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 시조공에 대한 기록/시조공 고려문화시중 휘 아에 대한기

최군 가이(崔君可邇)의 묘지명 병서(幷序)

아베베1 2011. 7. 3. 14:07

청음집 제34권
 묘지명(墓誌銘) 9수(九首)
최군 가이(崔君可邇)의 묘지명 병서(幷序)


호서(湖西)의 보은현(報恩縣)에 처사(處士) 최군이 살았는데, 대곡(大谷) 성운(成運)과 같은 때 사람이다. 대곡은 본디 함부로 교분을 맺지 않았지만 한 고을 안에서 처사와는 가장 친하게 지냈다. 이어 남명(南冥) 조식(曺植)과 동주(東洲) 성제원(成悌元)과 용문(龍門) 조욱(趙昱) 등 여러 현인들과 교분을 맺어서 모두 더불어 벗이 되었다. 지금까지도 이 네 분 선생의 풍모를 듣는 자들은 역시 처사의 사람됨을 알 수가 있다. 처사의 휘는 흥림(興霖)이다.
처사에게 아들이 있는데 이름이 명원(明遠)이며, 자가 가이(可邇)이다. 태어나서 네 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를 잃었는데, 조금 자라서는 슬퍼하며 사모하기를 마지않아 기일(忌日)이 되면 바깥 침소에서 자고 밥을 먹지 못했으며,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웃고 떠들지 않은 채 그날이 다 지나가도록 마치 여묘(廬墓)나 악실(堊室) 안에 있는 것처럼 하였다. 제사를 지낼 때에는 제기(祭器)를 반드시 몸소 나아가 직접 진설하면서 온 정성을 다 바쳤다.
처사를 섬김에 있어서는 물신양면 극진히 봉양하였다. 새벽이면 침소에 나아가 안부를 물었고, 특별한 일이 없으면 좌우를 떠나지 않았으며, 저녁이 되어 잠자리를 봐드린 다음에야 물러 나왔는데, 매일처럼 그와 같이 하면서 20년 동안을 혹시라도 해이하게 한 적이 없었다. 처사가 죽음에 미쳐서는 지나치게 애통해하여 거의 몸을 보전하지 못할 뻔하였는데도 오히려 온 힘을 다해 예를 극진히 하였다. 최질(衰絰)을 입고 지내면서 무덤에 가 곡하였는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피하지 않았다. 상기를 다 마치고는 스스로 지자(支子)이기 때문에 감히 제사를 지낼 수가 없었다. 이에 고인이 남겨 놓은 의관(衣冠)을 집에다가 보관해 두고 아침저녁으로 배알하였으며, 출입을 할 때에는 고하기를 평소와 같이 하였다.
형을 섬기기를 아버지를 섬기는 것과 같이 하였으며, 형의 아들 보기를 자신의 아들과 같이 보았다. 길사(吉事)와 흉사(凶事)에 있어서 넉넉하지 못한 바가 있으면 자기 집의 재물을 가지고 도와주었으며, 한 가지라도 맛난 음식을 얻으면 반드시 나누어 먹었다. 이에 향당(鄕黨)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면서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군은 본디 이 세상에서 구하는 것이 없었으며, 세상에서도 역시 군에 대해 제대로 아는 자가 없었다. 그러므로 끝내 매몰되어 버린 채 이름이 드러나지 않았다.
군은 아무 해 아무 달에 태어나 아무 해 아무 달에 졸하였는데, 향년은 40세였다. 보은현 서쪽 국사봉(國祀峯)에 있는 선영의 곁 묘향(卯向)의 산등성이에 장사 지냈다.
살펴보건대, 최씨는 화순(和順)의 망족(望族)이다. 처음에는 족계가 전주(全州)에서 나왔는데, 그 뒤에 옮겨 가 살게 된 이유는 알 수가 없다. 12대 아(阿)에 이르러 고려의 우상(右相)을 지냈는데, 시호가 문성(文成)이다. 또다시 9대를 전해 내려와 영유(永濡)에 이르는데, 공민왕(恭愍王) 때 해주(海州)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적들에게 굽히지 않고 맞서다가 죽었다. 이분 이후로 5대 동안 잇달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귀현(貴顯)이 되었다. 증조의 휘는 중청(重淸)으로, 광흥창 수(廣興倉守)를 지냈다. 할아버지의 휘는 해(垓)로,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군은 신평(新平) 이광계(李光啓)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 대윤(大允)은 의주 판관(義州判官)인데, 청렴하다는 명성이 드러났다. 딸은 사인(士人) 홍사철(洪士哲)에게 시집갔다. 또 측실에게서 2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대관(大寬)과 대준(大峻)이고, 딸은 신박(申泊)에게 시집갔다. 의주 판관은 1남을 두었는데, 이름이 수해(壽海)이다.
