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 시조공에 대한 기록/휘 비감(祕監) 최선(崔詵)

비감(祕監) 최선(崔詵)에게 바치다

아베베1 2011. 7. 3. 11:30

동국이상국전집 제3권
 고율시(古律詩)
비감(祕監) 최선(崔詵)에게 바치다


세상 지내온 것이 마치 꿈같고 / 閱世渾如夢
괴로운 인생 또한 무거운 짐이다 / 勞生亦劇擔
형상은 남곽의 나무에 부끄럽고 / 形慙南郭木
몸은 소릉의 남목과 비슷하다 / 身髣少陵楠
한번 날았으나 홍곡(鴻鵠)처럼 웅비한 것은 아니었고 / 一擧非雄鵠
세 번 자니 이미 늙은 누에가 되었다 / 三眠已老蠶
잠깐 벼슬한 것도 만족한데 / 薄遊甘得得
높은 자리 부질없이 엿보았네 / 高視謾耽耽
훌륭한 말 없어 북쪽이 비었으니 / 馬種徒空北
붕새가 감히 남쪽을 도모하랴
/ 鵬圖敢跂南
집에 있을 때는 사영운이 부처 멸시하던 일 생각하고 / 家思靈運佛
삶에 있어서는 남자된 것 계기처럼 즐거워했다 / 生樂啓期男
근심이 있어야 술맛을 제대로 알고 / 酒味愁偏識
늙어갈수록 인정을 깊이 안다 / 人情老漸諳
오늘 아침에 옛친구 만나 / 今朝逢舊友
해가 지도록 잔뜩 취한다 / 終日倚高酣
훌륭한 그의 아들이 / 鳳穴毛新好
사자(嗣子) 종재(宗梓)가 나를 찾아왔기에 말한 것이다.
누추한 집 찾아온 것 부끄럽다 / 蝸廬訪可慙
취중에 좋은 글 보고 / 醉看紅蜃筆
그를 따라 나섰네 / 出逐紫鸞驂
최군이 시를 지은 뒤에 나더러 자기 집에 가기를 권하였다.
해진 소매에 보푼 종이를 품고 / 破袖懷毛紙
귀문(貴門)의 말석에 참여하였다 / 高門殿玉簪
난초는 뜰 아래 빼어났고 / 蘭誇庭下秀
구슬은 손바닥에서 빛난다 / 珠媚掌中貪
최씨 집의 여러 아들을 가리킨 것이다. 두시(杜詩)에 “손바닥에 새로운 구슬을 탐하여 본다.[掌中貪看一珠新]” 하였다.
겸가(蒹葭)가 옥수(玉樹)에 의지하고 / 蒹倚怜他玉
푸른 빛이 진하니 내 쪽빛이 무색하다 / 靑深愧我藍
왕찬이 오는 것을 누가 놀라랴 / 孰驚王粲至
부질없이 아융과 얘기했구나 / 空與阿戎談
술자리에 촛불이 켜지고 / 酒席初廻燭
쟁반에는 가늘게 황감을 쪼개 놨다 / 霜盤細剖柑
가난하기는 비록 빙자같이 차나 / 貧雖氷子冷
말은 밀옹같이 달다 / 言作蜜翁甘
예전 것 말하면 부끄러울 것이 없고 / 說古誠無恧
지금 것 논해도 꽤 참여한다 / 論今亦頗叅
하늘을 얘기하면 팔팔에서 끝나고 / 談天終八八
도에 들어가는 것은 삼삼이 뒤졌다
/ 入道後三三
술잔의 횟수가 점점 많아지니 / 漸及觥籌簇
함장의 자리인 것도 잊었다 / 還忙席丈函
새벽에 한번 뵈오면 / 遲明如一謁
문자로 다시 즐기리라 / 文字更相耽


 

[주D-001]남곽의 나무[南郭木] : 고목나무처럼 흔들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장자(莊子)》제물론(齊物論)에 “남곽자기(南郭子綦)가 궤에 기대 앉아서 하늘을 쳐다보며 멍하니 자기 몸을 잊은 것 같았다. 안성자유(顔成子游)가 앞에서 모시다가 ‘형상을 고목(枯木)과 같이 할 수 있으며 마음을 재[灰]와 같이 할 수 있습니까?’ 했다.” 하였다.
[주D-002]소릉(少陵)의 남목(楠木) : 소릉은 두보(杜甫)의 호이고, 남목은 두보의 시 ‘楠木爲風雨所拔歎’에 나오는 나무로 훌륭한 재목감이 비바람에 뽑힌 것을 슬퍼한 것인데, 자신의 신세를 비유하였다.
[주D-003]훌륭한……도모하랴 : 옛날에 백락(伯樂)이 말을 잘 알아보았는데 그가 한번 기북(冀北)을 지나면 훌륭한 말을 모두 골라내어 기북의 들이 텅 빈 것같이 되었다고 한다. 붕새는 《장자(莊子)》에 나오는 상상조로 매우 커서 한 번에 9만 리를 난다고 한다. 여기서는 자기를 알아줄 백락 같은 사람이 없으므로 붕새같이 웅지(雄志)를 펴보고 싶어도 못한다는 뜻이다.
[주D-004]사영운(謝靈運)이……일 : 사영운이 부처를 신봉하던 맹의(孟顗)를 멸시했기 때문이다.
[주D-005]삶에……즐거워했다 : 공자(孔子)가 태산(泰山)에서 영계기(榮啓期)가 녹구(鹿裘)를 입고 새끼 두르고 거문고를 타며 노래하는 것을 보고 무엇이 그리 즐거우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하늘이 만물을 내매 사람이 가장 귀한데 내가 사람이 되었으니 한 가지 낙이고, 남자는 귀하고 여자는 천한데 내가 남자가 되었으니 두 가지 낙이고, 사람이 나서 일월을 보지 못하고 강보에서 죽는 자가 많은데 내 나이 90이니 이것이 세 가지 낙이다.” 하였다. 《列子 天瑞》
[주D-006]겸가(蒹葭)가……의지하고 : 겸가는 갈대인데, 갈대같이 변변찮은 자가 옥으로 만든 나무같이 훌륭한 인물에게 의지한다는 뜻이다.
[주D-007]푸른빛이……무색하다 : 푸른빛은 쪽빛에서 나왔지만 쪽빛보다도 더 푸르다는 것으로 즉 후진이 선생을 앞지른다는 뜻이니, 최씨의 아들들을 추어준 말이다.
[주D-008]왕찬(王粲) : 삼국(三國) 시대 사람. 박학다식(博學多識)한 재사(才士)이다.
[주D-009]아융(阿戎)과 얘기했구나 : 아융은 남의 아들을 일컫는 말이다. 진(晉) 나라 때 왕융(王戎)은 혼(渾)의 아들이다. 완적(阮籍)이 혼과 교제하였는데 20세나 아래인 융과도 교제하면서 혼에게 “그대와 말하는 것보다 아융(阿戎)과 이야기하는 것이 낫다.” 하였다.
[주D-010]빙자(氷子) : 우박의 이칭(異稱)이다.
[주D-011]밀옹(蜜翁) : 달콤하게 말 잘하는 사람.
[주D-012]하늘을……뒤졌다 : 팔팔(八八)은 곧 《주역(周易)》의 육십사괘(六十四卦)를 말한 듯하고, 삼삼(三三)은 곧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구궁(九宮)을 의미한 것 같다.
[주D-013]함장(函丈)의 자리 : 지팡이를 용납하는 자리로, 후에 스승을 함장이라 일컬었으니 강석(講席)이라는 뜻과 같다.

