문에 왕기(王畿)의 천 리 밖은 모두 제후의 영토였다. 훌륭한 덕이 있었기 때문에, 삼대, 삼대하고 일컫지만 천자가 소유한 영토는 사실 좁았다. 진(秦) 나라 때 와서 천하를 군현(郡縣)으로 만든 뒤에 중국은 모두 천자의 영토가 되었다.
진 나라 이후로 역년이 가장 오랜 나라는 한ㆍ당ㆍ송이었다. 당 나라는 명황(明皇)의 천보(天寶) 때에 와서 안녹산(安祿山)의 난리로 인하여 하북의 영토를 잃게 되었다. 이때 전국 때의 연(燕)ㆍ제(齊)ㆍ조(趙)ㆍ위(魏) 네 나라의 영토는 모두 재후들의 차지한 바가 되어, 당 나라가 망할 때까지 복구하지 못하였다. 송 나라는 개국하기 전에 벌써 연경ㆍ운중(雲中)의 16개 주(州)를 잃어 버렸고, 휘종(徽宗)ㆍ흠종(欽宗) 때 와서는 두 임금이 금 나라에 사로잡혔으며, 고종(高宗)은 임안(臨安)으로 수도를 옮겼다. 드디어 중원을 잃어 버리고 송 나라가 망할 때까지 회복해내지 못하였다. 당 나라ㆍ송나라는 비록 각각 3백여 년을 누리기는 하였지만, 당 나라는 하북의 영토를 잃었고 송 나라는 중원을 잃었으니, 천하가 분열된 것은 말할 것조차 못 된다. 유독 양한(兩漢 서한과 동한)만이 4백여 년을 누리기는 하였으나 서한은 2백 14년 만에 왕망(王莽)에 의해 반역을 담하였다.
그런데 대명(大明)은 홍무(洪武) 원년 무신(1368)에서 지금의 만력(萬曆) 정유년(1597)까지 2백 30년이다. 그 사이 정통(正統) 연간에 황제가 오랑캐의 적진 속에 빠지긴 하였지만 곧 바로 남쪽으로 돌아왔으므로 영토는 한자 한치도 잃지 않았다. 당ㆍ송은 정말 말할 것조차 못 되고 한은 2백 14년 만에 왕망의 찬역이 있었으며, 대명은 2백 30년이 되었어도 천하가 조용하였으니, 아, 훌륭한지고!
○ 기자(箕子)가 조선에 봉해진 뒤 몇 대를 전해 내려오다가 기준(箕準) 때 와서 위만 (衛滿)의 난리를 피해 평양에서 금마군(金馬郡)으로 도망쳤으니 바로 지금의 익산이다. 이것이 마한이 되었으며, 또한 몇 대를 전해 내려오다가 망하였다. 평안도에 지금 선우(鮮于)라는 성(姓)이 있는데, 기자의 후손이라 일컫는다. 《씨족대전(氏族大全)》에서 본 것이 기억난다. 《씨족대전》에,
“기자는 조선에 봉해지고, 소자(少子)는 우(于)에 봉해졌는데 그들의 후손이 선우씨가 되었다.”
고 하였다. 그렇다면 곧 기자와 소자의 후손이요, 기준의 후손은 아니다. 기준은 마한을 세웠는데, 그의 후손이 곧 한씨(韓氏)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청주 등지에 살고 있는 한씨들은 다 기준의 후손이라한다. 이 말은 《위략(魏略 책명)》에서 나왔다. 후손이라고는 하였지만 꼭 그런지는 모르겠다. 제종조에 기자의 후손을 찾아서 대대로 벼슬을 주어서 제사를 받들게 하여 마치 고려 숭의전(崇義殿)처럼 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진정한 후손을 얻지 못한다 하여 그 논의는 드디어 중단되었다. 《여지승람(輿地勝覽)》 익산성씨조(益山姓氏條)에, 한씨 성을 가진 자가 있다고 한 것은 이를 말함이다.
중국 사람은 위국의 왕을 일러 왕자(王子)라고 한다. 우리나라가 난리를 만나 파천(播遷 임금이 도성을 떠나 딴 곳으로 피난함)하게 되면서부터 중국 사람을 자주 접촉하여 이 말을 귀에 익히 들었다. 인하여 《송감(宋鑑)》의 〈인종기(仁宗紀)〉가 기억난다. 〈인종기〉에,
“북사(北使)가 말하기를, ‘고려가 직공(職貢 신하가 왕에게 바치는 공물)을 소홀히 하니 지금 군대를 동원하여 정벌하렵니다.’하니 인종은 말하기를, ‘이것은 다만 왕자(王子)의 죄요, 백성에게 관계되는 일은 아니다. 지금 군대를 동원하여 정벌한다 하더라도 왕자는 반드시 베이지 못할 것이요, 백성만 무찔러 죽일 것이다.’하여, 마침내 군대를 중지시켰다.”
고 하였다. 여기서의 왕자는 곧 고려의 왕을 지칭한 것이니, 송 나라 때 이미 그렇게 하였다.
광녕성(廣寧城) 북쪽 5리쯤에 기자정(箕子井)이 있다. 옆 부근에 옛날 기자묘가 있고, 방건(方巾 두건의 일종으로 옛날 문인(文人)들이 쓰던 관)을 쓴 기자의 소상(塑像 진흙으로 만든 사람의 상(像))이 있었는데, 가정(嘉靖 명 세종의 연호. 1522~1566) 연간에 달자(㺚子)가 태워 버려서 지금은 없어졌다. 광녕은 기자의 봉역(封域) 안에 있었다. 또한 기자가 여기에 머무른 사실이 없는데도 우물과 사당이 있었겠는가?
○ 평양에 등나무 지팡이 한 쌍이 있었는데 ‘기자 지팡이’라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하나는 가운데가 부러져서 누런 주석으로 부러진 곳을 싸 묶었다. 이것을 칠갑(漆匣)에 담아 두었다가, 감사가 관아에 나갈 적에 효기(驍騎) 두 사람이 가지고서 앞길을 인도한다. 감사가 좌정해서 정무를 보거나 손님을 대할 때는 이것을 섬돌 위 좌우편에 갈라 놓아두는데 붉은 칠한 나무틀로써 받는다. 임진왜란 때 잃어버렸다고 한다.
○ 광녕성 서쪽 40리 지점에 요궁(遼宮)의 옛터가 있었는데, 지금은 달자(達字)의 영토가 되었다. 성의 서쪽 5리쯤에 야율초재(耶律楚材)의 무덤 이있다. 그의 후손들에 대해서 물어 보았더니, 홍무(洪武) 황제가 오랑캐인 원 나라를 몰아낼 적에 그들의 종족을 따라서 오랑캐 지역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 대릉하보(大陵河堡 《월정별집》만록에는 소릉(小凌)으로 되었음)의 서북쪽 20리쯤에 산이 있으니 즉 목엽산(木葉山)이다. 산의 서쪽에 요(遼)의 시조 아보기(阿保機)의 사당이 있는데 성에서 바라다 보이며, 산 북쪽에는 그의 무덤이 있다 한다. 유정수(劉靜修)의 시에,
목엽산 머리 비바람 스친 지 몇해더냐 / 木葉山頭幾風雨
라고 한 것이, 곧 이 산이다.
○ 안시성주(安市城主)가 당 태종(唐太宗)의 정병(精兵)에 항거하여 마침내 외로운 성을 보전하였으니, 공이 위대하다. 그런데 성명은 전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서적이 드물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고구려 때의 사적(史籍)이 없어서 그런 것인가? 임진왜란 뒤에 중국의 장관(將官)으로 우리나라에 원병(援兵) 나온 오종도(吳宗道)란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안시성주의 성명은 양만춘(梁萬春 일반적으로는 양(楊)이라고 함)이다. 당 태종 《동정기(東征記)에 보인다.”
고 하였다. 얼마 전 감사 이시발(李時發)을 만났더니 말하기를,“일찍이 《당서연의(唐書衍義)》를 보니 안시성주는 과연 양만춘이었으며, 그 외에도 안시성을 지킨 장수가 무릇 두 사람이었다.”
고 하였다.
○ 참의 유조인(柳祖訒)은 젊어서 과거 공부에 전념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미 당상관에 오른 뒤에 소(疏)를 올려 화산군(花山君) 권반(權攀)의 전례에 의하여 과거에 응시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였다. 유조인이 일찍이 말하기를,
“명사(名士)로는 좌참찬 성공(成公)과 같고, 원훈(元勳)은 상산군(商山君) 박모(朴某)처럼 되어도 모두 소용 없고 반드시 과거에 올라서야만 세상에 전해서 행세할 수 있다.”
고 하였다. 나도 이런 말이 있다는 것은 들었는데, 마침 유조인이 찾아왔기에 이 사실을 물었더니, 정말 그렇다고 하였다. 사람들의 과거 급제에 대한 부러움이 이렇게까지 된단 말인가?
○ 황강(黃岡) 참판 김중회(金重晦 이름은 계휘(繼輝))가 같은 때 급제한 이준민 자수(李俊民子修 자수는 자(字))ㆍ이인 숙응(李遴叔膺 숙응은 자) 및 임자년 급제한 박계현 군옥(朴啓賢君沃 군옥은 자)과 승문원에 같이 벼슬하게 되었다. 자수가 참판에게 묻기를,
“네가 일찍이 사람을 볼줄 안다고 자부하더니 군옥의 앞길을 말할 수 있겠는가?”
하니, 참판은 대답하기를,
“군옥은 비록 조신(操身)하지 않아도 부형의 덕택으로 지위 명망은 병조 판서까지 이를 것이다.”
고 하였다. 나는 어떻게 되겠느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너는 비록 시골 선비이지만 그 재주가 병조 판서는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군옥보다 10년 뒤에야 될 것이다.”
고 하였다. 숙응을 부르니 대답하기를,
“숙응의 공명(功名)은 선지(瑄之 어희선(魚希瑄)의 자)와 견줄 만하고, 오히려 너희들을 따라올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때 어선지(魚瑄之)는 바야흐로 판사가 되었던 것이다. 나중에 선지와 숙응의 벼슬을 모두 호조 판서에 이르렀고, 군옥과 자순는 모두 병조 판서에 이르렀으니, 그 말이 마치 시귀(蓍龜 시초점과 거북점)처럼 용하였다.
소로(蘇老 노수신(盧守愼)을 지칭함)는 말하기를,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호)는 존심(存心) 공부가 많았다. 우리 동방에서, 학자로는 회재를, 위대한 사람으로는 음애(陰崖 이자(李耔)의 호)를 보았노라.”
고 하였다.
○ 소재(蘇齋)는 일찍이 말하기를,
“회재는 존심(存心) 공부가 많고 퇴계(退溪)는 강학(講學) 공부가 많았다.”
고 하였다. 퇴계가 보니, 회재가 망기당(忘機堂)에게 답한 편지가, 무릇 다섯 차례를 오고 갔다. 퇴계는 옷깃을 여미고 공경한 마음으로 말하기를,
“뜻하지 않게도 선생의 학문과 견해의 높음이 여기에까지 이르셨는가.”
하였다. 망기당이란 분은 생원 조한보(曺漢輔)인데 선학(禪學)을 공부한 사람이다.
○ 온 세상의 평론이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의 호)는 선(善)을 좋아하고 선비를 사랑 하며, 전고(典故)에 널리 통하였으나 학문상의 공부에 이르러서는 별로 착실하지 못하다고 하였다.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의 호)은 벼슬한 초년에 자기의 저술한 사단ㆍ칠정의 논을 소재에게 편지를 보내서 그의 의견을 물었다. 소재는 답장에,
“음양 가운데 태극이 있고, 칠정 가운데 사단이 있다.”
고 하였다. 고봉은 또 답장을 보내기를,
“내 마음에 아주 만족하여 부질없이 자신을 가졌습니다.”
고 하였다.
○ 소재의 일기를 보니, 소재는 경석(經席)에서 율곡(栗谷)을 세 번이나 추천하였다. 하루는 경연 중에서 상이, 유능한 인재를 묻자 소재는 대답하기를,
“이이(李珥)ㆍ허엽(許曄)입니다.”
라고 하였고, 하루는 경연에서 이 아무는 크게 임용해야 된다고 추천하였으며, 하루는 상이 대제학이 될 만한 사람을 묻자, 이이ㆍ이산해(李山海)ㆍ구봉령(具鳳齡)을 추천하였다.
○ 무인년(1518, 중종 13)에 김사재 정국(金思齋正國 정국은 이름)은 황해도 관찰사로 나갔는데, 마침 종계 주청사(宗系奏請使)의 일행을 만나 전례에 따라 황강(黃江)에서 송별을 하게 되었다. 상사는 남지정 곤(南止亭袞 지정은 호)이었고, 부사는 이음애 자(李陰崖耔 음애는 호)였으며, 서장관은 한공 충(韓公忠)이었다. 사재가 상사의 객관(客館) 대청에서 술잔을 잡아 작별 인사를 나누고, 이어서 지정에게 말하기를,
“공은 선비들을 사랑하지 않는데 모름지기 더욱 유의하여 아끼고 사랑해야겠습니다.”
고 하였다. 지정은 화가 잔뜩 나서 환송의 술잔을 받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사재는 공손히 사과하면서 나오기를 권했으나 끝내 나오지 않았다. 이 때문에 특별히 지정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던 것이다.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사재는 벼슬이 깎여서 쫓겨나고, 제현(諸賢)들은 큰 풍파를 만나서 20년 동안 조정에 돌아오지 못하였다. 이것은 곧 지정의 앙갚음이었다.
○ 일본 책사(冊使)가 우리나라에 도착하였다. 수행원 가운데 유산인 승종(兪山人承宗)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시에 능하고 또한 글씨에도 아주 뛰어나서 진(晉) 나라 사람의 필법이 있었다. 접반사 판서 이항복(李恒福)이 한 낭중(韓郞中 낭중은 당시 한호(韓濩)의 벼슬)이 쓴 책을 가지고 그에게 보이니, 유공(兪公)은 크게 칭찬을 하여 말하기를,
“자못 진 나라의 필법을 체득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그 책 안에 두 장은 자획이 진 나라 필법이 아니니 아마도 이 사람의 글씨가 아닌 것 같소.”
하였다. 이 판서가 이 책을 가지고 한 낭중에게 물으니, 한 낭중이 대답하기를,
“그 책 안에 두 장은 곧 김생(金生)의 시법을 모방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김생의 필법은 우리나라에서는 비록 훌륭한 이름을 떨치고 있으나 필체가 왕희지(王羲之)ㆍ왕헌지(王獻之)의 것과는 조금 다르고, 더군다나 중국 사람들은 한번도 이 필체를 보지 못한 것이다. 유공의 감상이 정밀함을 알 수 있다.
○ 장인(丈人 조안국(趙安國))은 가정 을묘년(1555, 명종 10) 왜변 때에 여러 장수들과 함께 어겨서 평안도로 귀양을 갔다가 곧바로 공로를 세워 속죄 하겠다는 명목으로 전라도 흥양현(興陽縣)의 녹도(鹿島)로 옮겨졌다. 얼마 후에 녹도에서 배 전체의 왜구를 몽땅 사로잡았으므로 장인은 공에 참여되어 돌아오게 되었다. 그런데 왜구의 배에서 얻은 생초(生綃)에 미인의 상반신을 그린 그림을 나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림의 미인은 하얀 꽃을 손에 쥐고 마치 그 향내를 맡고 있는 듯한 것이었다. 그 위에 시를 쓰기를,
졸다 깨니 중문은 오슬오슬 추운데 / 睡起重門淰淰寒
희끗희끗 귀밑머리 마전한 홑적삼이네 / 鬢雲繚繞練杉單
한가로운 이 마음 가는 봄이 애석해 / 閑情只恐春將晩
꽃가지 꺾어 쥐고 혼자서 보고 있구나 / 折得花枝獨自看
하였는데, 당인(唐寅)이 손수 소시(小詩)를 이렇게 쓰고, 아울러 도장까지 눌렀다. 뒤에 중국 소설을 상고해 보았더니, 인은 소주(蘇州) 장주(長洲)의 이름난 선비였다. 그런데 남기(南畿)의 향시(鄕試) 자원으로서 거인(擧人) 서경(徐經)과 과실을 저질렀다. 기미년 회시(會試) 때 장고관(掌考官) 예부 시랑 정민정(程敏政)이 글제 팔아먹은 사건으로 죄를 입고 관리에게 넘겨졌다. 그래서 한평생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고 문장과 서화로 스스로를 즐겨 예술과 문장에 자못 유명해져서, 그림하면 백호(伯虎)를 꼽았다. 백호는 곧 당인의 자다. 그의 그처럼 훌륭한 재주를 가지고 스스로 이름을 떨쳐서 제 몸을 마치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개탄할 일이다. 그 뒤에 임진왜란으로 서울이 함락되어 그 그림을 잃어버렸다. 그 시 또한 훌륭한데, 행여 후대에 영원히 없어질까 염려된다. 우선 이것을 기록 하여서 재주를 품고도 시험해보지 못한 그 사람을 슬퍼한다.
○ 임금호(林錦湖 임형수(林亨秀)의 호)는 동배(同輩)들을 업신여기는 버릇이 있어, 아무리 선배일지라도 모두 버릇 없는 말을 퍼부었다. 그러나 퇴계에게만은 존경하면서 감히 함부로 굴지 못하였다. 일찍이 신영천(申靈川 이름은 잠(潛))의 죽화(竹畫)에 쓰기를,
영천이 그려낸 푸른 대나무는 / 靈川筆下碧琅玕
소상 어귀 높은 표지 눈과 달이 차갑구나 / 湘口高標雪月寒
시인을 추려본들 어느 누가 근사하리 / 揀得詩人誰得似
청수한 그 아취는 퇴계와 함께 보리라 / 淸癯宜竝退溪看
하였으니, 그를 지극히 높인 것이다. 그 뒤에 제주로 귀양가서 퇴계의 편지에 시로써 화답하기를,
그대의 높은 의리 나로서는 어림없나니 / 高義吾君我不如
편지에 넘친 인정 너무도 간절하구나 / 書來情款溢言餘
변씨의 옥이 월형(刖刑) 부름을 원래 알고 있는데 / 本知卞玉能成刖
반드시 양장이라야 수레 넘어지는 것 아니라네 / 未必羊腸可覆車
떠도는 벼슬살이 이제는 괴롭기만 해 / 浮海宦情今已苦
산 사서 돌아갈 계획 응당 소홀하지 않으리라 / 買山歸計未應踈
강매화 피고 짐을 누구와 얘기하리 / 江梅落盡誰相問
만리 밖에서 속절없이 편지만 전할 뿐이네 / 萬里空傳尺素書
하였다.
○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호)은 진퇴의 의리를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호)에게 물었다. 목은은 대답하기를,
“지금 시대에는 제각기 제 뜻대로 행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 대신들은 국가와 고락을 같이해야 하므로 떠나버릴 수 없지만, 너는 떠날 수 있다.”
하였다. 야은은 떠날 것을 결정하고 목은에게 돌아가겠다는 작별 인사를 고하였다. 목은은 그때 장단(長湍) 별장(別莊)에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 시를 써서 주었다.
나는 외 기러기 까마득히 떠 있구나 / 鴻飛一箇在冥冥
○ 목은은 고려 말엽에 수상(首相)으로서 연경에 가기를 자청하였는데, 고황제(高皇帝)를 만나보고 할 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태조(太祖)의 의심을 살까 염려하여 태종(太宗)을 서장관으로 자신이 추천해서 데리고 떠났다. 홍무 황제(洪武皇帝)가 목은을 원 나라 조정의 한림(翰林)으로 여기면서 대화를 나누려 하였다. 목은은 본국을 부호(扶護)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니, 황제는 거짓 못 알아 듣는 체하면서 말하기를,
“네 한어(漢語 중국 말)는 납합출(納哈出)과 비슷하구나.”
고 하였다.
○ 기묘사화 때 구수복(具壽福)은 현직 이조 좌랑으로서 파직을 당하여 돌아갈 곳이 없었다. 장인은 이를 불쌍히 여겨 자기의 보은 별장에 내려가 있게 하였다. 구공은 즉시 보은으로 내려갔다. 얼마 뒤에 장인의 종으로 주간하는 자가, 구공이 여기에 붙어 살면서 자기 종처럼 부려먹는 것이 싫어서, 장인에게 참소하기를,
“좌랑 어른이 농막에 와 계시면서부터 여러 종들을 몹시 부려서 배겨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고 하였다. 장인은 사정을 알아보지 않고 발끈 화를 내서 그를 즉시 내쫓게 하였다. 그때는 마침 겨울철이었다. 구공은 쫓겨나서 야윈 말에 종 하나를 앞세우고 길을 오르긴 하였으나, 사방을 둘러봐도 갈 만한 곳이 없어, 행색이 참담하였다. 마침 호걸한 선비 하나가 사냥터에서 많은 구종(驅從)들을 거느리고, 개는 몰고 매는 어깨에 얹고서 지나갔다. 그런데 구공이 길가에서 어정버정 돌아다녔기 때문에 한 시간도 못 되는 사이에 무릇 두 차례나 만나게 되었다. 호걸한 선비는 홀연히 말 위에서 구공에게 읍하고 말하기를,
“그대는 어떤 사람이기에 이처럼 쓸쓸히 타달거리고 있소?”
하였다. 구공은 그렇게 된 까닭을 대강 말하였다. 호걸한 선비는 구공을 즉시 말에서 내리게 하였다. 털 보료를 눈 위에 깔고 또한 꿩을 구워 안주 삼아 술을 권하면서 옛날부터 친하게 지내는 사람처첨 마음을 터놓고 얘기하였다. 이어서 그의 집으로 함께 돌아갔다고 한다.
○ 소재(蘇齋)는 말하기를,
반우(返虞)는 비록 옛날부터 전해오는 예절이지만, 우리나라의 여묘(盧墓)에 거하는 예절이 참 좋은 풍속이다. 반우를 하면 좋은 집에서 처자들과 함께 거처하게 되므로 애통한 생각을 잊어버릴 때가 많아진다. 그러므로 상중(喪中)의 기강을 헐어버리니 아주 옳지 못하다.”
고 하였다. 일찍이 경석(經席)에 모시고 있으면서 거상(居喪)할 적에 반우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힘써 진달하였다.
진우량(陳友諒)의 아들 이(理)는 우량의 참람된 국호(國號)를 이어받아서 그대로 무창(武昌)에서 도읍하다가, 명(明) 나라 군사에게 사로잡혔다.고황제(高皇帝)가 명옥진(明玉珍)의 아들 승(昇)과 함께 고려에 귀양을 보냈다. 승은 개성에 머물러 있고, 이는 또 청양현(靑陽縣)으로 옮겨졌다. 이는 키가 보통 사람보다 우뚝하게 뛰어났다. 무창에서 첩 40명과 흰빛 준마 40필을 거느리고 왔다. 그런데 그가 죽자, 첩과 말이 한두 해 사이에 연다아 죽어 없어져서 하나도 남지 않았다고 한다.
과거에 급제한 뒤의 일이다. 통역관 고언명(高彦明)이 나에게 일러 말하기를,
“몇 해 전에 한번은 이당 화종(李堂和宗)을 만났더니 말하기를, ‘신사년(1521, 중종 16)에 가정 황제의 등극 조사(登極詔使) 수찬 당고(唐皐)가 나올 때에, 원접사 용재(容齋) 이공(李公)이 중국 사신에게 지금 천하의 문장은 누가 제일이냐고 물으니, 당 수찬이 천하의 문장은 이몽양(李夢陽)이 제일이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한다. 그때 공동(崆峒 이몽양의 호임)은 나이가 많아서 벼슬을 사직하고 변량(汴梁)에 살고 있었지만 이름이 천하에 울렸는데 우리나라는 알지 못하였다. 비록 이 말을 들었으면서도 중원(中原)에 가서 그를 방문하지 못했으니 탄식할 일이다. 근세에 와서야 《공동집》을 얻고, 비로소 그는 시와 문장이 다 훌륭하여 왕세정(王世貞)ㆍ이반룡(李攀龍) 등과 같은 문장들이 그를 매우 추존하기에 이르렀음을 알았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공동자(崆峒子)가 있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았다.
○ 당조사(唐詔使)가 서울에 도착할 적에 무릇 유관(遊觀)하는 재신(宰臣)들의 주고받는 시는 제술관 한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각각 한재신의 시를 맡아서 지었으므로, 혼잡하지 않았다. 눌재(訥齋) 박상(朴祥)이 예조 판서 홍숙(洪淑)의 시를 전담하여 지었던 것이다. 상사(上使)가 극히 감탄하여 칭찬하기를,
“예조 판서의 시는 아주 훌륭하여 원접공(遠接公 이행(李荇)을 말함)의 시보다 오히려 낫다.”
고 하였다. 이 말을 주부 정작(鄭碏)에게 들었다. 첨정(僉正) 박난(朴蘭)이 일찍이 나에게 말하기를,
“눌재의 여주 제영(驪州題詠)에,
도은ㆍ목은의 문장은 거북돌에 남아 있고 / 文章陶牧留龜石
신괴한 꾀꼬리는 말바위 기억하네 / 神怪黃驪記馬岩
라는 글귀는 문장의 힘이 매우 있다.”
고 하였다.
○ 내가 북경에 조회간 것이 무릇 네 차례였다. 가정 병인년(1566, 명종 21)에 서장관으로서 관원(灌園) 박공(朴公 이름은 계현(啓賢))을 따라서 갔다. 그 당시 예부 상서는 고공의(高公儀)였다. 섬돌 중층 위에서 범연히 바라보다가 회동관(會同館) 연회 때 한자리에 가까이 앉게 되어 자세히 살펴보니, 그 얼굴 생김새는 보통 사람에 지나지 않으나 온화스러운 군자였다. 그는 절강 인화(仁和) 사람이다. 그 뒤에 정승이 되었다. 만력 원년(1573, 선조 6)에 수상(首相) 고공(高拱)이 환관 풍보(馮保)를 없애려 하다가 실패하여 쫓김을 당하였다. 공은 지위가 셋째였는데, 환관 풍보 때문에 놀라고 걱정되어 얼마 못 가서 죽으니, 나이는 56세였다.
○ 만력 원년 계유에 주청부사로 청련(靑蓮) 이 판서(李判書 이름은 후백(後白))와 동행하였다. 육수성(陸樹聲)은 회시 장원으로 예부 상서가 되었는데, 헌칠한 키에 점잖게 서 있었다. 중국 사람은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모두 귀밑머리를 깨끗하게 쓸어내리는데, 육공만이 그러지 않았다. 그는 예부 상서에 이르기까지 관계의 경력을 쌓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매양 임하(林下)에 있었는데 조정에서 불러 올려 승급(陞級)시켜 지금의 관직까지 오르게 된 것이다. 들으니 각로(閣老) 장거정(張居正)이 좌주(座主 과거 시험관의 경칭)였다고 한다.
○ 북경에 갔다 돌아온 사람의 말에,
성조(成祖)가 서울의 대궐을 연도(燕都)에 창건하였다. 그 지점의 동편에 깊은 못이 있었는데, 이것을 즉시 메우고 바로 그 지점 위에 동장안문을 세웠다. 뒤에 그 문이 여러 차례 화재를 당하였다. 서로 전해 오기로는 이 못의 용이 갈 곳을 잃고 성이 나서 일부러 불을 지른 것이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문을 다시 만들어 화재를 막으려 하였는데 모든 기둥과 석가래를 모두 돌로 만들었다. 그래서 화재의 걱정은 드디어 없어졌다.”
한다.
내가 북경에 갔을 때 동장안문에 이르러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석가래와 기둥에 단청이 떨어져 나간 곳은 본바탕이 드러났는데, 모두 다음은 돌이었다. 그의 말이 정말 옳았다.
○ 동봉(東峯 김시습(金時習)의 호)은 학조(學祖)와는 같은 시대 사람이고, 학조 또한 당시의 문벌 있는 집안 사람으로서 중이 된 자여서 동봉에게 굽히지 않고 매양 그와 겨루었다. 하루는 산속으로 같이 가는데 동봉이 앞서고 학조는 뒤따랐다. 때마침 비는 개고 길 옆엔 멧돼지가 칡뿌리를 캐먹은 자리가 구덩이가 되어 꽤 깊은데, 거기 물이 그득이 고여 있었다. 동봉이 학조를 돌아 보고 말하기를,
“내가 이 웅덩에 들어가 뒹굴고 나올 터이니, 나를 따라 할 수 있느냐?”
하니, 학조는 이를 허락하였다. 즉시 두 사람은 같이 웅덩이 속으로 들어가서 뒹굴고 나왔다. 그런데 동봉은 입은 옷과 온 몸에 물 한 방울 젖은 곳이 없는데, 학조는 흙탕물이 온 얼굴에 흘러 내렸고 의복이 몽땅 젖어 있었다. 동봉은 웃으면서 학조에게 이르기를,
“네가 어찌 내 흉내를 낼 수 있겠느냐?”
고 하였다.
○ 동봉이 풍악산에 유람하려던 하루 전날이었다.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의 호) 등 훌륭한 명사들이 우거지인 용산 수정(水亭)에 찾아왔다. 동봉이 마주 애기하다가 갑자기 창밖 두어 길 밑으로 떨어져서 몹시 다쳐 숨을 쉬지 못하였다. 여러 손님들이 모두 달려가 구원하여 겨우 깨어났다. 그를 정자 안에 메다 놓고 손님들이 묻기를,
“그대가 이렇게 많이 다쳤으니 내일 어떻게 떠나겠는가?”
하니, 동봉은 대답하기를,
“자네들은 누원(樓院)에 가서 나의 송별만 기다리고 있게, 곧 조섭해서 조금이라도 낫게 된다면 병을 참고 일을 나서겠네.”
라고 하였다. 다음날 아침에 모든 손님들이 누원에 가니, 동봉을 벌써 와 있는데, 떨어져 다친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자약하게 웃고 이야기하였다. 추강은 나무라기를,
“자네는 어찌하여 환술을 써서 우리들을 속이는가?”
라고 하였다.
○ 《금헌휘언(今獻彙言)》에,
“동지 뒤에 남은 날이 있으면 남은 날의 수로써 이듬해의 윤달을 결정한다. 가령, 하루가 남으면 이듬해 정월에 윤달이 들고, 이틀이 남으면 2월에 윤달이 들고, 만약 13일 이상이 남으면 다음해엔 윤달이 없다.”
고 하였다.
융경(隆慶) 6년 임신년(1572, 선조 5) 앞해는 곧 신미년이다. 그 해에 동지 후 남은 날이 4일이었는데 일관(日官)은 2월에 윤달이 든다고 하였다. 어 학관(魚學官 숙권(叔權))은 일찍이 《휘언(彙言)》을 보았으므로 윤달이 잘못되었다. 고집하여 영감사(領監事)가 다시 계산해 보라는 명령까지 하는데, 일관은 그래도 자기의 견해를 고집하여 틀리지 않는다고 힘껏 말하였다. 뒤에 대통력을 보니 그 해의 윤달은 과연 2월에 들었었다. 일관은 죄책(罪責)을 면하였다. 일관 남응년(南應年)은 말하기를,
“책력 만드는 방식에 동지의 남는 날짜로써 윤달을 삼는다고 말하였지만, 이 방법은 혹 맞지 않는 곳이 있으며, 그달 안에 중기(中氣)가 없는 달로써 윤달을 삼으면 역수에 꼭 들어맞는다.”
고 하였다. 이것 또한 알아 두지 않을 수 없다.
○ 중국 사람은 말하기를,
“송조(宋朝)가 남쪽으로 옮겨 왕이 임안(臨安)에 머물러 있다가 그대로 수도를 정하였다. 옛 서울의 신하들은 임금의 수레를 호종하여 임안에 와서 살았으므로 성내의 백성들은 모두 개봉 사람이었으며, 언어는 모두 변량(汴梁)의 음에 비롯되었다. 자손들이 전하여 지금에 이르렀으므로 항주(杭州) 성안은 중국의 말씨이고 성밖은 남방음에 시골 사투리다.”
고 하였다.
○ 호응원(胡應元)은 말하기를,
“중국 각 현의 진사 출신은 복건성 보전현(莆田縣)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절강성ㆍ여요현(餘姚縣)이며, 이 밖의 고을들은 모두 이 두 현만 못하다.”
고 하였다.
○ 판윤 전임(田霖)은 육진 부사(六鎭府使)로 있을 적에, 객관(客館)을 다시 수리하고 낙성연을 베풀어서 이웃 진부(鎭府)의 통판(通判)들이 다 모였었다. 공이 객관에 나가 맞아서 연회를 시작하려는데 갑자기 배앓이를 만나 매우 위급하여 즉시 관아로 돌아오고, 여러 손님들도 편안히 있을 수 없어 모두 각자 숙소로 물러났다. 그런데 갑자기 객관 정청(正廳)의 대들보 기둥이 쓰러지면서 부러졌다. 그러나 사람은 다치지 않았다. 만약 공이 병이 들지 않고 잔치를 열게 되었다면 여러 손님들과 함께 모두 눌려 죽었을 것이다. 하늘이 도운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은 집이 청도(淸道)에 있었으니, 청도는 곧 경상북도였다. 탁영이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 경상북도의 향시에는 언제나 장원이었다. 같은 시기에 경상남도에서는 권홍(權弘)이 여러 번 장원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 알지는 못하였다. 회시에 응시하기 위해 두 사람 다 서울에 왔다. 하루는 권홍이 탁영을 찾아왔다. 탁영은 허겁지겁 나가 맞아서 윗자리에 안내하여 앉히고 물었다.
“그대는 향시 때마다 늘 장원만 하니, 무슨 책들을 읽어서 그처럼 문장이 훌륭합니까?”
하니, 홍은 대답하기를,
“딴 책은 별로 공부한 것이 없고 《통송(通宋)》만 숙독했을 뿐입니다.”
고 하였다. 탁영은 즉시 그 자리에 벌렁 드러누워서 업신여기는 태도를 보이고 다시는 손님의 대접을 하지 않았다.
탁영이 한번은 별과에 응시하였다. 그의 두 형인 준손(駿孫)ㆍ기손(驥孫)은 탁영의 손을 빌어서 탁영과 함께 모두 초시에 합격하였다. 전시의 날이 되어, 탁영은 두 형님의 책문만 대신 지어주고, 자기의 것은 짓지 않았다. 대개 그의 형님에게 장원을 양보하고 자기는 다음 과거 때 장원하려는 속셈이었다. 두 형님이 모두 과거에 올랐으며, 준손은 1등이 되었다. 다음 과거 때 전시의 시험관이 마음속으로는 탁영의 문장이 훌륭함을 알면서도 그 사람을 꺼려서 2등에 눌러 두었으므로 민첩(閔怗)이 곧 1등이 되었다. 탁영은 듣고 분이 나 말하기를,
“민첩은 어떠한 사람이냐?”
하고 통한해 마지않았다.
○ 동봉(東峯) 김시습(金時習)은 집을 뛰쳐나와서 방랑 생활을 하였다. 만약 성안에 오게 되면 어린아이들이 떼를 지어 뒤따라 오면서, ‘다섯살’하고 불러대었다. 대개 동봉이 다섯 살 적에 신동이란 별명이 있어서 나라의 부름을 받고 대궐에 나아갔기 때문인 것이다.
성안에 들어와서는 번번이 향교동에서 묵고 있었는데,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이 찾아가면 동봉은 예우하지 않고 벌렁 드러누워서 두 발을 거꾸로 벽 사이에 기대고 발장난을 하면서 종일 동안 얘기하였다. 동리 이웃 하인들이 모두 이르기를,
“김 아무가 서 상국을 예우하지 않고 이처럼 모욕을 주었으니, 다음에는 반드시 오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그 뒤 며칠 만에 서 정승은 다시 와서 찾아보았다.
○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은 경적(經籍)에 넓게 통하고 아울러 자ㆍ사(子史 제자 백가서와 사기)에 이르기까지 모두 거침없이 외었다. 한번은 강연에서 임문(臨文)하여 진계(進啓)할 적에 《성리대전(性理大全)》중의 말을 인용한 것이 있었다. 그런데 반 장을 외어 나가도록 한 자도 틀리지 않았다. 미암이 세상을 뜬 뒤에 내가 특진관으로 경연에 입시하였으므로 왕의 이같은 말씀을 듣게 되었다.
○ 기묘 제현들의 한 시대의 평론이, 문장은 한 나라의 법을 본받았고, 글씨는 진(晉) 나라의 법을 본받았으며, 시는 당(唐) 나라의 격조를 배웠고, 인물은 송(宋) 나라의 여러 유학자로서 표준을 삼은 것이라 하였으니, 김원충(金元冲 김정(金淨)의 자)ㆍ김대유(金大柔 김구(金絿)의 자(字))ㆍ기자경(奇子敬 기준(奇遵)의 자) 등이다. 충암(冲菴 김정의 호)과 덕양(德陽 기준의 호)의 시는 아주 훌륭하였다. 그의 유집(遺集)은 모두 부인한테 보관되어 있었는데, 보았더니 정말 당(唐) 나라의 음조였었다. 참의의 초서(草書) 두루마리가 있었는데, 흡사 진(晉) 나라 사람의 풍격이었고, 해자(楷字)는 왕희지(王羲之)ㆍ왕헌지(王獻之)의 필법을 완전히 숙달한 것이었다.
옥당에 옛날에 《한서(漢書)》가 있었는데 그 제목은 곧 충암의 글씨였다. 몇 해 전에 내가 구황 어사(救荒御史)로 충청도에 내려 가니 회덕(懷德)의 옛 집에 충암 부인이 아직까지 살아 있었다. 길가에서 통성명하였는데, 그의 손자가 충암의 전시 때의 시권(詩券)을 내보여 주었다. 자획이 《한서(漢書)》의 제목 글씨와 똑같아 자못 진 나라 사람의 필법이 있었다.
○ 유정수(劉靜修)는 백대를 전할 만한 인물이다. 〈과강부(過江賦)〉하나가 흠이었다. 정수는 또 다른 시에서,
누운 자리 지금은 누구에게 맡길꼬 / 臥榻而今又屬誰
하늘 땅 돌아보니 깃발만이 나부낀다 / 乾坤回首見旌旗
길가의 사람들은 항복한 임금 가리켜 / 路人爭指降王道
주 나라 일곱 살 애기와 흡사하다 하는도다 / 好似周家七歲兒
고 하였는데, 자못 조롱과 풍자가 들어 있어 또한 〈과강부〉의 뜻과 같았다.
○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는 예조 판서로 있을 때 그의 외손녀를 위해 신랑감을 고르게 되었다. 일찍이 사학(四學)에 앉아서 여러 서생들을 시험하였는데, 남학(南學)에서 광릉군(廣陵君) 이극배(李克培)를 택하여 그를 손서로 삼았다. 문경공의 집은 남부(南部)에 있었는데, 그 집을 광릉군에게 물려 주었다. 그 행랑채는 새[草]로 이은 것이었는데, 광릉의 대에 이르러서도 개조하지 않았으니, 두 분의 청렴 검소함은 공경할 만하다. 그 집이 지금은 상공(相公) 유전(柳㙉)의 집이 되었다고 한다. 외손녀는 즉 최유종(崔有悰)의 딸이다.
○ 장계(長溪) 황경문(黃景文) 정욱(廷彧)의 자)은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사대문서(事大文書 중국에 보내는 편지와 문서)는 묵초(墨草)에서 나왔다. 매양, ‘조선국왕 신성휘(朝鮮國王臣姓諱)’라고 하였는데, 대개 휘(諱) 자는 쓸 수 없기 때문이다.”
하였다.
지금 《대명회전(大明會典)》을 상고해 보니 종사(宗社)의 축문에 모두 황제 성명으로 쓰여졌다. 장계(長溪)의 말이 정말로 이와 꼭 들어맞았다. 이 소문이 장계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 더욱 자신만만해 할 것이다.
○ 일찍이 병인년(1566, 명종 21)에 북경에 가서 강절 선생(康節先生 소옹(邵雍)의 호)의 ‘생강(生薑)이 나무 위에서 난다’는 말을 국자학정 육광조(陸光祖)에게 물었더니, 말하기를,
“이것은 곧 중국의 속담입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생강은 곧 나무 위에서 난다.’고 그릇 말하자, 어떤 사람이 그 말을 부인하면서, ‘생강은 정말 땅위에서 난다.’하였더니, 나무 위에서 난다고 말하는 사람은, ‘내 말이 옳다.’고 우겼습니다. 그래서 지는 자는 노새 한 마리를 내기로 서로 약속하고 딴 사람에게 물으니 ‘생강은 원래 땅 위에서 나는 것인데, 어찌 나무 위에서 날 리가 있겠는가?’라고 하자, 그 사람은 곧 노새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복종하기는 싫어서, ‘노새는 준다만 생강은 결코 나무 위에서 나는 것이다.’라고 하였답니다. 이 속담은 사람들이 망령된 소견을 고집하는 것을 조롱한 것입니다.”
하였다.
○ 광주(廣州) 둔촌(遁村) 이집(李集)은 고려 말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전교시사에 이르렀다. 아들 셋을 두었는데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 맏아들 지직(之直)은 호조 참의ㆍ보문각 직제학이었다. 참의는 아들 둘을 두었는데 또한 과거에 급제하였고, 막내 아들 인손(仁孫)은 우의정이었는데 시호는 충희(忠僖)다. 충희공은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고, 둘째 아들 극감(克堪)은 형조 판서를 지냈고, 광성군(廣城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문경공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과거에 급제하고, 그의 맏아들 세좌(世佐)는 광양군(廣陽君)에 봉해졌다. 광양군의 아들 수정(守貞)은 수찬이다. 수찬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고, 막내 아들은 준경(浚慶)인데 영의정이다. 영의정의 작은 아들 덕열(德悅)은 현재 좌승지다. 8대를 연달아서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 또 광양군의 아우 세우(世佑)는 관찰사다. 관찰사의 아들 자(滋)는 홍문관 박사로 있다가, 연산군 때 외직으로 함창 현감이 되었다. 함창 현감의 아들은 약빙(若氷)이니 종부시 정이다. 정의 아들 홍남(洪男)은 공조 참의다. 참의의 아들은 민각(民覺)인데 장원을 하였고, 지금은 제용감 정이 되었다. 연달아 9대를 과거에 급제한 것이다.
○ 교관(敎官) 정군경(鄭君敬 작(碏)의 자)이 나에게 윤창주(尹滄洲 윤춘년(尹春年)의 호)가 임자년 가을에 쓴 증별시(贈別詩)를 보여 주었다. 시는 이러하다.
문장은 정맥이 있어 / 文章有正脈
뜻과 음이 주가 되거늘 / 意音爲之主
이 도를 오랫동안 전하지 못해 / 此道久不傳
소경 귀머거리 되고 말았네 / 已矣爲聾瞽
성과 정은 원래 맑은 것 / 性情本湛然
뜻만이 고무할 수 있다네 / 惟意能鼓舞
애와 낙은 각각 서로 응하고 / 哀樂各相應
안팎은 원래 한 법칙이다 / 表裏元一矩
원기는 정말 호연한 것이라 / 元氣信浩然
큰 악에 악보 어이 있으리 / 大樂安有譜
음조ㆍ반절은 문자에 붙어 있고 / 調切寄文子
박자는 종고에 맞춰 응하는 도다 / 節奏應鐘鼓
슬프다. 내 옛글 읽음이여 / 嗟余讀古書
십 년 동안 고생스리 노력했네 / 十年勤自苦
다행히도 하루아침에 깨달아져 / 一朝幸有得
눈으로 보듯 훤하다 할 수 있었도다 / 敢謂如目覩
정군은 나이 비록 적지만 / 鄭子雖年少
그 마음은 옛글 생각 간절했네 / 其心甚慕古
상종하여 여러 차례 물었지만 / 相從已屢問
도움 못 준 내 자신 부끄럽구나 / 自愧無所補
양기함을 근본 삼고 / 養氣以爲本
독서해서 돕게 했네 / 讀書以爲輔
혈기 정말 성하지 않으면 / 血氣苟不盛
만 권 서적 끝내 거칠어질 뿐이다 / 萬卷終鹵莽
그대는 귀 기울여 듣기 바라노니 / 願君聽慇懃
내 이 말은 진심에서 나온 것이라네 / 我言出肺腑
어찌 문장 짓는 것뿐이겠나 / 豈徒作文法
도 배움 또한 이로부터 취해지는도다 / 學道從此取
그대 지금 멀리 떠남은 / 今君有遠行
적막한 저 남방으로 돌아가는구나 / 寂寞歸南土
서로의 왕래 응당 오랫동안 없으리니 / 追隨應久廢
이별 어이 셀 수 있으랴 / 別離那可數
옛사람 흉내내어 증언하려 하나 / 贈言欲效古
내 재주는 이백ㆍ두보처럼 훌륭치 못하다네 / 我才非李杜
서성거리며 작별 차마 못하는데 / 徘徊不忍別
가을 바람 강포를 움직이도다 / 秋風動江浦
그때 정군(鄭君)의 나이 겨우 스무 살이었는데, 창주의 허여해 줌이 벌써 이와 같았다. 이 시는 자못 법도가 있어 볼 만하였다. 창주는 평생에 성률학(聲律學)을 가지고 자부하였다. 과연 독특한 견해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지금 왕감주(王弇州 명 세정(世貞)의 호)의 《치언부록(巵言附錄)》을 상고해 보니 왕경부(王敬夫 명 구사(九思)의 자)가 남곡(南曲)을 짓기를
술 또한 다 떨어져서 / 且盡杯中物
못 마시고 있는데 청산은 어두워진다 / 不飮靑山暮
라고 하여, 남방의 음은 반드시 남방, 북방의 음은 반드시 북방의 음으로 더욱 적절하게 분별하였다. 그렇다면 동일한 중원의 음이면서 남음(南音)ㆍ북음(北音)도 서로 들어가지 못하는데, 하물며 우리나라는 말과 소리가 다른 데에도 홀로 중국의 성률에 맞음이 있겠느가? 참으로 꼭 그렇지 못할 것이다. 이어 옛날 응교로서 옥당에 있을 적의 일이 기억난다. 한번은 어떤 모임에서 이 사실을 들어 부제학 소재에게 물었더니, 소재는 말하기를,
“이것은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고요하게 움직이지 않는 것은 성(性)이니 이것은 정말 맑은 것이지만, 정(情)이란 느껴서 모든 일에 통하는 것이다. 어찌 정마저 맑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 남소문동(南小門洞)에 종실(宗室) 한 분이 살고 있었다. 시를 즐기고 손님을 좋아하여, 한때의 이렇다 하는 시인 및 방외의 선비들이 모여 들어 언제나 손님이 만원이었다. 조우(祖雨)라는 중이 있었는데 일찍이 《장자(莊子)》를 가지고 재상 노사신에게 배우러 갔던 자다. 하루는 조우가 그의 집에 먼저 도착하고, 동봉 김열경(金悅卿)이 나중 이르렀다. 동봉은 조우가 이미 온 줄 알면서도 거짓 모르는 체하고 말하기를,
“조우는 노사신에게 수학하였으니 이 어찌 사람의 수에 넣을 수 있겠는가? 만약 여기에 오기만 하면 내가 반드시 그를 죽여 버리겠다.”
고 하니, 조우는 분을 견디지 못하여 동봉의 앞에 불쑥 나와서 말하기를,
“생원이 감히 대재상을 드러내 놓고 욕을 퍼부어서야 되겠는가? 만약 나를 죽이고 싶으면 그대 마음대로 죽여 보시오.”
하였다. 동봉은 조우를 움켜잡고 때리려 하는데 여러 손님들이 모두 떼어 말려서 겨우 빠져 달아나게 되었다. 노사신이 그때 정승의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그 뒤에 동봉이 수락산 속에 머물러 있었는데, 조우가 갑자기 찾아와 뵈었다. 동봉은 흔연히 맞으면서 말하기를,
“네가 고맙게 나를 찾아보러 오는가? 네가 글을 배우겠다면 내 마땅히 가르쳐 주겠다.”
하고, 즉시 종에게 밥을 지어서 먹이도록 하였다. 밥상이 준비되자, 동봉은 조우의 옆에 높이 걸터앉았다. 조우가 밥을 떠서 먹으려고 입에 숟가락이 갈 적마다 들어가기 직전에 발로 비벼 땅 위의 먼지를 일으켜서 그 숟갈 위에 날아 들게 하였다. 그래서 조우는 한 그릇 밥을 다 퍼내도록 끝내는 한 숟가락의 밥도 먹지 못하게 되었다. 조우가 말하기를,
“생원은 이미 밥을 지어서 나는 주고서 또 먹지 못하게 하니, 이것을 무슨 생각이오?”
하니, 동봉은 대답하기를,
“네가 노 아무개에게 글을 배웠으니 어찌 사람이냐?”
라고 하였다. 조우가 일찍이 송광사 주지를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우송광(雨松廣)이라고 불렀다. 80~90이 되도록 살아 있었으므로 수암(守庵) 박지화(朴枝華)가 그를 만나보게 되었던 것이다. 한번은 이 얘기를 수암에게 전하고 말하기를,
“동봉의 한 일들이 이처럼 괴상하여 나는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 모르겠소.”
하니, 수암은 대답하기를,
“동봉은 일찍이 주공ㆍ공자를 대단찮게 여기고, 탕왕과 무왕을 그르게 여긴 적이 있었다. 그런데 노사신이 그때 총애받는 정승이었기 때문에 반드시 이와 같이 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한다.
○ 고황제(高皇帝)의 장릉(長陵)은 남경의 종산(鍾山)에 있다. 그 산에 고라니와 사슴들이 많이 서식하여도 사람들이 감히 사냥을 할 수 없다. 때문에 언제나 사람을 겁내지 않아서 가까이 가도 피하지 않으며, 산밑 시냇물에는 굵고 작은 고기들이 헤엄치고 놀고 있는데, 그물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가까이 가도 또한 놀라 달아나지 않는다고 한다.
○ 직장(直長) 송미로(宋眉老)가 일찍이 말하기를,
“이천(利川)에 진사 한 분이 있었으니 곧 모재(慕齋)의 고제자였다. 그의 성명은 잊어버렸다. 한번은 모재가 풀지 못한 문자를 적어서 창주(滄洲) 윤춘년(尹春年)에게 물었더니, 조목조목 해석하여 다시 의문과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 극히 탄복할 만하다.”
고 하였다.