판관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 나에게 부탁하기를, “선인께서 살아서는 이미 때를 만나지 못하였고 죽어서 또 후세에 전해지지 못하는 것을 불초가 몹시 애통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선생께서 묘지명을 지어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내가 여러 차례 사양하였으나,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는 말하기를, “아, 애석하다. 한 집안의 부자간에 양대에 걸쳐 어짊과 효성이 이와 같은데도 위로 알려질 길이 막혀 조정에서 착한 사람을 드러내는 아름다움을 어그러뜨리게 하였다. 그러니 누가 그 책임을 질 것인가. 비록 나의 글재주가 망자를 빛나게 하는 데에는 부족하지만, 어찌 차마 이런 행실을 드러내지 않고 민멸되게 해 그 아들 된 자의 소망을 저버리고 군자들에게 엄한 힐책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명을 지었는데, 그 명은 다음과 같다.

선비 볼 때 어떤 점을 봐야 하는가 / 伊士何觀
평상시에 행한 행실 봐야 한다네 / 觀乎行成
행실 중에 어떤 것이 우선이려나 / 行維何先
어버이에 대한 효성 형제 우애네 / 孝親順兄
진정 행실 갖춰지지 아니했다면 / 苟行不備
높은 지위 올랐어도 뭔 영광이랴 / 雖顯孰榮
행실 높은 데에 비해 몸 낮은 거는 / 行尊身卑
그건 바로 군자 지닌 곧음인 거네 / 君子之貞
아름답고 아름답다 최씨의 가문 / 猗歟崔門
대대토록 숨은덕이 높고 높았네 / 世隆隱德
온 세상이 알아주지 아니했어도 / 擧世莫知
오직 어진 사람들은 다 알아줬네 / 惟賢者識
그 가르침 어찌 바탕 없었으리오 / 敎豈無素
선대 조상 충성스런 신하였다네 / 厥祖忠臣
그에 대한 보답 적다 말하지 말라 / 勿云報輕
이제 장차 후손 크게 열어 주리라 / 將啓後人
아득 높게 새로 쌓은 무덤 있거니 / 峨峨新阡
산세 아주 빼어나고 물은 맑다네 / 山秀水淸
아름다운 부인 함께 묻혔거니와 / 嘉耦同塋
죽어서도 살아서도 함께하였네 / 死穀偕臧
근심하고 근심하는 아들 있어서 / 惸惸嗣子
묘지의 명 지어 달라 부탁해 왔네 / 丐銘誌墓
묘지의 명 지은 자는 그 누구인가 / 銘之者誰
숙도라는 자를 쓰는 김상헌이네 / 惟金叔度

홍재전서 제117권
 경사강의(經史講義) 54 ○ 강목(綱目) 8
[당 고종(唐高宗)]


저수량(褚遂良)이 무후(武后)를 왕후로 세우는 일을 간언한 것에 대하여 호씨(胡氏)가 평하기를, “저수량은 충성스럽기는 하지만 만물이 소장영허(消長盈虛)하는 이치와 《주역》 구괘(姤卦)의 ‘여자가 드세니 취하지 말라’는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였다. 화란(禍亂)은 싹이 틀 때 베어 버리지 않으면 나중에는 도끼를 써도 막을 수 없다. 이 일은 사람의 지모(智謀)가 미진한 것이지 이를 하늘의 운명으로 돌릴 수 없는 것이다. 만약 무후가 머리를 기를 때 백관들을 거느리고 황후에게 글을 올려 그 일을 저지했더라면, 당시의 형세상 반드시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인물을 논평하기란 이처럼 어려운 일이다. 사서(史書)에서는 황후가 무후에게 은밀히 머리를 기르게 했다고 하였으니, 이는 외부 사람들에게 알리려 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저수량이 간언하여 말리고자 한들 어떻게 그녀가 머리를 기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간언하더라도 고종(高宗)에게 간언하는 것이 옳다. 고종이 황제의 지위에 있어 모든 정사가 그로부터 나오는데, 백관들을 거느리고 가서 황후에게 글을 올린다면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놀라게 하고 나라의 체통을 무너뜨리지 않겠는가. 저수량이 간언할 때, 처음에는 황후가 명문 가문에서 뽑혀 왔음을 말하고, 다음으로는 선제(先帝)의 중한 고명(顧命)을 받았음을 강조하고, 마지막으로는 바닥에 이마를 찧어 피를 흘리면서 홀(笏)을 돌려주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청하였다. 만약 고종이 조금이라도 본래의 마음을 지닌 사람이라면, 반드시 느낀 바가 있어 후회하고 부끄러워하여 하루해가 다 가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잘못을 인정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호씨는 어찌하여 일이 이미 이루어진 뒤이니 무익하다고 했단 말인가?