고려사절요 제12권
 명종 광효대왕 1(明宗光孝大王一)
경자 10년(1180), 송 순희 7년ㆍ금 대정 20년


○ 정월에 금 나라에서 소부감(少府監) 노공(盧珙)을 보내 와서 생신을 축하하였다.
○ 경성(京城)에 도적이 많이 일어났는데, 경대승의 도방(都房)이라고 자칭하였다. 유사(有司)가 체포하여 가두면 대승은 번번이 놓아 주었다. 이 일로 말미암아 드러내 놓고 약탈을 감행하여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꺼림이 없었다. 이의민은 대승이 자기를 해치려고 한다는 것을 들은 뒤로부터 항상 용사(勇士)들을 자기 집에 모아서 경비하였는데, 또 도방(都房)에서 꺼리는 자를 해치려 한다는 말을 듣고, 의민은 더욱 두려워하여 마을의 거리에 큰 문을 세워서 야경(夜警)하게 하며 여문(閭門)이라고 불렀다. 서울 안의 동리들이 다 본받아 여문을 세웠다.
○ 2월에 비로소 궁궐을 영조(營造)하였다.
○ 여름 6월에 이득옥(李得玉) 등 29명과 명경(明經) 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금 나라의 횡선사(橫宣使) 소부감(少府監) 곽희국(郭喜國)이 왔다.
○ 장군 경대승의 문객이 양가의 아들을 죽였으므로 담당관이 체포하여 치죄하고자 하니, 대승이 힘써 구원하여 죄를 면하게 되었다.
○ 왕이 총애하는 나인 명춘(明春)이 죽자 왕이 애련(哀戀)해 마지않으며 목놓아 울부짖으니, 태후가 놀라 너그럽게 마음먹도록 깨우치기를, “비록 정이 깊어서 그렇더라도 중방에까지 들리게 하여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오열을 그칠 수가 없어 드디어 친히 도망시(悼亡詩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는 시)를 짓고 종친(宗親)들로 하여금 화답하는 시를 지어 올리게 하여 스스로 위로하였다. 왕은 천품이 잔약한 데다가 여러 번 변고를 겪어서 자칫하면 곧 놀라고 두려워하여, 대체로 군국의 기무는 다 무신들에게 견제되었으며, 말소리나 얼굴표정에 이르기까지도 감히 자신의 뜻대로 하지 못하였더니, 적신(賊臣)이 주멸됨에 이르러 비로소 여자의 정에 빠지게 되었다. 내폐(內嬖 임금이 총애하는 나인(內人))로서 총애를 한몸에 받은 자가 5명이었고, 그 중에서도 더욱 총애하는 자는 순주(純珠)ㆍ명춘(明春) 2명뿐이었다. 지난해 겨울 이후로 순주가 죽고 명춘이 또 죽으니, 후궁에 마음을 기쁘게 해 줄 만한 자가 없었다. 이에 두 공주를 궁내에 불러들여 의복 등절의 여러 가지 일을 맡게 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였으며, 간혹 이불을 같이 덮고 함께 자기도 하며, 돌보고 생각하는 것이 가히 말할 수 없는 것도 있었다. 그의 사위가 여러 달을 혼자 살게 되니 분하고 성남을 참지 못해서 드디어 이혼하고자 하매, 왕이 듣고 곧 사위를 불러들여 태후궁(太后宮)에 살게 하고, 날마다 공주로 하여금 미복(微服) 차림으로 가 보고 위로하게 하더니, 11월에 이르러 공주를 자기집으로 돌려 보냈다. 또 순주ㆍ명춘과 여러 폐첩들이 낳은 어린 계집애 수십 명을 궁중에 불러 모아 모두 알록달록한 옷을 입히고 구거(鳩車 어린아이를 태우는 손수레)에 태워 안뜰에서 즐겨 놀게 하니, 울고 부르짖고 떠들고 시끄럽게 하는 품이 궁금(宮禁)과 같지 않으므로, 무신들이 모두 속으로 비웃고, 혹은 서로 얘기하면서 탄식하는 자도 있었다.
왕은 의종(毅宗)이 효제(孝悌)하지 못한 것을 경계로 삼았기 때문에 즉위한 이래로 지성껏 태후를 섬기고 종척(宗戚)들에게 돈목(敦睦)하였다. 태후가 유종(乳瘇)을 앓게 되자 아우인 승려 충희(冲曦)를 불러다가 시병(侍病)하게 하였더니, 희가 많은 궁녀에게 난행하고 또 공주를 간통하여 더러운 소문이 외부에 들렸다. 우사간(右司諫) 최선(崔詵)이 소를 올려 희의 추잡한 행위를 슬며시 돌려 말하고 내보내기를 청하니, 왕이 보고 크게 놀라며 이르기를, “사간이 우리 형제를 이간시킬 줄 몰랐다." 하고 드디어 선을 파면시켰다. 그 뒤로 대간(臺諫) 중에 감히 말하는 자가 없으며, 조정의 신하들은 모두 희에게 아부하여 뇌물이 공공연하게 행하여졌다.
○ 가을 7월에 중방에서 종참(宗旵) 등 10여 명의 중을 섬에 귀양보내었다. 이전에, 종참 등이 정균과 더불어 이의방을 음모하여 죽이고, 드디어 균과 친근하여져서 후정(後庭)에 드나들면서 꺼리는 데가 없었다. 균이 죽게 되자, 당시의 무신들이 모두 의방의 휘하(麾下)에 있었고 또 군국(軍國)의 권력이 중방에 귀속하게 된 것은 실로 의방의 힘에 의한 것이라고 하여 드디어 그들을 귀양보낸 것이다.
○ 참지정사 이소응(李紹膺)이 졸(卒)하였다. 소응은 봉록과 지위를 탐내고 미련을 가져서 나이 70이 넘었으나 치사(致仕)하지 않았다.
○ 9월에 이죄(二罪 참형ㆍ교형의 죄) 이하의 죄로 귀양간 자를 석방하였다.
○ 겨울 10월에 경대승에게 무소뿔로 만든 붉은 띠 한 벌과 말 한 필을 하사하였다.
○ 11월에 중수하던 강안전이 이룩되매, 문액(門額)을 향복(嚮福)이라고 하였다. 그곳이 중방과 가까웠으므로 무신들이 의논하기를, “향복은 항복과 음이 서로 비슷하니, 아마 문신들이 이것으로 무관들의 운세를 눌러 항복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하고, 그 문액을 고치기를 주청하매, 평장사 민영모에게 명하여 고치게 하였더니 영희(永禧)라고 하였다. 무신들이 다시 말하기를, “문신의 뜻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니, 영희라는 말이 따로 깊은 뜻이 있는 것인지 어찌 알겠는가. 희(禧)는 복(福)이지만 영(永)이라는 글자의 뜻은 길한 것인지 흉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중(重)자는 본 중방의 칭호이다."하고, 중희(重禧)로 고치기를 청하니, 왕이 이를 좇았다.
○ 비서소감 왕도(王度)를 금 나라에 보내어 횡선사(橫宣使)를 보내 준 것을 사례하고, 낭장 심진승(沈進升)은 생신을 축하하여 준 것을 사례하고, 병부낭중 진사룡(陳士龍)은 신년을 축하하게 하였다.
○ 12월 계미일 낮에 태백성이 나타나 하늘에 뻗쳤다.
○ 장군 경대승이 태자부 지유별장(太子府指諭別將) 허승(許升)과 어견룡행수(御牽龍行首) 김광립(金光立)을 죽였다. 대승이 중부 등을 죽인 뒤부터 항상 두려움을 품어서 자기 집에 많은 장사(壯士)를 길렀는데, 긴 베개와 큰 이불을 마련하고 날마다 윤번으로 숙직하게 하였다. 어떤 때는 자신이 이불을 함께 덮어 정성스럽고 간곡한 정의를 표시하기도 하였다, 허승 등은 그와 공을 같이 세웠음을 믿고 거만하고 방자스럽게 굴며, 몰래 불량배들을 기르며, 또 동궁(東宮)을 가까이 모시고 있으면서 뒷벽에 기대누워서 밤새도록 노래부르고 피리를 불며 방약무인하게 구니, 대승이 꺼려서 허승을 자기 집에 불러다가 베어 죽이고, 또 길에서 광립을 만나 그 자리에서 죽였다. 군사들로 자신을 호위하고 대궐에 나아가 아뢰기를, “승 등이 그 마음이 방자하여 다만 신 등을 죽이고자 할 뿐 아니라 또 반역을 도모하였으므로, 일이 급박하여서 아뢰어 올릴 겨를이 없어서 이미 베어 죽였습니다." 하였다. 왕이 근신에게 명하여 위로하였으며, 재상 이하가 모두 그의 집에 모여서 치하하였고, 어떤 이는 편지를 보내어 치하하니, 대승은 스스로 조금 안심되어 군사의 호위를 폐지하였다.
○ 최충렬을 중서시랑 평장사로, 한문준(韓文俊)을 참지정사로, 최우청(崔遇淸)을 추밀원사로, 이응초(李應招)를 지추밀원사로, 최세보(崔世輔)를 동지추밀원사로 삼았다.