○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정영위(丁令威)는 항주(杭州) 사람이다. 의무려(醫無閭)에 들어가서 신선을 배웠다. 지금 도화동(桃花洞)에 성수분(聖水盆)이 있으니 이것이 정영위의 유적인데, 학이 되어 화표주(華表柱)에 날아와서 울었다.
고 하였다. 요성(遼城) 밖 팔리참(八里站)의 서북쪽에 수산령(首山嶺)이 있고, 수산령의 동북쪽에 석봉(石峯)이 높이 솟아 있으니 곧 문황제(文皇帝)의 어가(御駕)가 머물던 산이라고 한다.
○ 추강(秋江) 남백공(南伯恭 남효온(南孝溫)의 자)이 과거에 응하지 않으니, 동봉은 그를 나무라기를,
“나는 영묘조(英廟朝 세종의 묘호)의 사람으로 노산(魯山) 때의 일을 직접 보았으니, 진실로 본조에 벼슬하기 어렵지만 자네는 그 뒤에 태어났으면서 벼슬하지 않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
하였다. 추강은 드디어 시험에 응시할 의사가 있었다. 그러나 소릉(昭陵)의 일이 통탄할 일이다 하여, 만약 복위시킬 수만 있다면 내가 벼슬할 수 있다하고 곧 소릉 위소(復位疏)를 올렸는데, 당시 논의가 떠들썩해져 이를 배척하였다. 그래서 추강은 즉시 벼슬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이따금 과장에 들어가서는 빈 피봉(皮封)만 내었으므로 과거 글은 장원에 뽑혔으나, 피봉을 뜯으면 성명이 없어서 방에 붙지 못하였다고 한다.
○ 만력 기축년(1589, 선조 22)에 종계 주청사(宗系奏請使)로 북경에 갔었다. 그때 마침 중양일(重陽日)이어서 국자감에서 공자를 뵈었다. 여관으로 돌아올 적에 일부러 딴 길을 택했는데, 길 위에서 보지 못한 것을 구경하려는 것이었다. 그 길을 지금 비록 기억해 낼 수 없으나, 동화문(東華門) 남쪽으로 뻗은 거리인 듯한데, 그 거리가 아주 좁았다. 학관(學官) 안정란(安庭蘭)이 중국 말을 잘하였으므로, 말머리에 서서 앞을 인도하였다. 발걸음이 그 동네의 중간쯤에 도착하니, 화분을 길가에 내다 놓은 것이 있었다. 그 꽃나무는 외줄기로 우뚝하게 바로 올라서 해마다 자란 마디가 있고, 마디마다 바야흐로 잎사귀가 붙어 있는데, 옆으로 뻗어 나간 가지가 없으며, 그 잎사귀는 꽤 두툼하면서도 넓적하여 마치 두충(杜冲)의 잎사귀와 같았다. 잎사귀 사이에 하얀 꽃이 때마침 활짝 피어 있는데, 꽃봉오리가 오얏꽃에 비해서 조금 더 크고도 두꺼웠다. 나는 생각하기를, 9월에 피는 흰꽃은 우리나라에서는 없는 것이니 반드시 이름난 꽃이리라 여기고, 곧 말을 멈추고 안생(安生)을 시켜서 길 옆에 사는 사람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이 꽃은 관가의 물건이라고 했다. 한 관리가 있다가, 이 말을 듣고 문밖에 나와서 내게 이르기를,
“당신이 이 꽃을 사겠소?”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사려는 것이 아니오. 나는 외국 사람인데, 이 꽃이 무슨 꽃인지를 몰라서 물어본 것뿐이오.”
하니, 대답하기를,
“이것은 말리화(茉莉花)입니다.”
하고, 인하여 손수 그 꽃 네댓 송이를 따서 내게 선물하였다. 냄새를 맡아보니 맑은 향기가 코를 찔렀다. 인해서 젊을 적에 본 《사문유취(事文類娶)》가운데 말리화를 두고 읊은 시가 떠올랐다. 시는 이러하다.
여러 사람 놀라게 할 고운 자태는 없지만 / 雖無艶態驚群目
다행히도 맑은 향기는 구추의 으뜸이라 / 幸有淸香壓九秋
이 꽃은 원래부터 맑은 향기가 있기로 유명한 것이다. 예관에 돌아온 즉시 소매 속의 꽃송이를 꺼내 가지고 물었더니, 여관 역부(役夫)들이 모두 말하기를,
“말리화다. 말리화는 남방에서 나는데, 서울에 옮겨 심어 그 꽃이 자못 많이 퍼졌다.”
고 하였다.
○ 모재는 벼슬하기 전부터 벌써 시를 볼 줄 안다고 당시에 이름이 났었다. 판서 성경숙(成磬叔 성현(成俔)의 자)이 한 해 동안 나서지 않고 집안에서 요양하였다. 그 사이에 두시(杜詩)를 숙독해서 사운(四韻) 여덟 수를 짓고 스스로 ‘마음에 만족한 작품이니 옛날 사람의 시에 견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때는 아들 하산(夏山) 세창(世昌)이 과거에 오르지 못하였을 때다. 하루는 하산에게 말하기를,
“내 이 시는 옛날 사람의 작품에 부끄러울 것이 없을 만한 것이다. 들으니 네 친구 김 아무개는 시의 잘잘못을 가려낸다고 하니, 네가 보통 종이에다 하인을 시켜서 베끼고 이것을 부엌 위에 수십 일 동안 매달아 연기에 오래 묵은 것처럼 만든 뒤, 그을리게 하여 김 아무개에게 보여 그것이 어느 시대의 시인가를 물어보라.”
하였다. 하산이 자기 집에 모재를 초청하여 손님 자리에 같이 앉고, 판서는 그 안방에 있으면서 벽만 가려 놓고 그 말을 들으려 하였다. 하산이 묻기를,
“집의 어른께서 시를 묵은 책 상자 속에서 찾아내셨는데, 이것이 참으로 옛날 사람의 작품임은 알 수 있다. 그러나 잘 모르겠구려. 송 나라 말엽의 작품인지, 아니면 원 나라 사람의 작품인지를 분명히 알 수 없어, 자네에게 이 시의 감정을 청하네.”
하였다. 모재는 두 편을 읽고 말하기를,
“이 시는 격이 낮다. 송 말엽의 시는 벌써 아니고, 원 나라 시 또한 아니다. 바로 현대의 작품이다.”
고 하였다. 또 묻기를,
“최고운(崔孤雲 최치원(崔致遠)의 호)이나 이목은(李牧隱 이색(李穡)의 호)의 작품은 아니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최고운ㆍ 이목은의 시는 격이 높다. 그러니 그들의 작품은 아닐 것이고, 진실로 현대 사람의 작품이다. 그러나 현대 사람의 작품으로는 매우 훌륭하다. 다른 사람은 아마 이렇게 지을 수 없을 것이다. 들으니, 대감(大監 성현을 지칭)께서 요즘 두시를 읽으셨다고 하는데, 만약 정밀하게 생각하고 다듬으시면 이만한 작품을 쓰실 수 있을 것이다. 아마 대감의 작품일게다.”
하였다. 판서가 안에서 이 얘기를 듣고 문을 열고 나와서 모재를 보고 말하기를,
“너의 시 공부가 이 정도가지 이른 것은 뜻밖이구나.”
하고, 드디어 술상을 차리고 마주 앉아서 오랫동안 조용히 얘기한 뒤에 파하였다 한다.
○ 중국의 풍속 습관은 예와 지금이 동일하지 않은 것이 있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기장밥은 젓가락으로 먹지 말라.”
하였는데, 주가(注家)에서는,
“젓가락으로 먹지 말라는 것은 숟가락으로 먹는 것이 편리함을 좋게 여긴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 중국에서는 밥을 뜰 때 모두 젓가락질이고, 이른바 숟가락이라는 것은 전혀 없다. 장자(莊子)가 말하기를,
하였다. 지금 중국엔 코 꿴 소가 없고, 우리나라에서만 그렇게 하고 있다. 숟가락을 사용하지 않고 소 코를 꿰지 않은 것은 어느 때부터인지 알 수 없다. 중국의 고급 사정을 잘 아는 자에게 물어 봐야겠다.
북경의 삼충묘(三忠廟)는 숭문문(崇文門) 밖 6~7리 지점 길 옆에 있고, 동쪽으로 도자하(桃子河)에 임하였는데, 제갈무후(諸葛武侯)ㆍ악무목(岳武穆)ㆍ문신국(文信國) 등 세 소상(塑像)이 있다.
○ 김전한(金典翰 전한은 벼슬 이름)은 일찍이 말하기를,
“모재가 임인년 7월부터 배앓이를 얻어서 계묘년 정월 초4일에 세상을 뜨셨다. 한번은 임인년 동짓달 밤에 밖에 나가 대변을 보고 돌아와서 전한에게 이르기를, ‘지금 하늘의 기상을 살펴보니 국가의 형편이 위태롭게 되었다. 외척이 장차 화를 전가시키면서 선비들이 살해를 많이 입게 되어 국가가 반드시 망할 것이다. 비록 망하지 않더라도 그 화를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 병으로 인해 일어나지 못하니 보게 되지 않을 것이지만, 너희들도 또한 말을 함부로 지껄여서 화기(禍機)를 건드리지 말라.’하고 연달아 4~5일을 혀를 차고 탄식하면서 먹지 않으셨다.”
고 하였다.
○ 모재가 기묘사화로 파직되어 쫓겨난 뒤에, 이천(利川)의 줏동(注叱洞)에 처음으로 갔었다. 그런데 마침 평안도 관찰사는 사로 친분이 있는 친구였다. 편지로 개가죽 배자(褙子)를 입고 밤중에 하늘의 기상을 살펴보려 한다고 하였는데, 드디어 개가죽 배자를 얻게 되었다. 또 문앞에다 높다란 누각을 짓고 흐리고 비오는 날이 아니면 밤에는 곧 털가죽 옷을 입고 누각에 올라가서 천문(天文)을 보면서 해를 마쳤다. 그러니 모재는 천문에도 극히 정통하였다.
○ 모재는 일찍이 말하기를,
“남곤이 기묘사류들을 죄에 빠뜨릴 적에 그의 본의는 그 기세를 죽이기 위해 파직시켜 내쫓으려 했을 뿐, 애당초 살해할 의사는 없었으나, 행여 왕께서 말을 들어 주지 않을까 염려하여, 일부러 장황하게 죄를 만들어 임금의 귀가 솔깃해지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런데 중묘(中廟 중종)께서 그 말을 지나치게 믿고 처분을 극히 무겁게 하였으므로 정암(靜菴)ㆍ충암(冲菴) 등이 마침내 그 생명을 보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남곤이 비록 이것을 후회는 하면서도 자기가 설치한 함정을 자기가 도로 구해낼 수 없었으므로 그들의 죽음을 눈으로 보고 한평생 한스럽게 여겼다.”
고 하였다.
○ 우참찬 백인걸(白仁傑)은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 모재에게 글을 배웠다. 한림에서 파직당하고 자원하여 여주(驪州)의 교수(敎授)로 나갔다. 항상 모재의 문하에 가서 매양 을사년 충순당(忠順堂) 면대(面對)의 일을 말하기를,
“회재는 그때 면대에 참여하지 않고 한번 죽을 따름인데, 어찌 차마 이기(李芑)의 무리들과 한때 같이 면대하였는가? 모재가 만일 세상에 계셨더라면 죽으면 죽었지, 결코 그 면대에 참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였다.
○ 만력 기축년에 북경을 갔었는데, 국자감에 나아가 장차 공자를 뵈려 할 적에, 관부(館夫) 이선(李瑄) 등이 길 위에서 한 골목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 골짜기에 융복사(隆福寺)가 있으니 실로 서울의 큰 사찰이요, 경태제(景泰帝)의 잠저입니다. 경태제가 잠저시에 언젠가 중이 되어 이 절에 머물고 있었는데, 정통 황제(正統皇帝)의 북방 사냥 행차를 만나 감국(監國)을 인하여 황제 위에 올랐습니다.”
하였다. 경태제가 일찍이 중 노릇을 하였다는 설은 다른 증거도 없으니, 그런지 아닌지를 모르겠다. 인해 기억 나기로는 사십가소설(四十家小說)의 《병일만기(病逸謾記)》인데, 육익 정의(陸釴鼎儀 정의는 자임)가 찬한 글 중 한 줄거리에,
“경태제의 죽음은 환자(宦子) 장안(蔣安)이 깁[帛]으로 억지로 죽였다.”
고 하였는데, 그럴듯하다. 또 기억나기로는 북경에 갔을 적인데, 남성을 물으니, 중국 사람이 이르기를,
“장안문 동편에 궁궐 담장을 불룩 나오게 쌓은 곳에서 바라보면, 그 가운데 궁전이 대내(大內)보다 조금 낮은 것이 곧 남궁(南宮)인데, 정통황제까지의 임금들이 여기에 살았다.”
고 하였다. 식자들의 평정(評訂)을 기다려야겠다.
○ 우리나라 종계(宗系)를 변무할 적에 주문(奏文) 가운데, 국조(國祖)의 휘(諱)는 자춘(子春), 자도 자춘(子春)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예부의 관리가 이것을 의심스럽게 여긴 자가 있어서 묻기를,
“자춘은 곧 인임(仁任)이라고 하는 사람의 자(字)가 아니냐?”
하였다. 사신이 돌아오자 참판 김계휘(金繼輝)는 그 말을 듣고 말하기를,
“이것은 의심할 것이 없다. 옛사람들은 자가 그 이름과 같은 사람이 많았다. 이를테면, 곽자의(郭子儀)의 자는 자의(子儀), 양연기(楊燕奇)의 자는 연기(燕奇)이다.”
하고, 이어서 이름과 자가 같은 사람을 무릇 7명을 드는데, 책자를 상고하지도 않고 대담하는 자리에서 직접 들었으니 박식하다고 할 만하다.
○ 공헌대왕(恭憲大王) 시호를 청하기 위해 쓴 행장(行狀)은 즉 퇴계가 제술한 것이다. 감정(勘定)할 때에 경복궁의 춘추관에 일제히 모였는데, 직책이 춘추관의 일을 겸한 자는 모두 회의 좌중에 있었으므로 다 기억할 수 없고, 다만 참판 김중회(金重晦)공이 참여한 것은 기억난다. 행장의 끄트머리에,
“왕의 선형(先兄) 영정왕(榮靖王) 모비(母妃)의 일족이 죄를 입고 죽기도 하고 더러는 귀양간 사람도 있었는데, 다 은혜를 베풀어 신원해 주고, 또 석방하여 돌아오게 하였다.”
는 말이 있었다. 그 당시 논의는, 영정왕 모비의 일족이 죄를 입었다는 것은 중국 조정에서는 모르는 일이니, 지금 이 말을 제기하여 중국 조정이 알게 할 필요는 없는 것이라고 하자, 퇴계는 말하기를,
“여러분의 의사가 이미 이렇다면 이 한 줄거리는 삭제하자.”
하고, 즉시 그 자리에서 지워버렸다. 이어서 말하기를,
“이것은 실로 선왕의 훌륭한 업적이다. 비록 중국 조정에는 숨기더라도 우리나라에서는 빠뜨려서 없애버릴 수 없는 일이니, 국승(國乘)에 분명히 기재하여 후세에 알도록 해야 한다.”
고 하였다 한다.
○ 문종대왕이 손수 눈 속의 매화 한 가지를 그리고, 아울러 칠언 율시 한마디를 제하여 안평대군에게 주었다. 그 둘째 구에,
도리어 차디찬 눈 속인데도 / 却於氷雪崢嶸裏
봄바람 살짝 얻어 향기 풍기네 / 偸得春風漏洩香
라고 하였고, 다른 구절은 잊어버려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박 참의(朴參議)의 말은 첨지 송응형(宋應泂)의 집에서 친히 보았다고 한다.
○ 노산왕(魯山王 단종)의 비(妃) 송씨(宋氏)는 적몰되어 관비가 되었는데, 신숙주(申叔舟)가 공신의 여자종으로 받아내려고 왕에게 청하기까지 하였으나, 광묘(光廟 세조의 묘호)가 그의 청을 허락하지 않고서 얼마 안 가서 궁중에서 정미수(鄭眉壽)를 양육하게 하였다.
○ 영양위(寧陽尉)가 적소에서 사사된 뒤 공주는 적몰되어 순천(順天) 관비가 되었다. 부사 여자신(呂自新)은 무인이었다. 장차 관비의 일로 부리려 하니, 공주는 곧장 대청에 들어가서 교의(交椅)를 베풀고 앉아서 말하기를,
“나는 왕의 딸이다. 내 비록 죄가 있어 정배되었지만, 어찌 수령이 감히 관비의 일을 시키는가?”
하여, 마침내 일을 시키지 못하게 되었다. 여자신은 뒤에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는데 즉 여유길(呂裕吉)의 방조(傍祖)다.
○ 중종(中宗) 임신년에 소릉(昭陵) 복위를 위한 회의를 특별히 베풀었는데, 유순정(柳順汀)이 수상으로서 홀로 불가하다고 하였다. 조정에서 의논을 널리 모으던 그날, 어떤 한 사람의 꿈에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정미수(鄭眉壽)가 유 정승과 씨름으로 서로 겨루다가 유 정승이 지는 것을 보았다. 때는 정 해평부원군이 죽고 장사를 치르기 전날이었다. 날이 밝아 유 정승이 관과 띠를 갖추고 대궐로 나아가려는데 갑자기 중풍이 들어 마침내 일어나지 못하였다. 소릉 복위의 반대 논의가 행하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마침내 복위하게 되었다 한다.
○ 내가 옛날에 대언(代言 승지의 별칭)이 되어 은대(銀臺 승정원의 별칭)에 있었는데, 마침 양도왕조(襄悼王朝 예종)의 일기를 상고해 보게 되었다. 양도왕이 하루는 이렇게 전교하였다.
“공정왕(恭靖王 정종)은 종사(宗社)에 죄를 얻지 않았는데도 묘시(廟諡)가 없으니 이것은 전례(典禮)를 빠뜨린 것이다. 지금 마땅히 시호를 올려야 한다.”
하여, 드디어 시호를 안종(安宗)이라 하였다. 그런데 그 후에 이내 공정왕으로 부르고 안종이란 시호는 마침내 폐지되어 불리지 않았으니, 또한 무슨 까닭인지 알 수 없다. 본국의 전고에 널리 통한 자를 만나서 이를 상의해 봐야겠다.
○ 금상(今上 현재의 임금을 말함)이 즉위한 처음에 잠저 때의 구휘(舊諱)를 고치고 아래에서 삼망(三望)을 갖추었는데 모두 날일(日) 자 변의 글자로서 비의(備擬)하여 바쳤다. 그 때 경(曔) 자가 수망(首望)이었는데 부망(副望)이었는지는 확실히 기억할 수는 없으나, 그 글자가 비의된 것만은 분명하다. 마침 지금 어휘에 낙점되었다. 참판 김계휘가 나중에 비의된 소문을 듣고 놀라기를,
“경(曔) 자는 바로 공정왕(恭靖王)의 어휘다.”
하였다. 만약 낙점이 되었더면 어떻게 될 뻔했겠나. 다행히 낙점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 후에 종묘의 어보(御寶)를 이산(李山)에게 도둑맞아서 도감을 설치하여 잃어버린 어보를 다시 만들게 되었다. 내가 제조가 되어 도제조 이하의 관원들로 더불어 종묘 안 각 실의 책보(冊寶)를 살펴 보았더니 첫째 실인 강헌왕(康獻王 태조)의 실 안에 공정왕의 존호를 올린 옥책이 있었는데, 그 문장에, ‘신(臣) 경(曔)…’으로 되어 있어, 바야흐로 경(曔) 자가 공정왕의 휘가 됨을 알았다. 온 세상이 모르는 것을 김 참판만이 알고 있으니 박식하다고 할 만하다.
○ 안성부원군(安城府院君) 이숙번(李叔蕃)은 광묘(光廟 세조)가 어릴 적에 보고 말하기를,
“어린애의 눈동자가 너무도 그의 할아버지를 닮았구나. 모쪼록 형제끼리 우애하고 너의 할아버지는 본받지 말라.”
하였다 한다. 할아버지는 태종을 가리킨 것이다.
○ 가정 경신년(1560, 명종 15)에 찬성 홍섬(洪暹)이 대제학의 직을 간절히 사양하여 원한 대로 되었다. 신임 대제학을 선출해야 하므로, 승정원이 전례에 의하여 무릇 가선대부 이상의 문관을 패초(牌招 왕명으로 승지가 신하를 부르는 것)하여, 모두 경복궁의 빈청에 나아갔다. 빈청의 행랑은 길이가 무릇 몇 칸이나 되어 매우 널찍하였으나, 왕명을 받고 그 자리에 나온 재신들로 빈청이 가득하였다. 영상 상진(尙震)ㆍ좌상 이준경(李浚慶)은 북쪽 벽에 앉고, 거기서 꺾어져 서쪽 벽에는 홍 찬성이 제일 윗자리에 앉고, 그 아래로 여러 재신들이 차례대로 앉았다. 찬성은 전례대로 자신의 후임을 추천하게 되었는데, 예조 판서 정유길(鄭惟吉)ㆍ지사 윤춘년(尹春年)ㆍ동지 이황(李滉)을 추천하고, 이어서 정승의 자리 앞에 나아가서 말하기를,
“이 아무는 경술과 사장(詞章)이 실로 이 임무에 합당하지만 초야에 깊이 묻혀서 굳이 나오지 않은 데야 어찌 하겠소?”
하였다. 이보다 앞서 찬성이 대제학을 사직했을 때, 답사에,
“신임 예조 판서를 겨우 보게 되었는데, 무엇 때문에 이처럼 사직하오?”
라는 말씀이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왕이 정 예조 판서에게 뜻을 두고 있음을 짐작하였다. 이날 예조 판서는 와서 참석하였고, 윤 지사는 병으로 오지 못하였다. 내가 주서로서 추천 단자를 가지고 아랫자리부터 윗자리까지 앞에 나가서 권점을 청하였다. 그런데 가선들은 거의가 임당(林塘 정유길의 호)에게 권점을 쳤고, 박영준(朴永俊)에게 와서야 퇴계에게 권점을 치기 시작하였다. 좌찬성(홍섬을 지칭함)이 권점 칠 차례가 되자 일어나 정승의 자리 앞에 나 앉으면서 말하기를,
“사람들은 각각 한 사람에게 권점을 치지만 내 생각으로는 세 사람이 모두 합당하니 모두에게 권점을 치겠습니다.”
하였다. 정승들이 허락하니 곧 세 사람 모두에게 권점을 쳤다. 참판 김주(金澍)는 좌찬성의 앞에 있었다. 박 참판(박영준을 지칭)에게 이르기를,
“영감이 만일 추천되었다면 내가 거기에 권점을 칠 텐데, 지금 추천되지 않았구려.”
하였다. 권점이 끝나게 되어 영상의 앞에 가지고 나아가니, 퇴계는 12권점, 임당은 16권점, 창주는 겨우 5권점뿐이었다. 영상은 창주의 이름 밑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여기는 너무 적다. 나는 여기에 권점을 쳐야겠구나.”
하고 즉시 그의 이름 밑에 권점을 쳤다. 창주는 이 때문에 6권점을 얻게 되었다. 나중에 수망(首望)으로서 권점이 많다고 하여 임당을 대제학에 임명하였다. 이것을 평시의 전례로 내가 분명히 아는 일이다.
임진왜란 뒤에 무릇 대제학을 선출할 때는 현직 정승과 육조 판서만 패초해서 권점을 모을 뿐이며, 심지어 박충간(朴忠侃) 같은 이는 음관(蔭官)으로서 마침 판서가 되어 뻔뻔스레 권점을 쳤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를 비웃었다. 전례가 오래지 않아서 증거삼을 만한데, 임진왜란 후에는 마음대로 새로운 예를 만들어 내서 이를 수행하고 있으니 탄식할 뿐이다.
○ 공헌왕(恭憲王) 때 황홍헌(黃洪憲)이라는 중국 사신은 명성이 미리 알려져 있었다. 하루는 경연에서 임당 정유길에게 묻기를,
“우리 나라 조사(詔使)들이 지은 시 가운데 누구의 것이 제일가오?”
하니, 임당은,
“기순(祁順)이 첫째고, 장영(張寧)이 첫째고, 장영(張寧)은 그 다음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지금 와서 살펴보건대, 장정지(張靖之 자영의 자)의 시는 편마다 절창이라 첫째가 되어야 합당한데, 임당이 그렇게 대단한 것은 어째서인가?
○ 대개 나라가 바뀔 적에 신하로서 임금을 죽이고 나라를 빼앗은 자는, 이를테면 유유(劉裕)ㆍ소도성(蕭道成) 등인데, 모두가 국운이 짧았다. 순환을 좋아하는 하늘의 이치가 당연하다. 그런데 홀로 사마소(司馬昭)만은 성제(成濟)의 손을 빌려서 고귀향공(高貴鄕公 위주(魏主) 모(髦))을 죽였는데도 사마(司馬)씨의 진(晉) 나라는 백 년 동안 나라를 누렸으므로 일찍이 이 일을 적이 괴이쩍게 여겼더니, 뒤에 깊이 연구하여 비로소 거기에 대한 설명을 얻게 되었다. 사마의(司馬懿)는 비록 찬탈의 터전은 닦았지만 일찍이 임금을 죽이지는 않았고, 사마소(司馬昭)의 자손이 비록 천하를 차지하였으나 회제(懷帝)ㆍ민제(愍帝) 때 와서 오랑캐의 손에 사로잡혀서 죽음을 당하였으니, 하늘이 사마소의 죄악에 대한 보복이 아주 뚜렷하여, 사마소의 후손은 진실로 이미 멸망한 것이다. 원제(元帝)는 곧 사마의의 증손이며 사마소의 후손은 아니다. 사마의는 임금을 죽인 죄가 없는 만큼, 그의 후손의 향국이 조금 연장된 것은 또한 당연한 이치다.
○ 일찍이 《송사(宋史)》를 상고해 보았더니, 이를테면 장돈(章惇)ㆍ채경(蔡京)ㆍ진회(秦檜) 등이 모두 간신전(姦臣傳)에 있는데, 그들의 죄악이 워낙 많았으므로 후세 사람들이 모두 간악한 사람으로 일컫는 것이다. 그런데 《고려사(高麗史)》의 간신전에 실린 조민수(曺敏修)ㆍ변안렬(邊安烈)로 말한다면, 그들의 일과 행동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간사스러운 증상이 있음을 보지 못하였다. 조민수는 다만 선왕(先王)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는 이색(李穡)의 말만 듣고 창왕(昌王)을 옹립하였을 뿐이며, 변안렬은 여흥왕(驪興王)을 개인적으로 찾아가 뵈었을 뿐이다. 이것을 가지고 죄를 만들어서 간신의 열에 넣어 두었으니 어찌 후세의 인심을 복종시킬 수 있으며, 또한 사실을 바른 대로 쓴 믿을 만한 역사가 될 수 있겠는가? 또 먼저 임금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는 것은 곧 이색의 말이다. 근본을 따져서 죄를 삼는다면 이색은 장차 죄의 우두머리임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런데 사신(史臣)들이 이색은 명유(名儒)라 하여 감히 간신의 이름을 붙이지 못하고, 민수에게만 가하였을 다름이니, 한번 웃음을 터뜨릴 만하다.
이자의(李資義) 같은 분은 헌종(獻宗)을 보호하려고 꾀를 쓰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주었다. 현종은 곧 선종(宣宗)의 아들로 이미 선종을 이어서 임금이 되었으며, 자의는 친(親)으로 말하면 그의 장인이다. 그를 보호함이 또한 무슨 죄가 되겠는가? 성공하지 못하고 죽은 것이 운명이다. 비록 죽었지만 부끄러움이 없을 만한 것이다. 《고려사》에서는 그를 역신(逆臣)으로 전(傳)을 내었다. 대개 역신이란, 자신이 난역을 범한 것을 말한다. 그런데 자의에게 이런 일이 있었는가? 개탄스러울 따름이다.
○ 염흥방(廉興邦)은 고려 말엽에 임견미(林堅味)와 재물을 탐냈다고 하여 한때 죽음을 당하여 지금까지도 임견미ㆍ염흥방이라 부르고 있다. 그런데 유희령(柳希齡)이 지은 《대동시림(大東詩林)》에 시인의 성명을 기록하였는데, 염흥방의 이름에 가서는,
“요(遼)를 쳐야 한다고 간하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고 하였다. 이것은 옛날 역사에도 없던 말인데, 희령이 갑자기 이런 말을 끄집어 내었으니, 또한 전해 들은 것이 꼭 그러한 단사를 얻어서 말한 것인가? 과연 이와 같다면 염흥방은 참으로 나라의 일에 충성한 사람이다. 그의 죽음이 합당한 죄가 아닌 듯하다. 허균(許筠)은 말하기를,
“우왕(禑王)이 최영(崔瑩)의 딸을 비(妃)로 맞아들일 때 흥방이, ‘군대를 장악하고 있는 대장의 딸을 후궁으로 맞아서는 안 된다.’고 간하였다. 이 때문에 최영(崔瑩)의 노여움을 깊이 건드려서 혹독한 재앙을 당한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믿을 만한 말인지 모르겠다.
○ 둔촌(遁村) 이집(李集)은 자는 호연(浩然)이며 벼슬은 판전교시사에까지 이르렀는데 고려 말에 죽었고, 본조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가 죽으니 정종지 도전(鄭宗之道傳 종지는 정도전의 자)이 곡하며 말하기를,
“손꼽아 세어본들 날 알아 줄 이 그 누구랴! 슬허 아픈 이 마음 하늘에나 물어 보련다. 약재(若齋)는 예전에 만리길 떠났는데, 둔촌 노인이 또 저 세상 사람이라네. 강개스런 그 말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맑고 산뜻한 시는 세상에 으뜸이었도다. 지금은 모두 함께 갔으니, 눈물 어리 흘리지 않으리.”
하였다. 약재는 곧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이다. 고려 때 북경에 사신으로 갔었다. 고황제(高皇帝)가 공마(貢馬)의 수가 모자란다 하여 대리(大理)에 귀양을 보냈는데 도중에서 죽었다. 길 가운데서 시를 짓기를,
좋은 말 오천 필은 어느 날 도착하려나 / 良馬五千何日到
도화관 밖에는 풀만이 더부룩하도다 / 桃花門外草芊芊
하였다. 둔촌의 죽음이 아마 척약재와 같은 시기였을 것이다. 참의 유희령이 지은 《대동시림》에는 둔촌의 이름 밑에서 주석을 내기를,
“본조에 들어와서 무슨 벼슬까지 했다.”
하였으니, 이보다 더 심한 거짓말이 어디 있겠는가? 후손되는 사람은 그 억울함음 분명히 밝혀야 될 것이다.
○ 인산군(仁山君) 홍윤성(洪允成)은 춘추감으로 있을 때에 시정기(時政記 정사를 집행하여 나가는 중에 역사에 남을 만한 것을 사관이 추려서 적은 기록)에서 자기의 죄악이 낭자하게 쓰여진 것을 보고 분해하면서 말하기를,
“왜종이[倭楮]에 박은 《강목(綱目)》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또한 즐겨 보지 않는데, 더군다나 《동국통감(東國通鑑)》이겠는가? 너희들 마음대로 써라. 누가 동국의 역사를 보려하겠느냐?”
하였다.
○ 정자삼(鄭子三)은 젊을 적에 늘 황여헌(黃汝獻)의 문하에 있었다. 내가 경상도 관찰로 있을 적에 전사삼을 청해 보고 울산 군수 황여헌의 평일의 일에 대해 물어보았다. 정자삼은 말하기를,
“매양 울산 군수를 모셨더니, 하루는 울산 군수가 갑자기 한숨을 쉬면서 말하기를, ‘선조 (先朝)에서 서당(書堂)에 뽑힌 사람은 무릇 일곱 사람이다. 이행(李荇)ㆍ김안국(金安國)ㆍ김안로(金安老)ㆍ소세양(蘇世讓)ㆍ유운(柳雲)ㆍ정사룡(鄭士龍) 그리고 나다. 이행과 김안로는 정승이 되고 또 대제학을 하였으며, 김안국ㆍ소세양ㆍ정사룡 또한 대제학을 지냈으므로 대제학을 지낸 사람이 다섯이다. 유운은 죄를 입고 일찍 죽었어도 오히려 종2품까지 되었는데, 나 혼자만이 어정어정 낭관의 자리에서 헤매다가 시골로 쫓겼났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느냐?’라고 하더라.”
하였다.
○ 신기재(申企齋 이름은 광한(光漢))는 무릇 시를 지은 것이 있으면 곧 직강(直講) 신호(申濩)에게 보여서 그의 시정을 얻은 위에야 세상에 행하였다. 하루는 세초연(洗草宴) 계축시(契軸詩)를 가지고 신 직강에게 보였다. 신 직강이,
인간의 남긴 자취 용이 오르는 것 같구나 / 人間遺迹似龍騰
라는 구절까지 읽다가는 마음에 들지 않아 두세 번 되풀이하면서 읊었다. 기재가 말하기를,
“이것이 만족스럽지 못해 그러는가?”
하니, 신 직강이 말하기를,
“동파(東坡)의 시에서 말한 바,
고 한 것은, 난정(蘭亭)의 견지(繭紙)의 진본은 소릉(昭陵 당 태종(唐太宗)의 능) 장사 때 같이 묻었고, 그 모본(摹本)으로 세상에 전하는 것도 오히려 용이 날아오르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모본이라 비록 진본은 아니지만, 그 필세는 오히려 용이 날아오르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말을 인용하여,
천하의 보배 글은 물을 따라 흘러간다 / 天上寶書隨水化
의 대구로 사용함은 아마도 마땅치 않은 것 같다.”
하니 기재는 말하기를,
“어찌 이렇게 봐서야 되겠는가? 용이 오른다는 것은 다만 마치 용이 변화를 부려서 흔적이 없음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하고, 신 직강의 말을 옳게 여기지 않아서 ‘용이 오른다’는 말은 고치지 않고 세상에 전해졌다. 지금 보니 아마 신 직강의 말이 옳은 듯하다.
○ 모재가 여강(驪江)에 있을 때에 음애(陰崖)는 충주, 희강(希剛 이장곤(李長坤))은 우만(牛灣)으로부터 신륵사(神勒寺)에 와서 모재와 서로 모여 유숙하였다.
그때 김이숙(金頤叔 안로(安老)의 자)이 국사를 맡아 보았는데,
“파직된 중신들이 한 곳에 모여서 국가의 일을 의논한다.”
고 하였다.
○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는 이기(李芑)가 《대학》과 《성리대전》 등의 글을 잘 안다 하여 매양 그의 집에 가서 정정(訂正)하고는 물었다. 모재 김안국이 들어오게 되어, 규암이 가서 뵈니 모재가, ‘이기는 실지로 학문을 알지 못하고 거칠고 험해서 만나봐서는 안 된다.’고 극언하였다. 기의 집은 관아에 나가는 길 옆에 있었으므로 규암이 전에는 늘 들렀는데, 이로부터 전혀 가지 않았다. 이기는 분해 하며 말하기를,
“송 아무가 김 아무의 말을 듣고 곧 나를 찾아보지 않는가?”
하고, 드디어 깊이 양심을 품었다 한다.
○ 윤원형(尹元衡)이 봉상시 정이 되자, 당시의 논의는 장차 이를 공박하려 하였다. 이 영상(李領相)이 이를 말리기를,
“대상의 형제도 오히려 연줄로 벼슬을 하는데 중전(中殿)의 형제간으로 이 직을 보전하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그가 당상관에 올라서 관압사(管押使)로 북경에 가게 되었는데, 죄를 입고 살아 돌아오지 못할까 염려하니, 참판 구수담(具壽聃)이 반드시 무사할 것이라고 보증하였다. 원형은 과연 무사히 갔다 와서 그를 매우 고맙게 여겼다. 을사사화가 일어나게 되어 이 정승은 중열(仲悅)의 작은 아버지 라하여 평안 감사로 밀려나고, 구공은 연좌되어 파직되었는데, 진복창(陳復昌)이, 선왕 때의 착한 사람은 어린 임금이 새로 들어서는 초기에 없어서는 안 된다는 소(疏)를 올려, 곧 다시 임용되었으니 모두 원형의 힘이었다.
○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사재 김정국은 황해 감사로 있으면서 남곤ㆍ심정의 간사하여 남을 모함한 죄상 및 정암(靜菴)과 제현들의 자신의 몸을 잊어버리고 나라에 목숨을 바친 충성을 힘껏 진술하여, 수천 마디 말의 상소문 하나를 지었는데 무려 10장이나 되었다. 마침 막료(幕僚)에 성이 남씨며 남곤의 일족인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헌납(獻納)에 발탁되어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다. 사재가 그 소를 주면서 말하기를,
“그대가 서울에 가거든 이 소를 꼭 올리게.”
하니, 남씨 또한 허락하면서 사양하지 않고 곧 소를 싸가지고 길에 올랐다. 공(사재를 지칭)의 어느 날 꿈에 신인(神人)이 공에게 일러 말하기를,
“그대가 만약 이 소를 올리게 되면 사림들은 모조리 결딴이 날 터이니, 지금 사람을 달려 보내면 도로 찾아올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공이 놀라 깨어 즉시 역졸(驛卒) 3명을 골라 헌납의 행차에 달려보내서 그 소를 도로 찾아오게 하였다. 헌납이 바야흐로 벽제관(碧蹄館)에 도착하였는데, 역졸이 뒤따르게 되어 남(南)은 곧 그 소를 돌려 주었다. 남곤이 남씨에게 소의 뜻을 묻자 남씨는 이런 일이 없었다 하고, 일체 남에게 말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를 매우 높이 여겼다. 나중에 남씨는 벼슬이 판서에까지 이르렀다. 요즘 죽산 현감(竹山縣監) 남대임(南大任)은 곧 그의 손자이다. 모재가 매양 사재에게 말하기를,
“이 소가 만약 올라가게 되었더라면 사람들은 어찌 내가 몰랐다고 말하겠는가? 우리 형제는 죽었을 것이다. 이 외에도 죽은 사람이 또한 얼마나 되었겠느냐?”
하였다. 그때 모재는 파직만 되었고, 사재는 삭직이 되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사재의 죄를 얻음이 모재보다 더 중한 것은 소가 비록 올라가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이 그가 소를 오리려 했던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남지정(南止亭)이 주청사로 갔다가 돌아올 적에 공이 황해 감사로서 황주(黃州)에 나가서 만나 보고는, 지정이 사림(士林)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나무라서 그 때문에 그의 노여움을 건드리게 되어 죄를 얻음이 더욱 무거웠다.”
고 하였다.
○ 소재가 말하기를,
“이중열(李仲悅)이 이조 좌랑으로서 윤춘년(尹春年)을 추천하지 않자, 춘년은 소를 올려 말하기를, ‘윤임(尹任)은 전하의 역적이요, 윤원로(尹元老)는 인묘(仁廟)의 역적이라’고 했다.”
고 하였다. 뒤에 와서 윤원형 형제가 비록 둘로 갈라졌으나 애당초는 한 마음이었다. 원로가 이미 인묘의 역적이 되었으면 원형은 홀로 인묘의 역적이 되지 않겠는가? 이것은 분명히 공초(供招)에 인정되어 결안(結案 형벌을 결정한 안문(案文))은 동일함이 있을 것이다.
○ 양재역 벽상서(壁上書)를 정언각(鄭彦慤)이 고변한 뒤에 당시 사류들의 죄가 결정되었다. 그때 진복창ㆍ윤춘년이 소재를 힘써 구해 주었으므로 사적(死籍)에서 벗어나고 다만 진도에 귀양가는 데에 그쳤다.
○ 소재는 이조 정랑으로 있을 적에 한때의 중망을 받았다. 마침 진복창과 함께 시원(試院)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시권(試券)을 고사(考査)할 적에 두 사람은 함께 과장을 좌우하였다. 과장이 파한 뒤에, 소재가 복창의 집에 한 번 찾아갔다가 그가 없어서 명함을 남겨두고 돌아왔다. 복창은 소재가 찾아온 것이 매우 고맙게 여겨 매양 그의 명함을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자랑삼아 내보이면서,
“과회(寡悔 노사신의 자)가 나를 찾아왔다가 내가 없어서 그냥 갔다. 이것이 그가 남겨둔 명함이다.”
라고 하였다고 한다. 정미년(1547, 명조 2)에 과회가 죄를 얻었을 적에 진복창이 힘써 구해줘서 그의 죄가 가벼워졌다는 것이다.
그는 진도에 귀양살이한 지 19년 만에 비로소 놓여 돌아오게 되었는데, 서열을 밟지 않고 뛰어올라 드디어 정승에까지 올랐다. 그 사이에 복창이 대사헌으로서 죄를 얻어 갑산(甲山)으로 멀리 귀양을 가게 되었다. 소재는 복창이 자기를 힘써 구해줘서 살아나게 되었으므로 복창의 아들을 자기집 식구처럼 돌보았다. 복창의 아들이 만일 소재의 집에 오게 되면 다정하기 자식과 같아 이름을 통하지 않고 바로 들어왔다고 한다.
○ 소재는 윤창주와는 진사의 동년(同年)이다. 늦게 귀양지에서 돌아와 부제학이 되었다. 내가 직제학이 되어 옥당에 있었다. 일찍이 한 차례 모임에서 내가 묻기를,
“창주는 일평생 음률을 안다고 자부하였는데, 과연 이런 일이 있습니까?”
하니, 소재는 대답하기를,
“이것은 헛말에 지나지 않는다.”
하였다. 대개 전혀 음률을 안다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 여성군(礪城君 송인(宋寅))은 즉 남지정의 외손자이다. 일찍이 말하기를,
“지정의 시는 용재를 아주 따르지 못하며, 용재의 문장은 지정에게 못지않다. 그런데 지정의〈백사정기(白沙亭記 《월정별집》에는 정(亭)이 정(汀)으로 되어 있음)〉만은 아마도 용재가 그만큼 짓지 못할 것이다.”
고 하였다. 용재는 시에만 이름이 났고 문장은 지정에게 어림도 없었는데, 여성군이 이렇게 말하니,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여성군이 지정의 문집을 인쇄하였으므로 판본이 그의 집에 간직되어 있는데, 그의 시는 인쇄하지 않았다. 정호음(鄭湖陰 정사룡(鄭士龍))은 일찍이 말하기를,
“지정의 시는 결코 대가(大家)인데, 어찌 후세에 전하지 않아서야 되겠느냐?”
하였다. 서진지(徐鎭之)는 우리 형제에게 일러 말하기를,
“지정의 홍경주(洪景舟)에게 한 제문에, ‘어두울 녘에 대궐문을 밀치고 곧장 바로 들어감은 우리 두 사람이 공동으로 하였다.’하였는데, 기묘사화 때 신무문(神武門) 고변한 사건을 가리킨 것이니, 웃음이 터져나올 만하다. 여성군이 이것을 빼버리어 판본 속에는 실리지 않았다.”
고 하였다.
○ 감서 허태휘(許太輝 엽(曄)의 자)는 언젠가 말하기를,
“진복창은 소인이기는 하지만 자못 재주가 있으니, 조정에서 만일 잘 다루어서 이용만 한다면 전혀 못쓸 사람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무강(李無疆)으로 말한다면 오직 권세 잡은 간신의 지시나 부추김을 받아 선량한 사람을 후려치는 것만 일삼을 뿐, 다른 재주라곤 없으니, 전혀 쓰지 못할 소인이다.”
라고 하였다.
○ 이무강은 이기(李芑)에게 붙어 아첨해서 바야흐로 양사(사헌부ㆍ 사간원)의 아장(亞長 사헌부 집의와 사간원 사간)이 되었으나 선비들의 평론을 이를 매우 더럽게 여겼다. 옥당에서 본관록(本館錄)에 권점을 찍는 날 관(館)의 전체 관원들이 모두 무강의 자를 부르며 말하기를,
“경휴(景休)가 이번 본관록에 틀림없이 피선될 거야.”
하였다. 그런데 권점이 끝나게 되어 무강의 이름 밑은 살펴보니 1권점도 없었다. 드디어 서로 놀라는 체하면서 말하기를,
“이 아무개가 어째서 오늘의 본관록에 참여되지 못하였을까?”
하였다. 한결같이 그 사람을 더럽게 여겨서 그의 이름 밑에 권점 찍기를 좋아하지 않은 것이 진정이었으면서도 겉으로는 거짓 놀랍다는 말을 하다니, 또한 우습다.
○ 진복창은 서화담(徐花潭 서경덕(徐敬德)의 호)에게 보낸 시에서,
봄철의 좋은 꽃은 피었다간 또 지고 / 春半好花開又落
비온 뒤의 못물은 흐렸다가 맑아진다 / 雨餘潭水濁還淸
푸른 솔 앙상한 바위 모양도 기이한데 / 蒼髥瘦骨多奇態
어찌하여 송암이라 이름하지 않는고? / 盍取松岩以記名
하였다. 진복창 그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감히 화담에게 호를 고치라고 권하였는가? 제 분수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겠다.
직장 이의중(李宜仲)은 영상 홍언필(洪彦弼)의 손서(孫婿)다. 그가 말하기를,
“젊을 적에 홍영상이 사궤장연(賜几杖宴)을 베풀었는데, 진복창은 대사간으로 와서 참석하였다. 잔치가 파하여 떠날 때 그는 발을 삐었다. 영상의 아들 지충추부사 섬(暹)이 다음날 복창의 집에 사람을 보내서 편지로 어제 발을 삐었는데 많이 다치지나 않았는지 위문하니, 복창은 화전지(花牋紙)에 답장을 쓰기를, ‘평소에 대감님의 가르침에 감격하고, 또 영감의 우정을 생각하여 마음 놓고 실컷 마시고 엎어지락 자빠지락 나오다가 발을 조금 삐긴 하였지만, 무어 다치기야 하였겠습니까? 지금은 벌써 회복되어 또 술자리에 나가고 있으니, 풍부(馮婦)의 범 잡음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하여, 지충추는 그의 편지 사연을 극히 칭찬하였었다.”
고 하였다. 내가 젊을 적에 한번은 임 판서(任判書)의 집에서 판서가 경상 감사로 부임할 적의 증별첩(贈別帖)을 보니, 그 속에 진복창의 별장(別章)이 있었다. 자체는 조송설(趙松雪 조맹부(趙孟頫)의 호)의 〈대우부(大雨賦)〉를 모방하였는데, 글씨가 아주 힘차고 아름다웠다.
○ 부정(副正) 신사헌(愼思獻)이 한번은 하는 말이,
“조인규(趙仁奎)가 내게 일러 말하기를, ‘우리집 어른께서 연산조에 장령이 되어 부임할 즈음에 새로 제주 목사로 임명된 사람이 있어 종루(鍾樓) 옆의 어느 집에 와 있으면서 만나기를 요구하였다. 장령께서 즉시 들러서 만나셨는데, 그 사람 하는 말이 「원래 질병이 있어 만약 바다 밖 제주의 땅으로 부임하게 된다면 장독(瘴毒)을 뒤집어쓰기 때문에 살아서 돌아오기 어렵소. 만일 나를 위해 적당하지 않다고 체직을 논해 준다면 매우 고맙겠소.」하였다. 말이 끝나자, 장령께서는 곧 작별하고 나오셔서 본부(本府)에 출근하지 않고 곧장 대궐로 나아가 피혐하시기를, 「오늘 아침 출근할 적에 제주 목사 아무가 길 옆에 와있다가 신을 보고 체직을 논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신이 원래부터 위풍이 없었기 때문에 감히 사적인 일을 가지고 서로 부탁한 것이오니 바라옵건대 신의 직을 갈아 주시옵소서.」하였다. 연산군은 즉시 그 사람을 잡아 국문하여 마침내 죽기에 이르렀으므로, 우리집 어른께서는 평생 동안 한스럽게 여기셨다.’하였다. 그가 아들을 두지 못하는 것도 또한 이러한 악을 쌓은 소치일 것이다.”
하였다.
○ 옥당에서 예전에 학 한 마리를 길렀었다. 당시에 이렇다 하는 학사(學士)들은 흔히 이 학을 두고 시를 지었는데, 모두 하늘 천(天) 자의 운을 달아 지었다. 그 가운데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ㆍ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작품이 특별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하서는 시의 학을 잃어버린 뒤에 지은 것이다. 임석천 시에,
두어 마디 맑은 소리 하늘 높이 울어대고 / 數聲嘹亮沈寥天
전나무 그늘, 대밭 가를 찾아 깃든다네 / 蒼檜陰中苦竹邊
연기 비는 삼도의 달을 가린 것이 그 얼마더뇨 / 煙雨幾䨪三島月
바람 서리는 오호 연꽃을 또 거꾸러뜨렸구나 / 風霜又倒五湖蓮
검은 먼지는 가린 것이 새로운 털을 물들였건만 / 緇塵已染新毛換
붉은 이마는 오히려 옛 모습 지녔도다 / 丹頂猶存舊骨仙
강해의 늙은이는 공연히 마주보고 섰으니 / 江海老人空對立
찬 이슬이 가을 자리에 젖어옴을 모르누나 / 不知涼露濕秋筵
하였다. 김하서의 시는 다음과 같다.
뛰어난 자태 하늘 멀리 보냄을 후회하노니 / 悔放殊姿送遠天
지금은 종적이 어느 물가에 붙여 있나 / 秪今蹤跡寄何邊
시 지어 천년 화표주(華表柱)를 조상하려 하노니 / 題詩肯弔千年柱
날개 쳐서 열 길 연꽃에 깃들 만하구나 / 刷羽堪依十丈蓮
맑게 부는 옥퉁소는 누대가에 비치고 / 淸轉玉簫臺畔影
아득한 적벽강은 꿈속의 신선이라 / 微茫赤壁夢中仙
산 높고 바다 넓어 소식조차 없으니 / 山高海濶無消息
그때의 대모연을 혹시나 기억하리 / 倘記當年玳瑁筵
하였다.
○ 김유신(金庾信)은 계유년 생원시에 장원하고 뒤에 대과에 올랐는데, 자문(咨文)을 보내서 말을 점검하러 곽산(郭山)에 이르렀다가 대낮에 도깨비에게 가위눌려서 까무러쳤다. 그것은 마치 거문고 줄과 같은 끈 하나로 급히 그의 배를 동여매는 것 같았다. 옆에 사람들이 칼로 그 실끈을 베어내면 끊어졌다가는 도로 이어져서 끝내 끊어내지 못하여 어찌할 도리가 없는데 홀연히 밖으로부터 삼베 직령(直領)을 입은 서생이 들어오자, 도깨비는 공중에서 여자의 소리를 내면서 말하기를,
“정 한림(鄭翰林)은 그대의 일에 무슨 관계가 있기에, 내가 누대의 원수를 갚으려 하는데, 그대가 무엇 때문에 장난질인가?”
하였다. 서생은 군수에게 청하기를,
“대나무통 하나와 주사(朱砂) 약간을 얻어서 사용해 보겠습니다.”
하기에, 군수는 즉시 대나무통과 주사를 주었다. 서생은 즉시 조그마한 종이 두 장을 잘라서 그 위에 부적을 그려, 하나는 대나무통 바닥에 깔고, 하나는 통 위에 얹어서 공중으로 날려 보내니 여자의 울부짖는 소리가 은은히 대나무통 속에서 나는데, 처음에는 가까이서 들리다가 차츰차츰 멀리 사라져 가고 유신은 즉시 깨나서 일어나 앉았다. 서생은 말하기를,
“지금은 비록 살아나게 되었지만 오던 길로 가서는 안 된다.”