[유학(幼學) 이현상(李顯相)이 대답하였다.]
호씨가 저수량을 논평한 것은 과연 이미 드러난 사실에서 흔적을 잡아 아직 드러나지도 않은 일에까지 가혹하게 흠을 잡아내려는 병통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약 군자의 선견지명(先見之明)으로 신하로서 뒤늦게 행동한 죄를 논한다면, 저수량 역시 죄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무씨(武氏)가 머리를 기를 때에는 기미를 알아보기 어려웠으므로 그럭저럭 지내며 간언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용서해 줄 수 있지만, 무씨가 소의(昭儀)가 되던 날에는 그 형적이 이미 드러났으니 조정에서 간쟁하여 저지하는 데에 어찌 아무런 방도가 없었겠습니까. 그리고 명분도 없는 작위가 무사(武士) 확(彠)에게 내려졌다면 황후를 폐하려는 조치가 이때에 이미 조짐을 보인 것인데도 저수량이 또한 용감하게 직언하지 못하고 이제 와서 때늦은 간언을 올려 이미 이루어진 일을 막고자 하였으니, 또한 지혜롭지 못하다 하겠습니다.

육천(六天)에 대하여 정현(鄭玄)은 “천황대제(天皇大帝)에 태미오제(太微五帝)를 합쳐 육천이라 한다.”고 하였다. 상천(上天)의 주재자를 천제(天帝)라고 하는데, 천제에 대해 어찌 다섯이니 여섯이니 하며 호칭을 나누고 자리를 정할 리가 있겠는가. 천황대제는 곧 오제(五帝)의 자리를 총괄하여 오제의 위에 있으면서 하늘의 조화와 권한을 주재하는 자일 것이다. 또한 오제는 청(靑), 황(黃), 적(赤), 백(白), 현(玄) 다섯 방위의 천제이다. 그런데 지금 태미오제라 하고 있으니, 그렇다면 오제는 오방(五方)의 천제가 아니라 혹 태미원(太微垣)의 궤도 내에 오제라는 별 이름이 있어서 이를 태미오제라 한 것인가? 또 이른바 신주(神州)라는 것은 구주(九州) 이외에 별도로 한 지역이 있어 그것을 신주라 이름한 것인가, 아니면 중국을 지칭하는 황도(黃圖), 요도(瑤圖), 적현(赤縣), 제주(齊州)의 호칭처럼 구주를 총칭하여 신주라 이름한 것인가?
[진사(進士) 이노익(李魯益)이 대답하였다.]