고려사절요 제13권
 명종 광효대왕 2(明宗光孝大王二)
임자 22년(1192), 송 소희 3년ㆍ금 명창 3년


○ 봄 정월에 금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와서 생신을 하례하였다.
○ 2월에 평장사 이혁유(李奕㽔)가 졸하였다. 혁유는 명문(名門)에 나서 자랐으나 부귀로써 남에게 교만하지 않으니 그를 존중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까닭으로 경인ㆍ계사년의 난리에 화를 면하게 되었으나, 만년에는 천첩(賤妾)을 지나치게 사랑하여 집안을 다스리지 못하니, 당시의 의논이 그를 부족하게 여겼다.
○ 여름 4월에 이부상서 정국검(鄭國儉)과 판비서성사(判祕書省事) 최선(崔詵) 등에게는 《자치통감》을 교정하게 하고, 주(州)ㆍ현(縣)으로 하여금 판각하여 바치게 하여 시종(侍從)하는 유신(儒臣)에게 나누어 주었다.
○ 손희작(孫希綽) 등 29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5월에 제(制)하기를, “옛날 밝은 임금이 천하를 교화할 적에 절검(節儉)을 숭상하고 사치를 물리쳤으니, 풍속을 후하게 하려는 까닭이다. 지금 풍속이 부화(浮華)를 숭상하여 무릇 공사간(公私間)에 잔치를 베풀 적에는 남보다 낫기를 다투어, 곡식을 진흙과 모래같이 쓰고 기름과 꿀 보기를 뜨물찌꺼기같이 하며, 다만 외관의 아름다움을 위하여 낭비함이 한이 없다. 지금부터는 유밀과(油蜜果)를 쓰지 말고, 과실(果實)로써 대신하되, 작은 잔치에는 3그릇을 초과하지 말고, 중간 잔치에는 5그릇을 초과하지 말고, 큰 잔 치에는 9그릇을 초과하지 말게 하며, 찬(饌) 역시 3가지를 초과하지 말게 할 것이며, 만약 부득이하여 더 쓰게 되더라도 포(脯)와 젓[醢]을 번갈아 들여 정식(定式)으로 삼을 것이다. 영(令)과 같이 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유사(有司)가 죄를 탄핵할 것이다." 하였다.
○ 6월에 금 나라에서 패출(孛朮) 노지충(魯至忠)을 횡선사(橫宣使)로 보내왔다.
○ 가을 7월에 사신을 금 나라에 보내어 방물을 바치고, 또 사신을 보내어 천수절(天壽節)을 하례하고, 다시 사신을 보내어 횡선(橫宣)한 것을 사례하였다.
○ 8월에 덕녕공주(德寧公主)가 졸하였다. 공주는 인종(仁宗)의 딸이다. 타고난 자질이 아름답고 고우며 행동거지가 조용하고 단정하며 또 담소를 잘하였다. 의종(毅宗)이 매양 꽃 피는 아침과 달 뜨는 저녁에 공주를 궐내에 불러 들여 밤낮으로 취하여 노래하니, 추문이 밖에까지 들렸다.
사신이 말하기를, “강씨(姜氏)가 제(齊) 나라에 가자 《춘추(春秋)》에 쓰기를, '제자(齊子)가 시집갔다’고 시인(詩人)이 이를 비난하여 천만세(千萬世) 후에도 추한 평판이 없어지지 않았다. 의종(毅宗) 역시 경계할 줄 알 것인데도, 곧 제양공(齊襄公)의 행실을 본받아 악명(惡名)을 후세에 남겼으니, 이른바 '안방의 말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가 바르게 죽지 못한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 임술일에 태백성이 하늘에 뻗쳤다.
○ 송 나라 상인(商人)이 와서 《태평어람(太平御覽)》을 바치므로, 백금(白金) 60근을 하사하였다.
○ 9월에 낭장 김원의(金元義) 등 20여 명을 보내어 서도(西都 서경(西京))에 가서 기내(畿內)의 전지를 측량하게 하였다.
○ 겨울 10월에 왕의 폐비(嬖婢)에서 난 아들 선사(善思)에게 명하여 중이 되게 하니 나이 겨우 10세였다. 의복과 등급이 적자(嫡子)와 다름이 없으며, 소군(小君)이라 일컬으면서 궐내에 드나들어 자못 세력을 부렸다. 이때 여러 폐첩(嬖妾)의 아들이 모두 머리를 깎고 이름난 절을 골라서 차지하고 권세를 부려 뇌물을 받아 들이니, 청탁하는 자들이 많이 붙좇았다.
○ 정당문학으로 치사한 염신약(廉信若)이 졸하였다. 신약은 총명하고 재빠르며 글을 널리 읽고 잘 기억하며 글을 잘 지어, 왕의 명으로 지은 국가의 귀중한 저술이 그의 손에서 많이 나왔다. 일찍이 3년 동안 무덤에 여막을 짓고 살았으므로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였다.


 

[주D-001]강씨(姜氏) : 노(魯) 나라 환공(桓公) 의 부인이 제(齊) 나라에서 온 강씨(姜氏) 인데, 친정 오라비와 간통하여 자주 친정에 간 일이 있다. 《시경》에 기롱하기를, “제 나라 여자가 노 나라에 시집갔는데, 왜 친정에 또 오는가" 하였다.
[주D-002]안방의……없다 : 춘추 때에 위(衛) 나라 선강(宣姜) 이 서자(庶子) 완(頑) 과 간통하였다. 시인이 시를 짓기를, “중구지언불가도야(中冓之言不可道也) "라 하였다.

 