하고 가짜 널[棺]을 만들어 ‘김유신의 널’이라 쓰게 하고, 한길을 따라서 돌아가게 하고, 또 유신은 변복을 시켜 수안(遂安) 산골짝 길을 경유하여 서울로 돌아오게 하였다. 이 뒤로 유신은 살긴 살았어도 마치 넋 잃은 사람과 같다가 3년 만에 결국 죽고 말았다. 이른바 서생은 행방을 알 수 없다. 사람들의 말에, 서생은 곧 정희량(鄭希良)이라고 하였다. 정희량이 죽지 않았음을 또한 여기서 징험할 만하다. 유신은 일찍이 정희량에게 수업을 하였으므로 옛날 정을 못 잊어 와서 구해준 것이라 한다.
○ 옛날 내가 직제학으로 옥당의 일회(一會 여럿이 한 번 모이는 일)에 참여하는데, 유미암(柳眉巖 유희춘(柳希春)의 호)은 그때 통정(通政)으로 부제학이 되어 진시황(秦始皇)의 일에 대해 이야기가 미쳤다. 나는 말하기를,
“일년 만에 아들 정(政)을 낳았으니, 한단(邯鄲)의 여자는 태자 궁중에 들어온 지 실지로 12개월이 지나서 아들을 낳은 것이며, 또 그보다 앞서 2~3개월을 지나서야 바야흐로 애기 밴 것을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15개월이 넘는다. 어째서 그대로 여불위(呂不韋)의 아들이라고 하겠는가? 이것은 반드시 후세 사람들이 진시황을 몹시 미워하여 이와 같이 사실이 아닌 말을 한 것이요, 실재로는 아마 장양왕(莊襄王)의 아들로 봐도 의심이 없을 것이다.”
하니 미암은 말하기를,
“옛날 사람은 애기를 배서 달을 넘어 낳는 약이 있었으니, 이것은 정말 불위의 자식인 것이다. 직제학도 불위의 속임수에 넘어감이 지나치구나.”
하였다. 이 설은 또한 꼭 그렇지는 않으나 주자(朱子)의 《강목(綱目)》에서도, 진시황과 진원제(晉元帝)는 모두 다른 성의 아들이라고 쓰지 않은 것은, 진실로 여씨가 진(秦)을, 우씨(牛氏)가 진(晋)을 이었다고 꼭 지적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 어떤 사람이 정승 임당(林塘)을 뵙고 말하기를,
“마침 옥당에 갔다가 당직 학사를 만났는데, 바야흐로 《호음고(湖陰稿)》를 열람하다가 자못 이를 업신여겨 좋지 않다고 하고, 간혹 그의 글귀를 지우기를 마치 글 등급을 매기듯 하더이다.”
하니, 임당은 그 말을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호음 아저씨께서 다른 일로 평론받는 것은 혹 모를 일이지만, 시에 가서야 지금 세상에 어찌 등급을 매길 사람이 있겠는가?”
하였다.
○ 정 문익공(鄭文翼公 정광필(鄭光弼)의 시호)은 김탁영(金濯纓)과 함께 양남(兩南 영남ㆍ호남) 어사의 명을 받아 같은 날 임금께 하직하고 용인현(龍仁縣)에 도착하였는데, 서로 사이가 좋아서 용인관(龍仁館)의 한 객실에서 같이 자게 되었다.
탁영이 강개하게 시사(時事)를 논하는데, 말씨가 지나침이 많았다. 문익공이 여러 차례 이것을 중지시키기를,
“말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하니, 탁영은 문득 분격해서 말하기를,
“사훈(士勛 정광필의 자)도 또한 이처럼 낮고 더러운 논을 하는가? 어찌 차마 기절 없는 썩어빠진 선비가 되는가?”
하여, 밤새도록 서로 뜻이 맞지 않았다 한다.
○ 여성위(礪城尉)는 말하기를,
“남지정(南止亭)이 과거에 올라서 방(榜) 부르는 날 새벽에 동년(同年)들과 광화문 밖으로 나아가는데, 홀연히 한 선생이 홍살[紅戟] 섬돌 앞에서 ‘남곤(南袞) 신래위(新來位)’라고 부르기에, 지정이 달려가니 그 선생은 지정에 말하기를, ‘네가 장원이 되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느냐? 중국에는 소동파(蘇東坡 소식(蘇軾)의 호)가 우리나라에는 내가 모두 제 2등으로 합격하였으니, 너도 이것으로 자신을 위로하고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말라.’한다. 지정이 마음속으로 누구인지 몰라, 자못 괴이쩍게 여겨 하인을 시켜 그 선생의 종에게 물어보았더니, 이는 김일손(金馹孫) 이었다.”
하였다. 대개 탁영은 평소에 장원이 되지 못한 것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는데, 마침 지정이 또 제2등이 되었으므로 이를 계기로 지정을 불러 이같이 말하여 그 평소의 불평스런 뜻을 터뜨린 것이라 한다.
○ 신평산 호(申平山濩)는 말하기를,
“용인에 사는 윤(尹) 아무는 탁영의 생질이다. 탁영과 지정이 서로 사이가 좋았으므로 서울 가게 되면 지정을 찾아가 뵈었다. 지정이 정승으로 있을 적에 윤 아무가 그를 찾아 뵈니, 지정은 한숨을 쉬며, ‘세상에 어찌 다시 탁영과 같은 분이 나오겠는가?’하니, 윤은, ‘대감의 문장으로도 곧 우리 외삼촌을 이처럼 칭찬하고 부러워합니까?’하니, 지정은, ‘너희들은 문장가의 수(數)를 바로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것이다. 물로 비유하면, 탁영의 문장은 곧 강물이요, 나의 문장은 도랑물이다. 어찌 서로 견줄 수 있겠는가?’하였으니, 그를 추중함이 이와 같았다.”
고 하였다.
○ 유촌(柳村 황여헌(黃汝獻))이 서당(書堂)에 있을 적에 시를 지었는데, 그 글제는 아마 ‘망월(望月)’등의 말인 듯하나 기억할 수 없다. 눌재(訥齋 박상(朴祥))는 이상(二上)으로 장원이 되고, 유촌은 삼중이었는데,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의 이름으로 또 한 수를 지어 삼하가 되었으며, 모재는 차상이었다. 유촌이 늘그막에 늘 말하기를,
“눌재의 이 시는 글자마다 출처가 있어 따라갈 수 없고, 모재는 원래 시에는 모자랐다.”
하였다 한다.
○ 송강(松岡) 조사수(趙士秀)는 대사성이 된 지 3년의 오랜 세월을 매양 신관(新館)에 출사하였으므로 다니는 길이 진복창(陳復昌)의 집을 지나가도 전혀 들러 찾아보지 않았다. 복창은 배리(陪吏 부하 아전)를 문 밖에 배치하고서 무릇 자기 집 앞을 지나면서 들리지 않는 자는 곧 알리게 하였다. 송강은 이 소문을 듣고 그 뒤부터는 이현로(梨峴路)로 다니지 않고 길을 고쳐 어의동(於義洞)으로 다녓다. 복창은 또 알고 어의동에 사람을 배치해 두고 탐지하게 하였으되, 송강은 끝내 한번도 찾아보지 않았다. 선배들은 명분과 절의를 가다듬어, 소인을 보기를 마치 더럽혀지는 것처럼 여겨 전혀 한번도 만나보지 않았으니, 공경할 만하다.
○ 명묘조(明廟朝)에 심충선(沈忠宣 신연원(沈連源)의 시호인 듯)은 수상으로 영경연(領經筵)을 겸하고, 조송강(趙松岡)은 지경연으로서 같이 입시하게 되었다. 대신들의 집이 정도에 지나침을 논하는데, 송강은 충선의 첩의 집 행랑채가 너무 크다고 바로 그 자리에서 논박하여, 충선은 몸둘 바를 몰라 등에 땀이 나서 옷이 흠뻑 젖었었다. 그 뒤로 충선은 첩의 집 행랑채를 깊이 잠그고서 손님을 대하지 못하게 하고 작은 사랑채에서만 손님을 맞았다. 그러나 송강을 이조 판서에 추천하여 낙점되게 하였다. 충선은 의리에 감복하고 송강은 곧음을 지켰으니, 모두 공경할 만하다.
○ 남명(南溟 조식(曺植)의 호) 조자건(曺子建)은 하종악(河宗岳)의 아내가 실행한 일을 가지고 귀암(龜岩 이정(李楨))과 논의가 달라서 절교하기에 이르렀다. 그때 소재(蘇齋)가 부친상을 당하여 상주(尙州)에서 수제(守制 상을 당하여 상의 예제를 지킴)하고 있었는데, 이 소문을 듣고 말하기를,
“남명은 평생 동안 관직을 사랑하지 않고 속세를 떠나 고고하게 지나더니, 한 부인의 실행에 대해 무슨 관계되는 것이 있기에 친구와 절교하는 것인지, 이는 이해할 수 없다.”
하였다. 남명의 문인 유종지(柳宗智)가 곧 소재의 한 말을 남명에게 고하니, 남명은,
“소재는 전해 들리는 말만 들었을 뿐, 나의 본정은 깊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 갑오년 겨울에 내가 주청사로 북경에 가는데, 부사 최입지(崔立之 입(岦)의 자)ㆍ 서장관 신경숙(申敬叔 흠(欽)의 자)과 함께 소주(蘇州)에 도착하였다. 이튿날 길을 떠나 길을 떠나 성중을 다 지나서 삼하(三河)로 향하려는 터였다. 서문 안에는 독락사(獨樂寺)란 절이 있고, 매우 높은 불상이 있었다. 최 부사와 신 서장관은 한번도 본 적이 없으므로 두 사람을 데리고 올라가서 구경하였다. 절의 동서편 행랑방엔 점쟁이 조소봉(趙小峯)이란 자가 와서 머물고 있었다. 우리 일행이 즉시 들러서 찾아보고 내력을 물어보았더니, 자기는 소흥부(紹興府) 사람이라 하고는, 이어서 그가 이른 아침에 점친 것을 내보여 주었다. 거기에,
“오늘 아침에 눈이 내림, 고려 재상이 찾아옴.”
이라고 적혀 있었다. 때마침 눈이 뿌렸고 우리 일행도 또한 도착하였으니, 그의 술법이 자못 신묘하다. 소봉은 나에게 혼자 고요한 방에 들어가서 묻고 싶은 일을 써서 조그마한 합(盒)에 집어 넣게 한다. 그래서 시키는 대로해 가지고 나와서 소봉에게 주었더니, 소봉은 향로에 불을 피워 부처 앞에 놓고 부처를 놓고 아주 공손하게 읍례를 드렸다. 이어서 그 합을 향로 위에 들고 쏘이고 또 그 합을 부처의 두 귀 둘레를 두어 바퀴 돌린 뒤에 상 위에 내려 놓았다. 그런데 물음을 쓴 말이 한 자도 틀림이 없었다. 그리고 최 부사와 신 서장관 두 사람의 물음은 글자 수가 더욱 많았는데도 틀리지 않고 신기하게 맞혔다. 만약 사복(射覆)놀이를 한다면, 그의 말은 열어 보지 않고도 반드시 맞히리라고 자신하였다. 이어서 나의 여행에 대해 점쳐 보았더니, 즉시 쓰기를,
“명년 정월에 말해서 떨어질 환이 있을 것이니, 부디 조심하라.”
고 하였다. 그 길로 북경에 갔다가 정월 21일에 하직하고 이튿날 통주(通州)로 돌아왔고, 통주에서 25일에 소주(蘇州)를 거쳐 옥전(玉田)으로 향하는데, 도중에서 타고 있던 말이 낙타를 보고 놀라 뛰는 바람에 그만 땅바닥에 떨어졌다. 어리둥절하여 소봉의 말을 미처 기억하지 못하였는데, 최입지가 곧 말을 해주어 비로소 그의 말이 들어맞았음을 깨달았다. 또한 기이한 일이다.
○ 임진왜란 때 난여(鑾輿 임금이 타는 수레)가 난리를 피하여 서쪽으로 옮겨 평양에 머물고 있었다. 하루는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공이, 부원수 신각(申恪)이 그의 진을 마음대로 떠나서 검찰사(檢察使) 정승(政丞) 이양원(李陽元)을 따라간 것이 글렀다고 하여, 장계를 올려 그에게 죄주기를 청하였다. 그런데 비변사에서는 그가 머물고 있는 곳에서 죽이기를 청하였다. 이튿날 신각에게서 비보가 들어왔는데, 베어낸 적의 귀가 40여 급(級)이라 하였다. 비변사의 제공들은 그의 공이 죄를 덮을 만하다 하여 용서하고 죽이지 않기를 청하고 또 선전관에게 빨리 뒤쫓아가서 그가 죽기 전에 도착하도록 부탁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떠난 선전관이 빨리 가지 못하였으므로 거기에 도착하니, 신 부원수는 벌써 죽었던 것이다. 그래서 비변사의 제공들은, 모두 죽지 않아도 되는데 끝내 죽음을 면하지 못하였다고 그를 아프게 여겼다.
이어서 홍무(洪武 명 태조(明太祖)의 연호) 연간의 일이 기억난다. 고황제(高皇帝)가, 학사(學士) 송염(宋濂)은 집에 있으면서 성탄절(聖誕節 천자의 생일)에 서울에 오지 않았다 하여 역말을 보내서 그를 목 베게 하였다. 이미 며칠이 지나서 효자황후(孝慈皇后)의 간함으로 인하여 다시 중지할 것을 명하였는데, 그때는 사람이 빨리 달려가서 처형하기 전에 그를 구해 주었으니, 그 행과 불행이 바로 이렇다. 신 부원수는 무관의 직에 있으면서 자못 직무의 봉사에 충실하였다. 일찍이 연안 부사(延安府使)로 있을 적에 성첩(城堞)을 수리하느라 우물이 마르게 되자, 도랑을 파서 성의 북쪽 비봉산(飛鳳山) 냇물을 끌어와서 성안으로 대었으므로, 드디어 물이 마르는 걱정이 없어졌다. 이정암(李廷馣)이 포위당하였을 적에 자못 그의 힘을 입어서 성이 함락되지 않았다 한다.
○ 임금호(林錦湖)는 을사 권간의 비위를 거슬려 제주 목사에서 파직되어 나주의 본가로 돌아왔는데 부모가 모두 살아 있었다. 그런데 홀연히 후명(後命 유배한 죄인에게 사약을 내려 죽임)이 있어 마침내 죽음을 면치 못하였다. 죽을 무렵에 정신이 어지럽지 않고 마치 조용히 죽음에 나아가는 사람처럼 하였으니, 비록 학문의 힘은 없을지라도 또한 타고난 천품은 원래 높았던 것이다.
○ 영천(靈川) 신잠(申潛)은 참판 종호(從濩)의 둘째 아들이다. 시에 능하고 묵죽(墨竹)을 잘 치고 초서를 잘 썼다. 정덕(正德) 계유년 진사시에 장원으로 뽑히고 또 기묘년 현량과에 합격하였다. 나중에 대과(大科)는 삭제되고 진사과의 백패(白牌) 또한 잃어버렸다. 별장(別莊)이 아차산(峩嵯山) 밑에 있었는데, 그는 시를 짓기를,
홍지는 회수되고 백패는 잃어버렸으니 / 紅紙已收白牌失
진사시의 장원한 것도 헛이름일세 / 壯元進士摠虛名
돌아와 아차산 밑에 사니 / 歸去峩嵯山下住
산인이란 두 글자야 어느 누가 다투리 / 山人二字孰能爭
하였다. 간성 군수(杆城郡守)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서, 당상에 오르고 상주 목사로 영전하였는데, 열심히 공직에 봉사하였으므로 백성들이 부모처럼 사랑하였다. 공은 마침내 상주에서 죽었는데, 주민들이 공을 추모하여 덕정비(德政碑)를 세웠다.
○ 내가 젊을 적에 황화지(黃華紙)로 책자를 만들어 퇴계 선생(退溪先生)에게 법서(法書)를 청했더니, 선생께서 소 강절(邵康節 소응(邵雍)의 시호)의 시만 써 주었다. 그 중의 한 율시에,
부름에 자주 사양해도 버리지 아니함은 / 相招多謝不相遺
가슴에 품은 경륜 씀직해서 그렇지만 / 將謂胸中有所施
나아간들 어찌 금리의 임무 감당하리 / 若進豈能禁吏責
한가로운 바에야 명예 다시 무엇하리 / 旣閑安用更名爲
다행히 요순 같은 착한 임금 만났으니 / 幸逢堯舜升平日
당우의 태평성대에 달갑게 늙으려네 / 甘老唐虞比屋時
청렴하고 어진 이 조정에 가득한데 / 滿眼淸賢在朝列
나라일에 늙은이야 무슨 소용 있으리 / 老夫無以繫安危
하였다. 그의 시는 부정공(富鄭公)에게 화답한 것이 많았는데, 부공이 강절에게 벼슬하기를 권하자, 강절은 벼슬을 원하지 않는다는 작품인 것이다. 다른 시도 거의 모두가 이런 내용이어서, 온 책이 모두 한가로움을 사랑하고 명리(名利)에 나아가지 않는 내용의 말이었다. 내가 관직을 사랑하여 물러나기를 좋아하지 않을 것을 퇴계께서 미리 아시고 주신 정문일침일 줄이야 어찌 알겠는가?
또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호)를 뵐 적마다 선생은 나에게 관직을 그만두고 시골에 가서 살라고 권하였다. 나는 돌아가서 살 만한 전지가 없다고 대답하였더니, 우계는 말하기를,
“비록 돌아갈 만한 곳이 없을지라도 만일 용단을 내서 돌아가면 가난하게 살 수는 있네. 속담에, ‘산 사람의 입에 거미줄 칠 리 없다’하였으니, 참으로 격언일세.”
하므로, 나는 부끄러워서 사과할 뿐이었다. 그런데, 내 나이 60이 넘도록 아직까지 관직에 미련을 두고 물러나려 하지 않을 줄이야 어찌 생각하였겠나? 퇴계와 우계는 모두 선견(先見)이 있어서 그렇게 하였던 것이다. 이 일을 한 번씩 생각할 적마다 얼굴이 붉어진다.
○ 최치원(崔致遠)의 〈쌍계사비(雙溪寺碑)〉 및 《해동명적(海東名迹)》의 〈추풍유고음(秋風唯高吟)〉의 자체는 가로 긋고 세로 내리 긋는 획이 가늘고도 힘차기 마치 산가지와 비슷하여 곧기만 하고 모양이 적었으며, 성석린(成石璘)의 〈연복사비(演福寺碑)〉 및 〈도평의사사청기(都評議使司廳記)〉의 자체는 성(成) 자 등의 과(戈) 획과 중(中) 자 등의 바로 내리 긋는 획이 매우 길어서, 다른 사람의 글자 모양과는 아주 비슷하지도 않으므로 늘 속에 괴이쩍게 여겼었다.
그런데, 임진왜란 후 갑오년에 북경에 가서 모든 명가들의 법첩을 사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구양순(歐陽詢)이 쓴 〈예천관명(醴泉觀銘)〉과 〈황보부군비(皇甫府君碑)〉는 자획이 가늘고도 힘차기 마치 산가지와 같고, 저수량(褚遂良)의 〈성교서(聖敎序)〉는 과(戈) 획과 중(中) 자 등의 획이 매우 길었다. 그래서 최치원(崔致遠)은 구양순의 체를 배우고, 성석린은 저수량의 체를 모방하였음을 비로소 알았다. 비록 우리 동방에 있을지라도 명필에 이르러서는 감히 스스로 자체(字體)를 만들지 못하고 옛날 사람의 체를 모방하였음을 여기서 또한 짐작할 수 있다. 본조에 들어와서는 조송설(趙松雪 조맹부(趙孟頫)의 호)의 체를 모방한 사람은 매우 많으나, 왕희지(王羲之)ㆍ왕헌지(王獻之)의 체를 배운 사람은 혹간 있으며, 우영흥(虞永興)ㆍ저수량ㆍ안진경(顔眞卿)ㆍ유공권(柳公權)ㆍ소식(蘇軾)ㆍ황정견(黃庭堅)의 체는 다시 전하는 자가 없어져서, 한결같이 붓 나가는 대로 휘갈려 써서 옛날 범을 다시 찾아볼 수 없으니, 개탄해 할 따름이다.
중국 조정의 정덕(正德) 연간에 오인(吳人) 축윤명(祝允明)은 명필의 이름을 독차지하여 명 나라 법서의 제일로 추존되었다. 〈국조명신법첩(國朝名臣法帖)〉가운데 축윤명의 글씨 한 권이 있었는데, 우리나라의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의 자체는 축 윤명이 쓴 〈사수시(四愁詩)〉와 아주 똑같았다. 정호음이 일찍이 축윤명의 체를 보고서 이것을 본받은 것이지, 아니면 우현히 합치된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 지난 갑오년에 북경에 가서 옥하관(玉河館)에 머물고 있을 적에 〈순화법첩(淳化法帖)〉을 며칠 동안 모방하여 연습하였다. 부사 최입지ㆍ서장관 신경숙은 이 소문을 듣고 말하기를,
“나이 60에 비로소 법서를 모사하여 장차 얼마나 성취되겠는가? 왜 이처럼 스스로 고생하고 있소.”
하기에, 나는 웃고 말았다. 그 뒤 임진왜란 때 죽국의 대병(大兵)이 와서 구해 주고 철수해 돌아갈 적에 유격(游擊) 왕입주(王立周)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소주 사람이었다. 내가 그를 찾아가 보고, 이어서 글씨 한 폭을 써서 그와 같은 고향인 왕감주(王弇州 왕세정(王世貞)의 호)의 아들 주사(主事) 왕사기(王士騏)에게 부쳤는데, 유격은 내 글씨를 보고 말하기를,
“이 글씨의 자획은 우영흥의 글씨를 모방한 것이다.”
하였다. 나의 글씨가 어찌 만분의 일이라도 우영흥의 필법을 얻었겠는가?
○ 찬성 허자(許磁)와 좌윤 이찬(李澯)은 대과에 오르기 전에 성균관에 같이 거하였다. 허찬성은 이 좌윤보다 두 살 위로 허 찬성은 병진생, 이 좌윤은 무오생이었는데, 매양 이 좌윤의 윗자리에 앉았었다. 어느 날 허 찬성은 꿈을 꾸고는 이로부터 매양 이 좌윤에게 윗자리를 사양하고 자기는 아랫자리에 앉았다. 계미년(1523, 중종 18)에 같이 과거에 올랐는데, 이 좌윤은 2등, 허 찬성은 3등이 되었다. 허 찬성은 그제서야 그때의 꿈 얘기를 하되, ‘자기와 이 좌윤이 동방 급제를 하였는데, 자기 이름이 바로 이 좌윤의 이름 아래에 있었다. 그 뒤부터 매양 이 좌윤의 아랫자리에 앉은 것은 그 꿈이 실현되기를 바란 것이요, 이것을 숨기고 미리 말하지 않은 것은 행여 하늘의 기밀을 누설시킬까 염려해서였다.’고 하였다.
○ 이조 판서 조사수(趙士秀)가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적에, 병조 판서 이준민(李俊民)은 상주 교수(尙州敎授)로 가도사(假都事)가 되었다. 관찰사의 순행(巡行)이 경주에 도착하니, 좌윤 이찬(李澯)공은 가도사에게 아주 공경히 대하고, 부의 아랫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은 재상이 될 인물이니, 진짜 도사로 대우해야 된다.”
하니, 관찰사는 듣고 빙긋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가도사는 어떠한 재상이기에 주인 영공(令公)이 이처럼 극히 우대하시오?”
하였다. 매우 경멸한 탓으로 그의 말씨가 이와 같았던 것이다. 그 뒤 이 좌윤은 체직되어 와서 경연청에 나가고, 이 판서도 이미 한림이 되어 같이 참석하였다. 그러나 이 좌윤은 이미 늙고 병들어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한림이 앞에 가서 스스로 얘기하니, 그제서야 알아보았다. 이 판서는 뒤에 병조 판서가 되어 공명이 조 판서와 거의 비슷하였으니, 이 좌윤은 안식(眼識)이 있다고 할 만하며, 조 판서의 사람을 잃음은 실로 그를 업신여긴 데에 있었던 것이다.
○ 첨지(僉知) 이공좌(李公佐)는 가정 계미(1523, 명종 18) 8월 20일 해시(亥時)에 태어났는데 영상 박순(朴淳)과는 오주(五柱)가 모두 같았다. 둘 다 계축년(1553, 명종 8) 정시(庭試)에 급제하였는데, 박 영상은 문과 장원이 되고, 이 첨지는 무과 장원이 되었다. 박순은 벼슬이 영사에 이르러 사퇴하고 영평(永平)으로 내려간 지 3년 만에 죽으니, 수는 겨우 67세이다. 적실에는 딸 하나만 있고 아들은 없으며, 측실에 아들이 있긴 하나 나이 어려서 성취시키지 못하였다. 이 첨지는 적실에 아들 넷, 딸 하나를 두고, 측실에는 1남 1녀를 두었는데, 적자ㆍ서자 5형제가 모두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 첨지 자신도 일찍이 3품의 부사(府使)를 역임하였고, 다섯 아들이 과거에 올랐다 하여 직급이 더해져 당상에 올랐으며, 올해 나이 81세인데도 건강하다. 맏아들 응해(應獬)는 현임 가선(嘉善)인 수사(水使)이며, 그 밑에 네 아들도 모두 6품 이상이다. 벼슬 지위로 말하면, 이 첨지가 박 영상에게 어림도 없지만, 오래 살고 자식 많으며 목전의 영화로 말하면, 이 첨지만이 누린 것이요, 박 영상이 도리어 모자란다. 오주가 같은데도 성쇠의 이치는 그 사이에 다름이 있으니, 이해하지 못할 일이다. 운명을 말하는 자가 거기에 대한 해설을 구해 보나 알아내지 못하여 말하기를,
“이 첨지는 해시 초에 나고, 박 영상은 해시 말에 나서 팔자가 같지 않은 까닭이다.”
라고 하니, 이는 더욱 괴이하다.
○ 나는 소재(蘇齋)와 함께 옥당에 있었다. 소재가 얘기하던 끝에 말하기를,
“《대학(大學)》의 ‘격물치지’와 ‘성의정심’은 본디 차례와 등급이 있는 것이지만, 그 외의 《논어(論語)》와 《맹자(孟子)》에 산발적으로 나오는 것은 주자(朱子)의 말대로 차례와 등급이 꼭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후대의 학자들은 선유(先儒)의 말이라 하여 감히 다른 의견을 가지지 못하나 실제로는 꼭 그렇지가 못하다.”
하였다. 이는 곧 주자의 말이라 하여 다 따를 수 없다는 뜻이다.
○ 소재는 또 말하기를,
“고봉(高峯)이 칠언율시를 지었으므로 나는 거기에 차운(次韻)을 붙였다. 고봉의 차운은 20여 수나 되었지만, 다는 다섯 수만 차운하고 말았다.”
한다. 그의 뜻을 한 운으로 많이 짓는 것을 능사로 삼지 않았기 때문이다.
○ 대제학 유회부(柳晦夫 근(根)의 자)는 말하기를,
“지금 본 서당(書堂)에서 조(祖)ㆍ 자(子)ㆍ 손(孫) 3대가 뽑힌 자는 무릇 세 집이다. 홍 감사(洪監司)의 집은 감사 홍춘경(洪春卿), 그의 아들 도승지 천민(天民)ㆍ찬성 성민(聖民) 형제와 승지의 아들 서봉(瑞鳳)이, 정 정승의 집은 우상 정유길(鄭惟吉), 그의 아들 현임 이조 판서 창연(昌衍), 이조 판서의 아들 지평(持平) 광성(廣成)이, 이 영상의 집은 전 영상 이산해(李山海) 공, 그의 아들 현임 이조 참의 경전(慶全), 이조 참의의 아들 전 정언(正言) 후(厚)ㆍ한림 구(久)의 형제가 모두 뽑히었다.”
하였다.
○ 안자유 계홍(安自裕季弘 계홍은 자) 어른은 김홍도(金弘度)의 당에 연좌되어 파직당하였다가 몇 해 지나서야 다시 임용되었다. 그러므로 내가 먼저 이조에 들어가고 공이 잇달아 들어와서 같이 좌랑이 되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곽부(郭赴) 공은 언관을 감당할 만한 분이라고 말하자, 공은 말하기를,
“곽부는 본디 착한 분이지만 그가 언관이 되는 데 있어서는 될 수도 안 될 수도 있는 그저 그런 자격이다. 그렇지만 그의 형 월(越)은 진실로 기이한 재주를 가진 선비이고 사람이 알지 못하는 명장의 재주를 가졌다. 만일 병사(兵使)에 임용되면 반드시 훌륭한 업적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월(越)은 매양 외직에만 임용되었고, 혹 풍헌관(風憲官 풍기를 취체하는 관리)이 되어서도 돌아다니기만 하였을 뿐, 남보다 훌륭함이 있음을 보지 못하였다. 그래서 나는 항상 안장(安丈)의 말이 실정보다 지나치다고 여겼다. 월은 나중에 의주 목사만 되었을 뿐, 병사는 되지 못하였으므로 그의 장수 재질이 과연 어떠한지 알 수 없거니와, 설사 한 방면의 장수가 되었다하더라도 평화로운 시대에는 진실로 실력을 드러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아들 재우(再祐)는 임진왜란을 당하여 포의(布衣)로 병대를 끌고 정진(鼎津)을 지켜 적이 감히 건너오지 못하였다. 그 뒤 적병을 여러 번 쳐부수었고, 또한 어루만져 통솔을 잘하였으므로 군사들이 모두 임용되기를 즐겨하였다. 설사 지금 병사나 수사가 된다 하여도 그의 재주를 충분히 펴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말하기를,
“척이 만일 다시 나오면 곽재우가 반드시 대장이 될 것이고, 삼군은 바야흐로 두려움이 없이 완전히 승리하고 깨끗이 소탕하는 공을 거둘 수 있다.”
하였으니, 지금의 명장은 한 사람뿐이다. 그러나 그의 장수 재질은 진실로 내림이 있었던 것이니, 단 샘물[醴泉]은 근원이 없는 것이라고 우겨서는 안 된다. 안 노인(安老人)의 안식에 매양 감복한다.
○ 신기재(申企齋)는 말하기를,
“한지원(韓智源)의 〈제갈채(諸葛菜)〉절구는 지금의 두시(杜詩)라.”
하였다. 시는 이러하다.
팥배나무엔 이미 소공의 덕화 없어졌는데 / 甘棠已無召公化
작은 나물엔 오히려 제갈 이름 전해 오네 / 小菜猶傳諸葛名
당시에 큰 별이 떨어지지 않았던들 / 不有當年大星落
위의 동산 오의 채마밭에는 나물만이 자랐으리 / 魏園吳圃菜渾生
○ 옛날에 내가 경차관(敬差官)으로 영남(嶺南)에 내려갔을 때다. 중에게 준 시축에,
고향생각 아득해 흰구름 바라보니 / 鄕心迢遞白雲端
남국의 가을 바람 나그네길 어렵구나 / 南國秋風道路難
말 위에서 중 만나 도리어 한 번 웃으니 / 馬上逢僧還一笑
산에 가득한 푸른 숲은 날 좀 보소 하는구나 / 滿山蒼翠要人看
하였더니, 남명(南溟)은 이를 매우 칭찬하였다 한다,
○ 융경 2년 무진 (1568, 선조 1)에 중국 조정은 한림원 검토 성헌(成憲)ㆍ병과급사중 왕새(王璽)를 보내어 황태자를 세운 조서를 반포하였는데, 무릇 조사를 접대하는 책임은 도승지에게 있었다. 성공(成公)의 뺨에 꽤 큰 혹이 있었는데, 우리 나라 의원에게 치료를 받으려고 하였다. 이후백(李後白) 공이 그때 도승지였는데, 아뢰기를,
“만약 우리나라 의원이 치료하다가 낫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상사(上使)에게 말하되, ‘외국엔 좋은 의원이 없다. 만약에 혹은 제거되지 않고 부스럼만 생긴다면 어찌하겠는가? 손을 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사정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상은 그 말이 그렇겠다 여기고 상자에게 청하니, 상사도 과연 그렇겠다고 하였다. 당시의 재신들은 모두 이공을 일러서 변통수에 능하다고 하였다. 성공은 기해생이니, 계주위(薊州衛) 사람이며, 을축년에 과거하였다. 그 뒤 기축년에 내가 북경에 갔더니, 성공은 국자감 좨주로 집에 돌아와서 병을 치료하여 뺨에 있던 혹이 말끔히 치료되어 있었다.
○ 모재(慕齋)는 조정에서 돌아온 뒤 오랫동안 예조 판서로 대제학을 겸하였다. 뒤에 병조 판서로서 찬성에 올랐고 이조 판서는 되지 못하였으니, 곧 양연(梁淵)의 방해로 인하여 그렇게 된 것인데, 정승의 자리가 비어 있었는데도 또한 복상(卜相)에 참여되지 못하였다 한다.
○ 퇴계는 벼슬하기 전에 서울을 오가는 길에 여강(驪江)의 범사정(泛槎亭)에 들러서 모재를 뵌 일이 있었다. 《퇴계집》 속에,
“모재를 뵈온 뒤부터 비로소 정인 군자(正人君子)의 도를 알았다.”
는 말이 있다. 여주의 산승(山僧)이 시축을 가지고 영남으로 퇴계를 찾아가 뵈었는데, 시축 속에 모재ㆍ기재(企齋) 두 노선생(老先生)의 절구가 있었다. 퇴계는 그 절구에 다음과 같이 차운하였다.
두 노인 서거한 지 몇 해나 지났던고 / 二老仙遊知幾年
매화 피는 섣달에 중이 와서 나를 찾네 / 僧來見我臘梅天
예전에 찾아갔던 이 사람은 / 自嗟疇昔登門客
남긴 시에 눈물 뿌리며 백발을 슬퍼한다오 / 淚洒遺篇雪滿顚
유이현(柳而見 유성룡(柳成龍)의 자)이 응교로 있을 적에 판서 이윤경(李潤慶)의 시호를 의논하기 위하여 가는 길에 좌의정 소재(蘇齋)에게 들러 뵈었다. 소재는 유이현에게 이르기를,
“판서는 유명한 재상이며, 또 남정(南征) 때 공로가 있었고, 또 청덕(淸德)이 많으니, 모름지기 좋은 시호로 정해야 할 것이다.”
라고 하니, 유이현은,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곧 의숙(懿肅)ㆍ익장(翼莊)ㆍ의도(懿度)로 망단(望單)을 갖추어 의정부에 보고하였다. 그 때 박사암(朴思菴 박순의 호)은 수상이었는데, 합석하여 계(啓)를 감정(勘定)할 때 시호가 그의 실정을 다 그려내지 못하였다 하여 고치라고 도로 내려 보냈다. 소 정승은 말하기를,
“이 논이 극히 합당하다.”
하고, 우상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의 호)과 함께 같은 말로 고하였다 한다.
○ 감주(弇州 명(明) 나라 왕 세정(王世貞)의 호)의 〈왕소군도(王昭君圖)〉의 발문에,
“개보(介甫 왕안석(王安石)의 자)만이 그의 정과 일을 얻어서 말하기를,
한의 은혜 얕아지고 호의 은혜 깊어지니 / 漢恩自淺胡自深
인생의 즐거움은 마음 서로 앎에 있도다 / 人生樂在相知心
하였는데, 비록 이 두 마디 말이 죄가 되기는 하였으나, 사람으로 하여금 그 속마음을 알게 하여 풍영왕(馮瀛王)을 허여함을 기다리지 않고도 그가 순수하지 못함을 미워하였으니, 가소로울 뿐이다.”
하였다. 나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그의 소군을 두고 읊은 글은 새로운 뜻을 지어내어 앞사람을 앞서려고 힘썼으므로, 묘사의 기교를 주로 삼다보면 그 사람의 본마음과 사정을 잘못 끄집어낼 수 있는 것이지만, 풍영왕에 이르러서는 자신이 오계(五季)를 섬겨 명분과 절의는 쓸어낸 듯하였으므로, 후세의 죄줌이 의당 돌아갈 데가 있어 결코 용서할 도리가 없는데, 개보는 곧 말하기를, “몸을 굽혀 세상을 구해서 모든 보살의 덕행이 있다.”하고, 심지어는 다섯 번 걸(桀)에게 나아가고, 다섯 번 탕(湯)에게 나아갔다는 고사를 비유까지 하였으니, 그의 본마음이 참으로 풍영왕을 그르게 여기지 않은 것이다. 뒤에 와서 치우친 소견을 고집하여 여러 사람의 논의를 배척하고 신법(新法)을 힘써 주장하고, 흉사(凶邪)한 자를 인용하여 천하를 어지럽힌 것은 실로 여기서 조짐이 시작된 것이다. 이벽 계장(李璧季章 계장은 자)은 도(燾)의 아들로 일찍이 주부자(朱夫子)에게 인정을 받은 자다. 처음에는 실로 조행을 잃지 않고 사류(士流)가 되었으나, 그가 형공(荊公)의 시를 주(註)낼 적에 그의 인생의 즐거움은 마음 서로 알아줌에 있도다[人生樂在相知心]라는 말을 혼자서 용서해 말하기를, “다른 사람이 이런 글귀를 지었더라면 사람들이 반드시 그르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하였으니, 그가 형공을 두둔하고 애석히 여긴 것은 곧 그의 본심이다. 주장하는 의논이 이와 같았다.
○ 내가 기축년(1589)에 북경으로 조회하러 갔을 적에 화숙양(華叔陽)은 제독주사(提督主事)로 우리들의 단속을 매우 까다롭게 하여 관부(館夫)들이 모두 원망하였다. 공은 시독학사(侍讀學士) 찰(察)의 아들이요, 왕봉주(王鳳洲 왕세정(王世貞)의 호)의 맏사위이다. 그때 들으니, 같은 고을에 사는 중서사인(中書舍人) 진씨(秦氏) 성을 가진 자가 충고하여 풍간하기를,
“그대의 춘부장 학사공(學士公)은 일찍이 조선에 사신을 갔다 와서 입에서 그칠 줄 모르게 조선을 칭찬하였는데, 그대가 어찌 사신을 이처럼 까다롭게 단속하오?”
하니, 공은 대답하기를,
“조선이 예의 바른 나라라고 집 어른께서 늘 칭찬하였음을 진실로 알지만, 직책이 제독에 있으니, 특별히 후하게 할 수 있소?”
라고 하였다 한다. 하루는 어떤 일을 가지고 글을 바치니, 공은 글자 네댓 자를 답으로 써서 던져 내렸다. 역관 홍순언(洪純彦)이 받아서 나에게 보이는데, 글씨가 훌륭하여 진(晉) 나라 필법이었다. 또 아주 호부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여, 여름철에는 아침마다 객관에 도착하였는데, 언제나 초록 문사단령(紋紗團領)을 입었으며, 날마다 갈아 입었다. 《이력편람(履歷便覽)》을 상고해 보니, 을해년에 죽었다 한다. 들으니, 화학사(華學士)의 병이 위독하자, 공은 자기 다리를 베어 약에 썼는데, 그로 인하여 부스럼을 앓다가 죽었다고 한다.
○ 내가 종계주청사(宗系奏請使)로 기축년(1589, 선조 22)에 북경을 갔을 적에 수상 신시행(申時行)ㆍ부수상 허국(許國)ㆍ왕석작(王錫爵)ㆍ왕가병(王嘉屛)이 각중(閣中)에서 일시에 함께 나왔다. 서공은 큰 키에 머리털이 희끗희끗하고, 허공은 작달만한 키에 수염이 듬성듬성 나고 매양 천청단령(天靑團領)을 입었으며, 왕공 석장은 머리가 새까맣고, 왕공 가병은 수염이 듬성듬성 나고 신체는 건장하기 무인(武人)과 같았는데, 우리나라의 지사(知事) 곽흘(郭屹)과 아주 비슷하였다.
신공은 임술년 과거에 장원하였는데, 을미생이며, 오현(吳縣) 사람이다. 허공은 을축년에 과거하고, 정해생이며 흡현(歙縣) 사람이다. 일찍이 검토(檢討)로써 급사중 위시량(魏時亮)과 함께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나와 등극조서를 반포한 적이 있는데, 그의 깨끗한 절조, 깊은 아량을 우리나라 사람은 마치 하늘의 신선처럼 우러러 보았었다. 왕공 석작은 임술년 회시에 제2등으로 합격하였고, 태창주(太倉州) 사람이며 갑오생이다. 또 왕공 가병은 북산음(北山陰) 사람이며, 병신생이다. 우리가 조정에 돌아올 칙서를 받을 때에 시강 육가교(陸可敎)가 칙서를 받들고 문화전문(文華殿門)에서 나에게 주었다. 육공은 작달만한 키에 수염이 적으며, 정축년에 과거하였고, 정미생이며, 난계(蘭溪) 사람인데, 호는 규일(葵日)이다.
부사 도(屠) 아무를 인하여 〈조천록서(朝天錄序)〉를 받았는데, 그의 문장이 매우 훌륭하였다. 《이력편람》을 상고해 보니, 갑오년에 남예부시랑(南禮部侍郞)에 올랐고, 무술년에 죽었다고 한다.
○ 온순(溫純)은 내가 기축년에 천자께 조회하러 갔을 때 창장호서(倉場戶書)로서 흰옷 차림에 보자기도 없이 예를 드리고 조정을 하직하였다. 관부(館夫)는 그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 분은 곧 분상(奔喪 타향에서 어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는 것)하는 창량호서(倉粮戶書)입니다.”
하기에, 그를 자세히 살펴보니, 상복 위에 흑단령(黑團領)을 입었는데, 상복은 흑단령보다 조금 더 길었으며, 발에는 황색 신을 신고 있었다. 관부는 이르되,
“대궐문을 나가면 즉시 단령은 벗어버리고 상복으로 길에 오르고, 전송하는 자가 있으면 전송을 받고 떠난다.”
하였다. 《이력편람》을 상고해 보니, 공은 기해생이고, 삼원현(三原縣) 사람이며, 을축년에 과거하였다.
○ 내가 갑오년에 북경에 사신으로 갔을 때, 유원진(劉元震)은 예부 우시랑으로 시독학사(侍讀學士)를 겸하고 있었다. 하루는 비가 오는데 종이 삿갓만 쓰고 우의는 입지 않았으며, 몸에는 푸른 비단 적삼만 입고 대궐을 나아갔다. 위대한 장부였다. 《이력편람》을 상고해 보았더니, 공은 임구(任邱) 사람으로 계묘생이며, 신미년에 방(榜)이 바뀌어지고, 이부 좌시랑으로 첨사를 맡고 있으며, 현재 각로(閣老)의 물망에 오르고 있다고 한다.
손계고(孫繼皐)는 예부 우시랑의 자리에 있으면서 나의 인사를 받았다. 그는 얼굴이 그림처럼 훤하고 몸집은 매우 뚱뚱하였다. 《이력편람》을 상고해 보았더니, 공은 갑술년 과거에 장원하였고, 경술생이며, 이부 우시랑에 추천되었다가 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계유에 북경에 갔다. 조회가 파하여 대궐문을 나올 적에 이부 상서 양박(楊博)ㆍ좌도어사(左都御史) 갈수례(葛守禮)가 나란히 나왔다. 단문(端門 정전(正殿) 앞에 있는 문)을 나서기 전에 관부(館夫)가 내게 가리켜 보이며 말하기를,
“이 분들은 이부 상서 양공ㆍ좌도어사 갈공입니다.”
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그들은 당시의 명신(名臣)입니다.”
하였다. 양공은 머리가 검고 번지르르하여 아직 늙지는 않았고, 그의 모양은 우리나라의 죽은 군수 심의검(沈義儉)과 거의 비슷하였다. 갈공은 양공에 비해 몸집은 조금 더 컸으나, 머리는 하얗게 세었다. 두 분은 가정 기축년 동년 출신이다. 또 기억나기로는, 그 걸음에 있기 전후에 공부 상서 뇌예지(雷禮之)를 만났는데, 단문을 나와서 막 동장안문(東長安門)으로 향하는 길에서 관부는 또한 가리켜 보이면서 그의 관직과 성명을 말해 주었다. 지금 《가정문견기(嘉靖聞見紀)》를 상고해 보니, 세 분은 모두 융경 임신년(1572, 선조 5)에 이 관직에 있었다. 이듬해인 계유년에도 아마 전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던 모양으로, 내가 바라보았던 사람이 틀리지 않을 것이다. 양공은 원래 이부(吏部)였는데, 전직 이서(吏書)로 기용되어 병부 일을 맡아보았다. 양공ㆍ 갈공은 모두 깨끗한 절조와 무거운 신망으로 당시의 명신이었고, 뇌공은 가정 임진년(1532, 중종 27)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공이 쓴 정 단간(鄭端簡 단간은 효(曉)의 시호)의 《오학편(吾學編)》서문을 보았더니, 그 ‘박학한 학문은 천하를 감복시키고, 덕스러운 몸과 깨끗한 행실이 이미 썩지 않는 서림(書林)에 벌여 있다.’는 것을 가지고 일컬어 문체를 세웠으니, 그 문장이 매우 아름다웠다. 역시 문장에 능한 명재상이었던 모양이다. 양공은 산서 포주(蒲州) 사람이고, 갈공은 산동 덕평(德平) 사람이며, 뇌공은 강서 풍성(豐城) 사람이다.
○ 계유년에 나는 종계주청사로 상사 판서 이후백(李後白)ㆍ서장관 칠원군(漆原君) 윤탁연(尹卓然)과 같이 북경을 가게 되었다. 우리 일행이 요양에 도착하여 군사 조련을 만났는데, 병부 시랑의 순시가 요성(遼城)에 온다 하여 성안의 대소 관원들은 다 하루 이틀 길 밖으로 마중을 나갔다. 며칠 뒤에야 시랑의 행차가 요성에 도착하였다는 것과 성안의 대소 관원들이 모시고 왔다는 것을 들었다. 이 뒤에 비로소 도사(都司)에서 관리를 만나보게 되어, 조련에 나갔던 사람은 곧 좌시랑 왕도곤(汪道昆)이었다는 것을 들었다.
그 뒤 시랑 왕남명(汪湳明)이 지은 《부묵(副墨)》 및 《황명십팔가(皇明十八家)》를 모니, 왕남명의 문장이 들어 있고, 감주(弇州)의 《사부고(四部稿)》에 왕백옥(汪佰玉 왕도곤(汪道昆)의 자)을 성대히 칭찬하였으므로, 왕 시랑은 곧 근세 문장의 대가임을 비로소 알았다. 다행히 한 시대에 같이 태어나고, 마침 북경으로 가는 길에 시랑의 요성 순시를 만났다. 당시에 만일 그가 천하의 훌륭한 문장사임을 알았더라면, 곧 길가에 나가서 얼굴을 쳐다보았을 터인데 미처 몰랐던 것이니, 지금까지 늘 한이 된다.
또 후일 시랑은 조련을 마친 뒤에 매일 한 말의 금을 소비하였다는 참소를 당한 후에 다시 기용되지 못하고 일생을 미쳤다고 한다. 봉주(鳳洲)의 편지첩에 공에게 보낸 편지를 보니 이르기를,
“일찍이 하인을 보내서 안부를 여쭈려 하였으나, 이때는 절월(節鉞 사신을 말함)이 현도(玄菟) 패수(浿水)가에 계셨습니다. 이 때문에 훌륭한 가르침을 받들지 못하여 한으로 여깁니다.”
하였으니, 그 당시 왕공이 요성으로 순시 나갔을 때였다.
○ 일찍이 《작애집(灼艾集)》을 보았더니, 한 가지 논의가 있는데, ‘풍도(馮道)는 정도로 벼슬하였고, 아첨하여 따른 적이 없었다.’고 성대히 칭찬하였다. 시세종(柴世宗)이 장차 유숭(劉崇)을 친히 막으려 하매, 풍도는 힘써 간하니, 세종이 말하기를,
“나의 많은 군대로써 유숭을 친히 정벌하는 것은 마치 산이 달걀을 누르는 것과 같다.”
하매, 풍도는 말하기를,
“폐하께서 산이 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이러한 말들은 다 직절(直截)한 것이요, 임금의 의견에 아첨하여 따른 적이 없었다고 하였으니, 풍도를 일러서 훌륭하다 할 수 있겠는가? 괴짜라고 말할 만하다.
어떤 중국 사람이 말하기를,
“거래(崌崍) 장가윤(張佳胤)이 《이창명집(李滄溟集)》의 서문을 지었는데, 왕봉주(王鳳洲)에게 또 서문을 청하자, 봉주는 핑계를 대고 짓지 않았다. 이것은 아마도 만일 자기가 서문을 짓게 되면 반드시 장거래(張崌崍)의 글보다 훌륭할 것이므로, 남이 지은 글을 덮어버리고 자기의 재주를 자랑하게 될까 염려한 것이다. 그가 짓지 않은 것은 실로 봉주다운 겸허한 덕행인 것이다.”
하였다.
○ 이시애(李施愛)는 반란을 일으켜 성언(聲言)하기를,
“신숙주(申叔舟)ㆍ 한명회(韓命澮)가 권력을 남용하고 있으므로 임금 곁에 있는 이 악당을 제거하련다.”
하자, 광묘(光廟 세조의 묘호)는 신숙주와 한명회를 금부(禁府)에 하옥시키고 내시에게 부정을 살피도록 하였는데, 내시가 말하기를,
“두 사람 다 칼을 쓰기는 하였으나, 칼이 가볍고 도한 목이 닿는 끝에는 구멍이 매우 넓습니다.”
하니, 즉시 금부당상을 추국하고 의금부 도사는 저자에서 찢어 죽이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옥을 내원(內苑)으로 옮겨서 승지가 순찰하고 금군이 수직하게 하였다. 10일이 지난 뒤에 특별히 두 사람을 불러 접견하는데, 맨발로 대전을 내려가서 여덟 가지 사항을 들어 자신을 책망한 뒤에 손을 잡고 대전(大殿)으로 오르고 관직은 옛날 그대로 두었다 한다.
○ 김모재(金慕齋)는 늘 어의동에 사는 문관(文官) 정씨(鄭氏)가 지은 규원시(閨怨詩)를 말하였다. 시는 다음과 같다.
홍루의 조용한 낮 베개마저 허전한데 / 紅樓晝寂寢屏空
한 움큼 매화 향기 숫제 옥다발일세 / 一掬寒香玉砌叢
눈물로 지워진 거북 무늬 변방은 멀고 / 泣罷龜紋沙塞遠
발에 가린 성긴 버들엔 또 갈바람일세 / 隔簾疏柳又西風
○ 중국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천하의 이름난 지역은 소주ㆍ항주의 두 부(府)다. 속담에,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당에는 소주ㆍ항주가 있다.’고 하여, 누구나 이 말은 한다.”
고 하였으니, 항주는 즉 남송(南宋)이 수도를 세운 임안부(臨安府)이고, 소주는 즉 송(宋)의 평강부(平江府)다.
○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은 일찍이 말하기를,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지은 시는 격이 매우 높아 그의 시재(詩才)는 비록 열 사람이 뜯어 갈라도 한 부분은 남을 것이며, 대제학도 넉넉히 해낼 수 있다.”
라고 하였으니, 심복(心腹)된 것이다.
○ 혜장왕(惠莊王 세조) 대엔 당시 신료들치고 누구나 노산군(魯山君 단종)의 일을 애석히 여기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가 성묘조(成廟朝)의 성명(聖明)한 때에 이르러서야 잊어버리게 되었다 한다.
○ 지난 기축년(1589)에 북경에 가서 옥하관(玉河館)에 머물 적이다. 어느 집에서 기르는 앵무새를 빌려다 보았더니, 크기는 까치에 비해서 조금 더 컸으며, 짙은 녹색에다 입부리와 엄지 발톱은 모두 검었다. 긴 말은 못하고 다만, ‘손님이 온다, 찻상 보라’, ‘고양이 온다.’라는 말을 할 따름이었다. 전해 오는 말에는, 앵무새가 본산지에서 중국으로 온 지 여러 해가 되면 입부리와 엄지발톱이 붉어지고, 그래야만 긴 말을 해낸다는 것이다. 옥하관에서 나들이할 적에 길가의 어느 집 누대 벽을 바라보니, 못질한 쇠횃대에 여러 쌍의 앵무새가 앉아 있는데, 입부리와 엄지발톱이 모두 붉었다. 그러나 빌려다 뵈는 못하였다. 틀림없이 긴 말을 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앵무새가 입을 벌려 말할 적에 보니, 혀가 비록 작긴 하였으나, 혀가 뾰족한 여느 새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고, 그 혓바닥이 둥그스름하기는 사람의 혀와 똑같았다. 이것이 사람처럼 총명하고 말을 해내는 까닭일 것이니, 물(物)에 부여한 이치 또한 묘하도다.