천황대제는 《시경(詩經)》의 이른바 호천상제(昊天上帝)를 말하는 것으로, 또한 요백보(曜魄寶)와 태일(太一)이라는 이름도 있습니다. 그 보좌하는 별을 오제라 하는데, 이를 청제(靑帝), 황제(黃帝), 적제(赤帝), 백제(白帝), 현제(玄帝)라 합니다. 대체로 오제의 위에 자리하여 하늘의 권한을 주재하는 자를 대제(大帝)라 하고, 주재자의 조화를 받들어 사철의 변화를 운용하는 자를 오제(五帝)라 합니다. 따라서 하나의 하늘 바깥에 또다시 다섯 하늘이 있어 각각 자신의 하늘을 다스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태미(太微)라는 것은 《회남자(淮南子)》에 ‘태일(太一)의 구역’이라고 하였고, 태일이 이미 대제의 또 다른 이름이니, 태미와 태일은 천황대제와 더불어 원래부터 다름이 없습니다. 그리고 신주(神州)는 곧 왕이 직접 다스리는 기내(畿內)를 지칭하는 것이고, 지신(地神)은 또한 후토(后土)라고도 부릅니다. 따라서 신주는 구주(九州)의 총괄적인 명칭도 아니요, 구주 이외에 다시 신주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문벌(門閥)로써 인재를 등용하는 것은 고대에는 없던 제도였으므로 춘추 시대의 세경(世卿)을 공자(孔子)가 기롱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진(晉) 나라에 호씨(狐氏)와 조씨(趙氏)가 있었어도 기결(冀缺)이 농사를 짓다가 등용되었고, 제(齊) 나라에 국씨(國氏)와 고씨(高氏)가 있었어도 영척(甯戚)이 소를 먹이다가 기용되기도 하였으니, 그 당시 열국(列國)에 본래 거실(巨室)이 있었지만, 재덕(才德)이 출중하고 특이한 선비들이 장사꾼이나 농사꾼, 창고지기 중에서 기용되는 것을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후위(後魏)의 구품중정제(九品中正制)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마침내 일정한 법이 되어 버렸다. 이에 권문세가의 귀족들은 고개를 높이 쳐들고 거리를 활보하며 고관대작을 아무런 노력도 없이 차지하는 반면, 지혜와 용기, 구변(口辯)과 기력을 가진 뛰어난 백성들은 굴종과 억압 속에서 죽을 때까지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았거니와, 그들 가운데는 실망하여 스스로 방종하며 살아간 자도 있었고 불만을 품고 반란을 생각한 자도 있었으니, 아, 하늘이 인재를 내면서 어찌 그들이 그렇게만 살아가게끔 만들었겠는가. 천하를 다스릴 인재는 천하를 다 뒤져 구하여도 모자랄 판인데 지금 아홉 등급으로 제한하니, 이것은 천하 인재의 열에 아홉은 들어다 버리는 격인 만큼 인재 등용이 어찌 그리도 폭넓지 못하단 말인가. 구품중정제는 그래도 관작(官爵)만을 제한할 뿐이었으나, 《씨족지(氏族志)》가 나오게 되자 혼인의 등급이 나누어져 그 법이 갈수록 세밀해졌고, 《성씨록(姓氏錄)》이 만들어지자 혼인의 금법(禁法)이 만들어져 그 풍조가 갈수록 성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금에 이르도록 어떠한 처방으로도 이를 구제하지 못하고 있으니, 아, 그 병폐가 고대에 용(俑)을 만든 것보다 더 심하다. 이제 그 병폐가 더욱 심한 것에 대하여 말해 보자면, 관작을 문벌에 따라 제한하는 것과 혼인을 족성(族姓)에 따라 등급 매기는 것 중에 그 병폐가 어느 것이 크고 어느 것이 작으며 어느 것이 얕고 어느 것이 깊은가? 양(梁) 나라 무제(武帝)가 후경(侯景)에게 말하기를, “왕씨(王氏)와 사씨(謝氏)는 문벌이 높으니 주씨(朱氏)와 장씨(張氏) 이하의 집안에서 혼처(婚處)를 구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는데, 무제는 그 한마디 말 때문에 나라를 잃었다고 할 만하다. 좌사(左思)의 ‘영사시(詠史詩)’에 “저 한 마디 굵기의 줄기로 이 백 척의 가지를 덮었다.[以彼徑寸莖 蔭此百尺條]”라고 하였는데, 그 또한 시세(時勢)를 상심한 절실한 말이다. 이에 대하여 상세히 논해 보도록 하라.
[생원(生員) 이희연(李羲淵)이 대답하였다.]