고려사절요 제13권
 명종 광효대왕 2(明宗光孝大王二)
정사 27년(1197), 송경원 3년ㆍ금 승안 2년


○ 봄 정월에 금 나라에서 아불한덕강(阿弗罕德剛)을 보내 와 생신을 하례하였다.
○ 2월 초하루 을사에 일식이 있었다.
○ 밤에 어떤 사람이 대궐에 들어와서 이빈문(利賓門) 밖 서쪽 행랑의 기둥에 구멍을 뚫었는데 무인(武人)이 말하기를, “이것은 반드시 동반(東班)이 서반(西班)을 저주하는 것이다." 하였다. 서로 전하며 떠드는 자가 매우 많으니, 문관이 스스로 변명할 수 없었는데, 다만 대장군 우승경(于承慶)이 말하기를, “이것은 간사한 사람이 이 일로 일을 만들고자 한 짓이지 동반이 한 일은 아니다." 하니, 여러 사람이 그제야 말썽을 그쳤다.
○ 제(制)하기를, “지난 번 조위총(趙位寵)이 서경(西京)에서 반역할 때에 원수(元帥) 윤인첨(尹鱗瞻)ㆍ기탁성(奇卓誠) 등이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이를 토벌 평정하였으니, 내가 그 공을 가상하게 여겨 날이 갈수록 더욱 잊혀지지 않으니, 인첨을 추충정난광국공신 수태사 문하시중 상주국(推忠靖難匡國功臣守太師門下侍中上柱國)으로 증직하고, 탁성을 수충협모좌리동덕공신 수태사 문하시중(輸忠協謀佐理同德功臣守太師門下侍中)으로 증직하라." 하였다. 또 제하기를, “좌승선 최충헌과 대장군 최충수는 악인을 원수같이 미워하여 손수 의민을 목베어 종사(宗社)를 편안하게 하였으니, 충헌을 충성좌리공신(忠誠佐理功臣)으로 삼고, 충수를 수충찬화공신(輸忠贊化功臣)으로 삼고, 그 아버지 원호(元浩)를 봉의찬덕공신 수태위 문하시랑(奉議贊德功臣守太尉門下侍郞)으로 증직하고, 모두 각상(閣上)에 얼굴을 그려 붙이게 하라." 하였다.
○ 여름 5월에 방연보(房衍寶) 등 30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가을 9월에 충헌이 흥왕사(興王寺)에 가려 하니, 어떤 사람이 익명서(匿名書)를 보냈는데, 그 글에 "흥왕사의 중 요일(寥一)이 두경승과 더불어 충헌을 해치려 한다." 하니, 충헌이 중지하였다.
○ 갑인일에 충헌 형제가 초제(醮祭)를 베풀어 왕을 폐하고 새 왕을 세워 주기를 하늘에 고하였다. 이날 저녁에 천둥과 번개가 치고 우박이 내리고 회오리바람이 갑자기 일어나서 흥국사(興國寺) 길가의 나무가 옥(獄) 안으로 쓰러지자, 담이 다 무너지고 새 보랑(步廊) 18간(間)이 한꺼번에 넘어졌다. 또 바람이 고달판(高達坂)에도 불고 지나가자 나무가 많이 쓰러졌다.
○ 경신일에 큰 천둥과 번개가 쳤다. 최충수가 그 생질 박진재(朴晉材)와 더불어 충헌에게 가서 모의하기를, “지금 왕이 왕위에 있는 지 28년이나 되므로, 늙고 정사를 게을리하여 여러 소군(小君)이 은혜와 위력을 마음대로 부려 국정을 문란하게 하고, 왕이 또 많은 소인을 총애하며 황금과 비단을 많이 내려 주어, 부고(府庫)가 텅 비었으니, 왕을 어찌 폐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태자 숙(璹)은 성품이 우매하고 유약하니, 어찌 태자의 자리에 마땅하겠습니까. 종실(宗室) 중에서 사공(司空) 진(縝)이 경사(經史)에 널리 통달하고 총명하여 도량이 있으니, 만약 왕으로 세운다면 나라가 중흥될 것입니다." 하였다. 진(縝)의 여종을 충수가 사랑하는 까닭으로 진을 왕으로 세우고자 하니 충헌이 말하기를, “평량공(平涼公) 민(旼)은 왕의 동모제(同母弟)로서 지략이 크고 풍도가 넓어서 제왕의 도량이 있으며, 더구나 그 아들 연(淵)은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니 마땅히 태자가 될 만하다." 하여 의논이 결정되지 못하였다. 진재가 말하기를, “진(縝)과 민(旼)이 모두 왕이 될 만하나 금 나라에서 진이 있는 줄은 알지 못하니 만약 진을 왕으로 세운다면, 저들(금 나라)이 반드시 왕위를 찬탈했다고 할 것이니, 민을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의종의 옛 일처럼 하여 아우에게 왕위를 전했다고 금 나라에 알린다면 후환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의논이 이에 정하여졌다.
신유일에 충헌 형제가 진재와 그 족인(族人) 김약진(金躍珍)ㆍ노석숭(盧碩崇) 등과 군사를 시가(市街)에 배치하여 중군(中軍)으로 삼고, 여러 위(衛)의 군사를 나누어 좌우군(左右軍), 전후군(前後軍)으로 삼아 네거리에 둔치고, 또 장수와 군사를 보내어 여러 성문을 닫았다. 두경승을 불러 자연도(紫燕島)에 귀양보내고, 추밀원부사 유득의(柳得義), 상장군 고안우(高安祐), 대장군 백부공(白富公), 친종장군(親從將軍) 주원적(周元廸), 장군 석성주(石城柱), 시랑 이상돈(李尙敦), 낭중 송위(宋韙)ㆍ염극권(廉克鬈), 어사(御史) 신광한(申光漢) 등 12명과 연(淵)ㆍ담(湛) 등 10여 명의 중을 영남으로 귀양보내고, 임술일에 또 소군(小君) 홍기(洪機) 등 10여 명을 바다 가운데 섬으로 귀양보냈다. 계해일에 충헌 형제가 사람을 대궐에 들여보내어 왕을 핍박해서 단기(單騎)로 성문을 나오게 하여 창락궁(昌樂宮)에 감금하고, 중금지유(中禁指諭) 정윤후(鄭允候)를 시켜 이를 지키게 하였다.
이때 태자가 내원(內園)의 북쪽 궁에 있었는데, 충헌 형제가 사람을 시켜 독촉하여 비(妃)와 더불어 궁문(宮門)을 걸어 나와 비[雨]를 무릅쓰고 역말[驛馬]을 태워 드디어 강화도로 내쫓고서, 평량공(平凉公) 민(旼)을 맞이하여 대관전(大觀殿)에서 왕위에 오르게 하고, 그 아들 연(淵)을 태자로 삼았다. 충헌 형제가 군사를 거느리고 추밀원에 들어가서 여러 위(衛)의 장군들을 구정(毬庭)에 둔치하게 하였다.
사신이 말하기를, “정중부ㆍ이의방ㆍ의민등이 의종을 시해하고 국가의 권력을 제 마음대로 부렸으니 명종으로서는 마땅히 마음에 맹세하고 스스로 힘을 써서 반드시 적(賊)을 토멸하고 말았어야 할 것이다. 만약 힘이 부족하다면, 경대승이 왕실의 미약함을 분개하고, 강신(强臣)의 발호를 미워하여 하루아침에 의병을 일으켜 중부(仲夫) 부자를 목베어 여우와 토끼를 사냥하듯이 하자, 의민은 머리를 부등켜 쥐고 쥐처럼 달아나 시골에 숨어서 목숨만을 부지했으니, 이때야말로 반드시 현량(賢良)을 임용하고 기강을 세워, 왕실을 다시 떨치게 할 시기인데도, 왕은 능히 그렇지 못하고, 안일에 만족하여 그 하는 일이 평상시의 아무 일이 없을 때와 같았다. 의민과 같은 자는 다만 한 필부이니 한 사자(使者)를 보내어 왕을 시해한 죄를 들춰내어 목베고 멸족함이 옳을 것인데, 도리어 불러들여 작위(爵位)를 갑자기 올려 주어, 그로 하여금 왕실을 업신여기고, 조신(朝臣)을 살해하며, 벼슬을 팔고 형옥(刑獄)을 가지고 뇌물을 받아 나라의 정치를 탁란(濁亂)하게 하였으니, 그 화가 참혹하였다. 최충헌이 이 틈을 타서 일어나니, 왕이 도리어 추방당하고 자손도 보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권신(權臣)이 잇달아 권력을 잡아 왕실이 겨우 망하지 않고 근근이 실날같이 이어온 지가 몇 백년이 되었으니, 아아, 원통하다." 하였다.