[주D-001]진(秦) 나라 때 …… 되었다. : 진시황(秦始皇)이 6국을 통일한 뒤에 이사(李斯)의 주의(奏議)에 따라 주(周) 나라 때부터 내려오던 봉건제도를 폐지하고 영토를 36군(郡)으로 나누었다. 이것이 곧 군현정치(郡縣政治)의 시초다.
[주D-002]고려 숭의전(崇義殿) : 이조(李朝)에서 고려 태조와 7왕 즉 혜종ㆍ정종ㆍ광종ㆍ경종ㆍ성종ㆍ목종ㆍ 헌종을 제사지내는 한편, 그곳을 숭의전이라 이름 짓고, 고려 왕족의 후손으로 하여금 관리케 했다. 초기에는 종6품에 해당하는 사(使), 종4품에 해당하는 수(守), 종6품에 해당하는 감(監), 종9품에 해당하는 여릉 참봉(麗陵參奉) 등의 관리를 두었다.
[주D-003]이를 말함이다 : 《월정별집(月汀別集)》권4에 수록된 만록(漫錄)에는 이 문장 끝에 ‘下缺’이라고 하여 생략을 표시하였다.
[주D-004]야율초재(耶律楚材) : 원(元) 나라 초기 사람. 천문ㆍ지리ㆍ노장ㆍ술수 등에 두루 능하고 태조의 신임을 받아 국정을 도맡아 했다. 시호는 문정공(文正公).
[주D-005]얼마 전 …… 《당서연의(唐書衍義)》를 보니 : 이 대문은 “頃見唐書衍義……”라고 되어 있는데, 문의가 분명치 않으므로 《월정별집(月汀別集)》 만록(漫錄)에 소재되어 있는 “頃見李監司時發言會見唐書衍義……”대로 번역하였음.
[주D-006]권반(權攀)의 전례 : 권반은 세조 5년(1459) 식년문과에서 세조의 허락으로 당상관으로서 응시하여 병과로 급제하였다.
[주D-007]변씨의 옥이 월형(刖刑) 부름 : 주(周) 나라 때 초인(楚人) 변화(卞和)가 초산(楚山)에서 박옥(璞玉)을 얻어 여왕(厲王)에게 바쳤더니, 거짓이라 하고 그의 왼발을 베었다. 그 후 무왕(武王)에게 다시 바쳤으나 역시 거짓이라고 그의 오른발을 베었다. 뒤에 문왕(文王)에게 바쳐서 옥인(玉人)이 쪼았더니 과연 보옥(寶玉)이 들어 있었다는 고사. 《韓非子》
[주D-008]양장 : 중국 산서성(山西省) 교성현(交城縣) 동남에 있는 경사진 비탈 이름. 전국 시대 조(趙) 나라의 요새지며, 마치 양 창자처럼 구불구불하다고 한다.
[주D-009]산사서 돌아갈 계획 : 은둔할 계획을 뜻함. 《세설신어(世說新語)》에 지도림(支道林)이 심공(深公)에게 산을 사자고 하였더니 심공이, “소유(巢由)가 산을 사 놓고 은둔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주D-010]반우(返虞) : 장사를 치르고 신주를 모시고 돌아오는 일. 반혼(返魂).
[주D-011]진우량(陳友諒)의 …… 사로잡혔다 : 진우량은 원 순제(元順帝) 때 서수휘(徐壽輝)의 난에 예문준(倪文俊)의 휘하로서 틈을 보아 문준과 수희를 죽이고 황제에 올라 국호를 한(漢)으로, 연호를 대의(大義)로 하다가, 4년 후에 명(明)의 태조에게 패하였다.
[주D-012]성조(成祖) : 명(明)의 3대 황제(1403~1424), 연호는 영락(永樂).
[주D-013]주 나라 일곱 살 애기 : 후주(後周)의 공제(恭帝). 7세에 제위에 올라 여덟 달 만에 송 태조(宋太祖)에게 양위당함.
[주D-014]사학(四學) : 태종 11년에 선비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세워진 서울의 중학(中學)ㆍ동학(東學)ㆍ서학(西學)ㆍ남학(南學).
[주D-015]학이 되어 화표주(華表柱)에 날아와서 울었다 : 《수신후기(搜神後記)》에, “정영위(丁令威)는 죽은 뒤 천 년 만에 학이 되어 고향에 돌아와 성문(城門) 화표주(華表柱)에 앉았다.” 하였다.
[주D-016]말머리를 …… 일이다 : 《장자》 추수편에 보인다.
[주D-017]그런데 …… 죽였는데도 : 성제는 위(魏)의 태자사인(太子舍人)으로서 사마소에게 붙어 아부하여 사마소를 치는 위주(魏主) 모(髦)를 찔러죽였다.
[주D-018]세초연(洗草宴) : 세초는 초고를 물에 씻어 버리는 것. 국사의 찬수(撰修)를 마치고 원고를 정리할 때에 베푸는 잔치.
[주D-019]세간의 남긴 자취 용이 오르는 것 같다 : 진(晉) 나라 왕희지(王羲之)는 누에고치처럼 윤택한 잠견지(蠶繭紙)에 서수필(鼠鬚筆)을 사용하여 〈난정서(蘭亭序)〉를 썼는데 매우 신기하였다. 그 후 당 태종은 그의 7세손 지영(智永)으로부터 난정서의 진적을 얻어 매우 사랑하던 끝에 이를 모각(摹刻)하여 황자(皇子)ㆍ근신(近臣)들에게 주고 진본은 자기 무덤에 순장케 하였다. 소동파는 그 모각본에 대하여 〈손신로구묵묘정시(孫莘老求墨妙亭詩)〉에서, “난정견지는 소릉에 들고, 세간에 남긴 자취 오히려 용이 오르는 듯하도다[蘭亭繭紙人昭陵 世間遺跡猶龍騰]”라고 읊었다.
[주D-020]사궤장연(賜几杖宴) : 궁중 의식의 하나. 70세 이상의 대신들에게 왕이 궤장(지팡이)를 하사하고, 동시에 베풀던 연회.
[주D-021]풍부(馮婦)의 범 잡음 : 풍부는 춘추 때 진(晉) 의 역사(力士). 군중들의 범을 쫓다가 범이 산모퉁이를 등지고 앉으니 아무도 감히 잡으려 들지 못했다. 때마침 풍부가 이를 보고 팔을 걷으면서 수레에서 내렸다. 이때 군중들은 모두 환호성을 질렀으나 뜻있는 선비들은 그 만용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주D-022]날개 쳐서 열 길 연꽃에 깃들 만하구나 : 〈윤희내전(尹喜內傳)〉에서 나온 이야기다. 진인(眞人)들이 놀 때엔 모두 연꽃 위에 앉는데 그 연꽃의 크기가 지름이 열 발이나 된다 한다.
[주D-023]한단(邯鄲)의 여자 : 진 태자(秦太子)의 아들 이인(異人)이 조(趙) 나라에 볼모잡혀 있을 때에 양적(陽翟)의 큰 장사치 여불위(呂不韋)가 동거하다가 이인에게 바쳐서 진시황을 낳게 했다는 여자.
[주D-024]부정공(富鄭公) : 성은 부(富), 이름은 필(弼), 자는 언국(彦國). 송(宋)의 명상(名相)으로서 영종(英宗) 때 정국공(鄭國公)에 봉해짐.
[주D-025]저수량(褚遂良) : 당(唐)의 명필. 해서와 예서에 특출하였고, 문사(文史)에도 두루 밝았다. 당시의 명필이었던 우세남(虞世南)이 죽자 태종은 함께 글씨를 이야기할 자가 없어 탄식하였는데, 마침 위징(魏徵)의 천거로 저수량을 얻었다.
[주D-026]오주(五柱) : 연(年)ㆍ월(月)ㆍ일(日)ㆍ시(時)의 사주(四柱)에 태월(胎月)을 더하여 오주(五柱)라 한다.
[주D-027]팥배나무엔 이미 소공의 덕화 없어졌는데 : 무왕(武王)의 동생인 석(奭). 희석이 감당(甘棠) 아래에 거주하며 남국(南國)에 교화를 밝혔다 한다. “우거진 감당을 꺾지 말고 베지 말라. 소백의 거처하던 곳이다[蔽芾甘棠 勿剪勿伐 召伯所茇]”는 등 시가(詩歌) 3장(章)이 전한다. 《詩經 召南》
[주D-028]당시에 큰 별이 떨어지지 않았던들 : 제갈량(諸葛亮)의 죽음을 비유한 것.
[주D-029]칭찬하였다 한다 : 《월정별집》 만록(漫錄)에는 다음 내용이 첨가되어 있다. 또 다음과 같은 산인에게 준 절구 한 수가 있다.
[주D-030]다섯 번 탕(湯)에게 나아갔다는 고사 : 은(殷) 나라 때 이윤(伊尹)은 다섯 번 탕왕(湯王)에게 나아가서 섬기고 다섯 번 걸왕(桀王)에게 나아가서 섬겼다 한다. 《孟子 告子》
[주D-031]이와 같았다 : 《월정별집》 만록에는 내용이 더 기록되어 있는데, 이해를 돕기 위해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악을 미워하는 마음이 부족함을 알 수 있다. 뒤에 한평원(韓平原)에게 아첨해 붙어서 좋은 벼슬자리를 엽취(獵取)하였다가, 한평원이 죽음을 당하자, 이벽은 그의 당으로 몰려 좌를 얻었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주D-032]《이력편람(履歷便覽)》 : 《월정별집》만록에는 《무진이력편람(戊辰履歷便覽)》으로 되어 있음.
[주D-033]손계고(孫繼皐)는 : 《월정별집》 만록에는 ‘내가 갑오년에 북경에 사신으로 갔을 적에[於余甲午祖京時]’라는 문구가 더 들어 있음.
[주D-034]계유 : 《월정별집》 만록에는, ‘만력 원년(萬曆元年)’이 ‘계유’ 앞에 첨가되어 있음. 만력 원년은 1573년임. ‘계유’ 뒤에는, ‘주청부사로 상사 청련 이후백과 함께[以奏請副使與上使李靑蓮後白]’라는 문구가 첨가되어 있음.
[주D-035]비슷하였다 : 《월정별집》 만록에는 소자(小字)로 다음과 같은 설명이 기록되어 있다. “의검은 곧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신광한(申光漢)의 사위이며, 심암(沈嵒)ㆍ심대(沈岱)의 아버지다.”
[주D-036]유숭(劉崇) : 북한(北漢)의 태조(太祖). 뒤에 이름을 민(旻)으로 고쳤다. 지원(知遠)과 동모제(同母弟). 젊어서 무뢰하여 자자형(刺字刑)을 받고 군졸이 되었다. 지원이 진(晉)에 벼슬하여, 숭을 도지휘사로 삼음. 은제(隱帝)가 시해되자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곽위(郭威)가 숭의 아들 빈(贇)을 세워 왕을 삼았다가 곧 죽였다. 숭은 드디어 태수(太守)에서 제위에 오르고 국호를 북한이라 하였으며, 이름을 민(旻)으로 고쳤다. 주(周)를 치다가 여러 번 패하였고, 주의 세종(世宗)이 즉위하자 고평(高平)에서 대패하고 분이 나서 죽었다. 재위 4년, 연호는 건우(乾祐)였다.
[주D-037]홍루 : 기생들이 노는 누각(樓閣)