신이 듣건대, 성인이 천하를 다스릴 때에는 오로지 어질고 재능 있는 사람을 등용하였으므로, 만약 어질지 못하거나 재능이 없으면 공경(公卿)의 아들이라도 반드시 공경이 되지는 않았고, 서민의 무리들도 자신이 서민인 것에 대하여 불만을 품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신분 간의 경계가 없고 피차간의 구분이 없게 된 연후에야 초야(草野)의 걸출한 인재에게 나라의 안위(安危)를 맡길 수 있고 명문(名門)의 우아한 선비에게 교화를 돕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등급 간에 혼인을 금지한 것은 그 폐단이 극심하기는 하지만, 유벽강(劉辟彊)이 곽광(霍光)과의 혼사를 사양한 것이나 정(鄭) 나라 공자 홀(忽)이 제강(齊姜)을 취하지 않은 사실에 대해서 옛날에도 이를 허여하였으니, 관작을 문벌에 따라 제한한 것에 비하여 차이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허경종(許敬宗)의 이른바 “대신(大臣)은 학문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말은 일반론으로 말하자면 어찌 절실한 논의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가 말한 학문이라는 것은, 이른바 대신으로서 지녀야 할 학문이 아니라 박식(博識)함을 과시하기 위한 학문에 불과하다. 그러나 두덕현(竇德玄)의 말은 사납지 않으면서도 엄정하였으니, 비록 학문이 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그가 대신의 체모를 갖추었다고 말할 것이다. 이적(李勣)이 이에 두 사람의 말을 모두 인정하고자 하여 둘 다 칭송하였으니, 무후(武后)를 세우려 할 때 고종(高宗)에게 ‘폐하의 집안일’이라고 답한 기미를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집안에서의 행실이 비록 훌륭하기는 하지만 그가 처세하는 절도를 보건대 시비(是非)에 대한 사람들의 판단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하거늘, 주자(朱子)가 그의 행실을 《소학(小學)》에까지 편집해 넣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유학 강태영(姜泰永)이 대답하였다.]
허경종이 잘 말한 것은 바로 두덕현이 말하지 못한 것이므로 그들 중에 누가 옳고 그른지 분명히 드러납니다. 따라서 이적이 두 사람의 말을 모두 인정하여 둘 다 칭송한 것은 시비의 판단을 무너뜨린다는 점에 있어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적이 병든 누이를 위해 손수 죽을 끓인 것이 비록 집안에서의 훌륭한 행실은 되겠지만, 큰 지조가 이미 훼손되었으니 조그마한 장점이 있은들 어찌 논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승냥이나 수달처럼 악한 짐승이라 하더라도 제사를 지내면 거기에서 보본(報本)의 마음을 취하고, 호랑이처럼 사나운 짐승이라 하더라도 흉배(胸背)의 무늬가 있으면 거기에서 어진 마음이 있는 것을 취하는 것이니, 하물며 언제나 없어지지 않는 인간 본래의 양지양능(良知良能)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주자가 《소학》에 그의 행실을 편집해 넣은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풍모[身], 언변[言], 필체[書], 판단력[判]은 과연 인재를 등용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기에 충분한가? 이상의 네 가지 중에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한가? 논란하는 이는 말하기를, “오직 판단력이 가장 중요하니, 대체로 판단력이란 사정을 훤히 알고 법률에 아주 익숙하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라고 하니, 이 말이 근사한 듯하다. 그런데 군자(君子)이면서도 혹 사정에는 어설프거나 소인(小人)이면서도 법률에는 참으로 익숙하다면, 어떤 면을 취사(取捨)하여야 하겠는가? 만약 풍모에 있어 건장함만을 취하고 언변에 있어 논리적인 것만 취한다면, 풍모가 볼품없는 안영(晏嬰)이나 키가 작은 배도(裴度)나 말을 더듬는 주창(周昌)과 등애(鄧艾) 같은 이는 모두 버림을 받았을 것이다. 공자(孔子) 같은 성인조차도 “언변을 보고 사람을 취하다가 재여(宰予)에게서 실수를 하였고, 용모를 보고 사람을 취하다가 자우(子羽 담대멸명(澹臺滅明)의 자)에게서 실수를 하였다.”고 말씀하셨거늘, 하물며 전형(銓衡)을 담당한 자가 중등(中等) 정도의 자질을 가진 사람인 경우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생원 이석호(李錫祜)가 대답하였다.]