○ 충헌이 왕에게 아뢰어, 내시 민식(閔湜) 등 70여 명을 내쫓고, 달애정(炟艾井)을 무너뜨리고, 광명사(廣明寺)의 우물을 어수(御水)로 쓰게 하였다. 민간에서 전하는 말에, “왕이 달애정의 물을 마시면 환관이 권세를 부린다." 하였기 때문에 이 우물을 없앤 것이다.
○ 왕이 대관전에 나가서 군신(群臣)들의 하례를 받고, 의봉루(儀鳳樓)로 옮겨가서 친히 구정(毬庭)에서 숙위(宿衛)하는 군사를 위로하고 곧 파하여 돌려보냈다. 이튿날 충헌 형제 또한 추밀원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갔다.
○ 최충헌을 정국공신 삼한대광 대중대부 상장군 주국(靖國功臣三韓大匡大中大夫上將軍柱國)으로 삼고, 충수를 수성제란공신 삼한정광 중대부 응양군대장군 위위경 지도성사 주국(輸誠濟亂功臣三韓正匡中大夫鷹揚軍大將軍衛尉卿知都省事柱國)으로 삼고, 박진재를 형부시랑으로 삼고, 조영인(趙永仁)을 판리부사(判吏部事)로 삼고, 기홍수(奇洪壽)를 참지정사 판병부사(叅知政事判兵部事)로 삼고, 충헌의 아버지 원호(元浩)에게 증직하여 영렬우성공신 삼중대광 문하시중(英烈佑聖功臣三重大匡門下侍中)으로 삼았다.
○ 충헌이 추밀원사 최연(崔璉)을 승주(昇州 전남 순천(順天))로 귀양보냈다.
○ 겨울 10월에 왕이 이름을 탁(晫)으로 고쳤다. 일찍이 잠저에 있을 때에, 꿈에 어떤 사람이 이름을 천탁(千晫)이라 짓더니 얼마 안 가서 왕위에 올랐다. 이때에 와서 금주(金主)와 이름이 같으므로 고치고자 하여 재상들에게 의논하여 지어 올리게 하니, 참지정사 최당(崔讜)이 탁(晫) 자를 지어 올렸다. 왕이 마음속으로 이를 이상하게 여겨, 드디어 이름을 고쳤다.
○ 고공원외랑(考功員外郞) 조통(趙通)을 금 나라에 보내어 표문(表文)을 올렸다. 그 표문에, “신의 형 국왕 호(皓)가 금 나라의 선제(先帝)를 섬겨 지금의 황제에 이르도록 속국의 직책을 이행한 지 30년 동안에 예(禮)가 어긋난 적이 없었습니다. 세상을 산 지 60년에 병들어 일어나지 못하는데, 약으로는 만금(萬金)의 좋은 약이 없고, 병은 이수(二竪 병마(病魔))의 괴롭힘을 당하기에 중한 책임을 벗고 남은 수명을 보전하려고 하여, 신의 부왕(父王)의 유촉(遺囑)을 추술(追述)하여 신으로 하여금 군국(軍國)의 사무를 임시로 맡게 하였사오니, 신은 이 간곡한 말에 어쩔 수 없는 데다 무슨 계책으로도 피할 수 없습니다. 부탁을 맡은 일이 너무 중하므로 위에 하소하려고 하였으나, 종묘는 제사지낼 사람이 없어서는 안되고, 백성은 왕이 없어서는 안 되겠으므로 정성스런 간청을 억지로 따라 번잡한 정무(政務)를 임시로 맡았습니다." 하였다.
전왕(前王)의 표문에는, “신이 외람스럽게도 약한 힘으로 번봉(藩封)을 물려받아 동해가에서 오랫동안 대국(大國)의 문화에 훈도(薰陶)되었사오나, 서산에 해가 지는 때에 임박하여 문득 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한 다리가 반신불수가 되어 걸을 적엔 반드시 남에게 의지하여야되고, 두 눈이 모두 어두워서 시력은 한걸음 앞을 보지 못합니다. 나이가 많아 이렇게 되었으니, 약물로 치료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앞에 국정이 많이 쌓였는데 그것을 처리하는 데도 정신이 혼미하거늘, 혹시 상국(上國)의 사신이 경내(境內)에 온다면 반드시 영접하는 데 예절이 어긋날 것입니다. 이 나라가 비록 소방(小邦)이라 하지만, 그 왕위는 하루라도 비우기 어렵습니다. 아버지 말씀이 귓가에 남았으니, '마땅히 아우에게 왕위를 전하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전에는 신의 형에게 부탁을 받았고, 이제는 신의 아우에게 마땅히 중한 책임을 전해야겠습니다. 하물며 신의 형은 원자(元子)가 있으나, 일찍이 선왕(先王)의 유훈을 전해 들었고, 또한 신의 마음을 받들어서, 대숙(大叔)의 어짊은 따라갈 수 없으니 연릉계자(延陵季子)의 절개를 본받기를 원한다고 하여 굳이 물러나고자 하옵니다. 신의 동모제(同母弟) 탁(晫)은 덕은 인심을 복종시키고, 이름이 종실에 높으오니, 능히 하국(下國)만 보전해 다스릴 뿐 아니라, 또한 상국(上國)에도 속국 노릇을 잘 할 것입니다. 이에 아우 탁으로 군국의 사무를 임시로 맡게 하면서 감히 마음속의 적은 정성을 피력하여 천지같은 은혜를 바라옵니다." 하였다.
○일찍이 태자가 창화백(昌化伯) 우(祐)의 딸에게 장가들어 비(妃)를 삼았는데, 이때에 와서 최충수가 그 딸로써 태자의 비를 삼고자 하여 왕에게 굳이 청하니, 왕이 기뻐하지 않았다. 충수가 나인(內人)에게 거짓으로 말하기를, “왕께서 이미 태자비를 내보냈느냐?" 하므로, 나인이 왕에게 고하니, 왕이 마지못해서 비를 내보내고는, 목이 메어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왕후도 눈물을 흘리니, 궁중의 사람이 모두 눈물 닦기를 그치지 않았다. 비(妃)가 드디어 미복(微服)으로 밖으로 나가니, 충수는 곧 날을 받고, 공장(工匠)을 모아 장구(粧具)를 많이 준비하였다.
충헌이 이 소식을 듣고 술을 가지고 충수의 집에 가서 조용히 함께 술을 마시다가 취하자 충헌이 말하기를, “그대가 딸을 동궁(東宮)에 들여보내고자 한다는 말을 들은 듯한데 그런 일이 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있습니다." 하였다. 충헌이 타이르기를, “지금 우리 형제의 세력이 비록 한 나라를 기울이고 있으나, 가계(家系)가 본래 미천하니 만약 딸을 동궁에 시집보낸다면 비난이 없겠느냐. 하물며 부부 사이는 은혜와 의리가 미리 정해져 있는 법인데, 태자는 몇 해 동안 비(妃)와 부부가 되었다가, 하루아침에 서로 이별하게 하면 그 어찌 인정(人情)이겠느냐. 옛날 사람이 말하기를, '앞 수레가 넘어지면 뒷수레가 경계한다.’ 하였는데, 전번에 이의방(李義方)이 딸을 태자에게 시집보냈다가 마침내 남의 손에 죽었으니, 지금 그대가 앞사람이 실패한 자취를 따라 하는 일이 옳으냐?" 하니, 충수가 하늘을 우러러보고 한숨을 쉬다가 한참 뒤에 말하기를, “형님의 말씀이 이치가 있으니 어떻게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면서, 드디어 공장(工匠)을 물리쳐 보냈다. 조금 후에 계획을 바꾸어 말하기를, ."대장부가 일을 행하면 마땅히 스스로 결단할 것이다." 하고는, 다시 공인(工人)을 모아 전과 같이 준비하였다. 그 어머니가 이르기를, “네가 형의 말을 따르기에 나도 참으로 기뻐하고 다행하게 여겼는데, 또 어찌 이와 같이 하느냐?" 하자, 충수가 노하여 말하기를, “부인들이 알 바가 아니다." 하면서, 손으로 밀치니 어머니가 땅에 넘어졌다.