잠곡유고 제9권
 서(序)
구루정기(傴僂亭記)


누대(樓臺)와 정사(亭榭)를 짓는 사람들은 모두가 적막한 것을 싫어하고 번잡한 것을 좋아하며, 기둥을 높게 세우고 보기에 화려하게 하여, 멀리는 강호(江湖)의 나루터 가에 세우고, 밖으로는 교외의 논밭 사이에 세운다. 그러나 묘시(卯時)에서 유시(酉時)까지 관아에서 일을 보느라 한번 올라가 볼 겨를이 없어서 도리어 인근 사람이나 지나가는 객이 그 위에 올라가서 한가롭게 소요하는 것만도 못하니, 실로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세운 것이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다. 혹은 대문을 걸어잠가 다른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사람도 있으니, 어찌 크게 우스운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우거하고 있는 집의 뒤편에 세 칸짜리 집을 세울 만한 작은 언덕이 있었다. 이에 드디어 띠풀을 엮어서 초가집을 세우고는, 안쪽에 있는 당(堂)을 공극당(拱極堂)이라 이름하고 그 바깥쪽에 있는 정자를 구루정(傴僂亭)이라고 이름하였는데, 이는 지붕이 낮아서 머리가 부딪히므로 반드시 허리를 구부린 다음에야 움직일 수가 있으므로 그렇게 이름지었다.
그 정자의 크기는 비록 작지만, 위치해 있는 곳은 높고도 기이하며, 바라다 보이는 곳은 넓고도 멀다. 바위는 우뚝하고 소나무는 푸르러서 마치 조각한 것 같기도 하고 꽂아 놓은 것도 같아 창 밖에 우뚝하니 서 있는 것은 목멱산(木覓山)의 잠두봉(蠶頭峯)이고, 용처럼 꿈틀대고 호랑이처럼 쭈그리고 있어서 달려가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여 서로 마주 대하여 돌아보고 있는 것은 백악산(白岳山)과 낙산(駱山)이다. 난새가 멈춘 듯 아름답고 고니가 서 있는 듯 우뚝하여 마치 날아가려다가 날아오르지 않은 듯한 것은 필운산(弼雲山)이고, 붓을 꽂은 듯 뾰족하고 홀을 세운 듯 우뚝하여 나아가려고 하다가 서 있는 듯한 것은 도봉산(道峯山)이다.
수락산(水落山)은 노원(蘆原)의 뒤편에서 마치 불곡산(佛谷山)을 전송하는 것 같고, 무악산(毋岳山)은 안현(鞍峴)의 위에 있으면서 마치 부아봉(負兒峯)을 좇는 듯하여, 기괴한 형상과 이상한 모양새가 여기저기 겹쳐서 나타난다. 그리고 백운봉(白雲峯)과 인수봉(仁壽峯) 등 여러 봉우리가 저 멀리 구름 하늘 밖 아득한 곳에 삐쭉하니 솟아 있는 모습이 더더욱 경외스럽고 사랑스러우니, 아침이면 아침대로 저녁이면 저녁대로 안개와 구름이 변화함에 따라 혹 숨기도 하고 드러내기도 하며, 혹 합해지기도 하고 혹 떨어지기도 한다. 그 누가 성시(城市) 안에 이처럼 신선의 경치가 있는 줄을 알겠는가.
저 강호의 경치와 교외의 흥취가 즐겁기는 하지만 항상 거기에 머물러서 살 수는 없으니, 한번 가고 두 번가는 사이에 해가 이미 짧다. 그러니 어찌 이곳에서 잠자고 거처하며 이곳에서 먹고 숨쉬면서 천변만화를 보며 마음과 눈을 즐겁게 하고 사시 팔절(四時八節)에 항상 창가에서 마주 대하는 것만 같겠는가.
나는 팔도(八道)를 두루 유람하였지만 경치를 감상할 마음이 일어나는 곳은 보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70여 년이 지난 뒤에 비로소 명승지를 얻어서 정자를 지었으니, 돌 틈 사이의 물은 갓끈을 빨 만하고 바위 사이의 물은 양치질을 할 만하며, 대나무를 쪼개 만든 수로(水路)로 물을 대어 연못에는 연꽃을 심을 수가 있고, 고기를 기르고 학을 기르며 만물을 친구로 삼을 수가 있다. 종일토록 적료하여 시장통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 오지 않으니, 이는 참으로 평소 꿈속에서도 생각지 못하던 곳이다.
비록 그러하나 큰길을 한번 바라다보면 여염집들은 땅에 나지막하게 있고, 두 대궐 쪽을 바라다보면 대궐 용마루가 하늘에 접해 있다. 이에 도성 사람들이 구름과 같이 오가며 보는 자가 많으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떨려서 높게 짓는 것이 혐의스럽다. 이 때문에 처마와 서까래를 낮게 하고 담장을 낮게 한 다음 소나무와 대나무로 뒤편에 울타리를 쳐서 검소함을 밝게 드러내 보였다.
높은 데 있으면서는 위태로움을 생각지 않아서는 안 되고, 방에 들어와서는 내려다보는 것을 생각지 않아서는 안 된다. 그러니 어찌 감히 마음이 상쾌해지는 것만 좋아하여 처사(處士)처럼 창가에 기대어 공상 속에 잠겨서야 되겠는가. 옛 솥의 명(銘)에 이르기를, “일명(一命)의 관원은 허리를 낮게 굽히고, 재명(再命)의 관원은 허리를 굽히고, 삼명(三命)의 관원은 머리를 수그린다.” 하였다. 나는 이 말에 깊이 느껴지는 바가 있어 머리를 수그리고서 나의 정자 이름을 지었다.