주(周) 나라에서 관리를 선발할 때는 먼저 육예(六藝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로써 뽑은 다음 육덕(六德 지(智), 인(仁), 성(聖), 의(義), 충(忠), 화(和))을 미리 가르쳤으며, 공문(孔門)에서 제자들을 가르칠 때는 반드시 네 가지 과목[四科 덕행(德行), 언어(言語), 정사(政事), 문학(文學)]으로 가르치되 덕행(德行)을 으뜸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풍모, 언변, 필체, 판단력으로 인재를 선발하는 법은 단지 지엽적인 재능과 언변과 풍모만을 보니, 덕을 숭상하던 옛날의 기풍이 아예 남아 있지 않습니다. 더구나 중등 이하의 자질을 가진 사람이 전형을 담당하면서 언변과 풍모만 따지다가 사람을 잘못 보는 폐단을 면하고자 하더라도 그것이 결코 불가능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이 법을 시행하되 다시 주 나라의 육덕과 한(漢) 나라의 효렴(孝廉) 제도를 근본으로 삼아 인재를 양성하는 방법을 곁들인다면, 아마도 인재를 선발하는 긴요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당 태종의 파진악(破陣樂)은 처음에 민간에서 연주하던 곡이었다가 마침내 조정에서 연주하는 곡이 된 것이다. 비록 대무(大武 주 무왕(周武王)의 음악)의 아름다움에는 필적하지 못하지만, 또한 창업수통(創業垂統)의 어려움을 생각나게 하고 왕업(王業)의 유래를 알게 한다. 또 두건덕(竇建德)과 왕세충(王世充)의 무리가 사로잡혀 머리가 잘린 사건은 태종이 옛 신하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곡에다 싣지 않았으니, 고종(高宗)이 차마 듣지 못했다는 곡이 어느 곡인지 모르겠다. 위징(魏徵)이 칠덕(七德)을 힘쓰고 구공(九功)을 살피게 한 것은 태종의 문치(文治)를 닦고 무공(武功)을 그만둔 통치를 찬양하기 위한 것이니, 차마 듣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고종이 태종을 이어 이를 지켜 가야 할 군주로서 그 음악을 듣고자 하지 않았다면 그래도 이해가 가는 일이지만, 차마 듣지 못했다고까지 하는 것은 어찌 인지상정(人之常情)을 벗어나는 것으로 크게 의심해 볼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생원 한석춘(韓錫春)이 대답하였다.]
고종이 파진악을 차마 듣지 못한 것은, 효자의 추모하는 마음에 치고 찌르는 모습을 눈으로 보면 선황(先皇)이 전쟁에 종사한 노고가 떠올랐을 것이요, 살벌한 소리를 귀로 들으면 선황이 양(羊)을 나누어 준 일이 생각났을 것이니, 어찌 아무런 감동이나 슬픔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한순간의 차마 듣지 못하는 마음으로 인하여 수십 년 동안 그 곡을 철폐하여 무공을 닦는 뜻이 거의 폐기되고 말았으니, 고종이 너무 유약한 데에 빠져 수성(守成)의 대업을 이루지 못한 것이 또한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군영(軍營)이란 장수가 머무는 곳으로서, 군영을 옮기거나 군영을 설치할 때 반드시 장수의 명령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날이 아무리 저물었다 하더라도 반드시 장수에게 고하지 않고 마음대로 군영을 설치한다거나 마음대로 참호(塹壕)를 파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배행검(裴行儉)이 군영을 설치하고 참호를 팔 때에는 지세(地勢)가 불리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다가 참호를 사방에 다 파 놓은 다음에야 비로소 이를 깨달았다는 말인가? 한신(韓信)은 조(趙) 나라를 격파한 후에 배수진(背水陣)을 친 까닭을 말하였고, 우후(虞詡)는 적을 패퇴시킨 후에 솥의 수를 늘린 까닭을 말하였다. 장수의 절묘한 계략은 진실로 남에게 알려 줄 수 없는 것이지만 또한 승리를 거둔 후에는 일찍이 숨긴 적이 없거늘, 배행검이 끝까지 그 까닭을 말해 주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생각건대 비바람이 몰아치리라는 징후를 미리 점쳐서 안 것에 불과하다면, 어찌 굳이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아서 마치 별도의 절묘한 계략이 있었던 것처럼 하였단 말인가.
[진사 박상영(朴尙榮)이 대답하였다.]
배행검은 군사를 잘 부리는 사람이라 이를 만합니다. 만약 곧장 높은 언덕에다 자리를 잡고 군영을 이동시키는 수고를 하지 않았다면, 자신의 절묘한 계략을 삼군(三軍)에게 자랑할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 때문에 저물녘에 군영을 설치했다가 갑자기 다시 군영을 이동함으로써 비바람을 점치는 자로 하여금 배행검이 비바람을 잘 예측하는가 의심하게 만들었고 지형을 잘 보는 자로 하여금 그가 지형을 잘 보는가 의심하게 만들어서, 농간을 부리고 이랬다저랬다 하여 그 계략의 끝을 드러내 보이지 않은 것입니다. 이에 온 군영의 군사들이 모두 경외하고 복종하여 목숨을 바쳤으니, 이것이 바로 병가(兵家)의 술수입니다. 이것이 그 까닭을 말하지 않아서 속임수가 탄로 나지 않도록 한 이유입니다.