충헌이 이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죄가 불효보다 큰 것이 없는데, 어머니를 욕보임이 이와 같으니 하물며 나에게랴. 반드시 말로써 타이를 수는 없으니, 내일 아침에 마땅히 나의 무리들을 시켜 광화문(廣化門)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 딸이 들어오면 막아 들여보내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충수에게 알리니, 충수 또한 그 무리에게 말하기를, “남은 나의 행동에 대하여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데, 형이 홀로 나를 제지하려는 것은 많은 무리가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내일 아침에 내가 마땅히 그 무리들을 제거해 버릴 것이니, 너희들은 힘을 내라." 하였다. 어느 사람이 또 달려가 충헌에게 알리니, 충헌이 울면서 그 무리들에게 말하기를, “충수가 그 딸을 동궁에 시집보내고자 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고 반역을 도모하려고 하는 것이다. 내일 아침에 우리 무리를 제거하고자 하니, 일이 이미 급한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하니, 무리들이 대답하기를, “박진재(朴晉材)와 의논하십시오." 하였다.
충헌이 곧 진재와 김약진(金躍珍)ㆍ노석숭(盧碩崇)을 불러 이 사실을 알리니, 진재가 말하기를, “공(公)의 형제분은 다 나의 외숙(外叔)이니 누구에게 정의(情誼)가 더하고 덜함이 있으리요. 다만 국가의 안위(安危)가 이 한번의 일에 달렸으니 아우를 도와서 역적이 되는 것보다는 형에게 가담하여 순리를 따르는 것이 낫겠습니다. 더구나 대의를 위해서는 골육의 사정(私情)을 끊는 법이니, 내가 마땅히 약진ㆍ석숭 등과 함께 각기 무리를 거느리고 돕겠습니다." 하니, 충헌이 크게 기뻐하였다.
밤 삼경(三更)에 충헌이 무리 천여 명을 거느리고 고달판(高達坂)을 지나 광화문에 이르러 문 지키는 자에게 알리기를, “충수가 내일 아침에 난리를 일으키고자 하므로 내가 사직을 보위하려고 하니, 이 사실을 빨리 왕이 계시는 곳에 아뢰라." 하였다. 문 지키는 자가 문 틈으로 통하여 아뢰자, 왕이 크게 놀라서 즉시 명하여 문을 열고 충헌을 맞아들여 구정(毬庭)에 둔치게 하고, 또 무고(武庫)의 무기를 꺼내어 금군에게 주어 대비하게 하니, 여러 위(衛)의 장군들도 군사를 거느리고 다투어 왔다. 충수가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그 무리에게 말하기를, “아우로서 형을 공격하는 것을 패덕(悖德)이라 이른다. 내가 어머니를 모시고 구정에 들어가서 형을 만나 죄를 빌 것이니 너희들은 각기 도망해 가라." 하니, 장군 오숙비(吳淑庇)ㆍ준존심(俊存深)ㆍ박정부(朴挺夫) 등이 말하기를, “저희들이 공(公)의 문하에 의탁한 것은 공이 세상을 덮을 만한 기개가 있기 때문이었는데, 이제 도리어 비겁함이 이와 같으니, 이것은 저희들을 멸족시키는 행동입니다. 청컨대, 한번 싸워서 승패를 결정하겠습니다."고 하니, 충수가 이를 허락하였다.
이른 새벽에 무려 천여 명을 거느리고 십자가(十字街)에 둔치며 약속하기를, “마땅히 힘을 합하여 싸워야 될 것이며, 진실로 저 무리를 죽이는 사람에게는 마땅히 죽은 자의 관직을 주겠다."고 하였다. 충수의 군사는 여러 장수들이 모두 충헌에게 붙좇은 것을 듣고는 스스로 후원이 적음을 알고 차차로 도망해 가버렸다. 이에 충헌은 광화문을 나와 시가(市街)를 향하여 내려오고, 충수는 광화문을 올라가다가 흥국사(興國寺) 남쪽에서 만나 서로 싸웠다. 진재ㆍ약진ㆍ석숭이 각기 무리들을 거느리고 나누어 앞뒤에서 협격(挾擊)하기로 하여 한 부대는 이현(泥峴)을 넘어가고, 한 부대는 사현(沙峴)을 넘어가고, 한 부대는 고달판을 넘어가서 앞뒤로 서로 도우며 앞뒤에서 공격하였다. 충헌이 어고(御庫)의 대각노(大角拏)로 마구 쏘아 화살이 빗발처럼 쏟아지니 충수의 무리가 보랑(步廊)의 문짝을 가져다가 방패를 삼아 막았으나, 이기지 못하고 결국 크게 무너졌다. 충수가 말하기를, “오늘날의 패전은 천운이다. 형이 임진강 이북에 있으면 나는 임진강 이남에 있겠다."고 하면서, 곧 숙비(淑庇)ㆍ존심(存深) 등과 보정문(保定門)에 달려가 문지키는 자를 베고 나와서 장단(長湍)을 건너 파평현(坡平縣)의 금강사(金剛寺)에 이르니, 추격한 자가 그를 베어 머리를 서울로 보내었다. 충헌이 울면서 추격하였던 자에게 말하기를, “나는 산 채로 잡으려고 하였는데 네가 어찌하여 경솔히 죽였느냐." 하였다. 곧 사람을 보내 시체를 거둬 장사지냈다.
○ 11월에 왕이 의봉루(儀鳳樓)에 나가서 사면령을 내려 중외(中外)에 차등(差等) 있게 은혜를 베풀었다.
○ 전 중서령 두경승이 근심하고 분하게 여겨 피를 토하더니, 자연도(紫燕島)에서 졸하였다. 경승은 만경현(萬頃縣 전북 김제(金堤)) 사람인데, 성품이 질박하고 정직하며 너그럽고 후하였다. 문재(文才)는 적었으나 용력(勇力)이 있어 후덕전 견룡(厚德殿牽龍)이 되었다. 경인년의 변고에 무인 중에 남의 재물을 빼앗은 자가 많았으나, 경승은 홀로 후덕전(厚德殿)의 문을 떠나지 않고 털끝만큼도 범하지 않았다. 김보당(金甫當)ㆍ조위총(趙位寵)의 난에 평정한 공이 있어 공신으로 봉해졌다. 이부(吏部)를 맡았을 때에는 비록 내총(內寵)과 권귀(權貴)일지라도 감히 그를 흔들지 못하였다. 이전 제도에는 3품 이상의 관원은 진급할 적마다 으레 사양하는 표문을 올리게 되고, 조서를 내려 윤허하지 않은 뒤에야 표문을 올려 사은(謝恩)하고 관직에 취임하였는데, 경승은 홀로 말하기를, “마음속으로는 사양하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남의 글을 빌려서 겉치레의 예절을 꾸미는 일은 나는 차마 할 수가 없다." 하였으니, 그의 정직함이 이와 같았다.
○ 문무관(文武官)의 자제(子弟) 30여 명을 춘방시학(春坊侍學)과 공자급사(公子給使)로 충원시켰다.
○ 12월에 조영인(趙永仁)을 수태사 문하시랑평장사 판이부사로 삼고, 기홍수(奇洪壽)를 중서시랑평장사 판병부사로 삼고, 임유(任濡)와 최당(崔讜)을 함께 중서시랑평장사로 삼고, 이문중(李文中)을 참지정사로 삼고, 우술유(于述儒)를 좌복야로 삼고, 최선(崔詵)을 지추밀원사로 삼고, 김준(金晙)을 동지추밀원사로 삼고, 채순희(蔡順禧)와 차약송(車若松)을 함께 추밀원부사로 삼고, 최충헌을 추밀원지주사 지어사대사로 삼았다.