[주D-001]묘시(卯時)에서 유시(酉時)까지 : 옛날에 관원들이 묘시에 출사하여 유시에 퇴근하였다.

추강집 제7권
 잡저(雜著)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〇 김굉필(金宏弼)은 자가 대유(大猷)이다.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에게 수업하였고, 경자년(1480, 성종11)에 생원시(生員試)에 입격하였다. 나와 나이가 같으나 생일이 나보다 늦다. 현풍(玄風)에 살았다. 고상한 행실은 비할 데가 없어 평상시에도 반드시 의관을 갖추었고, 본부인 외에는 일찍이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손에서 《소학》을 놓지 않았으며, 인정(人定)이 된 뒤라야 잠자리에 들고 닭이 울면 일어났다. 사람들이 국가의 일을 물으면, 반드시 말하기를 “《소학》을 읽는 아이가 어찌 큰 의리를 알겠는가.” 하였다. 일찍이 시를 짓기를,
학문에 종사해도 천기를 알지 못했지만 / 業文猶未識天機
《소학》의 글 속에서 어제의 잘못을 깨닫노라 / 小學書中悟昨非
하였다. 점필재 선생이 평하기를 “이것은 곧 성인이 되는 근본 터전이니, 노재(魯齋) 이후에 어찌 그러한 사람이 없다고 하겠는가.” 하였으니, 그를 추중함이 이와 같았다.
나이 30이 된 뒤에 비로소 다른 책을 읽었고, 후진을 가르치는 데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현손(李賢孫), 이장길(李長吉), 이적(李勣), 최충성(崔忠成), 박한공(朴漢恭), 윤신(尹信)과 같은 사람이 모두 그의 문하에서 나왔으니, 그 무성한 재질과 독실한 행실이 그 스승과 같았다.
나이가 들수록 도가 더욱 높아졌기에 세상이 만회될 수 없고 도가 행해질 수 없음을 익히 알아 빛을 감추고 자취를 숨겼다. 그러나 사람들이 또한 이러한 것을 알아주었다.
점필재 선생이 이조 참판이 되었으나 또한 국사를 건의하는 일이 없자, 대유가 시를 지어 올리기를,
도란 겨울에 갖옷 입고 여름에 얼음 마심에 있거늘 / 道在冬裘夏飮氷
비 개면 가고 비 오면 멈춤이 어찌 전능한 일일까 / 霽行潦止豈全能
난초도 만약 세속을 따른다면 마침내 변할 것이니 / 蘭如從俗終當變
소는 밭 갈고 말은 탄다는 이치를 누가 믿으리까 / 誰信牛耕馬可乘
하였다. 선생이 화답하기를,
분에 넘치게 관직이 경대부에 이르렀으나 / 分外官聯到伐氷
임금 바로잡고 세속 구제함을 내 어찌 능히 하랴 / 匡君救俗我何能
이로써 후배로 하여금 오졸함을 비웃게 했으니 / 從敎後輩嘲迂拙
구구한 권세의 벼슬길에는 나설 것이 못 되누나 / 勢利區區不足乘
하였으니, 대개 이를 싫어한 것이다. 이로부터 점필재와 사이가 나빠졌다.
정미년(1487, 성종18)에 부친상을 당해서는 죽만 마시고 슬피 곡읍하여 혼절했다가 다시 소생하였다.
〇 안우(安遇)는 자가 시숙(時叔)이다. 효행이 고을에 으뜸이었다. 아버지 상을 치르면서 한결같이 《가례(家禮)》를 따랐다. 점필재를 따라 수업했으나 얼마 뒤에 벼슬할 마음이 없어져서 비로소 점필재와 사이가 나빠졌다. 일찍이 향시(鄕試)에 뽑혀 서울로 가서 회시(會試)의 시장(試場)에 들어가려 하였다. 사관(四館)의 연소한 자들이 나이 든 지방 유생에게 교만하게 대하며 그들을 때리려 하거늘, 시숙이 말하기를 “어찌 부모께서 물려준 몸을 죄 없이 스스로 손상시켜서 명리를 구한단 말인가.” 하고는 들어가지 않고 떠나갔으니, 그 절조는 동한(東漢)의 선비에 견줄 만하다.
〇 권안(權晏)은 본관이 안동(安東)이고, 자가 화청(和淸)이다. 나이가 나보다 20여 세 위이다.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다행히 죽지 않아 죽음이 가까운 나이에 세 명의 벗을 얻었다.” 했으니, 나와 정중(正中)극창(克昌)을 이른 것이다. 젊었을 때에 무재(武才)가 있어 별시위(別侍衛)에 소속되었다. 사람됨이 오릉(於陵) 중자(仲子)처럼 청렴하며, 산수를 좋아하고 도(道)와 진리를 즐거워하였으며, 효제충신(孝悌忠信)에 있어 그보다 나을 사람이 없었다. 집이 허물어져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거나 혹 양식이 떨어져도 그 즐거움은 여전하였고, 짧은 베옷을 입고서 쓸쓸히 지냈다. 말년에 불교를 좋아하였다.
〇 정여창(鄭汝昌)은 자가 자욱(自勖)이다. 지리산에 들어가서 3년 동안 나오지 않고 오경(五經)을 공부하여 그 깊은 뜻을 궁구하여 체(體)와 용(用)은 근원은 같으나 나뉨이 다름을 알았고, 선과 악은 성(性)은 같으나 기(氣)가 다름을 알았고, 유(儒)와 불(佛)은 도(道)는 같으나 행적이 다름을 알았다. 그의 성리학을 성광(醒狂)이 존경하였다.
경자년(1480, 성종11)에 주상이 성균관에 하교하여 경전에 밝고 행실이 닦여진 유생을 찾도록 하니, 성균관에서 자욱을 천거하여 첫 번째로 두었다.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서거정(徐居正)이 장차 자욱을 내보내어 경전을 강론하게 하려 했으나 자욱이 스스로 물러났다.
계묘년(1483)에 진사시(進士試)에 입격하였다. 그의 아버지 육을(六乙)이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나라를 위하여 죽었다. 이때 자욱은 나이가 어렸으나 상을 치르는 데에 빠뜨림이 없었고, 모친상을 치를 때에도 전례(典禮)의 도수(度數)와 죽을 먹는 일을 한결같이 《가례》를 따랐다.
경술년(1490)에 참의(參議) 윤긍(尹兢)이 그의 효행과 학문이 사림 중에 비할 자가 없다고 천거하니, 특별히 불러 소격서 참봉(昭格署參奉)으로 삼았다. 자욱이 글을 올려 면직을 청하자, 주상이 하교하여 그를 포상하니 명성이 더욱 높아졌다.
자욱의 사람됨은 성품이 단아하고 중후하였다. 술을 마시지 않았고, 냄새나는 채소를 먹지 않았고, 쇠고기와 말고기를 먹지 않았다. 겉으로는 일상적인 얘기를 했으나 안으로는 마음이 또렷이 깨어 있었다. 젊은 날 성균관에 거처할 때에 남들과 함께 잠자면서 코는 골지만 잠들지는 않거늘 남들이 알지 못하였다. 어느 날 밤에 최진국(崔鎭國)에게 들킨 뒤로 성균관 안에 떠들썩하게 소문이 퍼지기를 “정 아무개가 참선하느라 자지 않는다.” 하였다.
〇 이정은(李貞恩)은 자가 정중(正中)이고, 호가 월호(月湖)이며, 또 다른 호가 남곡(嵐谷)ㆍ설창(雪窓)이다. 수천부정(秀川副正)에 제수되었다. 음률이 세상에 으뜸이어서 그윽이 강개한 곡조를 타면 길 가는 사람도 반드시 울었다.
사람됨이 돈후하고 겸손하며 식견과 도량이 있고 총명하였다. 학문함에 있어 이치를 우선하고 문장을 뒤로 하니 스승이 수고롭지 않았고, 시를 지음에 있어 격조를 우선하고 수사를 뒤로 하니 사람들이 싫어하지 않았고, 덕을 닦음에 있어 내면을 우선하고 외면을 뒤로 하니 사람들이 알지 못했고, 처신함에 있어 지위가 높다고 남을 억누르지 않기를 마치 가장 가난한 유생처럼 하였다.
〇 이분(李坋)은 자가 자야(子野)이고, 서울에 살았다. 어진 사람을 좋아하고 착한 일을 즐거워했고, 권세와 이익에 마음이 담담하였다. 시학에 조예가 깊어 대유(大猷)가 그 심원한 시론에 감복하였다.
〇 노조동(盧祖同)은 자가 공서(公緖)이다. 《소학》 읽기를 좋아하였고, 엽등(躐等)하는 학문과 조롱하는 글과 과거(科擧)의 재주를 좋아하지 않았다. 몸가짐과 법도를 지키는 것이 대략 대유와 같았다. 아버지의 상을 치르면서 3년 동안 시묘하며 한결같이 《가례》를 따랐다. 시숙(時叔)과 더불어 점필재 문하에서 함께 배우니, 선생이 그를 공경하였다.
〇 정세린(鄭世麟)은 자가 창부(昌符)이고, 영남에 살았다. 점필재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그 학문이 공서와 같았고 시재(詩才)가 매우 높으니, 선생이 그를 공경하였다. 병오년(1486, 성종17)에 죽으니, 나이가 22세였다.
〇 양준(楊浚)은 자가 징원(澄源)이다. 점필재에게 수업하였다. 깊고 침착하여 큰 도량이 있으며, 안빈낙도(安貧樂道)하여 마음이 담담하였다. 또 국량이 웅대하고 깊어서 수행하는 것이 기색에 드러나지 않았으나 총명은 날로 진보하였다. 유림이 그를 가장 낮게 보았으나 여경(餘慶)이 홀로 그를 알아주었다.
〇 김시습(金時習)은 본관이 강릉(江陵)이고 신라의 후예이다. 나보다 나이가 20세 위이다. 자가 열경(悅卿)이고, 호가 동봉(東峰)이며, 또 다른 호가 벽산청은(碧山淸隱)ㆍ청한자(淸寒子)이다. 세종 을묘년(1435, 세종17)에 태어났고, 5세에 글을 지을 줄 알았다. 세종이 승정원으로 초치(招致)하여 시를 짓게 하더니, 크게 기특하게 여기고 그 아버지를 불러 하교하기를 “이 아이를 잘 기르도록 하라. 내가 장차 크게 쓸 것이다.” 하였다.
을해년(1455, 단종3)에 세조가 섭정(攝政)하자, 불문(佛門)에 들어가서 설잠(雪岑)이라 이름하고, 수락산(水落山) 정사(精舍)에 들어가서 불도를 닦고 몸을 단련하였다. 유생을 보면 말마다 반드시 공맹(孔孟)을 일컬을 뿐 불법에 대해서는 입을 닫고 말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수련하는 것에 대해 물으면 또한 말하려 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괴애(乖崖) 김수온(金守溫)이 좌화(坐化)한 일을 말하니, 설잠이 말하기를 “좌화는 예(禮)에 있어 귀하지 않은 것이다. 나는 다만 증자(曾子)가 역책(易簀)하고 죽은 일과 자로(子路)가 결영(結纓)하고 죽은 일이 귀한 것임을 알 뿐 그 밖의 것은 알지 못한다.” 하였다.
신축년(1481, 성종12) 연간에 고기를 먹고 머리카락을 길렀다. 글을 지어 조부에게 제사 지내기를,
“삼가 아룁니다. 순(舜) 임금이 오교(五敎)를 펼치면서 부자유친(父子有親)을 첫머리에 두었고, 죄목 3천 가지를 나열함에 불효가 가장 큰 것이었습니다. 무릇 하늘과 땅 안에 살면서 그 누가 길러 주신 은혜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악한 짐승으로는 호랑이와 이리보다 더한 것이 없고 미천한 짐승으로는 승냥이와 수달보다 더한 것이 없지만, 어버이를 사랑하는 성품을 온전히 보존하고 또 근본에 보답하는 정성을 삼갈 수 있으니, 이는 모두 천리가 본래 그러한 것이라서 물욕이 덮어 가리기 어려운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어리석은 소자는 본지(本支)를 계승하였으나 젊은 날 이단에 빠졌기 때문에 통탄스럽게도 미혹되어 보본(報本)을 강구하지 못했고, 장차 불도를 닦으면 선령(先靈)을 천도(薦度)할 수 있다고 여겼으나 윤회설처럼 황당한 것이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장년에는 그대로 우물쭈물 지내다가 만년이 되어서야 바야흐로 후회했습니다. 이에 예전(禮典)을 상고하고 성경(聖經)을 뒤져서 조상을 추모하는 큰 의식을 고정(考定)하고 청빈한 생계를 참작하여 간소하면서도 정결하기에 힘썼고 제수를 차림에 있어 정성으로 하였습니다.
한나라 무제(武帝)는 나이 70세에 비로소 승상(丞相) 전천추(田千秋)의 말을 깨달았고, 원나라 덕공(德公)은 나이 100세에 노재(魯齋) 허형(許衡)의 풍도에 감화되었습니다. 상로(霜露)가 적시는 것을 보고 느끼며 세월이 흘러감을 근심하니, 놀랍고 황공함이 그지없고 탄식하고 의아함이 참으로 많습니다. 만약 옛날의 허물을 속죄하여 혹 하늘과 땅 사이에 용납될 수 있다면, 장차 얼굴을 들고 지하에서 조종(祖宗)을 뵈올 수 있을 듯합니다.”
하였다.
임인년(1482, 성종13) 이후로는 세상이 쇠퇴하려는 것을 보고서 인간의 일은 하지 않고 여염 간에 버려진 사람이 되어 날마다 사람들과 장례원(掌隷院)에서 쟁송(爭訟)하였다. 하루는 술을 먹고 저자를 지나다가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을 보고 말하기를 “네 놈은 의당 그만두어야 한다.” 하니, 정창손이 못 들은 척하였다. 사람들이 이를 위태롭게 여겨서 일찍이 함께 교유하던 자들이 모두 절교하고 왕래하지 않으니, 홀로 저잣거리의 미치광이 같은 자들과 즐겁게 놀다가 취하여 길가에 쓰러지기도 하였고, 언제나 바보처럼 웃고 다녔다.
뒤에 설악산에 들어가기도 하고 춘천산(春川山)에서 살기도 하여 드나듦에 일정함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그 종말을 알지 못하였다. 그가 좋아한 사람은 정중(正中), 자용(子容), 자정(子挺) 및 나였다. 저술한 시문 수만여 편이 옮겨 다니는 사이에 거의 다 산망(散亡)되었고, 조신(朝臣)과 선비들이 간혹 몰래 취하여 자기 작품으로 삼기도 한다.
〇 홍유손(洪裕孫)은 자가 여경(餘慶)이고, 호가 소총(篠叢)이며, 또 다른 호가 광진자(狂眞子)이다. 남양(南陽) 아전 홍순치(洪順致)의 아들이다. 집안이 대대로 청빈하여 옷이라곤 겨우 몸을 감싸는 정도이고 간혹 속옷도 입지 못하고 다녔다.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섭렵하였고, 성품이 방달(放達)하여 구속되지 않았다. 과거 시험을 좋아하지 않았고 향리(鄕吏)의 신분을 면할 계획도 하지 않았다. 신축년(1481, 성종12)에 남양 군수(南陽郡守) 채신보(蔡申甫)가 여경이 글을 잘한다고 하여 그의 신역(身役)을 면제해 주니, 즉시 영남으로 걸어가서 점필재를 뵙고 두시(杜詩)를 배웠다. 선생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이미 안자(顔子)가 즐거워하던 바를 알고 있다.” 하니, 배우는 사람들이 모두 그를 으뜸으로 여겼다.
지리산에 들어가서 학업을 익혔다. 서울에 이르러 간하기를 “선생께서 시사(時事)를 건의하지 않으시니, 어찌 헛되이 남의 작록(爵祿)을 취하는 일을 하십니까. 또 지금의 학자들이 노불(老佛)을 미워하지 않는 이가 없으나, 처신에 있어서는 하나도 노불에서 벗어나는 이가 없습니다. 둥글게 행하고 모남을 싫어하는 것이 노자(老子)이고, 홀로만 행하고 남을 돌보지 않는 것이 부처입니다.” 하니, 선생이 그를 대단히 미워하여 이로부터 매양 “여경이 간사한 꾀를 부린다.” 하였다. 여경 또한 스스로 행적을 감추고 부호한 집에서 의식을 의탁할 뿐이었다.
사람됨이 문(文)은 칠원(漆園)과 같고, 시(詩)는 산곡(山谷)의 경계를 건넜고, 재질은 공명(孔明)의 재주를 지녔고, 행실은 만천(曼倩)과 같았다.
〇 유종선(柳從善)은 본관이 진주(晉州)이고, 자가 여등(如登)이다. 산에 살면서 스스로를 감추니, 친구와 친척도 그의 얼굴을 보는 일이 드물었다.
〇 우선언(禹善言)은 처음의 자가 덕보(德父)이고, 호가 풍애(楓崖)이다. 단성군(丹城君) 우공(禹貢)의 아들로, 사람됨이 기개가 드높았다. 신축년(1481, 성종12)에 남쪽으로 영남에 가서 점필재 선생을 여막에서 뵈니, 선생이 자용(子容)이라는 자를 지어 주었다.
김몰(金圽)은 자가 개중(介仲)이고, 본관이 강진(康津)으로, 관찰사 김필(金)의 아들이다. 단정하고 중후하며 깨끗함을 좋아했다. 계묘년(1483)에 생원시에 입격하였고, 과거(科擧)를 중시하였다.
〇 최하림(崔河臨)은 자가 진국(鎭國)이고, 호가 태허당(太虛堂)이다. 성품이 공명(功名)을 좋아하였고, 경자년(1480)에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이해 여름에 요망한 승려 학조(學祖)가 그의 무리 설의(雪義)로 하여금 불상을 몰래 돌리게 하고는 ‘부처가 스스로 다닌다.’고 하여 곡식ㆍ비단ㆍ베를 가져오게 하는 것이 매일 천 건으로 헤아릴 정도였다. 태학생들이 글을 올려 요망한 승려를 처벌하기를 청하며 모두 다섯 번 글을 올렸으나 윤허를 얻지 못했다. 이 상소문은 대개 모두 진국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병오년(1486, 성종17) 7월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32세이다. 집이 가난하여 염습하여 장사 지낼 수 없으므로 친구들이 부의를 모아 장사 지냈다. 저술한 《안택기(安宅記)》가 세상에 전한다.
〇 이달선(李達善)은 자가 겸지(兼之)이다. 성품이 선을 좋아하였다. 병오년에 3등으로 급제하여 종부시 직장(宗簿寺直長)에 등용되었다.
〇 권경유(權景裕)는 자가 군요(君饒)이고, 본관이 안동(安東)이다. 강하고 굳세며 대체(大體)를 알았고, 작위(作爲)함을 좋아하지 않았다. 강공직(姜公直)을 매우 미워하여 인정(人情)에 가깝지 않다고 하더니, 늦게 그의 실행을 듣고는 매우 사랑하였다. 계묘년(1483)에 진사시에 입격하고, 병오년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에 등용되었다.
〇 이윤종(李尹宗)은 자가 극창(克昌)이고, 호가 차군당(此君堂)이며, 또 다른 호가 죽계(竹磎)이다. 시문에 뛰어났고, 사람됨이 어진 이를 좋아했다. 공직(公直), 자욱(自勖), 백연(伯淵), 화청(和淸)은 그가 몹시 좋아하던 벗들이다.
〇 고순(高淳)은 자가 희지(熙之)이고, 또 다른 자가 태진(太眞)ㆍ진진(眞眞)이다. 본관이 제주(濟州)이다. 귀머거리 증세가 있어 사람들이 땅에 글자를 써서 뜻을 전하였다. 무술년(1478)에 조명(詔命)에 응하여 글을 올려 시정(時政)을 논하였다가 망녕되다는 오명을 입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이를 알려 주니, 희지가 듣고 기뻐하며 망인(妄人)이라 자호하였다.
희지가 신덕우(辛德優)를 여러 선비들 속에서 처음 보았을 때에 여러 선비들은 서로 함께 큰 소리로 얘기하고 있었다. 희지가 작은 종이에 절구 한 수를 쓰기를,
조그마한 누각에 봄바람 고요한데 / 小閣春風靜
맑은 얘기들 모두 여유가 있구려 / 淸談摠有餘
귀머거리 이 사람은 아무 맛 없어 / 聾人無一味
머리 숙이고서 홀로 책을 본다오 / 垂首獨看書
하였다. 덕우가 기뻐서 그 시에 화답하기를,
세상의 소리는 떠들썩하고 혼탁하여 / 世聲聒溷濁
더러운 흙 냄새 아아 코끝에 남았소 / 糞壤嗟鼻餘
부럽구나 그대여 방로보다 나으니 / 羨君勝房老
한낮에 천 권의 책 속에 숨었구려 / 晝隱千卷書
하였다. 이로부터 마음을 알아주는 벗이 되었다. 무신년(1488, 성종19)에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〇 신영희(辛永禧)는 자가 덕우(德優)이고, 본관이 영산(靈山)으로, 재신(宰臣) 신석조(申碩祖)의 손자이다. 기개가 드높아 구속됨이 없고 고원하고 광대한 지절(志節)을 지녔으며, 과거(科擧)의 명성을 좋아하지 않았다. 시명(詩名)이 중외(中外)에 퍼졌으니, 참의(參議) 성현(成俔)이 그의 시를 두고 소동파(蘇東坡)와 황산곡(黃山谷)의 경지를 넘나든다고 하였다. 계묘년(1483)에 진사시에 입격한 뒤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〇 이종준(李宗準)은 자가 중균(仲鈞)이고, 호가 부휴자(浮休子)이며, 또 다른 호가 상우당(尙友堂)ㆍ태정일민(太庭逸民)ㆍ장륙거사(藏六居士)ㆍ용헌거사(慵軒居士)이다. 시문에 능하였다. 정유년(1477)에 진사시에 입격하고, 병오년(1486)에 2등으로 급제하여 지금 평안도 평사(平安道評事)로 나가 있다.
젊었을 때에 군요(君饒)를 알지 못하였다. 중균이 나와 정중(正中)과 더불어 달빛을 타고 꽃을 구경하며 군요의 집에 이르렀다. 내가 군요를 속여 말하기를 “호현방(好賢坊)의 살구꽃 아래에 어떤 이인(異人)이 시를 읊고 있기에 불러서 함께 왔소. 그의 말을 들어 보니 기개가 높고 구속됨이 없으며, 그의 시를 보니 맑고 시원함이 속진(俗塵)을 벗어나서 화식(火食)하는 사람이 말하는 바가 아니오. 세상에 신선이 있다면 바로 이런 사람이 아니겠소.” 하였다.
군요가 신을 거꾸로 신은 채 황급히 나와 맞이하여 서로 더불어 달 아래에 앉았다. 중균이 시를 지으면서 일부러 청수(淸瘦)한 격조의 시를 지어내니, 군요는 과연 크게 감복하여 꿇어앉아 말하기를 “누추한 오두막이 지극히 궁벽하거늘 수재(秀才)께서 어쩌다 나의 정다운 벗들로 인하여 왕림했으니, 어찌 천행이 아니겠습니까. 부디 하룻밤 유숙하기 바랍니다.” 하였다. 중균이 반드시 떠나가려 하니, 군요가 꿇어앉아 옷자락을 붙잡고 청하였다. 떠들썩하게 담소하며 밤을 지새우다가 아침이 밝아서야 비로소 어배동(於背洞)-어배는 동네 이름이다.-에 우거(寓居)하는 진사 이종준임을 알고는 서로 더불어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중균과 군요는 드디어 마음을 알아주는 벗이 되었다.
〇 김응기(金應箕)는 자가 백봉(伯奉)이다. 정유년(1477, 성종8)에 급제하여 지금 예조 정랑(禮曹正郞)으로 있다. 신라 종성(宗姓)인 김방경(金方慶)의 후손이다.
〇 김응규(金應奎)는 자가 중성(仲聖)으로, 김응기(金應箕)의 아우이다. 강개하면서 큰 절조가 있었다. 아버지 김지경(金之慶)이 그를 매우 사랑하였다. 정유년(1477)에 20세의 나이로 평안도의 향공(鄕貢)에 응시하여 연이어 세 시험에서 장원을 차지하였다. 진사 회시(會試)에 들어갔다가 시험장에서 죽으니, 당시의 여론이 애석하게 여겼다. 아들 하나가 있다.
〇 이총(李摠)은 자가 백원(百源)이다. 무풍부정(茂豐副正)에 제수되었고, 태종(太宗)의 증손이다. 거문고 타는 재주는 정중(正中)과 같으나 넓은 국량은 정중을 능가했다. 양화도(楊花渡) 어귀에 집을 짓고 손수 고기잡이배를 저으며 서호주인(西湖主人)이라 자호하였다.
〇 이현손(李賢孫)은 자가 세창(世昌)이다. 이신요(李神堯)의 후손으로, 벼슬이 명양부정(鳴陽副正)에 이르렀다. 나이가 나보다 13세 아래이다. 매양 법도로써 몸을 다스려서 독실한 행실이 대유(大猷)에 버금갔다. 일찍이 관례(冠禮)를 행하려 하니, 대유가 이를 만류하였다. 어머니 상을 당해서는 한결같이 《가례》를 따랐다.
〇 윤신(尹信)은 자가 임지(任之)이다. 파주(坡州)의 세가(世家)로서 문숙공(文肅公) 윤관(尹瓘)의 후손이다. 행실은 세창과 같으나 침착하고 온화함은 세창을 능가하였다. 대유를 사사(師事)하였다.
〇 이적(李勣)은 자가 중률(仲栗)이다. 시에 뛰어났으나 뒤에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공부하여 그 도를 맛보고는 이로부터 시를 전공하지 않았다. 지향하는 바는 높고 원대하여 상투적인 일을 일삼지 않았고, 위로 옛사람을 벗하였다. 평상시에도 의관을 단정히 갖추었다. 대유와 백연(伯淵)을 사사하였다.
〇 허반(許磐)은 자가 문병(文炳)이다. 계묘년(1483)에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성리학에 뜻을 두어 출세에는 마음이 담담하였다. 모든 일에 옛것을 본받으려 하였고, 대유를 사우(師友)로 삼으니 대유가 그 천성에서 나온 단아함에 감복하였다.
음보(蔭補)로 사직서 참봉(社稷署參奉)에 등용되니, 그때 좌상 홍응(洪應)이 제조(提調)로 있었다. 문병이 그에게 말하기를 “왕세자는 나라의 저군(儲君)입니다. 뒷날 우리나라 만백성이 우러러 의지할 분이거늘 지금 내시와 더불어 거처하면서 서연(書筵)에 나아가는 날은 적고 친압(親狎)한 자들과 노니는 날은 많으니, 청하건대…….” 하였다.
〇 민귀손(閔龜孫)은 자가 서경(瑞卿)이고, 본관이 여주(驪州)이다. 고(故) 첨정(僉正) 민수(閔粹)의 아들이고, 자정(子挺)의 처남이다. 일찍이 자정에게 시를 배워서 조금 뒤에 곧잘 지었다. 또 정중(正中)ㆍ정지(貞之)ㆍ중률(仲栗)과 종유하였고, 대유를 사사하였다. 사람됨이 단아하고 속루(俗累)가 없었다.
〇 신용개(申用漑)는 본관이 고령(高靈)이고, 자가 개지(漑之)이다. 침착하고 큰 도량이 있었다. 시에 뛰어나고 문에 능하였다. 신숙주가 바로 그의 조부이다. 부친 신면(申沔)은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죽었다.
〇 이주(李胄)는 본관이 고성(固城)이고, 자가 주지(胄之)이다. 어질면서 문에 능하였다. 용헌(容軒) 선생 이원(李原)의 증손이다.
〇 이원(李黿)은 자가 낭옹(浪翁)이다.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이고, 참판 박팽년(朴彭年)이 바로 외조부다. 두 집안의 어짊과 재능이 이 한 사람에게 모였다.
〇 이계맹(李繼孟)은 자가 희순(希醇)이다. 점필재가 그의 시문을 취하였다. 전주에 살았다. 결백한 행실이 무리 중에 뛰어났다.
〇 이세칙(李世則)은 자가 효옹(效翁)이다. 연안군(延安君) 이숙기(李叔琦)의 아들이다. 강개하면서 곧은 것을 좋아하였고, 맑은 지조가 남보다 뛰어났고, 시문에 능하였다.
〇 장세필(張世弼)은 자가 언경(彦卿)이다. 고양(高陽)에 살았다. 집이 가난했으나 어머니를 섬김에 반드시 술과 고기를 마련하였다. 젊어서 배우지 못하여 겨우 성명만 쓸 줄 알았다.
〇 최세명(崔世明)은 자가 보광(葆光)이다. 글 읽기를 좋아하고 벼슬하는 것을 중시하였다. 정유년(1477, 성종8)에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〇 안계송(安繼宋)은 자가 우윤(于胤)이고, 호가 박전(薄田)이다. 그는 성품이 어리석어 시와 술 이외는 따로 마음을 두는 일이 없었다. 사람들이 그를 알든 모르든 간에 모두 박전이라 일컬으며 비웃었으나 박전은 알지 못하였다. 음보(蔭補)로 돈녕부 직장(敦寧府直長)에 제수되어 지금까지 17년이 되었으나 벼슬자리를 옮기지 않았으니, 세리(勢利)에 마음이 담담함을 알 수 있다.
〇 신포(申誧)는 자가 지정(持正)이고, 호가 허주(虛舟)이다. 시와 그림에 뛰어났고, 집이 가난했으나 술을 좋아하였다. 일찍이 장륙(藏六)이라 자호하니, 중균(仲鈞)이 그 호를 좋아하여 술 한 병과 바꾸자고 청하므로, 지정이 허락하였다.
〇 구영안(丘永安)은 본관이 강릉이고, 자가 중인(仲仁)이며, 호가 호은(壺隱)이다. 문명(文名)이 있었다. 기축년(1469, 예종1)에 2등으로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벼슬을 중시하고 이익을 중시하였다. 또 음양(陰陽), 추보(推步), 풍수(風水), 의술(醫術), 선도(仙道), 불도(佛道), 승제(乘除)의 법을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〇 이심원(李深源)은 자가 백연(伯淵)이고, 호가 성광(醒狂)이며, 또 다른 호가 묵재(默齋)ㆍ태평진일(太平眞逸)이다. 태종의 현손이고, 나와 나이가 같으나 생일이 나보다 늦다. 경학에 밝고 덕행이 있으며 겸하여 의술에 능통하였다. 성품이 충성스럽고 효성스러우며 무당이나 불교를 좋아하지 않았다. 평상시에도 의관을 정제하였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전강(殿講)에서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에 통(通)을 맞아 명선대부(明善大夫)로 승급하고 행 주계부정(行朱溪副正)이 되었다.
나이 25세에 전후로 모두 다섯 번 글을 올려 다스리는 도를 논하니, 윤허되기도 하고 윤허되지 않기도 하였다. 또 조정에서 숙모부(叔母夫) 임사홍(任士洪)의 부도(不道)함과 딴마음을 품고 있음을 논박하다가 조부에게 미움을 사서 장단(長湍)으로 귀양 갔고 또 이천(伊川)으로 귀양 갔다. 임금에게 글을 올려 병든 부모를 뵙기를 청하니, 그 말이 간절하고 지극하여 윤허를 받았다.
정미년(1487, 성종18)에 종친과(宗親科) 시험에서 경사(經史)를 강(講)하여 제1등으로 뽑혔다. 약을 내리고 술을 내리며 2품의 품계도 내렸으나 군(君)에 봉하지는 않았으니, 이전에 조부를 거스른 허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〇 강응정(姜應貞)은 자가 공직(公直)이고, 호가 중화재(中和齋)이다. 나보다 10여 세 위이다. 은진(恩津)에서 살았고, 효행으로 일컬어졌다. 일찍이 어머니가 병들었을 때에 3년 동안 띠를 풀지 않았고 약은 반드시 직접 맛보았다. 하루는 꿈에 천신(天神)이 뜰에 내려와서 공직에게 이르기를 “내일 찾아오는 손님이 반드시 네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할 것이다.” 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과연 이름이 원(元)인 한 소년이 와서 스스로 윤왕동(輪王洞)에서 산다고 하며 공직에게 유숙하기를 청하였다. 그를 머무르게 하고 어머니의 병에 대하여 물으니, 소년은 과연 의약을 아는 사람이었다. 소년의 말대로 시험하여 15일 만에 병이 나았다. 뒤에 부모의 상을 치를 때에는 한결같이 《가례》를 따랐고, 겨울에도 맨발로 다녀서 몸이 성한 곳이 없었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문(旌門)과 정려(旌閭)를 세워서 표창하고 집안의 정역(丁役)을 면제하였다.
공직은 경서를 잘 외우고, 사람의 운명을 추산(推算)하고, 또한 의술을 섭렵하고, 겸하여 지리서를 섭렵하였다. 젊은 날 태학에서 유학할 때에 서울의 준수한 선비들과 더불어 주 문공(朱文公)의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향약(鄕約)을 만들고 혹 매달 초하루에 《소학》을 강론하였다. 그때 뽑힌 사람은 모두 당시의 명사들로서 김용석(金用石)은 자가 연숙(鍊叔)이고, 신종호(申從濩)는 자가 차소(次韶)이고, 박연(朴演)은 자가 문숙(文叔)이고, 손효조(孫孝祖)는 자가 무첨(无忝)이고, 정경조(鄭敬祖)는 자가 효곤(孝昆)이고, 권주(權柱)는 자가 우경(友卿)이고, 정석형(丁碩亨)은 자가 가회(嘉會)이고, 강백진(康伯珍)은 자가 자온(子韞)이고, 김윤제(金允濟)는 자가 자주(子舟)이니, 이들은 그중에 뛰어난 사람이고,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세상에서 좋아하지 않는 자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혹은 소학계(小學契)라 지목하거나 혹은 효자계(孝子契)라 지목하였고, 공자(孔子), 사성(四聖), 십철(十哲)이라는 기롱도 있었다.
시골에서 불우하게 지내며 늙도록 과거를 보지 않다가 계묘년(1483, 성종14)에 생원시에 입격하여 훈도(訓導)가 되었다.
〇 안응세(安應世)는 본관이 죽산(竹山)이고, 자가 자정(子挺)이다. 호가 월창(月窓)이고, 또 다른 호가 구로주인(鷗鷺主人)ㆍ연파조도(煙波釣徒)ㆍ여곽야인(藜藿野人)이다. 나보다 한 살 아래이다.
사람됨이 청담(淸澹)하고 쇄락(洒落)하며, 가난을 편안하게 여기고 분수를 달게 여겨서 명예와 이익을 구하지 않았다. 선도와 불법을 배우지 않았고, 장기와 바둑을 좋아하지 않았다. 시에 능하였고 악부(樂府)에 더욱 뛰어났다.
일찍이 말하기를 “의롭지 못한 재물은 집안 살림을 돕는 데에 그치지만 의롭지 못한 음식은 오장을 돕는 데에 그칠 뿐이니, 더욱 범해서는 안 된다.” 하였으니, 자정의 마음가짐이 대개 이와 같았다. 백옥(白玉)의 흠이라면 주색을 좋아한 것이다. 경자년(1480, 성종11)에 진사시에 입격하였고, 이해 9월에 죽었으니 향년 26세이다.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간에 애통해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아래의 ‘지’ 자는 잘못인 듯하다.-
〇 채순(蔡恂)은 자가 숙부(叔孚)이고, 양천(陽川)에 살았다. 경자년에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사람됨이 과거(科擧)를 중시하였다.
〇 한훈(韓訓)은 자가 학이(學而)이다. 본관이 청주(淸州)이고, 서울에 살았다. 시에 뛰어났고, 병오년(1486)에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〇 강흔(姜訢)은 자가 시가(時可)이고, 본관이 진주(晉州)이다. 관찰사 강자평(姜子平)의 막내아들이다. 처음에는 밀양에서 여경(餘慶)을 좇아 점필재에게 두시(杜詩)를 배웠고, 그 다음에는 덕우(德優)를 좇아 시를 배웠고, 그 다음에는 대유(大猷)를 좇아 《소학》을 공부했고, 그 다음에는 시숙(時叔)과 공서(公緖)를 좇아 유극기(兪克己)의 여막에서 시를 읽었다.
〇 조자지(趙自知)는 본관이 평양(平壤)이고, 자가 성지(性之)이다. 베풀기를 좋아하고 어진 이를 좋아하였으며, 산수를 좋아하고 유희(遊戱)를 좋아하였다. 공명(功名)을 좋아하지 않았고, 침착하여 말이 적었다. 여경에게 배워서 시에 능하였다.
〇 강백진(康伯珍)은 자가 자온(子韞)이다.
〇 김용석(金用石)은 자가 연숙(鍊叔)이다.
〇 이장길(李長吉)
〇 최충성(崔忠成)은 자가 필경(弼卿)이다.
〇 노섭(盧燮)
〇 유방(柳房)
〇 조원기(趙元紀)
〇 조광림(趙廣臨)
〇 정붕(鄭鵬)

추강거사(秋江居士)가 경지재(敬止齋)에서 쓰다.


[주D-001]인정(人定) : 야간 통행을 금지하기 위하여 밤마다 10시에 큰 종을 28번 치는 것을 말한다.
[주D-002]노재(魯齋) : 원나라 학자 허형(許衡)의 호이다. 그가 《소학》을 자득하여 이 책을 위주로 학자를 개도(開導)하였다. 일찍이 아들에게 말하기를 “《소학》과 사서(四書)는 내가 신명처럼 공경하고 믿는다.〔小學四書 吾敬信如神明〕” 하였다. 《宋元學案 卷90》
[주D-003]사관(四館) : 성균관(成均館), 예문관(藝文館), 승문원(承文院), 교서관(校書館)의 총칭이다.
[주D-004]정중(正中) : 이정은(李貞恩)의 자이다.
[주D-005]극창(克昌) : 이윤종(李尹宗)의 자이다.
[주D-006]오릉(於陵) 중자(仲子) : 오릉은 지명이고, 중자는 전국 시대 제(齊)나라 사람 진중자(陳仲子)이다. 그는 매우 청렴하여, 세가(世家)의 집안에서 태어났고 형이 합(蓋) 땅에서 받는 녹이 만종(萬鍾)이 되었으나 불의한 녹이라 하여 먹지 않고 오릉 땅에서 몸소 신을 짜고 아내가 길쌈하여 생계를 유지하였다. 《孟子 滕文公下》
[주D-007]성광(醒狂) : 이심원(李深源)의 호이다.
[주D-008]좌화(坐化) : 불교에서 앉은 자세로 입적하는 것을 말한다.
[주D-009]증자(曾子)가……일 : 증자는 공자의 제자이고, 역책(易簀)은 대자리를 바꾸는 것이다. 증자가 운명할 때에 계손(季孫)에게서 받은 대자리에 누워 있었다. 동자(童子)가 그것이 대부가 사용하는 대자리라서 신분에 맞지 않다고 지적하자, 증자가 말하기를 “내가 정도를 얻고서 죽으면 그만이다.” 하고 다른 자리로 바꾸게 한 뒤에 곧 운명하였다. 《禮記 檀弓上》 자로(子路)는 공자의 제자이고, 결영(結纓)은 갓끈을 매는 것이다. 자로가 위(衛)나라 난리에 싸우다가 적의 창에 찔려 갓끈이 끊어지자 “군자는 죽을 때에 갓을 벗지 않는다.” 하고 갓끈을 매고서 죽었다. 《春秋左氏傳 哀公16年》
[주D-010]오교(五敎) : 다섯 가지 가르침으로,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의 오륜을 말한다. 순 임금이 말하기를 “설(契)아, 백성이 친목하지 않고 오품(五品)이 순하지 않으므로 너를 사도(司徒)로 삼으니, ‘공경히 다섯 가지 가르침을 펼치되〔敬敷五敎〕’ 너그러움에 있게 하라.” 하였다. 《書經 舜典》
[주D-011]죄목……것이었습니다 : 공자가 말하기를 “오형의 종류가 3천 가지이지만 죄는 불효보다 더 큰 것이 없다.〔五刑之屬三千 而罪莫大於不孝〕” 하였다. 《孝經》
[주D-012]한나라……깨달았고 : 신선술에 미혹된 무제가 나이 70세에 전천추(田千秋)의 건의를 받아들여 방사(方士)들을 물리쳤고, 요망한 신선술에 미혹된 자신을 자탄(自歎)한 것을 말한다. 《通鑑節要 卷11 世宗孝武皇帝下》
[주D-013]상로(霜露)가……느끼며 : 절기가 바뀌는 것을 보고 부모 생각에 슬픔을 느낀다는 것이다. 《예기》〈제의(祭義)〉에 이르기를 “서리와 이슬이 이미 내리면 군자는 이를 밟고 반드시 서글픈 마음을 갖게 되니, 그 추움을 말한 것이 아니다.〔霜露旣降 君子履之 必有悽愴之心 非其寒之謂也〕” 하였다. 《小學 明倫》
[주D-014]안자(顔子)가 즐거워하던 바 : 안자는 공자의 제자 안회(顔回)에 대한 존칭이다. 안자가 ‘가난을 편안하게 여기고 도를 즐거워한 것〔安貧樂道〕’을 말한다.
[주D-015]문(文)은……같았다 : 칠원(漆園)은 장자(莊子)가 관리(官吏)로 있었던 마을로, 장자를 가리킨다. 산곡(山谷)은 송나라 시인 황정견(黃庭堅)의 호이다. 공명(孔明)은 삼국 시대 촉나라의 재상인 제갈량(諸葛亮)의 자이다. 만천(曼倩)은 한 무제 때 사람인 동방삭(東方朔)의 자로, 문사(文辭)에 뛰어나고 해학을 잘하였다고 한다.
[주D-016]김몰(金圽)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에는 이름이 김물(金勿)로 나온다. 본관이 영광(靈光)으로, 아버지 이름이 김필(金㻶)로 되어 있다.
[주D-017]방로(房老) : 방씨(房氏) 늙은이란 말로, 공담(空談)을 좋아했던 당나라 방관(房琯)을 말하는 듯하나, 미상이다.
[주D-018]통(通) : 강경과(講經科)의 성적 등급 중 첫 번째이다. 그 다음은 약(略), 조(粗), 불(不)이다.
[주D-019]사성(四聖), 십철(十哲) : 사성은 복성공(復聖公) 안자(顔子), 종성공(宗聖公) 증자(曾子), 술성공(述聖公) 자사(子思), 아성공(亞聖公) 맹자(孟子)를 일컫고, 십철은 민자건(閔子騫), 염백우(冉伯牛), 중궁(仲弓), 재아(宰我), 자공(子貢), 염유(冉有), 계로(季路), 자유(子游), 자하(子夏), 자장(子張)을 일컫는다.
[주D-020]아래의……듯하다 : 내용 가운데 안응세(安應世)가 한 말인 “의롭지……안 된다.”의 원문은 “不義之財 補止於家 不義之食 補止五臟 尤不可犯也”로 되어 있는데, 아래의 ‘지(止)’ 자란 ‘補止五臟’의 ‘止’를 가리킨다. 〈냉화(冷話)〉의 안응세 관련 일화에 “의롭지 못한 재물은 집안을 돕는 데에 그치는 것이니 그 더러움은 오히려 말할 수 있지만, 의롭지 못한 음식은 오장을 돕는 것이니 부모가 주신 몸을 더욱 소홀히 할 수 없다.〔不義之財 止於補家 其醜猶可說也 不義之食 補五臟 父母遺體 尤不可謾也〕” 하였다.
[주D-021]유극기(兪克己) : 유호인(兪好仁 : 1445~1494)을 가리킨다. 극기는 자이다.