한(漢) 나라가 관중(關中)에 도읍한 200여 년 동안 기근 때문에 자주 낙양(洛陽)으로 행차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데, 당 나라가 도읍한 곳이 바로 그 땅이다. 농(隴)과 촉(蜀)의 지형적인 이점과 비옥한 토지의 풍요에다 배와 수레가 집중되는 교통의 요지로 상인이 모여드는 등 한 나라에 비하여 달라진 것이 없거늘, 한번 기근이 들기만 하면 곧장 동도(東都)로 행차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황제가 옮겨 갈 때에 관리와 백성들이 노소(老少)를 막론하고 모두 다 따라갈 수는 없는 만큼 그것은 기근을 구제하는 방책에 있어서 또한 말단적인 것인데, 어찌 이처럼 번거로움을 꺼리지 않았는가. 화적법(和糴法)이 시행되고 나서야 동도로의 행차가 비로소 중지되었으니, 만약 이 법을 시행하지 않았다면 관중의 기근을 구제할 방법도, 동도로의 행차를 중지할 수 있는 계책도 없었단 말인가?
[생원 오점(吳霑)이 대답하였다.]
당 나라 때에 기근이 들기만 하면 번번이 동도로 행차한 것은, 오로지 절약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위(魏) 나라 혜왕(惠王)이 기근의 대책으로 백성들을 이주시킨 것을 두고도 옛 성현이 기롱하였는데, 하물며 당당한 천자로서 그 부(富)가 사해(四海)를 소유하고서도 양식이 많은 곳으로 쫓아가 먹으며 그 번거로움을 꺼리지 않는 것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화적법이 비록 흉년을 구제하는 데에 급선무이기는 하지만 또한 말단적인 대책에 불과합니다. 만약 검소한 생활을 보이고 재물을 절약한다면 또 어찌 굳이 화적법을 시행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배행검(裴行儉)이 사걸(四傑)인 왕발(王勃), 양경(楊烱), 노조린(盧照鄰), 낙빈왕(駱賓王)을 논평한 것은 진실로 인물을 평함에 있어 영원히 변치 않을 원칙이다. 그러나 원대한 사업을 이룰 사람은 반드시 모두 기량(器量)과 식견(識見)을 가지고 있고 가볍고 천박한 사람은 반드시 작록(爵祿)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면, 조정에서 사람을 등용하는 데나 선비가 남에게 인정을 받는 데에 각각의 정해진 분수와 정해진 값이 있어서, 기량이 높고 식견이 뛰어난 사람이 다 기용되지 못하거나 가볍고 천박한 사람이 혹 그 사이에 끼어들 염려는 없게 될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중후한 군자(君子)가 반드시 모두 다 묘당(廟堂)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만도 아니고, 경박한 소인(小人)이 반드시 모두 다 낮은 관직에 눌러앉아 있는 것만도 아니니, 배행검의 말이 아마도 때로는 맞지 않을 경우가 있을 것이다. 이른바 기량과 식견이 있다는 것이나 가볍고 천박하다고 하는 것은 품부(稟賦)받은 것을 가리켜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연마한 품격(品格)을 가지고 말하는 것인가? 품부받은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라면 품부받은 것이 보잘것없으면서도 기량이 큰 사람이 있으며, 품격을 가지고 말한 것이라면 품격은 높지만 기량이 얕은 사람이 있는데, 이 경우에는 또 어느 쪽이 쓰임에 맞고 어느 쪽이 쓰임에 맞지 않은가?
[진사 황종오(黃鍾五)가 대답하였다.]