고려사절요 제14권
 신종 정효대왕(神宗靖孝大王)
경신 3년(1200), 송 경원 6년·금 승안 5년


○ 봄 정월에 예빈소경 백원식(白元軾)을 금 나라에 보내어 정조(正朝)를 하례하였다.
○ 최충헌이 아뢰어, 서울과 지방 죄수의 형을 감면하였다.
○ 2월 갑자일에 태백성이 하늘에 뻗쳤다.
○ 윤2월에 원자(元子)가 자기 관속들에게 이르기를, “사람들이 모두 그 허물을 알지 못하는데, 내가 또한 어찌 스스로 알겠느냐. 모두 다 말하고 숨김이 없게 하라.”고 하니, 조정과 민간에서 매우 감탄하였다.
○ 3월에 중서평장사 이문충(李文冲)이 졸하였다.
○ 무인일에 태백성이 2일 동안 계속하여 하늘에 뻗쳤다.
○ 여름 4월에 원비(元妃) 김씨(金氏)를 책봉하여 궁주(宮主)로 삼고, 원자(元子) 덕(悳)을 책봉하여 왕태자로 삼았다.
○ 진주의 공사(公私) 노예가 떼를 지어 난리를 일으켜서 주리(州吏)의 집 50여 호를 무찔러 불사르고, 불이 번져 창정(倉正) 정방의(鄭方義)의 집까지 태웠다. 주리가 목관(牧官)에게 알려서 뒤쫓아 잡으니, 방의가 손에 활과 화살을 쥐고 들어와서 사록(司錄) 전수룡(全守龍)을 보았다. 수룡이 힐문(詰問)하기를, “어째서 활과 화살을 가지고 절하느냐. 네가 반드시 난리를 일으킬 것이로구나.” 하면서 곧 고문을 가하니, 방의가 다른 뜻이 없다고 자백하므로 놓아 주었다. 목사(牧使) 이순중(李淳中)이 이 소식을 듣고, 방의에게 착고를 채워 옥에 가두었다가 그 이튿날 다시 국문하려고 하는데, 방의의 아우 창대(昌大)가 갑자기 뜰에 뛰어들어와서 방의에게 채운 착고를 벗겨 버리고 부축하여 나갔다. 이어 불령배(不逞輩)를 불러 모아 고을에 마구 뛰어다니면서, 평소에 원수진 자 6천 4백 명을 죽였다. 이에 순중 등이 두려워하여 문을 닫고 나오지 않으니, 방의가 영(令)을 위협하여 사무를 보게 하였다. 조금 후에 방의가 고을 안의 은병(銀甁)을 많이 거두어서, 서울의 세력있는 사람에게 뇌물을 주어 그 죄를 면하려 하였다. 안찰부사 손공례(孫公禮)가 관내를 순시 하다가 진주에 와서 안문(按問)하니, 이민(吏民) 가운데 방의를 두려워하는 자가 많아서 모두 말하기를, “방의는 죄가 없습니다.” 하므로, 순중이 마침내 죄를 받아 초도(草島)로 귀양갔다.
○ 5월에 소부감 조통(趙通)과 중랑장 이당적(李唐績)을 보내어 진주를 안무하게 하였다.
○ 밀성(密城 경남 밀양)의 관노 50여 명이 관가의 은그릇을 도둑질하여 운문(雲門)의 적(賊)에게로 달아났다.
○ 가을 8월 계사일에 태양에 흑점이 있었는데, 크기가 오얏만하였다.
○조통 등이 진주에 이르니 방의의 포학한 기세가 매우 성하므로, 조통 등이 어찌할 줄 모르고 다만 팔짱만 끼고 있을 뿐이었다. 이때 합주(陜州 경남 합천)에 광명계발(光明計勃)이란 적(賊)이 있었는데, 또한 세력을 부리어 한 지방의 큰 해가 되었다. 방의와 원수가 된 진주 사람 20여 명이 합주(陜州)의 적(賊)에게 가서 의탁하고, 군사를 청하여 방의를 치고자 하니 적이 그 말을 따랐다. 그들이 진주에 이르니 방의가 나가 쳐서 이를 깨뜨리고, 이긴 기세를 타서 올부곡(兀部曲)까지 이르러 그 무리들을 다 죽였다.
○ 금주(金州 경남 김해)의 잡족인(雜族人)들이 떼를 지어 난리를 모의하여 호족들을 죽이니, 호족이 성 밖으로 도망하여 피하였다. 이에 군사로써 부사(副使)의 아문(衙門)을 포위하자 부사 이적유(李迪儒)가 지붕에 올라가서 주모자를 쏘니, 활줄 소리와 함께 넘어지거늘, 그 무리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조금 후에 돌아와서 말하기를, “우리들은 강포하고 탐오한 자를 제거하여 우리 고을을 깨끗하게 하고자 하는데, 무슨 이유로 우리를 쏘는가.” 하니, 적유가 거짓으로 놀라면서 말하기를, “내가 이를 생각하지 못하고 외적(外賊)으로 잘못 알았노라.” 하였다. 이에 성 밖의 호족들에게 비밀히 일러서 앞뒤에서 공격하여 이들을 다 죽였다.
○ 겨울 11월에 금 나라에서 예부시랑 유공헌(劉公憲)을 보내와서 생신을 하례하였다.
○ 12월에 최선(崔詵)을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리부사로 삼고, 임유(任儒)를 문하시랑 평장사로 삼고, 최충헌을 삼중대광 수태위 상주국으로 삼고, 지주사는 그전대로 하였으며, 안유부(安有孚)를 우부승선 중서사인으로 삼고, 조준(趙準)을 호부시랑 우간의대부로 삼았다. 조준은 충수(忠粹)의 사위이므로 충헌이 중요한 관직에 임명시키고자 하여 특별히 이 관직을 제수하였다. 충헌이 스스로 자신의 방자함을 알고서, 변고가 뜻밖에 일어날까 두려워하였다. 모든 문무(文武) 관리와 한량(閑良)으로부터 군졸에 이르기까지 억세고 완력이 있는 자를 모두 불러 와서, 6번(番)으로 나누어 날마다 번갈아 그 집에 숙직시키고, 도방(都房)이라 이름하였다. 그가 드나들면 번(番)을 합쳐 호위하니, 전투에 나가는 것과 같았다.
사신(史臣)이 말하기를, “최충헌이 제 마음대로 임금을 폐하고 세워서 위복(威福)의 권세를 부려, 자기에게 붙좇는 자는 관등(官等)을 비약 승진시키고, 자기와 의견이 다른 자는 귀양보내며, 뇌물을 받아들여 관작을 팔고, 용사(勇士)를 불러 모아 스스로 호위하니, 그의 권세는 날로 성해지고 왕실은 날로 미약해졌다. 옛날부터 임금이 약하고 신하가 강한 것이 이때보다 심한 적이 없었느니, 아아 통분하도다. 그 당시에 실록을 지은 이가, 그가 쓴 사필(史筆)이 누설될까 두려워하여 모두 숨기고 약(略)하였느니, 사신의 죄이다.” 하였다.
○ 경주부유수 방응교(房應喬)를 파면하고, 낭중 위돈겸(魏敦謙)으로 대체시켰다. 처음에 충헌이 의민(義旼)의 종족을 죽일 적에, 경주의 관원이 사경(思敬) 등을 의민의 일족이라 하므로 별장(別將) 최무(崔茂)에게 명하여 그를 잡아 죽였더니, 이에 최무와 사경의 두 종족이 서로 원망하였다. 응교가 사경의 족인(族人)의 참소를 믿고 그들에게 편드니, 이 때문에 두 일족이 함부로 서로 쳐서 죽였다. 응교가 이를 제지하지 못하므로, 파면시켰다.


[주D-001]위복(威福) : 《서경》에 “임금만이 위(威) 를 짓고 복(福) 을 짓는다.” 하였는데, 신하가 위복(威福) 을 부리는 것은 군권(君權) 을 침범하는 것이다.
고려사절요 제14권
 신종 정효대왕(神宗靖孝大王)
갑자 7년(1204), 송 가태 4년·금 태화 4년