추강집 제3권
 시(詩)○칠언절구(七言絶句)
수락산(水落山)으로 청은(淸隱)을 찾아가다 길을 잃었다. 30리쯤 갔을 때에 계곡의 근원이 비로소 다하고 길에 드리워진 복숭아 열매가 있었다. 가지를 휘어잡아 열매를 따서 먹으니 주린 배가 불렀다. 2수


온종일 험한 길 걸어 개울 하나 건너니 / 竟日崎嶇渡一溪
저녁 바람이 기이한 새 울음 불어 보내네 / 晩風吹進怪禽啼
산길 다한 바위 모퉁이의 복숭아꽃 나무 / 山窮石角桃花樹
가을 열매 주렁주렁 나그네 향해 드리웠네 / 秋實離離向客低



맹수들 막 지나가 발자국 마르지 않았는데 / 虎豹新過跡未乾
구름 깊은 어느 곳이 도인 사는 집이런가 / 雲深何處道人壇
수목들 하늘에 닿아 길이 없는가 했더니 / 參天樹木疑無路
고요히 보건대 날다람쥐 바위 사이 숨네 / 靜看蒼鼯竄石間


 

[주C-001]청은(淸隱) : 김시습(金時習)의 호 중 하나가 벽산청은(碧山淸隱)이다. 일찍이 수락산 수락정사(水落精舍)에 은거한 적이 있다.


 

해동잡록 2 본조(本朝)
김시습(金時習)

○ 본관은 강릉(江陵)이요, 자는 열경(悅卿)이다. 조금 자라자 말을 더듬어 가이 말은 잘하지 못하였으나, 붓과 먹을 주면 그 생각을 모두 글로 썼다. 세조 때에 세상을 달갑잖게 여겨 벼슬하지 않고, 거짓으로 미친 체하여 중이 되어 승명(僧名)을 설잠(雪岑)이라 불렀다. 스스로 그의 호(號)를 동봉(東峯)이라 하고, 또는 청한자(淸寒子) 혹은 벽산청은(碧山淸隱)이라고 하였다. 만년에 환속(還俗)하여 죽었는데, 《매월당 역대년기(每月堂歷代年紀)》와 《금오신화(金鰲新話)》가 있어 세상에 전한다.
○ 열경(悅卿)은 난 지 여덟 달 만에 능히 글을 읽을 줄 알았다. 말은 더디었으나 정신은 민첩하여 입으로 읽지는 못하였어도 뜻은 모두 통하였다. 본전(本傳)
○ 동봉(東峯)이 세 살에 어눌하여 아직 말은 잘 못하였으나, 그의 외조부가 글귀를 뽑아 가르치기를,
꽃이 난간 앞에서 웃으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 花笑檻前聲未聽
하니, 곧 병풍에 그린 꽃을 가리키며 빙그레 웃었다. 또 가르치기를,
새가 수풀에서 우나 눈물은 보기 어렵도다 / 鳥啼林下淚難看
하니, 또한 병풍에 그린 새를 가리키며 빙그레 웃었다. 이는 말로는 못하나 뜻은 능히 통하는 것이다.
○ 세 살에 유모가 맷돌에 보리 가는 것을 보고 또렷이 읊기를,
비는 안 오는데 우레 소리는 어디메서 울리는고 / 無雨雷聲何處動
누런 구름이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 / 黃雲片片四方分
하니,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겼다.
○ 세 살 때에 그 할아버지에게 묻기를, “시는 어떻게 짓습니까?” 하니, 할아버지가, “일곱 글자를 이어 놓은 것을 시라고 한다.”고 대답하였더니, 그렇다면 일곱 자를 엮을 테니 첫 글자를 불러 보시라고 하였다. 할아버지가 봄 춘(春) 자를 부르자, 곧 응하기를,
봄비가 세 휘장 밖으로 내리니 기운이 열리도다 / 春雨新幕氣運開
하여 사람들이 탄복하였다.
○ 다섯 살에 능히 시를 지었다. 세종이 그 말을 듣고 승정원으로 불러, 지신사(知申事) 박이창(朴以昌)에게 명하여 임금의 뜻을 전하고 사실인지 아닌지 묻는데, 안아 무릎 위에 놓고 임금이 이름을 불러 이르기를, “네가 능히 시구를 지을 수 있느냐?” 하니, 곧 응하기를,
올 때 포대기에 쌓인 김시습 / 來時襁湺金時習
하였다. 또 벽 위의 산수도(山水圖)를 가리키면서, “네가 또 짓겠느냐?” 하니 곧,
작은 정자와 배 안에는 누가 있는고 / 小亨舟宅何人在
하였다. 그가 지은 시와 글이 적지 않다. 곧 대궐로 들어가 아뢰니 전교(傳敎)를 내리기를, “성장하여 학문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려 장차 크게 기용하리라.” 하며, 크게 칭찬하고 비단 30필을 주고 제가 가지고 가라고 하였더니, 드디어 그 끝을 이어 가지고 끌고 나가므로 사람들이 또한 기특하게 여겼다.
○ 청한자(淸寒子)가 손을 만나 소식을 물을 제, 마구 욕하는 사람이 있다고 들으면 반드시 기쁜 빛이 돌았고, 만약 거짓 미친 체하여 실상을 감추고 있는 바가 있다고 하면 눈썹을 찌푸리고 기뻐하지 아니하였다.
○ 어떤 때는 벼[禾]를 심어 잘 자라서 이삭이 볼 만하게 되면 술취하여 낫을 휘둘러 모조리 땅에 쓰러뜨리고서는 목놓아 울었다. 상동
○ 시를 지을 때에는 종이가 떨어져야 그만두었고, 시가 다 되면 그것을 곧 불살라 버렸다. 상동
○ 거짓 미친 체하여 스스로를 감추었다. 그에게 도를 물으려 하는 사람이 백 천이나 되었지만 겉으로 미처 날뛰는 꼴을 하여 혹은 나무나 돌로 때리려 하고 혹은 활을 당겨 쏘려 하여 그 사람의 뜻을 떠보았다. 상동
○ 산에 들어가서 서 있는 나무의 껍질을 벗기고 시 쓰기를 좋아하였는데 써 놓고 한참 읊조리다가는 문득 울면서 깎아 버리곤 하였다. 상동
○ 총명이 뛰어나 사서 육경(四書六經)은 어려서 스승에게 배웠고, 제자백가(諸子百家) 같은 것은 가르침을 기다리지 않고 모조리 읽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한 번 외우면 잊지 않았으므로 평소에 일찍이 글을 읽은 적이 없으며 또한 책궤를 지고 따라다니며 배우지 않았으나 고금의 문헌을 빠짐없이 통달하였다. 상동
○ 다섯 살 때,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가 그의 이름을 듣고 그 집으로 찾아가 곧 불러 말하기를, “내가 늙었으니 늙을 노(老) 자로 시구를 지으라.” 하였더니, 곧 대답하기를,
늙은 나무 꽃이 피니 속은 늙지 않았도다 / 老木開花心不老
하였다. 문경공이 무릎을 치고 감탄하면서, “이것이 이른바 기동(奇童)이다.” 하였다. 본집(本集)
○ 난 지 여덟 달 만에 저절로 글을 알았고, 세 살 때에 능히 글을 지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여덟 달에 남의 말을 알아듣고 / 八朔解他語
세 돌에 능히 글을 지었다 / 三朞能綴文
하였다. 상동
〈구일유수유(九日有茱萸 9월 9일에 산에 올라 수유 열매를 머리에 꽂는 풍습〉 시에 이르기를,
다시 수유를 쥐고 자세히 보니 / 更把茱萸仔細看
올해도 어이하면 지난해 같이 즐길꼬 / 今年何似去年歡
가을 바람 능히 사람의 터럭을 흩날리기는 하나 / 秋風能解人間鬢
약간 묻은 서리를 지워 말리지 못하네 / 纔着霜花抹未乾
하였다. 상동
○ 동봉(東峯)이 육경(六經)과 사서(史書)를 싣고 관동의 산수를 두루 다니며, 기장 심을 땅을 얻어 농사짓고 살면서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이 박주를 가지고 그의 손을 잡고 슬퍼하다가 시를 지어 천리에 서로 만날 기약 없는 이별을 하였다. 상동
○ 매소(梅蘇 매요신(梅堯臣)과 소순흠(蘇舜欽))의 옛일을 본떠 오금언(五禽言)을 지었다. 포곡(布穀)은 지금의 산비둘기이고. 탈폐고(脫敝袴)는 발고(鵓鴣 집비둘기)와 같고, 기첩부(欺妾婦)이며, 아욕사(我欲死)이며, 불여귀(不如歸)며, 소연(巢燕)이며, 추앵(秋鶯 가을 꾀꼬리)을 말한 것이다.
○ 대언(大言)ㆍ소언(小言 한시(漢詩)에 있어서 율시(律詩)를 말함) 두 편을 지었는데, 대언은 큰 것을 극언(極言)하고, 소언은 작은 것을 극언하여서 자기의 뜻을 나타냈다.
○ 길가는 도중에서 난초가 풀 속에 시들어 있는 것을 보고 시를 지어 슬퍼하였다.
○ 벼루[硯]를 씻은 뒤에 스스로를 비웃어 희롱하여 지은 시에,
어찌 도경 고개 위의 구름을 얻어 / 安得陶景嶺上雲
끌어다가 옥전의 금화를 삼고 [종이] / 攤爲玉牋之金花
송섬(宋纖)의 천길 깎아지른 언덕을 / 宋纖千丈磨崖
단계(좋은 벼룻돌이 나는 곳)의 금경(거울)으로 삼고 / 爲端溪之金烱
두꺼비 뱃속에 동정호를 간직하고[먹물] / 蟾蜍腹裏藏洞庭
중산의 천 마리 붓을 다 달토록 [붓] / 禿盡中山千首穎
휘두르면 바람이 휩쓸고 구름이 모여드는 듯하고 / 其揮也風掃雲聚
당기면 북두가 줄고 은하가 도는 듯할꼬 / 其曳也斗轉河廻
하였다.
○ 산중에 있을 때, 산나물을 노구솥에 끓이면서 시로 적었는데,
동정에는 눈이 아직 안 녹았는데 / 洞庭雪未消
눈 속에서 산나물이 돋아났구나 / 雪底山蔬秀
캐어다가 노구솥에 끓이니 / 採之煮小鐺
보글보글 지렁이 우는 소리 같네 / 細細蚯蚓鳴
족히 내 주림을 채우며 / 足以充吾飢
가히 여생을 보전할 만하도다 / 可以保餘生
우습다 부귀한이여 / 可笑鐘鼎人
명리에 구차스럽구나 / 區區利與名
어찌 노구솥 안 나물의 / 何似鐺中蔬
한결같이 화평한 맛과 같으리오 / 一味和且平
하였다.
○ 약재(藥材)의 이름을 이용하여 진퇴체(進退體 시를 짓는 데 운을 쓰는 한 가지 격식) 한 편을 지었는데,
사나이 먼 뜻[애기풀]이 있으니 / 丈夫有遠志
해가 저물면 마땅히 돌아오리[승검초의 뿌리] / 歲暮行當歸
솔이 늙으니 복령[솔뿌리에 생기는 균류] 자라고 / 松老伏苓長
가을이 깊으니 마[산우]는 살찌도다 / 秋深山芉肥
벼슬살이는 강계처럼 맵고 / 宦情薑桂辣
세상길은 홍연(수은과 단사의 화합물)과 다르도다 / 世路汞鉛違
가난한 선비는 괴로움을 일찍 겪었으니 / 措大苦曾歷
일찍 쉬어 시비를 잊어버리라 / 早休忘是非
하였다.
○ 산중에 네 가지 새가 있어 아침저녁으로 일깨워 사람을 감동시킬 만하므로 사금언(四禽言)을 지어 그것으로 세상을 경계하기를, “누구를 위하여 잇속을 따르느냐[爲誰趨利]. 역시 허공을 잡으려 말라[亦莫把空]. 돌아감만 같지 못하리[不如歸]. 슬프고 슬프다[悲悲].” 하였다.
○ 산중에 내 죽고자 하는 새[我欲死鳥]가 있다 하여 시를 지었는데,
내 죽어 산허리에 묻히려 하니 / 我欲死埋山岡
4월의 청매가 귀걸이 같도다 / 四月靑梅如耳鐺
깊은 숲 속에 먹을 만한 것이 없으니 / 深林無物可以食
마른 가지로 날아가 헛되이 애를 끊는구나 / 飛向枯枝空斷腸
새여 새여 네 어이하리 / 禽兮禽兮奈爾何
백이ㆍ숙제가 수양산에서 굶어 죽은 것을 생각지 않느냐 / 不思夷齊飢首陽
하였다.
○ 세상의 부유한 사람이 자봉(自奉)하기를 오히려 아끼니, 하물며 남을 구제할 수 있으리오. 돈꿰미와 곡식을 썩히고, 후세 자손이 교만하고 사치하고 호협하게 하여 누(累)가 친척에게까지 미침을 탄식하여서 간귀(慳鬼)를 읊어 경계하였다.
○ 집을 짓되 움과 같이 하여 뒤쪽은 담이고 앞쪽은 벽인데, 책과 벼루를 곁에 늘어놓고 ‘지명환도(知命環堵)라 이름하고 명(銘)을 지어 벽에 붙이니 벽이 창이 되어 빛을 가리어 사랑스러웠다. 겉은 비록 꾸밈없이 질박하나 안은 단정하고 탁 트이었다.
○ 꽃동산 가꾸기 게을러[懶治花塢]의 시에,
돌을 쌓아 벽돌 삼아 꽃동산을 만들어 / 積石爲甃築花塢
해마다 호미질하고 깨끗이 쓸었네 / 年年鋤治又淨掃
오늘까지 더할 나위 없이 부지런히 공들였더니 / 邇來無復事勤劬
새 가지는 우거지고 묵은 가지는 마른다 / 新枝盤鬱舊枝槁
이제는 다시 무성함을 다스리지 않게 되니 / 從玆不復理繁蕪
일을 좋아함이 일 없음을 좋아함만 같지 못하도다 / 好事不如無事好
하였다.
○ 일찍이 말하기를, “처신하기가 몹시 힘드니, 인간 세상에는 살 수가 없다. 다섯 가지 불가가 있는데, 사람을 만나려면 옷차림에 정신을 써야 하는데, 빨래하고 옷 지을 사람이 없으니 첫째의 불가다. 아내나 첩을 얻으면 살림을 꾸려야 하는데 생계에 얽매어 빈부에 자재로울 수 없으니 둘째의 불가요, 또 어찌 도연명(陶淵明)의 적씨(翟氏)나 양홍(梁鴻)의 맹광(孟光)과 같이 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셋째의 불가이다. 옛 친구가 가엾이 여겨 벼슬자리에 천거하더라도 지위가 보잘것없고 녹이 박하여 체면을 유지할 수 없고, 성품 또한 어리석고 정직하기만 하여 소인(小人)의 무리들에게 용납될 수 없으니 이것은 넷째의 불가요, 깊은 골짜기에 살아 다만 산수 좋은 것만 좋아하고 밭갈고 김매는 일 같은 것은 개의(介意)하는 바 아니고, 골짜기를 나와 살길을 구하면 남들은 곧 여전히 몹시 곤궁하다 할 것이다. 입신하기가 이러하니 이것이 다섯째 불가이다.” 하였다.
○ 산중에 열 가지 경취(景趣)가 있으니, “하나는 향을 피우고 높이 누워 있음이요, 둘은 약을 먹고 도인(導引)함이요, 셋은 동산에 물주고 남새에 호미질함이요, 넷은 몸소 밭갈이하여 국록(國祿)에 대신함이요, 다섯은 섶을 꺾고 땔나무를 줍는 일이요, 여섯은 바구니를 들고 나물 캐기요, 일곱은 맑은 못에 낚시 드리우기요, 여덟은 깊은 골짜기에서 약초 캐기요, 아홉은 평상(平床)을 옮기어 글 읽기요, 열은 언행에 구속받지 않고 세속에 얽매이지 않음이다.” 하였다.
○ 산에 들어가 달 밝은 때를 만나면 매양 밤중에 홀로 앉아 〈이소경(離騷經)〉을 외우고는 통곡하고 돌아왔다.
○ 〈밤이 얼마쯤 되었나[夜如何]〉 2편을 지었는데,
밤이 얼마쯤 되었는가 밤이 아직 반도 못 깊었는데 / 夜如何其夜未央
총총한 별은 찬란하게 빛을 뿜네 …… / 繁星燦爛生光芒
하고, 그 끝 편에,
밤이 얼마나 되었는가 밤이 새려는데 / 夜如何其夜向晨
뭇 별이 광망을 거두고 북극성만 남아 있네 …… / 衆星收芒餘北辰
하였다.
○ 세상살이에 서툴러 성(城) 동쪽에 몇 이랑 밭을 빌려 콩과 조를 심어 거두었다. 그것을 읊은 시에,
내 성 동쪽에 밭을 빌려 / 我乞城東畝
힘써 일하여 봉록을 대신하려 했더니 / 作力代學干
절반은 참새와 쥐[탐관오리를 가리킨다]가 경작하였으나 / 雖半雀鼠耕
깨끗한 신하의 얼굴을 열 만하도다 / 足啓淸臣顔
……
아첨하고 교만하지 않음에 만족하노니 / 甘處不諂驕
길이 탄식할 것 없도다 / 足以無永嘆
하였다.
○ 〈고기 낚는 늙은이를 비웃는 글[嘲釣叟]〉 2편이 있으니, “하나는 태공(太公)이 주(周) 나라 왕실을 도와 그 임금을 베었으니, 임금과 신하의 대의(大義)를 온전히 하지 못한 비웃음이요, 하나는 엄자릉(嚴子陵)이 하찮은 절개를 지키노라 한조(漢祖)의 중흥을 돕지 못한 비웃음이다.” 하였다.
○ 동봉이 담장 밑에 남새밭을 만들어 7,8종의 풀을 심고, 여덟 수의 시를 지어서 적었는데, 목숙(苜蓿 거여목)ㆍ산약(山藥 마의 뿌리)ㆍ산계(山薊 삽주)ㆍ황정(黃精 죽대 뿌리)ㆍ당귀(當歸 승검초 뿌리)ㆍ자강(子薑)ㆍ훤초(萱草 원추리)ㆍ홍료(紅蓼 여귀)가 곧 그것이다. 조총(篠叢) 홍유손(洪裕孫)이 〈청한자를 제사하는 글[祭淸寒子文]〉에,
환술을 나타내어 기적을 세우니 / 現幻術而立奇
참으로 공이 불을 미워함이로다 / 誠我公之惡斯
하였다.
○ 동봉이 금오산(金鰲山)에 살 적에 눈 내리는 밤에 화로를 끼고 있노라면, 발자국 소리 하나 없이 적막하고 바람 불어 대 소리만 솨솨 하는데, 산동(山童)과 함께 재를 긁으면서 글자를 쓰고 옛사람의 글귀를 모아 산거(山居) 백 수를 이루었다.
○ 하늘은 이마라, 높아서 위가 없고 맑기가 가히 없다. 기운이 있어 빙빙 돌아 운행이 쉬지 않는다. 해와 달, 별들이 광명하게 매달려 있고 바람과 비, 서리와 이슬은 그 기운이 화(化)하여 떨어지는 것이다.
○ 악장(樂章) 두 편이 있는데, 하나는 〈꿩이 군자를 힘쓰다[有雉勗君子]〉요, 또 하나는 〈갈대가 현인을 생각한다[蒹葭思賢]〉였다.
○ 동봉이 충신을 열거하고 돌이켜 슬퍼하면서 찬(贊)을 지었는데, 용방(龍逄)ㆍ비간(比干)ㆍ기자(箕子)ㆍ이제[伯夷叔齊]ㆍ난성(欒成)영유(甯兪)왕촉(王蠋)신포서(申包胥)굴원(屈原)장량(張良)소무(蘇武)공승(龔勝)이업(李業)무후(武侯)악비(岳飛)문천상(文天祥)이다.
○ 청한자(淸寒子)가 말하기를, “옛사람이 산림에 거처하매 봉우리를 마시고, 시냇물을 쪼으면서[飮峯啄澗] 반드시 법도를 정제(整齊)하였으므로 나아가서 당대의 스승이 되었다.” 하니, 음봉탁간(飮峯啄澗)은 돌로 양치질 하고 흐르는 물을 베개한다[漱石枕流]는 뜻이다.
○ 전주(全州) 종이를 금강전(錦江牋)이라고 부르는데, 매월당(梅月堂)의 시에,
금강 봄 물 매끄러운 종이에 / 錦江春水膩魚牋
한가로이 새 시를 지어 두어 편 쓴다 / 閑製新詩寫數篇
큰 붓 한 번 휘두르니 천둥치고 비 내리는 듯 / 鉅筆一揮電雨動
흰구름 쌓인 속에 그린 용이 꿈틀거리는 듯 / 白雲堆裏畵龍飜
하였다.
○ 관서(關西)에 졸 제, 평양 서쪽에 들어가 석벽(石壁)에 꽂은 시가 있었는데,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평양성 서쪽 푸른 바닷가 / 君不見平壤城西滄海潯
포구의 석벽이 비녀처럼 깎아지른 것을 / 浦口石堧如削簪
큰 물결 굉음을 울리며 파도에 휩쓸리니 / 巨灇鳴瀧入海濤
흡사 패옥과 생황소리 같다네 / 怡似環珮笙鏞音
또 보지 못하였는가. 바닷가 부들 우거진 마을에 / 又不見海堧菰蒲鄕
봄 모종 잘 자라고 가을 벼 향기로운 것을 / 春苗芃芃秋稻香
8월 9월 벼 익을 때에 / 八月九月稻熟時
옥을 일고 구름으로 밥 지어 수저로 떠서 맛보네 / 淅玉炊雲翻匙嘗
하였다.
○ 산중에서 읊은 〈지초시(地椒詩)〉가 있는데,
지초가 봉우리 높이에 났으니 / 地椒生峯危
매운 향기 몽정보다 더하네 / 香辣勝蒙頂
달빛 흐르는 맑은 시냇물에 씻고 / 浥之淸澗月
푸른 돌솥에 달여 / 煎此靑石鼎
단정히 절방에 앉았노라 / 端坐上方窓
내 코를 찔러 봄잠을 깨우네 / 激我春睡醒
하였다.
○ 도연명(陶淵明)에 화답한 시가 60여 편 있는데 〈화도(和陶)〉라고 이름하였다.
○ 〈하시(荷詩)〉에,
이른 봄 연한 줄기는 삶아 먹을 만하고 / 春前莖嫩堪爲茹
늦가을에 뿌리 살쪄 김치 담글 만하도다 / 秋後根肥可作菹
하였는데, 지금 시골 남새밭에 많이 심으니, 맛이 향기로워서 먹을 만하다.
○ 15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외조모의 양육을 받았는데, 외로운 외손자라 하여 아들처럼 사랑하여 길렀다.
○ 〈삼나무를 심다[種杉]〉라는 시에,
동풍이 너의 겨울 가지를 길렀는데 / 東風長汝歲寒枝
비와 이슬을 한 자 되는 몸에 담뿍 받았구나 / 兩露偏承一尺姿
내 정원에 심어 북돋우니 / 種我公庭伋培土
뭇 꽃이 업신여긴다 탓하지 말라 / 煩君莫說衆芳欺
하였다.
○ 〈죽순을 보호함[護筍]〉이라는 시에 이르기를,
봄바람이 어린 죽순을 불러 일으키니 / 春風喚起籜龍兒
비단 같은 이끼 뚫어 낱낱이 올망졸망하구나 / 抽錦穿苔介介癡
가시를 꽂아 울타리 둘러 짐승을 막으니 / 挿棘編籬防獸觸
내일 아침이면 파릇파릇 순을 보리라 / 明朝應見碧參差
하였다.
○ 변산(邊山)에서 개 한 마리가 바위 구멍으로 도망쳐 들어가 한 해가 지나도 나오지를 않았다. 동봉이 일찍이 호남에 놀면서 시를 지었는데,
으르렁거리는 산개 바위틈에 엎드렸는데 / 狺狺山犬伏岩霔
구름은 솔숲으로 돌아 가고 해는 기울었도다 / 雲返松關日已斜
개도 생각 있어 세상 물정 잊었는데 / 狗亦有心忘物外
세상 사람 어이하여 분요함을 피하지 않느뇨 / 世人何不避喧嘩
하였다.
○ 〈부앙(俯仰)〉시에,
굽어보고 우러러보니 아득히 가이 없는데 / 俯仰杳無垠
그 가운데 이 몸이 있구나 / 其中有此身
삼재(천ㆍ지ㆍ인)에 참여하여 함께 섰으니 / 三才叅幷立
한 가지 이치가 저절로 분명하구나 / 一理自分明
욕심에 끌리면 미물이 되고 / 形役爲徵物
몸을 닦으면 곧 큰 군자 되리라 / 躬行卽大君
하였다.
○ 〈푸른 전나무[綠檜]〉라는 시가 있는데,
뜰 앞의 푸른 전나무 하늘까지 자랐는데 / 庭前綠檜叅天長
뼈마디 크고 굳세어 굽힐 줄 모르네 / 骨節老大剛不僂
몸뚱이 송백 같아 세속을 따르지 않고 / 體備松栢不隨俗
기품은 지출을 머금어 맑은 향기 풍기도다 / 氣含芝朮淸香馥
하였다. 또 소나무와 전나무로 이엉하고 오두막을 지어, 그것을 글제로 삼아 시 한 편을 지었는데,
낙엽으로 방석을 삼고 / 落葉以爲氈
마른 등걸로 두공을 삼네 / 枯査以爲櫨
구름과 아지랑이로 장막을 삼고 / 雲霞爲帳幕
푸른 산으로 병풍을 삼는도다 / 碧山爲屛風
하였다.
○ 동봉이 도롱이를 사 입고 홍수를 구경하고 돌아와 시를 지었는데,
백 전으로 새로 도롱이를 사 입고 / 百錢新買綠蓑衣
다리에서 큰 물을 구경하고 늦게 돌아오도다 / 觀漲溪橋帶晩歸
가는 비에 바람은 그치지 않는데 / 細雨斜風吹不斷
어깨를 솟구치고 사립으로 들어오네 / 一肩高聳入蓬扉
하였다.
○ 친구의 방문을 기뻐하여 지은 시에,
나그네 살이에 찾아오는 사람 없어 / 客裏無人弔
사립문 종일토록 닫혀 있네 / 柴扉盡日關
무심히 세상일을 보고 / 無心看世事
눈물 속에 구름 낀 산을 생각하네 / 有淚憶雲山
옛 친구는 사이가 멀어지고 / 故舊星踈濶
친한 벗은 전혀 오가지 않네 / 親朋絶往還
반갑다, 그대 반날을 머무르니 / 喜君留半日
마주 보고 얼굴 한 번 펴네 / 相對一開顔
하였다.
○ 〈동풍악(東風惡)〉 한 편을 노래하였는데,
동풍이 나쁘도다, 동풍이 나쁘도다 / 東風惡東風惡
쌀쌀한 봄바람 그칠 새 없구나 / 料峭無時休
……
만약에 동풍을 인심에 비할 양이면 / 若將東風比人心
동풍이 질 낮음을 부끄러워하리라 / 東風忸怩爲下風
하였다.
○ 일찍이 호남에서 놀았는데, 전날 놀던 고장 이름을 생각하면서 시를 짓기를,
먼 데 바라보니 산이 무등인데 / 望遠山無等
가는 길 골짜기에 꾀꼬리가 있도다 / 程途谷有鶯
향기로운 밭 벼는 옥구에 풍년인데 / 香秔豐沃溝
서리맞은 귤은 장성에 비치는구나 / 霜橘映長城
하였으니, 유앵(有鶯)은 골짜기 이름, 무등은 산 이름, 옥구와 장성은 모두 고을 이름이다.
○ 〈추한 꽃[醜花]〉ㆍ〈아리따움[美艶]〉 두 편이 있는데, 〈추한 꽃〉은 하나〈얼굴이 □[面 □]〉, 둘 〈오목 눈[凹眼]〉, 셋 〈코가 큼[鼻大]〉, 넷 〈입술이 두꺼움[唇厚]〉, 다섯 〈쑥대머리[蓬頭]〉, 여섯 〈이지러진 귀[窳耳]〉요, 〈아리따움〉은 하나 〈붉은 입술[絳唇]〉, 둘 〈복사빛 뺨 [桃腮]〉, 셋 〈버들 눈썹[柳眉]〉, 넷 〈높게 틀어올린 머리[雲髻]〉, 다섯 〈금비녀[金釵]〉, 여섯 〈우유빛 살결[酥乳]〉이라 하였다.
○ 〈산중 초목 7영(山中草木七詠)〉이 있는데, 하나 〈오래 묵은 잣나무[古栢]〉, 둘 〈산에 저절로 난 대나무[山竹]〉, 셋 〈후추나무[地椒]〉, 넷 〈골짜기에 난 난초[谷蘭]〉, 다섯 〈인삼(人蔘)〉, 여섯 〈만년송(萬年松)〉, 일곱 〈삼수지(三秀芝 1년에 세 번 솟는 지초)〉이다.
○ 금오산(金鰲山)에 살면서부터 멀리 노닐기를 기뻐하지 않고, 다만 매인 데 없이 한가히 노닐며 매화와 대를 찾아 읊고 취하면서 스스로 즐겼다.
○ 성질이 편벽되어 가난하여도 빌지 않았고 주어도 받지 아니하였다. 〈동서명(東西銘)〉을 본떠서 〈남북명〉을 지어 남쪽과 북쪽 벽에 붙여 놓았다.
○ 하늘은 위에 있어 돌고 해와 달은 번갈아 밝히며, 별들은 총총하다. 추위와 더위의 교체와 어둠과 밝음이 갈마드는 것은 질서 있는 움직임이요, 땅은 아래에 있어 하늘에 순종하고 산천초목은 흐르고 솟고 우거지고 마르고 하는 것이 모두 역시 질서 있는 움직임이다. 〈동봉서〉
○ 형적(形迹)이 있는 위험은 막을 수 있으나 형적이 없는 위험은 누르기 어렵다. 토목의 역사(役事)를 일으켜 궁실(宮室)을 수축하고, 창고가 넘쳐 씀씀이가 사치하고, 풍속이 부박하고 화려한 것을 숭상하고, 담론만 맑고 높으며, 정령(政令)을 아침에 내고 저녁에 고치는 것은 드러나지 않는 위험한 형적이니, 곧 형적 없는 위험이다. 상동
○ 산에 오르면 그 높음을 배울 것을 생각하고, 물에 임하면 그 맑음을 배울 것을 생각하며, 돌에 앉으면 그 굳음을 배울 것을 생각하고, 솔을 보면 그 절개 곧음을 배울 것을 생각하고, 달을 마주하면 그 밝음을 배울 것을 생각한다. 상동
○ 덕(德)은 재주의 근본이요, 재주는 덕의 남은 것이니, 옛날부터 재주가 넉넉하면서 덕이 모자라는 사람은 먼저 곧으나 뒤가 흐린 흠을 면하지 못한다. 상동
○ 아침에 났다가 저녁에 마르는 버섯[朝菌]은 해를 보면 마르고, 대춘(大椿)은 8천 년을 춘추로 삼으며, 하루살이는 아침에 났다 저녁에 죽고, 상서로운 새는 천 년을 한 평생으로 삼는다. 그러니 조균(朝菌)이 대춘(大椿)이 되고, 하루살이가 상서로운 새가 되려면 될 수 있겠는가? 사람이 늙고, 늙으면 죽는 것은 정해 놓은 이치인데, 요행히 장수를 누리는 자는 또한 괴상한 물건이다 하였다.
○ 성인(聖人)의 말은 글은 간략하나 뜻은 풍부하고, 부처[浮屠]의 말은 글은 번거로우나 뜻은 비어 있다 하였다.
○ 같은 짐승이지마는 고라니나 사슴이 마당에 오면 사람들이 모두 괴이히 여기며, 개나 양이 산에 살면 사람들이 모두 의아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그 사는 곳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 천길 높은 곳에 사는 봉황은 가시나무에 살지 아니한다. 가시나무에 살면 매미나 꾀꼬리가 희롱하여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돌 쌓인 아름다운 대나무 숲에 높이 날아야 가히 그 상서로움을 나타낼 것이요, 깊은 못의 용은 말 발자국 속에 고인 물에는 놀지 않는다. 말 발자국 속에 고인 물에서 놀면 거머리나 지렁이가 붙들고 기롱할 것이니, 반드시 용문(龍門)의 뛰는 물결에 헤엄치고 놀아야 가히 그 신령스러움을 나타낼 수가 있는 것이다.
○ 백이 숙제의 뜻이 비록 그때 사람들과 다르기는 하였으나 후세의 신하된 사람들이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고자 하는 마음과는 다르지 않다. 수레를 모는 데 비유하면, 수레를 밀고 끄는 것이 팔을 쓰는 방법은 비록 다르나 모두 뜻은 수레를 모는 데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 깊은 골짜기와 넓은 들에 사는 짐승은 추워도 따뜻하게 하지 못하고, 더워도 서늘하게 할 수가 없다. 먹는 것은 누린내 나는 짐승이나 풀이나 나무의 순이지마는 앓지 않고 일찍 죽지 않는 까닭은 몸을 보호함에 마음을 쓰지 않는 까닭이다.
○ 거미가 모이면 손님이 오고, 까막까치가 지저귀면 좋은 일 궂은 일이 있다는 것은 사람과 만물이 천지의 기운을 고루 타고나서 일원(一元)의 묘리에 함께 자라났기 때문에 비록 기품(氣稟)에는 차이가 있으나 알고 깨닫는 성정(性情)에는 일찍이 다름이 없으므로 사람의 일이 은연히 동하면 다른 물류(物類)가 먼저 응하여 알리는 것이다.
○ 도(道)를 싣고 있는 것이 역(易)이요, 그것을 발휘(發揮)한 것이 점(占)이다. 앞서기로는 천백 세(世) 전의 일과 이후로는 천백 년 후의 일이며, 천하 안에 있는 온갖 물건의 드러난 형상이 제각기 다름에 대하여 문밖에 나오지 않고서도 그 흥폐(興廢)와 길흉을 아는 것은, 역의 이치는 도(道)를 갖추고 있으며, 도의 본체(本體)는 나에게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 위의(威儀)를 삼가고 조심함은 덕(德)의 짝이다. 그것이 정(情)에 있으면 희로애락이 되고, 몸에 있으면 언어 행동이 된다. 그것이 몸가짐에 있으면 읍하고 사양하며 오르내리고, 관대(冠帶)에 있으면 보불(黼黻)을 수놓고 의관(衣冠)을 바르게 하고 첨시(瞻視)를 높여 엄연히 사람이 바라보고 두려워하게 하는 것이다.
○ 임금의 몸은 천지(天地)와 같아 크게 포용하여 밖이 없고, 해ㆍ달과 같이 항상 밝아서 잘 비추며, 산악과 같아 두텁고 무거워서 옮기기 어려우며, 강과 같아 깊고 넓게 적셔주면서도 마르지 않는다.
○ 유능한 군주는 반드시 일이 커지기 전에 미리 막아, 화근이 우물쭈물하는 데서 자라지 못하게 해야 한다. 화근이란 무엇이냐? 청담고론(淸談高論)은 화의 근원이요, 궁실이나 원유(園囿)는 화의 터전이다. 무익한 것을 함부로 숭상하는 것은 화의 번짐이요, 사랑 받는 여인이 은밀히 들어가 임금을 뵙는 것은 화의 근원이다. 간사한 무리가 아첨하고 참소하는 것은 화의 매개요, 주연을 베풀고 흥청거리는 것은 화의 날개요, 사냥하고 유람하는 것은 화의 형틀을 지고 정수리를 마멸시키는 것이다.
○ 태평한 세상의 정치는 간소하면서도 무게가 있고, 어지러운 세상의 정치는 번거로우면서도 가볍다.
○ 옛사람은 어버이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일찍이 잠깐 동안도 마음에서 잊어 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명절에는 배례하고 성묘하며, 제삿날이면 추천(追薦)한다. 산소(山所)에서는 잡목을 금하고, 소나무나 가래나무를 심는 것이 모두 추모의 정을 다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동봉서(東峯書)〉
○ 송진으로 단술을 만들면 술을 대용할 수 있는데, 먹기가 좀 쓰기는 하지마는 술은 독이 있으나, 이것은 독이 없으니 오장(五臟)을 편안케 할 것이다. 〈추강(秋江)에 답한 편지〉
○ 수(數)에는 대기(大期)가 있고 소기(小期)가 있으니, 대기는 음양이 한번 닫혔다가 열림이요, 소기에는 한 시간에 다하는 것이 있고, 하루에 다 하는 것이 있고, 한 달에 다하는 것이 있고, 한 해에 다하는 것이 있고, 한 대(代)에 다하는 것이 있다. 시간에 다하는 것은 기후(氣候)요, 날로 다하는 것은 낮과 밤이요, 달로 다하는 것은 초하루 그믐이요. 해로 다하는 것은 더위와 추위요, 대로 다하는 것은 인간 세상과 인물(人物)이 함께 죽는 것이다. 〈동봉서〉
○ 요즘 과거볼 때에 쓰는 문장을 보면 아름다운 듯하나 따지고 보면 뜻이 없다. 그 말이 비록 입에 흐르는 듯하나 새벽 이슬이나 봄 서리와 같다.
○ 곡식을 심는다는 것이 보리에서 조에 이르기까지 이삭이 고개를 숙이고 밤이 여물어 거두어들이는 것이 수십 섬이나 될 것인데 며칠 안 가서 산쥐가 모조리 없애 버리어 남은 이삭이라고는 없어진다. 만일 모자라서 입에 풀칠하기 위하여 포철(鋪餟 하는 일 없이 관록을 타 먹음)을 구한다면 선비의 지조는 땅에 떨어질 것이다. 〈유양양(柳襄陽)에게 준 편지〉
○ 산림에 사는 선비는 삼베옷이 남루하여 겨우 무릎을 감추고 갈건(葛巾)이 드러나 머리털을 가리지 못한다. 〈산림서〉
○ 북극성은 하늘의 중추(中樞)로서 늘 그 자리에 있어 움직이지 않아 기(氣)의 주인이 되고, 하늘의 중심에 있어서 수레바퀴의 굴대와 같고 맷돌의 배꼽 같아서 움직이려 하여도 움직일 수 없다. 〈동봉서〉
○ 수(壽)를 연장하는 방법은 언어를 삼가고 음식을 절제하며, 탐욕을 줄이고 잠을 가벼이하며, 희로(喜怒)를 알맞게 하는 것이다. 대개 언어에 절도가 없으면 허물과 걱정이 생기고 음식에 절제를 잃으면 몸이 허약해진다. 탐욕하면 위란(危亂)이 일어나고, 잠이 지나치면 게으름이 생기며, 희로가 알맞음을 잃으면 그 성명(性命)을 보전하지 못한다.
○ 우(虞 염려)는 생각의 즈음이요, 복(福)은 경사의 기본이요, 연(宴)은 편안함의 때요, 화는 독의 싹이다. 그러므로, 제왕의 업은 우려(憂慮)로써 흥하고 일예(逸豫 편하게 즐김)로써 망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 잘 다스리는 사람은 다스리기를 원하는 데 뜻이 있는 것이 아니요 순응하는 것이다. 다스리고자 하면서 몸소 실천하지 아니하면 백성이 배반하는데, 백성이 배반한다고 하여 형벌을 가하면 위태한 길이다.
○ 뜻이란 마음이 가는 것이니, 뜻이 이르는 곳에는 아무리 굳어도 들어가지 못할 것이 없고 높아서 이르지 못할 것이 없으니, 그 나아가는 방향에 사(邪)와 정(正)의 구분만이 있다.
○ 지금 속인들은 무식하여 위세(位勢)가 있으면 하루살이나 개미가 태양에 향하는 것과 같고, 위세를 얻으면 꼽추가 굽히지 못하는 것과 같아서 아첨하고 비위를 맞추어 주는 것을 기쁨으로 삼는다.
○ 여러 봉우리 청산과 한 조각 흰구름은 불청객(不請客)이 되고, 말 없는 짝이 된다.
○ 만년에는 유독 거리의 개구쟁이나 미치광이와 함께 놀며, 취하여 길가에 쓰러져 늘 바보짓을 하고 항상 웃으며 출입이 무상하니 사람들이 그의 정체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사우명행록》
○ 세조가 섭정한다는 말을 듣고 수락산 정사(水落山精舍)로 들어가 살면서 유생(儒生)을 보면 말할 적마다 공맹(孔孟)을 일컫고, 수련(修練)하는 일에 대하여 묻는 이가 있으면 말하려 하지 아니하였다. 상동
○ 성시(城市)에 노닐면 빈 배가 물결을 타듯하고, 산림에 숨어서는 외로운 구름이 쓸쓸히 흩어지는 것 같다. 〈동봉서〉
○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는데 여러 중들이 추앙하여 신사(神師)라 하였으며, 섬기기를 지성껏 하였다. 하루는 함께 청하기를, “저희들은 방법에 어두우니 금비(金篦 금으로 만든 살촉 같은 것으로 안질에 쓰는 도구인데, 여기서는 깨우친다는 말이다.)의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하니, 동봉이 말하기를, “좋다. 법연(法筵)을 크게 열라.” 하고, 가부좌(跏趺坐)로 앉았다. 중들이 모여서 꿇어앉아 귀를 기울여 듣고 있었다. 동봉이 말하기를, “소 한 마리를 몰고 오라.” 하니, 여러 사람들이 소를 끌어다가 뜰 아래 매었다. 또 말하기를, “꼴 다발을 가져오라.” 하여 소 뒤에 놓게 하고 크게 웃으며, “너희들이 법어(法語)를 듣고자 함이 이와 같은 것이다.” 하니, 중들이 얼굴을 붉히고 물러갔다. 소는 가축 중에서 가장 우둔한 것이다. 사람으로서 사리에 어둡고 무식한 자를 속인(俗人)들은 ‘소 뒤에 꼴 놓기’라고 한다. 《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 추강(秋江)과 더불어 속세를 벗어난 사람이 되어, 미친 듯이 읊조리고 방랑하면서 세상을 희롱하였다. 세상을 도피하여 불도(佛徒)가 되었으나 그 법을 받들지 아니하였으며, 늘 거리를 지나가다가 한 군데를 응시하면서 돌아가기를 잊어버리고 한참 동안 박은 듯이 서 있기도 하고, 혹은 문득 거리 길을 돌아서 가면 여러 아이들이 기와조각을 던져 쫓았으므로 세상 사람이 미치광이 중으로 지목하였다. 상동
○ 금오산에 들어가 글을 지어 석실(石室)에 간직하고 말하기를, “후세에 반드시 알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그 글은 대개 기이한 이야기들을 기술한 것으로 우의(寓意)가 있다. 《전등신화(剪燈新話)》를 본떠서 지은 것인데 곧 《금오신화(金鰲新話)》이다. 상동
○ 세로[竪]로 말하면, 해와 달의 왕래, 별들의 운행, 추위와 더위의 갈마들음, 음양의 교대, 차고 비고 성하고 쇠함이 모두 기(氣)요, 가로[橫]로 말하면, 산천과 악독(岳瀆)의 융결(融結), 비바람과 서리와 이슬들의 시행(施行), 초목의 자라고 마름, 인물의 움직이고 쉼, 성현(聖賢)의 어리석은 무리와의 구별, 청탁과 순수와 잡박(雜駁)의 가지런하지 않음은 모두 기가 천지 사이에 붙어 있는 것이다. 〈복기편(服氣篇)〉
○ 복기(服氣)란 오신(五神)을 지키고 사정(四正)을 따르는 것이다. 5신은 심장ㆍ간장ㆍ허파ㆍ지라ㆍ콩팥이요, 4정은 말ㆍ행동ㆍ앉기ㆍ서기를 바르게 함이다. 상동
○ 잘 다스리는 임금은 군자를 대접하기를 지초와 난초같이 하고, 소인을 피하기를 범이나 뱀과 같이 한다. 〈군자와 소인의 변(辨)〉
○ 만약, 좋은 날을 만나면 맑은 물과 향불을 갖추어 옛 선현에게 예배하고, 혹은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 명월(明月)을 맞이하면 눈물을 뿌리면서 돌아오기를 잊어버리곤 하였다. 〈집서(集序)〉
○ 청한자의 시구(詩句)의 용어(用語)는 성률(聲律)에 구애 받지 않으나 전장(典章)이 문란하지 아니하고, 사화(詞華)를 꾸미지 아니하나 큰 옥덩어리처럼 더욱 아름답다. 〈집서〉
○ 성질이 간이(簡易)하고 꾸밈이 적으며, 성품이 또 세상 물정에 어두운 데가 많았다. 그러므로, 담론이 맹랑하며 세속을 희롱하였다. 〈집서〉
○ 성품이 매인 데가 없고 호탕하여 세상 형편에 따라 융통성 있게 처세할 수가 없어, 드디어 때로는 중에게 때로는 속인에게 형적을 의탁하여 명산을 두루 찾아다니면서 가슴속에 쌓인 많은 불만을 발산시켰다. 〈집서〉
○ 모여든 중생의 승업(勝業)을 위하여 한 절에 들어가 그 중들에게 화전(火田)을 갈기를 권하여 거두어들인 것이 조금 푸짐했다. 곧 나무를 깎아서 통을 만들어 산골짜기에 늘어놓고 그 안에다가 술을 빚어 두고 표주박으로 퍼먹기를 몇 달이 지나서야 그만두었다. 그가 세상을 비분(悲墳)함이 이와 비슷한 것이 많았다. 〈집서〉
○ 의사란 진실로 반치(反置 약을 짓는 데나 병을 고치는 데 있어서 두고 안 둘 것을 잘 가림)를 알맞게 할 수 있다면 이끼나 쇠똥과 말똥 따위로도 목숨을 살릴 수 있을 것이니, 그런 사람은 모두 양의(良醫)다. 〈인재설(人才說)〉
○ 목수가 진실로 단점은 버리고 장점을 취할 줄 알면 큰 것은 대들보가 되고, 가는 것은 서까래가 될 것이며, 부소(扶蘇)의 줄기나 나무 조각 하나가 모두 아름다운 재목으로 쓰일 수 있을 것이다. 상동
○ 인생이 하늘과 땅 사이에서 명리(名利)에 급급하고 생업에 골몰함이 마치 뱁새가 능초[苕]에 연연하고 박[瓠]이 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과 같으니 어찌 슬프지 않으랴. 《유관서록(遊關西錄)》
○ 일찍이 어느 깊은 산에서 표주박 한 개를 가지고 암자 뒤의 폭포를 받아 손에 받들고 꿇어 앉아 인시(寅時 밤 4시)로부터 유시(酉時 오후 6시)까지 꼼짝도 않고 있었다. 만약 물이 쏟아지면 다시 부어서 유시에서 인시까지 여전히 받들고 꿇어 앉아 있었다. 《소문쇄록(謏聞瑣錄)》
○ 잘 드는 칼 같은 어금니가 있어, 또 제 수레바퀴의 고임 나무를 물어서 내가 가지 못하게 하였고 또 다시는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게 한다. 상동
○ 동봉이 종이나 밭과 집을 남이 빼앗아 가는 대로 내버려 두고 일찍이 마음을 쓰지 않고 있다가 다시 그 사람을 따라가 돌려달라 하고, 몸소 관가에 가서 맞대고 싸우며 떠들어대기를 거리의 장사치들의 다툼질 하듯 하였다. 마침내 시비가 가려져 관의 문서[官卷]가 이루어지매 소매 속에 넣고 문밖에 나와서 하늘을 쳐다보고 크게 웃고는 갑자기 문서를 꺼내어 발기발기 찢어서 도랑 속에 던졌다. 그가 사람을 희롱하고 속세를 업신여김이 이와 같았다. 《수언(粹言)》
○ 관동을 유람하고 난 뒤 호남에 이르니, 주민들이 부유하고 물산이 넉넉하기가 관동에 4ㆍ5배나 되었다. 백제가 이것에 의지하여 강했으며 교만하여 망한 것이다. 《유호남록(遊湖南錄)》
○ 만 길 낭떠러지 쳐다보기도 힘드는데 / 蒼崖萬丈仰難企
뇌우가 이 돌 위의 버섯을 길렀구나 / 雷雨長此石上耳
안은 터실터실하나 겉은 매끈한데 / 內面髼鬆外面滑
따다가 매만지니 맑기가 종이 같도다 / 摘來煩摑淸似紙
〈석이버섯을 읊음〉
○ 아름다운 돌이 가시 얽힌 산꼭대기에 있고 / 美石在荊顚
밝은 달이 깊은 못에 잠겼도다 / 明月沈重淵
양공의 쪼음을 만나지 못하니 / 不遇良工琢
누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보배인 줄을 알리 / 誰知無價珍
동봉의 시
○ 옷과 관과 신은 백성의 가죽[皮]이요, 술과 밥 따위의 음식물은 백성의 기름이다. 〈애민의(愛民義)〉
○ 기린은 우리[牢] 안에 매였고 개 돼지가 날뛰는구나 / 麒麟縶牢兮犬豕跳梁
봉황은 조롱 안에 갇혔고 닭오리가 훨훨 나는구나 / 鳳凰鎖籠兮雞鴨翶翔
〈의조상루(擬弔湘纍)〉
○ 한 어린 중이 있었는데 목소리가 맑아서 능히 상성(商聲 비장한 음조)을 낼 줄 알아서 길게 소리를 내어서 읊으면 여운이 공중에 꼬리를 끌어 처량한 느낌이 있었다. 매양 달밝은 때를 만나면 밤중에 홀로 앉아 어린 중으로 하여금 〈이소경(離騷經)〉을 한 번 낭송하게 하고는 문득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시었다.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 심장의 신(神)은 눈으로 나타나는 것이니, 눈이 빛을 탐하게 되어 오래 보면 피를 상하고, 콩팥의 정(精)은 귀로 나타나는 것이니 귀가 소리를 탐하게 되어 오래 들으면 콩팥을 상하고, 지라의 넋[脾魄]은 코로 나타나는 것이니 코가 냄새를 탐하여 냄새를 오래 맡으면 지라를 상하게 된다. 〈수진편(修眞篇)〉
○ 말을 많이 하면 담(膽)을 상하고, 오래 누워 있으면 기(氣)를 상하고, 오래 앉아 있으면 살[肉]을 상하고, 오래 서 있으면 콩팥을 상하고, 오래 걸으면 간을 상한다. 상동
○ 만약, 보지 않고 듣지 않아 눈을 감고 입을 막음이 극에 달하면, 사람도 진화(進化)하지 못한 명령(螟蛉)이나 진흙 속에 도사린 소라와 같을 것이다. 상동
○ 다섯 살에 능히 시를 지었는데, 일찍이 길에서 어떤 노파가 두부를 주자 곧 시를 읊었는데,
품질이 맷돌 속에서 나왔는데 / 稟質由來兩石中
원광이 해가 동쪽에서 솟는 것과 같도다 / 圓光正似日生東
삶은 용, 구운 봉황에는 미치지 못하나 / 烹龍炮鳳雖莫及
머리털이 없고 이 빠진 늙은이에게 가장 적합하구나 / 最合頭童齒豁翁
하였다. 이로부터 이름이 온 나라에 자자하여 사람들이 지목하여 ‘다섯 살’이라고만 불렀고 이름을 감히 부르지 못하였다. 〈행장(行狀)〉
○ 어버이가 죽자 그 무덤자리를 가려 편안히 장사지내는 데 풍수에 구애되지 않았다. 대개 그 편안한 곳을 가리되, 첫째는 흙의 두께를 가리고, 둘째는 물의 깊이를 가리고, 셋째로는 소나무나 가래나무가 자랄 만한가, 넷째는 세상이 바뀌어도 갈아서 밭을 만들 수 없고, 다섯째는 가까워서 시제(時祭)를 지내기에 편리한가. 이 다섯 가지 조건이 갖추어진 뒤에 장사 지내는 것이 군자의 행할 바이다. 비록 시체라도 구천(九泉)에 편안히 거처하게 함은, 역시 인자하고 사랑하는 깊은 뜻을 잊어버리지 못해서다. 〈상장서(喪葬書)〉
○ 경태(景泰 명(明)의 대종(代宗)의 연호) 을해년(1455)에 삼각산에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서울에서 돌아온 사람이 있었다. 세조가 임금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 문을 닫고 나가지 않기를 사흘, 하루 저녁은 갑자기 통곡하더니 그 책들을 모조리 불살라 버리고 거짓 미친 체하여 뒷간으로 빠져 도망하여 머리를 깎고 스스로 설잠(雪岑)이라고 불렀다. 행적(行迹)
천리마가 백락(伯樂)을 만나 갈기를 흔들면서 길게 울고, 백아(伯牙)가 종자기(鍾子期)를 만나 재주를 다하여 거문고를 탔다. 〈동잠서(東岑書)〉
○ 성인(聖人)은 하늘과 땅을 대신하여 말 없이 도를 행한다. 성인은 시키지 않아도 믿는다. 〈천지편(天地篇)〉
○ 잘 다스리는 임금은 형벌은 있고 놓아줌[赦]은 없으며, 매우 잘 다스려진 세상에는 정치에 있어 변경함이 없다. 〈형정의(刑政義)〉
○ 덕(德)은 행(行)의 실속이요, 행은 덕의 나타남이다, 덕이 넉넉하면 행은 저절로 나타나고, 행함에 허물이 없으면 덕이 저절로 빛난다. 〈덕행의(德行義)〉
○ 옛날의 성왕(聖王)은 그 궁실을 낮추고 백성을 편히 살게 하려고 하며, 의복을 아무렇게나 하고 백성을 두껍게 입혀 따뜻하게 하려고 하며, 음식을 변변치 않게 하고 백성을 배불리 먹이고자 하며, 스스로 만족하여 위대한 척하지 않고 백성을 평안하게 하고자 하며, 마음을 가다듬고 조심하여 백성이 언행을 삼가고 조심하게 하고자 하였다. 〈인군의(人君義)〉
○ 임금이 궁실에 있으면 백성의 편안함을 생각하고, 수레나 가마를 탔을 때에는 백성의 화평을 생각하여, 예사로이 바치는 물건도 대견히 여기고 어여삐 여겨야 하니 어떻게 망령되이 무익한 짓을 하여 백성을 구렁텅이에 빠지게 할 수 있겠는가. 〈애민설(愛民說)〉
○ 어진 정치는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하여 이 업을 힘쓰는 데 있을 뿐이다. 그것을 권하는 방법은 번거롭고 시끄럽게 명령을 내려 아침에 깨우치고 저녁에 장려하는 것이 아니라, 거둬들이기를 적게 하고 요역(徭役)을 가볍게 하여 그때를 빼앗지 않음에 있을 뿐이다. 〈매월당설(梅月堂說)〉
○ 한 말을 가지고 평생을 행할 것은 ‘충서(忠恕)’다. 충서로 처하면 변고가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좋은 말이 네 거리를 달리는 것 같아서 비록 천하를 멋대로 달려도 그것을 막지 못할 것이다. 〈상변설(常變說)〉
○ 강직하게 그릇됨을 고치게 하는 것은 쓴 듯하나 실은 달고, 온갖 행동으로 아첨하는 것은 평안한 듯하나 마침내는 위태한 것이다. 군자를 가까이하면 갈수록 가경이요, 소인을 접하는 것은 혜서(鼷鼠)라 몸을 죽이는 독약이다. 〈군자와 소인의 변(辨)〉
○ 지금의 평양 남쪽에 정전(井田)이 있어 길을 경계하여 여덟 집이 정전을 같이 하고 있다. 허물어진 담과 집터가 아직도 남아 있는 듯하다. 매월당(梅月堂)
○ 〈동이음(同異吟)〉이 있는데 이르기를,
같고 다르고 다르고 같고 같고 다르고 다르니 / 同異異同同異異
다르고 같고 같고 다르고 다르고 같고 같도다 / 異同同異異同同
같고 다른 참소식을 알려거든 / 欲知同異眞消息
높고 높은 최상봉에서 보고 알라 / 看取高高最上峯
하였다. 상동
○ 날마다 거문고를 타면서 〈백설(白雪 노래 이름)〉을 노래하니, 거문고 소리를 듣고 그 뜻을 아는 자가 부르지도 않는데 와서 당하(堂下)에서 듣는 것은 반드시 뜻밖의 일이라고 놀랄 것은 없다. 상동
○ 청한자는 유교를 행하면서 불교의 형적(形跡)이요, 성리(性理)에 밝고 불교에 대하여도 널리 알았다. 상동
○ 사람이 나면 팔자가 각기 다르고 수요(壽夭)도 또한 각각 차이가 있으나 같은 배에 탄 사람이 동시에 물에 빠지면 함께 고기 뱃속에 장사지내고, 한 싸움터의 군졸이 동시에 싸움에 지면 간(肝)과 뇌(腦)가 땅에 흩어지는 것은 이것이 대개 천지 만물의 운수가 그런 것이다. 상동
○ 청한자가 하루는 과격히 큰소리로 말하기를, “불교의 이치는 자못 깊다. 그러나 유학은 본래 단계가 있어 건강한 자가 사다리를 올라감과 같아서 가까스로 한 발을 들면 겨우 한 칸에 도달하니, 한 순간에 깨닫는 통괘한 즐거움은 없으나 우유 함영(優遊涵詠 한가롭고 침착하게 학문의 진리를 음미함)의 맛이 있다.” 하였다. 〈매월당서(梅月堂序)〉
○ 하늘과 땅의 호흡(呼吸)은 동지(冬至) 뒤는 ‘호(呼)’가 되고, 하지(夏至)뒤는 ‘흡(吸)’이 되는데 그것은 1년의 호흡이요, 자시(子時) 이후는 ‘호’가 되고 오시(午時) 이후는 ‘흡’이 되는데 이것은 하루의 호흡이다. 상동
수락산(水落山)에 우거(寓居)하고 있을 적에 비 내린 뒤에 산골 물이 불을 때면 종이를 찢어서 종이 조각 1백여 장을 만들어 가지고 반드시 여울이 빠른 곳을 골라 거기에 앉아서 생각에 잠겨 시를 짓는데 혹은 절구(絶句), 혹은 율시(律詩), 혹은 고풍(古風)을 종이에 써서 흐르는 물에 띄워 멀리 흘러가는 것을 보고는 또 쓰고 또 흘러 보내고, 이렇게 하기를 종일토록 하여 종이가 다 떨어져서야 돌아왔다. 척언(摭言)
○ 너는 양 밖의 양이요 / 如是羊外羊
나 역시 사람 밖의 사람이로다 / 我亦人外人
똑같이 물건 밖의 물건이니 / 同是物外物
각기 몸 밖의 몸을 보전하자 / 各保身外身
하였다. 매월당〈영양(羚羊)〉
○ 일찍이 금오산에서 지내면서 《전등신화(剪燈新話)》를 본떠 《금오신화(金鰲新話)》몇 권을 지었는데, 시를 지어 그 책 끝에 쓰기를,
오막살이 푸른 담요 따뜻도 한데 / 矮屋靑氈喓有餘
매화 그림자 창에 가득한 달밝은 밤이로다 / 滿窓梅影月明初
등잔 돋우고 밤새 향 피우고 앉았으니 / 挑燈永夜焚香坐
사람이 보지 못한 책을 볼까 두렵구나 / 恐看人間未兒書
하였다. 《동인시화(東人詩話)》
○ 풍기(風氣)는 무심한 것이어서 풍토가 맞지 않으면 저절로 산천의 독기(毒氣)가 되는 것이니, 사람이 만약 마음이 몸을 지키지 않으면 그것에 닿아서 자연히 병이 되고, 범하면 혹 죽기도 한다. 〈귀신론(鬼神論)〉
○ 매양 옛 도읍(都邑)에 노닐 때마다 반드시 배회하고 머뭇거리면서 비분강개하여 슬피 노래부르며, 몇 달 동안을 돌아갈 줄을 몰랐다. 본집(本集)
○ 평양에 설지(舌池)가 있는데 전하기를 한 노파가 혀를 씻은 곳이라고 한다. 시를 지어 이르기를,
하찮은 이를 탐내다가 큰 은혜를 잊었으니 / 小利貧來忘大恩
한 마디의 말이 만년의 원한이 되었도다 / 一言便作萬年寃
지금 못물이 피로 흐려졌으니 / 至今池水渾成血
사람이 말하기를 미친 할미 혀 씻은 흔적이라네 / 人道癡嫗洗舌痕
하였다. 상동
○ 〈산사(山畬 산전)〉시에
돌밭 험하여 돌투성인데 / 石田多犖确
그나마 절반은 덩굴투성이 / 高下半藤蘿
깊은 산골에 있으니 / 縱是山深處
해마다 구실[科 각종 조세] 면함직하네 / 年年可免科
하였다. 상동
○ 〈나는 그만 못하네[我不如行]〉 두 편을 지어 스스로 탄식하였는데, 하나는,
나는 장자방이 / 我不如張子房
한 권의 소서로 한왕을 도움만 못하다 / 一部素書佐漢王
하였고, 둘째는,
나는 제갈공명이 / 我不如諸葛孔明
두 편의 표를 올려 충성을 다함만 못하다 / 兩章上表輸忠誠
하였다. 상동
○ 동봉의 한 평생 품고 있던 마음을 세상 사람은 엿보지 못하였다. 시를 지을 제 고비 미(薇), 고사리 궐(蕨) 자를 즐겨 쓴 것도 그 뜻이 어디 있는지 모를 일이다. 척언
○ 속은 어둔하고 겉은 약은 것이 소인의 성질이요, 속으로 야무지고 겉은 트인 것이 군자의 길(吉)함이다. 〈환도명(環堵銘)〉
○ 즐거움이란 쾌적함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조화와 쾌적을 귀히 여기는 것이다. 잘 조화되고 쾌적하기 때문에 천지 만물이 그 즐거움을 같이하는 것이다. 〈천지편(天地篇)〉
○ 생(生)을 좋아하는 덕이 백성의 마음에 젖어들고, 인(仁)을 베푸는 혜택이 사방에 흐르면 비바람이 때를 맞추고 음양이 질서 있어, 세상이 태평하여 기린을 매어 둘 수 있고, 까치가 둥지를 틀 것이다. 매월당편(梅月堂篇)