배행검이 사걸(四傑)의 인물을 논평한 말은 조금도 틀림이 없다고 할 만합니다. 하지만 더러 경박한 사람이 권력을 잡기도 하고 중후한 사람이 묻혀 버리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는 예로부터 임금이 옳고 그름의 구분을 분명하게 하지 못하여 소인을 높은 지위에 있게 한 것이니, 군자의 도가 소진(消盡)된 시기입니다. 따라서 비록 배행검의 말로써 증험해 보려 한들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그리고 품부받은 것의 후박(厚薄)과 품격의 고하(高下)에 대하여 말씀드리자면, 이 또한 기질(氣質)이 서로 같지 않은 것일 뿐입니다. 백이(伯夷)는 성인이지만 맹자(孟子)는 그를 좁다고 생각하였고, 이천(伊川)은 대현(大賢)이지만 오히려 품부받은 것이 매우 박하다고 스스로 탄식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품격이 높은 자를 기량이 얕다 하여 버려서는 안 될 것이며, 기량이 큰 자를 품부받은 것이 박하다고 하여 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로지 그 사람이 현명한가 그렇지 못한가를 가지고 따져야 할 것입니다.

이상은 당 고종(唐高宗)이다.


[주D-001]구품중정제(九品中正制) : 본래 삼국 시대 위(魏)의 진군(陳群)이 창안한 관리등용법으로, 각군(各郡)에는 소중정(小中正)을, 주(州)에는 대중정(大中正)을 두어 전국의 인재를 추천하게 한 제도이다. 북위(北魏) 효문제(孝文帝) 시대에 크게 발달하면서 9등급의 향품(鄕品)을 나누어 그에 대응하는 관직에 임용하였는데, 결국 호족(豪族)의 자제가 관료로 진출하는 길이 되어 관료의 문벌화 현상과 귀족 사회를 발달시키게 되었다. 《김명희(金明姬), 중국수당사연구, 52쪽》
[주D-002]《씨족지(氏族志)》가 …… 되었다 : 《씨족지》와 《성씨록(姓氏錄)》의 편찬, 그리고 금혼령(禁婚令)의 성격은 여기서 정조(正祖)가 이해하고 있는 것과 약간 다르다. 당 나라 태종(太宗) 정관(貞觀) 6년(632)에 문망(門望)을 팔아먹는 매혼(賣婚)을 금지하고 12년(638)에는 ‘정관씨족지(貞觀氏族志)’를 편찬하여, 기존 산동 사성(山東四姓) 최(崔), 노(盧), 이(李), 정(鄭)으로 대표되는 산동 귀족 중심의 문벌 체제를 당 나라 종실과 관품(官品)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 체제로 바꾸고자 하였다. 즉 황족과 왕후족을 1등, 2등으로 하고, 이하는 조정의 관품에 따라 성씨의 등급을 매겨 종래 천하 제일이라고 하던 박릉 최씨(博陵崔氏)를 3등으로 낮추었다. 그 이후 무후(武后) 정권이 들어서자 고종(高宗) 현경(顯慶) 4년(659)에 산동 귀족인 칠성십가(七姓十家) 간의 통혼을 금지하고, 문망을 높이기 위해 이들에게 많은 재물을 주면서 결혼하는 배문혼(培門婚)을 금지시켰다. 아울러 당시 권력자인 이의부(李義府), 허경종(許敬宗) 등이 무후와 자신들의 가문이 ‘씨족지’에 등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시 ‘성씨록’을 편차하고 이전의 씨족지는 모두 불태워 버렸다. ‘성씨록’은 특히 군공(軍功)이나 과거(科擧)로 입신한 5품 이상의 관료를 사류(士類)로 편성하여 등재함으로써, 오히려 위진남북조 이래로 사서(士庶) 구별이 엄격했던 문벌제도에 타격을 주고 새로운 관료 세력을 형성한 서민층의 성장을 인정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계명(李啓命), 수당관료제의 성립과 전개, 172~211쪽》
[주D-003]승냥이나 …… 지내면 : 수달은 초봄에 강물이 녹으면 물고기를 잡아 바위에 늘어놓고 승냥이는 늦가을에 짐승들을 잡아다 사방에 늘어놓는데, 마치 제사상을 차린 것과 비슷하므로 옛날에는 수달과 승냥이가 제사를 지낸다고 여겼다.
[주D-004]칠덕(七德) : 무치(武治)에서 갖추어야 할 일곱 가지 덕으로, 금포(禁暴), 즙병(戢兵), 보대(保大), 정공(定功), 안민(安民), 화중(和衆), 풍재(豐財)를 말한다.
[주D-005]구공(九功) : 문치(文治)에서 갖추어야 할 아홉 가지 덕으로, 수(水), 화(火), 금(金), 목(木), 토(土), 곡(穀)의 육부(六府)와 정덕(正德), 이용(利用), 후생(厚生)의 삼사(三事)를 말한다