○ 봄 정월 1일 을축에 태양 속에 흑점이 있었는데, 크기가 오얏만하였고, 무릇 3일 동안이나 있었다. 태사(太史)가 진(晉) 나라 성강(成康) 8년 정월에 태양 속에 흑점이 있더니 여름에 제(帝)가 붕(崩)하였으므로, 그 징조를 싫어하여 감히 바른 대로 지적하여 말하지는 못하고 다만 아뢰기를, “태양은 임금의 상징이니, 만약 흠이 있으면 반드시 그 재앙이 드러납니다.” 하였다.
○ 최충헌이 대궐 안에 들어가서 문병하니, 왕이 이르기를, “과인이 번저(藩邸)에 있다가 왕위에 오른 것은 공의 힘이요, 나이도 이미 늙었으며 더구나 병이 오래 낫지 않으므로 정무를 보살필 수 없으니, 태자에게 왕위를 전하려 하오.” 하니, 충헌이 대답하기를, “원컨대, 주상께서는 잘 조리하소서. 선위하려는 명령은 신이 감히 따를 수 없습니다.” 하였다. 드디어 밖으로 나가서 재상 최선(崔詵)과 기홍수(奇洪壽)를 사제(私第)에 맞이하여, 비밀히 선위의 일을 의논하였다.
○ 충헌이, 최광의(崔匡義)·이이(李頤)·강순의(康純義)·이유성(李維城) 등이 경주를 평정한 공이 가장 많으므로 위에 아뢰어서 먼저 돌아오게 하여 모두 작질(爵秩)을 더하고, 요좌(寮佐) 이하의 모든 군사에게 상을 차등 있게 주었다.
○ 충헌이 다시 대궐에 들어가서 문병하니, 왕이 또 선위할 뜻을 매우 간곡하게 말하였다. 충헌이 태자에게 알리니 태자가 울면서 굳이 사양하였다. 왕이 천령전(千齡殿)으로 옮겨 거처하고 태자에게 조서를 내리기를, “짐이 덕이 적은 사람으로서 왕업을 물려받았는데, 나이도 이미 노쇠하고 병이 또 오래 낫지 않아서 정무를 보살필 수가 없다. 너 원자(元子)는 학문이 광명(光明)한 지경에 이르렀고, 덕이 백성의 기대에 부합하므로, 이에 왕위를 너에게 부탁한다.” 하였다. 충헌이 태자에게 아뢰기를, “군부의 명은 굳이 사양할 수 없습니다.” 하며, 이에 태자를 인도하여 강안전(康安殿)으로 들어와서, 어복(御服)을 입고 북쪽을 향하여 두 번 절하게 하고는, 모시고 대관전(大觀殿)으로 나가서 문무 백관의 조하(朝賀)를 받게 하였다.
왕이 부축을 받고 일어나서 충헌에게 이르기를, “오늘에야 짐의 소원이 이미 다 이루어졌으니, 병도 따라 나았소. 경은 짐의 부자에게 공덕이 적지 않으니 갚을 길이 없소.” 하면서, 드디어 눈물을 흘리니, 충헌이 두 번 절하고 밖으로 나갔다. 왕이 승선과 중방 등에 이르기를, “오늘 이후에는 다시 경들을 볼 수 없으니, 마땅히 각기 사군(嗣君)을 잘 보좌하여 나라가 잘 다스려지게 하라.” 하였다. 듣고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정축일에 왕이 덕양후(德陽侯)의 저택으로 옮겨가서 드디어 훙하였다. 무인일에 충헌이 재신과 추신을 그 사제에 모아서 예사(禮司)에서 아뢴 복상(服喪) 26일을 줄여 14일로 하기로 의논하였다.
○ 2월 경신일에 양릉(陽陵)에 장사하고, 정효(靖孝)란 시호를 올렸으며, 묘호를 신종이라 하였다.
사신이 말하기를, “신종이 최충헌에 의하여 왕위에 오르므로, 죽이고 살리며 폐하고 세우는 권한이 모두 최충헌의 손 안에 있었고, 왕은 한갓 실권 없는 자리만 차지한 채 신민의 위에 앉았기에 나무로 만든 허수아비와 같았을 뿐이니, 애석하다.” 하였다.
낭중 임영령(任永齡)을 금 나라에 보내어 왕의 상(喪)을 알렸다.
○ 3월에 문선왕(文宣王 공자(孔子))에게 석전제(釋奠祭)를 지냈다. 국상으로 인하여 이달에 지냈다.
○ 초토사(招討使) 정언진(丁彦眞)과 부사(副使) 전원균(田元均) 등이 돌아오니 충헌이 아뢰기를, “적이 다 제거되지 않았으니, 마땅히 중군판관 박인석(朴仁碩)을 남겨 두어서 안찰사로 삼아, 경병(京兵) 2백 명을 거느려 진압하게 하소서.” 하였다.
○ 여름 4월에 어머니 김씨를 높여 왕태후(王太后)로 삼고, 죄수를 사면하였다.
○ 5월에 왕의 생일 수기절(壽祺節)을 고쳐 수성절(壽成節)이라 하였다.
○ 안찰사 박인석이 남은 적 김순(金順) 등 20여 명을 사로잡고 병마녹사 황보경(皇甫經)을 보내어서 아뢰니, 왕이 경(經)을 내시원에 소속시켜 8품의 관직을 주었다.
○ 6월에 금 나라에서 소부감 장칭(張儞)과 대리소경 매경(梅瓊)을 보내어 신종에게 치제하고, 공부시랑 석각(石慤)에게는 조위하게 하고, 이부시랑 출갑회(朮甲晦)에게는 왕을 기복하게 하였다.
○ 금 나라의 사신에게 연회를 열어 주었다. 그전의 예(例)는 객사(客使)를 맞아 연회하는 날에는 내시 한 사람이 명령을 받들고 우창(右倉)의 말린 밥 15석을 내어 시위하는 군인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이날에는 군인이 고루 나눠 주지 않는다고 노하여 군사 한 사람을 때려 죽이니, 내시는 도망하여 면하였다. 형부에서 군인을 잡아 가두어서 국문하였는데, 매질하여 죽은 자가 두서너 사람이 되었으나, 마침내 군사를 죽인 자를 잡아 내지는 못하였다.
○ 동경유수를 강등시켜 지경주사(知慶州事)로 하고, 안동도호를 승격시켜 대도호부로 하고, 경주 관내의 주·부·군·현·향(鄕)·부곡(部曲)을 안동과 상주에 나누어 예속시켰다. 또 경상도를 고쳐 상진안동도(尙晉安東道)로 하였다. 어떤 사람이 충헌에게 말하기를, “동경은 옛날의 국도이며, 실로 남방의 큰 진(鎭)인데, 강등시켜 지관(知官)으로 만드니 불가한 것이 아닙니까?" 하니, 충헌이 말하기를, “동경 사람들이 신라가 다시 일어난다는 말을 만들어서 주·군에 격서(檄書)를 보내어 반역을 꾀하고 난리를 선동하니 징계하지 않을 수 없고, 안동은 도적들이 힘을 합쳐 공격하는 날에 한 마음으로 막아 내어 충의를 온전히 하였으니 권장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 가을 7월에 금 나라에서 횡선사로 병부시랑 완안립(完顔立)을 보내 왔다.
○ 사람 30여 명이 밤에 급사동정(給事同正) 지귀수(池龜壽)의 집에 모여 최충헌 죽일 계획을 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귀수가 도망하니, 어느 사람이 그 아우 귀영(龜永)을 잡아 충헌에게 알렸다. 충헌이 귀영을 국문하니 귀영이 말하기를, “장군 이광실(李光實)이 주모자입니다.” 하였다. 충헌이 이광실을 잡아 힐문하기를, “내가 평소에 너의 불초함을 알았으나 오래 된 친구라서 장군으로 임명하였는데, 어찌 감히 그렇게 할 수 있느냐.” 하니, 광실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이에 섬으로 귀양보냈다.
○ 8월에 장군 김경부(金慶夫)와 예부시랑 최광우(崔光遇)를 금 나라에 보내어 신종에게 사제(賜祭)한 것을 사례하였다.
○ 참지정사 차약송이 졸하였다.
○ 9월에 사신을 금 나라에 보내어 조위(弔慰)하여 주고 기복(起復)시켜 주고 횡선(橫宣)한 것을 사례하였다.
○ 겨울 10월에 인득후(印得侯) 등 30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11월에 원자 지(祗)를 세워서 왕태자로 삼았다. 나이 8세였다.
○ 12월에 최충헌을 수태사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병부어사대사로 삼았다. 왕은 충헌이 자기를 세운 공이 있으므로, 충헌을 신하로 대우하지 않으며, 항상 은문상국(恩門相國)이라 불렀다. 이때 한유한(韓惟漢)이란 사람이 있어 대대로 서울에 살았는데, 충헌이 국정을 제 마음대로 하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난이 장차 일어날 것이다.” 하면서, 드디어 처자를 이끌고 지리산에 숨었다. 조정에서 그를 불렀으나 오지 않고, 마침내 그곳에서 한평생을 마쳤다.
○ 양광도 안찰사 곽공의(郭公儀)가 욕심이 많고 비루하니, 백성 가운데 그를 원망하는 이가 많았다. 유사가 그 배리(陪吏)를 잡아 국문하였으나, 공의가 일찍이 박희(博戲)로써 충헌과 교분을 맺은 까닭에 끝까지 죄를 다스리지 못하고, 다만 그 배리만 매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