[주D-001]어찌 …… 얻어 : 도홍경(陶弘景)은 양(梁) 나라 때에 산중에 있는 도인(道人)인데, 그의 시에, “산중에 무엇이 있는고, 영(嶺) 위에 흰구름이 많다[山中何所有 嶺上多白雲]”는 글귀가 있다.
[주D-002]송섬(宋纖)의 …… 언덕을 : 남조 시대의 은사(隱士)인데 태수(太守) 마급(馬岌)이 찾아갔다가 보지 못하고 탄식하며 글을 지은 것에. “붉은 벼랑 천 길[丹崖千丈]”이란 글귀가 있다.
[주D-003]벼슬살이는 …… 맵고 : 새앙과 육계(肉桂)는 오래될수록 매워진다. 그러므로 늙을수록 기력이 정정하고 강직한 사람을 가리켜 강계지성(薑桂之性)이라 한다. 《송사(宋史)》에, “새앙과 육계는 늙어서 더욱 맵다.”라는 구절이 있다.
[주D-004]적씨(翟氏) : 도연명(陶淵明)의 처인데, 연명의 뜻을 받아 숨어 사는 가난한 생활을 편안히 하였다.
[주D-005]맹광(孟光) : 후한(後漢)시대 양홍(梁鴻)의 처인데 남편의 높은 뜻을 받아 숨어 살았다.
[주D-006]도인(導引) : 신선한 공기를 체내(體內)로 이끌어 넣는다는 뜻으로, 도가(道家)의 양생법(養生法)이다.
[주D-007]〈이소경(離騷經)〉 : 초(楚) 나라 굴원(屈原)이 간신의 모함으로 임금에게 쫓겨나 애국지성과 울분을 참지 못하여 이소(離騷)라는 장편의 서정시를 지었다. 이(離)는 조(遭), 소(騷)는 우(憂)의 뜻으로 근심을 만났다는 뜻이다.
[주D-008]고기 …… 글 : 신숙주(申叔舟)가 강태공(姜太公)과 엄자릉(嚴子陵) 두 노인의 조어도(釣魚圖)를 내놓으매 공이 이 시를 지어 조롱하였다고 한다.
[주D-009]태공(太公)이 …… 비웃음이요 : 주(周) 나라 문왕(文王)이 위수(渭水) 가에서 처음 만나 태공망(太公望)이라 칭호하고 스승으로 삼았다. 뒤에 무왕(武王)을 도와 은(殷) 나라 왕 주(紂)를 쳐서 주(周) 나라를 세웠다.
[주D-010]엄자릉(嚴子陵) …… 비웃음이다 : 엄자릉(嚴子陵)이 한(漢) 나라 광무제에게 불려갔다가 벼슬을 사양하고 부춘산(富春山) 아래 동강(桐江)에서 낚시질을 하였다.
[주D-011]용방(龍逄) : 하(夏) 나라 걸왕(桀王)의 신하 관용방(關龍逄)인데, 걸왕의 무도함을 간하다가 피살되었다. 은(殷) 나라 주왕(紂王)의 숙부(叔父)로서 주왕의 음란함을 간하다가 죽은 비간(比干)과 나란히 불리우는 충신이다.
[주D-012]난성(欒成) : 난성자(欒成子)인데 춘추시대 진(晉) 나라 대부로 무공(武公)이 진 나라 애공(哀公)을 쳐서 죽이고 난성자에게 상경(上卿)의 높은 벼슬로 불렀는데 난성자가 싸우다 죽었다.
[주D-013]영유(甯兪) : 공자가 칭찬한 영무자(甯武子)이고 위(衛) 나라 대부인데, 나라가 편안할 때에는 드러난 공적이 없는 것 같다가, 나라가 위태하매 충성을 다하여 타국에 잡혀가 죽게 된 임금을 구하여 왔다. 《論語》
[주D-014]왕촉(王蠋) : 전국 시대 연(燕) 나라 장수 악의(樂毅)가 제(齊) 나라를 쳐서 멸하고 획읍(劃邑)이란 시골에 사는 어진 사람 왕촉을 불렀더니 왕촉은,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 하면서 목매어 죽었다.
[주D-015]신포서(申包胥) : 오자서(伍子胥)의 아버지와 형이 죄없이 죽으매 오자서가 초(楚) 나라에서 망명하여 달아나다가 친구 신포서를 보고, “내가 장차 초 나라를 망치리라.” 하니, 신포서는, “자네가 망친다면 나는 회복시키리라.” 하였다. 그 뒤에 오자서가 오 나라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초 나라를 망치매 임금은 국외로 달아났다. 신포서가 진 나라에 가서 구원병을 청할 적에 일곱 날 일곱 밤을 뜰에 서서 울자 진왕이 감동되어 군사를 빌려 주어 신포서가 초 나라를 다시 회복하였다.
[주D-016]굴원(屈原) : 초(楚) 나라의 대부(大夫). 충간(忠諫)이 용납되지 않아 멱라수(汩羅水)에 몸을 던져 죽었는데 울분에 넘친 많은 서정적인 시를 썼다.
[주D-017]장량(張良) : 한(漢) 나라 고조(高祖)를 도와 천하를 통일한 충신으로, 자는 자방(子房)이다. 소하(蕭何)ㆍ 한신(韓信)과 함께 한 나라의 삼걸(三傑)이라 일컫는다.
[주D-018]소무(蘇武) : 한(漢) 나라 무제(武帝) 때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갔다가 잡히어 19년 만에 돌아왔는데, 절개를 굳게 지킨 공으로 전속국(典屬國)을 받았다.
[주D-019]공승(龔勝) : 전한(前漢) 애제(哀帝) 때의 충신으로, 왕망(王莽)이 집권하자 그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단식하여 죽었다.
[주D-020]이업(李業) : 전한(前漢) 말기의 고사(高士)로 왕망(王莽)의 새 조정에 벼슬하지 않고 산중에 숨었더니 뒤에 공손술(公孫述)이 촉(蜀)에서 황제(皇帝)라 칭하고 업을 부르기를, “오면 공후(公侯)의 높은 벼슬로 대접할 것이요, 오지 않으려면 이 약을 먹으라.” 하고, 독주(毒酒)를 보내니 업은 마시고 죽었다. 공손술이 크게 놀래 부의로 비단 백 필을 보내자 업의 아들은 도망하고 받지 않았다.
[주D-021]무후(武侯) : 유비(劉備)를 도와 촉한(蜀漢)을 세운 제갈량(諸葛亮).
[주D-022]악비(岳飛) : 남송(南宋)의 무장이며 충신으로서, 여러 차례 금인(金人)의 침입을 격퇴하여 용명을 떨쳤다.
[주D-023]문천상(文天祥) : 남송(南宋) 말기의 충신. 수도 임안(臨安)이 함락된 후 임금을 받들고 근왕군(勤王軍)을 일으켜 원(元) 나라 군사에 대항하였으나 실패, 사로잡혀 유폐(幽閉) 생활 3년에 참형을 당하였다. 그의 〈정기가(正氣歌)〉는 옥중에서 지은 것으로 후세의 충신과 의사(義士)들을 고무하였다.
[주D-024]대춘(大椿) : 전설상의 큰 나무 이름으로 인간의 3만 2천 년을 1년으로 한다고 하며, 장수(長壽)함을 대춘지수(大椿之壽)라고 한다.
[주D-025]보불(黼黻) : 옛날 임금의 대례복(大禮服)에 놓은 수인데, 보(黼)는 검은빛과 흰빛으로 도끼의 모양을 수놓은 것이요, 불(黻)은 검정과 파랑으로 아(亞)자 모양을 수놓은 것이다.
[주D-026]천리마가 …… 울고 : 백락은 말이 좋고 나쁨을 잘 감별하였다고 한다.
[주D-027]백아(伯牙)가 …… 탔다 : 백아는 춘추시대의 거문고를 잘 타던 사람. 종자기는 같은 시대의 초(楚) 나라의 음악가인데, 종자기가 백아의 거문고 소리를 듣고 그 곡조를 잘 알아들었고 그 마음도 깨달았다고 한다.
[주D-028]혜서(鼷鼠) : 쥐의 일종인데 주둥이에 독이 있어 사람을 물면 죽는다. 그러나 그 주둥이에 사람이 물려도 아픔을 느끼지 않고 도리어 유쾌한 기운을 느끼므로 죽어도 모른다.
[주D-029]정전(井田) : 중국 삼대(三代) 때의 농지 분배의 제도인데, 1리 사방의 농지를 상(井)자형으로 9구역을 만들어 가운데 1구역을 공전(公田), 다른 8구역을 사전(私田)이라 하여 백성의 8집에 나누어 각각 농사를 지어 차지하고, 공전은 8집이 공동으로 농사를 지어 나라에 바치게 하였다.
[주D-030]《전등신화(剪燈新話)》 : 명(眀) 나라의 구우(瞿佑)가 지은 괴담(怪談) 소설집으로 21편이 실려 있다.
[주D-031]금오신화(金鰲新話) : 김시습(金時習)이 금오산에 살면서 지은 우리 나라 최초의 한문소설로서 단편 소설집이다. 중국의 《전등신화》를 본떠서 지은 것인데 현재에는 다음의 5편만이 남아 있다.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남염부주지(南炎浮州志)〉〈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
[주D-032]소서(素書) : 진(秦) 나라의 황석공(黃石公)이 짓고. 송(宋) 나라 장상영(張尙英)이 주석을 붙인 책인데, 도(道)ㆍ 덕(德)ㆍ 인(仁)ㆍ 의(義)ㆍ 예(禮)의 다섯을 일체로 삼아 부드러움으로써 강함을 누르고 물러감으로써 나아감을 꾀한다는 이치를 말한 것이다.


 

대연유고

 

순조 4 1804 갑자 嘉慶 9 38 가을, 水落山과 道峯山을 유람하고 金流瀑布와 玉流瀑布를 구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